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2

0729 Hojae Lee 설문: '구원(제)'은 무엇을 말하는 지요?

(13) Hojae Lee

Hojae Lee

29 July at 17:21 ·

[제2탄] 현장 목소리를 듣고 페북운영에 참고하겠습니다.

* 원래 설문지를 설계하려면 다양한 질문을 분류하여야 하는데 페북 특성상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점 양해바랍니다. 다른 신앙동기가 있다면 적어주셔도 좋습니다.

1.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가진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구원(제)'은 무엇을 말하는 지요?
페북친구님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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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comments



Hojae Lee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구원이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데 자유로운게 구원인가요?




김이희 Hojae Lee
자신을 아는것 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예수가 공생애 3년동안 보여준 모습과도 통합니다





Jongjin Kim 갑자기 간단히 쓰려니 어려운데요, 예수를 알고(지식), 따름(실천)을 통해 조금씩이라도 삶을 점점 더 의로운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닐까 합니다.
뭔가 미진한 느낌은 있지만 오늘은 이렇게만 요약하는 걸로..ㅎㅎㅎ 아 근데 넘 어려운거 물으시는듯요^^;;





Hojae Lee 김선생님. 한국 교인들이 대부분 십자가의 구원을 말하는데 이것이 도데체 무엇이냐는 근본물음입니다. 구원은 무엇인가?





Jongjin Kim Hojae Lee 저는 대속론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외면(?)하는 편입니다. 한국 교인들이 대부분 말하는 십자가 구원은 그것 같아요.
대속론은, 분명 성경에 내용 근거가 있긴 합니다만, 사람을 극심한 죄책감에 밀어넣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나를 따라오라는 명령에 지체없이 따르는 행동에 구원의 의미를 두려 하고 있습니다.





Hojae Lee대속론이 어쨌든 구원에서는 언급이 되어야 하는데 김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김병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창조 법칙입니다.




Hojae Lee 김병태 선문답을 해결할 생각이 없으신 듯 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병태 Hojae Lee 어디지요 다 지워졌는지 못찾겠습니다.










Kyesuk Kim 구원이 평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뭔가 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하고 조건이 충족안되면 불안해지는데믿음으로 평안해지면 조건없이 충족되고 해결되는 경험이 많아서요
세상물질로는 평안을 얻기가 어려워요
수동태로 믿어지면서 평안이 와요



Hojae Lee 현실적이지만 솔직한 답 감사합니다.




Kyungsan Min게 구원이란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Hojae Lee 삶의 가치를 꼭 예수만을 믿어야 알고 실천할 수 있나요?




Kyungsan Min Hojae Lee 그렇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Hee Seong Kim 구원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라고 봅니다. 즉 그분을 아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은 이상하게도 이 세상이 절대 줄 수 없는 자유함을 누리고 감사와 기쁨, 만족 그리고 자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뀌는 삶을 살아가죠..




Hojae Lee 축하드립니다. 질문하나 더 드리고 싶은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귀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김복근 구원이란 삶의 태도, 가치관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의... 또는 나만의...' 좁은 관계에서 우리라는 보다 넓은 공동체로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곧 나의 삶의 변화이니 구원=회개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죠.





Hojae Lee 네 댓글 감사드립니다





권정숙 자신이 가진 권력,돈,자식등등으로 자신의 생명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 죄이고,
그 죄를 속하려 우리 대신 져주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에서 해방, 자유로와지는것이 구원~
구원 받은자는 이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아래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게됩니다.





Hojae Lee 감사합니다. 그럼 차원이 다른 삶은 어떻게 외형적으로 드러나는지요?




권정숙 세상의 기준이나 가치관을 따라사는것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초월, 자유로운 부분이 점점 확장되어져 가는거죠.
이땅에서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하죠ㅎ
저의 고백입니다ㅎ





Hojae Lee Already Not yet 네 권선생님 글에 그런 진솔함이 묻어나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S Young YU 평안의 상태.. 근본적 불안과 고통, 분리됨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궁극적인 평안이라고 생각해봅니다.



Hojae Lee 지금 예수를 믿은 후 늘 평안하신지 물어도 실례가 안 될럴는지요?





S Young YU 당연히 평안치 않습니다.ㅎ






김이희 제가 생각하는 구원은 사랑으로 이루어 집니다
예수의 전 생애를 보면 생각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것도 사랑받아야 그렇게 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자신이 존귀한 존재인줄 알고 또 타인도 나와같이 존귀함을 압니다 마음이 고픈 사람이 가장 위험합니다 왜곡이 잘 일어나거든요
제가 말하는 사랑은 혀끝에서 날아다니는 가벼운 사랑이 아닙니다




Hojae Lee 네. 그럼 사랑으로 이루어진 삶의 외형적 표시는 무엇인가요?





김이희 Hojae Lee
책임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입니다





Hojae Lee 네 감사합니다.





