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3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유기쁨 - 애니미즘의 재발견과 “person”의 번역

한국종교문화연구소
                                                                                                   newsletter No.468 2017/5/2

 

 

           애니미즘의 재발견과 “person”의 번역

          
 

    “모든 언어에는 번역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문화에 적합하며,
그 문화에만, 한 국민의 물리적 환경, 제도, 물질적 장치 및 태도와 가치에만 적합하기 때문이다.”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중.



       요즘 연구소에서는 <책 한 권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4월 모임에서는 장석만 선생님 발제로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의 『음식, 섹스 그리고 낯선 자들 : 종교를 일상생활로 이해하기 (Food, Sex and Strangers: Understanding Religion as Everyday Life)』(2013)가 다루어졌다.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연구소 페이스북 관리자가 올려둔 발제 피피티 파일을 읽어보면서 4월 모임이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소개한 피피티에는 ‘person’이란 단어가 몇 차례 등장했다. 가령 “종교는 이 관계적이고 물질적이며 참여적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person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섭이다.(Religion is a negotiation between persons who dwell together in this relational, material, participative world.)” 등의 문장이 그것이다. 일견 매우 단순한 듯 보이는 문장이지만 번역이 까다로운 이유는 하비가 ‘person’이란 단어를 인간에 국한해서 사용하지 않으며, 인간 이외의 다른 종들을 가리키기 위해서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person’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그레이엄 하비가 ‘person’의 의미범위를 인간 이외의 존재들까지 확장해서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애니미즘’ 연구가 있다. 좀 더 이전에 집필된 그의 대표적 저술인 『애니미즘: 살아있는 세계를 존중하기(Animism: Respecting the Living World)』(2006)에서, 그는 애니미즘을 “세계는 살아있는 persons의 공동체이며 그 가운데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세계관에 주어진 꼬리표”라고 재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과연 ‘person’이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 데 그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눈에 띄는 것은, 하비는 무엇보다도 ‘person’을 다른 ‘person’들과 상호작용하는 자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곧, 사물을 논할 때에 비해 ‘person’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성이다.


       종교학계에서는 그레이엄 하비가 ‘person’을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포괄하는 확장된 의미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거론되지만, 사실 토착민들의 애니미즘을 새로운 빛에서 조명하는 그와 같은 ‘person’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한 것은 1960년에 발표된, 오지브와 족에 대한 할로웰의 연구(Irving A. Hallowell, "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라 할 수 있다. 할로웰은 오지브와 족의 ‘person’ 범주가 인간 존재에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들의 ‘person' 개념이 인간과 동의어가 아니라 사실상 그것을 초월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그 글에서 오늘날 (하비를 포함한) 관심 있는 연구자들 및 생태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구처럼 사용되는 “other-than-human persons”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바위, 나무, 곰, 벼락 등 경험적 존재들 혹은 실재들이 포함된다.


       할로웰 이후 일군의 학자들은 서구적 통념에서는 인간이 아닌, 심지어 생명이 없는 대상에게서 또 다른 의미의 ‘personhood’를 발견하는 토착적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들어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면서 그러한 움직임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근대 서구 문명이 생태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대한 반성과 대안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인류학자, 철학자, 종교학자들이 영단어 ‘person’의 의미 확장을 시도하고 있으며, 생태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러한 확장된 의미범위를 가진 'person'의 사용이 뚜렷한 의도와 지향점을 가지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가령 동물의 권리를 주창하는 운동가들이 돌고래쇼 폐지를 주장하면서 돌고래를 dolphin-person으로 일컫는 사례도 본 적이 있다.


