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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Ten Ideas for Saving the World – Ecological Civilization in Korea Project



Ten Ideas for Saving the World – Ecological Civilization in Korea Project



Ten Ideas for Saving the World
ecocivkorea2017년 June 6일John Cobb - Anthology



지구를 구하는 10가지 아이디어
존 캅

“우주 심장부의 창조적 에너지가 과거에 그렇게 훌륭하게 발현됐다면, 우리는 그런 창조성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미래로 인도할 수 있기를 희망할 이유가 있다. 이제 우리의 도전은 지구의 패턴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살기 좋은 도시를 건설하고 건강한 음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메리 이블린 터커, 브라이언 토마스 스윔

우리는 중간 크기의 은하에서 중간 크기의 별을 도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의 무수한 생명을 파괴한지 한참 뒤에도 지구는 여전히 궤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구할 필요도, 구할 수도 없다. 우주의 역사로 보면 찰나에 작은 우리가 거대한 다중 은하의 여행에 포함됐다는 사실에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메리 이블린 터커와 브라이언 토마스 스윔은 다른 많은 이들처럼 우주에 대한 경탄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인간을 포함해 지구상의 생명에 대한 친밀감을 가리키는 바이오필리아 는 생명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특수성에도 해당한다. 그래서 지구 생명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아껴야 하며 우리 자신 역시 아껴야 한다. 우리는 지구와 스스로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야 한다. 이런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자신과 나머지 생명을 존중하면서 살라는 소명을 들을 수 있을까. 혹은 너무 늦었을까.
40년 전에 나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키는 중이었고, 내 아이들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환경과 관련된 이슈에 관여하도록 자극 받았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계를 살아야 할지에 도움이 된다면 신학은 생태신학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계는 인간만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그물이다.
그래서 나는 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나는 정반대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명이 의존하는 생명유지시스템의 파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희망적인 책이었고 어떤 면에서 나는 희망적인 사람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희망을 갖기에 너무 늦었다고 보일 때조차 하나님은 우주와 지구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우주의 창조성 안에 존재하는 영감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나의 희망은 또한 세계 자체, 자연,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사람들의 통렬함과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우리 인간은 자신과 자연 속의 나머지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고유한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관리자로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과거를 바꾸거나 인형극처럼 현재를 조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요가 아닌 설득, 조작이 아닌 사랑이다. 여러 면에서 이제 너무 늦었다.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고통 받는다.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끔찍한 시간을 살고 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지구를 파괴하는 걸 알면서도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현재 상황을 무시하거나 기술적 기적이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라면서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뛰어든다. 현대 세계는 지구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우리 문명은 붕괴할 것이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1)얼마나 남을 것인가 (2)우리는 폐허에서 지속가능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두 가지다.
우리가 나쁘게 행동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현대 세계가 현실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잘못 인도함으로써 인류 전체가 점점 먼 곳으로 이끌려왔다. 더 나은 이해가 없으면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1)거의 남지 않는다 (2)아마 불가능하다, 가 될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더 좋은 방법을 만나는 행운을 가진 사람들인 우리는 그것을 공유해야 할 깊은 책임이 있다.
나로서는 화이트헤드 철학이 더 좋은 방법임을 발견했다. 그의 유기체철학 혹은 과정철학은 최상의 생태적 사고와 최상의 인본적 사고를 결합시키고 과학적, 종교적, 윤리적, 예술적 통찰력을 한데 모은다. 아직 적은 숫자이지만 점점 늘어나는 다른 이들처럼 나는 화이트헤디언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이들처럼 화이트헤드 식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화이트헤드식 접근법을 공유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소유한 것에 만족하거나 대안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무시된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이 우리 행동의 광기를 보고 다른 길이 없는지 질문한다. 그래서 나는 열 가지 설명을 통해 보다 나은 이해와 좀더 희망적인 함의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 아이디어들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현실은 상호 연관된 사건들로 구성된다.
현대 세계는 시계를 모델로 한 자연의 관점 위에 세워졌다. 거대한 중세의 시계들은 시간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인형으로 구성된 쇼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것은 생명체가 궁극적으로 무생물과 함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과학의 임무는 이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전 세계는 움직이는 물체들로 구성됐다. 이 모델을 기반으로 한 과학은 세계에 대해 매우 많은 것을 알아냈다.
이런 사고를 멈추게 한 핵심은 과학자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인간이 기계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물체의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의 창시자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사고가 물체의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물질과 함께 정신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실재(entity)로 간주했다. 정신을 인간으로 제한함으로써 그는 세계의 나머지를 기계론적 과학의 영역으로 넘겼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 현대는 이원론을 채택한다. 실험을 하거나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새로운 법칙을 고안할 때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탐구하는 기계적 세계의 부분으로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해 자신들을 나머지 세계로부터 격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후대의 철학자들을 깊이 괴롭히는 이론적 문제를 만들어냈다.
기계론적 과학의 성공은 심지어 인간의 경험조차 포함하는 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런데 진화론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유사한 전(pre)인간 단계로부터 점진적 단계를 밟아서 발달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인간의 정신과 나머지 모든 것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계속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현대 사고의 지배적 관점은 이론적으로 모든 현실이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기계론적 사고는 일반적으로 원자적이다. 원자는 더 작은 단위로 나눠지지 않는 극소의 물질 단위로 이해된다. 이 원자들은 움직이거나 모인다고 간주되며, 과학의 연구대상인 모든 복잡한 실재들은 이런 집단화와 운동에 의해 설명된다고 본다. 그런 세계에서는 질과 가치, 감정과 믿음, 희망과 목적은 인과적 혹은 설명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부차적이며, 그런 것이 생길 때조차 진짜 현실(real)의 보조일 뿐이다.
이런 세계관은 실제 인간의 경험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세계에다 꿰어 맞추는 문제점 이외에 또 다른 충격을 경험했다. 원자라고 불리는 것이 원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그들은 더 작은 실재로 분해될 수 있다. 이런 부(sub)원자들은 그 동안 과학이 이해해온 작은 덩어리들의 행동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또한 작은 덩어리들이 해야 하는 방식대로 상호 독립적이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심지어 기계론적 과학의 원리에서는 금지된 방식으로 공간적으로 독립돼 있을 때조차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과학의 응답은 과거의 기본적 이해를 고수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인간의 경험처럼 궁극적으로는 설명될 수 있는 비정상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다른 응답이 가능하다. 진화론이 인간의 경험과 사고는 자연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 주었을 때 일부 사상가들은 자연이 당시의 지배적인 모델보다 더 풍부하고 복잡하다고 선언했다. 인간이 감정과 희망과 목적을 갖고 있다면, (1)그들의 동물 조상들도 이런 것들을 가졌고 (2)오늘날 다른 동물들도 이런 것들을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 인간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로 경험적 특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매우 뚜렷하고 놀랍게도, 부원자의 세계에 대해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순전히 물질적인 특성보다 경험적 특성을 가진 자연에 더 잘 맞는다.
우리가 아는 과학은 아마 자연의 이런 특성들을 무시하도록 강요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연구해온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스스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발견이 자연 세계를 망라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안으로서 과학은 중세의 시계들로부터 파생된 모델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마 다른 모델이 모든 데이터를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를 따르는 사람들은 후자의 대안을 채택한다. 우선 그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돼온 것들로 구성된다는 가정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물질적 실체의 개념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철학자들은 이것들이 편의상의 가정일 뿐 실제 증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접근방식은 세계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세계에는 전쟁이나 선거와 같은 커다란 사건이 있다. 이것들은 무수한 작은 사건들, 궁극적으로는 동물이 어떤 일을 경험하는 순간이나 양자의 운동들로 쪼개질 수 있다. 이것들은 큰 사건들을 구성하는 최소 사건들의 사례이다.
인간 경험의 한 순간이 하나의 사건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추상적 사고나 의식처럼 부원자적 사건에는 존재하지 않는 많은 특징들이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모든 사건들에 공통적인 특징들을 식별해낸다. 그것은 선행 사건의 요소들의 종합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에 놓여있는 사건들의 참여자가 된다. 그것은 스스로의 생성(becoming)에 참여하며, 그래서 그 사건이 왜 그렇게 일어났는지 설명한다면 그 사건은 그 자체의 원인의 하나로서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건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객체일 뿐 아니라 스스로의 생성에서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것이 행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생성과 미래의 사건에서 그것이 행한다는 점에서 주체이다. 주체로서 그것은 주체적 특성을 갖는다. 화이트헤드는 그것이 매력적이고 정서적이라고 본다. 그것은 만족스러운 정서적 상태에 이른다. 반면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실재는 모든 다른 실재에 대해 외부적이다. 화이트헤드의 사건은 과거 실재의 특성들을 포함하며, 각각의 사건이 미래 사건들의 구성에 참여한다. 내적 관계가 중요하다.
화이트헤드는 육체와 정신 사이에 구분이 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순수하게 육체적이거나 순수하게 정신적인 사건은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건은 부분적으로 육체적이다. 이것은 사건이 과거로부터 많은 부분을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모든 사건은 부분적으로 정신적이다. 이것은 사건이 스스로 선택한 가능성들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현대과학의 전제가 되는 지배적 개념과 화이트헤드 철학을 모두 공부한 사람들에게 화이트헤드의 사고가 증거를 더 포괄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화이트헤드 철학을 채택해왔다. 그러나 대부분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배운 패턴대로 연구를 계속하기를 원한다. 그들이 기존 방식대로 새로운 자료를 해석하는 한 그들은 다른 방식을 생각할 수 없다. 현재 방식을 지속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재난으로 이끄는 많은 실천과 정책들을 지지한다. 대안을 생각해야 하는 매우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2. 내재적 가치의 단계(gradation)가 있다.
무엇이 얼마나 가치가 있냐고 질문할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하고 이익이 되는지를 뜻한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시장에서 지불할 가격이 답변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들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에는 돈을 내지 않지만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 그들은 상대적 희소성을 고려하는 복잡한 이론을 도입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가치를 결정하더라도 ‘도구적’ 가치, 즉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에 도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또 다른 가치를 가질 때만 의미가 있다. 만약 그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즐거움을 더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여긴다. 인간의 즐거움은 그것이 다른데 기여하는 정도에서 대개 가치가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물론 사람의 즐거움은 도구적 가치를 가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에 기여할 수도 있다.
가치란 정의하자면 우리가 증가시키고자 하는 무엇이다. 극단적 사례로 어떤 사람이 즉각 생성되는 경험만을 증가시키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경험과 다른 경험 사이에 연속성이 높은 우리 같은 피조물에게는 연속적인 사건 경험의 내재적인 질에 대한 관심이 있다. 많은 동물에게는 유아나 그룹 구성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 인간에게는 내재적 가치의 증가에 대한 관심이 거의 무제한적이다.
즐거움은 주관적 상태다. 한 과학자가 이 상태의 육체적 상관관계를 발견하고 주관적 느낌이 육체적 발생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육체적 발생은 내재적 가치가 없다. 내재적 가치라는 생각은 지배적인 과학의 세계관이 발생에 아무런 실제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 주관적 세계에 묶여있다. 그리고 내재적 가치가 없는 곳에는 도구적 가치 또한 없다. 원칙적으로 과학적 세계관을 완전히 채택할 때 물리적 대상의 한 배열은 다른 어떤 것보다 좋거나 나쁘지 않다. 실용적으로 말해 대부분 과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이원론자들이다. 과학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치를 무시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스스로의 안락과 타인들의 복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화이트헤드 사상은 이런 가치중립적 우주와는 극적으로 대비된다. 화이트헤드에게는 모든 사건이 발생 자체로 주제이며, 주체 각각의 존재 방식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건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물론 이런 내재적 가치는 또한 미래의 기회에 도구적 가치 또한 갖는다.
인디언의 사고는 인간 이외 사물의 내재적 가치에 가장 충실하다. 적절한 연속적 관심은 보통 감성의 한계 혹은 삶의 한계에 주어진다. 자이나 교도들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창조물을 파괴하지 않는 데서 더 나아간다. 서구에서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르쳐 유명해졌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의 파괴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 무관심과 모든 생물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날카롭게 대조된다.
화이트헤드는 내재적 가치를 생물에만 제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부원자적 사건의 안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실용적 목적에서 생명의 감정에 대해 연속적 관심을 갖는 건 타당하다.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나 그의 서구 추종자들보다 인디언이나 슈바이처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제한된 경계선을 그리지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생명은 강도”라고 가르쳤다. 즉, 생명은 먹이를 파괴하는데 의존한다. 내재적
가치가 이 과정에서 파괴된다. 물론 우리 인간이 붉은 고기나 모든 고기, 모든 생선, 모든 해산물을 피한다면 더 적은 내재적 가치가 파괴된다. 우리는 많이 혹은 적게 강도질 하지만, 어떤 자이나교 성인들이 하듯이 우리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강도질”을 한다.
화이트헤드의 결론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우리의 강도질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 “강도는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재적 가치를 지닌 어떤 실재의 파괴는 그 파괴가 다른 것들의 복지에 기여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다. 모든 사건이 어떤 내재적 가치를 갖더라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가정한다. 실제로 그 차이(variation)는 매우 극단적일 수 있다. 개의 복지를 위해 진드기를 죽이고 인간의 복지를 위해 박테리아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기는 쉽다. 인간의 소비를 위해 채소를 죽이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재적 가치의 정도가 있고, 인간은 이런 종류의 합리적 판단을 하는 위치에 있다는 개념에 의존한다.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의 구분은 후자의 폄하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내재적 가치의 무게가 낮은 창조물이 가장 큰 내재적 가치를 지닌 창조물보다 생태계에서는 더 중요한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플랑크톤은 고래보다 해양에 훨씬 중요하다. 분명히 우리는 고래를 구하기 위해 막대한 플랑크톤을 희생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래와 플랑크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고래를 희생시켜야 한다. 플랑크톤이 없으면 고래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결정은 쉽지만, 나는 이 요점이 분명하기를 바란다.
물론 많은 결정이 매우 어렵다. 음식을 얻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동물을 죽이는 게 도덕적일까. 동물의 서식지를 농지 확장으로부터 얼마나 보호해야 할까. 인간을 위험한 약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떤 동물로 어떤 실험을 하는 게 정당화될까. 토종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외래 종을 언제 죽여야 할까.
마지막 질문은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는 부각되지 않는 중요한 질문이다. 생태계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강조되지 않는 중요한 질문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생태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 서식자들을 통해서만 내재적 가치를 갖지만, 이런 서식자들은 생태계의 통합성을 유지함으로써만 이익을 얻는다. 어떤 경우 인간의 간섭은 생명이 거의 없는 지역을 선택해서 그것을 많은 생명체가 사는 곳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희귀한 생태계를 파괴하고 비슷한 많은 것에 하나를 추가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다양성이 갖는 가치는 무엇인가. 희귀종 풍뎅이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할 수 있을까.

3. 하나님은 가치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질문은 계속된다. 화이트헤디언에게는 기성품 응답이 없다. 우리의 공헌은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고 관련된 고려사항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순간적 인간 경험과 같은 사건의 본질적인 가치는 그것이 합성하는 다양성에 의해 증가한다. 이것은 희귀종의 보전에 정당성을 더한다. 그러나 수천종의 희귀한 곤충이나 박테리아에 대해 아는 게 인간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성을 인식하기에 부족한 역량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제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이 우리에게 기여한 것(흔히 인용되는 의학적 혜택의 가능성 등)에 더해 생명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로 혹은 전체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깊고도 정당한 직감에서 화이트헤드를 따른다. 이러한 직감은 모든 생명이 통일된 경험을 갖거나 그렇게 존재해야만 완전히 정당화된다는 게 화이트헤드의 제안이다. 그를 따르는 우리는 생명권역(biosphere)을 단순화하는 건 하나님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다양성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건 아니다. 잘 모르는 딱정벌레 종의 생존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제적 기회를 부정하는 건 하나님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요점은 전체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고려 없이 어떤 결정을 내리면 안 된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 전체의, 전체를 위한 가치다.
우리는 우주가 포괄적 가치의 증가를 명령 받았다고 믿는다. 이는 그런 증가가 하나님의 목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의 사건에 신성하게 내재함으로써 이 목적을 실현한다. 이 내재는 모든 창조물에게 시공간에 필요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목표로 준다. 나는 이 목표가 사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보다 광범위한 관심의 지평을 가질 수 있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화이트 헤드의 관점으로 볼 때 관심의 넓이는 도덕의 척도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목적이 일어나는 일에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목적이 각 사건이 시작되는 기초라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의 덩어리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목적을 위한 자리란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요소들의 합성으로서 발생하는 사건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시공간에 맞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목적은 기초가 된다. 현대적 시각에서 하나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물질들의 창조자이자 입법자이다. 그렇게 해서 우주는 하나님에, 하나님은 우주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가치의 실현을 증진시키는 가장 보편적 특징들을 결정했을 것이다. 이 신념은 “인류”의 원리로 잘못 불리는 것과 들어맞는다. 화이트헤드로서는 이것이 각 생명에 맞춘 무수한 상수의 집합을 갖는지 설명하기 위해 수백만 개의 우주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현실의 바탕에 있는 가치들의 목적은 (원리에 대한) 설명만으로 충분하다.
화이트헤드의 목적론에 대한 확신은 현대 과학이 강력하게 반발해온 목적론의 갱신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화이트헤디언이 볼 때 현대과학은 중세과학이 사용해온 최종 원인과 보다 근래의 진화론에 대한 설명을 올바르게 거부했다. 우리는 그런 형태의 목적론의 재귀를 제안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목적론에 대한 알레르기는 다른 종류의 부조리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현대 신다윈주의 진화론자들은 진화과정에서 동물의 목적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여긴다. 동물들이 변화하는 환경 상황에 적응하고, 식량을 찾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는 새로운 방법이 유전적 변화가 긍정적 효과를 갖는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이런 거의 확실한 사실은 진화적 변화에 대한 표준적 설명에서 완전히 누락돼 있다. 그것이 목적의 역할이란 문을 열게 되는데 많은 생물학자들은 목적이 심지어 증거를 배제하는 비용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제외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종류의 기계론적 도그마주의는 그것이 대체한 중세과학보다 나을 게 없다. 살겠다는, 잘 살겠다는, 더 잘 살겠다는 깊은 의지가 없다면 진화도 없다. 그러나 무신적 과학자들의 의심은 기초가 든든하다. 만약 동물의 목적이 진화에서 어떤 역학을 한다면 현실의 주체적 측면은 어쨌든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 특히 목적을 가진 요소들은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우주, 자연, 도, 성령, 조물주, 혹은 화이트헤드와 나의 명명법으로 “하나님”은 생명계에 만연한 살겠다는, 잘 살겠다는, 더 잘 살겠다는 목표의 원천이다. 이것은 어떤 가치의 실현이라는 일반적 목표를 가진 생물권역에서의 표현이며 이 목표는 현실 전체에 만연한 목표이기도 하다.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목표는 창조물과 신성한 삶에 이바지하는 가치의 실현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비전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과학과 상충하지 않고 과학적 정보를 오히려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또 현재의 과학이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사실을 알도록 해준다. 그것은 신자뿐 아니라 무신론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보이는 영감에 근거한다.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관심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생태적 사고를 깊이 격려한다. 그리고 긴급히 요구되는 윤리학을 정초하며 종교적 정신의 가장 세련된 형식을 제공한다.