김이희 Hojae Lee
요즘 종교인들은 이부분이 비어있습니다
사랑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욕심이 차 있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훔친셈 입니다





유성식 대부분 너무 피상적으로.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보고 있네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원을 생각해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억압받는 핍박받는 자들의 시대에 필요했던 말이지요.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예수시대는 로마제국의 압제에 대부분 농민들처럼 힘없고 수탈당하는 자들에게 절대적느로 필요했던 것이죠... 제사장. 부자들. 기득권층에게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필요없어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Hojae Lee 감사합니다. 그럼 예수를 왜 믿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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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식 Hojae Lee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는 종교로 이미 굳어져 버린 기독교이기에 믿어야만 하지요. 종교가 아닌 진실된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예수의 길을 따라야하지요






김병태 하나님으로 부터 온전하게 지음 받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불완전에 떨어졌으므로 본래의 온전성을 회복 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불완전하여 불행의 고통이 있는 것이라면 구원이 가능하지 않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불완전하게 지었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은 부인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연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믿음을 깨닫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자아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를 좇으라 하셨고
석가는 집착을 버려라 무아를 말했고
또 자기를 살피라 너자신을 알라 등
나 하나가 회개하는 것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였지요.

자기의 고정 관념을 버리고 전통적 규정이나 규제에서 벗어나 참을 사유 할 수 있어야 참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면 진리가 자유케 하지요.

내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닌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될 때 구원 받았다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Hojae Lee 마지막 구절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어 구원을 받았을 때" 삶의 외형적 표징이 있나요? 궁금하네요!





김병태 Hojae Lee 외형적 표징은 석가의 외형이나 예수님의 외형으로 본다면 부처인지 그리스도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즉 외형은 이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김병태 구원이라는 단어에는 염세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라고도 하고
죄로 말미암아 불행의 고통과 사망이 왔다고 하죠.

구원된 상태를 안식(자유)이라 열반이라 일컫지요.^^




Hojae Lee 그럼 자유, 열반의 경지는 죽을 때는 시체를 남기고 영혼이 하늘 나라를 가는지요?




Hojae Lee ? 소통이 안되는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타자로 부터 유폐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김지연 저에게 있어 구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받고 있고 사랑하는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Hojae Lee 네 댓글 감사합니다. 그럼 그런 분이 죽은 후에는 영혼이 하늘나라 가나요?




김지연 저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어서인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 생각이나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인도해주시는 목사님께서는 지금 여기가 하나님 나라라고 하셨고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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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리 원죄론.아담과이브는
신이 인간에게 준 구원을 위한 밑자락을 깔기위한 소설의 스토리일 뿐이고
지혜있는 자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애초에 신과 합의한 신이 던진 물음-궁극의 자유를 향해 다가갑니다…See more





김병태 장예리 구원이 필요한 나인가? 에 대한 답에 있어서 자기 차원에 따른 구원을 소망하고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장예리 김병태 누구나의 소망이지요




Jinho Jang 인간의 본연을 회복해 가는 총체적 과정





하늘 선생님 몸글의 의도를 나름 감안하여, 제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영리가 지향하는 것과 같습니다만, 여덟 글자로 말씀드리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말씀드리면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와 내가 범한 죄로 인하여 진노의 자식이오,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을 믿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이 땅에서 천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어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라 합니다.





Hojae Lee 여기서 교단의 교리체계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건 교리 책에 다 나와있고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바를 적어주세요





하늘 Hojae Lee 어이쿠, 몸글의 의도를 제가 잘못 파악했네요. 괜한 댓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구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선민 내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며 주님 때문에 내 맘대로만 살지 못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Hojae Lee 이런 질문은 좀 '유치'할 수도 있지만 그 구원의 형태 혹은 댓가(?)는 어떻게 나타나는지요?





이선민 Hojae Lee
전혀 안 유치합니다^^

든든함
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빽ㅎ
손해봐도 뒤통수 맞아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어요
주님을 믿기에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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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진솔한 답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Daniel Ok 구원은 인간 본연으로 돌아감 아닐까요 ? 본연의 존재 목적
마치 새 제품이 사용되다가 다시 전부 분해 소제해서 만들어지듯이...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요






김병태 Daniel Ok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Daniel Ok 김병태 하나님께 돌아가는거죠





JongOk Lee 나의 구원은 진실과 자유함
                                   


김병태 replied · 1 reply 3 hrs







윤완섭 먼저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가 없는가라는 문제부터 생각하면, 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구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어디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는데, 저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원죄라는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구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죄가 없는 이유는, 구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대인이 수천 년 동안 구약은 물론 신약에서도 원죄를 발견하지 못했고,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이 선악과 이야기 즉, 원죄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대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오셨던 것 같습니다. 잊어버리셨거나… 기본적으로 원죄는 기독교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기독교적 관점 외에 다른 면에서 구원이 필요하냐고 한다면, 이 지구라는 곳에서 사는 동안 겪는 고통으로부터는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병들고 죽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구원이 필요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연구하고 깨달은 사람이 부처이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이고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로 나온 것이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 같은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지 점점 이것에 관심이 많아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질문인데, 우리 혹시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가요?



Hojae Lee 긴 댓글 감사합니다. 누구신지요? 모르는 사이같습니다.




윤완섭 Hojae Lee 그러시군요. 제 초등학교 동기와 이름이 같으셔서^^….



Hyun Kyung 저에게 있어서 구원은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그 자체(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구요. 그래서 그분이 구원이신 것이지요.




