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7

관상학 - 위키백과, physiognomy

관상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관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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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학(觀相學, physiognomy)은 인간의 외양(특히 얼굴)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성격 등을 파악하는 유사과학의 일종으로서, 과거에는 원형과학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었다.

관상(觀想)의 원어 테오리아에는 관조(觀照), 관찰, 사자(使者) 파견, 제례(祭禮)와 구경이라는 뜻이 있다.

 무엇인가를 '보는 것'으로서, 신이나 신상(神像)을 보는 종교적인 것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의 미의 관조로 바뀌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물의 원리·원인을 본다――즉 안다는 것, 이론적 지식이 된다. 이것은 제작이나 행위와는 달라 그 자체가 목적이므로 상위(上位)에 속한다. 관상생활(학자의 연구생활 같은 것)은 신의 자기사유(自己思惟)와 흡사하여 행복이며 최고선이라고 한다.

2009년 New Scientist에 의하면 관상과 사람의 성격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을 밝히며.[1] 관상학은 유사과학이라는 점을 밝혔다.[2]

역사[편집]

이는 본래 중국에서 발생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晋)나라의 고포자경(姑布子卿)이 공자(孔子)의 상을 보고 장차 대성인(大聖人)이 될 것을 예언하였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위(魏)나라 사람 당거(唐擧)도 상술(相術)로 이름이 높았으나 상법(相法)을 후세에 남긴 것은 없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인도에서 달마(達磨)가 중국으로 들어와 선불교를 일으키는 동시에 '달마상법'을 후세에 전하였다. 그 후 송(宋)나라 초기에 마의도사(麻衣道士)가 '마의상법'을 남겼는데, 관상학의 체계가 이때에 비로소 확립되었다.[출처 필요] '달마상법'과 '마의상법'은 관상학의 쌍벽을 이룬다. 관상학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이며, 고려시대에는 혜징(惠澄)이 상술로 유명하였다.[출처 필요] 조선시대에도 끊임없이 유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같이 보기[편집]

참조[편집]

  1.  “How your looks betray your personality”. 《New Scientist》 (2695). 2009년 2월 11일.
  2.  ^ a b c d e f Roy Porter (2003). "Marginalized practices".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Eighteenth-century science.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4 (illustrate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495–497. ISBN 978-0-521-57243-9. "Although we may now bracket physiognomy with Mesmerism as discredited or even laughable belief, many eighteenth-century writers referred to it in all seriousness as a useful science with a long history(...) Although many modern historians belittle physiognomy as a pseudoscience, at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 it was not merely a popular fad but also the subject of intense academic debate about the promises it held for future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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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ognomy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Lithographic drawing illustrative of the relation between the human physiognomy and that of the brute creation, by Charles Le Brun (1619–1690).
Illustration in a 19th-century book about physiognomy

Physiognomy (from the Greek φύσις'physis', meaning "nature", and 'gnomon', meaning "judge" or "interpreter") or Face Reading is the practice of assessing a person's character or personality from their outer appearance—especially the face. The term can also refer to the general appearance of a person, object, or terrain without reference to its implied characteristics—as in the physiognomy of an individual plant (see plant life-form) or of a plant community (see vegetation).

Physiognomy as a practice meets the contemporary definition of pseudoscience[1][2][3] and it is so regarded among academic circles because of its unsupported claims; popular belief in the practice of physiognomy is nonetheless still widespread and modern advances in artificial intelligence have sparked renewed interest in the field of study. The practice was well-accepted by ancient Greek philosophers, but fell into disrepute in the Middle Ages while practised by vagabonds and mountebanks. It revived and was popularised by Johann Kaspar Lavater, before falling from favour in the late 19th century.[4] Physiognomy in the 19th century is particularly noted as a basis for scientific racism.[5] Physiognomy as it is understood today is a subject of renewed scientific interest, especially as it relates to machine learning and facial recognition technology.[6][7][8] The main interest for scientists today are the risks, including privacy concerns, of physiognomy in the context of facial recognition algorithms.

