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5

Kang-nam Oh | 불교와 성경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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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 [1]

계간지 <불교평론>에서 이어가는 “불교로 읽는 고전” 시리즈의 하나로 ‘성경-불교의 입장에서 읽은 성경 이야기’를 쓰라는 원고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방금 나온 2021년 겨울호 248~265 쪽에 실렸네요. 
1. 성경의 구성, 
2.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3. 성경에 대한 태도, 
4. 해석의 문제, 
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로 구성되었는데, 

5번을 여기 올려봅니다.  즐독 부탁합니다.  (괄호 안은 각주들인데 페북에는 제대로 올려지지가 않네요.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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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

성경을 읽으면서 불교를 연상시키는 진술이나 사건들 몇 가지를 예거해 본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제들일 수 있기 바란다.  

1) 성경 첫째 권인 <창세기>에 보면 신이 6일 동안 세상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여라....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고 하였다. 서양 역사는 대체적으로 이 ‘정복’과 ‘다스리라’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땅을 마구잡이로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착취하고 살육하는 일을 계속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 말은 자연을 함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살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각주: Jeremy Rifkin, The Emerging Order: God in the Age of Scarcity, (Ballantine Books, 1979)와 그의 최근 책,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와 동저자, 안진환 옮김, <글로벌 그린 뉴딜>(민음사, 2020) 참조.)
  이런 새로운 이해는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2) 창조 이야기와 연관해서 야훼 신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을 조성하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자라게 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좋지만 그 중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른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며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과일을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었다.  둘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야훼 신은 이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순종·불순종의 입장에서 보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므로 쫓겨난 것이니 우리도 불순종하면 안 된다는 식의 윤리적, 율법적 해석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의식의 발달사를 다룬 켄 윌버(Ken Wilber)는 이 이야기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도 모르던 동물적인 주객 미분의 의식(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주객 분리의 의식(subject/object consciousness)으로 넘어온 단계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윌버는 물론 의식 발달의 완성은 이런 이분법적 분별 의식을 초월하는 초주객 의식(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라 한다. 
(각주: Ken Wilber, Up From Eden: A Transpersonal View of Human Evolution (Quest Books; Quest ed. edition, 2007) 참조.)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분별식(分別識)을 가지게 된 계기와 이를 넘어서서 분별식을 초극하는 단계로의 완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3) 성경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친 기별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4:17)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개’라고 번역한 것은 본래의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메타(넘어서다)와 노이아(의식)의 합성어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 하겠다는 뜻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메타노이아 체험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체험은 다 같이 ‘새로운 의식’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않을까?

4)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했다.  여기서 ‘내가’라는 것은 역사적 인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기보다는 ‘우주적 나(cosmic I)’,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우주적 생명력’, ‘본원적인 인간성,’ ‘나의 참 나’를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여겨진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친 말이 연상된다.  여기서 ‘나(我)’란 누구인가?  역사적 고타마 싯다르타를 의미할까?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나, 참 나인 불성(佛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선언과 부처님의 외침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 아니겠는가?

5) <마태복음>에 보면 최후 심판 장면이 나온다.  임금님이 의인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25:35~36)고 한다.  의인들이 자기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임금이 다시 입을 열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한다.  이런 것은 물론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고 결국은 하나라는 화엄 철학의 상즉(相卽) 상입(相入)의 원리나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에 의하면 보잘것없는 사람과 임금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임금에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6) 다시 화엄 사상을 원용하면, 예수님이 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19:19)는 말씀도 쉽게 이해된다.  이웃과 내가 따로 떨어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이웃만 하나가 아니라 나와 자연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8:12)고 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면 현재 자연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태학적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절박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학이 가르치는 삼경(三敬) 사상, 곧 경천(敬天), 경인(敬人)과 함께 경물(敬物)을 이야기하는데, 경물이야말로 환경 파괴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깊이 생각할 가르침이라 여겨진다.)

7) 일즉다(一卽多) 다중일(多卽一),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 모든 것이 결국 하나 안에 있고 하나가 모든 것 안에 있어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라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은 <요한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7:21)라고 하였다.  사실 󰡔요한복음󰡕의 중심 사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인류의 죄 값을 탕감하기 위해 피흘리셨으니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른바 대속론(代贖論)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신비적 합일’ 사상이다.  그러기에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1931-2021) 신부는 <요한복음> 해설서의 제목을 “어느 유대인 신비주의자의 이야기(Tales of a Jewish Mystic)”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번역에서는 제목을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이라고 했지만, 영어 원본에는 The Fourth Gospel: Tales of a Jewish Mystic(HarperCollins Publishes Ltd, 2013)으로 되어 있다.  신비주의란 절대자와의 합일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더욱이 류영모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외우는 위의 성경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독생자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심어준 하느님의 씨앗, 신성(神性)이라고 하였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8. 위에서 잠깐 언급한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 속에 빛으로 있는 신성(神性), 나의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고 있는 복음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도마복음> 풀이 책 서문 마지막 문장으로 “한 가지 좀 특별한 소망을 덧붙인다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졸저, <또 다른 예수>(예담, 2009), 29쪽. 기독교인들을 비롯해 비불자들을 위한 불교 안내서로, 오강남,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참조할 수 있다.)

나가면서

성경을 필자의 어머니처럼 일 년에도 몇 번씩 읽는 이도 있고, 필자의 사촌 형처럼 국한문 성경을 완전히 필사하고 이제 다시 한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일반 불교 신도들이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같은 것은 외우지만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경을 직접 읽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은 자기들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성경이나 불경에서 나온 진리 그대로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해석’과 ‘교리’를 성직자들이 전해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제 그런 전통에 무비판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텍스트를 직접 읽고 그 문자 너머 심층에 있는 속내를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방향으로 간취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그 깊이에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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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2)

며칠전 불교와 성경이라는 제목으로 "5. 불교와 관계에서 읽는 성경"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동감'해주셔서 이왕 쓴 것, 3번과 4번도 올려보자 하고 올립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아시는 분은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혹시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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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에 대한 태도

불교의 경전은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는 말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啓示)’의 책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

1) 문자주의적 태도
이른바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근본주의적(Fundamental) 혹은 복음주의(Evangelical) 그리스도인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한다. 심지어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縮字靈感說)’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든가, 여호수아가 해가 지기 전 쫒기는 적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하나님께 태양이 멈추도록 해 달라고 하니 태양이 멈췄다든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 나왔다고 하는 등 구약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였다는 복음서의 이야기 등등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하는데, 이런 문자주의를 받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참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우주를 엿새 만에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경 처음에 나오는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이고, 복음서들도 그 이름대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요한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바울의 동역자 마가와 누가가 쓴 것이고, 바울의 편지서도 14권 모두 바울이 직접 쓰고, 일반 편지서도 그 이름을 가진 저자들이 손수 쓴 것이라 믿는다.

2) 문자주의의 거부
한편 18세기 계몽시대 이후 발달된 이른바 ‘역사 비평학적 접근’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현대 성서학자들 대부분은 창조나 출애굽이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등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이 어느 한 때 정말로 있었던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지 않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진보적 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예를 들어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일 수 없다고 본다. 모세 오경 중 『신명기』 끝부분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모세 자신이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모세 오경은 내용이나 문체나 용어 등에서 각각 특유한 몇 가지 종류의 문헌이 나중에 편집되어 이루진 것이지 모세라든가 어느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로서, 『창세기』 1장1절에서 2장4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와 2장4절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가 각각 P문서와 J문서라고 하는 다른 종류의 문서였는데, 후대 󰡔창세기』 편집자가 이 두 문서를 적절히 짜깁기해서 붙여 놓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복음서들이 처음에는 저자의 이름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후대에 가서 지금과 같이 저자들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썼다면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될 것인데 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마가가 쓴 『마가복음』에 그 정도로 의존해서 거기서 그렇게 많은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또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썼다면 그가 『요한복음』을 쓸 당시 그의 나이는 100살에 가까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의문을 제기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나와 있는 말씀도 사실 모두 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verba ipsissima)’이라기보다 거의 다가 후대의 사상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연구한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낸 책으로 Robert W. Funk, 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HarperOne, 1996) 참조.)

  심지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 나사로 같은 인물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나 신이 인간이 되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저자들의 상상에 의한 결과물이라 보기도 한다. 
(존 쉘비 스퐁 지음, 변영권 옮김,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8) 참조.)
바울 서신 등도 바울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지만,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사상이나 문체 면에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 바울 자신이 쓴 것이라 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직접 쓴 것이 7편, 논쟁거리가 된 것이 3편,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이 3편, 따라서 바울이라고 하지만 “급진적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 세 명의 바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커스 J. 보그, 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 󰡔첫 번째 바울의 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참조.)

4, 해석의 문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신학자로는 20세기 최대 신학자 중 하나인  독일의 성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약 성서와 신화』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등의 저작을 통해 이른바 ‘비신화화(demythologizing)’를 주장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화적 서술이기 때문에 신화를 이해할 때 그것이 마치 우주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무엇인 것처럼 ‘우주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실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독일 신학자로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비신화화’라고 하면 신화를 없애는 작업이라 오해하기 쉽고 성경에서 신화를 없애면 남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비신화화라는 말 대신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혹은 ‘신화의 껍질을 깨기(breaking myth)라는 말을 제안했다.  틸리히는 종교적 서술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징이 지적하고 있는 상징 너머의 뜻을 알아내야 한다고 하고, 신학의 임무는 성경의 상징을 그 시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재신화화(remythologizing)’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역사비평적 접근이라든가 탈문자화라든가 신화적인 표현의 껍질깨기 방법 등이 불교의 텍스트를 읽는데도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불교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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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289 13uNoveamcb40eor satm 253a9:15glt  · 
오늘은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소설책 몇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째, 반수연 지음, <통영>(출판사 강, 2021)

캐나다에서 한국에 들어와 2주간 격리 기간을 보내는 동안 폭빠져서 읽은 책이다.  7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으로 「통영」은 다섯 번째 나오는 단편의 제목이다.  첫째 이야기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나머지 단편들도 재외동포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수상작이다.  1998년 캐나다로 이민한 작가가 캐나다 이민 생활에 얽힌 애환을 그리고 있다.  맛깔나고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밴쿠버 조선󰡕에 실려서 읽은 적이 있는데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경우 이야기들 자체도 감동이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지명이라든가 분위기가 내가 살고있는 밴쿠버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나에게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들이라 더욱 좋았다. 󰡔한겨레 신문󰡕에 서평이 크게 나왔다.

둘째, 김소윤 지음, <난주>(은행나무, 2018)

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이 소설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난주(Maria, 본명은 丁命連)는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맏딸로 1801년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의 아내였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그의 아내 난주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소설은 제주도로 간 난주의 파란만장한 삶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난주는 갖난 아기를 데리고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는데, 풍랑으로 배가 추자도에 잠시 머물렀을 때 아기를 바닷가에 떼어놓고 떠났다.  함께 제주도로 가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할 것이기에 차라리 추자도에서 평민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제주도의 노비제도와 방언이 많이 나온다.  제6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셋째, 박정선 지음, <백 년 동안의 침묵>(푸른사상, 2011)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그 형제들의 삶을 중심으로 소설화한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의 일부를 축약한 듯한 밀도 높은 이야기로 여러 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2012년 체육관광부 추천도서.
넷째, 한석훈 지음, <죽음과 친해지는 삶: 심층심리학습소설>(이분의일, 2021)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는 한석훈 교수가 죽음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소설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한 교수는 서문에서 “이 책은 노화를 예감하거나 노화에 이미 접어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적 내면을 탐색해보도록 안내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하여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길잡이용 성인학습소설입니다.”고 하고 이어서 “자신을 잘 알게 된 경우, 죽음을 경외의 마음으로 기다리며 이번 생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어 여생을보다 가치 있게 살 수 있으므로 스스로도 흡족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도 따뜻한 관계를 키울 수 있습니다. 깊이 사랑해야 잘 죽습니다.  내적 성숙에 대한 귀중한 배움의 내용을 지금껏 지상을 거쳐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남겨주었고, 그것을 저는 이야기 안에 담아내어 여러분 앞에 펼쳐보이겠습니다.” 죽음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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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민진의 󰡔파칭코󰡕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이야기했기에 여기서는 생략.  미국 Apple사가 8부작으로 제작하는 드라마는 내년 2월에 방영된다고 한다.

한 가지만 더: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2018)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에 속한다고 극찬.  나는 아직 3분의1 정도 읽다가 중단했는데, 다른 급한 일 끝내면 다시 시작할 예정. 
이상입니다.



2021/12/14

[김조년]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것들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것들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것들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12.13

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좀 진부하지만, 어제 12월 13일 날짜로 우리사회의 원로라는 이들이 대통령 선거기간에 깊게 생각을 나누고 적극 논의하면 좋겠다는 몇 가지를 제안하였다. ‘원로’라는 말을 쓰기에는 쑥스럽기는 하지만, 나도 그 제안문을 읽고 대체로 찬성하기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 내용을 좀 줄이고 내 생각을 한두 가지 넣어 여기에 소개한다.

코로나 전염병 확산 사태는 문명과정을 새롭게 정립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경제난과 양극화, 기후위기에 따른 자연재해는 인류의 운명이 절박한 상황에 부딪힌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때 미국과 중국이 군비경쟁과 패권경쟁을 벌이면서 나머지 다른 나라들을 자기편에 줄세우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사태는 하나될 인류의 희망에 정 반대되는 사건이기에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은 지난 70여 년 동안 전쟁과 독재를 거치면서도 민주화와 산업화에 뚜렷한 진전을 보이고 문화예술·스포츠에서도 좋게 평가받기에 이르렀고,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단순히 물질의 진보에 대한 것만 아니라, 바람직한 철학의 진화에도 인류에 공헌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의제들이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1. 우선 기후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는 인류문명의 어두운 내일을 미리 알린다. 탄소중립화 정책은 실제 모든 행정, 정치, 문화, 일상생활에서 철저하게 실천할 자세한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원자력활용과 폐기와 관련한 것은 아주 파격이라고 할만큼 진보스런 정책이 펼쳐져야 할 것이다.

1. 독재와 부패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망상하는 정치세력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어떤 권력기관이나 인간 집단도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와 부패로 치달을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특히 다시 ‘검찰국가’란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1. 미국·중국이 벌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패권 경쟁은 중단되어야 한다. 특히 올림픽경기에 참여하거나 거부하는 것들을 이용한 경쟁과 모든 다른 나라들을 줄세우기 하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러한 놀이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노선으로 평화유지의 차원에서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1. 미국과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상시체제로 지속되어야 한다. 어떤 지연시키거나 거부할 명분을 찾는 조건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비핵화, 제재 해제 그리고 관계 정상화 협상들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미국과 북한이 워싱턴과 평양에 동시에 임시대표부 설치, 미-북 간의 중단없는 전면 협상을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

1. 남·북 정부는 서울과 평양에 임시대표부를 설치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6·15 남북정상 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을 위해 서울과 평양에 임시대표부를 설치,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는 일을 원만히 진행하도록 해야 한다.


 
1. 구 일본제국의 가치관을 청산하지 못한 자민당 정권과 군사협력은 있을 수 없다. 자민당 정권과 군사협력 관계를 맺도록 한국에게 계속 요구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타당하지 않으므로 한국 정부는 이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1. 지방분권화를 통해 수도권의 비대화, 특권화를 막고, 지역이 활발하게 살게 하여야 한다. 철저한 지방분권 없이는 젊은 세대의 절망, 인구절벽, 부동산 투기, (지방)교육의 피폐, 지역의 소멸에 어떤 대응책도 효용이 없을 것이다. 중앙정부기관들의 분권과 지역의 자치행정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20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1)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광역지방자치단체장 들과의 예산·정책을 협의할 법정 월례회의와 2)광역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조세권의 대폭 이양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실질 지방분권화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수도권 집중이 계속 진행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1. 우리의 희망은 젊은 세대와 함께함을 넘어,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동행이 확립되어야 미래가 열릴 것이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은 공간을 위임하는 일을 적극 전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의병운동도, 독립운동도, 민주화운동도, 평화통일운동도 청년세대들의 과감한 도전으로 성취해왔고 극복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절망, 인구절벽, 부동산 투기, 교육 피폐, 지방의 소멸 등 우리 사회의 불평등-양극화의 산물도 젊은 세대들의 과감한 개혁운동으로 극복되고야 말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지난 시대의 독재와 불공정 등 기득권으로 돌아가려는 세력들의 절벽에 대해서도 비타협 투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할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소외된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면서 동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민주화-산업화에 성과를 거두고 메타버스(metaverse) 시대를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우리와 젊은 세대들의 동행이 필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 사익을 추구하는 일부 전통언론의 가짜 뉴스, 왜곡 보도에 사회개입이 필요하다. 우리사회의 일부 전통언론은 ‘살아있는’ 권력집단이 된 지 오래다. 특히 신문과 방송을 동원, 스스로 권력을 만들어내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자신의 하수인 권력을 만들어내겠다거나 가짜 뉴스를 통한 선전·선동을 일삼는 언론은 가소롭다. 일부 대형언론의 의도된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사회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개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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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2

Kohei Saito, Karl Marx's Ecosocialism - Progress in Political Economy (PPE)

Kohei Saito, Karl Marx's Ecosocialism - Progress in Political Economy (PPE)
Kohei Saito, Karl Marx’s Ecosocialism
Anna Sturman | September 28, 2021
Tags: Ecosocialism Environment Uneven Development World Ecology | 0 1218
I have the distinctly nerve-wracking pleasure of being the resident ecosocialist* charged with writing up a review of Kohei Saito’s Karl Marx’s Ecosocialism: Capital, Nature, and the Unfinished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hereafter KME), the latest academic tome read by the Past & Present Reading Group. In order to do this justice I will spend the first half of the review explicating the central rift within ecosocialist scholarship itself, before moving to discuss Saito’s contribution.

