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8

2019 Backhouse Lecture by Jason MacLeod

성경의 원리, 성경론

성경의 원리, 성경론 새벽별 2019. 7. 1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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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면 글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생각을 바꾸고 내 몸을 바꾸고 내 마음을 바꾼다. 말씀 이 내 안에 살아 운동하는 것을 본다. 로고스의 씨가 뿌려지면 반드시 가지를 뻗고 잎이 돋아나고 다 시 열매를 맺어 살아 운동하는 것이다. 내 생애, 눈을 감고 걸어가다 길을 잃은 적이 몇 번이었던가. 샛길로 빠지기도 여러 번, 고통의 골짜 기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뒤돌아보면 아득하다. 그때마다 표지판이 되어준 책은 성경이 유일하다. 어떤 때는 마음이 심히 괴로웠고 어떤 때는 뛸 듯이 기뻤다. 사십 년간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나의 삶이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만났던 하나 님을 나도 만났고, 그들이 오해했던 하나님을 나도 오해하기도 했었다. 간혹 어둡고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이 계속되기도 했었고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쏟아질 때는 가슴이 벅차올라 감당하기 어려운 때 도 있었다. 한 깨달은 자의 계명과 율법과 문장들로 인하여 수없는 피 흘림과 전쟁이 있어왔고 지금도 진행 중 이다. 율법 속 인간은 왜 생명나무를 따먹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오늘날 이 수많은 종교와 종파 가 난무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유대민족의 유일신 사상이 전 세계에 다신교로 퍼져 몽학선생이 되 어 눈을 멀게 하였는가? 미술사에, 문학사에, 예술계에 두루 퍼지고 스며들어 세계 시민을 다스리는 권력이 되었는가? 하나 님은 어디 계시며, 성령은 언제, 어디에 임하시며 어떻게 개인의 삶에 개입하시는가? 스스로 묻고 답 하지 않으면 세뇌 당한다. 스스로 보지 않고 보라는 대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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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생명수가 흐르는 길이 감추어져 있다. 그 길을 찾고 또 찾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 이라는 말씀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 그 길은 묻어둔 채 네 갈래 샛길로 빠지면 안 된다. 아무도 그 길 을 찾아줄 수 없다. 스스로 묻고 또 찾아야 한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들으라는 대로 듣 게 되어 심령 속에 들려오는 새벽 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가장 어두운 지금이야말로 새벽 별이 떠 오를 때가 아닌가? 이제 고요히 앉아 새벽 별의 소리를 마음의 귀로 들어보자.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28~29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을 푸는 가장 정확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로 성경을 풀지 말아야 하며 성경 밖에서 성경을 풀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66권으로 편집된 문서인데 각 권은 모두가 독립적이면서도 전체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 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인체와 같은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서이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 로 구성되어 있듯이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은 육체와 같고 신약은 영혼과 같 다. 현의식의 자리에서 초의식 세계로 비상하려는 원(願)이 있는 한편 육신의 인력(引力)이 무중력 상 태로 비상하려는 우리의 현의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이것이 바울의 다음과 같은 성구에 잘 나타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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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 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적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2~25 성경이 이같이 인체의 구조처럼 몸인 구약과 마음인 신약으로 구성된 것은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우리들의 육신의 소욕(所欲) 속에서 일어나 고 있는 사건의 비유와 상징이며, 신약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마음과 영혼이 어떻게 육신 의 소욕을 초극하고 승리하는가를 보여주는 비유와 상징인 것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곧 성경인 것이다. 성경은 인간 그 자체의 역사적 실존적 전개이다. 그러므로 성 경을 읽고 그 암호 해독은 인간 자신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때 바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것 이 현존인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나 밖에 성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격성이 있는 문서이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문서이므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닮게 구성되고 기록된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몸이 없으면 마음이 없고 마음이 없이 몸이 없듯 몸과 마음은 쌍전(雙全) 해야 한다. 때문에 구약이 없이 신약이 없고 신약이 없이 구약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신약과 구역을 함께 연구하고 그 암호를 해독해야 한다. 구약 세대는 예수가 없는 마당이었으므로 예수의 몸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세워 예수가 올 때까지 < 속죄의 집>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지상에 세운 성전은 예수가 오면 건축물로서의 존재 가 치는 없어지고 돌로 지은 성전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왔는데도 유대인의 대제사장 과 바리새인들은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은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69은 사십육 년45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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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19~22 이 성구에서 보듯이 <성전은 예수의 몸>의 상징인데 유대인들은 상징물만 중요시하고 그 실체가 무 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실체 자체와 상징을 구별할 참 지혜가 없었다. 예수가 성전은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구조물임을 천명한 후 사도들도 비로소 크게 깨달아 예수 승천 후 성전은 곧 인간의 몸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구속받은 인간의 몸이 곧 성령이 거하는 성전임을 깊이 인식했던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이처럼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인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돌과 시멘트로 지은 성전이 교회인 줄 착각 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인간 그 자체 안에 거하시는 분이지 건축물 속에 거하지 않는데 우리는 아직도 구약적인 사고방식을 탈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구조물로 이룩된 성전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 와 같은 착각과 미망(迷妄)은 재림 예수가 오기까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계속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개명(開明) 되면 이 땅에는 건축물로 된 성전과 교회는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몸이 성전인데 돌과 시멘트로 성전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pp. 39~56)

