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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3

Yipyo Hong 故 유동식 선생님을 그리워하며...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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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pyo Hong

故 유동식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소금(素琴) 유동식(柳東植, 1922-2022) 선생님께서 만 100세를 사신 끝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감신학보>("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 1962), <기독교사상>("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이해", 1963)의 두 글을 통해 한국 신학계에 토착화 신학 논쟁을 촉발시키신 분이다. '무교'(巫敎, 한국 샤머니즘)와 기독교를 고찰하신 유동식 선생님의 도발적 시도와 논쟁은, 이후 선배이신 윤성범 교수(유교와 기독교), 후배셨던 변선환 교수(불교와 기독교)의 참여까지 이끌어 내, 토착화 신학 담론을 감리교 신학의 중심에 놓으셨다. 이는 종교간 대화를 통한 화해와 평화의 모색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계, 교단에서의 거부감이나 내홍은 만만찮았고, 1992년 감리교 종교재판 사태는 그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고교 시절 접한 이 사건이 안긴 충격파가 없었다면 나도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유동식 선생님은 그렇게 우리 형제를 이 바닥(?)으로 이끄신 원점에 서 계신 분이시기도 하다.
군대 제대 후(2000년) 동생 홍승표 목사가 감신대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할 때 유동식 교수님을 강연자로 모시고자 봉원동 자택을 찾았다. 그 때 나는 너바나( Nirvana)의 커트 코베인(Kurt D. Cobain, 1967~1994) 티셔츠를 입고 찾아 갔는데, 내심 걱정한 것이 사실이다. 학교에서 만난 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교수는 내 옷을 보고 경박스럽다거나 불교 용어가 적혀 있다고 꾸짖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고령의 유동식 선생님은 너무나 온화하게 환대해 주셨고, 내 티셔츠를 유심히 보시더니, "열반(涅槃, Nirvana)이라고 적혀 있구만... 아주 심오한 옷을 입고 왔어...!"라고 하시며 복장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내 마음을 녹여 주셨다. 그리곤 쌍둥이 형제가 신학을 하게 된 계기를 물으시기에, 1992년 종교재판 이야기를 하니 한참을 서글퍼하시더니 두 사람의 사명이 크다고 격려해 주셨다. (변선환 교수와 함께 파문을 당한 홍정수 교수는 동향의 모교회 출신이기도 하다.)
젊은 학부 신학생 둘을 귀찮아하지 않고 몇 시간을 이야기 나누며 자신이 새롭게 진행 중인 ‘예술신학'에 대해 조곤조곤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때의 인연으로 감신대 강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연신원 옛 건물에서 개설하셨던 '예술신학' 대학원 강의도 청강했으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원우회 활동을 할 때에도 채플 강사로 모시는 등 만남을 이어간 것은 여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동생 홍승표 목사는 1960년대에 유동식 선생님께서 맡으셨던 대학기독교서회 월간 신학지 <기독교사상>의 편집장으로 4년간 일하면서 그 길을 이어 받는 영광도 누렸음은, 20대에 불쑥 찾아 뵈었던 때의 그 만남을 더욱 각별한 인연으로 느끼게 한다. 홍승표 목사의 박사논문은 한일 칼 바르트 신학의 수용 과정을 고찰하기도 했는데, 그 때 일본 경유의 왜곡된 바르트 신학을 탈피해 해방 후 처음으로 허혁 등과 함께 주체적인 바르트 읽기를 시도한 분으로서 유동식 선생님을 소개하는 등, 그분의 현대 신학사 속 위상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2005년 5월 30일에는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일본 도시샤사대학 신학부 모리 고이치(森孝一) 학장이 와서 '일신교에의 도전과 기독교의 책임성'(The Challenges to the Abrahamic Religions and the Responsibility of Christianity)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내 얼굴을 알아 보시고는 옆에 앉아 함께 내용을 경청하셨다. 나는 그 때 일본어를 전혀 못 알아 듣고 있는데, 일본어 강연을 전부 이해하시며 정성껏 필기를 하며 후배 학자의 주장에 경청하는 모습에 절로 존경심이 일어났다.
수년 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기독교인과 신도(神道) 이해"라는 주제로 연구를 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유동식 선생님의 뒤를 밟아 가고픈 후학으로서의 자연스런 동경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교토대학에서 이 주제를 다루려 할 때, 지도교수가 처음으로 소개해 준 책이 바로 호리 이치로(堀一郎) 교수의 『민간신앙』(民間信仰)라는 책이었다. 호리 선생은 다름 아닌 유동식 교수의 도쿄대학 및 국학원대학 지도교수였던 분이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와 절친으로 그의 책을 일본어로 옮겨 소개한 대표적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호리 선생의 책을 보면서 유동식 선생님과도 연결돼 있음을 느끼곤 했다.
유동식 교수님은 교토에 오실 때면, 교토의 도시샤대학 명예교수 다케나카 마사오 (竹中正夫, 1925-2006) 선생님을 꼭 뵈었다고 한다. 다케나카 선생은 교토대와 도시샤 신학부를 마친 뒤, 1950년부터 예일대학에 유학을 가셨는데, 마침 유학시기가 겹쳐 유동식 교수와 친분을 쌓으신 모양이다.
다케나카 선생도 『료우칸(일본 승려, 문학인)을 사랑한 그리스도인』(良寛を愛したキリスト者 小倉章蔵の生涯, 1992), 『와후쿠(기모노)의 그리스도인』(和服のキリスト者 :木月道人遊行記, 2001), 『미와 진실 : 근대 일본의 미술과 기독교』(美と真実: 近代日本の美術とキリスト教, 2006) 등의 책을 펴내시면서 일본의 전통 문화 및 근현대 미술 안에 깃든 기독교적 가치를 발굴하고 해석하셨다는 점에서 유동식 선생님과 지음지교(知音之交)의 벗이었다고 평가할 만 하다. 일본 불교의 성산인 교토 히에잔(比叡山) 기슭에 위치한 일본 크리스찬 아카데미(日本クリスチャン・アカデミー) 간사이 세미나 하우스( 関西セミナーハウス)에는 다케나카 선생이 수집한 기독교 미술 작품들이 진열돼 있어 그곳을 둘러 볼 때도 늘 화폭에 빠져 계실 유동식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었다.
유동식 선생께서 연희전문 수물과 시절 함께 다녔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5년 2월 너무나 일찍 별이 되었고, 도쿄 유학 시절의 스승 호리 이치로도 진작에 떠나 가셨으며, 우리 형제에게 다과를 대접해 주셔던 사모님(윤정은 전 이대 교수)도, 붕우 다케나카 마사오 선생도 모두 떠나고 없는 이승에서의 여생은 생각보다 너무 길어지신 탓에 만년은 지치지 않으셨을까 싶다.
이제는 다 훌훌 털어 내시고 그립던 분들을 다 만나며 회포 풀고 계시겠지... 나도 언젠가 때가 도래하면 다시 너바나(Nirvana) 티셔츠 꺼내 입고 유동식 선생님과 해후할 수 있기를... (산돌배)
....................................................
(*아래는 유동식 교수님께서 기독교사상 지면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쓰신 글을 일부입니다. )
<기독교사상>2002년 1월호, 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9)

무교와 한국문화 (유동식)

1. 우리의 마음 바탕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를 낸 이후 나는 항상 하나의 과제를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한국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종교적 영성을 본격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일이다. 복음이 뿌리내릴 곳은 우리들의 종교적 마음 밭, 곧 영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 또는 한국신학의 형성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영성의 구조와 특성이 규명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방대한 학문적 작업이 요청되는 일이다.
나는 1962년부터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일과 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의 일을 겸임해 왔다. 하루도 여유 있는 날이 없이 한 주간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이러한 속에서 본격적인 한국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단기간이라도 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꿈꾸어 왔다. 그것은 유학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국제선교협의회(I. M. C.)는 1957년 가나회의에서 제3세계의 신학교육 향상을 돕기 위해 신학교육기금(T. E. F.)을 창설했다. 1964년 연세대학교 안에 설립된 연합신학대학원은 이 기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서회는 이보다 앞서 1961년부터 T. E. F.의 원조로 신학교재 출판을 진행해 왔다. 1964년 말까지 이미 12종의 신학교재를 간행했다.
출판부장인 나는 자연히 T. E. F.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그 책임자인 코(Shoki Coe) 박사와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하루는 코 박사에게 내 연구계획에 대해 의논했다. 나는 동경대학에서 일년간 한국의 무교에 대해 연구할 생각이었다. 한국의 문화사와 더불어 존재해 온 우리의 무교는 우리들의 영성 또는 종교의식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동경대학을 택한 것은 그 곳에 민속종교 연구의 세계적 학자인 호리(堀一郞)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 박사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그 후 일이 급진전되어 호리 교수로부터는 연구 지도의 승낙을 받았고, 7월에는 T. E. F. 위원회에서 장학금 지급 통지가 왔다. 그러므로 1968년 9월부터 동경대학 문학부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해 정월부터 「기독교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한 “한국신학의 광맥” 시리즈는 이로 인해 연말까지만 쓰고 중단해야만 했다.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3회분의 원고를 쓰느라고 진땀을 흘렸던 생각이 난다.
호리 교수를 통해 배운 것은 그의 친구인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이다. 특히 그들의 공통관심의 대상인 샤머니즘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틀을 얻을 수 있었다.
동경대학에는 논문박사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논문을 쓸 작정이었다. 호리 교수와 함께 작성한 논문의 윤곽은 “조선 샤머니즘의 역사 구조적 특질”이었다.
그 해 동경대학은 격렬한 학생운동에 휘말려 결국에는 학교 제도상의 변혁을 초래했다. 그 중의 하나가 교수들의 정년을 60세로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60세를 넘어선 호리 교수는 다음 해에 퇴직해야만 했다. 그리고 국학원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문학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완성한 것은 1971년 말 경이다. 논문은 자연히 지도교수가 있는 국학원 대학에 제출했다.
6개월 후에 논문심사가 있었고, 학위수여식은 1972년 9월에 있었다. 이때 마침 집사람이 세익스피어 연구차 영국 엑세타 대학으로 가던 길이었으므로 동경에 들러서 학위수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조선 샤머니즘이란 “한국 무교(巫敎)”를 뜻한다. 그 원형은 고대 신화와 제천의례 속에 나타나 있다. 곧 천지의 주재신인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신의 능력에 힘입어 인간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꿈의 중심은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생존적 가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신인합일의 의례는 노래와 춤에 의한 제례의식이다. 무교란 단적으로 “가무로써 강신케 하여 소원을 성취한다는 원시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무교의 전승과 전개에는 세 흐름이 있어 왔다.
첫째는 단순전승이다. 외래 종교문화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옛 모습이 그대로 전승되어 가고 있다. 오늘의 민간신앙으로 알려진 무속의 흐름이 그것이다.
둘째는 종교습합적 전승이다. 대체로는 외형상 외래 종교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그 안에는 무교적 요소들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성종교의 저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셋째는 승화적 전승이다. 외래 종교를 매개로 무교가 승화되어 새로운 형태의 종교문화를 형성한다. 예컨대, 신라의 화랑도나 근세의 동학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전개 유형을 그림으로 그려 본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샤머니즘은 동북아시아 제 민족 사이에 공통된 종교현상이다. 그러나 각 민족마다 그들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그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 무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노래와 춤으로써 신령을 섬기는 심미적 종교성에 있다. 따라서 퉁구스나 일본의 굿이 주로 죽은 자들을 천도하기 위한 음산한 제례인데 비해, 한국의 굿은 무악을 동반한 재수굿이나 농악을 앞세운 마을굿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승에서의 기복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민중의 오락을 겸한 명랑한 것이다.
여기에 한국 무교가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삶을 부추겨 온 종교적 역할이 있다.

