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4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인생의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은 도스토옙스키
by한재우Aug 07. 2015

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든 것은 오징어잡이 배들이 낮잠을 자는 제주의 한적한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삼다수처럼 투명한 공기와 바닷바람처럼 맑은 새 소리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행운'이라는 말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담겨있겠지만, 그중에서 많은 분들이 공감할만한 한 가지를 꼽자면 이 사실이 아닐까 싶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대단히 길고, 대단히 어렵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2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이다. 평생에 걸쳐, 소설만 계산해도 무려 4만 장의 원고를 써낼 정도로 다작을 했던(수많은 에세이들은 제외하고) 도스토옙스키가 필생의 역작으로 빚어낸 작품이니 그 양이 방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대단히 긴 소설'을 넘어 '대단히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스타일 자체에 기인한 바가 크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그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에서 소설가의 스타일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림을 그리듯 이미지로서 소설을 보여주는 '시각적' 소설가와 지식과 관념을 전달하는데 무게를 두는 '단어적' 소설가가 그것이다. "붉은 기와를 얹은 하얀 지붕의 뾰족한 집들이 언덕의 비탈길에 늘어서 있으며..."로 시작하는 <적과 흑>의 스탕달은 '시각적' 소설가의 좋은 예를 보여주는 반면, 우리의 도스토옙스키는 (안타깝게도) '단어적' 소설가의 전형이다. 이를테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출발한다.


"나의 주인공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전기를 시작함에 있어 나는 다소간 의혹에 빠져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비록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를 나의 주인공이라 부르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전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들이 불가피하게 튀어나올 것임이 미리부터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어휴.


이미지를 상상하기 쉽지 않은 '단어적' 문장. 선과 악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 프로이트 같은 최고의 심리학자가 경탄했던 치밀한 심리분석.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2000페이지의 높은 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더욱 험준하게 만드는 절벽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파도의 발끝이 닿는 곳에 쌓아 올린 모래성처럼, 끊임없이 집중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일상의 한 가운데서 이 책을 폈더라면 얄팍한 인내력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끝까지 읽어서 깨뜨려 낼 수 있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여유로운 시골 바닷가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난 '행운'이란 이런 의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출퇴근 지하철에 시달려야 하는 직장인으로서는 '시간을 따로 내지 않으면' 읽기 힘든 책인 까닭에, 나는 시작부터 많은 기대를 안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기대를 품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질문이 샘솟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든 나에게도 이런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작가는 2000페이지나 되는 긴 여정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것인가. '대문호'라 불리는 소설가의 문장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작품이 문학사에 불멸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어떤 까닭에서인가. 그리고 과연 이 책을 나는 끝까지 '흥미'를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하여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다.




첫째, 막장과 걸작 사이. 이 책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구원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셋째, 이 책의 서두에 인용된 요한복음 12장 3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의 의미는 무엇이며, 밀알은 과연 누구인가.


#1 막장과 걸작 사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위대한 이유



카라마조프 가의 아버지 표도르는 꽤 성공한 지주(地主)다. 그는 대단히 탐욕스러운 인물이라, 여자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족을 못쓰는 호색한이며, 돈을 움켜쥐기 위해서라면 자식과의 불화도 불사하는 탕아다. 표도르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사생아가 있는데, 이 네 명을 중심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진행된다.


첫째 아들 디미트리는 현직 장교로서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러시아인이다.


그는 열정(그리고 욕망)이 가득한 인물로서 돈을 쓰거나 사랑에 빠지는 일에도 왕성한 행동력을 보여준다. 높은 명예심 역시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성격이다. 불같은 욕망에 끄달려 저지르는 잘못과 그 잘못에 대한 수치심이 디미트리가 심리적인 갈등에 시달리는 내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역사의 이곳 저곳에서 장성한 큰 아들이 그 아버지와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디미트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금전과 여자 문제로 아버지 표도르와 갈등 관계에 놓이며,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중심 사건을 형성한다. 디미트리를 상징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러시아인, 욕망, 명예다.


둘째 아들 이반은 지극히 이성적인 인물이다.


교양과 지식의 유럽인을 상징한다. 그는 논리와 사색을 추구하고,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차가운 이성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뜨거운 디미트리와 대비되고, 논리를 통해 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믿음으로 가득한 알렉세이와도 다르다. 이반의 키워드는 유럽, 이성, 논리다.


셋째 아들 알렉세이는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선한 인물'의 전형이다.


신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수도사로서 구도의 길에 몸을 바치려는 확고한 열정을 갖고 있다. 마을의 존경받는 어른인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대로 '사랑'의 높은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노력한다. 알렉세이는 어디를 가든 누구에게든 사랑받는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지만, 마을의 아이들이 그를 흠모하며 따른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알렉세이의 삶이 러시아적인 욕망이나 유럽의 지성에 기대기 보다는 실제 민중의 구체적인 현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알렉세이는 이야기 내내 카라마조프 가의 갈등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알렉세이의 키워드는 선, 믿음, 민중이다.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의 사생아(로 추정된)다.


표도르가 떠돌이 여자를 임신시켜 낳게 한 인물로 카라마조프 가의 요리사이자 하인으로 살고 있다. 그는 순수한 악의 캐릭터로서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싫어하고' '모든 사람을 경멸했다.' 스메르자코프는 어릴 적부터 잔인한 면모를 보인 바 있는데, 고양이를 목매달아 죽인 뒤 장례식 놀이를 하곤 했던 것이다. '누구 하나 좋아할 줄 모르는' 그에 대해 도스토옙스키는 작중 인물의 말을 빌려 "너도 사람이냐"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스메르자코프의 키워드는 악이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독 한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문학, 심리학, 철학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으며 그만큼 많이 주인공의 이름과 주요 사건들이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 가에서 벌어진 사건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아버지 표도르에게 세 아들이 모인다. 첫째 아들 디미트리가 돈 문제로 아버지에게 담판을 짓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의 현로, 조시마 장로가 동석한 가운데 가진 카라마조프 가의 회합은 합의는커녕 추잡한 스캔들(특히 표도르와 디미트리의)로 끝나고 만다.


금전 문제가 카라마조프 가에 드리워진 그늘에 불씨로 작용했다면, 그 위에 기름까지 끼얹은 것은 다름 아닌 여자 문제.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디미트리는 아버지 표도르가 점 찍어 놓은 여자(그루셴카)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고, 둘째 아들 이반은 버림받은 디미트리의 약혼자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루셴카가 표도르와 디미트리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여우짓을 하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는 주먹다짐으로 폭발하여 디미트리가 표도르를 '넘어뜨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지경에 이른다. 아버지의 여자를 뺏으려는 첫째 아들. 첫째 아들의 약혼자를 사랑하는 둘째 아들. 돈과 여자로 카라마조프 가는 풀릴 수 없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 때 악한 스메르자코프가 등장한다. 스메르자코프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하는데, 돈과 여자 문제에 이성을 잃은 디미트리를 함정에 빠뜨려 마치 그가 친부를 살해한 듯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마침내 디미트리는 존속살해범으로 체포되고 모든 증인과 정황 증거가 디미트리를 유죄로 몰아간다. 디미트리는 비록 방탕하고, 돈을 훔치고, 이웃 사람들을 모욕하는 망나니 짓을 저질렀을지언정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건만, 배심원들의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재판은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스메르자코프는 사실 '신은 없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둘째 이반의 생각에 기대 범죄를 저질렀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이 자신과 한 편이 되어주리라 바라면서 범행 사실을 털어놓지만, 진범을 알게 된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의 고백에 경악하고, 법정으로 달려간다. 마지막 공판일. 이반이 디미트리의 무죄를 주장하고 표도르의 살해범은 스메르자코프임을 주장하지만, 이반의 반응에 낙담한 스메르자코프는 간밤에 이미 아무런 유서 없이 목을 매어 자살한다.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배심원들은 디미트리의 유죄를 인정하는 오심을 저지른다. 디미트리는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떠날 운명에 처하고 이반과 알렉세이는 그를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줄거리만 훑어보면 흔하디 흔한 막장 드라마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2013년 일본에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높은 인기를 얻었는데, 요즘 써낸 각본이라 알고 본 사람들도 많았다 한다. 호색한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의 금전 갈등, 친부 살해와 출생의 비밀(사생아)까지. 막장 드라마에 들어가는 요소는 빠짐없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전업 작가로서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글자 수가 곧 수입'인 경제적으로 각박한 삶을 삶았다. 훗날 도스토옙스키가 남긴 육필 원고를 보면, 좌우의 여백에 '이 원고를 팔면 얼마를 벌 수 있는지'에 대한 계산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돈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디미트리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실제로 감옥에서 4년의 유형 생활을 했고, 사형집행 직전에 기적적으로 집행이 취소된 일도 있었으며, 간질병에도 시달렸고, 도박에도 어느 정도 빠져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난, 유형, 간질, 도박로 점철된 피폐한 삶이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삶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의 피폐한 어둠 때문이 아니라, 그 많은 곤란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같은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글을 쓰고, 또 써서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소원대로 '발자크에 필적하는' 대문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생의 숱한 어둠에 그치지 않고, 그 어둠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의 파란만장한 어둠에 보내는 경탄은 단지 그가 겪어야 했던 어둠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어둠이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의미 있는 경험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이와 같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단순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중요한 물음을 담아내는 도구로 가장 통속적인 소재를 택했다.




표도르의 네 아들은 각각 선과 악, 뜨거운 욕망과 차가운 이성을 상징한다. 우리에게는 순수한 선(알렉세이)과 순수한 악(스메르자코프)이 존재한다. 그 둘은 늘 양쪽 귀 주변을 날아다니며 속삭이는 천사와 악마다. 이들은 순수함 그 자체이므로 인간적인 고뇌가 거의 없다. 끊임없이 사랑받고 지침 없이 사랑하며, 이유 없이 미워하고 고민 없이 괴롭힌다. 하지만 인간은 선과 악으로 깨끗이 나뉠 수 없는, 보다 복잡한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디미트리) 임과 동시에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이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욕망과 이성 중 한쪽만 옳다고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주어서도 안된다. 도스토옙스키에 의하면 악이란 욕망과 이성 어느 쪽에도 깃들 수 있는 것이다. 절제하지 않은 욕망이 디미트리를 파멸로 이끌고 갔다면, 인간성이 배제된 이성의 추구 역시 이반으로 하여금 내면의 죄('모든 것은 허용된다.')를 저지르게 했다. 따라서 욕망과 이성의 외줄 위를 걷는 한 인간은 언제나 양쪽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네 아들을 낳은 아버지, 표도르를 주목하게 된다.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의 뿌리를 더듬어가면 결국 하나의 지점, 표도르에 이르게 된다. 지극히 선한 것과 지극히 악한 것, 인간적인 욕망과 이성적인 판단은 물과 기름처럼 깨끗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두가 한 명의 아버지가 낳은 자식이고, 하나의 시원(始原)에서 출발한 물줄기다. 표도르는, 검사의 말을 빌리면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 그러므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 표도르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은 우리의 마음 그 자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탐구 과정의 문학적 도구로서 막장 드라마를 택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위대한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와 진배없지만, 그 안에 깃든 의미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줄거리만 훑은 채 의미를 곱씹지 않으면 이는 껍질만 뜯어먹으면서 '오렌지의 맛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폐한 인생을 살면서도 그 피폐한 인생의 경험을 토대로 위대한 글을 써낸 도스토옙스키처럼, 통속적인 막장의 소재를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탐구했기 때문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위대한 작품이다.


#2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구원과 희망.


