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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5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epub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홍지수 (옮긴이),오강남 (해제)김영사2017-04-10 원제 :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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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종교학 주간 19위|Sales Point :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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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제공 파일 : ePub(25.89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424쪽, 약 34.1만자, 약 7.6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샤인
ISBN : 978893497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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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 인문학 > 신화/종교학 > 종교학 > 종교학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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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의 명저다.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목차
1장 종교의 진화 | 2장 초자연적 감시자 | 3장 위로부터의 압력 | 4장 우리는 거대한 신을 믿는다 | 5장 자유사상가는 무임승차자 | 6장 진정한 신도 | 7장 거대 집단에 필요한 거대한 신 | 8장 협력과 경쟁을 부추기는 신들 | 9장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 10장 신 없는 협력 | 해제_거대한 신, 그리고 그 너머 | 주석 | 참고문헌 | 색인

책속에서
P. 53 인간과 유사한 초자연적 존재들이 인간을 감시하고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고 인간의 행동을 보상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 훨씬 설득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이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청탁도 들어주는, 자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인격화된’ 신을 원한다. 추상적이고 인간사에 무심한 신보다 인격화된 신에게 훨씬 열렬한 추종자들이 몰리는 현상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접기
P. 137 친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세속적 경로가 또 하나 있다. 협력과 높은 수준의 신뢰를 촉진하는 효과적인 제도와 기관들이다. 이런 제도와 기관이 갖추어진 세속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이라면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종교에 의해 직접적으로 동기 유발되지 않는 무신론자도 친사회성을 보일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공적 영역을 관장하는 강력한 제도가 존재하면, 즉, 계약이 이행되고 경쟁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부정행위자는 처벌받는다는 믿음이 있으면,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공히 높은 수준의 신뢰와 협력의 태도를 보인다.  접기
P. 182~183 이런 터무니없이 과도한 행위들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주로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고, 이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예를 들어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남성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거세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로마제국 초기에는 키벨레 종교가 부활해 문화적으로 확산되었다. 신심을 공개적인 행동으로 과시해 보이면 키벨레를 숭배하는 다른 신도들에게 믿을 만하다는 신호를 보낼 뿐만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포교하는 수단도 된다는 뜻이다. 즉, 문화적으로 키벨레 종교를 비신도들에게 전파하는 수단이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행태가 나타났다. 그들은 기꺼이 순교를 택하여 문화적인 귀감이 되었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믿음이 문화적으로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접기
P. 296 종교적 관행과 의식을 통해 공고해지고 사회적 결속력은 공동체를 응집시키지만 동시에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부인인지 구분하게 만든다. 흔히 강한 사회적 결속력이 본질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결속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친사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도 많다. 하지만 강력한 사회적 결속력 이면에 존재하는 추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배타심이 생기고,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폭력적 반감을 표출한다. 이런 현상을 ‘집단 간 폭력에 대한 사회적 결속력 가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접기
P. 309 죽음을 상기시키면 사람들은 자기가 지닌 문화적 신념에 방어적으로 매달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비롯해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편협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실존적 위협이 팽배한 경우더라도 호전주의가 평화주의로 전환될 가능성은 있다. 이란의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죽음을 상기시키자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한다는 사례가 증가했다. 하지만 자비심을 강조하는 이슬람 가치들(“알라는 선행하는 자를 사랑하시니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라”)을 상기시키자, 죽음을 떠올려도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하는 수가 줄어들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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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아라 노렌자얀 (Ara Norenzay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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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성에 대해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연구에 CNN, BBC 등의 방송과 <뉴욕타임스 매거진> <이코노미스트> <슈피겔> <내셔널포스트> <뉴사이언티스트> 등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였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자랐으며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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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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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하버드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KBS 앵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정부의 정보통신부 차장, 리인터내셔널 무역투자연구원 이사로 일했다. 옮긴책으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미국의 봉쇄전략》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트럼프 위치 헌트》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가 있다.
최근작 :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 총 65종 (모두보기)
오강남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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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더보기
최근작 : <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 총 6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 뇌과학자 김대식, 종교학자 오강남,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 긍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추천! ★

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 명저.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흥미진진한 지적 탐구.

출판사 리뷰

인간과 사회 그리고 신의 관계에 대한
심오하고 독창적인 지적 탐구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생활을 하던 인류는 어떻게 거대한 집단을 만들고 오랜 기간 집단을 확장하거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친족이라는 친밀함의 경계를 넘어 낯모르는 사람들까지 거대 집단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어둘 수 있었던 구심점은 무엇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결속 아래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사회화의 기원을 묻는 이런 물음은 역사가 시작한 시점부터 있어왔고, 무수히 많은 종교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이 그 답을 찾아 수많은 시간을 바쳤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Big Gods》의 저자 아라 노렌자얀도 그중 한 사람이다. 레바논 출신으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그는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을 결속하는 힘이 무엇이며, 그 힘은 우리를 어떻게 협력하게 만들었는지 연구했고, 종교의 관점에서 그 답을 제시한다. 신앙의 대상이기만 했던 종교가 인간의 사회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거대한 집단에 거대한 종교가 필요했고, 거대 종교의 성장을 위해 거대한 사회가 필요했던 공생 관계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본다. 더불어 저자는 종교가 거대 사회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여덟 가지 믿음을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여덟 가지 믿음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급진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정연한 주장과 실험을 통한 탄탄한 연구가 뒷받침되었고, 영장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프란스 드 발도 “아라 노렌자얀은 방대한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절실하게 필요했던 논리정연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추천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과 종교의 미래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신에게 물을 것인가, 우리에게 물을 것인가”

젊은 석학 아라 노렌자얀의 학문이 집대성된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종교를 넘어 심리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종교의 탄생과 발달, 사회의 기원에 대해 밀도 있게 보여준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성격과 역할,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제도와 문화가 공정하고 선진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하는 한편, 21세기 미래의 종교 현실과 역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묻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사회제도의 발달과 공정한 세속적 권위의 강화로 변모하는 종교의 역할이다. 저자는 10장에서 2007년 코펜하겐에서 겪은 자전거 서비스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그리스도교가 전통을 이어온 서구 사회에서 점차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심지어 “정부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이 서로 상쇄하는 관계로 보인다는 점에서”(321쪽) 유럽의 무신론 확산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이런 세속적 제도는 종교를 대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제도가 잘 갖추어진 것에 비해 종교적 파급력이 강한 나라, 국민 대다수가 종교가 있다고 말하는 나라, 저자가 사회적인 긴장도(여러 가지 상황에 적용되는 엄격한 사회적 규범들을 갖추고 있는가?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은 어느 정도나 허용되고, 이런 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는가의 여부)가 상당히 높다고(259쪽) 연구를 통해 밝힌 한국의 독자들이 특히 눈여겨보며 우리 사회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거대한 신들,
그들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이 책을 관통하는 초자연적 감시에 대한 여덟 가지 믿음이 있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 여덟 가지 믿음은 종교가 거대한 사회를 만드는 데 되었다. 이제, 이 여덟 가지 주장을 찬찬히 짚어보자.

인간은 초자연적 감시자가 있다고 상정하고, 그 감시자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볼 줄 알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고 의인화한다. 감시자는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감시하고 있다. 이런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생각은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이런 신들을 두려워한 신앙인들은 전지적 능력이 없는 신들이나 인간의 도덕성에 무관심한 신들을 믿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구성원들과 서로 협력하고 신뢰하고 희생을 감수”(22쪽)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정신-육체 이원론’과 ‘목적론적 직관’을 가지고, 이것을 통해 막강하고 거대한 신이 인간을 감시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는 신격체-하늘의 감시자-가 있으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사람들”(48쪽)은 서로 협력하게 된다.
두 번째 믿음은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이다. 저자는 ‘일요일 효과’를 그 예로 든다.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는 자선이나 봉사 등 종교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일요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비신앙인들의 반응과 그리스도교도들의 반응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74쪽)는 것을 일요일 효과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24시간 내내 종교적일 수는 없으며, 종교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친사회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믿음은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이다. 저자는 신의 성정에 관한 평가실험을 통해 “신이 무자비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이 자비롭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부정행위를 할 가능성이 훨씬 낮”(86쪽)다는 것을 입증했다. 초자연적 존재에게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신의 자비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직접적이고 이는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신은 정반대 효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리를 저지르고 부추기는 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87쪽) 이는 천국보다 지옥을 믿는 비율이 높은 나라의 범죄율이 낮다는 아짐 샤리프와 마이크 렘툴라의 실험 결과에서도 입증되었다.
네 번째 믿음은 마 타리니Maa Tarini 여신을 믿는 인도 버스 운전기사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이다. 자신의 귀중품을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길 때 ‘신성한 유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니 무신론자보다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협력을 촉진하는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는 사람이라면 협력의 상대로 신뢰할 수 있”(123쪽)다. 9?11 이후에도 미국인들은 무슬림보다 무신론자에게 더 큰 반감을 가졌으며,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은 불신에서 비롯된 반면,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현오감에서 비롯”(149쪽)되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행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과도한 종교적 행위는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는 믿음으로 설명된다. 독실한 신자들이 이런 자학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거세나 장기간의 금식, 특정 음식 섭취 등 “거짓으로 꾸미기 어려운 행위를 함으로써 종교집단에게 신심을 증명해 보이는 효과가 있”(182쪽)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과도한 행위를 통해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종교적 믿음은 거짓으로 꾸미기 쉽기 때문에,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합리적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비용의 종교적 행위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진화”(188쪽)해온 것이다.
어린이에게 도덕적 심판을 하는 산타클로스는 왜 거대한 신이 될 수 없는가?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열렬한 추종자들이 독실하게 그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회적 증거가 없으면 그 신은 사람들을 개종하게 만들 힘을 발휘하지 못”(205쪽)하고 지리멸렬한다. 그래서 초자연적 감시자로 도덕성에 관심이 많은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의 신화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문화적 진화라는 막강한 힘이 작용하여 문화적 생존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종교집단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저자가 주장하는 초자연적 감시의 일곱 번째 믿음을 보자.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지구상 최후의 수렵채집 집단이라 불리는 ‘하드자Hadza'(탄자니아 북부에 거주)는 거대한 신을 섬기지 않는다. “교회도, 목사도, 지도자도, 종교적 수호자도 없고, 신의 형상이나 이미지, 조직화된 모임, 종교적 도덕성, 내세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도 없다.”(226쪽) 그들은 어느 정도 한계를 초월하는 영령이나 신을 섬겼지만, 오늘날의 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런 수렵채집인들이 거대한 신 없이도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사회는 도덕적 심판을 하는 전지전능한 초자연적 주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역사회의 결속력을 구축할 수 있었”(230쪽)기 때문이다.
마지막 종교적 믿음은 종교 간 경쟁에 관한 것이다. 거대한 집단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게 되었을 때 어떤 집단들이 더 우세하게 될까? “집단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거대한 신과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관행들로 무장한 친사회적 종교집단은 경쟁 집단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된다.”(262~263쪽) 바로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전적 진화의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문화적 진화로만 설명할 수 있다. 친사회적 종교집단의 생존을 위해 개종과 출산율의 증가를 통해 집단의 규모를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종교가 지닌 이점, 즉 출산율을 높인다는 이점은 협력을 촉진한다는 이점과 더불어 문화적 진화의 과정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280쪽)

우리가 잘 아는 이슬람교, 개신교뿐만 아니라 모르몬교나 오순절주의는 그 세력을 빠르게 확장한 반면 어떤 종파는 왜 그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동성애자보다, 왜 무신론자가 신앙인 사회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이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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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이다. 
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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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본문중에서 폐경을 완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자의적으로 만든 말이죠. 번역자의 태도로 옳지 않습니다. 공사구분을 해야죠. 
maitri 2017-09-12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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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용감한 책을 썼을까.. 레바논에서 20년동안 종교전쟁을 목격한 사람의 말이라면 이해가 될까.. 종교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썼다. 
삐약삐약 2019-01-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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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인류는 대부분의 세월을 가까운 혈연관계인 구성원들끼리 비교적 소규모 집단을 형성해 채집과 수렵 활동을 하며 서로 직접 대면하면서 관계를 유지했고, 이따금 낯선 이들과 제한적으로 교류를 했다." 대규모 공동체 생활, 낯선 타인과 협력과 거래를 시작한 시기는 불과 만이천 년 전으로, 농업 혁명이 시작된 시기다. (P.14) 그와 더불어 이른바 '거대한 신들'(big gods)에 대한 숭배가 퍼졌다.





거대한 신들은 '초자연적 감시자'다. 자연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지며, 상과 벌을 내리는 존재다.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믿음이 확산된 원인은 무엇일까. 거대한 신은 인류의 성장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가. 신앙의 토대는 무엇이고, 친사회적 성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가 다루는 질문들이다.





저자 아라 노렌자얀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특히 종교와 관련된 심리, 문화, 인류학적 연구로 CNN, BBC 등 유수의 언론에 연구 성과가 소개되었다. 저자의 주장은 여덟 가지로 요약된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다.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한 집단에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언뜻 당연하고 식상해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위의 주장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어떻게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대규모 집단생활에는 익명성이 따른다.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 다른 집단과 교역하기 위해선 중요한 거래비용이 있다. 바로 상호 신뢰다. 남을 믿을 수 있어야 생활할 수 있다. 신뢰는 중요한 무형의 사회적 자본으로, 경제적 거래 형성에도 필수 기반이 된다. 신뢰가 없는 사회는 탐색 등을 위해 막대한 거래비용이 소요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사회 체제가 고도화되지 못한 만이천 년 전 농업 혁명 당시에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바로 거대한 신들이다.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신앙으로 상대방의 도덕성을 담보했다. 사회 규모가 커질수록 신은 거대하고 전지전능해졌다.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도덕적 상벌을 내린다. 물론 소규모 채집 생활에도 신앙은 있었다. 자연 친화적이고 인간 생활에 덜 간섭했다. 무엇보다 권능을 부리는 범위도 한정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거대화될수록 신도 거대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 터키 동남부 괴베클리 테베는 돌 하나의 무게가 7에서 10톤에 이르는 장대한 종교 건축물이다. 그러나 신전 주변과 건축 당시에 농경 사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과연 수렵 채집인들은 왜 웅장한 신전을 세웠을까. 나아가 농업 혁명과 대규모 공동체 집단의 필요에 의해서 거대한 신들을 믿게 되었을까. 아니면 거대한 신들에 대한 믿음이 대규모 사회를 형성하게 하였을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다.





