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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9

Kang-nam Oh 성경과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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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성경과 동성애

16일 토요일 어제 서울광장에서 3년만에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이어서 시가 행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맞불 집회 및 행진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페북에 올린 적이 있고, 또 최근에 나온 <오강남의 생각>(현암사, 70~73쪽)에도 나오는데,  여기 옮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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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기독교인들 중에는 동성애를 죄악시하는데, 그 이유가 성경에 동성애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런 주장이 어떤가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성경 레위기 20:13에 보면 분명히 "남자와 남자가 관계하면 반드시 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했으니 그것은 안 된다"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이런 입장은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말이긴 하지만 성경의 말씀을 정말 그대로 따른다고 한다면 동성애자를 교인이나 교회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죽여야"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태도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댄다는 것은 이미 우리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 가지, 더욱 중요한 문제점은 동성애를 금지한 레위기에 보면 동성애만 금한 것이 아니라 월경 중에 잠자리를 같이 하면 공동체에서 쫓아내라, 심지어 두 가지 재로로 직조한 옷을 입으면 안 된다, 장애자의 몸으로 제단에 나가면 안 된다 하는 등의 금지조항이 있습니다. 그 외에 돼지고기나 바닷가재 같은 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것, 절기를 지키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등 수많은 준수사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금지조항을 불변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 금지조항과 함께 등장하는 월경중 동침하는 것, 혼방으로 된 옷을 입는 것, 장애자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는 것 등도 똑 같이 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곳에 있는 명령을 어느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것은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선별적 법시행"(selective enforcement)으로서 법률적으로 불법적인 일로 취급됩니다. 동성애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다른 금지조항도 다 같이 지켜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런 조항들을 다 지키는 기독교인들이 있을까요?
둘째, 그래도 바울이 금했지 않느냐 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9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라고 하고 또 로마인서 1:26 이하에도 남색하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생기는 온갖 죄악과 같은 선상에 두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바울이 말하는 ‘남색’이라는 것은 로마시대에 성행하던 일종의 성행위로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돈으로 사서 성적 쾌감의 대상으로 삼던 pedophilia(미성년에 대한 이상적 성욕, 소아성애)를 지칭하는 것었습니다. 오늘날 동성의 두 성인이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어느 젊은이의 경우처럼, 자기의 동성애적 경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호소하고 제발 자기에게도 이성을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애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동성애자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자 중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애자 중에도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성애자라고 모두 신앙을 버리거나 하나님과 등지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셋째, 결혼은 "생육하고 번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녀를 낳기 위한 수단인데, 동성끼리의 결혼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기에 안 된다고 하는 입장입니다. 이른바 ‘창조 질서’에 위배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성간에 결혼한 부부가 아기가 없다고 그 결혼을 포기하고 아기가 있을 때까지 계속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비록 결혼해서 자녀가 없어도 그 결혼은 신성한 것일 수 있습니다. 꼭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자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사람으로서 성경에 동성애를 금했기 때문에 금해야 한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지금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는데 그 이유 중하나가,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에 의하면, 사회에서 받아들이는 성평등, 동성애, 낙태 등의 문제를 우파 정치가들과 합동으로 교회가 이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의 <종교 없는 삶> 123쪽) 이런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 아닐까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선 이 정도로 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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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comments
이인석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Reply1 d
Daebin Moses Im
정리 감사합니다.공유합니다.
Reply1 dEdited
양성호
돈 있으면 사는 세상
이라더만..
Reply1 d
MyungJa Choi
고맙습니다. 공유합니다
Reply1 d
장서인
제가 20대에 이 글에서 지적해주신 오해 전부를 갖고 있었답니다. 그 이중잣대, 인지편향이 지금 다시 봐도 부끄럽네요.
Reply1 dEdited
박성현
정돈된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글도 기다립니다.
Reply1 d
Byung Hee Hong
반론 드립니다~
동성애를 금하는 것은 그것이 죄이기 때문인데 그럼 기독교인들인 이제 더이상 동성애를 죄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인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단지 LGBT라는 이유로 그들이 억압받고 차별받는 것은 원하지 않으며 누구와도 동등하게 인권이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수 천년 전 쓰여진 전설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성취되고 있다고 믿고 체험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부정하고 “더이상 LGBT는 죄가 아니다”라고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사실 성경이 죄라고 규정짓고 있는 것들을 보면 피해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일례로 마태복음 5장 28절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밝히고 있는데, 과연 이 율법에 자유로울 남자가 얼마나 될까요? LGBT보다 이성애를 가진 사람들이 죄인이 될 기회가 훨씬 많겠죠.
중요한 것은 성경이 율법으로 죄를 규정한 것은 그것을 범하지 않고 모두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으라 함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거울이 있어야 우리의 티를 알 수 있듯이 율법에 비추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되며,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2~24)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율법 아래에서는 모두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체질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지만 점점 죄에서 멀어지고 율법이 지켜지는 체질로 바뀌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이며 LGBT문제도 다르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Reply1 d
권기덕
.- 나름의 숙제 고민해 보겠습니다.
Reply1 d
Sung Hag Kim
공감합니다
Reply1 d
홍정옥
아무리 비교종교라해도 이건아닙니다. 비교종교를 하는것은좋으나 하나님의 의도는 떠나지 않아야합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룰수도없고 신앙의규범이 없이 합리화 시켜서 사탄의 올무로 성도들을 유인하는 글은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로 복음이흔들리는시대에 정신을바짝 차리고 영혼구원에 매진하고하나님께로 엎드려서 이시대의 문제를 기도해야합니다
Reply1 d
Kevin Lee
여러 설명중에 제일 논리적이네요
Reply1 d
Hoon Park
종교적 편견없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글의 모든 부분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Reply1 d
문영석
"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태 18,9),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태 5,39). 나는 아직까지 성경말씀을 지키느라 애꾸눈을 가진 신실한(?) 신자나, 왼편 뺨마저 돌려대는 그런 너그러운 기독교 신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희극은 한때 한국 기독교는 미국이 하나님을 믿어 잘 산다고 강변해왔고,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얼빠진 인간들에게 그 처럼 숭배하는 주한 미대사가 2022 퀴어 축제에 와서 축사를 하였는데 그 대사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합니다. 이러니 '개콘'이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Reply1 d
호우선사
동성애 문제는 단순한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 . 첫째, 대자연의 순리(자연과학적 이치)에 않 맞고, 둘째, 동성애를 즐기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는 이가 많아서 사회과학적으로도 문제요.
거의 건강학적으로도 적잖은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리고, 항문성교를 즐기는 남색은 항문 근육이 망가져서 나중에 대변이 밖으로 나오기도 하는 참 참혹한 광경도 있어요.
그들이 즐기는 동성애(남자끼리, 여자끼리)는 상상을 초월한 모든 섹스를 즐깁니다. 몸이 결국 다 망가져요.
문제는 많은 동성애자가 원래 태어날때부터 동서애자인 경우는 거의 없어요. 주장일뿐이예요. 대다수가 충동, 혹은 동성애자들로부터 유혹 혹은 성폭력으로 동성애자가 된 경우도 참 많아요. 또한, 아주 어린 남녀는 호기심에 동성애의 길로 접어든 자들이 많다는 거예요. . .
동성애자들이 자기들의 사익을 위해서 여러 요설로 쓴 책들이 범람해서 현재 왠만한 지식인들도 의학적, 사회과학적, 사회비용적인 면을 간과하고 있고 동성애자들에게 세되당하고 있어요.
사회비용적으로, 에이즈 혹은 동성애자 환자 1명 발생하면, 보험사가 평생 건강관리비로 지급하는 비용과 정부가 우리들의 혈세로 지급하는 보조비는 얼마나 많을 줄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적극적으로 그들을 폭행하고, 죽이고 하는 중세적인 행동은 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해야되겠지만 . . 동성애가 단순한 자기의 문제가 아니라 . . 사회비용적 측면, 개인 건강적 측면, 사회도덕적, 자연과학적 순리에 어긋난다는 점을 굉장히 간과하고 단순 논리만으로 이런 것을 주장하는 점은 튼 실수요, 착오입니다만 . . .