2. 무교문화론

1973년 3월부터 나는 연세대학교 교양학부의 종교주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박대선 총장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정확히 20년 전에도 나는 배화여고의 종교주임으로 취임했었다. ‘종교주임’이라는 것이 나의 천직인 듯이 느껴졌다.
한 가지 새로운 경험은 내가 홀로 쓸 수 있는 교수연구실을 갖게 된 일이다. 나는 비로소 내 연구를 위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장소와 함께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유신체제 하의 1975년은 어둡고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민주주의란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하게 한 대통령 긴급조치법에 의해 학생들과 교수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학원의 자율과 자유를 천명한 박 총장은 죄인으로 몰려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그러한 와중에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연구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년에 받은 대학원의 연구비 덕택으로 “한국 토착신앙과 민중의 불교 수용 형태”(「연세논총」)를 발표했고, 이에 힘입어 성곡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한·일 불교 수용 형태의 비교 연구”에 몰두했다. 한편 나는 내 학위논문을 다시 보충해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연대세 출판부)란 제호로 간행했다. 그 책의 맺는 말에서 나는 일종의 무교문화론을 폈다.
한국 문화의 깊은 암석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불교문화이다. 그 위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유교 문화이다.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남짓한 동안에 형성된 지표층이 있다. 곧 기독교를 동반한 서구문명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문화의 지층은 최소한 세 겹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문화는 단순히 세 겹의 문화층으로 된 둥근파가 아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한국문화의 심층부에는 지핵에 해당하는 무교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외래 종교 문화들을 받아들여 문화지층을 형성해 왔던 것이다.
한편, 문화지층들은 무교의 지핵을 억압하고 배척해 왔다. 따라서 무교는 문화의 표면으로부터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무교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문화의 심층에서 여전히 그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들의 행동 양식이나 가치체계를 적지 않게 지배하고 있다. 무교의 뜨거운 열량은 여전히 민중문화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지열이 창조적인 열량으로 전환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문명의 창조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세계문명은 그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새로운 문명이 싹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나비는 새로운 종류의 번데기에서만 나올 수 있다. 이러한 새 번데기를 무교에서 기대해 본다는 것이 무교문화론의 방향이다.
무교의 특질은 가무에 의한 제례를 통해 신화적 원초세계로 돌아가는데 있다. 그 곳은 신과 인간이, 하늘과 땅이, 삶과 죽음이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루는 창조적 세계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문화의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기독교의 도리는 그 동안 헬라와 로마의 아폴로적인 이성과 질서를 통해 세계 구원의 역사를 도모해 왔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서구문화가 갖는 한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도리를 재해석할 새로운 틀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자유와 황홀의 길이다. 가무강신하는 심미적 신인통합의 길이다. 곧 무교문화의 틀을 통한 복음의 재해석이다.
무교문화론은 결국 엑스타시 문화론이다.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된 엑스타시 속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문화이다. 삶은 거리를 두고 관망할 대상이 아니다. 삶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곧 예술이다.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삶이 곧 종교이다. 임마누엘은 삶과 자기와의 완전한 통합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자유와 기쁨의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쓰레기를 먹고 통제와 경제개발을 외치며 일어선 유신독재체제 속에서 무교 연구에 열을 올린 것은 이러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공감이나 한 듯이 <한국일보>가 제정한 출판문화상은 그 해의 저작상 대상으로 내 책을 선택했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도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내 학위논문이 『조선의 샤머니즘』(학생사)이라는 제호로 간행되었고, 또 하나는 그간 김충일 씨가 번역해 오던 『한국종교와 기독교』(양양사)의 일어판이다.
그런데, 이 무렵에 박 정권은 비판세력을 없애기 위해 교수 재임용제라는 것을 발표했다. 명분인즉 연구실적이 없는 무능한 교수들을 제거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각 대학별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의를 했다. 교양학부의 교수들은 전공에 따라 각 대학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탈락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신과대학만은 나를 재임용 교수 명단에서 탈락시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3. 무교 미술과 한국화의 뿌리

미술사의 전개는 종교적 이념의 형상화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미술사 역시 한국의 종교문화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 고대의 무교 미술은 불교미술로 이어졌고, 근세로 오면서 유교적 동양화가 전개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문화와 연계된 서구의 미술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세계의 미술사가 오늘의 한국화라는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화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역시 무교 미술일 것이다.
무교 미술의 전형적인 것은 고분 벽화나 무신도, 그리고 일부 민화에서 볼 수 있다. 그 특색은 무교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곡선과 채색으로 그려졌다는 데 있다. 그 사례를 들어본다.
① 고구려의 사신도
(중략)
② 신라의 천마도
(중략)
③ 창부도
중국문화의 기준으로 보아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선진 중국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려 하지 아니했다. 6세기에 이르러 진흥왕은 대륙문화를 매개로 전통문화를 승화시킴으로써 주체적인 민족문화를 구축해 나갔다. 그것은 화랑제도를 설치하고, 민족의 얼인 풍류도를 왕성하게 함양하는 것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고대 원시종교로서의 무교는 민중들의 신앙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무속이요, 샤머니즘이다. 가무강신하고 소원성취한다는 종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노래와 춤으로써 신령들과 교제하는 무당이다.
무당은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종교적 예술가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초의 직업적 예술가였다. 이러한 무당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는 것이 광대신인 창부이다. 창부는 말하자면 한국의 예술신이다.
무교의 신상은 전통적으로 그림으로써 표현한다. 현실을 뜻하는 삼차원의 입체적 신상을 만들지 아니하고 이차원적인 그림을 사용한다. 그것은 동방교회가 성상으로 이콘을 사용하는 것과도 같다.
무신도의 사용 역사는 이미 오래다. 12세기 이규보의 시문 속에도 무당들이 신당을 차린 다음 제석신이나 칠성신 등을 그려 놓고 굿을 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노무편).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굿당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인왕산 중턱에 있는 국사당이다. 그 곳에는 10여 폭의 무신도들이 걸려 있는데, 그 중 예술적으로 뛰어난 그림은 역시 <창부도>이다. 도포를 입고 빛갓을 쓴 창부가 피리를 불며 멋드러지게 춤을 추고 있다. 피리 하나만 빼고는 전체가 율동적인 곡선으로 그려져 있다. 그 생동감은 <천마도>나 <백호도>를 연상케 하며, 청·홍·황색과 흑백의 조화는 더욱더 고분 벽화의 전통을 실감케 한다.

글쓴이 / 유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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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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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Choong Lee

학부 때 아쉽게 유교수님 수업을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그 때는 유교수님의 책이 참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면, 참 귀한 우리 신학이었구나 싶습니다.



최문영

올려주시는 글들이 일반 성도에게는 어려울 때가 많아서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존재 자체를 몰랐던 유동식 교수님의 업적을 글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고인이 이표, 승표 오빠에게 영향을 끼친 것처럼 후학들에게도 앞으로 큰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주님 곁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계시겠지만 더 긴 시간 함께 하지 못해 슬픔으로 마음이 많이 아플 교수님 가정 가족들의 평안과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Seung Pyo Hong

최문영 문영아 반가워^^; 늘 한결같은 모습에 감사하구나. 언제 때가 되면 직접 만나 회포를 풀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건강하고 평안하길...


Yipyo Hong

최문영 고마워. 같이 송감에서 지낼 때 늘 진지하고 성실한 문영이 모습은 귀한 자극이 되었던 기억이 나... 지금도 여전한 그 모습이 얼마나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최문영

Yipyo Hong 어른이 되어서 알았습니다. 쌍둥이 오빠들이 도전적인 일을 많이 했었다는 것을요.^^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 신앙생활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공유해주시는 일본 소식과 취미생활 그리고 거침없는 정치적인 발언들 잘 보고 있습니다.*^^* 평안과 건강을 기도합니다.~*

2022/08/22

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 뽐뿌:종교포럼

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 뽐뿌:종교포럼



포럼 > 종교포럼

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1
Humble_David2012-09-17 11:17 | 조회 : 7212 / 추천 : 1
링크 : http://humbledavid.woobi.co.kr/42



박성업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실제로 어제 좀 정리해서 글을 써봤습니다.
근데 사실 정리가 안되어서 다시 쓸려고 고민중입니다.
거기다가 박성업 fb에서 몇몇 논쟁을 하면서 더 신기한 사실들을 발견했거든요 ^^

여튼 박성업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도 있는것 같아서 글 나눌려고 가져옵니다 :)



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이 사람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한국교회에 대한 비참함이 생긴다. 마음이 너무 안좋다.

