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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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 네이버 블로그

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 네이버 블로그

10/17/23, 1:36 PM 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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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http://kimjungmi.com/159361306
금관의 예수    
                    김지하 時
                    김민기 曲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구름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김민기에 대하여...
묵상
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misalee
2010. 11. 14.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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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a
10/17/23, 1:36 PM 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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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김민기는 70년대 통기타 가수들 중 가장 선두에 선 인물이다. 70년대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금지곡의 주인공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
다도 폭넓게 불렸고 또 지금도 불리우고 있는 그 유명한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작곡가 이기 때문이다. 그는 촉망받는 작곡가 이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의 문화영역에서 자신의 역량을 표출한 예술인이기도 했다. 현재 그는 조용히 '지하철1호선','개똥이','모스키토'로 이어지는 뮤지컬 작업을 통
해 지속적인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i. 미대생에서 통기타가수로

유복한 집안의 김민기는 서울대 미대 1학년때 개인전을 열정도로 촉망받는 미술학도 였다. 그러나 대학 미술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가 1학
년 낙제를 하게된다. 이때 고등학교때 그룹을 하던 친구가 함께 듀엣을 하자며 제안해 왔다. 당시 그는 화구 구입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있던
참에 잘됐다 싶었다.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음악다방에서 함께 기타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이때가 69년.
종로 YMCA의 '청개구리'에서 노래하던 김민기는 친구 소개로 양희은을 만났다. 양희은 역시 경기여고 재학시절부터 '청개구리'에 자주 들렀던 터
에 임문일(후에 DJ로 이름이 났음)의 소개로 김민기에게 노래반주를 부탁했다. 김민기는 대학진학 후 집안사정으로 가장역할을 해야했던 양희은
의 반주를 해주면서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다.
비록 한대수에게 영향받아 시작한 작곡이지만 '아침이슬'등 양희은이 부른 훌륭한 곡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70년 그렇게 양희은의 데뷔앨범이 발
매된다.

ii. 신입생 노래지도를 계기로 경찰서와 관계(?) 시작

통기타 가수들이 많이 모이던 '청개구리'의 후원자였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에 의해 김민기는 음반 출반을 주선 받는다. 71년 자작곡들을 모아 김
민기 앨범을 발매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압수조치를 당한다. 이유는 신입생들에게 노래지도를 했기 때문.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부르기를 지도했다. '우리 승리하리라(Pete Seeger의 We shall overcome의 번안곡)',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등 세 곡이다. 그는 이튿날 새벽 바로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꽃피우는 아이'는 그의 노래중 처음으로 방송금지되었고 시중의 음반
은 전량 압수되었다.
그의 첫 앨범에 추천사를써준 최경식은 그를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방송국에서 민기에게 내가 김민기론을 쓰겠다고 했더니 "김민기 놈" 하고 그가 되물어 거기 있던 모두가 웃었던 생각이 난다. 민기는 그
렇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씁쓸한 친구다. 그의 노래 속엔 대체로 콧대높고 줏대있는 젊은 한국이 도사리고 있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며 오래 기
다려야 하는 스튜디오 밖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기타아로 조용히 클래식 소품을 연습해 보던 그의 모습이나, 어느 날 오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함빡 비를 맞아 뼈 속 까지 젖었을 그가 맨발로 내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던 일(그는 금 붕어처럼 입을 뻐끔하니 입을 벌린 구두를 한길 가에 내다
버렸 단다)이며 뭇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가면서도 국산품 노래를 외고집 하던 일 등등, 그러한 그의 일상 생활은 그의 음악 속에 미화되거나
위장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구현 되어있다. <br /><br />이번 첫 디스크를 위해 특별히 음악적인 헌신을 보여준 정성조 쿼텟
과 김광희양에게 고마움을 금치못한다. <br /><br />한마디로 민기는 복도 많은 놈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다. 앞으로 그의 가능성과 창조력의 시
험대가 될 것이다. 본격적인 김민기론 은 그때 그날로 미루기로 하겠고 끝으로 이 디스크가 민기의 참 가치나 숨은 실력을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많은 분들에게 권한다." </font>
그는 앞날이 기대되는 촉망받는 작곡가였다. 이미 대학가에서 유명해진 (양희은이 부른) 통기타 곡들의 작곡자인 그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물로 생각하였고 그를 금지곡의 작곡가로 만들었다.

