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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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작성자 바보새 16-01-20 07:25 조회1,0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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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7. 그것은 애욕이다. 분노다. 동성에서 일어나는 무섭게 잡아먹는 놈이요 무섭게 죄짓는 놈이다. 그것이 이 현세에서 대적인 줄 알아야 한다.
동성(動性) 라쟈스(rajas), 사트바(sttva, 善性)와 타마스(tamas, 暗性)와 함께 프라크리티를 이룬다.
 
38. 불이 연기에 싸여 있듯이, 거울이 티끌에 싸여 있듯이, 태 안의 아기가 탯집에 싸여 있듯이, 이것은 거기 싸여 있느니라.
탯집(ulba) 태아를 싸고 있는 엷은 막이다. 아기가 난 다음에는 그것은 없애 버린다. 거의 모든 영어 번역이 그것을 “태아가 자궁에 쌓여 있듯이”라고 번역 하고 있지만 울바(ulba)는 자궁이 아니라 탯집이다. 태아를 감싸는 것은 이 탯집이지 자궁이 아니다. 자궁은 아기를 보호한다. 탯집은 없애지만 자궁을 없애는 사람은 없다.—마하데브 데자이
이것 이 지혜라는 말이다. ᅳ샹카라
거기 그 애욕.
 
39. 지혜는 여기 쌔워 있다. 쿤티의 아들아, 이 어진 이의 영원한 대적, 애욕의 형상을 쓰고 있으면서 영원히 배부를 줄 모르는 불에 말이다.
애욕의 형상을 쓰고(kamarupa) 힐(Hill)의 번역과 같이 형상을 마음대로 바꾸면서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욕망의 대상을 즐김으로써 만족되는 법이 없다. 불에 장작을 더하면 더할수록 불길이 더 서듯이 점점 더해갈 뿐이다. ⎯마누
세상에 애욕 같은 불은 다시없고, 미움 같은 괴물은 다시없고, 어리석음 같은 올무는 다시없으며, 탐욕 같은 급류는 다시없다.(There is no fire like lust, there is no monster like hatred, there is no snare like folly, there is no torrent like greed.)⎯「담마파다」
 
40. 이 감각과 의식과 이성이 그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것들로 지혜를 가리워 몸 속에 있는 이를 미혹시킨다.
몸 속에 있는 이 영혼, 자아.
 
41. 그러므로, 오 바라타르사바야, 먼저 네 감관을 제어하고 이 악한 것을 끊어버려라. 그것은 지혜와 분별의 파괴자니라.
바라타르샤바(bharatarshabha) 바라타족의 우왕(牛王, 잘난 이).
지혜 즈나나(jnana).
분별 비즈나나(vijnana).
「베다」에서 말하는 지혜,「삼캬」에서 말하는 자세한 지식이라는 것이 아마 여기 있는 즈나나와 비즈나나일 것이다. 샹카라는 즈나나를 설명하여 “경전과 스승에게서 얻는 자아와 사물에 대한 지식”이라 했고 비즈나나는 “그렇게 해서 배운 것에 대한 몸속의 체험” (anubhava)이라고 했다.
라마누쟈는 즈나나는 자아의 성격에 관한 것이고 비즈나나는 자아에 대한 분별 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슈피다라는 두 해석을 다 지지했다.
 
42. 사람들은 말하기를 감각은 위대하다. 그러나 의식은 감각보다도 위대하고 이성은 의식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성보다도 더 위대하다.
그 자아.
의식은 한단 한단 높아져야 한다.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감각의 지배 밑에서만 행동한다면 우리게는 거의 자유가 없다. 우리가 마나스(manas)의 지시를 받을 때에 좀 자유를 얻고, 우리 마나스가 부디(buddhi)와 결합할 때 좀더 자유롭고, 우리 행동이 저쪽에서 오는 빛에 뚫림을 받는 부디에 의해서 결정이 될 때 우리는 마침내 최대의 자유에 이른다. ⎯라다크리슈난
 
43. 아, 마하바후야, 그와 같이 그는 이성보다 더 위대함을 깨닫고, 자아에 의하여 자아를 제어함으로써, 애욕의 형상을 쓰는 저 정복하기 어려운 대적을 쳐부술지어다.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 일컫는「우파니샤드」안에 있는 절대의 학문, 요가의 경전,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의 제3장 카르마 요가의 끝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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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작성자 바보새 16-01-20 07:21 조회1,663회 댓글0건

 
제3장 카르마 요가
 
 
 
