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6

엔도 슈사쿠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알라딘: [전자책]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eBook]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은이),이평춘 (옮긴이)
어문학사2015-01-26 
원제 : 白い人·黃色い人



전자책정가  6,6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208쪽

책소개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등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으로, 엔도 슈샤쿠 문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엔도 슈샤쿠는 <백색인>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유일신을 갖는 서양의 백색인이기도 하고, 범신론적 신을 섬기는 동양의 황색인이기도 한 작가의 내면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신과 신 등 모든 관계의 대립이 발생하여 얽히는데, 소설은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라는 제목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시사한다.

프랑스인이면서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 협력자가 되어 버린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백색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의 평범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인 소년이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가 폐병 앓는 늙은 개의 목을 새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악마처럼 다가온 학대의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다.

'황색인'은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는 황색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나'가 브로우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는 브로우 신부에게 듀랑 신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뒤에 곧 듀랑 신부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교차하여 싣는 특별한 구성방식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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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신의 아이
백색인白い人 7

신들의 아이
황색인色い人 105

역자 후기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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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52“코냑.”
“안 돼요. 못 마시는 걸요.”
여자가 케이프를 벗자 쇄골이 보기 흉할 만큼 확연히 드러났다. 가슴은 7, 8세의 소녀처럼 납작했다.
“별거 아니니까 잠깐 입을 대봐. 그런데 쟈크에게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그녀는 괴로운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 당신을 믿어요.”
“안심해, 걱정할 거 없어.”
술잔이 오고감에 따라 여자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지고, 땀으로 엉망이 된 화장이 지워지기 시작하더니 주근깨가 드러났다. 망가진 인형처럼 목도 흔들렸다.
“믿~어~요.” 접기
P. 184-185물론 기미코는 20일 아침의 일을 모른다. 이브가 아담을 악으로 유혹했듯이 내게 작은 소리로 유혹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일본인이 그러하듯 닳아빠진 다다미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시선은 얼어붙은 듯 다다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악으로 유혹하는 듯 생각되었다.



저자 및 역자소개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지은이)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가톨릭 신자인 이모의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열한 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9년 게이오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장학금으로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결핵으로 인해 2년 반 만에 귀국한 뒤,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5년에 발표한 《하얀 사람》(白ぃ人)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바다와 독약》으로 신쵸샤 문학상과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하고 일본의 대표적 문학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엔도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유럽의 [신의 세계]를 경험한 [나]가 결국 동양의 [신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자전적 소설 《아덴까지》를 발표했는데, 그 6개월 뒤에 《백색인白い人》을 발표하였고, 또 6개월 뒤에 《황색인黃色い人》을 발표했다. 그리고 백색인으로 1955년 제3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아덴까지》의 작품 의식을 기반으로 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역시 엔도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1966년에 《침묵》(沈默)을 발표하여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96년 타계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종교소설과 통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이자 일본의 국민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침묵》, 《예수의 생애》,《내가 버린 여자》, 《깊은 강》, 《사해 부근에서》, 《바다와 독약》, 《그리스도의 탄생》 등 다수가 있으며 1996년 9월 29일 서거. 東京 府中市 가톨릭 묘지에 잠들어 있다. 접기

수상 : 1980년 노마문예상, 1979년 요미우리 문학상, 1966년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1955년 아쿠타가와상
최근작 : <나의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사무라이> … 총 156종 (모두보기)



이평춘 (옮긴이)


- 와세다대학 대학원 일문학 연구생 수료
-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 대학 대학원 일문학 석사
- 도쿄 시라유리여자대학 대학원
<엔도 슈사쿠 문학>으로 문학박사
- 2019년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외래교수


번역서 外
- 엔도 슈사쿠『바다와 독약』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예수의 생애』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그리스도의 탄생』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내가 버린 여자』어문학사
- 엔도 슈사쿠『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어문학사
- 엔도 슈사쿠『엔도슈사쿠 단편선집』어문학사 및 엔도 슈사쿠의 학술논문 다수
- 1986년부터 <영혼과 형식> 현대시 동인회에 참가하며 ‘이평아’라는 필명으로 4권의 동인지 출간 접기

최근작 : <타인의 땅> … 총 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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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등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
<제33회 아쿠타가와상(賞) 수상작>

신학생을 고문하는 사디스트 청년의 고뇌……
유년 시절 개화된 악의 희열 속에서도<신>과 무관할 수 없었던
「백색인」,
신부였던 피에르 듀랑의 <신>과 무관한<신들>의 세계가 운명이 되어 버린「황색인」


이 책의 개요

1
엔도 문학은 다신성을 지니고 있는 동양 정신 풍토 안에서의 기독교 토착화 문제 및 인간에게 있어서의 죄와 악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엔도 문학의 뿌리를 이룬 엔도 슈사쿠의 초기작

종교와 신과 구원의 문제에 관해 고찰한 엔도 슈사쿠는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문학 작가로서, 종교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바 있는‘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이번에 번역되어 출간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원제 : 백색인 황색인)은 엔도 슈사쿠의 초기작으로, 엔도 문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엔도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유럽의 <신의 세계>를 경험한 <나>가 결국 동양의 <신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자전적 소설 <아덴까지>를 발표했는데, 그 6개월 뒤에 <백색인白い人>을 발표하였고, 또 6개월 뒤에 <황색인 色い人>을 발표했다. 그리고 백색인으로 1955년 제3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아덴까지>의 작품 의식을 기반으로 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역시 엔도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유일신을 갖는 서양의 백색인이기도 하고, 범신론적 신을 섬기는 동양의 황색인이기도 한 엔도의 내면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신과 신 등 모든 관계의 대립이 발생하여 얽히는데, 소설은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라는 제목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시사한다.
특히 신의 아이(백색인)은 유일신을 섬기는 백색인(서양인)들의 세계관, 유일신의 세계에 순응하지 않는 백색인의 세계관 그리고 이것의 첨예한 갈등을 인간의 악이 극도로 팽창하던 시기인 독일 나치 침공을 배경으로 묘사한다. 인간에게 있는 악의 본성은 신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인가,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유다의 관계에 대해 간접적으로 고찰하고 있어, 행간에 담긴 엔도 슈사쿠 특유의 종교적 사색을 읽을 수 있다.

신의 아이(백색인)

프랑스인이면서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 협력자가 되어 버린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의 평범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인 소년이었다. 엄격한 청교도이신 어머니의 훈육 아래 평범하게 자란 듯하지만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가 폐병 앓는 늙은 개의 목을 새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악마처럼 다가온 학대의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일은 이후 ‘나’가 행하는 모든 비도덕적 행위의 모티브가 된다. 나의 내면에는 도덕, 종교, 가정 등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억누르는 것들을 해체시키려는 악의 속삭임이 커지기 시작한다.

(본문 p.25)
나는 그 자신만만한 표정이 매우 싫었다. 이 가톨릭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선과 덕, 인간의 정신적인 진보, 인간의 역사적 성숙이라는 말을 나는 귓가에 들리는 환청처럼 우스꽝스럽게 여기면서 듣고 있었다. 17, 18세인 순진한 학우들은 적어도 이 말들의 진실성과 가치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내게는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을까?

대학에 들어온 후 만난 쟈크는 이마는 벗어지고, 머리카락은 고추처럼 고불고불한 못생긴 신학생이다.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나’에게 쟈크는 ‘그리스도를 닮음’이란 책을 내밀며 하나님과 같이 십자가를 가슴에 짊어질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배반자 유다를 생각하다가 쟈크와 가까이 지내는 마리 테레즈를 농락하기로 결심한다. 무도회에 가지 않도록 신신당부한 쟈크를 무시한 채 마리 테레즈는 너무나도 쉽게 나에게 부름을 받고 무도회에 나간다.