아직도 동성애자들이 자기 성적 취향을 만족하기 위해서 . . 아직 소신이나, 과학적, 사회비용적 측면에 어두운 수많은 남녀를 여기저기에서 유혹하는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수작을 걸거나 혹은 강간에 의해서 된 동성애자가 적잖히 많아요. 이 세상에 오직 기독교만 오직 한 종교만 인류에게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착오요. 난 기독교인은 아니고 과학자며, 수도자지만, 사회문제를 한 안경을 통해서만 보면 항상 실수를 하지요. 인류역사상, 유럽역사를 보면 정치, 사회, 역사상 문제가 많지요? 미국을 포함해서 . . .
인간이 고등동물로 잘난 줄 알지만 . . 단지, '만용'으로써, 2019년부터 거의 3년간 . . . 미물인 코로나19에게도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고 싶군요 . . 현재까지 공식통계론, 약 650만명(통계상)이 세계적으로 사망했지만 . . 그런데 실제는 약 3배가 넘는 1500만명이라고 WHO통계는 말하고, 개인적 추산으로는 실제는 약 6배인 '3천만명이상'이라고 개인적으론 추정하고 있어요. 이유는, 공식 통계에 않잡힌 수많은 (1)노숙자 코로나 사망자, (2)다른 병으로 아프다가 코로나19에 걸려서 합병증으로 악화되어서 죽는 사망자는 코로나 사망자 공식 집계에 정부가 고의적으로 집계하고 있지 않아요(미국, 한국 등). 또한, (3)태어나다 코로나로 죽은 아기들과 영아들. . 꼭 이전에 아무 병이 없다가 코로나로만 진단받은 환자중 사망한 환자만 사망통계로 집계하고 있어요 -> 정치적으로 코로나 사망자 숫자를 줄려서 정부의 태만과 코로나시국관리를 잘못한 정부들이 욕을 덜 먹을려고 . . 나쁜 놈들이지만. . .
모든 사회문제는 사회과학적, 자연과학적, 건강학적/의학적, 사회뵹적, 정치적, 문화적 여러 요소를 고려하며 심사숙고하면서 길잡이를 제대로 해야 후세가 똑 바른 인도(인간의 길)을 간는 겁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거의 다 근대기이후부터 모두 유럽/일본.미국발 지식/학문만 공부하고 배워서 조상들의 자기 것을 거의 다 잊고 또한 전혀 몰라요.제발 한민족의 고유한 시원 사상과 자연과학적 공부를 좀 해보시는게 좋을듯 . .
*외국 지식으로만 사물을 보지마시고, 한국의 '(신)선도'(중국의 도교가 아님)를 좀 공부를 해보시는 걸 추천해요. 즉, '심신수련'과 '천부경', '삼일신고' 및 '참전계경' 등 경학(이치를 깨닫게 하는 학문)은 참 나와 대자연의 관계를 제대로 깨닫게하는 현대과학의 시초이며, 끝이요. 죽을때까지 공부하는게 학자요, 도를 닦는 도리일듯 . . .
Reply1 d
Joon Chung
성경에 땅은 다 내것이니 팔지말라고 하셨는데...집팔고 땅팔고 돈벌고 난리치는 기독교인들이 허구한 날 동성애만 가지고 왕왕거립니다....ㅋㅋㅋ
Reply1 d
이주연
Reply1 d
Kum Ho Shin
그럼 당신은 동성애가 정상적이라고 보십니까? 이는 명백한 창조질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을 해도 아전인수격으로 인용을 하시는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구약에서의 장모와 사위간의 상간, 짐승과 수간하는 자들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고 잘 살면 되겠네요. 그들을 구약에서 죽이라고 했지 신약에 그들을 죽이라는 말이 어디있느냐? 이러면서 말입니다. 아주 훌륭하신 발상이십니다. 당신의 자녀중에 그런 사람이 나와도 사랑하면 돼 하면서 박수를 쳐주실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무릇 시대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참고로 다음의 말씀을 깊이 새겨두시길.... 롬1:20-27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Reply1 d
백형근
사회가 진실을 추구하는 정의로 뭉치지 못하도록 친일매국과 토착왜구로 독립군을 학살한 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반역 행위로 보입니다.
Reply1 d
Joseph S. Shin
생각이 깊어집니다.
Reply1 d
지관
Reply1 d
Kim James Youngsuk
공감 합니다. 많은 분들이 달을 보라고 하는데 손가락을 보고 계신 것 같아 아쉽습니다. 조금 넓게 생각 하면 이해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달과 별이 어떤 것인지 다 알지만 주님께선 말씀 하지 않으셨듯 성경에 있는 글자 그대로가 아닌 주님의 간절한 뜻을 보는 은혜가 있길 소망 해 봅니다.
Reply1 d
Kyoungho Lim
깊이 공감합니다. ^^
자기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이의 삶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며,
반대로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을 거부하는 사람은 타인 삶의 어떤 부분도 거부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둘 다 심리적 거울 반응입니다.
이 '어떤 부분'을 거부하는 원인을 물으면 대게 "선입견"을 말합니다.
가정에서는 '가풍'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는 '관습'이나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에서는 '경전'이나 '교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각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에서 "먼저 입력된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걸 마땅히 지켜야 하는 절대 가치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가치를 받아들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주변 사람들, 특히 가장 가깝고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 지인 들이 같은 선입견을 가졌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출처가 "신"일 경우에 심판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절대적 명령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우주는 곧 창조주이고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주 전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중 하나만 알고 절대적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자기 마음을 구속하는 새장이 됩니다.
우주는 930억 광년의 지름에서 지금도 팽창하는 중이며 대중의 의식 또한 마찬가지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고로 고귀한 신의 사랑"을 외치는 종교인들은 과거의 절대적 의식상태에 묶인 태도를 보입니다.
"최고로 고귀한 사랑"이 영원 불멸의 절대적 명령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적"가치만 추구할 때 그 반대편과 다툼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교의 모순을 지적하며 "절대가치"를 넘어설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말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 대목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절대화'합니다. 그 결과로 '기독교' vs '비 기독교'라는 대립 구조를 만들고 그 새장 안에서 살아가죠.
자기 마음이 선입견의 결과라는 걸 모르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뭘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천국간다는 사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 사랑과 평화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와 화로 가득하다면 이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천국 간다'로 해석한 결과는 투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걸 사랑으로 바꾸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믿어야 천국 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품는 사람이 그 순간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시 증오의 대상이었던 문둥병, 혈루병, 몸 파는 여자, 세리, 귀신들린 사람 등을 품었습니다. 지금 증오의 대상인 동성애자처럼 차별받는 사람들을 말이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창조주는 "선"만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온 우주에는 모든 것이 존재하며, 온 우주는 전체적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하나, "빛과 어둠"이라는 하나, "옳고 금"이라는 하나 등의 모든 상대적 개념의 전체가 창조주의 질서입니다.
대자연(창조주)의 이치(질서)는 탄생과 소멸의 연속된 순환으로 이뤄집니다.
사람은 흙에서 창조돼 자기 삶을 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며, 사는 동안 우리 몸의 세포는 매 호흡마다 수많은 탄생과 소멸의 순환 과정으로 재생하며 유지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생각"과 감정 감각의 "느낌"이 무한하게 순환합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감정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고정된 생각"은 '고정된 사고방식'의 순환과정이 반복한 결과이고, '고정된 사고방식'은 '고정된 판단과 평가'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은 우선 발산적입니다. 그래서 남성성과 닮았습니다.
느낌은 수용적입니다. 그래서 여성성과 닮았습니다.
하늘과 땅,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 생각과 느낌의 균형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람의 마음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생각과 느낌의 균형이 자기 선입견만 의존해서 기분이 나쁜 상황만 반복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수히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그 사랑을 믿고 느끼며 두려움이 거둬지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말이죠.
골방(깊은 마음)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요.
여기에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선입견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무효한 곳'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며 몸과 정서와 정신의 긴장을 이완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이 무얼 바라는지 한 가지 주제를 떠올려 보세요. 온 몸과 마음이 듣는 느낌에 감각을 기울여 보세요. 그때 자신만의 기도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모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_()_
Reply1 dEdited
Hyuk Bom Kwon
참 공감할 내용입니다.
Reply1 d
Choi Young Bok
교수님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목사님들이 귀와 눈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성서를 들여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Reply1 d
하중조
널리 퍼날라 혼탁하고 어리석은 예배당을 차별없는 공동체로 만듭시다, 임마누엘!
주위를 돌아보세요, 혹시라도 내가
아는 목회자의 자녀가 커밍아웃 못하고
발을 동동 굴리고 있지나 않은지 . . . . .
Reply1 dEdited
Charlie Choi
이정도로 끝치지 마시고 계속 이문제에 대해서 같은 의견을 발표해 주세요
Reply1 d
Hoon Kang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Reply1 d
박병수
종교학자로써 올린 글입니다. 이분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인데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완전히 알 수 없지 않나요?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욥기'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할게 있고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저도 동성애를 옹호하지 않지만
십자가 이후 제사법이나 처벌의 방법은 없어지거나 달라졌을겁니다. 이 시대에 그들을 구약시대의 법대로 볼 수는 없어도
그들도 긍휼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으로 보라는 메시지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지지하든
그 외의 눈으로 보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가진 피조물들일 뿐입니다.
May be an illustration of one or more people
Reply1 d
박황희
종교인의 이율배반입니다.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율법의 도그마에 빠져 관견(管見)하는 자신의 편협과 편견을 깨닫지 못하고 맹신하는 행위입니다.
무당 목사들의 주술적이고 의존적 종교행위로 대한민국 기독교는 망하는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Reply1 d
박병수
박황희 저는 동성애 반대자 입니다.
다만 오강남씨는 크리스챤이 아니라 종교학자의 글이라 생각하고 그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상은 다양한 주장이 있다는 것을 들어줄 뿐입니다.
Reply1 dEdited


