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5

新しき村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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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しき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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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しき村の入口

一般財団法人新しき村(あたらしきむら)は、埼玉県入間郡毛呂山町にある共同体


目次
1歴史
2新しき村の精神
3施設
4参考文献
5脚注・出典
6関連項目
7外部リンク
歴史[編集]

1919年頃の新しき村

入植当初の小屋

武者小路実篤とその同志により、理想郷を目指して1918年大正7年)、宮崎県児湯郡木城町に開村された。

1938年昭和13年)にダムの建設により農地が水没することになったため、1939年(昭和14年)に一部が現在の位置(「東の村」)に移転し、残りは日向新しき村(ひゅうがあたらしきむら)として存続した。

第二次世界大戦終了時には1世帯のみとなっていたが、入村者が増え、1948年(昭和23年)に埼玉県から財団法人の認可を受け、1958年(昭和33年)にはついに自活できるようになった。

この村はただ生活するためのものではなく、精神に基いた世界を築く目的で開村されている。階級格差や過重労働を排し、農業(稲作や椎茸栽培など)を主とした自給自足に近い暮らしを行う。労働は「1日6時間、週休1日」を目安とし、余暇は「自己を生かす」活動が奨励される。三食と住居は無料だが、私有財産を全否定しているわけではなく、毎月3万5000円の個人費が支給される。

近年、村内の高齢化が進み、平均年齢は60歳を超えた。鶏卵の値下がりや人手不足で養鶏を止めるなど農業収入の低迷もあり、村の運営が困難になってきている。過去の積立金を取り崩して赤字を補填している[1]2013年時点の村内生活者数は13人。村外会員は約160人ほど。2018年時点では宮崎で3人、埼玉で8人が暮らしている[2]

村の存続を願う村外会員らが「日々新しき村の会」を2018年8月発足させた[3]
新しき村の精神[編集]

一、全世界の人間が天命を全うし各個人の内にすむ自我を完全に成長させることを理想とする。

一、その為に、自己を生かす為に他人の自我を害してはいけない。

一、その為に自己を正しく生かすようにする。自分の快楽、幸福、自由の為に他人の天命と正しき要求を害してはいけない。

一、全世界の人間が我等と同一の精神をもち、同一の生活方法をとる事で全世界の人間が同じく義務を果たせ、自由を楽しみ正しく生きられ、天命(個性もふくむ)を全うする道を歩くように心がける。

一、かくの如き生活をしようとするもの、かくの如き生活の可能を信じ全世界の人が實行する事を祈るもの、又は切に望むもの、それは新しき村の会員である、我等の兄弟姉妹である。

一、されば我等は国と国との争い、階級と階級との争いをせずに、正しき生活にすべての人が入る事で、入ろうとすることで、それ等の人が本当に協力する事で、我等の欲する世界が来ることを信じ、又その為に骨折るものである。
施設[編集]

公会堂兼食堂(580m²)、新しき村美術館(250m²)、生活文化館(200m²)、小集会場、アトリエ、茶室、住宅、作業場、畜舎等88棟。生活文化館は年中無休で無料公開している。



公会堂兼食堂



新しき村美術館



生活文化館



売店



茶畑
参考文献[編集]
『新しき村の説明及び会則』(2版) 新しき村東京支部、1919年。NDLJP:916768
脚注・出典[編集]

^ 「人間らしく」追求100年/武者小路実篤の「新しき村」3食と住居提供■一定の労働以外自由/埼玉・諸山に今も 住民減り、存続に危機感東京新聞』夕刊2018年11月6日(社会面)2018年11月7日閲覧。
^読売新聞』朝刊2018年10月30日「実篤の理想郷100年展」(都民版)。調布市立武者小路実篤記念館での、新しき村創立100周年記念特別展「新しき村の100年」(2018年10月20日~12月9日)紹介記事。
^ ■ルポ「新しき村」100年(下)存続へ知恵絞る村外会員『読売新聞』朝刊2018年11月20日(文化面)。
関連項目[編集]
ウィキメディア・コモンズには、新しき村に関連するカテゴリがあります。

ユートピア
レフ・トルストイ
空想的社会主義
集団農場
白樺派
武者小路実篤
城米彦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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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ミューン
上條勝久
石川静
渡辺修渡舟
津江市作
外部リンク[編集]
一般財団法人新しき村
新しき村・武者小路実篤記念美術館
新しき村
カテゴリ:
一般財団法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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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想的社会主義
日本の社会主義
村落共同体
武者小路実篤

[빈섬 이상국의 알바시네]예수가 재림한다면 믿겠습니까, 넷플렉스 영화 '메시아' - 아주경제



[빈섬 이상국의 알바시네]예수가 재림한다면 믿겠습니까, 넷플렉스 영화 '메시아' - 아주경제


요르단에서 상영 금지 요청…무엇이 문제였나


[영화 '메시아'의 한 장면.]


'종교란 무엇인가' 묻는 영화

넷플릭스 영화 '메시아' 시즌1 10편을 본 뒤, 무엇인가 기록을 남기고 싶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 신문(아주경제)에 연재하고 있는 '다석 류영모 시리즈'의 주제들과 메시지가 겹치면서,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 복잡한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0세기 벽두의 동서양 문명충돌 속에서 1800년된 기독교의 급속한 동방 전파가 이뤄졌고,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의 다석 류영모,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는 동양적인 지혜와 안목으로 기독교의 심각한 변질을 읽어냈다.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류영모는, 우치무라의 동양적(일본적) 기독교의 실천에서 영감을 받으면서, 이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면서 신성에 대한 심오한 확장을 이뤄낸다. 동양적 성찰과 예지가 서양기독교를 거듭나게 한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메시아(Messiah)는 구세주란 뜻으로 쓰이지만,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구약에서는 예지를 지닌 이스라엘왕을 뜻한다. 영화 촬영을 허락한 요르단 왕립영화위원회는 작품을 내놓기 이틀 전에 영화내용을 확인한 뒤 요르단에서의 스트리밍을 자제해줄 것을 넷플릭스에 요청했다. 종교의 신성함을 침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요르단의 법규를 위반할 수 있다는 설명을 붙였다.

허구의 내용이라고 밝힌 영화가 이렇듯 종교국가의 난색을 불러일으킨 것은, 영화가 내놓고 있는 질문인 '종교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메시아'처럼 행동하는 이란 출신의 남자 '알마시히(메흐디 데흐비 역, 알마시히는 메시아란 뜻으로 그를 따르는 대중이 붙인 별칭이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긴장을 자아낸다. 그는 과연 메시아인가.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이가 있고, 부정하는 이가 있다.



[영화 '메시아'의 한 장면.]

물위를 걷는 기적, 예수를 떠올리다

영화 속의 군중들이 바라보는 관점들이 있지만, 영화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관점도 있다. 영화 밖의 관객이라면, 영화 감독이나 작가의 생각을 기웃거리려 하거나 영화의 시나리오나 영화가 추구하는 의미를 짐작해보려할 것이다. 처음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던 알마시히가 갈수록 메시아의 심증을 높이는 건, 곳곳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다.

우선 미사일 폭격을 앞둔 시리아에서 군중들에게 겁없이 설교를 펼치며 기적의 모래폭풍으로 전쟁을 물리치는 이적이 이뤄졌고, 군중이 모인 한복판에서 총을 맞은 아이가 되살아나는 기적이 있었고, 중동에서 미국으로 순간을 이동을 했고, 토네이도 속에서 교회 하나와 소녀를 구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물 위를 걸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과 행적을 알고 있었으며, 격추된 비행기 속에서도 멀쩡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이미 추락사한 사람도 살려냈다.

영화는 이런 기적들을 섣불리 믿지 못하도록, 그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다. 그가 마술을 터득한 사람으로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하는 정신적 '장애'를 겪어온 과거가 그의 형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그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기적을 흉내내서 사회혼란을 꾀하려는 '신종 영성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흘린다. 그의 '테러'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높여놓기도 한다.



[프랑코 제퍼렐리 영화 '나자렛 예수'(1977).]

신은 인간에게 기적을 보여 설득할 이유가 없다?

알마시히의 기적들을 눈으로 보며, 사람들은 메시아의 재림을 확신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대목은, 현재의 대중이 '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예수 시대의 기독교가 어떻게 전파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톨스토이와 류영모는, 신이 '기적(초자연적인, 초인간적인 행위나 사건)'을 통해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기적은, 후세의 인간들이 신의 힘과 존재를 좀더 강력하게 믿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삽입한 '특수장치'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예수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고, 기적으로 신앙을 끌어모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자신의 '초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없는 존재다. 오직 인간에게 자신의 메시지인 '극기와 사랑'을 전파하기만 했으며, 그 자연스럽고 순수한 메시지로만 인간은 신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

신이 인간을 놀라게 하기 위해 '초능력'을 보이는 일은, 극히 인간적인 발상들이 조잡하게 '가필'된 결과라는 것이다. 류영모는 신은 '절대적 세계'의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세계에 숨쉬고 있는 인간이 동일한 '존재'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허황된 것이라는 입장에 선다. 하느님은 '없이 계시는' 존재라고 그는 표현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것은 절대세계에 들어서는 그 순간이라고도 한다. 깨달음 또한 그 지점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영성'을 무기로 삼는 테러리스트가 될 때 더 끔찍

영화 '메시아'는 성서에 기록된 기적들을 연상케 하는 초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이 오랫동안 잘못 지녀온 절대자에 대한 왜곡된 믿음들을 재현해 보여준다. 인간이 지니고 있지 않은 초능력을 가진 존재는 신이 되는가. 신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까지 덩달아 던진다. 기적을 보여준 존재라도 인간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또다른 확인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영화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영성'을 무기로 한 더 끔찍한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

알마시히는 예수의 풍자인가 조롱인가 재림인가. 영화 속의, '믿음에 대한 혼란'들은 이 수상하고 대단한 남자가 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알마시히의 능력이 눈속임이나 가짜여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메시아가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기적을 품고 왔느냐, 그 사랑의 힘으로 영성의 파탄지경에 이른 인간들을 다시 일으켜 새로운 믿음으로 거듭 나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가 전직 사기꾼으로 밝혀졌다 하더라도, 그 내면에 성서의 산상수훈에서 말했던 신의 메시지들이 흘러나온다면 그는 메시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

(알마시히가 진짜 예수로 재림할 수 있는)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박홍규 옮김, 2016. 들녘출판사) 고 말한 이는 톨스토이다. 그가 가장 이 영화의 본질과 결말을 잘 알고 있는 사상가인지 모른다.

이상국 논설실장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7년 09월 08일 (금) 02:10:0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미당 서정주 시집 전20권 완간

은행나무 출판사(대표 주연선)가 5년 작업 끝에 마무리 지은 ‘미당 서정주 전집’은 시 950편을 비롯해 시론(詩論)·수필·여행기·평전·소설·희곡 등 시인이 남긴 원고 대부분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미당이 발표한 1000여 편의 시 중에서 시집에 실은 것들만 전집에 수록했다. 편집위원회(이남호·이경철·윤재웅·전옥란·최현식)는 “미당이 발표해 놓고 시집에 넣지 않은 시 중 빼어난 작품이 적지 않지만, 시인의 뜻을 존중해 전집에 넣지 않았다”며 “논란이 된 친일시 4편도 기존 시집에 없던 것이므로 빠졌다”고 설명했다. 편집위원회는 미당의 업적에 대해 “겨레의 말을 잘 구사한 시인이요,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일보 2017년 8월 22일>




“시의 정부(政府)”, “큰 시인을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그가 만지거나 느끼는 것은 모두 시”, “단군 이래 최고 시인”, “그의 시에 이르러 한국 현대시가 독자적인 시어를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이런 찬사를 받는 문인이 또 있을까. 서정주(1915~2000)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노래한 서정시의 최고봉이자 문단의 큰 별이었다. 한때 교과서에 그의 시가 10편이나 실릴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국민 시인’이었다.

서정주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이던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학교를 떠나야 했다. 1931년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으나 그마저도 자퇴하는 등 학교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1933년 가을 일본의 톨스토이주의자 하마다 다쓰오가 서울 도화동에 세운 빈민굴에서 잠시 넝마주이를 하는 등 방황기를 보내고 있을 때 박한영 대종사가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박한영은 안암동 개운사 뒤 대원암에서 서정주에게 불교 경전을 가르치다가 시인이 될 재목임을 간파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시켰다. 이때도 서정주는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서정주는 1935년 ‘시건설’지에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널리 알려진 시 ‘자화상’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고 그해 11월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함께 창립한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향토적이고 본능적인 생명력을 노래하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 대표작 ‘화사’가 실린 것도 시인부락 2호였다. 그의 시 작업은 1930년대를 풍미한 김기림·이상 등의 모더니즘은 물론 1920년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었다.




한때 교과서에 그의 시가 10편이나 실릴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국민 시인’







▲ 미당 서정주1941년 2월 10일 발간한 첫 시집 ‘화사집’은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을 원색적 언어로 토해내고 악마적 관능의 세계를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그에게 선사하며 ‘한국의 보들레르’란 별칭을 안겨주었다. 문학청년 윤동주가 밤새워 베꼈다는 ‘화사집’에는 표제시 ‘화사’를 비롯해 ‘자화상’ 등 모두 2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지금도 전 국민이 애송하는 시의 하나인 ‘국화 옆에서’는 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해방 후 서정주는 극심한 좌우 대결 속에서 순수문학을 내걸고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다. 그의 시적 경향은 6·25 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 잡았고 이후 교과서에 다수 작품이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미쳤다.

서정주는 말년까지 숱한 명시를 남긴 영원한 현역 시인이었다. 첫 시집 ‘화사집’으로부터 시작해 ‘귀촉도’(1948), ‘서정주 시선’(1956), ‘신라초’(1961),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등을 거쳐 1997년 마지막이자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시집으로는 15권, 편수로는 미발표작까지 합쳐 1,000여 편의 시를 쓰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다작은 국내에도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있을 뿐이다.




도대체 이런 찬사를 받는 문인이 또 있을까




서정주는 이렇게 시로 일가를 이뤘으나 틈만 나면 끝없이 새 길을 찾아 나섰다. ‘세계 문인 중에서 가장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임을 자처할 정도로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으며 70대 후반에는 러시아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세계의 산 이름 1,625개를 매일 아침마다 외우기도 했다. 서정주는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갖고 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추천되었다.

“소설에 김동리, 시에 서정주”라는 격찬을 들었지만 그에게는 일제와 독재 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비판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1943년 9월 친일 성향의 출판사인 ‘인문사’에 들어가 친일색이 농후한 문학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도우며 모두 11편의 시, 수필, 소설, 종군기 등을 발표하고 1981년 2월에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전두환을 지지하는 TV 연설을 했다.

서정주는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며 친일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회했으나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하고 서정주를 ‘시의 정부’라고 치켜세우던 고은 역시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 “실존적 자아의식이나 근대적 역사 사고와는 동떨어져 있다”며 스승의 삶과 시를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착 정서로 쌓아올린 그의 시적 성취는 이러한 굴절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친일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큼 좋은 시를 남겼다”며 존경을 바치는 문인도 많다. 서정주는 2000년 12월 24일 사람들 가슴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놓고 눈을 감았다. 평생을 오누이처럼 해로하던 부인이 별세한 지 2달여 만이었다. 소설가 이문구는 이렇게 조사(弔詞)를 낭독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예컨대 오답을 유도하거나 위답을 기대하는 뒤틀린 심사와 무엇이 다르겠나. 어여튼 한 잔 따라 올리겠다.”







