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1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구월산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구월산지구

조선의 중서부 해안지구에 면하고있는 구월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광지, 피서지이다. 명승들뿐아니라 안악3호무덤을 비롯한 력사유적들도 적지 않다. 평양을 가까이 하고있어 평양에 체류하는 손님들이 하루이틀 피서지로 리용할수도 있고 등산, 참관, 해수욕도 할수 있는 리상적인 관광지구이다. 가지가지 재미나는 전설도 많이 깃들어있다.






구월산



구월산은 조선의 6대명산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9월의 단풍이 류별나게 아름답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였다. 구월산의 총면적은 110㎢이다.

구월산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정력적인 령도와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의하여 인민의 휴양지, 관광지로 훌륭히 꾸려졌다. 구월산에는 100여㎞의 탐승도로들과 수십개의 정각, 부감대들, 등산길들이 있다.

구월산관광지구에는 절승경개들뿐아니라 구월산성, 삼성사, 월정사, 안악3호무덤을 비롯한 많은 력사유적들이 있다.

평양과 가까이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등산, 참관, 해수욕을 하는 훌륭한 관광지이다.

평양에서 구월산까지는 약 100㎞이다. 남포시를 거쳐 서해갑문을 지나 륙로로 가는것이 편리하다.




구월산성



고구려시기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둘레길이는 5. 23㎞, 높이 3. 5~5. 2m이다.

성을 보위하는데 리용된 무기고, 식량창고, 병영 등의 터가 있으며 자기를 구워낸 가마터도 있다.

평양에서 구월산까지는 약 100㎞이다. 남포시를 거쳐 서해갑문을 지나 륙로로 가는것이 편리하다.




단풍골



구월산 서쪽비탈면을 따라 펼쳐진 명승구이다. 맑은 시내물이 쏟아져내리다가는 바위돌에 부딪쳐 무수한 물안개를 일으키는데 노을빛이 비끼면 령롱한 무지개색을 반사하여 마치 구슬을 뿌려놓은것 같다.

원래 옥류골이라고 하였는데 단풍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단풍골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구월산에서 제일 깊고 이름난 골안이다. 등산로정은 5km인데 차를 타고 유람할수도 있다. 단풍골에는 마당소, 삼형제소, 뱀장어소, 차대폭포와 같은 명소들뿐아니라 월정사와 같은 력사유적들도 있다.




월정사



구월산 아사봉을 배경으로 단풍골에 자리잡은 고구려시기 절이다.

지금의것은 조선봉건왕조초기에 다시 지은것이라 한다. 월정사란 월정대사에 의하여 세워진 절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만세루, 명부전, 수월당과 기타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건축형식이 독특할뿐아니라 주변경치 또한 매우 아름다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팔담골



관광도로를 따라 안악군 월정리 방향으로 내려가느라면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팔담골에 이르게 된다. 500m의 구간에 8개의 맑은 담소가 차례로 놓여있다고 하여 팔담골이라고 한다. 맑은 물우에 무도장, 휴식터도 있다.




삼성사



팔담골입구에서 2km정도 내려가면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고려말기에 세운 절인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삼성이란 단군의 할아버지 환인과 아버지 환웅, 단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 서, 남쪽에 3채의 주요건물과 보조건물이 있다.




은정호



팔담골에서 1. 5km 들어가면 은정폭포가 있는데 그우에 자리잡고있다. 협곡의 시내물이 모여 형성된 산중호수이다.

깊이가 약 5m되는 호수는 물이 맑아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며 물밑에는 마치 살아움직이는것만 같은 세마리의 돌사자가 있다.




안악3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자리잡고있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이다.

4세기 중엽에 건설되였는데 규모가 크며 특별히 화려하고 내용이 풍부한것으로 하여 고구려벽화무덤가운데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문화유산으로 되고있다.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력사와 건축, 회화, 음악, 춤, 무술, 음식차리기 등을 알수 있다.

안악3호무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산성혁명사적지





구월산성중심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아버님이시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걸출한 지도자이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주체10(1921)년 11월 이곳에 오시여 이 지구 반일조직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오직 무장투쟁으로써만 반일투쟁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방침을 제시하신 력사적인 곳이다.

《조선의 오늘》서부지역 사리원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사리원지구

평양으로부터 65k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리원시를 측으로 하여 이루어진 관광지이다.

사리원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정방산이 있는데 그 주변의 산들이 시의 북부를 둘러싸고있어 도시의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가장 볼만한 곳은 사리원시내에 있는 민속거리이다. 력사유적들도 적지 않다.

이 지구는 평양-개성고속도로의 중간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있어 개성으로 오갈 때 휴식의 한때를 즐길수 있는 리상적인 곳이다.




사리원시

황해북도의 소재지이며 평양의 남쪽관문도시이다.

해방전 순수 상업소비도시였던 사리원은 해방후 현대적인 공업과 발전된 농촌경리를 가진 지역으로 전변되였다. 새로 진행된 토지정리로 미곡협동농장을 비롯한 농장벌들의 면모가 일신되였다. 사리원은 포도생산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것으로 만든 경암포도주는 시의 특산이다. 시에는 계응상사리원농업대학을 비롯한 10여개의 대학과 병원들, 현대적인 사리원경기장과 력사박물관이 있다. 시의 북쪽에는 정방산유원지가 있으며 시안에는 경암산을 중심으로 아담하게 꾸려진 유원지가 있다. 력사유적들도 있다. 시에는 큰 강이 없고 하천들만 있으며 서흥강을 막아 건설한 큰 규모의 운하가 있다. 년평균기온은 10℃, 년평균강수량은 937. 8mm이다.




사리원시민속거리



시리원시민속거리는 경암산기슭에 자리잡고있다.

평양에서 차를 타고 1시간정도 달리면 와닿을수 있다. 80여정보의 부지에 꾸려진 민속거리에는 민족적향취가 짙게 풍기는 조선식합각지붕의 살림집들과 민속음식점들, 정각들과 다리들, 편의봉사시설들, 력사박물관과 거북선, 첨성대, 측우기 등을 재현한 력사문화유적유물들이 있다. 민속놀이장의 한쪽면은 우리 민족의 건국력사를 보여주는 모자이크벽화들로 꽉 차있다. 민속오락장에서는 장기, 윷놀이 등 민속오락경기들을 할수 있으며 민속식당에서는 찰떡, 지짐, 막걸리 등 민속음식들을 맛볼수 있다. 경암산려관에서는 국내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해주고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반일투사들을 키워내시던 장소, 민속놀이터 무대와 경암루, 룡조각, 민속차집 등이 경암산기슭에 위치하고있다. 민속차집에서는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 있으며 경암산 마루에 있는 선군정에서는 사리원시내를 한눈에 부감할수 있다.

명절이면 화려한 민족옷차림을 하고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녀성들의 모습이 거리의 흥취를 돋구어준다. 녀성들의 민족옷자랑무대도 볼만 하다. 학생소년들의 연띄우기며 제기차기, 줄넘기 등 민속놀이도 사람들에게 웃음과 랑만을 더해준다. 또한 민족옷차림의 떡메군들이 큼직한 떡메를 휘두르며 먹음직스러운 찰떡을 쳐대는 풍경은 명절분위기를 이채롭게 장식한다.




정방산



사리원시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다.

산마루들이 서로 잇닿아 정방형을 이루고있다 하여 정방산(높이 481m)이라고 부른다. 산세는 험준해보여도 곳곳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아득히 높은 기암절벽들, 울창한 수림으로 하여 볼수록 장쾌하다. 봄철이면 살구꽃, 벗꽃, 배꽃들이 한데 어울려 황홀경을 펼쳐놓는다. 꽃이 얼마나 많고 화려하였던지 저녁해가 져도 어두워지지 않는 특이한 절경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정방산에는 560여종의 식물들이 있다.

또한 딱따구리를 비롯한 온갖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참관자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경치도 좋지만 유적들이 많은것으로 하여 더욱 인기를 끌고있다.




정방산성



정방산중턱에 축성된 고려시기의 산성이다.

둘레가 12km이며 동, 서, 남, 북에 성문을 세우고 그 우에 문루를 만들었다.

성안에는 병실터, 무기고터, 식량창고터가 남아있다. 옛날 성안에는 48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고려시기의 유명한 불교절인 성불사와 돌탑이 남아있을뿐이다. 또한 조선봉건왕조시기 극도로 문란해진 나라의 정세속에서도 정방산성을 지킨 성장 김성업을 추모하여 세운 비석이 보존되여있다.

오늘 정방산은 피서지로, 즐거운 휴식터로 되고있다.




성불사



정방산성안에 있는 불교절이다.

898년에 처음 세운 절인데 지금의것은 고려말기에 다시 지은것이다.

성불사는 5층돌탑을 중심으로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등 6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고려시기의 건축형식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경암산



사리원시내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경암산은 자연의 조화로 이루어진 여러가지 형태의 바위들과 갖가지 식물들이 어울려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봄철에는 꽃속에 묻히고 가을에는 붉고 누런 나무잎들이 산을 이채롭게 장식한다. 산의 높이는 140m이다.




경암루

1436년에 세워진 경암루는 경암산에 위치하고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봉산군수가 있던 관청의 루정이였다.

루정에 올라서면 정원처럼 꾸려진 경암산이 사리원거리들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은정축산전문협동농장



수곡차집에서 평양으로 올라오면서 오른쪽으로 약 10km되는 지점에 자리잡고있다.

농장에서는 축산과 함께 벼, 강냉이, 콩을 비롯한 알곡과 남새들도 재배한다. 12 000정보의 면적을 차지한 목장구역에는 7개 호동의 염소우리들과 젖가공설비, 자연갱도식랭동고 등이 있다. 요그르트, 빠다, 치즈 등을 생산한다. 무연하게 펼쳐진 풀판을 따라 산보도 할수 있고 참관자들의 요구에 따라 농장원들의 흥겨운 봉산탈춤을 관람할수도 있다.




범안양어장



황해북도 서흥군 범안리에 위치하고있다.

34정보의 부지면적을 가진 양어장에는 48개의 못이 있는데 이곳에는 칠색송어, 잉어, 기념어, 메기 등이 자라고있다. 양어못들과 농촌문화주택, 축사들, 범안발전소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범안리는 오늘날 《선군8경》의 하나로 불리우고있다.




사리원 3. 8려관



사리원시 신양동 경암산기슭에 위치하고있는 4층짜리 려관이다. 려관은 크지 않으나 큰 호텔들에서는 느낄수 없는 평온과 집에 있는듯 한 감을 손님들에게 안겨준다. 수용능력은 60명이다.

방수:29개(1등실 1개, 2등실 3개, 3등실 25개)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남포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남포지구

조선서부 대동강하류연안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남포를 중심으로 한 관광지구이다.

와우도를 비롯한 명승지들과 강서세무덤과 같은 력사유적들, 서해갑문과 공장들, 농장들을 비롯한 수많은 관광대상들이 있다.

이 지구의 강서약수와 신덕산샘물이 유명하다.

지구에는 산지대의 식물로부터 간석지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퍼져있다. 산림속에는 메돼지, 노루, 여우 등이 있으며 야산지대와 공원들에는 꿩, 딱따구리, 종달새 등이 많다. 청산벌을 비롯한 논벌들과 간석지, 대동강하류일대에는 왜가리나 백로와 같은 철새들이 많이 날아든다.

평양에서 남포까지는 55km 이다.




남포시

조선의 중요한 공업기지일뿐아니라 조선서해의 이름난 항구문화도시이다.

기후는 조선서해와 대동강의 영향을 받아 내륙지대보다 겨울철에 따뜻하고 여름철에는 서늘하다. 년평균기온은 9. 9℃, 년평균강수량은 880mm이다.

이 지구는 경제발전에 유리한 자연환경과 자연부원을 가지고있다.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있다. 시에는 여러개의 대학들을 비롯한 교육기관들이 있으며 문화시설들과 체육시설들, 병원들이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서해갑문



항구려관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서해 8km의 날바다를 막아 건설한 거대한 갑문이다. 주체70(1981)년부터 주체75(1986)년까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건설되였다.

갑문에는 2천t~5만t급까지의 배들이 드나들수 있는 3개의 갑실이 있고 언제우에는 기차길, 자동차길과 걸음길이 있다. 갑문이 건설됨으로써 서해지구의 농경지들에 물을 대주고 공업지대와 주민지대의 공업용수와 음료수가 해결되였다. 또한 배통과능력이 높아지고 교통문제도 원만히 해결되였다. 서해갑문이 건설되기 전에는 남포에서 은률까지 200km를 돌아가야 하였지만 지금은 8km를 가면 된다.

또한 대동강하류의 풍치가 더욱 아름답게 변모되였다.




태성호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30km가량 가면 해발 200~300m의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인공호수가 있다.

둘레가 30km가 넘는 산중의 바다를 련상시키는 호수이다. 호수의 기본수원은 대동강이다. 관개용저수지로 건설하였다.

풍치아름다운 호수가를 따라 소년단야영소와 휴양소, 평양골프장이 자리잡고있다.

호수가에서 낚시질과 뽀트놀이도 할수 있다. 그 주변에서 어죽을 쑤거나 불고기를 하면서 자연을 즐기는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평양골프장



태성호기슭에 자리잡고있다.

수려한 풍치에 잘 어울리게 들어앉은 골프장은 약 120정보의 부지면적을 가지고있다. 잔디면적은 45정보이고 그 연장길이는 7km정도이다. 골프장은 18개의 홀로 되여있으며 매개 홀은 호수가를 따라 특색있게 이어져있다.

하루에 100여명이 경기를 할수 있도록 기재들과 봉사인원들이 충분히 준비되여있다. 건물안에는 식당, 상점, 한증탕, 휴식실 등 봉사시설들이 편리하게 꾸려져있다.

경기를 하지 않는 방문객들은 멋있는 환경과 푸른 태성호를 굽어보며 기분좋은 산책을 하는것으로만 만족을 느낄수 있다. 당일려행으로 리상적인 명소이다. 또한 청춘거리의 서산호텔옆에는 30개의 타석을 가진 평양골프련습장이 자리잡고있다. 골프련습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골프장까지 갈 시간이 넉넉치 못한 사람들에게 알맞춤한 곳이다.

주변에 호텔들도 있어 짧은 기간에 골프를 배우기에는 이 련습장을 리용하는것이 좋다.




와우도유원지



남포시중심에서 서남쪽으로 10km가량 가면 자그마한 산을 보게 된다. 이것이 한때에는 섬이였던 와우도이다. 바다에 소가 누워있는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산마루에 정각이 있고 앞에는 배놀이장과 해수욕장, 백사장, 물놀이장, 낚시터, 휴양소, 화초원 등이 있으며 배구장, 롱구장, 탁구장 등 체육시설들도 꾸려져있다. 뒤에는 와우도회관이 특색있게 꾸려져있다.

회관에는 오락장, 무도장을 비롯한 봉사시설들이 그쯘히 갖추어져있다. 일요일에 이곳은 남포시뿐아니라 평양에서 온 휴양객들로 차고넘친다.




강서세무덤



강서구역 삼묘리에 위치하고있는 7세기중엽의 고구려벽화무덤이다.

이 무덤들은 오늘까지 조선에서 알려진 100여기의 고구려벽화무덤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벽화인 사신도(백호, 주작, 현무, 청룡)가 있는것으로 하여 주의를 끌고있다.

사신도의 백호그림은 세계 명화중의 하나로 꼽히고있다.

주체93(200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였다.




덕흥리벽화무덤



강서구역 덕흥리에 자리잡고있는 덕흥리벽화무덤은 고구려24대왕인 광개토왕시기(408)년에 만든 무덤이다.

