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7

성덕도 - 디지털의성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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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도
성덕도 의성 교화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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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GC05201429
한자聖德道
이칭/별칭성덕도
분야종교/신종교
유형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시대현대/현대
집필자김홍수
[상세정보]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 종교.

[개설]

성덕도는 김옥재가 1952년 5월 대구에서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인간의 천성을 회복하여 도덕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창시되었으며, 천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성 반성’을 실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전통 사상인 유·불·선(儒佛仙)을 독립된 별개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로 파악하고, 이를 체득하기 위하여 정진함을 교리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1960년 성덕도 교화원으로 시작하여 1967년 성덕도로 개칭되었으며, 1992년에는 성덕 학원을 설립하여 성덕 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6월 본원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길 106-60번지로 옮겼다. 성덕도는 2013년 1월 현재 전국 12개 교구가 있으며 109개의 교화원과 자치원이 있다.

[변천]

의성 지역에는 의성 교화원, 안평 교화원, 신평 교화원 세 곳이 있는데, 1954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 의성 최초의 교화원인 의성 교화원이 설립되었다. 도생들은 기운법을 통해 몸의 불편한 곳을 치료하고, 마음을 다친 사람은 마음을 치료하였는데, 그 명성이 자자해지자 의성 각지에서 도생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였다.

1970년 안평면에서 도생 김희원을 비롯한 여러 도생들이 현재 안평 교화원 근처에 공간을 얻어 공부를 하다가 도생들의 수가 더 늘어나자 1986년 의성군 안평면 창길리에 안평 교화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86년 신평 교화원이 설립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제성일(齊誠日)인 일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자성 신앙 시간을 가지고, 평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수양 시간을 가진다. 주로 『자성반성 성덕명심도덕경(自性反省 聖德明心道德經)』을 가지고 수양한다. 형편에 따라 신도들이 모여 산행을 하면서 마음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매년 음력 10월 3일 성도일(成道日)에는 도주 김옥재를 모시는 행사를 거행한다. 수시로 문경시에 위치한 본원에 가서 청소를 하거나 식당일을 하는 등의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다.

[현황]

2013년 1월 현재 의성 교화원은 2012년 11월 25일에 부임한 최낙철 담임 교화사가 의성 교화원 및 신평 교화원 두 곳의 담임을 겸하고 있으며, 김태늠 회장과 조석자 총무가 시무하고 있다. 생도는 40여 명이 있다.

안평 교화원은 윤안의 회장과 양태연 총무가 시무하고 있으며 생도는 3명이 있다. 신평 교화원은 의성 교화원의 최낙철 담임 교화사가 담임을 맡고 있으며, 김유수 회장과 조외순 총무가 시무하고 있다. 생도는 30여 명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수정일제목내용
2017.09.18명칭 및 소재지 변경성덕대학 -> 성덕대학교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 산1번지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길 106-60번지

2024/12/15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 QuakerSpeak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 QuakerSpeak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March 18, 2021

“What does it mean to me to be a bad Quaker?” Mary Linda McKinney asks. Behind that, though, is another question: what does it mean to be a good Quaker? “I think there are two answers: one is cultural and one is spiritual, and I’m bad at being a cultural Quaker. I think I’m good at being a spiritual Quaker.”

“I always march to my own drummer and my drummer doesn’t play the type of music that anybody around me ever wants to hear,” Mary Linda admits. “I’m pretty much a misfit in any community that I’m around, and that includes Quakers… But spiritually to be a good Quaker is to seek the will of God as an individual and corporally with others, and from that perspective I feel like I’m a good Quaker because I do want to live my life letting God’s will flow through me and I want to do that in community with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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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QuakerSpeak

32.9K subscribers


6,636 views Mar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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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ome a Friends Journal subscriber for only $28
http://fdsj.nl/FJ-Subscribe
Filming and Editing by Rebecca Hamilton-Levi
Music: "Ghost Byzantine" by Blue Dot S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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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Sometimes sitting in worship can be excruciatingly uncomfortable. The way I describe it (and this came to me many, many years ago sitting in worship): I feel like all the other Quaker’s minds are like old Irishsetter dogs; they come into worship, they circle in front of the fire for a couple of times, and they settle into the silence. And my brain is like a chihuahua with the mailman stepping onto the front porch — just yapping yapping yapping yapping yapping. I later learned about the monkey mind of Buddhism but just constant.. constant chatter, so it’s sometimes very, very challenging and also a gift.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I’m Mary Linda McKinney; I live in Nashville, Tennessee; and I’m a longtime member of Nashville Friends Meeting although for the last three years I’ve been on sojourn with a number of other faith communities.