InJun Chung
감사합니다 교수님.
개인적으로 ‘낙태’에 대한 성경적 해석에 대하여서도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Reply1 d
Sang Kyung Koh
이미 오래전에 신교 구교 할것없이. 전부 동성애 인정하구선 이제와서 뭔 소리하는것인지. ...왜 종교지도자 들은 솔직하지 못한 짓거리를 하는지...싫다
Reply1 d
Jung Ryul Moon
성조기와 꼬리를 그렇게 흔들었는데..... ㅠ.ㅠ
https://m.yna.co.kr/amp/view/AKR20220716035851004
퀴어축제 참석 美대사 "인권 위해 여러분과 함께 싸울 것"(종합)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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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G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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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Kyung Koh
예수 샤후 300년이 지나 쓰여진 성경에대해 ? 뭣을 참으로 ...
Reply1 d
Sang Kyung Koh
외경 정경 성경. 히브리어 그리스어. 곱틱성경 그리고. 에수는 어느언어로 이야기 하고 살았을까 ?
Reply1 d
Sehoon Oh
아람어 일거 랍니다..

2022/05/14

알라딘: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김진호,이찬수,이충범 2012

알라딘: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김진호,이찬수,이충범 (지은이)자리(내일을 여는 책)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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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제목 그대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성서와 역사를 통해 재조명하고 있다. 모두 16가지 주제로 구성된 이 책은 매 주제마다 민감하고, 논쟁이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6가지 주제들은 기독교 신자이든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 선 사람이든 기독교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 그 자체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행태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과 관련 없이 반공의 뿌리 위에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방식에 철저히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권력화된 기독교는 어느새 자본과 정치를 넘나들며 자신들만의 성새(城塞)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는 과정은 결국 그 성새를 밑둥에서부터 부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업은 어떻게,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저자들은 기독교 본연의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왜곡된 뿌리를 걷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인바, 이 책은 그 작업을 위한 성서적 기반과 담론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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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사 교회의 정명正名, 사회의 정명正名
머리글 교회가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의 여러 이야기들, 그것으로 이웃과 대화하기

1장 유일신 _‘신상神像 없는 신앙’ 혹은 ‘반권력의 파토스’
2장 정통과 이단 _이단, 역사적 싸움에서 패배한 정통
3장 내세 _영혼의 구원에 대한 강렬한 열망
4장 구원 _죽음의 대속론을 넘어 부활의 속죄론으로
5장 창조 _비과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찰의 출발
6장 종말 _신체적 종말과 영원한 생명의 묵시적 이중나선
7장 성직 _목회는 본디 섬김이다
8장 성찬 _가장 낮은 이들에게 베푸는 평등의 밥상
9장 안식일 _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해방’의 날
10장 교회 _교회는 속죄의 목욕탕이 아니다
11장 사도신경 _배타성의 상징이 된 금관의 예수
12장 영과 육 웰빙 _시대의 ‘구원불평등’을 읽는 키워드
13장 결혼과 가정 _평등한 창조를 부정하는 순종론을 깨라
14장 교회와 여성 _원죄라는 편견이 만든 부정不淨의 여성관
15장 타종교와 이웃 _교회의 길이 아닌 그리스도의 길에 서라
16장 성전聖戰 _거룩한 전쟁, 성서는 이를 옹호하는가?

추천글

성전화·권력화된 한국 기독교에 던지는 근원적 물음
점점 성전화·권력화·화석화되어 가는 한국 교회가 교회 본연의 정체성과 역할을 재인식하므로 이 시대를 사는 한국 기독교인 모두에게 기독교 신앙이 줄 수 있는 활력과 역동성을 되찾도록 하는 일은 현 한국 교회에 주어진 최대의 과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김진호 목사님을 비롯하여 이런 과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몇몇 의식 있는 분들이 엮어내는 이 책은 두 손 들어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나 일반 지성인들이 모두 읽고 한국 기독교 활성화를 위한 대화의 장이 더욱 활발해지기 바란다.”
- 오강남 (종교학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신자유주의 성전이 된 교회를 향한 단호한 질문
“극우독재의 ‘하면 된다’ 구호에 ‘믿으면 받는다’로 호응하면서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부흥을 한 한국 개신교 교회는 신자유주의, 즉 자본독재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물적 기반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교회개혁’이라는 주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교회개혁은 교회임을 전제로 한 노력과 싸움이지만 그 교회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 교회들은 소박하게 말하면 교회를 가장한 상점들이며 제대로 말하면 신자유주의의 성전이자 회당들이다.”
-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저자 및 역자소개

구미정 (지은이) 
신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글 쓰고 강의하는 기독교 인문학자. 진지하고 심각한 신학 풍토 속 그녀의 이야기 신학은 자유롭고 경쾌한 놀이를 지향한다. 나아가 말과 글로 삶의 지혜를 나누는 창조적 놀이가 운동이 되어 교리와 교권, 현존 질서와 체제에 눌려있는 생명들이 하늘 숨을 쉬게 되기를 소망한다. <두 눈 그 너머에서 세상을 보다>(공저), <구약 성서, 마르지 않는 삶의 지혜>, <교회 밖 인문학 수업>, <두 글자로 신학하기>, <한 글자로 신학하기> 등 여러 책을 지었다.
최근작 : <그림으로 신학하기>,<십자가의 역사학>,<죽음준비교육 20강> … 총 25종 (모두보기)

김진호 (지은이) 
안병무 선생의 제자로서 그가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와 한백교회의 연구원과 담임목사였고, 계간 [당대비평]의 편집주간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연구실장으로 활동했다. 민중신학자이자 비판적 지식의 기획자로서 한국사회와 교회의 불편한 공존에 대해, 그리고 민중의 숨겨진 그림자를 찾는 것에 관한 글을 써왔다. 주요 저서로 『성서와 동성애』,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리부팅 바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예수의 독설』, 『반신학의 미소』 등이 있다.
최근작 : <길 없는 길 위에서>,<인간 너머의 인간>,<바이러스에 걸린 교회> … 총 56종 (모두보기)

이찬수 (지은이)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 더보기
최근작 : <보훈, 평화로의 길>,<독립.호국.민주의 미래와 보훈의 가치>,<보훈학 개론> … 총 58종 (모두보기)

이충범 (지은이) 
연세대학교(문학사)와 감리교 신학대학교(신학사)를 거처 드류 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석사(M.Div)를, 대학원에서 중세신비주의 연구로 철학박사(Ph. D)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학교 신학부의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세미시문화사, 문화신학, 일상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노래로 듣는 설교》《중세 신비주의와 여성》《종교인의 연애》(공저) 《아시아공동체와 여성》(공저) 《다문화와 여성신학》(공저) 《창조신앙 생태영성》(공저)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은 기독교 이야기》(공저)《 한류로 신학하기》(공저) 등이 ... 더보기
최근작 : <아시아 공동체와 평화>,<종교인의 연애>,<한류로 신학하기>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자본과 물신(物神)의 노예가 된 기독교를 정명(正名)하라!
13인의 기독교 연구자, 새로운 기독교 개혁의 촛불을 들다.

1990년대 초 개신교의 성장이 정체되고 교세가 감소하고 있다는 지표가 발표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위기론’은 교계에 점차 고조돼 왔다. 위기가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도 수가 줄고 있고, 문을 닫는 교회도 많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목사를 ‘먹사’로, 평신도를 ‘병신도’로 비아냥거리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할 정도로 개신교의 사회적 평판은 매우 부정적이다. 심지어 기독교는 사라져야 한다며 기독교 타도를 외치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무수히 생겨나고 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키워드는 황금만능, 물신숭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로 집약되는 공격적인 선교 행태와, 믿음은 곧 구원이라는 그릇된 대속(代贖)론이 배타성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의 위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안티 기독교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는 오늘의 상황은 기독교 자체의 근원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의 근본적 물음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것이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인지 아니면 기독교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외면, 왜곡하고 있는 것인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성서와 역사를 통해 재조명하고 있다. 모두 16가지 주제로 구성된 이 책은 매 주제마다 민감하고, 논쟁이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6가지 주제들은 기독교 신자이든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 선 사람이든 기독교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 그 자체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행태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과 관련 없이 반공의 뿌리 위에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방식에 철저히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권력화된 기독교는 어느새 자본과 정치를 넘나들며 자신들만의 성새(城塞)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는 과정은 결국 그 성새를 밑둥에서부터 부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업은 어떻게,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저자들은 기독교 본연의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왜곡된 뿌리를 걷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인바, 이 책은 그 작업을 위한 성서적 기반과 담론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다음의 글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일반적 가르침 중에도 경청해야 할 것이 있지만 그것의 문제적 측면을 주목하려 했고, 그 문제적 측면이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해 편협하게 수용하고 해석한 것임을 부각시키려 했다. 하여 우리는 독자들이 이 책에서 ‘다름’을 보기를 기대한다. 확고했던 신념을 대체하는 ‘확고한 대안’이 아니라,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이 또 하나의 대답을 주는 교과서 같은 것이 아니라 ‘참고서’(레퍼런스)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대화 자료이기를 기대한다.”
(저자를 대표하여 김진호 목사가 쓴 머리말 중에서)

기독교 역사와 성경에 대한 몰이해 속에
구원의 장사치, 속죄의 목욕탕으로 타락한 한국 기독교.
이제 새로운 종교개혁의 촛불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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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렵거나 변죽만 울리거나  
rosaleon 2013-09-11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이단 정죄보다 교회내부의 암덩어리 도려내야

  • 현재 개신교 예배당의 출입구에는 저마다 큼지막한 포스터가 하나씩은 붙어 있다. 이른바 '○○○ 이단의 출입을 금한다'는 게 그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걸 붙여 놓은 걸까? 교우들을 엉뚱한 교리로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빼내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 정말로 그들이 기존의 교우들을 이리처럼 도둑질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개신교 내부에서도 스스로 점검해야 할 몫이 있지 않을까? 그 동안 가르친 교회 교리가 교우들을 붙잡아두지 못한 이유 말이다. 그에 대한 진정성을 성찰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 물론 이단은 정통 교리와 어긋난 경향성을 드러내며 활약한다. 다만 이단 규정은 교리적인 차원보다는 주도권 다툼에서 빚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통이든 이단이든 교회 역사는 권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구미정·김진호·이찬수 외 여럿이서 쓴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에는 그와 같은 '이단'이라든지, '성직'이라든지, '창조'라든지, '성전(聖戰)'이라든지, 기독교의 여러 가지 속살들을 드러내 준다. 물론 그것은 바른 치유책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경계선은 대체 어떻게 그어진 것인가? 초기 기독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애초부터 교리적 차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바우어는 주장한다. 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공식 교리의 진술(이른바 정통은 교회에 의해 규정된다)이 아니라 동일한 주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바우어에 따르면, 정통과 이단이라고 하는 분류체계는 각각의 사상이나 내적인 교리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권력 집단의 정치적 판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46쪽)

  • 이는 제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인 정용택이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유세비우스(Eusbius)의 〈교회사〉와는 달리 독일의 발터 바우어(Walter Bauer)의 〈최초의 기독교에서의 정통과 이단〉이란 책에 초점을 맞춰 정통과 이단 간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그것이 곧 예수와 사도 시대의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관용되었던 다양한 교리들이 로마교회의 정치권력 아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배척되었다는 주장이다. 

