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이찬수.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이찬수. Show all posts

2020/03/29

14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





soombat.org/wwwb/CrazyWWWBoard.cgi?db=article&mode=read&num=576&page=1&ftype=6&fval=&backdepth=1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해암신학연구소, <교회와 신학>2호, 2014.12.1)

Download : 해암신학연구소20140930.hwp (94 Kbytes)


[해암신학연구소20140930]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목차-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2. 한국 진보신학의 특징
3.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의 현황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주어진 논제는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이다. '진보신학' 이라는 표현대신에 '진보주의 신학' 혹은 '자유주의신학' 이라는 표현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진보신학'이라는 짧은 표현을 쓰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호칭은 한국 기독교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학의 경향성인 통칭 '보수신학'과 비교하는 일반적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불과하지만, 호칭이란 어휘의 개념이 지닌 상징성과 그 어휘가 사용되는 언어공동체 안에서의 '전이해'(前理解) 때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가령 한국 기독교계에서 보수주의 계열은 '보수신학'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만 '진보신학'과 차별화 하면서 기독교 정통신학을 지키는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어휘와 '보수신학'을 동일시하려 든다. 그리고, '진보신학'은 통칭 '자유주의신학' 혹은 심할 땐 '인본주의신학' 이라는 선입관을 갖기 쉽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신학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또렷이 하려는 의도로서 '복음주의신학'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경우에,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을 하는 신학운동과 신학자들은 '비복음주의적'이라는 신학적 가치판단을 암묵적으로 주입시키는 독선적 입장이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한 분파로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순복음교회'라고 교회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서,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등 여타의 다른 교단소속 교회들은 '순복음'을 신앙하는 교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어휘의 선택과 그 오남용은 보다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임이 한국기독교사에서 드러난 것이다.

일부 보수주의 교단의 목회자들이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을 '자유주의신학, 신신학, 인본주의신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세계 신학의 역사 혹은 기독교 사상사의 흐름에 입각한 공정한 사고가 아니다. "계시된 경전의 권위와 정통교의를 무시하고 신학을 신학적 규범에 제약을 받지않고 멋대로 자유롭게 하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 아닌가?"라는 판단은 소박한 생각이다. 세계 각국의 신학계에서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엄정한 역사적 기간동안 형성되었던 유럽에서의 신학운동에 대한 전문적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신학'이란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이 사상계 전반을 강타한 이후, 19세기의 유럽 종합대학교 신학부의 신학자들의 반응으로서 슈라이에르맛허, 리츌, 하르낙 등으로 대표하는 신학사상 흐름을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은 세계신학사에서 말하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이 비판하는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니버로 대표되는 20세기 초반의 신학운동은 18세기 '신교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신학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혼동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어떤 신학적 입장, 혹은 신학함의 경향성과 특징들을 공유하는 신학인가를 먼저 개념정리 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의 '진보신학'이라고 할 때 다음같은 5가지 특징, 입장, 혹은 경향성을 지닌 신학운동을 의미한다.

2. 한국 진보신학 흐름의 특징

첫째, 한국 개신교권 안에 앞으로 소개할 다양한 진보신학운동의 흐름이 있지만, 그들의 공통적 특징으로 '성경연구에서 비판적 연구방법 수용'이라는 특징을 제일 먼저 들수 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보수신학 진영'과 '진보신학 진영'의 장점을 아우르려는 소위 통전신학 , 중도신학, 중제신학에 해당하는 신학자들을 '보수신학 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인지 진보신학 진영에 속한 다고 분류할 것인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장로교신학대학 총작직을 수행했던 이종성교수나 현재 총작직을 수행하는 김명룡교수를 보수와 진보 어느진영 신학자라고 분류할 것인가 질문을 받는다면, 이 글에서 필자는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이다. 왜나하면 신학계나 정치계에서 흔히 '진영논리'에 입각한 패가름을 필자도 아주 싫어하지만, 그 두분의 조직신학은 현대20세기 성서학계의 '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을 열린 맘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느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무리 사회참여와 현실비판적 역사참여 활동을 펼치더라도, 그 분의 성서관이 20세기 성서학계가 이룬 '비평적 성서연구방법'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보수신학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 연구수용'이라 함은, 소위 학계에서 고등비평이라고 총칭하는 비판적 연구방법들 예들면, 문헌비판 〮역사비판 〮편집비판 〮 전승비판 〮수사비평 연구등 모든 비평적 성경연구태도를 "신구약 상경이 전하려는 복음의 참 본질을 밝혀내기 위하여" 연구방법으로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계의 소위 '보수신학' 일명 '복음주의신학'이란 성경무오설 교리를 가장 중요한 근본교리로 삼는 토대주의 신학인 것이다. '보수신학' 계열안에도 다양할 편차가 있겠지만 공통적 특징은 앞서 언급한 현대 20세기 세계신학계가 연구하는 '비평적 성경연구방법'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성경무오설' 이라는 근본교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진화론을 거부하고,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현대사회윤리의 상황적 응답을 반복음적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글에서 한국신학계의 진보주의 신학 특징으로서 현대문명의 위기적 ‘삶의 상황’에 복음적 입장에서 대답하고 복음을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변증법적 신학’ 입장을 취한다.

20세기 초, 소위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로서 촉발된 일명 ‘신정통주의 신학 운동’과 보다 더 자유로운 신학운동은 모두 강렬한 ‘변증적 신학과제’를 인정하고 그 책임을 수행하려는 학문적 운동이었다. 구미 신학자들을 예들면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루돌프 불트만, 에밀 부룬너, 본 훼퍼등 20세기 전반기에 크게 활동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 ‘변증접적 신학’ 을 수행했다.

‘변증법적 신학 방법’이란 두가지를 함의한다. 그 한가지는 계시적 성경진리를 인간 삶의 정황을 무시하고 변함없이 ‘계시적 진리’로서 선포만하지 않고, ‘상황’과의 상호대화 속에서 기독교진리를 새로운 인간상황 안에 증언한다는 점이다. 또다른 한가지는 변증법적(dialogical) 신학방법을 수행하면서 복음의 구원과 진리를 옹호하는 적극적 과제 즉 복음진리의 변증(apologetic)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신학 교육기관에서 혹은 신학자가 현대신학의 방법적 특징으로 ‘변증법적 신학’을 수행했던, 앞서말한 20세기 초 신학거성들을 비롯하여 진화론적 신학, 종교다원론적 신학, 생태여성신학, 아시아의 빈곤신학등 세계신학계 운동에 긍정적으로 경청한다. 예들면, 신학자 떼이야르 샤르뎅, 죤 캅과 죤 힉, 인도의 사마르타와 대만의 송천성, 영미 여성신학자들 로스마리 류터나 맥 페이그를 강의실에서 자유롭게 논의 할수 있는 신학이 아니라면 진보신학 기관이거나 진보신학자라고 할 수 없다.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이란 포스트모던니즘과 대화하고 포스트모던니즘 안에서 복음을 변증하려는 적극적 신학을 의미한다.

셋째, 오늘의 한국 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오늘의 구원’을 강조하는 선교신학 정신에 긍정적으로 참여하는 속칭 ‘에큐메니칼 신학’을 의미한다.

오늘의 한국신학계에서 그 신학교육기관 혹은 신학자가 ‘진보신학’인가 여부를 가늠하는 쉬운 기준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강조하는 교회의 일치연합 운동, 교회들의 사회적 책임강조, 타계적-미래적 구원만이 아니라 ‘오늘-여기’에서 구원을 강조하는 상황적 신학운동을 지지하는가의 입장으로서 구별된다.

넷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신학을 하나님 백성들의 순례자적 신앙고백으로 이해하여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에 긍정적으로 복무하는 공통특징을 지닌다.

보수신학의 대부였던 박형룡박사가 보수신학은 “선교사가 전해준 복음적 정통신학을 그대로 보수하는 것”을 신학자의 기본 입장으로 삼았다면, 진보신학은 ‘순례자의 신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해명하고 변증하는 ‘신학들’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상대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신학체계를 절대불변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학문적 시도로서의 ‘신학 ’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반복음적 피혜를 초래한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진보신학’은 우리들에게 많은 좋은 점들을 가져다준 구미신학들, 예들면 라틴적 스콜라신학,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영미신학, 독일신학,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등이 필요하고 귀중하듯이 동아시아의 신학과 한국신학이 필요하고 당연하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동아시아-한국적 삶의 자리와 토양 속에서 주체적으로 ‘한국신학’을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섯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21세기 지구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기존의 ‘십자군의 영성신학’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영성신학’의 재정립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신학의 ‘패러다임전환’을 공통적으로 지향한다.

‘십자군의 영성신학’이라 함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일환으로서 진행하는 신학함의 태도에 있어서, 타문화및 세상 정복적 태도와 교회의 무한성장 번영을 복음적 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말한다. ‘십자가의 영성신학’이란 정복이 아닌 섬김, 성장번영이 아닌 낮춤과 비움, 금관의 예수가 아니라 가시관의 예수를 더 주목하는 신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대로, 이 글에서 말하는 한국 신학운동 흐름에서 ‘진보적 신학들’이라고 분류하는 기준을 5가지로 삼았다. 다시 정리하면 ① 비판적 성경연구 방법수용 ②변증법적-변증적 신학입장 ③ 에큐메니칼 신학정신 ④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 ⑤ 십자가의 영성 강조, 이상 5가지 이다.

위에서 말한 진보신학 특징들을 감안하여 필자는 다음장에서 아래의 다섯그룹을 한국의 진보신학계 현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등이다.

이상의 5가지 그룹의 한국 신학계 ‘진보신학 운동들’의 현황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언급하는 신학자 이름들은 그 분야의 특징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선택한 신학자 이름들 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한국 신학계는 이 글에서 지면관계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수많은 귀중한 신학자 지성집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구약 성서신학자들의 활동은 『신학과 교회』창간호와 이번호 특집에서 각각 자세하게 다루는 전문적 연구논문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학자 명단 언급은 하지 않는다.

3.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현황

(1)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의 첫 번째 흐름의 특징을 명시하기 위하여 필자는 ‘통전적 조정신학’(integrating modulation Theology)이라는 어휘를 일부러 만들어 쓰려한다. 이 어색한 신조어 명칭에서는 ‘통전’(integration, 統全)이라는 단어와 ‘조정’(modulation,調整)이라는 두 개의 어휘가 이 진보적 신학지성 집단의 특징을 지시한다. 통전(統全)은 본래 교육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단어로서 한인격체가 원만한 성숙성을 가지고 정서적, 도덕적, 철학적 측면에서도 균형과 통합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조정(調整)은 본래 음율, 음색, 음조등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들리도록 조절하는 일과 많이 관련되는 단어이다.

신학의 특징을 ‘통전적 조정신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극단적인 진보나 보수적 사고를 통전하고 조정하려는 신학이며,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부분적 진리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적 견해들을 종합(synthesis)하여 보다 ‘건전하고 온전한 형태의 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을 말한다. 이러한 ‘통전적 조정신학’ 작업에 특별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한국 신학자로서 장로회신학대학장을 오랫동안 맡아 수고하셨던 이종성 박사의 신학작업을 예로들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신학 저작물들은 ‘독창적 새로움의 신학’ 이 아니지만, 길게는 그리스도교 신학사 전체를 섭렵하고 짧게는 20세기 세계신학운동의 다양한 흐름들을 이해 한후에, 그 나름대로 ‘통전적 조정신학 체계’를 저술물 속에서 서술하였다.

짧은 한국 개신교 역사 안에서 불행하게도 보수와 진보라는 두 신학진영이 갈라지고 서로 각각의 ‘진영논리’에 갇혀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향성을 노정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통적적-조정신학 운동’은 건전한 신학지식을 목회자들과 신도들에게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일부 급진적 진보신학자들 중에서는 이종성박사로 상징되는 중도적 신학을 통전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만,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2장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진보신학의 범주’에 어떤 신학운동을 포함할 것인가에 대항 5가지 조건중에서 적어도 4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성서비평학 수용, 변증법적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과학신학에도 긍정적 입장을 가지므로, 이종성교수의 신학을 ‘보수신학’이라고 부른다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지금 생존하신 한국 신학계 원로 신학자들 중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 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신학자로서 예들면 해암 이장식 박사를 비롯하여 조종남, 김성수, 민경배, 강근환, 박근원, 선한용, 황승룡, 이형기, 정장복, 서정운, 이원규, 송순재, 윤응진, 박종천, 최인식교수들을 예로 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신학계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의 대표적 신학자는 조직신학 영역에서 김균진교수, 김명룡교수, 오영석교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균진 교수는 『기독교조직신학』(1권-5권)을 완성함으로서 20세기 전세계 진보적 신학흐름을 총정리했으며, 특히 말년에 집필한 『죽음의 신학』이라는 명저를 집필했는데, 긍정적 의미에서의 ‘통전적-조정신학’의 면모를 유감없이 나타내고 신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김명룡교수는 선배 이종성박사의 뒤를 이어 학문적으로나 신학교육 행정면에서 한국 신학계의 ‘통전적-조정신학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그와 김균진 교수와의 공동 노력에 의하여, 20세기 후반기 유럽 조직신학계의 대표적 학자 율겐 몰트만의 중요한 저작들이 10여권 번역되어 신학계와 일선 목회자들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오영석교수도 그의 저술물을 통해서 바르트-몰트만 신학계보의 개혁파신학의 흐름을 건전하게 전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한국 진보신학 흐름중 첫 번째 운동으로서 ‘통전적-조정신학’은 칼빈의 개혁신학 전통, 루터의 종교개혁전통, 웨슬레 신학 전통의 본래성과 그 오늘의 의미를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신학운동이다. 성서비평학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사회의 도전들에 열린맘으로 응전하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적 신학’이 전승해주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굳게 지키려는 심정을 공유한다. ‘복음과 상황’이 만날 때 대등한 관계의 해석학이 아니라 복음 우선적이며, ‘기독교와 이웃종교’가 대화할 때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유일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통전적-조정신학’은 충분히 그리고 철저히 변증법적 해석학 공리를 준수하지 않으면 ‘정통보수적 신학’의 연장이 아닌가라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2)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필자는 한국 진보신학운동의 둘째번 흐름으로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을 언급하고자 한다. 복음운동은 주기도문의 핵심화두 처럼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는 신앙고백이요 삶이요 운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언은 래세적이고 역사초월적 측면 못지않게 현세적이고 역사 내재적 측면을 지닌다. 엄밀하게 말해서 “종말론적이 아닌 신학은 기독교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회정치적 증언을 소홀히하는 신학은 충분히 기독교적 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은 한국적 삶의 총체적 자리안에 하나님의 정의, 자유, 평등, 평화가 온누리에 실현되어 실질적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요10:10) 일에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힘쓰는 신학이다.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이 모두 민중신학회 회원도 아니고 민중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리 복음이 민중지향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먼저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힘을 쏟는 신학운동의 현황을 살피고 그 다음에 민중신학운동을 살피려고 한다. 두 그룹은 대체로 중복되지만 구별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의 래디칼한(radical) 한 신학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정치신학의 본격적 태동은 1961년 박정희 군사혁명 이후, 군부세력의 집권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군사정부가 추진하는 반민주주의적, 반인권주의적, 경제성장 제일주의적 정책의 강행이 성서가 증언하는 복음의 자유, 인간 존엄성, 정의로운 평화,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회의 비젼에 심각하게 위배되고 충돌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동참했던 선구자들은,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12:1)이 있다. 고인이 되신 분들로는 김재준, 김정준, 박대선, 서남동, 문익환, 안병무, 김관석, 현영학, 김찬국교수 얼굴이 떠오른다.

민중신학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도 뚜렷한 한국의 ‘진보신학’ 계열로서 한국적 사회정치신학(Korean socio-political Theology)운동에 힘쓴 신학자들로서 현존하는 인물을 예로 든다면 박순경, 손규태, 노정선, 김창락, 박명철, 황성규, 임태수, 김성재, 유석성, 채수일장윤재, 정재현등을 예로 들수 있다. 현존하는 민중신학자로서는 원로신학자로서 서광선, 김용복교수를 비롯하여 임태수, 권진관, 김은규, 강원돈, 김진호, 류장현, 최형묵, 김영철, 방인성, 김희헌등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눈에 뜬다. 한국 진보신학계열에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려는 신학적 관심을 아래에서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독교복음의 본질파악을 위해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리얼(Real)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서연구에서 정치사회적 조명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본다. 복음이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한 인간구원과 해방’이 정치사회적 차원에 머문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한 해석은 관념적이고 반복음적이 된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순복음교회가 강조해왔던 소위 ‘삼박자 축복의 구원론’과 ‘성장과 풍요의 교회론’을 복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두가지 속성은 ‘공의로우심’(정의)과 ‘긍휼하심’(사랑)인데, 특히 예언자적 성서전통에 의하면 “가난한 자와 눌린자와 포로된자들”(루가 4:18)에게 자유, 해방, 평등, 평화를 선물하는 ‘민중에 대한 우선적 배려’가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특히 민중신학의 강조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장소가 성경, 예배당, 수도원, 크리스챤 형제공동체 못지않게 ‘고난당하는 민중현실’에서 만나라고 강조한다. ‘오클로스 민중론’을 예수와 특별관계로서 세계에 제시함으로써 민중신학은 국내보다도 세계에서 훨씬 높은 관심과 평가를 받았다.

셋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죄성이 개인적인 것만 아니라 집단적 사회구조적 죄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구조적 정치경제 악의 실체에 맞서서 ‘선한 싸움’을 하자는 것이다. 현재 전체 지구촌을 덮고 있는 소위 ‘신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당연한 것이거나 피 할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프란체스코교황이 강조하듯이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고 한국사회 전반에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고 힘써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넷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오늘의 신학적 아젠다’로서 제시하는 것들은, 철저한 민주주의 실현, 남북의 무기경쟁중단과 외세의존 탈피, 남북 민족의 주체적 화해와 평화통일, 소외된 사회계층에 대한 배려,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 회복 강조등이다.

