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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4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
윤동주


들어가는 말

반생명적인 인명경시(人命輕視)와 환경파괴(環境破壞)등이 우리 사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유지 본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나를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류영모의 생명1)체험

류영모의 일생은 전도자로 말씀 사룸이 그의 생명이다. 류영모는 하느님께 뚫린 마음과 사람에게 깊은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그의 속알은 정직이요, 그의 말씀은 진실이다. 그는 '구삼(九三)'2)을 자기의 운명으로 생각했고 생명으로 알고 열심히 살았다.

선생은 67세에 세상을 떠나기로 생각하고 그가 아끼던 김교신이 죽은 다음해 4월25일 다음날을 자기의 죽는날로 정했다. 그 이후 선생은 더욱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 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석일지 속에는 시조형식, 한시형식으로 3000수가 있고, 자신의 깊은 생각과 높은 뜻을 한글로 풀이했기 때문에 그 모습이 사뭇 독특하다.3)

류영모의 생명체험은 그의 독특한 언어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선생은 52세 되던 1월 4일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부르신지 38년만에 믿음에 드러감"이란 글을 내었다.

이것을 생명의 첫번 경험으로 계소리라고 했다.

그 후 14년간 '가온소리'가 계속되고 66세가 되는 때에 '제소리'가 시작되었다. '계소리'는 선생의 우주관이요, '가온소리'는 선생의 세계관이요, '제소리'는 선생의 인생관이다.

'계소리'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요,

'가온소리'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요,

'제소리'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할 수 있다.



천명지위성은 무극이태극이고,

솔성지위도란 일음일양지위도이며 바로 이것이 수도지위교다.

'태초부터 함께 계심'이 계소리요,

'올끈이로 생각이오니'가 가온소리요,

'온끝까지 말씀사름'이 제소리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도에 통하여 생명을 나타낼 수 있다.

한글로는 ㅁ, ㅂ, ㅍ. 이다.

땅에서 물이 올라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동화작용을 일으켜 풀이 된다. 사람은 하늘과 땅이 합쳐진 생명의 仁이다. 진리와 도가 통하여 생명이 된다.

류영모는 올끈이4)라고 해서 일일 일식을 시작했다.
일식(一食)과 명상(一坐)은 류영모 선생이 죽기까지 실천한 것이다.
인심을 줄이는 것이 일식이요 도심을 늘리는 것이 명상이다.

인심과 도심의 모순을 통일 하는 것이
유정유일 윤집궐중 즉 자중정(自中正)이다.
이것이 가온소리이다.

가온소리는 십자가의 도로서 매일 실천하는 계율(戒律)이다.
그러나 계율이라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해야 한다.

일식 일좌 역시 무위자연으로 해야 함을 선생은 말하고 있다.
이것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가온찌기 그저 제게로부터'5)이다

또한 선생님에 의하면 요한복음 17장 3절의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계소리', 그리스도를 '가온소리', 계소리와 가온소리 후에 저절로 나오는 것이 '제소리'다.

이렇듯 말씀이 생명이기에 말씀을 안먹을 수 없다.
먹는 문제는 절대지만 남녀문제는 상대요,
생각하는 것은 절대지만 가르치는 것은 상대다.
절대없이 상대 없고 상대 없이 절대 없다.
그래서 류선생님은 52세에 해혼(解婚)식을 하셨다.

선생님은 맹자의 사상(四象) "일음일양(一陰一陽), 춘하추동(春夏秋冬), 천지수화(天地水火),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성(性)이라 할 수 있는 인의예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性)은 감성(感性), 오성(悟性). 이성(理性), 영성(靈性)이다 이것을 현대적 언어로 하면 예술, 과학, 철학,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 선생은 이것을 '환빛', '펴참', '얼뜻', '숨김'이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이에따라 인(仁)의 삶을 '치키티피히'6)라고하셨다. 선생은 인간의 바탈을 꼬끼리7)로 비유하여 설명하시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숨김8)을 강조하셨는데 숨김(기체생명으로서 보는 생명)은 숨은 생명 김은 영원하여 영원한 생명도 되고, 숨은 은밀 김은 은밀히 숨어 계시는 없이계시는 님도 된다. 또한 숨김을 독수리9)에 비유하여 설명하시기도 한다.

독수리의 몸은 뼈에 바람이 들어가 허공과 하나되어 며칠이라도 떠 있을 수 있는 것을 선생은 빈탕10)과 하나가 되어서 노닐게 된다고 보았다.


2. 생명의 의미

류영모 선생은 생명을 無常生 非常命 生必無常이요, 命是非常이다. 라고 하셨다. 언제나 삶이 덧없어도 목숨 같이만 이라고 하셨다.

목숨은 지성불식(至誠不息)이다.
자면서도 숨을 쉬고 깨면서도 숨을 쉰다.
마찬가지로 말숨은 살아서도 말숨 쉬고 죽어서도 말숨 쉰다.
이 말숨은 생사를 초월하고 유·무의식도 또한 초월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살다 죽는 것은 멸망이지 생명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은 백년을 산다고 해도 3만6천일 숨은 9억번을 쉬고 끝이난다. 사람이 숨을 잘쉬는 것 호흡을 잘 하는 것이 생명이다.

이 호흡은 마치 문처럼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으로 문은 잘 맞고 돌쩌귀는 잘 돌아야 한다. 여기서 잘 돌아야 하는 것을 중(中)이라 했고, 잘 맞는 것을 정(正)이라 했다.

이런 생명있는 사람은 나고 죽어가며 문화로 꽃피우고 있다.



류영모는 중정(中正)을 팽이에 비유한다.

중심을 잘 잡아 돌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쓰러져 무너지고 만다.

언제까지나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상처중(知常處中)하기 위해서는 채찍을 쳐서 돌려야 한다. 하느님의 채찍이 바로 도(道)라고 하며, 자신이 스스로 바로잡는 것은 수신(修身)이며, 자치(自治)이고, 자유(自由)이다.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지상처중(知常處中)이다. 지상처중은 주인이요 언제나 세상을 이기면 그곳이 천국이다.

생명은 자기를 알고 자기를 이기는 것이 인간생명이다.

또한 생명은 지혜와 사랑과 정직과 진실이다.

생명은 무비(無非)이다. 무는 하늘처럼 큰 것이요, 비는 땅처럼 강한 것이다. 무는 사랑이요, 비는 지혜이다. 정직은 의(義)요, 진실은 인(仁)이다. 여기서 진실은 생(生)이요, 정직은 사(死)이다.



류영모선생의 생명(生命)이란 한시가 있어 소개한다.



생명(生命)



天命是性命 천명은 내 속에 들어와 성명이 되고
革命反正命 혁명은 언제나 정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요
知命自立命 지명은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고
使命必復命 사명은 하느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와서 땅을 이기고 정신을 일깨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생명이다.11)


3. 생명의 내용

류영모 선생은 숨을 우선 목숨과 말숨으로 나눈다.

그러나 목숨과 말숨에는 얼숨12)이 더해진다.

목숨은 기(氣)가 통하고, 말숨은 이(理)가 통하고, 얼숨은 신(神)이 통한다. 인간의 목적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인데 하루가 끝나면 잠자는 숨이요, 인생이 끝나면 d안식의 숨이며, 세상이 끝나면 믿음의 숨이다. 이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내가 바라는 숨은 영원한 나라의 영원한 숨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선생은 매일같이 냉수마찰과 심호흡을 하고 맨손체조와 몸 전체를 마찰한다.

이것을 통해서 선생은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꽉 차있는 지강지대(至剛至大)의 기체가 되어야 언제나 쉬지 않고 생각의 숨을 쉴 수가 있다고 하셨다. 즉 육체를 강하게 하는 목숨이 건강해야 생각의 숨인 이치의 숨이 말숨을 깨치게 할 것이다.



말숨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말숨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성령의 역사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쉬지 않고 생각해야

성(誠)에 도달 할 수 있다.

성에 도달하여 깨어나면 그 때부터 얼숨을 쉬게 된다.

얼숨을 도(道)라고 하고 신통(神通)이라고 하고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하고 일음일양이라고 한다.



류선생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일식, 일언, 일좌, 일인'이었다. 이것이 얼숨의 삶이었으며, 얼숨을 통해서 하루살이를 살았다.

어제도 아닌 내일도 아닌 오늘 하루를 살았다.



하루살이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다 라고 하셨다.

인생이 진짜로 깨어나는 것은 죽음뿐이다.

죽음은 '주구음', 주(主)님과 그리스도를 움켜잡는 일이다.

죽음의 과정을 숫자로 표현하였다. "10, 20, 30, 40, 50, 60, 70", "열려 슴을 설어 마라 쉬여 이여 쉬여 이루리라"라고 말하셨다.



그러므로 하늘 숨을 쉬고 천명의 숨을 쉬는 한말씀이 숨김이요 영원한 생명이다.



4. 생명의 보기

류영모 선생은 한글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24자만 쓰고있는 지금의 한글을 28자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은 변증법적 발전으로 된 글자로 'ㅁ ㅂ ㅍ' '물, 불, 풀', 'ㅅ ㅈ ㅊ' '삶, 잠, 참'에 지금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   ㅎ ㅎ'등을 다시 변증법적 구조에 맞추어 넣어야 한다고 한다.한글의 근본은 'ㅡ, ㅣ, •'로 'ㅡ'는 세상 'ㅣ'는 세상을 꿰뚫고 곧장 올라가는 정직 고디 신(神), '?'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평등과 독립과 박애의 상징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의 자음(子音)을 하느님의 한나신 아들 독생자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보혈의 꽃피를 흘리는 구원의 메시지로 보았다.



기니 그리스도께서
디리미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
비시이지 보이지 않느냐
치 인류를 치켜올리고
티 인류의 좁은 속을 티워 깨치고
피 진리의 꽃 보혈의 꽃을 피우고
히 무한한 하늘나라에까지 끌어 올린다.

모음(母音)으로는 우주의 어머니이신 한우님이 인류를 부르는 소리라 하였다.

ㅏ ㅑ 아해드아
ㅓ ㅕ 어서
ㅗ ㅛ 와요
ㅜ ㅠ 우흐로
ㅡ ㅣ 세상을 꿰뚫고 곧이 곧장
• 아버지께로 오라

이와같은 하느님 아버지 마음을 그린 모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음과 모음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계소리와 제소리로 합쳐진 한글은 그대로 바른 소리(正音)이요

가온소리(中音)이다. 중정(中正)이 생명의 핵심이요 한글은 생명의 글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또한 한글 속에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이 있다고 생각했다.13) 그래서 한민족의 사명은 한글을 세계화 하는 일이다.

한글 속에 숨어있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거룩한 빛을 찾아내어 인류를 살리는 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사명이며, 우리 한글의 구조 속에 인류를 살릴 수 있는 빛과 힘이 있기에 우리의 한글은 산 글이요 영원한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말씀은 존재의 집이다. 한글은 존재의 집이요 진리의 빛이다.



나가는 말

이상으로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을 살펴보았다. 선생의 큰 뜻을 우리가 헤아려 알기는 너무나도 부족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는 그의 생명에 대한 생각들은 너무나도 각인이 되어 그의 생각을 좇아갈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것이고 영원한 생명은 포괄적인 숨쉼이며, 숨쉼을 잘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생명사상을 우리의 한글과 연과지어 생각했던 선생의 사상은 너무나도 놀랍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난해한 그의 글들을 이해하기란 역시 버거웠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 어느정도 이해 가능한 글들로 나온 것이 천만 다행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생명이든지 그 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존을 해야할 의무와 책임을 가진 생명체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뜻을 안 선생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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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성서에서 생명(生命, vita)에 해당하는 개념은 히브리어 '하임( )'과 그리스어 '조에( )'이다. 구약의 하임은 다양하게 작용하는 생명력의 정수로서 신체적이고 기관적 생명을 뜻한다. 신약성서의 조에는 본래 동물과 인간, 그리고 식물등 유기체의 신체적 생동성을 뜻한다.심상태, {생명연구(물리적 환경과 생명에 대한 신학적 고찰)}, (생명문화총서2집), 생명문화연구소, 1994, p.19.
그렇지만 생명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위해서는 각주12번의 것과 같이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2) 구삼이란 {주역}, 건괘, 93의 종일건건(終日乾乾)이다.
구삼에 말하기를 군자는 종일 일하고 저녁에는 잔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배우고 가르치는 것인데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바로잡자는 것이고 가르친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이루자는 것이다. 가르칠 때는 고만하지 말고 배울 때는 욕심 내지 말라. 배우고 가르치고 때가 오면 쉬고 자면 아무 문제가 없다. 배운다는 것은 생각을 바로잡자는 것이고, 가르친다는 것은 말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나를 바로잡아도 남을 바로 못 잡으면 아무 쓸데가 없다. 배우는 것은 나를 바로잡는 것이요 가르치는 것은 남을 바로잡는 것이다. 종일 바쁘고 저녁에는 쉰다. 가르칠 때 교만하지 말고 배울 때 욕심내지 말고 성인을 닮아 가고 하느님 나라를 세워간다. 이것이 구삼 군자 종일 건건이라는 것이다.
김흥호, {다석일지공부4}, (김흥호전집 류영모 명상록 풀이), 2001. pp.377-378

3) ㅡ l ?   ? l o

    예?예?예, 예: 옛! 가 까 와 가 까 오 니!    
    예: 옛 날! 계: 갓 날! 내 온 날! 제 온 날!    
    계 바 로 졔 계 를 가 온 인 가 ?? 노 라.
으이아 가온 아이으 으는 세상, 이는 세상을 뚫고 솟아나와, 아는 아버지께 간다.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 품 가운데 안기면 아이, 내가 한없이 평안하고 만족스럽다. 가오가온, 가고가라, 예예예, 여기를 예어 나가 예옛, 예를 정말 빠져나가라. 그러면 하늘나라에 가까워, 가깝게 오니 그곳이 가온이요 하느님 마음속이다. 가고 가고 가서 예, 옛날 여기를 예어 빠져나간 순간이 하느님 아버지 계 갓날이요, 내가 온전해진 날이요 제가 올라간 날이다. 가온가온, 가고 가라. 아바계가 바로 계계다. 아버지 계신 데가 아들 있는 데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 가온인가 하노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 가온이요 중(中)이다.
김흥호, {다석일지공부5}, (김흥호전집 류영모 명상록 풀이), 2001. pp.421-422.

4) 이끗

이끗이 이끗이 나는 영원한 생명인 이의 영원한 생명의 한끝이다.
올 끈이로 올(理) 끈(斷) 이(續)로 이치를 생각하고 단행하고
온 끝에까지 온세께의 끝까지
말씀 사르므로 말씀을 전함으로 사명을 삼으니,
생각이오니 생각하는 나는
맨 첨부터 태초부터 나는
함께 계심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나라.
몬있은 끗으로 物存在中心 물질세계는 공간적이요 가운데 중심이 있고
숨있는 홓끗으로 命存在上元 정신세계는 시간적이요 처음에 중심이 있다. 처음이 꼭대기인가 한다.
말씀도 영원하고 생각도 영원하고 하느님도 영원하고 나도 영원하다.

5) 가온찌기

(講) 心線路
接境이오 一線이다.
前進이 一路다.
直上 一點心

 찌기 가온찌기는 진리의 자각이다.
잇다감 생각 모든 생각이 다 가고 있다.
그저 도(道)
나 므름 업시 물음 없이
제게로브터 도(道)로 부터
김흥호, {다석일지공부1}, (김흥호전집 류영모 명상록 풀이), 2001. p.174.

6) '치키티피히'란 치고 키우고 티우고 피우고 문한해져서 빈탕한데를 체우는 것으로 즉 가르치는 것이다.

