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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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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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공동번역 개정판의 명칭을 사용했다.
복음서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행전
사도행전
서신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야고보의 편지
베드로의 첫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세째 편지
유다의 편지
묵시록
요한의 묵시록
신약 성경의 사본


요하난의 기쁜 소식은 공관 복음서와 더불어 4복음서를 이루는 복음서이다.


목차
1명칭
2저자
3편집시기
4내용
5사랑의 전도서
6사랑하는 제자
7같이 보기
8각주
명칭[편집]
고대 그리스어: κατὰ Ἰωάννην εὐαγγέλιον, τὸ εὐαγγέλιον κατὰ Ἰωάννην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Ioannem
영어: Gospel According to John
한국어: 요하난의 기쁜 소식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福音書)
가톨릭: 요한 복음서(福音書)[1]
개역성경: 요한 복음(福音)
저자[편집]

'요하난의 기쁜 소식' 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오(마태), 마르코(마가), 루카(누가) 등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는 다른 전승을 바탕으로 성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라 불리는 다른 복음서들과 내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비롯한 주요 행적과 그 가르침은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점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한다.'라는 저작목표를 밝히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쓴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성서학자들은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요한 학파라고 불리는 신학공동체 일원이며, 최소 2명 이상일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는 요한 복음서 21장이 후대에 가필되었다는 성서학계의 학설에 근거한 것이다.[2]
편집시기[편집]

90년에서 100년에 쓰였다는 주장이 유력하며, 에페소에서 쓰였다는 주장을 의문시하는 시각도 있다.[3]
내용[편집]

공관 복음서들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세족례 등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이 들어있고 예수의 설교도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교리를 직설적인 문체로 길게 해설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예수가 카나(가나) 혼인잔치에서 보인 기적(포도주로 만듦)을 첫 번째 표적[4][5]이라고 적음으로써 기독교가 기존의 유대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6] 요한의 복음서의 가장 큰 특징은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 성인은 요한 복음서 서두에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신 말씀(Logos)이라고 설명하여, 그리스도를 만물의 원천으로 소개한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누군가가 그 몸을 으로 찔렀는데, 이때 이 나왔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예수는 사람의 가면을 썼을 뿐,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가현설을 반박하려는 신학적인 의도가 담긴 설명이다.
사랑의 전도서[편집]

복음서는 일명 사랑의 전도서라 불릴 만큼 하느님의 사랑과 그의 외아들 예수의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 성경 전체에서 의미하는 주요 메시지와 핵심, 즉 사랑은 요한복음의 단 한 줄의 구절로 나타나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 요한복음서, 3장 16절


요한(John)이 가졌던 믿음에 의한 구원은 바울로 (사도 파울로스, Paul)의 신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네 주 하느님을 '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경외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구절이 2번 언급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인 것이다. 바울로 또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으며,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사랑의 위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기독교인의 정수로 본 것이다. 이 두 저자의 교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일맥상통한다.
사랑하는 제자[편집]

성서학계에서는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제자(애제자)의 정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마티아, 사도 요한, 마르코(마가), 라자로(나사로), 사도 토마스(도마), 아리마태아 요셉(아리마대 요셉), 요한 마르코(요한이라는 히브리이름과 마르코라는 헬라 이름을 가진 마르코. 성서연구자들은 요한 마르코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로의 동역자 성 바르나바의 조카로 해석한다.)[7], 상징적인 인물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수가 사랑했다는 제자는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사도들은 아닐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라자로로 해석하는 견해와 사도 토마스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8]
같이 보기[편집]
요한 복음서 3장 16절
요한 복음서 18장 38절 (en) - 예수의 무죄를 나타나는 여러 성경 구절, 유월절의 양이 희생하는 것을 비유
예수와 간음한 여인 (en) - 예수가 유대인에게 처형당하던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일화이다. 원래의 사본에는 없어서 논란이 있다.
각주[편집]

구 '성 요왕 복음'
박태식. 《《복음서와 시간》》. 생활성서. p.154쪽.
같은 책, p.151
그리스어: σημεία 세메이아[*]를 번역한 말로써, 상징(sign)이라는 뜻이다.
김득중. 〈요한복음서에서의 첫 번째 이적〉.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본 복음서들의 신학》》. 한들출판사. p.71-72쪽.
같은 책, p.74-p.76
오경준. 〈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 홍성사.
김득중. 〈제10장 사랑하는 제자의 정체〉. 《앞의 책》. p.257,p.275-p.286쪽.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1986.8.14 오북환 장로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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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1986.8.14 오북환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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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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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1986.8.14 오북환 장로




