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4

단군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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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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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

삼태극

조선 전기 국왕 용보


조선 비왕족 추존 국왕
고조선 초대 단군
단군왕검 | 檀君王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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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천진전 단군화상, 1920년대[1][2]
출생
(음력)
연대 미상[3]
고조선 단군굴
사망
(음력)
연대 미상
능묘
단군릉(檀君陵)[4]
재위기간
(음력)
초대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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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단군 신화4. 단군 숭배5. 단군상6단군릉7표준영정8. 여담9대중매체에서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단군신화에서 등장하는 고조선(단군조선)의 초대 군주 또는 토착 고조선의 군주들이 세습했던 군주의 호칭으로 추정되는 말이다.[13] 이 항목은 초대 단군만을 설명한다.

2. 상세[편집]

정확한 명칭은 단군왕검([14])이지만 일반적으로 단군이라고 지칭된다. 친근하게 단군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한국의 역사를 열었다고 알려지는 신화 속 인물이다. 즉 한민족의 시조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른 바 단군신화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근대 이래로 표면적인 이야기 자체보다는 현실적인 관점으로 문장들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은 이름이며 왕명은 왕검인데 김영하 교수에 의하면 단군은 몽골 신화의 텡그리와 같은 의미이며 왕검은 일본에서 군주를 뜻하는 오오키미와 비슷한 것이다.[15] 하지만 대종교 등에서는 여전히 단군을 왕명으로 보고 1대 단군 2대 단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신채호를 필두로 강대한 고조선의 신앙적, 정치적인 집권군주로서 단군이 조명되고, 이에 따라 단군 신앙도 나철의 대종교로 조직화되어 민족주의적 일획을 담당했다. 이 대종교의 역사적 관점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으나 현대 국가 성립 초기에도 반영되어 개천절로 이어졌으나, 근대 이전까지 개천절에 대해 특별한 역사적인 근거 문헌이 있는 것은 아니고 민간 신앙을 공식화한 것에 가깝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이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대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던 과도기의 역사적 믿음이 반영된 산물로 보기도 했다. 과 호랑이를 숭배하던 토테미즘의 신석기 사회에, 천손 신앙을 가진 청동기 집단이 유입되어 그들이 호랑이 집단과 곰 집단을 흡수한 후, 훗날 고조선으로 발전하는 단군 집단을 이루었다는 정도로 해석했던 것이다.

다만 단군왕검이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13세기 말에 등장한 《삼국유사》이고,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문헌 《고기》(古記)는 현전하지 않는다.[16] 1145년에 나온 《삼국사기》에 평양의 원래 주인으로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적어도 고려 중기에는 신화의 구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선인왕검'이 '단군'으로 강력하게 추정되기는 하나 명확히 단군이라 명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7세기 신라의 통일 이후 단군 신앙의 중심지였을 평양은 신라와 발해의 중간지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평양성이 잡초가 무성한 폐허가 되는 등 어떤 상황이었는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전 시대의 전승이 계속해서 이어졌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후기 기록을 중국 사서에서 빌려써서 장수왕 등의 몇몇 군주들은 내정 기록보다 조공 기록이 더 많을 정도인지라 풍습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않을 정도라 이해가 안가는것도 아니지만. "단군"이라는 이름을 비롯하여, 신화 전체 모습이 확인되는 것은 《삼국유사》가 쓰인 시기를 비롯한 13~14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황해도 구월산[17]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환인 · 환웅 · 단군을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 단군은 민간 신앙의 중요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8] 때문에 최근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 신화를 대동강 유역에서 한정적으로 신봉되던 지방신으로 보는 견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실제 청동기 시대 역사를 반영한 사실로 보는 데 소극적이다.[19][20]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 대종교의 아류로 만들어진 태백교(太白敎)·단단학회(檀檀學會)와 같은 종교 집단의 유사역사학은 오늘날까지도 암암리에 사회 저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말하면 친일 식민사학자라고 몰아가기 일쑤지만, 민영휘영선군박영효이재극 등과 친일 유림단체들도 단군을 숭배하고 단군릉수축운동을 진행했다. 영상

애초에 '단군신화'는 주몽신화박혁거세신화수로왕신화같이 한국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속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건국신화로서 단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 없다. 그저 고조선의 건국신화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일이니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제기는 환빠들만의 주장으로 간주하고 무시하면 된다. 애초에 내용부터 현실성이 떨어지는 전설이라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신화라고 부르는게 당연한 것이다.