■신돌석, 최신예 잠수함 ‘신돌석함’으로 부활

구한말 평민 의병장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신돌석 장군이 해군의 1800톤급 최신예 잠수함으로 부활해 대한민국의 영해를 지키게 됐다. 해군은 8월 14일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제국 당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무장 항일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신돌석 장군의 애국심을 기리고 국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새로 건조 중인 214급 잠수함 9번함의 함명을 ‘신돌석함’으로 명명했다. 신돌석함은 대함전과 대잠수함전, 공격기뢰부설 임무 등을 수행할 수 있으며 특히 적의 핵심시설에 대한 장거리 정밀 타격이 가능한 국산 순항미사일을 탑재한다. <뉴스1 2017년 8월 14일>







▲ 신돌석 장군 기념관 안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신돌석(1878~1908)은 30년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항일 무력투쟁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후기 의병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시대 다른 의병들과 달리 홍길동이나 전우치처럼 온갖 신화의 주인공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축지법을 쓰고 전신주를 뽑아 일본군을 쳐 죽였다는 등의 무용담도 신돌석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징이다. 더구나 그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보니 그저 바람결처럼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도호부 남면 복평리 정신곡, 지금의 주소로는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에서 태어났다. 선조 중에는 양반에 해당하는 향리가 적지 않았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고 직책을 받지 못해 신돌석이 태어날 무렵에는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친이 적당한 재산을 갖고 있어 신돌석은 양반가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양반들과 교류했다.

신돌석은 18살이던 1896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는 전기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을 때 고향의 영덕 의진(義陣·의병부대)에 참가했다. 1897년 7월 관군을 상대로 벌인 남천쑤(남천숲) 전투에도 참전, 영덕 의진이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이후에도 간헐적인 전투에 참가했으나 1897년 말 의병이 해산하자 이후 10년간 전국을 방랑하며 지사들과 교유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살폈다. 이 가운데는 1908년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한 의병대장 허위의 제자로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박상진, 전기의병 당시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강년, 1907년 군대해산 후 원주 진위대 장병을 이끌고 의병항쟁을 수행한 민긍호 등이 있었다.




항일 무력투쟁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후기 의병운동의 대표적 인물




신돌석은 1906년 4월 경북 영덕에서 자신의 의병을 조직함으로써 후기 의병사에 길이 빛나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신돌석은 의병 이름을 ‘영릉(영해·강릉)’이라고 짓고 영릉의병장을 자처했다. 신돌석의 의진에는 가족들도 참가했다. 비교적 살림이 넉넉했던 부친은 가산을 처분해 아들을 지원하고 매형은 의병 활동 중 체포되어 곤란을 겪었으며 처남은 신돌석 의진의 도영장으로 청송 전투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 신돌석의 동생은 형의 순국 후 원수를 갚으러 나섰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영릉 의진은 평민 출신 의병장에 일부 양반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다른 의진들과 달랐다. 구성원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나 보부상, 어민, 동몽(남자아이), 전직 주사, 참봉, 사족, 유생 출신도 있었다. 유교적 지배 질서 사회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가 탄생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신돌석은 먼저 영해 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일본의 전초기지로 육성되고 있던 울진을 목표로 삼아 모두 4차례 공격해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성공했다. 이후 영양과 울진 관아, 영해읍과 영덕읍을 공격하며 세를 과시했다. 1906년 11월에는 이강년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벌여 영주와 순흥을 공략했다. 활동 무대는 남으로는 경상도 영덕, 포항, 경주 접경지, 북으로는 강원도 삼척 남부, 서로는 일월산에서 영양을 거쳐 청송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전역을 포괄했다.

신돌석 부대는 200~300명 단위로 작전을 펼쳤다. 잠자리는 주로 촌락의 민가를 사용했으며 물자가 풍부하고 활동 반경이 넓었다. 무기는 화승총이 주류를 이뤘으나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양총도 보유했다. 주요 공격 대상은 영양·진보·청송·울진·평해·영해·영덕 등지의 관아였으나 때로는 일본이 장악했거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경무서와 우편소 등을 습격했다. 일본 어부나 수산업자들도 공격 목표의 하나였다. 백두대간의 일월산과 백암산을 따라 남북으로 이동하고 동해안의 울진, 평해, 영덕 등지를 오르내렸다.

이인영이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의 의병 연합부대인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했을 때는 교남(경상) 창의대장으로 발표되었으나 신돌석이 양주로 이동하지 않고 자신의 근거지에서 계속 전투를 벌여 한 달 뒤에는 다른 의병장으로 교체되었다.




유교적 지배 질서 사회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가 탄생




이렇게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신돌석 의진의 활동 범위가 현격히 축소된 것은 1907년 말 시작된 ‘신돌석 생포 작전’의 여파였다. 일본 경찰은 골짜기를 누비면서 의병 용의자들을 색출하고 의병과 주민 사이의 연결 고리를 잘라버려 신출귀몰하는 신돌석을 압박했다. 1907년 말 일제가 발급한 ‘면죄문빙(免罪文憑·귀순자의 죄를 면하는 증서)’과 1908년 6월 만들어진 헌병 보조원 제도는 결정타였다.

일제는 1908년 9월 무뢰한으로 구성된 4,000여 명의 보조원을 선발해 헌병·경찰과 함께 활동하게 했는데 이들은 특정 지역의 지리, 친인척 관계 및 활동 양상까지 훤하게 꿰고 있어 의병에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결국 신돌석 의진에서도 투항자가 나타나 신돌석은 기동력을 이용한 유격전 양상으로 전술을 바꿔야 했다. 부대 규모는 100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숙식은 거의 산중 요새에서 해결했으며 힘겨운 산악 행군도 잦아졌다.

그래도 신돌석은 여전히 일본군에겐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일경은 수차례나 집중적인 토벌 작전을 펼쳐 의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고 보고하면서도, 보고서마다 ‘귀신같이 움직여서 토벌할 수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빼놓지 않았다. 결국 일제는 신돌석 생포 작전에 실패하자 회유책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피신해 있던 신돌석의 아내와 3살 난 아들을 찾아내 한 달 동안 후하게 대접한 뒤 서신을 딸려 신돌석에게 보냈다. 신돌석은 “어찌 죽지 않고 왔느냐”고 일갈하고는 편지를 펴보지도 않고 불 속에 던져버렸다.




그저 바람결처럼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다.




1908년 후반기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의병 투항자가 급증했다. 신돌석의 부하도 예외가 아니었다. 곧 닥칠 혹한도 큰 부담이었다. 1906년 겨울은 무기를 숨겨두고 일시적으로 해산해 견뎠고 1907년 겨울은 대규모 부대를 이끌면서 두 차례의 토벌 작전으로 극복했지만 1908년 겨울은 그 전과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보급도 갈수록 어려워져 더 이상 버틴다면 남은 부하들의 희생만 가져올 뿐이었다. 결국 신돌석은 1908년 10월 몇 명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살길을 찾아 떠나도록 명령했다. 자신은 만주로 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신돌석은 12월 11일 밤 9시 무렵 영덕군 북면 눌곡(현 지품면 눌곡)으로 가 과거 자신의 부장이던 김도윤(김상렬로도 불림)과 그의 형 김도룡(김상근으로도 불림)을 만났다. 그런데 며칠 후 일본 경찰이 “신돌석이 12월 12일(음력 11월 19일) 새벽 1시 무렵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신돌석이 1908년 8월 귀순한 김도윤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형 김도룡과 언쟁이 벌어지자 김도윤이 돌로 신돌석의 뒤통수를 내리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 무렵 한국인이 작성한 기록물에는 김도윤 형제가 현상금을 타낼 목적으로 신돌석을 취하게 한 후 살해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현장을 조사한 일본 측 기록이 더 신뢰를 받고 있다. 김도룡은 체포되고 김도윤은 도주했다.

신돌석의 시신은 12일 오후 6시 30분 영덕으로 옮겨졌고 신돌석 부하들의 확인을 거쳐 신돌석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시신은 신돌석의 집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971년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NM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 톨스토이와 평화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 톨스토이와 평화



톨스토이와 평화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평화교실 03

톨스토이와 평화





우리가 몰랐던 톨스토이: 성자(聖者)인가, 전사(戰士)인가!

- 톨스토이의 숨겨진 면모를 ‘평화’와 ‘동아시아’를 키워드로 살펴보다







§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톨스토이, 즉 사랑과 용서, 무소유, 무저항, 도덕적 수양을 설교하는 성자 톨스토이의 후광에 가려진 ‘전사 톨스토이’의 모습, 즉, 탈국가, 탈민족을 외치던 근대의 이단아, 적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신앙을 설파하며 기성 권력과 맹렬히 싸운 톨스토이, 그 결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비밀요원에게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혹독한 검열로 생애 후반기 자기 땅에서 어느 책 하나 온전히 출판할 수 없었던 ‘저항자 톨스토이’의 모습을 ‘평화’를 키워드로 살펴본다.

또 톨스토이의 이러한 평화사상이 근대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1) ‘힌두 톨스토이’ 간디, 2) 류스페이 등 중국의 혁명적 아나키스트, 3) ‘일본 톨스토이’ 도쿠토미 로카, 고토쿠 슈스이 등 일본의 반전평화주의자/사회주의자, 4) 최남선, 이광수 등 톨스토이를 숭배했던 근대조선의 애국계몽 지식인과의 관계 속에 해부한다.

§ 이 책이 전해주는 새로운 톨스토이의 모습은 그를 도덕 타령, 사랑 타령이나 하는 고리타분한 성인군자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또 그의 ‘절대평화주의’의 불온함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해진 평화의 규범성, 상투성을 뒤흔들며 평화에 대해 깊이 돌아보고 사색하게 만든다.

§ 이 책은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기획한 대중적 평화입문서 ‘평화교실’ 시리즈 세 번째 책으로 출판되었다.









■ 저 자 :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 분 야 : 사회과학

■ 발행일 : 2016년 5월 31일

■ 페이지 : 240쪽

■ 판 형 : 135mm ✕ 200mm

■ 가 격 : 13,000원

■ ISBN : 979-11-86502-51-8 94300

■ 문 의 : 02)735-7173





■ 출판사 서평



노벨상 후보에 20번이나 오른 톨스토이... 그런데 왜 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까?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쓴 천재 작가이자, 농민 계몽, 빈민 구제, 사형제 폐지나 반전 활동 등을 통해 인류애를 몸소 실천한 평화의 사도 톨스토이. 그는 노벨평화상에는 4번, 노벨문학상에는 자그마치 16번이나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두 상 중 어느 것도 받지 못했다. 대체 왜....

그 이유는 바로 ‘교회를 부정하고, 국가를 거부하고, 사적 소유에 도전했던’ 톨스토이 사상의 과격함과 전투성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톨스토이는...

교회와 싸우고, 국가와 싸우고, 소유 제도와 싸우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사실 우리에게도 그리 익숙지 않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톨스토이는 오드리 헵번의 『전쟁과 평화』, 소피 마르소의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검은 눈의 카추샤’가 등장하는 『부활』의 작가다. 이런 작가 톨스토이의 모습에는 어김없이 성자, 현자의 이미지가 덧씌어져 있다.

특히 2003년 MBC 교양프로그램 <느낌표>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이 고전베스트로 뽑힌 후, “바보 이반 이야기”,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같은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톨스토이하면 사랑, 무소유, 무저항, 비폭력을 설파하는 성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교회, 국가, 소유 제도와 싸우는 과격한 전사(戰士), 톨스토이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러한 비폭력, 사랑, 평화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했을까. 톨스토이는 이 모든 것이 ‘악에 대한 투쟁’ 속에 가능하다고 했다. 흔히 알려진 그의 무저항주의는 악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무저항인 것이지, 결코 악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라는 수동적인 무저항이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제도화하는 국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동 착취를 합법화하는 경제 질서,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신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는 기성 종교 등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 러시아 차르 정부, 군대, 경찰, 사법기관, 농노제나 자본주의 소유 구조,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와 평생에 걸쳐 간단없이 가열차게 싸웠다.



애국․민족의 시대에 톨스토이는 왜 탈국가, 탈민족을 부르짖었는가?

뿐만 아니라, 그는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전쟁이라는 최고의 악을 초래하는 근원으로 매섭게 질타했다. 그의 저 유명한 ‘러일전쟁 비전(非戰) 팜플렛’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연히 톨스토이는 보수 극우세력은 물론,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두와 불화했을 뿐 아니라, 당대 국제 평화주의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제국주의 열강, 피식민국가 할 것 없이 온 세계가 애국주의, 민족주의의 열기에 휩싸여 있던 당시, 오히려 탈국가, 탈민족에서 평화의 길을 찾은 톨스토이의 혜안은 초국가와 탈경계가 대세가 된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어떤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절대 평화주의자 톨스토이, 그 위험한 매력...

톨스토이의 유토피아는 국가로 대표되는 모든 제도화된 폭력의 거부 위에, 나아가 정당방위로서의 개별적 폭력조차 허용하지 않는 견결한 비폭력주의에 기반한다. 이러한 절대적 평화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엇보다 전투적이고, 따라서 불온한 평화주의로, 안전한 이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을 제외하고 자신을 둘러 싼 거의 모두와 싸워야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톨스토이, 성자와 전사 사이...

성자 톨스토이와 전사 톨스토이. 진실은 어느 한 쪽에 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에게 익숙한 성자 톨스토이는, 평화를 위해 말 그대로 ‘비타협적’으로 싸웠던 톨스토이, 저항자 톨스토이에 대한 이야기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의 출발점은 톨스토이의 지난한 투쟁이 발원하는 지점, 바로 그의 평화사상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평화’를 키워드로 성자이자 전사인 톨스토이를 깊이 파헤치는 동시에, 그 사상이 근대 (동)아시에 미친 심오한 영향을 파헤친다.





