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0

당신이 아는 북한은, 사실 북한이 아니었다 :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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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아는 북한은, 사실 북한이 아니었다
기사입력 2018-05-08 23:16 최종수정 2018-05-09 11:21 기사원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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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박한식·강국진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 [박세열 기자]

2009년 오바마 대통령 시절 미국인 기자 유나 리, 로라 링이 북한에 의해 억류됐다. 그들의 석방을 위해 방북 길에 나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몰려든 미국 기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세한 것은 박한식 교수에게 물어보라."


박한식 교수. 1939년생, 만주에서 태어났다. 해방 시기, 평양 피난민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분단이 되면서 경북 청도로 내려왔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쳤다. 가르치던 학생의 소개로 조지아 주지사였던 지미 카터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카터를 통해 덩샤오핑을 만났고, 덩샤오핑의 주선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이후 50여 차례 평양을 방문, 북한의 실상을 직접 보고 연구했다. 지미 카터,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중재했고, 미국의 주요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조언을 해온 그는 현재 미국 내 최고의 북한 전문가 중 한 명이다.


4.27 남북정상회담 직전 박 교수의 책이 나왔다. <서울신문> 강국진 기자가 묻고 박 교수가 답한 대담집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 펴냄)는 현시점 남북, 북미 관계의 전후 맥락을 설명해 주는 최고의 해설서이자, 북한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훌륭한 입문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북한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북정책 조정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는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 정부와 교섭해야 한다"고 했다. 분단 이후 반세기 넘게 우리는 북한의 이미지를 구축했고, 그 이미지를 상대해 왔다. 숱한 선거, 격동의 정치 속에서 구호와 적개심을 재료로 북한을 창조했고, 창조된 북한을 상대로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워 왔다.


박 교수는 "우리가 북한에 대해 명확하게 아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붕괴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닳고 닳은 '북한 붕괴론'이라는 점"이라고 했다.


북한 붕괴론의 역사는 길다. 1948년 북한 정부 수립과 함께 시작됐다는 것이 박 교수의 견해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북한 붕괴가 시간 문제라고 봤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한 교수는 북한이 빠르면 사흘, 늦어도 3년 안에 무너질 것'이라고 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통일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라고 했다. 1997년 황장엽 망명 때도 신문 방송에서는 북한이 붕괴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도 북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실상 '종교적 도그마 수준'인 북한 붕괴론을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별다른 근거 없이 맹신했다.


결국 북한 붕괴론은 허상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북한'이었다. 허상 위에 쌓은 정책이 실적을 낼 리 만무하다. 지난 10년간 미국과 한국 정부는 '전략적 인내'의 모순적 조어로 상징되는 위험한 '기다림'만 이어갔을 뿐, 노벨평화상을 '미리' 수상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됐던 '이명박근혜' 정권은 대북 정책에서 완전한 실패자들로 기록됐다.


아인슈타인은 '미친 짓(Insanity)'의 정의를 내리면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일'이라고 했다. 잘못된 인식,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대북 정책을 펴 왔는데,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나서길 바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지난 반세기 가까이 '북한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금기로 하면서 똑같은 일들을 반복해왔다. '지금까지 방식이 잘못됐으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하는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강제된 사유를 체화해 인식론적 오류를 숱하게 범하면서도 '빨갱이'로 몰릴까 봐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북한은 우리 사회의 자유롭고 객관적인 사고를 억압하는 가장 강고한 기제였다.


이제 그것을 깰 때가 왔다. 복잡하게 얽힌 북한 문제를 쾌도난마 식으로 풀어가는 박 교수의 식견을 따라가다 보면, 북한이라는 '유령'의 실체를 새롭게 볼 수 있다.
▲ 조지아대학교 매거진에 실린 박한식 교수. ⓒ조지아대학교
우리는 '북한의 사회 시스템'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독재 치하에서 못살고 탄압받는 인민들의 나라다. 보수 언론 중심의 단편적이고 왜곡된 (심지어 확인조차 불가한) 보도는 북한을 '환상'의 영역에 고정시킨다. 오늘 보도되는 북한은 엄혹한 중세 시대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지만, 내일 보도되는 북한은 '돈맛'을 본 인민의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의 사회다. 시스템에 대한 접근 없는 개별 사건들의 나열,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와 추상적 '수치'들의 건조한 팩트만 어지럽게 제시될 뿐이다.


이를테면 북한에 '장마당'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장마당'의 시스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박 교수가 장성택 처형의 맥락과 의미를 '장마당'의 대치 개념으로 묶어 해석한 부분은 특히 주목할 만 하다.


"(장마당은) 돈을 벌어서 자신들이 다 갖는 것이 아니라, 각 단위에서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고, 그 단위에서 수익을 갖는 구조입니다. 평양에 유명한 약장 골목이 있는데 서로 자기 집 약을 팔기 위해 호객 행위를 하며 경쟁깨나 벌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게마다 속해 있는 생산 단위가 있어 매상이 오르면 그 단위의 성적이 올라가고 상여금도 받게 됩니다. 집단과 집단 간 경쟁이 있는 것이지, 개인과 개인의 경쟁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북한에서 '경제 발전'은 확고하게 국론으로 자리를 잡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다만 장성택 처형을 계기로 '장성택 방식'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성택 방식은 자본주의 방법으로 사유재산, 개인주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성택은 국가 이름으로 거래하면서 자신의 개인 재산을 중국 은행에 축적한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북한 체제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장성택의 가장 큰 죄가 개인주의였던 것에는 이런 맥락이 있습니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데 장성택은 그렇지 못한 행위를 저질렀고, 더욱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거북한 존재가 되면서 일종의 혹으로 인식된 셈이지요.


한마디로 북한의 시장은 통제되는 시장입니다. 중국도 경제적으로 자본주의화가 되었지만 공산당이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북한도 노동당의 통제하에서 자본주의적 요소와 경제성장을 도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단위'가 성과를 올리는 시스템. 이 '단위'라는 것은 일종의 '협동조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쿠바가 1990년대 경제 위기를 겪은 후 협동조합 단위를 발전시켜 급속한 개인주의화를 막고 자본주의적 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것과 같은 맥으로 읽을 수 있다. 쿠바가 극심한 제재에도 내부 경제를 탄탄히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북한 역시 비슷한 방식의 체질 개선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고 있는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몇몇 탐욕스러운 상인'들이 북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일반적 해석들과는 다른 '시스템'이 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개인 재산 축적'의 상징으로 지목된 장성택의 처형과 관련해서는 조금 더 복합적인 해설을 곁들인다.


"2013년 12월에 있었던 장성택 처형은 (…)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에게 장성택을 누가 죽였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저는 '모른다'고 답할 것입니다. 제가 평양에서 들은 바를 종합해보면 조선노동당의 여러 최고위급 간부들이 협의한 끝에 장성택을 처형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결정 과정에서 눈물을 흘린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당 차원에서 '당과 국가를 위해 살려둘 수 없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에서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시 '당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수령'의 나라 북한은 '수령'이 없는 체제로 24년을 이어왔다. 북한의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김정은과 몇몇 엘리트가 아니라 '조선노동당원'들이다. 박 교수는 "조선노동당은 거대하고 구심력이 매우 강한 복합체로 당원 규모가 360만 명이나 됩니다. 북한 전체 인구가 약 2500만 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조선노동당이 얼마나 방대한 조직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조선노동당원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철저한 능력주의에 입각해 있어 승진을 하거나 중책을 맡는 일 모두 집단적인 평가 과정을 거친다. 한국에서는 '당원=특권층'의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북한 체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고정관념이다. 당원과 일반 대중의 '계급'이 존재하고, 그것이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보수 정치인들의 말대로 민중 봉기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선노동당과 인민 대중은 결합돼 있다고 한다.


쿠바를 수십차례 방문해 연구한 미국의 학자 아널드 오거스트가 쓴 <쿠바식 민주주의 : 대의민주주의 VS 참여민주주의>(삼천리 펴냄)에서는 '쿠바는 독재국가', '쿠바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미국인들의 통념을 깨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의회가 없는 쿠바에서는 수많은 '인민 조직'들이 의회를 대체하는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쿠바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을 목격한다. 쿠바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의 의사가 정치에 실제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도 비슷하다. 북한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만든 체제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만든 체제에 그들이 익숙하기 때문이며, 삶의 불만을 해결하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이 단순한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박근혜의 '망루 망신'…북핵 중국 책임론의 허상


▲ <선을 넘어 생각한다>(박한식·강국진 지음, 부키 펴냄) ⓒ부키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허상'이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유행했던 관점이 이른바 '북핵 중국 책임론'이었다.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는 물론, 한국의 공무원들, 심지어 기자들 역시 '북핵 중국 책임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북핵 위기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중국을 압박해야 한다'는 시론이 언론사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북핵 중국 책임론'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정말 중국은 북한을 움직일 힘이 있으면서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일까? 박 교수는 이 같은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에 주목한다.


"북핵 중국 책임론이 나온 정치적 맥락을 살펴보면 그 허구성이 바로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북핵 중국 책임론'은 조지 W.부시 행정부의 작품이나 다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 정부는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막으려고 한다는 점을 이용하는 동시에 북핵 전략 부재에 따른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서 북핵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중국에 공을 넘겨버렸던 것입니다. 미국측 인사의 다음 증언은 이 프레임의 전략적, 전술적 유용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정말 중국이 북한에 결정적인 압력을 가하거나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것은 나름대로 유용했다. 특히 미국이 북핵 문제를 두고 공개적으로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지렛대를 유지하는 것은 미국에 전략적 도움이 된다. (이성헌 '북핵의 중국 책임론과 미국의 외교 전략' 성균차이나브리프, 2014. 118~123쪽)'


미국 정부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알리바이를 손에 넣은 셈입니다. 언론에서 북핵 문제에 왜 진전이 없느냐고 물으면 미국 정부 관계자는 그냥 '중국이 협조를 안 해서'라고 답변하면 만사 오케이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이 같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런 프레임에 그대로 포섭되었습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 외교 정책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주는 반면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근혜 정권에서 '중국 책임론'은 특히 도그마처럼 받아들여졌다. 청와대 참모진은 '중국 역할론'에 단단히 중독되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책임론'이라는 허상을 이용하기 위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 '망루 외교'를 펼쳐 한국의 보수 세력마저 당황케 했다. 천안문 망루에 선 박근혜 대통령은 이듬해에 (중국 견제 의도가 담긴) 사드 도입을 추진하는 극도로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 결과는 다들 아는 바다.


이명박 정부는 그래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려고 시도했었다. 역대 대북 문제에서 가장 무능한 정권은 박근혜 정권이었다. '전략적 인내', '기다리기'를 넘어서 개성공단 폐쇄를 단행했다. 적극적 행동에 나섰다. 잘못된 정보, 잘못된 인식에 토대한 행동이 얼마나 문제 해결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북한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알고 있는 북한'만 중요했고 '있는 그대로의 북한'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남한은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 미국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달랐다. 중국과 구소련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다. 북한의 생존 방식이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양대 축 중 한쪽에 경도될 경우 난감한 상황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조선노동당 관계자에게서 "세상 모든 나라 중에서 제일 의존하면 안 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주성'을 특별히 중시하는 북한이나, 다목적 포석으로 북한과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 '중국 역할론'은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북한 인권 문제와 탈북자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


박 교수는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해석을 내놓는다.


1994년 7월 기자회견을 자청해 "북한이 현재 핵탄두 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탄두 5개를 추가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주장한 강명도 사건을 예로 든다.(강명도는 자신을 북한 정무원 총리 강성산의 사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중에 드러난 것은 이 기자회견 자체가 청와대 지시로 급조됐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측은 "기자회견을 하라고 지시했고, 그 이유는 북핵 협상이 한국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2000년대 초반 탈북자 김운철이 북한 내 강제 수용소와 고문, 처형 등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증언했을 때, 전 세계 언론이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스스로 김운철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박충일이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드러났다. 1997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돈벌이를 하다 다섯 번이나 중국 당국에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됐다 탈북한 인물이었다.


최근 사례로는 신동혁이 있다. 그는 스스로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난 탈북자라고 주장했고, <14호 수용소 탈출>이라는 책을 냈다. 오바마 행정부 국무장관이었던 존 케리가 "북한의 인권 탄압을 알리는 살아있는 표본"이라고 선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신동혁은 4호 수용소에서 태어났다고 했다가 후에 이를 번복하는 등 수차례 증언을 바꿨다. 신동혁의 지인인 정광일 씨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동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14호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지적해도 다른 사람들은 시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더라. 동혁이는 국내에선 별 활동을 안 했다. 들통날까 봐 두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관련해 싱가포르 경영대학교 송지영 교수가 쓴 글을 인용했다.


"탈북자들은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나 미국 의회, 서구 언론을 불문하고 질문은 한결같다. '왜 북한을 떠났나? 그곳에서의 삶은 얼마나 끔찍했나?' 그들의 이야기가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 국제적인 행사에 초청받는 일이 늘어날수록 수입이 늘어난다."


북한 인권 문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국정원의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의 본질도 비슷하다. 국정원은 유우성 씨 동생에게 '남한에서 정착해 살 게 해 주겠다'는 것을 미끼로, 거짓 증언을 이끌어냈다. 국정원은 애초에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 스스로 상상해낸 북한의 모습에 사회적 약자인 북한 이탈 남매의 삶을 끼워 맞춰 넣었고, 겁박과 강요를 통해 원하는 말을 수집했을 뿐이었다. 북한의 인권 문제든, 간첩 조작이든 탈북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북한 인권 실태를 과장해야 하고, 간첩이 끊임없이 잡혀야, 지금 현재 우리의 시스템이 우위에 있으며, 간첩을 잡아들일 만큼 건재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 교수는 탈북자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길 권한다.