거대한 신은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하고 사회적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 '친사회적 종교'다. 현재도 다양한 심리 연구 결과, 종교 관련 상징을 제시할 경우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공정한 거래를 한다. 기독교 신자와 무신론자는 일상적으로 행동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기독교 신자는 종교적 상징물을 보거나 주일에 더욱 도덕적이고 관대해졌다.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가고, 종교의 효과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다. 무신론자 거부감이 절반을 넘는데, 이는 이슬람보다 높은 수치다.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불신이었다. 무신론자는 믿을 수 없어서 거부당했다. 순교, 엄격한 금기 준수, 심지어 힌두교의 카바디 등의 종교적 자학행위는 일종의 고비용 신호전달로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신앙은 인류의 대규모 집단화와 함께했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들은 종교적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신뢰가 높다. 이유는 고도화된 사회 체제와 제도 덕분이다. 제도와 법체계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공평한 사회일수록 비종교적이고 무신론자에게 관대하다. 구성원들이 신앙으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필요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대부분이 믿는 종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사회적 제도와 법체계가 고도화될수록 친사회적 종교에 대한 의존이 감소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일만여 개의 종교가 있고, 하루에도 두세 개의 신흥 종교가 발생한다는 추산이 집계된다. 저자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도 미래에 종교가 건재할 수 있는 이유로 높은 출산률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세계 독재 국가들의 사회적 신뢰도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전히 종교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인간의 직관적 사고 방식에는 친종교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종교를 설명한다. 어떻게 거대한 신들에 대한 신앙이 발전하였고, 초자연적 감시자가 사회적 신뢰 관계를 증진시켰던 사례와 연구 결과를 설명한다. 종교가 친사회성을 띄고 세계적으로 전파된 이유다. 반면에,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전쟁과 종교적 분쟁 또한 거대해졌다.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는 행위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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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10-25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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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감 새창으로 보기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 | 홍지수 (옮긴이) | 오강남 (해제) | 김영사

  2016-09-19

_원제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2013년)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1.

‘신’의 존재감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양식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 이백년 동안 지구상에서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이 수없이 반복됐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을 유지해왔고 여전히 독실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 오히려 종교는 빠른 속도로 그 수가 늘어나고 성장하고 변해왔다. 하루 평균 두세 개의 신흥종교가 생겨난다는 추산도 있다.

 

2.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1만 여개의 종교가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지만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는 극소수 몇 개의 종교를 믿는다. 즉 몇몇 종교들이 전 세계 신앙인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문화시장에서 살아남은 극소수 종교운동들을 계승한 문화적 후손들이다.

 

3.

이 책의 저자 아라 노렌자얀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저자의 연구에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고 있다.

 

4.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이다. 신이 감시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다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신뢰의 수준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이다.저자는 신앙인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비신앙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견해를 펼쳐나간다. 아울러 지난 1만 2천 년에 걸쳐 친사회적 종교와 대규모 협력 공동체가 출현하도록 만든 역사적 동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5.

그렇다면 종교가 규정한 도덕 공동체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종교는 성스러운 가치들을 전파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고질적인 갈등을 일으키는가? 어떤 경우에 종교적 친사회성이 집단 간 적개심과 폭력으로 변질되는가? 갈등을 해소하는 데 종교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가?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들이다. 이와 같은 의문들은 종교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저자는 이 부분들에 대해 나름대로 그의 생각을 표출한다.

 

6.

시간을 거슬러 9세기와 13세기 사이 – 지금으로부터 20세대에서 30세대 전 -의 중세 유럽으로 되돌아간다면,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제도나 관행과 수없이 마주치게 된다. 저자는 그 중에서 신성재판(神聖裁判, trial by ordeal)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중세 유럽 당시는 물론 유전자검사 기술도, 전화 통화기록도, 보안카메라도, 심지어 믿을 만한 증인의 증언도 없던 시절이었다. 판사들이 증거를 조사하고 범행 동기나 범행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는지를 밝혀낼 방법들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난해한 사건들을 만나면 판사들은 신성재판을 명령했다. “끓는 물을 담은 솥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기나 돌을 던져 놓고 피고에게 그 솥 안에 팔을 집어넣어 그것을 건져내라고 명령했다. 피고가 화상을 입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했고, 그렇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렸다. 알몸인 피고를 결박하여 수심이 깊은 성수에 던져 넣어 피고의 몸이 가라앉으면 유죄를 선고하고, 몸이 물에 뜨면 무죄 방면하는 방식도 있었다.”

 

7.

저자는 장거리 교역과 종교인들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장거리 교역은 대규모 협력을 연구하기에 안성맞춤인 사례라는 것이다. 교역에 관여하는 상인 공동체들은 익명성, 책임 소재 규명이 어려운 집단적 행동이라는 문제를 극복하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과 서로 다른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빼앗기거나 사기를 당해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값진 물건들을 주고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런 교역망을 유지하고 번성하게 하려면 높은 수준의 사회적 결속력을 담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17세기 초, 아르메니아 비단 상인들이 운영했던 교역조직망을 살펴본다. 이 교역망의 최고 전성기에는 암스테르담과 런던 같은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멀리 인도, 티베트와 필리핀 같은 극동지역까지 뻗어 있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아르메니아 국가에서 정치적 군사적 혜택을 받지 않고도 자신들의 교역활동을 뒷받침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 비결은 뭘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 상인의 친족들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얽힌 정교한 통신망 및 사회적 감시망에 의존했다. 여기에 신뢰심이 추가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도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종교적 공동체들 내에서 상거래 계약이 자율적으로 이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일한 이유는 물론 아니지만)한 가지 강력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지 여부를 모두 알고 있고 늘 인간을 감시하며, 보상과 처벌을 내리는 신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8.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언급되는 (초자연적 감시에 대한) 여덟 가지 믿음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다.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한 집단에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9.

세속적 사회의 문화적 수명과 종교의 문화적 수명을 비교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일부 지역에서 세속화를 추진하는 막강한 힘들이 작용하면서 세속화가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경제적으로 더욱 풍요롭고, 실존적 안정이 확보되고, 세속적으로 막강한 제도들이 구축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과 과학과 분석적 사고에 노출되고 있다. “친사회적 종교는 세속적 제도들에 비해 한 가지 결정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다. 신앙인들의 높은 출산율이라는 횡재이다.” 종교가 지닌 이런 우위는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 약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가장 세속화된 사회들이 출산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친사회적 종교집단들이 세속화 세력에 맞서기에 불리한 여러 약점들을 출산율에서 만회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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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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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어떻게 생겨났고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나?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새창으로 보기

 알고 있는지? 종교에도 수명이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에 따르면 19세기에 종교적, 세속적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 공동체가 무려 200개나 만들어졌는데, 그 평균 수명이 겨우 25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보면 종교의 생명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길고 질길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가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한 번은 해 봤을지도 모를 그 질문에 본격적으로 천착하여 한 권의 책까지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인 아라 노렌자얀이다. 그리고 그 책이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는 종교의 생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종교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종교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해 진화론, 인지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 방법을 통해 종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밝혀낸다.



 터키 동남부에는 '괴베클리 테페'라는 유적지가 하나 있다. 원래는 중세의 공동묘지로 알려져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게 밝혀졌다. 무려 11,5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고대 유적지인 스톤헨지보다 두 배는 더 오래된 신전이다.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신전이라는 말은 이 때 종교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전이 있었던 시기는 놀랍게도 신석기 시대였다. 지금까지 종교는 농경 사회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베'의 존재는 먼저 거대한(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 때문에 농경 사회도 출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인류가 무리에서 사회로 전이해 가는데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과연 종교의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책의 전반부는 바로 그 의문을 푸는데 할애된다. 최근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육식 동물에 비해 부족한 체력적인 한계를 무엇보다 상호 협력을 통해 생존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의 언어도, 윤리 감각도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보호도 알고보면 그런 협력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런 협력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협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뢰다. 종교는 바로 그 신뢰를 구축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령 먼 이국의 이방인일지라도 신을 믿고 있다면 신뢰할만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넘어 국가가 만들어지고, 먼 이국의 땅까지 교역이 이뤄져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신뢰는 어떻게 보증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노렌자얀이 거대한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에게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신의 초자연적 감시자로써의 속성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종교의 신에겐 결코 빠지지 않는 공통된 특성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신의 명령과 믿음을 져버리면 형벌을 받는다'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산타클로스조차 1년 동안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 지켜본다는 관념이 남아있을까? 종교의 신은 이렇게 초자연적 감시자와 기독교의 십계명과도 같이 신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형벌을 내리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구축되었다. 왜나하면 바로 이것이 상호 협력을 위한 신뢰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회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무역을 할 때, 언제나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따졌다. 신을 믿으면, 그 역시 초자연적 감시자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며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도덕적으로 행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설령 같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뤄졌다. 실제로 당시엔 서로 다른 신을 많이 믿었지만 이방인 사이에 교역이 이뤄지는 것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을 믿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바로 이슬람교 최대 성지 순례 행사인 '하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로 성지 순례하는 하지는 이슬람교도라면 꼭 지켜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해서 매년 수백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이나라 저나라에서 찾아든다. 한 마디로 이슬람교에서 가장 대규모로 이뤄지는 국제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처럼 온갖 국적과 파들이 모이는 행사에 모이는 교도들이 그렇지 않은 교도들보다 더 타인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여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폭넓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종교적 체험이 도덕의 테두리를 확장시킨'(p. 304)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재밌는 예 하나를 들자면, 9. 11 이후 미국에서 무신론자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졌다는 게 조사로 입증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을 믿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자신의 아기들을 위한 보모를 고르기 위해 유타주에 주로 공고를 낸다고 한다. 거기는 몰몬교들이 많기에, 신을 믿는 그들이라면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신은 인류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호 협력을 위한 증진 방안 중의 하나로써 인위적으로 구축된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신이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신이 있어 인류가 좀 더 사회적이 되고 도덕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입증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빈도가 증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종교로 인한 많은 갈등을 보고 있다. IS는 코란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렌자얀은 그것이 전적으로 종교의 탓으로 볼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는 원래 이타주의적이 되도록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소속감이 필요했다. 그 소속감을 주기 위해선 종교 나름의 성스런 가치의 강조가 필수적이었는데, 현재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 대부분은 바로 이 성스런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여기게 되는 바람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렌자얀은 그런 종교들간의 타협불가능한 성스런 가치들 역시 마땅히 타협 가능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 본연의 의미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리하자면, 내게는 종교 본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 천 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참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필 주커면의 '신 없는 사회'를 읽은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이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가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신 없이도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아라 노렌자얀 역시 이 책에서 그런 나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민이 정부에 대해서 가지는 신뢰가 무척 크기 때문인데, 노렌자얀은 그것이 무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정부에 대한 믿음으로 전이된 것으로 설명한다. 필 주커면도 여기에 대해선 그다지 반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종교가 그냥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문화로 자리잡았기에(다시 말해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아비투스화 되어버렸기에) 가능해진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까. 이 책은 무신론의 유혹이 깊어지는 시대에 종교의 효용이 그렇게 없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종교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책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고 내부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도록 이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종교인으로 넘쳐나는 우리 나라가 이토록 살기가 어렵고 힘든 것은 우리가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지도 않고 서로 자신의 성스런 가치만 고집하고 때로는 그것을 탐욕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국정마저 한 이상한 종교인(과연 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때문에 파국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이제야말로 과연 종교라는 게 무엇인지 그 근본부터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렌자얀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종교의 본질은 상호 신뢰를 증진하여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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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로이 2016-10-2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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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탄생과 성장, 그 실체를 다양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잘 정리한 책 새창으로 보기
신과 종교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종교인들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면

바로 종교인들의 거센 공격이 빗발치기 십상인데 이 주제는 기본적으로 논쟁이 제대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신과 종교가 상당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종교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와

그 전파과정, 인간 사회에 있어 끼치는 영향까지 종교를 논리적으로 제대로 분석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통해서 신과 종교라는 허구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을 이미 경험했지만

이 책은 좀 더 사회학, 심리학적인 면에서 종교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먼저 신을 '인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존재, 존재의 근거 또는 만물의 총체로 신을 보는 일부 신학적인 교리들과는 달리,

신앙인들의 일상적인 생각 속에 존재하는 신은 마음을 지난 인간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사에 개입하는 막강하고 거대한 신이라는 개념이 인간 사회에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유형의 신들이 인간을 감시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믿음을 받아들인 사회들이

협력적인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적 감시는 낯선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어 초자연적 감시자가 출현하는 데 필요한 선행조건이 되었고 친사회적인 종교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도

협력이 가능하게 만들어 더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결국 거대한 신의 존재와 복잡한

사회집단의 형성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선 무신론자들에 대한 신앙인들의

편견에 대한 다양한 조사 결과와 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타 종교인들보다 무신론자에 대해

더 불신을 갖는 이유는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통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다는 말인데

현실에서 종교를 빌미로 이뤄지는 각종 범죄들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편견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한국 사회는 불신의 사회여서 무신론자에 대한 배타적인 편견이 적은 편이지만 종교 국가인

미국 등에선 무신론자가 동성애자보다도 더 불신의 대상이 된다니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해선 친사회적 규범을 창출하는 강력한 세속적 제도에 노출시키거나

그런 암시를 주는 방법, 무신론자가 많다는 사실을 노출시키거나 그런 암시를 주는 방법, 사회에서

종교적 성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아무래도 종교인들처럼 맹목적이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종교인들처럼 세력을 형성하거나 자기 표현을 강력하게 하지 않는 한 종교인들이 만들어내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긴 쉽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친사회적 종교집단은 집단생존율에서도 우위를 보이고 문화적 안정성도 가지고 있으며 종교인들은 출산율마저 높기 때문에 다른 집단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점이 많은데, 이런 종교의 위력은 결국 사회가 종교를 대체할 강력하고 세속적인 대안을

개발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정부와 사법기관 등 세속적 기관들이 충분히 신뢰를 받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면 결국 종교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종교가 어떻게 인류사회에 등장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지와

종교의 미래도 조심스럽게 엿볼 수 있었다. 종교가 분명 인간들의 결속을 이끌어내며 거대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이상적인 국가들로 생각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을

보면 더 이상 종교가 그리 필요한 것 같진 않다. 다만 종교가 무용한 세상이 되기 위해선 세속적인

사회가 충분히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면 종교가 여전히 기세를 떨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씁쓸한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종교가 없는 세상을 노래한 

존 레논의 'Imagine'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데 종교의 실체에 대해 다양한 연구결과를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서 이론적으로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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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6-10-23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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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은 제목만 얼핏 보면 "신의 존재 여부"를 과감히 논하거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유신론 vs 무신론"의 현황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런 추상적이고 어차피 똑떨어진 답이 나오기도 힘든 물음에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처럼 무익한 수고를 벌이는 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때로는 특징적 혹은 무작위로 뽑힌 집단을 두고 벌인 실험을 통해, 중립적이고 과학적 접근으로 "왜 신은 우리 인간의 관념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나"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않고는 차라리 부차적인 이슈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면(아주 어리석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 신은 속타서 죽을(?) 지경이겠지만 여튼 인간의 시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인간은 이런 번거롭고도 부자연스러운 개념을 만들어 내어 자신도 괴롭히고 안 믿겠다는 다른 동족까지 괴롭혔는지, 그 해답이 그런 이유에서라도 필요는 합니다.

