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6

알라딘: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AI 시대에 인간의 의미 찾기 강국진

알라딘: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AI 시대에 인간의 의미 찾기
강국진 (지은이)   필로소픽   2023-12-15
세일즈포인트 1,510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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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곧 다가올, 아니 어쩌면 이미 도래한 AI 시대. 만든 사람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는 이 미지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인류가 AI를 완전히 이해해서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개발을 보류해야 할까? 인공지능과 뇌과학을 전공한 저자는 AI에 대한 여러 걱정스런 질문들을 과학적, 철학적 통찰을 통해 해체해 버린다. 이러한 질문들은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된 사이비 문제라는 것.

저자는 기존의 기술 중심 인공지능 논의가 놓치고 있는 ‘비교’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바라본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켰던 ‘문자’ 와 ‘과학’ 패러다임을 인공지능과 비교해보면 인공지능이 기계보다는 문자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 접근법은 기계학습 인공지능이 기존 과학 패러다임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해주고, 우리의 걱정이 기우임을 깨닫게 해준다.

최적의 값을 찾아내는 기계학습 인공지능은 고립계와 환원주의를 바탕으로 두고 정답을 찾아내는 과학과 다르다. 기계학습 인공지능은 뉴턴처럼 만유인력 법칙을 만들 수도,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철학적 고찰을 통해, 문자 도구의 등장 이래 인간의 본질을 가장 크게 변화시킬 인공지능이란 도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부록에서는 기계학습의 근간이 되는 확률이론을 뼈문과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인공지능을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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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여는 글

1장 인공지능 패러다임
인공지능은 음악과 무엇이 다른가?
왜 인공지능 패러다임인가?

2장 기호주의 인공지능과 문자 지식 패러다임
오래된 인공지능
기호주의 인공지능의 한계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다

3장 기계학습 인공지능
기계학습
AI의 전제조건과 한계
AI는 뉴턴을 대체할 수 없다

4장 지능 패러다임
여러 가지 지능
과학 패러다임의 특징
고립계와 환원주의
AI 패러다임과 제3의 지식
AI 패러다임과 최적화
게임과 차원의 저주
과학적 지식과 제3의 지식의 공존

5장 AI 시대
도구를 쓰는 AI
지능과 환경
AI 패러다임과 교육
인공지능 시대를 사는 방법
문명의 시대와 부족의 시대, 그리고 인공지능
인본주의의 새로운 시작

닫는 글


부록
기계는 어떻게 학습을 할 수 있는가?
인공신경망이란 무엇인가?
빈도주의 확률
베이지안 확률
차원의 저주와 MC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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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23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핵심적 역할은 우리의 지능을 증진시키고 우리를 보다 합리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발달한 인공지능이 널리 쓰이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속에 내재화되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음악이나 문자처럼 말이다. 일찍이 과학적 문제 해결 패러다임은 우리를 변화시켜, 세상과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도 앞으로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P.26
인공지능 분야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서, 새로운 응용 사례에 대한 소식은 흥미로울 수 있으나 대부분 순식간에 낡은 정보가 되어버린다. 이런 정보를 모아 책으로 출판하려 하면, 그 책이 인쇄되는 도중에 더 새로운 정보가 쏟아질 것이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세상에 뒤처지지 않게 해준다. 새로운 인공지능을 또 만든다고 해봐야, 인공지능 패러다임에 속하는 또 다른 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왜 어떤 발전은 더 중요한지, 왜 어떤 발전은 느리게 이루어지는지, 나아가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온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교육도 우리가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패러다임의 영향을 받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이해는 과학 패러다임을 포함한 과거의 패러다임들에 기초하고 있는 교육과정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이해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공부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P.27
오늘날에는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술이 더 발전할 수도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도 없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공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사회적 개혁도 요구한다. 그냥 빠른 컴퓨터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열 명의 뉴턴이 태어나도 나머지 사람들이 수렵채집 문명에 머물러 있다면 과학이 발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93
AI 패러다임에서 무엇이 무엇을 대체하는가는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서로 연결되어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AI는 대단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P.188
사회가 점점 더 다원화되어만 가는 현재의 추세는 결국 언젠가 문명의 위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이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꼭 필요한 것이 AI다. 사람이 그 모든 데이터를 처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원화하는 동시에, 잊힌 계곡도 없어야 한다. 그것에 실패할 때, 즉 이 책에서 쓴 표현으로 사이보그 1이 사이보그 2로 진화하는 데 실패할 때, 우리는 집단적으로 더 지능적이게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의 재난일 것이다.
P.200~201
우리는 ‘본질’ 같은 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인간의 육체적 본질은 뇌고, 뇌의 본질은 슈퍼 뇌세포라는 식의 환원주의적 사고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변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영혼을 지닌다는 생각도, ‘인간’ 혹은 ‘나’라는 것의 본질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것은 그저 서로 다른 것이고, 지능은 그 서로 다른 것들이 연결된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인간이고 여기부터는 도구라는 식의 생각도 옳지 않다. 우리는 인간이 지능을 가진 존재라는 인본주의에 익숙하지만, 사실 인간 지능의 상당 부분은 인위적인 기술인 문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자 지식 지능이다. 즉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이며, 만들어지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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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강국진

최근작 :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철학을 하지 않는 닭> … 총 3종 (모두보기)

포항공대 물리학과에서 학부와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에 인공지능 연구로 공부 방향을 바꾸었고 〈신경망 학습에서의 대칭성 깨어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인공신경망이 아니라 진짜 뇌를 연구하기 위해 뇌과학으로 방향을 바꾸고 이스라엘의 히브루대학, 미국의 뉴욕대학 그리고 일본의 이화학 뇌과학 연구소 등에서 연구했다. 
이때 연구한 주제는 시각 피질에서의 신경망 네트워크의 모델 연구나 활동전위 내의 정보 분석이었고, 일본에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경이 가진 확률분포를 학습하는 문제를 연구했다. 

블로그에 쓴 글을 모아서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을 출판했으며 《주석 달린 플랫랜드》의 주석을 번역했다. 
블로그 <나를 지키는 공간>과 
책을 주로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 <오늘의 질문>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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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까?’라는 질문이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인 이유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반드시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적인가, 혹은 인간의 적인가?’ 다시 말해 인공지능은 인간을 돕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인공지능으로부터 안전한 인간만의 영역이 있을까? 저자는 이런 질문들이 AI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기계나 인간에 비교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즉 인공지능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비교’ 논증을 통해 기존 기술 중심 인공지능 책들이 놓치고 있던 맹점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저자의 논리 전개는, 개념 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를 해체하는 언어분석철학의 방법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강조하는 ‘비교’는 바로 ‘오래된 인공지능’으로서의 문자와의 비교, 그리고 과학 패러다임과의 비교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본질이 명료하게 드러나며, 인공지능에 대해 가졌던 고정관념이 전복된다.

수천 년 전 인간은 이미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인식을 못하지만, 인간은 문자라는 인공지능을 이미 가지고 있다. 유전적으로는 30만 년 전의 인류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문자와 결합한 현대인은 수렵채집인과는 다른 문명인이 된다. 문자를 통해 인간은 안정적으로 기록을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었고, 생각을 정리해서 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됐으며, 태양계 밖으로 우주선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가 없다면 아무리 천재과학자라도 과학이론을 세울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이 문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에 대해 인공지능으로서의 문자가 인간을 위협한다는 식으로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문자를 모르는 게 더 문제로 인식된다. 저자는 이러한 문자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AI 역시 인간과 통합되어, 인간의 지능을 확장시켜줄 도구라고 역설한다.

20세기 인공지능 연구는 왜 실패했을까?

초창기 인공지능의 연구자들은 문자 지식 지능을 컴퓨터로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그동안 인류의 발전에 문자지식이 너무나도 성공적인 능력을 보여줬으므로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기호주의 인공지능이라 불리는 이 접근법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끝났다. 사람이 아주 쉽게 하는 일조차 기호와 규칙으로 구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문자 지식 지능이 인간 지능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던 인공지능 연구는, 21세기에 들어 향상된 컴퓨터 연산능력에 힘입어 기계학습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부활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알파고를 위시한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의 놀라운 결과물을 보며, 인간이 기계로 대체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과학이 아니다

기계학습 인공지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과학 기술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고립계와 환원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은 정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도록 단순화된 방식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제한된 조건을 가정하고, 몇 가지 변수만 고려했다. 이런 단순한 법칙들을 조합해서 복잡한 기계를 만드는 것이 환원주의 방식이다. 반면 기계학습은 본질적으로 확률이다. 주어진 질문에 대해 확률값이 높은 답변을 내놓을 뿐, 그 답이 어떻게 도출되는지 논리구조나 인과관계를 제공하지 못한다. 실제로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챗GPT는 간단한 수학문제를 풀지 못해서 외부 수학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는 실정이다.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하고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걱정은 이러한 차이를 모른 채 환원주의적 과학 기술의 연속선상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환원주의 방식은 쌓여서 거대하고 정밀한 기계를 만들 수 있지만, 확률로 도출한 지식은 쌓을수록 오차가 커지기 때문에 거대하고 정밀한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사이보그2의 디딤돌

저자는 단순히 관련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인공지능과 인간의 정의에 대한 오래된 관념을 전복함으로써 독자가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밝힌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문제에서 그러했듯이, 저자는 철학적 해체 방법을 사용해 독자가 문제의 기초부터 재고하도록 만든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 혹은 ‘나’라는 것의 본질이 뭘까? 아니, ‘본질’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과 인공지능은 서로 대체되는 개별적 완성품일까?
저자는 인간이 이미 도구와 융합된 '사이보그'와 같은 존재임을 꼬집는다. 문자와 과학으로 발전된 지능을 가진 인간을 ‘사이보그 1’로 보았을 때, 현대 사회는 사이보그 1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로 채워지고 있다. 저자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그 문제를 돌파할 능력을 가진 ‘사이보그 2’로 만들어 줄 도구라고 역설한다.