7) 코기리

사람이란 코끼리 보내실제
새끼코기리 세 마리 딸리윗스니
1. 머리통 코기리는
참을 차져 오는 이를 태워 가지고 오라시고
2. 염통 코기리는
잘을 차져 오는 이를 태워가지고 오라시고
3. 눈코배기 코기리는
아름다움을 차져 오는 이를 태워가지고 오라시고
그럼 어미 코끼리는 뭘 실고 오라신가
숨기리 살길 차자 오는 이를 태워 오라셧지
그러믄 우리들을 다 다려 간다는 말슴인가
  참 잘 살 아름답게 기리길 길로 말슴
사람의 본체는 무엇일까.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람의 코기리(꼬끼리, 象)는 무엇일까. 사람은 큰 꼬기리와 세 마리의 작은 코기리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는 진리, 염통은 도덕, 눈 코는 예술, 그리고 어미는 영원한 생명 종교다.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1}, (김흥호전집 류영모 명상록풀이), 2001. pp.404-405.

8) "숨ㅅ김을 받고 얼뜻을 맡고  은 사람아 제 바탈을 바로 타고  다면 환빛을  에서만 보며 펴참을 바람에서나 보고 잇스랴." "하늘은 너의 가멸! 한우님은 우리 아 지! 한늘을 희어 펴서 얼뜻을 채려 듦이 참 아닐랴. 참 챔으로 참을 볼 것 아니랴. 누리를 거짓이라 말나, 네가 참을 찾지 안는 것이 누리를 거짓되게  뿐이니라." 가슴에 숨김을 받고 사람은 배에 얼뜻을 맡고 가는 것이 사람이다. 숨김이라는 생명과 얼뜻이라는 사명을 가온찍이 합일한 것이 사람이다. 생명사명의 합일이 천명이다. 천명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본성, 지성,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바로 타고 머리로 깊이 생각하며 간다면 천명과 성이 하나가 될 수 있다. 태양과 씨알이 하나가 되듯 바탈이 터서 나무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생명의 잎과 바탈의 꽃과 얼뜻의 열매를 열리게 할 수 있다. 싹이 터서 가온찍이 나무가 된다면 환빛을 해에서만 받고 펴참을 바람에서만 받겠느냐. 환빛을 해에서 받고 꽃을 피우고 펴참을 바람에서 받고 잎을 무성하게 하겠느냐. 이하 줄임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1}, (김흥호전집 류영모 명상록풀이), 2001. pp.404-405.

9) 독수리는 무서운 눈빛으로 전체를 뚫고 감시하면서 땅을 기는 토끼나 거북이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이 독수리의 눈이다. 독수리의 발은 아무리 험한 기암괴석도 움켜잡으념 놓치지 않는다. 날개는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몸은 뼈 속에 바람이 들어 허공과 하나가 되어 며칠이라도 떠 있으 수가 잇다. 몸은 성(性), 눈은 진(眞), 발은 선(善), 날개는 미(美)다. 진은 때어남이요, 선은 일어섬이고, 미는 날아감이다. 통일과 독립과 자유를 영체의 작용으로 본 것이다.

10) "빈탕(空) 한 (與) 맞혀(享) 노리(富)"
날 수 없는 불닫힌 몸둥이 매달린 나 얼이 묻언 꿈틀더니
맑혀 말 마음만큼 맞난 내 날라 나 비롯 븬탕 계에 한  졔를 보알다.
븬탕 마음 한 나 뵈압 옿로 올나 내 깃븐
此身享終臥, 將予享遙遊
身 世, 予 享
이름 누리, 올나 노리

11) 김흥호, {다석일지공부4}, (김흥호전집 류영모 명상록풀이), 2001. p.161.

12) 얼숨은 성령으로 말할 수 있다. 성령은 구약성서의 루하( )란 단어로 희랍어로는 프뉴마( ) 라틴어로(spiritus) 게르만어로(Geist)로 표현된다. 그러나 희랍어나 라틴어나 영어나 독일어가 말하는 영은 물질과 영이 대립하는 비물질적인 것으로 나타낸다. 하지만 히브리어의 루하( )는 그 의미가 너무도 다양하지만 인간과 동물 속에 있는 생영의 숨과 생명의 힘을 뜻한다. 또한 '하느님의 현존의 사건'으로 몰트만은 이해한다.
J. 몰트만, {생명의 영}, 김균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2. pp.62-64. 참조

13) 께케 깨캐

깨오 캐오 께올케 올나갈이들 들을 말슴
이제 저마닥 나갈 말슴 밖에야 뭘 찾으리
한웋님 우리 머리웋 께케깨캐 깰이 웋
아 어 오 우
ㅏ ㅓ ㅗ ㅜ ㅡ ㅣ ? 우리   나갈 말슴
께케깨캐 우리  한웋님께 올케 나감
깨여서 캐여나가만 맛맞맟임 잇 리
ㄱ은 하늘을 그리워한다는 뜻. 께는 하느님께, 올케는 올바로, 깨 깨여서, 캐 진리를 캐내여, 깰이 위 위로 깨어나는 것이 올라가는 길이다. ㄱ이 ㅋ이 되고, 깨가 캐가되고, 그것만 알아도 ㄱ 한 자만 알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김흥호, {다석일지공부2}, (김흥호전집 류영모 명상록풀이), 2001. pp.25-26.

2019/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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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최근 수정 시각: 2019-09-05 13:53:38





분류

기독교 신자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을 말한다.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인데, 함석헌 선생의 글에서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사실상은 신학교 언저리에서 떠돌던 언어유희 중 하나이다.

“제가 떠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거기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남아 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관성으로 남아 있는 건가요?” (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밖 신앙> 중에서)






1. 개념2. 현황3. 참고문헌

1. 개념[편집]

개신교에서는 관례적으로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다는 관용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면 기독교 신앙을 떠나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이 개념은 신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의 카톨릭 신학과 더 가까운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개개인의 신앙 양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신교 신학과는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개신교도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구원의 중요한 통로 중 하나로 여기지만, 교회만이 구원의 통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교회에 안나가는 기독교인'이 이론적으로는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한국 교회의 부패가 심각해져가면서 '신앙좋은' 이들이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뛰쳐나오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이들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고, 나름대로 신앙적 활동도 하지만 교회에는 소속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 개혁이나 새로운 신앙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서 신학교 언저리에서 떠돌던 '가나안 성도'라는 표현이 해학적으로 등장했고, 복음주의 활동가 양희송종교사회학자 정재영이 본격적으로 담론화 하면서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현상으로 부각 되었다.



일각에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가나안 성도'라는 고상한 표현으로 옹호해준다고 해서 표현 자체를 비난한다. 물론 그런 이들도 스스로를 가나안 성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양희송이나 정재영의 책을 보면 알겠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확고한 기독교적 자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나안 성도'라고 한다. 가톨릭의 냉담자와 같은 개념으로 여겨지는 경향도 있지만, 냉담자와는 확연히 분리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해외에서는 이미 'Believing without Belonging (소속없는 신앙)' 혹은 'Unchurched Christian (교회 없는 크리스천)' 같은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역시 유럽(특히 북유럽)의 세속화된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를 안나가면서도 기독교적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1]과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하고, 북미에서 많이 나타난다.



2. 현황[편집]



예전에는 한목협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전체 기독교인의 10%정도를 가나안 성도로 추산했다.[2] (그만큼 안되지만) 대충 한국 기독교인을 천만이라 보면 백만정도가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었다. 이 숫자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오히려 최근 여러 조사 결과에서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7년 최신의 통계에 따르면 청년층의 28%가 가나안 성도라는 통계도 있다.[3]. [4]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예배모임도 있고[5], 가나안 성도들끼리 교회를 만든 경우도 있다[6]. 근데 교회를 나와 새로운 교회로가면 가나안가나교인인가?



일부 기독교인은 '교회 모임은 거부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상 예배만 드리는' 케이스도 있는데, 기존 모임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다든가 정신과 등의 이유로 사람 만나기가 부담스럽다거나 주일에도 출근해야 한다는 이유라면 모르겠지만, 그냥 본인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라면 차라리 교회를 안 가는 것보다 뭐가 나을 게 있나 싶다...



3. 참고문헌[편집]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포이에마, 2014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재영 지음, IVP, 2015

<처치리스>, 조지 바나, 데이비드 키네만 지음, 터치북스, 2015





[1] 한국사람이 일상 생할에서 유교문화와 완전히 분리될수 없는 것과 같다.

[2] http://christian.nocutnews.co.kr/news/1027411

[3]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4061

[4] 가톨릭의 냉담자는 연 2차례의 판공성사를 받지 않으면 교적상으로 따로 관리되므로 그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만, 개신교는 원래 신도의 개념이 교회에 속박된 존재가 아니므로 그 숫자가 왔다갔다 한다.

[5] http://ichungeoram.com/10139[6]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688

2019/08/27

[김영진의 영화비평] <문라이트>가 잡아낸 분위기, 그 영화적 접근의 힘

[김영진의 영화비평] <문라이트>가 잡아낸 분위기, 그 영화적 접근의 힘
김영진(영화평론가) 2017-03-09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는 주인공 샤이론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모습을 세 단락으로 나눠 담고 있지만 별다른 사건이 없다. 1, 2부에서 샤이론은 동성애자라고 주변의 핍박을 받는다. 왕따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단 린치를 당한다. 3부에서 샤이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몸이 두배로 늘어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성인 남자이자 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소두목이 되어 있다. 샤이론의 주변 삶의 관계도 단출하다. 세 단락에 계속 나오는 인물은 마약 중독자인 샤이론의 엄마와 어릴 적부터 샤이론의 친구인 케빈뿐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쿠바 출신 남자 후안이 나오지만 마약상인 그는 2부에서 죽고 없다. 후안의 여자친구인 테레사는 1부에 이어 2부에도 나오지만 거의 엄마처럼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천사 같은 캐릭터인데도 그것 말고 별다른 역할이 없다.
잉여적 시선이 만든 자체적 리듬

이것은 요약한 스토리가 아니라 이 영화 내용의 거의 전부이다. 이 스토리로부터 가지를 쳐나가는 사건의 전개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110분이며 별로 길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자잘한 사건과 사건의 연결 사이에 영화의 주된 시간을 채우는 것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후안은 자기가 관리하는 지역에 차를 운전하고 와서 내린다. 후안의 동선을 카메라가 좇아가면 후안 밑에서 일하는 젊은이가 약을 팔 것을 애원하는 한 중독자를 뿌리치는 상황을 두 차례 360도 회전하며 보여주고 그다음엔 후안이 젊은이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는 모습을 또다시 360도로 회전하며 보여준다. 숏으로 나누지 않아 과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장면 테이크는 한산한 거리의 병든 모습을, 나른한 외형적 공기를, 적절한 격동을 실어 담는다. 장면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숏을 나눠 찍은 것보다는 당연히 긴 호흡이다.

이 영화는 이런 식의 잉여로 자체적 리듬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음미해볼 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카메라 자체가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의 숏을 곧잘 연출하는데도 그게 과잉으로 다가오지 않고 독자적인 스타일로 보인다. 1부에서 소년 샤이론이 다른 아이들과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기 직전에 카메라는 작전 지시라도 듣고 있는 양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이들을 패닝으로 죽 훑는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카메라를 본 것뿐이다. 1부의 또 다른 장면에서 아이들이 화장실에 모여 서로의 성기 크기를 확인하고 있을 때 멋도 모르고 들어온 샤이론은 그 자리에 끼게 되는데 이때도 카메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축구 장면에서처럼 패닝으로 훑는다. 샤이론이 다른 아이들과 친구가 된 것일까, 라고 잠시 추측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느끼게 하는데 효과는 정지 화면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물 흐르듯 시간도 흐른다.

이것이 과시적 허영으로 추락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그냥 맥락 없이 보면 천진한 소년들의 모습처럼 보일 화면이 앞뒤로 배치된 화면들 속에서 샤이론의 소외를 묘사하고 있어 일종의 대비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샤이론이 처음 화면에 소개될 때 샤이론은 자신을 호모라고 놀리며 쫓아오는 아이들을 피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집에서도 샤이론은 환영받지 못한다. 1부 끝에서 약에 취한 샤이론의 엄마가 샤이론에게 쳐다보지 말라고 표독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에 취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또한 자기 삶의 짐이 되는 샤이론이 거추장스러워서 한 말이지만 샤이론에게는 이게 트라우마다. 3부에서 어른이 된 샤이론은 꿈에서 어린 시절의 이 장면을 보며 악몽에서 깨어난다. 사건의 전개와는 별개로 이렇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들은 첫 장면의 한산한 거리 풍경처럼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표면들의 공허를 지적한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이 영화에서 담고 있는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 폭력의 잔혹함에 대해 많은 것을 함축하기도 한다. 사건을 복잡하게 전개시키는 대신 감독은 이런 장치들을 과하지 않게 반복하고 그로부터 어떤 간단하지 않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반복을 포함해 감독은 때로 평범한 장면에서 꽤 미묘한 뉘앙스를 끌어내는데 그렇다고 그걸 나중에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2부에서 청소년이 된 샤이론은 약을 사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엄마로부터 그날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듣고 방황하다가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의 집에 간다. 테레사는 샤이론을 반갑게 맞이하며 ‘여긴 사랑과 자부심밖에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샤이론이 잠자리에 들려 하자 테레사는 방으로 들어와 침구 정리하는 걸 능숙하게 도와준다. 테레사는 후안이 처음 샤이론을 데려왔을 때부터 별명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고 자식처럼 샤이론을 대해주던 여자였다. 이 장면에서 샤이론은 엄마 폴라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테레사에게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자식의 잠자리를 챙겨주는 엄마의 모습 같은 것, 동시에 이미 육체적으로는 성인이 다 된 샤이론에게 사랑과 자부심을 강조하는 테레사가 잠자리를 챙겨주는 건 다 늦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은 놀라운 후속 장면으로 이어진다. 누워서 자고 있는 샤이론의 몸을 카메라가 관능적으로 훑으며 부감으로 지나치는 장면 다음엔, 그 이동의 에너지를 이어서 샤이론이 테레사의 집 내부를 돌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샤이론이 바깥으로 나오면 샤이론의 친구 케빈이 여자친구와 성교를 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꿈에서 깨어난 샤이론이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이 장면은 끝나는데 잠재적인 성적 에너지를 꿈속에서 폭발시키는 것은 근친상간의 긴장을 친구의 성교로 끌어내는 방식을 통해서다. 이게 놀라운 것은 친구 케빈이 나중에서야 양성애자라는 게 밝혀지고 샤이론이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케빈을 연모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부에서 동일한 장치로, 성인이 된 샤이론의 몸을 카메라가 부감으로 훑을 때 샤이론의 몸은 어렸을 적의 샤이론의 몸이 아니라 유사 아버지였던 후안과 비슷한 체격을 갖추고 있다. 이 장면 다음에 샤이론이 전화를 받으면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케빈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린다. 2부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의 반복이다. 2부에서 잠재적 욕망이 해변에서의 짧은 사정으로 종결되는 남자들끼리의 동성애로 연결되었다면 3부에서는 또 다른 귀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케빈의 전화를 받은 다음날 샤이론은 몽정을 한다).
뒷모습이 보여주는 것

<문라이트>의 성취를 잘 보여주는 것은 이렇듯 별다른 극적 문맥이 없는 장면들에서 세밀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끄집어내어 그걸 적당한 리듬으로 반복하면서 시간을 능란하게 연장시키는 장면들에 있다. 2부에서 첫 경험을 치른 샤이론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약기운이 떨어진 샤이론의 엄마 폴라가 샤이론을 반갑게 맞이하는데, 늦게라도 들어오지 그랬느냐고 샤이론을 채근하면서 폴라가 샤이론을 집으로 데려갈 때,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핸드헬드로 좇는다. 화면에는 야외의 소음이 크게 들린다. 인물의 걷는 모습을 앞이나 옆이 아닌 뒤에서 잡아내는 것은 이 영화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패턴이다. 일단, 인물이 걷는 걸 보여주는 건 외형적 에너지가 있다. 그걸 뒤에서 보여준다면 인물의 표정 대신에 인물의 동작으로 모든 걸 전하겠다는 뜻이다. 인물의 걷는 뒷모습은 표정에 인물의 감정을 가두지 않는다. 이 영화에선 이 장치가 매우 효과적으로 쓰인다. 학교에서 집단 린치를 당한 다음날 샤이론이 학교에 등교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중대한 결심을 드러내는 듯 보이는 그의 걸음걸이가 화면에 자연스레 강조되게 따라잡는다. 관객은 샤이론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그의 걸음걸이로 미루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다. 이 장면의 끝에서 샤이론은 자신을 린치하도록 지휘한 같은 반 급우를 책상으로 내려치는데 그의 걷는 모습을 좇은 선행 숏들의 긴장감으로 인해 이 숏은 상당한 폭발력을 갖는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대화 장면을 담을 때조차 뒷모습을 택한다. 샤이론이 친구 케빈과 동성애 첫 경험을 하는 2부의 해변가 장면에서 카메라는 부감 앵글을 취하다가 샤이론의 등 뒤로 케빈의 말하는 얼굴을 보여준다. 두 소년은 다소 문학적이면서 감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평소의 거친 언행과는 별개로 소년들의 감성을 수줍게 드러내면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을 바람에 빗대 얘기하는 이 장면은 아름답다. 제목이 함축하는 질감을 화면으로 구현하면서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주변으로부터 거부받을까봐 두려워하는 욕망이 감상적인 대화의 실타래를 통해 스르륵 느닷없이 터져나오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감독은 전형적인 숏/역숏의 패턴 대신 대각선으로 축을 가르고 두 소년을 보여주는 방식을 썼다. 이것은 청소년기의 거친 언행에 숨겨진 마음을 살그머니 들춰보기 위해 다가가는 듯 신중하게 느껴지는 접근이다. 상스런 말로 시작된 두 소년의 대화가 ‘바람 느낌 너무 좋다…. 모든 사람이 그걸 느끼고 싶어 해. 모든 게 그냥 고요해지지. 들리는 건 그냥 심장박동뿐이겠지…. 너 울고 있어?’로 이어지는 가운데 화면은 같은 사이즈와 앵글로 붙이지 않은 그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조응하는 순간을 잡아낸다.

