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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김성수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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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입니다.

와단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첨부화일1 : 김성수-한국기독교사에서_퀘이커주의와_함.hwp (62464 Bytes)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김 성 수*


1. 머리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
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1. 머리말

함석헌은 한국기독교가 제사적인 면에서 벗어나 한국사회의 윤리와 정의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종교의 세계는 윤리나 사회정의 이상의 세계이지만, 윤리의식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종교는 미신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이러한 도덕과 사회정의 그리고 건전한 상식을 지닌 종교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퀘이커주의는 현실적이고 동시에 이상적인 동반자로서 함께 했다. 우리는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를 바람직한 종교로 생각할 수 없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1624~1691)는 인간 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 약자를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할 때,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국내 학계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1994년 영국 에섹스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함석헌의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이해〉(“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가 최초의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글이다. 이어서 1998년 영국 쉐필드 대학교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유산에 관한 연구 : 20세기 한국 씨알의 소리와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An Examination of Life and Legacy of a Korean Quaker Ham Sok Hon: Voice of the People and Pioneer of Religious Pluralism in Korea”)라는 논문에서 역시 부분적으로 퀘이커 함석헌에 관한 연구를 다뤘다. 이 주제와 관련된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2004년 영국 버밍엄-선더랜드 대학교 정지석의 박사학위 논문〈퀘이커 평화증언,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국통일신학〉(Quaker Peace Testimony, Ham Sok Hon's Ideas of Peace and Korean Reunification Theology)이 있다. 국내에서는 퀘이커주의에 대한 1차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에 관한 연구가 그동안 부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지석의 논문은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면,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은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를 비교 분석 했고, 박사학위 논문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을 총괄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선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사상이 한국기독교사에서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평가함으로써, 위에 언급한 논문들과의 차별성을 두고자 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미 역사에 미친 주요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이 연구는 현재 퀘이커주의에 관한 연구가 국내학계에 극도로 빈약한 형편임을 고려할 때 그 학문적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에 ‘조직기피증’ 성향의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 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할 것이다.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심을 사회적 행동으로 표현하여야 한다.……삶의 일부만이 아닌 전체가 거룩하고, 온통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절대자의 사랑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분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퀘이커주의는 개신교 신앙에 속한다. 서구의 경우에 각 퀘이커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믿는 편이다. 현재 영국 퀘이커회는 세계교회연합회와 영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다. 1997년 영국교회연합회는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유니테리언회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 삼위일체론에 대한 입장 밝히기를 꺼려하는 퀘이커회는 기꺼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1994년을 기준으로 세계에는 약 303,858명의 퀘이커들이 있다. 그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미국 103,379명)에 약 155,000명, 아프리카 대륙(케냐 104,500명)에 약 122,000명, 유럽(영국 17,934명)에 약 20,500명, 아시아 대륙(한국 10여 명)에 약 4,592명, 오세아니아에 약 1,766명 정도가 있다. 숫자 면에서는 퀘이커교가 단연 소수 종파임을 알 수 있다.
평등사상의 강조로 인해 목회자의 지도 없이 혼자서 성경공부나 기타 연구를 해야 하는 현대 퀘이커는 다수를 위한 종교보다는 소수 엘리트 종파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양적 성장과 질적 향상의 문제는 앞으로도 퀘이커들이 계속 고민해야 할 주제 중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한국 퀘이커는 1958년 처음 예배모임을 가진 이래 약 반세기가 다가오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약 10여 명에 불과하고 아직 한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 아니다. 아울러 아직 한국사회와 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함석헌에 대해서도 몇몇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호의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기독교계와 사학계로부터 함석헌은 아직 냉대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퀘이커교는 영국이 청교도혁명(1640~1660)에 휩싸여 있었을 때 서서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지 폭스의 사상은 영국에서 종교친우회(즉 퀘이커회) 창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폭스는 영국에서 직공(weave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청교도적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그의《일지》는 1694년 처음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책이 퀘이커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의《일지》를 통해서 폭스는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교감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생명, 내면의 빛(inner light, inspiration 혹은 holy spirit), 내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씨앗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나님의 영성과 교통할 수 있다.
퀘이커들은《성경》을 존재하게 한 절대자의 성령이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절대자가 몇 세기 전에 보여준《성경》의 기록보다는 ‘지금 여기서’ 절대자가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에서 내면의 빛(성령)이《성경》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집권세력으로부터 퀘이커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외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고, 개신교가 성서의 권위를 중요시한 반면, 퀘이커는 성령의 권위를 역설했다. 이 내면의 빛의 신앙은《신약성경》〈요한복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참 빛은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인간에게 빛을 준다.” “나(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자는 누구나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내면의 빛과 자라나는 종교