       그와 같은 ‘person’의 의미 확장은 그 단어를 인간에 국한해서 사용하는 일반적 통념과는 차이가 있기에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한 혼란은 의도된 것이다. 그레이엄 하비는 그의 저서 『애니미즘』에서 ‘person’이란 용어를 인간 및 인간과 비슷한 존재들(조상들과 일부 신격들) 뿐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공동체에까지 적용할 경우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물으며, 인간 이외의 ‘persons’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근대 서구문화의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확장된 의미범위의 ‘person’, ‘personhood’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나는 예전에 각각을 ‘개체’, ‘개성’ 등으로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곧 부적절한 번역임을 깨닫게 되었다. 영단어 ‘person’의 통상적인 의미(사람, 인간)를 살리면서, 의미의 확장이 가능한 번역어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1)인격, 인격체로 번역, (2)사람, 사람됨으로 번역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오른다.


       person, personhood를 인격, 인격체 등으로 번역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인격이란 우선 “사람으로서의 품격”으로 정의된다. 특징적인 것은, 법률적으로 인격은 “신체적 특성을 제외한 인간의 정신적, 심적 특성의 전체”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인격체’는 “인격을 갖춘 개체”를 의미한다. 실제로 ‘인격’이란 단어의 사용은 존재의 상호관계성, 상호작용 등을 떠올리게 하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품격’, 곧 존경할만한 성품이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으며, 신체성을 배제하고 일종의 정신적 특성을 가리키기 위해 종종 사용되기에, 확장된 의미의 'person'의 번역어로 선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 ‘사람됨’이라는 번역어들은 어떨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사람’은 일차적으로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로 정의된다. 그렇지만 또한 “어떤 지역이나 시기에 태어나거나 살고 있거나 살았던 자”로도 규정된다. ‘사람’의 우리말 어원을 살피면 좀 더 흥미롭다. 박갑수의 『우리말 우리문화』에 따르면, ‘사람’의 옛말은 ‘사’인데, 곧 ‘살다(生)’의 어간 ‘살-’에 접미사 ‘’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사람’은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지만, 만약 위의 어원설명을 받아들일 경우,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좀 더 폭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레이엄 하비의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는) ‘person’의 번역어로도 좀 더 적합할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란 번역어가 ‘person’이란 단어의 이른바 ‘완벽한 번역어’일 수는 없다. 말리노프스키가 말했듯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사회문화적 컨텍스트 속에서 그것이 하는 기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사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컨텍스트를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완전한 번역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과업이다. 어떤 번역(어)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해야 하는 것이 번역가의, 나아가 인간의 운명이다.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실패라는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 현시점에서는 다만 tree-person, rock-person, dolphin-person을 ‘나무-인격’, ‘바위-인격’, ‘돌고래-인격’으로 옮겼을 때 발생하는 번역의 예상효과와, ‘나무-사람’, ‘바위-사람’, ‘돌고래-사람’으로 옮겼을 때 발생하는 번역의 예상효과를 비교하면서, (다른 더 적절한 번역어가 제안되기 전까지는) 후자가 좀 더 적합한 번역어가 될 것 같다고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유기쁨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ntolose@hanmail.net
저서로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등이 있고, 논문으로 <생태의례와 감각의 정치>,<인간과 종교,그리고 생태 -더 큰‘이야기’속으로 걸어가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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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 퍼플북 5 
유기쁨 (지은이)한신대학교출판부2013-04-08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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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쪽128*188mm (B6)255gISBN : 978897806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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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1. 펼치는 말

2. 인도아대륙에서 태어난 종교

힌두교―업과 윤회, 층층이 겹겹이 연결된 세계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 힌두교, 너의 정체는 뭐냐? | 처음도 끝도 없는 시간 | 겹겹이 성스러운 세계 | 초월의 비밀은 내 안에 |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버리고 떠나기

자이나교―철저한 아힘사로 업을 떨어내는 삶
산토끼 돌이의 눈물 | ‘하늘을 입은 사람들’ | 온통 살아 있는 세계, 그러나 물질에 갇힌 영혼들 | 상황에 대한 올바른 지식: 인간의 오만함 경계 | 아힘사, 모든 생명을 철저히 존중하는 삶 | 세계를 살아 있다고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과 철저한 생명 존중

