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1

希修 < 불교에 대한 오해 #6.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듯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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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 대한 오해 #6.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듯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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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듯 세상 모든 존재들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보호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지만, 나는 다른 해석을 지지한다. Karaniya Mettā Sutta의 해당 부분은 "As a mother would try to protect her child, her only child, so should one cultivate a limitless heart with regard to all beings"인데, 이 경전이 詩의 형식인지라 모호성이 존재하므로 초기경전의 다른 부분들, 특히 부처님의 언행을 보아야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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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처님은 '어리석은 사람'( =인과를 이해/예측 못 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최고의 부적(符籍)이라고 말씀하셨다 (a). "어리석은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와 "세상 모든 이들을 어머니가 외아들 대하듯 대하라"는 양립 불가능한 얘기. 그런데 부처님은 모순이 없는 분이셨다. (인과를 모르는 사람에게 인과를 가르쳐 주는 것이 자비이긴 하지만, 배우고 익히려는 의지가 없는 상대를 귀찮게 하는 건 오지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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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ot associating with fools, consorting with the wise, paying homage to those worthy of homage: This is among the best protective charms." -- Sn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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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기가 죽어 울고 있는 여인 Kisa Gotami에게 부처님은 따뜻한 위로 대신 "마을에 내려가 일가 친척 누구 하나 죽은 적 없는 가문을 찾아 내어 그 집에서 겨자씨를 빌려 가져오라"고 하셨다. 생로병사의 고통이 싫다면 수행하여 무수한 윤회를 끝내라는 뜻. 보통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기 딸의 슬픔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라고 할 수 없으며, 상식적 의미에서의 사적 감정적 공감/연민과도 전혀 다르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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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적 감정적 pema (love, 사랑)에 대해 부처님은 오히려 부정적이셨다 (c,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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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When one loves, there arises the state of change & aberration, sorrow, lamentation, pain, distress, & despair:" -- AN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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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Love is born of love. Aversion is born of love. Love is born of aversion. Aversion is born of aversion. ... ... On the occasion when a monk, through the ending of effluents, enters & remains in the effluent-free awareness-release & discernment-release, having directly known & realized them for himself right in the here & now, then any love of his that is born of love, ... any aversion of his that is born of love, … any love of his that is born of aversion, … any aversion of his that is born of aversion is abandoned ... ." -- AN 4: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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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탐진치의 탐을 제거하는 훈련으로서 자선/봉사가 본격적인 수행의 기본 준비가 되며 당연히 선업이다. 그러나 자선/봉사가 팔정도의 8요소에 속하지는 않으며 수행자의 의무=계율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해탈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고, 팔정도의 8요소만큼 큰 선업도 아니라는 얘기. 자선/봉사 등의 선행을 할 때조차, 그 선행을 하는 사람, 받는 사람, 제 3자 등 그 누구에게도 여하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법은 피해야 한다고도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e). 다시 말해, 불교가 자비를 가르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희생을 장려하지도 절대 않는다는 얘기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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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A person of integrity gives a gift without adversely affecting himself or others." -- AN 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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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22:00 ~ 24:00, Venerable Dhammavudd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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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출생 직후 7발자국을 걸었다는 둥, 신체상 특징이 어떻다는 둥, 부처님이 전생에 자기 자신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이로 제공했다는 둥 ("Jataka")의 얘기들이 있기는 한데, 이런 건 모두 부처님 우상화를 위해 후에 섞여 들어간 '오염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내가 내 목숨을 대신 희생한다 해도, 그 행동이 나의 업 계좌에 선업으로 기록은 될지언정 내가 살린 사람의 업 자체에는 도움이 1도 안 된다. 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도 있어야 하기에, 니체의 말처럼 이타주의는 꼭 그만큼의 이기주의를 필요로 하며 이타주의의 장려는 이기주의자들을 배양하는 결과가 되는 것. 그런데 부처님은 새디스트도 매져키스트도 아니다. 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몸을 학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듯, 자기중심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만 함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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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런 사실들을 고려할 때, 어머니의 외아들 사랑 같은 절절하게 감정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부처님이 장려하셨을 리는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Karaniya Mettā Sutta에서 "어머니가 목숨 걸고 외아들을 보호하듯이"의 피수식어는 "모든 존재들을 보호하라/사랑하라"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신의 mettā/사무량심을 보호하고 유지해라"라는 타니사로 스님의 해석이 맞다고 보이며, 실제로 MN 21에서 부처님은 강도가 내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내고 있는 와중에도 상대에 대한 mettā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강도에게 팔다리를 잘리고 있는 와중에 강도에 대해 ‘어머니가 외아들 사랑하듯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란 완전 불가능. 그러나 내 팔다리를 자르고 있는 강도가 악업을 그만두고 선업으로 마음을 돌릴 경우 강도 자신에게도 좋고 나의 목숨부지 확률이 높아져 나에게도 좋은 일이 되므로, 강도가 선업을 행하여 행복을 짓기를 바라는 기원은 100%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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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가 세상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심지어 나를 해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조차 유지해야 하는 태도인 mettā는, '어머니의 외아들 사랑'이 아니라 '선업을 쌓는 지혜를 통해 이승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 =해탈)을 당신 스스로 성취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진실한 기원인 것이며, 이 기원만 늘 갱신한다면, 상대에 대한 싫은 느낌이 순간순간 올라오더라도, 상대와의 인연을 놓더라도 여전히 mettā라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주장이다.