(본문 p.50)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도회에서 마리 테레즈를 무자비하게 내팽개치고, 쟈크가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저주를 하도록 만든 후 1년이 지난다. 그 사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쟈크와 마리 테레즈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었다. 대학에는 두세 번 나갔지만, 옛날 친구는 이미 나를 잊고 있다.
3년이 지난 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관 통역사로 일하게 된 나는 제6구의 레지스탕트 연락원 역할을 하고 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힌 가톨릭 신부와 마주치게 된다. 그는 바로 쟈크였다.

(본문 p.63)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문을 받아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남자 역시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본문 p.92)
“마리 테레즈라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이 녀석 앞에서 그녀를 심문하는 겁니다.”
이날 밤 나는 또 다시 유다를 이용했다.

신들의 아이(황색인)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는 황색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나’가 브로우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는 브로우 신부에게 듀랑 신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뒤에 곧 듀랑 신부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교차하여 싣는 특별한 구성방식을 선보인다.
무엇보다 신들의 아이(황색인)에서는 백색인임에도 불구하고 황색의 신의 세계에 살게 된 듀랑 신부의 삶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신의 아이(백색인)와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듀랑 신부는 교회의 일본인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파하던,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착실한 신부였다. 어느 날 수해를 입고 양친과 여동생 등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기미코를 만난 이후 한순간 인간의 육욕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추방당하기에 이른다.
교회의 신도들로부터 가차 없는 모욕을 당하게 된 듀랑 신부는 근근이 브로우 신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삶을 연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배반하였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기미코를 폭행하기도 한다. 기미코는 듀랑 신부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님을, 이제 그리스도는 듀랑의 삶에서 희미해져가는 허상에 불과함을 인식시킨다.

(본문 p.166~168)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 거죠? 오히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는 부처님 쪽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나는 일어나 망연히 기미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화가 나서 내뱉은 기미코의 이 말은 돌연 계시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교회를 버린 지난 8년간, 나는 악몽처럼 하느님의 벌에 시달렸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아왔다. 나는 자신을 파문한 교회를 미워하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해 보았지만, 한순간도 하느님을 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미코의 말대로 그 하느님을 잊는다면, 그로부터 해방된다면, 더 이상 벌에 대한 두려움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진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선교한 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 (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기미코와 어제 찾아온 치바라는 청년이 지니고 있는 그 동양인 특유의 가늘고 긴, 멍한 눈의 비밀만은 알 듯한 느낌이 든다. 둔한 광택을 띤 그들의 눈은, 죽은 작은 새의 눈을 생각나게 한다. 그 멍한 시선에는 우리 백인이 왠지 기분 나쁘게 느끼는 무감동한 것, 비정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 기미코가 때때로 외우는, ‘나무아미타불’은 우리가 바치는 기도 같은 것이 아니라 죄의 무감각에 어울리는 주문이다.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죄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소설은 마지막에 듀랑 신부가 ‘나’에게 자신의 일기를 맡겨 그간의 일들을 브로우 신부에게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본문 p.198~199)
당신에게 있어 성탄은, 이 어둠 속에 신神께서 빛을 내려주신 밤이겠지요. 하지만 누런 피부색을 지닌 우리들에게는 어둠도, 빛도, 그 구별이 없습니다. 듀랑 씨는 죽기 전에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폭격 직전에 류머티즘을 앓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간 그 노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폭격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일기를 내게 맡긴 이상,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그 때문에 당신네들의 신神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심판도 벌도 없는 황색인의 세계, 지쳐서 눈을 감듯 텅 빈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백색인일지라도 듀랑 씨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같이 새하얀 그 세계만큼 피부색이 누런 우리들과 동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이 편지를 쓰게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
엔도는 이 두 작품을 같은 시기에 병행하여 썼고, 같은 해에 두 작품을 각각 발표했다(1955년「근대문학」5.6호/ 1955년 11월). 이처럼 이 시기 엔도에게 있어서는 <백색>과 <황색>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색이었고, 사상이었고, 신관神觀이었다. 엔도에게 있어서 <백색>과 <황색>의 이분법적 대립양상이 싹트게 된 동기는 유년 시절에 받은 세례와 대학 졸업 후 떠난 프랑스에서의 유학체험이었다.
동양인인 엔도가, 더욱이 독특한 범신적 종교양식을 갖고 있는 일본인인 엔도가, 프랑스에서 서양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증폭되어가는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와의 갈등은, 결국 엔도 문학의 뿌리가 되어갔으며, 이와 같은 이질감과 거리감은 이윽고 <백색>과 <황색>이라는 대립되는 <색>의 문제를 야기했고, 결국 이것을 넘어서 <백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과 <황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의 문제로 귀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백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은 유일신의 ‘신’으로, <황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은 일본의 범신론적인 ‘신들’로 묘사되어갔다. 엔도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신과 신들, 신과 인간, 신들과 인간, 신과 선, 신과 악, 인간과 선, 인간과 악의 문제를 형상화해갔다.
또한 <백색인>과 <황색인>은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만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신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 서구인 <백색인의 세계>에서도 그 신을 믿는 인간과, 그 신을 부정하는 인간이 상호 존재하고 있으며, 이 둘 역시도 항시 대립하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나아가, 이 작품은 설혹 신을 부정하며 신과 격렬히 투쟁하고 있다하더라도, 그 투쟁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어떤 섭리에 대한 고백성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작품은 고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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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전통이 장구한 서양의 세계관과 신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동양의 세계관 사이에서,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고민에 직면한다. 어느 세계든지 신을 믿는 인간과 부정하는 인간이 상호 존재하며 갈등하는데, 신에 관한 문제와 투쟁하는 삶의 과정에서 인간은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 
라파엘 2022-10-24 공감 (29) 댓글 (0)


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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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15년도 최애 소설이었던 ‘깊은 강’ 앤도 슈사쿠 작품이 VPL에 있길래 신나서 집었는데 쉽게 읽히면서도 그 가닥이 잡히지 않아 끝까지 찜찜하게 읽었다. 제목에서 보이듯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고 1부 백색인의 이야기 2부 황색인의 이야기로 프랑스와 일본에서 각각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두 줄기가 결국 한 줄기로 만나는 포인트가 있겠지만 캐치하지 못했다. 이건 읽은 것도 안 읽은 것도 아니다. 죄송!

발췌

혼자가 되었다. 유산은 앞으로 10년 동안의 내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나는 자유다.

중위는 얼굴도 들지 않았다. 나는 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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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y.K 2018-08-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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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이평춘 옮김, 『신의 아이-백색인』/『신들의 아이-황색인』, 어문학사, 2010. 


대단한 책이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온 흔적이 남는 책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접근했기에 그만큼 다가오는 무게감이 다르다. 대단히 무겁게 다가오지만, 그 날카로운 시선과 접근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우리가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일까? 뱀도 뱀이라면 싫어한다지만, 우리도 우리의 내면에 숨겨있는 잔혹성과 폭력성을 꺼내 이야기하면 왠지 거부감이 생긴다. 아니라고 우겨보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바뀔 본성이 아니지 않는가. 신의 아이와 신들의 아이. 이 두 작품을 읽어보고 엔도 슈사쿠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전자인 『신의 아이-백색인』에 대해 무섭지만, 관심과 애착이 갔다.

