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3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유기쁨 - 애니미즘의 재발견과 “person”의 번역

한국종교문화연구소
                                                                                                   newsletter No.468 2017/5/2

 

 

           애니미즘의 재발견과 “person”의 번역

          
 

    “모든 언어에는 번역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문화에 적합하며,
그 문화에만, 한 국민의 물리적 환경, 제도, 물질적 장치 및 태도와 가치에만 적합하기 때문이다.”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중.



       요즘 연구소에서는 <책 한 권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4월 모임에서는 장석만 선생님 발제로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의 『음식, 섹스 그리고 낯선 자들 : 종교를 일상생활로 이해하기 (Food, Sex and Strangers: Understanding Religion as Everyday Life)』(2013)가 다루어졌다.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연구소 페이스북 관리자가 올려둔 발제 피피티 파일을 읽어보면서 4월 모임이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소개한 피피티에는 ‘person’이란 단어가 몇 차례 등장했다. 가령 “종교는 이 관계적이고 물질적이며 참여적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person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섭이다.(Religion is a negotiation between persons who dwell together in this relational, material, participative world.)” 등의 문장이 그것이다. 일견 매우 단순한 듯 보이는 문장이지만 번역이 까다로운 이유는 하비가 ‘person’이란 단어를 인간에 국한해서 사용하지 않으며, 인간 이외의 다른 종들을 가리키기 위해서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person’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그레이엄 하비가 ‘person’의 의미범위를 인간 이외의 존재들까지 확장해서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애니미즘’ 연구가 있다. 좀 더 이전에 집필된 그의 대표적 저술인 『애니미즘: 살아있는 세계를 존중하기(Animism: Respecting the Living World)』(2006)에서, 그는 애니미즘을 “세계는 살아있는 persons의 공동체이며 그 가운데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세계관에 주어진 꼬리표”라고 재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과연 ‘person’이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 데 그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눈에 띄는 것은, 하비는 무엇보다도 ‘person’을 다른 ‘person’들과 상호작용하는 자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곧, 사물을 논할 때에 비해 ‘person’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성이다.


       종교학계에서는 그레이엄 하비가 ‘person’을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포괄하는 확장된 의미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거론되지만, 사실 토착민들의 애니미즘을 새로운 빛에서 조명하는 그와 같은 ‘person’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한 것은 1960년에 발표된, 오지브와 족에 대한 할로웰의 연구(Irving A. Hallowell, "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라 할 수 있다. 할로웰은 오지브와 족의 ‘person’ 범주가 인간 존재에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들의 ‘person' 개념이 인간과 동의어가 아니라 사실상 그것을 초월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그 글에서 오늘날 (하비를 포함한) 관심 있는 연구자들 및 생태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구처럼 사용되는 “other-than-human persons”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바위, 나무, 곰, 벼락 등 경험적 존재들 혹은 실재들이 포함된다.


       할로웰 이후 일군의 학자들은 서구적 통념에서는 인간이 아닌, 심지어 생명이 없는 대상에게서 또 다른 의미의 ‘personhood’를 발견하는 토착적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들어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면서 그러한 움직임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근대 서구 문명이 생태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대한 반성과 대안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인류학자, 철학자, 종교학자들이 영단어 ‘person’의 의미 확장을 시도하고 있으며, 생태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러한 확장된 의미범위를 가진 'person'의 사용이 뚜렷한 의도와 지향점을 가지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가령 동물의 권리를 주창하는 운동가들이 돌고래쇼 폐지를 주장하면서 돌고래를 dolphin-person으로 일컫는 사례도 본 적이 있다.


       그와 같은 ‘person’의 의미 확장은 그 단어를 인간에 국한해서 사용하는 일반적 통념과는 차이가 있기에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한 혼란은 의도된 것이다. 그레이엄 하비는 그의 저서 『애니미즘』에서 ‘person’이란 용어를 인간 및 인간과 비슷한 존재들(조상들과 일부 신격들) 뿐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공동체에까지 적용할 경우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물으며, 인간 이외의 ‘persons’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근대 서구문화의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확장된 의미범위의 ‘person’, ‘personhood’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나는 예전에 각각을 ‘개체’, ‘개성’ 등으로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곧 부적절한 번역임을 깨닫게 되었다. 영단어 ‘person’의 통상적인 의미(사람, 인간)를 살리면서, 의미의 확장이 가능한 번역어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1)인격, 인격체로 번역, (2)사람, 사람됨으로 번역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오른다.


       person, personhood를 인격, 인격체 등으로 번역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인격이란 우선 “사람으로서의 품격”으로 정의된다. 특징적인 것은, 법률적으로 인격은 “신체적 특성을 제외한 인간의 정신적, 심적 특성의 전체”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인격체’는 “인격을 갖춘 개체”를 의미한다. 실제로 ‘인격’이란 단어의 사용은 존재의 상호관계성, 상호작용 등을 떠올리게 하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품격’, 곧 존경할만한 성품이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으며, 신체성을 배제하고 일종의 정신적 특성을 가리키기 위해 종종 사용되기에, 확장된 의미의 'person'의 번역어로 선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 ‘사람됨’이라는 번역어들은 어떨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사람’은 일차적으로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로 정의된다. 그렇지만 또한 “어떤 지역이나 시기에 태어나거나 살고 있거나 살았던 자”로도 규정된다. ‘사람’의 우리말 어원을 살피면 좀 더 흥미롭다. 박갑수의 『우리말 우리문화』에 따르면, ‘사람’의 옛말은 ‘사’인데, 곧 ‘살다(生)’의 어간 ‘살-’에 접미사 ‘’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사람’은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지만, 만약 위의 어원설명을 받아들일 경우,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좀 더 폭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레이엄 하비의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는) ‘person’의 번역어로도 좀 더 적합할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란 번역어가 ‘person’이란 단어의 이른바 ‘완벽한 번역어’일 수는 없다. 말리노프스키가 말했듯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사회문화적 컨텍스트 속에서 그것이 하는 기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사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컨텍스트를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완전한 번역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과업이다. 어떤 번역(어)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해야 하는 것이 번역가의, 나아가 인간의 운명이다.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실패라는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 현시점에서는 다만 tree-person, rock-person, dolphin-person을 ‘나무-인격’, ‘바위-인격’, ‘돌고래-인격’으로 옮겼을 때 발생하는 번역의 예상효과와, ‘나무-사람’, ‘바위-사람’, ‘돌고래-사람’으로 옮겼을 때 발생하는 번역의 예상효과를 비교하면서, (다른 더 적절한 번역어가 제안되기 전까지는) 후자가 좀 더 적합한 번역어가 될 것 같다고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유기쁨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ntolose@hanmail.net
저서로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등이 있고, 논문으로 <생태의례와 감각의 정치>,<인간과 종교,그리고 생태 -더 큰‘이야기’속으로 걸어가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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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 퍼플북 5 
유기쁨 (지은이)한신대학교출판부2013-04-08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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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쪽128*188mm (B6)255gISBN : 978897806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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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1. 펼치는 말