불교―‘내가 제일 잘나가?!’ 거기서 우리의 고통이 시작되는 거야.
우리는 정작 중요한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이야기 | 미친 듯한 욕망의 소용돌이 | 내가 없으면 무엇이 있지?: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 이야기의 확장: 여래장과 인드라망. 나무도 성불할 수 있지 | 환경보살의 비전: 세상의 치유를 위한 적극적 한걸음

3.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

유교―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공부
개고기와 치킨의 딜레마―죄책감과 외면 사이에서 | 인간이면 인간답게: 인人과 인仁 |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공부 | 리理와 기氣로 연결된 세계 | 대나무를 보는 청년: 격물치지 | 친친親親―인仁의 확장

도교―천지의 도道와 함께 춤추면 초월할 수 있지.
길[道]을 잃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 나도 나비가 될 수 있어: 우주의 도와 나의 합치 | 나비가 되기 위하여: 몸 수련 | 우주적 힘을 이용해 세상의 질병을 치유하다 | 자연스러운 것으로 돌아가기

4. 서구사회를 지탱해온 종교

그리스도교―고통 받는 피조물과 연대하는 삶
사랑으로 산다 | 지구에서 인간의 자리는? | 그러나 인간들은 | 세상 속으로 오신 하느님 | 상처 입은 자연의 고통 |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5. 한국에서 생겨난 종교

천도교―(한울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들을 모셔야지.
“좁쌀 한 알 속의 우주” | 확 뒤집어져라: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다시개벽’ | 사람은 누구나 지극한 생명의 기운을 모시고 있다 | 내 안의 한울님을 잘 길러야지 | 경천, 경인, 경물: 세상 만물을 공경할 수밖에 | 밥 한 그릇을 알면 만사를 알게 될 텐데

닫는 말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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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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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신대와 감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4년 전에 가족과 함께 시골마을로 내려와 작은 집에서 잘생긴 백구 두 마리, 누렁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주로 ‘종교와 생태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고, 최근에는 닭을 키우면서 인간과 인간 외 동물과의 관계성에 대해, 나아가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최근 발표한 논문으로는 「잊힌 장소의 잊힌 존재들: 생태적 위험사회의 관계 맺기와 종교」, 「현대 종교문화와 생태 공공성: 부유하는 ‘사적(私的)’ 영성을 넘어서」, 「핵에너지의 공포와 매혹: 한국인의 핵 경험과 기억의 정치」,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가 있으며, 역서로는 『문화로 본 종교학』,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경작법과 농경 의례에 관한 연구』, 『세계관과 생태학: 종교, 철학, 그리고 환경』, 『원시문화』,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공역), 『진짜 예수는 일어나주시겠습니까?』(공역)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아픔 넘어>,<종교로 보는 세상>,<종교, 미디어, 감각> … 총 1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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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 열린 맘으로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열린 맘으로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열린 맘으로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3.22 19:08  수정 2021.03.22 19:1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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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맘에는 어떤 문이 있을까? 그 문은 쉽게 열 수 있을까? 한 번 닫으면 영원히 열리지 않고 닫혀 있는 문일까? 나는 내 맘 문을 때에 맞추어 잘 닫고 열까? 엉뚱한 때 열고 닫을까? 닫아야 할 때 열고, 열어야 할 때 닫을까?

사실 맘 문이라고 하지만, 한 번 닫힌 맘 문을 열기는 무척 어렵다. 또 열린 맘 문을 닫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맘 문도 꼭 닫혀만 있는 것도 없고, 늘 열려 있는 것도 없다.