 
카르마(karma) 행동 혹은 행작(行作).
이 장은「기타」의 짬 되는 가르침의 열쇠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행동의 정신과 성격을 남김 없이 온전히 밝혀서, 참된 지식이란 어떻게 그 자체를 무사(無私)한 봉사의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 간디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오, 쟈나르다나시여, 이해함이 만일 행동함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라면 저에게 이 끔찍한 행동을 하라 명하심은 무슨 뜻이시옵니까? 오, 케샤바시여.
쟈나르다나(Janardana) 크리슈나의 명칭의 하나. ‘사람을 괴롭히시는 이’라는 뜻을 가짐.
케샤바(keshava) 크리슈나의 이름의 하나. ‘긴 머리털을 가지신 이’ 라는 뜻.
아르쥬나는 결과를 바라고 하는 행동은 집착이나 욕망을 떠나서 하는 행동보다는 못하다는 가르침을 오해하고, 크리슈나의 생각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을 일하는 것보다 더 높이 보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럼 지식을 행동보다 높다고 하신다면 나더러 이 무서운 행동을 하라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2. 당신께서는 보기에 혼란된 말씀을 가지시고 저의 이성을 미혹케 하시는 듯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지선(至善)에 이를 수 있는 길을 하나로 결정하여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아르쥬나보고 마음이 약해졌다고 책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행동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에(2: 49∼50) 아르쥬나는 크게 미혹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보면 분명해진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 죄 없는 자야, 내가 일찍이 말했듯이 이 세계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느니라.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지식의 길과 행동하는 사람을 위한 행함의 길.
생각하는 사람(sankhyanam) 이론파 사람들.
행동하는 사람(yoginnam) 요가 곧 무사(無私)한 행(行)의 길을 닦는 사람들.
스승은, 현대의 심리학자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도자를 두 종류로 구별하고 있다. 즉, 내향적인 사람(introvert),곧 정신적인 내적 생활의 길을 찾으려는 경향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extrovert), 곧 활동적으로 외적 생활을 따르는 경향을 가지는 사람이다. 거기 따라서, 깊은 정신적 사색을 찾는 사람에게는 지식의 요가의 길이 있고, 활발하게 사랑의 활동을 원하는 성격에게는 행동의 요가의 길이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향 외향의 두 가지 경향을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기타」의 자리에서 보면 행동의 길은, 해탈을 위해서는 지식이나 마찬 가지로 유효한 방법이다.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마하바라타」에는 “그와 같이 두 가지 방식의 생활이 있다. 둘 다「베다경」에서 가르치는 길이다. 하나는 능동적인 길이요, 또 하나는 내버림의 길이다”라고 했다. 두 방식의 생활은 꼭 같이 값어치 있는 것이다. 스승은 즈나나(Jnana) 곧 지혜는 카르마, 행동과 서로 같이 서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샹카라(Shankara)는 행작(行作)은 깨달음(enlightenment)과 서로 양립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행작을 지혜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 대한 하나의 표본으로 취하는 것이다. 깨달은 이의 행함 안에는,「기타」의 스승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라는 의식이나 보수를 기대하는 생각이 들어 있지 않다. — 라다크리슈난
 
4.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그것을 내버림으로써 완전의 지경(成滿位)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행동의 얽어맴 생사의 바퀴(sansara).
나이슈카르먀는 행동의 영향을 입지 않는 지경이다. 제가한 행동의 결과로 얽어맴을 당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거기 대한 반동을 받는 법이요, 그러기 때문에 영혼을 변천하는 세계에 내 주어서 얽매임을 당하게 하는 근원이 된다. 그리하여 영혼이 이 세계를 초월해서 지고자와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행작의 포기가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의 포기다.⎯라다크리슈난
‘행동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행동의 얽맴에서 해방된다는 말이다. 이 자유는 모든 행동을 내버림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사물의 성질상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기 이를 수 있을까? 다음 절이 그것을 설명해준다.⎯간디
 
5. 어떤 사람도 비록 한 순간이라도 무위로 있을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천성에서 나오는 충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성 프라크리티 혹은 자연.
충동 글자대로 하면 구나(gunas), 곧 3성.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이상 일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일하지 않으면 생을 유지할 수 없다. 아난다기리는, 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3성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몸과 감각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3성에 몰려서 행동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한 말 속에는 자연히, 해방된 혼은 일하지 않는다는, 모든 일은 지고의 지경에서는 떨어진 것이라는, 그것은 무지에 돌아감이라는 견해를 물리치는 뜻이 들어 있다. 생명이 있는 한 행동은 불가피하다. 생각함은 하나의 행동이다. 삶은 하나의 행동이다. 그리고 이 행동들이 갖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음이,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오는 망상의 지배를 받지 않음이 진정한 무위지, 결코 육체적으로 활동을 피하는 것이 그것은 아니다. 해탈한 사람에게서는 일이 떨어져나간다 할 때 그 참 의미는 그는 이 이상 더 개인적인 일의 필요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의미는 그가 행동에서 도망가서 복된 무위 속에 피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같이 일한다. 어떤 필요에 얽매임 없이, 무지의 강요를 당함도 없이, 그리고 일을 하는 가운데도 거기 빠져듦이 없이 한다. 그의 이기심이 없어졌을 때 행동은 깊은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이요, 그 심령 속에 그윽이 자리잡고 있는 지고자의 지시에 의해서 된다. 욕망과 집착을 내버리고, 모든 생명체와 하나 되어, 그는 자기 속생명의 무한한 깊음에서부터 행동하고 그의 영원하고 거룩하고 지극히 높은 자아의 주재 밑에서 하게 된다. — 라다크리슈난
성인은 제 마음이 없이 씨의 마음을 가지고 제 마음을 삼는다(聖人無己心 以百姓心爲心). — 장자
 
6. 행동의 감각기관을 억제하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감각의 대상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미혹된 혼이니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 부르느니라.
혀에는 재갈을 물리면서도 마음으로는 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위선자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 신체는 자유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 세우는 육체의 통제는 정신적 통제의 선행조건이다. 신체의 통제는 온전히 스스로 세운 것이어야지 밖에서 가져다씌운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다시 말한다면, 무서운 생각으로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업신여겨 마땅하다 하는 위선자란 자제를 하기 위해 애쓰는 겸손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절이 말하는 것은 마음으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몸으로는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 재갈을 물리는 사람,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몸으로도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음 절은 그것을 뒤집어서 하는 말이다. — 간디
 
7. 그러나 아르쥬나야, 마음으로 모든 감각기관을 통제하고, 집착을 떠나, 감각기관들을 카르마 요가에 쓰는 사람은 뛰어 났느니라
마음과 몸이 잘 일치되어야 한다. 마음을 아무리 통제한다 하더라도 몸은 이 길로도 나가고 저 길로도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참으로 잘 다스린 사람은, 예를 든다면, 나쁜 소리에는 귀를 막고 다만 하나님이나 선한 사람의 찬양을 듣기 위해서만 연다. 그는 감성적인 쾌락에 대하여는 아무 맛을 가지지 않고 혼을 빛나게 하는 일에만 전념할 것이다. 그것이 행동의 깊이다. 카르마 요가는 자아를 몸의 얽맴에서 건져내는 요가(방법)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방탕의 여지가 없다. — 간디
인간의 의지는 법의 딱딱함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잃어진 안정, 우리의 잃어진 지성, 우리의 잃어진 순진을 도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물을 참(real)의 나타남으로 보아야지 붙잡고 가져버릴 물체(對象)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러한 물건에 대한 무집착(無執着)의 태도를 기르려면 명상이 절대로 필요하다. 6절에서 크리슈나는 외적인 포기를 말했고 이 절에서는 진정한 대적 때버림의 정신을 가르친다. ⎯라다크리슈난
 
