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30

동학과 현대과학의 만남…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 - 대학지성 In&Out



동학과 현대과학의 만남…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 - 대학지성 In&Out






동학과 현대과학의 만남…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
최민자 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승인 2021.11.29

■ 책을 말하다_ 『동학과 현대과학의 생명사상』 (최민자 지음, 모시는사람들, 472쪽, 2021.09)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팬데믹 단계에 돌입한 이후 다양한 변이 바이러스, 즉 영국의 ‘알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베타’, 브라질의 ‘감마’, 전염력이 훨씬 강한 인도의 ‘델타’ 변이에 이어 최근에는 더 치명적인 페루발 ‘람다’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어 코로나 시즌 2가 시작되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의 ‘코로나 백신 접종자 면역원성 분석 중간 결과’에 따르면 바이러스를 무력화하는 중화항체(中和抗體)량이 백신별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다가, 델타 바이러스에 대한 중화항체량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과 화이자 백신 모두 각각 3개월 뒤와 5개월 뒤 접종 직후보다 절반 수준으로 낮아지는 등 백신효과의 지속력이 약화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 등에 따르면 코로나 변이도 심각하지만 기후변화는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구 온난화로 빠르게 녹고 있는 북극 빙하, 그린란드 빙하 그리고 남극 빙하가 바다로 유입되어 해류 순환 시스템을 바꾸고, 이로 인해 곳곳에 기후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과학계에서는 지구 자기장의 급속한 감소와 자기장의 교란으로 지자극(地磁極)의 역전 가능성, 즉 지구 극이동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전망한다. 지자극 역전으로 북극(N극)과 남극(S극)이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나면 방향 감각을 자력에 의지하는 수천 종의 새와 물고기와 포유동물이 대멸종에 직면할 수도 있다. 지자극 역전 시 지축의 변화도 함께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대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게 되면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 화산폭발 등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전 세계적 현상은 인공지능(AI) 기술의 진화와 그 역기능에 대한 고민 또한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기 통솔체계에서부터 민간 상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의 응용범위는 실로 방대하며 심지어 정보의 바다 자체가 인공지능의 자유의지와 자의식이 싹트는 토양이 될지도 모른다며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분하는 마지노선이 무너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윤리적 제어를 통해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 윤리는 개발자와 과학자들의 윤리, 인공지능 시스템에 내재한 윤리 코드, 인공지능 시스템이 학습하고 추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로 대별될 수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닉 보스트롬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인공 초지능이 등장하고 지능 대확산(intelligence explosion)이 일어나면, 특히 인류에게 비우호적인 초지능이 등장하면 인간의 운명은 이 초지능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해결책의 단초를 ‘최선의 인간 본성’에서 찾고 있다.

이처럼 인류가 직면한 위기는 그 형태가 다양한 것 같지만, 그 본질은 모두 인간의 의식 패턴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 패턴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정한 가이드라인은 실효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우주의 본질인 생명에 대한 몰인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생명은 곧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며 ‘불가분의 전체성(undivided wholeness)’이고 생명의 ‘자기조직화’에 의해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것이니, 생명은 전일적이고 자기근원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심(公心)이 발현되어 ‘하나됨’을 자각적으로 실천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역사상 그 치열했던 철학적 사색과 과학적 탐색은 우주의 본질인 생명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미망의 삶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을 아는 것은 곧 ‘만사지(萬事知)’, 즉 만사를 아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후천개벽의 티핑포인트로 다가서고 있으며 한반도는 이원성과 분리성을 대표하는 마지막 사례가 되고 있다. 지구 문명이 대변곡점에 이르렀다는 징후는 지구의 생태 위기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부상, 그리고 과학과 영성의 접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가 이 거대한 개벽의 파도를 타고 넘으려면 삶의 존재론적 반경을 설정하는 ‘세 중심축’, 즉 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동학에서 진화는 ‘내가 나 되는 것’을 향한 복본(復本)의 여정이다. 우리가 진화의 바다에서 의식의 항해(voyage of consciousness)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문명의 배’ 그 자체에 몰입한다면 생명과 평화의 문명은 개화할 수가 없다. 동학의 통섭적 사유체계는 포스트휴먼 시대가 처한 존재론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유효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저서 『동학과 현대과학의 생명사상』(서울: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1)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동학과 현대과학의 사상적 근친성을 생명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학과 현대과학의 사상적 조우(遭遇)의 단초는 현대 물리학의 ‘의식(意識)’ 발견에 있다. 양자계(quantum system)가 근원적으로 비분리성(nonseparability) 또는 비국소성(nonlocality)[초공간성]을 갖고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서의 속성을 상보적으로 지닌다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적 관점은, 본체계와 현상계의 이분법이 폐기된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적 세계관과 상통한다. 또한 생명을 ‘하나’인 혼원일기(混元一氣, 至氣)로 보는 동학과, 우주만물을 잇는 에너지장(場) 즉 매트릭스(Matrix)로 보는 현대 물리학의 관점이, 생명을 비분리성·비이원성(nonduality)을 본질로 하는 영원한 ‘에너지 무도(energy dance)’라고 보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상통함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동학과 현대과학의 통섭적 생명관에 대한 비교 고찰을 통하여 생명의 본질 자체가 주체-객체 이분법이 폐기된 ‘참여하는 우주(participatory universe)’의 경계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신성한 영(神靈, 靈性)’인 동시에 ‘기화(氣化, 物性)’로 나타나는 일심(一心, 天‧神‧靈)의 이중성을,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 나타나는 양자계의 역설적 존재성과 회통(會通)시킴으로써 생명의 본체와 작용, 내재와 초월이 합일이며, 일심[에너지場, 매트릭스] 이외에 다른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네트워크가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패턴을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라고 명명하는 복잡계 과학의 관점을,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 이치를 제1원리인 하늘(天‧神‧靈)의 자기현현(self-manifestation)이라고 보는 동학의 관점에 조응시킴으로써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의 심원한 의미를 실제 삶의 영역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점이다.

셋째는 생명 현상을 전일적 흐름, 즉 홀로무브먼트(holomovement)로 보는 양자물리학의 관점을, 생명의 본체[天‧神‧靈]와 작용[우주만물]의 묘합 구조로 보는 동학의 ‘시(侍: 모심)’ 철학에 조응시킴으로써 통합적 비전에 의해 세계가 재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극도로 분절되어 있는 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수한 전일적 양태로 이들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비전이다. 존재의 세 차원인 물질계, 양자계 그리고 비국소적[靈的] 영역은 곧 우리 의식의 세 차원으로 각 상위 차원이 하위 차원을 포괄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진화적 홀라키(evolutionary holarchy)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앎의 세 양태, 즉 육의 눈(肉眼), 마음(정신)의 눈(心眼), 영의 눈(靈眼)과 상호 조응한다. 과학혁명은 패러다임의 변환과 연계되어 있고 패러다임 변환은 사회구조 변화와 맞물려 의식의 진화를 위한 최적 조건의 창출과 관계된다.

넷째는 현실 세계가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는 홀로그램과 같은 일반원리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홀로그램 우주론과, 우주만물[부분]이 하늘[전체]을 모시고 있다며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마저 넘어선 동학의 평등무이(平等無二)의 세계관이 물질의 공성(空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상통함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의 공성이란 우리가 물질이라고 지각하는 것이 에너지 진동에 불과하며 99.99%가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이 우주는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의 세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물만상이 끝없이 상호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두 입자가 공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비국소적으로(nonlocally)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개체 없이도 즉각적으로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이론과도 상통한다.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과 결정론적 해석 간의 논쟁은 인식론상의 문제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으로만 남을 수 없는 이유다. ‘양자 형이상학’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로 여기에 동학과의 접점이 있다.


최민자 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역임. 

저서로 
『무엇이 21세기를 지배하는가』, 
『빅 히스토리: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새로운 문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반도發 21세기 과학혁명과 존재혁명』 등 

다수가 있다.

2021/11/28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 녹색평론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 녹색평론
2000.07.01.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녹색평론 통권 제53호 데릭 젠슨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는 인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마을의 한 점성가는 그의 인생은 끝없는 여행이 될 것이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맞았다.
쿠마르의 부모는 아힘사(생물을 해치지 않음)의 원칙에 철저한 자이나교의 신자들이었다. 쿠마르가 네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후 쿠마르와 그의 어머니는 점점더 많은 시간을 절대적인 비폭력을 가르치며, 음식을 구걸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자이나교 승려들 곁에서 보냈다. 승려들은 어린 쿠마르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가 ‘영적인 혼’을 지녔다고 했다. 아홉살 때 몇몇 친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마르는 자이나교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모든 친지들과의 접촉을 끊고,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한 채 9년간 자이나교 승려로서 인도를 걸어서 횡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세상과의 단절이 그의 영성을 더욱 깊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종단을 떠났지만 걷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인도의 토지개혁운동에 참가하여, 수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다니면서, 불가촉천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줄 것을 부유한 지주들에게 요청하였다. 그의 걷기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러해 뒤 그는 핵무기에 반대하기 위해 돈 한푼 없이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그리고 위싱턴 디씨까지 걸어서 갔다. 후에 그는 영국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성지 순례여행을 물론 걸어서 했다.
지난 25년간 쿠마르는 생태적 사고와 전통문화, 그리고 자연의 지혜를 탐색하는 격월간 잡지《리서전스》를 편집하고 발행했다.
쿠마르는 또한 영국의 슈마허 칼리지를 설립하는 데 관계했다. 이 칼리지는《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E. F. 슈마허의 생태적 시각을 조명하고 가르치는 강연들로 시작해서 전일적인 국제적 에콜로지 센터로 성장했다. 학생들은 생태적 관점에서 경제, 철학, 사회 및 과학적 주제들을 공부한다. 학교가 지지하는 평등주의와 생태적 인식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서 학생들과 선생들은 요리에서 빨래까지 모든 일들을 같이 하며, 함께 살고, 먹고, 일한다.
쿠마르는 그의 자서전《목적지 없는 길》을 포함한 많은 책들을 편집하고 저술했다. 그는 영국의 노스 디본에서 그의 아내 쥰 미첼과 같이 살고 있다.

