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6

알라딘: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알라딘: 자본을 넘어선 자본
자본을 넘어선 자본  |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은이)그린비2004-04-19초판출간 2004년

양장본512쪽

책소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비합리성을 목도했던 칼 맑스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을 밝히고 그 법칙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을 제시하기 위해 <자본론 Das Kapital>을 썼다.

2004년, 저자 이진경은 '화폐가 절대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린 지금 이 시대, 스포츠도 예술도 심지어 국가나 체제에 대한 저항도 '돈'이 된다면 상품화하여 자본의 지배 아래 끌어들이고 마는 이 시대를 보며 정확히 맑스와 동일한 문제의식 아래 <자본론>을 다시 썼다'고 밝힌다.

즉 맑스의 자본을 재해석하거나 요약한 책이 아니라, 맑스의 이론과 그간 <자본론>에 대해 배운 내용, 그리고 저자 자신의 사유를 중첩시켜 새롭게 써낸 책이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어들(노동과 노동력의 구분, 상품, 가치와 잉여가치, 화폐와 등가물, 노동가치론, 자본의 본원적 축적, 자본의 유통과 회전, 재생산표식, 이윤율 저하 경향 등)이 저자 특유의 대중적인 문체로 명쾌하고 쉽게 정리되어 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금융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조절이론, 노동의 종말, 사회적 노동 등의 개념어들 역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정통적인 의미의 맑스주의 경제학에서 다루지 않는 개념 '기계적 잉여가치', 확대된 '지대'(地代) 개념도 등장한다. 각 장마다 주제의식에 부합하는 4~8장씩, 총 60여 장의 도판을 실어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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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 문

1장 칼 맑스, <자본>의 저자

2장.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1. 상품과 비-상품
2. 상품생산
3. 가치와 노동
4. 노동가치론과 휴머니즘
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3장. 교환과 화폐
1. 가치 개념의 발생
2. 표현적인 가치관계
1) 단순한 가치형태 2) 확대된 가치형태
3. 가치와 상품세계
1) 일반화된 가치형태 2) 화폐형태
4. 화폐와 물신주의(物神主義)
5. 화폐의 기능과 발생
1) 화폐의 기능 2) 화폐형태의 발생

4장 자본과 잉여가치
1. 가치론의 공리계
2.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
1) 자본의 일반적 공식 2) 자본의 일반적 공식의 모순 3)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
3. 노동과 노동력
1) 노동의 가치화 2) 노동력의 상품화 3)노동의 개념
4. 착취와 잉여가치
1) 비교와 가치화 2) 절대-이윤과 상대-이윤

5장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1. 상품 가치의 구성요소
2. 잉여가치의 외부성
1) 무엇이 잉여가치를 결정하는가? 2)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3. 절대적 잉여가치
1) 노동의 형식적 포섭 2) 노동시간과 계급투쟁
4. 상대적 잉여가치
1) 노동의 실질적 포섭 2) 협업과 분업 3) 기계와 계급투쟁 4) 공장체제
5. 기계적 잉여가치
1) '새로운 산업혁명' 2) 노동의 기계적 포섭 3) 기계, 인간, 생명 4) 훈육체제에서 통제체제로

6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
1. 자본의 축적
2. 자본 축적의 일반적 법칙
1) 축적과 재생산 2) 자본의 유기적 구성 3)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 4) 과잉인구, 혹은 산업예비군
3. 자본의 축적과 '인간'의 축적
1) 동일자와 타자 2) 실업화 압력 3)자본의 요구, 노동자의 욕망
4. 자본주의의 미래, 혹은 미래의 자본주의
1) 생산의 사회화, 자본의 딜레마 2) 탈노동화, 혹은 '노동의 종말' 3) 사회적 양극화? 4)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7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과 자본의 계보학
1. 자본의 기원 신화
2. 근대적 무산자의 창출
1) 농민으로부터의 토지약탈 2) 유혈입법과 감금 3) 자본의 혈통
3. 국내시장의 창출
1) 자본주의적 시장 2) 도시와 시장 3) 시장과 국가
4. '본원적 자본'은 어떻게 축적되었나?
1) 공채와 세금 2) 식민주의 3) 노예사냥 4) 축적의 신과 그 선교사들 5) 폭력의 경제학
5. 자본의 계보학
1) 맑스의 '방법론' 2) 계보학적 비판: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

8장 자본의 유통과 자본주의의 재생산
1. 자본의 순환과 그 외부
1) 자본의 세 형태 2)자본 순환의 세 형태 3) 자본의 순환과 '축적체제'
2. 자본의 유통과 가치의 생산
1)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2) 생산비용과 유통비용 3) 유통과정에서 생산과정으로
3. 자본의 회전과 속도의 화폐화
1)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2) 자본의 회전기간과 속도의 경제
4.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
1) 단순재생산 2) 확대재생산 3) 재생산표식과 균형의 문제 4) 재생산표식과 정치경제학 비판
5. 자본의 재생산과 현대 자본주의
1) 현대 자본주의에서 재생산과 균형 2) '위기'의 경제학, '위기'의 정치학

9장 이윤율의 논리와 자본주의
1. 이윤율과 평균화
1) 이윤율 평균화와 생산가격 2) 가치와 가격의 괴리 3) 가치와 가격의 '일치' 4) 평균화의 논리 5) 평균화와 정치경제학 비판
2. 지대론과 포획의 논리
1) 봉건적 지대와 자본주의적 지대 2) 차액지대와 절대지대 3) 지대론, 혹은 포획의 논리 4) 지대와 자연
3. 이윤율 저하 경향과 자본주의
1)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2)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요인들 3) 이윤율 저하와 과잉자본 4) 자본주의의 한계

10장 자본주의의 외부

부록
자본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책들
<자본> 원목차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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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진경 (지은이) 

전환기 한국사회의 토대를 분석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써서 24세에 이진경이라는 필명을 얻었다. 본명은 박태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논문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대한 공간 사회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지식 공동체 ‘수유너머104’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천착해 『철학과 굴뚝 청소부』를 썼고,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변혁을 모색한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이진경의 필로시네마』... 더보기
최근작 : <철학의 모험>,<수학의 모험>,<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 총 9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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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자본론>을 다시 읽으면서 정리해 놓은 책이어서 제목처럼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구매
이명 2014-10-2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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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넘어선 자본 새창으로 보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이다. 이 책을 비평하는 식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이진경처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우리에게 해석해 줄 생각을 해보았는가. 당신들의 무기는 이론이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이진경의 무기는 진심이다. 그리고 나는 자주 이론보다는 다소 어긋나있더라도 진심을 말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싶다.
Joule 2005-04-14 공감(8)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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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판 ‘자본을 읽자‘ 새창으로 보기
1.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맑스가 고전정치경제학자들을 비판했던 방법을 차용하여 저자 이진경이 맑스를 비판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나는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두 번을 읽었다. 내가 어떤 책을 재미있게 보게 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다. (1)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이후의 공부방향을 일러줄 때 (음.. 그렇군), (2) 어렴풋이 생각하던 것을 명료하게 정리해줄 때 (아.. 이 시대의 훌륭한 두뇌라 할 수 있는 이진경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3) 나의 다른 생각이 설득될 때, 혹은 완전 설득되지 않더라도 내가 믿어 의심치 않던 것을 균열시킬 때, 그 균열을 통해 이 대단한 저자에게 게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때 (뭐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 어디 한번 보자...), etc. 난 이 책을 보면서 이 셋 모두를 느꼈다. (1)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2). 이 책은 예전에 푸코와 폴라니를 읽으면서 맑스의 본원적 축적을 떠올렸을 때나, 아래에서 보겠지만 자본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그 외부를 생각했을 때를 상기시켜줬다. 그러나 (3). 다른 무엇보다 "기계가 잉여가치를 창출한다고?" 나는 고정자본이 그 마모분만큼 인간의 죽은 노동을 생산물에 이전시키는 것으로 배웠다. 어디 한번 물고늘어져 보자...

 

2. (2) {자본}의 외부

이론은 개념 및 범주들, 공리들,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하나의 場 안에 제각각의 위치를 부여하는 논리들을 통해 구성된다. 곧 이론은 그 자체로 역사적 실제가 아니다. 어떤 이론 속의 개념과 현실 세계 속의 대상 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유동적이며 우발성에 가득찬 역사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하고, 세계가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완결된 형태를 관통하는 논리가 신에 필적하는 천재에 의해 간파됨으로써 진리가 양산된다고 가정하는 순진무구한 생각이다. 이론은 대상의 모든 측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제 측면의 중요도를 가늠하여 이론 내부의 계기로 포섭되는 현상과 무시되어 계속 이론 밖에 내버려지는 측면을 선별한다. 이것이 추상의 방법이다. 이 추상, 곧 취사선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각 계기들 간의 연관을 드러내고자 함이며, 바로 이 연관을 드러내는 것이 이론적 설명이며, 필연성이란 오로지 이 이론적 설명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일 뿐, 세계 내에서 그 자체로 항상-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상적인 범주나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이 속해 있는 역사적 모태로부터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적 특정성을 지닌 어떤 실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구성된 이론은 자신이 자기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의 일부임을 겸허히 인정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정리하면, 이론과 역사는 별개이지만, 하나의 이론은 그 자신이 다루는 역사적 대상에 의해 범위가 제약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사적 모태에 의해 구속된다.

 

<외부 1>

하나의 역사적 이론이라 할 수 있는 {자본}에서 제시된 맑스의 이론적 설명(explanation)은 결코 역사적 기술(description)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1권은 역사적 사실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공장감독관의 보고서에 그려져 있는 영국 공장들의 비참한 현실이나, 소위 본원적 축적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에서 농민들이 어떻게 토지로부터 분리되었는지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맑스가 제시하고 있는 이론의 예증을 위해 쓰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증과 달리 '전제'로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식민지 체제와 세계시장의 확장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그 자신의 이론이 겨냥하고 있음과 동시에 발딛고 서있는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할 수 있었던 일반적 조건으로서 전제(premise)로 도입된다. 전제란 무엇인가? 전제란 이론을 지탱하기 위해 도입되지만, 바로 그 이론 안에서는 분석되지 않는 것이다. 그 전제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이론 바깥의 역사적 사실성 -  곧 실제로 일어났는가 - 일 뿐이다. 맑스는 식민지 체제와 세계시장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연한다.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고... 추상적 모형인 이론은 이렇게 사실적 전제를 통해 그 외부와 자신과의 경계를 표시한다. 

 

<외부 2>

{자본}의 이론과 그 외부가 만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투쟁 역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노동일의 분할에 관한 설명에서이다. 노동일이 어떻게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분할되는가는 오직 역사적으로만 (곧 그 이론 바깥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맑스의 주장의 논리적 연속성이 파열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계급 간의 역관계는 맑스가 {자본}을 통해 펼치고 있는 연속추론(successive approximation) 외부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3. (3) 갸우뚱: 기계적 포섭? 기계적 잉여가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의 미덕 중 하나는 저자가 {자본}의 이론적 설명을 다른 저작들에서 제시된 역사적 기술과 병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치와 화폐'를 다루는 3장에서 저자는 화폐의 발생에 대한 {자본}의 이론적 설명, 곧 가치의 표현적 관계가 재현적 관계로 전화하는 과정과 더불어, 폴라니와 베버의 역사적 기술을 통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가 서로 다른 기원을 갖지만 양자 모두 국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이론과 역사 간의 '대질'이라는 발리바르 식 비판을 몸소 보여주고 있고,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의 뛰어남에 경탄했다. 이 방식은 다른 장들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이진경은 {자본}에 대해 말하지만, {자본}의 저 도저한 논리에 갇혀있지 않다.