독창적인 혜안으로 풀어내는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모든 것
물리학과 인공지능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뇌과학 분야에서도 활발히 연구한 저자는 인공지능의 역사와 한계점, 그리고 현재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주도하는 기계학습 인공지능에 대해 쉽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인공지능을 오로지 과학적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마치 “교회가 과학을 가르치려 드는” 것과 같다. 종교와 과학이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듯이, 과학과 인공지능도 각자 다른 믿음을 통해 굴러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려면, 본질적인 작동 방식뿐만 아니라 사용자나 법률 등 인문·사회적 환경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 점을 정확히 꿰뚫은 저자는 빈도주의 확률과 베이지언 확률, 몬테카를로 기법부터 드레이퍼스와 튜링의 논의, 탈레브의 ‘블랙 스완’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규칙, 그리고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까지 다루며 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폭 넓은 지식으로 인공지능을 탐구한다. 이러한 설명은 비전공자도 이해하기 쉬운 논리적 전개와 유쾌한 비유를 통해서 웬만한 확률통계 책이나 철학책보다 쉽고 즐겁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AI 시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책은 결국 AI 시대를 통해 삶과 인간의 정의가 다시 세워질 것임을 말한다. 지금껏 사회 전반을 지배해 온 것은 과학 패러다임으로, 모든 문제에 단 하나의 답이 있으며 세계에는 정확하고 간결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 살게 한다. 과학 패러다임의 사회에서 세부적인 지식과 법칙은 점점 증가하고,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계곡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러한 개인화 현상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문명의 붕괴를 피할 수 없다.
AI 시대는 안과 밖이, 각각의 도구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실패도 데이터이며 완벽하지 않은 지식도 연결을 통해 쓸모 있어진다. 사람들은 인간보다 이성적인 AI의 등장에 인본주의가 사라질까봐 걱정하지만, AI 시대는 인본주의가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더 겸손하고 덜 개인주의적인 인본주의의 시대이다. 저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안내한다. 이는 AI를 통해 얻는 지식을 ‘제3의 지식’으로 구분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제안이다. 당신은 문명의 붕괴로 향할 것인가, 새로운 인본주의를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향한 방향키는 AI가 아닌, AI를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할 당신의 손에 달려있다.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의 시대를 우리가 어떤 태도로 마주해야 할지, 과연 그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당신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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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 
인공지능시대 이해의 문턱이나마 밟으니
ㅡ강국진,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읽고 

인공지능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함께 휩쓸려다니고 있다. 인공지능이 과연 무엇이길래 폭주하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경고와, 획기적신기술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찬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인류문명의 발전단계는 문명의 존속여부가 달려있는 신기원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인공지능은 이 거대한 전환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문제접근방식이다.

우리는 앞으로 '과학의 시대'를 넘어선 전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현 시기는 중세 종교의 시대가 근대 과학의 시대로 바뀐 것만큼이나 크나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 책은 이 거대한 인류역사의 전환을 '인공지능시대'로 파악해 해명하고 있다.
데이터가 얼마 없고 불확실하던 종교의 시대에 사람들은 특정한 인간의 영감이 진리를 가르쳐준다는 믿음을 가졌다.
과학의 시대에는 정확한 데이터가 많이 누적되었다. 사람들은 그 데이터 속에 간결하고 정확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회가 다원화되고 인간이해를 넘는 데이터가 폭증하고 기술발전이 인간지능의 수용한계를 넘어 복잡하고 빠르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의 믿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AI를 통해 기본적으로 많은 데이터와 변수의 최적화가 우리를 문제 해결책으로서의 제3의 지식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믿음의 실현을 요구하는 거대한 도전앞에 서있다.

 인공지능은 기계이되 기존의 기계들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따라 만들어짐으로써 과학시대를 초월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기존의 기계생산과정은 작은 부분을 먼저 만들고 이해하여그것을 모아서 더 큰 부분을 만들고 이해하는 환원주의적 방식을 따랐다.과학패러다임은 작은 이론이나 법칙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세계를 설명해나가는 환원주의 원리를 따랐다.

반면에 인공지능은 데이터와 컴퓨터 최적화에 의해서 만들어짐으로써 환원주의 원리를 벗어났다. 인공지능은 작은 부분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지지도 않으며 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해법을 찾지도 않는다. 인공지능은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데 그 과정은 생명의 진화를 닮아있다.

보편법칙을 추구하는 과학은 반확률적이다(아원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AI패러다임에서 나타나는제3의 지식은 그 본질이 확률적이다. 제3의 지식은 과학법칙처럼 유일하고 배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AI패러다임은 반시스템적이고 당면 문제해결 지향을 뚜렷이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물리학수준에서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세상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 시대는그렇게 기존 과학시대의 문제접근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중첩되고 있다. 

널리 우려되고 있는 지구환경문제와 기후위기등의 문제뿐만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원화되는 사회를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해결책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문명은 언제나 그대로 유지되거나 발전하는게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해지다가 갑자기 몰락하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그 복잡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누적된 문제들로 인해 지금의 이 문명은 '진화냐 붕괴냐'의 갈림길에 서있다. 여기서 AI는 문명의 붕괴를 막고 진화로 향하게 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과학은 법칙을 도출할 때 전제로서 고립계를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잊고 우리 스스로를 환경 없이도 존재하는 기계로 여기게  하며 법칙에 집중하게 한다. 
하지만 AI패러다임에는 단지 데이터와 학습기계뿐만 아니라 AI가 수행하고 있는 그 게임 혹은 전체시스템의 설계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AI패러다임은 환경의 핵심적 역할을 잊지 않고 연결을 소중히 여기도록 한다. 연결이 곧 지능인 것이다.

저자 강국진은 통제할 수 없는 범용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그로인한 인공지능기술발전에 대한 통제경향성을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거대한 논리로 반박한다. 만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그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자체의 위험성 때문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단순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아닌,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꿀 놀라운 인식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 새 시대는 정보의 독점과 통제로 소수의 엘리트가 권력을 잡던 구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될 것이다.

"AI는 위협이 아니라 희망이고, 지금의 세상에 대한 치료제다. 인간은 종교의 시대에는 영적인 존재로, 과학의 시대에는 이성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AI시대에 인간은 제3의 지식을 지닌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미래는 인간이 대체되어 할 일이 없어지는 시대가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해방된 존재로서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자기를 표현하는 시대다. 발달된 지능적 시스템이 필요한 사람과 서비스와 물자를 연결해주는 시대다."

새롭게 시대를 정의하고 그를 통해 인간의 자기인식과 관계맺기에 나타날 변화를 예측하여 인간됨의 새로운 의미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일급의 인문학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광대한 인문학과 과학이론을 아우르면서 시대의 과제를 논할 수 있는  일급지성이 우리나라에도 있음을 확인하고 탄복하여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이책의 분량이 적고 논의가 굵직굵직한 문명사적 맥락을 타고 흘러 시대의 문제를 단순한 낙관론으로 결론지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외한이 세세한 기술적 부분까지 따라잡을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입문서로서 이 책의 가치는 무궁하다 할 것이다.
눈이 안좋아져서 책을 멀리 해야하는데 이 책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한번 펼쳐든 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눈은 더 침침해졌지만 그래도 후회 없을 정도로 엄청난 지적충격을 주는 재미난 독서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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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선진국 발돋움, 텍스트 생산에 달렸다

미술선진국 발돋움, 텍스트 생산에 달렸다

미술선진국 발돋움, 텍스트 생산에 달렸다
한겨레입력 2024. 1. 5.
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전천후 예술평론가 김남수씨가 2년여에 걸쳐 준비·기획한 전시 ‘물의 왕: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포스터. 김지하의 말년 사유를 담은 책 <수왕사>를 텍스트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고 이를 참여 작가들과 공유해 제작한 작품들을 한자리에 펼쳐놓았다. 자하미술관 누리집

▶이코노미 인사이트 구독하기http://www.economyinsight.co.kr/com/com-spk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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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칼럼인데 새해 벽두부터 뜬금없이 웬 텍스트인가 싶을 것이다. 미술선진국은 좋은 작품을 제작하는 좋은 작가가 많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다만 좋은 작품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걸 누가 정하고 평가하느냐가 문제다. 게다가 제조업에서 보듯이 선진국은 제품을 잘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만드는 방법을 생산하는 나라다.

좋은 미술을 정의하는 담론, 즉 텍스트는 그동안 서구에서 독점적으로 생산했다. 그들이 기준을 정했으니 당연히 그들이 좋다고 평가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우리에겐 발언권을 주지 않아 그들의 평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국내 최고 권위를 지닌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국내 대다수 미술상 심사위원에 외국인이 초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정하더라도 그들의 인증을 받아야 국제적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처럼 미술선진국 되기는 작품보다 텍스트의 생산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전시 ‘물의 왕: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2023년 말, 서울 인왕산 자락의 한 미술관에서 열린 작은 전시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영화, 미술, 무용을 넘나드는 전천후 예술평론가 김남수씨가 2년여에 걸쳐 준비·기획한 ‘물의 왕: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라는 전시다. 김지하의 말년 사유를 담은 책 <수왕사>를 텍스트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고, 이를 참여작가들과 공유해 제작한 작품들을 한자리에 펼쳐놓았다. 기획 과정에서 함께 텍스트 읽기에 참여했던 분들의 연계 강연과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입소문이 나면서 김지하, 생명사상, 개벽사상, 동학에 관심 있는 인사들이 삼삼오오 전시를 찾았다.

2022년 별세한 김지하는 사실상 한국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지식인이다. 근대화 초기인 식민 치하에서 서구문화와 사유를 도입했던 지식인들이 처한 상황과 노력을 국문학자 김윤식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저술로 그려냈다. 근대화를 스스로 이뤄내는 1960~1990년대, 이에 따른 억압과 폐해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며 다시 자기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이 시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김지하를 중심으로 선배인 조동일, 후배인 미술가 오윤, 마당극의 임진택, 탈춤의 채희완, 대중가요의 김민기 등 그와 가까운 인물들뿐 아니라 그보다 앞선 신동엽부터 지금의 환경운동과 한살림운동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의 사상적 지형을 그의 사유가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김지하는 민주화운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운동권의 ‘얼굴마담’이었지만 그가 생명사상에 경도됐던 1980년대 신군부 치하에서는 진보 진영으로부터 이미 변심의 의혹을 샀다. 1991년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그의 이름은 2012년 박근혜 지지를 선언했을 때 잠깐 회자했을 뿐 대중에게서 잊혔다. 그래서 막상 그의 장례는 문학계도 문화계도 아닌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뒤늦게 이부영을 중심으로 ‘김지하시인추모문화제추진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사십구재를 빌려 문화제를 치렀다.