맘 문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집의 문도 어떤 때는 열고, 어떤 때는 닫는다. 사람이 나가고 들어올 때 열고 닫는다. 또 바람이나 공기를 받고 막을 때 또 열고 닫는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연세가 높은 증조할머니가 계셨다. 어리고 활발한 우리는 추운 겨울에도 펄럭거리며 문을 열고 닫으면서 들락날락했다. 때로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증조할머니는 ‘문 꼭닫고 살살 다녀라’ 하셨다. 어떤 때는,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어린 나는 따뜻한 이불을 덥고 오래도록 자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때 또 할머니는 문을 활짝 열고 새바람이 들어오게 두라고 하셨다. 어떤 때는 그 바람이 차가우니 닫으라 하시더니, 어떤 때는 새바람이 들어오게 활짝 열어두라고 하셨다.

문은 언제 열고 닫는 것일까? 열린 그 문들은 얼마나 새바람을 불러 들였고, 닫힌 그 문들은 어떤 것들도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까?

시골에서는 밤이 되면 사립문을 닫았지만, 아침이 되면 언제나 활짝 열어 놓았다. 금줄이 쳐져 있지 않을 때는 언제나 누구나 쉽게 드나들었다. 사립문에 쳐져 있는 금줄, 그것은 참 신비롭고 놀라운 전통이었다. 모든 것이 다 통과되었지만, 외부 사람만은 들어가지 못하였다. 열려 있지만 닫힌 문이다. 물론 요사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집문은 옛날과 전혀 다르다. 단독주택이든, 다세대주택이든 모든 문은 꼭꼭 닫혀 있는 것이 보통이다.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잠겨 있다. 항상 찍히는 사진기가 돌아간다. 이런 때는 열려 있어도 닫혀 있는 것과 같다. 서로가 믿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아주 놀라운 일이다. 언젠가는 모든 사람을 다 믿는다는 상징으로 문을 열어 두었겠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 문을 꼭꼭 닫고 잠근다. 이것은 맘 문이 그만큼 닫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맘 문이 닫히니 개인 주택이나 다세대 주택의 출입구와 집 문과 방문이 다 닫힌다. 답답한 시대다. 더욱 요사이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문제로 모든 곳이 열린 듯 닫혀 있다.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문도 닫힌다. 그런데도 무사히 통과되는 것들도 많다. 문은 아무리 닫아도 열리고 또 아무리 열려고 하여도 닫힌 상태로 있기도 한다. 맘 문도 그러한 것일까?


 
문을 활짝 열어도, 시원하게 확 트인 넓은 들판이나 높은 산에 올라도, 또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가에 서 보아도 답답한 때가 많다. 어느 개인에게는 어려서부터 맺히고 쌓여서 풀리지 않는 어떤 응어리가 있어서 무엇을 해도 답답한 것을 풀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종족과 종족들 사이에 이루어진 긴 역사과정의 응어리들도 역시 풀리지 않고 꼭 막혀 있을 때가 참으로 많다. 그러할 때, 밖에서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일단 맘 문을 열고 보라고 한다.

사실 상당히 많은 것들에는 문을 닫아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들이 많다. 바람이 그렇고, 빛이 그러하며, 병균이 그러하고, 철새들이 그러하며, 맘이 그러하다. 문화의 흐름이 그러하고, 정신의 오고감이 그러하다.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요사이 내 맘에는 이른바 기축시대라고 하던 때 인류의 스승들이 말씀하셨던 것들이 암암리에 실현될 조짐들이 보인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던 것들을 허물라는 말씀, 나라와 나라의 금이 거짓이라는 말씀,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순간과 영원이 한 점이라는 말씀, 깨달음의 거룩한 생활과 평범한 일상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원수와 친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이런 것들이 지금은 생각이나 믿음으로가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다만 맘을 열고, 눈을 뜨고, 귀를 막지 않으면 보이는 현실이다.