(3)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

한국 진보신학의 세 번째 그룹은 ‘한국적 종교문화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자 그룹이다. 흔히 줄여서 ‘한국문화신학’라고 부르는데 이 신학캠프는 ‘한국민중신학회’와 쌍벽을 이루면서,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한국의 진보신학을 견인해가는 신학운동이다.

일찍이 폴 틸리히는 1920년대초 그가 독일 학계에 데뷔하는 베르린학회에서 「문화신학의 이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 논문발표에서 그는 문화종교신학의 본질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다음같이 피력한바 있다: “종교는 문화의 알짬(substance)이요 문화는 종교의 표현형식(form) 이다”. 다시말해서 문화의 다양한 장르들 법률, 예술, 문학, 이념, 건축, 그리고 심지어 과학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인간의 의미있는 활동의 “깊이 차원”에 종교가 있기 때문에, 사람생명체에 비교한다면 ‘종교’는 정신과 영혼이며 ‘문화’는 신체와 활동이다.

한국 신학계에서 종교문화신학의 발아지역은 장로교보다 감리교 였다. 일찍이 탁사 최병헌목사가 기독교에 접한 이후 한국 전통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성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주체적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부터, 소위 ‘복음의 토착화론’에 선구적 역할을 감리교신학교수단 에서 했고,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교수등 용기있는 개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대체로 한국의 장로교회 교단은 칼빈주의의 강력한 영향으로 ‘복음의 토착화론’에 소극적이거나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3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복음의 빛에 비추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들을 조명하면서 ‘복음’과 ‘한국전통문화’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려는 과제를 갖는다.특히 이웃종교들과의 바른 관계정립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둘째, 한국인 크리스챤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의 문화, 예술, 삶의 표현형식으로 조형(造型)하고 증언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의미한다. 예배 전례상의 상징적 표현들, 건축과 미술과 음악의 한국토착적 표현들, 기독교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소설, 연극, 시 작품창작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셋째, 2,000년 그리스도교신학과 동아시아 영성전통과 만남으로서 제3천년 시기의 ‘제3의 눈’의 신학 형성을 지향한다. 헬라적 교부신학, 라틴신학, 게르만 독일신학, 영미신학이 있었듯이,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정신토양 속에서 형성된 ‘제3의 눈’의 신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종교문화라는 폭넓은 관심영역 때문에, 문화신학학회 정회원만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전문 분과 학자들이 참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서신학자, 여성신학자, 기독교 사회윤리학자, 정치신학자들이 고루 고루 참여하고 있다. 한국 종교문화신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술물도 남긴 학자들중 그 일부만 열거하면 유동식, 유재신, 심일섭, 이계준, 김광식, 김경재, 박재순, 이정배, 김영일, 서창원, 김흡영, 이정구, 송성진, 허호익, 이찬수, 손호현, 박일준 교수와 여성신학자로서 특히 차옥숭교수의 무교연구와 이은선교수의 유학연구, 오정숙박사의 다석연구가 돋보인다. 여성신학자들 활동은 ‘여성신학’운동의 항목에서 별도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문화종교신학계를 지난 30년간 이끌어온 대표적 학자는 유동식 교수이다. 그의 학술적 공헌은 매우 독창적인데 대표적 저술물로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풍류신학』, 『신학과 예술의 만남』이 대표적인 저작물이다. 유동식교수가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끼친 독보적 공헌의 의미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민족의 종교심성 바탕에 깔려있는 무교 혹은 무속연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종교사에서의 ‘무교’를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바알신앙’과 동일시해왔던 오해와 갈등을 상당부분 해소 시켰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민의 종교심성의 영성적 원형바탕을 ‘풍류도’로서 밝힘으로서 기독교신앙의 한민족에 수용과정에서 선교과제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셋째, 특히 말년엔 ‘예술신학’을 제창하면서 신학의 최고경지가 예술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묵상에서 꽃핀다는 것을 밝혀준다.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사에서 변선환목사에 대한 감리교단의 ‘파문’은 감리교단의 역사내 부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신학사에서 큰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변교수가 “이웃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발언한 것이 파문죄목의 중요한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변교수가 의미하는 내용과 교단의 보수적 정통 교권주의자들의 의미하는 내용사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본다. 변선환 교수에게서 ‘구원’은 구체적으로 구원받은 종교인들의 생명현상학에서 세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자기중심적이던 이기적 실존이 실재(Reality)중심의 해방된 존재로 자유인이 된다. 둘째, 자유인이 된 종교인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함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다. 셋째,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내용에 다양성이 있으나, 공통점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고 죽음을 넘어선 승리적 삶을 산다.

유동식, 변선환교수의 선도적 문화신학의 과업을 이어받아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을 젊은 세대들과 호흡을 맞추며 크게 활동한 학자는 이정배교수와 감신대를 중심으로한 그 선후배 동료신학자들이다. 『문화와 신학』 정기 학술지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으며 『한국신학, 이것이다.』(한들출판사, 2006)와 『한류로 신학하기』(동연,2013)를 간행하여 한국문화종교신학회의 과거정리와 미래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는 시범을 보였다. 이정배, 김흡영, 박재순 박사를 비롯한 문화신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종교유산의 토양에 뿌리 박은 한국신학을 정립하려는 역저를 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특히 불교와의 대화가 학자들간에는 열매를 조금씩 거두어간다. 우선 한국교수불자연합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공동주관으로서 붓다와 예수를 상대편 종교인으로서 어떻게 보는가를 시민공개강좌로서 갖고 『인류의 스승으로서 붓다와 예수』(동연, 2006)라는 표제의 단행본으로서 출판된 것은 특기 할만한 일이다. 기독교 학자로서 불교와 기독교 상호관계연구 결실로서 종교학자이면서도 제1급의 신학자인 길희성교수의 연구서는 신학계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 불교계의 전문 학술지 『불교평론』에서 기독교신학자들의 글을 싣는등 학문적 대화는 종요히 계속되어 가고 있다.

천도교, 원불교, 유교, 전통민족종교들과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기독교와 불교와의 관계는 그동안 타종교의 가치와 존재를 부정하는 보수적 교회들의 배타적 태도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선교전선의 약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진보적 기독교 목회자들이 ‘종교간 대화모임’에 열린자세로 임하며, 특히 생태환경운동이나 사회정의 구현에서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성탄절과 석탄봉축일에 서로 경축하는 따뜻한 마음은 조금씩 증가되어가는 추세여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우주적 보편종교이다. 양대 종교사이의 대화와 협력은 상대방을 정복하려는 것도 아니고 흡수통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양대종교의 특징과 진리증언의 길에 서로 경청하면서 보다 성숙해지려는 것이다. 개신교의 종교신학은 결코 종교혼합론이 아니며 도리혀 종교혼합론은 이웃종교 종교배타론 만큼 위험하고 성숙하지 못한 독선과 독단론이라고 본다.

(4) 여성신학 운동

한국신학계의 진보적 신학 운동의 현황소개에서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 만큼 눈부신 활동과 엄청난 학문적 기여및 사회실천적 공헌을 한 지성집단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보다 자세한 여성신학의 역사와 현황소개는 여성신학협의회에서 간행한 훌륭한 단행본 및 논문들이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들은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교계와 신학계를 막론하고 소위 ‘보수, 진보’를 구별하는 확실한 판단도 그 교회,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에서 일어난 ‘여성신학 운동’과 1980년대 초기에 그 반응으로 태동한 ‘한국 여성신학’의 소리들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받아드리는가의 태도로서 여부로서 구별이 가능하다. 그만큼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은 전통적 한국보수교회 안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전통 비판적 주장과 래디칼한 문명비판적 주장들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한국신학계에서 여신학자 협의회가 정식 결성된 해는 1984년이어서 어느듯 30년이 되었지만, 한국 여성신학자들의 활동현황을 살펴보기 전에 ‘여성신학’ 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징을 아래의 몇가지로서 먼저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여성신학은 기독교문명사회와 교회공동체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억압이 가부장적 성서해석에 있음을 주장하고 새로운 성서해석을 시도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 주제는 인간으로서 존엄한 여성의 ‘해방’이다.

경전으로서 성경의 문자무오설과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보수적 신학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겠지만, 여성신학자들은 경전으로서의 성경자체의 형성과 편집과 전승이 ‘가부장적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성서를 ‘억압과 차별’의 경전으로서가 아니라‘해방과 평등과 자유’의 원천으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신구약 성경의 완성자이신‘예수의 마음자리’에서 성서를 읽고, 성서문자에 메이지 말고 성서가 말하려는‘살리는 영’으로 읽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가 엮은 『새롭게 읽는 성서의 여성들』(1994), 구약신학자 이경숙의 『구약성서의 여성들』(1994), 신약학자 최영실의 『신약성서의 여성들』(1995) , 그리고 최만자의 『성서와 여성신학』(1995)등이 여성신학자들의 새로운 성서해석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둘째, 여성신학은 교회안에서와 사회에 편만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부당한 억압구조와 사회와 문명의 성차별적 가부장적 문화구조 해체를 통한 양성평등의 새로운 인간공동체 구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주제는 여성의 평등권을 담보하는 ‘정의’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제반 활동영역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무능한 존재, 지배받고 남성에 의해 계도(啓導) 받아야할 존재로 생각하는 일체의 허위의식 지배이데올로기를 철폐하고, 양성 평등 문명사회를 요청하고 투쟁한다. 한국의 여성신학계는 서구사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국사회에서의 여성폄하적인 노동의 임금차별, 직장의 진급제약, 여성에게 가하는 성의 상품화, 가사노동의 집중과부하등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비인간화 현실을 극복하려는 ‘실천적 여성신학 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여성의 ‘해방과 평등’의 아젠다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여성신학은 민중신학과 파트너쉽을 가지고 발전해가고 있다.

셋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생태계의 위기상황에 주목하고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과제를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중심 주제는 ‘생명의 평화’ 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해방’모티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계, 여성의 ‘평등’ 주장을 하는 정치사회 인간문명의 맥락을 넘어서, 기독교 여성신학은 오늘날 인류문명이 직면한 자연파괴,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기가 성경을 포함한 가부장적 인류종교경전의 잘못해석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 지성계는 인류문명이 당면한 자연환경 오염,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험문제가, 다른 어떠한 주제들 예들면 경제발전이나 우주과학실험이나, 신무기 개발경쟁보다도 우선순위에 놓여야한다는 점에 한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여성의 비하와 억압은 자연(대지)에 대한 무한 공격적 개발과 관련되고, 생태계의 조화와 순환원리를 무시하는 남성적 문화의 ‘바벨탑 건설 본능’과 관련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여선신학계의 원로이셨던 고 이우정선생의 고희기념논문집 책이름이 『여성,평화,생명』(경세원,1993)이었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여성신학의 지향성을 잘 나타낸다.

넷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외국의 여성신학과 다른 독특한 한민족의 분단상황, 동족간 상잔, 전쟁위협과 무기경쟁을 극복하고 모성의 심정으로 민족의 화해, 협력, 평화통일의 과제를 신학적 의제로 진지하게 삼는다. 중심주제는 ‘한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이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모성’이다.

특히 여성신학의 제1세대들 박순경, 이우정은 여성신학운동의 본질적 과제가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임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자들이 여선신학의 긴급한 주제로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의제로 삼는것은 단순히 한국의 일반학계 정치학, 외교학, 군사학등에서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여신학자 선언」(1988)에서 천명한바와 같이, 한민족의 분단을 강요하고, 지속하고,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모든 어리석은 국제정치적 행위자체가 따지고 들어가면 인류문명의 가부장적 죄악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8-19세기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쟁탈, 1,2차 세계대전의 국가주의 발호, 2차대전 후의 세계 냉전체제, 근래 한반도를 둘러싼 6자회담의 정체가 모두 가부장주의 정치문화의 열매이다. 힘의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패권주의, 국가주의 경쟁과 보복의 악순환, 군사문화의 창궐,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구입등등은 그 어리석음을 뿌리에서 비판하여 극복하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에 여성신학의 중요 아젠다가 된다.

하나님의 모성적 심성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인간살상과 긴장갈등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신학의 중요한 신학적 의제로서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민족평화 통일 신학’은 마침네 신학의 아킬레스건이랄 수 있는 전통적 신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주장한다. 그동안 서구신학이 설명한 ‘하나님론’이 다분히 가부장적, 남성적, 지배적 힘숭배의 관념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반성이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운동은 성서가 증언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온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들’ 예들면 ‘산고의 진통’, ‘기다림과 설득’, ‘차마못하는 마음’, ‘내어줌으로서 만족’, ‘비움으로서 충만’ 등의 속성을 기독교 신관이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 신관은 율법제정자, 질서의 보존자, 인과응보적 심판주, 선악의 재판관, 세계정상의 지배자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관의 혁명은 역동적인 기독교 ‘영성운동’에 창조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인 여성신학자들의 ‘지성집단’의 힘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더욱 놀라운 결실을 맺을 것이다. 필자의 이글은 여성 신학자들의 활동과 논저를 소개할 목적에 있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다만 ‘구름같이 많은 한국의 에스더들’의 면모를 독자들이 감지하도록 하기 위해 필자의 서재에서 발견되는 여성신학자들의 면모를 소개하는데 그친다. 물론 미처 소개못하는 인재들이 더 많다. 이우정, 박순경, 손승희, 안상님, 정숙자, 최만자, 선순화, 장상, 김윤옥, 최영실, 이경숙, 박경미, 김애영, 임희숙, 정미현, 이영미, 강남순, 유춘자, 이현숙, 이문숙, 윤수경,한국염, 김순영, 이숙진, 김정수, 권미경, 명노선(무순) 제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5)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다섯번째 캠프는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이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를 본질로 하지만, 일반적인 현대 물리학이나 천문학등 과학일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신학적 응답보다는 그 핵심이 지구촌이 당면한 ‘생태학적 위기’(ecological crisis)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자연신학적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한 갈래로서 ‘신자연신학’( new theology of nature)은 다음같은 차이가 있다. 전통적 ‘자연신학’은 계시론과 신 인식론에 관련된 개념으로서, 자연질서와 리성을 포함한 일반자연을 매개로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이론이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한 초자연적 ‘말씀계시’(성서) 만이 아니라, 자연도 하나님의 또다른 말씀이라는 긍정적 생각이 그 단초를 이룬다. 특히 중세 스콜라신학 체계에서 ‘우주론적 신존재증명’(cosmological arguments)은 전형적인 전통적 ‘자연신학’의 한 사례이다.

20세기 초,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자연신학 논쟁’도 인간성의 ‘전적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응답능력이 인간성안에 존재하느냐 않느냐의 논쟁이므로 전통적 ‘자연신학’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신자연신학’은 계시론이나 신인식론의 가능성 여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뉴톤-데카르트적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 진화적 자연, 새로움을 생성하고 창발시키는 자연, 자기조직능력과 자기조절능력을 자신 안에 갖춘 유기체적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지와 씨름하는 신학적 통찰이 관련되어 있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한 갈래로서 ‘생태학적 신자연신학’의 의제와 특성들을 3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적 ‘신자연신학’ 운동은 종교(신학)와 자연과학과의 관계정립에서 상호 배타적 관계모델이나 평행적 독립모델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대화모델과 상호 통합모델까지를 추구한다.

이언 바버(Ian Barbour)는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책안에서 인류문명사속에서 자연과학과 종교간의 만남의 관계유형을 4가지로 이론으로서 대별하여 설명하였다: 갈등이론, 독립이론, 대화이론, 통합이론이 그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성서무오설에 입각하여 진화론을 부정하고 생명 종들의 독립적 창조론을 주장할 때,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는 갈등모델에 해당한다.

창세기 창조설화를 자연과학 지식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창조의 목적과 근원과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설화로서 이해하고, 객관적 사실세계(fact) 탐구를 주업무로 하는 자연과학과 창조의 궁극적 의미와 뜻을 탐구하는 주관적 가치세계(meaning)를 탐구하는 정신과학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독립이론에 해당한다. 칸트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의 거성들(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부룬너, 라인홀드 니버)은 사싱 독립모델의 캠프에 속한 신학자들이다.

그러나 세계 자연과학계와 신학계는 1960년 이후, 이전의 독립이론에 안주 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과 종교(신학)의 관계성 정립에서 대화이론과 통합이론이 활발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 지성계의 흐름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신진 신학자들은 테드 피터스(Ted Peters)가 엮은 책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을 우리말로 공동번역한 5명의 신학자들이다. 김흡영, 배국원, 윤원철,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수고했는데, 특히 이분야에서 김흡영교수의 선도적 노력이 컸다. 문화신학자 이정배교수는『기독교 자연신학』을 저술하고 죤 폴킹혼(John Polkinghorne)의 『과학시대의 신론』을 번역하였으며,김흡영교수는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를 저슬했다. 강성열교수는 『기독교 신앙과 카오스 이론』을 저술했고, 심광섭교수는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 이라는 책을 통해서 현대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대화 곧 신자연시학을 연구발표 하였다.

둘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중 ‘신자연신학’ 운동의 뚜렷한 목표는 기독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어떤 형태이든 진화론을 부정하는 기독교계의 ‘창조론’을 극복해야할 21세기 신학적 과제라고 본다.

위 주제를 가지고 특별히 노력을 경주한 진보신학자 신재식 교수는 최근 『예수와 다원의 동행』을 출판하여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기독교신앙이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될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신재식은 이 책에서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쟁점들과 이론들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신자연신학을 이끌어가는 한국 진보신학계 중진 신학자로서 면모를 보인다.