김지하는 ‘오적’을 쓴 시인이자 군사독재에 저항한 민주투사이고, 한국문화를 되살리고 일군 민족적 문화운동가다. 또한 동학을 재발굴하면서 생명과 살림에 관한 사상을 펼친 생명사상가다. 그는 오늘, 바로 지금 가장 뜨거운 화두인 생명사상을 1980년대에 이미 설파했고, 최근 사상적·역사적 의의를 새롭게 조명받는 동학에 평생 심취했다. 한마디로 김지하는 시대를 앞선 사상가로, 우리가 버려서는 안 될 귀중한 ‘텍스트’다.

텍스트는 생각을 담은 글이다. 인류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한 시대를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생각이 우린들 왜 없었겠는가. 그동안 우리는 앞선 서구를 배우느라 철저하게 서구의 텍스트를 습득하는 데 올인했고, 그러다보니 근대 이후 한국에 사상가가 있었는지를 물을 지경이 됐다. 반면 서구는 매 시기 주요한 사상가들의 계보를 촘촘하게 세워 연구한다. 앞선 사상가를 읽으면서 자신의 사유를 세우고, 그 사유 위에 후학이 다시 자기 사유를 세우는 식으로 연구가 쌓이면 사유는 점점 더 정교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서구는 좋은 사유, 좋은 텍스트가 생산되기 유리한 선순환 구조가 확립돼 있다.

우리의 경우, 수년 전 철학자 이정우가 스승인 박홍규의 사상을 담아 <동일성과 차이생성: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를 출간했다. 서구 존재론사를 그리스 철학에서 근대를 생략하고 앙리 베르그송으로 바로 뛰어넘어 축약·정리한 박홍규의 서구 존재론사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본인의 생각을 더해, 스승의 사유를 빌려 자신의 사유를 밝혔다. 텍스트는 이처럼 외워야 할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거기에 기대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비빌 언덕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서구의 텍스트를 절대적 진리인 양 암기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텍스트와 독자적인 사유, 즉 새로운 텍스트의 생산능력은 방기됐다.

우리 텍스트 읽고 소개해야

이제 우리 텍스트를 알리고 쓰는 작업이 저술과 전시에서 시작되고 있다. 스승의 텍스트를 알리면서 자신의 텍스트를 쓰는 이정우의 저술이나 김지하라는 텍스트를 모티브로 갑오농민전쟁 실패 이후 동학 재정립을 도모하던 당시의 사유를 오늘의 현실을 읽고 헤쳐나가기 위해 소환한 김남수의 전시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마침 홍콩 미술계에서 서울을 방문한 한 연구자가 내게 물었다. 한국문학이나 역사, 문화를 알고 싶은데 중요한 작가나 사상가, 사건 등을 알려달라고 말이다. 나는 한국의 주요한 텍스트로 김지하와 동학이 있다고 말했다. 연구자는 곧바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관련 게시글을 찾아본 뒤 내용이 맞냐고 물었다.

아무리 우리 텍스트를 알리고 싶어도 외부의 관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을 향한 외국의 관심이 높은 지금, 우리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나라로 발돋움할 문턱에 와 있다. 그리고 생산은 텍스트를 쓰고 연구하는 일뿐 아니라, 우리 텍스트를 스스로 읽고 소개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

2024/01/05

Luke Timothy Johnson


Yet, what were we to do with what was apparently a gift from God, given without our asking, given, in fact, despite our greatest fears?   


 Interspersed with my short stints back at the monastery, the flow of long letters and equally lengthy phone calls continued between 1971 and 1973. We tried to work out <how we could be faithful to God> and <honor what (we were increasingly convinced) God had given us>, and <not do damage to those to whom we were committed>. In the winter of 1972-1973, I left the rectory and moved to a one-room apartment on Chapel street. I set to work on papers petitioning for a dispensation from my vows. My petition was rejected; leaving the monastery meant, in effect, to be excommunicated. Joy's husband had already separated from her, and the process of divorce (on the grounds of abandonment) began. She petitioned the church for an annulment, and that petition likewise was rejected. We were on our own.  


Cut off from the tradition that had sustained each of us throughout our lives, we depended even more on each other to make our way forward in darkness rather than light, in ambiguity rather than certainty. In June of 1973, I drove Joy and three of the youngest children to New Haven, where we leased a house near the divinity school on Edgehill Avenue. We began to try to create a life together, because each of our past lives was lost forever. We each would have to figure out <how to seek sanctity divorced from the contexts that had formerly given shape to that most fundamental of quests.>  


To call all of this a distraction would be much too dismissive. The gift of Joy's love wa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my life, and it remained he most important element of my life for forty-seven years until Joy died in 2017. 

Joy was, and remained to the end, not only <the singular symbol of God's grace in my life> but <the embodiment of that grace>. 

She was for me <"the love of God poured into our hearts through the Holy spirit."> 

She taught me what grace was simply by being who she was. 

It was not an affectation when I would later declare that everything I knew about grace I learned from Joy. 

There is a reason why I dedicated the great majority of my books to her.  


Not a distraction. But this new and powerful reality shattered the certainties of my former existence and meant that, from the very start of doctoral work, I labored at scholarship with one figurative hand behind my back. The other hand was always busy trying to stir and discern emotional tea leaves, and trying to deal with the human damage that illicit love (even if holy) can leave in its wake. Joy and I married in early 1974, and our daughter Tiffany was born later that year. I was now a new creation: a husband, a stepfather of six children three of them full ime in the household), and the father of one. I had not finished my PhD, and I was still a long way from having a job that could support this 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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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구하지도 않고 실제로는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겉보기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도원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1971년부터 1973년까지 긴 편지와 똑같이 긴 전화 통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신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존중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또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972-1973년 겨울, 나는 목사관을 떠나 (예일 대학 가까이에 있는) 채플 스트리트에 있는 원룸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나는 (수도승이 되는) 서약(의) 면제를 청원하는 서류 작업에 착수했습니다만 내 청원이 거부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떠나는 것은 사실상 파문을 의미했습니다. 조이의 남편은 이미 그녀와 별거했고, (버림을 이유로) 이혼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교회에 무효화 (?)를 청원했지만 그 청원도 마찬가지로 거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둘만의 홀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를 평생 지탱해 온 전통에서 단절된 우리는 빛보다는 어둠 속에서, 확실성보다는 모호함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욱 서로 의지했습니다. 1973년 6월에 나는 조이와 막내 세 자녀를 데리고 뉴헤이븐으로 가서 Edgehill Avenue에 있는 신학교 근처에 집을 임대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과거의 삶이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에 <함께 삶을 창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탐구의 가장 근본적인 근본을 형성했던 이제까지의 맥락에서 분리된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을 마음의 혼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사정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입니다. <조이의 사랑>이라는 이 선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조이가 2017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47년 동안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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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는 <내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유일한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구현>이었고,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성령으로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은혜가 무엇인지 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은혜에 관해 아는 모든 것을 조이에게서 배웠다고 나중에 선언한 것은 가식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책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헌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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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새롭고 강력한 현실은 나의 이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산산조각 냈고, 이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박사 과정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한 손을 등 뒤로 한 채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다른 한 손은 감정적인 찻잎을 휘젓고 분별하려고 애쓰며, (심지어 거룩하더라도) 불법적인 사랑이 그 여파로 남길 수 있는 인간적 피해를 처리하려고 애쓰느라 항상 바빴습니다. 조이와 나는 1974년 초에 결혼했고, 그 해 말에 우리 딸 티파니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남편이자 여섯 자녀 중 세 자녀를 둔 계부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나는 박사 학위를 마치지 못했고, 이 벤처를 지원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기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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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a distraction. But this new and powerful reality shattered the certainties of my former existence and meant that, from the very start of doctoral work, I labored at scholarship with one figurative hand behind my back. 

The other hand was always busy trying to stir and discern emotional tea leaves, and trying to deal with the human damage that illicit love (even if holy) can leave in its wake. Joy and I married in early 1974, and our daughter Tiffany was born later that year. I was now a new creation: a husband, a stepfather of six children three of them full ime in the household), and the father of one. I had not finished my PhD, and I was still a long way from having a job that could support this venture.






유상용 - [산마을 너머, 지금 뭐해?] 이 책은 우리 동네에 있는 ‘대안 특성화 고등학교 산마을’을 졸업한 17명의...

(2) 유상용 - [산마을 너머, 지금 뭐해?] 이 책은 우리 동네에 있는 ‘대안 특성화 고등학교 산마을’을 졸업한 17명의... | Facebook


이 책은 우리 동네에 있는 ‘대안 특성화 고등학교 산마을’을 졸업한 17명의 20~30대 젊은이들의 산마을 이후의 삶과 그것의 바탕이 된 산마을에서의 체험을 돌아보는 글 모음집이다.
<대안학교는 있어도 대안사회가 따로 있지 않은> 세상에서, “대학 안가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어”라는 다 검증되지는 않은 희망과 권유를 받아들이며, 대학을 가든 안가든 무엇이 중한 지를 알아차려가는 인생 여행기다.

2000년도에 설립된 산마을고등학교는 올해로 24년을 맞이한 ‘청년’학교가 되었다. 편저자인 최보길선생은 이 책을 펴내면서, 산마을의 시작부터 함께 하면서 숙제처럼 여겨왔던 산마을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을, 산마을과 그 이후를 온전히 살아온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통해 답해보려고 한다. 23년 동안 졸업한 392명의 젊은이들이 고뇌하며 자유를 찾아간 여정의 일단을 그 중 17명의 글을 통해 만난다.

