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장자.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장자. Show all posts

2021/11/05

도교와 도교사상 : Orbis terrarum by Walker.Hodu.J 장호두

도교와 도교사상 : 네이버 블로그
도교와 도교사상

1.도교사상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도가사상 또는 도교적인 요소가 깊이 깔려있다. 도가사상은 억압당한 계
층들에게 도교나 불교 무속신앙은 현실적인 고통과 불만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1.도교신앙의 계층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양반들이 도가사상을 이해하였다면 생산을 담당한 백성들과 천인,부
녀자들은 종교로서의 도교에 더 친숙하였다.
2.도교사상
윤리적인 부분은 유교와 이론도 받아들였고 조직의 체계형성에는 불교를 모방하기도 하였으며
종교,심리적인 면에서 무속신앙의 요소를 강하게 띈다.
3.민중도교
농민과 민중을 주제로 하는 도교를 '민중도교'라고도 한다.
민중도교는 농민과 민중의 사회적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삼교 합의 문화운동을 일으키기도 하
는데, 송대 이후에는 이른바 민중 도교의 시대가 전개된다.

(2)한국도교의 특징
한국도교는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닌다.
1.단군신화를 뿌리로 하여 전개된 선가설이다. 선가설의 정착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한국 시
대 이전부터있었다.
조선시대까지도 전해져 내려온다.
도교의 제례인 재초를 통하여 국가의 재앙을 막고 복을 비는 의례적인 도교로서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사이에 수련 도교가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수련 도교는 단축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공행을 쌓아 도를 얻고 신선이 되려는 내단법이다.

2.도가
(1)도가의 사상
도교의 모태가 되는 도가사상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삼는 사상이다.
1.정치사상
도가 사상은 실제로 춘추 전국 시대라는 난세에 대응하여나온사상이기 때문에 개인적 윤리론
이기 보다는 하나의 정치사상이다
2.화평윤리
도가의 도는개인의 명상적 도가 아니라 세상을 화평하게 하려는 도라고 할 수 있다.
(2)동양적 사유
역사적으로 유가의 적극성은항상 도가의 소극성에서 힘을 빌려갔다.그런 ㄸ늣에서 우리가 보
통 동양적 사유라고 하는 말은 도가사상의 측면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개인적 처세술
도교를 통하여 세속하게 된 도가의 정신은 개인적 행복 추구와 처세방법론으로도 자리잡는다.
2.삼보
노자에서는 도가의 세가지 보배와 자애와 검양의 양보를 꼽는다.도가의 실천방법론을 한마디
로 요약한다면 청정자수라 하겠다.

03.불교와 불교사사아

1.불교의 발생
(1)인도문명
인도문명은 세계어느 문명보다도 고도의 정신적 체험을 기반으로하는다양한 사상을 갖는다.
1.개혁사상
불교는 베다적 전통을 부정하는 비교적 비정통 사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대 가장 개혁적인 인
도사상이라 할 수 있다.
2.신중심에서 탈피
불교사상이 인도 정통 브라마니즘에서대해 개혁적인 저은 철저하게 계급적으로 짜여진 정통사
회의 폐쇄화된 인간관을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성을 주장한 것과 신중심적 세계관의 제의 중심
적인해탈관을 인간중심적 세꼐관과 자기구제적 해탈관으로 전환시킨 데 있다.
(2)불교의 발생
기워전 6세기경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의해 시작된 이 사상은 종교적 교단으로 발전하였고 당
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성장해 가던 크샤트리아 계급에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통일왕조의
지배적 이념이 된다.
불교의 가르침
흔히 사성제와 12연기, 그리고 팔정도로 요약된다. 그 핵심은 속박을 현실에서의 인간 삶을 투
철하게 직시할 것과 그에대한 해방의 가능성을 믿으며 아울러 그 실현을 자기 스스로 얻어야한
다는 전제 아래 추제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2.부파불교
불교 사상은 여러 갈래로 분화되면서 각기 자기의 논리와체계를형성하였다.부파불교시대(아비
다르마 불교)라 일컬어지는 이 단계에 오면 교단 비구 위주로 흘러가게 되자 재가신자들의 구
제문제는 자연 소홀하게 취급된다.
(3)대승불교
기운전후 시기 구제에서 소외된 재가신자들의 이러한 불만을 간파한 기존 교단 내부의 진보적
비구들은 새로운 종교 혁신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한다
1.중생구재
대승 불교의 이념은 기존 교단의 자기 구제 방식을 지양하고 타인 구제까지도 고려한 방식을
채택할 것과,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실천할 것을 주장한다.
2.보살의 이념
대승운동에 걸 맞은 이상적 모델로서 '보살'의 이념을 제시하고 스스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구
제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2.중국불교
(1)중국불교의 교단
중국적 불교종단인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1.교학불교
천태종과 화엄종의 두 종파는 불교이론의 다양성을 통일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 왕조라는 역사적 조거네도 부응하고 있으며 나아가 중국적 사변을 마음껏 발휘한다.
2.교학불교의 한계 0 Orbis terrarum by Walker.Hodu.J
교학불교는 역사적 조건에 부응하려 한 결과 통합의 논리가 너무 낙관적이고 도 지나치게 사변
적 이어서 구체적 개별자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다.
(2)선불교
당나라 중엽 이후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통일 왕조가 서서히 무너지게 되자 시대정신을 지
도하고 있던 고그스런 불교 이론도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1.선불교
선불교의 기본 명제는 인도 불교에 대한 중국적 해석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현실
지향적인 중국적 사유에서 볼때 필연적 귀결이었다.
2.중국적 사유
선불교는 각자의 현실적 조건에서 주체의 자기 각성을 강조한 점은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일찍
이 경험하지 못했던 것으로, 중국적 사유에 입체적 깊이를 더해 주고 치밀성과 세계관의 확대
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다.

3.한국불교

(1)불교의 수용
주욱 불교가 한국에 수용되는 시기는 부족연맹체적역사단계를 극복하고 고대국가를 형성해가
는 시기였다.
1.통치이데올로기
확대된 영역국가로서한국의 불교수용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건에서 고대국가 형성에 필요한 보
편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요청된다.이것은 한국불교가 처음부터 국가불교적 성격으로 수용됨으
로써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갖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무속과 결합
고대국가 건설의 주체들은 이러한 과제를 결국 무속 관념의 불교적 해석과 무속 형태의 불교적
변용이라고 해결한다.
(2)불교 사상의 전성기/통일 신라 불교
신라의 삼국 통일은 이 새대를 이끌어나갈, 용청인 통합을 위한 보편적인 이념이 필요하였다.
비록 성격의 차이는 있었으나, 삼국이 고대국가를 완성했을때의 지도적 국가 이념은 은 다 같
은 불교였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불교가 가진 시대적 과제는 다양한 갈래의 불교 사상을 체계
적으로 통합시켜 내부적으로는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외부적으로는 당제국에 대응할 수
잇는 자주력의 강화에 있었다.

1.한국적 불교
ㄱ.통일 신라의 불교는 의상의 화엄종과 원측계통의 법상종이었다. 그러나 이 두종교는 엄밀히
보면 중국불교의 한국적 전개에 불과하며 국제성을 띠기는하지만 자주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
다.
진정한 의미의 해결은 원효에 의해 실현된다.
통일 신라의 불교는 의상과 화엄종과 원측계통의 법상종이었다.그러나 이 두종교는 엄밀히 보
면 중국불교의 한국적 전통에 불과하며 국제성을 띠기는 했으나 자주성을 가진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의 해결은 원효엥 의해 실현되었다.
원효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과제로 남아있떤 중관학파와 유가학파의 사상적 통일이라는 대
승불교의 최고의 과제를 대승기신론소를 통해 매우 훌륭하게 해결한다.이것은시라의 불교가
국제불교로서 자주성을 보인 동시에 매우 시대적 문제의 해결을 사상적으로 성취시켰음을 의
미한다.

2.민간불교
원효의 사상은 지배계급에서 관념적으로만 수용되어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했던 이론 0 Orbis terrarum by Walker.Hodu.J
불교를 민중생활 속의 실천불교로 전환시킨다. 이것은 민중의 지각성을 진작시킬 뿐 아니라, 중
앙에 집중되었던 불교교단을 지역적으로 분산시켜 차후 선불교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날 수
있던 계기를 만든다.
(3)선교일치와 고려불교
고려왕조의 정치적 본질이 호족들의 연합세력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를 뒷받침했던 사
상적 지도이념의 선불교 였다.
1.선불교의특징
선불교는 교학이론의 통일성을 거부하는 개체지향적 선불교의 분산적 성격이다.
2.광종의 통합
광종에 의해 추진된 오교양종의 정비는 새로운 교학이론을 동원하여 교종과 선종을 통합시켜
왕권지배체제를 강화하려 한다.
3.의천의 교선일치
의천의 천태교학을 통하 교선일치사상으로 나타난다.물론이것은 그 이전 제관의 천태사교에의
해 나타나는 바와 같은사상적 발전의 현실적 결실이기도하다.

4.지눌의 돈오점수
지눌의돈오점수설은 의천에 의해 제시된 이론 중심의 불철저한 교선일치사상을 주체를 강조하
는 선 중심의 교선 일치사상으로 전개시킨다. 이것은 현실에 대응하는논리이기도 하지만한국
사상사에 있어서 원효에 비견되는 자기 사상의 발전적 단계이다.
도 그의 수선사 결사운동의 불교의 대사회적 역기능과 비민중성을 개혁하려는 실천운동 이었
따.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여러 갈래로 발전된 선종의 각 유파들을 취사선택하고 중요한 교학적
성과들까지 반영하고 있는 독자적인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4)숭유억불정책의 조선불교
여말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말부터 원나랄르 통해 받아들인 성리학적 시각에서 고려사회의 모순
을 비판한다.
1.정치적 목표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은 단순한 사상적 대립에서 나온 선택적 결정이 아니라,조선왕조의 유지
를 위한 정치적 목표가운데 하나였다.
2.조선불교의 특징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의 공세에 대해 방어적인 유불조화의 논리를 편다던가, 혹은 유학의 도
통관에 영향을 받아 한국적 법통설을 세우려는 점과 같은 것이다. 조선의 불교는 교단의 외형
적 발전이나 교리의 발달은 없었으나, 억압당한 민중의 정서가 불교를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불교는 대개 민중적이고 토착적 불교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2021/11/01

함석헌의 바가바드기타 주석에 나타나는인용 모음 주석법의 재해석* 나혜숙**

 인도철학제46집(2016.4),75~100쪽

http://krindology.com/db/docs/03.ip46_NHS.pdf

함석헌의 바가바드기타 주석에 나타나는인용 모음 주석법의 재해석*


나혜숙**


Ⅰ들어가는 말. 

Ⅱ 힌두 주석 전통에서 바라본 이 문헌의 연구 가치.

Ⅲ 인용 모음에 대한 기존 해석들. 

Ⅳ 독자의 기타 이해에 초점을 둔 인용 모음. 

Ⅴ 나가는 말.


요약문 [주요어: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주석법, 인용 모음, 해석, 독자]


본 연구는 함석헌(1901-1989)의 바가바드 기타 주석에 나타나는 인용 모음 주석법을 재조명한다. 기존의 해석들과 달리, 본 연구에서는 함석헌이 인용 모음 주석법을 사용하는 이유가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돕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다섯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함석헌은 마치 초횡의 노자익처럼 기타에 대한 좋은 주들 의 요점만 모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편리함을 추구한다. 이러한 의 미에서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를 ‘기타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함석헌은 기타 본문에는 없는 해제와 서론을 만들었다. 도움 없 이 기타를 읽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 그는, 해제와 서론을 만드는 것은 독자가 기타를 읽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직접 밝혔다. 셋째, 함석헌은 어려운 단어, 구절, 시구에 여러 번역과 주석을 제공한 다. 자신의 인도 철학 지식에 한계가 있으므로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번역과 주석을 제공해 독자가 읽고 스스로 뜻을 가늠하게 하기 위 해서이다. 넷째, 함석헌은 다른 주석을 인용할 때 논리적인 핵심만 인용 하지 않고 다른 주석가들이 사용하는 인용까지 포함시키는 일이 잦다. 그 이유는 되도록 다양한 인용을 통해 생소한 기타를 이해하기가 수 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은 여섯 명의 기타 주석가 가운데 라다크리슈난 의 주석을 압도적으로 인용한다. 라다크리슈난은 문헌을 풀이하고, 동서 양의 예시를 풍부하게 들고, 중세 힌두 주석가들도 인용하는 주석가이 므로, 기타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소개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이 사실들에 근거를 둘 때, 함석헌의 인용 주석법은 선별한 모음이고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돕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

다.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5S1A5B5A07042502).

**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 rapanda1@hanmail.net



Ⅰ. 들어가는 말


바가바드 기타(이하 기타로 약칭)는 고대 힌두 경전 가운 데 한국에도 잘 알려진 경전이다. 한국에 처음 이 경전이 번역된 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영역서(英譯書)1)를 인도학자 박석일이 번역 한 바가바드 기타로 1978년2)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박석일의 번역은 중역(重譯)이기는 하지만 힌두교의 대표적 경전군에 속하 는 기타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번 역서 다음에 출간된 역서는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산스크리트 어의 영역서3)를 함석헌(1901-1989)이 번역하고 주석을 단 바가

 

1) Prabhavananda, Swami & Christopher Isherwood, trans.(1st ed. 1944; rep. ed. 1972).

2) 몇 군데에서 초판으로 소개된 1987년 박석일의 바가바드 기타는 중판(重版)이다.