So what does it mean to me to be a bad Quaker? And I actually think I have to step back from that and say what does it mean to be a good Quaker? So I think there are two answers to that: one is cultural and one is spiritual, and I’m bad at being a cultural Quaker. I think I’m good at being a spiritual Quaker.


A Distinction Between Culture and Spirit

I have severe ADD. I always march to my own drummer and my drummer doesn’t play the type of music that anybody around me ever wants to hear. I’m pretty much a misfit in any community that I’m around, and that includes Quakers. I don’t make small talk; I’m blunt but not in the good Quakerly kind of ways of being blunt. Culture is very uncomfortable for me sometimes. But spiritually to be a good Quaker is to seek the will of God as an individual and corporally with others, and from that perspective I feel like I’m a good Quaker because I do want to live my life letting God’s will flow through me and I want to do that in community with others.


Showing Up As You Are

I think God always meets us where we are, and over the decade that I have been a Friend I have been in so many different states of being and meeting for worship was both a comfort to me and a challenge for me but I was being as good a Friend as I knew how to be or was able to be, and being there as my authentic self was what I had to offer to God at the point. So I’ll say that I think when we show up that’s all God requires of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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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ews expressed in this video are of the speakers and do not necessarily reflect the views of Friends Journal or its collabora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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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i Dana,
      When Rebecca, the QuakerSpeak video producer, looked at my website, she saw something in it that made her want to use this theme for the interview. I agreed in large part, because I know I’m not the only one who feels this way about how they are present with the Divine and among Friends. If you’d like to have a conversation about this, you’re welcome to email me at friendmarylinda at gmail.
      Mary Linda
      Reply

  1. Mary Linda,
    I found a Quaker soul mate in you. I thought I was the only one who didn’t fit into the good Quaker mold. After seven years I realize that despite anything, it’s the simplicity, the Quaker ideals, and values that continually draw me in.
    I go to Meeting for Worship every week.
    Reply

    1. Hi Ray,
      Misfits in good company! I’m glad that what we experience in worship make our square-peg/round-hole-ness in Quaker community worth it. Feel free to email me if you want to talk more about your experiences. friendmarylinda at gmail.
      Mary Linda
      Reply

  2. This is a wonderful explanation. I am a birthright Quaker, but I identify with this. I have to say, however, that there have been very few times that I haven’t felt comfortable in meeting for worship and have “gotten much” out of it. Merely slowing down and opening one’s mind is therapeutic. I miss worship when I am unable to attend.Reply

  3. Oh Mary Linda, you are in such good company….of those marching to their own drum, being on the outside looking in.
    Buddha, Baha u llah, Jesus, Mother Teresa, Mary Baker Eddy…they all “stepped to a different dance.”
    Bravo Mary Linda, you’ve given this old duffer inspiration and hope!
    Reply

  4. As an isolated Quaker, I suspected that being a Quaker kept me from community. I find that is not true. I work harder to live and learn how to live my life with God. The pandemic has been great for me because so much is available on Zoom. I do miss the physical presence of Friends, the hugs, the physical presence!Reply

  5. Friend speaks my mind, exactly….and I am so grateful for your honesty. Our Meeting lost a member a few years ago because he told me he didn’t feel he was good enough to be a Quaker. In the past year, I have felt increasingly unable to connect and feel different and out of sync, impatient and I have been a member since 1992. I am prompted by your sharing to continue to reflect on the nature of my worship, connection to community and my spirit guides.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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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 - 에큐메니안

“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 - 에큐메니안


“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제4회 李信상 시상식” 함께 진행하고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에게 공동으로 수여
장성호 | 승인 2024.12.13 04:13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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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信연구소”가 송년 모임과 출판기념회,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을 진행하고, 특히 새로 출판된 이정배·이은선 교수의 책의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평가했다. ⓒ장성호


‘한국 信연구소’의 송년 모임과 출판기념회 및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이 13일(목) 오후 5시 30분부터 감신대 웨슬리채플 제1 세미나실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신학적 사유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저작들의 출판을 축하하고, 사회적 기여를 이룬 개인과 단체를 격려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1부 출판기념회는 안재학 목사(석천교회)의 대금 연주로 시작을 알렸다. 이후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감신대 명예교수)가 출판 경과를 보고하며 네 권의 신간을 소개했다.

가장 먼저 소개된 책은 이신 목사의 유작 시집 『李信 詩集 돌의 소리』(평사리, 2024 개정증보판)였다. 12년 만에 다시 출간된 이 시집은 초현실주의적 감각의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으며, 1970년대 시인 이신의 독특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 교수는 “이신 목사의 시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통찰로 우리를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바라보게 한다”고 평했다.