신자연신학의 주제중 특히 진화론과 전통적 창조신앙과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돕는 존 F. 호트(John F. Haught)교수의 명저 『다윈 이후의 하느님: 진화의 신학』을 박만교수가 번역하였는데, 그 주제에 관하여 신선한 통찰을 우리들에게 선물한다. 이 책에 관하여 서평자 그리핀이 말하는대로 “ 이 책을 통하여, 우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며, 창조주는 진화로 인해 제약을 받는 전능하신 설계자가 아니라 가능성과 가치, 새로움, 정보,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우주적 원천으로 이해된다”.

셋째, 신자연신학 운동은 실천적 시급한 지구촌 문제의식과 더불어 생태학적 영성과 신학의 새로운 재구성을 힘주어 주장한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구가 환경파괴문제및 기후붕괴, 그리고 생태계 교란 등으로 위기상태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에서는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응책에 관혀 진보신학이 보수신학과 다른점은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 극복은 단순히 ‘개인적 경건윤리 의식’을 고취함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데 있다. 다시말하면, 정통적 신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특히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통적 기독교 패러다임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개인윤리적 생활에서, 근검절약, 자원의 재활용, 자연환경보호운동등의 실천으로서만은 않된다는 인식을 갖는다.

생태학적 윤리, 혹은 생태학적 영성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무엇이 선하고 옳은 일인가의 윤리적 판단기준은 인간과 하나님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정의, 진실, 정직, 평등, 사랑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및 생태계와의 관계가 고려되지 않는 바른 도덕적 삶, 영적 삶이란 지극히 부분적이거나 심지어 반윤리적, 비영성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생태신학에 대한 비상한 관심은 한국교회환경연구소가엮은 책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에서 15명의 신학자들이 세계 생테신학의 동향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책안에서 세계적 생태신학자들 예들면 제이 맥다니엘, 디터 헷셀, 다글라스 할, 샐리 매페이그, 버나드 앤더슨, 로즈마리 류터, 매튜 폭스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생태학적 신학에 관한 한국 기독교계의 각성과 응답을 촉구하면서 여러신학자와 출판사가 노력하지만,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박사의 열정에 힘입어 이 분야의 좋은 논저가 한국 교계에 소개되었는데 그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진보신학의 여성신학운동과 생태신학 운동의 배경에는 현대 기독교 신관에 대한 새로운 재성찰이 요청되는데, 과정신학의 신관은 다양한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과정신학을 한국 진보신학계에 소개한 학자들로서 류기종, 김상일, 장왕식,김희헌, 전철, 정강길 등의 공헌이 있었다.

생태학적 신학운동캠프에 속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한국사회에서 이끌어가는 평신도 크리스챤 과학자인 장회익 교수의 명저 『삶과 온생명』은 특기할만한 저술물로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안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 윤리학을 극복하고 동시에 동양사상이 흔히 빠지는 범신론적 만물동체주의(萬物同體主義)에도 빠지 아니하고, 전체지구를 '유기체적 한 몸'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자리매김은 '중추신경계'에 해당한다는 은유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진보신학의 운동현황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진보신학 캠프안에 흐르는 5가지 색깔을 그 신학적 지향성과 특징들이 무엇인지 대략살펴 보았다.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라는 것은 앞으로 10년 혹은 30년 을 내어다 보면서 미래의 과제를 살피자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언제나 현제 속에 이미 다가오고 있는 것이며, 내일의 과제는 곧 오늘의 과제이다. 특히 힘써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미쳐 수행하지 못한 신학적 책임을 각성하자는 의미에서 내일의 과제라고 말한 것 뿐이다. 진보신학의 개념규정과 그 현황 흐름을 각각 5가지 언급했으므로, 내일의 전망과 과제도 5가지를 간추려 살피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첫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은 아직 교회론을 충분하게 담론화 하지 못했으며, 21세기 세속화 물결과 포스트모던사회 속에서 새로운 교회론의 치열한 담론화가 요청된다.

기독교 신학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믿는 바를 서술하고 세상에 증언하며 새로운 세상 상황 속에서 변증하는 과제를 지닌다. 줄여말하면, 신학이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봉사하는 책임을 갖는다.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교회공동체의 공동작업인 것이지 개인 신학자의 기독교에 관한 소견이거나 특정 지식인 집단의 기독교철학 작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들은 1960년대 이후, 급진적으로 변화된 시대상황과 한국적 ‘삶의 자리’에서 보다 복음적이고 책임적 신앙고백과 실천적 참여를 하는 과제앞에서 일차적으로 기존 전통신학의 굳어지고 시대착오적 신학틀과 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과제에 복무하지 않으면 않되게 되었다. 그리고. 진보적 신학운동을 펼처갔던 신학자들은 ‘굳건한 정통신학’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충분하게 설득하지 못하고, 기존교회 울타리 밖에서 그리고 진보적 신학집단들 학회활동 안에서 주로 신학운동을 펼쳐간 것이다.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교회’, ‘선교의 아방가르로서 교회’, ‘민중운동으로서의 교회’, ‘전위적 제자직을 수행하는 교회’, ‘평신도중심의 만인 사제직 교회’, ‘자연과 세속사회를 제단으로 삼는 범성례전적 교회’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제도적 전통교회의 형태변화를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감성과 윤리성과 지성이 아울러 충만한 <21세기에 걸맞는 영성적 제3교회> 시대를 아직 열지 못했다. 이것이 제일 첫 번째 과제이다.

둘째, 진보신학의 다음과제는 신학을 진보적 신학자들 집단의 전유물로서 생각하거나 전문적 신학써클 안에서만 논하는 학문적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진보신학 운동의 대중화, 소통강화’라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대중화는 학문성의 하향조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교회의 적지않는 지성인 신도들은 기존교회의 설교와 신학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진보적 신학서적 독서를 통하여 신학적-영적 갈증을 메꾸어오고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열린강좌’가 시대의 흐름이듯이 ‘감성과 지성이 함께 숨쉬는 열린 신학강좌’를 기획하여 귀중한 한국진보신학 써클이 지닌 집단지성을 ‘생명의 떡과 포도주의 잔치’로 펼쳐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통은 세상의 다른 학문들과 학제간 소통, 기독교 안에서 보수신학과 진보신학과의 소통을 과제로 갖는다. 평화통일 신학은 남북한의 역사적 경험이 융합된 소통의 신학을 요청한다.

셋째, 한국의 진보신학만이 아니라 세계신학의 최대화두는 계몽주의 시대 인간 역사의 경험, 아우슈비치 홀로코스트, 그리고 지구촌의 생태계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 이해’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신학은 학문이름 그대로 결국은 ‘신론’이 중심을 이룬다. 기독교의 위기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위기이거나 ‘예언자와 사도들이 증언한 성서적 진리’의 위기가 아니라, 그 해석과 이해의 틀을 새롭게 재해석하지 못하고 기존교리에 안주하는데서 오는 위기이다. 적어도 “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안에 계시는 한 하나님”(엡4:6) 고백에 걸맞는 새로워진 하나님론을 말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다시말하면,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 신관은 만유를 초월하시는 주 하나님, 들꽃과 고난당하는 피조물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내재적 하나님, 그러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창발하면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과정적 하나님 체험이 동시에 살아나는 신관을 요청한다.

넷째, 한국의 진보신학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종교개혁신학 원리의 총체적 메타크리틱’ 과제를 숙제로 갖는다.

흔히 종교개혁의 3대모토로서 ‘오직 믿음만, 오직 성서만, 오직 은총만’의 신학원리를 강조한다. 본래적인 의미에서라면 언급한 종교개혁 정신의 3대원리는 항구적 진리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나, 지난 500년을 지나오는 동안, 종교개혁이 3대원리는 많은 신학적 문제를 제기해왔다는 것을 개신교 교회사에서 증명한다. 특히 개신교 교회안에 영성수행의 약화, 성례전 신학의 약화, 성서해석상의 분파주의,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공공성의 약화를 초래했다.

다섯째, 세계신학사 지평에서 볼 때, 한국 진보신학은 동아시아 정신적 영성토양에 뿌리내린 ‘동아시신학’(East-Asian Theology)을 형성하여 세계 그리스독교 신학사에 공헌한 과제와 사명을 갖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역사는 짧고 각각의 관심영역으로 분화되어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구미신학의 역사가 각각 위대한 복음진리를 그들 시대와 문화역사적 토양 속에 육화시켜 독특한 신학전통을 창출해 냈다면, 동아시아 문화역사 토양에서 그 가능성은 훨씬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문화권 안에는 불교, 유교, 노장철학, 한국의 종교등과 더불어 아시안인들의 고난경험과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등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실패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진보신학은 그 과제를 피할수 없는 세계신학사적 과제로서 인식하고 있다. (탈고 2014.9.23)


[논문 한글 요약]

이 논문은 한국의 진보신학의 동향과 그 과제를 개론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진보신학’이라는 명칭은 한국의 교계나 신학계에서 ‘보수신학’이라는 표현에 대비하여 사용하는 호칭을 일컫는데 다음같은 신학함의 경향성을 공통으로 한다: (i)세계 신학계의 비평적 성경연구 방법의 수용 (ii) 복음과 상황과의 변증법적 관계 (iii)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신학운동 참여 (iv) 토착적 한국신학 형성추구 (v) 십자군의 영성을 지양한 십자가의 영성을 추구함이 공유하는 정신이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운동으로서는 다음같은 다섯가지 신학써클을 통하여 진보신학의 현황과 미래과제를 살펴보았다: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자연신학 운동이 그것이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이 안고 있는 내일의 과제들은 진보신학에 걸맞는 교회론의 강화, 진보신학운동의 대중화, 21세기 지식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론의 새로운 정립, 그리고 종교개혁 정신의 근본적 재성찰, 그리고 세계신학계에 공헌해야 할 동아시아 영성신학 정립으로 보았다.
(중요 어휘) : 성서비평학, 오늘의 구원, 생태학적 여성학, 우주신인론적 영성
---


[논문 영문요약]

This essay is a bird's eye view of Korean Progressive Theology, which is a common title in contrast to Korean Conservative Theology. In a broad sense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shows some marked trends toward doing theoloy : acceptance of biblical criticism , dialectical method between gospel and situation, commitment to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through investigation into indigenous theology, and pursuit for spirituality of crucifixion.
For making a general survey of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this essay classifies Progressive Theology of Korea into five large groups: (i) theology of modulation (ii) minjung oriented socio-political theology (iii) indigeneous religio-cultural theology (iv) feminist theoloy (v) eco-theology of nature. And some specific chracters and tendencies of each theological movements are described comprehensively.
At the end of this treaties, the urgent tasks of Progressive Theology for today as well as future are suggested to theologians of five groups above mentioned: formation for update ecclesiology corresponding to post-modern world, driving of progressive theology to win a public support, proposal of new doctrine of God overcoming a supernatural God of orthodoxy protestants, and shaping of new christian spirituality deep rooted in east-Asian fertile soil.

(key words) Biblical criticism, liberation, salvation of Today, eco-feminism, cosmotheandric spirituality.



2019/12/28

19 이호재 한국의 이단 기독교와 기독교 이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한국의 이단 기독교와 기독교 이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한국의 이단 기독교와 기독교 이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종교학자 눈으로 본 한국교회…예수의 삶과 성경의 황금률 실천하는 참기독교인 육성해야

이호재 (newsnjoy@newsnjoy.or.kr)
승인 2019.09.19 17:28


종교(학)에서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고정된 개념이 없으며 다양한 종교 문화와 신앙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정통과 이단'은 상호 의존적인 개념으로 다원적인 사회에서는 거의 화석화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 역사 자체가 '정통'과 '이단'의 분열사이자 교체사였던 역사적 사실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고 다원화된 종교 시대에도 어느 종교에서나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고 차별화하는 시대착오적인 근본주의적 종교현상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근본주의는 초기 종교의 정체성을 형성한 종교적 기제였기에, 그 관성적 종교적 영향력으로 진리 수호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내적 신념이 내재화되어 있다.

원래 학술적으로 이 글 제목은 "한국의 그리스도교 '이단'과 그리스도교 '이단', 그리고 말씀"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독자에게 편하게 전달하기 위해 통용화된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용어 자체가 이 글에서는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와 교파를 보는 사회적 잣대를 제공하기에 편리한 이해를 도울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마 보수 성향 기독교인일 경우, 한국의 이단 기독교 하면 쉽게 떠오르는 종교 단체가 있을 것이다. 이단 기독교는 특정 기독교 단체가 배타적인 성경 해석권을 기준으로 종교 시장에서 이해관계에 있는 기독교를 판별하면서 생겨난다. 반면에 '기독교 이단'은 독자들에게 생소한 개념일 수도 있다. 이 개념은 기독교 내부에서 기독교적이지 않은 현상을 패러디해 필자가 특별히 붙인 종교적 용어이다.

전자가 소위 주류 기독교에서 서구 신학과 다른 새로운 성경 해석과 기성 기독교의 종교 권위에 도전하는 기독교를 표방하는 단체에 적용하는 배타적 방어기제라면, 후자는 한국의 역사적 종교 전통의 맥락을 존중하지 않고,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과도기적 기독교 현상, 즉 '격의 그리스도교 문화 현상'을 말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예를 들면 성경의 기본 정신과 기독교의 본질이 신앙생활과 괴리되어 나타나는 신행信行 불일치 현상,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 세습, 교회 매매 등과 같은 반反기독교적 현상을 말한다.



종교적 권위의 독단과
성경 해석권 남용으로 양산되는
이단 기독교




한국의 종교 문화는 풍류와 무교적 심성이 바탕이 되어 수용된 유교적 전통, 불교적 전통, 도교적 전통이 축적된 다원적인 종교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 근대가 들어설 즈음 서구의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며, 거의 동시에 동학이 효시가 되어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다양한 신종교가 창교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종교 지도를 형성하게 된다.

한국 종교 역사의 '막내'격인 기독교는 초창기 열정적인 전도, 교육, 의료 기관 설립, 한글 성경 번역 등 한국 사회에 긍정적 바람을 불어넣었다. 반면에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 해방 후 반공을 내세운 정권과의 정치적 결탁, 사회 차원보다는 개인 구원을 내세운 자본신앙과 결탁한 '성장신학'과 '번영신학'으로 세계 교회가 놀랄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어 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시련, 한국전쟁의 참화,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투쟁, 열강 사이 힘의 역학에서 분단된 남북한이라는 시련의 역사에 걸맞은 한국 신학과 한국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였는가? 한국 사회가 본받을 기독교인상이 정립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난과 역경 속에 문화를 꽃피운 저력의 기독교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양적 성장에 걸맞게 질적인 내실을 갖추지 못했는지를 진지하게 반성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살펴보려는 이단 기독교 현상과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


해방 전후 역사에서 우치무라 간조(1861~1930)에게 신학적 세례를 받았던 함석헌(1901~1989)은 무교회주의자라며 이단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1956년 <사상계>에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기독교 비판과 대안 제시를 했고, 천주교 윤창중 신부와 몇 차례 지상 논쟁을 했지만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면서 건전한 기독교 담론으로 수용되지 못한다. 사실 '무교회'를 보고 어감상 교회를 부정한다는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우치무라의 교회론은 제도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성경 정신과 부합하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의 거두인 서남동(1918~1984)이 1970년 통일교의 <원리 강론>을 '종교적 상상력과 독창성에 있어서 최고'라는 신학적 평가를 한 것이 개신교계 반발을 사, 재임하던 대학교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학자가 성경에 토대를 둔 종교 조직, 예를 들면 초기 통일교 경전,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경전 등을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학문적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이었던 변선환(1927~1995)'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입장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불교와의 대화를 추진한 일이 빌미가 되어, 1992년 감리회에서 목사 자격과 신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제명된 불행한 역사가 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는 기억에서 사라질 만하면 재현된다. 
2006년 이찬수 교수 해임 사건, 
2017년 손원영 교수 파면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당연히 권장해야 하는 불교 등 다른 종교와 우호적 관계를 표현한 신앙적 양심이 강단을 떠나게 만드는 빌미로 작동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다원화된 종교적 전통에 놓인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공존 및 공생은 적극 권장해야 할 종교 행위이다. 이런 몇 가지 종교적 선례는 대부분의 신학 교수와 신학자가 교단 소속의 범위를 벗어나는 신학적 범주와 자유에 기초해 학문하는 일을 꺼리게 만드는 내적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종교적 적폐 행위는 건전한 이단 연구마저 왜곡해 특정 교단의 일방적인 종교 정보만 전달하는 통로로 악용되기도 한다. 건전한 종교 문화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는 종교의 사회학적 순기능을 스스로 유폐하는 악순환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기독교 내부로 들어가 보자.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개신교로 범주화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만 보더라도 장로교, 감리회, 성결교, 예수교 등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최대 교단인 장로교는

  • 신사참배와 
  • 친일 청산 문제, 
  • 역사 비평 도입, 
  •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에 대한 

견해 차이로 다양한 교파로 나누어진다. 지금은 수백 개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

종교적 상식이지만 종교 내 분열은 늘 진리와 교권 수호를 외형적 명목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교권과 교세의 확산과 확장을 위한 세속적 자리다툼이 주요한 동기로 작동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일정한 교세와 교단을 형성하면 이해 당사자 간 이단 투쟁은 상호 간의 '침묵의 카르텔'로 잠복한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교단 소속 신학자는 끊임없이 '신학적 자기 검열' 속에 교단이 허용하는 신학적 사유 테두리 안에서 교단 목소리를 추종하거나 강화하는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이런 틈을 악용해 이단 기독교를 판별하고 정죄하는 일부 직업 종교인은 기독교/비기독교, 교회/비교회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형성돼 온 서구 기독교 담론에서 구축된 교리 체계를 신봉하면서 '이단 사냥'에 열중한다. 이 과정에서 양식 있는 다수 기독교인의 목소리는 덮이고 만다.