무덤안에는 무덤의 년대를 가늠할수 있는 600여개의 글자가 씌여져있으며 강성한 고구려를 보여주는 벽화들이 그려져있다. 주인공이 벼슬을 지낼 때 13군태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무사들의 그림, 고구려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한 그림 등으로 벽화가 형상되였다.

주체93(200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였다.




룡강온탕원



조선의 중서부에 위치하고있다.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을 리용하여 고혈압, 관절염, 신경통이나 수술후유증, 부인성질환, 만성위염, 만성대장염, 피부병 등을 치료해주는 시설이다.

룡강온천은 조선의 온천가운데서 광물질이 제일 많고 브롬이온과 라돈이 들어있어 질병치료에 특효가 있는 매혹적인 온천이다. 이곳에는 라돈가스욕, 온몸치료욕, 국소치료욕, 물맞이치료욕, 내복치료 등을 할수 있는 시설들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온탕원에서는 음료수와 생활용수를 예성산샘물로 리용한다. 소화기에 좋은 이 물을 마음껏 마시면서 온천욕을 하고나면 10년은 더 젊어지고 청춘의 정력을 되찾을수 있다.

7개의 호동으로 된 온탕원의 매 방(총 28개방)에는 치료실, 침실 등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종합봉사건물에는 화면반주음악실과 연회장, 당구장을 비롯한 각종 봉사시설들이 꾸려져있다.

온탕원의 정원가까이에 있는 호수가에서 잉어, 숭어를 직접 낚아 맛있는 료리들도 해먹을수 있다. 온탕원에서 맛볼수 있는 조선서해대합조개불고기는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령남배수리공장 2호도크



령남배수리공장에 현대적으로 일떠선 배수리기지이다.

수만t급배 여러척을 동시에 수리할수 있을뿐아니라 운영을 콤퓨터화한 대형도크가 새로 건설됨으로써 배수리능력이 훨씬 높아졌다. 여러개의 수리부두와 종합수리직장, 수백세대의 살림집 등 많은 대상들도 동시에 건설되였다.

집체같은 대형짐배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도크와 수리시설들, 조종실, 전망대, 풍력발전기 등을 볼수 있다.




남포육아원



주체84(1995)년 10월에 개원한 남포육아원에서는 남포시안의 세쌍둥이들과 어머니가 없거나 부모들이 장기환자인 4살까지의 어린이들을 키우고있다.

주체93(2004)년에 개건되였다. 3층으로 된 육아원에는 해빛쪼임칸과 호실들, 지능놀이실, 종합놀이장 등이 있다.




청산협동농장



청산협동농장은 평양에서 28km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있다.

청산리는 벼를 비롯한 알곡을 재배하는 농업생산기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49(1960)년 2월 이곳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창조하시였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은 조선로동당의 전통으로 되여있는 혁명적군중로선을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현실에 맞게 구체화하고 발전시킨 대중지도사상, 대중지도방법이다.

청산리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이곳을 사회주의농촌의 본보기농장으로 전변시키신 령도업적이 깃들어있는 뜻깊은 곳이다.




김응서집



남포시 룡강군 애원리에 있는 이 집은 김응서가 1564년에 출생하여 20살까지 살던 집이다.

김응서(1564-1624)는 임진조국전쟁시기의 애국명장이였다. 1592년 왜적들이 평양성을 일시 강점하자 그는 부대를 지휘하여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바치였다. 원상그대로 보존되여있는 집은 본채와 부속건물, 1791년에 세운 충렬문, 1819년에 세운 충렬사 등으로 되여있다. 충렬사는 김응서와 그 조상들의 제를 지내던 사당이다. 충렬사에서 100m정도 올라가면 휴식터가 있는데 야외식사를 하기에 맞춤한 장소이다.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해주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해주지구

조선서해의 해주만기슭에 자리잡고있는 해주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광지구이다.

이 지구에는 서부벌방지대의 《계곡미의 녀왕》으로 알려진 장수산과 같은 명산들이 있으며 부용당, 수양산성, 해주석빙고, 해주5층탑 등 력사유적들이 적지 않게 보존되여있다.

신천박물관을 비롯한 참관지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손꼽히는 명승구는 석담구곡과 바다에 솟아있는 형제섬이다.




해주시

황해남도의 도소재지이며 조선서해의 주요항구도시이다.

해주시 면적의 90%이상이 200m미만의 구릉 및 벌지역이다. 상업 및 소비도시였던 해주시는 오늘 현대적인 항구문화도시로 발전하였다.

해주항은 예로부터 평양, 개성 등 국내의 주요도시들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을 발전시켜온 력사가 오랜 무역항이다. 시에는 10여개의 대학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교육기관들과 문화기관, 체육기관, 보건기관들이 있으며 공원과 유원지 등 봉사시설들도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또한 부용당, 사미정, 해주성개측비 등 력사유적들이 보존되여있다. 예로부터 해주배가 유명하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거리는 140km이며 년평균기온은 14. 7℃, 년평균강수량은 1 147. 5mm이다.




장수산



황해남도 재령군과 신원군의 경계에 있다.

예로부터 이 산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좋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오래오래 살았다고 하여 장수산(해발 747m)이라 이름지었다.

《황해금강》으로 불리우는 아름다운 산으로서 선조들은 《장수산은 서부벌방지대에 혜성같이 나타난 계곡미의 녀왕》이라고 하였다.

제일 높은 봉은 환희봉이며 동서길이 10km, 북남길이 8km이다. 장수산유원지는 열두굽이계곡으로 이루어졌다.

계곡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명소들과 천연기념물들이 재미나는 전설들과 어울리고있어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여섯굽이에 있는 300년수는 건강장수에 특효가 있을뿐아니라 예로부터 조선력사에 이름을 남긴 고구려 고국원왕, 장수왕, 황희장군 등 왕들과 명장들이 마신 소문난 약샘이라고 한다. 장수산에는 산성과 현암사, 묘음사와 같은 력사유적들도 보존되여있다.

또한 희귀한 식물들과 여러 종의 동물들이 있는데 특히 꿩이 많아 예로부터 일명 《치악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장수산의 제일 아름다운 계절은 서리꽃핀 겨울철이다.




수양산



해주시와 신원군의 경계에 있다.

해발 946m로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설류봉, 장대봉을 비롯한 우아한 산봉우리들이 솟아있어 더 높아보인다. 동서길이 12km, 북남길이 10km이다.

산의 남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암절벽들이 천태만상의 산악풍치를 펼치고있다. 폭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수양산폭포가 유명하다.

또한 수양산성을 비롯하여 해주석빙고, 해주5층탑 등 력사유적들이 있다.




석담구곡



해주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석담천의 중류에 있다.

돌못과 아홉골짜기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산꼭대기의 큰 바위가 갓처럼 생겼다 하여 관암(1곡), 온 바위가 꽃으로 덮인다 하여 화암(2곡),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우에 록음이 우거진다 하여 취병(3곡), 늙은 소나무들이 벼랑우에 우거진다 하여 송애(4곡), 구곡의 으뜸이라 하여 은병(5곡), 약 1km 올라가면 맑은 물이 흰 모래우를 흘러 벼랑으로 떨어져 고인 넓고 깊은 못인 천연의 낚시터가 있다 하여 조협(6곡), 기암이 절벽을 이루고 가을이면 온 골짜기가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진다 하여 풍암(7곡),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거문고소리같다 하여 금탄(8곡), 주위가 고요하여 글읽기 좋은 곳이라 하여 문산(9곡) 이렇게 석담구곡은 저저마다 독특한 미를 자랑하는 아홉골짜기로 이루어졌다.

은병(5곡)에는 조선봉건왕조시기 교육기관이였던 소현서원 등 옛 건물들이 자리잡고있어 이곳의 품위를 한결 돋구어준다.

석담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수양산성



예로부터 황해도 3대산성의 하나로 일러오는 고구려시기 산성이다.

서쪽에 높이 솟은 장대봉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련결한 큰 산성이다. 성벽은 대부분 바위우에 쌓았는데 평균높이가 6~7m이다. 산성의 동, 성, 남, 북에 각각 문이 있는데 남문 가까이 성벽의 너비는 14m나 된다. 장대터와 많은 집터들이 보존되여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업적이 깃들어있다. 오늘 수양산성은 명승지로 훌륭히 꾸려져 문화휴식터로 널리 리용되고있다.

성안에 유명한 수양산폭포가 있다.




수양산폭포



수양산성안에 있다.

사계절 경치가 뛰여난 장쾌한 폭포(높이 128m)로서 해주8경의 하나로 일러온다. 폭포는 2단으로 흐르는데 중간에 넓다란 바위와 깊은 소가 있다.




해주석빙고

해주시 옥계동 수양산기슭에 있다.

고려초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돌로 만든것이다. 화강석을 다듬어 남북으로 길게 무지개형으로 쌓은 다음 흙과 석회를 다져서 덮고 그우에 잔디를 입혔다. 지금의것은 1735년에 보수한것이다. 길이는 28. 3m이며 높이는 약 6m, 너비는 5m이다.




해주5층탑

해주시 옥계동 수양산기슭에 있는 고려시기 돌탑이다.

2층으로 된 기단우에 탑몸을 올려쌓고 탑머리를 놓은 정방형평면의 화강석탑이다. 지붕돌의 네귀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가까이에 해주석빙고와 고려시기에 지은 사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소현서원



석담구곡의 5번째 골짜기인 은병에 있는 조선봉건왕조시기 사립교육기관이다.

조선봉건왕조중엽의 유학자 리이(1536-1584년)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저술사업을 하던 건물인데 후에 서원으로 꾸리였다. 선행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던 사당집인 정묘와 강의를 하던 청계당이 있다. 청계당에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수군을 이끌고 왜적을 쳐물리치는데서 위훈을 세운 리순신(1548-1598년)장군이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연구하였다는 력사적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조선전쟁시기 파괴된것을 전후에 옛 모습그대로 복구한 조선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부용당



해주시 부용동에 있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루정이다.

1500년에 련못북쪽언덕가에 루정 한채가 있었는데 련꽃(부용)같은 루정이라는 뜻에서 부용당이라 불렀다.

1526년 물속에 26개의 기둥을 박고 정각을 한채 더 짓고 련못가의 루정과 다리로 련결시켰다. 못가와 못안의 루정이 하나로 이어진 아름다운 자태를 물우에 그림자로 비치던 부용당은 《련당청우》(련못루정에서 비오는 소리를 듣는것을 즐기는 일)로 유명하였다.

조선전쟁시기 파괴된것을 원상그대로 복구하였다. 여기에는 흥미있는 전설도 깃들어있다.




계남목장



황해남도 신원군 계남리에 위치하고있다.

계곡이 많다고 하여 계남리라고 부르는 곳에 자리잡고있는 젖과 고기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목장이다.

석담구곡에서 목장까지 20km이다. 15정보의 부지면적에 4개의 분장으로 이루어진 목장에서는 젖소, 돼지, 염소, 토끼 등을 방목하고있다.

목장의 매 분장에 있는 젖가공실들에서는 치즈, 빠다, 케피르, 요그르트 등을 생상하고있다. 목장은 특색있는 살림집들이 아담하게 늘어서있어 풍치가 좋다.




신천박물관

신천군 소재지에 있다. 조선전쟁시기 미군이 감행한 야수적학살말행자료들이 전시되여있다.

박물관부근에는 미제의 죄행을 고발하는 5 605명 애국자묘와 원한의 밤나무골, 화약창고, 화약창고에서 학살된 사백어머니묘와 백둘어린이묘가 있다.




형제섬

해주시 중심에서 서남쪽으로 9km 가면 바다가 시작되는데 배를 타고 또 6km정도 가면 자그마한 두개의 바위섬이 있다. 이것이 형제섬이다.

조선서해는 밀물과 썰물차이가 심하므로 형제섬에 이르러 조금 있으면 주변바다가 무연한 백사장으로 변한다. 이때 백사장과 군데군데 이루어진 《호수》들에서 미역도 감고 일광욕도 하면서 조개나 게잡이를 할수 있다.

밀물때가 되면 배를 타고 부두로 돌아온다.




해주다라니석당



해주시 해청동에 있는 고려시기 석당이다.

다라니석당이란 불교경전인《다리니경문》을 기둥곁면에 새겨서 세운 절의 돌시설물이다. 받침돌의 둘레에 탐스러운 꽃잎이 아름답게 새겨져있다.

해주다라니석당은 날씬하면서도 장중한 감을 준다.




해주려관(4급)



해주시 영광동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연회장과 안마실을 비롯한 여러 봉사시설들이 갖추어져있으며 식당에서는 해주교반과 서해수산물료리(해삼, 생복, 광어, 피조개, 바스레기, 대합 등)를 기본으로 한다.

방수:21개(1등실 2개, 2등실 2개, 3등실 17개)

Spiritual Life Takes Courage - Jack Kornfield

Spiritual Life Takes Courage - Jack Kornfield



Spiritual Life Takes Courage

Equanimity is not indifference, and compassion is not pity. True spirituality  requires us to be fully present for life. For us to begin to look directly at the world situation is not a question of ceremony or of religion. Meditation helps us to look deeply at the sorrow that exists now in our world, and to look at our individual and collective relationship to it, to bear witness to it, to acknowledge it instead of running away. Without mindfulness and compassion the suffering is too great to bear. We close our minds. We close our eyes and our hearts.
Yet opening ourselves to all aspects of experience is necessary if we want to make a difference. To look at the world honestly, unflinchingly, and directly requires us to also look at ourselves. We discover that sorrow and pain are not just out there, external, but are also within ourselves. We have our own fear, prejudice, hatred, desire, neurosis, and anxiety. It is our own sorrow. In opening ourselves to suffering, we discover the great heart of compassion.
In the heart of each of us, a potential exists for experiencing this compassion and wholeness. The problem is that we becomes so busy and lost in our own thinking that we lose connection with our true nature. When we reconnect with our wholeness, our being naturally expresses itself both in meditation and through sharing ourselves with others.
I spend most of my time teaching meditation. Years ago, when many thousands of Cambodian people were fleeing violence in their homeland only to face starvation and disease in refugee camps in Thailand, something in me said, “I’ve got to go there,” and so I went. I knew the people and a few of the local languages. After being there trying to assist, I returned to this country to guide intensive meditation retreats. I did not deliberate much at the time about whether or not I should go to work in the refugee camps. I felt that it had to be done, and I went and did it. It was immediate and personal.
In year following I have done work in Palestine and Burma, in prisons and local hospitals, and with kids in street gangs. This is what I have been called to do alongside my meditation teaching. This has been my way. But it is not right for everyone. Some monks spend their lives in caves in the Himalayas ceaselessly radiating compassion for the world. Others run orphanages for children whose parents have died of AIDS. Which is the right way? The spiritual path does not present us with a prescribed, pat formula for everyone to follow. It is not a matter of imitation. We cannot be Mother Teresa or Gandhi or the Buddha. We have to be ourselves. We must discover and connect with our unique expression of the truth. We must learn to listen to and trust ourselves.
This excerpt is taken from the book, “Bringing Home the Dharma: Awakening Right Where You Are

2018/12/20

정신의학신문 모바일 사이트, 용서의 심리학, 용서는 왜 필요할까?



정신의학신문 모바일 사이트, 용서의 심리학, 용서는 왜 필요할까?



용서의 심리학, 용서는 왜 필요할까?

기사승인 2018.12.04



[정신의학신문 : 최명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용서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분개, 부정적 판단, 무관심한 행동을 할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를 향해 연민, 관대함, 심지어 사랑이라는 과분한 속성들을 마음에 품는 것이라고 합니다.



용서에 대한 오해?