Hojae Lee 네 '그 분이 구원' 그리고 '가기중심성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표현은 여러가지 함의가 있을텐데요. 나름 답을 찾으셨으니 현실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실천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0730 Hojae Lee 오늘도 '구원'에 대한 댓글 토론을 합니다

(11) Hojae Lee



Hojae Lee
30 July at 08:40 ·



빛나는 하루!

어제에 이어 오늘도 '구원'에 대한 댓글 토론을 합니다. 새벽녁까지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제 실수로 일부 토론내용이 삭제되었는데 양해바랍니다. ( * '구원' 이라는 종교적 용어는 개념정리가 되어야 함)

[제2탄] 현장 목소리를 듣고 페북운영에 참고하겠습니다.


1.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가진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구원(제)'은 무엇을 말하는 지요?
2. 혹은 신앙동기가 무엇인가로 대체해 댓글 주셔도 좋습니다.
3. 혹은 대속론代贖論(서구신학), 자속론自贖論(유영모, 함석헌), 대속적 자속론(성경의 맥락으로는 이게 맞지 않나요?)

누구든지 자유로운 의견을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 댓글에는 서로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토론하시기를 권장합니다.

참고] 2015년 한국조직신학회가 기획발간한 '구원론' 목차

1. 구원론의 본질과 다양성 | 배경식
2.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 | 정홍열
3. 안셀름의 만족설 이해 | 황덕형
4. 루터(M. Luther)의 객관적 속죄론과 과정 속에 있는 구원 | 김재진
5. 깔뱅의 구원론 | 최윤배
6. 존 웨슬리의 구원론 | 이찬석
7. 슐라이어마허의 구원론 | 심광섭
8. 바르트의 구원론 | 황돈형
9.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구원론 | 신옥수
10. 판넨베르크의 구원론 | 이신건
11. 생태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본 구원론 | 정미현
12. 과학신학의 구원론 | 현우식
13. 남미 해방신학의 구원론 | 서창원
14. 한국신학과 통전적 구원론 | 허호익




50Sunghwan Jo and 4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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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이거 나름대로 '구원'에 대해 인연되시는 분끼리 정리하고 넘어가지요. 댓글과 토론 환영합니다.





김이희 날마다 올려주시는 질문에
답을 찾으며 정리가 되고 있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신앙동기입니다…See more






Hojae Lee 네 자문자답! 이것도 멋진 말씀이네요.
저는 6/23일 부터 나름 계획대로 글을 올리는데 페북특성인지 연속적으로 글을 안보시니 서로 엉뚱한 얘기로 곤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같이 정리해 봅니다.






사봉석 이무더위에 대단한 열정이시네요.





Hojae Lee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사봉석 Hojae Lee 더 많이 해 주세요.ㅎㅎㅎ.





Hojae Lee 사봉석 사선생님이 댓글을 달아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구원이 무엇입니까?





사봉석 Hojae Lee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 하심과 희망으로 인도함이 아닐까요.ㅎㅎ.





Hojae Lee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 희망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나타나는 가라는 물음입니다.





사봉석 Hojae Lee 내가 전인적으로 행동하는것이죠.

잘못된 습관과 부정적 사고와 언어를 창조적으로 변화 시켜 나가는것.






Hojae Lee 그런 정도는 개과천선 한다는 정도윽 의미로 이해해도 되나요?





사봉석 Hojae Lee 네. 그런정도죠. 혁명인이 되진 않잖아요.





Hojae Lee 네 감사합니다. 사선생님도 이 더위에 화이팅입니다






사봉석 Hojae Lee 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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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교회에서 구원을 받으셨다면 일상생활에서 바울과 같은 고통과 고민 은 없으신가요? 아직도 고통과 번민이 있다면 구원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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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저는 삼대째 모태신앙인으로 육십이 넘도록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속 마음에는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기 위한 내 의가 앞서 있었죠

그러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믿음, 구원, 성령충만등 이야기로만 주고 받고 기도하지 실제적 체험을 하지 못해 제일 걱정되는 것이 전도해서 사람을 데려 오느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오년전 혈액암 말기 삼년생존율5%의 진단을 받고, 그 때 받은 충격을 설명할 수도 없고 해도 듣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비슷하게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사람끼리만 고개만 꺼득여도 그 마음을 서로 알듯이

영적인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같은 수준의 영적체험을 한 사람은 한마디만해도 서로가 이해 할수가 있고 더 깊은 체험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이해 할 수가 없죠

그러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영적체험이 없는 사람은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영적 체험은 안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듯 마음으로 느끼고 알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고
일반 학자나 체험 없는 성도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체험을 위해 목숨을 건 결단과 치열한 영적훈련을 해 보지 않아 영적체험이 없는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

영적훈련을 시키는 방법도 모르고 설교때 마다 성도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해라는 설교만하고 자신들을 하지 않아 좋은 열매가 없으며 미사려구를 잘 이용하여 재미있게 하면 되는 것이죠

성도들은 내용도 모르고 듣기 좋은 소리면 아멘!으로 화답하고는 교회 문을 나서며 법규를 위반하여 이웃 주민들로 부터 민원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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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아이구 장선생님 이렇게 장문의 글을 댓글로 다시다니 감사합니다. 페북친구분들은 일독을 권장합니다, 깊은 체험과 의미가 담긴 신앙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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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감사합니다
한말씀만 더 올리면 영적 체험을 한 사람도 바울과 같은 고통을 느끼느냐고 하시는데 한마디로 전혀 입니다 바울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할때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히려 더 많은 고난을 즐겨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듯이 이런 것을 알고 느끼도 설명할 수 없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좋은 토론과 고백을 할 수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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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Hwan Jo 구원..?? 누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하는 것이 아닌가요..?? 사람들은 착각을 하지요. 누군가 내 잘못을 용서해 줬다고 생각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내 마음이 그렇게 단지 생각할 따름이지요.