나는 삼월의 어느 맑은 날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막 방송을 마친 참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작은 카페로 걸어가 케이크 한조각을 앞에 두고 앉았다. 나는 그의 온후함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곧바로 생태적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곧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미처 녹음기를 켜기도 전에 그는 생태적 문제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데릭 젠슨)

* * *



쿠마르 나는 매 순간을 창조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예전에 내가 썼던 것이나 말했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현재를 살고, 항상 주의를 집중하며 산다는 거지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듣는 것, 보는 것들을 항상 의식하는 겁니다. 내 주위와 정신과 감정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것 말입니다.

젠슨 그건 너무 많은 일이 아닌가요?

쿠마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된 일은 아니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창조적인 일이고, 그래서 도전적이며 즐거운 일입니다. 삶을 ‘벼랑’에서 살기 시작하면, 그래서 진정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산다면, 매 순간이 모험이 됩니다. 물론 매우 힘든 삶의 선택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런 삶을 통해 일 자체로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삶이 정해진 틀속으로 들어가버리면 ― 수입, 집, 생활, 책 등 모든 게 정돈되고, 계획되고, 조직된다면 ― 일의 양은 적어지겠지만, 아마 … 글쎄요, 당신의 느낌이 어떨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나라면 불만족스러워질 겁니다.

젠슨 어떻게 이런 삶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까? 벽돌 한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한장을 놓았던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핵무기에 반대해서 평화행진을 하면서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 디씨까지 걸어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걸었던 겁니다. 도보여행을 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인생을 살아가거나 모든 긴 여정들은 끈질기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보면 “굉장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만,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한번 붓질을 하고 그 다음에 또 한번의 붓질을 한 겁니다. 매번 여기에는 어떤 색을 넣을 것인지, 어떤 질감을 나타낼 것인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예술작품을 창조해내는 일과 삶을 만들어나가는 행위는 매우 유사합니다. 책을 한권 쓰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일단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서 문장 다음에 문장, 문단 다음에 문단, 페이지 다음에 페이지를 계속 쓰는 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죠. 순간 순간, 하루 하루, 일년 다음에 일년, 그렇게 삶이 다할 때까지 사는 겁니다. 삶 역시 책이고, 예술작품이며,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이제 당신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나는 활력있게, 주의를 기울이며, 열린 마음과 창조성을 통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딛어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62년에 걸친 여정이었죠. 그 여정은 항상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삶을 창조하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젠슨 그럼 의식적으로 당신의 삶을 만들어왔다는 말씀인가요?

쿠마르 언제나 그래왔죠.

젠슨 그 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는 걸 느끼십니까?

쿠마르 나는 다행하게도 어머니나 교육에 의해서 억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홉살에 자이나교 승려가 되는 것 같은, 위험하고 모험적인 길을 걸을 기회가 있었던 거죠. 그 당시에도 그것은 모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외적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삶은 다 예외적인 겁니다. 만일 단순히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의 창조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미 예외적인 것이 됩니다.

젠슨 삶의 과정이 바로 예술창조라는 개념은 여러 예술가들의 말을 연상시키는데요.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만.

쿠마르 예술이 그런 식으로 세상과 분리된다는 건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나의 관점으로는 예술과 삶, 그리고 세상은 크게 보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튜디오나 뭐 그런 곳에서 순간적으로 고립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아주 커다란 오류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명상을 할 때 혼자 있다고 느끼기는 합니다만, 내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점에 관련해 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곳으로부터 고귀한 생각들이 내게 오게 하라. 그리고 그 보답으로 나의 고귀한 생각들이 온 세상으로 퍼지게 하라.”
책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빚거나 혹은 인생을 살거나 모든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보다 큰 세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작가는 종이를 사용하는데, 그 종이는 나무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음식을 소화합니다. 정신적, 감정적인 면에서도 작가는 사회를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예술은 우리 전체에 대한 반응이며, 그것을 사회에 보여주는 일입니다. 사회는 그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마치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와 같죠. 당신이 질문을 하고 나는 거기에 대답을 합니다. 상호의존적이죠.

젠슨 만일 삶이 예술과 같다면, 삶은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긴, 60년 동안의 대화이죠.

젠슨 누구와 말입니까?

쿠마르 타자들이죠. 이 타자들은 결국 모든 것입니다. 나무나 강, 새나 산, 배우자, 자식들, 조상들 모두입니다. 내 어머니 얘기를 했는데, 어머니도 이 대화 속에 있습니다.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의 스승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베다에 대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은 과거와의 대화이고, 미래와의 대화입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화인 것입니다.

젠슨 당신의 생각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입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은 바로 내 삶에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네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주검과 어머니가 울며 상복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젠슨 죽음이 삶의 대화를 시작하는 보편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모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특별합니다. 모든 대화가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각각 독특한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내가 죽음의 공포와 그 존재, 그리고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홉살에 나는 자이나교 승려가 되었습니다.
자이나교는 약 2500년 전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이나교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해치지 않는다는 아힘사의 원칙에 굉장히 철저합니다. 그들은 비폭력주의자이고, 물론 채식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게 모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입을 여덟겹의 천으로 가리고 다녔는데, 그 까닭은 공기중의 생물을 우연히라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천을 오직 먹을 때만 풀 수 있었는데, 먹는 동안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옷이나 다른 소지품들 ― 이불, 동냥그릇, 책들 ― 을 일일이 검사해서 벌레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얻은 것은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서 벌레나 풀을 밟지 않도록 했고, 앞을 잘 볼 수 없는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실내에서도 내 앞을 부드러운 털로 쓸면서 움직였습니다.
승려들은 먹을 것을 구걸합니다. 규칙에 따라 우리는 문을 열어놓은 집에서 채소로 만들어진, 그리고 기쁘게 주는 음식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참을성을 기르기 위해서 다른 조건들이 덧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르는 노예로 팔려서 한쪽 발은 집밖에 다른 한쪽 발은 집안에 묶여있는 공주에게서만 음식을 받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물에 불린 콩을 대나무 접시에 담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승려로서 나는 옷을 빨지 않았고 다 닳아서 헤져 못 입을 때까지 입었습니다. 목욕을 하거나 양치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날 스승 옆에서 머리를 긁어 벼룩이 몇마리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생물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 벼룩들을 다시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섹스는 어떻습니까?

쿠마르 금지됩니다. 섹스는 세속의 것입니다. 자이나교에서는 목샤 ― 영혼의 구원 ― 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과 몸에 대한 집착과 관계를 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아버지나 어머니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사랑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젠슨 제게는 상당히 끔찍하게 들리는군요.

쿠마르 그것은 자이나교의 죽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만일 삶이 삼사라 ― 탄생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 ― 라면 자이나교 승려의 목표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젠슨 왜 자이나교를 떠났습니까?

쿠마르 주된 원인은 내 친구 하나가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책을 준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종교적인 책이 아니면 읽을 수 없다고 했더니 그 책은 매우 깊은 의미에서 종교적인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읽었습니다. 간디는 바로 지금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삶과 세계에서 사람을 분리시키려는 종교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신을 대면하기 위해 승려는 이 세상에는 등을 돌려야 한다는, 내가 배운 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습니다.
큰 도시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또다른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도시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사람은 지팡이 속에 큰 칼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승께 물었습니다. 스승은 “우리는 칼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승려가 아니지 않느냐. 그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후에 그 안내인에게 직접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이나 스승께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난 그저 구경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래도 우리는 비폭력을 믿지 않습니까?”
“우리가 당신들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비폭력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먹을 것을 만들고 요리하는 데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음식을 만들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 겁니까?”
그 안내인은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지적해준 겁니다. 우리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살고자 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 대신에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이나 경험 또는 육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승려생활이 진리에 대한 추구를 도리어 엄격히 제약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교단을 떠나 세상 속에서 열반을 찾기로 했던 것입니다.

젠슨 그래서 더이상 세상을 포기할 수 없게 되었군요?

쿠마르 그러나 승려생활은 그 이후 나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생활의 경험으로 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을 체득하였습니다. 맨발로 뜨거운 땅 위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거나, 돈과 집, 부모 없이 살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온 것은, 되돌아보았을 때, 내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정신과 세상을 분리시키는 것 ― 영성은 성자를, 예술은 예술가를, 음악은 음악인을 위한 것일 뿐이며,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 ― 이 옳지 않다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길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시절을 승려로서 지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실은 그 경험에 대해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단들이 영성을 잃어버리고 그 조직의 규율에만 집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찾는 것보다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리죠.

젠슨 세상을 포기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의 질식 사이에 관계가 있습니까?

쿠마르 내 경우에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실제로 나를 아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얼마나 적절하고 유익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영혼에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게 되자 내가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 “나는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승려의 삶을 떠나게 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은 삶으로부터의 도피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은 일상의 삶에서 단련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밖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 지구, 땅, 사람들 ― 아름다운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그 아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인 무대로 나를 뛰어들게 하였습니다. 나는 삶의 총체성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임을 확신했습니다.