01.
가끔 나는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적 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무성할때에 다른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독특한 "관점"이 생길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것자체가 "성령"을 잘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때만 생각하면 완전 부끄러움ㅋㅋㅋㅋㅋ) 때로 그런 독특한 관점을 썰로 풀다보면 평생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기독교적/공동체적/신학적/신앙적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또 제자그룹을 이끌기도 하고 이렇게 평생 글만 쓰고 강의만 불려다니며 사는 것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과연 나는 그런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치열한 고민이다.)

그런데 솔직히 "박성업"이란 인물과 그러한 인물로 일어난 "박성업 현상(?)"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하다보니 참 내 스스로에게 한심한 생각들이 많이 든다.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적 인물을 언급하거나 비평하는 글들을 써왔고 주변 후배들에게도 참 많은 기독교 인물들을 비평했다. 일례로 김동호 목사님, 이찬수 목사님, 전병욱 목사, 박옥수 목사 등이었다. 뭐 그런데로 이런 분들을 언급하고 비평하는 것들이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기 인물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맥락에 있어 흐름을 짚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성업이란 인물을 내가 구지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박성업현상 혹은 박성업에 대해서 내가 언급할만큼 그의 사상이 파격적이거나 혹은 뚜렷한 색을 가지고 있을까? 흠.... 솔직히 지금까지는 기분이 찝찝하다.

02.
일단 박성업을 까기전에 소위 나 스스로의 흑역사(?)부터 고백하고 가야겠다. 나는 2008년쯤부터 2010년까지 횟수로 따지자면 약 3년에 걸쳐 소위 "신사도운동". 즉 성령운동에 빠져있었다. 이른바 성령, 은사, 체험등을 무시하는 기존 교단에 대한 반항행위였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독교의 단면을 경험하고 싶었던 연유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쪽 계열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또 인터넷 카페를 살펴보니 대부분의 은사주의가 "시한부적 종말론"과 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한때 한국교회를 24시간 기도신드롬으로 물들였던 IHOP도 시한부적 종말론을 갖고 있다는 설이 있다.)

즉 "시한부 종말론"은 어떤 특정한 시간대가 오면 재림예수가 세상에 도래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재림신앙"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재림"의 도래가 어떤 구체적 방법을 통해서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경의 특별한 예언적 해석(그런게 있나?)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풀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할 사실은 성서는 우리에게 "대언"하는 것이지.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미래를 예견하고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일종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말은 방법론에서부터, 즉 시작부터 틀렸다. 그리고 구약성서 전반적으로 기대하는 "종말"은 비참하고 우울한 심판의 개념이 아니라 권세들이 심판당하는 기쁨과 환희의 시간이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바르게 "재림"을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환희와 기쁨을 대망하며 소망을 가져야하는 것이지 마치 주인이 돌아올 것을 걱정하며 자신의 행위를 날마다 점검하는 종의 모습으로 기다리는 것은 구약성서를 싸그리 무시하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성서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참고로 다미선교회가 가장 잘 알려진 시한부종말주의자였다. 실제로 뉴스에서도 다미선교회를 생중계했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성령운동은 시한부종말론과 묘하게 결합된다.(실제로 다미선교회 출신의 성도들이 대부분 현 성령운동하는 교회로 흡수되었다) 그 이유는 시한부종말론을 대망하는 많은 성도들이 신비를 많이 경험했던 연유때문이다.(예언이라던가 환상과 관련된 부분..) 즉, 성령운동하는 교회는 그런 은사자를 필요로 하고,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자신을 환영할 새로운 "교회"의 토대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운동"의 큰 두 맥락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존 오스틴, 조엘 오스틴, 케네스 해긴, 조용기 등으로 대표되어지는 "믿음운동"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성도의 성결"과 "성령의 나타남"에 대해 크게 연관시키지 않는다. 마치 구원이 절대적 은총의 행위듯이, 성령의 나타남도 절대적 은총의 행위라고 말한다.(저런 인물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면 우리나라 기도원운동역사에서 주로 찾을 수 있는 "성결운동"이 있다. 소위 산속에 숨겨진 은사주의 단체에서 주로 발생하는 이러한 "성결운동"은 기본적으로 "성도의 성결"과 "성령의 나타남"을 인과관계로 묶어버린다. 극단적 성결을 통해서 성령의 나타남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마치 무당의 신내림굿을 갈망하는 행위를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성결운동"은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주 흐름이다. 그리고 이런 산속에 숨어져있던 기도원에서 나타나던 성령운동의 흐름이 영동제일교회, 큰믿음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라는 틀과 또 부흥회라는 형식을 만나면서 한국교회 전반적으로 보편화된다. 실제로 그쪽 교회들은 "성결"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러한 시한부종말론의 흐름, 성령운동의 흐름, 성결운동의 흐름. 이 모든 흐름이 짬뽕으로 얽힌 것이 바로 소위 "박성업 현상"이다.

03.
실제로 나 스스로가 신사도운동에서 회심하게된 계기가 바로 "박성업"이었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모든 성령운동, 성결운동, 시한부종말론의 극단적 모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등장은 "데이빗 오워"라는 용하게 예언한다던 선지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근데 묘하게도 데이빗 오워는 그런 박성업의 극단적 모습과 흡사한 메시지를 전국적으로 선포하고 다닌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의 예언은 빗나간다.(물론 회개가 한반도 전쟁위기를 막았다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겠지만ㅋ)

여튼 박성업을 철저하게 까발리기전에 일단 그에 대한 칭찬부터 해주고 가자. 그게 예의인것 같다. 그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나름의 삶을 모두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겉모양을 취한 사람이다.(그의 삶의 괘적이 어찌 변할지는 모르니 그가 아예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보기엔 그는 분명 진심이 가득한 열정적 사람이다. 마치 사도 바울을 보는 것 같다.) 또한 그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자신이 믿고 있고 견지하고 있는 바를 대단하게 열정적으로 말한다. 또 그는 돈, 여자, 명예에 큰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의 두 눈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 가치에 고정되어있다. 그는 분명 명예와 타협하고, 물질주의와 타협하고, 겉모습은 "형제님", "자매님"하지만 내면에 감춰진 억제된 무수한 음란함을 가진 일반적 한국교회와는 분명 비교되는 모습이다.(물론 실제 그의 삶을 잘 몰라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수많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열정적인 사람에게 소위 "마음"을 주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고뇌가 필요하다. 왜 우리는 한국그리스도인 청년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는가? 왜 데이빗오워나 박성업 따위에게 왜 홍대새교회따위에게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는가?)

04.
박성업을 먼저 까야할 것은 "거룩"의 관점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까는 이유는 현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하고 개념을 정리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좌절하고 "죄책감"에 빠지게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룩'이 무엇인가? 하느님은 "거룩"하다고 해명되어있는데 하느님이 왜 '거룩'하며 그가 거룩한 것처럼 우리가 '거룩'해야한다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인가?

'거룩'은 구별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문제, 주초문제, 도덕성문제에 주로 적용시킨다. 그래서 혼전순결을 주장하고 주초를 금지하며 또한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솔직히 따져보자. 그러한다면 "물질"에 대한 거룩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일조"인가? 왜 정규직의 취업을 원하는 일반인과 구별된 모습을 위해 "비정규직"을 원하지는 않는 것인가? 왜 높은 연봉의 직장을 원하는 사람들과의 구별된 모습을 위해 저연봉 혹은 자발적 봉사를 택하지는 않는 것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그럼 따져보자. 하느님이 '거룩'하다는데.. 그럼 하느님은 성관계를 왜 만드셨는가? 왜 담배와 술이 있게 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물론 이런 주장에 체계적으로도 반박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의미는 '거룩'에 대한 문제다. 하느님이 왜 거룩한가? 어떤 면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은 피조물과 달리 구별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즉 피조물된 우리 모두와 구별되어있다는 신에 대한 경외함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하라"는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의 단순한 행위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즉, 하느님이 피조물과 다른듯이 히브리민족 또한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는 그들만의 표현인 것이다.(그랬기에 그 거룩을 드러내기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즉, 히브리인들은 "구별된 존재"를 드러내기위해 율법을 지킨 것이지. 율법을 지켜서 거룩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린 스스로가 하느님앞에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이는 dogma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것이다.(마치 사랑의 언어가 다른것처럼)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한 삶'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단순히 상식적으로 사는 삶에 불과하다. 왠만한 상식적인 사람이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면 살 수 있는 삶이다. 그러한 삶의 방식에다가 '거룩'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런 면에서 박성업의 거룩에 대한 관점은 하느님을 심각히 모독하고 있다. 그는 분명 대중가요와 모든 미디어매체가 사단에 의해 오염되었다며 '백워드매스킹'이라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했다. 한번 따져보자. '사단이 세상 신'이라는 성서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그 말씀은 하느님의 통치가 임박했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박성업은 그러한 사단의 존재를 온 세계의 왕으로 높여주었다. 그리고는 미디어를 쥐고 모든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왕중의 왕으로 높여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미디어에 대한 사단의 괘계앞에 무능한 하느님에 대한 모습을 만들었다. 그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적합한 반응은 무엇인가? 바로 미디어와의 단절이다. 즉, 우리의 하느님이 무능하니 우리는 사단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된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지키기위해(?) 미디어와 단절되라는 명령이다. 물론 미디어에 중독되고 미디어에 사로잡히다보면 인간의 주체성은 소멸된다. 하지만 그러한 의견이 단순한 개인에 대한 주관적 "권면"일 경우와 공동체를 향한 도그마가 되어 객관적으로 선포되는 경우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거룩이 그러한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왜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었는가? 이 성서의 고백은 우리가 개념화하고 카테고리화한 거룩의 개념과 하느님의 거룩의 개념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반증이다.