저자 출판 발매 성경의 원리 상 변찬린 한국신학연구소 2019.04.19. 69 45 새벽별(sara660)님을 이웃추가하고 새글을 받아보세요 새벽별의 은사 취소 이웃추가 7/18/2019 성경의 원리, 성경론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ra660&logNo=221586895524&fbclid=IwAR2tWwF5WjFPKPSvRs2vE9YnuuIjPtC5DaDmuPX9R… 5/8 

시멘트 사이로 생명은 흐르고 무심에 이른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빼앗기게 될 수도 있는 어떤 것을 도무지 소유하지 않 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기도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과 일치되기 위해서만 기도할 뿐입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 69 45 새벽별(sara660)님을 이웃추가하고 새글을 받아보세요 새벽별의 은사 취소 이웃추가 7/18/2019 성경의 원리, 성경론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ra660&logNo=221586895524&fbclid=IwAR2tWwF5WjFPKPSvRs2vE9YnuuIjPtC5DaDmuPX9R… 6/8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 라. 요한계시록 2:17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은 받는 자 밖에는 모른다. 겉사람에게 영혼의 기능을 사용하지 말고 이제 속 사람으로 향하자. 분명하게 기록된 성경 속 말씀, 우리는 살아있는 성전이다. 내 안에 성령이 살아계 시면서 지혜를 주시며 갈 길과 할 말을 가르치신다. 다시 사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약의 휘장을 찢었 으므로 우리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곧바로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길 위에 함께 달려가시 는 이가 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모든 두려움을 이기게 한다. 우리가 두려워할 게 무엇인 가? 오직 우리의 푯대는 모든 곳에 편재하시는 분이다. 특정한 장소가 없다.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 눈의 비늘을 떼고 진리를 보자. 말해질 수 없고, 말할 수 없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흰 돌, 오직 내 안의 신성, 지성소에서 신령으로 예배하자. #성경의원리 #변찬린 #영성생활인 #한국신학연구소 #한밝성경해석학시리

Hojae Lee 우리는 우리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는지요?



(28) Hojae Lee

Hojae Lee
16 July at 09:15 ·



우리는 우리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는지요? 나는 나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늘 열강에 부디끼며 생존해 왔기에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요! 유럽에 가면 작지 않은 나라이고, 적지 않은 인구입니다. 우리나라가 대단하다고 하면 늘 국수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을 학자들이 붙여야 할 정도로 우리는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요? 오랫만에 짬을 내어 글을 쓰지만 페북 친구 여러분 우리는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하지 않는지요? 세계 경제 11위 권 이런 거 언급하지 않습니다.
떨치고 일어나 오천여년의 짓눌린 역사에 지구마을과 우주촌을 향해 우리의 평화와 사랑을 목놓아 불러 봅시다.


우리는 이미 홍익인간, 제세이화로 부터, 최치원이 말한 풍류정신과 사상, 그리고 원효의 통불교 정신, 퇴계의 성경사상, 다산의 실학, 최제우의 동학, 강증산의 해원상생과 천지공사, 대종교의 종교사상, 원불교의 일원상,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전래 등 인류역사의 사고가 차곡차곡 진흙더미에 축적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냉전의 대척점인 남과 북이 분단되어 실존적인 아픔을 우리가 겪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일본의 지금 행태를 보세요. 국제 관계에 우리 편은 없습니다. 내 혀에도 물리는데! 이런 고난과 아픔의 시대속에 위대한 인물과 사상은 탄생하고 확산됩니다.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위대한 인물은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뜻이 계신 분은
한 몇 년동안 동서양철학, 동서양문학, 성경, 불경 등 종교텍스트, 과학 등 현대학문을 하시고, 무화과의 깨달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학자적 양심으로 한 마디 더 합니다.