 

이 방식은 '잉여가치와 계급투쟁'을 다루는 5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그리고 이 잉여가치를 가능케하는 노동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대한 맑스의 개념화는 '관계적'이다. 곧 상대방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이 경우 '상대' 없이 '절대'는 사고되어질 수 없으며, '형식' 없이 '실질'은 사고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맑스가 이 개념쌍들을 어떻게 구분하던가? 바로 대규모 공업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가능케 한 기술 혁신이다. 이제 자본가들은 단지 노동자들을 공장에 더 오래 매어두는 방법 외에도 잉여가치를 증가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더 빨리 돌아가는 기계를 들여온다거나, 노동자가 덜 필요한 기계를 들이거나 하면서, 이전에는 노동자 세 명이 생산했던 것을 한 명이 생산하게 만든다. 이진경은 기계적 잉여가치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을 설명하기 위해 맑스가 알 수 없었던 그 이후의 역사적 발전을 소개한다. 자동화와 정보화, 포스트포드주의, 이로 인해 변화된 생활양식, etc. 저자에 따르면, 이제 잉여가치는 고용된 임노동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계가 되어버린 세계 내부의 활동 전반을 통해 생산된다. 포드주의 체제를 통해 획득되었던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들의 일반성은 이제 상실된다. 이진경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라는 일종의 ultra-실질적 포섭을 상정하면서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를 무시하며,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개념들이 딛고 있는 지반들을 제거해버린다. 여기서 기계란 단순한 메타포가 아닌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만이 노동하고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인간학적 관념이 기계와 인간, 기계와 생명의 경계가 점차 소멸하고 있는 현재 세계에서 점차 지지할 수 없는 허구적 관념임을 드러내"는 것이란다 (205쪽). 저자는 진정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점차 소멸하고 있다고, 소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어법처럼 그 소멸점은 "무한히 연기"되긴 하지만 존재하는 경향의 방향으로 존재한다는 것인가? 나는 자연도 노동과 더불어 가치의 생산과 증식에 참여한다는 주장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죽은 노동이 응고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말은 도통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기서 기계란 무엇인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된 방추가 이제 자기 혼자서 가치를 또 생산한다고?? 그게 아니라면, 그 기계란 이미 기계처럼 되어버린 사회인가? 만약 그렇다면 또 이제 가치란 무엇인가? 또 노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노동과 활동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 난관은 {자본}의 이론 내부에서 애초에 한 쌍으로 개념화된 개념쌍들을 고립적인 개념들로 분리시키고, 여기에 이후의 역사 전개에 따라 제3의 새로운 개념을 첨가함으로써 야기된 난관이다. 곧 관계가 제거된 개념들 간의 병렬로 바꿔 놓는 것이다. 다른 장들에서 제시된 역사적 기술들이 대체로 맑스의 문제설정에 충실하면서 {자본}의 이론적 설명들을 훌륭하게 보충하는 반면, 이 5장은 자본의 이론적 설명을 폐기처분한다. 그래.. 그럴 수 있다... 19세기 중후반 저작인 자본과 21세기 벽두의 우리의 거리는 한참 멀다. 그런데 그럴 바에야, 이진경이 차라리 맑스와 각을 더 제대로 세우고, 이제 이런 세상에 맑스의 가치론은 박물관으로 들어가라고 좀더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 이 '뭐뭐하지 않을까?'라는 표현 이 책에 참 많이 나온다. 읽을 때마다 눈에 걸렸는데, 나도 그렇게 썼다. 그냥.. 톡 까놓고 말하자. '낫지 않았을까?'가 아니라 '낫다'라고... 그래야 맑스던 이진경이던 좀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아무리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곧 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한 책까지 옆에다 놓고 줄쳐가면서 읽는다고 해도, 읽는 사람의 성의란 쓰는 사람의 성의에 비할 수 없다. 이 책은 결코 녹록한 입문서가 아니다. 저자만큼의 多讀을 독자들에게 기대하기란 무리이겠지만, 난 이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자본}을 읽고 어느 정도까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자본}을 통달했다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 모르겠다. 아마 그 통달의 순간이란 내게 무한히 연기되는 어떠한 상상의 지점일 지도 - 이 책을 읽고 난 후 {자본}의 내용들을 다시 곱씹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다시 {자본}을 읽게 되는 어떤 날, 난 로스돌스키와 함께 이진경의 이 책을 옆에 두고 다시 읽을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으신 독자들... 저자 이진경 선생의 관점이 꼬우면.. {자본}에 도전하시라..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읽으면 1년 남짓이면 3권까지 일단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때 당신은 지금 당신이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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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5-06-28 공감(6)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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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읽을만한 책~! 새창으로 보기
사회과학 서적도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나의 편견은 이 책을 보면서 여지 없이 깨졌다. 내가 받은 이 감동이 맑스에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이진경씨에게 기인한 것일까? 그런건 별 상관없다. 중요한건 지금 내가 이 책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일테니.

이진경씨는 '맑스'와 '자본'을 재해석함으로써 맑스라는 불사조에 또하나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물론, 이진경씨의 맑스 속에는 폴라니, 네그리, 푸코, 알튀세르 그리고 무엇보다 들뢰즈!!의 맑스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물론 나 또한 이 책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바 있고, 아울러 실제 내가 보기에도 다소 궤변처럼 보이는 논리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맑스를 지금, 여기에서 부활시키려는 그의 노력과 발상의 전환을 비난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진경씨는 줄곧 '외부'를 이야기한다. 외부는 사물과 체계가 존재한다면 있을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외부'이다. 그리고 그는, 맑스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외부를 사유하려 했던 학자였고, 그리고 그 외부를 사유하기 위해 '자본'을 썼다는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자본을 리라이팅 즉, '다시 쓴다.'(물론 그 다시쓰는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자본'에 쓰여져 있다고 알고 있는 몇몇 '법칙'에 대한 설명을 누락시키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읽다보면 종종 정말 '반짝반짝 빛난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정보화시대 그리고 세계화 시대 맑스는, 혹은 '자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에 대해 정말이지 감동적일 정도로 좋은 정보를 얻었고, 그의 사고 방식은 그만큼 내가 사유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준 것 같다. 물론 그의 작업이 이 책으로 '완성'된 것이라 보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 책에서 보여준 분석과 기획은, 나로하여금 이후 그의 행보를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말았다. 정말 강추~!! 나에게 있어 이 책은 정말 '올해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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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6-10-26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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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은 ' 정치경제학 비판 '이라는 화두에서 출발한다.

왜 정치경제학비판인가? 정치경제학의 공리계인 노동가치설을 맑스는 인정하고 완성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그것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극복을 해나간다고 한다.

결코 상품이 될 수 없는 노동이 상품이 되고 가치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이라면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말은 노동을 해방시키는 명제가 아닌 노동을 예속시키는 지양되어야 할 자본주의의 특수한 공리계임을 주장한다. 기계도 잉여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기계적 잉여가치, 노동하지 않는 개인의 삶고 생활도 가치화시켜내고 ,자연도 가치화되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자연까지도 착취하고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충분히 공감이 되는 주장들이다. 하지만 이것과 연결되는 실천적인 함의가 정확히 해명이 되지 않으면 단순히 그럴 듯한 주장에 그칠 수도 있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의 담지자인 노동자 계급은 변혁의 주체로서 위치지워진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 이것을 뒷받침했던 공리는 바로 노동가치설이다. 즉 노동계급만이 가치를 창조하며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유일한 주인임을... 이러한 공리계를 해체시키면 자본에 대항해서 자본주의 세상을 전복시키는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 네그리가 말하는 ' 다중 '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자본에 대한 비판.. 좋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떠한 실천이 자본을 전복시키고 이진경이 말하는 자본의 내부에 외부를 만드는 가 하는 것이다.

거시적인 담론을 지지하고 받쳐주는 세상을 전복시키는 아주 작은 실천적인 출발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모색은 어떻게 이루어 져야 하는가? 이제 이런 고민과 실천이 하나 하나 쌓여야 할 시점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실천속에서 이러한 거시담론의 옳고 그름도 판가름 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월의 누적과 실천의 누적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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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62by 2006-01-0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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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넘어선 자본

- 맑스로 다시 돌아온 이진경의 역작, [자본을 넘어선 자본] 소개

 

80년대 학번들에게 익숙했던 논쟁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구체' 논쟁. '사구체'는 '사회구성체'의 약자로 우리 사회의 구조 혹은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논쟁이었다지요. 가장 오른쪽 노선은 우리 사회를 '식민지봉건국가'로 규정하거나 이와 비슷하게는 '신식민지반봉건국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국가'(일명 '신식국독자')로 규정하면서 세상을 개조하기 위한 각기 다른 시각과 프로그램을 펼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90년대 초반 학번인 우리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개념들이었습니다. 물론, 학회 세미나 시간이나 술자리에서는 선배들로부터 '사구체'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선배들은 한결같이 오래된 이야기를 하듯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는 이미 '사구체'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보다 회자되던 시기였습니다. 
98년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냄새와 함께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책을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라는 제목의, 이전 '사구체' 논쟁을 본격적으로 촉발시켰다던, 한 시기를 풍미한 유명한 그 텍스트였습니다. 저는 [자본]Ⅱ권과 함께 학교 도서관 4층에 틀어박혀서 무협지 보듯 읽었습니다.

엥겔스에 의해 출판된 [자본]Ⅱ권의 저자는 주지하다시피 칼 맑스였고,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저자는 이진경이었습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저의 뇌리에 [자본]Ⅱ권과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항상 공존했었는데요. 당시의 제가 보기에 이진경은 [자본]으로 대변되는 '사회과학방법론'을 우리 사회에 이론적으로 적용한 탁월한 이론가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5년간 그는 고전적 인식론에서 '탈주'하여 '근대성'을 화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골치아픈 영역에서 '사유'를 하였고, 질 들뢰즈니 펠릭스 가타리 등을 운운하는 이진경은 조금씩 저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랬던 이진경이 2004년도에 [자본]을 들고 다시금 맑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자본을 넘어선 자본]입니다.
오래 전 기억의 편린을 잡고 저는 바로 책을 구입했고, 이해를 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른 채 소설책 보듯 읽었습니다.
서두가 길었는데요,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본 몇 안되는 [자본] '해설서'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자본]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단 한 가지, 독자인 제 입맛에 맞지 않은 점이 있다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고전적 [자본]의 '외부'를 사유하고자 하지 않았나 싶은 점, 이는 저자가 '탈주'의 습성으로 [자본]을 독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책 내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제 식대로 그냥 [자본]의 '해설서'로 읽고 말았으며, 나름 만족스런 책이었기에 강력 추천합니다.

아래, [자본] 관련한 책들을 소개합니다.
 