하버드 의대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용서와 구분되어야 할 몇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용서는 범죄에 대한 관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의에 대한 고발과 누군가에 대한 증오는 다르다.
둘째, 용서는 망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를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용서는 지나간 고통을 제거하지 않는다. 단지 미래의 고통을 제거한다.
넷째, 용서는 가해자를 너그러이 봐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용서는 가해자의 행동과 우리의 아픔이 미래에 개선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사진_픽사베이



용서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조지 베일런트는 용서를 위해 감정이입과 미래를 그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꼽습니다. 즉,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과거 일에 얽매이기보다는,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는 마음이 용서를 가능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는 왜 필요할까요?

미국의 뇌생리학 박사인 앤드류 뉴버그는 "동물과 인간에게 용서 행동의 진화는 갈수록 격화되는 복수 행동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사회 집단에 유익하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면 차분하고 평화를 느끼는 반면, 복수는 갈등과 긴장을 느끼게 합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9장 18절 "너는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코란에 기록된 알라의 지혜에는 '카파라'(용서)라는 단어가 234번 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그들의 종교에서 가르침과는 달리 복수에 복수를 반복하면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을 지키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최신식 무기가 아닌 서로 용서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용서는 정말 이로울까요?

용서는 받을 때보다 남을 용서할 때 더 큰 평화가 찾아오는 역설적 속성이 있습니다. 종교적 의무로써 강요된 용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활성화되는 교감신경이 향진되어 혈압이 오르지만, 공감과 사랑에 의해 중재된 용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원한을 품고 상처를 생각하면 혈압이 오르지만, 가해자의 상황에 공감하고 용서를 상상할 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용서는 안정감을 주는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해 혈압을 낮추고 심장병 위험을 감소시킵니다.


시간이 지나도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왜 그럴까요?

피해받은 상황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나 정서와 관련되기 때문인 경우가 있습니다. 자책감, 죄책감, 버림받음, 자기 결함, 박탈감 등이 그 예입니다. 복수심을 내려놓고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인식하고,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일로 부정적 감정과 생각으로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치료가 내적 상처의 치유와 삶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최명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1@gmail.com

South Korea’s Betrayal of the “Comfort Women”



South Korea’s Betrayal of the “Comfort Women”




DECEMBER 31, 2015
South Korea’s Betrayal of the “Comfort Women”

by K.J. NOH


Diplomatic Collusion

On December 28th, 2015, the foreign ministers of Japan and Korea, suddenly and hastily announced a “resolution” to the “comfort women” issue, women trafficked and exploited as sexual slaves by the Japanese Army during WWII. This involved an apology by the Japanese prime minister, and the creation of fund for reparations.

“The issue of ‘comfort women’ was a matter which, with the involvement of the military authorities of the day, severely injured the honor and dignity of many women,” said the Japanese Foreign Minister. 1 billion yen ($8.3M) was also promised to the fund to assist the 46 surviving comfort women.

Former comfort women and activist groups, however, rejected the agreement, calling it “a betrayal”, “a travesty”, and “a sham”. Some of them wept openly. Opposition politicians demanded the resignation of the Korean Foreign Minister. Protests have broken out in Korea in front of the Japanese Embassy.

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in Japan, one of the key activist organizations, called Monday’s deal “shocking”, saying, “It’s a humiliating diplomacy for South Korea…The agreement is nothing but a diplomatic collusion that thoroughly betrayed the wishes of comfort women and the South Korean people…It wipes out 25 years of progress.”

Grandma Yong Soo Lee, former comfort women and prominent activist, also denounced the agreement. “This agreement seems to have been made without having the victims in mind. I dismiss it in its entirety”, she stated, and denounced the Korean foreign minister as “a traitor”.

Why are the comfort women still unsatisfied? Global media is laudatory, and the US State department was quick to praise and promote it. On the surface it seems reasonable: a letter of apology with solatia/reparation. It’s seventy years late, but better late than never. What more could the women want?

To understand this issue, one needs to look a little deeper at the history.

The World Split Open

The so called “comfort women” system was the planned, organized, systemic trafficking and sexual enslavement of hundreds of thousands of young women all over Asia—primarily from 11 Japanese colonies–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from 1932-1945. As the system progressed and developed, it may have started out with some actual prostitutes, but it quickly devolved into an industrial system of sexual exploitation of women, taking on monstrous proportions and involving sexual atrocities on a scale unseen in modern history. The “comfort women” system was to wartime prostitution what the holocaust was to homicide: the industrial-scale factory farming of rape: the wholesale, organized, rationalized procurement, imprisonment, torture, brutalization, sexual enslavement, and terrorization of women.

After the war, this history of barbarity was whitewashed out of the record as policy, politics, and prejudice conspired to facilitate amnesia. Comfort women who had survived the torture, beatings, mutilations and daily rapes—up to 50 times a day–were often shot or fragged to conceal evidence of war crimes by retreating Japanese soldiers. Another 40% were estimated to have committed suicide during their enslavement. In all, historians estimate that only one out of four women enslaved would survive, a death rate higher than that of frontline combat soldiers or African slaves during the middle passage at the height of transatlantic slave trade. This makes the “comfort women” issue one of the largest, unacknowledged, unatoned-for atrocities of the twentieth century.

While it’s unclear how many women were actually kidnapped, conscripted, tricked, sold into sexual slavery–most records were destroyed by administrators afraid of retribution–numbers generally range into the hundreds of thousands. (Differing attrition rates account for the discrepancy).

What is irrefutable, however, is that the comfort women system was systematically organized, planned, administer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Women had to be issued passports and visas issued by military authorities to travel to far off colonies; comfort women were transported by military ships and convoys; the “comfort stations” were usually managed and run by the military (or subcontracted to the military), often inside or adjacent to military bases; and army medics “inspected” the women, and also used them for human experimentation: How many times can a woman be raped? How can STD’s be transmitted or prevented?

Japanese Imperial Accountancy guidelines issued instructions on how to depreciate comfort women (as “perishable goods”) as part of military inventory, and published fee schedules and calendars to coordinate sexual access of enlisted men and officers. Critics who argue that individual brokers and entrepreneurs created a voluntary, free-market, “entertainment” enterprise for the Japanese military fail to understand the fundamentals of logistics of the Japanese military at war, and ignore the basic fact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during the Showa era was a fascist military dictatorship with a command economy that dictated and controlled all aspects of society, including procurement, distribution, and supply: edicts would be given for quotas of rice, resources, laborers, or women; colonies had to obey. This highly integrated, coordinated system of exploitation and trafficking, and its ruthless assembly line rape foreshadows modern day “lean” systems of management and production, and it became the template and model for modern day globalized sexual trafficking.

For seventy years, the Japanese government (aided and abetted by the US) denied the existence of the system of comfort women. The small number of women who survived retreated into the shadows, wracked with illness, nightmares, debilitating pain and shame. The majority of them were sterile from the extreme sexual violence, and many carried the secrets of their broken bodies to their graves. Then in 1991, a single Korean woman came out and broke the silence.

“What would happen if one woman were to tell the truth of her life? The world would split open”, wrote the poet, Muriel Ruykeyser. Kim Hak-sun was that women, and when she came out with her story, she split wide open the closed world of Korean-Japanese history: she gave courage to others to share their stories, and slowly, hesistantly, they came out, to denounce the Japanese, voices trembling from a half-century’s burden of shamed silence and outrage: “Tell the Emperor to kneel before me and ask for mercy” said one comfort woman, “I demand an apology—for all of us”. As the chorus of voices rose, and the evidence of criminality grew, the Japanese government continued to squirm to evade responsibility, until the burden of denial became bigger than embarrassment of admission. With Korea’s Japanese collaborators on the sidelines, and with active advocacy by the Korean government, the Japanese government relented and in 1993, it issued an ambiguous, pro-forma, soft-core apology—the Kono statement—issued, not by the head of state, but by the chief cabinet secretary, Yohei Kono.

False and Real Apologies

The Kono statement, because it was not delivered and ratified in the Japanese Diet, was not considered to be an official apology with legal standing, but was still hailed by some as an important first step of acknowledgement. In any event, it provided adequate cover to continue to move discussion forward. (The current Abe government, anxious to remove any ambiguity about the status of Kono statement, passed, this time, very clearly and conspicuously in the Diet, a resolution stating unequivocably that the Kono statement was not an official apolog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facilitated the creation of a private reparation fund—the Asian Women’s Fund– that was to collect donations to go to the former victims.

Needless to say, the majority of comfort women refused both the apology and the money. They continued to insist on a real apology. Specifically, they demanded, with eminent commonsense and reason, the following measures:


* Full acknowledgement of the military sexual slavery implemented by the Imperial Armed Forces of Japan between 1932 to 1945

* Thorough and complete investigation to fully chronicle the scope of the crime

* Formal, official apology from the National Assembly (Diet) of Japan

* Legal and full reparations to all victims

* Full and ongoing education

* Building of memorials to commemorate the victims and preserve the history of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Military

* Prosecution of the criminals responsible for the crime

None of these demands have been met by this agreement (or any previous apologies). There is no acknowledgement that this was an official policy of the government, only ambiguous statements of “involvement” by the military; generic expression of regret for “pain and suffering”, the cause of which is unspecified; the statement of “coercion” in the Kono statement is dropped—implying, as the Abe government has always insisted, that the comfort women were voluntary prostitutes; direct legal reparation is sidestepped by the donation of the money to a fund (a paltry amount); formal apology (presented and ratified in the Diet) seems unlikely; and far from investigating, prosecuting perpetrators, and educating about the crime, the “apology” comes with a gag order: Korea is henceforth to cease and desist forever in its criticism of Japan; a comfort woman memorial should be taken down; and the issue, as the Japanese foreign minister repeated ad nauseam, is “irrevocably closed”. It’s hard to imagine a more total capitulation. If this is apology—then the South Korean government should cease to claim injury—a few more apologies like this, and it will cease to function as a state.

What in the world would have led the Korean government to accept such an absurdity?

Pivoting into Madness

Just as it’s impossible to predict the orbit of the planets without assuming a heliocentric theory with the sun as the gravitational center that determines their movements, it’s impossible to understand the absurd, mercurial, retrograde movements of South Korean politics without looking at the gravitational force of the US. Once this is understood, the absurd, self-defeating actions of South Korean politics: masochistic trade agreements, self-destructive economic policies, the absurd construction of military bases at tremendous environmental, civic, and economic costs, and the signing of this latest agreement become clear and predictable.


For a decade now, the US has planned a “pivot” to the Asia Pacific, but even before that,

for a century and a half, the US had always considered the pacific to be an “American Lake”, and considered its rim countries to be its real or imagined vassals. Commodore Shufeldt, the signatory of the first Korean-US diplomatic treaty in 1882, expressed that belief in turgid, gendered, purple prose when he wrote, “The pacific is the ocean bride of America—China, Japan & Corea–…are the bridesmaids. …Let us as Americans—see to it that “the bridegroom cometh…let us determine….that no commercial rival or hostile flag can float with impunity over the long swell of the pacific sea…..it is on this ocean that the East and the West have thus come together, reaching the point where search for Empire ceases and human power attains its climax.”

In similar vein, but with less purple prose, Halford MacKinder, the grandfather of modern geostrategic thinking (along with Afred Thayer Mahan) referred to the Eurasian continent as the “heartland” or the “pivot state” or center of the “world island”.

Mackinder and Mahan’s theories can be contrasted as theories of “land-based” power vs. “sea-based” power; but both saw the center of the Asian continent to be critical for global dominance.

“Who rules the Heartland commands the World-Island. Who rules the World-Island commands the World”, quipped Mackinder.

Moder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Geostrategic thinkers in government, academy, thinktank land, and the military are all the children (or bastards) of MacKinder, whether they admit it or not. With the rise of China to ascendancy in Asia, and the ghost of MacKinder haunting their dreams for unipolar power projection in the 21st Century, US geostrategic thinkers—with Hillary Clinton as their spokesperson–reconnoitered the imminent geopolitical shifts and put forth a “Pivot to Asia”, in her 2011 article, “America’s Pacific Century”: a return to the Pivot state of the global island:

“The future of politics will be decided in Asia…. and the United States will be right at the center of the action…One of the most important tasks of American statecraft over the next decade will therefore be to lock in a substantially increased investment — diplomatic, economic, strategic, and otherwise — in the Asia-Pacific region….The Asia-Pacific has become a key driver of global politics.… A strategic turn to the region fits logically into our overall global effort to secure and sustain America’s global leadership”.

What this pivot entails in practical terms is the movement of 60% of US military force to the Asia Pacific to counter China’s influence in the region. It involves, among other things, surrounding China with a necklace of up-armored and refurbished US bases; implementing a doctrine of war/offensive containment (AirSea Battle/JAM-GC); creating bi-lateral & multi-lateral military cooperation agreements, with war games and military coordination exercises; and up-armoring and remilitarizing of the entire region. It also involves hostile, belligerent, and provocative saber-rattling exercises in the South China Sea (China’s key maritime trade route) under the pretext of “freedom of navigation” and “joint military exercises”; information and cultural warfare in the form of constant demonization of China in the media; and legal warfare (as in the US sponsorship and support of the Philippine government’s suit against China in the UN CLOS arbitration); and last but not least, blockade, isolation, and economic warfare through the proposed Transpacific Partnership “trade” agreement.

The Vortex of Vassalage


Key to the pivot is the Korean-Japanese military/political alliance to challenge, contain, threaten, and if necessary take down China: if push comes to shove, Japan is the “unsinkable aircraft carrier”, and South Korea is the “beach head” or “frontage road”. Should war be in the cards, all South Korean troops, equipment, and bases fall under US command by the status of forces agreement. Japan has just nullified its peace constitution and upgraded its military agreements with the US to allow it offensive capacity anywhere in the world. Coordinated intelligence sharing, and linked, inter-operable layered missile defense systems between Korean and Japan are also part of this aggressive forward-leaning strategy. The frictions of the “comfort women” issue had been a barrier to effective military coordination: it’s hard to speak of a coordinated pivot to Asia if your partners are not on speaking terms. Now with that out of the way, the Pivot can proceed as planned.

The heads of the two governments had not met until March 2014, in a meeting brokered by Barack Obama: two misbehaving siblings who needed to be told to reconcile and make up by the paterfamilias. This agreement is the final result of that chiding, both children falling in line to remove all obstacles to coordination—economic, political, military– between them. In public and in private, the US state department had been pushing petulantly for this rapprochment, alternately stamping its feet in impatience and putting its foot in its mouth. It has finally gotten its wish; it may yet regret it.

If expediency and geopolitical self-interest rarely make for enlightened policy; historical amnesia, ethical barrel-scraping, and sycophantic servitude are a recipe for disaster. Past Korean history illuminates this agreement as a continuation of unequal, undemocratic, unpopular treaties pushed by US-influenced/manipulated right wing governments. In the case of Park Chung Hee, the current president’s father; these treaties were implemented and managed only with bloodshed and terror.

The military dictator, Park Chung Hee, president from 1961-1979, was a Japanese colonial collaborator in the Japanese Imperial Kwangtung Army. In a situation vaguely prefiguring the present, fear and loathing of Communist Chinese influence in the region pushed the Chair of the US Policy Planning Council Walt Rostow to pressure South Korea to sign a normalization treaty with Japan in 1965. Rostow’s view (telegraphed in his book “Stages of Economic Growth: the Non-Communist Manifesto”) was to create a powerful, coordinated, interlocked capitalist bloc between Korea and Japan (and other East Asian countries) as a bulwark against the rising tide of communism in the region. Authoritarian nationalists would be supported in their development to counter the spread of Communist ideology; these countries would focus on an export-oriented development model that would “take off”, demonstrating the superiority of Capitalism, and these would challenge rising tides of independence movements with their socialist, import substitution, nationally autonomous economies.

