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연재 |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연재 | 다음뉴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자연과 문화의 대립 바깥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가

A : 자연주의와 애니미즘 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탐구⑥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1949∼)‘인간은 동식물과 다르다’는서구 자연주의 사고 비판하며인간 우월적 존재론에 반기아마존 아추아..2019.10.08

Q : 매체는 인간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가

A : 축음기는 소리의 발견을, 타자기는 개인의 해체를 가져왔다 ⑤ 프리드리히 키틀러 (Friedrich Kittler, 1943∼2011) 매체 = 정보 저장·전달 수단 문화사도 매체史로 재편 가능 인류 최초의 매..2019.10.01

Q : 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A : 다원주의 ‘전체속 부분’만 인정… 부분간 ‘평등한 관계’ 봐야④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 1941~) 서구중심 ‘절대진리’ 비판에 다원주의 흡수하면서 부분적 진리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2019.09.24

A : 때로는 '죽임'이 필요하지만.. '죽여도 괜찮은' 존재란 없다

Q : 지구에서 어떻게 삶의 지속을 추구할 것인가 ③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44~) 인간의 敵, 기계를 부숴라? 러다이트 해법 옳지 않아 오히려 기계는 ‘다정한 나’가 될 수도 사이보그란 이미..2019.09.17

Q :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는가

A : 인간만이 아닌 자연·사물과의 공존… 바람직한 결합 모색해야②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1947~ )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2019.09.10

'포스트 이론'후 등장한 '탈인간주의' 국내 첫 종합 소개

- 연재 가이드오늘의 세계 이해·설명하는데25년 前 인식의 틀은 한계 지녀새 思潮 이끄는 사상가들의핵심적 질문을 풀어가는 형식저작 요약·논의 시사점도 담아국내 소장·중견 학자가 필자로세계적 삽화 작가 이정호 참여 문..2019.09.03

Q : 21세기의 사상,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① 전체 개괄A : ‘인간 vs 비인간’ 이분법 넘어 ‘동등한 행위자’로 인식 21세기 사상에서는 지구적 생태 위기를 극복할 희망을 원주민의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아마존 원주민은 동물, 식물, 무생..2019.09.03

2019/10/08

[19기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신규 위촉 56% - 한호일보



[19기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신규 위촉 56% - 한호일보

[19기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신규 위촉 56%97명 중 54명, 여성 36%, 45세 미만 33%
고직순 기자 | 승인 2019.09.0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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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진 아태 부의장, 형주백 호주협의회장 유임

이숙진 아태 부의장(왼쪽)과 형주백 호주협의회장이 유임됐다


9월부터 2년 임기가 시작되는 제19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 임원진과 자문위원들이 지난 주 발표됐다.

한호일보가 6일 온라인을 통해 보도한대로 5명의 해외부의장 중 
이숙진 아시아•태평양지역회의 부의장(제마이홀딩스그룹 대표)과 
해외협의회장(43명) 중 형주백 18기협의회장(HNJ P/L 대표)은 19기 호주협의회장으로 유임됐다.

또 시드니 동포 이수길 민주연합 호주회장(재호주과학기술자협회 대표)과 
차인순 씨(Sharon Family Day Care 대표)가 해외상임위원(34명)으로 위촉됐다.

호주협의회에서 위촉된 총 147명(시드니총영사관 관할 지역 97명 포함) 명단도 해당 자문위원들에게 통보됐다. 호주협의회는 호주 및 파푸아뉴기니, 피지 등 태평양 도서국가들이 포함된다.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97명 중 재임자가 43명이고 신규위원은 54명으로 56%를 차지했다. 여성위원이 35명(36%)이며 청년위원(45세 이하)은 32명(33%)이다. 재임자 중에는 다수의 10년 이상 연임자들도 포함돼 있다.