하나님 앞에는 밤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우리 셈으로 따지면 수수 억만 만의 시간 날짜라도 년이라도 몇 광년이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잠깐이야. 잠깐 하나님은 잠깐이야. 우리는 몇 만 년을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 대면 무한에다 대면 잠깐이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분을 두시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어서 갈려고 하는 것도 좋지만 더 큰 은혜 주시기 위해서 아직도 천국에 갈 자리가 준비가 조금 덜 되었다. 덜되었으니까 제일 좋은 자리를 마련했는데 조금 지금 전등을 안 달았다든가 전등이 필요 없지만 거기서는 하나님이 빛이니까 무엇이 좀 꽃 하나 심을 데가 지금 안 심었다든가 조금 덜 피었다거나 무엇이 조금 덜된 것뿐이니 그저 감사히, 감사히 받을 것뿐이다. 그렇게 말씀이 내려요. 지금 제 집회이지, 여러분의 집회가 아니야. 여러분도 받으면 여러분의 집회이고 개인 개인의 집회야.
또 그 이야기 하면 길지만 처음에 말씀 봤을 때도 보니까 그렇습디다. 처음에 일주일 전부터 부흥집회를 위해서 준비를 해가지고 일주일 만에 마쳤지만 일주일 동안 집회 가운데 첫날밤부터 예수 믿는 사람 손드시오. 많이 들어요. 아마 마칠 때까지 하면 몇 백 명 교회 부산 초량교회인데 본 교회가 600명가량 되는데 아마 새로 믿겠다는 사람 몇 백 명 될 것 같아요. 저녁마다 적었으니까 나도 첫날밤에 적었거든. 나 믿겠다고 그러면 6개월쯤 되면 학습을 받거든, 그래서 학습 받으라고 준비하고 오라고 하니까 저도 갔지요. 학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문답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청년들이 믿겠다고 했는데 둘밖에 없더라고 둘 밖에 나하고 어떤 청년하고 둘이 문답합디다. 그때 문답이 무엇이냐? 어찌해야 구원받습니까? 믿으면 구원 받겠지요? 조금 맞았지만 조금 틀렸소. 회개해야 구원 받아요. 안 믿고 어떻게 회개를 해요? 속으로 믿어져야 회개를 하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으니까 순서로는 회개가 먼저겠지요? 그렇지만 믿어질 때 인제 회개하고 믿고, 믿고 회개하는 거예요. 완전한 회개는 믿어짐에 따라서 완전한 회개지, 이것은 숨 끊어질 때 까지 회개해요. 인간은, 부활이고 죽고 살고 죽고 살고 죽어진 만큼 살아 겉 사람이 부패해진 만큼 날로 새로워져 날마다 회개요. 날마다 부활입니다. 신앙은 어제 회개 다했다 아니에요. 언제 다해? 아직 회개 시작도 않았어. 나는 자기 부정이 회개인데 자기부정 언제 했냐? 안했다고. 그러고 보니까 조금 보니까 그 청년마저 없데요. 안보여. 나오지도 않아. 그러고 보니까 아 그 집회는 내 영혼 건지려고 그랬다. 그때 말씀은 말씀조차 제목조차 첫날부터 제목조차 내가 생각하던 문제였거든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인생이란 무엇이냐? 이렇게 허망할 바에야 뭐 하러 났냐? 일찍 죽는 것이 좋지 한참 좋을 때 죽어버려야지, 나중에 결말이 이렇게 될 바에요? 뭐 하러 인생의 가치가 있냐? 그 인생관에 대해서 자나 깨나 생각이 그것뿐이야. 뭐 희망이 발견되지 않으면 차라리 자살해버리지 뭐 하러 사냐? 그 말이야. 뭐 하러 사냐? 이렇게 허망할 바에야 뭐 하러 인생의 가치가 어디가 있냐? 그랬던 참인데 그날 밤에 가서, 모든 만물이 목적이 있는데 성경 하나 봐요, 시편 119편 91절 이에요. 처음 들었어도 그 말씀은 잊어버리지 않아 어찌 내게 적절한 말씀이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않아요? 또 하나는 빌립보 1장 11절이고 그때 성경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그럴 때인데요. 읽어봐요.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라.’ 공동번역에는 ‘만물이 주의 여종이라’ 그랬어요. 여종은 낳으니까 사람을 낳아 주니까 생산해 만물이 주의 여종이라. 천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사라고 계속 하겠습니다만 천사가 무엇이냐? 만물이 흙덩이도 천사야 천사, 흙덩이 흙속에 지금 고구마 들었을라나 몰라. 이파리 두어 개 붙은 것 끊어가지고 땅에다 묻어 놓으면 가을에 캘 때 머리빡만한 것 캐 어떤 것 은 언제 한번 보니까 7관 5백, 그것을 3년을 심으니까 7관 5백 몇 메가 나오더라고. 그렇게 커버려. 고구마 순 쪼그만 것에서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종노릇을 했냐? 하나님의 천사가 천사들이 하나님이 시켜서 천사들이 흙을 이용해서 흙속에서 키웠다고, 농사도 농부가 지은 것 아니에요. 천사들이 지어요. 그래 농부들이 천사 대리를 했지요?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니까 이 집회에서도 내게 어떤 영혼에게 말씀을 받아요. 그러면 그 영혼 하나를 위해서 집회가 된 거예요. 다 받았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 집회에는 내 영혼, 실증을 보라. 책만 보지 말고 책에서 찾지 말고 실증을 보라. 그래서 그 정신환자 자기도 그 병에 들었던 그 정신환자 법적으로 경우대로 따지면 두들겨 맞는다고 맞아. 그분보다 더 낮아지고 내려가서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독거리면 누그러진다고요. 목욕도 세수도 안하려고 그래, 더 낮아져, 낮아져 참 겸손해. 그러니까 천사다. 천사 복음이다. 그것이 복음을 봤어. 복음이 무엇이냐? 그것이 복음이다. 말이 아니야. 복음은 말이 아니고 실 사랑의 역사다. 하나님의 역사가 복음이다. 사명의 역사다. 사랑이 거기 있다. 더 낮아지고, 낮아지고 다른 자매는 가서 약을 사려고 하니까 약이 많으니까 한보따리야. 벌써 거기가면 한보따리 온다. 그런다고, 그래도 순서가 어찌 지혜 있게 잘하니까 사람이 모두 일등으로 앞으로가라고 그냥 경우대로 하려면 아무개 좀 약 좀 줘야 쓰겠어요. 안된다고 탁 거절할 텐데 가서 어린양을 하고 또 그이가 말 안 들으면 더 높은 사람한테 가서 더 어린양을 하고 재미가 있거든. 그거 타가지고 온다고 그렇게 하는데 저기서는 자매는 환자들 세수나 시켜주고 그렇게 하지, 약 사러 가지 말라고 다른 사람은 약을 잘 못 사오는데 멸시만 받고 와서 창피하다고 그러는데 탁탁 거절해 버리니까 창피하지요. 그렇지만 이이는 잘 타와. 그것 잘 타오는 것뿐만 아니라 버스를 타면 그때가 기도하는 시간이라고 참 하나님 만나서 기도하는 시간이라고 그러고 가서 목적지가서 어떻게 내리나 몰라. 그런데 가서 알려주신다고 그래, 산 복음이에요. 이것이 산 복음을 목격했어요. 환자 자매에도 그렇고 그러면 일찍 죽으려고 말라.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 내 생각은 그렇지요 그러면 그 자매 환자 당사자 자매가 거기서 겸손해지고 그 은혜를 깨달아진 만큼 그 수종을 든 사람이 성녀가 돼. 노인들 나는 피해만 돼. 피해만 돼. 어서 죽어버려야 돼. 남에게 폐 안 끼치려면 죽어버려야 돼. 그것 조금 오해에요. 생명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은혜를 받으라는 것인데 자기 생각이야. 아이고 나 죽어야 한다. 안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 마지막 말씀도 그러지 않았어요? 하도 고통이 심하니까 언니가 어서 죽었으면 좋지 않아? 나도 못 보겠네. 곁에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대로는 더 오래살고도 싶지 않고 일찍 죽고도 싶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몇 조금 보태면 몇 만 년을 살게 하더라도 감사할 것뿐이다. 곧 데리고 가셔도 감사, 일평생 병중에 있어도 감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그 병중 에서 또 그럴수록 그 병중에서 천국사리를 하니까 영적으로 고통으로 못 견디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받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자유로 이랬으면 좋겠다. 그거 욕심이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함으로 그 수종을 드는 사람을 깨우칠 수 있다. 하나님은 본인은 물론이지만 그 수종꾼들의 영혼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섭리로 봐야 되요. 그러니까 겸손만 해주면 나가요 내가 자유로 교만하면 무엇에 써요? 내 마음대로 착착 자유해가지고 선도 행하고 남도 구제하고 교만하면 무엇 하겠어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바보천치라도 겸손해지면 하나님이 받지만 교만하면 다 틀렸다고 전 세계 인류를 다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도 없지만 막상 그렇게 해줬다하더라도 그만큼 자기 영혼은 얼마나 교만할거냐 말이야. 소용없어요. 모든 재산을 다 바치고 자기 자신마저 화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사랑 없을 수 있거든요. 그거 소용없는 거예요. 우리는 선의 표준을 인간계에서 찾는다고 아니에요. 선의 표준은 사람이 못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여야지 인간 자기 생각에서 선 그건 죄에요. 인간이 보기에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는 정 반대라는 거야. 세상 행복이 영적 행복과 정 반대야. 가장 멸시천대 받는 것이 큰 영광이고 가장 높아지는 것이 천한 것이고 낮아질 것이고 정반대로 세상 행복과 영혼의 행복과는 정 반대에요. 세상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과는 정 반대란 말이야. 제일 멸시천대 받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만합시다.

