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5

알라딘: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알라딘: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김희준 (지은이)생각의힘2012-07-27





















































Sales Point : 810

9.2100자평(3)리뷰(12)
이 책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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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쪽
152*223mm (A5신)
480g
ISBN : 9788996919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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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봤음직한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지난 100여 년간 눈부신 발전을 이룬 과학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고갱의 그림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 현대과학이 명쾌한 답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서울대 ‘명품 강의’로 꼽힌 ‘자연과학의 세계’ 강의 내용을 포함하여 과학의 세계를 종교와 철학, 문학, 예술, 경제 등 흥미로운 이야기와 곁들여 소개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과학에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은 어린 시절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의 신비한 매력에 푹 빠졌던 순수한 소년이 어른이 되어 현대과학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찾아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자신의 감동을 나누는 한 과학자의 산책이다.


목차


I.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1. 빅뱅 19
노자의 태일생수 / 라부아지에의 태일생수소
러더퍼드의 태일생양성자 / 빅빵
2. 칸트의 섬 우주 35
칸트의 묘비명 / 메시에의 성운 / 푸른 하늘 은하수
/ 베셀의 연주 시차 리비트의 변광성 / 안드로메다 은하
3. 콩트의 오류 58
원소의 지문 / 불확정성 원리 / 별빛의 스펙트럼
4. 팽창하는 우주 68
슬라이퍼의 적색 편이 / 허블 법칙 / 우주의 나이 / 별의 나이올베르스의 역설
5. 빅뱅의 메아리 83
우주적 잡음 / 흑체 복사 스펙트럼 / 신의 지문 / 우주의 인플레이션

II. 우리는 누구인가?
1. 외계 생명체와의 대화 109
아레시보 성간 메시지
2. 도법자연 115
생명의 원소 / 도생일 / 일생이 / 이생삼 / 삼생만물
3. 상생의 도 146
속 삼생만물 / 이상한 나라의 전자 / 선택의 자유 / 분류와 통합
4. 생존과 번영 161
대사와 유전 / 우리 몸은 대성당 / 로댕의 대성당 / 이중나선 만세 진화의 기록
5. 호모 사피엔스 181
만물의 영장 / 만 몰의 원자 / 문화인 / 문명인
6. 생명의 행성 191
창백한 푸른 점 / 산소의 지구 / 떠도는 지각
7. 우연과 필연의 이중성 210
역사란 무엇인가? / 파동-입자 이중성

III.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 국화 옆에서 219
2. 불과 얼음 222
3. 아인슈타인의 실수 225
4. 집으로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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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36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면 별들은 얼마나 멀리 있는지, 또 별들은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별들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내가 어릴 때 하늘의 별 못지않게 좋아했던 것은 외할아버지께서 온실에서 기르던 각종 꽃이었다. 특히 장미의 색과 향기가 좋았다. 나중에 장미의 색과 향기에 들어 있는 탄소, 산소, 질소 등의 원소가 별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별에 더욱 친근감을 느끼고 별을 사랑하게 되었다. 접기
P. 60 만일 별에서 직접 시료를 가져와서 분석해야 한다면 별의 원소 조성을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빛의 속도로도 최소한 몇 년 걸리는 별에서 시료를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35년에 유명한 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콩트Auguste Comte는 우리가 별의 위치, 운동 등은 조사할 수 있지만 별들이 어떤 화학 원소로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시료가 없이는 내용을 실증할 수 없다는 의미로 빛이 얼마나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으니 당시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콩트는 1857년에 죽었는데 그가 2년만 더 살았더라면 별의 원소 성분을 조사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접기
P. 110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본다는 점을 꿰뚫은 데 있다고 한다.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는 인간 사회에서 각자에게‘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각자의 배경과 관심에 따라 수많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답이 있다면 과연 어떤 답일까?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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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2년 8월 4일자 '주목! 이 책'



저자 및 역자소개
김희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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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물리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20년 동안 보스턴 지역에서 연구 생활을 하다가 1997년부터 서울대학교 화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2013~2017)로 재직하였다. 과학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국제화학올림피아드 학술위원장’, ‘과학 교과과정 개정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5년에는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 기술인’으로 선정되었고, 2007년에는 ‘서울대 교육상’을 수상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 15년 이상 강의한 비이공계생 대상 ‘자연과학의 세계’는 2012년에 SBS 등이 주관하는 ‘대학 100대 명강의’로 선정되었다. 저서로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상상 스토리로 이해하는 통합과학』,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과학, 화학Ⅰ, 화학Ⅱ 교과서(상상아카데미, 대표저자)를 집필하였으며, 이 밖에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자연과학의 세계』, 『생명의 화학, 삶의 화학』(공저), 『밀러와 함께 하는 기초화학』, 『과학으로 수학보기, 수학으로 과학보기』(공저), 옮긴 책으로 『리비트의 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화학』, 『어떻게 원자를 쪼갤까』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리셋 고등 화학 1.2>,<상상 스토리로 이해하는 통합과학>,<대학 100대 명강의 (5disc)> … 총 3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현대과학의 명쾌한 답을 들여다 보다.
이 책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봤음직한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지난 100여 년간 눈부신 발전을 이룬 과학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고갱의 그림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 현대과학이 명쾌한 답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서울대 ‘명품 강의’로 꼽힌 ‘자연과학의 세계’ 강의 내용을 포함하여 과학의 세계를 종교와 철학, 문학, 예술, 경제 등 흥미로운 이야기와 곁들여 소개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과학에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이해를 돕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감동시켜 온 저자의 명품 강의를 철학과 연결지어 일반 독자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 책은 어린 시절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의 신비한 매력에 푹 빠졌던 순수한 소년이 어른이 되어 현대과학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찾아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자신의 감동을 나누는 한 과학자의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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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궁금했던 생각들을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풀어, 이야기해주는 책.... 흥미롭습니다.
zoonzoon 2012-07-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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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사람에게 있어 수많은 선택지, 수많은 답은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은 논리와 근거가 명확한, 똑 부러지는 답을 찾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도 마찬가지다.
철학적이면서도 종교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질문들.
이도 저도 아니면서 장황하기만 한 설명은 왠지 사양하고 싶다.
그것이 아무리 짧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책에서는 위의 질문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넘나들며 지구과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는데
조리 있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이해하기에도 큰 무리가 없었다.
마치 책이 아니라 배율 높은 렌즈를 가진 망원경 혹은 현미경이 손에 주어진 기분이다.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바라보거나,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계속 확대하며 들여다보니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그런 기분!!
막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의 기본 뼈대를 알고 나니 이제는 더 알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 대한 답은 지구의 역사, 생명체의 시작을 되짚어보다가
빅뱅 우주론까지 다다르게 된다.예전에는 빅뱅을 그저 우주의 시작, 한 점에서의 폭발로만 여겼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다니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주란 곳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은 그저 티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떠올리면 우주란 곳이 갑자기 거대하고 압도적으로 내리누르는 것 같은 기분인데 하나씩 알게 되면서 좀 더 궁금해졌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이야기, 법칙들이 나오게 된 배경도 재밌고 성운의 거리를 측정하고 우주의 나이, 우주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그리고 계속 팽창하기에 무한하다고 여겼었는데 올베르스의 역설을 보니 우주가 유한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답은 첫 번째 질문의 답이었던 ‘빅뱅’에서 그 실마리가 이어지지만, 개인적으로
<아레시보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
이 메시지는 푸에트리코의 아레시보 전파 천문대에서 별과 별 사이를 헤치고 외계로 보냈다고 해서 아레시보 성간 메시지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진법을 디지털화해서 보내고 있는데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잘 함축해서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다시 등장하는 빅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분에선 빅뱅이 시작하면서 그 에너지가 어떻게 다른 형태로 바뀌어 왔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질이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원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라는 용어도 나오고 생물 생존의 필수적인 단백질, 아미노산 결합, DNA 이중나선 구조, 염기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으니 차근차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과학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새롭게 기초를 다질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마지막 질문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약 50억 년 후에 수소가 다 고갈되면 주계열성인 태양은 적색 거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태양이 적색 거성이 되면 100
배 정도까지 커지는데, 그때가 되면 태양 표면이 수성을 넘어서고 지구
표면 온도는 수백 도에 달해서 그 전에 이미 모든 생명은 종말을 맞을 것
이다. (p.224)