The unspoken context: Ecosocialist rifts

While it goes generally unexplored in KME, the context for this book is the ongoing cleavage between work in the tradition of so-called ‘first-stage’ ecosocialism, such as James O’Connor’s ‘second contradiction’, and scholarship in the tradition of the metabolic rift school,  ‘second-stage’ ecosocialism, associated primarily with the work of John Bellamy Foster, Paul Burkett and Brett Clark. It is worth setting out some of the key aspects of this supposed opposition, which begins from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Marx had a fully-formed or coherent ecological theory.

The second contradiction is perhaps the quintessential theorisation of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 from the ‘first-stage’ ecosocialists. James O’Connor theorised a second contradiction within capitalism, co-existing with the primary contradiction between labour and capital which tends to result in crises of overproduction (or demand-side crises of profit realisation). The second contradiction, O’Connor held, emerges as one of underproduction (supply-side crises), responding to capital’s expansionary imperative and the finite reproductive capacities of socio-ecological systems. In O’Connor’s original formulation, both the systematic degradation of the conditions of production and the social response to the ongoing appropriation of non-human nature can lead to economic crises. The restructuring of social relations following such crises presents opportunities for demonstrating the non-teleological resolution of crisis tendencies, and thus is a useful mechanism for movement-building. Many scholars following O’Connor have used this approach to reveal so-called ‘environmental limits’ as socially constructed, avoiding the political dead-end of Malthusianism.

As Alan Rudy has argued, the second contradiction often gets mistaken for an ‘ecological’ crisis, when it is more appropriately considered as a theorem of socio-ecological crisis and response, building from Neil Smith’s production of nature argument to see the conditions of (re)production as constantly (re)produced through human labour. Humans are part of nature, and through producing ourselves and non-human nature(s) in-and-against(-and beyond) the capital relation, we can combine and thus strengthen multivalent class struggle across socio-natures. The centering of human labour as the process through which we transform and are transformed by the rest of nature is regularly dismissed as constructivism – but this handy strawman can be neatly countered by some of the contemporary meditations on the ways humans transform and are transformed by the rest of nature, for example the work of Blanche Verlie, on climate and affect. These sorts of discussions help to deepen Smith’s production of nature thesis.

These arguments also tie to the materialist ecofeminist literature, and the double dialectic of socio-ecological reproduction in-and-against the capital relation. Jason W. Moore’s ‘world ecology’ takes this basic dialectic, or ‘double internality’, and considers it at the world-scale. The openness of this approach also makes it legible to the full array of struggles in-and-against the capital relation, embedded in socio-natures. Here in particular we can see the internal links to Indigenous sovereignty struggles.

The metabolic rift school begins from the premise that there is a coherent ecological theory in Marx’s existing work and thus the very premise of ‘first-stage’ ecosocialist theory is wrong. Rift scholars have been concerned to work out the nitty-gritty detail of how capital systematically degrades the ecological systems upon which all labour relies. It is essentially a variant of value-theory: the rift is a constitutive dynamic of capitalism, driven by the rupture between the town and country first induced by the event of industrialisation.

There is a great deal of good to be said about the metabolic rift school’s efforts to build, or parse, a form of ecosocialist theory from Marx’s existing works. The ability to do so, however, is not entirely surprising, given humans are a part of nature and the ‘first’ contradiction is about humans in an historically specific form of (re)production. It is ironic, given their focus on the labour theory of value, that the rift school appears unable or unwilling to grapple with Smith’s elegant treatment of historically-specific forms of human labour and contradictions therein as the necessary centrepiece of any ecological thought.

There is not enough space here to set out the full array of accusations which have been lobbed. I will content myself with suggesting that much of the furore goes to the basic epistemological intent of these mirroring approaches. The second contradiction/production of nature synthesis is focused on labour (and the contours of contemporary labour movements, with concerns about environments, ‘race’, gender, and so on all constitutively part of this consideration—the tensions of which are set out usefully by Stuart Rosewarne). The metabolic rift is concerned primarily with the capital relation. The former is inherently a political strategy. The latter is a theorem.

Into this theoretical morass swings Saito with his freshly available MEGA texts, landing feet-first in the rift school’s camp. The publication of MEGA for the first time in English is promised to reveal new insights gleaned from Marx’s notebooks, which reveal a(n even) more robust foundation for the rift school’s claim that Marx had an ecological theory. Saito sets out to explore the trail of Marx’s ecological development, and engagement with the various characters who were working on similar issues, to suggest that ecology was not a secondary nor negligible consideration within his work. Through careful engagement with this freshly available primary source material, Saito argues, we can trace the development of Marx’s ecological thought and fortify the rift school’s contention that the Promethean Marx was a straw man. ‘Look no further!’ they claim. Our Karl had the answers all along.

Karl Marx’s Ecosocialism as a contribution to ecosocialist scholarship

The bottom line, I suppose, is that Saito’s decision to work entirely within the confines of the rift school battle lines has resulted in a text which—despite its strengths in textual analysis and promise of broader contribution—does very little to advance ecosocialist scholarship, politics or strategy, as a whole.

The research agenda at the base of KME seemed to dictate Saito’s engagement, or lack thereof, with certain historical figures and ideas. One example is the extended discussion of Karl Nikolas Fraas’ influence on Marx’s later ecological thought, despite Saito’s admission that Fraas’ name appeared only once in Marx’s extensive written body of work. Conversely, this doubling down on the rift school agenda led to many missed opportunities to engage usefully with the O’Connor-Smith synthesis, and at times I found myself silently screaming ‘Neil Smith said this!!’ at the page—waiting for the other socio-natures to drop, so to speak.

Still, the novel reading of Marx’s notes might have led to some useful bridge-building across the ecosocialist divide. Alas, despite the promise of juicy tidbits from the MEGA, the carefully reconstructed development of Marx’s ecology did not appear to offer us anything we had not already seen. The small deviations from accepted chronologies do not appear to substantively alter the existing rift school reading. On the other hand, Saito’s efforts to demonstrate that the human-nature relation was deeply important to Marx is a point well-made, even if it has been made before.

A common critique of the rift school, and one that certainly applies to Saito here, is the tendency toward reification of ‘Nature’ and pre-capitalist natures. In existing debates about the double internality of human and non-human natures in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the theorisation of the dialectic is a source of massive controversy. I (along with my frequent collaborator Natasha Heenan) would suggest that not much substantive hangs on this issue. To side with Moore, other than the compulsions of capital driving contemporary academia, it is unclear why it is heresy to suggest that ‘the metabolic rift’ is rather a proliferating and mutating series of rifts. The rifts have not sprung from a single moment, but are necessary to the operation of capital on the global scale.

The insistence on a singular metabolism also obliterates the diversity and, certainly at times the ecologically devastating, internal compulsions of pre-capitalist socio-natures. A lack of engagement with even a handful of the lively socio-natures which co-exist with and against the capital relation in the present moment—Indigenous sovereignty movements, materialist feminisms and the questions of social reproduction, anti-imperialist agro-ecological movements—are all lost within the singular metabolism.

Without an explicit focus on the generative contradictions animating a pluriversal metabolism of human reproduction within the rest of nature, I am left asking: what is the politics of this? The focus on capital rather than the human labour which creates and internally divides the capital relation leaves us wanting for a political imperative. The focus on capital rather than socio-natures in-against-and beyond capital leads, I suggest, to a fundamentally defensive/offensive binary of possible action (think Andreas Malm’s war communism lens) rather than an open programme of political economic transformation operating at the level of the global, strengthened rather than riven by acknowledging the agency of the various sites of socio-natures building in-against-and beyond the capital relation.

Against the charge of rigidity, we can certainly acknowledge that there is a case to be made for the KME’s function at the level of internationalist theory and praxis. Saito’s work here has, anecdotally, almost single-handedly revived interest in the work of Marx in Japan, which is no small political feat! Perhaps this context can tell us more about why this project was so favourably received within the Anglophonic ecosocialist scholarship—it contributes to a properly internationalist ecosocialist project, and is thus deserving of acclaim.

On the other hand, it is imperative that ecosocialism becomes increasingly accessible, and the stories it allows us to tell are grounded in the materiality of socio-natures, past, present and future. Ecofascism is on the rise, the Mathusian politics of ‘population control’ are an ever-present spectre, and how we choose to outline and advance an ecosocialist agenda will have very real political consequences. This is not a book I would recommend to someone as an entry-point to thinking about ecosocialism, either theoretically, historically or politically—a problem, considering the arresting title.

Ultimately, I’m not sure what is to be gained by refusing to see the generative frictions and resonances between so-called first and second-stage ecosocialisms, beyond playing into the established dynamic of academia in capitalism. The unwillingness of the rift school to absorb the vitality and politics which drove first-stage ecosocialist thought, and which quite frankly yielded a theoretical framework which offers immediate and practical opportunities for action, is a real shame. It certainly would be much more useful for us, as ecosocialists (and here materialist ecofeminism should be taken as read as a basic requirement for calling oneself an ecosocialist), to explore how our work strengthens each other’s perspective rather than fighting to the death over What Marx Said.

 

*I am but one of the ecosocialist theorists in the P&P Reading Group and extend my thanks in particular to Tash Heenan and Matt Ryan for their thoughtful comments on the draft of this review. More broadly, the reading of ecosocialist theory and debates set out here is informed by my ongoing, shared research agenda with Tash Hee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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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Anna Sturman
Anna is a PhD candidate in the Department of Political Economy at the University of Sydney. Her research centr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climate change, particularly theories of the state, and of non-human nature and value, from a materialist ecofeminist perspective.

2冊の人新世本 - 外付脳内そっ閉じメモ

2冊の人新世本 - 外付脳内そっ閉じメモ

외부 뇌내 밀폐 메모
뇌에 전갈처럼 모이지만 단순한 놓는 곳 데스. 그렇게 닫을 필요.
2021 - 02 - 27
2권의 사람 신세본

2권의 사람 신세본, 
  1. 시노하라 마사타케 『「인간 이후」의 철학:인신세를 살다」, 
  2. 사이토 유키히라 「인신 세의 「자본론」」 독료. 

같은 사람 신세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도, 양자가 보는 곳은 완전히 달랐다. 
또한 인신세와 인류사회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법도 크게 달랐다. 이 2명의 저자는, 작년의 서두에 잡지에서 대담했을 때에 잘(라고 할까 거의) 대화가 맞지 않았지만 *1 , 확실히 그것도 어쩔 수 있을까라고 솔직히 말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두 사람이 보는 세계의 차이

간단히 말하면, 
  1. 시노하라는 인간 신세의 시대에 새롭게 퍼지기 시작한 인간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세계를 유일하게 보고 있고, 
  2. 반대로 사이토는 인간이 아직 살아가는 세계로 처음부터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1. 시노하라는 인간 신세의 시대가 되면 인간이 살 수 있는 세상은 인간이 살 수 없게 된 세상에 쌓이는 것일 뿐이므로 인간이 아직 살 수 있는 생활세계는 이제 인간이 살 수 없게 된 황폐한 세계에 의해 항상 침식, 교란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한 인간의 생활세계는 당연히 부서지며 마음도 사라지게 되고, 거기서 운영되는 생활도 인간 주체의 본연도 크게 변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시노하라는 그러한 삶과 주체의 변용을 유일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2. 한편 사이토는, 인간 신세의 시대가 되어도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가 퍼지기 시작하더라도, 아니 반대로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 인간이 살 수 있는 세계를 전력으로 지켜나가지 않아 해야 한다는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요점은,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한 자본주의 기타이 의 인식이 체제의 폭주 시간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원래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점점 폭주하면서 인간이 살기 어려운 세계를 지구상에 만들어 왔지만, 그 폭주가 높아져 기후변화를 가져오고, 드디어 지구를 실제로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로 만들기 시작하고 버렸다. 이러한 인신세의 상황하에서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이 살기 어려운 세계의 시정에 노력해 온 사회 운동은, 한층 더 새롭게, 인간이 아직 살 수 있는 세계를 지키는 새로운 사명까지 맡지 않는다 얻지 못하게 된다. 
  3. 사이토는 자본주의에 반대해 온 사회운동이 이 새로운 사명을 맡게 된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힘을 담을 수 있다 이었다.

인신세라는 시대와 인류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의 차이

이처럼 시노하라와 사이토는 보고 있는 세계가 완전히 달랐지만, 그 차이는 인신세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인류사회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의 그것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1. 우선 시노하라에게 있어서, 인신세의 시대에 시작된,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의 지구상에서의 확대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곳까지 와 있다. 이른바 '대홍수'는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고, 인간이 그것을 멈추기에는 더 이상 늦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새로운 지구(표면)의 상황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인간 주체는 크게 변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2. 한편 사이토에 있어서는, 확실히 인신세의 시대가 되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의 확대는 개시되지 않았지만, 아직 인간이 어떻게든 하면 그 진행을 밀어 넣어 봉쇄할 수 있다. 즉 '대홍수'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멈추기에는 아직 얼마 안 되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말해도, 용서받은 시간이 더 이상 적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종래부터 자본주의에 반대해 온 사회운동은 한층 더 그 운동을 강화, 촉진시켜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수호에 매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구 온난화 와 기후 위기를 일으켜 인신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온 범인이 자본주의인 것은 너무 분명했기 때문.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금까지의 세계를 지키는 것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아니 아직 늦는다(포스트 아포칼립스/프레 혹은 인트라 아포칼립스). ――이것이, 인신세의 시대에 격화한 기후변화와 종래의 인류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2명의 저자의 파악 방법의 차이이다. 이 차이에 따라인지, 「인신세」라고 하는 표기의 읽는 방법까지도 양자의 사이에서는 다른 시말이었다. 
  1. 시노 원본에서는 「인신세」는 「진신세이」라고 읽을 수 있지만, 이 읽는 방법으로부터는 분명히, 지구 환경의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따라, 인류 쪽도 근본적인 변화를 강요되어 새로운 본연의 자세를 어쩔 수 없게 된다('인신'화)라는 함의를 읽을 수 있다. 
  2. 한편 사이토모토에서는 「인신세」는 「한신세이」라고 읽혀지지만, 이 읽는 방법에는, 저자 본인이 뒤에서 조금 말하고 있듯이, 자본의 전제 와 그것이 원인인 기후 위기로부터 , 지금까지의 인류사회를 지키는 것에 성공해, 인류가 인류로서(즉 「사람」으로서, 「사람」인 채) 자립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밝혀져 있었다 *2 .

두 사람 사이에 예상되는 서로에 대한 비판

이상과 같이 2명의 저자는, 같은 사람 신세라는 것을 취급하면서도, 보고 있는 곳도 스탠스도 꽤 달랐던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 양자가 서로를 비판하면 어떻게 되는지 간단히 상정해보고 싶다. 
우선 시노하라로부터 하면 사이토는 이미 기존의 생활세계나 주체의 존재는 유지할 수 없다는 인신세라는 새로운 시대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옛 휴머니즘 의 입장에 서서 기존의 생활세계와 주체의 본연의 모습을 단지 온존시키려고 급증하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편 사이토로부터 하면, 시노하라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고 위기를 부추기는 것은 재해나 위기를 계기로 자본을 재편해, 부유층에 의한 재의 독점을 한층 진행시키는 참사 자본주의나, 혹은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을 구실로 하여 통치의 비대화를 정당화하는, 그 말하는 기후 모택동 에 단지 가담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인식의 또 다른 느린 강조, 필연적으로 지금은 더 많은 기술이 인류의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노로 지라 는 발상이 낳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만 배가될 것이다. 라이브로 인간 위해서는 어렵게되었다 황폐 한 환경에서 계속 생활 할 고급 기술 노로 저런 에만 있기 때문에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했다. しかしこれでは、原発などの巨大技術の存在を正当化したり、あるいは、プラットフォームを独占したうえで新たなテクノロジーの開発に色々と触手を伸ばしている、既存の巨大テック企業をさらに肥え太らせる밖에 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2명의 저자는 생각도 입장도 대조적인 것이지만, 이 양자로부터는 여러가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라고는 해도 그 한편으로, 역시 불만이나 의심이 아무래도 남아 버린다. 다음에 그들에 대해 조금 보고 싶다.

