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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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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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諸子百家, 영어Hundred Schools of Thought) 또는 현상적 표현인 백가쟁명(百家爭鳴, 영어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여러 사상가와 그 학파를 말한다.
주나라(周)가 동으로 천도한 후의 동주(東周: 기원전 771~256) 시대에서는 종주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세력을 추구하면서 거리낌이 없어져서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국 천하는 소란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기원전 221년의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를 뜻한다. 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 경제 · 정치상의 일대 변혁기였다. 이는 씨족제적인 사회의 해체기이며, 주나라의 봉건 제도와 그에 따르는 질서가 붕괴하는 시기이며, 또한, 경제적 · 군사적 실력주의의 대두기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조의 권위 실추에 따르는 제후의 독립과 대립 항쟁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중국의 사상계는 최초로 활발해졌다.

전개[편집]

춘추 시대 (기원전 770~[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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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자의 사상의 근원은 오래전의 은나라 · 주나라 시대의 민족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나라 시대에는 자연적 인간에 있어서 모든 현상은 천명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어졌으며, 군주는 이 천명을 주술에 의해 예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주나라 초기의 주공(周公)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후천적인 수양 등에 의해 어느 정도 바뀔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독자적인 (禮)의 문화에 대한 기초를 만들었다. 공자는 이러한 (禮)의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여 발전시켜 유교의 기초를 이룩했다.

전국 시대 (기원전 403~221)[편집]

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 중 기원전 260년의 전국 칠웅(燕) · (魏) · (齊) · (趙) · (秦) · (楚) · (韓)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항쟁을 이겨내고 강자로 생존해 나가는 것을 우선하는 제후국들의 요청에 응하기 위하여, 또는 여러 가지로 면모를 바꾸고 있는 다양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하여 여러 유파의 많은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크게 유가(儒家) · 묵가(墨家) · 도가(道家) · 음양가(陰陽家) · 명가(名家) · 종횡가(縱橫家) · 법가(法家) · 잡가(雜家) · 농가(農家)의 9유파(流派)로 나뉘었는데, 바야흐로 백가쟁명의 중국 사상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초기[편집]

전국시대의 초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는 묵가(墨家)의 시조인 묵자(墨子)이다. 그는 철저한 혁신론 · 실리주의를 제창하여 유교의 (禮)와 그 번잡함을 비판하고 겸애(兼愛: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 · 상현(尙賢: 문자 그대로는 "어진 사람을 존경함", 반귀족적 인재등용론[1]· 절용(節用: 절약하여 아껴 씀) 등을 가르쳤다.

중기[편집]

전국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는 유가(儒家)의 맹자(孟子)와 도가(道家)의 장자(莊子)이다.
이 당시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는 제나라(齊)의 서울이었던 임치(臨淄)의 직하(稷下)였다.
맹자는 직하에서 논리적인 변론술을 습득하고 묵가의 사상에 대해 반론을 폈으며, 유교를 되살려 패도를 배제하고 왕도를 가르쳤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여 성선설(性善說)을 전개했다.
장자는 사색의 대상을 자연계에서 구해, 위대한 자연을 지배하고 규율하는 (道)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직관에 의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후기[편집]

전국시대 후기에 진나라(秦)가 부국강병을 이루고 동쪽으로 정벌을 나설 본격적인 자세를 가다듬어갈 무렵, 학문과 사상에서도 객관성 · 실효성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유가의 순자(筍子)와 법가의 한비자(韓非子)이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제창하고, 인간의 한 본성을 바르게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禮)를 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이 때의 (禮)는 (法)에 가깝다.
한비자는 순자의 (禮)를 법률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에 있어서 개념과 결과의 일치를 구하고 군주의 에 의한 국가의 통제 · 유지 방법을 논하여, 장차 성립될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취할 통치 체제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주었다.

진·한 이후 (기원전 221~)[편집]

진나라(秦) · 한나라(漢) 제국의 성립기에는 법가의 사상이 중용되었다. 그러나 한나라(漢)의 성립 후인, 전한 무제 때에 유교가 관학이 되면서 그 이후로는 유가가 중국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고 이러한 경향은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구류십가[편집]

사기(史記)》에서는 제자백가를 음양가(陰陽家) · 유가(儒家) · 묵가(墨家) · 명가(名家) · 법가(法家) · 도가(道家)의 6가로 분류하였다.
반면, 《한서(漢書)》 〈예문지〉에서는 《사기》의 6가에 종횡가(縱橫家) · 잡가(雜家) · 농가(農家) · 시부가(詩賦家) · 병가(兵家) · 수술가(數術家) · 방기가(方技家)의 8가를 추가하여 14가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한서》 〈예문지〉에서는 제자백가 중 대표적인 10개의 학파를 구류십가(九流十家)라고 부르고 있다. 구류십가는 유가(儒家) · 도가(道家) · 음양가(陰陽家) · 법가(法家) · 명가(名家) · 묵가(墨家) · 종횡가(縱橫家) · 잡가(雜家) · 농가(農家)의 구류(九流)에 소설가(小說家)를 더한 것이다. 즉, 소설가를 제외한 9학파는 "가(家)"와 "류(流)" 모두에 들어가지만 소설가는 "가(家)"에는 들어가지만 "류(流)"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구류십가(九流十家)
  1. 유가(儒家) - 공자 · 맹자 · 순자
  2. 도가(道家) - 노자 · 열자 · 장자
  3. 음양가(陰陽家) - 추연 · 추석
  4. 법가(法家) - 관중 · 상앙 · 신불해 · 한비자
  5. 명가(名家) - 등석 · 혜시 · 공손룡
  6. 묵가(墨家) - 묵자 · 별묵
  7. 종횡가(縱橫家) - 귀곡자 · 소진 · 장의
  8. 잡가(雜家) - 여불위 · 유안
  9. 농가(農家) - 허행
  10. 소설가(小說家) - 육자 · 청사자