그 다음에 마리아의 노래,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 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불효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신 것입니다. 꿈을 상실한 낙관주의자보다 낫다. 염세주의자 일지라도 세상은 모든 것이 싫어서 피하고 숨고 그럴지라도 꿈을 상실한 낙관주의자보다는 낫다. 꿈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꿈이 있어야 한다. 희망을 말한 거야. 희망 희망을 성경에서 찾아봐요. 신구약에 많아요. 그렇지만 구약에서 먼저 봅니다. 예레미야 여기서부터 봐야지요. 스가랴 9장 9절서 12절, 제가 봅니다. 구역으로 봐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절,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 마병 말을 끊겠고 세상 모든 무기,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요. 그의 전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절,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모았나니, 갇혀있다. 진리에 딱 붙잡혀있는 사람들입니다. 감정을 스스로 억제한 사람들이에요.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소망을 품었다. 소망을, 소망 없이 갇힌 것은 그것은 참 비참한 일이지만 소망을 품고 갇혔으니까 더 희망이 확실해 진다고요.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갚아주겠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 확실한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 이르노니 내가 배나, 배나 네게 갚을 것이다.
이것은 공동번역 이고요. 예레미야 31장 19장서부터 볼까요? 예레미야 29장 11절 10절서부터 읽겠습니다. 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벨론에서 70년을 다 채운 다음에야 약속대로 나는 너희를 찾아가 이곳으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희에게 어떻게 하여 주는 것이 좋을지 나는 이미 뜻을 세웠다. 나는 너희에게 나쁘게 하여주지 않고 잘하여 주려고 뜻을 세웠다. 우리가 어떤 감정적으로 아주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려운 문제에 부닥쳤다고 생각할 때 그럴 때는 기쁜 소식, 좋게 해주려는 하나님의 섭리다. 그렇게 봐요. 그 문제가 그 어려운 문제를 통해서 내 영적 문제가 신앙적인 어떤 문제가 탁 풀린다면 그렇게 좋은 일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사건들은 다 축복이에요. 육적으로는 다 불리한 것 같지만 육적으로 불리할수록 그건 영적으로 다행한 길이 열린다는 뜻이에요. 나는 너희에게 나쁘게 육으로는 나빠요. 나쁘게 하여주지 않고 잘하여 주려고 뜻을 세웠다. 밝은 앞날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밝은 앞날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12절, 나를 부르며 나에게 와서 빌기만 하여라. 기도로 그렇게 하면 들어주리라. 마침내 너희는 일편단심으로 나를 찾게 되리라. 지금 예수를 찾아본다. 열심히 찾아본다. 일편단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일편 다심입니까? 다심이야. 다심, 이것도 좀 찾아보고 저것도 좀 찾아보고 그렇게 일편단심으로 나를 찾게 되리라. 그렇게 나를 찾으면 일편단심으로만 찾으면 아무 다른데 마음 내키는데 없이 매인데 없이 오직 주님을 찾는 데만 오로지 전심전력 그렇게 찾으면 내가 만나주리라. 만나주리라. 그래 여기서 좀 찾아보다가 안 만나지면 또 저기서 찾아보다가 늘 그러면 못 만나, 일편단심이라야 돼. 똑똑히 일러둔다. 너희는 나를 만날 것이며 나는 너희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너희는 나에게 쫓겨 세계만방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왜 세계만방에다가 흩어버렸을까? 왜 그랬을까? 거기서 회개할 때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때 부르시려고, 여기 동광원에 모여 살아도 회개하지 않으면 싹 흩어버릴 거라고 하나님께서, 거기 가서 참으로 내가 그것을 왜 그렇게 몰랐던가? 참 거기가 내 영혼의 집이었었는데 왜 몰랐던가? 그러고 후회 하고 후회하고 뉘우치고 돌아온다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회개 안하면 그런단 말이야. 회개했다하면 지금 이렇게 살겠어요? 회개했다면 그냥 천국에 살지 회개했다면 무엇이 문제가 있겠냐 말이야. 그냥 그대로가 생활이 전부가 천국이지 무엇 다른 것이 있겠냐 말이야. 회개를 안했다는 증거야. 모두 문제가 있고 얽히고설키고 그것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은 회개를 안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못 만났다는 증거이고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나를 부르며 나에게 와서 빌기만 하여라. 그렇게 하면 들어주리라. 마침내 너희는 일편단심으로 나를 찾게 되리라. 그렇게 나를 찾으면 내가 만나 주리라. 똑똑히 일러둔다. 너희는 나를 만날 것이며 나는 너희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너희는 나에게 쫓겨 세계만방에 포로가 되었어요. 각국에 잡혀가 버렸어, 포로로 끌려갔지만 나는 너희를 거기에서 어디에서 포로로 끌려간 나라에서 회개하면 뉘우치면 거기에서 모아들인다. 여러 나라로 쫓아버렸는데 거기에서 모아들인다고 모아들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건 한국 사람이 어느 나라에 제일 많이 갔어요? 일본인가요? 미국인가요? 나는 모르겠네. 하여간 미국도 상당히 많이 갔다고, 그런데 거기에서 회개하면 도로 싹 돌아오지 않겠어요? 그러나 몸이 그 말 아니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그렇게 돌아온다고 지금 이스라엘에서 하지만 지금 그대로면 싸움만 계속하지 않아요? 우리 영혼의 나라이지, 영적 나라이지 육체 땅에 있는 나라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은 세상이지만 세상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다.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있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 너희 마음속에 있다. 심중천국이란 말이야. 땅에다가 하늘나라 나라이 임하옵소서. 하니까 땅에 하늘나라 자기 안에 하늘나라를 이룬 사람은 그냥 땅에가 하늘나라에요. 그런 데가 성경에 어디가 있어요? 에베소 2장 5절 6절이요. 제가 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 주셨습니다. 앞으로 미래사가 나이에요. 벌써 과거사로 되어있어요. 하늘에 하늘나라에서 한자리에 앉혔다. 그러니까 지금 하늘나라를 이룬 사람은 땅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거야.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어요. 미리 영원한 하늘나라도 가겠지만 지금 이대로 계속이야. 계속 몸만 갈릴 때가 있을 뿐이지 마음에는 계속이다. 하늘나라 땅에서 자기 안에서 지옥도 있고 연옥도 있고 천국이 있어요. 무엇이냐? 지옥은 믿지 않는 마음이 지옥이야. 지옥살이 항상 죽겠다. 죽겠다. 그렇지요? 항상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지옥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인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해서 모셔 들여서 믿게 되면 자기는 없으니까 그리스도와 일단 한번 연옥 생활을 한다. 연옥이란 무엇이냐? 단련, 지옥을 벗어나는 단련 죄를 떠나는 훈련, 그것이 떠나진 만큼 죄는 자기가 지으니까 죄가 없어 진만큼 천국이 가까웠다고 예수께서 너는 하늘나라가 멀지않다. 가까워졌다. 어떤 사람보고 그랬어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제일 되는 계명이라고, 아 그쯤 알았으면 가까웠다. 아직 하늘나라는 아니지만 이루어지지는 않았어도 가까웠다. 그쯤 마음을 다하고 몸까지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나선 사람은 가까워져 자꾸 단련이 된 만큼 자기가 부정이 된 만큼 겉 사람이 부패된 만큼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져, 그것이 하늘나라에요. 죽은 뒤에 하늘나라 간다고만 생각하고 멋대로 살아버리면 그것 아니에요? 그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소망은 하나 더 보지요. 예레미야 31장 16절 17절 봅니다. 저들이 적국에서 돌아오리라. 원수의 나라에서 돌아온다. 회개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밝은 앞날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 자식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그랬어요. 이것은 소망이라는 말은 없지만 그냥 읽었으니까 한번 이사야 57장 15절이에요. 여기는 14절서부터 되어있네요. 위로의 약속, 또 말씀하신다. 길을 훤히 닦고 또 닦아라. 내 백성이 갈 길에서 걸림돌을 치워버려라. 우리 지금 신앙으로 앞으로 전진 해 나아갈 길이 걸림돌이 많아요. 그 무엇일까요? 제일 큰 돌이 무엇일까요? 자기지요? 자기, 지극히 높으신 이 보좌에 영원히 앉아 계시는 이 거룩하신 분이라 불리는 이께서 말씀 하신다. 