시드니 총영사관 관계자는 2일 “평통 사무국에서 자문위원 명단은 개인정보 등의 사유로 비공개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고직순 기자 editor@hanhodaily.com

류영모의 ‘다석 마지막 강의’ :: 불교저널



류영모의 ‘다석 마지막 강의’ :: 불교저널



류영모의 ‘다석 마지막 강의’
다석 류영모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육성


2010년 03월 29일 (월) 17:49:49 서현욱 기자 mytrea70@yahoo.co.kr






폐부를 찌르는 다석 사상의 정수!
육성으로 듣는 동서 회통의 종교사상

2008년 7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류영모는 우리 말과 글로 철학을 했던 최초의 사상가이자, 기독교를 큰 줄기로 삼아 유교, 불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통달하여 마침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우리나라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임을 말한 다석의 종교 사상은 21세기 들어와 종교 간 분열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상생을 가능하게 해줄 희망과 대안의 사상으로서 세계 신학계와 철학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다석 마지막 강의》는 다석 류영모가 여든한 살 때인 1971년 8월 12일부터 일 주일간 전남 광주에 있는 자생적 금욕 수도 공동체 ‘동광원’에서 수녀와 수사들에게 한 강의의 녹음 테이프를 글로 옮기고 류영모의 직제자 박영호가 풀이한 것이다. 일평생 삶과 죽음을 궁구하며 진리를 좇은 대사상가가 들려주는 폐부를 찌르는 간결하고 명료한 진언 속에서 다석 사상의 핵심을 만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꿰어 낸 제소리!

이 강의에서 류영모는 《맹자》와 《중용》, 《주역》, 구약과 신약 성경, 불경을 두루 아우르며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일원다교(一元多敎)의 사상을 펼친다. 또한 류영모는 예수와 석가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본받을 스승이라고 말한다. 예수와 석가도 하느님을 신앙한 이들이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와 석가처럼 하느님을 신앙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예수와 석가의 하느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다석 마지막 강의》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예수와 석가처럼 큰 깨달음에 이른 몇 사람만이 냈던 독창적인 ‘제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다석 강의 녹음 테이프 가운데 음질 상태가 좋은 5개의 강의를 골라 MP3 CD로 만들어 책에 첨부하였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로 진리를 말하는 류영모의 맑고 굳센 목소리가 시종일관 청중을 압도한다.

다석 류영모의 마지막 강의, 40년 만에 빛을 보다!
다석 류영모는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사상가이자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달통한 석학이었지만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현재 다석과 관련된 책들은 다석이 직접 구술하거나 쓴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려는 제자들의 기록이거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이다. 그나마 다석이 1956~1957년에 걸쳐 서울 YMCA에서 행한 연경반 강의의 속기록 전문을 다듬어 출간한 《다석강의》가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석 마지막 강의》에서 다석 류영모 자신이 직접 들려주는 다석 사상의 정수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81세의 나이로 죽음을 앞둔 다석 류영모가 ‘동광원’이라는 금욕 수도 공동체에서 마지막으로 한 대중 강연의 녹음 테이프를 녹취해 풀어 쓴 것이다.

동광원 강의 녹음 테이프는 그 발견 자체가 일대 사건이다. 애초에 동광원에서 이루어진 고별 강의를 서울 쪽의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다석의 강의를 동광원의 수사 김용래가 녹음했다는 사실이 20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려졌다. 류영모의 말씀을 가장 먼저 녹음한 곳은 KBS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1959년 12월 8일에 13분 동안 요가 운동에 관해 녹음을 했는데, KBS에 문의한 바에 따르면 녹음 테이프는 보관되어 있었으나 음질이 훼손되어 들을 수 없다. 그밖에 몇 사람이 다석의 강의를 녹음하였으나 분실되었다. 결국 동광원 녹음 테이프는 류영모의 육성이 담긴 유일한 자료로서 대단히 가치가 높다. 가공되기 전 원석과 같은 《다석 마지막 강의》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책이 될 것이다.

동광원 강의 녹음 테이프의 진정한 가치는 다석 류영모의 가르침을 다른 이의 손과 머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들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마지막 고별 강의에서 류영모는 일체의 군소리를 떨어버리고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게 진리를 이야기하는, 최고 경지에 이른 사상가, 영성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굽이를 지나거나 곁길로 나가지 않고 오로지 앞을 향해 시원하게 뚫린 큰길로 성큼성큼 걸어가 곧장 핵심으로 들어가는 다석의 육성 강의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스승을 직접 뵐 수 없는 목마름을 풀어줄 해갈의 물줄기가 될 것이다.
류영모/교양인/22,000원

◎ 류영모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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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이 하나였던 참사람 다석 류영모(1890~1981)

다석 류영모는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처음 세례를 받고 8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老子)》를 한글로 완역하는 등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 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

생전에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재단법인 씨알’을 만들었다.