만일 '이단' 투쟁 정당성 측면에서 본다면, 천주교와 개신교, 기장과 예장, 예장 내의 합동과 통합, 감리회와 장로교 등 다양한 분파 현상을 보이는 기독교 내부에서 교단과 교파 사이에 '이단 판정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근본적 물음을 던져 보자. 누구나 쉽게 말하기를 주저하지만 결국은 이해관계자의 종교 권력 투쟁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특히 이단 기독교 연구가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가? 마치 예수를 정죄하려던 유대교의 바리새적인 독단적 태도로 상대방을 '이단 사냥'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어볼 뿐이다.

일부 이단 직업 종교인에 대한 기독교계 내부의 시선도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다. 하물며 이단 직업종교인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대하는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독단적인 이단 판정은 사실을 왜곡하는 뒤틀린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는 어느 교단은 이단을 해제하고, 다른 교단은 이단을 유지하는 이율배반적 이단 판정을 기독교계 내외에서 어떻게 평가할지 외부인 시선에서는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일반 기독교계가 우려하는 이단 기독교가 한국 종교사에 부단하게 출현하는 것은 기성 기독교의 결핍을 채우려는 '한국적인 기독교' 문화 현상이라는 종교학자 윤승용의 비평에 귀를 기우려 봄직도 하다.) 종교학자 입장에서 다원적 종교 전통을 가진 한국에서 서구 신학 전통과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성경 해석권'을 기준으로 한국적 기독교를 이단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제국형 식민신학의 배타적 독단에 불과하다. 이단 기독교 논쟁은 이해관계자가 종교 시장을 유지하고 확산하려는 종교현상에 불과하다.

종교학자 관점에서는 정통 종교도 없고, 이단 종교도 없다. 오직 하나의 종교 문화만 있을 뿐이다. 함석헌은 적절하게 지적한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는 맘만이 이단이라면 유일한 이단일 것이다"


자본신앙과 건물 성전에 함몰된
기독교 이단


기독교 이단은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창교자와 성경 가르침과는 본질적으로 괴리된 종교현상을 나타내는 기독교를 말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 종교 권력이 예수와 초기 제자와 같이 세속적 권력을 탐하지 않고 겸손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탐욕적 모습을 보이거나, 세속적 명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는 기독교 정신과 먼 기독교 이단의 모습이다.

특히 기독교 이단은 한국의 역사적 종교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기독교 이외에 다른 종교와 관계 설정을 할 때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사회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기독교 이단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현상으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예수의 몸 된 성전'이라고 종교 선전을 하면서 이를 세습하거나 매매하는 종교적 행위이다. 성전은 모세의 장막 성전, 솔로몬의 예루살렘성전 등 유형 건물 성전 시대를 지나, 예수를 기점으로 건물 성전이 아닌 인격 성전과 인격 공동체가 '참성전'인 시대가 왔음을 성경은 말한다. 기독교인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전하는 '교회'를 사유화해서 '세습'하고 '매매'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런 교회 세습과 교회 매매 사태를 보고도 성전에 대한 근본정신인 인격 교회, 인격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기독교 담론은 거의 형성되지 않고 있다.

인간이 만든 건물 성전(교회)에는 하나님이 부재(행 7:47-49, 행 17:24-25)한다. 바울은 기독교인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고후 6:16)이라는 인격 성전(요 2:19, 고전 3:16-17, 고전 6:19)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공동체적 성령 체험과 새로운 생활 모형은 인격 공동체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최근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대형 교회 매매와 목회자 세습은 일부 직업 종교인의 일탈으로만 보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오히려 외부인 시선으로는 기독교의 신앙 공동체가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지금도 건물 교회를 '참교회'로 선전하면서도, 직업 종교인의 탐욕으로 교회를 매매하고 세습하는 일을 용인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호도하는 기독교 이단 현상에 불과하다.

둘째, 기독교 이단은 '자본신앙과 세속 권력'만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존경과 사표의 대상이 아닌 미움과 배척의 대상으로 형성되는 기독교 현상을 말한다. 기독교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성장신학과 번영신학에 함몰되어 양적 교세만을 추구한다. 반면에, 십자가의 고난신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비신학이 주류 신앙이 되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참기독교인상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기독교 신앙 생태계를 말한다.

아울러 창조주에게서 위임(?)받은 지상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는 직업 종교인이 과학의 도전, 생태계 위협이라는 시대적 도전과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역사적 소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기독교 모습을 보인다면, 이것이 바로 기독교 이단 현상이다. 또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에 충실해서 값싼 은총과 믿음 신앙에 함몰되어 '건물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신자를 양산하는 것이 기독교 이단의 모습이다. 심지어 사회 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M교회의 성직 세습, 또 다른 M교회의 성직자 윤리 문제, S교회의 도로 불법 전용, 또 다른 S교회의 자금 횡령 문제 등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런 기독교 이단의 모습을 가진 직업 종교인과 종교 조직의 행태는 진정한 참기독교인들의 빛나는 종교적 행위마저 평가절하하는 역기능을 한다.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은 한국 기독교 생태계가 '빛과 사랑'으로 넘친다면 이런 어두운 그림자마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신앙인만 있는 조직인지, 아니면 직업 종교인의 인건비와 건물 교회 유지비와 교세 확장을 위한 신자의 양적 확보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셋째, 기독교 이단은 주체적인 한국 신학의 부재와 다른 종교 간 대화와 공존을 부정하는 제국형 종교와 신학이 창궐하는 종교현상이다. 현재 한국 신학이 서구 신학 전래사이며,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은 마치 신라 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종파 불교가 신라에 고스란히 재연되고,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 이외에 무교, 양명학 등은 음사와 사문난적으로 치부하던 역사적 상황을 방불하게 한다. 이런 역사적 유비 현상이 지금 한국 기독교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럽다.

한국인의 삶의 정황을 도외시하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적 신앙의 태도를 가진 기독교 교단과 교파, 신자가 있다면, 이는 다원화된 한국 종교 지형과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한 기독교 이단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문화가 한국인의 주체적 심성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서구에서 전래된 '격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대리로 신앙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서구 신학 전통과 서구 신학자의 사유 체계를 빌리지 않고는 주체적인 한국의 신학을 전개하지 못한 뼈아픈 한국 기독교의 슬픔이다.

지구촌의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적 정황에서 세계적인 신학을 만들어 내놓지 못하고 '칼 라너', '본회퍼', '칼 바르트',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 서구 신학자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이식해서 한국 기독교계를 서구 신학의 대리전을 치르게 하는 제국주의적 식민신학 현상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이단을 발생하게 하는 온상이자 근본 원인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식민신학과 제국 기독교의 행태가 한국 기독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필자를 포함해서 양식 있는 대중을 절망하게 한다.



하나님 말-씀의 재현: 영성靈聖 생활인生活人의 탄생


이단 기독교와 기독교 이단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성경 텍스트가 서술하는 '말-씀' 오해에 있다. '말-씀'을 오해하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청의 2015년 종교 인구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100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이렇게 많은 기독교 인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예수와 같이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사는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되는가? 세계 최고의 교세 성장을 자랑하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삶을 실천하는 기독교 인구는 얼마나 되는가!

재작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고,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 종교 행사도 또 한 페이지의 과거 역사로 넘어갔다. 잘 알다시피 '기념과 선언'만으로 새로운 기독교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믿음을 통한 실체 없는 개인 구원과 '남녀차별'의 기독교 전통, 그리고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신학적 용어로 기독교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로마 시대가 아니다. 낡은 문명과 새 문명의 전환기에 처한 문명사적 시간 속에, 냉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대척점에 있는 지구촌의 하나뿐인 분단 한국에 사는 기독교인은 새로운 혁명적 결단을 해야 한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참다운 한국인이다. 참다운 한국인이야말로 참다운 지구촌 시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절대 획일화되지 않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각 민족 단위로 복음의 씨가 내려져야 한다. 예수가 만일 "너는 한국인으로서 나의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는가?"라고 물을 때 기독교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자문자답해 보라. 서구 신학을 통해 배운 신앙으로 '앵무새'와 같은 서구 신학을 통해 배운 영혼 없는 답변을 예수가 기대하겠는가! 절대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한국인이라는 주체적이고 토착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말-씀'을 체화해서 새로운 기독교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말-씀의 회복은 말(logos)을 쓰는(씀, praxis) 영성靈聖 생활인生活人의 탄생이다.


조직신학회장을 역임한 김흡영은 로고스와 프락시스가 이원론적으로 전개되는 서구 신학의 뿌리 깊은 한계를 지적하며, 로고스(말)와 프락시스(씀)가 일치되는 '도의 신학'을 주장한다. 잘 알다시피 도道의 어원적 해석 자체가 머리首를 찾아가는辵 활동이다. 전통 신학에서 태초에 감추어진 비밀이 '성육신 사건'을 통해 나타나고, 예수는 영성시대의 첫 열매가 된다.

이처럼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말, 예를 들면 평화·사랑·고난·믿음·은혜·봉사·섬김·구원 등의 근본어로 이루어진 다양한 말言 가운데 자기의 말을 찾아야 한다.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준 말을 '마음의 지성소'에 고이 간직하고, 로고스의 창조적 행위의 참여자(요한복음 1장, 요한1서 1장 참조)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과 관계성을 맺고 일상생활에서 재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과 자신의 씀(삶)이 생활 세계에서 개성적인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인 영靈적인 차원에 뿌리를 박고, 일상생활에서 성聖스러운 행동을 하는 영성靈聖 생활인生活人으로 거듭나야 한다. 제도 크리스천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참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향기'를 싱그럽게 뿜어내는 화신체로서 말이다. 말-씀의 회복, 성서 텍스트에 면면히 흐르는 바탕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해서 '사랑'의 화신체, '평화'의 전도사, '청빈'의 섬김이 등으로 거듭나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을 육성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영성 생활인이 한반도 삶의 정황에서 평화통일의 주역이 되어 새 문명의 생활 세계를 구현해 실천하는 본보기를 지구촌 사회에 보여 주어야 한다. 또한 이것이 바탕이 되어 인격 성전과 인격 성전이 중첩적이고 다층적으로 연대한 영성 생활 공동체가 지구촌 차원에서 낡은 문명을 혁신하고 새 문명의 생활 세계를 선도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새 시대 한국 기독교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만일 이단 기독교와 기독교 이단를 판별하는 유일한 '이단' 판정의 기준을 만든다면,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경의 황금률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참기독교인을 육성해 내는 종교 조직인가 여부로 규정되어야 한다. 즉 영성 생활인만이 참기독교인이라는 '선포'를 통해 한국 기독교는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

이호재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 종교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 종교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의 사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새 축 시대의 영성 생활인'이라는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 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운동>(2018), <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2017), <인생 지도>(2017)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 재래 종교의 '구원'관>, <함석헌의 '새 종교'론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변찬린의 새 교회론 연구> 등 수십 편의 국내외 논문이 있다.

2019/09/08

‘가나안 성도’ 5년 새 배로 늘어-국민일보



‘가나안 성도’ 5년 새 배로 늘어-국민일보

‘가나안 성도’ 5년 새 배로 늘어
한목협 ‘2017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입력 : 2017-12-29 00:00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지만 교회엔 나가지 않는, 이른바 ‘가나안 성도’가 5년 사이 배 넘게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같은 기간 헌금 액수도 큰 폭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대표회장 이성구 목사)는 28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2017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대상 1000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은 23.3%였다. 직전 조사 시점인 2012년(10.5%)에 비해 12.8% 포인트 높아진 수치로, 1998년(11.7%), 2004년(11.6%)보다 낮아졌다가 최근 5년 만에 급증한 것이다.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로는 ‘얽매이거나 구속되기 싫어서’가 44.1%로 가장 높았다. 이어 ‘목회자들의 좋지 않은 이미지’(14.4%), ‘교인들의 배타성’(11.2%) 등이 뒤를 이었다. 가나안 성도 대부분이 타의보다는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대내외 사역 및 사역자 생활과 직결되는 헌금 액수도 5년 전에 비해 감소했다.

기독교인들의 월평균 헌금액은 2017년 17만5700원이었다. 1998년 8만3000원에서 2012년 22만2000원까지 올랐으나 올 들어 20% 정도 감소한 것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도 2012년 28%에서 2017년 39.5%로 크게 늘었다. 이 같은 헌금 감소는 교회가 펼치는 구제 및 선교 등의 중장기 사역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주관식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를 묻는 설문 결과도 공개됐다. 고 한경직 목사가 14.5%로 1위에 올랐다. 이어 고 옥한흠(6.8%), 고 주기철(5.3%), 조용기(3.3%), 장경동(2.9%), 고 손양원(2.6%), 이찬수(2.2%), 고 하용조(2.1%) 목사 등의 순이었다.

이번 조사는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5000명, 기독교인 1000명, 비기독교인 1000명을 상대로 지난 9월 22일부터 10월 20일까지 진행됐다.

이현우 기자 base@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75424

2019/08/02

0731 Hojae Lee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1) Hojae Lee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Hojae Lee

31 July at 03:21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구원’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가지고 페북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물음과 답변을 했다.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이지만 용감한 많은 분들이 자신의 ‘구원관’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해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구원관’이라 표현하면 혹 그 간단한 늘 생각하던 바를 적은 것이라고 과소평가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분의 ‘구원관’이다. 유명한 신학자의 ‘구원관’은 책에 적혀 있어, 편집과정을 거쳐 세련되게 정리된 것이지만, 이 분들의 ‘구원관’은 일상생활의 날 것을 그대로 공개한 것이기에 거칠지만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이미 아는 페북친구들이 혹 있다. 내가 쓴 글보다는 페북친구들의 댓글을 열심히 읽으며 맘에 드는 것에 일일이 ‘좋아요’ ‘최고요’를 구별해서 누르고 있다. 이미 이 분은 인생의 정수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2. .누구든지 ‘트리우마’가 있다. 심리학 용어로 ‘정신적 외상’이라고 한다. 가슴에 담긴 남모르는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맺힌 트라우마가 평생을 지배한다. 심지어 역사적 트라우마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게다가 어느 민족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진 민족은 우리나라이다.

떨리는 가슴으로 다시 한번 우리 역사를 되새겨 보라. 교만한 중국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위기상황에 불쑥불쑥 곰발바닥을 음흉하게 내미는 러시아, 자기 안방인듯 안하무인인 미국 등의 조연으로 등장하는 한국현대! 한민족의 오천년 역사책마저 식민사관에 찌든 실증사학자에 의해 기술되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위대한 자기’을 잃어버리고 늘 남에게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받으려는 뿌리박힌 사대주의(큰 것에 기대어 자신을 확인하려는 주의)에 쓰여진 역사의 자양분으로 어찌 위대한 혼을 길러낼 수 있겠는가. 이 사대주의는 적게 가진 민중보다 오히려 많이 가진 기득권이 더 심할 지 모른다. 그래서 흔히 99섬 가진 부자가 한 섬 가진 가난한 이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범람하는 제국학문주의에 빠져있는 배경에는 이런 '학문적 트라우마'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신앙'마저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신앙을 마치 자기 신앙인양 대리만족하는 주구신앙에 빠져있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그 뿌리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기의 건강한 몸을 회복할 생각은 고사하고 환상의 무지개를 쫒던 것이 우리의 짧은 인생이요, 우리의 신앙이요, 한민족의 역사였다고 하면 과언인가!

3. 이젠 트리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으로 탄생되어야 할 시점이다. 솔직해 지자. 기독교인이 금과 옥조로 모시는 성경이라는 텍스트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이고 헬레니즘이라는 콘텍스트로 해석되어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어 전달되어 진다. 성경의 편집과정 자체가 이미 종교권력의 힘이 작용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모든 경전은 ‘신비화되고 주술화 되어’ 신성성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성경만이 아니라 경전은 그렇게 하늘나라의 말씀을 적은 글이라고 경전에서 강조되며 다양한 종교의 신자들은 그렇게 신앙하고 있다. 그 중의 최고는 자기가 신앙하는 경전이고 신앙대상이다. 그러니까 믿는 것이다. 한 예로 들어보자. 서구에서 믿는 예수, 특히 미국에서 믿는 예수는 그동안 잘 생긴 미남형 ‘백인예수(아래 사진 왼쪽)’로 알아왔다. 우리도 그런 줄 알았다. 지금은 BBC 방송에서 고증예측한 유대인 예수(아래 사진 오른쪽 위)라고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 갓 쓰고 한복입은 예수(운보 김기창 작, 아래사진 오른쪽 밑)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친구예수를 벗삼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온전한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한 자리에 까지 가야한다'. 예수의 부활의 당부이자 사랑의 명령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눈이 새까맣고 코가 납작하다고 주장하고, 트라키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이 빨갛다고 주장한다. - 크레노파네스 (B.C 570~ 475)

마음속에 종교권위에 의해 형성된 일체의 우상, 사회적 권력에 의해 조성된 식민사관, 지구촌의 강대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유포되는 사유체계에서 자신을 일깨워야 한다. 누구를 통해 얻은 일체의 믿음과 지식을 팽개치고 자신의 위대한 혼을 찾으라. 이것을 찾으면 승자이고, 못 찾으면 패자이다. 진리의 자리는 누가 데려다 주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건물성전에서 예배에 참여해야 신앙이 돈독해 진다면 이미 낡은 시대의 대리신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십중팔구 틀리지 않는다.

