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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원자력 발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 - 지속가능저널

"원자력 발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 - 지속가능저널



"원자력 발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대담]박진희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공동대표, 송상훈 (사)푸른아시아 전문위원
문재인 정부가 지난달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8기의 일시 가동 중단을 시작으로 고리 원전 1호기 영구정지, 신규 원전 건설 계획 전면 백지화 선언까지 확고한 탈핵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 에너지 정책의 대전환을 천명한 문 대통령이 실제로 행동에 나서 로드맵에 따라 하나씩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장은 찬반여론이 팽팽하다. 시민·사회단체는 탈핵은 시대적 흐름이라며 정부의 정책을 반겼지만 이해관계가 직결된 원자력업계와 야당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법적 근거가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처럼 탈원전을 둘러싸고 구체적 움직임이 목격되고 있고 논란이 뜨거운 상황에서 14일 탈핵에너지교수모임 박진희 공동대표(동국대)를 만나 탈핵을 포함한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후변화 대응을 실천하는 국제 NGO (사)푸른아시아의 송상훈 전문위원이 대담을 진행했다.

탈핵에너지교수모임 박진희 공동대표(동국대)와 국제 NGO (사)푸른아시아의 송상훈 전문위원이 14일 동국에서 탈핵을 포함한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이소록
(송상훈)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했다. 신규 원전 신고리4호와 신한울1, 2호는 사실상 완공되어 가동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공정률 27.7%인 신고리 5.6호 공사 중단 여부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하겠다는 대통령의 결단에 대하여 논란이 많다.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박진희)탈원전을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국내 에너지정책이 만들어진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1978년도에 고리 1호기가 처음 가동된 이후로 지금까지 정부차원에서 원전을 멈추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에너지 정책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송)얼마 전 탈원전을 반대하는 교수 417명의 성명서 발표가 있었다. 탈원전 정책 추진은 전력 수급 불안정, 에너지 안보 위기, 민생부담 증가 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우선 에너지 안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자. 일각에서는 우리나라가 원유 수입 5위, 석탄 수입 3위, LNG 수입 9위 국가이니 에너지안보를 위해서라도 원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박)에너지 안보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급의 안정성이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해외 의존도는 96%에 달한다. 만약 가스 수송로가 봉쇄된다거나, 중동에서 석유공급이 중단된다면 우리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즉, 해외 상황의 변화에 직접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에너지를 자체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려면 해외에서 들어오는 에너지 공급 라인의 안정화가 필요적이다.
탈원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원전을 통한 에너지안보를 주장한다. 비록 우리나라가 우라늄을 수입하지만 연료를 가공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원전의 해외 의존율이 별로 높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에너지 안보는 오히려 재생에너지 개발을 통해서 확고해질 수 있다. 풍력, 태양열 등의 재생에너지는 애초에 해외에 의존할 필요도 없거니와 안전하기 때문이다.

(송)하지만 재생에너지는 ‘간헐성’ 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다. 전력수급에는 차질이 없을까.

(박)원전과 달리 태양광, 풍력, 지열 등 재생에너지 발전은 24시간 가동이 어렵기 때문에 간헐적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재생에너지 활용에서는 단일에너지원을 하나씩 사용하지 않는다. 태양광, 풍력, 지열 등을 모두 결합해 복합발전을 한다면 간헐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복합발전을 위해서는 ‘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라는 기술적 전제가 확보되어야 한다. 한국에는 아직 스마트 그리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폐쇄된 원전 설비용량 전부를 바로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그 가교기술로 가스발전을 진행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2030년이 되면 모든 원전의 가동이 중단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원전 제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2021년에서 2030년까지 원전 25기 중 11기의 가동을 중단하고, 원전의 설계 수명을 연장하지 않으면서 LNG를 통해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복안이다. 문 정부의 계획에 따르자면 2030년 우리나라의 에너지믹스는 LNG 37%, 석탄 25%, 원전 18%, 재생에너지 20%다. 공급에 큰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송)원전을 폐지하는 이유 중 하나로 애초에 잘못된 전력수요예측을 꼽는다.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많은 전력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수요를 과도하게 예측해서 원전이나 석탄화력발전소를 더 지으려고 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더구나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제조업은 사실상 대부분 중국에서 가져가고 있고, 한국에서는 4차산업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대부분의 산업이 저전력 산업으로 전환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동의하나.

(박)2030년까지 계획한 신규 원전은 7차 전력수급계획에 기초하였다. 7차 전력수급계획은 2029년까지 연간 전력 소비량이 3.2~3.5%씩 증가한다는 것을 전제로 발전 설비량을 계산했다. 그러나 2013, 2014, 2015년도 전력소비증가율은 3.5%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더 많은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보자는 생각을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전력 예비율(현재 설비가 되어있는데 가동하지 않는 설비율)은 이미 60%에 달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계산 결과에 따르면 가스발전을 늘리면 2030년까지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총량공급에 있어 전력예비율은 15%가 될 것이기에 전력 부족 사태는 없다. 더군다나 지적한 대로 4차산업은 저전력ㆍ저탄소 기술에 기반하므로 과도한 전력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 (대담이 이루어진 이날, 전력거래소는 2030년 우리나라 전력 수요가 2년 전에 예측했던 것보다 10%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치를 발표했다.)

(송)원전을 멈추면 전기료가 크게 인상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박)전기료가 얼마나 인상될 지는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렵다. 한전에서 발표한 발전원별 판매단가를 기준으로 전기요금을 계산해보면 탈원전시 전기요금이 인상된다는 주장은 맞다. 120원 정도의 단가인 가스발전을 두 배로 증가시켜 원전의 공백을 메꾼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수가 있을 수 있다. 이미 문재인 정부가 발전용 에너지 세제개편의 의지를 드러낸 만큼, 발전단가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 발전용 유연탄에는 거의 과세하지 않는 데 비해 LNG에는 높은 세율이 부과하는 편이다. 석탄 세율을 높이고 LNG 세율을 낮추도록 조정한다면 발전단가가 달라진다. 거기에 석탄과 원전연료의 외부비용(발전에 따른 사회·경제·환경적 비용. 가령 온실가스배출, 미세먼지, 대기오염, 국민 의료비용, 폭발사고와 방사능 누출, 폐기물 처리에 따른 제비용 등등)까지 모두 고려한다면 원전의 발전원가는 결코 저렴하지 않다.

(송)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원전 운영능력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면서 후쿠시마 같은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전 1위국인 미국에서 일어난 스리마일섬 사고, 원전 3위국인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 원전 4위 러시아의 체르노빌 사고 등을 보았을 때 사고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박진희
(박)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지진 안전지대라고 생각해 왔지만, 경주 지진을 통해 그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동안 비활성 단층이라고 생각했던 양산단층, 율산단층의 활성단층 가능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일본 후쿠시마 사고의 경우 주변 30km에 15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원전 주변에 부산, 울산 등 대도시가 산재해 있어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다. 국내 원전은 기본적으로 규모 6.5에서 7.0까지의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그 이상의 지진은 버티기 어렵다. 더 높은 규모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낮다지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원전사고를 완벽히 대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탈원전을 하는 것이다.

(송)원전이 풍력발전보다 CO2배출이 적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온배수 배출로 인한 CO2 발생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동해의 CO2 농도를 태평양과 비교해 추정했을 때 원전에서 배출된 CO2는 1,156만 톤으로 추산된다. 이 양은 2013년 한국의 CO2 배출량 총계 6억9450톤의 1.2% 상당한다. 과연 원전이 탄소 중립적일까.

(박)에너지원의 탄소배출량을 제대로 따져보기 위해서는 전 주기평가(LCA)를 해야 한다. 우라늄광산에서부터 시작해 최종적으로 원전의 가동을 중단하고 이후 폐기처분하는 과정, 방사성 폐기물을 보관하는 데에서 나오는 탄소배출까지 모든 것들을 고려해야만 원전이 탄소중립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다. 원전은 발전할 때, 엄밀히 말해 핵분열반응 과정에서는 탄소배출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신재생에너지에 비해 탄소 중립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 주기평가를 했을 때에는 태양광발전과 원전 사이에 탄소배출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탈원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폐기물 처리 문제 때문이다. 고준위 폐기물인 사용 후 핵연료를 처리하는 기술은 원전을 가동하는 그 어떤 국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저장소에 임시로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화장실 없는 아파트인 것이다. 고준위 폐기물 처리 대안으로 지층 매립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지층 매립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방사선 반감기를 고려해 10만년동안 지층에 아무런 지진이나 외부변동이 없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석탄발전은 논외로 하고, 그동안 인류가 원전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한 이유는 원전 외에 경제성 있는 에너지 개발 기술을 갖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대안이 충분히 제시되고 있다. 바로 재생에너지다. 경제성과 안전을 맞바꾸는 일을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송)새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앙 집중형 에너지 정책을 지방 분권형·분산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박)그렇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정책은 철저히 중앙 집중형이다. 그동안 지방이 에너지정책에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충남에서 화력발전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여 서울에 전력을 공급하면서 오히려 충남은 미세먼지에 시달리게 되는 억울한 일이 빚어졌다. 에너지 분권화, 청정에너지로 지역에너지 전환 등이 이루어진다면 예시한 충남처럼 지방은 에너지 자립이 가능해 질 것이다. 에너지에 대한 자치 권력의 강화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또한 에너지 소비자가 생산자가 될 수 있기에 에너지를 대하는 시민의 의식도 달라질 것으로 본다.

(송)에너지 분권화를 이룬 독일에서, 에너지 발전시설을 마을이 소유해 주민들이 수익을 나눈다고 들었다. 이러한 사례가 또 있나.

