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9

알라딘: 화엄철학: 쉽게 풀어 쓴 불교철학의 정수, 까르마 C.C.츠앙 (지은이),이찬수 (옮긴이) 1998

알라딘: 화엄철학


까르마 C.C.츠앙 (지은이),이찬수 (옮긴이)

경서원199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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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강스님 문안인사 올림니다.
작성자 사미사미 (61.��.129.199) 06-02-14


올해는 무척 많은 눈이 내렸읍니다.

 하얀 눈송이를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어봄니다. 스님의  화엄경강의는 흐르는 물과 같고 소복소복
쌓이는 함박눈 같았지요.
 처음 제에게는 어렵게 다가왔지만 박식한 강의는 궁금증을  하나하나씩 풀어 주었읍니다.
참으로 저에게는 불교가 가슴으로 느껴저왔읍니다.

 여러가지 화엄사상이 전하고자 했던 사상이 연기법이며 사사무애의 가르침이 생각나고
인연 화합되어 생겨난 결과물이 마음이며, 마음은 다스림의 대상이지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다...

 아직은 화암경에 대하여 그림자만 보는것 같음니다...

까르마 c.c 츠앙(경서원)의 화암철학을 읽고나니 여러가지로 느껴졌읍니다.
생각하는마음 .바라보는 시각....

 부처님의 법이 온우주에 가득찼고 나는 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어느한부분에 연계되어
있으리라 생각됨니다.

 해강스님 ?
추운 날씨에 건강하신지 문안드림니다.
인연이 되어 다시한번 스님에 강의를 듣고 싶군요.

  얼마전 화엄불교대학 학림원 졸업식이 (2월11일) 거행 되었는데.
스님이 계섰드라면 졸업식이 더욱더 빛나리라 생각되었고
학교측에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읍니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배려 해준 학교에 감사드리며 스님에 강의를 듣게해준 많은 인연에
고개숙여 합장합니다.

  두서없는 글 용서 바라며 이만 줄일까 합니다
  스님 항상 건강하시고 성불하십시요.

  전북 화엄 불교대학 학림원  학생 
                  윤점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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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철학/華嚴哲學], 불교철학의 진수, 화엄철학. 
하지만 이 또한 악용될 여지는 다분하다. 비판할 부분도 있고.
관쥬
2020. 6. 8.
https://m.blog.naver.com/songj489/221994052093

화엄철학, 아니 거의 대부분의 불교철학 종파는 말합니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각각의 존재자들은 세계 전체를 대표할만할 정도의 고귀한 가치를 지닙니다.
화엄철학의 꽃밭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죠.
작은 꽃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고. 그 작은 꽃 하나는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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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에 대해서 아시나요?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 하나로 뉴욕에 폭풍우가 닥친다는 내용이죠.
나비의 날개짓은 미세하게나마 기류를 바꿉니다.
이 바뀐 기류는 다른 것을 바꾸고. 바뀐 것은 또 다른 것을 바꾸어, 결국 뉴욕에는 폭풍우가 인다는 것입니다.
인간사의 현상 하나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자체가 어디에서부터 발원한 것인지 고민해보면,
수많은 원인들이 모여 하나의 사건/하나의 존재자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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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개념 중에 인드라망 경계문이라는 게 나옵니다.
인드라는 인도의 고대 신입니다. 인드라는 하늘을 관장합니다.
그런 인드라가 갖는 그물이 '인드라망'입니다. 이 그물은 되게 복잡한 4차원/5차원의 구조를 띱니다.
인드라망에는 총 천 개의 그물코가 있습니다. 그물코 하나하나마다 구슬들이 일일이 박혀있습니다.
이 구슬 하나를 들여다보면요, 999개가 다 비춰서 보입니다.
즉 하나의 존재자에 전체 우주가 보입니다.
근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구슬만을 비춥니다.
즉 하나에 전체가 보이고 전체가 하나로 보이는 그물 구조를 가지는 것이죠.
인드라망과 같은 것이 이 세계의 존재자입니다. 즉, 일즉다인 것이죠.
우주 전체가 사소한 존재 하나에 집중합니다.
사소한 존재 하나가 우주 전체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전체는 하나로 귀속됩니다. 모든 존재 각각은 그것대로 전체이구요.