하느님의 거룩.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앞에 구별되었다는 성서의 증언이다. 그것은 철저히 피동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철저히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개인마다 주관적으로 그러한 하느님의 거룩이라는 행위에 반응하는 부분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그 행위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구체적 응답의 행위를 카테고리화한다거나 정형화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광대하심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05.
그리고 박성업을 까는 이유는 "무비판적 우경화"이다.

실제로 그가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 백워드매스킹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세력과 미국의 정치적 극우주의자들이 만나서 만들어진 가르침들에 불과하다. 실제로 유럽의 에큐메니컬하고 사회참여적이며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마치 예수의 삶과 흡사한 성령운동(진첸도르프의 공동체, 때제공동체)과는 달리 북미오순절운동은 체제에 대해 순응적이고 또한 전쟁에 대해 예언하고 권면하며 전쟁을 위해 기도한다.(중동 vs 미국의 대결구도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공화당 정권을 지지하고 공화당 지도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예언한다. 또한 그러한 북미오순절운동의 대부분의 거물급 인사들은 이미 사회적 지도층이다. 이들의 삶의 자리는 과연 예수를 닮았는가? 아니면 헤롯을 닮았는가? 나사렛사람을 닮았는가? 아니면 로마인을 닮았는가? 히브리인을 닮았는가? 아니면 애굽왕 바로를 닮았는가?

실제로 내가 구독하는 대다수의 목회자의 페이스북중에 가장 많은 "좋아요"를 누르게끔 만드는 새물결선교회의 김요한 목사님의 페이스북에는 오늘 "교인들의 보수화, 기득권화"를 걱정하시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 초대교인, 바울, 히브리인 등등 성서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의 삶의 자리는 대다수가 피지배층이며, 성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하느님의 모습은 그러한 피지배층의 신원과 탄원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반면 하느님에 의해 심판받는 쪽은 언제나 기득권측이다.)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전형적인 고백은 바로 산상수훈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됩니까?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교인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보수주의자가 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보수란 기존의 질서와 힘, 이해관계와 가치를 보존하고 파수하는 사람들입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지켜야 할 기존의 것들이 많아졌다는 뜻입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따라서 그들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그런 교인들이 늘어나면, 목사는 그런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보수적 가치에 기반을 둔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그러면 보수적 가치를 지닌 교인들은 그런 목사에게 더 넉넉한 생활과 활동의 보장을 통해서 보상을 해줍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이렇게 해서 양자간에 서로 상호공존하는 거래가 성사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ns="http://www.w3.org/1999/xhtml" class="text_exposed_hide">...ns="http://www.w3.org/1999/xhtml" class="text_exposed_show"> 그것은 자신의 부와 힘을 기반으로 이제 상당한 수준의 문화 현상을 체험하는 교인들의 전방위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교회가 다양한 종교 상품들을 개발하고, 그 상품을 매개로 해서 부자 교인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고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종교 상품들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변질됩니다.
목사는 종교 상품을 기획하고 개발해서 진열대에 올려놓기 바쁘고, 교인들은 그것을 소비하기 바빠지는 것이지요.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구조가 형성되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차원은 소멸되어 버리고,
우리가 시장에서 거래하는 종교 상품이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은혜를 대체하며,
우리가 그런 상품을 얼마나 많이 구매하고 소비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구원의 질이 결정된다는 아주 나쁜 생각과 가치관이 똬리를 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메가 처치 안에서 행해지는 화려하고 현란한 예배와 각종 훈련과 조직들이 다 이런 맹점을 띠고 있다는 것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치명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처치가 아닌 대다수 교회들 조차도 이런 구조를 부러움의 눈길로 ㅉㅗㅈ아가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From 김요한 목사님의 Fb



실제로 나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진보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반우경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내 삶의 자리가 피지배층의 삶의 자리이고 지배층의 정책변화에 따라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삶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반우경화. 즉 중도진보라는 색깔을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럼 나사렛인 예수, 히브리인, 바울, 초대교인등의 정치적 성향은 무엇일까? 물론 그들이 어떤 정당을 택하고 지지하겠느냐는 질문은 좀 부적합하긴하다.(특히나 민감한 이 시기에 ㅋㅋ)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분명 지배층과 대립해왔고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는 피지배층을 위한 메시지였음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박성업을 비롯한 소위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세력들은 이러한 "우경화"에 대한 성서적 인식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공산주의"를 사단으로 몰고간다.(전형적인 이승만 장로님의 "반공주의"논리요 MB장로님의 "반공주의"논리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를 실현해가던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그런 입장을 견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구체적 세력이 절대적 사탄의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면 지금 현 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과연 무엇인가? 그 또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을 방해하는 "사탄적"체제가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산주의"가 더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체제는 인간을 위협하고 본질적 행복을 방해하는 "사탄적"요소가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모든 체제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쩔수없는 인간의 본질이기에..) 허나, 공산주의만을 극단적인 사탄적 요소의 체제인 것처럼 몰아가는 행위는 잘못되었다.

또한 그토록 그들이 주장하는 통일, 북한민들에 대한 긍휼에 대한 부분에 대한 "방법론"은 딱딱하기만 할까도 솔직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이런 우경화된 기독교세력은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단의 앞잡이 혹은 김일성에게 공산화된 빨갱이로 취급한다. 그들의 이른바 "햇볕정책"이 북한에게 전쟁무기를 공급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방법이 동북아 속에서 남북공조와 남북통일로 이끌 수 있는 것일까?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가장 좋은 결과를 낸 정책들이 바로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 체제"는 사탄의 체제이며 그런 사탄과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고 정복해야만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그렇기에 그들은 우경화된 정치정책을 지지한다.)

06.
아 힘들다. 이번에는 두가지를 동시에 까보자. 바로 "신비주의"와 "근본주의"의 묘한 짬뽕이다.
실제로 "성령운동"의 장점은 바로 자유이다. 그러한 자유는 묘하게 모호성과 연결된다. 실제로 그러한 "성령"과의 교통을 주장하던 많은 단체들이 기존 교회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를 경험해왔고 그 자유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수많은 현안에 대해 실질적 참여로 연결되었다. (진첸도르프의 공동체도 그랬고 조지폭스의 퀘이커도 그랬다.) 이는 "신비주의"가 기존의 "문자주의" 혹은 "교리주의"와는 상반된 점이다. (물론 장점과 단점이 있겠지만..) 실제로 문자주의, 교리주의와 상반된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흐른 성령운동은 묘하게 자유롭게 흐르지만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서로의 다름은 묘하게 결합되어 시너지를 발휘한다. 그것이 바로 성령운동의 장점이다. 반면 상반된 문자주의, 교리주의의 단점은 바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있다. 무조건 교리, 문자라는 틀속에 개인을 무시하고 단체의 주장만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박성업은 "신비" 혹은 "성령"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의 주장은 "근본주의적"이다.(한국교회/미국교회에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을 동시에 추구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추구해서 얻은 성령의 계시, 깨달음은 묘하게 "말씀화"되어 "교조주의"라는 틀속에서 성도들을 억압한다. 성령운동의 장점은 서로의 환상과 계시, 경험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인데, 이른바 근본주의적 성령운동은 어떤 은사자의 환상, 계시, 경험들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가치로 인해 따르는 성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되고, 다른 경험을 한 성도들의 경험은 "혼탁하다"는 평가와 함께 무시당하면서 그러한 "절대적가치"는 점점 높아져만 간다. 그러다보니 은사자와 피은사자의 간격은 점점 커지고 교리주의, 문자주의가 지닌 강압성보다 훨씬 더 큰 강압성으로 성도들을 압박한다.(그들은 궁극적 하느님의 몇 안되는 체널러기에 ㅋㅋ)

그의 대부분의 글들은 그러한 근본주의적 성령운동의 단점을 뚜렷하게 띄고 있다.참고로 그가 올린 글 하나를 첨부해본다.

ns="http://www.w3.org/1999/xhtml">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는 없지만 신학은 공부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대화가 안통해서 깝깝해 미칠때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무슨 말을 해도 오로지 자기가 알고 배웠다는 신학 카테고리들 중 하나로 밖에 인식 못한다. "그건 은사주의, 이건 복음주의, 그건 세대주의, 그건, 이건...." 있는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 못나눈다. 자기가 공부했다고 하는 신학의 틀로 인식하는 것 외에는 그냥 유기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못듣는다. 마치 언어장애 걸린것 처럼.... 자기가 자부하는 지식 때문에 말이다.....
마찬가지로 신학뿐아니라 세상과 관련된 이야기도 지금 우리는 무슨 말을 해도 그냥 그 말 자체에 대한 유기적인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로 밖에 인식을 못한다.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이 말꺼내면 우파 저 말꺼내면 좌파..

From 박성업의 Fb



실제로 그가 느끼는 깝깝함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것 같다. 한국사회는 "정답"이라는 것이 뚜렷해야만 인정받는 사회다. 그러다보니 인문학보다는 실용적 학문이 인기가 많다. 그러다보니 신학조차 실용화되어버린다. 교리와 교리속에 담겨진 세계를 이해하기보다는 교리내용 자체를 달달달 외우고 말하고 서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교리와 교리속에 담겨진 세계를 경험할때 주어지는 자유로움보다는 딱딱함이 가득한 신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허나, 박성업 그는 딱딱함이 가득한 신비주의자다. 그에게는 신학적 통찰력도 없고 신학적 사유도 결여되어있다. 오로지 그에게 주어지는 신비적인 음성은 소위 "안통해서 깝깝해 미치게 만드는" 권위가 부여된다. 다른사람의 비판적 권면조차도 자기가 경험한 카테고리틀속에 주어넣어서 "유기적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행위"들을 보지 못한다. "마치 언어장애 걸린 것처럼 자기가 자부하는"신적 경험때문에 그렇다.

참고로 신비주의자들은 교회역사 대대로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항상 "위험성"이 존재했다. 허나 그들의 "위험성"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역사성". 즉, 내부와 외부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서 였다. 그러한 열려진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진 한계 자체를 스스로 보정하고 교정했다는 것이다.(실례로 빈야드의 존윔버가 그랬다. 그는 실제로 성령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지만 신사도운동의 모호하고 신비한 이야기만 하던 예언자/선지자들과 동역하다가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과거가 존재한다.)