다음으로 이은선 교수(세종대 명예교수)의 『神學에서 信學으로: 참 인류세를 위한 한국 信學』(모시는사람들, 2024)이 소개되었다. 이 책은 동서양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접점을 탐구하며, 초월적 거룩함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이정배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여성 신학자로서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 학문 담론을 새롭게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 이정배 교수(사진 왼쪽)와 이은선 교수(사진 오른쪽)가 이번에 출간한 책들은 자신의 신학적 여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으며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 ⓒ장성호


서창원 교수(감신대 명예교수)는 이은선 교수의 책을 “기존 신학을 해체하고 믿음의 신학(信學)으로 재구성하는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이라고 극찬했다. 특히 유교와 기독교 경전 간의 비교 분석을 통해 비기독교 경전과 동양 신유학 경전을 비교 설명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과 아시아 여성 신학의 독창적인 계보를 잇는 서적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세 번째로는 이정배 교수 자신의 저서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 空, 公, 共』(신앙과지성사, 2024)이 소개되었다. 이 교수는 이 책을 “동학 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관계를 재해석해 개벽신학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서창원 교수는 이 교수의 개벽신학에 대해 “기독교 묵시와 동학 사상의 융합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신학적 상상력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이정배 교수의 또 다른 저서 『실패한 제자들, 그 이후』(명작, 2024)는 개인적 성찰을 담은 에세이적 저작으로, “시대와 사건에 대한 성찰을 모아 만든 선물 같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김언종 원장(한국고전번역원장)은 이정배·이은선 두 학자의 저작에 대해 “기독교의 배타성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호평하며, “큰 의심이 큰 진전을 만든다”는 유학자 진원장의 말을 인용해 두 학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하지만 저서에서 『천부경』과 『환단고기』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성이 담보되지 않는 문헌임을 지적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 신앙의 실천을 치하하는 “제4회 李信상 시상식”에서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전 공동대표)가 공동 수상하며 학문과 실천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자리가 되었다. ⓒ장성호


2부에서는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수상자로는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전 공동대표)가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의 홍경숙 상임이사는 “중증장애인 어머니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협동조합이 큰 도전에 직면했지만, 이번 수상이 또 한걸음 나아갈 동력이 되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진미리 박사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이상을 향해 느리지만 끊임없이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은선 교수는 “信學은 언어와 믿음의 작업이며, 과거의 지혜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며 이번 행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또한 “한강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 연구소가 책을 내고 여러분을 모신 것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의미를 더했다. 이 교수는 “신학적 사유와 역사적 성찰은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성장한다”는 메시지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한국 信연구소의 이번 송년 모임은 신학과 실천, 믿음과 역사, 학문과 사회적 책임을 잇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참석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장성호 webmaster@ecumenian.com

2024/12/14

Philo Kalia - 『김지하를 다시 본다』 엮은이 :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 Facebook

(2) Philo Kalia - 『김지하를 다시 본다』 도서명 : 김지하를 다시 본다 엮은이 :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 Facebook