주요 학파의 사상[편집]

제자백가들은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위기를 구하려는 의도와 목적 아래서 일어난 것이며, 철학사상에 특히 기여한 것은 유가 · 도가 · 묵가 · 법가 · 명가이다.
이 밖에는, 강병책(强兵策)을 편 손무(孫武)와 오기(吳起)가 걸출하였고 손빈과 범려도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병가에 속한다.

유가[편집]

공자 초상: 당나라의 오도자 작
유가는 유교 · 유학 · 공교(孔敎)라고도 불린다. 유가는 공자(孔子)를 시조로 중국의 전통적인 정교일치(政敎一致) 사상을 받들고, (仁)의 도덕을 최고 이념으로 하여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 · 정치학으로서, 동양 철학사상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공자의 (仁)은 인간심정에 고유한 자애(慈愛)의 마음을 확충하는 것,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완전한 인격을 이룬 경지이다. (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 애인)으로, 그 발단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 자애(慈愛)로부터 시작하며, 나아가서는 형제 · 가정 · 사회 · 국가 · 인류에게까지 미치는 인도(人道: 사람의 길)이며,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한다. 공자는 인도(人道)를 닦아서 천도(天道)에까지 이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강조하였다.
공자의 (仁)은 부처의 자비(慈悲)나 예수의 박애(博愛)와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는 (德)이지만, 어디까지나 윤리로서의 인도(人道)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공자는 종교인과는 달리 현생(現生)의 삶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공자와 자사(子思)를 이은 맹자(孟子)는 공자의 를 근본으로 하여 그 의의를 재서술하고 보충하였다. 그는 성선설(性善說)에 의한 4덕(四德)과 4단(四端)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  ·  · (仁義禮智)의 고유한 이 있다고 하였다. 또 선천적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을 주장하고, 또 인의의 정치 즉 왕도(王道)로써 치국 · 평천하를 이룰 것을 강조하였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순자(荀子)가 나와 역시 공자를 이었으며, 그는 특히 (禮)로써 혼란한 천하를 질서있게 바로잡으려 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맹자와 순자는 도덕뿐만 아니라 경세사상을 부르짖음으로써 왕도정치에 있어 인민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유가의 경전(經傳)으로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의 4서와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춘추(春秋)》의 5경이 있다.

도가[편집]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물소를 타고 주나라를 떠났다[2]
장자의 나비의 꿈
도가는 황로학(黃老學) 또는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한다. 도가의 시조인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禮樂: 예법과 음악), 형정(刑政: 정치와 형벌, 정치와 행정)의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어린 아이의 천진성으로 복귀하여 무위자연의 사회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노자의 이른바 도덕(道德)은 보통 말하는 도덕(Virtue)이 아니고, 유가의 이른바 인의(仁義)라는 도덕의 상위개념으로서 (道, Tao)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는 형이상학적 본체임과 동시에 인성론(人性論)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뒤이어 전국시대에서는 장자(莊子)가 나와 도가철학의 인식론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만물제관(萬物齊觀) · 시비양행론(是非兩行論)을 주창하고 가치의 전환을 부르짖음으로써 평등 · 자유 · 무욕을 강조했다.
열자(列子)는 노자를 이어 형이상학적으로 기화(氣化)를 상세히 논하고, 허무청정(虛無淸淨) · 전성보전(全性保眞)을 주장함으로써 신비적 · 은둔주의적 철학 사상으로 기울어졌으며, 이 계통에 있는 양주(楊朱)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이기쾌락주의(利己快樂主義)적인 독선에 빠졌다.
유가가 중국 고래의 전통적인 적극적인 면을 계승하여 형성된 것과 반대로 도가는 그 소극적인 면을 이어 무위자연의 사상체계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도교(道敎, Taoism)는 후한(後漢) 때 노자를 천존(天尊)으로 받들어 조직한 종교이지만, 도가 자체는 종교가 아니다.

묵가[편집]

묵가는 묵자(墨子)를 시조로 하며,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유가의 형식주의와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하늘(天)이 만민을 겸애(兼愛: 박애의 뜻)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서로 겸애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리사욕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절검(節儉)과 근로(勤勞)를 내세웠다.
묵가는 천귀사상(天鬼思想)을 중심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었으며, 또 삼표(三表)의 논리로써 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이 경향은 후세 별묵(別墨)이라 불리며, 논리학파인 사공파(事功派)로 분파되었고, 사공파는 다시 전도파(傳道派) · 실행파(實行派) 및 기타로 나뉘었다. 실행파는 묵자의 역행주의(力行主義)를 이어 허행(許行) · 진상(陳相) 등의 철저한 무정부주의 · 사회주의 · 무위자연의 사상으로 흘렀다.