4. 인간은 고유한 가치와 책임이 있다.
화이트헤드 추종자들에게는 인간이 서로 다른 창조물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자연세계의 일부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직 인간만이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견해에 맞서 나는 모든 사건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고 확신하는 화이트헤드를 따른다. 인간은 모든 것의 척도가 아니다. 우리의 오만은 엄청나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디언은 인간이 특별한 가치나 중요성을 주장할 수 없는, 여러 종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은 따르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여러 종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우리 종은 모든 다른 종들과 집단적으로, 개별적으로 구별되는 중요한 존엄이 있다. 우리가 특별한 고유성을 주장하는 건 정당하다.
인간은 타인과 다른 종, 그리고 우리가 부분을 이루는 전체를 보살피는 능력에서 고유하다. 우리 지식으로는 다른 생명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만 우리가 하듯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의 출중한 능력이 있지만 우리는 전체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힘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대신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되는 제한된 목표를 위해 우리의 능력을 쓴다는 점에서도 고유하다.
우리는 지구상의 어떤 다른 창조물보다 인간의 경험에서 더 많은 가치가 실현됨을 믿는다. 우리가 돌고래와 고래의 자질에 감탄하는 것을 배웠던 것처럼, 우리는 경험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의 대부분이 거의 확실하게 부족한 언어의 복잡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그들의 운명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일차적 관심사는 단순히 임의적 인간중심주의 혹은 “종파주의”의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우리는 무엇이 더 큰 내재적 가치를 만드는지에 대한 상대적으로 객관적 이해를 갖고 있으며, 우리 종이 이의 현실화에서 고유한 능력을 가졌다는 판단에서 정당화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위해 모든 종을 보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존하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사물들의 체계에서 우리 자신이 갖는 고유한 중요성을 인정하는데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은 가치 실현을 위한 고유한 잠재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우리 종이 현존재로 진화하면서 너무 많이 파괴한 데 대한 고유한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가 환경을 망쳐온 유일한 종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종보다 대규모로 파괴해왔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의식적으로, 체계적으로 무시해왔다. 다른 종이 파괴적으로 행동할 때는 도덕적 타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생물권역과 하나님에 대해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범죄를 집단적으로 저질렀다.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디. 이것이 우리를 다른 종들로부터 극적으로 분리시킨다.
우리가 다른 파괴적인 종, 예를 들어 사람들을 죽이는 세균을 만날 때 우리는 그 파괴력을 포함해 종 자체를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훨씬 더 파괴적으로 행동할 때 우리의 악행을 감당할 다른 종은 없다. 오직 우리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우위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개인의 경험에서 가장 큰 가치를 구현하는 우리는 스스로를 포함해 생물권역의 생존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인간에게 허세를 줄이고 우리의 자리를 상호연결된 전체 속의 한 종으로 여기라는 주문은 현명하지 않다. 우리가 세계에 끼친 피해는 세계 스스로 치유하기에는 너무 심각하다. 그러려면 너무 늦다. 우리 자신에게 그동안 잘못 사용해온 특별한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회개하라고 요구하는 게 낫다. 회개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 우리가 특별한 위치를 갖는 전체 생물권역을 위해 우리의 권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곳에서는 생명이 번성하고 가치가 증가했지만, 의미로서 “자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와 떨어진 자연이 성취한 균형을 어지럽힌 자연의 일부다. 우리는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종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연의 진화를 가로막았다. 가치들의 창조에서 하나님과 협력하는데 힘을 쓰는 대신, 치아의 일부로 하나님의 지속가능한 창조를 우리 자신의 지속가능하지 않은 창조로 대체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방식에 대해 많이 배웠고, 세계의 구원을 위해 신과 함께 일하는 위대한 재능을 갖게 됐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지구에 가한 거의 치명적인 상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울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집단적으로 끔찍한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강렬한 개인적 죄책감과 후회가 된다면 가치의 증가가 아니라 감소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방향을 바꾸는 집단적 회개가 필요하다. 이것은 객관적 죄의 인식과 후회의 감정 없이는 일어나지 않지만, 심화되면 안 된다. 매우 민감한 개인이라면 덕을 갖추기 위해 후회를 강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람들은 충분히 후회한다면 자신이 참여한 죄를 갚는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지 않다. 죄책감과 후회가 회개로 이어진다면 집단적 죄에 참여했다는 인식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 되지만, 다른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인류가 세계에 행한 일에 대한 너무 많은 개인적 후회는 오늘날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배적 세계관은 개인주의를 부추긴다. 각각의 개인은 오직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느끼도록 배웠다. 나아가 그런 행동이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 결과가 아무리 파괴적이라도 개인은 결백하다고 여겨진다. 비난은 다른 곳을 향한다. 기업의 책임에 참여한다는 생각은 이런 지배적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디언은 사물을 다르게 본다. 공동체와 떨어진 개인은 없다. 매 순간의 존재는 지난 사건의 종합이다. 그런 종합이자 스스로의 생성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결정되면서 존재는 자신이 탄생한 세계를 초월한다. 그러나 존재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그 세계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고도로 구조화돼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주로 구성된다. 과거는 이미 스스로 해석돼 우리에게 온다. 이 해석이 주로 우리의 자기이해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나는 자신을 화이트헤디언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시카고대학 신학원에서 화이트헤디언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주어졌다. 내가 다른 곳에서 공부했다면 이런 자기정체성은 생기지 않았거나 만약 생겼다면 실제로 나의 자기이해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 자신의 결정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정반대다. 그러나 내 결정의 역할은 특정 공동체와의 동일시를 확인하고 그 공동체의 형성과 확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그 공동체가 해온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것이 나의 자기이해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나의 자존감을 높였다면 공동체의 실수나 한계에 대한 인정 역시 나의 자기이해의 한 부분이 돼야 한다. 이것은 내가 그 실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그런 한계를 초래하지 않았을 때도 그렇다. 좋든 나쁘든 나는 성취와 실패에서 단체의 현실에 참여한다.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이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세계에서의 특정 지위와 특권을 주었다. 나는 집과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내 조국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것이 내 자존감에 추가된다. 나 자신을 미국인이란 정체성에서 떼어놓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나중에 시민권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시민권을 포기한 미국인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조국의 성취에 자부심을 갖는다면 내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조국의 범죄에서도 나를 분리시킬 수 없다. 참여를 인정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집단적 회개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의 회개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만한 개인적 책임감을 가질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화이트헤디언들에게 개인 정체성은 집단 정체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아마 집단 정체성의 가장 강력한 형식은 인간일 것이다. 인류 전체가 공포스러운 죄악에 가담했다면 그 지위로부터 많은 이점을 얻고 많은 행동이 정당화됐던 한 인간으로서 나는 책임감을 공유한다. 사실 나는 인류의 파괴적 행위에 매우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가담해 왔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불참은 제한적 참여보다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해 내가 그런 환경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했다면 개인의 죄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파괴적 행동을 강요한 상황을 변화시킬 책임은 공유한다. 개인적 결백은 중요한 목표가 아니다.

5. 교육은 지혜를 위한 것이다
현대 세계관은 교육을 형성하고 교육을 통해 스스로를 전파한다. 그 세계관이 잘못되고 현대사회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현재의 교육은 선보다 해악이 크다. 그렇다고 전혀 선이 없는 건 아니다. 많은 선을 행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육은 생명을 유지하는 지구의 수용력을 파괴하고, 그래서 이런 운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보다 자기파멸로 이끈다.
문제는 조기교육에 있는 게 아니다. 유치원에서 교사들은 아이들과 그들의 건강한 발달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빠르게 관심은 빠르게 경제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주제와 기술로 옮아간다. 경제에 대한 사회의 요구와 요구 받는 경제의 성격을 고려할 때 경제에 맞춰지는 게 노동자들의 복지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들을 여기 맞춰 준비시키는 건 합리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교육이 어린이들을 필연적인 종말로 가는 경제에 참여시키기 위한 준비일 뿐 아니라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점이다. 파괴적 경제에 맞는 준비를 해온 이들은 가능한 한 그 경제에 매달리지만, 그 파괴성은 명백하다.
고등교육은 훨씬 더 문제적이다. 이 단계 교육의 표준은 연구중심 대학이다. 성공적인 연구는 어떤 영역의 데이터를 분리시키고 그 분야의 연구방식을 개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결과는 학문 “분과”로 불린다. 모든 지식을 각각의 분과로 조직하고 그 각각이 인간에게 유용한 정보를 추가하는 게 이상으로 여겨진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각 분과학문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한 주제는 다른 주제만큼 연구에 적합해야 한다.
연구자 개인의 관심이 어느 정도는 반영될 것이다. 그러나 성과가 쉽게 나올수록 연구에 돈이 몰린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연구는 펀딩 여부에 좌우된다. 의료, 기업, 군사 목적에 돈이 주로 몰리므로 대부분 연구가 이 분야에 집중된다. 연구중심 대학이 가치중립적이므로 연구 평가는 수혜자의 입장에서 독단적으로 이뤄진다.
대다수 연구는 그것이 속한 분과학문의 현재 사고체계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된다. 확립된 방법이 사용된다. 이 방법들에 의해 연구될 수 없는 내용은 연구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부분 분과에서 방법과 이론 사이에 논쟁이 있으며, 연구자들은 이것을 연구의 지적 실체라고 믿는다. 그러나 분과의 역사에 대한 연구나 그 논쟁이 일어난 맥락에서의 기본 가정에 대한 숙고는 거의 없다.
연구중심 대학은 인간에 대한 정보량을 엄청나게 늘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정보가 어떻게 사용돼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붕괴에 이를 만큼 극단적으로 질주해온 현대 세계의 가정들에 대한 비판도 없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사회와 경제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대학의 어디에서 오늘날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이해하기 위해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모든 곳이다. 물론 많은 독립적 연구에서 얻어진 정보는 일관성이 없고 지침을 주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대학은 붕괴되는 문명을 구하는 것이 군대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하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축구 점수에 대한 정보보다 중요하지 않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전자보다 후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분과의 경계를 넘어 글로벌 위기에 대해 일관성 있게 고민하는 일부 교수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학으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명망 있는 저자인 스탠리 피시의 최근 책은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한 관심보다 가치중립적 연구를 지지한다. 책 제목은 “네 나름의 세계를 구하라(Save the World on Your Own Time)”이다. 세계에 대한 관심은 현대 대학 모델에 맞지 않는다.
연구중심 대학은 전문대학원들이 보완해주는 수많은 학과들로 구성된다. 초기교육에서 학생들은 노동자가 될 준비를 하는데 비해 대학은 학생들을 연구자나 교수뿐 아니라 경영인, 의사, 교사, 변호사, 엔지니어 등이 되도록 준비시킨다. 분과 별로 전문화된 학습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직업별 실용교육은 분과보다는 전문대학원에서 이뤄진다. 피닉스 대학은 분과학문을 넘어선 새로운 종류의 고등교육을 개척했다. 이 대학은 숙련 직무교육을 제공한다. 또 훈련 받은 직무와 직결된 연구에서 나온 정보를 제공한다. 명백히 이런 종류의 교육에 대한 수요가 있다. 가치중립이 유일한 가치인 대학들은 점점 이런 수요에 부응한다.
모든 것과 대조적으로 화이트헤드의 비전은 지혜를 지향하는 교육을 요구한다. 물론 모든 사회는 젊은이들이 경제를 포함해 사회에 참여하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첨단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기관이 필요하며 다음 세대의 일부는 이런 연구를 잘 하도록 교육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절망적 위기의식으로 지혜를 추구하고 이를 얻도록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연구기관이 필요하다.
지혜 추구는 초기의 인격 발달에 대한 관심과 이어진다. 적어도 화이트헤디언에게는 지혜란 성숙한 인간의 중요한 특성이다. 과거 세기에는 고등교육이 지혜를 포함한 인격 발달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런 관점에서 유용하게 여겨졌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분과학문에 걸쳐있는 사상을 가르치는 인문대학들이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대학들은 분과 연구에 맞춰지지 않은 교수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화이트헤디언은 고등교육에서 인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싸울 것이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특별한 역할에 대한 고전적 이해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오늘날 고등교육에 필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인문학은 전지구적으로 생물권역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 없던 시기에 생겨났다. 그것들이 인간중심적인 반면, 우리는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통합이 최우선 과제인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 인문학은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주의를 독려한다. 또 엘리트주의로 인해 여유가 있고 그 여유를 잘 활용하려는 이들과 그저 오락을 즐기려는 보통 사람들을 분리시킨다. 지혜는 중요성의 판단에서 드러난다. 연구중심 대학이 이런 종류의 판단을 거부하는 것은 지구의운명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디언은 대학이 연구기관으로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하며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통해 커리큘럼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나아가 학생들이 이런 비판적 반성에 참여하고, 이런 결정을 자신의 연구과제와 직업에 연결시키도록 독려함으로써 대학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것은 특별한 초점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세계는 물리학자와 엔지니어, 초등학교 교사와 경제학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물리학자와 엔지니어는 인간에 대한 특별한 주의와 더불어 생물권역의 번성을 고려하면서 연구와 프로젝트를 결정해야 한다. 초등학교 교사는 어린이들이 미리 겁을 먹지 않도록 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우리 시대의 현실로 인도할지 고민할 것이다. 경제학자는 어떻게 하면 경제를 성장시킬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어떤 경제의 경제를 제공해야 할지, 어떻게 그 방향으로 빨리 이행할지 질문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기본 가정은 끊임없이 발화되고 재고돼야 한다.
나는 고등교육 수준에서만 지혜를 교육의 가장 기초적 목표로 삼는 게 어떤 것인지 논의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고등교육은 초기교육과 단절되면 안된다. 생물권역의 상태에 대한 숙고와 이런 맥락에서 인류의 전망은 청소년들에게도 중요하다. 사회가 격려해준다면 그들 역시 지혜의 척도가 될 수 있다.

6. 경제는 생물권역의 번성을 향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은 산업혁명이다. 그 이전까지는 대중의 삶의 방식에 많은 중요한 변화가 있었지만, 농업경제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부분 사회에서 사람들은 토지에 생존을 의지했고, 소수만이 농부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를 흡수해 부를 얻었다. 이런 잉여가 마을과 도시의 삶을 지탱했으며, 여기서 장인, 상인, 전문가의 중산계급이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발달했다. 소수는 호사스럽게 살았다. 대개 빈민층에 대한 제한된 식량공급이 빠른 인구증가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세기에 발견한 것은 같은 수의 노동자가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의 초점은 의류, 가구, 일상용품, 도구, 기계의 생산에 있었다. 노동자들을 조립라인에 배치하고 석탄 에너지로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노동시간당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과거에 희소했던 상품이 풍부해지고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부자들의 사치품이었던 것을 대중들도 쓸 수 있게 됐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었다. 장인들이 느꼈던 만족감이 조립라인 노동자들에게는 없었다. 공장에서는 전례 없는 공해가 발생했다. 공장 투자자들의 이익 추구는 농촌에서 소작인의 착취보다 더욱 악독한 노동 착취로 이어졌다. 산업 도시는 빈민가로 가득 찼다. 실업은 농업사회에서 거의 경험하지 못한 문제가 됐다. 지주 귀족은 그들의 권력이 산업 자본가들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단순한 이익 추구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산업화로 인한 변화에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시계를 되돌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업모델은 점점 더 넓게 적용됐다. 결국 농업도 산업화되었고, 산업적 방법의 특징은 상품화에도 적용되었다. 노동시간당 생산으로 정의되는 생산성 증가는 모든 곳에서 표준이 되었다. 산업경제는 더 큰 시장을 요구했다. 규모의 경제가 돼야 거대한 공장이 작은 공장들보다 가격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제품을 판매하려면 더 많은 고객이 필요했다. 산업권력이 전세계에서 시장을 찾으면서 국제관계에 영향이 미쳤다.
공장들은 종종 지역에서는 충분하지 않은 천연자원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경제가 주요한 정책 관심사인 국가들은 자원 확보에 관심을 가졌다. 제국주의가 진전한 또 다른 계기가 있다.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특별히 커졌고, 그래서 조건이 좋은 곳이라면 어디서든 상품을 생산하고 수요가 있다면 어디서든 판매했다.
애덤 스미스로 시작된 현대 경제이론은 산업화와 더불어 성장했다. 경제학자들은 산업화의 이점을 설명하고 산업주의자들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사람들에 맞서 산업주의자들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공장생산뿐 아니라 전체 경제가 재화와 서비스 생산량으로 측정하는 “성장”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글로벌 시장으로 향하는 움직임의 강한 옹호자였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연구와 이론의 기반을 산업사회에 두었다. 오늘날에는 금융부문이 생산부문을 지배하게 되었다. 금융은 정부마저 장악했다. 통화공급의 조절이 권력의 주요 원천이다. 경제학자들은 산업경제를 대체한 이런 현상에 대한 이해가 훨씬 낮다. 은행이 조절하는 시장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경제이론가들이 산업 성장에 필요한 원자재를 공급하는 환경의 능력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무시했다. 그들은 특정 자원이 고갈되면 가격이 올라간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사용자가 이 자원을 보다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쓰며, 더 풍부하고 덜 비싼 대체재를 찾도록 한다. 그런 희소성은 또 발명가로 하여금 부족한 자원이 불필요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게 한다.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신호가 희소성의 문제를 우회하는 개발로 이끈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원 부족을 성장의 한계로 여기지 않는다. 아주 최근까지 공해에 대한 논의는 적었지만, 경제학자들은 이것에 같은 유형으로 대응했다. 인간 경제의 무제한 성장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국외자로 간주된다.
“용량초과와 붕괴”라는 아이디어는 동물학에서 왔으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주류경제적 사고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늘날 심각한 지구온난화의 문제는 이 개념을 인간사에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그것은 경제이론에서 제외됐다. 경제학자는 어디서나 어던 환경에서나 경제성장의 치어리더로 남아있다. 그들은 가장 유해한 형태의 현대적 세계관에 깊이 빠져있다.
다행스럽게도 학계와 경제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규모 문제를 강조하는 생태경제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은 인간경제가 자연경제의 일부이며 한정된 부분으로 나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연 경제가 한정적인 한 인간경제 역시 제한되어야 한다. 허먼 데일리는 오랫동안 이런 발전의 선두주자였다.
생태경제학자들은 경제의 목표를 재정의한다. 이 작업에 중요하게 기여한 책이 마크 애니얼스키의 “행복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Happiness, 2007)”이다.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그렇게 추켜세운 성장이 실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함을 발견했다. 경제학자의 임무는 인간의 복지에 기여하는 경제의 조직 방식을 찾는 것이다. 부탄왕국은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이란 용어로 행복을 측정한다.
경제학의 목표를 재정의하는데 중요한 전환은 주류 경제이론의 근간인 개인주의로부터 공동체에 대한 배려로 가는 것이다. 최소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의 행복은 소비하는 상품과 재화의 양보다 인간관계의 작동에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불행하게도 현대적 사고는 경제학을 오도했다. 그들은 계약과 교환 이상의 인간관계를 무시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방식은 그들이 사는 공동체의 질을 높이는 것이지만, 현대 경제사상의 적용은 공동체를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경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물, 음식, 개선된 쉼터, 교육, 의료 혜택을 통해 많은 공동체들이 개선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공동체를 떠나도록 만드는 건 인간의 복지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행복을 위한 경제학” 조차도 우리 시대에는 충분하지 않다. 애니얼스키와 부탄의 통치자들이 완전히 이해한 것처럼 인간의 행복은 전체 생태계의 번성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전지구 생물권역의 재생을 위한 경제이론이 필요하다.
생태경제로의 이행은 산업과 정부에 대한 금융기관들의 지배를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 열쇠는 공동체를 위해 어떤 수준에서든 통화공급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의 국유화는 미국의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다. 노스 다코타처럼 주립은행들은 주들의 재정조건을 크게 개선할 것이다. 화폐 발행은 더 낮은 단계에서도 가능하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는 붕괴되고 있다. 이 붕괴를 예방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이 기회를 공동체에 봉사하는 지역경제를 건설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것은 장기적 추세의 심오한 반전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공동체를 다국적 은행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주립은행과 지방은행과 지역통화가 포함된다. 지역경제는 성장 대신 절약과 지속가능성을 장려한다. 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장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대신 지역사회는 원하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일할 수 없는 사람의 필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책임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상품의 과잉으로 측정된 “높은” 생활수준을 건강한 생태계, 건강한 인간공동체의 안전한 장소와 교환할 수 있다.