◎풀이, 박영호(1934~ ) 는?

1934년에 태어난 박영호는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가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그는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박영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잃어버린 예수 -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도서출판 교양인 제공

2019/10/07

19 이기상.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 - 에큐메니안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 - 에큐메니안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12 18:59


“경전에 이르기를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적의 도(道)로 돌아가면 재앙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친다’ 했다.”(한용운)(1)

지난 호까지 나는 독일의 가톨릭 종교철학자 베른하르트 벨터의 사상 전모를 특히 그의 ‘없음’(무) 사상과 관련해 다루어 보았다. 또한 동양의 ‘없음’(무) 사상과 비교하며 글을 마무리 하였다.

이번 글부터는 한국으로 눈을 돌려 한국의 사상가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나는 오랫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석 류영모에 대한 연구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주제가 분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제가 함축하고 있는 방향과 내용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였다.

다석 류영모는 왜 철학자가 아니었나

우선 주제에서 ‘철학적 의미’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한국 철학계의 연구 풍토를 감안할 때 부정적인 배경을 함축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 철학계에서는 아무도 류영모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 그의 사상의 일부분이 드러나면서 몇몇 학자들이 류영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대부분 신학자들이었다.

▲ 다석 류영모 선생님(사진 오른쪽)과 부인 김효정 선생님(가운데), 그리고 제자 박영호 선생님(왼쪽) ⓒGetty Image


그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도 선뜩 그를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그의 일지나 강의 가운데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생각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류영모가 어디에서도 철학적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 ‘사상가’로 분류할 수는 있어도 ‘철학자’로 지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듯싶다.

따라서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 점이 분명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류영모가 남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잡지에 실린 글은 몇 편 되지도 않고 그나마 그것도 학술지가 아닌 일반 교양지 수준의 잡지에 실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있는 그의 어록이나 명상록 등은 그가 종로 YMCA 연경반에서 행한 강의들과 그가 거의 매일 기록한 일기들을 기록하고 해설한 것들이다.

그의 일기인 『다석일지』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시 형식으로 쓰여 있다. 대충 한시(漢詩)가 1300편, 우리말 시가 1700편정도 실려 있다. 이 시들은 대부분 짧고 함축적이어서 해설이 없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든 형편이다.

류영모의 생각의 큰 얼개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은 그의 강의록이다. 여기서의 강의도 대학이나 학술단체에서의 강의가 아니라 성경연구모임에서 몇몇 사람들을 앞에 놓고 행한 강의일 뿐이다. 이 강의록마저도 그가 준비한 강의원고가 아니고 제자들이 속기사를 시켜 기록하게 한 강의 기록본이다.

이 강의록이 ‘다석어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지만 학술적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2)

류영모는 왜 한국 철학자인가

이와 같은 배경이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넓은 의미의 사상가는 될지 몰라도 철학자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의 일기와 강의록에 심오한 사상의 단편은 있을지 몰라도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류영모 철학’이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동안 『다석일지』와 그의 강의록들을 공부하고, 다석의 제자들이 해설해서 펴낸 명상록들과 일지 공부들을 연구하면서 다석의 생각들이 단순히 사상의 편린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나의 큰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류영모 자신은 신, 우주[세계], 인간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사상들을 좀 더 넓고 깊게 그 함축한 의미를 따라가며 이해하여 해석할 때 다석의 독특한 신론, 우주[세계]론, 인간론을 구축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동안 나는 이런 작업을 하여 몇 편의 글과 책으로 출간하였다.(3)

따라서 체계적인 이론이 없기 때문에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 근거가 없는 셈이다.(4)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비록 그가 남긴 글은 하나도 없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를 철학자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사상에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류영모를 철학자로 내세울 수 있는 근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류영모는 우리말로 사유하고 철학한 주체적인 한국 철학자다.
2) 그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시도한 현대 철학자이다. 우리는 그의 철학에서 시대정신의 반영을 읽어낼 수 있다.
3) 그는 동서 통합의 지구촌 시대에 통합적인 사유로 새로운 신론, 인간론, 생명론을 전개한 세계 철학자이다.
4) 그는 무엇보다도 존재이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 철학자이다. 있음의 관점이 아닌 없음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것을 제안한 ‘없음[무]의 형이상학자’이다.
5) 그는 이성중심의 인간관에서 탈피하여 영성중심의 인간관을 제시한 인간학자이다.
6) 그는 생명에서 하늘의 뜻을 볼 것을 제안한 영성가이다.