책에서는 태양 에너지와 지구 환경에 대해 예상과 가능성을 제시하며 우리는 종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답하고 있다.
사실이기에 꽤 현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가 남았던 종말이란 단어는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영화에 나오듯 그때쯤이면 새로운 행성에 이주하며 살고 있을지.
예전만 해도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없을 거라 믿었지만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만들어냈다.
이제는 무거운 기체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날 인공위성과 우주선을 만들어내는 단계에까지 왔다.
게다가 드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곳이 지구 한 곳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행성을 찾지 못한다면 반대로 사람이 살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 나가는 방법도 연구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내 대답은 이렇다.
우주가 팽창하며 뻗어 가듯 지구에 사는 인류도 우주로 점점 나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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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빛책갈피 2012-09-0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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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철학과 과학의 묘한 섞임이 주는 그 신비감이 참 좋다. 사실 철학과 과학 장르의 책들을 몇 번 접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존재하는 신' 등과 같은 서적에서도 철학과 과학의 공존 및 대립을 다루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두 분야는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많은 부분 관계가 얽혀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에서처럼 철학이 질문을 던지면 과학이 대답을 하고, 반대로 과학이 던진 의문을 철학이 풀어내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아마 이 책을 쓰면서, 철학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들을 과학을 통해 이해하게끔 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들은 사실 철학적으로 굉장히 오묘한 질문인데, 이를 과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참 재미있고 거침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서 지구는 어떻게 생겨났고, 그에 더해 우주는? 은하는? 이라는 질문으로 세분화되면서 과학은 구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철학적 질문에 접근하게 된다. 과학에 대해 문외한 이거나 문과계열을 공부했던 사람들이라면 자칫 이해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했는데 천천히 부담 없이 읽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은 우주입장에서는 아주 하찮은 크기의 '지구'라는 행성에서 기생하고 있는 한 생명체일 뿐이다. 극히 미미하고 영향력 없는 존재. 우주에 속한 은하들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이와 관련하여 별들도 정말 많다. 우리는 이렇게 우주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임에도 우주라는 것 자체를 갈망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며 때로는 철학을 통해 논하기도 한다. 인간인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하고, 다르게 생각하면 참 건방진 것 같은데, 우주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별의 반짝임을 통해서 우주의 나이, 행성의 나이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다양한 과학자 및 철학자들을 통한 다양한 상식으로의 접근.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 그 기회가 바로 이 책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을 읽은 것이다. 다 읽고 나서도 100%이해하지 못한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서 과학과 철학적 지식을 동시에 습득했다.



철학이란 참 애매하고 어려운 학문이다. 생각의 깊이에 따라 그 의미와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리고 과학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하지만 과학은 어렵긴 하지만 꼼꼼히 파악하며 들어가 보면 이해가 되고 사실입증이 가능한 학문이다. 이렇게 두 분야가 서로 상반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공존'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둘이 대립할 때도 충분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나는 이 둘의 '공존' 및 '대립'을 다룬 책들을 앞으로도 꾸준히 읽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 책들을 읽을 때마다 이 책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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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야성야성 2012-09-08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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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과학의 열매로 풍부하고 편리하지만 실상 우리는 과학적 지식은 학교때 시험을 보기위한 공부에 불과했다. 그것도 물리나 화학은 어렵고 점수따기도 힘들어 생물이나 지구과학정도만 공부하는 추세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과학적인 지식이 없는 나같은 문과적인 사람이 이해나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평품강의란 말과 일반인도 알기 쉽다는 선전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못 읽으면 말고.. 하는 심정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택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 뿐만아니라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은 너무나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이고 그러다 보니 머리가 아픈 존재이다. 나에게는. 거기다 과학이라니 과학도 마찬가지로 아주 미세한 부분으로 파고들어 또한 형이상학처럼 되어버리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확대되는 지식을 도저히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철학의 중요한 질문 세가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대답을 과학에서 하나 하나 짚어가며 찾아본다. 그러는 과정에 우리가 고등학교때 들었던 짧은 과학지식도 나오고 처음 만나는 내용도 있지만 몰라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궁금하면 바로 인터넷검색으로 알아봐가면서 읽으니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많았고 이렇게 따져가면 읽기가 얼마만인가하며 오랜만에 공부하는 기분도 나서 좋았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로부터 시작해서 원류를 따지고 따지고 가다보면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탄생한 것은 언제인가하는 문제와 만나게 되고 지구는 언제 만들어졌나와 또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우주는 언제 만들어졌나하는 문제까지 가게 된다.

인간의 몸은 거의 대부분이 물로 되어있다. 물은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수소와 산소는 어디에서 왔나? 산소는 수소보다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면 수소는 어디에서 왔나?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빅뱅우주에서 미세한 에너지 차이가 별과 은하로 발전해서 오늘날 우리가 존재할 수있는 기반이 되었고 우리는 우주 에너지의 일부이며 양성자,중성자,전자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답을 또 얻게 된다.

과학에서 물질을 다루는 적절한 기본단위인 원자로 볼때 사람은 10의 28승 개의 화학결합을 이룬 원자들로 되어있고, 사람체중의 10%는 빅뱅우주에서 만들어진 수소로 나머지 90%는 거의 모두가 적색거성에서 만들어진 산소,탄소,질소,인,철등으로 되어있어 초신성 폭발로 우주공간에서 빠져나와 만들어진 존재라 별은 우리의 고향이며 우리는 별의 잔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와우!! 우리가 별을 그리워하고 사는 이유가 혹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누구인가? 지구에 사는 우리는 외계인과 교신하려고 메세지를 보내기도 하고 또다른 생명체를 찾기위해 다른 별도 탐색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대사를 통해 일생을 살아가고 생식을 통해 대물림을 하는 지구상에 사는 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태양에너지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지구는 언제까지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할 것인가로 정리될 수 있다. 태양은 약 50억년전에 태어났는데, 이때 약 100억년 융합해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정도의 수소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수소의 반 정도를 사용한 셈이다. 약 50억년 후에 수소가 다 고갈되면 주계열성인 태양은 적색거성으로 바뀐다. 그러면 100배정도로 커지는데 그때 태양표면이 수성을 넘어서고 지구표면 온도는 수백도에 달해서 그 전에 이미 모든 생명은 종말을 맞을 것이다. 프로스트가 말한대로 불로 망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과학도 철학도 다 내게로 와! 하는 겁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아직 이해도 못한 책속의 많은 내용들은 무시한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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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2012-09-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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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김희준, 생각의힘, 2012.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 과학자는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철학의 세계가 과학적 관점으로 접목되고 과학적 시각으로 철학의 세계를 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략적인 우주의 나이는 137억살. 137억년 전 빅뱅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에 물질이 만들어나고 생명체가 진화해가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적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노자와 같은 동양의 철학자나 탈레스와 같은 서양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는지를 논의해 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의 크기에 대한 설명으로 은하수를 언급한다.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윤극영 작곡의 동요에서도 등장하는 은하수에는 3천 억 개 정도의 별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구에서 은하수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되며 그 크기는 어떻게 되는지 의문이 든다. 은하수의 지름은 10만 광년 정도이고 두깨는 2,000광년이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광속으로 8분, 토성까지는 1시간 정도의 거리지만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광속으로 4년 정도가 걸리며, 현재 연구결과로는 100억 광년 거리의 천체를 볼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과학의 발전은 경의로운가.