(박)덴마크가 대표적이다. 덴마크는 풍력발전에서 시작해 바이오매스 발전까지, 에너지협동조합의 형태로 에너지 분권화가 이루어졌다. 에너지 발전 시설의 마을 공동 소유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영국이다. 마을에서 태양광, 바이오매스 발전을 통해 전기를 팔아서 수익을 얻고 이 돈을 마을회관 기금 등으로 쓰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개인들이 재생에너지 발전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제도의 뒷받침이 있었다. ‘발전차액지원제도’는 재생 에너지원으로 생산한 전력 가격과 기성 에너지원으로 생산한 전력 생산단가 차액을 정부가 보상해주는 제도다. 공급업자들이 전력을 높은 고정가격으로 구매하기 때문에 개인은 그만큼 이익을 얻게 된다. 작년 에너지 협동조합 이익률이 4%에 달하면서 재생에너지는 이제 투자개념으로 확대되는 시기에 이르렀다.

발전차액지원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종 에너지 소비자인 개인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독일에서 2000년대에 전기가격 15원 중에서 1원을 재생에너지 부담금으로 매겼다. 에너지 협동조합이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이 투자함에 따라 그 다음해에는 2원으로 재생에너지 부담금을 늘렸고, 부담금이 늘어나면서 전기요금이 17유로에서 24유로로 올라갔다. 정작 더 큰 문제는 개인에게는 재생에너지 부담금을 물리면서 수출 위주의 산업체에는 면세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는 최근 문제를 인식하여 부담금을 조정하고 있다. 부담금이 조정된다면 개인의 부담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여러 국가에서 그리드패리티(화석연료 발전단가와 신재생에너지 발전단가가 같아지는 시기)를 달성한 만큼 앞으로 재생에너지 가격은 계속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생에너지가 늘어난다고 해서 전기요금이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요금인상이 있더라도 잠깐일 뿐,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경제적인 발전원은 재생에너지다.

(송)기후변화 시대를 맞는 국가의 에너지 정책방향과 시민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박)지금까지 에너지 공급을 이야기했지만 에너지 전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는 일이다. 지금 수준의 소비를 지속하면서 에너지 전환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절대적인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지에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원전 중단 여부를 넘어서서 수요관리에 방점을 맞춘 정책으로 전환 및 법제개편이 필수적이다. 시민들 역시 전력 소비량을 절대적으로 감축하지 않으면 결코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데 노력해야 한다.


탈핵에너지교수모임

2011년 11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국내 탈핵의 필요성을 느낀 교수들이 모여 결성했다. 현재 정회원 100여명이 활동 중이며 다수의 후원회원도 참여하고 있다. 탈핵의 필요성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강연, 토론회, 출판 사업, 연대활동을 주로 한다.



대담 송상훈 (사)푸른아시아 전문위원





이소록 / KSRN기자  sustainability@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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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5) Yipyo Hong - 71년 전 일본의 세월호를 만나고 통곡하다! 어제 40대 여성 교우의 아버님 장례식에...

(5) Yipyo Hong - 71년 전 일본의 세월호를 만나고 통곡하다! 어제 40대 여성 교우의 아버님 장례식에...



71년 전 일본의 세월호를 만나고 통곡하다!
어제 40대 여성 교우의 아버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 이상하게 나의 발길을 이끄는 신사가 하나 있어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효고현 북부 시골 토요오카(豊岡) 이즈시쵸(出石町)의 이치노미야신사(一宮神社)... 1,0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들과 오랜 삼나무 숲이 그곳이 오랜 세월 지역의 종교적 공간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한다.
음습한 뒷길을 따라 올라가니 빽빽한 삼나무 숲 앞에 청일, 러일, 중일전쟁 등에 나가 목숨을 잃은 지역 젊은이들의 혼을 기리는 ‘충혼탑’(忠魂塔) 세워져 있어, 흔한 일본 신사의 국수주의 선양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오른 쪽에 서 있는 ‘대효고개척단 순난자의 비’(大兵庫開拓団 殉難者之碑弾)라는 비석이 호기심을 자극해 뒤로 돌아가 보았다. 그리고 비문을 읽고 아연(啞然)하여 통곡하고야 말았다.
“1944년 3월, 대효고 개척단원 476명 만주(국) 빈강성 난서현 북안촌, 쌍합 촌락 두 곳 입식(入植, 식민지 이주 시킴). 1945년 8월 17일 345명 입수자결(入水自決)하다.“
(昭和十九年三月大兵庫開拓団員四七六名満州浜江省蘭西縣北安村, 双合屯二入植シ昭和二十年八月十七日三四五名入水自決ス)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건설 구호로 국민들을 속이며 세뇌하던 일본 정부는, 전쟁 막바지까지도 전쟁 식량의 조달을 위해 자국의 농민들을 무리하게 만몽(만주몽골)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농업에 종사케 했다. 그리고 선량한 농민들로 하여금 본토 농민들을 노예로 삼게 하고 착취하도록 했다. 즉 가해자가 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들은 가해자로 살아야만 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문제는 일본이 전쟁에서 지자, 그들 농민과 가족(노인, 여성, 아동)들은 집단 자결을 강요받았다. 정부 정책과 명령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여 1944년에 만주로 떠난 토요오카의 농민들은, 다음 해(1945) 패전 소식을 듣고, 어른아이 할 것이 없이 몸을 줄에 묶고 돌을 메달아 집단으로 물에 빠져 죽었다. 소련군의 포로로 비참하게 죽느니 자결을 선택하도록 종용한 국가의 무책임한 폭력이다.
내가 통곡한 이유는 만주로 떠난 토요오카 농민 가족의 숫자가 세월호 탑승객고 똑같은 476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 숫자도 세월호 306명(사망실종)을 조금 웃도는 345명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물속으로 빠지는 집단 자결을 강요받았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는 저 무책임한 일본 정부의 ‘대효고만주개척단’의 죽음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1944년 476명 만주행, 익년 345명 집단 익사 자살...
2014년 476명 제주행, 익일 306명 집단 익사 학살...
지난 2016년 8월 14일, 일본 NHK는 【마을 사람들(村人)은 만주로 보내졌다 - ‘국책’ 71년째의 진실】(村人は満州へ送られた~“国策”71年目の真実)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일본 농민들의 만주몽골 지역 이주정책은 무려 500만명을 목표로 했었고, 국내 빈곤층을 해외로 내보내어 국내 경제의 파이를 확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통제 관리 요원확대를 통해 효과적인 수탈과 전쟁동원을 획책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전북 지역 새누리 의원 정운천이란 자가 젊은이들 10만 명 쯤 캄보디아나 아프리카 보내면 좋겠다는 발상의 뿌리이기도 하다.
목표는 500만명이었지만, 패전 때까지 보내진 일본인 개척민의 수는 27만 명 이상이었고, 전황이 불리해져 위험이 극대화된 1943년 이후에도 6만 명 이상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향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3만 5천 명이라는 가장 많은 지역민을 사지(死地)로 내몬 나가노현의 비극적 일화를 소개한다. 전쟁 말기에 만주에 건너간 95명의 마을 사람들이 결국 집단 자결로 내 몰렸다는 것을 알게 된 촌장의 일기가 그것이다. 탁무성(拓務省)과 농림성 등 중앙정부와 각 도도부현(지방정부)이 교묘하게 마을 촌장들을 유도하여 만주 개척민 인원수를 강제 할당하였고, 그 확보 인원만큼 지역 보조금를 주는 등, 사탕과 채찍을 동원해 이주를 획책했던 경위가 일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오직 전쟁과 부국강병의 광기에 빠져 있던 국가의 폭력 하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476명이 타고 있던 세월호처럼 말이다. 그리고 저 일본인 개척단의 최종 배후 조정자들은 만주의 관공군 군벌 장교들이었다. 박근혜의 아비 박정희는 바로 그들 ‘관동군’의 장교였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병징용, 그 모두가 그들이 주도한 야만적 군국주의의 죄악이다. 지금도 원자력발전소의 위기와 불안고조, 사드 배치 등의 무기의 과잉 수입과 전쟁 공포 조장 등의 문제는 이들 군국 좀비들이 일소되지 않은 까닭이다.
다큐멘터리에는 나가노현 남부, 시모이나군(下伊那郡)의 토요오카무라(豊丘村)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내가 어제 방문한 효고현의 ‘토요오카’와 발음이 같다. 2,900명이 살던 궁핍하고 조그만 이 마을에서는 전쟁 말기에 27세대 95명의 마을 사람이 만주에 보내졌다. 하지만 그 후 남자 농민들은 모두 군에 소집되었고,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 현지인들로부터 습격을 받으며 폭력과 강간에 노출된 여성과 아이들 73명은 산속으로 도주하던 끝에 결국 집단 자결을 하게 된다. 당시 15세였던 쿠보다 칸(久保田諫) 씨(현재 86세)는, 아이 어머니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아이들을 목 졸라 죽이는데 협력했고, 20여 명의 아이를 죽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찌르며 집단 자결한 어른들... 산속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하지만 급소를 빗겨간 쿠보타 씨는 빈사(瀕死) 상태에서 발견되어 잘 알던 중국인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와 당시의 비참함을 증언했다. 전쟁 당시 촌장으로서 개척단을 꾸려 그들을 배웅했던 35세 촌장 쿠루미사와 모리(胡桃澤盛) 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패전 직후 41세가 되던 해에 촌장으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 “개척민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라는 유서를 남기로 목을 매 자살했다. 지금 내 나이의 촌부(村夫)조차 자신의 오판에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도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 쿠루미사와 켄(胡桃澤健, 78세) 씨는 아버지가 자살했던 안방을 슬픈 표정으로 소개한다. 일본 정부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자신의 그릇된 판단을 참회하는 내용은 1만 쪽 분량의 일기가 최근 공개됐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쿠리미사와 촌장의 일기와 달리, 당시 그 사업을 진행한 전직 관료들의 반성 없는 뻔뻔스러운 증언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책임지지 않는 국가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정책’이라는 이름의 악마는 지금도 발악(發惡)하고 있다. 하지만 ‘정책’을 온순한 개로 길들여 ‘발선’(發善)케 하는 것은 시민들의 양심과 연대 의식이다.
71년 전, 나라의 지시만 믿고 만주행 배에 몸을 실었던 476명의 효고현 농민 가족 중 345명은 이듬해에 목숨을 잃었다. 3년 전 세월호에 몸을 실었던 476명의 승객들 중 306명이 선장과 해경의 지시를 믿고 따르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러한 역사는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기권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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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ailymotion.com/video/x4opo90