3) 함석헌은 어떤 영역서(英譯書)를 저본으로 번역했는지 서지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주석서 첫머리에 언급한

“에브리맨스(Everyman’s) 문고판의 바가바드기타”(함석헌 1996: 56)를

단서로 하고 여러 번역을 대조한 결과, 그가 저본으로 한 기타는 다음의

영역서에 포함된 한 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Nicol Macnicol, ed.(1938),

HinduScriptures:HymnsfromtheRigveda,FiveUpanishads,the

Bhagavadgita,Everyman’s Library, London: J. M. Dent & Sons

Ltd.이다. 이 책은 이미 영역되어 출판되었던 힌두 경전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리그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막스 뮐러(Max Müller)의 번역, 기타는 라이오넬 바넷(Lionel D. Barnett)의 번역이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서문을 썼다. 이 1938년 판본은, 로버트 제너(Robert C. Zaehner)가 새로 번역, 편집하고 서문을 쓴 개정판이 1966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오기 전까지 꾸준히 인쇄를 거듭했다(1943,

1948, 1957, 1959, 1963. 1965). 이 1938년 판본에 실린 바넷의 기타

번역(책 제목은 Bhagavad-Gita:orTheLord’sSong)은 1905년 첫 출간된 이후 여러 번 증쇄했기 때문에 어떤 판본인지 확실하지 않다.

1906년부터 1982년까지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출판 역사를 편찬한

바드 기타이다. 함석헌의 역주서는 스무 권의 함석헌전집 중 한 권으로 한길사에서 1985년에 출간되었다. 이후 기타에 대한 많은 번역서, 해설서, 논문이 출판되었다.

기타에 대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간된 역서이자 최초의 주 석서이기도 한 함석헌의 기타 주석에는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 그것은 이 문헌이 기타에 대한 다른 주석, 힌두교 외 의 종교 경전, 문학 작품의 인용을 모아놓은 방법으로 일관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논자(論者)가 논점을 근거를 들어 전개하 는 쓰기 방식이 익숙한 현대에, ‘주석가가 왜 자신의 주석을 주 (主)로 하지 않고 인용 모음을 주로 하는가?’, ‘이러한 주석법을 어 떻게 이해하면 좋은가?’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함석헌의 주석서에는 이 주석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일체 없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먼저 과거에 이 질문을 던지고 대답한 학자들의 언급을 분석한 후, 함석헌의 주석서를 주의 깊게 읽어 이 질문에 새로운 측면에서 대답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함 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이 기존의 이해들과 달리 ‘독자의 기타 이해’와 관련된 활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함석헌의 주석서 판본 이 세 종류4)이기 때문에, 기타와 그 주석을 인용할 때 독자의 편의상 쪽 표기대신 기타의 장과 절로 표기한다. 선행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의 연구 가치를 논한다.

 

시모어(Seymour)는 1905년 판본인 듯하다고 추정한다(Seymour 2011:

146).

4) 위에서 언급한 함석헌전집 13권(한길사 1985), 이거룡의 해제를 넣은 ‘한길그레이트북스’ 18권(한길사 1996), 이거룡의 해제를 빼고 다시 편집한 함석헌저작집 28권(한길사 2009).

Ⅱ. 힌두 주석 전통에서 바라본 이 문헌의 연구 가치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는 함석헌 연구자나 기타 연구자에게 잘 알려진 문헌이기는 하지만 이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세밀한 연구는 이 문헌이 출간된 후 현재까지 30년이 넘는 동안 거의 전 무하다. 박홍규는 “함석헌의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연구는 없 다” )고 바르게 지적했다. 2013년에 출판된 박홍규의 논문함석 헌과 간디의 종교관 비교: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 로는 중요한 서지 정보가 불분명한 데에 따른 오류가 있기는 하 지만, )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를 연구의 주요한 한 축으로 삼았 고 텍스트 연구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이 문헌을 가장 비중 있 고 세밀하게 다룬 연구다.

이렇게 이 문헌을 대상으로 한 연구물 수는 턱없이 적지만, 이 문헌은 활발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다. 연구하는 방향에 따라 그 가치를 다양하게 논할 수 있겠지만, 본 논문에서는 힌두 주석 전 통에서 바라보는 이 문헌의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함석헌은  기타를 주석서 형태로 출간했는데 그 자체가 주목할 만하다. 왜 냐하면 주석서는 힌두 지적(知的) 전통이 전수되는 형태를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힌두교 내 교파 간 분쟁은 물리적 이라기보다 주로 지적 논쟁이고, 일반적으로 이 논쟁은 교파의 권 위 있는 근본 경전에 대한 주석과 해석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주 석가는 자신이 속한 교파의 근본 경전을 주석하면서 교리의 입장 에 맞추어 경전을 해석할 수 있음을 입증해내고, 그 해석에 동의 하지 않는 다른 교파에 속한 논쟁자들의 의견을 포함시키고 논박 한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주석에 복(複) 주석이 쓰이고, 그 복 주 석에 또 복 주석이 쓰이는 방식으로 주석 전통이 이어졌다. 그리 고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복 주석들이 붙은 주석은 경전에 준 하는 큰 권위를 얻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이렇게 힌두교의 교파 간 철학적, 종교적, 신학적 교류는 전통적으로 주석이라는 형태로

행해졌다.7)

함석헌이 노자와 장자의 경전에도 주석했기 때문에 왜 특별히 힌두 경전 기타에 주석을 한 것이 특별한 일일까 생각할 수 있 다. 그러나 힌두 지적(知的) 전통에서 지식이 전수되고 교류된 주 된 방식이 ‘주석’이라는 것은 인도 문헌에 관심 있는 연구자가 아 닌 이상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함석헌의 주석서에 대한 기 존 해석과 평가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를 환 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는 주석에서 논쟁자를 포함시키고 논박 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주석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가 힌두 종교와 철학의 면면(綿綿)한 주석 전통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번역서가 아니라 주석서를 남긴 사실에 과대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실 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다.

 

7) 김호성(2004: 195)은 다음과 같이 힌두 지적(知的) 전통의 특징을 잘 정리해 말해 주었다. “선행하는 원전에 대한 주석/해석으로서 그 철학사가

전개되어 왔다는 점은 인도철학의 한 특징이다. 근현대에 이르러

해석학(Hermeneutics)이 서양의 신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서 발전되어 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자기학문의 방법론을 해석학으로서 의식하는 것에는 다소 뒤졌다고 하더라도, 그 哲學史 전체가 해석학적 특징을 躍如하게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정통의(vedic) 인도종교철학에 앞서는 것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함석헌은 힌두 사상을 잘 모른다고 겸손해했지만 문헌을 읽어보면 실제로는 많은 인도 주석과 번역을 읽었음을 알 수 있 다. 그가 힌두 주석 전통을 ‘이론적으로’ 몰랐을 수는 있어도, 기 타의 주석 전통이 인도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여러 인도 주석을 읽으면서 ‘실제로’ 맛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지도 의 도하지도 않았겠지만 힌두 주석의 그리고 기타 주석의 전통적 흐름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국내에 기타에 대한 한글 번역서, 해설서, 학술 논문은 적극적으로 출판된 데에 비해, 한국인이 쓴 기타 전체에 대한 주석서는 지금까지도 함석헌의 주석서뿐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주석서에 담긴 주석 내용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힌두 경전 자체가 생소하던 1980년대 국내에 힌두 경전이 주석서 라는 형태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함석헌의 주석서는 국내 힌두 종교와 철학 연구사에서 독특하고, 과감하고, 의미 있 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이 문헌의 가치를 주석서라는 형식상의 특징을 가지고 논했다. 이제 이 주석서의 여러 주석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고 판단되고 학자들도 가장 주목했던 인 용 모음식 주석법에 관해 기존의 해석들을 각각 살펴본다.


Ⅲ. 인용 모음에 대한 기존 해석들


함석헌의 인용 모음에 관한 학자들의 언급은 함석헌에 관한 글 과 기타에 관한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의견을 네 가지 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장광설 및 온갖 것의 수집으로 본 해석, 둘째, 인용을 나열이라고 성격 지운 후 회통과 종교다원주의로 본 해석, 셋째,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인용으로 대체한다는 해석, 넷 째, 인용을 비교 행위로 본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1. 장광설, 온갖 것 수집 심재룡은 기타를 다양한 해탈의 길이 담긴 경전이 아니라 카 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일관된 절대주의 철학의 산물” )로 해석한 다. 그래서 기타를 해석하는 다른 방식들을 비판하면서 “어떤 이들은 이 <노래>에서 석가, 공자, 노자, 예수 등 인류의 온갖 성 인의 말씀을 다 발견하노라고 장광설을 벌이는가 하면” )이라고 말한다. 심재룡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의 “어떤 이 들”에 함석헌이 속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류황태는 “[기타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보이는 번역 서도 거의 없다. 함석헌의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자신의 관점이 명확하지 않다. 세상 온갖 것을 다 수집해 놓은 것 같다.”10)고 말 한다. 본 논문에서는 함석헌이 인용을 모으는 행위를 자신의 지식 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아무 것이나 수집하는 행위로 해석하지 않고, 독자가 기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할 것이다.

2. 나열, 회통과 종교다원주의

이거룡은 인용 모음 주석법에 관해 처음 주목하고 가장 분량 있는 글을 남겼다. 그는 함석헌의 인용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체계도 없이 그저 이런저런 주석가들의 생각을 나열해놓은 듯하 고”, ) “백과사전식의 나열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른다” )고 말한다. 그는 무분별해 보이는 나열식 주석법이 부정 적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잘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선생의 나열식 인용은 결코 싸구려 절충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회통(會通)이 아닐까 싶다. 좀 단순하고 투박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여러 종교 경전들을 나란히 인용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것만으로도 각 종교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등을 기대고 있는 듯하여 실로 보기가 좋은 것이다.13) 이후 김영호도 이거룡과 같은 입장에 선다.

꼭 종교학 이론을 세우지 않더라도 여러 종교 경전들을 나열식으로 인용하는 것만으로 그는 종교간의 갈등이 보이게 안 보이게 첨예한 오늘의 풍토에 경종을 주고 종교 다원주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 그것을 학자들은 절충주의(syncretism)라고 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절 충이 아니고 높은 자리에서 감싸안는 ‘회통’(會通)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14)

이렇게 이거룡, 김영호는 함석헌의 인용 모음을 ‘나열’이라고 보 고 나서 회통과 종교다원주의의 긍정적 측면으로 해석한다. 함석 헌의 인용에서 종교다원주의와 회통을 제시(김영호)까지는 아니 더라도 발견(이거룡)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 논문에 서는 함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이 무분별한 나열의 성격보다는 선별한 모음의 성격에 가깝고, 회통과 종교다원주의보다는 우선 독자의 기타 이해에 더 관련된 활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3. 인용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한다.

이거룡은 함석헌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인용을 통해 한다고

해석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선생의 생각이 담긴 부분이라고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의 주석을 끌어다 쓰는 가운데 스스로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다하는 주석을 내고 있

 

13) 이거룡(1996) p. 51.

14) 김영호(2001) pp. 238-239.

다.15)

‘이러저러한 경전들이 이러저러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에, 기실 자기의 생각을 담아낸다.16)

류황태는 함석헌이 “자신의 맘에 드는, 자신의 판단에 적당한 인용 비교를 해 놓았다.”17)고 말한다. 박홍규도 류황태와 같은 입 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면 함석헌의 바가바드기타 해석서에는 간디를 비롯한 여러 사 람의 해석이 함석헌 자신의 해석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해석 과 달리 타인의 해석을 인용한 것은 어떤 의도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해석에 찬성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해석의 하나로 제시한다는 것인지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해석 중 한두 가지를 인용하고 있 으므로 자신의 의견과 같다고 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18)

인용이란 함석헌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도구이거나(이거 룡), 그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나(류황태) 자신의 의견과 같은 부분 을 인용했다(박홍규)는 해석이다. 주를 선별하는 행위, 선별한 주 안에서도 인용할 부분을 고르는 행위에는 선별하고 고르는 자의 시각이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그가 ‘자신 의 말을 대신 전하는 주’ 혹은 ‘자신의 의견과 같은 주’를 선별해 인용했다기보다는, ‘독자가 기타를 잘 이해하는 데에 적합하다 고 판단한 주’를 인용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점이 함석헌 자신보다는 독자에게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주석서에서 함석헌은 직접 주석하는 일도 많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을 굳이 인용을 통해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5) 이거룡(1996) p. 49.

16) 이거룡(1996) p. 51.

17) 류황태(2009) pp. 65-66.

18) 박홍규(2013) p. 89.

4. 인용을 비교한다. 기타의 구절과 인용을 비교한다.

함석헌의 인용 주석법에 대해 류황태는 “대부분 관련이 없는, 초점에 맞지 않는 인용 비교를 늘어놓는다” )고 말한다. 그리고 박홍규는 “그의 바가바드기타 해석은 … 그 각 구절을 다른 종 교나 사상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이를 비교종교학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 말한다. 류황태는 함석헌이 “인용 비 교”를 한다고 평가했는데, 함석헌은 번역끼리는 비교했지만, 자신 이 인용한 주석, 경전, 문학 작품끼리 비교하거나, 평가하거나, 해 석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주를 선별해 모으는 데 에 관심이 있었고 모아 놓은 인용들끼리 비교하지는 않았기 때문 에 류황태가 말한 “인용 비교”는 성립되기 힘들다. 그리고 본 논 문에서는, 함석헌의 인용법이 박홍규가 말한 대로 기타의 구절 과 다른 사상들을 비교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히려 기타의 구절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돕기 위해 여러 인용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 행 위란 모음 행위보다 한 단계 발전된 분석 행위인데, 함석헌이 기 타의 구절과 다른 종교나 사상을 ‘비교한다’고 평가할 만한 근거 가 약하기 때문이다.


Ⅳ. 독자의 기타 이해에 초점을 둔 인용 모음


기존의 해석들과 달리, 본 논문에서는 인용 모음 주석법이 독자 의 기타 이해를 초점으로 둔다고 주장하기 위해 다섯 가지 근 거를 제시할 것이다. 첫째, 함석헌은 좋은 주들에서 뽑은 요점을 한데 모은다. 둘째, 해제와 서론을 만든다. 셋째, 어려운 단어, 구 절, 문장에 여러 번역을 소개한다. 넷째, 제3의 인용을 포함시킨 다. 다섯째, 동서양의 예시들과 중세 힌두 주석가들을 인용한 라 다크리슈나의 주석을 가장 많이 인용한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본

다.