7. 농업은 토양을 되살려야 한다
인간의 개입과 상관없이 계절의 순환은 토양을 조금씩 되살려 놓는다. 그것은 점점 비옥해져 스스로의 성장을 촉진한다. 인간이 사냥과 채집으로 살았을 때는 이런 토양의 개선이 계속됐다. 변화는 농경사회가 부상하면서 생겼다.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고 의도적으로 한가지 작물을 심으면 원하는 식물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농사는 다양한 맥락과 형식으로 발전했다. 일부는 다른 것보다 지속 가능했지만, 모두 표토를 쌓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반대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일부 고대문명은 사람들이 경작하던 땅이 부양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멸망했다. 이것은 “용량초과와 붕괴” 모델의 농업을 시도하려는 이들에게 경고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경작할 만한 새 땅이 발견되고, 오래된 땅의 일부도 여전히 비옥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경우이든 대안은 없어 보였다. 농업은 인구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음식을 생산했다. 인구를 부양하려면 유해한 방식의 경작이 계속돼야 헸다. 사람들이 새 땅으로 옮겨야 했다면 그렇게 했다. 지구의 인구가 경작지 규모에 비해 작은 한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보였다.
수천 년 동안 기본적인 농업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특히 20세기에는 산업모델이 농업에 적용됐다. 가족농장은 농업기업에 길을 내주었다. 농업과학은 식물의 화학적 수요와 잡초 및 해충을 죽이는 방식을 연구했다. 비료와 독극물이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필요한 영양을 인공적으로 주입할 수 있으므로 토양의 상태는 덜 중요해졌다. 단일경작이 확산됐다.
새로운 화학적 지배에 맞춰 식물의 유전자를 변형시켰다. 다양한 종의 밀과 옥수수는 화학물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단일종으로 대체됐다. 거대한 기계가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을 대체했다. 농촌의 많은 지역에서 인구가 감소했다.
이 모든 것에서 얻어진 성과는 생산량을 노동시간으로 나눠 계산한 “생산성”이었다. 경제이론가들은 이런 성과를 농장노동자들이 다른 일을 하도록 해방된 것이라고 축하했다. 생태학자들은 토양이 자연적 비옥함을 잃고 더 빨리 침식되는데 불안을 느꼈다. 그들은 또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과 인공적 품종이 자연, 환경,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우려했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볼 때 생태학자들은 걱정할 권리가 있다. 수천 년 동안 농업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친밀한 개입으로 이어져 왔다. 인간의 조작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주로 자연과의 작업과정이었다. 산업과 관련해 개발된 현대 경제이론을 농업에 적용하는 것은 전체 과정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한 농사를 점점 희소해지는 담수와 석유라는 자원에 의존하게 한다.
쿠바가 그런 위험을 보여준다. 소비에트연방의 피보호자였던 쿠바는 현대적 방식으로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는다. 소비에트연방과 위성국가들을 위해 설탕을 생산하라는 임무였다. 대신 쿠바는 석유와 식량을 포함한 다른 필수품목을 받기로 했다. 광대한 쿠바의 농지가 산업적인 설탕 생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국의 봉쇄조치가 이뤄졌다. 쿠바는 설탕을 수출할 수도, 석유와 식량을 수입할 수도 없었다. 적응은 어려웠다. 그러나 대규모 기아는 없었다. 자산을 가진 농부들이 재빨리 석유의존적인 설탕 생산에서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다행히도 유기농법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많이 진전됐고, 필요가 생기자 농부들은 빨리 배웠다.
산업화된 설탕 생산자들은 이런 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런 농장들은 설탕 생산에 맞춰졌다. 그들의 장비는 설탕 생산용이었고 노동자들은 다른 작물이나 경작 방식에 대해 지식이 없었다. 어쨌든 전통 농법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쿠바에는 농민 농사가 산업적 형식에 완전히 휩쓸려 나가지는 않았다.
화이트헤디언들이 미래를 내다보듯이 우리는 기업농에 사용된 땅이 전통적 방식으로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전통적 가족 농사로부터 진화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 그것은 석유난에 부딪친 쿠바인들이 택했던 유기농 생산이다. 그러나 유기농 조차 토양을 착취하며, 토양이 감소하면서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의 임무는 착취를 멈추고 토양을 회복하는 자연적 과정을 따르는 방식을 찾는 것이다.
기업농과 관련해 부정적 측면과 함께 많은 긍정적 발전도 이뤄졌다. 무경운(no-till) 농법은 토지를 바람에 노출시키는 쟁기질을 안 해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특정 식물들의 조합이 해충 피해를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 관개는 직접 필요한 곳에만 사용하는 시스템에 의해 훨씬 적은 물로도 가능하게 됐다.
우리는 일년 중 언제라도 거의 모든 음식을 먹는데 익숙할 만큼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글로벌 경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사치다. 그것의 붕괴를 준비하는 우리는 지역에서 키운 작물을 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다양성을 감소시키지만, 장점도 있다. 유기농법으로 키운 신선한 작물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이 방향으로 이미 많이 진전됐다. 전 세계에 걸친 수천 개의 파머스 마켓은 작물을 키우는 농부뿐 아니라 식습관의 변화도 독려한다. 광범위한 도시농업 운동도 있다. 이것은 많은 공지와 빈집과 실업자들이 있는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발전했다. 내가 사는 LA 카운티 주거지역에서도 노는 땅을 실업상태인 멕시코 이민자들에게 이용하게 하려는 노력이 있다. 지금까지는 지역의 식품생산이 식품산업에 비해 주변적이다. 그러나 이것의 성장은 글로벌 체제의 붕괴에서 누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의 문제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토지가 제한적이고 식량 수요가 커지면 집약적인 식량 생산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이미 있다. 패서디나에 사는 여섯 명의 가족은 4분의 1 에이커에서 생산한 식량으로 자급자족한다. 또 현금을 벌기 위해 특별 품목을 인근 레스토랑에 판매한다.
장기적으로는 또 다른 진전이 중요해질 것이다. 집약노동 방식은 토양 침식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완전히 새로운 농법도 배울 수 있다. 캔자스주 살리나에 있는 랜드연구소의 웨스 잭슨은 광대한 미국 대초원이 다년생의 다품종 경작이 이뤄진 수천 년 동안 비옥한 표토로 뒤덮였다고 밝혔다. 유럽 농부들이 이주했을 때 그들은 이것을 일년생 단일작물 재배로 바꿨다. 그래서 토양유실이 시작됐다.
우리는 흔히 식량공급에 필요한 곡식이 일년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잭슨은 다년생의 옥수수와 밀이 있지만, 우리가 경작하는 일년생에 비해 생산량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다년생 작물이 인간에게 필요한 씨앗을 덜 생산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생산성이 높은 다년생 곡물을 개발하기 위한 50년에 걸친 실험에 착수했고, 큰 진전을 이뤘다. 이런 연구야말로 우리 대학들이 장거리 선적을 잘 견디는 토마토를 만들기 위한 연구 대신 해야 하는 일이다. 식습관의 변화 역시 더 많은 사람들이 붕괴에서 살아남도록 해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육식에 중독돼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 사람들보다 많이 먹는다. 그리고 우리는 건강에 필요하고 좋은 이상으로 먹는다. 많은 경우 우리가 먹는 고기의 열량에 비해 열 배나 많은 열량의 곡식을 동물 먹이로 사용한다. 육식의 극적 감소는 더 많은 곡물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육식문제에 접근할 때 목표는 완전한 채식주의가 아니라 곡물 사료로 키우는 동물의 육식을 그만두는 것이다. 농사는 안되지만 목장에 맞는 땅이 있으며, 고기생산은 거기에 가장 적합하다. 또한 작은 농장을 가장 통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필요하다. 그들은 버려져야 할 쓰레기를 먹고 작물에 필요한 천연비료를 생산한다. 잉여 동물의 소비는 식량 공급에 효율적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비전은 다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채식주의자가 되도록 한다. 우리가 죽이는 동물들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그들을 죽이는 건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 가치를 파괴하지는 않지만, 같은 종류의 죄악이다. 화이트헤디언은 그런 살생이 최소화해야 된다고 믿는다. 육식을 자제함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화이트헤디언의 또 다른 주장이 있다. 화이트헤디언의 관점에서 고통을 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 이론적으로 달리 주장하더라도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고기가 잔인한 방식으로 사육된다는 것이다. 이런 고통은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있다. 고기소비는 동물의 고통에 야만적으로 무관심한 산업을 지탱한다.

8. 편안한 주거는 자연에의 요구를 최소화해야 한다
값싼 땅, 값싼 교통, 값싼 설비의 시대에 우리는 교외의 넓은 땅에다 수백만 채의 넓고 단열이 안되는 집을 지었다. 주택 건설에 많은 나무를 사용해 그 과정에서 숲을 희생시켰다. 개인주의는 대가족을 핵가족으로 대체하고 이웃으로부터도 우리 자신을 분리시켰다. 우리 이웃보다는 다른 곳에 있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에게서 공동체를 찾았다. 우리 집은 우리 자신과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가 그렇듯 남들도 우리 사생활을 존중해주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이제 지역에서의 식량 생산을 위한 토지가 필요하고 교통과 설비가 비싸지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숲을 없애기보다 나무로 덮어야 한다.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분명 우리의 임무 중 많은 부분은 가진 것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열로 설비 이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태양판으로 우리가 쓰는 에너지 일부를 생산할 수 있다. 이웃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나홀로 차량을 줄이고 공용의 설비를 마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땅을 식량 생산에 사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중요하며 얼마 동안은 붕괴를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장에서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 가진 것을 대체해야 하는 새로운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다행히 숲을 더 벌채하고 냉난방 설비의 효율을 더 높이지 않고도 안락한 주거를 제공하는 건물 실험이 많이 이뤄졌다.
슈퍼벽돌이 한 사례다. 전통벽돌은 우리 현대인들이 짓는 집보다 환경에 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것은 목재가 필요했고 다른 한계도 있었다. 슈퍼벽돌 건물은 집을 짓는 땅으로부터 90% 이상의 건축자재가 나온다. 목재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건설 과정에서 약간의 운송이 필요하고 원거리 숲에 의존하지 않는다. 전통벽돌처럼 두꺼운 벽은 우수한 단열효과를 낸다. 내구성도 높다. 화재에도 강하다. 지진에 대비해 벽을 보호하는 작은 철봉을 사용한다. 그것은 매우 다른 미래로의 전환에 맞게 지어지는 건물이다.
이런 것으로 현재 교외 건물을 대체하는 것은 훌륭한 진전이지만, 이것은 주거 문제의 일부만을 해결한다. 거주자들은 여전히 직장이나 필요한 서비스에서 떨어져 있다. 자전거로 연결될 수도 있으나, 교통 수요는 남아있다.
파올로 솔레리는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는 우리가 짓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를 상상했다. 이것을 건설하려면 슈퍼벽돌 건물보다 많은 재료가 필요하지만, 현재의 교통수요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제안한 도시를 “건축적 생태학” 혹은 “아르콜로지”라고 부른다.
그는 어떤 도시들의 다운타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자연스런 발전으로서 아르콜로지를 바라본다. 오늘날 우리는 호텔에서부터 걷거나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길을 건너지 않고도 백화점, 식당, 사무실, 상업시설, 극장에 갈 수 있다. 때로는 실내공원도 포함된다. 이런 복합공간을 학교나 병원까지 확장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호텔 옆이나 안에 거주용 아파트들이 들어설 수도 있다.
이것은 건물의 층고 덕분에 좁은 지역에서도 가능하다. 10에이커에 짓는 80층짜리 건물 한 동이 800에이커를 차지한 1층짜리 건물과 가용공간이 비슷하다. 도로, 보도, 주차장, 주유소뿐만 아니라 건물 둘레, 건물 사이의 공간까지 실내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실제로는 더 넓을 것이다. 여기에는 도시가족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시설이 들어간다. 이 건물 안에서는 모터 운송수단이 필요 없거나 사용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도보나 필요한 경우 휠체어 혹은 다른 장비로 접근 가능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악몽처럼 들릴 수도 있다. 폐소공포로 상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주거구역을 바깥벽에 배치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그런 건물을 도시의 거리와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인 것으로 상상하는 대신 바깥의 거대한 야외에 혼자 서 있는 것으로 상상해보자. 건물의 어느 곳에서든지 잠깐 걸으면 정원일이나 레크리에이션을 위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달리 말해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거주자들보다 훨씬 쉽게 시골지역에 접근할 수 있다. 차를 운전해야 한다면 빌리면 된다. 다른 도시로 가는 교통편도 있을 것이다.
솔레리는 아르콜로지를 언덕 위에 건설하고 아래 경사면을 덮는 온실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온실을 통과하면서 덥혀진 공기를 아르콜로지의 난방이나 다른 용도로 쓰려는 것이다. 산업시설은 지하층에 배치해 나머지 건물에서 쓰고 남은 잔열을 활용한다. 아르콜로지 자체가 단열되고 계절에 따라 태양이나 그늘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지어진다. 직간접 태양에너지는 아르콜로지의 모든 수요를 충족시킨다.
일단 건설되면 아르콜로지는 화석연료가 필요 없다. 아르콜로지의 모든 사람들은 모터 교통수단 없이 그 안에서 모든 곳에 접근할 수 있다. 슈퍼벽돌 주택과 비교했을 때 문제는 건설이다. 현재 형태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보다는 돈과 자재가 적게 들겠지만, 여전히 사회적 부와 정교한 교통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 자원이 있다면 아르콜로지는 금방 건설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도시들보다 글로벌 경제의 붕괴에서 훨씬 잘 생존할 수 있다.