법가[편집]

상앙(商鞅) 상
법가는 관자(管子)를 시조로 하는 학파로,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을 거쳐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법가는 정치철학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어 천하통일을 도모하려는 학파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법가는 엄격한 법치주의가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3] 법가는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法)과 (術)이라고 주장하였다.[3] 법가에서 말하는 (法)은 군주가 정하는 규범을 뜻하며 (術)은 을 행하는 수단을 뜻한다.[3]
관자는 공리(功利)와 법치(法治)를 겸한 사상가이며 또 실행가였다. 신불해는 패도(覇道)의 (術)에 밝고, 상앙(商鞅)은 패도의 (法)에 뛰어났으며, 이 (術)과 (法)은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종합되어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으로 완성되었다. 한비자의 학은 유가 · 도가 · 법가의 사상을 종합으로써 이루어졌다.

명가[편집]

명가는 논리학파이며, 주요 사상가로는 등석(鄧析) · 혜시(惠施) · 공손룡 · 윤문(尹文) · 별묵(別墨) 등이 있다.
명가는 (名)과 (實), 즉 개념과 대상의 불일치를 교정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등석은 양가지설(兩可之說), 즉 이율배반율(二律背反律)과 무궁의 사(無窮之辭)로써 유명하며, 혜시는 변설(辯說)로써 만물평등을 주장했으며, 공손룡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으로 유명하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세계사 > 인류 문화의 시작 > 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 >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 묵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Renard, (2002), p.16
  3. ↑ 이동:   세계사 > 인류 문화의 시작 > 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 >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 법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제자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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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子百家

1. 개요2. 제자백가 일람3. 관련 서적

1. 개요[편집]

동주시대, 특히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생겨난 다수의 사상가들을 일컫는다. 제자백가(諸子百家)란, 여러 선생(~자)들이 백여명이나 된다는 뜻으로, 실제 전적에 남아있는 제자백가의 사상가 수는 무려 200명에 육박한다. 사실 원래 이 쪽 단어에선 '백'이나 '천', '만' 등의 숫자를 그냥 막연하게 많다는 뜻으로 쓰는 경향이 많긴 하지만.

하필이면 왜 이 시기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주나라의 종법제적 규범이 완전히 무너지고, 기존의 지배층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그 몰락한 지배층들의 일파가 자신이 익힌 지식을 활용하여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쓴 결과로 풀이된다. 쉽게 말해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대를 도대체 어떻게 멈출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사상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중에서 유력한 능력을 보였던 사람들이 제자백가인 것이다.

사실 동주 당시에는 유가와 묵가의 명칭밖에 없었으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 그리고 《칠략》을 지은 유향과 같은 서한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 보는 "~가"의 명칭이 생기고 분류되었다. 아래의 표에 나온 분류 역시 후세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생긴 분류이기 때문에, 유가 정도를 제외하면 아래에서 "~가"로 묶인 사람들의 사상이 전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본래 구류(九流)라 하여 '소설가'를 제외했으나, 훗날 소설가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십가(十家)'라고도 부른다. 흔히 '삼교구류(三敎九流)'라 하여  삼교를 포함한 중국 철학의 대표로 꼽힌다.

물론 유가와 도가를 포함한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들도 약 2500년이 지난 현대 동아시아인들에 의해서 엄연히 사용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독서삼품과는 유학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로 채용하기 위한 제도였으며 비록 골품제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5경 3사 및 제자백가에 능통한 자는 순서를 뛰어넘어 특품으로 등용 한다는 내용이 있을정도 였다.

2. 제자백가 일람[편집]

3. 관련 서적[편집]

[1] 오늘날 편의상 도가로 분류하지만, 실제로는 도가 측에 위아론이라고 비판받은 인물이다. 장자의 기록에도 등장하여 공자처럼 허구로 장자와 대화하다가 (말발에) 쳐발리고 까이던 인물로 묘사될 정도라 도가에서는 무시당하는 입장이다.[2] 본명은 전양저(田穰苴)로 사마는 그가 한 벼슬 이름이었다.[3] 증자, 자사 계열 유가[4] 자하 계열 유가[5] 주나라의 사관으로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고, 대대례의 보부편에서 그의 기록을 인용하였다는 것만 짧게 있다.

Hundred Schools of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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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dred Schools of Thought
Traditional Chinese諸子百家
Simplified Chinese诸子百家
Birth places of notable Chinese philosophers from Hundred Schools of Thought in the Zhou dynasty.
The Hundred Schools of Thought (Chinese諸子百家pinyinzhūzǐ bǎijiā) were philosophies and schools that flourished from the 6th century to 221 B.C. during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and the Warring States period of ancient China.[1]
An era of great cultural and intellectual expansion in China,[2] it was fraught with chaos and bloody battles, but it was also known as the Golden Age of Chinese philosophy because a broad range of thoughts and ideas were developed and discussed freely. This phenomenon has been called the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 (百家爭鳴/百家争鸣; bǎijiā zhēngmíngpai-chia cheng-ming; "hundred schools contend"). The thoughts and ideas discussed and refined during this period have profoundly influenced lifestyles and social consciousness up to the present day in East Asian countries and the East Asian diaspora around the world. The intellectual society of this era was characterized by itinerant scholars, who were often employed by various state rulers as advisers on the methods of government, war, and diplomacy.
This period ended with the rise of the imperial Qin dynasty and the subsequent purge of dissent.