3. 단군 신화[편집]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의 것이나 이 외에도 《제왕운기》나 《세종실록지리지》 <단군세기> 등 다양한 서적에 여러 판본들이 존재한다. 단군에 대한 신화는 이같은 문헌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구전문학으로도 전해내려왔는데, 상기된 문헌기록 역시 구전문학을 채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단군은 실존 인물이지만 일종의 신화적 존재라는 성격이 강해 사실상 그의 대한 기록의 대다수는 이같이 신화적 성격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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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군 숭배[편집]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엔 단군에 관한 숭배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에서 섬기던 '가한신(可汗神)'이 단군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단군의 제사에 대한 기록은 현재 고려시대부터 확인 되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어 단인, 단웅, 단군을 모셨다고 한다. 다만 고려 시대 초, 중기엔 단군 숭배가 그리 크지 않았다. 7대 목종 시기에 삼성사 의주(儀注)[21]를 만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고려 시대에 정부가 삼성사에 제사를 지냈거나, 지방 관리가 지낸 제사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22]. 고려에서 단군의 비중이 늘어나는 건 말기로, 고종 대에 강화도로 대피한 뒤 강화도의 유적이 단군의 유적으로 알려졌고,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에선 단군이 시조로 높여졌다.[23]

조선 왕조가 열린 뒤, 태종이 평양에 기자 사당을 지은 뒤 단군을 동쪽에 배향했다. 세종이 단군-동명성왕 사당을 지어 독립적으로 제사를 지냈고, 영조가 숭령전이란 액호를 내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24] 삼성사에서의 제사는 숭령전이 건립되며 중지되었는데 건물 자체는 지역 차원에서 보존하며 유지되었다. 이후 제사를 평양으로 옮겨버린 탓에 역병이 나돌았다는 소문이 돌며 지역여론의 항의가 거세지자 성종 대에 복구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만 원래는 위패와 목상을 같이 모시고 있었는데, 태종 대 재상 하륜이 전국의 사당에 모셔져 있던 목상들을 혁파하고 위패만 모실 것을 건의하여 삼성사에서도 목상은 없어지고 위패만 남게 된다.
이 목상은 복구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숭령전, 삼성사 외에도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평양시 강동군의 단군묘[25] 등이 있고 동국통감 등 조선 시대 사서엔 단군이 시조로서 확실하게 등장하는 등 단군 숭배는 조선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26]

구한말엔 민족주의가 대두되며 단군이 매우 중시됐고, 더 나아가 단군을 신으로 숭배하는 대종교가 탄생했다.[27] 민간 무속 신앙에도 단군은 숭배 대상이었으며, 지금까지 논란이 많은 증산도 계통의 종교들에서도 단군을 숭배한다.

현재엔 단군과 관련된 장소론 평양 숭령전과 단군릉, 구월산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각지에 세워진 단군성전 등이 있다.

일본에도 단군을 제신으로 모신 신사가 있다. 가고시마현에 위치한 곳으로 옥산(玉山)신궁, 타마야마 진구라고 한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540 왜란 시기에 끌려갔던 조선 도공들의 후예가 만든 것이다. 현지에 방문해 본 결과 야트막한 동산자락의 가족묘당으로 추측되는 묘역 위쪽에 위치해 있는데, 신물은 집체만한 바윗돌이고 그 바윗돌 위에 신당을 지었다. 규모가 작은 편이며 관리인원이 상주하지도 않고, 여느 신사들과는 달리 상시개방 하지도 않는 듯하다.