젠슨 자이나교를 떠난 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쿠마르 나는 비노바 바브와 같이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간디와 함께 일했던 분으로, 간디의 정신적인 후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로 가장 빈곤한 계층, 즉 하리잔 ― 불가촉천민 ― 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기 위한 토지개혁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전역을 걸어서 다니면서 하리잔들과 지주들에게 땅도 공기나 해, 물과 같이 신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들 ― 그는 ‘흙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 은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의 위는 무척 작지만 가난한 자들의 위는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5천만에이커의 땅을 요구했습니다. 300에이커를 소유한 지주가 단 1에이커만 내놓을 때에 그는 만일 사원을 짓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되겠지만 가난한 이들이 땅을 갖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6분의 1은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땅을 내놓았습니다.
전에 내가 아직 승려였을 때, 삶과 영성은 다소 추상적인 개념들이었는데, 비노바 바브를 만나면서 그것들이 현실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새롭고 실제적인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지주에게 예속되어 착취당하며 가난으로 고통받는 땅 없는 노동자들을 접했을 때, 나의 영성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 경제, 정치, 사회적 차별의 문제에 대해 비폭력, 진리, 영성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땅의 소유권이 천부의 것이고, 가난한 농민들은 일을 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태어났으며, 이 모든 것들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 것인가? 자신들의 처지를 운명 ― 전생의 업으로 인해 주인을 섬기도록 태어났다는 ― 이라고 믿는 불가촉천민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도 똑같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그들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당연히 다른 모든 이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세상과 대화하며 평등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이해시킬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내게는 꼭 해내야 하는 모험과 같았습니다. 토지개혁운동을 통해서 나는 승려생활의 개인적 영성을 집단적 영성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많은 지주들이 땅을 내놓게 했고, 또 많은 하리잔들이 그 땅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비노바가 요구한 5천만에이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4백만에이커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하고 땅이 없는 천민들로 하여금 그 땅에서 경작하고, 우물을 파고, 곡식을 기르고 공동의 교육체계를 갖추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지주들과 천민들을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동반자적인 관계였습니다.

젠슨 그러나 동반관계란 그 개념에 있어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 근거하는 게 아닙니까? 어떻게 한쪽은 부유하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데 동반자 관계가 성립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나는 영성적 동반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주들이 소작인들의 선의와 선한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힘의 균형은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동반자 관계는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겠지만, 당장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비노바의 토지개혁은 영성적 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반자의 관계로 살 수 있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그런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작을 했습니다. 많은 지주들이 그들의 땅의 6분의 1이 아니라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대화를 거부하는 지주들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쿠마르 우리는 그들이 “오늘은 대화를 거부해도 내일 일은 모른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앉아있는 이 카페에 들어오려면 먼저 출입문을 찾아야겠지요. 다른 곳으로 들어오려고 하다가는 벽에다 머리를 부딪히게 될 뿐입니다. 지주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비슷합니다. 기다리고 찾으면 약한 부분, 마음을 여는 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문을 찾지 못했어도 다음날은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문이 잠겨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열쇠를 찾았다 해도 녹이 슬어있을지도 모르며, 기름칠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이 많기는 했지만, 우리가 한발자국씩 나아간다면 궁극적으로는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만일 저항에 부딪히면 물러났다가 다음에 다시 그 지주의 친구 ― 이미 땅을 내놓은 ― 와 같이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주는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니라면, 다시 다음에 찾아가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끈질기고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노바 바브는 1955년에 토지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1985년까지 30년 동안 땅 없는 이들에게 땅을 찾아주려고 온 인도를 걸어다녔습니다.

젠슨 만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착취를 멈추지 않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면요? 히틀러 같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쿠마르 집이 불에 타서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물을 많이 끌어와서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예방책으로서의 원칙입니다. 집에 불이 붙기 전에 먼저 소화기와 탈출 통로, 비상구를 확보해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비폭력적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미디어도 비폭력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불만을 가진다면 무시하거나 억압해선 안됩니다.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의논해보자”고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히틀러라면 어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1차대전 이후의 독일의 문제가 무엇이었나를 짚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조약을 맺었습니까? 독일인들에게 “당신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한 짓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서 하고 있는 일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히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짓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저항할 것입니다. 자기 나라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같은 이가 등장한 다음에는 비폭력에 대해서 생각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것은 비폭력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교육, 자비심, 너그러움, 평등, 위엄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의 방법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기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갈등에 대처하는 법도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로 아이들로부터 비폭력의 문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미디어, 광고, 정부, 경찰, 법정으로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관에서는 단순히 벌주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비폭력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 폭력이 자라나는 것을 그저 내버려두다가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 놀랍니다. 우리는 “그는 악마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히틀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젠슨 아직 평화로운 토착문화가 많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의 시메이나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오카나간스 같은 곳 말입니다.

쿠마르 이들 문화가 많은 경우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도 비폭력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축장에서 동물들을 죽이고 공업의 형태로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가혹하게 다룬다면, 그런 잔혹성이 우리의 마음에 배어들어 다른 인간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젠슨 우리가 먹는 것들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들지요.

쿠마르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비폭력은 히틀러와 관계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죠. 비폭력은 삶의 방식입니다.

젠슨 비노바 바브와 함께 당신은 땅을 위해 걸었습니다. 1962년부터는 평화를 위해 걸었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마치 지금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다가 신문의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90세의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핵 반대 시위를 하다가 투옥되었다는 글이었습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90세에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동료 프라바커 메논과 의논하여, 핵 강대국들의 수도인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까지 평화행진을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버트란드 러셀에게 우리가 도우러 간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나는 매우 늙었으니 빨리 걸으라”고 답장을 했더군요.
우리는 기부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비노바는 돈 없이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대륙을 거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종교를 믿으며, 다른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들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노바는 “만일 돈이 있으면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모텔에서 잠을 잘 것이 아니냐. 그러나 돈이 없으면 무방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남을 믿어야 하고, 두려움을 없애야 하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찾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돈 없이 걸어서 인도를 출발했습니다.

젠슨 그것이 당신의 삶의 패턴인 것 같습니다. 아무런 방비 없이 미지의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것 말입니다.

쿠마르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과 토지를 구하는 것, 그리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땅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베풀어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게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나의 삶은 믿음으로 이루어져왔던 것입니다.

젠슨 사람들이 실제로 도움을 주었습니까?

쿠마르 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온 마을 전체가 먹을 것을 들고 우리를 환영하러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를 위해 잔치를 열고 우리의 발을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난처하게 여겼지만 사람들이 굳이 그렇게 하겠다더군요.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발을 주었습니다. 우체국 직원은 우표를 주었습니다. 이발사는 면도를 해주고, 택시기사들은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은 거절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었지만 그것도 또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어떤 아이가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정 코스에서 상당히 벗어나야 했지만 우리는 그 청을 받아주었습니다. 동베를린 경계에서 한 보초는 자신도 총을 버리고 평화를 위한 싸움에 동참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흑해 근처의 조지아에서는 여성들이 자기네가 일하고 있는 홍차 공장에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이 바로 핵폭탄의 짐을 지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폭탄을 만들기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도 우리들이고, 그로 인해 죽는 것도 우리들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목소리를 내어 그것에 반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얘기를 듣고 한 여성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뛰어나가 홍차 네상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스크바의 우리 지도자와 프랑스 대통령, 영국 수상,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말을 같이 전해주세요. 만일 폭탄을 떨어뜨릴 생각이 들면 잠깐 멈추고 이 차를 한봉지 타서 마시라고요. 그러면 세계의 보통 사람들은 폭탄이 아니라 빵을, 죽음이 아니라 삶을 원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겠지요.” 그녀의 말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했습니다.

젠슨 행진에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쿠마르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 평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한 마을에서의 일인데, 그 집의 남편이 우리를 초대했습니다만, 그 아내는 우리를 쫓아내더군요.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밤을 묵어갈 손님을 데리고오는 데 그만 질려버렸다고 말했습니다만, 실은 정치와 평화를 얘기하며 인도에서 온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조지아주의 올바니에서의 일인데, 나는 한 영국인 친구와 카페에 갔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치즈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웨이트레스는 주문을 받고 가더니 돌아와서 샌드위치가 다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커피만 달라고 했습니다만, 그것도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매니저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어떤 손님을 받을지는 자기가 정할 수 있으며 우리는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되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권총을 꺼내들더니 내 가슴을 겨누더군요. 내 친구가 나를 막아섰고, 다른 손님들이 우리를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내 피부색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핵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었지요? 그 답은 아니오입니다.

젠슨 보통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한다고 나선 이들의 반응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쿠마르 정부들의 반응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접하는 데서부터, 문제는 자신들이 아니라 적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다양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감옥에 갇혔다가 국외로 추방당했습니다.

젠슨 환경운동이나 반기업운동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차이가 나타납니다. 보통 시민들은 연어의 멸종을 원하지 않고, 다국적 기업들을 좋아하지도 않죠. 그러나 실제 행동에는 큰 차이가 …

쿠마르 한편으로는 기업과 정부기관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보통 사람들이 있죠.

젠슨 그리고 또 이런 기관들 내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그 기관들 자체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쿠마르 그것은 일자리와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저당권, 보험, 연금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가 선전이나 광고, 교육,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조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반사회적이라고 믿도록 세뇌된 거지요.

젠슨 동감입니다. 나는 콜로라도 광산학교에서 물리학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창들은 대부분 핵잠수함이나 다국적 정유회사, 광산기업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틀에 묶여서 살 수 없었던 거죠. 어떤 이들은 내게 마련되어 있는 삶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용감하다고 합니다만, 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나는 불행했습니다.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함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두려움은 우리 사회의 지배요소입니다. 어린시절부터 부모, 학교, 정부가 두려움을 키워줍니다. 두려워하도록 양육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갈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아주 쉬운 형태의 거짓 안정을 제공합니다. 돈이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달러의 독재 밑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공적 삶뿐만 아니라 사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젠슨 이런 사고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 걸까요?

쿠마르 광고가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상품을 사면 행복해지고, 안전하고, 사랑받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존경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매일 봅니다. 매일 10억달러가 광고에 쓰여집니다. 매일 말입니다! 일년에 3650억달러입니다!