Schools listed in the Shiji[edit]

A traditional source for this period is the Shiji, or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by Sima Qian. The autobiographical section of the Shiji, the "Taishigong Zixu" (太史公自序), refers to the schools of thought described below.

Confucianism[edit]

Confucianism (儒家; RújiāJu-chia; "School of scholars") is the body of thought that arguably had the most enduring effects on Chinese life. Its written legacy lies in the Confucian Classics, which later became the foundation of traditional society. Confucius (551–479 BC), or Kongzi ("Master Kong"), looked back to the early days of the Zhou dynasty for an ideal socio-political order. He believed that the only effective system of government necessitated prescribed relationships for each individual: "Let the ruler be a ruler and the subject a subject". Furthermore, he contended that a king must be virtuous in order to rule the state properly. To Confucius, the functions of government and social stratification were facts of life to be sustained by ethical values; thus his ideal human was the junzi, which is translated as "gentleman" or "superior person".
Mencius (371–289 BC), or Mengzi, formulated his teachings directly in response to Confucius.
The effect of the combined work of Confucius, the codifier and interpreter of a system of relationships based on ethical behavior, and Mencius, the synthesizer and developer of applied Confucianist thought, was to provide traditional Chinese society with a comprehensive framework by which to order virtually every aspect of life.
There were many accretions to the body of Confucian thought, both immediately and over the millennia, from within and without the Confucian school. Interpretations adapted to contemporary society allowed for flexibility within Confucianism, while the fundamental system of modeled behavior from ancient texts formed its philosophical core.
Diametrically opposed to Mencius, in regards to human nature (性), was the interpretation of Xunzi (c. 300–237 BC), another Confucian follower. Xunzi preached that man is not innately good; he asserted that goodness is attainable only through training one's desires and conduct.

Legalism[edit]

The School of Law or Legalism (法家; FǎjiāFa-chia; "School of law") doctrine was formulated by Li KuiShang Yang (d. 338 BC), Han Feizi (d. 233 BC), and Li Si (d. 208 BC), who maintained that human nature was incorrigibly selfish; accordingly, the only way to preserve the social order was to impose discipline from above, and to see to a strict enforcement of laws. The Legalists exalted the state above all, seeking its prosperity and martial prowess over the welfare of the common people.
Legalism greatly influenced the philosophical basis for the imperial form of government. During the Han Dynasty, the most practical elements of Confucianism and Legalism were taken to form a sort of synthesis, marking the creation of a new form of government that would remain largely intact until the late 19th century.

Taoism[edit]

Philosophical Taoism or Daoism (道家; DàojiāTao-chia; "School of the Way") developed into the second most significant stream of Chinese thought. Its formulation is often attributed to the legendary sage Laozi ("Old Master"), who is said to predate Confucius, and Zhuangzi (369–286 BC). The focus of Taoism is on the individual within the natural realm rather than the individual within society; accordingly, the goal of life for each individual is seeking to adjust oneself and adapting to the rhythm of the natural (and the supernatural) world, to follow the Way (tao) of the universe, and to live in harmony. In many ways the opposite of rigid Confucian morality, Taoism was for many of its adherents a complement to their ordered daily lives. A scholar serving as an official would usually follow Confucian teachings, but at leisure or in retirement might seek harmony with nature as a Taoist recluse. Politically, Taoism advocates for rule through inaction, and avoiding excessive interference.

Mohism[edit]

Mohism or Moism (墨家; Mòjiā; Mo-chia; "School of Mo") was developed by followers of Mozi (also referred to as Mo Di; 470–c.391 BC). Though the school did not survive through the Qin dynasty, Mohism was seen as a major rival of Confucianism in the period of the Hundred Schools of Thought. Its philosophy rested on the idea of impartial care (Chinese: 兼愛; pinyin: Jian Ai; lit.: 'inclusive love/care'): Mozi believed that "everyone is equal before heaven", and that people should seek to imitate heaven by engaging in the practice of collective love. This is often translated and popularized as "universal love", which is misleading as Mozi believed that the essential problem of human ethics was an excess of partiality in compassion, not a deficit in compassion as such. His aim was to re-evaluate behavior, not emotions or attitudes.[3] His epistemology can be regarded as primitive materialist empiricism; he believed that human cognition ought to be based on one's perceptions – one's sensory experiences, such as sight and hearing – instead of imagination or internal logic, elements founded on the human capacity for abstraction.
Mozi advocated frugality, condemning the Confucian emphasis on ritual and music, which he denounced as extravagant. He regarded offensive warfare as wasteful and advocated pacifism or at the most, defensive fortification. The achievement of social goals, according to Mozi, necessitated the unity of thought and action. His political philosophy bears a resemblance to divine-rule monarchy: the population ought always to obey its leaders, as its leaders ought always to follow the will of heaven. Mohism might be argued to have elements of meritocracy: Mozi contended that rulers should appoint officials by virtue of their ability instead of their family connections. Although popular faith in Mohism had declined by the end of the Qin Dynasty, its views are said to be strongly echoed in Legalist thought.