***
 

1.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지음, <그린비>, 2004.
: 저자는 자본주의 '이후'가 아닌, 현재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그 '외부'를 사유하고, 미래의 '공산주의'가 아닌, 현재의 '꼬뮤니즘'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념을 떠나서 고전으로서의 [자본]의 내용이 뭔지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2. [자본]Ⅰ,Ⅱ, 칼 맑스 지음, 김수행 번역, <비봉출판사>

: [자본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자본]이 맞다고 하더군요. [자본]Ⅰ권은 상권과 하권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Ⅱ권은 학교도서관에서 읽으면서 요약했던 노트 형태로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과 비교할 정도로 제가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에 김수행 교수가 번역을 잘 하셨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Ⅲ권은 어려워서 읽을 엄두를 못내고 포기했습니다.
 

3. [디지털시대 다시 읽는 자본론], 가와카미 노리미치 지음, 최종민 옮김, <당대>, 2000.

: 상품, 가치와 가격, 화폐 등 [자본]1권에서 분석한 개념들을 중심으로 현재적인 해석을 가한 책

 

4. [두 경제학의 이야기], 이정전 지음, <한길사>, 1998.

: 주류 경제학과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비교한 책인데요, 다분히 이론적인 텍스트이오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5. [자본론을 읽는다], 루이 알뛰세 지음,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아마도 처음 읽은 사회과학서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본]을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고 결심하게 한 책이지요. [자본]을 나름 정치경제학 텍스트나 경제학 텍스트가 아닌 '철학'적 텍스트로 독해하게끔 했던 책이기도 합니다. 즉, 자본주의를 실재적 대상이 아닌 지식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계급투쟁의 이론적 무기로서 철학적 사유를 결합시킨 알뛰세의 시도. 역시 쉽지않은 책입니다. 

 

6.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제Ⅰ권 2분책, 짜골로프 외 지음, 윤소영 편역, <새길>, 1990. 

: 구 소련에서 편찬한 정치경제학 교과서인데, 사회주의 이전의 생산양식들 중 자본주의체제에 대해 연구, 분석했다는 책입니다. 제가 대학 2학년때인가, 이른바 '사구체' 논쟁의 부스러기 같은 연속선 상에서 우리 사회를 '신식국독자' 체제로 규정했던 선배들로부터 추천받아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자본]의 내용을 소비에뜨식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참고서적이지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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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rice1007 2007-07-2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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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전자책] 불교를 철학하다 -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epub 이진경

알라딘: [전자책] 불교를 철학하다

[eBook] 불교를 철학하다 -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epub 
이진경 (지은이)휴(休)2016-12-19 

전자책정가
9,600원

종이책 페이지수 356쪽,

책소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이 그간 공부했던 과학, 철학, 예술 등이 불교적 사유의 흐름 속에서 섞이고 변성된 것들로, 자신도 모르게 밀려들어갔던 심연 속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촘촘하게 담아낸 책이다. 현대철학으로서의 불교, 즉 불교의 개념을 현대로 가져와 우리 삶 속에 투영해보고 융합해봄으로써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불교로의 재탄생을 이야기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25가지 개념을 다루는 방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은 무언가에 섞여 들어가며 스스로 바뀌어간 ‘불교의 초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연기, 무상, 인과, 무아, 보시, 중생, 분별, 중도, 공, 윤회, 자비, 마음, 식, 십이연기(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에 대한 이치와 지혜를 설명하면서 ‘21세기’라고 명명되는 이 시대의 연기적 조건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불교로,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의 방향을 조명한다.
목차
제1장 나의 본성은 내 이웃이 결정한다
연기: 외부에 의한 사유

1. 형이상학이여, 안녕
2. 당신의 본성은 당신의 이웃이 결정한다
3. ‘자업자득’의 업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제2장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하지만…
무상: 차이의 철학과 필연적 무지

1. 잎이 질 때 드러나는 본체
2. 환(幻), 필연적 무지
3. 집단적 환상과 무상의 정치학

제3장 나비의 날개를 타고 끼어드는 것
인과: 분석적 인과성과 연기적 인과성

1. 인과를 모르면 여우가 된다
2. 나비효과, 혹은 차이의 반복
3. 연기적 인과성, 연기적 합리성

제4장 내가 죽는 곳에서 만인이 태어나느니…
무아: 비인칭적 죽음과 부모 이전의 ‘나’

1. 카게무샤의 눈물
2.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3. 수정란도 되기 전의 나

제5장 존재 자체가 선물이 될 수 있다면
보시: 불가능한 선물과 절대적 선물

1. 소모적 장식과 선물
2. 무주상보시, 혹은 절대적 선물
3. 부처의 선물, 보살의 선물

제6장 모든 개체는 공동체다
중생: 공동체의 존재론과 중생

1. 모든 개체는 중생이다
2. 모든 중생은 공동체다
3. 중생은 부처인데, 왜 부처가 되어야 하는가

제7장 부처는 똥이고, 소음은 음악이다
분별: 척도의 권력과 타자성

1. 분별, 선택 이전의 선택
2. ‘옳은 것’의 힘
3. ‘초험적 경험’, 혹은 분별을 넘어선 분별

제8장 극단보다 더 먼 ‘한가운데’
중도: 중도의 존재론, 파격의 논리학

1. 있으면서 없는 것
2. 중도와 중용의 차이
3. 파격의 논리학

제9장 사물의 구원, 혹은 쓸모없는 것들의 존재론
공: 존재의 사유와 순수 잠재성

1. 연기적 조건 ‘이전’의 존재
2. 불생불멸의 잠재성
3. 존재는 왜 보이지 않는가

제10장 죽음의 불가능성이 왜 고통이 되는가
윤회: 영원회귀와 니힐리즘

1. 영생의 고통이라니
2. 고통의 피안에서 차안의 해탈로
3. 노바디(nobody)의 윤회

제11장 연민의 윤리에서 우주적 우정으로
자비: 타자의 윤리학과 존재론적 우정

1.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2. 연민 없이 사랑하라
3. 미움 없이 미워하라

제12장 자유의지 없는 세상에서의 자유
마음: 마음의 물리학과 능력의 윤리학

1. 내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니다
2. 어떤 마음이 내 마음을 만드는가
3. 행을 닦을 때, 우리는 무엇을 닦는 것일까

제13장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혼을 갖고 있다
식: 분자적 인식론과 식의 존재론

1. 눈 없이 보고, 코 없이 냄새 맡는 것들
2. 분자들의 지각, 세포들의 인식
3. 신체는 식을 만들고, 식은 신체를 만든다

제14장 무지 이전의 무명에서 생멸 이전의 ‘존재’로
십이연기: 무명의 카오스와 무지의 코스모스

1. 십이연기를 지금 다시 묻다
2. 무명(無明): 무한속도로 변하는 세계를 어찌할 것인가
3. 행(行): 태초에 행동이 있었으니라
4. 식(識): 동물 이전의 인식능력
5. 명색(名色): 안팎의 식별이 ‘나’를 만들고
6. 육처(六處): 이유 있는 허구의 여섯 시종들
7. 촉(觸): 있어도 만나지 못하면 없는 것이니
8. 수(受): 기쁨과 슬픔의 자연학
9. 애(愛): 분별심은 왜 지혜 아닌 무지로 인도하는가
10. 취(取): 가지려는 마음의 수동성
11. 유(有)/생(生): 생성보다 존재가 선행한다는 믿음이라니
12. 노사(老死): 고통과 두려움이 그려낸 생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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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방법은 많지만, 무엇보다 명확하고 뚜렷한 방법은 '연기'라는 말로 요약하는 것이다.
P. 18
‘연기적 사유’는 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무상함의 저편을 찾는 게 아니라, 무상함을 보는 것이 지혜임을 설하고,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음을 가르친다. 심지어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가변적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으라고 말한다. 아주 달라 보이는 것에서도 ‘동일한 것’을 찾는 ‘동일성의 사유’와 반대로, 아주 비슷한 것에서도 ‘차이’를 보는 ‘차이의 사유’라고 할 것이다. _p.18  접기
P. 43-44
불교의 가르침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무상이 바로 본체고, 그것 이외의 본체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도를 깨친다는 것은 바로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아는 것뿐 아니라, 무상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무상함 속에서 대하는 것이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아니, 상(常)이란 무엇인가? 항상 그대로인 것,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조건이 달라져도 그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상을, 불변의 실체를 추구한다 함은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걸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이란, 그런 동일성이 없음이고, 그런 동일성에 반하는 것만이 있음을 뜻한다. 동일성에 반하는 것은 ‘차이’다.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항상된 것을 찾음이 달라 보이는 것마저 ‘동일화’하려 함이라면,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차이화’하고 있음을 봄이다. 동일성이 없다 함은 오직 차이만이, ‘차이화하는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상의 통찰은 곧바로 ‘차이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_p.43-44  접기
P. 87-88
자아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이든 단단해지는 순간 나를 가두는 벽이 된다. 무아란 그런 벽을 반복하여 깨고 지금의 ‘나’를 반복하여 넘어설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끝없는 변이의 과정을 기꺼이 수긍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넘어서려고 선택하는 것 역시 ‘나’의 선택인 한,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나의 죽음이 아니라 확장에 불과한 거 아닌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게 다가오는 삶은 대부분의 경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온다. 나의 죽음을 동반하는 나의 선택이란 ‘외부’라고 불러 마땅한 그 뜻하지 않은 것과 내가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뜻하지 않은 것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옴을 수긍하는 것이다. _p.87-88  접기
P. 108
먼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의 존재는 시방삼세 존재자들의 연쇄가 준 선물이다. 준다는 생각 없이 준 선물이다. 그렇기에 무주상보시는 어딘가 특별히 따로 있기 이전에,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기대어 있는 것, ‘연기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내게 존재를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니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가, 매순간 자신의 삶이 이 우주적 연쇄의 존재자가 주는 선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이 부처라면, 부처란 매순간의 존재와 삶이 거대한 우주적 스케일의 선물임을 알고 받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_p.108  접기
P. 165
중도는 유무를 떠나는 것뿐 아니라, 진위를 떠나고, 선악을 떠나고, 남과 여, 적과 친구 같은 모든 이항대립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서나 이항적인 양극단을 떠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중도는 어떤 문제나 사태에 적용되고 관철되어야 할 ‘사유의 방법’에 가깝다. 즉 사태나 문장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하여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서구의 논리학적 사유방법과 반대로 양극단이 서로 섞이거나 중첩되기도 하고, 하나가 반대의 것으로 전변되는 아주 다른 종류의 ‘논리학’이다.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극단을 넘나들며 해체하는 횡단의 사고다. _p.165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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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진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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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 한국사회의 토대를 분석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써서 24세에 이진경이라는 필명을 얻었다. 본명은 박태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논문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대한 공간 사회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지식 공동체 ‘수유너머104’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천착해 『철학과 굴뚝 청소부』를 썼고,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변혁을 모색한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이진경의 필로시네마』를 썼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과 함께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삶의 탈주를 꿈꾸며 『노마디즘』, 『철학의 외부』, 『역사의 공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 접기
최근작 : <철학의 모험>,<수학의 모험>,<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 총 90종 (모두보기)
SNS : //twitter.com/solaris00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 불교를 말하다!