■ 차 례



Ⅰ부 지금 왜 톨스토이인가



Ⅱ부 톨스토이와 평화 : 성자와 전사 사이

제1장 참회와 파문

제2장 반국가와 탈애국

제3장 톨스토이와 세계평화

제4장 The Last Station : 위대한 고통의 인간



Ⅲ부 톨스토이와 아시아 평화

제1장 톨스토이와 인도

제2장 톨스토이와 중국

제3장 톨스토이와 일본

제4장 톨스토이와 한국



Ⅳ부 두 톨스토이의 만남 : 성자와 전사





■ 책 속에서



노벨상이 톨스토이를 끝내 포용하지 못한 것도 얼핏 수긍이 간다. 당시 서유럽은 평화 보장의 기본 단위로 국민국가를 상정하고, 평화의 국제법적 기초를 국가 간 관계 속에 마련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노벨상은 당대 이러한 국제 평화의 기조에 적극 호응할 뿐 아니라, 이를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톨스토이의 가차 없는 국가 부정, 그 토대인 사유(私有)의 부정 등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 다시 말해 ‘건전한 이상주의’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 본문 11~12쪽

톨스토이가 ‘이단 중의 이단’이자 ‘러시아 사회를 파괴할 극도로 불온한 인물’로 파문당한 진짜 이유는 예수의 신성과 부활, 내세 등을 믿지 않고, 성찬이나 고해 등을 거부한 때문만은 아니다. 톨스토이가 교리나 형식상의 파격을 요구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런 단순화와 절제를 통해서만 누구나 이해 가능하고 실천 가능한 예수의 가르침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쉽고 간명한 예수의 가르침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톨스토이는 국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국가를 교회가 정당화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렇게 톨스토이의 반교회론은 반국가론과 연결된다. 본문 47쪽

...이 마지막 열흘이 톨스토이라는 신화를 완성한다. 82살에 가출이라니. 불과 열흘 사이 ‘가출-발병-죽음’으로 숨 돌릴 새 없이 이어진 이 극적인 사건은 파란만장했던 톨스토이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기자들이 역 앞에 장사진을 치고, 전국에서 몰려온 추종자들이 웅성거리고, 그 와중에 48년을 함께 산 부인은 죽어가는 남편의 임종을 허락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다. 이 난리법석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톨스토이의 마지막에 더 없이 어울리는 장면이다. 평생 사랑을 설교했고, 늘 평화를 소원했던 톨스토이는 한때 더없이 사랑했던 아내와의 불화로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역설은 성자 톨스토이와 전사 톨스토이의 간극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 본문 113쪽

그의 탈국가 사상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한 천재의 혜안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혜안을 넘어 그것을 그 시대의 대안적 문법으로 기입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윤리적 결단’이 되고 만다. 누구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강고한 국가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 홀로 반국가, 반애국, 탈민족을 외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을 감행하는 것,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 양자 모두 도저한 윤리적 결단이다. 헤아릴 수 없는 논란과 의혹과 박해 속에서,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톨스토이는 둘을 모두 해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 탈국가, 탈민족은 현상의 인식인가, 윤리적 결단인가. - 본문 216쪽



■ 저자 소개 _ 이문영

서울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노어노문학과에서 석사를,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바흐찐(M. Bakhtin)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평화연구소, 국민대 유라시아연구소,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등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Nostalgia as a Feature of ‘Glocalization’: Use of the Past in Post-Soviet Russia”, “형제국가들의 역사전쟁: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의 기원”, “탈경계 시대 동아시아 평화와 러시아 극동에 대한 상상력” 등 다수의 논문,『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공저),『폭력이란 무엇인가: 기원과 구조』(공저) 등의 책을 출판했다.



출처: https://www.mosinsaram.com/196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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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평화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평화교실 3  
이문영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6-05-31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5138130


240쪽135*200mm312gISBN : 979118650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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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 - 평화라는 이름의 폭력들

평화와 법

함석헌의 평화론 - 협화주의적 평화인문학

다시 통일을 꿈꾸다 - 한반도 미래전략과 ‘평화연합’ 구상

평화를 걷다 - 한국현대사 평화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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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에게 익숙한 톨스토이, 즉 사랑과 용서, 무소유, 무저항, 도덕적 수양을 설교하는 성자 톨스토이의 후광에 가려진 ‘전사 톨스토이’의 모습, 즉, 탈국가, 탈민족을 외치던 근대의 이단아, 적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신앙을 설파하며 기성 권력과 맹렬히 싸운 톨스토이, 그 결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비밀요원에게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혹독한 검열로 생애 후반기 자기 땅에서 어느 책 하나 온전히 출판할 수 없었던 ‘저항자 톨스토이’의 모습을 ‘평화’를 키워드로 살펴본다.

또 톨스토이의 이러한 평화사상이 근대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1) ‘힌두 톨스토이’ 간디, 2) 류스페이 등 중국의 혁명적 아나키스트, 3) ‘일본 톨스토이’ 도쿠토미 로카, 고토쿠 슈스이 등 일본의 반전평화주의자/사회주의자, 4) 최남선, 이광수 등 톨스토이를 숭배했던 근대조선의 애국계몽 지식인과의 관계 속에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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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부 지금 왜 톨스토이인가

Ⅱ부 톨스토이와 평화 : 성자와 전사 사이
제1장 참회와 파문
제2장 반국가와 탈애국
제3장 톨스토이와 세계평화
제4장 The Last Station : 위대한 고통의 인간

Ⅲ부 톨스토이와 아시아 평화
제1장 톨스토이와 인도
제2장 톨스토이와 중국
제3장 톨스토이와 일본
제4장 톨스토이와 한국

Ⅳ부 두 톨스토이의 만남 : 성자와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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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1~12 노벨상이 톨스토이를 끝내 포용하지 못한 것도 얼핏 수긍이 간다. 당시 서유럽은 평화 보장의 기본 단위로 국민국가를 상정하고, 평화의 국제법적 기초를 국가 간 관계 속에 마련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노벨상은 당대 이러한 국제 평화의 기조에 적극 호응할 뿐 아니라, 이를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톨스토이의 가차 없는 국가 부정, 그 토대인 사유(私有)의 부정 등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 다시 말해 ‘건전한 이상주의’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접기
P. 47 톨스토이가 ‘이단 중의 이단’이자 ‘러시아 사회를 파괴할 극도로 불온한 인물’로 파문당한 진짜 이유는 예수의 신성과 부활, 내세 등을 믿지 않고, 성찬이나 고해 등을 거부한 때문만은 아니다. 톨스토이가 교리나 형식상의 파격을 요구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런 단순화와 절제를 통해서만 누구나 이해 가능하고 실천 가능한 예수의 가르침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쉽고 간명한 예수의 가르침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톨스토이는 국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국가를 교회가 정당화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렇게 톨스토이의 반교회론은 반국가론과 연결된다.  접기
P. 113 ...이 마지막 열흘이 톨스토이라는 신화를 완성한다. 82살에 가출이라니. 불과 열흘 사이 ‘가출-발병-죽음’으로 숨 돌릴 새 없이 이어진 이 극적인 사건은 파란만장했던 톨스토이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기자들이 역 앞에 장사진을 치고, 전국에서 몰려온 추종자들이 웅성거리고, 그 와중에 48년을 함께 산 부인은 죽어가는 남편의 임종을 허락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다. 이 난리법석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톨스토이의 마지막에 더 없이 어울리는 장면이다. 평생 사랑을 설교했고, 늘 평화를 소원했던 톨스토이는 한때 더없이 사랑했던 아내와의 불화로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역설은 성자 톨스토이와 전사 톨스토이의 간극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접기
P. 216 그의 탈국가 사상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한 천재의 혜안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혜안을 넘어 그것을 그 시대의 대안적 문법으로 기입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윤리적 결단’이 되고 만다. 누구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강고한 국가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 홀로 반국가, 반애국, 탈민족을 외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을 감행하는 것,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 양자 모두 도저한 윤리적 결단이다. 헤아릴 수 없는 논란과 의혹과 박해 속에서,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톨스토이는 둘을 모두 해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 탈국가, 탈민족은 현상의 인식인가, 윤리적 결단인가.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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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문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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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노어노문학과에서 석사를,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바흐찐(M. Bakhtin)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평화연구소, 국민대 유라시아연구소,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등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Nostalgia as a Feature of ‘Glocalization’: Use of the Past in Post-Soviet Russia”, “형제국가들의 역사전쟁: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의 기원”, “탈경계 시대 동아시아 평화와 러시아 극동에 대한 상상력” 등 다수의 논문,『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공저),『폭력이란 무엇인가: 기원과 구조』(공저) 등의 책을 출판했다. 접기
최근작 : <세계의 분쟁>,<톨스토이와 평화>,<유토피아의 환영 (반양장)>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가 몰랐던 톨스토이: 성자(聖者)인가, 전사(戰士)인가!
- 톨스토이의 숨겨진 면모를 ‘평화’와 ‘동아시아’를 키워드로 살펴보다

§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톨스토이, 즉 사랑과 용서, 무소유, 무저항, 도덕적 수양을 설교하는 성자 톨스토이의 후광에 가려진 ‘전사 톨스토이’의 모습, 즉, 탈국가, 탈민족을 외치던 근대의 이단아, 적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신앙을 설파하며 기성 권력과 맹렬히 싸운 톨스토이, 그 결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비밀요원에게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혹독한 검열로 생애 후반기 자기 땅에서 어느 책 하나 온전히 출판할 수 없었던 ‘저항자 톨스토이’의 모습을 ‘평화’를 키워드로 살펴본다.
또 톨스토이의 이러한 평화사상이 근대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1) ‘힌두 톨스토이’ 간디, 2) 류스페이 등 중국의 혁명적 아나키스트, 3) ‘일본 톨스토이’ 도쿠토미 로카, 고토쿠 슈스이 등 일본의 반전평화주의자/사회주의자, 4) 최남선, 이광수 등 톨스토이를 숭배했던 근대조선의 애국계몽 지식인과의 관계 속에 해부한다.

§ 이 책이 전해주는 새로운 톨스토이의 모습은 그를 도덕 타령, 사랑 타령이나 하는 고리타분한 성인군자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또 그의 ‘절대평화주의’의 불온함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해진 평화의 규범성, 상투성을 뒤흔들며 평화에 대해 깊이 돌아보고 사색하게 만든다.

§ 이 책은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기획한 대중적 평화입문서 ‘평화교실’ 시리즈 세 번째 책으로 출판되었다.

■ 출판사 서평

노벨상 후보에 20번이나 오른 톨스토이... 그런데 왜 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까?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쓴 천재 작가이자, 농민 계몽, 빈민 구제, 사형제 폐지나 반전 활동 등을 통해 인류애를 몸소 실천한 평화의 사도 톨스토이. 그는 노벨평화상에는 4번, 노벨문학상에는 자그마치 16번이나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두 상 중 어느 것도 받지 못했다. 대체 왜....
그 이유는 바로 ‘교회를 부정하고, 국가를 거부하고, 사적 소유에 도전했던’ 톨스토이 사상의 과격함과 전투성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톨스토이는...
교회와 싸우고, 국가와 싸우고, 소유 제도와 싸우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사실 우리에게도 그리 익숙지 않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톨스토이는 오드리 헵번의 『전쟁과 평화』, 소피 마르소의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검은 눈의 카추샤’가 등장하는 『부활』의 작가다. 이런 작가 톨스토이의 모습에는 어김없이 성자, 현자의 이미지가 덧씌어져 있다.
특히 2003년 MBC 교양프로그램 <느낌표>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이 고전베스트로 뽑힌 후, “바보 이반 이야기”,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같은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톨스토이하면 사랑, 무소유, 무저항, 비폭력을 설파하는 성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교회, 국가, 소유 제도와 싸우는 과격한 전사(戰士), 톨스토이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러한 비폭력, 사랑, 평화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했을까. 톨스토이는 이 모든 것이 ‘악에 대한 투쟁’ 속에 가능하다고 했다. 흔히 알려진 그의 무저항주의는 악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무저항인 것이지, 결코 악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라는 수동적인 무저항이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제도화하는 국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동 착취를 합법화하는 경제 질서,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신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는 기성 종교 등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 러시아 차르 정부, 군대, 경찰, 사법기관, 농노제나 자본주의 소유 구조,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와 평생에 걸쳐 간단없이 가열차게 싸웠다.

애국.민족의 시대에 톨스토이는 왜 탈국가, 탈민족을 부르짖었는가?
뿐만 아니라, 그는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전쟁이라는 최고의 악을 초래하는 근원으로 매섭게 질타했다. 그의 저 유명한 ‘러일전쟁 비전(非戰) 팜플렛’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연히 톨스토이는 보수 극우세력은 물론,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두와 불화했을 뿐 아니라, 당대 국제 평화주의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제국주의 열강, 피식민국가 할 것 없이 온 세계가 애국주의, 민족주의의 열기에 휩싸여 있던 당시, 오히려 탈국가, 탈민족에서 평화의 길을 찾은 톨스토이의 혜안은 초국가와 탈경계가 대세가 된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어떤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절대 평화주의자 톨스토이, 그 위험한 매력...
톨스토이의 유토피아는 국가로 대표되는 모든 제도화된 폭력의 거부 위에, 나아가 정당방위로서의 개별적 폭력조차 허용하지 않는 견결한 비폭력주의에 기반한다. 이러한 절대적 평화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엇보다 전투적이고, 따라서 불온한 평화주의로, 안전한 이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을 제외하고 자신을 둘러 싼 거의 모두와 싸워야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톨스토이, 성자와 전사 사이...
성자 톨스토이와 전사 톨스토이. 진실은 어느 한 쪽에 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에게 익숙한 성자 톨스토이는, 평화를 위해 말 그대로 ‘비타협적’으로 싸웠던 톨스토이, 저항자 톨스토이에 대한 이야기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의 출발점은 톨스토이의 지난한 투쟁이 발원하는 지점, 바로 그의 평화사상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평화’를 키워드로 성자이자 전사인 톨스토이를 깊이 파헤치는 동시에, 그 사상이 근대 (동)아시에 미친 심오한 영향을 파헤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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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톨스토이는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문영교수의 이 책을 읽으니, 무척 겸손해 진다. 정말 아는 것만 보이는구나. 
강두웅 2016-06-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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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에 평화라는 담론을 제목으로 정한 것 자체가 매우 신기했고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4번이나 올랐다는 새로운 사실은 덤으로 주어진 지식~^^
부르조아가 권태롭게 외치는 평화인지, 부정적 국가권력에 맞서자는 진심어린 주장인지를 알아가는 즐거움 또한 새로운 이야기~~ 
김재형 2016-06-2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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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톨스토이 새창으로 보기
톨스토이의 성자 이미지로 인해 톨스토이와 노벨평화상을 연결시키지 못했었는데 수상하지 못한 이유가 그런 속된(?) 이유였다는 게 아이러니컬하다~ 몰랐던 톨스토이를 알기 쉽게 소개해준 착한 책^^ 
임태혁 2016-06-2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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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와 알렉세이 톨스토이 새창으로 보기
러시아 작가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대표작이 번역돼 나왔기에('대표작'이라고 하지만 나도 모르던 작품이다. 대학에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읽을 일은 거의 없었기에) 포스팅을 하려다, 우리가 잘 아는 톨스토이(레프 톨스토이)와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혼동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듯싶어서 다시 구별해놓기로 한다. 러시아어 이름에서 '톨스토이'는 성이니 만큼 이 집안 사람들은 모두 '톨스토이'다.

이번에 <가린의 살인광선>(마마미소, 2016)이란 SF소설이 번역돼 나온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83-1945)도 톨스토이 가문의 일원이고, <전쟁과 평화>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와는 먼 친척뻘 된다. 매번 풀네임을 불러주는 건 번거롭기에(우리가 그렇다는 말이다) '톨스토이' 하면 레프 톨스토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되고,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지칭할 때는 '알렉세이 톨스토이'라고 이름과 성을 같이 써주어야 한다.  

 예전에 적은 대로,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과학소설 내지 SF소설로 <아엘리타>가 번역돼 있지만 발췌본이어서 큰 의의를 두기 어려운데, 이번에 나온 <가린의 살인광선>은 완역본인지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과학소설로서의 특성에 추리, 모험, 영웅, 유토피아의 요소까지 아울러 갖춘 작품으로 레이저 광선 발명의 동기 부여에 기여한 SF소설이다." 나보코프가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했다고. 