내 맘을 닫게 하고, 눈을 감게 하고, 귀를 먹게 하는 것들은 확고한 진리인 듯이 보이고 배우고 믿어 왔던 이념들, 전통들, 규정들이다. 좋고 나쁘며, 예쁘고 미우며, 높고 낮으며, 빠르고 느리며, 아름답고 더러우며, 화려하고 지저분하다는 어떤 판단과 규정에 의하여 우리 눈을 뜨고 닫게 하고, 맘을 열고 닫게 하던 것들을 잠깐 옆으로 젖혀 두고 살펴본다면 상황은 전혀 달리지지 않을까? 열린 맘으로, 아니 맘을 조금 열고 보면 금방 새롭게 깨달아지는 세계가 아니던가? 맘을 조금 넓게 열고 보면, 우리는 한 세계, 한 역사, 한 하늘, 한 물, 한 바람, 한 빛 속에서 살고 있음을 금방 깨닫는다. 그렇게 보면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종교와 종교가, 정당과 정당이, 여와 야가, 예쁨과 미움이 한 가지를 향하여 함께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열린 내 맘 속에서 이것들의 순수한 본질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될 일이 아닐까?

열린 맘으로 보면 허상과 실상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으니 허상에 매어 억울하게 살았던 맘 하나 같이 열면 어떨까? 열린 맘으로 보면 이것 속에 저것이, 저것 속에 이것이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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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2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기자명 현응스님   
입력 2010.02.21

2010년 2월 18일 17회 열린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출현 배경과 그 사상적 특징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이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가 덧없고 허망한 것을 일깨워주어 존재의 실재성으로부터 해탈하게 해주는 효과를 이끌어내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부파불교,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면서 교리적 발전과 정립을 거쳐 더욱 정치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삶과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변화시켜 가야 하는지를 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깨워 주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야 하는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즉 초기불교의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은 개인의 삶과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목적, 방법, 이유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가족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많은 불교도들은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딜레마는 불교 내부에서 교리적으로 모색하여 해결해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지만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이외의 종교나 사상들과 많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부각된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브라마니즘을 위시한 당시의 종교와 사상은 대다수 실재론적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무상, 무아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일과 그런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설명하는 일은 대단히 주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소품, 대품 등)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실재성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매우 희유한 일일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대다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종류나 형태의 실재성 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실재성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실재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의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 무아, 공을 내세우는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반야경 등의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어려움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 어떤 실재(예컨대 신, 브 라만, 선, 이성, 명예, 부, 쾌락 등)가 전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실재로부터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있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는 과연 삶과 역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연기적 세계관을 가지고도 세상을 적극적이고도 뜨겁게 살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그 해답을 내 놓은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은 다음과 같은 첫 질문으로 시작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사람은 일상에서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다스려야 합니까?”
즉 무상, 무아, 공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머묾 없이 마음을 내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아, 인, 중생, 수자라는 각종 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집착하거나 머무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는 결국 머물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유명한 ‘응무소주이생기심’의 구절은 ‘응무소주’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기심’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읽어야 대승의 취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어 행하는 일,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청정심이며, 미묘한 행인 것이다.

중국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는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일러 ‘묘행무주(머물지 않는 미묘한 행위)’라 해석하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머물지 않음)’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을 밝힘’이라 하지만 사실 대승의 가르침은 ‘머물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하는가’에 있다.

불교는 보통 극단적인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승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입장에다가 의도적, 잠정적, 가상적인 실재론적인 입장을 접목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의 불교가 연기론을 공관사상으로 발전시켜 세상을 보는 관점을 공, 가, 중이라는 독특한 존재론으로 형성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전된 연기적 존재관에 의도적인 원과 방편이라는 역사적 실천을 접목하는 일,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회심의 역사관인 것이다.


대승경전과 소승(초기)경전의 내용적 차이는 무엇일까?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표현하면 소승경전이라고 부르며, 공, 공관, 유식, 여래장, 법계, 법신, 진여 등의 용어로 표현하면 대승경전이라고 부르는가? 물론 아니다.

