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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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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hr ·



크리스마스 새벽이군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당신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십니까?』


그저께부터 읽기 시작한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책의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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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1년경 동인(東人)세력이 확대되는 흐름 속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세 가지 양상이 나타났다.
첫째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정(正)과 사(邪), 즉 바름과 간사함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본래 동인과 서인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입장이 다를 뿐 , 정사(正邪)로 구분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동인 일부는 서인을 공공연히 ‘소인(小人)’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소인’이라는 말은 예사 용어가 아니었다. 이 단어는 문정 왕후 사망 후 조정에 진출한 신진사류가 명종 대 훈척계 인물들을 가리킬 때 썼던 용어이다. 소인은 정치적 대화나 타협 대상이 아닌 싸워서 격퇴시켜야할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둘째는 구신(舊臣) 중에서 동인에 가담하는 사람이 속속 둥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서인을 공격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보상 받으려 했다. 때문에, 그 말이 더욱 공격적이었다.
셋째는 이전까지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 있었던 김우웅, 이발, 류성룡 같은 인물들이 당파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선조 11년에 잇었던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들과 이이(李珥)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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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是非)와 정사(正邪)는 차원을 달리하는 구분이다. ‘시비’는 특정한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판단 내용에 국한될 뿐 판단 주체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때문에 사안에 따라 시(是)와 비(非)의 주체는 달라질 수 있다. ‘비’즉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해서 그 판단 주체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정사(正邪)’는 개별 상황을 뛰어넘어 판단주체의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다. 그리고 정(正)과 사(邪)의 차원에서 비로소 군자와 소인이 구분되었다. 소인은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아닌 제거되어야할 대상을 뜻했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동인과 서인의 보합(保合), 조제(調劑)에 대한 논의도 동시에 등장했다. 조제란 정파간 세력 균형을, 보합이란 대화합을 뜻했다.
조제보합론은 조정에서 동인이 자신의 주도권확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쳐야할 논리였다. 특히 동인과 결합한 구신(舊臣)에게 조제보합론은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었다. 그들을 조정에서 축출시킬 수도 있는 논리였다. 이이(李珥)가 조제보합론을 들고 나오자 동인 측은 크게 반발했다.
이미 현실은 조제보합론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제보합론은 사림(士林)의 오랜 이상과 정체성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조제보합론이 가진 힘의 원천이었다>

450년 전 역사가 요즘 우리 현실과 겹쳐서 읽힙니다.
저는 이조(李朝)의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서로 정통이라고 주장한 논리의 근거가 된 유학(儒學)에 대해서도 공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뒤늦게 공자를 접하고, 이 책을 선물 받아 보면서 여러 생각들이 올라옵니다.

이이(李珥)가 다음 장(章)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성탄절과 연말을 지내면서 이 책을 보게되는 행운에 감사합니다.

2019/12/09

19 김형수(녹색당) 그린뉴딜과 탈성장,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Namgok Lee

연구소 칼럼 - [칼럼] 그린뉴딜과 탈성장,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칼럼] 그린뉴딜과 탈성장,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by 녹색전환연구소 posted Sep 26, 2019
김형수(녹색당 서울시당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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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IPCC 1.5도 특별보고서 발표된 후 파리협약에서 합의한 2도가 아닌 1.5도 이내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제한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전 세계 시민들은 각국 정부에 기후 위기 비상사태를 선언할 것을 요구하며 2050년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 즉각적인 감축 계획을 요구하고 있다.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을 45% 줄여야만 1.5도 이내로 지구 온도 상승을 제한할 수 있다는 IPCC의 특별 보고서에 따라 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10년에 불과하다. 앞으로 10년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은 무엇일까?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정책은 바로 그린뉴딜 정책이다. 미국 정치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오카시오 코르테즈와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버니 샌더스는 앞 다투어 그린뉴딜 정책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린뉴딜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탈성장 또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대안 정책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린뉴딜과 탈성장, 방향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고, 각 정책을 지지하는 진영들에서는 논쟁이 있다. 그린뉴딜과 탈성장은 인류가 초래한 온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경로에서 서로 같은 길일까 아니면 다른 길일까?


그린뉴딜, 로버트 폴린의 주장

그린뉴딜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연구자 로버트 폴린을 통해서 그린 뉴딜의 주장을 살펴보자. 폴린은 실현가능한 지구적 기후 안정화 진전시키기: 탈성장 대 그린뉴딜(2019)에서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막고 지구 기후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 경제성장을 하는 절대적 탈동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그린뉴딜의 기본은 GDP의 1.5 ~2퍼센트를 에너지효율 향상, 재생에너지 확대에 투자해 생활 수준을 높이고 일자리를 창출하자는 프로그램으로 요약된다.


폴린이 말하는 에너지효율 향상 프로그램이란 건물효율 개선, 대중교통 시스템 향상과 함께 에너지효율을 높인 차량 이용, 전력 송배전 손실 감소, 산업기계 효율적 운영 등을 뜻한다. 폴린은 에너지효율 향상은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같은 서비스라면 더 적은 에너지가 필요하므로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폴린에 따르면 재생에너지에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게 한다. 전환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에 투자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노동자에게 적당한 보상을 보장하고, 작업장 조건과 노동조합 대표성을 강화하며,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직업 기회를 필연적으로 확대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정투자라는 공적 지출로 직업의 질, 조합의 범위, 소수자들에 대한 직업에 대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폴린은 에너지효율, 재생에너지 확대에 투자는 산업 정책을 필연적으로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한다 해도 공공기업, 사적 기업 등이 초기 자본의 흐름을 진전시키고, 프로젝트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 세제 혜택, 공공 조달 등의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탈성장 주장을 평가하는데, 탈성장은 구체적인 실현 가능한 기후 안정화 정책들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향후 20년 동안의 10% GDP 감소라는 탈성장론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2007년 ~2009년 금융위기나 대공항 수준의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성원들에게 미칠 충격이 크고, 해당 시나리오에서는 그린뉴딜 시나리오에서보다 이산화탄소배출 감축량이 적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탈성장 시나리오에서조차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키는 것은 GDP 전체의 축소가 아니라 에너지효율, 재생에너지 부문 투자의 거대한 성장임을 지적한다. 계산상 화석연료 생산과 소비는 급격하게 감소하지만, 에너지효율, 재생에너지 부문 투자는 GDP 성장에 기여하는데, 무엇보다 이 정도의 GDP 감소는 빈민층과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감소와 실업을 결과한다고 비판한다. 탈성장은 전략적 관점에서도 재생에너지 프로젝터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탈성장, 버튼과 소머빌의 주장