8.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行)은 비행(非行) 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9. 쿤티의 아들아, 희생을 위한 행동을 내놓고는, 이 세상은 모든 행동으로 얽매여 있다. 집착을 떠나 이 희생을 위한 행동을 하라.
‘희생을 위한 행동’ 이란 하나님께 바치는 무사(無私)한 봉사이다. — 간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해 봉사 정신으로 해야 한다. 미맘사(Mimamsa, 글자의 뜻으로는 깊은 생각, 혹은 해석. 六派 철학의 하나)가 행동은 희생을 목적으로 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면서,「기타」는 우리더러 그러한 행동을 어떠한 갚아줌을 바라는 마음 없이 하라고 가르쳐준다.
그러한 경우 그 불가피한 행동은 아무런 구속력도 가지지 않는다. 희생(sacrifice) 그 자체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는 낮은 마음을 높은 마음에다 희생(바쳐)해야 한다.「베다」의 신(神)들에 대해 행해지는 종교의식은 여기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이름으로 하는 창조의 봉사가 된다. — 라다크리슈난
 
10. 맨첨에 조물주께서 사람을 희생과 함께 지으시면서 말씀 하셨다. “이로써 너희는 번성할지어다. 이것이 너희 모든 소원의 카마두크가 될지어다.”
카마두크(kamadhuk, 如意牛) 무엇이나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주었다는 인드라 신의 신비스런 암소.
조물주(Prajapati) 창조주(The Lord of Creatures),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 모양으로 순 영의 절대적인 신이라기보다는 모든 생명질(生命質) 생명력을 포함하는 것의 인격화된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충동 때문에 창조를 했다고 한다.
하나는 외롭고 가난하고 무서워서, 또 하나는 제 본체가 넘치고 싶은 갈망에, 그래서 “내가 번성할까, 내가 만물을 낳아놓을까!”(May I give increase: may I bring forth Ceratures?) 했다고 한다.
 
11. 이로써 너희는 신들을 공양하라. 신들 또한 너희를 공양 할 것이다. 그와 같이 서로서로 공양함으로써 너희는 가장 높은 선에 이를 것이다.
신들 여기와 다음 12절에 있는 신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전창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모든 창조에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봉사함이요, 또 그것이 곧 희생이다. — 간디
사람은 공양드린다 하여도 아무것도 제 것으로 할 수가 없다. 하나님 혹은 신들에게 속하는 것을 가지고 바친다. 이 희생이란 우리가 자연과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 것뿐이다.
 
12. 희생으로 공양을 받으면 신들은 네게 바라는 바 복락을 줄 것이다. 그 선물을 받아쓰면서 그들께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도둑이다.
희생(yajna) 아름다움과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식과 경험이 자람에 따라, 또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뜻은 자라고 변하기 쉽다.
야즈나(yajna)는 글자 그대로는 예배(worship)란 뜻이다. 거기서 희생이란 뜻이 되고, 거기서 희생적인 행동 혹은 봉사적인 행동을 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는 제 독특한 야즈나를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 — 「청년 인도」
또 야즈나는 남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이 일시적이었거나, 또는 정신적인 성질의 것이었거나간에, 아무 보수를 받음도 없이 또 바람도 없이 행해진 행동을 의미한다. ‘행동’이란 말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사상과 말까지도 포함되어야 하고, ‘남’이란 말은 인류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인류에게 봉사할 목적으로라도 하등동물을 희생했다면 그것은 야즈나가 될 수 없다.
이 세계는 이런 의미의 야즈나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기타」는 제2장에서 참 지식에 관해서 말을 한 다음 제3장에서 거기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을 끄집어내서, 많은 말로 야즈나는 창조 자체와 더불어 왔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몸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으로 모든 일에 봉사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때문에 또「기타」는 야즈나를 바침이 없이 먹는 자는 도둑한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한다. 정결한 생애를 살려는 사람은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야즈나의 성격으로 되어야 한다. 야즈나는 우리의 출생과 더불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빚진 자요,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우주에 대해 봉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씨종이 제 섬기는 주인에게서 밥과 옷과 그밖의 모든 것을 받듯이 우리도 이 우주의 주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 「에라브다 망디르」
“네 이마의 땀으로 네 먹을 것을 벌라” 하고 성경은 말했다. 희생에는 이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하나는 밥 버는 노동일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제 빵을 위해 일하고 그 이상 더 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을 위해 넉넉한 빵과 넉넉한 여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잉 인구의 소리도 병소리도 우리 주위에 보는 그런 비참의 소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노동 가장 높은 형태의 희생일 것이다. 사람은 제 몸이나 마음을 가지고 물 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겠지만 그것은 다 노체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노동이 될 것이다. 사람은 제 밥을 지식적인 노동으로도 벌 수 있지 않느냐고? 아니다. 육체의 필요는 육체로 공급하여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게로 돌려라” 하는 말은 아마도 이러한 경우에 꼭 맞는 말일 것이다. — 하리잔
 
13. 선한 사람은 희생에서 남은 것을 먹고 모든 죄에서 해방 되지만 악한 자는 자기를 위해 밥을 짓고 그 죄를 먹는다.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저만 먹는 사람은 죄를 먹는다. — 「베다경」
자기만을 위해 밥을 짓는 자는 죄를 먹고, 희생을 바친 후에 남는 음식은 선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음식이다. — 「베다경」
그의 몸인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은 채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11:29)
 
