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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4

Namgok Lee 인간 특유의 2차 본능 이 더 커지는 시대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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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교수의 책을 꾸준히 읽고 잇다.

 전에 별로 관심도 없고 잘 몰라서 빼놓고 읽었던 장(章)들을 이번에는 빠짐없이 읽어본다.

‘제7장 회화(繪畵)’을 읽다가 연상되는 생각들이 있어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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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에서 사실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일변하기 시작한 때는 사진기가 발명되고 난 뒤부터이다. 사진기는 1839년 루이 다게르가 최초로 발견하였는데 과학기술을 이용해 실물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사진기가 점차 퍼져 나가자 회화는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양 회화사에서 18세기 후기부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사실성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추상성을 더 강조하는 사조가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사진의 발견과 무관하지 않다.’
‘원근법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15세기 초의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인 브루넬레스키다. 그는 물체는 뒤로 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작아지고, 나중에는 결국 한 점이 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이전의 그림에서 가로수가 늘어져 있는 길이 지평선 위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의 역사를 거슬러가면 최초의 발견자 또는 창안자나 발명자를 만난다.
누워서 원격 리모콘으로 심지어는 말로 해도(아마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마 생각하는 것만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불이 켜지는 전기도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잊혀진다. 누가 발명했는지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발견 또는 발명했다고 하지만, 그의 단독 작품이 아니다.
이미 무수한 역사와 노력의 축적들이 그 배경에 있다.
철학이나 문학이나 예술뿐만 아니라 습속이나 제도의 변화도 여러 변수의 종합적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토록 강고하게 보이던 가부장제의 유산인 남아(男兒)로 대(代)를 잇고, 조상에 대한 봉제사(奉祭祀) 문화가 조용히(큰 저항이나 강제나 특정 종교와 무관하게) 허물어져 가는 과정을 보았다.
아마 족보를 챙기는 문화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옛날 같으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을 대(大) 사변(事變)들이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많다.
지금은 물질도 풍부해지고, 민주주의라는 제도도 발전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부(富)나 권력(權力)에 대한 탐욕이 몇 천년 동안의 강한 관성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마 언젠가는 그런 것조차 기이한 옛 이야기로 들릴 날이 있을까?

다행히 인류가 지금의 위기를 잘 넘기고,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길을 갈 수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본다. 
또 실제로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의식의 확장이 위기를 넘어서는 길이기도 하다.

 단지 그것이 자유로워지는 길이라는 것을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 과제이긴하지만.
그런데 아직은 너무 견고해보이고,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그토록 강고하던 남아(男兒)로 대(代)를 잇는 습속과 문화가 사라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부(富)나 권력(權力)보다는 명예욕(名譽慾)은 좀 더 오래갈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의 연관’ 속에서 이런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부, 권력, 명예는 자기중심적인 1차본능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들이다.

이 1차적 본능보다 인간 특유의 2차 본능(숭고지향성, 어떤 사람들은 佛性이라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靈性이라 부르는)이 더 커지는 시대‘모든 것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새벽의 독서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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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이계표
모든 것과의 연관❗
연기론적인 사고입니다.👏
 · Reply · 2 d · Edited
이계표
전래의 토착적 영성과 서구의 근대적 이성과의 관계를 개벽세상이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 Reply · 2 d
崔明淑
나이 든 사람들에게 2차 본능은 비교적 추구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정말로? 글쎄요. 2차 본능을 추구하려면 상당히 구도자적으로 살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 Reply · 2 d
Namgok Lee
崔明淑 오히려 신세대에게서 자연스럽게 이행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결혼이나 가족제도의 변화처럼.
 · Reply · 2 d
崔明淑
Namgok Lee 가치전환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겠군요.
 · Reply · 2 d

Namgok Lee 박석 책 음악의 정치적 사회적 효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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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 h  · 
새벽의 독서 산책
박석 지음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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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음악에 지대한 관심과 소질이 있었다. 그는 고대의 순임금이 만들었다는 소(韶) 음악을 듣고 아름다운 음률에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공자가 음악을 좋아했던 것은 물론 개인적인 취향도 있었겠지만 음악의 정치적 사회적 효용성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 음악 이론을 집대성한 ⌈예기⌉의 ⌊악기⌋편에서는 예(禮)와 악(樂)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악(樂)이란 동화하는 것이요, 
  • 예(禮)란 차별하는 것이다. 
동화되는 즉 서로 친하게 되고, 차별하는 즉 서로 공경하게 된다. 
악(樂)이 앞지르게 되면 넘쳐흐르게 되고, 예(禮)가 앞지르게 되면 소원하게 된다.
성정에 화합하고 용모를 가꾸는 것은 예악(禮樂)의 일이다. 

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이고 
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질서다. 
조화로우므로 만물이 모두 화육되고 질서가 있으므로 만물이 모두 구별된다.‘

고대 중국에서 예의 본질은 사회계층과 신분에 놓인 질서의 확립이다. 
그리고 그 질서란 차별적인 것이다. 
이렇게 차별적인 질서가 확립될 때 사회는 안정된다. 

그러나 차별성을 강조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는 소원해지고 사회는 삭막해진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樂)이 필요한 것이다. 악(樂)의 본질은 서로 동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가까워진다.
예란 천지의 질서이고 악이란 천지의 조화로움이라고 강조한다.

공자는 일찍이 순임금의 음악을 들으면서 아름다움과 선함이 극진하다고 했다. 
그러나 무왕이 만든 음악을 듣고는 아름다움은 극진하지만 선함은 극진하지 않다고 평했다. 
미(美)와 선(善)이 하나가 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는 예가 우선이고 악은 예를 보조하는 수단이지만, 
개인 수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조금 다르다. 

공자는 ‘논어’에서 “시에서 일으키고, 예에서 세우고, 악에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는 말을 했다. 
  • 시를 통하여 도의적 감흥을 일으키고 
  • 예를 통하여 인류의 규범을 세우고 
  • 마지막으로 악을 통하여 인격도야를 완성한다는 뜻이다. 

악은 예보다 한 차원 높은 것으로 유가적 수양의 마지막 단계에 필요한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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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 느낌

봉건군주제의 신분계급사회에서 발전한 고대 중국의 예와 악에 대한 사고의 한계에서 공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신분계급에 바탕을 둔 차별적인 질서(禮)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공자를 변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그런 생각을 오랫 동안 해왔었다. 그리고 60이 훌쩍 지나서 비로소 논어를 접했다.
그리고 논어 속에서 그 시대의 한계와 그 속에서도 보편적 이상을 추구하며 고뇌한 한 사람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었다.

예禮를 차별적 질서로 보지 않고, 신분계급제를 넘어서  
인간이 추구해야할 본연(本然)의 아름다운 질서로 보려고 한 흔적이 논어에는 많이 나온다.

나에게는 그런 면이 보여오다 보니까 아마도 유가(儒家) 일반의 해석과는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마 내 주관적 해석도 많을 것이다. 단지 인류의 선각자로서 그 원석(原石)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예(禮)보다 악(樂)을 상위로 본 것 또한 단지 수양의 최고 단계로서가 아니라, 차별적 질서 속에서 보편적 이상을 추구한 공자의 고뇌의 일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너무 공자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제 공자의 팬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는데.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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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

Namgok Lee 박석 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 이라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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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5 h  · 
박 석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독서량과 천재적 번뜩임, 유려한 문체에 빠져든다.
고금(古今)과 동서(東西) 그리고 종교, 철학, 정치, 예술, 건축을 넘나드는 방대함이 놀랍다.
노자(老子)가 말한 화광동진(和光同塵)과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두 코드로 관통하고 있다.