현대의 과학, 철학, 예술은 물론 우리 사회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의해 침윤되고 혼합된 불교의 모습을 찾아서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방법은 많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명확하고 뚜렷한 방법은 ‘연기’라는 말로 요약하는 것이다. 즉 연기가 불교의 요체고, 석가모니가 자신의 깨달음을 펼치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개념이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연(緣)하여 일어남(起)이다. 연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기대어 있음이다. 따라서 연기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반대로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 《중아함경》에 있는 유명한 문구가 그것을 요약해준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처럼 불교의 오랜 역사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연기적 조건 속에서 과거의 자신과 대결하며 스스로를 갱신해온 것임을 안다면, 현대의 과학, 철학, 예술은 물론 우리 사회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의해 침윤되고 혼합된 불교의 모습을 ‘순수한 불교’를 준거로 비난하는 것처럼 거리가 먼 것은 없을 것이다.

신간 《불교를 철학하다》는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이 그간 공부했던 과학, 철학, 예술 등이 불교적 사유의 흐름 속에서 섞이고 변성된 것들로, 자신도 모르게 밀려들어갔던 심연 속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촘촘하게 담아낸 책이다. 현대철학으로서의 불교, 즉 불교의 개념을 현대로 가져와 우리 삶 속에 투영해보고 융합해봄으로써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불교로의 재탄생을 이야기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25가지 개념을 다루는 방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은 무언가에 섞여 들어가며 스스로 바뀌어간 ‘불교의 초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연기, 무상, 인과, 무아, 보시, 중생, 분별, 중도, 공, 윤회, 자비, 마음, 식, 십이연기(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에 대한 이치와 지혜를 설명하면서 ‘21세기’라고 명명되는 이 시대의 연기적 조건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불교로,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의 방향을 조명한다.
인터넷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곳이 연결되고, 기계와 인간이 섞이고 합체되며, 생명체가 복제되고 매매되는 시대에 어떤 현대철학보다 더 현대적인 철학으로, 어떤 윤리보다 더 현대적인 삶의 방법으로서 불교가 재탄생되어야 한다는 한 현대철학자의 경계를 허무는 관점과 폭넓은 사유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세속을 벗어난 수행과 고된 깨달음의 여정을 뛰어넘어 좀 더 행복하고 충만하게 우리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깨달음의 실천적 요체로서 다가온다.

‘무아’의 철학,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다

그런데 왜 현대철학자가 ‘불교’를 이야기할까? 또 그에게 불교란 어떤 의미일까? 철학자 이진경에게 ‘불교’는 아주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종교였고, 아득한 먼 곳에서 가끔씩 보내는 철학적 눈짓에 불과했다. 한 번도 절에 가본 적이 없었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철학적 향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찾아서 읽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성철 스님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접한 후 《벽암록》의 심오함과 유머러스함, 고준함에 ‘매혹’되었고, 가까운 이들과의 갈등에서 시작된 당혹스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아상’에 대해, 그 아상이 만드는 세계의 일방성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었다. 내 기준에 따라 세상사를 분별하며 내 맘에 들지 않는 얘기는 싫다고 쳐내고 맘에 드는 얘기만 기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점차 ‘무아’를 설하는 철학(4장 참고)에 빨려 들어갔고, 세상을 향해 분별하고 재단하던 시선을 비로소 내 자신을 보는 데 내 자신이 만든 세상의 협소함을 보는 데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전에 읽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것, 가령 ‘차이의 철학’이니 ‘공동체’니 하는 것들이 ‘무아’의 철학 없이는 공허한 것이 될 것임을 직감했고, 그 직관 속에서 그것들 또한 변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운명의 지침들이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 또 하나의 현대철학,
25가지 불교 개념으로 삶을 사유하다

이 책은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이 ‘불교’에 매혹되고 예고 없이 맞닥뜨린 삶의 심연 속에서 보고 생각하게 된 것들, 불교가 신체와 영혼에 스며들어 만들어낸 사유의 단면을 섬세하면서도 통찰력 넘치는 문장으로 보여준다.

■ 연기: 외부에 의한 사유
‘연기적 사유’는 무상함을 보는 것이 지혜임을 설하고,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음을 가르친다. 저자는 이러한 ‘연기’를 이야기하며 세르반테스와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똑같은 글이지만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른 문체와 의미를 갖는다는 것, 바이올린 역시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악기가 된다는 것, 흑인이 노예가 되었던 것은 백인과의 끔직한 만남에 기인한다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좋은 본성을 가지려면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이란 밖에서 오는 것, 즉 바이올린이나 흑인의 본성은 그것의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연기적 사유는 어떤 것의 본성을 그 외부에 의해 포착하는 ‘외부성의 사유’다.

■ 무상: 차이의 철학과 필연적 무지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차이화’하고 있음을 봄이다. 우리는 동일한 신체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의 세포들은 생명하며 바뀌어가고 있다. 나뭇잎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스스로와도 끊임없이 달라지는 무상한 ‘차이화’ 과정 속에 있다. 가령 ‘남성’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남성’이라고 동일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차이가 숨어 있다. 힘 좋은 남성, 눈물이 많은 남성, 남성을 좋아하는 남성 등. 남성적 정체성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동일성의 사유는 이 모든 차이가 최소화되고 사라지도록 억누르는 반면, 무상과 차이를 본다는 것은 ‘남성’이란 동일성 안에서 수많은 차이가 숨어 있음을 보고, 그것들에 따라 동일한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그런 차이화에 대해 억지로 막지 않고 열어둘 것을 요구한다.

■ 인과: 분석적 인과성과 연기적 인과성
분석적 인과성은 수학적 공식으로 정확하게 표시되는 보편적 인과법칙을 찾는 것이라면, 연기적 인과성은 초기 조건의 차이에 따라 인과의 작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한다고 언제나 캘리포니아에 폭풍이 부는 건 아니고, 사회주의 사회라고 반드시 셀프서비스가 없어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 무아: 비인칭적 죽음과 부모 이전의 ‘나’
무아란 ‘본래의 자아’나 ‘불변의 자아’ 혹은 ‘참된 나’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음을 뜻한다. 자아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이든 단단해지는 순간 나를 가두는 벽이 된다. 무아란 그런 벽을 반복하여 깨고 지금의 ‘나’를 반복하여 넘어설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는 죽음을 불랑쇼는 ‘비인칭적 죽음(비인격적 죽음)’이라고 명명했고, 누군가 죽으며 비워진 자리에서 ‘누군가’ 다른 이가 탄생하는데 이를 ‘비인칭적 탄생’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그런 비인칭적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사건의 영원한 반복임을, 기쁜 긍정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아란 능력의 최대치를 뜻하는 잠재성을 향해 우리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자아 형성 이전의 아기가 가진 잠재적 능력을 통해 다른 ‘나’들로 바꾸어가는 것이다.

■ 보시: 불가능한 선물과 절대적 선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란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는 것, 그런 만큼 받으려는 마음도 동반하지 않고, 그렇기에 받은 이에게 어떤 채무감도 부과하지 않는 것, 따라서 교환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는 증여, 이것이 절대적인 증여고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절대적 선물’이다. 선물인 줄도 모르는 채 주고받는 선물, 있을 수 없는 선물이란 점에서 ‘불가능한 선물’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무외시(無畏施)’처럼 존재 그 자체로 선물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편안함이든 긴장감이든 자신에게 어떤 도움으로 다가왔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대적 선물이고 무주상보시일 것이라고 말한다.

■ 중생: 공동체의 존재론과 중생
중생이란 수많은 것이 하나의 ‘무리(衆)’를 이루어 살아가는(生) 개체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는 개체다. 무리지어-살아가는 중생은 모두 그 자체로 공동체다. 개개의 인간이나 동식물만 중생이요 공동체인 게 아니라, 내 몸도, 심장이나 허파, 세포도 모두 중생인 동시에 공동체고,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가족이나 마을도 중생이요 공동체다. 중생은 공동의 삶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입이나 호오 분별에서 벗어나 몸이나 지구의 고통에 눈을 돌리고, 그것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통찰해야 한다. 좋은 삶을 위해선 지혜(인연으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긍정하고 그것과 기쁘게 공생하는 법을 아는 것)가 필요하지만, 선악호오의 분별을 떠날 때에만 지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 분별: 척도의 권력과 타자성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과 같은 이차적 관념이 덧붙여진 구별이나 판단, 인식을 분별이라 한다. 분별은 모두 ‘나’의 기준을 척도로 행해진다.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남들도 행해야 한다는 암묵적 가정이 분별의 행위 속에 숨어서 작동한다. 그 척도를 내려놓지 않으면 남의 처지가 보이지 않고, 남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에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성’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20세기 현대예술의 역사는 분별심에 대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카소, 뒤샹, 장뒤페를 비롯하여 현대음악가 루이지 루솔로 역시 관념과 척도를 깨버리자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중도: 중도의 존재론, 파격의 논리학
중도란 진위와 선악 같은 양자의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떠나서 사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태나 문장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하여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서구의 논리학적 사유방법과 반대로 양극단이 서로 섞이거나 중첩되기도 하고 극단을 넘나들며 해체하는 횡단의 사고다. 눈 안에 들어선 격자, 사유를 직조하는 ‘이치’를 파괴하여 틀을 벗어나서 사유하게 하는 ‘파격의 논리학’이다.

■ 공: 존재의 사유와 순수 잠재성
공은 어떤 규정성이나 본성이 없기에 연기적 조건에 따라 그 조건이 규정하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알도 될 수 있고, 식재료도 될 수 있고, 남을 괴롭힐 무언가가 될 수도 있고, 실험재료도 될 수 있고…. 규정성은 없지만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갖는 상태가 바로 공이다. 공성을 본다는 것은 용도의 규정 속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규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 사물의 공성을 보는 것, 고기의 규정성에서 벗어나 소나 돼지의 잠재성을 보는 것, ‘흑인’이란 규정에서 벗어나 어떤 한 사람의 잠재성을 보는 것. 그러나 더 중요한 진실은 그런 ‘구원’의 행위를 통해 사물이나 사람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구원하는 자가 자신이란 사실이다.

■ 윤회: 영원회귀와 니힐리즘
윤회하는 수많은 생의 긍정은 수많은 생을 반복하여 사는 힘의 긍정이다. 이것은 그때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힘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사상과 매우 가깝다. 극락이든 구원이든 현세를 떠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현세적 삶 안에 있으며, 그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것임을 말한다. 윤회하는 삶은 ‘나’라는 실체가 없을 때만 가능하다. 어떤 누구도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 그것만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 ‘아무도 아닌 자’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어떤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이 능력을 ‘무아’라고 한다면, 윤회란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수많은 존재자가 될 수 있는 이 잠재적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다. 이 능력을 ‘생명’이라고 부른다면, 윤회란 니체의 말처럼 영원한 시간을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어떤 동일한 힘이 그때마다 다른 양상들로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다.

■ 자비: 타자의 윤리학과 존재론적 우정
자비란 우정과 공감이라는, 우리 중생들이 고통에 찬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버티게 해주는 두 가지 관계를 집약한 개념이다. 남에게 기쁨을 주려는 마음과 남에게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가까이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고통받는 불쌍한 ‘타자(과부, 고아, 빈민 등)’를 향한 연민에 대해 설한 반면, 달라이 라마는 인간이 아닌 것을 포함하는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는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다. 중생은 불쌍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부처’가 될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모든 중생은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지만, 현행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조건에 따라 다른 지위와 규정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현행화된 세간에서는 조건에 따라 많고 적음,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교차하며 자비행이 행해지게 마련이다.