1. 좋은 주를 한데 모아 편리하다.

함석헌은 기타 주석서에서는 인용 모음에 대해 논한 적이 없 지만, 다른 주석을 모아 놓는 주석법의 장점은 편리함이라고 다른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많은 주석서 중 초횡(焦竑)의 노자익(老子翼)에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노자에 대해서 고래로 주석이 많아요. 옛날 사람은 요새와는 또 달 라서는 노자익(老子翼)이라는 걸 제일 편리하다 하지요. 왜 그런고 하니 각 사람의 주(註)를 다 보려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그 렇겠지만, 그럴 새가 있어요? 그런데 초횡(焦竑)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재주도 있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인데, 모든 걸 골라서, 자기 말도 이따 금 나오긴 나오지만, 자기만이 아니고 남들의 좋은 주를 모아서 냈어

요.

이 책의 특색은 본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을 한 사람이 해석하 는 것이 아니고 개중에 그래도 누가 누가 했던 주로 좋은 걸로 몇 개 골라서 그 요점 되는 거를 같이 실었어요. 이 사람 저 사람의 해석을 볼 수가 있어 편리한 거야. 이름도 노자익이라 하는데 왜 익(翼)이 라 그랬는고 하니, 새에게 나래가 있으면 잘 날 수 있는 모양으로 이 런 주가 있으면 좋다는 거지요. ‘덕(德)을 우익한다’ ‘호랑이에 나래 붙 은 사람’이라 그러잖아요? 노자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좋은 주를 붙 였다 그런 의미로 노자익이라 그래요.21)

함석헌이 노자에 대한 특정 주석에 관해 쓴 위 인용글에서 그

 

21) 함석헌(2009a) p. 56.

가 주석 활동에서 중시한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여러 해석 을 한데 볼 수 있는 편리함을 중시한 점, 둘째, 많은 주석 가운데 좋은 주석을 골라 싣는 점, 셋째, 선별한 주석 중에서도 요점을 싣 는 점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기타 주석에 그대로 적용된다. 함석헌도 여러 사람의 해석을 실었고, 주를 선별했고, 선별한 주 를 다 인용한 것이 아니라 요점이라고 생각한 점을 실었다. 그러 므로 그가 초횡의 주석법을 기타에 도입했다고 볼 수 있고, 그 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를 ‘기타익(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익에 관한 함석헌의 생각을 고려 하고, 또 그가 노자익에 관해 서술한 주석법과 기타의 주석법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함석헌의 인용은 기존의 연구에서 쓰인 ‘나열’로 이해하기보다는 ‘모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함석헌의 주석 의도를 더 잘 살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함석헌이 이 방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자신이’ 편리하게 기타를 읽기 위함도 있겠지 만, ‘독자가’ 기타에 관한 여러 주석을 한데 모아 편리하게 읽기 위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 해제와 서론을 만든다.

함석헌은 해제와 서론을 만들어 싣는다. 그는 말로만 전해 듣던 기타를 부산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해 놀라고 기뻤다고 말한 직후,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 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라고 말한다. 함석헌이 저본으 로 삼은 힌두 경전들(Hindu Scriptures) )의 한 부분으로 실린 바넷(Barnett)의 기타 영역에는 해설과 주가 있기는 하지만 아 주 적었다. ) 함석헌은 자신이 이 경전을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번역으로 읽을 때 막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기타 영역서 에 포함된 서론과 부록을 선택해 해제용(解題用)으로 번역해 싣는 다. 그는 왜 해제와 서론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왜 자신의 말로 쓰 지 않고 다른 글을 번역해 싣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내가 경험해 봤으니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해제의 경우] 서툰 내가 하는 것보다는 잘한 이의 것을 빌리는 것이 옳을 듯해 스와미 프라바바난다(Swami

Prabhavananda)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공 동 번역에 실린기타와 마하바라타기타의 우주론두 장을 우선 실어서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24)

함석헌이 해제용으로 번역해 실은기타와 마하바라타에는  기타와 기타가 속한 마하바라타의 주요 주제인 다르마 (dharma)가 소개되어 있다. 또기타의 우주론에는 기타의 핵 심 철학인, 상키야(sāṅkhya) 철학의 순수 정신인 푸루샤(puruṣa) 와 근본 물질인 프라크리티(prakṛti)의 이원론이 소개되어 있고, 근본물질에서 23개의 물질이 전개되는 원리가 도표와 함께 실려 있다. 둘 다 기타에 생소한 한국 독자에게 입문용으로 소개하기 에 적당한 자료이다. 또한 원래 기타 본문에는 서론이 없지만 함석헌은 거의 모든 장(열여덟 장 중 열다섯 장)에 인용으로 이루 어진 서론을 넣는다. 이렇게 해제와 서론을 주석에 넣는 것은, 그 가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 니다”,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라고 말한 대로, 독자가 기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 외에는 따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3. 어려운 단어, 구절, 문장에 여러 번역을 소개한다.

함석헌은 기타 본문의 단어, 구절, 시구 전체가 어려울 때 여 러 번역을 제공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우선, 기타 2.66을

 

24) 함석헌(1996) p. 56. 묶음표는 필자의 삽입.

함석헌은 “마음의 통일 없는 사람에게 이성 없고, 마음의 통일 없 는 사람에게 영감도 없다. 영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사람에게 어디서 즐거움이 있겠느냐?”로 번역한다. 이 구절의 단어를 주석하면서 그는 “영감”의 산스크리트어 bhavana(원래는 bhāvanā)를 소개한 후, 이 단어에 대한 총 일곱 가지 번역을 소개한다. 산스크리트어 bhāvanā는 직역하면 형용사로서 ‘존재하게 하는’, ‘일으키는’, 명사로서 ‘생각’, ‘상상’, ‘명상’이라는 뜻으로 이 시구에서는 번역이 까다롭다. 그래서 함석헌은 자신의 번역인 ‘영감’으로 뜻을 결정하면서도, 일곱 번역, 즉 ‘헌신’(간디), ‘집중력’(라다크리슈난), ‘정려(靜慮)’(다카쿠스, 즉 세계성전전집 ), ‘올바른 상태’(데이비스), ‘반성’(힐), ‘지식 추구의 유지’(텔랑), ‘신령 감응’(바넷, 즉 에브리맨스 문고판)을 소개한다.

또 난해하다고 판단한 기타 8.4 )에 대해서는 다섯 명(라다크 리슈난, 다카쿠스, 간디, 스와미 프라부파다, 틸라크)의 번역을 모 두 문장 채로 소개한다. 함석헌이 주석을 길게 인용하는 일은 흔 하지만, 번역가들의 기타 시구 번역을 통째로 인용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이 시구가 그에게 상당히 난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문에 인도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푸루샤’가 들어가자 다 음과 같이 말한다.

… 그중 가장 문제 되는 것이 둘째 구절에 있는 푸루샤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람, 사람 몸, 인류, 개인, 인격, 혼, 초월적 영, 원시 남성 등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인도 철학을 모르는 나로서는 도저히 확신을 가지고 그중 어느 것을 골라낼 수가 없다. 위에 인용한 여러분들의 번 역을 참조해 독자가 스스로 짐작하기 바란다.(기타 8.4에 대한 함석 헌의 주석 중) 함석헌이 이 시구와 특정 개념을 번역하는 어려움을 밝히고, 그

래서 여러 번역을 제공하고, 독자가 직접 살펴보기를 권하는 모습 을 볼 수 있다. 함석헌이 ‘푸루샤’ 개념을 이해하는 데 겪은 어려 움은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숨은 푸루샤를 말하는 것인데, 물질(prakriti)에 대립시켜서 생명의 씨, 혹은 정신, 혹은 얼, 혹은 인격, 혹은 말씀(로고스)이라 부를 수 있 는 것이므로 여기서 숨이라 해봤다. 어떤 번역에는 원인(原人)이라 하 기도 했다.

수천 년에 걸쳐 발전해 온 힌두교의 복잡한 교리, 철학, 신화, 우주 론의 뜻을 우리로서는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읽는 데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바가바드기타 있는 그대로의 한 절을 인용하여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가를 보이기로 한다.(기타 8.22 에 대한 함석헌의 주석)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함석헌은 바가바드기타 있는 그대로라는 기타 주석서에 나열된 푸루샤의 별칭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푸루쇼타마(Purushottama), 트리비크라마(Trivikrama), 케샤바 (Keshvava), 마다바(Madhava), 아니룻다(Aniruddha), 흐리시케샤 (Hrishikesha), 상카르사나(Sankarsana), 프리쥼나(Pradyumna), 슈리다라(Sridhara), 바수데바(Vasudeva), 다모다라(Damodhara), 자나르다나(Janardana), 나라야나(Narayana), 바마나(Vamana), 파

드마나바(Padmanabha) 등등이다.”

푸루샤는 리그 베다부터 상키야 철학과 베단타 철학을 거쳐 힌두 사상에서 풍요롭고 깊이 있게 발전한 철학 개념이므로, 함석 헌이 주석가로서 겪었을 학문적 어려움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의 주석에서 보이는 훌륭한 점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 번역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언급을 회피하거나 최소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자신이 확신 있게 뜻을 선택하기 어 려움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밝히고, 여러 번역과 주석을 인용해 독 자가 이들을 참고한 후 직접 뜻을 가늠하기를 권한다. 이것은 그 의 인용 모음이 독자의 기타 이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 해 준다. “읽는 데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바가바드기타 있는 그 대로의 한 절을 인용”한다고 그가 한 말에서도, 그의 주석 인용 이 독자에게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은 그가 인용한 주석들의 해석적 시각끼리 혹은 인용한 주석끼리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본문의 단어, 구절, 문장 번역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이 사실은 그가 주석가들의 해석과 인용을 비교하는 일보다는 기타 의 본문을 이해하는 일에 더 무게를 둔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4. 제3의 인용을 포함시킨다.

함석헌은 주석, 경전, 문학 작품을 직접 인용할 뿐만 아니라, 그 가 인용하는 주석가가 인용하는 제3의 인용도 자주 포함시킨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예를 든다. 함석헌은 기타 4.23을 주석하면 서 데사이 )의 주석을 인용한다. 우선 기타 4.23은 다음과 같다.

집착을 떠나 해탈하여, 그 마음은 지혜 위에 굳게 서고, 그 행동, 희 생을 위하는 사람의 행위(業)는 온전히 소멸되어버리느니라.(기타 4.

23)

함석헌은 이 본문에 대한 데사이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

다.

[4장] 19절에서 23절까지는 자유로운 행위의 모든 조건을 묶어서 설명하는 말이다. 3장 9절에서는 희생을 위한 행위는 얽어맴이 없다고 했는데 이 절에서는 희생은 카르마, 곧 업까지도 소멸시킨다고 한다. 업이란 이제 앞으로 열매를 맺을 행위다. 희생은 그와 같이 얽어맴을 예방도 하고 고칠 수도 있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구자라트의 신 비가 나라신하 메다(Narasinha Metha)는 무지한 사람을, “굴러가는 차 밑을 걸어가면서 자기가 그 차를 끌고 가거니 하고 믿는 개와 같 다”고 말하였다. 판디트 살타발레카르(Saltavalekar)는 지혜있는 사람 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했다. “차를 타고 앉아 있는 사람이 차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정말 움직이는 것은 차뿐이 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진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찾아 제 몸이라 는 차를 타고 나가는데, 그 몸은 움직이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다.”

(기타4.23에 대한 데사이의 주석)

함석헌이 데사이의 주석을 인용할 때, 데사이가 인용한 두 사람 나라신하 메다와 살타발레카르의 인용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함석헌은 데사이의 주석적 요점에 더해 데사이가 인용한 부분, 즉 함석헌에게는 제3의 인용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물론 그가 이 비유가 마음에 들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독자가 기타 본문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본다. 함석헌의 주석서에서 가 장 긴 주석인 기타 6.10에 대한 주석은 그 대부분이 라다크리슈 난의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기타 6.10은 다음과 같다.

요가를 닦는 사람은 은밀한 곳에 홀로 남아 있어, 몸과 마음을 억제 하고, 모든 욕망과 가진 것을 버리고, 늘 정신 모으기를 힘써야 하느니

라.(기타 6.10)

이 시구에 대해 라다크리슈난은 우선 요가에 대해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를 언급하면서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명상의 대상 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때 구약성서의잠언 을 인용한다. 또 “은밀한 곳”이라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마태복 음6장 6절을 인용하고, 오리겐이 은둔자들에 관해 기록한 글을 인용한다. 또한 “몸과 마음을 억제”하는 구절을 주석할 때에는 중 세 힌두 주석가 샹카라를 인용하고, 자기를 억제해 마음이 정결해 져야 하나님과 깊이 교통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서 워즈워드, 릴케 를 인용한다. 또 외계로 향한 마음을 거두어 자신의 혼으로 한데 모음을 설명하면서 플라톤의 메논을 인용한다.

함석헌은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적 요점, 즉 외부로 향하는 마음 을 명상의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는 요점만 인용해도 되었을 텐데, 긴 분량인데도 라다크리슈난이 언급하고 인용하는 다양한 경전, 종교가, 문학가, 철학자를 모두 실었다. 우연히 주석 인용이 이러 한 스타일을 띄게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제3의 주석이 포함되는 모습이 일관적이고 사례가 많다. 이것은 함석헌이 인용을 잘라내 기보다는 주석서에 되도록 포함시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해준

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왜 제3의 인용을 되도록 많이 포함시키고 싶어 했을까? 종교다원주의로 해석하고자 하는 독자는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함석헌이 기타의 시구에 나 타난 사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고, 같은 사상이 다른 종교, 사상,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필자는 함석헌이 제3의 인용을 포함하는 이유는 국내 에 생소한 힌두 경전 기타 본문을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독자가 수월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는 작업이라고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독자가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사고의 개념 틀에 빗 대어 기타 본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논리적이고 딱 딱한 요점만 싣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3의 인용까지 모두 포함시 킨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거룡은 함석헌의 주석법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양한 언어로 표현될 때 의미가 명확해지는 점을 잘 지적했다. 그는 “어느 한 종교의 사상은 그 종교 자체의 언어로 해석되기보다는 다른 종교 의 언어로 풀어 밝혀질 때 더욱 선명하게 제모습을 드러내”27)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통의 입장에서 함석헌의 주석 모음을 해석하 는 이거룡이 이 문장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 지만, 이 문장은 함석헌이 다른 주석을 인용하는 주석법의 목적을 핵심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함석헌은 기타 의 언어를 다른 종교들의 언어, 다른 문화들의 언어로 풀어 밝힌 부분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독자가 기타의 언어를 더 잘 이해하 도록 돕고자 했다. 함석헌 자신에게도 생소했을 힌두 경전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그 스스로 연구하여 주석을 달고, 주석가들의 주석 도 인용하고, 해당 시구의 요점을 그 자신도 다른 종교와 문화에 빗대어 생각해 보고, 다른 주석가들이 인용한 부분도 빼지 않고 의도적으로 인용에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다.