Hojae Lee 네 조선생님. 개벽프로젝트 성공리에 완성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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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성경적으로 볼때 구원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가능합니다.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교는 수겁의 윤회를 통하여 인연을 만나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생명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가? 스스로 찾을려면 더이상 죄를 짓지 아니하고 죄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탕감을 받아야 합니다. 윤회의 삶속에서 업보를 벗어야 합니다. 그런데 벗기는 커녕 죄를 짓고 업보는 쌓여만 갑니다. 그런데 이런 업보를 한번에 탕감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말씀이 육신이 된 죄와 상관이 없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진리를 배우게 되면 수겁의 윤회에서도 깨닫지 못할 진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대속이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되니 불교적으로는 인연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지하여 이러한 인연을 그냥 지나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자가 아니면 나에게 나아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나는 그리스도이며 참인 진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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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1 Hojae Lee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1) Hojae Lee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Hojae Lee

31 July at 03:21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구원’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가지고 페북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물음과 답변을 했다.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이지만 용감한 많은 분들이 자신의 ‘구원관’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해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구원관’이라 표현하면 혹 그 간단한 늘 생각하던 바를 적은 것이라고 과소평가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분의 ‘구원관’이다. 유명한 신학자의 ‘구원관’은 책에 적혀 있어, 편집과정을 거쳐 세련되게 정리된 것이지만, 이 분들의 ‘구원관’은 일상생활의 날 것을 그대로 공개한 것이기에 거칠지만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이미 아는 페북친구들이 혹 있다. 내가 쓴 글보다는 페북친구들의 댓글을 열심히 읽으며 맘에 드는 것에 일일이 ‘좋아요’ ‘최고요’를 구별해서 누르고 있다. 이미 이 분은 인생의 정수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2. .누구든지 ‘트리우마’가 있다. 심리학 용어로 ‘정신적 외상’이라고 한다. 가슴에 담긴 남모르는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맺힌 트라우마가 평생을 지배한다. 심지어 역사적 트라우마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게다가 어느 민족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진 민족은 우리나라이다.

떨리는 가슴으로 다시 한번 우리 역사를 되새겨 보라. 교만한 중국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위기상황에 불쑥불쑥 곰발바닥을 음흉하게 내미는 러시아, 자기 안방인듯 안하무인인 미국 등의 조연으로 등장하는 한국현대! 한민족의 오천년 역사책마저 식민사관에 찌든 실증사학자에 의해 기술되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위대한 자기’을 잃어버리고 늘 남에게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받으려는 뿌리박힌 사대주의(큰 것에 기대어 자신을 확인하려는 주의)에 쓰여진 역사의 자양분으로 어찌 위대한 혼을 길러낼 수 있겠는가. 이 사대주의는 적게 가진 민중보다 오히려 많이 가진 기득권이 더 심할 지 모른다. 그래서 흔히 99섬 가진 부자가 한 섬 가진 가난한 이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범람하는 제국학문주의에 빠져있는 배경에는 이런 '학문적 트라우마'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신앙'마저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신앙을 마치 자기 신앙인양 대리만족하는 주구신앙에 빠져있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그 뿌리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기의 건강한 몸을 회복할 생각은 고사하고 환상의 무지개를 쫒던 것이 우리의 짧은 인생이요, 우리의 신앙이요, 한민족의 역사였다고 하면 과언인가!

3. 이젠 트리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으로 탄생되어야 할 시점이다. 솔직해 지자. 기독교인이 금과 옥조로 모시는 성경이라는 텍스트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이고 헬레니즘이라는 콘텍스트로 해석되어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어 전달되어 진다. 성경의 편집과정 자체가 이미 종교권력의 힘이 작용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모든 경전은 ‘신비화되고 주술화 되어’ 신성성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성경만이 아니라 경전은 그렇게 하늘나라의 말씀을 적은 글이라고 경전에서 강조되며 다양한 종교의 신자들은 그렇게 신앙하고 있다. 그 중의 최고는 자기가 신앙하는 경전이고 신앙대상이다. 그러니까 믿는 것이다. 한 예로 들어보자. 서구에서 믿는 예수, 특히 미국에서 믿는 예수는 그동안 잘 생긴 미남형 ‘백인예수(아래 사진 왼쪽)’로 알아왔다. 우리도 그런 줄 알았다. 지금은 BBC 방송에서 고증예측한 유대인 예수(아래 사진 오른쪽 위)라고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 갓 쓰고 한복입은 예수(운보 김기창 작, 아래사진 오른쪽 밑)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친구예수를 벗삼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온전한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한 자리에 까지 가야한다'. 예수의 부활의 당부이자 사랑의 명령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눈이 새까맣고 코가 납작하다고 주장하고, 트라키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이 빨갛다고 주장한다. - 크레노파네스 (B.C 570~ 475)

마음속에 종교권위에 의해 형성된 일체의 우상, 사회적 권력에 의해 조성된 식민사관, 지구촌의 강대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유포되는 사유체계에서 자신을 일깨워야 한다. 누구를 통해 얻은 일체의 믿음과 지식을 팽개치고 자신의 위대한 혼을 찾으라. 이것을 찾으면 승자이고, 못 찾으면 패자이다. 진리의 자리는 누가 데려다 주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건물성전에서 예배에 참여해야 신앙이 돈독해 진다면 이미 낡은 시대의 대리신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십중팔구 틀리지 않는다.