9. 대부분 제조업은 지역적이어야 한다
인류가 마침내 자살과도 같은 화석연료 사용을 끝내기로 결심했을 때 한곳에서 생산한 상품을 전세계로 운송하는 일도 끝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것은 쉽게 예측되는 현재 문명 붕괴의 한 부분이다. 물론 화석에너지 중독이 너무 강해서 인간과 생물권역에 어떤 비용을 치르게 할 지 모르는 글로벌 문명을 지키려고 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지구 용량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만약 더 큰 규모의 원자력 에너지로 돌린다면 생존에 대한 위협은 그 성격만 달라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는 자살 직전 멈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말하겠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면한다. 현재 글로벌 문명의 장점 가운데 어떤 것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식품과 주거지에 대해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싶은 막대한 제조품의 세계가 있다. 가능할까.
대답은 아무도 무엇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유통을 위한 제조로부터 현지 생산으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점진적 진전이 이상적이다. 교통비용이 올라감에 따라 무겁고 부피가 큰 품목은 수요지 가까이서 생산할 것이다. 화석연료 사용이 점점 제한된다면 그런 추세는 가속화하며 작고 가벼운 상품조차 더 지역에서 만들 것이다. 이런 전환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 글로벌 생산방식에 비해 우리의 삶과 사회에 적은 영향을 미친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경제의 지역화의 일부이다.
그러나 상품운송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산업생산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다. 이제 대체에너지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가장 좋은 것은 풍력 및 태양이다. 소규모 지역생산은 현재 대세인 대규모 집중생산 방식에 비해 풍력과 태양 에너지를 활용하는데 유리하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제조에 필요한 천연자원을 해당지역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원을 운송할 수 없다면 제품 생산도 어렵다. 이 문제는 많은 독창성이 요구된다. 이것이 해결되면 많은 수요가 지역에서 가능한 원료들로 충족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옷을 생각해보자. 면과 모는 옷의 중요한 원료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이 원료를 구할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섬유로 옷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상점들은 지금 당연히 여기는 수많은 종류의 옷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옷에 대한 실제 수요는 세계 어디서든지 대부분 충족될 수 있다.
지역생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많은 것들이 비실용적이라는 것이다. 자동차가 그 예다. 백만 명이 사는 도시라도 시장이 그 도시로만 한정된다면 자동차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없다. 그 도시는 확실히 여러 경쟁 회사를 지원할 수 없다.
이상적인 답은 도시들이 자동차가 필요 없도록 건설돼야 한다는 것이며 실제 이런 방향으로 나가길 희망한다. 자가용들이 어렵긴 하겠지만 재앙 없이 사라지길 상상해본다. 그러나 대중교통은 많은 장소에서 지역생산이 더욱 비실용적인 차량들을 요구한다. 교통수단이 붕괴하는 글로벌 사회로부터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로 고통 없이 전환되는 걸 상상하기는 어렵다.
도시교통과 관련해 두 방향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하나는 자가용뿐 아니라 대중 교통수단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거주자들로 하여금 자전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삼을 만한 자족적 지역 안에서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거대도시들이 자신들의 교통수단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용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차량을 제조하는 공장과 함께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교통체계에 전력을 공급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또 다른 폭넓은 변화가 상상되고 고무될 수 있다. 우리는 값싼 대량생산 제품에 익숙해졌다. 미국인 대다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갖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그것들을 쌓아두거나 새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옷장을 비우는 것이다. 이런 물건의 홍수는 사람들이 실제 필요한 물건이 대부분 손으로 만들어지던 상황을 대체했다. 오늘날 수작업은 주업이 아닌 취미이지만, 이런 방향으로의 후퇴는 환영할만한 거시다. 수작업이 칭찬받고 그 생산품이 수익을 남겨 팔린다면 실업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자연과 최소한의 물건을 사용하겠지만, 우리가 갖는 것은 더 큰 만족을 주며 그것의 생산은 일상적 행동이 아닌 창조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자통신의 광대한 세계가 글로벌 경제의 붕괴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새로운 질서 안에서 우리가 즐겼던 여행은 드문 사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나머지 세계와 단절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전자적으로 접촉하는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다. 새로운 글로벌 상황에의 적응이 한 장소에서 성공하면 세계의 다른 사람들과도 쉽게 공유될 수 있다. 외딴 마을의 사람들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상가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최선의 의학지식에 누구든 접근할 수 있다. 생산의 지역화가 넓은 지평의 사고와 행동의 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10. 모든 공동체는 공동체들의 공동체여야 한다
글로벌 경제와 연관 제도의 붕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역 자원으로 뭔가를 해보도록 이끌 것이다. 사람들이 이 과제에 지속불가능한 글로벌 경제와 지구 자원의 용량초과를 만들어냈던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접근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매우 황폐해질 것이다. 이 글은 대안을 북돋우기 위해 씌었다. 인류는 지역 공동체를 건설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공동체는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자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부분 교외지역의 이웃들은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는 주민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즉 나는 나 자신을 “필그림”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나의 은퇴시설인 필그림 플레이스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지금 내가 누구인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참여하는 공동체다. 필그림 플레이스는 거기에의 참여가 다른 필그림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것이며 전체에 대한 일정 책임을 지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의 공동체다. 우리는 누구도 재정문제 때문에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민족국가가 생겼을 때 그것은 공동체가 되고자 했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국적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기를 기대하고 국가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거기에 기여하고자 한다.
민족국가들로 구성된 유럽의 형성은 모더니티의 부상에 기여했다. 그것은 민족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지역공동체와 종교공동체를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많은 부분이 지역적이었고, 지역공동체는 강력하게 남아있었다. 산업혁명은 지역경제를 크게 약화시키고 국가 안에서의 이동성을 증가시켰다. 지역공동체는 중요성을 잃고 더 이상 공동체로 작동하기를 멈췄다. 이런 전체 과정은 계몽주의 사상이 뒷받침하는 개인주의에 의해 강화됐다.
이런 개인주의는 이제 민족공동체에 대해서도 등을 돌렸다. 경제엘리트는 더 이상 자신들을 특별히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공동체에 속했다면 그것은 부와 권력을 가진 초국가적인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미국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기여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뿌리를 둔 그런 생각을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영향력도 커진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에게 자유를 주고 이익을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부는 그들을 다른 사람들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다른 목적의 어떤 기여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커져가는 글로벌 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중요성을 새로 자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역 차원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다. 심각한 공동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고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데 동의하기를 희망한다. 앞 장에서는 가장 희망적인 방식으로 가능한 것을 제시했다.
공동체의 주요한 문제는 자신들을 다른 공동체와 구분해서 정의하는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식이 강한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실제 혹은 가상의 위협으로 인식한다. 세계를 우리/그들로 이해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부정적 이해와 함께 쉽게 생겨난다. 각자 중요한 결핍을 가진 지역공동체들로 구성된 세계는 쉽게 폭력으로 변하는 갈등으로 위협받는다. 이런 종류의 세계는 지속불가능하다.
그래서 목표는 강하고 건강한 지역공동체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공동체가 돼야 하는 것이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런 사례를 볼 수 있다. 소도시의 고등학교 팀을 생각해보자. 소도시민들은 그들의 팀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그들을 맹렬히 응원한다. 그러나 특정리그를 구성하는 팀들은 또한 그 리그에 참여함으로써 정체성을 얻고, 그 정체성이 강하고 건강하기를 원한다. 또한 관심이 좀더 넓어지면 자신들의 팀을 운영하던 이들은 다른 팀을 응원하는 다른 소도시에 관심을 갖는다. 팀 간의 경쟁은 스포츠맨십의 맥락에 포함되며, 팀들은 경쟁팀을 존중하는 일의 중요성을 배운다.
건강한 지역공동체는 기본적 자기이해의 일부로서 다른 공동체와 그 소속원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가질 것이다. 한 공동체가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다면 이웃들이 도우러 올 것이다. 경쟁을 하는 건 건강하지만, 여기에 좀더 넓은 맥락의 존중과 협력이 없다면 건강하지 않다.
지역공동체들은 상대적으로 자립적 경제를 유지하지만, 이웃과의 협력이 필요한 경제적 문제도 있을 것이다. 오직 경쟁만 하는 곳은 생존하지 못하며, 자신과 함께 다른 공동체까지 파괴할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공동체의 공동체에 참여해야 한다. 각 공동체가 상당한 자율권을 갖더라도 완전히 독립하려는 어떤 노력도 실격이다. 공동체의 공동체는 또한 결정의 권위가 필요할 것이다. 공동체의 공동체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초점이 있는 세계에서조차 글로벌 수준에서의 거버넌스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정치구조는 우리가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극복할 때만 지속가능하다. 현대세계에서 개인주의는 지역과 민족 단위 공동체의 침식뿐 아니라 어떤 수준에서든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런 필요는 “실체”의 사고로부터 나온다. 과정사상은 공동체적 사고다. 개인은 공동체에서만 건강한 사람이 된다. 사람은 지배하지 않으며 공동체도 그렇다. 공동체는 사람을 형태 짓고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태 짓고 권위라는 수단을 부여한다. 지역공동체는 지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동체들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공동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건강하고 강해질 수 있다. 상위의 공동체는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을 구성하는 공동체들에 봉사하려고 존재하지만, 이런 공동체들은 스스로의 권위라는 수단이 필요하다.
실체적 사고는 한 기관의 힘이 커지면 다른 기관은 힘을 잃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과정사상은 협력이 아니면 큰 힘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협력의 매개의 힘을 키우는 것은 그것을 통해 협력하는 사람들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형태의 힘은 다른 사람의 힘을 키우는 힘이다. 그것을 깊이 이해하는 세계가 지속가능한 세계가 될 것이다.

2019/06/04

1905 박한식[4]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등록 :2019-05-05 21:01수정 :2019-06-03 09:56

길을 찾아서-4회 시브이아이디(CVID)가 불가능한 까닭
80·90년대 북에서 겪은 ‘팀스피릿 훈련’
한미 연합군사훈련 때면 ‘전시’ 초비상
농번기 맞물리면 한해 농사에도 악영향

집집마다 미군 공습 대비 ‘야간소등’
나사 위성촬영 사진 ‘남북 대비’ 선전
“북 전력난 극심-남 경제발전” 왜곡

“미군이 돌연 선제공격하면 어쩌나”
학자·고위급 정치지도자들 ‘공포감’

‘완전·검증 가능·불가역적 비핵화’
북-미 서로 불신하는한 실현 불가능



길을 찾아서-4회 시브이아이디(CVID)가 불가능한 까닭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북핵위기'는 그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중국, 북한, 한국 등이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과는 이내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협상이 반복될수록 북핵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북핵위기는 오히려 악화되는 패턴을 보였다. 북한은 현재 실질적인 핵 보유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기이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후 지금까지 50회 이상 다녀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북한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각으로 북한을 해석하고, 또 심지어 그런 시각을 북한에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통해서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시각은 오늘도 여전히 북한을 강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시각으로 북한을 재단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란 용어로 개념화했다. 아울러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입각해서 입안된 모든 북핵위기 해법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26년 동안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 역시 인식론적 제국주의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2002년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린 리너 출판)를 출간했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직접 관찰하고, 또 북한 내부 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면서 터득한 주체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나는 또 한 권의 북한 연구서를 동료 학자들과 함께 펴냈는데, <탈신비화시킨 북한>(North Korea Demystified·케임브리지 프레스)이 그것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각색된 북한의 모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2018년에는 우리말로 된 북한 연구서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를 펴냈다.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2014년 1월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야경 사진으로, 그해 <로이터>에서 ‘올해의 사진’으로 뽑혀 화제를 모았다. 박한식 교수는 흔히 ‘남북한의 경제 발전상 대비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는 이런 사진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론적 제국주의’ 시각을 상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펴낸 박한식 교수의 저서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린 리너 출판)그런데 약 10년을 주기로 출간된 나의 책 제목들이 어떤 공통의 명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담고고 있었다. 그런 나의 연구 태도를 ‘엠퍼시’(empathy)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는데, 우리말로 의역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현재 이른바 시브이아이디(CVID),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피브이아이디(PVID), ‘최종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뜻하는 에프에프브이디(FFVD) 등의 용어도 사용하고 있지만, 시브이아이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시브이아이디가 미국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개념이라고 판단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 동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조건 핵을 없애라고 강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한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시’(C), 즉 `완전한’(Complete)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 크게 일반사찰과 특별사찰로 나뉜다. 보통은 일반사찰로 한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무기 소재지와 핵무기 수량 등을 신고하면 원자력기구 에서 현지를 방문해서 검증한다. 북한이 신고한 곳의 일부를 샘플로 선별해서 검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사찰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반드시 북한에 대한 `신뢰'를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원자력기구나 미국은 북한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정직하게 신고한다손 치더라도 믿지를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사찰은 더더욱 어렵다. 원자력기구에서 북한이 신고한 곳뿐만 아니라, 자체 분석에 따라 핵무기 소재지로 의심되는 곳까지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사실상 북한의 모든 곳을 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런데도 원자력기구와 미국이 특별사찰을 강행한다면 북한은 자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총격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브이아이디에서 `브이’(V), 즉 `검증 가능한'(Verifiable) 비핵화는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 전문가가 북한이 신고한 지역을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원자력기구와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믿지 않으니 신고 지역만 보고 검증할 생각이 없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아이’(I)', 즉 `불가역적'(Irreversible) 비핵화 역시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전문가, 핵무기를 만든 경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 등도 보유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한다손 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불가역적' 비핵화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분석을 종합해보면 시브이아이디는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핵위기의 해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시브이아이디는 이제 그만 얘기해야만 한다.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처지에서 핵을 보유한 까닭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얘기한 엠퍼시(역지사지)를 통해서 그런 진단을 해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2012년 나온 박한식 교수의 편저 <탈신비화시킨 북한>(케임브리지 프레스)나는 이른바 남쪽의 `팀스피릿훈련'(1976~93) 기간 중에 북한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은 북한 공격을 목적으로 시행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었다. 해마다 두 달 남짓 동안 냉전시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참가병력이 20만~3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남쪽에서 팀스피릿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곧바로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미국은 훈련이라지만, 언제든지 총부리를 북한으로 돌릴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상태에서 일상생활은 전면적으로 마비된다. 팀스피릿훈련이 주로 농번기여서 북한은 농사 준비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북한은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내 찾아낸 해법이 바로 `핵무기'였다. 더욱이 북한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면서 이내 죽음을 당하고, 또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쉽게 살해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핵무기가 정답이라는 판단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최근까지 거의 해마다 북한을 방문해온 박한식 교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훈련’ 때마다 전쟁 상황에 휩싸이는 북한 지도자들과 주민들의 공포를 현지에서 여러차례 체험했다. 사진은 1984년 팀스피릿훈련 때 ‘청군’으로 참가한 주한미군의 모습이다. 사진 국방홍보원

나는 팀스피릿훈련 시기에 북한의 교수나 일반 주민의 집을 방문해서 그들의 대처방식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창문에 커튼을 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다. 혹시라고 불빛이 새어 나가면 정부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그러면 북한 전역이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에서 위성으로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사진을 종종 잡지나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다. 온통 깜깜한 북한의 모습과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모습을 선명하게 대비되는 사진이다. 팀스피릿훈련 같은 때 북한에 머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실소를 하거나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전기가 없으면 북한 전역이 저렇게 깜깜할 수 있단 말인가? 전기가 풍족한 남한은 저렇게 대낮처럼 밝은데 말이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북한과 비교하니 남한과 같은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내가 직접 목격한 북한의 밤이 평상시에는 그 정도로 깜깜한 적은 없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시작해 93년까지 해마다 시행된 팀스피릿 훈련은 ‘평화수호를 위한 한미 결속의 훈련’(1990년) 구호처럼 방어작전을 표방했으나 북한이 자구책으로 ‘핵개발’에 나서는 빌미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5년 3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럼스펠드(맨왼쪽) 미 국방장관이 ‘남북 대비 한반도 야경 사진’을 미국 방문중 펜타곤의 집무실을 찾은 박근혜(맨오른쪽) 당시 한나라당 대표 일행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팀스피릿훈련이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의 학자나 고위급 정치지도자과 대화를 해본 적도 여러차례인데, 그럴 때면 내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북한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막강한 무력을 준비해왔음에도, 자칫 선제공격을 당해 대응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생각해 보라.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History)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무려 3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북-미간 북핵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믿고 있다. 1993년 팀스피릿훈련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명칭을 달리한 한-미 군사훈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내가 직접 확인한 북한의 전시 대비 상황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5년 미 국무장관 럼스펠드가 공개해 화제를 모은 집무실 탁자 위의 한반도 야경 사진. 나사에서 2003년 9월 위성으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런데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내가 북한을 거쳐 남한에 와보면 완전히 딴 세상이란 것이다. 남쪽에서는 팀스피릿훈련 중에도 전쟁 가능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미간의 심각한 긴장구조와 그로인해 반복적으로 전쟁 상태에 내몰리는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그 공포에 따른 선제공격 가능성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런 실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색깔론'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색깔론 강변이 곧 애국적 행위인 것처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처럼 공허한 색깔론으로 한반도의 참혹한 전쟁을 방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터져도 북한이라는 `악마'가 일으켰다고 저주만 할 것인가?

`전쟁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누가 살아 남았는지 만을 결정할 뿐이다.'(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 only who is left)

버트런드 러셀의 이 경구를 기억하는 것, 한반도 평화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2723.html#csidx05c5c30aa68c3f99291d13246edc711

2019/05/06

한국농어민신문 모바일 사이트,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곡성 ‘항꾸네협동조합’





한국농어민신문 모바일 사이트,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곡성 ‘항꾸네협동조합’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곡성 ‘항꾸네협동조합’



기사승인 2019.02.19 16:20

신문 3083호(2019.02.2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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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생기고 귀농인 모이니, 자연스레 공동체적 마을 생겨"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 항꾸네협동조합 일꾼들. 왼쪽부터 문영규 상임이사, 신혜영 활동가, 이재관 초대 이사장.









위대한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이 세상을 구한다”고 했다. 2006년 녹색평론사가 펴낸 동명의 책에는 ‘스와라지’(마을 자치)에 대한 그의 사상이 담겨있다. 그는 이기심, 정신적 빈곤, 낭비, 농촌 착취를 조장하는 근대적 대도시와 산업문명을 “인류에게 큰 화근”으로 보고, 우리의 미래를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찾았다. 세계화와 경제성장에 희생되고, 마을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오늘 농촌현실에서 간디의 스와라지는 새로운 희망의 단초다. 전남 곡성에는 간디의 말처럼 마을공동체를 살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 나가는 ‘항꾸네협동조합’이 있다.





귀농 경험 나누고 의지하다

2013년 협동조합 만들어

조합원 자발적 기부·봉사로

마을 다큐 제작·잔치 등 해내



모임 위한 마을카페 ‘농담’

작은도서관 ‘책담’ 등도 꾸며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이야기



마을 초입, 나무로 만든 입간판에 ‘항꾸네’란 이름이 정겹다. 항꾸네란 남도에서 ‘함께’란 뜻이다. 항꾸네협동조합은 “혼자 말고 함께(항꾸네)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자연스레 여물고 있는 마을공동체다. 곡성에 귀농한 사람들이 경험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지내다가, 2013년에 협동조합을 만들고 마을에 필요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출발했다.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왔던 마을공동체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마을,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통해 마을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문영규 항꾸네협동조합 상임이사의 설명이다.



항꾸네협동조합 창립 준비를 하면서 ‘지속 가능한 삶’과 ‘조합원 행복’이라는 큰 방향이 정리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적정기술 공방, 마을 카페, 귀농 청년 돕기, 마을 다큐 제작, 마을잔치 등을 꼽아 보았고, 6년에 걸쳐 그것을 실제로 해냈다. 적정기술 공방 ‘다짜고짜’, 마을 카페 ‘농담’, 작은 도서관 ‘책담’, 귀농 청년 쉐어하우스 ‘꿈엔들’을 함께 지었다. 조합원이 땅을 무상 제공하고, 건축과 운영에 관련한 기획, 행정, 구매, 연구개발 등의 일을 모두 자발적인 기부와 봉사로 해결했다. 지난해 9월부터는 곡성군의 지원으로 청년 조합원 두 명을 정식으로 고용, 보다 짜임새 있게 운영하고 있다. 조합원이 무상으로 빌려준 땅에 조합원들이 직접 건물을 지었으니 임대료가 발생하지 않아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조합이 문을 닫을 일이 없다.



마을공동체가 잘 돌아가려면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중요하다. 기존 마을회관이 있지만, 이곳은 경로당과 비슷해 어르신들 위주로 모이고 쉬는 형태라 귀농인들이 모이기는 좀 어렵다. 그래서 마을카페 ‘농담’을 지었다가 공간이 아까워서 절반을 작은 도서관 ‘책담’으로 만들었다.



“여러 공간이 생기고, 생태와 자립을 위해 귀농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니, 자연스레 공동체적인 마을이 새로 생겨나더군요. 품앗이 농사도 할 수 있는 만큼 함께 하게 되고, 적정기술 난로도 함께 만들고, 함께 음식도 만들어 먹고, 영화도 보고, 축하할 일에는 파티도 하고, 그러다 음주가무로 이어지기도 하고.” 재능 있는 조합원에게 천연 염색과 옷 만들기와 목공을 배우고, 스스로 몸을 돌보는 몸 마사지도 하고, 조합원 집짓기도 함께 했다. 인근의 위해시설 막는다고 떼 지어 데모도 하고, 마을뿐 아니라 지역의 일에도 함께 참여하게 됐다. 공간이 생기고, 함께 하는 마음이 모이고, 그 가운데 새로운 사람들이 더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공동체성’이 있는 마을로 자리 잡아간다.





▲ 귀농청년 쉐어하우스 꿈엔들 내부. 정원 10명에 청년들이 머물면서 농촌생활을 익힌다.





귀농 청년 쉐어하우스 ‘꿈엔들’



일정기간 마을에 머물며 ‘농사·각종 기술’ 습득



귀농·시골생활 꿈꾸는 청년

적은 돈 내고 최장 1년 체험

마을 프로그램 참여도 가능



▲ 귀농 청년을 위한 쉐어하우스 ‘꿈엔들’을 아시나요?



항꾸네 조합원들은 대부분 청년 시절을 지나 귀농하는 바람에, 좀 더 일찍 삶을 바꾸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협동조합 설립 초기에 우리보다 더 젊은 청년들이 그런 아쉬움과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먼저 정착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자고 했다. 사실 귀농 희망 청년들이 당장 필요한 것은 거주할 집이다. 항꾸네는 귀농 귀촌 청년들이 일정기간 머무르면서 자기 농사와 에너지 적정기술을 배우는 쉐어하우스를 먼저 짓기로 했다. 38평 규모에 정원 10명인 쉐어하우스 ‘꿈엔들’은 2018년 4월 완공돼 현재 일부 청년들이 입주해 있다.



항꾸네가 준비한 ‘청년귀농 지원 프로그램’은 2019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사회적 농업’으로 지정됐다. 덕분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할 수 있게 됐고, 청년들도 적은 비용부담으로 참여가 가능해졌다.