07.
까다보니 깔게 너무 많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인 모든 행위들의 교집합. 아니 합집합이 바로 박성업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는 놀라울만큼 단순하다. 미디어의 영향을 최대한 피해야한다. 그리고 말씀 기도(라 부르고 그들만의 종교생활이라 부른다)에 전무해야한다. 또 예수에 목숨을 걸어야하며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또 북한정권이 무너지길 위해 기도해야한다. 또 진보적 개혁적 인사들이 정권에 집권하는 것을 막기위해 끝없이 기도해야한다. 요정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2000년이 넘도록 사회와 그리고 역사와 대화해왔다. 초대교회조차 구약에 주어졌던 야훼와의 역사와 대화했다. 또한 이방인교회들은 헬라철학까지도 대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이 경험한 신체험을 한없이 객관화시키고 사회속에 논증해왔고 해명해왔다. 그러한 작업들이 바로 "변증법"이다.

그러한 "변증법"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교리가 맞다고 우기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기독교교리를 해체하는 작업이었고, 더욱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틀에 맞춰서 예수와 하느님나라를 해명하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와 같은 부분을 언급하며 종교는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이야기했다.)

혹시라도 박성업씨 혹은 박성업을 따르는 성도들이 보고 있다면 딱 한마디만 들어줬으면 좋겠다. "대화". 이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대화"라는 종교적 행위는 사실상 주관적 경험으로의 몰입이다. 하느님은 제우스와 같은 초월적인 세상밖의 어떠한 존재 혹은 체널이 아니기 때문이다.(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는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과 다름없다. 실제로 틸리히는 존재와 실재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오히려 하느님은 역사속에 존재하고 역사속에서 우리와 만난다. 어떤 면에서 "역사가 심판한다"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역사와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나치가 멸망하기전에는 나치와 손잡았던 독일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겠는가? 예수를 죽였던 유태인의 후손을 살해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심판결과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다.) 물론 일부는 왜곡된 것도 있을테고 일부는 해석해야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 실체적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계시, 환상, 음성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도 가끔 경험한다.(요즘은 기도 잘안해서 모르겠다만;;) 허나 그러한 사건들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그러한 "관점"은 신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배워야되고 넓혀야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것이다.(신학은 오랫동안 하느님과 인간의 주관적 대화를 지속적으로 객관화시킨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을 무시할때 결국 모든 주관적 성령체험은 "자기에게로 몰입"이 되어버리고 스스로가 갇혀버리는 것이다.(실제로 이런식으로 이단이 되고, 소수종파가 된다.)

P.S
솔직히 너무 급하게 또한 어떤 주제를 물자마자 글이 쏟아져서 너무 난장판된 글이 된 것 같다. 언제쯤 차근차근 정리해서 올려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점은 명백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슬프다"는 것이다. 언제쯤 신학무용론과 "체험중심의" 극단적인 실용주의의 기독교현실이 회복되어질까? 아니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현실의 틀이요 배경이요 땅인 한국사회는 어떻게 회복될까? 지속적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정치적 혁신이 일어나면 가능할까? 아니면 주님이 오셔야만 가능할까? 참으로 한숨이 내쉬어지는 밤이다.

곧 정리해서 다시 올릴 것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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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쌔우 0 0

앗 좋은글감사합니다.
예전엔 데이빗님 블로그에 글보러 자주갔었는데 블로그가안들어가지더라구요ㅠㅜ

제 학교친구들(신학생들)중에도 박성업 친구맺고 좋아요누르는 녀석들 꽤 있던데 한숨이 절로나옵니다...

2015-09-10 10:26 * | 덧글

2022/05/14

알라딘: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김진호,이찬수,이충범 2012

알라딘: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김진호,이찬수,이충범 (지은이)자리(내일을 여는 책)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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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제목 그대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성서와 역사를 통해 재조명하고 있다. 모두 16가지 주제로 구성된 이 책은 매 주제마다 민감하고, 논쟁이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6가지 주제들은 기독교 신자이든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 선 사람이든 기독교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 그 자체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행태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과 관련 없이 반공의 뿌리 위에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방식에 철저히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권력화된 기독교는 어느새 자본과 정치를 넘나들며 자신들만의 성새(城塞)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는 과정은 결국 그 성새를 밑둥에서부터 부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업은 어떻게,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저자들은 기독교 본연의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왜곡된 뿌리를 걷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인바, 이 책은 그 작업을 위한 성서적 기반과 담론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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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사 교회의 정명正名, 사회의 정명正名
머리글 교회가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의 여러 이야기들, 그것으로 이웃과 대화하기

1장 유일신 _‘신상神像 없는 신앙’ 혹은 ‘반권력의 파토스’
2장 정통과 이단 _이단, 역사적 싸움에서 패배한 정통
3장 내세 _영혼의 구원에 대한 강렬한 열망
4장 구원 _죽음의 대속론을 넘어 부활의 속죄론으로
5장 창조 _비과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찰의 출발
6장 종말 _신체적 종말과 영원한 생명의 묵시적 이중나선
7장 성직 _목회는 본디 섬김이다
8장 성찬 _가장 낮은 이들에게 베푸는 평등의 밥상
9장 안식일 _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해방’의 날
10장 교회 _교회는 속죄의 목욕탕이 아니다
11장 사도신경 _배타성의 상징이 된 금관의 예수
12장 영과 육 웰빙 _시대의 ‘구원불평등’을 읽는 키워드
13장 결혼과 가정 _평등한 창조를 부정하는 순종론을 깨라
14장 교회와 여성 _원죄라는 편견이 만든 부정不淨의 여성관
15장 타종교와 이웃 _교회의 길이 아닌 그리스도의 길에 서라
16장 성전聖戰 _거룩한 전쟁, 성서는 이를 옹호하는가?

추천글

성전화·권력화된 한국 기독교에 던지는 근원적 물음
점점 성전화·권력화·화석화되어 가는 한국 교회가 교회 본연의 정체성과 역할을 재인식하므로 이 시대를 사는 한국 기독교인 모두에게 기독교 신앙이 줄 수 있는 활력과 역동성을 되찾도록 하는 일은 현 한국 교회에 주어진 최대의 과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김진호 목사님을 비롯하여 이런 과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몇몇 의식 있는 분들이 엮어내는 이 책은 두 손 들어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나 일반 지성인들이 모두 읽고 한국 기독교 활성화를 위한 대화의 장이 더욱 활발해지기 바란다.”
- 오강남 (종교학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신자유주의 성전이 된 교회를 향한 단호한 질문
“극우독재의 ‘하면 된다’ 구호에 ‘믿으면 받는다’로 호응하면서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부흥을 한 한국 개신교 교회는 신자유주의, 즉 자본독재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물적 기반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교회개혁’이라는 주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교회개혁은 교회임을 전제로 한 노력과 싸움이지만 그 교회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 교회들은 소박하게 말하면 교회를 가장한 상점들이며 제대로 말하면 신자유주의의 성전이자 회당들이다.”
-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저자 및 역자소개

구미정 (지은이) 
신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글 쓰고 강의하는 기독교 인문학자. 진지하고 심각한 신학 풍토 속 그녀의 이야기 신학은 자유롭고 경쾌한 놀이를 지향한다. 나아가 말과 글로 삶의 지혜를 나누는 창조적 놀이가 운동이 되어 교리와 교권, 현존 질서와 체제에 눌려있는 생명들이 하늘 숨을 쉬게 되기를 소망한다. <두 눈 그 너머에서 세상을 보다>(공저), <구약 성서, 마르지 않는 삶의 지혜>, <교회 밖 인문학 수업>, <두 글자로 신학하기>, <한 글자로 신학하기> 등 여러 책을 지었다.
최근작 : <그림으로 신학하기>,<십자가의 역사학>,<죽음준비교육 20강> … 총 25종 (모두보기)

김진호 (지은이) 
안병무 선생의 제자로서 그가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와 한백교회의 연구원과 담임목사였고, 계간 [당대비평]의 편집주간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연구실장으로 활동했다. 민중신학자이자 비판적 지식의 기획자로서 한국사회와 교회의 불편한 공존에 대해, 그리고 민중의 숨겨진 그림자를 찾는 것에 관한 글을 써왔다. 주요 저서로 『성서와 동성애』,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리부팅 바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예수의 독설』, 『반신학의 미소』 등이 있다.
최근작 : <길 없는 길 위에서>,<인간 너머의 인간>,<바이러스에 걸린 교회> … 총 56종 (모두보기)

이찬수 (지은이)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 더보기
최근작 : <보훈, 평화로의 길>,<독립.호국.민주의 미래와 보훈의 가치>,<보훈학 개론> … 총 58종 (모두보기)

이충범 (지은이) 
연세대학교(문학사)와 감리교 신학대학교(신학사)를 거처 드류 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석사(M.Div)를, 대학원에서 중세신비주의 연구로 철학박사(Ph. D)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학교 신학부의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세미시문화사, 문화신학, 일상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노래로 듣는 설교》《중세 신비주의와 여성》《종교인의 연애》(공저) 《아시아공동체와 여성》(공저) 《다문화와 여성신학》(공저) 《창조신앙 생태영성》(공저)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은 기독교 이야기》(공저)《 한류로 신학하기》(공저) 등이 ... 더보기
최근작 : <아시아 공동체와 평화>,<종교인의 연애>,<한류로 신학하기>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자본과 물신(物神)의 노예가 된 기독교를 정명(正名)하라!
13인의 기독교 연구자, 새로운 기독교 개혁의 촛불을 들다.