14. 모든 산것은 밥에서 나오고, 밥은 비에서 나오고, 비는 희생에서 나오고, 희생은 일함에서 나온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빵 노동(bread-labour)라고 했던 육체 노동을 주장하는 말이다. 그것을 남을 위해 무사(無私)한 마음으로 할 때 야즈나 곧 희생이 된다. 비는 지식의 잔치로는 오는 법 없다. 다만 육체노동으로만 온다. 산에 나무가 없어 헐벗으면 비가 아니 오고, 나무를 심으면 비를 끌어 식물이 느는 것에 따라 강우량이 올라간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과학적 사실 아닌가? 육체노동을 그만둔 때문에 일어나는 도덕적 신체적 모든 나쁜 결과를 다 알 사람이 누군가? — 「에라브다 망디르」
같은 뜻을 열자(列子)는 도둑질이라는 말을 가지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국씨(國氏)는 큰 부자고 향씨(向氏)는 큰 가난뱅이인데 향씨가 국씨 보고 부자 되는 방법을 물었더니 국씨 대답하기를 도둑질을 해서 됐노라고 했다. 향씨가 들은 대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죄를 짓고, 있던 것까지 뺏기고 분해 국씨한테 가서 질문을 했더니, 국씨가 말하기를 “너 어떻게 도둑질을 했느냐” 했다. 향씨는 제 한 대로 대답했더니 국씨는 듣고 말하기를 “도둑질하는 도를 그렇게도 모른단 말이냐? 내 일러줄 터이니 들어보아라. 하늘에 시(時)가 있고 땅에 이(利)가있다. 나는 천지의 시, 이, 구름, 비, 산과 못의 나고 자라는 것을 도둑해서 내 곡식을 키우고, 내 집을 짓고, 뭍에서는 새, 짐승을 도둑하고 물에서 고기를 도둑해서 산다. 도둑질 아닌 것이 없지. 그것이 다 하늘이 낸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네가 도둑했다는 금은옥백(金銀玉帛)은 사람이 모아놓은 것이지 하늘이 준 것 아니다. 죄 얻어 마땅하지 않느냐?” 했다. 향씨가 그 말을 듣고도 알 수 없어 동곽(東郭)선생한테 가서 호소했다. 동곽선생은 대답하였다. “네 한 몸부터 도둑질한 것 아니냐? 음양의 화(和)를 도둑해서 네 생을 이루고 네 몸을 담았는데 하물며 그 밖엣 것이겠느냐?……국씨의 도둑질은 공도(公道)다. 그러므로 재앙이 없고, 네 도둑질은 사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진 것이다. 공사(公私)가 있다는 놈도 도둑이요, 공사가 없다는 놈도 도둑이다. 공(公)을 공으로 하고 사(私)를 사로 하는 것이 천지의 덕이다. 천지의 덕을 아는 사람을 누가 도둑이라 하겠느냐? 누가 도둑 아니라 하겠느냐? 一열자(天瑞)
 
15. 알지어다. 행동은 브라마에서 나오고, 브라마는 불멸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것 속에 두루 들어 있는 브라마는 언제나 희생 위에 안주해 있다.
브라마라는 말이 좀 불편하게 쓰인 탓으로 15절을 해석하는 데 많은 불필요한 곤란이 생긴다. 첨의 두 브라마는 프라크리티를 의미하는 것이고, 셋째와 넷째의 것은 창조 전체에 편만하는 불멸자, 무한을 의미한다. 그 뜻은 희생은 창조의 원인이요 또 결과라는 발이다. 톨스토이는 같은말을 희생의 원형의 사슬에서 그 연결하는 고리를 빼버리고 더 간단한 말로 해 버렸다. “일은 밥을 낳고 밥은 일을 낳는다. 그것은 끝없는 원이다. 서 토가 저쪽의 원인인 동시에 또 결과다.” 이것은 브라우닝으로 하여금 “죄와 고통의 이 무서운 기계”(This dread machinery of sin and sorrow)라고 노래하게 했던 희생의 영원한 과정이다.
 
서로서로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창조적이면서 또 자기희생적이면서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 같음에.
(Love in turn, and be beloved,
Creative and self-sacrificing too,
And thus evertually God- like)
— 마하데브 데자이
 
행동은 불멸자 안에 뿌리박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행동이 아니면 세계는 망해버리고 만다. 세계는 하나의 큰 희생이다. 「리그 베다」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한 푸루샤가 희생으로 바침이 되어 그의 사지가 허공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큰 희생으로 세계의 구조는 유지되어간다. 행동은 모든 생명 가진 것의 도덕적 또는 육체적 요소다. — 라다크리슈난
 
16. 오, 프리다의 아들아,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살며 감각의 쾌락에 빠져, 이와 같이 돌아가는 바퀴를 따르려 하지 않는 자는 쓸데없이 사는 것이니라.
이 절들에서는 희생을 신과 사람 사이에 서로 주고받음 하는 것이라는 「베다」의 사상을 더 큰 규모로 펴서 우주적으로 모든 생명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 하고 있다. 희생의 정신으로 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은 모든 희생을 누려 받으시는 이다. 희생의 최고자다. 또 그 것은 생명의 법칙이다. 개인과 우주는 서로 의존한다. 인간 생명과 우주 생명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류가 되고 있다. 자기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산다. 세계는 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협동 때문에 돌아가고 있다. 희생은 신들에게 바쳐질 뿐만 아니라 또 지고자(至高者)에게도 바쳐진다. 신들은 그이의 가지가지의 나타남이다. 4장 24절에는 행동과 희생의 자료, 주는 자와 받는 자, 희생의 목적과 대상이 다 브라만이라고 하고 있다. — 라다크리슈난
 