이 영화에서의 인물들의 뒷모습을 잡은 장면들은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이들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 강조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예의와 같은 것으로 본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관객도 이 영화가 뒷모습을 잡는 패턴에 익숙해 있고 이런 장면들에 이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보고 싶은 인물의 표정을 보여줄 것이란 안도감이 든다. 특히 3부의 식당 장면에서는 감독의 신중하지만 정확한 화면 크기를 결정하는 감각이 돋보인다. 케빈이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에 샤이론이 들어와서 앉아 있다가 자신을 알아본 케빈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순간, 감독은 이 두 사람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번갈아 보여준다. 케빈이 샤이론을 위해 특별식을 만들고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의 시작이 지연되는 상황들 속에서, 케빈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고 샤이론이 그걸 기다리는 일상적이지만 극적인 설정 속에서, 샤이론의 얼굴 클로즈업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데도 시시각각 많은 변화를 담는다. 샤이론의 유사 아버지였던 후안과 마찬가지로 케빈도 쿠바인이었다는 게 상기되는 말이 오간 후(이제 후안 대신 샤이론은 케빈을 인생의 파트너로 맞이할 것인가), 케빈은 사만사라는 여인과 결혼해 아이가 있다는 말을 하고 샤이론은 후안처럼 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범죄자 두목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교환한다. 두 사람은 각자 처지에 따른 이유로 상대방에게 실망한다. 케빈이 잠시 주방으로 간 사이에 화면은 식당의 출입문을 보여주고 카메라는 그 문을 향해 다가간다. 이어지는 샤이론의 클로즈업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려준다. 샤이론은 케빈을 찾아온 걸 후회하고 있다.

샤이론이 전화한 이유가 뭐냐고 묻자 케빈은 일어나서 주크박스로 간다. 샤이론의 클로즈업에서 카메라가 패닝하면 주크박스가 보이고 더 이동하면 케빈이 노래를 튼다. 컷하지 않고 움직임으로 처리한 영화의 리듬 패턴이 이 장면에서 극적으로 상승한다.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온 이 영화만의 절묘한 잉여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케빈의 연가와도 같다. (안녕하세요, 낯선 분. 당신이 돌아오니 너무 좋네요….) 그전까지 관객인 우리는 케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케빈이 샤이론에게 전화했던 앞선 장면에서 관객은 케빈이 전화를 끊은 후 식당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며 깊은 상념에 빠진 모습을 본다. 케빈은 심지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마치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는 듯이 말이다. 케빈은 영화에서 게이의 성징을 드러낸 적이 없다. 해변에서 느닷없이 나눈 샤이론과의 사랑이 충동이었는지 그의 본성이었는지 알 수 없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던 케빈의 정체에 대한 이런 괄호 치기 전략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앞의 숏으로 인해 증폭되지만 활시위를 크게 당겼다가 놓은 것처럼 대단원의 섬세한 클로즈업 배치를 통해 미적거렸던 의문들은 상쇄된다.

<문라이트>는 영화가 사건을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잡아내는 것, 때로는 표정을 잡는 것이 아니라 동작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는 영화적 접근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20세기의 모던 시네마에서 과하게 추구되었으나 이제는 속도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지고 있던 호흡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관련영화
문라이트Moonlight(2016)

2019/07/31

Hojae Lee


Hojae Lee
10 hrs ·
트라우마를 극복한 '위대한 혼'만이 새 문명을 노래한다.

1. 우리는 이틀에 걸쳐 ‘구원’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가지고 페북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물음과 답변을 했다.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이지만 용감한 많은 분들이 자신의 ‘구원관’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해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구원관’이라 표현하면 혹 그 간단한 늘 생각하던 바를 적은 것이라고 과소평가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분의 ‘구원관’이다. 유명한 신학자의 ‘구원관’은 책에 적혀 있어, 편집과정을 거쳐 세련되게 정리된 것이지만, 이 분들의 ‘구원관’은 일상생활의 날 것을 그대로 공개한 것이기에 거칠지만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이미 아는 페북친구들이 혹 있다. 내가 쓴 글보다는 페북친구들의 댓글을 열심히 읽으며 맘에 드는 것에 일일이 ‘좋아요’ ‘최고요’를 구별해서 누르고 있다. 이미 이 분은 인생의 정수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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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이찬수, Lee Woosang and 8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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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ki Lee
Soonki Lee 명쾌하고 시원합니다. 박수 보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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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김태진 이런 좋은 그림을 그린게 하필이면 이응노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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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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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eum Lee
Doheum Lee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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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Hojae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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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김혜경 긴글 잘 읽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날뻔했어요 언뜻 신본주의이신듯하여 댓글 몇번 올리고 조아요 눌렸는데 저와는 신앙관이 맞지않는듯합니다 사람들에게 의견과 생각을 묻고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시는 수단이 굉장히 탁월하십니다 하마터면 저도 넘어갈뻔했어요 혹시 무신론자는 아니신지 묻고싶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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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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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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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Yesterday at 08:40 ·
빛나는 하루!

어제에 이어 오늘도 '구원'에 대한 댓글 토론을 합니다. 새벽녁까지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제 실수로 일부 토론내용이 삭제되었는데 양해바랍니다. ( * '구원' 이라는 종교적 용어는 개념정리가 되어야 함)

[제2탄] 현장 목소리를 듣고 페북운영에 참고하겠습니다.

1.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가진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구원(제)'은 무엇을 말하는 지요?
2. 혹은 신앙동기가 무엇인가로 대체해 댓글 주셔도 좋습니다.
3. 혹은 대속론代贖論(서구신학), 자속론自贖論(유영모, 함석헌), 대속적 자속론(성경의 맥락으로는 이게 맞지 않나요?)

누구든지 자유로운 의견을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 댓글에는 서로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토론하시기를 권장합니다.

참고] 2015년 한국조직신학회가 기획발간한 '구원론' 목차

1. 구원론의 본질과 다양성 | 배경식
2.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 | 정홍열
3. 안셀름의 만족설 이해 | 황덕형
4. 루터(M. Luther)의 객관적 속죄론과 과정 속에 있는 구원 | 김재진
5. 깔뱅의 구원론 | 최윤배
6. 존 웨슬리의 구원론 | 이찬석
7. 슐라이어마허의 구원론 | 심광섭
8. 바르트의 구원론 | 황돈형
9.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구원론 | 신옥수
10. 판넨베르크의 구원론 | 이신건
11. 생태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본 구원론 | 정미현
12. 과학신학의 구원론 | 현우식
13. 남미 해방신학의 구원론 | 서창원
14. 한국신학과 통전적 구원론 | 허호익

48Sunghwan Jo and 4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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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사봉석 이무더위에 대단한 열정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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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사봉석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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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Hojae Lee 교회에서 구원을 받으셨다면 일상생활에서 바울과 같은 고통과 고민 은 없으신가요? 아직도 고통과 번민이 있다면 구원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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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저는 삼대째 모태신앙인으로 육십이 넘도록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속 마음에는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기 위한 내 의가 앞서 있었죠
그러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믿음, 구원, 성령충만등 이야기로만 주고 받고 기도하지 실제적 체험을 하지 못해 제일 걱정되는 것이 전도해서 사람을 데려 오느 것이었습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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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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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Hwan  Jo
Seong Hwan Jo 구원..?? 누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하는 것이 아닌가요..?? 사람들은 착각을 하지요. 누군가 내 잘못을 용서해 줬다고 생각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내 마음이 그렇게 단지 생각할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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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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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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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9 July at 17:21 ·
[제2탄] 현장 목소리를 듣고 페북운영에 참고하겠습니다.
* 원래 설문지를 설계하려면 다양한 질문을 분류하여야 하는데 페북 특성상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점 양해바랍니다. 다른 신앙동기가 있다면 적어주셔도 좋습니다.

1.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가진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구원(제)'은 무엇을 말하는 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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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ho Jang
Jinho Jang 인간의 본연을 회복해 가는 총체적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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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하늘 선생님 몸글의 의도를 나름 감안하여, 제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영리가 지향하는 것과 같습니다만, 여덟 글자로 말씀드리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말씀드리면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와 내가 범한 죄로 인하여 진노의 자식이오,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을 믿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이 땅에서 천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어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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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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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이선민 내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며 주님 때문에 내 맘대로만 살지 못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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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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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Ok
Daniel Ok 구원은 인간 본연으로 돌아감 아닐까요 ? 본연의 존재 목적
마치 새 제품이 사용되다가 다시 전부 분해 소제해서 만들어지듯이...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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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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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July at 08:36 ·
이메일 :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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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9 July at 06:23 ·
[근본주의적 맹신(盲信), 현실주의적 과신(過信) , 혁신주의적 정신(正信)]

1. 근본주의와 근본주의자는 어느 종파종교에도 있다. 또한 현실주의와 현실주의자도 어느 종파종교에도 있다. 그리고 늘 혁신주의와 혁신주의자도 있다. 근본주의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형태로 드러나며, 현실주의는 타협적이며 세속영합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혁신주의는 포월적이며 자기희생적으로 나타난다. 근본주의는 조직의 윗자리에 있지만 썩어버리며, 현실주의는 인기영합적이기에 주류를 이루지만 열매가 거의 없고, 혁신주의는 창조적 소수로서 시대를 이끌며 열매를 맺는다. 이를 근본주의적 맹신, 현실주의적 과신, 혁신주의적 정신이라 불러본다.

2. 근본주의는 1) 늘 '나만이 진리다'라는 독단에 빠져 배타적인 주장을 한다. 2) 또한 내가 속한 공동체만이 타 공동체보다 우월하다고 맹신한다. 3) 그리고 다른 세상은 '덜 떨어진 그 무엇'이라고 과소평가한다. 예를 들면 근본주의는 전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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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Yuik Kim, Sunghwan Jo and 8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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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참 신앙인은 예수의 진리의 복음을 어떤 종교보다 더 생명을 걸고 삶에서 실천하면
세상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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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사봉석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가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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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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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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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8 July at 12:47 ·
[특정 종교조직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허구이다]

1. 사실 페이스북에 이 글을 먼저 올려야 하는데 새벽녁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랫글을 먼저 올리게 되었다. 다소 늦었지만 어제 많은 페북친구들이 한국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의 현장의 목소리를 전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특히 어제 댓글을 올려 주신 분은 정말 용감(!)하신 분들이다. 어떤 글이든지 '제소리'를 내지 못하는 '앵무새 소리'는 창조주가 있다면 창조의 뜻에도 맞지 않다.

2. 생각해 보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찬송과 영광의 목소리가 독창이겠는가? 칼뱅의 소리와 웨슬리의 소리와 메이첸의 소리와 루터의 소리만 들리겠는가? 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가인과 아벨, 빛나는 예언자와 선지자, 한민족의 성도들의 목소리는 없겠는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장엄한 합창교향곡이 울리지 않겠는가! 구원받은 장엄한 목소리에 분명히 '나'는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의 맥락에서 누가 구원을 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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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Sunghwan Jo, Sung Luke Kim and 10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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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호
연창호 "구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같은 종교내에서도다릅
니다 각자 자신에게 "하늘"이 있습니다 사람얼굴이 다 다르듯이ᆢ 그러나 사람얼굴이 공통적으로 같은게 있듯이 회통시킬 능력이 있어야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것을 알아챌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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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훈
손성훈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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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희
김이희 진리는 정형화 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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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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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김병태 기독교가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고 있을까요?
불교가 불경을 잘 해석하고 있을까요?…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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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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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8 July at 07:03 ·
자본신앙과 제국학문주의에 포섭된 한국 사유체계

1. 우리는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수 있다. 다원적 종교주의가 펼쳐지는 지구촌에서 과연 한국, 한국인, 한국 종교문화의 세계사적 사명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한국의 학문세계는 교수, 학자 등 직업지식인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고등교육기관의 평가시스템, 연구재단의 연구과제 선정과 연구기간 등은 세계적인 담론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다학제를 말하지만 다학제적인 논문은 기존 학문권력에 의해 게제하기가 그리 쉽지 않고, 이를 평가기관에서 온당히 인정받을 수 없는가. 일 년에 수 편의 논문을 쓰게 만드는 논문 양산기계로기능하는 직업지식인에게 세계적인 담론을 만들어내라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다.

2. 철학자, 신학자, 를 포함한 인문학자가 한국 사회의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는 것은 같은 인문학자로서 어불성성이다. 인문학은 한 사회와 시대의 사유체계를 제시하고 형성해 가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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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규
최양규 기독교신학에서 새물결플러스 김요한 목사님 아시는지요? 유투브 바이블클래스 강좌도시청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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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치열한 토론과 논쟁, 대안제시의 거대한 담론이 이땅에 뿌리내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길이 이어갈 한국적 철학이 각 분야에서 들불 처럼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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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jin Kim
Jongjin Kim 한국의 지식계를 "지식 오퍼상"이라고 했던..(누구였더라?;;) 말이 생각나네요. 맞는 말씀이긴 한데, 지금의 학문/종교 생태계(과연 생태계라 부를 수 있는지도 좀 애매합니다ㅠㅠ)에서는 실천방안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 생태계 바깥에서 개고생을 각오한 공부가 이뤄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절망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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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사봉석 혜안이 더 깊어 지셔서 민중들에게도 함께하는 일이 되도록 힘써 주세요.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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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석
사봉석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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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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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7 July at 10:26 ·
페북친구님들에게 페북운영에 참고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합니다. 한국종교 특히 한국 기독교계가 안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자유스럽게 간단하게 댓글이나 메세지로 써 주시면 됩니다. 한 분이 여러 개 써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시)
1. '재물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런 거로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2. 동성애 문제로 교파간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유
3. 교회를 세습하는 문제
4. 교회를 매매하는 행위 등등

107KarpChon Kim and 10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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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이종원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 겠지요.목회자의 문제는 성도의 문제 이기도 하고요. 말씀을 말씀으로 받는 자세의 순종이 결여되어 결국은 교만이 사탄의 종노릇 하고 자기의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멸망의 길이겠지요. 진짜 목사.성도 한사람을 찿으시는지도 모르죠. 탓 하기전에 나를 돌아보고 나단이 이야기 할때 순종하고 돌이킨 다윗의 모습이 한국교회를 하나님나라를 위하는길 이라봅니다. 문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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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 Jik Lee
Dong Jik Lee 반지성주의+(주술적)축자영감설 = 동성애 진화론 이신칭의 PC 등등 기본적 개념정의도 없이 찌라시 수준의 논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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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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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훈
손성훈 임직 교육에서 다니던 교회 목사의 아버지 목사가 와서 교육 했습니다.
봉사도 잘 안하고 헌금도 적게 내는 성도는 기생충이다.
목사한테는 종이 아니라 종님으로 불러야 한다, 했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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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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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이현주 인천 신현동 성결교회 류우열목사
교회를 기업경영하듯이
직분가진사람들 대출시켜 문어발 성장만시킨는 장사꾼같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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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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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7 July at 05:36 ·
[한국에 한국신학과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가 없다: "격의(格義)그리스도교" 시대]

부제 : 하느님(천주교/개신교 공동번역)인가? 하나님(개신교 성경)인가? 하느님(천주교 성경)인가?