5. 라다크리슈난 주석을 압도적으로 인용한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은 압도적으로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사용 한다. 라다크리슈난(1888-1975)은 대학의 철학 교수, 부총장, 외교 대사를 거쳐 인도 대통령(1962-1967)을 지낸 인물로서 학계와 정 계에서 모두 활동했지만, 인도의 고대 고전(기타, 우파니샤드, 법구경)을 주석한 주석가기도 했다. 함석헌은 기타를 주석하 면서 총 여섯 명의 인도인 주석가(인용 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라 다크리슈난, 간디, 마헤시, 데사이, 틸락, 스와미 프라부파다)를 인 용하는데, 함석헌이 간디를 존경했기 때문에 간디의 주석에 크게 의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간디 의 주석보다 세 배 가량 많이 사용하고, 기타 본문의 모든 장에 빠짐없이 사용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라다크리슈난의 주에는 산스크리트어가 로마자로 들어가 있고, 각 시구마다 주석이 길지 않고, 단어와 짧은 구절에 대한 주 석이 많다. 또한 간디, 마헤시, 틸락의 주석은 짧은 구절의 주석보 다는 자신의 해설이 주(主)이고 각자의 관점을 담은 사상이 포함

 

27) 이거룡(1996) p. 51.

되는 데에 반해,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은 관점을 담았다기보다는 단어, 구절을 중심으로 문헌 풀이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라다크리슈난은 샹카라(Śaṅkara, 8세기), 라마누자 (Rāmānuja, 11세기), 마드바(Madhva, 13세기), 베단타 데시카 (Vedānta Deśika, 13세기), 마두수다나 사라스바티(Madhusūdana Sarasvatī, 16세기)와 같은 중요한 힌두 중세 기타 주석가들을 자주 소개한다. 산스크리트어를 모르는 함석헌이 주석서들을 직접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중세 힌두 주석가들의 작품을 풍부 하게 담은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에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이 점 은 그가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인용할 때 자주 이 중세 주석가 들의 인용까지 포함시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셋째, 라다크리슈난은 인도 철학과 종교의 가치가 서양 철학과 종교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동양과 서양의 사상에 교류점이 많았 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으므로, 서양의 종교나 문학을 인용하여 인 도 사상과 비교해 언급하거나 인용하는 곳들이 많다. 예들 들어, 기타 11.5에서부터는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간청을 받은 후 자 신을 신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보여준다. 라다크리슈난은 이 종교 체험을 예수의 변모, 사울의 다마스커스 도상의 환상, 콘스탄틴의 십자가, 잔다르크의 환상에 빗대고, 성 힐데가르드의 작품을 인용 한다. 동서양을 이분(二分)하는 틀로 이해한 함석헌에게, 동양 사 상과 서양 사상을 비교하는 라다크리슈난의 주석 경향은 잘 맞았 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주석가들보다 문헌 풀이에 충실하고, 힌두교 안에 서 기타의 주석들을 소개하고, 기타와 힌두교 밖의 사상들을 비교하는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점으로 미 루어, 함석헌이 독자의 기타 본문 이해에 역점을 두었다고 이해 할 수 있다.


Ⅴ. 나가는 말


본 논문에서는 함석헌의 기타 주석에 두드러진 주석법이 인 용 모음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주석법에 대해 기존에 행해진 해석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장광설과 온갖 것의 수집이 라고 본 해석, 둘째, 나열이라고 성격 지운 후 회통과 종교다원주 의라고 본 해석, 셋째, 자신의 말을 대신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용 을 사용한다는 해석, 넷째, 인용 간에 비교하거나 기타 구절과 인용을 비교한다는 해석이었다. 이 기존의 해석들과 달리, 본 논 문에서는 함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은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도 우려는 행위와 관련 있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다섯 가지를 제 시하였다.

첫째, 비록 함석헌이 기타 주석서에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초 횡의 노자익을 들어 설명한 부분을 참고하여, 함석헌은 기타 를 읽는 이가 좋은 주의 요점만 모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편 리함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타 주석서를 함석헌의 ‘기타익’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함석헌의 인용을 ‘나열’이라기보다는 ‘모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함 석헌의 주석 의도를 살린 더 적절한 이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함석헌은 기타 본문에는 없는 해제와 서론을 만들었다. 자신이 해제와 서론 없이 기타를 읽기 어려웠던 경험에 바탕을 두었고, 그래서 해제와 서론을 만드는 것은 독자가 기타를 읽는 데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직접 밝혔다. 셋째, 함석헌은 힌두 종교 와 철학을 논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드러내 고, 어려운 단어, 구절, 시구에 여러 번역과 주석을 제공한다. 자신 의 지식에 한계가 있으므로 여러 번역과 주석을 통해 독자가 읽 고 스스로 가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함석헌은 다른 주석 을 인용할 때 논리적이고 딱딱한 핵심만 인용하지 않고 다른 주 석에 담긴 제3의 인용까지 인용에 포함시키는 일이 잦다. 그 이유 는 제3의 인용을 통해 생소한 기타를 이해하기가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은 여섯 명의 기타 주석가 중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압도적으로 인용 한다. 라다크리슈난은 문헌 풀이에 주목하고, 자신의 해석도 하면 서 동서양의 예시를 풍부하게 들고, 중세 힌두 주석가들도 인용하 는 주석가이므로, 함석헌이 생소한 힌두 경전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 독자에게 소개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에 근거를 두고 전체적으로 볼 때, 함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은 기 존 해석들과 달리, 독자가 한국인에게 생소한 기타를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한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석헌이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돕고자 한 이 유는, 그가 기타가 “진리의 말씀” )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 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어 한 것과 관련 있다. “진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밝히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전도” )라는 비 유적 표현을 사용할 만큼 기타 독서에서 큰 감화를 받았고 기 타를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했던 마음은 확실하다. 즉, 그는 독 자가 기타를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 긴 진리를 깊이 있게 이해해 삶에서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바람은, 자신이 주석 없이 읽을 때 겪은 어려웠던 경험을 살려, 독자가 기타를 더 잘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행위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고백한 힌두 사상에 대한 지식의 한계 안에서, 최 선으로 선택한 주석법이 바로 ‘인용 모음’이라는 주석법으로 나타 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영호(2001). 함석헌과 인도사상 ,함석헌 사상을 찾아서. 서울: 삼인.

김호성(2004). 바가바드기타를 읽는 틸락의 分析的 讀書法 , 종교연구 35집. 서울: 한국종교학회, pp. 195-224.

류황태(2009). 바가바드 기타 와 한국문화의 세계화 , 동서비교문학저널 21호. 서울: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pp. 51-75. 박석일(1978). 바가바드기타. 서울: 정음사. 박홍규

2013 함석헌과 간디의 종교관 비교: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석당논총 56권. 부산: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pp. 83-114.

2015 바가바드기타로 본 함석헌과 간디의 종교관 , 함석헌과 간디: 평화를 향한 같고도 다른 길. 파주: 도서출판 들녘, pp. 235-269.

심재룡(1990). 인도 고전 해설: 바가바드 기타의 묘수풀이 , 동양의 지혜와 禪. 서울: 세계사. pp. 300-334. 이거룡(1996). 거룩한 자의 노래: 함석헌 선생 주석의 바가바드기타 , 바가바드 기타. 서울: 한길사, pp.

21-53.

이현주(2006).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 기타. 초판 2001 ; 재판 ; 서울: 당대. 함석헌

1985. 함석헌전집13: 바가바드기타. 서울: 한길사.

2009a. 함석헌저작집24: 씨의 옛글풀이. 파주: 한길사.

2009b. 함석헌저작집28: 바가바드 기타. 파주: 한길사. 함석헌 역주(1996). 바가바드 기타. 서울: 한길사.

Barnett, Lionel D. Bhagavad-Gita:orTheLord’sSong. The Temple Classics. London: J. M. Dent and Co., 1905.

Desai, Mahadev(1946). TheGospelofSelflessActionOrthe

GitaaccordingtoGandhi(TranslationoftheOriginalin

Gujarati,withanAdditionalIntroductionand Commentary). Ahmedabad, India: Navajivan Publishing House.

Gandhi, Mohandas K.(1991). M.K.GandhiInterpretsthe Bhagavadgita. 1st ed. 1980 ; rep. ed. ; New Delhi: Orient Paperbacks (A division of Vision Books Private Ltd.).

Macnicol, Nicol, ed.(1938). HinduScriptures:Hymnsfromthe Rigveda,FiveUpanishads,theBhagavadgita.

Everyman’s Library. London: J. M. Dent & Sons Ltd.

Prabhavananda, Swami & Christopher Isherwood, trans.(1972).

TheSongofGod:Bhagavad-Gita.1st ed. 1944 ; rep. ed.

; London: Phoenix House Ltd.,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Seymour, Terry(2011). APrintingHistoryofEveryman’s Library1906-1982. Bloomington, IN: AuthorHouse.

Zaehner, Robert C., trans., and ed.(1966). HinduScriptures.

Everyman’s Library. London: J. M. Dent & Sons Ltd.

Abstract

Reinterpretation of the Commentarial Method of Collecting Quotations: in Ham Seok-heon’s Commentary on the Bhagavad Gītā

Haesook Ra

Sogang University

This study aims at shedding new light on Ham Seok-heon’s commentarial method of collecting quotations in his commentary on the BhagavadGītā (henceforth Gītā). Although he leaves his own comments, Ham Seok-heon (1901-1989, henceforth Ham) mainly uses a particular kind of commentarial method; that is, he quotes passages from both other commentators’ commentaries and other religious texts as well as works of literature. Previously, several scholars interpreted this kind of commentarial method as a disorderly enumeration of quotations or as based on religious pluralism, and so on. This study, however, argues that it is rather a selected collection of quotations, by which he wants to help the readers of the commented text Gītā understand better. I suggest five reasons for this argument.

First, mentioning Jiao Hong(焦竑)’s commentarial method in the 老子翼, Ham writes that Jiao Hong collected at one place selected good comments from different commentaries. Considering this record, it can be assumed that Ham also desired the readers of the Gītāto read at one place the selected good comments. Second, He makes a preface, which is a translation of two chapters from a dif-

 

 ∙印度哲學제46집

ferent book, to the Gītāand the introductions to almost every chapter of It. Having an experience of reading it almost without any commentarial aid, Ham writes himself that he makes the preface and introductions for the sake of helping the readers understand the Gītā better. Third, he provides the difficult words, phrases, and sentences of the Gītā with various translations and comments. As he reveals that he is not conversant with Indian philosophy, the various translations and comments are for the readers themselves to decide the meaning of those difficult parts. Fourth, he quotes not only the logical and central ideas but also rich citations that other commentators provide. It can be conjectured that Ham wanted to include numerous citations, so that they facilitate the readers’ understanding of the Gītā. Finally, Ham depends most on Radhakrishnan’s comments, which are characterized as annotating the Gītā text, giving abundant citations from both the Eastern and the Western traditions, and quoting the medieval Indian commentators such as Śaṅkara, Rāmānuja, and Madhva. Based on these five observations, this study intends to show that Ham’s commentarial method of collecting quotations was devised in order to help the readers of the Gītā acquire a better understanding of It.

Keywords : Ham Seok-heon, BhagavadGītā, commentarial method, a selected collection of quotations, interpretation, readers.