두번째 주제인 '우리는 누구인가'는 외계생명체와의 대화라는 주제로 시작한다. SETI(Search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에서 추진 중인 외계인 찾는 프로젝트에 대해 잠깐 소개한다. 1974년에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의 주도로 메시지를 전파에 실어 외계로 보냈는데 현재 25,000광년 거리에 있는 M13 구상성단을 향해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메시지에는 생명의 필수적인 다섯가지 원소인 수소, 탄소, 질소, 산소, 인의 원자번호가 기록되었으며, 지구상 생명체의 DNA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A,T,G,C의 화학식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태양계의 9개 행성(명왕성 퇴출 이전)이 표현되었으며 그 중에서 이 메시지는 지구에 사는 생명체가 보냈다는 표시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생명체는 어떤 물질로 구성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을 노자철학에 근간을 둔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이라고 표현한 동양철학에 빗대어 설명한다. 결국 별들의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생명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빅뱅 우주에서 만들어진 수소, 그리고 적색 거성에서 만들어진 탄소, 산소 등이 초신성 폭팔에 의해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가서 수소와 만나 메테인, 물 등 간단한 화합물을 만든 다음 수억 년 후에 태양계의 재료가 되어 결국 우리 몸에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별은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는 별의 잔해(star dust)라고 말할 수 있다. - p.145



DNA 이중나선 구조에 대한 설명을 지나 현명한 인류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현생 인류가 존재할 수 있었던 지구와 태양계의 환경적 특성을 논의한다.



마지막 주제인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대답은 다소 명확하지 못하다. 이 문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할 수 있는 해답으로는 냉혹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는 계속 팽창을 거듭하고 있으며, 그 가속 팽창을 일으키는 척력인 다크 에너지가 우주 전체의 에너지의 73%를 차지한다는 점을 한번 더 강조한다. 다만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돌아갈 곳'에 대해서는 과학의 영역은 아니라고 단정한다. 평생동안 과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과학의 한계를 인정한 결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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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리더 2012-10-0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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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지식을 구분할때 암묵적 지식과 명시적 지식으로 구분하곤 한다. 타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명시적지식이 필요한데.. 나 같은 경우는 암묵적 지식의 비중이 더 높은듯 하다. 그러다보니 대충 알기는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을 잘 못한다. 그래서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을때 어려운 이야기를 잘 풀어서.. 깊이있는 이야기를 쉬운말로 설명해주시는 분들을 부러워하곤 한다. 그리고 이 번에 읽은 책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을 통해 만난 김희준 교수님의 강의를 꼭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 왜 '명품강의'로 선정되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과학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일단 사용되는 용어들이 낯설고 여러가지 현상을 발견한 박사들의 이름은 많고.. 그들의 이름을 딴 법칙과 정의는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암기위주가 아니라 이렇게 스토리텔링 형식을 빌어서 만나는 과학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철학자 칸트의 사유가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하고, 콩트의 오류도 나온다. 그가 몇년만 더 살았어도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는 걸 알수도 있었을텐데.. 아쉽기도 하다. 인간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철학자들이 상당히 과학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유를 통해 세상과 사람과 자연을 분석하고 연구했고 상당히 타당한 전개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무작정 외웠던 정의나 이론의 뒷이야기를 살짝살짝 만날수도 있어 재미있었다.




이 그림을 먼저 봤다면.. 아 이 책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이 그림을 만나게 되었을 때는.. 내가 읽어온 내용을 한 눈에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제목으로 갖고 있는 그림 한점으로 시작된다.



고갱이 이 작품을 그린 이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갖을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김희준 교수님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현대과학을 통해 찾아나간다. 첫번째 질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 비해 두번째 질문 우리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학창시절에 4가지로 나뉘어 있던 과목..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하나로 다가오는 느낌이였다. 그리고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마지막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답은 분량적으로도 매우 짧고 상당히 철학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특히나 집으로 라는 챕터에 등장한 시는 더욱 인상적이다.


그리고 생의 저녁이 이르러
인간의 하루가 마감되면
그들은 모두 천국으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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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2-09-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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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마음이 우리를 속이는 5가지 방법 - Wonderful Mind

상처받은 마음이 우리를 속이는 5가지 방법 - Wonderful Mind



상처받은 마음이 우리를 속이는 5가지 방법

·  2018-09-18
마음은 의외로 쉽게 부러진다. 마음이 부러지고 다쳤을 때, 상처받은 마음이 우리를 기만하게 된다. 절망에 빠지게 하고, 이뤄질 수 없는 헛된 희망에 집착하게 한다. 그러다 조금씩 마음은 포기하게 되고, 평범한 상태로 돌아간다.
상처받은 마음이라는 주제는 슬프게도 현대에서는 매우 빈번하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익숙하지 않기도 하다. 70년대에 가장 히트했던 곡 중 하나가 비지스의 노래였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상처받은 마음을 고칠 수 있을까? 비가 내리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태양이 빛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우
리는 이 단어들에서 절망의 작은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의 상실로 인해 결코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발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사랑하고 잃어 버리는 편이 낫다.” –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
사회심리학자들이 종종 지적하는 사실은바로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 사회적, 정서적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뼈가 부러진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실망감을 주거나, 사기를 꺾거나, 정서적으로 쇠약하게 만드는 것만큼 우리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의 신체는 무엇을 해야 하고, 신체적인 부상이나 감염에 대응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인간 관계가 깨지면, 그만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막히게 된다.

상처받은 마음이 어떻게 우리를 속이게 될까?

무심코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속인다. 상처받은 마음이 원래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로, 아직도 주인에게 붙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거절에 대한 대처법을 잘 모르는 마음, 또는 얼마 전까지 만해도 모든 것이었던 연인과의 결별 등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일어난 일을 부정하려는 방어 메커니즘의 연쇄 속에 갇혀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더욱 정교하고 불리한 과정이 두뇌에서 발생하게 된다.
우리의 뇌는 2차 체성 감각 피질과, 후부 척수충을 활성화시킨다. 이는 육체적 고통과 연결되는 구조와 같다. 정서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우리가 명확하게 생각할 수 없고, 우리 자신을 속이게 된다. 이 과정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해보자.
당신의 마음이 당신을 속일 때, 그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자신도 아프기 때문이다.

1.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잃어버렸다

정서적 고통은 자신의 고뇌를 불러 일으키고, 그 고뇌와 절망을 피하게 만드는 피난처를 스스로 찾게 만든다. 이 파열 이후의 단계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잃었으며,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있는 유일한 사람을 잃었다’와 같이 해로운 생각이 생겨나기 쉽다.
마음은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사로잡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물론 전 애인도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었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났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2. 나는 잘못했지만, 나는 나를 바꿀 수 있어!

