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탄생 : 네이버 매거진캐스트
한국인의 탄생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저
미지북스
2013.10.10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미지북스, 2013)는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을 망라한 한국의 대표적 소설들을
자료로 삼아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
다. 이 글은 <한국인의 탄생>에 대한 국문학자의 서평이지만, “국문학자의 관점에서
정치학자의 국문학 연구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 융합 시대에 다른 분야에 대
한 연구를 시도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며, 최 교수의 책은 국문학을 재료로 했을
뿐 실제로 목표로 하는 것은 “정치사상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왜 한국의 소설을
이용해 정치사상사를 집필하려는 “비정통적인” 방법을 쓴 것일까? 그 사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는 서구의 경우와 같이 사상사로 읽고 분석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저서들, 텍스트가 거의 없다. 말하자면 이론적, 철학적으로 자신이 살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그런 체계적인 저술이 거의 없다.
(...) 이 책은 한국 근대 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우리의 근대 소설
문학에서 창조되어 나타난 일련의 인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 이런 식의 비정통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는 까닭은 우리의 근현대 사상사가
정통적인 방법론으로는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런 방법
론을 선택한 것은 여러 차례의 좌절을 겪은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 방법론의
아름다움으로 학문 연구의 결과를 예단하는 것은 실증주의 사회과학, 특히 현재
미국 학계의 지배적인 흐름이 낳은 심각한 병폐다. (19~29면)
이 책은 오로지 “한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identity) 주제에 집중하고 있으
며, 소설이라는 것은 그러한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짐작된다. 하지
만 어떤 연구자가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좌절”을 겪은 끝에 어떤 책을 내놓았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그것이 “지난 20여 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인
모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느껴온 것(10면)”의 결과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의 탄생>을 “해방 70년이 되어가는 한국학문의 자기반성”으
로 읽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서평자는 이러한 저자의 연구태도가 깊은 학자적 양
심과 창의성, 열정의 결과라고 직관한다.
최 교수의 이 책은 국문학자들에게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국문학계에는 몇 가지 불합
리한 관행들이 있는데,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연구가 지나치게 분리돼 있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최 교수는 문학이 아닌 사상사를 바라보고 있는만큼, 이러한 구별을 인
정하지 않고 허균의 <홍길동전>부터 홍명희의 <임꺽정>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맥
락 속에서 작품을 분석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상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던 만큼, 소설 속의 “인물”을 분석하는 데에 치중한다. 그래서 홍길동, 성춘향, 신소설의 다양한 인물군, 이광수 <무정>의 이형식, 신채호 <꿈하늘>의 한놈, 김동
인 소설의 여러 주인공들, 이광수 <유정>의 최석, 홍명희 <임꺽정>의 임꺽정을 선
정해 분석하고 있다.
서평자는 일단 한국의 소설을 이용하여 정치사상사를 이끌어내려 한 최 교수의 시도
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인문학의 위기, 나아가 “국문학의 위기”가 심심찮게 언급되
고 있는 시점에서, 국문학에 대한 외부의 관심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에는 분명 위험성도 따른다. 그럼에도 저자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뜨거운 관심 때문에 “어렵게 이 책을 내게 되었다(11면)”고 고백하였다. 동시에 이러
한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데서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셨던 듯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
된 결과가 다른 방법론으로 산출된 결과물보다 더 훌륭하고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할
근거가 부족하다(29면)”고 인정한다. 서평자는 최 교수의 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바, 즉 “분석결과를 진리에 가깝게” 하는 데 필요한 바를 밝히는 방식으로 논
의하려고 한다.
2
최 교수가 연구 자료로 소설을 선택한 것은 속된 말로 “소설이 예뻐서”가 결코 아니
다. 짐작컨대 저자는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
을 철학적 이론적으로 논술해간 사상사적 저술을 먼저 검색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
교수도 지적했듯이 그런 저술들 가운데 학술적으로 권위있는 작품이나 고전의 반열
에 든 것은 거의 없다. 예컨대 우리는 미국인 하면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독
일인 하면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프랑스인 하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이탈리아인 하면 몸젠의 <로마사>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한국인” 하면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 저술이 없는 것이다. 서양 각국의 경우에는 위에 언급한 고전들을 제외
하고도 세부적인 연구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주제로 한 탁월한 저술이 없는 까닭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설령 문제의식이 있었을지라도 중화(中華) 사상과 한문 글쓰
기의 압력 때문에 “한국인(조선인, 혹은 고려인)의 정체성”을 주제로 글을 쓰기가 어
려웠을 것이다. 민족 주체성을 다룬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나 일연의 <삼국유사>
등은 고려 후기에 나타났으나, 학문적 논술은 아니었다. 한국적(조선적)인 것에 대한
분과 학문(역사, 지리)적 관심조차 조선 후기에야 겨우 빛을 볼 수 있었다(안정복의
<동사강목>;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인간 집단”으로서 한국인 자체에 대한 관심
은 근대에 이르기 전에는 나타나기 힘들었다.
또한 근대 이후에는 최 교수의 말씀대로 우리 민족이 그러한 체계적인 저술을 할 시
간적 여유가 없었다. 최 교수는 책 속에서 실용적 지식만을 숭상하고 기초적인 지적
작업을 경시하는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매우 열렬한 어조로 비판하는데, 한국인들
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저술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
가 그러한 “반지성주의”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한국인의 탄생>은 그러한 반지성
주의의 주류적 흐름을 뚫고 나온 첫 성과인 셈이다.
그러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우리에게 이러한 사상사적 저술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에게 그런 문제의식이 없어서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특별히 게을러서도 아닐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앞서 말한 사정 때문
에 자기정체성에 대한 저술을 하기가 어려웠고, 근대 이후에는 한국인의 삶이 급격히
근대화(이는 일본화 또는 서구화를 뜻함)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났다. 또한, 당
연한 이야기지만, 저술이란 언어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좋은 저술이 나오려면 한국어
가 학술어로서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近代化)는 특히 초기에
일본의 식민통치와 일본어 이식이라는 기형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서 학자들조차 한국
어로 글쓰는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한국어가 “학문의 언어”로 인정된 것조차
얼마 되지 않으며, 자연과학을 포함한 많은 학문적 관행에서는 아직까지도 한국어가
학술어로서 불신받는 것이 현실이다.
서구에서 국민 정체성에 대한 이론이나 저술이 활발한 것은 그들이 독자적 방식으로
일찍부터 학문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학문은 그저 책읽기나 글쓰기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학문은 물적 인프라(출판산업, 도서관, 대학, 실험실, 연구지
원기관)들을 필요로 하며, 학문의 성과는 대체로 그 나라의 국력과 정비례한다. 특히
“국민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국가의 경영방침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제국의 통치
경험이 있는 국가에서 발달하게 마련이다. 위에서 언급한 저술들을 보더라도 <갈리
아 전쟁기>는 로마 제국 최고 권력자의 프랑스인론이며, <게르마니아> 역시 로마제
1)
국 최고 지식인의 독일인론이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나폴레옹 제국의 경험을 생
생히 기억하고 있던 프랑스 지식인의 미국론이며, 몸젠의 <로마사>는 19세기에 세
계를 향해 제국을 선포한 독일인의 이탈리아인론인 것이다.
로마인은 제국 통치 경험 탓에 프랑스인, 독일인에 대해 대략 2천 년 이전부터 관심
을 가져 왔으며, 이후 힘의 균형이 변하면서 정반대 방향의 연구도 이루어졌다. 즉 고
대에는 이탈리아인(로마인)들이 프랑스나 독일에 관심을 가졌다면, 근대에는 프랑스
인(토크빌)이나 독일인(몸젠)이 외국(미국, 이탈리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몸젠의
경우 신생 제국 독일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로마사를 연구한 측
면도 있을 것이다. 상호 연결되어 있는 유럽 각국의 지정학적 특질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 각국이 14세기 르네상스 이후 엄청난 노력을 들여 자국어 글쓰기를 발
달시켰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 내내 중국문화와 한문 글쓰기의 압력에 시달리며, 성리학 등 중
국 학술의 일부만을 편향적으로 수용하던 한반도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20세기 이
후 한국이 일본의 영향 하에서 근대화를 겪고 서구화된 지금에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너무나 많은 요소가 개입하게 되었고, 이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
는 동서의 여러 문헌(언어를 포함한다)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굳건한 학문적 인프라
로 뒷받침된, 한국어 혹은 외국어 글쓰기를 할 수 있는 한국인 학자들이 나와야 한
다. 최 교수께서는 이러한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의 부진을 비관하시는 듯한
데,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보다 조금 덜 중요한 문제로서, 서평자가 현재 더욱 궁금한 것은 “소설을 선정하는
편법”을 최 교수가 감행한(?) 것이 어느 정도 적실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다. 얼핏
보아도 최 교수가 <한국인의 탄생>에서 자료로 삼은 소설의 선정기준은 그다지 분
명치 않다. 그러나 저자는 연구의 필요성을 시급하게 느꼈고, 학문적 정합성보다 일
단 발언의 공론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소설이다. 저자가 소설을 사상사적 연구 대상으로 주목하게 된 과정을 서평자 나름대로 추론해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1)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사상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2) 한국인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사상사적으로 깊이 있는 저술을 하지 못했다.