Kishi Nobusuke, the grandfather of the current Prime Minister, Shinzo Abe, was the Japanese Minister of Industry during the Showa Era, and a mentor to Park Chung Hee, when he was a Japanese collaborator. When the treaty needed to be passed, Kishi was drafted into the process, and called in his cards with his loyal former subaltern, Park, who passed the treaty in June of 1965, which renounced all reparation claims on the part of Korea. The people of South Korea exploded in protest and outrage; Park Chung Hee declared martial law arresting, imprisoning, and torturing thousands of people in order to ratify and implement the legislation. Park the daughter may now be looking at the same bleak history.

Meanwhile the Abe government is tap-dancing its way around the comfort women statues towards the munitions depot. It has given away nothing, except a little chump change, it has not apologized or lost face—if anything it has dialed back the apologimeter a few notches from the Kono statement, and it has finally silenced the Korean government, which will silence its people. It has thus cleared the deck for a fascist resurgence and militarization, to undo the last half-century of pacifist lassitude and enervation. Abe subscribes to ultra-right, nationalist, militarist ideologies that dream of Imperial restoration, with a 500 million dollar budget for white-washing its history, and politicians and diplomats rushing forth to badger and intimidate anyone who challenges Japanese dreams of imperial glory past, present, or future.

Pivot or no Pivot, unleashing the Japanese genie may be something to regret. Escalating to a war with China, that would be madness beyond any apology. But history teaches us not to be astonished at the unimaginable. Just ask the comfort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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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 Noh is a long time activist, writer and teacher. He can be reached at k.j.noh48@gmail.com

2018/12/19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



룡남산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독창적인 청년중시사상과 령도의 빛나는 력사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 진철 2017.12.31.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력사는 천리혜안의 빛나는 예지로 혁명적청년운동의 가장 빛나는 모범을 창조하시고 청년들을 주체혁명위업의 믿음직한 계승자, 청년강국의 주인공들로 억세게 키우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력사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청년동맹이 걸어온 70년의 력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독창적인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승리의 력사이며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받드는 조선청년들의 열화같은 충정과 애국헌신이 수놓아온 력사입니다.》

반만년의 우리 나라 력사에 청년은 어느때나 있었고 이름을 남긴 청년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처럼 모든 청년들이 청년강국의 주인이라는 고귀한 영예를 지니고 살며 투쟁하는 존엄높은 청춘의 시대는 일찌기 없었다.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력사가 오늘과 같이 승리로 아로새겨지고 청년들이 혁명의 계승자, 청년강국의 맹장들로 억세게 자라나게 된것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가 있었기때문이다.

언제나 우리 청년들을 혁명의 계승자로 억세게 키우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혁명령도의 전기간 독창적인 청년사랑, 청년중시사상을 제시하시고 현명하게 령도하시여 력사상 처음으로 청년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는 불멸의 업적을 쌓으시였다.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는 무엇보다먼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독창적인 청년중시사상과 령도의 빛나는 력사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령도의 전행정에서 청년중시의 정치를 베푸시여 청년동맹을 당의 믿음직한 정치적후비대로 강화하고 우리 나라에서 청년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수 있는 근본담보를 마련하시였다.

일찌기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청년운동의 시원을 열어놓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의 청년운동사상을 제시하시고 청년들에게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며 청년사업을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돌이켜보면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 외세의 대포밥으로 끌려다니며 속절없이 숨져야 했고 망국의 청년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이국의 거리에서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인력거를 끌어야 했던 이 나라 청년들이였다.

식민지청년이라는 수치스러운 오욕을 숙명처럼 감수해야 했던 이 나라 청년들이 자기 운명에서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것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을 조선혁명의 진두에 높이 모신 력사의 그날부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16(1927)년 8월 28일 조선청년들을 《ㅌ.ㄷ》의 기치아래 묶어세워 주체형의 혁명조직인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하신 그때부터 조선청년운동은 진정한 자기의 새 력사를 아로새기기 시작하였으며 고귀한 전통을 창조하게 되였다.

공청의 핵심들을 골간으로 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직을 확대해나가시였으며 광범한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주체19(1930)년 여름에 결성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 성원들의 대다수도 공청을 통해 육성된 선봉적인 청년투사들이였고 항일전쟁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무명의 영웅들도 공청의 산아들이였다. 공청에서 단련된 청년투사들로 항일유격대가 창건되고 그 청년투사들을 골간으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되였으며 그들의 영웅적투쟁에 의하여 조국해방위업이 성취되였다.

조선의 열혈청년들을 혁명의 전위투사들로 억세게 키우시고 우리 나라 청년운동의 영광스러운 력사를 창조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청년중시사상과 령도는 새 조국건설시기와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사회주의건설시기 등 혁명의 년대와 년대를 거쳐 줄기차게 이어졌다.

해방된 조선청년들의 기개가 하늘높이 나래치는 속에 보통강개수공사와 같은 방대한 건국사업들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진행되고 민주조선의 위대한 창조물들이 수많이 일떠서게 되였다.

가렬처절하였던 조국해방전쟁시기 청년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 싸움으로써 영웅조선의 전승신화를 창조하고 제국주의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영예롭게 수호하였다. 당과 수령의 부름에 충실한 청년들은 전후 어려운 시기에도 복구건설에서 빛나는 로력적위훈을 세웠으며 천리마를 타고 질풍같이 내달려 짧은 기간에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를 일떠세우는 영웅조선의 기적을 안아왔다.

해주-하성사이철길과 송남청년탄광, 강계청년발전소와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 김일성경기장과 주체사상탑, 5월1일경기장, 광복거리…

우리의 도시와 농촌을 비롯한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일어난 세기적인 전변과 우리 인민의 행복한 생활에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당의 구상을 한몸바쳐 꽃피운 청년들의 고귀한 피땀이 스며있다.

이처럼 우리 청년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따라 사회주의건설의 여러 전투장마다에서 수령결사옹위의 빛나는 자욱을 수놓으며 청춘을 빛내여왔다.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는 다음으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청년중시사상과 령도의 빛나는 력사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청년중시로선과 탁월하고 세련된 령도로 청년동맹을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한 청년조직으로 강화발전시키시고 청년들을 백두의 혈통을 이어나가는 믿음직한 계승자들로,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맹장들로 키워 청년운동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놓으시였다.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해나가는것을 청년동맹의 기본사명, 조선청년운동의 총적목표로 규정하시고 사회주의청년운동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완벽한 해명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청년운동을 수령의 사상과 위업을 빛나게 계승해나가는 가장 혁명적인 운동으로 되게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현시대와 청년들의 임무》, 《김일성동지의 청년운동사상과 령도업적을 빛내여나가자》를 비롯한 수많은 불후의 고전적로작들을 발표하시여 조선청년운동이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시고 우리 청년동맹과 청년들에게 최고사령관의 예비전투부대, 별동대, 당의 영원한 동행자라는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시였다.

조선로동당창건 50돐경축 평양시청년학생들의 홰불행진이 진행되던 그날에는 우리 청년들이 당과 수령을 맨 앞장에서 결사옹호보위하며 당의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나가는 우리 당의 청년전위가 되기를 바라시는 크나큰 믿음과 기대가 담긴 혁명의 홰불봉을 넘겨주시였다.

청년들의 가슴속에 우리 나라 청년운동의 시원을 열어놓으신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깊이 심어주시고 수백만 청년전위들을 영원히 수령님의 전사, 제자로 살게 하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은 수령님의 존함으로 빛나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고귀한 부름에도, 장군님께서 몸소 제정하여주신 청년절에도 뜨겁게 어리여있다.

주체적청년운동의 위대한 전통을 만대로 이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청년들을 사랑하라!》는 구호를 제시하시고 청년들을 위해서라면 천만금도 아낌없이 돌려주시였으며 자신의 동상은 세우지 못하게 하시면서도 청년들에 대한 기념탑들을 잘 세워주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였기에 우리의 청년운동은 년대와 년대를 넘어, 세기와 세기를 이어 준엄한 혁명의 폭풍우를 헤치며 언제나 곧바로, 당을 따라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수 있었다.

우리 청년들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최상최대의 믿음과 사랑에 의하여 수많은 청년들이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초소들에서 시대의 전형으로, 기적과 위훈의 창조자들로 자라났다.

김광철, 정성옥, 유경화를 비롯한 수많은 청년영웅들이 태여났고 청년영웅도로건설장을 비롯한 대고조전투장들에서 위훈의 창조자들의 대부대가 자라났으며 사회와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미풍선구자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게 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운명을 판가름하던 반제반미대결전의 준엄한 시기에 청년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혁명령도를 앞장에서 받들어 주체혁명의 명맥과 사회주의조국을 결사수호하였으며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의 전환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렇듯 혁명령도의 전기간 청년중시를 국사중의 국사로, 혁명의 전략적로선으로 내세우고 현명하게 이끄시여 력사상 처음으로 청년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였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청년강국을 일떠세우신것은 우리 수령님들의 숭고한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결실이다.

오늘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업적을 끝없이 빛내여나가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청년동맹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로 일색화된 강철의 청년조직으로, 조선로동당의 정치적후비대, 강위력한 전위대오로 더욱 강화발전되였다.

날로 억세여지는 이 대오속에는 당과 수령에 대한 고결한 충정과 보석같은 애국의 마음을 안고 청춘시절을 빛내여나가는 청년들도 있으며 세계의 하늘높이 람홍색공화국기를 휘날린 체육선수들도, 과학탐구로 사회주의강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한 청년대학생들도 있다. 그리고 사회와 집단, 동지를 위하여 자기를 아낌없이 바치고 당이 부르는 어렵고 힘든 곳으로 탄원한 청년들은 물론 잘못 살아온 지난날과 결별하고 새 출발을 한 청년들도 있으며 20살 꽃나이에 부모없는 아이들을 친혈육의 정으로 애지중지 키우고있는 《처녀어머니》도 있다.

지난해의 련속적인 철야진군의 앞장에도 바로 우리 청년들이 서있었다. 자력자강의 정신과 과학기술의 위력으로 새 기준, 새 기록을 돌파하며 폭풍쳐 내달려온 선구자, 개척자들도, 시대정신이 맥박치는 혁명적이고 전투적이며 랑만적인 선군청년문화와 아름답고 고상한 도덕기풍을 확립해나가는 훌륭한 젊은이들도 다름아닌 우리의 청년들이였다. 백두산영웅청년정신을 지니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의 선봉에서 힘차게 투쟁해온 청년들의 불굴의 의지는 지난해 전국의 수많은 농촌청년작업반, 청년분조들에서 알곡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하는 자랑찬 성과가 이룩되고 많은 공장, 기업소들에서 2년분, 3년분 인민경제계획완수자, 만리마기수들이 수없이 배출되게 한 원천으로 되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대부대가 있기에 우리 혁명대오는 그 어떤 난관속에서도 더욱 힘차게 전진하고 사회주의대가정에는 따뜻한 정이 끝없이 넘쳐나고있는것이다.

오늘 세상에는 아직도 력사의 변두리에 밀려나 사회의 우환거리로 버림받는 청년들이 적지 않지만 우리 청년들처럼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우리 당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나라와 민족의 양양한 앞날을 열어나가는 가장 활력있는 부대로, 혁명의 믿음직한 계승자들로 떠받들리우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불멸의 업적을 옹호고수하고 길이 빛내이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청년운동사상과 령도를 충정으로 받들어나갈것이다.▲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



룡남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박사 부교수 허천 2017.10.13.


오늘날 세계의 문단에는 부르죠아지의 반동적이고 반인민적인 문학이 범람하고있으며 자기나름의 도덕과 정의의 목소리를 높여보려고 애쓰는 작가들도 제국주의자들의 썩어빠진 사상문화와 부르죠아지의 온갖 반동철학과 패륜패덕의 악영향으로 하여 시대와 인민앞에 지닌 자기들의 사명감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작품창작에서 나아갈 앞길을 찾지 못하여 갈팡질팡하고있다.

우리 시대는 지난날 착취받고 억압받던 인민대중이 력사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세계를 자기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개조하며 자기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고있는 력사의 새시대, 자주의 시대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새시대의 요구와 자주성을 지향하는 세계진보적인민들의 념원을 헤아리시고 주체81(1992)년 1월 20일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을 발표하시여 세계진보적문학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주체의 문학리론은 오늘 인류의 리상인 자주위업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고있는 새로운 리론이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6권 95페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으로 되는것은 무엇보다도 자주시대의 가장 과학적이며 혁명적인 문예관을 새롭게 밝혀주었기때문이다.

문학예술을 자주시대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창조발전시키는데서 선차적으로 나서는 문제는 시대의 요구를 옳바로 구현한 문예관을 확립하는것이다. 문예관은 문학예술의 본성과 사명, 작품창작의 원칙과 방도, 작품의 사회적가치를 밝히는데서 출발점으로 된다.


장구한 인류력사의 전기간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옳은 문예관을 찾아 오랜 세월 암중모색하며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고대그리스의 철학가인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시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세 동방의 우리 나라 고려시기 리인로(1152-1220)의 《파한집》과 리제현(1287-1367)의 《력옹패설》, 17세기 프랑스의 부알로의 《시의 예술》 그리고 로씨야의 막씸 고리끼(1868-1936)의 《문학론》을 비롯하여 고금동서의 이름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도서에서 문학에 대하여 제나름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문학의 개별적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시기 제노라고 하던 《문학대가》들도 문학의 본성과 그 사회적기능을 비롯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실현에 이바지하는 혁명적인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자주시대앞에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이룩하고 세계적범위에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여야 할 력사적과제가 전면에 나서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문예관은 자주시대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체현하고있는 주체의 문예관이라는것을 천명하시고 인간과 생활을 그리며 인민대중을 위하여 참답게 복무하는데 인간학으로서의 문학의 본성이 있다는것을 밝히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로작에서 문학예술의 인간학적본질에 대한 독창적인 해명에 기초하시여 자주시대의 문학은 주체의 인간학으로 되여야 한다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시였다. 주체의 인간학은 자주성에 대한 문제, 자주적인 인간에 대한 문제를 내세우고 주체형의 인간전형을 창조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수행에 이바지하는 새형의 문학이다.

주체의 문예관은 사람을 가장 진실하게 그리며 인민대중을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진실로 사실주의적인 문학예술을 창조하게 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옳바른 문예관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으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주체사실주의, 주체사실주의창작방법의 특징을 전면적으로 밝혀주어 자주시대 인민대중의 지향과 념원을 진실한 예술적형상으로 창조할수 있는 참된 길을 밝혀주었기때문이다.

세계진보적문학의 발전사에는 인문주의문학과 계몽주의문학, 진보적랑만주의문학과 비판적사실주의문학 그리고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의 발생발전을 기록하고있다.

인문주의문학에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지향을 짓밟고 인간을 신의 노예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봉건주의와 중세기 종교적광신을 배격하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내세웠으나 그것은 기껏하여 인간의 지성과 리성을 존중하는데 머물고말았으며 계몽주의는 《자유》와 《평등》, 《정의》의 구호를 들었으나 그것도 결국은 부르죠아지의 계급적리해관계를 옹호하는데로 떨어지고말았다. 봉건적 및 자본주의적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적진보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로 사람들을 열렬히 호소한 진보적랑만주의는 사회적리상이 뚜렷하지 못하고 그 실현방도를 제시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생활력을 곧 잃고말았다.

사회적존재로서의 인간과 생활의 본질을 깊이있게 밝혀내는 문제는 지난날 동서방의 그 어느 진보적문학사조들에서도 실현할수 없었다.