School of Yin-yang[edit]

The School of Naturalists or Yin-yang (陰陽家/阴阳家; YīnyángjiāYin-yang-chia; "School of Yin-Yang") was a philosophy that synthesized the concepts of yin-yang and the Five ElementsZou Yan is considered the founder of this school.[4] His theory attempted to explain the universe in terms of basic forces in nature: the complementary agents of yin (dark, cold, female, negative) and yang (light, hot, male, positive) and the Five Elements or Five Phases (water, fire, wood, metal, and earth). In its early days, this theory was most strongly associated with the states of Yan and Qi. In later periods, these epistemological theories came to hold significance in both philosophy and popular belief. This school was absorbed into Taoism's alchemic and magical dimensions as well as into the Chinese medical framework. The earliest surviving recordings of this are in the Ma Wang Dui texts and Huangdi Neijing.

Logicians[edit]

The School of Names or Logicians (名家; MíngjiāMing-chia; "School of names") grew out of Mohism, with a philosophy that focused on definition and logic. It is said to have parallels with that of the Ancient Greek sophists or dialecticians. The most notable Logician was Gongsun Longzi.

Schools listed in the Hanshu[edit]

In addition to the above six major philosophical schools within the Hundred Schools of Thought, the "Yiwenzhi" of the Book of Han adds four more into the Ten Schools (十家; Shijia).

School of Diplomacy[edit]

The School of Diplomacy or School of Vertical and Horizontal [Alliances] (纵横家縱橫家Zonghengjia) specialized in diplomatic politics; Zhang Yi and Su Qin were representative thinkers. This school focused on practical matters instead of any moral principle, so it stressed political and diplomatic tactics, and debate and lobbying skill. Scholars from this school were good oratorsdebaters and tacticians.

Agriculturalism[edit]

Agriculturalism (农家農家Nongjia) was an early agrarian social and political philosophy that advocated peasant utopian communalism and egalitarianism.[5] The philosophy is founded on the notion that human society originates with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e, and societies are based upon "people's natural propensity to farm."[6]
The Agriculturalists believed that the ideal government, modeled after the semi-mythical governance of Shennong, is led by a benevolent king, one who works alongside the people in tilling the fields. The Agriculturalist king is not paid by the government through its treasuries; his livelihood is derived from the profits he earns working in the fields, not his leadership.[7]
Unlike the Confucians, the Agriculturalists did not believe in the division of labour, arguing instead that the economic policies of a country need to be based upon an egalitarian self sufficiency. The Agriculturalists supported the fixing of prices, in which all similar goods, regardless of differences in quality and demand, are set at exactly the same, unchanging price.[7]
For example, Mencius once criticized its chief proponent Xu Xing for advocating that rulers should work in the fields with their subjects. One of Xu's students is quoted as having criticized the duke of Teng in a conversation with Mencius by saying:
"A worthy ruler feeds himself by ploughing side by side with the people, and rules while cooking his own meals. Now Teng on the contrary possesses granaries and treasuries, so the ruler is supporting himself by oppressing the people."

Syncretism[edit]

Syncretism, or the School of Miscellany (杂家雜家Zajia) integrated teachings from different schools; for instance, Lü Buwei found scholars from different schools to write a book called Lüshi Chunqiu cooperatively. This school tried to integrate the merits of various schools and avoid their perceived flaws. The (c. 330 BC) Shizi is the earliest textual example of the Syncretic School.

School of "Minor-talks"[edit]

The School of "Minor-talks" (小说家小說家Xiaoshuojia) was not a unique school of thought. Indeed, all the thoughts which were discussed by and originated from non-famous people on the street were included in this school. At that time, there were some government officials responsible for collecting ideas from non-famous people on the street and report to their senior. These thoughts formed the origin of this school. This also explains its Chinese name, which literally means "school of minor-talks".

Unlisted schools[edit]

These schools were not listed in the Hanshu but did have substantial influence.

School of the Military[edit]

Another group is the School of the Military (兵家Bingjia) that often studied and discussed about what westerners called Philosophy of war. Some of them studied warfare and strategy, others focused on kinds and skills of weapons. Sun Tzu and Sun Bin were influential leaders. Some of their famous works are Sun Tzu's The Art of War and Sun Bin's Art of War. Their theories influenced the later China and even the East Asia greatly. They work well in many ways in the modern day.

Yangism[edit]

Yangism was a form of ethical egoism founded by Yang Zhu. It was once widespread but fell to obscurity before the Han dynasty. Due to its stress on individualism, it influenced later generations of Taoists.

School of the Medical Skills[edit]

School of the Medical Skills (方技家Fangjijia) is a school which studied Medicine and health. Bian Que and Qibo were well-known scholars. Two of the earliest and existing Chinese medical works are Huangdi Neijing and Shanghan Lun.