젠슨 그런 수치를 들을 때마다 몇년 전에 읽었던 비교 수치가 떠오릅니다. 70년대 후반에 천연두를 없애는 데 약 3억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좀더 적은 비용으로 5억명의 어린이들에게 수두, 디프테리아, 홍역의 예방접종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매년 25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억달러면 제3세계의 5백만 어린이들을 1년 동안 학교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광고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깨끗한 물이 부족한 모든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쿠마르 단지 악하거나 부패한 지도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주들보다 하리잔들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더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리, 핵폭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권리나 온전한 세상에서 깨끗한 공기와 물을 마시며 살아갈 권리가 모두 자신들에게 있음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세뇌되고, 조작된 대로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의 마음, 존재, 눈, 사고는 한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전지구적 단일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생산자이고 제조자이며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해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용기를 찾아야 합니다. 용기는 각자의 신념에서 올 수도 있고, 실패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결혼의 실패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붕괴되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이 그러했듯이, 비록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여도 만족이나 성취감을 찾지 못하여 공허감이나 고통, 불행을 느끼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단 그런 공허를 느끼기 시작하면, 사슬을 깨뜨리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영혼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대량생산 사회는 몹시 추악합니다. 아주 작은 예로 세라믹과 폴리스틸렌의 촉감 차이를 비교해보세요. 폴리스틸렌 사용에서 생기는 쓰레기는 차치하고라도 말입니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걷는 것과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영혼은 굶주려 죽어버리게 됩니다.

젠슨 산업문명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라 보십니까?

쿠마르 소련은 붕괴했죠. 아파르트헤이트도 사라졌습니다. 이 산업주의, 물질주의의 단일문화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영구히 노예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시스템은 모래 위에 서있습니다. 생태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이런 체제는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궁극에는 인간 영혼이 승리할 것입니다. 나는 현재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다방면에 걸친 환경재앙 때문에 결국 우리가 더 나은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유기농산물, 수공예품이나 예술작품들, 음악, 시, 그리고 땅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과 자연, 사랑을 예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상호의존적으로 될 것입니다. 서로 돕고 살게 될 것이고 영혼을 살찌우는 사회로 돌아갈 것입니다.

젠슨 많은 환경운동가들은 회색곰이나 연어 혹은 그밖의 생물들이 산업문명이 붕괴할 때까지 멸종되지 않게 하여 그들에게도 삶을 지속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일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그때가 되었을 때, 다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남기기 위해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토착민들도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도 그와 같은 요소가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공동체의 의미를 유지하고,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보존하려는 시도 말입니다.

쿠마르 그런 문제에 관련해서 내가 사용하는 두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구명보트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문명이라는 배가 침몰할 때 우리도 함께 가라앉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대안적 기술, 공동체, 예술, 작은학교, 수공예 ― 이런 것들이 바로 구명보트입니다.
또하나의 비유는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켜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건설적인 계획 하나를 시작하는 게 세상이 얼마나 나쁜지 끝없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기술주의 대중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넘어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잡지《리서전스》와 슈마허 칼리지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승려생활의 영성적 토대와 토지개혁운동을 통한 사회적인 관심, 세계를 걸으면서 추구했던 평화에 대한 이상과 땅 위를 걸으면서 발견한 생태적 관심을 아우르는 비젼을 널리 퍼뜨리려고 합니다. 땅 위를 걸어가면 나무, 강, 나비, 딱정벌레 같은 자연과 아주 가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나는 내 두 다리가 내 신체에서 가장 창조적인 부분이고, 걷기가 에너지의 가장 창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자연의 아름다움, 즉 생명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비폭력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비방(秘方)이나 지름길은 없습니다.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린 작업입니다.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합니다. 자비심도 필요합니다. 참을성과 자비심은 비폭력의 두가지 덕목입니다. 문화는 한사람, 한사람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하나의 운동, 하나의 큰 대화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김형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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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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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華嚴宗)은 《화엄경(華嚴經)》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다. 

  • 화엄종에는 중국의 화엄종 · 
  • 해동 화엄종이라고 불린 한국의 화엄종 · 
  • 일본의 화엄종이 있다. 

해동 화엄종은 원융종(圓融宗) · 부석종(浮石宗) · 의상종(義湘宗)이라고도 불리었다.[1][2]

중국의 화엄종은 제2대 조사인 지엄에 의해 기틀이 다져졌으며 승려인 심상(審祥: ?-742)이 시조라고 할 수 있다.[3]

화엄종의 교학을 화엄교학(華嚴敎學)이라고 하며, 

화엄교학은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여 법장(法藏: 643-712)이 대성한 교학으로, 

지의(智顗: 538-597)가 대성한 천태교학(天台敎學)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대표적인 교학 중 하나를 이룬다. 화엄교학은 심원하고 광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는데, 주요 교의로는 법계연기(法界緣起) · 십현문(十玄門) · 육상원융(六相圓融)이 있다.[4] 특히, 법계연기 중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는 연기론의 극치로서 화엄교학의 특징을 이루는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라고도 불린다.[4][5]

오교십종(五敎十宗)은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두순(杜順: 557-640)에 의해 기초가 놓인 것을 법장이 완성한 화엄종의 교판이다.[6]

중국의 화엄종[편집]

개요 및 특징[편집]

중국의 화엄종(華嚴宗)은 제2대 조사인 지엄에 의해 기틀이 잡히고 당나라 시대의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 643-712)에 의해 699년에 더욱 발전한 종파이다.[7][8] 화엄종은 수나라 시대에 천태지의대사(智顗: 538-597)에 의해 개창된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교리 발전 면에서 2대쌍벽을 이루었다.[7]

화엄의 교학은, 천태의 교학이 실천으로서의 지관(止觀)을 중시한 데 비해, 심원하고 광대한 불교의 세계관("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을 이론적으로 확립하였다는 특징이 있다.[4]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관법(觀法)은 천태종의 지관(止觀)에 양보하고 이론면에 편중하였기 때문에 화엄종은 살아 있는 종교로서의 생명력이 약간 부족했다.[4]

기초[편집]

인도 불교에서는 세친(世親: 320-400)이 《화엄경》 중 〈십지경(十地經)〉을 주석한 《십지경론(十地經論)》이 있었다.[7] 그리고 이 《십지경론》을 바탕으로 중국 남북조 시대(420-589) 중 북조에 해당하는 북위(386-534)에서 지론종이 일어났는데, 이와 같이 법장(643-712)에 의한 화엄종의 성립 이전부터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왕성했다.[7]

중국에서 《화엄경》이 처음 한역된 것은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95-429)에 의해서인데, 그는 《육십화엄(六十華嚴)》을 408년부터 420년에 걸쳐서 번역하였다.[7][4] 그 후 《육십화엄》의 연구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나, 화엄교학(華嚴敎學)은 이들 경전 연구자들보다는 수나라(581-618) 시대와 당나라(618-907) 초기에 걸쳐 활약한 (禪觀)을 실천 수행하였던 두순(杜順: 557-640)에서 비롯되어, 지엄(智儼: 602-668)을 거쳐, 현수대사 법장(法藏: 643-712)에 의해 대성되었다.[4] 법장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등의 저작에 의해 한 종파로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4]

성립[편집]

당 중종 때에 실차난타(實叉難陀)에 의해 《팔십화엄(八十華嚴)》이 695년부터 699년에 걸쳐서 번역되었다.[7] 법장(法藏: 643-712)은 699년 10월 측천무후의 청으로 불수기사에서 새로 번역된 《팔십화엄(八十華嚴)》을 강하여, 현수(賢首)라는 호를 받았으며 측천무후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8] 또한 이때 전후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20권 (687-695),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3권, 《화엄지귀(華嚴旨歸)》 ·유심법계기(遊心法界記)》·《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등의 논서를 지어 화엄의 교리를 크게 밝히고 화엄종의 조직적 체계를 이루어 놓았다.[8]

한편 《화엄경(華嚴經)》은 699년의 화엄종의 성립 이후에도 다시 번역되었는데, 당 덕종 때에 반야삼장(般若三藏)이 《사십화엄(四十華嚴)》을 785년부터 798년에 걸쳐서 번역하였다.

한국의 화엄종[편집]

개요 및 성립[편집]

신라 시대에 의상(義湘: 625-702)이 당나라에 건너가 지엄(智儼: 602-668)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배운 후 문무왕 10년(670년)에 귀국하여 해동 화엄종을 개종하였다.[1] 이로써 의상은 해동 화엄종의 비조(鼻祖)가 되었는데, 그를 원효(元曉) · 윤필(潤筆)과 함께 화엄삼사(華嚴三師)라 한다.[1]

처음에는 원융종(圓融宗)이라 하였으나 뒤에 화엄종이라 개칭하였다.[1] 개산조인 의상은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정하였으며, 때문에 화엄종은 부석종(浮石宗) 또는 의상종(義湘宗)이라고도 불렸다.[2]

신라 말에 4개의 종파(열반종 · 계율종 · 법성종 · 법상종)와 아울러 5교(五敎)라 일컫게 되고, 다시 구산선문(九山禪門)과 아울러 5교 9산이라 했다.[1] 고려 숙종 2년(1097년의천이 천태종을 열면서 9산은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하여 5교 양종(五敎兩宗)이 되었다.[1]

신라 시대[편집]

의상의 교화를 입은 3,000여 명의 제자들 중 오진(悟眞) · 지통(智通) · 표훈(表訓) · 진정(眞定) · 진장(眞藏) · 도융(道融) · 양원(良源) · 상원(相源) · 능화(能和) · 의적(義寂)의 화엄십성(華嚴十聖)이 배출되었다.[2]

부석사의 창립 후에는 의상의 제자 혹은 그 법손(法孫)들에 의해 창건된 절로 원주의 비바라사(毘婆羅寺) ·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 동래의 범어사(梵魚寺) · 비슬의 옥천사(玉泉寺) · 남원의 화엄사(華嚴寺) 등이 화엄 십대사찰(華嚴十大寺刹)에 속하게 되었다.[2] 이러한 것을 보면 남북국 시대 신라에서 화엄종의 교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특히 해인사는 의상의 법손인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順應)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화엄사는 의상(625-702)의 법손인 연기(緣起)에 의해 창건되었다.[9]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다른 설이 있는데,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때의 고승인 연기(緣起)가 진흥왕 5년(544)에 창건했다는 설[10][11]과 인도의 승려였던 연기(緣起)가 백제 성왕(재위: 523-554) 22년(544)에 창건했다는 설[12]이 있다.)