5. 단군상[편집]

단군상은 심심하면 머리가 박살나고 낙서 당한다. 예를 들면 이 사건이 있다. 보통 학교나 특정 위인과 관련이 깊은 지자체에는 위인의 동상이 흔하게 설치되어 있는데 유독 단군상만 봉변을 당하는 것이 의아하기도 한데, 극단적 개신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의 조상신으로 숭배되기도 하는 단군의 상은 빼도 박도 못 할 우상숭배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도 단군상이나 절의 불상 등의 파손행위를 대부분 극단적 개신교인들이 행함을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때 활발하게 설치되었던 단군상은 단월드(구 단학선원)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이 단체 역시 논란이 아주 많다. #

다만 단군상이 종교단체에서 자신들의 종교 홍보를 목적으로 세웠다고 이를 파괴함은 공공시설 파괴나 사유재산 침해에 해당하는 범죄다. 단군상은 기본적으로 해당 학교에 기부의 형식으로 증정된 것이기 때문에 해당 학교에 소유권이 있다. 종교의 자유가 타인의 재산까지 맘대로 빼앗을 권리를 주는 건 아니다.

사실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로 단군상을 철거하고 싶다면 그냥 해당 학교 기물에 권리가 있는 인물이나 집단에서 단군상 철거를 설득하는 방법이 있다. 사립학교라면 해당 재단에 요청하고, 공립학교라면 해당 학교 교장에게 권한이 있으니 교장에게 요청하여 그들이 철거를 허락하면 온전히 합법적으로 단군상을 철거할 수 있다. 학부모회를 통한 요청은 이사장이나 교장도 쉽게 무시하지 못하기에 해당 학교 학부모회를 설득하는 게 가장 좋다. 이런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철거된 단군상도 많고, 이렇게 철거된 경우는 문제될 게 없기에 이슈도 되지 않는다.

개신교 측에서는 아예 단군상문제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이후 이슬람선교및단군상대책위원회 로 발전했다.

6. 단군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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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93년 발굴한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양식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측은 고구려 시대에 복원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단군릉의 위치가 북한이기 때문에 확인을 하려면 통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태지만 북한의 단독 조사이기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사학계는 회의적이다.

북한이 단군릉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출토된 뼈의 방사성 측정 연대인데, 이에 대해 이견이 많다. 그리고 평양이 단군 시대부터의 중심이라며 체제 선전에 써먹는다.[* 그전까지 고조선의 중심에 대한 북한의 학설은 요령 중심설이었다. 그러다가 평양 단군릉 발견 이후로 평양 중심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단군릉 자체가 회의적이다 보니 그 배경에 대해서 이런 저런 추측이 많다.

중국과의 관계, 체제 안정화 등. 즉, 단군릉 발굴을 통해 학설이 바뀐 게 아니라 학설을 바꿀 필요가 있어서 단군릉을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북'조선'의 건국자 '김일성 = 단군', 2세 '김정일 = 왕건'(통일의 주역) 개념으로 국민들을 세뇌시키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7. 표준영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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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 표준영정
단군 표준영정
박정희 정부의 주도하에 한국의 역사적 인물에게 일괄적으로 표준영정이 지정되었는데, 당연히 단군의 영정 또한 새로 그려졌다. 1978년에 홍숙호 화백에게 의뢰하여 그려진 작품으로 쉽게 말하지면 국가공인의 단군어진이다.

다만, 현대의 창작물이기 때문에 큰 역사적 의미는 없다.[28] 현재에 들어선 표준영정 자체가 여러 문제가 있어 비판을 자주 받는 관계로 예전처럼 많이 쓰이는 편은 아니다.

여러 잎사귀들로 치장되어 있던 70년대 이전의 단군 초상화들과는 달리 그러한 장식들은 사라진 형태이다.