투고 일자 : 2016년 3월 28일 심사 기간 : 2016년 4월 11일 ~ 4월 28일 게재 확정일 : 2016년 4월 29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25 조회1,363회 댓글0건

검색목록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18장은 기타 철학 전체의 결말이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말해온 전체를 대충 보자는 것이다. 더 자세한 것을 알려면 이 책 16장을 보라. 1장에서부터 죽 말해오는 것을 보면 아르쥬나가 전쟁하기를 포기하려는 순간에 그를 달래어 자기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전쟁은 아르쥬나의 태어난 신분으로 하면 마땅히 당해야하는 운명적인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크게 될 출발점인 것이었다. 아르쥬나는 자기가 만일 존장들을 죽이는 그런 악을 행한다면 축복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꽉 차 있었다. 그러므로 제 2장 첫머리에서 인생의 두 가지 길이 제시된다. 하나는 즈나닌들 즉 성자들이 받아들이는 길, 다시 말해서, 삼캬(내버림)이고, 또 하나는 카르마 요가(즉 요가)다. 그리고 결론은, 해탈을 얻는데 둘 다 꼭같이 유익하지만, 둘 중에서 카르마 요가가 더욱 뛰어나다는 것이고(5: 2), 카르마 요가의 길에 의하면, 이 둘 중에서, 이성의 쪽이 더욱 뛰어나다고 한다. 이성이 확고하고 안정되기만 하면 카르마(행동)가 누구를 잘못되게 하는 일은 없다. 아무도 카르마로부터 도망할 수는 없고, 아무도 카르마를 내버릴 수도 없다. 결과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기만 하면 족하다. 아ang든지 카르마는 이행하여야 한다.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아니면 저 자신을 위해서. 사람의 이성이 순수하기만하면 지식이 카르마와 충돌되는 일은 없다. 옛 전통을 생각해보면, 쟈나카나 그외의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이런 것과 또 그밖의 논리적인 토론이 제 3장으로부터 제 5장에 이르기까지에서 나온다. 그 다음은 카르마 요가를 성공케 하는 이성의 평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카르마 요가의 길을 따르는 동안 어떻게 해탈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성의 평정을 얻으려면 감각을 통제하는 힘을 얻지 않으면 아니되고, 그리하여 만유를 꿰뚫는 오직 한 분의 지고자(至高者)가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체험하여야 한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러한 이유로 해 제6장에서 감각의 통제를 다루었고, 제7장서부터 17장에 이르는 동안에 ① 카르마 요가를 닦는 동안 어떻게 해서 지고자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② 그 지식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중에서 제7장과 8장에서는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jnana-vijnana)의 ① 가변(可變) 또는 불변의, ② 인식할 수 있는 또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다루었다. 그리고 제9장으로부터 12장에 이르는 동안에 지고자의 인식할 수 없는 모습이 비록 인식할 수 있는 모습보다 더 높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인식할 수 있는 모습을 예배하면서도 오직 한 분의 지고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면, 그것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지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13장에서는 몸과 아트만(ksetra-kstrajna-vicara)에 대한 이치를 설명해주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가변과 불변을 말하는 데 있어서 아뱍타(avyakta, 인식할 수 없는 것)라 하는 것은 사실은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아트만(atman, 자아. 영 혼)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14장에서부터 17장에 이르기까지에 아 주 자세한 설명으로 세상의 갖가지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생긴 것과 각양각색의 세계가 생긴 것이 프라크리티의 구성으로 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 제목은 사실은 가변과 불변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해서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에 대한 해설을 완성한다. 그러나 간 곳마다에서 아르쥬나에게 주는 오직 하나의 교훈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결정적인 교리를 선언한다. 일생을 카르마 요가의 길, 즉 지고자에 대한 예배의 길, 모든 행동을 순결한 마음으로, 제 신분에 따라,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지고자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진실로 인생에 있어서 최선의 길이라고. 그와 같이 하여서 카르마 요가를, 지식에 기초를 두고, 열심있는 신심이 그 뛰어난 속이 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여러 방면으로 설명한 다음, 바로 그 종교를 결론짓는 것이 이 제 18장이다. 그리해서 아르쥬나는 가르침을 받아 자의로 전쟁을 하게 된다. 이 길에서는,「기타」에 의해 최선의 길이라고 선포된 이 길에서 아르쥬나는 인생의 넷째 길, 즉 내버림의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은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금욕주의자(nitya-sannyasin)라고 했다(5:3). 그러므로 아르쥬나의 그 다음 질문은, ① 때때로 제 4 의 인생길, 즉 금욕의 길을 취하는 것과, ② 글자 그대로 모든 행동을 내버리는 주지가 카르마 요가의 길 속에 들어 있느냐 들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일 들어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포기(sannyasa)와 내버림(tyaga) 두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털라크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오, 억센 팔을 가지신 이여, 저는 포기와 내버림의 참 뜻을, 참으로, 흐리쉬케샤시여, 그것을 따로따로 알고 싶습니다. 오, 머리털 흐트러진 귀신 죽이시는 이시여!

포기(sannyasa) 이욕(離欲), 행동울 아주 아니함.

내버림(tyaga) 이과(離果), 행동의 결과를 바라지 않음.

억센 팔을 가지신 이, 흐리쉬케샤, 머리털 흐트러진 귀신 죽이시는 이 모두 크리슈나를 가리킴.

「기타」는 행동을 내버리기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욕망을 버리고 행동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참 포기이다. 이 절에서는 산야사는 모든 행작(行作)을 버리라는 뜻으로 탸가는 모든 행작의 결과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으로 씌어 있다. “카르마로도 아니요, 결과나 가멸음으로도 아니요, 오직 탸가, 즉 단념에 의해서만 해탈은 얻어진다.”(「Taittriya Aranyaka」, X, 10. 3).「기타」는 해방된 영혼은 해방된 후에도 계속 봉사생활에 남아 있는 것이 좋다고 권함으로써, 모든 행동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지혜가 생기면 행동을 그쳐버린다는 의견에 반대하고 있다.「기타」의 스승은 행동하는 사람은 얽매임 속에 있는 것이고 자유를 얻은 사람은 행동 할 수 없다는 견해는 옳지 못하다는 의견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질문의 뜻은 그 말들의 자전에 있는 뜻에만 있는 것 아니다. 산야사니 탸가니, 혹은 그것이 어떻게 서로 다르니 하는 것들. 그 두 단어의 근본뜻은 다 같이 ‘내버린다’는 뜻이다. 아르쥬나가 그것을 몰라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거룩하신 주는 어디서도 행동을 버리라고 한 일은 없다. 그리고 제4장에서도 5장, 6장에서도, 언제나 내버림에 관해 말할 때는 반드시 탸가 즉 결과를 바라는 그리고 모든 행동을 파라메슈바라(지고자)에게 바쳐버리는 산야사를 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만일「우파니샤드」를 본다면 거기 내버림의 길을 말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행동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든다면 이런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버림으로써, 즉 글자대로 모든 행동의 탸가를 행함으로써 해탈을 얻었다” “산야사의 요가로 정결함에 도달한 금욕주의자들이 그것을 모든 행동의 포기의 형식으로 했다” “우리가 우리의 아들들이나 손자, 그외의 후손들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같은 것들이다. 아르쥬나가 듣기에, 거룩하신 주가 말할 때에, 산야사와 탸가의 두말을 경전에 지정되어있는 인생의 네 단계 중의 하나인 내버림에 적용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뜻에서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싶어서 그 질문을 했던 것이다. ―틸라크

사실상「바가바드기타」는 17장에서 끝난 것이고, 이 18장은 위에서 설명했던 모든 문제들을 최종으로 요약해 말하기 위한 보충적인 것이다. 모든 장에서 크리슈나는 인생의 구경의 목적이 지극히 높으신 신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같은 점을 이 18장에서는 가장 확실한 지식의 길이라고 지적한다. 처음 여섯 장에서는 진실한 예배를 강조한다. “모든 요가 수행자 혹은 초월주의자 중에서 언제나 속에서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최고”라고 말했다. 다음 여섯 장에서는 순수한 예배와 그 성격과 활동이 어떤 것임을 설명했고, 그 다음 세번째 여섯장에서는 지식과 내버림, 물질적 성격의 활동과 초월적 성격의 활동, 신심 깊은 예배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장에서 크리슈나를 가리켜 말할 때에 흐리쉬케샤(Hrishikesha), 케쉬니 수다나(Keshinisudana) 두 이름을 쓴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흐리쉬케샤는 모든 감각의 주로서의 크리슈나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정신적인 평정에 들어가도록 도와준다. 아르쥬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요약하여서 정신적 평정에 이르게 해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의심나는 것들이 있었다. 의심은 언제나 마귀에 비유된다. 그래서 그는 크리슈나를 부를 때에 케쉬니수다나라고 불렀다. 케쉬는 아주 무서운 마귀였는데 크리슈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아르쥬나는 이제 크리슈나에게 그 의심의 마귀를 죽여주기를 원한 것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성자들은 애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행작을 그치는 것을 포기라 알았고, 모든 행작의 열매를 내버리는 것을 지식있는 이들은 내버림이라 했느니라.

비행(非行)이 이상적은 못된다. 사욕이나 이득의 기대 없는 행동을 내가 능동자는 아니요, 내 몸을 보편적인 자아에 내맡길 뿐이라 하는 정신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이다.「기타」는 행작의 완전한 포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행작을 니슈카마 카르마(nishkama karma), 즉 무욕의 행동으로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나 샴카라는, 여기서 말하는 탸가(내버림)는 다마 카르마 요가 수행자에게만 적용할 것이고, 즈나나 요가를 닦는 이는 행동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식은 행작과 같이 설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라다크리슈난

 

3. 어떤 지식 있는 이들은 행작은 악으로 알고 버릴 것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또 희생과 보시와 고행은 버리지 말 것이라 했느니라.

 

4.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내버림에 대한 나의 결론을 들어보아라. 사람 중의 호랑이야, 내버림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느니라.

라마누자(Ramanuja)는 내버림을 세 가지로 나눈다. ① 결과의 내버림, ② 자기가 동인(動因)이요 따라서 집착의 동인이란 생각의 내버림, ③주님이 모든 행동의 주인인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기가 모든 것의 동인이란 생각을 내버림. ―라다크리슈난

 

5. 희생, 보시, 고행의 행동은 내버리지 말고 잘 행하여야 할 것이니, 희생과 보시와 고행은 어진 사람을 정결케 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이 파바나(pavana).

 

6. 그러나 이 행작들도 결과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해야 하느니라. 오,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이것이 나의 최종 결정의 의견이니라.

이것은 카르마 요가에 대한 최종결론이다. 이때까지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카르마의 결점은 카르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결과를 바라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해왔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결과를 기대함 없이 욕심없는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다.「기타」는 산야사론의 모든 행동은 잘못이므로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찬성하지 않는다.「기타」는 다만 카먀(욕심 없는)의 산야사(내버림)만을 권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즉 경전이 제정한 모든 의식과 예식은, 욕망에서 오는 것이므로 카먀이며, 그러면 다 버려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다면 야즈나, 즉, 희생의 바퀴가 끊어지고 말지 않느냐, 그러면 세계는 멸망되고 말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거기에 대해「기타」는 이와 같이 대답한다. 경전에서 하늘에 이르기 위해 비록 희생, 보시, 고행을 하라고 제정했다 하더라도, 그 행동들이 바로 욕심 없이, 또 전체의 복이 되게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생각에서다. 즉, 희생을 바치거나 보시를 베풀거나, 고행을 하는 것은 이 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모든 욕심없이 하는 행동을 각 사람의 신분에 따라하듯이, 희생도, 보시도, 고행도 이생에서의 제 신분에 따라, 결과를 기대함 없이, 집착 없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언제나 늘 파바나(pavana, 마음을 정결케 해주는)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여서 이 행동들은 결과의 기대를 내버리고, 오직 진실한 신심에서, 모든 것을 지극히 높으신 주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바퀴는 끊어짐 없이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 이의 마음속에 이미 결과를 기대함이 없으므로 그 행동들은 해탈을 방해함이 없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안정 된다. ―틸라크

 

7. 타고난 의무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무지로 인하여 그것을 버리는 것을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8. 어떤 일이라도 단순히 고통스럽다고 해서, 또는 신체의 아픔을 두려워해서 포기한다면 그것을 동성적인 포기라 하는 것이니 그는 결코 그 포기의 결과를 얻지 못하느니라.

 

9. 그러나 아르쥬나야, 주어진 일을 오직 의무로 알고 집착을 버리고 결과를 기대함 없이 행한다면, 그것을 선성적 포기라 하느니라.

 

10. 언짢은 일이라 해서 싫어하지도 않고 좋은 일이라 해서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선성으로 가득 차 있는 내버림의 사람이니, 그는 어질고 모든 의심이 사라진 사람이니라.

 

11. 사실로 몸을 가지고 있는 이로서 행작을 온전히 버리기는 불가능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행작의 결과를 버린 사람을 내버림의 사람이라고 하느니라.

 

12. 바람직한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 그 둘이 섞인 것, 내 버림을 하지 못한 자의 죽은 후의 행작의 결과는 이와 같이 세 가지니라. 그러나 내버림의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느니라.

 

13. 억센 팔을 가진 자야, 모든 행작의 완성을 위하여 내게서 삼캬의 교리에서 가르치는 다섯 요소를 배워라.

삼캬(samkhya) 수론(數論).

여기서 말하는 삼캬는 베단타(Vedanta)를 의미한다. ᅳ라다크리슈난

 

14. 행동의 장소, 행동자, 감각기관, 각종 노력, 최고의 주재자 이것이니라.

장소(adhisthana) 소의(所依)

행동자(karta) 능작(能作).

감각기관(karana) 작구(作具).

최고의 주재자(daiva) 주신(主神).

 

15. 사람이 그 몸으로나 말로나 마음으로 그 어떤 행동을 했든간에 옳고 긇고를 물을 것 없이, 그 동기는 다 이 다섯 가지에 있느니라.

 

16. 사실이 이런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충분한 이성적 판단이 부족한 탓으로, 자기를 단 하나의 행동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참을) 보지 못한다.

행동자는 다섯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자기를 유일의 행동자로 알았을 때 그는 오해한 것이다. 샹카라는 “순수한 자아를 행동자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가 만일 그 행하는 힘을 순수자아에 돌린다면 그는 사실을 오해하는 것이다. 에고(ego, 小我)를 보통 행동자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인간 행동의 주된 한 결정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인간 행동이란 모두 다 자연의 산물이다. 에고란 그런 것인 줄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 얽어매는 힘에서 벗어나서 보편적인 자아(大我)의 보다 큰 지식 속에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자아관(self-vision)에서 볼 때 모든 행동은 다 프라크리티(prakrit, 자연)의 산물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다섯 가지로 갈라서 하는 설명은 분명치 못하다. 그리고 여러 주석가들의 가지가지 설명이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 일반적으로 공통되는 것은 다만 이런 것들이다. 아디스다나(所依)는 몸을 의미하고, 카르타(karta, 能作)는 마음이며, 카라나(karanas,作具)는 감각기관이고, 체스타(cestas)는 들숨 날숨이고, 다이바(daiva)는 문제가 많다.