Philo Kalia

12 December at 19:31 ·



『김지하를 다시 본다』
도서명 : 김지하를 다시 본다
엮은이 :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임진택
글쓴이
1부 : 이부영 임진택 염무웅
임동확 서승희 김사인 이재복 홍용희 백현미
정지창 김봉준 채희완 이윤선 심광현 김수현
유홍준 홍성담
김정남 미야타마리에 히라이히사시
박맹수 김용휘 조현범 김선필 이기상 심광섭
주요섭 김소남
김용우 유정길 김영래 김영동 이병철
2부 : 김지하
기획・제작 : 이애주 문화재단,
한국작가회의 50주년 기념사업단
펴낸곳 : 개마서원
펴낸날 : 2024년 11월 18일
ISBN : 979-11-989453-1-0
사 양 : 신국판 152×224/1056쪽/양장제본
가 격 : 54,000원
문 의 : 개마서원(010 7532 6818) 윤혜경
ongoejisin@gmail.com
*시인 김지하 1주기 추모 학술 심포지엄에 이기상 교수의 발표에 토론자로 참여하는 바람에 이 방대한 책의 말석이라도 참여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방금 이 두꺼운 책(1,056쪽)을 받았다.
처음 시들을 통해 충격을 받았고, 동학에 관심을 가지다가 그의 사상기행을 따라 답사하면서 만났고, 한국 미학을 찾다가 김지하를 좀 더 깊이 만났고, 생명 사상에서 더 깊이 만났고, 개벽이라는 이름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다양한 사회적 관심 밑에 개벽 종교, 동학, 기독교, 불교를 종횡무진하며 길을 찾는 시인을 만났다. “흰그늘의 생명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전체 사상을 다시 다시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지하를 다시 본다』는 2023년 5월 6일~7일 김지하 추모 1주기에 열린 《김지하 추모 학술 심포지엄》 토론 자료를 정리하고, 다시 꼭 읽어야 할 김지하의 글을 모아 만든 105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1부에는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임진택, 임동확, 김사인, 홍용희, 정지창, 채희완, 심광현 등 30여 명이 「김지하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이라는 큰 주제 아래 〈김지하의 문학과 예술, 미학〉 〈김지하의 그림과 글씨〉 〈민주화운동과 김지하〉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으로 나누어 주제 발표와 토론을 한 후 정리한 내용과 종합토론을 한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2부에는 「김지하가 남긴 글과 생각-생명의 길・개벽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김지하가 남긴 수많은 글 중에서 꼭 다시 읽어봐야 할 글을 골라 실었다.
암울한 시대에 수많은 젊은이를 위로하고 힘주었던 글 「양심선언」, 「나는 무죄이다」. 로터스상 수상 연설인 「창조적 통일을 위하여」,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등 현시대의 문제점들을 수십 년 앞서서 말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개벽과 생명운동」, 김지하가 자신의 문학에 대해 쓴 「깊이 잠든 이끼의 샘」, 김지하가 남긴 생명사상을 살필 수 있는 「생명평화선언」, 「화엄개벽의 모심」 등 진지하게 김지하를 다시 보고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으로 원고를 모았다.
김지하 시인은 50년 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고(이는 1974년 11월 18일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수호 투쟁 속에 연재된 글 ‘고행...1974’가 문제가 되어 다시 감옥에 갇혀야 했던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2022년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져 있었고, 그를 아는 사람 중에도 그의 ‘훼절’에 대한 불쾌한 감정으로 그 이름을 기억에서 떨쳐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 이후 탁월한 문학적·예술적·미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백척간두의 정치투쟁에 치열하게 임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앞서 생명운동을 주창한 생명사상가였다. 이런 김지하는 결코 폄훼되어서도 안 되고 잊혀서도 안 될 인물이라는 생각에 시인과 가까이 지내던 동료와 후배들이 뜻을 모아 이 책 『김지하를 다시 본다』를 출판하게 되었다.
김지하 시인은 이미 40여 년 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제반 상황들, 즉 생명 경시와 환경 파괴, 기후 위기와 전염병의 창궐, 핵전쟁 위기를 예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인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생명사상이란 화두를 높이 든 생명사상가이자 생명운동가였다. 이런 김지하가 누구였는지 세상에 다시 간곡히 알려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인의 생명 세계관에 입각한 문명 전환의 길에 나서게 하는 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김지하 金芝河(1941.2.4.~ 2022.5.8.)
시인,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이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했고, 1969년『시인』지에 「황톳길」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정치풍자 담시 「오적」을 발표하며 문단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64년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가담해 첫 옥고를 치른 후, ‘오적 필화 사건’ ‘비어 필화 사건’ ‘민청학련 사건’ ‘고행…1974 필화 사건’ 등으로 8년 간의 투옥, 사형선고 등의 고초를 겪었다.
1980년대 이후 생명 사상을 제창하고 생명 운동을 추진했으며, 우리의 고대사상과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75년 제3세계 노벨상이라 불리는‘로터스 특별상’을, 1981년 세계시인대회에서‘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사상기행』 회고록인 『흰 그늘의 길 1.2.3』 등이 있다. 감옥에서 얻은 지병으로 투병 중 2022년 5월 8일 타계했다.
엮은이의 글 중에서
그는 횔덜린과 달리 정치투쟁의 일선에서 네 차례나 감옥을 경험하고
죽음의 위험을 통과한 뒤에야 영성과 생명이라는 결정적 화두에 이르렀다.
그 지난한 과정에는 오랜 시간의 가혹한 독방과 치열한 독서와
건곤일척의 사색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아니라 김지하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술회했다.
분단 한국에서 조선의 문화적·이념적 전통을 잇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투쟁을 벌인 김지하야말로 인류 보편적 문화·예술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
김지하는 결국 흰 그늘이 서린 모란꽃을 화사한 채색화로 그리다
세상을 떠났다. 묵란으로 시작하여 묵매로, 그리고 달마도로,
또 수묵산수화와 채색 모란도로 화제를 옮기며 생애 후반,
붓을 놓지 않은 김지하는 실로 위대한 현대 문인화가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단언하건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제반 상황들, 생명 경시·환경 파괴·
기후 위기·전염병 창궐·핵전쟁 위기를 보면 김지하의 예언은 맞았다.
이에 대한 대안과 처방을 김지하는 40년 전부터 이미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했고, 모색했고, 제안했고, 실험했고, 행동했고,
그리하여 기진할 때까지 절규했다.
임진택 (창작판소리 명창, 마당극 연출가)
차례