"저는 탈북자 문제를 접근하는 기본 방식으로 두 가지 측면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먼저 이들이 한국에서 불법 체류를 하는 이주 노동자와 본질상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입니다. 탈북자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의 흐름에 따라 저임금 지역에서 고임금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탈북자들이 평범한 사람이다. 이들을 모두 '투사'로 만들어내 북한을 악마화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웜비어 사건'부터 '대북 퍼주기'의 허상까지, 당신이 궁금해하는 북한


박 교수는 북한 정치 체제와 사회 체제에 대한 실증적 지식을 토대로 민감한 사안을 거침없이 풀어 설명한다. 웜비어 사건 등 북한의 외국인(특히 미국인) 억류 문제를 비롯해, 숱한 오해를 낳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내놓는다. '극우' 성향의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김용갑 전 의원이 '작명'한 '대북 퍼주기'라는 환상을 깨고, '통일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통설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박한다. 나아가 북한 비핵화, 남북 경협, 북미 관계, 북일 관계 등을 조망하고, 전망까지 제시한다. 경제 분야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대한 기대감도 묻어난다. 트럼프 대통령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트럼프 스타일이 남북 문제에 끼칠 영향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5월 3일 자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4월27일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특별히 눈치채지 못한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비핵화가 남북이 아니라 북·미 간의 문제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비핵화가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북·미 간 문제라고 얘기하면 친북, 종북, 북한 대변인 소리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남북정상회담이 비핵화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징검다리였다는 점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 인식은 서서히 바뀌어 간다. 이 교수가 지적한 것과 함께, '북한에 관한 우리 안의 허상'을 깨는 것은 남북 평화 체제로 가는 첫 단계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유용하다. 상대를 이해하고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과 친해지기'에 대한 공포가 깨질 때, 남과 북은 비로소 공존할 수 있다. 그래야 공존의 다음 단계인 통일의 구체적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강국진 기자는 박한식 교수의 글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꼼꼼한 팩트 체크를 거쳐 풀어냈다.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사안이지만 호흡이 빠르고 술술 읽힌다.


북한을 공부할 때다. 북한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허상을 통째로 깨야 한다. 이 책은 북한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서 훌륭한 입문서다.

박세열 기자 (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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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ka****
당신 식솔 3대를 다 끌고 북한에서 산다면 인정.말장난 아주 지긋지긋하니까.. 그녕 실천으로 보여줘요.
2018-05-08 23:45:28접기요청
답글8
공감/비공감공감81비공감34
rome****댓글모음
대박! 바로 이런 팩트가 우린 필요해
2018-05-09 00:04:09접기요청
답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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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beercoffeesoda
박한식 교수는 사상이 빨갱이죠. 탈북자들을 거짓말장이로 모는 사람. 나이 헛먹었죠. 북한 주민 인권 얘기는 거의 안하는 분이죠.
2018-05-08 23:44:01접기요청
답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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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n****
인지부조화가 생기니깐 이런 궤변도 북괴광신도들한테는 먹히는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황장협을 비롯한 북한고위급 인사들은 모두 그럼 만화책보고서 김일성 일당공산독재에 대해 비판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김정은이가 조선노동당의 결정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김정은이는 착한데 건드리지마라? 넘 웃겨서 배가 터질지경이다 ㅋㅋㅋㅋㅋ
2018-05-09 00:04:17접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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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9****
아주 흥미롭고 의미있는글이네요 지금것 읽었던 그 어느글보다도 북한에대한 그리고 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대한 아주 정확한 진단이네요
2018-05-09 00:55:53접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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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7****
북조선 로동신문 이냐? 간첩새키가 기사쓴거같네
2018-05-08 23:47:55접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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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h2****
북한을 제대로 알자는 거지 북한의 체제가 좋다 나쁘다를 얘기한 건 한 줄도 없는 기사에 빨갱이 소리가 나오다니 기사를 다 읽기는 한건가?
2018-05-09 12:38:24접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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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in****
하도 여론조작을 해대니까 이제 이런빨갱이들 기사에도 무슨댓글이 올라올까 걱정스럽다.제발 북찬양하고싶으면 직접 북한가서 살아라
2018-05-09 00:13:20접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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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b****
지 마누라 딸래미 먼저 북한에 일년 살아보라하고 보내면 인정한다.
2018-05-09 00:18:40접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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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on****댓글모음
지겹다 지겨워 아직도 댓글에 빨갱이 빨갱이...지금 시대가 어떤시댄데 참한심한 xx 어려서 방공교육을 너무 잘받아서 그런가 내가보기엔 지금것 해온짓 보면 자유한당이 빨갱가 하는짓 보다 더하던데
2018-05-09 07:50:12접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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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재팬 패싱’ 우려 불식 안간힘 - 경향신문



아베 ‘재팬 패싱’ 우려 불식 안간힘 - 경향신문
아베 ‘재팬 패싱’ 우려 불식 안간힘도쿄 | 김진우 특파원
입력 : 2018.05.09

ㆍ한·중 정상 리더십 칭찬하며
ㆍ‘납치 문제’ 해결 협조 구해
ㆍ‘외교 이벤트’ 효과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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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외교의 아베’ 이미지를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 한반도 정세를 둘러싸고 일본만 ‘모기장 밖’ 신세가 되는 ‘재팬 패싱(소외)’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잇따른 스캔들로 난국에 빠진 정권을 한·중·일 정상회의 등 ‘외교 이벤트’를 통해 부양하려는 의도도 읽힌다.

일본은 최근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외교적 설 자리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간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 등 대북 압력론으로만 일관하다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예정되면서 일본만 ‘왕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지난달 말 황급히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한 것도 이런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다.

9일 2년 반 만에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는 아베 총리에겐 모처럼 잡은 기회였다.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논의 테이블에 일본 측 의제를 올리는 한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상호 방문 실현 등 일본의 외교력을 회복할 계기였던 셈이다.

이런 의도는 한·중 정상을 추어올린 아베 총리의 발언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축복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을 칭찬한다. 판문점선언문에 완전한 비핵화가 포함된 것을 평가한다”고 말했다. 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번주 중국을 방문했다. 시 주석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측 의제가 관련국 논의에 포함돼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공동발표에서 “납치 문제 조기 해결을 위해 두 정상에게 협조를 부탁했고, 일본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의도대로 일본이 ‘모기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아가 외교적 주도권을 회복할지는 미지수다. 이날 한·중·일 정상회의도 전날 북·중 정상회담 소식으로 인해 일본의 고립감이 두드러진 측면이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은 두 번이나 북·중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일본이 쓸 ‘지렛대’는 당장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이 일본의 경제 원조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서 훨씬 뒤의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야당인 입헌민주당 쓰지모토 기요미 국회대책위원장은 이날 “ ‘도넛 외교’(한·중이 빠지는 등 가운데가 뚫린 외교)를 해오면서 중국·한국과 신뢰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문제에서 ‘모기장 밖’에 놓인 상황”이라면서 “(지금은) 당황해서 필사적으로 따라잡고 싶다는 모습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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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91607001&code=970100#csidx47a48ece664579aa7afb772427d8bec

4차 산업과 통일조국, ‘자유민주주의’여 안녕한가? - 통일뉴스

4차 산업과 통일조국, ‘자유민주주의’여 안녕한가?<기고>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교수
김상일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8.05.10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아 본 사람들은 검사와 판사가 한결같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 말은 ‘자유민주주의’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피고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전복하려 했기에 엄중이 벌하고 다스려야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신성불가침적 존재라는 것은 국가보안법 재판을 한 번 받아보면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변호사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해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끝까지 강조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자유민주주의’란 말, 더 없이 아름다우면서, 더 없이 고통을 주는 말. 당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에 수긍할 것이다.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4차 산업화와 함께 제일 먼저 사라질 것으로 ‘자유주의’라고 본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현금 자유민주주의를 새 헌법과 검정 국정 교과서에서 다루는 문제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각을 세우고 있다. 양쪽 모두 다가오는 미래 산업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 같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은 신문 5월 5월 자 ‘오피니언’ 난에서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위대한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상언 논설위원은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가 중.고교 검정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 중,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뺀 ‘민주주의’만 하라고 한 데 대한 보수 언론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신성불가침인 것이 추락하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 어디에도 신성한 것 같은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신성한 것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고, 신성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요구사항 일 뿐이다. 지금까지 인류 문명사에서 과거에 신성하다고 하던 것이 추락 안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신마저 니체에 의하여 그 사망선고를 받았고, 중세기의 그 신성하다던 로마 교황의 오늘날 처지를 보라. ‘자유민주주의’ 역시 그 신성불가침의 권좌의 자리에서 내려 올 때가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4차 산업의 시대로 온 세계가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라리의 말을 들어 보자. “오늘 날 세계는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가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과학이 이 자유주의 질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호모 데우스, 386쪽)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유에 높은 가치를 둔 이유는 인간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중세기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와 그 이후에도 서구적 인간관을 지배해 온 사상이다. 이 자유주의가 그 자체로서 위험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리스 철학과 결탁되면서 존 로크, 루소, 제퍼슨 같은 계몽주의 사상 속에도 스며들었다는 데 있다.

자유의지란 말 속에는 인간의 내면에는 부셔지거나 파괴될 수 없는 알갱이 같은 자아(에고)가 있고, 이 자아는 자유의지를 조종하는 운전자와 같다. 다시 말해서 서양적 자아는 개인주의적이고 그것은 파괴될 수 없는 원자(아르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아 자체가 없거나 불가능하다면? 4차 산업이 자아의 허구를 증명할 것이다.

20세기 과학에 의해 이러한 아르케와 같은 실체는 양자물리학에 의하여 여지없이 부정되었고, 4차 산업의 유전자 공학과 생명공학에 의하여 자아의 존재와 자유의지가 설 자리는 없어졌다. 이는 곧 자유주의의 근간과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언 논설위원은 성균관대 최준선 교수의 말을 인용, “민주주의는 권력의 행사 주체가 국민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선택의 권리와 책임의 의무를 갖고 미래를 개척하며, 자아실현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이다.”

그럼 과연 그런가? 과연 최 교수가 말한 대로의 자유민주주의가 지켜 진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이상은 논설위원은 “학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정보기관의 여론조작, 정부의 문화 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 재벌의 갑질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여 교과서에서 자유를 지우지 말라’고 이상언은 강변하고 있다.

묻고 싶다. 왜 이 논설위원은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엔 이런 논설을 쓰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란 말이 사람 잡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진데, 자유민주의란 말을 교과서에 그대로 둔다는 것은 그 수단을 그대로 두자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를 그대로 두자고 하는 말은 문재인 정부도 과거 정부 때와 같이 자유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정보 사찰을 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도 좋단 말이지 않는가?

보수 언론이 이런 자가당착적인 논리를 전개할 경우 이와 같이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고문과 구타를 함부로 해 온 것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란 이름이고 행태일진데, 이를 알면서도 이를 지키자고 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 역시 정보사찰이나 블랙리스트를 감시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가 불가결하다는 논리가 아닌가?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4차 산업과 함께 발달된 알고리즘algorithm은 유기체로서의 생명체 속에서 자유의지 같은 것, 혹은 자아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 발견할 수도 없다고 한다. 8만 년 전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에게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 같은 것이 있다는 상상의 산물이 4차 산업의 등장과 함께 자취도 흔적도 없이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종언을 고하고 초인 ‘호모 데우스Homo-Deus’로 대변화가 이미 도래해 왔다.

호모 사피엔스가 동물을 사육하고 가축화 하듯이, 앞으로 호모 데우스는 호모 사피엔스를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한다. 현생 인류는 멸종이 되든지 아니면 초인의 가축이 될 것이다. 동물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듯이 앞으로 호모 사피엔스도 그렇게 될 것이다.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이 인간을 하나의 기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면 이런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변해, 20세기에 들어 인간은 유기체적인 존재로 여겼지만, 4차 산업과 함께 로봇이나 사이보그 같은 존재는 알고리즘의 구조로 된 기계와 같은 존재로 다시 탄생하였다. 무기체가 유기체를 압도하는 전도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리 알고리즘을 쉽게 이해하면 동양의 역에서 말하는 괘卦와 같은 것으로서 0과 1의 비트의 조합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해 두는 것은 알고리즘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양에서는 알고리즘이 만물 속에서 작동하고 존재는 유기체와 무기체의 조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1.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생명이나 자아 그리고 자유 같은 것도 모두 알고리즘이며 생명이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2.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기 때문에 의식을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사이보그 같은)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544쪽)
3. 미래의 종교는 알고리즘 데이터교로 통일 될 것이다.

서구 사회는 이런 세계를 ‘멋진 신세계’라고 한다. 우울증 환자를 진찰 한 결과 뇌 속에 넣어 둔 칩에 배터리가 닳은 것이 원인이었다. 배터리를 새로 갈아 주니 우울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경두개 직류 자극 헬멧을 쓰니 전쟁에서 두려움 같은 것도 완전히 사라진다. 진통 같은 것도 유전자 알고리즘에 의하여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칩을 몸속에 넣어 두었다가 이를 의사에 보내면 인간의 수명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이를 ‘길가메쉬 프로젝트’라 한다. 쉽게 말해 ‘진시황제 프로젝트’라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세상이 오면 우리를 괴롭히던 자유민주주의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아니 적어도 문명의 초기 농경문화가 등장하면서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의 지고의 가치이던 자유의지라는 것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 확실하다. 자유의지가 무용지물이 되면 자유민주주의도 사라질 것이다.

통일조국과 함께 이러한 4차 산업화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가 ‘자유’라는 말을 교과서에서 제거하려고 할 때에 이러한 4차 산업의 도래를 의식한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유기체와 무기체가 알고리즘에 의하여 결합된 사이보그가 호모 데우스로 등장해 호모 사피엔스를 가축하는 그날까지 생각해 지금부터 헌법과 교육 지침을 만들어야 하는가? 너무 앞서 가고 성급한 주장일까? 아니라고 본다.

최근 하버드 대학교 조지 처지 교수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현생 사피엔스 여인의 자궁에 넣어 3만 년 전에 사라진 우리의 조상을 재생시킬 것이라 한다. 많은 여인들이 이에 동참하려 한다고 한다. 이들에게 자유민주주란 무슨 의미가 있고, 인권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3만 년 전 유인원과 같이 산다면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이고,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도 국가보안법은 유효할 것인가?

확실히 인권과 자유의지, 그리고 인간의 자아에 대한 개념 정리를 다시 할 순간에 서 있다. 이 순간이란 바로 호모 사피엔스 종언의 순간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에 즈음하여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남북이 합작하여 새로운 설계를 해야 될 순간이 되었다. 북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남북이 같이 노력해 핵보다 더 위대하고 큰 시너지 효과를 해 낼 수 있지 않을까? 4차 산업은 앞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포함해 19-20세기 적폐들을 다 삼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첫째 생명공학, 둘째 사이보그 공학, 셋째 비유기물 공학(로봇공학) 같은 것을 남북 합작으로 성공시켜 나가면 한반도에서 새로운 문명이 분명히 탄생할 것이다.

통일조국에서 북한에 가 부동산 투자하고 여행 다닐 꿈만 꾼다면 서글프지 않는가? 남북이 지혜를 모을 때에, 이 세 가지의 발전이 결코 ‘1984년’과 같은 세상이 아닌 진정한 사람 하나하나가 사회 관계망 속에서 중심이 되는, 호모-데우스를 너머 ‘호모-호모 Homo-Homo’의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것은 이미 동학이 예견한 인내천人乃天의 세상일 것이다.