신라 말까지 계속하여 뛰어난 화엄종의 승려들이 나왔는데 숭복사(崇福寺)의 쾌언(快言)과 세달사(世達寺)의 신림(神琳)이 유명하였다.[2] 또한 법융(法融) · 범체(梵體) · 융질(融質) · 담림(曇林)도 화엄종의 강백(講伯: 경론을 강의한 승려)이었다.[2]

고려 시대[편집]

신라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9산선문은 고려에 와서 이엄(利嚴: 866-932)의 수미산파의 성립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13] 이러한 선법(禪法)의 영향으로 교종의 교학이 빛을 잃은 듯했으나 화엄종의 화엄교학만은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13] 남북국 시대 때 의상이 화엄 사상을 널리 펼친 이래 화엄종의 화엄교학은 끊임없이 연구되어 고려에 계승되었다.[13] 화엄종의 화엄교학은 고려 시대 전체를 통해 선종이나 교종을 막론하고 널리 연구되었다.[13] 그 이유는 화엄교학의 사상이 대승보살의 실천적 행동을 강조한 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13]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때는 균여(均如: 923-973)가 화엄종의 교세를 크게 떨쳤다.[2] 그는 수도에 힘쓰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14] 균여는 《보현십종원생가(普賢十種願生歌)》(약칭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라는 열한 수의 향가를 지어 노래 속에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 넣음으로써 대중이 불교에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14] 그의 《보현십원가》는 대승보살의 실천적 행동을 강조한 화엄교학의 사상을 근간으로 성립된 것이었다.[13] 또한 그는 당시 남악(南岳) · 북악(北岳)의 양파로 분열된 화엄학을 통일시키려고 하였으며, 불교의 종파 간에 통합에도 힘을 기울여 종파간의 분쟁을 종식시켰다.[14][15][16]

연산의 개태사(開泰寺) · 개성의 귀법사(歸法寺)와 법수사(法水寺) · 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 · 합천의 반야사(般若寺)와 홍호사(弘護寺)가 고려 시대에 화엄종 교단에 속하였다.[2]

조선 시대[편집]

조선 태종 6년에는 화엄종과 도문종이 합쳐서 총 43사(寺)로 폐합되었다.

대한민국[편집]

화엄종의 종지는, 부처의 최초 깨달음의 상태인 화엄경 사상을 바탕으로 삼고, 종조(宗祖)는 원효를 받들고, 실천행에 있어서는 화엄경 보현보살 행원품에 의하여 모든 중생을 근기에 따라 알맞은 방편으로 깨우쳐주며,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행동하여 결국 수억겁 윤회고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의 혹을 떼어내고 본래면목 청정무구(本來面目淸淨無垢)한 상락아정(常樂我靜)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늘 편안한 불국정토”- 이 모든 국토 모든 중생들의 삶이 되는 것을 큰 목적으로 삼는다 하였다. 화엄종은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원효는 스스로 화엄경의 근본이치를 밝혀내어, 한 종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화엄종의 효시가 되는것이다. 종(宗)의 이름마저도 인도나 당나라에 없는 분황종(芬皇宗)이라 공칭(公稱)하였고, 지금도 현존해 있는 경주시 분황사는 분황종의 총본산 이였으며 원효가 오래 주석하던 곳이다. 또 다른 화엄종파는 의상이 당나라의 화엄종 제2조인 지엄대사의 지도를 받고 신라로 돌아와 부석종을 창종하였지만, 고려말 조선 초 까지 종풍이 이어 지다가 조선시대 배불정책에 의한 강압적인 종파폐합으로 말미암아 교종계에 흡수되고 말았다.

근세에 들어서 회명일승 대법사의 유훈을 이어 능해월승 대종사가 면면히 이어 오던 분황.부석 양종의 종지, 종풍을 그대로 되살려 1966년도에 인천 약사사를 대본산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을 창종(초대종정: 능해)하였고, 해원(二世종정)이 법통 이은어 법인 화엄승가장학재단(1978년)과 공익법인 대한불교화엄종장학회(1992년)를 설립하였으며 세,수81 세에 입적.

일본의 화엄종[편집]

성립 배경[편집]

겐메이(元明) 천황(661-721)이 헤이조코(平城京: 지금의 나라시)로 천거한 직후부터 도성을 헤이안코(平安京: 지금의 교토)로 옮겨 갈 때까지의 80여 년간(710-794)을 나라 시대라고 한다.[3] 이 시대 중에서 쇼무(聖武) 천황의 시대(729-749)는 나라 시대 불교의 최고 전성기였다.[3]

쇼토쿠 태자(574-622) 시대부터 지배계급 가운데에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3] 이러한 생각은 율령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더욱 강렬해졌다.[3] 쇼무 천황은 사회 동요가 심각해지자 불교의 힘을 빌려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지방 각지에 절을 세웠다.[3] 쇼무 천황은 칙령을 내려 경전을 필사하게 하고 절마다 땅을 하사하였다.[3]

나라 시대에는 한국 및 중국에서 온 승려들과 중국으로 유학갔던 승려들이 돌아와 불교를 연구하였다.[3] 그 결과 삼론종 · 성실종 · 법상종 · 구사종 · 화엄종 · 율종의 남도육종(南都六宗)이 형성되었다.[3] 여기서의 "종(宗)"은 불교의 종파나 종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학파와 유사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3] 나라 시대의 대사원에는 특정 한 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종이 함께 존재하였고, 한 승려가 여러 종을 겸하여 배우거나 연구할 수도 있었다.[3]

도다이사(東大寺)는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었다.[3]

성립 및 발전[편집]

736년에 중국 승려 도선(道璿: 702-760)이 일본으로 왔는데, 그는 (律)을 강술한 동시에 《화엄경》도 강의하였다.[3]

또 당시 화엄종에 정통한 신라승 심상(審祥: ?-742)이 일본의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고 있었다.[3] 때마침 이를 알게 된 일본 승려 양변(良辨)은 화엄종을 융성시킬 목적으로 심상을 청해 《화엄경》의 강술을 청하였다.[3] 이것이 일본 화엄종의 시작으로, 일본 화엄종의 시조는 심상이라 할 수 있다.[3]

그러나 일본에 전래된 불교 종파 가운데 나라 시대에서 가장 성행한 것은 삼론종과 법상종이었다.[3] 비록 이후에 화엄종과 율종의 두 종이 전파되었지만, 이 두 종파는 유행한 시기가 비교적 짧기 때문에 가장 성행한 유파로 볼 수 없다.[3]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 이동: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화엄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 이동: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종파 > 화엄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 ↑ 이동: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일본의 사상 > 불교사상 > 남도육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4. ↑ 이동: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사상 > 중국불교의 사상 > 화엄교학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운허 & 동국역경원. "法界緣起(법계연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불교 사전》. 2011년 3월 21일에 확인.
  6.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사상 > 중국불교의 사상 > 5교10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7. ↑ 이동: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중국불교의 종파 > 화엄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8. ↑ 이동:   운허 & 동국역경원. "賢首(현수)" Archived 2015년 6월 26일 - 웨이백 머신, 《불교 사전》. 2011년 3월 17일에 확인: "699년 10월 측천 무후의 청으로 불수기사에서 새로 번역된 『화엄경』을 강하여, 현수라는 호를 받고, 이로부터 무후의 신임이 두터웠다. 책을 지어 화엄의 교리를 크게 밝히고, 화엄종의 조직적 체계를 이루어 놓았다."
  9.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종파 > 화엄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부석사의 창립을 본 후 의상의 제자 혹은 그 법손(法孫)들의 손을 거쳐 이룩된 절로 원주의 비바라사(毘婆羅寺), 가야의 해인사(海印寺), 동래 범어사(梵魚寺), 비슬의 옥천사(玉泉寺), 남원의 화엄사(華嚴寺) 등 10대 사찰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화엄종의 교단은 대단하였다. 특히 해인사는 의상의 법손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順應)에 의하여 이룩되었고, 화엄사는 의상의 법손인 연기(緣起)조사가 이룩하였다."
  10.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삼국시대의 사상 > 삼국시대의 불교사상 > 연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연기 緣起 신라 진흥왕 때의 고승. 전남 구례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하여 우리나라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11.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전라남도 > 화엄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화엄사 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에 있는 절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으로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12.  "화엄사 창건 연혁" Archived 2002년 2월 7일 - 웨이백 머신, 화엄사 공식 사이트. 2011년 3월 17일에 확인: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 법왕(599)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습니다."
  13. ↑ 이동: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한국불교의 역사〔개설〕> 고려시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14. ↑ 이동:   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귀족문화 > 균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15.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고려시대의 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 균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16.  인명사전 > 한 국 인 명 > ㄱ > 균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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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厳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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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足石刻の華厳三聖像(世界遺産)。

華厳宗(けごんしゅう)は、中国大乗仏教宗派のひとつであり、杜順を開祖とする。『大方広仏華厳経』(『華厳経』)を所依の経典として、独自の教学体系を立てた宗派である。韓国、日本、ベトナムにも広まった。