17. 그러나 즐거움을 아트만에만 구하고, 아트만에만 만족하며, 아트만으로만 좋다 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아서 아니 될 일이 없다.
그는 의무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그가 일하는 것은 의무라는 생각에서 하는 것도 아니요, 자기의 존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의 완전한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 라다크리슈난
이 간단한 한 절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이것은 불멸의 즐거움의 변함없는 근본을 보여주는 것이요 앞의 절에 있는 육욕적인 생각의 사람과 정신적인 생각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그 즐거움이 어디서 오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진다”고 했다.
육욕적으로 된 사람은 희생을 바치는 것도 없이 감각에만 빠져들면서 헛된 생을 보내므로, 그 하는 활동은 갈수록 더 죄와 얽매임에만 빠져들게 하지만, 정신적으로 된 사람은 그 눈을 안으로 돌려 모든 즐거움의 불멸의 근원, 곧 아트만을 찾는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에 행동에서 해방됨을 얻는다.
이 절 뜻은 그에게는 모든 행동이 끊어지게 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얽어매는 행동에서 해방됐다는 말이다. 자주(自主)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와 하나되게 했기 때문에 그는 소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아트만 곧 대아를 위해 산다. 그 대아는 곧 우주의 대아와 한 대아다.「우파니샤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진실로 위에도 아트만, 아래도 아트만, 앞에 도 아트만, 뒤에도 아트만, 오른편에도 아트만, 왼편에도 아트만이다. 그는 이것을 보고, 이것을 믿고, 이것을 깨달았으므로 아트만을 배불리 먹고, 아트만으로 더불어 놀고, 아트만의 동무가 되고 그의 모든 기쁨을 아트만 안에 찾아, 스와라쟈(swarajya)를 얻었다. 그는 삼계(三界)에 자유자 재함을 얻었다.” — 마하데브 데자이
 
18. 그는 이 세상에서 제가 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이(利)라 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 없다. 일체의 산 것 중에 어느 것에도 그의 이가 달렸다고 생각 하는 것은 없다.
 
19. 그러므로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하라.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르기 때문이다.
 
20. 쟈나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완전에 이른 것도 행함에 의해서 된 것이다. 너도 이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자나카(janaka) 미틸라(Mithila) 나라의 어진 임금, 그 이름은 인도에서는 언제나 자기 실현을 완전히 하고, 쉬지 않고 무사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는 ‘내 것’이란 생각을 완전히 없이했기 때문에 그 왕성에 불이 붙는다는 말을 듣자 “미틸라가 다 탄다 해도 내 것이 탈 것은 하나도 없다” 했다고 한다.
세계의 유지(lokasamgraha) 세계의 하나 됨, 사회의 서로 연결됨을 목적해서 하는 말이다.
세계가 만일 물질적 불행, 도덕적 타락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공동살림이 정당하고 품위 있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종교적인 도덕이 사회활동을 다스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의 목적은 사회를 정신화하고 지구 위에 동포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상을 현실 제도 속에 구현할 수 있다는 희망의 영감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인도 세계가 그 젊음을 잃었을 때 그것은 저 세상적으로 기울어버렸다. 늙어 지치게 되면 포기와 인내의 복음을 취하는 법이다. 희망과 정력이 넘치는 때에는 현실 속에서 봉사의 활동을 하고 문명을 구원할 것을 강조하게 된다. 보에티우스(Boethius)는 “혼자서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에 못 간다”고 잘라서 말했다. — 라다크리슈난
 
21. 무엇이거나 어진 사람이 한 것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는 법이다. 그가 모범을 세우면 세상은 그것을 따른다.
위에 좋아하는 이가 있으면 아래는 반드시 더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오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矣 君子之德風也 小人之德草也 草尙之風 必偃) — 맹자(膝文公上)
보통 사람은 잘난 이가 세운 표준을 배워서 한다. 데모크라시는 위인에 대한 불신임 때문에 당황하고 있다.「기타」는 위대한 사람이란 뒤엣사람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개척자란 것을 지적해주고 있다. 빛은 대개 일반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선 개인을 통해서 온다. 그들은 뒤따라 오는 사람들이 아직 아래 골짜기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산꼭대기에서 빛나는 불빛을 벌써 보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한다면, 인간세상의 소금이요, 누룩이요, 빛이다. 그들이 그 빛나는 불빛을 보고 외칠 때에 알아듣는 사람은 극히 적은 수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뒤늦게야 차차 깨닫고 그를 따라간다. — 라다크리슈난
그러나 데모크라시의 약점이 위인에 대한 불신임에 있다고 할 때 그 잘못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할까? 물론 씨 자체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도리어 그 위인이란 사람들이 높이 외로이 서서 씨 속에 뛰어들지 않는 데와, 또 그 두 사이에 서서 일부러 계획적으로 막고, 왜곡시키고, 이간시키는 중간 지식인들의 장난에 있지 않을까? 실지로 사회 밑바닥의 씨들은 예수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간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에 말한 맹자의 가르침도 이것과 합한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 할 때, 그 풀과 바람은 하나다. 초상지풍(草尙之風)이라, 풀 위에 바람을 더한다. 풀 속으로 내려가는 바람이 풀을 눕게 하지 하늘 공중에 부는 바람, 혹은 직대기는 폭풍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러기 때문에 노자의 말이 참이다. “성인은 제 마음이란 것이 없다. 씨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聖人無己心 以百姓心爲心) 또 “스스로 보는 이는 밝지 못하다”(自見者不明) 했다. 정말 어진 이는 전체의 눈으로 보고 전체의 귀로 듣고 전체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사람의 하는 일을 씨이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는가. — 함석헌
 