1. 한국 교회는 서구신학의 맹종과 서구신학을 표준으로 하여 한국종교문화를 재단한다. 식민식학형 직업종교인은 낡은 그리스도교에 사로잡힌 서구신학의 대리인이자 중개상에 불과하다 삼국시대의 원효가 통불교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만들고 퇴계가 성리학의 대가로서 새로운 유학전통을 만들었듯이 지금은 그리스도교계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탄생되어야 한다 하지만 서구신학의 대리전을 벌이는 한국신학은 서구신학의 연장선에서 형성되는 담론에 불과하다 서구신학의 복음의 씨를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는 동안 서구신학의 복음에는 문제가 있는지 물어본 적 조차 없다. (그럴 용기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는 웨슬리신학, 칼빈신학, 시대에 따라 나오는 서구신학자의 신학이론과 성경해석만이 정통이기때문이다.)

2. 주류를 점하는 보수교단이 교리화된 신학체계를 한국에 직수입하였기 때문에 서구전통에 뿌리박은 가톨릭과 개신교만이 정통이다. 마치 한국 종교사에서 조선시대에 성리학 이외에 유학전통을 사문난적이라고 정죄하듯이 한국교회는 서구신학과 신학전통을 표준으로 이단과 ‘사이비 그리스도교’를 양산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유비현상은 21세기에도 벌어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신학자라면 현 식민 신학현상, 주구 신학현상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구신학에서 형성된 담론은 서구의 역사와 사회적 문화가 반영된 서구의 신학적 환경에서 제기된 신학이자 교리체계이다. 가톨릭은 헬레니즘에 의해 해석된 믿음체계와 로마 교황과 유럽국가 황제와의 권력 투쟁에서 형성된 의례체계로 만들어진 교회전통이다. 서구신학은 변화하는 시대의 사조에 따라 끊임없이 신학을 만들어내고 한국신학은 서구신학의 소비시장으로서만 작동되고 있는 것이 현주소이지 아닌가?

* 천주교와 개신교가 힘을 합쳐 공동번역을 할 때 '하느님'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천주교만이 '하느님'이라 하고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한다.'the Scripture'라는 경전의 이름마저 한 곳은 '성서' 한 곳은 '성경'이다. 더 가관인 것인 그래도 같은 뜻이라는 신학자들의 궤변이다. 신도들은 왜 이 두 용어가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였는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 바란다. 가장 기초적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용어마저 하나로 통일하지 못한 '종교권력'과 '종교시장'의 다툼에 기독교계는 자성하여야 한다. 하느님이라고 부를때의 신개념과 하나님이라고 부를때의 신의 개념과 범주는 한민족에게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이다. 즉 종교권력으로 기독교 시장을 양분하지만 결코 한국 씨알에게 한국인의 심성인 '조화와 평화'의 종교적 토양을 제국주의의 신학으로 억누르고 있는 "격의그리스도교 문화"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자본기독교와 건물교회는 성경의 정신과 동떨어닌 "격의그리스도"에 불과하다.( "격의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글쓴이가 한국학계에 제안하는 용어이다)

3. 종교적 신앙은 삶의 결단이고 실존적인 체험의 행위이다 남이 차려놓은 음식을 골라먹는 것도 아니고 남이 씹어주는 음식물을 먹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한국 그리스도교인의 신앙행태라고 본다면 어불성설일까? ‘나 = 인간’ 이 텍스트가 되어 내가 태어난 종교전통(콘텍스트1)과 종교문헌 콘텍스트 (2)이 나의 주체적인 종교체험(신앙고백)이 합류하여 소화하지 못하는 사상은 주구신앙에 불과하다. 중국조차도 중화신학(中華神學)을 국가적 차원에서 계획하는 마당에 다원적 종교현상과 제국주의와 냉전의 아픔을 가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에 남북통일신학과 인류의 평화신학을 만들 신학적 용기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대부분의 직업종교인은 서양 선교사가 전해준 교리와 교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교단소속의 직업종교인은 교단의 교리체계를 벗어난 신학이론과 새로운 성경해석은 꿈도 꾸지 못한다. ( 1, 2, 3, “포스트종교운동”에서 인용)

4.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신자들은 다른 소속의 교단과 교파의 기독교인과 대화를 해 보라. 아니 다른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과 대화해 보라.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은 '하나의 신'을 믿는다면서 생각하는 신앙의 차별과 차이는 오히려 다른 종교인 불자의 간격보다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과연 칼뱅과 웨슬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같이 만날 수 있을까? 과연 그 믿음의 후예들인 신도는 같은 성경으로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나의 주체적 신앙고백이 없는 ‘교파와 교회의 직업종교인’을 통한 대리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우려하는 교회의 모습은 한국인의 위대한 혼을 잃어버리고 서구 제국신학에 압도당하여 우리 목소리를 내지못하는 공동묘지에서 나는 울음소리라고 할 수도 있다.

5. 깨고 깨어야 한다. 우리가 깨지 못하면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 2019년 7월 21일 종교학자 김병수 선생은 "제국들은 평화와 무기를 끼워팔고, 주구들인 외래종교들은 사랑으로 민중의 고혈을 짠다"라는 선지자적인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이를 노장사상등으로 그 의미를 적용하여 불교를 이해하는 단계(격의불교시대)를 거쳐 선불교라는 중국불교를 탄생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한국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하나님’, ‘성경과 성서’라는 용어도 통일하지 못한 채 ‘격의그리스도교’시대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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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oun Joon Lee
Hyoun Joon Lee 아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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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6 July at 15:57 ·
[서구신학을 포월하여 새로운 성경해석과 성경해석의 틀을 만든 변찬린]

한 학자가 변찬린의 생애와 저술을 직접 읽어보지도 않고, 일부 학자가 쓴 변찬린의 리뷰만을 보고 변찬린이 '토착화 신학'을 한 줄 착각하고 있다. 한국 신학의 한계이다.

변찬린은 서구신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또한 영통계시적 독단적 성경해석을 극복하려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해석학적 대원칙아래 새로운 성경해석을 한 것이다.

저자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판단을 내리는 위대한(?) 학자가 어찌 특정 외국 학문의 틀 안에서 신학과 목회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대단한(?) 실력의 보유자임에 틀림없다. 서구신학자의 신학 이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한국인이 해석하면 안된다는 신학적 법칙을 외국 신학교에서 배우고 왔나보다. 식민식학의 한계이자 제국신학의 첨병 역할을 충실히 하는 신학자임에 틀림없다.

[성경의 원리] 개정신판 한국신학연구소 발간사에서

김상일(전 한신대 교수)은 2017년 12월 18일 《교수신문》에 “한국의 선맥과 기독교의 부활사상을 상호 교차적이며, 융합적으로 이해한 것은 변찬린이 세계종교계에서 최초라고 평가된다. 어느 누구도 변찬린과 같이 ”성경은 선맥이다“라는 논지를 초지일관 주장하지 못했다”고 말하여, 이어서 “변찬린은 한국적 화합에 의해 기독교를 통해 ’선맥‘을 다시 찾으려 했다, 『성경의 원리』상권은 신선사상인 도맥론과 불교의 윤회론을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변찬린이 선맥을 불교나 도가 사상과 화합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원로 신학자인 서창원(전 감신대 교수)은 2018년 3월 『기독교 사상』에서 “경전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도한 변찬린의 ’ᄒᆞᆫᄇᆞᆰ성경해석학‘이란 제명으로 ”동방종교 심성에 근거한 변찬린의 ’ᄒᆞᆫᄇᆞᆰ성경해석학‘과 독자반응 비평이 새롭게 주목받아 독창적 해석학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라고 하며 한국 신학이 한국의 종교적 심성과 성경의 영성적 지평이 융합되기를 바랜다는 염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한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윤승용 박사는 뉴스레터(504호, 2018.1.10.)에서 “ᄒᆞᆫᄇᆞᆰ 변찬린, 새 축(軸)의 시대 ’한국적 기독교‘해석 틀을 만들다”라는 제명의 글에서 변찬린의 성경해석학과 ᄒᆞᆫᄇᆞᆰ사상은 “문화신학자들이 가졌던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진정한 화해, 주체적 성경해석 그룹이 초종교적 자리에서 추구한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영통 계시파들이 바라는 선(仙)을 바탕으로 한 성경해석적인 통일한국론”을 모두 아우르며 “우리의 삶의 현장을 고려한 주체적 신학담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래 인류의 생명과 문명을 고려한 생명신학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 신학이고, 새로운 축의 시대를 대비하는 인류 미래신학으로 손색이 없다”고 논평하는 등 한국 신학계와 종교계에서 다양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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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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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6 July at 06:56 ·
한국의 '이단' 기독교 :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정통인가?

* '이단' 기독교(이하 이단 기독교로 표현)라는 말은 기독교인에게 아주 익숙한 용어일 것이다. 그리고 이단하면 생각나는 종교단체가 아주 선명하게 각색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분이 계신다면 이미 확보한 종교시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서구가 만들어놓은 '정통신학'의 패러다임의 틀에서 제국주의적 식민신학을 확산하려는 종교 선전에 물들어 '믿음과 은총'으로 '성령의 아홉열매'도 없이 '자기구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부실 기독교일 가능성이 높다.

1.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개신교로 범주화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를 보더라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예수교 등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최대 교단인 장로교는 ‘역사비평’의 도입이 계기가 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분리된 역사가 있다.

2. 종교적 상식이지만 종교내의 분열은 늘 진리와 교권 수호를 명목으로 내세우지만 현실적으로는 교권과 교세의 투쟁이 주요한 동기로 작동한다. 일정한 교세와 교단을 형성하면 이해당사자간의 이단투쟁은 상호간의 ‘침묵의 카르텔’로 잠복한다. 이로 인해 거칠게 표현한다면 교단소속의 신학자는 끊임없이 ‘신학적인 자기검열’속에 대부분 충실한 교단이익의 목소리에 추종하는 대변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내면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틈을 타 이단 기독교를 선전하고 확산하는 일부 직업종교인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교회와 비 교회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형성되어온 서구 기독교 담론에서 구축된 교리체계를 신봉하면서 ‘이단’사냥에 열중한다. 그리고 건전한 양식있는 다수의 크리스챤의 목소리는 덮이고 만다.

3. 만일 ‘이단’투쟁의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면 천주교와 개신교, 기장과 예장, 예장 내의 합동과 통합, 감리교와 장로교 등 다양한 분파현상을 보이는 기독교 내부에서 교단과 교파사이에서 ‘이단판정의 동일성’은 유지하고 있는 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해 보자. 쉽게 말하기를 주저하지만 결국은 이해관계자의 종교권력투쟁의 산물에 불과할 뿐인지 않는가. 이단 기독교 연구가에게 어디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가? 마치 예수를 정죄하려던 유대교의 종교지도자의 바리새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물어볼 뿐이다. 기독교계 내부가 이럴진대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이단 기독교를 판정하는 종교와 직업종교인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4. 자신이 믿는 '종교와 교단과 교회와 직업종교인'만은 정통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종교인을 바라보는 기독교인, 유교의 조상제사를 조상숭배라고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거나, 불상앞에서 불교의례에 참여한다고 자기 신앙이 흔들리는 신앙인과 '믿음과 은혜'라는 신앙의 패러다임안에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맹신하는 이들이 이단 기독교(종교)를 탄생시키는 장본인들이다. '이단'은 '정통'을 자처하는 조직과 종교인이 가진 허상이다. '이단'과 '정통'의 이원론적인 배타적인 의식은 서구신학이 우리에게 물려준 대리전이자 연장선의 사유체계에 불과하다. 깨고 깨어 나의 신앙의 하여야 한다.

5. '이단'과 '정통'의 이원론적인 분리의식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인간의 원초적 죽음의식의 외면적 발현현상이다. 또한 자기만은 어떻게 구원받아야 한다는 맹신과 과신의 교만의식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더 나아가 영혼은 죽어서 하늘나라가고 육체는 땅에 묻힌다는 타락하고 무명에 빠진 인간이 '구원'을 얻기위해 벌리는 피안의식에 빠진 영육전쟁이다. 이것이 종교역사에 확대된 것이 종교전쟁, 즉 '이단과 정통'의 싸움이다.

6. 쉽게 말해 아직도 머릿속에 '정통과 이단'이라는 분리의식이 있다면 '자기구원(제)''의 길은 멀다고 느끼면 된다. 자기 종교안의 구원(제)의 패러다음은 어떤 형식이든(믿음과 은총, 혹은 해탈, 혹은 자아실현 등등) 타자와의 통일과 조화이고 그 '통일과 조화'는 나만의 통일이 아닌 더 나아가 우주적 통일이라고 모든 종교는 가르치고 있다. 물아일체, 천인합일, 우주적 그리스도 등등등 그렇지 않은가?

7. 장마비가 내리는 오늘 아침! 분리된 나와 정통과 이단의 도식에 빠진 나를 발견한다면 흐르는 빗물에 씻어버리자. 그리고 텅빈 마음에 조화와 평화와 개벽의 기운을 불쏘시개로 삼아 '말씀'의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비약하는 새로움의 영성에너지를 만들자. 그리고 심호흡 한 번 하고 쫄지말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성인살이'나 해보자.

144Sunghwan Jo, 이찬수 and 14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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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익
조성익 교수님의 지적이 아주 적확합니다. 사랑을 전해야하는 기독교는 태생부터 교회란 너울을 쓰기 위한 암투로 시작되었지요. 사도신경의 변화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신경은 니체아부터 칼체돈까지 너덧번 채택되었는데 그때마다 내용은 점차 퇴보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권력의 이동을 말해주지요.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여지없이 축출되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란 애당초부터 없었습니다. 지금은 시절이 좋아서(?) 자기의 신앙을 자유롭게 서술할수 있지만 500년전에 태어났더라면 저도 아마 화형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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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송
김두송 이단은 예수님이 머리되고,주인되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교회,성락교회,구원파,JMS,명성교회,사랑의교회,소망교회,순복음교회,새중앙교회 등, 지금 우리나라는 이단을 빼면 기독교인구가 약200만정도 밖에 않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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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송
김두송 신천지,만민교회,지금도 교회가 분열되어 성도와 목회자 간에 싸우고 있는 교회,다 이단이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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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근
김복근 결국 '이단'이란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낙인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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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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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5 July at 16:26 ·
기복신앙과 기복부흥사형 직업종교인 유감

1. 오늘 우리 페북에 난리가 났네요! 외출을 나갔다 왔더니 바로 '무당하나님과 온전한 기도'에 대한 다양한 반응에 적시에 댓글을 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댓글가운데 건설적 비판 댓글은 타당한 지적으로 겸허히 수용합니다.

2. 대부분 무속과 무당의 용어와 개념에 대한 이해지평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편견(?)때문 인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들도 '무당하나님과 온전한 기도'에 대한 맥락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신 듯 합니다.