4. 우리는 위대한 결단을 내려 나의 위대한 혼을 되찾아야 한다. 어느 한 순간 나의 전 실존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고 남모르는 그 아픔을 안고 새로운 알로 태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믿음의 터 위에 위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믿음에 끼어있는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 모든 끼꺼기가 제거된 자리, 그 마음의 지성소에 ‘나의 말’이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그 불로 ‘교리체계와 신학체계’를 불태워야 한다. 입술에 이미 습관화되어 버린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멘, 할렐루야, 믿음, 은총, 은혜’ 등의 현란함을 ‘묵여뢰’의 침묵으로 이겨내야 한다. 
얼마 전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고 3수험생인데 자기가 한국 신학에 관심이 있어 “다석의 마지막강의”라는 책을 누구에게(이름대면 여러분이 다 알만한 사람이다) 추천받아 칠개월에 걸쳐 다 읽었단다. 페북을 보다보니 내 페북에 추천책(아마 김흡영의 “도의 신학”, 기온찍기, 박영호의 “다석전기”,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 찍힌 사진들을 보고 어떤 책부터 읽는 것이 좋은 지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일인가? 수험생 그것도 고 3수험생이라 우선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가서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 때 다시 연락하라고 답을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자기는 공부 열심히 하고 머리 식히면서 읽을 책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이런 젊은이들이 지금 곳곳에 있다. 어찌 희망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5. 새 문명의 아침은 밝아왔다. 새로운 천지개벽 혹은 새로운 빛이라는 ‘새벽’은 늘 우리를 맞이한다. 하늘은 0시에 깨고, 땅은 두 시에 깨고, 인간은 네 시에 깨어난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다 깨어난 후 새벽은 온다. 새 문명의 새벽이 이 땅에서 다시 떠오른다. 새 문명의 성격과 모양은 지금 우리 세대가 어떠한 선택을 하는 가에 달려있다. 나를 찾자! 강대한 세계제국이 유포하는 불량세계관, 사회적 위계의 탐욕, 종교적 식민신앙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왜 동시대에 한국인으로 태어나 ‘백척간두’에 선 분단조국을 애처롭게 혹은 분노하며 혹은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가? 모두 사생결단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새 문명’을 펼쳐보라는 ‘하나님’을 믿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 발짝 더 내딛어야 한다. 진리는 역설이다. 새 문명은 이 역설을 실천하는 자에 의해 만들어 진다. 한민족의 새벽은 밝아오고 있다. 깨어나 세수하고 새 태양을 맞이하자.





118You, 이찬수, KarpChon Kim and 11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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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ki Lee 명쾌하고 시원합니다. 박수 보내드립니다. 😊




김태진 이런 좋은 그림을 그린게 하필이면 이응노 ㅜㅜ

Hojae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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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eum Lee 지지합니다.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혜경 긴글 잘 읽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날뻔했어요 언뜻 신본주의이신듯하여 댓글 몇번 올리고 조아요 눌렸는데 저와는 신앙관이 맞지않는듯합니다 사람들에게 의견과 생각을 묻고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시는 수단이 굉장히 탁월하십니다 하마터면 저도 넘어갈뻔했어요 혹시 무신론자는 아니신지 묻고싶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Hojae Lee 김선생님! 저는 글에서 이미 수차례 입장을 밝히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신'본'주의는 무엇이고 인'본'주의는 무엇인지요? 저는 종교학자로서 그 '본'을 묻고 있는 겁니다. 넘어갈 뻔 하셨다는데 어디로 넘어갈 뻔 하셨는지요? ㅎㅎ 주체적 신앙을 하라고 글마다 주장하고 있는데! 그래도 혹 심심하시면 놀러 오셔도 환영합니다. 김선생님의 댓글은 한국 교회의 신앙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같습니다. 긴 댓글 감사합니다.



김혜경 Hojae Lee 그리스도인들의 본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즉 말씀이지요 주체적인신앙을 하라고 말씀하셨는 그주체의 위치가.......