 그런가 하면, 우리의 '톨스토이'(레프 톨스토이)도 번역본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문예출판사, 2016) 번역본이 한 종 추가되었는데, 이로써 최소 서너 종의 읽을 만한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봄에는 톨스토이의 종교론(기독교론)으로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들녘, 2016)가 박홍규 교수의 번역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국내 최초 완역판'이라고 돼 있는데, (지금은 절판됐지만) 예전에 나왔던 책들은 발췌본이었던 건지 궁금하다(확인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참회록>,<신앙론>과 함께 톨스토이 후기 사상을 가늠하게 해주는 삼부작으로도 읽을 수 있다. <참회록>조차도 번역본이 희소해졌지만.

 톨스토이의 인생관과 평화사상에 대해서는 이강은/김성일의 <인생교과서 톨스토이>(21세기북스, 2016)와 함께 이문영의 <톨스토이와 평화>(모시는사람들, 2016)가 좋은 가이드북이다. 그의 급전적인 비폭력, 무저항 사상에 대해서는 <국가는 폭력이다>(달팽이, 2008)에 수록된 글들을 참고할 수 있다. 1890년대부터 쓴 정치적 에세이 7편을 담고 있다...

16.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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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6-08-07 공감 (3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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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 죄는 지은 네가 사죄를 해. 엄한 하느님 ... 새창으로 보기
‘대속‘죄는 지은 네가 사죄를 해. 엄한 하느님 끌어들이지 말고. 빚내서 짓는 교회는 대체 뭐야. 하느님은 네 안에 있다°는 말. 이리 해달라 기도하지 마라. 지은 죄는 당사자에게 빌라. 신은 바쁘다.볕뉘. 다시 보기로 한다. 신을 팔고 다니거나 자신의 죄를 감해달라 굽신거리는 자들을. ㆍㆍㆍ ㆍㆍㆍ인간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 레프 톨스토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박홍규역 ° 이문영 Moonyoung Lee, 《톨스토이와 평화》, 모시는사람들
여울 2020-03-04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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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톨스토이와 동양

알라딘: 톨스토이와 동양



톨스토이와 동양 

김려춘 (지은이),이항재 (옮긴이)인디북(인디아이)2004-12-21원제 : The Orient with Lev Nikolaevich Tolstoi

반양장본256쪽152*223mm (A5신)358gISBN : 9788958560531



책소개

동양적 요소가 잠재되어 있는 러시아의 역사와 문학, 특히 톨스토이의 문학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논문들을 묶은 책. 톨스토이의 동양에 대한 관심과 인식, 동양에서의 톨스토이 수용과 이해에 대한 글들을 만날 수 있다.

책은 톨스토이에게 동양이 어떤 대상인지, 도교를 비롯한 여러 동양 사상이 톨스토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을 다루었다. 이밖에도 한국비평의 톨스토이 수용, 톨스토이와 일본과의 관계, 인간이 기계문명에 병들어 있는 오늘날 필요한 톨스토이 정신을 짚었다.



목차



머리말



톨스토이와 동양 / 이강은 옮김(경북대 노문과 교수)



러시아와 동양 - 문화학적 관점에서

무위론 - 노자와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재고 - '무위론'의 시각으로 / 이항재 옮김(단국대 노문과 교수)



톨스토이 창작에 나타나는 서정 - 서사적 통합성 / 정명자 옮김(건국대 노문과 교수)



톨스토이와 한국

레프 톨스토이와 현대 일본 소설의 문제 / 백용식 옮김(충북대 노문과 교수)



레프 톨스토이와 일본에서의 반전 운동 / 심성보 옮김(건국대 노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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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톨스토이에게 아시아 제 민족들에 대한 '문명적 우월'이라는 개념은 아주 낯설었다. 유럽인들이 동양 민족들을 정복한 것은 정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 때문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톨스토이의 평등에 관한 이러한 느낌은 절대로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러시아 정신 속에 내재한 전 인류적 동정심과 함께 러시아와 동양이 역사적 및 심리적으로 가깝다는 그의 확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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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려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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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46년 함흥사범학교 재학 중에 소련으로 유학을 갔으며, 1952년에 로스토프대학 노문학부를 졸업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평양외국어대학 노문학부 교수를 지냈고, 1955년에 모스크바대학 대학원 러시아 문학부에 입학해서 59년에 졸업했다. 우즈베키스탄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1961년 소련 공민권을 취득했다. 2004년 현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아시아.아프리카 문학부에 근무하고 있다. 러시아 작가동맹 정회원으로 모스크바대학 국제한국학연구센터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러시아 문학과 일본 문학>(1985, 모스크바), <진달래꽃, 번역과 연구>(2002, 모스크바)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톨스토이와 동양>

이항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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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노어노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연구교수,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을 지냈고, 2019년 현재 단국대학교 러시아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의 정치학》, 《사냥꾼의 눈, 시인의 마음》, 《러시아 문학의 이해》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러시아 문학사》, 《첫사랑》, 《루진》, 《아버지와 아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숄로호프 단편선》, 《톨스토이와 행복한 하루》 등이 있고, 러시아 문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작 : <러시아 문학의 이해>,<러시아문학 앤솔러지 1>,<소설의 정치학> … 총 56종 (모두보기)

김려춘(지은이)의 말

그러나 동양만이 톨스토이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톨스토이도 동양의 정신적 유산에 다가간 것이다. 동양과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톨스토이가 살던 시대는 서구 열강이 동양을 침략하고, 또 근대화의 우등생이었던 일본이 반만년에 걸쳐 국토와 민족의 전통이 끊임없이 이어진 한국을 침탈한 시대였다. 이 죄악적인 행위는 '문화 보급'의 미명 아래 저질러졌다. 톨스토이는 침략과 약탈에는 도덕적 정당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을 지배한 이토 히로부미를 그는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동양적 의미에서 볼 때 대단히 문명화된 한국'에 대해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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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전체 현대불교신문

‘동서양인(東西洋人)’의 삶을 산 톨스토이
 김철우 기자
승인 2005.01.05 


 동서양인(東西洋人)의 삶을 산 톨스토이. 사진제공=인디북.

19세기 동서양의 만남. ‘일방통행’이란 단어부터 떠오른다. 서양은 문명의 시혜자로 ‘우쭐’ 했고, 동양은 ‘삐죽거리는’ 수용자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관계 자체가 쌍방향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접근태도도 달랐다. 동양은 근대화의 이정표를 서구에서 찾으려 했고, 서양은 ‘정체된’ 동양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달랐다. 동양에 대한 그의 태도는 쌍무적이었고, 진정한 상호성을 원칙으로 했다. 동양만이 톨스토이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톨스토이도 동양의 정신적 유산에 다가갔다.

기존 동서양의 편협한 상호인식, 그리고 소통을 위한 대화. 책 <톨스토이와 동양>은 평행선상에 서 있는 동서양의 만남들을 ‘톨스토이’라는 인물에서 그 접점을 찾고 있다. 때문에 논의 초점은 동서양의 관계성 조명, 톨스토이의 동양관 성립과정에 철저히 맞춰져 있다.

지은이 모스크바대학 김려춘 교수는 우선 이 책의 서두를 톨스토이의 동서양 관계부터 규명하는데서 출발한다.


 톨스토이와 동양의 책표지.

“아시아 민중들에 대한 ‘문명화된 우월성’은 톨스토이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반대라고 했다. 이런 평등의식은 결코 ‘만들어진 것’도, ‘인위적인 것’도 아니었다. 러시아와 동양은 역사적ㆍ심리적으로 유사하다는 그의 확신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이 같은 톨스토이의 동양관은 그의 문학사상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보편적 진리를 향한 모색 과정에서 그의 동양체험은 많은 공명을 일으킨다. 최소한 동양은 지적 확장을 위한 지식의 대상이 아니었고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 동양은 지혜 그 자체였다.

그럼 톨스토이가 경험한 동양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인생 말년에 접한 노자의 <도덕경>이다. 이를 통해 톨스토이는 동양의 모든 것을 ‘자기화’ 한다. 또 노자의 무위론은 그의 학문적 세계관에 일대 전환을 일으킨다. 무엇보다도 노자의 자유로운 사고방식, 표현의 간결성, 단편적인 구상 등은 톨스토이가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데 자극제가 됐다. 심지어 톨스토이는 1891년 자기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친 11권의 서적 리스트를 엄선할 때, <복음서>와 함께 <도덕경>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꼽을 정도였다.

톨스토이는 노자로부터 배운 무위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충고할 수 있다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일을 중지하고 주위를 살펴보라. 즉 무위의 삶을 살아보라. 그리고 나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라고 싶다.”

톨스토이와 노자의 사상적 해후는 시공을 초월해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던져주는데 충분하다. 물질숭배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성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사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친필 원고.

한국에 대한 톨스토이의 인식도 이 책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톨스토이는 “한국인은 동양적 의미에서 볼 때 대단히 문명화된 국민”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동양문화의 항구적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어, 서양을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조국 러시아를 포함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철저히 비판했다.

러일전쟁 직후, 1904년 미국 ‘노스아메리칸’ 지가 “러시아와 일본 중, 당신은 어느 쪽인가 아님 양쪽 다 반대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러시아도 일본도 아니다. 정부의 기만에 속아 자기의 행복과 양심을 버리고, 신앙에 어긋나는 전쟁을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양국의 인민들의 편”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그의 반전관은 1906년 조선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를 ‘미치광이’,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라고 극렬히 비판한다.

톨스토이와 동양의 관계를 고찰한 이 책은 그 중요한 취지에도 아쉬운 대목이 곳곳에 발견된다. 8편의 논문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등 밀도가 떨어진다.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지 않고 출간한 책이라는 의구심을 거둬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최소한 ‘눈 푸른’ 러시아의 문학가 바라본 동양에 대한 시선들이 담겨졌기에 그렇다.


‘톨스토이와 동양’
김려춘 지음 / 이항재 외 옮김
인디북 펴냄 /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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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francois :: 톨스토이와 메이지 일본: 종교사상가로 소개된 톨스토이 [1]

jeanfrancois :: 톨스토이와 메이지 일본: 종교사상가로 소개된 톨스토이 [1]



. 11. 17:38

니콜라스(1836-1912). 1970년 시성. 러시아 정교회를 일본에 소개한 정교회의 사제.





개인적으로 톨스토이에 대해 관심이 많은 터에 우연히 접하게 된 책에, 공교롭게도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톨스토이를 유별난 방식으로 수입한 연유에 대해서 추적한 논문이 실려 있었다.

기연이라면 기연일텐데. 암튼 필리핀에서 시간도 보내던 차에 포스트나 만들자는 심사로 소개한다.



Translation and Conversion beyond Western Modernity: Tolstoian Religion in Meiji Japan, Sho Konish, in Converting Cultures:

 Religion, Ideology and Transformation of Modernity

(ed. by Dennis Washburn and A. Kevin Reinhart, Brill: Leinden and Boston, 2007)



Translation And Conversion Beyond Western Modernity: Tolstoian Religion In Meiji Japan

In: Converting Cultures

Author: Sho Konishi

Page Count: 233–265

DOI: https://doi.org/10.1163/ej.9789004158221.i-507.49







필리핀에 오기 직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책. 당시 톨스토이-러스킨-간디의 계보에 관심이 많았던 때, 우연히 일본에서의 톨스토이 종교의 수용에 관한 흥미로운 아티클

을 만난 것이다.



도덕경과 톨스토이, 고니시



니콜라이라는 정교회의 사제가 일본에 처음 들어와서 정력적으로 일본 정교회를 정초할 때 그의 총애를 받았던 일본인 정교회 신자가 바로 고니시 마쓰타로Konishi

Masutato였다. 고니시는 1886년 니콜라스의 기대를 한몸에 안고 키에프의 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 때 고니시는 도덕경을 러시아의 사교계에 소개를 하게 되는데, 특히

모스코바 심리학회에서 고니시가 도덕경을 강의하면서 톨스토이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왜 도덕경인가? 왜 도덕경이 당시 러시아의 지성계에 깊은 공명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가?



저자-고니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저자는 그 이유를 메이지 연간의 정교회 신자 고니시가 이해한 노자라는 인물은 당시 러시아 지성계에 만연해있던 아나키즘과 사상적

인 공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고니시의 설명은 도덕경의 신학적인 측면과 그 사회적인 측면을 통합시켜 대중들에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민들을 조직할 제도나 국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무

정부주의자들에게도 말이다. N. N. Bazhenov는 고니시의 발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노자의 윤리관은 흥미롭다. 로자는 루소의 선구자처럼 보인다. 그에게 자

연상태의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종종 노자는 무정부주의자나 허무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사회를 파괴적인 전쟁과 불신으로 가득찬 인간관계에서 구하고자 한 노

자는 협동적인 소규모 자치공동체의 단순한 삶을 변호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고니시의 견해에 따르면, 러시아의 청중들이 노자를 무정부주의자로 수용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244-245)



톨스토이 역시 노자의 이런 무정부주의적인 면모에 매료되었다. 그가 도덕경에서 발견한 것은 제도종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무기였다. 톨스토이는 고니시에게 도덕경을

함께 러시아로 번역 소개하자고 제안한다. 논문의 저자 고니시의 다음의 묘사를 보면 도덕경이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적인 종교관을 매개하는 방식, 즉 도덕경을 통해 톨스토

이가 그 자신의 무교회주의적인 종교관을 심화시키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과 같은 당대의 무정부주의자는 나중에 이를 톨스토이의 ‘새로운 보편종교’라고 부르고 있다. 1세기 이후 전개된 그리스도교의 제도적인 상황, 예컨대 경제적

사회적 계서제를 정당화하거나 톨스토이가 미신적인 관습이라고 부르는 교회의 정치에 대한 개입과 같은 모습 등에 실망한 톨스토이는 도덕경에서 종교적인 목소리를 발견

한 것이다. 톨스토이의 개인적인 편지나 일기를 보면, 도덕경이 톨스토이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전개하는데 있어 멀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248)

톨스토이와 고니시의 협력의 산물인 러시아어 판 도덕경은 1894년 인쇄, 1913년 재판되어 나타난다.

식민지 시기 "예술" 개념 수용과 문학장의 변동; 홍명희의 "예술", 개념과 운동의 지반 -일본 경유 톨스토이의 비판적 수용-









학술




식민지 시기 "예술" 개념 수용과 문학장의 변동; 홍명희의 "예술", 개념과 운동의 지반 -일본 경유 톨스토이의 비판적 수용-
저자 이예안
참여구분 HK연구인력(HK교수)
저자수 1
학술지명 한림대학교 개념과 소통 12권
발행처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게재일 2013.12.31
초록

특집 : 식민지 시기 "예술" 개념 수용과 문학장의 변동; 홍명희의 "예술", 개념과 운동의 지반

-일본 경유 톨스토이의 비판적 수용-

Hong Myeong-hee`s Concept and Practice of "Art"

-His Critical Accommodation of Tolstoy, via Japan-



본고는 근대 한국의 예술 개념 수용과 형성을 살펴보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 ‘인생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서의 톨스토이 수용을 검토하고 그러한 기반에서 벽초 홍명희가 톨스토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 이해의 변천에 따라 어떠한 예술 개념을 구축했는지 검토한다. 

근대 일본의 예술 개념의 형성과 전개를 생각하는 데에는 ‘미술’의 제도화, 정제화와 병행하여 나타난 일본 정부의 ‘미학’에 대한 관심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미’에 대한 관심의 증폭과 더불어 문단에서 예술의 자율성에 관한 논의가 나왔으며, 한편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론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톨스토이의 ‘인생을 위한 예술’론이 등장했다.