프로그램 이름은 ‘청년 자자공(自自共) 과정’이다. 자자공이란 ‘자연, 자립, 공유’란 뜻이다. 자연 스런 논 밭 농사, 자연탐방(산행, 나무, 산나물 배우기), 남도 탐방을 통해 자연스런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또 적정기술, 목공, 건축, 자연염색, 몸살림, 술 빚기, 옷만들기, 시골요리를 배우면서 자립하는 힘을 기른다. 공유란 항꾸네가 직접 지은 청년공유주택, 마을공방, 공유부엌, 작은도서관 등을 이용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구술생애사 글쓰기 특강, 농촌인문학 프로그램 등 항꾸네 마을공동체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대상자는 △대안의 삶을 찾는 청년 △ 귀농을 희망하는 청년 △ 일정기간 머물며 시골생활을 해보고픈 청년이다. 연령은 만 39세까지다. 기간은 1개월, 6개월, 12개월 짜리가 있는데, 3월부터 시작된다. 비용은 쉐어하우스 ‘꿈엔들’ 기본사용료는 월 4만원에, 전기료, 상수도료, 인터넷비 등 관리비는 사용자들이 분담한다. 넓은 거실에 공동주방이 있어 식사는 함께 해결한다.



혹시 이 과정에 참여하면 꼭 전남 곡성에 정착해야만 하는지, 신청하면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오해하는 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문영규 이사는 “꼭 귀농할 청년이 아니어도 되고, 2박3일도 가능하고, 한 달만 살아보는 것도 가능하다”며 “귀농 귀촌을 생각하는 청년들이 와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골라 머물러 보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재미난 항꾸네 마을살이도 함께 하며 삶을 전환하는 귀농을 자유롭게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수시 모집인데 조기에 정원이 찰 수 있다. 참여를 원하는 청년은 일단 2월23일까지 전화 또는 방문하면 된다. 문의: 청년마을활동가 신혜영 010-4326-7584, 김현식 010-3065-4960



▲ 다짜고짜 공방 . 지역실정에 맞는 적정기술을 배우는 곳이다.





적정기술 보급 ‘다짜고짜’ 공방



고효율 화덕 제작, 집수리법 등 ‘공유’



▲농촌 적정기술을 보급하는 ‘다짜고짜’ 공방



다짜고짜 공방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활용하기 좋은 에너지와 생활의 ‘적정기술’을 교육하고 보급한다. 에너지 적정기술이란 산업화되고 유한하며 고비용인 석유와 원자력 에너지를 대신해 에너지를 자립하거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예를 들어 햇빛온풍기, 햇빛건조기, 햇빛온수기, 고효율 화덕, 고효율 화목난로, 개량구들, 축열식 벽난로 등이 그것이다. 생활 적정기술이란 귀농을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본주의적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적정기술이다. 창고, 구들방, 생태뒷간 등 건축물 손수 짓기, 집고치기, 용접, 목공, 구들 놓기 등이다.



다짜고짜 공방에서는 낯익은 빈 고추장 통, 가스통, 드럼통들이 난로와 화덕으로 재탄생된다. 또 ‘내 손으로 내 난로 만들기 워크샾’을 통해 참가자들이 재료비와 참가비를 내고 교육을 받아가며 직접 난로를 만들어 가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예를 들면 발열량과 내구성이 좋으며,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이 장착되고 상판을 화덕처럼 이용할 수 있는 난로를 누구나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용접을 가르쳐 준다. 다짜고짜 공방의 적정기술 제품은 입소문으로 많이 알려져서 구매신청도 들어오고, 어떤 것을 개발해 달라고 프로젝트 같은 일도 들어온다고 한다. 항꾸네는 주문이 들어오면 난로를 만들어 팔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적은 연료로 따뜻하게 살수 있는 기술을 나누고자 한다. 목마른 사람에게 매번 물을 주는 것 보다는 스스로 물을 찾고, 우물을 팔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함께 어울려 살다보면 인연이 주는 새로움 있어"



문영규 항꾸네협동조합 상임이사







“함께 어울려 살다보면 인연이 주는 새로움이 있어요.” 문영규 항꾸네협동조합 상임이사는 “농촌에서 살다보면 서로 서로 도와야 하는 상황이 오기에 자연스럽게 품앗이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자립을 꿈꾸며 살아가려 해도, 혼자만의 자립은 없다. 그런 자립은 한계가 있다. 혼자보다 함께 하는 자립은 더 두텁고 넓다. “한 해 한 해 함께 보내며, ‘항꾸네’ 사람들은 조금씩 그것을 느끼고 있어요. ‘귀농’은 ‘일의 전환’만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고 관계의 전환이라고요.”



자급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귀농했지만, 삶의 공간과 방법만 바꾸었다고 행복해지는 것만은 아니라 ‘전환’이 중요하다. “일과 누리는 삶이 어우러지는 것”이 바로 전환이고, 행복이다.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못자리도 같이 하고, 콩 농사도 함께 짓는다. 두부도 같이 만들어 먹는다. 다르게 살아왔지만, 남을 강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가족처럼, 형 동생 같은 느낌으로 지내면서 일을 함께 하다 보니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자급자족을 생각한다고 해도, 사회와 벽을 쌓고 지내는 삶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와 완전 분리가 아니라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고,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선 해결해 보자는 겁니다. 도시에선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지만, 여기선 나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한다는 게 다른 것 같습니다.” 소비를 줄이긴 하지만, 시골에선 도시처럼 돈이 들어갈 일이 많지 않고, 충동구매 같은 것을 없애는 거지 부족하게 산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원하는 삶, 주체적인 삶이 행복감을 줍니다.”



그는 청년 귀농은 “경험을 쌓을 겸 소박하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청년들이 들어오도록 여러 제도를 만들고 있지만, 사업계획서를 너무 거창한 것을 요구하는데, 도시 청년이 아무것도 몰랐던 농업을 어떻게 거창하게 쓰느냐”면서 “그 것부터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농촌을 살린다는 것은, “노력한 만큼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고, 정책은 그것을 어떻게 관리할까에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도, 정부가 일자리로만 보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 "농촌은 원래 계획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때 형편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빌 언덕이 필요한 거고, 인연이 중요합니다.” 항꾸네협동조합이 귀농청년들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를 주거 문제로 보고 쉐어하우스 ‘꿈엔들’을 만든 이유다.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한국농어민신문 모바일 사이트,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곡성 ‘항꾸네협동조합’





한국농어민신문 모바일 사이트,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곡성 ‘항꾸네협동조합’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곡성 ‘항꾸네협동조합’



기사승인 2019.02.19 16:20

신문 3083호(2019.02.2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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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생기고 귀농인 모이니, 자연스레 공동체적 마을 생겨"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 항꾸네협동조합 일꾼들. 왼쪽부터 문영규 상임이사, 신혜영 활동가, 이재관 초대 이사장.









위대한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이 세상을 구한다”고 했다. 2006년 녹색평론사가 펴낸 동명의 책에는 ‘스와라지’(마을 자치)에 대한 그의 사상이 담겨있다. 그는 이기심, 정신적 빈곤, 낭비, 농촌 착취를 조장하는 근대적 대도시와 산업문명을 “인류에게 큰 화근”으로 보고, 우리의 미래를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찾았다. 세계화와 경제성장에 희생되고, 마을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오늘 농촌현실에서 간디의 스와라지는 새로운 희망의 단초다. 전남 곡성에는 간디의 말처럼 마을공동체를 살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 나가는 ‘항꾸네협동조합’이 있다.





귀농 경험 나누고 의지하다

2013년 협동조합 만들어

조합원 자발적 기부·봉사로

마을 다큐 제작·잔치 등 해내



모임 위한 마을카페 ‘농담’

작은도서관 ‘책담’ 등도 꾸며



▲자연스레 여무는 마을공동체 이야기



마을 초입, 나무로 만든 입간판에 ‘항꾸네’란 이름이 정겹다. 항꾸네란 남도에서 ‘함께’란 뜻이다. 항꾸네협동조합은 “혼자 말고 함께(항꾸네)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자연스레 여물고 있는 마을공동체다. 곡성에 귀농한 사람들이 경험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지내다가, 2013년에 협동조합을 만들고 마을에 필요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출발했다.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왔던 마을공동체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마을,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통해 마을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문영규 항꾸네협동조합 상임이사의 설명이다.



항꾸네협동조합 창립 준비를 하면서 ‘지속 가능한 삶’과 ‘조합원 행복’이라는 큰 방향이 정리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적정기술 공방, 마을 카페, 귀농 청년 돕기, 마을 다큐 제작, 마을잔치 등을 꼽아 보았고, 6년에 걸쳐 그것을 실제로 해냈다. 적정기술 공방 ‘다짜고짜’, 마을 카페 ‘농담’, 작은 도서관 ‘책담’, 귀농 청년 쉐어하우스 ‘꿈엔들’을 함께 지었다. 조합원이 땅을 무상 제공하고, 건축과 운영에 관련한 기획, 행정, 구매, 연구개발 등의 일을 모두 자발적인 기부와 봉사로 해결했다. 지난해 9월부터는 곡성군의 지원으로 청년 조합원 두 명을 정식으로 고용, 보다 짜임새 있게 운영하고 있다. 조합원이 무상으로 빌려준 땅에 조합원들이 직접 건물을 지었으니 임대료가 발생하지 않아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조합이 문을 닫을 일이 없다.



마을공동체가 잘 돌아가려면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중요하다. 기존 마을회관이 있지만, 이곳은 경로당과 비슷해 어르신들 위주로 모이고 쉬는 형태라 귀농인들이 모이기는 좀 어렵다. 그래서 마을카페 ‘농담’을 지었다가 공간이 아까워서 절반을 작은 도서관 ‘책담’으로 만들었다.



“여러 공간이 생기고, 생태와 자립을 위해 귀농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니, 자연스레 공동체적인 마을이 새로 생겨나더군요. 품앗이 농사도 할 수 있는 만큼 함께 하게 되고, 적정기술 난로도 함께 만들고, 함께 음식도 만들어 먹고, 영화도 보고, 축하할 일에는 파티도 하고, 그러다 음주가무로 이어지기도 하고.” 재능 있는 조합원에게 천연 염색과 옷 만들기와 목공을 배우고, 스스로 몸을 돌보는 몸 마사지도 하고, 조합원 집짓기도 함께 했다. 인근의 위해시설 막는다고 떼 지어 데모도 하고, 마을뿐 아니라 지역의 일에도 함께 참여하게 됐다. 공간이 생기고, 함께 하는 마음이 모이고, 그 가운데 새로운 사람들이 더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공동체성’이 있는 마을로 자리 잡아간다.





▲ 귀농청년 쉐어하우스 꿈엔들 내부. 정원 10명에 청년들이 머물면서 농촌생활을 익힌다.





귀농 청년 쉐어하우스 ‘꿈엔들’



일정기간 마을에 머물며 ‘농사·각종 기술’ 습득



귀농·시골생활 꿈꾸는 청년

적은 돈 내고 최장 1년 체험

마을 프로그램 참여도 가능



▲ 귀농 청년을 위한 쉐어하우스 ‘꿈엔들’을 아시나요?



항꾸네 조합원들은 대부분 청년 시절을 지나 귀농하는 바람에, 좀 더 일찍 삶을 바꾸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협동조합 설립 초기에 우리보다 더 젊은 청년들이 그런 아쉬움과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먼저 정착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자고 했다. 사실 귀농 희망 청년들이 당장 필요한 것은 거주할 집이다. 항꾸네는 귀농 귀촌 청년들이 일정기간 머무르면서 자기 농사와 에너지 적정기술을 배우는 쉐어하우스를 먼저 짓기로 했다. 38평 규모에 정원 10명인 쉐어하우스 ‘꿈엔들’은 2018년 4월 완공돼 현재 일부 청년들이 입주해 있다.



항꾸네가 준비한 ‘청년귀농 지원 프로그램’은 2019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사회적 농업’으로 지정됐다. 덕분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할 수 있게 됐고, 청년들도 적은 비용부담으로 참여가 가능해졌다.



프로그램 이름은 ‘청년 자자공(自自共) 과정’이다. 자자공이란 ‘자연, 자립, 공유’란 뜻이다. 자연 스런 논 밭 농사, 자연탐방(산행, 나무, 산나물 배우기), 남도 탐방을 통해 자연스런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또 적정기술, 목공, 건축, 자연염색, 몸살림, 술 빚기, 옷만들기, 시골요리를 배우면서 자립하는 힘을 기른다. 공유란 항꾸네가 직접 지은 청년공유주택, 마을공방, 공유부엌, 작은도서관 등을 이용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구술생애사 글쓰기 특강, 농촌인문학 프로그램 등 항꾸네 마을공동체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대상자는 △대안의 삶을 찾는 청년 △ 귀농을 희망하는 청년 △ 일정기간 머물며 시골생활을 해보고픈 청년이다. 연령은 만 39세까지다. 기간은 1개월, 6개월, 12개월 짜리가 있는데, 3월부터 시작된다. 비용은 쉐어하우스 ‘꿈엔들’ 기본사용료는 월 4만원에, 전기료, 상수도료, 인터넷비 등 관리비는 사용자들이 분담한다. 넓은 거실에 공동주방이 있어 식사는 함께 해결한다.



혹시 이 과정에 참여하면 꼭 전남 곡성에 정착해야만 하는지, 신청하면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오해하는 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문영규 이사는 “꼭 귀농할 청년이 아니어도 되고, 2박3일도 가능하고, 한 달만 살아보는 것도 가능하다”며 “귀농 귀촌을 생각하는 청년들이 와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골라 머물러 보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재미난 항꾸네 마을살이도 함께 하며 삶을 전환하는 귀농을 자유롭게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수시 모집인데 조기에 정원이 찰 수 있다. 참여를 원하는 청년은 일단 2월23일까지 전화 또는 방문하면 된다. 문의: 청년마을활동가 신혜영 010-4326-7584, 김현식 010-3065-4960



▲ 다짜고짜 공방 . 지역실정에 맞는 적정기술을 배우는 곳이다.





적정기술 보급 ‘다짜고짜’ 공방



고효율 화덕 제작, 집수리법 등 ‘공유’



▲농촌 적정기술을 보급하는 ‘다짜고짜’ 공방



다짜고짜 공방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활용하기 좋은 에너지와 생활의 ‘적정기술’을 교육하고 보급한다. 에너지 적정기술이란 산업화되고 유한하며 고비용인 석유와 원자력 에너지를 대신해 에너지를 자립하거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예를 들어 햇빛온풍기, 햇빛건조기, 햇빛온수기, 고효율 화덕, 고효율 화목난로, 개량구들, 축열식 벽난로 등이 그것이다. 생활 적정기술이란 귀농을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본주의적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적정기술이다. 창고, 구들방, 생태뒷간 등 건축물 손수 짓기, 집고치기, 용접, 목공, 구들 놓기 등이다.



다짜고짜 공방에서는 낯익은 빈 고추장 통, 가스통, 드럼통들이 난로와 화덕으로 재탄생된다. 또 ‘내 손으로 내 난로 만들기 워크샾’을 통해 참가자들이 재료비와 참가비를 내고 교육을 받아가며 직접 난로를 만들어 가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예를 들면 발열량과 내구성이 좋으며,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이 장착되고 상판을 화덕처럼 이용할 수 있는 난로를 누구나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용접을 가르쳐 준다. 다짜고짜 공방의 적정기술 제품은 입소문으로 많이 알려져서 구매신청도 들어오고, 어떤 것을 개발해 달라고 프로젝트 같은 일도 들어온다고 한다. 항꾸네는 주문이 들어오면 난로를 만들어 팔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적은 연료로 따뜻하게 살수 있는 기술을 나누고자 한다. 목마른 사람에게 매번 물을 주는 것 보다는 스스로 물을 찾고, 우물을 팔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함께 어울려 살다보면 인연이 주는 새로움 있어"



문영규 항꾸네협동조합 상임이사







“함께 어울려 살다보면 인연이 주는 새로움이 있어요.” 문영규 항꾸네협동조합 상임이사는 “농촌에서 살다보면 서로 서로 도와야 하는 상황이 오기에 자연스럽게 품앗이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자립을 꿈꾸며 살아가려 해도, 혼자만의 자립은 없다. 그런 자립은 한계가 있다. 혼자보다 함께 하는 자립은 더 두텁고 넓다. “한 해 한 해 함께 보내며, ‘항꾸네’ 사람들은 조금씩 그것을 느끼고 있어요. ‘귀농’은 ‘일의 전환’만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고 관계의 전환이라고요.”



자급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귀농했지만, 삶의 공간과 방법만 바꾸었다고 행복해지는 것만은 아니라 ‘전환’이 중요하다. “일과 누리는 삶이 어우러지는 것”이 바로 전환이고, 행복이다.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못자리도 같이 하고, 콩 농사도 함께 짓는다. 두부도 같이 만들어 먹는다. 다르게 살아왔지만, 남을 강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가족처럼, 형 동생 같은 느낌으로 지내면서 일을 함께 하다 보니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자급자족을 생각한다고 해도, 사회와 벽을 쌓고 지내는 삶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와 완전 분리가 아니라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고,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선 해결해 보자는 겁니다. 도시에선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지만, 여기선 나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한다는 게 다른 것 같습니다.” 소비를 줄이긴 하지만, 시골에선 도시처럼 돈이 들어갈 일이 많지 않고, 충동구매 같은 것을 없애는 거지 부족하게 산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원하는 삶, 주체적인 삶이 행복감을 줍니다.”



그는 청년 귀농은 “경험을 쌓을 겸 소박하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청년들이 들어오도록 여러 제도를 만들고 있지만, 사업계획서를 너무 거창한 것을 요구하는데, 도시 청년이 아무것도 몰랐던 농업을 어떻게 거창하게 쓰느냐”면서 “그 것부터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농촌을 살린다는 것은, “노력한 만큼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고, 정책은 그것을 어떻게 관리할까에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도, 정부가 일자리로만 보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 "농촌은 원래 계획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때 형편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빌 언덕이 필요한 거고, 인연이 중요합니다.” 항꾸네협동조합이 귀농청년들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를 주거 문제로 보고 쉐어하우스 ‘꿈엔들’을 만든 이유다.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2019/02/13

09 허미영 한국의 생명농업운동에 미친 정농회의 영향





담론 201 12(1), 2009 pp. 27-58
한국의 생명농업운동에 미친 정농회의 1)
- 1) -
         허 미 *
국문요약
이 연구에서는 유기농업에서 정통성을 지켜온 정농회의 활동을 생명농업운동, 특히 신사회운동의 일환인 문화정체성운동으로 규정하 다. 정농회는 기존의 주류 농업방식에 항하며 성경에 기 한 이웃사랑을 강령으로 채택한 독특한 농민단체 이다. 정농회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높으며, 새로운 농업방식을 추구하고, 다른 농 민단체와 추구하는 가치도 다르다. 한 교육과 출 을 통하여 회원들의 의식교육  안농업의 보 과 확산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런 에서 농업방식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안 인 공동체문화를 형성하는데 진보 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 자원의 확보를 통한 세 교체  정농생 의 정상화를 통한 유통 활성 화문제 등 향후 발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주제어: 정농회, 생명농업운동, 문화정체성운동, 안문화, 발 변화

신라 학교 여성문제연구소/사회학

1) 이 논문은 2007년도 정부(교육인 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 아 수행되었다(KRF-2007-358-B00024). 귀 한 비평을 해주신 익명의 심사 원들께 감 사드린다.