따라서 mettā의 번역으로 lovingkindness 보다 goodwill이 적확하다고 보여지며,
그래서 각묵 스님 (Pali Canon과 아비담마를 한국어로 완역하신 분)도 '慈'를 '사랑' 아닌 '성냄 없음'으로 정의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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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 ... mettā is not necessarily an attitude of lovingkindness. It’s more an attitude of goodwill—wishing the other person well, but realizing that true happiness is something that each of us ultimately will have to find for him or herself, and sometimes most easily when we go our separate ways. ... ...
The Buddha never recommends developing universal pema—for, as he notes, love can easily lead to hatred ... ... instead of drawing a parallel between protecting your only child and protecting other beings, he draws the parallel between protecting the child and protecting your goodwill. This fits in with his other teachings in the Canon. Nowhere does he tell people to throw down their lives to prevent every cruelty and injustice in the world, but he does praise his followers for being willing to throw down their lives for their precepts. ... ... If you truly feel metta for yourself and others, you can’t let your desire for warm feelings of love and intimacy render you insensitive to what would actually be the most skillful way to promote true happiness for all." -- 'Mettā Means Good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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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If you think of goodwill as lovingkindness and you’re there like the mother protecting her only child, as some people believe that passage in the Karaniya Mettā Sutta says, it becomes pretty oppressive — and very inflated. How are you going to go running around protecting everybody the way a mother would protect her child? It’s hard enough to protect one child, much less all beings. But actually, the Buddha’s saying in that passage that you’ve got to protect your goodwill, both for yourself and for others, as a mother would protect her child. That’s something you can actually do."
-- 'Goodwill in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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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明淑, Sungsoo Hong and 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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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 저런 '잘못된' 해석이 널리 퍼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환상/소망사고 때문 아니겠는지. 인간의 이런 욕망/환상/소망사고에 영합하는 종교라야 잘 '팔리'기도 할 테고. 말로는 '진리' 운운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진리가 아니라 실은 진통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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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re’s a passage in one of Ajaan Maha Boowa’s Dhamma talks where he’s saying to the monks, “Suppose the Buddha were able to see your defilements. Don’t you think he’d be disgusted?” I’ve heard people react to that, saying that the Buddha wouldn’t 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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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어들의 보다 정확한 connotation을 가려내는 일이 참 만만치가 않군요.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초기불교의 용어에 대한 합의가 완성이 될런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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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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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1tSptoenhsorehds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의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는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며 여기서 완성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삼위일체론은 쾌쾌묵은 낡은 신앙의 교리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변혁하자는 실천론인데... 신앙인 중에 얼마나 이 교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믿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 니콜라스 페도로프가 한 말이다. 그는 러시아 황제 차르의 독재정치와 크로토포킨의 무정부주의를 중재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은 것인데, 삼위의 사귐을 따르는 정교회의 사귐(Sobornost)의 원리는 자유와 정의가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론이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니? 믿음은 애초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니, 믿음의 대상인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몰트만에게 삼위(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지배’(Herrschaft)가 아니라 ‘사귐’(Gemeinschft)이다. 삼위일체적 사귐은 삼위의 경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며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참된 신학적 자유론이다, 기존의 지배권과 복종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치밀한 사랑의 사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철학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이다. 세계의 변화를 실천하는 철학은 분명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회적 프로그램을 삼위일체론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유물론과 무신론을 대신하여 정의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인격들 간의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에 의해 삼위일체 사회론으로 발전된다. 보프는 삼위일체적 사귐(communion)을 전면에 내세운다. 태초에 사귐이 있었다는 말로 삼위일체론을 시작한다. 그는 삼위일체적 사귐이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은 인간 안에서, 사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창조(자연) 안에서 이 사귐의 원리를 실현해 나간다. 이 사귐의 원리는 먼저 정치와 교회에 적용되어 모든 권위주의와 상하 지배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평등의 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삶의 원리는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넘어서며, 사회로서의 교회에서 사귐의 공동체 교회로 나아가게 한다. 삼위일체론은 가히 완전한 해방을 추동하는 힘이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 밖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 교리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의 세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이 일치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이다. 그렇기때문에 1980년도 이후 동서교회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세계교회가 삼위일체론을 다시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들은 고무적이다. 