시노 원본에 대한 불만

시노하라는 살아있는 공간( 앰비언트 공간, 주위 환경 ​​Umwelt, 장소)의 특유의 감촉(기배, 분위기)이나 독특한 풍경, 광경의 기술에 철저히 시도한, 일본 독특한 풍토론, 풍경론의 계보에 위치하는 필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계보는 와 쓰지 테츠로 의 풍토론과 현상학계 의 공간론 이 독특한 방식으로 융합함으로써 태어나 전후의 신교토 학파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공간의 감촉의 기술에 전념한다는, 이 계보의 방법론에 따르면, 비록 살 수 없는 세계를 조우해도, 그 조우의 가운데서, 살 수 없는 세계의 그 살 수 있다 나름을 어디까지나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 노력을 통해 살 수 없다는 것 자체의 살아있는 느낌을 어떻게든 말로 써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방법론에서는 살 수 없게 된 세계와의 조우에 의해 생긴 주체나 생활세계의 근본적 변용의 파악이 불충분한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세계나 살아 활동하는 선택사항이 자명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주체가 아닌) 주체의 모습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 그들을 살아 거기에서 어떤 살아 느낌을 얻는 방식에 여전한 고집 을 계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세계나, 살아서 느끼고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주체의 모습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살거나, 살아보고 그것 특유의 느낌을 잡는다는 방법 이외의 방법이 본래는 필요하게 될 것이다 *3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거나 살아있는 느낌에 어디까지나 구니한다면, 살 수 있는 앰비언트 공간이 실제로는 살 수 없는 세계를 만나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그 공간의 유지에 계속 노력하려고 하는, 단지 방어적인 자세에 종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4 .

이러한 시노하라의 방법론의 특징은, 책 중에서도 그 저작이 다루어지고 있던, 왕년의 타기 코지 의 방법론의 그것에 상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타키는 처음에는 현상학 에서 출발하여 도중부터 기호론 을 여러가지 도입해 갔지만, 그의 방법론은 어디까지나 바로 살아있는 경험의 가운데서 살아있는 느낌을 기술한다고 한다 현상학 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살기에 철저히 소원하고, 또 실제로 살아보고 그 느낌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공허한 기호들이 증식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태를 앞두고, 바로, 그러한 사태 특유 의 살아있는 감촉을 석출하려고 계속 노력한 것이다. 즉, 살기가 어려운 기호들의 그 공허함 자체를 생생하게 체험하려고 한 것이다.

공허한 채로 증식해 나가는 기호 세계에 대해서는 거기에 걸맞지 않는 현상학적 방법을 감안하여 계속 적용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있는 현상학적 공간과, 살기에 있어서 소원한 기호 세계 사이의 그루브에 계속 머무르고, 생에 있어서 어울리는 기호 세계의 그 소원함을, 어디까지나 살아 느끼고자 노력하는 것. 이러한 다목의 방법론은, 이하와 같은 시노하라의 그것과 정확히 대응하고 있다. 살 수 없게 된 세계, 즉 접근이 불가능해진 실재의 쇄도, 촉발을 앞두고, 그러한 사태에는 맞지 않는, 살아있는 공간의 기술에 철저히 하는 현상학적 풍토론, 장소 이론의 방법을 감히 적용해 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기색이나 분위기에 잠길 수 있는 앰비언트 공간과, 앰비언트 공간의 성립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액세스 불가능한 실재들이 쇄도하기 시작한 사태의 사이에 계속 머물러, 기색이나 분위기에 잠긴다 일 등 용서하지 않는 세계의 도래, 침투가 가져온, 붕괴나 소멸의 예감에 물들인 특유의 기색이나 분위기의 기술에 철저히 가는 것.

사이토모토에 대한 의심
〇인 신세와 글로벌 자본주의
사이토가 강조하지 않는, 공통 공유, 공동 관리에 의한 민주주의의 실현, 나아가서는, 공통 특유의 윤택함의 전면적인 향수에 의한 탈성장적인 방식으로의 지속 가능성의 실현이라는 전략은, 원래는 글로벌 자본주의 ( 신자유주의 )에 대항하기 위한 리바타리안 좌익들의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글로벌 자본주의 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이 그대로 기후위기라는 인신세 시대에 새로 생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슬라이드 되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아무래도 불식할 수 없다.

もちろん、気候危機を引き起こして、人新世という地質学的年代を新たにもたらした張本人は資本主義体制だったのだから、その資本主義に対抗するための戦略が、深刻な気候危機に対処하기 위해서도 꽤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가져오는 영향이 너무 커서 기존 대응책으로는 어쩔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일부러 사람 신세라는 다른 연대를 설정한 것이 아니었는가. 거기에서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대응할 수 없게 된 새로운 사태가 생겼다고 할까, 이미 모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본주의 에 대항하는 방법은 그대로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으로도 유효하다고 오랫동안 강조를 계속하면 단순히 공통을 공유하거나 그 윤택함을 전면적으로 누리자 하는 것과는 명확하게 다른, 인신세하의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플러스 알파의 부분이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부분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 채, 인신세의 시대이기 때문에 공통의 공동 관리를, 탈성장적인 지속 가능한 사회의 실현을과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어느새 그것은, 유예가 없는, 이제 시간がないからこそリバタリアン左翼が昔から唱えてきた戦略を選ぶしかないと、ただ煽ってせき急き立てるだけのふるまいに等しくなってしまう。거기에서는 인신세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단순히 스스로의 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시와 같은 것으로 이용되는 것만이 되는 것은 아닐까?

〇 생산력 지상주의/지속 가능성이라는 대립 도식
또 사이토모토에서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생산력 지상주의/지속 가능성>이라는 대립축을 설정하고, 자신은 분명히 후자의 입장에 서겠다고 단언해 버린 점이다. 생산 힘 우월하고, 기술입니다 노로 이런 의 혁신 도 자본의 이윤율 내려 가고있는 경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시도와 함께, 증가에 의해, 무엇보다도으로 생산 능력의 증가로주고 우선 순위 심지어 기후 위기에서 사람들 중신, 기술 노로 저런 위치의 진행에 의해 어떻게 든 대응을 시도 할 것입니다. 한편 지속가능성의 입장은 전근대적인 커뮤니티가 입회지 등의 공유지(공통)를 적절히 공동관리하고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풍부함을 충분히 발휘시키는 것을 통해 커뮤니티를 지속시켜 온 역사를 중시한다. 이러한 커뮤니티의 모습을 범례로 하여 경제시스템을 더 이상 자본의 자기증식운동에 의존하지 않는 탈성장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었다. 사회 안에서 다양한 공유지와 공유물의 공동관리를 부활시켜 나가면 (사적 소유의 원리에 근거한) 자본의 운동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아도 풍부함을 실현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사이에서 평등하게 나눌 수 있게 되어, 나아가 동시에 CO2의 배출이나 자연 환경의 파괴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2개의 입장을 리짓트에 대립시켜, 오로지 지속 가능성의 입장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가지는 문제점은, 대략 다음의 3점이 될 것이다.

1) 자본의 움직임에 항복 이외의 방식으로 기술 노로 이런 의 혁신이 중요한 문제의 결과로, 원인은 방향의 종류로 이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잘립니다. 따라서 Tech Noro Gee 와 그 혁신 은 독점적으로 공동 소유되어 더 이상 그 중 하나로 보이지 않는 곳이 많고 그 중 많은 것이 공동 관리되고 있습니다. 사이토는 모처럼, A·고르츠의, <다른 사람과의 협동이나 커뮤니케이션을 촉구하는 「개방적 기술」/사람을 분단, 노예화시키면서 특정의 사람에게의 독점을 용서하는 「폐쇄적 기술」>이라고 한다(이쪽 (이)는 유익한 대립축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는 이 대립축이 충분히 살리지 않은 채로 되어 버린다. 개방적 기술은 오로지 공동관리의 대상일 뿐인 수많은 공통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커먼의 공동관리, 공동소유 방식 자체에 깊이 관여하고 그것을 더 바람직한 것으로 개선한다는 중요한 일을 할 것이다. Tech Noro Gee 는 공동 관리인으로서 공동 소유 방식을 변경해야 하는 동시에 나아가야 할 잠재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이 무시되어 버려도 될까.

또 인신세의 시대 하에서 기후변화가 심각화해 나가면, 다양한 공통이 본래 가지고 있던 풍부함을 적절한 공동 관리에 의해서 단지 발휘시키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할 수 없게 된다. そうなった際には、コモンの共同管理によってだけではなく、さらに何らかのテクノロジーを駆使して過酷化した地球環境に対峙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のだが、この種の可能性も考慮され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사이토 자신은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곧바로 사회를 공통의 공동관리 중심의 것에 재편만 하면 자본주의에 의한 더 이상의 지구환경에 대한 수탈을 저지하고 공통의 공동 관리만으로 지속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술 노로 이런 과에 따라 실현의 지속 가능성,하지만 그는 시야의 외부로 처음부터 배치했다이 수여되었다.

2 ) 위의 1 )에서 말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는 점이지만, 전 근대적인 커뮤니티에 있어서의 공통의 공동 관리, 공동 소유가, 경제의 지속가능화의 범례로서 세워져 버리면, 공통 공동관리, 공동소유를 집행하는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의 측면이 오로지 커뮤니티(특정 가치관, 생활습관, 생활양식 이 공유되고 그 공유를 통해 성원에게 귀속의식 , 아이덴티티 가 가져오는 집단)에 겹쳐지게 되고, 2개의 측면 사이의 구별이 모호하게 되어 버린다. 확실히 전 현대적인 커뮤니티에는, 공통을 공동 관리하는 어소시에이션의 측면이 항상 겸비하고 있었지만, 후자의 이 측면은, 사적 소유의 원리에 근거한 욕망의 체계인 소사에티 ( 부르주아 사회 )라고 하는 부정적 매개를 거쳐, 처음으로 전자의 커뮤니티라고 하는 측면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일까. 그러한 부정적 매개를 거치지 않고 커뮤니티에 원래 갖추어져 있던 어소시에이션의 기능이, 단지 소외론적 으로 고차의 차원으로 회복될 뿐이라면, 언제까지나 어소시에이션과 커뮤니티는 연결된 채로 되어 버릴 것이다. 연관 (기능)의 실현은 특정 커뮤니티를 형성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5 .

3 ) 전 근대적인 커뮤니티의 공통 공동관리를 범례로 하여 경제시스템을 지속가능하게 하려고 하는 이상과 같은 시도를 사이토는 탈성장적인 커뮤니즘 이라고 부른다. ' 커뮤니즘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시도는 원래는 ' 자본론 ' 이후의 만기 마르크스 가 주장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마르크스 연구에서는, 「자본론」이후의 만기의 초고군의 연구가 수박이었기 때문에, 만기 마르크스 의 주장이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구가 진행되어 만기 마르크스 의 생각이 드러나 실은 그것이야말로 인신세의 시대에야말로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시기의 마르크스 의 사상을 특권화하고, 그 의의나 현대성을 설한다는 행동은 더 이상 시대 지연의 것 밖에 없는 것일까. 확실히 마르크스 의 생각이나 입장은, 시기마다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곳에서 다르고, 그들을 다시 비추어 보면, 통일한 상을 묶는 것이 어려운 것이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시기마다 크게 다른 사고방식이나 입장 뒤에 실은 숨겨진 통일과 조화가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상정되어 해석에 의해 어떻게든 그들을 떠오르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 했다. 하지만 그 결과, 마르크스 의 읽는 방법이 상당히 자의적인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상황에 위기감을 기억한 사람들은, 이번에는 텍스트의 엄밀한 읽기를 중시하게 되어 오히려 각 시기 동안 의 마르크스 의 입장의 변화나 단절을 강조하게 되었다. とはいえただそれだけではマルクス特有の思想を明確に押し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さらに特定の時期のマルクス(『経哲草稿』期の初期マルクスや、『ド・イデ』から『資本論』にいたる후기 마르크스 등)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이라고 과잉으로 부추기면서 특권화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어느 시점의 마르크스걸릴 것인지를 둘러싸고 불모한 갈등이나 논쟁이 생기게 되었지만, 이 이후에 '만기 마르크스 '되는 것을 덧붙이려는 사이토의 행동은 그 종류의 갈등이나 논쟁을 보다 악화시키는 것에 밖에 되지 않을까. 단순히 옥상 가게를 곁들이는 것 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マルクスは、革命の実現によって資本主義体制を打破するという、終生変わらなかった目標を達成するために、立場や主張を生涯の間に次から次へと変えていったわけだから、当然そこに는 연속적인 면과 단절된 면이 모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이 양면을 통일한 상하에 포섭하거나 그 중 하나를 특권화하는 등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오히려 마르크스 연구자로서 앞으로 해야 할 것은, 연속과 단절의 양면을 안은 채의 마르크스 의 생애의 사상적 행위를, 미완성인 채의 거대한 운동으로서 그려내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 그가 제출한 여러가지 이론이나 분석은, 현재에도 통용하는 깊은 통찰과, 시대의 한계가 각인된 인식이 복잡하게 얽힌 상태에 있는 가기이기 때문에, 그 얽힘을 정중하게 풀어 갈 필요가 있다 도 나온다 *6 . 이러한 작업이 만기 마르크스 를 특권화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또 신세의 시대를 새롭게 살게 된 우리에게도 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어떨까 있을까.

자신의 입장
언제나 부정으로부터 들어가 결국 아무것도 건설적인 것은 말하지 않고 끝나 버리는, 전형적인 음란 한 행동처럼 어려움만 말해 버렸기 때문에, 마지막은 조금 긍정적인 이야기를. 불평만 말했지만 너의 입장은 뭐야? 라고 돌입될 것 같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매우 간단하게 밝혀 가고 싶다.

자신의 입장이란, 한마디로, 시노하라모토와 사이토모토의 각각의 좋은 사촌이다. 우선 시노 원본에서는, 인신세의 시대에서는 우리의 생활 세계는 근본적인 변용을 강요받는다는 인식을 답습해 나가고 싶다. 그러므로 ‘인신세’라는 표기는 단호하게 ‘진신세이’라고 읽기로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는 인간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세계 위에 간신히 쌓이는 것 밖에 없어졌기 때문에 하지만)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로부터의 침식을 끊임없이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생활세계는 인신세의 도래와 함께 근본적으로 변용해 버린 것이다. ――시노하라는 이렇게 강조하지 않지만, 확실히 그것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활 세계의 근본적인 변용을, 앰비언트 공간 안에서 주체가 경험하는 분위기나 감촉의 변화로서 어디까지나 기술해 나가려는, 시노하라가 선택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유보를 표명하고 싶다 .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가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 안에 침식하기 시작했다면 분위기와 느낌에 주체가 잠길 수 있는 앰비언트 공간의 성립 자체도 어려워져 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활세계의 근본적인 변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앰비언트 공간에 잠기는 것과는 다른 주체의 본연의 자세에 의거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모습은, 앰비언트 공간이 성립되지 않게 되어 엄청난 살고 있는 주체의 상황에 의거하면서 재차 만들어져 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 상황을 정면에서 받아들이면서, 감각을 날카롭게 하거나 미묘한 느낌에 잠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와의 다른 접하는 방법(근접성)을 시작해 나가야 할 것이다 *7.

한편 사이토모토에서는, 반자본주의, 탈성장, 커뮤니즘 의 가능성의 추구라는 기본적인 스탠스를 그대로 답습해 가고 싶다. 특히 반자본주의와 커뮤니즘 의 추구라고 하는 스탠스는, SDGs 나 그린 뉴딜 이 내거는 다양한 수치 목표가, 사기업의 이윤 추구 활동을 단순히 정당화하기 위한 공소한 주제에 후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신세가 도래한 상황에 대한 사이토의 인식에 대해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지 않는다. 아직 간신히 늦기 때문에, 서둘러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를 진행하면, (종래의 인간성 이 유지된) 지금까지의 사회의 본연의 방법을 어떻게든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さらにまた、脱成長を達成しさえすれば、資本主義体制下よりも多くの者が種々のコモンが本来持っていた潤沢さを平等に享受できるようになるから、むしろより豊かな社会が실현하게 될 것이라고도.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오히려 반대로, 벌써 맞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사회의 본연의 방법이나 종래의 인간성 도 크게 변화시켜 가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결국, 보다 현실적이고 땅에 발 붙은 대책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불리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 비추어 적응하는 것에서 항상 가져온 것이고, 또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더 이상 도망쳐られないものとして直視することからし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또 사이토모토 중에서는 이상과 같은 상황 인식과, 다음과 같은 주장이 표리 일체의 것이 되고 있었다. 이른바, 전 근대의 커뮤니티를 모델로 한, 공통을 공유·관리하는 어소시에이션을 확립해 상호 연계해 가는 것만으로, 인신세하의 기후 변동에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불행히도 이쪽의 주장에 대해서도 유보를 표명할 수밖에 없다. 공통을 공유하는 어소시에이션의 확립은 확실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심각한 기후변화에는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확립되어야 하는 어소시에이션 쪽도, 단순히 전근대의 커뮤니티를 범례로 한 것만으로는 불충분해질 것이다. 사람 신세하의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과거에 전례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어소시에이션을 제로로부터 구축해 나갈 필요도 나올 것이다. いずれにせよ、非資本主義的な体制にふさわしい、脱成長状態を維持するための新たなテクノロジーのシステムの設計や構築が、プラスアルファとなる重要な課題として浮上してくることになると思う. 기술 노로 저런 일반적인 중 하나가 관리 할의 대상이 아니므로, 단순히 공유하지 않습니다.