다음 글부터 나는 좀더 자세하게 위의 주장들을 검토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이원섭 옮김, 운주사, 1992, 119.
(미주 2) 다석학회는 이 강의 속기록들을 검토하여 믿고 인용할 수 있는 강의록으로 출간하였다.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미주 3) 참조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인문학 연구」 제4집(1999),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34; “존재에서 성스러움에로! 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모색 ― 하이데거의 철학과 류영모 사상에 대한 비교연구”, 『인문학과 해석학』(해석학 연구 제8집) (한국해석학회 편) (2001. 10월), 247〜300; “다석 류영모에게서의 텅빔과 성스러움”, 2000년 11월 18일 체코 올로모츠에서 개최된 국제현상학회 발표원고,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16집 (2001년 6월), 353〜392; “다석 류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씨알의 소리』통권 제174호(2003년 9/10월호), 71〜99; “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류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생명사상 재조명』(오산창립100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집) (2005년 11월 28일), 53〜85;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 2003;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지식산업사, 2003.
(미주 4) 물론 나는 류영모의 인간론, 신론, 생명론 등을 전개하면서 류영모 자신의 말이나 글에 의존하기보다는 그의 말이나 글이 함축하고 있는 차원과 그 지시하고 있는 방향을 고려에 넣어 이론적인 얼개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혹자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자의적인 해석에 가깝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은 철학이론들이 그런 생산적인 대결에서 생겨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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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현대 한국 철학의 시작
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3)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26 17:42



얼마 전에 나는 큰 책방에서 철학책들을 훑어보다가 『한국철학의 흐름』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나 흐뭇한 기분도 잠시 차례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고 있다는 그 책이 마지막으로 다룬 사상가가 다산 정약용이었기 때문이다.(1)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서 1836년에 명을 달리한 사상가이다. 그를 끝으로 하여 한국철학의 흐름은 멈추었다는 이야기다.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한국철학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는 이야기다. 독일을 예로 든다면 마치 헤겔(1770〜1831)을 끝으로 독일철학이 끝났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누가 한국 철학자인가

아니 그 예도 충분치 못하다. 헤겔이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로 통하는 것은 그가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정약용은 한 권도 자신의 사상을 한글로 써서 펴낸 적이 없다.(2) 서양에서의 근대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라틴어가 아닌 그들의 지방어인 민족어로 사유하고 글을 썼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정약용을 한국 근대 사상가로 분류하는 데에도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학을 시대의 자식이라고 하며 자신의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는다고 말한다. 정말로 정약용 이후 이 땅에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은 사상가나 철학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지난 170년 동안 이 한반도에는 우리의 현실과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인간이 무엇인지, 세상이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했는지, 이 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으로 고민한 학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

▲ 철학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모국어로 생각하며 문제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다석 류영모는 현대 한국 철학자이다.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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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우리 철학인들은 왜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인지, 20세기 들어서서 한국철학은 무엇을 했는지, 21세기 한국철학의 전망은 어떠한지 등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철학자,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는 사람

독일어로 기술되지 않은 독일철학, 프랑스어로 쓰이지 않은 프랑스철학을 생각할 수 없듯이 우선 우리는 엄격히 우리말인 한글로 서술되지 않은 사상들을 ‘한국철학’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조심해야 한다. 물론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 등이 다 한국역사에 속한다. 그 시대의 사상들을 넓은 의미에서 한국사상 또는 한국철학에 소속시킬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우리는 한국 고대 사상, 중세 사상, 근대 사상, 현대 사상 등의 시대구분을 하고 그 구분의 기준을 마련하고 그 철학적 독특함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럴 경우 정약용을 한국 근대 사상가로 분류할 수 있는지, 어떤 근거에서 근대 사상가인지 논의해봐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언어와 사상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하지 않고 한국에서 낳아서 자라 사상 활동을 한 사람은 모두 한국 사상가로 간주했다. 단순하게 산 시기 또는 왕조를 염두에 두고 사상가들을 분류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20세기 들어서서 세계철학의 흐름 자체가 ‘언어’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언어를 철학의 핵심주제로 삼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보편 언어란 없고 언어는 모두 말하는 민족의 기억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에 사상을 표현한다는 철학의 언어도 어쩔 수 없이 그 시대 그 민족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철학은 어디 다른 곳보다도 한민족의 기억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한글말 속에 가장 잘 표현되었을 것이다. 어떤 다른 언어보다도 한글말로 가장 맞갖게 기술되었을 것이다.