村人は満州へ送られた~“国策”71年目の真実~20160814

2016/12/11

2006 생명 평화 정의 - 지구촌의 평화를 위한 사명과 과제 -박성준

생명, 평화, 정의 /박성준

<사단법인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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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립10주년세미나
-지구촌 평화를 위하여

/ 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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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제10주년 기념세미나 [발제 3] 2006

생명 평화 정의
- 지구촌의 평화를 위한 사명과 과제 -


박 성 준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겸임교수
비폭력 평화물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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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는 禾=자연=생명=쌀=밥=하늘(*김지하, “밥이 하늘입니다”)과 口=食口=사람=민중=인민=만민, 그리고 平=고름=공평=공정=정의를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평화의 ‘平’은 고르게 하다=공평/공정/평등하게 하다=정의롭게 하다와 같이 ‘동사’(verb)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和’를 고르게 하고 정의롭게 하다(‘平’)라는 뜻의 ‘평화’도 동사로 보아야 합니다. ‘평화’가 이처럼 명사가 아닌 동사라면, 평화는 관념(idea)이나 주의=이념(ideology)이 아니고 삶(life)이고 살림(*죽임의 반대)이고 행동(praxis)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를 뜻하는 말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흔히 “peace”라는 말로 영역됩니다만, peace는 샬롬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peace는 단지 현재 교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에 비해, 구약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의 샬롬은 전쟁행위가 중단된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샬롬은 일상적인 삶의 모든 관계, 영역, 차원과 관련되어 있는 지극히 풍부하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샬롬의 개념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삶의 토대로 여겼던 것, 곧 서로가 함께 일구는 공동체를 포괄합니다.

이처럼, 샬롬이 공동체적 언어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샬롬은 단지 개인이나 작은 집단의 ‘내적 안녕’(internal well-being)을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community)를 말하는 것이며, 정의로운 정치와 균등한 부의 분배 위에 이룩되는 한 사회의 총체적 안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립했습니다. 예수가 뜻했던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 샬롬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평화(peacelessness)

2차대전의 참화(慘禍)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고조시켜, 많은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이 각각의 학문분야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60년대에는 미소냉전의 격화를 배경으로, ‘전쟁과 평화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살아남느냐 절멸하느냐󰡓가 전(全)인류적 의식(意識)이 되었던 그 시대에, 독일의 대표적 지성 C. F. 폰 바이cm제커는 “평화는 인류 생존 가능성의 조건이다󰡓라는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이 명제는 극한적 폭력이 만연하는 오늘날에도 타당합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국제사회의 현상유지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최대의 이득을 얻는 북반구 나라들의 국가 이해(national interest)를 반영한 연구들이 평화연구의 주류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나온 것은 제3세계, 발전도상국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제3세계에는 전쟁이 없는 때에도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전쟁의 종식이 행복, 복지, 번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것, 빈곤, 기아, 환경오염, 착취, 억압은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평화학자 수가타 다스굽타(Sugata Dasgupta)는 “비평화, 나쁜 개발󰡓(󰡐Peacelessness and Maldevelopment󰡑, 1968)이란 책에서 󰡒비(非)평화(peacelessness)󰡓라는 신조어로써 제3세계적 삶의 정황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비평화의 구성요소로서 빈곤, 기아, 영양실조, 질병, 오염 등을 들면서 이들은 반드시 전쟁이나 국제적 긴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 이러한 비평화의 구성요소들을 제거하고 충분한 의식주, 의료, 위생적 생활환경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실현의 길이자 제3세계와 발전도상국의 평화연구의 과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의 현상유지가 아니라, 세계의 정치경제 구조의 근본적 변혁(變革)을 평화연구의 중심에 놓는 제3세계 평화학의 입장과 접근방법이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의(異議) 제기에 대해, 북유럽의 평화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대표자격인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단지 전쟁이 없다는 의미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하고, 이에 반해 행복, 복지, 번영이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라고 했습니다. 즉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란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실현이며,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통과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폭력에는 신체에 직접 위해를 가해오는 개인적이고(personal) 직접적이며 현재적(顯在的)인 폭력이 있는가 하면, 간접적이고 구조적이고 잠재적인 폭력이 있다고 하면서 전자의 예로는 전쟁, 테러, 린치, 폭행 등을 들고 후자의 예로는 나쁜 사회제도, 잘못된 관습, 불평등한 경제, 나쁜 정치나 법률, 환경파괴와 오염, 나쁜 개발 따위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독의 신학자로서 평화문제를 깊이 연구해오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는 전쟁의 방지가 긴급한 과제인 현대 세계에서,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negative(부정적, 소극적)하게 정의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소극적 평화라고 하는 개념은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국제 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버릴󰡓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류가 폭력의 악순환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도 결코 소극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수가타 다스굽타의 ‘비평화󰡑의 개념과 요한 갈퉁의 ‘적극적 평화󰡑의 개념, 그리고 볼프강 후버의 비판은 각각 평화의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일깨워주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다스굽타의 󰡐비평화󰡑나 갈퉁의 󰡐구조적 폭력󰡑 등의 개념을 매개로 하면서, 평화연구는 그 영역과 지평을 널리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제3세계의 빈곤의 문제, 전 지구적인 󰡐20대 80󰡑의 사회, 생태계와 환경 파괴 문제, 농업-농민 문제,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자차별, 학력이나 신분에 따른 차별 등도 구조적 폭력으로서 평화연구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무관심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미국 동행안을 여행하다가 커넥티컷주의 팍스우드라는 곳에 그 때 막 문을 연 ‘피쿼트 뮤지엄󰡑이라는 미국 원주민 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피쿼트(Pequot) 민족은 거의 다 사라지고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인디언 거주구역에 살면서 후손들에게 남겨줄 이 박물관을 세운 겁니다. 박물관 안에는 자기들 옛 마을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모형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우리 동네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쿼트 사람들의 피부색과 얼굴생김새도 우리와 엇비슷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는 방식이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과 물레를 잣고 있는 모습, 개울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식, 농사를 짓는 도구들이 우리하고 너무나도 닮아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누이와 고모가 있었고 이웃 마을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일만 년 이상 지금은 아메리카라 불리는 이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온 원래의 주인이었구나!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그들을 거의 다 학살해버렸구나! 피쿼트 박물관에서 그들의 순결하고 발랄한 옛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대륙이 원래 유럽에서 온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우리와 멀지 않은 친척 뻘 되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감동에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미국에 건너간 첫해, 말이 잘 되지 않아 그 스트레스로 위장병이 몹시 악화돼 있었는데, 그 날 이후 나는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 위장병도 나아버리더군요. 키 크고 눈이 푸른 그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서투른 영어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언젠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좋은 책을 한 권쯤 번역 출판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9월 11일의 충격 뒤로 사태전개를 보는 데서도 미국과 서방측의 잣대와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판단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 눈앞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난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알아보려고 해도 도움을 주는 자료나 책자가 거의 없었고 또 평소에 너무나도 게으르고 무관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슬람과 '지하드'에 대한 이해

전 세계 이슬람권 인구는 14억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인구 18억의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샬롬󰡑 즉 평화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슬람의 정신은 다양성의 존중과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알라󰡑라는 것은 이슬람의 특별한 신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을 말하는 이슬람 말일뿐입니다. 이슬람 종교의 뿌리는 히브리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멀지 않습니다.

흔히 ‘성전’이라고 번역되는 󰡐지하드󰡑가 갖는 의미는 󰡐내적 투쟁󰡑,󰡐악을 극복하고 선을 이룩하려는 정신적인, 내면적인 투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내적인 투쟁이야말로 지하드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합니다. 󰡐지하드󰡑의 더 깊은 뜻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 깊은 자기성찰에 의한 내적 쇄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것만이 아닌 외적인 것이 될 때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불의와의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장투쟁이 지하드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경우는 도발이나 침략을 당했을 때, 자신들의 종교 가치가 짓밟혔을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네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손에 드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인 것처럼 얘기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지하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이슬람 사람들이 왜 폭력을 쓰게 되었는가. 그 폭력의 뿌리에 대해 모르면서 이슬람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남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그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시각이 내면화되어서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미국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큰 병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우리의 이런 병에 대해 진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시각,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테러를 보는 눈

국제무역센터 테러 사건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6천명이나 죽은 처참한 사건을 두고 이런 반응을 보여도 되는 것인가? 왜 그런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직 제3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일제 식민지 백성이었고 해방되었다지만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으며,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햇볕정책 이래로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감돌고 있고, 미국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는 언제 다시 전쟁에 휘말릴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이 앞선 채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그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어마어마한 초현대 무기를 동원해 보복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온 서방 세계가 미국의 편을 들고 있고 우리 정부도 그러한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을 천명하고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란 무엇인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가령 6천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테러 사건이 미국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아랍지역에서 일어났다면, 그리고 그 행위자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었다면, 세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미국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폭력은 ‘테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조차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방세계는 그런 미국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미국의 그런 행동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이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폭력사건들, 엄청난 규모의 참혹한 파괴와 살육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런 사건이 이슬람권에서 일어났을 때 더 그러했습니다. 걸프전쟁에서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상하수도, 전기, 가스 시설 등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 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 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병으로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문들은 대부분 이런 것을 미국의 시각을 통해서, 미국이 전해주는 대로 보도해 왔고 우리들은 그저 먼 산 보듯이 하면서 보도의 진실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무덤덤히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미국이 당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테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왕 관심을 가질 바에는 이 기회에 󰡒테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한번 되짚어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즉, 어떤 집단이 미국 중심의 세계가 악으로 규정하는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에 대해서만 테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강대국이 국가의 이름으로, 강대국들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엔의 승인까지 얻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파괴와 민간인에 대한 살육을 행하는 전쟁이나 군사공격은 테러로 볼 수 없는 것인가?