부정은 이 전투의 첫 부분이며, 이것은 우리가 불가피하게 매달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우리가 스스로를 비난하고, 우리가 관계를 소홀히 했음을 말해 주며, 우리가 여전히 고쳐질 수 있는 잘못을 흔히 저지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다시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거의 강박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깨끗한 맨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가진 것을 그렇게 쉽게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상처받았고, 호의는 우리를 눈멀게 한다. 차가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두 번째 기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3. 접촉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집착

우리는 즉각적인 의사 소통, 즉각적인 도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좌절을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나는 그가 나를 막았으며, 더 이상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각은 침묵, 거부, 또는 연락 지연 등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천 번의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마지막 메시지를 위해 또는 마지막의 절실한 요청을 말하기 위해, 온갖 수많은 전략을 세우려 할 것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역동성은 충분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연락처나 SNS에서 전 애인을 삭제하는 등 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때때로 사람이 떠날 때 온 세상이 비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4. 내 인생이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은 이 정서적 붕괴를 겪은 후에는 결코 이전과 똑같아질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속이며 결코 다시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다시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나를 떠난 것과 다른 사람을 결코 찾게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러한 생각은 터무니없는 자기 학대이자 고문이다. 물론 인생은 다시는 같을 수는 없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삶을 마주하고, 훨씬 더 좋은 삶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지만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상대가 나를 싫어하게 된 이유를 들어야만 한다

인정하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이유가 분명하고 객관적이며 확실한 이유가 있는 걸까? 때로는, 어쩌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사랑에 대해 집착하고, 그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의 불꽃은 때로 그 이유를 모른 채 꺼져버린다. 다른 사람들이 원인일 수도 있다. 아니면 티끌 모아 태산이 되듯이, 작은 것이 쌓여서 큰 문제를 터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의한 분열은 한 가지 단어로 번역될 수 없다. 이러한 경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게 된 사람과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정직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론을 내자면, 우리는 상처받은 마음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감정과 추론은 우리의 마음 속의 전투에 의한 결과이다. 우리가 그때 일어난 일을 용기를 갖고 받아들이면, 우리 주변의 혼돈을 가라앉혀줄 것이다. 조금씩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우리는 마음을 치유하는 미묘하면서도 필수적인 일을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2019/06/04

1903 박한식 [1] #길/박한식/1회/카터/상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길/박한식/1회/카터/상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길/박한식/1회/카터/상

등록 :2019-03-18 16:05수정 :2019-05-21 14:35

1970년대 중반 조지대아대 교수 시절
제자인 예비역 해군장교 하워드 버넬
카터와 해군사관학교 같은 반 ‘절친’
대선 나선 카터의 ‘국제정치 고문’으로

1976년 카터에 ‘주한미군 철수’ 제안
대선 공약 내걸자 박정희정권 ‘민감’
애틀란타 총영사에 ‘서울대 선배’ 배치

1994년 ‘전쟁막자’ 카터에 ‘방북’ 강권
‘퇴임 대통령 개입’ 거부하던 빌 클린턴
돌연 갈루치 북핵특사 카터 자택 보내
“클린턴 ‘최후통첩’ 김일성에 전해달라”
북한도 24시간 이내 공식 초청장 ‘화답’

정종욱 수석 전화 “카터 방북 막아달라”
‘불가’ 답하자 “서울 먼저 방문” 재요청


1994년 봄부터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박한식 교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김일성 주석과 만나 평화 협상을 해달라’고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한 카터는 6월15~18일 ‘첫 방북 드라마’를 펼쳐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해 6월17일 카터(왼쪽)와 김일성(오른쪽)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두번째 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1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상“클린턴 ‘카터 평양행’ 돌연 승락하자 김영삼도 급선회했다”



1994년 봄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폭격 준비를 거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고조되던 위기는 지미 카터의 방북을 계기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카터는 그해 6월 김일성과 만나서 북한 핵개발 동결 약속을 받아냈고, 그 약속의 내용을 곧바로 <시엔엔>(CNN)을 통해서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면 그때 퇴임한 지 10년도 지난 전 대통령 카터가 갑자기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주역으로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카터는 대통령 재선에 실패한 뒤 1982년 ‘인류의 평화를 유지하고, 질병을 퇴치하며, 희망을 북돋는다’(waging peace, fighting disease, building hope)는 목적을 내걸고 카터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센터의 설립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카터가 대통령 재임 때보다도 퇴임 이후 더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평가한다.

사실 카터는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북한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서 비핵화가 이루어져야만 하고, 미국도 남한의 전술 핵무기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카터의 그런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한 그의 북한 방문을 적극 권했다. 카터도 나의 제안에 적극 호응해서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다.

얘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내가 카터를 알게 된 배경을 되도록 상세하게 얘기하고자 한다. 카터와 나의 독특한 인연이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기여를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의 조지아대 대학원 제자인 하워드 버넬은 카터와 1944년 미 해군사관학교 동기로, 76년 대선 출마한 카터의 국제정치 담당 고문을 맡아 두 사람을 연결해줬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카터는 1944년 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46년 장교로 임관했다. 사진은 해사 졸업식에서 예비아내 로잘린(왼쪽)과 함께 한 모습이다. 두 사람은 한 동네 이웃 사이로 만나 46년 결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나와 카터를 이어진 친구는 하워드 버넬이었다. 버넬은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30여년동안 해군으로 복무했다. 그는 제대한 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지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와 지도 학생이 된 것이다. 버넬은 자신의 부친이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카터와 버넬이 해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같은 반 친구로서 대단히 절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버넬이 나의 지도학생이 된 1970년대 중반, 카터는 조지아주 주지사를 마치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터는 국제정치에 대한 식견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버넬을 자신의 국제정치 담당 고문으로 채용했다. 그러니 내가 그 고문의 스승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와 카터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카터에게 많은 국제정치학적 조언을 해주었고, 카터 역시 지금까지 내 얘기를 경청해 주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해외주둔 미군철수 문제였다. 나는 논문을 작성해서 해외 미군의 철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이 해외에서 장기간 주둔할수록 반미감정이 전세계로 확산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터는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카터에게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 미군 철수정책을 조언했고 카터는 공약으로 채택해 당선됐다. 1979년 6월29일 방한한 카터(오른쪽)는 박정희(왼쪽) 대통령에게 실제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카터의 미군철수 정책은 미국에서 막대한 돈줄을 쥐고 있는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돈줄이 차단된 카터는 결국 1980년 대통령 재선에서 실패했다. 나 역시 카터의 재선 실패에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 그래서 카터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면 카터는 나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어서 자신이 받아들였으니 미군철수는 자신의 정책이라면서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1976년 첫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 때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자 한국 정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담당 특보로 재직했던 함병춘은 카터와 “딱 붙어있는” 한국인 젊은 교수를 좋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카터가 아직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76년 12월 애틀랜타에 한국총영사관을 최초로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서울대 ‘까마득한’ 선배(오명호?)를 총영사로 보냈다. 아마도 나를 감시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에 놀란 박정희는 1976년 12월 북미에서 가장 먼저 애틀란타에 한국총영사관을 열고 박한식 교수의 서울대 정치학과 선배인 오명호를 초대 총영사로 보냈다. 사진 주애틀란타 총영사관 제공이제 내가 카터와 함께 1994년 북핵문제 해결에 관여한 얘기를 계속해 보기로 한다. 나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북핵 위기를 지켜보면서 기존의 연구 주제를 미뤄둔 채 한반도 전쟁 저지에 온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일찌기 유년기에 직접 체험했던 한국전쟁의 참상이 한반도에서 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터에게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직접 만나달라고 강권했다. 카터의 방북을 통해서 북미간의 경색된 대화 채널이 재개되고,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마련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카터 역시 나의 제안에 공감하고 방북을 희망했지만 곧바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카터의 방북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이 볼 때 북핵문제는 현직인 자신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지 퇴임한 카터의 몫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북핵특사가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의 자택을 방문했다. 플레인스는 공항이 없는 변두리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곳은 애틀란타에서 자동차 타고 5시간 정도 가야만 겨우 도달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런데도 갈루치가 집까지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은 카터에게 전달할 클린턴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94년 6월초 카터의 ‘방북특사’ 제안을 전격 수용한 클린턴 대통령은 로버트 갈루치 북핵특사를 조지아주의 작은 마을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의 자택(사진)으로 보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그뒤 카터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클린턴이 방북을 허락했으니 수속을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터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클린턴의 ‘최후통첩’(ultimatum)을 김일성에게 전달하는 것이 방북 목적이라고 했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또한 카터는 북한의 공식 초청장이 필요하다고 그랬다. 나는 영문 초청장 초안을 작성해서 북한에 전달했다. 북한에서는 24시간 내에 내가 잡아준 초안에 따라 초청장을 완성해서 나에게 팩스로 보내주었다. 한밤중이었다. 나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교 연구실 팩스가 아니라 우리집 지하실에 있는 팩스로 받았다. 나는 곧바로 카터에게 전달했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카터에게 전화해서 초청장 수령을 확인했다.