2024/12/07

Healing Childhood Scars-Dawren


Childhood Scars-Dawren

Soft White Underb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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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34 views  Nov 5, 2024  #softwhiteunderbelly #marklaita #adversechildhoodexperiences
Soft White Underbelly interview and portrait of Dawren, a Placentia, California man who survived a difficult child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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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u #softwhiteunderbelly #marklaita #documentary #childhoodtrauma #adversechildhoodexperiences #survivorstory #challenges #familydynamics #mentalhealth
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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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script


all right Darren Darren uh 
where'd you grow up where are you from originally 
I'm from
Busan South Korea oh really mhm and 
you came to the US when 
um when I was 16 
tell me about your family um my father was a
writer but he wasn't successful so our financial situation was difficult so we had to live with my
grandmother and my grandfather had a second family so he only showed up a few
times a year my father was abusive um mentally
verbally and physically he was mentally ill and he
drank a lot a cute beat us on even
Street and one time he ran down the street he jumped kicked my mom in the
stomach uh while everyone was watching including my younger brother and
I and on the top of that um my grandmother was very difficult to handle
she hated my mom she had to make every little thing about my
mom so my mom was very unhappy in the
family my parents always fought and I remember the
plates flying and smashing on the floor and I remember she yells at him
she was going to divorce him so but afterwards she came to me and
looked me in eyes she just say that to threaten my dad
and it was relief for me each time CU I trusted
her and one day my brother and I were watching TV
and I knew something was going on my mom was
packing and she walked out of the door and we knew she wouldn't come
back we just sat there pretending to watch
TV cuz we didn't know what was happening we didn't know what to
do then I was 10 and my brother was seven
but that Mor chased me hunted me like all all my
life why didn't you do anything why didn't you say anything I could could have grabbed her leg and begging not to
go each time I I blamed
myself somehow my old neighbor found out about the news I'm sure my grandmother
told everyone so when other people found me
on the street they just came to me with the questions why she live who's cooking now
is she ever going to come back I questions I cannot even
answer I felt like I was naked I also so embarrassed and
vulnerable so since then I try my best to hide my past and my
weaknesses so after my my mom left it was just my dad who had to take care of
us we moved to smaller house and my grandma got her own
apartment I was really angry I was really angry at my dad and my
grandmother for driving my mom away
and after 3 years my dad told me told us he was
going to Canada alone to make some money and real like okay just another
thing happening we didn't think it was like wrong or
um out of ordinary
he left us again just like my my
mom so after he was gone every day my brother and I had to
figure out what to eat every day in the beginning we had some money so we bought
what we want to eat like junk food but as our budget was getting low
we had to survive with instant noodle where were you living you weren't living
with your grandparents it was just us too we were just living we were just
trying to figure out just two of us the grand parents didn't come in to help you
no so I was 13 and my brother was
10 and I felt like just it was just raining on us and
we were just getting socked in the rain we didn't even know there was umbrella cuz no one really helped
us so we were eating instant noodle every day and we came down to the point that
we could only afford a pack one single pack of tofu so we ate
that nobody told us what to do but we still went to the school and
finished our homework I remember we didn't have hot
water so we had to boil water to wash ourselves wash
clothes but we often skipped was we lazy we were just
dirty but you had a house yeah we had a house um one of our ants um
helped us financially she helped us for rent but she couldn't do it forever so
we stayed there alone for 6 month then
we were moved to um another uncle's house and then to grandmother's and
another aunt's house and back to Uncle's house we're just shuffled around the
relative we didn't plant Our Roots and 3 years later um my father um
invited us to New York and he was Mo he moved there and he got remarried so that
was 16 year old for me and 13 for my brother so we
reunited but my dad hasn't changed much and I was still
angry but we moved away for college but then I learned that my brother was
struggling he he told me he was going to end his life and I was really
shocked and I was scared so I just I made him move to my
school so I could keep eye on him but I was strugling too at the time
so I withdrew from college because I I had severe anxiety
and panic attacks thankfully my brother and I got
married to wonderful people but for
me my pain my my trauma caused a lot of issue in our
relationship after years my wife just when we were fighting she she just casually told me there isn't anything
she can do anymore but for me I felt being