■ 마음: 마음의 물리학과 능력의 윤리학
일체유심조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속한 마음이다. 마음은 모두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는다.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마음들의 연쇄에 의해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다른 산출능력을 갖는다. 흑인을 노예로 삼으려는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의 마음과 자유인으로 대하려는 마음에 상대하는 흑인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유전자조차 그러하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나의 마음, 너의 마음은 모두 35억 년간 생명의 역사라고 불리는 연기적 조건이 기억되고 집적된 것이며, 그런 외부적 조건이 내부화된 것이다. 나에게 작용하는 모든 마음이 응집되어 내부화된 것이다.

■ 식: 분자적 인식론과 식의 존재론
식의 개념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의식) 각각의 인식능력이나 그것이 얻은 식의 독자성을 사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인식의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해준다. 나아가 인간 아닌 생명체의 ‘인식능력’이나 그것으로 얻은 ‘식’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세포의 핵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아니 핵산들의 식의 작용은 세포별로 고유한 단백질을 만든다. 분자적 식의 작용으로 인해 생명체의 신체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체라는 존재방식은 물론 그 존재 자체가 유전자나 그 이하 수준에서 진행되는 식의 작용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식의 작용은 단지 인식론의 영역뿐 아니라 ‘존재론’의 영역에도 속한다.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이유나 존재양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시적 식의 작용은 생명체의 존재를 특정한 양상으로 구성하고, 그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가장 일차적인 성분인 것이다. 분자적 식의 개념을 통해 이제 우리는 미시적 식의 존재론에 도달하게 된다.

■ 십이연기: 무명의 카오스와 무지의 코스모스
십이연기(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는 생과 사, 늙음 등 열두 개 사태들의 연관을 연기법에 의해 포착하여 설명한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인 ‘늙고 죽음(老死)’은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며, 태어남은 ‘있음(有)’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한다. 있음은 ‘집착/취착(取)’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고, 집착은 ‘애착(愛)’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며, 애착은 쾌감이나 불쾌감 같은 ‘감각작용(感受, 受)’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한다. 감각작용은 감각기관과 외부의 만남 내지 ‘접촉(觸)’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접촉을 조건으로 하고, 그런 접촉은 눈과 귀, 코 등 여섯 개의 ‘감각기관(六入, 六處)’을 조건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다. 이런 육처는 사물(色)을 구별하고 그것을 파악하는(~라고 명명하는) 작용(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고, 명색은 분별능력이나 분별작용(識)을 조건으로 가능하게 된다. 분별작용은 필경 살기 위해 발동되는 충동이나 의지, 그에 따른 행동(行)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 행동이나 의지는 세상이 무언지 알지 못하는 조건 위에서, 즉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
이 개념들을 세심하게 따져보면 수많은 의문을 야기한다. 이는 ‘십이연기’의 가르침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명한 연쇄가 아니며, 사용된 개념들 또한 상식이나 통념과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십이연기를 우리가 처한 지적·존재적 조건에서 사유를 이끌어낸다. 상투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깊이 통찰하는 지혜의 단서로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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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요체는 연기(緣起)이다. 불변하는 영원한 존재는 없으니 무상함의 사유가 바로 지혜이다. 연기에 바탕하여 이시대 불교를 현대적인 철학과 윤리로 접근하고 재탄생시키려는 새로운 융합의 철학적 사유가 탁월하다. 현실의 굴뚝청소에서 내면의 청소로 이어지는 저자의 지적 편력이 돋보인다.  구매
현정 2017-03-12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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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교수는 불교전공자는 아니지만 어설픈 ‘불교주의자‘들에 비해 훨씬 더 불교의 본령에 육박하고 있다.전공이 아니고 기고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불교 자체가 그런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워온 지난한 자기 갱신의 역사이거늘.다만 이 책의 관점을 절대화하지 말자.그 또한 아상일 테니.  구매
흰바람벽 2017-10-25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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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입각한 책보다 불교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책.  구매
heru25 2019-10-0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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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혁명성을 한껏 드러낸 책.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통섭‘을 보여준다. 불교가 지니는 현대성과 창조성을 이렇게 매력적으로 드러내긴 어려울 듯.  구매
박하향 2017-01-1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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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들뢰즈에 대해 많이 공부해서 그런지 들뢰즈로 불교 철학하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뢰즈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보였지만 잘 읽히고 괜찮았다  구매
koziro 2016-12-0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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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흐리는 종교 새창으로 보기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제언에서 유발하라리가 말한 것처럼 종교는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낸 강력한 하나의 허구로써 인간의 적응도를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해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수 있게 해주었고,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그리고 삶의 목표를 제시하며 도덕적 인간공동체를 만들어주었고, 신에 대한 공동의 믿음으로 강한 결속력을 부여했다. 종교는 필요로써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와 우주를 설명해주기도 하였는데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재에 이르러선 이런 종교의 설명은 불합리한 측면이 많아졌고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부분도 사실이다. 때문에 몇몇 종교는 애써 현대과학의 성과에 대응하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나 그런 논란에서 비켜나있는 종교도 있다.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중 현대과학의 설명과 많은 부분에서 합치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불교다. 책은 그런 불교의 현대성과 미래성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처와 과학기계장치가 결합된 파격적 모습을 표지로 선정했다. 그리고 책의 저자역시 불교의 여러 철학을 설명하며 현대 과학과 이를 결부시키기도 한다.

 불교에서 시작은 공이다. 우주와 세계는 공이다. 텅비었다는 뜻인데 사실 그렇지가 않다. 양자역학에 의해 입자는 언제든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어 완벽한 진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공에서 말하는 무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 무언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갖는 무규정성이 된다.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모든 가변성의 바탕이고 근거가 된다.

 이런 공에서 연기가 시작된다. 무언가는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관련하여 생겨난다. 따라서 연기는 연하여 일어난단 뜻으로 어떤 조건에 의하여 일어나고 어떤 조건에 기대에 존재함을 말한다. 즉, 인간이든 사물이든 절대불변의 본성 같은 것은 없으며 특정한 관계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입자는 관찰자의 영향을 받으며 이로 인해 입자의 위치와 속도 두가지를 완벽하게 측정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또한 사람이나 사물간에는 상성이 있고, 서로 영향을 받는다. 즉, 연기적 존재인 것이다.

 다음은 무상과 무아다. 고정 불변의 진리와 존재는 없기에 모든 것은 항상 빠르게 변화한다. 같은 사람만 하더라도 세포단위에서 무수한 교류와 변화가 있으며 1년여의 시간이지나면 사람에게서 이전의 세포는 남아 있지 않다. 또한 늙어가며 다른 것과 연기해 꾸준히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한다. 때문에 무상이나 무아는 본래의 자아나 불변의 자아는 없음을 의미한다. 지금의 나나 사물은 특정한 연기 조건에서 만들어진 잠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이나 무아는 이런 내가 죽고 다른 내가 계속해서 생성되는 것이며 이것을 우주와 함께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상과 무아속에서도 열역한 제2법칙을 무시하고 생겨난 생명은 본래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세계에 던져진 생명은 이런 의지로 인해 살고자 하나 세계는 무명이다. 무명이란 무상과 무아의 세계로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포착할수 없는 세계다. 하지만 생명은 살아남아야하기에 억지로 무명의 세계의 속도를 늦추고 멈추고 관찰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식이라고 한다.식은 환경과 개체의 만남이고, 반복되는 만남에 대한 지각과 포착이며 그럼으로써 발생하고 발전한 지각능력과 포착능력들이다. 인간과 다른 생명이 환경에 대해 유전자에 새긴 것들이나 지능, 그리고 사람과 생명이 만들어낸 모든 지식과 밈등은 모두 이 식으로 인한 것들이다. 이 식은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용한 것이기에 무지이나 반드시 필요한 무지다.

 우주의 모든 것은 연기적 존재로 서로 연결되었으며 불성을 갖는 평등한 것들이지만 식으로 인해 생명체는 경계를 만들어낸다. 이 경계는 생존을 위해 피아를 구분하는 것으로 그 경계는 사실 매우 모호하다. 숨을 내쉬며 외부가 금방 나의 내부가 되고 내부의 공기가 외부의 것이 된다. 먹이의 섭취는 다른 것을 내몸으로 만드는 것이고 배설은 나의 것을 외부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는 필요하고 생명체가 만들어낸 대표적 경계는 면역계다.

 하여튼 식은 호오나 미추처럼 선호를 나타내는 이차적 관념인 분별로 이어진다. 이는 이차적 관점으로 생득적인 것도 아니고 재인식이며 선별이다. 하지만 이 이차적 관념은 곧 일단 생명체에 정착되면 오히려 생각이전에 일어나고 감각보다 앞서 감지되며 이성보다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감정적인 것이어서 너무 단순하여 정확한 지각을 막고, 분별은 너무 빨라서 생각하기 전에 판단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분별은 다른 것들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이런 분별은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합적으로도 이루어진다. 분별의 척도라는 것이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분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해진다. 연기적 존재가 본성을 거부하고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별을 넘어서기 위해선 낯선 것과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분별하기 어려운 것과의 만남으로 분별이 정지되고 비로서 제대로된 생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만남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고, 여러 사람과 세계, 견해를 접하는게 중요하다. 이처럼 분별심을 내려놓는 다는 것은 타자성의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분별을 떠났을 때 비로서 어떤 조건에서 어떤게 더 나은지 제대로 분별할수 있다.

 불교는 상당히 평등한 종교인데 이런 점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점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중생은 모든 인간에서 사물, 생명체와 작은 것들도 의미한다. 불성은 연기적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존재자와 현행활 도리 수 있는 잠재력인데 이게 가능한 것이 부처다. 즉, 부처는 연기법의 작용을 통찰하여 그에 응하되 내부화된 성향에 머물지 않고 그 때마다 적적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내는 능력에 보여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부처를 대하는 것이 자비이며 자비를 부처가 아닌 자에게도 행하는 이유는 모두가 잠재적 부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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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9-10-14 공감(26)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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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진경의 놀라운 불교 철학 새창으로 보기 구매
불교의 의미를 어떤 전공자보다 래디컬하고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 자유롭게 풀어쓴 책이 이진경의 '불교를 철학하다'이다. 제목에 철학이란 말이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이진경은 '외부, 사유의 정치학', '필로 시네마;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등 철학 저서들을 쓴 저자이다.

 

문화의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처럼 우리사회에서 인문학이 소비되는 방식에 근본적 문제제기를 한 '불온한 인문학'(2011년 6월 출간)에 수록된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에서 저자는 하이데거의 개념들과 유식불교나 화엄학의 개념들간에 유사한 개념들을 찾아 대응시키는 것 등을 횡단으로 간주되는 유비적 대응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의 관심이 불교 철학으로 드러났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충격을 의도하고 쓰지 않았겠지만 이진경의 책은 래디컬한 만큼 충격적이다. 개인적으로 김영명의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를 가장 핵심적 불교 비판서이자 애정의 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인상적인 대목은 다음의 구절이다. "기존 불교계는 자동차는 엔진, 브레이크, 바퀴 등 즉 자동차 전체보다 작은 단위의 실체들이 일시적으로 만나 이루어진 것이기에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문제는 자동차의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그 부품들의 실체는 인정한다."는 것이다.(163 페이지)

 

각설하고 이진경의 책은 불교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의도한 빛나는 책이다. 연기(緣起), 무상(無常), 인과(因果), 무아(無我), 보시(普施), 중생(衆生), 분별(分別), 중도(中道), 공(空), 윤회(輪回), 자비(慈悲), 마음, 식(識), 십이연기(十二緣起) 등 열 네 개념에 대해 저자가 펼치는 사유는 놀랍다.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도 명쾌하고 논란이 분분한 부분에 대해서도 의연한 것이 저자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과장하면 카뮈가 그르니에에 대해 한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란 말을 해도 좋을 듯 하다.