메이지 전기의 톨스토이 수용은 도쿠토미 로카에 의해 강한 기독교적 색채를 띠게 되는데, 그러한 톨스토이상(像)이 이후 일본의 톨스토이 수용을 특징짓는다. 수용 주체에 따라 크게 종교계, 사회주의사상계, 문학계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일본 톨스토이 수용의 세 측면에 따라 그 각각에 대한 반응으로서 홍명희의 톨스토이 이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홍명희는 톨스토이에 대해 일본에서 부각된 종교적인 면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한편, 톨스토이사상에 촉발된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또한 동시에 톨스토이 예술론의 의의를 재발견하고 그에 공감했으나, 그 예술론이 지향하는 종교적 측면에는 여전히비판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홍명희의 이러한 톨스토이에 대한 다층적인 비판은 이어지는 시기에 홍명희를 마르크스주의, 프롤레타리아 예술론으로 견인하는 원동력이 된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홍명희가 의거하는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의 골조에서 레닌에 의해 수정된 톨스토이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접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레닌 식으로 수정된 톨스토이의 이해에 공감하며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을 제시했던 것인데, 민족협동전선으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그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톨스토이를 재검토한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공통 기반으로서 또 다른 예술 개념을 모색한다. 여기에서 톨스토이는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민 이상’을 리얼리즘 기법을 통해 표현한 ‘예술가’로서 새로이 평가해야 할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자장에서 ‘문학’, ‘예술’을 모색할 때 부정된다. 마르크스 사회주의이론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서 한 걸음 물러선 홍명희가 조선의 자장에서 민중·예술·운동을 지향하려 할 때, 톨스토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최대치로 교차되면서 그 틈사이로 ‘조선문학’의 여지가 열렸다. 하지만 ‘조선적’인 것은 여전히 기대 지평이며 ‘예술’은 유보되어 있다.

As part of an effort to clarify the acceptance and formation of the modern concept of art in Korea, this essay considers, first, how Japan accepted Tolstoy as an advocate of ‘art for life’ in the Meiji period, and then examines how Hong Myeong-hee made use of this in his understanding of Tolstoy and how this influenced his concept of art. In the early Meiji period, the Japanese understanding of Tolstoy became strongly tinged with Christianity through the influence of Tokutomi Roka, and this has characterized the Japanese image of Tolstoy ever since. Tolstoy was assimilated into Japan in three distinct ways by religious, socialist, and literary circles, and this essay considers Hong`s understanding of Tolstoy in terms of these three categories. Hong was quite critical about the religious attitudes prevailing in Japan, while he had no clear vision about the early Japanese socialism inspired by Tolstoy. He rediscovered the significance of Tolstoy`s concept of art and appreciated it, but at the same time, he remained sceptical of its religious aspects. Accordingly, this nuanced critical attitude toward Tolstoy led him to accept the Marxist proletarian concept of art in the following years. Hong initially relied on a conceptual framework of art which was a combination of Marxism with Tolstoyism as revised by Lenin; that is, he adopted a Marxian concept of art while sympathizing with the Tolstoyan stance modified in the style of Lenin. He subsequently came to re-consider Tolstoy, however, by distancing him from Lenin`s ideas, as he changed his views in line with those of the National United Front. He was groping for a different concept of art which could provide a common basis for the entire Joseon people. At this point, Hong considered Tolstoy as an artist who expressed the Russian ideal of ‘the people’ through realism, yet when Hong sought for a new concept of ‘literature’ and ‘art’ relevant to Joseon he had no role for Tolstoy. Then he took a step backward from the proletarian art movement based on Marxian socialism, however, looking for a way to integrate ‘people, art, and movement’ on a national level, and the tension between his positive and negative responses to Tolstoy finally opened a space for “Joseon Literature” to emerge. Hong had still to establish “what is proper and peculiar to Joseon”, however, and his concept of ‘art’ was also not fully for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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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전후 일본 혁명가들의 톨스토이 수용 양상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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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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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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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모든 종교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

‘제나에서 얼나’ 다석 류영모의 생애, 사상과 신앙…깨달으면 하나인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

기사입력: 2020/03/12 [19:55]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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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에서 얼나’ 다석 류영모의 생애, 사상과 신앙…깨달으면 하나인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







20세기 한국이 낳은 대표적 사상가이자 영성 철학자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는 인간으로서의 에고(몸나, 맘나), 곧 ‘제나’에서 벗어나 영(靈)이 주인이 되는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보인 선구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얼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한얼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한얼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한얼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한얼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한얼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얼나로』 중에서







다석 류영모의 생애



다석 류영모는 1890년 3월13일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6살 때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중국 송나라 휘종 때 강지江贄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중 대요를 뽑아 만든 역사서)을 배웠다.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고 다시 한문 서당에 다녔다. 12살 때부터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3년 동안 ‘맹자’를 배웠다.







15세에는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고,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9년 경기도 양평의 양평학교에서 한학기 동안 교사로 일했다. 1910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1912년에는 기독교 사상가요 문인인 톨스토이를 연구하여 그 영향으로 기성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짧은 소설들(‘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서 드러나듯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나가는 종교행사의 충실한 참여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복음을 이웃에 대한 자비, 정직한 노동, 양심적 병역거부, 악을 선으로 이기는 비폭력투쟁 등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서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 다석 류영모   





1915년 김효정과 결혼했고, 이후 최남선과 교제하며 잡지 《청춘》에 '농우', '오늘' 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1919년 삼일독립운동 때에 이승훈이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였다. 후에 이것이 적발되어 압수당했으며 류영모 대신 아버지 류명근이 체포되어 105일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년간 재직하였다. 1928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1928년 이전에는 아버지의 경성피혁 상점의 일을 도왔는데, 이후로는 아버지 류명근이 차려준 솜 공장인 경성제면소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잡지 《성서조선》에 기고했으며 이 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57일 만에 서대전 형무소에서 아들 의상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지만 이후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책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개신교에 입문한 이후 도그마에 물들지 않고 진리 탐구에 매진, 불교와 도교와 유교를 하나로 꿰는 ‘동서통합의 영성철학자’로 거듭났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불·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대로 ‘20세기 최대의 사건이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다석의 가슴속에서는 동서양의 종교가 만나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했다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이래 줄곧, 몸과 맘의 ‘제나(ego)’에서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 자체인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김흥호 같은 ‘겨레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적 종교사상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강의 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다.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 에든버러(Edinburgh)대학교에서 강의되었다.







●류영모와 김효정의 결혼







다석 류영모는 "결혼은 안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인격의 온전함이 능히 독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순 없다. "만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완전을 이룬다면 한번 하는 것이 좋아요. 결혼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데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류영모의 주위에는 등장하는 여인이 없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고 동경물리학교 유학을 다녀온 류영모이지만 비혼(非婚)을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했던 까닭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듯 사귀어본 사람이 없었다. 곁에서 독신인 그를 지켜본 목사 김필성이 중매에 나선다. 김 목사는 자신의 친구인 김건표의 누이동생 김효정(金孝貞)을 소개한다. 김건표는 류영모보다 7살 위로 전주 신흥학교 교사와 군산 우체국장을 지냈다. 신부가 될 김효정은 충남 한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현성(金顯成), 어머니는 임씨(林氏)이다. 위로 오빠 건표가 있고, 3살 아래의 동생 숙정(淑貞)이 있다. 김현성은 구한말 무관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일찍이 김옥균·박영효와 함께 개화운동에 가담했고 뒷날 전남과 목포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김효정은 아버지와 오빠의 직장을 따라 광주·목포·전주·군산·이리 등 호남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효정과 숙정 자매는 군산에서 소학교 3년, 중학교 3년 과정의 학교를 다녔다. 여학생이라고는 두 자매뿐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다녔다.







여름에는 덮어 쓴 장옷으로 잔등에 땀띠가 나 고생을 하였다. 나이 많은 남학생 틈에 자매가 학교에 다닌다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어찌나 말이 많던지 자매가 도중에 학교에 가기를 그만두었다. 학교 측에서 집으로 찾아와 자매가 학업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두 사람이 도중에 그만두면 앞으로 다른 여학생들이 입학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자매는 다시 학교에 나가 졸업을 했다.







동생 숙정은 서울에 와서 경기고녀를 졸업한 뒤에 교사가 되었다. 효정의 부모는 오빠와는 달리 신랑감 류영모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부친은 사위도 자신처럼 건장한 무인형(武人型)을 바랐다. 류영모는 작은 체격에 지적인 면모의 선비형이다. 류영모는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앞으로 시골로 가서 농사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효정의 모친이 싫어했다. 사위 될 사람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면 체력이 약한 맏딸이 농사바라지를 감당해낼 수 없을 거라고 걱정했다. 남편 따라 밭이랑에서 김 매고 오줌항아리를 이고 나르고 마당질에 도리깨질을 해야 할 터인데 효정의 체력으로는 역부족이란 것이다.







●어긋날 뻔한 혼담 성사시킨 류영모의 서신







김효정은 나중에 팔순이 되었을 무렵, 류영모와 혼담이 있던 처녀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오빠의 말씀이 신랑 될 사람은 학식이 깊고 생활이 철저한 사람이라고 하였어요. 사람은 참되게 살려면 농사짓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드시 국산품을 쓰는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류영모는 당시 목포에 살고 있던 신부감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중매하는 김필성의 얘기만 듣고 참한 규수라 하여 혼사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인·장모될 분들이 완강하게 반대를 한다니 난감했다. 시골에 가서 농사지으면서 살겠다는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혼담이 그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류영모는 생각 끝에 장인이 될 김현성에게 허혼(許婚)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김효정의 집에서는 류영모의 편지를 받고 술렁이었다. 사위가 될 사람으로부터 장인 될 사람에게 편지가 왔으니 그때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김현성은 사윗감 류영모의 편지를 읽고는 그 문장과 글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둘째 딸 숙정이를 불러서 읽어보라고 했다. 언니 효정이 사랑방에서 나오는 숙정에게 편지에 무슨 말이 씌어 있더냐고 물었다. 숙정의 대답은 이러했다. "붓글씨로 쓴 편지글이 논어를 읽는 것 같았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어." 당시 숙정은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 한자가 많았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만, 학교 교사도 못 읽는 글이라니, 대체 뭐라고 썼기에 그랬을까? 그렇다고 아버지께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류영모는 이 편지 한 장으로 혼담을 성사시켰다. 당시 풍속은 신랑이 장가(처가집)를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랑 류영모는 신부에게 시집(시가)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임금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친영례(親迎禮)와 같이 잔치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굳이 양가를 오가는 이중잔치를 벌일 필요 없이 처음부터 시댁으로 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서로 이런 논란이 오가던 끝에, 신부 집에서 양보를 했다. 장인 김현성은 혼례에 오지 않았고 오빠인 김건표가 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신부 김효정은 목포항에서 인천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탔고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경인선 기차를 탔다. 신부는 배멀미와 차멀미를 연속으로 했다.





▲ 류영모·김효정 부부   





●"남녀는 최선 다하라" 주례사에서 읽은 성경구절







서울 종로구 당주동 신랑집 마루에서 혼례가 올려졌다. 목사 김필성이 주례를 맡았다. 신부도 14살 때부터 교회에 나간 기독교 신자라 교회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신랑 류영모는 주례에게 예식 때 읽을 성경구절을 미리 지정해 줬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전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였다.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자기 아내를, 여자는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 할 일을 다 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간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혼례를 올린 때가 1915년 9월, 늦더위가 느껴지는 초가을이었다. 25살의 신랑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22살의 신부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혼례복으로 입었다. 김효정에게 오빠 김건표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남편은 훌륭한 분이다. 네가 남편의 뜻을 거스르면 너와 나 사이에 남매의 의를 칼로 자르고 소금을 치듯 끊을 것이다."







58년 전의 얘기를 80살이 된 김효정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의 말을 깊이 품고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신랑 류영모, 첫날밤 실종 사건





혼례식을 올린 류영모는 그 길로 호남선 목포행 열차를 타고 목포에 있는 처가로 향했다. 신부의 부모님을 뵙기 전에는 감히 신방에 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신부는 신랑이 신방에 들기를 기다렸다. 밤이 늦도록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부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만 신랑이 행방불명이 된 셈 치고는 집안이 너무 잠잠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장가든 날 신부보다 더 중요한지 궁금했다. 신식 혼례를 올렸으니 신랑이 풀어 주어야 하는 족두리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옛말에 집안이 쓸쓸하면 맏딸 시집보낸 집 같다고 한다. 22살이 되도록 고이고이 기른 딸을 멀리 서울로 시집보내고 부모는 쓸쓸한 마음과 온갖 걱정을 보태면서 집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인가. 새신랑인 사위 류영모가 목포 처갓집 대문 안으로 쑥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기겁하듯 놀랐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길?” 마땅히 서울에서 신부와 함께 있어야 할 신랑이 홍길동처럼 목포에 나타났으니 예삿일은 아니다. 사위 류영모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장인·장모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찌 신부를 혼자 두고 이곳에 왔는가?” 이렇게 묻자 류영모는 이렇게 말한다. “장인·장모님에게 인사를 올리기 전에 어찌 신방에 들 수 있겠습니까?” 이걸 나무라야 하나, 고마워해야 하나. 장인·장모는 난감한 표정 속에서도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신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주다니 고맙구려.”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기 위한 청년의 선택







그렇게 장인·장모의 대화는 오래 이어졌고, 사위의 식견 속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지니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장인은 문득 이런 말을 꺼낸다. "여보게, 자네 얘기들이 실상을 꿰뚫고 있고 나라의 뒷날까지 깊이 걱정하고 있는 대장부의 기개까지 느껴지게 하네. 우리 둘째 딸 숙정이가 있네. 자네 부인이 된 첫째와는 세 살 터울일세. 맏사위가 둘째의 인연도 한번 찾아주심이 어떻겠는가?"







그러면서 경탄을 이어갔다. "5척 단구(短軀)에서 어떻게 그런 기개와 담론이 나오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네." 키가 작다는 건, 장인이 처음에 그를 마뜩잖아 했던 이유가 아닌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을 한다. "5척의 키나 8척의 키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겠습니까. 신체의 자잘한 것에 얽매여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우주를 살피지 못한다면, 그 눈이 어찌 높고 큰 것이겠습니까. 학교에 있을 때 천문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가르쳐, 세상을 이루는 보다 큰 것에 대해 관심을 지니게 되니 소소한 차이들에서 마음을 쓰는 일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단구와 생각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에 호쾌한 무골인 장인의 입이 하릴없이 닫히고 말았다. 류영모는 처가의 큰 대접을 받고 귀경하는 길에 관촉사에 들러 은진미륵보살입상을 구경했다. 논산의 대장간에 들러 솥을 만드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신부를 두고온 신랑으로선 속 터질 만큼 느긋한 행보였다. 서울의 김효정과 재회한 것은 첫날밤이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대체 왜 이토록 사랑의 입방(入房)을 늦췄을까. 그가 직접 이에 대해 말한 바는 없지만, 젊은 나이로 조급해지는 마음을 바로잡고 사랑의 이름을 빌린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고자 함이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결혼 2년 뒤인 1917년에 첫아들 의상(宜相)을 낳았다. 1919년엔 둘째 자상(自相)을, 1921년엔 셋째 각상(覺相)을 두었다. 아들 셋의 이름에 항렬 자 상(相)을 빼면 의자각(宜自覺)이 된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으라. 그는 별 뜻 없이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가 아들들이 어떻게 하기를 바랐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1926년에 낳은 딸의 이름은 월상(月相)이었다. 음력 보름에 낳았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의 이름을 모두 이어보면 의자각월(宜自覺月)이 아닌가. '마땅히 스스로 깨닫아 달처럼 환해져라',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환해지는 일은 부모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핏줄에 대한 애착을 담은 말도 아니다. 태어난 이상, 스스로 그 정신의 길을 찾아서 가야 한다는 진정어린 애정의 충고이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돋으라







류영모는 자식을 잘 길러 훌륭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고 보았다. 자식은 결국 육신이 품는 희망일 뿐이다. 후손이 끊어질 것을 고민하던 나라가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정신이 끊어지지 않아야 나라가 산다고 말한다. 정신을 이어주는 것이 육신을 이어주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런 면모를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이름 속에 넣어놓은 '의자각월'은 '정신 잇기'의 염원이 아닐까 싶다. 육신으로는 내가 낳았지만 정신으로 거듭나는 것은 너희 스스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돋아 오르는 달이 아닌가. 류영모의 결혼생활은 담담하고 아름다웠다. 김효정과 회혼(回婚)을 넘기며 백년해로했다.