이런 이유로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교회론(밀로슬라브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으로, 삼위일체 예배론(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경배와 찬미의 신학>)으로, 삼위일체 생활론 및 생태론(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현재규, <열린 친교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적 종교 대화론(Mark Heim, The Depth of the Riches. A Trinitarian Theology of Religious Ends) 등으로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론이 프로그램 대신 아름다운 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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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ong Kim
또한 "아름다운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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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YtesterSpoiday rtlSlcahtmutn so1famgre7:td1cod3  · 
기독교-마르크스주의(무신론) 대화(3)
무신론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세속와와 무신론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거룩한 분위기가 세속은 물론 성전 안에서도 사라진 시대에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가?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대응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무시하는 것이다. 제일 속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정신적 상황과 담을 쌓게 된다. 둘째, 무신론을 교회와 신학 안에서 추방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비도덕적, 비시민적이라고 정죄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담론 권력이 세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셋째는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론을 변호함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변증하려는 태도이다. 가장 많은 입장이다. 넷째, 합리적 반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치열한 합리주의적 지성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수용하여 강화시키는 태도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함께 했던 신죽음의 신학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통해 신학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래에 언급하는 네 신학자들도 무신론 및 니체의 허무주의와 격렬히 씨름하면서 신론을 전개한다. 모두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시기, 1970년대 어간의 일이다.
①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으로> 방향을 튼다. 1972년에 나온 이 책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학, 즉 하느님을 말하고 느낄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비판으로 제시한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6장이 가장 핵심이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이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무신론에 선을 긋는다. 이어 그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전통적 유신론은 물론 무신론도 비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② 에베하르트 융엘, 『세계의 신비이신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 1977). 무신론과 유신론 논쟁 사이에 서 계신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 그리스도. 융엘은 관념론 특히 헤겔과 피히테, 포이어바흐, 니체의 ‘신 죽음’을 깊게 논의하고 십자가의 달린 자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성을 말한다.
③ 한스 큉,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신물음에 대한 대답』(Existiert Gott?, 1978). 큉은 근-현대 철학자들의 무신론 연구와 신학의 기여도와 비판에 860쪽 책의 600쪽 넘게 할애한다. 근-현대 무신론의 본질과 신학이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비판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④니체의 허무주의와 깊이 논쟁한 철학자, 철학적 신학자는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하느님, 1+2>(Gott der Philosophen I,II, 1972)이다. 허무주의의 긴 다리를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의 그늘 속에서 과연 신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 철학적 신학은 가능할 것인가? 바이셰델은 철학하기의 추진력을 물음,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에서 찾고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철저한 물음의 출처”(Vonwoher der radikalen Fraglichkeit)라고 명명한다.
나는 하이데게, 바이셰델, 벨테의 탈형이상학적 하느님(1991)으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97년에 번역하고 마지막 장을 보완하여 출간했다. 탈형이상학은 미국의 카푸토와 프랑스의 마리옹이 깊게 이어가는 것을 기쁘게 본다. 모두 하이데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나오는 신학에서는 포이어바흐-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로 이어지는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한 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삼위일체론이 급부상하고, 철학계에서는 아감벤, 바디우의 바울연구와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해 예수운동을 바울이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최근의 바울연구에서는 이 입장을 뒤집어 놓는다. 관점, 시점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다. 파도처럼 새로운 사상이 밀려온다.
Comments
Jae Young Kim
탈형이상학의 하나님, 이 책을 아직도 구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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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u9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34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2)
몰트만은 1967-68년도에 잠시 반짝했던 시기,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밀란 마코비치(Milan Machoveč)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 몰트만은 그를 1966년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가 개최된 함부르크에서 알게 되었다고 운을 떼면서, 그는 단정하고 젊은 철학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주변의 신학자보다 더 관용적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는 프라하에서도 지적이었고, 박식했으며, 매우 성실했다. 그의 다음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의 정치적 투쟁을 위해 나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다. 하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성서의 시편을 읽고 성가를 부를 것이다.”