 

저자는 철학에 익숙하기에 동서 사유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금강경 등의 불교 경전, 벽암록 같은 선불교 공안집, 유식(唯識) 불교 등은 물론 보르헤스, 마르크스, 생물학, 나비효과,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카게무샤(かげむしゃ)', 매트릭스(영화), 데카르트, 스피노자, 블랑쇼, 포틀래치 개념, 조르주 바타유, 프로이트, 양자역학, 현대음악, 진은영의 시, 니체 등을 여유롭게 횡단한다.

 

전체가 버릴 것이 없지만 특별히 몇 부분을 보자. 저자는 공(空)을 어떤 규정성도 없음으로 정의한다. 어떤 규정성이나 본성이 없기에 연기적 조건에 따라 그 조건이 규정하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공은 단지 없음을 뜻하는 무(無)가 아니라 차라리 가능한 규정성들이 너무 많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가령 달걀은 식재료도 될 수 있고 남을 괴롭힐 무엇인가(투척용)가 될 수 있고 실험재료도 될 수 있고... 무질서가 아닌 무한질서로서의 카오스가 생각난다. 인연을 의지해 생기는 연기는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는 없음을 가르친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본성이 달라진다.(18 페이지)

 

저자는 가변적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니체는 가변적 세계의 저편을 추구하는 행위를 니힐리즘으로 규정했다. 공성(空性)을 본다는 것은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음을 보는 것이고 최대치로 열린 잠재성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179 페이지)

 

저자는 어떤 누구도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 그것만이 윤회하는 것이라며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이 능력을 무아라 한다면 윤회란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수많은 존재자가 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라 결론짓는다.(21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여러 생의 윤회든 한 생 안에서의 윤회든 그것은 나나 진아(眞我), 아트만보다는 무아나 생명이라고 불리는 게 더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다. 윤회를 긍정하는 것은 이 힘의 되돌아옴, 이 흐름의 가변성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218 페이지)

 

압권(壓卷)은 마음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한 해명이다. 저자는 마음을 논하며 스피노자의 자유의지 부정을 논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쓸 때도 그것은 그가 겪은 어떤 사건, 혹은 사람이 무언가 쓰도록 촉발했기 때문이고 그런 자극을 표현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247 페이지)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행위조차 신체의 어떤 상태가 요구한 것을 따른 것이다. 신장이나 방광이 앞장서는 그런 촉발이 없다면 소변기 앞에 서려는 마음이 생겼을 리 없다. 소변을 보는 것도 내가 마음 먹기 이전에 신체가 마음먹은 것이고 그 신체에 흡수된 수분이 마음 먹은 것이다.

 

내가 내 뜻대로 행위한다고 즉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믿는 것은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을 하게 만든 원인을 모르고 있음을 뜻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라 할 때 그 마음은 저렇게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하는, 내게 다가온 것들에 속한 마음들이다.(247 페이지)

 

그렇기에 일체유심조는 연기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연기법의 다른 표현이고 내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관념론과 반대되는 방향의 사고이다.(248 페이지) 저자는 이 부분에서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활용한다.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뜻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산출하는 역할'을 능산적 마음, 나의 마음이나 개미의 마음 등 각각의 마음은 그것에 의해 산출된 능력이란 점에서 소산적 마음이라 설명한다.(251 페이지)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들었지만 전편이 이런 논리와 흐름으로 진행된다.

 

화려하면서 꼼꼼하고 치밀하면서 자유로운 책이 ‘불교를 철학하다’이다. 자주 들여다 보아야 할 책이다. 놀라운 책이기 때문이고 더 배우고 적응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비판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다른 생각이기에 비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유식무경(唯識無境)은 다르게 볼 여지가 충분하다 하겠다.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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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8-11-09 공감(1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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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제대로 철학했습니다. 평이하지만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심길 2017-02-0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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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철학하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통해 ‘익숙해진다’는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부모님이 특별한 종교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무신론자로 살아갈 수 있다. 어린 시절 이웃집 어른을 따라 교회에 다니다 부흥회의 분위기에 질겁하고, 소풍 길에 다녔던 절은 볼 거리이거나 쉼터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책을 통해 이슬람을 만나고 왜곡된 프로파간다에서 참모습을 찾으려 읽는다. 부모님과 함께한 어린 시절의 익숙함이 종교보다 자신을 믿고 살아간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시대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 온 이진경님이 불교를 종교보다 철학으로 이해하고 안내하는 불교철학 기본서 라고 판단한다. 바람 쐬러 다녔던 절, 스님들,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체유심조’와 ‘가는 걸 잡지 말고, 오는 걸 막지마라’ 정도였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보왕삼매경’을 보고 좋다고 느낀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불교 철학을 온통 이해했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몇 가지 불교 철학 개념을 알고 이해한 것만으로도 기쁘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1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 ‘나의 본성은 내 이웃이 결정한다’에서 막혔던 가슴이 터지고, 답답함이 사라지며 ‘아 ! 그래, 그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연기적 사유’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책이란 독자가 읽었을 때 책이다. 가지고만 있으면 책이 아니라 짐이거나 스트레스일 뿐이다. 좋아했던 남자의 변심을 원망하고 안타까워하고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연기’를 받아들이지 못함이다. 연기緣起가 무엇인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사라짐이다.

“‘연기적 사유’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주역의 모든 것은 변한다와 같은 변화를 긍정함을 토대로 한다. 그러니 불변한 것을 찾으려는 서양의 형이상학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다.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혼 초기에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10년, 20년 후에 같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것조차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업’이란 하던 것을 계속 하게 하는 성향으로 관성적인 잠재력이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업은 본성이 아닌 것조차 반복되면서 본성처럼 몸과 입, 의지에 달라붙어 관성적인 언행을 만들어낸다.” 연기적 조건의 차이에 업의 힘이 끼어들어 변화를 만들어간다.

 

불교의 가르침중 하나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상이란 조건이 달라져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무상이란 동일성이 없음, 동일성에 반하는 ‘차이’가 있음이다. “무상을 본다는 것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무상을 보지 못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 할 때 애착과 집착이 일어나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다.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하는 ‘동일성의 사유’도 배운다. 차이에서 출발하는 불교 철학은 차이화에서 생긴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일성에 가두려는 힘에 대항하며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한다.

 

근대 과학의 분석적 인과성과 불교 철학의 연기적 인과성을 비교한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이라는 단서로 독립변수와 종속 변수로 분석하는 인과는 서양의 분석법이다. 분석적 인과성에서 변수간 인과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하지만, ‘연기적 인과성’이란 필연성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필연성을 가진 법칙마저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빚어내는 우연성도 무시하지 않는다. ‘카게무샤의 눈물’에서 우리는 조건, 관계에 따라 다른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를 풀어낸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이라 본다. 행동패턴은 익숙해진 일상생활을 쉽고 편하게 해 주는데, 이는 새로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패턴 안에 제약된다. “삶의 가능성이 ‘나’라고 불리는 성격이나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오십 정도가 되어야 자아가 안정된다는 말은 자아에 갇혀가는 시기라는 말이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나와 남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다 남에게 폐가되고, 나에게 안타까운 어떤 상태를 표시할 뿐이란다. 그렇기도 하다.

 

지구는 가장 큰 공동체다. “일정하게 유지되는 대기비율처럼, 지구의 온도 역시 그런 항상성을 갖는다. 이런 이유에서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일 뿐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하나의 생명체다.”

 

끌어당겨 내 것으로 가지려는 마음(탐심 貪心), 밀쳐 내거나 제거하려는 마음(진심 嗔心) : “오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치달리고, 갖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집착하며, 가버린 것을 붙잡으려 애쓰고, 바로 옆에 있는 것을 피하려 하며, 피할 수 없이 다가온 것을 밀쳐내려 버둥거린다.”

 

‘도’라는 지혜는 선악호오, 미추정사 美醜正邪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 요체다. 분멸은 모두 ‘나’의 기준을 척도로 행해진다.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분별하지 말라는 뜻은 호오미추의 판단을 떠나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空’이란 연기적 조건을 모두 지워 남는 것이 아무런 본성도 규정성도 없음이다. “공성을 본다는 것은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을 보는 것이고, 최대치로 열린 잠재성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

 

‘윤회’는 영생불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삶이란 모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에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그런 고통 속에 영원히 머문다는 것이다. 윤회의 중단은 고통스런 삶의 중단이요, 그로부터 벗어남이다. 열반, 해탈은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연기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당대에는 혁명적 발상이다. “고통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차분하게 직시하고 그 안에서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다시 찾아 나선 이유였다.” 고통이나 번뇌 없는 깨달음은 없다. 윤회하는 현세적 삶과 별개의 해탈이나 극락 같은 것은 따로 없다. 윤회하는 삶을 떠나야 할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이다. 고통에서 배우려고만 한다면 깨달음을 향한 길을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집착이다. “연민 없이 사랑하라.”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성과 거리가 멀다. 동정이나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전제되어 있다.

 

一切唯心造 :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 조건 속에 스며들어 있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든다.”

 

十二緣起 : 無明/行/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生/老死

앞에 것이 뒤 것의 조건이다. 뒤는 앞이 있어서 일어난다.

 

“미움 없이 미워하라.”와 “눈 업이 보고, 코 없이 냄새 맡는 것들”, “十二緣起”의 어느 부분들은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휴에서 2016년 11월 초판을 내놓았고, 2017년 9월 초판 6쇄, 본문 356쪽 분량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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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hill 2018-07-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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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불교를 철학하다 새창으로 보기
조금 아쉽.
hiphop99dan 2018-01-0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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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이 쌓여서, 이번 주는 도서관 꾹 참고 있는 ... 새창으로 보기
읽을 책이 쌓여서, 이번 주는 도서관 꾹 참고 있는 책 읽자 했건만... 마음이 들썩들썩~ 평일엔 도서관 가기 힘들텐데 하는 초조한 마음이 오후가 지나면서 심해져.. 에라 모르겠다. 또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도서관엔 이미 빌린 책이 많으니, 두 번째로 가까운 도서관으로~ 훗~ 나 좀 천재같아.)