< 장애인 협업농장, 지역 청년협동조합, 여성노동조합, 비영리 청소년 및 평화통일 단체 활동가, 인가 · 비인가 대안학교 교사, 프리랜서 인문학 연구 작가, 문학 작가, 출판기획자, 평화 인권 학습자 겸 기획가, 사회적 경제 부업을 하는 여행생활자(우피), 청년 주거공동체 출신 농부, 철학을 전공한 인터넷 뉴스 PD, 사진 찍는 스타트업 공간매니저, 축제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발도로프 교육에 관심 있는 건축학 전공자 >
참 다양한 길을 걸어가는 이들의 산마을에 관한 추억 중에는, ‘기숙생활을 포함한 3년 동안 너무 가까이 살아서, 좋아하고 미워하며, 많은 활동과 대화로, 무던히도 지지고 복고 살아온 시간들이, 졸업 후 시간이 흐르며 자기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연 평화 상생 (自然 平和 相生)이라는 산마을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 이념이 과연 학생들에게 얼마나 살아있는 것으로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때 생각하고 살아보고 흡수한 것은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때로는 버티는 힘으로, 가끔 열어보는 일기장으로, 길을 잃을 때 쳐다보는 산위의 마을의 등불처럼, 서서히 힘을 발휘하겠지...
돌아보면 나의 고2시절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흥분과 열정과 두려움이 혼재된, 묘한 아름다움의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가능성의 꽃봉오리.
 
나도 산마을 야학 ‘마이라이프세미나’의 강사로서 9년간, 그들과 소수지만 깊게 대화를 나눠왔고, 둘째 아들도 3년전 산마을고를 졸업하고 지금은 군인이 되었다. 그 시기는 학교 내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페미니즘의 바람이 불고, 인권-성평등-기후위기-채식 등의 공부와 활동이 활발한 때였다. 나는 학부모회장, 학교 운영위원장을 하며 2년 이상 학생, 학부모, 교사들과 질풍의 시간을 함께 했다. 아들은 이제야 그 시기의 심적 부담에서 벗어나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가 대학교 때 겪었던 것을 이 친구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겪고 있던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에 겪고 의문을 품은 과제들은 나의 평생의 일이 되었고, 그 싹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트기 시작했었다. 그러니 미지의 이 세상에서 정답을 일찍 결론 내기 보다는, 바른 질문을 찾아내어 돌사탕처럼 오래 입에 물고 슬슬 단맛을 녹여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들은 또한 한국의 대안교육 20여년의 중간보고서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풀무학교와 같은 지사(志士)형 설립자 정신에 의한 개교와는 또 다른, 80~90년대 민주화와 이어진 대안사회, 대안교육운동의 시대정신으로 탄생한 한국의 여러 대안학교들이 어떤 열매를 맺었고, 어떤 길로 가야할 지를 생각해보는 ‘산’ 증거로서의 사람과 글이다.
 
산마을고는 최근 산마을2.0을 모색해가고 있다. 그 중에 내가 특히 관심이 있는 것은 ‘마을-지역의 학교’로서의 산마을이다. 이미 여러 해 동안, 학교와 마을이 함께 길을 걸어왔고, 마을의 삶에서 실현해가고 있다.
 
홋카이도 조선학교의 삶을 다큐영화로 만든 ‘우리학교(김명준 감독, 2006)’가 있다. 당시 ‘공동체 상영’으로 산안마을 식구들과 함께 보며, 그 삶의 진정성에 감동해 눈물을 많이 흘렸다. 

조선학교는 조총련학교가 아니고, 해방 후 일본에 남게된 ‘조선민족’이 ‘나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만든 학교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희미해진 ‘조선의 순박함’이 살아있는 ‘마을의 학교’였다. 산마을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사람다움의 마을학교로 살아있기를 바란다.
 
산마을은 ‘우리학교’다.








책소개

강화도에는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 잘 못 찾는 작은 학교가 하나 있다. 주소는 맞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라는 이미지와 너무 달라 바로 앞에 학교를 두고도 전화를 하는 경우가 많단다. 산 밑의 기와집. 그게 이 책의 이야기들이 탄생한 산마을 고등학교다. 사람이 흔히 ‘대안학교’라고 말하지만 인가된 고등학교다. 물론 배우는 과목들이 좀 다르다. 삶과 철학, 강화사의 이해, 지역 봉사, 생활기술, 진로과제 탐색연구, 생태농업, 통합 기행, 학생자치활동과 토론, 창작활동, 문화비평 등을 일반적인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이 배운다. 특히 자연, 평화, 상생이라는 학교 철학에 충실한 동아리 활동과 강좌 개설이 활발하다고.

이 책은 그 학교에서 3년을 지내고 세상에서 10년 혹은 그 가까이의 시간을 보낸 산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10년의 시간은 멀기도 가깝기도 한 시간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의 10년은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나아가는 10년이기 때문에 다들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지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모아 놓으니 다양한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17명의 이야기가 다르고 이야기를 모은 선생님의 이야기도 다르다. 그게 산마을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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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사
산마을 너머로부터 받은 작은 위로 -정승관 ∙ 4
산마을 너머에 뿌려진 평화 일꾼들의 이야기 -강화정 ∙ 7

머리글
‘산마을 너머’ 너희들, ‘너희들 너머’ 다시 산마을 -최보길 ∙ 10

Ⅰ 산마을
가볍게 쓰는 산마을 –최보길 ∙ 23

Ⅱ 산마을 너머

삶과 철학
불확실한 삶, 확실한 기쁨 –정건화 ∙ 54
새로 이야기 -이슬 ∙ 65
나의 리듬 -공연규 ∙ 71
거북이의 삶은 –이한솔 ∙ 79

공동체 이론과 실제
공존하는 삶 -김희진 ∙ 90
파랑새 찾기 -김정인 ∙ 101
너그러운 세상이 마련해 둔 내 자리를 찾아서 -조희주 ∙ 110
세상의 변화는 ‘나의 변화’에서부터 -이기은 ∙119

지역과 세계
강화도에서 그만두지 않는 방식 -성결 ∙ 130
식물자원에서 생태농업으로 가는 중? -이지수 ∙ 140
만난다는 것 -오민석 ∙ 151
늘보의 배낭여행 -허예린 ∙ 162

문화비평과 창작활동
쓰는 마음 -신은솔 ∙ 176
물살을 가르는 마음으로 -전소연 ∙ 184
필름이 바랠수록 세상은 선명해진다 -여지후 ∙ 189
흐르듯 자연스럽게 -심지윤 ∙ 201
건축학과 10학년 -김서인 ∙ 210

Ⅲ 산마을에 불어오는 메아리
산마을은 어디에나 있다 -안성균 ∙ 224
큰 병이 생겼다 -고경일 ∙ 235
자존감에서 비롯한 남다른 자부심 –오창익 ∙ 239
산마을 너머의 삶을 살펴 ‘보고서’ –최보길 ∙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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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보길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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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과 ‘역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귀가 솔깃해진다. 특히 두 단어가 ‘강화도’라는 지명과 만나 들려오면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하고, 또 분주한 발걸음을 내딛기도 한다. 밤새워 고민하고 의논해서 함께 그린 교육활동 계획이 현장의 발걸음 위에서 하나씩 실존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리고 그 시간을 기억해 주는 산마을 친구를 만날 때면 인생의 절반을 함께해 온 ‘산마을’에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텃밭도 일구고 강화 답사도 다니고, 강화와 관련된 근현대사 인물들에 대해서 관심도 키워간다. 자료를 찾고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을 들여 품을 ... 더보기
최근작 : <세 개의 시선, 하나의 강화>,<산마을 너머 지금 뭐해?>,<강화도의 기억을 걷다> … 총 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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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산마을 너머 지금 뭐해?>

최보길(지은이)의 말
‘대안교육’과 ‘역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심장이 조금 빨라지기 시작한다. 특히 두 단어가 ‘강화도’라는 지역명과 함께 움직이면 목소리도 커지고 얼굴색도 변한다. 돌아보니 ‘대안교육’, ‘역사’, ‘강화’는 어느새 오십여 년을 함께해 온 삶의 추억이 되었다.
텃밭도 일구고 강화 답사도 다니고, 요즘엔 강화와 관련된 근현대사 인물들에 대해서도 시선이 간다. 학창 시절에는 몰랐으나 자료를 찾고 글 쓰는 것은 신경 쓰이는 일이지만 내심 좋아하는 일이지 싶다. 십 년 후엔 농사짓고, 여행하고, 글 쓰는 일로 일상을 꾸렸으면 한다. 막걸리 빚는 실력도 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군가가 찾아가거나 찾아왔을 때 자연스레 꺼내어 놓을 추억의 안주가 많아지겠지.

“강화도의 기억을 걷다”를 쓰고나서 “산마을”의 이야기를 쓰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다 담임교사란 인연으로 지수와 예린이를 만났다. 남미 여행자에서 모교의 농업 교사로 돌아온 지수, 문화기획자로 살다가 가끔 사라져 지구별 여행자로 살아가는 예린! 두 사람의 젊은 인생이 강화에 잠시 머물렀다. 귀한 손길이고 소중한 발걸음이다.
‘산마을 너머 뭐해?’에서 ‘산마을 너머 뭐해!’로 그 본모습을 갖추기까지 밤과 낮, 그리고 한국과 영국을 연결하며 쏟아냈던 마음은 이 책 못지않게 소중한 추억이다. ‘기억’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좀 부족하다는 생각에 짧은 문장으로라도 ‘기록’해두고 싶다. 두 친구 덕분에 귀한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정인, 소연, 지수, 한솔, 건화, 희진, 은솔, 희주,
연규, 서인, 지윤, 지후, 슬, 예린, 기은, 민석, 결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든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 열일곱의 청춘을 응원한다. 빛은 다양한 색과 온도로 빛난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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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산마을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뭐하고 살아요?

산마을을 떠난 17인의 10년 이야

그렇다. 이 책은 17명의 이야기다. 그래서 글을 쓴 사람도 많고 추천사도 많다. 무엇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도 많고 이 책을 읽을 독자가 가져갈 것도 많다, 이 책에서 보이는 17명의 이야기는 다른 고등학교 졸업생들과 같으면서 다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강화도에는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 잘 못 찾는 작은 학교가 하나 있다. 주소는 맞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라는 이미지와 너무 달라 바로 앞에 학교를 두고도 전화를 하는 경우가 많단다. 산 밑의 기와집. 그게 이 책의 이야기들이 탄생한 산마을 고등학교다. 사람이 흔히 ‘대안학교’라고 말하지만 인가된 고등학교다. 물론 배우는 과목들이 좀 다르다. 삶과 철학, 강화사의 이해, 지역 봉사, 생활기술, 진로과제 탐색연구, 생태농업, 통합 기행, 학생자치활동과 토론, 창작활동, 문화비평 등을 일반적인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이 배운다. 특히 자연, 평화, 상생이라는 학교 철학에 충실한 동아리 활동과 강좌 개설이 활발하다고.