일찍이 한국에서도 그의 대표작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Jesus für Atheisten)가 안병무에 의해 1974년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예수운동과 별 다를바가 없지만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제자들인가, 하는 주장에서 다르다.
이 책은 전체 6장이다. 첫 장은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의 정당성을 모색하고, 2장은 자료의 문제, 3장은 예수 이전의 유대 종교를 다룬다. 심장 부분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예수의 사신”이고, 5장은 “그리스도”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제 선포의 내용과 예수 사후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가 된 후 예수 선포가 어떻게 변형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방법론에서 8-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역사적 예수>나 <예수운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코비치는 예수의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강점으로 ‘올 시대’의 입장으로부터 인간들을 감격시키는 순간적인 요구의 선포자였음을 언급한다. 예수선포 전체의 본질과 의미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변화시키라! 회개하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랍어 ‘회개하라’(metanoeite, μετανοεῖτε)는 말의 뜻은 ‘너희 자신을 변화시켜라’, ‘달라져라’, ‘자신의 내적 변화를 위해 정진하라’는 뜻으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계 1:5)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사신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요구는 타자에 대한 감상성이나 소시민적 노력이나 타자의 약함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엄격하고 타협없는 요구이다. 이 계명은 요구, 변화,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사신은 모순되지 않고 아주 분명한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철저한 변화와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 관용과 인내이다.
예수는 바리새적 위선, 외관, 형식주의, 자기德의 과시, 명예욕, 계급욕, 출세욕 등을 늘 경계하고 비판한다. 바리새주의란 “금요일에 돼지 간장의 순대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 그들을 번민케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 사후 다시 예수를 따르도록 제자들을 모은 사도는 베드로였음을 마코비치는 강조한다. (그는 가톨릭교회 전통이 강한 체코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의 사신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신앙의 근거, 구속자, 선포된 자 그리스도, 즉 신앙의 대상으로 바꾼 바울이나, 예수의 사신을 예수의 자기 증언으로 바꾼 요한은 예수 선포의 순수한 종말론적 성격을 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말씀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정통 기독교의 발전은 단순히 순수 신앙에 근거해서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가중되는 체제화와 교권적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마르크시트의 중요한 관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가 예수를, 특히 전통적으로 교회적-종교적 방식으로 더 잘 신앙하느냐가 오늘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강조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원리를 성취하느냐가 예수의 제자됨의 중요한 관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헌은 예수 이후 1,800여년 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구약적 메시아주의와 철저한 변화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적 동경을 사실상 계승한 자로서,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의 철저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타당하다. “그대들의 실제적 삶의 순간 순간이 그대들의 이론의 거짓을 벌하지 않는가? 만일 그대들이 부당한 오해를 받았을 때, 재판에 부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저 사도는 그런 행위를 부당하다고 쓰고 있다. 만일 그대들이 왼편 뺨을 맞으면, 오른 편 뺨을 내밀겠는가? ...... 그대들 대부분의 소송과 대부분의 민법행위가 소유문제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의 보화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씌여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세계관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 그의 미래와 현재, 그의 승리와 패배, 그의 사랑과 고통, 그의 절망과 지울 수 없는 희망을 문제시한다.
애 책은 1974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된 책인데 46-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갈피 끝이 흑갈색으로 변해 종이가 메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독일 도서관에서 300년, 500년 전 인쇄된 고서를 봤을 때의 감격을 전혀 맛볼 수 없는 책 종이의 자격미달이다.
Comments
Sun-joong Kim
아, 저 책... 한국에 있는 박스들을 뒤지면 나올텐데... 영역본은 지금 갖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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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7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10g:od38  ·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
이 말씀은 맹목적 믿음과 안심을 키우는 엉터리 상담자의 확언이 아니라 길들여진 사유를 도전하게 하고 현실의 속면을 파고들어 파열하게 만드는 메시아적 메시지이다. 현실은 생명을 해치려는 세력으로 득실거린다. 그 소용돌이 안에서, 생명의 각축장 안에서 그것을 善으로 바꾸는 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힘이 보이는가?