커뮤니즘 에 대한 부론
마지막으로 본론에서는 벗어나 버리지만, 어소시에이션이라고 하는 것만이 중시되는 최근의 좌파계대의 풍조에 한마디 고언을 제시해 두고 싶다. 사견 에 의하면 커뮤니즘 의 운동이란,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주의뿐만 아니라, 개량주의 와 전위주의라고 하는 다른 2개도 필요해, 그 3개가 모여 서로 삼위일체적인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라고 처음으로 성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8 . 여기서 말하는 전위주의란 물론 소수 정예의 전위당에 의한 지도를 중시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회와 인간의 방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집단이나 조직을 형성하고, 또한 그 형성의 운동과 동시에, 실제로 사회나 인간의 방식에 개입해, 그들을 크게 변화시켜 가는 실천을 중시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회나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우선 사회에 대해서는, 자유, 평등, 연대가 그 안에서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또 인간에 대해서는, 자유, 평등 , 연대를 무엇보다도 존중할 수 있도록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인위적, 작위적으로 가져오려는 *9 전위주의의 실천은 종종 배타적인 당파에 수렴해 가거나, 혹은 때로는 광신적인 컬트와 동등한 것으로 일탈해 버리는 것 많았다. 그 때문에, 이런 종류의 막힘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기 위해서, 특히 68년 혁명 당시는, 전위당의 형성·운영과, 집단적인 정신 요법, 정신 분석 을 합체조차 시키려고 한 움직임도 존재했다 하지만, 유감스럽지만 그런 움직임은 불충분한 채 좌절해 버린 것 같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경험을 거친 이래, 수많은 기획의 막힘을 앞둔 채, 전위주의는 계속 기능부전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어소시에이션주의가 현재에 도달하여 힘을 갖게 된 것일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소시에이션 주의에 의거만 하면 전위주의의 기능 부전을 극복할 수 있다든가, 혹은 어소시에이션 주의의 입장을 철저히 하면 전위주의의 기능부전의 문제에 일절 터치하지 않고 커뮤니즘 의 운동을 진행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은, 분명히 부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지나친 이단적인 발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말하면, 큰 착오라고조차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이른바 마르크스 의 프루돈화 ?). 애초에 개량주의 분들도 마찬가지로 전위주의의 막힘 문제에서 바로 손을 잡고 자신의 입장만을 추진하는 것에 철저히 있었지만, 이러한 선택을 한 결과 20세기 자본주의의 전개 에 대해서는 전혀 검을 칠 수 없게 되어, 단지 그것을 보완하는 것만의 역할에 달게 하는 것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10 . 한편, 어소시에이션 주의자는 현재 네오 리베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유력한 대항축으로서 일단 기능하고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자본주의의 측이 이른바 감시 자본주의나 신용 자본주의로 재편되어 가면, 종래와 같이 유력한 대항축으로서 기능을 계속할지 어떨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어소시에이션주의의 입장에서는, 각 어소시에이션의 성원은, 오로지 「윤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즉 호혜적, 상호부조적으로 행동하도록 요구되고 있었지만, 감시 자본주의나 신용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바로 윤리적·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강하게 유도, 조작하게 된 새벽에는 과연 어소시에이션주의는 그 움직임에 대해 계속 유효하게 할 수 있을까. 역시 전위주의로부터의 개입을 따로 따지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윤리적인 행동으로 선도하게 된 감시 자본주의나 신용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저항해 나갈 수 없게 된다 겠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전위주의의 기능 부전 상태에 정면에서 임해, 그것을 빨리 어떻게든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
*1 : 시노하라 마사부 + 사이토 유키히라 「토의:포스트 자본주의와 인신세」, 「현대 사상」2020년 1월호 「특집= 현대 사상 의 총 전망 2020」 소수

*2 : 「인신세」라고 하는 표기에 이상과 같이 2개의 읽는 방법이 생긴 것은, 실제로는, 단순히 출판사의 방침의 차이에 근거하는 것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3 :たとえばC・マラブーは、深刻なトラウマなどによって主体の通常の機能が大きく損なわれた状態のうちに「可塑性」という様態を見出して、それを、資本主義体制下で望ましいと見하고 있던, 「유연성」이라고 하는 주체의 통상의 모습과 구별하기 위해 노력해 갔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 등이 살기 어려워진 상태를 살기 이외의 방식으로 수용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갈 때 참고가 될 것이다. 다만 말라부의 경우는, 가소성이라는 것이 주체성의 본질이라고 여겨진 생명의 활동성과 직결되어 버려, 오히려 가소성이야말로 생명의 활동성을 기초로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결국은 종래의 인간 중심주의적인 주체관과 생명관을 강화시키는 것밖에 없었지만.

*4 : 게다가 치사카 쿄지 도 다음과 같이 같은 불만을 흘렸다.


*5 : 물론, 커뮤니티의 측면 없는 어소시에이션을 억지로 실현시키려고 하고, 그 측면을 무리하게 억압해 나가려는 폭력성은 문제가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소시에이션을 유일하게 커뮤니티에 근거시키고, 또 커뮤니티의 1기능으로서 어소시에이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만 하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6 : 사이토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계급투쟁 이나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물질 대사 에 주목한 점에 보고 있는데 그 마르크스 특유의 물질 대사 론이 현재 의 생물학이나 생태학 의 수준에서 봐 얼마나의 것이었는가, 명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 계급투쟁 이나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과 물질 대사 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밝히는 과제가 생겨나게 된다. 아마 이쪽의 과제는, 다른 저작으로 새롭게 착수되게 되는 것이겠지만. (*2월 28일 보충: 그 과제에 관해서는 『대홍수 전에』에서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것 같아서, 다시 제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7 : 그러나 실제로, 문제는 더 복잡합니다. 시노하라는 주위에 떠도는 분위기의 미묘한 변화(취성이나 붕괴의 감각의 촉발)을 통해 인신세의 도래에 의한 생활세계의 근본적인 변용을 파악해 나가는 발상을 원래 T 모튼 의 앰비언트 공간론에서 받았지만, 당의 그 모튼 은, G·하만의 오브젝트 지향 존재론 의 영향을 받아, 종래는 인간적 주체의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던, 분위기에 잠기거나 감각을 갈아 맑게 하거나 하는 경험을, 인간과는 전혀 무연한(혹은 인간도 어디까지나 그 일부일 밖에 없다) 어슬렁거리는 대상끼리의 관계로서 읽어 가는 것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살 수 없는 세계를 만지면서 생긴 다양한 환영이 솟아오르는 만성적인 공황상태는, 사실은 어색한 대상끼리가 관계하는(근접하는) 때에는 항상 일어나고 있었던, 객관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 된다. 시노하라는 T. 모튼 의 이러한 일종의 실재론적 전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분위기에 몸을 담그는 것을 주체의 경험으로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상과 같은 모튼 의 이론적 전개를 근거로 한다면, 생활 세계의 근본적 변용을 파악해 나가는 방법에는, 앰비언트 공간 자체의 미성립, 붕괴에 정위해 가는 방향 외에, 또 하나, 앰비언트공간 속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 취성의 감각이나 만성적인 패닉 상태를 인간 주체와는 무연한 어색한 대상끼리의 관계로서 파악해 나가는 방향도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두 방향은 어떻게 교차해 나가게 될까. なお篠原のモートン受容の不十分さと、モートンの一種の実在論的転回については、菅原潤の新著が詳しい(菅原潤『実在論的転回と人新世』知泉書館、2021年、第5章"티모시 모튼 의 초과 개체").

*8 : 엄밀히 말하면 또 하나 평의회(코뮌, 카운실)주의라는 것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평의회주의도, 어소시에이션 주의와 같이, 점진적인 개량주의 와, 권력의 일극 집중을 진행시킨 전위주의와의 쌍방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면서, 자치 나 자주 관리라고 하는 것을 중시해 간다 조류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어소시에이션 주의중에 포함하기로 하고 싶다. 덧붙여서, 나가사키 히로시 가, 봉기의 자연 성장성에 의거하면서, 그 자연 성장성을 유지하는 장치로서 평의회 권력을 기초로 하려고 한 것에 대해, 사이토 코헤이는, 자연의 물질 대사 과정에 의거하면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 대사 과정의 균열을 복구시키는 장치로서 전 근대적인 커뮤니티를 모델로 한 어소시에이션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9 : 변화를 인위적, 작위적으로 가져오려는 것은 한마디로 '개조'한다는 것이다.

*10 : 최근의 좌파 가속주의의 조류는, 이 개량주의 의 입장의 최신판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지금부터, 기술 노로 이런 어떤 디자인과 쌍 자본의 주요 전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의 동작을하기 때문에, 될 것입니다 좌파 가속 원리의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있다. 그러나 어소시에이션 주의나, 그리고 특히 전위주의와의 제휴가 존재하지 않는 채로는, 역시 자본에의 저항은 불충분한 상태인 채로 머무는 것은 아닐까.

ashibumi68 288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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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2冊の人新世本
2冊の人新世本、篠原雅武『「人間以後」の哲学:人新世を生きる』、斎藤幸平『人新世の「資本論」』読了。同じ人新世について論じ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両者が見ているところはまったく違っていた。また人新世と人類社会との間の関係の把握の仕方も大きく異なっていた。この2人の著者は、昨年の冒頭に雑誌で対談したときにうまく(というか殆ど)会話がかみ合わなかったのだが*1、確かにそれもむべなるかなと正直言って思わざるを得なかった。

2人が見ている世界の違い
簡単に言えば、篠原は、人新世の時代に新たに広がり始めた、人間がもう生きられなくなった世界の方をもっぱら見ていて、反対に斎藤は、人間がまだ生きられる世界の方に最初から焦点を絞っていたのだった。より詳しく言うと、篠原は、人新世の時代になると、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る世界は、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世界の上にかろうじて築かれるものでしかなくなり、従って、人間がまだ生きることができる生活世界は、もう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荒廃した世界によって常に浸食、攪乱されるようになると見ている。そうした人間の生活世界は当然脆くて心もとなくなり、そこで営まれる生活も人間主体のあり方も大きく変容せざるを得なくなる。篠原は、そうした生活や主体の変容をもっぱら記述しようと努めていた。

一方斎藤は、人新世の時代になってたとえ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が広がり始めたとしても、いや逆に広がり始めたからこそ、まだ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る世界を全力で守っ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スタンスを取る。そこでポイントとなるのは、資本主義体制の暴走の度が増してついに臨界点に達したという認識だ。元々資本主義という体制は、どんどん暴走しながら人間が生きにくい世界を地球上に生み出してきたのだが、その暴走が高じて気候変動をもたらし、遂に地球を実際に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にし始めてしまった。こうした人新世の状況下では、資本主義に反対して、人間が生きにくい世界の是正に努めてきた社会運動は、さらに新たに、人間がまだ生きられる世界を守るという新たな使命まで引き受けざるを得なくなる。斎藤は、資本主義に反対してきた社会運動がこの新たな使命を引き受けることになった事実を強調しながら、だからこそ今まで以上に資本主義に反対する運動を推し進めるしかないのだ、と力を込めるのだった。

人新世という時代と人類との関係の把握の仕方の違い
このように篠原と斎藤は見ている世界がまったく違っていたのだが、その違いは、人新世という新たな時代の到来と人類社会との関係の把握の仕方のそれにまで及んでいた。まず篠原にとって、人新世の時代に始まった、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の地球上での拡大は、もう取り返しのつかないところまで来ている。いわゆる「大洪水」はすでに相当進んでいて、人間がそれを止めるにはもはや手遅れだったのだ。だからこそそうした新たな地球(表面)の状況に適応していくために、人間主体は大きく変容せざるを得なくなる。

一方斎藤にとっては、確かに人新世の時代になって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の拡大は開始されはしたのだが、まだ人間が何とかすればその進行を押しとどめて封じ込めることができる。つまり「大洪水」はすでに始まりつつあるのだが、人間がそれを止めるのにはまだ間に合うのだ。但しそうは言っても、許された時間がもう残り少ないことには変わらない。そしてだからこそ、従来から資本主義に反対してきた社会運動は、さらにその運動を強化、促進させ、人間が生きられる世界の守護に邁進していく必要がある。地球温暖化や気候危機を引き起こして人新世という新たな時代をもたらした犯人が資本主義であるのは、あまりにも明らかだったのだから。

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る今までの世界を守り通すことはもう間に合わない/いやまだ間に合う(ポスト・アポカリプス/プレあるいはイントラ・アポカリプス)。――これが、人新世の時代に激化した気候変動と従来の人類社会との関係に対する2人の著者の捉え方の違いである。この違いに応じてか、「人新世」という表記の読み方までもが両者の間では異なる始末なのだった。篠原本では「人新世」は「じんしんせい」と読ませるのだが、この読み方からは明らかに、地球環境の不可逆な変化に応じて、人類の方も根本的な変化を強いられ新しいあり方をせざるを得なくなる(「人新」化)という含意が読み取れる。一方斎藤本では「人新世」は「ひとしんせい」と読まされるのだが、この読み方には、著者本人があとがきで少し述べていたように、資本の専制とそれが原因である気候危機から、今までの人類社会を守ることに成功し、人類が人類として(つまり「ひと」として、「ひと」のまま)自立して新しく生まれ直すことができるという意味が明らかに込められていた*2。

2人の間で想定される互いへの批判
以上のように2人の著者は、同じ人新世というものを扱いながらも、見ているところもスタンスもかなり異なっていたのだった。そこで、もし両者が互いを批判するとどうなるのか、簡単に想定してみたい。まず篠原からすれば、斎藤は、もう従来の生活世界や主体の在り方は維持できないという、人新世という新たな時代の核心を捉え損ねていることになるだろう。旧来のヒューマニズムの立場に立って、従来の生活世界や主体のあり方をただ温存させようと汲々としているとしか見えない筈だ。

一方斎藤からすれば、篠原のようにもう取り返しがつかないと危機を煽ることは、災害や危機を契機として資本を再編し、富裕層による財の独占を一層進める惨事資本主義や、あるいは、気候危機への対応を口実にして統治の肥大化を正当化する、彼言うところの気候毛沢東主義にただ加担することにしかならないだろう。またもう遅いという認識の強調は、必然的に、今後も人類が存続するためには今以上のテクノロジーの発展に期待をかけるしかないという発想をもたらすことになる。人間が生きるのが困難になった荒廃した環境下でも生活し続けるためには、高度なテクノロジーに全面的に依存するしかなくなるからだ。しかしこれでは、原発などの巨大技術の存在を正当化したり、あるいは、プラットフォームを独占したうえで新たなテクノロジーの開発に色々と触手を伸ばしている、既存の巨大テック企業をさらに肥え太らせることにしかならない。

以上のように2人の著者は考え方も立場も対照的なのだが、この両者からは色々と教えらえられるものが多かった。とは言ってもその一方で、やはり不満や疑念の方がどうしても残ってしまう。次にそれらについて少し見ていきたい。

篠原本への不満
篠原は、生きられる空間(アンビエント空間、周囲環境Umwelt、場所)の特有の感触(気配、雰囲気)や独特の風景、光景の記述に徹しようとした、日本独特の風土論、風景論の系譜に位置する書き手だと言える。この系譜は和辻哲郎の風土論と、現象学系の空間論が独特の仕方で融合することによって生まれ、戦後の新京都学派の一翼を担っていた。生きられた空間の感触の記述に専念するという、この系譜の方法論に従うと、たとえ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に遭遇したとしても、その遭遇の只中で、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のその生きることができなさをあくまで生きようと努めることになる。そうした努力を通して、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自体の生きられた感触を、何とか言葉に書きとめていこうとするわけだ。

しかし以上のような方法論では、生きられなくなった世界との遭遇によって生じた、主体や生活世界の根本的変容の把握が不十分なものになるのではないか。もはや生き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世界や、生きて活動するという選択肢が自明なものではなくなった(主体ならざる)主体の様態を受容しようとする際、それらのものを生きて、そこから何らかの生きられた感触を得るという仕方に相変わらず固執し続けることになるからだ。もはや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や、生きて感じて活動することが困難になった主体の様態を受容するためには、それらを生きるというか、生きてみてそれ特有の感触を掬い取るという仕方以外の方法が本来は必要になる筈だろう*3。にもかかわらず、生きることや、生きられた感触にあくまで拘泥するならば、生きられるアンビエント空間が、実際には、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に遭遇してすでに崩壊し始めたにもかかわらず、あくまでその空間の維持に努め続けようとする、ただの防御的な姿勢に終始してしまうのではないか*4。

こうした篠原の方法論の特徴は、本の中でもその著作が取り上げられていた、往年の多木浩二の方法論のそれに相通じるものがあると思う。多木は最初は現象学から出発し、途中から記号論を色々と取り入れていったのだが、しかし彼の方法論はあくまで、まさに生きられた経験の只中での生きられた感触を記述するという現象学的なものだった。そして、生きることにとって徹底的に疎遠であり、また実際に生きてみてその感触を覚えるのがとても困難な、空虚な記号たちが増殖し始めた新たな事態を前にして、まさに、そうした事態特有の生きられた感触を析出しようと努力し続けたのである。つまり、生きることが困難な記号たちのその空虚さ自体を生き生きと体験しようとしてみたわけだ。

空虚のまま増殖していく記号世界に対して、それにはそぐわない現象学的方法を敢えて適用し続けること。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生きられた現象学的空間と、生きることにとって疎遠な記号世界との間の溝に留まり続け、生にとってよそよそしい記号世界のその疎遠さを、あくまで生きて感じ取ろうと努めること。こうした多木の方法論は、以下のような篠原のそれとちょうど対応している。生きることが不可能になった世界、つまりアクセスが不可能になった実在の殺到、せり出しを前にして、そうした事態にはそぐわない、生きられた空間の記述に徹する現象学的な風土論、場所論の方法を敢えて適用してみること。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気配や雰囲気に浸ることができるアンビエント空間と、アンビエント空間の成立自体を許さない、アクセス不可能な実在たちが殺到し始めた事態との間に留まり続け、気配や雰囲気に浸ることなど許さない世界の到来、浸透がもたらした、崩壊や消滅の予感に彩られた特有の気配や雰囲気の記述に徹していくこと。

斎藤本への疑念
〇人新世とグローバル資本主義
斎藤が強調してやまない、コモンの共有、共同管理による民主主義の実現、さらには、コモン特有の潤沢さの全面的な享受による脱成長的な仕方での持続可能性の実現という戦略は、元々は、グローバル資本主義(新自由主義)に対抗するためのリバタリアン左翼たちのそれだった。そのため、グローバル資本主義に対抗するための戦略が、そのまま、気候危機という、人新世の時代に新たに生じた状況に対応するための戦略へとスライドされただけなのではないか、という疑念がどうしても払拭できない。

もちろん、気候危機を引き起こして、人新世という地質学的年代を新たにもたらした張本人は資本主義体制だったのだから、その資本主義に対抗するための戦略が、深刻な気候危機に対処するためにもかなり役立つのは当然のことだ。しかし、気候危機がもたらす影響があまりにも大き過ぎたために、従来の対応策ではもうどうにもならなくなったからこそ、わざわざ人新世という別の年代を設定したのではなかったのか。そこでは、今までのやり方ではもはや対応できなくなった新たな事態が生じていたというか、すでに萌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そう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グローバル資本主義に対抗する仕方はそのまま気候危機に対処する仕方としても有効だともっぱら強調し続けると、単にコモンを共有したり、その潤沢さを全面的に享受しようとするのとは明確に異なった、人新世下の新たな事態に対処するためのプラスアルファの部分が決定的に見えなくなってしまうと思う。そうした部分にまったく注目しないまま、人新世の時代だからこそコモンの共同管理を、脱成長的な持続可能な社会の実現をと一方的に主張するだけでは、いつのまにかそれは、もう猶予がない、もう時間がないからこそリバタリアン左翼が昔から唱えてきた戦略を選ぶしかないと、ただ煽ってせき急き立てるだけのふるまいに等しくなってしまう。そこでは人新世という新たな時代の到来が、単に自らの戦略を正当化するためのダシのようなものとして利用されるだけになるのでは?