지극한 사람은 저란 것이 없고, 검스러운 사람은 제 힘이란 것이 없으며,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느니라.(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장자

 

17. 스스로 나다 하는 생각이 없고, 그 이성이 더럽게 물들지 않은 사람은 다른 세상 사람을 죽이더라도 죽인 것이 아니요, 또 거기 얽매이지도 않는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우주적 영(靈)의 기계로서, 또 우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한다. 그는 아주 무서운 행동도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나 욕심 없이, 다만 그것이 주어진 의무이기 때문에 한다. 그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 하는 정신이 문제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을 죽인 것이지만, 참의 자리에서는 죽인 것이 아니다. 이 절의 뜻은 우리가 벌받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큰 영적 의식 속에 사는 사람은 어떤 악을 행하고 싶은 생각을 느끼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악한 행동은 무지와 분리주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초월적 자아와의 하나됨 의식에서는 다만 선한 것이 나올 뿐이다. ―라다크리슈난

 

18. 지식과 지식의 대상과 아는 이는 행동을 일으키는 세 겹의 충동이요, 감관과 감각과 행작자는 행작의 세 모음이다.

지식의 대상 소지(所知).

아는 이 능지(能知).

충동 동기적 원소(原素).

행작자 능작(能作).

모음(集成) 결과적 원소.

 

19. 지식과 행동과 행동하는 자는 특성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 말하는 세 가지이니 그것을 자세히 들어야 할 것이다.

 

20. 만유 속에서 오직 하나의 무너지지 않는 존재를 보고, 차별 속에서 무차별을 보는 지혜는 선성적이라 알 것이니라.

 

21. 가지가지의 만물 속에서 서로 다른 존재를 알아보는 지식이 있으니 그것은 동성적이라 알 것이니라.

 

22. 그러나 하나의 결과에 집착하여서 그것을 전체로 알며, 그 원인도 그 참뜻도 모르고 좁은 생각만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암성적이 라고 알 것이니라.

 

23. 신앙으로 내 할 일이다 결정된 일을 아무 집착 없이, 또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이,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이 한다면 그것은 선성의 행동이라 할 것이니라.

 

24. 어떤 일을 자기를 나타내자는 강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 결과를 노리고 힘을 써서 한다면 그것은 동성적이라 할 것이니라.

 

25. 그저 무지한 생각에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도, 어떤 결과가 오겠는지도, 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손해나 상처가 나겠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하는 행동은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6. 어떠한 집착도 가진 것이 없고, 나란 내 것이란 말을 하는 일이 없으며, 일이 성공되건 실패되건 흔들림이 없이 굳센 뜻으로 성실과 노력으로 일하는 사람은 선성의 사람이니라.

 

27. 열정적이어서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마음을 많이 쓰고, 탐욕과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가지며, 속이 정결치 못하고 기쁘고 슬픔에 변덕이 심한 사람은 동성의 사람이니라.

 

28. 마음에 통일이 없이 야성적이고, 완고하고, 사기적이고, 사납고, 게으르고, 비관에 잘 빠지고 느림보인 사람은 암성적이니라.

 

29. 자연의 양태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가멸음의 정복자야, 하나하나 남김없이 말할 터이니, 잘 들어두어라.

 

30. 프리다의 아들아, 움직임(動)과 안 움직임(靜), 함(爲)과 안함(無爲),두려움(畏)과 두렵지 않음(無畏) 얽맴(繁縛)과 풀어 놓음(解脫)을 아는 이성은 선성적이니라.

 

31. 프리다의 아들아, 법(法, 다르마)과 비법(非法), 마땅히 할 것과 해서는 아니 될 것을 똑똑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은 동성적이라 할 것이니라.

 

32. 프리다의 아들아,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어서 비법을 법으로 믿고, 일체의 사물을 뒤집어 보는 이성은 암성이라 할 것이니라.

 

33. 프리다의 아들아, 흔들림 없는 굳센 뜻을 가지고, 요가에 의하여 마음과 정신과 감각의 작용을 제어해가는 사람은 선성적이라 할 것이니라.

 

34. 그렇지만 아르쥬나야, 집착을 가지고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법(의무)과 쾌락과 재물을 지켜가는 그러한 견고는, 오 프리다의 아들아, 그것은 동성적이니라.

법, 쾌락, 재물, 사람들은 여기다가 모크샤(해탈)를 넣어서 이를 인생 의 네 가지 목적이라 한다. ―힐

 

35. 프리다의 아들아, 만일 어리석어서 잠, 공포, 걱정근심, 비관, 방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견고 같은 것은 암성이니라.

 

36.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이제 내게서 세 가지 안락을 들어보아라. 그것을 꾸준히 닦으면 즐거움을 얻어 고통이 끝나는 데 이르느니라.

 

37. 그 처음에는 독약 같고, 그 나중에는 감로 같으니, 그것은 자아를 뚫어 깨달음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그것을 선성적인 것이라 하느니라.

 

38. 감관과 그 대상의 접촉에서 오는 즐거움이니, 그 처음은 감로 같고 그 나중은 독약 같다. 그런 쾌락은 동성적이라고 전해오느니라.

 

39. 그 첨에 있어서도 나중에 있어서도 자아를 혼미케 함으로써 잠, 게으름, 방탕 속에서 나오는 쾌락인데, 이는 암성적이라고 일러오느니라.

행복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한가지로 바라는 목적인데, 다만 우리의 성격을 그 어떤 것이 지배하고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 암성(타마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폭력, 게으름, 맹목적, 거짓으로 만족하게 되고, 라자스, 즉 동성이 우세하게 되면 돈, 권력, 자랑, 교만, 명예를 행복으로 알게 된다. 인간의 참 행복은 그러한 외적 물건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높은 마음과 혼의 보다 고상한 것을 충족시켜 우리 가장 깊은 속에 있는 내적인 것을 발전시켜가는 데 있다. 그 같은 고통스럽고 억압당하는 것 같지만 구경에는 우리를 즐거움과 자유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지식과 덕행의 행복에서 영원한 평안과 환희에 이를 수 있다. 즉 영적 아난다(ananda of the spirit)이다. 그때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아(self)와 만물과 하나가 된다. ―라다크리슈난

참 즐거움은 즐거움 없음이다(至樂無樂). ―장자

 

40. 땅 위에 있어서나, 하늘 위의 신들 사이에 있어서나 프라크리티(자연)에서 나오는 세 가지의 특성을 벗어난 이는 하나도 없느니라.

 

41. 대적을 혼나게 하는 용사야, 브라만과 크샤트리야와 바야샤와 그리고 수드라까지도 그 하는 일은 자성(自性곧 自然)에서 나오는 세 구나에 의하여 분배되는 것이니라.

브라만(brahmanas) 범족(梵族). 바라문(波羅門).

크샤트리야(kshatriyas) 왕족, 찰제리(刹帝利).

바이샤(vaishyas) 농상족(農商族), 비사(毗舍).

수드라(sudras) 노예족, 수다라(首陀羅).

구나(gunas) 특성, 덕.

이 네 가지 구별은 힌두사회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고, 세계 어디에도 적용된다. 그 구별은 인간의 성격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네 계급에는 각각 분명한 특성이 있다. 물론 그것은 서로 배타적은 아니다. 반드시 늘 유전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기타」를 가지고 현존하는 사회조직을, 그 딱딱하고 서로 혼잡해져 있는 그대로를 지지하려고 할 수는 없다. 「기타」는 그 네 계급론을 그 범위와 의미를 확대해서 보고 있다. 사람의 외면적 생활은 내적 생활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 표면은 그 깊이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각 개인은 그의 타고난 성격, 스바빠바(svabhava)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그는 그의 생애에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의 의무다(svadharma). 각 개인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초점이요, 거룩하신 이의 한 부분이다. 그의 목적은 이 거룩한 가능성을 그의 생애 속에서 실현하는 데 있다. 우주의 한 영(The Soul)이 세계의 허다한 혼(souls) 들을 낳았다. 그러나 거룩하신 이라는 이념은 우리의 본질적인 성격이요, 우리 존재의 진리이다. 우리의 스바빠바이지, 구나의 기구가 아니다. 구나는 나타냄의 한 중개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이 만일 제게 적당한 일을 한다면, 그가 만일 제 생의 원리를 따르기만 한다면, 즉 자기의 수바다르마를 다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그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 나타내실 것이다.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들이 아무런 충돌 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이 어떤 사건을 처리하려고 나설 때, 전체의 계획을 다 아노라고 자신하기 때문에 지상에서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가 우리의 성격에 따라서 일을 하는 한 우리는 옳은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우리의 행동은 영적 완성의 한 부분이 된다. 개인 속에 있는 거룩한 것이 완전히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불멸의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인간의 생애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문제는 우리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고, 또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천성에 반대하는 죄를 짓게 된다. 스바빠바 교훈의 요점은, 인간은 하나의 개인으로 대할 것이지 무슨 형(型)으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르쥬나에게 해준 말의 요점은 하나의 무사로서 용감히 싸우는 것이 지혜로운 평화에 대해 성숙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네 가지의 넓은 성격이 있는데, 거기 맞추어가려면 네 가지 사회적인 생활양식이 있다. 네 계급은 출생이나 피부 빛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어떤 임무를 다하는 데 우리에게 가장 맞는 심리적인 특성으로 되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하늘은 누구를 특별히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저 늘 착한 사람과 더불어 한다. (天道無親 常與善人) ―노자

 

42. 가라앉음, 스스로 다스림, 고행, 맑음, 넓은 마음, 곧음, 지혜, 지식, 신앙, 이것은 자성에서 나와 브라만들이 하는 일이요,

 

43. 날쌤, 알참, 참고 견딤, 재주, 버팀, 보시, 지도력, 이런 것은 자성에서 나오는 왕족들의 행작이니라.

 

44. 농경, 짐승치기, 상업, 이런 것은 자성에서 나와서 하는 바이샤의 하늘 행작이요, 받들어 섬기는 일들은 자성에서 나와서 하는 수드라의 행작이니라.

 

45. 사람은 제 의무에 마음을 다함으로써 자기완성에 이를 수 있다. 이제 어떻게 제 의무를 마음 다해 함으로써 자기완성에 이르는가를 들어보아라.

 

46. 만유가 그에게서 전개되었으며, 일체가 그것으로 편만 되어 있는 이, 그이를 섬기기를 제 의무로써 다함으로 하여 사람은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느니라.

 

47. 불완전하게라도 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를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무를 빛나게 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를 다하는 사람은 죄에 물드는 일이 없느니라. (3장 35절 참조)

 

48. 타고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는 비록 잘못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말 것이니 모든 경영(經營)은 다 결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연기에 싸여 있듯이.

 

49,그 이성은 언제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고, 그 자아는 정복되어 있어 욕망을 떠난 사람은 내버림에 의하여 최고의 지경 즉 초행작에 이르느니라.

초행작(naishkarmya)은 모든 행작을 초월한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이 세상일에서 벗어나 모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는 육신으로 살아 있는 한 도저히 불가능하다.「기타」가 주장하는 것은 내적(속으로) 내버림이다. 에고(ego,小我)와 자연은 비슷한 것이므로 해방된 영혼은 브라만이 됨에 따라 순수자아(pure self)는 잠잠하며, 안정되고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게 되지만, 여전히 이 자연의 세계에서 활동한다. 그 자연이란 어떤 것임을 앎으로 하여.

 

50. 쿤티의 아들아, 완성의 지경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브라만에 이르는가를 간단히 들어보아라. 그것이 지식의 최고의 경지이니라.

완성의 지경 성만위(成滿位).

 

51. 맑은 이성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굳센 뜻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소리 따위 감각의 대상을 물리치고, 좋고 언짢고를 내 버리고,

 

52.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적게 먹고, 몸과 말과 뜻을 억제하여 명상과 요가에 전념하고, 언제나 이욕(離欲)에 의지 하며,

 

53. 아집, 폭력, 오만, 욕망, 분노, 탐욕을 벗어나 아욕(我慾)이 없고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브라만과 하나됨을 얻을 수 있느니라.

브라만과 하나됨 브라마 부타(brahma-bhuta).

 

54. 브라만과 하나로 되어 마음이 안정에 든 사람은 근심도 바람도 없고, 일체만물을 평등으로 보며, 나에 대한 최고의 믿음에 이른다.

나 크리슈나를 가리킴.

이 절은「기타」에서 볼 때는, 개인이 형태도 없는 절대 속에 녹아 없이지게 되는 것이 반드시 최고의 경지는 아니고, 도리어 변(變)과 불변(不變)을 자신 속에 다 가지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主)를 정성되게 믿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설명이다. ―라다크리슈난

브라만과 신은 온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쓰지 나오시로

 

55. 정성된 믿음에 의하여 그는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크)며,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를 참으로 알게 되면 그러면 곧바로 내게로 들어온다.

 

56. 언제나 온가지 행작을 하면서도 그는 나를 의지하고 내 은혜에 의하여 영원불멸의 경지에 들어 갈 것이다.

아타르(Attar)는 이브라힘 아담(Ibrahim)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순례자의 앞에 행복의 문이 열리기 전에 그의 가슴속에서 세 개의 베일이 벗겨져야 한다. 첫째, 그에 대한 영원한 선물로 두 세계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지기 전, 그는 기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누구나 어떤 피조물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아직도 탐욕이 있다. 그런데 탐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니 주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베일은, 그가 두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려면 설혹 받았다가 그것을 다시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섭섭하게 여겨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했다는 증거요, 노했다는 것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째는, 어떤 칭찬이나 호의에 넘어가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속는 사람은 마음이 허수한 사람이기 때문이요, 또 그런 사람은 진리는 알아보지 못한다. 순례자는 고상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브라운, A Literary History of Persia)

이 세 절에서 저자는 지혜와 신앙과 행작은 서로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작은 성격, 곧 프라크리티는 하나님의 힘이고 개인은 다만 하나님의 기계일 뿐이라는 지식을 가지고야만 가능하다. 그 뜻을 영원 하신 이에게 꽉 박아놓은 사람은 그의 은총에 의하여 무엇을 하거나, 그는 영원히 그 큰집 속에 산다. ―라다크리슈난

 

57. 마음으로 일체 행작을 내게 맡기고, 나를 최고의 돌아갈 곳으로 알고, 이성의 요가에 의지하여, 끊임없이 생각을 내게 두어라.

 

58. 생각을 내게 두면, 나의 은혜에 의하여 일체의 고난을 초월할 것이요, 만일 네 아집을 가지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너는 멸망할 것이니라.