2. 인도아대륙에서 태어난 종교

힌두교―업과 윤회, 층층이 겹겹이 연결된 세계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 힌두교, 너의 정체는 뭐냐? | 처음도 끝도 없는 시간 | 겹겹이 성스러운 세계 | 초월의 비밀은 내 안에 |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버리고 떠나기

자이나교―철저한 아힘사로 업을 떨어내는 삶
산토끼 돌이의 눈물 | ‘하늘을 입은 사람들’ | 온통 살아 있는 세계, 그러나 물질에 갇힌 영혼들 | 상황에 대한 올바른 지식: 인간의 오만함 경계 | 아힘사, 모든 생명을 철저히 존중하는 삶 | 세계를 살아 있다고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과 철저한 생명 존중

불교―‘내가 제일 잘나가?!’ 거기서 우리의 고통이 시작되는 거야.
우리는 정작 중요한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이야기 | 미친 듯한 욕망의 소용돌이 | 내가 없으면 무엇이 있지?: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 이야기의 확장: 여래장과 인드라망. 나무도 성불할 수 있지 | 환경보살의 비전: 세상의 치유를 위한 적극적 한걸음

3.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

유교―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공부
개고기와 치킨의 딜레마―죄책감과 외면 사이에서 | 인간이면 인간답게: 인人과 인仁 |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공부 | 리理와 기氣로 연결된 세계 | 대나무를 보는 청년: 격물치지 | 친친親親―인仁의 확장

도교―천지의 도道와 함께 춤추면 초월할 수 있지.
길[道]을 잃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 나도 나비가 될 수 있어: 우주의 도와 나의 합치 | 나비가 되기 위하여: 몸 수련 | 우주적 힘을 이용해 세상의 질병을 치유하다 | 자연스러운 것으로 돌아가기

4. 서구사회를 지탱해온 종교

그리스도교―고통 받는 피조물과 연대하는 삶
사랑으로 산다 | 지구에서 인간의 자리는? | 그러나 인간들은 | 세상 속으로 오신 하느님 | 상처 입은 자연의 고통 |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5. 한국에서 생겨난 종교

천도교―(한울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들을 모셔야지.
“좁쌀 한 알 속의 우주” | 확 뒤집어져라: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다시개벽’ | 사람은 누구나 지극한 생명의 기운을 모시고 있다 | 내 안의 한울님을 잘 길러야지 | 경천, 경인, 경물: 세상 만물을 공경할 수밖에 | 밥 한 그릇을 알면 만사를 알게 될 텐데

닫는 말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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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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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신대와 감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4년 전에 가족과 함께 시골마을로 내려와 작은 집에서 잘생긴 백구 두 마리, 누렁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주로 ‘종교와 생태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고, 최근에는 닭을 키우면서 인간과 인간 외 동물과의 관계성에 대해, 나아가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최근 발표한 논문으로는 「잊힌 장소의 잊힌 존재들: 생태적 위험사회의 관계 맺기와 종교」, 「현대 종교문화와 생태 공공성: 부유하는 ‘사적(私的)’ 영성을 넘어서」, 「핵에너지의 공포와 매혹: 한국인의 핵 경험과 기억의 정치」,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가 있으며, 역서로는 『문화로 본 종교학』,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경작법과 농경 의례에 관한 연구』, 『세계관과 생태학: 종교, 철학, 그리고 환경』, 『원시문화』,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공역), 『진짜 예수는 일어나주시겠습니까?』(공역)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아픔 넘어>,<종교로 보는 세상>,<종교, 미디어, 감각> … 총 1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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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 열린 맘으로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열린 맘으로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열린 맘으로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3.22 19:08  수정 2021.03.22 19:1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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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맘에는 어떤 문이 있을까? 그 문은 쉽게 열 수 있을까? 한 번 닫으면 영원히 열리지 않고 닫혀 있는 문일까? 나는 내 맘 문을 때에 맞추어 잘 닫고 열까? 엉뚱한 때 열고 닫을까? 닫아야 할 때 열고, 열어야 할 때 닫을까?

사실 맘 문이라고 하지만, 한 번 닫힌 맘 문을 열기는 무척 어렵다. 또 열린 맘 문을 닫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맘 문도 꼭 닫혀만 있는 것도 없고, 늘 열려 있는 것도 없다.

맘 문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집의 문도 어떤 때는 열고, 어떤 때는 닫는다. 사람이 나가고 들어올 때 열고 닫는다. 또 바람이나 공기를 받고 막을 때 또 열고 닫는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연세가 높은 증조할머니가 계셨다. 어리고 활발한 우리는 추운 겨울에도 펄럭거리며 문을 열고 닫으면서 들락날락했다. 때로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증조할머니는 ‘문 꼭닫고 살살 다녀라’ 하셨다. 어떤 때는,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어린 나는 따뜻한 이불을 덥고 오래도록 자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때 또 할머니는 문을 활짝 열고 새바람이 들어오게 두라고 하셨다. 어떤 때는 그 바람이 차가우니 닫으라 하시더니, 어떤 때는 새바람이 들어오게 활짝 열어두라고 하셨다.

문은 언제 열고 닫는 것일까? 열린 그 문들은 얼마나 새바람을 불러 들였고, 닫힌 그 문들은 어떤 것들도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까?

시골에서는 밤이 되면 사립문을 닫았지만, 아침이 되면 언제나 활짝 열어 놓았다. 금줄이 쳐져 있지 않을 때는 언제나 누구나 쉽게 드나들었다. 사립문에 쳐져 있는 금줄, 그것은 참 신비롭고 놀라운 전통이었다. 모든 것이 다 통과되었지만, 외부 사람만은 들어가지 못하였다. 열려 있지만 닫힌 문이다. 물론 요사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집문은 옛날과 전혀 다르다. 단독주택이든, 다세대주택이든 모든 문은 꼭꼭 닫혀 있는 것이 보통이다.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잠겨 있다. 항상 찍히는 사진기가 돌아간다. 이런 때는 열려 있어도 닫혀 있는 것과 같다. 서로가 믿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아주 놀라운 일이다. 언젠가는 모든 사람을 다 믿는다는 상징으로 문을 열어 두었겠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 문을 꼭꼭 닫고 잠근다. 이것은 맘 문이 그만큼 닫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맘 문이 닫히니 개인 주택이나 다세대 주택의 출입구와 집 문과 방문이 다 닫힌다. 답답한 시대다. 더욱 요사이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문제로 모든 곳이 열린 듯 닫혀 있다.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문도 닫힌다. 그런데도 무사히 통과되는 것들도 많다. 문은 아무리 닫아도 열리고 또 아무리 열려고 하여도 닫힌 상태로 있기도 한다. 맘 문도 그러한 것일까?