법성, 공성, 연기성, 불성은 다 동의어이며, 나아가 유식성, 법계, 진여, 여래장 또한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공, 여래장, 진여 등의 용어로 세계를 설명하면 대승이라고 보고,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설명하면 소승이라고 보는 태도는 소승과 대승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조삼모사에 속는 원숭이와 비슷한 꼴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대승경전의 진면목은 무상, 무아 또는 공이나 진여라는 연기적 세계에 살면서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바라밀을 행하도록 강조하는 부분이다.

초기대승경전인 십지경(화엄)에서 나타나는 10바라밀은 이러한 대승의 역사적 실천론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인다. 6바라밀에 이은 방편, 원, 력, 지, 이 네 가지 바라밀은 대승불교 회심의 역사적 상상력으로서 연기적 깨달음이 어떻게 역사화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태도는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결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절대주의란 잠정, 가설, 의도성의 색깔을 띤 독특한 절대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승경전을 보면 반야경은 공(연기)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입장에 서면서도(무주) 여러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 정토장엄을 설하는 것이 된다. 공과 연기를 설하는 것은 초기불교 이래로 줄곧 해 왔던 일이다. 대승의 시대에 오면 공과 연기라는 평면적 세계에 불교 특유의 실천론을 덧붙이는 노력을 하게 되며, 그러한 내용들이 모든 대승경전에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은 법계연기나 화엄교관이라는 수행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적 세계관에 서서 다양한 바라밀을 행해 법계를 장엄하는 것에 대해 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경전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 역사적 실천론인 것이다.

정토, 열반, 법화 등의 대승경전도 같은 취지이다. 즉 대승경전은 마음을 밝히거나 세상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도의 사회적 실천의 자세, 목표로 삼는 이상사회(정토), 그리고 그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론에 대한 설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입장은 보살(보디사트바)을 실천적 삶의 주체로 내세우는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보디는 연기적 깨달음을 뜻하며, 사트바는 중생계의 삶과 역사를 뜻한다. 즉 보디와 사트바가 결합된다는 것은 깨달음과 역사가 결합되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지만,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로 읽어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대승의 취지는 보살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구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연기, 공, 반야”만 강조하는 불교, “개인적인 몸과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만 강조하는 현대사회의 불교

불교는 초기불교 이후로 각 부파의 아비달마 시대를 거쳐 기원 전후에 이미 연기론과 역사적 실천을 접목시킨 대승불교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불교가 오히려 초기불교의 문제의식 수준으로 회귀하여 대다수 불교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과정에서 연기, 공, 반야를 설하는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대단히 아쉽다.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한다.

또한 현대불교가 대승불교의 역사적인 실천론을 상실하고 연기론의 범주로 물러나 있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그 연기론의 적용 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에 한정지어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도 정작 연기와 공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일체의 존재현상이 상호 연기적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 개인의 몸과 마음이 다른 영역과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사념처라 하여 존재 현상을 살피는 위빠사나 수행 또한 크게 보면 모든 존재들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잘 살피자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근자의 불교포교의 방향과 그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불교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중국 등의 소위 북방불교는 물론이고 미얌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나 티벳불교까지 모두 다 연기론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으며, 그 연기론의 적용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 문제에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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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7:03 IP삭제
최근에 한국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사념처 수행의 대상이 사회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등은 고결한 안목으로 보인다.
스님의 지적대로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이라" 설명하고 가르쳐왔다. 아마 지금도 대다수의 강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대승경전을 새롭게 읽어내는 스님의 안목은 존경스럽다. 이 글에 대한 찬탄의 소리가 잇달아 나올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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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4:52 IP삭제
불교평론에 올라온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었다.

그 동안 어느 강사나 강주나 학자가 쓴 글 보다도 감명 깊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역사를 꽤뚫은 자만이 투시 가능한 서로의 장단점을 그는 읽고 있었으며 그러한 안목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 내고 있었다.
금강경을 마음을 일으키라는 '생기심'의 메세지로 읽는 것이라든지 화엄경을 '사회적 실천론'으로 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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