카터는 방북 수속을 밟는 와중에서 나에게 북한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북한 내부 사정을 잘 모르니까 북한에 함께 가면서 자신이 꼭 알아야 할 사항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카터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국사람이다. 또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그럼 북한에 가서 카터 옆에 앉아야 할까? 그렇게 되면 결국 ‘이완용’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김일성 옆에 앉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 그런 고민을 밤새도록 하다가 결국 방북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대신 약 40쪽 분량의 북한 브리핑 자료를 작성해서 카터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워낙 몸이 약해서 밤을 지새우면서 작업하는 일은 평생토록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터에게 제공할 브리핑 자료만은 밤을 지새우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성했다. 카터의 치밀한 성격을 고려하면 아마 그 자료를 거의 암기하고서 북한에 들어갔을 것이다.



1994년 6월15일 ‘방북 특사’ 카터는 판문점을 통한 육로 방북으로 또한번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전 남쪽 환송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카터(맨왼쪽)를 동행할 보인 로잘린(오른쪽 둘째)과 제임스 레이니(맨오른쪽) 주한 미대사가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카터가 비행기를 타고서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즈음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종욱과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동창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카터의 방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카터와 가까이 지내는 내가 카터의 방북을 막아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나는 카터를 태운 비행기가 이미 떠났다고 답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계획을 수정해서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카터가 평양에 앞서 서울을 먼저 방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면 청와대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전달해 달라고 그랬다. 나는 청와대의 제안을 카터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카터는 타고간 비행기로 평양에 직행하는 대신, 서울에서 도보로 38선을 건너서 북한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카터는 한국·북한·미국의 양해를 얻어 자기의 뜻을 실현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일이었다.

집필/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42.html#csidx0cd37006dbd017da96f2a3c3a87c565

1905 박한식[4]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등록 :2019-05-05 21:01수정 :2019-06-03 09:56

길을 찾아서-4회 시브이아이디(CVID)가 불가능한 까닭
80·90년대 북에서 겪은 ‘팀스피릿 훈련’
한미 연합군사훈련 때면 ‘전시’ 초비상
농번기 맞물리면 한해 농사에도 악영향

집집마다 미군 공습 대비 ‘야간소등’
나사 위성촬영 사진 ‘남북 대비’ 선전
“북 전력난 극심-남 경제발전” 왜곡

“미군이 돌연 선제공격하면 어쩌나”
학자·고위급 정치지도자들 ‘공포감’

‘완전·검증 가능·불가역적 비핵화’
북-미 서로 불신하는한 실현 불가능



길을 찾아서-4회 시브이아이디(CVID)가 불가능한 까닭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북핵위기'는 그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중국, 북한, 한국 등이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과는 이내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협상이 반복될수록 북핵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북핵위기는 오히려 악화되는 패턴을 보였다. 북한은 현재 실질적인 핵 보유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기이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후 지금까지 50회 이상 다녀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북한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각으로 북한을 해석하고, 또 심지어 그런 시각을 북한에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통해서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시각은 오늘도 여전히 북한을 강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시각으로 북한을 재단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란 용어로 개념화했다. 아울러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입각해서 입안된 모든 북핵위기 해법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26년 동안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 역시 인식론적 제국주의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2002년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린 리너 출판)를 출간했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직접 관찰하고, 또 북한 내부 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면서 터득한 주체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나는 또 한 권의 북한 연구서를 동료 학자들과 함께 펴냈는데, <탈신비화시킨 북한>(North Korea Demystified·케임브리지 프레스)이 그것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각색된 북한의 모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2018년에는 우리말로 된 북한 연구서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를 펴냈다.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2014년 1월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야경 사진으로, 그해 <로이터>에서 ‘올해의 사진’으로 뽑혀 화제를 모았다. 박한식 교수는 흔히 ‘남북한의 경제 발전상 대비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는 이런 사진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론적 제국주의’ 시각을 상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펴낸 박한식 교수의 저서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린 리너 출판)그런데 약 10년을 주기로 출간된 나의 책 제목들이 어떤 공통의 명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담고고 있었다. 그런 나의 연구 태도를 ‘엠퍼시’(empathy)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는데, 우리말로 의역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현재 이른바 시브이아이디(CVID),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피브이아이디(PVID), ‘최종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뜻하는 에프에프브이디(FFVD) 등의 용어도 사용하고 있지만, 시브이아이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시브이아이디가 미국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개념이라고 판단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 동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조건 핵을 없애라고 강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한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시’(C), 즉 `완전한’(Complete)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 크게 일반사찰과 특별사찰로 나뉜다. 보통은 일반사찰로 한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무기 소재지와 핵무기 수량 등을 신고하면 원자력기구 에서 현지를 방문해서 검증한다. 북한이 신고한 곳의 일부를 샘플로 선별해서 검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사찰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반드시 북한에 대한 `신뢰'를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원자력기구나 미국은 북한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정직하게 신고한다손 치더라도 믿지를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사찰은 더더욱 어렵다. 원자력기구에서 북한이 신고한 곳뿐만 아니라, 자체 분석에 따라 핵무기 소재지로 의심되는 곳까지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사실상 북한의 모든 곳을 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런데도 원자력기구와 미국이 특별사찰을 강행한다면 북한은 자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총격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브이아이디에서 `브이’(V), 즉 `검증 가능한'(Verifiable) 비핵화는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 전문가가 북한이 신고한 지역을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원자력기구와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믿지 않으니 신고 지역만 보고 검증할 생각이 없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아이’(I)', 즉 `불가역적'(Irreversible) 비핵화 역시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전문가, 핵무기를 만든 경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 등도 보유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한다손 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불가역적' 비핵화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분석을 종합해보면 시브이아이디는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핵위기의 해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시브이아이디는 이제 그만 얘기해야만 한다.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처지에서 핵을 보유한 까닭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얘기한 엠퍼시(역지사지)를 통해서 그런 진단을 해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2012년 나온 박한식 교수의 편저 <탈신비화시킨 북한>(케임브리지 프레스)나는 이른바 남쪽의 `팀스피릿훈련'(1976~93) 기간 중에 북한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은 북한 공격을 목적으로 시행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었다. 해마다 두 달 남짓 동안 냉전시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참가병력이 20만~3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남쪽에서 팀스피릿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곧바로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미국은 훈련이라지만, 언제든지 총부리를 북한으로 돌릴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상태에서 일상생활은 전면적으로 마비된다. 팀스피릿훈련이 주로 농번기여서 북한은 농사 준비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북한은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내 찾아낸 해법이 바로 `핵무기'였다. 더욱이 북한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면서 이내 죽음을 당하고, 또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쉽게 살해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핵무기가 정답이라는 판단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최근까지 거의 해마다 북한을 방문해온 박한식 교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훈련’ 때마다 전쟁 상황에 휩싸이는 북한 지도자들과 주민들의 공포를 현지에서 여러차례 체험했다. 사진은 1984년 팀스피릿훈련 때 ‘청군’으로 참가한 주한미군의 모습이다. 사진 국방홍보원