도스토옙스키가 탐구한 바, 인간이란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이 흙탕물처럼 뒤섞인 복잡다단한 존재다.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복잡한 것이기에, 우리 역시 언제든 표도르처럼 방탕한 삶을 살 수 있고, 디미트리처럼 돈 때문에 아버지를 들이받을 수 있으며, 스메르자코프처럼 철저한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알렉세이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같은 계단에 올라서 있는데, 다만 누구는 몇 계단쯤 위에, 다른 사람은 그 아래에 있을 뿐'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벗어날 수 없는 죄악으로부터 구원은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구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죄를 지음으로 해서 벌을 받게 되고, 그 고통을 전제로 하여 구원과 희망을 모색하게 되는 까닭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기본적으로 법정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카라마조프 가를 둘러싼 인물과 갈등 관계가 제시되고,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며,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디미트리는 3000 루블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법정 공판을 통해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법정 소설과 같이 '진범은 누구인가', '범행 동기는 무엇인가', '결국 정의는 바로 서는가'의 질문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즉, 디미트리는 누명을 벗고, 잃었던 명예를 회복하며, 스메르자코프의 파렴치함이 널리 알려지면서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위대하다 평가받는 것은 이 책이 단순히 형사적인 유무죄의 문제로 카라마조프 가의 비극을 귀결시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 또한 유죄라고 본다.




스메르자코프가 표도르를 살해하는데 기댔던 것은 둘째 이반의 사상이었다. '신은 없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이반의 논리적 사유에 그는 범행의 이론적 당위성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범행 의사를 일부분(간질 발작 시간을 미리 예고하는 등) 이반에게 털어놓는다. 물론 이반에게는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도, 살해를 교사할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이반 역시 마음속으로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날 밤' 아버지 곁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범행을 돕게 된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런 사실을 들어 '이반 역시 아버지가 살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 주장한다. 물론 이반이 범행을 알았거나, 눈치챈 것은 아니다. 스메르자코프의 범행 의사를 사전에 명확히 알았다면 그에 찬동했을 리도 없다. 다만 이반은 '이따금' '마음속으로'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법정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증인석에 서서 "저는 그냥 살인자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하고 만다. 물론 재판에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주장이다.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 역시 유죄'라는 생각은 형사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명제다. 형법의 처벌 대상은 행위이며, 행위가 없는 부작위(不作爲)라 할지라도, 행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의 적극적 행위나 마찬가지로 간주될 수 있는 부작위만이 처벌의 대상인 까닭이다. 범행을 준비하는 '예비'나 여럿이 범행을 모의하는 '음모' 조차 예비하는 '행위'와 공모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다. 즉,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저울에는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이 올라갈 자리가 없다.




그러나 저 유명한 말, '법은 도덕의 최소한'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마음의 잘못'에도 들이대 온, 보다 눈금이 촘촘한 잣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십계명 중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다. 간음의 의미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범주에서 악업을 짓는다. 뜻으로 저지르는 잘못도 몸과 말로 짓는 악업과 마찬가지다. 온 우주의 인과 법칙은 마음으로 품은 악한 뜻에도 에누리가 없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법치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형사법상 규정된 행위만을 죄라고 여긴다. 법전으로 울타리를 세워놓고 그 담장을 넘지 않는 한 '나는 무고한 사람'이라 자신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언급한 대로 우리는 '식탁 위에 놓인 돈을 훔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자기가 대단히 정직한 사람인 양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울타리를 뛰어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가 닿을 수 있는 최선의 자리인가.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이 뒤섞인 우리 마음이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 고작 그것뿐인가. 2500년 전 공자는 말하길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라. 법으로 이끌고 형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벌은 면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온갖 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낯짝 두꺼운 생각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마음의 잘못'도 유죄라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가슴 안에 항상 촘촘한 잣대를 품은 채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스메르자코프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의 잘못조차 유죄로 받아들인다면, (거의)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죄에는 벌이 따르고, 벌은 고통스럽다. 벗어나기 힘든 이 굴레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구원은 무엇을 통해 가능하며,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그 답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불신(不信)'으로 '죽도록 괴로워하는 여인'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길을 알려준다.



"사랑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그럴 수 있습니다. 부인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실천적으로, 끊임없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사랑'을 통한 구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전체를 관통하여 각 인물들을 통해 몇 번이나 반복하여 드러난다.




수도원의 회합에서 스캔들이 있던 날, 골칫덩어리 가족과 영적 스승 조시마 장로 사이에서 고된 하루를 보낸 수도사 알렉세이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은 병약한 소녀 리사의 갑작스런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리사가 손에 쥐어준 편지를, 알렉세이는 그 자리에서 세 번이나 거듭하여 읽는다.



"한 순간이 지나자 다시 조용하고 행복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봉투에 접어 넣고 성호를 그은 뒤 자리에 누웠다. 영혼의 혼란이 갑자기 사라졌다."




수치심과 좌절감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 마음먹었던 디미트리를 생명을 붙들어준 것도 사랑에 대한 희망이었다.



"새벽 5시, 이곳에서 동틀 녘에 스스로를 죽이겠노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지요. 야비한 놈으로 죽건 고결한 놈으로 죽건 어쨌거나 매한가지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매한가지가 아닌 게 돼 버렸어요. 믿으시겠습니까...(중략)... 때가 어느 때입니까. 내 사랑이 결실을 맺어 바야흐로 내 앞에서 천국이 다시 펼쳐진 때가 아닙니까."




논어에 이르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 살기를 바라는 것'이라 했다(愛之欲其生).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던 이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알료샤, 나는 살고 싶어,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어. 내가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봄이면 싹을 틔우는 끈적끈적한 잎사귀들이 소중하고, 파란 하늘도 소중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내게는 너무 소중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어떤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인가.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의 두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사랑과 대비되는 의미의 사랑이다. 우리가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테레사 수녀는 말했다. "난 결코 대중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작은(것부터 베푸는) 사랑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양파 한 뿌리'의 우화가 등장한다. 나쁜 짓만을 저지르고 살아온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이 평생 동안 베푼 선행이라고는 떠돌이에게 못난 양파 한 뿌리를 적선한 것이 전부였다. 결국 사후에 부인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되었는데, 천사들이 그 부인을 지옥에서 건져내려 할 때에, 바로 그 양파 한 뿌리를 내려 붙들게 했다는 이야기다.




디미트리의 재판에서도 '호두 1푼트'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배심원 제도를 통한 형사 소송은 배심원단이 피고인에게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느냐가 유죄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모든 정황이 디미트리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디미트리에 대한 여러 증언들이 그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몰아갈 때, 마을의 터줏대감인 어떤 노인이 나와 디미트리에게 도움을 준다.




노인은 디미트리가 어릴 적에 1푼트의 호두를 건넨 적이 있었는데, 마을을 떠난 디미트리가 20여 년 후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어 나타났을 때 '호두 1푼트'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드렸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친부를 살해한 파렴치한 인간인가'를 가리는 재판에서 노인의 증언은 배심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짓는 죄와 구원의 길로서의 사랑, 그것에 대해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정리한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우리 개개인이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이며 그것도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의 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각각의 사람에 대해 개별적으로 유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이야 말로 수도승의 길은 물론이고 지상의 온갖 사람의 길이 도달해야 할 월계관인 것입니다."


#3 밀알의 의미, 밀알은 누구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가장 첫 페이지에는 요한복음 12장 34절이 인용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에 수감된 4년 동안 오로지 <성경>만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곳곳에 있는 신과 불멸, 선과 악에 대한 깊은 논쟁들은 그가 유형 생활 동안 <성경>을 붙들고 치열하게 사유하여 도달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밀알'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사상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인다.


'밀알은 누구인가'를 고민할 때,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일류샤(일류셰치카)다.




그는 가난한 스네기료프의 어린 아들로서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아이다. 그러나 아픈 몸, 지독히 어두운 가정환경에도 일류샤의 내면 만큼은 절대로 아프지도, 어둡지도 않다. 그는 아버지 스네기료프를 모욕하는 어른과 자신을 따돌리는 학급의 급우 전체를 상대로도 당당히 맞설 줄 아는 용감한 인물이다.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주눅 든 채 살아가는 아버지와 병들고 철없는 어머니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조숙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이 실수로 죽인(나중에 건강하게 살아 돌아온다) 개를 떠올리며 끊임없이 마음 아파할 정도로 자비심도 있다. 결국 일류샤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학급 친구들은 일류 샤의 진심에 공감하고 그에게 사과함으로써 하나가 된다.




그런 일류 샤가 일견 '밀알의 상징'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일류 샤의 장례식을 그리며 마무리된다. 그를 괴롭히던 학급 급우들과 알렉세이는 일류샤를 떠나보내며 "영원히 이렇게! 평생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일류 샤의 높은 도덕성과 불굴의 용기가 '많은 열매'로 맺히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원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2부작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돌연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했던 다음 내용은 시간이 흘러 알렉세이가 혁명가가 되고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 한다. 일류샤라는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밀알로 태어나게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땅에 묻힌 밀알'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시마 장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류 샤의 죽음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막을 내렸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마을의 현로 조시마 장로의 죽음으로 막을 올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조시마 장로는 깊은 지혜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존재다. 수도원에는 장로와의 면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장로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개개인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가르침을 전한다. 생명을 다해 민중에게 사랑을 베풀어준다는 점에서 조시마 장로의 모습에 2500년 전 붓다, 그리고 2000년 전 예수가 오버랩된다.




장로의 곁에는 그를 존경하는 수도사들이 늘 함께한다. 알렉세이도 그중 한 명이다. 조시마 장로는 그를 특별히 아끼는데, 몇 시간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의식하고 알렉세이에게 유언이자 마지막 가르침을 남긴다.



"고뇌 속에서 행복을 구하도록 해라. 일을 해라,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선과 사랑의 상징인 알렉세이가 골방에 틀어박힌 유약한 수도사가 아니라, 행동을 통한 사랑을 실천하는 리더로 자랄 수 있었던 데는 장로의 영향이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오랜 경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혔고, 알렉세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화되어 '많은 열매'로 자라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주인공 알렉세이는 또 어떤가.




비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알렉세이지만, 그 자신만큼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믿으며, 진실에 당장 뛰어들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싶은 열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불멸을 위해 살고 싶다. 어정쩡한 타협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디미트리를 진범으로 의심할 때에도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확신으로 형의 무죄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반이 자책감으로 시름시름 앓을 때, 건강을 되찾아 살아가야 한다고 독려한 것도 알렉세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사랑했으며,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고자 애썼다.




알렉세이의 삶에 죽음은 아직 먼 이야기일지라도(그는 스무 살이다) '밀알'으로서 그의 영향력은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조시마 장로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부단하게 노력했는데, 특히 아이들의 사회에 뛰어들어 일류 샤와 급우들 간의 화합을 끌어낸 것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장로가 지시한 바, 수도원을 떠나 보다 넓은 세상에서 방황하고 배우게 될 그의 앞 일을 생각하면 알렉세이 역시 하나의 '밀알'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 이르러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시마 장로가 베푼 가르침을 알렉세이가 따랐고, 알렉세이가 실천한 사랑은 일류사에게 닿았으며, 일류샤가 보여준 용기는 그와 척을 지었던 여러 급우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즉, 조시마라는 밀알은 알렉세이에, 알렉세이라는 밀알은 일류샤에, 그리고 일류샤라는 밀알은 많은 친구들에게 이어져 더 '많은 열매'로 맺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시마가, 알렉세이가, 일류샤가,
그 모두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밀알'이 아닐까.