<초조한 마음>이 생각보다 두꺼워서 깜놀. <감정의 혼란> 분량 즈음으로 내 멋대로 생각해놓고, 빨리 못 읽을 거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든다. 책 제목과 싱크로율 1000%
다시 데려가겠다던 <불교>와의 약속도 지키고,
수연님과 함께 읽을 줌파 라히리 책도 챙기고,
팟케스트에서 듣다가 추천 받아 읽고 싶은 책도 빌리고... 하.. 또 5권 꽉 채웠엉.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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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11 공감 (30)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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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반 이상 이해가 안되는데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 새창으로 보기
와~ 반 이상 이해가 안되는데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다니..
정말 나의 배경지식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던 부분을 읽을 때는 이해가 쏙쏙, 흐름이 줄줄~ 모르는 부분을 읽을 때는 하얀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혹은 한 장씩 읽고 함께 토론해 보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하다.
강연을 다시 책으로 낸 거라 말씀하시는 톤으로 적어놔서 그런지 읽히긴 정말 잘 읽힌다.(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흐름을 꿰고 있다니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

정말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왜 막시무스님이 주기적으로 굴뚝청소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는지 진짜 완전 알겠음.(막시무스님 감사해용!)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싶은 책장에 넣었는데, 그때 북다이제스터님이 <불교를 철학하다> 구절을 올리셨는데 그게 또 너무 좋아서 담았다. 댓글로 북다님이 두 작품의 작가가 같다는 걸 알려주셔서 완전 운명적인 책이 되었음.(옷깃만 스쳐도 운명 남발하는 거 아시죠?)(북다님, 감사해요!! 저자 따윈 신경 안 쓰는 저에게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장 집에서 세번째로 가까운 도서관에서 두 권 다 빌렸으나, 이건 다 읽고 <불교>는 뚜껑도 못 열어보고 반납..ㅜㅠ 괜찮다. 또 빌릴 거니까! 다시 데려와 주겠노라고 사진도 찍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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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11 공감 (30)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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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교수의 함석헌과 『노자』1-14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김시천교수의 함석헌과 『노자』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2강 『노자』에 관하여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4강 『노자』와 무위 2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제9강 상상력과 과학
제10강 『노자』와 자연
제11강 『노자』와 성인 1
제12강 『노자』와 성인 2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고전연구 노자 | 바보새 함석헌

동양고전(1980) 1 페이지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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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고전연구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노자 바보새 07-11 1062 0
17 고전연구 천하를 부탁함직 하다/노자 바보새 07-11 1914 0
16 고전연구 지게문 나가지 않고 천하를 안다/노자 바보새 07-10 1416 0
15 고전연구 윗 선은 물과 같다/노자 바보새 07-09 1664 0
14 고전연구 올바름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라/노자 바보새 07-09 11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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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전연구 골짜기 검은 아니 죽어 /노자 바보새 07-09 145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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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고쳐 씹기 > 동양고전(1980) | 바보새함석헌