1990년대 초 개신교의 성장이 정체되고 교세가 감소하고 있다는 지표가 발표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위기론’은 교계에 점차 고조돼 왔다. 위기가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도 수가 줄고 있고, 문을 닫는 교회도 많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목사를 ‘먹사’로, 평신도를 ‘병신도’로 비아냥거리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할 정도로 개신교의 사회적 평판은 매우 부정적이다. 심지어 기독교는 사라져야 한다며 기독교 타도를 외치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무수히 생겨나고 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키워드는 황금만능, 물신숭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로 집약되는 공격적인 선교 행태와, 믿음은 곧 구원이라는 그릇된 대속(代贖)론이 배타성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의 위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안티 기독교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는 오늘의 상황은 기독교 자체의 근원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의 근본적 물음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것이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인지 아니면 기독교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외면, 왜곡하고 있는 것인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성서와 역사를 통해 재조명하고 있다. 모두 16가지 주제로 구성된 이 책은 매 주제마다 민감하고, 논쟁이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6가지 주제들은 기독교 신자이든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 선 사람이든 기독교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 그 자체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행태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과 관련 없이 반공의 뿌리 위에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방식에 철저히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권력화된 기독교는 어느새 자본과 정치를 넘나들며 자신들만의 성새(城塞)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는 과정은 결국 그 성새를 밑둥에서부터 부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업은 어떻게,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저자들은 기독교 본연의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왜곡된 뿌리를 걷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인바, 이 책은 그 작업을 위한 성서적 기반과 담론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다음의 글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일반적 가르침 중에도 경청해야 할 것이 있지만 그것의 문제적 측면을 주목하려 했고, 그 문제적 측면이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해 편협하게 수용하고 해석한 것임을 부각시키려 했다. 하여 우리는 독자들이 이 책에서 ‘다름’을 보기를 기대한다. 확고했던 신념을 대체하는 ‘확고한 대안’이 아니라,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이 또 하나의 대답을 주는 교과서 같은 것이 아니라 ‘참고서’(레퍼런스)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대화 자료이기를 기대한다.”
(저자를 대표하여 김진호 목사가 쓴 머리말 중에서)

기독교 역사와 성경에 대한 몰이해 속에
구원의 장사치, 속죄의 목욕탕으로 타락한 한국 기독교.
이제 새로운 종교개혁의 촛불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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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렵거나 변죽만 울리거나  
rosaleon 2013-09-11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이단 정죄보다 교회내부의 암덩어리 도려내야

  • 현재 개신교 예배당의 출입구에는 저마다 큼지막한 포스터가 하나씩은 붙어 있다. 이른바 '○○○ 이단의 출입을 금한다'는 게 그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걸 붙여 놓은 걸까? 교우들을 엉뚱한 교리로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빼내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 정말로 그들이 기존의 교우들을 이리처럼 도둑질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개신교 내부에서도 스스로 점검해야 할 몫이 있지 않을까? 그 동안 가르친 교회 교리가 교우들을 붙잡아두지 못한 이유 말이다. 그에 대한 진정성을 성찰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 물론 이단은 정통 교리와 어긋난 경향성을 드러내며 활약한다. 다만 이단 규정은 교리적인 차원보다는 주도권 다툼에서 빚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통이든 이단이든 교회 역사는 권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구미정·김진호·이찬수 외 여럿이서 쓴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에는 그와 같은 '이단'이라든지, '성직'이라든지, '창조'라든지, '성전(聖戰)'이라든지, 기독교의 여러 가지 속살들을 드러내 준다. 물론 그것은 바른 치유책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경계선은 대체 어떻게 그어진 것인가? 초기 기독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애초부터 교리적 차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바우어는 주장한다. 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공식 교리의 진술(이른바 정통은 교회에 의해 규정된다)이 아니라 동일한 주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바우어에 따르면, 정통과 이단이라고 하는 분류체계는 각각의 사상이나 내적인 교리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권력 집단의 정치적 판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46쪽)

  • 이는 제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인 정용택이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유세비우스(Eusbius)의 〈교회사〉와는 달리 독일의 발터 바우어(Walter Bauer)의 〈최초의 기독교에서의 정통과 이단〉이란 책에 초점을 맞춰 정통과 이단 간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그것이 곧 예수와 사도 시대의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관용되었던 다양한 교리들이 로마교회의 정치권력 아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배척되었다는 주장이다. 

  • 아울러 정용택은 지금의 한국교회와는 달리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준 관용성에 눈뜨도록 종용한다. 이른바 초기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때는 '단일한 개신교 교리'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비교적 원만하게 공존하던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더 큰 문제는 무엇일까? 기성교회가 제시한 메마른 교리와 답답한 의례에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이단종파로 규정한 집회에서는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와 열광적인 종말론 등으로 무장한 채 기존 교우들의 억압된 욕망을 분출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기성교회는 막강한 권력과 딱딱한 교리로 교우들을 옥죄려고 했지 그들처럼 교우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데는 등한시했다는 견해다.

  • 그것은 구미정이 바라 본 '성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 시대의 목회자가 정녕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를 계승하고 싶은 욕망이 하늘을 찌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루터의 '만인사제'로 인해 '영적 평등주의'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 권위'를 수호하려는 목회자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 "결국 목사가 자기 자신을 평신도와 구분지어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고질병에서 헤어나는 게 관건이렸다. 이렇게 보면, 목사의 직분을 '성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뻣뻣한' 평신도를 곁에 둔 목사야말로 복 받은 사람인 셈이다. 그 평신도는 목사로 하여금 만인사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각성케 하는 고마운 스승이 될 테니 말이다."(133쪽)

  • 이는 스물아홉에 요절한 젊은 시인 기형도의 〈우리 동네 목사님〉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목회가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를 확장하는 걸 성공으로 생각하는 판에, 그 시인의 글에 등장하는 목사는 둘째 아이를 폐렴으로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복'을 기대했던 교인들조차도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마당이었고, 그 책임을 목사에게 묻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그 목사가 전능한 신이 아닌데도 말이다.

  • 그만큼 오늘날 교회는 목사도 그리고 교우들도 병이 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사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예배당을 크게 짓는데 혈안이 돼 있고, 교우들은 교회부흥의 실패원인을 목사에게 돌리는 병폐에 빠져 있다. 교회가 부흥되면 목사를 신격화하지만, 부흥이 저조하거나 교인수가 감소하면 무능한 목사로 낙인찍는 게 보편화된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오늘날 교회의 암 덩어리는 교회 바깥의 이단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회 내부의 폐부와도 같은 권력욕과 딱딱한 교리들은 교우들을 더 병들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것들을 찢고 수술하지 않는 한 그 암덩어리는 더욱더 급속하게 확산될 것이다

  •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그 속살의 암덩어리들을 이야기하겠는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교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암덩어리들이 무엇인지 바르게 진단하고, 그것들을 수술하여, 보다 더 내실을 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명의 신학자들은 그런 바람으로 각각의 꼭지를 맡아 이 책을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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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2012-05-0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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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을 열다

  • 김규항씨의 말대로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볼지는 모른다. 하지만

  • 단 몇 사람이라도 이 책을 보기만 한다면 그는 가만히 예전의 신앙을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 제목 그대로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이야기가 교회와 나의 모습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 신앙이란 것을 거의 교리 안에서 듣고 읽고 이해하고 살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

  • 모든 교리가 성경과 하나님께서 직접 일러주시고 명령하신 것으로 믿고 따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 이 책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자의적으로 해석해낸 교리의 맹목성을 역사적 교회사를 들려줌으로써 증명해준다.

  • 읽고 나면 혹시 불편해질까, 선입견이 있었다. 왜냐면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나 혹평을 받는 존재들이기에

  • 이 책 역시 혹평에 강도 높은 비웃음과 야유까지 얹지 않았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 오히려 읽고 나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이며 기독교가 나아갈 바가 어디인지

  •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동안 아무도 보여주지 않던 기독교의 밀실을 시원하게 열어 보여주었고 비로소 복음의 핵심이

  • 지금 이 순간 교회에서 사회에서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었기에 오히려 마음에 기쁨이 깃들었다.

  • 깊은 사유와 기도와 말씀이,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하신 것처럼

  • 예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것을 보고 행하기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길이라고 믿는 성도들의

  • 영성에 이 책이 더 거룩한 고민의 시계를 확보해주리라 생각 한다.

  •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를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 물론 그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 미미하여 자괴감이 들지라도

  • 현재의 이 혼탁한 교회의 어느 한 부분에 일정의 빚이 있는 우리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지 않을까.

  • 그것이 세상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기독교를 일으켜 나가는 날마다의 첫 걸음일 것이다.

  •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의 보다 성숙하고 바람직한 성도와 한국교회의 깨어남을 염원하는 저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접기
강아지똥 2012-05-1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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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알라딘: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알라딘: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 한국 종교의 귀신론 
오문환,이찬수,법현,원영상,정순덕,김동규,김우형,최대광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10-07-30

책소개

기독교, 불교, 무교, 유교, 천도교의 귀신관 외에 일본인의 귀신담론, 그리고 발표자들의 종합 토론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저자들이 전문(종교) 학자이자 또 개인적으로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관심 영역에 따라 귀신에 대한 이해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귀신을 지성적이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모들아카데미', '종교문화연구원', '한신대학교신학연구소' 등 세 단체에서 {오늘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 여러 종교의 귀신론}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5월부터 9월까지 다섯 번의 소규모 세미나식 강좌와 한 번의 종합적 공개강좌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인간은 귀신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여러 종교들에서는 귀신을 어떻게 간주해 왔는지, 그에 대한 대중적이고 지성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종교인들의 다양한 종교체험의 근저에 놓여 있다고 할 만한 귀신 현상을 오늘의 지성과 학문으로는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탐구하고 정리하고 전달하고자 한다.