앞에서 고민해 본 두 번째 질문 '구원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살핀 바와 같이 도스토옙스키는 '우리 개개인은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이며 각각 개별적으로도 유죄'라고 했다. 모든 이가 모든 이에 대해 유죄인 것은 이 세상이 그물망처럼 촘촘한 인과 관계로 빠짐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잘못은 눈에 보이는 인과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과 관계를 거쳐 어딘가에 도달하고, 무엇인가에게 해를 끼친다. 우리가 길가에 쓰레기를 버린다 하여 우리 자신이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존재는 그 쓰레기로 인하여 반드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비단 잘못과 죄악, 이 세상의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개개인이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개개인은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밀알'이 될 수 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묻혀 많은 열매를 맺듯, 우리가 베푼 사랑도 인과 관계를 따라 어딘가에 닿을 것이고 무엇인가에 이로움을 보탠다. 비록 밀알을 심는 우리의 눈으로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을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존재는 그로 인하여 분명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결국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으며,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각각의 존재에 대해 개별적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월계관이다."


대단히 길고, 대단히 어려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덮으며,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밀알이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도스토옙스키의 격려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비록 가난과 유형 생활, 간질병과 도박에 빠져 피폐한 삶을 영위하였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끝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끝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가장 막장의 소재를 통해 온 세상에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졌듯, 도스토옙스키도 파란만장한 어둠의 삶을 토대로 휘황찬란한 밀알이 되었다.




그렇기에 도스토옙스키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전적으로 행복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 곧장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서약을 이행했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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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우출간작가
태도 수업저자

<혼자하는 공부의 정석> <365 공부 비타민>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 저자 / 팟캐스트 "서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 유튜브 "재우의 서재" 운영자

박정미 - 아주 오래 된 의문

박정미 - 아주 오래 된 의문

박정미

231104
  · 
아주 오래 된 의문

 세상에 쓸 데 없는 이상한 고민을 할 때가 있다. 
사춘기시절이 주로 그러한데, 내 인생에서는 대학 신입생시절 운동권 주변을 맴돌면서부터였다. 
자의식이 강했던 나는 처음 정면으로 마주한 사회와의 접합면에서 하염없이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자아의 한계를 돌파하려다가 튕겨나오고, 다시 들이대다 상처입고 내면으로 침잠하곤 했다. 
나 자신도 구체화할 수 없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의문의 구렁텅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생각의 함정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때 제기된 어둡고 무거운 실뭉치같은 의문에서 실마리를 찾아 질문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응답해가는 과정이 바로 내 인생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무질서한 생활과 유물론철학을 학습하면서 생긴 신경증으로 학교를 휴학하고 시골 고향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졌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철학이 몸으로 표현되었는지, 몸이 음식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반년 후 학교로 돌아왔지만 원래부터 약했던 몸은 그 후로도 내 발목을 잡았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생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산다.

내 의식에 들러붙어 활력을 빨아먹던 유물론 철학과 결별하게 된 것은 나이 마흔도 넘어셔였다. 아빠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이다. 
 아빠와의 영원한 이별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인터넷서점 검색란에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넣고 떠오르는 책은 다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혼의 존재와 카르마로 작동되는 자아의 진보와 불멸과 환생이 우주의 법칙이라는 사상을 수용하게 됐다. 수용이라기 보다는 재확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유물론을 학습하기 전에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해왔으니까.  

지금도 그 불교-인도철학의 핵심사상은 내 존재를 떠받치는 기반으로 살아있다(물론 불교는 불멸의 영혼을 부정하고 생을 거치며 언젠가 해체되어야 할 생명의 파동으로 이해한다.). 나는 언젠가는 돌아가신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나뵐 수 있음에 안도했다. 이 때가 내 인생의 한 문제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말하고 행동하고 어울리기보다는 한 켠에 서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쪽이었는데 대학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촌놈대학교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서울대 콤플렉스를 가진 시골마을 남자수재들이 대부분이었던 학교라서 더 그랬다. 

그 중의 몇몇 특별한 개성들은 호기심과 관심을 끌었는데, 동문들의 소문과 인터넷을 통해 지금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추적하여 확인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인간은 술에 취하기만 하면 5,18을 이야기하며 울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고통을 절절이 불고 하던 운동권 남학생이었다. 나는 사회현실과 역사에 대한 그 격정의 토로와 뜨거운 민족애에 반은 감동하면서도 반은 미심쩍어했는데, 결국 환멸을 느끼고 절연했다. 

지금도 그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요란하게 살아가고 있더라.

대학시절 받은 큰 문제 중의 하나가 그렇게 거대하고 추상적인 것을 쉽사리 말하는 인간들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 인간의 영적 진화의 잣대는 사랑과 자비라고 한다. 그러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두 사람을,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열 사람을, 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민족과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사랑에 가까운 진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큰 사랑을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왜 개별적 관계에서는 그토록 거짓되고 망령되이 행동할 수 있을까. 왜 그들은 그토록 쉽사리 민족애와 조국애를 입 밖에 꺼낼 수 있는 것인가. 왜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낄 수 없고 의심과 환멸만 느끼는 것인가.

 며칠 전 시월의 마지막날, 모교 주변을 자전거로 도는데 문득 내 마음 속에 해답을 물고 떠오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지, 인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사랑은 추상적인 인류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웃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사랑이 땀과 냄새와 눈빛을 가진 개별적인간을 벗어나면 그것은 사랑의 경계를 넘어간다. 민족애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민족을 위한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명예감정을 지칭한다. 명예감정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명예감정은 인간 내면에서 가장 훌륭한 감정 중 하나라고 본다. 다만 잣대가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범주에 민족애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족애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통과 연민과 책임의 감정뿐만 아니라 민족에 반대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까지도 아우른다. 사랑에 분노와 증오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 시절 운동권으로 젊은 학생들을 이끌었던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드높은 명예감정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민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의식이 강조되었다.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초조함, 역사적 소명의식의 깨어남, 혜택받는 계층으로서의 부채의식이 그들을 내몰았다. 

 하지만 꼭 그런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어디에나 있는 새끼악마는 여기에도 끼어들곤 했다. 새끼악마는 구체적 인간에 대한 사랑도, 드높은 명예감정도 아닌 권력욕의 발로로 운동권에 또아리를 틀었다.

 무지개처럼 마음도 칸막이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스펙트럼을 형성해서 번지듯 넘어간다. 사랑의 감정 옆에 명예감정이 있다면 권력욕은 멀리 떨어져 겹쳐지지 않는 곳에 있다. 명예감정은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가치지만 권력욕은 사랑과는 대척점을 이루는 사랑의 적이다.

 학생운동을 왜 했는지, 젊어서는 주위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 잘 알 수가 없다. 젊음 자체의 순수한 혈기와 단순성이 욕망조차 신선하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어 한 때는 자신과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지만 긴 인생행로에서는 결국 다 드러내고야 만다. 

우리 세대에서는 소련이 멸망하고 북한의 실상이 드러남으로써 학생시절 추종하던 사상과 철학이 오류로 판명났을 때 선명하게 길이 갈렸다. 지천명이라는 나이 쉰도 중반을 넘은 지금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족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고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길을 처절하게 반성하고 욕을 먹으면서까지 고난을 자초하며 길이 끊어진 곳에서 새길을 만들어 걸어갔다. 내면의 명예감정이 길을 밝히고 고상한 인격을 증명해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는 반성적 의식을 내비치기는커녕 자신의 과거를 민주화운동에만 축소 왜곡하여 포장하는데 힘썼다. 권력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윗선에 아부하고 대중선전에 사력을 다해 국회의원이 되고 기관장자리를 꿰찼다. 그가 진실로 원했던 것이 민족과 민중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권력과 사회적 지위였음을 스스로 증명해낸 것이다.

 

손민석 - 헤겔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른이 되자!"이다. 하지만 난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걸~? 책의... | Facebook

손민석 - 헤겔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른이 되자!"이다. 하지만 난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걸~?

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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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른이 되자!"이다. 하지만 난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걸~? 책의 1부에 나오는 내용인데 좀더 풀어쓰려 했지만.. 안 하기로 했다. 이놈
들, <자본론>의 상품장이 어렵듯이 원래 자유 개념이 어려운거다 이놈들! 헤겔이 이놈! 한다!


Taechang Kim Evolutionary Faith: Rediscovering God in Our Great Story 2002 by Diarmuid O Mur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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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utionary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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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Attention please.
" What then surely is most new about our modern understanding of life is the idea of evolution, for it enables us to see life not an eternally repeating cycle, but as a process that continually generates and discovers novelty."
-Lee Smolin-
This book feels like an expedition into an unknown land, yet one that feels strangely familiar. The book arises not out of any particular intellectual pursuit or academic need.
It is being born out of hunger, a need to explore the big question that face our world today, questions that deserve consideration and attention at a more spiritual level, rather than being forever subjected to the harsh, piercing light of scientific analysis or socioeconomic reductionist. Evolution tends to be explained in one of three dominant ways:the scientific, the religious, or the mythological. Scientific research tells us a great deal on how the universe began and unfolded over some twelve billion years,
and within that context, science tends to cherish the Darwinian "survival of the fittest" as an important clue to our understanding of the entire process. The religions share a broad agreement on the idea that God created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sustains its unfolding at every moment, and eventually will bring it to an end according to God's mysterious but wise plan.
Both science and religion aim at observable, verifiable truths, using different but related methods. Neither gives much attention to my third line of pursuit, the mythological. As popularly understood, myth belongs to the realm of the fanciful and the speculative, popularized stories that explain away rather than explain what the world is about. Alternatively, some social scientists-anthroplogist, for example-have attempted a rehabilitation of the notion of myth, suggesting that many ancient and primitive stories embody deep and enduring truths. The truth of the stories rests not in whether or not we can verify the the facts, because often we do not have the relevant information with which to do that; we access their truth more through rational intuition and imagination than through rational discourse and logical argument. Throughout the present work I draw on a range of different insights from both science and religion (theology), but I am attempting to blend them into what might begin to look like a myth for our time This is an onerous undertaking far beyond my learning or experience, but I hope that it serves as a humble beginning that others no doubt will modufy, correct, embellish, and build upon.
( pp. 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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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utionary Faith: Rediscovering God in Our Great Story Paperback – October 3, 2002
by Diarmuid O Murchu
(Author)
4.3 4.3 out of 5 stars 16 ratings

4.0 on Goodreads 22 ratings

Paperback
$14.45
53 Used from $1.3525 New from $9.80

In this sequel to the bestselling "Quantum Theology, " O'Murchu explores the meaning of evolution and sheds light on the profound spiritual directions suggested by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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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t length

231 pages



Quantum Theology: Spiritual Implications of the New Physics


Diarmuid O'Murchu
4.2 out of 5 stars 90
Paperback
83 offers from $2.99

From Library Journal
O'Murchu is a London-based priest and social psychologist whose previous works include Quantum Theology and Our World in Transition; his latest uses the insights of science and the convictions of environmentalism to suggest that humanity's next evolution will both unite humanity with the life of the planet and bring us closer to God. O'Murchu is, in effect, a post-Teilhardian theologian, and as Teilhard de Chardin is rather little discussed nowadays, O'Murchu's ideas may be of great interest to the spiritual seeker.
Copyright 2002 Reed Business Information, Inc.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Orbis Books; 0 edition (October 3, 2002)
Language ‏ : ‎ English
Paperback ‏ : ‎ 231 pages

#4,975 in History & Philosophy of Science (Books)