20세기초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출현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는 혁명적랑만주의, 비판적사실주의를 비롯한 종래의 진보적인 창작방법을 비판적으로 총화하고 한계단 발전시킨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사실주의창작방법으로서 착취받고 압박받는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한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수행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선행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은 객관적현실과 인간의 사회계급적성격을 옳바로 보고 그릴수 있게 하는 유물변증법적세계관에 의거하였기때문에 사실주의적전형화문제를 높은 수준에서 해결할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문예사에 처음으로 출현한 사회주의적사실주의가 제기하였던 력사적과제는 자본의 철쇄와 제국주의예속에서 근로인민대중을 해방하는데 복무하는것이였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창작방법을 요구한다. 주체사실주의는 사람중심의 세계관, 주체의 세계관에 기초하고있으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데 복무하는것을 력사적과제로 제기하였다.

인간과 생활을 어떻게 보고 그리는가 하는 문학의 근본문제는 사람중심의 철학적세계관에 기초하고있는 주체사실주의에 의하여 비로소 완벽하게 해결될수 있었다.

주체사실주의는 자주성을 지향하는 인민대중의 요구에 맞는것이면 긍정적이고 본질적인것으로 보고 그리며 그에 맞지 않는것이면 부정적이고 비본질적인것으로 보고 그린다. 주체사실주의는 인간의 성격을 전형화하는데서 자주성을 기본으로 하여 일반화와 개성화의 통일을 실현할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계급적성격이라는것도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사람들사이에 맺어지는 사회적관계의 반영이다.

주체사실주의는 주체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생활을 보고 그림으로써 비록 부유한 가정의 출신이라 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회적진보와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몸바쳐싸운 사람이라면 그를 애국자로, 혁명가로 내세운다. 인간만 아니라 생활도 자주성을 척도로 하여 보고 그릴것을 요구하는 주체사실주의는 대중의 자주적인 지향과 요구에 맞는 생활을 시대의 본질과 력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체현한 전형적인것으로 보고 그린다.

사람, 인민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와 현실, 사회와 력사를 보고 자주성을 기본척도로 하여 전형화와 진실성의 원칙을 고수하는 여기에 주체사실주의의 본질적특성이 있다.

우리 문학예술은 주체사실주의창작방법에 의거함으로써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문학예술의 본보기로 활짝 꽃펴나고 인류문예사발전에서 일찌기 있어본적없는 일대 전성기를 펼쳐놓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시기에 벌써 자주시대의 요구를 명철하게 통찰하시고 새시대의 문학실천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확고한 주체적립장에서 독창적으로 풀어나가심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는 처음으로 우리 식의 사회주의적사실주의, 주체사실주의로 발전하게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문학예술의 혁명적전통을 전면적으로 계승발전시키시고 주체사실주의의 본질적특성을 밝혀주시였으며 혁명적문학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사상리론적문제들을 독창적으로 해명해주시여 주체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시였을뿐아니라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예술건설과 발전의 새로운 력사를 펼쳐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으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생활과 형상, 문학형태와 창작실천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모든 리론실천적문제들에 과학적이며 전면적인 해답을 주고있기때문이다.

문학이 사람들의 생활의 참다운 교과서,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 사상적무기로서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자면 구체적인 형상요소와 문학형태, 그에 따르는 창작실천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다 밝혀주는 문학리론이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놓고볼 때 착취와 억압, 예속과 지배의 낡은 사회관계를 유지하려는 착취계급의 리해관계를 반영하고있는 부르죠아반동문예리론은 문학의 본성을 외곡하고 문학을 부르죠아계급의 향락과 리윤추구의 수단으로 본다. 부르죠아문예리론은 문학예술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일신의 안일과 향락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극단한 개인주의와 패륜패덕을 고취하여 사람들을 황금의 노예로 전락시키며 인민대중의 혁명의식과 계급의식을 마비시켜 그들을 언제까지나 착취계급, 지배계급의 예속물로 만들려고 한다.

현대부르죠아문학리론은 어느것 하나 변변한 체모도 갖추지 못하고 제나름대로 문학에 대하여 횡설수설하고있다. 실례로 모더니즘문학은 문학예술의 사상적내용과 인식교양적기능을 부정하고 신비주의와 극단의 리기주의를 설교하며 죽음과 공포, 고독과 절망, 허무와 방탕 등을 찬미하며 허식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면서 문학예술의 내용은 물론 형식자체를 기형화하고 파괴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력사의 자주적인 주체인 사회정치적생명체가 문학의 영원히 변함없는 형상대상이며 복무대상이라는것을 밝혀주시였다.

문학은 예로부터 인간과 생활을 자기의 형상원천으로 삼아왔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할 때마다 문학의 기본형상대상은 바뀌여지군하였다. 사회정치적생명체는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오랜 투쟁과정에 형성되였으며 사회적집단의 발전력사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른 집단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는 작품의 종자, 성격과 사건과의 관계, 형상의 힘, 문학의 지성세계, 구성, 언어형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주고있으며 시와 소설, 아동문학 등 문학의 모든 형태를 다양하게 발전시키는데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과학적이고 전면적인 해답을 주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부르죠아문예리론의 반동성을 낱낱이 발가놓는데서도 비할바 없는 위력을 나타내고있다. 주체의 문학리론은 세계진보적문인들에게 형형색색의 온갖 부르죠아문예사조와 조류, 류파들의 반동적본질을 낱낱이 폭로비판하는 불변의 사상리론적지침을 마련해주었으며 그들의 정의의 필봉을 더욱더 예리하게 만들어주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시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빛나게 계승발전시켜오신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나라 사회주의현실에서 주체의 문학리론은 창작실천에서의 빛나는 성과에 의하여 그 진리성과 정당성, 생활력이 남김없이 확증되였으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선군혁명령도따라 사회주의문명강국건설의 최후승리를 앞당겨오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체문학, 선군문학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밝힌 우리 식의 문학창작원리와 형상구성법칙을 실천에 구현함으로써 수천년세월을 두고 착취계급에 의하여 부식된 온갖 반동적인 문학과 그 잔재를 말끔히 가셔내고 진실로 인민대중을 위한 참다운 문학으로 되였다.

이처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인류의 리상인 자주위업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여 문학이 오늘의 이 위대한 시대와 발걸음을 같이하게 함으로써 세계의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인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신심을 안겨주고 그들을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문학창작에로 힘있게 떠미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사회적진보와 정의, 민족적독립과 새 사회건설을 위한 세계진보적인류의 정의로운 문학창작활동을 선도하는 불멸의 기치로, 시대의 발전을 추동하고 온 세계의 자주화위업수행에로 세계진보적인류를 선도하는 불멸의 문학대강으로서 력사와 더불어 영원할것이다.

증언과 자료를 통하여 본 조선전쟁의 도발자



룡남산

증언과 자료를 통하여 본 조선전쟁의 도발자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김병철 2017.7.31.

이 땅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린지 67년이 되였다.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참화를 들씌운 조선전쟁은 미국에 의하여 강요된것이였다.




그러나 미국은 철면피하게도 수십년이 지나고 세기가 바뀐 오늘까지 우리 공화국을 전쟁의 도발자로 매도하면서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반공화국침략책동을 합법화하고있으며 미국의 주장에 순종하는데 습관된 서방세계가 그 론조를 그대로 외우고있다.




1950년 조선전쟁도발책임문제는 단순한 력사적인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평화가 깃들지 못하고 세계최대의 열점지역으로 되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정세가 지속되고있는 조선반도의 엄혹한 현실로부터 이 문제는 누가 진실로 평화를 바라고 전쟁을 추구하는가를 가르는 정치적문제라는것을 실증해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의 도발자이며 우리 인민의 철천지원쑤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도발의 책임을 우리에게 넘겨씌워보려고 책동하지만 그 무엇으로써도 력사의 엄연한 사실을 외곡할수 없습니다.》 (《김정일전집》 제5권 229페지)




우리에게 전쟁도발의 책임을 넘겨씌우려고 력사적으로 책동해온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은 사실상 저들자신의 증언으로 저들이야말로 조선전쟁의 도발자라는것을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우선 미국의 정계와 군부의 우두머리들은 조선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후 세계제패를 추구한 미국의 침략적대외정책, 대조선정책의 산물이라는것을 스스로 증언하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특수한 폭력적수단에 의거한 국가정책의 연장이라고 볼 때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대외정책, 대조선정책을 고찰하는것은 전쟁도발자로서의 미국의 정체를 폭로하는데서 선차적인 문제로 된다.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1945년 12월 19일 국회에 보낸 《교서》에서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얻은 승리는 세계를 지도할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하였다.우리들은 제1차 세계대전후 윌슨대통령이 우리에게 부여하기를 원하였던 지도적지위를 이제야 인수 하게 되였다.》고 하였다.




트루맨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제시하는 《교서》에서 말한 《지도적지위》, 《세계를 지도할 책임》이란 곧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미국이 다른 렬강들을 누르고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되였다는것이며 따라서 미국이 세계를 저들의 비위에 맞게 재편성해야 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면 트루맨이 세계의 면전에서 로골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도》를 떠든 리면에 무엇이 깔려있는가를 론의할 필요가 있다.




세계제패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날 때부터 추구한 숙망이였으나 미국은 그것을 실현할만 한 힘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등장하였다.




전후 세계정치구도에서 주도적지위를 차지할 교활하고 음흉한 목적에서 반파쑈련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은 전쟁기간 자기 령토에 포탄 한발 떨어지지 않은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련합국들에 많은 군수물자를 팔아먹음으로써 세계최대의 채권국으로 되였고 전후 자본주의공업총생산액의 3분의 2를 차지하였다.




반대로 이전시기 미국을 내려다보던 유럽렬강들은 전쟁을 통하여 극도로 쇠약해지고 미국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예속되게 되였다.




도이췰란드와 일본은 전패국으로서 미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전승국이라고 하는 영국, 프랑스 등도 전쟁기간 국력이 심히 쇠약해지고 미국에 예속되게 되였다.




거만해질대로 거만해진 미국은 드디여 제2차 세계대전직후부터 로골적으로 세계제패를 저들의 대외정책으로 내세우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미국의 거두들은 세계제패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조선을 지배하는것을 선차적인 문제로 보았다.




트루맨이 《초당파외교》를 제창하면서 국무성의 고문으로 임명한 공화당출신의 덜레스는 고문직에 취임하면서 《나의 새로운 임무의 중점은 극동에 둘것이다. 극동에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가장 많기때문이다.》고 의미심장하게 확언하였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직후 극동 특히 조선을 중시하게 된것은 당시 조선반도가 차지하고있던 지정학적위치의 중요성에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직후 바야흐로 시작되는 《랭전》의 시대에 유럽에서는 도이췰란드, 아시아에서는 조선에서 공산주의와 대치하고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트루맨의 특사로 남조선을 시찰한 포레이는 1946년 6월 22일 트루맨에게 제출한 《조선정세에 관한 견해, 결론 및 권고》를 종합한 비밀보고서에서 《솔직히 말해서 조선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이 성공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이 걸려있는 사상상의 싸움터이다. 다시말하여 패망한 봉건주의에 도전하여 민주주의(미국식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인용자)가 서나갈수 있겠는가 아니면 공산주의가 강하게 될것인가를 시험하는 장소로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이의 대결장이라는 의미였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조선은 쏘련, 중국과 잇닿아있는 동북아시아의 관문에 위치하고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최고군사지휘권을 가졌고 전후 일본과 남조선에서 미국의 정책을 주도하던 맥아더는 《유럽은 죽어가는 체계》이고 8억의 인구를 가진 아시아야말로 《앞으로 1 000년의 세계력사의 발전을 결정》할것이라고 하면서 일본이 《장래의 도약대》라면 《조선은 대륙에로의 건늠다리》로서 조선반도 전지역을 정복할 때 《우리들은 쏘베트 씨비리와 남방을 련결하는 유일한 보급선을 산산이 끊어버리고 울라지보스또크와 싱가포르사이의 전지역을 지배할수 있을것이다. 그때에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없게 될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맥아더의 이 주장은 조선을 장악할 때만이 중국대륙을 손에 넣고 쏘련을 위협하여 극동에 대한 지배를 실현할수 있으며 나아가서 전 아시아를 장악할수 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1949년 1월 28일부로 된 미국무성 정보조사국의 《극비문건 4849》 호에서도 《조선이 차지하고있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지리적위치로 하여 조선과 그 인민을 좌우하는것은 극동에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다른 어떠한 국가》들에도 가치있는것이며 《정치적으로 조선이 미국에 대하여 가지는 중요성은 물론 의심할바 없다.》고 지적함으로써 미국이 일관하게 조선을 극동침략정책의 초점으로 간주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미국현대사》의 저자 하쉘 메이어가 《실제에 있어서 월가의 조선인민에 대한 전쟁은 그 장군들이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1945년 9월에 시작되였다.》고 자기의 책에서 서술한것은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다음으로 미국과 일본의 력사가들이 자기의 저서들에서 서술한 적지 않은 자료들은 조선전쟁은 1948-1949년 경제공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미국이 도발하였다는것을 론증하고있다.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얻은 전시리윤을 밑천으로 상승하던 미국경제는 1948년말~1949년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전반적경제공황에 말려들게 되였다. 1948년말에 경공업부문으로부터 시작된 공황은 점차 중공업부문에까지 련쇄반응을 일으켜 1949년 상반년에만도 4 600개의 회사가 파산되였으며 실업자가 급격히 증대하여 1950년안으로 1 300만명에 이를것으로 예견되였다.




미국은 1948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을 극복하는데서도 조선전쟁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서는 미국인들자신과 조선전쟁을 연구한 외국인들속에서 이미 공인된 력사적사실로 인정되고있다.




당시 전쟁열에 들뜬 미국지배층에 대하여 《비사, 조선전쟁》의 저자 인 아이. 에프. 스톤은 《…미국의 지도세력은 변함없이 평화가 경제에 미치는 작용을 두려워하면서 공포에 휩싸여있었다. 정치가와 실업계 지도자들의 행동을 좌우하는것이 이 공포였다. 만일 조선에서 평화가 이룩되면 인도지나와 먄마에서도 조선의 뒤를 따르게 될것이다.》 라고 폭로하였으며 영국잡지 《에코노미스트》는 《미국은 위기를 극복할 계기가 필요하였으며 전쟁을 날조하지 않을수 없었다.》라고 썼다.




조선전쟁에 대하여 여러모로 연구하고 이에 대한 책들을 집필한 미국력사가 디 더블유 콘데는 자기의 글에서 《조선전쟁이 미국경제의 경기가 좋지 못할 때 일어난것은 부정할수 없다. 실업가들과 정부지도자들은 트루맨의 조선전쟁개입을 호경기에로의 예고로서 환영하였다.》라고 쓰면서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1951년 5월 5일부가 보도한데 의하면 《트루맨대통령과 톰 코내리상원의원 등 높은 직위에 있는 많은 지도자들이 1949년 가을과 1950년 5월까지의 사이에 전쟁을 바라고있었다.》라고 명백히 지적하였다.




일본의 한 력사평론가도 《조선전쟁은 미국이 직면하고있는 경제위기의 타개책으로 되였다.》고 하면서 《조선전쟁은 1948년 가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1949년에 이르러 더욱 심각해져 공업생산은 전해에 비해 15%나 감소되고 독점자본의 리윤은 16%나 감소된 사실과 무관계한것이 아니였다.》라고 미국의 조선전쟁도발원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였다.




결국 미제는 《번영이 요구되거든 언제나 전쟁을!》이라는 독점자본의 본성으로부터 《경제공황의 공포》가 극도에 이른 1950년을 전쟁도발시기로 정하게 되였던것이다.