역자도 이번 작품을 번역을 마친 후에도 제목을 정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원제인 백색인, 황색인에 부제목을 붙인 채로 출간하였다고 한다. 독자에게 이 책을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해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의 아이』에는 30년 넘게 신을 믿어왔고, 20년 넘게 종교 문학을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오고 있다는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뭍어 나온다. 

카톨릭 신자이면서 프랑스 유학을 갔던 작가의 이력을 떠올려봤을 때 순간, 이건 자서전이 아닌가?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묘사하기 어려울만큼의 세밀하고 적나라한 감정 묘사와 고뇌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예수쟁이들의 연민만큼 나를 상처 입히는 것은 없었다’는 ‘나’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고백이 아닌가 곱씹어 봤었다. 
나와 신학생인 자크, 그리고 마리 테레즈.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전혀 인과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몇가지 사건들이 기묘하게 물려나가면서 죄를 낳고, 죄를 낳게 된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  오라는 구절이 떠오르자 이 작품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임을 예감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나. 

폭력과 괴롭힘, 고문과 죽음. 괴롭히는 사람은 어느 순간 어떠한 죄의식도 없이 일종의 정욕적인 희열까지 느끼게 되고 매질을 끝냈을 때는 마치 육욕의 희열이 돌연 사라졌을 때와 같이 허무함마저 느끼는 장면을 보며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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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sosh 2010-05-1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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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실존 

첫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은 책이었다. 문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서술역시 매끄럽다. 군더더기도 없지만 문장상의 장식도 매우 절제되어 있다. 기교가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는 느낌을 준다. 도대체 이런 책을 수십년 전에 처녀작으로 썻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이 책 한권만으로도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도 손색이 없다. 작품의 깊이로 보아도, 문장의 흠잡을데 없는 맛으로 보아도...

그의 맛깔나는 문장도 문장이지만, 그의 책이 가지는 매력의 백미는 그가 요즘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존재론적 탐구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흔히들 그를 기독교 문학의 대가라고들 평한다고 한다. 사실 그는 기독교 문학의 중요한 한 분파를 이루는 의 선과악, 원죄, 인간과 신의 관계같은 주제들을 보기드물게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재미 한국인 문인인 김은국도 그와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책을 꼭 종교적인 색채로만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지금은 서양에서 기독교가 많이 쇠태하는듯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절의 서양에는 기독교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기독교적인 주제가 광범위하가 문학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의 문학은 또한 그의 학창시절 뜨겁게 유행하던 실존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고 있다. 요즘 실존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실존주의라는 인류의 지적유산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우리가 생소하지 않은 감동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가 다루는 문제가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의 문제점이기 때문이다. 백색인과 황색인에서 동과 서에 따른 차이점이 부각되긴 하지만, 그 차이는 공통점에 비하면 경미한 편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기대어 않은 삶의 의미라는 자못 심각한 주제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멋진 독서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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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2010-05-05 공감(2) 댓글(0)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 엔도 슈사쿠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지만 나라마다 믿는 종교의 종류와 그 수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민감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자신이 믿는 믿음이라는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 외에 또 다른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한다. 그게 바로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잠시나마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종교를 찾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과 인간 그리고 종교의 관계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신에 대해 고찰이라고나 할까? 다소 무겁기도 하지만 종교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렵다는 생각마저 느끼기도 했다.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목에서 언급하는 ‘신의 아이(백색인)’는 프랑스인이지만 어릴 때 충격적인 것을 목격한 뒤로 자신도 그 행동을 하게 된다. 이 부분은 나에게도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신들의 아이(황색인)’는 범신론적이며 책에서 등장하는 ‘듀랑’신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기미코’를 만나게 되고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에서 쫓게 나게 되고 신부의 자리까지 박탈당하게 된다. 이 두 이야기는 각각 다르게 전개된다. 하지만, 두 물줄기가 하나의 강이나 호수에서 만나는 것처럼 이 이야기도 한 곳으로 만나게 된다. 각각 다른 종료를 믿고 있고 다른 사건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문제나 내면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사건이나 그에 대한 결과를 통해서 종교 문제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종교문제나 그 방식에 대해서 모두 다르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점은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종교를 믿고 안 믿고가 아닌 각각의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와 생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다소 무게감이 있고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풀어가는 전개 방식도 각각 다른 이야기로 시작하여 하나의 덩어리로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종교와 인간 그리고 종교와 신에 대한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적인 요소도 있었고 신의 아이와 신들의 아이에 대한 대립으로 갈등도 생겨나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터였지만 종교와 신,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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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 2010-05-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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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 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엔도 슈샤쿠의 작품을 접해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엔도 슈샤쿠는 종교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바 있는‘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이라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읽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책도 많이 읽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이 책은 나에게 그렇게 쉬운 책도 아니며 페이지수는 작은 책이지만 쉽게 넘어가는 그런 책도 아니였다,

신의 아이(백색인)과 신들의 아이(황색인)이 책의 배경은 세계2차 세계 대전 당시이다,,
신의 아이(백색인)은 독일군의 통역 사무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나치에 치원해서 나치의 고문자의 일원이 된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과거를 회상하면서 서술을 한 이야기이다,
나는 못생긴 아이였고 못생겼을 뿐아니라 태어날때부터 사팔뜨기였다,그래서 부모님들로부터 완전하게 사랑받지도 못했고,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자신의 쾌락밖에 모르는 사람이였으며,어머니는 그런 남편의 영향으로 어린아이인 나에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요해서 아이로써 누려야 할 기쁨과 자유를 금하고 책도 읽지 못하고 하면서 철저하게 청교적인 삶을 강요했는데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오히려 '나'의 육욕은 학대의 코락을 동반하여 눈을 뜨게 된다.
하녀 이본느가 늙은 개에게 가하는 학대와 고문,고통의 광경을 엿보던 12세의 소년 '나'는 생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단순히 여성에 대하서만 자신의 가학본능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모든 인류를 괴롭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것이다,
훗날 고문자의 일원이 되어서 피고문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절규소리에 무언가 꺼림직한 정욕적인 유희를 느끼기도 하고 또 대학때 신학도 친구인 쟈크가 레지스탕트 연락책 활동을 한 죄로 잡혀왔을때 그를 고문하고 신의존재를 부인하도록 만들려고 고문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일신을 섬기는 백색인(서양인)들의 세계관에서 유일신의 세계를 순응해서 살아가는 쟈크와,,유일신을 거부하고 신의존재를 거부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도 볼수 있었고, 신을 부정하며 신과 격렬히 투쟁하고 있는 '나'의 모습도 보면서 인간이 악으로 극도로 치닫아 있는 모습도 볼수 있어서 씁쓸했다.