3. 지적된 부분은 바로 우리의 전통적 종교문화인 '무교 혹은 무속'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글쓴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 종교문화인 무교와 무속에 대해 근대이후에 부정적 이미를 덧붙여 씌운 종교가 바로 기독교 문화입니다. 바로 서양 선교사와 유동식이 쓴 "한국종교와 기독교"에 나오듯이 기독교와 교회내부의 기복신앙을 무속의 영향이라고 평가한 것이고 '배척해야 할' 부정적인 문화라고 소개합니다.(15-39 페이지)

4. 저는 무당은 목사와 같은 하나의 직업종교인이고 무교는 기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라고 인식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속과 무교(사실 이 용어도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라는 언어가 가진 부정적인 오염은 서구신학과 기독교의 편견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신학자를 제외하고 일반 학자들은 편견을 가지지 않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신학자가 쓴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독교를 비교한 논문을 보면 한국의 전통종교의 하나인 무속과 무교가 무언가 결핍된 종교로 서술됩니다. 그러기에 비판적으로 지적한 댓글은 이런 것에 대해 글쓴이가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언급입니다)
* 무교와 관련되시는 분이나 무교(도교 혹은 풍류)와의 습합현상을 많이 받은 불교과 관련 되시는 분도 서구식 근대종교, 특히 제국형 기독교 문화가 만든 무교(속)애 덧칠한 '부정적 트라우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를 격려합니다. 무교도 온전한 하나의 종교이며 종교현상입니다.

제가 이런 입장을 가지고도 '무당하나님'이라고 제목을 붙인데 대해 하나님을 왜 무교(속)와 연계시키냐는 비판의 댓글이 주를 이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학문적으로 성숙한 댓글이 달려 무안하기조차 합니다.
얘기가 길어지는데 제가 일전에 출간된 책의 내용을 참고하기 바랍니다.(이호재. 포스트종교운동. 2018. 141-142). 이 글을 읽으시고 오해가 있었다면 해소가 되고 궁금증이 있었다면 풀리기를 기대합니다. 댓글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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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희
김이희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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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교
정승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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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근
김복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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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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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5 July at 09:44 ·
무당하나님과 온전한 기도

1. 내 기억에 종교 연구를 위해 만난 많은 종교인 가운데 특히 신학교수, 원로 신학자, 평신도 등 기독교인이 많았다. 식사를 할 자리면 당연히 목사가 기도를 하며 인터뷰를 하는 입장에서 기도의례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 그 가운데 특히 90세도 넘은 원로 교수(신학자, 목사)에게 책을 드리러 방문할 때의 이야기다. 그의 아내도 80세를 울쩍 넘었다. 집 근처의 한식당에 가서 담소를 나누다 음식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기도를 한다. 3분도 채 안되는 시간에 나를 포함해 그 분 아내와 세 명이 있는데 그 원로교수가 하는 기도의 태도와 간절함은 말그대로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서 하는 기도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난 처음으로 '아멘'했다. 그리고 그 후로 아직까지 없다.

2. 류영모는 1971년 8월 동광원에서 신도들에게 인도하는 기도를 부탁받자 이렇게 말한다. 자신 혼자는 어찌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기도를 할 수 있지만 대중을 인도해서 까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는 경지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쩜 새벽 기도 인도는 이 사람이 맡아서 여러분과 같이 기도하기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때는 기도를 내가 혼자 하면 했지 여러분하고 같이 안하고 지내왔습니다. 저는 기도 인도는 할 줄 몰라요. 정말 기도 인도를 할 수가 있다 하면 인도한다는 이가 기도하는데 작용을 해서는 안되요. 온전히 하나님과 살기만을 기도하고 그치면 그이는 온전한 기도한 것입니다” (다석 마지막 강의 . 166-167)

3. 구약의 대 선지자인 모세도 므리바 반석을 세 번이 아닌 두 번을 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는 신성모독으로 인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직업종교인의 말 한마디는 절대존재의 대언의 행위이기에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연 기도는 무엇일까?
자신의 기도가 날개가 돋혀 하늘나라까지 가서 하나님 응답을 받아올 수 있는 기도인가 물어보아야 한다.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이 O.K. 하시나? 우리 애 수능시험 잘 보게 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나. 속고 속이는 기도의례는 그만 두고 마음의 지성소에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의 고민을 풀어주는 기도'를 해야한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이 '기복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무당하나님으로 만들지 말고 참 기도를 하여야 한다.

그럼 참 기도는 무엇인가? 나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고민을 풀어주는 기도이다.
기복기도를 하는 목자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지 말자!
기복기도하는 사람은 천국문을 막고 있는 것이고, 기복기도에 동참하는 사람은 돈과 영혼과 시간을 마귀에게 바치는 것이다.

159Yuik Kim, Sunghwan Jo and 15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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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익
조성익 교회 밖에 계신 분이 더 정확하고 냉철히 판단하시니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기적(利己的) 소아(小我)를 죽이고, 와서 진정으로 이타적(利他的) 참 자아(自我)를 찾아가라 란 말씀인데, 자기의 이성은 안 죽이고 이기적인 몸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그리스도의 옷만 덧입혀진 꼴이니, 기복신앙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현실이 슬픕니다. 하나님의 가슴도 무너지고 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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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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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a Cho
Flora Cho 예언 기도를 하는 분만 찾아다니는 선배와 친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녔었던 개척 교회도 예언 기도를 했었습니다. 저는 그 예언 기도가 너무 불쾌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분명 저에게 직접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왜 그 분들은 그렇게 쉽게 하나님게 들은 예언이라며 성도들에게 함부로 그런 말씀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의 잘 못된 예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았을지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인생에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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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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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근
김복근 무당하나님이란 표현보다는 호렙산산신령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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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ki Lee
Soonki Lee 참 기도는 나의 문제가 아니고 하느님의 문제를 풀어주는 기도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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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ki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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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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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5 July at 04:28 ·
평신도가 예수(부처)를 살려 내자 : 성인聖人으로 하루살기

1. 인류의 고전인 경전텍스트, 사서오경, 대장경, 성경, 꾸란경, 도교의 경전인 도장 등은 일점일획을 절대시하는 문자 숭배의 시대를 거쳐 인간이성의 발달과정을 거쳐 철저히 해체되어 비신화화/역사화되면서 경전의 위상은 추락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1990년 초,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후쿠야마는 “역사는 종언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지구촌은 민주주의의 경제적 이데오로기인 자본주의로 급속히 재편된다. 더불어 옛날 그 빛나던 종교경전의 위력은 과학의 도전으로 응전의 용기를 잃고 있으며, 경전의 정신을 담지하던 성전과 경전의 말을 전하던 직업종교인은 ‘자본’의 도전에 '오합지졸'이 되는 형국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종말이 아니고 종교 종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2. 성경을 포함한 경전텍스트는 건물성전 유지와 직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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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좋은 말씀 공감합니다
특히4번에 깊이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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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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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준
오승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좋은땅이십니다.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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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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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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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updated his status.
24 July at 19:03 ·
[대무大巫는 새 날을 개명開明하는 한국인의 사명입니다]

한밝선생이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속에서 쓴 한민족에게 보내는 구도엽서
============================================
우리는 대무大巫입니다.
무巫의 식성食性으로 성인을 잡아 먹는 대무大巫입니다
조무래기 샤아만이 아닌 뜨내기 무당이 아닌
신접한 사탄이 아닌 신시神市의 〈한〉사람 대무입니다.

이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입니다,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종교 아비를 삼키는
한국 심성의 오지奧地를 개발하여
이 시대의 고뇌를 초극하고 인류의 고난을 극복하고
역사의 물음에 대답하게 하십시요.
세계사의 네거리에서 살煞풀이 굿을 하지 않으면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사상의 골고다에서 해원解寃굿을 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습니다
살인한 형제들의 속죄 굿을 하지 않으면
이해와 화동和同은 결코 없읍니다.
저 허공에 전운(戰雲)처럼 엉킨
원귀(怨鬼)와 무주고혼(無主孤魂)들의 한恨을
풀어줄 자 그 누구입니까 ?

백악관에서 크레믈린 궁宮에서
자금성에서 북악산에서
모란봉에서 부란텐부르크문에서
예루살렘에서 베트남에서
악령과 사신(邪神)을 축출할 자 그 누구입니까 ?
유일신 야웨와 유일신 알라의 불화를 제거하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살煞을 풀 자 그 누구입니까 ?
힌두교와 모슬렘 사이에 살기를 제거할 자 그 누구입니까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엉킨 증오를 없이할 자 그 누구입니까 ?

대무大巫는 새 날을 개명開明하는 한국인의 사명입니다.
화해和解는 한국 혼魂의 저력입니다
내 조국은 더러운 세계사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
나는 뜨거운 눈물과 깊은 신음과 임리(淋悧)하는 피로서
무巫의 굿을 하여
이 땅에 평화의 성대聖代를 개천開天하고
자유의 성일聖日을 개명開明하겠읍니다.

(변찬린의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에서)

46Yuik Kim, Sunghwan Jo and 4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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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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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4 July at 06:18 ·
평신도는 말-씀의 인간으로 거듭나 역사광장을 걷자( 2)

1. 내가 말하는 평신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나가면서도 남보다 믿음이 부족하고, 성경에 정통하지도 않으면서도 공부도 안하고, 그리고 십일조 등 헌금을 적게되면 마음속에 무언가 죄책감를 나고,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에 가서 기도를 올리면 마음이 편해지고, 교회내에서 집사, 권사, 장로 등은 무언가 믿음이 있고, 은총을 받은 것 같고, 남의 믿음이 부러운 즉, 상대적 신앙을 가진 성도를 말한다. 좀 더 일반화한다면 종교를 믿으면서 남과 비교를 하는 절대적 신앙이 아닌 표면적이고 상대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평신도의 마음속의 이런 심리상태가 직업종교인을 우상화하고 맘몸신앙과 기복신앙을 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신자가 성경을 몰라서 물으면 가르쳐 주는 대화문화가 아니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하는 목사나 질문자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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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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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말은 어려운것 같은데 맡는 말 같아요 한가지만 덧 붙이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하나로
모든 진리의 말씀은 한줄에 꿰어 있는 것이 복음같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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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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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준
오승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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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욱
남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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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a Cho
Flora Cho 100%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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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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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3 July at 05:38 ·
평신도는 눈치보지 말고 자기 가슴에 '말씀의 불'을 붙이자 (1)

1.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이 습관이고 관습이 되어 관례에 따라 윤회의 틀에 박혀 살아간다. 이를 타파시키는 것이 신앙이요, 말씀이 담긴 경전이다. 경전 속에 있는 글자는 나의 가슴을 박동치게 하는 살아있는 불이다. 살아있는 말씀의 불이 성도들의 잠자는 가슴에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불을 붙여주어야 할 직업종교인은 오히려 '교리의 말', '탐욕의 말', '기복숭배의 말'로 둔갑시켜 붙으려는 불마저 꺼 주체적 신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현실이 목격된다. 그래도 자기는 바른 신앙을 가진 줄 안다. 딱한 일이다.

2. 각 개인은 살면서 한 평생 자신의 마음을 고동치게 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만일 너에게 그 말이 있냐는 실존적 질문에도 '배운 데로 답한다' 그것이 교리의 신앙고백이고, 교학체계이다. 예수가 지금 우리 면전에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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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박걸, 이찬수 and 14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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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Illhwa
YI Illhwa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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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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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익
조성익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남의 신앙에 곁붙이로 따라가는 사람을 종교인이라 하고 자기신앙으로 사는 자를 믿는자, 신앙인이라 부르지요 내가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되라는 게 가르침인데 부처에 금옷을 입히고 예수를 거룩하게 먼 높은 곳에 모셔놓는 어리석음은 타락한 인간들의 어쩔수없는 필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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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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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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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3 July at 03:21 ·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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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신도가 한 평생 성경을 연구하다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에서 그 마지막 퍼즐을 맞추었다고 실존적 고백을 하는 글!

그(녀)의 마지막 목숨을 건 질문은 무엇이며, 어떤 것에서 그 해답을 찾았을까? 평신도의 입장에서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서 만난 진리의 화룡점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성경에 진리가 있을지언정 해석자의 수준에 따라 계시되는 하늘이 다르다는 이 분의 "성경의 원리" 제2장 도맥론의 리뷰를 감상해 보시라.

이 정도는 되어야 성경연구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상의 결과는 또한 페북친구의 몫이며 나는 소개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 성도여 쫄지마시라. 두드리라 그럼 열린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분이 연 성경해석을 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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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원리, 도맥론(道脈論)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무엇에 목말라하였는...
54Lee Woosang and 5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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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훈
임창훈 아멘^*^*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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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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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July at 08:16 ·
평신도는 쫄지말고 공부해 성경에 정통하라.

1. 한국 교회가 세계적인 양적 성장을 하였지만 그 부정적 폐해가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평신도가 성경을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성경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어디에서 찾는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문서인데 열심히 성경공부하여 바른 하나님을 찾아 믿고, 실천하여야 한다.

2. 성경은 말한다. 건물성전에 대한 비판은 예수가 하였고, 예수사후 스데반도 건물성전을 비판하며 첫 순교자가 된다. 또한 예수는 나의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한다고 너희는 나의친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와 초기제자들은 복음전파를 위해 전대를 메지 않고 무소유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즉 건물성전의 반대와 복음 전파자는 무소유해야 하며, 예수는 신앙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친구라는 친구신앙(즉 하나님이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삼대 원칙이 성경에 흐르는 기본정신이다. (구약의 레위족속이 기업이 없었다 등등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3. 구체적으로 바울도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17),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이며 바울은 교회에 대해 제사장의 필요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즉 신자를 대신한 직업종교인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모임 사역과 섬김을 제시장적 직무, 어떤 특별한 제사장 계층이 아닌 모든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직무로 보았다. 당연히 그들은 공동식사를 위해 모였고, 예배를 위해 모였지 고정적인 예배중심지와 성전, 제사장이나 희생제사도 없었다. 이를 근거로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런 건물교회를 많이 세워서 마치 건물교회에 일요일만 되면 출장갔던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이 건물교회에 와서 성도들의 예배와 찬송을 받는단 말인가?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제물이니라"라고 하였다. 거룩한 산 제물인 성도들은 움직이는 인격성전이다. 인격성전이 성령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면 된다. 무슨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을 말하면서 신도들에게 마치 무슨 성경해석의 비법이 있는 양 직업종교인은 자유스럽게 성경을 읽는 것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곤 한다. 진리의 판정자는 성령이고 하나님이지, 직업종교인이 아니다.

4.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그리고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보혜사: 이거 특정종교단체와 특정인이 아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라고 않았나?

5.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텍스트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가 성령을 받아서 해석한다는 것이 성경텍스트가 이렇게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6. 따라서 평신도인 성도는 자신을 가지고 배수의 진을 치고 성경공부를 하라. 온라인에 가면 성경의 다양한 역본과 히브리어 헬라어를 비교해석한 책도 많다. 오직 깊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일상생활에서 겸손의 사회적 자세로, 경제적으로 무소유를 지향하며, 명예욕이 없었던 예수를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주렁주렁 다는 생활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경전텍스트는 단순하다. 성경은 부활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타락으로 죽은 인간이니 부활하자는 것이고 세상 살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 사랑하라는 것 아닌가. 믿음, 은총, 은사 다 좋은데 그 믿음과 은총과 은사를 받은 만큼 성령의 열매로 외형적으로 보여달라는 것이다.

7. 복잡한 교리체계와 신학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평신도님 우리 쫄지말고 성경공부 합시다. 그럼 누구한테 가서 배워야 하나 하는 순간 또 특정인의 신앙노예가 됩니다. 목숨걸고 하면 성령이 성경을 가르쳐 준다는 게 성경의 기본정신입니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히 교리의 노예, 종교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예수가 기독교의 교주입니까?

8.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만이 아니고 세상학문(특히, 과학)과 소통을 하면서 예수처럼 세상의 아픔을 나누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밝히는 성숙한 역사적 태도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어제 추천한 책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어제 추천한 책 :
1.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한국신학연구소)
2. 류영모의 다석일지(영인본)
3. 김흡영의 "도의신학"과 "가온찍기"
4. 박영호의 "다석전기"
5. 함석헌의 " 뜻으로 본 한국역사"

243You, Sung Luke Kim, KarpChon Kim and 24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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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
공인 문제는 목사입니다.
성경을 깨우쳐주어야 하는데
목사를 섬기라고 가르킵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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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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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해
김은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게 성서를읽게하는 손가락역할이 보기어렵다는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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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해
김은해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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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훈
손성훈 Like 를 누르는데 안 먹히네요?
아무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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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욱
남영욱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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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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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1 July at 07:15 ·
내 서가에 꽃혀 있는 책 가운데 한국 사회 특히 한국 교회가 바람직한 길로 가는 것을 바라는 분들에게 몇권 추천합니다. 왼쪽 마지막 책은 사진촬영의 버팀목으로 쓴 책으로 제외입니다.
* 추천책의 공통점은 주체적 나를 바탕으로 한국, 지구마을,우주촌을 사유에 담고 치열한 삶으로 녹여낸 인물과 책들입니다.
* 나의 뿌리와 절대 존재와의 합발(合發: 합일合一이 아님)의 경험/체험없이 나의 근본적 변화와 사회/종교/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추천책이 정갈합니다.