마크 버튼과 피터 소머빌은 탈성장: 반론 에서 폴린을 겨냥해 직접 비판을 제기한다. 그들은 폴린이 기후변화만 강조하고 있고, 생물 다양성, 깨끗한 공기, 물, 살만한 도시, 사회적 국제적 평등을 기후변화를 완화라는 긴급성에 종속시킨다고 지적한다. 즉 현재 인간의 자원 소모에 의한 생태적 수용 능력의 한계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폴린은 금융화된 신자유주의, 수익 추구의 극대화를 비판하고 성장은 긍정하고 있는데, 버튼과 소머빌은 금융화된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 이윤율 하락에 대한 대처 방안이라는 점에서 성장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가 아닌 그것의 파생된 문제를 악당으로 오인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선진국의 성장과 탄소배출의 분리 현상인 탈동조화는 탈산업화가 되면서 탄소 배출 산업을 외부화, 국가적으로 외주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고, 물질적 관점에서 자원 소모와 경제성장의 탈동조화는 일어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버튼과 소머빌은 역사적으로 재생에너지 확대가 화석연료 감소로 이어진 사례가 없다는 점도 지적한다. 재생에너지가 늘면서 화석연료 사용도 늘었고, 현재와 같은 소비수준으로 재생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서 재생에너지 활용이 18배나 증가해야 한다며 폴린을 비판한다. 그리고 폴린의 정의로운 전환 프로젝트는 화석연료 산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이윤 추구나 자원 개발이나 채굴은 석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경제와 이윤 추구는 분리되어야 하고, 생태적 수용 한계 내에서 인간의 필요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 축소가 꼭 빈곤층에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부와 소득의 집중에 강하게 연결된 배출을 축소하는 것임을 강조하며 당장의 미래는 아닐지라도 지구의 생태적 수용 능력 한계 내에서 인간의 필요를 충당해야 하며, 전 지구적 경제의 물질적 규모 감소와 평등한 통제, 배출 감소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불필요한 산업생산, 에너지 소비, 도로 공항 투기적 고층 건물 등 건설,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농업을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통한 열 생산, 전기차를 통한 교통, 시멘트와 철을 사용하지 않은 건설, 종생태학의 원리를 따르는 농업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린뉴딜 비판에 대한 폴린의 반박


버튼과 소머빌에 대한 반론은 아니지만 폴린은 탈성장론자들의 비판에 답하면서 여전히 구체적 정책이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일본의 예를 들며 일본 경제는 90년대 성장 없는 초 저성장 시대를 지났지만 이산화탄소배출량이 전혀 줄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GDP 감소가 탄소배출 저감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제시한다. 또 인도를 예를 들면서 탈성장론자들은 개발도상국의 탈성장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인도는 경제성장과 함께 탄소배출을 많이 한다는 점을 들며, 인도 같은 나라에도 절대적 탈동조화 그린뉴딜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폴린이 현재의 총체적 생태적 위기를 이산화탄소 혹은 온실가스 배출 문제로 초점을 맞추는 경향은 분명하다. 기후 위기가 일으킬 총체적인 생태적 파국도 있지만,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뿐만 아니라 자원소모 자체가 일으키는 생태적 과부하를 고려했을 때 화석연료나 발전 부문에 초점을 맞춘 저탄소 기획은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탈성장론은 근대 문명의 성장 지상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적확히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의 즉각적인 실천 계획들을 그린뉴딜론 만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인류가 마주한 위기에 대응할 시간은 부족한데, 인류가 나가야 할 큰 흐름에 대한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저탄소사회라는 방향은 동일하지만, 무엇을 위기로 인식하고, 문제의 근원을 보는 시각에서는 그린뉴딜과 탈성장은 최종 도착지가 다를 수 있다. 그린뉴딜은 기존 성장지상주의적 산업 문명의 체질 개편 내지는 일자리 확충에 국한될 수도 있고(체제 유지의 알리바이), 탈성장론은 실천과 계획 없는 비판에만 머무르거나 현실화되지 못한 담론으로만 머물 수도 있다. 상호 비판과 경쟁을 통한 대안의 정교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양쪽을 모두 긍정하자면,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방향은 탈성장에 둬 지구의 생태적 한계 내에 인류의 필요를 충당하도록 경제를 축소시켜 가야 할 것이다. 다만, 전환 사회로 진입하는 마중물이자 단기적 이행전략으로 그린뉴딜을 택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본다면 그린뉴딜을 보다 더 산업 문명 비판적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탈성장의 기획과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폴린의 그린뉴딜에서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상품의 생산과 소비, 이를 거래하는 시장의 역할이 강조 전제되어 있고 임금노동시스템 유지 또한 전제되어 있다. 성장을 요구하는 시장 시스템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줄일 수 있는 자급, 자립의 역할이 강조되는 농업과 농작인 삶이 더 풍부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또 임금노동 체제 자체가 변화되는 시점에서 임금노동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본소득론 또한 결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Robert Pollin, Advancing a viable glogal climate stabiliztion profect: Degrowth versus the Green New Deal, 2019 Union for radical political economics,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2019 vol 51(2) 311-319