일일이 인간사에 끼어들어 악당을 처단하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 냉정하고 초연하며 공감도 안 하면서 전지전능하기만 한 신, 따라서 그 가시적 흔적을 확인도 할 수 없는 저런 신을 왜 인간은 숭배하는지, 지극히 이기적이고 생존 본능에 충실하게 진화해 온 인간치고는 썩이나 안 어울리는 이런 선택("관념론적 신앙")을 왜 거창하게 해 온 건지,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하나 짚어 나갑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그저 과정의 기술에 그친다거나, 최종적인 해답은 독자가 스스로 내 보라며 무책임하게 발을 빼지도 않습니다. 그 나름 대담한 결론까지 낸다는 점에서 독자는 더욱 혹해서 읽어 갑니다. 그리고 제법 알찬 생각거리까지 건지거나, 더 나아가 저자들의 결론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논쟁적인 주제를 담았으면서도 흥미롭고, 논의의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하기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첫째 명제는 유신론/무신론 여부에 관계 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믿음 체계는, 일일이 마을의 원로나 실력자가 개개인의 뒤를 쫓아 다니며 도덕을 준수할 수고를 덜어 줍니다. 사회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1차 집단의 윤리가 다양한 개성과 선택을 규율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만, 일탈 분자의 질서 파괴 행위를 작건 크건 용인하면 공동체 전체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합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이 아니라 확신)시키고, 설령 현장에 감시하는 (사람의)눈길이 없다 해도 저 위에서 전지전능한 이가 지켜 보고 있다고 환기시키면, 그저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가 강력하다는 겁니다.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서는 우스운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역사 시대 초기 전체가 공존할 지혜가 필요한 단계에선 이게 꽤나 효율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효과를 크게 보았을 터입니다. 우리 종이 지금 이 정도로나 생존을 이어 왔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리는 것도 저런 어설픈 믿음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소수의 범죄자(어리석기까지 한)가 공동체 전체를 망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아닐까요?

종교의 효과가 개인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 쉽게 말해 이런 뜻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개인이 종교적(이라기보다 사회적) 의무를 잘 지킨다기보다, 그저그런 껄렁한 신자가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조성되었을 때 이런 의무를 더 확실히 지킨다는 겁니다. 즉 종교는 개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일일이 고쳐 먹게 한다기보다, 불특정 다수가 평균적으로 나쁜 마음을 덜 먹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건, 이런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이라기보다 차라리 친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 경우 다분히 실용적인 효용을 창출하며, 여기서 강조하는 도덕은, 결국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돕는 공리적 메커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시스템 한 구석에 고장이 났을 때 보수 없이도 자발적 봉사에 나서는 건 그게 동기가 종교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결국은 개인의 행동으로 사회가 건전한 질서로 복귀한다는 그 실용적 결과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바른 행동으로 사회의 질서가 잡히는 그 결과에 주목하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내내 구사하는 "친사회적"이란 용어는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천하고 가난하며 사악한 종자들에게 죽어서 지옥 간다는 협박도 못 하면 어떻게 교회가 유지되겠소?"라는 어느 성직자(...)의 말이 나옵니다. 여튼 이런 사후 세계에의 엄혹한, 혹은 한없이 희망적인 기제가 개념상으로 구축되면, 사람들의 행동은 아무 현세적 보상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친사회적(결과적으로는)"으로 재편됩니다. 처벌은 꼭 현세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며, 존재의 필멸성, 유한성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머리 속에 인식된 이들에게 "지옥의 위력"은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혹은, 현세의 처지에 큰 만족을 못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신(사실은 이를 빙자한 권력자의 야욕)의 미션을 수행하면 지복(至福)의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끼로 테러리스트의 길을 부추기는 집단(IS 등)도 있습니다. 샤리프와 렘툴라의 실험 보고서가 이를 직접 표명하지는 않아도, 어쩌면 이 역시 "친사회성 증대"의 범주로 판단하면 (테러리스트= 반인륜 이란 이유에서) 다시 타당성이 확인되는 셈입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경우에도(흑인이나 [미국에서는 소수파인] 가톨릭이나, 여성이나, 심지어는 모르몬, 동성애자보다 더) 나쁜 취급, 불신을 받는 게 흥미롭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어떤 기독교도는 "설사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파로 적대한다 해도, 그가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보다야 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같은 말을 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는 종교 관념이 희박한 동양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주장 같습니다. 한국이라면 오히려 무교라고 밝히는 이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인상도 주고, 기독교라 해도 자파에서 이단이라 점찍은 이들에게는 무교인(잠재적 고객)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 드는 예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코코넛을 운반하는 운전수들"입니다. 힌두의 신전까지 코코넛을 그 원산지로부터 옮겨 가야 하는데, 중간에 가로채거나 의무를 태만히하는 이도 없이, 일단 앞 "주자"로부터 바톤을 넘겨 받은 모든 운전수들이 착실히 이를 (아무 대가 없이) 운반핝다는 겁니다. 인도 사회가 정직하고 이들이 교육을 충분히 받아 명예를 지키는 까닭일까요? 전혀 아니겠죠. 그 비결은 오로지 "마 타리니 신이 무슨 응보를 내릴지 몰라서" 같은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신념은 경제 질서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핵심 팩터이기도 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예전에 사회를 선진 질서와 그렇지 못한 혼란으로 양분하는 원인으로 "트러스트"를 꼽은 적이 있죠. 이런 "신뢰"가 종교적(거의 미신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도, 이성적인 형량 과정을 거쳐 자발적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회 질서의 고도화 단게에 차별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등한 개인들의 예를 들며 "이런 문제도 하나 해결 못하는데 A의 효용이 대체 무엇이냐?"며 유치하고 미숙한 불평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자신의 예를 들며, 나 자신이 효과를 못 봤으니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며 일반화의 폭주 그 끝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가 있어도 이 모양인데 종교가 없으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관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신이 창조하여 완전무결한 인간이 오늘날 이지경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어디냐며 대견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훨씬 건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이 있고 없고, 어느 종교가 그르고 옳고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든 뭐든 어떤 제도와 신념의 도움을 빌려 인간이 얼마나 나은 삶(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을 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공리적 결과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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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6-10-25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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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4

The Ch5 Studio 독후감 철학

The Ch5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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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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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사람들 [66호] 지나온 10년 앞으로의 10년

기획 - 내용보기

 [66호] 지나온 10년 앞으로의 10년
등록자 교육담당등록일자 2019.02.14
IP 59.29.x.153조회수 951

진행_원상호 편집위원장
 
참석_성락철 무위당사람들 이사장, 황도근 무위당학교장, 심상덕 무위당기념관장,
       김찬수 무위당사람들 기획관리이사, 장동영 무위당학교 운영위원장,
       박설희 무위당사람들 사무국장, 황진영 무위당사람들 사업팀장
 
정리. 편집위원회
 
 
“이때까지 추구한 게 의미가 없으면
소리 없이 버려야 한다.
10년을 쌓았건 20년을 쌓았건
그게 모래성이라는 걸 알았으면
허물 줄도 알아야 한다.
집착(執着)이 병통(病痛)이다.”
-무위당 어록 중에서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이 올해로 법인 설립 10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잘한 일도 많았지만 미숙했던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추구한 것이 의미가 있고 모래성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면 앞으로의 10년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일꾼들이 지난 1월 17일 무위당기념관에 모여 지나 온 10년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10년을 내다보며 비전을 공유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10년이 그랬듯 앞으로도 무위당 선생님의 사상과 삶의 실천 방식 등 기본 정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생명과 평화, 협동, 연대의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중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지나 온 10년의 성과와 성찰
 
진행자
: 안녕하세요. 어느덧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이 법인으로 전환된 지 10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선 지나 온 10년을 돌아보며 성과와 성찰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성락철 이사장
: 무위당 선생님은 생전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후학들이 그 말씀을 따르느라 10여 년을 허비한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선배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속상한 일도 많아요. 협동운동과 생명운동으로 한정해 놓고 일을 한 것 같다는 말입니다. 사실 선생님은 생명운동, 협동운동보다 훨씬 더 큰일을 하신 분이죠.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했어요. 신협운동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단 말입니다.
 
제가 예전 어느 날 선생님을 찾아가서 투정을 부릴 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야, 이놈아, 신협운동이 너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 게 아니다. 신협운동을 통해 민주화 교육을 시키겠다는 말이야”라고요.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데모한다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며 농촌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신협 조합원들에게 민주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하나로 귀결돼 민주화가 되어가는 과정의 그림을 그리신 겁니다.
 
표면적으로 선생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절에 신협운동을 하신 거예요. 선생님은 생명운동, 협동운동, 한살림 운동만 한 것이 아닌 거죠.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그 밑에서 일했던 분들도 암암리에 와서 지도받고 그랬어요. 그 일들을 모두 기록해 놓은 분도 계시고요. 올해부터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부분을 좀 더 알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올해 가장 중요하게 해보고 싶은 사업으로 지학순 주교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해 발굴하고, 기록하고 알리는 부분입니다. 민주화와 관련된 아주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기록한 분이 기록물을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장동영 운영위원장
: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에 대해 원주 내에서는 소위 ‘그들만의 리그’라거나 ‘좌빨’이라는 등의 인식이 남아있는 것 같아 이를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할지 고민입니다. 최근에 어떤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중 비중 있어 보이는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무당인지 무위당인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왜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루냐”고요. 조금 당황스러웠고 이 말을 들으니 고민도 많이 됐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말입니다. 슬기롭게 잘 풀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무위당학교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해 말하고 싶습니다. 무위당학교가 지금보다 좀 더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으로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이 역시 고민을 많이 해야 될 것 같아요. 무위당 선생님은 담론을 많이 이야기 하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신협에 들어와서 보니까 필요할 때는 담론을 던지셨지만, 어떤 사안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는 무위당 선생님과 지학순 주교님이 굉장히 치열하고 섬세하게 고민을 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부분을 못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부분에 좀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외부에서 볼 때 무위당사람들에서는 담론만 던지고 있지 않느냐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무위당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실패하더라도 만들어가고 개척해나가는 것이 조금 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바람이 있습니다.
 
황도근 무위당학교장
: 지나 온 10년을 뒤돌아보면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이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무위당만인회는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전국적으로 화두를 던졌다면 무위당사람들은 뒷일을 거의 다 했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분이 동주 심상덕 선생님입니다. 서화 전시회를 위한 서포터 기관일 정도로 열심히 하셨습니다. 무위당사람들 최고의 일 중 하나는 2009년부터 전국 전시회를 다니며 서포터 역할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지금의 무위당사람들이 존재하는 기본 동력이라고 생각됩니다.
 
지역은 늘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미움도 사랑도 바로 옆에 있듯이 말이죠. 지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화 전시회가 가장 큰 성과 중 하나고 이와 함께 무위당 서화자료집을 낸 것은 지난 10년 무위당사람들의 가장 큰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이 생기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것이 바로 무위당학교입니다. 무위당학교는 원주에서 제법 자리잡는 데 성공한 것 같아요. 서화전시회는 전국에 알리는 데 성공했고, 무위당학교는 원주에서 인식을 바꾸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운영위원들의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 분들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무위당 모임이 지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된 것 같아요.
 
무위당학교는 앞으로도 지역 사람들을 위한 소통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정적인 일처리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의 초창기 행정은 약간 뒤죽박죽이었어요. 예산도 1억이 좀 안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산이 2억 원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예산이 더 급격하게 늘어날 가능성이 많아요. 지금까지 무위당사람들의 사무국이 힘들었던 것은 대외적인 일과 내부 행정을 동시에 하다보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다시 말하면 무위당사람들 사무국은 일하기 굉장히 어려운 곳이라는 겁니다. 전국 단위로 일을 해야 하고, 어르신도 모셔야 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은 사무국에서 일하는 국장님이나 실무자 분들이 꿋꿋하게 잘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잘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스스로 서로 칭찬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상덕 관장
: 이제 곧 무위당 선생님 25주기를 맞이합니다. 매년 기일 행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무국 직원들이 외부에서 치러지는 1박 2일 행사 때 반드시 동행했으면 좋겠어요. 하루를 같이 묵고, 먹고,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분들과 잘 알게 됩니다. 다른 행사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무위당 선생님 기일 행사 때 손님이 오면 사무국 실무자들이 외부 손님 3분의 1은 모르는 것 같아요.
 
공식적인 명함을 가지고 있는 분이야 당연히 알겠지만 그 외에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거든요. 밖에서 1박만 해도 그 주변 사람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은 생전에 어떤 손님이 오시든 사람들을 불러 인사 시키고, 함께 동행하고, 식사하고, 잠도 여자는 여자 집에, 남자는 남자 집에 모셨어요. 그 다음날 아침도 될 수 있으면 댁에서 대접하고, 그것이 안 되면 함께 모여 해장국을 먹기도 했죠. 이런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끈끈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이 싹틀 수 있었던 거죠. 그 덕분에 우리도 어디를 가면 그 분들이 똑같이 대접을 해줘요. 어디든 그분들이 계시는 곳을 가면 내 집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잘해주시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역할을 해주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라도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원주에 오겠다고 전화가 오면 재워주고, 밥을 대접하고, 숙박 장소도 알아봐 주고, 그곳으로 직접 모시기도 하고 그래요. 손님이 오면 다른 건 못해도 두부와 묵, 막걸리를 싸들고 찾아갑니다. 그러면 굉장히 좋아하고 잊지 못하는 거예요. 이런 역할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찬수 기획관리이사
: 김정남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국에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와 유명한 인물에 대한 기리는 모임도 있고, 기념사업회도 있지만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곳은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당사람들 10년의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1세대 어른부터 같이 일하는 이사님, 실무진들의 자기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다른 이사님들보다 무위당사람들에 합류를 굉장히 늦게 했습니다. 원주의 여러 단체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는데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무위당 선생님 일은 친한 친구가 핵심적으로 하고 있어서 합류하게 됐습니다. 제가 프로그램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까 인물에 대한 콘텐츠에 관심이 많았어요. 무위당 선생님은 굉장히 콘텐츠가 풍부한 분이셨고 저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한테 늘 이야기 합니다. “원주는 앞으로 무위당 선생님 때문에 먹고 살 거다”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스토리텔링이 무궁무진할 뿐 아니라 무위당 선생님은 우리 현대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나 감옥 생활, 민주화 등 거의 모두 우리 현대사와 관여가 돼 있어요. 이것은 원주로서 큰 유산입니다. 이런 사실을 원주사람들이 아직도 인식을 못하는 것 같아 굉장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다음 정말 잘해온 것을 저는 세 가지로 봅니다. 첫 번째가 무위당사람들 소식지인데요. 김삼웅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이분은 무위당사람들 소식지가 없었다면 무위당 선생님 평전을 못 썼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안에 무위당의 역사를 비롯해 인터뷰와 글을 보면 다 들어 있다는 겁니다. 소식지에 대한 평가를 굉장히 좋게 해주더라고요. 첫 권부터 봐도 몇 장 안 되지만 굉장히 내공이 깊은 소식지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4년 동안 편집장을 하면서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소식지에 대한 일만 했어요. 매일 말입니다. 그 정도밖에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또 하나는 역시 서화 자료집에 대한 겁니다. 지난해 심상덕 관장님을 따라 다녀봤는데 저 같으면 정말 못하겠더라고요. 작품이 있다는 소리에 생판 모르는 집 찾아가서 초인종을 누르는 일을 10년 넘게 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마음속으로 정말 존경하고, 누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신 것이라고 봅니다.
 