목차
총설 : 믿는 만큼 경험한다 │ 이찬수

간절한 마음이 모이면 마는 쓰러지게 되어 있다 │ 정순덕

어그러진 질서와 회복, 그 표상으로서 귀신 │ 김동규
무속은 귀신신앙인가| 귀신의 종류와 성격| 무속과 주술 | 진희 이야기 : 귀신의 상징론적 분석 | 현대사회와 귀신 : 무속 상징으로서의 귀신

공자와 주자, 그리고 귀신 │ 김우형
유교의 성격과 유학적 귀신관| 귀신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 혹은 인식론적 입장 : 공자의 귀신관 | 제사의 정당화 : 주자의 귀신관| 유학의 귀신관의 의미

귀, 아귀, 마, 신 모두 교화의 대상 │ 법현
귀신 이야기들| 귀신은 있다고 보아야 하나?| 귀, 아귀| 귀, 귀신, 마, 마왕| 현실에 나타나는 귀신| 귀신은 어디에 사는가?| 수행과 귀신| 귀신도 교화의 대상

악령과 귀신 │ 최대광
들어가는 말 | 기독교의 귀신론| 나오는 말

근대 일본과 이노우에 엔료의 요괴학 │ 원영상
시작하는 말 | 근대 일본의 정신상황과 불교| 이노우에 엔료의 요괴학 | 요괴학 연구의 목표| 맺음말

려고도 하지 않으며 죽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 오문환
삶과 죽음 | 귀신이 곧 나다 | 억대 선조가 곧 나다 : ‘향아설위’| 살려고도 하지 않으며 죽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종합토론 :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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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귀신은 없지 않고 있다. 허상이 아니라 귀신 담론의 질서를 따르는 이에게는 실상이다. 종교적인 표현을 쓰자면, 믿는 이에게 귀신은 실상이다. 귀신은 그 믿음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귀신 담론은 없었던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귀신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대상이기만 하기보다는 사회적 논의를 통해 유연하게 공존하며 변화되어야 할 대... 더보기
그것은 귀신과 신령의 싸움이지요.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정순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신령과 마가 대립할 뿐입니다. 그때 결국 마는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반드시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이 모이면 마는 쓰러지게 되어 있다 ‘ (무속인 구술담) 61쪽)
무속의 귀신은 운세/방향/신령 혹은 귀신이라는 문제틀 안에서 그것이 어그러진 형태로서 드러나는 의미론적 존재임이 드러난다. … 즉, 부정적인 귀신의 이미지는 곧 긍정적인 세계 질서의 강화 수단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어그러진 질서와 회복, 그 표상으로서 귀신’ (무속의 귀신론) 91쪽)
공자와 주희의 귀신관은 휴머니즘을 기초로 하되 신비한 귀신 현상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인식론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공자와 주자, 그리고 귀신 ‘(유교의 귀신관) 120쪽)
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귀신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설사 수행과 존재들의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못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들은 없애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를 좋은 것으로 바꿔야 할 존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귀, 아귀, 마, 신 모두 교화의 대상’ (불교의 귀신관) 143쪽)
기독교의 귀신론이라면 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이나 사탄과 악령이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 둘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악령과 귀신’(기독교의 귀신관) 172쪽)
이노우에는 요괴학의 최종 목표인 진괴의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아류의 신학을 추구한다고 보는 기독교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하고, 학리學理상의 최고봉으로서의 불교를 현실 개량의 철학으로 완성하여 근대국가에 복무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근대 일본과 이노우에 엔료의 요괴학’ 205쪽)
세상에는 죽어서 무궁하고 무한한 세계로 환원하는 사람들과 살아서 무궁하고 무한한 세계에 사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를 범인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성인이라고 한다. 범인에게는 생사가 두 세계이지만 성인에게는 생사가 하나일 뿐이다.(‘살려고도 하지 않으며 죽으려고도 하지 않는다’(천도교의 사후관)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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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오문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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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치사상이 전공이며 북경대학교(北京大學校)에 연구학자로 다녀왔으며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해월 최시형의 정치사상』, 『동학의 정치철학』 등이 있으며, [율곡의 군자관과 그 정치철학적 의미], [동학사상에서의 자율성과 공공성] 등의 논문이 있다.

최근작 : <비교공공성으로 본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인권의 정치사상>,<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 총 15종 (모두보기)
이찬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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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 더보기
최근작 : <보훈, 평화로의 길>,<독립.호국.민주의 미래와 보훈의 가치>,<보훈학 개론> … 총 58종 (모두보기)
법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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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 출생으로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석·박사를 수료했다. 고교 시절 평택 명법사에서 입문 첫날 밤샘 참선한 체 험을 새기며 대학 졸업 후, 득도와 전법을 위해 출가해 득도와 전법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응용불교를 초기와 후기불교, 일반사회와 불교사회, 자력수행불교와 타력가피불교의 회통에 관심을 가지고 정진한다. 은평구 열린선원에서 14년째 전법 중이고, 인천공항 제2터미널 불교실 세계선원을 법호 스님과 함께 개원해 이끌고 있으며, 일본 나가노 금강사 주지를 맡아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에게 수... 더보기
최근작 : <그래도, 가끔>,<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부루나의 노래> … 총 4종 (모두보기)
원영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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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정역원 연구교수,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불교 교무. 일본 교토(京都)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술로는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2011)(공저), 『승가대학 교재: 한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2013)(공저), (『佛敎大學國際學術硏究叢書: 佛敎と社會』(2015)(공저) 등,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근대일본의 화엄사상과 국가」 등이 있다.
최근작 :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동아시아불교, 근대와의 만남> … 총 5종 (모두보기)
정순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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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
최근작 :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김동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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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에서 동아시아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이며, 서강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강사이다. 지은 책으로 『환동해지역의 오래된 현재』(공저), 『종교는 돈을 어떻게 가르치는가』(공저), 『샤머니즘의 사상』(공저),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무당, 여성, 신령들』(공역)이 있다.
최근작 :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 산>,<환동해지역의 오래된 현재>,<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 총 4종 (모두보기)
김우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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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최근작 : <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최대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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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부목사.
최근작 : <종교 근본주의>,<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 총 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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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귀신’에 대한 담론은, 21세기, 첨단 과학문명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아마도 인류가 인지 능력을 갖게 된 이후로, 귀신 이야기는 언제나 존재해 왔을 것이다.
혹자는 “전기(電氣)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귀신은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오늘날 방송(케이블 등)에 차고 넘치는 것이 귀신 담론이다. 누구나 한번쯤 귀신을 보았거나, 귀신 이야기에 머리가 쭈뼛 선 경험은 갖고 있기 마련일 터. 그 경험은 단지 내 마음이 허해서 생겨난 착각일 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그 착각이란 무엇이고,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현실은 무엇인가?
현대인들은 모두 ‘귀신은 없다’라는 정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대부분의 ‘상식적인 사람’은 그 정답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제사’를 지내고, 내가 죽은 다음에는 ‘영육(靈肉)을 통털어 전적인 무(無)’로 환원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을 돌이켜보면, ‘귀신’을 지지(支持)하는 의식과 문화도 그리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다.
귀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경험담과 예부터 그러한 내용을 언급해 왔던 각종 문헌이나 관련 연구 등을 종합해 보면, 사람의 생김이 제각각이듯이 귀신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귀신에 대한 담론이 종교와 연결되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각 종교에서는 귀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이 귀신을 단순히 타파와 극복의 대상이나 감각적 자극이나 흥미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끝없이 해석되면서 인간의 삶 안에 늘 함께 해 왔던, 인간 삶의 이면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 귀신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인간의 현재를, 인간의 미래를 좀더 정확하게, 좀더 바르게, 좀더 선하게 이해하고 체화하기 위한 고민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귀신을 추상적인 듯한 인간 정신 능력의 구체화 내지 인간적 상상력의 이미지화로 해석할 수 있다 해도 좋겠다. 어찌 되었든 귀신에 대해 자극적이고 단편적으로 묘사하던 수준에서 더 나아가, 사실상 ‘귀신’을 오래도록 전승해 온 여러 종교들의 입장을 종합하는 가운데, 귀신 현상에 대한 지성적인 이해의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접기

2022/03/21

Yoo Jung Gil 놀라운 뮤지컬 [싯다르타]를 보고

(5) Facebook

Yoo Jung Gil
놀라운 뮤지컬 <싯다르타>를 보고

<와! 이거 대박...>

코로나19의 상황으로 공연계는 대단히 위축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엔터테인먼트의 여러 인연과 관심이 있어

올해들어 탈마당극 1월 22일 <아가멤논>을 봤고 다음날 23일은 대학로에서 창작 오페라 <장총>, 3월 5일 아람누리에서 <130회 두레콘서트>를 봤고, 급기야 오늘 3월 19일 올림픽공원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뮤지컬 <싯다르타>를 봤습니다.
이렇게 잘난체하는 것은 제가 나름 평균적인 한국인에 비해 한 10배는 넘게 공연분야에 관람경험이 있어 남다른 안목이 쫌(?)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다음 감상의 글에 사실성의 무게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결론을 말하면, 이 뮤지컬의 스토리 흐름이 아주 좋았고, 장중하고 입체적인 음악에 놀라웠으며, 배우들의 시원하고 거침없는 성량의 노래, 화려한 군무와 무대예술 등 공연을 볼수록 몰입도가 높아진 공연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출가 고뇌를 보며 나 스스로 수행과 마음공부의 초심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향한 깊은 각성의 계기를 갖게 된 인생뮤지컬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슛도다나왕의 고통과 싯다르타의 출가>

예언자 아시타 선인은 아이가 태어나 왕이 된다면 강력한 군주, 전륜성왕이 되거나, 수행자가 되면 큰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듣고 전륜성광을 기대하는 카필라국의 왕 아버지는 슛도다나는 아들이 출가할까봐 전전긍긍 걱정합니다. 뮤지컬로 보니 그 고뇌가 다시금 구체적으로 전달이 됩니다.
인근의 강대국 코살라국이나 마가다국에서 받는 서러움 때문에 아버지는 반드시 아들이 왕이 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지만, 예민한 태자는 결국 농경제에서, 사문유관에서 생명의 고통과 중생의 고통을 보고 왜 <생명들이 서로 죽고죽이는가, 함께 행복하지 못할까>를 고뇌하며 결국 아들 <라훌라>를 낫고 출가를 하게 되는 장면에 다시금 깊은 성찰을 하게됩니다.
또한 마지막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싯다르타의 내면의 마장을 상징하는 마왕 파순 (마라 파피야스)의 유혹과 가슴을 후벼파는 그의 대사와 배우의 호소력있는 연기는 뮤지컬을 보는 내내 나에게 하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아쉬운게 있다면 옆에 노래의 가사와 대사를 보여주는 전광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웅이 아니라 한 인간의 득도 과정을 보여주는 오페라>

처음엔 부처님의 일생을 과연 어찌다 표현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뮤지컬의 미덕은 고통을 벗어나 깨달음을 위해, 삶의 가치와 이상을 위해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몬드수저로 태어난 태자의 안정된 삶을 홀연히 던지고 출가하는 과정, 고통받는 생명과 가난한 중생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고행과 수행의 과정, 그리고 결국 강력한 마왕의 유혹에 갈등하고 고뇌하다 마지막에 큰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드라마적인 설득력을 갖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홀로있지 않고 연결된 인연의 존재임을 합창으로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과정이 아주 시원했고 깔끔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전체를 보니 개인 싯다르타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고, 스스로 탈각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주제여서 더욱 감흥이 깊었습니다.
특히 음악에 대해 칭송하고 싶습니다. 역동적이고 힘있는 음악과 연주도 좋았지만 안정적으로 시원한 호소력 넘치는 최고 뮤지컬 경력의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는 몰입을 넘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작곡가와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노고, 배우들이 참 경외스럽더군요.