日本仏教における華厳宗は、審祥により736年に伝えられた。南都六宗の一つ[1]東大寺盧舎那仏像(奈良の大仏)が建立された。

華厳宗の本尊は、歴史上の仏を超えた絶対的な毘盧遮那仏と一体になっている。菩薩の修行の階梯を説いた「十地品」、善財童子の遍歴を描いた「入法界品」などが有名。東大寺の大仏も本経の教主・毘盧舎那仏であり、日本仏教の黎明期に重用されたが、大乗仏教の中でも独特の教学を持つため宗勢は徐々に衰えていった[注 1]

歴史[編集]

開祖は杜順557年-640年)、第2祖は智儼602年-668年)、第3祖は法蔵643年-712年)、第4祖は澄観738年-839年)、第5祖は宗密780年-839年)と相承されている。この中国の五祖の前に、2世紀頃のインドの馬鳴(アシュヴァゴーシャ)龍樹(ナーガールジュナ)を加えて七祖とすることもある。また朝鮮半島(古代新羅)にも伝わり、義湘によって広められる。

日本における華厳宗は、第3祖法蔵門下の審祥によって736年に伝えられた。金鐘寺(後の東大寺)良弁の招きを受けた審祥は、この寺において『華厳経』・『梵網経』に基づく講義を行い、その思想が反映されて東大寺盧舎那仏像(奈良の大仏)が建立(743年-749年)された。鎌倉仏教期には、明恵によって密教思想が取り込まれ、さらに凝然による教学の確立がなされている。法相宗律宗と並ぶ、南都六宗の一つで、十三宗五十六派の一つである。

教学[編集]

時代的にも地域的にも広範なので、様々な変容がある。

重々無尽の縁起[編集]

華厳思想の中心になるのは、この世界の実相は個別具体的な事物が、相互に関係しあい(相即相入)無限に重なりあっているという考え方(重々無尽の縁起)である。この実相を4つの見方「四法界」に分ける。我々の通常のものの見方は事法界で、無自性の見方の理法界は仏の世界である。この両者を止揚した無自性・空の世界と具体的個物や現象が妨げあわず共存する理事無礙法界が、修行をすると顕れるが、これは天台の考え方で理と事を分けている点が不徹底である。この分裂をなくせば、最後に、理すなわち無自性・空も消え去り、ただ事物と事物が融通無碍に共存する事々無礙法界という仏の見方に到達し、これが本来の真実一如の世界である。

また、華厳では仏の立場になって見るので、三性説もまた唯識とは逆に、仏の側から順に円成実性、依他起性、遍計所執性と説かれる。

仏になることを目的とするのではなく、最初から仏の立場に自分を置いて考え、行動することを求めるのが華厳思想であるから、華厳経の一部の十地品に説かれるとおり、菩薩初地で信不退転となれば、あとは菩薩第十地までは自ずから到達するはずで、結局菩薩の初心にあるべき金剛の信が決定的に重要だと考える。

性起説[編集]

仏性についての考え方では天台宗が性具説を説き凡夫が次第に修行によって自らに十分備わっていない外来の仏性に救いとられて、目覚めさせられて行くと説くのに対し、華厳宗では性起説を説き、もともと衆生には円満な仏性が備わっているという如来蔵の考え方をとり、それが信じられず自覚しようとしないので迷うのだと考える。

華厳経の位置づけ[編集]

天台宗教相判釈(経典の内容を分析し、成立の順序や内容の高低を判定する)・五時八教の教判(天台大師智顗による)では、華厳経は最初に説かれ、仏のさとったままの言葉を記したもので、凡夫には理解しがたいものとしている。

著名な管長[編集]

脚注[編集]

注釈[編集]

  1. ^ の立場を主観とした世界観や教学が当初は朝廷に歓迎されたものの、衆生を性善説的にみる点に於いて合致しなくなったとも考えられる。
  2. ^ 2期目、任期は2022年迄。再任は下記の清水公照以来。

出典[編集]

  1. ^ 南都六宗(なんとろくしゅう)とは - コトバンク”. 朝日新聞社. 2017年8月3日閲覧。
  2. ^ 東大寺で晋山式 再任の佐川別当、大仏殿で報告 -朝日新聞デジタル”. 朝日新聞社. 2019年12月22日閲覧。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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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a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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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ayan
Dazu.jpg
Three Worthies of Huayan – Dazu Rock CarvingsChongqingChina
Chinese name
Chinese华严宗
Traditional Chinese華嚴宗
Vietnamese name
VietnameseHoa Nghiêm tông
Hán-Nôm華嚴宗
Korean name
Hangul화엄종
Hanja華嚴宗
Japanese name
Kanji華厳宗
Kanaけごん しゅう
Sanskrit name
SanskritAvataṃsaka

The Huayan or Flower Garland school of Buddhism (traditional Chinese華嚴; ; pinyinHuáyán, from SanskritAvataṃsaka) is a tradition of Mahayana Buddhist philosophy that first flourished in China during the Tang dynasty. The Huayan worldview is based primarily on the Avatamsaka Sutra (Chinese華嚴經pinyinHuáyán jīng).[1] The name Flower Garland is meant to suggest the crowning glory of a Buddha's profound understanding of ultimate reality.

The Huayan School is known as Hwaeom in KoreaKegon in Japan and Hoa Nghiêm in Vietnam. This tradition also had a strong influence on Chan Buddhism.[1]

Origins and development[edit]

Aerial view of Huayan TempleDatong, built during the Jin dynasty (1115–1234).

Origins[edit]

The earliest texts associated with the Avatamsaka sutra are the Dousha jing (Taisho 280), produced by Lokaksema in the latter part of the second century CE and the Pusa benye jing (T. 281), translated by Zhi Qian in the early to mid third century. There is evidence that these small Buddhavatamsaka sutras circulated on their own as individual scriptures.[2]

The translation of the large Avatamsaka sutra is often dated to the Southern Dynasties (420-589) when a translation team led by Gandharan master, Buddhabhadra worked on the sutra. There is also evidence of this sutra tradition in the Northern Dynasties (386-581) where a certain Xuangao (402-444) taught the Huayan samadhi.[3]

Patriarchs[edit]

The founding of the school is traditionally attributed to a series of five "patriarchs" who were instrumental in developing the schools' doctrines. These five are:[4][5]

  1. Dushun (Chinese杜順Wade–GilesTu-Shun), responsible for the establishment of Huayan studies as a distinct field;
  2. Zhiyan (Chinese智儼Wade–GilesChih-yen), considered to have established the basic doctrines of the sect;
  3. Fazang (Chinese法藏Wade–GilesFa-tsang), considered to have rationalized the doctrine for greater acceptance by society;
  4. Chengguan (Chinese澄觀Wade–GilesCh'eng-kuan), together with Zongmi, are understood to have further developed and transformed the teachings
  5. Guifeng Zongmi (Chinese圭峰宗密Wade–GilesKuei-feng Tsung-mi), who is simultaneous a patriarch of the Chinese Chán tradition and who also incorporated Taoist and Confucian teachings.

The five monks later honored as Huayan patriarchs were erudite scholar-practitioners who connected Buddhism with Chinese traditional culture closely, creating a Buddhist historical trend in developing multiple facets while the tradition’s essence remained the same.[6] Based on their writings, exegeses, and oral teachings, these men each played a significant and distinct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school, although there are certain aspects of this patriarchal scheme which are clearly contrived. For example, Chengguan was born 26 years after Fazang's death. According to Robert Gimello's dissertation on Chih-Yen (1976), "most if not all of the major themes of Huayen thought" can be found in the works of the second patriarch Chih-yen, particularly the classification of scriptures and theories on the Dharmadhatu. Thus he names the patriarch Chih-yen (602-668) as the crucial figure in the foundation of Huayan.[7] The tradition reached the height of its influence under Fazang, who was the Buddhist teacher of the Empress Wu Zetian (684–705).[8]

Another important figure in the development and popularization of Huayan thought was the lay scholar Li Tongxuan (Chinese李通玄, 635?-730), the author of the Huáyán lùn (Chinese華嚴論), a popular and lengthy commentary on the Avatamsaka sutra. Fazang's disciple Huiyuan (673-743) also wrote a commentary on the Avatamsaka.[9]

Some accounts of the school also like to extend its patriarch-ship earlier to Aśvaghoṣa and Nāgārjuna.

Stagnation[edit]

After the time of Zongmi and Li Tongxuan the Chinese school of Huayan generally stagnated in terms of new development, and then eventually began to decline. The school, which had been dependent upon the support it received from the government, suffered severely during the Buddhist purge of 841-845, initiated by Emperor Wuzong of Tang. The school stagnated even further in the confusion of th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907-979) period after the fall of the Tang dynasty when some Huayan commentaries were lost.

Revival and Expansion[edit]

After th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the Huayan lineage experienced a revival in the following Song dynasty (960-1279), and the few Huayan commentaries which had been dispersed were returned in 1085 by the Goryeo monk Uicheon. From the Song dynasty through the Yuan dynastyMing dynasty, and Qing dynasty to the modern period, Huayan philosophy continued to develop and new commentaries and rites were written and initiated, such as the "Rites on Practicing the Vows of Samantabhadra" (Chinese: 華嚴普賢行願修證儀; PinyinHuáyán Pǔxián Xíngyuàn Xiūzhèng Yí) and "Sagara-mudra Repentance Rites on the Flower Adornment Sutra" (Chinese: 華嚴經海印道場懺儀; PinyinHuáyánjīng Hǎiyìn Dàochǎng Chànyí). Throughout this period, much of Huayan's profound metaphysics, such as that of the Four Dharmadhātu (Chinese四法界; Pinyin: Sìfǎjiè) of interpenetration, was also integrated into the other Chinese Buddhist traditions.