류영모의 처가, 즉 김효정 친정집안의 뒷날을 훑어보면 이렇다. 류영모의 처남 김건표는 뒤에 서울에 와서 살았다. 만년에는 출판사에서 청탁하는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출판사와 인연을 맺고 일을 하는 처남의 권고로 당시의 도량형에 관한 책을 편술하여 이름을 『메트르』라 하였다. 류영모는 처남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했던 것인데, 나중엔 아예 개성사(開成社)라는 출판사를 열게 됐다. 개성(開成)이란 역경(易經)의 계사전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 만물의 뜻을 열어 천하의 일을 성취함)를 뜻한다. 『메트르』를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 출판사를 경영하는 일본 사람이 자사 출판서적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해 왔다. 도량형의 원기(原器)를 실은 것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 도량형의 원기는 인류 공동의 표준기기로 표절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요, 일본 사람의 소송이라 패소한다. 개성사는 책도 내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처남 김건표는 자녀를 못 두었기에 처가의 손(孫)은 끊어졌다. 김건표의 아내(류영모의 처남댁)는 90살이 넘도록 장수하였다. 류영모가 사준 땅에 지은 전주 동광원에서 살다 돌아갔다. 처제 김숙정은 혼인하여 오류동에서 거주했다.







류영모와 김정식·조만식·우치무라와의 만남







1912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22세의 다석 류영모는 길 위에 서서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늦가을 오후 교사로 2년을 근무했던 교정엔 마른 잎들이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서슴없이 제 나무를 버린 저 잎들은 다시 시작될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거름이 되리라. 그에게 지난 2년은 다양한 동서양 학문을 접하는 기간이기도 했지만 이승훈, 여준, 이광수, 안창호, 신채호, 윤기섭 등 당대의 지식인·교육자·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열정과 지식과 신념에 감화를 받던 때였다.







오산학교 교사 시절은 그에게 사상적인 격동기이기도 했다. 이 학교에 교리 기독교를 전파했던 류영모는 톨스토이와 일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로서 서구적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 즉,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했음)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적 성찰을 심화한다. 성서와 톨스토이 저서, 불경과 도덕경을 숙독하면서 그의 기독교 사상은 이미 시스템화 돼 있는 교회와 교리의 종교체계에 대한 깊은 의문을 키워갔다.







이 의문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되었고,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적 신념체계들과의 뿌리 깊은 공통점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오산학교에 머문 지 1년이 되었을 때 두 살 아래 동생 류영묵의 죽음을 겪었고, 생사관(生死觀)에 대해 고심참담했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집요하게 진실을 탐문해 들어가고 있었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풀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학교를 떠났지만, 그의 마음속엔 학문과 사상의 갈증이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국내엔 대학이 없었기에 일본 유학을 택했다. 류영모는 지식을 더 다져 다시 오산학교에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학교사가 필요한 그곳을 생각하며, 대학의 전초단계 과정(예비학교)이라 할 수 있는 도쿄(東京)물리학교에 들어간다. 1912년 9월의 일이다. 그런데 그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대학 입시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귀국한다.







●깊어진 사상의 갈증 그리고 세 사람







갑작스럽게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류영모는 이 무렵(일본 재학)이 인생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 고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학문을 계속하는 일이 그의 사상과 신앙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리학자가 되는 일보다, 당시의 그에겐 신학사상가가 되어 식민지 조국의 정신성(精神性)을 일신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데에는 일본 체류시절 느꼈던 도쿄의 어떤 '공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류영모는 도쿄에서 그의 생에 큰 영감을 준 세 사람을 만난다. 김정식과 조만식,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다.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 1862~1937)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류영모에게 예수를 알게 해준 일생일대의 은사이다. 1905년 15세의 류영모는 연동교회에서 김정식을 만났고 그를 통해 성경을 읽게 됐다. 김정식은 대한제국 시절 경무관을 지냈는데, 독립협회 사건에 연루되어 1902년 국사범(國事犯)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이때 선교사 게일이 감방에 넣어준 신약성경을 읽는다. 4대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의 생애를 돌아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 몹시 억울한 상황에서 예수가 취한 의연한 태도는 성스럽게 여겨졌다. 김정식은 성경을 7번 읽었고 8번째 읽는 가운데 1904년 무죄 석방이 된다.







김정식의 옥중 신앙고백서는 절절하여,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나는 육신의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내 불쌍한 사정을 고할 곳이 없으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지극히 친절하시고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형님께 고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 앵사는 나이 10살도 안 되었을 때 두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로마교황(가톨릭) 양육원에 보냈으니, 때때로 부모를 찾아 부르짖을 생각을 하면 뼈가 저리고 오장이 녹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 같은 악한 죄인도 없었고 지금 이같은 깨끗한 마음을 얻은 사람도 나 혼자뿐입니다. 차후 어떤 지경에 처할지라도 이 은혜를 잊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전날에 지은 죄로 오늘 이 같은 긍휼(矜恤, 가엾이 여김)을 받기는 진실로 뜻밖입니다. 이 몸이 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찌 이런 은혜를 얻었으리오."

-김정식의 옥중 신앙고백서 중에서







●다석, '믿음의 은사' 김정식과 재회







감옥에서 나온 김정식은 캐나다인 게일 선교사(James Scarth Gale, 奇一, 1863~1937)의 권유를 받고 연동교회와 YMCA의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연지동, 지금의 연동교회 자리에 있었던 애린당(愛隣堂, 이웃사랑의 집)에 살았다. 감옥에서 출발해 신앙 입문 3년차에 이른 43세 김정식은 15세 류영모에게 자신을 그토록 놀랍게 바꾼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류영모는 예배시간이 아닌 때에도 애린당에 찾아가 여러 가지 일을 도우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함께 지냈던 ‘믿음의 스승’를 류영모는 7년 뒤에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것이다. 식민지의 척박한 삶 속에서 살아 있는 것만도 반갑던 시절에, 이국땅에서 '믿음의 스승‘을 만난 일은 그야말로 축복 받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정식은 류영모의 손을 잡고 가족에게로 데려갔고 사진도 찍었다.



김정식은 어떻게 도쿄에 와 있었을까.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잡는다'는 암암리의 공감대가 커지면서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늘어났다. YMCA는 한국 유학생들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도쿄에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세운다. 1906년 8월 서울 YMCA에서 일하던 김정식이 파견되어 도쿄 총무직을 맞는다. 이 건물은 1919년 2월8일 그 유명한 재일유학생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곳이다.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모두 김정식의 지원을 받았다. 조만식, 안재홍, 김규식, 송진우, 장덕수, 신익희, 김병로, 이광수 등 쟁쟁한 명사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메이지대 법대생 조만식과의 만남







김정식은 ‘신앙의 제자’ 류영모에게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2~1950)을 소개해준다. 재일본 유학생들은 종파를 초월한 연합교회를 만들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거기에서 류영모는 조만식을 처음 만났다. 조만식은 같은 평안도 사람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을 알고 있었기에 오산학교 교사로 지낸 류영모를 더욱 반가워했다. 그의 하숙집이 류영모가 기거하는 곳에서 가깝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류영모는 메이지(明治)대학교 법과 졸업반이던 조만식을 자주 찾아가 얘기를 나눴다. 훗날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으로 남게 된 위대한 인물 조만식은 그때 눈빛이 형형한 청년에게 문득 이런 얘기를 꺼냈을지도 모른다.







"요강을 잘 닦으시오."







류영모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어린 날 동네 부잣집 머슴이었소. 내가 할 일은 요강 닦는 일이었지요. 나는 매일 있는 힘을 다해 요강을 닦고 또 닦았소. 어느 날 주인이 나를 불러 공부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내게 학비를 대주었습니다. 작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을지 모른다. "애국 애족하는 길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있어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은 쓰지 말라고 하고 싶소. 다만 큰 눈을 두 개 그려주면 좋겠습니다.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 일본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한 눈으로 조국이 자주독립하는 것을 지켜보려 합니다." 고당 어록에 있는 말들이다. 23세 류영모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울림으로 남았을 것이다.                               





▲ 고당 조만식 





인연은 오묘하다. 조만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 옥중에 있던 이승훈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로버트 교장이 들어온 뒤 기독교 신앙통제가 심해진 오산학교를 민족정신의 성지로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만식은 뜻이 그러하니 석달만 맡아 수습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9년간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이 학교의 기풍을 제대로 갖춘 큰 교육인으로 길이 남았다. 그는 오산학교 기도회에서 이렇게 교장설교를 했다고 한다.







"사람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겨레를 사랑합시다. 옳은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를 믿읍시다."







이런 조만식의 뒤를 이은 교장은 류영모였다.







다석에게 기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에 관한 얘기다. 류영모가 일본에 갔던 1912년 우치무라는 51세였다. 그는 한 살 아래인 김정식(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과 친구처럼 지냈다. 우치무라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 신앙의 벗인 경성의 김정식군 방문이 있었다. 3년 만에 만나서 대단히 반가웠다. 그는 장로교회에서 일하지만 그 신앙에 물들지 않았음을 알고 기뻤다. 그가 고국의 일을 말할 때에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 기도를 같이 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1919년 5월19일)







●김정식과 절친이었던 우치무라의 강연







"오래간만에 조선 김정식군이 찾아왔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빛으로 빛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뻤다. 그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본과 조선의 합동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정치가나 군인이나 실업가는 모른다. 나는 일본인이고 김정식은 조선인이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형제이다. 김군은 나의 신앙을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걸 감사한다."(1922년 11월7일)







이 엄혹한 시절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우치무라 간조는 누구인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근대 일본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정치가)를 저격했을 때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다(잡지 '성서의 연구', 1909년 12월호).







"나는 조선을 위해 이 일을 기뻐한다. 이 나라는 지금 실제적으로 국토를 잃고 정부를 잃고 독립을 잃고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다. 자비로운 하느님이 지상에서 이들 조선인의 손실에 대해 영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보상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인의 하느님은 또한 조선인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후하시고 그들에게는 박하실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가지고 조선인의 지상에서의 손실을 메워주실 것이다. 지상에서 저주를 받았으면 하늘에서 은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이 은혜로운 아버지에게 자비를 입을 것을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 표방하는 평등과 사랑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탄력을 받던 시기에 일본 지식인이 자국의 통감 피살 사건에 대해 이같은 논평을 내놓는다는 것은 대단히 용감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보인다.                           





▲ 우치무라 간조   



●주체적인 기독교 교리해석을 고민하다







김정식은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강연회에 우치무라를 강사로 자주 초빙했다. 류영모는 도쿄물리학교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 우치무라의 강연을 들었다. 하지만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류영모는 우치무라가 서양에서 출발한 기독교를 그대로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이식하는 것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교회와 교리 문제, 일본 국가주의와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문제 등에선 일정한 이견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우치무라가 이 땅의 초기 기독교 정착 과정에서 주체적인 '교리 해석'에 눈뜨게 했고 독립운동과 같은 국가적 현실논리의 신앙적 구현을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 종교사적 존재감은 지금도 상당해 보인다. 류영모가 우치무라의 신앙적 실천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청년시절 '영성(靈性)의 주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를 우치무라에게서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우치무라 '무교회'는 서양식 기독교에 대한 반대







우치무라의 경우, 삿포로 농학교에서 놀라운 형제애를 체험했던 '7인형제의 작은 교회'의 함의(含意)를 신앙적 신념으로 발전시켰다. 교회와 목사 중심의 서양 기독교가 아니라,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평등하며 자발적인 형식으로 움직이는 '교회 아닌 교회'를 실천한 것이다. 일본 기독교에 서양 전통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뿌리 깊은 애국적 주체성의 발로이기도 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無敎會)’는 교회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제도주의와 성례전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제도주의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계급시스템이다. 믿음 안에서 신도들은 철저히 평등하다는 얘기다. 또 신앙을 형식에 가두거나 교파적 신조가 구원을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주의 혹은 배타주의를 비판했다. 예수 이후에 생겨난 인위적인 형식과 구분들이 본질적인 신앙을 오히려 훼손하거나 왜곡한다고 본 것이다.







성례전주의는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세례는 죄를 정화시키는 기적적인 힘이 있는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앙생활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만찬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형제·자매로 거듭나는 신앙행위라고 해석했다.







우치무라는 말했다. "나에게 교회는 없지만 그리스도는 있다.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내게도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가 나의 교회다." 그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새롭게 읽을 것을 제안했고, 그것이 '성서연구회'다. 기존의 기독교계에서는 성서를 연구한다는 시도 자체가 불경이었다. 







●임종 때에도 인류의 행복과 일본 융성을 말한 우치무라







우치무라 간조는 70세인 1930년에 눈을 감으며 "인류의 행복과 일본국의 융성과 우주의 완성을 기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와 일본을 늘 함께 생각했던 애국적인 신념을 드러낸 유언이었다. 그가 일본을 비판할 때도, 거기엔 깊은 애국심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그가 남긴 사상인 '무교회주의'는 평생 투쟁적으로 살았던 신앙적 삶의 기반 같은 것이었다. 또한 세상에 남겨놓은 결실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무교회주의는 나의 신앙이다. 혹자가 감리교회 신자이고 혹자는 침례교회 신자이고 혹은 성공회 신자이고 회중교회 신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교회 신자이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류영모가 교회를 탈피하면서 주창했던 비정통 기독교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접근은 류영모 신앙이 지닌 독보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를 돋을새김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류영모는 톨스토이의 신학적 입장과 마찬가지로 '교회' 자체가 성서에는 없는 기업적 시스템이며, 예수의 초인적 면모나 '기적' 또한 믿음을 돋우고자 후세에 덧붙인 가필일 뿐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회를 중심으로 교파를 형성하고 그밖의 신앙행위를 이단으로 배격하는 서양기독교의 골격에서 스스로 이탈하고자 했다. 그는 정통을 표방하는 교회들을 비판함으로써 이런 생각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교회를 나와 성서 속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가르침을 가려내고 동양적 통찰과 함께 적용하여 그 보편성을 실천하는 길을 걸었다.