4. 우리는 위대한 결단을 내려 나의 위대한 혼을 되찾아야 한다. 어느 한 순간 나의 전 실존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고 남모르는 그 아픔을 안고 새로운 알로 태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믿음의 터 위에 위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믿음에 끼어있는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 모든 끼꺼기가 제거된 자리, 그 마음의 지성소에 ‘나의 말’이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그 불로 ‘교리체계와 신학체계’를 불태워야 한다. 입술에 이미 습관화되어 버린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멘, 할렐루야, 믿음, 은총, 은혜’ 등의 현란함을 ‘묵여뢰’의 침묵으로 이겨내야 한다. 
얼마 전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고 3수험생인데 자기가 한국 신학에 관심이 있어 “다석의 마지막강의”라는 책을 누구에게(이름대면 여러분이 다 알만한 사람이다) 추천받아 칠개월에 걸쳐 다 읽었단다. 페북을 보다보니 내 페북에 추천책(아마 김흡영의 “도의 신학”, 기온찍기, 박영호의 “다석전기”,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 찍힌 사진들을 보고 어떤 책부터 읽는 것이 좋은 지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일인가? 수험생 그것도 고 3수험생이라 우선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가서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 때 다시 연락하라고 답을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자기는 공부 열심히 하고 머리 식히면서 읽을 책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이런 젊은이들이 지금 곳곳에 있다. 어찌 희망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5. 새 문명의 아침은 밝아왔다. 새로운 천지개벽 혹은 새로운 빛이라는 ‘새벽’은 늘 우리를 맞이한다. 하늘은 0시에 깨고, 땅은 두 시에 깨고, 인간은 네 시에 깨어난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다 깨어난 후 새벽은 온다. 새 문명의 새벽이 이 땅에서 다시 떠오른다. 새 문명의 성격과 모양은 지금 우리 세대가 어떠한 선택을 하는 가에 달려있다. 나를 찾자! 강대한 세계제국이 유포하는 불량세계관, 사회적 위계의 탐욕, 종교적 식민신앙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왜 동시대에 한국인으로 태어나 ‘백척간두’에 선 분단조국을 애처롭게 혹은 분노하며 혹은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가? 모두 사생결단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새 문명’을 펼쳐보라는 ‘하나님’을 믿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 발짝 더 내딛어야 한다. 진리는 역설이다. 새 문명은 이 역설을 실천하는 자에 의해 만들어 진다. 한민족의 새벽은 밝아오고 있다. 깨어나 세수하고 새 태양을 맞이하자.





118You, 이찬수, KarpChon Kim and 115 others

16 comments12 shares




Soonki Lee 명쾌하고 시원합니다. 박수 보내드립니다. 😊




김태진 이런 좋은 그림을 그린게 하필이면 이응노 ㅜㅜ

Hojae Lee replied

· 2 replies





Doheum Lee 지지합니다.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혜경 긴글 잘 읽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날뻔했어요 언뜻 신본주의이신듯하여 댓글 몇번 올리고 조아요 눌렸는데 저와는 신앙관이 맞지않는듯합니다 사람들에게 의견과 생각을 묻고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시는 수단이 굉장히 탁월하십니다 하마터면 저도 넘어갈뻔했어요 혹시 무신론자는 아니신지 묻고싶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Hojae Lee 김선생님! 저는 글에서 이미 수차례 입장을 밝히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신'본'주의는 무엇이고 인'본'주의는 무엇인지요? 저는 종교학자로서 그 '본'을 묻고 있는 겁니다. 넘어갈 뻔 하셨다는데 어디로 넘어갈 뻔 하셨는지요? ㅎㅎ 주체적 신앙을 하라고 글마다 주장하고 있는데! 그래도 혹 심심하시면 놀러 오셔도 환영합니다. 김선생님의 댓글은 한국 교회의 신앙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같습니다. 긴 댓글 감사합니다.



김혜경 Hojae Lee 그리스도인들의 본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즉 말씀이지요 주체적인신앙을 하라고 말씀하셨는 그주체의 위치가.......





Hojae Lee 김혜경 네 김선생님! 이렇게 질문하시면 답을 할 수가 있지요!(제가 그동안 쓴 글을 시간이 되시면 정독해 보세요) 그 주체의 '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고 그 믿음이 맞다면, 만약 그리스도교인 이라면 '성령의 아홉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와 은총과 은사'를 말하며 기독교인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그 결과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지를 체크해 보라는 것이지요! 저는 교회 등 제도종교에는 몸을 담은 적도, 한국 종교의 상황을 보니 담고 싶지도 않습니다.


2019/07/31

Hojae Lee


Hojae Lee
10 hrs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구원’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가지고 페북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물음과 답변을 했다.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이지만 용감한 많은 분들이 자신의 ‘구원관’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해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구원관’이라 표현하면 혹 그 간단한 늘 생각하던 바를 적은 것이라고 과소평가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분의 ‘구원관’이다. 유명한 신학자의 ‘구원관’은 책에 적혀 있어, 편집과정을 거쳐 세련되게 정리된 것이지만, 이 분들의 ‘구원관’은 일상생활의 날 것을 그대로 공개한 것이기에 거칠지만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이미 아는 페북친구들이 혹 있다. 내가 쓴 글보다는 페북친구들의 댓글을 열심히 읽으며 맘에 드는 것에 일일이 ‘좋아요’ ‘최고요’를 구별해서 누르고 있다. 이미 이 분은 인생의 정수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2. ...
Continue reading
Image may contain: 1 person
Image may contain: 1 person, beard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85이찬수, Lee Woosang and 83 others
10 comments
9 shares
Like
Show More Reactions
Comment
Share
Comments
Soonki Lee
Soonki Lee 명쾌하고 시원합니다. 박수 보내드립니다. 😊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9h
김태진
김태진 이런 좋은 그림을 그린게 하필이면 이응노 ㅜㅜ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4h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2 replies
   4 hrs
Doheum Lee
Doheum Lee 지지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3h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3 hrs
김혜경
김혜경 긴글 잘 읽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날뻔했어요 언뜻 신본주의이신듯하여 댓글 몇번 올리고 조아요 눌렸는데 저와는 신앙관이 맞지않는듯합니다 사람들에게 의견과 생각을 묻고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시는 수단이 굉장히 탁월하십니다 하마터면 저도 넘어갈뻔했어요 혹시 무신론자는 아니신지 묻고싶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h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1 hr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Yesterday at 08:40 ·
빛나는 하루!

어제에 이어 오늘도 '구원'에 대한 댓글 토론을 합니다. 새벽녁까지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제 실수로 일부 토론내용이 삭제되었는데 양해바랍니다. ( * '구원' 이라는 종교적 용어는 개념정리가 되어야 함)

[제2탄] 현장 목소리를 듣고 페북운영에 참고하겠습니다.

1.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가진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구원(제)'은 무엇을 말하는 지요?
2. 혹은 신앙동기가 무엇인가로 대체해 댓글 주셔도 좋습니다.
3. 혹은 대속론代贖論(서구신학), 자속론自贖論(유영모, 함석헌), 대속적 자속론(성경의 맥락으로는 이게 맞지 않나요?)

누구든지 자유로운 의견을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 댓글에는 서로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토론하시기를 권장합니다.

참고] 2015년 한국조직신학회가 기획발간한 '구원론' 목차

1. 구원론의 본질과 다양성 | 배경식
2.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 | 정홍열
3. 안셀름의 만족설 이해 | 황덕형
4. 루터(M. Luther)의 객관적 속죄론과 과정 속에 있는 구원 | 김재진
5. 깔뱅의 구원론 | 최윤배
6. 존 웨슬리의 구원론 | 이찬석
7. 슐라이어마허의 구원론 | 심광섭
8. 바르트의 구원론 | 황돈형
9.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구원론 | 신옥수
10. 판넨베르크의 구원론 | 이신건
11. 생태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본 구원론 | 정미현
12. 과학신학의 구원론 | 현우식
13. 남미 해방신학의 구원론 | 서창원
14. 한국신학과 통전적 구원론 | 허호익

48Sunghwan Jo and 47 others
21 comments
1 share
Like
Show More Reactions
Comment
Share
Comments
View 2 more comments
사봉석
사봉석 이무더위에 대단한 열정이시네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1d
사봉석
사봉석 replied

·
 10 replies
Hojae Lee
Hojae Lee 교회에서 구원을 받으셨다면 일상생활에서 바울과 같은 고통과 고민 은 없으신가요? 아직도 고통과 번민이 있다면 구원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지요?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1d
장도영
장도영 저는 삼대째 모태신앙인으로 육십이 넘도록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속 마음에는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기 위한 내 의가 앞서 있었죠
그러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믿음, 구원, 성령충만등 이야기로만 주고 받고 기도하지 실제적 체험을 하지 못해 제일 걱정되는 것이 전도해서 사람을 데려 오느 것이었습니다…See more
3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19h · Edited
장도영
장도영 replied

·
 2 replies
Seong Hwan  Jo
Seong Hwan Jo 구원..?? 누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하는 것이 아닌가요..?? 사람들은 착각을 하지요. 누군가 내 잘못을 용서해 줬다고 생각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내 마음이 그렇게 단지 생각할 따름이지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8h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6 hr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9 July at 17:21 ·
[제2탄] 현장 목소리를 듣고 페북운영에 참고하겠습니다.
* 원래 설문지를 설계하려면 다양한 질문을 분류하여야 하는데 페북 특성상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점 양해바랍니다. 다른 신앙동기가 있다면 적어주셔도 좋습니다.

1.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가진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구원(제)'은 무엇을 말하는 지요?...
See more
4242
66 comment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14 more comments
Jinho Jang
Jinho Jang 인간의 본연을 회복해 가는 총체적 과정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하늘
하늘 선생님 몸글의 의도를 나름 감안하여, 제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영리가 지향하는 것과 같습니다만, 여덟 글자로 말씀드리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말씀드리면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와 내가 범한 죄로 인하여 진노의 자식이오,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을 믿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이 땅에서 천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어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라 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이선민
이선민 내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며 주님 때문에 내 맘대로만 살지 못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Daniel Ok
Daniel Ok 구원은 인간 본연으로 돌아감 아닐까요 ? 본연의 존재 목적
마치 새 제품이 사용되다가 다시 전부 분해 소제해서 만들어지듯이...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요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h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updated his bio.
29 July at 08:36 ·
이메일 : injicheo@naver.com
33
Comments

Hojae Lee
29 July at 06:23 ·
[근본주의적 맹신(盲信), 현실주의적 과신(過信) , 혁신주의적 정신(正信)]

1. 근본주의와 근본주의자는 어느 종파종교에도 있다. 또한 현실주의와 현실주의자도 어느 종파종교에도 있다. 그리고 늘 혁신주의와 혁신주의자도 있다. 근본주의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형태로 드러나며, 현실주의는 타협적이며 세속영합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혁신주의는 포월적이며 자기희생적으로 나타난다. 근본주의는 조직의 윗자리에 있지만 썩어버리며, 현실주의는 인기영합적이기에 주류를 이루지만 열매가 거의 없고, 혁신주의는 창조적 소수로서 시대를 이끌며 열매를 맺는다. 이를 근본주의적 맹신, 현실주의적 과신, 혁신주의적 정신이라 불러본다.

2. 근본주의는 1) 늘 '나만이 진리다'라는 독단에 빠져 배타적인 주장을 한다. 2) 또한 내가 속한 공동체만이 타 공동체보다 우월하다고 맹신한다. 3) 그리고 다른 세상은 '덜 떨어진 그 무엇'이라고 과소평가한다. 예를 들면 근본주의는 전통에...
See more
88Yuik Kim, Sunghwan Jo and 86 others
5 comments
5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장도영
장도영 참 신앙인은 예수의 진리의 복음을 어떤 종교보다 더 생명을 걸고 삶에서 실천하면
세상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See more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d · Edited
사봉석
사봉석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가 보여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d
사봉석
사봉석 replied

·
 2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8 July at 12:47 ·
[특정 종교조직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허구이다]

1. 사실 페이스북에 이 글을 먼저 올려야 하는데 새벽녁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랫글을 먼저 올리게 되었다. 다소 늦었지만 어제 많은 페북친구들이 한국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의 현장의 목소리를 전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특히 어제 댓글을 올려 주신 분은 정말 용감(!)하신 분들이다. 어떤 글이든지 '제소리'를 내지 못하는 '앵무새 소리'는 창조주가 있다면 창조의 뜻에도 맞지 않다.

2. 생각해 보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찬송과 영광의 목소리가 독창이겠는가? 칼뱅의 소리와 웨슬리의 소리와 메이첸의 소리와 루터의 소리만 들리겠는가? 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가인과 아벨, 빛나는 예언자와 선지자, 한민족의 성도들의 목소리는 없겠는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장엄한 합창교향곡이 울리지 않겠는가! 구원받은 장엄한 목소리에 분명히 '나'는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의 맥락에서 누가 구원을 받는가?...
See more
103Sunghwan Jo, Sung Luke Kim and 101 others
26 comments
9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5 more comments
연창호
연창호 "구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같은 종교내에서도다릅
니다 각자 자신에게 "하늘"이 있습니다 사람얼굴이 다 다르듯이ᆢ 그러나 사람얼굴이 공통적으로 같은게 있듯이 회통시킬 능력이 있어야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것을 알아챌수 있지요
4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손성훈
손성훈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4 replies
김이희
김이희 진리는 정형화 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병태
김병태 기독교가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고 있을까요?
불교가 불경을 잘 해석하고 있을까요?…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 Edite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8 July at 07:03 ·
자본신앙과 제국학문주의에 포섭된 한국 사유체계

1. 우리는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수 있다. 다원적 종교주의가 펼쳐지는 지구촌에서 과연 한국, 한국인, 한국 종교문화의 세계사적 사명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한국의 학문세계는 교수, 학자 등 직업지식인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고등교육기관의 평가시스템, 연구재단의 연구과제 선정과 연구기간 등은 세계적인 담론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다학제를 말하지만 다학제적인 논문은 기존 학문권력에 의해 게제하기가 그리 쉽지 않고, 이를 평가기관에서 온당히 인정받을 수 없는가. 일 년에 수 편의 논문을 쓰게 만드는 논문 양산기계로기능하는 직업지식인에게 세계적인 담론을 만들어내라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다.

2. 철학자, 신학자, 를 포함한 인문학자가 한국 사회의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는 것은 같은 인문학자로서 어불성성이다. 인문학은 한 사회와 시대의 사유체계를 제시하고 형성해 가는 것이 ...
Continue reading
108Sunghwan Jo, 박길수 and 106 others
21 comments
6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2 more comments
최양규
최양규 기독교신학에서 새물결플러스 김요한 목사님 아시는지요? 유투브 바이블클래스 강좌도시청해 보세요.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장도영
장도영 치열한 토론과 논쟁, 대안제시의 거대한 담론이 이땅에 뿌리내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길이 이어갈 한국적 철학이 각 분야에서 들불 처럼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Jongjin Kim
Jongjin Kim 한국의 지식계를 "지식 오퍼상"이라고 했던..(누구였더라?;;) 말이 생각나네요. 맞는 말씀이긴 한데, 지금의 학문/종교 생태계(과연 생태계라 부를 수 있는지도 좀 애매합니다ㅠㅠ)에서는 실천방안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 생태계 바깥에서 개고생을 각오한 공부가 이뤄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절망감이 듭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2 replies
사봉석
사봉석 혜안이 더 깊어 지셔서 민중들에게도 함께하는 일이 되도록 힘써 주세요.감사 합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사봉석
사봉석 replied

·
 2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7 July at 10:26 ·
페북친구님들에게 페북운영에 참고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합니다. 한국종교 특히 한국 기독교계가 안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자유스럽게 간단하게 댓글이나 메세지로 써 주시면 됩니다. 한 분이 여러 개 써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시)
1. '재물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런 거로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2. 동성애 문제로 교파간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유
3. 교회를 세습하는 문제
4. 교회를 매매하는 행위 등등

107KarpChon Kim and 106 others
75 comments
2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20 more comments
이종원
이종원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 겠지요.목회자의 문제는 성도의 문제 이기도 하고요. 말씀을 말씀으로 받는 자세의 순종이 결여되어 결국은 교만이 사탄의 종노릇 하고 자기의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멸망의 길이겠지요. 진짜 목사.성도 한사람을 찿으시는지도 모르죠. 탓 하기전에 나를 돌아보고 나단이 이야기 할때 순종하고 돌이킨 다윗의 모습이 한국교회를 하나님나라를 위하는길 이라봅니다. 문제는 나!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Dong Jik Lee
Dong Jik Lee 반지성주의+(주술적)축자영감설 = 동성애 진화론 이신칭의 PC 등등 기본적 개념정의도 없이 찌라시 수준의 논쟁만~~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손성훈
손성훈 임직 교육에서 다니던 교회 목사의 아버지 목사가 와서 교육 했습니다.
봉사도 잘 안하고 헌금도 적게 내는 성도는 기생충이다.
목사한테는 종이 아니라 종님으로 불러야 한다, 했습니다. …See more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이현주
이현주 인천 신현동 성결교회 류우열목사
교회를 기업경영하듯이
직분가진사람들 대출시켜 문어발 성장만시킨는 장사꾼같은 목사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7 July at 05:36 ·
[한국에 한국신학과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가 없다: "격의(格義)그리스도교" 시대]

부제 : 하느님(천주교/개신교 공동번역)인가? 하나님(개신교 성경)인가? 하느님(천주교 성경)인가?

1. 한국 교회는 서구신학의 맹종과 서구신학을 표준으로 하여 한국종교문화를 재단한다. 식민식학형 직업종교인은 낡은 그리스도교에 사로잡힌 서구신학의 대리인이자 중개상에 불과하다 삼국시대의 원효가 통불교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만들고 퇴계가 성리학의 대가로서 새로운 유학전통을 만들었듯이 지금은 그리스도교계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탄생되어야 한다 하지만 서구신학의 대리전을 벌이는 한국신학은 서구신학의 연장선에서 형성되는 담론에 불과하다 서구신학의 복음의 씨를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는 동안 서구신학의 복음에는 문제가 있는지 물어본 적 조차 없다. (그럴 용기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는 웨슬리신학, 칼빈신학, 시대에 따라 나오는 서구신학자의 신학이론과 성경해석만이 정통이기때문이다.)