22. 오,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는 이 삼계 속에서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아무 일도 없고, 또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삼계(三界) 천(天), 공(空), 지(地).
혹시 이런 반대를 듣는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 아니시니 물리적으로 일을 하신다 할 수는 없고, 썩 잘 한다 해도 정신적으로 일하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해, 달, 별 등등의 운동은 곧 하나님이 일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적 활동이 아니고 물리적 활동이다. 하나님은 비록 형상도 없고 사람 같은 인격은 아니지만 마치 형상이 있고 몸을 가지신 것처럼 일하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일하고 계시면서도 일에 얽매이심이 없다. 그 영향을 입지도 않으신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마치 자연의 모든 운동이나 변천이 기계적이기는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지혜 혹은 뜻에 의하여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처럼 사람도 제 하는 날마다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규칙적이고 정확한 데까지 내려가도록 해야지만 또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일이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기계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자동기계에까지 내려가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 뒤에 하나님의 지도가 있는 것을 알아 자기도 깨달음으로 따라 하는 데 있다. 누구나 다만 자기를, 그리고 행동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기계적인 정확뿐 아니라 어떠한 닳아짐도 떨어짐도 없는 안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사람은 제 마지막 날까지 씩씩하고 꿋꿋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 그 몸은 때가 이르면 떨어져나가겠지만 그 혼(魂)은 주름살 하나 없이 흠집하나 없이 늘푸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간디
하나님의 삶과 이 세상 삶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 라다크리슈난
나의 만유(萬有)의 주 되는 이름 안에서 나는 온 세상을 위해서 종처럼 일한다.(In the name of my lordship, I slave for the whole world.)一「마하바라타」
내 아버지께서 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입니다.—「요한」(5:17)
 
23. 내가 만일 피곤한 줄 모르고 일하지 않는다면, 오, 프리다의 아들아, 사람은 언제나 나 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
크리슈나가 어떤 집착도 없이 일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마치 이러는 것 같다.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 제자가 되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마태」(11: 29〜30)
사람이 애착의 맛에서 물러설 때 모든 일의 멍에는 편하고 모든 짐은 가벼운 것이 돼버린다. 마치 지구의 인력이 없어질 때 몸이 그 무게를 잃는 것과 같다. —마하데브 데자이
크리슈나의 생일에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 “크리슈나는 일생을 씨에 봉사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씨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쿠르크쉐트라에서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보다 아르쥬나의 차부가 되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의 전생애는 하나의 끊임없은 카르마의「기타」였습니다……그는 어릴 때 소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고팔라(Gopala)라 부릅니다만 그것은 소몰이꾼이란 뜻입니다. 크리슈나는 잘 줄을 몰랐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뜬눈으로 세상을 지켰습니다.” — 「청년 인도」
 
24.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이 세계는 망해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끊어짐 없는 일하심으로 인해 이 세계는 유지되고 비존재 (非存在)에 떨어짐을 면한다.
성 토마스는 말하기를 “어떤 것이나 그것이 존재 속에 나온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같이, 그것이 보존되어가는 것도 그의 뜻에 달렸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만일 자기의 활동을 만물에서 거둬 가신다면 만물은 무(無)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했다. — 라다크리슈난
 
25. 바라타의 아들아, 지혜 없는 자가 제 하는 일에 집착함으로써 일을 하듯이 지혜 있는 자는 마땅히 집착함이 없이 세계의 질서를 붙들어가기 위해 그와 같이 일해야 하느니라.
광명에 집중되는 혼은 이미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거룩하신 이가 하듯이 자기도 우주적인 활동에 더불어 참여하여야 한다. 그때 그의 행동은 지고자의 광명과 희열에 감동되어서 하는 것일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중화(中和)를 이루면 하늘 땅이 제 자리를 얻고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용」
오직 천하에 지극한 정성이어야 능히 그 바탈을 다할 수 있는데 그 바탈을 능히 다하면 사람의 바탈을 능히 다할 수 있고, 사람의 바탈을 능히 다하면 몬의 바탈을 능히 다할 수 있고, 몬의 바탈을 능히 다하면 하늘 땅의 치고 기르는 일을 능히 도울 수 있고, 하늘 땅의 치고 기르는 일을 능히 도울 수 있으면 하늘 땅으로 더불어 셋|치고 기느니라(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賛天 地之化育 可以賛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 「중용」
 
26. 깨달은 자는 깨닫지 못하여 행동에 집착하는 자의 마음을 뒤흔들어서는 아니된다. 깨달은 사람은 도리어 모든 일을 요가의 정신으로 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자연의 힘에 대해 절을 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잘못된 것을 숭배하고 있으며 신성(神性)의 보다 큰 통일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의 자그만 자아는 아닌 어떤 것에 대해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조잡한 생각이라도 그 속에는 바르게살기를 원하는 지아비 지어미들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무엇이 들어 있다. 역사적 의미를 갖는 전통적 의식 속에는, 잘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무언중에 하는 확신이 담겨 있다. 그 근본이 종교적인 것이냐 아니냐는 그 대상이 아니라 그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사람이 다 가장 높은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대단히 느린 걸음으로 되는 것이지 갑자기 일약(一躍)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종교 견해는 우리 힘으로 선택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과 자라남과 전체적인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업신여겨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단순한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이지 결코 허투로 해서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단순한 신앙은 실천의 값어치와 영적 호소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근래의 인류학은 우리가 토착민들을 발달시키자는 욕심에 그들의 무해한 오락, 그들의 노래와 층, 그들의 잔치와 축제를 없애버려서는 아니 된다고 경고를 해준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간 우리는 그것을 사랑과 존경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들의 제한 된 이해를 보다 큰 관점에 이르는 계단으로 삼지 않으면 아니된다.
맑은 물을 얻기 전에는 더러운 물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만신당(萬神堂) 안에는 군중들이 섬기던 가지가지의 신들이 다 모시어져 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시내와 숲의 신, 먼 옛날의 전설의 신, 부락 수호의 남신 여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된 확신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조화시켜 보자는 생각에, 그것은 자신 속에, 형형색색의 요소와 동기를 다 포함하는 하나의 엄청난 종합에 도달하게 됐다. 종교 안에 깜깜하고 원시적인 미신이 씨글거리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一라다크리슈난
하나님 동산의 연한 풀을 짓밟지 말라. — 조지 폭스
 