다음은 무위당학교입니다. 저는 인문학아카데미 같은 것을 예전부터 추구해왔는데요. 무위당학교 일을 하면서 ‘무위당 선생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육 이념을 실현하는 굉장히 좋은 학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건도 안 좋고 하다 보니 봄· 가을 두 번 정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만 거기에 최선을 다했어요. 실무자나 담당자는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10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진행자
: 지금까지 지나 온 10년을 뒤돌아봤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이 한 많은 일들 중 민주화 운동에 대한 분야가 없어 안타까웠다는 말씀도 있었고요. 또 외부 인사에 대한 모심의 역할을 하는 분들이 없어 아쉬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무위당학교가 좀 더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제안과 서화집 발간의 큰 결과물에 대한 성과, 전국 전시회를 통한 전국화에도 기여했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고생한 사무국의 실무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10년은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지금부터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도근 교장
: 서화 전시회 등 10여 년을 노력해서 얻은 큰 자산을 가지고 앞으로의 10년은 패턴이 좀 달라져야 될 것 같습니다. 전시회 등의 스타일보다 무위당의 사상과 접목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영상도 있을 수 있겠고요. 그렇게 전환하는 시기가 올해부터 진행됐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올해부터는 전시회를 열거나, 무위당 선생님을 소개할 때 서화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고 더욱 다양한 형태로 모든 행사들이 진행되었으면 해요. 무위당 선생님의 사상과 시대정신, 미래에 대한 비전 등 다양한 형태로 말입니다. 심상덕 관장님을 중심으로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새롭게 디자인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가 아닌 새로운 사람이 주관하게끔 무대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시각이 다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디자이너를 통해서 제2의 전시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면서 세 가지 정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무조건 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조직이 커지면 돈과 명예, 두 가지가 다가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조직이 커지고, 생명협동교육관이 생기고, 국가 예산도 받으면 상당한 명예가 걸린 일이 되어버리죠. 이 때문에 내부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이 무위당 선생님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볼 때 무위당 선생님 자체보다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안에서 일하는 실무자를 쳐다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내부 수련을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기적으로 내부 토론회를 자주 해서 스스로 다져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부 실무자들이 외부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무조건 새사람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려 있는 조직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정신운동, 사상운동이 퍼져나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누가 오더라도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중심축은 흔들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에는 어르신들이 있으니까 결코 흔들릴 조직은 아닙니다.
 
세 번째로 10년을 기획하는 분들은 과거 관성을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했다고 해서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끔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밖에서 많은 지원을 받더라도 공격을 받지 않아요. 무위당 선생님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끼리의 리그가 안 되게끔 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끼리 리그를 하다가 정치상황이나 외부 환경이 바뀌었을 때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무위당학교는 지금과 같이 시민강좌로 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대안교육이 되어야 해요. 앞으로 모든 교육은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무위당학교를 사회화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국을 모두 네트워크화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역마다 대안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과 새롭게 연결하고 연대해서 큰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상덕 관장
: 무위당 서화집이 8집까지 나왔어요. 올해는 1집에서 8집까지 작품이 나오게 해준 소장자들을 찾아가 작품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지 돌아보고 싶어요. 그동안 기증해달라는 소리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기증을 해준다고 해도 어디 걸어 놓을 때도 변변치 않고 그래서 큰 숙제였어요.
 
올해는 행구동 생명협동교육관도 준공을 한다고 하니 일단 그 핑계로 기증을 받아볼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무위당기념관 창고 안에 작품이 있는 데 예산을 세워서라도 잘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봤으면 좋겠어요.
 
박설희 사무국장
: 앞으로의 역할이나 사업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우선 요즘하고 있는 작업은 그동안 나온 서화집 1집에서 8집까지 수록돼 있는 모든 작품을 데이터베이스(DB)화 하는 것이에요. 현재 2집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분실사고도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바코드 같은 것도 정해서 무위당기념관에 들고 나는 것을 잘 정리하고 소장 작품도 잘 목록화해 전시회든지, 연구 자료로 쓸 때 바로바로 이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원로분의 책도 엑셀 작업은 돼 있는 데 마땅한 서가가 없어 묶어놓기만 했어요. 이런 자료 목록들을 연구 자료화 할 수 있게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을 정리하면서 느낀 건 심상덕 관장님이 그동안 많이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종류별로 기증자가 누구고,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등에 대한 정보가 디테일하게 잘 입력돼 있었어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 자료를 보면서 느꼈습니다. 사무국에서 심 관장님의 뒤를 이어서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무위당학교를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무위당사람들이나 무위당학교에 애정을 가지셨던 분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주십니다. 그런 의견을 많이 들어야겠어요. 생명협동교육관 관련해서 만인회 분들 뵈러 다니실 때 저도 되도록이면 꼭 같이 다니고 싶습니다. 큰 그림을 같이 그려줄 분들 얘기를 많이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가 뭔가 제안하고, 시작할 때도 그 분들의 의견이나 고민을 받아 안고 그걸 녹여내 하는 것이라고 많은 분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뭔가를 진행하면서 앞서 나갈 때, 그동안 고생하신 분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응원하면서 잘한다고 애정을 가져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을 할애해서 정기적인 토론회나 학습모임 등을 통해 우리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사업적으로, 일적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정신 등 소양을 쌓아야 버틸 수 있고, 오래 지속할 수 있고, 좀 더 창의적이고, 좀 더 주도적인 활동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일의 책무성이 높아지는 만큼 우리가 견딜만한 기본 정신, 이런 것들을 잘 할 수 있게 저희 자체적으로 그런 것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역할을 잘 받아 안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한편으로는 그런 것도 하고 싶어요. 최근 지방분권화 얘기도 그렇고 지역자치, 마을공동체, 도시재생이든 굉장히 여러 단위의 지역 모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공동체 운동, 지역자치를 표방하는 많은 운동들이 있는데 원주에서 그렇게 해오던 면모들이 운동사적 관점으로 잘 번역이 돼서 후배들이 잘 새길 수 있도록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얼마 전 원로님에게도 물어봤는데 “노동운동, 빈민운동, 농촌운동, 도시문제 해결과 같은 분과별 운동이 많았는데 무위당 선생님은 원주에 있었지만 운동의 큰 틀 자체를 성찰하시고 새로운 전망을 내놓으셨다”라고 하셨어요. 운동사적 관점에서 지금의 시민단체 등 시민사회 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주신 거 같아요. 이런 이야기들도 세상에 잘 발신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제가 교류하고 있는 연구자들과 자료를 모아서 공부하는 모임을 작게라도 해서 세미나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전시회나 무위당학교 모두 위에서, 중앙에서 지시하는 형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인 마음들이 모여서 지역모임들이 꾸려졌거든요. 이것이 무위당 선생님 운동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의 운동도 그렇게 돼야 될 것 같습니다.
 
봉산동 도시재생과 결합하고, 심상덕 관장님은 원주초등학교와 연결되는 등 지역과 밀착한, 사회적인 흐름들이 구체적으로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잘 만들어지고 있구나. 그동안 해온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사상에 대해서 교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연구모임 등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갈 수 있도록 잘 준비하겠습니다.
 
김찬수 기획관리이사
: 생명협동교육관이 생기면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많은 분이 생각하고, 꿈꾸는 다양한 교육에 대한 커리큘럼이 생길 것입니다. 생명 협동에 대한 교육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그런 조건을 만들어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무위당사람들은 이제 태동기를 거쳐 거침없는 전개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발전기까지 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발전기로 도약하기 위한 전환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전환기를 잘 넘기면 정말 무위당사람들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을 하다보면 정체기도 오고 힘든 시기도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생명협동교육관은 다음 세대가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는 장으로 우리가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동륜 선생님이 남편인 황도근 교수에게 ‘당신은 정사각형 네모를 원으로 생각하고 굴리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 정사각형도 계속 굴리다보면 모서리가 깎이기 마련이지요. 저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 중 쉬운 건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 10년도 그 생각으로 저에게 주어진 일을 하겠습니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황진영 사업팀장
: 요즘 실무자로서 정체성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는 왜 ‘무위당사람들’과 함께하는가? 그 정체성을 찾는 것이 동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디서 일하든지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와 조직이 함께 간다고 생각하기 위해 지금은 저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와 내년까지가 조직도 그렇지만 실무자에게도 중요한 해가 될 것 같아요. 저는 무위당사람들에 합류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일하면서 번뇌도 가끔 있어요. 이런 부분들을 주위에서 잘 이해해주고 보듬어줘 일할 수 있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기본 정신을 실무자들이 잃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정기적인 토론과 학습도 좋지만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무위당 선생님의 사상과 삶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 사상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무위당 선생님이 남겨놓으신 유산을 가지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등 실무자로서도 체험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런 것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진행자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의 10년은 역시 두 가지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가 새로운 변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위당 선생님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더욱 애써야 된다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올해 안으로 행구동에 생명협동교육관이 준공되면 지금보다 할 일은 배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직이 커지고, 규모도 방대해지겠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선생님의 사상과 시대정신이 올곧게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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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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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다음
장일순 선생님.. he**kmh | 2012-07-1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장일순 선생님의 어록을 모았다.
하나 하나가 예술이다.
 
특히, 그의 호인 '무위'에 대한 참 의미가 드러난다. 계산하지 않는 마음, 제 것 막 나눠주려는 마음 말이다.
또한 실패 해야, 자기반성도 하고, 남 아픈 줄도 알게 된다는 말..
연대를 통한 새 세상의 꿈..
와.. 역시 대박이다. 장일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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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아시나요? 5f**10 | 2010-07-17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며 모든 이를 다 알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장일순 선생도 내가 이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렇게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선생은 강원도 원주에 대성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며, 한살림 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란 사실을 알고서 "아, 그 사람!!"하면서

나의 기억 창고의 녹쓴 문을 열 수 있었다.

 

집에서 시내까지 15분 정도의 거리인 원주천 둑방길을 지나가는데 2시간이나 걸려 다닌다는 장일순 선생의 호는 무위당이다.

또한, 선생은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서화가이며,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다.

凡人이라면 무심코 지나칠 발 아래의 풀들을 보면서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자신의 스승이요 벗이란 생각에 잠겨 그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티베트 수도승의  오체투구만큼이나 진지함이 느껴집니다.

 

무위당 선생은 향기가 풍기는 듯합니다.

암울한 시절 민주 투사들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기 위해 야밤에 감시의 눈길을 피해 원주로 선생을 찾곤 했답니다. 멀리서도 향기를 풍기니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어렵싸리 찾아와 밤새 선생과의 대화로 기를 충전받고 했나 봅니다.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도 선생의 벗이었답니다.

 

"향기가 못가는데 없고 인적없는 골짝에서도 그 향기를 감추지 않는다"(14 쪽)

 

선생은 평생 붓글씨를 쓰셨습니다.

예서에서 해서 그리고 행서까지 두루두루 잘 쓰셨답니다. 특히, 묵으로 난을 즐겨 쳤으며 추사의 "불이선란(不二禪蘭)"과 대원군의 "석파란(石坡蘭)"만큼이나 선생의 "무위란(無爲蘭)"도 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흔한 잡풀에, 풀 한포기 위에 꽃 대를 치고 꽃 잎을 그린 붓 자국이 마치 사람의 조용한 얼굴 모양입니다. 서화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도 한 눈에 척 알아 볼 수 있는 그림과 글씨들이 이 책엔 온통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선 묵향이 은은하게 풍깁니다.

 

"서필어생(書必於生), 글씨는 삶에서 나온다"(31 쪽)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면서 유학과 노장사상에도 해박했다. 선생의 할아버지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영향을 받아 "걸어 다니는

동학(東學)"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종교간의 장벽을 허무는데 앞장선 선각자입니다.

 

"모든 종교는 담을 내려야 합니다......어차피 삶의 영역은 우주적인데 왜 담을 쌓습니까? 그것은 종교의 제 모습이 아닙니다.

담을 내려야 합니다"(93 쪽)

 

불가에선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즉,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道란 세속에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천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세속에 있는 것이라고 설파하면서 해월 선생의 가르침도 전하고 있습니다.

 

"천지즉부모(天地卽父母)요, 부모즉천지(父母卽天地)니, 천지부모(天地父母)는 일체야(一體也)라"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94년 원주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선생에 대하여 김지하 시인은

이렇게 평합니다.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 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134 쪽)

 

이렇듯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세상을 늘 바로 보았으며 지혜와 용기를 얻기 위해 찾아온 많은 이들을 따뜻한 맘으로

맞이했던 故 장일순 선생은 이 시대의 선각자며 만인의 스승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선생의 말씀과 그림을 함께 담은 잠언집입니다. 지난 6월 중순 암투병중 하늘로 가신 제 아버님의 분위기와 비슷하여 읽는 내내 아버님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소유하려 하면 경쟁이 생기고 그것은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21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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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la**971 | 2010-03-06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잠언집...!

사실 잠언집에서 하는 말들은 다 똑같다.

다 그 말이 그 말이고, 모두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말들을 그저 책에서 풀어 써 놓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하지만 문제는 삶은 그렇게 생각대로, 계획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다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고 싶다!!!

하지만,,, 내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차서,,, 남들보다 잘 살고 싶고,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나 혼자의 힘으로는 마음속 허욕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서 너무 힘들다.