동경대전, 대순전경(특정 증산교의 경전이 아님), 원불교 전서, 대종교경전 을 읽으시고 , 
인물로는 유영모의 다석전기, 함석헌 전집,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를 읽고,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 시대에 태어나 누군가는 시대의 사명은 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난 아니야' 라고 속삭이는 '마귀'의 목소리를 물리치세요. 바로 그 말이 들린다면, 그런 의혹이 나에게 든다면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한 순간 유혹이겨내면 영원을 삽니다. 화이팅입니다.

(25) Hojae Lee '중화신학'을 만들자

(25) Hojae Lee









Hojae Lee
Yesterday at 07:40 ·



중국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중국의 씽크뱅크이며 중국의 인문학을 이끄는 그 곳에서는 화요일에 한 번씩 출근하여 자신의 연구성과를 공유한다.

당시 그 곳 세계 연구소에서 종교 연구자들이 가장 핫한 화제가 기독교였다. 기독교의 교세가 공산당원의 숫자보다 더 많아지는 것을 정권차원에서 우려하니 당연히 그들의 식사자리 단골주제가 기독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좀 더 단독직입적으로 말하면 공산당 통제아래에서 관리가 되는가였다.

그들 중에 '중화신학'을 만들자라는 의견도 있었다. 인도불교를 격의불교(불교용어를 노장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는 중간 경지)를 거쳐 선불교라는 독창적인 중국불교의 역사가 있으니 이런 발상이 그들에게 낯설지가 않다.


글에서 책에서 늘 밝혀왔듯이 미안하지만 한국 신학은 서구신학의 대리전이자 연장이다. 감리교는 웨슬리를 말하고, 장로교는 칼뱅을 말하고, 동시에 예수와 성경의 말씀을 말한다. 생각해보라. 기장과 합동, 통합과 감리교가 성경의 복음을 말하지만 그들의 성경이해는 아주 다르다. '역사비평'을 도입한 기장과 그렇지 않은 교단의 성경의 이해가 같은가? 물어보시라.

또한 '성경적이지 않다'. '믿음이 없네요' 이런 말을 크리스챤은 자주 말하곤 한다. 성경적인 해석을 한 책을 소개해 주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보여달라. 칼뱅의 "기독교 강요"도 성경해석의 한 방편이고 성경은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과 본인만 아는 믿음, 이웃에게 사랑으로 증거해 내지 못하는 믿음을 강요하지 말라.

굳이 우리가 말하자면 성경의 두 마디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예수가 우리에게 준 계명의 완성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만큼, 눈에 보이는 이웃사랑으로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밝히자 라는 것이다. 과연 이 자리에서 그런 입술로만 믿음이 아닌 실천하는 믿음을 가졌는가를 성찰해 보자.

이웃나라, 아직도 공산주의가 정체성인 중국에서 '중화신학'을 한다는데, 중국보다 더 한 종교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정황에서 우리의 믿음과 성경이해를 우리가 이해하자는데 왜 칼 바르트가 나오고 몰트만이 나오고 폴 틸리히가 나오 서구신학을 거들먹 거리는가? 





  • 김경재의 다원적 성경이해, 
  • 안병무, 서남동, 등의 민중신학, 
  • 이명권의 종교간 대화시리즈, 
  • 박재순의 함석헌과 유영모의 씨알사상 조명, 
  • 김흡영의 도의 신학, 
  • 박종천의 상생신학, 
  • 이정배의 유영모 신학사상 조명, 
  • 이은선의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등등등, 그리고 경전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평가받는 
  • 변찬린의 한밝성경해석학 등은 


이미 축적된 주체적 성경이해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믿음은 맹신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개체적 개성에게 준 거룩한 선물이자 편지이다. 그 편지와 선물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실천하자.