Ⅰ. 문제제기

개인의 건강과 행복한 삶에 한 극 인 추구는 사회의 요한 흐름 의 하나이다. 우리사회의 요한 담론 의 하나인 먹거리 문제는 이런 흐름의 연속선  상에 있다. 먹거리 담론의 핵심인 안 성문제는 과학과 기술 의 용을 통한 농업의 산업화와 세계화의 결과이다. 농업생산의 산업화과정 은 부족한 식량에 한 도 이었다. 하지만 녹색 명이라는 성취의 이면에 지 않은 사회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간 진행된 농업의 화학화는 토양 의 황폐화  먹거리의 안 성에 한 심각한 이 되고 있으며, 규모화를 앞세운 값싼 외국농산물 수입은 소농 심의 국내농업의 생산기반을 와해시 키고 있다.

농업환경의 변화에 한 안 의 하나로 정부는 친환경농업을 극 추진하 다. 재 상태에서 친환경농업은 요한 사회 함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농업의 생산기반이 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농 의 기를 극복할 수 있는 안이라는 이다. 정부가 WTO 체제에서 고품질 농산물 생산으로 방향을 환할 때 안으로 제시한 것이 친환경농업이다. 둘째, 친환경농업 은 우리 사회의 먹거리 안 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이다. 먹거리 안 성 문제는 경제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농업부문의 경쟁력 향 상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의 기 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셋째, 속도문명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안문화운동의 성격을 띠 고 있다는  등이다(허미 , 2008: 240).
농업부문에서 주류문화에 한 도 으로 안농업 패러다임이 등장하 다
(Beus and Dunlap, 1990: 590-591). 안농업운동에서 유기농업단체의
역할은 지 않다. 재 국 인 유기농업 생산자단체로는 한국유기농업 회2), 정농회, 한살림, 자연농업 회 등 30여개 환경농업단체가 있다. 우리 나라의 안농업발 에서 한살림의 등장, 농산물 수입개방에 따른 정부의 정 책변화, 사회 면에 등장한 안 한 먹거리와 웰빙담론은 요한 계기가 되었 다. 이런 시 흐름에서 안농업단체들은 성장을 지속하여 왔다. 재 먹거리 담론이 제기하는 사회 문제의 요성으로 보아 유기농업
반에 걸친 사회 기여를 학문 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지만 이들 유기농업 단체의 조직이나 활동의 성격에 한 본격 인 연구는 아주 제한 으로 이루
어 졌다(김철규와 최창석, 2008; 김호, 2007; 김흥주, 2008; 정규호,
2) 1978년 창립된 유기자연농업연구회가 15년 만에 ()한국유기농업 회로 개칭하 다. 한국유기농업 회는 국에 200개의 지회가 있으며, 회원 수는 37,000여 명에 이른다.
2008; 한경호, 2006). 본 논문에서 연구자가 특별히 심을 가지고 있는 유기농업 단체는 정농회3)이다. 그 이유는 첫째, 정농회는 다른 생산자조직 과 달리 정체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유기농업의 선구 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셋째, 다른 생산자단체와는 성격과 역할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회 향력이 지 함으로 정농회 조직자체에 한 연구가 요구되기 때문 이다(김종무, 1997: 38-39).
이 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가장 오랫동안 유기농업운동을 실천하
고 정통성을 지켜온 정농회의 운동을 신사회운동의 일환인 생명농업운동으로 규정하 다. 특히 친환경농업의 확산 이 부터 유기농업운동을 시작한 정농 회의 사회 성격을 멜루치(Melucci, 1980)의 문화정체성운동의 에서 설명하고, 김성국(2000)의 신사회운동에 한 연구를 참고하여 정농회가 한 국의 생명농업운동에 미친 향에 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생명농업 운동의 에서 정농회의 이념, 조직의 구성, 운동의 수단과 목표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정농회의 생명농업운동이 지역의 안문화의 형성에 미친 향과 그 의미를 논의할 것이다. 셋째로는 정농회의 향후 망  정농회를
한 발         제안을 하고자 한다.

Ⅱ. 이론 논의

1. 신사회운동으로서의 생명농업운동

안농업 패러다임은 농업의 지속가능성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농업문화, 농 공동체 등 농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 한 새로운 을 나타 낸다. 유기농업으로 환한 농업인의 동기를 살펴보면, 여기에는 음식  토 양과 환경에 한 심, 화학자재에 한 반감, 량 생산과 소비에 한 반 감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물의 행복  농업에 한 자부심과 문 인 도 이 포함되어 있다(Risgaard, Frederiksen and Kaltoft, 2007: 448).
3) 정농회는 일본의 기독교 유기농업단체인 애농회의 향을 받아 1970년 반에 창립 되었다. 행농업의 험을 인식한 선구자 인 소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특히 정농 회의 창립이 농업의 생산성 향상을 하여 화학재를 집 으로 투입하던 녹색 명의 시발 과 같이 한다는 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농업 패러다임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통한 환경보존, 유기질 퇴비와 윤 작 등을 통한 순환농업의 추구, 손작업을 통한 해충  잡 제거 등 생산성 과 이윤을 뛰어넘는 생태 인 삶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에서 안농업 운동은 농업부문에서 나타난 신사회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구사회운동에서는 피지배계 의 경제 이익투쟁이 주가 된다면, 신사회운 동은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가치 을 허용하고 시키는 운동이다. 신사 회운동은 기존체제와 지배문화를 비 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항정신(Kuchler and Dalton, 1990: 280; 김성국, 2000: 712 재인 용)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1980년 후반에 이르면 서구 부분의 신사 회운동은 제도권 정치와 한 연 을 맺으면서 실용 인 개 주의운동으로 변모한다.
신사회운동은 다극화하는 사회에서 극 인 사회참여를 통해 새로운 사
회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사회참여의 기회는 서구의 좌 정권의 선거 승리와 무 하지 않다. 사회참여를 통한 운동의 실천에 한 부정 견해에도 불구 하고, 신사회운동이 근본 으로 자본주의의 자본논리  시장경제에 한 지 배와 불평등에 하여 부정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분명하다. 신사회운동이 사회주의 비 정신을 계승하고 수용하는 면에서는 좌 이다. 그러면서도 계 이고 료 인 권 를 부정한다는 에서 자유해방주의 이다
(Kitschelt, 1990: 180, 김성국, 2000: 712 재인용).
신사회운동은 환경운동, 반핵운동, 여성운동, 생명농업운동, 생활
동조합운동, 지역화폐운동 등 시민의 일상생활과 련된 다양한 역에서 나 타난다. 특히 일상생활과 련지어 주류문화  그 가치에 도 하며, 삶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치 을 허용하는 것이 포함된다. 농업 역에서 도 주류인 산업화  세계화에 반 하고, 지역과 환경을 강조하는 새로운 패 러다임, 안농업 패러다임이 출 하게 된다. 안농업 패러다임의 한 지류 로 개되는 생명농업운동은 농업 역에서 개된 신사회운동이다.
정농회의 이념 지향은 생명농업이다. 정농회의 핵심 구성원이 주장하는 철학 기반뿐만 아니라 정농희의 주요활동을 살펴보면 그 성격은 분명하다. 안농업의 주요 특징인 높은 지속가능성 수용(허미 , 2002: 142)은 정농 회원들의 안농업에 한 철학 기반을 잘 보여 다. 정농회는 외 인 지원뿐만 아니라 외 강요도 물리치고 자발 인 참여를 통하여 농업    내부의 소리 없는 개 을 지속해 왔다. 연수회나 총회를 통하여 생명농업 에 한 의식을 강화하고, 출 물이나 각종 회보  소식지를 통하여 정체성 을 확인하며, 양심에 따라 유기농업을 실천하여 왔다. 2. 문화 정체성 이론의 용
사회운동 연구자들은 집합 정체성이 인지도덕감정 요소로 구
성되는 다층 성격을 지니며, 특정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개인과 조직은 다 인 집합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강조한다(Hunt and Benford,
2004: 448-449; Polletta and Jasper, 2001: 283-284; Whittier, 1997: 760-761; 이해진, 2008: 74 재인용). 이러한 집합 정체성은 헌 신과 연 감을 높여주고, 참여자 개인의 생애사에 향을 미치며, 반동과 사
회통제를 래하기도 한다(Hunt and Benford, 2004: 448-449).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집단의 다른 농민과 강한 연  정체성을 공유할수록 농 민들은 항에 더 참여한다(Klandermans, 2004: 367).
정농회는 총회  연수회를 통한 집단 유 로 조직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정농회원들의 정체성 유지는 사회운동을 하나의 주도 인 문화양식 혹 은 상징 코드를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으로 정의하면서 문화 지향성을 핵 심 분석개념으로 채택하는 멜루치의 이론에 잘 부합된다. 멜루치의 문화 정체성모델은 인간의 의식, 이념, 사회 투쟁, 행동을 한 결속을 강조한
. 멜루치 이론은 정체지향성 사회운동에 한 클랜더만스(Klandermans, 1986: 190-191)의 주장과 잘 부합4)한다.
멜루치(Melucci, 1980: 199-226; 김성국, 2000: 717 재인용)는 사회
운동에 한 기존 연구가 측정 가능한 상에만 을 맞추는 실증주의 경향을 비 하면서 상의 기 에 침잠하여 있는 문화 네트워크에 주목해
4) 첫째, 가치부분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은 반근 이며 경제성장에 기 를 두는 사회 목표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지 까지 개인 인 차원으로 간주된 문제를 정치 인 주제로 만들었다. 둘째, 행동형에서는 비 습 인 행동형을 취하며 조직 면에서 작 은 규모로 앙집권 이 아닌 조직을 표방하며 표제 성격을 거부한다. 그래서 자 구책과 자체조직을 강조하며 외부의 재정원조에 의존하기를 거부한다. 셋째, 구성원에 서는 특정 집단에 제한되지 않으며 신 간층에 속한 부류로 근 화로 야기된 문제에
민감한 비교 고등교육을 받고 서비스직종에서 일하는    은이들로 구성되는 집단이 다(Klandermans, 1986: 190-191; 김병서, 1995: 487-490 재인용). 
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 다. 다시 말하면 왜 그들은 어떤 사회운동에 그토록 헌신하는가를 설명하기 해서는 경제 이해 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른 문화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사회운동은 생산 의 물질 구조를 재소유하기 해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 발 에 한 집합 통제, 다시 말해 개인의 일상 존재에서의 시간, 공간, 인 계의 재소유를 해서도 싸우게 된다(멜루치, 1993: 152).
정농회는 경제 실리를 추구하지 않고, 공동체 삶을 지향하며, 새로운 농업  문화운동을 주도하여 왔다. 정농회가 추구하는 목표가 생명존  생태보 이라는 에서, 기독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새 로운 사회건설을 추구하는 , 주류문화에 도 하며 안문화를 창출하고 있 다는 에서 문화정체성운동이다. 정농회는 창립 이후 30년을 넘게 정농이념, 즉 바른 농사의 추구라는 정체성을 지켜왔다. 정농회의 생명농업운동이 안 인 농업패러다임의 특징을 수용하고, 그들의 운동양식이 문화 내용을 반 하고 있다는 에서 멜루치가 주장하는 문화 정체성이론의 한 사례 이다.
이 논문에서는 정농회의 운동과 성격을 규명하기 하여 문헌연구, 설문조
, 그리고 심층면 의 세 가지 연구방법을 병행하 다. 문헌연구에서는 주로 2차 자료를 활용하 다. 생명농업 련 논문, 정농회에서 발간하는 정농회보와 정농소식, 총회자료집, 문서  기타서 을 참고하 다. 그리고 정농회  정농생 홈페이지, 귀농운동본부 홈페이지  회원들의 개인 블로그 등 도 참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설문조사는 2008년 정기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을 상으로 실시하 다.5)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회원들에 해서는 우편조사 방법을 사용하 다. 정기 총회에서 수거한 응답지는 49부 다. 우편조사에서는 140부를 발송하 으
5) 연구자는 2001년 처음으로 정농회 여성연수회를 참 한 이후 지속 으로 정농회에 심을 갖고 총회              기타 활동에 참여하 다. 2001년과 2002년도 정농회 여성연수회와
2003년 정기총회, 2004년 여름연수회, 2005년과 2008년 정기총회, 2004년과 2005년 정 농생 총회에 참석하 다.
, 회수한 설문지는 37부에 불과하 다. 86부의 응답지 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회원 2부를 제외한 84부를 분석하 다. 설문의 주요 내용은 농 실태와 정농회 가입기간, 정농회에 한 인식, 정농조직에서 가장 시 한 문 제, 유기농업에 한 인식, 농사일 만족도, 지속가능성 수용정도 등이었다.
심층면 은 정농회 련 주요 정보를 제공해  수 있는 임원  임원 역
임자를 심으로 이루어졌다. 심층면 을 실시한 인원은 9명이다6).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피면 자는 직 방문하거나 화로 면 을 실시하 다.
2008 1, 4, 6, 11월로 4개월 실시하 으며, 소요시간은 1시간 에서 2시간 정도 되었다. 화면 은 한 사례 당 2-3회에 걸쳐 이루어졌으 며 한 번에 30여 분이 소요되었다. 한 면 내용을 검토한 후 내용을 보충 할 필요가 있거나 다른 회원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단될 경우에 는 추가로 화면 을 실시하 다. 심층면 은 비구조화된 방식을 취하 으 며, 주요 면 내용으로는 정농회의 가입동기, 유기농업을 하면서 당면하는 문제, 정농회가 잘하는 , 정농회가 조직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 정농 회원으로서 역할  조직의 향후 방향 등이었다.

1. 정농회의 조직

정농회는 회장과 3명의 부회장, 그리고 14명의 이사들로 구성된 회장단을 심으로 운 되며, 회장단 아래에는 각종 원회와 국 지회를 두고 있다. 원회는 청년 원회, 여성 원회, 축산 원회, 잡곡 원회, 과수 원회, 채 소 원회가 있으며, 2004년도 민간품질인증기 으로 지정되면서 품질인증 원회가 설치되었다. 앙조직과는 별개로 보성, 부안, 장성, 팔당, 해남, 화 천, 무안, 상주, 홍성, 장흥 등 10곳에 지회가 결성되어 있다. 국에 걸쳐 약 600여 명의 회원들이 있으며, 회비를 내고 직 활동에 참여하는 회원은 400여명에 이른다(정농회 정기총회자료, 2008: 3).
6) 실제 이보다 더 많은 상을 면 하 으나 이 논문에 사용된 사례는 9사례뿐이다.
정농회의 리더십 기반은 성경에 기 한 강령의 실천7)이다. 양심에 따라
바른 농사(正農)를 지을 것을 내부규율로 하고 있다. 조직 내 구성원들로부 터 존경을 받는 창립회원들이 아직도 총회에 참석하여 활동을 하고 있다. 회 원들은 8,90세가 넘는 창립회원을 삶의 모델로 여기고 스승으로 한다. 이와 같은 창립회원에 한 신망이, 신입회원들에게는 다소간 자유로운 소통 이나 교류의 해요인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지만 유기농의 실천과정에서는 강력한 견제작용을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농운동확산
바른 농업으로 회복할 수 있는 농정 안 제시  건의
교육사업
정농교육  각종 농법의 연구개발, 각 지회별 교육 개최 생명역동농법, 겨농법, 오리농법 등 장실험실천
민간인증업무
효율 인 생산, 회원 리
정농연 사업
정농생  ()정농의 정상화, 신입회원  귀농자 순회방문
재정자립사업
정농회 련 서     매활성화
유 단체와 교류
일본애농회와 농업  평화교류, 독일 생명역동농업연구기 , 환경농업단체연합회와 교류
출 홍보사업
정농회보(1)  정농소식(6)발간, 외국유기농 련서 번역출간
< 1>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정농회는 이념에 입각한 성실한 농사활동 외에 정농운동참여, 교육사업, 민간인증업무, 정농연 사업, 유 단체 교류사 업, 출 홍보 등 문화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매년 겨울에 정기총회와 더 불어 겨울연수회를 약 23일 일정으로 개최하며, 여름연수회  여성연수 회를 개최한다. 각종 연수회는 신앙강좌 등 정농을 한 정신교육을 심으 로 운 된다.
자료: 정농회 30차 정기총회자료집(2005)
7) 정농회의 기본 이념은 기독교 정신과 맞물려 있다. 기독교 정신은 총회 때마다 진행 되는 신앙강화시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농회 원로가 심이 되어 진행하는 새벽 신앙강화시간에는 성경에 바탕을 둔 정농인의 역할 등을 강조한다.