퀘이커주의에서 생명과 진리의 원천은 각 사람의 내면의 빛, 즉 마음속 그리스도다. 17세기 영국 퀘이커들은 종교가 설교나 교리, 의식에 의한 제도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있으므로, 폭스는 각 개인이 침묵예배를 통해서 절대자와 교감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느꼈다. 이 내면의 빛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어떠한 형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이 내면의 빛은 각 개인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단체모임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종교에는 영구불변한 종교와 늘 새롭게 변하는 종교가 있고 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는 것이 퀘이커주의다. 퀘이커들은 성경과 그 밖의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존중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열려 있고 책임적일 수 있는 능력이 각 사람 안에 존재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은 성경에 씌어진 문자를 그대로 믿기보다는 그 내용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초창기 퀘이커들이 정규 교육과 성직자 계급을 경시한 결과, 종종 신학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퀘이커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초창기 퀘이커들에게 대학 진학의 길이 제약된 것도 퀘이커들이 대학교에서 ‘퀘이커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보다는 ‘삶 속에서 퀘이커주의를 체현화’시키는 데에 더욱 중점을 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퀘이커신학의 부재 탓이건 혹은 퀘이커주의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꺼려하는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누구도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퀘이커교의 공식대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한 각 퀘이커는 단지 자신이 이해하는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를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2) 성속이 하나

퀘이커들은 인간사의 모든 일에는 성속에 관계없이 절대자의 숨결이 서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퀘이커주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전체성이다. 모든 것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어떤 것도 전체라는 영역에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퀘이커들에겐 성속의 구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그래서 사회문제는 종교문제와 동등하게 중요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시각 때문에 퀘이커들이 기도, 묵상, 혹은 절대자에게 예배할 때, 장황한 말이나 예식보다는 좀더 침묵에 중점을 둔다. 이 점이 퀘이커가, 비록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해 ‘성악설’이나 ‘원죄’론보다는 ‘성선설’이나 ‘낙관론’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기독교의 시각과 다른 면이다.
초창기 조지 폭스를 비롯한 영국 퀘이커들은 한 개인의 영적 통찰도 깊은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퀘이커들의 증언(testimonies)은 타인의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을 그 기초로 한다. 그래서 수감자들을 위한 교도소 시설의 개선, 정신병원시설 개선, 여성참정권, 노예제도반대, 노동자들을 위한 공정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정직한 상거래 확립(정찰제 소개), 교육 및 구호사업, 세계평화운동 등을 위해 퀘이커들은 역사를 통해 부단히 힘써 왔다. 또한 초창기부터 퀘이커들은 남녀평등을 중요시했다. 그것은 예배뿐 아니라 공개연설, 교육, 그리고 사무관계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퀘이커 모임에서 양성 평등의 훈련을 통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도력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사회의 소외된 계급인 여성과 중․하층계급의 주목을 받았다는 면에서 17세기 중반 영국 퀘이커교와 19세기 후반 한국 개신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함석헌이 유교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멸시받던 ‘평안도 상놈’ 출신이고 19세기 후반 상공업자가 많은 평안도에서 태어난 것도, 그가 훗날 퀘이커주의로부터 더욱 사상적 친근감을 갖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짐작된다.