이 힘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메시아적인 것”으로 이어지며 크게 자란다. 메시아적인 힘이고 메시아적인 시간이다. 시간의 종말(끝)이 아니라 종말의 시간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그 시간은 영원을 현재에서 폭발시키는 시간이며, 그 시간은 현실 안에서 현재에 현실태와 다른 線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善은 현실태와 다른 線으로 분할되는 그 순간, 그 지점일 것이다. 생명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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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일
그림 :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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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6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16g:od39  · 
다윗은 수금(하프) 연주가이며 우선 시인,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삼하 23:1)이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詩人이란 사실이 얼마나 복된 전통이며 위대한 유산인가! “예술의 본질은 詩다”라고 하이데거가 좀 세게 발언했지만, 성경에 시편이 있고, 그리스에는 철학이 시작되기 전 시인들의 무대였고, 중국에는 시경이 있다.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음악과 함께 미술 그리고 시와 시적 언어가 지배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신성한 것과 하나님을 합리적 사유와 논쟁적 논리를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시는 사물을 분석하기 전에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 음미하고 노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시학적 신학(Theologia Poetica)을 적극 수용해야 하며 그 원조는 다윗이다. 고-중세의 영성가나 수도원 신학자들, 경건주의적 기독교의 언어는 시이다. 찰스 웨슬리는 시와 음악으로써 감리교 운동을 전개했음은 잘 알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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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6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08g:od42  ·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창 45:8)
형님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보냈다. 처음에는 죽이려고 생각했다가 대상(隊商)에게 팔았다. 얼마나 마음의 의도가 고약하고 비인간적인가? 사람들도 요셉이 이집트에 보내진 것은 요셉의 형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요셉의 생각과 고백을 통해 현상적 사실에서는 감추어진, 사실의 인과관계만을 보는 눈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실제를, 아무리 그 사실을 인과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분석해도 일절 알 수 없는 속면을 감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고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용인으로서의 형님들은 부정된다. 형님들 행위 배후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신 것이…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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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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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2s3od:mrcecd29  · 
예술신학
1.예술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예술신학이라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성서와 교회전통을 신학의 규범과 자료로 삼지만, 각 시대의 철학과 긴밀한 대화 속에서 신학 사상을 전개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과학과의 대화를 뜨겁게 진행 중이다.기독교 윤리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 학문과 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이 예술 및 대중문화와 대화하면서 신학을 전개한 경우는 앞의 경우와 비교할 때 매우 적은 양이다.
2.예술신학은 예술의 모든 장르 및 대중문화, 놀이와 여가와 대화할 뿐 아니라 오감의 활동을 중시한다. 음악신학, 미술신학이란 말을 써서 특정 예술 분야와의 만남을 부각하듯이, ‘감각신학’이란 말을 쓸 수 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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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chan Lee
공부과정에 학생으로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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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updated his profile picture.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1s7od:mrcecd13  · 
Image may contain: text that says "예술목회 Institute for Artistic Ministry 원장 심광섭 (신학박사) Mobile_010-8880-0739 www.artm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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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란
비장함이 느껴지는 포즈---어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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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1s3od:mrcecd53  · 
요한복음은 예수 사랑의 신비를 유월절 축제(요한 13장) 이후에 시작되는 수난 이야기의 이야기 배치와 독특한 문학구조를 통해 표현한다. 요한복음의 최고의 과제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그 무능력으로부터 해방하여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깨우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전에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이 말씀은 예수의 사랑을 읽는 요한복음의 시각이다. “자기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εἰς τέλος ἠγάπησεν αὐτούς)는 말씀은 요한복음의 근본적인 저술 동기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의 말씀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에서 완성된다. 이스라엘의 해방의 축제일인 유월절의 시작은 말씀이 육신이 된 참된 유월절 양이신 예수께서 끝까지 사랑할 때를 더욱 속 깊게 다지는 시간이다.
누가복음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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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u25tmctS opfonsJanduolraryi iuatteu g0foidc6:0hm0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1)
몰트만의 자서전 <너른 공간>(Weiter Raum) 중 꼭 짚고 싶은 곳이 “기독교-마르크스주의의 대화”(171-188) 부분이다. 우리 세대는 청년 시절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같은 문제, 같은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맑스나 맑스주의 책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과 동경이 무척 컸고, 마침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번역되어(이 책은 이내 금서가 됨) 몇몇 사람들이 모여 통독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한 서점을 둘러보던 중 아주 구석에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W)을 발견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 전집은 누구도 찾지 않은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1권과 3권을 구입했다. 서독에서 나온 책에 비해 무척 저렴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 책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던 폐쇄적 분위기가 내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시절이다. 