(3) 한국인의 실제 모습과 의식을 한국인의 손으로 자세하게 그려낸 자료는 소설
뿐이다.
(4)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소설들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추출해 연구한다면 한국
인의 정체성에 대한 사상사적 접근이 가능하다.
필자는 위의 추론에 대체로 공감하지만,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위와
같은 방법론으로 소설을 활용할 경우 검열이 문제의식을 왜곡한 작품은 제외하거나
제한적으로 다뤄야 한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대부분 작품은 저자와 검열자의 공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약이 많았다. 저자는 그 문제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검열이란 단순히 완성된 텍스트를 첨가, 삭제, 편집하는 것만을 뜻하
지 않는다. 검열 제도가 작동하는 전제에서 창작의 자유가 위축된 사실 자체가 문제
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자가 선정한 여러 작품들은 텍스트 해석만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곧 언급할 이광수의 <유정>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경
우이다.
국문학계에서는 대체로 한국소설의 원형을 세속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고려
시대의 벼슬인 “패관(稗官)”의 기록에서 찾는다. 세속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온갖
번잡하고 시시하며 때로는 저속하고 음란하기까지 한 이야기들이 이른바 “소설”의
감이 되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작고 사소한(小) 이야깃거리(說)”란 뜻
아닌가. 나는 최 교수의 정치학적 소설 연구가 “시정(市情)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라 경영의 기본”이라고 믿었던 고려시대 지도층들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믿는
다.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패관의 이야기가 사소하고 저속한 것은 상관이 없다. 단 거기에는 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진실성이 포함돼야 한다. 진실되지 않으면
아무리 고상한 것도 소용없다는 것, 그것이 “소설(小說)”의 정신이라고 서평자는 믿
는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소설이 허구(fiction)라는 것 때문에 “소설=거짓말”이라고 이해
하고, 소설가를 무슨 거짓말쟁이, 말재주꾼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소설의
본모습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소설이 실제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
러나 “좋은” 소설은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이 소설은 참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구나”라는 평가를 받을 때에 그 소설은 성공한 것이다. 단순히
이것은 흔히 말하는 현실주의(사실주의, 리얼리즘) 소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논픽션이나 자서전, 회고록 같은 것을 쓰지 않는 이상, 아니 어쩌면 그 경우에
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과학에서도 정치가의 회고록을
100% 믿지는 않을 것이다. 회고록 저자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의도적
2)
으로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며, 저자의 의식이나 세계관 자체가 편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문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은 “진정한 현실은 영원히 개별적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있다”는 상대주의의 금언(金言)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근대
소설의 발생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의 근대 소설가들이 “허구(거짓)” 장르로서 소설
을 개발한 데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강력한 개인적 의지
가 작용하였다. 공산주의자 엥겔스가 반동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경향의 작가인 발자
크의 소설을 격찬하며 “어떤 역사서보다 프랑스 19세기 초반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소설의 이러한 마력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
러한 진실성이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부족한 소설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추려
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역
사에 대한 전망과 전체 사정을 고려하는 안목을 필요로 하는 매우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3
<한국인의 탄생>이 이 시대에 갖는 여러 가지 미덕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과는 신소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를 촉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
다. 최 교수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와 <은세계>(1908) 등을 분석하면서, 조선시대 말기에 대한 우리의 역사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 또한 이 시대는 조선
왕조의 운영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하여 마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요약되
는 “홉스적 자연상태”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특히 첫 번째 지적에 완전
히 공감한다. 한국인의 국사지식이 미흡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하기
까지 하지만, 특히 조선 말기에 대한 역사 지식의 부족은 거의 참담할 지경이다. 그리
고 이것은 개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다. 서평자는 한국 근대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
한데도 크게 먹칠이 된 두 구간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1894~1904년이고, 다른 하
나는 1938~1945년이다. 첫째 기간은 청일전쟁으로부터 촉발된 일본 주도의 국
가 시스템 개조기간인 “갑오개혁”부터 러일전쟁까지의 기간이며, 둘째 기간은 중일
전쟁부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기까지의 기간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첫
째 기간이 <한국인의 탄생> 초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신소설이 잉태, 성숙되고 있던 시기였다.
최 교수의 설명대로 신소설은 이상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기까지 하는 소설이다. 문학
적으로 미흡할 뿐만 아니라, 살인 납치 강간 등 온갖 음모와 협잡이 난무하는 지옥과
같은 세계다. 최초의 신소설이라 할 <혈의 누>가 나온 것은 1906년이므로 앞에서
내가 말한 이른바 “먹칠구간”은 벗어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1906년에 갑
자기 <혈의 누>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일전쟁(1894년)으로 인해 부
모를 이별하고 생고아가 된 평범한 조선의 소녀를 “납치하여 미국 유학을 보내고 마
는” 가혹한 내용의 이 소설은 짐작컨대 이인직의 머릿속에서 “첫 번째 먹칠구간” 내
내 잉태되고 자라났을 것이다. 1906년은 이인직이 그것을 손으로 옮겨 종이 위에 옮
겨 적은 해일 뿐이다.
이인직은 흔히 말하는 “골수 친일파”로서, 1910년에 있었던 조선병합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어떻게 보면 “한일병합의 실행자”였다. 이런 사람이 최초의 신소설 작가라는
것은 솔직히 말해 누구라도 직시하기 언짢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인직은 이토록 대한
민국의 전사(前史) 속에서는 기억하기조차 고통스러운 배신자였음에도 “최초의 신소
설 작가”로 남아 21세기의 우리들한테까지 “나를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에
게는 “나는 기억될 만한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러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근대사의 첫 번째 먹칠구간의 비밀이다.
이인직의 <혈의 누>는 1894년 평양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평양 사는 일곱 살 여자
애 옥련이가 조선 땅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에 휘말려 부모와 생이별한다. “착한 일본
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가고, 거기서 4년간 심상소학교를 다니며 신교육을 받는
다. 그후 다시 6~7세 연상의 조선 청년 구완서를 우연히 만나 함께 미국유학을 떠난
다. 옥련은 미국 워싱턴에서 고등소학교를 우등졸업하고 그 소식이 현지신문에 실려
생이별했던 부모와 연락이 닿는다. 그것이 1902년이고, 옥련의 나이는 15세였다. 최 교수는 <혈의 누>를 한마디로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공부의 노예로 만들어
일본으로 미국으로 보낸(124면)” 이야기로 규정하셨는데, 참으로 정곡을 찌른 평가
이다. 이 소설은 결코 정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현실의 이야기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근대소설의 이념은 “삶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허구를 도구로 사
용”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실제 있었던 역사적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묘사는 작품
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인직이 구완서가 아닌 김옥련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능력이 떨어지거나, 작가로서 역량이 부족한 결과라고 볼
3)
수밖에 없다.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가 1894년에 미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진실성
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 교수는 이러한 사실 지적에 머무르지 않
고,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소설들이 집중적으로 창작되어야 했는지 하는 물적 조건을
묻는다. 최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독특한 종류의 소설이라는 판단과 분류를 떠나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이
러한 독특한 작품들이 어쩌다, 왜 이 시대에, 이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
는 것이다. (...) 사실 구한말 역사에서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던 시점부터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에 이르기까지의 시기 동안 어떤 일이 벌어
졌는지,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이 시대
는 기본적인 역사가 전혀 씌어지지 않은 암흑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72면)
참으로 적실한 문제제기이자, 국문학계의 연구관행에 대한 사회과학자의 정당한 비
판이다. 나 또한 최 교수의 이러한 문제제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 교수는 이 시기
에 "신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런 특이한 소설들이 나오게 된 이유를 우리
역사의 첫번째 먹칠구간(18941904) 초기에 공동체의 붕괴와 홉스적 자연상태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최 교수가 파악한 신소설의 특징을 인용한다.