1.다석일지(영인본) : 류영모의 영성구도일기. 전 네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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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You, KarpChon Kim, Myung-kwon Lee and 18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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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ub  Lee
Yosub Lee 잘 읽고 잘 배우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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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ub  Lee
Yosub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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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숙
윤인숙 💞책이 많으시군요
다석전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새로 한번 더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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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Hojae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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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호
연창호 변찬린선생의 요한계시록 읽어보아야겠네요
지금 요한계시록 공부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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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호
연창호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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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Sejin Pak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만, 선생님을 통해 소개된 책을 이미 몇권 주문했습니다. 변찬린 전기, 기온찍기. 우선 한권 씩 만 사 봅니다. 함석헌은 여러권 있고, 다석전기도 아직 읽지 않았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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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Hojae Lee Sejin Pak 인연이 되는 책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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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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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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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0 July at 12:26 ·
인간은 생각하고 대화하고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대화가운데 토론은 효율적인 공부입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세상이 아닙니다.

중세 시대에는 라틴어 성경을 일반 평민이 읽지도 못하여 평민이 성경을 접하기가 어렸웠지만, 루터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독일어로 성서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도 다양한 한글 성경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온갖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누가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해석권은 특정 종교단체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자율문화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페북공간에서 토론 예의를 지키면서 상호간 열띤 토론을 대단히 환영합니다.
130나일경, Sunghwan Jo and 12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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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김지연 지금은 아는게 없어서 토론을 못하지만 나중엔 궁금한 것도 묻고 토론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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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김지연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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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희
김이희 사람의 본능중에
상호작용 하려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이 의미없게 느껴지는것이 우울증 이고요…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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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oong  Han
Hojoong Han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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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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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0 July at 10:41 ·
변찬린의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은 구도자로서 틈틈히 적은 영성일기의 일부분입니다. 시중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공개합니다. 반드시 출처를 밝히고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도 SNS와 목사설교자료로 무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주의바랍니다(남의 자료를 이용하면 저작권자의 이름을 밝히고 사용하면 목회의 권위가 손상되나 봅니다. 그런면에서 이성하목사의 "신학서적표절반대운동" 적극적으로 응원합니다)
===================================
새밝이여
그대는 고고학과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배운 후 입산하라.
그대는 고전물리학과 원자문리학사와 수리원리를 배우고 퇴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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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박걸 and 6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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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도영 좋은 말씀 항상 감사 드리며
세상의 온갖 지식의 말을 다 합해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고 행복은 사랑에서 나오는데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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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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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0 July at 09:45 ·
한국기독교 성경해석과 신앙패러다임 전환 요청 2

1. 한국 기독교의 전래는 북경 천주교 북당에서 세례받은 이승훈으로 비롯되며, 개신교의 역사는 알렌과 아펜젤러가 들어온 시점으로 잡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옥성득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 교회사"에서 시각을 교정해야 하는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2.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서구의 선교사가 한국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며 한국 근대기에 신분해방, 한글애용, 교육, 의료 등의 부분에 일정부분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개신교 목사는 아주 소수의 목사를 빼고는 신사참배를 하는 우상숭배를 하였고,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지시에 순종하며 신사참배를 하였다. 이런 역사적 우상숭배도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자. 자질구레한 이런 내용은 다 아실테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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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Sunghwan Jo, Sung Luke Kim and 12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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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kyoung  jung
Haekyoung jung 오직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한국교회가 보여준건 땅사서 집짓고 우리끼리 잘 먹고......
문동환 박사님의 '예수냐 바울이냐'를 읽었을때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왜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불교, 회교, 힌두교 지역을 여행하면서 믿음이란 종교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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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규
이복규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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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익
조성익 만약 기독교가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라면 그렇게 지독한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에 반하여 맹목적으로 믿어야했다면 기독교는 선교지에 학교나 병원을 세우지 않고 예배당이나 기도원만 세웠을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만이 주실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로 나타난 성령받은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그들을 보고 일컫는 말이었지요 이신칭의에 목매달고 있는 사람들은 칭의에 구원이 달려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정의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거짓 성령체험자들이 받았다고 우기는 바람에 정말로 '믿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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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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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이종원 은혜와 믿음의 균형적인 삶이 그리스인이라 생각듬니다. 귀한 말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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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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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주
유택주 교회를 벗어난 성령신앙이라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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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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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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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9 July at 20:55 ·
평신도는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성경텍스트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해 준다. 예수도 3년의 공생애 가운데 자신의 종교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직업종교인에게 질문을 받는다. 이를 본받아 직업종교인에게 '너희는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기독교 평신도는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묻지도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하는 평신도는 자기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준다는 기복신앙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한국 교회의 실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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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You, 박길수, Sung Luke Kim and 20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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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Ok
Daniel Ok 물을 기회를 원천 봉쇄하죠...
한국 교회의 문화가 “물으면 이상한 놈” 취급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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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san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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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기
백영기 이미 아시다시피,
성서 서간에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지체를 이룬다''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존재와 기능과 역할들이 그리고 교회의 개념들(구약에서 부터 신약까지 성서 곳곳에 관련 표현들이 있기는 하지만)이 함축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듯 합니다.
사역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에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그렇게 이어진 더욱 구체적인 그 권위는 신약에 와서 성령을 받고 성령에 봉사하는 권위로 표현되고…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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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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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욱
홍정욱 묻는다는 말은 영어로 구한다는 말과 같지요.
구한다는 말은 기도를 의미하고요.
즉 구하려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만한 권위를 가지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자신들의 눈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봐드렸어야 했지요. 하지만 이미 바리새인들의 맘속엔 헛된 가치를 추구하는 정욕으로 가득찼으니 어찌 권위의 출처를 알겠습니까?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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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욱
홍정욱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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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 Sang Gabriel Kim
Jong Sang Gabriel Kim 경공부를 거의 하지 않죠. 신도나 성도나 신자나 승려나 목사나 신부나..... 지금까지 그런 분들만 봐왔을지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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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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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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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9 July at 20:27 ·
한국 기독교 성경해석과 신앙패러다임 전환 요청 1.

1. 다양한 경전을 읽었지만 신학 책은 그렇게 많이 읽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여유가 있어 신학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을 시간이 생겨 공부를 하다보니 문득 일전에 연세대의 모 교수와 통화한 내용이 새삼 떠오른다. '신학과 교회사이에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지식이 교회의 평신도에게 전혀 전달이 안되는 일종의 부도체현상이 현장목회의 모습가운데 일부라는 것이다.

2. 사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도대체 서구신학자들의 주장이 어떠한데 한국 교회는 이렇게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교회가 되어가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많이 생겼다. 그런데 서구신학자는 다양한 신학적 자유를 누리며 성경해석에서 자유로웠다. 반면 한국의 신학자 혹은 신학교수는 교단소속의 대학에서 교단의 신학적 사유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학자의 선택이니 탓 할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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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Sung Deuk Oak, KarpChon Kim and 14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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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용욱
노용욱 무거운 마음으로 힘든 말을 한것이 아니라 이런 허튼 소리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아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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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Hojae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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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김호 경계에 선 인간은 고독하지만 용기가 우리를 이끌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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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Hojae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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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Illhwa
YI Illhwa 참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문이. 왜 보수근본주의자들로 한정을 지으시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햄하여야 할 일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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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Illhwa
YI Illhwa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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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조용호 힌국교회는 자주독립을 위해 독립전쟁을 할 마음이 없어보입니다. 식민지 논리로 무장할 뿐 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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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Hojae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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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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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9 July at 09:03 ·
나는 한국산 종자韓國産 種子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한〉의 껍질을 쓰고 고난의 역사를
십자가 처럼 질머진 채
세계내 역사의 한 가운데 서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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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You, 박걸 and 9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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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Philo Kalia 글맛이 아주 독특하고 새롭습니다. 도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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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종
이승종 교수님, 평안 하시죠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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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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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san  Min
Kyungsan Min 내용이 어렵지만 계속 곱씹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대충 봐도 깊이가 장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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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san  Min
Kyungsan Mi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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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 로스께, 되놈은 어느 나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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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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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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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9 July at 08:24 ·
자기검열 : 거대한 사상과 일상생활의 윤회 울타리에서 해탈하자

WWW. 는 세상의 온라인 정보와 오프라인 정보를 실시간으로 연계해 준다. 자유라는 이름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모든 정보를 취사선택할 권리를 가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일차적으로 '자기검열'된 정보를 접하여 분류하고 재구성하여 자기 세계관에 맞게 편안하게 맞추어 그런 윤회의 사유사회안에서 살고 있다.
내가 쓰는 글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쓰지만, 이미 머릿속에는 가능하면 대중의 언어로 쓰려고 안갖힘을 쓰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다. 또한 혹자는 이미 느끼겠지만 사용하는 단어도 표현하고자 하는 양식도 이미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있다. 늘 '과거의 비판, '새로운 무엇', '굳어진 제도와 관습의 비판'을 상대적으로 많은 종교언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은 편하다. 그러나 세계관과 세계관, 문명과 다른 문명이 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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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송
김두송 타락,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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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송
김두송 그냥있으면신학은없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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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송
김두송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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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송
김두송 그리고예수님을잘따르면됩니다.성겨미면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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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송
김두송 성경이면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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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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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8 July at 07:02 ·
나는 누구인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

얼마 전 원로신학자들의 좌담회에 초빙되어 가서 토론한 적이 있다. '기독교와 이웃종교의 대화'라는 주제지만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참여하였다. 덕분에 "한국 재래종교의 '구원'관"이란 논문도 6개월에 걸쳐 연구하여 게재해 보기도 하였다.
눈치빠른 이는 알아채었겠지만, 논문 제목에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이라고 한 것이 눈에 뜨일 것이다. 의미인 즉슨 '구원'이라는 이 단어는 정말 사람 몇 죽이는 무서운 단어이다. 주최측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그런 구원과 유비적인 유교, 불교, 도교의 '구원'에 대해 신학자들이 알 수 있게 써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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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You, Yuik Kim, 박걸 and 19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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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김병수 구원보다 십원을 더 원하는 것이 삶의 본질적 실체입니다. 이는 생명살림의 실천적 자세를 이웃들에게 제시함이 종교의 본질적 요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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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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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장정태 함석헌 선생을 연구하는 사람을 만나 조순명,박영호 선생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안색이 변했다. 얼굴이 변할만큼 금기어인줄 몰 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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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찬
최영찬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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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san  Min
Kyungsan Min 제가 잘 몰라서 여쭤봅니다. 불교나 힌두교같은 경우는 모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배타적인 종교끼리 대화가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의미가 있을런지요. 전 별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특히 21세기에 종교의 영향력 자체가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는데 이제와서 대화를 해서 뭐하나...란 생각도 좀 듭니다. 차라리 법과 제도로 인권을 강화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 기독교의 경우 바로 자기자리 찾아갈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이 시대에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하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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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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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유영재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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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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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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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7 July at 07:40 ·
중국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중국의 씽크뱅크이며 중국의 인문학을 이끄는 그 곳에서는 화요일에 한 번씩 출근하여 자신의 연구성과를 공유한다.

당시 그 곳 세계 연구소에서 종교 연구자들이 가장 핫한 화제가 기독교였다. 기독교의 교세가 공산당원의 숫자보다 더 많아지는 것을 정권차원에서 우려하니 당연히 그들의 식사자리 단골주제가 기독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좀 더 단독직입적으로 말하면 공산당 통제아래에서 관리가 되는가였다.

그들 중에 '중화신학'을 만들자라는 의견도 있었다. 인도불교를 격의불교(불교용어를 노장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는 중간 경지)를 거쳐 선불교라는 독창적인 중국불교의 역사가 있으니 이런 발상이 그들에게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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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Yuik Kim, 박길수 and 21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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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규
심인규 너무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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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
송상호 깊이 있고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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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
송상호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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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모
전준모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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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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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ul Lee
Dongul Lee 올바른 성경적 이론에 기반한 건강한 실천적인 삶..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할 구도자의 삶이지요..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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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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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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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7 July at 02:55 ·
새벽별님의 블러그에 실린 글을 공유합니다. 그 글이 밝고 맑고 깨끗합니다. 변찬린 선생의 "성경의 원리"가운데 성경론에 대한 리뷰입니다. 정성들여 쓴 글의 향기가 물씬 납니다. 그 글이 그 사람됨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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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론
​성경을 읽을 때면 글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생각을 바꾸고 내 몸을 바꾸고 내 마음을 바꾼다. 말씀이 ...
48박길수 and 4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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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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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6 July at 09:15 ·
우리는 우리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는지요? 나는 나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늘 열강에 부디끼며 생존해 왔기에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요! 유럽에 가면 작지 않은 나라이고, 적지 않은 인구입니다. 우리나라가 대단하다고 하면 늘 국수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을 학자들이 붙여야 할 정도로 우리는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요? 오랫만에 짬을 내어 글을 쓰지만 페북 친구 여러분 우리는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하지 않는지요? 세계 경제 11위 권 이런 거 언급하지 않습니다.
떨치고 일어나 오천여년의 짓눌린 역사에 지구마을과 우주촌을 향해 우리의 평화와 사랑을 목놓아 불러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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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Yuik Kim, 박길수 and 17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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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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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열
심상열 좋은 글이지만 성경적이지 않네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것과 영생의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밖에 없다고 성경에 말씀 하고 있네요…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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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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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규일
성규일 다석과 함석헌선생은 꼭 만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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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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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김호 시대의 사명!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헤처나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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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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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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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6 July at 07:00 ·
포스트 종교운동의 다섯가지 지향점

첫째 종교를 왜 신앙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종교체험을 가지라.
둘째 창시자의 정신과 동떨어진 자본신앙(기복신앙)과 건물종교의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직업종교인의 종교권위에 저항하라
세째 건물성전을 해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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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김병태 종교를 왜 신앙하는가? 하신 물음은 자기 신앙에 대하여 검토하고 메타인지하게 하는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사료 됩니다.
저는 성경적으로 아담이 맨 처음 세웠던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죄에 대한 의미는 우리가 이땅에서 삶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 한 것으로 봅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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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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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김병태 신앙의 주체가 자신이어야 됨은 공감합니다.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고 주체화하는 경향을 벗어나는 정신이 무소유와 무아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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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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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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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6 July at 06:41 ·
1. 대학 시절부터 '종교'는 나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멀리 중국에 가서 중국도교와 신종교도 연구하게 된다. 그렇다고 어느 특정한 종교에 몸담은 적은 없다. 성경이 좋고 불경이 좋고, 사서삼경이 좋고, 물리학 등 과학도 좋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자양분을 삼으며 생활해 왔다.
(개인적인 학력과 경력의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출판된 책과 학술지들에 있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음)