동양의 불교적 세계관은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의 세계가 참된 세계라고 했다. 애시당초부터 서양식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음양오행에 의하면 오행 가운데 목木은 유기체이고, 금金은 무기체이다. 금과 목이 서로 상생상극 하여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 말 속에는 유전자 공학과 생명공학을 맞이할 사상적 준비가 우리 가운데 있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과학은 이러한 상생상극 관계를 모른 채 4차 산업에 진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양은 지금 유기체와 비유기체의 결합을 성공시키려 하고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왜 가능하고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이 될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사이보그와 로봇에 대해 경외감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다.

칩과 같은 비유기체가 유기체인 몸과 어떻게 조화가 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아직 없다. 데카르트가 두 세계를 단절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치과에서 임플란트는 두 세계의 연결 고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눈과 귀에서도 앞으로 비유기체 같은 칩을 넣으면 생화학 작용을 하여 인체의 신경망과 잘 조화 될 것이라 한다.

동양적 지혜는 오랜 고대로부터 양자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목생화-화극금-금극목 이라는 상생상극의 조화 관계를 다시 되돌아 생각해 보면서 이런 세계관에 맞는 정치 철학과 교육 이념을 발견해야 될 순간에 우리는 서 있다.

서양의 자유민주주의와 유일신관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유일신관도 종언을 고할 것이다. 통일조국 한국에서 4차 산업의 신문명을 통일과 함께 탄생시킨다는 것이 우리의 몫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서양은 지금 유기체와 비유기체의 결합을 성공시키고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왜 가능하고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이 될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사이보그와 로봇에 대해 경외감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양적 지혜는 오랜 고대부터 그 관계를 알고 있었다. 서양의 자유민주주의와 유일신관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유일신관도 종언을 고할 것이다. 4차 산업은 이미 수천 년 전 우리의 지혜 속에 들어 있었다. 우리 사상으로 무장된 ‘멋진 신세계’, 곧 통일 조국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5월의 신록만큼이나 가슴 벅차고 살 맛 나지 않는가?

한국의 정보기관과 사법부는 앞으로 사이보그를 어떻게 국가보안법으로 다룰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음양오행의 균형 있는 감각으로 다루어 주기를 바란다.

[윤평중 칼럼] 한반도 2國 체제가 현실적 대안이다 : 조선일보 - 사설ㆍ칼럼 > 외부칼럼 > 윤평중 칼럼



[윤평중 칼럼] 한반도 2國 체제가 현실적 대안이다 : 조선일보 - 사설ㆍ칼럼 > 외부칼럼 > 윤평중 칼럼

[윤평중 칼럼] 한반도 2國 체제가 현실적 대안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 2018/03/16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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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미·북 정상회담 소식이 세계를 강타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외교로 한국 정부의 운신 폭도 넓어졌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미·북 대화는 예정된 절차였다. 핵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제2의 한국전쟁은 관련 당사국 모두에 아마겟돈의 파국을 뜻한다. 남·북·미·중 모두 외교적 해법을 바라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그럼에도 한반도를 괴롭혀온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단칼에 잘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안갯속 한반도 상황을 돌파하려면 오히려 남북 2국 체제 모색이 급선무이다. '한반도 2국 체제'는 남북한이 별개 주권국가로서 엄존한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남북이 이런 현실을 수용하고 정상 국가로서 수교해 상호 교류와 경제 협력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1년 9월 18일 유엔 동시 가입으로 별개 독립 주권국가임을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전체 회원국 159곳의 만장일치 승인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2국 체제론은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 남과 북의 두 국가가 '결손(缺損) 국가'에 불과하다는 분단 체제론의 비판도 단호히 거부한다.

분명 남북통일은 고귀한 소망이다. 같은 민족끼리 잘 살아보자는 꿈은 엄청난 감성적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낭만적 민족 통일론이 평화를 해치고 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교훈은 역사의 비극적 아이러니이다. 6·25전쟁은 북한판(版) 민족 통일론을 북이 무력으로 강행한 결과 빚어진 대(大)참극이었다. 6·25 후에도 남북은 국력 경쟁에서 앞선 쪽이 공세적 통일 담론을 주도해 왔다. 1970년대 초까지는 북이 통일론을 이끌었고 남북의 국력이 역전된 뒤엔 한국이 통일론을 견인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목격했듯 핵이라는 절대무기를 쥔 북한이 남북통일을 앞장서 외치는 게 지금 상황이다.

평화 협상을 거쳐 상호 대등하게 통일한 분단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사의 통절한 교훈이다. 베트남은 무력 통일 되었으며 예멘은 평화 통일의 첫 단계가 무너진 후 무력 통일로 귀결되었다. 독일은 일방적 흡수 통일이었다. 남북통일의 이치도 하등 다르지 않다. 통일이란 이름 아래 한국 시민들이 자유와 풍요를 포기할 리 없다. 통일의 대의(大義)를 위해 김정은이 유일 권력을 내려놓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 공화정과 북한의 유일 체제를 동등하게 통합한 제3의 통일 국가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섣불리 통일하려는 시도가 평화를 가져오기는커녕 무력 충돌과 전쟁을 부르게 될 필연적 이유이다.

한반도 2국 체제에서 남북은 다른 나라들과도 교차적 외교 관계를 맺게 된다. 한국이 북방 정책을 통해 중·러와 수교한 것처럼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도 필지할 사실이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교차 승인으로 남북 적대 관계를 끝내는 그림이다. 이 구도야말로 한반도 평화 체제의 본격 출범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는 통일에서가 아니라 굳건한 2국 체제의 정립에서 나온다. 한반도 2국 체제는 영구 분단으로 이어지기는커녕 궁극적 통일로 가는 단 한 가지 합리적 방안이다. 이는 우리가 정치적 상상력을 1세기 단위로 확장할 때 나오는 불가피한 결론이다.

한반도 문제를 푸는 데 정치적 현실주의가 시금석이 되어야 마땅하다. 북한 핵과 중국의 존재는 한국의 북진 통일이나 흡수 통일을 불가능하게 한다. 한국의 민주 공화정과 주한 미군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는 결정적 힘이다. 미국에 한반도는 중국과 벌이는 세계 주도권 경쟁의 최전선에 자리한 핵심 요충지이다. 그 군사적 교두보이자 세계 10대 경제 강국인 동맹국 한국을 '세계 제1 패권국 미국'이 포기할 전략적 이유는 전무하다. 따라서 언젠가 이루어질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의 전망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생각하는 게 대한민국 국익에 이롭다.

전쟁 불가피론자들은 대북 선제공격이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숙고해야 한다. 제2의 6·25가 한반도 전체를 파괴해도 남북통일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음에도 전전(戰前)의 분단 상태로 복귀한 6·25전쟁이 반면교사다. 한반도 2국 체제는 '전쟁 없는 한반도'로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그리고 김정은의 핵 포기 없이 남북 2국 체제는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은 차분히 한반도 2국 체제를 준비해야 할 때다. 모든 난제를 단칼에 풀 절대 보검(寶劍)은 없다. 정상회담에 대한 장밋빛 기대는 절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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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의 100자평 (34)
지수빈( sueb**** )

2국체제는 김정은에게만 유리하다. 김정은은 영구적으로 한국과 미국에 핵위협을 가할것이다. 김정은은 수세에 몰리니 이단 거짓말할뿐... 절대 핵포기 않는다. 두번 다시 속는다면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리질것. 김정은을 조용히 없애버리는 게 최선책이다.
2018.03.18 15:55:42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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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박( koy**** )

뭔 얘기냐?미북이 수교하면 김정은은 반드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고 할것은 명약관화하다.문재인의 정체는 아예 모르거나 괘념치도 않겠다는 논평이다.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이유도 전무하다고 했는데 동의 하지 않는다.문재인이 반미 친북 친중으로 나가면 한국을 포기할수도 있다.2국체제가 현실적 대안이라면,우리도 핵을갖자고 말을해야 맞는다
2018.03.17 19:01:09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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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렬( booche**** )

나는 미 북수교로 가는 것이 이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 북수교는 반드시 북한에 비핵화가 되어야만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비핵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 북수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2018.03.17 12:34:03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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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열( jiny**** )

남한이 핵을 갖게 된다면 2국 체제도 나쁘진 않다. 즉 실현 가능성이 별로다.
2018.03.17 12:17:39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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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진( castl**** )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고 남북 2국 체제로 이행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30년동안 온갖 자원 다 바치고, 김대중, 노무현 남한 좌파의 자금 지원 받아가며 만든 핵을 김정은이 포기한다? 현실적으로 한반도 미래 시나리오는 두가지밖에 없다. (1) 한미동맹과의 전면전으로 북한 패망 후 통일. (2) 국제 제재 하에 북한 붕괴 후 한국으로 흡수통일.
2018.03.17 09:14:23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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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왕규( ywki**** )

핵무장 한 후에 봅시다.
2018.03.17 05:36:29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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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수( jummp**** )

문정인이 제자구나 공산주의자들..
2018.03.17 01:05:26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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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 daniels**** )

전쟁 없는 한반도를 위해 2국체제로 가자고? 신학교 수라는 자가 하는 소리가 북한이 말하는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냐? 북한은 수백만명을 굶어 죽이는 살인집단이지 국가가 아니다. 북한 주민은 우리가 품어야 할 대상이지만 지금 북한의 권력을 잡고 있는 살인마 집단은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이다. 조선일보도 이런 글을 싣다니 정신 차려라.
2018.03.16 23:18:17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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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수( p100**** )

윤선생 다좋은데 김정은은 남조선을 절대 인정 않해 왜냐면 인정하는순간 자기가 죽거든 나같아도 않해 어떻게 인정하나 구걸할일 있게 자존심 상하게 잘만하면 핵무기로 협박하면 무혈점령할수 있는데
2018.03.16 21:35:31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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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덕( ahnda**** )

대찬성-좋아요: 한반도의 남북 2국 체제가 한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가장 합리적 방안: 내 70 평생동안 이 좁은 반도의 조국에서 일상적인 사회 정치불안에서 간신히 살아와서 느끼는 바는 윤교수의 고견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입니다. 이 땅에서 소위 지도자라는 정치인이 매일 내뱉는 통일은 허상일 뿐입니다. 남북이 형제국으로 교류하며 시간이 지나면 통일 됩니다.
2018.03.16 18:46:16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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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음( hunmin**** )

관리자가 (비속어/비하) 사유로 100자평을 삭제하였습니다
2018.03.16 16:41:42

장두익( dooik**** )

요즘 개나 소나 교수라네 ㅋㅋ 헛소리도 정도껏해야지...
2018.03.16 15:59:47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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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k**** )

박대통령 탄핵에 앞장선 조선일보가 좌파에 장악 당했다더니 윤평중을 보니 좌파가 장악 한것이 맞네. 이제 조선일보가 김정은과 문재인 정권의 2중대가 되었구만
2018.03.16 15:14:25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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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옥( y**** )

오랜 세월 건전한 시민인양 행세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스파이가 서술한 칼럼같다
2018.03.16 14:11:39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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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찬( superd**** )

군사적 충돌없이 각자 그냥 외국처럼 남으로 살아가면된다. 같은 민족이라고 꼭 하나의 국가로 통일 할 필요도 없는거고 각자의 나라에서 각자 알아서 살아가면된다. 통일이 꼭 필요하나? 우리나라가 남 신경쓸 여유없다. 나에게 피해만.위협만 주지말아라. 뭘하든 신경쓰지 않을테니 그게 요즘 사람들 생각이다
2018.03.16 13:33:41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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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NPR. Beauty The Invisible Embrace by JOHN O'DONOHUE

Beauty The Invisible Embrace

by JOHN O'DONOHUE



Hardcover, 261 pages, Harpercollins, List Price: $23.95|purch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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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ummary


The author of Anam Cara draws on Celtic wisdom and his philosophical imagination to explore the role of beauty in human life, contending that people facing an unprecedented level of anxiety can turn to fine works of music and art in order to rediscover hope, creativity, and serenity. 25,000 first printing.

read an excerpt of this book
Note: Book excerpts are provided by the publisher and may contain language some find offensive.


Excerpt: Beauty

Chapter One

Thy light alone —
Gives grace and truth to life's unquiet dream.

Percy Bysshe Shelley, 'Hymn to Intellectual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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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life is braided with luminous moments.

I was with a friend out on Loch Corrib, the largest lake in the West of Ireland. It was a beautiful summer's day. Time had come to rest in the silence and stillness that presided there. The lake slept without a ripple. A grey-blue haze enfolded everything. There was no division any more between earth and sky. Reaching far into the distance, everything was suffused in a majestic blue light. The mountains of Conamara seemed like pile upon pile of delicate blue; you felt you could almost reach out your hand and pull them towards you. No object protruded anywhere. Trees, stones, fields and islands had forgotten themselves in the daze of blue. Then, suddenly, a harsh flutter as near us the lake surface split and a huge cormorant flew from inside the water and struck up into the air. Its ragged black wings and large awkward shape were like an eruption from the underworld. Against the finely woven blue everywhere its strange form fluttered and gleamed in absolute black. She had the place to herself. She was the one clear object to be seen. And as if to conceal the source as she soared, she left her shadow thistling the lake surface. This was an event of pure disclosure: a sudden epiphany from between the worlds. The strange beauty of the cormorant was a counterpoint to the dreamlike delicacy of the lake and the landscape. Sometimes beauty is that unpredictable; a threshold we had never noticed opens, mystery comes alive around us and we realize how the earth is full of concealed beauty.

St Augustine expressed this memorably:

 'I asked the earth, I asked the sea and the deeps, among the living animals, the things that creep. I asked the winds that blow, I asked the heavens, the sun, the moon, the stars, and to all things that stand at the doors of my flesh ... My question was the gaze I turned to them. Their answer was their beauty.'



Beauty Is Quietly Woven through Our Days

When we hear the word 'beauty', we inevitably think that beauty belongs in a special elite realm where only the extraordinary dwells. Yet without realizing it, each day each one of us is visited by beauty. When you actually listen to people, it is surprising how often beauty is mentioned. A world without beauty would be unbearable. Indeed the subtle touches of beauty are what enable most people to survive. Yet beauty is so quietly woven through our ordinary days that we hardly notice it. Everywhere there is tenderness, care and kindness, there is beauty. Despite our natural difficulties with our parents, each of us has in our memory moments of deep love we shared with them. Perhaps it was a moment in which you became aware of some infinite tenderness in the way your mother gazed upon you, and you knew that her heart would always carry you as tenderly as it carried herself. Or it might have been a phrase of affection that has continued to sound around your life like a bright circle of blessing.