(3) 종교, 과학, 탈민족, 탈국가

절대계뿐만 아니라 상대계 진리를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은, 역사를 통해 과학 발달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접목에 주요 공헌을 해왔다. 특별히 영국의 경우 뛰어난 퀘이커 과학․기술자들이 영국사회에 준 영향과 공헌을 살펴볼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무쇠 교량을 설계 건축한 건축설계가 아브라함 다비(1678~1717)와 아브라함 다비 3세(1750 ~1789), 천체물리학자 아더 에딩톤(1882~1944), 유전공학자 프란시스 겔톤(1822~1911), 화학자 존 달톤 (1766~1844), 소독약과 방부제를 발명한 조셉 리스터(1827~1912) 등이다.
이렇게 퀘이커 과학자들이 가진 종교적 신앙심은 그들에게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가치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1851년으로부터 1900년 사이에 영국 퀘이커는 왕립과학회의 회원으로 추천되는 확률이 퀘이커가 아닌 다른 학자들보다 50배나 더 많았다. 종교적 신비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결합한 퀘이커들이 과학과 신앙의 갈등으로부터 대체로 자유롭게 되었고, 그 대신 그 점에서 상생의 길을 발견한 것이 퀘이커들이 과학과 종교 사이의 자연스러운 접목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은 타인들의 고난에 외부적 행동으로 참여함으로써 드러났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 퀘이커들은 피난민과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1847년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퀘이커들은 세계 최초로 무료식당운동을 전개했다. 더불어 미국의 청년, 흑인, 인디언, 새 이민자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퀘이커들의 범세계적 활동들이 세계주의자 함석헌에게 공감을 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퀘이커들을 절대평화주의자들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 생활에서 각 퀘이커는 각자의 내면의 빛이나 통찰력에 따라 각자 믿음대로 결정한다. 예를 들면 미국 독립전쟁 당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집총을 거부한 퀘이커들이 있는 반면, 애국심의 가치를 평화주의보다 앞세워 전쟁에 참여한 퀘이커들도 많았다. 또한 남북전쟁 중 많은 퀘이커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무력을 통해서라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론을 택하기도 했다.
사회정의 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퀘이커들은 사회정의, 빈곤 및 문맹퇴치, 반전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미 퀘이커회는 제 1․2차 세계대전에서 난민 및 그 유가족들을 도와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국제적 평화주의의 중요성을 행동으로서 고취시켰던 공헌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제 2차 대전 후에도 퀘이커들은 국제적 원조, 구제, 재건활동을 지원했다. 특별히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영․미 퀘이커 의료봉사단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의료봉사활동을 벌였다. 약 2만여 명의 한국전쟁 난민은 영․미 퀘이커의료봉사단의 도움 아래 군산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다. 1970년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여러모로 도와주었고 1990년대는 영국 대학원에서 ‘함석헌 연구’를 위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필자에게 해 주었다.
퀘이커들은 실천적인 면과 신비적인 면, 상대적 사회현실과 절대적 가치인 하나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속한 구체적 한 시대와 영원의 세계, 일치와 다양성, 그리고 최소한의 형식과 무제한적인 생명 등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영국 퀘이커교도 잉글 라이트는 그러한 상대세계와 절대세계의 밀접한 연관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속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퀘이커들의 침묵 예배는 상호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구한말 대다수 그와 동시대인과는 다르게 여섯 살 때인 1907년 함석헌은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를 가졌다. 초등학교도 전통적인 서당보다는 장로교 계통의 소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대한제국이 쓰러져가는 20세기 여명에 함석헌이 누린 보기 드문 특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유․불․도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적 전통 속에서 함석헌은 어려서부터 이 동서사상과 종교를 접할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그런 함석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퀘이커교도였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접하게 된 과정과 그 퀘이커주의가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퀘이커 함석헌이 한국기독교사에 어떤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함석헌은 대외적으로는 약육강식이 판치던 제국주의 시대에 국내적으로는 자국민을 상대로 국가 폭력이 난무하는 20세기 한반도에 살았다. 찰스 틸리는 국가의 성립 자체를 조직범죄로 평가하고 국가행동양식을 조직범죄에 비교하기도 했다. 함석헌이 국가주의를 탈피하고자 노력하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취했던 것이 이러한 틸리의 역사사회학적 분석과 동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가 자국민의 안녕과 평안을 지켜줄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민을 상대로 착취와 폭력만을 일삼는다면 그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함석헌은 서구기독교가 로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 이념화되고 정치제도권과 결탁함으로써 일반 씨알과 생활을 함께 했던 예수정신의 본래 의미를 상실했다고 믿었다. 그때부터 영과 운동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 세속권력을 위한 편의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고,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한낱 도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함석헌은 국법에 의하여 공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종교를 늙고 침체된 종교로 보았다. 1940년대 이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비판적 입장을 가진 함석헌이 아마도 그래서 국가주의에 물들지 않고 국가종교가 아닌 비국교, 퀘이커교에 한없는 매력을 느꼈다고 평가된다.
함석헌은 박정권하에서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민이라는 단어나, 주체보다는 객체로서의 의미가 강한 백성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했다. 민중이라는 단어 역시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는 한자라 역시 사용을 꺼려했고, 인민이라는 용어는 레드 콤플렉스가 극대화된 남한정권 아래서 ‘빨갱이’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서 역시 사용을 자제했다. 그래서 이런 이념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고자 그는 기꺼이 ‘민’에 해당하는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생각한, ‘씨알’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함석헌이 생각한 씨알은 ‘순수․순박한 사람’, 노자가 이야기한 ‘다듬지 않은 사람’ 혹은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이야기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최초 퀘이커 조지 폭스가 17세기 영국 장인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하고 근엄한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 것처럼, 함석헌도 20세기 상공업이 발달한 평안도 지역에서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그는 3․1운동이라는 정치․사회변혁을 체험하고 경직된 장로교로부터 영적 만족을 못 느끼게 되는 것도 폭스의 영적 행로와 유사성이 있다. 고난의 삶을 살다간 조지 폭스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아들 함석헌도 아무런 세속의 매개 없이 절대자와 직접 대면하려던 사람이었다.
함석헌의 종교적 편력이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17세기 영국교회의 세속적 권위에 대항해서 폭스가 주장한 ‘내면의 빛’ 개념이 20세기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함석헌은 퀘이커주의 내면의 빛을 통해 내적 힘을 기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신을, 한국 민족이 그 의지를 기르고 일으켜 세우는 한 방법으로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도 폭스처럼 기성교회의 무조건적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탈권위적 성향의 퀘이커주의로부터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1) 퀘이커주의와의 첫 만남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후 오산학교에서 면학에 힘쓸 때인 1921년이었다. 그때 그는 토마스 카알라일(1795 ~1881)의《의상철학》을 통해서 퀘이커주의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이때 그는 조지 폭스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폭스의《일지》를 읽게 되었다. 이 때 함석헌은 퀘이커주의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으나 깊은 흥미는 못 느꼈다. 그 후 함석헌이 유학차 일본에 있을 때(1923~1928) 그는 처음으로 우치무라 간조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1862~1933)와 함께 일본 퀘이커 모임에 출석했다. 그러나 이때 그가 일본 퀘이커들로부터 별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함석헌이 니토베로부터 별 감동을 못 받은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니토베는 젊은 시절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 갔을 때 일본의 첫 퀘이커교도가 되었다. 니토베는 훗날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을 방문해 만주침략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강변했다. 아마 니토베의 이런 행동양식이 함석헌에게 별 감동을 못 준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에 대한 관심은 해방 후인 1947년까지 약 20년 동안 중단되었다. 1947년 함석헌은 북한에서 막 월남한 상태에서 YMCA 총무 현동완으로부터 서구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듣게 되었다. 함석헌은 그 당시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을 듣고 놀랐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국가 폭력으로부터 세계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그 중요성을 실감했다. 더구나 북한에서 맞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소련군정하에서 겪은 야만적 폭력과 수감생활은 그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우쳐 주었다. 더구나 그 후 함석헌은 국가폭력의 절정인 6․25전쟁을 체험했다. 전쟁기간 중 여기저기 피난생활을 하며 그는 온 세계와 민족이 이념을 넘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6․25를 겪은 그는 “이제 일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도 아니요, 민족도 아니요, 계급도 아니다. 세계다”라고 탈민족주의, 세계주의를 선언한다.
이런 와중에 함석헌이 그 생애에 처음으로 서양 퀘이커교도들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 전북 군산에서였다. 1953년 6․25 직후 함석헌은 전북 군산병원(현재 원광대병원)에 한국의 피난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단으로 온 영․미 퀘이커교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20~30대의 젊은이들로 전후에 과부와 고아가 되어버린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1953년부터 5년 동안 자원봉사를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함석헌은 서구의 젊은 퀘이커들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6․25 직후……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로 인해 나는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문헌이나 사상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의 ‘직접적 행동’ 때문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조지 폭스가 주장한 ‘네 삶으로 말하라’는 퀘이커주의의 핵심이 그대로 함석헌에게 전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1958년 2월 15일은 한국 퀘이커 역사에서 기록될 날짜이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의 집에서 처음 한국인들을 위한 퀘이커 예배모임이 시작되었다. 이윤구(1929~ )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으며 이어 1958년 7월 이윤구는 한국의 첫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1959년 8월부터는 세계 최초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가 자신의 집을 퀘이커 예배모임 장소로 제공해 주고 참여했다.