 
문을 활짝 열어도, 시원하게 확 트인 넓은 들판이나 높은 산에 올라도, 또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가에 서 보아도 답답한 때가 많다. 어느 개인에게는 어려서부터 맺히고 쌓여서 풀리지 않는 어떤 응어리가 있어서 무엇을 해도 답답한 것을 풀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종족과 종족들 사이에 이루어진 긴 역사과정의 응어리들도 역시 풀리지 않고 꼭 막혀 있을 때가 참으로 많다. 그러할 때, 밖에서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일단 맘 문을 열고 보라고 한다.

사실 상당히 많은 것들에는 문을 닫아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들이 많다. 바람이 그렇고, 빛이 그러하며, 병균이 그러하고, 철새들이 그러하며, 맘이 그러하다. 문화의 흐름이 그러하고, 정신의 오고감이 그러하다.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요사이 내 맘에는 이른바 기축시대라고 하던 때 인류의 스승들이 말씀하셨던 것들이 암암리에 실현될 조짐들이 보인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던 것들을 허물라는 말씀, 나라와 나라의 금이 거짓이라는 말씀,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순간과 영원이 한 점이라는 말씀, 깨달음의 거룩한 생활과 평범한 일상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원수와 친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이런 것들이 지금은 생각이나 믿음으로가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다만 맘을 열고, 눈을 뜨고, 귀를 막지 않으면 보이는 현실이다.

내 맘을 닫게 하고, 눈을 감게 하고, 귀를 먹게 하는 것들은 확고한 진리인 듯이 보이고 배우고 믿어 왔던 이념들, 전통들, 규정들이다. 좋고 나쁘며, 예쁘고 미우며, 높고 낮으며, 빠르고 느리며, 아름답고 더러우며, 화려하고 지저분하다는 어떤 판단과 규정에 의하여 우리 눈을 뜨고 닫게 하고, 맘을 열고 닫게 하던 것들을 잠깐 옆으로 젖혀 두고 살펴본다면 상황은 전혀 달리지지 않을까? 열린 맘으로, 아니 맘을 조금 열고 보면 금방 새롭게 깨달아지는 세계가 아니던가? 맘을 조금 넓게 열고 보면, 우리는 한 세계, 한 역사, 한 하늘, 한 물, 한 바람, 한 빛 속에서 살고 있음을 금방 깨닫는다. 그렇게 보면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종교와 종교가, 정당과 정당이, 여와 야가, 예쁨과 미움이 한 가지를 향하여 함께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열린 내 맘 속에서 이것들의 순수한 본질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될 일이 아닐까?

열린 맘으로 보면 허상과 실상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으니 허상에 매어 억울하게 살았던 맘 하나 같이 열면 어떨까? 열린 맘으로 보면 이것 속에 저것이, 저것 속에 이것이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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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2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기자명 현응스님   
입력 2010.02.21

2010년 2월 18일 17회 열린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출현 배경과 그 사상적 특징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이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가 덧없고 허망한 것을 일깨워주어 존재의 실재성으로부터 해탈하게 해주는 효과를 이끌어내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부파불교,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면서 교리적 발전과 정립을 거쳐 더욱 정치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삶과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변화시켜 가야 하는지를 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깨워 주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야 하는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즉 초기불교의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은 개인의 삶과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목적, 방법, 이유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가족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많은 불교도들은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딜레마는 불교 내부에서 교리적으로 모색하여 해결해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지만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이외의 종교나 사상들과 많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부각된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브라마니즘을 위시한 당시의 종교와 사상은 대다수 실재론적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무상, 무아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일과 그런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설명하는 일은 대단히 주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소품, 대품 등)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실재성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매우 희유한 일일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대다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종류나 형태의 실재성 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실재성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실재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의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 무아, 공을 내세우는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반야경 등의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어려움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 어떤 실재(예컨대 신, 브 라만, 선, 이성, 명예, 부, 쾌락 등)가 전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실재로부터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있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는 과연 삶과 역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연기적 세계관을 가지고도 세상을 적극적이고도 뜨겁게 살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그 해답을 내 놓은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은 다음과 같은 첫 질문으로 시작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사람은 일상에서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다스려야 합니까?”
즉 무상, 무아, 공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머묾 없이 마음을 내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아, 인, 중생, 수자라는 각종 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집착하거나 머무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는 결국 머물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유명한 ‘응무소주이생기심’의 구절은 ‘응무소주’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기심’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읽어야 대승의 취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어 행하는 일,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청정심이며, 미묘한 행인 것이다.

중국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는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일러 ‘묘행무주(머물지 않는 미묘한 행위)’라 해석하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머물지 않음)’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을 밝힘’이라 하지만 사실 대승의 가르침은 ‘머물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하는가’에 있다.

불교는 보통 극단적인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승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입장에다가 의도적, 잠정적, 가상적인 실재론적인 입장을 접목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의 불교가 연기론을 공관사상으로 발전시켜 세상을 보는 관점을 공, 가, 중이라는 독특한 존재론으로 형성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전된 연기적 존재관에 의도적인 원과 방편이라는 역사적 실천을 접목하는 일,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회심의 역사관인 것이다.


대승경전과 소승(초기)경전의 내용적 차이는 무엇일까?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표현하면 소승경전이라고 부르며, 공, 공관, 유식, 여래장, 법계, 법신, 진여 등의 용어로 표현하면 대승경전이라고 부르는가? 물론 아니다.

법성, 공성, 연기성, 불성은 다 동의어이며, 나아가 유식성, 법계, 진여, 여래장 또한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공, 여래장, 진여 등의 용어로 세계를 설명하면 대승이라고 보고,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설명하면 소승이라고 보는 태도는 소승과 대승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조삼모사에 속는 원숭이와 비슷한 꼴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대승경전의 진면목은 무상, 무아 또는 공이나 진여라는 연기적 세계에 살면서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바라밀을 행하도록 강조하는 부분이다.