나는 높고 거룩한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아주 높고 거룩한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도 누구하고 같이 살기를 좋아하시냐? 얻어맞은 사람, 얻어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하고 함께 살기를 원해요. 여기 아마 별로 얻어맞은 사람, 더러 육이오 때 아마 김 장로님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만 그러니까 돌아오는지도 모르지요. 얻어맞아, 애매히 얻어맞았단 말이야. 잘못해서 맞을 것이야 분명히 맞아야지요. 그렇지만 잘했는데 맞아, 얻어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잃은 용기를 되살려 준다. 잃은 용기는 그때 그 잃어버린 용기는 잃어버렸지만 다시 생기는 용기는 새것이지요. 새것 잃은 용기를 되살려주고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리라. 내가 언제까지나 따지기만 하랴, 조금 장로교에서는 따지기도 했지만 노여워하기도 하시고 매도 때리기도 하셨지만 그러니까 예수님에게다가 마지막으로 매 때려버리지 않았어요? 내가 언제까지나 따지기만 하랴. 항상 노여워하기만 하랴, 사람은 나에게서 용기를 얻고 나에게서 생명의 숨길을 받는다. 그들이 너무 못되게 욕심을 부림으로 나는 성이 났다. 화가 나서 그들을 치고 얼굴을 돌렸다. 치기는 쳤지만 내가 더 아프다. 그랬을 거란 말이야. 그리고 배신하고 제멋대로 가버릴 때 그래도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사랑이란 말이야.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눈여겨보았다. 오늘 지금 멀리 멀리 사람 눈도 피해서 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못 속인단 말이야. 다 보았다. 내가 그들의 병을 고쳐주며 위로하고 한껏 격려해주리라. 슬피 울던 입술에서 19절입니다. 아까 얻어맞고 말이야. 슬피 울던 입술에서 이런 찬미가가 터져 나오리라. 이런 찬미가 터져 나오게 하리라. 태평천하일세. 태평천하일세. 멀리도 가까이도 태평천하일세. 야훼께서 약속해 주셨다. 내가 너를 고쳐주마. 그만치 희망에 대해서 보고 신약에는 많이 있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만 책을 읽다가 성경을 보니까 시간이 다 가버리고 이 두 가지 태도의 중간에 우리가 취해야할 유일하고도 현명한 진로, 앞으로 진행할 길이 있다. 그러면 두 가지 길이 무엇이 있지요? 여러분이 봤지만 회의주의 염세주의 또 꿈도 없는 낙관주의, 꿈은 가져야해요. 회의주의가 되었던지 염세주의가 되었던지 꿈은 가져야 될 텐데 꿈까지 없어져 버렸어요. 희망이 없어져 버렸어요. 우리는 희망을 갖은 만큼 힘 있게 사는 겁니다. 다른 것 조금 다 부족해도 좋아요. 그렇지만 약속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내가 약속을 지킨다. 지키며 간다. 부정한데서 나오라. 회개하라 말이야. 약속을 지키는 것은 회개하는 겁니다. 회개, 그래 이 두 가지 태도 중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하고도 현명한 진로가 있다. 그것은 예수가 성전에서, 이것은 성경 안 봤습니다만 삼일간이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마리아가 취한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통과해야 한단 말이에요. 거기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2장이지요. 누가복음 2장 11절 12절, 제가 보고 갑니다. 오늘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시다. 그 구주가 말구유에 났단 말이에요. 구유에 소 우릿간에 구유에 났어요. 너희는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라고 말했다.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가지고 방도 아니고 짐승 우릿간에 비가 철철 새는 소도 가난한 집에 우릿간에 태어나서 부자일 때는 소도 키웠는데 가난하니까 소도 못 키워서 지붕이 다 새고 말이야. 아주 보잘 것 없는 곳이란 말이야. 차마 곧 뜯으려다가 놔뒀어. 뜯을 사람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놔뒀는데 그런데다가 형편없이 가난한 얼마나 형편없이 가난했던지 여관에도 못 들어가고 돈이 있어야지요. 그러니까 애기는 낳아야겠고 다급하니까 거기에다 낳았단 말이야. 그 아기가 구주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냐 말이야. 그것이 구주라는 것을 알아보는 표라는 거예요. 표 그런데 이것은 감정적인 인간의 타락 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그 구주라고 알아볼 사람이 있겠습니까? 성령이 통하지 않고는 성령이 가르쳐주지 않고는 어떻게 알겠냐 말이야.
그것도 문제인데 여기는 책에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고 예수의 수난 소년시절 거기 41절서부터 나오는데 봅시다. 해마다 유월절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려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가 12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런 줄도 몰랐어요. 그런 줄도 몰랐다. 따라오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때는 좀 하루길인데 말이야. 아침부터 저물도록 나서서 가야하는 하룻길인데 그렇게 오도록 어째 뒤를 안돌아 보는가 모르겠어요. 그래서 집에 다 오고 보니까 안 따라 왔어.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일행 중에 끼어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를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음으로 줄 곳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어요. 그러니까 사흘이 꼬박 걸렸단 말이야. 하룻길 길은 하루길인데 사방 찾자니까 친척집 친척이란 데는 갈만한데는 다 찾아 가봤어. 또 어디 아는 집에는 다 찾아갔다. 그러니까 사흘이나 걸렸어요. 줄 곳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사흘 만에 사흘 만에 그랬어요. 이 책에는 나흘 만에 그랬어요.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그 율법학자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 있어서 묻겠어요? 하나님이신데 무엇을 묻겠어요? 그런데 묻는 것은 어쩌자는 거예요? 가르쳐 주자는 거예요. 너희 모르지 않느냐 말이야. 그러니까 묻는 것은 너희가 얼마나 아는가? 너희 스스로 알아봐라. 모른다. 그러니까 진리의 문답을 했다. 진리와 조금 그러니까 12살 쟁이 인데 그런 신학자들하고 율법학자들하고 대화를 한단 말이야. 대화, 주고받고 이건 하나님이야. 그리고 그래도 하나님인줄을 몰랐을 거예요. 아 보통 어찌 이렇게 훌륭할까? 우리들도 모르는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했어요. 놀랬어요. 천재라, 바로 거의 하나님 가깝다 말이야. 경탄하고 있었다. 그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왜 놀래요? 기뻐서 놀랬지요? 기뻐서 놀랬지요? 너무 기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얼마나 너를 찾느라 고생했느냐 말이야.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얘야 놀래기는 놀랬는데 얘야, 왜가 나와요? 왜 우리 일본사람들을 조금 나쁘게 말하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왜놈 난쟁이 키가 작다. 지금은 키가 커요. 왜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나와 네 아버지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했다. 어째 12살쯤 되면 그만큼 철이 들었어야 할 텐데 부모가 너를 안 찾을 줄 알았냐?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잃어버리고 안 찾을 부모가 어디 있겠냐 말이야. 왜 그렇게 철이 없냐? 나무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배웠는가? 또 왜? 그러자 예수는 왜? 왜? 내일 낮에는 해방 기념일이라고요. 왜 사람들이 왜 사람들이 36년 붙들고 잘 가르쳤지요. 다 좋은 일 했어요.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 집에 아버지 집에, 또 그전 성경 같으면 천주교서 보는 성경 같으면 아버지 집에 일이 있는 곳에 아버지 일이 있는 내 집에 우리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모르십니까? 손으로 가슴을 칠일이야. 답답해요. 서로 답답해. 그러면 우리 조금 안 됐지만 누가 잘잘못을 누가 잘못했는가? 한번 봅시다. 누가 잘 못했습니까? 누가 잘못했어요? 인륜상으로 보면 예수님이 잘못했어요. 천륜으로 보면 어머니가 아직 미달이에요. 몰라. 그러면 우리는 인륜 따라 가는 것 아닙니다. 천륜 따라 가야지요. 믿는 사람은 예수님만 관계를 해야지 우리들 고기 덩어리하고 짝해서는 안 되어요. 인간끼리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어요. 천륜은 사명과 관련을 맺는 것 아닙니까? 인륜은 사람끼리지요. 부모형제 모두 인륜 아닙니까? 인륜도덕 인륜도덕을 잘 지켜서 구원이 되요. 예수님의 교훈은 정반대 아니에요? 다 버려라. 다 버려, 설교가 인륜 도덕설 그러면 성경 안 봐도 도덕성 더 좋은 것 쌓였는데 성경은 도덕성이 아니에요. 하늘나라 천국 복음이에요. 땅의 일이 아니에요. 하늘나라 기쁜 소식이에요. 죄인만이 죄인일수록 희망을 갖은 복음이에요. 죄를 많이 깨달은 영혼일수록 큰 희망을 주는 복음이에요. 의인은 상관없어요. 세상에 똑똑하고 잘사는 사람들은 성경 상관없어요. 필요 없어요. 예수하고는 상관없는 거예요.