서구신학자가 우리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해 주는가? 유불도의 종교전통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복음을 전해받았을때 구원문제를 서구신학이 한 번이라도 우리 입장에서 고민해 보았는가?

이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아직도 살아있는 문서이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알고 믿고 실천해야 하는 문서이다. 성경의 언어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성경은 문자로 만들어진 세상이고, 눈에 보이는 코스모스는 대우주이고 인간은 소우주이다. 역사와 문명과 민중과 한국과 지구마을과 우주촌을 머리에 이고 성경을 읽을 일이다.

깨어난 자는 시대의 위중함을 각 자의 자리에서 인식하고 자신의 신앙의 깊이만큼 이웃과 한반도와 지구촌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PS) 페북 글은 수정없이 본문 내용 그대로 공유하셔도 됩니다.




185Yuik Kim, 박길수 and 18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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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규 너무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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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 나는 누구인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 얼마 전 원로신학자들의 좌담회에 초빙되어 가서 토론한 적이...





(17) Hojae Lee - 나는 누구인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 얼마 전 원로신학자들의 좌담회에 초빙되어 가서 토론한 적이...















Hojae Lee

4 hrs ·







나는 누구인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



얼마 전 원로신학자들의 좌담회에 초빙되어 가서 토론한 적이 있다. '기독교와 이웃종교의 대화'라는 주제지만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참여하였다. 덕분에 "한국 재래종교의 '구원'관"이란 논문도 6개월에 걸쳐 연구하여 게재해 보기도 하였다.

눈치빠른 이는 알아채었겠지만, 논문 제목에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이라고 한 것이 눈에 뜨일 것이다. 의미인 즉슨 '구원'이라는 이 단어는 정말 사람 몇 죽이는 무서운 단어이다. 주최측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그런 구원과 유비적인 유교, 불교, 도교의 '구원'에 대해 신학자들이 알 수 있게 써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시라.

성경에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예수로 말미암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믿고 있으니 크리스챤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불경에는 "상구보리 하와중생"하며 "내가 깨달을 수 있다"는 각자로서 해탈한다는 사상이 짙게 깔려있다. 이는 역사속에 생명력을 가지는 유교, 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모두 마찬가지이다. 개념과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구원'이라는 기제는 어느 종교에서나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믿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자기 신앙'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궁극적 구원'이냐는 것이다. 각 자의 종교적 신앙의 자리에서 구원이 무엇인가 물어보라. 한국 조직신학회에서 2015년에 "구원론"이란 단행본이 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서구신학자의 개개인의 성경속의 구원에 대한 글들이 적혀있다. 읽어보고 만족하는 구원론이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믿음, 은총, 깨달음, 자비, 사랑, 도 이런 근본어들은 신앙과 실천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이해되고 깨달아지고 실천되는 것이지 교회에 간다고, 사찰에 간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신앙이 제도화되어 유지된다면 종교인구가 늘어갈 수록 지구촌의 위기, 생태계의 위기는 왜 닥치는가? 생명공학, AI등의 발전에 종교텍스트는 무력하기만 하다. 왜 이런 생기는가?

모두가 세속생활에 종교적 신앙과 종교권위를 팔아먹기때문이다. 직업종교인은 예수와 석가모니를 내세우며 '자기 잇속'챙기고 건물성전유지비를 '십일조'라는 구원통행료를 꼬박꼬박 내는 신자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보다는 편안한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뼈골이 상접할 정도로 고난의 수행을 통해 각자를 선포했는데 원효이후 무문관에 들어가 식음을 철폐하며 석가모니보다 더 뛰어난 한국의 수행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시대의 바른 종교, 바른 종교적 신앙은 '나부터 자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주체적 신앙은 절대적 나와 궁극적 하나인 깨달음에서 천지를 밝히는 일이다.

때 마침 동학의 '개벽파 선언'의 활동도 보이고, 그리스도교의 뜻있는 이들의 개혁소리도 들린다. 개혁과 혁명은 제도가 아니다. 인격혁명이며 인간혁명이다. 새 시대의 사유체계와 문명체계를 우리가 만들어 보자.

크리스챤들은 복음을 선포만 하지 말고 실천하라. 인터넷 들어가면 선포하고 싶어하는 내용 다 있다.

불자들은 석가모니보다 더 큰 깨달음을 증명해 보이라.

한국의 신종교 신자도 덩치키우려고 하지말로 새로운 개벽인간 상을 만드는데 집중하시라.