초기대승경전인 십지경(화엄)에서 나타나는 10바라밀은 이러한 대승의 역사적 실천론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인다. 6바라밀에 이은 방편, 원, 력, 지, 이 네 가지 바라밀은 대승불교 회심의 역사적 상상력으로서 연기적 깨달음이 어떻게 역사화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태도는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결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절대주의란 잠정, 가설, 의도성의 색깔을 띤 독특한 절대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승경전을 보면 반야경은 공(연기)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입장에 서면서도(무주) 여러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 정토장엄을 설하는 것이 된다. 공과 연기를 설하는 것은 초기불교 이래로 줄곧 해 왔던 일이다. 대승의 시대에 오면 공과 연기라는 평면적 세계에 불교 특유의 실천론을 덧붙이는 노력을 하게 되며, 그러한 내용들이 모든 대승경전에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은 법계연기나 화엄교관이라는 수행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적 세계관에 서서 다양한 바라밀을 행해 법계를 장엄하는 것에 대해 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경전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 역사적 실천론인 것이다.

정토, 열반, 법화 등의 대승경전도 같은 취지이다. 즉 대승경전은 마음을 밝히거나 세상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도의 사회적 실천의 자세, 목표로 삼는 이상사회(정토), 그리고 그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론에 대한 설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입장은 보살(보디사트바)을 실천적 삶의 주체로 내세우는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보디는 연기적 깨달음을 뜻하며, 사트바는 중생계의 삶과 역사를 뜻한다. 즉 보디와 사트바가 결합된다는 것은 깨달음과 역사가 결합되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지만,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로 읽어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대승의 취지는 보살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구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연기, 공, 반야”만 강조하는 불교, “개인적인 몸과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만 강조하는 현대사회의 불교

불교는 초기불교 이후로 각 부파의 아비달마 시대를 거쳐 기원 전후에 이미 연기론과 역사적 실천을 접목시킨 대승불교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불교가 오히려 초기불교의 문제의식 수준으로 회귀하여 대다수 불교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과정에서 연기, 공, 반야를 설하는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대단히 아쉽다.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한다.

또한 현대불교가 대승불교의 역사적인 실천론을 상실하고 연기론의 범주로 물러나 있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그 연기론의 적용 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에 한정지어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도 정작 연기와 공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일체의 존재현상이 상호 연기적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 개인의 몸과 마음이 다른 영역과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사념처라 하여 존재 현상을 살피는 위빠사나 수행 또한 크게 보면 모든 존재들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잘 살피자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근자의 불교포교의 방향과 그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불교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중국 등의 소위 북방불교는 물론이고 미얌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나 티벳불교까지 모두 다 연기론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으며, 그 연기론의 적용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 문제에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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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7:03 IP삭제
최근에 한국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사념처 수행의 대상이 사회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등은 고결한 안목으로 보인다.
스님의 지적대로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이라" 설명하고 가르쳐왔다. 아마 지금도 대다수의 강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대승경전을 새롭게 읽어내는 스님의 안목은 존경스럽다. 이 글에 대한 찬탄의 소리가 잇달아 나올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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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4:52 IP삭제
불교평론에 올라온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었다.

그 동안 어느 강사나 강주나 학자가 쓴 글 보다도 감명 깊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역사를 꽤뚫은 자만이 투시 가능한 서로의 장단점을 그는 읽고 있었으며 그러한 안목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 내고 있었다.
금강경을 마음을 일으키라는 '생기심'의 메세지로 읽는 것이라든지 화엄경을 '사회적 실천론'으로 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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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깨달음과 역사 - 개정증보판 현응

알라딘: 깨달음과 역사

깨달음과 역사 - 개정증보판   
현응 (지은이)불광출판사2016-08-12

 9.5 100자평(2)리뷰(2)
360쪽

Enlightenment and History : Theory and Praxis in Contemporary Buddhism
 - <깨달음과 역사 : 현대 불교에서의 이론과 실천>영문판

책소개

<깨달음과 역사> 개정증보판. 

개정증보판에서는 '깨달음 논쟁'을 촉발시킨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비롯해,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원고를 새롭게 추가했다. 또한 표지 디자인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어, 불교의 원형질을 이루는 유전자인 무상, 무아, 연기, 공, 자비를 변화와 관계성의 이미지로 추상화하여 현대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불교를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역사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불교는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바꿔주는 데 있다. 특히 1장 '사제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에서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불교 용어와 교리를 쉽고 진솔하게 풀어주고 있어 불교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깨달음, 연기, 공, 윤회, 대승과 소승 등 애매하고 모호하게 다가왔던 개념들이 명확한 실체로 다가온다.


목차
서문 『깨달음과 역사』를 다시 펴내며

1장 사제(師弟)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
1월_ 대승과 소승
2월_ 무심시도(無心是道)
3월_ 확연무성(廓然無聖)
4월_ 윤회와 해탈
5월_ 색즉시공 공즉시색
6월_ 공(空)의 이중적 구조
7월_ 대도무문(大道無門)
8월_ 깨달음과 역사
9월_ 돈오점수설, 돈오돈수설에 대해
10월_ 마음·부처·중생
11월_ 보살만행(菩薩卍行)
12월_ 불국정토(佛國淨土)

2장 각(覺) - 깨달음

3장 깨달음을 위한 산책

4장 돈오점수, 돈오돈수설 비판

5장 역사에 다가가는 불교
불교와 사회
불교의 사회적 실천
민중불교운동의 대승적 전개를 위하여

6장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7장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