27. 모든 행동은 자연의 성(性)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나라는 생각에 자아를 어지럽힌 사람은 “그것을 하는 것은 나다” 하고 생각한다.
자연 프라크리티.
성(性) 구나.
우리의 의식적인 존재는 여러 가지 면을 가지는데, 이기적인 자아는 행동이 자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그 힘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기타」에 의하면, 이기적인 자아가 완전히 자연의 지배 밑에 있을 때 그것은 자유로 행동할 수가 없어진다. 몸과 목숨과 마음은 환경에 속해 있는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28. 그러나, 오 마하바후야, 이 성(性)과 그 활동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성이 성에 대해 작용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거기 집착하지 않는다.
마하바후(Mahabahu) 큰 팔을 가진 이, 곧 아르쥬나.
숨쉼이나 눈깜짝임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제가 한다고는 생각 않는다. 다만, 병이나 그밖의 어떤 방해로 그것을 할 수 없어진 때에만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행동은 그 능력을 우리 자신의 것인 듯 가로챔 없이 자동적으로 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가 자비를 행하는 줄 알지도 못한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무집착(無執着)은 꾸준한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된다. — 간디
프라크리티와 성(性)은 인간의 자유의 한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유전이나 환경의 압력 같이 경험적인 자아는, 마치 모든 우주적인 힘들이 다 원인의 결과인 것같이 여러 가지 활동의 결과다. ᅳ라다크리슈난
모든 일의 몫이 결정되어 있으니 생각해보면 명(命)으로 되는 것이지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萬事分已定 算來由命不由人). — 「명심보감」
지혜있는 이는 명(命)으로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법(法)으로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이(理)로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세(勢)와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智者不與命闘 不與法闘 不與理闘 不與勢闘) — 「여숙간」
이 말을 받아서 석계도(席啓圖)가 뒤집어서 말하기를, “명을 아지 못하는 사람과 싸우지 않으며, 법을 아지 못하는 사람과 싸우지 않으며, 무리한 사람과 싸우지 않으며, 세력 없는 사람과 싸우지 않는다”(不與不知命者闘 不與不知法者闘 不與無理之人闘 不與無勢之人闘) 하였다. —「축덕록」
 
29. 자연의 성(性)에 미혹하는 사람은 성의 작용에 집착한다. 그러나 전체를 아는 사람은 전체를 모르는 둔한 사람을 흔들어 주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자연의 충동에 따라 행하는 사람을 흔들어주어서는 아니된다. 그들은 자아와 자연에 속해 있는 이기적인 자기를 혼동하는 그 잘못에서 서서히 건져나옴을 입어야한다. 참 자아는 거룩한 것이요 온전히 자유하고 스스로를 안다. 거짓 자아는 자연의 한 부분인 이기적인 나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의 작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삼캬의 설명으로 한다면 프라크리티가 능동적인 대신 참 자아는 비행동적이요,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작용과 일치할 때에 능동적인 인격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기타」는 완전한 비행동(非行動)에 의하여 푸루샤는 프라크리티에서 물러나게 된다는 삼캬론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알아봄(識別)은 비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되 해방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아트만 곧 참 자아는 공명정대한 한 증인이란 것을 안다면 우리가 비록 불완전과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가 하나 되기 위해서 하는 큰 싸움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어떤 행동도 우리를 얽어맬 수는 없을 것이다.—라다크리슈난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가리지 말고 그를 반가이 맞으십시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그 반대로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 「로마서」(14: 1~3)
 
30. 네 모든 일을 내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바라는 것도 없이, 나란 생각도 없이, 속탐을 내버리고 싸워라.
가장 높은 자아 아쟈트마(adhyatma), 개인 자아의 근본이 되는 보편적인 영혼의 지경. —바네트
우주의 존재와 그 모든 활동의 주재가 되시는 주에게 우리 자신을 바쳐 버리고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당신 뜻대로 되어지이다”가 모든 일에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우리는 주의 종이라는 생각으로 일하여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지극한 사람은 저가 없고, 검스러운 사람은 제 공이란 것이 없으며,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다.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 장자(逍遙遊)
 
31. 나의 이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불평함 없이 지켜 행하는 사람도 또한 일함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느니라.
 
32. 그러나 나의 이 가르침을 트집하고 따르려 하지 않는 자는 모든 지식에서 어둡고 생각이 없는 자다. 알지어다, 그는 망했느니라.
 
33. 비록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제 성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 모든 산 물건은 각각 제 성에 따라 한다. 무엇으로 그것을 누를 수 있느냐?
이것은 2장 61절과 63절에 있는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 아니다. 스스로 억제함은 구원에 가는 길이다(6:35,13:7).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힘을 기울여서 스스로 온전한 억제에 이르려 힘써야 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 강제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절의 말씀은 스스로 억제함을 제해버리는 말이 아니라, 다만 성을 이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이것은 나는 할 수 없다, 내 천성에는 그것은 없다” 하는 사람은 그 절을 잘못 읽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천성을 모른다. 그러나 습관이 천성은 아니다. 나아가고 물러서지 않는 것, 올라가고 내려가지 않는 것이 영혼의 천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워서 물러서지 않고는, 내려가지 않고는 못견딜 것 같아도 버티어나가야 한다. 다음 절은 그것을 잘 가르쳐준다. —간디
자연은 혹시는 숨는다. 이따금은 저버린다. 아주 없어지는 일은 별로 없다. 무리로 하면 그 값으로 더 사나와진다. (Nature is often hidden, sometimes overcome, seldom extinguished. Force make the nature more violent in the return.)-베이컨
사람의 성질은 선천적 조건과(과거의 행동과 유전을 포함해서) 후천적 조건(물리적 또는 문화적 환경을 포함해서)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렇게 의미된 것들의 일부는 불가피한 것이고 그것을 눌러버릴 수 없다. 그러나 그대부분은 통제할 수가 있다. 사람의 할 일은 자기를 잘 살펴서 그 불가피한 것과 고칠 수 있는 것, 에픽테투스(Epictetus)의 말을 빌어 한다면, “분내(分內)의 일과 분외(分外)의 일(The things in his power and the things not in his power)”을 아는 것이다. — 마하데브 데자이
프라크리티는 과거의 행동의 결과로 우리가 날 때에 타가지고 나온 정신적 준비다. 그것은 제 갈길을 간다. 샹카라는 하나님조차도 그 하는 것을 멈추지는 못한다고 한다. 과거의 행동으로 하여금 그 자연적인 결과를 내게 한 것은 바로 그의 명령이다. 행동은 프라크리티의 작용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고 자아는 다만 치우침 없는 증인이기 때문에 누름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절의 뜻은 영혼에 대해 성(性)은 전능적인 힘을 가지는 것을 알려주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성 곧 우리 존재의 원리에 따라 행할 것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온갖 충동대로 맘대로 하란 말은 아니다. 우리의 생명, 참을 찾아 그것을 나타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것은 설혹 우리가 억누르려 한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시당한 자연은 복수하는 법이다. — 라다크리슈난
 