이 책은 그 학교에서 3년을 지내고 세상에서 10년 혹은 그 가까이의 시간을 보낸 산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10년의 시간은 멀기도 가깝기도 한 시간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의 10년은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나아가는 10년이기 때문에 다들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지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모아 놓으니 다양한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17명의 이야기가 다르고 이야기를 모은 선생님의 이야기도 다르다. 그게 산마을답다고 말한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삶, 다양한 이야기.

17인의 10년이라 각각 다른 이야기가 나올 줄은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다 보면 더욱 다양한 삶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나같이 다른 삶들이다. 그래서 대안학교나 교육에 딱히 관심 없는 독자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몇 장이라도 읽다 보면 인생은 꼭 하나의 길이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게 보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떤 이는 방송국에서 어떤 이는 길 위에서 어떤 이는 사회단체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다르기도 이렇게 다를 수 없겠다 싶은 17인의 삶이지만 끝까지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쯤에는 이들의 삶이 산마을 고등학교의 교육철학인 자연, 평화, 상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니 확신하게 된다. 자기만 품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그 가치를 전파한다. 이 책 역시 그 씨앗 중의 하나이다.

자연 · 상생 · 평화의 가치를 품고 사는 삶이 되길.

이들의 삶은 특별하지 않다. 남들하고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대안학교 졸업생들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연을 생각하고 평화를 중시하며 함께 사는 삶을 생각한다. 평범하지만 평범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강조해서 이야기한다.
교육의 백년을 생각할 수 없이 정책이 왔다 갔다 하고 한쪽에서는 무너지는 교권을, 한쪽에서는 퍼져버린 혐오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입시 중심인 우리 사회의 교육인지라 학교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사건들도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산마을 고등학교의 10년은 더욱 가치를 발한다. 17인의 다양한 삶을 보기만 해도 길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은 다시 생각해야 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이들의 삶을, 우리의 삶을 응원한다. 접기



티머시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 한국성결신문, 뉴스조이

티머시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 문화 < 뉴스 < 기사본문 - 한국성결신문

<화제의 책>티머시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기자명 조재석 기자
입력 201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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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예수’ 아닌 ‘살아있는 예수’ 증언
성서, 전통, 예배와 성도 생활 등으로 예수 배우기 요청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로 미국과 전 세계 성경학계 등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세계적인 신약성서 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이 그 후속작으로 ‘살아있는 예수’(청림출판)를 펴냈다. 그는 전작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저술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예수의 진리를 재확인했던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약성서 전체를 학문적인 논리, 통찰력을 기초로 고찰,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믿는 살아있는 예수를 증언한다.

그는 이 책에서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를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 다루는 연구는 문제가 있으며 우리는 신약성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의 복합적인 이미지 모두를 보아야 하며 그분은 부활하여 현재도 살아있는 예수임을 다양하고 신비로운 묘사로 설명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재정립하기 위해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방법으로 재구성한 예수에 근거해 그 신앙을 재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지적하고 “역사적 방법이 추구하는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살아있는 예수를 배우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해 가기 시작한다.

저자는 예수를 배우게 되는 복합적이고 풍부한 방식으로 성서와 신경, 신앙공동체의 교육 등 전통을 비롯하여 공동체의 예배와 성도들의 생활, 섬기고 포용하는 작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배우기를 설명한다. 특히 저자는 예수를 배우는 것은 결과적 산물보다 과정에 관심을 둘 것을 요청하면서 아내와의 상호 배움을 예를 들어 침묵과 묵상, 고난과 인내, 지속적인 배움, 공동체와 함께 배울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예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주님으로서 현존하기 때문에 신약성서를 아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메시아의 특성을 풍부히 계시하는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근거해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비롯해 유다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요한서신과 히브리서 등 서신서에 나타난 예수의 독특한 칭호를 살피며 예수의 현재적 실제와 신앙인의 관계성 진술 내용을 찾아간다. 이어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예수가 가지는 의미를 보여준 최초의 증언인 바울서신과 예수에 대한 네 가지 묘사를 하고 있는 사복음서와 누가행전으로 통칭되는 사도행전의 예수 증언을 되살펴간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2000년전 어느 한 시점만이 아니라 역사와 신앙 속에서, 오늘의 현재에 살아있는 예수를 우리에게 생생히 경험케 한다.

이 책은 살아있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 각 글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생이나 성도들에게 신약성서를 종합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개론으로서, 예수 연구나 기독교 과목의 교재로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루크 티머시 존슨/청림출판/268쪽/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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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비추] 루크 티머스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2-02-26 09:36 조회(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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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예수를 죽은 자로 여기는가, 아니면 살아있는 분으로 생각하는가?”

교회가 탄생하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제한된 상상력과 자료를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이미지를 구축해 자신들이 만든 예수가 더 사실에 가까우며 믿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텔레비전이나 순회강연에서 예수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텔레비전 전도자들’ 역시 암암리에 교회 전통을 거부하고 조직화된 기독교를 경멸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약성서 학자인 루크 티머시 존슨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저술이 가진 한계를 폭로하고 새로운 방향의 포괄적인 연구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책 『살아있는 예수』에서 역시 존슨은 예수를 단순히 과거의 죽은 인물로 다루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주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진정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저자 소개
저자 : 루크 티머시 존슨 Luke Timothy Johnson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로 미국과 전 세계의 성경 학계와 교계 및 언론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세계적인 신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이 그 후속작으로 『살아있는 예수』를 출간해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약성경 해석』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초기 기독교의 신앙체험』 등을 비롯해 저명한 주석서와 연구서를 많이 집필해 참다운 기독교 학문의 정체성을 제시한 그는 2011년에 종교 부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 인디애나 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에모리 대학교에서 신약신학 석좌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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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영성이라는 말은 인간 정신의 도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신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자유로이 답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만남은 인간 예수와 관련된다.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부활한 주님으로서의 예수 말이다.

우리는 그런 예수와의 만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수를 과거에 가두고 싶어하는 역사주의와 예수의 구체성을 증발시키고 위협하는 신비주의 사이에 또 다른 영역이 있을까? 이 책에서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종속적인 학습 과정, 즉 신약성서에 기술된 다양한 예수 묘사가 부정적인 기능보다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영역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여러 차원에 대한 이해를 격려하려는 것이다. --- 서문 중에서

만일 예수를 단지 죽은 자로 바라본다면, 그 업적이나 생애에 관여할 수 있는 얼마의 방식이 있다. 이 경우 예수에 대한 자료 중에서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좀 더 명확히 밝혀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모든 것이 변한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인 기록과 관련되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자 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묻게 되는 문제이다. 예수가 살아있다면 생명을 주는 자임이 틀림없다. 이때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분이다. 다시 말해, 단지 분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대면하여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리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관해 배운다는 것에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 --- 1장 “그는 살아있는 분이다” 중에서

예수의 부활로 탄생한 교회는 예수에 관한 후대의 어느 문서 자료보다도 선행한다. 그리고 예수에 관해 말하는 내용은 그 양식이 설화든, 환상이든, 서신이든, 육신으로 알던 예수가 지금은 영으로 살아서 그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났음을 확신한 사람들이 저술한 것이다. 예수에 대한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 예수에 대한 지속적인 체험을 통해 선별되고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현재의 체험이 결코 그분의 과거를 지우거나 허구화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회는 예수가 지금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예수가 과거에 누구였는지를 더 잘 통찰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오순절 날부터 우리 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교회 전승이 없었다면, 오늘날 예수에 관한 어떤 지식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2장 “전승을 통한 예수 배우기”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영적 변화를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낸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그런 성인들의 생애에서 예수를 배우므로 전적으로 온당하다. 우리는 성인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을 성인으로 인정한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과 인격에서 예수의 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행동하는 것을 본다. 예수의 복음 설화에서처럼, 말씀과 행동의 온전함이 없다면 성결함은 있을 수 없다. 예수의 본보기가 보여주듯이 우리가 타락과 망설임에서 풀려나지 않는다면, 예수의 행동 방식처럼 죽음까지 희생하는 섬김과 사랑이 없다면, 그리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해 타인에게 주어지는 지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타인이 갖게 되는 강함, 우리의 상처를 통해 타인에게 주는 치유, 우리의 빈곤을 통해 타인이 받는 풍요, 우리의 죽음을 통해 타인이 얻게 되는 생명이 없다면, 신성함이란 있을 수 없다. --- 3장 “영화로운 주님의 육체적 임재” 중에서

함께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고통’이 따르고 ‘인내’가 요구된다. 삶이 정상적으로 순조롭게 전개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상호 주체적 배움에는 항상 긴장과 도전이 따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통해 배우려는 노력은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 찬 하나의 실습이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일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일과 중첩되는데, 더 많은 사람과 관련될수록 스트레스가 더 높아지며 고통도 한층 커진다. 조이는 나보다 열 살이 많고, 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 출신이다. 또 교육, 문화, 재산, 정치 등에 대해 각자 다른 체험을 가진 상태였다. 우리 가정은 20여 년에 걸쳐 일곱 명의 자녀, 특히 사춘기에 처한 자녀를 여러 명 두고 있다. 함께하려는 우리의 결정은 조이에게는 그녀의 첫 번째 가정이 붕괴되는 것이었고, 내게는 수도원 가족을 등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지탱하던 신앙 공동체에서 고립되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우리는 함께 살아오는 동안 만성 질병에 자주 걸렸다. 다시 말해, 즐겁게 휴가를 보내기보다는 병원 응급실이나 수술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여러 날을 집에서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다. 조이와 나는 “배움은 고통이다”라는 격언에 동의하면서, 거기에 “고통당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라는 우리의 말을 부연하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겪으면서 서로를 더 깊이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도전이 없는 평탄한 생활이었다면 이런 교훈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 4장 “예수를 배우는 과정” 중에서

성서의 문헌들은 예수 배우기가 형식적 고백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를 배우는 것은 예수의 말에 따라 살고 예수의 신앙 척도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이며, 예수가 증인으로 살았듯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증언하는 생활을 뜻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걸어간 길, 즉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걸어간 고난의 길이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예수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된 분이며,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한 신앙의 모델이다. --- 5장 “살아있는 예수와 계시적 글” 중에서

바울에게 ‘예수 배우기’는 과거에 존재한 인물에 대한 단순한 정보 수집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예수의 인격과 일치하는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예수의 형상을 닮도록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활 방식과 그들이 한때 속해 있던 이방인 세계의 생활 방식을 명확히 대조하기 위해,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말한다. 이어서 이렇게 권고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0-24). --- 6장 “바울의 예수 증언” 중에서

역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배경을 초월한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모든 아테네 시민이 소크라테스는 아니었다. 모든 로마 귀족이 카이사르는 아니었다. 모든 로마 황제가 아우렐리우스는 아니었다. 모든 노예가 스파르타쿠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유대인 소작인이 예수는 아니었다! 예수에 대한 연구자들의 해석이 매우 진부하게 끝나는 이유는 그 해석이 추출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명확하고 일관성 있는 ‘예수 이미지’를 원하지만, 그런 이미지에는 진정한 인간 존재의 표상인 특수성과 복합성이 결여되어 있다. 예수를 좀 더 ‘인간적으로’ 묘사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약성서에서 묘사한 것보다 예수를 더 추상적으로 만든 것이다. --- 7장 “한 인물에 대한 네 가지 묘사” 중에서

마가는 독자들이 제자들을 닮지 말고 예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래서 제자들이 오해한 두 장면을 소개한 뒤, 변화산상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밝히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7)라는 음성으로 끝을 맺는다. 그 메시지는 산 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독자들을 향한 음성이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를 따를 때, 우리는 제자들의 언어와 행동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에게 배워야 한다.