2. 주류를 점하는 보수교단이 교리화된 신학체계를 한국에 직수입하였기 때문에 서구전통에 뿌리박은 가톨릭과 개신교만이 정통이다. 마치 한국 종교사에서 조선시대에 성리학 이외에 유학전통을 사문난적이라고 정죄하듯이 한국교회는 서구신학과 신학전통을 표준으로 이단과 ‘사이비 그리스도교’를 양산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유비현상은 21세기에도 벌어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신학자라면 현 식민 신학현상, 주구 신학현상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구신학에서 형성된 담론은 서구의 역사와 사회적 문화가 반영된 서구의 신학적 환경에서 제기된 신학이자 교리체계이다. 가톨릭은 헬레니즘에 의해 해석된 믿음체계와 로마 교황과 유럽국가 황제와의 권력 투쟁에서 형성된 의례체계로 만들어진 교회전통이다. 서구신학은 변화하는 시대의 사조에 따라 끊임없이 신학을 만들어내고 한국신학은 서구신학의 소비시장으로서만 작동되고 있는 것이 현주소이지 아닌가?

* 천주교와 개신교가 힘을 합쳐 공동번역을 할 때 '하느님'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천주교만이 '하느님'이라 하고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한다.'the Scripture'라는 경전의 이름마저 한 곳은 '성서' 한 곳은 '성경'이다. 더 가관인 것인 그래도 같은 뜻이라는 신학자들의 궤변이다. 신도들은 왜 이 두 용어가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였는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 바란다. 가장 기초적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용어마저 하나로 통일하지 못한 '종교권력'과 '종교시장'의 다툼에 기독교계는 자성하여야 한다. 하느님이라고 부를때의 신개념과 하나님이라고 부를때의 신의 개념과 범주는 한민족에게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이다. 즉 종교권력으로 기독교 시장을 양분하지만 결코 한국 씨알에게 한국인의 심성인 '조화와 평화'의 종교적 토양을 제국주의의 신학으로 억누르고 있는 "격의그리스도교 문화"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자본기독교와 건물교회는 성경의 정신과 동떨어닌 "격의그리스도"에 불과하다.( "격의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글쓴이가 한국학계에 제안하는 용어이다)

3. 종교적 신앙은 삶의 결단이고 실존적인 체험의 행위이다 남이 차려놓은 음식을 골라먹는 것도 아니고 남이 씹어주는 음식물을 먹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한국 그리스도교인의 신앙행태라고 본다면 어불성설일까? ‘나 = 인간’ 이 텍스트가 되어 내가 태어난 종교전통(콘텍스트1)과 종교문헌 콘텍스트 (2)이 나의 주체적인 종교체험(신앙고백)이 합류하여 소화하지 못하는 사상은 주구신앙에 불과하다. 중국조차도 중화신학(中華神學)을 국가적 차원에서 계획하는 마당에 다원적 종교현상과 제국주의와 냉전의 아픔을 가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에 남북통일신학과 인류의 평화신학을 만들 신학적 용기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대부분의 직업종교인은 서양 선교사가 전해준 교리와 교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교단소속의 직업종교인은 교단의 교리체계를 벗어난 신학이론과 새로운 성경해석은 꿈도 꾸지 못한다. ( 1, 2, 3, “포스트종교운동”에서 인용)

4.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신자들은 다른 소속의 교단과 교파의 기독교인과 대화를 해 보라. 아니 다른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과 대화해 보라.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은 '하나의 신'을 믿는다면서 생각하는 신앙의 차별과 차이는 오히려 다른 종교인 불자의 간격보다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과연 칼뱅과 웨슬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같이 만날 수 있을까? 과연 그 믿음의 후예들인 신도는 같은 성경으로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나의 주체적 신앙고백이 없는 ‘교파와 교회의 직업종교인’을 통한 대리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우려하는 교회의 모습은 한국인의 위대한 혼을 잃어버리고 서구 제국신학에 압도당하여 우리 목소리를 내지못하는 공동묘지에서 나는 울음소리라고 할 수도 있다.

5. 깨고 깨어야 한다. 우리가 깨지 못하면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 2019년 7월 21일 종교학자 김병수 선생은 "제국들은 평화와 무기를 끼워팔고, 주구들인 외래종교들은 사랑으로 민중의 고혈을 짠다"라는 선지자적인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이를 노장사상등으로 그 의미를 적용하여 불교를 이해하는 단계(격의불교시대)를 거쳐 선불교라는 중국불교를 탄생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한국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하나님’, ‘성경과 성서’라는 용어도 통일하지 못한 채 ‘격의그리스도교’시대에 불과할 뿐이다.

88Sunghwan Jo, KarpChon Kim and 86 others
1 comment
5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Hyoun Joon Lee
Hyoun Joon Lee 아집들이...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4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6 July at 15:57 ·
[서구신학을 포월하여 새로운 성경해석과 성경해석의 틀을 만든 변찬린]

한 학자가 변찬린의 생애와 저술을 직접 읽어보지도 않고, 일부 학자가 쓴 변찬린의 리뷰만을 보고 변찬린이 '토착화 신학'을 한 줄 착각하고 있다. 한국 신학의 한계이다.

변찬린은 서구신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또한 영통계시적 독단적 성경해석을 극복하려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해석학적 대원칙아래 새로운 성경해석을 한 것이다.

저자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판단을 내리는 위대한(?) 학자가 어찌 특정 외국 학문의 틀 안에서 신학과 목회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대단한(?) 실력의 보유자임에 틀림없다. 서구신학자의 신학 이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한국인이 해석하면 안된다는 신학적 법칙을 외국 신학교에서 배우고 왔나보다. 식민식학의 한계이자 제국신학의 첨병 역할을 충실히 하는 신학자임에 틀림없다.

[성경의 원리] 개정신판 한국신학연구소 발간사에서

김상일(전 한신대 교수)은 2017년 12월 18일 《교수신문》에 “한국의 선맥과 기독교의 부활사상을 상호 교차적이며, 융합적으로 이해한 것은 변찬린이 세계종교계에서 최초라고 평가된다. 어느 누구도 변찬린과 같이 ”성경은 선맥이다“라는 논지를 초지일관 주장하지 못했다”고 말하여, 이어서 “변찬린은 한국적 화합에 의해 기독교를 통해 ’선맥‘을 다시 찾으려 했다, 『성경의 원리』상권은 신선사상인 도맥론과 불교의 윤회론을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변찬린이 선맥을 불교나 도가 사상과 화합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원로 신학자인 서창원(전 감신대 교수)은 2018년 3월 『기독교 사상』에서 “경전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도한 변찬린의 ’ᄒᆞᆫᄇᆞᆰ성경해석학‘이란 제명으로 ”동방종교 심성에 근거한 변찬린의 ’ᄒᆞᆫᄇᆞᆰ성경해석학‘과 독자반응 비평이 새롭게 주목받아 독창적 해석학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라고 하며 한국 신학이 한국의 종교적 심성과 성경의 영성적 지평이 융합되기를 바랜다는 염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한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윤승용 박사는 뉴스레터(504호, 2018.1.10.)에서 “ᄒᆞᆫᄇᆞᆰ 변찬린, 새 축(軸)의 시대 ’한국적 기독교‘해석 틀을 만들다”라는 제명의 글에서 변찬린의 성경해석학과 ᄒᆞᆫᄇᆞᆰ사상은 “문화신학자들이 가졌던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진정한 화해, 주체적 성경해석 그룹이 초종교적 자리에서 추구한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영통 계시파들이 바라는 선(仙)을 바탕으로 한 성경해석적인 통일한국론”을 모두 아우르며 “우리의 삶의 현장을 고려한 주체적 신학담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래 인류의 생명과 문명을 고려한 생명신학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 신학이고, 새로운 축의 시대를 대비하는 인류 미래신학으로 손색이 없다”고 논평하는 등 한국 신학계와 종교계에서 다양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57Sunghwan Jo and 56 others
2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6 July at 06:56 ·
한국의 '이단' 기독교 :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정통인가?

* '이단' 기독교(이하 이단 기독교로 표현)라는 말은 기독교인에게 아주 익숙한 용어일 것이다. 그리고 이단하면 생각나는 종교단체가 아주 선명하게 각색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분이 계신다면 이미 확보한 종교시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서구가 만들어놓은 '정통신학'의 패러다임의 틀에서 제국주의적 식민신학을 확산하려는 종교 선전에 물들어 '믿음과 은총'으로 '성령의 아홉열매'도 없이 '자기구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부실 기독교일 가능성이 높다.

1.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개신교로 범주화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를 보더라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예수교 등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최대 교단인 장로교는 ‘역사비평’의 도입이 계기가 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분리된 역사가 있다.

2. 종교적 상식이지만 종교내의 분열은 늘 진리와 교권 수호를 명목으로 내세우지만 현실적으로는 교권과 교세의 투쟁이 주요한 동기로 작동한다. 일정한 교세와 교단을 형성하면 이해당사자간의 이단투쟁은 상호간의 ‘침묵의 카르텔’로 잠복한다. 이로 인해 거칠게 표현한다면 교단소속의 신학자는 끊임없이 ‘신학적인 자기검열’속에 대부분 충실한 교단이익의 목소리에 추종하는 대변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내면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틈을 타 이단 기독교를 선전하고 확산하는 일부 직업종교인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교회와 비 교회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형성되어온 서구 기독교 담론에서 구축된 교리체계를 신봉하면서 ‘이단’사냥에 열중한다. 그리고 건전한 양식있는 다수의 크리스챤의 목소리는 덮이고 만다.

3. 만일 ‘이단’투쟁의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면 천주교와 개신교, 기장과 예장, 예장 내의 합동과 통합, 감리교와 장로교 등 다양한 분파현상을 보이는 기독교 내부에서 교단과 교파사이에서 ‘이단판정의 동일성’은 유지하고 있는 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해 보자. 쉽게 말하기를 주저하지만 결국은 이해관계자의 종교권력투쟁의 산물에 불과할 뿐인지 않는가. 이단 기독교 연구가에게 어디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가? 마치 예수를 정죄하려던 유대교의 종교지도자의 바리새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물어볼 뿐이다. 기독교계 내부가 이럴진대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이단 기독교를 판정하는 종교와 직업종교인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4. 자신이 믿는 '종교와 교단과 교회와 직업종교인'만은 정통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종교인을 바라보는 기독교인, 유교의 조상제사를 조상숭배라고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거나, 불상앞에서 불교의례에 참여한다고 자기 신앙이 흔들리는 신앙인과 '믿음과 은혜'라는 신앙의 패러다임안에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맹신하는 이들이 이단 기독교(종교)를 탄생시키는 장본인들이다. '이단'은 '정통'을 자처하는 조직과 종교인이 가진 허상이다. '이단'과 '정통'의 이원론적인 배타적인 의식은 서구신학이 우리에게 물려준 대리전이자 연장선의 사유체계에 불과하다. 깨고 깨어 나의 신앙의 하여야 한다.

5. '이단'과 '정통'의 이원론적인 분리의식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인간의 원초적 죽음의식의 외면적 발현현상이다. 또한 자기만은 어떻게 구원받아야 한다는 맹신과 과신의 교만의식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더 나아가 영혼은 죽어서 하늘나라가고 육체는 땅에 묻힌다는 타락하고 무명에 빠진 인간이 '구원'을 얻기위해 벌리는 피안의식에 빠진 영육전쟁이다. 이것이 종교역사에 확대된 것이 종교전쟁, 즉 '이단과 정통'의 싸움이다.

6. 쉽게 말해 아직도 머릿속에 '정통과 이단'이라는 분리의식이 있다면 '자기구원(제)''의 길은 멀다고 느끼면 된다. 자기 종교안의 구원(제)의 패러다음은 어떤 형식이든(믿음과 은총, 혹은 해탈, 혹은 자아실현 등등) 타자와의 통일과 조화이고 그 '통일과 조화'는 나만의 통일이 아닌 더 나아가 우주적 통일이라고 모든 종교는 가르치고 있다. 물아일체, 천인합일, 우주적 그리스도 등등등 그렇지 않은가?

7. 장마비가 내리는 오늘 아침! 분리된 나와 정통과 이단의 도식에 빠진 나를 발견한다면 흐르는 빗물에 씻어버리자. 그리고 텅빈 마음에 조화와 평화와 개벽의 기운을 불쏘시개로 삼아 '말씀'의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비약하는 새로움의 영성에너지를 만들자. 그리고 심호흡 한 번 하고 쫄지말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성인살이'나 해보자.

144Sunghwan Jo, 이찬수 and 142 others
16 comments
2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5 more comments
조성익
조성익 교수님의 지적이 아주 적확합니다. 사랑을 전해야하는 기독교는 태생부터 교회란 너울을 쓰기 위한 암투로 시작되었지요. 사도신경의 변화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신경은 니체아부터 칼체돈까지 너덧번 채택되었는데 그때마다 내용은 점차 퇴보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권력의 이동을 말해주지요.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여지없이 축출되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란 애당초부터 없었습니다. 지금은 시절이 좋아서(?) 자기의 신앙을 자유롭게 서술할수 있지만 500년전에 태어났더라면 저도 아마 화형감일 겁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4d
김두송
김두송 이단은 예수님이 머리되고,주인되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교회,성락교회,구원파,JMS,명성교회,사랑의교회,소망교회,순복음교회,새중앙교회 등, 지금 우리나라는 이단을 빼면 기독교인구가 약200만정도 밖에 않되죠?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김두송
김두송 신천지,만민교회,지금도 교회가 분열되어 성도와 목회자 간에 싸우고 있는 교회,다 이단이죠!ㅋ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김복근
김복근 결국 '이단'이란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낙인찍기...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5 July at 16:26 ·
기복신앙과 기복부흥사형 직업종교인 유감

1. 오늘 우리 페북에 난리가 났네요! 외출을 나갔다 왔더니 바로 '무당하나님과 온전한 기도'에 대한 다양한 반응에 적시에 댓글을 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댓글가운데 건설적 비판 댓글은 타당한 지적으로 겸허히 수용합니다.

2. 대부분 무속과 무당의 용어와 개념에 대한 이해지평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편견(?)때문 인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들도 '무당하나님과 온전한 기도'에 대한 맥락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신 듯 합니다.

3. 지적된 부분은 바로 우리의 전통적 종교문화인 '무교 혹은 무속'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글쓴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 종교문화인 무교와 무속에 대해 근대이후에 부정적 이미를 덧붙여 씌운 종교가 바로 기독교 문화입니다. 바로 서양 선교사와 유동식이 쓴 "한국종교와 기독교"에 나오듯이 기독교와 교회내부의 기복신앙을 무속의 영향이라고 평가한 것이고 '배척해야 할' 부정적인 문화라고 소개합니다.(15-39 페이지)

4. 저는 무당은 목사와 같은 하나의 직업종교인이고 무교는 기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라고 인식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속과 무교(사실 이 용어도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라는 언어가 가진 부정적인 오염은 서구신학과 기독교의 편견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신학자를 제외하고 일반 학자들은 편견을 가지지 않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신학자가 쓴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독교를 비교한 논문을 보면 한국의 전통종교의 하나인 무속과 무교가 무언가 결핍된 종교로 서술됩니다. 그러기에 비판적으로 지적한 댓글은 이런 것에 대해 글쓴이가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언급입니다)
* 무교와 관련되시는 분이나 무교(도교 혹은 풍류)와의 습합현상을 많이 받은 불교과 관련 되시는 분도 서구식 근대종교, 특히 제국형 기독교 문화가 만든 무교(속)애 덧칠한 '부정적 트라우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를 격려합니다. 무교도 온전한 하나의 종교이며 종교현상입니다.

제가 이런 입장을 가지고도 '무당하나님'이라고 제목을 붙인데 대해 하나님을 왜 무교(속)와 연계시키냐는 비판의 댓글이 주를 이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학문적으로 성숙한 댓글이 달려 무안하기조차 합니다.
얘기가 길어지는데 제가 일전에 출간된 책의 내용을 참고하기 바랍니다.(이호재. 포스트종교운동. 2018. 141-142). 이 글을 읽으시고 오해가 있었다면 해소가 되고 궁금증이 있었다면 풀리기를 기대합니다. 댓글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Image may contain: text
Image may contain: text
8383
4 comments
3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김이희
김이희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5d
정승교
정승교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5d
김복근
김복근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5 July at 09:44 ·
무당하나님과 온전한 기도

1. 내 기억에 종교 연구를 위해 만난 많은 종교인 가운데 특히 신학교수, 원로 신학자, 평신도 등 기독교인이 많았다. 식사를 할 자리면 당연히 목사가 기도를 하며 인터뷰를 하는 입장에서 기도의례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 그 가운데 특히 90세도 넘은 원로 교수(신학자, 목사)에게 책을 드리러 방문할 때의 이야기다. 그의 아내도 80세를 울쩍 넘었다. 집 근처의 한식당에 가서 담소를 나누다 음식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기도를 한다. 3분도 채 안되는 시간에 나를 포함해 그 분 아내와 세 명이 있는데 그 원로교수가 하는 기도의 태도와 간절함은 말그대로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서 하는 기도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난 처음으로 '아멘'했다. 그리고 그 후로 아직까지 없다.