‘전쟁에 반대하는 인민의 연대󰡑(People's Coalition Against War; PCAW)라는 미국에 본부를 둔 평화단체에서는 이렇게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테러에 대한 해결 방법은 정당한 절차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정당한 절차는 협상과 외교여야 하지 협박과 최후통첩, 봉쇄와 금수조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큰 증오와 분노를 불러올 것이기에. … 󰡐테러󰡑란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의에 찬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어떤 국가에 의해 승인된 테러, 파시스트에 의한 테러, 개인과 집단에 의한 테러 등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여기서 말하는 테러의 개념에 따른다면, 미국이 수단의 제약회사를 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라든가 걸프전에서 행했던 혹은 코소보에서 행했던 전쟁이라는 이름의 살상행위도 테러에 포함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平和’와 ‘샬롬’, ‘적극적 평화’와 ‘비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2002년판 미 육군의 ‘테러리즘 정의’(the US Army definition of terrorism)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러리즘이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협박이나 강제, 공포의 주입등... 계산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을 행사하는 것이다.”(Terrorism is “....the caculated use of violence or threat of violence to attain goals that are political, religious or ideological in nature....through intimidation, coercion or instilling fear.”)

이 정의에 따른다면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테러’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테러’도 폭력과 협박과 공포를 사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테러 전쟁’(war on terrorism)에 이르러서는 폭력과 공포의 사용은 더 한층 강화됩니다. 테러리스트와 그 동조자들로 간주되는 자들을 공격하고 살육하며 포로로 잡기 위해 한 국가의 무장력이 동원됩니다. 이렇게 볼 때, 테러와 대테러와 전쟁 사이에는 그다지 다른 점이 없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폭력과 협박과 공포의 사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입니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월성’(moral superiority)이나 ‘정의’(justice)를 내세우지만, 그 점에서는 테러리스트 측에서도 할 말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전쟁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전쟁은 평화의 반대말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평화의 반대말이 반드시 전쟁인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없지만 평화도 없다”는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샬롬’의 의미에서 보았듯이, 평화’라는 말에는 󰡐전쟁의 부재󰡑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와 정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만이라도 온전하지 않으면 나머지 두 가지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전(保全)하는 것이고, 생명의 살림과 지킴과 보전인 평화는 정의(正義;justice)가 살아 숨쉴 때에야 비로소 담보됩니다.

최근 ‘녹색평론사’에서 출간한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정치평론집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에서 좀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나라의 테러리스트는 종종 다른 나라의 애국투사입니다.” “세계는 자살 폭파범을 비난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긴 여정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발칸지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석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이 아랍에 편집증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 곳에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매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를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 토마스 프리드먼 만큼 우아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친 짓도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미국은 이라크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인은 협상이나 망설임 없이, 혹은 유엔의 승인 없이도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뿐만 아니라, 유엔에 대해 미국이 거의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을 보십시요. 세계화에 대한 그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미국의 보복 군사행동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정치인 미국의 하원의원 바바라 리 여사가 말했듯이,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기 전에 “한 발짝 물러서서󰡓 테러의 원인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았어야 합니다. 온 인류는 테러리즘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하고 거기에 대한 깊은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미국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 왔기에 이슬람 민중들이 저렇게까지 처절한 증오심을 품고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자살테러를 감행했겠는가, 그들의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

어느 기자는 “미국 테러 참사는 일종의 부메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미하일 델랴긴(세계화문제연구소 소장)은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는 러시아 속담을 곁들이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약소국가들에 불안정을 조장해 이익을 챙기면서 약소민족들의 이권을 냉혹하게 무시했다. 이로 인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 균열이 심해졌고 그 결과 악마적 테러가 폭발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시사저널󰡑2001년10월25일자 참조)

또 우리나라 신문과 잡지에 자주 글을 써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친숙해진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는 ‘한겨레21󰡑 2001년10월2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노르웨이의 어느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 씨와 외과의사 후솜 씨의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좀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의료봉사경험이 풍부한 두 의사의 의견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약 7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한다는 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솜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그의 논리를 일축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양민을 죽이는 것을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변호하느냐󰡒는 분노 섞인 기자의 질문에 후솜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 때 환자 중에서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는 했지만 끝내 오른 손은 못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었다. 완전한 절망의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애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애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후솜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세계관의 문제를 언급했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 못하는 것이다.󰡓

후솜은 이번 사태를 긴 역사의 안목으로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이 벌여온 오래된 싸움의 한 장면이다. 중세적, 근대적 서구의 세계사 무대등장이 이루어진 때부터, 이미 50대에 걸쳐서 비(非)서구지역의 주민들은 십자군의 약탈과 노예매매, 정복과 식민화, 약탈로 인한 아사사태에 시달려 왔다. 그러다가 평화스러운 농민들이 결국 투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형벌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미국의 신무기 실험장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21세기 첫 전쟁은 겉으로는 빈라덴과 그 집단의 테러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은 명분일 뿐, 미국이 테러응징을 내세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패권을 강화하려고 한다고 지적합니다.(시사저널 2001년 10월25일자 참조) 숨겨진 전쟁목표는 또 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국토를 무기성능 시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번 테러 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해가려 합니다.

시대는 문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이번 사태가 21세기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가 너무 심각하고 거대해서 그 후과가 어디까지 미칠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려되는 것은 첨단 무기를 가진 초강대국의 폭력에 맞서 아무 힘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하는 생물학 무기가 등장하고 해서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이 사태가 인류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노력과 함께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 사회구조와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농부이자 평화운동가인 월든 베리(Wendell Berry)씨는 ‘무너지는 낙관론 - 공포 가운데서 살아가기’(Thoughts in the Presence of Fear)라는 글에서 문명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대략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9월11일 사건과 더불어, 기술적/경제적 낙관론이 의문의 여지없이 통하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신세계질서’, ‘신경제’ 운운하면서 마치 우리가 무한정 성장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서있던 낙관론은 이제 무너지고 있다. 그런 낙관론을 신봉했던 정치지도자들과 대기업간부들과 투자자들은, 번영의 결과가 전 세계 인구의 극히 일부인 한줌의 부유층들에게 귀속된다는 사실, 그것도 미국과 같은 잘 사는 나라에서조차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 번영은 전 세계에 걸친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딛고 서있으며, 그 번영의 생태적 비용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 위협으로부터 부유층들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발전된’ 나라들은 ‘자유 시장’에게 신(god)의 지위를 부여해 왔다. 그들은 한편 농민들과 농토와 마을 공동체와 숲과 습지와 평원을, 한마디로 전 생태계를 희생 제물로 삼아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지금 전 세계적으로 ‘경제의 비집중화’(economic decentralization), ‘경제정의’, ‘생태적 책임’을 위한 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9월 11일 사건 이후로 그러한 노력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일련의 연속적 기술혁신 조차도 이번에 경험한 더 엄청난 혁신, 즉 새로운 형태의 전쟁(a new kind of war)에 의해 마구 짓밟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치 못했다. 그 새로운 무기, 새 전쟁은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기술혁신의 성과를 우리들의 재앙으로 바꾸어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대로 무한경쟁 자유무역의 지구경제시스템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부유한 산업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기비판과 자기수정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군림해온 ‘기술혁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행복한 환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4차에 걸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이래로 걸프전,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전쟁에 이르기까지 10년을 주기로 해서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기 상인들의 투자와 자본회전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는 완전 초토화라는 자연과 생활환경의 파괴가 가능하고 생태적 질서 자체를 완전히 변형해버리는 가공할 무기들이 등장했습니다. 최첨단의 무기를 생산해내는 군수산업의 경쟁은 종착점도 브레이크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경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경쟁의 결과 무기체계는 이미 ‘전쟁무기’라는 한계선을 넘어섰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재래적 의미의 전쟁 도구가 아니라, 그 악마적인 힘은 신의 영역을 침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를 먹고사는 전쟁상인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는 미국경제의 체질도 근본적인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식 삶의 방식, 미국식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제도를 세계의 모든 지역과 나라에 전파하고, 심지어는 이슬람권과 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이러한 방식은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을 꿈꾸라

이런 모든 문제-인류가 안고 있는 질병들-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서 말했듯이 문제 자체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평화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지금의 반 평화 흐름보다 더 거대하고 도도한 물결로 일어나야 인류가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고,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거대한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가능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디 옹의 저 놀라운 통찰에 깊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새 발견들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폭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더 놀라운 발견들,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한 꿈을 꿔야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해내야 합니다. 그것은 차가운 현실주의적인 분석과 논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9월 11일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보면서 전 세계 인류가 평화를 위해서 커다란 각성을 해야 하고 서로 연대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거대한 연대가 그 반대 방향, 즉 폭력의 악순환으로 가려고 하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통제를 가하고 그 고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9. 11 직후, 뉴욕 타임스 9월 24일자 논단 ‘새로운 세계에서의 미국의 주권󰡑이란 글에서 펜실베니어 주립대학 로버트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공격은 그래도 전통적인 성격의 공격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생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은 미국 땅에서 6천명이 아니라 60만 명도 죽일 수 있다.”