(2) ‘죄인’ 함석헌

함석헌은 군산병원에서 서구 퀘이커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를 중시하는 활동에 큰 감동을 받아 나중에 퀘이커 회원이 된다. 물론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적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결국 그 자신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고백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로부터 ‘여성문제’로 여전히 비난받고 있는 상태였고, 보수적 한국교회의 교단으로부터는 격렬하게 배척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함석헌이 고독감에 친구를 절실히 그리워하고 있을 무렵인 1950년대 후반, 그런 그에게 친구가 되고자 서구 퀘이커들이 나타났다. 훗날 함석헌은 무엇이 그를 서구 퀘이커들과 극도로 가깝게 만들었는지 술회했다.

내가 퀘이커주의를 공부한 후 퀘이커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갈 데가 없게 된 나는 퀘이커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다.
그 당시 함석헌은 외로운 ‘죄인’으로서의 어려운 심정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내가 죄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죄인 한 사람이 사회 전체로부터 어떻게 전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를 체험했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용서에 대한 함석헌의 태도를 통해서 그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외로움은 커져 갔고, 그때 그가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얼마나 죄인으로서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나를 볼 수 있다.

친구들도 나 용서 아니 하나 봐요. 그래서 맘을 걷어 잡을 수 없어요. 죽겠어요!……친구, 친구! 없어요. 죄를 사하고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만이 친구인데 없나 봐요. 나는 한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맘을 알아줄, 붙들어줄 한 사람! 1960년 10월 9일.

함석헌의 이러한 고뇌에 찬 체험은 훗날 그에게 개인과 전체와의 관계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 그 중요성을 깨우치게 한다.




(3) 왜 퀘이커가 되었나?

서구 퀘이커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있는 함석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퀘이커 주의와 극도로 가깝게 된 동기는 퀘이커 사상에 어떤 큰 동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퀘이커들이 다정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퀘이커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또한 사상적으로도 퀘이커주의에 많은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이 기존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종교조직,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한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주요 관심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세계평화와 사회정의에 집중된 것에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의 서구 퀘이커에 대한 관심은 그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다. 서구 퀘이커들도 흰 수염,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을 신은 ‘신비한 동양의 현인’ 같은 함석헌의 모습에 깊이 끌려들었다. 그들은 아마도 6․25전쟁 후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나라에서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를 만나며 무더운 사막 한 가운데서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주의가 얼마나 동양적인 종교인가를 재삼 강조한 바도 있다.