나는 팀스피릿훈련 시기에 북한의 교수나 일반 주민의 집을 방문해서 그들의 대처방식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창문에 커튼을 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다. 혹시라고 불빛이 새어 나가면 정부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그러면 북한 전역이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에서 위성으로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사진을 종종 잡지나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다. 온통 깜깜한 북한의 모습과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모습을 선명하게 대비되는 사진이다. 팀스피릿훈련 같은 때 북한에 머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실소를 하거나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전기가 없으면 북한 전역이 저렇게 깜깜할 수 있단 말인가? 전기가 풍족한 남한은 저렇게 대낮처럼 밝은데 말이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북한과 비교하니 남한과 같은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내가 직접 목격한 북한의 밤이 평상시에는 그 정도로 깜깜한 적은 없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시작해 93년까지 해마다 시행된 팀스피릿 훈련은 ‘평화수호를 위한 한미 결속의 훈련’(1990년) 구호처럼 방어작전을 표방했으나 북한이 자구책으로 ‘핵개발’에 나서는 빌미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5년 3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럼스펠드(맨왼쪽) 미 국방장관이 ‘남북 대비 한반도 야경 사진’을 미국 방문중 펜타곤의 집무실을 찾은 박근혜(맨오른쪽) 당시 한나라당 대표 일행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팀스피릿훈련이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의 학자나 고위급 정치지도자과 대화를 해본 적도 여러차례인데, 그럴 때면 내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북한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막강한 무력을 준비해왔음에도, 자칫 선제공격을 당해 대응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생각해 보라.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History)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무려 3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북-미간 북핵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믿고 있다. 1993년 팀스피릿훈련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명칭을 달리한 한-미 군사훈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내가 직접 확인한 북한의 전시 대비 상황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5년 미 국무장관 럼스펠드가 공개해 화제를 모은 집무실 탁자 위의 한반도 야경 사진. 나사에서 2003년 9월 위성으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런데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내가 북한을 거쳐 남한에 와보면 완전히 딴 세상이란 것이다. 남쪽에서는 팀스피릿훈련 중에도 전쟁 가능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미간의 심각한 긴장구조와 그로인해 반복적으로 전쟁 상태에 내몰리는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그 공포에 따른 선제공격 가능성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런 실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색깔론'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색깔론 강변이 곧 애국적 행위인 것처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처럼 공허한 색깔론으로 한반도의 참혹한 전쟁을 방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터져도 북한이라는 `악마'가 일으켰다고 저주만 할 것인가?

`전쟁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누가 살아 남았는지 만을 결정할 뿐이다.'(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 only who is left)

버트런드 러셀의 이 경구를 기억하는 것, 한반도 평화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2723.html#csidx05c5c30aa68c3f99291d13246edc711

1904 박한식[3]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등록 :2019-04-15 10:00수정 :2019-04-15 10:05


1994년 ‘제네바 합의’ 경수로 지원 약속
미국 불이행에 북 ‘고난의 행군’ 시작
그무렵 방북…탁아소 아사 현장에 충격

1998년 김정일 ‘선군정치’ 본격 나서
미 경제제재 더 강화 국제사회도 가세
“정통성 기반 북체제 이해 못한 실패책”

유니세프 ‘북 아동 6만명 아사 위기’ 보고
핵은 미실행 위협…제재는 생존권 문제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 잔인하다”

북-미 서로 다른 ‘인권 개념’ 이해 필요
2차대전 승전국 잣대인 ‘세계인권헌장’
‘인류 보편적 가치’ 표방하지만 배타적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를 넘겼으나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을 이겨내고자 ‘고난의 행군’에 돌입했다. 90년대 중반 북한의 탁아소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박한식 교수는 “북의 인권 문제를 구실로 삼은 미국의 경제제재 탓에 어린이들의 정작 기본 인권인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모순”을 지적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 영양실조 상태로 보이는 북한 탁아소의 아이들 모습. 연합뉴스1994년 10월 체결된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동결 대가로 북한에 1000MWe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경수로 완공 때까지 연간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에너지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그리고 그 여파는 1990년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로 그대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악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이 겪은 참상은 약 200만명의 북한 인민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때마다 목에 붉은 띠를 두른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배고픔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디기 위한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던 것이다.


1998년 김정일은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러자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많은 나라들도 미국의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경제제재에 굴복해서 미국의 뜻에 순순히 따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북한은 정치체제의 ‘정통성’(legitimacy)의 기반을 경제적 부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의 경제적 기반이 훼손되더라도 주체사상이라는 정통성의 기반은 거의 훼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이 지금까지 실패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경제제재를 지속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1998년 김정일은 경제난 돌파와 체제 강화를 위해 ‘선군정치’를 본격 시행하고 나섰다. 2010년 8월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선군혁명영도 시작 50주년 기념 선군절’도 제정했다. 사진은 2005년 선군정치연구소조의 선전 포스터.그러나 우리는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욱 잔인한 무기”라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국제정치학에서 핵무기는 전쟁 수단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 수단으로 이해한다.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 능력이 오히려 실제 사용을 제한하는 역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사용하는 식량무기는 매일 먹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이라크 경제제재는 13년간 지속되었는데, 그로 인해 5살 미만의 어린이 약 50만명이 굶어 죽었다. 또한 2018년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의 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미국 주도의 대북 경제제재로 약 6만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부모는 이미 굶어 죽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실제 희생자는 6만명을 훨씬 넘어설 수밖에 없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한 탁아소를 방문했다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를 안내하는 북한 관리들에게 이들의 부모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 죽었다고 답해 주었다. 생각해 보라.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신이 굶어 죽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자식에게 모두 주지 않겠는가? 그때 탁아소에서 굶어 죽어가던 어린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라고 믿는다. 나는 북한 관리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지만 참담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죽어가는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문을 조용히 걸어 잠갔다. 이어서 나보다 키가 두배 가까이 큰 북한 관리들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키가 작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을 딱 2명 봤는데, 박정희와 덩샤오핑(등소평)이 그들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쳤다. 그들의 안경이 땅에 떨어졌다. 나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너희들 ‘배때기’는 이렇게 멀쩡한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탁아소의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가느냐!” 그러자 북한 관리들이 곧바로 나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다 함께 방바닥에 쓰러져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서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지난 2월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왼쪽) 대통령은 김정은(오른쪽) 국무위원장의 ‘경제제재 일부 해제’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28일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이틀째 확대회담의 결렬 직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김정은은 지난 2월28일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유엔 제재의 일부, 즉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해제’를 요구했다. 김정은의 요구는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인민의 실상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김정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 의회에서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을 환영하면서 북한의 인권 탄압 등의 이유로 경제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6만명에 이르는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미국이 그토록 강변하는 ‘인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나는 조지아대학에 재직하면서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연구했다. 대학원에 인권 과목을 개설해서 수십년간 강의를 했고, 1995년부터 ‘국제문제연구소’(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Issues, GLOBIS)를 만들어 강의실 밖의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인권을 외교정책의 의제에 포함시킨 지미 카터와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토론하면서 나름의 인권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에서 ‘국제문제연구소’(GLOBIS)를 세워 ‘북한 포럼’을 여는 한편 강의실 밖 인권 문제 연구와 해결 방안을 주도적으로 모색해왔다. 조지아대 누리집 갈무리.내가 공부한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인권 개념’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국가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승전국의 제한된 시각을 반영한 특수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북한도 북 나름의 인권 개념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미국과 북한의 인권 개념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미국이 독점한 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인권은 크게 3가지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째, 천부권(universalism)이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에는 인권이 있고, 북한에는 인권이 없다는 식의 얘기는 성립할 수 없다. 둘째, 양도 불가능성(inalienability)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권리로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셋째, 공동 책임성(entitlement)이다. 예컨대 평양에서 아이가 굶고 있으면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나는 천부권, 양도 불가능성, 공동 책임성에 기초를 둔 인권은 크게 6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첫째, 생존권(life right)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권리로서 인권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을 차지한다. 둘째, 귀속권(belonging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삶을 영위할 권리다. 셋째, 평등권(equality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다. 넷째, 선택권(choice-making right)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다섯째, 사랑권(love right)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가정에 소속되어 있다. 가정의 권위를 생각하면 중매결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권리는 부모가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바로 그 남자와 여자에게 소중한 권리다. 또한 이산가족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도 사랑권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해방권(liberation right)이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교적 해방 내지 해탈을 의미한다. 인권은 이상의 6가지 차원을 모두 충족할 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인권 개념은 1948년 12월10일 유엔에서 발표한 ‘세계인권헌장’에 담겨 있다. 박한식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잣대를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유엔의 1950년 세계인권헌장 제정 2돌 기념사진.미국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강변하는 인권 개념의 구체적 모습은 1948년에 제정한 ‘세계인권선언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는 모든 인간의 천부적 자유(free)와 평등(equal)을 동시에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는 자본주의의 키워드이고, 평등은 사회주의의 키워드이다. 따라서 양자는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규정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욕망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자유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평등을 단순히 병치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역설하는 인권 개념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 ‘선택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면서 구성되었다. 미국이 중시하는 선택권이란 결국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며, 그런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권’을 경시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미국이 자국의 가혹한 경제제재로 수많은 북한 어린이들이 굶어 죽을 처지라는 명백한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북한의 인권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 인민의 생존권이라는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북한은 국가의 주권을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시한다. 국가의 주권이 보장되어야만 개인의 인권 또한 보장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인권 개념은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 강조하는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에서 ‘생존권’ ‘귀속권’ ‘평등권’을 대단히 중시하는 방향에서 구성되었는데, 이 3가지 권리는 모두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는 취약한 양상을 보인다.