공동체가 개인으로 분해되어 모든 사람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다투며
공포에 떠는,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범죄도 마다하지 않고 여유만 있으면 자신
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그런 공간, 모든 사람들이 아귀가 되어 버린 그런 세상
을 (신소설은인용자) 그리고 있다. (89면)
이 시기를 다루는 3장 2절 <자연상태의 삶과 죽음>은 이 책에서 가장 읽기 고통스
러운 부분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좋든 싫든 한반도의 오백 년 역사
를 이끌었던 조선왕조의 처참한 몰락과정과 그 속에서 겪었던 백성들의 비정상적 행
태들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사실 이것이 더 큰 문제인데) 우리 학계가
이러한 상태의 원인을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의 자기고백 때문이다. 서평을 쓰
기로 마음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크게 저자께 놀란 것 중 하나는 학자적 양
심이라는 말로 단순히 말하고 말 수 없는 어떤 솔직함과 자기진단을 발견했기 때문이
다.
우리가 그토록 나락에 빠졌던 이유에 대해서 밝히는 것은 앞으로 과제이지만, 그 결
과에 대한 최교수의 진단은 정곡을 찔렀다. 그는 조선말기 홉스적 자연상태에 빠진
한반도의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구원의 길을 일본과 병합하는 데서 찾았고, 그러한
대안에 대한 반발이 근대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다고 분석한다(162면). 이제, 서평자
가 앞서 언급한 한국 근대사의 첫번째 먹칠구간이 형성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한국을 일본에 진상(進上)한” 이른바 친일파 1세대가 형성된 기간인 것이
다. 친일파의 기원에 대한 최 교수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우리가 인정하기 고통스러
울지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이제 그것을 딛고 넘어서야 할 때가 왔음을 선언하
고 있다.
아마 그때 조선 땅이 살만한 곳이었다면 이용구도 송병준도 (이인직도 물론 포함된
다인용자)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애국자가 나왔
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
그토록 많던 친일파를 용서까지는 못해 주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168면)
다시, 이인직의 <혈의 누>로 돌아가보자. 이인직은 대체 이 작품을 왜 썼을까? 이
작품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의 물리적 역량이 조선인들에게 충분히 인식된
1906년에 나온 작품이다. 내용 자체에는 거의 현실성이 없지만, “일곱 살 난 여자애
가 일본과 미국으로 탈출하는 것만이 희망”이라는 비현실적인 내용의 소설이 나왔다
는 사실 자체가 시대의 진실이 되어 버리는 기막힌 작품이었다. 즉 "소설 내용:개별
적 현실사건"의 대응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엥겔스가 발자크 소설을 분
석할 때 말한 바 리얼리즘의 과제이다), "작품의 존재:작품을 낳은 시대"의 대응이
문제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문학연구의 과제를 넘어선 것이며, 문학을 사회과학적
으로 분석하는 <한국인의 탄생>이 성립하는 지점이다.
4
지금까지 나는 책의 전반적 특성과 장점, 전체적 한계, 그리고 한국학계는 물론이거
니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 책이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주로 언급하였다. 이제는
세부적인 문제점(그러나 상당히 중요한)을 지적하고자 한다. 저자는 책 7장에서 "새
로운 전사의 창조"라는 제목으로 이광수의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 <유정>을 분석한
다. 이 부분은 국문학계의 원로 김윤식 교수와 큰 견해 차이를 빚고 있어 논쟁의 여지
가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다. 필자는 국문학자의 관점이 아닌, 가능하면 최 교수 본인
의 방법론에 입각해서 작품의 선정과 분석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짚으려 한다.
저자는 이미 책 서두 부분에서 "이 책에서 우리 근대문학사의 명작들을 읽는 방식은
국문학에서 시도하는 방식과 상당히 다를 것(26면)"이라고 밝혔다. 당연한 이야기
다. 국문학에서는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 자체의 특성이나, 언어표현과 사회현실의 관
계를 연구한다. 반면 신소설에 대한 분석을 우리가 살펴봤듯이 저자는 사회현상, 사
상사적 현상으로서 문학작품을 본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의 사회과학적 의미를 찾으
려고 한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국문학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최 교
수의 독법이 국문학연구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평자가 판단하기에는, 유감스럽게도 최 교수께서 이러한 "사회과학적 분석
방법"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그러하며, 이
는 결론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예컨대 7장에서 저자는 이광수의 <유정>을 국문학
자들이 반성해야 할 정도로 세밀하게 독해하고, 그 결과를 해석으로 내놓고 있다. 그
러나 서평자가 보기에 이러한 세밀한 독해는 (분명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저자 본인
이 표방한 방법론과 배치된다. 최 교수는 분명히 문학을 사상사, 사회사적으로 접근
한다고 밝혔음에도, 유독 <유정>을 다룰 때만은 언어 텍스트 자체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평자는 주관화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7장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이 장은 1933년 1012월에 걸쳐 춘원 이
광수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유정>에 대한 분석이다. 작품 내용은 최석이라는 독
립운동가이자 교육자가 유부남임에도 동료의 딸이자 제자인 남정임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고, 주변의 시기와 비난을 견디지 못해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 가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 작품을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
하는데, 그것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해설에서 잘 드러난다.
최석은 이광수가 자신의 시대, 일제 강점기에 만든 '강한 인간'의 최신 모델이었
다. (...) 그의 강함의 핵심 요인은 정임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지키겠다는 이성이
모두 최석 안에서 뜨거운 대결과 갈등을 통해 강화되었다는 데 있다. 최석의 죽음
은 목숨을 대가로 사랑과 이성의 진정성과 위대함을 증명하는 순교였다. (419면)
춘원이 살아있다면 매우 기뻐할 만한, 과연 작품의 가치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고 생
각된다. 서평자는 저자의 이러한 평가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고 싶지만, 굳이 말하라
고 한다면 비판적이다. 단, 서평자는 이것이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 개인적 선호의 문
제가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 근대사의 두 번째 먹칠구간인
193745년의 기원과 관련된 것으로, 일부러 무게 잡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지극히 엄중한"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근대소설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그것이 허구를 통해 성취하려는 진
실"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기준은 분과학문의 영역을 넘어선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혈의 누>를 다시 생각해 보자. 전통적으로 국문학계에서는 이 작품을 비
판적으로 다뤄 왔다. 작가도 극렬 친일파고, 우리가 앞에서 분석했듯이 역사적 사실
과도 맞지 않고, 사건들은 우연이 반복되고, 일본인은 좋게 묘사된다. 그럼 이 작품이
아무 가치가 없는가? 아니다. 전통적인 문학연구의 방식, 그러니까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와 구조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저열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
리가 이 작품의 “존재 자체”를 그 사회가 낳은 일종의 현상으로 본다면, <혈의 누>
는 그 시대의 불구성과 아픔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제목부터
생각해 보자! 피눈물이면 “피눈물”이지 왜 “혈의 누(血の涙)”란 말인가? 이는 이인직
이 최소한 구어가 아닌 문자언어에서는 한국어보다 일본어에 더 익숙했다는 것을 보
여주는 증거다. <혈의 누>는 언어예술이 아닌 사회 병리현상의 일부로 다루어야 하
는 것이다.
최 교수께서 연구의 설득력을 높이려면, 이광수의 <유정>을 분석하는 데서도 이와
같은 사회과학적 잣대를 적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 교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작품의 내용을 세밀하게 독해하여 결론을 유도하는 데 그쳤다. 저자의 <유정>에 대
한 호감은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 최석은 이성 제자를 육체적으로 사랑하려는 동물
적 본능을 초인적 이성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인한 인간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살과 도피의 유혹을 벗어났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최석은 이길 수 없는 싸움
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418면)"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강한 인간(전사)” 창조의
모델은 심훈의 <상록수>로 계승됐고, 이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사랑은 “좋아하는
이성과 결합하는 행복한 감정”이 아니라 “강한 인간을 단련하는 진지한 일”이 되었다
고 저자는 결론짓는다(427면).