Robert Pollin, Degrowth versus Green New Deal: Response to Julet Schor and Andrew Jorgenson, 2019 Union for radical political economics,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2019 vol 51(2) 3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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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BurtonPeter Somerville, Degrowth: A defence, New Left Review 115, 95-104
 

탈성장론과 그린성장론을 들여다보고 싶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인류 존속의 위기에 대한 체감이 이상할 정도로 낮은 원인이나 탈성장이나 그린성장이 뿌리내리기 위한 동력, 문명전환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변동과의 괸련 등에 대해서.
이 글에 소개된 논의들 속에는 이런 부분들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삶의 목표, 행복에 대한 심층의 가치관 변화를 어떻게 도모하는냐는 것은 이런 논의가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논의로 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아닐까?
지금의 단계에서 추진하려면 노사관계나 실업이나 복지에 대한 전망에 대해 정치 경제적 설득이 가능하고 유력한 정치세력이 이 전망들로 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정치에서 인류의 급박한 위기에 대응하는 목소리가 거의 안보일 정도로 약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아픈 실태다.
만일 위기가 급속하게 닥치고 사람들의 인문적 토대와 정치 경제의 제도와 의식이 문명전환의 방향으로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멸하거나 그것을 피하기 위한 어떤 형태의 생태 독재가 불가피할 수도 있을텐데 이것은 또 다른 재앙으로 될 것이다.
단지 그린성장이냐 탈성장이냐 같은 기술적ㆍ제도적 접근만으로는 어렵고, 근본적이기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더 알아봐야겠지만.
문명전환의 동력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검토되어야할 그린성장이나 탈성장에 대해.
그리고 4차 혁명과의 연동에 대해 폭넓은 연계 속에서 다방면의 노력들이 집중되어야할 것 같다.
녹색당이 이런 면에서 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새벽에 이 글을 보며, 들었던 느낌이다.
이태영

2019/07/02

(18) Namgok Lee - 내가 어제 나를 공자 계열이라고 느꼈던 그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인간의 질적 진화에...

(18) Namgok Lee - 내가 어제 나를 공자 계열이라고 느꼈던 그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인간의 질적 진화에...






Namgok Lee
8 hrs ·



내가 어제 나를 공자 계열이라고 느꼈던 그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인간의 질적 진화에 대한 신념을 평생 간직한 사람이다.
그는 계급적이고 신분적인 바탕에서 쓰였던 '군자'라는 말을 그 것으로부터 해방하여 신분 계급을 떠나 누구라도 그가 획득한 인간의 질적 진화의 정도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이 자체가 조용(?)하고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그는 사람을 나누는 고정된 틀로 이 말을 쓰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말하는 '군자'에 턱없이 못미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요즘 21세기에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하는 세번째 주제가 '군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이다.

공자의 '도'는 그야말로 길이다.
인간의 정신적 목표들이 인간의 정치적ㆍ사회적 현실과 따로 놀지 않고, 일치시키려는,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ㆍ사회화ㆍ보편화하려는 노력을 성패와 관계없이 일관되게 추구하였다.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며 현실과 분리되어 이원화된 그런 '도'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21세기는 과거 축의 시대 인류의 선구자들이 보았던 그 인간 자체의 진화라는 목표들이 현실적이고 보편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는 시대로 보인다.
'진보'의 목표가 무엇인가?
이 점을 놓친다면, 무엇이 진보인가?

나는 50대의 대부분을 무소유사회의 실험에 동참하였다.
그것을 창안한 사람이 야마기시 미요조(1901~1961)다.
그 또한 인간의 정신적 진화의 목표를 분명히 했지만, 크게 집중한 것이 그 것을 인간 사회에 어떻게 구체화ㆍ현실화할 것인가였다.
그가 죽은 후 '실현지 방식'의 실천이 진행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성급한 실현지 방식이 인간과 사회의 현실로부터 떨어져 보편화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떠났다.
그러나 야마기시는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

나는 공자를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순이 넘어 '논어'를 접했다.
아마 전통적인 방식으로 논어를 학습했다면 보이지 않았을 보배들이 보여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많이 달랐다.
요즘 크릴의 공자를 꼼꼼이 보고 있는 것도 그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공자에 반한 것을 보면 나는 아마 그 계열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다.

새벽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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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철 南谷, 맞네. 남곡은 매우 선진적, 진보적인, 멋있는 공자 계열로 보이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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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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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철 replied · 2 replies 5 hrs


Sejin Pak "인간의 질적 진화"의 "진화"의 의미가 진화론의 진화가 아니고 영어로 하면 perfectability 완전성, 완전하게 할 수 있음, 이라고 한다면, 영어 세계에서는 공자는 perfectability of men 인간의 완전성을 믿었다고 하는데, 그 면을 보자면 서양의 계몽주의, 계몽사상 enlightenment thought에서도 역시 perfectability of men 인간의 완전성을 믿었다고 하지요. 이 면에서 만이 아니라 진보 progress라면 역시 계몽주의의 시대의 대표적인 믿음인 것이 보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동서양의 사상에 공통점이 더 많이보이네요.

2019/06/21

(8) Namgok Lee - 크릴의 공자 Ⅲ 유교(儒敎) 제12장 전설(傳說)의 발전①



(8) Namgok Lee - 크릴의 공자 Ⅲ 유교(儒敎) 제12장 전설(傳說)의 발전① (이 장에서는 공자 사후 공자가...