어마어마한 최첨단 과학무기로 잔뜩 무장하고 있는 세계 초 강대 제국이 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오해이거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로버트 라이트 교수의 지적처럼, 이른바‘테러 집단’도 미국의 첨단무기에 못지않은 가공할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현대 세계에서는 무기가 지나치게 발달해 버려서 전쟁이나 폭력에 의한 문제 해결이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식과 정보와 과학기술의 전 세계적인 소통의 결과로 ‘무기의 평준화’가 이루어져 오직 공멸이 있을 뿐 일방적인 승리가 불가능해져버렸습니다.

미국은 지금 이라크라는 수렁에 깊이 발이 빠져있습니다. 사건의 결과가 미국의 보복공격과 그에 대한 재 보복으로, 탄저균 같은 생물학적 무기가 사용되는 바이오전쟁으로, 그리고 다시 원자력발전소 공격과 같은 더 무서운 재앙으로… 이렇게 끝 모르는 폭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면 전 세계와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자랑인 ‘시민적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옹호해야 하며, 미국이 더 강화된 군사주의나 전시 파시즘 체제로 가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을 통제하려면 먼저, 또는 적어도 동시에 미국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만약에 미국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스스로를 통제 할 수 있도록, 미국 안의 양심 있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고 평화적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미 미국에서 반전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점차 확산되어 갈 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무력감, 우리가 미국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적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것이 창조적 상상력입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평화의 새 문명을 여는 열쇠꾸러미 중 가장 큰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엮어놓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이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 세계 반전 평화 연대세력의 힘으로 선의의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현재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운동가 한상진님의 최근 편지를 조금 인용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바그다드 상황은 현재 최악의 상황에서 별로 나아진게 없습니다.

제가 나오기 전날 잠깐 시내를 나갔을 때, 무장저항 세력이 시내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이 지나가지 않는 시간은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 그린존 인근마저도 무장 저항세력이 순찰을 돌 정도로 무장 저항 세력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아마도 미국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내부에서 조차 이번 전쟁에 대한 회의가 상당하게 퍼져 있습니다.

즉 스스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빨리 이라크에서 복무기간을 마치고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무장저항 세력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지만, 미군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미군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막강한 화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민간인과 저항세력 구분하지 않고 폭격을 퍼붓고 있습니다만 이런 미군의 행위는 안그래도 이미 멀어진 이라크의 민심을 더욱 멀게만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미군은 민간인과 저항세력을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미군 검문소 앞에서 미군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방향을 돌리는 차량에 마저도 무차별 사격을 해 댑니다. 하다못해 기자와 무장 세력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 합니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막강한 화력을 이용하여 2,500 만 모든 이라크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뿐입니다.“ (2004. 9.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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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의 굴레를 벗고 자율의 대지에 서자

우리 정부가 미국과의 현실적 관계를 어찌할 수 없어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부터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옳을 것인가? 이 물음을 품고 한걸음 물러나 간디 옹을 찾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간디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간디가 직접 저술한 글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드문 글들 가운데 그의 ‘자서전’과 더불어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글 한편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어 있습니다. ‘힌두 스와라지’(안찬수 옮김, 출판사 강)가 바로 그 글입니다.

‘힌두 스와라지’는 간디가 1909년 12월 남아프리카 트란스발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투쟁을 대표하는 주간 신문 ‘인디언 어피니언’지에 구자라트어로 발표한 글입니다.

그 글의 서문에서 간디는, “ ‘인디언 오피니언’의 독자들에게 제시하려고 인도의 자치라는 주제를 놓고 몇 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썼습니다. 스스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기에 간디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진솔하게 표출되어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라는 말은 간디의 방식을 잘 드러낸 표현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방식’이란 다른 사람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스와라지’(Swaraj)는 ‘자치’를 뜻하는 힌두어로, 간디 사상의 한 핵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swa=self; raj=govern, 따라서 self-government, self-rule 등으로 영역됩니다. 간디는 ‘민족적 자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 자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은 간디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할 때 그 주체는 계급이나 계층 또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개인인 나 자신이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 그 소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고 하는 이 점을 간디는 주목하고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의 제10장에서 ‘폭력’의 문제에 언급합니다. 그 장의 구자라트어 제목은 ‘darugolo’인데, 이 단어는 4장에서는 ‘무기와 탄약’으로, 15장에서는 ‘총’으로 번역되었다. 간디는 이 말 대신에 ‘육체의 힘’ ‘총의 힘’ ‘무기의 힘’ 등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들로 ‘혼의 힘’(atmabal)을 사용하는 것과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것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sat=truth, agraha=firmness), [진리파지], [비폭력적(또는 수동적) 저항] [시민적 불복종]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이 말은 고통을 견뎌내면서 오로지 ‘혼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곳에는 악이 존재하지만 연민이 있는 곳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무기의 힘은 사랑의 힘이나 혼의 힘과 싸울 때에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간디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의 힘이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척결하고 근본적 변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은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 세계를 변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힘 있는 수단’이 필요한데, 간디가 말하는 ‘사티아그라하’ 곧 수동적, 비폭력적 저항은 현실 속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가 간디에 관해서 가장 큰 오해가 일어나는 대목입니다. 간디는, “나는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비폭력 저항을 믿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즉 그는 사티아그라하‘를 현실과 세계를 변혁하는 가장 힘 있는 수단으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비폭력적 저항을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적 대안’(a realistic alternative)으로 얘기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간디가 [사티아그라하]를 군사적 언어(military terms)로 얘기했다고 말하는 해설가들 -‘A Force More Powerful’의 저자 Peter Ackerman과 Jack Duvall 같은 이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로 간디는 “비굴한 굴복 보다는 차라리 폭력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간디는 누구보다도 ‘행동’과 ‘피동성’(passivity)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간디는 나치 독일의 행태에 대해 우려하면서 베를린의 한 유태인 지도자인 랍비에게, “저항을 조직하고 나치의 위협에 맛서 싸울 수 있도록 많은 유태인들과 유태인 동조세력을 동원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간디는 불의한 상황에서의 피동성을 볼 때 마다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비폭력적 저항이 피동성과 대체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라크 파병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간디 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혜를 얻습니다.

먼저, ‘간디의 방식’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라크 파병과 같은 중대한 문제는 미국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을 때, 타율이 아닌 자율(‘스와라지’)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육체의 힘’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랬듯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고, 끝내는 패배하고 이라크로부터 물러날 것입니다. 미국에 추종하는 이라크 파병 한국군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우리는 ‘사티아그라하’ 곧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의 방법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미국정부의 압력에 의한 결정’이라는 데 공감하는 85%이상의 국민들이 있습니다. 그 국민들이 파병반대의 이유와 정당성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각가지 방법으로 도와드리며 그 국민들과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파병결정이 철회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이와 동시에 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전후재건을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현실적 대안’을 구체적, 세부적으로 마련하여 전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국민들이 그 안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파병에 반대한다면, 정부는 파병결정을 철회해야만 한다. 이러한 자율적이고 성숙한 ‘의사결정 과정’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파병반대운동의 내실(內實)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짓밟아버린 ‘절차적 정당성’을 국민과 시민의 차원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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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9

2013 핵발전소 '펑', 해운대 30분-부산시 90분이면 초토화 : 네이버 뉴스

2013 핵발전소 '펑', 해운대 30분-부산시 90분이면 초토화



[정희준의 '어퍼컷'] 부산, 제2의 후쿠시마가 될 것인가?

 [프레시안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

 수도권에는 핵발전소가 없다. 왜일까. 간단하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핵공학자들이 아무리 "핵발전소는 안전해요~"를 외쳐도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그간 가동한 전 세계 500여 개의 핵발전소 중 이미 세 개가 터졌다. 그리고 그곳은 죽음의 땅이 됐다. 서울 근처엔 절대 안 지을 것이다.

최근 정부의 데이터를 총괄하는 제3정부통합전산센터 건립을 위한 입지 선정 작업이 한창이다. 기획재정부는 부산을 선호한다고 한다. 해외에서 해저로 케이블이 들어오는 송정에 데이터베이스 망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제시한 입지 조건 중엔 이런 게 있다고 한다. 핵발전소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벗어나야 한다는 것. 송정은 고리 핵발전소 바로 옆 동네다. 이는 정부 역시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통합전산센터는 중요한 시설이다.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국민은? 부산, 울산, 경상남도에 사는 국민은 안전한 곳에 살 권리가 없는가. 정부는 입지 조건으로 '30킬로미터 밖'을 제시했다는데 바로 그 30킬로미터 안에는 343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살고 있다. 정부는 그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는가. 그들의 목숨 값은 전산 데이터 값보다 못한가.

정부는 알고 있다

국토 면적당 핵발전소 밀집도는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핵발전소라는 사실상의 폭탄을 껴안고 사는 지역이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기장군 고리 지역에 이미 6기가 가동 중이고 여기에 또 4기가 추가 건설 중이다. 인구 350만 대도시가 핵발전소 10개를 끼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문제는 고리 핵발전소 1호기다. 1호기는 2007년 30년의 수명이 만료됐음에도 이명박 정부가 10년간 재가동을 승인해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고리 1호기는 '노후 핵발전소'도 아니고 사실상 '폐 핵발전소'인데 이걸 땜질해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국내 최초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는 건설 당시 기술 부족으로 인해 세 조각을 붙여 만든 '용접 원자로'로 전체 핵발전소 사고 및 고장 건수 659건 가운데 129건을 기록한 '공포의 핵발전소'이다.

그런데 지난 4월 한국수력원자력은 연장 시한이 4년 밖에 남지 않은 고리 1호기에만 무려 2382억 원을 들여 부품 교체에 들어가기로 했고 또 곧 스트레스 테스트를 치를 것이라고 한다. 2차 수명 연장을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든, 비행기든, 그 어떤 기계든 37년을 쓰면서도 그 성능을 유지하는 것이 있는가. 그럼에도 또 재연장을 해서 50년 쓰겠다고 나선 것이다. 전 세계 핵발전소 평균 수명은 19.3년에 불과하다.