나의 그 욕심이 나를 괴롭혀서 내 삶은 그리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그래서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무언가 한 줄기 마음의 희망을 찾기 위해, 희망의 빛을 발견하기 위해서~~!!!!!

 

- 화장실에서 일을 본 후, 뒷물을 하지 않으면 영 찝찝하다는 무위당 장일순 .

- 자신이 암에 걸린 걸 알고서, 세상이 병들고 자연이 병들었는데 어찌 사람이라고 병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덤덤히 받아들였다는 장일순.

- 20분이면 갈 거리를 만나는 사람들과 안부를 물으며 걷느라 2시간여 가량이나 걸렸다는 장일순 선생.

- 친구가 똥통에 빠졌을 때 밖에서 나오라하면 나오지 않으니, 나도 똥통에 들어가 여기는 너무 더럽고 냄새가 나니 같이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고, 거기까지 가야 한다고 하는 선생.

- 예수가 구유에서 태어난 이유는, 말의 먹이로 태어남이라고,,, 예수님은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모두 구원하심이라고 말하는 선생.

 

문체가 정말 톡톡 튄다.

사투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 말투가 재밌기 까지 하다.

그래서 글에서,,,,,,,,,,, 더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살아계셨다면, 무턱대고 한번 찾아가서 직접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은 느낌이 물씬 든다.

한국판 탈무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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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go**kysea | 2010-03-01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잠언집인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받자마자 느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지금 무언가 가득 들어있다.' 실제 책 무게과는 달리 더 무거운 무언가가 들어있다고 느꼈다.

깔끔한 표지와 더불어 책 속의 글들은 짧게 쓰여져 있다.

까만 글씨로 가득차 있는 답답한 책이 아닌,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글씨와 그림, 글 그리고 여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순히 글이 짧아서 그림이 작아서 여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가 선생님의 글을 읽고  그 글에 대해서 짧게나마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여백이 일부러 주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글을 하나하나 읽어내려 갈 때마다 잠시 생각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은 나에게 이렇게 적용시키면 좋겠다'라는 생각 정리의 공간인 셈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욕심, 명예, 권력, 물질적인 것 등에 따라서 선에서 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깨끗한 자연 뿐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더러워지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경쟁으로 가득 차고, 최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경쟁은 필요하지 않다고,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하며, 화목이 산을 움직이라면 진짜로 산을 움직일 수 있을거라고 전하고 있다.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가지길 원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나와 다른사람 즉 그대를 동일시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나와 그대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에 의해 태어났으며, 먹고 살 수 있는 것이고,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끼리만 하나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환경이 되어주는 자연과 그 속에 사는 동물들, 작은 벌레까지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왕 함께 살아가는거 화목하게 살아야 서로가 기쁘고 더욱 행복을 맛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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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de**pure | 2010-03-01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무위당 장일순을 아세요?
거리에 나가 장일순을 물으면 열에 아홉은 누구신지 모른다고 하지 싶습니다.
이렇게 책의 첫 부분에서 우리에게 장일순 선생을 아는지 판화가 이철수씨가 물으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아홉에 내가 속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무위당 장일순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 분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읽고 붓글씨를 보면서 아! 참 대단한 분 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얼굴을 닮은 난초가 인상적이다. 푸근하면서도 걱정 근심이 없는 미소가.

비록 가톨릭 교인이면서도 할아버지께 배운 한학의 영향인지 노장철학과 동학(해월 최시형), 생명사상, 공동운명체에 관한 한살림 운동 등 다양한 사상들을 한데 묶어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의 글들은 가끔 힘들고 지칠 때, 나의 욕심이 너무 앞서 나갈 때 읽으면 참으로 좋을 듯 싶다.
그 중에 몇 개는 다시 옮겨 적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자 한다.

잘 쓴 글씨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 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출세
요즘 출세 좋아하는데
어머니 뱃솟에서 나온 것이 바로 출세지요.
나, 이거 하나가 있기 위해
태양과 물,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이 지구 아니 우주 전체가 있어야 돼요.
어느 하나가 빠져도 안 돼요.
그러니 그대나 나나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 거에요.

향기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향기는 절도 퍼져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요.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되
바라는 것 없이 그 일을 하고 가는 것이지요.
그 길밖에 없어요.

실패
자꾸 떨여저도 괜찮아요.
떨어져야 배워요.
댓바람에 붙어 버리면 좋을 듯싶지만
떨어지면서 깊어지고
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법이에요.
남 아픈 줄도 알게 되고.


참 따뜻한 마음을 지닌 큰 선생님이 어린 학생을 알기 쉬운 말로 타이르는 듯 하다.
일상에서 지치고 힘든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위로가 되는 말들이 많다.
차분해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글들이다. 주변에 놓고 나의 욕심이 커져갈 때면 자주 찾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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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것을 bo**ch2 | 2010-02-2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것을

 

 

제목이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살아가는

것이 항상 일방향으로 직진하다보니 쉬어

가는 여유를 찾는것도 삶의 일부인 것을 많이

느끼는 요즘인데 이책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를

 준다.

 

책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과 서화로

 이루어져 있다.단순하지만 곧은 말씀들은 쉽게
책을 넘기지 못하게 한다.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라고 말하기 보다는 우주의 법칙에

기대어 사람의 도리들을 따뜻한 언어로 말해주고

계신다. 

 

139쪽에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는 말이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한뿌리요, 세상 만물은 나와
한 몸이나 다를 바 없다는 얘기 입니다."라고
기본이 되는 삶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

 

민주화운동과 생명 사상가였던 무위당 선생님의
말씀은 자기 본위로 살아가는 모든이게 교훈이될 

말씀을 해 주시고 있다.

한번도 자신의 서화를 돈으로 바꾼적 없으신 무위당

선생님의 삶의 길을 바라보니 내 스스로가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뒤적여보며 다시 한번 실천하는 삶을
살다간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


43쪽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앉은 자리 선 자리를 보라
이루려 하면은 헛되느니라
자연은 이루려 하는자와
함께하지 않느니라"


213쪽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악순환이 끊어진다.
상대를 죽이고 가려 하면
악순환만 초래할 뿐이다.
무조건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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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kh**e9 | 2010-02-23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머리속에 자꾸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요.
처음에는 작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무위당 장일순이라는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거 있죠?
도대체 장일순 선생님이 누구이길래 다들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어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면서 교육가, 서예가로 특히 난초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네요.
노자 사상에 관심이 많아서 노자 이야기를 저술하기 했으면 그 자신이 실제로 무위자연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랬다고 하네요.
다양한 문인들과 종교인들을 통해서 종교적 갈등이 아닌 화합을 중시한 것 같아요.
노자를 풀어쓴 노자 이야기의 저술이 있지만 이 책은 선생님의 지인들이 편찬한 잠언집의 성격의 책이라고 하네요.
사실 잠언이라고 하면 좀 고리타분하고 세상이나 현실과 좀 동떨어진 이야기들일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의 잠언은 사람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구나 서민들의 삶과 말이죠.
그래서 더욱 더 한 마디 한 마디에 빠져들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읽다보면 마음에 무언가 와 닿는 느낌이 들어요.
밥 한 그릇에서 온 우주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현대의 물질만능주의 세상에 물들지 않은 도도함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낮은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고 사랑하고 따뜻했던 선생님의 마음이 가르침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결국에는 티끌인 것을, 우리는 너무 아둥바둥 살아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글 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도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깃들여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진주가 진흙탕 속에 있어도 진주인 것처럼 진정한 깨달음은 빛을 발하는 것 같아요.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이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각자가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더 늦기 전에 말이죠.
비록 똥물이라도 함께 빠질 수 있고 그 속에서 올바른 길을 인도할 수 있기를 말이죠.
마음 속에 느끼는 것이 하나 있고 무언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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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소중한 가르침을 주고 떠나신 스승의 말과 그림 ah**527 | 2010-01-31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장일순 [張壹淳, 1928.9.3~1994.5.22]

 한국의 서화가·사회운동가·정치가. 1970년대 반독재투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자연복구를 주장하는 생명사상운동을 펼쳤다. 서예에 뛰어났고 만년에 난에 사람의 얼굴을 담는 '얼굴 난초' 작업을 했다.

(네이버 두산대백과사전 발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에 대해서는 생명운동가이고 사람 얼굴 난초 그림, 서예 몇 점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예전 어느 책에선가 선생님이 지으신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에 대하여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도 분별없는 너른 마음으로 유학,동학,노장사상, 불교사상을 품에 안은 생명사상가의 글로 소개한 서평을 읽고 나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과 그림을 제대로 접해본 것은 이 책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이 사실상 처음이다. 책 양장 커버에 선생님의 약력과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생을 주창한 생명사상가로서 이미 널리 알려지셨던 우리 시대의 스승이시자 사회운동가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짧은 생을 살다가 가셨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환경운동과 생명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살아 생전에도 많은 이의 스승이셨지만 돌아가신 후에 더 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셨다는 소개글에 삼가 옷깃을 여미게 되는 숙연함마저 들게 한다.

 

  이 책은 5.16. 군사 정변 이후 그분이 주창하신 "중립화 평화통일론"으로 인해 옥고를 치루시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정부기관의 사찰을 받으신 터라 행여나 남에게 피해를 줄까봐 직접 쓰신 글들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지만, 서화와 강연, 대담을 통해서 남기신 그분의 글과 그림, 말씀을 그분과 인연이 있던 분들과 제자들이 한 데 모아 편찬한 책인데 경전 속 어려운 경귀들이나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닌 투박하고 소박한 맛이 있어  오히려 가슴에 더 와닿는 그런 글들과 그림들이다. 비록 짧막짧막하고 여백이 많은 글과 그림이지만 선생님의 생명사상이 오롯이 녹아 있어 읽으면서 계속 책 표지의 선생님 사진과 간략한 소개, 맨 뒷페이지의 선생님의 약력을 몇번씩 들춰보며 어떤 분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감동을 준다.

 원래부터 상업성이 역력한 인도의 스승 누구 누구의 묵상록 또는 잠언집, 명언·명구집 따위를 싫어하는 터이지만, 우리 시대의 스승으로신영복 선생님의 글들이나 장일순 선생님의 이런 글들은 거창한 선전문구나 요란한 광고가 아니더라도 그분들의 이 시대에 대한 진실한 고뇌와 사랑, 연민에 공감하고 그분들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한권 두권 선택하게 되고 서로에게 선물하게 만드는, 꾸준히 읽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스승은 꼭 곁에서 모셔야만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남기신 글들이나 육성에 감동받는 간접적인 경험으로도 그분들과 연을 맺고 스승으로 모시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분들이 이 세상에 남기신 글들과 그림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들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다시금 께닫게 된다. 

 

그러나 참 아쉽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 그리고 이미 돌아가셔서 그분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많은 글을 남기시지 않으셨기에 그분의 사상과 삶을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가 많지 않다는 것이 참 아쉽다. 마음만 먹고 아직도 읽지 못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빨리 읽고 싶어진다.

 

책 구절구절 하나하나가 소중하지만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문인화가이자 서예가로 경지를 이루셨던 분임에도 이런 말씀을 남긴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 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사람마다 제 몫이 다른 것이고 그래서 직업이 다 다른 것이다. 그러나 자기 몫에 대해서 당당하라"

  

"이때까지 추구한게 의미가 없으면 소리없이 버려야 한다. 10년을 쌓았건 20년을 쌓았건 그게 모래성이란 걸 알았으면 허물 줄도 알아야 한다. 집착이 병통(病痛)이다."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자연스러운 것 만큼 무서운 게 없다. 자연스럽고 이지러지지 않는 삶이 우리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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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to**1 | 2010-01-17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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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을 하고 고운 말씨를 쓰고 올바른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지만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달플수록 안 좋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 같다. tv에서 한 스님이 절에서 수련을 하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집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리포터가 왜 절에 계시지 않고 여기서 지내느냐고 묻자 속세의 고달픈 삶을 사는 것도 진정한 도를 닦는 한가지 방법이 아니겠느냐며 반문하였다.  

무위당 장일순 님의 이름은 생소하다. 장일순 선생은 원주에 대성학교를 세운 교육자이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낸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서화가이자 사회운동가로 1970년대 원주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로 만든 지도자이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공생과 살림의 문명을 주창한 생명사상가라고 한다. 

선생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94년 원주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하기까지, 서울에서의 유학기간과 5.16군사정변 직후 사상범으로 춘천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고향 땅 원주를 떠난 적이 없었다. 생애의 거의 대부부분을 원주라는 작은 지방도시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언제나 시대의 정치,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진 선생은 늘 세상을 바로 보았고 앞서 보았다. 그리고 당신을 통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용기를 얻으려는 사람들을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했으며 많은 이들이 선생을 찾아와 삶의 지표와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고 한다. 

책에는 선생의 글과 사람의 얼굴을 닮은 난초, 대나무와 서체가 있는데 읽을 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삶이 힘들어질 때나 고민이 생길때, 여유가 필요할때 읽으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다. 그 외에도 자연과 인간관계, 사회문제와 종교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또한 있어서 생각해보면서 읽기에 좋았다.

         실패 
자꾸 떨어져도 괜찮아요
떨어져야 배워요
댓바람에 붙어 버리면 좋을 듯싶지만
떨어지면서 깊어지고
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법이에요
남 아픈 줄도 알게 되고

        부활
살다 보면 넘어지거나 엎어질 때가 있어요
누구나 다 그래요.
그때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야 돼요
몇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야 돼요
끊임없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이 말하자면 부활이에요. 

옛날에는 
사람이 공부한다는 것이
자기의 진실한 삶을 위해 
수행하는 자세로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남에게 고용되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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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장일순 li**ngs | 2010-01-17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강원도 원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당신의 모든 삶의 모든 것을 그곳에 뿌리내리고 자연과 하나되어 조용히 아름답게 살다가셨다는 것을. 5.16 군사정변 때 사상범으로 옥살이를 한 이후로 혁명이란 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라 여겨 '정성'을 다해 흙을 일구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무위당 선생은 '걷는 동학'이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동학사상에 애정을 가지셨고, 해월 최시형 선생을 무척이나 존경하여 많은 글 속에 그 마음을 담아내셨다. 붓으로 쓴 굵직한 글씨와 사람의 얼굴형상을 한 난초의 모습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면서도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 물론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다 거룩한 모범이지만 / 해월 선생은 바로 우리 지척에서 /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 주고 가셨죠.

(p.106, '해월, 겨레의 스승' 中에서)

 

최시형은 동학의 2대 교주이며 동학농민운동에 힘쓰신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르침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고,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미물이라 할지라도 생명이 다 있으니 더불어 살아야한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더 나아가 온 세계 인류가 일체가 되어 평등하게 자주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무위당 선생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늘 강조하였으며, '풍요로운 가난'을 외치셨다. 자연에서 얻은 좋은 음식을 공생하자는 의미로, 그동안 자업자족하며 모은 돈을 모두 '한살림 운동'을 위해 쓰셨다.

