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 / 거름 되어서 살리고 꽃피우는 마음 / 기다리는 마음 /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것 / 소통하는 것 / 깊게 느끼는 것 / 모든 것을 품고 키우는 마음 / 편안하고 고요한 근본 생명 그 자체 / 누구나 다 푹 빠지고 싶은 것 /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마음 / 눈물 / 판단 없는 사랑 / 기쁨의 물질 / 지극한 정성 / 고통과 아픔의 고향 / 솟아오르는 새싹 / 조화와 조율 / 시인의 마음 / 활짝 열린 가슴 / 근원적인 삶 / 희생 / 쉴 수 있는 곳 / 마음의 고향 / 영원한 만남 / 모든 이의 쉼터 / 건강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 / 텅 빈 자리 / 나와 네가 함께하는 곳 / 한솥밥 / 내가 먼저 안는 것 / 당신이 나임을 아는 것 / 새롭게 깨어남 / 우주의 동력 / 천국 / 시작과 마침 / 조율 / 내재되어 있는 근원 /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아는 것 / 우리가 가고 있는 길 / 다 주고도 또 주고 싶은 마음 / 생명수 / 성소 / 우주의 젖줄기 / 조건 없는 사랑 / 그대 앞에 떨림 / 가장 멀리 가장 가까이 / 대지의 어머니 / 태초의 자궁 / 나의 본적지 / 나의 바탕
위에 나열된 내용들은 2013년 8월 26, 27일 이틀 동안 제주 조천읍 와산리 조이빌 리조트에서 있었던 생명모성 초동 워크숍에서 20여 명이 모여 생명모성과 관련된 자장을 생성하고 개념을 정리해본 결실이다. 이 워크숍은 ‘생명모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집중적으로 다룬 자리였다.
다시 정리하자면, 생명모성이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존재의 근원성이고, 여성-남성으로 이분화 되기 이전의 성품으로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동물계에서도 볼 수 있는, 잉태해서 보살피고 키우려는 생명의 충동이고 본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모성은 선한 본능으로, 양심 본심의 자태로 드러나며, 정의롭고 진실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대의가 이 땅에 이루기를 염원하는 고차원적인 심성의 기도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모성은 존재적 기본 성품으로써 생명세계 전체와 조율하고 조화하고 통합을 이루기를 염원하는 최고의 영성이다. 병을 치유하는 힐링의 힘이고,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려내는 기적의 힘이고, 충동적 욕구와 욕망을 자제하고 만사를 함부로 하지 않으며 삼가는 마음,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조국을 위해 나를 바칠 수 있는 부모-열녀-열사의 마음이다. '여성은 약하나 모성은 강하다'라는 말처럼, 생명모성은 미처 자기 안에 있는지 몰랐던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열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이나 사회 곳곳을 살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생명모성의 결핍으로 메마른 속에서 시간과 노력과 인적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리고 생명모성이 무엇이기에 크게 존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토록 궁한 것일까?
신기루 같은 생명모성
우리 주위로 눈을 돌려 보자. 생명모성은 우리 가정을 이루는 근본 바탕인데, 한동안 보이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삶 속에 있어 주어야 사랑의 밭이 생기고 그 토양에서 새 생명이 싹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그 자태가 사라져 버린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삶의 건조함과 무의미함을 느끼면서 시들시들해지는 증상을 보이고, 절망감에 빠져들고 심할 경우는 자살에까지 치닫게 된다. 현재 한국 사회 자살률이 세계 1위라 하니 사회가 이런 병을 앓고 있음이다.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필자는 생명모성 결핍의 원인을 뿌리영성의 단절에서 찾는다. 뿌리영성과의 단절은 어머니와의 관계 고갈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개인적으로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왔다.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면, 아들을 기다리는 독자의 가정에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 남동생에게 쏠린 어른들의 관심 밖에서 자랐다. 엄마는 직장 때문에 항상 집을 비워 우리 삼남매는 할머니와 식모 손에서 키워졌고, 이런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성과 자존감을 모르고 커 갔다. 엄마는 분명 나를 사랑했겠지만 나는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고, 나의 감성세계는 닫혀 있었다.
그런 내가 지금 생명모성 일, 인간의 막힌 가슴을 녹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이 나 개인의 성장 과정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나를 나무랄 때 종종 "너는 영리한 애가 왜 그러지?"라고 얘기하시곤 했다. 저능아는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외부와 통하는 문이 닫힌 채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던 것이다. 그럴 때 내 가슴은 마비되고 머리 작동은 느려지고 주의는 고착되고 저능아같이 행동했다. 그러다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고 대화를 해주면 상황이 나아지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다.