제 멘토 알프레드 예거는 박사학위논문을 <신 없는 나라. 에른스트 블로흐의 종말론>(Reich ohne Gott. Zur Eschatologie Ernst Blochs, 1969)이라는 제목으로 에른스트 블로흐를 썼기 때문에, 상당한 기일이 지난 어느 날, 구술시험 주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유럽에서 발생한 ‘크리스천-맑시스트 다이어로그’를 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 사상도 익히고, 연구를 통해 마르크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공통점과 접점을 찾다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 대화는 역사적으로 이미 정리되고 끝난 사건이니 지금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주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매우 아쉬웠지만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주제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몰트만의 서술이 관심을 촉발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19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신학자들(몰트만, 윙엘, 큉, 카스퍼, 골비처, 크라우스)의 새로운 신론 탐구에서, 그 이전 60년대 미국의 <신죽음의 신학>이나 70년대 이후의 뜨거운 해방신학과 맑스주의의 대화에서, 그리고 이런 전사(前史)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최근 (좀 오만하다고 생각되는) 유럽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부흥한 바울연구 및 유물론적 신학과 크게 보아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어, 그 출발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미지 하나는 알지 못하는 책의 표지인데 제목(<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 맘에 들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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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아 저는 블로흐 저서들을 읽고 싶습니다. 특히 유토피아의 정신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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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Young Joon Kim 희망의 원리는 읽을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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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심광섭 네 희망의 원리도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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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1tSptoenhsorehds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의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는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며 여기서 완성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삼위일체론은 쾌쾌묵은 낡은 신앙의 교리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변혁하자는 실천론인데... 신앙인 중에 얼마나 이 교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믿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 니콜라스 페도로프가 한 말이다. 그는 러시아 황제 차르의 독재정치와 크로토포킨의 무정부주의를 중재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은 것인데, 삼위의 사귐을 따르는 정교회의 사귐(Sobornost)의 원리는 자유와 정의가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론이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니? 믿음은 애초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니, 믿음의 대상인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몰트만에게 삼위(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지배’(Herrschaft)가 아니라 ‘사귐’(Gemeinschft)이다. 삼위일체적 사귐은 삼위의 경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며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참된 신학적 자유론이다, 기존의 지배권과 복종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치밀한 사랑의 사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철학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이다. 세계의 변화를 실천하는 철학은 분명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회적 프로그램을 삼위일체론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유물론과 무신론을 대신하여 정의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인격들 간의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에 의해 삼위일체 사회론으로 발전된다. 보프는 삼위일체적 사귐(communion)을 전면에 내세운다. 태초에 사귐이 있었다는 말로 삼위일체론을 시작한다. 그는 삼위일체적 사귐이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은 인간 안에서, 사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창조(자연) 안에서 이 사귐의 원리를 실현해 나간다. 이 사귐의 원리는 먼저 정치와 교회에 적용되어 모든 권위주의와 상하 지배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평등의 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삶의 원리는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넘어서며, 사회로서의 교회에서 사귐의 공동체 교회로 나아가게 한다. 삼위일체론은 가히 완전한 해방을 추동하는 힘이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 밖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 교리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의 세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이 일치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이다. 그렇기때문에 1980년도 이후 동서교회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세계교회가 삼위일체론을 다시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들은 고무적이다.
이런 이유로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교회론(밀로슬라브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으로, 삼위일체 예배론(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경배와 찬미의 신학>)으로, 삼위일체 생활론 및 생태론(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현재규, <열린 친교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적 종교 대화론(Mark Heim, The Depth of the Riches. A Trinitarian Theology of Religious Ends) 등으로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론이 프로그램 대신 아름다운 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75Paul Dongwon Goh and 7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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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ong Kim

또한 "아름다운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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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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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마르크스주의(무신론) 대화(3)
무신론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세속와와 무신론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거룩한 분위기가 세속은 물론 성전 안에서도 사라진 시대에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가?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대응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무시하는 것이다. 제일 속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정신적 상황과 담을 쌓게 된다. 둘째, 무신론을 교회와 신학 안에서 추방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비도덕적, 비시민적이라고 정죄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담론 권력이 세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셋째는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론을 변호함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변증하려는 태도이다. 가장 많은 입장이다. 넷째, 합리적 반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치열한 합리주의적 지성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수용하여 강화시키는 태도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함께 했던 신죽음의 신학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통해 신학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래에 언급하는 네 신학자들도 무신론 및 니체의 허무주의와 격렬히 씨름하면서 신론을 전개한다. 모두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시기, 1970년대 어간의 일이다.
①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으로> 방향을 튼다. 1972년에 나온 이 책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학, 즉 하느님을 말하고 느낄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비판으로 제시한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6장이 가장 핵심이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이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무신론에 선을 긋는다. 이어 그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전통적 유신론은 물론 무신론도 비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② 에베하르트 융엘, 『세계의 신비이신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 1977). 무신론과 유신론 논쟁 사이에 서 계신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 그리스도. 융엘은 관념론 특히 헤겔과 피히테, 포이어바흐, 니체의 ‘신 죽음’을 깊게 논의하고 십자가의 달린 자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성을 말한다.