iii. 김지하를 만난 후 미술 붓을 놓다

김민기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인 71년 시인 김지하를 만난다. 김지하가 중심이 되어 한국 문화에 대한 토론을 하는 폰트라(PONTRA : Po
em ON TRAsh, 즉 "잿더미위에 시를"이란 뜻)라는 모임에서 그가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선배들의 조언을 듣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모임을
통해 그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새로 운 인식을 하고 친구와 같이 야학을 열고 노동자와 함께 연극을 꾸리기도 한다. 72년 여름, 마산노동자들과의
야유회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석양의 고깃배들을 보고 멋있다고 감탄하는 자신에게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것인데 뭐가 멋있느냐'는 한 여공
의 얘기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감수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고 그는 서양화붓을 버리고 기타를 다른사람에게 줘버렸다.

iv. 연극패와의 교류 - 금관의 예수 작곡

그 즈음 카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일환으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가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이때 김민기는 연극
패들과 교류를 갖게되고 첫공연장인 원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금관의 예수'('주여 이제는 이 곳에'로 알려져있고, 첫 발매된 양희은의 음반에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되어 있다)가 작곡되었다.

v. 국악과의 만남 - 마당극의 효시 소리굿 '아구' 대본 작업

김민기는 작곡과 출신 이종구와 김영동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음대동아리 였던 '20세기 음악연구회'에서 이종구
가 신경림 시에 곡을 붙여 국악과 기타반주로 된 곡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물론 기타부분 편곡과 연 주는 김민기의 몫이다.
또 74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렸던 이종구 작곡 발표에서 김민기는 국악반주의 '빈산', '서울길', '백제관음', '하나이었다더라' 등을 노래 했다. 또
공연2부에서 이뤄진 소리굿 '아구'에서는 이종국이 작곡하고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이애주 등이 참여했는데, 대본은 남사당 덧뵈기 중의 먹중과
장의 기본 골격을 원용하여 김민기가 정리한 것이다. 공연은 암표값이 15배까지 뛰어올랐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공연을 통해 사회적인 내
용을 담는데 탈춤양식의 마당극이 얼마나 효과적이며 또 어떻게 담아내는가를 보여주었고 이후 마당극 운동의 크게 일어나는 출발이 되었다.
그해 이애주의 무용국 '땅굿'에 참가하고 10월 군에 입대한다.

vi. 유신 반대 집회서 김민기곡을 운동가요로 채택

74년 입대후 처음 그는 카츄사의 AFKN 방송국 배치되어 편한 군대 생활을 했었다. 75년은 유신찬반투표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카톨릭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 투표 반대운동을 벌였고 투표당일 반대집회 계획이 세워졌다. 이 집회의 계획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파토리로 채택되었
다. 당시는 시위 때 부를만한 운동가요가 거의 없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알고 부르던 노래였던 그의 곡들이 선곡된 것이었다. 이 집회는 무산되었
지만 이를 계기로 김 민기는 영문도 모른채 전방으로 쫓겨갔고 영창생활을 감당해야했다.
그런일로 입대전보다 유명해져서 제대한 김민기의 노래는 대학가에서 애창되었고 그의 모든 공식적 활동은 제약을 받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투
사로 인식되었고 대학가에서 불리던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들이 그의 노래로 단정되곤 했다. 제대 얼마 후 김민기는 부평의 한 공장에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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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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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직은 아니었지만 그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소박한 생각에 새벽마다 공부를 가르쳤다. 요즘 말하는 의식화교육과는 무관한 것이었
다. 이때 그는 함께 생활하던 노동자들의 합동 결혼식을 위해 '상록수'를 만들어 불러주었다. 그 무렵 김민기는 서울미대 학장의 배려로 9년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더 이상 공장근무가 불가능해지자 그는 퇴사 했다.
vii. 양희은 앨범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을 타인의 이름으로 제작
78년 양희은이 김민기의 노래들로 앨범을 발표했다. 군 복무시절에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생각'과 제대후에 만든 '밤배놀이' '상록수(앨
범에서는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이 제목이다)'등이다. 모두 김민기의 것이었지만 친척이나 주변사람의 이름을 빌려 발표했다.(작사작곡
자가 김 아영으로 되어있다.) 김민기라는 이름으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의 이름을 빌어 낸 이 앨범마져도 온전할순 없었다. 얼마안가 일부가 삭제 되었고, 곧 다시 판금되어야 했다. 말썽이 된 것은 '늙은 군인
의 노래' 때문이었다 (이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이 노래는 약간의 가사를 바꾸어 나중에 군대에서도 부르게 되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합법적인 음악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김민기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한다.