〇生産力至上主義/持続可能性という対立図式
また斎藤本でもう1つ気になったのは、〈生産力至上主義/持続可能性〉という対立軸を設定して、自分ははっきりと後者の立場に立つと言い切ってしまった点だ。生産力至上主義とは、テクノロジーのイノベーションによる生産力の増大を何よりも優先させ、その増大によって、資本の利潤率が下がっていく中でも引き続き経済成長を維持させようとするとともに、人新世の下での気候危機に対しても、テクノロジーの進歩によって何とか対応しようとする立場のことである。一方持続可能性の立場の方は、前近代的なコミュニティが、入会地などの共有地(コモン)を適切に共同管理し、それが本来持っていた豊かさを十分に発揮させることを通してコミュニティを持続させてきた歴史を重視する。こうしたコミュニティのあり方を範例にして、経済システムを、もはや資本の自己増殖運動に依存することがない、脱成長的なものに改めようと目論むのだった。社会の中に、様々な共有地や共有物の共同管理を復活させていけば、(私的所有の原理に基づいた)資本の運動にもはや頼らなくても豊かさを実現して、それを人々に間で平等に分かち合えるようになり、ひいては同時に、CO2の排出や自然環境の破壊も抑制できる筈だと考えるのである。

以上のような2つの立場をリジットに対立させて、もっぱら持続可能性の立場の方を選択しようとすることが持つ問題点は、おおよそ次の3点になるだろう。

1)資本の運動に身を委ねる以外の仕方で、テクノロジーのイノベーションをどう起こし、どういった方向に導いていくのかという重要な問題が切り捨てられてしまう。そのためテクノロジーやそのイノベーションも、もっぱら共同所有、共同管理の対象であるコモンの多くあるものの1つとしてしか捉えられなくなるのだ。斎藤はせっかく、A・ゴルツの、〈他者との協同や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促す「開放的技術」/人々を分断、奴隷化させると共に特定の者への独占を許す「閉鎖的技術」〉という(こちらの方は)有益な対立軸を導入したにもかかわらず、これではこの対立軸が充分に生かされないままになってしまう。開放的技術は、もっぱら共同管理の対象でしかない、数あるコモンの中の1つに過ぎないようなものではないだろう。そうではなく、コモンの共同管理、共同所有の仕方自体に深く関わり、それをより好ましいものに改善するという重要な働きをする筈だ。つまりテクノロジーは、共同管理、共同所有の仕方自体を改めていく可能性をも持つものの筈なのだ。こうした側面が無視されてしまって果たしてよいのだろうか。

また人新世の時代下で気候変動が深刻化していくと、様々なコモンが本来持っていた豊かさを適切な共同管理によってただ発揮させるだけでは、もはや社会の持続可能性を確保することができなくなる。そうなった際には、コモンの共同管理によってだけではなく、さらに何らかのテクノロジーを駆使して過酷化した地球環境に対峙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のだが、この種の可能性も考慮されてはいないのだった。もちろん斎藤自身は、まだ少し時間が残っているから、すぐに社会をコモンの共同管理中心のものに再編しさえすれば、資本主義によるこれ以上の地球環境に対する収奪を阻止して、コモンの共同管理だけで持続可能性を実現できるようになる筈だという立場を取っていた。それゆえ、テクノロジーに依存した持続可能性の実現の可能性など、最初から視野の外に置かれていたのは当然のことだったのだが。

2)上の1)で言われたことと深く関係している点なのだが、前近代的なコミュニティにおけるコモンの共同管理、共同所有が、経済の持続可能化の範例として立てられてしまうと、コモンの共同管理、共同所有を執り行うアソシエーション(協同組合)の側面が、もっぱらコミュニティ(特定の価値観、生活習慣、生活様式が共有され、その共有を通して成員に帰属意識、アイデンティティがもたらされる集団)に重ね合わせられるようになり、二つの側面の間の区別が曖昧にさせられてしまう。確かに前近代的なコミュニティには、コモンを共同管理するアソシエーションの側面が常に兼ね備わっていたのだが、後者のこの側面は、私的所有の原理に基づいた欲望の体系であるソサエティ(ブルジョワ社会)という否定的媒介を経て、初めて前者のコミュニティという側面から分離されて自立できるようになるのではなかったのか。そのような否定的媒介を経ることなく、コミュニティに元々備わっていたアソシエーションの機能が、ただ疎外論的に高次の次元で回復されるだけだとなると、いつまでもアソシエーションとコミュニティは結びついたままになってしまうだろう。アソシエーション(機能)の実現は、特定のコミュニティを形成することを通してしか可能ではないことになる*5。

3)前近代的なコミュニティのコモンの共同管理を範例にして経済システムを持続可能なものしようとする以上のような試みを、斎藤は脱成長的なコミュニズムと呼ぶ。「コミュニズム」という言葉を用いるのは、こうした試みは、元々は、『資本論』以降の晩期マルクスが主張していたものだと考えているからだ。今までのマルクス研究では、『資本論』以降の晩期の草稿群の研究が手薄だったため、晩期マルクスの主張が主張していたことがあまり知られていなかった、しかし研究が進んで晩期マルクスの考えが明らかになり、実はそれこそが人新世の時代にこそ意義があるものだったというわけだ。

しかし、特定の時期のマルクスの思想を特権化して、その意義や現代性を説くというふるまいはもはや時代遅れのものでしかないのではないか。確かにマルクスの考えや立場は、時期ごとに微妙だが決定的なところで異なっていて、それらを改めて照らし合わせてみると、統一した像を結ぶのが難しいのだった。そのためかつては、時期ごとに大きく異なる考え方や立場の背後に、実は隠された統一や調和が存在している筈だと想定され、解釈によって何とかそれらを浮かび上がらせようと多くの者が努力していた。だがその結果、マルクスの読み方がかなり恣意的なものになってしまったため、この状況に危機感を覚えた者たちは、今度はテキストの厳密な読みを重視するようになり、むしろ各時期の間のマルクスの立場の変化や断絶の方を強調するようになった。とはいえただそれだけではマルクス特有の思想を明確に押し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さらに特定の時期のマルクス(『経哲草稿』期の初期マルクスや、『ド・イデ』から『資本論』にいたる後期マルクスなど)を、それこそが「真のマルクス」だ、「マルクス思想の核心」だなどと過剰に煽りながら特権化するに至ってしまった。こうして、どの時期のマルクスを取るかをめぐって不毛な対立や論争が生じるようになったのだが、この後に及んで「晩期マルクス」なるものをつけ加えようとする斎藤のふるまいは、その種の対立や論争をより悪化させることにしかならないのではないか。単に屋上屋を架すようなものでしかないのでは。

マルクスは、革命の実現によって資本主義体制を打破するという、終生変わらなかった目標を達成するために、立場や主張を生涯の間に次から次へと変えていったわけだから、当然そこには、連続している面と断絶している面との両方が存在していることになる。従って、この両面を統一した像の下に包摂したり、そのどれか一つを特権化することなどもはや必要ないのではないか。むしろマルクス研究者としてこれからやるべきなのは、連続と断絶の両面を抱えたままのマルクスの生涯の思想的営みを、未完成のままの巨大な運動として描き出していくことになると思う。また彼が提出した諸々の理論や分析は、現在にも通用する深い洞察と、時代の限界が刻印された認識とが複雑に絡み合った状態にある筈だから、その絡み合いをていねいに解きほぐしていく必要も出てくる*6。こうした作業の方が、晩期マルクスを特権化することよりもはるかに重要であり、また人新世の時代を新たに生きるようになった私たちにもより役立つように思われるのだが、果たしてどうなのだろうか。

自分の立場
いつも否定から入って結局何も建設的なことは言わないまま終わってしまう、典型的な陰キャのふるまいのように難クセばかり述べてしまったので、最後は少し前向きな話を。文句ばかり言っていたがではお前の立場は何なんだ?と突っ込まれそうなので、自分の立場をごく簡単に明らかにしていきたい。

自分の立場とは、一言で言えば、篠原本と斎藤本のそれぞれのいいとこ取りである。まず篠原本からは、人新世の時代では私たちの生活世界は根本的な変容を強いられるという認識を踏襲していきたい。それゆえ、「人新世」という表記は断固として「じんしんせい」と読むことにする。私たちが生きている世界は、人間がもはや生きられなくなった世界の上にかろうじて築かれるものでしかなくなったため(実は人間の生活世界のシステムは昔からすでにそのようなものでしかなかったとも言えるのだが)、人間が生きられない世界からの浸食を絶えず受けるようになった。そのため、私たちの生活世界は人新世の到来とともに根本的に変容してしまったのだ。――篠原はこう強調してやまないのだが、確かにそれはそうだと思う。とはいえ生活世界の根本的な変容を、アンビエント空間の中で主体が経験する雰囲気や感触の変化としてあくまで記述していこうとする、篠原が選択した方法論の方に対しては留保を表明したい。人間が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が人間が生きている世界の内に浸食し始めたならば、雰囲気や感触に主体が浸ることができるアンビエント空間の成立自体も困難になっていく筈だからだ。それゆえ、こうした生活世界の根本的な変容に対処するためには、アンビエント空間に浸るのとは別の主体のあり方に依拠していくようにするしかないだろう。多分そのあり方は、アンビエント空間が成立しなくなって途方に暮れている主体の状況に依拠しながら改めて作り出されていくことになると思う。その状況を正面から受け止めながら、感覚を研ぎ澄ましたり微妙な感触に浸るのとはまったく異なった、世界との別の接し方(近接性)を立ち上げていくべきなのだろう*7。

一方斎藤本からは、反資本主義、脱成長、コミュニズムの可能性の追求という基本的スタンスをそのまま踏襲していきたい。特に反資本主義とコミュニズムの追求というスタンスは、SDGsやグリーンニューディールが掲げる種々の数値目標が、私企業の利潤追求活動を単に正当化するための空疎なお題目に後退し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も、絶対に必要なものになるだろう。とはいえ、人新世が到来した状況に対する斎藤の認識の方に対しては留保せざるを得ない。彼は次のように強調してやまないのだった。まだかろうじて間に合うから、急いで気候変動への対処を進めれば、(従来の人間性が維持された)今までの社会のあり方を何とか「持続」させることができる筈だと。さらにまた、脱成長を達成しさえすれば、資本主義体制下よりも多くの者が種々のコモンが本来持っていた潤沢さを平等に享受できるようになるから、むしろより豊かな社会が実現することになるだろうとも。しかし本当にそうなのだろうか。むしろ逆に、もう間に合わないから、新たな状況に適応するために社会のあり方や従来の人間性も大きく変化させていかざるを得ないと考えた方が、結局は、より現実的で地に足がついた対策が取れるようにな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そもそも社会の根本的な変化と言われるものは、新たな状況にしぶしぶ適応することから常にもたらされてきたのであり、また社会の変化を主導した新しい思想や観念は、まさにそうした状況をもはや逃れられないものとして直視することからしばしば生じてきたのだから。

また斎藤本の中では以上のような状況認識と、次のような主張とが表裏一体のものとなっていた。彼いわく、前近代のコミュニティをモデルとした、コモンを共有・管理するアソシエーションを確立して相互連携していくだけで、人新世下の気候変動に対処できるようになる筈だと。残念ながらこちらの主張に対しても留保を表明せざるを得ない。コモンを共有するアソシエーションの確立は確かに必要なのだが、しかしそれだけでは深刻な気候変動には対処できはしないだろう。また確立されるべきアソシエーションの方も、単に前近代のコミュニティを範例にしたものだけでは不十分になる筈だ。人新世下の新たな状況に対処できるような、過去に前例のないような、まったく新しいタイプのアソシエーションをゼロから構築していく必要も出てくるだろう。いずれにせよ、非資本主義的な体制にふさわしい、脱成長状態を維持するための新たなテクノロジーのシステムの設計や構築が、プラスアルファとなる重要な課題として浮上してくることになると思う。テクノロジーは、決して単なる共有、管理の対象となるコモンの1つではなかったのだから。

コミュニズムについての付論
最後に本論からははずれてしまうが、アソシエーションというものばかりが重視される最近の左派界隈の風潮に一言苦言を呈しておきたい。私見によればコミュニズムの運動とは、アソシエーション(協同組合)主義だけではなく、改良主義と前衛主義という他の2つも必要であり、それらの3つが揃って互いに三位一体的な緊密な関係を形成して初めて成立するものだと言える*8。ここで言われている前衛主義とは、もちろん少数精鋭の前衛党による指導を重視するという意味も含んでいるが、それよりもより広い意味で、社会や人間のあり方に積極的に介入して、それらを根本的に変化させるような集団や組織を形成し、またその形成の運動と同時に、実際に社会や人間のあり方に介入して、それらを大きく変化させていく実践を重視することを指していた。社会や人間をどう変化させるのかと言えば、それは当然、まず社会に対しては、自由、平等、連帯がその中で全面的に実現できるように仕向け、また人間に対しては、自由、平等、連帯を何よりも尊重できるように仕向けていくことになる。こうした変化を人為的、作為的にもたらそうとする*9前衛主義の実践は、しばしば排他的な党派に収斂していったり、あるいはときには狂信的なカルトに等しいものへと逸脱してしまうことが多かった。そのため、この種の行き詰まりを何とか避けようとするために、特に68年革命当時は、前衛党の形成・運営と、集団的な精神療法、精神分析とを合体すらさせようとした動きも存在したのだが、残念ながらそうした動きは不十分なまま頓挫してしまったようだ。そのためスターリン主義の経験を経て以来、数々の企ての行き詰まりを前にしたまま、前衛主義はずっと機能不全を起こしている状態にあると言える。

そしてそうだったからこそ、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が現在に到って力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だろう。これは当然のなりゆきだったと思われるのだが、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に依拠しさえすれば前衛主義の機能不全を克服できるとか、あるいは、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の立場を徹底しさえすれば、前衛主義の機能不全の問題に一切タッチせずにコミュニズムの運動を進めることができるなどと考えてしまうのは、明らかに不適切だろう。それは行き過ぎた異端的な発想でしかないと思う。はっきり言えば、大きな錯誤であるとすら言えるのではないか(いわゆるマルクスのプルードン化?)。そもそも改良主義の方も、同じように前衛主義の行き詰まりの問題からさっさと手を引いて、自分の立場だけを推し進めることに徹していたのだが、こうした選択をした結果、20世紀の資本主義の展開に対してはまったく太刀打ちできなくなり、ただそれを補完するだけの役割に甘んじるだけになってしまったのだった *10。一方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の方は、現在はネオリベ的な金融資本主義への有力な対抗軸として一応機能してはいるのだが、しかし近い将来、資本主義の側がいわゆる監視資本主義や信用資本主義に再編されていけば、従来のように有力な対抗軸として機能し続けられるかどうかは決して定かではないだろう。そもそも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の立場では、各アソシエーションの成員は、もっぱら「倫理的に」ふるまうように、つまり互恵的、相互扶助的にふるまうように求められていたのだが、監視資本主義や信用資本主義が、人々をまさに倫理的・道徳的にふるまうように強く誘導、操作するようになった暁には、果たして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はその動きに対して有効に抵抗し続けることなどできるのだろうか。やはり前衛主義からの介入を別に仰ぐようにしなければ、人々を倫理的なふるまいへと善導するようになった監視資本主義や信用資本主義に対しては、充分に抵抗していくことなどできなくなるだろう。そしてそうだからこそ、現在の前衛主義の機能不全状態に正面から取り組み、それを早く何とか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われるのだが…。