abandoned again just like my parents did so I fell into this deep
depression I couldn't I didn't talk to anyone I was just crying for days and
month I became
suicidal and around that time my father called me and he needed
help he said he has a cancer stage four can colon
cancer I was already miserable but I had to see him every day I have to take care
of him he was even a angrier than before cuz he has to deal with the pain and I
was angrier cuz I was raising a kid and when I look at
him it remind me like horrible things my dad did to me when I was
young and even he refused to have a surgery last minute so he pissed up
doctors but he couldn't control the pain so he asked me please get rescheduled
the surgery so I had to go talk to the doctor and I have to back
them even after or surgery a day after he escaped the hospital with the needle
on but it wasn't the first time so I had to chase him down I have to call the
hospital and like apologize to people
but at the end there was nothing we could do except for hospice
care it was quite relief for me cuz I was getting
help there was someone who helped my dad and I had a second child so my wife
and I were working together again so I was slowly getting better then my wife suggest asked
me I should go to Korea to spend time with my mom so I went Korea for two months to
spend time with my mom and my stepfather it was it was 20 27 years after she left
us but to me this trip was to heal and
confront my pain and my trauma so while I was there we traveled
we talked a lot and I read a lot of books I studied them
like on trauma PTSD relationship and
Grace so I learned like important
things one of them was that I found my younger
self the anger hatred impatience that I have felt were from my
younger self the boy who didn't get much love much
attention like throughout my life like random thoughts coming up like little
sad stories I had it like one time my
dad bought KFC for my cousin not me and
there was a time I went to a baseball game game with my friends we didn't have money but someone off offered the food
we're taking a bite but when it was my turn there was nothing so these are
silly memories but I still had it I mean like my younger self had it so I decided
to revisit like all the places so I I tracked down the same KFC
went there and I asked him like what do you do you want to eat and we ordered bunch of food we ate it I asked him if
you're feeling better I went to a baseball game
and I got the best possible suit and we ordered Bunch again and ate
it I I talked to him again and also um visited all all the
houses that gave me trauma so I went to the street where my
mom was kicked and I went to the house where my mom left
us so in my head I was like Imagining the same
moment and when the thing happened I hugged myself and my brother
and telling them I know you guys are scared
it's okay to cry but um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and um another thing I learned was
about Grace and the meaning of forgiveness in ancient Greek to forgive
was to release and to let go so
I decided to let go of my pain my past and I decided to keep good memories
for people who hurt me so I the very first person to forgive
was my grandmother in
Korea uh we bury people on the mountains so I took a bus to the base
and and I walked like hours high up on the mountain and she
was buried next to my grandfather and I S sat down talked to
them telling my grandfather you might have caused my
dad's instability because you had second family you didn't take care of of
him and telling my grandma about all the hurtful memories that I carried
I forgave them especially my grandma I was still sitting there and
looking up on the sky I don't know how to describe the feeling but it was so incredible just to
let things go no I'm not exaggerating but the sky was also so beautiful and even like
walking down the mountain for hours was so happy so now when I think of my
grandmother I smile I also
forgave friends who bullied me I didn't meet them but truly in my
heart wish them better lives
and I had to forgive my mom there was a time I couldn't even
call her mom cuz she also had another family back then
but I know she carried the guilt her whole
life apologizing me every time we see each
other I couldn't talk to her face to face CU I I knew we will break it break
down into tears so on last day in Korea I left her
letter
last person I need to forgive was my that I didn't know how to cuz by then we
already moved to West Coast but anyway I came back to the
States and few days later I woke up in the middle of night I couldn't call back
to sleep I don't know why but I was feeling oh something is not right
and next day my brother called me he was rushed to hospital and he
didn't have much time so I booked a flight hoping that he
could make a little longer so I could go see him and talk to him forgive
him when I arrived at the hospital he was alive but he was like living corpse I I
could see he didn't have much my brother and I we prayed for him
we talked to him I forgave him and my brother and talked a
lot about our past and few days later somehow my father got a little
better he had better pulse and better blood pressure and I could see like he
could recognize Us in his eyes so I asked him that blink once for yes and
blink twice for no asked him do you remember anything we said before and he
blinked twice and I felt so blessed I felt like
it was a miracle that I could get to talk to him again forgive him
again so we my brother and I talk to him and I forgave him
again and that night we watched the baseball game on TV
just like our old days and three of us spent the last