박 교수는 노자는 화광동진을 이야기했지만, 노자 스스로는 미완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양과 고금을 회통하면서 스스로 그 완성에 대한 집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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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그 코드가 대단히 우수하고,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가 많지만, 아무리 우수한 코드라고 해도 그 코드 자체가 진리나 진실에 접근하는데 일정한 한계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코드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인식체계다. 다만 자신이 어떤 코드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그 자체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사물이나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인식능력이나 탐구력이 뛰어날수록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나는 틀릴 수 있다’라는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진리 탐구와 진정한 창조를 위해 필요하다.
 한 사람 안에서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결국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진행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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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이라는 장(章)에서 
‘동서문화 교류 초기의 서양인에 비친 중국 철학’에서 마테오 리치, 니콜라스 트리고, 필립 쿠플레, 라 모트 르 바예 등을 소개하고, 
최초로 중국 철학을 비교 연구한 서양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논리학, 형이상학 등은 서양이 중국에 앞선 것이 사실이지만 윤리학 방면에서는 중국이 서양 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인류의 보편 정신에 기초하여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추구하였으며 평화적이고 평등한 교류를 통하여 인류의 복지가 증대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후대 현실의 역사에서는 라이프니츠가 희망하였던 아름다운 쌍방 교류는 이어지지 못하고 서양의 침탈로 인한 일방적인 교류가 되고 말았다.’

중국문화와 유가사상을 극찬하였던 볼프와 볼테르를 소개하고, 볼테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유교에 깊게 심취했던 것은 유교에서 이신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며, 공자의 사상에서 발견한 관용 사상으로써 다시 기독교의 맹신주의와 신구교의 갈등으로 고통을 겪던 프랑스 사회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미신적이고 부패한 종교이며 특히 지나친 배타성으로 인해 관용력이 부족한 저급한 종교라고 악평하였다’

반면에 유가사상을 극도로 폄하하였던 헤르더와 헤겔을 소개하면서, 헤르더는 중국은 인종적 지리적 특징에 따라 인류사의 유년기에 영원히 고착된 나라에 불과하한 것으로 보고, 그의 역사철학과 중국관이 그대로 헤겔에게 계승된다고 보고 있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헤르더와 마찬가지로 인도 중국 페르시아 이집트 등 동양을 세계사의 유아기, 그리스를 청년기, 로마제국을 장년기로 보고 게르만 사회를 역사의 성숙기이자 완성기로 보고 있다. 동양 가운데서도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끼친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비교적 높게 평가하고 중국과 인도는 정체에 빠져 있는 유아기라고 폄하하였다.
중국인들에게는 미신이 만연하며 내면의 비자립성과 정신적 부자유 정신의 상실이 보인다‘

박석 교수의 표현이다.

 ‘헤르더와 헤겔의 중국관은 사실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라는 유아적인 자기중심성과 중국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선입관에서 나온 황당한 견해여서 실소를 금할 길이 없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들의 중국관은 당시의 유럽 문명권과 중국 문명권의 실제적인 힘의 역전을 잘 반영한다.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철학 강의를 할 1830년 즈음에는 서양 문명의 우위가 더욱 가시화되었다. 결국 그로부터 약 10여년 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대패하고 그 뒤 서양 열강의 동네북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은 서세동점이 본격화되던 시기로 많은 서양의 사상가들이 헤르더와 헤겔의 중국관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마르크스의 중국관도 헤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편향된 중국관은 1차 대전 이후에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의 과학문명과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참혹한 전쟁을 목도하면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적어본다.

박 교수의 창(窓)을 통해서 역사와 사상의 흐름을 보는 것이 즐겁다.
내 젊은 시절의 짧은 독서량이나 스스로가 빠졌던 코드를 되돌아보게도 되고, 비록 노년이라도 이렇게 접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면서...

2021/11/11

Namgok Lee 박석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이라는 장(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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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h  · 
생활의 리듬으로 새벽에 독서를 하고 내용을 발췌해서 기록해 본다.
속독(速讀)의 부족함을 메꾸기도 하고, 내 의견을 첨부하기도 할 겸.
박석 지음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를 계속 읽고 있다.

오늘은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이라는 장(章)에서 일부 발췌.
(* 인도와 석가모니를 빼고, ‘문화적 토양과 깨달음’이라고 하면 상당히 보편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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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가르침과 명상을 살펴 보았는데 이 장에서 석가를 이야기하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석가의 삶과 가르침과 명상은 예수와 공자의 중간이다. 
앞에서 예수와 공자를 비교할 때 이미 짐작했겠지만 개인의 삶과 깨달음은 그가 속한 사회분위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중국은 기원전 11세기를 전후로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가면서 종교적 무속적 사회시스템에서 예(禮)와 악(樂)이 중심이 되는 사회시스템으로 전환했다. 모든 것을 저 초월적인 하늘과 신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던 신본주의에서 인간 중심, 땅 중심의 인문주의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문주의의 방점을 방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공자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기원전 5~6세기에 이르러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가 이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자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대부분 사상가들이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데 비해 인도의 사상가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하고 해탈에 이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이는 사회문화적 코드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이미 예(禮) 시스템이 중요한 사회문화적 코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춘추전국 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예(禮) 범주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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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드에 반대한 사상가들도 이런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인도에서는 종교가 사회문화의 가장 중요한 코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운동에서도 어떻게 하면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를 개혁하여 새로운 사회에 어울리는 종교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석가가 왕의 길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종교가 정치보다 더욱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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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인문적 토양인도의 종교적 토양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의 하나. 

사회문화적 코드 또한 시대의 변천과 인지의 발달 그리고 사회의 진화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우열(愚劣)로 단순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인도에서 불교는 토착적인 종교에게 밀렸지만, 인도의 사상 풍토에서 발전한 불교는 어떤 점에서 화광동진의 인문적 유교보다 존재에 대한 성찰의 깊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 즉 물질과 제도의 진화가 상당수준으로 진척된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제기되는 ‘관념계에 내재하는 근원적 부자유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단히 귀중한 정신적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면이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지금 한국의 사회문화적 코드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 a] 중국의 유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들, 그리고
  • b]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와 중국을 통해 변화된 내용들, 
  • c] 근대 이후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시대를 거쳐가면서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분단 동족상쟁의 전쟁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급속하게 이루어 2차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하는 나라로 되었다.
지금 사회적으로는 극심한 양극화, 정신적으로는 극심한 문화지체 속에서
과도기적 혼돈을 겪고 있지만, 그것을 슬기롭게 넘어설 수 있다면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일구는 대단히 좋은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혼돈과 쇠퇴의 길일 갈 것인가? 새로운 문명을 향한 창조의 길을 갈 것인가?
요즘의 혼돈 속에서 그 바탕의 힘을 살리는 노력이 이 시대 우리 공동체에 부여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2021/11/09

Namgok Lee 박석 ‘유교는 종교인가?’ 2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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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유교는 종교인가?’

어제에 이어서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라는 장(章)을 읽었다.