서평자는 저자의 이런 결론을 수긍하기 어렵다. 먼저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서평자
가 보기에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내세운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따른 것이 아니다. 저자가 그렇게 했듯이 <유정>의 내적 언어에만 주목하면, 이 작품은 제자에게 마음
이 흔들린 지식인의, 그다지 공감가지 않는 내적 독백으로 읽히는 것이 당연하다. 최
교수는 국문학계의 원로 김윤식 교수가 <유정>을 "방랑의 광증의 분출"이라고 평한
것에 대해 강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지만(374면), 서평자가 보기에 김 교수의 평가는
작품을 보는 또다른 시선으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유부남인 민족지도자가 불륜의 유혹을 극복하면 강인한 인간
이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정상적인가? 저자도 이것이 “잔인하고 변태적인
길(428면)”이라고 적시하였다. 저자께 정중히 여쭙고 싶다. 이러한 잔인하고 변태적
인 길을 “강자가 되고 전사가 되는 진정한 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냐고. 이것은
“불륜의 유혹을 극복하지만 그로 인한 내적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는 남성”은 매우 강
인한 존재가 된다는 말인 셈인데, 과연 이런 논리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신소설
을 분석할 때 나타났던 날카로운 사회과학적 시선이, <유정> 앞에서는 갑자기 무뎌
지는 이유를 서평자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저자의 충분한 보충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기를 원한다.
지금의 상태로서는 저자가 “전사의 창조”라는 자신의 결론을 위해 작품을 끼워 맞췄
다는 느낌을 준다. “허구를 통해 진실을 추구한다”는 근대소설의 기준에서 볼 때, <
유정>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가져다 주었는가? 어쩌면 이광수 본인은 이렇게 생각
했는지도 모르겠다. “민족 지도자로서 고결한 도덕성은 유지하고, 사랑의 이상도 놓
치지 않으려면, 처절한 내적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결론은 삶의 포기가 아닌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죽음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던 최 교수가 이러한 춘원의 논리를 비판하지 않
는 데서 서평자는 놀라움을 느낀다.
춘원의 위와 같은 논리는 조금만 살펴보아도 소영웅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며, 역
사와 현실에 대한 관심을 거세당한 정신주의(精神主義)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
한 정신주의, 정신의 승리가 공허한 것임을 통렬히 비판한 작품이 <유정>보다 12년
전에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내놓은 소설 <아큐정전>이었다. 여기서 루쉰은 냉철한
현실인식과 실력이 갖춰지지 않은 “긍정하는 정신”은 결코 약자들이 취해서는 안되
는 길임을 설득력 있게 말했다. 설령 춘원이 제시한 최석의 길이 진짜로 “강자(전사)
로 단련되는 길”이라고 한들, 이는 대다수의 백성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아닌 것이다. 최대한 높이 평가한들 그것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지도자가 취해야 할 높은 정신
적 극기의 사례”일 뿐이다. 우리는 차라리, 이인직이 <혈의 누>와 같은 “병리적 신
소설”을 쓴 이유를 탐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광수가 왜 <유정>과 같은 “병리
적 근대소설”을 썼는지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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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최 교수도 모르지 않겠지만, 국문학계의 춘원 이광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간단하지가 않다. 말년의 친일행각 때문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부정적 평가는 이광수 소설의
가치가 실제로 낮다는 판단의 결과다. 여기서 “가치”란 언어예술의 완성도를 뜻하기
도 하고, “허구를 통해 진실을 탐구한다”는 근대소설의 정신에 미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인직의 신소설이 그러하듯, 이광수의 작품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사회적
증거” 정도의 뜻을 지니는 것 같다. 이러한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는 인색한 국문학자
들은, 이광수 소설을 과도한 도덕주의로 인해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한 변태적
시각의 산물로 처리하기까지 한다.
서평자 역시 이광수 소설의 문학적 가치는 별로 없다고 보지만, 사회과학적 시각에
입각한 역사적 가치의 평정(評定)은 엄밀하고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다. 그가 변태적인 소설을 썼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왜 이광수는 그런 소설밖에 쓸
수 없었는지, 그가 살았던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것
은 조상에 대한 후손의 의무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발
견할지도 모른다. 마치 <친일인명사전>이 우리 조부와 부친 세대의 모습이자, 우리
의 자화상인 것처럼 말이다.
이광수가 <유정>을 썼던 1930년대 초반은 이인직이 <혈의 누>를 쓰던 시대와 많
이 달랐다. 일단 이 시대는 최 교수가 “홉스적 자연상태”라고 규정했던 역사의 먹칠
구간이 아니었다. 일본의 힘일지언정 강력한 치안(治安)과 내정질서가 확립되어 있
었고, 많은 사료들도 확보돼 있어 한국인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지냈는지 꽤 심도있
게 알 수 있다. 1926년의 만세운동,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총독부 통치가 상당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인들 중에서도 포기
4)
5)
6)
할 사람은 포기했으며, 저항할 사람은 이미 외국으로 가서 거점을 잡은 상태였던 것
이다. 문학사적으로 보아도 이 시대를 준비했던 1920년대는 한국어로 된 상당수의
문학이 축적되는 첫 10년간이었다. 춘원 이광수(1892년생)만 해도 한국어로 된 선
배의 글을 읽고 문학수업을 할 수 없었던 불행한 세대였다. <무정>(1917)을 통해
조선 전체에 문명(文名)을 널리 떨친 춘원의 글을 읽으면서 “문학”을 배웠던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였고, <유정>은 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정>을 읽을 때, <혈의 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잘 모르는
시기에 접근하기 위한 열쇠로서 작품에 접근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어느 정도 알려진 시대의 특성과 <유정>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춘원은 대체로 사회 현실을 폭넓게 묘사하기보다 자기의 분신과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내적 갈등을 즐겨 그렸다. <무정>(1917)의 이형식
이 그랬고, <유정>(1933)의 최석이 그러했으며, <사랑>(1938)의 안빈이 그러했
다. 특히 <유정>과 <사랑>은 사회 지도층 인사인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이라는 제
재(題材)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어, 얼핏 보면 똑같은 작품처럼 헷갈릴 정도이
다.
루쉰은 자기 작품의 주인공인 아큐(당시 어리석은 중국민중의 전형)의 정신주의를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풍자, 비판했지만, 이광수는 풍자나 자기비판과는 거
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진지하고 고지식했으며, “진심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믿음은 본인의 성향에도 기인하겠지만, 그러한 성향을
결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도산 안창호(1878~1938)의 영향이었다. 흔히 도산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방식으로 준비론 내지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고, 이광수는 충
직한 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유명한 “흥사단 입단문답”에서 알 수 있듯이, 도
산이 우리 민족에게 요구했던 것은 “진실된 마음”과 “거짓없음”이었다. 그리고 그것
은, 오늘날 사람들이 얼핏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가르침
이었다. 흥사단 입단문답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문: 군은 어느 나라 제품을 안심하고 사시오?
답: 독일 것, 미국 것. 문: 우리나라 제품은 신용 못하시오?
답: (쓴웃음을 지으며) 신용 못합니다. 문: 어떤 나라의 상공업이 신용을 못 받고서 그 나라가 부(富)할 수 있겠소?
답: 상공업에 신용 없이는 그 나라가 부할 수 없습니다. (이광수, <도산 안창호>, 하서, 2000, 171면)
믿음이 없으면 경제도 발전할 수 없다는 도산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외제차를 선호
하는 분위기가 불식되지 않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에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춘원이 그토록 정신주의에 깊이 기울게 된 까닭도 여기
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춘원의 작품 경향은 언제나 일관되다. 심지어 1941년에 나
온 친일소설 <그들의 사랑>에서도 춘원은 “진심으로 일본에게 충성을 다해야 일본
인으로부터 차별받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여 동료 조선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
하는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조선인 마키하라(본명 이원구)를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춘원 정신주의(精神主義)의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
대로 <유정>의 위험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될 수
없지만, 진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자명한 진리다. 생각
해 보자. 왜 독일차가 좋은가? 오늘날 벤츠 본사가 있는 독일 남서부 슈투트가르트
지방 사람들은, 예로부터 “고지식하고 검소하며 놀 줄 모르는 일벌레”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광수도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다. 춘원은 문사들치고는 특이하게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
자세와 개인적 성품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뛰어난 자연과학 기술, 그러한 기
술을 산업화할 수 있는 물적 인프라, 그리고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금융산업의 발달
없이, 진심만으로 독일차가 나올 수 있었을까? 준비론 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도산의 가르침은 단순히 진실하라는 것이 아니었고, “진심을 다해
물적 토대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우리 민족에게 더 큰 시련을, “유
부남의 불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시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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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가 <유정>을 쓰고 있던 1933년 내내, 도산은 차디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
어 있었다. 1932년 김구의 기획에 따른 윤봉길 의사(義士)의 상하이 폭탄 테러로 인
해 마침 그곳에서 한국독립당 활동을 하던 중 애꿎게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 국내로
압송되었던 것이다. 도산(준비론자)은 당시 이승만(외교론자), 김구(무력행동론자)
등과 함께 국외 독립운동 세력의 한 중추였고,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중에 강
제로 입국한 셈이다. 연구자들은 이광수가 도산의 체포를 슬퍼하고 자주 면회를 갔다
고 기록한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와중에 쓴 소설이 유부남의 정신
적 불륜을 정신적 투쟁으로 승화시킨 <유정>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1938년
3월 감옥에서 얻은 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도산이 경성제대병원에서 숨을 거두신
직후에도, 춘원은 <유정>과 매우 비슷한 분위기의 정신적 불륜소설 <사랑>을 썼
다. 물론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자유가 있고, 자기가 모시던 어른이 돌아가신다고 해
서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창작에 임하는 이광수의
이런 행태가 아름답거나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광수는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어떤 연구자의 말대로 고아였던 탓에 “애정 기갈증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일까?