마가는 예수 이해와 제자도 이해를 가장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부활한 예수의 현재적 능력을 권력과 특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누리는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배우는 것은 작은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는 방식을 배우는 것, 즉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준 방식을 따라 종이 되는 길을 배우는 것이다. --- 8장 “마가복음의 예수” 중에서

마태는 제자도에 대한 마가의 이해를 근본적인 변경 없이 확장하고 심화시켰다. 마태는 예수를 유대적인 유산에 좀 더 명확히 연결시키고(예수는 토라의 화신이다) 교회의 운명에 확실히 연결시킴으로써(예수는 부활한 주님이며 교사이다) 예수 이미지를 한층 복합적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교훈이 개인과 교회를 가르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야고보서와 바울 서신 못지않게 마태복음에서도 예수 배우기는 예수 자신의 생애와 일치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활이다. --- 9장 “마태복음의 예수” 중에서

제자들은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저서에서 상이한 역할을 맡는다.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한 후 예언자 예수의 계승자로 활동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가 활동한 대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대로 예수의 ‘선택받은 증인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마가가 묘사한 우둔하고 불충한 제자들의 모습을 마태처럼 누가 역시 완화시키리라는 예상이 들 것이다. 누가의 첫 저술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 중 가? 묘한 것은 예수의 예언자적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답함으로써 본보기가 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소유물을 모두 포기한 자이며 죄인이다(눅 5:11, 28, 18:28-30).
 
예수와 여행할 때는 소유를 함께 나누었고(눅 8:1-3) 예수가 군중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에 참여했다(눅 9:10-17). 그러나 제자들의 모든 행동이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이해했지만(눅 9:20) 메시아가 고난받아야 하며(눅 9:44-45, 18:34) 그를 따르는 자들은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납득하지 못한다(눅 9:23-25). 부활한 예수는 이처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태도를 책망했다(눅 24:25-27). --- 10장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예수” 중에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은 많은 차이가 있으며, 요한복음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시자로 활동한 예수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에서 역시 신약성서 전체에서 만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스스로 목마름을 체험함으로 성령을 부어주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부른다. --- 11장 “요한복음의 예수”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영’이라 불리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도야하거나,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이나 고난에서 탈피해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타자’인 하나님의 성령에 자유롭게 위임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또는 예수에 의한 만남이 포함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복음 중심적이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과 예수가 보여준 유형에 따라 우리 삶을 변화시킴으로써 예수를 배우는 과정으로 구성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온 복음을 의미한다. --- 12장 “계속 이어지는 신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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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진정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다!
세계적인 성서학자가 현대세계에 다시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교회가 탄생하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제한된 상상력과 자료를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이미지를 구축해 자신들이 만든 예수가 더 사실에 가까우며 믿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텔레비전이나 순회강연에서 예수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텔레비전 전도자들’ 역시 암암리에 교회 전통을 거부하고 조직화된 기독교를 경멸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약성서 학자인 루크 티머시 존슨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저술이 가진 한계를 폭로하고 새로운 방향의 포괄적인 연구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책 『살아있는 예수』에서 역시 존슨은 예수를 단순히 과거의 죽은 인물로 다루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주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진정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만일 예수를 단지 죽은 자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예수에 대해 과거에서 온 메아리만을 들을 수 있으며 예수에 대한 자료 중에서 모호한 부분이 좀 더 명확히 밝혀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더 이상 역사적인 기록을 묻지 않고 인간 존재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자 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이때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분이다. 단지 분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대면하여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리인인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으므로, 예수에 관해 배운다는 것에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의혹이 아니라 신뢰로 접근하는 복음해석의 개가
『살아있는 예수』는 예수를 향한 신앙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무적인 증언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 영성이라 불리는 것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본디 영성이라는 말은 인간 정신의 도야가 아니라 성령인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자유로이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만남은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부활한 주님인 예수를 만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책에서 존슨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믿는 살아있는 예수를 진정한 예수로 묘사하기 위해 학문적인 논리, 통찰력, 그리고 신약성서의 모든 문헌들을 동원한다.

존슨은 우선 서구 철학이 단순성과 통일성을 선호해 온 경향에 대해 지적하며, 이런 경향이 배움 그 자체가 지닌 과정의 다양성을 억제하고 예수 이미지가 지닌 복합성을 억누른다고 역설한다. 또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울 서신을 중대한 자료로 고려하지 않지만, 바울 서신은 기독교 초기에 기록된 믿을 만한 서신으로 예수 탐구를 위해 귀중한 자료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또는 기독교 외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죽은 예수를 재구성하려는 데 반해, 존슨은 신약성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의 복합적인 이미지 모두를 살아있는 예수에 대한 다양하고 신비로운 묘사로 수용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다양한 묘사야말로 참되고 생생한 증언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와 살아있는 예수를 올바르게 구분하기 위해 신약성서의 각 문서를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간단명료하고도 포괄적인 신약성서 개론으로 읽힐 수 있으며, 예수 연구나 기독 과목을 위해 훌륭한 성서적 기초가 되는 교재로 쓰일 수 있다. 또한 성서 주해를 능숙하게 예시하고 가르쳐주는 성서 주석의 실례요,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신앙의 증언이다.

살아있는 예수의 인격은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이 책은 ‘예수 배우기’의 의미가 단순히 이론적인 과제가 아니라, 제자도의 문제라는 것을 매 순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복음서의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를 찾아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배우려면, 우리 자신이 거룩한 자가 되어 예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존슨은 성서와 교회 전승을 통해 예수를 배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살아있는 예수의 인격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예시로, 자신의 살아있는 아내 조이의 인격을 몇십 년에 걸쳐 배워온 방법을 겸손하고 솔직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예수는 살아있는 분으로서 성령이나 다양한 구현을 통해 세상에서 계속 행동하고 말하므로, 예수를 배우는 과정 또한 어느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매 순간 살아있는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것이다. 신앙이 단지 과거에 죽은 예수를 배우는 것이라면, 그런 배움은 어느 시점에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매 순간 우리를 압도하는 살아있는 주님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결코 배움을 중지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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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에모리 대학교의 신약신학 석좌교수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을 현대 세계에 다시 증언한 복음 해석의 개가이다. 최고의 지성과 경건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교회 지도자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영적 감동과 깊이를 제공할 것임에 틀림없다. - 신경하(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 회장)

《살아있는 예수》에서 저자는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가 진정한 예수요, 살아있는 예수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예수에 대한 혼탁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지금, 이 책은 맑은 공기처럼 우리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줄 것이다. - 한정호(경기도 평택시 서정교회 담임)

루크 티머시 존슨은 지성과 신앙이 겸비된 최고 학자이며,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를 저술하여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잘못 진행된 현대 예수 연구를 혹독히 비판하고, 예수의 진리를 재확언했다. 《살아있는 예수》는 그의 속편으로 인간 예수의 신성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 고수철(서울시 흑석동 제일교회 담임, 전 협성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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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12-02-26 10:06)
 
아무래도 청림출판사는 책을 개념 없이 내는 것 같다. 그동안 보수적인 한국교회 사정을 생각해 상업적으로 잘팔릴 것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들 자신의 신앙이 보수적이라서 이런 책을 내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래도 그나마 학문적이었던 바트 어만의 책을 냈던 점에 비해선 정말이지 이같이 논리적으로도 덜떨어진 보수 진영의 책을 내리라곤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지만 알고보면 두 책의 내용은 서로 충돌한다).

물론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볼 땐 루크 티머시 존슨 같은 이들의 책이 매우 각광받을만큼 인기 있을는지 모르나 내가 보는 평가의 잣대는 존슨 주장에 대한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맥락에서 보는 평가인지라 인기와는 또다른 별개의 사항에 속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혹자는 신앙은 논리와 다르다는 점을 빌미로 오히려 논리 무시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혹은 보수와 진보 기독교 진영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책을 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역시 소신 있는 출판보다는 상업적 고려의 맥락이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존슨의 경우는 내가 볼 때 이는 보수 기독교 세력들이 의도한 바에 놀아날 뿐이며 확고한 원칙이나 개념은 탈각되어 있어 보인다. 이미 이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테지만, 애초부터 루크 티머시 존슨이란 인물은 기존 진보 기독교 학계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공격하기 위해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의도적으로 지원해주며 밀어주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미 그의 포지션 자체부터가 보수 기독교 전통의 예수 신앙을 변호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가였던 존 도미닉 크로산에 대한 반대 논객으로 티비에 나와 대립각을 세우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당연히 존슨은 진보적 학자들의 예수세미나에 대해선 매우 비난하는 입장 서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너무나 단순 억지에 가깝다.