언제까지 죄인이고 중생인가?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는 이 자리에 시대의 고민을 안고 우리가 새 문명의 역사를 밝혀보자









108박걸, 이은선 and 10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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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jin Paul Chang 다석 선생님이 생각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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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다석선생은 우리 시대의 큰 어른입니다. 우리 시대의 공감의식을 부족하나마 표현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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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희 제가 생각하는 구원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속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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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김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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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희 Hojae Lee

네 물이 적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새로운 시선이 생길때는 당하는사람이 어떤 충격과 아픔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충격속에서 더넓고 자유로운 시선을 갖게 되지요 물은 낮은곳으로 임하고 순환하며 생명에 관여하지만 뚫고 나오는 능동적인 모습을 담기에는 아쉬움이 있어보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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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물이 가만있으면 다른 생명을 키우며 낮은 곳으로 겸손하게 내려가지만, 뜨거운 불을 만나면 기체가 되어 하늘로 가지요! 시공우주에서는 얼음처럼 묵묵히 수행하다, 깨달음을 얻으면 물처럼 낮은 곳으로 겸손의 도로 생명을 사랑하다가, 영성우주로 갈때는 흔적도 없이 기체로 갑니다.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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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 (지은이)불광출판사20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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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반양장본

360쪽

152*225mm

551g

ISBN : 9788974793227





책소개

&lt;깨달음과 역사&gt; 개정증보판. 개정증보판에서는 '깨달음 논쟁'을 촉발시킨 &lt;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gt;를 비롯해, &lt;'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gt;, &lt;기본불교와 대승불교&gt; 원고를 새롭게 추가했다. 또한 표지 디자인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어, 불교의 원형질을 이루는 유전자인 무상, 무아, 연기, 공, 자비를 변화와 관계성의 이미지로 추상화하여 현대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불교를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역사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불교는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바꿔주는 데 있다. 특히 1장 '사제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에서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불교 용어와 교리를 쉽고 진솔하게 풀어주고 있어 불교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깨달음, 연기, 공, 윤회, 대승과 소승 등 애매하고 모호하게 다가왔던 개념들이 명확한 실체로 다가온다.





목차





서문 『깨달음과 역사』를 다시 펴내며



1장 사제(師弟)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

1월_ 대승과 소승

2월_ 무심시도(無心是道)

3월_ 확연무성(廓然無聖)

4월_ 윤회와 해탈

5월_ 색즉시공 공즉시색

6월_ 공(空)의 이중적 구조

7월_ 대도무문(大道無門)

8월_ 깨달음과 역사

9월_ 돈오점수설, 돈오돈수설에 대해

10월_ 마음·부처·중생

11월_ 보살만행(菩薩卍行)

12월_ 불국정토(佛國淨土)



2장 각(覺) - 깨달음



3장 깨달음을 위한 산책



4장 돈오점수, 돈오돈수설 비판



5장 역사에 다가가는 불교

불교와 사회

불교의 사회적 실천

민중불교운동의 대승적 전개를 위하여



6장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7장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

접기





책속에서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은 일관된 문제의식과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Bodhi, 연기적 관점)’과 ‘역사(Sattva, 인생과 세상)’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역사를 연기적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말하며, 역사란 ‘깨달음의 시각으로 비춰보고 실현하는 현실적 삶’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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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0 나는 불교만큼 오해를 받는 가르침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은 거의 모두 곡해되고 굴절되어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불교는 무심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비분별을 떠난 초연한 은자로서의 태도는 불교인의 독특한 성격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조는 듯 잠자는 듯한 침묵과 웃을 듯 말 듯 달관한 듯한 무관심이 적멸과 열반의 경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접기

P. 34 사제님도 동의할 줄 압니다만, 나는 윤회라는 것을 비단 어떤 사람이 칠십 년쯤 살고는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식의, 심지어는 개로도 태어나고 새로도 태어나는, 그런 계속되는 생명의 쳇바퀴 현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염불 구절에도 나오는 바,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이 아니겠습니까? 곧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말합니다. 접기