다음으로 미국정계와 군부의 주요인물들과 그의 하수인인 남조선괴뢰상층인물들은 자기들의 증언으로써 저들이 전쟁준비를 발광적으로 다그치고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전범자들이라는것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미제는 괴뢰군조작후 장교들을 체계적으로 미국에 류학보내기도 하고 주일미군부대에 파견하여 미국식군사훈련도 주었다. 괴뢰군에 대한 이러한 류의 훈련은 주로 일본의 규슈와 야마구찌현에 주둔하고있는 미제24사단에서 실시되였다. 미제24사단장 띤의 《회상록》에 의하면 미 24사단에서의 괴뢰군장교들에 대한 훈련은 조선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였다. 남조선주재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도 남조선에서 저들이 괴뢰군을 훈련주고있는데 대하여 미국기자들에게 《실전에 경험있는 500명의 장병(남조선주둔 미군사고문단을 의미-인용자)들의 능률적이며 집중적인 활동》에 의하여 남조선에서 《당신들을 위하여 싸울 10만의 병사들을 훈련》시키고있다고 하면서 괴뢰군을 미국《자본을 지키는 훌륭한 번견》이라고 하였으며 미국은 남조선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둘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고있다고 자랑하였다.




1950년 9월 22일 미국회에서 한 상원의원 톰 코내리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1949년에만도 1억 8 500만US$분의 군사기재들을 주었는데 그중에는 소총, 카빈총, 기관총, 각종 포들과 탄약, 포탄들, 장갑차들, 함정 79척, 비행기 20대를 비롯하여 다종다양한 전쟁장비들이 들어있었다.




미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1951년 5월에 열린 국회에서 전쟁도발전에 남조선괴뢰군의 무장장비를 등한시하지 않았는가라는 공화당출신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하여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는 충분하였다고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1만 4 000여명의 군대를 유지하였는데 그중 6만 5 000명의 륙군은 미국식보병기재로써 완전히 장비되여있었다. 경찰과 해안경비대의 약 절반은 미국제휴대무기 및 카빈총을 가졌었고 나머지는 같은 종류의 일본제장비를 갖추고있었다. 공격이 개시되였을 당시 이 군대는 우리의 원조로써 15만명으로 증가되였다.》




남조선괴뢰군이 완전히 미국화된 침략군대로, 현대적무장장비를 갖춘 정규군으로 강화된데 대하여 당시 남조선에 주재하고있던 《뉴욕타임스》특파원도 《미국장교들이 훈련시킨 모든 외국군대들가운데서 남조선군대는 가장 미국화된 군대이다. 그들은 미국제군복을 입고있으며 미국제자동차를 타며 미국제무기를 휴대하고있다. 여러해에 걸친 맹훈련의 결과 그들은 미국인처럼 행세하며 많은 점에 있어서 미국인들처럼 행동한다.》고 증언하였다.




하기에 1950년 5월 9일《미국제경제협조처》(《E.C.A》) 남조선원조처장 죤슨은 미국회하원 세출위원회에서 《미국의 무장으로 장비되고 서울의 미군사절단의 지도밑에 미국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된 10여만의 남조선군대장병들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임의의 순간에도 전쟁을 개시할수 있다.》고 증언하였고 미국방장관 루이스 죤슨까지도 《남조선군은 북조선군이 국경의 건너편에서 다대한 원조를 받지 않는 한 그들을 패배시킬것이다.》라고 확언하였다.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기 위한 《북벌》전쟁계획작성도 미국이 주도하였다는 증언도 명백하다.




한때 괴뢰정부의 내무부장관으로서 죤 무쵸의 호출을 받고 자주 미국대사관에 드나들었던 김효석의 증언에 의하면 괴뢰군의 《북벌》 군사행동계획은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의 주도밑에 작성되였으며 괴뢰군1사단장 김석원, 교통부장관 허정 등이 그에 협력하였다. 그 계획에 의하면 작전을 1949년 7~8월경에 전《전선(38゜선)에서 동시에 감행 하되 주공격은 서부전선의 1사단이 담당하기로 되였다.




김효석의 증언은 《북벌》군사행동계획의 기본골자를 밝힌것으로서 이것은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해방할 때 괴뢰륙군 본부에서 압수한 《북벌》군사전략계획도에 의하여 립증되였다. 이 군사 지도의 밑에는 1945년, 미군군사지도인쇄소 발행, 축척 1:1 000 000 이라는 영문자가 찍혀있다.




이에 대하여 맥아더사령부참모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문제에 대한 미제의 계획에 정통하였던 에이다대좌는 1950년 12월 이란주재 미군사고문단 성원으로 있을 때 이란군참모들과의 담화석상에서 《미국의 계획은 리승만의 직접적인 참가와 미륙해군의 원조에 의하여 조선의 38゜선이북지역을 점령하는것이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김효석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계획실행을 위하여 1949년 5월에 무쵸는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김효석에게 《미국의 의도를 잘 알고 모든 준비를 유감이 없도록 갖출것》이며 《38゜선 이북에 대한 총진군의 시기》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길수 있게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미국의 지원과 부추김을 받은 남조선괴뢰들은 북침전쟁을 통하여 전조선을 《통일》할 허황한 망상에 넘쳐 전쟁도발망언을 련발하였다.




리승만역도는 1949년 4월 10일 조병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은 북방을 평정》해야 한다, 《북조선으로 진격하여 철의 장막을 38゜선으로부터 압록강연안》으로 밀어제껴야 한다고 줴쳤고 1949년 10월 7일 미국의 UP통신사 부사장 죠셒 죤슨과의 회견에서는 《나는 우리들이 3일이내에 평양을 점령할수 있다고 확신》하고있다고 허장성세하였다.




리승만역도는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당길 목적으로 미국에서 자기의 적극적인 대변자적역할을 하고있던 올리버에게 1949년 9월 30일에 전쟁도발의 급박성에 대하여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공격을 개시하여 북의 공산권안에 있는 우리의 충실한 지지세력과 합세하여 평양에서 그 나머지 사람들을 숙청해야 할 가장 좋은 시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다음 우리의 방어선을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강화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비밀편지를 보냈으며 올리버는 10월 10일부 회답편지에서 《북침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공격이 가장 훌륭한, 때로는 유일한 방어로 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리승만의 졸개들도 기승을 부리며 북침을 선동하였다.




괴뢰군참모총장 채병덕은 1949년 년두사라는데서 괴뢰군의 과업에 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신년도에 실지적행동으로 미회복지를 회복하여 조국강토를 통일하여야 할것이다.》느니, 괴뢰국방장관 신성모는 《우리 국군은 …명령만 있으면 이북의 평양, 원산까지라도 1일내에 점령할 자신과 실력을 가지고있다.》느니, 괴뢰국무총리 리범석은 1949 년 3월에 《학도호국단》결성식에 나타나 《학도제군! 이북으로 총진군하자!; 그래서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총을 놓자.》고 고아댔다.




한때 괴뢰내무부장관이였고 국회부의장이였던 윤치영도 1949년 3월 9일 기자회견에서 《남북조선을 통일하는 유일한 방법은 북조선의 실지를 힘으로 회복하는것이다.》라고 떠벌이였다.




이와 같은 증언들은 리승만을 괴수로 하는 남조선괴뢰들이 북침전쟁을 《국토통일》의 기본수단으로 삼고 미국의 계획에 따라 전쟁도발을 기정사실화하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미국무성 특별고문 덜레스가 1950년 6월에 남조선에 날아들었다. 6월 17일 서울에 도착한 덜레스는 다음날 미군사고문단과 괴뢰군의 고위인물들을 거느리고 38゜선을 시찰하고 만족을 표시하였으며 19일에는 괴뢰국회에서 《당신들은 외롭지 않다. 당신들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구상을 실현하는데서 가치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절대로 외롭지 않을것이다.》고 괴뢰들을 《격려》하였다.




덜레스의 방문일정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18일에 진행된 리승만과의 비밀회담이였다. 이 회담의 내용에 대하여 해방후 미군정청 고문 겸 하지의 책임고문인 서재필의 1등서기관으로 있다가 그후 유엔주재 남조선대사, 뉴욕주립대학 사회정치학 명예교수, 박사였던 림창영은 《내가 이전에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낸바 있는 전 국군중장 최덕신의 말에 의하면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주의와 싸울 각오가 되여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이 언제나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확언하였다고 한다.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북조선을 공격할 준비가 되여있다면 미국은 유엔을 통하여 도와주겠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리승만에게 남조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는것을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할 필요성과 그에 따라 행동계획을 짜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고 확언하였다.




결국 덜레스가 남조선을 떠나간지 불과 며칠후에 전쟁의 포성이 울렸던것이다.




력사는 결코 위조할수도 외곡할수도 없으며 부정할수도 없다.




력사적증언과 자료들은 조선전쟁의 도발자는 바로 미국이며 미국은 전범자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미국에 의하여 조선전쟁이 강요된지 수십년세월이 흐르고 세기는 바뀌였지만 미국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도 미국과 그에 빌붙어 잔명을 유지하는 남조선괴뢰역적패당은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 공화국의 《도발》과 《위협》을 떠들며 새 전쟁도발에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다.




그러나 우리 공화국과 미국사이의 전략적구도는 완전히 뒤바뀌였다. 만일 미국이 이러한 현실을 망각하고 이 땅에서 전쟁을 도발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자멸만을 가져올뿐이다.

《하느님의 사도》- 미국신사들



룡남산




《하느님의 사도》- 미국신사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김철란 2017.10.1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전쟁전까지만 하여도 미제를 숭배하던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통하여 미제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침략자이며 강도이며 천하에 제일 비겁쟁이라는것을 똑똑히 알고 그들을 저주하게 되였습니다.》(《김일성전집》 제16권 288페지)

종교를 리용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실현하려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19세기후반기부터 그리스도교(신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게 되였다.

침략의 척후병으로 우리 나라에 기여든 미국선교사들은 조선사람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마비시키고 숭미사상을 불어넣어 조선에 대한 미국의 침략을 용이하게 할 목적밑에 그리스도교선전에 미쳐 날뛰였다.

미국선교사들은 저들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도》로, 《교육가》, 《자선가》로 자처하면서 도처에 교회당과 학교, 병원 등을 세우고 그를 통하여 숭미사대주의를 부식시키였다.

미국선교사들은 언제나 《미국은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나라》이고 《미국사람들은 인구의 80%가 신자》라고 하면서 미국이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로 된것은 《예수를 믿기때문에 하느님이 축복해서 그렇게 된것》이라고 설교하였다.

미국선교사들의 책동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많은 그리스도교신자들은 미국사람을 《하느님의 사도》로, 《벗》으로 여기고 미국을 《천국》처럼 숭배하게 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의 머리속에 미제가 심어놓은 숭미사상은 조선전쟁에서 다름아닌 미제에 의하여 뿌리뽑히게 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에서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는 만행을 감행함으로써 저들의 야수성과 악랄성을 세상에 낱낱이 드러내놓았으며 전쟁에서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강대성》의 허위와 취약성을 스스로 폭로하였다.

전쟁전까지만 하여도 미국을 숭배하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전쟁시기 미제가 학교와 병원, 례배당들을 폭격하고 종교인들도 가차없이 살륙하는것을 목격하고 《하느님의 사도》로 자처하는 미제야말로 가장 악독한 침략자, 추악한 강도, 천하에 제일 비겁쟁이라는것을 깨닫고 스스로 숭미사상을 버리게 되였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살고있던 한 그리스도교목사는 전쟁전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우리 당을 비방하며 미제국주의자들이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전쟁시기 우리 인민군대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하게 되자 제일먼저 적의 기발을 들고 미제침략군을 마중하러 나갔다. 그런데 미국놈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닭을 마구 잡아가고 녀성들을 희롱하였으며 목사의 딸까지 릉욕하였다. 이것을 본 목사는 미제국주의자들이 예수를 가지고 사람들을 속여왔다는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예수를 믿는것을 걷어치웠으며 인민군대가 다시 진격해오자 공화국기발을 들고 나가 인민군대를 환영하였다.

전후에는 우리 공화국정권과 당을 따라 일을 잘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대동군의 이 그리스도교목사에 대한 실례를 드시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종교를 우리가 없앤것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자들이 없앴다고, 미제가 우리 나라 종교인들을 《교양》하는 《선생》노릇을 한셈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종교인들을 《교양》한 《선생》!

미제는 제아무리 《인도주의》와 《박애》를 부르짖으며 양의 울음소리를 낸다 해도 저들의 침략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승냥이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놓고있다.

녀성과 인권



룡남산




녀성과 인권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 로정혁 2018.4.7.


오늘 국제사회에서 인권문제는 중요한 초점의 하나로 제기되고있다.

세계정치무대에서 가장 빈번히 예민하고 중요한 의제로 취급되고있는것이 인권문제이다. 문제는 《인권옹호자》, 《인권재판관》으로 자처하는 미국의 주장이 득세할 때마다 주요전략적지대들, 열점지역들에서 분쟁과 사회적혼란이 격화되고 인권유린행위가 더욱 극심해지고있는것이다.

특히 녀성들의 처지가 더욱 악화되고있다.

녀성들에게 남성들과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것은 인류의 한결같은 지향이며 요구이다.

녀성의 인권문제는 남자들과 동등한 사회적인간으로서의 녀성의 권리를 남자들과 꼭같이 보장해주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오히려 남자들보다 더욱 위해주고 보호해주어야 하는것이 바로 녀성인권이다.

녀성은 남자들과 꼭같은 사회적존재이며 그로부터 그들의 권리 또한 남자들의 권리와 꼭같다.

녀성은 사회를 발전시켜나가는 한쪽수레바퀴이며 가정과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가정의 꽃, 사회의 꽃, 나라와 민족의 꽃이다.

사실상 어느 나라에서나 녀성들은 남성들에 못지 않는 역할을 하고있다. 어린이들을 낳아 정신육체적으로 건전한 사회적존재로 키우는데서 녀성인 어머니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더우기 녀성은 성격이나 육체적으로 남자들보다 연약하기때문에 국가와 사회가 제도적으로 녀성의 인격을 존중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녀성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과 체질상특성으로부터 국제사회는 녀성들을 사회적으로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국제조직들을 내오고 일련의 국제협약들을 체결하였으며 세계 모든 나라들이 그를 엄격히 준수할것을 요구하고있다.

그러나 오늘 세계의 수많은 녀성들이 초보적인 생존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하고있을뿐아니라 온갖 사회악의 희생물로 되고있다.

녀성천시, 녀성멸시사상이 뿌리깊이 남아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녀성들은 《만민평등》, 《인권존중》이라는 허울좋은 간판밑에서 온갖 멸시와 차별의 대상으로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하고있다.

특히 《인권재판관》노릇을 하는 미국에서 녀성들의 처지는 가장 혹심하다.

녀성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것은 해당 사회의 문명정도와 그 나라 사람들의 도덕수준을 엿볼수 있게 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되고있다. 이에 비추어볼 때 녀성들의 초보적인 인권을 여지없이 짓밟고 그들을 사회악의 시궁창에 몰아넣는 미국사회는 문명과 도덕면에 있어서 가장 뒤떨어진 사회라고 해야 할것이다.

《번영》과 《발전》, 《인권존중》과 《만민복지》를 떠들어대는 미국의 녀성들에게 있어서 일자리문제는 큰 걱정거리로 되고있다. 그것은 일자리를 제일 힘들게 얻는것도 녀성들이고 임신과 해산을 구실로 해고자명단의 첫자리에 오르는것도 녀성들이기때문이다. 요행 해고를 면한다고 하여도 차별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있다. 녀성들은 장시간 고된 로동을 강요당하고있지만 남성들에 비해 25%나 적은 임금을 받고있다.

녀성들에 대한 폭행은 미국사회의 말세기적풍조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다.