신들의 아이(황색인)도 역시 세계2차 대전속의 혼란한 일본의 모습속에서 성당신자인 치바(나)가 사제에게 편지형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또는 듀랑신부의 일기를 옮겨 놓기도 했다,
치바는 성당신자이지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살아간다. 징용과 노동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일주일에 두번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지만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연민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떤 죄의식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어린시절의 친구 사이키의 약혼녀와 몇년간 계속 불륜의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듀랑신부,,블란서 사제였던 듀랑신부, 사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하건만, 선교지인 일본에서 일본여인을 범해서 교회에서도 추방당하고 매일매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자기 자신을 보며 괴롭고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 거죠.
오히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는 부처님 쪽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166
이렇게 괴로움의 나날들속에서도 또 계속 마음속으로 죄를 짓고 또 행동으로도 죄를 짓는 모습이 참으로 씁쓸하고,결국은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만을 그린것이 아닐까 한다,
번역자는 이책처럼 번역하기 어려웠던 책도 없었다고 하지만은 책을 읽는 이도 짧은 글이지만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와 내용이라서 가벼운 책은 아니라서 마음이 좀 무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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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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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신들의 아이 새창으로 보기
신에 대한 문제는 어쩌면 신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끝없은 인간의 호기심에 대해서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다면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아직도 모든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고 있는 것.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어디에서 온 건인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문제.
이런 문제들은 인류의 지식이나 정신으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해답을 구했을지도 모르죠.
만약에 신이 있다면 자연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풀릴 것 같아요.
그러나 이런 문제가 풀리기는 하지만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죠.
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죠.
이 책에서는 백색인과 황색인으로 나뉘어 각각의 신과 신들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신들일 수도 있고,
물론 이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과정에서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죠.
사실 직접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의문이 생기게 되고 여기에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가정이 발생하고 끝없는 문제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구도 또 문제, 해답 찾기를 반복하는 게 어쩌면 우리 인류의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만약에 신이 있다면 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섬기어지는지 또 세계가 왜 신의 뜻대로 사랑으로 가득차지 않는지, 왜 인간에게 죄가 있어야 하는지, 선과 악의 문제 등등.
종교에 대한 문제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 자신의 이야기이자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조금은 무거운 주제에 대한 탐구이기에 신과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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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루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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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 엔도 슈사쿠 새창으로 보기

그러니까 일단 이렇게 이야기하고 시작하자..나~~안 무신론자, 신을 믿지 않는자임.. 가만히 보자...그 신이라는 존재감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지?..신,,어떤쪽에서는 유일신을 외치면서 나를 제외한 모든 신이란 불리우는 것들은 다 우상숭배이니라..하는 경우도 있고...또 다른곳에서는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고 외쳐대는 곳들도 있다..게다가 어느 나라에서는..건담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더라...그 나라는 수많은 신이 존재하는 나라이더라...물론 이 소설의 작가 또한 그나라의 사람이더라...근데 이 소설은 미신과 다신의 의미가 부각된 나라에서 카톨릭적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죄악과 신을 향한 순결한 정신 사이에 방황하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믿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라는 가벼움을 소설적 형식을 빌어 신으로의 죄사함(?..이런말 맞나??.)을 보여준다..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짧고 가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묵직함이 한 천톤급은 된다..특히나 저변에 깔린 기조가 종교라는 주제와 인간의 나약함과 죄악적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일 경우라믄???..하이고!!~~한숨 나온다..그렇다고 종교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 믿음의 분석적 고찰(?) 뭐 이런 것 같은 박사논문은 아닝께로 독서에 큰 무리는 없다..그냥 소설이다..한 인간의 욕망과 종교적 반항등을 결부시켜 종교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한 작가가 만들어낸 픽션인게쥐...재미는 있다..게다가 밑바닥에 깔린 의미 조차 느낌이 팍온다.. 종교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나 싶다...하지만 난 종교인이 아니라 공감의 차원까지는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하기사 난 욕망떵어리니까능... 게다가 야한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빨리 긴다...더벅머리를 벗어나질 못한다...난 야한 여자가 좋다...응??..그래서 신이 날 멀리 하신다??..ㅋㅋㅋ..미안..농담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상당히 길다...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이라고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이 작품은 두개의 작품을 하나로 묶었다..물론 작품의 성격상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같은 느낌으로 집필된 작품이지만 역시 엔도 슈사쿠는 백색인이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그 후 병행된 작품인 황색인을 엮어 하나의 작품으로 선보인거쥐..지금..옛날에는 같이 묶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하여튼 지금은 같이 묶어서 나왔다...내용은 비슷하다...두 작품 모두 수기와 고백적 형식의 일기와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 섞여서 작품이 진행된다...주인공들은 종교적으로 신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인물들이나 그들은 신을 배신한다..물론 불사파의 조필의 부하였다면 "직사"당했을 것이지만 신은 그들은 용서하시는건지, 알면서 외면하시는건지.. 우짠지 내비둔다.ㅋ ..그들은 인간의 욕망에 굴복하고 비겁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된다..ㅋ 백색인에서의 쟈크가 그러했고 황색인에서의 듀랑신부가 그러했다.. 줄거리는 여기까지...뭐 딴거 없다..신에게 반항하고 인간임에 욕망에 불타올라 신을 저버리고 죄악의 길로 들어선 인간의 반항(?)과 고백과 그 뭐라 그러지?.갑자기 생각이 안나네?..저 머시냐?..화장실 같은데 들어가서 신부님한테 고백하는거...뭐지??....앗!! 고해...뭐 그런 내용으로 진행되는 작품되시게따..그러니까..어찌합니까~~어떻해야할까요~~뭐 이렁거..아님 말고..ㅋ

 

짧고 굵은 작품.. 이렇게 평하면 어떨까 싶다.. 종교인이 아니라 공감의 차원과는 별개의 느낌에서 순수한 소설적 감성으로만 이야기한다면 나쁘지 않았다...신이라는 존재와 인간은 절대적으로 멀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더 끌리는 뭔가가 있었다.. 무신론자라는 나의 입장에서 볼때도 굳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해가능한 작품으로 인식되어진다.. 하지만 너무 강한 카톨릭적 감성이기 때문에 반감을 가질만한 독자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릇이 큰 나같이(??) 종교적 포용력이 무한대이신 분들에게는 그럭저럭 읽을 만한 독서가 되었지 싶고...참고로 띠지에 붙은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작품이라는 말에는 뭔가 안맞는듯하다...사실 난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혹시라도 의미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좀 알켜 주시라...그 차이가 무었인지..

 

문득 군대에서 이등병때가 생각난다...난 빵 하나를 위해서라면 신을 마주할 수 있다라고..

몇초간 생각해본 적이 있다....뭔 말인쥐 모르겠으나...하여튼 그때는 그랬다..빵이 신보다 강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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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마다 2010-05-1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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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새창으로 보기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어느날부터인가 살면서 한 가지 종교를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최근에 마음속에 아직 믿음은 많이 부족하지만, 한 가지 종교를 선택해서 다니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친정 작은어머니가  20대의 젊은 외동딸을 병으로 잃고 힘든 상황이 되었는데,  오랜 믿음생활로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보다  굳건하게 잘 견디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다.  

   사촌 동생이 유명을 달리 한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그때부터 작은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가슴속으로는 너무도 안타깝고 힘들게 견디고 계시겠지만,  의외로  당신의 딸이  진정  꼭 쓰임이 필요한 좋은 곳에 갔을 것이라고 긍정하는 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어머니의 믿음에 대해서 여러 차례 물을 기회를 갖게 되면서 내 생각도 깊어지게 되었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란 무엇인가? 믿음을 갖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오랜 시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살씩 나이 들어 갈수록 내가 더 늙고 병이 들거나, 앞으로 힘든 일들이 닥치더라도  믿는 마음이 있으면 조금 더 의지가 되고,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하곤 했다.  딱 내가 종교에 대해, 믿음에 대해  이런 저런 갈등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   동, 서양의 종교관. 종교를 공부한 사람들이 종교와 멀어지거나,   죄를 지었을 때의 갈등등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종교관에 대해서도,  모든  믿음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된다.  

 
  아직  종교에 대한  지식도, 마음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책을 읽어 나가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동, 서양의 종교적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종교적인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작가에 대한 검색을 먼저 해보게 되었는데,   일본인으로 태어나 어릴 때 가토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기에 프랑스로 가토릭 대학에 유학을 한  그에 대한 정보들을  알게 되니,  조금씩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본느'의 포동 포동한 무릎은 낙인 찍히듯 내 기억 속에 하얗게,   
                                        너무나도 하얗게 남겨졌다.