이 자리에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어쩌
면 이광수만이 답할 수 있는,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서평자가 말하고 싶은
취지는, 이토록 엄중한 시기에, 왜 민족의 스승을 자처한 이광수는, 그토록 사랑놀음
과 관련된 주제밖에 (물론 단순한 쾌락의 사랑놀음은 아닐지언정) 다루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또한 일종의 병리현상일 수 있다는 가설을, 우리는 진지하게 검토해
야 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설 수준에서나마, 당시의 정세와 관련지어 찾고 싶다. 이광수가 <사랑>을 내놓은 1938년은 한국 근대사의 두 번째 먹칠구간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때 국문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어
조차 쓰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한국문학이 멸절될 상황에 놓였고, 그러한 시기가 있
었다는 것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러한 이름을 붙이게 했을 것이다. 실
제로 거의 모든 문인들이 친일작품을 지었고, 그 부끄러운 역사는 실제로 1950~60
년대에 걸쳐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먹칠되었다. 그것을 다시 복원하여 그 시대의 맨
얼굴을 드러낸 책이 임종국의 <친일문학론>(1966)이며, 그 성과를 이어받아 사학
계의 성과로 이뤄낸 것이 <친일인명사전>(2009)인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이때 이런 암흑기가 시작된 것일까?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은 당시의
정세 변화다. 1937년 7월 관동군이 북경을 공격함으로써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그
보다 한달 앞선 6월에 온건한 준비론을 표방하던 동우회를 친일화하기 위한 공작으
로 이광수와 안창호 등 동우회 간부가 수감되었던 것이다(안창호는 1932년 수감되
었다가 35년에 가출옥했고 망명을 준비하다가 서두르지 못해 재수감됨). 안창호 선
생의 육신은 이 두 번째 수감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맞이했고, 춘원도 6개월이라는
비교적 긴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이광수는 출감한 뒤(1937.12), 흥사단과 동우회의
큰 어른인 도산을 잃고(1938.3),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나서며, 일본 사법부의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가공할 만한 “진실된 친일(親日), 겉과 속이 같은 친일(親日), 불쌍한
우리 민족이 살길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친일(親日)”의 길을 가게 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면, 우리는 <유정>에서 춘원이 제시했다는 이른바 “전사
의 길”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섣불리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진정한 강자(强者)일까? 춘원 이광수라는 사람은 도
산의 1차 검거의 원인이 되었던 1932년의 윤봉길 의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침묵했다. 그의 세계관(준비론, 민족개조론)에 따르면 윤의사의 행동은 진정한
강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객기의 분출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객기의 분출이었을
까? 윤봉길 의거가 없었다면,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장개석이 연합국 수뇌
들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까? 1945년 9월
미국 군함 미주리 호의 함상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일본의 서명
대표는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였다. 그는 다리를 절고 있
었는데, 미주리 호 함상의 그 수많은 미군들 가운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
으리라. 그는 윤봉길 의거의 현장에 있었으며, 윤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가 절단되
었던 것이다.
윤의사의 행동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이광수가 던진 “강자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의
깊이를 그와 다르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탄생>은 우리 학계에서 최초로
이 문제를 제기한 책이지만, 너무 많은 사정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지적함으로써 이광수식 “강자 만들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다. 한국인 가운데
저항시인 윤동주(1918~1945)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광수가
친일행각에 열중하던 1941년 당시,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그러
나 그는 “시를 쓰려거든 일본말로 쓰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서슬퍼런 압박에 굴복하
지 않았고,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마치 <유정>의 최석이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대신 끓어오르는 욕망의 보복으로 스트레스성 죽음을 맞이했듯이. 그
러나 차이도 있다. 윤동주의 죽음은 “실제 상황”인 반면, 최석의 죽음은 허구인 것이
다. 그것도 그냥 허구가 아니라 “그것의 진실성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허
구”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누가 진정한 강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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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중고등학생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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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무엇을 생각하
[아포리아] 유럽의 자
작가란 무엇인가
[편집후기] 작가들은
7
나는 이미 <한국인의 탄생>에 대한 서평으로 시작하여 너무나 많은 말을 내뱉고 말
았다. 글을 쓰는 내내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고, 실천 없는 글쓰기의 무력감을 절
감하며 말을 조심해야 했다. 정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 다만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되겠기 때문에, 저자께 드리고 싶은 몇 마디의 말씀과 함께 마무리를 지어야 하겠
다.
<유정>이외의 다른 작품들에 섬세한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한다. 힘과 권력이라는
주제는 사회과학의 주요 테마인 것이 분명하고, 그 점에서 “강자가 되는 길”을 제시
한 한국소설들을 찾아 분석한 취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유정>말고도, 이광수 말고도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고민한 작가와 작품들이 있다. 여성적 섬
세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강경애(1905~1943)의 처절한 강인함, 황무지 같은
식민지의 황야를 관통하며 사회주의자가 되어간, 그리고 결국은 북한의 애국열사릉
에 묻힌 이기영(1895~1984)의 품위 있는 강인함, 그리고 어떠한 논리와 협박으로
도 자기 말을 잃은 민족의 독립은 있을 수 없다는 자명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윤동
주의 순교자적 강인함을 기억하고, 이들이 현대 한국인들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바
까지 탐구해야 최 교수의 작업은 완성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이신 최 교수의 저술에 깔린 문제의식으로서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
판”을 언급하겠다. 우리 사회에서 순수한 학문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공부는 출
세의 수단이 된지 오래이다. 이때 “출세”라 함은 결국 <한국인의 탄생>에서 누차 이
야기했던 “강자 되기”의 다른 말일 뿐이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가, <혈의 누>의 배
경이 되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즉 홉스적 자연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빼앗기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학문이고 뭐고
간에 그 절대원칙의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IMF 사태 이후 그러한 흐
름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서평자가 생각하기에 이광수가 진실된 정신을 그
토록 강조하고, 술도 마시지 않고,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하면서 지낸 이유도 바로 이러
한 “급박한 생의 요구”였을 것이다.
최 교수의 취지가, 우리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반지성주의”의 근원에
이광수의 <유정> 같은 작품들이 놓여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라면, 서평자는 전적으
로 동의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광수의 “진실된 정신”은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 생존
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1938~1945)에, 생존이라는 더 큰 명제 앞에서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민
족”이라는 가치를 지켜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반면, 서평자가 보기에 안창호 선생
이나 윤동주의 “진실된 정신”은 반지성주의(생의 욕구를 위해 지적 작업의 가치를 후
순위로 미루는 것)를 벗어나 있다. 거기에는 생존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의
근원은 국제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품위(안창호)이거나, 탁월한 수준의 민족교
육과 보편적 기독교 정신(윤동주)이었다.