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에요. 암만 기독교 간판 정통이라고 붙였다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복음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50절,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만큼 미흡해요.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가 모른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의 태도를 취한다. 이것이 기회다. 염세주의나 회의주의나 낙관주의나 다 아니지만 거기 중간에 취할 길이 무엇이냐? 마음에 두는 것. 51절이지요, 예수는 부모를 따라나섰음으로 그랬지만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몰랐습니까? 그래버렸으면 그러면 안 따라오셔야 되지 않아요? 그래 인제 30년 더 살고 33년까지 할 일이 있거든요. 그런데 12살 밖에 안 되니까 미리 나중에 맞출 일까지 미리 다 이야기 하신 것이고 또 예수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데만 계시는 것이지 그래 우리 믿는 사람도 항상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둬야지 내 생각 내 뜻 가져서는 안 된단 말이야. 믿는 사람이라면 그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받아들여야지, 자기 뜻은 버리고, 갈멜 산길이라는 십자가의 요한께서 그렇게 설명했어. 내가 그대로 기억 안 되도 변화해요. 변화 여기에 나와요 변화 변(變)자는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이 변이고 화(化) 는 이제 있어 있던 것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무엇이 있는가? 있던 것을 자기 뜻이 있던 것은 없어지고 인제 무엇이 있냐? 화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 자기 뜻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자기 뜻이야. 그래가지고 하나님으로 변화된다는 거야. 그리스도로 변화된다는 거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바로 그리스도가 된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실천한다고 몸으로 사실 때 실천 한다고, 변화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순종하며 살았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순종해 따라오니까 52절에 그 어머니는 51절에 있고 만요.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것이에요. 이 점이에요. 지금 확실히 해결이 안 되도 이해가 안 되어도 신앙을 품고 인제 약속대로 내가 그 과정을 치러 가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그 확신을 믿어야지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믿음과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간직하였다. 이 길이에요. 예수가 성전에서 삼일간이나 행방불명되었을 때에 마리아가 취한 길이다. 우리가 마음에 간직한 그것도 아직 확실히는 이해 안 된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 승천하실지 그것은 시간은 모르지만 사도요한의 집으로 가서 사도 요한의 집에서 마쳤지 않습니까? 예수의 십자가 진 뒤에 어머니를 사도요한에게 사도들을 대표로 네 어머니다. 이것은 당신의 아들이다. 당신은 아들 노릇은 다했으니까 그러니까 사도요한에게 그러면 믿는 사람 대표에요. 믿어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저같이 거짓으로 믿는 것 아니고 참으로 믿는 사람은 내 어머니가 되어요. 마리아에게는 예수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누구에게도 이것을 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누군가의 삶이다. 왜 자기 아들이 왜 그렇게 자신들을 애태웠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삼일간이나 찾아 헤매다가 4일째 되던 날, 저는 그전에 이 책을 보기 전에는 이런 정도로는 생각했습니다. 삼일 만에 찾았다. 그러면 우리 성령으로 거듭난 연혼 부활이란 말이야. 부활을 체험하는 영혼에게 예수가 찾아진 것이다. 만난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영혼 김 선생 같은 체험한 영혼은 만난 것이에요. 확실히 만나서 같이 사는 거란 말이에요. 3일이라는 것은 성경에 많이 있어요. 부활 의식과 무슨 경건한 모양 그것은 아무리 경건한 모양의 의식 예배를 드리고 그런 것이 말할 수 없어. 친지 신앙 동지들 막 모아서 토론하고 무엇 하고 무엇하고 해서 예수를 만나지는가? 아니에요. 개인 개인이 완전히 옛사람은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신 예수와 부활을 체험할 때 그때 예수와 같이 산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3일 동안 계속 이유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3일 동안 계속될지 모르고 혹은 3년이 될지도 모른다. 3년이 되겠습니까? 또 제대로 된다면 3일 만에 되겠지요?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신앙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신앙생활 낙심해서는 안 돼. 신앙이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확실히 다 이해한 것 아니에요. 다 알았다고 할 수 없어요. 이해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것,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 어차피 나 같은 것이 뭐 알겠냐? 그러고 아주 이해 안하려고 해버린다고요.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알게 되어있는데도 알려고도 안 해. 애당초 뭐 나 같은 것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니까 예수 믿지 그러면 무엇 하는가? 예수 믿으면 좋은데 무엇 하는가? 자기 욕심대로 다 살면서 그것 하지 말고 믿어야 할 텐데 하면서 믿는다고 하는 거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란 이해하려는 것이다. 신앙이란 알았다.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아 깊은 뜻이 있다고 하는데 내 머리로는 안 되겠다. 더 좀 더 밝아지고 더 좀 더 회개를 철저히 하고 해야지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안 된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냐? 진리니까 내 머리로는 모르지요. 진리니까 성경이 왜 성경이냐? 내가 모르니까 성경이야. 내가 알면 성경이겠는가? 내 책이지,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지, 모르니까 성경이다. 나 같은 것이 모르니까 성경이다. 성령이 이끌려서 썼으니까 성령이라야 알아지지, 내 생각으로는 모릅니다. 그것에는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 한다고 자기에게 타이르는 것이다. 스스로 어떠한 의미가 있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성급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저는 모르니까 스스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고 말도 해보고 하는데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말 안 해요. 그러니까 이 선생은 깨달은 분이라고 믿기는 하지 깨달았는지 확실히는 몰라도 깨달은 분이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그렇게는 했어요. 그러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만 그런 뜻은 있겠지, 그래 나는 그분에 대해 다른 오해는 안 해. 아무리 내가 이해가 안 돼. 안 되어도 뜻이 있지만 내가 미련해서 못 본 것이고 내 눈이 어둡지, 왜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아요. 누구든지 한번 그 인격을 믿었으면 지금 아닌 듯이 나타나도 너는 하지 말라는 그런 것 내 교훈이지 그 사람이 왜 그럴까 그것 아니에요. 그거 믿은 것 아니에요. 인격으로 인격적으로 교제라는 것 그것 아니에요. 아무리 다른 사람이 그 사람 잘못이라고 도적놈이라고 욕해도 그분 참 애매한 소리다. 상 받겠다. 그래 이해하고 믿어주는 거야. 신앙적인 인격적인 교제라는 것은 무조건 믿어주는 거야.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래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누구든지 자기가 예수로 본답니다. 그거 예수 아니겠소? 다 지체니까 왜 불평하고 싸우느냐? 지체로 모르니까 그렇지 율법은 항상 너 나 다투거든, 갈라지고 그렇지만 복음은 하나니까 다 한 몸이야. 교파도 없어, 국경도 없다. 다 한 몸 예수의 지체니까 한 몸이야. 나만 예수의 지체인가 아니다. 제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예수의 지체이다. 어제 보니까 제일 모두 미쳤다고 비난하고 지금도 신용안하고 그렇지만 참 천사다.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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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2