전통적으로 볼 때 초월적 존재나 사후 세계에 대한 보류적인 태도는 유교의 큰 단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여러 신을 모시든 유일신을 모시든 신 중심의 세계관은 아직 고대의 신화적 사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유교는 그러한 신화적 사유체계를 극복하고 인본주의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대부분 종교들이 제시하는 사후 세계관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오히려 불가지론이나 유보적 입장을 취했던 공자의 입장이 훨씬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보아도 초월적 존재인 귀신보다는 인간을, 사후세계보다도 지금 여기의 삶을 중시했던 공자의 태도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和光同塵(화광동진) 노자 말씀 중에 '和光同塵'이 있다. 
和光 : 빛(빛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부드럽게 하는 능력과 
재능을 나타내지 않고 감추고 세속을 따른다는 뜻이고, 
同塵 :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수양(修養)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인간세계를 지향한다.
공자 수양론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도 현실을 초월한 궁극의 세계를 향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태도를 성찰하는 것이다.

공자 명상의 하나의 특징은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을 중시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명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느낌이 없다. 내가 60이 넘어 논어를 처음 접하면서 공자에게 경탄했던 것은 그의 과학적인 탐구 태도였다. ‘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진리를 밝히려는 정신과 태도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내가 연찬(硏鑽)이라고 부르는 소통과 탐구에 놀라울 정도로 근접한 성현(聖賢)을 공자에게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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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유교는 봉건지배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낙인이 찍혔고, 동아시아 낙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공자가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대성약범(大聖若凡)을 추구했기 때문인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구화 이후 공자의 권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바로 대성약범 때문이다.

서구화의 거센 파도가 전 세계 비서구 지역의 전통문화에 급격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사실 종교의 영역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고유의 전통종교(인도의 힌두교,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불교 등)가 있는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기독교가 그다지 많이 전파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들 종교 사상들은 모두 현실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부분은 서구화의 영역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 

그러나 유교는 달랐다. 대성약범을 지향한 유교는 다른 전통 종교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 현실적인 정치윤리에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었다. 때문에 서구화의 직격탄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유교 속에 현실적인 윤리 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신앙, 사후 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 세속을 초월하는 성스러움의 오라 등이 있었다면 그렇게 급속하게 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이 대성약범(大聖若凡) 때문에 공자는 새롭게 평가받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한 부분이고, 시대에 따라 변천하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류의식의 발달단계로 보았을 때 앞으로는 대성약범의 종교가 훨씬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정치사상이나 윤리는 낡은 면이 있을지 몰라도 그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깨달음과 수양론 등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학이지지(學而知之)의 점진적인 성스러움
하늘보다 땅신보다 인간을 더욱 중시한 태도, 
그리고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통합하려는 거시적 관점 등은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

2021/11/08

Namgok Lee 박석 교수의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장(章)

(2) Facebook
박석 교수의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장(章)을 발췌 소개한다.
( * )는 내 의견을 보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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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식의 획기적인 진보에 따라 종교적 성스러움에 대한 관념도 점차 바뀌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과학적 합리적 사유능력의 발달로 신화적 초월적 성스러움이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라질 수 없듯이 성스러움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성스러움의 성격은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거꾸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특성의 하나가 숭고지향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종교에서는 ‘성(聖)스러움’이라고 말해 왔고, 그것이 인간의 사라질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존 제도 종교는 크게 쇠퇴할 것으로 보는데, 그 종교성은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 깊게 체현(體顯)될 것이다)

‘초월성과 일상성의 통합’이라는 방향에서 박 교수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① 신화적 성스러움에서 인간적 성스러움으로
② 집단주관적 우주론에서 보편적인 우주론으로
③ 내면세계에 치우친 수도(修道)에서 현실과 소통하는 수도로
이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를 고전적 성스러움의 차원에서
세상을 향해 종교적 사랑이나 자비를 베푸는 차원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현대적 성스러움의 관점에서
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나 갈등을 해결하고
현실사회를 좀 더 사람다운 삶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

(*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 동안 제도 종교가 이런 면에서 부족하고 지배 세력의 옹호자로 작용해 온 면이 많았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타나는 사조로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석가나 예수가 고민했던 지점은
근대 이후 사회과학적 측면에서의 모순 갈등론이 나타낸 일면성과 독단성 그리고 투쟁이나 혁명 등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여러 문제들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전환을 시도했다는 점들이 다시 부각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나선형 순환의 사상 및 실천의 진전이 아닌가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선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독특한 문화지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과거에 하지 못한 반성을 변화된 현실에서 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관념의 후진성인데,
이것이 현실정치의 혼돈을 부추기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진보를 지향하는 운동은 ‘관념과 현실의 괴리’를 넘어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스러움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서 바라보면 유교의 종교성 여부는 문제가 복잡하고 애매하다. 그러나 화광동진(和光同塵)에 바탕을 둔 새로운 차원의 성스러움으로 보자면 유교는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라 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세련된 고등종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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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다1, 崇高-

형용사
숭엄하고 고상하다. 순화어는 `높고 거룩하다'.
"숭고한 희생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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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ubl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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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다의 의미 - 사전 - WORDROW
https://wordrow.kr › 사전


옛 문물을 높여 소중히 여기다., 뜻이 높고 고상하다., 산이 높고 우뚝하다.



숭고하다 뜻: 뜻이 높고 고상하다. - WORD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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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다 崇高하다 : 뜻이 높고 고상하다. 어휘 형용사 혼종어 · 숭고한 희생. · 그의 죽음이 가져다준 숭고한 교훈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학교에서는 ...


숭고 - 나무위키:대문
https://namu.wiki › 숭고


16 Nov 2020 — 하지만 흔히 대중에 알려진 사람에게 빗대는 숭고함의 뜻은 
많은 것들을 빗댄 것이나 그것을 최소화되었거나 그나마의 나은 선택의 길을 한 사람이라면 ...


숭고하다
https://korean.dict.naver.com › koen


뜻이 높고 훌륭하다. One's ideal being high and great. 숭고한 가치. 속도조절. 숭고한 사랑. 속도조절. 숭고한 의식. 속도조절. 숭고한 이상. 속도조절.



숭고하다 뜻 - 뜻이 높고 고상하다.,산이 높고 우뚝하다.,옛 문
https://badadict.com › ...


뜻이 높고 고상하다.,산이 높고 우뚝하다.,옛 문물을 높여 소중히 여기다.



숭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 › wiki › 숭고


미학에서, 숭고란 위대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물리적, 도덕적, 지적, 형이상학적, 미적, 정신적, 또는 예술적인 것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특히 계산, 측정 또는 모방 ...


선생님 - 강남구청 인터넷수능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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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y 2021 — 숭고하다라는 뜻이 잘 이해가 안되기도 해서요 ㅜㅜ 안타까운건지 숭고한건지 알려 ... 
숭고하다는 본받을 만한 높은 정신적 경지나 사상을 의미해요.



자연의 숭고함을 느낀 적 있나요? - 브런치
https://brunch.co.kr › ...


18 Sept 2019 —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느낌은 숭고하다 라고 부르게 ... 나약함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나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발전하도록 ...



영어 한국어 사전에 숭고함 의 의미 1
https://www.almaany.com › en-kr


celestially. 거룩하게 , 숭고하게 , 신성하게. male. 남성의 ; 숫컷의. move up. 숭진시키다 , 숭급시키다 , 끌어올리다 , 숭진하다 , 숭급하다. outnumber.



숭고하다 - 제타위키
https://zetawiki.com › wiki › 숭고하다


26 July 2017 — 존엄하고 거룩하다. 뜻이 높고 고상하다. 2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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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학에서, 숭고위대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물리적도덕적지적형이상학적미적정신적, 또는 예술적인 것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특히 계산, 측정 또는 모방의 가능성을 넘는 위대함을 나타낸다.