In Greek the word for 'the beautiful' is to kalon. It is related to the word kalein which includes the notion of 'call'. When we experience beauty, we feel called. The Beautiful stirs passion and urgency in us and calls us forth from aloneness into the warmth and wonder of an eternal embrace. It unites us again with the neglected and forgotten grandeur of life. The call of beauty is not a cold call into the dark or the unknown; in some instinctive way we know that beauty is no stranger. We respond with joy to the call of beauty because in an instant it can awaken under the layers of the heart a forgotten brightness. Plato said: 'Beauty was ours in all its brightness ... Whole were we who celebrated that festival' (Phaedrus).

Beauty does not linger, it only visits. Yet beauty's visitation affects us and invites us into its rhythm, it calls us to feel, think and act beautifully in the world: to create and live a life that awakens the Beautiful. A life without delight is only half a life. Lest this be construed as a plea for decadence or a self-indulgence that is blind to the horrors of the world, we should remember that beauty does not restrict its visitations only to those whom fortune or circumstances favour. Indeed, it is often the whispers and glimpses of beauty which enable people to endure on desperate frontiers.

Even, and perhaps especially, in the bleakest times, we can still discover and awaken beauty; these are precisely the times when we need it most. Nowhere else can we find the joy that beauty brings. Joy is not simply the fruit of circumstance; we can choose to be joyous independent of what is happening around us. The joyful heart sees and reads the world with a sense of freedom and graciousness. Despite all the difficult turns on the road, it never loses sight of the world as a gift. St Augustine said: 'The soul is weighed in the balance by what delights her. Delight or enjoyment sets the soul in her ordered place. Where the delight is, there is the treasure.' Perhaps this is why there is such delight in beauty. In the midst of fragmentation and distress beauty draws the soul into an experience where an elegant order prevails. This brings a lovely tranquillity and satisfies the desire of the soul. When the Beautiful continues on its way, the soul has been strengthened by a delight that will further assist her in transfiguring struggle.

Continues...

2018/05/08

Opinion | When Beauty Strikes - The New York Times



Opinion | When Beauty Strikes - The New York Times



When Beauty Strikes



By David BrooksJan. 15, 2016


Across the street from my apartment building in Washington there’s a gigantic supermarket and a CVS. Above the supermarket there had been a large empty space with floor-to-ceiling windows. The space was recently taken by a ballet school, so now when I step outside in the evenings I see dozens of dancers framed against the windows, doing their exercises — gracefully and often in unison.

It can be arrestingly beautiful. The unexpected beauty exposes the limitations of the normal, banal streetscape I take for granted every day. But it also reminds me of a worldview, which was more common in eras more romantic than our own.

This is the view that beauty is a big, transformational thing, the proper goal of art and maybe civilization itself. This humanistic worldview holds that beauty conquers the deadening aspects of routine; it educates the emotions and connects us to the eternal.

By arousing the senses, beauty arouses thought and spirit. A person who has appreciated physical grace may have a finer sense of how to move with graciousness through the tribulations of life. A person who has appreciated the Pietà has a greater capacity for empathy, a more refined sense of the different forms of sadness and a wider awareness of the repertoire of emotions.


John O’Donohue, a modern proponent of this humanistic viewpoint, writes in his book “Beauty: The Invisible Embrace”: “Some of our most wonderful memories are beautiful places where we felt immediately at home. We feel most alive in the presence of the beautiful for it meets the needs of our soul. … Without beauty the search for truth, the desire for goodness and the love of order and unity would be sterile exploits. Beauty brings warmth, elegance and grandeur.”

The art critic Frederick Turner wrote that beauty “is the highest integrative level of understanding and the most comprehensive capacity for effective action. It enables us to go with, rather than against, the deepest tendency or theme of the universe.”

By this philosophy, beauty incites spiritual longing.

Today the word eros refers to sex, but to the Greeks it meant the fervent desire to reach excellence and deepen the voyage of life. This eros is a powerful longing. Whenever you see people doing art, whether they are amateurs at a swing dance class or a professional painter, you invariably see them trying to get better. “I am seeking. I am striving. I am in it with all my heart,” Vincent van Gogh wrote.

Some people call eros the fierce longing for truth. “Making your unknown known is the important thing,” Georgia O’Keeffe wrote. Mathematicians talk about their solutions in aesthetic terms, as beautiful or elegant.

Others describe eros as a more spiritual or religious longing. They note that beauty is numinous and fleeting, a passing experience that enlarges the soul and gives us a glimpse of the sacred. As the painter Paul Klee put it, “Color links us with cosmic regions.”

These days we all like beautiful things. Everybody approves of art. But the culture does not attach as much emotional, intellectual or spiritual weight to beauty. We live, as Leon Wieseltier wrote in an essay for The Times Book Review, in a post-humanist moment. That which can be measured with data is valorized. Economists are experts on happiness. The world is understood primarily as the product of impersonal forces; the nonmaterial dimensions of life explained by the material ones.

Over the past century, artists have had suspicious and varied attitudes toward beauty. Some regard all that aesthetics-can-save-your-soul mumbo jumbo as sentimental claptrap. They want something grittier and more confrontational. In the academy, theory washed like an avalanche over the celebration of sheer beauty — at least for a time.

For some reason many artists prefer to descend to the level of us pundits. Abandoning their natural turf, the depths of emotion, symbol, myth and the inner life, they decided that relevance meant naked partisan stance-taking in the outer world (often in ignorance of the complexity of the evidence). Meanwhile, how many times have you heard advocates lobby for arts funding on the grounds that it’s good for economic development?

In fact, artists have their biggest social impact when they achieve it obliquely. If true racial reconciliation is achieved in this country, it will be through the kind of deep spiritual and emotional understanding that art can foster. You change the world by changing peoples’ hearts and imaginations.

The shift to post-humanism has left the world beauty-poor and meaning-deprived. It’s not so much that we need more artists and bigger audiences, though that would be nice. It’s that we accidentally abandoned a worldview that showed how art can be used to cultivate the fullest inner life. We left behind an ethos that reminded people of the links between the beautiful, the true and the good — the way pleasure and love can lead to no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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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ersion of this article appears in print on January 15, 2016

Beauty: The Invisible Embrace by John O'Donohue






Amazon.com: Customer reviews: Beauty: The Invisible Embrace

Paperback: 272 pages
Publisher: Harper Perennial; Perennial ed. edition (March 1, 2005)


stars

Beauty by John O'Donohue is a beautiful book written by a beautiful man. I find a book filled with such inspiring words difficult, almost inappropriate, to read straight through. Many lines invite us to read and reread them and then close the books and linger with their fragrance for days. I would like to give a sampling of such lines here, taken from two of my favorite chapters - The Call to Beauty and The Music of Beauty. I will also include a personal reflection on each quote.

"Indeed, the subtle touches of beauty are what enable most people to survive. Yet beauty is so quietly woven through our ordinary days that we hardly notice it. Everywhere there is tenderness, care, and kindness, there is beauty." 

During this past year I have been studying ancient Greek philosophy. Turns out, my favorite philosopher is Epicurus. One big reason is that Epicurus himself was noted for his kindness and incorporated the importance of being caring, sensitive and kind into his philosophy.

"Yet beauty's visitation affects us and invites us into its rhythm, it calls us to feel, think and act beautifully in the world: to create and live a life that awakens the Beautiful." 

I have been involved in the creative arts for many years but I have come to realize our greatest creation is to become ourselves a being radiating beauty.

"Even, and perhaps especially, in the bleakest times, we can still discover and awaken beauty; these are precisely the times when we need it most. Nowhere else can we find the joy that beauty brings. Joy is not simply the fruit of circumstances; we can choose to be joyous independent of what is happening around us." 

How true. John O'Donohue invites us to raise our own inner vibration and experience the inner joy of simply being alive. This is especially needed when we are facing our biggest challenges.

". . . if our style of looking becomes beautiful, then beauty will become visible and shine forth for us. We will be surprised to discover beauty in unexpected places where the ungraceful eye would never linger. The graced eye can glimpse beauty anywhere, for beauty does not reserve itself for special elite moments or instances; it does not wait for perfection but is present already secretly in everything. When we beautify our gaze, the grace of hidden beauty becomes our joy and our sanctuary."

Thank you, John. `Beautify our gaze' - the experience of beauty is an inner transformation not a change of scenery.

"To behold beauty dignifies your life; it heals you and calls you out beyond the smallness of our own self-limitation to experience new horizons. To experience beauty is to have your life enlarged." 

Again, thank you, John. There is a rightness and clarity when we see beauty in the world and we become fuller and more attuned to not only the outside world by also to ourselves.

"Beauty is not to be captured or controlled for there is something intrinsically elusive in its nature. More like a visitation than a solid fact, beauty invests the aura of a person or infuses a landscape with an unexpected intimacy that satisfies our longing." 

Indeed, intimate and mysterious beyond any words.

"To the human ear, however, music echoes the deepest grandeur and the most sublime intimacy of the soul." 

I find this true to my own experience. Music hits me at a much deeper level than the other arts. It is like an internal dance with my nervous system.

"In contrast to most other forms of art, music alters your experience of time. To enter a piece of music, or to have the music enfold you, is to depart for a while from regulated time. Music creates a rhythm that beats out its own time-shape."

 Music is so much connected to Eros and love. Both have a dynamic aspect that short-circuits reason and reflection and both are transporting, absorbing, sensuous, kinetic, and involve your whole person, body and soul, in a most corporeal and bodily way.

"There is a profound sense in which music opens a secret door in time and reaches in to the eternal. This is the authority and grace of music; it evokes or creates an atmosphere where presence awakens to its eternal depth."

 I never tire of reading these words over and over again.

Again, a beautiful book written by a beautiful man. Please pick up a copy and be inspired.

12 people found this helpful

5.0 out of 5 starsBeauty in Everything
ByOma L Roseon November 9, 2015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At first I had a hard time getting into the book but was really impressed as I read further and began to feel the meaning of some of the essays. We don't always think about the meaning of things as we go about our busy world. This book is well worth reading and "thinking" as you go along! It has made me stop and observe the beauty that is in everything!

4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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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John O'Donohue Shines
ByGail F. Hoakon January 22, 2014
Format: Audio CD|Verified Purchase
I can not say enough about Irish poet, priest, and deep thinker John O'Donohue. I knew I loved his work and particular beautiful view of life, so when I gave this to my husband for Christmas to listen to on our trip to the Oregon Coast, I knew it would be a winner. He outshone himself, having us stop the tape frequently to cry and converse over the profoundness of his of his words. What an amazing man! The world misses him, yet embraces his spirit forever.

8 people found this helpful

5.0 out of 5 starsBest of the Best
ByWestwood Village Reviewson September 6, 2014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This is the finest and most inspirational book on this subject I have ever encountered. This is one of those rare works where you can open the book to any page and immediately find deeply insightful paragraphs. I love O'Donohue and still mourn his untimely passing. He was a genius and his work continues to shine. Of all his works, this is the best.

6 people found this helpful

5.0 out of 5 starsJust What I Needed!
BySkye A. Hopkinson January 23, 2014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The timeliness of this book's message reminds me of the old Burt Bacharach song, "What the World Needs Now..." but ending with this book instead of love! This book's message is about REAL beauty, something that has truly been stolen from most of us through today's hectic and media laden world. For those looking for a philosophical solution to modern problems, this book is a must read and just the right length; it's not too short or too long! Beauty is more mystically defined here, it is not the beauty that is manufactured by models or movie stars, not even by radio stations and television. More than a "stop and smell the roses" mentality, O'Donohue invokes deeper thinking on the part of the reader, something that like beauty, is often absent in our world today.

The book was required by my composition class, and at first glance I didn't see how it would fit into the subject matter, but I am very glad my instructor placed this on her readings list!

5 people found this helpful

5.0 out of 5 starsCan be used as a book of meditations. The ...
ByEllen Leahyon September 26, 2014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Can be used as a book of meditations. The author's use of language is so eloquent, especially since English was not his first language. I have given this book as gifts to friends who are undergoing cancer treatment or who are caretakers for terminally ill relatives, as a way to make sense out of the senseless times in our lives.

8 people found this helpful

5.0 out of 5 starsBeautiful.
ByStephanie K. Neadon August 11, 2017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Deep and beautiful reading by a great soul. This is one of my "morning books," the ones I reach for when I need an uplift to my thoughts, heart and spirit to take into my day. It's not light reading. You have to be willing to engage your own mind. There are no platitudes here. There is deep, heartfelt thought from an incredibly well-read and caring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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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Awake to the Beauty that surrounds you!
ByRose Di Gregorioon July 7, 2007
Format: Audio CD|Verified Purchase
This CD fills the very essence of my soul! As a Franciscan religious I appreciate the beauty and splendor of all of God's creation! John O'Donahue has captured the essence of the Franciscan Spirit! St. Francis called everything by the intimate name of "brother" and "sister"! As St. Francis says, "Put on new glasses" "adjust your focus" and you will see beauty all around you." With St. Francis we can all say "My God and My All"! Thank you and God bless you, Sister Rose Therese Di Gregorio O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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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Divine Beauty: The Invisible Embrace
ByStriving for Nowon February 14, 2014
Format: Hardcover|Verified Purchase
As always, an invaluable lifescript from the late and wondrous John O'Donohue. An incredible read for anyone appreciating and living by the words of this contemporary mystic.
I gifted this copy to my Valentine in hopes that the beauty aspect would ring loud and true. I believe it has.
Thank you for leaving your inspiring essence behind, John O'Donohue. You are 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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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Beauty simply is
BySandpiper Helenon February 22, 2008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The very sad news is that there will be no more books by John O'Donohue because of his untimely death in January. The blessing is that we have a treasury of wisdom and elegance in his published writings and various recordings. We can still listen to his Irish lilt and laugh at his humor; we can still read his prose and poetry suffused with wisdom and caring. Beauty is a book which reminds us how we should look at the world around us, expectantly looking for signs of beauty to counter the other signs of neglect, pain, violence, dis-harmony. He takes us beneath the surface, urging us to troll the depths of our souls to find our beauty. Every sentence will call you to ponder more deeply and invite you to look anew at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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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회고록 (26) 한인 유학생 2세대가 평가한 이승만 … 배타주의자의 비극 | Ilpyong Kim



회고록 (26) 한인 유학생 2세대가 평가한 이승만 … 배타주의자의 비극 | Ilpyong Kim




회고록 (26) 한인 유학생 2세대가 평가한 이승만 … 배타주의자의 비극
By ilpyongkim on December 31, 2012


우리들이 드레이크 호텔 커피숍에서 매우 진지한 토론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유학생 이승만은 조선조 시대 1874년에 황해도 평산에서 상류층 가정의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서울로 이사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의 한학공부는 훗날 한국정치에도 여러 가지로 독단적으로 정책결정을 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6세에 두 살 연상인 박씨와 결혼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신학문(즉 서양문화)을 배우는 한편 김규식과 함께 <매일신문>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는 서재필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서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요간부로 발탁됐다. 만민공동회의를 주도하는 등 민중계몽에 투신한 일도 있었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와 대결관계에 있었던 황국협회의 모함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잘못 전해졌다.