●조선산 기독교를 주창한 김교신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기독교를 계속해서 새롭게 표현하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 우치무라의 주장들을 '진정한 복음'이라고 믿었다. 복음의 진리를 일본 역사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는 우치무라는 그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예언자로 여겨졌다. 그는 1927년부터 조선성서연구회 5명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한다. 이 잡지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폐간된다. 그는 이 잡지에서 '조선산(朝鮮産) 기독교'를 주창했다.                       





▲ 김교신   





일본은 김교신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해 감옥으로 보냈다. 1944년 전염병에 걸린 조선노동자를 간호하다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선 무교회'는 친구였던 함석헌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함석헌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격랑 속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역사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우치무라는 당시 조선에 대해 과감한 우호적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3·1독립운동의 일제 탄압과 관동대지진의 대학살에 대해선 침묵했다. 김교신이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영국과 스코틀랜드 관계처럼 되면 좋지 않겠느냐"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적 평등관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일본에 대한 애착을 넘어선 보편적 투철함은 지니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우치무라는 조선의 영적인 세계까지 노리는 영적 제국주의의 야심가"라는 맹렬한 국내 비판(김린서)까지 받기도 했다.







류영모는 비교적 우치무라에 대한 말을 아꼈지만, 자신과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외국 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 정신에 입각해 교회 본래의 정통신앙을 세우고자 했죠. 나와 톨스토이는 (교회를 벗어난) 비정통신앙입니다." 







톨스토이 사상을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한 류영모



●20세기 한국 문명을 깨운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는 영변의 아래쪽에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고려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물리친 귀주대첩으로 유명하다. 귀주(龜州)는 정주의 옛 이름이다. 조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 갈 때 사흘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곳도 이 일대였는데, 관군이 난을 진압한 뒤 정주는 ‘반역향(叛逆鄕)’으로 찍혀 정원현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 500년간 과거 급제자를 280여명이나 배출하여 한양을 제외하고는 합격자를 가장 많이 낸 학향(學鄕)으로 손꼽혔다.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정주역이 생겼고 교통의 요지로 발달한다. 오산학교가 설립되던 1907년 정주군의 인구는 4만2000여명으로 북적이는 도시였다. 이곳은 근대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20세기 초기 근대화를 이끈 요람'으로 손꼽힌다. 문학가 백석과 이광수, 종교인 문선명(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언론인 방우영(전 조선일보 회장)의 고향이다. 특히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정주에서 3개 교회를 개척한 문선명 총재의 종조부 문윤국 목사는 오산학교 설립에도 뜻을 같이했다, 문 총재는 생전에 펴낸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서 문 목사를 ‘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문 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문 목사는 정주에서 목사로 봉직하던 중 3.1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문 목사는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로 권유받았으나 스스로 물러나자 기독교계 대표 이승훈이 거사 실패 후의 후사를 당부하고 민족대표 명단에 빠짐으로서 그의 명성은 자연히 묻히게 됐다.                       





▲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이승훈의 주도로 설립된 오산학교(정주군 갈산리 오산)에는 여준·윤기섭·류영모·장지영·이광수·염상섭·김억이 교사를 지냈고, 교장으로는 백이행·이종성·박기선·조만식·류영모·주기용 등 뛰어난 교육자들이 학교를 키워냈다(류영모는 교사와 교장을 모두 지낸 오산학교의 핵심 교육자였음). 백인제·김홍일·함석헌·이중섭·김소월이 이 학교 출신 학생이며, 김기석·주기철·한경직 목사도 오산학교를 나왔다. 학생 7명에 교사 2명으로 부랴부랴 창설했던 이 작은 학교(4년제 중등과정)가 일제 치하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주체적 종교운동의 산실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1907년 12월24일 학생과 학부모를 합해 20여명이 참석한 개교식에서 이승훈이 발표한 개교사는 이렇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 내려온 이 강토를 원수인 일본인들에게 내맡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총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자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늘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들을 가리켜 만분의 일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을 한데 모아서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평북 구성에서 태어난 김소월은 오산학교 재학시절 교사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2년 《개벽》지에 실린 '진달래꽃'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란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 일대(영변 약산 제일봉과 학벼루)의 아름다운 풍광은 황폐한 식민지 민족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향수를 아로새겼다. 또 다른 국민시인으로 인정받는 백석을 낳은 것만으로도 오산학교는 '위대한 시의 메카'로 불릴 만하다.





●춘원 이광수와 교대한 물리선생 류영모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때는 1910년 10월1일이었다. 8월29일이 국치일(國恥日)이었으니 한달 남짓 지난 무렵. 빼앗긴 들에도 계절은 오고 있었다. 평북 정주엔 곱기만 한 단풍이 들고 산들바람 속에서 갈잎의 노래가 들려왔다. 교사 류영모가 간 오산학교엔 아직 1회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4년제 학교에서 아직 3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던 때다. 1907년 12월 24일에 설립했으니 3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은 모두 합쳐 8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옥이었던 오산학교에는 딴 지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합숙을 했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이었다. 교사 류영모는 당시 3학년이던 김여제, 이인수와 한 방을 쓰며 기거했다. 교사와 학생이 나이도 어슷비슷했다.







한해 전에 먼저 온 선생으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있었다. 과학 교사를 맡고 있던 이광수는 18세였고, 류영모는 두살 위인 20세였다. 류영모는 이광수를 만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인데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공명을 느껴 금방 동지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흔하지가 않다. 죽을 때까지 사귈 수 있는 친구도 이렇게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고 몇 백리 밖에서 찾아오는데 죽마고우를 만나는 것같이 금방 익숙해진다. 하룻밤을 새더라도 참 즐겁다. 평생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알려질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와서 예수교, 불교, 유교는 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춘원은 오산학교 교가를 작사했다. 이후 류영모가 수학과 물리화학, 천문학을 맡게 된다. 류영모가 당시 교재로 쓰던 물리교과서는 서울 종로에 있는 출판사 보성관에서 번역한 한자투성이의 책이다. 우선 한자부터 가르쳐야 읽기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산학교의 아침 풍경은 이랬다. 학생들은 새벽 기상종에 맞춰 일어나 열을 지어 구보를 하며 황성산(黃城山)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오산동 북쪽에 있는 이 산은 누런 점토로 축조한 토성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학생들은 구령에 맞춰 교가를 제창했다.







"뒷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러/비에나 눈에나 변함 없이/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사랑하는 학교 우리 학교"







이 교가 소리에 맞춰 마을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 교가를 지은 사람은 교사 여준이었다. 그는 수신(도덕), 역사, 지리, 산수를 가르치던 선생이다. 열심히 구령을 부르며 구보하는 학생을 이끄는 교사는 서진순이었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육군 연성학교를 나왔기에 학생들의 체조와 훈련을 담당했다. 깐깐한 교사로 스파르타 교육을 했다.







구보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소금으로 이를 닦고 얼굴을 씻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아침 식사를 했고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은 여준 선생에게 글도 배웠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이승훈에 대해서 오산학교 출신인 함석헌이 지은 시조가 남아 있다.







"남강(이승훈의 호)이 무엇인고 성(誠, 정성)이며 열(熱, 열정)이로다 / 강(剛, 굳셈)이며 직(直, 곧음)이러니/의(義, 옳음)시며 신(信, 믿음)이시라/나갈 젠 단(斷, 단호)이시며 그저 겸(謙, 겸손)이시더라/일천년 묵은 동산 가꾸잔 큰 뜻 품고/늙을 줄 모르는 맘 어디 가 머무느냐/황성산 푸른 솔 위에 만고운(萬古韻, 만년의 운치)만 높았네"







●오산학교 '톨스토이 신앙' 탄압사건







1910년 11월7일 이후 류영모는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러시아 대문호, 사상가) 사상에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오산학교에서는 '톨스토이 신앙탄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1910년 12월 학교설립자 이승훈은 기독교 신자가 된 뒤 평양신학교장이자 선교사인 로버트(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통해 조선에서 사망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와 가까워졌다. 그간 교장 역할을 하던 여준이 만주로 떠나자 로버트 선교사에게 교장을 맡긴다. 이듬해 2월엔 이승훈은 안명근 사건으로 감옥에 갔고 로버트가 학교를 관리하게 됐다.







로버트는 오산학교를 기독교 장로회 학교로 만들어갔다. 학생들에게 교리문답을 하게하고 교회교리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 이광수는 이런 방침과 충돌하다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떠난다. 류영모는 어떻게 됐을까. 1912년쯤 이 학교와 결별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일제의 탄압을 받는 것만도 고통스러운데 선교사에게 사상 감시를 받는 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그마(dogma, 기독교 교리)로 자유로운 생각을 구속한다면 거기에 진리가 살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1912년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그는 교회 교리 신앙도 떠난다. 오산학교에 정통 기독교를 심었던 류영모는 그 정통 기독교의 배척을 받아 자기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면 톨스토이는 류영모에게 어떻게 다가온 것일까. 우선 통일복음서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톨스토이는 기독교의 4대 복음서를 하나로 요약했다. 이것을 '요약복음서' 혹은 '통일복음서'라 부른다. 그런데 그는 복음서를 요약하면서 교회가 지금껏 중요시해온 것들의 일부를 빼버렸다







●성경 내용을 재정리한 '통일복음서'의 충격







세례요한의 수태와 출생, 투옥과 죽음을 빼버렸고, 예수의 출생과 가족계보, 이집트(애급) 탈출 부분을 잘라냈고,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펼친 그리스도 기적과 악마 축출, 바다 위를 걷는 기적, 무화과나무의 건조, 병자 치료, 죽은 이의 소생을 제외시켰다. 또 예수의 부활과 예수 예언의 성취 같은 부분도 없앴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힘주어 전파해온 성서의 부분들을 잘라낸 셈이다. 통일복음서 서문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들은 조금도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 경전을 번잡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복음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신성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는 무지한 군중에게 설교했다. 예수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에 대해서 들은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5만종의 기록물 중에서 세 가지를 고르고 한 가지 요한복음을 더 골랐다. 성경 복음이 모두 성령으로 보내진 것이라는 상투적인 견해에 미혹되어선 안 된다.“







톨스토이는 교회 교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년시절 처음 신약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랑과 겸손과 자기부정이며 악에 대해 선으로 대하라는 메시지였다. 내겐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었다. 내 마음이 회의와 절망 속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교회에 귀의했다. 그런데 교회가 믿는 신조 속에 나를 감동시킨 기독교 본질이 보이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였던 게 교회에선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교회는 사랑과 겸손과 자기부정의 내적인 진리에서 이탈해 외적인 독단의 신념만을 인정하고 있었다."(톨스토이 '종교론' 중에서)

     

●톨스토이 “교회는 죽었다”







톨스토이는 “교회는 죽었다”고 말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택할 것인가, 교회의 가르침을 택할 것인가. 둘 가운데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 규율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의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택했을 때 남아 있는 교의가 하나도 없었다."(톨스토이 '나의 신앙의 요체' 중에서)                         





▲ 레프 톨스토이





류영모는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자기의 사상을 정리해 나갔을 것이다. 무엇이 정통신앙인가. 교회를 버렸다는 톨스토이가 비정통인가. 예수의 진정한 정통은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가 구술한 것을 기초로 마르코(마가)가 쓴 마르코복음에는 톨스토이 통일복음서처럼 동정녀 탄생도 없고 예수 육신부활도 원래 없었다(예수 부활은 2세기초 아리스티온이 증보한 것에 들어갔음).





류영모는 토인비와 헤르만 헤세의 글들도 읽었다.







"나는 기독교 전통적 신앙이 초보적인 검증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수준이란 것을 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육신 부활 승천이 특히 그렇다.'(토인비의 '회고록' 중에서)







"나는 종교 없이 산 적은 없다.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교회 없이 살아왔다. 찬란한 가톨릭교회는 가까이 다가가면 유혈폭력과 정치, 비열함의 냄새가 풍긴다."(헤르만 헤세의 '인생론')







성령의 생명은 어디 있는가. '정통'이라고 지켜온 저 위경(僞經)의 구절들에 있는가. 기독교 본질에 벗어난 독단의 신념에 있는가. 무엇이 정통인가. 이 깊은 문제의식이 젊은 류영모를 치열하게 이끌었을 것이다.     

           

●나와 톨스토이는 우치무라와 다르다







류영모의 말을 대신해준 것은 에드윈 헤치('허버트강연집')였다.







"예수의 산상수훈과 사도신경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불과 100년 사이에 다른 종교가 됐다. 정치화하고 세속화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인가 사도신경인가?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사도신경은 교회에서 기도로 가르쳐지며 읽혀지지만 산상수훈은 심지어 교회에서 읽혀지는 복음 구절에서도 제외되고 그래서 전체 복음서가 읽혀지는 날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집회에서 신도들은 결코 듣지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기독교인들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산상수훈과 사도신경이 이렇게 택일을 해야 하는 선택지인지, 그것이 지니는 논리적 갈등이나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석명(釋明)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감히, 왜 저런 질문을 던져 1800년 기독교 역사를 흔들고 있는 것일까.







●예수의 참메시지는 ‘산상수훈’







산상수훈은 성경 마태복음 5~7장을 가리키는 성구이다. 산상수훈은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도 불리며, 예수가 선교활동 초기에 갈릴리의 작은 산(가버나움) 위에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행한 설교이다. 이 설교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기본적인 기독교 윤리지침으로 꼽힌다. 내용은 '8개의 복(八福)'과 사회적 의무와 자선행위, 기도, 금식,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참된 신앙생활의 내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말하고 있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임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순종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배부를 것이요 /연민을 지닌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연민을 받을 것이요 /마음이 맑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느님을 볼 것이요 /평화롭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다 <'산상수훈' 중에서>







'복이 있나니'의 앞에 있는 8가지 조건들은 역설에 가까운 것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내가 잘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 팔복은 모두 남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공동체나 집단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자기의 것을 덜어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팔복을 말한 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한다. '세상'이라고 표현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며, 소금과 빛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을 말한다. 소금의 역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역할과 세상의 맛을 내는 역할이다. 빛의 역할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역할과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현재의 역할과 미래의 역할을 겹친 비유로 말하고 있다. 소금이 그 맛을 잃거나 등불을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아래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면서, 예수는 소금답고 빛답게 사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말해준다.







●사도신경, 신앙 '이단'의 판단 근거







사도신경은 사도(apostle)가 전해준 신경(creed)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규범을 가리킨다. 사도는 예수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메시지 전달자들을 말한다. 2세기의 교회에서 정리된 세례의 믿음고백 형식이 3세기 이래로 전해져 사도신경의 기본이 되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사도신경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10세기에 완결된 형태로 서방종교에서 사용된다. 사도신경은 사도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전승에 기초해서 만들었으므로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도신경은 이단을 판단하는 기초근거가 된다.