Top reviews

Top reviews from the United States


Eugene Silverman

4.0 out of 5 stars This is a mind bending exercise.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anuary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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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 challenges many traditional ideas in science and religion. It broadens ones thinking. It offers hope for the future, if our species doesn’t destroy itself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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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ychia

5.0 out of 5 stars A Compelling and Prophetic Work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September 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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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urchu's 'Evolutionary Faith' is not an easy read in that it requires a fully attentive mind to assimilate the full extent and depth of its message. And that message, conveyed through the medium of unfolding story, is that we belong and can only authentically live out our lives, in the context of our planetary and cosmic home. Unless or until we make a spiritual homecoming to this mystical 'place' of belonging at the heart of creation, and learn to listen, love and grow in congruence with its meaning for our lives (God's primary and ultimate revelation), we will forever flounder in our misguided will to power, arrogance, control and domination. From his seminal work, "Quantum Theology" to his most recent, "Christianity's Dangerous Memory", O'Murchu's writing has the quality of a profound quest . . and what this cutting-edge thinker has to say, he says exquisitely, compellingly and prophetically. Highly recommended for the discerning reader who has an interest in evolutionary theology's interface with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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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ck

4.0 out of 5 stars Inspiring reading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March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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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 readable with some deep insights into the potential of the human race if we can only survive our adolescence !, I too think that some of the negative reviews of this book reek of intellectual snobbery and speak more of semantics than the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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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ine Maurier

5.0 out of 5 stars I bought it for a friend who devoured mine.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March 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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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ought it for a friend who devoured mine. Not that difficult a read if you really want to be stretc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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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mpy

5.0 out of 5 stars Five Stars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April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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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 good condition as describ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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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tese Falcon

2.0 out of 5 stars Non-Teilhardian and pantheistic (from Maltese Falcon)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December 31, 2005

This is just a note to acknowledge that the review entitled "Non-Teilhardian and pantheistic" was submitted by me before I became Amazon's Maltese Fal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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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 D. Vogelsang

5.0 out of 5 stars The book is wonderful. Our church members are discussing it and it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October 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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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 is wonderful. Our church members are discussing it and it is a conduit for great conversations and greatly needed ho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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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ph

5.0 out of 5 stars Five Stars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ne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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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Strachan
4.0 out of 5 stars RadicalReviewed in Canada on March 2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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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requently read books that are considered to be theologically radical. This book, by Diarmuid O'Murchu, is by far the most radical theological text I have read recently. O'Murchu begins by outlining and celebrating the evolutionary process that underlies all of life in the universe or universes around us. Within that framework, he discusses the manner in which human spirituality was expressed during the many millennia prior to the rise of "civilization" and the organized religions associated with civilization. All this began about 6000 years ago. For a very short portion of human life on earth, organized religion has been the main channel for the expression of human spirituality. O'Murchu outlines the ways in which this development changed the nature of divinity in the human mind, and changed the values by which humans have come to live by.

The patriarchal and hierarchical values of civilization are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values governing human life prior to "civilized" life. O'Murchu underlines his belief that these civilized values are at the root of most of the planet's problems, human or otherwise. The values of pre-civilized humanity appear to have been much more amenable to cooperative life, care for the planet, wise use of resources, etc.

O'Murchu points out that the rise of civilization and organized religion were both dictated by the evolutionary process. He sees hope in the current decline in the life of organized religion, for that may signal that evolution's use for this entity may be changing, and organized religion may be on it's way out. It might take a few hundred years, but O'Murchu's view is that we all will be better off without it. His exposition of the message and ministry of Jesus tells us that Jesus was not interested in organized religion, or even of any religion. His mission was to show people how to life humanly together in cooperative and life giving ways. According to O'Murchu, the end of organized religion may be an advance in the possibility of living according to the message of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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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E. Byrnes
5.0 out of 5 stars Energising and Important Book for adult Faith Seekers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on August 1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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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ound this book highly stimulating and energising. It spoke deeply to my faith and psyche and the concepts, though re-evolutionary, were somehow deeply authentic. I would recommend it to anyone who is searching for a deeper faith in light of the latest findings in cosmology and the thought and scholarship of contemporary thinkers and seekers in faith and religion. I found the book both challenging and a joy to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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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ie M
2.0 out of 5 stars O'Murchu gets carried away with himself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on December 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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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urchu blurs line between sense and his version of reality. He seems carried away by his own intelligence and wants to re write 2000 years of Christi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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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utionary Faith: Rediscovering God in Our Great Story – Diarmuid O’Murchu
February 21, 2018
RGIOGS


The author uses the insights of science and the convictions of environmentalism to suggest that humanity’s next evolution will both unite humanity with the life of the planet and bring us closer to God. O’Murchu is, in effect, a post-Teilhardian theologian.

Just as Hindus see the need for a god of destruction and Christians see the cross at the heart of creation, so evolution seems to need destruction.

Gaia’s interconnectness is really the key to his thinking but the ‘scientists’ he quotes are really new-age mystics of the sort who hang around with the infamous Matthew Fox. There is, however, some real, though speculative, physics when he talks about string theory.

There is evolutionary physics as well as evolutionary biology.

He is on dangerous ground when he suggests that God may not be the ultimate creator or source and he is simply wrong when he asserts that there is a lone hero figure like Abraham in all religions.

The generosity of creation is shown at Cana and in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Quotations:

“it is time to embrace the cosmic and planetary context within which our life story and the story of all life unfolds. We belong to a reality greater than ourselves, and it is within that enlarged context that we will rediscover the benign mystery within which everything is endowed with purpose and meaning.”

If we knew the unwritten story of our past, especially the pre­historic past, its fascination would cut the history of kings and queens, wars and parliaments, down to proper size. —John McLeish

We belong to a universe of creatively interacting systems, a giant network of interplay and possibility forever drawn toward novelty and innovation (which is what natural selection makes possible). In the creation around us there are no isolated objects; everything belongs to creative interactive systems. We miss the deeper meaning if we stay with the product and ignore or bypass the evolving process. Nothing is static or stable (a favored concept of classical Newtonian science); each moment characterizes the unfolding dynamics of a highly creative universe.

“I believe in the creative energy of the divine, erupting with unimaginable exuberance, transforming the seething vacuum into a whirlwind of zest and flow.

“I believe in the divine imprint as it manifests itself in swirling vortexes and particle formations, birthing forth atoms and galaxies.

“I believe in the providential outburst of supernovas and in the absorbing potential of black holes.

“I believe in the gift of agelessness, those billions of formative aeons in which the paradox of creation and destruction unfolds into the shapes and patterns of the observable universe.

“I believe in the holy energy that begot material form and biological life in ancient bacterial forms and in the amazing array of living creatures.

“I believe in the incarnation of the divine in the human soul, initially activated in Africa over four million years ago.

“I believe in the “I Am Who Am,” uttered across the aeons, pulsating incessantly throughout the whole of creation and begetting possibilities that the human mind can only vaguely imagine at this time.

“As a beneficiary of the Christian tradition, I believe in the power of the new reign of God, embodied and proclaimed in the life of Jesus and offered unconditionally for the liberation of all life-forms.”

New life-forms do not simply come into being when all the con­ditions are right. Often they unfold long before their expected time. Genetic mutation and natural selection are not just random processes; new possibilities are being invoked, often against tremendous odds. And we do not need to invoke some “God of the gaps” to explain the new upsurge. There is a deep and powerful creativity at work within the evolving process itself.

To describe this creative future as endowed with a sense of “prom­ise” embraces religious wisdom in a way that enhances and enforces some of science’s greatest discoveries. In all the major religions, God promises—not just a reward in a life hereafter, but a fullness of life in an open-ended future that is more enduring and all embracing than any “here” or “hereafter.” This is the resilience of life that science never has been able to explain adequately. The fascinating coincidences are sometimes suggested as evidence for God’s involvement in the evolu­tionary process; they certainly awaken a sense of awe and mystery, but I suspect that they are no more than a tiny glance at the depth of mys­tery that characterizes creation. We never are, and never will be, able to explain adequately this divine creativity; to do so would effectively strip the future of its radical promise and possibility.

Does this mean that everybody is a theologian? Yes, it does. God reveals indiscriminately and with prodigious generosity. Some will ap­propriate the revelation through the study of theology or some other exploration of ultimate meaning. An indigenous person may appro­priate it through a convivial relationship with the land. A little child staring into her mother’s eyes and intuitively knowing that she is loved unconditionally is responding as profoundly as any theologian ever did. An old man sitting in an armchair and reflecting in gentle grati­tude on the story of his lifetime is doing theology in its fullest sense. And so is the politician seeking a peaceful and just outcome to the tribal conflicts that ravage many African countries. All are touching into the energy of the ultimate mystery.

The theologian Peter Hodgson (1994) grapples extensively with the meaning of energy, and he concludes that we are dealing with some­thing akin to a primal, erotic, alluring, relational force. It is beyond precise definition, and Hodgson, like Chaisson, believes that it perme­ates every sphere of existence. It is tangible but not quantifiable. For those who believe in God, energy is a primary characteristic of divine creativity; indeed, it might well be the most tangible evidence of God’s creativity at work in the cosmos.

Were there no differentiation, the universe would collapse into a homogeneous smudge; were there no subjectivity (autopoiesis), the universe would collapse into inert, dead extension; were there no communion, the universe would collapse into isolated singularities of being.

The Eucharist is a supreme moment of cosmic, planetary, spiritual, and human embodiment. All the elements meet as one in a ritual en­gagement from which nobody, for any reason, should be excluded. Radical inclusion is at the heart of every eucharistic enactment, subver­sively modeled by the Jesus of Christianity, who welcomed everybody to the eucharistic table, including those who were totally prohibited according to the religious rules of the day: tax collectors, prostitutes, and sinners.

There is a profound evolutionary connection with every eucharistic celebration, which often is overshadowed by the role assigned to the priest in the Christian tradition, and by his equivalent in other faith traditions. According to the official rite of celebration, the changing of the bread and wine in the Eucharist does not happen through the power of the priest, but by the invocation of the Holy Spirit — the “epiclesis.” And eucharistic theology requires a second epiclesis to be enunciated after the consecration of the bread and wine, beseeching the creative Spirit to transform the hearts of all those who are about to receive the consecrated food so that it will nourish them to become more proactive in their commitment to justice and right relationships. That same Spirit-power which enlivens, animates, and sustains every­thing in creation is also the heart, source, and inspiration of every eucharistic celebration.

The Eucharist acclaims and celebrates unashamedly the radical rela­tionality that characterizes every form of embodiment, from the cosmic to the personal. And it also pronounces that God is totally at home in the immediacy of that encounter; stated in the affirming assertion of Sallie McFague (1993): God loves bodies! God is present precisely in the mo­ments of intense bodily encounter, whether in the erotic passion of sex­ual embrace, the intensity of human intimacy, or the inexpressible won­der of childbirth; God is also present in memorable moments of being a one with nature, the expressionless bond in which people of grief can be united, or the mysterious unity that brings people of every race, creed, and color around a eucharistic table. In all these situations and in many more besides, God is at home and radically present to us. Words may fail to say how, but the heart has its wise and unspeakable intuitions.

The Christian theologian may feel uneasy because I have moved into eucharistic reflections without first considering the embodied presence of Jesus as a historical person of the past and an incarnational influ­ence in the present. From an evolutionary point of view, I suggest that the Eucharist needs a fresh articulation in the context of an alive cre­ation that is forever responsive to God’s allurement. Every Eucharist is a profound affirmation of the prodigiously nourishing God who wants to see nobody excluded from the table of cosmic abundance. God over­flows and so does God’s creation. In a word, that is what eucharistic celebration is meant to be about.