*1:篠原雅武+斎藤幸平「討議:ポスト資本主義と人新世」、『現代思想』2020年1月号「特集=現代思想の総展望2020」所収

*2:「人新世」という表記に以上のように2つの読み方が生じたのは、実際のところは、単に出版社の方針の違いに拠るものでしか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が。

*3:たとえばC・マラブーは、深刻なトラウマなどによって主体の通常の機能が大きく損なわれた状態のうちに「可塑性」という様態を見出して、それを、資本主義体制下で望ましいと見なされていた、「柔軟性」という主体の通常の様態と区別することに努めていった。こうした彼女の努力などが、生きることが困難になった状態を、生きること以外の仕方で受容する方法について考えていく際に参考になるだろう。ただしマラブーの場合は、可塑性というものが、主体性の本質であるとされた生命の活動性と直結されてしまい、むしろ可塑性こそが生命の活動性を基礎づけるとされたため、結局は従来の人間中心主義的な主体観や生命観を強化させることにしかならなかったのだが。

*4:なお千坂恭二も以下のように同じような不満を漏らしていた。


*5:もちろん、コミュニティの側面なきアソシエーションを強引に実現させようとして、その側面を無理やり抑圧していこうとすることの暴力性は問題に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が。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アソシエーションをもっぱらコミュニティに基づかせ、またコミュニティの1機能としてアソシエーション機能を発揮できるようにさえすればよいわけではないだろう。

*6:斎藤はマルクス思想の核心を、階級闘争や、生産関係と生産力との間の矛盾ではなく、物質代謝に着目した点に見ているわけだが、そのマルクス特有の物質代謝論が現在の生物学や生態学の水準から見てどのくらいのものだったのか、明示する必要があっただろう。また階級闘争や生産関係と生産力との間の矛盾と、物質代謝とがどのように関係していたのかについても、改めて明らかにする課題が生じてくることになる。多分こちらの課題の方は、別の著作で新たに着手されることになるのだろうが。(*2月28日補足:その課題に関しては『大洪水の前に』ですでにある程度果たされていたようなので、改めてきちんと読んでみます。)

*7:しかし実際は、問題はもっと複雑である。篠原は、周囲に漂う雰囲気の微妙な変化(脆さや崩壊の感覚のせり出し)を通して、人新世の到来による生活世界の根本的変容を把握していくという発想を、もともとはT・モートンのアンビエント空間論から受け取ったのだが、当のそのモートンは、G・ハーマンのオブジェクト指向存在論の影響を受けて、従来は人間的主体のものだと思われていた、雰囲気に浸ったり感覚を研ぎ澄ましたりする経験を、人間とはまったく無縁な(あるいは人間もあくまでその一部でしかない)よそよそしい対象同士の関係として読み替えていくということをしていたからだ。つまり、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世界に触れることによって生じた、様々な幻影が憑きまとう慢性的なパニック状態は、実はよそよそしい対象同士が関係する(近接する)際には常に起きていた、客観的な出来事で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る。篠原は、T・モートンのこうした一種の実在論的転回を充分に考慮せず、相変わらず雰囲気に浸ることを主体の経験として捉え続けていた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以上のようなモートンの理論的展開を踏まえるならば、生活世界の根本的変容を捉えていく仕方には、アンビエント空間自体の未成立、崩壊に定位していく方向のほかに、もう1つ、アンビエント空間の中でせり出し始めた脆さの感覚や慢性的なパニック状態を、人間主体とは無縁なよそよそしい対象同士の関係として把握し直していく方向もあったことになる。いったいこの2つの方向はどのように交差していくことになるのだろうか。なお篠原のモートン受容の不十分さと、モートンの一種の実在論的転回については、菅原潤の新著が詳しい(菅原潤『実在論的転回と人新世』知泉書館、2021年、第5章「ティモシー・モートンの超過客体」)。

*8:厳密に言えばもう1つ評議会(コミューン、カウンシル)主義というものも存在している。しかしこの評議会主義も、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と同じく、漸進的な改良主義と、権力の一極集中を進めた前衛主義との双方から自らを区別しながら、自治や自主管理というものを重視していく潮流であるから、ここでは暫定的に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のうちに含めることにしたい。ちなみに、長崎浩が、蜂起(叛乱)の自然成長性に依拠しながら、その自然成長性を保持する装置として評議会権力を基礎づけようとしたのに対して、斎藤幸平は、自然の物質代謝過程に依拠しながら、自然と人間との間の物質代謝過程の亀裂を修復させる装置として、前近代的なコミュニティをモデルとしたアソシエーションを基礎づけていると言える。

*9:変化を人為的、作為的にもたらそうとすることとは、一言で言えば「改造」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

*10:最近の左派加速主義の潮流は、この改良主義の立場の最新版に相当すると思われる。確かにこれからは、テクノロジーの設計や運営こそが対資本の主戦場になることが予想されるから、左派加速主義の主張は一定の意味を持つようにはなるのだろう。しかしアソシエーション主義や、そしてとりわけ前衛主義との連携が存在しないままでは、やはり資本への抵抗は不十分な状態のままに留まるのではないか。

ashibumi68 288日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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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co.jp: 談 no.119 人新世と未来の自然学 : 篠原 雅武, 林 竜馬, 斎藤 幸平, 公益財団法人たばこ総合研究センター, アルシーヴ社: Japanese Books

Amazon.co.jp: 談 no.119 人新世と未来の自然学 : 篠原 雅武, 林 竜馬, 斎藤 幸平, 公益財団法人たばこ総合研究センター, アルシーヴ社: Japanese Books

談 no.119 人新世と未来の自然学 Mook – December 23, 2020
by 篠原 雅武 (著), 林 竜馬 (著), 斎藤 幸平 (著), 公益財団法人たばこ総合研究センター (編集), & 1 more
4.7 out of 5 stars 5 ratings

M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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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気化学者パウル・クルッツェンと生物学ユージン・ストーマーは、私たちがもはや「完新世」ではなく、人間活動が地球の生態系や気候に重大な影響を与える「人新世」という新たな地質年代を生きていると唱えた。人新世のアイデアは、地球環境への人間の影響力を重視するが、そもそも人間は、地球環境に深く依存していたのではなかったのか。そうした考えは、人間と地球環境の切り分け、すなわち人間と自然の分割がほとんど意味をなさない、曖昧なものではないかという議論へ発展していく。自然と人間という二元論が意味をなくす。人新世では、自然と人間の二元論が消滅するだけではない。自然科学と人文科学という学問の二分法もまた意味をなさなくなってきているのだ。 今日、人文科学は、人間を超えた視野を獲得し、西洋思考に潜在する人間中心主義を脱中心化しつつある。人新世のアイデアは、こうして、地球科学、考古学、自然人類学、歴史学、文化人類学、生物学、さらには文化表象など、人間と自然のかかわりすべてを対象とする学問へと思考の方向を大きく転換させようとしている。新たな自然学の誕生だ。


〈人新世の哲学〉
「脆さと定まらなさ、自己・他者・ものたちのある場所」

篠原雅武(京都大学総合生存学館(思修館)特任准教授/哲学・環境人文学)

ハンナ・アーレントが『人間の条件』で問うたことは、人間そのものというよりは、人間の条件をめぐるものであった。では、人間の条件とは何か。人間の営みを支え、成り立たせているものであるが、アーレントはこれを、人間の内面性とは独立の世界、つまりは事物性のある世界として考えようとした。その観点から見れば、カンタン・メイヤスーやティモシー・モートンらの思弁的実在論、あるいはオブジェクト指向存在論で展開しようとする新しい実在論を先取りするものと考えることもできるだろう。
アーレントの問題関心である「人間的なものと自然的なものが区別されつつ切り離されないものであること」を人新世という文脈においてどう考えたら良いのか。すなわち、人間と自然という問題系を踏まえ、そのうえでアーレントが思考する「人間の条件」について、改めて考てみたい。

〈時間スケールと自然環境〉
「人新世と10万年スケールの森の歴史」

林竜馬(滋賀県立琵琶湖博物館研究部主任学芸員/古微生物学、地球生命科学)

歴史時代の植生を、長期的な時間スケールにたって、“人新世"的な状態と見るならば、現在の里山の変化はその“人新世"的な森と人との関係が再び変容し、現生的な森の姿へとたくましく遷移している過程とも捉えられる。人新世は、現在そして未来の人と地球について、人間自身の問題として考えていくうえで、きわめて有効な概念枠だといえるだろう。人新世を手がかりにして、人間と森、環境、世界の歴史的かかわりを考える。

〈物質代謝論の射程〉
「人新世と脱成長コミュニズム」

斎藤幸平(大阪市立大学大学院経済学研究科・経済学部准教授/政治哲学、経済思想、マルクス主義)

環境危機での批判理論の役割は、分析を通じて環境危機の歴史的・社会的原因を概念化し、新しい社会のビジョンを提示することに他ならない。マルクス主義も「物質代謝の亀裂」論と人新世の分析を融合し、資本主義の矛盾として、地球温暖化、砂漠化、種の絶滅といった問題に取り組んでいる。ところが、人新世をめぐる一部の議論は、人間と自然の「ハイブリット」や「一元論」を強調することで、環境危機の社会的原因の所在を曖昧にし、近代主義的な技術信奉によって、不都合な真実を隠蔽しているのである。今必要なことは、人新世の議論をより生産的な方向性へ軌道修正することである。それはとりもなおさず、マルクス主義をエコロジカルな観点から読み直すこと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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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t length

94 pages
Language

Japanese
Publisher

水曜社
Publication date

December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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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description

著者について
篠原雅武(しのはら・まさたけ)
1975年横浜市生まれ。京都大学大学院人間・環境学研究科博士課程修了。現在、京都大学総合生存学館(思修館)特定准教授。博士(人間・環境学)。専門は、哲学、環境人文学。著書に『「人間以後」の哲学:人新世を生きる』(講談社選書メチエ、2020)、『人新世の哲学:思弁的実在論以後の「人間の条件」』(人文書院、2018)、他。

林竜馬(はやし・りょうま)
1981年東京都生まれ。京都府立大学大学院農学研究科生物生産環境学専攻博士後期課程修了。現在、滋賀県琵琶湖博物館研究部主任学芸員。専門は、古微生物学、地球生命科学。主要論文に「変動する森から見つめる〈人新世〉』(『現代思想)2017.vol45-22所収)他。

斎藤幸平(さいとう・こうへい)
1987年生まれ。ベルリン・フンボルト大学哲学科博士課程修了。博士(哲学)。大阪市立大学大学院経済学研究科准教授。専門は、経済思想、社会思想。著書に『人新世の「資本論」』(集英社新書、2020)、『大洪水の前に:マルクスと惑星の物質代謝』(堀之内出版、2019)他。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水曜社 (December 23, 2020)
Publication date ‏ : ‎ December 23, 2020

1760夜 『人新世とは何か』 クリストフ・ポヌイユ&ジャン=バティスト・フレソズ − 松岡正剛の千夜千冊

1760夜 『人新世とは何か』 クリストフ・ポヌイユ&ジャン=バティスト・フレソズ − 松岡正剛の千夜千冊: 청도사 2018 Bonneuil Ando Jean Christophe-Baptiste Fressoz L' Evenement Anthropocene - La Terre, L' Histoire Et Nous 2013, 2016 [번역] Shiori Nosaka 편집: Atsushi Oshikawa 협력: Tsukahara Higashiware-Zaijo Masumi 기타 Sotei: Hisashi Takenaka  

크리스토프 포누유 & 장 = 바티스트 프레소스

청도사 2018

Bonneuil Ando Jean Christophe-Baptiste Fressoz
L' Evenement Anthropocene - La Terre, L' Histoire Et Nous 2013, 2016
[번역] Shiori
Nosaka 편집: Atsushi Oshikawa 협력: Tsukahara Higashiware-Zaijo Masumi 기타
Sotei: Hisashi Takenaka

 올해도 살고 있으나 코로나 판데믹은 한층 더 맞을 것 같지 않고 전세계 감염자는 8000만명을 돌파했고 죽은 사람은 170만명을 넘고 있다. 아직 느껴질 것이다. 1주일 전에는 남극 대륙의 캠프에도 감염이 있었고, 지구상의 6대륙이 모두 침식되었다. COVID19의 돌연변이도 두드러졌다. 아프리카 돌연변이 종은 또한 전염병 경로를 패시지합니다.
 일반적으로 왠지 구미가 심하다. 여러 번 도시의 락 다운을 시도했지만, 공을 연주하지 않는다.
 백신은 급피치로 개발되고 있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내춘 이후일 것이다. 치료제는 아직 없고, 면역형성의 실태조사도 늦어져 병원이나 간호사의 피폐가 심하다. 코로나형 RNA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감염증의 세계사」( 1655 밤 )도 언급하고 있듯이, 아마 몇 년이 걸린다.
 그래도 힘든 일이었다. 감염자의 수가 감쇠하지 않는 한 학교도 일반 점포도 열 수 없다. 공원에도 이자카야에도 툭할 수 없고, 스포츠 대회는 배웅되고, 극장은 의자석을 2개 둔다. 이대로 바이러스 변이가 계속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가 무엇인가를 가만을 하고 있다. 그 뭔가 모르겠어요.
 그런 가운데 일본은 무책에 가깝다. 아베도 가수도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우선주의와 포퓰리즘이기 때문에 PCR 검사나 의료 대책은 어색하고, 그 대신 아베노마스크·지원금·보조금을 뿌려, GOTO 캠페인이나 식사 할인 등으로 환심을 사, 계속 차를 탁해 왔다. 알기 쉬운 브로셔 하나, 만들지 않는다. ICT 시대의 최초의 바이러스·판데믹(일본에서는 에피데믹)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소프트나 앱도 개발되지 않는다. 차는 탁할 뿐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자본주의의 끝을 상상하기보다는 세계의 막힘을 상상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세계의 코로나 감염자수(2020년 12월 24일 시점)

코로나 감염자 수 확대에 따라 Go To가 전국에서 정지 된
텔레비전 동 뉴스

프레드릭 제임슨
예엘 대학에서 아우에르바흐의 가오루를 받은 프랑스 문학 연구자. 저서 『미래의 고고학』에서는 고금 동서의 SF소설을 분석해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역할을 제기했다.
 코로나 아키라가 세계 동시적인 공세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숙주(지구의 호스트)인 인간사회 쪽이 그러한 사태 악화를 촉진시킬 여지를 주고 있기 때문에, COVID19 자체의 행동이나 변이는, 21세기 의 호스트 세계사회의 행동의 반영 그 자체이다. 이런 일을 계속하면 세상의 가치관이나 사회관이나 생활관에 결정적인 금이 들어간다.
 어떤 금이냐는 것은 조제스크-레겐의 열역학적 경제분석 등이 그 상흔을 나타내고 있다. 수많은 지구 환경 위기의 데이터는 우주 쓰레기에서 해중 플라스틱 파편의 양에 이르기까지 거의 데이터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참상이 어떠한 것인지는 수치라도 알고 있을 것인데, 그런데도, 미체험한 유사 사태가 장기화해 온 것에 의해, 내일의 사회의 변경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느낄 것이다 부터, 어울려서 「뉴노멀」이란 바보 같은 것을 생각한다. 눈앞의 내일의 날들만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평시는 유사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2021년이 되어, 바이러스 화에 의한 판데믹(혹은 지역적인 에피데믹)이 수개월 후에 수렴(종식)해도(도쿄 올림픽이 개최되려 중단되려고), 이러한 미체험한 신체적인 위험 일어나는 사태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사회의 존재를 순식간에 변모시키는 것이라는 것, 그러한 것이 반년도 1년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을 체험해 보면, 이 후의 세계나 사회 는 이전의 채로 좋은 것인지, 그런 회사의 나날에 돌아가 버려도 좋은 것인지, 지금까지는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도 되어 왔다. '평시 유사병'이라고도 하고 싶어지는 터무니없는 트라우마(PTSD)의 발생이다.

 원래처럼 돌아가면 좋을까 하면, 좋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제1차 문명전쟁이라 불려야 할 걸프전쟁이나 그 후의 리먼 쇼크가 일어났을 때에, 무엇이 문제인지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전부터 말하자면 레이가노믹스나 새챠리즘의 진전이 일어나, 일본에서 말하면 일미 협의가 스스무나, 이것을 고이즈미 준이치로나 다케나카 평장이 추종했을 때, 「이것으로 좋을 리 없다」 라는 사태가 심하게 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보케했다. 아니면 시라를 오고 있었다. EU를 결속시킬지 분단시킬지에 가득 찬 몇 년 망치거나, 트럼프의 출현에 우왕좌왕하거나, 모리카케 문제로 차를 탁해 보거나, 그런 일 뿐이었다.
 거기에 1년 이상에 걸친 감염 전선의 실황이다. 모두 소와 소셜 디스턴스를 취해, 텔레워크나 리모트 워크를 시작했다. 그중, 이것은 분명 일하는 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실감하기 시작해, 신축 주택이나 맨션 판매의 회사가 3DWK라고 하는 것처럼 리모트 워크 스페이스를 위한 「W」를 피처한 배치를 팔았다.
 불안이 이런 정도로는 곤란하다. 지구 자체가 이상해지고 있는 것이며, 직장이 변경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지구'라는 거대한 샐러드볼이 위험한 것이다. 존 켈리는 기후변화와 감염증과 테러리즘을 대량파괴무기로 간주했지만 겨우 2014년이었다(켈리는 바이덴 정권의 브레인이 되었다). 너무 늦었다. '인신세'는 벌써 왔던 것이다.