P. 191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왜 역사의 길에 나서게 되는가? 존재에 대한 사랑[慈]과 연민[悲] 때문이다.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 내는 고리이다. 이 자비가 구체적으로 표출된 모습이 방편(方便), 원(願), 역(力)이라 부르는 불교적 행동양식이다. 원(願)이란 역사에 대한 어떤 목표 설정에 해당되며, 역(力)이란 원(願)을 최종적으로 성취하게 하는 불굴의 신념을 뜻하며, 방편이란 원(願)을 성취하는 구체적 방법론과 실천을 말한다. 따라서 원력과 방편은 자비의 역사적 표출에 다름 아니다. 깨달음만 있는 사람은 아라한(Arhan)이라 부른다. 깨달음에다 자비와 원력을 덧붙인 사람은 보살(Bhodhisattva)이라 부른다. 아라한이란 ‘깨달음’이라는 단일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보살이란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의 복합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아라한은 소승의 삶이라 불리고 보살은 대승의 삶이라 불린다. 접기

P. 315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이라 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깨달음을 ‘~에 대한 이해’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완성된 그 어떤 경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기간은 말할 것 없이 크게 차이날 것이다. 만일 깨달음을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당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 걸렸을 뿐이다. 그리고 ‘납득시킨다’는 말을 썼듯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납득시키는 방법도 선정삼매를 통한 것이 아니라 밤낮 없는 대화와 토론이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현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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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불교에 인연이 있어 1971년 해인사로 출가해 종성(宗性) 화상을 은사로 수계했다.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봉암사, 해인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기도 했다.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대승불교승가회, 선우도량 등 불교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중앙종회의원, 불교신문사 사장, 해인사 주지 등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으로 재임중이다.





최근작 : &lt;Enlightenment and History : Theory and Praxis in Contemporary Buddhism&gt;,&lt;깨달음과 역사&gt;,&lt;깨달음과 역사&gt; … 총 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최초의 불교역사철학 에세이!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초판은 26년 전인 1990년 해인사출판부에서 출판됐다. 민주화의 열기가 봇물처럼 넘쳐나던 1980년대 중후반에 쓴 원고를 모아 엮은 것으로, “불교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깨달음(보디)의 영역으로, 현실과 실천의 범주를 역사(사트바)의 영역으로 거두어들인 최초의 불교역사철학 에세이. 완전히 새롭게 불교해석을 함으로써 불교도에게 세상을 보고 역사를 인식하는 안목을 열어주고, 보살행 실천의 지침을 제공해 주는 역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국불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월이 흘러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된 뒤로는 복사본을 만들어 돌려보는 등 독자들의 한결같은 성원에 힘입어, 2009년 20년 만에 불광출판사에서 새롭게 개정판으로 나왔다. 개정판은 4쇄를 찍으며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후 2015년 9월 열린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계기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스님들과 불교학자들 중심으로 깨달음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깨달음 논쟁’은 “오랜만에 추문이나 논란이 아닌 본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 속에서 1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번에 출간된 『깨달음과 역사』 개정증보판은 ‘깨달음 논쟁’을 촉발시킨 &lt;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gt;를 비롯해, &lt;‘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gt;, &lt;기본불교와 대승불교&gt; 원고를 새롭게 추가했다. 또한 표지 디자인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어, 불교의 원형질을 이루는 유전자인 무상, 무아, 연기, 공, 자비를 변화와 관계성의 이미지로 추상화하여 현대적으로 형상화했다.

아직까지 『깨달음과 역사』를 접하지 못했다면, 일독을 권해본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불교에 대한 고정관념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놀라운 체험과 더불어 고전이 주는 묵직한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응 스님이 깊은 인문학적 소양으로 갈파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 보살(Bodhisattva)



『깨달음과 역사』는 현응 스님의 독서와 사색, 수행, 실천행의 결정체이다. 현재 조계종 교육원장으로서 시대에 부응하는 승가교육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스님은 일찍이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기획조정실장으로 현 종헌 종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종단의 굵직굵직한 중책을 맡아 탁월한 능력을 발휘, ‘조계종의 재사(才士)’라는 별명을 얻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스님은 동서양 고전을 섭렵한 것은 물론, 최신 인문학 서적들을 챙겨 읽으면서 세상과 소통한다. “명석한 두뇌에 경학을 깊이 공부하고, 자기 사상과 입지가 분명한 사람”, “마음 씀이 부드러우나 일을 함에 굳은 신념을 가지고 추진하는 외유내강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지향한다. 대승불교의 이상형은 보디사트바(보살)이다. 스님은 이 책에서 보디와 사트바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하였다. 『깨달음과 역사』라는 제목처럼 이 책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깨달음(Bodhi, 연기적 관점)’과 ‘역사(Sattva, 인생과 세상)’이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은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가 아니라 ‘세상을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을 깨닫는 것, 다시 말해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는 일임을 역설한다.