내 증상은 ‘약 자폐증’(mild autism)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 거리감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그 현상을 이해하고 원인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오랜 세월이 걸린 후에 비로소 약 자폐증에 대해, 그리고 ASD (autistic spetrum disorder)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을 하면서, 그리고 교육철학-감성치유-감성교육-영성교육 분야를 접목하면서 나는 획기적인 접근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개인들이 자신의 약 자폐증을 알아차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게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모성의 배경 이야기이다.
나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네 살 때 6.25전쟁 피난 중 일어난 드라마틱한 전인적 체험이었다. 포성이 터지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는 난리 속에 우리 식구도 피난길에 올라 충청북도 어느 산골로 들어갔다. 빈 오두막집 한 칸을 발견하고 여섯 식구가 얼마간 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샹그릴라를 만났다. 포성은 더 이상 안 들리고 평화로운 기운이 그득한 고요한 산골짝 안에서 모처럼 어머니는 매일 우리와 함께하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 앞 개천에서 세수를 하고, 물을 길어다 밥을 하고, 낮에는 들에서 나물을 캐고, 밤에는 반짝이는 검은 하늘에서 쏟아질 것같이 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생전 처음으로 나의 고립된 속에서 완전히 나오는 체험을 했다. 땅과 하늘, 산과 들, 그 기운이 나의 기운이고 나를 움직이는 체험이었는데 그러한 체험을 하도록 해준 링크가 엄마의 존재이었다. (엄마가 완전히 내 곁에 있을 때 아버지가 미국가고 안 계신 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그때의 생생했던 경험은 나의 몸과 마음을 진동시키면서 깊숙이 파고들어갔고, 나의 감성을 활짝 열어 처음으로 외부세계와 온전히 하나 되는 강렬한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이 체험은 나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되었고, 어린 마음속에 의식의 전환을 일으켰다. 이 세상이 무엇이 가능한 곳인지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훗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절대로 좌절하지 않게 해 주었다. 존재의 신비를 체험함으로써 그 느낌을 알 수 있었고, 그 체험을 또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그것을 내 삶 속에 재창조하도록 정진하게 했다.
생명모성의 길
그러한 전인적 체험의 결과로 나는 평생에 걸쳐 '통합된 진리'를 탐구하게 되었다. 이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여기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학문 속에서 이런저런 분야를 답사하며 동양철학, 서양철학, 영성학 등을 공부하고 교육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기존의 학문 안에서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르치는 길로 들어서는 대신, 방향을 돌려 내면치유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는 도구를 잘 갖추고 잘 쓰도록 하자. 분절되고 막혀 있고 성장이 중단된 내 내면의 상처 입은 부분들을 찾아서 치유하자. 그리고 통합하자. 평화를 이루자. 나 자신과 주위의 평화 통일, 이것이 곧 나의 사명이 되었다.
감성이란 것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강력하고 정밀한 컴퓨터와 같아서 그것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어도 알지 못한다. 제대로 작동이 안 되는 나를 사용해 살아가려 한다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되겠는가? 주어진 능력이 다 발휘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 놓인 여러 가능성들을 뒤로 하고 감성치유와 자기계발의 길로 들어섰다.
내 자신의 감성치유를 거치고 어머니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이었다. 그 관계를 소아와 엄마의 관계에서 성인 대 성인의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앞서 이런 분야가 없었고 길을 닦아 놓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이 길을 만들며 가야 한다는 데서 막연하고 무모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온전한 관계를 원하는 절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면서 우리 모녀는 갈등과 통증으로 가득 찬 관계에서 평정이 깃든 도반의 관계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인류 의식의 진화에 기여하는 동지 관계로, 전환에 전환을 거듭해 왔다.
이 길은 나의 금광을 발견하는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터득한 원리를 자녀들을 대하는 데에도 적용해 왔다. 자녀들과도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관계를 이루고, 각자의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잘 극복해 가며 충실한 삶을 살아냄으로써 이 세상에 기여하는 동지적 구심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내가 사용해 온 방법은, 그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그들의 문제 요인을 내게 미약했던 부분으로 받아 들이고 고치는 내 자신의 내면 작업으로 들어가고, 그럴 때 나오는 새로운 통찰의 힘으로 그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항상 그들보다 반 보 앞서 갔다. 그렇게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생명모성을 발휘하고 그 차원에서 서로를 지원하며 살기 위하여 항상 가슴을 통해 울려 나오는 사회의식을 공유해 왔다. 예전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또는 (유교식으로) 남성이 권위적인 심리와 관점에서 시작해 조직적으로 이끌어가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어둠의 생명모성 / 빛의 생명모성
생명모성을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삶의 복잡하고 어두운 상황 속에서 예지와 인내심과 결단력과 추진력을 발휘하는 전사 에너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글의 첫머리에 서술해 놓은 말들이 제시하는 밝고 따뜻하고 여린 에너지는 완성의 단계에서 느낄 수 있다.)