 

59. 네가 비록 네 아집을 가지고 ‘나는 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의 그 결정은 소용이 없다. 네 자성이 너를 강제할 것이니라.

자성(自性) 프라크리티, 자연, 본능, 본질.

‘싸우지 않겠다’ 하는 욕망은 다만 그의 옅은 본성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의 깊은 존재는 그를 싸우는 편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가 만일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무기를 내던지고 전쟁에서 물러난다면, 그리하여 전쟁이 그 없이 진행된다면, 그리하여 자기의 물러남 때문에 세상이 불행하게 될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는 우주정신인 냉혹한 압력에 의하여 하는 수 없이 무기를 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아가 우주진 화에 협력해야 할 것이요, 이를 부정하고 반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는 본질적으로 결정을 맡는 자리에서부터 결정 하는 자리로 가게 될 것이다. 아르쥬나에게 미혹을 일으켜서 자기 존재의 위대한 뜻에서 떨어져나가게 하는 것은 그의 낮은 속이 하는 것이다. 이제 아르쥬나는 그 참뜻을 깨달았으므로, 이기적인 목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제 제자는 모든 사욕의 겁을 버리고 자기의 ‘속의 빛’에 복종해야 할 것이요, 그러면 그는 그를 이끌어 모든 고난과 장애를 이기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조건을 결정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결과 싸우는데 우리 정력을 소모해서는 아니 된다. 보통 사람은 다 자연적 인간이어서 조그만 일들에 본능적으로 열중하기 쉽지만, 사람은 변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보람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데에만 있다. 성 프랑시스의 유명한 기도가 이것을 한마디로 잘 표시해 준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렇습니다, 그저 언제나 그렇습니다.”(Yes Father! Yes, and always Yes!) ―라다크리슈난

 

60. 쿤티의 아들아, 네가 미혹된 생각에 하지 않고자 하는 행동도 네 자성에서 나오는 행작에 얽매여, 네 마음에 없으면서도 하지 않을 수없이 되느니라.

 

61. 아르쥬나야, 자재주는 만물의 마음속에 계신다. 그는 그의 신비로운 힘으로 만물을, 마치 돌아가는 바퀴 위에 올려놓은 듯 돌리신다.

자재주(自在主) 이슈바라를 가리킴.

신비로운 힘 환력(幻力)

 

62. 바라타의 아들아, 너의 온 존재를 다 가지고 그에게로 돌아가라(歸依). 그의 은혜로 너는 최고의 평화, 영원한 집에 이를 것이니라.

 

63. 이처럼 모든 비밀 중의 비밀인 지혜를 나는 너에게 말했으니, 깊이깊이 생각한 후 네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나님은 얼핏 보기에는 무관심한 듯하다. 그는 결정을 아르쥬나의 선택에 맡겼다. 그가 무관심하신 듯이 보이는 것은 그가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각각 제 자유로운 뜻으로 자기한테 오기를 바라시는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자유로이 자진해 오는 것이야말로 귀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같이하자고 요청을 할 것이지 강제할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이끌 것이지 몰아칠 것이 아니다. 설득을 시킬 것이지 강요할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자기 명령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언제든지 맘대로 물리치려면 물리치고 받으려면 받을 수 있다. 완전한 행복은 구도자의 충분한 승낙으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면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실망에 떨어졌을 때 위로해주시기를 지체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갈 곳을 대신 기어 올라가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길이 참고 견디시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예정론 사이에는 유럽에서도 인도에서도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의지의 자유와 인간의 노력이 주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의지 그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지 없이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정된 자는 선한 행실과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예정은 확실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정은 피조물에 의해서만 진행된다……그렇지만 그것들 때문에 예정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을 거절할 자유는 있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받는 것은 오직 제 행실로 그것을 받을 준비를 스스로 해가지고 있는 사람뿐이라고 했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에 의하면, 의지의 자유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조차도 인간의 결정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 할 수 있지만. 또 그것을 멀리할 수도 있다.

정신적 지도자는 육체적 폭력이나 기적부림, 부적 같은 것으로 우리를 놀리지는 않는다. 참 선생은 거짓 책임을 꾸미지는 않는다. 제자가 설혹 그릇된 방향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조언은 해주지만 강제로 돌이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이 될 때에는, 선생은 제자가 아직 미숙한 때에는, 마치 아버지가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애에게 하듯이 해주지만 제 발로 걷게 될 때는 도와주려고 팔은 벌리지만 나가는 방향은 제가 취하도록 제자에게 맡겨둔다.

크리슈나는 다만 차부일 뿐이다. 그는 아르쥬나가 가는 방향대로 따라갈 뿐이다. 그는 무장은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영향을 아르쥬나에게 준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사로잡는 사랑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 사랑엔 한이 없다. 아르쥬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찾아내어야 한다. 그는 습관과 권위자에게서 얻은 단순하고 맹목적인 신앙으로 행동해서는 아니된다. 불가피하게 감정적으로 얻어진 불분명한 가정들은 광신적인 고집으로 사람을 이끌어 말할 수 없는 비참에 빠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제 신앙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르쥬나는 참된 성실성을 가져야 한다. 그의 생각은 참으로 제 것이요, 스승이 넣어준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가르침은 교리를 머리속에 집어넣어주는 일이 아니다. ―라다크리슈난

 

64. 다시 나의 비밀 중의 비밀인 가장 높은 가르침의 말을 들어라. 너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자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유익한 것을 말해주리라.

 

65. 마음을 내게 쏟고 나를 정성껏 믿으며 내게 몸을 바치고 나를 공경하라. 그러면 너는 내게로 올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네게 약속하노니, 너는 내 사랑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66. 일체의 (종교적) 의식을 버리고, 오직 내게만 의지하라. 내가 너를 일체의 죄악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지어다.

아르쥬나는 전쟁의 결과로 일어날 계급의 혼란, 선조에 대한 불경, 스승들에 대한 불경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다. 크리슈나는 그런 규율, 습관, 의무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그저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기가 하라는 대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아르쥬나가 만일 제 목숨과 행동, 감정, 사고를 다 버리고, 자기를 온전히 들어 하나님께 항복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인도하여 이 인생의 싸움에서 빠져나오게 하실 것이다. 자아를 초월하는 가장 쉬운 길은 항복이다. “아무것에도, 자기의 도덕에조차도 종노릇을 아니하는 사람만이, 거룩하신 이를 명상할 자격이 있다.” ―라다크리슈난

 

67. 너는 이것을 고행을 하지 않는 자에게나, 참된 믿음이 없는 자에게나, 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에게, 또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말하지 말지니라.

 

68. 나를 진실로 믿는 자들에게 이 최고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게 최고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 그 사람은 틀림없이 내게로 올 것이니라.

69. 인간 중에, 그 사람보다도 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세상에서 그 사람보다도 더 내 사랑을 받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70. 그리고 만일 우리 둘의 이 신성한 (종교적) 대화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나에게 지식의 희생을 바치는 것이라고.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71. 믿는 마음으로, 불평함 없이 듣는다면 그 사람도 해탈을 얻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이 가는 청정세계에 갈 것이다.

 

72. 오, 프리다의 아들아, 너는 과연 마음을 한점에 모으고 이 말을 들었느냐? 가멸음의 정복자야, 네 지식의 헤매임은 소멸되었느냐?

 

 

아르쥬나 말하기를

 

73. 불사(不死)의 주이시여, 당신의 은혜로 저의 헤매임은 사라졌사옵니다. 제 (의무에 대한) 기억을 다시 찾았사옵니다. 의혹은 사라지고 튼튼히 섰사옵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대로 하겠사옵니다.

 

산자야 말하기를

 

74. 저는 이 놀랍고 솜털 곤두서는 대화를 바슈데바의 후신(後身)인 크리슈나와 대아(大我)를 가진 아르쥬나 사이에서 들었습니다.

바슈데바(Vasudeva) 바수천왕(婆藪天王).

 

75. 브야사의 은혜로 이 최고 비밀의 요가를 들었습니다.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 자신이 제 면전에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브야사(Vyasa,廣博仙人)는 산자야에게 멀리서 듣고 보는 능력을 주었다.

 

76. 대왕이시여,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돌이켜 생각해볼 때마다 더욱더 기쁨을 느낍니다.

 

77. 대왕이시여, 저 놀라운 하리 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점점 더 하는 환희와 놀람을 느낍니다.

하리(Hari) 크리슈나를 가리킴.

 

78.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 계신 곳, 한량이신 프리다 부인의 아들이 계신 곳, 거기에는 늘 행운이 있고, 승리가 있고, 번양이 있고, 견고한 통치가 있습니다.

 

이것이 내버림에 의한 해탈의 요가라 이름 붙여진 제18장의 끝이며,「바가바드기타」라 일컫는「우파니샤드」의 끝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13 조회999회 댓글0건
검색목록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13장에서 크리슈나는 몸과 영혼(아트만)에 대한 이치와, 겸하여 삼캬론에서 말하는 그와 비슷한 프라크리티와 푸루샤의 차이를 설명했고, 14장에서는 세 가지 구나(性)의 결과로 인하여 각 개인의 천성에는 서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난 다음, 그러므로 선성의 사람, 동성의 사람, 암성의 사람이 각각 종국에 가서 어떤 지경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3 성초월(三性超越, trigunatita)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삼캬론에 의한 브라마의 경지는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는 어떤 방법에 의해서 도달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 모든 설명이 다 삼캬론의 말로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것은 삼캬론의 이원론을 받아들이면서 한 것은 아니다. 프라크리티와 푸루샤가 다 그이의 나타남인, 유일의 파라메슈바라의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으로 그것을 한다. 이러한 파라메슈바라의 형상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거기 더하여서 그는 또 제 8장에서 아지 야즈나(adhiyajna)와 아쟈트마(akhyatma)와 아지다이바타(adhidaivata) 등의 차이를 말씀했고, 또 만유를 꿰뚫는 유일의 파라 메슈바라가 계신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는 또 몸 안에 와 계시는 아트만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말했다. 이제 여기서 크리슈나는 왜 어찌해서 파라에슈바라로부터 우주적 전개가 창조되었느냐,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이름과 형상에 의한 파라메슈바라의 흩어짐(擴散)은 왜 있게 됐느냐 하는 것을 한참동안 하나의 나무, 혹은 숲에 비하면서 그려내고는, 나중에 그들 절대의 나(絕對我, Purushottama)로 그린다. 그것이 곧 파라메슈바라의 최고의 형상이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불멸의 보리수는 그 뿌리를 위에 두고 그 가지를 아래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잎은 베다의 노래요, 그것을 아는 이는 베다를 아는 이니라.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에 두는 이 세계의 나무는 영원한 것이다.”(「Katha UP.」) 산사라브리크샤(sansaravriksha), 곧 우주의 나무다. 「마하바라타」는 우주진화를 하나의 나무에 비하면서 그것은 위대한 지식의 검(jnanena paramasina)으로만 찍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나무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뿌리를 위에다 두었다 한 것이고, 그것이 세계로 뻗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지를 아래로 두었다고 한다. 이 세계는 초월해 있는 이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체다. 옛날의 신앙에 의하면, 이 세계는 베다에서 하는 희생의 바침으로 유지되어간다. 그래서 그 잎을 베다의 노래라고 했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살려가는 것은 잎이기 때문이다.「리그베다」1,2,4, 7을 보라.
그리고 다른 데에는 “이 우주의 나무를 만든 것은 나다”(「Taittiriya UP.」1, 10)라고 했으며, 또 다른 데에서는 우리 몸은 흙에서 난 것이고 혼은 하늘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땅과 별이 돋는 하늘의 아들이지만, 내 종족은 하늘에서만 온 것이다.”(Petelia orphic tablet)
플라톤(「Timaios」)을 보면, “우리 영혼의 가장 존귀한 부분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귀한 영혼을 넣어주셨다. 그것이 우리 몸의 가장 위인 정수리에 있어서 우리를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에 있는 우리 동족에게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속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라다크리슈난
보리수 즉 아슈바타(ashvatta), 슈바타는 내일이라는 뜻, 아슈바타라면 내일까지 가지도 못한다는 말. 이 감각의 세계는 아주 덧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덧없는 것이지만, 그 뿌리는 브라만이기 때문에 불멸이다. 그것을 보호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베다의 잎, 곧 다르마다. 감각의 세계는 그런 것인 줄을 알고 또 다르마를 아는 사람이 참으로 아는 이, 곧 베다를 아는 사람이다. ―간디
이 아슈바타를 대개는 인도 말로 피팔(peepal) 나무로 해석하는데 또 어떤 책에는 반얀(banyan) 나무라고 한 데도 있다. 반얀나무란 가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서 하나의 나무가 되고 또 뿌리가 내리고 해서 나중에는 숲이 되고 마는데, 아마 이렇게 뿌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기 때문에 이것으로 번역한 듯하지만, 그 비유하는 전체의 의도로 보나, 또 그 나무의 생긴 당당한 모습으로 보나 피팔나무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피팔은 한문으로 된 문헌에도 필발나수(畢鉢羅樹)라고 음으로 번역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석가모니가 그 밑에서 도를 깨달았다고 해서 각수(覺樹) 혹은 도수(道樹)라고도 번역되는데. 불교가 퍼진 이후부터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린다. 보리는 옳게 발음하면 ‘보디’ 라 해야 할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보리로 발음해온다.
피팔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한다면 느티나무와 성질이 비슷해서 크게 자라고 가지가 넓게 퍼져 그 밑에서 쉬고 명상하기에 좋다. 간디가 가장 오래 있었던 세바그람 아슈람에 가면 그 뜰에 간디가 손수 심었다는 피팔나무가 한 그루 있다. 1971년 내가 가봤을 때 이미 아름이 넘었다. 저녁 다섯시가 되면 그 아슈람에 있는 수도자들이 간디의 생시에 하던 대로 나와 맨땅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맨 앞에 전에 간디가 앉던 자리에는 방석을 하나 놓아서 보이지는 않으나 그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 뒤에는 조그만 칠판 같은 것을 세워놓았는데, 거기에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당한곳은 큰 성당이나 절 같은 데가 아니라, 활짝 열린 바깥, 그중에서도 특히 큰 나무 밑이다. 그래야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이라도 다 마음 놓고 올 수가 있다”는 간디의 말이 씌어 있었다.
장자가 슬슬 거닒(道遙遊)을 했다고 하는 큰 저(樗)라는 나무도 그런 나무였을까? 아담 부부가 낙제를 했던 그 나무도 역시 그 우주의 나무가 아닐까? ―함석헌
 