ⓒ프레시안

핵발전소 사고는 시간의 문제, 내가 아니길 바랄 뿐

그렇다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노심 용융 사고는 가능할까. 한국수력원자력 측은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 제1, 제2, 제3의 비상 발전기를 가지고 있고 후쿠시마 사고의 원인이 쓰나미로 인한 발전기 침수였기 때문에 비상 전원 차량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4단계의 비상 대비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다 무용지물이었다. 고리 1호기는 이미 2012년 2월 정전 사고가 났고 또 한국수력원자력은 이를 담대하게 은폐했다가 들통이 났다. 원자로에 전력 공급이 끊기는 완전 정전(black out)이 12분간이나 지속됐는데도 이를 숨긴 것이다. 이게 2시간 정도 지속되면 연료봉이 녹기 시작하고 이는 곧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한국판이 되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대재앙 100분 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이런 사고는 없을 것인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7월 고리 1호기의 비상 발전기 2대가 무려 18시간 동안 멈췄다. 이마저도 또 은폐하려 했던 것인지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알려졌고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금도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국민들은 고리 1호기의 연이은 사고를 잘 모를까. 핵발전소에서 거리가 먼 중앙 언론사들이 이 문제를 해외 토픽 보듯 하기 때문이다.

사고 나면 대피가 가능할까

그러면 실제 상황을 그려보자. 고리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터졌다고 말이다. 방사성 물질이 퍼지기 전에 대피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방사성 물질은 얼마나 빨리 퍼질까.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직후 국방과학연구소의 화생방 시스템 모델에 기상청 자료 등을 입력한 시뮬레이션 결과 고리 핵발전소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규모의 사고가 날 경우 북동풍이 초속 4미터로 불면 기장군은 20분 만에, 50분이 지나면 서부산 경계 지점까지, 90분이면 부산 전역이 방사능으로 덮인다고 한다. 북동풍이 잘 부는 여름엔 더 빠르게 퍼진다고 한다. 결국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해운대 구민들에겐 30~40분, 부산 시민들에겐 90분 남짓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과연 그 시간 안에 대피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궁금함에 더해진다. 과연 이들 국민들은 사고 소식과 대피령을 얼마나 빨리 알게 될까. 사고 즉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고리 핵발전소에서 제때 한국수력원자력으로 보고할까? 그러면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자력안전위원회 또는 한국전력으로 곧바로 보고할까? 그럼 여기서 국토교통부로, 그리고 청와대로 얼마 만에 보고가 될까. 시간 꽤나 걸릴 것이다.

그러면 국토교통부와 청와대는 얼마 만에 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부산, 울산, 경남의 3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에게 대피하라는 결정, 그거 쉽게 할 수 있을까. 이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마 부들부들 떨 것이다.

한 전문가에 물어봤다. 사고 후 얼마 만에 부산 시민들이 알게 될 지에 대해서. 그는 회의적이었다. 보고 라인을 통해 상부 기관에 올라가고 각 기관마다 혼란 속에 논의도 거칠 텐데 어느 세월에 시민들이 알겠냐는 것이다. 작년 고리 1호기 정전 은폐 사건도 조직적 은폐 기도와 상부 보고 지체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면 대피할 시간도 없이 피폭되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이었다.

핵발전소 사고의 그날은 '지속 가능한 아비규환'의 시작

핵발전소는 사고를 배제할 수 없다. '언제냐'의 문제일 뿐 대형 사고는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핵발전소 1기에 밸브만 3만여 개, 용접 부위는 6만5000여 곳, 배관의 길이는 170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부품이 고작(?) 2만 개라는 자동차도 가다가 그냥 서버리기도 하는데 핵발전소는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고리 핵발전소는 사고발생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선 1호기는 폐원자로를 땜질해서 쓰고 있다. 사고 및 고장 건수 129회에 빛나는 공포의 핵발전소이다. 특히 한국은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전쟁 발발 시 적의 미사일이 최우선적으로 타격하는 곳은 통신기지와 원자로이다.

자연환경도 딱이다. 부산 인근 지역은 지난 10년간 핵발전소 4곳의 반경 50킬로미터 내에서 총 75차례의 지진이 발생한 곳이다. 바닷가에 있으니 당연히 쓰나미도 가능하다.

인적 환경은 어떠한가. 며칠 전 검찰은 핵발전소 부품의 품질 보증 서류 위조, 시험 성적서 위조, 인사 청탁 등의 핵발전소 비리로 총 43명을 기소하고 54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중엔 그 유명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과 한국전력 이종찬 부사장, 김종신 한국수력원자력 사장도 포함되어 있다. 핵발전소 집단은 사고 은폐 집단이자 사실상 비리 집단임이 증명된 것이다.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기에 이만큼 탁월한 조건을 가진 핵발전소가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방사능 유출 사고가 나면 부산과 울산의 공장이 멈추고 세계 5위의 부산항이 폐쇄돼 경제적 손실이 600조 원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장기적 사망자가 30만, 80만 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정말 사고가 터지면 이러한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대재앙, 사회적 아수라장이 발생할 것이고 이는 지속 불가능한 아비규환으로 연결될 것이다.

일단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처럼 노심 용융 사고가 발생하면 '30킬로미터 내 343만 명'이라는 숫자는 사실상 주민 대피가 불가능한 숫자다. 후쿠시마는 30킬로미터 내 거주자가 고작 15만 명이었다.

이제는 아파트촌으로 변모하여 수시로 교통 정체에 시달리는 43만 해운대 구민들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울산은 또 어떻고.

이 위급한 마당에 전화는 분명 불통이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자식을 찾지 못해 공포감에 휩싸일 것이다. 또 일시에 그 많은 사람들이 차를 몰고 핵발전소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려 하겠지만 곧 길은 막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차를 버리고 짐을 지고 걷게 되지 않을까.

다 잘 됐다 치자. 그러면 대피한 이 수십만 또는 수백만 명을 어디서 묶게 하겠는가. 이건 대피소 수준이 아니다. 수용소를 수백 개 만들어야 한다. 수용소 생활 10년이면 집에 가게 될까? 20년?

아니면 일본이 지금 이순간도 찾아 헤매는 방사능 오염 제거 방법을 터득하는 그날까지? 그래서 그린피스도 "세계 어디에도 이런 곳이 없다"면서 만약 고리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면 후쿠시마 사고를 훨씬 능가하는 세계적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요즘 유신 시대로 회귀했다고 걱정들이 많으신데 유신 시절이 아니라 아예 한국 전쟁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유신 시절' 정도가 아니라 '동란 시절'로 회귀할 수도

사실 이 문제는 부산과 인근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 일본은 후쿠시마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도쿄에서도 방사능 오염 지수가 평소의 100배 이상 측정되는 경우가 빈번해 일본인들에게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있다. 사고가 나면 영남권 전체가 위험 지역이 된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해류를 따라 대전, 광주, 강원도, 서울까지도 방사능은 여행할 수 있다.

서울의 고급 백화점에 납품되던 기장 미역이 요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지금도 이러한데 사고가 터지면 일단 남쪽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해산물, 축산물의 교류가 끊기게 될 것이다. 다른 상품들도 거래가 끊길 것이다. 결국 부산, 울산 지역의 사람들은 인간관계도 타격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후쿠시마에서 온 사람들 만나기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한다. 정서적, 사회적 격리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나중에 복구라도 하지만 핵발전소가 잘못되면 아예 사람이 접근도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된다. 핵발전소에서 적어도 20킬로미터 이내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 재산이라는 게 집이 전부인 경우가 많은데 적어도 수백만 명의 재산이 연기가 되어 날아간다. 자식 교육은 또 어쩌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모여 일본처럼 '사회적 낙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핵은 '인간이 다룰 수 없는 물질'이라고 한다. 강원대학교 성원기 교수는 핵은 "굉장히 위험한 물질" 정도가 아니라 "인류와 공존이 불가능한 물질"이라고 했다. 후쿠시마 사고 수습을 직접 지휘했던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 사고 2주기를 맞아 이렇게 말했다.

"핵발전소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핵발전 정책이다."
지금 밥상 위 생선구이가 어디서 왔느냐를 따질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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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2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 전문가들과의 대화](9) 마루야마 겐지·소설가 - 경향신문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 전문가들과의 대화](9) 마루야마 겐지·소설가 - 경향신문