viii. 노래굿 테입 ' 공장의 불빛' 이후 요사찰 인물이 됨

'공장의 불빛'은 1970년대 대표적인 노조 탄압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굿 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
낸 것이었다.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테이프에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비로소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공장의 불
빛'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그는 당연히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공장의 불빛'은 그가 감옥행을 감수 하고 만든 것이었지만 구
속되지 않고 곧 풀려나왔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는 이제 더욱 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아무데도 갈곳이 없었다.
김민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전북으로 향했고 익산의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고용한
주인집은 정기적으로 그에관해 경찰에 보고를 해야 했다. 10.26이 터진 후 그는 김제로 옮겨 소작농사를 시작한다.
viiii. 여성해고 노동자를 위한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공연
10.26직후, 한국사회는 새로 맞을 봄의 기대로 잔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와 대학시절에 함께 활동했던 야학의 후배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여성 해고 노동자들에게 보모교육을 시켜 유아원을 설립하고자 한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유아원 기금마련 자선공연이 김민기
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는 실로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10.26이전이라면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었다. 프로그램등에 그 의 참여를 밝히지 않았지
만 어느새 소문을 듣고 공연장소인 문화체육관에 몰려든 젊은이들은 김민기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그는 마지막 공연에서 계속되는 앵콜
요청으로 다섯 곡이나 더 불러야 했다. 이 공연에서 마련된 자금으로 '해송 아기둥지'라는 이름의 유아원이 설립되었다.

x. 전라도 문화패들과 교류, 마당극 등 각종 기획에 참여

1980년 봄, 광주지역 대학출신의 문화패들이 극단 '광대'를 조직, 창립공연으로 마당극 '돼지풀이'를 공연했다. 이 창립무대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축사를 했고, 김민기가 기획, 양희은 등이 찬조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김제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 동안 그의 집에는 전라도지역의 문화패를 비롯,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쉴새없이 들락거렸다. 모내기철이
나 추수때면 각지의 친구, 후배들이 모여들어 일을 도와 주었고 그의 집은 마치 장터처럼 떠들썩하기 마련이었다. 이 때 김제·전주지방의 젊은 연
극패들이 자주 그를 찾아왔었는 데, 그는 이들을 규합, 근대사 세미나를 겸한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창작했고, 1981년, 전주에서 소
규모 위크샾 형식으로 공연을 가졌다.
xi. 영농 후계자로서 농민의 삶
1981년, 김민기는 전곡으로 옮겨 작은 아버지와 함께 소작을 시작했다. 전곡에서 농사를 짓던중 그는 농민의 현실을 더욱 깊이 절감하는 계기가
된 한 사건을 경험 하게 된다. 그해 그는 약 5000평 규모의 참깨농사를 시작했는데 비료를 살포한지 얼마지나 싹이 모두 타 죽어 있었다. 그는 혼
자 원인조사에 나섰고 결국 비료회사에서 정량의 5배 이상이나 과다 살포한 탓임을 밝혀낸다. 그 때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각지를 찾아다니며 협
조를 구했으나 도움받을 길이 없었고, 그는 혼자서 비료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
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 등에 관해 거의 완벽한 데이터를 작성 해 냈다. 그는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
내는 집념을 보인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새마을 운동' 이후 마치 투기꾼처럼 변해 버린 농민의 모습과, 속으로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
었던 농촌의 현실을 뼈 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1981년 겨울, 전곡의 민통선 북방지역에 5000평 규모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다. 단, 논옆에
있는 흉가 하나를 매입해야 한다는 조건 이었다. 그 겨울, 김민기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원을 벌었고, 그것으로 흉가를 매입, 그곳
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규합, 청년회를 조직했고, 그것을 통해 쌀 출하사업도 벌였다. 그 곳에서 생산된 쌀
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매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다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결
과 농민측과 소비자측에게 각기 250만원 정도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청년회는 이 이익금을 기금으로 쓸 수 있었고, 그 중 일부는 마을 공동 목
욕탕 건립기금으로 적립 할 수 있었다. 이 일로 한때 엉뚱하게도 '쌀장수'로 소문이 났고, 시인 황명걸은 '쌀장수 김민기'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
다(문예중앙, 1984 여름).

xii.연우무대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1983년, 극단 연우무대는 2년전 김민기가 전주에서 만들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의 대본을 손질하여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 본선
에 올랐다. 이 연극은 김민기의 연출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는 데, 당시 제목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였다. 이 작품은 평론
가들로 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김민기의 명성에 힘입어 대학생층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문예회관 대극장 개관이래 최대의 관
객동원이라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xiii. 84년 뮤지컬 음반 무산