그의 죄목은 조선조 왕위를 폐지하고 정부를 타도하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다음해 그는 탈출했다가 다시 잡혀서 감옥에 투옥된 후 감옥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한글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독립정신』은 2002년 영어로 번역돼 미국에서도 출판됐다. 그는 선진국의 제도와 문화를 수입하고 국민교육을 확장하며 외국과의 통상을 증대해야 한다는 경제정책을 강조하고 또 민족의 대동단결을 역설함으로써 한민족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 서재필, 박용만 등과 함께 미국유학생 출신의 민족주의자이다.

필자가 해방 뒤 원주의 삼촌댁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삼촌은 한국의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군민회)의 강원도 지부의 이사로 임명됐다. 그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정신』을 읽은 후 감명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에게도 한번 읽어 보라고 권유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 읽어본 기억이 있다. 나는 이승만 박사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이승만은 1904년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해 8월 9일 황제의 사면 명령에 의해 석방됐으며 조선조의 개혁주의 실세였던 민영환과 한규설 등의 도움으로 미국에 밀사로 파견됐다. 유학생 여권을 받은 후 인천항을 출발하고, 일본을 거처 미국선박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기 위해 노동이민으로 도착한지 얼마 안 되는 한인들 앞에서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구국연설을 했다. 그리고 한인 이민자들의 통역으로 온 윤병구 목사와 친해지고 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본과 러시아와의 전쟁(일로전쟁) 후 1905년부터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려는 야욕을 막기 위해서는 때마침 미국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 평화회의(일-러 전쟁 후 미국의 중재로 개최된 평화회의)에 이승만을 한국대표로 참석시킨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가지 않고 워싱턴에 가서 로비활동을 벌이고 윤영구 목사는 하와이에 남아서 한인들로부터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알칸소주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만나서 자신의 밀명을 알리고 그의 주선으로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스와 면담을 하게 됐다. 존 헤이스, 딘스모어, 이승만의 3자 회담에서 헤이스 국무장관은 일본-러시아 평화조약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매우 호의적인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헤이스 미 국무장관은 1904년 중국에 대한 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새로 주창한 국무장관으로서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인물이다.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는 1904년 6월 극동을 방문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른 미국 국방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한인교포 4천명의 이름으로 환영했다. 그는 태프트 장관으로부터 테오도어(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얻는데 성공했다. 윤병구 목사는 태프트 국방장관의 소개장을 들고 워싱턴에 와서 이승만과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접하려고 모든 힘을 다했다.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왼쪽)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드로 윌슨. 이승만은 윌슨에게 독립 탄원서를 냈지만, 윌슨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1904년 7월 6일 아침(오전)에 루즈벨트 대통령과 역사적인 면담을 성사시킨 것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루즈벨트라는 사람은 러시아세력의 동아시아 침투를 막기 위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에게는 더 유익하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일본이 승인해 주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밀약(태프트-桂秘密條約)과 같은 비밀조약이 준비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조약은 1904년 7월에 체결됐다.

1905년 11월 17일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후 이승만은 조국에 돌아갈 마음을 던져버리고 미국에 그대로 주저앉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6·25전쟁 후 미국에 와서 공부하겠다는 우리 유학생들처럼 말이다. 그는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하고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세례도 받았다. 1905년 2월에 조지워싱턴대에 등록한 이승만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방학동안 그는 한국독립을 위한 공개강연도 여러 차례 하면서 그 연설보상으로 학비를 조달했다. 그리고 그와 동감하는 미국친구들도 사귈 수가 있었다. 그는 1907년 6월 5일 우수한 성적으로 조지워싱턴대의 학부를 졸업했다.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한 후 이승만은 보스턴으로 올라가 하버드대 대학원에 등록하고 석사학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08년 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동지 윤영구 목사와 함께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6일간 콜로라도주 덴버 시에서 한국인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 회의에는 중국 상해, 런던, 러시아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등 각지의 한인들의 대표 36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해 한인들의 국제단체를 창립하려고 힘썼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맨하튼 120가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숙소를 정하고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등록해 박사학위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로교 선교사 어네스트 힐 목사의 알선으로 1908년에 프린스턴대 대학원으로 옮기고 2년 동안 열심이 공부해 박사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는 영세중립론」이라는 제목으로 학위논문을 쓰고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대에서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승만은 루스밸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지 못한 이승만은 조국에 돌아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6년간의 미국유학생활을 청산하고 1910년 9월 발틱호를 타고 유럽을 경유해 귀국한 것이다. 오랜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에 돌아온 그는 YMCA 총무로서 기독교사업을 통해 조국에 봉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대중 강연도 하고 또 각 교회의 집회를 통해서 은근한 방법으로 조국독립에 대한 인식을 한국인 대중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한양 Y학당의 교장 직함을 인계 받은 후 이승만은 국제법(만국공법)을 강의할 때 제자 임병직(후에 대한민국 초대 외무장관 역임), 이원순, 허정(1960년 4·19 혁명 후에 과도정부 내각총리) 등을 만나서 그들의 존경을 얻어낸다. 그들은 후일 이승만 박사의 충실한 추종자가 됐으며,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각료로 입각했다.


한인유학생1세대였던 독립운동의 리더 안창호와 박용만은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극명하게 달랐다. 이것이 이후 파벌갈등을 불러오게 된다. 왼쪽이 안창호. 오른쪽이 군대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했던 박용만이다.

이승만 박사는 1910년에 입국해 1년간의 고국체류를 끝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911년 3월 26일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된 국제 감리교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던 이승만은 대회가 끝나자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고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획을 세우고 미국 장기체류를 준비했다. 그는 프린스턴대 대학원 시절 자기의 스승이었든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독립을 위한 탄원서를 보낸 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강력한 대책을 세우고 그것을 밀고 나갔다. 윌슨 대통령은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극동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돕지 않았다. 테디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를 그대로 방관만 한 대통령이다. 자기 스승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실망을 느낀 이승만은 그 당시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박용만의 초청으로 1913년에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1월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33년 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와 같은 운동은 재미동포의 재정적 또는 정신적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 박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업적은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에 미화된 부분도 많이 있다.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1952년에는 헌법을 고쳐서 재임할 수 있었고, 또 1960년에는 3선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은 물론 종신 대통령이 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감행한 일도 있었다. 4·19 학생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그의 업적에 대한 비판도 많았으며, 그의 장기집권에 대한 욕망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의 업적을 인정해 상해임시정부는 그를 초대 대통령으로 영입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가의 탄핵을 당해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정치란 타협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이미 타협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정치가로 변해 있었다. 한국의 어용학자와 일부 언론인들이 그의 업적을 신화로 만든 부분도 많이 있었으며 또 날조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학계와 전문가 중에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역사를 바로 쓰고 또 그가 남긴 교훈도 잘 전달하는 학자도 있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1950년대의 우리 한국 유학생들은 이승만 박사의 미국유학시절의 경험과 독립운동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하나의 모델로 삼았다. 우리는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조국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과 같은 한인유학생 제1세대는 일제 통치하에 있는 우리 민족의 자결권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것이다. 우리 유학생 제2세대는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한인유학생 선배들로부터 배울 점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배워서는 안 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사색당쟁 즉 파벌싸움이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에서 무엇인가 배우기 위해 한인유학생 출신이며 독립운동가의 대표적인 리더인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독립운동 경험과 이들 세 사람의 정치노선을 분류해봤다. 이승만은 정치외교를 통해서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운동노선을 따랐고, 안창호는 교육과 계몽운동을 통해서 한민족의 인간개조 그리고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정신적 재무장운동을 하는 정치노선을 선택했으며, 박용만은 군대를 양성해서 무력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이룩하는 정치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들의 독립운동 정신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들이 보였던 당파싸움은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우리는 이승만이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고 노선이 다르면 政敵으로 몰아서 쫓아내 버렸다. 자기를 미국에 초청해 준 박용만과는 의견충돌 때문에 갈라섰고, 정치노선이 달라서 자기 스스로 태평양 동지회를 만들어 안창호의 국민회의에 맞서 정치투쟁을 한 것은 이승만이 독립운동에서 범한 매우 중대한 과오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파벌투쟁의 리더로 부상했으며,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됐지만 끝내 파벌투쟁으로 밀려나게 됐으니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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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Ilpyong Kim, Mem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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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su Sinmun January 2, 2013 at 5:25 am | Reply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한 후 이승만은 보스턴으로 올라가 하버드대 대학원에 등록하고 석사학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08년 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교수신문 편집자주: 그러나 김일평 교수의 회고와 달리 그가 하버드대에서 낙제를 받았으며, 석사학위를 받은 것은 그 이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를 받기 전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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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6.이승만의 유학(2)
[중앙일보] 입력 1995.03.01 00:00 | 종합 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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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박사는 세계적 명문인 하버드大와 프린스턴大 대학원에서 2년반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미국대학에서 2년 남짓한 기간에 인문.사회과학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쾌거였음은 물론 미국의 대학교육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보다 먼저 많은 유학생을 서양에 파견했지만 그들중 李박사의 학력에 필적(匹敵)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李承晩)의 미국 유학경력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조지워싱턴大 학부에서 성적이 우수하지 못했던「외국학생」이승만이 무슨 수로 하버드大와 프린스턴大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느냐와 그가 언제 하버드大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느냐다.
우선 이승만이 하버드大 대학원에 입학한 비결부터 파헤쳐 보자.그는 조지 워싱턴大에서 4학기를 마친 1906년 겨울,자기의옛 은사 서재필(徐載弼)에게 편지로 하버드大 대학원에 진학할 의사를 밝히고 조언을 구했다.서재필은 하버드大에 진학하려는 그의 꿈을 칭찬하고 하버드大에서 역사학을 전공할 것과 1년이내에석사과정을 끝내고 귀국할 것을 충고했다.
서재필은 박사학위까지 취득할 필요는 없다고 못박았다.이러한 회답을 받은 이승만은 스승의 충고를 선별적으로 수용했다.
즉 그는 1907년 초 하버드大 인문대학원 원장 앞으로 보낸입학요청서에서,자기는 다년간 동양적 학문에 공업을 쌓은 인물이며 한국에서 할 일이 많고 또 자기의 귀국을 고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하버드大에서 2년이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싶다고밝혔다.동시에 그는 조지 워싱턴大에서는 2년이내에 박사학위 취득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조건부 입학지원서를 접수한 하버드大측은 당황했다.이유인즉 본국 학생중에도 인문학 분야에서 2년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선례가 없기 때문이었다(통상적으로 4년이상의 시간이 소요됨). 하버드大측은 결국 이승만에게 시한부 조건없이 박사과정에 입학하되 일단 들어와 석사과정부터 차근차근 밟으라고 대답했다.
이승만은 불만족스럽지만 장차 조국에 돌아가「서양문명을 도입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하버드大와 같은 명문대학의 학위가필요하다」는 판단아래 이 입학조건을 받아들였다.
1907년 가을부터 1908년 봄까지 보스턴 근처 케임브리지市에 있는 하버드大에서의 학창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이 대학의 「세속적」인 지적 분위기가 전도열에 불타고 있던「종교적」인 그에게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여하튼 그는 역사학 4과목(B.B.B.C),정치학 2과목(B.B),그리고 경제학 1과목(D)을 택해 1년안에 석사학위를 끝내면서 곧 바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낙제점(D),그리고 역사학 과목 하나에서 C학점을 받음으로써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이승만이 이 학교를 떠난후(1909) 하버드大 대학원은 그에게 미국사 한과목을 추가로 이수,「B」이상 성적을 받으면 석사학위 를 주겠다고배려해 주었다.
이승만은 하계대학에서 이 과목의 B학점을 따냄으로써 드디어 1910년(즉,프린스턴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해)2월23일에 하버드大의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하버드大에서 1년간 고전(苦戰)했지만 2년안에 박사학위를 받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그는 1908년 겨울 뉴욕으로 가서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머무르면서 콜럼비아大 박사과정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요행히 그는 여기서 몇해전 서울에서 사귀었던 선교사 홀(E F Hall)을 만나게 되어 그와 함께 프린스턴大를 방문,대학원장 웨스트(A F West)박사를 면접했다.면접후 웨스트 원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다시 2년안에 박사학위를 끝내야 되겠다고 강조했다.
만약 프린스턴大측이 이 점을 고려해주지 않는다면 자기는 차라리 뉴욕에 머무르면서 조건이 더 유리한 콜럼비아大에 입학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드디어 프린스턴大측은 이승만에게 2년 안에 박사과정을 끝내 주겠다는 보장아래 그를 입학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프린스턴신학교의 특별학생으로 받아주어 신학교 학사에서 무료로 기숙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만학도(만33~35세)이승만이 뉴저지州의 아름다운 프린스턴大캠퍼스에서 공부한 기간은 1908년 9월부터 1910년 6월14일까지 2년 미만이다.
이때 그는 신학교 학장 어드먼,대학원 원장 웨스트,그리고 대학교 총장 윌슨등의 총애를 받으면서 비교적 즐거운 학구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과목을 청강하면서 프린스턴大 대학원에선 국제법을 전공하고 미국역사와 철학사 를 부전공으로 택했다.마지막 학기에 그는 엘리엇교수의 지도아래『미국의 영향을 받은「국제법상의」중립』이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썼 다.그의 학위논문은 심사위원 3명으로부터「우수」평점을 부여받았으며 졸업후1912년 1월 프린스턴大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승만은 1910년 7월18일의 졸업식에서-나중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이 된-윌슨총장으로부터 손수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승만은 서양사(특히 미국사).정치학.철학 등을 폭넓게배운 기초위에 국제법을 전공한,말하자면 한국 최초의 국제정치학자였다. 19세기 중엽이래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받아온 우리민족은 드디어 당당한 만국공법(萬國公法)의 대가(大家)를 배출한 셈이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6.이승만의 유학(2)

이승만 박사학위 논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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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학위 논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한국 현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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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kmji98/220336645028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을 분석해 보았다.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 (참고: 이승만 박사학위 허위 혹은 불법, 부도덕, 부당 취득을 주장하는 기사(백년전쟁-두얼굴의 이승만)
http://rock1209.tistory.com/1123
백년전쟁의 주장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나는 모함이라 판단했다) 지킬박사 (kmji98)
프로필 쪽지 이웃추가 (1026) 카테고리 ^ 영화, 드라마 책, 문학, 시 미술 전시회 박물관 철학 가치관 시사논평 불행에서 벗어 나는 법 아들에게 주는 조언 한국 문화 관 찰 정치 외교 칼 럼 조직론 리더십 권력 시사 이슈 기 타 성차별이라고? 경제 명언 명문구 일상의 발견 신화와 문학 아는만큼 보이 는 문화유산답 사기 북한산성 남한산성 한양성곽 궁궐 사찰 왕 릉 그외 아차산성 고구 려보루 역사의섬 강화 도 문학·책 , iPhone_4 , 국내여행 , 마하바 라따 , 마하바라타 , 사진 , 영화 , LG-F 320S , 세계여행 ,

제1장에서 제5장까지가 본문이며 제6장은 요약편이다. 이미 제6장 요약 편에 대한 번역본이 있으므로, 나는 그 번역본을 중심으로 덧칠을 해가 며 (역자주로 표기) 내 감평을 쓴다. (적색 글씨가 나의 글이다. 원 역자 정인섭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승만 대통령의 박사학위 논문 번역집 : 정인섭 譯(2000) '미국의 영향 을 받은 중립; 이승만의 전시중립론.