Namgok Lee
3 hrs · 0621

크릴의 공자
Ⅲ 유교(儒敎) 제12장 전설(傳說)의 발전①

(이 장에서는 공자 사후 공자가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를 공자를 비난하거나 공자를 옹호하는 숱한 왜곡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 묵자(墨子)는 공자가 사망한 직후에 태어나 묵학(墨學)이라는 철학을 창시하였으며, 묵가(墨家)라는 견고하게 조직된 집단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묵자는 유가로서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유가와 절연하고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묵자> 비유(非儒)편은 유가 전체를 비난하면서 공자를 통렬히 비난하고 있는데, 훨씬 후에 쓰여져 원전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묵자가 공자 개인을 언급한 예가 거의 없으며, 공자를 기술한 것은 단 하나 뿐인데 거기에는 공자가 바보로 취급되어 있다.

묵자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세상의 악을 고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공자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나 판단의 여지를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것은 추수를 포기하고 낟알을 줍는 것과 같다”

묵자는 빈곤, 무질서 및 전쟁을 비롯한 이 세상의 죄악을 엄격한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묵자는 자신이 진심으로 믿고 있는 귀신의 존재를 유가가 부정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天災)가 천(天)의 응징이며 폭정의 표시라는 묵자의 생각은 소위 한 대(漢代) 정통유교 속에 거의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묵자가 직접 유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묵학도, 또 결국은 유교도 공자의 합리적인 철학보다 훨씬 인기를 모으고 있는 세속적인 미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자는 사유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였지만, 진리의 고정된 척도는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는 책임을 맡겼고 그것도 각자의 자유에 일임하였다.
그러나 지적(知的) 자유에는 정신적 노고가 필연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인간은 대체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제자 가운데 공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따라서 공자의 시체가 식자마자 제자들이 아늑한 지적 안식처를 세우고 그 안에서 성전(聖典) 및,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성인의 권위를 찾기 시작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런 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 추구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해 온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무오류의 권위에 대한 추종’ 등은 지금도 강하게 존재한다.
아마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스스로 독재에 대한 끌림이 일어날 소지는 여전히 있다.
우리 현실에서 비록 이전투구로 보이는 현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진정한 진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긍정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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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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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Jun · · 크릴의 공자 Ⅲ 유교(儒敎) 제11장 유(儒) * 중국 역사에서 공자가 죽은 뒤 3세기 동안의 시기만큼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시대도 없을 것이다. 그 기간은 가장 격심한 변화의 시대였으며, 거의 모든 것이 과거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적 신분의 급속한 부침(浮沈), 교통망의 발달과 여행의 성행, 화폐와 상업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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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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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Jun · · …대중의식의 성숙이 아닐까? 공자 시대에 군주의 의식을 강제할 수 없었던 것 이상으로 대중의식의 성숙을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제도의 확립과 대중 의식의 성숙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두 바퀴이다. *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절대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을 지나왔다. 이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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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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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Jun · · 크릴의 공자 Ⅱ공자 제10장 改革家 ③ *공자가 주장한 개혁이 과연 ‘민주적’이었다고 말해도 좋은지, 또 만일 그렇다면 어느 정도 ‘민주적’이었느냐는 문제를 고찰할 단계가 되었다. 만약 공자가 주장한 것과 오늘날 민주정치라는 것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동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22박길수, 김재형 and 2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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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Jun · · 크릴의 공자 Ⅱ공자 제10장 개혁가 ② * 공자는 당시의 정치를 철저히 개혁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이 완료된 뒤에는 관리들이 정당한 상급자에게 합당한 복종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인정하였다. “군주는 군주, 신하는 신하,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 정치구상의 약점은 명백하다. 권력을 장악한 것은 군주이고, 그들이 원하지 않을 경우…
36박정미, 박정희 and 3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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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Jun · · 크릴의 공자 Ⅱ공자 제10장 개혁가(改革家)① * 요•순•우 등에 관한 설화는 대부분 공자 이후에 형성되었으며, 이 설화적인 제왕들은 점차로 모든 유가덕목의 원형 그 자체가 되었다. 공자는 요•순•우로부터 어떤 시사를 얻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실제로 그들이 공자의 사상으로 윤색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 군주는 아무도 믿어서는…
21박정미, 신영숙 and 1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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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Jun · · 크릴의 공자 Ⅱ공자 제9장 철인(哲人) * 어떤 중국 학자는 당시 중국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저지시키고 과거를 부활시키려는 것이 공자 필생의 희망이었기 때문에(이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공자는 반동가일 뿐 아니라 실제로 ‘반혁명분자’라고 주장한다. 자료를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자가 한편으로는 고대 유산을 실제로 자주 언급하였고 공자…
32김재형, 신영숙 and 3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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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un · · 크릴의 공자 Ⅱ공자 8장 학인(學人) *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추측된 각종 책들은 모두 검토한 결과, 공자가 시경, 서경, 춘추, 역경 등 어떤 책도 저술하였거나 편찬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캉유웨이(康有爲)는 극단적으로 공자 이전부터 보존되어온 중국의 모든 문헌을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주장한다. 강유웨이 자신은 19세기 말 중국이…
33You, Sunghwan Jo, 김재형 and 3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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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un · · 크릴의 공자. Ⅱ제 7장 교사(敎師)에서. * 공자 사후 1세기 후의 묵자, “내 말은 충분한 지침이 될 것이다.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추수를 포기하고 낱알을 주워 모으는 것 같으며, 자기 말로 내 말을 논박하는 것은 마치 달걀을 바위에 던지는 격이다. 천하의 달걀을 모두 던져도 바위를 훼손하지 못할 것이다.” BC 300년 경 유가(儒家)의 순자,…
38박정미, 이정희 and 3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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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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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May · · 크릴의 ‘공자’ 읽기가 늦어지고 있다.(이렇게 옮기면서 자세히 읽게 된다 ㅎㅎ) Ⅰ.배경(背景). 제3장 <공자 시대와 중국>의 끝 부분이다. 