그가 전곡에서 농사꾼으로 일하고 있던 1983년 겨울, 그가 살고 있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가지고 있던 책까지도 몽땅 불타 버리는 액운을
만난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새로 집을 지어줄테니 계속 머물러 달라고 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미국에 유학중이던 김석
만이 돌아왔다. 김민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김민기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종용했다. 마침내 김민기는 농촌생활을 일단 청
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계 약금을 받아
시작한 이 기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뮤지컬의 창작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데다 내용상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작품임에도
그것이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윤심의를 위한 접수가 거부되어 심의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레코드사로부터 받아낸
계약금만 고스란히 빚으로 떠넘겨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낸다는 것은 그 내용을 불문하고 불가능한 일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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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a
10/17/23, 1:36 PM 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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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작업을 하면서 한 여성을 만났고 그는 85년 여름 결혼했다.
(위의 글 전체는 김창남 엮음 '김민기'(1986, 도서출판 한울)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옮긴 것입니다.)

xiv. 김민기는 오늘날의 문화운동의 출발점이다.

- 노래운동에서 보는 김민기

노래운동에서 김민기는 모델이며 극복해야할 한계이다.
그들에 의하면 김민기는 서구 의존적인 한대수나 번안가요로 출발한 송창식 등과 달리 한국적인 포크(?)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의
노래는 당시 시대 상황이 녹아있고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가 묻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민기의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여러가지의 문화
활동들과 잦은 구금 등은 그를 통기타 '전사'로 불릴만한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노래에 대한 그러한 평가를 전적으로 수용하는것을 경계한다.
'70년대 이래 그의 노래에 대해 내려진 정치적 평가(관변쪽에서든 그 반대편에서든)가 다소 과장되고 신비화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br />(- 김
창남, '김민기' 도서출판 한울)
그가 민족적 음악의 모습을 한 통기타 작곡가이고 가수라 해도 그의 노래는 방송 금지로 인해 대중과 괴리 되었고 그 결과 지식인들만이 주수용
층 이었다는 것이다. 또 시대를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내용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점도 지적되고 있다. 오히려 김민기의 문화활동이 이런 한계를
신비화 시켰다는 것이다.
노래운동에서는 자신들이 상업화된 유통구조에 안착할 경우 정치성이나 운동성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가지고있
는 근대적 유통구조만을 고집할 때는 운동의 대상인 대중과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도 알고 있다.
과거 김창남은 김민기에서 노래운동의 돌파구를 찾았다. 자본주의적 구조에 지배되는 유통구조를 인정하고 그 것에 근거하되 새로운 음악 언어를
점차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성을 갖기위해 상업적 유통구조를 활용하되, 운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음악언어'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음악적 언어란 김민기가 보여준 '밤뱃놀이' 의 대중가요와 민요의 만남 그리고 '공장의 불빛'과 같은 구전가요의 유효적절한 활용
등은 그들에게 새로운 방 법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시도와 노력을 해주길 바랬던 그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노래운동 진영에서는 성공적인 사례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노래운동진영에서도 90년대 새롭게 등장한 댄스뮤직과 음악성, 대중성 그리고 파워를 함께 지닌 서태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 문화 영역으로 김민기론을 확대해야

김민기 흔히 "나는 그저 작은 나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이를 자신들 이야기로 확대 해석했다"고 자신을 낮춰 말하곤 한다. 물론 그의
노래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의미를 띄며 신비화 된 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김민기를 통기타 작곡가, 가수에 한정지어 얘기 할 때 그렇다. 그의 시작은 앞날이 기대되는 촉망받는 신진 대중가요 작곡가에 출
발했지만 그가 김지하를 만난 후 부터는 그의 각종 예술활동으로 문화영역이 광범위 해진다. 70년 중반 김지하와의 인연 이후 연극패와 관계를
맺으면서 시작한 각종 문화교류들은 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고 국악무대, 마당
극, 노래굿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휘되었다. 그의 활동은 문화운동의 한 전례가 되고 출발이 되었다.