서양사람에게서 나온 종교 중에서 동양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사상이 바로 퀘이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워드 브린톤이 [퀘이커주의를]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마도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동양 고전사상 사이에 많은 일치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함석헌과 서구의 퀘이커리들이 왜 그리도 급속한 ‘열애’에 빠졌는지를 이해할 만하다.
1962년, ‘열애’에 불붙은 미국 퀘이커들은 필라델피아 펜들힐 퀘이커연구소로 10개월간 함석헌을 초대했다. 다음해인 1963년 봄, 영국 퀘이커들도 그를 버밍험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소로 초대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990년 봄, 필자는 우드브룩에 3개월간 머물며 함석헌이 그곳에 남긴 발자취를 되밟아보았다. 1963년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함석헌은 영국 퀘이커들에게 한번 한국사에 대한 강의를 영어로 했는데 그는 그의 영어발음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때 한 영국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어강의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감동을 전했다’고 술회했다. 1990년에 우드부룩에서 필자가 만난 나이가 지긋한 한 영국퀘이커는 필자에게 “함석헌의 영어발음이 당신의 영어발음 보다 좋았었던 것 같던데요”라고 일침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펜들힐과 우드브룩에서 함석헌은 퀘이커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구미 퀘이커연구소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그도 퀘이커들의 자율적 원칙에 깊이 매료되고 많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많은 사상적 공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그는 특별하게 퀘이커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1953년「대선언」 이후 함석헌이 어떤 특정종교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직 기피증’은 퀘이커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함석헌은 그 자신을 외딴 들판의 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길을 계속 가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7년 그는 태평양 퀘이커 연회 초청으로 미국 북캐롤라이나의 세계퀘이커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함석헌은 비로소 퀘이커회의의 공식회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럼 무엇이 '종파기피증'에 있었던 함석헌을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퀘이커들의 우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퀘이커주의는 신비파운동에서 일어났지만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의 주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이렇게 불확실하지만, 열린 태도로 함석헌은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었다. 퀘이커주의는 신비주의적 신앙체계를 지니고 있으나 신비주의가 간과하기 쉬운 사회․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므로 퀘이커주의를 ‘윤리적이고 상식적 신비주의’의 양상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퀘이커주의의 이러한 면에 함석헌은 매료되었던 것이다.

(4) 퀘이커와 씨알의 소리

그래서 1967년 함석헌은 정식으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65년 이래, 벌써 함석헌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 퀘이커들의 잡지〈프랜드 저널〉에 ‘한국의 간디 퀘이커 함석헌’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퀘이커들은 회원과 참석자들을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1950년대 후반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을 처음 만났을 때 미첼이 함석헌을 놓고 한 증언이 그러한 퀘이커들의 태도를 반영해준다. 미첼은 함석헌을 처음 만난 후 그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당신은 퀘이커교도가 되기 전에 이미 퀘이커였습니다.” 미첼의 함석헌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비형식주의, 반교리주의, 검소함, 평등주의, 세계평화, 사회개혁적인 태도 등에 매료되었지만, 그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가입하기 이전에 함석헌은 벌써 그 안에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자격으로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둘러앉아, 그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나타나 계시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 됐거나 못 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퀘이커에 대한 그의 위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가 퀘이커의 평등주의와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는 태도에 애착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의 평등사상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 퀘이커 모임에서 함석헌과 다른 퀘이커들과의 관계는 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 모임의 평등사상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퀘이커주의는 1960년대 이후 함석헌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서구 퀘이커들은 그의 민주화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박정희의 잇단 긴급조치 발동과 장준하의 의문사와 맞물려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6년 함석헌이 다른 재야인사들과 함께 참여한 ‘3․1민주구국선언’은 긴급조치 아래서 하강기에 빠져 있던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권에 의해 구금당하고 있었을 때, 영국 퀘이커 주간지인〈프랜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함석헌 감금되다 ; -- 함석헌은 ‘3.1 구국선언’에 이어 다른 8명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함석헌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세계퀘이커협의회는 박대통령과 재영 한국대사에게 함석헌을 비롯한 다른 구금자들을 조속히 석방시켜 줄 것을 호소했다. 이 호소문을 통해서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적 원칙에 입각한 비폭력주의와 그의 인도주의를 위한 전적인 헌신을 언급했다. 미국퀘이커협의회 또한 박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냄과 동시에, 포드대통령에게 서면을 보내 남한의 인권이 극악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박대통령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3․1민주구국선언’ 후 함석헌은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빼앗기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은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계속해서〈프렌드〉지는 ‘3․1민주구국선언’ 이후 함석헌이 겪는 재판과정을 보도했다.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은 다른 17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서울에서 열린 공판에 회부되었다.……모든 피고인들은 징역을 선고받았고, 함석헌은 8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이 선언서를 통해서 서명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폐기하고, 국회를 복원시킬 것과, 사법부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이 선언서는 박정권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한국경제구조를 철저히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75살의 함석헌은 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죄로 8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계류상태에서,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서간을 보냈다. 다음 서간은 그의 외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내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1976년 8월 9일 새벽 4시……지난주 기도예배를 드리던 중 나는 오는 8월 11일 법정최후진술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이 열려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를 기소한 검찰 측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을 위로할 생각입니다. 이번 일은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투쟁의 끝이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를 심판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새로오는 세상을 맞이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길고 긴 고난과 시험을 우리 씨알에게 허락하셨다고 느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러 값진 고난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에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건강하시고 진리 안에서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글은 함석헌이 재판을 앞두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에게조차 얼마나 훈훈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아울러 내면의 빛을 강조하는 퀘이커주의를 통해서, 그가 외적 탄압을 넘어서 어떻게 내적 평안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함석헌의 자유를 위한 서구 퀘이커들의 국제적 활동이 서구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여간 이 글을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함석헌은 집행유예로 형 집행정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민주화 운동을 위해 영․미 퀘이커들이 보여준 국제적 차원의 지지와 후원을 동아시아의 도가협회나 불교회로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은 아마도 그래서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데 서구의 실질적 영향력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는 현대세계에 서 서구의 두드러진 영향력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지금 이 세계를 이만큼이라도 유지해가는 게 뭘로 되는지 아십니까? …… 완전히 기독교적은 못되지만, 그래도 현실을 유지해가는 것은 서구적인 지성이에요.……서구적인 지성이란 것은 17세기 18세기 근대에 오면서 발달한 건데, 그것은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결국, 서구 퀘이커들의 지속적인 국제적 지지를 받아가며 함석헌은 더욱 효과적으로 그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과학적․이성적 종교