공자(의 사상)가 출현한 배경에 대한 서술이다. “(전략) 이러한 사회 내부의 질병은 스스로 항독소(抗毒素)를 낳았다. 귀족의 아들들은 모두 영지와 관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귀족 가문의 남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불가능한…
35박정미, Jae Hyoung Lee and 3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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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Namgok Lee - “우주(宇宙)란 무엇일까?‘. 이석영 교수의 이야기



Namgok Lee - 월간 ‘불교문화’ 이 달호 특집이 “우주(宇宙)란 무엇일까?‘다. 이석영 교수의 이야기 가운데...




Namgok Lee
4 hrs ·



월간 ‘불교문화’ 이 달호 특집이 “우주(宇宙)란 무엇일까?‘다.
이석영 교수의 이야기 가운데 일부다.

*인류는 기록의 역사를 살아온지 수 천년만에 드디어 우주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 배경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주론적 지식에 의하면 우주는 대략 137억년 전 쯤 거대한 팽창(빅 뱅)과 함께 시작됐다.
우주의 나이 대략 38만년 쯤 되엇을 때 빛과 물질이 분리되어 자유롭게 항해하기 시작햇다. 빛으로부터 독립한 물질은 중력에 의해 밀집하고 은하와 별을 만들기 시작했다.
*약 45억년 전 우리 태양계가 만들어졌다. 지구도 그 때 탄생했다. 우리 천문학자들은 그 후 생명이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생물학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우주엔 많은 에너지가 있는데, 그 중에 우리가 정체를 알고 있는 , 원자와 분자로 구성된 물질은 4%만을 차지한다. 나머지 96%는 그 존재의 증거는 많지만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에너지 덩어리다.
*태양은 앞으로 약 50억년쯤 후에는 그 수명을 다해 부풀고 결국 지구를 삼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지성인으로서의 인류가 만년 이상 존속할 확률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천문학자들이 인정하는 우주론을 요약하고 나니 머쓱해진다.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에너지의 정체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 꽃이 아름다운가? 나는 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이 우주에 잇다고 말한다. 우주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는다. 우주는 그 존재를 확인햇을 때 갑절, 규모를 알게 되엇을 때 갑절, 그리고 그것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의미를 깨달을 때 또 갑절이 되는 감동을 준다. 우주는 나이고, 나는 곧 우주다. 그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김희준 교수의 원고 뒷 편이다.

*여러분과 아인슈타인 중 누가 더 우주를 이해하는 것 같은가?
여러분이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죽을 때까지 ‘우주배경복사’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우주의 역사를 드라마로 보자면, 빅뱅으로 출발해 초기 우주의 급격한 입자들의 진화, 별의 진화, 화학적 진화, 생물학적 진화, 인류의 진화가 전개되었다.
이 5단계 진화의 핵심에 화학적 진화가 잇다. 무생물이엇던 단순한 분자로부터 생명체의 필수요소인 아미노산 같은 것이 생긴 일은 엄청난 진화적 사건이다. 이 5단계의 진화는 그야말로 놀라운 드라마다.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보자면 기(起)는 빅뱅, 승(承)은 빅뱅을 계승해 입자들이 태어나는 것, 전(轉)은 무생물에서 생물로 획기적 전환, 결(結)은 우리 자신이라 할 수 잇다.

내 생각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하는 것도 가설(假設)일 뿐이다.
2500년 전의 현자(賢者), 공자의 무지(無知)를 출발점으로 하여 단정(斷定)이나 고정(固定) 없이 이 아름다운 우주의 비밀을 탐구해가야 한다.
우주 진화의 총아(寵兒)로 보이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밤하늘의 별을 가끔이라도 쳐다보자.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느껴보자.
우리가 다녀가는 이 기적의 우주와 더 기적의 지구와 더더 기적 같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생각해 보자.
‘아집’과 ‘소유’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그렇다고 별을 보다가 개울에 빠지진 말자.

우주 천문학은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2019/05/02

(4) Namgok Lee ‘다시 개벽’ 운동에 심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4) Namgok Lee



요즘 내가 잘 알고 또 좋아하는 분들이 열어가고 있는 ‘다시 개벽’ 운동에 심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내 개인적으로 말하면 1980년대를 전후(前後)해서 표현은 그렇게 안했지만 개벽운동으로 전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예견되는 가운데 그 왜곡된 변화들을 보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내 개인이 어떤 사건과 만나면서 겪었던 내적 고뇌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개벽운동가라고 자기 정체성을 밝히지 않은 것은 ‘개벽’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세기에 어울리지 않은 종교나 신비주의 그리고 넘어서야할 닫힌 민족주의(특히 열등감에서 나오는 지나친 과거 역사 미화)와 주로 연관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개벽’운동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21세기와 어울리지 않는 종교성이나 역사 해석 등을 주로 하는 관념적 운동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개벽 운동이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운동이 되려면 ‘각자도생의 이기적 경쟁’을 넘어서는 동기에 의한 생산력이 경제의 토대로 자리잡을 수 있는 전망이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을 주지도 않는다.그러나 그 시스템(자본주의)이 생산력을 증대시켜 왔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시도들은 실패하였다.
지난 한 세기의 세계사적 실험에서 사회주의는 무릎을 꿇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전념(몰입)하여 그것이 기쁨으로 되는' 동기가 생산력의 원천으로 될 때 새로운 생산관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요즘 빠른 속도로 확대 심화되고 있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은 ‘제도’와 ‘의식’만 뒷받침되면 즐거운 생산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내가 1980년대에 감동적으로 만났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정신은 새로운 동기에 의한 생산력과 시스템을 갖출 때 비로소 개벽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연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원불교의 대종사이신 소태산 박중빈 선생께서 초기에 ‘협동조합’을 하신 뜻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잘 보고 있지만, 세계자본주의는 많은 심각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의 보편적 시스템으로 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시스템(제도)을 전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 ‘개벽’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불교의 존경하고 신뢰하는 벗님들께도 이런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다.
내가 ‘다시 개벽’ 운동에 심정적으로 적극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관념화 추상화된 운동으로 흘러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Comments
  • 김경일 적극 공감합니다
    문제는 이기적 경쟁의 동기를 어떻게 자리이타적 공생의 동기로 바꿀 수 있는가가 문제인듯 합니다