And nourishment is intimately linked with bodies. All bodies need sustaining nourishment and cannot thrive without it. God’s body, the cosmic and terrestrial bodies, along with the vast range of embodied forms that populate creation, all meet at the eucharistic table. Yes, it is about sacrifice — in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sacrifice,” which means “to make something sacred.” In fact, what really happens is that we draw forth the innate sacredness of all things and unite as one body in proclaiming the prolific goodness of our nourishing and sustaining God.

Meanwhile, the triumph of consciousness continues unabated. We have contributed to this triumph, but it also has its own momentum. And at this critical moment, the crucial question is not, “How do we control it?” but rather, “How do we submit to its higher wisdom?” Many people cringe when they hear the word “submit.” It sounds so passive; but most perturbing of all, it means that we are asked to let go of our power. And yet letting go of power is another mis­perception, because when we choose to engage with our planet and universe in a symbiotic relationship, we do not abandon power; rather, we rediscover it in a whole new way.

As a planetary, cosmic species, we belong to a reality greater than ourselves. It is our congruence with our planetary identity and our cosmic potential that bestow genuine power upon us, including the wisdom to befriend our human vulnerability. As long as we continue to set ourselves against or above the creation in which we are em­bedded, all that we will achieve is more sickness, pain, alienation, and meaninglessness. We set ourselves at enmity with the creation to which we belong. Ironically, we may be paving the pathways of our own de­struction, and if we continue blindly on that route, not all the gods on earth or in heaven will save us from ultimate catastrop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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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utionary Faith
Rediscovering God in Our Great Story
By Diarmuid O'Murchu
An exhilarating overview of personal and planetary transformation.
Book Review by Frederic and Mary Ann Brussat
https://www.spiritualityandpractice.com/book-reviews/view/5748/evolutionary-faith


Diarmuid O'Murchu is a Catholic priest and social psychologist in London who is mesmerized by all the wild possibilities of life transforming life on both a personal and a planetary scale. He has been writing about the connections between science and religion for many years; his books include Quantum Theology, Reclaiming Spirituality and Religion in Exile: A Spiritual Homecoming.

At the outset of this dramatic theological work, O'Murchu states: "It is time to embrace the grandeur, complexity, and paradox that characterize evolution at every stage, a story that continues to unfold under the mysterious wisdom of our cocreative God, whose strategies always have, and always will, outwit our human and religious desire for neat, predictable outcomes." In four sections that all intertwine, the author spells out "our great story" of evolution, synergy (an emptiness that overflows, aliveness as an E-merging property), relationality (the Divine as relational matrix, thriving on paradox, boundaries that no longer hold), embodiment ("This is my body," humanity's rightful place, incarnation: African style), and consciousness (the future of evolution, consciousness and globalization, our next evolutionary leap).

What are some of the most important dimensions of evolutionary faith? O'Murchu celebrates the innovation and creativity of the universe with all its constant newness and rebirths. He loves the diversity in every precinct of the natural world. No two atoms are alike. He is convinced that "communion is the goal of all movement, personal and planetary alike." And closely allied with this dimension of relationality in the cosmos is the new emphasis upon Spirit in the evolutionary story. The author concurs with William Johnston and others who see mysticism as the most capacious spiritual perspective for a world of constant novelty, transformation, communion, and Spirit. Adventure is built into the very core of evolutionary faith, and O'Murchu conveys this excitement in his writing.













2023/11/01

박석 교수, 더불어숲학교서 ‘사회의 명상화’ 강의 2004

“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박석 교수, 더불어숲학교서 ‘사회의 명상화’ 강의

박 석 상명대 교수 | 기사입력 2004.05.24. 

봄이 절정에 오른 강원도 내린천 미산계곡 개인산방(開仁山房). 지난 주말(22-23일) 여기서 열린 더불어숲학교에선 상명대 박석 교수가 ‘사회의 명상화, 명상의 사회화’를 강의했다. 이날 박 교수는 명상계의 대가답게 명상을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문명의 치유책으로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박 교수는 현대문명의 위기가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현상”에서 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류의 과학 기술력은 급성장했지만 정신적 능력은 더디게 성장해 마치 어린 아이에게 기관총을 맡긴 것과 같은 위험한 형국이라는 것. 박 교수는 역사적으로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종교가 기여해왔지만 현재 그런 희망을 접고 있다.

박 교수는 여기서 명상을 주목하고 있는데 “명상은 종교와 같이 정신적 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면서 현재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기복적인 신앙이나 도그마화된 교리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석 교수의 이날 강의 요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사회의 명상화**

근대 이후 서구문명은 인류사를 주도하였다. 그들의 과학기술은 인류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켜주었으며 이것은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였던 자유와 평등에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근대 서구문명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서구문명은 이처럼 화려한 면이 있지만 아울러 부정적인 문제도 많이 남겨놓았다.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엄청난 빈부의 격차,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세계 전쟁,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생긴 제3세계의 종족 내지는 민족 갈등,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극도의 물신주의, 도덕성 상실, 인간 소외 등의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환경파괴, 자원고갈, 핵전쟁의 위협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류의 사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심각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끔찍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유럽의 일부 선구적 지식인들은 그들이 철저하게 신뢰하였던 근대적 합리성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정치운동으로 시작하였다가 점차 기성세대에 기성문화에 대한 반항과 비판으로 나아갔던 68혁명은 20년대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움직임을 대중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탈근대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대한 담론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도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신과학운동, 환경운동, 영성운동, 공동체운동 등의 새로운 양상의 운동도 모두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온 지금도 근대 서구문명이 가져온 폐단들은 대부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으며 특히 환경문제와 자원문제는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지금은 인류문명의 커다란 위기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위기에 대한 진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강연자는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현상을 가장 주된 원인으로 보고 싶다. 여기서 물질적 능력이란 자연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조작하여 물질적 생산력을 높이는 능력을 말한다. 과학 기술력이 바로 이에 해당하며 나아가 생산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를 효율적으로 관리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부차적인 지식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물질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능력이란 정신적 가치, 예컨대 삶의 의미, 생명의 존엄성, 존재의 의미 등을 자각할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의 과학 기술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성장하였지만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너무나 더디게 성장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물질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능력의 괴리가 심각하고 위험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기관총을 맡긴 것과 같은 형국이다. 지금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종교이다. 그러나 현재의 종교는 두 가지의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아직도 기복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교 간의 갈등 문제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때 종교는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제고시켜주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심각한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야 하고 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집단주관적 착각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집단주관이란 집단이 공유하는 주관으로서 그 집단의 범위가 클 때는 절대객관으로 오해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집단주관적 진리를 절대객관적 진리로 착각을 할 때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강연자는 명상을 들고 싶다. 왜냐하면 명상은 종교와 같이 정신적 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면서 현재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기복적인 신앙이나 도그마화된 교리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흔히 명상이라고 하면 힌두교의 요가나 불교의 참선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명상이라는 용어는 인도 요가의 8단계 가운데 7단계로서 의식이 어느 한 대상에 전념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Dhyana’를 번역한 영어의 ‘Meditation’을 일본 사람들이 다시 번역한 말이다. 선종(禪宗)의 참선(參禪)의 ‘禪’ 또한 요가의 ‘Dhyana’를 번역한 말임을 생각할 때 명상은 인도의 종교문화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은 힌두교나 불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고등 종교에는 모두 인간의 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행법이 있는데 이들 또한 명상이라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는 고대의 선지자들과 랍비들이 자신들의 의식세계를 깊게 하여 야훼와 교통하기 위하여 까발라라고 하는 명상을 하였으며, 기독교의 수사들 또한 묵상기도와 아울러 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현전을 체험하기 위한 관상 기도법이라는 명상법을 수행하였으며, 이슬람교에도 많은 수피들이 알라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한 명상법들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도교에서도 단순한 건강의 차원을 넘어 불로장생을 얻기 위하여 호흡과 아울러 고도의 정신집중법을 이용한 명상법이 있으며, 사회적인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에서도 외물의 유혹에서 벗어나 본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명상법이 있었다.

원래 명상은 해당 종교의 핵심적인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고급스러운 심신수련법이기 때문에 일반 신도보다는 사제계급이나 전문적인 수도자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명상법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책으로 남겨지는 경우에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표현으로 기록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던 것은 명상법 속에 금욕이나 특이한 호흡법 내지는 정신 집중법들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함부로 따라하는 경우 여러 가지 부작용을 발생할 수도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지만 종교권력의 독점을 위하여 혹은 명상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부러 정보를 제한하였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서서 이런 여러 가지 비의적 명상법들이 점차 과학화되고 대중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명상의 세계에 대한 관심도과 이해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명상의 대중화와 과학화가 더욱 가속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명상이 대중화되고 과학화되는 것은 인류의 의식 혁명을 위해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명상은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해 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명상은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빠른 시간에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비종교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지만 종교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명상을 통하여 종교인들은 기복적 차원의 종교행위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고 아울러 종교적 집단주관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상은 경전이나 교리에 대한 신념적 차원을 강화하기보다는 종교적 성스러움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따라서 도그마적인 요소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우리의 사회를 좀 더 명상적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적이란 물질적 이익에만 급급하여 정신적 가치를 고려할 틈이 없는 상태에서 물질적 이익과 정신적 가치를 조화시킬 줄 아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차원에서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자연과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부분과 전체가 서로 대립하는 차원에서 부분과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류사회는 점차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풍조가 팽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풍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20세기 말부터는 신자유주의의 구호 아래 인류사회 전체가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 할 것 없이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혈안이 되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고속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전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속도 경쟁 외에는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린 결과 물질적으로 이전에 비해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대급부로 우리의 정신은 점차 황폐화되고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그뿐인가. 소중한 우리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는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고 자원도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다. 아울러 산업혁명 이후에 점차 쌓아온 환경공해는 이제 인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 미국 국방부에서는 머지않은 장래에 환경문제가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환경문제는 이제 일부 환경론자들의 외로운 구호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국방성의 관료들조차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아야 하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제는 정신없이 무한경쟁에 좇아가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의 삶의 양식이 과연 바람직한 삶인지를 반성하고 이 사회가, 인류문명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때이다. 이제는 걸음의 속도를 조금씩 줄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즉, 이 사회 전체가 명상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문명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하루빨리 낭떠러지로 향해 달려가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외향적 물질적 욕구를 극도로 부추기는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강연자는 물질적 욕구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더 중시하고 외향적 가치보다는 내면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명상 속에서 끄집어 낼 것을 제안한다.

물론 현 자본주의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안목으로는 사회의 명상화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은 인류의 의식을 빠른 시간 내에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명상은 인간의 욕구를 한 단계 승화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욕구는 현실사회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힘이다. 진화의 최고 단계에 이른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지만 이 현실을 움직이는 기본적 욕구는 식욕, 성욕 등의 생리적 욕구와,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 등의 사회적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들은 한 개인의 삶을 유지시키는 동력인 동시에 사회전체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한 개인이나 그 사회전체는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화와 균형이 무너질 때 개인이나 사회는 파멸로 치닫는다.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나 그 사회 구성원에게 욕구를 조정을 요구한다. 비교적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인 법률, 규범으로부터 내면적 자율성을 더 강조하는 윤리, 도덕, 종교에 이르기까지 욕구의 조정을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 있다.