조제스크-레겐
루마니아의 경제학자. 런던에서 수리 통계학의 창시자 칼 피어슨에게 사사.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고 수리경제학의 선구자로서 실적을 올렸다.

존 케리
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대통령 특사를 맡은 기후 문제로 지명됐다.
 인신세(진신세이)는 새로운 개념이다. 2000년 2월 멕시코의 지구환경을 둘러싼 국제회의에서 파울 크루첸이 내놓은 지질연대를 위한 새로운 용어다.
 크루첸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로 오존홀 연구 등으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지구 온난화와 온실 가스의 문제에 대한 많은 토론의 오피니언 리더입니다. '기후변화'(일본경제신문 출판) 등 베스트셀러도 있다.
 그 크루첸이 21세기를 앞두고, 오늘 현재의 우리는 완신세(Holocen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신세」(Anthropocene=안트로포센 혹은 안트로포신)에 돌입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이 계기로, 어쨌든 「인신세」라는 견해가 화제가 되어 왔다.
 기존의 지질연대학의 공식 견해에서는 현재 지구는 1만1500년 전에 시작된 신생대 4기의 '완신세'에 속한다. 우리 인류도 거기에 언제나 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크루첸은 완신세는 이미 마침표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산업혁명 이후 지구는 새로운 지질연대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했다.
 확실히 말하자면 1784년에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을 때부터 신생대 4기인 '인신세'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파울 크루첸
프론가스에 의한 오존층 파괴 연구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네덜란드 화학자.
 생명의 역사는 38억년을 넘어왔다. 46억년의 지구사 중 해저에 광합성을 하는 시아노박테리아당을 계기로, 생명은 그 후에 개전해 나가는 870만종을 향해 걸음을 시작해, 지질 연대에서 말하면 고생대(캠브리아기~데본 기~벨름기), 중세대(삼조기~쥬라기~백아기)를 걸고, 6500만년 전부터 신생대에 돌입해 오늘에 이르렀다.
 신생대(Cenozoic era)는 전반의 제3기와 후반의 제4기로 나뉘어, 그 제4기가 260만년 정도 전부터 시작되어 인간을 출현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4기는 계속 빙하 시대이지만, 전반의 갱신세와 후반=현재의 완신세(Holocene)는 한랭한 빙기와 약간 온난한 간빙기가 천천히 돌아오고 지금은 제4간 빙기가 계속된다 있다. 이전에는 오키세키라는 식으로도 불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제4기 완신세(제4간 빙기)에 있지만, 크루첸 등은 아니, 우리는 지금 제4기인 신세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질연대는 태양의 활동이나 거대운석의 낙하나 지구온도의 변화나 해양사정 등 지구의 안팎에 일어난 자연조건에 의해 스테이징되어 왔지만 '인신세' 라고 하는 제안에 의해, 우리는 유사 사상 처음으로 「문명이나 인위의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지질 연대」에 있다고 된다.
 기온상승, 인플루엔자 유행, 오존홀 문제, 온실효과 가스 만연, 에이즈의 대유행, SARS, MARS, 코로나의 유행은 그러한 4기 마지막 지질연대의 헐떡임이 된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고도로 숙숙한 것 같은데 기아나 빈곤이 없어지지 않는 것도, 이 수십년의 인신세가 신자유주의, 금융공학의 유행, 머드머니의 광란, 넷 자본주의의 만연 등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질 시대를 나선 모양의 그림으로 나타낸 것
미국 조사단이 작성.

10만년 단위의 기온과 인류사
완신세 사이, 기후가 현저하게 안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루첸의 경고 포함 제안은 반드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지질학자 안토니오 스토파니는 이미 1873년에 "인류는 새로운 지질학 변화를 띤 사람"(인류의 지질 시대)로 정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블라디미르 베네나츠키("생물 권'개념의 제창자)가 지구를 '생물지협화학(고오지미 케민르)의 순환계'로 본 것은 1920년대였다. 그 후에도 지구 환경의 변화를 우려하는 견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위적 지질연대에 이르렀다는 것, 그 증거는 더 이상 반증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확고한 체계적 설명에 의해 논의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안트로포센」(인신세 )라고 불리는 것임을 선명하게 한 것은 크뤼젠이었다.
 바로 브루노 라투르가 “인신세라는 개념은 근대와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대신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들 중에서도 철학적, 인류학적, 정치적 개념으로서 지금까지 없을 정도로 결의적 이다”라고 반응했다. 라투르는 인류사회를 '변화하는 작용점'이 만드는 액터 네트워크로 설명하려는 사회인류학자다.
 사실, 인신세는 옛날부터 시작되었고, 다양한 인간 활동의 소산과 흔적이 지구 시스템의 기능에 장애를 줄 정도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그렇다면, 인신세는 유럽인이 미국 대륙을 정복했을 때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지질학자 시몬 루이스와 마크 마스리안은 미국 ​​인디언의 인구 붕괴 조사를 토대로 제창했다. , 얀 자라셰비치는 인신세는 그러한 일이 여러 번 지구에 손상을 입힌 '층위적 구조'가 되어 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마 그랬던 것이다. 이하, 인신세보다 안트로포센이라고 말하는 쪽이 확실히 오기 때문에, 그렇게 쓰기로 하지만, 안트로포센은 매우 층위적(스트라티그래픽)에 지구를 침식해 온 것이다.


블라디미르 베네나츠키
광물학을 발단으로 지구화학, 생물지구화학, 방사선지질학, 수문지질학 등 모든 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출생.

브루노 라투르
과학과 기술의 고찰에서 출발하여 문화 인류학, 철학, 사회학, 지리학, 현대 미술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프랑스의 철학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는 논모더니즘의 사고를 제시하고 있다.

얀 자라셰비치
국제층서 위원회, 지질학자 그룹의 상위. "안트로포센"을 지구의 역사를 분리하는 대략 150의 시대 세그먼트의 한에 추가할지 어떨지의 면담의 중심에 있다.
 본 책은 안트로포센의 제안을 전제로 하여 CNRS(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크리스토프 포누유와 장바티스트 프레소스가 안트로포센이라는 새로운 틀의 등장으로 인류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 혹은 그것에는 종래의 사고방식의 무엇을 변경해야 할 것인지, 그 것을 정중하게, 한편 래디컬 히스토리 같게 총 준것이다.
 두 사람의 검증에 따르면 안트로포센 층위화의 제1단계는 산업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어난다. 이 기간에 석탄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소비량은 40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은 50배로, 인구는 6배로, 이용토지면적은 약 3배가 되었다. 이윽고 육로에도 해로에도 증기기관화와 속도화가 일어나 인류는 어떠한 자동 엔진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많은 숲이 각지에서 잃어버리고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277ppm에서 상승하기 시작했다(20세기 중반에 311ppm에 달했다).
 제2단계는 대전 후인 1945년부터, 여기서 석유의 대량 소비에 의해 이산화탄소나 메탄의 대기중 농도가 급격히 증가하여 지구의 질소와 인의 순환 농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거기에 전후의 자유무역주의에 의한 국제경제시스템의 가속이 딱 겹쳐져, 예를 들어 수력발전소의 증가수, 자동차 생산수, 맥도날드 햄버거의 점포수가 질소와 인의 대기 순환 지수와 동기해 갔다 . 바다가 오염되어 농약이나 약제가 인체에 스며들어갔다. 「대가속」(그레이트·가속)이라고 불린다.
 제3단계는 2000년부터로 사태는 점점 심각해질 뿐이다. 전자결제시스템이 글로벌화되어 인터넷사회가 만연해간 것, 그 무렵 중국이 이산화탄소 배출국에서 미국을 몰아 세계 제1위가 된 것은 그 상징적인 동기 현상이었다.
 특히 유전자 조작에 의한 농산물과 의약품의 양산과 금융공학에 의한 탐욕스러운 머니게임이 새로운 글로벌 스탠다드를 획득한 것은, 주민의 한사람 한사람이 「지각」이나 「피부」나 「근린」에 의해 겨우 지켜왔다 리얼한 경계를 어지럽혀 갔다. SARS나 MARS나 COVID는 그러한 '쓰루쓰루스베스베의 사회환경' 속에서 쉬울 것으로 늘어나간 것이다.
 이러한 큰 3단계의 층위적 침습을 통해 기술의 비계획적인 확장이 지구사회환경을 이상하게 만들고 지구사회환경은 사람들로부터 위기의 실감을 빼앗아 갔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야합니까? '뉴노멀' 등이라는 타박상 손으로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구공학 테크놀로지에 착용한 지구 시스템 가게들은, 「지-권력」을 거래하는 통치에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본서는 그렇게 된 책임의 일단이 각국과 국제기관을 차지하는 지오크라트(지구관료)와 사회생태계의 복합성을 무시한 에코파시즘에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덕분에 안트로포센은 다른 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저자 크리스토프 포누유와 장 바티스트 프레소스

인신세의 외관도
인구의 증가나 종이의 소비량, 오존층의 파괴율, 종의 멸종수 등, 1945년 이후에 「대가속」(그레이트·가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가 지구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을 그린 일러스트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재생 불가능한 화석 연료에 의존해 왔

공장에서 나오는 대량의 배기 가스

자연 회복력을 능가하는 속도로 삼림 벌채

버려진 어구에 얽힌 바다
거북 바다 거북의 사인의 70%가 인간활동과 관련되어 그 중 25%가 얽혀 사고.

중동 쿠웨이트에서 버려진 자동차 타이어의 더미

노란 모래를 가면으로 걷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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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폐기물로 덮인 시아크 강(인도네시아)
 지구가 벌써 망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헐떡이면서도 아직 활성이다. 지구가 아니라 '사람-지구계'가 완전히 이상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심각하다.
 이 책은 그 심각한 재미를 여러 신세상으로 강조하고 있다. 가라앉는 열신세, 식신세, 사신세, 혹은 가라앉는 욕망(탐식·소비) 신세, 무지신세, 현려신세, 또 찢는 영신세, 자본신세, 논쟁신세, 군신세.
 일일이 안내하지 않지만, 대략의 전망은 붙을 것이다. 그 중에서 영신세는 근대 이후 영국이 겪은 틀림으로 인하여 일어난 사람 신세 전체에의 옥근을 말한다. 나는 한때 '세계와 일본의 틀림'(춘추사. 나중에 '국가와 '나'의 행방'으로 개제 증보)에서 이런 '영국의 틀림'을 3장 혀의 영국으로 특필한 것이다.
 당연히 미국 신세도 있다. 미국 신세다. 이는 자본제 계약주의와 포르티컬 콜렉트 컴플라이언스에 의한 안트로포센의 과잉 배포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모든 자원(자원)이 계약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차이나 신세, 중동 신세가 부상할 것이다.
 무지신세라는 것은 산업계나 기술상이나 정치가나 지구 관료가 '자연을 외부화'하는 편이 좋다고 말한 것을 말한다. 이제 조금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의 외부화」와 「세계의 경제화」를 동일시한 것이 무지의 안트로포센을 확장해 버린 것이다. 칼 폴란니( 151밤 )가 “상업화 사회에 있어서의 기계제 생산은 사회의 자연적 인간적 실체의 상품으로의 전화 의외의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현명한 신세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하나는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덴스가 유의한 "재귀성"이라는 것이 제대로 논의할 수 없었던 것, 또 하나는 포스트 모던 사상 등에 의해 "큰 이야기 '가 버려진 것이 컸다. 말하자면 현명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안트로포센의 본질이 파악 이해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 논의가 재귀 사이클이나 경제 리비도 회로에 끌려 버린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명에 대한 비판에 근거한다.
 이런 식으로 된 배경에 논쟁 신세가 라디칼에 작동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 이 논쟁의 부비란, 박물관의 시대부터 다윈의 진화론이 확립해 가기까지의 시기, 지구와 인류에 관한 철학이나 사상이 확실히 논쟁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뷔폰, 헤이튼, 라마르크( 548밤 ), 라이엘, 다윈, 헤켈 등의 가설이 담백하게 다윈주의에 통합되어 밀, 푸리에(838밤), 오웬, 크로포토킨 등의 논의가 결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랏다이트 운동도 뉴하모니도 시골 도시 구상도, 일소에 붙은 것이었다.


원저『인신세란 무엇인가』

『인신세란 무엇인가』 커버 전체
황량한 대지에 폐기된 비행기의 잔해.

칼 폴란니
비엔나 출신의 경제학자.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위기 시대에 대치. 사람과 자연의 상호작용 과정이 “경제”라고 했다. 「암묵지」의 마이클 폴란니는 동생.

앤서니 기덴스와 울릭 벡
모더니티 분석의 틀로서 '재귀성' 개념의 확립의 필요성을 설명한 2명의 사상가.
 이런 식으로 안트로포센의 무정한 수진을 설명해 보면, 연구자나 사상자가 주수 방관해 온 것처럼 비칠지도 모르지만, 물론 그런 일은 없다. 꽤 다양한 지적도 가설도 사색도 있었다. 이 책은 그것을 쫓는데도 곳곳에서 페이지를 찔러 놓고 좀처럼 굉장한 한 권으로 되어 있다.
 왜 완신세가 없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크루첸뿐만 아니라 윌 스테판과 클로드 롤리우스들도 "완신세의 숨을 뿌린 흉기는 대기 속에 있다"고 몇번 도 발언했다. 메탄, 아산화질소, 이산화탄소 등의 흉기적 변화다. 이에 냉장고나 에어컨이 배출하는 프론이 몰래 손을 빌려줬다. 
 환경 위기에 대한 지적은 60 년대 레이첼 카슨 ( 593 밤 )의 "침묵의 봄"(신시오 사)과 제임스 러블록 ( 584 밤 )의 "가이아의 과학"(공작사)에서도 발신되어 , 사람-지구계가 어떤 것인지, 어쩌면 우리는 전혀 모르는 계에 싸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경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다가갔다. 이사벨 스탠제르는 이 시스템에 미지의 피드백 루프가 관여하고 있다고 말했고, 그것이 과도한 자원 소비에 의해 본래의 생태계를 왜곡시키고 있을 것이라고 추리했다.
 로마클럽은 '성장 한계'를 호소했고 언론은 '복합오염'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드루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프스'는 사람-지구계가 자본주의가 만든 피드백 루프에 의해서 몇중에 다시 함입되어 신경증에 걸려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이것을 조제스크-레겐은 열역학적 피드백 루프가 일으키는 수치를 들고 검증했다.


레이첼 카슨
환경 문제의 고전 '침묵의 봄'에서 지구의 비명을 전한 해양 생물학자.

클로드 롤리우스
40년 이상 지구 관측 프로젝트에 참가해 남극의 얼음에 갇힌 공기로부터 과거 대기의 모습을 조사해 기후변화를 밝혔다.
 환경위기는 생태계의 이상을 나타내는 다양한 풋프린트(생태학적 흔적)에 의해 드디어 눈에 보이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지리학자 아르 엘리스는 지금까지의 「인간이 흐트러진 자연의 생태계」라는 견해로는 안 되고, 더 대담하게 변경해야 한다고 제창했다. “자신들의 회에 자연의 생태계를 잡은 인간계”라는 견해를 해야 하고, 연구되어야 하거나 공격받아야 하는 것도 이 인간계임을 강조했다.
 사태는 새로운 문명론의 양상을 취하게 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 거시적인 견해를 제공하는 사람은 적었다. 과연 '불편한 진실'은 잇달아 열거되지만, 그들을 문명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안트로포센에 무지신세가 혼입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일단 뷔폰이 '자연의 여러 시기'로, 라이엘이 '지질학 원리'로, 미슐레( 78밤 )가 '보편사'로 , 부르크하르트가 '세계사적 고찰'에서 포섭한 것 같은 시점을 지금 환경문명사적으로 크게 계승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포섭적으로 말해야 하는가. 이미 미슐레가 이렇게 썼다. "세계가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즉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정신의 물질에 대한 자유의 운명에 대한 싸움이다."
 아마도 사회가 환경에서 너무 분리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루소( 663야 )나 콘트나 웨버나 듀르켐이, 사회라는 실상의 의미를 너무 강조한 것이다. 또 심리가 환경에서 너무 찢어진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 ( 895 밤)의 책임도 있다. 로만 로랑의 '대양적 감정'을 프로이트는 유아기에 보이는 융합적 환각에 불과하다고 단절했지만 오히려 로맨 로랑의 환경심리학이 새롭게 등장해야 할 것이다.