Namgok Lee - 다음 글은 1992년 불교사회연구소 <서원과 연대 창간호>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우리의...

(4) Namgok Lee - 다음 글은 1992년 불교사회연구소 <서원과 연대 창간호>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우리의...



다음 글은 1992년 불교사회연구소 <서원과 연대 창간호>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우리의 인식과 실천 방향"이라는 주제로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많이 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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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로운 문명의 길
(인류는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을 통해서만 자유의 확대와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그 후 계속된 과학기술혁신은 생산력의 비약적 향상을 가져 왔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무한히 전개될 인간의 능력과 그 결과로 나타날 높은 생산력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확실한 전제가 될 것이라는 신념을 보편화하면서 산업문명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근대 산업문명의 탄생과 확산은 인간의 삶과 세계의 운동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대 비약을 의미하였으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지배적 질서로 되고 있습니다. 이 문명의 토대 위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자기 전개 과정에 따라 민족 문제와 계급문제 기타의 사회문제들이 야기 되었으며, 또한 이 문명의 기본틀 안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엄청난 희생과 노력이 자유와 평등의 제단 앞에 바쳐졌습니다.(세계대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쟁과 혁명 등)
이 시대에 있어서 사회진보의 중심고리는 사회구조의 변혁이었으며, 그 핵심은 높은 생산력을 보장하는 생산관계, 그러한 생산관계를 뒷밭침하는 체제(제도)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오늘의 지배적인 경향도 크게 보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근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이끌어온 산업문명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그것이 점점 더 심각해 짐에 따라(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근대 이래의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그런 요구와 노력들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향이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질서의 맹아인지에 대해(그것이 앞으로 질적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 확언하기는 아직 어렵다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지향이 현대 세계의 제 조건이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근대 이래 진보(자유의 확대)의 근본 조건으로 생각되어 온 인간 능력의 무한한 전개와 생산력의 무한한 확대라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온 인간의 행위능력과 그다지 변치 않는 인간의 가치이념체계 사이의 괴리는 무한한 생산력(대중의 무한 소비추구와 이윤동기와 서로 연관되어 끝없이 순환한다)의 추구가 이제 인류를 포함한 전체 생태계를 파멸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반(反)생산력으로 될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괴리는 더 많이 소유(소비)할수록 더욱 심화되는 인간소외(물신에 의한 지배)라는 근본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현대의 이러한 근본문제들은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능력에 비해 자기 자신을 개조하는 능력이 지나치게 못미친다는 사실로부터 나타납니다. 만일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노력을 방기한 채 지금까지의 문명을 지속시켜 나간다면, 인류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최초의 존재가 될지 모릅니다.(가장 큰 반론은 인간의 능력 즉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토인비가 확신을 가지고 예견한대로 예견되는 멸망을 피하기 위해 일부 부유한 국가에 의한 대다수 가난한 나라와 민족들에 대한 세계 독재체제의 수립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벌써 그러한 징후들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진정으로 세계의 진보와 평화,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 개인·집단·국가라면 이러한 최악의 함정을 피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공존하며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점점 더 우리가 당면해야할 문제가 근대적 과제(기존 산업문명의 토대 위에서의 사회구조의 개혁)로부터 현대적 과제(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을 가지고 추구될 것입니다. 역사는 때로는 비약의 시기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과거의 축적된 유산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회정의(자유·평등)를 추구하는 정치·경제·대중운동들은 변함 없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운동이 지향하는 목표·운동방식·운동의 주체는 현대적 제 조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진보성은 면면히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이 담아야할 내용은 과거의 <좋은 생산관계-높은 생산력-고도 대중소비>라는 연관으로부터 <좋은 욕구-좋은 생산관계-좋은 생산력-좋은 소비-좋은 방법>의 연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좋은>이라는 표현이 좀 애매하지만, 그것은 그 안에 내용을 부여함으로써 옳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대체적인 윤곽을 가설로 제시할 수 있을 뿐이며, 보다 전문화된 이론과 실천적 검증을 통해 구체성과 현실성을 획득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1) 좋은 욕구
좋은 욕구를 첫 번째로 드는 이유는 사회구조·가치이념체계·생활양식의 연관 가운데 새로운 문명을 위한 중심고리가 새로운 가치이념체계와 그에 부응하는 생활양식의 전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구조의 변혁이 사람의 동기와 욕구의 질을 변화시키는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역사의 경험과 현대의 근본적 문제들이 인간의 행위능력과 가치이념체계의 괴리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새로운 가치이념체계는 결국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고 통제하는 원동력인 동기와 욕구를 변화시킬 때만 그 생명력을 갖습니다. 만일 머리 속에서 새로운 가치이념체계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행동(실천)을 변화시키는 동기와 욕구를 변화시켜 구체적 삶의 양식을 바꾸지 못하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삶의 동기는 욕구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욕구가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욕구의 질입니다. 일찍이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 잘 것이요, 그러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