접기


책속에서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은 일관된 문제의식과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Bodhi, 연기적 관점)’과 ‘역사(Sattva, 인생과 세상)’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역사를 연기적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말하며, 역사란 ‘깨달음의 시각으로 비춰보고 실현하는 현실적 삶’을 뜻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깨달음과 역사』 초판본 <묶는 글>에서 “이 책은 ‘불교역사철학 서설’이라고 하고 싶다”라고 썼다. ‘불교는 세속의 가치를 벗어나 출세간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넘어서, ‘불교는 역사를 잘 이해하여 제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가르침’으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불교를 세속주의로 몰아가고자 함이 아니라 역사주의로 해석하고자 하는 뜻이다. -서문  접기
P. 20 나는 불교만큼 오해를 받는 가르침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은 거의 모두 곡해되고 굴절되어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불교는 무심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비분별을 떠난 초연한 은자로서의 태도는 불교인의 독특한 성격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조는 듯 잠자는 듯한 침묵과 웃을 듯 말 듯 달관한 듯한 무관심이 적멸과 열반의 경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접기
P. 34 사제님도 동의할 줄 압니다만, 나는 윤회라는 것을 비단 어떤 사람이 칠십 년쯤 살고는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식의, 심지어는 개로도 태어나고 새로도 태어나는, 그런 계속되는 생명의 쳇바퀴 현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염불 구절에도 나오는 바,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이 아니겠습니까? 곧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말합니다.  접기
P. 191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왜 역사의 길에 나서게 되는가? 존재에 대한 사랑[慈]과 연민[悲] 때문이다.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 내는 고리이다. 이 자비가 구체적으로 표출된 모습이 방편(方便), 원(願), 역(力)이라 부르는 불교적 행동양식이다. 원(願)이란 역사에 대한 어떤 목표 설정에 해당되며, 역(力)이란 원(願)을 최종적으로 성취하게 하는 불굴의 신념을 뜻하며, 방편이란 원(願)을 성취하는 구체적 방법론과 실천을 말한다. 따라서 원력과 방편은 자비의 역사적 표출에 다름 아니다. 깨달음만 있는 사람은 아라한(Arhan)이라 부른다. 깨달음에다 자비와 원력을 덧붙인 사람은 보살(Bhodhisattva)이라 부른다. 아라한이란 ‘깨달음’이라는 단일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보살이란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의 복합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아라한은 소승의 삶이라 불리고 보살은 대승의 삶이라 불린다.  접기
P. 315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이라 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깨달음을 ‘~에 대한 이해’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완성된 그 어떤 경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기간은 말할 것 없이 크게 차이날 것이다. 만일 깨달음을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당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 걸렸을 뿐이다. 그리고 ‘납득시킨다’는 말을 썼듯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납득시키는 방법도 선정삼매를 통한 것이 아니라 밤낮 없는 대화와 토론이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현응 (지은이)

1955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불교에 인연이 있어 1971년 해인사로 출가해 종성(宗性) 화상을 은사로 수계했다.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봉암사, 해인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기도 했다.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대승불교승가회, 선우도량 등 불교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중앙종회의원, 불교신문사 사장, 해인사 주지 등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으로 재임중이다.
최근작 : <Enlightenment and History : Theory and Praxis in Contemporary Buddhism>,<깨달음과 역사>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불광출판사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최초의 불교역사철학 에세이!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초판은 26년 전인 1990년 해인사출판부에서 출판됐다. 민주화의 열기가 봇물처럼 넘쳐나던 1980년대 중후반에 쓴 원고를 모아 엮은 것으로, “불교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깨달음(보디)의 영역으로, 현실과 실천의 범주를 역사(사트바)의 영역으로 거두어들인 최초의 불교역사철학 에세이. 완전히 새롭게 불교해석을 함으로써 불교도에게 세상을 보고 역사를 인식하는 안목을 열어주고, 보살행 실천의 지침을 제공해 주는 역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국불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월이 흘러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된 뒤로는 복사본을 만들어 돌려보는 등 독자들의 한결같은 성원에 힘입어, 2009년 20년 만에 불광출판사에서 새롭게 개정판으로 나왔다. 개정판은 4쇄를 찍으며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후 2015년 9월 열린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계기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스님들과 불교학자들 중심으로 깨달음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깨달음 논쟁’은 “오랜만에 추문이나 논란이 아닌 본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 속에서 1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번에 출간된 『깨달음과 역사』 개정증보판은 ‘깨달음 논쟁’을 촉발시킨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비롯해,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원고를 새롭게 추가했다. 또한 표지 디자인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어, 불교의 원형질을 이루는 유전자인 무상, 무아, 연기, 공, 자비를 변화와 관계성의 이미지로 추상화하여 현대적으로 형상화했다.
아직까지 『깨달음과 역사』를 접하지 못했다면, 일독을 권해본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불교에 대한 고정관념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놀라운 체험과 더불어 고전이 주는 묵직한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응 스님이 깊은 인문학적 소양으로 갈파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 보살(Bodhisattva)

『깨달음과 역사』는 현응 스님의 독서와 사색, 수행, 실천행의 결정체이다. 현재 조계종 교육원장으로서 시대에 부응하는 승가교육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스님은 일찍이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기획조정실장으로 현 종헌 종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종단의 굵직굵직한 중책을 맡아 탁월한 능력을 발휘, ‘조계종의 재사(才士)’라는 별명을 얻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스님은 동서양 고전을 섭렵한 것은 물론, 최신 인문학 서적들을 챙겨 읽으면서 세상과 소통한다. “명석한 두뇌에 경학을 깊이 공부하고, 자기 사상과 입지가 분명한 사람”, “마음 씀이 부드러우나 일을 함에 굳은 신념을 가지고 추진하는 외유내강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지향한다. 대승불교의 이상형은 보디사트바(보살)이다. 스님은 이 책에서 보디와 사트바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하였다. 『깨달음과 역사』라는 제목처럼 이 책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깨달음(Bodhi, 연기적 관점)’과 ‘역사(Sattva, 인생과 세상)’이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은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가 아니라 ‘세상을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을 깨닫는 것, 다시 말해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는 일임을 역설한다.

“보디사트바(보살)란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의 합성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속적인 표현으로 ‘깨달음의 역사화’, ‘역사의 깨달음화’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이 보살의 삶에 있어서는 그의 깨달음에 기초하는 역사로부터의 자유로움만 만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와 교섭하도록 적극 참여하여 그 자신을 투사시킨다고나 할까요. 표현은 뭐 합니다만, 저는 이것을 ‘역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being and history)’와 ‘역사에로의 자유(freedom to being and history)’를 겸한 삶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현응 스님은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역사의 길에 나서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慈]과 연민[悲] 때문이며,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내는 고리임을 거듭 강조한다. 깨달음과 역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삶에 희망이 솟아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추구하던 불교는 너무도 ‘가난한 불교’였다. 맹목적으로 깨달음만 추구하며,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했다. 깨달음은 신비롭거나 높디높은 경지가 아니다. 우리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삼라만상을 변화와 관계성의 연기적 관점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역사의 현장에서 깊이 실천될 때 불교는 나와 세상을 두루 구제할 수 있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입문서이자 바른 길잡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불교를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역사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불교는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바꿔주는 데 있다. 특히 1장 ‘사제(師弟)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에서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불교 용어와 교리를 쉽고 진솔하게 풀어주고 있어 불교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깨달음[覺], 연기(緣起), 공(空), 윤회, 대승과 소승 등 애매하고 모호하게 다가왔던 개념들이 명확한 실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닌, 불교정신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떠한 행위로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며 직접적인 실천으로 이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과 수행법, 깨달은 사람의 삶의 모습, 보살이 역사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며 안내한다.
『깨달음과 역사』가 출간된 지 26년이 지난 지금, 과거보다 더욱 활발한 논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주목해 볼 만한 현상이다. 현응 스님이 이 책에서 설파하고 주장하는 내용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한국불교가 그동안 전통적 교리와 신행 방법만 고수하며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개인의 삶과 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반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불교정신과 사상이 역사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현응 스님의 문제의식이 그동안 암묵적 침묵에 가려져 왔다면, 지금의 ‘깨달음 논쟁’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새로 출발하는 불교를 제안하고 있으며, 기존 불교의 재정립을 촉구하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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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강의내용을 정리해서 모아놓은책. 이 시대에 불교인이 나아가야할 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대승과 소승, 돈오와 점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기본적이지만 사실은 자세히 얘기하길 꺼려왔던 문제에 대해서도 정리해놔서 소장가치가 있다고 봄.  구매
타는목마름으로 2016-09-1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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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우미 2020-03-2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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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불교에세이! 새창으로 보기
 전 조계종 교육원장이셨고 현재는 해인사 주지로 계시는 현응스님의

불교에세이.. 감히 한국 최고의 불교에세이라 말하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큰 감동을 받은 책..