  • 아울러 정용택은 지금의 한국교회와는 달리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준 관용성에 눈뜨도록 종용한다. 이른바 초기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때는 '단일한 개신교 교리'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비교적 원만하게 공존하던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더 큰 문제는 무엇일까? 기성교회가 제시한 메마른 교리와 답답한 의례에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이단종파로 규정한 집회에서는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와 열광적인 종말론 등으로 무장한 채 기존 교우들의 억압된 욕망을 분출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기성교회는 막강한 권력과 딱딱한 교리로 교우들을 옥죄려고 했지 그들처럼 교우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데는 등한시했다는 견해다.

  • 그것은 구미정이 바라 본 '성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 시대의 목회자가 정녕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를 계승하고 싶은 욕망이 하늘을 찌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루터의 '만인사제'로 인해 '영적 평등주의'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 권위'를 수호하려는 목회자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 "결국 목사가 자기 자신을 평신도와 구분지어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고질병에서 헤어나는 게 관건이렸다. 이렇게 보면, 목사의 직분을 '성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뻣뻣한' 평신도를 곁에 둔 목사야말로 복 받은 사람인 셈이다. 그 평신도는 목사로 하여금 만인사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각성케 하는 고마운 스승이 될 테니 말이다."(133쪽)

  • 이는 스물아홉에 요절한 젊은 시인 기형도의 〈우리 동네 목사님〉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목회가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를 확장하는 걸 성공으로 생각하는 판에, 그 시인의 글에 등장하는 목사는 둘째 아이를 폐렴으로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복'을 기대했던 교인들조차도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마당이었고, 그 책임을 목사에게 묻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그 목사가 전능한 신이 아닌데도 말이다.

  • 그만큼 오늘날 교회는 목사도 그리고 교우들도 병이 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사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예배당을 크게 짓는데 혈안이 돼 있고, 교우들은 교회부흥의 실패원인을 목사에게 돌리는 병폐에 빠져 있다. 교회가 부흥되면 목사를 신격화하지만, 부흥이 저조하거나 교인수가 감소하면 무능한 목사로 낙인찍는 게 보편화된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오늘날 교회의 암 덩어리는 교회 바깥의 이단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회 내부의 폐부와도 같은 권력욕과 딱딱한 교리들은 교우들을 더 병들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것들을 찢고 수술하지 않는 한 그 암덩어리는 더욱더 급속하게 확산될 것이다

  •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그 속살의 암덩어리들을 이야기하겠는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교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암덩어리들이 무엇인지 바르게 진단하고, 그것들을 수술하여, 보다 더 내실을 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명의 신학자들은 그런 바람으로 각각의 꼭지를 맡아 이 책을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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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2012-05-0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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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을 열다

  • 김규항씨의 말대로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볼지는 모른다. 하지만

  • 단 몇 사람이라도 이 책을 보기만 한다면 그는 가만히 예전의 신앙을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 제목 그대로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이야기가 교회와 나의 모습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 신앙이란 것을 거의 교리 안에서 듣고 읽고 이해하고 살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

  • 모든 교리가 성경과 하나님께서 직접 일러주시고 명령하신 것으로 믿고 따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 이 책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자의적으로 해석해낸 교리의 맹목성을 역사적 교회사를 들려줌으로써 증명해준다.

  • 읽고 나면 혹시 불편해질까, 선입견이 있었다. 왜냐면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나 혹평을 받는 존재들이기에

  • 이 책 역시 혹평에 강도 높은 비웃음과 야유까지 얹지 않았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 오히려 읽고 나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이며 기독교가 나아갈 바가 어디인지

  •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동안 아무도 보여주지 않던 기독교의 밀실을 시원하게 열어 보여주었고 비로소 복음의 핵심이

  • 지금 이 순간 교회에서 사회에서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었기에 오히려 마음에 기쁨이 깃들었다.

  • 깊은 사유와 기도와 말씀이,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하신 것처럼

  • 예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것을 보고 행하기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길이라고 믿는 성도들의

  • 영성에 이 책이 더 거룩한 고민의 시계를 확보해주리라 생각 한다.

  •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를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 물론 그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 미미하여 자괴감이 들지라도

  • 현재의 이 혼탁한 교회의 어느 한 부분에 일정의 빚이 있는 우리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지 않을까.

  • 그것이 세상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기독교를 일으켜 나가는 날마다의 첫 걸음일 것이다.

  •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의 보다 성숙하고 바람직한 성도와 한국교회의 깨어남을 염원하는 저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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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 2012-05-1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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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1

알라딘: 영원의 철학 - 목차

알라딘: 영원의 철학

영원의 철학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 조옥경 (옮긴이), 오강남 (해제)   
김영사   2014-07-14
 
책소개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 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이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인용되었으며, 21세기에도 그 깊이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안목은 27개 주제 속에 배치한 멋진 인용문들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나며, 해설에서 묻어나는 사유와 체험의 깊이는 《멋진 신세계》의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다.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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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제_ ‘영원의 철학’으로 세계 종교의 심층을 보다
들어가며
01 그대가 그것이다
여기에 그분 말고 누가 있겠나
02 근본바탕의 성질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생겼다
03 성격, 거룩함, 신성한 화신
동일시를 통해, 은총을 통해
04 세상 속의 신
그러나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리라
05 최고의 사랑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긴다
06 고행, 비집착, 올바른 생계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용하기
07 진리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두루마리가 진짜 경전이다
08 종교와 기질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09 자기이해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긴다
10 은총과 자유의지
그대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11 선과 악
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의 자아를 보라
12 시간과 영원
어떻게 시간적 상태가 비시간적 상태와 공존할 수 있을까
13 구원, 해방, 깨달음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어야 한다
14 불멸과 존속
어디로도 가지 않고,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 자
15 침묵
갈망과 혐오의 목소리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일
16 기도
제 안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기도하소서
17 고통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18 믿음
믿음은 극락으로 이끌지만, 다르마는 니르바나로 이끈다

19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20 종교로 인해 짓는 죄
가장 근본적인 속박의 원인은 잘못된 믿음과 무지

21 우상숭배
진리와 정의가 새로운 우상이 될 때

22 감정에 호소하기
정서와 느낌의 우상숭배는 대가를 치른다

23 기적
영혼과 신 사이에 드리워진 방해물

24 의식, 상징, 성찬식
영원으로 통하는 문인가, 속박의 도구인가

25 영적 훈련
새로운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는 약의 사용법
26 끈기와 규칙성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27 묵상, 행위, 사회적 유용성
무엇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가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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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3

알라딘: 귀향 틱낫한 (지은이),오강남 (옮긴이 Going Home: Jesus and Buddha as Brothers

알라딘: 귀향

귀향    틱낫한 (지은이),오강남 (옮긴이)
모색2001-09-01

- 절판 확인일 :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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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베트남의 대선사인 틱낫한 스님의 법어집. 이 책에 소개된 틱낫한 스님의 메시지는 서로 갈등하는 가족들, 정당과 국가, 이해단체 간,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이끄는 나침반 구실을 한다.

스님은 서로 다른 종교간, 인종간, 문화간, 국가간의 대립되는 모든 관념과 개념들에 매이면, 이 세상의 분쟁과 갈등과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이 서로 다른 모든 차이를 긍정하고 서로 다름을 기뻐하면서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뿌리는 모두 하나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다는 것.

그 점에서 틱낫한 스님 전하는 귀향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가 출발한 하나의 영적 뿌리로 돌아가자는 의미요, 그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시작됨을 일러주는 것이다.


목차
- 머리말

제1장 이해의 탄생
제2장 귀향
제3장 우리의 새생명을 꽃피우자
제4장 진리의 몸, 법신을 찾아
제5장 사랑이 뜻하는 것
제6장 예수님과 부처님은 한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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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들어가 살 데는 있을 지 모르나, 그들 마음 속에는 집도 고향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들에게 집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집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집이 되어야 합니다.

. 부처님과 예수님은 언제나 제 내면에 계시면서, 매우 평화롭고 서로 한마음입니다. 제 속에 계신 부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 서로 다른 종교가 만나는 것은 각자의 종교를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21세기에 걸어보는 희망입니다. 종교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한, 세계에 참다운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들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키길 원한다면 서로 다른 전통들끼리 열린 마음의 자세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종교가 여러 세기 동안 전쟁의 원인이 되었음을 상기하면 됩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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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틱낫한 (Thich Nhat Hanh) (지은이) 

오늘날 선불교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이자 세계적인 교육자로 70년 가까이 ‘마음다함(mindfulness)’을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으나, 베트남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 조치를 당한 뒤 1973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982년 보르도에 명상 공동체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세우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2008년부터 교육 분야에 마음다함을 도입하기 위해 유럽,... 더보기
최근작 : <모든 발걸음마다 평화>,<틱낫한의 깨어 있는 마음 수행>,<최상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 … 총 1050종 (모두보기)


오강남 (옮긴이)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더보기
최근작 : <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 총 65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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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로 돌아가기

  틱낫한 스님의 책을 오랫만에 들었다. 일생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 전쟁 종식을 위해 노력하신 분, 전쟁이 끝나자 전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은 두려움과 공포를 사랑과 자비로서 감싸안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종교인 불교를 사람들에게 심어놓기 위한 승려만은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과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세계의 인류가 자신이 자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믿는 종교의 뿌리로 돌아감으로써 모든 종교가 반목과 적대감에서 벗어나 상호간의 이해와 사랑을 높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것을 원했다.