 

-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속에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 속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그대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은 없겠죠.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전환시대의 논리'저자)  (p.116)

 

무위당 선생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삶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의 작은 행동이 큰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 태어나 묵묵히 '자기 몫'을 다하신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제 몫이 다른 것이니, 자기의 몫에 대해서는 당당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바깥 세상에서 보면 좀 느리고 답답해 보이지만 자연의 흐름과 함께하려면 느릴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 이름 없이 일을 해야 한다. / 돼지가 살이 찌면 빨리 죽고 / 사람이 이름이 나면 쉽게 망가진다. (p.191)

 

- 싸움의 상대가 나에게 굴복하기를 바라지 말고/상대가 나에게 찬사를 보내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p.212)

 

카톨릭 신자이지만, 노자나 장자, 석가모니의 말씀까지도 가슴 속에 새기신다. 종교가 다른 것을 존중은 하되, 생활에 있어 '생명은 하나'라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니 서로 담 쌓지 말자고 살자고. 그의 생은 고요하고 조용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위'라는 그의 호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도 다 가진 것과 같이 살다가신 분인 것 같다. 내 욕심, 내 욕망을 위해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잠시 마음의 길을 넓히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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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읽고 my**3 | 2010-01-15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을 읽고

내 자신은 이 책을 통하여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멋진 생에 대해서 처음 알았고, 독서를 하는 내내 행복함과 아울러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강원도 원주를 중심으로 하여 교육자로서 활동과 신용협동조합 운동과 한 살림 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이셨으며, 1970년대 원주를 반 독재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로 만든 지도자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공생과 살림의 문명을 주창한 생명사상가이셨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유학. 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고, 해월 최시형의 동학 사상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종교 간의 장벽을 넘어 대화를 추구한 선지자이기도 하였다. 사람의 얼굴을 담아낸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서화가였다. 이런 다방면의 활동을 하는데 있어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로 보려 노력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맞이하였던 진정한 선각자요, 만인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의 복잡함 속에서 이렇게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행동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담겨있는 금과옥조의 새겨두어야 한 중요한 글과 함께 손수 그리고, 직접 쓰신 메시지들이 바로 곁에서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새기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내 자신도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을 해오고 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 구절이나 사자성구인 필유다복(必有多福), 여의길상(如意吉祥), 만사승의(萬事勝意), 사계평안(四季平安),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업번창(事業繁昌) 등을 휴대용 지갑에 넣어 다닐 수 있는 크기의 종이에 만들어 갖고 다니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나 가게 등에 주어오고 있다. 의외로 반응들이 좋은 것을 보면서 앞으로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집에 찾아오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붓을 직접 들고 써주신 글과 그림들은 바로 죽비가 되고 경책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일생을 같이 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감동어린 모습을 상상해본다. ‘밥 알 하나, 티끌 하나에도 대우주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 ‘일상의 삶이 곧 도다. 지극한 정성으로 바치는 마음이 되어 밥 먹고 똥 싸야 한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화해하는 것을 이끌어 내야 한다.’, ‘아이가 되어야 한다. 아이는 자기가 좋으면 제 것 갖다 주면서 서로 만난다.’, ‘소유하려면 경쟁이 생기고 그것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등 주옥같은 글씨와 의미 있는 붓글씨, 그림 등을 열심히 따르고 흉내 내면서 내 자신도 모방해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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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한 알에도 깃든 우주 ip**1001 | 2010-01-12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무위당 장일순 잠언집)/김익록 엮음/시골생활/2009'

 

p-78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내 마음 지그시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지요.

세상에서 제일 하잘것없는 게 좁쌀 아니에요?

'내가 조 한 알이다.'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요.

 

10개의 작은 제목안에 총 84편의 꿀같은 말씀들이 적혀있다.

좋은 멘토가 되어주실 분을 살아 계실때 뵙지 못했지만(1994년 5월 22일 67세의 일기로 영면하심)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된 것도 복이라 생각한다.

 

무위당 선생님은 행여 남에게 피해가 갈까 봐 직접 쓰신 글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다고 한다. 대신 서화로 생각을 전하셨고, 강연과 대담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만났다고 한다. 이 책도 주로 강연이나 대담을 녹취해서 풀어낸 기록과 서화 속에서 들려주신 말씀들을 모아서 엮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한 번도 뵙지 못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생생했다. 그 동안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 들에 답을 주시는 말씀으로 가득하여 내 인생의 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짧은 말씀들을 엮어 놓아서 책의 크기도 작고, 231쪽밖에 되지 않아 쉽게 보았다.

책을 덮고 나니 울림이 커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使人生爲藝-인생이 곧 예술이 되게 하라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0909

0909 2011. 1. 20. 22:17

http://blog.daum.net/bjk40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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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人生爲藝-인생이 곧 예술이 되게 하라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 목 차 -

0. 머리말

Ⅰ. 몸말

1. 생애 / 연보

2. 사상

1) 정치 - 도덕정치

2) 종교 - 밥을 중심으로

3) 생명사상

4) 예술세계

Ⅱ. 맺음말

Ⅲ. 참고문헌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 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 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 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로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김지하, <말씀>

 

 

0. 머리말

 

몇 해 전 미학파트 행에 동행하게 되어 원주를 찾았던 기억이 났다. 우리 일행은 원주에서 장일순을 기리는 모임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났다. 그분들에게서 원주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 살림운동,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의료생협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역사회를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을 이렇게 이끌어주신 장일순 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다. 그 만남은 여행에서 가장 신선했던 충격 중 하나였고, 꼭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라도 지역에서 지역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행위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몇 해가 흘러 점점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며 내 아이를 위한, 더 나아가 우리 아이들을 위한 희망의 대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때 다시 장일순 선생님의 책을 들었다.

그 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사셨고 누군가의 앞에 서시지 않고 항상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아가셨던 분이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고난을 준 이까지 용서하려 하는 큰 용서의 전문가이자 세상에 못나고 실패한 이들을 보듬어 주는 삶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시기도 했다. 그 분은 또한 노장사상을 비롯한 고전에서부터 서구의 기독교 사상, 나아가 우리의 동학사상까지 아우르며 그 안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진리,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설파했던 생명사상가였다.

또한 전문예술가는 아니었지만 옛날의 선비들이 시서화 악가무를 일상적 행위의 하나로 즐기듯이 문화예술을 벗하며 살아온 문인화가, 문인예술가였다고 보인다.

책 속의 진리를 책 밖으로 꺼내 직접 이를 구현하고자 했던 실천가이자 인위적 예술이 아닌 무위(無爲) 안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문화예술, 상품가치로써의 예술이 아닌 사람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문화예술을 구현하였던 실천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삶이 일치하는 삶, 그것이 바로 미학적 삶이고 장일순 선생님이 추구하였던 삶일 것이다.

정말 단순하고 쉽지만 좀처럼 현실에 구현되기 어려운 삶의 진리, 생명의 진리를 실천하고 자 했던 무위당 선생님의 사상과 작품세계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Ⅰ. 몸말

 

장일순(張壹淳, 1928년 9월 3일 - 1994년 5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이다.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만들었고 생명운동을 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일본의 사회평론가이자 기공 지도자인 쓰무라 다카시가 마치󰡐걷는 동학'같다고 했던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명이나 모였다는 사람.

궁금하다. 장일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다. 20대 중반에는 김재옥, 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고, 30대 초반에는󰡐참여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생각 아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이승만정권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30대 중반에는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3년간의 옥살이는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감옥은 장일순에게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가르침에 따라󰡐파워게임과 야합이 판을 치는 정치판'보다는󰡐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숨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옥한 뒤로도 장일순은 오랫동안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는데, 그 때 장일순은 서울로 유학을 가며 그만둔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장일순에게 붓글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마음을 닦는, 말하자면 묵선(墨禪)이었다.

그처럼 운신이 편치 않은 속에서도 장일순은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인 신용협동조합의 설립과 정착을 도왔고, 70년대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였던 지학순과 손을 잡고 원주가 앞장서서 비판정신을 갖고 부패한 정치권을 일깨우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주춧돌 구실을 했다. 80년대에는 정치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 살림의 세계관, 곧 생명의 세계관을 이 땅에 태동시켰다. 또한 해월 최시형을 우리 겨레의, 아니 전세계의 스승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장일순은 이런 일을 아무런 직함도 갖지 않고, 요컨대 평생 돈벌이 한번 하지 않고 했는데도 부부간이나 가족이 대단히 화목했다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제가와 평천하를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게 힘든 사람이 없도록 잘 아울렀다.

거기에는 가문의 힘도 있었다. 장일순은 3대를 통해 핀 꽃으로 보면 좋을 듯 하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반드시 두 손으로 드리도록 엄하게 가르쳤고, 할아버지는 먼저 죽은 손자의 상여를 향해 절을 했던 흔히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부지는 부유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희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일순과 그의 할아버지를󰡐낙타를 타고 바늘 구멍을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장일순은 자신의 여성성을 활짝 꽃피운,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부드러웠다. 부드럽되 한마디, 한 행동은 만인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늘 바로 보았고, 앞서서 보았다. 그런 장일순을 통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일년 내내 빌 틈이 없었다.

단 한번을 보고 장일순에게 크게 반했다는 김종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땅의 풀뿌리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고, 사람사는 도리를 가르쳤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지금 단순히 동학이나 천도교의 스승이 아니라 이 겨레, 이 나라 사람들 전체의 스승이듯이 장일순 선생의 자리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1. 생애 - 연보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부친 장복흥(張福興)과 모친 김복희(金福姬)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호(號)는 호암(湖岩)이었으나, 60년대에는 청강(靑江)으로, 70년대에는 무위당(无爲堂)으로, 80년대에는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어 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張慶浩) 밑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생명공경의 자세를 배움. 묵객으로 할아버지와 절친하던 우국지사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서 서화를 익힘.

1940년 원주초등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음. 서울로 유학.

1944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

1945년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

1950년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옴. 이후부터 줄곧 원주에서 생활.

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성학원을 설립. 이후 5년간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봉직.

1955년 봉산동에 손수 토담집을 지어서 살기 시작함.

1956년 무소속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

1957년 이인숙(李仁淑)과 결혼. 슬하에 3남을 둠.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낙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름.

1963년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당함.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함.

1964년 이 해부터 몇 해 동안 포도농사에 전념.

1968년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함.

1971년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시위를 주도. 이 시위는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촉발하는데 큰 역할을 함. 이후부터는 민주화 운동을 막후에서 전개.

1973년 전 해 여름에 닥친 큰 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

1977년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

1983년 민주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주통일 국민연합>을 발족하는데 일조함. 10월 29일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

1988년 한살림 운동의 기금조성을 위해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 개최. 다섯 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

1989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원주시 호저면 송곡(松谷)에 비문을 쓰고 기념비를 세움.

1991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발족하는데 고문으로 참여. 6월 14일 위암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

1992년 생명사상을 주제로 한 강연 다수.

1993년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냄. 9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 11월 13일 민청학련 운동승계 사업회로부터 투옥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음.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해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의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

1997년 녹색평론사에서 장일순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은 『나락 한알 속의 우주』를 펴냄

1998년 상지대학교 전시관에서 장일순 유작전이 열흘간 열림

2001년 7주기를 맞이하여 원주 시립박물관 주최 무위당 선생 기획전시회를 두 달 동안 열음.

2004년 10주기를 맞이하여 토지문화관과 원주가톨릭센터, 원주시립박물관 일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림. 최성현이 쓴 <좁쌀 한 알>이 도솔출판사에서, 최종덕이 편집한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가 녹색평론사에서 출간됨.

2007년 9월 6일 무위당 선생의 사상적 유산인 원주밝음신협 건물 4층에 <무위당 기념관> 개관.

 

 

 

2. 사상

 

1) 정치 - 도덕정치

 

장일순 선생님은 현실정치를 통해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고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의 벽에 부딪혀 고배를 마시게 된다. 박정희정권 시기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감옥생활을 한 후에는 야합으로 얼룩진 정치판을 떠나 현장에서 현실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사회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미 20대에 원 월드운동과 같은 세계적인 평화질서 구축에 대한 관심과 뜻을 품었던 그에게 기존의 정치판은 뜻을 펴 보이기엔 이미 가능성을 상실한 병든 상태였던 것이다. 장일순 선생님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의 출발점을 누군가에게 대항하기 위함을 뛰어넘어 모든 생명의 지속성을 살리기 위함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탄압했던 위정자들까지도 품어안기로 한다. 이를 통해 김지하는 우주적 기틀로서의 도덕과 사회적 현실개혁로서의 정치가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을 가진 선생님을 도덕정치가라고 이름짓는다.

 

도덕정치

민주화를 위한 당신의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정치사상가,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재야의 대부라는 이미지보다는 쌀 한 알,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사람, 산업문명의 절박한 위기와 한계를 남보다 먼저 느끼시고 아퍼하시면서 생명의 큰 기운으로 이겨내고자 애쓴 생명운동의 길잡이이자 사상가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선생님의 사상을 도덕정치가로 이름한 김지하 시인의 말씀이 매우 중요한 듯 합니다. 우주적 기틀로서의 도덕과 사회적 현실개혁로서의 정치가 함께 가야 한다는 사상적 은유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도덕정치가라는 의미를 이해해야만 약관 20여 세의 나이에 진보적 이념을 갖고 현실정치를 통해 사회를 바르게 개혁하고자 했던 선생님이 왜 생명운동을 주창하시게 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당신은 대립의 갈등구조 중심으로 해석해 오던 사회적 관계를 상호 보완적 공생의 관계로 새롭게 보신 것입니다. 당신의 사회정치적 접근방식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도덕적 이해가 밑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생명과 협동 그리고 교육운동을 자본가에 대한 경제적 약자들의 대항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우주 모든 생명들의 존재법칙으로서 강조하셨습니다. 우주 천지만물이 모두 한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더불을 때만 뭇생명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위당의 사상이 도덕정치라는 재해석으로 가능해 진 것입니다. (이병철과 김지하의 말씀 중에서)

 

 

화합의 논리, 협동하는 삶

그런데 요새 문제가 뭐냐, 민중운동이니 뭐니 하는데 이 민중운동의 목표가 뭐냐 이 말이야. 저 새끼들이 저렇게 사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어, 저 놈들 도둑놈인데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그것이 소련이나 동구라파에서 해보려도 했던 거야. 그래서 뭐 해결이 돼요? 네가 뻑적지근하게 잘 사니까 우리도 좀 그렇게 돼야 되겠다는 거 아니야? 그거 가지고는 안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나라의 민중운동은 자칫하면 저 아프리카나 이런 데 있는 빈민지대의 기아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이렇게들 잘사는데 왜 이렇게들 미쳤어, 지랄이야, 이럴 거 아닌가. 가치의 설정만은 물질의 가공과 생산자가 조작한 그것 속에서 설정하지 말자 이 말이야. 그리하여 이 물질과 이 자연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생활하는 방법을 도출할 적에 전체가 건전해지는 것 아니겠어?