2. 그러나 늘 성경속에 나온 예수의 말씀, 그리고 불경속에 있는 석가모니의 말씀과 이를 계승하고 있는 교회와 절, 그리고 그 속에 몸담은 구성원들은 실례지만 건물성전에 다닌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그 가운데 적지만 창시자의 모습을 따르는 분들도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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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Yuik Kim, 박걸 and 22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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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박성민 친구 되어 기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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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oung-ho
Kim Young-ho 사람 만나러 교회 갑니다. 괜히 왔다는 생각할때도 있지만 그래도 동반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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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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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석
양문석 이기적 '나'라는 입장이 선행될때 그 어떤 논의가 유의미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이타적 인물이었던 석가와 부처에 대한 믿을을 가장 이기적 기대에 바치고있는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종교인인가? 무엇보다도 예수와 석가는 믿는데 그들의 말씀은 어디갔는가. 손가락만 볼지언정 그 방향만큼은 달을 가르켰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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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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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 Hi Yi
Eun Hi Yi 안녕하셔요? 첨으로 글 올립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 슈퍼마켓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소비자인 사람은 정작 자신의 욕구와 지향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대로 소비재에 엎어 넘어지는...?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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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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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5 July at 15:17 ·
책을 읽다가 페북 친구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글이 있어 공유합니다. 한국의 세계적인 신학인 김흡영 선생의 "도의 신학"을 세계화시키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저술된 "가온찍기(다석 유명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 의 아주 적은 일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말보다도 하나님께 우리 몸을 대신하여 동물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몸제사에 있었는데 "오직 말씀"을 강조해 온 개신교의 영향으로 예배도 몸제사가 아닌 말예배로 축소되어 버렸다. 예배가 말제사, 말잔치가 되어 버리고 또한 신학이 글신학, 글잔치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리스도교가 말 종교에서 몸종교로, 말예배에서 몸예배로, 말신학에서 몸신학으로 본래의 모습대로 거듭나야 할 때이다. 다석은 이미 오래 전에 이와 같은 말예배에서 몸예배로의 복귀와 말신학에서 몸신학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주창했다고 할 수 있다"

김흡영, 가온찍기. 24 인용
187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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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선
윤인선 울언니는 춤예배 시도하다
여신학자 모임에서 퇴출 당했는디 ㅎㅎㅎ
어이 없지라~…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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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왕(송정미) 안동CBS 개국 4주년 기념 JOY4U CCM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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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왕(송정미) 안동CBS 개국 4주년 기념 JOY4U CCM 콘서트
춤의 왕(송정미) 안동CBS 개국 4주년 기념 JOY4U CCM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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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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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유리 귀한 말씀 읽을수 있게 친구되주셔서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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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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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실
박성실 예수님도 제사가 아닌 말씀 예배로 천국잔치만 하섰던대 신약의 모든 사도 ㆍ신자들 문제 있다면 구원은 제사로 아님 회개로 부터인가‥? 이단도 제사가 아닌 말 로서 시작된다 조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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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섭
신원섭 책이 품절 되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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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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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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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5 July at 14:55 ·
한 구도자의 처절한 구도의 몸부림과 그 굳센 의지를 맘으로 영으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仙人掌 변찬린

내 모르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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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우
진영우 변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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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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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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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5 July at 06:04 ·
제국주의 학문에서 탈피하여 우리 학문하자!

한국 종교계 종사자들은 수입학문, 식민학문, 번역학문은 그만하고 우리 학문을 합시다. 우리가 언제까지 수입학문으로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역할을 할 것인가요. 종교학자, 신학자, 철학자 등 인문학자들은 우리 학문, 우리 삶의 정황에 뿌리박고 사고합시다.
한예로 '종교다원주의'라는 것도 서구신학자의 제국주의형 발상입니다. 우리는 원래 다원적 전통에서 살아왔습니다. 존 힉, 파니카, 칼 라너 들먹이며 서구신학의 질문에 순종하며 대답하는 학생신학은 그만합시다.
차라리 분단한국에서 평화신학, 통일신학, DMZ신학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정황에 부합하는 인류차원의 주제가 아닌가요!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을 되살리고, 김흡영의 도의 신학을 평가하고, 우리 것으로 세계사유의 한계를 돌파합시다.
168You, Sunghwan Jo, 박걸 and 16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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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6

알라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알라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eBook]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은이)더숲201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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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00자평(44)리뷰(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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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280쪽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터치, 크레마 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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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편집 회의
"류시화 시인이 묻고 삶이 답하다"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류시화 시인의 신작 산문집으로, 삶과 인간에 관한 51편의 산문을 묶었다. 시인은 젊은 시절 삶에 여러 질문들을 던졌고,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삶의 경험을 통해 발견해내었다고 한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시인이 여러 해 동안 발견한 삶에 관한 중요한 깨달음들이다.

시인은 특유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며, 행복, 인생, 사람, 상실과 회복의 이야기들을 섬세하고 담백하게 풀어냈다. 시인만이 지어낼 수 있는 문장들은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가만히 귀 기울이게 만들고, 51편의 산문을 차분히 읽어나가는 동안에는 인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과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내 글이 위로나 힘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다만 길 위에서 당신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작가의 이 마음이 독자들에게도 가닿기를.
- 에세이 MD 송진경 (2017.02.17)

책소개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후 류시화 특유의 울림과 시선을 담은 신작 산문집. 삶과 인간을 이해해 나가는 51편의 산문을 묶었다.

여기에 실린 '마음이 담긴 길', '퀘렌시아', '찻잔 속 파리',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이유',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마음은 이야기꾼',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등 여러 글들은 페이스북에서 수만 명의 독자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사여구를 배제하고 언어의 낭비 없이 담백하게 써 내려간 글들이 오히려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경희대 국문과 시절 은사였던 소설가 황순원 선생이 "시는 젊었을 때 쓰고, 산문은 나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청춘 시절 시작된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가 어떤 해답에 이르렀는지 서문 제목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에서 드러난다.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독자의 오랜 기대에 대한 류시화의 성실한 응답이면서 상실과 회복에 관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쉽게 읽히면서도 섬세하고 중량감 있는 문장들로 우리를 '근원적인 질문과 해답들'로 이끌어가는 감각이 시인답다.


목차


서문 _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
퀘렌시아 _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아서
찻잔 속 파리 _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이유 _두 가슴의 거리
누군가의 마지막을 미소 짓게 _한 가슴의 상처를 치유한다면
짐 코벳 이야기 _과정이 즐거웠는가
나는 누구인가 _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마음이 담긴 길 _방황한다고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푸른 꽃 _당신의 푸른 꽃은 무엇인가
지금이 바로 그때 _두 점성가 이야기
예찬 _현실에 색을 입히는 법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 오면 좋겠다 _여뀌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_프루스트의 장미

혼자 걷는 길은 없다 _영혼의 동반자들과 함께
그대에게 가는 먼 길 _신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비전 퀘스트 _삶은,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웃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_인생을 놀이처럼
나의 노래는 _잘못 산 인생은 없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_동굴 속 여인의 일화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_사랑하면 다가오는 것들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인가 _춤 명상
마음은 이야기꾼 _마음 챙김
우리는 다 같다 _공감과 연민
얼굴 속 얼굴 _어머니 명상
운디드 힐러 _상처 받은 자에서 치유자로

두 번째 화살 피하기 _고통을 다루는 기술
어머니 고래 _삶이 알아서 하리라
잘못 베낀 삶 _즐겁게 살라는 것
죽음 앞에서 _절실함을 무력화시키는 일상
어느 추장 이야기 _인디언들의 버리고 떠나기
별이 보이는가 _모든 진리를 가지고 오지 말라
상처 주고 상처 받기 _테러리스트가 되지 말고 테라피스트가 되라

수도승과 전갈 _어느 본성을 따를 것인가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한다 _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_빛은 상처를 통해 들어온다
치료의 원 _바벰바 부족의 지혜
오늘 감동한 일이 있었는가 _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당신의 잎새 _신의 선물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_내려놓은 후의 자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_알아차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_마음 챙김 식사
무명의 이름으로 _순종의 열매
내일은 없다 _라마야나 이야기
문어가 말을 걸다 _회복의 시작
닭이 몇 마리인가 _생명들에 값하는 삶

어둠 속에서 눈은 보기 시작한다 _코기 족 원주민 이야기
금 간 보석 _부서져서 열리기
내 안의 비평가 _비평을 넘어 존재로
우연한 선물 _넓어져 가는 원
숫자에 포함시킬 수 없는 사람 _나와 너
히말라야를 그리는 사람 _불확실성과 친해지기
이타카 _네가 걸어온 길이 너의 삶이 될지니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우리 안에는 늘 새로워지려는, 다시 생기를 얻으려는 본능이 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자기 안에서 깨우려는 의지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고 있으며, 삶에 매몰되어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유하고 온전해지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이 영적 스승을 찾아와 말했다.
"저는 언제나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승이 말했다.
"그대는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에 받은 오래된 상처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그것 때문에 많이 약해진 것이다.&q... 더보기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로 오면 좋겠다. 나도 그 많은 이름을 버리고 당신에게로 가면 좋겠다. 이름을 알기 전에 서로를 느끼면 좋겠다. 그때 신비의 문을 여는 열쇠가 우리에게 내려온다. 현존에는 이름이 없다. 궁극의 신비인 우리는 이름과 분류를 넘어서 있다. 그 세계에서만 우리는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내 안의 신과 당신 안의 신이, 내 안의 불과 당신 안의 불이 만날 수 있다. 내 안의 절대 고요와 당신 안의 절대 고요가. 접기
‘길’의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만 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내가 옳다고 느끼는 길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벗어난다고 해서 낙오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이라는 기준이 오류를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담긴 길을 걸으려면 편견의 반대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든 사람이 당신의 여행을 이해하리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길이지 그 사람들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답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찾는 것이 호모 비아토르이다. 접기
우리 각자의 삶은 한 편의 『오디세이아』이다. 그 대서사시의 완성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각자의 이타카 여행이어야 한다. 그 길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우리의 순례이다. 당신의 이타카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 이타카로 가는 길 어디쯤에 있는가? 애꾸눈 괴물의 동굴에서 고통받고 있는가, 바다의 신의 격랑에 침몰하고 있는가? 아니면 페니키아의 시장에서 호사스러운 물건들을 구입하고 있는가?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을 향해 가는 길 위가 바로 이타카임을 이미 이해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제대로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접기
P46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뒤를 좇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가고 싶은 길을 가라. 그것이 마음이 담긴 길이라면, 마음이 담긴 길을 갈 때 자아가 빛난다. 접기 - sara
P83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 먼 길을 돌아 ‘곧바로‘ 목적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신비이고 삶의 이야기이다. 방황하지 않고 직선으로 가는 길은 과정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놓친다. 많은 길을 돌고 때로는 불필요하게 후회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접기 - sara
P139
배가 열리기 원하지만 사과가 열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은 마음속에서 상상한 배와 현실의 사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그 사건들을 우리는 즉각적으로 개인화시키고 감정을 투여한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우리를 더 상처 입히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문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마음에서 온다. 접기 - sara
P164
당신이 추구의 길에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이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그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 해답은 당신의 목적지가 아닌 그의 목적지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목말라하는 당신을 위한다고 바다를 주려고 하는 사람은 믿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갈증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빛을 찾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하늘을 가져다준다면 당신은 오히려 눈이 멀 것이다.
-중략-
시인 메리 올리버도 썼다.
자신이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언제나 거리를 두게 하시고
‘보라!‘라고 말하면서 놀라움 속에 웃는 사람들과는
언제나 가까이 있게 하소서. 접기 - sara
P247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예의는 ‘너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자세이다. 각자의 내면에 훌륭한 교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연장이 망치일 때는 모든 대상을 튀어나온 못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그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많은 옳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다. 행복한 관계는 비평이나 조언이 아니라 상대방의 ‘순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접기 - 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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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류시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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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한동안 시 창작을 접고 인도, 네팔, 티베트 등지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오쇼,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바바 하리 다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무닌드라 등 영적 스승들의 책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서울과 인도를 오가며 생활해 왔다.

1991년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1996년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발표했다. 세상을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 더보기


수상 : 2012년 경희문학상
최근작 :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인생 우화>,<시로 납치하다> … 총 14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에서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
류시화 시인의 신작 산문집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후 류시화 특유의 울림과 시선을 담은 신작 산문집. 삶과 인간을 이해해 나가는 51편의 산문을 묶었다. 여기에 실린 「마음이 담긴 길」「퀘렌시아」「찻잔 속 파리」「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이유」「혼자 걷는 길은 없다」「마음은 이야기꾼」「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등 여러 글들은 페이스북에서 수만 명의 독자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사여구를 배제하고 언어의 낭비 없이 담백하게 써 내려간 글들이 오히려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경희대 국문과 시절 은사였던 소설가 황순원 선생이 "시는 젊었을 때 쓰고, 산문은 나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청춘 시절 시작된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가 어떤 해답에 이르렀는지 서문 제목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에서 드러난다. 이 신작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독자의 오랜 기대에 대한 류시화의 성실한 응답이면서 상실과 회복에 관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쉽게 읽히면서도 섬세하고 중량감 있는 문장들로 우리를 '근원적인 질문과 해답들'로 이끌어가는 감각이 시인답다.

우리는 삶의 어느 순간에도 자유롭고 진정한 나일 수 있을까? 인생을 이야기하는 많은 산문들 속에서 류시화이기에 쓸 수 있는 글들이 있다. 해마다 계속된 인도 여행과 명상 서적 번역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의지와 끈기를 반영할 뿐 아니라 그의 글들을 '잃어버린 나'를 찾아 나가는 '자아 찾기'로 귀결시킨다. 우리 안에는 늘 새로워지고 다시 생기를 얻으려는 본능이 있음을 투우장의 소를 통해 이야기하는 「퀘렌시아」, 인생의 문제를 초월했다는 듯 우리는 곧잘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하지만 그 노 프라블럼의 기준을 '나'에서 '타인'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빅 프라블럼'임을 보여 주는 「찻잔 속 파리」, 목소리의 크기는 가슴과 가슴 사이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이유」, 과정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짐 코벳 이야기」,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놓친 것은 지금 이 순간들이라는 「지금이 바로 그때」, 현실 세계는 본래 천연색이 아니라 무채색이나, 그 현실에 색깔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라는 「예찬」,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 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여뀌」.

그리고 눈앞의 세상을 보지 않고 삶을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혼이 고통받는다는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여행을 하든 과거에 그 길을 걸었던 모든 사람이나 현재 걷고 있는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된다는 「혼자 걷는 길은 없다」, 신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기 위해 때로는 길을 잃게 한다는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고통의 대부분은 실제의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더 심화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두 번째 화살 피하기」, 모든 치유자는 상처 입은 사람이며 진정한 힐러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사람이라는 「운디드 힐러」…… 책의 마지막에 실린,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곧 우리의 삶이 되리라는 「이타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편 빼놓을 수 없는 명산문들이 우리 영혼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51편의 산문이 태피스트리를 직조해 가며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궁극적인 물음에 답하는 이 책은 오랫동안 그의 신작을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는 그가 20여 년 전에 발표했던 첫 산문집보다 더 첫 산문집인 것처럼 신선하다. 그의 글들이 언제나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작하지 않는 작가이기에 그의 새 글을 읽는 마음이 각별하다. 접기


올해의 책
2017 올해의 책 : 이 책을 선택한 이유


아픈 마음을 치유해주는 최고의 책. - bookholic
힐링을 위한 최고의 책이었습니다. - bookholic
언제나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인 류시화의 책 - 라일락
류시화의 책은 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 우민(愚民)ngs01
류시화님 건재함을 보여준 책이었다~ ^^* 앞으로도 그분의 신간이 기다려진다~ ^^* 류시화님 화이팅! ~ ^^* - 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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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인상깊고 와닿습니다. 너무 기대됩니다! 얼른 읽어보고 싶어요.
한겨울 2017-02-09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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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흩어진듯한 느낌이 들땐 어김없이 서점에 가는데, 이 책을 사와서 읽었더니 다시 중심이 잡혀가는 느낌이에요.
진짜 양서는 읽다 자꾸만 덮게 되는 책이라고 하는데, 이 책이 그래요. 한줄한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생각하게 되네요.
musikdy 2017-03-12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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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오랜만의 신작. 정말 반갑고 기대 됩니다!
김선우 2017-02-09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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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은내용을 이렇게 편하게 전달하시다니...역시 류시화님!!!
룰루라떼 2017-03-19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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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힘을 얻는 글입니다.
레드하우스 2017-02-16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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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힐링이 필요하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책은 아빠가 좋아하는 류시화의 책이란다. 류시화 본인도 그렇게 이야기하듯, 이름과 긴 머리 때문에 자신을 여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대. 얼마 전에 아빠의 회사 선배 한 분이, 류시화가 지금까지 여자인줄 알았다고 하니, 그런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구나. 더욱이 류시화의 감성 가득한 글들만 접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실, 아빠도 맨 처음 류시화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랬어. 류시화에 대해서 찾아보고 나서야, 남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아빠가 류시화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인도 여행기였어. 그 책에 나왔던 글들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고, 그 이후 류시화의 여러 산문집, 여러 시집들, 여러 번역서들을 읽었는데도 가장 첫 번째로 뽑는 것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었어. 그런데,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란 책을 읽고 어쩌면 이제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정도로 이번에 읽은 책이 너무 좋았단다. 아빠는 책을 읽을 때 책에 낙서를 하거나, 접거나, 줄을 긋는 행위를 절대 하지 않는데, 딱 한가지 하는 것이 있어. 인상 깊은 구절의 페이지를 책 앞면지에 적어… 물론 아주 약하게 연필로…. 그런데, 이번에 읽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책 앞면지에는 무려 38개의 페이지를 적었단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지인을 얼마 전에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 분 역시 이 책의 내용이 너무 좋다면서 천천히 아껴 읽고 있다고 하는구나.