로만 로랑
노벨 문학상 작가. 전쟁의 비인간성을 강하게 비난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반전·평화를 주장했다.
 안트로포센은 새로운 환경적 문명학과 환경적 인문학을 기다렸다. 그래서 예를 들어 피크렛 버크스와 칼 폭크 등은 '사회 생태 시스템'이라는 틀을 1998년에 제창했다. 물질과 에너지의 유동분석을 사회생태계의 대사구조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자연변화를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고 있었다. 응답이나 반응의 현상학으로서의 문명학이나 인문학은 지루하다.
 폴리티컬 생태도 사태 돌파를 시도했다. 「자연이 들어간 사회」와 「사회가 들어간 자연」을 이중으로 취급하는 이론적인 틀(이중의 내재성)을 마련했지만, 잘못되었다. 이런 견해는 상황의 비틀림에 민감하게 주목하지만, 그 어쨌든 결국은 비틀림을 되돌리는 "탄력"(복원력)을 안이하게 기대해 버리는 것이다. 정말로, 축하합니다. 탄력이란, 마음대로 일어날 리가 없다.
 아마도 최근의 사회학자는 자연이 원래 말이 아니고 계속 2차적·다차적임을 경시하고, 직립 2족 보행한 인간 원숭이가 원래 반자연으로서의 스타트를 끊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 너무 많을 것이다.

 환경적 문명학이나 환경적 인문학이 태동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시간축을 가져야 한다. 역사관을 지지하는 시간축이다.
 그런데 이것이 페르난 브로델 이후, 다음과 같은 3개의 시간할당이 되어 왔다. a 「자연과 기후의 거의 부동으로 인간 활동에 좌우되지 않는 시간」, b 「경제와 사회의 사건에 관한 완만한 시간」, c 「전쟁이나 외교나 정치의 페이스에 아울러 급속하게 변동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3 이다. 아나르파는 이 재봉대 위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a가 틀리기 때문에 달게됩니다.
 한편, 역사주의의 함정을 면하게 하기 위해, 에마뉘엘 라듀리의 『새로운 역사』(신평론, 후지와라 서점) 등이 「인간을 넣지 않는 역사」에 근거하는 시간할인을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이쪽에도 무리가 있다. 예방선이 너무 늘었다.
 따라서 '자연주의 메트로폴리스'의 윌리엄 크로논이 자본주의 활동이 형성하는 요인을 배려한 '2차적 자연', 에드문트 뤼셀의 인간과 생물의 상호작용을 밑바탕으로 한 '진화적 역사 시간' 티모시 미첼의 자연이 사회에 꽂는 분광성에 주목한 '에너지 프리즘'이라는 아이디어가 잇달아 나왔는데, 모두 이것도 이마이치였다.

 환경(environment)이라는 개념을 21세기의 복잡계 속에서 잘 작동시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원래는 1850년대에 영어나 프랑스어로 “environs”라는 말은 부근이나 근교라는 의미로 잡혀 있었고, 이것을 지구규모나 생물규모에 맞는 ‘환경’으로 넓혀서 사용한 것은 허버트 스펜서였다. 했다.
 스펜서는 라틴어 「키르쿠무후사」(Circumfusa)가 가지는 뉘앙스(위생에서 말하는 서컴 스탠스)를 포함해 다윈주의처럼 환경 개념을 시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쩐지 모호한 것으로, 당시에는 이들과 유사하게 뷔폰이나 디드로( 180밤 )나 라마르크나 카바니스 등이 자연환경 개념 '밀리우'(milieu)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야말로 논쟁이나 논의가 깊어지고 있으면 좋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거기가 논쟁 신세로 집중하지 않았던 추악이 터진 곳이다. 이 때가 '환경의 최중요성'을 제시하는 최초로 최대의 기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폰 유쿠스큐르( 735밤 )가 '생물에서 본 세계'(사색사·이와나미 문고) 등에서 제시한 '환세계'(Umwelt)와 와쓰지 테츠로의 '풍토' 등의 시점이 주류 환경 논의에서 시작된 채로 되었다. 나가 오규스탄 베르크( 77밤 )와 잡담했던 무렵은, 이것이야말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길버트 화이트의 '세르본의 박물관지'가 “자연의 이코노미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존재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일과 식물학자 베르나르단 드 생피에르의 "지구의 조화는 최소한의 식물종을 없애는 것만으로 그 일부 또는 전부를 파괴해 버릴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장 바티스트 로비네의 「인간이나 대형 동물은, 우리가 지구라고 부르는 이보다 큰 동물의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관점이, 완전히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만약 논쟁 신세가 작동하고 있으면, 약간 놀라운 이야기가 되지만, 일본에서 말하자면 나는 아라마타 히로시( 982야 )나 나카자와 신이치( 979야 )가 80년대에 좋아 마음대로 방언하고 있었다 일 등도, 남방 쿠마쿠스( 1624 밤 )나 러블록의 환경 인문학과 함께, 또 화이트 헤드의 유기체의 철학과 함께, 최신의 안트로포센한 논의에 짜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최근이라면 사쿠라 통( 358야 )의 견해 등이 이들을 맡고 있다.


하버드 스펜서
다윈의 진화론을 전용하고 사회 진화론을 제창. 모든 분야의 학문을 통일하고 종합체계화한 철학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폰 유쿠스큐르(왼쪽 위), 길버트 화이트(오른쪽 위), 베르날단 드 생피에르(왼쪽 하단), 장 바티스트 로비네(오른쪽 하단)

생물별 「환세계」를 설명하는 일러스트레이션
유쿠스큐르 「생물에서 본 세계」에서
 환경 논의가 잘 통합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농업 화학이 간과되어 버린 적이 있다. 지금까지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근본적으로 일으킨 것은 에너지와 물질의 교환에 의한 것이다.
 라보아제가 '연소'에 주목한 것은 산소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 환경에서의 '대사의 비밀'을 고찰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생명과 문명 사이를 잇는 화학이 부상했다.
 그렇다면 안트로포센은 토양과 공기를 둘러싼 화학을 좀 더 신사상의 중심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중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이 분야에도 '재귀성'이 보이기 어려운 구조가 활발히 있었을 것인데, 사회학이나 환경 이론은 거기를 흘렸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미 아서 영은 1770년의 '전원경제'에 목장과 농장을 얽히는 물질 순환의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해 “균정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자연 연쇄의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는 관점에서 도시, 농촌, 목장에 숨어있는 피드백 루프를 모색했다.

 리비히의 '최소율'도 토양 재활용의 필연성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리비히는 토양에 숨어있는 소량의 질소, 인, 칼륨, 마그네슘, 황, 철 등의 화학 원소가 토양의 비옥의 비밀을 잡고 있음을 포기하고 만약 도시의 문화가 이것을 경시하면 사회 그는 자사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당시 영국이 과노 (해조 배설물, 인 비료)와 무기 비료에 큰 돈을 움직여 수입하려고하는 모습을 뱀파이어에 갇아, "영국은 다른 나라가 자신의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것을 빼앗고 있다”고 썼다.
 실제로 농업화학에 의해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실험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피에르 루루가 프랑스 크루즈 지방 부삭에 만든 '킬 크루즈'(순환·환환)는 배설물의 재활용에 의해 마을락 집합체를 등식초율시키는 실험이었다 . 농업 화학 분야는 아니지만, 크로포토킨의 상호부조론에 공감한 건축가의 레베레히트 미게가 '모두로 자급'에서 제안한 자급시속 공동체의 계획은 그린 매니페스트를 내걸고 처음으로 '그린'이라는 용어 을 환경론에 적용하였다.
 これらは1920年代のウラジミール・ベルナドスキーの「生物地球化学」に、40年代のジョージ・ハッチンソンの「システム生態学」に、そして60年代のラブロックとリン・マーギュリス(414夜)の「大気圏生物化学」 에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발전해 갔다. 둘 다 흥미로운 발상이었는데, 이것 또한 종합적인 안트로포센 이론에 조성되어 있지 않다.
 자세한 것은, 천야 천권의 포코 스키( 1622 밤 )의 「미생물이 지구를 만들었다」(청토사), 마루야마 시게토쿠·이소자키 유키오( 1615 밤))의 '생명과 지구의 역사'(이와나미 신서), 워드와 카슈빙( 1637밤 )의 '생물은 왜 탄생했는가'(가와데 서방 신사) 등을 보고 싶다.


라보아제의 다이아몬드 연소 실험

에도의 학자, 우다가와 유스케에 의해 그려진 라보아지에의 수소 연소 실험도

왼쪽 상단에서 아서 영 (왼쪽 위), 유스투스 리비히 (오른쪽 위), 피에르 루루 (왼쪽 하단), 레베레흐트 미게 (오른쪽 하단)
 그런데 앞으로의 환경 철학이 진심으로 잡아야 하는 최대의 상대는 아마 엔트로피의 문제일 것이다. 지구는, 과잉의 에너지나 모이는 정보를 어딘가에 잘 버리지 않는 한은 생명계를 유지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부의 엔트로피」를 활용할 수 있었던 구조와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다.
 그렇다고 하면, 찢어진 「사람-지구」계가 안트로포센에 걸려 온 와중에서 전갈처럼 모여 와 버린 엔트로피를, 무엇에 의해 배출하는지, 아니면 무언가로 변환하는지, 거기에 질문된다 이다.
 여기를 다이나믹한 독서로 하기 위해서는, 하나는, 볼츠만이나 프리고진( 909밤 )의 열역학 가설을 어떻게 취하는가 하는 것이다. 열역학은 우주론에도 관련되기 때문에, 상당히 큰 스코프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하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자연 내부의 에너지 비축과 인류의 이익을 위한 가치 부여'나 에른스트 마하( 157밤 )의 '열학의 여러 원리'에 나오는 '사유의 경제' 이론을 어떻게 읽을지, 에드발트 자하의 '사회 역학의 설립', 패트릭 게데스의 '존 러스킨 이코노미', 프레드릭 소디의 '데카르트 경제학' 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즉 경제학과 엔트로피를 환경학으로서 어떻게 브리지시킬까라는 읽음근을 기동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금 혀가 부족했지만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소디가 “금리란 우연으로 이루어진 인간끼리의 합의일 뿐, 자본이 종속하는 엔트로피의 원칙에 오랫동안 모순된 채로 있다. 는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등을 어떻게 해석해 나갈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엔트로피 처리를 다루려고 할 때, 제임스 줄과 윌리엄 톰슨의 자연 신학의 전통에 따라 너무 멀어지거나 그 반대를 마주하는 마르크스 ( 789 밤 )의 자본론과 노동론 에 너무 가담하게 된다. 최근, 상배된지 얼마 안된 사이토 유키히라군의 『인신세의 ‘자본론’(슈에이샤 신서)은 매우 재기환발한 저서였지만(그러니까 나도 띠에 추천문을 전했지만), 자본의 문제 에 말한 만큼, 각종 엔트로피의 배출에는 닿지 않고, 안트로포센론으로서도 꽤 치우치고 있었다.


지구 시스템에 대한 인간 활동의 표준 모델

루트비히 볼츠만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물리학자, 철학자. 통계역학의 단서를 연 공적과 함께 전자기학, 열역학, 수학 연구로 알려져 있다. 원자를 실재의 대상으로 생각한 최초의 과학자.

패트릭 게데스
현대 도시 계획, 시정학, 환경 교육의 아버지. 도시 조사에 근거한 도시·지역 계획 이론의 진전에 큰 영향을 주어, 시민 참가의 마을 만들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저것 이것 안내해 보았지만, 본서에는 보다 풍부한 컨텐츠가 소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성장 신화로부터의 탈출」이 빗나가고 있는 사상이나 데이터가 집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지 가능한 지구 관리와 가이아와의 화해의 수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뭐, 어쨌든 안트로포센한 논의는 지금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미 안내해 온 것처럼 18세기 중반부터 몇번이나 논의되어 온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俎 위에 올라오지 않는 논의도 아직 남아 있다. 나의 견해로는, 특히 뉴사이버네틱스인 생각, 혼돈과 복잡계를 둘러싼 견해, 자기 조직화의 이론의 가능성과 한계, 비선형 수학의 가능성, 사이보그나 로봇 사회의 문제, 넷 사회나 AI의 역할 등 등의 검토가, 본서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유발 노아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와데 서방 신사), 마르크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고단샤), 바이런리스의 "인류의 역사와 AI 미래」(디스커버 21) 등보다는, 본서에 몰두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덧붙여서 최근에는 「인신세」를 씌운 책이 솟아나고 있지만, 크리건 리드의 「사피엔스 이변」(아스카 신사), 시노하라 마사부의 「인신세의 철학」(코단샤 선서 메티에) 등, 둘 다 띠에는 짧았고 뒤에는 길었다. 천야 천권의 독자는 역시 본서에 잡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드디어 100세를 맞이한 제임스 러블록이 안트로포센보다 더 앞서서 '노바센(Novacene)'(NHK 출판)이라는 책을 마무리해 오치아이 요이치군을 기뻐했다. 편하게 말하고 있는 책이지만, 우아한 맛이 있다. 안트로포센 이후의 시대는 마침내 전자적 지성이 관여할 것이라는 예언이 되고 있다. 코로나 사무라이 설날에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임스 러블록과 『노바센』의 원저
「가이아 이론」의 제창자. 지구에서 인간의 역할은 높은 지능을 가진 <초지능>의 진화를 촉진하고 가이아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전환한다고 예언한다. 2020년에 101세를 맞았다.
 오늘 밤이 2020년 마지막 천야천권이다. 올해는 장 미셸 모르보와 ( 1730 밤 )의 "보이지 않는 것을 모으는 꿀벌"(사조 사)에서 시작하여 다와다 하코 ( 1736 밤 )를 쓴 곳에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본 상륙 뉴스를 만나 컬 짐머의 '바이러스 플래닛'(아스카 신사)과 프레드릭 케크의 '유감 세계'(수성사)와 니시야마 켄이치의 '면역 네트워크 시대'(NHK 출판) 등을 급히 소개했다.
 한편, 카도카와 소피아 문고 「천야 천권 에디션」의 구성과 가필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와 소립자」나 「방법 문학」이나 「서브 칼즈」를 위한 천야를 삽입하는 나날도 계속된다 했다. 나에게 있어서의 천야천권은 더 이상 회봉행에 가까운 것이 있지만, 실제로는 장작을 끓는 목욕에 가까워, 그 밤에 목욕에 들어가는 저자를, 미리 준비한 다양한 형태의 목욕통에서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가마솥 밖의 모닥불에서 짓밟고 있는 몸이다.
 뭐, 그런 것은 어쨌든, 새해 전날의 천야 천권을 안트로포센인 1권으로 할 수 있고, 조금 안심하고 있다. 저자 2명과 함께 목욕을 할 생각으로 철자한 것이다. 「새해 전날 정해지지 않는 세상의 사다메야」(니시츠루), 또 「노래 반고를 모르는 제야의 화통일까」(자규). 그럼 내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올해도 연말까지 천야 천권을 계속 썼다.
(도판 구성:데라히라 켄지·니시무라 슌카츠)

⊕『인신세란 무엇인가〈지구와 인류의 시대〉의 사상사』⊕

∈ 著者:クリストフ・ポヌイユ
    ジャン=バティスト・フレソズ
∈ 訳者:野坂 しおり
∈ 発行者:清水 一人
∈ 発行所:青土社
∈ 装丁:竹中 尚史
∈ 印刷・製本:双文社印刷
∈ 発行:2018年3月20 일

⊕ 목차 정보 ⊕

∈∈ 엽서∈∈
서언
∈ 제일부 그 명칭은 인신 세로 한다
∈ 제1장 인위 기원의 지질혁명
∈ 제2장 가이아와 함께 생각한다: 환경학적 인문학

∈ 제2부 지구를 위해 말하고 인류를 인도한다: 인신세의 지구 관료적인 큰 이야기를 저지한다
∈ 제3장 클리오, 지구,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자
∈ 제4장 신세 또는 과두 정치 신세

∈ 제3부 인신세를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 제5장 열신세: 이산화탄소의 정치사
∈ 제6장 사신세: 힘과 환경파괴
∈ 제7장 을 소비한다
∈ 제8장 현려신세:환경학적 재귀성의 문법
∈ 제9장 무지신세:자연의 외부화와 세계의 경제화
∈ 제10장 자본신세:지구시스템과 세계시스템의結合した歴史
∈ 第一一章 論争新世:人新世的な活動に対する一七五〇年以来の抗議運動

∈ ∈ 결론
인류세 에서 살아남고 살기
∈ ∈ 참고 ∈ ∈ 번역가의 추간
∈ ∈ 개인 이름 색인

⊕ 저자 약력 ⊕
크리스토프 보누유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 연구원. 전문은 과학기술사·환경사. 프랑스의 과학기술사 연구를 견인하는 알렉산드르 코일레 센터에 소속.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2013년부터 수유사의 '인신세' 컬렉션을 주재. 편저에 「또 하나의 「30년의 영광」의 역사」 「과학과 지식의 역사 제3권:테크노사이언스의 세기(1914년~)」등이 있다.

장 ⁼ 바티스트 프레소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연구원을 거쳐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 연구원. 전문은 과학기술사·환경사. 알렉산드르 코일레 센터에 소속.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주저는 과학기술이 가지는 리스크에 관련된 논쟁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논한 『기쁨의 묵시록』. 편저에 「환경사 입문」등.

⊕ 역자 약력 ⊕
노자카 시오리(노사카・시오리)
고베대학 국제문화학부 졸업.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석사과정 수료. 현재는 이 박사과정에 재적. 전문은 과학기술사・생물학사. 논문 발표에 "소비되는 유산균, 상상/창조되는 건강: 대일본 제국에서의 유산균 요법의 도입과 형성에 대해"("제국 일본의 지식 네트워크에 관한 과학사 연구"수록)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