  프랑스의 보르도지방에서 플럼빌리지를 운영하고 계신 스님은 우리들의 참된 존재는 지금의 드러난 세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국토와 서방정토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숨쉬며 살아가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기쁘고 행복한 바로 이곳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부처님과 만나는 법은 '마음 다함'이라고 한다. 숨쉴때는 온전히 숨쉬는 것을 느끼고, 걸을 때는 온전히 발걸음에 온 마음을 집중하고, 먹을 때는 음식에 모든 마음을 집중하는 것, 바로 현재에 온 마음을 기울여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마음 다함은 마음 없음이 된다. 온마음을 모르는 마음으로 만들고 생각과 관념을 떠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묻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과 더욱 가까워진다. 그 곳이 바로 우리의 참된 고향이다.

  우리가 보는 작은 생명체 하나에 들어있는 온 우주를 보는 것, 그래서 나와 그 작은 생명체 하나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 모든 생명체의 육신은 사라져도 그것의 본체는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그리고 생겨나지도 않음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내 눈 앞에 있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찰을 필요로 한다. 내 눈앞에서 느티나무 작은 잎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그 잎새사이로 언뜻 비쳐지는 하늘, 이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한다. 나무아래로 시원한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오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틱낫한 스님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듣는다. 내 속에 있는 진정한 내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스님은 지구에 사는 온 인류가 타인과 타종교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버리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지구인이 보다 성숙한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남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의 뿌리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어떤 종교든지 그 원래 뿌리는 순수하고 인간 존재의 본래모습과 닿아 있으니까. 그 종교의 뿌리에서 멀어지면서 우리는 서로가 다르고 독립된 개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원래 나무를 보라. 그 뿌리는 대지 흙으로 서로 같은 영양분과 에너지를 받으며 자라지 않는가?

  자신의 존재 밑바탕까지 보아야 그 많은 종교가 바로 그 밑바탕에 이르는 하나의 길일 뿐,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대지 흙으로서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되고 서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줄기를 타고 가지로 갈수록 잎으로 갈수록 우리는 자신이 독립된 개체인양 생각하고 자신의 물질적 삶이 전부인양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희생시키면서 정작 중요한 자신의 밑바탕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삶은 늘 역설적이다. 물질적 삶에 치우칠수록 자신의 정신적 삶은 황폐해지고 자신을 버릴수록 오히려 더욱 자신의 본래모습을 되찾는다. 원래 참된 진리는 역설적이지 않은가? 길 없는 길, 문 없는 문을 지나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가는 여정은 세상 모든 곳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으나 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오늘 나는 내 몸 담은 이곳에서 대도로 가는 길을 모색해본다.

- 접기
달팽이 2005-07-24 공감(2) 댓글(0)


알라딘: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예수 틱낫한 (지은이),오강남 (옮긴이) 2013 Living Buddha, Living Christ (1995년)

알라딘: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예수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예수 
틱낫한 (지은이),오강남 (옮긴이)솔바람2013-04-30
원제 : Living Buddha, Living Christ (1995년)

- 품절 확인일 : 2020-01-21
새상품 eBook 중고상품 (3)
판매알림 신청 출간알림 신청 12,000원
303쪽

Living Buddha, Living Christ (Hardcover) Hardcover
Living Buddha, Living Christ (Paperback) Paperback


목차


서문
신령한 영의 목소리

소개의 말
체험을 통한 공감대의 발견

제1장 가만히 있어 내가 하느님 됨을 알지어다
제2장 '마음 다함' 그리고 성령
제3장 최초의 만찬
제4장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예수
제5장 수련 공동체
제6장 평화스런 마음
제7장 미래가 가능하려면
제8장 귀의하다
제9장 피안
제10장 믿음과 실천


부록 | 논문
깨침과 메타노이아-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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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2

제대로 번역된 노장철학을 찾아서.. : 네이버 블로그

제대로 번역된 노장철학을 찾아서.. : 네이버 블로그

노자사이비 연구소

제대로 번역된 노장철학을 찾아서..

프로필

2016. 8. 31. 17:05

 이웃추가

제대로 번역된 노장철학을 찾아서..책에 대한 잡담 

                  
yamoo l 2011-09-03 22:03
          
 

알라딘에 각 분야의 고수분들이 많은 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분도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일 전 제 서재를 오랜 만에 찾아오신 알라디너분의 서재에 인사차 갔다가 엄청난 서재를 운영하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포스팅이 많이 없어 처음글부터 마지막글까지 금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고 나서는 그분(이하 J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사실이라면(미천한 제 눈에는 주장하는 바가 모두 타당한 것 같습니다) J님은 도올이거나 아니면 도올에 필적할, 아니 우리나라 노장철학계의 독보적인 전문가 이실 것입니다.

글의 문체가 도올과 너무 흡사하여, 혹시 도올밑에서 수학하신 분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J님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볼 때 매우 독선적입니다.

그가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부분은 거의 모든 노장 철학 번역서들이 노장 철학을 잘 르고 번역해서, 진정한 노장철학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J님이 비판하는 바를 따라가 보면 노장에 관련된 책들의 중요한 오역이 무엇인지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오역이 사실이라면 노장에 관계된 책들은 모두 다시 출간되어야 될 듯싶습니다.


제가 J님의 서재에 들어가 이 글을 옮겨 놓는 이유는 J님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많은 공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노자를 아는 체는 사람들 또한 전혀 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글에 댓글 달면서 감사하다느니 하고 잠꼬대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에 노장전문가가 별로 없다고 비전문가의 왜곡된 번역서를 두고 이런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제대로 아는 전문가 누가 한번 나와서 방송강의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J님이 지적한 노장에 관계된 책의 오역 비판에 대한 핵심을 옮겨 놓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제대로 된 노장 철학서를 선택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분이 지적하시는 부분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1인 이기에....

대표적인 장자해설서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를 비판한 부분입니다.


철학적 바탕이 없는 번역은 상식 수준의 해설이 되어버린다. 철학책 번역은 문자, 한문실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에 대한 깊은 철학지식과 특히 장자는 선사상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 이해가 있어야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도 많이 떨어진다. 그런데 다른 책은 또한 이보다도 못하니 이 책을 보는 자가 많은 것이다. 
 동양철학, 도가철학의 매우 중요한 개념들을 통일성없이 막 번역어를 갖다 붙여놓았다. '천지'를 '천지자연'으로 해놓으면 오역이다. 천지는 천지이지 자연을 왜 가져다 붙이는가? 뜻이 맞다고? 천만에. 천지는 우주라는 뜻이지 자연이라는 뜻이 아니다. "道德" 은 '도와 덕'이지 '도덕'이 아니다. 도덕은 우리가 모랄을 번역한 개념이다. 장자의 도덕은 도와 덕을 붙인 두 단어이다. 모랄이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 노장에는 도덕, 모랄을 초월하라고 하지 모랄에 대한 철학이 없다.
이런 두 예들 외에 무수히 많은 장자의 중요한 철학개념들에 대한 번역어가 철학적 고찰이 없이 그냥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막 한글로 옮겨 놓았다.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오역,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오역이 발견된다.   
 꼭 이 책만이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의 기초적이면서 핵심적인 오역을 하나 짚어보자.  본책 덕충부에 '인기지리무진' 얘기에서 '天죽'이 나온다. 여기서 '天'을 역자가 '자연'이라 번역했는데 오역이다. 장자에 나오는, 노자도 마찬가지, '天' 자는 지금 우리가 아는 자연, 네이쳐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를 '하늘'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장자를 강의하는 거의 모든 교수들과 장자 번역서 모두, 장자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천'을 '자연'으로 알고 장자를 '자연철학'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다 틀렸다. 
"자연이 먹여살리는데 어찌 또 '人爲'가 필요하랴"  자연이니 인위하는 말들이 모두 장자의 용어가 아니고 장자사상에는 이런 개념을 쓰지 않는다. 이런 법주로 설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정 자체를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런 범주개념으로 설명을 천 페이지를 해도 다 꽝이다. 자꾸 서양철학개념을 노자, 장자를 설명하려고, 아니 동양철학 다 마찬가지다, 하니까 노자,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자연'이라는 개념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이 동일할까? 하이데거 기초만 알아도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독창성이 있는 것이다. 노자 장자에 나오는 '物'이란 개념은 어디에 가까울까? 우리가' 물질' 또는 '사물'이라고 쓰는 용어에 현혹되어 이 '물'자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서양의 '자연'은 물질이다. 그러나 노장의 물은 물질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다. 노장의 '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물의 본질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를 한자로 '自然'이라고 노자가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자연'을 지금 우리가 쓰는, 서양의 용어인 '네이쳐'로 읽으면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을 뜻하는 '신'을 '신발'로 보면 안 되듯이.  노자가 '自然'이라고 한 표현을 장자는 '天'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곽상이 장자의'천'을 '자연' 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때의 '자연'은 '네이쳐'가 아니라 노자의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도의 본질성격이 스스로 그러함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본질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노장의 주장이다. 왜? 모든 존재자는 다 虛허하기 때문에. 즉 비워져 있기 때문에.  그러니 자연을 팔아먹는 모든 장자 번역책 잘못 것을 알 것이다. 장자를 왜곡하지 말라. 이 책의 모든 부분이 다 틀리다는 게 아니라 이런 중요한 부분은 분명히 알고 가려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이 책뿐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서에 대해 하는 말이다.