요컨대, 루크 티머시 존슨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죽은 예수이며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인데, 그 골자는 신앙 공동체 곧 교회 전통의 맥락으로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보면 정작 그의 이론들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 단지 교회 전통의 예수를 만나는 일이야말로 곧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라고 줄창 항변할 뿐이다. 이러한 핵심 전제 하에서 그 자신의 논지를 진행해갈 뿐인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성령체험을 받아야 성경을 비로소 잘 알 수 있다는 식의 주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범주 안에 들어와야 너가 예수를 만날 수 있고 깨침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너가 그 어떤 경지에 들어와야 공중부양 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들의 주장과도 그 주장의 패턴에 있어서만큼은 유사한 논리다. 일종의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대전제가 밑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무조건 믿어라'의 영역에 속한다.

게다가 예수에 대한 존슨의 입장은 기존 교회의 보수적인 예수 신앙처럼 그 역시 예수의 초자연적인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 때문에 한동안 골치 아팠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루크 티머시 존슨의 주장들이 매우 반갑고 고맙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신앙의 전제들을 루크 티머시 존슨의 주장을 통해 재확인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말한 예수는 사실상 근본주의 기독교가 쳐놓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요 5대 교리의 그물망을 결코 벗어나진 않고 있다.
구원도 교회 전통의 예수의 구원만이 참된 구원의 역사로 주장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보면 루크 티머시 존슨의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가 아니라
그야말로 이미 교회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교회가 죽여놓았던 예수, 교리적 예수, 바로 그 예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매우 골때리는 저서인 것이다. (오마이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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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머시 존슨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게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 있는 예수〉
기자명 권성권  승인 2012.02.21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7021

▲<살아 있는 예수〉/ 루크 티머시 존슨 지음 / 손혜숙 옮김 / 청림출판 펴냄 / 268쪽 / 1만 4000원

18세기 계몽주의는 신학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에서 인간 예수로 분리해 내는 시도가 그렇다. 예수의 일생도 역사적인 관점으로 조명하는 붐이 일었다. 그로 인해 예수는 유대인 혁명가였고, 십자가에 처형되자 제자들이 그를 신격화했다는 주장도 폈다.


그것이 타당한 설득력을 얻었던 것일까? 그 뒤에는 사(四)복음서를 놓고서도 역사와 신화를 떼어 내는 연구가 진행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 싼 '역사적인'(historical) 부분과 '신화적인'(mythical)부분들을 분리시키는 작업이 그거였다.

왜 그런 신학적인 작업을 한 걸까? 고백의 차원에 머물던 신앙심에 회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존의 규명을 먼저 밝혀내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예수는 누구였는가?' 하는 것보다 '그 시대의 예수는 누구였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너무 앞서 나가면 본질에서 이탈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역사적 예수에 외골수로 매달린 신학자들은 대부분 예수를 유대 혁명자로 간주하며, 기독교는 초기 제자들이 만들어 낸 창작물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사(四)복음서도 초기 기독교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기 위해 쓴 '문학작품'이라고 항변한다.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 있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허점과 한계를 지적한 책이다. 이제까지 믿음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부인하고, 지난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가 성서 속에 있는 예수보다 더 믿을 만하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펀치를 날리는 격이다.

"최근 유사한 전제로 다시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도 복음서의 다양성을 없애려 한다. 이번에는 수세기 동안 신앙인에게 가장 가치 있었던 복음서의 특징, 즉 부활에 비추어 예수를 해석하고 증언하는 것이 '역사적 진리'에 부적합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학자들은 사실이라고 추측되는 '말씀'과 '행위'의 단면만을 그 설화에서 발굴해 낼 수 있으며, 그것만을 예수가 '정말로 누구였는가?'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런 재구성이야말로 '더욱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해석 구도를 적용시키지 않았으므로 사실과 더 일치하며, 불일치 요소가 제거되었으므로 더 일관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163쪽)."

이것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가들의 허점을 찌르는 대목이다. 케네디나, 히틀러나 테레사 수녀도 그렇지만, 역사적 예수를 인식하는 관점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필름 조각 더미가 한 편의 영화가 될 수가 없고, 짧은 에피소드를 수집한 것이 한 권의 소설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들은 예수를 하나의 모형으로만 확정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성경을 창밖으로 던지게 만드는 꼴이고, 신약성경의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는 모순을 범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존슨은 거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사(四)복음서에 기초한 예수에 집중하는 데 반해 그는 바울서신과 일반 서신도 눈여겨본다. 특별히 바울 서신 같은 경우는 기독교 초기에 기록된 믿을 만한 서신으로 예수 탐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확신한다.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건대 한 인물에 대한 탐구는 다양하다. 때로는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한다. 사실 예수에 관한 칭호도 선생, 메시아, 왕, 예언자, 제사장, 주님, 인자, 하나님의 아들, 말씀, 재판관, 보혜사, 증인, 친구 등 너무나 다양하지 않던가. 또한 예수에게 적용된 은유와 비유도 양, 목자, 문, 포도나무, 빛, 빵, 물, 피, 성전, 영, 닻, 돌, 건축가 등 복합적이다.

그런데 그런 호칭과 은유는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비친 예수의 모습이지, 예수가 그들에게 비추고자 한 건 아니었다. 예수가 갖고 있는 면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걸 요즘의 언론에 비추면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론이 항상 예수를 답한 것이지, 예수가 항상 언론에 답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구전과 전승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존슨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을 한 방 날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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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놀, 5070세대 온라인 놀이터로 시니어 사회문제 해결 앞장 < K글로벌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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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놀, 5070세대 온라인 놀이터로 시니어 사회문제 해결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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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위치K글로벌 리포트

기자명최정훈 기자
입력 2023.08.22 

신중년층 문화·여가·취미 커뮤니티 플랫폼 서비스
인공지능 가미해 MZ세대처럼 수용성 높여
해외교포 시작으로 시장확대 채비

[K글로벌타임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는 나라로 손꼽힌다. 노인 빈곤, 독거 노인, 고독사 등 언론보도를 통해 시니어 문제들이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지만 뚜렷한 해결책 없이 답보상태에 있다. 시니어에 속하는 5070세대들이 2,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이들을 위한 전용 커뮤니티는 전무한 실정이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지만 소외된 중년, 노인층들은 비활동성과 우울증 등 문제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시니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만남과 관계 형성이 더욱더 필요한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니어 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선 스타트업이 등장해 이목을 끌고 있다. 시놀은 '인생 하반기 건강한 에이징을 위해'를 표방하며 50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액티비티 가득한 커뮤니티를 조성하고 있다. 시놀은 시니어들을 위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해외 고객들을 위한 온라인 놀이터를 구현하는데도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김민지 시놀 대표 [사진=시놀]




다시 찾아온 청춘 꽃피우도록 기여

우리나라에는 MZ세대와 알파 세대를 합친 것 이상으로 시니어 세대가 많다. 국내 50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43%를 넘었다. 게다가 국내 노년 인구 중 53.3%는 싱글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시니어인데 중년,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점차 길어지는 노후로 인해 60대부터 100세까지 40년이라는 기간 동안 시니어들은 외로움과 고립감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 중 챙겨줄 사람이 없는 독신이나 이혼한 사람의 우울증 비율은 2배 가까이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년층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축소되고 사회관계 수준이 낮아지며 자연스레 여가활동의 범위도 한정되기 일쑤이다. 이는 정신건강과 삶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소지가 있다.

최근 이 같은 추세에서 등장한 '시니어 테크'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아도 건강 관리에 국한한 서비스만 떠오른다. '에이징 테크' 분야가 각광받고 있지만, 아직 액티브 시니어들이 활동할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서비스나 어르신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는 앱 등은 부재한 상황이다. 시놀의 가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배경이다.

시니어의 우울증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시놀'은 시니어 놀이터(놀자)의 약자이다. 5070 신중년들이 친구가 돼 서로 문화·여가·취미를 나누고, 제2의 인생을 찾도록 돕는 시니어 소셜벤처 기업이다.

김민지 시놀 대표는 "시니어 세대만을 위한 소셜 커뮤니티를 통해 비슷한 연령의 그들끼리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 돌봄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며, "이 일을 누군가는 나서서 해야하는데, 미래에셋증권 은퇴컨설팅 경력과 시니어 시장 이해도가 높은 저희 팀이 최적이라고 자신했다"고 밝혔다.

시놀은 단순 '시니어 데이팅'을 넘어 액티비티, 교육, 커머스, 컨시어지 등 시니어를 위한 'All-in-one' 시니어 라이프 스타일 커뮤니티 플랫폼 앱을 구축하고 있다.
[사진=시놀]




진정성 있는 시니어 문제 해결에 방점

시놀은 현재 '단짝찾기'와 여행, 교육, 문화, 건강 등 온·오프라인 취미 여가 '모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단짝찾기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주변 이성친구를 소개시켜 주는 서비스로, 온라인에서 부담없이 친구를 사귀고 대화할 수 있다. 핸드폰 번호로 3초 회원가입하게 되면 이용자는 '단짝 찾기' 메뉴에서 가까운 위치에 거주하며 관심사가 통하는 이성 친구를 추천받는다.

하루에 4명의 친구를 무료로 확인할 수 있으며, 구독권을 결제하면 매일 친구 10명 소개와 대화 무제한, 나에게 관심 있는 친구 보기 기능 등이 활성화된다. 특히 온라인상의 만남 주선이다 보니 매칭 전 상대방의 관심사와 나이, 직업, 종교, 결혼 상태, 음주량 등을 먼저 확인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짝이 나타나면 상대방에게 편지를 보내 관심을 표할 수 있으며, 이를 수락하면 매칭돼 대화로 이어진다.

또한 이달 론칭한 '모임'은 내 위치 주변의 관심 있는 모임을 검색하고 참여해 자연스럽게 소속감과 신체 건강을 얻을 수 있는 서비스다. 누구나 모임장이 돼 재능을 맘껏 공유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활동하며 소득 창출의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건강한 인생 하반기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한다.

모임은 8월 초 출시 이후 누적 앱 다운로드 3만건,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 7,000여명을 기록하는 등 흥행을 예고하고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본인인증' 대신 ‘인공지능(AI) 실시간 안면 인식 사진 검증’으로 이용 장벽을 낮춰 50세이상 회원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이 시놀의 설명이다.