그의 문화활동을 정리해보자.
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 1학년에 개인 미전
70년 양희은 데뷔작 '아침이슬' 앨범 작곡
71년 겨울, 시인 김지하를 만남, 노동자 야학활동
73년 초, 카톨릭권 '금관의 예수' 공연
74년 4월, 소리굿 '아구' 공연
74년 여름, 이애주의 무용극 '땅굿' 공연에 참가
74-77 군생활
78년, LP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 제작
78년 겨울, 노래굿 '공장의 불빛' 완성
79년 12월, 유아원 기금마련을 위한 자선공연에 출연
80년 봄, 광주에서 극단 '광대' 창립 기념공연 기획에 참가
81년,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공연
81년, 경기도 전곡에서 농민의 삶 체험
83년,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84년 창작 뮤지컬 음반 준비(발매무산)
15년간 그의 활동은 활발한 예술활동 그 자체이다. 그는 통기타가요 작곡에서 부터 공연을 기획하고 참가하면서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간 인물이었다. 특히 마당극이나 노래굿등은 후배 문화활동가들에게 많은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내용과 형식에대한 많은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한마디로 김민기는 많은 창작활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와 의식세계를 다양하게 표현한 천재적 예술가인 것이다. 물론 70년대는 정치적 상황
과 다양한 민족적인 문화의 불모라는 시대적 상황이 그를 더 필요로 한 것이기도 하다.
노래운동에서 김민기의 음악을 한정적인 영역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노래라는 것은 김민기의 선도적이었던 모
든 예술 활동의 하나일 따름이다. 이렇게 다재다능의 예술가 김민기에게서 통기타 음악만을 떼어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고 한계를 짓는 것은 그
활동 한조각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는 것 일지도 모른다.
이제 김민기를 이야기 하려면 그가 처했던 현실과 문화에 제안했던 모든 것에서 출발하여 논해야 하지 않을까.
문화운동과 관련되어 할 얘기는 많지만 여기에서 논해야할 주제는 아니기에 다루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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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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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a
10/17/23, 1:36 PM 김지하 시인의 명작 - 금관의 예수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enercon2/120118421784 5/7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디
죽음 저편에, 사철 푸른 나무숲, 거기 있을까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은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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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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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금관의 예수 - 2009년 성탄과 용산참사, 정지창

금관의 예수

금관의 예수

[茶山포럼] 2009년 성탄과 용산참사
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 기사입력 2009.12.23


막이 오르면, 한국 1971년 겨울. 청회색의 음울한 하늘을 배경으로 삐에따의 예수상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무대 중앙에 작은 탁자. 탁자 위엔 검은 표지의 거대한 성서. (…) 기타 소리와 함께 노래가 들린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디/ 죽음 저편에/ 사철 푸른 나무숲/ 거기 있을까/ (…)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1973년 원주 카톨릭회관에서 초연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첫머리다. 1970년대의 캄캄한 겨울에 거리로 쫓겨난 거지, 문둥이, 창녀들과 이들을 도우려는 수녀, 이들을 등쳐먹는 순경과 사장, 이들을 외면하는 대학생과 신부. 그리고 시멘트의 감옥에 갇혀 금으로 된 관을 쓰고 있는 예수. 예수는 금관을 벗어 문둥에게 주지만, 신부와 순경, 사장이 달려들어 도로 예수의 머리에 씌워 버리고 예수는 다시 시멘트로 굳어버린다.

장면은 바뀌어 성탄일을 눈앞에 둔 2009년 12월 하순, 용산참사의 현장인 남일당 건물 앞 거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신부와 수녀, 스님, 문인, 학생, 일반시민, 유가족들이 모여 미사를 올리고 있다. 그동안 철거 용역 깡패들과 경찰들의 폭력과 정부의 무관심 속에 단식을 계속하다가 쓰러진 문규현 신부의 뒤를 이어 그의 형인 문정현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남일당 성당'이라 불리는 이 거리의 성당엔 금관을 쓴 예수는 보이지 않는다.

금관을 쓴 예수는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라는 문둥의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오직 저희들만을 위하여, 저희들만의 신전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너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그들은 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나의 제자임을 자랑한다. (…)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탓에 그들의 귀에는 나의 말도, 너희들 가난한 백성의 외침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나를 가두었다."

나라란 무엇이고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매서운 추위 속에 찾아온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달콤한 크리스마스 캐롤보다 김민기가 작곡한 「금관의 예수」를 들으며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해야겠다. 그리고 나라란 무엇이고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나라란 우리에게 빼앗기만 하는 곳/ 땅에서 쫓아내고 집을 빼앗는 곳/ 지아비를 빼앗아가고 지어미를 짓밟는 곳."(신경림의 「새재」가운데에서)

정말 그런 것인가.