다음은, 역시 가장 많이 팔린 <도덕경, 오강남>에 대한 비판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 노장전문가(노장철학으로 박사논문 쓴 사람)은 몇 명 안된다. 이런 사람들만 노자를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도 안 되는 사람 중에 노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까놓고 애기해보자. 오강남 역자가 노자의 도를 정확하게 알까? 내가 이 책을 본 바로는, 모른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써놀았다. 다른 거의 모든 번역서처럼.
 노자는 대자연에 대해 설교한 적이 없다. 자연을 말하지 않는다. 문명에 대해 말하지. 자연에서 살라? 자연의 순리에 맞추어서 살라?
 인간은 이미 자연의 순리에 따라 태어났다.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다. 뭘 또 자연에 맞추어서 사는가? 그렇게 안 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살기 싫어도 살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자연을 벗어나서 살고 있단 말인가? 1초라도 벗어나면 인간은 바로 사라진다. 아니, 벗어날 수가 없다. 죽는다는 현상도 자연 현상이므로.
 노자가 자연을 찬양했는가? 찬양할 필요가 없다니까. 당신들은 공기를 찬양하는가? 하늘과 땅을 찬양하는가? 찬양할 필요없다. 찬양 안 해도 인간은 이것들과 더블어 살수밖에 없는 자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냥 살다가 가면 된다.
 노자는 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말 안 해주어도 자연은 그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스스로 알아서 자연의 순리대로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연의 하나이면서도 자연을 파괴하면서, 4대강 사업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 인간이다. 노자는 자연이 아니라 문명에 대해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자에 있어서는 문명도 자연이다. 새가 집을 짓는 것도 문명이다.  이만하자, 당신들이 노자를 모른다면 당신들 책임이 아니다. 아는 사람들이 잘 알려주지 못한 것이 문제지. 이 한심한 현상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오강남의 번역과 해설은 다른 일반 번역서와 다름 없는 비전문가의 어설픈 왜곡이다.

 

 이 외에도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표적으로 유명한(?) 번역본에 대한 오역의 지적 예입니다. (이외에도 부지기수로 많지만 아래 대표적인 책들만 소개)


 <도덕경> 노태준. 도의 본체? 이 표현을 보면 역자가 노자의 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도가 본체라는 말인가, 도에 대한 본체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다 틀렸다. '본체'라는 말이 서양의 실체론에 빠진 말이다. 도에는 본체가 있지도 않고 도가 본체도 아니다. 도가 본체일 수 없다는 것이 노자의 도사상이다.  자연? 네이쳐 노자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이지 네이쳐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살라? 이런 것은 노자사상이 아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강신주
장자의 도가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하는데 그럴 듯해 보인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런 서양스러운 용어로 표현하면 대단해 보일 것이다. (중략) 도가 과연 타자와의 소통인가? 타자와 우리가 소통을 하는 영역은 사회정치적인 공적 영역에서 일뿐이다. 타자와의 소통은 도가 가지고 있는 곁가지의 한 성격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곧 도는 아니다.  장자는 무아론을 말하는데 빈배 설화같은 것이다. (중략)나가 없는데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타자와? 타자도 무아상태라면 누구와? 그 누가 없는데 누구와 누가 소통을 하는가?  타자와의 소통이 필요한 것은 정치영역에서 있다. 왜? 합의를 해야 하니까. 타자는 나와 다르기때문에 서로를 인정하든가, 결정을 하려면 합의를 해야 한다. 3, 4냐 4, 3이냐. 그럼 3.5로 합의하자라든가. 이게 조삼모사의 메세지인가? 조삼모사가 말하는 것은' 허' 불교용어로 '공' 이 바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어리석어서 그걸을 모른다. 알면 원숭이에서도 부처가 나왔을 것이다. 원숭이에겐 보통 인간 마음을 초월한 영혼수준은 높은 정신경지가 없다.  

 

<노자 잠언록>, 보누스
노자에 관한 번역서가 많은 데 이런 책이 가장 짜증난다. 노자는 철학이다. 어떤 한철학, 관점을 가지고 81장을 번역하고 해설을 해야지 무슨 격언집처럼 아무 것이나 그때 그때 갖다 끼워넣는 식으로 해설을 하는가? 노자는 인생론을 위한 격언집이 아니다. 노자의 우주존재론과 정치철학을 알고 성인론을 이해하라. 이런 책은 종이낭비다.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강신주
노자의 정치철학을 왜곡하지 말라. 노자를 국가주의에 파묻친 사기꾼으로 만드는가? 노자는 원래 아나키즘에 가깝지 않았는가? 난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노자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로 먼저 주어라라고 했다? 지금의 맑시즘을 자본주의가 있지도 않았던 노자에 갖다가 붙여 비판을 한다. 노자를 다시 읽어라.


  

 <노자강의-김충렬 교수의>
이 책의 저자는 우리나라 동양철학계에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장철학을 할려는 사람은 거의 다 이 저자 밑으로 가서 논문을 썻다.  이 사람의 동양철학에 대한 박학함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저자가 노자의 도를 알까? 글쎄.......  노자의 도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몇 구절 번역을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그 구절을 살펴 본 바로는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역시 방동미류의 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선사상적인 깨달음이 있는냐 그것도 아닌것 같다. 이 저자 밑에서 쓴 박사논문을 다 읽어 봤는데 이를 지도한 이 책의 저자가 노장을 아는지 의심스러웠다.  우리나라 노장계는 정말 정글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쪽의 큰 인물이 나온다면 이 책은 제외하고라도 노자, 장자의 허섭한 번역서가 이렇게 날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 노자-꼭 읽어야 할 인문고전 동양편4> 타임기획 호승희 역                            청소년을 위해 노자를 읽히는가? 노자 도덕경은 청소년은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절대 읽히지 말라. 청소년을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얘들이 읽어서 도움 받을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역자가, 출판사가 이 책 작업을 했단 말인가? 한마디로 노자를 모르는 자들이다. 노자를 알면 이런 기획 안 한다. 이 책뿐 아니라 청소년 시리즈에 노자, 장자를 넣는데 절대 넣지 말라. 있어도 얘들에게 읽히지 말라. 읽히면 오히려 독이 된다. 물론 읽혀도 전혀 모르겟지만. 만약 애들이 읽고 이해했다면 그건 잘못 안 것이다. 그건 절대 노자의 도가 아니다. 노자는 철학교수도 어려워 못 읽는 책이다. 


<철학콘서트>
"도는 철학, 덕은 정치학" 노자 도덕경에 어디 이런 사상이 있는가? 도와 덕은 이런 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의 초보 같은데 뭐 이리 여러가지로 아는 체를 하는가? 다른 부분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나 똑 바로 알고 책을 써라. 개론이나 입문서는 오히려 철학의 해박한 대가들이 써야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번역된 노장에 관계된 책은 한권도 없느냐? 그렇지 안답니다. 장자에 대한 좋은 번역서는 없지만 제대로 된 도덕경의 번역서는 있다는 군요! 

J님께서 추천하신 제대로 번역된 4권의 도덕경 (우리나라에서 도덕경을 제대로 풀이한 도덕경 전문 주석서)  

  1. 심재원, 노자도덕경, 그 선의 향기, 정우서적. 감산덕청의 주석을 함께 완역하고 철학 설명을 해 놓았음.    
  2. 임채우,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왕필의 주석을 완역.     
  3. 최진석 정지욱, 노자의소, 소나무. 성현영의 주석을 완역.    
  4.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 소명. 하상공의 주석을 완역. 각주 충실 




 

 

  

 

어떤 분이 J님의 추천대로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를 읽었는데, 오강남 역본의 미진한 부분이 해결되었답니다. 저도 한 번 이들 책으로 유명한 도덕경을 제대로 읽어볼 요량입니다!

                                                                                                                          
                                                                                

2021/12/15

Kang-nam Oh | 불교와 성경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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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 [1]

계간지 <불교평론>에서 이어가는 “불교로 읽는 고전” 시리즈의 하나로 ‘성경-불교의 입장에서 읽은 성경 이야기’를 쓰라는 원고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방금 나온 2021년 겨울호 248~265 쪽에 실렸네요. 
1. 성경의 구성, 
2.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3. 성경에 대한 태도, 
4. 해석의 문제, 
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로 구성되었는데, 

5번을 여기 올려봅니다.  즐독 부탁합니다.  (괄호 안은 각주들인데 페북에는 제대로 올려지지가 않네요.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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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

성경을 읽으면서 불교를 연상시키는 진술이나 사건들 몇 가지를 예거해 본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제들일 수 있기 바란다.  

1) 성경 첫째 권인 <창세기>에 보면 신이 6일 동안 세상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여라....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고 하였다. 서양 역사는 대체적으로 이 ‘정복’과 ‘다스리라’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땅을 마구잡이로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착취하고 살육하는 일을 계속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 말은 자연을 함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살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각주: Jeremy Rifkin, The Emerging Order: God in the Age of Scarcity, (Ballantine Books, 1979)와 그의 최근 책,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와 동저자, 안진환 옮김, <글로벌 그린 뉴딜>(민음사, 2020) 참조.)
  이런 새로운 이해는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2) 창조 이야기와 연관해서 야훼 신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을 조성하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자라게 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좋지만 그 중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른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며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과일을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었다.  둘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야훼 신은 이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순종·불순종의 입장에서 보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므로 쫓겨난 것이니 우리도 불순종하면 안 된다는 식의 윤리적, 율법적 해석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의식의 발달사를 다룬 켄 윌버(Ken Wilber)는 이 이야기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도 모르던 동물적인 주객 미분의 의식(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주객 분리의 의식(subject/object consciousness)으로 넘어온 단계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윌버는 물론 의식 발달의 완성은 이런 이분법적 분별 의식을 초월하는 초주객 의식(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라 한다. 
(각주: Ken Wilber, Up From Eden: A Transpersonal View of Human Evolution (Quest Books; Quest ed. edition, 2007) 참조.)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분별식(分別識)을 가지게 된 계기와 이를 넘어서서 분별식을 초극하는 단계로의 완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3) 성경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친 기별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4:17)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개’라고 번역한 것은 본래의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메타(넘어서다)와 노이아(의식)의 합성어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 하겠다는 뜻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메타노이아 체험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체험은 다 같이 ‘새로운 의식’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않을까?