2013년 4월에 이 나라에서 발표된 조사자료에 의하면 성폭력범죄로 매일 6만 7 000명이상의 녀성들이 피해를 입고있다. 2013년 5월에 오하이오주에서 52살 난 범죄자가 자기 형제 2명과 함께 10년동안이나 3명의 녀성을 랍치하여 쇠사슬과 바줄로 묶어 자기 집 지하의 독방들에 가두어두고 상시적으로 성폭행을 가한 사실이 사회계에 알려져 만사람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무지와 몽매로 얼룩진 중세기도 아닌 현대에, 고도의 문명과 발전에로 치닫고있는 21세기에 이런 치떨리는 현대판 성노예생활을 강요한 야만인, 호색광들이 있다는 사실은 소스라치는 놀라움과 함께 극도의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수 없다.

지어 군대내에서까지 녀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 우심해지고있다.

미공군의 훈련교관인 루이스 워커가 10명의 녀성훈련생들에게 성폭행을 가한것은 1990년대이래 미군내에서 가장 큰 성추문사건의 하나로 기록되여있다.

미군내에서 평균 녀성군인 5명중 1명이 성폭행을 당하고있는데 피해자들은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있는 형편이다.

2013년 4월에 발표된 조사자료에 의하면 이 나라에서 녀성군인의 약 79%가 성폭행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130만명의 녀성들이 성폭행을 당하고있다. 현재 미국의 대학들에서는 5명중 1명이 성폭행피해자들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녀성들의 인권은 가정에서도 무참히 짓밟히고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행복의 요람이 아니라 지옥으로, 불행과 고통의 근원으로 되고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평균 약 210만명의 녀성들이 가정폭력을 당하고있다. 하루 평균 3명의 녀성들이 남편에 의해 살해되고 4명의 녀성들이 학대로 죽고있다. 가정폭력행위가 얼마나 극심한가 하는것은 미국에서 《가정폭력방지법》이라는 괴이한 법까지 나오고 결혼증서를 발급할 때 《가정폭력부가세》를 받아낸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녀성차별, 녀성멸시의 사회악속에서 극도로 타락한 녀성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범죄자로 전락되고있다.

미국의 오하이오주에서는 한 녀성이 지난 13개월동안에 젖먹이어린이를 포함하여 자기가 낳은 3명의 자식을 질식시켜 살해하였다. 뉴욕시에서는 26살 난 녀성이 낳은지 6개월도 안되는 갓난애기를 창밖으로 내던져 죽이는 치떨리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모성애라고는 도저히 찾아볼래야 찾아볼수 없는 녀성들의 이와 같은 범죄행위들은 썩을대로 썩은 미국식《문명》의 진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이것은 결코 미국에만 국한되는것이 아니다.

2007년 1월 녀성들을 한갖 《아이낳는 기계》라고 모독한 당시 일본의 후생로동상이라는자의 도덕적으로 저렬하고 몰상식한 망발은 사회계의 경악을 자아냈으며 이것은 일본의 어두운 정치현실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다.

녀성천시, 녀성차별은 오늘날 자본주의나라들에서 보편적현상으로 되고있지만 《문명국》이라느니,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는 사회》라느니 뭐니 하며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일본처럼 녀성의 존엄을 혹심하게 짓밟는 나라는 없다.

자료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는 다른 나라 녀성들을 끌어다가 성노예생활을 강요하는 인신매매범죄조직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일본의 이름난 음식점들에도 접대원의 명목으로 끌려와 《성봉사》를 강요당하며 치욕스러운 노예살이를 하는 외국녀성들이 수다하다. 녀성매매의 《주요목적지》로 되고있는 일본에서는 무용수선발, 료리사채용, 미용사모집 등 그럴듯 한 직업광고들에 속아 섬나라에 끌려온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동유럽출신의 수많은 녀성들이 《성산업》에 종사하고있다. 그들은 일본의 《성산업》경영주들에게 팔린 순간부터 모든 자유와 권리를 잃고 갖은 학대와 멸시속에 성노예로 전락되고있다. 변태적인 성욕자들의 시달림을 받는것도 헐치 않은데다가 《주인》들의 학대 또한 가혹하기 그지없다. 만일 반항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야만 하는것이 그들의 기막힌 운명이다.

자본주의사회의 녀성들의 권리가 무참히 유린되고있을 때 녀성들이 가정과 사회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복받은 삶을 마음껏 누리고있다. 녀성존중의 대화원을 펼쳐주시고 그것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인민사랑의 자애로운 품속에서 우리 녀성들의 존엄은 더욱 빛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당은 어버이수령님께서 키워주신 훌륭한 우리 녀성들을 더없이 귀중히 여기며 녀성들의 권리와 존엄을 철저히 옹호보장하고 그들에게 진실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있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5권 19페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녀성들의 참된 삶과 행복에 대해서는 남녘겨레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21세기에도 녀성차별은 심각한 사회정치적문제로 녀성들의 운명을 위협하고있다. 현시대에 녀성문제해결의 진정한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 대답은 바로 녀성들의 아름다운 화원인 북의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남조선의 녀성인권문제전문가)

《녀성의 존엄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고 녀성의 온갖 권리가 최상의 수준에서 행사되는 북은 정녕 녀성의 왕국, 녀성의 락원이다. 도시와 농어촌, 공장과 마을 등 가는 곳마다에 탁아소, 유치원이 있어 어머니들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해주고있다. 쌍둥이만 낳아도 그 양육때문에 걱정의 한숨소리로 땅이 꺼질 지경인 이남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서울대학교 녀교수)

《남녘의 녀성들이 소박맞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고있을 때 북에서는 축복의 꽃속에 묻힌 녀성들에게 남편들이 <사랑하시라>, <안해의 노래>를 불러주면서 아끼고 위해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녀성존중의 풍토가 정착된 북의 모습이다.》 (목포의 녀성)

《북에서는 사회성원의 절반을 이루는 녀성들이 천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고있으니 어찌 북을 녀성천국이라 하지 않겠는가. 북에서는 남녀평등권법령에 의하여 녀성들이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제도적으로 충분히 보장받고있다. 북이 이렇듯 리상적인 녀성복지사회로 된것은 녀성들을 그토록 내세워주시며 온갖 은정을 다 베푸시는 따사로운 해님을 모신 덕분이다.》 (남조선 녀성인권연구회 회원)

《북의 녀성들은 과학자, 교육자, 예술인, 체육인, 의사로 조국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있다. 정말 북의 녀성들이 부럽다. 녀성들의 리상천국을 마련해주신 김일성주석님께와 김정일장군님께 허리굽혀 진정의 인사를 드리고 또 드리고싶다.》 (서울의 녀성)

《나의 본명은 나라 끼리꼬이고 고향은 일본 후꾸시마현입니다.

제가 조선인남편 김경종을 따라 조선에 온지도 54년이 흘러 어느덧 84살이 되였습니다. 당시 네자식을 데리고 왔던 저는 지금은 43명이나 되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저의 형제들과 친척친우들 그리고 우리 마을사람들은 저를 보고 자식들을 잘 두었다고, 자식복이 있다고 부러워합니다.

저 또한 자식들에 대한 자랑으로 은근히 긍지를 가지군 합니다.

어머니의 본분은 자식들을 잘 키우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훌륭한 자식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도 있는것이고…

하지만 사람들마다 부러워하는 그 자식복은 조선의 사회주의제도가 안겨준것입니다.

일본에서 살 때 우리 가정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였습니다. 곁방살이를 하면서 집고생도 했고 나 또한 배고파 애처롭게 우는 아이를 업고 남편과 함께 공사장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자식들을 공부시키려는것은 한갖 공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와서야 저는 네 자식들을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여 국가의 혜택으로 키우면서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살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의 고향이 일본인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 더 낳아 그 애는 고향을 평양으로, 그늘 한점 없이 깨끗하게 키우려고 했습니다.

내가 임신하자 나라에서는 담당의사까지 붙여주었으며 큰 병원에 입원하여 해산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퇴원할 때 무심결에 입원비와 해산비, 약값 등 모두 합쳐 얼마를 내야 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원의 말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것이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일곱자식을 낳으면서 의사얼굴은 보지도 못하였고 입원이란 생각도 못하였다고 했는데 이 좋은 세상에서 내가 왜 아이를 하나만 낳겠습니까. 그래 둘이나 더 낳았습니다.

저는 자식들 모두를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대학공부 시켰고 시집장가를 보냈습니다. 그 소식이 일본신문들에도 실리였다고 합니다.

그때가 20여년전이였는데 일본의 옛 동향친구가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신문을 통해 내가 평양에서 아들딸 7남매를 다 대학공부시키고 시집장가보내여 손자손녀들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부러움을 금치 못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 나이먹도록 장가를 못보내여 늘 걱정하고있으며 손자는 언제나 보게 될는지 모르고있다고 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자식많은 부모는 이래저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많아 저에게는 늘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고향방문으로 일본에 갔을 때도 자식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던것이였습니다.

일곱자식들뿐아니라 오늘은 14명이나 되는 손자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였거나 대학에 다니고있으며 증손자, 증손녀들도 태여났습니다.

대학졸업증만해도 20개가 넘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건축종합대학, 한덕수평양경공업종합대학, 조선체육대학,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평양외국어대학…

며느리, 사위들과 손자며느리, 손녀사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날 43명이나 되는 식솔이 다 모여 즐길 때면 정말 생각이 깊어집니다.

내가 일본땅에 있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락을 생각이나 했겠는가고 말입니다.

하기에 저는 자손들에게 이 고마운 사회주의제도를 위해 맡은 일들을 더 잘하라고 늘 당부하군 합니다.》

이것은 재일조선인남편을 따라 우리 나라에 온 재조일본인녀성 라옥희가 쓴 수기의 일부이다.

녀성들의 천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귀화한 외국인녀성들까지도 차별없이 따뜻이 품에 안아 보살펴주고있다.

어디 가나 녀성존중의 사랑과 정이 넘치고 어디서나 녀성들을 떠받드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는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세워주시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더욱 빛내여주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녀성들의 락원이며 이 은혜로운 품속에서 우리 녀성들의 존엄은 온 세상에 더욱 빛날것이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의 주요특성



룡남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의 주요특성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박사 부교수 진정철 2017.12.18.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대외경제관계를 다각적으로 발전시키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비롯한 경제개발구개발사업을 적극 밀고나가야 합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우리 나라의 대외관계를 다각적으로 발전시키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비롯한 경제개발구개발사업을 적극 밀고나갈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지이며 명승지이다. 여기서 지대란 일정한 관광구획의 단위를 의미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관광구획을 지대‐지구‐구역‐소구역을 단위로 하여 나누는데 여기서 가장 큰 관광구획단위는 지대(1급)이며 대표적인것이 바로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이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우선 지리적으로 관광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있다.

일반적으로 관광지의 지리적특성이라고 할 때 관광지의 지리적위치, 교통의 편리성, 관광지의 기상기후조건 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관광수요자들의 요구에 만족되는 관광지는 세계적으로 많지 못하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이러한 요구조건들을 비교적 원만한 수준에서 만족시키는 관광지대이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관광려행에 아주 적합한 위치에 자리잡고있는 관광지이다.

원산은 우리 나라의 동해바다가에 위치하고있는 강원도의 소재지이고 해안도시이며 기묘한 산봉우리들과 바다를 끼고있다. 위치는 조선반도의 동쪽중부에 자리잡고있으며 년평균온도가 10.4℃이다.

원산시는 로씨야와 중국, 일본 등 린접나라들에서 비행기로는 1~2시간이면 와닿을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3~4시간이면 중국홍콩, 중국대북, 상해를 비롯한 인구 100만명이상을 가진 여러 나라의 도시들로 오갈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있다.

국내교통로를 보면 륙로로는 평양-원산관광도로, 철도로는 원산-금강산철도가 있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또한 여러가지 목적의 관광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있다.

일반적으로 관광은 휴양이나 병치료를 목적으로 하여 진행하는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이러한 목적을 모두 만족시킨다.

주요관광자원들로는 수많은 력사유적들과, 백사장들, 광천자원들, 자연호수들, 자연식물군락들, 관광명소들, 치료에 특효가 있는 감탕을 가진 호수 2개가 있다.

무엇보다먼저 여름철관광기간에 해수욕을 위한 송도원해수욕장,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꾸려져있다.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주체49(1960)년 8월 17일에 창설되였는데 창설당시에는 수백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송도원중앙소년단야영소로 꾸려졌으며 주체74(1985)년 8월에 그 능력이 확장되여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로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주체82(1993)년 3월에 야영소가 현대적으로 건설되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천여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웅장화려한 야영소로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국제친선소년회관, 화면반주음악설비가 갖추어진 음악감상실, 실내수영관, 물놀이장, 문어다리유희시설, 수족관 등이 갖추어져있으며 정구장, 축구장, 롱구장, 배구장, 송구장, 탁구장, 뽀트장이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국제친선소년회관에는 극장, 전자오락실, 음악실, 태권도실, 탁구실, 미술실, 도서실, 소년단실 등이 꾸려져있다. 또한 침실들과 식당, 상점, 진료소, 수리기지 등이 현대적으로 꾸려져있다. 야영은 매해 4월부터 10월까지의 기간에 진행하며 야영기간은 12일간이다.

외국인소년들은 매해 7, 8월을 기본으로 하여 20~25일간 우리 나라 소년단원들과 함께 야영생활을 진행한다.

우리 어린이들을 위하여서는 이 땅의 천만금이라도 아끼지 않으시고 통채로 안겨주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를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훌륭하게 개건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대원수님의 자애로운 영상을 형상한 동상이 정중히 모셔지게 되였으며 김정일애국주의교양실, 국제친선소년회관, 야외운동장과 실내체육관, 실내수영관, 야외물놀이장, 야외활쏘기장, 수족관, 조류사, 동물박제품진렬실 등 야영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이 종합적으로 꾸려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병치료목적의 관광을 위한 여러가지 온천과 감탕치료장소들을 가지고있다.

통천지구에는 우리 나라 관동 8경의 하나인 총석정이 있으며 이 지구에는 신경통, 소대장염치료에 특효인 동정호와 시중호 등 자연호수와 감탕자원이 있다. 그리고 백사장들과 해수욕장, 관광명소들, 숙박시설들과 치료장, 상점, 식당 등 봉사시설들이 있다.

금강산지구에는 외금강과 내금강, 해금강과 삼일포가 있다.

외금강지구와 내금강지구, 삼일포지구, 해금강지구에는 수백개의 관광명소들과 력사유적, 자연식물군락, 백사장들과 자연호수들, 광천자원이 있다.

이밖에도 골프장, 눈썰매장, 스키련습장, 해수욕장이 있으며 옥류관, 단풍관, 목란관, 온천장도 있다. 여기에 숙박시설들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또한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관광을 진행할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있다.

일반적으로 관광지들은 어느 한 계절에만 관광을 할수 있는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관광의 계절적특성으로 볼 때 일년 사계절 모두 관광을 할수 있는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관광지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우리 인민들이 최고의 문명을 최상의 수준에서 누리도록 하시기 위하여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세계적수준의 관광지로 꾸리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에는 겨울철관광을 위한 세계일류급의 마식령스키장이 훌륭히 건설되였다.

마식령스키장은 강원도 원산시 령저구에 있으며 종합적인 스키장지구로서 스키주로의 총연장길이는 49.6km이다. 스키장에는 화려하고 아담하면서도 산골맛이 나는 마식령호텔이 있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바다와 산을 모두 끼고있어 여러 류형의 관광을 할수 있고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관광을 할수 있는곳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광지이다. 그리고 관광명소들과 휴양지, 치료지의 곳곳마다에 숙박시설들과 문화후생시설들이 훌륭히 꾸려져있으므로 관광객들의 편의를 충분히 보장할수 있다.