                        나의 육욕은 학대의 쾌락을 동반하며 눈을 떴다. 

 
   '신의아이 (백색인)'을  읽어가는 동안, 어느 부분은 정말 진지하게, 또 다른 부분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서도  인간과 믿음에 대해, 종교와 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신의아이 (백색인)' 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청교도 적인  생활을 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의 하얀 허벅지를 보면서 자신 안에  숨어 있었던   쾌락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차대전중 독일군대의 통역관이 되어,  청년기에  알게 된 신학생 '자크'를 고문하는 입장이 된다.  그러면서  그의 연인인 '마리 테레즈'를 고문실 옆방에 데려와 범한다.   연인을 통해 마지막으로 '자크'의 자백을 받아내고자 했지만, 결국 ' 자크'는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주인공 '나'의  행동들을  따라가면서  한 인간의 내부에서 선과 악,  쾌락과 갈등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거죠?"

      '신들의 아이 (황색인)' 의 파문당한 신부 '듀랑'과  조금씩 어려운 상황의  그를  돕는  또 다른 신부인 '브로우',  그리고 일본인 이자 교회에서  자신으로 인해 쫓겨난 '듀랑' 과 함께 살고 있는 '기미코'.의 이야기이다.   '황색인'은 백인으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한 순간의 실수로 파면당하면서,  함께 사는 황색인 기미코 사이에서의 갈등을 볼 수 있다.  나 '치바'가  '브로우'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와  자신을 도와주었던 '브로우' 신부를 위험 속에 빠지게 한 '듀랑' 신부의 일기가  내가 브로우 신부에게 말하는 편지내용과 '듀랑'신부가  나와 브로우 신부, 기미코 사이에서의 갈등등을 적은 일기내용이 번갈아 쓰여져서  서로  다른 백색인과 황색인의 눈으로 보는 종교와 갈등을 보여준다.  서양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관을 가진 '듀랑'과   동양에서 살아온 '기미코'가 가진  기독교를 보는 종교관을 보면서  서양인들의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무거운 추를 무엇으로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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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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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 운명과 구원에 대한 질문 새창으로 보기
엔도 슈사쿠라는 이름, 들어는 보았으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이 책(혹은 그의 작품 세계 전체?)의 특징을 규정짓는 것은 2년간의 프랑스 유학과 귀국이 아닌가 한다. 유학 후 '신의 세계'를 경험한 '신들의 세계'의 자식인 자신에 대해 쓴 소설이 '아덴까지'라는 작품인데 이 소설을 쓰고 6개월 후에 이 책에 실린 '백색인'을,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황색인'을 썼다고 한다. 연도는 1955년, 나이는 대략 35세 정도였을 그... 태생적으로 카톨릭 인이었던 그에게도 시대의 특이성과 문명의 이질성은 폭풍처럼 다가왔던 것일까? 이 소설은 그가 느낀 '이물감'을 거침없이 담아낸다. 

제목도 그렇고 책의 구성도 그렇고 작가의 경력으로 봐도 그렇고, 두 편의 소설이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설프게나마 들어본 적이 있는 일신교와 다신교가 가지는 철학적 차이를 떠올려보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상당히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소설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왠걸? 이러한 기대들은 하나같이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싸늘하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매섭고 격렬하다.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일그러져 있으며 스스로의 욕망과 죄책감에 휩쓸린 채로 살아간다. 백색인의 '나'는 자신의 이지러짐을 세계에 관통시키려 드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며 신이라는 이름의 세계로 자신의 이지러짐을 채우려하는 신부 자크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카인이 아벨을 망가뜨리듯, 그는 자크의 유일한 욕망인 마리 테레즈를 이용하여 자크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자크를 죽임으로써 세계의 무의미를 증명해냈지만 결국 황폐하고 무감동할 뿐... 황색인은 세 인물의 고백이 어우러지지만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듀랑 신부'이다. 선교사로 일본에 와서 오랜 세월 신부로 봉사해왔던 그는 기미코라는 여인과의 만나 '타락'한 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 죄책감에 빠진 이들이 그렇듯 그는 스스로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던져놓고, 마침내 '브로우 신부'를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신'을 버린다. 신이 없기에 황색인은 평온하고 무감할 수 있다고, 그들을 닮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색인의 경우, 듀랑 신부의 입을 빌어 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대조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이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듀랑 신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신과 신들의 세계를 충돌시켰을 뿐이다. 하물며 백색인에서의 '나'는 무신론자이고, 대적자 자크 신부의 신앙 역시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운명'이라는 세계의 무자비함이다. 자크 신부나 브로우 신부는 그것을 숙명이라 읽어냈을 뿐이고, 백색인 '나'나 기미코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 뿐... 차라리 전쟁이라는 욕망의 향연장에서 지치고 패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인간상들의 모습, 어쩌면 이 글을 쓸 때 엔도가 느꼈을 무력감이 그 모습에 비추어 보일 따름이다.  

결국 이 한 쌍의 소설은 거울을 마주본 듯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신과 신들은 구원을 주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장난처럼 운명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신의 끄트머리라도 붙들려고 하는 듀랑 신부든, 무의미를 입에 달고 다니는 백색인의 '나', 황색인의 '치바'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은 답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아직 젊은 시절,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절에 씌여졌던 작품이어서일까? 두껍지 않은 이 책 안에 작가는 평생에 걸쳐 고민해야할 화두를 던져둔 것이 아닐지... 생을 살아가며 작가가 나름의 답을 찾는지는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 알 일이리라. 그 답을 들어보고 싶기도, 듣지 않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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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버서난달 2010-05-1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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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만큼이나 확연히 다른 동서양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와 갈등 새창으로 보기
이웃 나라 일본은 야오요로즈카미쿠니(八百万神國), 즉 8백만의 뭇 신들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자칭한다. 이러한 만신들을 숭배하는 일본의 민족 종교 신도(神道)는 전체 인구의 95 % 이상인 1억 1천만 명이 숭배할 정도로 일본의 국교로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보다 일찍 개항했음에도 기독교는 1 % 도 채 안 되는 100 만 명 남짓 정도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독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일본에서 기독교를 주제로 한 “침묵”,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깊은 강”등을 써왔으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엔도 슈사쿠”는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어문학사(2010년 4월)에서 출간된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은 종교와 신, 구원의 문제에 관한 그의 일련의 문학세계를 일컫는 “엔도문학”이 형성되기 이전의 초창기 작품으로 그의 문학 세계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전에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어떠한 경향적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가 없지만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그가 고민해왔다는 서양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엿볼 수는 있었던 그런 책이었다.  


 책은 기독교 유일신앙의 세계인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즉 백색인의 세계와 앞에서 말한 동시대의 온갖 만신들의 나라 일본, 즉 황색인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백색인의 세계부터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 소년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늙은 개의 목을 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하녀 이본느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청교도적인 일상에서 일탈하는 그런 쾌락을 느끼게 된다. 대학에서 엄격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생활하는 신학생 “자크”를 만나면서 유일 신앙인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반발심을 느끼게 되고, 그의 사촌 여동생인 “마리 테레즈”를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쟈크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무도회장에 데려간다.  