History and origins[edit]

The "Yiwenzhi" of the Hanshu claims that the officials working for the government during the early Zhou Dynasty lost their position when the authority of the Zhou rulers began to break down in the Eastern Zhou period. In this way, the officials spread all over the country and started to teach their own field of knowledge as private teachers. In this way the schools of philosophy were born. In particular, the School of Scholars (i.e. the Confucian School) was born from the officials of the Ministry of Education; the Taoists from the historians; the Yin-yang School from the astronomers; the Legalist School from the Ministry of Justice; the School of Names from the Ministry of Rituals; the Mohist School from the Guardians of the Temple; the School of Diplomacy from the Ministry of Embassies; the School of Miscellany from the government counselors; the School of Agriculture from the Ministry of the Soil and Wheat; the School of Minor Talks from the minor officials. Although the details are unclear, the burning of books and burying of scholars during the Qin was the end of the period of open discussion.
It should be stressed that only the Ru, or Confucians and the Mohists were actual organized schools of teachers and disciples during this period. All the other schools were invented later to describe groups of texts that expressed similar ideas. There was never an organized group of people describing themselves as "Legalists," for example, and the term "Daoist" was only coined in the Eastern Han after having succeeded the Western Han's Huang-Lao movement.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 "Chinese philosophy", Encyclopædia Britannica, accessed 4/6/2014
  2. ^ Graham, A.C., Disputers of the Tao: Philosophical Argument in Ancient China (Open Court 1993). ISBN 0-8126-9087-7
  3. ^ The Shorter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ited by Edward Craig. Routledge Publishing. 2005.
  4. ^ "Zou Yan". Encyclopædia Britannica. Retrieved 1 March 2011.
  5. ^ Deutsch, Eliot; Ronald Bontekoei (1999). A companion to world philosophies. Wiley Blackwell. p. 183.
  6. ^ Sellmann, James Daryl (2010). Timing and rulership in Master Lü's Spring and Autumn annals. SUNY Press. p. 76.
  7. Jump up to:a b Denecke, Wiebke (2011). The Dynamics of Masters Literature: Early Chinese Thought from Confucius to Han Feizi. Harvard University Press. p. 38.

External links[edit]


김원기 성추행범과 그의 친구들

Comments

김원기


22ti JuSlypo hmnsalrddt teoare1dlf2hd:uis4f7 ·




제가 제일 열받은 게 뭔지 간단하게 말을 하자면요, "잘못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고인의 마지막을 추모하는 기분으로 놔두면 안 되겠냐."는 심정이 드는 그 내면의 구조랄까 기제입니다. 

사람은 일단 감정으로 판단을 내리고 그 다음에 논리를 가져다 끼워맞추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위의 심정이 작동한다는 건, 애초에 성추행을 포함하는 성폭력에 대해서 구체적 공감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무슨 근거와 논리를 찾아 덧붙이건 간에) 이 분들에게는 처음부터 박원순의 성추행이라는 게 전혀 실질적인 무게감을 갖지 않았다는 거죠. 그걸 스스로 모르면 알라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데, 여전히 모르는 분들이 왜 이렇게 기세등등해요 이 씨발넘들아.
 
역사적인 영웅을 하나 떠올려 보세요. 이순신이어도 좋고 김좌진이어도 좋고. 전쟁 중에 무고한 백성들이 끼어 있는 작은 마을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한 십여 명이 죽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별 느낌 없죠? 인종청소가 벌어지는 내전 지역에서 일가족이 끌려나와 모두 목이 잘려 죽는 일이 벌어졌다고 들어도, 대부분 별 느낌 없을 겁니다. 왜냐면 대부분 사람들에겐 그 사건이 (혹은 그 사건을 설명하는 언어가) 구체적인 공포, 절망, 분노의 감정을 전혀 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경험이 아니라면)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구체적인 공감과 함께 작동하는 실질적인 인류애를 증대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성폭력 사건들은 그렇게 먼 이야기일 수가 없어요. 그건 그럴 수 있지 하고 양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무슨 알렉산더가 술에 만취해서 충동적으로 죄 없는 부하의 목을 잘라 버렸다는 이야기 들으며 "영웅이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런 정복자가 어디 있냐." 이렇게 대꾸하듯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앞에 (페미니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양) 단서를 붙이고 알리바이를 늘어놓아도, 솔직히 자기는 알잖아요. 처음에 이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자기 안에서 일어난 감정적 반응이 그렇게 작동했다는 걸. 그런데 왜 사기를 쳐요 이 씨발새끼들아.
충분히 괴로워하고 참담하게 느꼈다는 게 전혀 티가 나지 않는데, 남들이 좋아요 눌러주니까 신나서 2절, 3절, 뇌절하고 있는 페북 명사들, 그런 이유에서 너네들 진짜 쓰레기거든요. 너네 안에는 삶이 지옥이 된 사람들의 고통도 없고,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 끔찍한 파렴치함에 대한 죄책감도 없어요. 그건 그냥 공허한 단어들로만 존재하고, '내 친구 박원순' 하나만 있죠. 그러니 그만 닥쳐요. 진짜.
PS
구체적 공감이 전혀 작동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위해 몇 자 추가함.
새끼발가락 찧었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생생하죠? 길에서 어떤 인간이 갑자기 뛰어오더니 구둣발로 새끼발가락을 콱 찍고는 그냥 도망갔어요. 뛰어가서 잡았더니 그냥 장난 친 거고 그렇게 아프고 불쾌할 지 몰랐다, 그러면서 건성으로 실실 웃으며 미안미안, 이러고 그냥 가려고 해요. 굉장히 짜증나겠죠? 여전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발가락이 아파 죽겠는데 말예요.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사과 받았으면 됐지, 뭘 난리냐. 이제 그만 해라."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저 사람, 당신만 모르지 이 동네에서는 좋은 일 많이 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며 씨발씨발 거리는 당신에게 "아픈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심한 욕을 해서 모욕하는 건 지나치지 않냐."고 훈계질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솔직히 발 일부러 밟는 건 못 봤고, 당신이 욕하는 건 봤다. 발가락 좀 보여 봐라." 이러는 인간까지 나오질 않나, 뭐 그런 상황이 됩니다.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더 말도 못하고 그냥 미친 놈한테 걸린 게 운이 나빴던 거라고 그냥 절뚝거리며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그 동네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저기, 발 찧었다고 상욕을 해대던 그 인간이네"하고 쑥덕쑥덕 거립니다. "유세 떠나?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쩔뚝거려?"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리구요. 미치고 환장하겠죠?
이 말도 안되는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고통스럽고 억울해서 절망적이기까지 한 게 성폭력 사건입니다. 그러니 자기 발가락의 고통에 대해 보이는 태도보다는 더 진지하라고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못 알아먹으면 넌 사람 새끼가 아냐.