4)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했다.  여기서 ‘내가’라는 것은 역사적 인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기보다는 ‘우주적 나(cosmic I)’,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우주적 생명력’, ‘본원적인 인간성,’ ‘나의 참 나’를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여겨진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친 말이 연상된다.  여기서 ‘나(我)’란 누구인가?  역사적 고타마 싯다르타를 의미할까?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나, 참 나인 불성(佛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선언과 부처님의 외침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 아니겠는가?

5) <마태복음>에 보면 최후 심판 장면이 나온다.  임금님이 의인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25:35~36)고 한다.  의인들이 자기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임금이 다시 입을 열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한다.  이런 것은 물론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고 결국은 하나라는 화엄 철학의 상즉(相卽) 상입(相入)의 원리나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에 의하면 보잘것없는 사람과 임금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임금에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6) 다시 화엄 사상을 원용하면, 예수님이 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19:19)는 말씀도 쉽게 이해된다.  이웃과 내가 따로 떨어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이웃만 하나가 아니라 나와 자연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8:12)고 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면 현재 자연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태학적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절박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학이 가르치는 삼경(三敬) 사상, 곧 경천(敬天), 경인(敬人)과 함께 경물(敬物)을 이야기하는데, 경물이야말로 환경 파괴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깊이 생각할 가르침이라 여겨진다.)

7) 일즉다(一卽多) 다중일(多卽一),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 모든 것이 결국 하나 안에 있고 하나가 모든 것 안에 있어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라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은 <요한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7:21)라고 하였다.  사실 󰡔요한복음󰡕의 중심 사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인류의 죄 값을 탕감하기 위해 피흘리셨으니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른바 대속론(代贖論)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신비적 합일’ 사상이다.  그러기에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1931-2021) 신부는 <요한복음> 해설서의 제목을 “어느 유대인 신비주의자의 이야기(Tales of a Jewish Mystic)”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번역에서는 제목을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이라고 했지만, 영어 원본에는 The Fourth Gospel: Tales of a Jewish Mystic(HarperCollins Publishes Ltd, 2013)으로 되어 있다.  신비주의란 절대자와의 합일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더욱이 류영모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외우는 위의 성경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독생자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심어준 하느님의 씨앗, 신성(神性)이라고 하였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8. 위에서 잠깐 언급한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 속에 빛으로 있는 신성(神性), 나의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고 있는 복음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도마복음> 풀이 책 서문 마지막 문장으로 “한 가지 좀 특별한 소망을 덧붙인다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졸저, <또 다른 예수>(예담, 2009), 29쪽. 기독교인들을 비롯해 비불자들을 위한 불교 안내서로, 오강남,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참조할 수 있다.)

나가면서

성경을 필자의 어머니처럼 일 년에도 몇 번씩 읽는 이도 있고, 필자의 사촌 형처럼 국한문 성경을 완전히 필사하고 이제 다시 한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일반 불교 신도들이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같은 것은 외우지만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경을 직접 읽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은 자기들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성경이나 불경에서 나온 진리 그대로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해석’과 ‘교리’를 성직자들이 전해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제 그런 전통에 무비판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텍스트를 직접 읽고 그 문자 너머 심층에 있는 속내를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방향으로 간취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그 깊이에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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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2)

며칠전 불교와 성경이라는 제목으로 "5. 불교와 관계에서 읽는 성경"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동감'해주셔서 이왕 쓴 것, 3번과 4번도 올려보자 하고 올립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아시는 분은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혹시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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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에 대한 태도

불교의 경전은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는 말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啓示)’의 책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

1) 문자주의적 태도
이른바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근본주의적(Fundamental) 혹은 복음주의(Evangelical) 그리스도인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한다. 심지어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縮字靈感說)’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든가, 여호수아가 해가 지기 전 쫒기는 적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하나님께 태양이 멈추도록 해 달라고 하니 태양이 멈췄다든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 나왔다고 하는 등 구약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였다는 복음서의 이야기 등등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하는데, 이런 문자주의를 받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참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우주를 엿새 만에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경 처음에 나오는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이고, 복음서들도 그 이름대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요한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바울의 동역자 마가와 누가가 쓴 것이고, 바울의 편지서도 14권 모두 바울이 직접 쓰고, 일반 편지서도 그 이름을 가진 저자들이 손수 쓴 것이라 믿는다.

2) 문자주의의 거부
한편 18세기 계몽시대 이후 발달된 이른바 ‘역사 비평학적 접근’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현대 성서학자들 대부분은 창조나 출애굽이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등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이 어느 한 때 정말로 있었던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지 않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진보적 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예를 들어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일 수 없다고 본다. 모세 오경 중 『신명기』 끝부분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모세 자신이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모세 오경은 내용이나 문체나 용어 등에서 각각 특유한 몇 가지 종류의 문헌이 나중에 편집되어 이루진 것이지 모세라든가 어느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로서, 『창세기』 1장1절에서 2장4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와 2장4절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가 각각 P문서와 J문서라고 하는 다른 종류의 문서였는데, 후대 󰡔창세기』 편집자가 이 두 문서를 적절히 짜깁기해서 붙여 놓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복음서들이 처음에는 저자의 이름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후대에 가서 지금과 같이 저자들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썼다면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될 것인데 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마가가 쓴 『마가복음』에 그 정도로 의존해서 거기서 그렇게 많은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또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썼다면 그가 『요한복음』을 쓸 당시 그의 나이는 100살에 가까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의문을 제기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나와 있는 말씀도 사실 모두 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verba ipsissima)’이라기보다 거의 다가 후대의 사상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연구한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낸 책으로 Robert W. Funk, 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HarperOne, 1996) 참조.)

  심지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 나사로 같은 인물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나 신이 인간이 되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저자들의 상상에 의한 결과물이라 보기도 한다. 
(존 쉘비 스퐁 지음, 변영권 옮김,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8) 참조.)
바울 서신 등도 바울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지만,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사상이나 문체 면에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 바울 자신이 쓴 것이라 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직접 쓴 것이 7편, 논쟁거리가 된 것이 3편,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이 3편, 따라서 바울이라고 하지만 “급진적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 세 명의 바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커스 J. 보그, 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 󰡔첫 번째 바울의 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참조.)

4, 해석의 문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신학자로는 20세기 최대 신학자 중 하나인  독일의 성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약 성서와 신화』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등의 저작을 통해 이른바 ‘비신화화(demythologizing)’를 주장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화적 서술이기 때문에 신화를 이해할 때 그것이 마치 우주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무엇인 것처럼 ‘우주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실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독일 신학자로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비신화화’라고 하면 신화를 없애는 작업이라 오해하기 쉽고 성경에서 신화를 없애면 남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비신화화라는 말 대신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혹은 ‘신화의 껍질을 깨기(breaking myth)라는 말을 제안했다.  틸리히는 종교적 서술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징이 지적하고 있는 상징 너머의 뜻을 알아내야 한다고 하고, 신학의 임무는 성경의 상징을 그 시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재신화화(remythologizing)’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역사비평적 접근이라든가 탈문자화라든가 신화적인 표현의 껍질깨기 방법 등이 불교의 텍스트를 읽는데도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불교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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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289 13uNoveamcb40eor satm 253a9:15glt  · 
오늘은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소설책 몇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째, 반수연 지음, <통영>(출판사 강, 2021)

캐나다에서 한국에 들어와 2주간 격리 기간을 보내는 동안 폭빠져서 읽은 책이다.  7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으로 「통영」은 다섯 번째 나오는 단편의 제목이다.  첫째 이야기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나머지 단편들도 재외동포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수상작이다.  1998년 캐나다로 이민한 작가가 캐나다 이민 생활에 얽힌 애환을 그리고 있다.  맛깔나고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밴쿠버 조선󰡕에 실려서 읽은 적이 있는데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경우 이야기들 자체도 감동이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지명이라든가 분위기가 내가 살고있는 밴쿠버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나에게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들이라 더욱 좋았다. 󰡔한겨레 신문󰡕에 서평이 크게 나왔다.