(역자주 재번역 의역: 전시 제3국 선박의 중립성에 대한 고찰: 지난 150년간 국제법상 중립성 이론 발전에 서 미국이 기여한 바를 중심으로)
이승만 박사학위논문 ‘제6장 요약’ 번역문 - 정인섭 譯(2000).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이승만의 전시중립론(이 승만 박사학위논문 번역집) p.143-151에서 발췌 -

이제 우리가 알게 된 것처럼 국제법 역사의 초창기에는 중립 (역자주: 교전국간 전시 상태에서 제3자국의 중립)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중립의 기초적 개념은 로마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점진적 몰락 과 함께 태동하였다. 그로티우스로부터 시작되는 국제법 초기 학자들은 중립 개념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들의 견해는 중립 개념의 발전 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발전 당시의 관념은 다소 모호하고 불완전하였 으며, 일정한 상황 하에서는 중립국이 교전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 는 것도 중립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합법성을 인정하였다. (역자주: 전시 제3국 중립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펠로폰네소스 전 쟁사에 나온다. BC 433년, 코린토스는 코르키라와 전쟁상태에 빠졌다. 아테네는 親 코르키라이나 코린토스(와 스파르타 및 전체 라코니아 동 맹국과) 평화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아테네는 30대의 함대를 파견하면 서 역사상 최소억지 정책을 최초로 시행했다: '코린토스함대가 코르키라 함대를 향해 교전하러 가거나, 코르키라의 영토에 상륙하려는 의도로 항 해하지 않는 한 교전을 회피하라'. click to enlarge image 태그 최근 | 인기 일 월 화 수 목 금 토 GomPlayer_2 , 미 술·디자인 , Canon_ PowerShot_A2500 , _2 , 서울도성 , 이 승만 ▶모두보기 1 2 3 4 5 6 7 8 9 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31