③ 한스 큉,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신물음에 대한 대답』(Existiert Gott?, 1978). 큉은 근-현대 철학자들의 무신론 연구와 신학의 기여도와 비판에 860쪽 책의 600쪽 넘게 할애한다. 근-현대 무신론의 본질과 신학이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비판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④니체의 허무주의와 깊이 논쟁한 철학자, 철학적 신학자는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하느님, 1+2>(Gott der Philosophen I,II, 1972)이다. 허무주의의 긴 다리를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의 그늘 속에서 과연 신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 철학적 신학은 가능할 것인가? 바이셰델은 철학하기의 추진력을 물음,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에서 찾고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철저한 물음의 출처”(Vonwoher der radikalen Fraglichkeit)라고 명명한다.
나는 하이데게, 바이셰델, 벨테의 탈형이상학적 하느님(1991)으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97년에 번역하고 마지막 장을 보완하여 출간했다. 탈형이상학은 미국의 카푸토와 프랑스의 마리옹이 깊게 이어가는 것을 기쁘게 본다. 모두 하이데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나오는 신학에서는 포이어바흐-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로 이어지는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한 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삼위일체론이 급부상하고, 철학계에서는 아감벤, 바디우의 바울연구와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해 예수운동을 바울이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최근의 바울연구에서는 이 입장을 뒤집어 놓는다. 관점, 시점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다. 파도처럼 새로운 사상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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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Young Kim

탈형이상학의 하나님, 이 책을 아직도 구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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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u9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34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2)
몰트만은 1967-68년도에 잠시 반짝했던 시기,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밀란 마코비치(Milan Machoveč)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 몰트만은 그를 1966년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가 개최된 함부르크에서 알게 되었다고 운을 떼면서, 그는 단정하고 젊은 철학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주변의 신학자보다 더 관용적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는 프라하에서도 지적이었고, 박식했으며, 매우 성실했다. 그의 다음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의 정치적 투쟁을 위해 나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다. 하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성서의 시편을 읽고 성가를 부를 것이다.”
일찍이 한국에서도 그의 대표작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Jesus für Atheisten)가 안병무에 의해 1974년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예수운동과 별 다를바가 없지만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제자들인가, 하는 주장에서 다르다.
이 책은 전체 6장이다. 첫 장은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의 정당성을 모색하고, 2장은 자료의 문제, 3장은 예수 이전의 유대 종교를 다룬다. 심장 부분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예수의 사신”이고, 5장은 “그리스도”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제 선포의 내용과 예수 사후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가 된 후 예수 선포가 어떻게 변형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방법론에서 8-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역사적 예수>나 <예수운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코비치는 예수의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강점으로 ‘올 시대’의 입장으로부터 인간들을 감격시키는 순간적인 요구의 선포자였음을 언급한다. 예수선포 전체의 본질과 의미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변화시키라! 회개하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랍어 ‘회개하라’(metanoeite, μετανοεῖτε)는 말의 뜻은 ‘너희 자신을 변화시켜라’, ‘달라져라’, ‘자신의 내적 변화를 위해 정진하라’는 뜻으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계 1:5)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사신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요구는 타자에 대한 감상성이나 소시민적 노력이나 타자의 약함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엄격하고 타협없는 요구이다. 이 계명은 요구, 변화,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사신은 모순되지 않고 아주 분명한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철저한 변화와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 관용과 인내이다.
예수는 바리새적 위선, 외관, 형식주의, 자기德의 과시, 명예욕, 계급욕, 출세욕 등을 늘 경계하고 비판한다. 바리새주의란 “금요일에 돼지 간장의 순대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 그들을 번민케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 사후 다시 예수를 따르도록 제자들을 모은 사도는 베드로였음을 마코비치는 강조한다. (그는 가톨릭교회 전통이 강한 체코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의 사신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신앙의 근거, 구속자, 선포된 자 그리스도, 즉 신앙의 대상으로 바꾼 바울이나, 예수의 사신을 예수의 자기 증언으로 바꾼 요한은 예수 선포의 순수한 종말론적 성격을 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말씀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정통 기독교의 발전은 단순히 순수 신앙에 근거해서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가중되는 체제화와 교권적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마르크시트의 중요한 관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가 예수를, 특히 전통적으로 교회적-종교적 방식으로 더 잘 신앙하느냐가 오늘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강조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원리를 성취하느냐가 예수의 제자됨의 중요한 관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헌은 예수 이후 1,800여년 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구약적 메시아주의와 철저한 변화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적 동경을 사실상 계승한 자로서,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의 철저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타당하다. “그대들의 실제적 삶의 순간 순간이 그대들의 이론의 거짓을 벌하지 않는가? 만일 그대들이 부당한 오해를 받았을 때, 재판에 부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저 사도는 그런 행위를 부당하다고 쓰고 있다. 만일 그대들이 왼편 뺨을 맞으면, 오른 편 뺨을 내밀겠는가? ...... 그대들 대부분의 소송과 대부분의 민법행위가 소유문제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의 보화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씌여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세계관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 그의 미래와 현재, 그의 승리와 패배, 그의 사랑과 고통, 그의 절망과 지울 수 없는 희망을 문제시한다.