2. 류영모는 1971년 8월 동광원에서 신도들에게 인도하는 기도를 부탁받자 이렇게 말한다. 자신 혼자는 어찌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기도를 할 수 있지만 대중을 인도해서 까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는 경지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쩜 새벽 기도 인도는 이 사람이 맡아서 여러분과 같이 기도하기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때는 기도를 내가 혼자 하면 했지 여러분하고 같이 안하고 지내왔습니다. 저는 기도 인도는 할 줄 몰라요. 정말 기도 인도를 할 수가 있다 하면 인도한다는 이가 기도하는데 작용을 해서는 안되요. 온전히 하나님과 살기만을 기도하고 그치면 그이는 온전한 기도한 것입니다” (다석 마지막 강의 . 166-167)

3. 구약의 대 선지자인 모세도 므리바 반석을 세 번이 아닌 두 번을 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는 신성모독으로 인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직업종교인의 말 한마디는 절대존재의 대언의 행위이기에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연 기도는 무엇일까?
자신의 기도가 날개가 돋혀 하늘나라까지 가서 하나님 응답을 받아올 수 있는 기도인가 물어보아야 한다.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이 O.K. 하시나? 우리 애 수능시험 잘 보게 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나. 속고 속이는 기도의례는 그만 두고 마음의 지성소에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의 고민을 풀어주는 기도'를 해야한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이 '기복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무당하나님으로 만들지 말고 참 기도를 하여야 한다.

그럼 참 기도는 무엇인가? 나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고민을 풀어주는 기도이다.
기복기도를 하는 목자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지 말자!
기복기도하는 사람은 천국문을 막고 있는 것이고, 기복기도에 동참하는 사람은 돈과 영혼과 시간을 마귀에게 바치는 것이다.

159Yuik Kim, Sunghwan Jo and 157 others
31 comments
6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11 more comments
조성익
조성익 교회 밖에 계신 분이 더 정확하고 냉철히 판단하시니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기적(利己的) 소아(小我)를 죽이고, 와서 진정으로 이타적(利他的) 참 자아(自我)를 찾아가라 란 말씀인데, 자기의 이성은 안 죽이고 이기적인 몸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그리스도의 옷만 덧입혀진 꼴이니, 기복신앙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현실이 슬픕니다. 하나님의 가슴도 무너지고 계실 겁니다.
4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5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Flora Cho
Flora Cho 예언 기도를 하는 분만 찾아다니는 선배와 친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녔었던 개척 교회도 예언 기도를 했었습니다. 저는 그 예언 기도가 너무 불쾌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분명 저에게 직접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왜 그 분들은 그렇게 쉽게 하나님게 들은 예언이라며 성도들에게 함부로 그런 말씀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의 잘 못된 예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았을지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인생에 …See more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복근
김복근 무당하나님이란 표현보다는 호렙산산신령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oonki Lee
Soonki Lee 참 기도는 나의 문제가 아니고 하느님의 문제를 풀어주는 기도다. _()_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Soonki Lee
Soonki Lee replied

·
 2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5 July at 04:28 ·
평신도가 예수(부처)를 살려 내자 : 성인聖人으로 하루살기

1. 인류의 고전인 경전텍스트, 사서오경, 대장경, 성경, 꾸란경, 도교의 경전인 도장 등은 일점일획을 절대시하는 문자 숭배의 시대를 거쳐 인간이성의 발달과정을 거쳐 철저히 해체되어 비신화화/역사화되면서 경전의 위상은 추락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1990년 초,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후쿠야마는 “역사는 종언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지구촌은 민주주의의 경제적 이데오로기인 자본주의로 급속히 재편된다. 더불어 옛날 그 빛나던 종교경전의 위력은 과학의 도전으로 응전의 용기를 잃고 있으며, 경전의 정신을 담지하던 성전과 경전의 말을 전하던 직업종교인은 ‘자본’의 도전에 '오합지졸'이 되는 형국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종말이 아니고 종교 종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2. 성경을 포함한 경전텍스트는 건물성전 유지와 직업종...
Continue reading
114114
9 comments
8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장도영
장도영 좋은 말씀 공감합니다
특히4번에 깊이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쭉~~~~😊💖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6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오승준
오승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좋은땅이십니다.샬롬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6d · Edited
오승준
오승준 replied

·
 4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updated his status.
24 July at 19:03 ·
[대무大巫는 새 날을 개명開明하는 한국인의 사명입니다]

한밝선생이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속에서 쓴 한민족에게 보내는 구도엽서
============================================
우리는 대무大巫입니다.
무巫의 식성食性으로 성인을 잡아 먹는 대무大巫입니다
조무래기 샤아만이 아닌 뜨내기 무당이 아닌
신접한 사탄이 아닌 신시神市의 〈한〉사람 대무입니다.

이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입니다,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종교 아비를 삼키는
한국 심성의 오지奧地를 개발하여
이 시대의 고뇌를 초극하고 인류의 고난을 극복하고
역사의 물음에 대답하게 하십시요.
세계사의 네거리에서 살煞풀이 굿을 하지 않으면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사상의 골고다에서 해원解寃굿을 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습니다
살인한 형제들의 속죄 굿을 하지 않으면
이해와 화동和同은 결코 없읍니다.
저 허공에 전운(戰雲)처럼 엉킨
원귀(怨鬼)와 무주고혼(無主孤魂)들의 한恨을
풀어줄 자 그 누구입니까 ?

백악관에서 크레믈린 궁宮에서
자금성에서 북악산에서
모란봉에서 부란텐부르크문에서
예루살렘에서 베트남에서
악령과 사신(邪神)을 축출할 자 그 누구입니까 ?
유일신 야웨와 유일신 알라의 불화를 제거하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살煞을 풀 자 그 누구입니까 ?
힌두교와 모슬렘 사이에 살기를 제거할 자 그 누구입니까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엉킨 증오를 없이할 자 그 누구입니까 ?

대무大巫는 새 날을 개명開明하는 한국인의 사명입니다.
화해和解는 한국 혼魂의 저력입니다
내 조국은 더러운 세계사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
나는 뜨거운 눈물과 깊은 신음과 임리(淋悧)하는 피로서
무巫의 굿을 하여
이 땅에 평화의 성대聖代를 개천開天하고
자유의 성일聖日을 개명開明하겠읍니다.

(변찬린의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에서)

46Yuik Kim, Sunghwan Jo and 44 others
2 comments
1 share
Like
Comment
Share
Comment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4 July at 06:18 ·
평신도는 말-씀의 인간으로 거듭나 역사광장을 걷자( 2)

1. 내가 말하는 평신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나가면서도 남보다 믿음이 부족하고, 성경에 정통하지도 않으면서도 공부도 안하고, 그리고 십일조 등 헌금을 적게되면 마음속에 무언가 죄책감를 나고,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에 가서 기도를 올리면 마음이 편해지고, 교회내에서 집사, 권사, 장로 등은 무언가 믿음이 있고, 은총을 받은 것 같고, 남의 믿음이 부러운 즉, 상대적 신앙을 가진 성도를 말한다. 좀 더 일반화한다면 종교를 믿으면서 남과 비교를 하는 절대적 신앙이 아닌 표면적이고 상대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평신도의 마음속의 이런 심리상태가 직업종교인을 우상화하고 맘몸신앙과 기복신앙을 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신자가 성경을 몰라서 물으면 가르쳐 주는 대화문화가 아니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하는 목사나 질문자체를 ...
Continue reading
122122
16 comments
2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3 more comments
장도영
장도영 말은 어려운것 같은데 맡는 말 같아요 한가지만 덧 붙이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하나로
모든 진리의 말씀은 한줄에 꿰어 있는 것이 복음같습니다 …See more
4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장도영
장도영 replied

·
 2 replies
오승준
오승준 아멘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남영욱
남영욱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6d
Flora Cho
Flora Cho 100% 공감합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3 July at 05:38 ·
평신도는 눈치보지 말고 자기 가슴에 '말씀의 불'을 붙이자 (1)

1.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이 습관이고 관습이 되어 관례에 따라 윤회의 틀에 박혀 살아간다. 이를 타파시키는 것이 신앙이요, 말씀이 담긴 경전이다. 경전 속에 있는 글자는 나의 가슴을 박동치게 하는 살아있는 불이다. 살아있는 말씀의 불이 성도들의 잠자는 가슴에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불을 붙여주어야 할 직업종교인은 오히려 '교리의 말', '탐욕의 말', '기복숭배의 말'로 둔갑시켜 붙으려는 불마저 꺼 주체적 신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현실이 목격된다. 그래도 자기는 바른 신앙을 가진 줄 안다. 딱한 일이다.

2. 각 개인은 살면서 한 평생 자신의 마음을 고동치게 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만일 너에게 그 말이 있냐는 실존적 질문에도 '배운 데로 답한다' 그것이 교리의 신앙고백이고, 교학체계이다. 예수가 지금 우리 면전에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면 ...
Continue reading
148박걸, 이찬수 and 146 others
6 comments
4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YI Illhwa
YI Illhwa 좋은 글입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조성익
조성익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남의 신앙에 곁붙이로 따라가는 사람을 종교인이라 하고 자기신앙으로 사는 자를 믿는자, 신앙인이라 부르지요 내가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되라는 게 가르침인데 부처에 금옷을 입히고 예수를 거룩하게 먼 높은 곳에 모셔놓는 어리석음은 타락한 인간들의 어쩔수없는 필연인가 봅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3 July at 03:21 ·
NAVER
 ·
한 평신도가 한 평생 성경을 연구하다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에서 그 마지막 퍼즐을 맞추었다고 실존적 고백을 하는 글!

그(녀)의 마지막 목숨을 건 질문은 무엇이며, 어떤 것에서 그 해답을 찾았을까? 평신도의 입장에서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서 만난 진리의 화룡점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성경에 진리가 있을지언정 해석자의 수준에 따라 계시되는 하늘이 다르다는 이 분의 "성경의 원리" 제2장 도맥론의 리뷰를 감상해 보시라.

이 정도는 되어야 성경연구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상의 결과는 또한 페북친구의 몫이며 나는 소개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 성도여 쫄지마시라. 두드리라 그럼 열린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분이 연 성경해석을 들어보라!

BLOG.NAVER.COM
성경의 원리, 도맥론(道脈論)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무엇에 목말라하였는...
54Lee Woosang and 53 others
3 comments
1 share
Like
Comment
Share
Comments
임창훈
임창훈 아멘^*^*감사합니다 📚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updated his status.
22 July at 08:16 ·
평신도는 쫄지말고 공부해 성경에 정통하라.

1. 한국 교회가 세계적인 양적 성장을 하였지만 그 부정적 폐해가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평신도가 성경을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성경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어디에서 찾는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문서인데 열심히 성경공부하여 바른 하나님을 찾아 믿고, 실천하여야 한다.

2. 성경은 말한다. 건물성전에 대한 비판은 예수가 하였고, 예수사후 스데반도 건물성전을 비판하며 첫 순교자가 된다. 또한 예수는 나의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한다고 너희는 나의친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와 초기제자들은 복음전파를 위해 전대를 메지 않고 무소유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즉 건물성전의 반대와 복음 전파자는 무소유해야 하며, 예수는 신앙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친구라는 친구신앙(즉 하나님이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삼대 원칙이 성경에 흐르는 기본정신이다. (구약의 레위족속이 기업이 없었다 등등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3. 구체적으로 바울도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17),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이며 바울은 교회에 대해 제사장의 필요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즉 신자를 대신한 직업종교인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모임 사역과 섬김을 제시장적 직무, 어떤 특별한 제사장 계층이 아닌 모든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직무로 보았다. 당연히 그들은 공동식사를 위해 모였고, 예배를 위해 모였지 고정적인 예배중심지와 성전, 제사장이나 희생제사도 없었다. 이를 근거로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런 건물교회를 많이 세워서 마치 건물교회에 일요일만 되면 출장갔던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이 건물교회에 와서 성도들의 예배와 찬송을 받는단 말인가?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제물이니라"라고 하였다. 거룩한 산 제물인 성도들은 움직이는 인격성전이다. 인격성전이 성령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면 된다. 무슨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을 말하면서 신도들에게 마치 무슨 성경해석의 비법이 있는 양 직업종교인은 자유스럽게 성경을 읽는 것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곤 한다. 진리의 판정자는 성령이고 하나님이지, 직업종교인이 아니다.

4.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그리고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보혜사: 이거 특정종교단체와 특정인이 아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라고 않았나?

5.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텍스트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가 성령을 받아서 해석한다는 것이 성경텍스트가 이렇게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6. 따라서 평신도인 성도는 자신을 가지고 배수의 진을 치고 성경공부를 하라. 온라인에 가면 성경의 다양한 역본과 히브리어 헬라어를 비교해석한 책도 많다. 오직 깊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일상생활에서 겸손의 사회적 자세로, 경제적으로 무소유를 지향하며, 명예욕이 없었던 예수를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주렁주렁 다는 생활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경전텍스트는 단순하다. 성경은 부활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타락으로 죽은 인간이니 부활하자는 것이고 세상 살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 사랑하라는 것 아닌가. 믿음, 은총, 은사 다 좋은데 그 믿음과 은총과 은사를 받은 만큼 성령의 열매로 외형적으로 보여달라는 것이다.

7. 복잡한 교리체계와 신학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평신도님 우리 쫄지말고 성경공부 합시다. 그럼 누구한테 가서 배워야 하나 하는 순간 또 특정인의 신앙노예가 됩니다. 목숨걸고 하면 성령이 성경을 가르쳐 준다는 게 성경의 기본정신입니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히 교리의 노예, 종교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예수가 기독교의 교주입니까?

8.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만이 아니고 세상학문(특히, 과학)과 소통을 하면서 예수처럼 세상의 아픔을 나누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밝히는 성숙한 역사적 태도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어제 추천한 책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어제 추천한 책 :
1.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한국신학연구소)
2. 류영모의 다석일지(영인본)
3. 김흡영의 "도의신학"과 "가온찍기"
4. 박영호의 "다석전기"
5. 함석헌의 " 뜻으로 본 한국역사"

243You, Sung Luke Kim, KarpChon Kim and 240 others
36 comments
19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13 more comments
공인
공인 문제는 목사입니다.
성경을 깨우쳐주어야 하는데
목사를 섬기라고 가르킵니다.…See more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은해
김은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게 성서를읽게하는 손가락역할이 보기어렵다는것 입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김은해
김은해 replied

·
 2 replies
손성훈
손성훈 Like 를 누르는데 안 먹히네요?
아무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6d
1 reply
남영욱
남영욱 AMEN!!!!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6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1 July at 07:15 ·
내 서가에 꽃혀 있는 책 가운데 한국 사회 특히 한국 교회가 바람직한 길로 가는 것을 바라는 분들에게 몇권 추천합니다. 왼쪽 마지막 책은 사진촬영의 버팀목으로 쓴 책으로 제외입니다.
* 추천책의 공통점은 주체적 나를 바탕으로 한국, 지구마을,우주촌을 사유에 담고 치열한 삶으로 녹여낸 인물과 책들입니다.
* 나의 뿌리와 절대 존재와의 합발(合發: 합일合一이 아님)의 경험/체험없이 나의 근본적 변화와 사회/종교/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추천책이 정갈합니다.

1.다석일지(영인본) : 류영모의 영성구도일기. 전 네권...
See more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187You, KarpChon Kim, Myung-kwon Lee and 184 others
31 comments
2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6 more comments
Yosub  Lee
Yosub Lee 잘 읽고 잘 배우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Yosub  Lee
Yosub Lee replied

·
 2 replies
윤인숙
윤인숙 💞책이 많으시군요
다석전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새로 한번 더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연창호
연창호 변찬린선생의 요한계시록 읽어보아야겠네요
지금 요한계시록 공부하고 있거든요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연창호
연창호 replied

·
 2 replies
Sejin Pak
Sejin Pak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만, 선생님을 통해 소개된 책을 이미 몇권 주문했습니다. 변찬린 전기, 기온찍기. 우선 한권 씩 만 사 봅니다. 함석헌은 여러권 있고, 다석전기도 아직 읽지 않았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1
Edit or delete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Sejin Pak 인연이 되는 책이길 기대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Sejin Pak
Write a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0 July at 12:26 ·
인간은 생각하고 대화하고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대화가운데 토론은 효율적인 공부입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세상이 아닙니다.