서평자는 이러한 진지하고 엄청난 문제를 고민할 기회를 주신 저자 최정운 교수께 깊
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열띤 토론과 폭넓은 연구가 이어져, 진정으로 이 사회가 반지
성주의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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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4년 2월
'아포리아북리뷰'시리즈보기(37/39)
주석
제공 [아포리아 북리뷰] Vol.2, No.2, 2014.02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www.aporia.co.kr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변화와 연속의 서사
학교 속의 문맹자들 공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명의 지배영역 생명의 법철학적 판단기준
문화로 본 종교학 '종교' 너머의 종교 연구를 꿈꾸며
전쟁은 속임수다 리링의 병가론과 중국의 전통
자살의 전설 분노와 상처, 사랑과 그리움으로 빚어 낸 아버지의 초상들
매거진 전체 기획/단행본 한국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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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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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말하면 “한국인이란 누구인가(혹은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진지하고 급
박하고 심각하게 질문한 이들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식민통치의 주체였던 일본
인들이었을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 강의했던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무속고나
다카하시 토오루가 조선학술사 같은 것들이 그 증거다. 물론 이런 저술들은 오늘
날 부분적으로 인용 없이 이용되거나, 혹은 식민사관으로 매도되면서 잊혀져 발
전적으로 극복되지 못했다.
2
이때 언어는 한국어이면 가장 좋겠지만, 정체성론은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을
독자로 하기도 해야 하므로 굳이 한국어가 아니라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극단
적으로 말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영어로 쓰고, 필요하면 번역을 해도 된다. 예컨대
퀘이커교도였던 일본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는 1899년에 무
사도(Bushido the Soul of Japan)를 영어로 써서 미국에서 출간했고, 베스트셀러
가 되었다. 이는 그와 연배가 비슷한 서재필(1864~1951)이 한국에서 독립신문 영
문판 원고를 직접 썼던 일과 상응한다. 다만 니토베는 초기의 제국적 통치경험과
물적 인프라,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자기 국가에 대한 자부심 덕에 학문
적 저술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서재필은 그러한 것들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몽과 언론활동에 먼저 손을 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이 시기가 왜 먹칠구간이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
다. 1894년은 갑오개혁이 있었고, 1895년 을미사변,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대
한제국 선포, 1898년 만민공동회 운동 등 최소한 이 시기의 전반부만큼은 상당히
많은 역사적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 번째 먹칠구간은 두 번째 먹
칠구간에 비해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그
실제 내부 정황에 대해 섬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컨대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본군의 경복궁 포위라는 무력시위로 인해 강제된 것임을 우리는 학
교에서 가르치는가? 1898년의 만민공동회 운동이 한국사에서 최초의 공화주의
(共和主義) 운동이었으며, 그것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이승만(대한민국 초대 대통
령)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우는가? 그리고 1898년 이후 러일전쟁이 일
어나는 1904년까지의 침묵 기간이 서양사에서 말하는 일종의 왕정복고(王政復
古)에 해당하는 반동(反動) 시기라는 것을 우리는 아는가? 더 나아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는 배우는가? 서평자가 보기에 한국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섬세함의 부족이며, 그 문제의 원인은 고통스런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와 솔직함
의 부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역사왜곡에 못지 않은 역사인식의 왜곡, 역사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인 “과거에서 배우는 미래를 위한 교훈 찾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4
서평자는 김윤식 교수를 두둔하거나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김윤식 교
수의 평가는 춘원문학에 대한 단순한 폄하가 아니라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김 교수는 춘원의 성격과 작품세계의 발전 과정 전체 맥락에서 <유정>에 대해 가
치를 매긴 것이고, 실제로 김윤식 교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 문학현상을 사
회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최 교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5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친일에 이르는 내적 과정을 그 자체로 살피고,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비판적 평가를 내리는 연구도 있다. 국문학자
로서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국문학계의 면모도 꽤 다양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대표적인 연구로 심원섭, <이광수와 아베 미츠이에, 일본어 시 창작의 문제
>, {일본 유학생 문인들의 대정소화체험}(소명출판, 20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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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것이 {한국문학통사}에서 보여주는 조동일 교수의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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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출판사 편집후기 및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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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의견 전체의견
jssa**** 저는 본 저서의 미흡한 부분을 다루는 최정운 교수님의 후속 저서가 곧 출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본 저서를 읽고 "장군의 아들 1편"만 본 것 같은 찝찝함이 느껴져서
요. 하지만 "장군의 아들"처럼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곧 "장군의 아들 2편"이 나오길 기
대하겠습니다^^*
20140214 10:56 신고
답글
제국/식민지와 무사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개혁의 속도를 가속화 시키면서 천황제 중심의 이데올르기를 근본으로 하여 중압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복구하였고 특히 서구의 신군사무기체를 빠르게 구축함으로서 아시아 대륙에 대한 유럽 제국주의적 모델을 실험하였다.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에서 명치유신까지 약 700년간은 직 간접으로 지배계급으로서의 영주와 천황 그리고 무사계급인 사무라이와의 관계로서 권력관계가 규정되어져 왔다. 중세 막부체제의 성립 그리고 메이지 혁명의 근대화를 추진 시켰던 주도세력들이 사무라이 출신의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평지가 협소한 산지지형을 이루며, 대륙에서 볼 수 있는 광대한 구조성의 평탄지역은 볼 수 없다.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생산 활동의 무대로 삼아온 평탄지는 산간의 분지나 하천의 퇴적 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곡저평야 그리고 충적평야 등으로서, 좁은 일본열도 안에 점점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점점이 분포한 평지를 중심으로 막부체제의 특징인 270여 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인 ‘번’으로 구성되어지는데 이는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로서,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킨다. 오늘날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 그 밑의 가신들을 번사라고 부르지만 실제 그 당시에는 다이묘 집안의 명칭으로 번을 지칭했고, 봉지에 ‘후’ 호칭을 붙이거나 본래 관직명을 부름으로써 번주를 호칭한다. 에도 시대부터 ‘폐번치현’ 직전까지 존재했던 번들은 보통 ‘에도 300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어 졌지만 실제 존재했던 번들의 수는 500여개에 이르지만 신설, 폐지 합병을 거듭하면서 평균적으로 270개의 번이 열도에 분포되어 있었다. 에도시대에는 국가를 뜻하는 ‘구니’가 ‘번’을 의미했다. 그 당시에는 통일국가의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으로서 도쿠가와막부에 의해 전국통일은 이루어 졌지만, 그것은 막부의 수장인 쇼군과 번의 영주인 다이묘의 군사적 관계에 한정된 것이었다. 막부는 약 800만 석 규모의 직할영지에 대해서만 징세권과 지배력이 있었고 각 지방, 곧 번에 대한 징세권과 주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영주에게 전권이 주어져있었다. 다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각 번은 그 규모에 따라 군사동원의 의무만 있었다. 막부의 수장인 쇼군을 정이대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납세와 국방의 의무라 본 다면 번의 주민은 막부에 대해서 국방의 의무만 있었고 납세의 의무는 전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번에 대해서만 부담했다. 번의 주민은 영주의 승인 없이는 번의 경계를 넘을 수 없었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일반 주민에게 번은 곧 국가였다. 각각의 번은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번의 지역을 벗어나려면 번청의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번의 경계지점에는 ‘세키쇼’라는 검문소가 있고 다른 번으로 갈 때는 지금의 여권에 해당하는 ‘데가타’가 있어야 통과 할 수 있었다. 무단으로 번의 경계를 넘을 때는 탈번의 죄를 짓게 되고 영주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며 사형에 처할 정도의 무거운 범죄행위가 되었다.