왜 류영모는 한국 철학자인가

이렇게 사상과 언어와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하고 철학은 우리말인 한글로 해야 하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한글로 표현된 말과 글에서 우리의 세계관, 인간관, 신관을 찾아 해석해내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한국의 현대 사상가라고 불리기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그런 사람은 바로 다석 류영모라고 주장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보며 우리말을 통해 우리말 안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말건네온 하느님[존재]의 소리를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다음 글부터는 류영모가 20세기 한국의 현대철학자로서 손색이 없음을 입증해보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20세기 초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문제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 당시 지식인들은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고찰하기로 한다.

미주
(미주 1) 한국 사상이나 철학에서 다산 정약용을 마지막 사상가로 소개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김재영, 『한국사상 오디세이』, 인물과사상사, 2004; 민병수 외, 『한국사상』, 우석출판사, 2004;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2001.
(미주 2) 우리는 오늘날 한시(漢詩)로만 시를 써서 발표한 시인을 엄밀한 의미의 한국현대시인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가.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08 박재순 연구소장이 다시쓴 진정한 한국의 대사상가 유영모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박재순 연구소장이 다시쓴 진정한 한국의 대사상가 유영모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박재순 연구소장이 다시쓴 진정한 한국의 대사상가 유영모

등록 :2008-07-31 18:16수정 :2008-07-31 19:35



‘다석 유영모’
박재순 씨알연구소장이 다시 쓴
‘다석 유영모’



사상가 유영모(1890~1981) 선생을 조명한 <다석 유영모>(현암사 펴냄)가 나왔다. 저자는 유영모와 그의 제자 함석헌의 사상을 공부하고 이를 널리 펴는 데 앞장서고 있는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이다. 그의 사상은 오는 2~3일 열리는 세계철학대회에서도 논의된다.

저자는 유영모를 천문·지리·서양철학·동양철학·불경·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요, 우리말 우리글로 사고한 진정한 한국의 사상가로 꼽는다.

유영모는 16살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2살에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그곳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전했다. 40대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따라 기독교청년회(YMCA) 연경반에서 30년 넘게 강의했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절대시하고 <성경>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성인을 모두 좋아했다.

저자는 1975년 세검정에 있는 유영모의 집에서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80대 중반이던 선생은 신선처럼 보였다고 회고한다. 당시 유영모는 무릎 꿇고 않아서 그곳에 온 사람들 수를 헤아리면서 수에 대한 풀이를 했다.

“하나는 나누어지지 않은 온전한 것, 큰 것, 한울, 처음을 나타낸다.…셋은 선다는 말에서 나왔다. 다리가 셋이면 어디서나 잘 선다.…다섯은 ‘다 섰다’를 뜻하고 여섯은 ’이어 섬’이고, …열은 ’열린다’는 뜻이다.”

유영모는 당시 밥 먹을 때도 물은 잘 안 먹는데 늘 입 안에 물이 가득 고인다고 했다. 사흘 금식하고 50리를 걷고도 목마르기는커녕 입에 군침만 돌더라고 했다.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이 마음에 와닿아 지금도 그의 사상을 받드는 저자는 우리 전통 사상과 현대 사상을 결합함으로써 함석헌의 싸알사상, 민중신학, 종교 다원주의 사상, 토착화 신학, 생명 철학의 선구자가 된 다석의 사상이야말로 지구화와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상생 평화의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 인류에게 자극과 영감을 줄 것이라고 평한다.



조현 기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301773.html#csidx78fd0b0ef81dc58b6c9b5c37a602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