34. 모든 감관에는 그 대상에 대한 좋아함과 싫어함이 붙어 있다. 누구나 그 지배 아래 들어서는 아니 된다. 그 둘은 가는 길의 방해꾼들이니라.
사람은 반드시 부디(buddhi) 혹은 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충동(衝動)의 하자는 대로만 한다면 우리 살림은 동물과 한가지로 목적도 없고 뜻도 없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만일 그냥 내버려둔다면 좋고 언짢고가 우리 행동을 결정해버릴 것이다. 어떤 것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언짢기 때문에 저렇게 하는 한 우리는 우리 행동에 얽매이고 만다. 그러나 그 충동을 이기고 우리가 만일 의무감 밑에 행동한다면 우리는 프라크 리티의 장난에 희생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자유의 실행은 자연의 필연에 의해 조건이 붙는 것이지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 — 라다크리슈난
 
35.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제 의무를 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 낫다. 제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니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 뿐이다.
의무 다르마, 불교 경전에서 번역할 때 법(法)이라고 하는 말이다. 대단히 넓게 쓰이는 말로서 모든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다 포함한다.
옛날 인도 사람은 인생에 네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째는 아르다(artha)요, 둘째는 카마(kama)요, 세째가 이 다르마(dharma)요, 마지막은 모크샤(moksha)다.
아르다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아마 우리말로 한다면 세간살이라 할 때에 세간에 해당하는 것일 것이다. 본래 글자 뜻으로는 아르다는 물건이란 말이라는데, 인생 목적의 첫째로 꼽을 때는 어려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질적 소유를 말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 경제도 있고 정치도 있고 기술도 필요하다.
카마는 즐거움, 사랑의 뜻이다. 서양의 큐핏(Cupid) 모양으로 카마는 꽃활에 꽃살을 메워 가슴을 향해 쓴다. 그래서 사람의 가슴속에 사랑과 가지가지의 욕망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그 지배를 받지 않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랑의 신, 쾌락의 신이었다.
모크샤는 또 아파바르가apavarga) 니르브르티(nirvrtti, nivrtti)라고도 하는데 그 그 다 떠난다, 버린다, 놔준다, 구월한다 하는 뜻이다. 보통 열반(涅槃)이라 하는 말그 물론 니르브르티의 음역(音譯)에서 온 것이다. 사람은 행복한 세간살림도 하고 사랑도 하고 쾌락도 누리고, 또 올바른 사회인으로 도덕 종교의 의무도 다하며 살아야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 완전히 정신적으로 자유하는 지경에 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인생관이었다.
여기서 다르마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사람은 다 제 다르마가 있다. 제 의무, 제 법, 쉽게 말해서 제 종교가 있다. 그 제 일을 하는 것이 종교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제것’ 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득(自得), 체험이다. 아무리 진리라도 제가 몸소 해서 얻지 못하고 남의 한 것을 모방만 해서는 참 자유하는 즐거운 지경에 이를 수 없다. 내가 참 하고 싶어서 하면 십자가를 져도 즐겁지만, 좋다고 하기 때문에 남을 따라서 하려면 마침내는 천당엘 간다고 해도 무섭고 괴로울 것이다. 확신이 없으므로, 무엇이 어떻게 되나, 어디로 가는 건가, 그러다 잘못되면, 하는 불안이 늘 있기 때문이다.
군자가 깊이 이르기를 도로써 하는 것은 그 스스로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으면 있는 것이 평안하고, 있는 것이 평안하면 무엇이나 자료하기를 깊이할 수 있고, 자료하기를 깊이하면 좌에 취하거나 우에 취하거나 그 원(근본되는 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 自得之 則居之安 居之安 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 맹자(離婁下)
우리는 다 꼭 같은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다섯 탤런트를 받았느냐 다만 한 탤런트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맡겨진 것을 어느만큼 충성되게 했느냐 하는 데 있다. 나는 크든 작든간에 사내답게 내 노릇을 해야 한다. 선(善)은 순전(純全)함에 있다. 내 의무가 아무리 맛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라도 거기 충성되어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어떤 정신으로 했느냐 하는 데 따라 심판을 받지, 그 일의 성질에 따라 되지 않는다. 일은 그것이 무슨 일이거나간에 거기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온전히 바친 마음으로 행한 사람에게 구원의 자격이 있다.—간디
제 이웃에 대한 순수한 봉사가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하여 봉사하지 않음이 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반대일 것이다. 먼데 뵈는 모양사리에 눈이 어리워서 봉사하기 위해 땅 끝을 헤매는 사람은 제 욕심을 채우지 못할 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다. 스와데시는 스와다르마를 자기 직접 신변 환경에 적용한 것이다. 一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