통일하면… 고통 뿐이... 자유와 평등, 어떤 게 ... (아테네 vs 스파르타-코린토스-테베 동맹. 이 당시 아테네와 스파르타측 은 30년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였다. 이 분쟁이 이어져 펠로폰네소스 전 쟁이 발발했다. BC 432-BC 403) 중립국과 교전국의 관계를 규율하는 명확한 규칙이 없었으므로 국제교역 은 전적으로 교전국의 처분에 맡겨졌으며, 어떠한 보호책도 마련되어 있 지 않았다. 이제는 중요한 원칙으로 성립된 중립국 영토의 불가침 원칙 조차 18세기 후반기에 이를 때까지도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다. 교전국이 중립국 영토를 통하여 자신의 병력을 이동시키고, 중립국에서 육군과 해 군을 모병하고, 중립국 관할 구역에서 전함을 무장하고 장비를 갖추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반면 국가는 자국 영토 내에서 중립적 작전(역 자주: 중립적 항행)을 중지시킬 권리가 없었고, 자국 국민이 외국 군대에 입대하는 행위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았으며, 교전국 일방을 적대시하는 어떠한 역무에 종사하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중립국 국민은 물론 국가 자신도 각자의 이익과 감정에 따라 교전국 일방 또는 쌍방에 대하여 온갖 종류의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에 있어서 완벽한 자유를 누렸다. (감평: 1904 노일전쟁시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일본은 조선 의 중립국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 2018.0월5별▶보기 0 서재 안에 포스트가 없습니다. 0 전체보기 최근댓글 ^ 김정은이 왜 유해 졌나? BC 405년 아테네, 나... 이승만 평가 4 - 독부 ... n_mythology님의 블.. shcroit80님의블 로.. jtwo1272님의블로 그 chok1216님의 블 로.. 블로그 이름은? 역사블로거 전문가 내가 추가 한 나를 추가 한 지킬박사 이웃 커넥트 전체 이웃 8 명 일산간세상의icono 소호자과오름추적자 살다보숨그기 1/ 1 지킬박..님 이웃의 새글보기 http://www.geulmaru.co.kr/bbs/board.php? bo_table=history_column&wr_id=3 중립에 관한 초보적 관념은 유럽국가들의 초기 해상법에서 발견되는데, 콘솔라토 델 마레는 그중 가장 유명하였다. “너의 친구를 위하면, 너의 적을 해하게 된다” (역자주: "너의 친구(즉 중립 우호적인 제3국)는 보호 하고, 너의 적(즉, 교전상대국)은 해쳐라")는 콘솔라토의 원칙은 중립국 을 교전국과 구별하고, 중립국을 보호하려는 욕구가 증대하였음을 나타 내준다. 영국은 이 원칙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항상 적국의 선박과 물자 는 몰수하고 우방의 선박과 물자는 자유롭게 놓아 줄 것을 주장하였다. 다른 유럽국가 일부도 이 원칙을 실행하였으나, 어느 국가도 영국이 실 행한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16세기 네덜란드는 공해에서 교전국의 수색을 피하기 위하여 중립선박 상의 화물은 몰수배제(역자주: '중립국/우호국의 선박은 중립적/우호적 재화를 싣고 있다고 간주하자'는 주장)라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제시하였 다. 대부분의 유럽 해양국가들은 이 새로운 원칙의 도입을 환영하지 않 았는데, 네덜란드는 타국과의 조약에 이 원칙을 삽입시키려는 노력에서 적선상의 화물은 적화 (역자주: '적대국의 선박은 적대적 재화를 싣고 있 다고 간주하자') 라는 반대원칙도 제시하였다. 프랑스와 그리고 후일 이 를 따른 스페인은 모든 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교전권을 행사 하였다. 적성감염주의(敵性感染主義)에 따라 그들은 적화(敵貨)를 수송 하는 중립국 선박도 몰수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8세기 말엽에 이르기 까지의 국제무역은 매우 개탄스러운 상태에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 었다. (감평: 네덜란드 같은 소규모 개방국은 무역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 다. 한국도 똑같다. 자유무역을 위해 애타게 자유주의적 중립원칙을 수 립하려 힘썼다. '중립선박은 중립적인 재화를 적재했다고 간주해다 활동정보 다녀간 블로거 ^ 이웃 블로거 ^ 블로그 이웃 903 명글 보내기 81 회 포스트 스크랩 783 회사용중인 아이템 보 기 오, 그대신 적대국 선박은 적대적인 재화를 적재했다고 보고 나포해도 무방하다'.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반대를 자진해서 내주는 현명한 방법 이다) 1666년 영란전쟁 "4일 전쟁"  (한 때 잘나가던 네덜란드는 영국의 원투펀치에 실신당하고, 알아서 2진 으로 물러앉고 자유 무역해서 먹고 사는 길을 찾았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은 중립법의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의 미하였다. 존 포스터(John W. Foster)는 “미국은 정치적 성립 초기부터 자유교역, 진지하고 진정한 중립, 전시 사유재산의 존중, 가장 진보된 자 연권과 정의의 관념 등의 옹호자였으며, 짧은 역사 속에서도 미국은 지 속적인 주장을 통하여 이 고귀한 원칙들이 승인되는데 세계 다른 어떤 국 가보다도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 말하였다. 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해결된 가장 중요한 문제들로는 ①독립의 승인, ②중립국 영역의 불가침, ③중립교역의 자유 등을 들 수 있다. (감평: 미국은 건국초기부터 자유무역, 사유재산, 천부 자연권과 정의의 개념, 일관 지속적인 주장으로 국제사회를 리드했다. 머리가 절로 숙여 진다. 미국의 잠재력, 특히 그 소프트 파워에. 이 나라는 결코 250년 밖 에 안 된, 역사일천의 신생국가가 아니다) 343 822,893 미국 독립전쟁 기간에 중립국 프랑스는 주로 미국 외교의 영향에 의하여 영국과의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 프랑스 왕실은 처음에는 비밀리에 실시 하였지만 당시 중립국의 통상적인 방식대로 미국의 독립투쟁을 위한 모 든 군사적 지원을 자유롭게 제공하였다. 미국과 프랑스간 우호통상조약 체결에 의한 미국독립의 공식 승인은 상조의 승인(주)이었으며, 그 결과 영국은 프랑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사례로부터 반란 식민지 에 대한 중립국의 상조의 독립승인은 그 중립국에 대한 식민모국의 선전 포고를 정당화시킨다는 점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게 되었다. (주) (역자주: 상조의 승인 尙早의 承認 이란 영토성, 주민 존재, 실효적 지배의 3대 요건을 미비한 단체를 성급하게 국가로 인정하는 행위를 말 한다) (강평: 신생국 미국이 오히려 노련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우방으로 끌어 들이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하게 만들고 프랑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 독립을 쟁취했다. 프랑스는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다 허리가 휘 었고, 10여 년 뒤에 프랑스 대혁명의 폭탄을 맞고 왕정이 무너졌다) 미국의 성공적인 수립 이래 독립과 교전단체의 승인(承認) 문제는 국가 간에 가장 활발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미국 혁명에 의하여 어느 정도 자극을 받아 미주의 많은 유럽 식민지,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가 모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중립국들에 대하여 자신의 정치적 존재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오늘날 수락(역자주: 이해)되고 있는 승인에 관한 일반원칙은 유럽과 남미 혁명운동과의 관계에서 주로 미국의 영향 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당시 외교문서에 나타난 미국 정치인들의 현명한 사려분별과 신중한 발언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따르는 올바른 선례를 형 성하였다. 남북전쟁 기간 중 영국이 남군을 교전단체로 승인한 것은 미국 내에서 엄 청난 흥분과 반영(反英)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승인 에 대한 영국의 해석을 묵인함으로써 그것이 상조의 승인이 아님을 인정 하였다. 이 논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승인이 정당화될 수 있음이 명백하여졌다. 즉 영국의 무역이 남북전쟁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것처럼 중립 교역이 전쟁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때와 링컨의 봉쇄 선언에 의하여 명백해진 것과 같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가 그것이다.(역 자주: 타국이 일방 국가내에 별도의 교전단체를 승인할 수 있는 요건은 그 타국의 중립무역이 침해받고 있으며 그 일방국가에서 내전이 실제로 발발했을 때이다. 남북전쟁시 합법적인 미합중국 정부 외에 남부연합이 독립을 선언하고 미합중국과 교전행위를 하였으므로 이 요건이 수립된 다) 남북전쟁 한장면. 남부연합기와 합중국기가 격돌하고 있다 저 유명한 지네 사건은 중립역사상 매우 중요한 쟁점을 해결하였다. 중 립국 영토의 불가침 원칙은 1793년 워싱턴 대통령에 의하여 최초로 선언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의 중립을 유지하 기 위하여 워싱턴은 그의 유명한 중립 선언을 통하여 미국 시민에게 어떠 한 군사적 참여도 회피하라고 경고하였다. 이 선언은 또한 중립국은 자 국민이 외국에 복무하여 중립국과 평화관계에 있는 타국에 대한 적대행 위를 하는 것을 금지시킬 적극적 의무를 지닌다는 새로운 원칙의 탄생을 의미하였다. (역자주: 중립국의 의무에 대한 논의시작 - 중립국은 자국 민이 타국에 지원병이 되어 우방국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 것) 주미프랑스 대사 에드몬드 지네 (Edmond-Charles Genet 1763  – 1834)가 필라델피아에서 환영받고 있다 (프랑스 혁명 후 프랑스 혁명정부에 영국이 선전포고하였다. 지네 대사 는 미국민들을 선동하여 반영국 친프랑스 운동을 일으켰다. 미국인들이 사략선을 통해 영국 선박을 나포하고, 프랑스 혁명군에 가담하기도 했 다. 미국정부는 프랑스의 건국지은에도 불구하고 불영 전쟁에는 끼고 싶 지 않았다)  이 선언에 규정된 중립의무를 이행하고 정부 당국의 명령을 집행함에 있 어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의회는 1794년 누구도 미국의 관할 권 내에서 미국과 평화 관계에 있는 국가를 적대시하는 비중립 역무를 수 행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제1차 외국모병법을 제정하였다. 남미에서의 혁명적 반란기 동안 미국 정부는 독립투쟁을 하는 반란 식민 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미국 항구 내에서 매일같이 장비를 갖추던 원정대 를 저지시키려는 조치수단으로 제1차 외국모병법은 부적절함을 알게 되 었고, 그 결과 1818년 제2차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미국 대 통령은 위법한 파병을 막기 위하여 육해군 병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았으며, 연방지방법원은 법규정을 위반하여 사용되지 않으리라는 약속(역자주: 보증보험증서)과 함께 보증금을 제출하지 않으면 출항하려 는 어떠한 선박도 억류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법은 후일 많 은 유럽 국가들의 입법의 바탕이 되었으며, 그중 영국의 1819년도 법은 가장 주목을 끈다. 남미에서의 혁명봉기 기간 중 중립유지에 어려움을 겪던 영국 정부는 출항하려는 선박에 대한 보증금 제출 요구만을 제외하 면 (역자주: 원문에서는 보증보험증서를 제외하고 보증금 제출만을 요구 하였다고 써있다. 정인섭의 오역이다) 1818년도 미국법을 거의 그대로 추종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 기간 중 이러한 요구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난 이후에는, 영국의 1871년도 외국 모병법에서는 미 국법의 그 부분까지 채용되었다. 영국정부가 미국의 중립법을 유심히 뒤 따랐다는 사실은 “만약 내가 중립제도에서 지침을 원한다면, 나는 워싱 턴 대통령과 제퍼슨 장관 시절 미국이 취한 예를 따르겠다”는 캐닝 (Canning)의 유명한 발언에 아주 잘 표시되고 있다. (역자주: 미국영토 내에서 우방국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금지하였더니, 미국 항구에서 우방국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목적으로 해상원정대가 출 발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중립국의 의무 추가 - 중립국은 출항 선박에 대 해 우방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보증보험증서와 보증금을 징구한다) (강평: 이런 것이 시스템적 사고방식. 규제의 실효성을 담보할 새로운 통 제방식의 고안이다. 법의 실효적 영향력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가 능한 일이다.) 만약 앨라배마호 분쟁이 영원히 미해결로 남겨졌다면, 영국의 행동은 이 후의 전쟁에 있어서 중립국에 대한 유감스러운 선례가 될 수도 있었다. 영국 정부 대표 러셀(Russell)백작은 앨라배마호 및 다른 남군 선박들의 원정에 대하여 개인들의 밀무역원칙을 적용하려고 노력하였으며(역자 주: 남부정부의 개인들이 하는 밀무역에 대해서 영국이 관여할 필요가 없 다는 뜻) , 따라서 “영국 정부는 이들 선박에 대하여 전혀 개입할 수가 없었다”는 점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작은 이 분쟁을 중재재판에 회부시키자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를 밀무역이 아닌 적대적 원 정으로 본 미국은 그 선박들이 영국 수역을 떠나지 못하도록 잡아두어야 하는 중립국으로서의 의무가 영국정부에 부과되는데도, 영국이 이 의무 를 게을리하였으므로 미국의 교역에 가하여진 피해에 대하여 미국에게 보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결국 영국이 이 사건을 제네 바 중재재판에 회부하기로 동의할 때까지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최종판 정은 영국에게 미국시민이 입은 직접적인 피해에 대하여 무거운 배상금 을 지불하라고 명하였다. (감평: 국가간 분쟁에서 스위스같은 제3의 중립국에 중재재판을 올리고 그 판결에 복종하는 것이다. 아시아권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다. 아시아가 구미열강에 비해 얼마나 서구적 현대적 국제법 개념이 미 개한 상태인지 알 수 있다. 이게 무려 조선의 대원군 시절에 벌어진 일이 라니. 지금도 한국 중국 정부 공히 구미국가가 정한 국제적 규범, 국제법 에 대한 감각, 외교적 의전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겪어보지 않은 것은 베껴서 알기 어렵다) Alabama 이 중재재판에서는 영국 정부가 앨라배마호 등의 선박이 영국 관할구역 을 출항하도록 하였고, 또한 이후 이들 선박이 남군 공용선박의 자격으 로 여러 식민지의 항구들에 기항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적절한 주의의 무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판단되었다. 이 분쟁의 해결 이후 어떠한 중립 국도 자국과 평화관계인 국가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국 관할 내에서 장비 를 갖춘 적대적 원정을 밀무역으로 다루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다. 독립전쟁 기간 중 미국은 중립교역의 취급에 관하여 영국의 관행을 따랐 다. 적선과 적화(역자주: 敵貨적대적 화물)는 몰수되었고, 중립선과 중립 화(역자주: 중립 화물)는 놓아주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곧 이 관행을 포기하였고, 프랑스와의 1778년도 조약에서는 ‘중립 선박상의 화물은 몰 수 배제’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과거에는 적성감염주의 원칙을 채택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조약규정에 따라 적국 항구 를 출입하려는 모든 중립국 선박들은 나포에서 면제된다는 칙령을 발표 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엄격한 규칙 (역자주: 비자유주의적 규칙. 중립국 선박도 나포하는 따위의 정책)을 시행함으로 인하여, 이 칙령은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곧 취소되었다. 미국은 중립무역에 대한 영국식의 엄격한 취급을 완화시키기 시작한 이 래, 결코 콘솔라토 델 마레(역주: 우호적 중립선은 보호하고, 적대선은 나포한다) 의 원칙을 주장하지 않았다. 미국의 최고의 주안점은 중립 선 박상의 화물은 몰수 배제라는 원칙을 영구히 확립시키려는 것이었다. 따 라서 미국은 중립 선박상의 화물은 몰수 배제라는 원칙과 적선상의 화물 은 적화라는 두 원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 조하였다. 이 시기의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일부 조약에서는 이 두 개의 원칙이 동시에 채택되기도 하였는데, 미국은 결코 적선상의 화물은 적화라는 원칙만을 따라(역자주: 적선-적성화물 원칙만을 독립적으로는 인정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중립선-중립화물의 원칙과 상응해서만 인정 했다) 수락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이 자유주의적인 원칙을 프러시아와의 조약에서 의도적으로 포기하였던 1799년 이전가지는 적선상의 화물은 적화라는 조항의 삽입 여부와 관계없이 실제로 모든 조약에 중립 선박상 의 화물은 몰수 배제라는 원칙을 삼입시켰다. 미국의 정치가들은 자유주 의적 원칙을 실행하여도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원칙을 채택하지 않는다 면 미국은 항상 손해보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자 자유주 의적 원칙의 수립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하였다. (역자주: 미국만 자유주의를 앞서가다 손해를 보자, 일시적으로 자유주의 기조를 후퇴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흐름은 자유주의의 확대였다) 나폴레옹과 영국 간의 투쟁기간 (역자 주 1814년에 종결) 중 양측은 바 다에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미국은 중립교역의 자 유를 계속 주장한 유일한 국가였다. 이러한 주장의 결과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순양함이 미국 선박에게 가한 피해에 대하여 배상을 지불하여야 만 하였다. 영국 정부는 1756년도 전쟁규칙과 공해상의 미국 선박으로 부터 자신의 선원을 징용하는 오랜 관행을 여전히 고수하였다. 미국은 거래금지 및 금수법을 통하여 이러한 침해 행위에 대한 보복을 하였다. 1794년도 제이 조약을 통하여 영국은 칙령에 의거하여 영국 군인들이 저 지른 불법체포에 대하여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선원 의 징용과 중립 무역권의 무시는 미국이 마침내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 를 한 181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영국이 실시하 던 징용권과 1756년도 전쟁규칙상의 원칙이 다시는 심각한 국제분쟁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다. 1805년 트라팔카 해전 (감평: 프랑스에게도 배상금을 받아내고, 영국에 대해 무역보복을 하고, 급기야 전쟁까지. 결국에 영국이 물러서서 배상금을 지불했다. 미국의 파워는 경이롭다) (역자주: 미영 전쟁 1812.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각기 대륙봉쇄령을 내리고 대륙국가와 영국간의 무역을 막았다. 이때 영국은 집중적으로 미국 선박을 단속하였다. 영국군은 미국선원을 강제로 영국 해군으로 징집하기도 했다. 미국은 영국령 캐나다의 영토를 탐냈다. 이 러한 배경으로 양국간 전쟁이 벌어졌다. 영국은 백악관을 급습하여 불질 러 버렸고, 이때 백악관을 복구하면서 검댕을 감추려고 흰색 뼁끼칠을 했는데 그게 White House가 되었다. 미국의 맥킨리 요새는 영군의 맹공 에도 성조기를 앞세우며 수성에 성공했는데, 그 유래로 미국 국가가 나 왔다"the star spangled banner". 전쟁의 결과는 흐지부지  ) 미영 전쟁에서 영국군이 맥킨리 요새를 포격하는 그림 크리미아 전쟁(역자주: 1853-1856)이 발발하자 미국은 유럽 국가들에게 다음 두 가지 원칙을 채택하자고 제안하였다. 즉 ① 전시금제품이 아닌 중립 선박상의 화물은 몰수 배제, ② 전시금제품이 아닌 적선상의 중립 국 화물은 몰수 배제가 그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각국은 파리에 모여 저 유명한 파리선언에서 이 원칙을 다른 두 원칙과 연계시켜 제시하였 다. 미국의 제안에 추가된 규정은 ① 봉쇄선언이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 는 실효성이 있어야 함, ② 사략선 제도의 폐지였다. 1783년 프랭클린과 영국 간의 협상내용의 일부였던 사략선의 금지를 포함하여, 이 양자는 미국이 다년 간 주장하였던 것이었다. 지상봉쇄의 폐해는 미국에 의하여 언제나 비난되던 것으로, 특히 나폴레옹 전쟁의 폭풍기와 그 이후여 그 러하였다. 파리회의 참가국들이 마시(Marcy) 수정안의 채택을 거부함으 로써 그 결과가 미국은 파리선언의 당사국이 되기를 거절하였지만, 미국 이 파리선언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참으로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역자주: 중립선박의 자유무역원칙이 정립되고 있다. 중립선박이라면 그 안에 전시금수품이 없는 한 몰수배제, 적선이라도 그 안에 중립화물은 몰수배제, 봉쇄령을 발하려 한다면 아무도 봉쇄를 뚫을 수 없도록 제대 로 된 단속을 할 것 - 즉, 봉쇄한다고 뻥카만 치고 봉쇄 뚫을 놈은 뚫게 냅두고 령을 지키려는 국가만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즉즉, 제대로 단속안하면 나도 봉쇄령 무시할 거임) 크림전쟁에서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격돌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전시금제품의 목록을 확장시키려는 영국의 입장에 맞서서 이를 가능한 한 축소시키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였다. 프랭클린은 전시금제품의 수송에 대한 징벌로서 이를 몰수하는 규칙은 너무 가혹하 므로 억류하는 것으로 이 원칙을 대체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우리 시 민은 언제나 자유롭게 무기를 제조하고, 판매하고, 수출할 수 있다”는 제 퍼슨의 유명한 주장은 이후 확립된 원칙으로 수락되었다. 즉 상품이 선 의의 (역자주: 眞性의)상업적 거래의 대상이라면, 중립국 정부는 개인의 전시금제품 무역에 개입할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역자주: 반드시 개입할 의무는 없다는 의미). 영국이 식료품을 전시금제품으로 몰수한 행위는 미국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미국의 선박과 화물의 불 법포획에 대하여 제이 조약 (역자주: 1794년)에서 영국 정부가 지불하기 로 합의한 보상은 주로 식료품에 관한 논란의 결과였다. 중립국의 우편 증기선 (역자주: 19세기~20세기 초기의 대서양 횡단 우 편배달 선박)은 포획으로부터 면제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 남 북전쟁 기간 중 미국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우호국이나 중립국의 공공 우편물은 개봉되거나 조사받지 않은 상태로 중립국의 적절한 당국(역자 주: 우편당국)에 전달되도록 하라는 시워드 장관의 지시는 모든 외국에 게 통보되었고, 이 원칙은 점차 일반화되었다. 전시금제품에 관한 미국 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남북전쟁 기간 중 완전히 변경되었다. 연방정부가 출간한 전시금제품 목록에는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포함 되었다. 게다가 트렌트 사건에서 연방정부는 중립국 항구로 향하는 중립 국 선박에서 발견된 적국 외교관을 전시금제품에 준하여 취급하겠다는 윌크스 선장의 원칙을 처음에는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한 논의로부터 그 같은 인물이 전시금제물로 취급되어서는 아니되며, 교전 국 포획자는 중립국 선박에서 그를 강제로 끌어내릴 수 없다는 점이 명백 해졌다. 지상 봉쇄(紙上縫鎖 paper blockade 봉쇄하겠다고 뻥카만 치는 행위)의 관행은 미국에 의하여 언제나 비난되었음을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는 미국의 상인과 해운에 많은 피해를 야기하였고, 그 결과 오랜 지연 끝에 프랑스 의회는 피해에 대한 배상으로 미국에 대 하여 500만 달러의 지불을 결정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그 같은 봉쇄의 해약을 깨닫고, 1856년 파리에서 실효적인 봉쇄만인 구속력 있음을 공 식 선언하였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Continental Blockade 1806-1812 영국 정부는 교전국이나 중립국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항해하는 상선을 검문으로부터 면제시켜주자는 데 항상 반대하였다. 미국 역시 교전국의 호위 하에 항해하는 상선은 몰수하였으나, 자국 군함의 호위를 받는 중 립국 상선은 교전국의 검문 검색권으로부터 면제된다고 항상 주장하였 다. 중립국의 호위를 받는 선박은 면제를 향유한다는 조항은 미국이 타 국과 체결한 많은 조약에 포함되었다. 1801년 영국 역시 이러한 원칙을 요구하던 성 페테스부르크 해운조약에 가입함으로써 미국식 관행을 수락 하였다. 영국식 연속항해의 원칙에 따르면 적국 또는 적국 식민지 항구를 떠나 적 국 항구로 향하고 있지만 위장 수입서류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 중간에 중 립국 항구를 방문함으로써 항해를 단절시키려는 중립국 선박은 중간의 중립국 항구로부터 최종 적국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나포되더라도 몰수 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기간 중 미국은 선박이 중립국 항구에서 중립 국 항구로 가는 항해의 첫 번째 항정(航程)에 있을지라도, 그 물자가 최 종적으로는 적국을 향한다고 의심될 때에는 해당선박을 전시금제품 교역 과 봉쇄 침파 시도를 이유로 몰수하는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미 국의 정책은 정당화될 수 없다면 격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는 그후 1908~1909년 런던회의에서 수용됨으로써 국제법의 일부로 승인되었 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전시금제품 수송에만 적용되었으며, 봉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역자주: 적대국에 대한 해상봉쇄 상태에서, 중립국 선박이 중립국 항구 에서 다른 중립국으로 가는 도중 검색을 당한 경우다. 이때 최종 목적지 가 그 적대국이며 그 선적품이 전시금제품인 경우는 나포/몰수가능. 그 러나 그 선적품이 전시금제품이 아니라면 단순한 해상 봉쇄 위반용 積財 品으로 보아 나포/몰수 불가능) 대체로 중립법에 관한 미국의 영향은 깊고 폭넓게 미치었다. 현재의 중 립제도를 177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와 비교하면 전반적으로 국 제법의 다른 어떠한 분야보다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발전이 모 든 인류에게 대단한 축복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교전국의 작전 영역은 크게 제한되었고, 전시 중 국가 간의 평화적인 교류수단은 괄목 할 정도로 보장되었다. 무엇보다도 중립교역의 자유가 확대되고 보장되 었다. 유럽의 해양강국들이 제기하였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지속 적으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이와 같 은 성과를 이룩하는데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감평: 미국은 자유주의적 견해로 중립국 선박의 교역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전시에도 중립국을 통한 수출입, 혹은 중립국간의 교역을 보호받도록 한 노력으로 세계 경제의 발전 특히 미국경제의 발전 에 기여했다. 미국이 20-21세기의 확고한 세계 초 강대국이 된 것은 우 연이 아니다. 국제법적 아젠다를 주도하고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끊임 없이 유도 고수하였다. 국제법상 중립무역분야에서 고문변호사 겸 이사 회 의장 국가가 된 미국은 소프트 파워에서 이미 초강대국의 기틀을 마련 한 것이다. 바라볼수록 위대한 천조국이다. 단순히 자원이 많고 물량 이 거대하여 천조국이 아니다. 이런 법적, 규범적, 문화적 소프트 파워 는 全인류가 미국을 (미워하면서도) 숭배하게 만든다. 유학생활에 이런 미국의 파워를 몸소 체험하고, 이승만은 일찌감치 친미가 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열쇠라고 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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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Summary Review