Physiognomy is sometimes referred to as 'anthroposcopy', a term originating in the 19th century.[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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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무엇인가?
1741주호식 [jpatrick]스크랩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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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관상기도는 가르멜회 수녀님들 같은 관상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기도가 아닌가요?

관상기도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기도를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설명을 한다. 
첫째, 소리기도는 묵주기도와 같이 입으로 소리를 내어 바치는 다양한 기도를 말한다. 
둘째, 묵상기도는 인간의 사고력, 상상력, 감정과 의욕 등을 사용하여 복음 말씀이나 영적 서적 등을 자기 자신에게 비추어 성찰하고 새로운 결심에 이르는 기도이다. 
셋째, 관상기도는 하느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기도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는 능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이다.

그런데 관상기도와 관상은 다르다. 모든 기도의 형태는 관상의 은총을 받기 위한 도구이다. 관상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된 상태를 말하며 관상기도는 특별히 이것을 지향하는 기도의 형태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관상기도는 관상 생활을 하는 이들의 고차원적인 기도이고 묵주기도는 일반 평신도들이 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필자도 수도원에 입회한 지 2년째 되던 청원자 시절 이런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 수도원에는 매일 오전, 오후 30분씩 묵상이나 관상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나이 많은 지원자가 글쎄 묵상시간에 묵상을 하지 않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수도자가 되었으니 묵상 시간에는 묵상기도나 관상기도를 바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지원자는 “그냥 나는 묵주기도가 좋아요”라고 단순하게 대답을 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뭘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사실 묵주기도는 관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기도이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생애의 신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관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도의 형태이든 상관없이, 심지어 기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관상의 선물을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관상이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통해 운명을 예견’하는 단어, 관상觀相과 그 소리가 같아 혼동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상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한자어 자체가 주는 특별한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관觀은 ‘볼 견見’자에 ‘황새 관雚’이 더해져 그 의미는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상想은 ‘서로 상相’과 ‘마음 심心’이 더해져 ‘생각, 사색, 그리움, 닮음’ 등의 뜻을 지닌다. 그래서 관觀과 상想, 둘을 합치면, ‘서로 마음으로 자세히 바라본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관상기도는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기에 관상을 뜻하는 희랍어 θεωρία(theoria, 눈 혹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를 한자 觀想(관상)으로 묘사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활동을 통한 기도인 묵상(默想, 잠잠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능동적인 기도라면,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의 관상은 수동적이고 하느님 중심적임을 잘 묘사하고 있다. 
희랍어 θεωρία는 라틴어 Contemplatio(콘템플라시오)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 역시 관상의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Contemplatio는 con-(함께)과 templum(성전)의 합성어이다. 즉,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라고 한 말씀에 적용해 본다면, 관상은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관상이란 용어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이, 관상은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과 일치하여 함께 사는 것이다. 그분이 거하시는 내 마음을 비우고 정화하여 예수님의 사랑으로 깨어나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바로 관상적인 삶이다.



[2022년 1월 23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가톨릭마산 3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

[묶음표 한자말] 관상觀想 | YES24 블로그

[묶음표 한자말] 관상觀想 | YES24 블로그

묶음표 한자말 186 : 관상觀想

느티나무 하나로 나무를 보고 느끼는 관상觀想의 즐거움은 모두 누릴 수 있는 셈이지요
《유상준,박소영-풀꽃 편지》(그물코,2013) 88쪽

한자말 ‘관상(觀想)’은 종교에서 쓰는 낱말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수행의 한 가지로서 마음을 오로지 일정한 대상에 기울여, 어떤 상념을 일으키게 하여 번뇌를 없애는 일”이라 하고, 여느 종교에서는 “신(神)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이라고 해요.
곰곰이 헤아리면, 불교에서 쓰는 ‘관상’은 ‘마음닦기’라 할 만합니다. 여느 종교에서는 ‘하느님읽기’나 ‘하느님사랑’이라 할 만해요.