Hojae Lee 김혜경 네 김선생님! 이렇게 질문하시면 답을 할 수가 있지요!(제가 그동안 쓴 글을 시간이 되시면 정독해 보세요) 그 주체의 '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고 그 믿음이 맞다면, 만약 그리스도교인 이라면 '성령의 아홉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와 은총과 은사'를 말하며 기독교인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그 결과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지를 체크해 보라는 것이지요! 저는 교회 등 제도종교에는 몸을 담은 적도, 한국 종교의 상황을 보니 담고 싶지도 않습니다.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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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백주년에 다시 생각해보는 공자의 인생


5.4 백주년에 다시 생각해보는 공자의 인생

5.4시기 중국의 가장 강력한 공자 비판자는 루쉰이었다. 루쉰은 중국을 낙후하게 만든 주범을 ‘식인예교’라고 지목하며 공자를 신랄하게 추궁하였다, 그러나 루쉰의 글을 통으로 읽어보면 공자를 극단으로 몰아세우기만 한 것은 아니다. 루쉰의 공자전이라 칭할 수 있는 「현대 중국의 공자」에서는 공자의 인생을 살아서나 죽어서나 불우한 운명이었다고 평가한다. 살아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어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이라는 왕자의 칭호를 받고,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 문명을 떨쳤던 공자를 왜 불우하다고 본 것일까? 루쉰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소설 「공을기」를 보면, 글은 알지만 가난하여 밥을 빌어먹는 주인공 공을기가 안주로 시킨 회향두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다가 다 떨어지자 “많은가? 많지 않도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이 말은 『논어』에서 공자가 “나는 어려서 미천하게 자랐기 때문에 하찮은 일의 재능이 많은 것이다. 군자가 재능이 많은가? 많지 않다”1)고 한 구절을 빗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공을기의 시대착오적인 비루한 삶을 공자의 궁핍했던 어린 시절과 겹치게 함으로써, 중국 문제의 근원을 공자와 연계시키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그러나 공을기의 중얼거림과 공자의 말 사이에는 커다란 맥락의 차이가 있다. 공을기의 중얼거림은 가난의 사지로 내몰린 무기력한 자의 불안감이 배어있다. 이와 달리 공자의 말은 어린 시절부터 힘든 일을 능숙하게 해내어 고상한 군자들에게 없는 많은 재능을 익힘으로써, 이것이 현재의 공자를 가능케 한 배움의 힘이었다는 자부심을 표출하고 있다. 공자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변변한 관직을 얻지 못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는데, 이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등용의 꿈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소설 「관문을 떠난 이야기」에서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는 장면 속에 잘 드러난다. 공자는 노자에게 “저는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 등 육경을 연구했습니다. 저로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연구하여 완전히 익혔다고 생각합니다. 72명의 군주를 찾아가 알현하였지만 아무도 채용해 주질 않았습니다. 정말, 사람이란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도’란 것이 알 수 없는 것일까요”라고 묻는다. 노자가 선왕의 발자취에 불과한 육경을 신발이라 여겨 도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하자, 이에 공자는 충격을 받고 물러난다. 석 달 후 공자는 다시 노자를 찾아와 “저는 오랫동안 변화 속에 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떠나버린다. 이에 노자는 공자가 자신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인정하면서, “같은 한 켤레의 신발이라 할지라도 나의 것은 모래땅을 밟는 것이고, 그의 것은 조정에 오르는 것”이라고 평한다. 이 소설은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설화에 기반한 것인데,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공자 34세 때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지 못하다가 52세 때인 정공 10년에 드디어 등용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등용 이후에도 공자는 현실의 벽에 막혀 불우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한때 노나라의 경시총감까지 올랐지만, 바로 추락해 실업자가 되었고 또 권신에게 경멸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조롱을 받았으며 심지어 폭민에게 포위를 당해 배를 곯은 적도 있었다.
제자들이 삼천 명이 되었지만 중용한 이는 겨우 칠십이 명이었고 게다가 진실로 믿었던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루는 공자가 분개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를 둥둥 떠다닌다면 나를 따를 이는 자로일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소극적인 계획을 세운 것으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2)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52세 때에 노나라 정공에 의해 대사구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대사구는 지금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루쉰은 이를 경시총감이라고 한 것이다. 당시 노나라는 세 가문의 귀족 연합체인 삼환씨가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공자는 군주에게 권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명분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여겼다. 이에 공자는 삼환씨의 사읍을 개혁하려 하지만 반발한 귀족들이 연합하여 노나라 정공을 압박하면서 공자는 대사구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루쉰은 이를 두고 ‘바로 추락해 실업자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이후 공자는 56세에서 69세까지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위, 진, 조, 송, 채, 초 등 주변국을 떠도는 망명 생활을 한다. 주유천하를 하는 동안 공자는 여러 제후들과 세력가들로부터 대접을 받기도 하고 냉대를 받기도 하며,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등 험난한 여정을 보낸다. 위나라 영공에게 갔을 때는 후한 대접을 받았으나 예만 알고 군사·전쟁을 모르는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고, 송나라에서는 공자가 나무 아래서 예를 강의하는데 사마환퇴가 나무를 뽑아 공자를 죽이려 했다. 정나라에서는 사람들로부터 공자의 모습이 주인을 잃고 천대받는 ‘집 잃은 개’와 같다는 조롱을 당하고,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 지역에서는 공자가 초나라로 가는 길을 막으려는 세력들에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루쉰이 ‘권신에게 경멸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조롱을 받았으며 심지어 폭민에게 포위를 당해 배를 곯은 적도 있었다’고 한 것은 바로 주유천하 시절의 고난을 설명한 것이다.