이 말은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욕구를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결코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욕구를 보다 높은 차원의 질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보다 높은 차원의 큰 욕구를 우리는 <좋은 욕구>라고 부르겠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굶주림·목마름·성적욕구 등이 충족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이며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인간의 특이성에 비추어 볼 때 진정한 인간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산업문명을 비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점의 하나가 온갖 치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근본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앞으로 열려 있는 방향에 조화되는 인간적 욕구를 확대시키는 것보다는 동물적 욕구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퇴영적인 욕구는 그의 높은 행위능력과 결합할 때 동물보다 못한 행위를 낳게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퇴영적 욕구는 소유욕과 이기주의와 결합하면서 물신의 지배를 확립해 가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대상의 유한성 때문에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며 독점하려 하고 필연적으로 불의한 사회구조와 맞물려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단절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가공할 과학 기술능력은 이러한 악순환이 자타공멸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욕구의 질이 변화되지 않는한 사회구조의 개혁만으로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직접적으로 인간의 퇴영적 욕구를 <좋은 욕구>로 전환하기 위한 조건과 동력·방도를 찾아서 집중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류는 그가 깨고 나온 자연과의 원시적 조화로부터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향한 기나긴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그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욕구란 바로 이 앞으로 나가는 방향과 그의 탁월한 능력에 조화되는 욕구를 말합니다.
퇴영적 욕구가 소유욕과 이기주의와 결합되어 있다면, 좋은 욕구는 존재의 확대를 추구하며 상생과 조화를 그 내용으로 갖게 됩니다. 존재의 확대란 예컨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추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율적이고 자각적인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와 경쟁한다거나 그 기회를 독점하려 한다면 그것은 부처가 되는 길과는 반대의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좋은 욕구는 경쟁적이거나 독점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나누고 베풀 때 더 큰 만족을 얻기 때문에 상생과 조화를 그 속성으로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의 전환이 특수한 소수에게만 가능하다면 앞서의 견해와 주장들은 현실성을 획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의 현대인들이(특수한 자질을 가진 소수가 아니다. 그러한 소수는 어느 시대에나 늘 있어 왔다) 그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이러한 전환을 요구하고 받아들일 조건들이 점차 성숙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것은
첫째,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의 문명과 생활양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생활을 통해 점점 심하게 느끼게 됩니다. 퇴영적 욕구, 끝없는 소유욕, 지배욕, 이기주의가 결코 그들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신병과 스트레스의 증가, 생명경시풍조의 만연, 동양 사상과 종교에 대한 관심의 증가, 여러 가지 수행방법에 참여 확대 등이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이런 문명이 계속되면 어쩌면 모두가 살아남기 힘들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점점 더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과학이 제공하는 지식과 정보 그것을 전달하는 대중 매체의 발달은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심각한 공해·환경문제 등과 함께 이러한 위기의식을 급속하고 광범하게 심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아직 자신의 욕구와 생활양식을 바꾸는데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도 공해문제가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욕구의 질을 전환하여 생활양식을 바꾸는 일에 곧 바로 착수하여야 합니다.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집단들이 먼저 이런 노력을 내면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진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좋은 생산관계
좋은 욕구로의 전환은 좋은 생산관계로의 사회구조적 개혁을 위한 노력과 결합되지 않을 때 대중의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공허한 구호로 그치거나 때로는 불의한 사회구조를 존치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의식문화의 개혁 운동은 반드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구조개혁의 노력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기존의 생산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전통적인 정치·경제·대중운동 등과 함께 새로운 생산관계를 직접 창출하는 노력을 함께 수행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근대 이래 좋은 생산관계란 다음의 두가지를 의미하였습니다.
첫째는 높은 생산력을 보장할 것, 둘째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을 폐지할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응하는 요소로 파악되었으며, 이 두가지 조건의 결합 위에 과학적 이론과 사회적 실천이 진행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보다 규정적인 것은 높은 생산력의 보장이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자본주의와 그에 대응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여 갈등·경쟁·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제 자신을 대폭 수정한 현대자본주의에 현존 사회주의권이 무릎을 꿇음으로써 20세기를 거의 지배해온 세계질서를 둘러싼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립구도는 거의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 지배적인 세계경제질서가 당면한 문제들은 ① 아직도 의식주의 기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나라들과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존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② 불균등이 지배하는 국제경제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국가 또는 블록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시켜 갈 것인가하는 근대 이래의 전통적인 문제와 함께 ③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를 추구하는 현대산업문명이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인간소외와 자연생태계의 파괴 등에 체제가 무엇이든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하는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변화된 세계사적 조건과 현대적 과제의 제기는 좋은 생산관계를 높은 생산력을 보장하는 것으로부터 다음의 두가지를 더 충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게 합니다.
첫째, 현대의 과학기술수준과 생산력은 자연을 무한한 자원으로 간주하던 근대적 성장위주의 관점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한한 자원과 무한 생산 추구 간에 발생하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생산, 즉 자연의 생명력을 파괴하지 않는 생산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을 폐지하려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위한 노력과 함께, 사람 사이의 관계가 박애와 연대가 실현되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과 가치이념체계로의 전환이 그 안에서 발전하는 그런 생산관계이어야 합니다.
요컨대 오늘의 관점에서 좋은 생산관계는 높은 효율성과 함께 반드시 좋은 생산과 좋은 삶의 양식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민족주의의 기치 밑에서 남과 북이 민족적 생명력을 이러한 방향으로 최대한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마도 상당한 기간 남과 북에서 각각의 경제체제를 개혁하는 운동이 주류를 이루겠지만, 우리는 이런 전통적 방식과 함께 남북의 상이한 경제질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매개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직접 시도하고 확산하는 방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협동생산을 제의해 보고자 합니다. 협동생산의 성공적인 사례는 외국의 경우에는 많지만(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역사의 냉혹한 조건들 때문에 어쩌면 우리 민족의 정서나 전통과 조화될지 모르는 협동생산이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진취적인 사람들이 협동생산과 같은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에 진지한 관심과 노력을 집중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외국의 예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좋은 생산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렇다할 구체적 경험이 없으므로, 추상적 원칙이나 당위론에 그칠 우려가 있겠지만 적극적인 실천의지를 갖는 사람들에게 판단과 계획의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의 원칙들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① 협동소유의 원칙입니다.