사도신경은 이런 형식을 지닌다. (1)나는 전능하신 하느님, 창조주를 믿습니다. (2)나는 그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장례 지낸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3)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4)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와 교제와 죄를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내가 지금 여기서 믿는다'는 실존적 신앙을 강조하고 그 믿음이 전승되어온 것임을 강조한다. 이 강조는 이단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단은 예수를 통해 계시해준 하느님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믿음 위에 세운 신앙이라는 논리다. 사도적 전승이 아니라는 점이 이단을 가르는 핵심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1800년 전 이교도들이 사는 고대 로마세계 한가운데 이상하고도 새로운 가르침이 나타났다. 이 가르침은 예수라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옛 종교의 모든 규칙 대신 오직 내면적 완성과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신인 사랑을 내세웠다. 이 가르침은 그 내면적 완성의 결과, 즉 예언자들이 예언한 외면적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었다. 이 가르침에는 진리, 교리와 진리의 일치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이 가르침에는 사람을 변호하여 정당화하고 그를 구원한다는 행위는 없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의 내면적 완성과 사랑만이 본질이었다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오늘날의 '교회'가 없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실존적 신앙고백의 핵심에는 예수가 말한 '무욕과 사랑'은 전혀 없고 오직 인간과 다른 초인적인 기적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재확인하는 내용들만 담겨 있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교회'라는 현재의 개념이 비성서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복음서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딱 두 차례 나오는데, 단순한 모임을 가리킬 뿐 신앙의 기관이나 시스템을 가리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교리문답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교회를 문제 삼는 더 큰 까닭은 스스로를 무오류로 주장하고 '이단'을 설정하는 개념으로 활용하여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대한 추구를 억압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자임했던 '사람과 신의 중재자'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가르침을 인간 각자에게 알려주러 왔는데 왜 또 다른 중재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교회가 세워놓은 교리들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허구임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 교회에 대해 이렇게 놀랄 만한 발언을 쏟아낸 이가 대문호이자 종교사상가인 톨스토이였다. 이 땅에서 톨스토이의 이같은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에서 구체적이고 확장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 다석 류영모였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우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류영모의 가슴 속에선 동양과 서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고 자라나 꽃을 피웠다. 기독교, 불교, 유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종교일원론자(宗敎一元主義者)이자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20세기 한국이 낳은 정신적인 큰 스승이자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자’로,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몸과 맘의 거짓된 제나(ego)를 벗어나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이신 한얼님(니르바나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다음은 다석 연구의 최고 권위자 박영호가 엮은 책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얼나로』의 내용 중 일부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







“탐색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예수에 대한 나의 이해도 기독교라는 도그마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개되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예수와 석가가 가리켜 보이는 바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두 성인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얼싸안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 불교인들에게 사랑의 실천이 불충분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수행이 불충분하다는 것 등이 체감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찾고 또 찾아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동일하다.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신의 성품(혹은 부처님 성품)을 알아차리고 깨어나는 것. 이 지향점을 가리켜 보이는 것은 비단 기독교와 불교만이 아니다. 유교, 도교, 이슬람교 등도 다 마찬가지다. 종교다원주의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종교일원주의인 것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 다석 류명모 어록 중에서







●하늘아버지, 땅아버지





"눈을 감고 나 자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해보면 머리는 물론 온몸이 시원해진다. 이 다섯 자(尺) 몸뚱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위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 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드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한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께 머리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 머리다. 내가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부자유친(父子有親)하여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예수만큼 효도를 다한 사람이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부터가 남다르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부르듯이 그렇게 친근하게 부른 사람이 예수가 처음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만으로도 예수는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예수처럼 하느님을 우러러 아버지라고 부를 때 몸속의 피가 용솟음치고 기쁨이 샘솟는다.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마음속에 있다. 십자가 소리보다 아버지 소리를 많이 하라. 언제나 염천호부(念天呼父)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화두이며 공안(公案, 석가의 말과 행동)이다. 일요일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머리, 말머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이 땅에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쁜 짓 하는 아들은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에 악인은 없다. 유교가 잘못된 것은 하늘의 아버지를 버리고 땅의 아버지만 찾다가 땅의 아버지조차 버리게 된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를 먼저 찾아야 땅의 아버지도 찾게 된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안잊으면 섬기는 것“ 



   

“사람이 우주의 비롯인 맨첨(太初)을 잘 모른다. 우리 사람은 온통(전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라 온통(전체)으로 온전(완전)한 한얼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온통이요 온전인 한얼님을 그리워한다.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얼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한 삶이다. 우리가 여기 왜 있나? 이 까닭을 알자면 한얼님 아버지에게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우리의 머리 위에 한얼님을 이고서 거룩한 생각을 피워야지 다른 생각을 할 것 없다. 한얼님을 뚜렷이 한얼님 아들로 뚜렷할 일이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한얼님을 섬기는 데는 물질이 안 든다. 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섬기는 것이다. 안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곧 정신의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을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책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몸나로』 엮은이 박영호는 함석헌의 글에 감명을 받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오던 중에 함석헌의 스승인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바로 그 길로 제자가 되었다. 1965년 “스스로 독립하라”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5년간 혼자 공부한 끝에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으며, 팔순이 되신 다석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 마침보람”이라고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사상을 통해 얼나로 솟나는 길을 가리켜 보이는 그의 저서로는 『다석 전기』, 『노자와 다석』, 『다석 중용 강의』, 『다석 씨알 강의』, ,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 『잃어버린 예수: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사상으로 풀이한 도마복음』 등이 있다.

   

류영모의 '지금·여기·나' 철학







류영모가 최남선을 알게 된 것은 '소년' 잡지 편집을 돕던 이광수가 어느 날 최남선과 함께 자신의 집에 찾아오면서였다. 함께 오산학교 교사를 3년 지낸 이광수는 류영모를 잘 알고 있었다. 1914년 7월 최남선이 잡지 '청춘'을 창간할 무렵이었다.







류영모는 그 다음호인 8월호에 글을 싣는다. '청춘'에 처음 기고한 글은 '나의 1234'(1914년 8월1일 청춘 2호)였다. 이후 꾸준히 글을 실었다. '활발(活潑)'(청춘 6호), '농우(農牛)'(청춘 7호), '오늘'(1918년 6월 청춘 14호), '무한대(無限大)'(청춘 15호) 등이다. '활발'이란 글은 당시 중학교 교과서인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전재되었다. '청춘'에 이어 나온 주간지 '동명(東明)'에 '남강 이승훈전'을 싣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실린 류영모의 글들 중 하나인 '오늘'이란 글이다. 28세 때의 생각으로 믿기지 않는다. "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는 힘있는 충고이다.

                 

●“오늘을 똑바로 살아라”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 살이에 있다 하노라. 오늘 여기 '나'라 하는 것은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 함께 났으나 이름이 다른 것)이라 하지 않으면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할 것이니 '오늘'이라 할 때엔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여기서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 하는 뜻이로다. 무수지점(無數地點)에 광겁시간(曠劫時間)에 억조인생(億兆人生)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만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오늘 오늘 산 오늘 오늘 어제의 나,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된 나, 나 여기 사는 나를 낳아놓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리. 현실아(現實我)는 아니니라. 내일을 생각하려거든 어떻게 하면 내일의 위함이 되도록 오늘을 진선(盡善)하게 삼가는 맘으로나 할 것이요. 너무 내일만 허망(虛望)하다가 오늘을 무료히 보내게 되면 이것은 나지도 않은 용마를 꿈꾸다가 집에 있는 망아지까지 먹이지 않는 격이라. 산 것은 사는 때에 살 것이니라.“

-잡지 ‘청춘’에 실린  다석의 기고문 중에서







종교는 저마다 "사랑하라"고 외치는데···







수많은 종교들의 메시지를 딱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뭘까. 강조하는 방식이나 수식어가 다를 수 있지만 핵심은 "사랑하라"이다. 사랑한다는 일은 자기의 에고(ego)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해 마음을 쓰고 헌신하고 배려하는 일이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인간에게 타자를 향한 사랑은 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과 이웃과 이성과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무아(無我, 자기를 초월함)'의 경지를 갖는 것이 이상적 신앙의 원형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 폐단인 양극화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조건들을 더욱 버겁게 만들었고 희망의 싹을 잘라버렸다. 거기에 디지털 문명의 급진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 변동은 기존 삶의 질서들을 심각하게 흔들어놓고 있다. 이같은 시대야말로 신앙적 가치 회복이 절실하지만, 종교는 스스로 세상의 가치에 매몰된 듯 맹렬한 욕망의 대열에 줄을 선 듯하다.







이런 사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거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남녀 간의 사랑조차도 그 원관념을 잃고, 오직 욕망의 거래나 득실의 저울질로 뒤바뀌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 결혼은 더욱 '의문시되는' 행위가 되어간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사회생활을 하고 개별적인 소득을 내는 시대에, 서로 삶을 합치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득의 합산’을 통해 삶의 수준을 높이는 장점만을 높이 살 뿐이다. TV드라마가 날마다 보여주듯 권력과 금력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미줄일 뿐이다. 거기에 사랑은 한가한 '장식품'이 되어 있다. 이것이 행복하거나 의미 있는 삶의 구현인가. 종교가 내놓는 '사랑'이 전혀 실현되지 않은 채, 생활의 방편을 얻기 위해 하는 결혼식들. 그리고 그런 것에 환멸을 느껴 비혼(非婚)을 택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종교와 사상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남녀는 성별(聖別)을 해야 결속이 깊어”







"연애를 옛날에는 상사(相思)라 하였어요. 서로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연애가 장사처럼 여겨집니다. 별 타산(打算)이 다 꿈틀거립니다.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다, 당신의 종이 되어도 좋다, 당신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것은 다 흥정을 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남녀가 교제를 황망히 해선 안 됩니다. 성별(性別, 남녀간의 구별)이 뚜렷해야 상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별(聖別, 성스러운 거리)이라 합니다. 성별을 해야 구속(救贖, 죄를 대신해 구해줌)이 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시간적으로 여유를 두고 공간적으로 멀리하여, 서로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간격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급하게 사귀는 것은 경솔입니다. 좋다고 달려가고 곱게 보인다고 곧바로 가까이 하면 상사의 마음이 굳세지 못합니다."

-류영모의 연애론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 이뤄지고 있어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류영모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불교인인가? 오케이.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오케이. 그러나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다면, 당신은 아직 세상의 반쪽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나 마르코 폴로가 세계일주 항해를 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지도가 완성되었지만,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나 그리스도인에만 머문다면, 당신은 아직 정신적인 세계일주를 하지 못한 채 동양인이나 서양인으로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3차원 위성지도(내비게이션)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데도 평면 지도책만을 고집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난 이후, 지구촌이 명실공히 하나가 되면서, 종교 간의 활발한 교류를 넘어서서 이제는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統攝)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동일한 달을 가리켜 보이는 손가락들이라는 것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차원적 세상에서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어 보편화되었듯이, 정신계에서도 마음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었다. 아직은 그것을 활용하는 이가 적을 뿐.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서 손잡고 만들어낸 정신의 내비게이션, 그것을 사용하게 된 자의 자유와 풍요로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에게 주어진 특혜가 아닐까.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 나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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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성

3 July 2019 · Public

꾸준히 주님을 바라보는 유익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람이 도를 깨닫기 위해 산 속에 들어가,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산 아래 마을에 사는 한 농부에게 자기를 위하여 식사를 날라 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기도하여도 깨달아지는 것이 없어 한 수도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수도사는 식사를 날라다 주는 농부가 신앙이 아주 깊은 사람인데 농부의 집에 가서 며칠 머물면서 농부가 사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면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농부의 집에 가서 ‘이 농부에게 어떤 면이 있기에 배울 것이 있다고 했을까?' 생각하면서 유심히 지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생활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주여!" 한 마디 외치고는 밭에 나가 일합니다. 저녁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는 또 "주여!" 한 마디 외치고는 누워 곤하게 잡니다.

이 사람이 수도사를 찾아가서 농부의 삶에서 깨달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수도사는 그러느냐고 하면서 기름병을 하나 내 주면서 농부의 집에 다녀오는데 기름이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수도사가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 기름병을 가지고 농부의 집에 다녀오는 동안 주님을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까?" 그는 기름이 흐르지 않도록 하는 일에 신경을 쓰느라고 한 번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 보시오. 당신은 그 간단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농부는 그렇게 피곤한 삶 가운데서도 하루에 두 번이나 주님을 찾지 않소? 그대는 그저 기름이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 하나만 걱정했지만 농부는 걱정할 일이 얼마나 많소? 날씨 걱정, 씨 뿌린 것이 제대로 자랄까 하는 걱정, 새들이 와서 쪼아먹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 그렇게 걱정할 일이 많은 가운데서도 주님을 두 번이나 찾지 않소?"

이 사람이 크게 깨닫고 산에서 내려 왔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갈망하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만 바쁘면 주님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사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을 듣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믿지는 않습니다. 아니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이라도 늘려 가자는 목적으로 매일 일기를 씁니다.





그런데 이처럼 꾸준히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과의 친밀함을 가지는데 너무나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막연하게 여겨지던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동행일기를 쓴다고 당장 큰 변화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꾸준히 일기를 쓰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주님께서 제가 일기를 쓰는 것을 보시고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꾸준히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니 이제야 귀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 간사님이 실패했던 일을 일기에 쓸 때는 마음이 무겁지만 다음에 같은 일을 겪을 때, 이전에 일기를 썼던 일이 기억나 달리 행동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매사에 주님을 생각하려고 하니 주님이 바라보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같은 실패를 계속 반복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아내가 임신하였을 때, 유난히 주위에 임신한 여자가 눈에 많이 뜨였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후, 주위에 군인들이 더 많이 보인다는 권사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계속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이 더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24 시간 예수님을 생각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달라질 리 없습니다.

그러나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을 경험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주님을 바라보되 꾸준히 그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동행일기를 쓰되 주님을 사모하는 이들이 함께 쓰기를 권하는 이유입니다.

톨스토이 아나키즘의 동아시아 수용 - earticle

톨스토이 아나키즘의 동아시아 수용 - earticle

This papers object is to study East Asian acceptance of Tolstoys nonviolence anarchism on the direction of thought and practice

Tolstoy was accepted positively as literature but his anarchism was accepted negatively Such tendency has been continued from the

beginning of 20th century to late now The cause is thought state nationalism on Confucianism The peaceful use of anarchism is

necessary to solve the modern East Asian international conflicts





이 글은 톨스토이의 비폭력 아나키즘이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사상과 운동의 측면에서 검토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문학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된 반면 그의 아나키즘은 부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그러한 경향은 20세기초엽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 원인으로는 유교 전통에 입각한 국가주의 등에 있

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난 1세기 이상 심각한 갈등관계에 있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비추어보면 톨스토이 아나키즘의 평화적 이용이 절실하다고 생각되어

톨스토이 아나키즘에 대한 재검토와 수용 당시에 빚어진 문제점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この論文はトルストイの非暴力アナキズムの東アジア受容を思想と運動の側面で檢討ずる. 東アジアでトルストイは文學の次元で肯定的に受容され

た反面, 被のアナキズムは否定的に收容された.そのような傾向は20世紀の初葉からいままでそのままである.その原因は儒敎の傳統にもどづいた國

家主義などにあるようにおもわれるが, 1世紀の以上における深刻な葛藤の關係にある東アジアの國際情勢においてトルストイの非暴力アナキズム

の平和的な利用が切實するのでトルストイの非暴力アナキズムの再檢討と受容の當時に生じた問題點を再照明する.

목차

<요지>

I 머리말

II 톨스토이의 비폭력 아나키즘 재검토

III 일본에서의 톨스토이 아나키즘 수용

IV 중국에서의 톨스토이 아나키즘 수용

V 한국에서의 톨스토이 아나키즘 수용

VI 맺음말

<참고문헌> 要旨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