주유천하 시절 공자는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자로, 안연, 자공, 염유 등 애제자들과 고난을 함께 하였다. 제자들이 공자를 찾아온 목적은 대부분 관료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명망가인 공자의 추천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공자는 이른바 관료 양성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강의를 한 것이고, 전승되어온 고대의 문헌 특히 시서는 공자 아카데미의 주 교재였다. 그래서 『논어』는 공자 아카데미에서 진행된 공자의 강의, 공자와 제자의 대화, 공자와 외부 인사의 대화 등을 편찬한 것이며, 주 내용은 군주 및 관료를 위한 정치론과 윤리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 되었다는 말은 공자 아카데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봐야지 실제 숫자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자 스스로도 등용이 쉽지 않는 처지에서 3천 명의 제자가 있을 정도로 관료 배출률이 높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망명 시기인 주유천하 시절에는 공자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소수의 애제자들만이 곁에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뗏목을 타고 바다를 둥둥 떠다니겠다’고 한 말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자는 직접적인 원망보다는 자기 절제와 초탈한 태도를 통해 비애를 드러낸다. 자기 절제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고’ 등용되지 못한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는 것인데, 이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는’ 끝없는 도전정신으로 승화된다. 초탈한 태도는 공자가 뗏목을 타고 가려고 한 세계나 중원 바깥의 오랑캐 땅 그리고 안연의 삶과 같은 안빈낙도의 태도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관료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이며, 노장사상과 같은 자연에의 귀의나 탈속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논어』는 등용의 꿈을 위한 정치철학론과 아울러, 등용이 좌절되었을 때의 비애와 성찰을 위한 인생론까지 포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주유천하를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등용의 꿈을 내려놓고 남은 생을 학문과 교육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루쉰은 공자가 죽은 뒤에 운이 좀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성지성문선왕’과 같은 놀라운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입된 석가모니에 비한다면 아주 불쌍한 처지라고 인식한다. 모든 현마다 공자 문묘가 있지만 일반 서민들이 참배하지 않아 적막하고 영락한 모습인 데 반해, 절이나 신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공자를 성인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권력자의 유성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다.
중국에서 공자는 권력자들이 떠받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자 혹은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성인은 일반 민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 권력자들의 성묘에 대한 열정 역시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를 숭상할 때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어서 목적이 달성되자 이 도구는 쓸모없게 되고, 반대로 달성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30-40년 전에 권력을 쥐고자 하는 사람, 즉 관리가 되고자 한 이들은 모두 ‘사서’와 ‘오경’을 읽고 ‘팔고’를 지었는데, 다른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서적과 문장을 ‘문을 두드리는 벽돌’이라고 명명했다. 문관시험에 급제하면 이런 것들은 동시에 망각되는데, 마치 문을 두드릴 때 사용한 벽돌처럼 문이 열리면 이 벽돌도 내던져진다.
공자는 기실 죽은 뒤에 ‘문을 두드리는’ 벽돌의 직무를 맡은 인물인 셈이다.3)
죽은 뒤의 공자는 권력자가 자신의 목적 실현을 위해 떠받드는 것이며 목적이 완료되면 ‘문을 두드리는 벽돌’처럼 바로 망각될 운명에 처한다. 공자의 지위를 높이는 것은 권력자가 공자의 높은 지위를 빌려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며, 반대로 공자를 욕하는 것은 공자를 빌려 권력 잡은 자를 비판하여 자신이 그 권력을 소유하기 위함이다. 어느 경우든 공자를 진심으로 대하는 자는 없다. 게다가 바다 건너 다른 세계에서도 공자 존숭의 현상이 벌어진다. 루쉰이 「현대 중국의 공자」를 쓴 계기는 일본 최대 공자묘인 유시마세이도가 1923년에 소실되었다가 1935년 4월에 재건되었는데 후난성 주석 허젠 장군이 자신이 소장하던 공자 화상을 기증한 신문 기사 때문이다. 이 기사를 보면서 루쉰은 만청 일본 유학 시절 도쿄 고분학원에서 중국 유학생들을 집합시켜 오차노미즈 공자묘 참배한 일을 떠올린다. 당시 루쉰과 중국 유학생들은 ‘공자와 그 무리’에 절망하여 일본에 온 건데 이곳에서도 참배를 해야 하는 기괴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루쉰은 바다 건너 대영제국의 식민지 홍콩에서도 경험하게 된다.
홍콩에서는 대영 제국의 지배하에 공자를 숭배하고 동방문명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매년 공자 탄신 행사를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여 성대하게 치른다. 그 목적은 공자의 도를 바로잡아 삼강오륜과 인도(人道)를 혼란시키는 공산주의 선전과 그 위협을 타파하기 위함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쇠락하여 사설(邪說)이 판치는 중국 대륙을 대신하여 홍콩이 공자의 도를 계승하는 대규모의 경축행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루쉰은 이를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는 공자의 뜻깊은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 옳음을 숭상하고 사악함을 멀리하여, 다행히 대영제국의 덕정이 베풀어졌습니다”4)라고 풍자한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여 다른 세계로 가려던 공자의 뜻이 실제로 바다 건너 일본과 홍콩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만일 루쉰이 18세기 유럽에서 공자 열풍이 일어나 서구 계몽주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았다면 기괴한 감정이 더더욱 솟구쳤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 건너 어느 곳에서도 공자의 본의와 비애를 진심으로 알아주는 자는 없으며, 자신의 정통성과 권력 그리고 사유재산을 위해 공자를 떠받들고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공자는 살아서도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고, 죽어서는 왕자의 지위에 오르고 바다 건너 다른 세계에서도 존숭되었지만 결국 권력자의 일시적인 이용대상으로 받들어진 셈이다. 루쉰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공자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불우한 운명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루쉰은 「꽃이 없는 장미」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공자뿐만 아니라 세계 위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라고 인식한다. 아래의 비평은 21세기 중국의 공자 열풍에 대해 살아있는 풍자로 삼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만약 공구,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 신도는 두렵고 당황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교주 선생이 어떻게 개탄할지 정말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다면 그를 박해하는 수밖에 없다.