The early history of the law of nations allowed of no such idea as neutrality, as we understand it now. The very elementary ideas of neutrality began with the gradual decline of the Roman Church and the Roman Empire. The earlier writers on international law, beginning with Hugo Grotius, endeavored to define neutrality, and their opinions were of considerable value to its development. But their ideas of it were more or less vague and imperfect, admitting the legality of warlike assistance rendered by neutrals to belligerents under certain circumstances as consistent with neutrality. Having no definite rules to regulate the relations between neutrals and belligerents, international commerce was entirely at the mercy of warring states and was afforded no protection whatever. The principle of the inviolability of neutral territory, important as it has now become, was practically unknown down to the latter part of the i8th century. Belligerents were left entirely free to transport their troops across neutral territory, to raise land and naval forces in neutral states, and to arm and equip vessels of war in neutral jurisdiction. States had, on the other hand, neither the right to prevent neutral operations in their territory nor were they held responsible for the acts of their subjects in entering the service of a foreign state, or from engaging in any other service hostile to one of the belligerents. The subjects of neutral states, as well as the states themselves, were at perfect liberty to give all sorts of warlike succours to either, or both, of the belligerent parties, as their individual interests or sentiments should dictate. The rudimentary ideas of neutrality were found in some of the early maritime codes of European countries, the Consolato del Mare being the most famous of them all. The principle of the Consolato, namely, 'spare your friend and harm your enemy', was a manifestation of the growing desire to distinguish neutrals from belligerents and for protecting the lat103 ter. Great Britain, acknowledging the justice of this principle, always insisted upon condemning enemy's ships and enemy's goods, while Hberating friend's ships and friend's goods. Some of the other European powers practiced this rule but none of them to the extent that England did. During the i6th century the Dutch, desirous of avoiding belligerent search on the high seas, introduced the liberal principle of free ship, free goods. Most of the European maritime powers did not welcome the introduction of this new principle, and the Dutch in their efforts to insert this rule in their treaties with other states introduced the converse principle of enemy ship, enemy goods. The French exercise of belligerent rights, followed later by Spain, was the most extreme of all the European countries. Under the doctrine of hostile infection, they condemned neutral vessels for carrying enemy goods. It goes without saying that under such circumstances international trade was in a most deplorable condition down to the end of the i8th century. The declaration of the independence of the United States in 1776 marks the introduction of a new era in the history of the laws of neutrality. "From the beginning of its political existence," says John W. Foster, "it (the United States) made itself the champion of a free commerce, of a sincere and genuine neutrality, of respect of private property in war, of the most advanced ideas of natural rights and justice; and in its brief existence, by its persistent advocacy, it has exerted a greater influence in the recognition of these elevated principles than any other nation in the world." The most important questions, the settlement of which was largely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were (i) the recognition of independence, (2) the inviolability of neutral jurisdiction, and (3) the freedom of neutral commerce. During the American war for independence, neutral France was drawn into war with England largely by the influence of American diplomacy. In the accustomed way of neutrals in those days the French Court gave freely, though secretly at first, all kinds of warlike assistance to the Americans in their struggle for independence. The formal recognition of American independence by the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France was premature, and as a result. Great Britain declared war against France. From this 104 instance, it became universally understood that a premature recognition of the independence of a revolted colony by a neutral country justified the mother-country in declaring war against the neutral. Since the successful establishment of the American Republic, the question of the recognition of independence and of belligerency has become the subject of the most lively discussions between nations. More or less inspired by the American Revolution, many of the European colonies in the Western Hemisphere, especially those of Spain and Portugal, revolted from the mother-country and demanded from neutral powers the recognition of their political existence. The general rules of such recognition as understood at the present time, were largely established through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in its relations with the European and South American revolutionary movements. The wise discretion and the judicious statements of the American statesmen shown in the diplomatic correspondence of the time set forth a correct example which the nations of the world follow. During the American Civil War, the British recognition of the belligerency of the Confederate States aroused tremendous excitement and feeling against Great Britain in the United States. But the American government acquiesced in the British interpretation of the recognition, thus acknowledging that it was not premature. Out of this dispute it was made clear that such a recognition is justifiable on the following conditions: when neutral commerce is affected by the contest, as the British trade was by the Civil War ; and when war actually exists, as it was manifested by Lincoln's blockade proclamation. The celebrated Genet affair settled a most important question in the history of neutrality. The principle of the inviolability of neutral territory was first proclaimed by President Washington in 1793. In order to maintain the neutrality of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progress of the war between England and France, Washington warned the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in his famous Neutrality Proclamation, to refrain from any warlike participation in the contest. This Proclamation marked also the inauguration of the new principle that a neutral state has a positive duty to prevent its citizens from any hostile action in the service of a foreign state 105 against another with which the neutral country is at peace. In order to fulfill the neutral duties set forth in the proclamation and to meet the difficulties that stood in the way of the execution of the orders by the government authorities, Congress passed the first Foreign Enlistment Act of 1794, prohibiting any person from performing unneutral services, within the jurisdiction of the United States, against any state with which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During the revolutionary uprisings in South America,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found the first Foreign Enlistment Act inadequate as a means of procedure against the expeditions that were being fitted out daily in the ports of the United States to help the revolting colonies in their struggles for independence, and as a result the second Act was passed in 1818. By this Act,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was authorized to use the land and naval forces to prevent any illegal expedition and the District Courts were empowered to detain any vessel ready to sail unless a bond of security was furnished with the promise that the vessel should not be employed contrary to the terms of the law. This Act became the basis for the legislation of many European states in later years, the act of 1819 in England being the most prominent. Under the difficulties of maintaining its neutrality during the revolutionary uprisings in South America, the British government closely followed the American Act of 1818, excepting the requirement of security to be furnished by the vessel about to depart. This part of the act was later adopted by Great Britain in her Foreign Enlistment Act of 1871, after there had been ample opportunity furnished during the American Civil War to prove the necessity of the requirement. The fact that the British government carefully followed the American neutrality acts could never be better shown than by the well known statement of Mr. Canning : "If I wished for a guide in the system of neutrality, I should take that laid down by America in the days of the Presidency of Washington and the Secretaryship of Jefferson . . ." Had the Alabama dispute been left permanently unsettled, the action of England would have furnished an unfortunate precedent for neutral states in future wars. The British government represented by Earl Russell, endeavored to apply to the expeditions of the "Alabama" and the other Confederate 106 ships the principle of individual contraband trade, and therefore had repeatedly asserted that "Her Majesty's Government can not in any way interfere with these vessels." Furthermore, the Earl refused to submit these claims to a court of arbitration that had been proposed by the United States. Treating them as hostile expeditions, and not as contraband trade, the United States insisted upon claiming that it was a neutral duty incumbent upon the British government to have kept the ships from leaving English waters, and as it failed in this duty^ the British government must compensate the United States for the damage done to American commerce. These claims were never given up until the British government at last consented to submit them to a court of arbitration at Geneva, the final award of which compelled Great Britain to pay a heavy indemnity for the direct damages sustained by the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By this Arbitration it was decided that the British government failed to use due diligence in allowing the Alabama and the other vessels to depart from British jurisdiction, and also by admitting them afterwards into its various colonial ports as public vessels of the Confederate States. Since the settlement of this dispute no neutral state would make the mistake of treating as contraband trade hostile expeditions fitted out within its own jurisdiction to serve against a nation with which it was at peace. At the time of the Revolution the United States followed the practice of Great Britain in regard to the treatment of neutral commerce. Enemy ships and enemy goods were condemned, and free ships and free goods were allowed to go free. But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soon gave up this practice and in 1778 the principle of free ship, free goods, was adopted in a treaty with France. The French government, following the provisions of the treaty with the United States, in spite of its former practice of hostile infection, issued an ordinance exempting from seizure all neutral ships bound to or from enemy ports. But on account of the continued severity of the British rule, this ordinance was soon afterward revoked by the F nch government. .ice the United States began to mitigate the severity of the English treatment of neutral trade, it never advocated the principles of the Consolato del Mare. Its chief endeavor was to establish permanently the principle of free ship, free goods,. 107 and it therefore repeatedly asserted that the two maxims, free ship, free goods and enemy ship, enemy goods, were not inseparable. Although these two opposite rules were both adopted in some of the treatie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other parties during this period, the United States never accepted the principle of enemy ship, enemy goods, alone. Either with or without the enemy ship, enemy goods, clause, the United States inserted the free ship, free goods, maxim practically in all of its treaties down to 1799, when it deliberately abandoned the liberal rule in its treaty with Prussia. Through their experiences, the American statesmen discovered the fact that the United States was always the loser in the practice of the liberal principle, so long as the other powers would not adopt the same principle, and consequently decided not to insist any longer on the establishment of the liberal rule. During the struggle between Napoleon and England, each trying to cripple the other on the sea, the United States was the only power that still claimed the freedom of neutral commerce. As a result of this claim, the French government was compelled to pay an indemnity to the United States for damage done to American ships by French cruisers. The English government still continued in its old practice of the Rule of the War of 1756 and of impressing British seamen from American vessels on the high seas. The United States retaliated against these outrages by the Non-Intercourse and the Embargo Acts. By the Jay treaty of 1794, England agreed to pay to the United States a sum for the illegal captures made by British men-of-war under the authority of the Orders in Council. But still the impressment of seamen and the disregard of the rights of neutral trade kept on until 1812, when the United States at last declared war on England. From the close of that war the right of impressment as it was practiced by Great Britain and the doctrine of the Rule of the War of 1756 have never become questions of serious international dispute. At the outbreak of the Crimean War, the United States proposed to the European powers to adopt two principles, viz. : (i) that free ships make free goods, with the exception of contraband of war, and (2) that neutral goods in enemy ships may not be confiscated, with the exception of contraband. After the war the powers assembled at Paris and set forth 108 these principles in connection with two others, in the celebrated Declaration of Paris. The articles in addition to those proposed by the United States were : ( i ) that declaring that blockade to be binding must be effective, and (2) that doing away with the practice of privateering. Both of these had been advocated by the United States for some years, especially that against privateering, which had formed a part of Franklin's negotiations with Great Britain in 1783. The evil of the paper blockade had always been condemned by the United States, especially during and since the stormy days of the Napoleonic Wars. Although the powers at Paris refused to adopt the Marcy Amendment, and the United States consequently declined to become a party to the Declaration, the direct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upon that Declaration was, indeed, inestimable. From the early days of its history the United States had earnestly endeavored to restrict the list of contraband articles to the narrowest possible limit, in opposition to the English tendency of expanding it. Franklin went as far as to contend that the rule of confiscating contraband goods as a jpunishment for carrying them was too severe, and that, therefore, the detention of such goods should be substituted for this rule. The famous assertion of Jefferson that "our citizens have always been free to make, vend, and export arms" has ever since been accepted as the established rule ; that is, that a neutral government is not required to interfere with individual trade in contraband goods so long as the goods are a part of a bona fide commercial transaction. The British condemnation of provisions as contraband was strongly protested by the United States. The compensation agreed upon in the Jay treaty to be paid by the British government for the illegal capture of American vessels and cargoes, was mainly the result of the controversy concerning provisions. The very important principle that neutral mail steamers be exempt from seizure was introduc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Civil War. Secretary Seward's instructions that public mails of any friendly or neutral power should be delivered unopened and unsearched to the proper neutral authorities were communicated to all the foreign powers and the rule gradually became universal. The liberal tendency of the United States toward contraband 109 articles was totally changed during the Civil War. The list of contraband articles published by the Federal government included almost everything that might be useful in war. Furthermore, in the case of the Trent, the Federal government at first advocated Captain Wilkes' principle of treating as analogues of contraband the belligerent diplomatic persons found on neutral vessels bound for a neutral port. From the discussion that arose on this incident, however, it was clearly established that such persons are not to be treated as contraband and that a belligerent captor should not forcibly extract such persons from a neutral vessel. It has been mentioned above that the practice of paper blockade was always condemned by the United States. Napoleon's 'continental system' caused much damage to American merchants and shipping, and as a result of it the French Chambers appropriated $5,00Ov00O, after much delay, to the United States as indemnity for the damage done. The European powers realized the evil of such blockades and formally declared at Paris in 1856 that blockades in order to be binding must be effective. The British government always denied the exemption from search of a merchant vessel sailing under the convoy of either a belligerent or a neutral war ship. The United States also condemned merchant vessels sailing under a belligerent convoy, but always contended that a neutral merchant vessel under the convoy of a ship of war of its own state must be exempt from the belligerent right of visit and search. This immunity of ships under neutral convoy was provided for in many of the treatie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other powers. In 1801, Great Britain also admitted the American usage by joining the Maritime Convention of St. Petersburg, which urged this principle. According to the British doctrine of continuous voyage, neutral vessels bound for an enemy port from an enemy or enemy colonial port, but stopping and breaking the voyage at some intermediate neutral port for the purpose of getting a set of papers showing a colourable importation, were condemned when captured on their way from the intermediate neutral port to the ultimate hostile destination. But the United States went so far, in the Civil War, as to condemn vessels for contraband trading and attempt to break blockade even on the no first leg of the voyage when the ships were going from neutral port to neutral port, when there was suspicion that the goods had an ultimate hostile destination. This American doctrine was severely criticised as being unjustifiable, but since that time it has gained recognition as a part of international law by its incorporation in the London Conference of 1908-09. But here it was applied to the carrying of absolute contraband only and not to blockade. In the main,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upon the laws of neutrality has been profound and far reaching. Comparing the present system of neutrality as a whole to that which obtained in the early days down as far as the year 1776, its advancement has been far greater than has been that of any other branch of international law. That this advancement has been a great blessing to all mankind goes without saying. The sphere of hostile operations has been vastly limited, the means of peaceful intercourse between nations in time of war has been guaranteed to a great extent, and, above all, the freedom of neutral commerce enlarged and safeguarded. In spite of all the opposition raised by the great European maritime powers, the United States, by its persistent advocacy of liberal viiews, contributed a larger portion of influence toward these accomplishments than any other nation in the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