1.

그럼 이 책을 아빠가 왜 그렇게 좋게 읽었을까. 책을 덮고 생각해 봤어. 책의 내용이 무적 좋았던 것도 있었지만, 아빠 개인적인 것도 더 더해진 것 같았어. 요즘 아빠가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어. 이 광활한 우주에, 길고 긴 우주의 역사 속에서 한낱 인간이 찰나를 살다 가는데, 뭘 그리 고민하고 힘들어하느냐는 것, 아빠도 잘 알아. 아빠도 늘 머릿속에 그런 것을 새기면서 살아. 하지만, 어떤 신경 쓰이는 일이나 생각이 생기면, 머릿속 한 구석에 자리잡는데, 그것 참 떼어내기 힘든 것 같구나. 아빠가 요즘 좀 그런 시기였거든. 그때 이 책을 읽어서 많은 위로가 되었어. 지은이 류시화가 지금 아빠의 심정을 알고, 옆에서 위로해주는 기분이었단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해 화살을 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도 벅찬데, 왜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 쏘냐고.. 그래서 더욱 힘들게 하냐고.. 그러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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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정신에 가장 해로운 일이 ‘되새김’이다. 마음속에 되새김은 독화살과 같다. ‘문제를 느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문제 때문에 쓰러지지는 말라.’라는 말이 있다.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은 사실 큰일이 아니다. 그 화살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살 때문에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는 것이 더 큰일이다. 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것은 마음의 선택에 달려 있다. 외부의 일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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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라는 것이 혼자는 살 수 없는 법이잖아. 그러다 보면 서로 언쟁이 붙기도 하고, 서로 상처가 되는 말도 하고, 그러다 보면 목소리가 커지게 되고… 그러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제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그것은 회사 생활이나 가정 생활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상황에 대해서 류시화는 이렇게 이야기하더구나.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크게 한다고… 그래서 논쟁을 할 때나 화가 날 때, 서로 가슴이 멀어지지 않게,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화가 반대의 경우, 즉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경우와 빗대어 이야기해주었어. 둘이 사랑에 빠지면 가슴이 가까워져서 속삭인다고, 어떨 때는 바라만 본다고 말이야. 아빠가 깊이 공감하면서도 반성하게 되는 구절이었단다. 앞으로 누군가 논쟁을 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말아야지… 아참, 너희들도 싸울 때 목소리가 높아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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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마침내 스승이 설명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25)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랑을 가면 부드럽게 속삭인다. 두 가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큰소리로 외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지면 두 가슴의 거리가 사라져서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두 영혼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 없이도 이해하는 것이 이것이 사람들이 화를 낼 때와 사랑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스승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논쟁을 할 때 서로의 가슴이 멀어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질러 서로의 가슴을 밀어내서는 안 된다. 계속 소리를 지르면 그 거리를 회복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게 된다.”

===========================

..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 하기에는 너무 좋은 구절들이 많구나. 앞서 이야기했던 책면지에 적혀 있는 페이지를 찾아서 다시 한번 읽어보았어. 그리고 천천히 컴퓨터 자판을 따라 치면서 발췌해 보았어. 나중에 커서 너희들도 힘이 들거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 너희들에게도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돼. 아빠도 가끔씩 이 책을 펼쳐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가까운 시일에 혹시 책 선물을 할 기회가 있다면 꼭 이 책을 해 줄 것 같구나.



2.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의 명언과 책들이 인용해 주었어. 아빠가 읽은 책들도 있어, 그런 책들이 나오면 반갑더구나. 이 책을 중간쯤 읽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이 책에 소개된 책들을 리스트로 정리해서 나중에 기회 될 때 읽어보겠다는 생각. 다 읽고, 앞 페이지부터 다시 들쳐보면서 리스트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책 뒤편에 ‘참고서적’이라면서 인용한 책들 제목을 적어주었어. 이 책들을 아빠가 읽어야 할 책 리스트에 추가해야겠구나. 이 책들은 또 언제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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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오후의 죽음>

조애나 메이시 <내가 사랑한 세상>

짐 코벳 <정글 이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미셸 투르니에 <예찬>

에드먼드 화이트 <마르셀 프루스트의 생애>

페마 초드론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질 때>

이청준 <소문의 벽>

아잔 브라흐마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앤드류 하비 <숨은 여행>

파트룰 린포체 <완벽한 스승의 가르침>

소걀 린포체 <깨달음 뒤의 깨달음>

에크하르트 톨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 수업>

레이첼 나오미 레멘 <할아버지의 축복>

어니스트 커츠, 캐서린 케첨 공저 <불완전함의 영성>

안드레아 조이 코헨 <가면을 쓴 축복>

J.R.R. 톨킨 <니글의 잎새>

파블로 네루다 <추억>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콘스탄틴 카바피 <카파피 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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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7-11-21 공감(2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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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세이] 류시화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작성된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본문에는 도서의 중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이 책을 선택한 이유
시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인이 류시화이다.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한 분이기에.

그의 시를 읽을 때면 난 따뜻함보다는 차가움을 많이 느꼈었다. 그 느낌을 시가 아닌 글 속에서 느끼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면 충분했다.



▶ 도서정보

- 저 자 : 류시화
- 제 목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 출판사 : 더숲
- 발행일 : 17.02.17
- 분 류 : 문학(에세이)
- 기 간 : 17.07.05-06










▶ 총 평 점(한줄평)
9점 / 소개되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가슴을 흔든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은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시간. 그래서 표류했던 마음. 그 긴 방황이 방황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따뜻함보다는 차가움 속에서 오는 평화.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대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대에도 많은 종류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그 기대야말로 삶을 평온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그 기대에 대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 도서평점(항목별)

- 등장인물 : -

- 소 재 : 9점 / 책의 특성상 딱 꼬집어 소재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다. 그래서 더 좋았다. 닭살 돋는 멘트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소재다. ㅎㅎ

- 구 성 : 10점 / 짧은 챕터들의 모음. 각 챕터마다 주제와 이야기가 있다. 짧은 호흡으로 끊어 읽기에 좋다. 개인적으로 이런 구성을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의 이야기들에 빠지다 보니, 묘하게 이야기들이 연결이 된다.

- 가 독 성 : 7점 / 전반적으로 잘 읽힌다. 챕터별로 워낙 짧아서 읽기에 편리한 점이 있다. 하지만 가끔 문장의 어색함이 느껴지곤 한다. 단어와 단어는 괜찮은데, 문장으로 이어지니 개인적으로 조금 갸웃할 때가 있었다. 성향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 재 미 : -

- 의 미 : 10점 / 정답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더 내게 깊게 다가왔다. 정답도, 해답도 아닌 그저 이야기를 해준다. 그것이 내게 생각하게 하는 것. 생뚱맞게 표현하면 우주가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 책 속의 한 줄

[p21 중에서]
인생의 문제를 초월했다는 듯 우리는 곧잘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노 프라블럼의 기준을 '나'에서 '타인'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랴 말로 '빅 프라블럼'이다. 자기중심에만 머물러 있는 관점은 결코 노 프라블럼일 수가 없다.








[p46 중에서]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뒤를 좇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가고 싶은 길을 가라, 그것이 마음이 담긴 길이라면. 마음이 담긴 길을 갈 때 자아가 빛난다.








[p106 중에서]
장소들은 본래의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여행자는 며칠 만에 장소가 가진 신비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먼 길을 찾아가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다. 오랜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장소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낯선 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장소의 요정들은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p201 중에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매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방해한다.










▶ 독서일지

[17.07.05 / p4-67]
당연한 얘기인데 훅 하고 들어온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17.07.06 / p68-277(완)]
어제와 오늘의 느낌은 또 다르다. 처음부터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든다. / 언제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시금 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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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구석시골총각 2017-07-06 공감(2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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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인생의 문제를 초월했다는 듯 우리는 곧잘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노 프라블럼의 기준을 '나'에서 타인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빅 프라블럼이다. 자기 중심에만 머물러 있는 관점은 결코 노 프라블럼일 수가 없다. -p21

류시화님의 글은 여운과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몇 해전에 1박2일에서 복불복을 할때 강호동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나만 아니면 돼! 어쩌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 지도층에서부터 비리를 저지르고도 나만 안 걸리게 증거를 없애면
된다는 발상. 그리고 법을 너무도 잘 알기에 법적 테두리에서 합법적으로 탈세한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청문회에서의 우병우 뻔뻔한 행태등 말이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좀더 가진 이가 베풀어야만 한다. 구천구백만원 가진 이가 백만원 가진 사람의 돈을 빼앗아 일억 채우려는 사고는 버려야 되지 않을까?
- 접기
우민(愚民)ngs01 2017-03-03 공감(15)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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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믿어보련다




글은 녹는점이었다. 글을 경계로 추웠던 마음은 따뜻함을 향해 허물어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외롭다, 음, 격하게 외롭다. 소름 돋는 이 고독을 냉큼 예술로 승화시켜야 해. 우스갯소리로 포장하여 친한 이에게 건네곤 했던 이 말은 사실 진심이었다. 내 말은 아재개그처럼 썰렁했지만 가끔은 웃겼고, 그 말 직전에는 더 자주 외롭고 추웠던 마음이 늘 앞서 있었다.

10여년 남짓 되었을까. 외로울 때면 책을 읽고 느낌을 글로 적었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음을 단지 글로 표현했을 뿐인데, 거울인 듯, 자화상인 듯 나의 글은 잔잔하게 내 자신을 보여주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글을 쓰는 나는 글 안에 있는 나를 보는 관찰자가 되어 그 안에 담긴 마음을 토닥이고 있었다. ‘불완전하고 상처 입은 자신을 아름답게 재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삶의 예술이다. 흠과 결함을 더 창조적인 것으로 변신시키기 때문에 ‘예술’인 것이다.(p241)’아직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문장이 결정적인 흠이지만, 그래도 꿋꿋이 예술이라 세뇌하며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다. 그때마다 거짓말처럼 외로움이 위로가 되는 마법을 경험하며.

‘상처를 외면하지 말라. 붕대 감긴 곳을 보라. 빛은 상처 난 곳을 통해 네게 들어온다.(p183)’외면하거나 감추지 않기로 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당신의 가슴에 담긴 것들이다.(p266)’라는 말처럼, 가슴 뛰는 순간들을 많이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공전 소리는 너무 커서 오히려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주 깊은 슬픔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듯이, 이 책이 그랬다. 이러다가는 책 한 권 통째로 필사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옮겨 적기가 어려웠다. 근 한 달 동안 사무실 책상 위에, 안방 머리맡에, 커피 옆 테이블에 이 책이 놓였던 이유다. 난해한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건만 소설책 읽듯 쭉쭉 읽어 내릴 수 없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잡는 손가락은 습자지를 넘기듯 조심스러웠다. 마음 역시 느린 화면이 재생되듯 천천히 움직였다. 명상록인 듯 잠언집인 듯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보도록 하는 내용들로 가득한 51편의 산문집이다. 나는 걷기 명상을 하는 사람이 되어 느릿느릿 문장의 뒤를 따라 책 속을 산책했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문장들이 발끝에 닿는 풀잎인양 마음 곳곳을 툭툭 건드렸다.



마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졌다.

물음표가 들어온 어느 날은 하루의 매듭을 묶기 전에 책 속의 문장을 따라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p112~113)’, ‘오늘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감동받거나 인상 깊은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나에게 영감을 준 일은 무엇이었는가?(p191)’

쉼표가 들어온 또 다른 날은 과감히 직장 일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일(=웹 소설 「판타스틱 남장신부」몰아보기)을 했다.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한 한다.(p15)’심적으로 힘들다는 친한 지인에게 카카오 톡으로 이 문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위로가 되었다며 격하게 공감을 했다.

느낌표가 들어온 날도 있었다. 많은 위로를 받고 잠이 들었다.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p45)’간혹 주춤거릴 때가 있었다. 시를 쓰거나 글을 쓰면서 퇴근 후의 시간을 보낼 때, 전공과는 전혀 반대편에 있는 이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 걸까 하는 생각에. 그 때에도, 으슬으슬 몸이 떨려 털스웨터에 야상까지 입고 굳이 커피숍에 온 4월 하순의 지금도, 나의 글에는 나의 온 마음이 담겨있으니. 이 길은 분명 좋은 길일 것이다.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 마음이 화해졌다.

화살표가 들어온 날에는 든든한 동지를 얻은 듯했다. ‘내가 지금 걸어가는 이 길, 누군가는 그 길을 걸었으며, 지금도 누군가는 나처럼 길을 걷고 있고, 또 누군가는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p78)’문장에서의‘길’이 물리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디를 향하든 마음이 향하는 곳이라면 씩씩하게 걸어가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책을 읽는 모든 날이 좋았다. 잠시 무로 돌아가셨던 그분이 떠오를 정도로 내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다.



마음의 연필을 들고, 나와 나의 삶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스케치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내가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며 비관적인 시선을 가졌던, 어느 책 속 등장인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던 때가 있었다. 우물을 향해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개구리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듯, 마음을 할퀴는 상처는 철저하게 상대적이다. 누구도 절대적인 크기로 상처의 깊이를 속단할 수는 없다.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그러안은 나는 어리석게도 세상을 탓한다.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거나 도망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스스로에게 쏘는 화살은 피할 길이 없다.(p139)’땅에 떨어진 화살을 굳이 주워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혀온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를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로 분류했다고 한다.(p256) 그의 시선이 참신하다. 주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본다. 어떤 이는 ‘너’이고, 또 다른 이는 ‘그것’에 가깝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그것’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내 글도.



이번 달 독서모임의 토론도서는 소설이었다. 마음이 지쳐있던 한 달 전, 소설을 한 호흡으로 길게 읽어 내려가기 부담스러웠을 때, 이 책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근 한 달간 이 책을 읽고, 힘을 얻은 나는 이틀 만에 토론도서 읽기와 독후감을 클리어 한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p83)’우회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머문 셈이다. 선물과도 같은 책이고, 따뜻한 책이고, 스스로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책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p204)’가장 위로가 된 문장이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처럼, 이렇게 잠시 쉬어도 가면서 가슴 뛰는 순간들로 내 삶을 채워가고 싶다. 마음 어딘가 달려있을 나만의 날개를 믿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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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7-04-24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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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인생은 오디세우스의 여행길 같아야 한다고 류시화는 말한다.
<새는 날아갈 때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마지막 편이 오디세우스 이야기이다. 근 일년 간 슬픔의 시간들을 보낼 때 많은 위로를 준 책이라 깊은 애정을 느끼는 책이다.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이 곧 나의 삶이라며 시인은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난관과 고통을 통해서 성취한 것만이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삶은 풀어야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기에
관념과 공식에서 벗어나 이 삶을 오디세우스처럼 온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손님을 맞이하고
살아있는 동안 경험속으로 뛰어들고
살아있는 동안 삶을 이해하라‘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사는 삶의 과정 그자체의 노래가 아닐까. 수북이 낙엽 쌓인 등산로를 걸으며 떠나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려 애쓴다. 눈부셨던 가을날의 편린들은 그렇게 기억속으로 분분히 낙화하여 떠나고 나만 홀로 남겨져 이 겨울을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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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隱청은 2017-11-25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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