위대한 인물이 화석이 되고 사람들은 그를 위인이라고 칭할 때 즈음이면 그는 이미 꼭두각시로 변해 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 말하는 위대함과 미미함이란 자신에게 이용 효과가 큰지 작은지를 가리키는 것이다.5)
5.4 백주년인 올해 중국은 중화제국 재건을 위한 역사의 연속성과 정통성 확립에 분주하다. 백년 전 5.4 정신의 핵심이 주체의 독립과 혁신 그리고 민주주의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부자의 꿈을 이룬 후손들이 공자를 다시 존숭하며 전 세계를 향해 ‘대동 세계’의 꿈을 발신하고 있다. 그러나 루쉰의 말대로 공자는 탁월한 치국의 방법을 기획했으나 그것은 모두 민중을 다스리는 권력자를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고 했다. 이는 국가 경영이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로, 관중은 부민(富民) 정책을 통해 제나라를 춘추전국시대 최초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풍족한 생활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로서 윤리와 예의를 중시한 공자 역시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논어』「자로」편에서,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제자 염유가 수레를 몰았는데, 공자가 “사람이 많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이에 염유가 “나라에 백성이 많으면 여기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물으니, 공자가 “부유하게 해야지” 하였다. 염유가 다시 “이미 부유하다면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물으니, 공자가 “교육을 해야지”하였다.
백성을 먼저 부유하게 한 후에 교육을 해야 한다는 공자의 생각은 개혁개방시대를 열어간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떠오르게 한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은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이루어 세계 1위의 경제대국 귀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부민론의 관점에서는 커다란 곤경에 직면한 상태다. 먼저 부유하게 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관중의 말대로 창고가 가득 차고 의식이 풍족해진 중국(인)이 예절과 영욕을 알게 된 것인지, 공자의 말대로 부유한 다음에 교육이 이루어진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유라시아 공동 부유를 약속하는 일대일로를 통해 ‘문명 대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지금, 부유한 이후의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쟁점이다.
시야를 전 지구적 차원으로 넓혀보면 문명 대전환의 움직임은 비단 중국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부를 획득하고 이를 지속시키는 서구 중심적 시스템을 탈피하려는 흐름이 흥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문명과 종교, 지역을 바탕으로 전 지구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대안 세계를 모색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을 문명의 대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터키, 이란,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 등이 주축이 된 이슬람 공동체, 인도가 중심이 된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 러시아가 주도하는 대유라시아 연합, 동남아 국가들이 추진하는 아세안 공동체 등이 그러하며, 중국이 구상하는 일대일로 역시 이러한 전 지구적 차원의 문명 대전환 흐름 속에 위치한다.
관건은 현행 서구 중심적 자본주의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제도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할 수 있느냐다. 중국은 공자를 아이콘으로 한 대동세계(인류운명공동체)를 내세우며 유라시아 부의 길(일대일로)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내세의 극락보다 현세의 실리를 중시하는 지극히 중국적인 방식이다. 상호 이익에 기반한 지리 경제적 영토를 확장하고 신축된 부의 길을 따라 새로운 도시와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윤을 목적하지 않는 할랄경제와 같은 대안적 경제제도나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 협력하며 포용적 정치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아세안과 같은 정치체제는 눈에 띠지 않는다. 이익을 따라 전 세계에 중화경제권을 구축하는 것 이상의, 그야말로 대동세계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문명 대전환 속에는 인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풍요로운 물질생활이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지, 만물의 영장인 인류는 왜 지구 환경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지 등,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위기감이 내재되어 있다. 문명 대전환의 주체들이 각기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고유의 종교와 문명을 되살려 내부 문제 및 인류 위기의 해법을 찾는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주지하듯이 중국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공자(유교)이다.
그러나 공자(유교)가 과연 다른 문명 대전환의 주체들이 자신의 종교 문명에 기대하는 것처럼,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을 창조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은 유교가 종교인가에 관한 해묵은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중국 신문명의 창조가 공자와의 회통을 기반으로 한다면, 그 가능한 방법을 사유해보자는 것이다.‘공자가 살아야/죽어야, 나라가 산다/죽는다’는 애증의 관계를 넘어, 부유한 이후의 문제와 인류 위기의 해법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어떻게 공자를 통해 찾을 수 있는지 실천적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전 지구적 문명 대전환에 공자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1) 『논어』 「자한」.
2) 루쉰,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루쉰전집』 제8권, 그린비, 2015, 418쪽.
3) 루쉰, 『루쉰전집』 제8권, 419-420쪽.
4) 루쉰, 『루쉰전집』 제5권, 318쪽.
5) 루쉰, 『루쉰전집』 제4권, 326쪽.

전남대 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