명상은 이들 가운데서 가장 고차원적이고 자율적인 조정수단이다. 명상은 타율적 제재인 법률이나 관습과는 달리 자율적으로 욕구를 조절할 수 있게 해주며, 추구하는 이상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렵고 그래서 위선이나 타락으로 빠지기 쉬운 윤리, 도덕, 종교보다도 훨씬 효율적으로 욕구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그 이유는 명상 속에는 욕구를 조절하는 구체적인 테크닉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욕구의 문제는 결코 고원한 성자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때로 명상가 가운데서는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초인적인 금욕이나 무욕의 경지를 보여주곤 한다. 그런 극단적인 금욕이나 무욕은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욕구조절 능력을 말한다.

명상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보통 사람들도 일정 정도 수준의 욕구조절은 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통해 감각기관이 조금만 정화되기만 해도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음식들을 탐욕스럽게 먹는 행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고도 더 깊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여러 가지 물질적 욕구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지게 된다.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면서도 많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명이다.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인류는 자연을 이용하여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것은 인류의 물질적 복지의 증진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탐욕적인 자본주의체제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기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을 쫒고 있다.

그렇게 해서 생산된 부는 일부계층에게만 편중되고 그것은 비만과 기아의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한나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문제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사회에서는 비만환자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사람마다 다이어트에 대한 한심한 고민을 하고 있는 반면 선진자본주의제국들에 의해 수탈당한 제3세계에서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기아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욕구들은 인류문명의 미래를 위해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것을 추구하는 명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분명 도움을 줄 수가 있다. 물론 개인의 욕구의 조절이 바로 사회변혁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운동이 확산되어 적은 소유와 소비가 더 아름다운 삶의 양식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만 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사회제도와 체제를 변혁하는 작업을 보다 용이하게 진행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명상의 사회화**

명상은 오랫동안 소수의 구도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깊은 산중과 수도원에 있던 명상은 서서히 속세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구인들이 동양의 정신세계인 힌두교와 불교의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빠른 속도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반부터 인도의 선구적인 요가 스승들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면서 힌두교의 명상의 세계를 서구인들에게 널리 전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선승들도 선불교의 참선 명상법들을 서양인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단순히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심취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점차 근대 서구문명의 폐단을 치유하는 대안운동의 하나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관심을 지니는 사람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68혁명 이후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일어나자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명상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환경운동이나 공동체운동 영성운동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상을 수련하는 것이 그리 낯설게 다가오지 않고 명상과 자신들의 운동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한 일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70년대 이후에는 명상의 심리적 생리적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심리치료나 일반 환자치료에서도 조금씩 응용되고 있다. 7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슈탈트 심리치료는 원래 탄생과정에서 동양사상과 명상의 요소를 유입하였기 때문에 명상적인 기법이 상당 부분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심리치료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가장 실증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인지행동심리치료에서도 명상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일반 병원에서도 명상을 응용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중 보스톤에 있는 메사추세스주립대학 병원의 예방행동의학과 교수이자 병원 부설 스트레스감소센터(Stress Reduction Center)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센터의 원장인 존 카밧진 교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를 서양인들의 체질에 맞게끔 개선한 MBSR 프로그램(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을 운용하여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재 그의 MBSR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의 대학병원과 개인클리닉에서 환자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명상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육체의 이완을 가져온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명상을 실용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도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건강과 미용 차원에서는 하타요가가 일찍부터 널리 유행하였고 최근에는 중국의 태극권 또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또한 지속적으로 서양인들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도심 속에서도 명상센터가 늘고 있는 추세이며 교외나 산중의 명상 센터에는 여름 휴가철이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명상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근래에는 웰빙의 유행으로 명상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서구의 영향으로 인해 80년대 초부터 서서히 명상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80년대 초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띠 등의 인도 성자들이 쓴 명상서적의 번역서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인도명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다가 80년대 중반에 우학도인의 민족비전의 전통수련법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식으로 기술한 <단>이 유행하면서 단학계열의 수련법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중후반에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에고를 죽이는 테크닉을 사용하는 마음수련법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웰빙의 유행으로 명상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명상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 개인적인 구도의 방편으로 혹은 종교적 수양의 방편으로 쓰였던 명상은 근 백년이 채 못 되는 기간에 급속도로 대중화되고 사회화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 되기에는 아직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많이 있다.

우선 명상의 세계는 아직도 필요 이상의 신비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과학화 체계화가 시급하다. 근래에 들어 구미에서는 명상의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밝히는 논문과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명상의 과학화에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개별 명상에 대한 효과를 부분적으로 밝히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다양한 명상을 체계적으로 비교 연구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밝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많은 논문들 중에는 과학적 연구라는 핑계 아래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명상단체 내지는 자신이 관심이 있는 명상법을 선전하는 도구로 쓰이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사실 명상에서 나타나는 효과의 상당 부분은 명상 자체의 효과라기보다는 심리적 기대치에 의한 플라세보 효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일정 부분의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때로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더 많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상단체에서는 과장광고로 일관하고 있어 때로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아울러 여러 가지 명상법들이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을 혼돈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명상법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

명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데 크게 방해가 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혼동이다. 명상 속에는 주관적 현상과 객관적 현상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할 때 깊은 이완을 체험하면서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체험하거나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 등은 객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하다보면 그 속에 담긴 특정한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대해 강력한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집단주관적인 착각의 소지가 있다. 물론 명상은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맹목적인 신앙에 비해서는 집단주관적 착각의 요소가 훨씬 적다. 그러나 명상 또한 분명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별로 못 느끼지만 명상에 본격적으로 심취하게 되면 대체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집단주관적인 착각에 빠지는 경우 가장 크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소통기능의 저하이다. 물론 집단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은 더욱 원활해진다. 문제는 타집단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에 대해서도 잘 소통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방적인 주장을 하거나 아예 대화의 문을 닫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소통기능의 저하는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명상인구의 확대를 지향할 경우 어떤 면에서는 사회는 소통부재로 인해 도리어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관성의 극복은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마지막 문제는 앞의 문제와 상관관계가 있는데, 명상은 대체로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칫 외면의 현실세계와 괴리가 생기기 쉽다는 것이다. 주변에 명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현실과 그다지 큰 간극이 없는데 점차 시간이 흘러서 명상에 더욱 심취할수록 내면세계에 도취되어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처음부터 현실도피적 경향이 있는 사람이 명상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명상에 심취하면서 점차 현실도피적 성향이 강화되는 경우도 있는데 하여튼 사람마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명상에 빠지게 되면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상을 단순히 개인적 종교적 구도의 도구로서 받아들일 경우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도 수도원에서 깊은 산중의 선원에서 오로지 종교적 구도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은 많이 있다. 그리고 깊은 명상을 통해 심오한 깨달음을 얻는 경우 그 집단 내에서는 추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명상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려면 이제는 좀 더 현실세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일부 명상가들 가운데서는 현실과 잘 조화를 이루면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이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상 전체의 방향성과 메커니즘의 문제이다. 이제는 명상 전체의 방향성에 대해 조정이 필요한 때이고 테크닉 자체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게 될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명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상에서 언급한 문제들, 그 중에서 집단주관의 문제와 일상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이나 깨달음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가질 필요성이 있다. 과연 집단주관적인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인가 하는 문제와 내면의 초월적 세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연자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탐구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이제는 명상과 깨달음에 있어서도 집단주관적 틀을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틀을 찾아야 하고 현실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 보다 성숙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본다. 강연자는 집단주관적인 성향을 극복할 수 있고 일상의 삶과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명상법인 바라보기 명상법을 만들어 주변사람들과 나누는 중이다.

명상이 사회 변혁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 자체를 변혁하고 개량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명상을 사회적 차원에 접근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강연자는 이를 위해 그 사이 다음과 같은 실천과 구상을 하고 있다.

명상이 사회화되기 위해서는 명상의 사회화 자체를 주제로 하는 토론의 장을 많이 열어야 한다. 대부분 명상하는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명상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명상의 사회화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설령 있다 해도 명상의 사회화에 대한 기본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사회란 결국 개인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식이 변혁되면 그것이 바로 사회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명상을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의식이 깊이 각성되면 그가 설령 사회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거나 혹은 깊은 산속에서만 살아도 사회의 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있어서 한 개인의 의식발전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인류라는 종 전체의 발전에도 공헌을 한다고 생각한다.

명상하는 사람으로서 일리가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강연자 역시 옛날에는 그렇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하게 되면서 위와 같은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이고 일면적인 접근인가를 알게 되면서 이제는 위와 같은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의식의 변혁이 사회의 변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현실적 유효성을 생각한다면 그 사이에는 너무나 넓은 강이 있다.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논리는 너무나 강고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의식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라 여겨진다. 속세를 떠난 산중도인의 고매한 깨달음 또한 현실의 변혁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한강투석과 같은 것이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푸는 것이 가장 빠른 것이다.

또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의 명상은 내면의 각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현실 문제를 접할 때 대부분 내면적 주관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일체유심조니 모든 현실은 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등등의 입장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명상하는 이들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접할 때 항상 현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면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강연자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갈등의 원인은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외면적 조건에도 있는 것이다. 내와 외를 같이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모든 것은 내면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이다. 이런 명상의 틀 자체를 바꾸지 않고 명상 인구의 확장만 시도하는 것은 사회의 변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많은 명상가를 배출하고 있고 명상가에 대한 사회적인 명망이 높은 인도라든지 미얀마 등의 국가의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현실의 낙후는 여러 가지 많은 역사적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명상 또한 어느 정도 역할은 담당하였다고 본다. 즉 마르크스가 말한 민중의 아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이 진정으로 사회변혁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계 내부에서 먼저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현실의 여러 갈등과 문제들은 내면의 마음의 상태와 외면의 현실적 조건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접근보다는 양방향의 접근이 문제 해결에 더욱 효과적이다. 이런 면에서 운동권과 명상권은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영성적인 관심도 풍부하고 아울러 현실개혁에 대한 의지도 많은 지역에서는 명상권과 운동권이 제대로 통합될 수 있을 때 우리의 현실의 장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명상권과 운동권이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상대를 배우려고 하고 아울러 새로운 모색을 위한 토론의 장을 많이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론을 하며 모색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명상과 사회운동의 연결 고리를 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을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사회적 활용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영역을 확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연자는 오랜 명상을 통해 명상 속에는 참으로 많은 가능성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그 가능성들을 현실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상은 과거에는 종교적 수도의 방편으로 널리 쓰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주로 복잡한 사회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의 심신을 치유하는 도구로 많이 쓰이고 있는 편이다. 강연자 또한 오랫동안 명상을 하면서 본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명상이 몸과 마음의 불필요한 긴장을 제거시켜주며 유연성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상의 이러한 효용성은 예방의학이나 대체의학 방면에서 보다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문제이고 최근에 이러한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강연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심리치료 분야인데 몇 년 전부터 게슈탈트 심리치료 연구회에 참가하여 그쪽 분야의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UCLA에서 방문학자로 공부하고 있을 때에도 그 쪽 심리학과 교수와 정신과 교수와 토론을 나누면서 좋은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심리치료는 명상과 가장 가까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미국의 심리학계에서는 명상을 심리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연구와 토의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편이다. 강연자는 게슈탈트학회와의 만남을 통하여 심리학자들에게 명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고 그 결과 요즈음은 명상에 대한 관심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앞으로 좀 더 본격적인 교류가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또한 명상은 자기 내면세계와의 교감 자연과의 교감 등을 통하여 예술가들의 창조력 향상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특히 공연예술 쪽으로는 신체 훈련이나 발성훈련 등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강연자는 몇 년 전 한국공연예술원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현역 연극배우와 배우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연기력 향상을 위한 명상 강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대학의 연극영상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공과목으로 명상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명상이 연기수업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던 학생들도 한 한기 수업을 마친 뒤에는 명상이 연기력 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명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은 또한 교육 분야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 나아가 근대서구의 지식위주의 교육풍토에 회의를 느끼고 전인교육, 참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명상을 교육에 접목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강연자는 몇 년 전 대안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명상을 어떻게 교육 분야에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강연과 토론을 나눈 적이 있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생각이다.