회원 성비는 남성 75%, 여성 25%다. 모임 메뉴를 통해 5070 누구나 운동이나 와인, 친목, 봉사활동 등 원하는 주제의 소모임을 개설할 수 있다. 모임장을 통해 자율 운영되며, 모임장은 재능을 기부하며 정기적인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시놀은 수월한 모임 운영을 위해 대관·홍보·정산 지원은 물론, 모임장 양성 교육도 운영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앱을 통해 자발적으로 생성된 모임은 벌써 100여개에 달한다. 가까운 거리에서 정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모임에 참여해 취미, 여가를 즐기는 회원이 많아지면서 모임 수 역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여성 회원들의 모임 참여도, 앱 활동성이 증가하는 분위기라는 것이 시놀의 분석이다.
'디캠프 디데이' 행사에서 시놀 IR 피칭하는 김민지 대표 [사진=시놀]




글로벌 시니어 고객에게 접근 박차

해외에서는 매치닷컴(Match.com) 등 시니어 데이팅 및 액티비티 서비스들을 통해 디지털 기반의 시니어 타겟 서비스가 개발 및 확산되는 추세이다.

시놀 또한 글로벌 시니어 고객을 유치할 목표로 해외시장 공략을 추진 중이다. 시놀은 1차적으로 현지시장 공략보다는 해외교포를 대상으로 한국어 앱 서비스를 릴리즈 할 계획이다. 연말 20개국으로 앱 배포 지역을 확대하고, 국가별 반응을 토대로 최소 실행 가능한 번역 제품(MVP, Minium Viable Product)을 가지고 해외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

시놀은 아직 서비스 1년차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유저 테스트를 통해 Product Market Fit을 찾아가는 것에 공을 들이고 있다. 아직 앱의 유료 결제자는 월 600여명 정도이고, 더 쉬운 이체 결제방법을 제공하는 것과 높은 사용 만족도를 제공할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K글로벌타임스 최정훈 기자] paraclitu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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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4

Quaker Testimony: What We Witness to the World - Friends Journal

Quaker Testimony: What We Witness to the World - Friends Journal

Quaker Testimony: What We Witness to the World

By Paul Buckley. Pendle Hill Pamphlets (number 481), 2023. 34 pages. $7.50/paperback or eBook.

“So you want to learn more about Quakerism?” I used to tell newcomers: find a Quaker, follow her around and watch how she lives. Paul Buckley has given us the Pendle Hill pamphlet we have been waiting for: one that rightly describes Friends testimony as the witness of our lives, 24/7.

The first part of the pamphlet describes the historic role of Quaker testimony. 

For early Friends, a testimony was “an act that publicly witnesses or testifies to an aspect of our most basic spiritual beliefs;

 it is an outward expression of something that the Inward Light has revealed to an individual or a group of people.” Buckley describes five characteristics specific to a Quaker testimony:

  1. It originates with a divine leading, not something we think is a good idea.
  2. It is a consistent public behavior, not an occasional or private action.
  3. It is communal behavior, not just personal.
  4. It is a challenge to act outside one’s comfort zone, and for others because it challenges their assumptions and normal conventions.
  5. It is rooted in God’s love for us and our love for the deep well-being of others.

Under persecution, it was obvious who was a Quaker and who was not. But after the 1689 Toleration Act, it became easier for someone to claim to be a Quaker while not having to do anything unpopular or difficult. In the eighteenth and early-nineteenth centuries, strict rules of behavior were codified: no longer to mark the frontier of the Lamb’s War but as a boundary between Friends and non-Friends. The rules became like a creed for Quakers. But as major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changes multiplied—especially after the U.S. Civil War—these archaic rules broke down and were largely abandoned. The inner spiritual truth behind them had long since evaporated for most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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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most Friends are familiar with SPICES, an acronym for a basket of Quaker testimonies. There is no official definition, but often the letters are taken to stand for simplicity, peace, integrity, community, equality, and stewardship/sustainability. 

Apparently the acronym began in the 1990s as a teaching tool for children (although the idea to single out Friends’ social principles into a list originated over 40 years earlier with Howard Brinton), especially to help non-Friends in Quaker schools get a handle on “Quaker values.” Buckley points out that “values are things we decide on. Testimonies are products of the Inward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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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ngers of emphasizing SPICES rather than testimony is that the former become a secular creed: the easy answer to the question, what do Quakers believe? SPICES do not need spiritual roots. They are generally acceptable to nearly anyone and are not distinctly Quaker. In effect, SPICES dumbs down Quakerism.

Instead of a vibrant faith based on listening for guidance from the Divine, it is a list of things to do. Instead of the traditional aim to be faithful, SPICES encourages us to be task-oriented, to achieve successful results. Everything Friends stand for has to be shoe-horned into one of these words, or we need to add more letters. Finally, by assuming the SPICES are the sum total of Quaker life, we constrict our vision of spiritual gifts. Above all, where is love in the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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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testimony is our life; let our lives speak.

When necessary, use words. This pamphlet is highly recommended for every meeting to read and consider together. Discussion questions are included.


Marty Grundy is a member of Wellesley (Mass.) Meeting and has been trying for years to relay the message in this pamphlet to Friends.

이병철 - -연하장을 발송하다

이병철 - -연하장을 발송하다/ 어제 오후에 우체국에 가서 지인들에게 올해의 연하장을 보냈다. 다른 해보다 훨씬... | Facebook



이병철
17 m ·



-연하장을 발송하다/
어제 오후에 우체국에 가서 지인들에게 올해의 연하장을 보냈다. 다른 해보다 훨씬 빠르게 보낸 것인데, 평소 정원님과 둘이 하던 일을 마침 휴가차 집에 와 있던 막내가 거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새해 초에 판화 형태의 연하장을 직접 만들어 보내기 시작했던 것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햇수로는 거의 50여 년에 가까운 것 같다. 결혼 전부터인데, 내 기억으로는 76년부터라 싶다. 이 연도를 기억하는 것은 이 해가 내 생애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 해라 싶기 때문이다.
75년 이른 봄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다가 농민운동을 그 길로 선택하고 뛰어든 해가 그 해부터였는데, 그 해의 초에 고무판에 그림을 새기고 엽서에 탁본하듯이 먹물로 찍어 보냈던 것이 그 처음이었으리라 싶다.
연하장 작업을 고무판에서 목판으로 바꾼 것은 80년, 결혼한 이후인데, 그 뒤로 한동안은 목판에 그림을 새겨 찍은 판화에 붓글씨로 써서 연하장을 만들어 보냈다.
정원님의 기억에 의하면 내 연하장 그림과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것은 89년부터라고 하는데, 이 해부터 연하장의 그림 내용이 바뀌고 색채도 검정에서 채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연하장은 나도 기억한다. 연꽃을 새기고 붉은색을 입힌 판화였다. 홍련(紅蓮)을 새겨 보낸 것이다. 그동안 투쟁적이거나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표현한 그림 대신에 처음으로 꽃이 등장한 것이었다. 내가 기존의 운동에서 이른바 생명운동으로 전환(?)한 시점도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87년은 아마도 내 생애에서 가장 치열했던 때라 여겨지는데,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조직을 책임지고 있던 나는 백성(民)이 나라의 주요 의제를 직접 결정하는 체제를 꿈꾸었고 이는 결국 단일화의 실패로 좌절되면서 사회운동에서의 은퇴를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와 일 년 넘게 칩거하며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새롭게 모색했고 그런 모색 끝에 다다른 것이 생명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설명이 필요한데, 언젠가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래서 그 때부터 연하장의 형태도, 내용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내 연하장에서 그림 대신에 글씨로 바뀐 것은 2,000년대를 지난 뒤라 싶다. 모자라는 솜씨에 그림을 새긴다는 것이 갈수록 부담스러워 쉽고 편하게 한다고 글씨로 바꾸었다고 하겠는데, 글씨로 사자성어 등을 새기면 한 해의 메시지를 훨씬 더 쉽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또한 귀찮다는 생각에 글자 한 자를 새기기 시작했던 것도 어느새 십수 년에 이른 것 같다.
 
해마다 연초에 새해를 품어갈 한 글자를 써서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그동안 새겨 보낸 글자가 올해의 비(悲 24년), 성(省 23년), 성(醒 22년), 지(止 21년), 공(共 20년), 서(恕 19년) 등인데, 올해의 비(悲)와 함께 하는 '자(慈)'를 새겨보낸 해가 2014년이니, ‘자(慈)’와 ‘비(悲)’가 하나임을 깨닫는 것에 10년이 걸렸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싶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가 하는 것은 우리 가족들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런 내가 거의 오십여 년 가까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하장을 만들어 보내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가족들도 신기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사실 나도 연말이 되면 인제 그만두어야지 하는 생각을 갈수록 더 하게 된다.
연하장을 한 장 한 장 목판으로 찍고 글씨를 써서 만들어 보내는 작업이 품과 시간이 여간 걸리는 게 아니다. 연말과 연초를 온통 이 일에 매달리다시피 해야 한다.
글자를 새긴 목판에 잉크를 묻히고 한지를 덮고 숟가락으로 문질러서 한 장씩 찍는 작업은 오래전부터 공부모임 도반들이 함께해주고 있지만 그 위에 다시 무언가를 쓰고 우편으로 발송하는 작업은 우리 내외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귀찮고 힘겹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없지도 않다. 그래서 매번 연하장 보내는 것은 올해로 마지막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리 계속해온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백수로 살아온 내가 신세 진 이들에게 그 고마움을 표현할 다른 마땅한 방법이 없이 이렇게라도 한 해의 인사를 대신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내가 직접 연하장을 만들어 보내는 일을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다. 좀 귀찮더라도 이렇게 연하장을 만들어 보낼 지인들이 있고, 아직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이 또한 감사하고 즐거운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찍는 것이 한정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시 그동안 내 연하장을 받았는데, 왜 올해는 보내지 않는가 하고 서운해하는 이들이 계신다면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내가 깜빡했을 수도 있고, 만든 연하장이 모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한다는 의미가 갈수록 각별하게 느껴진다. 해가 바뀐다는 것이 그냥 달력 상의 바뀜만이 아님이 절실히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곧 우주적 사건임이 몸으로도 경험되는 것이다.
해마다 한 해를 품어갈 한 글자와 그 글자에 담은 새해의 서시 한 편을 이번 생의 고마운 이들과 나눌 수 있어 고맙고 기쁘다.
올 한해, 함께 품어가자고 했던 '비(悲)'를 새삼 생각한다.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한다면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을.
아침에 연하장에 관한 생각이 들어 함께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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