사무라이란 기본적으로 번주에 의한 자기 무장세력 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 부담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집단이다. 근대국가의 군인이 국가의 중앙 행정관청으로 부터 무기를 부여 받아 무장하고 국고로부터 급료를 받는 관료적이고 타율적인 무장 집단이라고 한다면, 사무라이란 지방의 번주의 재정으로 전투를 위해 농민으로부터 분리된 전문적인 전사 집단을 가리킨다. 본래 이러한 전사 집단은 고대국가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지방의 실력자가 자기 집단을 방어하기위해 무장하였던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한 탁월한 사무라이의 지도 아래에 그들만의 독자적인 생활규율과 에토스를 가지고 집단을 형성하여 중앙화된 율령 국가의 바깥쪽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천황이나 귀족들에게는 그러한 무장 세력이 사병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그들은 독립적으로 장원을 개척하여 중앙의 귀족이나 승려들에게 기부하면서 조건적으로 징세권이나 재판권의 중재로부터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치외법권적인 무장집단간의 헤게모니 각축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기까지 전국적인 동란을 거쳐 1615년 도요토미의 붕괴와 도쿠가와에 의한 통일과 전국지배의 확립에 이르게 되는데, 사무라이들에 의한 일본의 지배는 12세기말 가마쿠라 막부에서 막번체제에 이르기기까지 수백년의 시기를 거쳐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무라이에 의한 장기적인 제도의 완성이 근대의 메이지 혁명까지 이르러 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사도라는 말은 전국시대 말기와 근세 초기에 걸쳐 무장들에 의해 사용되어 지던 용어로서 가훈류의 형태로 전승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일본과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 된 것은 1899년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잠시 체류하면서 영문으로 집필한 퀘이커 신자이며 미국과 독일에서 학자로서 명성이 나 있었고 1920년대 국제연맹에서 중역을 맡았던 일본의 국체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자인 니토베 이나조의 ‘일본의 영혼, 무사도’가 저술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에 참여하고 4년 뒤에 저술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5년 뒤에 러일전쟁을 일으키었다. 두 차례의 일본인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해외에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무사도’는 일본인의 전쟁에서 승리한 정신력의 우월성의 골격을 설명하는 해설서로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근대일본은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비서구권의 세계에서 유례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는 국가이었다. 니토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사이에서 무사도와 기독교적 기사도를 대비하면서 일본을 서양과 동등한 위치에 둔다. 그는 여기서 서구인들이 설정한 동양에서 일본을 분리해내어서 서구와 일본을 동등하게 위치 지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일본의 위상을 이웃 나라인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일본을 분리해내어 ‘인류가 고안해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것’인 무사도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등 국민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 시킨다. 이 책에서 니토베는 외국인들에게 유럽의 역사와 문학을 소재로 비교하면서 일본인의 정신생활을 중심을 설명한다. 니토베에게 있어 무사도란 무사가 그 직업에서 또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 이해하였는데 무사의 법도, 즉 무인계급의 신분에 수반하는 의무이다. 그에게 있어 무사도는 현재에도 과도적인 일본의 지도원리이며, 또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힘으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한 원동력, 청일전쟁에서 나타난 불굴의 인내와 용기도 무사도의 유산이다. ‘일본인이 외국으로부터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되는 것을 못 견디는 명예심’이 무사도의 발현에 따른 결과이다. 러일전쟁 후 문명개화의 반동으로 일본의 복고주의가 대중화될 즈음에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동양의 정신문명 그 가운데 일본의 특수성의 산물인 일본정신 으로 무사도를 소개한 이가 동경제국대학의 철학과 원로이며 천황제 국가의 이념적 틀을 준비한 관 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 이다. 그는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비판하면서 무사도에는 경전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무사도의 지적계보 중에서 야마다 소코의 ‘무교소학’을 가리키며 일본의 전통과 사상에 기원을 두지 않은 니토베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단순히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 청일, 러일전쟁의 연속적인 승리를 기초로 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으로서의 자의식의 통합을 강조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서양과 동양의 대등성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 서구의 역사와 철학이나 문학의 설명이 필요치 않고 무사도는 오히려 야마가 소코로부터 시작해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거쳐서 막부말기의 지사들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으로 이어오다가 메이지 군인을 통해 발현되는 일본민족의 정통성안에서 그 실천적인 가치를 이끌어 낸다. 무사도란 실행에 따르는 일종의 정신훈련이며 일본고유의 상무기상과 유교, 선 이 삼자가 융합 조합되어 발전된 것으로서 그 시원과 운명을 일본민족과 함께하는 초역사적인 것이다. 금후 일본의 도덕을 정립하는 방식은 반드시 무사도의 정신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노우에는 무사도를 민족과 함께하는 역사적 실체로 봄으로서 도쿠카와 시대의 무사의 생활윤리로 기능하였던 무사도는 메이지유신에서 국민도덕으로 변용되어야한다. 각 번의 번사가 주군에 대하여 충절을 지키던 도투가와 시대의 무사도는, 명치국가의 성립과 함께 무사의 조직이 군대의 조직으로 바뀌었으므로 군대는 천황에 대해 충절을 지키는 무사도가 되어야한다. 이와 같이 이노우에게 있어서 무사도는 번과 주군에 대한 충절로서의 윤리는 천황제국가에서 국민도덕인 천황에 대한 충성의 윤리로 재정립된다.
이노우에 이후 무사도 담론은 총력전 체제하의 기능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이는 와쓰지 데쓰로이다. 와쓰지 데쓰로는 1980년대의 신우익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로서 조명 받은 인물로서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의 서구철학자에도 정통해 있는 도쿄제국대학의 철학 교수였다. 와쓰지는 전전 일본인문학의 총제적 대표주자로 불리 우기도 한다. 그는 초기작인 ‘니체연구’(1914)와 ‘시렌 키에르케고르’(1915)를 통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니체나 키에르케고르는 유럽의 대표적인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자로 ‘초인’ 그리고 ‘단독자’등의 주요개념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러한 명성을 얻고 5년 만에 ‘일본고대문화’(1920)에서 기존의 실존주의적 연구에서 전향하여 ‘천황이 폭압을 쓸 것도 없이 모든 백성의 마음을 표현했던 군신일체의 무비의 고대 국체’를 찬양했다.
2. 식민지 조선의 무사도 동원 이데올로기: 화랑도
한국인의 정신을 표상하는 대표적인것 하나는 화랑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열망하였던 대한제국 애국계몽기의 이상적인 국민상이라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화랑을 개인의 도덕적 완성의 모델이자 국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국민의 자질로서 소환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화랑은 근대 한국의 자기구성 과정에서 100여 년 동안 변주되며 만들어진 전통표상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기에 발명되기 시작한 화랑도 이데올로기는 고정된 형태로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특히 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자들의 조선적인 고유한 것에 대한 구성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민족 이데올로기와 식민 말기의 총동원 체제하에서의 동원 이데올로기로서의 화랑도에 대한 표상은 그 의의를 달리하고 있다.
화랑도에 대한 담론의 문제는 화랑에 대해 어떤 것을 논하기 전에 화랑 그 자체의 실체 즉 화랑의 실재성에 관한 문제이다. 화랑의 존재를 확인 해 줄 수 있는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아직까지는 문헌학적 검증이 이루어지 않은 가설의 단계에 있다. 이 ‘화랑세기’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540년부터 681년까지 기간 동안의 전기이다. 20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이 문헌에 대한 해석은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의 견해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일본제국 시대 관 학자들의 식민사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강한 민족, 자랑스러운 역사의 실증이라는 미명하에 민족사를 탄생시켰던 학자들은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역사소설로 폄하하면서 위작으로 판정하였다. 다른 하나는 관학사학자들의 민족사학 그리고 실증사학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한국사의 원류를 내물왕 이전의 신라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화랑세기’를 진본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화랑세기의’ 위작이냐 진본이냐의 시비를 떠나서 화랑에 대한 전승 문헌은 단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 기사와 ’삼국유사의 권3, 미륵선화 미시랑 전자사 조‘ 기사와 함께 두 기사만이 원본으로 남아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413-491)은 국토를 넓혀 북으로는 부여성과 요동성을 포함한 만주일대를 지배했고, 남으로는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을 점령했다. 수도를 통구에서 평양으로 옮긴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에게도 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리하여 진흥왕과 백제의 성왕(523-554)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기에 이른다(551). 그러나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독점하게 되자 백제와는 또 다시 적대관계가 된다. 이러한 시점에 진흥왕은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주체성의 확립된 청소년의 양성을 목적으로 화랑제도를 조직하게 된다. 고구려의 군사대국과 백제의 문화대국에 맞서 후발 주자인 신라의 진흥왕은 남쪽의 가야을 병합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등의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고 황륭사를 건립하여 호국불교의 이념을 확립하여 국기를 다졌다. 특히 진흥왕은 가야의 우륵으로 하여금 전통 가무 예술을 정립하고 이러한 전통을 승계할 목적으로 화랑제도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에는 화랑의 전말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남겨있다.