2. 아래로 위로 그 가지는 벋고, 바탈에 의해 그 진액을 받고 감각의 대상에 의해 그 순을 내며, 그 뿌리가 아래로 서리어 인간 세상의 짓에 얽힌다.
바탈 구나, 3성.
순 잔가지, 싹(芽)
짓 카르마, 업. 작위(作爲).
샹카라의 주석에는 아래로 서리는 뿌리는 전생의 행동의 결과로서 혼이 가지고 있는 바사나(vasana,욕망)라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은 깨닫지 못한 마음들이 보는 감각세계의 나무의 모양을 그린 것이다. 그들은 위로 브라만 속에 있는 그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감각의 대상에 애착하게 된다. 그리고 세 구나로 그 나무에 물을 주며 속세의 카르마에 얽매어 있게 된다. ―간디
아슈바타 나무의 뿌리가 위에 있고 가지가 아래 있다는 것이「카다 우파니샤드」에 나와 있는데, 그것을 ‘영원한 불멸의 브라만’ 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언제나 덧없는(可滅) 그러면서도 그 덧없음에서 영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슈바타는 틸라크가 결정적으로 단정한 대로 피쿠스 텔리지오나(ficus religiona), 혹은 피팔나무다. 그 뿌리, 즉, 원초적인 씨는 브라만인데, 시적으로 표현해서 ‘위’ 라 했고, 그 무성하게 퍼진 가지는 환하게 우리 눈앞에, 아랫세상에 있다. 그러나 2절에서 그 뿌리가 아래 있다고 한 것은 이 죽을 인생들은 언제나 그 정말 뿌리는 잊어버리고 세상적인 뿌리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가지가 위로 아래로 퍼졌다고 한 것은, 행동은 과거 행동의 결과로 되는 것인데 그것이 또 행동으로 나타나서, 나서는 죽고, 죽어서는 또 나는 끊임없는 반복을 보여 주고 있다. 힐(Hill)이 “피팔나무는 새 뿌리를 박기 위해 기근(氣根)을 내지는 않는다”고 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도 자라서 노목이 되면 한다. 라나데(Ranade) 교수는 그의 우파니샤드 철학 연구에서 칼라일의「영웅숭배론」속의 명문을 빌어서 아슈바타 나무를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익드라실나무(tree igdrasil)에 비교하고 있다. “그 가지는 그 움틈과 잎 떨어짐으로—사건들, 겪었던 일들, 이루어진 일들, 재난들—모든 나라와 시대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 한 잎새마다가 한 인물의 전기 아닌 것이 있으며, 그 한 엽맥에 한 행동이나 말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 가지는 민족들의 역사요, 그 설렁거리는 잎소리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는 인간 생존의 소리다. 인간 심정의 숨소리가 설렁거리며 자라고 있다. 이것은 익드라실, 존재의 나무다. 이것은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된 것이요, 되고 있는 것이요 될 것이다. 한다는 동사(do)의 무한한 연결이다.” 라나데 교수는 한 가지 중요한 반대되는 점에 주의를 하고 있다. 즉, 익드라실은 그 뿌리를 헬라(Hela) 곧 죽음의 나라에 깊이 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2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는 뿌리들이—1절에서와 같이 그 뿌리가 아니고—아래로 서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비교는 학식 많은 교수가 했던 것보다 도리어 더 가깝게, 더 교훈적이 된다. 한다는 동사의 연결이란 것은 영원한 카르마(業)의 얽어맴이다.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끝없이 되풀이되는 죽음이다. 간디가 15장 2절에서 설명한 것같이, 사람이 만일 눈을 떠서 위에 있는 불멸의 뿌리를, 그것이 곧 죽음 없는 지경인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12장 7절을 보라. 거기는 산사라(sansara,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는 세상)가 곧 죽음이라고 되어 있다. ―마하데브 데자이
모든 주석가들의 말이 아슈바타나무가 ‘산사라’ 곧 감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서는 일치하나, 그 자세한 해석에서는 제각기 다르다. 샹카라는 뿌리는 브라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위에’ 있다고 했고, 가지는 삼캬론의 타트바(tattva, 25개의 원리)들이므로 현실세계에서 보는 대로 ‘아래’에 있다고 하고, 더 나가서 이 가지들은 “아래에도 위에도”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산사라’ 안에서는 인간이 중간에 있고 위에는 브라마와 데바(deva)가 있고 아래는 낮은 단계의 생물들이 있기 때문 이다. 그는 또 1절의 물라(mula, 뿌리)와 2절의 물라니(mulani, 뿌리들)를 구별해 말했다. 둘째 것은 제2의 뿌리, 곧 인간세상에서 선악의 행동을 하게 하는 바사나(vasana,욕망)들이기 때문이다. 라마누쟈는 위에 있는 뿌리를 일곱 세계 위에 앉아 계시는 브라마라고 생각하는 이 외에는 샹카라와 한 가지 의견이다. 샹카라는「베다」는, 옳고 끓고를 다루는 의미에 있어서는, 이 세계를 보호하기를 마치 잎이 나무를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찬도가 우파니샤드」참조) 그는 마드바(madhva), 슈리다라(Sridhara) 또 그외의 사람들과 한가지로 아슈바타(ashvattha)를 아슈바스타(a-shvah-stha, svo pisthata)에서 끌어내온다. 그 이유는 이 세계는, 비록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불멸이기는 하지만, 변전무상(變轉無常)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주석가의 해석을 다 보자면 한이 없는 일이다. 톰슨(J.C. Thomson)이 아슈바타를 반얀나무(banyan tree)라고 믿고 그 가지가 아래로 내려와서 새 뿌리가 된다고 한 것은 잘못 알고 한 말이다. 이것은 잘못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왜 특별히 아슈바타나무가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로 뻗는다고 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보자는 하나의 시험이라고는 할 수 있다. 주석가들이 이 점을 전연 무시하고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다음에서 하려는 말은 완전치는 못하지만 이 나무를 왜 골랐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아슈바타여(ashvattha, 아마도 ashvah-stha, 즉 그 밑에 말들이 서 있는 나무라는 데서 끌어내온 것인 듯한데)는 피쿠스 렐리지오나 혹은 피팔나무인데 인도에서는 누구나 잘 아는 나무요, 힌두교도들이 매우 존경하는 나무다. 이것은 그와 비슷한 나무인 반얀나무처럼 가지에서 기근(氣根)을 내어 땅에 가 닿아 새 뿌리를 박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로 뻗는다고 했을까? 이 나무는 그 자라는 법이 독특해서 뿌리가 다른 나무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무통이 굵게 자람에 따라 그 모양을 전연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그 일부분이 땅 위로 쑥 삐져올라와서 여러 개의 가지를 내어 얼크러지게 되고, 그 여러 개의 뿌리가 제각기 가지와 뿌리를 낸다. 그래서 뿌리와 가지가 서로 구별을 할 수없이 하나로 된다. 그래서 가지가 땅으로 내려왔다고도 할 수 있고, 뿌리가 위로 올라 왔다고도 할 수 있게 된다. 그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면 왜 상징으로 아슈바타를 택했느냐 하는 설명이 될 뿐 아니라 그 비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럴 때는 ‘위’는 눈에 보이는 이 세계 땅 위란 뜻이고, ‘아래’는 땅밑의 보이지 않는 밑이란 뜻이다. 뿌리와 가지를 하나로 하면 프라크리티이고, 땅 밑은 아뱍타(avyakta) 곧 감각할 수 없는 것. 땅 위는 뱍타(vyakta) 곧 감각할 수 있는 것. 1절의 뿌리와 2절의 뿌리들은 구별할 필요도 없다.—힐
 
3. 여기서는 그 실상을, 그 끝도 시작도 뿌리도 알지 못한다. 먼저 이 꽉 뿌리박힌 아슈바타나무를 날카로운 무집착의 칼로 찍어라.
 
4. 그런 다음 사람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경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오직 이 태고 이래의 모든 세계가 그리로 좇아 나오는 그 맨첨의 영이신 분에게만 귀의하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맨첨의 영이신 분 최초의 인간(primal person, primal being, original personality of godhead), 원인 (原人). 원아(原我).
 
5. 오만함이 없고, 헤매임이 없는 사람, 집착에서 오는 사악을 이기고 항상 참 자아에 머물러있어 애욕을 가라앉히고 고락의 상대에서 해방되어 현혹당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불멸의 지경에 이르느니라.
 
6. 해도 달도 불도 비치는 일이 없으며, 한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옴이 없는 곳, 거기가 나의 머무는 가장 높은 곳이다.
 
7. 내 몸의 한 가는 부스러기조차도 생명계에서 한 산 혼이 되어 영원히 있으면서 자연계에 있는 마음까지를 합한 육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있느니라.
가는 부스러기 미립자(particle), 미분(微分), 미진(微塵).
생명 지바(jiva). 유한한 생명.
자연계 자성, 프라크리티.
마음 의식.
육감 빛,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오감과 의식.
이것은 최고의 주재자가 사실로 자기 몸을 가는 티끌로 갈라놓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은 최고 주재의 한 운동이요 한 삶(大生命)의 한 초점이다. 자아는 하나의 핵심이어서 자신을 확대하여 온 세계를 안을 수 있고, 마음과 혼을 긴밀하게 통일한다. 실지로 나타나는 그 모양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나, 개인 영혼의 실상은 거룩하신 이 그대로다. 그러나 인간적인 나타냄은 그것을 온전히 할 수는 없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늘 땅을 연결하는 다리다. 각 개인은 우주 안에서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그가 자기의 한계성을 벗어날 때 그는 초개인적 절대 속에 녹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 속에 살게 되는 것이고 우주적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동참자가 되는 것이다.
샹카라는, 자아는 최고 주재의 한 부분인 것이 마치 항아리 속이나 방 속에 있는 공간이 대우주 공간의 한 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라마누쟈에게서 영혼은 사실로 하나님의 한 부분이다(amsha).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개인 영혼의 실체가 되는 것이고 감관의 종살이를 하게 됨으로 인해 얽어매임을 당한다. ―라다크리슈난
 
8. 몸의 주인이 어떤 몸을 가질 때나 또 그것을 떠날 때는 그것들을 가지고 간다. 마치 바람이 향기를 그 있던 곳에서 걷어 가지고 가듯이.
몸의 주인 이슈바라(Ishvara).
그것들 감각과 의식.
 
9. 그는 귀와 눈과 촉감과 미감과 냄새맡음과 의식에 붙어 있으면서 감각의 대상을 즐긴다.
 
10. 그가 3성(三性)과 짝이 되어 떠나고, 머물고, 즐기고 할 때에 미혹한 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오직 지혜의 눈을 가진 자만이 그것을 본다.
 
11. 요가를 닦는 사람은 힘쓰면 그가 자기 속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볼 것이니라. 그러나 생각 없고 자아훈련이 되지 못한 사람은 비록 힘쓴다 해도 그를 볼 수 없느니라.
 
12. 저 태양에서 나와 은세계를 비치는 광명, 달에도 있고 불에도 있는 그 광명, 알지어다, 그것은 다 내게서 나온 것이니라.
 
13. 땅에 들어가서는 내 힘으로 만유를 지지하고, 또 감로의 진액이 되어 모든 초목을 내가 기른다.
 
14. 나는 일체몸불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 몸속에 있으며, 또 오를숨 내릴숨에 짝해 다니며, 네 가지 식물을 소화시킨다.
일체몸불(ᅳ切人火) 바이슈바나라(vaishvanara), 체온, 생명체의 몸속에 와있는 아그니(Ahni, 火神).
네가지 식물 끽(喫, 마심), 담(噉, 씹어먹음), 지(舐, 할아먹음), 철(啜, 빨아먹음) 곧 모든 음식물.
 
15. 나는 모든 사람의 심장 속에 들어가 있으며 기억과 지식과 잊어버림은(혹은 의심을 쫓아냄, 혹은 결핍은) 내게서 나간다. 또 모든「베다」에서 알려졌어야 할 것은 나요, 실로「베다」의 종국을 지은 것은 나다. 또「베다」를 아는 것도 나다.
 
16. 이 세계에는 두 사람이 있다. 멸과 불열이다. 모든 존재는 멸이요, 변함없는 것이 불멸이다.
 
17. 그러나 그것들 말고 가장 높으신 분이 계신다. 이를 지상의 자아라고 부른다. 그 불멸의 주는 삼계에 들어가 그것을 지지 하신다.
지상(至上)의 자아 파라마트마(paramatma).
 
18. 나는 멸을 초월하며 또 불멸보다 높으므로, 세계에 있어서도「베다」에 있어서도 지상의 자아로 존경을 받는다.
 
19. 바라타의 아들아, 미혹하지 않는 자는 그와 같이 나를 지상의 자아로 앎으로 하여 그는 일체를 아는 사람이요 전존재로써 나를 신봉하는 사람이니라.
 
20. 오, 죄없는 자야, 신비 중에 가장 신비인 이 성전이 나에 의하여 가르쳐졌으니, 바라타의 아들아, 이것을 아는 자는 깨달은 자가 될 것이요,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 완성한 것이 될 것이니라.
깨달은 사람 부디만(buddhiman)이란 말은 여기서는 혹은 부다(buddha), 즈나나(jnana), 인식아(認識我, knower)의 뜻이다.「바라타」(Bharata)에서는 부다라는 단어와 크리타크리차(kritakritya)라는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으로 쓰는 부다라는 말, 즉 “화신으로 태어난 부처님”이라는 의미의 말은「마하바라타」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15장 멸(滅) 불멸(不滅)을 초월하는 지상(至上)의 자아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쳐주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