넬슨 만델라의 27년에 걸친 감방 투쟁은 어둠 속에서 생명모성이 발현하는 좋은 예이다. 특히 그가 감방생활을 하는 동안 보여준 올곧고 고귀하기까지 한 모습에 그를 지키던 백인 교도관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는 예화는 모델 사례라 할 만하다. 만델라는 그의 승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증오에서 자신을 해방해야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입증해주었다.
생명모성은 그저 독립투사의 정신이 아니라 증오심, 두려움, 수치심, 열등감, 화, 슬픔, 고독, 절망감 등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다 품고 녹여내는 거대한 생명의 장 안에서 그 힘을 드러내면서 장애를 뚫고 나오는 생명의 근원적인 힘이다. 증오에서 자신을 해방하지 않으면, 증오의 기운이 자신을 사로잡고 족쇄를 채워 버린다. 이것이 지금 많은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가 아닌지 냉철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정복당한 모든 지구촌 원주민들 중에서 자신의 운명을 가장 혁신적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는 부족은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인데, 그들은 십여 년 전에 자기들 내에서 만든 뉴질랜드 정부를 포함해 다른 어느 나라도 인정하지 않는 ‘Maori Government of Aoetearoa’라는 이름의 마오리 정부를 만들고, 쑤 니코라Sue Wyliam Wiremu Nikora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부족 주신(Great Spirit)으로부터 받았다는 특유의 강력한 비전과 확신을 가지고 마오리 족의 주권과 소유권을 살려 내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 여성을 올해 뉴질랜드 기스번에서 있었던 ‘13 grandmothers 회의’에서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마오리 사람들의 대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상담을 하며 그들을 돌봐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소중한 생명모성의 힘을 보았다.
생명모성은 적시에 사람을 구제하고 사회를 구제하고 필요할 때 대전환을 일으키는 생명과 창조의 원동력이다.
생명모성의 실체: 진실, 정직
생명모성의 힘이 발휘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자기 내면에 있는 생명모성의 원천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 상대를 위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행동할 때 나오는 힘은 상대를 무시하고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들어가 억압하는 등 음성·양성적 폭력을 범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지금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생명모성이 힘을 발휘하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충만해 있어야 한다. 남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할 경우에는 우선 자기 내면의 치유와 정화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한다. 혼자 하는 명상과 수행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문제는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고, 따라서 필요한 것은 관계성의 치유이며 정화이기 때문이다. 자라는 과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자기의 결핍의 정체를 자각하지 못할 때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할 수 없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직할 수 없다. 대인관계는 자신에게의 진실함, 즉 내면의 정화와 정비례한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면밀한 차원에서 자기가 어떤 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 정도와 비례하여 생명모성을 짓밟는 행위들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그 범위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가족적 비극으로부터 조직적·사회적 비리, 지구환경 파괴 등 범지구적으로 확장된다. 생명모성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양심과 관련되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관련되고,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지구 환경과 관련되고, 우리의 뿌리와 관련된다.
생명모성의 실체: 공감(empathy)
과학, 물질, 경쟁과 소유를 중요시하는 현대문명은 지구상의 생명모성 에너지를 고갈시켰고, 현대인들의 의식은 인간 중심, 이성 중심, 물질문명 중심으로 옮겨갔다. 문명의 이름 아래, 자연과 생태계와 일체되어 조화를 이루며 살던 토착민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해 정복했고, 그들의 우주관과 지혜와 영적 능력을 말살해 뿌리를 말려 버렸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 앞에 닥쳐 있는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 지구촌 전반의 생명 위기이다.