중세 시대에는 라틴어 성경을 일반 평민이 읽지도 못하여 평민이 성경을 접하기가 어렸웠지만, 루터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독일어로 성서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도 다양한 한글 성경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온갖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누가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해석권은 특정 종교단체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자율문화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페북공간에서 토론 예의를 지키면서 상호간 열띤 토론을 대단히 환영합니다.
130나일경, Sunghwan Jo and 128 others
5 comment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김지연
김지연 지금은 아는게 없어서 토론을 못하지만 나중엔 궁금한 것도 묻고 토론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김지연
김지연 replied

·
 2 replies
김이희
김이희 사람의 본능중에
상호작용 하려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이 의미없게 느껴지는것이 우울증 이고요…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oong  Han
Hojoong Han 감사드립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0 July at 10:41 ·
변찬린의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은 구도자로서 틈틈히 적은 영성일기의 일부분입니다. 시중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공개합니다. 반드시 출처를 밝히고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도 SNS와 목사설교자료로 무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주의바랍니다(남의 자료를 이용하면 저작권자의 이름을 밝히고 사용하면 목회의 권위가 손상되나 봅니다. 그런면에서 이성하목사의 "신학서적표절반대운동" 적극적으로 응원합니다)
===================================
새밝이여
그대는 고고학과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배운 후 입산하라.
그대는 고전물리학과 원자문리학사와 수리원리를 배우고 퇴수하라....
See more
66박걸 and 65 others
1 comment
Like
Comment
Share
Comments
장도영
장도영 좋은 말씀 항상 감사 드리며
세상의 온갖 지식의 말을 다 합해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고 행복은 사랑에서 나오는데 …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5d · Edite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20 July at 09:45 ·
한국기독교 성경해석과 신앙패러다임 전환 요청 2

1. 한국 기독교의 전래는 북경 천주교 북당에서 세례받은 이승훈으로 비롯되며, 개신교의 역사는 알렌과 아펜젤러가 들어온 시점으로 잡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옥성득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 교회사"에서 시각을 교정해야 하는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2.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서구의 선교사가 한국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며 한국 근대기에 신분해방, 한글애용, 교육, 의료 등의 부분에 일정부분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개신교 목사는 아주 소수의 목사를 빼고는 신사참배를 하는 우상숭배를 하였고,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지시에 순종하며 신사참배를 하였다. 이런 역사적 우상숭배도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자. 자질구레한 이런 내용은 다 아실테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See more
124Sunghwan Jo, Sung Luke Kim and 122 others
26 comments
3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4 more comments
Haekyoung  jung
Haekyoung jung 오직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한국교회가 보여준건 땅사서 집짓고 우리끼리 잘 먹고......
문동환 박사님의 '예수냐 바울이냐'를 읽었을때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왜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불교, 회교, 힌두교 지역을 여행하면서 믿음이란 종교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See more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이복규
이복규 replied

·
 1 reply
조성익
조성익 만약 기독교가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라면 그렇게 지독한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에 반하여 맹목적으로 믿어야했다면 기독교는 선교지에 학교나 병원을 세우지 않고 예배당이나 기도원만 세웠을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만이 주실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로 나타난 성령받은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그들을 보고 일컫는 말이었지요 이신칭의에 목매달고 있는 사람들은 칭의에 구원이 달려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정의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거짓 성령체험자들이 받았다고 우기는 바람에 정말로 '믿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이종원
이종원 은혜와 믿음의 균형적인 삶이 그리스인이라 생각듬니다. 귀한 말씀 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유택주
유택주 교회를 벗어난 성령신앙이라야 한다고 봅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9 July at 20:55 ·
평신도는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성경텍스트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해 준다. 예수도 3년의 공생애 가운데 자신의 종교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직업종교인에게 질문을 받는다. 이를 본받아 직업종교인에게 '너희는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기독교 평신도는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묻지도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하는 평신도는 자기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준다는 기복신앙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한국 교회의 실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문제다. ...
See more
210You, 박길수, Sung Luke Kim and 207 others
28 comments
6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3 more comments
Daniel Ok
Daniel Ok 물을 기회를 원천 봉쇄하죠...
한국 교회의 문화가 “물으면 이상한 놈” 취급하죠...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Kyungsan  Min
Kyungsan Min replied

·
 5 replies
백영기
백영기 이미 아시다시피,
성서 서간에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지체를 이룬다''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존재와 기능과 역할들이 그리고 교회의 개념들(구약에서 부터 신약까지 성서 곳곳에 관련 표현들이 있기는 하지만)이 함축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듯 합니다.
사역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에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그렇게 이어진 더욱 구체적인 그 권위는 신약에 와서 성령을 받고 성령에 봉사하는 권위로 표현되고…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 Edite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홍정욱
홍정욱 묻는다는 말은 영어로 구한다는 말과 같지요.
구한다는 말은 기도를 의미하고요.
즉 구하려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만한 권위를 가지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자신들의 눈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봐드렸어야 했지요. 하지만 이미 바리새인들의 맘속엔 헛된 가치를 추구하는 정욕으로 가득찼으니 어찌 권위의 출처를 알겠습니까? …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홍정욱
홍정욱 replied

·
 6 replies
Jong Sang Gabriel Kim
Jong Sang Gabriel Kim 경공부를 거의 하지 않죠. 신도나 성도나 신자나 승려나 목사나 신부나..... 지금까지 그런 분들만 봐왔을지도 모르지만요.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9 July at 20:27 ·
한국 기독교 성경해석과 신앙패러다임 전환 요청 1.

1. 다양한 경전을 읽었지만 신학 책은 그렇게 많이 읽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여유가 있어 신학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을 시간이 생겨 공부를 하다보니 문득 일전에 연세대의 모 교수와 통화한 내용이 새삼 떠오른다. '신학과 교회사이에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지식이 교회의 평신도에게 전혀 전달이 안되는 일종의 부도체현상이 현장목회의 모습가운데 일부라는 것이다.

2. 사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도대체 서구신학자들의 주장이 어떠한데 한국 교회는 이렇게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교회가 되어가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많이 생겼다. 그런데 서구신학자는 다양한 신학적 자유를 누리며 성경해석에서 자유로웠다. 반면 한국의 신학자 혹은 신학교수는 교단소속의 대학에서 교단의 신학적 사유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학자의 선택이니 탓 할 이유도 없다....
See more
144Sung Deuk Oak, KarpChon Kim and 142 others
11 comments
4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1 more comment
노용욱
노용욱 무거운 마음으로 힘든 말을 한것이 아니라 이런 허튼 소리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아파하십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호
김호 경계에 선 인간은 고독하지만 용기가 우리를 이끌어줄 것입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YI Illhwa
YI Illhwa 참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문이. 왜 보수근본주의자들로 한정을 지으시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햄하여야 할 일을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YI Illhwa
YI Illhwa replied

·
 2 replies
조용호
조용호 힌국교회는 자주독립을 위해 독립전쟁을 할 마음이 없어보입니다. 식민지 논리로 무장할 뿐 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9 July at 09:03 ·
나는 한국산 종자韓國産 種子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한〉의 껍질을 쓰고 고난의 역사를
십자가 처럼 질머진 채
세계내 역사의 한 가운데 서 있읍니다....
See more
96You, 박걸 and 94 others
22 comments
1 share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1 more comment
Philo Kalia
Philo Kalia 글맛이 아주 독특하고 새롭습니다. 도전이 됩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이승종
이승종 교수님, 평안 하시죠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Kyungsan  Min
Kyungsan Min 내용이 어렵지만 계속 곱씹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대충 봐도 깊이가 장난 아닙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Kyungsan  Min
Kyungsan Min replied

·
 2 replies
감사
감사 로스께, 되놈은 어느 나라인가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 Edited
감사
감사 replied

·
 2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9 July at 08:24 ·
자기검열 : 거대한 사상과 일상생활의 윤회 울타리에서 해탈하자

WWW. 는 세상의 온라인 정보와 오프라인 정보를 실시간으로 연계해 준다. 자유라는 이름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모든 정보를 취사선택할 권리를 가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일차적으로 '자기검열'된 정보를 접하여 분류하고 재구성하여 자기 세계관에 맞게 편안하게 맞추어 그런 윤회의 사유사회안에서 살고 있다.
내가 쓰는 글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쓰지만, 이미 머릿속에는 가능하면 대중의 언어로 쓰려고 안갖힘을 쓰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다. 또한 혹자는 이미 느끼겠지만 사용하는 단어도 표현하고자 하는 양식도 이미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있다. 늘 '과거의 비판, '새로운 무엇', '굳어진 제도와 관습의 비판'을 상대적으로 많은 종교언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은 편하다. 그러나 세계관과 세계관, 문명과 다른 문명이 만날...
See more
7171
18 comments
1 share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4 more comments
김두송
김두송 타락,ㅋ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김두송
김두송 그냥있으면신학은없으집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김두송
김두송 replied

·
 2 replies
김두송
김두송 그리고예수님을잘따르면됩니다.성겨미면충분합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김두송
김두송 성경이면충분합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3d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8 July at 07:02 ·
나는 누구인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

얼마 전 원로신학자들의 좌담회에 초빙되어 가서 토론한 적이 있다. '기독교와 이웃종교의 대화'라는 주제지만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참여하였다. 덕분에 "한국 재래종교의 '구원'관"이란 논문도 6개월에 걸쳐 연구하여 게재해 보기도 하였다.
눈치빠른 이는 알아채었겠지만, 논문 제목에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이라고 한 것이 눈에 뜨일 것이다. 의미인 즉슨 '구원'이라는 이 단어는 정말 사람 몇 죽이는 무서운 단어이다. 주최측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그런 구원과 유비적인 유교, 불교, 도교의 '구원'에 대해 신학자들이 알 수 있게 써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See more
197You, Yuik Kim, 박걸 and 194 others
40 comments
10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9 more comments
김병수
김병수 구원보다 십원을 더 원하는 것이 삶의 본질적 실체입니다. 이는 생명살림의 실천적 자세를 이웃들에게 제시함이 종교의 본질적 요소가 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5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장정태
장정태 함석헌 선생을 연구하는 사람을 만나 조순명,박영호 선생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안색이 변했다. 얼굴이 변할만큼 금기어인줄 몰 랐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5d
최영찬
최영찬 replied

·
 3 replies
Kyungsan  Min
Kyungsan Min 제가 잘 몰라서 여쭤봅니다. 불교나 힌두교같은 경우는 모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배타적인 종교끼리 대화가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의미가 있을런지요. 전 별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특히 21세기에 종교의 영향력 자체가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는데 이제와서 대화를 해서 뭐하나...란 생각도 좀 듭니다. 차라리 법과 제도로 인권을 강화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 기독교의 경우 바로 자기자리 찾아갈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이 시대에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하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5d · Edite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유영재
유영재 공유하겠습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4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7 July at 07:40 ·
중국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중국의 씽크뱅크이며 중국의 인문학을 이끄는 그 곳에서는 화요일에 한 번씩 출근하여 자신의 연구성과를 공유한다.

당시 그 곳 세계 연구소에서 종교 연구자들이 가장 핫한 화제가 기독교였다. 기독교의 교세가 공산당원의 숫자보다 더 많아지는 것을 정권차원에서 우려하니 당연히 그들의 식사자리 단골주제가 기독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좀 더 단독직입적으로 말하면 공산당 통제아래에서 관리가 되는가였다.

그들 중에 '중화신학'을 만들자라는 의견도 있었다. 인도불교를 격의불교(불교용어를 노장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는 중간 경지)를 거쳐 선불교라는 독창적인 중국불교의 역사가 있으니 이런 발상이 그들에게 낯설지가 않다....
See more
216Yuik Kim, 박길수 and 214 others
22 comments
10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4 more comments
심인규
심인규 너무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3 replies
송상호
송상호 깊이 있고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송상호
송상호 replied

·
 2 replies
전준모
전준모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2:14)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2 replies
Dongul Lee
Dongul Lee 올바른 성경적 이론에 기반한 건강한 실천적인 삶..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할 구도자의 삶이지요.. …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7 July at 02:55 ·
새벽별님의 블러그에 실린 글을 공유합니다. 그 글이 밝고 맑고 깨끗합니다. 변찬린 선생의 "성경의 원리"가운데 성경론에 대한 리뷰입니다. 정성들여 쓴 글의 향기가 물씬 납니다. 그 글이 그 사람됨을 드러냅니다.

BLOG.NAVER.COM
성경론
​성경을 읽을 때면 글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생각을 바꾸고 내 몸을 바꾸고 내 마음을 바꾼다. 말씀이 ...
48박길수 and 47 others
3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6 July at 09:15 ·
우리는 우리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는지요? 나는 나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늘 열강에 부디끼며 생존해 왔기에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요! 유럽에 가면 작지 않은 나라이고, 적지 않은 인구입니다. 우리나라가 대단하다고 하면 늘 국수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을 학자들이 붙여야 할 정도로 우리는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요? 오랫만에 짬을 내어 글을 쓰지만 페북 친구 여러분 우리는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하지 않는지요? 세계 경제 11위 권 이런 거 언급하지 않습니다.
떨치고 일어나 오천여년의 짓눌린 역사에 지구마을과 우주촌을 향해 우리의 평화와 사랑을 목놓아 불러 봅시다. ...
See more
178Yuik Kim, 박길수 and 176 others
15 comments
4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3 more comments
감사
감사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심상열
심상열 좋은 글이지만 성경적이지 않네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것과 영생의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밖에 없다고 성경에 말씀 하고 있네요…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심상열
심상열 replied

·
 2 replies
성규일
성규일 다석과 함석헌선생은 꼭 만나야지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호
김호 시대의 사명!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헤처나가야 할 길입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김호
김호 replied

·
 2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6 July at 07:00 ·
포스트 종교운동의 다섯가지 지향점

첫째 종교를 왜 신앙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종교체험을 가지라.
둘째 창시자의 정신과 동떨어진 자본신앙(기복신앙)과 건물종교의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직업종교인의 종교권위에 저항하라
세째 건물성전을 해체하라...
See more
9696
4 comments
3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김병태
김병태 종교를 왜 신앙하는가? 하신 물음은 자기 신앙에 대하여 검토하고 메타인지하게 하는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사료 됩니다.
저는 성경적으로 아담이 맨 처음 세웠던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죄에 대한 의미는 우리가 이땅에서 삶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 한 것으로 봅니다. …See more
4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김병태
김병태 신앙의 주체가 자신이어야 됨은 공감합니다.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고 주체화하는 경향을 벗어나는 정신이 무소유와 무아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요?
4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6 July at 06:41 ·
1. 대학 시절부터 '종교'는 나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멀리 중국에 가서 중국도교와 신종교도 연구하게 된다. 그렇다고 어느 특정한 종교에 몸담은 적은 없다. 성경이 좋고 불경이 좋고, 사서삼경이 좋고, 물리학 등 과학도 좋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자양분을 삼으며 생활해 왔다.
(개인적인 학력과 경력의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출판된 책과 학술지들에 있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음)

2. 그러나 늘 성경속에 나온 예수의 말씀, 그리고 불경속에 있는 석가모니의 말씀과 이를 계승하고 있는 교회와 절, 그리고 그 속에 몸담은 구성원들은 실례지만 건물성전에 다닌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그 가운데 적지만 창시자의 모습을 따르는 분들도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
See more
223Yuik Kim, 박걸 and 221 others
30 comments
3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9 more comments
박성민
박성민 친구 되어 기쁨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Kim Young-ho
Kim Young-ho 사람 만나러 교회 갑니다. 괜히 왔다는 생각할때도 있지만 그래도 동반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양문석
양문석 이기적 '나'라는 입장이 선행될때 그 어떤 논의가 유의미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이타적 인물이었던 석가와 부처에 대한 믿을을 가장 이기적 기대에 바치고있는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종교인인가? 무엇보다도 예수와 석가는 믿는데 그들의 말씀은 어디갔는가. 손가락만 볼지언정 그 방향만큼은 달을 가르켰으면 좋으련만...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Eun Hi Yi
Eun Hi Yi 안녕하셔요? 첨으로 글 올립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 슈퍼마켓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소비자인 사람은 정작 자신의 욕구와 지향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대로 소비재에 엎어 넘어지는...? …See more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5 July at 15:17 ·
책을 읽다가 페북 친구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글이 있어 공유합니다. 한국의 세계적인 신학인 김흡영 선생의 "도의 신학"을 세계화시키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저술된 "가온찍기(다석 유명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 의 아주 적은 일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말보다도 하나님께 우리 몸을 대신하여 동물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몸제사에 있었는데 "오직 말씀"을 강조해 온 개신교의 영향으로 예배도 몸제사가 아닌 말예배로 축소되어 버렸다. 예배가 말제사, 말잔치가 되어 버리고 또한 신학이 글신학, 글잔치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리스도교가 말 종교에서 몸종교로, 말예배에서 몸예배로, 말신학에서 몸신학으로 본래의 모습대로 거듭나야 할 때이다. 다석은 이미 오래 전에 이와 같은 말예배에서 몸예배로의 복귀와 말신학에서 몸신학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주창했다고 할 수 있다"

김흡영, 가온찍기. 24 인용
187187
21 comments
4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5 more comments
윤인선
윤인선 울언니는 춤예배 시도하다
여신학자 모임에서 퇴출 당했는디 ㅎㅎㅎ
어이 없지라~…See more
Hide or report this
춤의 왕(송정미) 안동CBS 개국 4주년 기념 JOY4U CCM 콘서트
YOUTUBE.COM
춤의 왕(송정미) 안동CBS 개국 4주년 기념 JOY4U CCM 콘서트
춤의 왕(송정미) 안동CBS 개국 4주년 기념 JOY4U CCM 콘서트
1
Like
 · Reply · 2w · Edited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1 reply
유리
유리 귀한 말씀 읽을수 있게 친구되주셔서
기뻐요^^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유리
유리 replied

·
 2 replies
박성실
박성실 예수님도 제사가 아닌 말씀 예배로 천국잔치만 하섰던대 신약의 모든 사도 ㆍ신자들 문제 있다면 구원은 제사로 아님 회개로 부터인가‥? 이단도 제사가 아닌 말 로서 시작된다 조심할 때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신원섭
신원섭 책이 품절 되었더군요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신원섭
신원섭 replied

·
 2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5 July at 14:55 ·
한 구도자의 처절한 구도의 몸부림과 그 굳센 의지를 맘으로 영으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仙人掌 변찬린

내 모르괘라...
See more
6060
6 comments
1 share
Like
Comment
Share
Comments
진영우
진영우 변찬린?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2w
Hojae Lee
Hojae Lee replied

·
 5 replies
Sejin Pak
Write a comment...

Hojae Lee
15 July at 06:04 ·
제국주의 학문에서 탈피하여 우리 학문하자!

한국 종교계 종사자들은 수입학문, 식민학문, 번역학문은 그만하고 우리 학문을 합시다. 우리가 언제까지 수입학문으로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역할을 할 것인가요. 종교학자, 신학자, 철학자 등 인문학자들은 우리 학문, 우리 삶의 정황에 뿌리박고 사고합시다.
한예로 '종교다원주의'라는 것도 서구신학자의 제국주의형 발상입니다. 우리는 원래 다원적 전통에서 살아왔습니다. 존 힉, 파니카, 칼 라너 들먹이며 서구신학의 질문에 순종하며 대답하는 학생신학은 그만합시다.
차라리 분단한국에서 평화신학, 통일신학, DMZ신학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정황에 부합하는 인류차원의 주제가 아닌가요!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을 되살리고, 김흡영의 도의 신학을 평가하고, 우리 것으로 세계사유의 한계를 돌파합시다.
168You, Sunghwan Jo, 박걸 and 165 others
10 comments
6 sha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