둘째, 김소윤 지음, <난주>(은행나무, 2018)

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이 소설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난주(Maria, 본명은 丁命連)는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맏딸로 1801년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의 아내였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그의 아내 난주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소설은 제주도로 간 난주의 파란만장한 삶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난주는 갖난 아기를 데리고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는데, 풍랑으로 배가 추자도에 잠시 머물렀을 때 아기를 바닷가에 떼어놓고 떠났다.  함께 제주도로 가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할 것이기에 차라리 추자도에서 평민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제주도의 노비제도와 방언이 많이 나온다.  제6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셋째, 박정선 지음, <백 년 동안의 침묵>(푸른사상, 2011)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그 형제들의 삶을 중심으로 소설화한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의 일부를 축약한 듯한 밀도 높은 이야기로 여러 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2012년 체육관광부 추천도서.
넷째, 한석훈 지음, <죽음과 친해지는 삶: 심층심리학습소설>(이분의일, 2021)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는 한석훈 교수가 죽음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소설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한 교수는 서문에서 “이 책은 노화를 예감하거나 노화에 이미 접어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적 내면을 탐색해보도록 안내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하여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길잡이용 성인학습소설입니다.”고 하고 이어서 “자신을 잘 알게 된 경우, 죽음을 경외의 마음으로 기다리며 이번 생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어 여생을보다 가치 있게 살 수 있으므로 스스로도 흡족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도 따뜻한 관계를 키울 수 있습니다. 깊이 사랑해야 잘 죽습니다.  내적 성숙에 대한 귀중한 배움의 내용을 지금껏 지상을 거쳐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남겨주었고, 그것을 저는 이야기 안에 담아내어 여러분 앞에 펼쳐보이겠습니다.” 죽음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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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민진의 󰡔파칭코󰡕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이야기했기에 여기서는 생략.  미국 Apple사가 8부작으로 제작하는 드라마는 내년 2월에 방영된다고 한다.

한 가지만 더: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2018)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에 속한다고 극찬.  나는 아직 3분의1 정도 읽다가 중단했는데, 다른 급한 일 끝내면 다시 시작할 예정. 
이상입니다.



2021/09/15

Kang-nam Oh 탈종교화 시대의 종교 [종교 없는 삶] 필 주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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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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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종교화 시대의 종교

오강남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 명예교수)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탈종교화 현상이다. 이른바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전체적으로 전통 종교와 상관없이 사는 탈종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탈종교가 현재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현상인 셈이다.
종교 인구가 미미한 유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종교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는 미국에서 제일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church alumni association)’라고 했겠는가?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 특히 10대에서 40대의 젊은 층, 그리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탈종교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보고다.

왜 이런 탈종교화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주된 이유는 현대인들이 기복이나 상벌을 기본 전제로 하는 종교에 더 이상 매료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도 최근에 낸 <종교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극락이나 천국, 지옥으로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종교는 이제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제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탈종교적 윤리(secular ethics)”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종교가 완전히 무용지물인가? 종교사회학자 뒤르켐(Durkheim)의 영향을 받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사회심리학자 아라 노렌자얀(Ara Norenzayan)은 그의 책 <거대한 신들(Big Gods)>에서 한때 종교를 필요로 하는 시대, 종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수렵시대 이후 점점 인지가 발달되면서 사회관계를 넓혀 가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인간들의 행동거지를 감시하는 거대한 감시자(Watcher)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신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도 이런 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나 사람들이 있다. 그런 믿음이 인간 사회가 오늘의 수준에 올라오기까지 일종의 사다리 역할을 했지만 이제 상당 수 앞서 가는 나라에서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 없는 사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미국의 기독교 설교자들에 의하면 종교 없는 사회, 신을 믿지 않는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혼돈과 무질서, 범죄가 창궐하는 흑암의 사회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을 낸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안식년을 맞아 덴마크에 가서 1년여를 지나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범죄율이나 부패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면 신을 믿는 비율이 높은 나라들일 수록 번영과 평등, 자유, 민주주의, 여권, 인권, 교육 정도, 범죄 율, 기대수명 등에서 그만큼 덜 건강하다는 것이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신을 가장 많이 믿는 이른바 바이블 벨트에 위치한 중남부 주들이 교육 수준이나 범죄율 등 여러 면에서 신을 가장 덜 믿는 서부와 동북부 주들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다고 한다.
영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그의 책 <신의 역사> 마지막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미국이 유럽 국가들보다 도덕적으로 낙후한 것은 미국에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다.

주커먼은 전통적으로 받들어 오던 신을 믿고 종교적으로 열렬하게 살 때의 부작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의 주장을 보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그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칭 열렬하다는 근본주의 신자들의 경우 대부분 한번 받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자연히 보수적이 된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모든 것을 흑백·선악 등 이분법적으로 보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지금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는 몇몇 종교인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일부 종교인들을 보라. 민주적이고 다원주의적인 현 사회에서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이런 배타주의적 정신으로서는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다.
종교 없이 산다고 허무하게 살아야 하는가? 주커먼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실증적 자료를 통해 명확히 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종교가 없어도, 신이 없어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없어야, 신이 없어야’ 잘 산다는 것이다.
 
숨 막힐 정도의 전통적 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나면 삶과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지금껏 당연히 여기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봄에 솟아나는 들풀 한포기, 바람에 나부끼는 잎 새 하나를 보고도 경이로움과 놀람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의 일에서부터 광대한 우주의 ‘경이로운 신비(awesome mysteries)’를 하나하나 발견하며 외경과 환희와 황홀함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아하!(aha!)’의 연속이다. 이렇게 종교를 넘어서 모든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사는 삶의 태도를 저자는 ‘외경주의(aweism)’라고, 그리고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을 ‘경외주의자(aweist)’라 불렀다. 이것이 오늘에 절실한 ‘종교 아닌 종교’라는 것이다.








283Namgok Lee, 박길수 and 28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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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범

개인적인 이해로는 탈종교화라는 표현 자체에 공감하는데, 그 의미로는 그 종교의 본질을 알고 완전히 겪어 드디어 벗어나는 것과 그것을 모르는채 감정적으로나 사회적 현상으로, 일종에 종교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은 개념으로는 안타까운 현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진정한 탈종교화는 사실 그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 종교를 알만큼 알아 그야말로 졸업하는 것같은 의미여야 한다는 이해구요. 그러기에 부정적이긴 하지만 오늘의 그런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들도 그런면에서는 일종에 반면교사가 된다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곧 종교의 폐해같은 경우로 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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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욱

탈종교 사회는 괜찮은데 반종교 사회가 되면 위험할지도 ...
저는 평소 종교모임과 종교조직을 구분하는데,
전자는 아직 필요성을 긍정하는 편이고 후자는 부정하는 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종교적 모임과 종교적 조직이 다른 영향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또 일상적 대화에서 종교의 가르침, 가르침에서 파생된 교리, 교리에서 파생된 문화, 그 종교문화에서 파생된 특정 사회문화가 구분없이 너무 혼합되어 사용되는게 아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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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eop Kim

탈종교적 윤리(secular ethics)는 종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온 영역에서의 윤리성 회복을 의미한다면 A. 카이퍼의 영역주권과는 연계될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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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금선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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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n Soo Park

종교를 등에업고 자행되는 악행들,,,, 우리나라는 유래없이 1년 365일을 종교로 시작해서 종교로 끝을 맺습니다. 신년기도회~~송구영신예배, 그리고 매일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토요예배, 주일예배, 각종 성서세미나, 계절마다 부흥회,,, 종교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 사회는 우리를 “개독교”라 부릅니다. 어떻습니까?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종교입니까? 탈종교화라는 말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죠. 교회에서 종교에 파묻혀 예배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며 “주여주여” 불러보지만 이 말씀이 대답을 합니다. 진작 우리나라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자면서 남북이 만난 2018년 4월27 눈물나는(개인적으로 눈물이 핑돌음)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그 주 4월 29일 예배때 담임목사 설교에서 일언반구가 없다. 통일기도회는 열자면서 이런일에는 성도들의 관심과 애정을 그리고 소원을 함께 해야하는데... 동감은 아니더라도 공감이라도 해야하는데...
종교는 공감을 뛰어넘어 동감으로 가야하는데 공감조차 없으니 누군들 종교를 갖고 싶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탈종교화 된 서구 몇 몇 나라들이 더 따뜻하고 서로서로 돕고 아름답게 보이는데 당연히 탈종교화가 가속화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해야...”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를 갖지않는다고 종교가 없는것인가?
믿는 자, 믿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잣대가 종교의 유무로 판단한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참 이웃의 비유도 있지않은가?
탈종교화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보다 종교생활(행함)이 되어야하고 신앙이 좋아보이는 것보다 신앙생활(행함)을 함으로써 탈종교화로 진짜 예수님의 성품 본질로 돌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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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호

아쉽게도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되고말았습니다 이땅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을 하늘로 되돌려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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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 Jeong

감사합니다. 선생님 글로 Aweist, Aweism 이라는 새 단어 (나에겐) 를 만났습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숨을 쉬고, 신진대사를 포함한 모든 몸의일을 미묘하게 진행하고있는 나의 몸둥이를 내려다 보면 "신비" 하지 않을수 없지요. 선악의 구별보다는 우리 자체가 "Awesome!!! " 하다고 인지 (Awareness) 한다면....
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는게 안타까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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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Sung Lee

종교없는 삶이 제일 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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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Sung Lee

박진수! 오랜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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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ol Yu

거의 문맹이신 나의 할머님은 정규 교육을 받으신 적도 없으시고 절에도 다니시지 않으셨다.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베프시고 가난한 친척에게 도움을 주셨다.부엌뒤에 나무밑에 정화수 떠놓고 비시는것이 그분의 유일한 종교 활동이었다..그분에게는 스님도 목사도 절도 교회당도 경전도 필요치 않았다.그리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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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hee Yoon

오늘 아침에 종교와 신,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주신 양심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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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eun Park

‘경외주의자(aweist)’ 라는 말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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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종희

신존재의 유무문제보다. 신의 계시ㅡ복음에 대한 해석과 태도가 문제가되어야 할것 같습니다.샬롬
복음=Evangelism(예수 천당) 일변도에서
복음=Missio Dei(J.P.IC)로의 파라다임 전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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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기

탈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14살 중이처럼 피해의식에서 반항과 교만이 싹트는것 아닌가 사람은 자연과 순리에 순복 해야한다고 생각 합니다 오로지 주의 은혜로 잘 살았다 함이 없다면 평안이 올까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살아기자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