고대 철학[편집]

숭고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연구는 롱기누스에 기인한다. 이것은 기원과 저자가 확실하지 않지만 1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롱기누스의 경우 숭고함은 특히 수사학의 맥락에서 위대하거나 고상하거나 고상한 생각이나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숭고한 것은 더 큰 설득력으로 경외와 존경심을 일으킨다.

근대 철학[편집]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자연의 미적 특성으로서의 숭고한 개념의 발전은 18 세기 제3대 섀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쿠퍼 와 존 데니스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1]

에드먼드 버크숭고 개념을 발전시켰다.[2] 버크는 숭고와 미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숭고와 미의 관계는 상호 배타성 중 하나이지만 둘 다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으며, 숭고함은 공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지각이 허구라는 것을 아는 것은 즐거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

1764년 이마누엘 칸트는 관찰 대상의 정신 상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기록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숭고한 것이 고귀한 것, 훌륭함, 무서운 것의 세 가지 종류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숭고를 문화적 차이의 표식이자 동양 예술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에 대한 그의 목적론적 견해는 그가 "동양" 문화를 덜 발달되고 정치적 구조 측면에서 더 독재적이며 신의 법칙을 더 두려워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중국 예술의 특징 인 복잡한 세부 사항의 초과 또는 이슬람 예술의 패턴이 숭고의 전형적인 예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예술 형식의 탈 체화와 무형 함이 시청자에게 압도적인 미적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고 주장했다.[4]

현대 철학[편집]

20세기 신칸트 미학의 독일의 철학자와 이론가 맥스 데소어는 다섯 개 주 미적 형태(미적인 것, 숭고한 것, 비극적인 것, 추한 것, 우스운 것)를 공식화했다.[5]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따르면 미학의 주제로서 숭고한 것은 모더니즘 시대의 주요 특징이었다.[6] 리오타르는 모더니스트들이 인간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지각자의 해방으로 미적인 것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숭고한 의미는 인간의 이성에서 아포리아를 가리키는 방식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적 힘의 가장자리를 표현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의 다양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참고 문헌[편집]

  1.  Nicolson, Marjorie Hope. Mountain Gloom and Mountain Glory. Ithaca, 1959
  2.  Nicolson, Marjorie Hope. "Sublime in External Nature". Dictionary of the History of Ideas. New York, 1974.
  3.  Monroe C. Beardsley, "History of Aesthetics",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ume 1, p. 27 (Macmillan, 1973). But Edmund Burke disagreed: "Nor is it, either in real or fictitious distresses, our immunity from them which produces our delight ... it is absolutely necessary that my life should be out of any imminent hazard, before I can take a delight in the sufferings of others, real or imaginary ... it is a sophism to argue from thence, that this immunity is the cause of my delight".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Part 1, Section 15)
  4.  Hegel, G.W.F. Aesthetics: Lectures on Fine Art. Translated by T.M. Know. Oxford: Clarendon, 1975.
  5.  Emery, Stephen A.. "Dessoir, Max". In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2, p. 355. Macmillan (1973).
  6.  Lyotard, Jean-François. Lessons on the Analytic of the Sublime. Trans. Elizabeth Rottenbe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Lyotard expresses his own elements of the sublime but recommends Kant's Critique of Judgment, §23–§29 as a preliminary reading requirement to understanding his analysis.


사자성어 읽기 - 和光同塵 (화광동진)
입력 : 2015.11.05


화광동진(和光同塵)에서 
和는 화할 화, 
光은 빛 광, 
同은 한 가지 동, 
塵은 티끌 진으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으로, 
노자' 제56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앎을 말하지 않으며, 
앎을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앎이 있는 사람은 그 이목구비를 틀어막고 지혜의 문을 닫으며, 
지혜의 날카로움을 꺾으며, 지혜로 인해 일어나는 혼란을 풀고, 지혜의 빛을 감추어 나타내지 않고(和其光), 속세의 티끌과 하나가 된다(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현동(玄同)의 사람에 대해서는 
친해질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득을 줄 수도 없고 해(害)를 줄 수도 없으며, 
귀(貴)하게 할 수도 천(賤)하게 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귀(貴)한 것이 된다.

"도(道)는 언제나 무위(無爲)하면서도 무위함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노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화광동진'과 '현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현실 사회 속에서도 이러한 도(道)의 법칙에 순응(順應)하는 것만이 최상(最上)으로 여겼다. 따라서 현실적인 인간사회에서 위대한 일, 좋은 일, 남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 등일지라도 그것을 내세워서 자기의 공으로 여기며 자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자기 스스로가 주재자가 되고자 하는 것 따위는 부도덕(不道德)한 것으로 여겼다.


불교(佛敎)가 중국에 전파됨에 따라 중국의 고승(高僧)들은 
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어휘를 빌려서 중생을 제도하는 말로 삼았다. 
빛나는 불교의 진리를 가슴속에 가득 안고서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으며 
행동(行動)으로 대중(大衆) 속에 파묻혀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고 제도(濟度)하는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당시의 승려(僧侶)들은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모르는 척 살아야 하고, 
높이 올라갈수록 아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세출의 뛰어난 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자신의 빛을 줄여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지혜롭게 화목을 추구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고용철 중대부고 교사]






2021/11/07

환생,신과학,아나키즘

환생,신과학,아나키즘



환생 + 신과학 + 아나키즘 = ?

김강주의 홈 페이지를 찾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에는 환생, 신과학, 아나키즘, 고대 한일관계사 등의 관련 문서와 사이트가 실려 있습니다.



제가 작성하거나 찾아 놓은 몇 가지 문서들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제 소개)
환생의 과학성 (환생을 위한 변론)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이샤 우파니샤드
환생을 믿은 서양인들


명상과 선
책소개 "도솔천에서 만납시다(백봉 김기추 거사 법어집)" 99.6.16
책소개 "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98.8.8
책소개 "박석 교수의 명상체험여행"

환생
책소개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
책소개 "영혼의 탐구"
책소개 "삶 이전의 삶"
책소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책소개 "전생의 나를 찾아서"
책소개 "누구도 윤회를 부정할 수 없다"
책소개 "윤회의 진실"
책소개 "윤회의 비밀"
책소개 "김영우와 함께 하는 전생여행"
책소개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책소개 "브라이언 와이스의 전생요법"
책소개 "커밍백"
책소개 "윤회체험"
책소개 설기문 교수의 "최면과 전생퇴행" 98.10.18

신과학
새로운 과학, 새로운 기술 98. 11. 14 
책소개 "아인슈타인은 틀렸다" 빅터 샤우버거 이야기 98.8.8
책소개 "신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98.8.8
책소개 "살아있는 에너지" 빅터 샤우버거의 삶과 아주 색다른 과학이야기 98.8.8
책소개 지구를 구하는 "21세기 초기술" 98.10.18
책소개 "꿈의 신기술을 찾아서" 98.10.18
책소개 "신과학으로 풀어보는 피라미드 에너지" 99.4.24
책소개 "반중력의 과학" 99.4.24

아나키즘
책소개 "아나키즘"
책소개 "아나키'환경'공동체"
선언문(신채호)

한일관계사
임나일본부는 실재했다

* 방명록 내용 소개

영문 금강경 Diamond Sutra
영문 신심명 Hsin Hsin Ming
영문 조주무자(무문관 제1칙) Chao-chou's Dog
영문 도마복음서 Gospel of Thomas
영문 아가 Song of Solomon
영문 이샤 우파니샤드 Isha Upanishad
책소개 "REINCARNATION : The Missing Link in Christianity"
책소개 "ONLY LOVE IS REAL: A Story of Soulmates Reunited"
The Gospel Truth? (4/8/96 Time Domestic Version)
The secret lives of Jesus Christ (4/8/96 Time)
Could the Gospels really be eyewitnessers? (4/8/96 Time)


여기에서 당신도 제가 좋아하는 곳들을 여행하실 수 있습니다.