麦酒とテポドン / 文 聖姫【著】《ムン/ソンヒ》



麦酒とテポドン / 文 聖姫【著】《ムン/ソンヒ》 - 紀伊國屋書店ウェブストア







個数:
電子版価格 ¥726


平凡社新書
麦酒(ビール)とテポドン―経済から読み解く北朝鮮

文 聖姫【著】《ムン/ソンヒ》

価格 ¥924(本体¥840)
平凡社(2018/12発売)
ポイント 8pt


サイズ 新書判/ページ数 256p/高さ 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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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容説明

市場経済への移行が起こり得ないケースとして、北朝鮮を挙げるむきがある。果たして本当にそうか。朝鮮新報記者、研究者としてたびたび訪朝し、農民市場や工場・企業の調査、市民からの聞き取りなどを行ってきた著者が描く、リアルな北朝鮮。押し寄せる市場経済化の中で何が起きているか。「大同江ビール」は改革・開放の象徴になるか。文在寅政権下の韓国との経済協力は進展するか。
目次

第1章 市場経済化の波は止められない
第2章 経済から読み解く金正恩体制のゆくえ
第3章 北朝鮮の人々
第4章 大同江ビールと改革・開放
第5章 ブラックアウト、消えた電力
第6章 南北経済協力と文在寅政権
第7章 核開発とミサイル
著者等紹介

文聖姫[ムンソンヒ]
1961年生まれ。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韓国朝鮮文化研究専攻博士課程修了。博士(文学)。専門は北朝鮮の政治・経済と市民社会。朝鮮新報記者を経て現在は「週刊金曜日」編集部在籍(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書籍に掲載されている著者及び編者、訳者、監修者、イラストレーターなどの紹介情報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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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版社内容情報

もはや厳格な社会主義計画経済ではなく、経済の市場化が止まらない北朝鮮。農民市場や工場などの実態を通して等身大の姿を描くルポ。《概要》
市場経済への移行が起こり得ないケースとして、北朝鮮を挙げるむきがある。果たして本当にそうか。朝鮮新報記者、研究者としてたびたび訪朝し、農民市場や工場・企業の調査、市民からの聞き取りなどを行ってきた著者が描く、リアルな北朝鮮。
押し寄せる市場経済化の中で何が起きているか。
「大同江ビール」は改革・開放の象徴になるか。文在寅政権下の韓国との経済協力は進展する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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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ローグ
期待が絶望へ/二度の平壌特派員/平壌郊外に設けられた総合市場/記者から研究者へ

第一章 市場経済化の波は止められない
値引き交渉も/危機から生まれた経済改革/改革後退と「デノミ」の失敗
もう供給には頼らない/なくならない“必要悪”/バッタ市場からダニ市場に
動かない列車と“にわか市場”/「本当にコチェビ?」/インジョコギとイタリアン
地方で外食してみた/国定価格と市場価格

第二章 経済から読み解く金正恩体制のゆくえ
新興富裕層の台頭/一般市民に必要な路上商店/中国製品を追い出したいが
現場に経営権を委譲/金正恩は改革派?/進む農業改革/社会主義農業政策の崩壊
経済協力のパートナーは韓国から中国へ/経済特区は二四カ所もあるが……
労働力は貴重な外貨獲得手段/「冬季漁獲戦闘」と漂流船

第三章 北朝鮮の人々
取材の成否を握る案内員/運転手と案内員の壁/移動の自由
社会の変化表す女性のファッション/北朝鮮の人たちも「タイタニック」を見た
腕を組むカップルが増える/当局も黙認する副業/北朝鮮で最も有名なアナウンサー
間食として配給されるロッテのチョコパイ/学者はつらいよ/中国の改革・開放政策から学ぶ?

第四章 大同江ビールと改革・開放
ビールは南より北/スピード普及の背景にビアホール/平壌ホテルでカクテルを飲む
北朝鮮にも爆弾酒?/夏恒例になるか、ビールの祭典/缶ビールも登場、輸出を目指すが
幻に終わった米国への輸出/改革・開放のシンボルとなるか

第五章 ブラックアウト、消えた電力
消えた(?)北朝鮮/七〇年前、北朝鮮は韓国に電力を送っていた
国章に描かれた水力発電所/極秘資料から見えてくるもの/なぜ軽水炉を望んだのか
慢性的電力不足の“助っ人”/平壌専用の熙川発電所
中国は本当に石油輸出を中止したのか

第六章 南北経済協力と文在寅政権
七〇年代に逆転した南北の経済関係/きっかけは水害支援/二つの首脳会談と経済協力
金剛山観光と開城工業団地/保守政権下で後退/新「ベルリン宣言」
経済協力復活なるか?/鉄道・道路の連結が改革・開放へつながるか?
一五万平壌市民の前で演説した文大統領

第七章 核開発とミサイル
中国、最初の核実験/マッカーサーと核兵器/核とミサイルにこだわる理由
核開発は経済のため?/進化した核・ミサイル能力/映画にもなった「核実験」
非核化は実現するか?/史上初の米朝首脳会談/北朝鮮の本気度

あとがき
北朝鮮関連年表
参考文献


文 聖姫[ムン ソンヒ]
著・文・その他

Spiritual but not religious - Wikipedia



Spiritual but not religious - Wikipedia

Part of a series on Spirituality


Out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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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 but not relig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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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 non-Western[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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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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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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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 but not religious" (SBNR), also known as "Spiritual but not affiliated" (SBNA), is a popular phrase and initialism used to self-identify a life stance of spirituality that takes issue with organized religion as the sole or most valuable means of furthering spiritual growth. Historically, the words religious and spiritual have been used synonymously to describe all the various aspects of the concept of religion,[1] but in contemporary usage spirituality has often become associated with the interior life of the individual,[2][1] placing an emphasis upon the well-being of the "mind-body-spirit",[3]:63 while religion refers to organizational or communal dimensions.[1]


Contents

1Origins and demography
2Characteristics of SBNR
2.1Anti-institutional and personal
2.2Categorization of SBNRs
2.3Practices
3Criticism
4See also
5Notes
6References
7Sources

Origins and demography[edit]

Historically, the words religious and spiritual have been used synonymously to describe all the various aspects of the concept of religion.[1] However, religion is a highly contested term with scholars such as Russell McCutcheon arguing that the term "religion" is used as a way to name a "seemingly distinct domain of diverse items of human activity and production".[4] The field of religious studies cannot even agree on one definition for religion and since spirituality overlaps with it in many ways it is difficult to reach a consensus for a definition for spirituality as well.[5][note 1]

The specific expression was used in several scholarly works, including an anthropological paper in 1960[6] and in Zinnbauer et. al's seminal paper "Religiousness and Spirituality: Unfuzzying the Fuzzy."[7]. SBNR as a movement in America was delineated by author Sven Erlandson in his 2000 book "Spiritual but not Religious".[8][9][10] The phenomenon possibly started to emerge as a result of a new Romantic movement that began in the 1960s, wherea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has been remotely linked to William James' definition of religious experience, which he defines as the "feelings, acts and experiences of individual their solitude, so far as they apprehend themselves to stand in relation to whatever they may consider the divine."[11] Romantic movements tend to lean away from traditional religion and resemble spiritual movements in their endorsement of mystical, unorthodox, and exotic ways.[12] Owen Thomas also states that the ambiguity and lack of structure present in Romantic movements are also present within spiritual movements.