위와 같은 분석에 따른다면,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과 북한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은 모두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아무리 강력하게 비판한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북한은 미국과 전혀 다른 인권 개념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아랍권의 이슬람교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비판이 아랍권에 먹힐 수 있겠는가?

미국이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토록 장기간 노력했는데도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은 미국이 당연시하는 ‘사유양식’(modes of thought)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에 친숙한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규탄하면서 경제제재를 강제하면 북한이 굴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는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악마로 간주하면서 끝없이 압박하고 위협하는 대신, 그래서 수없이 많은 북한 인민을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대신, 미국한테 친숙한 사유양식 그 자체를 혁신하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새롭게 입안해서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이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북한 어린이의 ‘인권’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0021.html#csidx666e75743085ebeb8fa2a2b7babc1d4

1904 박한식[2]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등록 :2019-04-01 16:06수정 :2019-05-21 14:38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
1994년 6월16일 카터 백악관에 ‘통보’
“김일성 ‘북핵동결 합의’ 공개하겠다”
곧바로 CNN 평양 특파원과 인터뷰
‘폭격 대기중’ 클린턴과 한동안 ‘냉랭’

‘북핵 폭격 해결’ 주장은 순진·위험
“북은 반드시 보복 공격 할 것이다”
6·25때 초토화된 북은 ‘전국 땅굴화’
남은 초고밀도·인구집중 ‘살상 막대’

합의 21일뒤 ‘김일성 급서’ 들은 카터
정성어린 조문 편지에 북 관리 ‘눈물’

‘김일성 유훈’ 10월21일 ‘제네바 합의’
미국도 일본도 한국도 ‘지원’ 불이행

“3개월 못버틴다” 전략적 인내 ‘고수’
“북한붕괴론의 5가지 허상 깨달아야”
주체사상·선군정치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1994년 6월16일 평양에서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합의한 ‘북핵 동결’은 먼저 클린턴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워싱턴시각 15일) 카터는 평양에서 백악관의 로버트 갈루치에게 전화를 해서 합의 내용을 전달한 다음, <시엔엔>(CNN) 인터뷰를 통해 그 내용을 미리 공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리고 실제로 인터뷰를 진행해버렸다. 카터는 합의 내용이 세상에 빨리 공개되지 않으면, 이미 충분히 준비된 미국의 ‘북한 영변 폭격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카터의 조처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동안 냉랭하게 지냈다.



1994년 6월16일 ‘글린턴의 특사’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 개발 동결’에 합의한 사실을 <시엔엔>과 현지 생방송 인터뷰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시엔엔 화면 갈무리실제로 그때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북핵 동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을 폭격할 계획이었다. 그런 와중에 클린턴 정부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했다. “미국이 영변을 폭격했을 때 북한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에서는 요즘도 미국이 그때 영변을 폭격했다면 북핵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발언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른 채 오로지 북한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에 기초해서 내뱉는 순진하고도 위험천만한 생각의 소산일 뿐이다. 나는 “미국이 영변을 폭격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 북한이 어떤 식으로 보복할 것으로 보느냐고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한 미군기지, 주일 미군기지, 괌 주둔 미군기지 등을 폭격할 것이다”, “미군기지 주변에는 많은 민간인도 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북한이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폭격하면 수십만명의 인명이 살상될 것이다”, “미국은 반드시 국제사회에서 그 피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1994년 6월16일 미국 워싱턴(현지시각 15일)의 백악관에서 회의중이던 고어 부통령, 윌리엄 페리(맨오른쪽) 국무장관 등 클린턴의 참모들이 <시엔엔>을 통해 카터의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돈 오버도퍼 <투 코리아> 중에서.한편, 1950년 무렵 평양의 인구는 약 100만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은 평양에 약 1만개 정도의 폭탄을 투하했다. 100명당 1발꼴로 폭탄비를 쏟아부은 셈이다. 그 시절엔 한 집에 보통 10명 정도의 대가족이 살았다. 따라서 평양에는 약 10만 가구가 있었던 셈인데 미군의 폭격으로 그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의 미국에 대한 원초적 적대감이 끊임없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미 공군 폭격의 위력을 목격하면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땅굴을 파서 방공호를 만드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아마도 북한은 현재 세계에서 땅굴을 가장 잘 팔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의 지하철도 지하 100m 깊이에서 운행된다. 대동강 강바닥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는 것이다. 또한 그 지하철 내부에는 방대한 영역의 대피소가 있다. 지하철이 곧 거대한 방공호인 셈이다. 따라서 유사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평양 시민들은 마치 ‘개미새끼처럼’ 지하의 방공호로 모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미국은 폭격할 목표 지점을 확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 미국의 우방인 남한의 사정은 어떤가? 남한에서는 모든 것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서울의 자동차만 하더라도 수백만대에 이른다. 그런데 모든 차에는 연료(가솔린, 디젤, 액화천연가스 등) 탱크가 장착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 한국을 폭격하면 자동차들이 곧 폭탄이 되어 버린다. 또한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도시가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 집들도 폭격을 당하면 이내 폭발해버릴 것이다. 자, 미국 당신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보라. 당신들이 영변을 폭격하면 우방국인 남한 사람들은 수백만명이 죽어 나갈 것이지만, 정작 북한 사람들은 그만큼 죽지 않는다. 이처럼 빤하게 보이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전쟁이 나면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하다. 심지어 미국보다 북한이 우세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식의 얘기를 카터에게도 전하고, <시엔엔> 등 여러 유력 언론에 나가서도 되풀이 경고했다. 그러자 좀 진보적 시각을 지닌 많은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서 더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다행히 그들은 대부분 쉽게 내 얘기에 수긍했다.