함석헌이 종교의 신비주의와 상식주의 요소를 모두다 중요시한 만큼 그는 퀘이커들의 ‘이성적 신앙’에 많은 공감을 가졌다. 함석헌은 미래의 종교가 광신적이기보다는 과학적․합리적이어야 하고, 감정적이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지니면서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함석헌에게서 합리적 이성을 결핍한 종교는 맹목적 광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과학과 종교 가운데 하나만 택하는 상황이 오면 차라리 과학을 택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종교의 세계는 과학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상호보완적인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동서 문화의 차이와 역사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퀘이커들의 종교관과 그 자신의 신앙관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함석헌이 1955년 쓴, 기독교인에게서 기도의 의미와 하나님의 씨앗이 각 씨알 속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은 퀘이커들의 신앙관인 성속을 구별하지 않는 ‘온 삶 자체의 신성함’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

기도하란 말은 말로 하란 말이 아니다. 말로 하는 기도는 기도의 가장 끄트머리, 가장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기도는 몸으로 살림으로 하는 기도다.
나는 하나님은 아니요 하나님의 모습을 가진 자라 하나님에게까지 갈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다.

서구 퀘이커들이 고정된 교리보다는 다양하게 변해가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 것처럼, 함석헌 또한 그의 영적 행로를 통해서 경직된 교리나 형식주의보다는 유연하고 초월적 양상이 강한 내적 신앙을 중요시했다. 그가 퀘이커주의를 가까이 알기 전인 1953년,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리에 그저 복종하기보다는 다변적으로 변화해가는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바 있다.

동양의 맘이 본 생명의 근본 모양도 역(易) 아닙니까? 역이란 변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변합니다. 인생이 변하는 것이라면 불변하는 교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는 ‘영원의 미완성’이라 노래했고 그래서 고정된 교리를 갖지 않은 퀘이커주의와 근원적 공명을 느낀 것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화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함석헌은 현대인들의 신에 대한 관념도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변화에 따르는 관념변화의 절박한 필요성을 태아와 그 어머니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어머니 몸에서 오는 것으로 살지만, 생명이 자라서 어느 시기에 오면 거기가 도리어 죽는 곳이요 어서 거기를 탈출하여야 된다는 지혜가 솟게 됩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거기를 빠져나오면 일순간에 새 살림이 시작됩니다.

그의 이런 비유는 과거의 생동하는 종교적 영감일지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적용되지 않고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질식시키는 사슬과 화석화된 교리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준다.

(6) 보편적 역사의식과 평화주의

그의 말년인 1979년과 1985년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퀘이커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추구해 온 비폭력 철학의 근원은 노장의 평화사상과 퀘이커의 평화주의에서 비롯된다. 퀘이커주의는 두 가지 측면 즉,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봉사와 세계평화의 실현을 특별히 강조한다. 함석헌 또한 ‘역사적’인 것에 뜨거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역사의식을 중요시했기에, 그는 퀘이커주의의 ‘내면의 빛’을 ‘속의 소리’ 즉 ‘양심의 소리’로 해석했고, 이 양심의 소리는 함석헌에게 곧 ‘하느님의 소리’이자 ‘역사의 소리’였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을 총체적이자 일체적 존재로 이해했는데 역사적 보편주의 입장에서〈신약성경〉을 예로 들어 자신의 역사관을 이야기 했다.

예수는 자기 말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이가 하는 것이라 했다. 그 보내신 이란 보통 말로 하면 역사요, 종교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 역사의 아들이라 하나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예수를 가지고 마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고, 누가는 아담의 자손이라 하였고, 요한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라 했다.