* 이 글은 다산연구소(www.edasan.org)가 발행하는 <茶山포럼> 12월 22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寅 씨와 예수 (쓰쿠마 선서) | 요네다 아키라 | 책 | 우편 주문 | 아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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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 씨와 예수 (쓰쿠마 선서) 단행본 – 20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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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는 '금관의 예수'만 있다 - NEWS M

한국 교회에는 '금관의 예수'만 있다 - NEWS M

한국 교회에는 '금관의 예수'만 있다
김종희
승인 200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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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와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디
죽음 저편에, 사철 푸른 나무숲, 거기 있을까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은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김지하가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니면서 만든 희곡 <금관의 예수> 앞부분에 나오는 이 시를 가지고 김민기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렇게 우울한 노래는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는 암울한 70년대 초반이었다.


▲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간절히 기도하는 저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다이아몬드와 루비와 진주로 단장한 십자가의 예수는 들을 수는 있는 것일까. (왼쪽 사진은 70년대 청계천에서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찍어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고, 오른쪽 사진은 영국 일간지 Telegraph에서 보석으로 장식한 예수상 전시회를 보도하면서 실은 사진이다.)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애원하는 예수

때는 1971년 겨울.

바깥 공기는 차갑고 금세라도 폭설이 내릴 양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 있지만, 따뜻한 성당 안에서 신부는 오후의 나른함을 이겨내려는 듯 커다랗게 하품한다.

헌금도 안 들고 와서 고해성사를 하려는 창녀는 백해무익하고, 사회 정의 문제를 상의하러 오는 사람들은 귀찮다. 길거리에서 덜덜 떨면서 구걸하는 거지와 문둥이 몸에서 뿜어나오는 악취를 맡는 것도 신부에게는 고역이다.

신부에게 창녀굴은 더러운 곳이고, 데모는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교회는 밑 빠진 독에 물만 부어주면 되지, 빠진 밑을 메우는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수녀와 논쟁을 벌이는 것도 짜증난다.

배때기 사장은 구걸하는 거지와 문둥이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그리고 금관을 쓴 예수상으로 고개를 돌려 성호를 긋는다. 예수가 쓰고 있는 금관은 작년 성탄절 때 사장이 헌금한 돈으로 만든 것이다. 사장은 "앞으로도 여러 교회 공사를 나에게 맡겨서 돈을 많이 벌게 해주면,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을 금덩어리로 만들어드리겠다"고 빈다.

사장은 거지와 문둥이에게 "허리 가늘고, 엉덩이 크고, 경험 많고, 나이 어린 아가씨 어디 없냐"고 묻다가 경찰이 다가오자 줄행랑을 친다. 문둥이와 거지에게 삥 뜯으려던 경찰은 사장이 뭔가 켕겨서 도망갔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쫓는다.

문둥이가 무심결에 예수상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부아가 치민다. 자기의 몰골이 한심하게 보인 것이다. 그는 한때 예수를 믿었다. 하지만 성서 속의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인데, 현실 속의 예수는 문둥이의 친구가 아니다. 이 땅에서 예수는 깨끗하고 점잖고 잘 사는 사람들의 친구다. 문둥이는 예수 팔아서 천년만년 잘 먹고 잘 살려는 예수쟁이들을 욕하다가 예수상 밑에 토하고 쓰러진다.

잠시 후,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에 놀라 깨어난다. 예수상을 올려다보니까 예수 눈에서 눈물이 주르룩 흐르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예수는 가시로 만든 관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문둥이가 예수 머리에서 그걸 벗기는 순간 예수가 입을 연다.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어둡고 적적한 이 시멘트의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 속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그 불행 속에 내가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서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받았느니라."

문둥이가 얘기한다. "예수님,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너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오직 저희들만을 위하여, 저희들만의 신전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너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그들은 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들은 나의 제자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의롭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와 너무나 가까이 있는 탓으로, 그들의 귀에는 나의 말도, 너희들 가난한 백성의 외침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날 가두었다."

"예수님, 어찌하면 예수님이 해방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실 수 있습니까? 어찌하면 다시 살아나 저희들에게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를 가까이 하려는 자는 안 된다. 눈앞의 모든 백성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불행을 외면하고 저 혼자서만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안 된다.

의롭지 못한 자도 안 된다.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에 몸을 굽히는 의롭지 못한 자는 안 된다. 용기 없는 자는 안 된다. 권력을 가진 악의 무리가 죄 없는 백성을 괴롭히고 착취하고 기만하고 억압하는데도 항거해 싸우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는 안 된다.

기도만으로도 안 된다. 기도와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너와 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핍박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밖엔 안 된다. 네가 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하리라."

"예수님, 저는 힘이 없습니다. 제 몸 하나도 의탁할 곳이 없는 가련한 놈입니다. 제가 어떻게?"