 

이 책은 미국에서 철학교수 하시는 홍창성교수님의 책

<미네소타 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는데

홍창성 교수님의 책도 엄청났지만 <깨달음과 역사>에 수록된 주요 글들이

씌어진 시기는 현응스님이 불과 40세 전후의 나이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책에는 불교계에서 "깨달음 논쟁"을 촉발시킨 유명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깨달음 논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불교평론에서 검색하여 읽어볼 수 있다.

현응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다른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의

반박글들이 있는데 불교철학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흥미로울 것이다.

나는 당연히 현응스님의 생각에 깊이 동의한다.

 

불교나 불교철학에 관심있는 분들은<깨달음과 역사>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이 책은 작년에 이어 올해 두번 째 읽는 중인데 내 책꽃이에 늘 눈에 띄는 곳에

꽃아둔 책이다.

다시 완독하고 나서 리뷰를 마무리할 생각이다.

 

아! 홍창성 교수를 검색하다가 홍교수의 새 책이 나왔구나!

정말 반갑고 기분좋다. 홍교수의 <미네소타 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이후

홍교수의 새 책을 기다려 왔는데 바로 주문넣는다.

 

홍교수의 신작은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이다.

제목만 봐도 불교철학의 핵심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깨달음과 역사> 리뷰는 홍교수의 새책까지 완독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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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라슈 2020-11-25 공감(7)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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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깨달음과 역사 새창으로 보기 구매
그동안 불자로 지내면서 어색했던 부분들을 일소해 쓸어버리는 듯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이다.
2500년 전의 가르침이 지금도 이어진다는 거야 고전을 읽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그 가르침 자체보다 그것이 전수되는 방식이 늘 같기는 커녕 더 어려워지는 듯 하여 어색했었다. 때로는 그간의 문화, 문명, 지식수준의 변화를 간과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갖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지금 사람들이 2500년 전 사람들보다 훨씬지식도 뛰어나고 이해력도 좋고, 배경 환경도 비교안될 정도로 좋은데,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건 왜 더 오래걸리느냐의 문제였다.

현응스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 답할 뿐만아니라 대승불교의 진정한 의미까지..
내가 생각하고 대충 그러려니.. 하는 문제들까지 싹 정리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이 왜 논란이 됐는지 알만했다.

밑줄치기를 중단했다.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쳐야할 것만 같아서다. 두고두고 읽어봐야겠다.

아, 현응스님의 답이 궁금한가?
부처님의 가르침, 즉 깨달음은 연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왕조시대고 책도 많이 없던 부처님 당시로서는 놀라운 이야기지만 지금은 그다니 혁명적인 이야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수행은 끝인가?
그리고 그간 열심히 공부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은 헛수고인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이런 걸 융합한다는 데에 있다.
두고두고 봐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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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2018-01-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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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깨달으면 부처? 도대체 깨닫는다는 게 뭔가
[서평] 깨달음에 대한 정의 <깨달음과 역사>
16.08.18 14:00l최종 업데이트 16.08.18 14:01l임윤수(zzzoh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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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깨달음'이라는 세 글자는 쉬 범접할 수 없는 비밀이었고 궁금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이 '깨달음=이해'라는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불교계에서 물결 같은 파장이 일었습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잔잔한 파장이 아니라 파고가 높은 파도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부산 범어사 주지, 안국선원 선원장인 수불 스님은 '깨달음은 이해'라는 현응스님의 주장에 "성철 스님이 계셨다면 '마구니'라며 주장자를 내려쳤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주제로 한 세미나도 열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니 만만치 않은 반응입니다.(* 주장자 : 선사(禪師)들이 좌선할 때 또는 설법할 때 지니는 지팡이)

사실 그동안 오도송(悟道頌, 고승들이 부처의 도를 깨닫고 지은 시가)이라는 걸 읊은 스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도송이라는 걸 아무리 읽어봐도 뭘 깨달았다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일반인들이 쉬 알 수 없는 게 '오도송'이라고 방어벽을 치면 딱히 할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깨달음'이란 결국 출가 수행자들만의 전유물이며 스님들만의 영역이라는 이기적 해석이 될 것입니다.

논쟁 속 정의 <깨달음과 역사>

 <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8월 12일 / 17,000원) 
▲  <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8월 12일 / 17,000원)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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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펴낸곳 불광출판사)의 저자인 현응 스님은 율장의 하나인 마하박가(大品律藏), 성도(成道) 직후 깨달음의 내용을 정리하는 부처님의 생각과 첫 설법(초전법륜)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 <마하박하>를 '깨달음 = 이해'라고 하는 주장의 전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삼라만상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개념적이든 그 어떤 것이든 연기적(緣起的)으로 드러나 있으며(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러한 상태를 이해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107쪽-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각자(覺者,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다는 게 참 요원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비밀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깨달을 수 없으니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말은 허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깨달음 = 이해'로 정의 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세속인이라고 해서 깨닫지 못할 것 없고,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이해로 정의되고,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범위와 정도가 목적과 목표로 설정된다면,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 현실적으로도 가능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이라 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깨달음을 '∼에 대한 이해'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몸과 마음의 완성된 그 어떤 경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기간은 말할 것 없이 크게 차이날 것이다. -315쪽-

사실 일부 스님들이 주장하는 깨달음은 좇고 쫒아도 잡히지 않는 파랑새이고 무지개일지도 모릅니다. 뜬구름 같은 깨달음은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다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천안통이 터졌다는 건지, 숙명통이 터졌다는 건지… 아니면 신이라도 내려 어떤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으니 막연히 짐작하고 미루어 어림할 뿐입니다.