토착민들은 주위 환경과 일체되어 살면서 바람과 땅과 천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야생 동물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었다. 동물계뿐 아니라 생태계 전체와 연결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적절하게 지켜나갔고, 전체를 성소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북미 인디언들이, 또 수만 년간 호주 대륙에 살아오면서 그 땅을 망가뜨리지 않고 살아 온 호주 원주민 (Australian Aborigines) 들이 전하고 있는 말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인간이 야생동물과 소통하게 되면 어떤 장면들이 벌어지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남아프리카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브리튼바흐 Anna Breytenbach로, 동물과 의사소통하는 동물교감사(Animal Communicator)다. 안나는 인간이 야생동물과 소통하는 것을 생명과의 연결(connection with life)이라 부르고, 그러한 연결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그들과의 공명이 일어나고 자비심이 살아난다고 말한다. 생명모성은 종국적으로 생명과의 연결이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의 발동이고, 상대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이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공감 (감정 이입)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상대가 느끼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게 되면 상대를 위하고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고 원치 않는 것을 하지 않게 된다.
생명모성의 전망: 왜 한국에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생명모성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모성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 후자는 주로 자기 자식에 대한 애착의 감정이며, 자기 자식이 안전하고 잘되기만을 바라는 데 국한되는 것이다. 반면 생명모성은 생명 전반에 관련된 것이고 생태계 전반에 대한 의식의 열림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하고많은 나라 중 하필이면 왜 한국에서 생명모성의 불꽃이 언급되고 있는가?
한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모성의 힘이 막강한 나라였다. 이는 여성의 힘을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유교적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변두리로 밀려났고, 여성의 몸이 갖는 역할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수단으로 좁혀졌다. 여성의 힘이 한 집안의 모성 영역으로 집중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전통과 역사 속에서 여성의 자아의식은 "착한 여자"의 테두리 안에 갇히고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이 강요하는 인의예지의 틀 속에서 자기를 규정해야 했고 희로애락의 감정은 건강하게 표현될 수 없었다. 이러한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온 모성은 왜곡되고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강하게 불고 있는 치맛바람의 유래가 그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에너지는 대단히 강하지만 건전하지 않은 면이 많고,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서도 자식의 성공에서 대리 만족을 기대하는 심적 요소가 무겁게 작용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긍정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기운을 퍼뜨리기보다는 눌려 있는 전통의 무게에 저항하면서 자기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기존의 여성 역할에 회의를 갖게 된 많은 여성들이 독신의 삶을 선호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풍토적 환경은 좁기 때문에 이런 속에서 독신주의를 선택하는 여성들은 여성의 힘의 원천인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생명모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아 정체감을 상실한 체 헤맬 수 있다. 한편 자연적으로 강한 모성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자기중심적 모성의 그물을 던져 다른 사람들을 자기 방식 속에 가두려 하고, 상대가 반기를 들면 마음에 불만이나 한스러움이 생겨나 부정적인 기운을 표출한다. 그런 가운데 한국 사회에서 의식이 깨어난 사람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다시 필자의 이야기로 풀어내자면, 십여 년 간의 감성치유 작업을 거치면서 정신적으로 아주 밀접해진 어머니의 개인사가 나의 역사가 되는 과정을 통해 나의 뿌리를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강한 생명모성의 소유자인 내 어머니의 한국식 모성에 반발하며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노력했고, 네 번의 이민을 하는 동안 한국식 어머니의 강력한 힘과 약점을 동시에 직시할 수 있었다. 서양의 열린 자연과 환경 속에서 생명모성에 대한 상을 정립하고 탐사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 모성이 결핍된 한국의 여성성을 보게 되었고, 또 한 발 물러서 있는 주권 잃은 한국의 남성성을 보게 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특성이 나 자신의 영적 여정, 그리고 생명모성과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하고 생명모성이 한국에 출현하도록 하는 일을 착수하게 된 것이 여기까지의 경로이다.
맺으며
생명모성은 한국이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독특한 성품을 키워낼 수 있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개념이다. (대장금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 말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1)한국 사회의 깨어있는 사람들, 사회의 문제를 절감하는 사람들이 생명모성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2)권위주의 틀 속에 갇혀서 혹독히 단련 받아 온 한국의 여성들과 남성들이 자신 속에 내재된 모성적 근원성, 뿌리영성을 자각하고 키워내는 것,
(3)하느님에 매달리던 것에서 어머니 땅과 생태계 전반을 보호하는 모성적 영성을 키워내는 관점으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생명모성의 결핍으로 구성된 인류 역사의 정복자들. 그들에 의해 말살된 지구촌 토착민들의 광대한 생명모성. 지구 어머니를 구심점으로 하는 생명 인생관을 새로이 적립할 시기가 왔다.
민족주의 대신에 인류적 생태영성 주의. 이 길의 안내자는 내 안에 내재해 있는 생명모성. 지금까지 나를 옭아매 왔던 감성 탯줄을 자르고 나의 주체인 생명모성 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는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모심과 살림]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반아 시민통신원 vanakim7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