night so I was thinking he would make longer so I decided to come back for my
family so I made final goodai I told him I'll this is the last
time I'll see you I'm keeping good memories with you
only and I love you that's first and last time I said
him I got back to LA it was suddenly
raining but my brother called me he passed away I was
outside I just lay down in the floor soaking in the
rain and I could remember the time when he was still in the hospital there's one Korean
nurse she came to me are you the son so
yeah oh and she told me like she's so sorry that she heard all the stories of
my dad and like she asked me if he ever apologized to me and then no but at the
point I didn't even want to hear that I didn't want him to say that cuz he's not like like
that but again like I'm laying down on the ground I feel like he's talking to
me somehow oh that saying sorry and I love you
too so I thought my life story came to close at that point cuz I
learned so much I regained my strength for my work and for my
family it wasn't over so I had this young
cousin the son of the aunt who financially helped us a lot when we were
kids he was coming to this country to study so like I to my
hand don't worry about him I got I got him you know don't worry about him he's
like a little brother to me so like when he came my wife and I took took him out
for dinner we talked and we could hear his
story that he didn't come here to study but to
escape because his sexual orientation was not appreciated in his family
and he had P painful story in the society so my wife and I
tried to provide provide him everything like we dropped off food and we invite him we have him over to our
house but he only called me when he needed something right and he was seeing
someone and he said he need he wanted
cosigner for his bigger apartment and I have to talk to my wife
it's about money and I told her about his mom
helped us a lot so I got to do it so we did it but soon
after they broke up and he was struggling so I had to make more efforts
to make him feel better and like you know make him come outside and to have dinner but he kept avoiding me maybe
next time like I'm not ready like I I'll call you next time around that time my uncle in Korea
called me and asked me to check on him so okay I couldn't reach
him so I called the apartment cuz I'm cosigner like give me the access but they only told me to call police
station I asked him why but they don't tell me anything I go called the police station
they couldn't find them and they also told me I'm not immediate family so they cannot tell me anything so I called
every possible way to get get in touch with
them no luck so I just went to the police station with his name written
down and the officer looked at me
with with um sorry face he's
deceased and I was frozen and I couldn't process in my head and I asked
him what like why how bunch of question but still I'm just his cousin he
couldn't tell me a thing so I I got the number of his investigator and like other people and
later I found out that he ended his own life
and uh people already talked to my aunt and it was the
process of like sending his body and his stuff back to
Korea so I blamed again blamed myself again because I was the only one who had
him here and I knew it even after my
and I I called her so many times to apologize her but she didn't pick up and
my another Uncle told me not to call her
anymore other family told me um it's not my fault but he's death
like waited so heavily on me
my life had to go on for my family but inside it it wasn't the
same my my life stopped so I I I I try to think of all
the thing happened in my life and I I could understand why still
things are happening to me why is it not
stopping and I again found myself thinking about
forgiveness I I have forgiven everyone except
myself maybe it's time to forgive myself for the
guilt for my mom's departure for not
taking care of my brother for causing to death and for the guilt I I put on
myself
I'm still on the journey to find a way to do
it but one day I hope my aunt wants to talk to me and forgive me
and maybe you could talk about how he was like here and what he was dealing with
but I know it will take time for so
long I HD my past my weaknesses but after all of
this I realized and I believe they are my greatest
asset my past my trauma my struggle how I
overcame became my strength to help
others I'm not a doctor but I want to help I want to say people in my own
way at least I don't want people to end their own
lives I I want people to [Music] find purpose and meaning of their
life everyone deserve the life they love
so I decided to use my asset and I decided
to be happy good for you yeah thank you
beautiful story thank you thank you Darren thank you thank you so much for having
me even though a soft white underbelly consists of a lot of videos It's really
still a photography project to me and if you appreciate the photography sometimes it's difficult to enjoy it
when it's scrolling down the screen which is the only option I had in this horizontal format on uh on YouTube so
last year we came out with the first soft white underbelly book which is a collection of the best portraits from the thousands of interviews I've done
each portrait in this book is accompanied by an interesting quote from the person's interview oh my
God there's more
wow these aren't as bad as I thought I look like a
witch I will not be reprinting this book when it sells out so once it's gone it's gone for good you can order yours at
softw underbelly dorg $125 $150 for a sign
copy thank you for watching