나무를 보고 느끼는 관상觀想의 즐거움
→ 나무를 보고 느끼는 즐거움
→ 나무를 보고 느끼면서 마음을 닦는 즐거움
→ 나무를 보고 느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즐거움
보기글에서는 한자말 ‘관상’을 넣으면서 한자를 잇달아 붙입니다. 아마 ‘관상’을 한글로만 넣으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기 때문일 테지요. 그러나, 한자를 밝혀 ‘觀想’이라 적더라도 뜻이 또렷하지 않습니다. 외려 거추장스럽습니다.
한편, ‘觀想’은 “보다 + 생각하다”입니다. “보고 생각하다”인 셈이요, “보고 느끼다”라 할 수도 있어
요. 그러니, 이 뜻을 헤아린다면 “보고 느끼는 관상”처럼 적을 적에는 겹말이 되기도 해요. ‘관상’이라는 낱말은 아예 덜 때에 가장 낫고, 따로 꾸밈말이나 보탬말을 넣으려 한다면 “마음을 닦는”이나 “마음을 다스리는”이나 “마음을 갈고닦는”이나 “마음을 가꾸는” 같은 말마디를 넣어야 잘 어울리리라 봅니다.

느티나무 하나로 나무를 보고 느끼면서 마음을 닦는 즐거움은 모두 누릴 수 있는 셈이지요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관상 뜻 - Google 검색

관상 뜻 - Google 검색

1. 사람의 운명이나 수명, 성격 등과 관련이 있는 얼굴의 생김새. 또는 얼굴의 생긴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이나 수명, 성격 등을 알아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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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27. — 관상(觀相)이란 겉으로 드러난 얼굴(생김새)을 말한다. 또는 그 생김새로 사람의 성격과 기질을 파악하는 점(占)을 말하기도 한다.
뜻밖에 일어난 변고나 사고와 그에 따른 어떤 좋지 않은 결과를 가리키는 민간용어. ... 서화에 종이나 비단을 발라 꾸며서 족자 · 액자 · 병풍 등의 형태로 꾸미는 표지장식 ...
2022. 1. 20. — 관觀은 '볼 견見'자에 '황새 관雚'이 더해져 그 의미는 '자세히 본다'는 이다. 상想은 '서로 상相'과 '마음 심心'이 더해져 '생각, 사색, 그리움, 닮음' ...
하느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행위.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본성에 참여하여 친밀한 친교를 누리도록 ...
관상(觀想)의 원어 테오리아에는 관조(觀照), 관찰, 사자(使者) 파견, 제례(祭禮)와 구경이라는 이 있다. 무엇인가를 '보는 것'으로서, 신이나 신상(神像)을 보는 ...
2007. 5. 16. — 먼저 관상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 관상(觀想)이란 한자말은 '마음의 상을 바라본다'는 이다. 곧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히며 ...
2017. 3. 8. — 엄밀한 말뜻에서 볼 때, 관상은 하나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니,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대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
세상의 현실 가운데 우리 존재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관상이거나 적어도 관상적 ... “이것이 하나님의 이라고 분별했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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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목회] 관상적 시선에 대하여 - 가스펠투데이

[예술과 목회] 관상적 시선에 대하여 - 가스펠투데이

[예술과 목회] 관상적 시선에 대하여
이민재 목사
승인 2024.01.02

관상적 시선이란 무엇일까?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는(히 12:2) 눈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성령의 조명을 받는다. 일치와 조명 상태에서 눈에서는 비늘이 떨어진다. 세례받을 때처럼 정화되고 깨끗해진다. 따라서 관상적 시선은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눈이다. 관상 상태를 벗어난 눈이 모든 것을 진부하고 상투적으로 본다면,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관상적 시선은 모든 것을 새롭고 경이롭게 본다.