나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자크에게 있어서 유다가 누구인지,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P.47).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P.50) 

그로부터 3년 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나”는 게슈타포 통역사로 일하게 되고 그 곳에서 레지스탕스 연락관으로 일하던 신부 “자크”를 만나게 된다. “나”는 종교적 신념과 정의를 부르짖는 쟈크를 비웃으며 마리 테레즈를 잡아와 고문실 옆방에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그에게도 배신을 강요하지만 그는 고문과 더럽혀지는 그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백색인의 세계가 기독교적인 세계관 내부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악을 이야기한다면 황색인의 세계에서는 운명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정반대의 종교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8년전 한순간의 욕정에 의해 파문당한 신부 듀랑은 성당의 후배 신부인 브로우 신부의 보살핌으로 근근히 살아간다 . B29가 일본 영토를 직접 폭격하는 전쟁의 막바지 무렵, 듀랑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권총이 발각될까 두려워 브로우 신부의 사제관에 몰래 숨어들어 권총을 숨겨놓고, 거짓 투서를 보내 결국 브로우 신부는 잡혀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 낯선 땅에서의 기독교의 구원과 배신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괴로워하게 된다. 

선교한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중략)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중략)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 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P.168)

일본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죄의 고통, 구원에 대한 갈망, 우리 백인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애매모호한 상태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중략). 금빛 털이 나 있는 손등은 분명히 백인의 손이었고, 하느님을 믿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백인종의 손이었다, 나는 황색인이 될 수 없었고, 이 피부색 또한 바꿀 수 가 없었다. -(P.191) 

작가는 동,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를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로 정의하여 모든 인간 운명의 배후에는 신의 은밀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섭리조차도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동양적 - 엄밀하게 말해서는 일본 -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듀랑이 백인들의 방법과는 다른 구원의 방법을 찾았음에도 결국 자신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다고 독백하는 부분에서 이미 운명으로 결정되어 결코 좁혀지지도 않고 넘을 수 없는 두 세계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가 있었다. 서로 다른 종말과 구원에 대한 인식, 범신론의 세계는 결국 유일신의 세계에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간격을 좁히기 위한 인위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갈등보다는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평행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교 간의 차이와 갈등에 관심을 두고 출발했던 작가의 문학관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의 문학세계에 있어 본격적인 작품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물론 아직 문학의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은 초창기의 작품이어서 이 작품을 통해 엔도 슈사쿠 전체를 이야기하기에는 비약이 심하겠지만, 적어도 엔도 슈사쿠 문학 전반을 꿰뚫는 주제라는 종교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는 이 책이 손색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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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미르 2010-05-06 공감(1) 댓글(

2012 이찬수. **불교 없이는 신학도 불가능했다 - 불광미디어

불교 없이는 신학도 불가능했다 - 불광미디어

불교 없이는 신학도 불가능했다
불광출판사 
승인 2012.04.23

내가 만난 불교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고등학교와 대학 때는 집과 학교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교회였다. 그 시절 교회 생활은 즐거웠다. 
고교시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할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대학은 화학과로 진학했다.

광주항쟁의 후폭풍으로 캠퍼스에는 전투경찰이 상주하던 시절이었다. 최루가스가 매캐한 교정을 거닐며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이 커지던 어느 날, 속에서 솟아오르는 강력한 메시지에 사로잡혔다. 목사가 되어 소외된 이들과 함께 불의한 시대를 살라는 요청이었다. 한 번뿐인 삶, 나는 그 내면의 요청에 따르기로 용감하게 결심했다. 그 뒤 부전공 제도를 이용해 종교학과에서 신학 공부를 병행했다.

신학으로 시작했다가 종교학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종교학은 내게 낯선 학문이었다. ‘힌두교’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여러종교에 대해 배우면서 이른바 ‘타종교’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불교, 유교, 도교 같은 동양종교의 가르침은 나의 뿌리를 되돌아보게 만들었고, 근동종교, 유대교, 이슬람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적 제한성 내지는 상대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불교의 매력은 대단히 컸다. 공空사상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상대적이고 관계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알지도 못하고 폄하하던 지난날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신학을 잘 하기 위해서라도 불교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대학원을 종교학과로 진학했다. 대학원에서는 특히 선과 화엄사상에 끌렸다. 『화엄오교장』에서 ‘육상원융’을 해설하며 나온 “기둥이 없으면 집도 없다.”는 식의 구절은 화두처럼 성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학생에게 세상을 설명한답시고『화엄오교장』의 그 구절을 나도 모르게 내뱉고는, 그 말에 다시 휩싸이게 되었다. 그 뒤 그 말은 정말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아!”하며 화엄경의 연기론적 혹은 성기론적 세계 해석이 순식간에 내 속에 녹아들어갔다. 이론이 몸으로 느껴지는 신기한 순간이었다.   

지눌의 선사상에 나타난 믿음信의 문제를 중심으로 석사논문을 썼고, 화엄사상에 대한 대표적 영어권 저술인『The Buddhist Teaching of Totality』도 우리말로 번역했다(『화엄철학』, 경서원). 그럴수록 세상을 ‘상대’적 혹은 ‘관계’적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하나 안에서 전체를 보는 안목도 생겨났다. 신도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보였다. 불교를 알수록 기독교가 더 잘 보인 것이다. 나는 불교와 기독교의 근저에서 상통하는 세계를 신앙의 근거이자 핵심, 학문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나는 초심에 따라 신학 석사과정을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박사과정에서는 일본 현대불교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와 탁월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을 비교하며 논문을 썼다. 박사 논문은 보완을 거쳐『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인간은 신의 암호』라는 두권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논문에 담긴 신은 어느 한 편에서 다른 편을 거부하는 대립적 존재가 아니었다. 공空이라고 표현해도 상관없을, 만물의 존재원리이자 때로는 만물 그 자체이기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기독교인이었다. 
불교적 세계관은 나의 신학적 관심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공사상과 합일하다시피 한 신관으로 갈등 해소를 위한 종교 간 대화에 힘쓰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소명처럼 생각되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신학 혹은 종교학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불교였다. 
불교로 인해 기독교적 세계관의 확장과 심화를 경험하면서 
애초에 품었던 목회의 길로까지 다시 들어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교회에서 신자들과 불교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대학에서 불교학으로 강의를 하기도 하는 내게 
불교 없는 기독교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찬수.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한국 그리스도교 비평』등의 책을 썼고, 『화엄철학』,『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등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 강남대 교수이자 길벗예수교회 목사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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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부당 해직된 강남대 이찬수 교수에게 배운다-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참세상 현장기자석 :: 부당 해직된 강남대 이찬수 교수에게 배운다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인권연대 2007.01.02


이찬수 교수에 대한 강남대의 독선적 종교재판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교내외의 양심적인 목소리와 교육당국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강남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강남대에서 ‘기독교적 창학이념’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이찬수 교수는 그동안 이화여대, 성공회대, 감리교신학대에서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이어나갔습니다. 