새문명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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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 Buddhism 선불교
The Kwan Um School of Zen 관음선종회
Ramana Maharish 라마나 마하리쉬
Osho Rajneesh 오쇼 라즈니쉬
The Gospel Of Thomas Homepage 도마 복음서 홈페이지
The Ascended Masters 영적인 스승들의 가르침
Anarchist Library 아나키스트 문고
Anarchist Archive 아나키스트 문집

남기고 싶은 말 (방명록)



hanmiru1004@hanmail.net
1999년 6월 16일 수정
1998.1.1 이후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알려드릴 것은 위의 자료들과 사이트들 중 제 뜻과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다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들일 뿐입니다.

10 박석 "명상의 사회화, 사회의 명상화 이루고 싶다"

"명상의 사회화, 사회의 명상화 이루고 싶다" - 오마이뉴스

"명상의 사회화, 사회의 명상화 이루고 싶다"

최진섭(dream4star)



▲ 티베트 여행길에서 티베트에서 만나서 에레베스트산 베이스캠프 여행길에 함께 나선 슬로바키아와 홍콩에서 온 친구들 그리고 티베트 가이드.
ⓒ 이슬람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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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고요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고요를 통해 펄펄 끓는 삶의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명상이다."

바라보기 명상법을 전파하기 위해 <하루 5분의 멈춤>, <명상체험 여행> 같은 책을 펴낸박석(52) 교수(상명대 중문학과)는 고요함만을 추구하는 명상은 한쪽에 치우친 명상법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일반적인 명상가들과는 달리 다양한 사회활동, 사회참여를 많이 하는 편이다. 미래사회와 종교성 연구원(2004년 창립) 원장직을 4년간 맡아서 일을 하는 등 사회운동과 영성운동의 조화로운 만남을 이루기 위해 애써 왔고, 지금은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에 참여해서 활동하고 있다.


'명상가가 왜 그리 바쁘게 사나?'


한적한 곳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수행하는 명상가의 모습을 연상하는 일반인들은 박 교수에게 "명상가가 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며 사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박 교수는 명상가는 정중동과 동정중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답변한다. 5월 22~23일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 '바라보기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박석 교수에게 '명상의 사회화, 사회의 명상화'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명상에 심취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사춘기 시절부터 '육체적 존재가 전부인가'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의문을 품어왔다. 고등학교 때는 기독교에 심취해 개척교회 전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대학(서울대 중어중문학과 79학번)에서는 명상요가 서클 활동을 했다. 그때 만난 한 선배로부터 '명상의 핵심은 자기 속에 있는 불멸의 자유와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에 자극을 받아 요가, 화두선, 위빠사나, 태극권, 라즈니쉬 명상법, 국선도 등의 수행법을 배우러 다녔다. 해인사에서 3천배를 올린 뒤 성철 스님을 만나 요가와 선종의 차이에 대해 묻기도 했다."

- 여러 가지 수행법 중에서 어떤 것이 마음에 들었나?

"초기에는 미국으로 건너간 인도의 요가 명상의 대가 요가난다가 가르친 수행법에 심취했다. 우주합일의 초월적 기쁨과 일상생활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을 중시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쪽으로 전환했다."

"완전한 깨달음은 없다"



▲ 일본 후지산에서 2009년 일본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후지산에 올랐다.
ⓒ 박석

- 저서 <명상길라잡이>를 보면 93년에 '이뭣고' 화두를 들고 49일간 단식수행하다 깨쳤다는 얘기가 나온다. 깨달음을 얻은 결론이 무엇인가?

"완전한 깨달음은 없고, 모든 깨달음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떤 깨달음도 완전한 것이 아니기에 결국 남는 것은 삶이고, 현재의식만이 중요함을 알아챘다. 생명은 타자와의 소통이고 우주만물은 지금도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듯이 완전한 깨달음은 없기에 끝없이 수행을 해야 한다. 진정한 영성, 진정한 깨달음은 내면적 영성만이 아니라, 현실의 삶 속에서 인격의 성장, 욕구의 조화, 사회적 실천 등이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는 어떤 수행을 주로 하나?
"바라보기 명상을 주로 하는데, 이것은 삶과 깨달음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명상법이다. 기존의 명상법은 대체로 지나치게 내면적 평화와 기쁨을 각성하는 데 치우쳐 있는데, 그 종점은 대체로 우주와의 합일, 초월적 진아의 발견 등이다. 이와는 달리 바라보기 명상은 내면적 영성의 각성과 아울러 현실의 삶 속에서 인격의 성숙, 타인과의 소통능력의 향상과 사회적 실천능력의 배양을 중시한다."

-그동안 강연이나 기고문을 통해서 명상의 신비주의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명상이 신비주의에 빠지면 병든다.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다거나 우주와 일체가 되었다는 신비 체험자들을 만나보면 실제로는 인격적으로 미숙하거나 에고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분명히 외부에서 보면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은 그것을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주관적 착각 내지는 집단 주관적 착각이다."

- 종교나 명상이 어느 정도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는 것 아닌가?

"명상이나 종교 수행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다보면 당연히 신비체험을 할 수 있다. 신비체험은 명상이나 종교의 깊이를 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 자체가 깨달음은 아니며 거기에 함몰되면 자칫 매우 위험하게 된다
종교에서 사회적 계율을 중시하고 신비체험에 빠지는 것을 비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티베트 하늘호수에서 2008년 1월, 해발 4700미터에 있는 티베트의 남초호수(일명 하늘호수)에 들렀다.
ⓒ 박석

- 잘못된 수행법이나 수행단체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면?

"정신세계의 영역을 현실세계의 잣대로만 판단하기 어려운 점도 있겠으나, 스승을 신격화하거나 스승의 권위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고, 과도한 금품을 요구하는 단체는 십중팔구 사이비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의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속성효과를 내세우는 곳도 의심해봐야 한다. 정신세계도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만병통치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 왜 이런 현상이 생기나?

"수행단체를 찾는 이들 중에는 로또 심리를 지닌 이들이 많다. 욕심 내지 말고 천천히 해야 하는데, 한 번에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명상과 종교의 차이가 있다면?

"본질적으로는 명상과 종교는 차이가 없다. 위대한 종교가들은 대부분 위대한 명상가였다. 
그러나 종교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기복적인 성격과 도그마화된 교리체계를 띨 수밖에 없다."


"명상은 적게 소유하는 사회 만드는 데 기여"


- 자본주의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여러 가지 방안 중에 사회의 명상화야말로 매우 효율적인 방안이라 여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는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현상에서 왔는데,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더 높여야 조화로운 세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명상은 인류의 의식을 성숙하게 만들고, 인간의 욕구를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기능을 하기에,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사회가 더 아름다운 사회라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 명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개인의 의식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의 의식이 변하면 근본적인 사회변화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의식 변화가 사회 변혁에 도움이 된다는 기본 전제에는 동의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명상이 내면의 각성에만 집중해서, 현실의 부조리를 접하고도 항상 내면의 문제로만 대하고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큰 문제다. 명상가가 많은 인도나 미얀마 등의 사회 현실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이들 지역의 낙후는 복합적인 역사, 문화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겠지만 개인적인 명상에 치중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럴 때는 종교나 명상이 아편 역할을 한 것이다."