이것이 일즉다 다즉일입니다. 모든 전체는 그 자체로 불성을 드러냅니다.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여래성 연기가 곧 그것입니다.
본질에는 부처의 완전한 본성이 있고, 원인과 조건의 연기를 통해 이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모든 전체가 됩니다.
부분과 전체 관계에서 우주 전체는 하나로 집중됩니다.
법장이라는 불교 학자는 이를 육상원융이라고 일컫습니다.
그에 따르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은 총 여섯 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서로 둥글게 융합되어 있습니다.
이가 총상과 별상입니다.
총상은 전체의 모습이고, 별상은 부분의 모습입니다. 이 둘은 서로 어우러집니다.
꽃밭과 꽃을 예로 들어보면, 꽃밭은 총상이구요 꽃 한 송이는 별상입니다.
집을 예로 들어보자면, 전체 집이 총상이구요 창문 대문 기둥 벽 같은 것이 별상입니다.
이는 각각의 사물들이지만, 시야를 뒤로 빼면 이는 한 채의 집입니다.
이게 총상과 별상/동상과 이상의 관계입니다.
각각의 존재자들은 동일한 목표가 있습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꽃밭 전체를 이룬다는 동일한 목표가 있습니다.
즉, 튤립 한 송이는 저마다의 특징이 있지만 저마다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한 존재자는 각자의 특수성을 가지면서도 하나의 목적을 가집니다.
지붕, 창문, 대문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 역할과 목적 전체가 합쳐지면 집이라는 목적을 이룹니다.
목적은 같지만 부분들이 제각각 다른 일을 합니다.
성상과 괴상의 관계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전체의 조화와 부분들의 개성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면 매우 조화롭지만 부분을 보면 개성이 있습니다.
집의 모든 부분들이 잘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루어 집을 이루지만 부분을 보면 역할이 다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전체를 지향하고 개별을 이루고, 개성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꺠지 않습니다.
이는 노르웨이의 네스라는 생태학자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층 생태주의를 역설합니다. 이 반대는 얕은 생태주의입니다.
환경과 생태를 왜 보존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후손들에게 보다 넉넉한 자원, 살기 좋은 자연을 물려주기 위하여 환경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연을 자연 자체로 대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수단으로서만 보는 것입니다. 이는 얕은 생태주의입니다.
심층 생태주의는요,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봅니다. 즉 지구를 구성하는 각각의 존재자들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지
는 특별한 지위는 없습니다.
모든 자연 대상물들, 환경, 벌레마저도 우주 자연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이지요.
깊은 생태주의는 모든 존재자들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해야한다는 깊이 있는 관점의 전환입니다.
네스의 이 관점은 화엄철학과 긴밀하지요.
화엄철학에서는 이 세계의 존재자들 모두가 동등하고 고귀합니다. 이는 즉 우주 전체가 중요하며, 우주 전체만큼이나 각각의 개별자들도 소중하다
는 것입니다.
어떤 그 무엇도 우/열, 상/하, 미/추 구분을 떠나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관념들,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들, 우리의 가치관들이 매우 잘못되었으며 이 때문에 나 자신도 고통받고 타
인도 괴롭힌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실상을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인식의 잣대, 대학이라는 인식의 잣대들이 우리의 삶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잣대는 본디 우리 삶을 질서 잡기 위해 있는 것이거늘, 굉장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시각을 버려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불교의 궁극적 메시지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관점을 버리면 세상이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
모든 존재자들이 누구에 의해 가치 평가를 받아서, 낫다/천하다 하는 것은 잘못된 잣대로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가 존재 자체의 의미가 아닌 것이지요. 이게 화엄의 사상입니다.
이 사상이 심층생태주의에 모티브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하겠습니까.
평가를 못 합니다. 평가할 수 없습니다.
남존여비로 여자를 평가해선 안 되겠습니다. 여자를 우수하다는 잣대로 보자는 말도 아닙니다.
존재자 자체를 보자, 이 말입니다. 존재자 자체를 긍정적으로 볼 떄 우리 삶이 온당해집니다. 이것이 화엄의 궁극적 진리입니다.
네스에 따르면, 파리 한 마리도 생존방식이 있습니다.
이는 지구 전체에서 보면 필수불가결한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 '해충'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주 전체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 문제입니다.
네스를 설명하면요, 파시즘/전체주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화엄철학의 현실에서는 각각의 개성들이 있고 이들은 개별적 목적들을 가지지만 이는 합쳐져서 전체를 위한 것이 됩니다.
헌데 개별자들이 전체를 위한 것이 되면 각각의 개별자들은 자기 삶이 아니라 목적성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아래에서의 개념처럼 말입니다.
개별적 존재자들의 삶이 그 자체, 자기가 원하는 삶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각각의 존재자들은 자기 삶을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근데 넓은 관점에서 거대한 목적을 씌운다고 가정했을 때.
집이라는/꽃밭이라는 테두리를 지운다면 이건 전체성으로 해석되기 쉬워집니다. 이게 화엄철학의 역사적 현실입니다.
법장은 의상대사의 후배였습니다. 그런데 법장 스님이 악녀로 손 꼽히는, 칙천무가의 엄혹한 독재 정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법장은 칙천무가 옆의 금사자 조각을 보고 화엄철학에 대해 설명합니다.
칙천무가 당신이 우주라며 그를 위대하신 통치자로 칭송합니다.
즉 철학이 독재정치에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스즈키 다이셰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즈키는 다이쇼 천황에게 화엄철학을 설명하며 제국주의를 옹호합니다.
화엄은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이 저마다 제 삶을 살아가고, 함부로 평가되지 못 하는 평등 사상이 매력적인 학문입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삶이 곧, 꽃밭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귀속됩니다.
관념적으로만 이해한 것과 다른 것이지요.
그런 것은, 화엄의 현실에 대해 우울하게끔 만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