배계급 위해 움직이는 국가를 대부분 ‘내 나라’로 착각
ㆍ집단에 눌려 잃어버린 ‘개인’ 되찾아주는 게 나의 문학
마루야마 겐지가 일본 나가노현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968년 고향으로 돌아가 문단과 거리를 둔 채 집필과 정원 관리에 몰두해왔다.
마루야마 겐지가 일본 나가노현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968년 고향으로 돌아가 문단과 거리를 둔 채 집필과 정원 관리에 몰두해왔다.
우리는 개인의 결정이 모여 전체의 입장을 정하는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 동안 개인이 품어오는 희망의 무게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가벼워졌으며, 불안에 흔들려 왔다.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지 그 의심의 부피 역시 커져버렸다.
광복 70주년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공익캠페인에서는 국가를 위하는 마음,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국가를 추구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서구를 중심으로 세계는 불평등이 도를 넘고 있으니 해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한국 역시 불평등의 가속화 속에서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리고 있다.
역사, 문명의 진보는 순응하지 않는 개인의 결정에 의해 진전되어 왔다. 그렇지 않았으면 바뀌어지지 않았을 왕정이었고 정교일치였으며 봉건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연 전체를 ‘나’의 뜻으로 진전시키고 있는지?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휘청이는 개인의 마음을 살펴보기로 했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에게 그 현상을 물었다. 그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조직, 사회, 국가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실려 부표처럼 떠다니는 개인의 선택에 끓어오르는 안타까움을 토했다.
마루야마 겐지와의 대담은 지난달 6일 그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도쿄에서 기차로 3시간 반 걸려 도착한 나가노현 시나노오오마치(信濃大町)역으로 그는 직접 마중을 나왔다. 트럭을 몰고 위아래 블랙진을 걸쳐 입은 풍모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시류에 안주하는 해무 같은 나른함을 거둬내려는 로커의 이미지였다.
▲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잘못됐다”고 제동 거는 국민
국가가 추상적 대상이라지만
결국 인간, 한국에선 ‘자본가’
▲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다면서
왜 도쿄에는 짓지 않나?
돈이 말라 있는 시골 사람들
국가가 나눠주는 ‘사탕’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것
▲ 작가들이 독자를 위로한다는 건
일시적 안심을 주는 값싼 위로
‘마음 연못’에 작은 돌 던져
조그만 파문이라도 낼 수 있다면
문학으로서 충분히 성공한 것
‘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
그게 뭔지 꾸준히 자문해야…
내가 지키고 바라봐야 할 한가지
‘권력과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
안희경(이하 안) = 선생님의 작품에는 여러 유형의 인물이 나옵니다. 애달픈 이들이 주인공이고 가족, 생계, 이웃의 손가락질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이들이 그 주변을 에워쌉니다.
마루야마 겐지(이하 마루야마) = 제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세상에서 가장 약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대부분 주인공은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천일의 유리>는 스티븐 호킹과 같은 병을 앓는 소년이 천일 동안 겪는 이야기인데, 그 소년도 실존 인물이지요. 그 약한 위치에서 사람들을 바라봄으로써 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립니다. 인간은 의외로 타인을 주시하지 않아요. 특히나 도시에 사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습관에 빠지죠. 하지만 이런 시골에 살다보면 인구가 적으니 자연스레 눈길이 사람을 쫓아요. 저 길에 어느 할머니가 혼자 지나가면 ‘저 할머니는 어디로 뭘 하러 가나’, 병을 지닌 소년이 비틀비틀 걸어오면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에 빠지죠. 인간의 부조리, 불합리한 입장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 하는 이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감동을 그려내는 게 문학이 추구하는 최대의 목적이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가치가 내게 있는가’라는 물음에 빠지게 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 그쪽을 향하는 것이 문학이겠죠.
안 = 소설 문장 한 줄 한 줄이 시각적으로 그려지며 전체가 하나의 시처럼 밀도가 높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회구조의 모순을 갈고리로 찍어 올리듯 꿰고요.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는 근대의 고기잡이법에 휘둘리고 있는 사나이들(어부)은 모두, 빚을 갚기 위해서 …(<물의 가족> 중)’와 같은 표현에는 왜 보통 사람들이 현대의 편리 속에서 계속 고통에 빠지는지 새겨져 있죠. 우리는 가난하거나 실패하면 ‘스스로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라고 위로하고, 다시 경쟁 속으로 들어갈 명분을 찾는데요. 구조의 부조리를 꺼내드는 시선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마루야마 = 그걸 설명하려면 제 성장 과정을 이야기해야 해요. 소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특수학급이라고 해서 몸이 약한 아이나 정신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모아놓은 학급에 들어가게 됐어요. 저는 건강한데 배정받았습니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어요. 운동회 때 ‘유희’라고 학생들끼리 손 잡고 춤추는 시간이 있는데 바보같이 느껴져 집에 가버린 적이 있죠. 열 살짜리가 학교 말을 듣지 않은 거예요. 또 전쟁이 끝나고 황실 왕족이 죽었을 때 도쿄를 향해 머리를 숙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대체 누구냐 물으니 선생님께서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설명해 줬는데, 저는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곤 또 집에 가버렸죠(웃음). 결국 정신적으로 이상한 아이로 찍혀서 특수학급에 간 겁니다. 우리 학급 학생들은 모두 결핵을 앓거나 정신장애를 갖고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제가 건강하니까 급우들을 보살피는 의무를 줬습니다. 겨울에 석탄난로를 때잖아요. 당시 일본은 가난했어요. 석탄을 하루에 한 자루만 줬습니다. 금방 타버리죠. 그러면 선생님이 저를 불러요. 가서 훔쳐오라고(웃음). 석탄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요. 우리 급우들은 감기만 걸려도 목숨이 위태로우니까요. 그분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다른 반 학생들이 우리 친구를 괴롭히면 제가 막 때려줬어요. 선생님은 또 모른 척했고요. 얼마 후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약한 존재를 감싸는 습관이 생겼나봐요. 내 몫은 잊더라도 다른 이에게 뭔가 주려는 습관 말이에요.
안 = 지금도 학교에서는 왕따와 폭력이 이어집니다. 빈부 차이가 확연한 구도시와 신도시 사이에 있는 학교들에는 또 다른 질서가 있기도 하죠. 가난과 결핍에 대한 분노가 오히려 만만해 보이는 약자에게 집단으로 향하는 질서 말이에요. 열등감과 자기 과시는 하나의 뿌리라고 하잖아요. 아이들도 약하면 밟힐까봐 폭력적인 자기 방어를 합니다. 인간의 본성, 어떻다고 여기세요?
마루야마 = 인간은 정말 비열해요. 인간은 동물로 태어납니다. 인간으로 죽을 수 있을지는 각자의 노력에 달렸고요. 대부분 동물로 태어나서 동물로 죽죠.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교양을 갖춰야 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데 취직하기 위해 머리에 지식을 쑤셔 넣는 일은 교양이 아니에요. 그 예를 관동대지진에서 볼 수 있어요. 그때 일본 정부는 대중의 분노가 국가로 향하면 난감하니까 다른 곳으로 돌렸죠. 조선인들을 제물로 던져줬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쳐들어 올 거라고 소문냈어요. 도쿄 사람들은 ‘조선인이 오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고, 대학 교수들도 나섰습니다. 그때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외쳤던 이는 생선가게 주인이었습니다. 대학 교수와 생선장수, 둘 중 누가 더 교양인일까요?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요즘 인간이 되기 위한 지식, 인간이 되기 위한 교양은 사라졌어요. 국가가 교양과 지식을 강요하죠. 국가의 편의에 부합하는 지식, 국가의 편의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교양입니다.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거 잘못된 거 아닌가’라고 제동 거는 국민입니다. 그러고는 값싼 급여를 받아도, 해고당해도 불평하지 않는 노동자, 전쟁을 할 테니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네’ 하는 순응형 국민을 양민이라고 합니다. 식자들은 국가를 추상적인 대상이라고 하는데요.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결국은 인간들이에요. 저 사람과 저 사람과 저 사람이 국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습니다. 국가는 지배계급을 위해 움직입니다. 미국이든 북한이든 그 어떤 국가라도 지배계급 외의 국민은 부수적인 존재, 노예죠. 그런 국가를 대부분의 국민은 자신의 나라라고 착각하고 있죠. 또 국가가 착각하게 만들고요.
안 = 국가가 명확하게 보인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국가는 누굴까요? 경찰? 공무원?
마루야마 = 자본가죠. 한국에서 보자면 재벌이죠. 정치가들도 자본가들에게 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일본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래요.
안 = 현대를 움직이는 힘이네요. 이미 돈의 흐름, 돈의 주인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를 움켜쥐고 있으니 우리나라 상표, 우리나라 은행이라고 자긍심 경쟁을 하는 것도 부질없어 보입니다.
마루야마 = 물론이죠. 그 자본에 반하는 사람은 국적불문, 순식간에 말살될 수 있어요. 실제로 죽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말살됩니다. 지배계급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대의명분을 내세우죠. 국가를 없애면 무질서한 세계, 범죄 왕국이 될 거라고 협박합니다.
안 = 그래도 국가가 치안을 유지해주고 세금을 거둬 기간산업을 보완하잖아요. 그런 질서가 있으니 직장도 생기고, 장사도 하고, 또 농부들은 지원금도 받고 그러지 않습니까?
마루야마 = 그것은 국민의 분노를 피하려는 최소한의 사탕(이익) 나누기예요. 몽땅 빼앗으면 폭동이 일어나니까요. 원자력발전소가 그 예죠. 꼭 시골에 지으려 합니다. 도쿄 같은 도시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시골은 욕망과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죠. 말하자면 나라가 돈 주면 무슨 일이든 순응하는 이들이 많다는 겁니다. 돈이 말라 있으니 넘어갈 수밖에요. ‘원자력발전소를 하면 지역에 이러한 점이 좋습니다’ ‘이런 것도 만들어 주겠습니다’라고 사탕을 줘요. 거기에 어용학자가 와서 안전하다고 보증하죠. 그렇게 안전한 것을 세우는데 국가가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쓰겠습니까? 안전하다면 도쿄에 세워도 되잖아요. 시골 사람들도 눈치는 채지만 눈앞에 놓인 현금에 마음을 내주게 됩니다. 후쿠시마 사태로 방사능 오염이 발생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요.
장편소설 &lt;물의 가족&gt;을 비롯해 많은 작품이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과 친숙한 마루야마 겐지는 “세상을 조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곳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것”을 작가의 사명으로 들었다.사진 크게보기
장편소설 <물의 가족>을 비롯해 많은 작품이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과 친숙한 마루야마 겐지는 “세상을 조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곳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것”을 작가의 사명으로 들었다.