-1998년 새문명아카데미에서 바라보기명상 강좌를 시작한 이래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 힘을 쏟아왔고, 현재는 명상모임 바라보기(www.paraboki.net)에서 명상지도를 하고 있는데,바라보기 명상법이 다른 명상법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명상법들이 깊게 들어가면 특정 종교적 세계관에 고착되거나 초월주의에 빠져 일상의 삶과는 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바라보기 명상은 종교적 요소를 배제하고 대신 심리적 과학적 요소를 보강하였고, 내면과 외면의 조화, 일상생활과의 조화를 추구한다."



▲ 음악명상 바라보기 명상법에 주력하는 박석 교수는 자신이 직접부른 음악명상 CD를 만들기도 했다.
ⓒ 박석

-<하루 5분의 멈춤>을 보면 "바라보기 명상은 현란한 일상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평정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바라보기 수련법과 불교의 위빠사나, 관법하고는 무엇이 다른지?

"위빠사나도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라보기 명상과 같다. 그러나 위빠사나 명상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명상법이어서 실제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틀에 맞추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기 명상은 종교적 세계관과 무관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삶의 양식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다. 바라보기 명상은 훨씬 적극적으로 삶 속에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사회에 참여하면서 자아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족을 도반으로, 가정을 도량으로


- 명상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족이 방해가 된다면서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혼자 지내는 경우도 많다.

"가정은 훌륭한 수행도량이고, 부인과 자녀는 도반이다. 
명상하는 이들 가운데는 가정, 자녀를 수행의 장애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현실과 괴리된 내면의 평화와 기쁨만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폐단이다. 
진정한 평화와 기쁨은 현실의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고 실천할 때 오는 것이다. 바라보기 명상은 생활 속에서의 명상을 강조한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올해 안에 우선 바라보기 명상에 어울리는 명칭을 지닌 사단법인을 만들 계획이다. 근래 명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기저기서 명상센터가 생기고 있는데, 대부분이 지나치게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바라보기 명상센터는 어떤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바라보기 명상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공동 출자해서 사회적 공익을 추구하는 단체로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음악을 위시한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포크음악제, 영성음악제, 환경음악제 등의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도 개최할 예정이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명상, 치유, 예술이 함께 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 참가신청] 강화도 오마이스쿨 1박 2일(5월22~23일) 명상프로그램/ 박석 교수의 바라보기 명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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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야기/좋은글
나빌랑 2019. 1. 6. 22:34 http://blog.daum.net/j2l0003/382
11/7/21, 4:15 PM 나빌랑
https://blog.daum.net/j2l0003/382 2/4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


무슨 일이든 지나치거나 모자라서는 아니 된다.
동(動)과 정(靜)은 인격수양의 양면에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극적인 동이나 극적인 정은 모두 자연의 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중용(中庸)의 도를 지켜 동과 정을 적당히 어울리게 함이 참 수양이다.
동적인 자는 마치 바람 속에 끊임없이 나부끼는 불길이요.
정적인 자는 타고남은 재(災)위에 앉은 고목에 사기(死氣)가 침통한
듯하다. 사람의 마음은 응당 한가한 구름 속을 자유로이 나는 솔개 같고
잔잔히 흐르는 물속을 임의로 뛰노는 물고기 같아야 하거늘
정(靜)속에 동(動)이 있고
동(動)속에 정(靜)이 있어,
이야말로 도(道)를 얻은 자의 마음이로다.
동(動)중에 정(靜)을,
정(靜)중에 동(動)을 취하여 동정(動靜)이 적당하여야만
참 맛을 잃지 않는다.

박석 바라보기 명상이란? – 채널숨

바라보기 명상이란? – 채널숨

Namgok Lee | 박석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2)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독한 가난과 이런 저런 사상의 편력 그리고 꽤 고생을 하고 살았지만, 그런 고생보다는 생애를 통해 귀한 인연들을 만나고 맺어 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새삼 느끼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천재성(天才性)이 대단한 젊은 학자들을 만난 것도 나에게는 큰 행운이다.
그 가운데 명상가로 세상에 알려진 박석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전화를 받았는데, 지금 몇 년 째 저술을 하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재성이 있는데, 노력까지 치열한 사람이다.
동서(東西)와 종교 철학 문학 회화(繪畵) 음악 건축에 이르기까지를 회통하는 그의 서사가 머리에 가득하다.
너무 광대하다보니까, 그 무게에 눌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사상 인문의 보고(寶庫)에 새로운 창조물을 더해주리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2013년에 보내준 책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를 다시 읽고 있다.

1 장이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인데, 그 첫 번째 시작인 ‘모호한 노자, 보는 만큼 보이는 도덕경’을 읽고 있다.

어떤 도덕경 해설에서도 만나기 힘든 동서양을 넘나드는 통찰을 읽으며, 감탄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명상가에서 인문운동가로 사회활동가로 삶을 바꾸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노자의 세계를 깊게 들여다보던 중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여름 방학 때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58년 생이니까, 계산해보니 그의 나이 36세경인 같다)
당시 나는 도가사상, 불교철학, 힌두교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인식주체와 객체를 초월한 궁극의 의식 세계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무기한 단식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49일째 아침에 마침내 내가 원하던 그 세계를 깨치게 되었고 곧 회복식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회복식 사흘째 새벽, 나는 기존의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도는 주객과 시공을 초월한 절대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평범한 일상의 현재의식으로 되돌아오는 데 있다는 통찰이었다.
(중략)

새로운 통찰은  나의 삶을 크게 바꾸었다. 
나는 사실 어릴 적부터 은둔적이고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지녔고 
명상을 하면서 현실 사회의 역사와 문명과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그 날의 통찰 이후 현실 사회를 제대로 알기 위해 
뒤늦게 사회과학과 문명사, 동서문화를 공부하기도 하고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시민단체 활동도 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내면의 세계만 들여다보다 비로소 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 보니 이 시기에 내가 박 교수를 만난 것 같다.

나는 그가 경험한 명상의 세계를 모른다.
그래서 더욱 그의 말들이 나에게는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늘부터 이 책을 읽으면서 박 교수의 그 폭 넓은 학문과 명상의 세계에 푹 빠져보려 한다.
특히 문명전환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시점에서 박 교수의 연구가 무르익기를 기대하며 응원한다.

2 comments
이병철
나도 박석교수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어 이태전인가 우리집에도 다녀갔지요. 
그때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불어를 공부한지 얼마 안되어 꽤 난해한 책으로 알려진 불어책을 번역하여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언어에도 뛰어난 분이지요. 그의 역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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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박석 교수의 책을 보면서, 메모를 틈틈이 남기려 한다.

원체 속독(速讀)하는 습관이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써보며 음미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이기도 하고 관심 있는 분들께 혹 참고가 된다면 좋을 것 같아서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코드로 문명을 탐구 관찰하는 것은 나선형 순환, 즉 순환과 발전을 포함하는 관점인데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다.
(대체로 동의한다는 표현은 어떤 코드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오는 경우 그 코드에 의해 시야가 제한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는 의미)

‘문명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서 볼 때, 의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는 가장 핵심적 내용이다.
여러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크게 두 가지 현실적 과제로 압축된다.