8. 여담[편집]

  • 언론 등에서 심심하면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단군 이래 최대' 등의 문구로 등장하기도 한다. 곧 '유사 이래 최대'라는 말과 같은 의미.[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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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국대학교의 단국이 바로 이 단군의 '단'과 애국의 '국'을 합쳐 만든 것이며 남북을 막론한 단군의 건국 정신을 받들자는 김구 선생의 뜻이 반영돼 지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단국대학교의 상징 동물 역시 이다.
  • 산해경》의 <중차구경> 끄트머리에는 옥산 이후 십삼편에서 "다시 동쪽으로 150리를 가면 웅산(熊山)이라는 곳이다. 이곳에 곰의 굴이 있는데 늘 신인(神人)이 드나든다. 여름에는 열리고 겨울이면 닫히는데 이 굴이 겨울에 열리면 반드시 전쟁이 난다."는 기록이 있어 환인과 웅녀와 엮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산경》이다.
  • 우스개로 터를 잘못 잡은 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외세에게 침입받기 쉽고 석유 한 방울 안 나는데다 여름이면 같은 위도 지역들보다 덥고 겨울이면 추운 땅에 터를 잡았냐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농담일뿐, 애초에 단군왕검께서 터를잡으신 곳은 만주지방쪽이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었을 시절 생존가능한 곳에 터를 잡은건 대단한 것이다. 다만 단군이 터를 잡은 곳은 요서(십이대영자 문화) 지방으로 추정되며 한반도가 고조선의 중심이 된 건 후대의 일로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연나라에게 요녕 지역을 잃은 후부터다. 물론 요서지방도 한반도랑 별 다를바 없어서 여름에 매우 덥고 겨울에는 강원도를 뛰어넘을 정도로 추우며 일교차가 끝내주는 등 차라리 한반도가 낫게 보일 지경.
사람 사는건 어딜 가나 똑같은지 폴란드 최초의 왕조를 창건한 미에슈코 1세나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자인 아폰수 1세이스라엘의 모세도 비슷한 농담이 있다. 모세는 아예 이스라엘 총리(골다 메이어)가 깠을 정도. 이스라엘인을 40년이나 광야를 해메게 한 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땅으로 이끌었다고.[30]
  • 1990년대 중반에 단군 신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단군의 땅이라는 텍스트 MUD 게임이 서비스되었다. 한국 최초의 상용화된 다중사용자 게임 중에 하나이다. 또 일부 머드 게임에서 최고 레벨에 달한 사용자를 단군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 2006년 SBS에서 단군을 주제로 한 사극을 기획 중이라고 밝히고 다음해인 2007년 'SBS 2007년 대기획'을 통해 100부작 대하사극이 될 것임을 밝혔으나 2010년에 마지막 기획 기사를 남기고 아무런 얘기가 없는 걸 보니 결국 무산된 모양.
  • 2019년 9월 23일 단군문화포럼 주최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에서 1883년 10월 봉안한 단군 영정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전시회는 9월 2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다. 단군 초상화는 20세기 이후에 제작한 그림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이 그림이 현존 최고(最古) 작품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
  • 한민족의 시조를 상징하는 만큼, 어떤 순서의 첫번째를 비유하기도 한다. 멤버가 순차적으로 데뷔한 이달의 소녀 멤버 중 첫번째로 데뷔한 희진의 별명이 '단군'이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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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문서[편집]

11. 둘러보기[편집]