이렇듯 명상은 잘만 활용하면 사회 여러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명상의 영역을 확대하고 주변 분야와 교류를 촉진시키는 것은 명상의 사회화에 훌륭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 또 하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명상을 제도권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근래 명상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증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여러 명상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되고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명상법 가운데도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불량한 것도 많다. 불량한 것이란 부분적으로는 일시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각성시켜주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몸과 마음에 도리어 부정적 효과를 남기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명상법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였을 때 몸과 마음에 이상현상을 가지고 오거나 혹은 눈에 보이는 뚜렷한 현상은 없지만 집단주관적 도취에 빠져 정상적인 소통기능이 저하되거나 내면의 세계에만 심취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들어 결국 삶을 그르치게 하는 경우는 참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적으로 불행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명상의 효과라고 하는 것들은 단기간 내에 객관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함정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명상이 제도권 학문으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강연자는 6,7년 전부터 대학에서 ‘동양사상과 명상’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동양사상과 그 속에서 발달한 여러 명상체계들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근 일부 대학에서 명상에 대한 강좌가 조금씩 생기고 있으며 대학원에서 기공학과, 명상학과, 요가학과 등을 개설한 대학도 생겼다. 앞으로는 명상도 학문적으로 체계를 갖추고 전문적인 학회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명상이 제도권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 때 명상교사에 대한 자격요건도 강화할 수 있고 명상이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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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박석 교수, 더불어숲학교서 ‘사회의 명상화’ 강의

박 석 상명대 교수  |  기사입력 2004.05.24


봄이 절정에 오른 강원도 내린천 미산계곡 개인산방(開仁山房). 지난 주말(22-23일) 여기서 열린 더불어숲학교에선 상명대 박석 교수가 ‘사회의 명상화, 명상의 사회화’를 강의했다. 이날 박 교수는 명상계의 대가답게 명상을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문명의 치유책으로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박 교수는 현대문명의 위기가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현상”에서 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류의 과학 기술력은 급성장했지만 정신적 능력은 더디게 성장해 마치 어린 아이에게 기관총을 맡긴 것과 같은 위험한 형국이라는 것. 박 교수는 역사적으로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종교가 기여해왔지만 현재 그런 희망을 접고 있다.
 
박 교수는 여기서 명상을 주목하고 있는데 “명상은 종교와 같이 정신적 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면서 현재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기복적인 신앙이나 도그마화된 교리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석 교수의 이날 강의 요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사회의 명상화** 
 
근대 이후 서구문명은 인류사를 주도하였다. 그들의 과학기술은 인류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켜주었으며 이것은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였던 자유와 평등에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근대 서구문명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서구문명은 이처럼 화려한 면이 있지만 아울러 부정적인 문제도 많이 남겨놓았다.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엄청난 빈부의 격차,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세계 전쟁,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생긴 제3세계의 종족 내지는 민족 갈등,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극도의 물신주의, 도덕성 상실, 인간 소외 등의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환경파괴, 자원고갈, 핵전쟁의 위협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류의 사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심각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끔찍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유럽의 일부 선구적 지식인들은 그들이 철저하게 신뢰하였던 근대적 합리성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정치운동으로 시작하였다가 점차 기성세대에 기성문화에 대한 반항과 비판으로 나아갔던 68혁명은 20년대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움직임을 대중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탈근대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대한 담론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도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신과학운동, 환경운동, 영성운동, 공동체운동 등의 새로운 양상의 운동도 모두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온 지금도 근대 서구문명이 가져온 폐단들은 대부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으며 특히 환경문제와 자원문제는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지금은 인류문명의 커다란 위기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위기에 대한 진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강연자는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현상을 가장 주된 원인으로 보고 싶다. 여기서 물질적 능력이란 자연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조작하여 물질적 생산력을 높이는 능력을 말한다. 과학 기술력이 바로 이에 해당하며 나아가 생산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를 효율적으로 관리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부차적인 지식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물질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능력이란 정신적 가치, 예컨대 삶의 의미, 생명의 존엄성, 존재의 의미 등을 자각할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의 과학 기술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성장하였지만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너무나 더디게 성장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물질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능력의 괴리가 심각하고 위험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기관총을 맡긴 것과 같은 형국이다. 지금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종교이다. 그러나 현재의 종교는 두 가지의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아직도 기복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교 간의 갈등 문제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때 종교는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제고시켜주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심각한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야 하고 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집단주관적 착각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집단주관이란 집단이 공유하는 주관으로서 그 집단의 범위가 클 때는 절대객관으로 오해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집단주관적 진리를 절대객관적 진리로 착각을 할 때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강연자는 명상을 들고 싶다. 왜냐하면 명상은 종교와 같이 정신적 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면서 현재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기복적인 신앙이나 도그마화된 교리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흔히 명상이라고 하면 힌두교의 요가나 불교의 참선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명상이라는 용어는 인도 요가의 8단계 가운데 7단계로서 의식이 어느 한 대상에 전념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Dhyana’를 번역한 영어의 ‘Meditation’을 일본 사람들이 다시 번역한 말이다. 선종(禪宗)의 참선(參禪)의 ‘禪’ 또한 요가의 ‘Dhyana’를 번역한 말임을 생각할 때 명상은 인도의 종교문화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은 힌두교나 불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고등 종교에는 모두 인간의 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행법이 있는데 이들 또한 명상이라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는 고대의 선지자들과 랍비들이 자신들의 의식세계를 깊게 하여 야훼와 교통하기 위하여 까발라라고 하는 명상을 하였으며, 기독교의 수사들 또한 묵상기도와 아울러 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현전을 체험하기 위한 관상 기도법이라는 명상법을 수행하였으며, 이슬람교에도 많은 수피들이 알라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한 명상법들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도교에서도 단순한 건강의 차원을 넘어 불로장생을 얻기 위하여 호흡과 아울러 고도의 정신집중법을 이용한 명상법이 있으며, 사회적인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에서도 외물의 유혹에서 벗어나 본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명상법이 있었다. 
 
원래 명상은 해당 종교의 핵심적인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고급스러운 심신수련법이기 때문에 일반 신도보다는 사제계급이나 전문적인 수도자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명상법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책으로 남겨지는 경우에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표현으로 기록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던 것은 명상법 속에 금욕이나 특이한 호흡법 내지는 정신 집중법들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함부로 따라하는 경우 여러 가지 부작용을 발생할 수도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지만 종교권력의 독점을 위하여 혹은 명상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부러 정보를 제한하였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서서 이런 여러 가지 비의적 명상법들이 점차 과학화되고 대중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명상의 세계에 대한 관심도과 이해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명상의 대중화와 과학화가 더욱 가속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명상이 대중화되고 과학화되는 것은 인류의 의식 혁명을 위해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명상은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해 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명상은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빠른 시간에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비종교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지만 종교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명상을 통하여 종교인들은 기복적 차원의 종교행위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고 아울러 종교적 집단주관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상은 경전이나 교리에 대한 신념적 차원을 강화하기보다는 종교적 성스러움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따라서 도그마적인 요소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우리의 사회를 좀 더 명상적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적이란 물질적 이익에만 급급하여 정신적 가치를 고려할 틈이 없는 상태에서 물질적 이익과 정신적 가치를 조화시킬 줄 아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차원에서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자연과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부분과 전체가 서로 대립하는 차원에서 부분과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류사회는 점차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풍조가 팽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풍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20세기 말부터는 신자유주의의 구호 아래 인류사회 전체가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 할 것 없이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혈안이 되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고속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전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속도 경쟁 외에는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린 결과 물질적으로 이전에 비해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대급부로 우리의 정신은 점차 황폐화되고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그뿐인가. 소중한 우리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는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고 자원도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다. 아울러 산업혁명 이후에 점차 쌓아온 환경공해는 이제 인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 미국 국방부에서는 머지않은 장래에 환경문제가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환경문제는 이제 일부 환경론자들의 외로운 구호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국방성의 관료들조차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아야 하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제는 정신없이 무한경쟁에 좇아가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의 삶의 양식이 과연 바람직한 삶인지를 반성하고 이 사회가, 인류문명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때이다. 이제는 걸음의 속도를 조금씩 줄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즉, 이 사회 전체가 명상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문명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하루빨리 낭떠러지로 향해 달려가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외향적 물질적 욕구를 극도로 부추기는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강연자는 물질적 욕구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더 중시하고 외향적 가치보다는 내면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명상 속에서 끄집어 낼 것을 제안한다. 
 
물론 현 자본주의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안목으로는 사회의 명상화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은 인류의 의식을 빠른 시간 내에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명상은 인간의 욕구를 한 단계 승화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욕구는 현실사회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힘이다. 진화의 최고 단계에 이른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지만 이 현실을 움직이는 기본적 욕구는 식욕, 성욕 등의 생리적 욕구와,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 등의 사회적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들은 한 개인의 삶을 유지시키는 동력인 동시에 사회전체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한 개인이나 그 사회전체는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화와 균형이 무너질 때 개인이나 사회는 파멸로 치닫는다.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나 그 사회 구성원에게 욕구를 조정을 요구한다. 비교적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인 법률, 규범으로부터 내면적 자율성을 더 강조하는 윤리, 도덕, 종교에 이르기까지 욕구의 조정을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 있다. 
 
명상은 이들 가운데서 가장 고차원적이고 자율적인 조정수단이다. 명상은 타율적 제재인 법률이나 관습과는 달리 자율적으로 욕구를 조절할 수 있게 해주며, 추구하는 이상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렵고 그래서 위선이나 타락으로 빠지기 쉬운 윤리, 도덕, 종교보다도 훨씬 효율적으로 욕구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그 이유는 명상 속에는 욕구를 조절하는 구체적인 테크닉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욕구의 문제는 결코 고원한 성자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때로 명상가 가운데서는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초인적인 금욕이나 무욕의 경지를 보여주곤 한다. 그런 극단적인 금욕이나 무욕은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욕구조절 능력을 말한다. 
 
명상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보통 사람들도 일정 정도 수준의 욕구조절은 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통해 감각기관이 조금만 정화되기만 해도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음식들을 탐욕스럽게 먹는 행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고도 더 깊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여러 가지 물질적 욕구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지게 된다.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면서도 많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명이다.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인류는 자연을 이용하여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것은 인류의 물질적 복지의 증진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탐욕적인 자본주의체제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기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을 쫒고 있다. 
 