② 철저한 자발성과 민주주의 원칙입니다.
③ 협동체의 중심 가치가 협동과 자리이타(自利利他)이어야 합니다.
④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있어 철저히 <인간을 위하고 자연과 조화하는> 원칙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⑤ 기술혁신과 합리적 경영 등을 통해 전체 시장경제 안에서 다른 경제 단위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⑥ 소비자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과 서로 긴밀한 보완관계를 형성하여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요컨대 협동생산이 그 협동적 원칙과 효율성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함께 세울 수 있을 때만 그것은 새로운 모델로서 현실성을 획득하고, 나라의 전체 경제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 좋은 생산력(좋은 소비)
앞에서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현대의 과학기술수준, 생산력 수준, 행위능력과 가치이념체계의 괴리는 근대 이래 진보의 표지로 당연시해 온 무한생산과 무한소비에 대한 신념을 그 뿌리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인간 상호 간의 관계(사회생활)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높은 생산력>의 추구가 선(善)으로 간주되는 사고는 이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들에서 분명해집니다.
① 자연에 대한 약탈적인 그 동안의 성장지상주의적인 생산력추구는 이미 오존층의 파괴, 지구온난화현상, 산성비, 사막화현상 등 지구적 차원에서 심각한 생태환경위기를 낳고 있습니다.
② 생활의 풍요와 편의를 위한 각종 재화의 대량생산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환경오염과 공해는 이제 우리 생존에 근원적인 숨쉴 공기, 마실 물, 일용할 음식에 대해서도 안심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③ 이윤동기에 지배되는 시장경제원리는 무한소비와 무한생산의 상호 상승작용을 낳고(무한 소비를 부추기고 그러한 소비수요가 이윤의 원천으로 되는) 이러한 소비 문화는 인간의 퇴영적 욕구와 소유와 소비를 향한 경쟁을 증대시킴으로써 생활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생활로 근본적인 인간 소외의 원인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높은 생산력에 의한 무한생산과 무한소비의 추구는 인간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담보하는 것으로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높은 생산력 대신에 <좋은 생산력>을 새로운 시대의 조건으로 파악합니다. 좋은 생산력은 <인간의 질적 향상을 추구하고,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추구하는> 방향에 서 있는 생산력을 의미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이념체계와 생활양식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전환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임에는 분명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① 과학과 기술은 더욱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 그 자체는 몰가치적이지만 과학자와 기술자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선(善)한 과학과 깨끗한 기술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생산을 추구해야 합니다. 최고의 첨단 과학기술과 생산력이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② 대중의 소비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소비자대중(국민)은 그들의 욕구와 생활양식이 전환되지 않으면 자유와 행복의 확대는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위협 받는 사실을 직시하고 큰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문화의 대전환은 여러 분야의 종합적인 노력의 연관 위에서만 가능하겠지만, 최상의 지식(현대첨단과학)과 최선의 의지(고등종교)의 상호보완과 여러 형태의 시민운동이 그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4) 좋은 방법
앞에서 언급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대민족주의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를 추진할 새로운 통합력이 요구됩니다.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는 새로운 통합력은 새로운 방법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새로운 통합력을 형성하는 과정에는 우선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고와 태도를 단호하게 거부하여야 합니다. 목적과 수단은 둘 다 정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우리가 경험해온 귀중한 교훈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은 그 수단의 정당성을 그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심각한 부정의와 대중의 낮은 의식수준, 공공연한 폭력적 지배 등은 특히 급진적인 정의파로 하여금 정당한 목적이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것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앞으로는 일시적 성공도 불가능할 것) 길게 보면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수단이 목적을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용과 절차에서의 민주주의, 목적과 수단에서의 평화주의가 우리가 견지해야할 대원칙이라고 봅니다.
둘째,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실질적 부자유와 실질적 불평등에 반대하고 개혁하기 위한 전통적인 노력과 직접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확대해가는 창조적 노력이 상호보완하고 서로 영향을 주는 방법이 시도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정치운동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정권획득을 위한 노력과 소단위에서의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권력의 무화(無化)를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며, 노동운동에서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전통적인 노력과 함께 협동생산 등의 새로운 생산관계를 추구하는 창조적인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조건에서 볼 때 새로운 통합력은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중층구조의 운동형식의 연관 속에서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예견되는 구도는 정치 중심의 통합력이 아니라, 가장 저변에 의식문화의 개혁을 추구하는 국민운동(민족운동)이 전개되고, 그 토대 위에 여러 형태의 광범한 대중운동이 서고, 이러한 대중운동의 발전 위에 정치운동이 배치되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배치는 기계적일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국민운동이 직접적으로 정치운동을 규정하거나, 예상하기는 힘들지만 그 반대의 작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시민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이익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잠재적인 이익에 바탕을 둔 대중운동은 바로 국민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새로운 통합력의 구심은 서로 충돌되는 집단 이익에 바탕을 둔 운동에서가 아니라 작은 이익을 포용하여 큰 이익을 추구하는 운동, 더 나아가서는 이익을 초월하려는 의지와 태도(새로운 문명)를 확산시키는 운동을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원칙에서 여러 분야의 운동들이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좋은 방법들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운동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개인이나 집단들에 의해 구체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