종교를 내세운 강남대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반종교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대책위’는 열린시민강좌로 진행된 이찬수 교수의 ‘기독교와 현대사회’에 이어, 종교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강좌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강좌에는 우리 사회가 상호 이해 속에서 진정으로 소통하고 성숙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각계 전문가들의 특강도 준비돼 있습니다.
관용과 대화의 원칙으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걸어가야 할 참 길을 나누는 자리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주 최 : 강남대 이찬수 교수 부당해직사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
* 일 정 : 2007년 1월 16일부터 매주 화.목 저녁 7시.
* 장 소 : 인권연대 교육장(4호선 한성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2분 거리)
* 수강료: 4만원(계좌입금: 국민은행 003-21-0712-089(예금주 오창익))
* 문의 및 접수: 인권실천시민연대(02-3672-9443, hrights@chol.com)
종교자유정책연구원(02-2278-1141, kirf@kirf.or.kr)


* 프로그램

1/16(화) 다양성, 진리에 이르는 지름길
1/18(목-특강) 이슬람의 이해와 종교간 대화 : 이희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1/23(화) 文으로 化하다 - 한국종교문화론
1/25(목-특강)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 : 윤영해/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1/30(화) 다르면서 같은 불교와 기독교
2/1(목) 종교적 다양성을 소화해 낸 신학 - 스미스, 힉, 라너의 신학
2/6(화-특강)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 : 홍세화/한겨레 시민편집인
2/8일(목) 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거야 - 성서적 타종교관






* 교재 및 참고문헌


이찬수, <종교로 세계 읽기>,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마이클 콜린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 역사>, 시공사, 2001.
김광원 외, <기독교 바로 알기>, 선학사, 2002.
이찬수, <생각나야 생각하지: 사유, 주체, 관계, 그리고 종교>, 다산글방, 2002.
강남대학교교양교재편찬위원회, <기독교와 현대사회>, 강남대학교출판부, 1998.
그 밖에 파워포인트 자료들 및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




강사 소개

이찬수
이찬수 교수는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같은 곳 신학분야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저서로 ꡔ종교 신학의 이해ꡕ, ꡔ인간은 신의 암호ꡕ, ꡔ한국 종교문화 연구 100년ꡕ(공저), ꡔ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ꡕ, ꡔ생각나야 생각하지-사유, 주체 관계 그리고 종교ꡕ, ꡔ종교로 세계 읽기ꡕ 외 다수가 있습니다. 7년 동안 재직한 강남대에서 부당하게 해직되고, 현재 감신대, 성공회대,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희수
터키 국립 이스탄불대학에서 중동 역사와 문화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와 한국-터키친선협회 사무총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세계적인 이슬람 문화전공자로 유네스코 본부의 ꡔ세계이슬람 문화 총서ꡕ의 동아시아편 집필 책임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ꡔ이슬람: 9.11 테러와 이슬람세계 올바로 이해하기ꡕ, ꡔ이스탄불; 동서양 문명의 교류ꡕ, ꡔ한-이슬람교류사ꡕ 등이 있습니다.

윤영해
동국대학교 선학과와 대학원을 거쳐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비교종교학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해인사로 출가해 18년간 수행한 뒤 환속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ꡔ주자의 선불교비판연구ꡕ, ꡔ불교의 공동체 윤리ꡕ, ꡔ천수경과 기도법ꡕ 등이 있습니다.

홍세화
1979년에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 한 후 2002년에 귀국하였습니다. 현재 한겨레 시민편집인,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고 있으며 ꡔ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ꡕ, ꡔ빨간신호등ꡕ, ꡔ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ꡕ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강남대이찬수교수부당해직사태해결을위한대책위원회 www.hrights.or.kr/yichansu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 geulhangari.com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 geulhangari.com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지은이 | 김진호 이찬수 이상철 유승태 김희선 김나미 정용택 홍정호 백소영 이숙진
발행일 | 2018년 0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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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 단체가 연합하여 열린 공동 강좌 ‘지금 여기로 걸어나온 십계’를 시작으로 기획되었다. 세 단체는 신앙인아카데미, 우리신학연구소(가톨릭),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기독교)인데, 개신교 단체와 가톨릭 단체가 함께하다보니 개신교와 가톨릭이 다루는 십계가 조금 다르다는 데서부터 논의는 시작되었다. 개신교와 동방정교의 십계명은 2계명으로 ‘우상 금령’을 넣었는데, 가톨릭에서는 이를 1계명인 ‘다른 신에 대한 신앙 금지’ 항목에 포함시켰다. 또한 개신교와 동방정교의 10계명은 ‘이웃에 대한 탐욕 금지’인데 가톨릭은 이를 두 개로 나누어 9계명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 것’과 10계명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 것’으로 구분했다. 이 책에서는 가톨릭의 분류 방식을 따랐다.

목차
서론

1계명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신이 하나’라는 말에 대한 범재신론적 해석 │ 이찬수

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신의 이름을 둘러싼 전통, 상상, 그리고 진실 │ 이상철

3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
체제의 분할 전략을 넘어서: 안식일 정신과 기본소득운동 │ 유승태

4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 공경의 계명과 아동 학대 │ 김희선

5계명 살인하지 말라
서바이벌의 체계를 척결하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하여 │ 김진호

6계명 간음하지 말라
이성애 가부장제 없이는 불가능한 간음 제도 │ 김나미

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악마는 뒤처진 자부터 잡는다 │ 정용택

8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살리는 말의 주인이 되라: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 │ 홍정호

9계명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 │ 백소영

10계명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
탐욕의 다수결인 시대, 우리 안의 탐욕 │ 이숙진

보론 역사로서의 십계명 /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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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미국의 목회신학자 도널드 캡스는 본인 자신이 아동 학대라는 주제에 대해 심화된 연구를 하게된 계기가 바로 ˝종교가 아동 학대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 고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동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학대를 정당화하는데 종교가 사용되었다면, 치유와 정의를 불러올 수 있는 자원 역시 종교에서 찾을 수 있을까? 89p - :Dora
이 법은 과거의 주체들인 ‘조상‘이 아니라 현재의 주체들인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물론 그 법의 표현들은 [출애굽기]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그 법은 과거의 법이 아니라 현재의 법이다. 즉 그 법령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의미는 현재의 경험 속에서 재해석된 것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을 성찰하게 한다... 더보기 - iamjune
‘하나‘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유일신론과 범재신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는 사실상 ‘전체‘이자 ‘근원‘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37쪽) - iamjune
문득 나는 제2계명에 대한 데리다식 독법이 진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영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를 교리적.교조적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찾을 수 있어?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라는 의심의 해석학 내지는 ˝틈과 균열의 존재론으... 더보기 - iamjune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노동과 생산성의 기준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이른바 ‘생산적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영국적으로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머물게 하며 이들의 희생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ㅣ 만든다는 점에서, 노동 과정 자체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 의미를 되찾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73쪽) - iam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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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서가 법 속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늘의 시대정신을 담아 성서의 법들을 이해할 것인가

개신교 신자든 가톨릭 신자든 혹은 비신자나 타종교인이든 십계명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교회가 십계명 암기를 신자됨의 통과의례로 삼고 있고 많은 이가 십계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조차 ‘십계’를 깊게 사유하고 성찰의 소재로 삼는 일은 매우 낯설다. 이 책은 십계에 대한 이런저런 오해와 해석을 뛰어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맥락을 투과하여 십계를 새롭게 읽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세 단체가 연합하여 열린 공동 강좌 ‘지금 여기로 걸어나온 십계’를 시작으로 기획되었다. 세 단체는 신앙인아카데미, 우리신학연구소(가톨릭),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기독교)인데, 개신교 단체와 가톨릭 단체가 함께하다보니 개신교와 가톨릭이 다루는 십계가 조금 다르다는 데서부터 논의는 시작되었다. 개신교와 동방정교의 십계명은 2계명으로 ‘우상 금령’을 넣었는데, 가톨릭에서는 이를 1계명인 ‘다른 신에 대한 신앙 금지’ 항목에 포함시켰다. 또한 개신교와 동방정교의 10계명은 ‘이웃에 대한 탐욕 금지’인데 가톨릭은 이를 두 개로 나누어 9계명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 것’과 10계명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 것’으로 구분했다. 이 책에서는 가톨릭의 분류 방식을 따랐다.