하나는 확증편향에서 벗어나 대화 소통 탐구 합의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편의상 ‘연찬(硏鑽)’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어떤 점에서는 확증편향이 지식 개발의 동력으로 작용해 온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테일러도 전락(轉落) 이후 지식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약(LEAP)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해방하는 분절 과정을 거쳐 무분절의 일체(一體)로 진화하는 것 또한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의식의 도약은 자기중심적 분절과 확신에 찬 탐구과정을 거치고 그 성과들을 포함하며, 자기중심적인 확증편향을 넘어 보편의 세계 무분절의 세계로 의식이 열려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락(轉落) 이전의 무분절과 도약 이후의 무분절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나선형 순환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물질의 소비와 소유를 위주로 하는 물질문명에서 단순(單純)소박(素朴)한 삶 속에서 정신적 풍요를 향유하는 정신문명으로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것이다.

여기서 단순(單純)소박(素朴)함에 대해서 ‘아름다움(美)’에 대한 박석 교수의 표현이 대단히 음미할만하여 적어보고 소개해보고 싶어서 이 글을 남긴다.

세련된 소박미(素朴美), 
심오한 단순미(單純美), 
숙성된 평담미(平淡美)라는 표현은

단순히 미학적 관점을 넘어서 
미래 문명의 단순소박한 삶의 내용을 잘 표현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
Namgok Lee 

사람 사이에 합의(合意)가 가능할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감각 기관과 입력된 정보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 간에 ‘뜻(意)’을 합(合)할 수 있을까?
실제의 경험을 통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심하게 표현한 말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도 있다. 자기 또한 타인에겐 지옥이겠지만)
이것은 인간 존재 특히 관념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타협(妥協)’이 있는 것이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이 ‘타협’이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바탕에서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분이나 계급, 국적이나 민족, 성별이나 나이 등에 의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사회를 변혁하는 거친 과정들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또 다른 특성은 이해관계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 간의 ‘타협’을 넘어 진리(뭐라고 표현하든 관념과 별개의 실재)를 추구하는 상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무타협(無妥協)’으로 진리나 진실을 향해 합의(合意)를 도출하려는 지향이 있는 것이다.
무타협(無妥協)은 흔히 말하는 ‘비타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대부분의 비타협은 ‘확증편향’과 겹친다.

때로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비타협적 투쟁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데 기여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과정적인 것이다.
‘무타협’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인식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와는 별개의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통과한 상(像 또는 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이다.
그렇게 해서 아집(확증편향)에서 자유롭게 되는 상태로 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가리켜 말한 ‘무의(毋意)’는 바로 이런 ‘무아집’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합의(合意)가 불가능하다는 실태를 넘어서, 무타협으로 진리나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특성은 동물 일반의 1차적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숭고지향성(사랑, 자비)과 보합(輔合)한다.
그 둘을 결합한 말이 ‘성(聖)’이다.
보통 사람의 성화(聖化), 사회의 성화(聖化)가 가능할까?
인류 존속이 걸린 위기의 시대에 물어지는 질문이다.

우문(愚問)인가?

박석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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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이병철
'성화'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개인과 사회의 성화,
공부하고 깨어있다는 의미가 그것이라 하겠지요.
 · Reply · 4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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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박석 (지은이)  들녘 2014



책소개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_ ‘대교약졸’로 꿰뚫는 동서 인문학 5

1장.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
모호한 노자, 보는 만큼 보이는 도덕경 16
대교약졸, 현묘한 직관 속에 감추어진 논리 41
대교약졸은 화광동진의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 57

2장. 대교약졸에서 미학의 코드를 읽다
플라톤과는 달리 미에 관심이 없었던 노자 72
나선형적 발전을 보여주는 아름다움들 80
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101

3장. 거룩한 기독교와 범속한 유교
유교는 과연 종교인가? 학문에 불과한가? 120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 135
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164

4장. 복잡한 인도 불교와 단순한 중국 선종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 186
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201
인도 종교와 중국 선종의 깨달음의 미학 224

5장. 철학: 치밀한 지적 탐구와 중후한 실천궁행
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 240
추상적/논리적 사유와 형상적·직관적 사유 263
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288

6장. 문학: 통일된 플롯의 강렬함, 수렴된 감정의 절제미
서사와 카타르시스, 서정과 잔잔한 울림 322
발산적이고 명료한 표현, 수렴적이고 함축적인 표현 347

7장. 회화: 농염한 채색미와 담백한 여백미
사실적 묘사의 인물화, 기운생동의 산수화 378
원근과 채색의 미학, 선과 여백의 미학 400

8장. 음악: 풍성하고 감미로운 소리, 성기고 그윽한 소리
숫자에서 과학으로, 바람에서 정치로 420
화성법에 금속성 악기, 미분음에 식물성 악기 440

9장. 건축: 돌로 만든 웅장함, 나무로 만든 조화로움
영원을 갈망하는 석조건축, 조화를 꿈꾸는 목조건축 464
정원, 동서양의 미적 안목과 자연관이 녹아 있는 공간 493

10장. 발산의 서양문화, 수렴의 동양문화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 512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중국문화 550
새로운 대교약졸을 기대하며 581

나가는 글_ ‘나’를 잘 들여다보고 ‘세상’을 잘 내다보자 599
참고문헌 603
찾아보기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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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03~104 중국예술은 바로 분산적 통일미를 강조한다. 먼저 회화를 보면 서양회화가 초점투시를 위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는 하나의 시각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중국회화는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 여러 개의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중국회화도 초점투시 위주의 그림들도 있다. 그러나 중국회화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하는 산수화에선 산점투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산을 밑에서 위로 바라보는 시각과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산 뒤쪽의 감추어진 그윽함을 바라보는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다. 한 폭의 그림에서 여러 개의 시각이 분산되어 나타나면 시각적 통일미는 분명 찾기가 어렵고,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이 어우러져 초점투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운치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건축물에서도 중국은 분산적 통일미를 추구한다. 서양의 대표적인 건축물, 예컨대 성당이나 궁전들이 대개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중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궁전이나 사원들은 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다.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하나로 집중된 건물에 비해 통일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원림건축에서는 각각 분리된 공간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흩어진 각각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나름대로의 통일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통일미인 것이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에는 반드시 지휘자가 있지만 중국 전통음악의 합주에는 한가운데 서서 전체 음악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지휘자가 없다. 각각의 악기들이 지휘자 없이 제각기 놀면서도 전체적인 호흡을 맞추는 것을 중시한다. 한 명의 지휘자가 수십 명의 단원들을 이끌어가는 오케스트라에 비해 통일미가 부족한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 속에는 조화로움이 있다. 다만 집중적 통일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16~117 사실 과학기술은 선진과 낙후가 있지만, 문화는 절대 객관적인 우열이 있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은 제각각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이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동일한 집단 내에서는 아름다움에도 어느 정도의 보편적인 기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미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칸트는 미적 판단은 취미판단에 속하기 때문에 완전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상호 간의 타당성, 즉 공통의 타당성을 가질 수는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집단이 서로 다르다면 장자가 의문을 제기하였듯이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동양인들은 알게 모르게 문화의 영역에서도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근대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의 위력에 압도되어 주눅이 들어 문화 영역의 아름다움이란 영역에서도 그들이 만든 관점을 좇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주체성을 찾아야 할 때이다. 그냥 겉으로 보면 서양은 교, 동양을 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보면 그 졸은 단순한 졸이 아니라 대교약졸의 졸일 수 있다. 굳이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성을 외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름다움에는 절대객관적인 기준이나 서열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자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려미와 소박미, 다채미와 단순미, 농염미와 평담미, 집중된 통일미와 분산된 통일미, 전경을 부각시키는 아름다움과 배경과의 조화미, 그리고 이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서 발산미와 수렴미, 이들은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코드들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76~177 물론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론이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다. 사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신의 개념은 원래 아주 소박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의 족장시대의 신은 주로 엘로 불렸는데 초월적 개념은 거의 없고 부족의 번영을 약속하는 부족의 수호신 정도의 개념이었다. 족장시대의 유대의 신은 비교적 친근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 모세를 거치면서 유대의 신은 크게 변모한다. 우선 엘에서 야훼로 그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부족의 신에서 민족의 신으로 바뀌었고, 거기에다 계약을 통해 유대민족이 약속을 잘 지키면 주변 민족들을 내리치면서 유대민족을 축복을 주다가도 유대민족이 계약을 어기는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엄격한 신으로 변모한다.
사실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착기의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유대민족은 전쟁을 치를 때는 전쟁의 신을 믿었지만,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뒤에는 농경의 신이었던 바알 신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예언자들은 바알 신을 숭배하던 자신의 민족을 질책하면서 야훼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요하곤 했다. 당시의 유대교에는 유일신이라는 개념 외에 특별한 고등 철학이나 윤리도 없었다. 사실 축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대의 야훼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했다.
기원전 8세기에 축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등 윤리와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야훼에 대한 개념이 점차 바뀌게 된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 이 시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는 야훼는 이전의 가혹하고 무자비하고 희생 제물을 즐기던 모습에서 희생 제물보다는 사회의 정의를 강조하고 무한한 사랑을 강조하는 신으로 점차 변모한다. _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접기