기독교 영성전통은 관상적 시선을 깨닫게 하려고 이콘 묵상을 발전시켜왔다. 아래 그림은 스페인 화가 키코 아르게요가 그린 예수 이콘이다. 
이제 이콘을 몇 분간 주의 깊게 바라보고 느낌을 적어보자.
icon of jesus, kiko arguello, 1939~현재

사람마다 본 것이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눈이 슬프다 하고, 무심하다고 한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는 사람도 있고, 튀어나온 광대뼈를 보는 사람도 있다. 콧날이 날카롭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왼쪽 볼에서 대여섯 가닥의 수염을 보는 사람도 있다. 꽉 다문 입에서 어떤 굳은 의지를 보는 사람도 있고, 눈에 초점이 없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 것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가”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을 보는 주체는 나이고, 그림의 예수는 나의 봄에 의해 “알려지는” 대상이다. 이러한 봄을 통해 주체인 나는 대상(예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이 그림을 보는 다른 방법이 있다. 이제 이콘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콘의 눈으로, 즉 예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보는 주체가 되어 이콘이라는 대상에 “관해” 무언가 알려고 하는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런 충동을 흘려보낸다. 그러면 눈이 고요해진다. 이렇게 눈을 고요하게 만든 다음, 다시 예수의 눈을 통해 나를 본다. 더 나아가 예수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본다. 이때 보는 주체는 예수님(또는 하나님)이고, 나는 예수님이 보시는 대상이 된다.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 이러한 시선의 변형 또는 역전이야말로 이콘 묵상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경이와 신비로 빛난다.

이제 이콘의 시선으로 나를 십여 분 동안 바라본다. 바라보는 동안 판단하는 마음, 거리끼는 마음, 죄책감, 두려움, 불안 같은 느낌이 들면 그 느낌을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이콘의 눈을 통해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계속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수용적 시선에서 벗어나거나 숨거나 감추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한다.

이런 식으로 이콘을 묵상하면 내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인식한다.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알려지는 자”가 된다. 이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나의 인식작용을 채우기 시작한다. 나는 이분법적인 주관/객관의 인식틀을 벗어나 상호-인식mutual knowing의 상태에 들어간다. 이뿐 아니라 나는 예수님(하나님)의 바라봄을 통해 예수님과 상호내재적 현존 상태에 들어간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갈 2:20) 관상 상태에 이른다.

이콘 묵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눈을 감고 이콘의 느낌을 마음에 간직한 다음, 이콘의 형체를 흘려보내고 이콘의 눈이 나의 눈이 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내가 이콘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눈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삶을, 세상을 바라본다.

관상적 시선은 기적을 일으킨다. 관상적 시선으로 나를 보면 나는 세속이나 악마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는”(사 43:4) 고귀한 존재가 된다. 관상적 시선으로 남을 보면 남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다. 비교의 대상도 아니며 욕망 충족의 도구도 아니다. 친구가 되며, 길벗이 된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넘어선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소울프렌드로 만나는 영적 인연이다.

관상적 시선으로 보면 삶은 신비와 신성으로 충만하다. 섭리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에서 “신성한 삶의 배열”을 읽는다. 은총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의 모든 고통이 보석처럼 빛난다. 모든 관계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동료 인간은 성사聖事가 된다.

노동도 새로워진다. 나의 노동을 통해 누군가의 생명이 유지됨을 알기에 소명감을 샘솟는다. 모든 노동 속에는 누군가의 기도─노동자 자신의 기도, 노동자의 가족을 위한 기도, 노동자를 위한 부모의 기도, 아내의 기도, 남편의 기도, 아이들의 기도─가 들어있음을 깨닫기에 노동이 거룩해진다. 지겹고 고달팠던 노동은 마침내 거룩한 하나님의 일Officium Divinum이 되고 시간 전례Liturgia Honarum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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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 목사
은명교회 담임
감신대 객원교수
예목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