그렇게 해서 생산된 부는 일부계층에게만 편중되고 그것은 비만과 기아의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한나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문제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사회에서는 비만환자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사람마다 다이어트에 대한 한심한 고민을 하고 있는 반면 선진자본주의제국들에 의해 수탈당한 제3세계에서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기아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욕구들은 인류문명의 미래를 위해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것을 추구하는 명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분명 도움을 줄 수가 있다. 물론 개인의 욕구의 조절이 바로 사회변혁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운동이 확산되어 적은 소유와 소비가 더 아름다운 삶의 양식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만 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사회제도와 체제를 변혁하는 작업을 보다 용이하게 진행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명상의 사회화** 
 
명상은 오랫동안 소수의 구도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깊은 산중과 수도원에 있던 명상은 서서히 속세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구인들이 동양의 정신세계인 힌두교와 불교의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빠른 속도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반부터 인도의 선구적인 요가 스승들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면서 힌두교의 명상의 세계를 서구인들에게 널리 전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선승들도 선불교의 참선 명상법들을 서양인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단순히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심취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점차 근대 서구문명의 폐단을 치유하는 대안운동의 하나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관심을 지니는 사람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68혁명 이후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일어나자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명상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환경운동이나 공동체운동 영성운동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상을 수련하는 것이 그리 낯설게 다가오지 않고 명상과 자신들의 운동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한 일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70년대 이후에는 명상의 심리적 생리적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심리치료나 일반 환자치료에서도 조금씩 응용되고 있다. 7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슈탈트 심리치료는 원래 탄생과정에서 동양사상과 명상의 요소를 유입하였기 때문에 명상적인 기법이 상당 부분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심리치료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가장 실증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인지행동심리치료에서도 명상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일반 병원에서도 명상을 응용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중 보스톤에 있는 메사추세스주립대학 병원의 예방행동의학과 교수이자 병원 부설 스트레스감소센터(Stress Reduction Center)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센터의 원장인 존 카밧진 교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를 서양인들의 체질에 맞게끔 개선한 MBSR 프로그램(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을 운용하여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재 그의 MBSR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의 대학병원과 개인클리닉에서 환자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명상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육체의 이완을 가져온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명상을 실용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도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건강과 미용 차원에서는 하타요가가 일찍부터 널리 유행하였고 최근에는 중국의 태극권 또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또한 지속적으로 서양인들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도심 속에서도 명상센터가 늘고 있는 추세이며 교외나 산중의 명상 센터에는 여름 휴가철이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명상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근래에는 웰빙의 유행으로 명상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서구의 영향으로 인해 80년대 초부터 서서히 명상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80년대 초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띠 등의 인도 성자들이 쓴 명상서적의 번역서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인도명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다가 80년대 중반에 우학도인의 민족비전의 전통수련법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식으로 기술한 <단>이 유행하면서 단학계열의 수련법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중후반에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에고를 죽이는 테크닉을 사용하는 마음수련법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웰빙의 유행으로 명상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명상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 개인적인 구도의 방편으로 혹은 종교적 수양의 방편으로 쓰였던 명상은 근 백년이 채 못 되는 기간에 급속도로 대중화되고 사회화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 되기에는 아직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많이 있다. 
 
우선 명상의 세계는 아직도 필요 이상의 신비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과학화 체계화가 시급하다. 근래에 들어 구미에서는 명상의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밝히는 논문과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명상의 과학화에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개별 명상에 대한 효과를 부분적으로 밝히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다양한 명상을 체계적으로 비교 연구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밝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많은 논문들 중에는 과학적 연구라는 핑계 아래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명상단체 내지는 자신이 관심이 있는 명상법을 선전하는 도구로 쓰이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사실 명상에서 나타나는 효과의 상당 부분은 명상 자체의 효과라기보다는 심리적 기대치에 의한 플라세보 효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일정 부분의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때로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더 많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상단체에서는 과장광고로 일관하고 있어 때로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아울러 여러 가지 명상법들이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을 혼돈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명상법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 
 
명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데 크게 방해가 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혼동이다. 명상 속에는 주관적 현상과 객관적 현상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할 때 깊은 이완을 체험하면서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체험하거나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 등은 객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하다보면 그 속에 담긴 특정한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대해 강력한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집단주관적인 착각의 소지가 있다. 물론 명상은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맹목적인 신앙에 비해서는 집단주관적 착각의 요소가 훨씬 적다. 그러나 명상 또한 분명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별로 못 느끼지만 명상에 본격적으로 심취하게 되면 대체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집단주관적인 착각에 빠지는 경우 가장 크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소통기능의 저하이다. 물론 집단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은 더욱 원활해진다. 문제는 타집단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에 대해서도 잘 소통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방적인 주장을 하거나 아예 대화의 문을 닫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소통기능의 저하는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명상인구의 확대를 지향할 경우 어떤 면에서는 사회는 소통부재로 인해 도리어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관성의 극복은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마지막 문제는 앞의 문제와 상관관계가 있는데, 명상은 대체로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칫 외면의 현실세계와 괴리가 생기기 쉽다는 것이다. 주변에 명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현실과 그다지 큰 간극이 없는데 점차 시간이 흘러서 명상에 더욱 심취할수록 내면세계에 도취되어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처음부터 현실도피적 경향이 있는 사람이 명상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명상에 심취하면서 점차 현실도피적 성향이 강화되는 경우도 있는데 하여튼 사람마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명상에 빠지게 되면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상을 단순히 개인적 종교적 구도의 도구로서 받아들일 경우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도 수도원에서 깊은 산중의 선원에서 오로지 종교적 구도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은 많이 있다. 그리고 깊은 명상을 통해 심오한 깨달음을 얻는 경우 그 집단 내에서는 추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명상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려면 이제는 좀 더 현실세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일부 명상가들 가운데서는 현실과 잘 조화를 이루면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이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상 전체의 방향성과 메커니즘의 문제이다. 이제는 명상 전체의 방향성에 대해 조정이 필요한 때이고 테크닉 자체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게 될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명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상에서 언급한 문제들, 그 중에서 집단주관의 문제와 일상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이나 깨달음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가질 필요성이 있다. 과연 집단주관적인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인가 하는 문제와 내면의 초월적 세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연자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탐구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이제는 명상과 깨달음에 있어서도 집단주관적 틀을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틀을 찾아야 하고 현실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 보다 성숙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본다. 강연자는 집단주관적인 성향을 극복할 수 있고 일상의 삶과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명상법인 바라보기 명상법을 만들어 주변사람들과 나누는 중이다. 
 
명상이 사회 변혁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 자체를 변혁하고 개량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명상을 사회적 차원에 접근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강연자는 이를 위해 그 사이 다음과 같은 실천과 구상을 하고 있다.
 
명상이 사회화되기 위해서는 명상의 사회화 자체를 주제로 하는 토론의 장을 많이 열어야 한다. 대부분 명상하는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명상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명상의 사회화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설령 있다 해도 명상의 사회화에 대한 기본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사회란 결국 개인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식이 변혁되면 그것이 바로 사회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명상을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의식이 깊이 각성되면 그가 설령 사회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거나 혹은 깊은 산속에서만 살아도 사회의 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있어서 한 개인의 의식발전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인류라는 종 전체의 발전에도 공헌을 한다고 생각한다. 
 
명상하는 사람으로서 일리가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강연자 역시 옛날에는 그렇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하게 되면서 위와 같은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이고 일면적인 접근인가를 알게 되면서 이제는 위와 같은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의식의 변혁이 사회의 변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현실적 유효성을 생각한다면 그 사이에는 너무나 넓은 강이 있다.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논리는 너무나 강고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의식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라 여겨진다. 속세를 떠난 산중도인의 고매한 깨달음 또한 현실의 변혁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한강투석과 같은 것이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푸는 것이 가장 빠른 것이다.
 
또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의 명상은 내면의 각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현실 문제를 접할 때 대부분 내면적 주관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일체유심조니 모든 현실은 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등등의 입장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명상하는 이들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접할 때 항상 현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면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강연자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갈등의 원인은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외면적 조건에도 있는 것이다. 내와 외를 같이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모든 것은 내면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이다. 이런 명상의 틀 자체를 바꾸지 않고 명상 인구의 확장만 시도하는 것은 사회의 변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많은 명상가를 배출하고 있고 명상가에 대한 사회적인 명망이 높은 인도라든지 미얀마 등의 국가의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현실의 낙후는 여러 가지 많은 역사적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명상 또한 어느 정도 역할은 담당하였다고 본다. 즉 마르크스가 말한 민중의 아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이 진정으로 사회변혁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계 내부에서 먼저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현실의 여러 갈등과 문제들은 내면의 마음의 상태와 외면의 현실적 조건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접근보다는 양방향의 접근이 문제 해결에 더욱 효과적이다. 이런 면에서 운동권과 명상권은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영성적인 관심도 풍부하고 아울러 현실개혁에 대한 의지도 많은 지역에서는 명상권과 운동권이 제대로 통합될 수 있을 때 우리의 현실의 장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명상권과 운동권이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상대를 배우려고 하고 아울러 새로운 모색을 위한 토론의 장을 많이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론을 하며 모색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명상과 사회운동의 연결 고리를 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을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사회적 활용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영역을 확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연자는 오랜 명상을 통해 명상 속에는 참으로 많은 가능성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그 가능성들을 현실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상은 과거에는 종교적 수도의 방편으로 널리 쓰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주로 복잡한 사회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의 심신을 치유하는 도구로 많이 쓰이고 있는 편이다. 강연자 또한 오랫동안 명상을 하면서 본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명상이 몸과 마음의 불필요한 긴장을 제거시켜주며 유연성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상의 이러한 효용성은 예방의학이나 대체의학 방면에서 보다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문제이고 최근에 이러한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강연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심리치료 분야인데 몇 년 전부터 게슈탈트 심리치료 연구회에 참가하여 그쪽 분야의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UCLA에서 방문학자로 공부하고 있을 때에도 그 쪽 심리학과 교수와 정신과 교수와 토론을 나누면서 좋은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심리치료는 명상과 가장 가까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미국의 심리학계에서는 명상을 심리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연구와 토의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편이다. 강연자는 게슈탈트학회와의 만남을 통하여 심리학자들에게 명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고 그 결과 요즈음은 명상에 대한 관심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앞으로 좀 더 본격적인 교류가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또한 명상은 자기 내면세계와의 교감 자연과의 교감 등을 통하여 예술가들의 창조력 향상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특히 공연예술 쪽으로는 신체 훈련이나 발성훈련 등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강연자는 몇 년 전 한국공연예술원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현역 연극배우와 배우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연기력 향상을 위한 명상 강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대학의 연극영상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공과목으로 명상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명상이 연기수업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던 학생들도 한 한기 수업을 마친 뒤에는 명상이 연기력 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명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은 또한 교육 분야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 나아가 근대서구의 지식위주의 교육풍토에 회의를 느끼고 전인교육, 참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명상을 교육에 접목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강연자는 몇 년 전 대안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명상을 어떻게 교육 분야에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강연과 토론을 나눈 적이 있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생각이다.
 
이렇듯 명상은 잘만 활용하면 사회 여러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명상의 영역을 확대하고 주변 분야와 교류를 촉진시키는 것은 명상의 사회화에 훌륭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 또 하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명상을 제도권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근래 명상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증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여러 명상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되고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명상법 가운데도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불량한 것도 많다. 불량한 것이란 부분적으로는 일시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각성시켜주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몸과 마음에 도리어 부정적 효과를 남기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명상법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였을 때 몸과 마음에 이상현상을 가지고 오거나 혹은 눈에 보이는 뚜렷한 현상은 없지만 집단주관적 도취에 빠져 정상적인 소통기능이 저하되거나 내면의 세계에만 심취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들어 결국 삶을 그르치게 하는 경우는 참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적으로 불행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명상의 효과라고 하는 것들은 단기간 내에 객관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함정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명상이 제도권 학문으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강연자는 6,7년 전부터 대학에서 ‘동양사상과 명상’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동양사상과 그 속에서 발달한 여러 명상체계들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근 일부 대학에서 명상에 대한 강좌가 조금씩 생기고 있으며 대학원에서 기공학과, 명상학과, 요가학과 등을 개설한 대학도 생겼다. 앞으로는 명상도 학문적으로 체계를 갖추고 전문적인 학회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명상이 제도권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 때 명상교사에 대한 자격요건도 강화할 수 있고 명상이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