===

2024/12/06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空·公·共 이정배

알라딘: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空·公·共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空·公·共 
이정배 (지은이)신앙과지성사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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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너츠 고블릿.친환경 노트 (택1, 대상도서 1권 포함 종교 분야 15,000원 이상)

정가
3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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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원(5%) + 멤버십(3~1%)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원

배송료
무료
수령예상일

504쪽

책소개
기독교 묵시의식과 수운의 종교체험인 한국 개벽사상을 역사적 유비로 회통 하여 신학적 상상력으로 엮어진 독창적 연구서로서 방대한 500여 쪽의 저서는 한국 사회의 종교, 경제, 정치제도에 대한 현실사회의 이중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연속과 단절의 쌍곡선적 변주곡의 향연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정배 교수는 50여 년의 신학적 노정에서 한국 종교체험인 개벽사상(Great Openig)을 통해 서구사상과 서구 자본주의 그리고 서구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空·公·共의 해석학적 화두를 웅장하게 전개한다.


목차


추천하며
문명론적 시대사조에 대한 한국적 응답 _4

책을 펴내며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공(空)·공(公)·공(共) _6

1장 개벽신학의 세 토대로서
空·公·共
동학 개벽사상 연구사의 흐름 _14
기독교 신학의 개벽적 전회 _27
역사유비와 개벽사상 _45
개벽신학의 세 토대로서 공(空)·공(公)·공(共) _53

2장 空
개벽사상가로서 성 프란치스코 _74
동학과 다석 사상, 그 필연적 만남 _116
대속과 자속의 불이성 _158
理氣 우주론 관점에서 본 초월적 자연주의 _173

3장 公
자본세 속의 ‘자본’ 기독교에서 회복력(탈성장) 시대를
위한 개벽 기독교로 _204
탈성장 시대와 개벽적 기독교 _241
포스트휴먼으로서 ‘호모 데우스’ , 그것이 개벽일까? _269
개벽, 토발(土發)적 시각에서 본 함석헌 _303

4장 共
항일과 친일의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 _332
개벽신학으로서의 통일신학 _349
좌우 이념을 넘어선 영구 중립화 _419
‘DMZ 民+평화 손잡기’ 운동 _443

마지막 글
개벽신학의 세 차원: 空·公·共으로 본 동학 _450

주 _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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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55년 7월 15일 서울 출생으로 2024년 올해 고희를 맞았다. 유교적 가치와 민간신앙을 지녔던 부모 밑에서 성장했으나 대광중고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에 눈을 떠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올해로 신학 공부 50년 세월이 쌓였다. 아내 이은선을 만나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에서 함께 학위를 마친 후 모교에서 30년 가르치다 명예퇴직했다.
재학 중 일아(一雅) 변선환 선생을 만나 토착화신학 전통을 잇게 된 것은 신학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었다. 세월호 사건의 영향으로 다소 일찍 대학을 떠났으나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얻은 감동을 지금껏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토착화신학은 교회 비판을 넘어 시대정신과의 갈등이었고 문명 재창조의 학문이었다. JPIC 정신에 입각하여 ‘작은교회’ 운동을 시작했고 기후붕괴 시대에 ‘탈성장’ 가치를 선언했으며 다석 유영모 사상을 연구했고 그리고 최근 〈개벽신학〉을 주창한 일 모두는 동일 정신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간 수십 권의 책을 썼으나 고희를 맞아 동시에 출간한 두 책 속에 앞서 말한 모든 것이 담겼다. 『실패한 제자들 그 이후』(명작 2024)와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신앙과지성사 2024)이 바로 그것이다. 지향점이 같으나 전자는 마음으로 썼고 후자는 치열한 논리의 결과물이다. 신학자 이신을 만나 ‘역사유비’를 생각했고 그것을 동학사상과 연결시켜 〈개벽신학〉이라 말했으며 이런 의식을 펼치는 학문공동체의 탄생을 염원하며 ‘이후’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식의 앞날을 달리 생각하며 희생을 마다치 않은 부모님께 한없이 죄송하여 염치(?)없지만 신학 공부 50년 세월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

저서
『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동연 2019)
『이정배의 수도원 독서』(신앙과지성사 2019)
『코로나바이러스, 사람에게 묻다』(밀알기획 2021)
『유영모의 귀일신학』(신앙과지성사 2021)
『종교개혁 500년과 ‘이후’ 신학』(모시는사람들 2017)
『3.1운동 100주년과 ‘이후’ 신학』((모시는사람들 2019)
『한국전쟁 70년과 ‘이후’ 교회』(모시는사람들 2020)
『역사유비로서의 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동연 2023)
『이신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동연 2021)
『스승의 손사래』(늘봄 2023)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空‧公‧共』(신앙과지성사 2024) 접기

최근작 : <실패한 제자들, 그 이후>,<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空·公·共>,<개벽사상과 종교공부> … 총 58종 (모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