[1]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9호.[2] 참고로 정인호가 집필한《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에 실린 ‘동국(東國)을 창립(創立)하신 단군(檀君)의 상(像)’ 삽화가 가장 오래된 단군 초상화로 유명하며, 그외에도 여러 그림이 있다. 대종교에서 쓰는 것도 있으며 황해도 삼성사에서 쓰는 것, 김종래가 그린 것, 홍석창이 그린 현정회에서 쓰는 것도 있다.[3] 신화상 기원전 2333년 이전[4] 1900년 대한제국 고종 추존.[5] 《제왕운기》에선 1048년.[6] 초대 단군만을 본 것이 아닌 전체 고조선의 단군(추정)들의 재위기간을 합친 것으로 추정되거나 아직 확실하지 않아 보이는 기록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7] 단군은 종교지배자를 뜻한다(제사장).[8] 왕검은 정치 지배자를 말한다.[9] 《삼국유사》에선 유화부인과 동일인물로 나온다.[10] 해부루왕(解扶婁王)[11] 추모왕(鄒牟王)[12] 단군릉에서 발견된 단군의 유골이라고 주장하는 유골의 키이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단군릉에 묻힌 인물이 단군이 아닌 고구려의 지방귀족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군의 키가 아닌 무덤에 묻혀있던 고구려 지방귀족의 키일 가능성이 높다.[13] (예: 2대 단군 - 3대 단군...)[14] 고조선의 후기 수도인 왕검성과 같은 검소할 검 자이다.[15] 이를 통해 단군왕검이란 "하늘의 임금님"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16] 사실 일연이 인용한 책 중에 제목이 《고기》(古記)인 서적이 있는지, 또는 그냥 옛날 기록(고기, 古記)이라는 뜻인지도 불명확하다. 다만 조선 초기까지는 고기류의 서적들이 다수 현존해있었고, 여러 서적에서도 인용되어 그 내용이 어떠한지 알수는 이다. 다만 설화적인 내용 또는 과장된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했던 관계로 슬프게도 후세의 서적에 온전히 전해지지는 못했다..[17] 오늘날 황해남도 안악군.[18] 조선시대 중국(명)에서 사신이 오면 의주→평양→한성(서울) 순으로 들어오는 게 순리였는데, 평양에서 지방관들의 대접을 받으며 기거할 때 반드시 이 삼성사에 들러 제례를 갖췄다고 한다. 조선 초기 영묘조(세종조)까지의 일이다.[19]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단군 신화의 연대 자체가 ① 단군이 중국의 와 동시대의 인물 → ② 요의 역사적 존재를 사실로 인정하고 연대를 비정 → ③ 단군의 역사적 연대를 획정이라는 방식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는 요 임금은커녕 하나라조차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논리의 고리 자체가 끊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단군 신화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역사시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도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대는 철석같이 믿는 이중잣대를 들이댄다. 다만 정말로 환빠인 사람들은 대체로 삼황오제를 긍정하며 단지 한국에 유리하게 해석할 뿐이다.[20] 다만 무작정 이중잣대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요임금 관련 부분은 나중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혹은 고조선 시대의 구전전설이 평양 일대에서 계속 전해져 내려오다가 구체적인 연대 제시를 통한 신뢰성 상승이나 중국에 지지 않는 국가적 자긍심 고취 등의 이유로 요 임금 관련 내용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원래 구전전설이나 설화, 전설 등의 문학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살이 붙는 특징이 있다.[21] 제사 의례를 기록하고 주석을 단 글.[22] 고려사엔 동명성제사에 고려 정부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압을 내려 제사 지내고, 평양 관리들은 매달 1일, 15일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를 보아 고려 초, 중기엔 동명성왕 숭배가 단군 숭배보다 더 컸다는 걸 알 수 있다.[23] 이는 고려 중기에 제작된 삼국사기에선 단군의 기록을 아예 넣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선인 왕검'의 기록은 있지만 선인 왕검이 곧 단군인지는 알 수 없다.[24] 이때 기자는 따로 숭인전에 배향되었지만 동명성왕은 숭령전에 같이 배향되었는데 해모수가 단군과 동일시되면서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로 취급되었던 걸로 추정된다.[25] 대한제국 때 단군릉으로 격상됐다.[26] 더불어 위만은 감히 단군의 정통성을 해한 찬탈자였기 때문에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져 극히 멸시받게 되었다.[27] 참고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대종교 측에서 주신으로 받드는 것은 단군이 아닌 환인이다.[28] 물론 예전에 단군을 묘사한 그림들도 기껏해야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이라 매한가지이긴 하다.[29] 비슷한 사례로 일본에서는 일본 신화의 창조신 이자나기를 같은 용례로 쓴다. 대표적으로 일본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이자, 리즈시절인 이자나기 경기가 있다. 이쪽은 원래는 1950년대 전반 경제 성장으로 인한 호황을 진무 천황 이후 최대 호경기라고 해서 '진무 경기'라고 했다가, 1950년대 후반 호황이 계속 이어지자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이후 최대라는 의미로 해당 신에 대한 신화에 등장하는 '이와토 경기'라고 한 이후, 1960년대 호경기에는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이자나기 경기'라고 한 것.[30] 다만 이후 이스라엘에서 셰일가스가 꽤 많이 난다는 것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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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에서 나의 정신분석적 고찰