오늘날 십계명을 새로 읽다
십계를 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영화 「십계」(1956)나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처럼 십계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많고, 이러한 영화가 나온다는 건 십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여러 사람에게 흥미로운 소재로 다가왔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 탓인지 혹은 이미 대중에게 형성되어 있는 틀에 박힌 십계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십계는 홍해를 가르는 물길 이야기와 관련된 스펙터클한 스토리 이상을 끌어내지 못한다. 요컨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십계는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않고 성찰되지 않는” 대표적인 소재다. 이렇듯 십계를 단순한 흥미로운 스토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신앙적인 숙고와 성찰의 소재로 묻고자 할 때, 처음 고려했던 점은 그것이 성서 자체의 신앙 속에서 어떤 고민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성서에서 십계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두 텍스트(「출애굽기」 20장, 「신명기」 5장) 가운데 「신명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이 언약을 우리 조상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 당신들과 함께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_「신명기」 5장 3-4절

여기서 그 대상은 ‘현재’의 주체들, 즉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다. 과거의 법이 아닌 현재의 법이다. 즉 법령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의미는 현재의 경험 속에서 재해석된 것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을 성찰케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 한국에서 우리는 십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 책에 담긴 각 계명에 대한 열 가지의 이야기는 그 결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도 각양각색이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맥락과 무관하게 경직된 의미로 해석되어온 교회의 십계 독법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우리 시대의 현실적인 고민거리들을 십계의 항목 하나하나와 새롭게 대면시켜 재해석하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책 전체를 꿰뚫는 저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역사로서의 십계를 넘어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_「마가복음」 12장 29-30절

1장 「‘신이 하나’라는 말에 대한 범재신론적 해석」에서는 1계명(“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을 다룬다. 주님이 오직 한 분이라거나 신이 하나라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단순한 숫자로서의 하나라는 것을 넘어 신이 철저한 헌신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실천적 요청의 표현이다. 이 글에서는 많은 기독교인이 야훼/주님이 한 분이라는 말을 수량적으로만 이해하고 ‘하나’의 의미를 성찰하지 않으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1계명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신이 하나라는 말의 신학적 의미를 오늘날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결국 ‘신이 하나’라는 말은 ‘전체’, 즉 신이 모든 곳에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를 잘 살린 신론이 ‘범재신론’은 다신론, 유일신론, 범신론, 무신론을 모두 포괄하고 넘어서는 개념으로, 유일신론의 폐기이자 재해석이고 동시에 완성이다.
2장 「신의 이름을 둘러싼 전통, 상상, 그리고 진실」은 2계명(“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을 데리다식 해체론적 독해 방법을 통해 해석한다. 이는 2계명을 교리적·교조적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찾을 수 있어?”라는 의심의 해석학 내지는 틈과 균열의 존재론으로 신을 바라보려는 시도다.
3장 「체제의 분할 전략을 넘어서: 안식일 정신과 기본소득운동」은 3계명(“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을 다룬다. 인간의 쉼을 위한 안식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의 경계를 살펴봐야 한다. 이 글에서는 안식일과 노동 문제를 오늘날 임금소득과 생활소득의 괴리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일각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본소득’과 연결 짓는다. 상처받은 마태복음 공동체가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성찰과 승화의 과정에서 나와 적을 가르지 않는 보편 윤리를 선택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 시대 빈곤의 현장과 연대하는 실천으로써 기본소득을 바라봐야 한다.
4장 「부모 공경의 계명과 아동 학대」는 4계명(“네 부모를 공경하라”)을 다루면서 부모 공경과 아동 학대를 연결시켜 이야기한다. 무조건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계명이 과연 합당한가? 이 글에서는 부모로부터 폭력을 경험하는 아이들이 주일에 교회에 가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느낄 공포를 중심으로, 계명을 듣는 ‘대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이때 오히려 교회는 부모 공경을 순종의 계명으로 가르침으로써 부모의 폭력을 정당화할 여지가 있다. 교회의 참역할은 무조건적으로 계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 학대를 당한 아이들에 대한 치유다.
5장 「서바이벌의 체계를 척결하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대하여」는 5계명(“살인하지 말라”)을 다루며 살인 가운데 오늘날 가장 문제가 심각한 ‘자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교는 자살에 적대적이다. 자살은 살인에 포함되지 않았고, 자살 자체는 아주 잘못된 행위로 비판받았다. 하지만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한 요즘, 5계명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살을 부추기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 이에 맞물린 서바이벌 사회와 그 사회가 초래한 절망 등이 만연한 상황에서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신의 계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8장 「살리는 말의 주인이 되라: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에서는 8계명(“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을 다룬다. 이 계명은 모든 형태의 거짓말을 금지하는 도덕주의적 선언이 아니라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말, 특히 고대 이스라엘 재판에서 상대를 억울하게 피해자로 만드는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즉 부와 권력을 독점한 이들에게 맞서 맨몸으로 대응하는 이들 편에 서서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 ‘법률의 역사화’를 시도한 것으로, 곧 ‘법의 말’을 통한 대중의 주체화 시도다. 이러한 법의 말을 넘어 참말이 일으키는 사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타자의 말이 놓인 맥락 속으로,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자리로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6계명 “간음하지 말라”, 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9계명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10계명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의 네 가지 계명은 서로 같은 맥락에 있다. 이웃의 집, 소, 나귀, 남종, 여종 등을 넘어 아내까지도 남편의 소유로 보았던 가부장적 문화에서 만들어진 이 계명들을 오늘날 그대로 따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어 보인다.
6장 「이성애 가부장제 없이는 불가능한 간음 제도」는 6계명이 과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의도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고대 사회에서 ‘간음하지 말라’의 대상은 여성에 한정되었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맘대로 다뤄질 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는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후기자본주의, 이성애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과연 결혼이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7장 「도둑질하지 말라」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청중은 사유재산이 있고, 법적·종교적으로 권리를 가진 성인 남성이다. ‘도둑질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가나브’를 당대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유인하여 노예로 만들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7계명은 소규모 자영 농민들에 대한 지배 엘리트들의 전방위적인 수탈, 곧 토지 강탈에서 고리대를 통한 노예화로 이어지는 ‘인간 도둑질/도적질’ 금지를 위한 계명이다.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역시 언제나 야만적인 체제의 희생자는 가장 뒤처진 자들이다. 십계명이 본래의 취지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 변혁 운동이 필수적으로 선행되거나 동반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9장 「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에서는 9계명(“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은 있는데, 왜 ‘남의 남편’에 대한 계명은 없을까? 가부장제 문화였던 전통사회의 시대적 맥락을 고려해 이 계명을 새롭게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성서의 권위를 훼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계시로서의 보편 복음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10장 「탐욕의 다수결인 시대, 우리 안의 탐욕」에서는 10계명(“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을 통해 우리 안의 탐욕을 본다. 자본과 소비 욕망, 시장이 중심이 된 이래로 ‘지구 이웃’들은 풍요와 번영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는 이웃의 소유를 탐냄으로써 얻어진 풍요다. 서로의 관계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러한 삶이 존재로 사는 방식이며 우리는 인간을 넘어 지구 모든 존재에게로 이러한 구조를 확정하는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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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고 기다리는 책. 가톨릭과 개신교 단체 셋이 함께 만들었는데 개신교 신학일반으로 분류되어 있다. 분류와 통계의 한계.  구매
:Dora 2018-02-16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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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십계

십계는 율법 즉 윤리 도덕의 영역인데 인문학적 고찰(나에게는 인문학적이 낭만적으로 들린다)이 왜 필요할까 싶기도 했다. ‘인문학적‘이란 말이 내포하는 의미와 범위가 넓다는 것도 안다. 그보다 현실적, 사회학적, 시의적, 시대상황적, 운동으로서 복지적 고찰이 맞는 듯...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착적 십계의 해석은 남용될 수밖에 없다. 결국 희생자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고찰은 계속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