그는 또〈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맹, 노․장도 모두다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역설했다.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도 표현했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객관적으로도 평가할 수 있는 종교적 열정에 맞먹는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데, 한 종교에 열렬히 외골수로 몰입하면서 그런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절대적 표현과 상대적 표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함석헌의 종교적 신앙고백이 때로는 그가 속해 있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석헌에게 광범위한 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는, 삶의 단면만 보여줄 뿐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퀘이커들의 뚜렷하고 폭넓은 역사의식에 많은 공감대를 느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1959년에 쓴 함석헌의 글을 보면 그가 주장한 종교인의 역사의식과 사회참여론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그는 ‘속알 밝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퀘이커주의의 근본사상인 ‘내면의 빛’과 아주 흡사하다.

모든 종교 도덕은 어쩔 수 없이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다시 말할 것 없다. 모든 것의 터는 낱 사람에 있다. 그러나 내 속알 밝힘이 산골짜기나 골방 속에서 되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속알 밝힘은 반드시 그 어두워진 역사적 사회적 사회 살림 속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아무도 제 인격을 온전히 이루고 혼을 기르는데 역사적 사회를 떠나 외톨이로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퀘이커교도로서 필자는 다른 여러 종교 또한 내 종교를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의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나의 생각의 폭이 조금이라도 넓어져 간다고 느낀다. 인간정신은 획일적인 데서보다는 다양성 속에서 최고 가치를 발휘한다. 절대자는 문자 그대로 어디서나 존재한다. 퀘이커들은 이것을 ‘신적인 어떤 요소는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고 표현한다. 영국 성공회 신부이며 퀘이커교도인 폴 오스트리쳐는 “선한 것이건 사악한 것이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들과 여러 근본정신에 이미 큰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의 세계평화주의에 대한 갈망은 결국 민족주의를 배타적인 감정으로 평가하기에 이른다. 1930년대《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쓸 때의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그 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체험한 함석헌은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자로서 성숙된 세계평화의 길을 왜 인류가 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역설한다.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인간이 아직 어린 시절 한때 우리를 이끄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그 정도를 지나쳐 자랐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것이 죄악이다. 청산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제 민족주의 시대가 지나갔음으로 인류가 유아기 시절의 민족관을 버리고 민족을 넘어서서 세계를 포용하는 세계와 우주 전체관을 가져야 할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전체는 곧 함석헌에게 운명공동체인 인류사회 전체이자 절대자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7) 미래의 종교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새로운 종교는 아니지만 새 종교의 탄생을 위해 태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특별히 퀘이커들의 단체적인 명상을 그는 인류의 새 종교를 위한 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 퀘이커들의 명상과 동양의 명상인 참선이 어떻게 다른가를 지적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이 브린톤의《퀘이커 300년》을 읽었을 때 그는 퀘이커들의 단체 및 공동체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퀘이커 300년》에서 브린톤이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이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단체적인 것임을 강조했던 것을 상기하며,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그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다.

내가《퀘이커 300년》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 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퀘이커들이 제기한 공동체 정신은 계급․인종․종교․국가의 기원에 무관하게 사람들이 팀워크로 상호 협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퀘이커 신비주의는 개인에 머물지 않는 단체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것이다.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퀘이커주의는 함석헌 생애 후반기인 1960년대 이후 그의 종교․사상관 그리고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의 무소속 구도자와 종교적 ‘이단자’로서 함석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서구의 퀘이커들은 그에게 심적․물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결국 그는 퀘이커로서 삶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쩌면 항시 추구하는 ‘영원한 미완성’의 구도자였다고 느껴진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 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