According to a study conducted by Pew Research Center in 2012, the number of Americans who do not identify with any religion has increased from 15% in 2007 to 20% in 2012, and this number continues to grow. One fifth of the US public and a third of adults under the age of 30 are reportedly unaffiliated with any religion but identify as being spiritual in some way. Of these religiously unaffiliated Americans, 37% classify themselves as spiritual but not religious, while 68% say they do believe in God, and 58% feel a deep connection to the Earth.[13]

Increased popular and scholarly attention to "spirituality" has been related by scholars like Pargament to sociocultural trends towards deinstitutionalization, individualization, and globalization.[14]

Generational replacement has been understood as a significant factor of the growth of religiously unaffiliated individuals. Significant differences were found between the percentage of those considered younger Millennials (born 1990–1994) as compared with Generation Xers (born 1965–1980), with 34% and 21% reporting to be religiously unaffiliated, respectively.[13]

Demographically, research has found that the religiously unaffiliated population is younger, predominately male, and 35% are between the ages of 18 and 29. Conversely, only 8% of religiously unaffiliated individuals are 65 and older. Among those unaffiliated with organized religion as a whole, 56% are men and 44% are women.[13]

Another possible explanation for the emergence of SBNR is linguistic. Owen Thomas highlights the fact that spirituality movements tend to be localized to English and North American cultures. The meaning of the term "spirit" is more narrow in English than that of other languages, referring to all of the uniquely human capacities and cultural functions.[15]

Yet, according to Siobhan Chandler, to appreciate the "god within" is not a twentieth century notion with its roots in 1960s counter culture or 1980s New Age, but spirituality is a concept that has pervaded all of history.[16]
Characteristics of SBNR[edit]
Anti-institutional and personal[edit]

According to Abby Day, some of those who are critical of religion see it as rigid and pushy, leading them to use terms such as atheist, agnostic to describe themselves.[17] For many people, SBNR is not just about rejecting religion outright, but not wanting to be restricted by it.[17]

According to Linda Mercadante, SBNRs take a decidedly anti-dogmatic stance against religious belief in general. They claim not only that belief is non-essential, but that it is potentially harmful or at least a hindrance to spirituality.[1]

According to Philip D. Kenneson, many of those studied who identify as SBNR feel a tension between their personal spirituality and membership in a conventional religious organization. Most of them value curiosity, intellectual freedom, and an experimental approach to religion. Many go as far to view organized religion as the major enemy of authentic spirituality, claiming that spirituality is private reflection and private experience—not public ritual.[18] To be "religious" conveys an institutional connotation, usually associated with Abrahamic traditions: to attend worship services, to say Mass, to light Hanukkah candles. To be "spiritual," in contrast, connotes personal practice and personal empowerment having to do with the deepest motivations of life.[18] As a result, in cultures that are deeply suspicious of institutional structures and that place a high value on individual freedom and autonomy, spirituality has come to have largely positive connotations, while religion has been viewed more negatively.[18]

According to Robert Fuller, the SBNR phenomenon can be characterized as a mix of intellectual progressivism and mystical hunger, impatient with the piety of established churches.[19]

According to Robert Wuthnow, spirituality is about much more than going to church and agreeing or disagreeing with church doctrines. Spirituality is the shorthand term used in Western society to talk about a person's relationship with God.[20] For many people, how they think about religion and spirituality is certainly guided by what they see and do in their congregations.[20] At a deeper level, it involves a person's self-identity—feeling loved by God, and these feelings can wax and wane.[20]

Categorization of SBNRs[edit]

Linda A. Mercadante categorizes SBNRs into five distinct categories:[21]
"Dissenters" are the people who, for the most part, make a conscious effort to veer away from institutional religion. "Protesting dissenters" refers to those SBNRs who have been 'turned off' religious affiliation because of adverse personal experiences with it. "Drifted Dissenters" refers to those SBNRs who, for a multitude of reasons, fell out of touch with organized religion and chose never to go back. "Conscientious objector dissenters" refers to those SBNRs who are overtly skeptical of religious institutions and are of the view that religion is neither a useful nor necessary part of an individual's spirituality.
"Casuals" are the people who see religious and/or spiritual practices as primarily functional. Spirituality is not an organizing principle in their lives. Rather they believe it should be used on an as-needed basis for bettering their health, relieving stress, and for emotional support. The spirituality of "Casuals" is thus best understood as a "therapeutic" spirituality that centers on the individual's personal wellbeing.
"Explorers" are the people who seem to have what Mercandante refers to as a "spiritual wanderlust". These SBNRs find their constant search for novel spiritual practices to be a byproduct of their "unsatisfied curiosity", their desire for journey and change, as well as feelings of disappointment. Explorers are best understood as "spiritual tourists" who take comfort in the destination-less journey of their spirituality and have no intentions of ultimately committing to a spiritual home.
"Seekers" are those people who are looking for a spiritual home but contemplate recovering earlier religious identities. These SBNRs embrace the "spiritual but not religious" label and are eager to find a completely new religious identity or alternative spiritual group that they can ultimately commit to.
"Immigrants" are those people who have found themselves in a novel spiritual realm and are trying to adjust themselves to this newfound identity and its community. "Immigrants" can be best understood as those SBNRs who are "trying on" a radically new spiritual environment but have yet to feel completely settled there.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for these SBNRs, although they are hoping to become fully integrated in their newfound spiritual identities, the process of acclimation is difficult and often disconcerting.
Practices[edit]

See also: Spirituality and New Age

SBNR is related to feminist spiritual and religious thought and ecological spiritualities,[22] and also to Neo-Paganism, Wicca, Shamanic, Druidic, Gaian and ceremonial magic practices.[22] Some New Age spiritual practices include astrology, Ouija boards, Tarot cards, the I Ching, and science fiction.[22] A common practice of SBNRs is meditation, such as mindfulness and Transcendental Meditation.[22]


Criticism[edit]

Some representatives of organized religion have criticized the practice of spirituality without religiosity. Lillian Daniel, a liberal Protestant minister, has characterized the
SBNR worldview as a product of secular American consumer culture, far removed from community and "right smack in the bland majority of people who find ancient religions dull but find themselves uniquely fascinating".[23] James Martin, a Jesuit priest, has called the SBNR lifestyle "plain old laziness",[24] stating that "spirituality without religion can become a self-centered complacency divorced from the wisdom of a community".[25]

Other critics contend that within the "Spiritual but not Religious" worldview, self-knowledge and self-growth have been problematically equated with knowledge of God, directing a person's focus inward. As a result,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forces that shape the world are neglected and left untended.[26] Further, some scholars have noted the relative spiritual superficiality of particular SBNR practices. Classical mysticism within the world's major religions requires sustained dedication, often in the form of prolonged asceticism, extended devotion to prayer, and the cultivation of humility. In contrast, SBNRs in the Western world are encouraged to dabble in spiritual practices in a way that is often casual and lacking in rigor or any reorganization of priorities. Sociologist Robert Wuthnow suggests that these forms of mysticism are "shallow and inauthentic".[27] Other critics take issue with the intellectual legitimacy of SBNR scholarship. When contrasted with professional or academic theology, spiritual philosophies can appear unpolished, disjointed, or inconsistently sourced.[28]

Wong and Vinsky challenge SBNR discourse that posits religion as "institutional and structured" in contrast to spirituality as "inclusive and universal" (1346).[29] They argue that this understanding makes invisible the historical construction of "spirituality", which currently relies on a rejection of EuroChristianity for its own self-definition. According to them, Western discourses of "spirituality" appropriate indigenous spiritual traditions and "ethnic" traditions of the East, yet racialized ethnic groups are more likely to be labeled "religious" than "spiritual" by white SBNR practitioners.[29] Wong and Vinsky assert that through these processes, colonial othering is enacted through SBNR discourse.