 

왜 한 살림인가

만나라는 말이야. 문제는 공동의 과제를 밀고 나가야지. 어차피 운동에는 다 각각이지만 각각이라도 연대해가야 된다 이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생명세력, 반생명적으로 문제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항해서 우리가 일을 확산해나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다만 한 가지라도 사회를 위해서 밝게 일하고 있고 좋은 일 하고 있는 그러한 단체는, 연대를 하자고 할 때는 함께하자는 말이예요. 함께 하지 않았을 때 어떤 문제가 오느냐, 보글보글 혼자 우리끼리만 놀다가 끝나게 돼요. ... (우리의) 시각이 정치에서부터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연대할 능력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운동은 가속화되고 더 깊이 제대로 정착이 되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혁명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에요.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꺼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되지요.

혁명이라는 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예요.

아직 생명을 모르는 사람들 하고도 만나라 이거예요.

보듬어 안고 가자는 거지요.

그들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겁니다.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때 변하는 거거든요.

 

변화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요.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해요.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상대는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아야 해요.

내 것이 옳다고 하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틀을 갖고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만 판을 짜려고 해서는

세상의 큰 변화를 이루기 어렵지요.

 

 

2) 종교 - 밥을 중심으로

 

장일순 선생님은 어릴 적에는 유학의 바탕을 둔 학문분위기를 접했고 형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카톨릭 사상을, 그리고 지인을 통해 천도교를 알게 되면서 동학사상까지 다양한 종교사상을 접하였다. 이후 칩거 생활동안에는 노자, 장자, 스페인 농민공동체 몬드라곤에 관한 책들을 접하면서 이후 선생님의 궁극적 목표였던 생명사상과 협동조합에 대한 전망을 확립하게 된다. 다양한 종교를 접하면서 선생님은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진리를 밥에서 찾아내었다. 또한 우리에겐 표면적으로만 알려져 있던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님의 소중한 생명사상을 찾아내어 평생의 사상적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현실 속에서는 장일순 선생님은 당시 종교가 가지고 있던 아집을 과감히 버릴 것을 이야기하셨고 이를 실행에 옮겨 성직자간의 만남의 자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동학사상

무위당 선생님은 몽양(夢陽)의 제자로서 이 사회에 입문하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몽양의 평등 사상과 죽산(竹山)의 누리 사상의 출발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어릴적 부터 집안의 한학 전통으로 이어진 유가철학(儒家哲學)과 가톨릭 정신이 그 바탕에 있었습니다. 이후 동학(東學)사상에 대한 깊은 천착으로 간디즘과 해월(海月)의 ‘밥사상’, 또한 민족문제를 넘어선 인류문제, 지구문제, 생태계문제에 깊은 공부를 하셨습니다.

선생은 글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해월도 그리고 성명 삼자까지도 남기지 않고 간 많은 선철들이 글을 남기지 않았으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이치를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자의 무위 사상이 사상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의 삶에서 나락 한알 속의 우주처럼 구현되셨습니다. 당신의 노자 이해는 정말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장의 삶에서 자신을 기고 낮추고 모시는 구체적 행위로 이어질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위당 철학의 가장 높은 버렁으로 보이는 「모심과 섬김」은 아마도 평생을 두고 사숙(私淑)해온 최보따리 최해월(催海月)한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해월사상의 <십무천>(十毋天) 속에 나타난 삶이 바로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한울님을 속이지 마라.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말고, 상하게 하지 말고, 어지럽게 하지 말고, 일찍 죽게 하지 말고, 더럽히지 말고, 굶주리게 하지 말고, 허물어지게 하지 말고, 싫어하고 불안하게 하지 말고, 춥고 굶주리게 하지 말라." (김성동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 탄생

예수께서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서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으라. 이 것은 내 몸이다.’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나의 피이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의 참 양식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빵과 포도주가 그 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양식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밥으로 오신 것을 말해주십니다. 하느님으로서의 밥, 생명으로서의 밥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나라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 한그릇을 알면 만사를 알게 되나니라” 했고,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20강에는 ‘아독이어인 귀사모(我獨異於人 貴食母)’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食자는 기른다는 뜻으로 ‘사’라고 읽으며 母자는 모든 것이 태어나고 죽어서 돌아가는 근원인 도(道)를 말합니다. 나홀로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허례허식과 부귀를 따르지 않고 도심(道心)을 기르는 것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몸으로서의 밥, 피로서의 포도주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불상을 보고 절하다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는 김진홍이 지학순, 장일순과 함께 치악산으로 바람을 쐬러 갔던 어느 날이었다. 가는 길에 상원사란 절이 있어 거기에 들렸는데, 대웅전 안의 불상을 향해 장일순과 지학순이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했다! 지학순은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고, 장일순은 평신도다. 김진홍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진홍은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가 믿는 것만이 최고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장일순과 지학순이 오히려 성인처럼 보였다.

장일순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신부와 목사가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서로 담을 낮춰야 한다는 말을 늘 했다. 그 결과, 한때 원주에서는 가톨릭 신부들이 개신교 교회에서, 개신교 목사가 성당에서 강론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선생님은 밥을 통해 예수와 석가와 해월을 만나게 하고, 모든 생명들의 관계가 생명인 밥이 되어 서로를 나누는 관계임을 일깨워 주셨다. 그 가운데서 특히 해월 선생의 밥이야기를 빌려 밥이 곧 생명이요, 한그릇의 밥 속에 온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으니 밥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먹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을 위한 근본과제임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고자 하셨다.(萬事知 食一碗) 선생님을 통해 만나게 된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의미와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사상은 지금까지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개벽이었다.

 

  향아설위

장일순은 잡지사 기자인 김지용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체가 내 안에, 또 네 안에 있는데 벽에 대고 제사할 필요 없는거지.

해월께선 할아버지 내외, 아버지 내외, 아들 내외, 딸, 며느리, 손자 할 것 없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향아설위를 했으니 대단하지. 생각해 보게. 19세기에 할아버지가 며느리, 손자에게 절을 했으니 될 법이나 한 소린가. 요새 민주주의 갖고는 어림없는 얘기 아닌가 말이야."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향아설위'라는 것 있잖소. 그것은 종래의 모든 종교에 대한 대혁명이죠. 늘 저쪽에다 목적을 설정해놓고 대개 이렇게 이렇게 해주시오 하고 바라면서 벽에다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그게 아니라 일체의 근원이 내 안에 있다, 즉 조상도 내 안에 있고 모든 시작이 내 안에 있으니까 제사는 내 안에 있는 영원한 한울님을 향해 올려야 한다는 말씀이죠."

 

자애와 무위는 하나

山不利 水不利 利在挽弓之間(산불리 수불리 이재만궁지간)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이로운 것은 화살을 이렇게 당기고 있는 그 사이에 있나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심상태, 무욕상태, 그래서 단심으로 활을 나꾸고 있는 그런 상태래야, 그러니까 활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과녁에다가도 너무 혼을 뺏기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 무심상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단순히 그렇다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 없는 그런 자세, 그렇게 되면 이롭다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여기의 바로 이 말씀은 어디가 좋다 하는 딴 장소가 없다 이 말이예요. 바로 자기가 앉은 그 자리, 지금 거기서 최선을 다하는데 거기에는 한눈 팖이 없어야 된다, 쓸데없는 욕심부림이 없어야 된다. 인위적인 계산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말씀을 해월 선생께서 해주셨더란 말이에요.

 

 

3) 생명사상

 

장일순 선생님은 생명이라는 화두를 일관되게 말씀하셨다. 세상의 하찮은 미물까지도 생명을 가진 인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간만이 잘 사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과 세상만물이 다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이라는 주제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9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던 환경운동 등에 대한 전망을 이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들어있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우주적 존재임을 설파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확장하였다. 결국 세상만물에 생명이 깃들어있고 그 생명을 모심으로써 모든 존재를 보듬고 나아가는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생명사상

우리 시대 생명 사상의 큰 스승이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남겨주신 생명의 뜻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아주 사소한 생활 속에서부터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모시는 일, 그것이 바로 생명사상의 요체인 듯 합니다. 세상 살기가 아무리 험악하고 먹고 살기가 아무리 척박해도 무차별 경쟁과 죽임이 아니라 자연과 나누고 사람과 함께 하면서 사람다운 삶의 터전을 조금씩 넓혀 가는 길이 바로 생명사상의 실천이며 구현일 것입니다. 그렇게 쉬운 일을 우리는 잊고 살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이거늘, 그런 이치만 안다면 서로를 모시는 일이 어려울 것 없다는 것이 무위당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치는 굳이 말로 표현될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그런 이치의 원천입니다. 무위당 선생은 어머니를 기리는 작품을 여럿 남기셨습니다. 그 작품은 단순히 글과 그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시려거든 어머니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강조한 것일 겁니다. 그래서 모심은 어머니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모든 이가 어머니에서 태어났듯이 어머니의 자비심은 우리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기운 역시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그 힘이 바로 생명의 힘이며 그 힘이 바로 예수나 부처의 기운이기도 하다는 것을 무위당 선생은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천지를 모시는 일은 바로 일상적인 사랑을 확인 하는 일이며 신을 모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위당 선생은 그 모심이 마음으로만 그쳐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항상 스스로를 낮추어 서로에게 어울리는 사회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실천의 삶이 바로 한살림 운동으로 나타났고 대성학교 설립과 같은 교육운동의 일환이셨습니다. 선생의 연대기로만 볼라치면 사회운동 다음에 나중에서야 생명운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여지지만, 실제로는 선생의 삶은 항상 사회의 실천운동과 마음의 도덕수양이라는 두 삶의 길이 항상 하나로 엮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갈래의 길이 둘이 아니라 원래 하나임을 아는 일, 바로 그것이 무위당 생명사상의 뿌리를 체득하는 지름길입니다.

 

삶의 도량에서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이 사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진정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의 작은 벌레가 엄숙하게 가르쳐줄 때에 그 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참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 구나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

 

풀은 부처의 어머니

장일순의 집 정원에는 잡초가 가득했다. 그것을 보고 홍동선이 물었다.

"잡초도 가꾸십니까?"

장일순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놈들이 아침 저녁으로 나를 반기니 어떻하겠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여. 공생의 원리가 우주의 법칙이 아닌가?"

 

너나 나나 거지

장일순이 최병하에게 말했다.

"너나 나나 거지다."

최병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장일순도 물론 거지가 아니었고, 자신도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장이었지 거지가 아니었다. 장일순이 뜨악해 하는 최병하에게 물었다.

"거지가 뭔가?"

"거리에 깡통을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먹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장일순이 받았다.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제재소라는 깡통을 놓고 앉아 있는 거지라네. 거지는 행인이 있어 먹고 살고, 자네는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있어 먹고 사네. 서로 겉모양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장일순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최병하는 얼른 답을 못했다.

"거지에게는 행인이, 자네에게는 손님이, 고객이 하느님이라네. 그런 줄 알고 손님을 하느님처럼 잘 모시라고, 누가 자네에게 밥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지 잘 보라고."

밥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시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 안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4) 예술세계

무위당 장일순 - 인위가 아닌 무위의 서화

장일순 수묵전(그림마당 민 1991)/유홍준(영남대 교수)/팜플렛 발문

 

재야서가·문인화가

무위당 장일순(无爲堂 張壹淳)의 글씨와 그림은 그 말의 참뜻이 유지되는 한에서 재야서가(在野書家)의 글씨이며, 우리 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文人畵家)의 회화세계이다. 그리고 그 예술이 목표로 하는 바의 미적 이상은 일격(逸格)의 예술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이 분화 또는 파편화되어버리는 근대사회로 들어오기 이전, 아직 총체적인 것, 근원적인 것, 세상에 통용되는 교양적인 것의 가치가 존중받던 시절에는 미술 또한 직업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지식인)는 자신의 교양과 학문을 드높이고, 간직하고 싶은 정서를 발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거문고를 타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당시 지식인의 삶속에서 지필묵(紙筆墨)은 오늘날의 만년필이나 볼펜처럼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고, 글씨를 쓰는 필법(筆法)은 그림, 그중에서도 난초와 대나무 그림 같은 사군자의 묘법(描法)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가를 틈타 희묵(戱墨), 농묵(弄墨), 완묵(玩墨)하곤 하였다. 그러한 문인을 사람들은 여기화가(餘技畵家)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취미와 여기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기술을 앞세우는 직업화가인 화원(畵員)의 그림과는 다른 높은 정신적 차원의 예술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문인화의 본령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근대사회로 들어오게 되면 문인화가들의 그런 기백과 자부심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고, 지필묵은 만년필로 대체되면서 종래의 문인화풍이란 한낱 겉껍질만 남은 상투화된 형식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금도 각종 문화센터에서는 '문인화반(文人畵班)'이라는 이름으로 사군자를 가르치고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이나 수강하는 사람이나 문인화의 정신은 제쳐놓고 그 형태만 따르고 있는 실정이니 그것을 전통계승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무위당의 서화에 문인화의 참뜻이 서려 있다고 한 것이다.

문인화의 참뜻이란 그것을 단순히 기법의 능숙 여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문인의 정신과 기품이 살아 있는가 아닌가를 묻는 데 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문인화풍이 매너리즘화되어가는 세태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진원소(陳元素)·승백정(僧白丁)·석도(石濤)로부터 정판교(鄭板橋)·전택석(錢澤石)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로지 난초를 잘 그렸고 그 인품(人品) 또한 고고하고 빼어났으니, 화품(畵品)도 그 인품에 따라 상하를 정할 것이지 (인품을 빼어버린) 화품만으로 논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인품과 화품

무위당은 그의 그림이나 글씨에 찍는 머릿도장으로 "원주인(原州人)"이라는 문자도장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분명 원주사람이다. 그는 원주에서 태어나 원주에서 자랐고 줄곧 원주에서 살아왔다. 원주를 떠난 적이 있다면 오직 한번 서울대학교 미학과 제1회 입학생으로 대학생활을 하던 시절이다. 대학 3학년 때 6·25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이내 원주로 돌아온 이후 줄곧 여기를 떠나지 않았다.