Modern Era[edit]

In 1914, Huayan University, the first modern Buddhist monastic school, was founded in Shanghai to further systemize Huayan teachings to monastics and helped to expand the Huayan tradition into the rest of into East AsiaTaiwan, and the West. The university managed to foster a network of educated monks who focused on Huayan Buddhism during the 20th century. Through this network, the lineage of the Huayan tradition was transmitted to many monks, which helped to preserve the lineage down to the modern day via new Huayan-centred organizations that these monks would later found.[10]

Several new Huayan-centred Buddhist organizations have been established since the latter half of the 20th century. In contemporary times, the largest and oldest of the Huayan-centered organizations in Taiwan is the Huayan Lotus Society (Huayan Lianshe 華嚴蓮社), which was founded in 1952 by the monk Zhiguang and his disciple Nanting, who were both part of the network fostered by the Huayan University. Since its founding, the Huayan Lotus Society has been centered on the study and practice of the Huayan Sutra. It hosts a full recitation of the sutra twice each year, during the third and tenth months of the lunar calendar. Each year during the eleventh lunar month, the society also hosts a seven-day Huayan Buddha retreat (Huayan foqi 華嚴佛七), during which participants chant the names of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in the text. The society emphasizes the study of the Huayan Sutra by hosting regular lectures on it. In recent decades, these lectures have occurred on a weekly basis.[10] Like other Taiwanese Buddhist organization's, the Society has also diversified its propagation and educational activities over the years. It produces its own periodical and runs its own press. It also now runs a variety of educational programs, including a kindergarten, a vocational college, and short-term courses in Buddhism for college and primary-school students, and offers scholarships. One example is their founding of the Huayan Buddhist College (Huayan Zhuanzong Xueyuan 華嚴專宗學院) in 1975. They have also established branch temples overseas, most notably in California’s San Francisco Bay Area. In 1989, they expanded their outreach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by formally establishing the Huayan Lotus Society of the United States (Meiguo Huayan Lianshe 美國華嚴蓮社). Like the parent organization in Taiwan, this branch holds weekly lectures on the Huayan Sutra and several annual Huayan Dharma Assemblies where it is chanted. It also holds monthly memorial services for the society’s spiritual forebears.[10]

In Mainland China, Huayan teachings began to be more widely re-propagated after the end of the Cultural Revolution. Various monks from the network of monks fostered by the original Huayan University, such as Zhenchan (真禪) and Mengcan (夢參), were the driving factors behind the re-propagation as they travelled widely throughout China as well as other countries such as the United States and lectured on Huayan teachings. In 1996, one of Mengcan's tonsured disciples, the monk Jimeng (繼夢), also known as Haiyun (海雲), founded the Huayan Studies Association (Huayan Xuehui 華嚴學會) in Taipei, which was followed in 1999 by the founding of the larger Caotangshan Great Huayan Temple (Caotangshan Da Huayansi 草堂山大華嚴寺). This temple hosts many Huayan-related activities, including a weekly Huayan Assembly. Since 2000, the association has grown internationally, with branches in AustraliaCanada, and the United States.[10]

Texts[edit]

Avatamsaka Sutra, vol. 12, frontispiece in gold and silver text on indigo blue paper, mid 14th century

Avataṃsaka Sūtra[edit]

The Huayan school's worldview was inspired on the content of what it considered to be the supreme Buddhist revelation, the Avataṃsaka Sūtra (Flower Garland Sutra, Ch. Huāyán Jīng). The Avataṃsaka Sūtra is a compilation of sutras of various length, which originally circulated as their own sutras before being combined.[11] The earliest of these texts, the Ten Stages Sutra, maybe dates from the first century CE.[12] The Daśabhūmika Sūtra describes the ten stages on the Bodhisattva-path. The various sutras were probably joined together shortly before its translation into Chinese, at the beginning of the 5th century CE.[12][13]

According to Williams, the Avataṃsaka Sūtra is not a systematic philosophical work, but mentions various Mahayana teachings, including Madhyamaka śūnyatā teachings,[1] Yogacara ideas,[1] as well as mentioning a pure untainted awareness or consciousness (amalacitta).[14] It is filled with mystical and visionary imagery, focusing on the Buddha Vairocana, who is said to pervade every atom of the entire universe with his magical creations and emanations as a way to help all beings:[15]

In each dust-mote of these worlds

Are countless worlds and Buddhas...
From the tip of each hair of Buddha's body
Are revealed the indescribable Pure Lands...
The indescribable infinite Lands

All ensemble in a hair's tip [of Buddha].[16]

An important doctrine that the Huayan school drew from this sutra is the idea that all levels of reality are interrelated and interpenetrated, the idea that "inside everything is everything else". The sutra states:

They . . . perceive that the fields full of assemblies, the beings and aeons which are as many as all the dust particles, are all present in every particle of dust. They perceive that the many fields and assemblies and the beings and the aeons are all reflected in each particle of dust.[15]

In the Huayan school, this is depicted in the image of Indra's net. This "unity in totality allows every individual entity of the phenomenal world its uniqueness without attributing an inherent nature to anything".[16] According to Williams,

As a description of the way things are in our unenlightened world this seems incredible. But the dharmadhatu is the world as seen by the Buddha wherein there is no question of the world (an objectively real world ‘out there’) as distinct from meditative vision. Thus the sutra is less concerned with describing the world this way as with recounting the Bodhisattva’s attainments by which he can see the world in such a light, and the Bodhisattva’s miraculous powers by which, through his magical interventions in this world with no fixed hard boundaries, he can cause things to interpenetrate.[15]

Other texts[edit]

Other Mahayana texts such as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 (Dasheng Qixin Lun 大乘起信論), which was a condensation of Chinese thought on awakening and ultimate reality, influenced Huayan masters like Fazang and Zongmi, who both wrote commentaries on the text.[17] The Lotus sutra was also seen as an important text in this school, though not as important as the Avatamsaka. The Sutra of Perfect Enlightenment was particularly important for Zongmi.

The Huayen patriarchs wrote numerous commentaries and original treatises on the Mahayana sutras and Huayen philosophy. Fazang for example, wrote commentaries on the Avatamsaka, the Lankavatara Sutra and the Awakening of Faith.[18] One of the key Huayen treatises is On the Meditation of the Dharmadhātu attributed to the first patriarch Dushun.[19] Another is Fazang’s Treatise on the Golden Lion which is said to have been written to explain Huayen's view of interpenetration to Empress Wu.[20]

Peter N. Gregory notes that the Huayan commentarial tradition was:

"not primarily concerned with a careful exegesis of the original meaning of the scripture. Rather, what it discovered in the text was the justification for a number of ideas and metaphors in terms of which it elaborated its own body of doctrine. Many of the key Huayan doctrines that were inspired by the scripture (such as nature origination, the conditioned origination of the dharmadhatu, the samadhi of oceanic reflection, or the six aspects of all dharmas) played only a peripheral role in or had a tenuous connection with the actual Huayan sutra itself. The great commentaries written on the text by Fa-tsang and Ch'eng-kuan were not so much concerned with rendering a faithful and judicious interpretation of the words of the text as they were with using the text as a basis from which to advance a doctrinal agenda that was determined by the context of Sui-Tang Buddhism."[21]

Theory and practice[edit]

A 3D rendering of Indra's net.

Huayan thought is mainly focused on explaining the nature of the Dharmadhatu, the world as it is ultimately, from the point of view of a fully awakened being. It is often said to be the philosophical articulation of Chan meditation.[22] It is influenced by the Avatamsaka and Buddha nature literature as well as by the Chinese Yogacara and Madhyamaka schools. Patriarchs of the school such as Zongmi were also influenced by Chinese philosophy, particularly the classics of Taoism.[23]

Interpenetration[edit]

A key doctrine of Huayan is the mutual containment and interpenetration of all phenomena (dharmas) or "perfect interfusion" (yuanrong, 圓融). This is associated with what the Huayan sees as its unique contribution, the "dharmadhatu pratityasamutpada". This is described by Wei Daoru as the idea that "countless dharmas (all phenomena in the world) are representations of the wisdom of Buddha without exception" and that "they exist in a state of mutual dependence, interfusion and balance without any contradiction or conflict. This thought essentially argues that there is no relationship of cause and result among phenomena and that things are not formed sequentially. Instead, they constitute the world by the mutual interfusion of complete equality."[24]

According to this theory, any phenomenon exists only as part of the total nexus of reality, its existence depends on the total network of all other things, which are all equally connected to each other and contained in each other.[24]

The Huayan patriarchs used various metaphors to express this, such as Indra's net, a hall of mirrors and the world text. To illustrate the doctrine to Empress Wu, the patriarch Fazang:

"called for a candle and placed it surrounded by mirrors on every side. When lit, the candle was reflected in each mirror, and each of the reflections in every other mirror so that in any one mirror were the images of all the others."[25]

This Buddhist doctrine also includes the views that:[26]

  • "Practicing one teaching is practicing all teachings"
  • Ending one mental defilement is ending all of them
  • Truth (or reality) is understood as encompassing and interpenetrating falsehood (or illusion), and vice versa
  • Good is understood as encompassing and interpenetrating evil
  • Similarly, all mind-made distinctions are understood as "collapsing" in the enlightened understanding of emptiness (a tradition traced back to the Buddhist philosopher Nagarjuna)

Li and Shi[edit]

Another important distinction used by Huayan patriarchs is that of li and shi, noumenon and phenomenon which was explained using the metaphor of gold and lions, or water and waves. According to Paul Williams:

First, noumenon and phenomena mutually interpenetrate and are (in a sense) identical. There is no opposition between the two. The one does not cancel out the other. Second, Fazang explains elsewhere that since all things arise interdependently (following Madhyamika), and since the links of interdependence expand throughout the entire universe and at all time (past, present, and future depend upon each other, which is to say the total dharmadhatu arises simultaneously), so in the totality of interdependence, the dharmadhatu, all phenomena are mutually interpenetrating and identical.[27]

Fourfold Dharmadhatu and meditation[edit]

The theory of the Fourfold Dharmadhatu (sifajie, 四法界) is explained in the "Meditative Perspectives on the Huayan Dharmadhatu" (Huayan Fajie Guanmen, 華嚴法界觀門) and its commentaries.[23] This theory is the central meditative framework for the Huayan tradition. Another key text is the "Cessation and Contemplation in the Five Teachings of Huayan" (Huayan wujiao zhiguan 華嚴五教止觀).[23] The Dharmadhatu is the goal of the bodhisattva's practice, the ultimate nature of reality which must be known or entered into (ru, 入). According to Fox, the Fourfold Dharmadhatu is "four cognitive approaches to the world, four ways of apprehending reality".The four ways of seeing reality are:[23] [28]

  1. All dharmas are seen as particular separate events or phenomena (shi 事). This is the mundane way of seeing.
  2. All events are an expression of li (理, the absolute, principle or noumenon), which is associated with the concepts of shunyata, “One Mind” (yi xin 一心) and Buddha nature
  3. Shi and Li interpenetrate (lishi wuai 理事無礙)
  4. All events interpenetrate (shishi wuai 事事無礙), "all distinct phenomenal dharmas interfuse and penetrate in all ways" (Zongmi).