“보디사트바(보살)란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의 합성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속적인 표현으로 ‘깨달음의 역사화’, ‘역사의 깨달음화’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이 보살의 삶에 있어서는 그의 깨달음에 기초하는 역사로부터의 자유로움만 만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와 교섭하도록 적극 참여하여 그 자신을 투사시킨다고나 할까요. 표현은 뭐 합니다만, 저는 이것을 ‘역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being and history)’와 ‘역사에로의 자유(freedom to being and history)’를 겸한 삶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현응 스님은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역사의 길에 나서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慈]과 연민[悲] 때문이며,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내는 고리임을 거듭 강조한다. 깨달음과 역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삶에 희망이 솟아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추구하던 불교는 너무도 ‘가난한 불교’였다. 맹목적으로 깨달음만 추구하며,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했다. 깨달음은 신비롭거나 높디높은 경지가 아니다. 우리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삼라만상을 변화와 관계성의 연기적 관점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역사의 현장에서 깊이 실천될 때 불교는 나와 세상을 두루 구제할 수 있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입문서이자 바른 길잡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불교를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역사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불교는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바꿔주는 데 있다. 특히 1장 ‘사제(師弟)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에서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불교 용어와 교리를 쉽고 진솔하게 풀어주고 있어 불교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깨달음[覺], 연기(緣起), 공(空), 윤회, 대승과 소승 등 애매하고 모호하게 다가왔던 개념들이 명확한 실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닌, 불교정신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떠한 행위로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며 직접적인 실천으로 이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과 수행법, 깨달은 사람의 삶의 모습, 보살이 역사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며 안내한다.

『깨달음과 역사』가 출간된 지 26년이 지난 지금, 과거보다 더욱 활발한 논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주목해 볼 만한 현상이다. 현응 스님이 이 책에서 설파하고 주장하는 내용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한국불교가 그동안 전통적 교리와 신행 방법만 고수하며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개인의 삶과 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반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불교정신과 사상이 역사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현응 스님의 문제의식이 그동안 암묵적 침묵에 가려져 왔다면, 지금의 ‘깨달음 논쟁’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새로 출발하는 불교를 제안하고 있으며, 기존 불교의 재정립을 촉구하고 있다. 접기





    





그동안의 강의내용을 정리해서 모아놓은책. 이 시대에 불교인이 나아가야할 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대승과 소승, 돈오와 점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기본적이지만 사실은 자세히 얘기하길 꺼려왔던 문제에 대해서도 정리해놔서 소장가치가 있다고 봄.  

타는목마름으로 2016-09-1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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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깨달음과 역사  





그동안 불자로 지내면서 어색했던 부분들을 일소해 쓸어버리는 듯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이다.

2500년 전의 가르침이 지금도 이어진다는 거야 고전을 읽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그 가르침 자체보다 그것이 전수되는 방식이 늘 같기는 커녕 더 어려워지는 듯 하여 어색했었다. 때로는 그간의 문화, 문명, 지식수준의 변화를 간과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갖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지금 사람들이 2500년 전 사람들보다 훨씬지식도 뛰어나고 이해력도 좋고, 배경 환경도 비교안될 정도로 좋은데,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건 왜 더 오래걸리느냐의 문제였다.



현응스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 답할 뿐만아니라 대승불교의 진정한 의미까지..

내가 생각하고 대충 그러려니.. 하는 문제들까지 싹 정리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이 왜 논란이 됐는지 알만했다.



밑줄치기를 중단했다.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쳐야할 것만 같아서다. 두고두고 읽어봐야겠다.



아, 현응스님의 답이 궁금한가?

부처님의 가르침, 즉 깨달음은 연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왕조시대고 책도 많이 없던 부처님 당시로서는 놀라운 이야기지만 지금은 그다니 혁명적인 이야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수행은 끝인가?

그리고 그간 열심히 공부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은 헛수고인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이런 걸 융합한다는 데에 있다.

두고두고 봐야하는 이유다.

- 접기

모닥불 2018-01-01 공감(2)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