"아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네가 할 수 있다. 너만이 날 해방하여 내가 너희들과 함께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이룩하게 만들어줄 사람이다. 너의 그 가난, 너의 그 슬기와 어진 마음, 더욱이 불의에 대해 항거하려는 네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자, 가까이 오라. 가까이 와,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내 몸을 자유롭게 하라. 이 시멘트를 벗겨내라. 내 머리 위엔 가시관으로 족하니라……."

문둥이가 예수의 몸에 바른 시멘트를 벗겨내려 할 찰나, 신부와 사장과 경찰이 나타나 문둥이의 손에 든 금관을 빼앗아 예수의 머리에 씌웠다. 예수는 다시 굳어져버렸다.




▲ 영국의 일간지 Telegraph는 작년 9월 영국의 한 예술가가 루비와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3개의 대형 예수상 전시회 소식을 전했다. 가시관, 손목, 심장, 아랫도리를 가린 천, 발목의 못 등을 장식한 보석 가격은 우리 돈으로 1,500억 원에 달하며, 예수상의 무게는 1톤이나 된다. 보석은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 예수의 순수한 희생 등을 의미한다고 했다.십자가 군병들아, 예수 위해 일어나라!



한완상 선생이 작년에 쓴 책 <예수 없는 예수 교회>를 펼치니, 자연스레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가 떠올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대용으로 만든 황금 송아지, 다윗과 솔로몬이 만든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하얗게 회칠한 죽은 자의 무덤처럼, <금관의 예수>에서 예수쟁이들은 탐욕 덩어리로 빚은 황금 면류관을 예수 머리에 씌었다. 1970년대 금관을 쓰고 박제가 된 예수는 40년이 지난 지금 시멘트 쪼가리 하나 벗겨지지 않은 채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안에 그대로 굳어 있다.

한완상 선생이 보기에 한국 교회에는 가시관을 쓴 예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 교회'인데도 '예수가 없다'고 했다. 금관을 쓴 예수는 짝퉁 예수다. 짝퉁을 진품보다 훨씬 더 명품으로 만드는 탁월한 솜씨를 한국 사람들은 갖고 있다. 짝퉁 예수를 진품 예수보다 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가짐직하고, 믿음직하게 만드는 기막힌 재주를 한국의 예수쟁이들은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보기 흉한 가시관을 내버리고 아름다운 금관을 예수 머리에 덥석 씌웠다. 금관만 씌운 게 아니다. 패배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승리를 상징하는 십자검을 예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화려한 금관을 머리에 쓰고, 날이 퍼렇게 선 십자검을 손에 쥐고, 완고한 교리(敎理)의 흉배를 가슴팍에 붙인 짝퉁 예수를 앞세워 '땅 밟기'를 하고, '여리고 함락 작전'을 펼치고, '영적 전쟁'을 벌이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고 있다. 군가 비슷한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기 들고 앞서 나가 굳세게 싸우라
주께서 승전하고 영광을 얻도록, 그 군대 거느리사 늘 이김 주시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그 나팔 소리 듣고 곧 나가 싸우라
수없는 원수들 앞에 주 따라갈지니, 주 예수 힘을 주사 강하게 하시네

십자가의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 믿어라
복음의 갑주 입고 늘 기도하면서, 너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라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이날에 접전하고 곧 개가 부르리
승전한 군병들은 영생을 얻으며, 영광의 주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


▲ 1970년대 금관을 쓰고 박제가 된 예수는 40년이 지난 지금 시멘트 쪼가리 하나 벗겨지지 않은 채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안에 그대로 굳어 있다. 저자 한완상 선생은 예수에게 덧씌운 껍데기를 벗기고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온전히 만나야 한다고 호소한다.

십자가는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는 것

한완상 선생이 아는 갈릴리 예수, 나사렛 예수는 금관을 쓰고, 십자검을 쥐고, 교리의 흉배를 붙인 예수가 아니다.

그가 아는 예수는 팔을 안으로 굽지 않고 밖으로 굽는 분이다.

"팔이 안으로만 굽는 잘못된 하나님을 앞세우면, 자기들의 탐욕과 독선을 키우려 하기 마련입니다. ……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셨던 예수는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곧 종교적인 이기심과 독선을 철저히 극복하셨음을 뜻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양팔은 밖으로 쭉 뻗는 사랑의 팔입니다.

…… 팔이 안으로만 굽는 한국 교회는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주님은 손이 안으로 말라붙은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손과 팔을 밖으로 쭉 뻗으시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밖으로 뻗는 팔은 자신을 비우는 팔이요, 죽으려는 팔입니다. 사즉생(死卽生)의 팔입니다. 내가 죽음으로 남과 함께 새로운 삶을 부활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멋지게 패배한 분이다.