애 책은 1974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된 책인데 46-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갈피 끝이 흑갈색으로 변해 종이가 메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독일 도서관에서 300년, 500년 전 인쇄된 고서를 봤을 때의 감격을 전혀 맛볼 수 없는 책 종이의 자격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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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ong Kim

아, 저 책... 한국에 있는 박스들을 뒤지면 나올텐데... 영역본은 지금 갖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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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u7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27 ·



당신의 영혼을 환한 하나님께 맡긴 허심(虛心)한 춤사위다. 성령의 산들바람을 타고 허허(虛虛)롭게 된 몸은 십자가에 붙박일 수 없어 십자가에 못 박힌 몸의 리듬을 통해 생동한다. 뼈와 근육 그리고 살에서 어떤 긴장이나 아픔도 느낄 수 없다. 신기(神氣)와 같은 생명의 기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물결처럼 흐른다.
십자가라는 가장 거칠고 황량하고 까슬한 외재적 물질세계에 구애됨 없이 풀려나 무궁한 우주적 생명세계에로 들어가려는 춤이다. 춤추는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히다. 그것은 너무나 허허롭고 무욕(無慾)하며, 바람타고 나는 무애(無碍)한 연(鳶)의 자유로운 헤적임이요, 물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유영(遊泳)하는 물고기의 즐거움 같아서 보는 이의 눈길을 더욱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보면 볼수록 그림은 보는 사람의 해맑은 마음을 움직여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의 춤에 합류하게 한다.
[유튜브 실시간 강좌예고]: 2월 1일(월), 오후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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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u25tmctS opfonsJanduolraryi iuatteu g0foidc6:0hm0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1)
몰트만의 자서전 <너른 공간>(Weiter Raum) 중 꼭 짚고 싶은 곳이 “기독교-마르크스주의의 대화”(171-188) 부분이다. 우리 세대는 청년 시절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같은 문제, 같은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맑스나 맑스주의 책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과 동경이 무척 컸고, 마침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번역되어(이 책은 이내 금서가 됨) 몇몇 사람들이 모여 통독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한 서점을 둘러보던 중 아주 구석에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W)을 발견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 전집은 누구도 찾지 않은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1권과 3권을 구입했다. 서독에서 나온 책에 비해 무척 저렴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 책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던 폐쇄적 분위기가 내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시절이다.
제 멘토 알프레드 예거는 박사학위논문을 <신 없는 나라. 에른스트 블로흐의 종말론>(Reich ohne Gott. Zur Eschatologie Ernst Blochs, 1969)이라는 제목으로 에른스트 블로흐를 썼기 때문에, 상당한 기일이 지난 어느 날, 구술시험 주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유럽에서 발생한 ‘크리스천-맑시스트 다이어로그’를 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 사상도 익히고, 연구를 통해 마르크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공통점과 접점을 찾다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 대화는 역사적으로 이미 정리되고 끝난 사건이니 지금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주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매우 아쉬웠지만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주제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몰트만의 서술이 관심을 촉발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19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신학자들(몰트만, 윙엘, 큉, 카스퍼, 골비처, 크라우스)의 새로운 신론 탐구에서, 그 이전 60년대 미국의 <신죽음의 신학>이나 70년대 이후의 뜨거운 해방신학과 맑스주의의 대화에서, 그리고 이런 전사(前史)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최근 (좀 오만하다고 생각되는) 유럽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부흥한 바울연구 및 유물론적 신학과 크게 보아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어, 그 출발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미지 하나는 알지 못하는 책의 표지인데 제목(<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 맘에 들어 싣는다.












90Young Joon Kim and 8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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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아 저는 블로흐 저서들을 읽고 싶습니다. 특히 유토피아의 정신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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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d



Philo Kalia

Young Joon Kim 희망의 원리는 읽을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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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d


Young Joon Kim

심광섭 네 희망의 원리도 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