旴丹추천 0조회 55
16.02.23 

국선도에서 나의 정신분석적 고찰

정 임순 수사


국선도를 처음 시작 하면서 몸이 차츰 나아지는 것에 대한 기대뿐이었다. 그렇게 무겁고 아프고 부기 때문에 늘 얼굴이 부어 있었고 오후가 되어서야 부기가 빠지고 얼굴은 항상 상기되어 눈이 벌겋게 충혈 되고 누군가 말을 잘못 하면 그것을 따지며 싸울 듯이 대들었다. 젊었을 때 혹사한 내 몸과 마음을 돌보면서 중년으로 훨씬 넘어서야 삶의 중요한 변환기에 서 있을 때 국선도를 접했다. 난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인 줄만 알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국선도를 배우고 나서는 “생은 다른 곳에” 라는 생각을 서서히 하면서 생물학에서는 강하거나 똑똑한 유전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유전자가 살아남는다고 한다는 생각에 철저한 변화시도를 준비하고 실천하기로 했다.

아무리 변화를 꿈꾸고 삶의 외형을 변화시켜도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호흡을 하고, 열감을 느끼고, 그렇게 굳었던 몸도 행공동작으로 서서히 열리다 보니 내가 살아왔던 과거의 내 행동들이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서 스스로에게 맹세를 했다. 평생 자신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가슴 한 복판에 법당을 차려 놓고 진심으로 나 자신에게 예를 다하는 마음으로 의식을 치루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책에 있는 행공 몇 동작 설명하는 것 보다 자신의 몸을 알고 자신이 놓여 있는 현재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국선도를 한다면 몸의 이완, 의식의 이완, 신경의 이완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어떤 호흡에서든 이완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우리 도우님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저 또한 돌덩이처럼 굳는다는 걸 늘 체험하다보니 이 이완이라는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 자신의 내면의 아이 이완은 그 동안 자신을 얼마나 혹사하고 경직시켰는지 이완이라는 아이를 달래기도 힘들었다. 이완을 쉽게 하는 마음부터 가지는 감정을 감사, 경이, 존중의 단계로 변화시키다 보면 심리 내면에서 통찰이 일어나면서 왜곡된 편견과 미숙한 관념들을 알아차리게 되고 내면의 자기를 볼 수 있다.





“자기를 본다” 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자기를 볼 줄 알게 외부로 투사한 감정을 끌어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를 알고, 나를 보고, 나를 느끼고, 나를 내려놓음으로 가는 첫 단계의 이완작업이다. 그리고 행공하면서 느꼈던 것은 행공하면서 느껴지는 근육과 신경의 살아나는 고통의 연속 속에서도 인체에 대해서 모르면 안 된다는 생각과 죽은 세포를 어떻게 하면 다시 살릴지에 대한 막연함에 끝없는 공부를 하게 되며 깊은 애착을 느끼게 한다.




상대방이 싫고 불편한 감정은 모두가 나의 모습이다. 라고 생각하며 이제까지의 낡은 사고방식과 잘못된 습관을 고치며 알아가는 알아차림인 것이다. 반복된 국선도의 행공으로 몸에 좋은 습관을 들이며 호흡으로 나를 찾아가며

빛을 돌려 아랫배를 관조하며 눈의 총기를 밖으로 뿜지 말고 내면으로 감싸 안으며 내 배 안에 와인의 오크통처럼 숙성되는 축기를 만들어 진정한 깨달음으로 정진하는 것이 국선도인으로 가는 길이며 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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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재 권16.03.31 08:21


첫댓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깊은 내면의 성찰
끝에
내린 분석이라
저도배울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감사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님 아래
훌룡한
선생님이
나오심을
알겠습니다

이병철 - -이변비중(離邊非中), 매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생각하다

이병철 - -이변비중(離邊非中), 매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생각하다/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대표적 담론가이자 열심한... | Facebook


이병철
58 m ·
 
-이변비중(離邊非中),
매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생각하다/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대표적 담론가이자 열심한 현장운동가이기도 한 사발 주요섭선생이 이번에 노겸 김지하시인의 생명사상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정식 이름은 ‘김지하의 사회사상 연구’로, 부제를 ‘니콜라스 루만의 사회학적 쳬계이론을 경유하여’라고 달았다.