See also[edit]

Notes[edit]

^ According to Linda Mercandante, the concept of religion is a social construct, since in other eras, religion, culture, and even national identity were often inseparable. And as for spirituality, this is an old concept with a new usage.[1] Previous to today’s era, what people today call spirituality was often called piety.[1] Mercadante sees religion as a complex adaptive network of myths, symbols, rituals and concepts that simultaneously figure patterns of feeling, thinking, and acting and disrupt stable structures of meaning and purpose.[1] When understood in that way, religion not only involves ideas and practices that are manifestly religious but also includes a broad range of cultural phenomena not ordinarily associated with religion.[1] Many people use spirituality to refer to their interior life of faith and religion to mean the necessary communal and/or organizational part.[1] Mercadante sees both spirituality and religion as consisting of four basic components: beliefs, desire, rituals, and behavioural expectations, but across the field of Religious Studies the definitions vary.[1]

References[edit]

  1. ^ Jump up to:a b c d e f g h i j k Mercandante 2014.
  2. ^ Carette and King, Selling Spirituality, 41.
  3. ^ Paul Heelas (21 January 2009). Spiritualities of Life: New Age Romanticism and Consumptive Capitalism. John Wiley & Sons. ISBN 978-1-4443-0111-3.
  4. ^ McCutcheon, Russell T. (2010-12-01). "Will Your Cognitive Anchor Hold in the Storms of Culture?".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78 (4): 1182–1193. doi:10.1093/jaarel/lfq085. ISSN 0002-7189.
  5. ^ "Critical Theory and the Importance of Religious Studies". Bulletin for the Study of Religion. Retrieved 2015-12-06.
  6. ^ Publications in Anthropology, 1960. 1960.
  7. ^ Zinnbauer et al. 1997 Journal for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Volume 36 No. 4 pp. 549-64
  8. ^ Erlandson, Sven (2000). Spiritual but Not Religious: A Call to Religious Revolution in America. Bloomington: iUniverse. ISBN 05950110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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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Spiritual but Not Religious: The Movement". 2017-11-13.
  11. ^ Kenneson, Philip D. (July 2015). "What's in a Name? A Brief Introduction to the "Spiritual But Not Religious"". Liturgy. 30 (3): 8.
  12. ^ Thomas, Owen (January 2006). "Spiritual but Not Religious: The Influence of the Current Romantic Movement". Anglican Theological Review. 88 (3): 397.
  13. ^ Jump up to:a b c Funk, Cary; Smith, Greg. ""Nones" on the Rise: One-in-Five Adults Have No Religious Affiliation" (PDF). pewforum.org.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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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Chandl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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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Are there dangers in being 'spiritual but not religious'?". CNN.com. 2010-06-09.
  25. ^ Martin, James (2010-03-11). "Spiritual but not religious - Not so fast!: Making the case for moving beyond your own personal God". Busted Halo: an online magazine for spiritual seekers. Retrieved 2010-09-19. Spirituality without religion can become a self-centered complacency divorced from the wisdom of a community.
  26. ^ Fuller, Robert (2001). Spiritual, but Not Religious: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 New York: Oxford. pp. 158–159.
  27. ^ Fuller, Robert (2001). Spiritual, but Not Religious: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 New York: Oxford. p. 160.
  28. ^ Fuller, Robert (2001). Spiritual, but Not Religious: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 New York: Oxford. p.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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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edit]

Chandler, Siobhan (2013), "The Way of the Spiritual Seeker", in Bryant, M. Darrol (ed.), Ways of the Spirit: Celebrating Dialogue, Diversity and Spirituality, Pandora Press
Fuller, Robert C. (2001), "Exotic Messages, Familiar Themes." Spiritual, but Not Religious: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 Oxford University Press
Kenneson, Philip D. (2015), "What's in a Name? A Brief Introduction to the "Spiritual But Not Religious"", Liturgy, 30 (3): 3–13, doi:10.1080/0458063X.2015.1019259
Mercandante, Linda A. (2014), Belief without borders: inside the minds of the spiritual but not religious,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9931002
Wuthnow, Robert (2007), After the baby boomers how twenty- and thirty-somethings are shaping the future of American relig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ISBN 9781400831227


영성의 정의



영성의 정의



영성의 정의 영성과 역사 영성과 신학 영성의 실천성 역사와 현실 주기도문영성 주기도문영성2


영성이란?




영성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애매하고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육신이나 물질과 구분되는 그 이외의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로서 영성이란 말이 사용되기도 했고 또는 경건, 금욕주의, 신비적인 체험등이 영성이란 말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또는 '신앙의 본질'이라는 말로서 정의하고 싶다.

구약에서는 영성의 정의를 '하나님과 만나 친교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영성을 이렇게 정의할 때에 영성생활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삶을 말하며 영성수련이란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갖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다.
교회사적으로 영성은 내면생활을 강조하고 발전시키는 방법과 기술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영성을 '신앙의 체험 또는 하나님 체험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고 증거되는 모습'을 영성이라고 한다. 예를들면 프란시스 수도사들의 청빈생활 운동이라든가 이냐시오의 내면세계의 치유로서 관상기도와 오관묵상을 하는 정신체조교본도 말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영성을 수도원적 영성이해로 머물지 아니하고 매우 다양하게 각 분야에서 각 처한 장소에서 그리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놓고 영성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시아 영성, 이슬람 영성, 정치적 영성, 교회개혁 영성 그리고 인권과 해방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도 영성의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영성과 인간과 성령




영성과 인간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친교로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가 있다.
영성을 하나님과 친교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친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만남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만남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행사하시고 그의 선행적인 주도권에 응답함으로서 하나님과 친교는 이루어지게 된다.

성령은 성부 아버지와 성자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신 성령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의 진실한 믿음으로 인도하고 그리고 그의 선하심에 참여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와 함께 영원까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거함 속에서 기도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 주님과의 만남'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간 안에 거하신다(요14:16-17) .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거함 속에서 기도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고 예배드릴 수가 있다. 이것이 주님과의 만남이다. 이러한 만남이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즉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말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살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나와 공동체 속에서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는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일원이 된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이다"(고전10:17). 그것은 기독교 영성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공동체를 말한다. '나'는 중요한 존재로서 즉 유기체적인 존재로서 역할을 한다. 예를들면 '네가 슬프니, 내가 슬프고, 네가 기쁘니, 내가 기쁘고, 네가 아프니,내가 아프다.' 오직 나는 너라는 거울 속에서 나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웃과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관련 속에서 영성적 삶은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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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질문: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답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는 구속의 날을 위해 우리를 인치시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에베소서 1:13, 4:30).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요한복음 16:13)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진리의 일부는 하나님의 일들을 취하여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적용이 이루어질 때, 신자는 성령께서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거듭난 신자가 자신의 삶을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에 맡기는 정도에 근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이 구절의 시제는 진행형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그저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술의 지배를 받게 될 때, 그는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말을 하거나, 불안정하게 걷거나, 의사 결정이 둔해지는 등의 어떤 특징들을 드러냅니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성령의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특성들을 갈라디아서 5:22-23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소위 “성령의 열매”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신자 안에서, 그리고 그 신자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에 의해 맺혀지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건전한 말과 일관된 영적인 행보를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의사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복종함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매일의 관계에서 “알고 성장하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신자로서 우리가 자백을 통해 (요한일서 1:9) 성령님과의 분명한 소통을 유지하겠다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성령을 근심하게 할 때 (에베소서 4:30; 요일 1:5-8),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쌓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복종할 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막힘이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기독교 영성은 육체와 죄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영과 의식적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성령의 사역에 순종하기를 선택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개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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