P. 226~227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단하선사丹霞禪師가 겨울철에 낙양의 혜림사慧林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씨는 추운데 땔감이 없자 단하선사는 본당으로 달려가서 목불을 들고 와 쪼개어 장작불을 지폈다. 그 절의 승려가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발대발하면서 불제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따지자 단하선사는 태연하게 부지깽이를 들고는 장작 잿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승려는 의아해하면서 도대체 뭘 하느냐고 물었다. 단하선사는 부처님의 사리를 찾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 승려는 어이가 없어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단하선사는 사리도 없는 목불로 불을 땠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그 승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공안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예컨대 우상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것이다. _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접기

P. 314~315 서양은 대체로 이원성을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심한 경우에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있어서는 안 되고, 또한 서로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데카르트는 정신의 작용이 자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의 영향을 받아 극심한 가뭄 때에 스스로 근신을 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던 조선시대의 임금의 행위는 정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연과 정신을 더욱 확연히 분리시킴으로써 정신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자연의 특징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즉 신이 인간의 정신에 부여한 이성적인 사유의 능력은 더욱 강조되고 아울러 어떠한 정신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자연의 물질성이 보장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철학자는 인간 이성의 힘을 더욱더 신뢰하고, 과학자는 신학의 간섭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자연에 대한 탐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_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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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석 (지은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상명대학교 글로벌인문학부대학 중국어권지역학전공 교수

저서: <두보 초기시 역해>(솔출판사, 공저), <동양사상과 명상>(제이앤씨), <대교약졸,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중국문화>(들녘),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문학을 어떻게 보았는가>(역락), <불가능한 누드>(들녘),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들녁), <의식과 본질>(위즈덤하우스), <한산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최근작 : <참선 잘하그래이>,<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하루 5분의 멈춤>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문화사 전체를 하나의 코드로 꿰뚫다
그리스로마?춘추전국시대부터 21세기까지 문화와 인문의 시공간을 탐사하다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는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그것은 저자가 학자인 동시에 명상가로서 오랫동안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하며 겪었던 다양한 종교적 체험들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사유체계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는 것도 이 책만의 개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의 차이가 문학에서, 그리고 회화, 음악, 건축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수천 년에 걸친 서양과 동양의 문화사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그 전체적인 흐름을 압축해서 소개하고 서세동점 이후의 동양문화가 나아갈 바를 모색한다.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지만 ‘대교약졸’이라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현미경으로 분석하다 보니 동서양 문화의 특징이 손에 잡힐 듯 일목요연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무겁고 딱딱한 인문학적 용어를 지양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안내하고 있어 독자들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동서양 문화의 깊고 풍부한 세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놀라운 인문학 코드, 수렴과 발산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인문학적·문화적 호기심과 궁금증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성스러움을 강하게 발산하는 예수가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였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왜 일상의 윤리를 강조하는 범속한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받았을까? 왜 서양철학은 논리와 분석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철학은 직관과 통찰을 좋아할까? 왜 서양사람들은 확실한 이분법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사람들은 두루뭉술하게 하나로 보기를 좋아할까? 서양문학에서는 서사성을 중시하는 소설과 희곡이 크게 발달한 반면 동양문학은 서정성을 중시하는 운문이 주를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회화에는 누드가 넘쳐나는데, 왜 동양회화에서는 누드가 없을까? 서양화는 화려한 채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왜 동양회에서는 수묵과 여백의 미를 더욱 중시할까? 서양음악은 화성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왜 동양음악은 화성법이나 대위법이 없는 것일까? 서양음악에는 지휘자가 필요한데 왜 동양음악에는 지휘자가 없을까? 서양 고전건축물은 왜 하나같이 주재료가 돌이고, 동양의 건축물은 나무일까?

굳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위와 같은 의문을 지녀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의문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 관계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별다른 뾰쪽한 답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위의 모든 질문들이 사실은 하나의 미학적 코드에서 나온 것에 놀라게 된다. 그 코드는 바로 발산과 수렴의 미학이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대교약졸에 들어 있는 논리와 미학을 탐색하면서 여러 가지 아름다움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발산과 수렴으로 나눈다. 그리고 3장부터 9장까지는 이 발산과 수렴의 코드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의 영역을 탐색하면서 그 차이점들을 하나씩 풀어간다. 한 절씩,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어 보이던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이 점차 하나로 꿰뚫어져 일목요연하게 이해될 뿐만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인문학적·문화적 궁금증과 호기심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10장에서는 거대 문명사적인 시각으로 동서양 문명의 흐름을 탐사한다. 각 문화 영역에서 입체적인 비교와 분석을 통해 정리된 동서양 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은 문명사의 이야기를 통해 한 차원 더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를 비교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동아시아 문화의 현황은 어떠하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끝으로 저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 통찰들을 차분히 체화시켜 자신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데에도 적용해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내다보는 데 활용해보라고 권유한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 책은 잘 일깨워준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독자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숙제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그림을 어떤 아름다움으로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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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분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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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인문학책이 범람하는 요즘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 제목을 보고 흥미로와 주저없이 구입해 읽었다. 인문학 전반에 대한 개론이 아닌 저자의 30년넘는 치열한 수행후에 깨친 깨달음을 바탕으로 `대교약졸` 한마디로 동서양의 모든 분야에 대한 명쾌한 통찰이 놀랍다.  구매
산야 2013-11-2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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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wow !!!

두꺼운 페이지에 망설이고 있다면 기우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물 흐르듯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동서양의 철학, 역사, 건축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엄청난 학식에 감탄하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꿰뚫는 통찰력에 두 번 감탄한다. 특히 1장의 노자의 도덕경 부분에선 무릎을 칠만큼 놀라운 '새로운 도덕경'을 만나기도 했다.   내가 접해본 인문학도서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icepray 2013-12-22 공감(2)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