70Insu Bae, 希修 and 68 others
7 comments

김원기

22ti JuSlypo hmnsalrddt teoare0dlf8hd:uis0f3 ·



남의 독해력을 조롱하는 분의 글을 봤는데, 누구나 자기 지적 능력에 만족하며 사는 경향이 있다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기준 정도는 있는 게 아닐까?
"불심검문에 걸려 연쇄살인의 종료와 함께 인생도 끝난 사람"이라고 해보자. '만약 ~이 아니었다면(if not)'의 논리를 가지고 생각하면, 불심검문에 걸린 게 이 사람 인생 종치게 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거 웃기는 이야기. 불심검문이 문제였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애초에 연쇄살인은 문제가 아니었다는 얘기처럼 들리니까.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죽인 놈이라서 인생이 망한 거지, 보통 사람들은 불심검문 걸려도 아무 일 없다.
그래서 '미투에 걸려 인생 조지는 남자들'이라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것부터가 말이 안된다는 거다(표현보다, 그런 표현이 튀어나오는 마인드의 문제겠지만). 안 걸리는 게 핵심은 아니잖아? 미투 할 여자 안 할 여자 잘 고르는 법이 중요해? 뭐 이렇게 말하면 읽는 쪽의 독해력을 문제 삼겠지만, 진짜 문제는 글도 사고력도 엉망인 쓰는 쪽에 있을 거다. 미투가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이 문제인 것처럼.
학교 교육 이전에 당연히 상식처럼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얘기를 쓰고 있으니 아침부터 기운이 빠지긴 하는데, 보통 그 상식이 없는 사람은 명랑하고 신나게 잘 살더라고. 그러니 나도 기운내서 하루를 시작해야지. 말 되는 소리를 할 수 없으면 좀 닥쳐요들.

33Insu Bae, 希修 and 31 others

< 성추행범과 그의 친구들 >

자신의 부하직원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성추행한 자들이 조사가 개시되면 조사처리담당자에게 제출하는 전형적 자료 유형이 있다.
교수-성추행범은 온갖 자료를 모으고 모아서 제출한다. 지난 수년간 (때로는 10년치)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목록, 학생들로부터 받은 감사 편지 혹은 문자메시지,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다. 그가 이런 자료를 제출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첫째, 나는 이렇게 훌륭한 교수/연구자다. 이렇게 훌륭한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둘째, 나는 이렇게 훌륭한 교수/연구자다. 그 어마어마한 업적을 보라. 성추행은 사소한 ‘실수’에 불과하다.
 
대개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면 첫 번째, 증거가 드러나면 두 번째 메시지로 갈아탄다.
직장 내 성추행범 역시 마찬가지다. 조사가 개시되면 가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조직에 필요한 인재인지, 그리고 부하직원이 얼마나 자신을 따르는지 보여주고자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제출한다. 그 과정에서 그런 자료를 제출하도록 부하직원들을 종용, 협박하기도 하지만, 때로 부하직원들은 스스로 알아서 그런 자료를 만들어 바친다. 가해자를 위해서 탄원서를 돌리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사건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유포하고, 조사과정에서 허위 진술을 하거나 진술을 거부하기도 한다. 평소에 그다지 ‘모시기 경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직원들조차 ‘이때다’ 싶어서 가해자에게 열혈 충성을 다한다.
가해자의 ‘우월적 지위’가 대단할수록, ‘집권 기간’이 길수록, 가해자 측근들의 2차 가해 양상은 더 광범위하게, 장기간, 더 지독하게 계속된다. 그런 광경을 지켜본 한 피해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이 ‘너무너무 징그러웠다’고. 어떤 피해자는 그런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했는데, 그 범죄 현장에 매일 출근해야 하는 심경’이라고.
사람들이 어떤 위치에서 상황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정의로운 시민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폭력의 행위자가 되기도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폭력은 사건을 바라보는 다음 두 가지 위치성 스펙트럼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가해자의 편에서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객관성을 핑계로 가해자와 같은 기득권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 세 가지 글들은 지금까지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글들 중 대표적인 문제적 발화들이다. 할 말은 많지만 이 글들의 문제점 및 해악에 대해서 간단히 짚고자 한다.
1. 1) 한겨레신문에 실린 조희연 서울특별시교육감의 “40년 친구 박원순을 기억한다”
2) 페이스북에 게시된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의 “100조원” 발언
2. 페이스북에 게시된 강남순 교수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와 테러리즘”과 이 글에 대한 아무개 교수의 “교수님, 감사합니다” 발언