The three levels of Huayan meditation on the Dharmadhatu correspond to the last three views of the Dharmadhatu are:[23]

  1. Meditation on “True Emptiness.”
  2. Illuminating the non-obstruction of principle and phenomena.
  3. Meditation on “universal pervasion and complete accommodation.”

According to Fox, "these dharmadhatus are not separate worlds – they are actually increasingly more holographic perspectives on a single phenomenological manifold...they more properly represent four types or orders of perspectives on experience."[23] Furthermore, for Huayan, this practice is the solution to the problem of samsara which lies in the "fixation or attachment to a particular perspective. What we think are the essences of objects are really therefore nothing but mere names, mere functional designations, and none of these contextual definitions need necessarily interfere with any of the others."[23]

Other practices[edit]

According to Paul Williams, the reading and recitation of the Avatamsaka sutra was also a central practice for the tradition, for monks and laity.[29]

Another practice which is highlighted in the Avatamsaka sutra is that of Buddhānusmṛti or nianfo-mindfulness of the Buddha.[30]

The tradition also mentions two key samadhis, the ocean-seal samadhi (Ch. haiyin sanmei) and the huayan samadhi (huayan sanmei).[31]

Layman Li Tongxuan developed a unique meditative practice based on the 9th chapter of the Avatamsaka sutra. The practice, named 'the contemplation of Buddhalight' (foguang guan), focused on tracing the universal light which is radiated by the Buddha in one's mind and expanding it further outwards.[32]

Sudden enlightenment[edit]

Huayan favored the teaching of sudden enlightenment. This is because the Buddha nature is already present in all sentient beings and also because their theory of interpenetration entails that Buddhahood is already present at the first stage of a Bodhisattva's path.[33] According to Li Tongxuan:

[T]he first access of faith in the mind of the practitioner is in itself the culmination of the entire path, the very realization of final Buddhahood.... ‘Faith’ or confidence in the possibility of enlightenment is nothing but enlightenment itself, in an anticipatory and causative modality.[34]

Buddhahood was seen as beyond language and stages of practice. Because practices cannot create something that is already not imminent, they were seen as simply revealing what was already there. The patriarch Zongmi formulated his own theory of awakening which was "immediate awakening followed by gradual cultivation" and the view that "immediate and gradual are not only not contradictory, but are actually complementary".[23]

Paradox[edit]

Huayan makes extensive use of paradox in argument and literary imagery. All three types of paradox originate in the tension between conventional and absolute truth. Huayan uses three types of paradox:

1. Emphasizing the concept of śūnyatā, first is asserted that a phenomenon X is empty, which implies that X is not X. An example from Fazang is the assertion:

[W]hen one understands that origination is without self-nature, then there is no origination.[35]

2. Reversing the first paradox by asserting that any empty phenomenon is an expression of the absolute non-duality between emptiness and form, or the identity between conditioned, relative reality and the ultimate truth of tathatā. This paradox is derived from two doctrinal sources:

Fazang's paradoxical assertion illustrates this second type:

When the great wisdom of perfect clarity gazes upon a minute hair, the universal sea of nature, the true source, is clearly manifest.[35]

3. The third variation of paradox is grounded in the Huayan doctrine of the "nonobstruction of all phenomena" (shih shih wu-ai(k)). Each phenomenon is perceived as interpenetrating with and containing all others. This paradoxical violation of the conventional order of time and space is exemplified by Fa-tsang's famous "Essay on the Golden Lion":

In each and every hair [of the lion] there is the golden lion. All of the lions contained in each and every hair simultaneously and suddenly penetrate into one hair. [Therefore], within each and every hair there are unlimited lions.[35]

Classification of Buddhist teachings[edit]

Buddhism was introduced into China in bits and pieces. When the knowledge of Buddhism grew larger, various schools attempted to get a grip on the Buddhist tradition by developing classifications of teachings,[17] such as the Five Periods and Eight Teachings of the Tiantai-school.

The Huayan school developed a fivefold classification:[36]

  1. The Hinayana-teachings, especially the Sarvastivadins
  2. The Mahayana-teachings, including YogacaraMadhyamaka
  3. The "Final Teachings", based on the Tathagatagarbha-teachings, especially the Awakening of Faith
  4. The Sudden Teaching, "which 'revealed' (hsien) rather than verbalised the teaching"[36]
  5. The Complete, or Perfect, Teachings of the Avatamsaka-sutra and the Huayan school.

Huayan and Chan had doctrinal arguments regarding which would be the correct concept of sudden awakening. The teachings of the Chán-school were regarded as inferior by the Huayan teachers. The Chán-school polemitized against this classification, by devising its own rhetorics in defense.[37]

Influence[edit]

The doctrines of the Huayan school ended up having profound impact on the philosophical attitudes of East Asian Buddhism. According to Wei Daoru their theory of perfect interfusion was "gradually accepted by all Buddhist traditions and it eventually permeated all aspects of Chinese Buddhism."[24]

Chinese Chán was profoundly influenced by it, though Chán also defined itself by distinguishing itself from Huayan.[37] Tsung-mi, the Fifth Patriarch of the Huayan school, also occupies a prominent position in the history of Chán. During the Song, the Huayan metaphysics were completely assimilated by the Chán-school.[38]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c d Van Norden, Bryan; Jones, Nicholaos (2019). "Huayan Buddhism". In Zalta, Edward N. (ed.).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Center for the Study of Language and Information.
  2. ^ Hamar, Imre (Editor).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ASIATISCHE FORSCHUNGEN), 2007, page 110.
  3. ^ Hamar, Imre (Editor).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ASIATISCHE FORSCHUNGEN), 2007, page 169.
  4. ^ Cook 1977, p. 24.
  5. ^ Imre 2007, p. 5.
  6. ^ Chengguan, Guo Cheen (2014). Translating Totality in Parts: Chengguan's commentaries and subcommentaries to the Avatamska Sutra. Lanham, Marylan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ISBN 978-0761863090.
  7. ^ Hamar, Imre (Editor).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ASIATISCHE FORSCHUNGEN), 2007, page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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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Williams, Paul, Mahayana Buddhism: The Doctrinal Foundations, Routledge, 2008, 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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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Jump up to:a b Dumoulin 2005, p. 47.
  17. Jump up to:a b Lai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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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Chang 1992, p. 207.
  20. ^ Williams, Paul. Mahayana Buddhism the doctrinal foundations, 2nd edition, 2009, page 141.
  21. ^ Gregory, Peter N. Tsung-Mi and the Sinification of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2, p. 9-10.
  22. ^ Williams, Paul. Mahayana Buddhism the doctrinal foundations, 2nd edition, 2009, page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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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Jump up to:a b c Hamar, Imre (Editor).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ASIATISCHE FORSCHUNGEN), 2007, page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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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Hamar, Imre (Editor).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ASIATISCHE FORSCHUNGEN), 2007, page 1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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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Hamar, Imre (Editor).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ASIATISCHE FORSCHUNGEN), 2007, page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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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Williams, Paul. Mahayana Buddhism the doctrinal foundations, 2nd edition, 2009, page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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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Jump up to:a b Buswell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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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edit]

Further reading[edit]

  • Cleary, Thomas (1995). Entry Into the Inconceivable: An Introduction to Hua-Yen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 Reprint edition. ISBN 0824816978 (Essays by Tang Dynasty Huayen masters)
  • Fa Zang (2014). "Rafter Dialogue" and "Essay on the Golden Lion," in Justin Tiwald and Bryan W. Van Norden, eds., Readings in Later Chinese Philosophy.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ISBN 978-1624661907
  • Gimello, Robert; Girard, Frédéric; Hamar, Imre (2012). Avataṃsaka Buddhism in East Asia: Huayan, Kegon, Flower Ornament Buddhism ; origins and adaptation of a visual culture, Asiatische Forschungen: Monographienreihe zur Geschichte, Kultur und Sprache der Völker Ost- u. Zentralasiens, Wiesbaden: Harrassowitz, ISBN 978-3-447-06678-5.
  • Gregory, Peter N. (1983). The place of the Sudden Teaching within the Hua-Yen tradition:an investigation of the process of doctrinal change,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6 (1), 31 - 60
  • Haiyun Jimeng (2006). The Dawn of Enlightenment - The Opening Passage of Avatamsaka Sutra with a Commentary, Kongting Publishing. ISBN 986748410X
  • Hamar, Imre, ed. (2007),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Wiesbaden: Harrassowitz Verlag
  • Prince, Tony (2020), Universal Enlightenment - An introduction to the Teachings and Practices of Huayen Buddhism (2nd edn.). Amazon Kindle Book. ASIN B08C37PG7G

External links[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