2. 정농회의 이념

정농회의 강령은 성경을 토 로 바른 농사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
며 이상농 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농업은 단순한 경제행 가 아니며, 생명을 존 하고, 인격 인 사회 계를 요하게 여긴다. 특히 제 제와 같은 농약사용은 간 인 살인행 로 인식하며8), 회원 스스로 정농회를 농민단체 아니라 생명농업운동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농민단체는 경제투쟁을 지향하기 때문에 농민의 권익을 추구하지만, 정농회는 생명을 살리고 바르게 농사를 짓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값인상이나 외국 농산물 수입반 와 같은 운 동 혹은 슬로건을 내세우지 않는다.
정농회는 일반농법으로 지은 농사는 여하지 않습니다. … 농사를 지어 서 수익이 보장이 안 되니수익보장을 해 달라’, ‘정책을 바꾸어보자하 는 농민단체가 아닙니다. … 그럼 정농회는 뭐냐정농을 통해 농사에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농약, 제 제,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 와 땅을 살리는 힘이 있는그 농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강 인,
2003: 3).
들 을 바라볼라치면 남들은 제 제, 농약, 화학비료를 다량 사용하여 농사를 쉽게 짓는 데 논밭에 엎드려 김을 맬 때에 이웃의 조소와 가족 의 원망을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돈이나 명 나 권력에 미치면 본 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멸로 가지만 정농에 미치면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김 권, 2000: 53).
값 더 받기 운동이 기세를 더할 때, 그런데 우리는 값 더 받기 운동 을  한 이 없습니다. 그래서 농민단체들 사이에서는 정농회가 농 민의 권익을 외면한다는 비난의 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소득의 함에 있지 않다는 성경말 이 있습니다. … 우리는 농 사를 바꾸는데 을 두었지돈을 많이 버는 가에는 을 두지 않았습니다(오재길, 2006: 419).
정농회는 안농업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모범 인 조직이다. 지역사회를
8) 화로 면 한 피면 자로부터 확인한 정보이다. 정농회 창립 기회원으로 농사와 율무 등 잡곡을 재배하고 있다.
활성화시키고 안 인 삶을 추구한다. 다품종을 소량으로 생산하며, 지역사 회의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극단 인 경우 매를 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 자족을 목표로 농사를 짓는다.9) 최근 작목이 나 생산량을 주체 으로 결정하려는 원칙을 고수하여 특정 생 에 의해 농가 의 생산이 통제되는 것을 거부하는 농가도 있다.10) 생 에 매하는 비 보 다 개인회원과 직거래 비 을 늘리려고 하고 가까운 지역에는 농장방문구입 을 권유하고 물물교환을 시도하기도 한다.11) 3. 정체 지향 생명농업운동
정농회가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발 과정에서 심 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은 그간 지켜온 역사와 정통성, 그리고 흔들림 없이 지속된 생명농업운 동에 한 정농회의 이념 정체성의 공유가 핵심 인 요인이었다. 이런 측 면에서 정농회의 생명농업운동은, < 2>에 요약되어 있는 바와 같이 멜루치 가 주장하는 5가지 역과 잘 부합된다. 첫째로는 먹거리를 사회문제로, 좋 은 먹거리의 나눔을 이웃사랑의 역으로 확 한 에서 공 역과 사 역의 미분리라는 특성을 보인다는 이다. 정농회는 개인을 독립 인 개체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 환경 속에 유기 으로 연합된 존재로 본다. 따라서 먹거 리 문제는 개인 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 인 문제가 된다.
둘째, 일탈과 사회운동의 첩은 주류문화에 한 항과 동시에 안사회
의 건설이라는 정농회의 이념에 잘 나타나 있다. 공 역과 사 역이 미 분리되어 있으면서 일탈과 사회운동이 첩되어 표 된다는 멜루치의 주장은 먹거리 문제의 정치화에서 잘 나타난다. 먹거리 역은 개인 인 역이면서 동시에 사회 인 역이다. 화학재에 기 한 농업의 생산성 향상을 거부한다
9)       당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귀농하여 감자, 매실, 팥 등 각종 채소 농사를 짓고 있었던 정농회 회원과의 화면 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이다. 
10)     총회에서 만나 면담한 2명의 회원이 진술한 내용이다. 이들 피면 자는 모두 생 의 물류방식이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서 인터넷을 통해 직거래를 주로 한다고 밝혔다. 한 사람의 피면 자는, 생 가운데 일부는 유기재배농산물의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 로 오히려 무농약재배를 권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피면 자는 농사의 목 을 자 자족  자연과 교류하는 삶이라고 하 다.
11)     화면 과            면면 에서 2명으로부터 입수한 내용이다.
는 면에서는 일탈을, 먹거리의 안 성 문제에 한 각종 집합활동에서 사회 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로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보는 조직활동에의 자발 참여, 각종 사회운 동  농업활동 등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재정 인 측면에서 그 특성이 뚜 렷하다12). 정농회는 박정희 정권의 녹색 명이 보 되던 1970년 반에 시작되었다. 국가권력은 정부기 을 동원하여 감시  통제를 강화하 으나 정농회원들은 신앙에 기 하여 흔들림 없이 유기농업을 실천하 다. 이런 기 조는 정권이 바 고 사회 여건이 변하여 경제 인 이권의 유혹이 있을 때 조차 유지되고 있다. 정농회는 20여 년간 회원의 회비를 통하여 재정 자 립을 해왔고, 정부  기타 기 의 지원에 하여 비 이다. 1998년 친환 경농업육성법제정 이후 농림부가 교육비를 지원하는 데 해 자생력을 상실 한다고 우려를 표한다(김종북, 1999: 22).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도 회비 와 이사들의 후원 과 출 사업으로 조직을 유지 리하고 있다.
넷째, 집단유 를 통한 정체성 확보는 정농회의 독특한 조직문화에서 잘
나타난다. 정농회의 회원들은 이웃사랑과 나눔에 익숙해 있다. 이와 같은 이 타 행 는 기독교 사랑에 기반하고 있다. 총회와 연수회는 집단유  정체성 확보에 요한 역할을 한다. 정농회가 추구하는 나눔의 철학를 잘 보 여주고 있는 것이 좋은 종자  신기술의 공유이다. 를 들어, 총회나 연수 회기간에는 회원들이 가지고 온 토종종자를 나 다. 한 새로운 기술을 배 우기 하여 다른 지역의 생산자를 찾아가서 숙식을 하며 수받는다.13) 이 와 같은 통은 정기총회  연수회를 통한 끊임없는 교육과 교류, 소식지  회보 발간을 통한 의사소통, 다양한 방법을 통한 네트워크 등이 요한 역할을 한다. 
다섯째, 직 참여의 실 은 조직 활동  농사방법의 실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논의들이 총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연수기간에 나 지식 과 정보들을 장에 용시킨다. 한 개인 인 차원에서는 실험하는 농업인
12)  정부나 타 기 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있고, 회비와 도서 매 수익 이 재정의 원천이 다(정농회총회자료집, 2007 참조). 재정 독립은 정농회의 독립요소이며, 다른 기독 교 농민운동과 차별되는 요 요소이다(한경호, 2006: 5).
13)  농가에 방문하여 만난 회원에게서 얻은 사실이다.  이 피면 자는 회원들과 토종종 자들을 나 고 있었으며, 오미자와 수박  양념채소와 같은 작물 등을 재배하고 있 었다. 
으로 농업자재의 제작에서부터 자신의 토지에 맞는 농사법 찾기까지 다양한 실험들을 한다.14) 유기농업생산자는 그 사회에서 환경 친화 인 신자로서 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델(Padel, 2001: 40-41; 김흥주 2008: 53 재인용)이 지 한 로 정농회원은 새로운 유기농기술을 수용하고, 실험 하고, 하는 데 앞장선다.
< 2> 새로운 사회운동의 특성
번호
멜루치
클래만더스
정농회의
1
·사 역의
미 분리
개인생활의
정치화
-   인간과 자연과의 계 재정립
-   농산물의 정치화 실
2
일탈과 사회 운동의 첩
비 습 인 행동형
-   녹색 명에 한 항
-   생명농업운동의
3
자율성과 독립성 확보
외부 원조에 한 의존의 거부
-   회원회비를 통한 재정 자립
-   출 사업을 통한 독립성 확보
4
집단유 를 통한 정체성
확보

-   정기총회  연수회를 통한 조직 강화
-   신앙강화시간을 통한 정체성유지
-   소식지  회보발간을 통한 정보교류
-   지회를 통한 네트워크
5
직 참여의
-
-   총회의결을 통한 의사결정
-   실험을 통한 유기농업기술 공유
자료: 멜루치(1993:153-155)
정농회의 정체성 지향의 특징은 민간 친환경농산물 품질인증 기 으로서
의 엄격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농회의 품질인증은 일반 품질인증과는 달리 무비닐, 무항생제 등의 검출에서 6-8 등 으로 세분시킨 까다로운 검사 를 실시하고 있다. 화학재를 사용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질산염이나 퇴비 의 질도 고려한다(정농소식, 2008: 42-43). 기존의 인증기 은 화학비료나 농 약이 심사항이었지만 정농회는 비닐멀칭 사용여부, 퇴비의 질, 질산염, 종 자, 경력, 기타 등등을 종합 으로 고려하는 인증제를 확립하 다.
14) 정농회 총회에서 면 한 피조사자로부터 얻은 정보에 기 한 기술이다. 이 피면 자 는 농기구를 손수 제작하거나 새로운 농법을 용하는 등의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 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던  다른 피면 자는 농가로 직 방문하 여 만났는데, 연근과 각종 채소를 재배하는 그는 소비자딸기체험행사를 하고 있었다.
정농생 은 친환경농산물의 행인증을 포함하나 비록 인증을 받지 아니
하 을지라도 실재 재배를 고려하기 때문에 인증표시 자체보다는 농사짓는 사람에 한 인증을 강조한다. 인증시 등 의 기 은 정농회의 의견을 수렴 하고, 용은 장 직원이나 지역담당 간사의 보고서를 참조하여 물품 원회 에서 결정한다. 정농회의 활동은 신사회운동이 표방하는 새로운 가치로의 변 화를 소리 없는 명이라고 부르면서, 물질 가치에서 탈피하여 탈물질 가치를 추구한다고 언 한 잉 하르트(Inglehart, 1995; 김병서, 1995:
488에서 재인용)의 주장을 보여주는 조용한 사회 명이다. 4. 정농회원들의 조직참여와 만족도
정농회원들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 의 하나가 의식교육이다. 농업
의 생산성 악화  경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농회원들은 < 3>  < 4>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여 히 의식교육을 강조하고 있음이 설문 조사 결과에서도 사실로 드러났다. 정농회가 잘하고 있는 도 의식교육이었 으며, 시 한 사항도 의식교육을 들었다. 정체성의 유지와 확보에서 의식의 동일성이 요하며, 이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됨을 알 수 있었다.
< 3>  정농회가 가장 잘하고 있는  ( 복응답)
번호
  
빈도
비율
1
의식교육
54
57.4
2
매지원
0
0
3
기술교육
9
9.6
4
회원 간 화합
17
18.1
5
후계세 교육
5
5.3
6
정보공유
8
8.5
7
기타
1
1.1

94
100.0
< 4>에 요약된 설문조사 결과로서 응답자들이 가장 시 한 사항으로 정 농 생활 동의 활성화(30%) 문제를 지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농 생활 동의 활성화는 정농회가 조직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 의 하나이
. 정농회의 상에도 불구하고 참여농민들의 어려움 의 하나는 여 히 유통과 소득이기 때문이다.
 < 4> 정농회가 회원들에게 해 주어야 할 가장 시 한 사항( 복응답)
번호
  
빈도
비율
1
회원들 상 농산물 유통교육  
 11
 11.0
2
회원 상 유기농업기술교육
 19
 19.0
3
다양한 교양강좌 
  5
  5.0
4
생명농업 반에 한 의식교육
 31
 31.0
5
의사결정정보의 공유
  4
  4.0
6
정농 생활 동의 활성화
 30
 30.0
100
100.0
특히 자체 유통시스템 구축의 차원에서 시작된 정농의 생활 동조합은 운
미흡으로 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을 받지 못한 회원들이 많으며, 회원들의 경제 어려움이 가 되고 있어 의욕을 상실하는 측면이 있다.15) 한살림이나 한국유기농 회와 같은 단체처럼 정농회는 회원들의 로를 거의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16). 이 은 경제 이익추구와 배치되는 정농회의 정 체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으며, 이런 본질 인 요소가 회원들 간 혹은 신입회원들의 기 응에서 갈등요소가 될 수 있다.
정농회의 소득  이윤추구의 한계는 이상과 실사이의 괴리에 한 고 민과 연계된다. 신념으로 무장된 창립 1세 가 장에서 물러나면서 2,3세 의 경제 어려움이 조직문제의 이면에 숨겨져 있다. 이런 결과들은 조직 에 한 만족도에서도 반 되어 있다. < 5>에 나타난 결과에 의하면, 5 만 척도에서 반 인 조직만족도는 3.57로 약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임 원과 일반회원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임원들은 4.00으로 만족 도가 높지만, 일반회원은 3.44로 보통수 이었다.
15)  자녀 두 명이 학에 진학하면서 학비 충당을 해 재배면 을 늘려 노동 강도를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진술한 한 피면 자의 견해이다. 
16)  정농회원들 에 정농에서 운 하는 생 에 농산물을 유통시키는 회원은 제한되어 있고, 부분 로  유통은 개별 으로 해결하고 있다.
< 5> 정농회원들의 임원여부에 따른 정농회에 한  만족도
   
 
표 편차
사례수
t(78)
   
4.00
.667
19
- 2.792**
일반회원
3.44
.786
61
   
3.57
.792
83
** p<.01
체 으로 보면, < 6>에 제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정농회는 추구하는
목표가 여타 농민단체의 목표와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고(4.21), 정농회원 으로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4.27). 하지만 농산물 매에 애로를 겪 고 있고(3.06), 지회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2.88). 이는 정농회에 한 의식교육, 회원들 간의 신념공유는 분명히 잘 되어 있는 반면에, 경제 인 측면에서 실제 인 도움이 없음을 반증하는 결과로 해석된다.
신입회원과 같은 3세 회원들은 농사일뿐만 아니라 자녀교육 등 경제생
활을 해야 하는 농민들이고, 기 창립회원들 같은 기독교 강령에 기반한 정체성이 확고하다고 볼 수 없다. 때문에 정농의 지향성  이념에서 의견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는 재 정농회가 기로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 조직 차원에서 회원들 간의 통합, 나아가 조직방향에 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 임을 시사한다.
< 6> 정농회에 한 회원들의 인식                  
                                                                  (5 척도 상 수)
구분
    
평균
표 편차
1
정농회는 다른 농민단체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
4.21
4.207
2
정농회는 일반회원의 의견이 잘 반 되는 편이다.
3.31
3.313
3
정농회는 여성회원의 요구를 잘 반 하는 편이다.
3.31
3.307
4
나는 정농회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4.27
4.268
5
정농회에서 출간하는 도서는 농사일에 도움이 된다.
4.12
4.123
6
나에게는 심 ·경제 도움을 주고받는 정농회원이 있다.
3.46
3.461
7
나는 농산물 매에 애로를 겪고 있다.
3.06
3.063
8
정농회의 지회활동이 활성화되어 있다.
2.88
2.875
 그 지 않다(1) <------> (5) 매우 그 다

Ⅳ. 정농회의 사회 역할과 그 향

1. 정농교육을 통한 생명농업운동의 확산


정농회의 정농실천(正農實踐)은 다른 이익집단과 다른 독특성과 차별성을 지니게 만드는 강령이고 핵심요소이다. 이것이 바로 정농회의 기본이념이며, 안사회를 지향하는 신사회운동의 기반이다. ‘바른 농사를 짓고, 다음 세 를 하여 교육하고, 사랑과 동의 이상농 을 건설하여 인류사회의 석이 되고자 하는이념기반은 철 하게 이루어지는 의식교육을 통하여 확립된다. 정기총회와 각종 연수회에서 실시하는 로그램 에서 신앙강화를 통하여 정농이념을 공유하고 강화한다.
총회  연수 로그램에서 정농을 한 생명교육은 핵심이 된다. 부분 타 기 의 안농업 련 교육에서는 기술교육이 주가 되지만 정농회에서는 의식교육이 우선시된다. 한 유기농업 실천과정에서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 들을 공유한다. 표 인 로 생명역동농법17)에 한 소개  교육을 들 수 있다. 정농회 임원진이 기존의 유기농업을 넘어서는 농법으로 생명역동농법 을 실험하며, 회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일부 회원만 생명역동농법연구회에 참여하고 있지만 장에서 직 실험하고 그 결과를 연수회와 정농소식을 통 하여 공유하고 있다.
정농회는 자체 의식교육  기술교육, 나아가 차세 교육뿐만 아니라 귀 농자를 한 교육에도 극 이다. 풀무학교는 차세 교육을 변하는 농업 학교이다. 홍성지역에서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교육기 일 뿐만 아니라 정농 후계자를 길러내는 통로 역할을 한다. 한 정농회는 귀농의 문역할을 한. 정농회의 핵심회원이 귀농학교의 강의를 통하여 의식교육 뿐만 아니라 기술교육을 실시한다. 다음 사례는 정농회원이 된 다음 농사와 삶의 이 변화한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17) 루돌 슈타이 (Rudolf Steiner)가 창안한 생명역동농법을 정농회에서 번역 출간하 다. 10년 부터 정농회원들에게 소개되어왔으며, 2005년부터 연구회를 구성하 여 증폭제를 만드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증폭제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농작물 을 건강하게 만들며 각종 미량원소가 풍부하게 들어있는 퇴비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
(루돌 슈타이 , 2002: 276).
정농회를 알기  나의 농법은 철 한 화학농법이었다. 컴퓨터처럼 정확 하게 열매나 잎에 병이 안보여도 방책으로 5-7일 간격으로 농약을 살 포했고 씻지도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때는 농약의 무서움도  몰랐고, 살포액이 묻어도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고 생각했 던 것이다. 일등농사를 지으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야만 하 니 사람도 골탕 먹고 나무도 골탕 먹어 둘 다 죽음의 지름길로 달려갔 던 셈이다. 그런데 정농회를 알고부터는 돌아서기 시작하 다.(김수찬,
2006: 32)
정농인이라는 정체성은 교육을 통하여 확립되고 유지된다. 정농교육은 생 명농업이라는 철학 기반을 강화하고, 회원들을 핵심 멤버로 만드는 요소이
. 정농회에는 각종 시행착오를 통하여 얻은 풍부한 유기농법 련 경험과 철학을 겸비한 회원들이 각 지회마다 있다. 이들은 정농회 회원뿐만 아니라 귀농운동본부나 환경농업운동단체에 속한 농민들을 상으로 하는 다양한 교 육에도 극 참여하고 있다. 교육과정  친환경농업 련 사회활동을 통하여 사회개 을 실천하고 있다. 생명농업의 이념으로 무장된 정농회원들이 각 지역에서 유기농업을 하면 서 생명농업운동을 실천함으로써 지역사회의 개 에 지 않은 향을 미친 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정농회의 지역농업운동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농 회원이 리더가 되는 표 인 지역농업운동단체로는 장성 한마음공동체, 홍 성 환경농업 농조합, 팔당생명살림과 제주생명살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지역을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표 인 실천사례18)로 꼽을 수 있다. 
1) 장성 한마음공동체 한마음공동체는 정농회원인 남상도 목사가 심이 되어 1990년에 창립된지역 유기농생산조합이다. 장성지역의 농업방식을 친환경농업으로 환시키생산과 소비를 이어주는 유통조직을 만들어 새로운 지역발 의 모델로 발 시켰다19). 2008년 재 마령리덕성리평산리분향리 지역 80농가가 생 산자 동조합에 참여하고 있으며마을 체의 유기농화그리고 , 학습휴식먹거리볼거리가 제공되는 공원조성을 계획하고 있다(오창국, 2008: 4). 한마음 공동체가 재의 틀을 갖추게 된 데는 안 인 생태문화를 만들 기 해 아이디어를 기획한 정농회원인 남상도 목사의 역할이 크다남상도 (2003: 61)목사는 정농회원들이 지역사회를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어 가 기 해서는 지역 단 농 이나 지역의 정치에 심을 가질 필요성을 제기하 고생산자의 입장이 반 된 유통을 원칙으로 지역과 경제가 동시에 고려되 는 생태공동체를 추구하 다재 한마음공동체는 각자 자기 농사만을 지어 왔던 농민들이 이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보름에 한 번씩 모여 생산조 , 유통매에 이르기까지 동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농업 동공동체를 이 루고 있다(오창국, 2008: 10).
18)  오재길 고문은 80세를 넘긴 시 에 농 문제에 기독교가 일말의 사회 책임을 가져 야 한다는 신념으로 고향인 제주도로 건 가 ()제주생명살림을 만들고 제주지역의 유기농업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제주지역에서 친환경 학교 식추진이 탄력을 받고 있다.

2)                 팔당생명살림팔당생명살림은 우리나라 표 인 친환경농산물 생산자조직으로 서울과
수도권소비시장에 근 한 지리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지역이 1975년 수 도법에 의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주택신축  증축이 제약을 받게 되고, 주민들은 개발제한에 따른 피해를 입게 되었다. 특히 팔당생명살림의 기원이 된 것은 1995년 설립된팔당상수원 유기농업운동본부이다. 팔당지 역이 유기농업지역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서울과 수도권시민의 식수를 해 상수원 수질을 보호하겠다는 서울시와 농 앙회의팔당상수원 친환경농업 육성사업이 계기가 되었다.
정농회의 창립회원인 정상일과 정농회장을 역임한 정상묵은 유기농업운동 본부의 조직에서부터 팔당생명살림의 창립에 많은 기여를 하 다. 두물머리 농장을 운 하고 있는 정상일 회원은 정상묵 회장을 도와 조직구성  운 에 기 를 마련하 다. 재 정농회 팔당지회가 결성되어 있고, 정농회와는한 향을 주고받고 있다. 팔당생명살림의 성공 안착에 하여 김철규
와 최창석(2008: 17-22)은 정치 기회구조리더십과 이념조직화와 신 략 등이 핵심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설명한다.
19)  한마음공동체는 3기에 걸쳐 성장하 다. 1: 교회공동체와 농민운동 조직(1984-1990), 2: 유기농업 생산조직 건설과 매조직의 확 (1990-2000), 3: 생태문화산업 과 지역행정 농민조직과의 계 확 (2000-)로 이에 해서는 오미란(2004: 82) 참조.