그러나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전쟁 방지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의 파국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오히려 카터의 방북을 반대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의 집중 폭격으로 초토화된 평양 시내 전경. 박한식 교수는 ‘미제에 대한 북한의 원초적 적대감’의 뿌리이자 트라우마가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창비 제공카터는 그해 16월15~18일 3박4일간 평양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은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급서했다. 카터는 평양에 다시 들어가 조의를 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평양에 정성 들여 쓴 편지를 보냈다. 북한에서 영어 잘하기로 손꼽히는 한 참사관이 카터의 그 편지를 읽고서 엉엉 울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방송을 통해 김일성의 장례식에 ‘외국인 조문 사절 원칙’을 발표했다. 그래서 카터의 조문 방북을 거절했다. 나는 훗날 카터의 편지를 읽고 울었다는 북한 참사관을 카터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 북한 참사관은 카터에게 정중하게 답례 인사를 했다.



1994년 6월15~18일 3박4일간 1차 방북을 통해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한 카터는 세계적인 평화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앞서 16일 ‘북핵 동결 합의’를 전격 발표하면서 클린턴과 사이가 불편해진 때문인지 18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하는 카터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나는 김일성 서거 당일 로마에 있었다. <시엔엔>에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그때 북한 쪽에 “내가 당장 북한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시엔엔>은 북한과 소통할 수 있는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답변은 “북한에 오셔서 통곡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평양에 가지 않았다.



1994년 6월15~18일 첫 방북한 ‘북핵 특사’ 카터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 전격적인 ‘북핵 동결’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한반도 전쟁 시계를 극적으로 멈추게 했다. 그 3주 뒤인 7월8일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과 12일간의 국장 소식은 또 한번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겨레> 자료사진.1994년 카터의 방북으로 전쟁의 고비를 넘긴 ‘1차 북핵 위기’는 10월21일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국제사회에서는 전력난이 심한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유훈으로 맺어진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생명력을 잃은 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없는 북한이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도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예산 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수로 설비 비용을 모두 한국에 떠넘겨 버렸다. 한국 역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뒤로 미국은 북한이 붕괴되는 날만 기다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라는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붕괴 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에도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통치’에 따라 북미는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해 10월21일 로버트 갈루치(왼쪽) 미 대북 특사와 강석주(오른쪽) 북 외무성 제1부상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핵동결과 경수로 지원’ 등을 담은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붕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은, 수많은 정치인이나 연구 학자의 사유를 강력하게 지배해온 ‘북한붕괴론’이 현실 앞에서 반복적으로 ‘파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대략 5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해서 유지된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표방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자각적으로 배제하는 노선을 걸었다. 따라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이 붕괴하자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북한은 그런 충격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일반적으로 정치체제가 붕괴되려면 국민의 지지가 철회되는 이른바 ‘정통성 위기’(legitimacy crisis)가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 북한체제의 정통성은 경제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경제가 어려워도 체제의 정통성 위기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경제가 어려워지자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더욱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셋째, 정치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쿠데타가 발생하려면 쿠데타 세력끼리 공유할 수 있는 비밀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북한은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된 나라이고, 또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유통되는 나라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비밀정보를 매개로 쿠데타 활동을 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넷째, 북한은 남한과 정통성 경쟁을 전개하면서 북한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만일 남한이 없다면 북한은 정통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남한을 부정함으로써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식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주지하듯 동독은 서독에 흡수통일 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동독과 북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고, 서독과 남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며,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독과 동독은 모두 독일 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강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남한은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다. 요컨대 위에서 예시한 요건이나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붕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내 판단이다.



1994년 6월18일 귀환한 카터(왼쪽)는 청와대로 김영삼(오른쪽) 대통령을 예방해 ‘김일성의 7월중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전했다. 김 대통령은 조건 없는 수락을 발표했으나 김일성이 사망하자 ‘3개월 이내 북한붕괴론’을 장담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군정치를 군인이 인민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선군정치가 그런 시스템이었다면 북한은 벌써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정치는 이른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사회주의 우방국의 경제적 지원이 거의 끊어진 시절에,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제재가 북한의 숨통을 강력하게 옥죄던 시절에, 요컨대 북한이 철저하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더 이상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 이래 지금껏 ‘북핵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한 붕괴론’은 체제의 근간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무시한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북한 노동당에 ‘주체사상’ 선전 포스터. 연합뉴스북한에서는 인민 생활이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군이 나서서 해결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농경지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의 90%가 군인이었다. 동네마다 군인이 인민을 돕는 사무소도 있다. 인민의 집에서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군인 사무소로 전화해 도움을 청한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고쳐준다. 군인들은 인민이 봉착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군인이 인민을 도와주면 인민은 자연히 군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된다. 모든 인민의 아들과 딸은 군에서 10년간 복무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군인이 인민을 돕는 선군정치가 시행될수록 군인과 인민은 자연스럽게 일심단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나면 휴가 나온 군인은 곧바로 군부대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전쟁이 나면 군인은 자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목적은 전투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향 동네를 지키고, 그곳에 사는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싸운다면 누구나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심장에서 나오는 충성심이 발휘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일성의 훈시였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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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8235.html#csidx269a40fae941b08b7d5a1f48925953d

1903 박한식[1]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등록 :2019-03-18 16:42수정 :2019-06-03 09:45



‘길을 찾아서’ 새 연재 주인공인 박한식 조지아대 석좌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통일의 길’ 찾아서 반세기 ‘평화학’ 개척

1981년부터 50여차례 방북 ‘김씨 3대’ 탐구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2번째 주인공은 북한전문가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석좌교수이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1981년 ‘중공 지도자’ 등소평의 주선으로 첫 방북한 이래 지금까지 50차례 넘게 북한을 다녀온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정권을 안팎에서 내내 탐구해온 보기 드문 학자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하얼빈으로 이주한 유민집안에서 1939년 태어난 그는 유년기 시절 해방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참상과 서울대 정치학과 시절 ‘4·19혁명’을 겪으며 ‘평화’를 인생의 과제로 삼았다. 1965년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통일의 길을 찾을 때까지 귀국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지에 따라 반세기 넘게 한반도 문제 연구에 천착해 독창적인 ‘평화학’을 개척했다. 애초 ‘주체사상’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그의 북한 연구는 ‘창시자’를 자처한 황장엽은 물론이고 김일성대학 등 북한 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토론을 할 정도로 객관적인 시각을 인정받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학자를 넘어 남-북-미를 잇는 ‘평화의 중재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카터 북한특사’ 제안을 비롯해 그는 국제정치 무대의 막전막후에서 전쟁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는 ‘평화 수호자’ 노릇을 자임해왔다. 2010년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교인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주는 ‘간디·킹·이케다 커뮤니티빌더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평화운동가로도 인정받았다.

<한겨레>는 지난 수개월에 걸쳐 박 교수와 필자인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의 인터넷 통신망을 통한 구술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김정은-트럼프의 2차 북미정상회담 중단 이후 북핵 문제는 또다시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팔순의 원로학자가 열정적으로 풀어놓는 ‘북한 탐구 비사’와 ‘한반도 평화 해법’을 격주로 한 차례씩 소개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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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55.html#csidx791843cce00a91cb860616990873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