첫째, ,조희연 교육감의 글, 김동춘 교수의 “100조원” 발언과 관련하여,
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가해자에 대한 애도는 ‘사적’으로, 철저한 진상규명은 ‘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시민의 세금으로 공식적 애도 행사를 치른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다. 우월적 지위에 의한 성희롱, 성폭력이 얼마나 사소하게 취급될 수 있고, 쉽게 침묵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공식적 발화행위라는 점에서 그렇다.
조희연 교육감의 경우, 그 해악은 더욱 심각하다. 교육현장은 무엇보다도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그는 학교의 안전과 교육환경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공직자다. 그는 학교현장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육자가 학생을 성희롱했을 때, ‘엄정한 처리’를 통해 학생의 학습권 및 학습환경을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있는 교육감이 어마어마한 지위를 이용해서 오랫동안 성희롱을 자행한 ‘친구’의 업적을 기리며 공식적 애도를 했다. 그것은 어떤 메시지인가? 학교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장, 교감, 교사가 성희롱을 하면 그들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메시지다. 시민으로서 나는 교육환경에 대한 보호책임 있는 교육감 조희연과 박 아무개씨의 40년 친구 개인 조희연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사는 그 글에 지면을 할당함으로써 이 거대한 폭력에 가담했고, 폭력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론사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
 
둘째, 강남순 교수의 글과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페미니즘 책을 여러 권 낸 분이다. 그 글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무지에 의한 폭력’, 젠더 무감성(gender blindness), 성인지 감수성의 결핍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센서는 ‘주류 집단에 속하는 성인 남성의 언어와 경험에서 벗어나 여성 및 소수자의 경험과 관점을 존중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작동한다.
강남순 교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할 시점에서, 저 높고 높은 곳에서 한 수 가르치는 태도를 견지하며, 공식적 애도를 문제삼는 사람들을 싸잡아 ‘테러리스트’로 매도했다. 그의 글은 피해자의 목소리, 경험이 전혀 들리지 않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위치, 즉 ‘무지’의 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젠더 폭력은 이와 같은 무지에 의해서 발생한다.
‘주류 기득권이 아니라 소수자의 경험과 관점을 존중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국민-국가의 시민, 지구 시민(global citizenship), 그리고 우주적 시민(cosmopolitan citizenship), 어느 층위에서 설정하건,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간다움의 덕목 중의 기본이다. 그 글에서 나타난 태도는 강남순 교수가 평소 여러 저서에서 언급한 코스모폴리터니즘의 가치를 스스로 배반한 행위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우선적으로 강조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민주주의 가치가 있다. 어떤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성희롱을 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정황이 드러났다면,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의’다. 그리고 사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은 2018년 대법원 판결문에서 언급된 바,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의 ‘동료 시민’으로서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온갖 미사여구로 객관성으로 포장된 폭력의 언어를 쏟아낼 것이 아니라, ‘증거를 내 놓으라’고 피해자를 겁박하면서 가해자 편에 설 것이 아니라, 사건이 정의롭게 해결됨으로써 피해자의 노동권 및 노동환경이 정상화되는지 제대로 감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성희롱 가해자’의 편, ‘가해자’와 같은 기득권이 아니라, 피해자가 서 있는 소수자의 자리, 그 자리로 이동하거나 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인 ‘정의’는 그런 시민들로 이뤄진 사회에서 가능하다.



김원기

21t SpJoduuliheanys tosaSt ctrfrh13:eS3dhn7d ·

아래 글의 연장선상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도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가부장적) 세상은 (남성) 가해자 중심으로 성폭력 사건을 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이 사회에서 피해자의 고발/고소는 진위를 따져야 하는, 사물화된 진술-증거의 더미로 환원되고, 가해자의 사정은 (그 엿같은) '인지상정'에 의해서 이미 충분히 헤아려지는 '사람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추문과 처벌에 의해 가해자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사람이 사람의 일을 헤아리고 공감함'의 태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피해자의 '증언-증거'에 대해서는 법정의 판사와 같은 태도로 유보적 거리두기를 하는 게, 이 남성 중심 사회의 디폴트 루트. 이게 박원순 성추행 사건에 적용되고 있는 거다. 아주 극적으로. 역겹게.
피해자 중심주의란, 쉽게 생각해 사람이 사람을 온전하게 대하는 태도를, 피해자에게 제대로 적용하는 거다. 당연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법관의 태도 같은 건 버리고 이 사건의 실체를 이해해보겠다는 태도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당신의 자리가 팔짱끼고 '흐음?'하는 태도로 따지는 심문관의 자리가 아니란 걸 명심해라). 그와 함께 이 고발/고소가 진실이라면 그로 인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가해자를 추상적인 범죄 행위 그 자체, 아니면 적어도 익명의 X로 환원시켜 유보적 거리두기를 해보라. 그러면 사건을 보는 시각이 전면적으로 달라지는 걸 경험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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