옛글 고쳐 씹기 > 동양고전(1980) | 바보새함석헌

고전연구 | 옛글 고쳐 씹기
작성자 바보새 13-12-31 13:37 조회1,7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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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씨알이 씨알 노릇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옛글 곧 고전을 고쳐 읽는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옛글입니다. 이날까지 서양 문명, 더구나도 물질주의적인 문명이 주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래서 동양은 오랜 정신적인 특색을 가지는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 눌려서 거의 그 값을 인정받지 못했고 동양사람 자신까지 동양의 생각을 업신여겨 왔습니다. 더구나 종교에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들었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참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동양 소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동양사람 자신이 도리어, 발등 밑이 어둡다고, 그런 생각을 못한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버려진 유산을 다시 찾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고쳐 씹어서 거기서 새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는 문명의 새 방향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날까지 서양적인 것이 모든 방면에서 오직 하나의 옳은 길인 것처럼 그 길은 자동적으로 행복에 이르는 것처럼 생각해 왔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서양사람 자신이 당황하고 비관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깊은 생각을 하는 것 없이, 자, 벌어라, 벌어서 먹고 마시고 유쾌하게 놀자, 하는 식이라면 말할 것 없지만 적어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엄숙한 문제입니다. 덮어놓고 하는 낙관주의는 허락이 않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대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때껏 달리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한번 바꾸어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서양이 만일 아니라면 찾아볼 길은 동양 밖에 없습니다. 물론 동양 서양을 분명히 금을 긋기는 어렵습니다마는, 토론을 위해 토론을 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대체로 동양은 동양이요 서양은 서양으로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또 모르면 모를수록 동양의 옛 것에 찾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우기 위해, 동양 옛글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이 위기라, 전환기라 합니다. 왜 위기인가? 위기인 까닭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날까지 써 오던 가치의 체계가 쓸 수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하나로 말하기 어렵지만 오늘날은 사람의 살림이 갑자기 심히 달라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그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사는 것인데, 그 점이 짐승과 다른 점인데 의미는 어떤 보람을 느낄 때에만 있습니다. 보람을 느끼려면 행동에 어떤 목적이 서고 표준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가치입니다. 시대가 이상적으로 잘 나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행동의 목표와 표준이 분명히 서 있어서 누구나 거기 따르기만 하면 개인과 전체의 발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라는 것은 그것이 깨진 때입니다. 달리는 차가 급커브를 돌면 탄 사람이 그냥 제자리에서 있을 수 없듯이 시대가 급작히 변하면 옛날에 있던 전통적인 교훈을 가지고는 살아나갈 수가 없어집니다. 가치체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가지가지이므로 행동을 지시하는 가르침도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가 서로 충돌이 되지 않는 조화를 이루도록 종교와 철학과 도덕과 예술과 경제와 정치 사이에 하나의 체계가 서 있어야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깨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급커브를 도는 차안에서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 모양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며 서로 맞부딪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대를 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창조적인 살림을 해갈 수 있게 하려면 우선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것이 나올 것이냐? 빈들에서 길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모든 방면을 다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희망 있는 곳이 동양 아닐까? 서양은, 이날껏 서양의 학문 종교가 있는 힘을 다해 자랑하며 나가다가 이렇게 됐으니 거기서는 거의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거기도 절대로, 희망이 없다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완전한 것이 아님으로 늘 남겨 놓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도 다 써먹었다 할 수 없고, 희랍 철학, 중세 사상도 다 써 먹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미처 알아내서 써 보지 못한 보물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양의 유산 자체 속을 더 더듬을 필요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은 휠씬 더 우선권을 가집니다. 이때껏 거의 전적으로 내버려 두었고, 또 방향이 거의 정반대로 다른 점이 있으니만큼 우선 먼저 여기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로는 새 마음을 위해서입니다. 나가는 방향도 고쳐야 하고 행동의 표준이 되는 가치체계도 새로 세워야지만, 또 그것들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셋은 서로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서 새 방향 새 행동이 나오기도 하지만, 또 새 방향을 더듬고 새 행동을 시험해 보는 동안에야 새 마음을 얻게도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에는 지난날의 것이 거의 전적으로 소용이 없어졌으니 만큼, 말하자면, 기적이 일어나야하는데 기적이란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무것도 가진 밑천이 없이, 단지 마음 하나 가지고 새 창조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때에는 자연 마음에 그 우선권이 가게 됩니다. 마음이야말로 무에서 나오는 유입니다. 마음이야말로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새 일이 있기 전에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에서 나온다 했습니다마는 아무것도 없는 무일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부정함으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있음에 대해 부정을 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면 부정하는 무 속에서 다른 하나 곧 새 있음이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이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적인 것에서 살아나려면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해 봄에 의해서만 새 마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잃은 자는 얻고 얻는 자는 잃는다는 말은 이러한 뜻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용은 곧 반작용입니다. 서양이라는 현재를 박차려면 동양의 언덕에 등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막혀 버린 배를 서양이라는 죽음의 진탕에서 떼내려면 죽은 듯이 서 있는 저 언덕의 동양바위를 한사코 박찰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의 감정, 감정이기보다도 하나의 체험적인 직감입니다. 이론에 말라붙는 사람은 결국 못할 것입니다. 고기 잡자는 낚시꾼이 사실은 도리어 고기에 잡히듯이 이론도 그러할 것입니다. 케케묵은 듯한 옛글을 되씹고 앉았는 것은 서양적인 학문 방법에서 보면 이해가 아니갈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화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나간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돌변화는 늘 직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에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하는 것은 소위「근대화」라는 것입니다. 근대화란 결코 국민적인 지혜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일부 지배 계급이 씨알의 인권을 짓밟고 씨알을 몰아 자기네의 권력과 향락을 위한 짐승 같은 일로 몰아치면서 그것을 속이기 위해 내건 구호입니다. 물론 모든 구호는 그럴듯이 뵈는 점이 있기 때문에 내거는 것입니다. 허지만 생각해 보면 거기 속이는 것이 있음을 곧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설명을 이리저리 할 수 있지만 사실상 근대화는 곧 서구화입니다. 동양은 동양으로서의 한국은 한국으로서의 역사가 있고, 개성이 있고 환경도 제 환경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구화라 하면 말부터 잘못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근대화라고 붙였지만 서구의 모방이 나 추종이 아니고 동양이나 한국 제 자리에서 내다본 무엇이 있나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정치 방식이 서양 것 아닌 것 있습니까? 그 교육이 서양 것 아닌 것이 있습니까? 그 생활 내용에 무엇이 우리 자리에서 근대적이려 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들에게 머리가 없습니다. 머리가 없는 것은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한국을 살리자는데 있는 것 아니라, 무슨 보람 있는 문화 창조를 하자는데 있는 것 아니라, 다만 권력과 돈에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타가지고 나오기는 마찬가지로 단군 할아버지 이래의 유전에서 타가지고 나온 유전 인자지만 그것이 작용을 제대로 못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 것마다 어리석습니다. 백보 천보 양보하여 나라 생각 문화 생각에 했다하자, 서양의 뒤를 따르는 것이 무엇이 잘하는 일입니까? 잘이라는 것은 그 목적이 바로 놓였을 때의 말입 니다. 살 곳으로 향했을 때 빠른 것이 자랑이지, 죽을 데로 향했는데 빠른 것이 무슨 공이요 자랑입니까? 오늘 서양 사람더러 말하라면 서양 자신이 죽게 됐다는 것입니다. 신문 보지 않습니까? 미국이 우리보다 낳은 것이 무엇입니까? 데모 학생에게 총을 쏘는 것을 우리게서 배워가는 처지입니다. 그럼 핵무기 비행기에서 우리보다 앞 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데모크라시의 챔피언인 것을 자랑해 오던 미국이 학생에 대해 총을 쏘게 된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그 핵무기 그 비행기 그 달러에 있습니다. 그럼 선진국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날까지 앞섰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우리보다도 뒤진 부분이 있어서 이날껏 싸워오댓는데 이제 그 악한 부분이 선한 부분을 누르게 됨으로 인해 획 거꾸로 서게 됐습니다. 이제 워싱턴, 제퍼슨, 헤밀턴, 링컨, 에머슨, 소로, 에디슨의 미국이 아닙니다. 그런 미국을 배우겠다면 반대할 이유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화라는 이름 안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표시 되는 서양문명은 이제 망하게 된 문명입니다. 미래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가 무조건 반항을 하는 것은 살기 위해 미국만 아니라 인류를 건지기 위해 하는 반항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근대화를 부르짖으면서「민족중흥」이다! 이 나라에는 사람의 자식은 하나도 없고 몰아치면 도살장으로도 달려가는 송아지 새끼만 있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씨알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근대화가 결코 사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족도 나라도 모르고 일본의 종노릇 미국 독일의 종노릇을 해서라도 살아만 가면 그만이라는, 동족을 죽여서라도 부귀를 하면 그만이라는 것들에는 근대화가 살 길이겠지만 씨알에게는 아니 그렇습니다. 사실을 보십시요 근대화를 부르짖어서 농민은 살았습니까 죽였습니까? 노동자는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설혹 당장에 이익이 난다 가정을 하더라도 역사의 달리는 방향을 볼 때 이것은 멸망으로 우리만 아니라 전 인류가 멸망으로 놓여 있습니다. 한강의 인도교가 끊어져서 앞에 가던 사람은 한강에 빠지는데 뒤에서는 그것이 살길이라 내 밀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발 앞에 뵈는 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닙니다. 전체를 내다봐야지. 세계 1차 대전도 2차 대전도 다 소위 그 근대화 정신의 결과로 온 세계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민족중흥이라면서 한다! 지배자는 또 씨알 생각 본래 아니 하는 것이니 말할 것 없습니다. 신문 잡지까지 그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씨알은 이제 신문 잡지를 믿을 수 없습니다. 라디오를 잘 이용하십시오. 남의 나라에서 세계에서 무엇이 돼 가고 있나 거기 주의해야 합니다.
지배자는 향락주의 생존경쟁에 근거를 두는 서양식 살림이 좋아서 그럴 것이지만, 또 거기 붙어먹는 정신 썩어진 지식인도 그럴는지 모르지만, 얻어먹는 것이 없는 씨알은 파리했기 때문에 지방질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서양 말고 동양에야말로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호랑이 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놈의 발톱 이빨이 남을 잡아먹는 담에는 그 아름다움이 소용이 없습니다. 서양에 좋은 점이 있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철학, 과학은 그 군국주의 제국주의 상업주의 때문에 가치를 발휘할 수 없어졌습니다. 눈물을 아니 흘리고 고추를 먹을 수 없듯이 씨알을 죽이지 않고 서양 문명을 배울 수 없습니다. 동양은 사람을 힘의 표준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전쟁 방법을 발달시킨 서양에 깔려 종살이를 했지만 이제 그 의미가 들어나는 날이 왔습니다. 전쟁 잘못하는 것이 결코 후진국 아닙니다. 과학 떨어진 것이 결코 야만 아닙니다. 여러 십년을 속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본적으로 고쳐 생각해 봐야하는 때가 왔습니다. 근대화라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우리게 어떤 고상한 것이 있었던지, 우리의 문화유산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않고, 다만 일본 사람 서양 사람에게서 전쟁 기술과 소위 정치랍시고 사람을 어떻게 하면, 속일 수 있고 얽을 수 있는지, 죄악을 어떻게하면 하고도 아니한 척 교묘하게 할 수 있는지 그것만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신으로 우리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지. 그 소리를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너, 나만 아니라「우리」를 살리는 길을 우리 조상들은 어질게 찾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시대가 달라져 그대로 그냥 쓸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시 찾아보노라면 오늘의 길이 스스로 밝아질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 생각할 문제는 젊은이의 반항입니다. 옛글을 고쳐 씹자는 데 젊은이는 아마 반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 깊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먼저 잊어서 아니 되는 것은 사람은 역사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엄정하게 말하면 사람만 아닙니다. 생명의 진화가 역사적입니다 진화는 두 큰 힘, 곧 유전과 변화로 이루어집니다. 옛 없이는 이제 없습니다. 모든 새 것은 옛것을 토대로 하고 나옵니다. 생각하는 인간에서는 더구나도 그렇습니다. 먼저 사람의 생각한 것 없이 전연 새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는 새 것을 찾는 데서 발전을 하지만, 역사를 전적으로 무시하고는 자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 단순한 호기심의 만족을 위한 변천이라면 모르지만, 모든 건설적 창조적인 사상은 반드시 과거를 존경하고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溫古知新입니다.
옛글의 예는 결코 죽어 버린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감을 따라 낡아 버리는 것 있고 낡아버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낡아버리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요 낡아 버리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본질적인 것입니다. 길게 몇 백만 몇 천만년을 두고 하면 근본이니 본 질이니 하는 것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혹 그것도 변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천천히, 다른 말로 하면, 극히 큰 스케일로 되어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 근본 되는 것을 붙잡는 것이 가장 중요 합니다. 예란 시간을 뚫고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수천 년 동안에 변동이 많은데 그것을 뚫고 오늘까지 와서 사람이 그것을 찾지 않으면 아니 될 때는 거기 상당한 까닭이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면 세콰이어라는 나무가 있어 그 나이 3천년 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나무가 다 불과 몇 백 년에 죽어 버리는데 그 나무만이 그렇게 장수하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있은 후 여러 가지 사람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다 잊어져버렸는데 그중에 석가, 공자, 노자, 예수 하는 분들의 말만이 오늘도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거기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옛것, 古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古典이라 할 때 典자는 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册자는 옛날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을 때 대나무를 쪼개서 그것을 가죽 오리로 엮고, 그 위에다 옻으로 글자를 썼는데 그 대쪽은 엮은 모양을 그린 것입니다. 그것을 두루마리로 말아두었기 때문에 冊을 헬 때에 한 編, 한 卷 합니다. 典자는 그 책을 상위에 올려 논 모양입니다. 책중에도 보통 책이 아니고 귀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典자는 經典, 法典하는 존중하는 책에만 묻혀 씁니다. 經이라는 자는 날이란 말입니다. 천을 낳을 때에 먼저 날이 있고 거기다 씨를 씁니다. 어진이의 말씀은 천의 날 같이 첨부터 끝까지 언제나 있어서 끊어져서는 아니 된다는 뜻으로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것이 古典이 뭐냐 하는 뜻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생각이 허다하지만 그 허다한 생각 중에서 골리우고 정돈된 것이 말이요, 말 중에서 또 골리우고 정돈된 것이 글인데, 글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때 쓰일 글, 길게 두고두고 쓰일 글입니다. 그때 그때에 관한 글 개개의 물건과 일에 관한 글은 한 동안 씌우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잊어져 버립니다. 고전이란 주로 사람의 사람관계에 대한 지혜와 행동에 관한 것으로 오래 두고두고 소용이 될 글 들입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그것을 통해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적 유산을 받아 살게 됩니다. 만일 옛글이 없이 새로 나는 사람마다 제각기 새로 출발해서 자기로서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다면 문화 발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글이 아니고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도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사람의 지어낸 것을 문화라 글월이라 하리만큼 글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흑인은 아주 바탕이 떨어진 인종인줄 알았지만 이제는 과학적인 실험에 의해 그들이 결코 바탕이 떨어진 것 아님이 밝아졌습니다. 사실 오늘날 위대한 흑인 종교가, 철학가, 예술가, 정치가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 흑인이 왜 이날껏 문화에서 뒤졌던가? 자연의 여러 조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는 아마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글자가 없었던 것일 것입니다. 어째 그랬는지 그들은 글자를 발명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글이 없습니다. 그러면 씨알의 교육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가 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여간 그래서 글 중에서도 글인 고전은 반드시 모든 지식에 앞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가 어른 세대에 대해 반항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문제가 핵무기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시대가 급작히 변해서 전 세대까지 그 가치를 발휘해왔던 가치체계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격분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전 세대와 아주 단절을 하고 앞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기 어른 된 세대의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변한 것은 어느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늙은 세대 전체가 힘을 쓰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할 것이 옛글을 오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고쳐 해석하는 일 아닐까? 옛날 하던 식대로는 아니 됩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옛날은 청년시기에 들면 대개 한번은 죄 문제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 나 지금 젊은이에게는 죄를 부르짖어가지고는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다 타락이 돼서가 아닙니다. 기성세대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동정하는 생각으로 보면 그들은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져서 그럽니다. 그들도 종교적 요구가 있지 없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는 환각제를 먹어서까지 전엣 사람이 이르렀던 종교적 체험에 가자고 합니다. 그 방법은 물론 잘못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절대로 아니 될 것입니다. 그 겨누는 지경은 같습니다. 그 방식이 다릅니다. 시험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으로부터 만년 수만 년 전 인간도 문제를 죄라는 것으로 제출했을까? 아닐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변천하는 도중에 우리의 종교의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을 타락이라고만 보지 말고, 또 타락이면 타락일수록 그들의 병에 맞는 처방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맞는 처방이란 없습니다. 종교는 만병통치약인듯 생각했던 것은 구식입니다. 그것으로 세상 건지지 못할 것입니다. 반항하는 젊은이를 알아주도록 그들과 대화가 성립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생명이란 본래 불효자입니다. 나가는 아들입니다. 젊은 세대가 제 말을 버리고 낡은 세대에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배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씨알의 할 일이 여기 있습니다. 중류 이상 귀족주의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어려울 것입니다. 젊은 세대의 이해는 역시 무식하다는 씨알의 층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날까지의 옛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을 해방하기 전은 젊은 세대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옛글을 고쳐 씹는데 있어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지금 있는 종교로부터 올 반대입니다. 종교 경전의 말은 옳습니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라 잘못이 없다 하는 말 조차도 그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럴 때 제일 문제 되는 것은 권위 문제일 것입니다. 예로부터 그래서 보수주의가 늘 정통으로 옵니다. 그러나 그 점에서는 석가나 예수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결코 형식에 거리끼지 않았습니다. 또 저쪽을 승인시키자는 것이 목적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권위는 영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깨쳤다면 잘 깨쳤습니다. 일부러 깨쳤습니다. 그러나 그 깨치는 목적이 종교 제도나 교리를 지키는데 있지 않고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새 해석을 하고 깨쳤습니다. 그리고는 옛날의 전통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 아니라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혼자서 읽는 것 아니라 그 시대 전체로부터 읽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느 의미로는 천 년 전 그 이들이 나섰던 때보다 더 심한 변동입니다. 그때보다 사람의 헤매임이 더 규모가 크고 더 복잡하고 더 심각합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종교도, 도덕도, 중류이상 지배 계급의 것이지 정말 일하는 씨알의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예수도 돈 있어야 믿겠더라」하는 말이 우리를 도망의 여지없이 심판하고 있습니다. 맑스(마르크스)의 말이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부분 옳은 것이 있습니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합니다. 깊은 종교적 체험에 들어가면 아니 그렇지만 적어도 보통 말하는 생각이니 사상이니 하는 정도에서는 존재야말로 의식을 결정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없는 사람과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孟子가 “恒產이 없고서도 恒心을 가지는 것은 君子 뿐이고, 보통 사람은 桓產없으면 恒心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뒤집어 말하고 싶습니다. “돈이 있으면 良心이 없어지고 돈이 없으면 良心이 살아난다.”고 하여간 돈이나 세력이 있고 없는 것을 따라 절대는 아니지만 사람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럼 그럴 때 성경에 대한 생각이 같을 수 있을까? 성경이 하나가 아닙니다. 둘입니다. 부자의 성경과 가난한 사람의 성경. 하나에는 사업의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적혀 있지만, 다른 하나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벌로 적혀 있습니다. 다 같이 모세와 예언자에게서 받은 성경이지만 바리새 교인의 성경과 예수의 성경과는 같은 성경이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살린 것도 성경이었지만 십자가 위에 무참히 죽인 것도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이 어디 있느냐 하면,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 하는데 있었습니다. 산상수훈 첫머리에 “가난한 사람 복이 있다, 하늘나라 그 사람 것이다”하는 말씀을 하고,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한 것은 결코 그저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또 한 번 부자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하늘나라 문을 여는 새로운 성경 해석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씨알도 2천 년 전 씨알 중의 으뜸 씨알인 그가 그랬던 것 같이 전체를 살리기 위해 성경을 제멋대로 고쳐 씹어 읽고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입니다. 어느 의미론 벌써 시작 됐다 할 수도 있습니다.
 
씨알의소리  1970. 5월  2호
저작집30; 24- 19
전집20; 2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