원주에서 그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교육운동·사회운동을 착실히 전개해나갔다. 원주 대성학원을 설립하면서 청년교육에 앞장섰고, 밝음신용협동조합을 만드는 산파역이 되어 원주에서 신용협동조합이 뿌리내리고 고리대금업을 축축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지역사회의 일꾼이자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꾸데따가 일어나면서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무더기로 구속될 때 그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갖은 회유와 유혹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지켰고 그 아픔을 감내하고는 원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여전히 원주사람으로 살아갔다. 1970년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캄캄해서 앞이 막막했던 유신시절,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던 방식대로 그곳에 뿌리내린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지학순 주교의 천주교 원주교구, 그리고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이 주도하던 가톨릭농민회의 일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후견하였다. 시인 김지하가 원주로 내려와 그에게 깊은 감화를 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하여 70년대 유신독재에 대항하는 첫 불꽃이 원주에서 일어났던 것을 사람들은 무위당과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1974년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어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 학생운동은 인혁당 배후조종을 받은 것으로 조작되는 엄청난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이때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이 그 배후인물로 부각됨으로써 민청학련은 불온집단이 아니라 양심세력의 결집이었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의 추이에서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을 하고 수사기관에 출두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은 무위당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무위당의 인품과 사회적 실천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이 한 일을 크게 드러내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그가 유창한 논리를 펴거나 세상을 경륜하는 지혜를 내세운 일은 없었다. 오직 자연의 순리, 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자세에서 사물과 일을 대했고 인간관계를 유지해왔다. 서울의 이름 높은 지식인에서 원주의 구두닦이 소년까지 폭넓은 인적 유대를 갖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인품 덕분이다.

그의 사회운동에는 언제나 하나의 정신이 유지되었다. 그는 항상 참된 인간적 가치와 그것의 사회적 실천을 인생 지고의 가치로 삼아왔다. 그는 인간이 자연 속의 한 동물이고, 뭇 동물 속에서의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했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속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연의 속성이 있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지켜야 할 덕성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이 개조해나갈 자연의 모습과, 인간이 파괴한 자연의 원상복구를 동시에 주장해왔다. 이런 정신을 그는 고전에서 찾았고 노장철학, 선가의 가르침을 익히고,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의 사상과 세계관에 깊은 감화를 받기도 했다.

 

무위당의 창작자세

무위당이 글씨를 쓰고 난초를 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의 일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보안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요시찰인물이 되었을 때 그는 붓을 잡고 "먹장난[戱墨]"을 시작했다. 반은 감시자의 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고 반은 자신의 정서적 욕구에서였다.

무위당이 그때 처음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아가면서 글씨를 배웠다. 밖에 나가 무작정 뛰노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던 5, 6세 어린 시절에 붓을 잡고 신문지 전체가 먹으로 가득차도록 획을 긋고 또 그어야 했던 호된 훈련과정이 훗날 그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는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붓을 잡는 것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할아버지인 여운 장경호(旅雲 張慶浩)는 그 자신이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당시 관동지방의 이름난 서화가인 차강 박기정(此江 朴基正)과 절친한 사이였다. 차강은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잊혀진 채 그저 강릉의 묵객(墨客)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당대의 문사이자 지사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의병에 참여했고 끝내 '서화협회(書畵協會)'에조차 참여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뜻을 지켰던 분이다. 무위당의 서화는 이러한 차강의 훈도 아래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위당이 처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낙관을 할 때 사용한 호는 청강(淸江)이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맑은 강물이란 얼마나 뜻 깊고 아름다운가 하는 마음에서 붙인 자호(自號)라 한다. 힘겹게 살아가면서 맑은 강을 만나면 거기에 잠시 앉아 쉬어보자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주로 원주에서, 한번은 춘천에서 열었으니 모두 강원도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원주 봉산동 키 큰 측백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선물로 주곤 하였다. 거기에 반드시 그 인물이 지켜야 할 경구와 격언 또는 시구를 적어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림을 받는 사람의 이름 뒤에는 아형(雅兄), 학형(學兄)이라는 표현보다는 도반(道伴)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벗이라는 뜻이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 자세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80년대 말 수많은 재야단체들이 '기금마련전'을 너나없이 열다시피 했을 때 무위당은 한 번도 출품을 거절한 일없이, 오히려 부탁한 것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보내주곤 했다. 그리고는 사례비를 받은 일이 없다. 그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은 "만약 이 그림을 그리면 얼마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그날로 나는 붓을 꺾을 것"이라고 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은 '한살림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 자세를 나는 무한대로 존경한다. 지금 세상에 이런 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그 옛날이라고 몇이나 있었겠는가 싶다. 나는 청나라 때 문인화가인 정판교의 글을 읽다가 꼭 무위당의 창작 자세에 들어맞는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쓰고자 함이지, 그것을 갖고 세상사람들과 즐기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畵蘭畵竹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享人也]

 

무위당의 글씨와 그림

무위당의 글씨 또한 직업적인 서가의 그것과 길을 달리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정통서법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서예계의 사정에 구애됨이 없이 글의 내용과 서체 모두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정서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뜻에서 나는 그 말의 참뜻이 유지되는 한에서 재야서가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무위당의 글씨는 예서체(隸書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예서체는 잘 짜여진 구조의 멋과 삐침과 파임이라는 힘을 자랑한다. 그리고 또한 초서나 행서와 달리 형태가 간명하여 "무지렁이도 알아볼 수 있는 민중적 서체"라는 일면도 지니고 있다.

이런 예서체를 선생은 아주 소탈한 맛으로 전환시키면서 부드럽고 편안한 글씨, 그러나 힘과 균형이 들어있는 독자적인 서체로 발전시켰다. 서법의 생명력이라 할 골기(骨氣)를 유지하면서 유연하고도 자연스러움이 풍기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무위당이 어떻게 이처럼 독자적인 서체를 지닐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붓을 다룬 오랜 연륜, 그의 삶과 인품, 언뜻 떠오른 것은 거기에서 연유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나는 그 해답을 3년 전에 얻어낼 수 있었다.

무위당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요즈음 길거리에서 군고구마 장수 아저씨가 서툰 솜씨이지만 삶의 필요에 의해 나무판자 위에 정성스레 쓴 '군고구마'라는 글씨 속에서 이 시대 글씨의 한 이상(理想)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인생이 거짓없이 녹아들어 있는 글씨,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무심(無心)과 무위(無爲)의 철리(哲理)이다. "뛰어난 기교란 어수룩해 보이는 법"이라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서체이다. 그것이 무위당 글씨의 본질이고 특성인 것이다.

무위당의 난초는 참으로 독창적인 것이다. 그는 난초를 치면서 고귀한 멋이나 곱상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춘란(春蘭)이나 기품을 앞세운 건란(乾蘭)은 즐기지 않는다. 무위당의 난초는 한마디로 조선 난초이다. 잎이 짧고 넓적하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잡초 같은 난초를 좋아한다. 그것도 바람결에 잎을 날리면서도 꽃줄기만은 의연히 세우고 그 향기를 펼치는 풍란(風蘭)을 즐겨 그린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화제(畵題)를 붙인다.

무위당의 난초 그림에서는 맑은 품성과 강인한 생명력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 ── 선생이 주창하는 생명사상과 정신을 표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난초는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르는 힘차고 건강하고 소탈한 심성의 인간상에 들어맞는 민초도(民草圖)로 전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위당은 만년에 들어 여기에 새로운 형식을 하나 더했다. 그것은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마치 선화(禪畵)처럼 스스럼없이 그은 몇 가닥의 붓자국으로 그린 간필법(簡筆法)의 난초들은 그대로가 사람의 얼굴이고 몸매가 된다. 웃는 얼굴, 생각하는 얼굴, 때로는 부처님의 모습까지 연상되는 무심(無心)의 경지이다.

무위당의 이 독자적인 얼굴 난초는 그가 문인화가로서 이 시대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문인화의 오랜 역사적 전통의 맥락에서 언급될 만한 징표로 여겨진다. 그것은 결코 기법의 수련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그의 맑은 인품과 꿋꿋한 삶속에서 터득된 하나의 결실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그가 창조적인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준 마지막 화가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사람 ── 도반(道伴)으로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을 무한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군고구마

드라마 작가인 홍승연은 이런 글을 보내왔다.

"글씨를 써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군고구마, 실비집, 빈대떡과 같은 글씨들이 아름답게 보여 선생님 글씨는 내게서 냉대를 받는 편이다."

 

김익호는 이런 글을 보내왔다.

"봉산동에 있는 교육원에서 장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어요. 시내 길모퉁이에서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어요. 바람막이 포장을 쳐놓고, 포장 앞과 양옆에 󰡐군고구마'라고 써붙여 놓고 말이지. 서툰 글씨였어요. 꼭 초등학교 일이학년이 크레파스로, 혹은 나무 작대기를 꺾어 쓴 글씨같아 보였는데, 안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먼 곳에서도 뚜렷하게 잘 보였어요. 그 글씨를 보며 걸으며 생각했지. 󰡐아, 얼마나 훌륭한가! 이 글씨는 이곳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반갑고 따뜻할 것인가! 부끄럽다. 내 글씨 또한 저 󰡐군고구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일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걸었어요."

 

세 분의 아버지

칠그림을 하는 양유진이 "선생님, 저 별명 하나 지어주십시오."

아호를 하나 지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청을 받고 장일순은 아무말이 없었다. 다만 물끄러미 양유전을 바라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10분쯤 조용히 양유전을 바라보고 나서 장일순이 한 말은 이 한마디였다.

"일주일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렇게 해서 받은 호가 소하다. 흴 소素, 연꽃 荷. 흰 연꽃이라는 뜻이다.

"너는 옻칠하는 칠장이 아니냐? 진흙처럼 질척질척한 것을 주무르는 일을 하지. 그런데 연꽃은 그런 진흙에서 피지 않니? 그 가운데서도 흰 연꽃은 백 년에 한번 핀다고 한다."

󰡐인생이 예술이 되게 하라.'

장일순이 양유전에게 준 글이다. 나날의 삶 그 자체가 곧 예술이 되도록 살라는 뜻인데,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누구의 삶에서나 흰 연꽃이 피어나리라.

 

 

 

Ⅱ. 맺음말

 

선생님 추모의 자리에서 김지하 선배가 선생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제시한 바가 있다.

첫째로 모셔라(侍). 천지만물이 모두 저마다 하늘을 모시고 계심을 알고(天地萬物 莫非侍天主). 둘째로 기어라. 무위당에서 조 한알로. 평화의 조건으로서 양보와 겸손을 실천하라. 그리고 셋째로 이루려 하지 마라(無爲, 無爲卽無不爲). 생각은 공에 두고 삶은 세상의 끊임없는 개혁에 두라.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앉은 자리 선 자리를 보라. 이루려 하면 헛되느니라. 자연은 이루려 하는 자와 함께하지 않느니라."

 

1. 사회현상의 분석, 대안에서 실천까지

 

우리가 그동안 열광해왔던 외국의 사상가들은 세상의 현상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한 이들은 드물었던 것 같다. 책상머리에 앉아 세상의 이치를 고민한다 한들 그것이 대안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많은 지식인들이 책상머리 고민만으로 일관된 연구를 하기 때문에 학문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닐까?

봇물 터지듯이 수입된 근현대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생각을 접하며 과연 같은 시기 우리에게는 이 땅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여 연구한 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장일순 선생님을 만나면서 우리에겐 그 누구보다 현명한 사상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현실을 분석하고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이를 행동에 옮기는 실천가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녔음에 더욱 놀랐다. 물론 장일순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축적된 고금의 진리와 동학사상, 그리고 선배 지식인 등의 사상적 뒷받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이론과 배경들을 하나의 명쾌한 명제로 정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명제를 전달하면서 더 나아가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2, 장(場)의 확대 - 원주를 떠나지 않고 천리 밖을 보는 삶

 

장일순 선생님이야말로 본인이 살아온 장(場)과의 가장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그러나 드러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장(場)의 바탕으로써, 나아가 세상의 모든 장(場)과의 소통을 이끌어내면서 본인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서울 중심, 대도시 중심의 거시적인 사회활동이 아닌 원주라는 소도시를 기반으로 하여 평생을 원주를 떠나지 않고도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캠프 역할을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지역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면서 전국단위, 세계단위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로컬리티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분이다. 앞에 나서지 않고도 원주라는 지역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줄 만큼의 지역적 발전을 이끌어내신 지역의 큰 어른인 것이다.

 

3. 예술과 삶이 일치하는 삶 -使人生爲藝

 

장일순 선생님에게 있어 문화예술은 어떤 의미였을까? 서예를 일찍부터 배우면서 한학을 자연스레 접했을 것이고, 출옥 이후 다시 붓을 잡으면서 많은 사회적 탄압을 견디게 해주었으며, 더 나아가 붓글씨를 통해 자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하려고 했었다. 서예 덕분에 선생님은 연금의 시간들을 창조의 시간으로, 깨달음의 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본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들을 오해 많은 글자가 아니라 가슴으로 전해지는 난초 그림 하나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선생님은 예술의 궁극적 기원과 목적을 일상적 삶과 일치시키면서 삶의 진정성을 담은 그림과 글씨를 쓰기 위해 노력하셨다. 단순히 잘 그렸다 멋있다의 예술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삶의 실천적 대안까지도 찾아낼 수 있는 지표와 같은 존재였다.

문화예술이라 하면 흔히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위안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일순 선생님은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 인간수련의 장(場)으로써 문화예술을 선택하였다. 문화예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값진 가치를 발휘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4.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신 선생님

 

장일순 선생님의 생애와 하신 말씀을 접하면서 선생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말씀과 에피소드들이 다 소중하게 다가왔다. 버릴 것이 없었다. 큰 업적을 하나만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 어떤 것을 내세워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거나 내세우신 적이 없지만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힘주어 이야기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화살을 당기고 있는 상태, 그 어디에도 힘은 실려 있지 않지만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수 없는 각성의 상태, 선생님의 이야기가 한시간 반의 발표문으로는 정리되기 힘든 것은 평생을 각성의 상태로 하여 하는 것 없으신 듯 많은 것을 이루어놓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지도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참된 지도자의 부재는 가야할 나침반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과연 장일순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비록 당신 스스로는 나락 한 알과 다름 없는 작은 존재라고 늘 이야기하셨지만 나락 한 알에 우주가 담겨있기에 선생님의 존재를 세상이 알고 있음만으로도 세상의 변혁은 더 빨리 왔을지도 모르겠다.

 

 

Ⅲ. 참고문헌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1997.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녹색평론사, 2004.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2004.

김익록,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09.

무위당 만인계 홈페이지 http://www.jangilsoon.co.kr.

 

 

 

출처 : 같음을 구하고 다름을 존중하다...
글쓴이 : 구동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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