원산-금강산관광지대의 매력적인 자연풍경과 1류급의 관광시설조건은 세계의 그 어느 나라들과 당당히 견줄수 있으며 특히 무더운 여름철과 추운 겨울철관광을 모두 보장할수 있어 세계적인 주목을 모으고있는 관광지대로 되고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사회주의문명강국건설은 더욱더 앞당겨지고있으며 세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인 우리 나라에서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서의 훌륭한 본보기로 꾸려지게 될것이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은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



룡남산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은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학 박호영 20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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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나라를 과학기술강국의 지위에 올려세우기 위하여서는 인재를 중시하며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사회주의강국건설에서 오늘 우리가 선차적으로 점령하여야 할 중요한 목표는 과학기술강국이며 과학기술강국을 건설하자면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여야 한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는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대학졸업정도의 지식을 소유한 지식형근로자로, 과학기술발전의 담당자로 준비시키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다.

전체 인민을 현대과학기술로 무장한 과학기술인재로 튼튼히 준비시켜야 지식경제시대의 요구에 맞게 나라의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을 과학기술적으로 확고히 담보해나갈수 있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로 되는것은 무엇보다먼저 그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직접적담당자인 과학기술인재대렬을 튼튼히 꾸릴수 있게 하기때문이다.

과학기술에 의거하고 과학의 힘으로 전진하여나가는 오늘 어디서나 요구되는것은 인재들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대상하는 자연의 령역이 넓어지며 더우기는 첨단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사람들의 활동에서 육체적로동보다 정신로동, 과학기술적창조력이 노는 역할이 더욱 높아지는 조건에서 현시기 사회는 더 많은 인재들을 요구하고있다.

과학기술인재들에 의하여 창조되는 새 지식과 기술들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산업구조를 현대화하고 생산활동에서 경제적효과를 최대한으로 높여 사회경제발전을 추동하고 나아가서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재가 많고 그들의 역할이 높으면 자력갱생의 투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도 세인을 놀래우는 기적을 창조할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조건이 아무리 유리해도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주저앉게 된다.

사회주의강국은 과학기술강국이며 과학기술강국은 곧 과학기술인재강국이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는 사회생활의 특정한 부문, 단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부문, 모든 단위의 일군들과 근로자들, 사회의 전체 성원들을 대학졸업정도의 지식을 소유하고 능숙하게 활용해나가는 유능한 인재들로 키워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직접적담당자인 과학기술인재대렬을 튼튼히 꾸려나가게 한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그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목표를 빨리 달성할수 있게 하는 지름길이기때문이다.

과학기술강국은 나라의 전반적인 과학기술이 세계첨단수준에 올라선 나라, 과학기술의 주도적역할에 의하여 경제와 국방,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부문이 급속히 발전하는 나라이다.

과학기술강국건설의 목표는 가까운 앞날에 종합적과학기술력에서 세계적으로 앞선 나라들의 대렬에 당당히 들어서는것이다.

과학기술력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자원이며 사회발전의 강력한 추동력이다. 나라의 정치사상적위력과 경제력, 군사력도 최신과학기술에 의하여 안받침되여야 비상히 강화되고 더 높이 발휘될수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도 남들이 걸은 길을 따라만 갈것이 아니라 년대와 년대를 뛰여넘으며 비약해나가야 한다.

과학기술강국의 목표는 어느 한두사람의 과학기술인재들의 힘으로는 달성할수 없다. 과학기술강국의 목표 그자체가 어느 한분야의 과학기술력이 아니라 경제와 국방, 문화를 비롯한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의 과학기술력을 발전시켜 나라의 존엄과 지위를 최상의 경지에 올려세우기 위한 사업인것만큼 과학자, 기술자들은 말할것도 없고 사회의 모든 근로자들도 현대과학기술을 소유한 기술형의 인간, 지식형의 인간이 될것을 요구하고있다.

때문에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여야 나라의 종합적과학기술력을 발전시키는데서 비약을 일으켜나갈수 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과학기술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유능한 과학기술인재로 키우는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목표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고있다.

새 세기 교육혁명을 일으켜 우리 나라를 교육강국, 인재강국으로 빛내여나가려는 당의 의도밑에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이 실시되여 중등일반교육체계가 강화되고있으며 전국의 학교와 대학들이 교육의 현대화, 정보화를 실현하면서 교육내용과 방법,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한 불바람을 일으키고 교육조건과 환경을 일신시켜나가고있다.

전민학습의 대전당이며 다기능화된 과학기술보급의 중심기지인 과학기술전당을 중심으로 전국의 도, 시, 군들마다의 도서관과 미래원, 과학기술보급실들에 보급망을 형성하여 새로운 과학기술자료들이 중앙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물이 흐르듯이 보급되도록 하고있다.

전민학습의 거점인 대학들에 원격교육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지고 공장대학, 농장대학, 어장대학들이 늘어나고 기관, 기업소, 공장, 협동농장들마다에 현대적인 과학기술보급실이 훌륭히 꾸려져 수많은 근로자들과 일군들이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과학기술지식을 소유한 유능한 과학기술인재들로 준비해나가고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과학기술열풍에 의하여 생산과 건설에서 많은 성과들이 일어나고있으며 특히 국방과학기술분야에서 놀라운 기적들이 다계단으로 련발적으로 일어나고있다.

이 모든 자랑찬 현실은 발전하는 현실의 요구에 맞게 전민과학기술인재화방침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가는 우리 당의 령도가 있는 한 과학기술강국은 가까운 앞날에 반드시 일떠서고야만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



룡남산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박사 부교수 장순남 2018.9.17.


오늘 우리 지식인들은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을 높이 받들고 눈부신 과학기술성과로 사회주의강국건설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투쟁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위대한 주체사상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인테리를 로동자, 농민과 함께 우리 혁명의 기본동력으로 내세우시였으며 과학자, 기술자들을 더없이 귀중한 나라의 보배로 여기시고 그들모두를 한품에 안아 과학탐구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였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5권 483페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과학연구수단과 조건보장보다도 과학을 알고 지식인들을 믿고 아껴주는 위대한 령도자, 참다운 스승을 모시는것이다.

오늘 우리의 지식인들이 세계를 놀래우는 과학연구성과로 사회주의강국건설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고있는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이 있기때문이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무엇보다도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은 우선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규정하신것이다.

혁명의 동력을 옳게 규정하는것은 혁명투쟁에서 혁명력량편성과 그에 맞는 과학적인 전략전술의 수립에서 중요한 문제로 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의 첫시기에 벌써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나 일제통치하에서 공부하고 일제기관에서 복무하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있는 반일사상과 애국적량심을 더 귀중히 여기시여 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시고 동지로, 투사로 키워주시였으며 주체35(1946)년 8월 공산당을 근로인민의 대중적정당인 로동당으로 강화발전시키면서 우리 당마크에 로동자와 농민, 근로인테리를 상징하는 마치와 낫, 붓을 그려놓도록 하시였다.

우리 지식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규정하시고 당기발에 지식인을 상징하는 붓을 그려넣도록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 그 어떤 믿음에도 비길데 없는 믿음중의 가장 큰 믿음으로 된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에게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도 맡겨주시며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도록 하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당과 혁명에 대한 충정심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을 굳게 믿으시고 해방직후부터 그들을 당에 받아들이고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직책도 맡겨주시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전에 공부한 오랜 지식인들중의 한 사람인 임록재선생의 한생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임록재선생은 수천종의 가치있는 식물자원들을 수집조사하고 그에 대한 과학연구사업을 진행하여 인민경제발전과 인민들의 건강증진 및 문화정서생활향상에 적극 이바지한 유명한 식물학자이다.

남달리 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임록재선생은 해방전 우리 나라의 풀과 나무에 대한 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제 나라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에 조선말로 이름을 붙인 죄아닌 죄로 하여 식물표본통을 가지고 방랑의 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해방후에도 남조선에서 식민지지식인의 설음과 고통을 강요당하였다. 그는 주체35(1946)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진정한 식물학자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였고 오랜 기간 중앙식물원 원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북반부의 지식인들은 물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달려온 허헌, 김광진, 계응상 등 여러 지식인들을 굳게 믿으시고 이들모두를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도 애국적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은 애국적인 지식인들이라고 높이 평가하시면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교육상, 내각무임소상,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비롯한 중책들을 맡겨주시고 우리 당의 지식인이라는 고귀한 칭호도 안겨주시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의 정치적생명을 끝까지 책임져주시고 빛내여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이 나쁜놈들의 모해나 사업과정의 본의아닌 실수로 하여 엄중한 과오를 범하고 자기의 귀중한 정치적생명을 잃게 되였을 때에도 그들을 굳게 믿으시고 그들의 정치적생명을 회복시켜주시고 끝까지 빛내여나가도록 하시였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유전학자였던 계응상선생의 한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속에서 자기의 정치적생명을 끝까지 빛내인 한생이라고 할수 있다.

계응상선생은 주체44(1955)년 여름 마쟈르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보고회에 참가하여 《환경유전설》의 과학성을 부정하는 현대유전학에 관한 문제를 발표하여 참가자들의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국제학술보고회가 끝난 후 조국으로 돌아오던중 이전 쏘련과학자 릐쉔꼬를 만나 주체적인 과학탐구의 길에서 자기가 달성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학술적으로 《환경유전설》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과학적인 론증을 하였다.

그러나 종파사대주의자들은 계응상선생이 큰 나라의 기분을 잡쳐놓았으니 큰일난다고 하면서 그에게 사죄할것을 강요하였으며 그를 잠업연구소의 소장직위에서 해임하고 연구소를 해산하려 하였고 잠업학에 대한 강의도 중지시켰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파사대주의자들의 그릇된 처사를 호되게 비판하시고 계응상선생을 훌륭한 과학자로 높이 치하하시였다. 뿐만아니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업연구소를 다시 조직하고 그를 소장직위에서 다시 사업하도록 하시였으며 중지되였던 잠업학강의도 계속하도록 해주시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처럼 우리 지식인들의 정치적생명을 끝까지 책임져주시고 빛내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이 있었기에 계응상, 로태석, 강영창 등 오랜 지식인들은 새 조국건설시기와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를 비롯하여 혁명과 건설의 여러 단계에서 언제나 우리 당과 운명을 함께 하며 당을 받들어 끝까지 잘 싸울수 있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다음으로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주체과학의 70여년력사는 우리 지식인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뜻과 정을 주시고 자신의 혈붙이처럼 여기시며 보살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은정에 대한 이야기를 수많이 기록하고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은 우선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이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세우도록 이끌어주시고 자그마한 과학연구성과도 높이 평가하시며 내세워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이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튼튼히 세우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과학연구사업에서 기본은 우리 당과 우리 혁명이 요구하는 방향에 따라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지식인들이 모든 과학적문제들을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당의 의도에 맞게 우리 인민의 지향과 요구, 우리 나라의 구체적실정에 기초하여 진행해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자그마한 과학연구성과도 높이 평가해주시고 온 나라 인민들이 다 알도록 내세워주시였다.

혁명생애의 전기간 우리 지식인들을 금싸래기처럼 귀중히 여기시고 애지중지 키우시며 친어버이의 애틋한 정을 기울여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에게 주실수 있는 모든 영예를 다 안겨주시면서 온 세상에 보란듯이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각별하고 끊임없는 사랑속에 홍기문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어학, 력사학분야의 수많은 도서들과 론문들을 집필하였으며 여러권의 민족고전들을 번역하였다. 그가 조선봉건왕조실록번역사업에서 성과를 이룩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직접적인 지도밑에 우리 사회과학자들이 전40권의 당정책해설도서인 《조선로동당정책사》를 집필하였을 때에는 《조선로동당정책사》에 인민상을 수여할것을 제의하시고 집필에 참가한 사회과학자들에게 높은 국가수훈과 학위학직을 수여해주도록 하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보살피심속에서 우리 지식인들은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확고히 세우고 우리 당과 혁명, 우리 조국과 인민을 위한 훌륭한 과학연구성과를 이룩할수 있었으며 온 나라가 다 아는 지식인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이 과학연구사업에 전심할수 있도록 생활조건과 사업조건에 깊은 관심을 돌려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을 나라의 귀중한 보배, 밑천이라고 하시며 주실수 있는 온갖 사랑과 배려를 다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생활조건을 일일히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탄생 35돐을 맞으시는 주체36(1947)년 4월 15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과 항일혁명투사들이 마련해드린 검소한 생일상마저 마다하시면서도 얼마 안있으면 5.1절인데 종합대학에는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명절을 쇠는 학자들이 많을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게 명절떡감으로 옥백미와 찹쌀가마니를 집집마다 보내주자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이뿐만아니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 본교사의 터전을 잡아주시던 그때 벌써 풍치아름다운 모란봉기슭, 대동강가의 아늑한 골안에 종합대학 교원들의 살림집을 짓도록 가르쳐주시고 본교사건설에 뒤이어 서재까지 달린 3칸, 4칸짜리 훌륭한 교원살림집마을을 꾸려주시였다.

해방후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지식인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시여 손수 위촉장까지 보내시며 김일성종합대학의 높은 교단에 세워주시고 그들의 건강과 가정생활문제에 이르기까지 따뜻이 보살펴주신 사실, 전투원 한사람 한사람이 금싸래기처럼 귀중하였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한개 련대를 풀어 한 과학자의 가정을 적후에서 구원해오도록 하신 사실 등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에게 돌려주신 뜨거운 사랑과 배려는 참으로 많고많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사업조건도 최상의 수준에서 마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교원생활을 하다가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온 리승기선생에게 전쟁의 어려운 조건이지만 비날론연구를 중지하지 않고 계속할수 있도록 실험실도 꾸려주고 실험설비도 사다주면서 모든 조건을 다 보장해주시였으며 그가 실험에서 성공하였을 때에는 그 성과에 기초하여 전후에 큰 비날론공장까지 건설하도록 하시였다.

일찌기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함흥과 평성에 현대적인 과학연구기지를 꾸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과학부문에 투자하는것이 당장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해도 후대들을 위하여 투자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과학연구사업에 많은 자금을 돌리도록 하시였다.

이처럼 우리 지식인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속에서 최상의 생활조건과 과학연구조건을 보장받게 되였으며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과학연구사업에 열중하여 조국의 륭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훌륭한 과학연구성과들을 내놓을수 있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에게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의 품에서 어엿한 혁명가로 성장한 허헌선생이 잘못되였다는 비보를 받으시고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한명의 군인이 그처럼 귀중하던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시기 무려 3 000여명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그의 시신을 무조건 찾도록 최고사령관명령을 내리시였으며 그의 시신을 찾은 다음에는 시신을 안전한 곳에 두었다가 전후에 다시 잘 안장하도록 하는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고 그의 장의를 국장으로 하도록 하고 자신의 화환도 보내주시였으며 공화국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남북의 각 정당, 사회단체의 명의로 부고를 발표하여 그의 투쟁공적을 평가할데 대한 내각결정을 채택하게 하시였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 갖은 민족적멸시를 받아온 원홍구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과학자로서의 값높은 삶을 누리고 눈부신 영예를 다 받아안았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당시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였을뿐아니라 로력훈장을 비롯하여 높은 급의 훈장을 받았으며 사망후에는 그의 초상우표까지 발간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사랑, 보살피심이 있어 우리 지식인들은 죽어서도 령도자의 추억속에, 온 나라 인민들의 기억속에 살아있는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는것이다.

우리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위대한 장군님에 의하여 더욱 활짝 꽃펴났으며 오늘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에 의하여 그대로 이어지고있다.

이처럼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 지식인들이 더 큰 과학기술적성과로 사회주의강국건설을 추동해나갈수 있는 힘있는 원동력으로 되고있다.

우리 지식인들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그 믿음, 그 사랑에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자기의 있는 지혜, 있는 열정, 있는 힘을 다바쳐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