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보다 먼저 군신들이 인재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놀게 하며 그들의 행실을 보아서 이를 등용하려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두 여인을 뽑았는데, 하나는 남모라 하였고, 하나는 준정이라 하였다. 그들은 그 무리를 300여명이나 모았는데, 두 여인은 차츰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게 되었다. 준정은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독주를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그를 이끌어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나 사건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을 당하고, 그 무리들은 실망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락을 즐기고,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랑을 하였는데,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 좋은 사람을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말하기를 ‘어린 재상과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뛰어난 장사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현모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하는데,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 하였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취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실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라’ 하였고, 당나라 연호징이 ‘신라국기’에서 말하기를 ‘귀인의 자제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섬겼다’고 하였다”
대한 제국기의 여러 문서들을 통해 볼 때, 이때의 지식인들에게 상무정신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공공의 장에서 담론화 되고 있었다. 1901년과 1904년의 황성신문에 실린 논설문과 기고문에서는 “문을 숭상하고 무을 숭상하지 않는 민은 필히 멸망할 것”을 주장하거나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길은 상무로써 정신을 삼고 ‘유혈’로써 주의를 삼고, 모험으로써 성질을 삼고, ‘파괴’로써 방침을 삼는데 있다”고 하여 상무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무정신을 강조하는 기고문에는 상무정신의 모범적인 예로 일본의 무사도를 들고 있다. 박은식의 경우 서우학회지인 ‘서우’에서 조선의 문을 숭앙하고 무를 천시하는 풍조가 극에 달해 조선은 남의 노예가 되는 처지에 놓였으나 일본의 경우에는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무사도와 같은 상무적 국풍이 청국과 러시아에서 승전할 수 있었다‘고 논술하였다. 1906년 6월 8일 황성신문 서점광고란에 양계초의 ’중국의 무사도‘ 그리고 ’일본유신세년사‘,’일본유신활력사‘,’일본무비교육‘ 등의 책명이 실려 있었고 이러한 책들을 통해 일본의 무사도가 상세하게 소개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906년 5월 황성신문에는 ’일본유신삼십년사‘ 제1회 학술편 제4장의 번역문이 실렸고 이 글의 논지는 명치유신 이후에도 무사도가 쇠미한 것 같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07년 2월의 황성신문에 실린 ’정신과 감각‘이라는 논설에서는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의 발전은 서양으로부터의 신문화나 신기술이 아니라 무사도의 정신에 기인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의 유학생 최석하도 ’조선혼‘이란 논설에서 양계초가 ’중국혼‘을 그리고 무사도를 숭상하는 일본에서 대화혼을 강조한 것처럼 ’조선혼‘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한국 근대 내셔널리즘의 정초자이면서 무정부주의자였던 단재 신채(1880-1936)는 1920년경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여 단군조선 2000년의 정치제도, 종교, 철학, 문학, 풍습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종교와 관련해서 선교와 화랑을 언급한다. ‘단군은 선인의 시조이고 선인은 곧 우리의 국교이며, 우리의 무사도며, 우리 민족의 넋이며 정신이며 우리 국사의 꽃’ 이라고 언급하면서 선교를 화랑의 연원이고 조선의 무사도의 연원임을 강조한다. 1920년경에 쓴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화랑은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심‘이라 선언하고 이러한 화랑정신이 나말여초의 유교도에 잔멸을 당하여 그 역사의 형체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채호는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쓴 ‘조선상고사’에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 책의 제8편 제1장 ‘신라의 발흥’에서 화랑을 신라가 발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으로 보고 후세의 역사는 한문화의 지나친 사대주의로 인하여 조선의 중국화로 화랑의 정신이 잃어져 가는 것으로 보며 통단한다. 그러므로 단재는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하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과 같은 우매한 짓 이라고 질타를 가한다. 신라의 화랑은 이제 무사도에서 벗어나 조선에 까지 확장되어 조선을 조선되게 하여온 것으로서 평가를 상승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후기저작으로 가면 화랑도에 대한 인식은 점차 유가나 불가의 수준과 같은 낭가로 발전해 나아가지만 낭가를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신채호의 기본적인 사상적 구성이 양계초의 중국사상사 구성에서 보여 지는 ‘중국지무사도’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조선의 무사혼론은 양계초의 중국의 무사도론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진다. 신채호의 화랑도 논의는 1890년대 이후에 동아시아의 담론으로 부각된 일본의 무사도론과 이것에 도전을 받은 양계초의 중국 무사도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것 이다. 양계초는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의 원인을 상무정신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그는 1904년 ‘중국지무사도’라는 그의 책에서 중국사에 있어 춘추 전국시대를 가장 무사도가 왕성했던 시기로 보나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유교 국교화로의 과정에서 무사도가 쇠퇴하게 되었다는 논지를 핀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 ‘중국혼안재호’라는 글에서는 사라져버린 무사도를 회복시켜 중국의 혼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20세기 초는 삼국에 국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었다. 이는 일본의 경우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중국과 한국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측면에서 국민의 동원이 필요하였고 무사도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었던 것이다.
1940년대부터 조선은 제국 일본의 한 지방으로 통합되면서 조선의 문화도 제국의 문화 안으로 서서히 통합되어 간다. 화랑도는 더 이상 일본의 무사도와 구별되는 조선 고유의 표상이 아니라 일본과 조선이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서 기록된다. 일제는 국가총동원과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충성을 위해 일본의 무사도와 한국의 화랑도는 그 기원에 있어 하나가되어 지고 공통된 기원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서 고대의 일본과 조상의 관계가 재구성되고 이러한 신화를 통하여 조선은 현실적으로나 상상의 영역에서도 일본제국의 동일자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고대 신라무사 화랑은 대동아 전장으로 불려진다. 1943년 10월20일에는 ‘반도인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장의 소환은 각계의 명사들이 신문을 통해 혹은 직접 강연에서 화랑도 이데올로기를 통해 학병의 출진을 독려하게 된다. 정운형이 엮은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는 징병에 대한 당시의 공통된 인식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주체화’의 논리‘와 ’숭무의 논리‘로 압축할 수 있다. 무기가 주어지는 것은 국민적 평등의 구체적인 실현이며, 조선의 멸망이 유교의 숭문에서 망하게 된 것이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나약한 문이 아니라 무인 화랑도의 정신 이라고 말한다. 유명인사 중 최남선은 ’매일신보‘에 다가 시국에 직면하여 고민을 물어오는 조선의 청년들이 많다고 전제하고 ‘임전무퇴’ 의 계율을 도덕적 명령으로 제시한다. 화랑 오계 중 임전무태의 강조는 임전무태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하고 죽음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안재홍도 ‘1943년 11월 15일자의 ’매일신보‘, ‘특집: 학도에게 고한다’에서 ‘우리 역사는 고려 말엽부터 숭문천무의 사상이 반도를 휩쓸어 이조에 들어와서는 더욱더 그 경향이 농후하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무사정신을 결한 이조 중엽의 우리 선조를 원망하기 전에 제군은 멀리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상기하라’고 학도병을 지원을 독려하였다. 또한 1943년 11월 16일자 ’매일신보‘, ‘특집: 학도에게 고한다’에서도 조만식은 ‘이 땅에도 장구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무인의 늠름한 대오가 다시 소생되었다. 제군의 선배된 우리들이 그처럼 숙원하고 고대하던 무장반도가 지금 제군의 세대에 이루어지려 함을 목전에 보게 되었으니 이 이상 더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무인의 재현‘,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제군의 광영, 반도의 영예를 축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학도병을 권유한다. 마찬가지의 권유문도 1943년 11월 8일자에서도 양주삼도 ‘반도의 문약을 일소하고 무의 전통을 이곳에 창조’하자고 쓰고 있다. 이러한 지배집단과 사회명사들의 화랑을 활용한 동원 이데올로기의 권유문을 통해 수많은 학병들은 실제로 화랑도의 구현하기위한 신라의 청년처럼 전장으로 나갔다. 이러한 학도병 동원 이데올로기로 쓰였던 저명인사들의 화랑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원의 장애였던 주부들에게도 향하게 된다. 그 당시의 매일신보의 한 특집호에서는 반도 여성이 ‘상무적 교양에 힘써 국군의 어머니로서 손색없는 총후여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과 출진 학도와 어머니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신라시대의 화랑의 정신과 그 어머니에 대한 말‘을 학도에게 전한다. 이병도는 신라의 어머니 교육의 정형으로 화랑 원술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을 군국의 어머니의 상으로 주조한다. 원술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짧은 이야기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당병과 싸우다 패해 적진에 돌진해 죽으려다 부하의 만류로 살아 돌아오자 김유신이 이를 수치로 여기고 원술을 평생 만나주지 않고 죽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찾아간 원술을 그 어머니인 지소여인도 역시 자신도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돌려보냈다는 이야기 이다. 이광수의 ’원술의 출정‘은 위의 기록에 원술의 정혼녀 아좌희라는 인물을 추가한 단편으로서 삼국사기의 서사를 통해 학병들에게는 임전무퇴, 조선반도의 여인들은 지소부인처럼 상무적 교양을 갖춘 국군의 어머니 그리고 아내는 화랑의 아내 아좌지 처럼 자식과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총력전에 가담하는 총후부인이 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