아직 논문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 내가 무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우선 외우(畏友) 주선생이 이런 역작을 내기까지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이제 학자로서도 공식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앞으로 사발님이 생명운동가이자 학자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고 성원한다.

나는 사발님과 이른바 생명운동을 함께 해오면서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가 많다. 그가 생명담론을 통해 새롭게 제시하는 여러 견해는 ‘생명’과 ‘생명운동’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사발님이 노겸 김지하시인의 생명사상을 깊게 탐구하고 이를 통해 생명담론으로 새롭게 풀어가는 것이 내게도 좋은 공부이자 기쁨이기도 하다. 아마도 지금 사발님 만큼 노겸 김시인의 삶과 사상을 깊게 연구하는 학자도 드물 것이라 싶다. 그런 그의 연구작업은 그간 진영의 편파성으로 이해하고 평가해왔던 노겸시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위기의 이 시대, 생명운동에 대한 새로운 방향 제시와 그 실천에 대해서도 크게 기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는 사발님처럼 나도 생전의 노겸시인에게 대한 마음의 짐이 여전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번 사발님의 논문 가운데, 노겸 시인의 사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여러 키워드가 있지만 그 가운데 나에게 깊게 다가오는 개념 하나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말이다. 이 말, 이 단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접해오던 익숙한 것인데, 이번 논문과 사발님이 생명운동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제시하는 담론에서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불속 지부지 
차시 이변비중

(道不屬 知不知 
此是 離邊非中)’. 

우리 집 안방에 걸려있는 액자의 글귀이다. 
오래전에 스승께서 써주신 것인데, 스승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지도 어느새 삼십 년이 다 되었으니 사십 년 넘게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글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이변비중(離邊非中)’이란 이 단어를 만나왔음에도 아직도 그 의미를 선명히 깨우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이번에 사발님의 학위 논문과 담론제시를 통해 새삼스럽게 들었다. 오래전에 이 글귀를 써서 주셨을 때는 나에게 이 뜻을 잘 새겨 그렇게 살라고 일러주신 것일 텐데도 여태껏 제대로 새겨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온 것이라는 뒤늦은 자각이라고 할까.

그동안 나는 이 글의 출처가 막연히 도덕경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출처를 찾아보았더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좌계선생 등 한학을 하는 분들께 물어보는 과정에서 어쩌면 이 문장은 도가와 불가의 두 개념을 스승께서 하나로 합쳐 만드신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中)이란 개념은 유가에서도 중용과 시중(時中)과 같은 중심 개념의 하나이니 포함 삼교(三敎)라는 말처럼 유불선(儒佛仙)을 회통(會通)하는 의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道)가 앎의 영역을 떠난 것이란 말은 도덕경을 통해서도 익숙히 들어온 것이고 어렴풋이 짐작은 되는데, 문제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의미라 하겠다. 이 말을 흔히 불교의 중도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양극단을 버리되 중간도 아닌 전체적인 차원 변화의 진정한 중도"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풀이 또한 내게는 흔쾌히 다가오지를 않는다.
‘이변비중(離邊非中)’이란 존재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머물러야 하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지금 내게 들어와 있는 한 생각은 그 자리가 ‘매이지 않은 마음자리’라는 한 생각이다.

세계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머무는 자리 또한 고정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편, 저편이라고 하는 이른바 진영논리도 이런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디엔가 머문다면 그곳은 가장자리(변)거나 중앙일 수밖에 없다. 그곳은 결코 이변비중의 자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변비중의 자리를 어디라고 지칭하는 그 ‘매이는 마음을 떠난 자리’라 싶은 것이다. 이는 마치 양자물리학의 이른바 ‘관찰자 효과’에 보이는 입자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전자 등 미립자가 관찰자에 따라 그 모습과 위상이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만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어떤 자리(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다시 다른 사건에서는 또 다른 위치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