<보편적 호소력있는 세계적 뮤지컬이 되길>

실제 종교의 교조로서 싯다르타가 아니라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탈피(脫皮)의 과정에 집중된 이 내용은 유럽과 미국등 서구사회에서도 보편적 호소력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이 정도의 거대한 음악과 화려한 안무 연출이면 충분히 K-뮤지컬로서 세계성을 갖을 수 있는 한국문화 컨텐츠라고 생각되었고 실제 정말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저와 함께 간 두 분도 이 공연의 화려함과 장중함, 그리고 득도의 깨달음 과정에 대한 메시지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어린 싯다르타가 <왜 사람들이 살려면 작은 생명을 죽여야 하는지>를 노래하는 대목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또한 <고행을 중단하고 보통사람의 삶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고 말하는 대목에 남다른 울림이 있었습니다.

<안보면 인생의 후회>

사실 처음 이 <뮤지컬 싯다르타>공연이야기를 들은 것은 한 4년전입니다. 당시에 내가 아는 분이 대단히 열심히 공연홍보했지만 어려운 불교내의 문화환경 때문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아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3월 19일은 우리 불교환경연대의 공동대표이신 태고종전국비구니회 회장 <현중스님>께서 초청해 주셔서 이런 감동의 기회를 갖게 되었군요. 이럴 줄알았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건데. 땅을 치고 후회합니다.
4월 3일까지 서울공연후에 4월 8-10일은 광주에서, 15일 17일은 부산에서, 22일-24일은 대구에서 한답니다. 꼭 가보시길...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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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You, 강길모, 이찬수 and 167 others

22 comments

Gookhyeon Hwang

원작이 헤세인가요? 책은 정말 몰입해서 봤는데

Reply
1 d

2022/01/27

“독립·호국·민주 ‘보훈의 삼각뿔’ 조화시켜 국민통합 이뤄야죠”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독립·호국·민주 ‘보훈의 삼각뿔’ 조화시켜 국민통합 이뤄야죠”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독립·호국·민주 ‘보훈의 삼각뿔’ 조화시켜 국민통합 이뤄야죠”

등록 :2022-01-26 19:14수정 :2022-01-27 02:31
강성만 기자 사진
강성만 기자

【짬】 보훈교육연구원 이찬수 원장




이찬수 원장이 인터뷰 뒤 보훈교육연구원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성만 선임기자

“그동안 보훈 연구 결과는 주로 전문가들 책상 서랍에만 있었어요. 보훈 연구 주제도 보훈 대상자 처우 개선에 치중했죠. 국민들이 보훈에 대해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거나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 데는 이런 점도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보훈 연구도 시민과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 총서를 기획했죠.”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이 2020년 2월 취임하고 바로 기획해 지금껏 14권을 낸 ‘보훈문화총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연구원은 보훈복지의료공단 산하기관으로 직원 35명이 보훈 교육과 연구 업무를 맡고 있다.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지난 2006년 기독교계 재단인 강남대에서 해직당하기도 했던 이 원장은 10년 전부터 애초 전공인 비교종교학 대신 평화학 연구에 힘을 쏟아왔다. 강남대 복직 2년 뒤인 2012년 정규직 교수를 포기하고 비정규직인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자리를 옮겨 ‘평화 인문학’이라는 학문 정립을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 21일 경기도 수원 영화동 연구원 사무실에서 이 원장을 만났다.





보훈문화총서 14권.

총서에는 의료·복지 등 낯익은 보훈 주제도 있지만 평화나 국제관계 관점에서 보훈을 짚거나 북한이나 주변국들의 보훈 정책을 살핀 내용도 담겼다. ‘아시아의 보훈과 민주주의’ 편을 보면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이 1992년 헌법을 개정해 보훈 대상자 규정을 ‘혁명에 공이 있는’에서 ‘국가에 공이 있는’으로 바꿨고, 또 일본이 연합군의 자국 점령 상태가 사실상 종결된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직후 첫 행사로 ‘전몰자 추도식’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보훈을 담당하는 별도 국가기구가 없고 보훈을 사회보장의 틀 안에서 관리한다는 점도 알려준다.

그는 한국 보훈의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훈의 세 축인 독립과 호국(국가 수호), 민주가 조화롭게 연결되고 보완하는 ‘삼각뿔 보훈’을 제시했다. “우리는 독립과 호국, 민주를 각기 따로 봅니다. 보훈교육 때도 독립운동가, 6·25 참전용사, 5·18 유공자를 나눠 제각각 설명하죠. 하지만 셋 사이에는 충돌이 있어요. 일본 강점기에 독립군을 잡던 백선엽은 호국을 이유로 서훈을 받았지만,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북한 초기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했잖아요? 국가 보훈의 목표인 국민통합을 위해서는 보훈도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통합의 논리로 가야죠.”

그는 총서의 글에서 “김원봉 이상으로 조국 독립에 공헌한 사람을 찾기 힘들지만 ‘유공자는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는 보훈처 내부 규정에 따라 서훈을 받지 못했다”며 이는 “한국적 보훈의 세 이념 중 호국이 독립보다 더 비중 있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썼다. “우리는 지나치게 전쟁 즉, 호국 중심으로 보훈을 이해하고 있어요. 호국의 폭을 넓혀서 친일파 백선엽을 서훈한 것처럼 김원봉도 광복군 부사령·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 공적을 고려해 서훈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당장 서훈이 어렵다면 ‘독립공로자’라는 임시 명분으로라도 공적을 치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독립·호국·민주가 하나로 연결되는 한국 보훈의 첫 사례가 될 수도 있다고 봤다. 보훈당국은 독립운동가 선정 기점을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 규정하고 있지만 1894~95년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현재 서훈 대상에서 빠져 있다. “동학 농민군을 유공자 지정에서 배제한 논리는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명예회복법과 충돌해요. 이 법은 동학 농민군이 1894년 3월 봉건체제 개혁을 위해 1차 봉기하고 그해 9월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키려고 2차 봉기했다고 규정하고 있어요.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독립과 호국, 민주를 연결하는 한국적 보훈의 논리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겁니다.”



취임 2년 만에 ‘보훈문화총서’ 14권
보훈 개념·주제·국제 비교 연구
대상자 처우개선·호국 중심 벗어나
“김원봉 ‘독립유공자’ 서훈 바람직”



‘불교·기독교’ 비교종교학 석·박사
“보훈도 폭력 줄이는 평화학과 상통”





그는 보훈에는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면서 그 예로 민주유공자를 들었다. “한국에만 있는 민주유공자 지정에는 나라가 민주주의적 통합의 길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죠.” 그는 “고령화로 보훈 대상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며 “앞으로는 독립과 호국, 민주 외에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희생적으로 기여한 이들도 적극적으로 찾아 보훈 대상자로 올리면 좋겠다”고도 했다. 2019년 설 연휴 때 과로로 숨져 그해 8월 국가사회발전 특별공로 순직자로 지정된 고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과 같은 ‘국가사회 기여자’를 더 많이 발굴해 정신을 선양하자는 것이다.

서강대 화학과를 나온 이 원장은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각각 불교와 기독교를 다룬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두 개나 받았고 이어 불교와 기독교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왜 비교종교학에서 평화학으로 공부 주제를 바꿨냐고 하자 그는 “여러 종교 현상을 보면서 종교의 공통 지향은 평화라고 늘 생각해왔다”고 답했다. “강남대 복직 뒤 동료 교수나 직원들 눈치가 보여 재미도 없고 전망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때 마침 서울대에서 평화를 인문학으로 연구한다는 공고가 떠 지원했죠.” 왜 연구원장에 공모했냐는 질문에는 “제가 해온 평화학을 보훈 정책에 적용하면 제대로 된 보훈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답했다.





이찬수 원장. 강성만 선임기자

평화학 연구자인 그에게 평화의 정의는 폭력 줄이기 즉, ‘감폭력’이다. “국제사회에서 평화는 기존 폭력을 줄이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폭력이 없는 상태는 평화의 사전적 정의에 불과하죠. 인류에게 그런 세상은 없었어요.” 우리는 감폭력의 길을 가고 있을까? “외형적으로는 감폭력이지만 내적인 폭력은 더 정교해졌죠. 성과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서 극도로 피곤하지만 스스로 피해자라는 생각도 못 해요. 구조화된 폭력 피해를 당하면서도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죠.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진 세상이죠.” 어떻게 해야 할까? “정책 제시 이상으로 교육을 통한 자기 발견이 중요해요. 다 같이 조금씩 가난해지는 삶을 기쁘게 선택하고 자연의 질서에 어울리는 생태적인 삶으로 방향을 튼다면 감폭력의 길이 보이지 않을까요.”

평화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이라면 예배당이나 사적인 공간에서 사회적 폭력을 줄이는 데 희생적으로 공헌해야죠. 종교인이니까 평화를 실천하는 게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이가 바로 종교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보는 것처럼 종단이나 제도가 중심이 된 종교는 오히려 폭력을 키우잖아요? 종교 조직과 제도가 약속한 것을 바꾸려는 이들을 이단으로 보기 때문이고, 종교의 사물화 현상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2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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