하지만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건, 저자가 '7월에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행합일',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삭발을 하고 염의를 입고 사는 스님들 중에 '육바라밀'과 '오계', '하심'과 '방하착', '자비'와 '보시' 등등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책에서 저자가 정의하고 있는 깨달음, 연기적 상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도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작금의 승가는 세속인들 세계 못지않게 잡다한 사건들로 시끄럽습니다.

승가가 깨달음을 파랑새나 무지개처럼 정의하지 말고, 아는 만큼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작금 세속인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잡다한 이야기들은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살아 계셨다면 '마구니라며 주장자를 내려쳤을 것'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는 현응 스님의 주장 "깨달음=이해"가 왠지 반갑기만 한 것은 막막하기만 했던 깨달음이 결코 이룰 수 없는 난공불락의 '도'가 아니며,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라는 말이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8월 12일 / 17,000원)

불교언론-“선학원 법진 전 이사장이 ‘현응스님 성추행의혹’ 지시했다” - 법보신문

불교언론-“선학원 법진 전 이사장이 ‘현응스님 성추행의혹’ 지시했다” - 법보신

“선학원 법진 전 이사장이 ‘현응스님 성추행의혹’ 지시했다”

권오영 기자
승인 2021.03.12


  • 3월11일 김모 불교저널 전 편집장 법원서 증언
  • “불교닷컴 대표와 불러 내용증명 보내라고 지시”
  • “법진 이사장 말 신빙성 없어 기사작성 안했다”
  • 국립공원 여직원 P씨 “S씨 주장, 사실 아니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허위 글을 게재해 명예훼손혐의로 기소된 S여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선학원 법진 전 이사장이 이 글이 게재되기에 앞서 불교닷컴과 불교저널 기자를 불러 현응 스님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하며, 내용증명을 보내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번 사건에 법진 전 이사장이 깊이 연루돼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관심을 모은다. 또한 불교닷컴과의 관련성 여부에도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선학원기관지 불교저널의 편집장을 지낸 김모씨는 3월1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4차 공판에 출석해 이같이 증언했다. 김씨는 S여성이 2018년 3월 ‘metoo withyou’라는 웹사이트 게시판에 성추행 의혹의 글을 게시하기에 앞서 2016년 12월 현응 스님에게 성추행 의혹과 관련한 질의서를 내용증명으로 발송한 당사자다.

김씨는 이날 내용증명을 발송한 경위와 관련해 “당시 선학원은 조계종과 법인법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고, 법진 이사장은 자신의 성추행문제로 고소를 당한 상태였다”며 “2016년 12월경 법진 이사장이 (자신이 주지로 있던) 서울 정법사로 불러, ‘현응 스님의 성추행 의혹을 제보 받았다’며 내용증명을 보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불교닷컴 이모 대표도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법진 이사장의 제보내용은 2018년 3월 S여성이 ‘metoo’ 게시판에 올린 글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내용증명에서 (현응 스님의) 회신이 없으면 곧 기사를 내보낼 것처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검찰의 질의에 “기사화할 만 한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씨는 S씨 변호인의 질의에서도 “(법진 이사장의 제보는) 신빙성이 없어 신뢰할 수 없었다”며 “이사장의 지시에 (내용증명을 보내 확인하려는) 흉내를 냈던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현응 스님이 내용증명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는 변호인의 질의에 “현응 스님 자신이 보기에도 그 내용이 너무 허구적이고,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변호인은 “성추행의혹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불교계 신문기자가 성추행의혹과 관련해 내용증명을 보내왔으면, 질의서를 무시할 수 없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며 김 씨가 답변하기 어려워 보이는 영역의 질의를 재차 제기했다. 이에 대해 김 씨는 “글쎄, 그건 모르겠다”고 짧게 답했다.

변호인은 “법진 이사장에게 현응 스님의 성추행 의혹을 제보한 사람이 여기 있는 피고인데, 그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법진 이사장이 (현응 스님의 성추행 의혹을) 일부러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김 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날 공판에는 피고인 S씨가 ‘metoo’ 웹사이트에 게시한 글에서 ‘현응 스님으로부터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성추행 당한 여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지목한 P여성도 증인으로 출석했다. S씨는 웹사이트 글에서 “해인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 데, 해인사에서 알고 지내던 국립공원 여직원이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얘기를 하다가 주지스님이 바람 쐬어준다며 대구시내로 데려갔다는 말을 했다”며 “국립공원 여직원에게도 내게 한 것처럼 그렇게 유인해 대구시내로 가서 술집으로 데려갔다니 정말 분노가 일어났다”고 주장했었다.

이와 관련 P씨는 “가야산국립공원 직원으로 일할 당시 S씨와 친한 관계가 아니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며 “S씨와 전화통화를 한 사실도 없다”고 말했다. 다만 P씨는 “2018년 4월경 해인사에서 알고 지내던 스님에 의해 ‘metoo’ 게시판의 글을 알게 됐고, 그 속의 내용을 보고 몹시 불쾌해 하고 있었다”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S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러나 화가 나서 ‘난 당신을 모른다’고 답한 게 S씨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화통화였다”고 밝혔다.