"세속적 욕망의 차원에서 보면 십자가 지기는 허망하고 헛된 고행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허무한 죽음은 승리 지상주의적 욕망의 철저한 포기를 뜻하기에 역설적으로 놀라운 변혁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값싼 승리주의를 우아하게 이겨내신 예수의 당당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지 앞세워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 앞세우기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짓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는 짓거리입니다. 십자가로 보석을 만들어 자기 신분 상승을 과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플러스(+)의 부적으로 보는 천박한 생각이 깔려 있지요."

그가 아는 예수는 스스로 자기를 비우는 분이다.

"'나는 길이다'라는 예수의 고백에는 나를 길처럼 밟고 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많이 밟을수록 더욱 길다워집니다. 예수는 그렇게 밟힘으로써 인간에게 참 희망과 질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값진 은총입니다. 밟히는 아픔은 일종의 용서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 바로 그 아픔을 길 되신 예수께서 스스로 껴안으시고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선언 속에 전지전능한 신이기에 모두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무조건 경배하라는 독선적 명령과 강요는 전혀 없습니다.

'나는 진리다'라는 예수의 선포는 당신이 진리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탐욕과 독선으로 이끄는 길이거나, 지배와 억압으로 이끄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이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예수의 선포는 인간의 탐욕과 독선과 오만이라는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선포입니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은 육체의 삶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더 소중한 존재의 삶이 있다는 선포입니다. …… 배타적 복음주의 기치 아래(십자가 아닌),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타종교를 경멸하고 차별하고 핍박한다면, 어찌 그것이 예수의 길이겠습니까? 참 생명의 힘이겠습니까? 참 생명은 자기를 비우고 지워 남들에게 진리와 기쁨을 가득 채워주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지독하게 밟히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힘이기도 합니다."

한완상 선생은 예수에게 덮어씌운 온갖 껍데기를 벗겨드리자고 호소한다. 갈릴리의 예수, 나사렛 예수가 입을 열고, 발을 떼고, 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고, 문둥이와 거지를 마음껏 껴안을 수 있도록 해드리자고 호소한다.

말 못하는 금관의 예수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절규하고 있는지 모른다. "제발 어서 나를 구원해주거라."


김종희

양희은 - 금관의 예수 (가사 무수정 원곡) 김지하 작사 김민기 작곡


양희은 - 금관의 예수 (가사 무수정 원곡) 김지하 작사 김민기 작곡

집고양이
7.85K subscribers

19,410 views  Feb 9, 2016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유신독재에 반대하여 1973년 일본에서 결성)일본본부선전국에서 제작하고 
재일한국청년동맹에서 발행한 금관의 예수 (1970년 후반추정)의 수록곡 양희은의 '금관의 예수'.. 
김지하 작사 김민기 작곡..가사 무수정 원곡입니다. 뒷면의 김민기님 곡들은 김민기1집 수록곡과 동일합니다. 
원하시는 분은 누구나 퍼가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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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론(理氣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기론(理氣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기론 (理氣論)
목차
===
정의
개설

이기의 개념
1. 이의 의미 특성
2. 기의 의미 특성
3. 이기의 관계

이기론의 전개
1. 주리적 이기관
2. 주기적 이기관
3. 일원적 이기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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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도설 본문
유교 개념 이와 기,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우주와 인간의 존재 구조와 그 생성근원을 유기적으로 설명하는 성리학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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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이와 기,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우주와 인간의 존재 구조와 그 생성근원을 유기적으로 설명하는 성리학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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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신유학은 중국 남송대의 성리학자 주희(朱熹)에 의해 완성되었고, 명·청대, 그리고 조선조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상체계이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이(理)와 기(氣)로써 구성되었으며, 이와 기에 의해 생성 변화된다고 말한다. 즉, 유형적 존재는 모두 무형의 원리 또는 원인에 의해 생성, 변화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와 기에 의한 존재론적 규정과 생성론적 설명은 두 가지 원칙 위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이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 위에 있고, 동시에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기론은 적어도 이 없는 기나, 기 없는 이만을 전제할 수 없으면서도, 이는 이고, 기는 어디까지나 기라고 규정한다.

이기론의 전개는 사실상 이와 기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이해 방법에서 그 내용과 전개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기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기 개념에 대한 이해와 규정을 선행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이·기 개념에 대한 특성과 의미를 명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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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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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학·중용 | 쉽고 바르게 읽는 고전
증자,자사 (지은이),박삼수 (옮긴이)문예출판사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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