3)                 홍성 문당마을
정농회원인 주형로가 마을의 리더로 있는 문당마을은 국 최 로 오리 농법을 보 한 곳으로 재 국 인 인지도, 인터넷 매와 친환경농업시 범마을로서 국 각지의 방문객이 연 찾아가는 곳이다. 홍성 문당마을은 정농회원이 마을의 리더역할을 충실히 하여  하나의 성공 인 농 마을건 설의 모델이 된 곳이다. 문당리는 농 에 산재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농 을 희망이 있는 곳으로 만들고, 농 과 도시가 공생하는 갖가지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20)
홍성지역은 오랜 기간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인 ·물 으로 토 를 만
들어 온 풀무학교를 기반으로 다양한 유형의 생산공동체가 서로 긴 히 력 계를 맺고 있으며(정규호, 2008: 75), 자원순환 인 생태마을을 만들기 하여 마을단 에서는 국내 최 로 100년 발 계획을 수립하
. 특히 태양열과 태양 , 바이오가스 등의 자연에 지를 사용하는 방안 과 자연형 삽교천 만들기, 자연 소재의 주택 만들기, 자연정화 연못과 빗 물이 통과하는 길 만들기 등 있는 그 로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도 생활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문 이고 체계 인 방안들을 많이 마련
해 주었다.21)
20)  http://mundang.invil.org/ (검색일: 2009 2 20)
21)  http://mundang.invil.org/ (검색일: 2009 2 20)
< 7> 정농회원이 주도한 공동체 비교
구분
홍성 환경농업마을
장성 한마음공동체
팔당 생명살림
 
주형로
남상도
정상묵
 
1993년 오리농법
1990년 직거래
1995
팔당유기농업운동본부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생태공동체 건설
농민과 도시민이 상생하는 공동체
생명존 , 환경친화 농업육성  생활운동 개
 
120여 농가
80여 농가, 103/연 매출(2008)
100여 농가, 50/억 매출(2006)
소비자 교 
유치원생, , 소비자, 환경농업실천농민과의 교류확 . 15천명/연 방문
남지역 
국지역매장소비자
교류(추수감사 행사의
한국식 용). 3만 명/연 방문
추수감사 소비자 연 딸기체험행사 등
다양한 체험행사,
농업인 생산지 방문. 4,000/연 방문.
  원 순환형 정 
친환경마을 100년 계획수립, 홍성
한우작목, 유기농 볏짚사용, 태양열주택시범사업도입

정농에 의한
유기농업실천,
상수원수질 정화 련 사업, 폐비닐수거,
천연세제사용, 재활용, 농약, 화학비료,
인공화합물사용 지
  요 권 
홍성, 수도권
  국 지역 매장,
직매장 55
 
팔당지역, 서울, 수도권
주작목
농사, 밭농사,
채소 심, 축산
, 채소, 과일, 천연염색
주로 시설재배 심
자료: 필자가 문헌자료를 재구성함
 
성공 인 지역발 모델로 간주되는 세 지역의 리더들은 정농회원이다. 지 역발 에 한 설계와 자기희생을 제로 한 헌신 인 노력  극 인 참 여가 이룬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지역에 기반한 안 문화공동체의 성공에 공통 인 요소가 리더십의 존재여부라는 (허장정기환, 2003: 67)에서 정농회의 역할이 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출 운동을 통한 안문화의 확산

출 은 교육과 함께 회원선도  의식 환에 주요 매체이다. 정농회가 교 육과 더불어 출 사업에 정성을 들이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직까지 홈페 이지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는 반면에 여 히 정농소식지  정농회보를 통하 여 정보를 공유하고, 각종 출간되는 책을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농사방법 등을 모색한다. 정농출 사에서 출간되는 정기간 행물은 정농소식지와 정농회보 등이 있으며, 기타 유기농업 련 문서  강좌교재들을 출 하고 있다.
정농소식지에는 세계 각지에서 출 된 유기농 련 문농서를 번역하여
게재함으로써 농사에 필요한 지식  정보를 회원들에게 제공한다. 특히 일 본  쿠바의 유기농업 련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여 안 인 농업의 가능성 을 제기하고, 안 농업의 추진에 따르는 생활양식인 안문화를 시키 는데 기여하고 있다. 소식지에 게재된 에는소비만능의 시 의 산업사회 폐기물 홍수환경문제로 인한 인간사회의 문제 ’, ‘일본 애농회와 국제교 류 내용등이 게재되고 있다. 한 생산자소식과 생 의 물품정보를 함께 소 개하여 소비자도 생산자의 문제를 동시에 알 수 있도록 하 으며, 정농회원 도 생 생활재에 한 근성을 높 다.
일 년에 한 번 출간하는 정농회보에는       사회와 과학기술,” “정농은 생
명운동,” “농사꾼의 자존심,” “속도가 잃어버리게 한 것,” “원자력은 과연 안 한가?,” “얼굴과 얼굴이 보이는 유통,” “애농소비자의 사례,” “제 제도 무서운 독물,” “화학비료로 재배된 채소도 암의 원인이 된다,” “정의운동과 동시에 생 명운동은 필연 인 것입니다,” “유럽의 표 인 유기농산물 기 , 독일의 유 기농업등 다양한 주제가 실려 있다(정농회보선집, 1995, 2005).
정농회가 30여년 넘는 역사를 지속해 오면서 정체성을 유지해온 것은 바
로 유기농 련 책과 외국의 유기농업이론서를 번역 출 하여22) 회원들에게 제공하고, 이러한 서 의 보 을 통해 정농회원들과 끊임없이 지식  정보 를 공유한 결과이다. 설문조사에서도 출 서 이 농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 이 5 척도 상에서 4.12로 높게 나왔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하고 배우는
22) 21세기의 정농정신, 청둥오리와 함께 짓는 벼농사, 새천년생명을 한 제언, 사람과 자연을 되살리는 길, 쿠바의 유기농업 등이다. 
정농인의 자세와 나눔철학에 기 한 정보공유를 통하여 재의 정농회가 만 들어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V. 정농회 생명농업운동의 망

1. 정농이념지향과 실과의 갈등

일부 정농회원의 갈등지 은 정농회의 이념과 경제 인 실간의 괴리이
. 정농회원들은 정농회의 이념에 동조하지만 다양한 입지와 지향 을 가진 개인들이기도 하다. 일부 회원들은 이념과 실 사이에 지 않은 고민을 한 다. 특히 정농회의 이념 지향에 따른 유기농업의 실천은 동조하지만 실 으로는 경제 인 어려움이 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정농이념의 실천과 실사이의 고민은 일상의 역인 소득과 여가
사이의 다리기에서 나타난다. 생산량과 소득을 향상시키기 해서 시설재 배를 채택하면 노동량이 늘어나게 된다. 그 게 되면, 휴식 없는 노동이 되 고 결국 노동에 지치게 된다. 일부 농가는 생산량을 이고 여가를 즐기기 한 방향으로 환하고, 일부 농가는 자녀교육비를 기 해 소득을 향상 시키기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둘째, 경제성 추구는 문화  단작화를 통한 량생산에                  을 맞추고,
연 생산을 통한 시설재배를 하게 된다. 그럴 경우에는 경제 인 여유는 생 기지만, 석유에 지투입의 증가라는 측면과 자연환경과 조화를 통한 농산물 생산이라는 지속가능한 이념과 부합되지 않는다. 이를 지속가능한 농업과 유 기농업의 분기 을 삼을 수 있는데, 이런 갈등은 다양한 형태로 추구된다. 우리나라 친환경농업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속가능성을 수용하면서 경제성 을 추구하는 것(허미 , 2002: 145)은 이런 을 반 한다.
셋째, 환경보존 인 순환농업의 실 이다. 농업방법으로 유기농업이 아닌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천하기 해서는 자연순환 인 생태시스템을 유지하면 서 시스템 내에서 산출되는 유기농자재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 게 하기 해서는 지역자체가 생태 인 환경으로 바 어야 함은 물론 유기 축산과 경종 이 순환 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경종과 축산이 분리된 소농 심의 노동집약 인 국내 농업여건에서 농자재를 마련하기 한 퇴비확보에는 한 계가 있다. 정농회가 우리나라에서 독보 인 유기농업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인 지원시스템의 미비, 경제 인 실 등이 맞물려서 지속가능한 농업 의 실 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 정농생 의 활성화를 통한 유통지원

경제 으로 안정되지 않은 유기농가의 고민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이 로의 확보이며, 이는 정농 생활 동조합의 활성화와 한 련이 있다. 정농회원들이 가장 많이 지 하고 있는 발 인 요소들로 정농생 의 활성 화를 들고 있다. 일부 외 인 인지도가 높은 회원의 경우에 다양한 로를 확보하고 생산물을 량 매하고 있지만 부분의 정농회원은 매의 어려
움을 겪고 있다23). 일부 유기농업에 뜻을 두고 정농회에 가입한 귀농인들의 회원활동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24)
정농회는 생명교육에는 많은 심을 두었지만 유통부문에는 심이 었 다. 결과 으로 생산과 소비가 조화되는 운 에 실패하 다. 정농회에서 유 통의 필요성을 느끼고 1990  ()정농을 만들어 도매유통을, 나아가 경실련과 함께 만든 경실련-정농생 을 창립하고 생활 동조합을 운 하 지 만 운 미숙으로 실패하 다. 결국 정농생 은 2004년 경실련과 분리되고 정농회가 생활 동조합을 직 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손해를 생산자가 떠 안게 되는 결과만 낳았다.
여러 가지 내외 인 여건 한 생 활성화에 정 이지 않다. 체 으
로 보면, 생 에 참여하는 조합원의 수가 무 다. 소규모의 운 은 취 되는 물품의 수도 제한 으로 만든다. 홈페이지도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홈 페이지를 통한 생 운 은 소비비 이 큰 은 회원의 확 에 걸림돌이 된 다. 생 의 근성 한계를 극복하기 해서는 홈페이지의 활성화가 요한
23)  이와 같은           실에서 기반을 갖추고 있는 기존의 회원들과 새롭게 유기농업을 시작하 는 회원들 간에 경제 인     실과 정농인으로서의 정체성 차이로 이견이 제기되고 있 다. 유기농업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단계회원들의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24)  그러나 귀농한 일부회원은 상주, 홍성, 완주, 괴산 지역에 설립된 귀농지원센터장을 맡아 귀농 지원  새로운 마을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 이 한 타 생 에 비하여 여건이 좋지 않다. 게다가 재 친환경농산물 유통에서 시장편입이 증가(허미 , 2005: 50)함으로써 시장경제의 경쟁시 스템이 정착되고 있다. 그 결과 다양한 소비자의 욕구에 부합되는 시스템이 확산되고 있으며, 생 시스템 한 시장 시스템을 닮아 가고 있는 상황이다 (허미 , 2008: 254). 이 한 후발주자인 정농생 의 활성화를 더욱 어 렵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역사회에서의 정농회의 역할을 새롭게 조망하게 한다. 안농업은 지역생산과 지역소비를 심으로 추구하며, 직거래를 강조한다. 하 지만 농가의 유통 실은 만족스럽지 못한 편이다. 회원들의 실태조사결과 직 거래의 비 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거래 활 성화를 해서는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다양한 네트워크, 생 산자-생산자 네트워크, 생산자-소비자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정농회가 지 까지 올곧은 길을 걸어온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우 리가 농 에서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고 생활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교 육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 정농회가 구체 으로 회원들이 살아가는 공간 인 마을을 안 으로 살리는 일에 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26) 이런 한계는 이제 은 회원들이 극복해 나가야 한다. 지역단 에서 정농
25)  진주지역의 한 유기농단체의 경우 농산물의 부분을 문유통업체에 매하는 것과 는 조 이다(허미 , 2008: 242).
26)  총회에서 만난 피면 자의 진술이다. 피면 자는 등생인 아이의 학교운 원회에 참여하여 식 원회와 도서 원회를 새로 두기로 하여 학교운 에 학부모들이 직 참여할 수 있게 하 다(http://www.hyangyou.net).
회원들이 학교 식문제에 개입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회원들 간에 의견이나 가치 에서 괴리가 있어 조직원 결합이나 동원이 만 같지 않으며, 총회참석률이나 집 도에서도 차이가 난다.27) 이 사실은 총회에 참석하고 그에 한 단상을 은 한 은 회원의 에서도 그 로 드러나 있다.
아쉬웠던 것은 뜻 있고 앞서 나가시는 어른들이  안보이시네요. 김 복 선생님, 김종복 선생님지 의 정농회에 야의 외침이 되 주실 어른들을 뵐 수 없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스스로 자정능력을 잃 은 모임은 정체되고, 굳어버리고, 썩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임 속에 쓴 소리를 해 수 있는, 채 을 들어 수 있는 님들이 떠나간다 는 것은 우리 모임이 자정능력을 잃어간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박종 , 2004: 14) 
한 조직이나 단체의 사활은 구성원의 충원과 재생산에 달려 있다. 그런
에서 새로운 회원의 입과 조직 활성화 문제는 향후 정농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우선 인 과제로 남아 있다.
정농회는 진실된 마음으로 흙사랑과 땅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에서 다 른 유기농단체와 다르다고 본다. 정농회가 확 되려면 기독교 색채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처음에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은 인정하지만 생명의 차원에서 타종교를 충분히 껴안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력, 인재양성 면에선 좋은 인재를 끌어들이고 으로 확산하려면 내부 정비가 필요한 것 같다. 일반 사람, 종교가 없 거나 타종교를 가진 사람을 데리고 가려해도 좀 어렵다.28)
물론 정농회의 가입조건으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필수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정농회의 기독교 지향이 신입회원들에게 약간의 어려움이 되기도 한다는 에서, 그리고 지평을 넓 세계 평화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에서 종교 개방성과 포용성에 한 고민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지회의 활성화 문제이다. 정농회가 지역에서 제 로 뿌리를 내리려
27)  피면 자의 진술로부터 얻은 정보이다.
28)  화로 면 을 정농회 회원의 진술이다.  피면 자는 감자와 쥐 이콩 등을 재배하 고 있었다.
, 지회가 활성화되어 회원들 간의 유기 력 계  연 가 잘 이루어져 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회활성화는 제한되어 있다. 홍성, 팔당, 장성, 보성 등 일부 지회활동이 활발한 곳을 제외하고 안 인 공동체운동이 미흡 한 편이다. 
는 정농회가 유통에 신경 쓰고 하는 것은 별로라고 생각해요. 지역에 맞는 그림들을 그려줘야 한다고 니다. 부안처럼 경 이 좋으면 숙박형 이 맞고 이것들을 소비자와 연결하고사단법인의 역할들이 각각의 지역의 특성에 맞게 소비자를 연결시키는 것이 요해요. 오지의 경우 농산물을 장해서 하고 그런 지역모델을 폭넓게 만들어 가는 역할을 해야 된다고 요.

정농회는 이념이 분명한 정체성 지향의 단체이다. 그 동안 이루어온 활동 이나 사업을 통하여 볼 때, 정농회는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생 명농업운동에 정 인 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정부나 다른 기 의 경제 지원이 없이 농민들이 낸 회비만으로 조직을 지속할 수 있었 다는 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추구하며, 비물질주의 경향의 안 생활양식 을 공유하 기 때문이다.
정농회는 지역사회에서 안 인 문화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첫째, 정농생
명농업교육을 통한 유기농업의 실천기반 마련이다. 30년 넘게 매년 총회를 열고 농사방법을 교류하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농사의 필연성 을 논의하 다. 둘째, 지역에서 정농회원이 심이 되어 안 인 마을공동 체를 만들어 왔다. 장성 한마음공동체, 홍성 문당마을, 팔당생명살림 등은 우리나라에서 지역 생명농업운동으로 성공한 표 인 사례로 정농회원이 마 을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정농회는 출 운동을 통하여 국제 인 유기농운동의 자료를 출 하여 회원들에게 소개하고 타 유기농민들에게도 향을 주고 있다. 정농회가 출 한 정농회보에는 성경 에서 유기농업을 사명감을 가지고 지을 것과 의 속도문명과 석유문명의 문제 , 자본주의 생활방식을 넘어 설 수 있는 안문화의 가능성이 소개되어 있다. 출 을 통한 안농업의 확산과 보 은 회원들의 의식교육에 정 인 효과를 가져 왔다.
설문조사와 심층면 의 결과, 회원들은 정농회가 여타 농민단체와 추구하 는 가치가 분명히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정농회가 잘 하는 도 의식 교육이고, 시 한 도 여 히 의식교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은 정농 회의 정체성과 련지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다음으로 요한 과제는 정농생 의 활성화라고 하 다. 이러한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정농 회가 지 까지 해온 정농의식교육의 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정농회가 유기농산물 유통에 하여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요구로 해석 된다.
정농회가 향후 보다 발        으로 변화하기 해서는 첫째, 신입회원이 이탈
하지 않고 안착할 수 있는 시스템정착과 정농회원의 인 자원 리에 보다 극 일 필요가 있다. 둘째, 정농생 의 활성화 요구에 부응하기 한 방안이 조직차원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셋째, 지회 활성화를 통하여 지역에서 생 태환경을 유기 으로 결합하고,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새로운 모델을 구축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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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

The Effects of Right Farming Association on Bio-Agricultural Movement in Korea

   
Huh, Mee-Young*29)         
This study defines the activities of Right Farming Association(RFA), which has  acquainted itself with organic farming - bio agricultural movement. It views those activities of RFA as a cultural identity movement, which is related to New Social Movements(NSM). RFA opposes the existing mainstream farming methods and pursues new farming methods. RFA is a unique, self-generated farmers' association which selected loving neighbors, the teaching from the Bible, as main principles. It‘s pursuing values are distinctively different from those of other farming associations and takes pride in being part of RFA. It also takes advanced views toward not only farming methods but also building up community alternative culture in areas. It tries to raise awareness among the members through the spread and distribution of alternative farming by publication. However, it is essential that RFA finds solutions to a shift in generations by securing workforce and to activation of distribution by normalization of Jungnong-Coop to improve in the near future.
Key Words : Right Farming Association(RFA), Bio-Agricultural Movement, Cultural Identity Movement, Alternative Culture, Developmental Change
* Silla University/Sociology
[2009.1.29 접수] [2009.5.4 게재확정]

허미영은 부산 학교 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 받았다. 주요 심분야는 친환경농산물 생산과 소비의 젠더 , 안문화, 문화사회학 등이며, 한국사회 일상문화코드』( , 2004)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유기농산물 소비의 사회학  『농 사회학』 15 2(2005), “유기농가 부부의 노동과 일상생활『한국유기농업학회지』제163(2008) 등이 있다. E-mail: huhmy1@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