P씨는 ‘가야산국립공원 직원으로 근무할 당시 현응 스님과 대구시내로 나가 술을 마셨고,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을 S씨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 사실이 있느냐’는 검찰의 질의에 “S씨에게 전화한 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사실도 없다”고 답했다. 이어 “현응 스님이 해인사 주지라는 것 외에 스님을 알지 못했다”며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확인서를 경찰에 제출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공판에는 1982년부터 해인사 직원으로 근무했던 성모씨도 증인으로 참석해 “2004년경 해인사 주지스님이 타고 다니던 승용차는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기본적인 선팅이 됐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S씨는 ‘metoo’ 게시판에 작성한 글에서 “(성추행당한 날) 주지스님의 어둡게 썬팅 되어진 에쿠스에 탔다”고 주장했었다. 이에 대해 성씨는 “어른스님이 검은 것(썬팅)을 싫어해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는, 그 당시 제일 옅은 색으로 한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이날 공판에 나온 증인들의 진술은 대부분 S씨가 ‘metoo’ 게시판에서 주장한 내용과 상반됐다. 때문에 이들의 진술이 향후 최종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77호 / 2021년 3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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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너머산 2021-03-21 02:10:27
더보기현응의 문제는 성추행혐의도 있지만 깨달음 대승불교 선종 전통과 관련해 일대 혼란과 몰이해를 야기한 점이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해 본인의 입장을 재차 분명히 해야함은 물론, 종단 및 관련 당사자들의 적절한 대응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종단의 지향이 혼조에 빠진 지경 아니던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답글 3
4 2
성불연대 2021-03-18 17:57:57
더보기현응 스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성명서 남발했던 성불연대는 참회 안하나? 이 기사 읽고도 입에 꿀 발라놓은 것처럼 침묵이네. 법진이 성폭력으로 실형선고를 받아도 그건 모르쇠하고 현응 스님 파렴치범 만들던 그 꼬라지들이 생각나네. 니들이 불자면 참회해라 이것들아.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답글쓰기
4 7
중놈 2021-03-15 06:45:55
더보기그놈이나 그놈이나
중놈답글쓰기
6 7
천벌 받을 놈들 참 많다 2021-03-15 06:27:51
더보기당시 현응스님이 피디수첩 내용이 사실이면 자기가 옷을 벗고 사실이 아니라면 최승호가 엠비씨 사장으로 책임지라며 떳떳함을 주장했었다. 그런데 저게 성추행 으로 실형을 받은 법진 이사장이 개입되어 있었다니 충격적이다.답글쓰기
16 5
인사동 2021-03-14 21:54:13
더보기법보신문 덕에 성추행사건을 다시 알게되어 고맙긴한데
성추행 건을 잊을라하면 법보에서 보도해주니 고맙긴한데
이런 일이 회자되는 자체가 본사 주지뿐 아니라 불자들에게 명예스럽지 못하다.
성추행 안했으면 빨리 밝혀지도록 당사자는 최선의 노력해야 할 것이며
법보는 결과를 보도해 주면 좋겠다. 그게 당사자를 돕는게 아닌가.
피곤한 기사로 불자들에게 전달하여, 한참 지난사건으로 인해 또 짜증나게하지 말고
성추행이 사실이면 절집을 떠나는게 부처님의 제자로서 합당하고
잊을만하면 보도하는 법보는 현응스님을 안 좋은 이미지에서
다시 기억나게 하는일을 언제까지 계속할건지
무지 답답합니다.






17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 “깨달음은 초월적이고 신비한 경험 아닙니다”

“깨달음은 초월적이고 신비한 경험 아닙니다”


“깨달음은 초월적이고 신비한 경험 아닙니다”
입력 2017.06.1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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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번역한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 교수.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 불교에 대해 서구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길 바랐다. 불광출판사 제공



90년대 출간 현응 스님 철학서

정밀한 논리에 감탄해 번역

“미국선 불교 좀 알아야 교양인”

“자아나 영혼 같은 게 없다고 보는 불교는, 말하자면 굉장히 ‘쿨’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뭔가 좀 허전하니까 우리는 자꾸 영혼, 사랑 같은 ‘핫’한 것들을 집어넣지요. 그 지점에서 서구인들은 우리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같은 말들은 연기(緣起), 공(空)의 논리와 안 어울린다고 보는 거지요.”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이라는, ‘방편’ 같은 표현도 이 간극을 메워 주지 못한다. “중생 계도를 위한 방편이라고 하면, 논리를 중요시하는 서구인들은 있는 그대로 설명해야지 왜 그걸 살짝 속여야 하느냐고 되물어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책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 영문번역 작업을 한 홍창성(53)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교수의 말이다. 홍 교수의 이런 말은 왜 그가 현응 스님의 책을 번역했는가와도 통한다.

‘깨달음과 역사’는 현응 스님이 1990년 내놓은 불교 철학서다. 사회적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과 더불어,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 경지로 상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은은하게 화제가 되던 이 책은 2015년 책 발간 25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리면서 ‘깨달음 논쟁’으로 번졌고, 불교계는 이 주제를 두고 1년여 동안 치열하게 논쟁했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삶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화’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은 참선(參禪)과 선정(禪定)을 강조하는 분들에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지요.” 깨달음이란, 화두 하나를 붙잡고 오래오래 고심하다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변화와 관계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대하는 방법을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지난해 깨달음 논쟁을 반영해 책이 새롭게 나왔고, 홍 교수는 이 책을 번역했다.

홍 교수는 원래 정밀한 논리를 중시하는 분석철학을 전공해 미국에 정착한 서양철학자다. 유학 시절 숭산 스님의 선원을 드나들다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분석철학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해 꾸준히 공부했다. 미국철학회 아시아분과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세계적 불교 학자들과도 꾸준히 교류했다. 2010년 가을 우연히 현응 스님이 쓴 논문을 접하고서는 그의 논리에 반했고, 그의 책을 구해 읽고서는 무릎을 탁 쳤다.
2015년 불교계 '깨달음 논쟁'을 담은 '깨달음과 역사'.
'깨달음과 역사'의 영역본.

“제 딴엔 열심히 공부한다 했지만 해외에서 독학하듯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제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건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제 궁금증이 당연한 것이었구나, 제 공부가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 기뻤고, 또 현응 스님이 그에 대한 대답을 다 해 놔서 기뻤습니다. 그것도 이미 1990년에 그렇게 해 놨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했지요.”

한 달 동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곱씹어 가며 책 전체를 꼼꼼히 다 읽었다. “속된 말로 칼 들어갈 곳도 없을 정도로 정밀한 논리가 놀라웠다”고도 했다. 불교에 관심 있는 주변 미국인들에게도 몇 편 뽑아 소개했더니 열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독실한 기독교도, 독실한 유대교도들도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지금도 영역본이 언제 나오냐며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다 한다. 홍 교수는 “요즘 미국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좀 알아야 교양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만큼 일반인들 반응도 좋을 것이라 기대한다”며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도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 불교계에 대한 아쉬움으로도 이어진다. 2012년 동국대 세미나에 참석한 경험을 들었다. 분석철학자이다 보니 성철스님과 비트겐슈타인을 비교한 주제발표를 맡았다. “성철 스님은 대단하신 분이지요. 하지만 학자로서 현대적 의미에서 보자면 몇 가지 부분이 아쉽다고 논평했습니다. 그게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라 생각했는데, 발표 뒤 1시간 반 동안 엄청나게 공격적인 질문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깨달음 논쟁에 대한 자리를 다시 한번 더 마련했다. 함께 책을 번역한 아내 유선경(52) 미네소타주립대 교수와 함께 강연ㆍ토론회를 연다. 21ㆍ22일, 28ㆍ29일 서울 자하문로 사찰음식전문점 마지에서다.

홍 교수는 불교적 깨달음을 누려 본 경험이 있었을까. “2004년 쌍둥이를 낳았어요. 분자생물학을 공부했던 아내가 저 때문에 철학으로 갈아타고 뒤늦게 한창 학위 공부를 할 때라 제가 2년 정도 휴직하고 육아를 했었죠. 기저귀를 7,500장쯤 갈았을 때 머릿속이 환해지는 경험을 했었지요.”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