안 = 다들 결정을 내릴 때는 각자의 의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일이 터지면 국가나 조직, 아니면 동료의 생각에 휘둘렸구나라며 배신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죠. 택시를 탈 때마다 당혹스러운 경우는 기사님들이 극단적인 정치 선동을 할 때입니다. 다들 개인적으로는 명민한데,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세상을 편가르는 단순한 사고는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요?
마루야마 = 인간은 세뇌당하기 쉬워요. 특히 국가, 학자, 유명인의 말은 비판없이 받아들이죠. 방송에서 끊임없이 같은 말을 하면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침해당합니다. 일본어에 고코로구미(心組·마음가짐)라고 있어요. 스스로가 마음을 단단히 가지는 것.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이래도 괜찮은가’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은 진짜인가’ ‘국가가 말하는 것이 옳은 걸까’라고 질문하고 자기 답을 찾는 것을 ‘고코로구미를 단단히 한다’라고 하죠. 안 그러면 순식간에 당해요.
안 = 그러려면 전체 판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마루야마 = (질문을 자르며) 판이 아니에요. 한 점을 봐야 해요. 제가 오프로드 바이크를 타는데, 절벽으로 치달을 때 빠져나오는 법을 알려줄게요. 급커브를 틀어야 살아요. 아마추어는 무서우니까 이곳 저곳 둘러보며 상황을 잽니다. 하지만 프로는 출구 한 점만을 응시하죠. 전체를 본다고 두리번거리면 시선이 애매해져요.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칩니다. 한 점이 왜 중요한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가장 중요한 한 점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그 지점이 우리 마음을 단단히 다잡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지식인 중에 외국 신문, 일본 신문 이 잡듯 읽는 이들이 있어요. 뭔가 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겠죠. 그런데 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몰라요. 우리는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세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잘못하는 것이 서재에 들어가 아무도 안 만나고 골똘히 ‘인생은 이렇다’ ‘인간은 저렇다’ 답을 내리는데, 그 과정에서 답은 왜곡됩니다. 풀 한 포기, 작은 나무 한 그루를 키우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을 평생 모르고 살아요. 아까 생선장수 이야기했죠? 아침부터 밤까지 생선만 팔았을 거예요. 신문도, 철학서도 안 읽고. 그래도 ‘조선인이 침략해 온다는 소리는 거짓이다’라고 단칼에 답을 내렸잖아요. 전체를 보는 것은 그런 것이에요. 전체를 보고 싶다면 전체를 보지 마라. 한 점을 봐라!
안 = 그 생선장수는 사람을 깊게 만남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읽어냈다는 거죠?
마루야마 = 국가가 흘려보낸 데마고그에 휩쓸리지 않았던 거예요.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으로 사귄 겁니다.
안 = 한 점, 어디에 찍어야 할까요?
마루야마 =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이것만은 지키겠다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자문해보고 ‘이것을 양보하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하는 것,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을 확보해야죠.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겁니다.
안 = 선생님의 한 점은 어디인가요?
마루야마 = 권력과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뿐입니다.
안 = 어떤 권력이죠?
마루야마 = 국가권력이죠. 그리고 국가가 초래하는 권위, 또 문학상 제도. 이 모두를 거부합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그늘에서 자라는 식물이에요. 음지식물은 빛을 너무 많이 쪼이면 사그라집니다. 이때의 빛은 명예, 돈이고요. 그럼 음지식물은 단번에 말라요. 소설가 중에는 갑자기 책이 잘 팔리고, 또 여러 상을 받자마자 엉망이 된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안 = 그래도 어차피 우리는 서로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잖습니까?
마루야마 =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에요. 하지만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개인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회사, 국가와 같은 집단 속에 편입되어 자신을 잊고 개인을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죠. ‘나’라는 개인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을 되찾기 위한 문학이 바로 저의 문학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다시금 묻도록요. (잠시 침묵) 대개의 독자들은 스스로를 잊기 위해 소설을 읽습니다.
안 = 작가들은 독자를 위로할 수 있어 행복하고, 존재 의의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저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고요.
마루야마 = 매우 값싼 위로죠. 진정한 위로가 될 리 없어요. 일시적인 안심일 뿐이잖아요. 위로와 일시적인 안심은 전혀 다릅니다. 작가는 독자를 현실 그 자체 속으로 쑥 들이밀어야 해요.
안 = 현실은 버겁잖아요.
마루야마 = 그러니까 힘들 때 술 마시는 것처럼 문학에 손댑니다. 문학이 술 정도의 가치라는 거죠. 진보도 무엇도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너덜너덜해지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지 알 수 없게 돼요. 문학이 그래도 되는 건지….
안 = 선생님의 소설에는 어망 속의 물방울이 자신을 비추고 세상을 비추고, 또 그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을 비추는 양식이 있습니다. 소설이 그렇게 나와 세상 그리고 타인과의 연계를 비춰주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마루야마 = 오래전에 사르트르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정치 참여 문학이 유행할 때였죠. 사르트르는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세상에 물었습니다. 작가로서 고백하자면 그 순간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작가의 자만이죠. 그래도 문학은 마음이라는 연못에 작은 돌을 던져주는 작업입니다. 조그만 파문일지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충분히 성공이라 생각해요. 그것이 작가의 역할이죠.
안 = 작가가 아니라도 각자의 공간에서 누구나 파문을 낼 수 있다면 다양하고 생명력 있는 사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살이에서 겁을 집어 먹어서인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어 표현이 떠오르네요.
마루야마 = 일본에서는 ‘튀어나온 말뚝은 맞는다’라고 합니다. 남과 다른 행동을 하면 비난을 받죠. 개인으로 돌아와 나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회적으로 말살당하는 분위기예요.
안 = 그런데도 왜 내 멋대로 살라 하세요(웃음).
마루야마 = 그래도 한번 해 봅시다. 내 인생 사는데 왜 남을 신경 써야 합니까?
안 = 그럼, 밥벌이하기 어렵잖아요.
마루야마 = 그래요. 밥이야 먹고 살아야죠. 그렇다고 영혼까지 팔면 서럽잖아요. 누군가가 내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흔들려고 한다면, 힘이 세건 돈이 많건 부모건 으랏차 밀쳐내야죠. 인간은 본능과 욕망의 노예로 태어나요. 지성, 이성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죠. 동물이야 못된 꾀 같은 걸 부릴 줄 모르니 인간처럼 야비한 짓은 안 합니다. 일은 남한테 시키고 이득은 가로채는 그런 짓 말이에요. 인간은 참 어중간한 만듦새로 나왔어요. 그게 인간의 비극입니다. 인간의 뇌를 설명하자면 세 개의 층으로 말할 수 있어요. 동족도 먹어치우는 파충류의 뇌, 거기에 제멋대로인 원숭이 뇌를 덧쓰고, 그 위에 매우 높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뇌가 놓였습니다. 그러니 그 세 개의 층이 조화를 못 찾죠. 대부분이 가장 위의 뇌는 쓰지 않고 가장 밑의 뇌와 두 번째의 원숭이의 뇌만을 쓰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왜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지능적인 뇌가 인간에게만 주어졌는지는 생물학적으로 여전히 수수께끼예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 가장 위의 뇌를 최대한 쓰며 산다는 겁니다. 인간답다는 표현에는 두 측면이 있어요. 인간은 약하니까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 인간답다고 하는 사람과, 아니다, 인간은 약하지만 강하게 뚫고 나가야 인간다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죠. 제 생각은 이래요. 진정한 인간다움은 동물로서의 삶을 멈추고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뇌를 한껏 쓰는 데 있습니다. 또 하나, 약자인 척하지 않는 것!
안 = 이성을 키우는 방법은요?
마루야마 = 자신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밖에 없어요. 책으로도, 누군가에게 물어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지. 타인의 앞에서 의식하는 자신이 아닌, 혼자가 되었을 때 ‘이것이 나구나’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그로부터 이성은 길러집니다.
그와의 대화는 기차 시간에 맞춰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조바심 나는 상황에서 한 가지 덧질문을 했다. “작품도 강렬하고 에세이에서도 모질 정도로 단언하는 말을 휘두르셨어요. 한국 독자들 가운데 선생은 만개했다 봉오리째 떨어지는 동백처럼 황혼이 오기 전 느닷없이 세상을 저버릴 거라 여겼던 이들이 있습니다. 선생의 늙은 몸이 당혹스럽다고 해요.”
선생의 얼굴에 등고선 같은 주름이 물결쳤다. 웃음을 물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너덜너덜해져서 죽을 거예요. 이 세상을 살아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글 쓰다가 아니면 정원 손질하다 털썩 쓰러져 죽고 싶습니다.”
끝까지 맹렬히 살겠다는 선생의 기개다. 숲속 같은 그 집 마당에는 씨앗에서 나와 재목이 된 나무들과 그 둥치를 감고 오르는 음지 덩굴들로 싱싱한 기운이 가득했다. 땅에 붙을 듯 고개 숙였지만, 보라 물망초의 빛깔도 완숙하고.
■ 마루야마 겐지
▲ 66년 첫 작품으로
일 아쿠타가와상 수상
귀향 후 집필에 전념
마루야마 겐지(70)는 소설가로 일본 나가노현 시나노오오마치에 산다. 1963년 도쿄의 무역회사에서 일할 때 부인을 만났으며, 1966년 회사가 부도에 처하자 생계 대책으로 소설 <여름의 흐름>을 썼다. 그 첫 작품으로 ‘문학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1968년 <정오이다>에서 귀향한 청년의 고독을 그려낸 후 본인도 귀향했다. 이후 문단과 선을 긋고 집필과 정원 관리에 전념한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천일의 유리> <물의 가족> <천년 동안에>, 소설집 <어두운 여울의 빛남> <달에 울다> 등이 있다. 그리고 에세이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소설가의 각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을 펴냈다.
마중 나온 마루야마 겐지와 그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가 먼저 신경숙 작가의 표절 시비에 대해 말을 꺼냈다. 자신의 소설도 거론됐으니 입장을 밝혀달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언론이 취재를 왔다고 한다. 한국 언론은 거절했고 일본 언론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일본 문단을 지적하며 작가들이 아름다운 문장, 이야기의 구조 등 너무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작가의 길은 세상을 조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곳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정신이다. 50여년 충실히 작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서 사상가의 면모가 번졌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212156105#csidxb84159c73ea20daaef4c52d1a0678c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