죽는 날까지 민족․국가 그리고 종교의 벽을 극복하고자 했던 함석헌. 그러면서도 결국 자신은 한국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기독교인’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의 사람.
그렇다. 그는 철저한 모순의 사람이었다. 성속, 민족과 세계, 과학과 종교, 한 종교와 여러 종교,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갈망하고 추구한 그는 모순의 사람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불완전한 위선자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완전과 지고의 진선미를 추구하는 철저히 모순된 존재다. 그리고 이 모순에 인간의 비극이 있고 희망이 있다. 완전한 절대자와 합일을 끝없이 갈망하고 추구하는 불완전한 상대자가 인간이고, 그런 면에서 함석헌은 철저한 자기모순의 인간이었다. 어느 종교적 종파나 정당에도 가입하기를 꺼려했음에도 퀘이커교의 회원이 되고, 더러운 정치판에 말로 할 수 없는 환멸과 비애를 느끼면서도 장준하의 선거운동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함석헌! 그런 속 다르고 겉 다른 모순의 삶을 살면서도 그는 진리의 본질은 외양적 종교교리나 정치강령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양심 속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가 살던 20세기 한반도는 국가주의라는 가치가 전지전능한 가치였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한 존재의 생사를 너끈히 위협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 속에서 작은 한 개인과 거대한 국가의 대립이라는 개념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절대적 국가권력에 대해 한 개인이 스스로 세워놓은 이상적 원칙에 따라 저항한다는 것은, 곧 그 개인과 가족의 필연적 희생을 의미했다.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한 함석헌은 그래서 ‘바보새’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 편협성과 정치․사회적 압제가 팽배했던 지극히 제한된 한국역사의 한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이 최소한의 조직을 갖춘 퀘이커교의 교도가 된 것은 그런 열악한 외부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최소한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의 위치와 의미를 필자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퀘이커 함석헌은 ‘내면의 빛’을 추구하며 혼란의 시대 ‘한국의 양심’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난세에 종교인으로서 사회참여를 통해 그는 한국기독교의 영성을 더욱 심화시켰고,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펼쳐보였던 것이다. 둘째, 이제 한국교회도 교회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양적인 규모에 걸맞는 질적인 성숙함을 한국기독교계가 갖추어야만 한다는 본을,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보여주었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셋째,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목회자에 대한 의존도를 지양하면서, 평신도가 스스로 이끄는 신앙생활을 지향하는 데,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하나님이 항상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한 것처럼, 그는 퀘이커로서 역사의 ‘지금 여기에서’ 일할 것을 강조했고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여기가 곧 하늘나라였던 것이다. 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그의 뜨거운 비판은 곧 그의 종교인으로서 신앙고백․양심선언이자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공의의 추구였다. 전체적인 것만이 거룩한 것으로 믿었던 그는 씨알과 더불어 기꺼이 고난의 길을 택했다.
퀘이커주의는 함석헌에게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과 타종교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을 더욱 일깨워 주었다. 아마도 진리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정립뿐만 아니라 인종, 성, 문화, 국가, 이념, 생각, 얼굴, 모든 것이 다른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에 있지 않을까.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는 ‘발과 별,’ 즉 현실과 이상의 조화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이상도 현실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면 빛을 보지 못하고, 원대한 이상이 없는 근시안적인 현실은 인간 정신을 메마르게 할 뿐이다.
한국기독교인의 종교관도 외골수적이거나 편집광적인 획일성에서 벗어나 폭넓은 보편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의 영향 등으로 경제적 단위는 물론이고 문화․정신적으로 더욱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각 국가, 문화간의 긴밀한 접촉은 불가피하다. 세계 공동체의 사회구조 또한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 점점 더 보편적으로 변화 되어간다. 자기민족 중심주의는 이제 인류가 청산해야 할 과제다. 이러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한 민족의 미래는 인종․문화․종교적 다양성과 여러 집단 간의 상호존중에 있다. 내가 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의 다름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곧 독선이고 아집일 뿐이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는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선민의식을 극복하고 다른 종교나 이념에 대해 관용을 갖고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었다.
편식이 몸의 건강에 안 좋듯이 균형을 잃은 편향된 사상이나 종파심은 인류의 건강한 정신발달에 안 좋다. 함석헌이 그랬듯이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내가 가진 이념이나 신앙이 최고 불변의 가치이고 생명보다 소중할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그리고 타인의 그런 관점과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고서는 인류가 영원히 흑백논리와 독선, 그리고 끝없는 죽음의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타인, 타민족, 타국가의 신앙과 이념을 서로가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하나님 나라는 인류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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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전집10 : 달라지는 世界의 한길 위에서》, 한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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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접수일 : 2005년 7월 25일 / 심사완료일 : 2005년 8월 1일)


국문초록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대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때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월간지〈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게 된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스캔들’ 등으로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의 정치적 관여, 혹은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으며 인간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의 약자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하면서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했다.
이 글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 역사에 미친 주요 공헌과 영향을 분석했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의 ‘조직기피증’ 성향에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했다.

주제어 : 내면의 빛, 기독교, 종교, 성속, 평등, 과학, 민족과 국가, 퀘이커, 역사, 세계평화.


Abstract

The Position of Quakerism and Ham Sok-Ho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Kim Sung-Soo

Ham Sok Hon had a close connection with the Western Quakers from 1960 until he died in 1989. During this period he was actively engaged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vigorously protesting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At the height of the military dictatorship, 1970, Ham also established a monthly magazine, Voice of the People. What turned Ham, the downhearted man of the end of 1950s who was involved in a scandal, into a relentless freedom fighter?
From at least the 1960s onward, Quakerism was always behind Ham whenever he was active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George Fox, early leader of the Quaker movement, also emphasized the equality of men and women, and respect for each individual, not only under the law but also before God. Fox said that religion means looking after the social underdog and standing by him. Ham, always a man of doing rather than a man of being, ended his life as a Quaker. I will therefore examine and evaluate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Ham and Quakerism.
In this paper, firstly I will look into the philosophical aspect of Quakerism as seen through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In particular, I will closely examine the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Quakerism to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Secondly, I will analyze how and why Ham became interested in Quakerism, and how his thinking was influenced by Quakerism. By doing so, I will look into what it meant to be a Quaker to Ham as a Korean. In addition, I will also examine what kind of role Ham fulfilled as a Quaker in relation to Korean Christianity.

Key-words : Inner Light, Christianity, Religion, Secred and Secular, Equality, Science, Nation and State, Quaker, History, and the World Peace.








20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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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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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류영모, 오른쪽이 그의 제자 함석헌이다

류영모(柳永模 1890년 3월 13일 ~ 1981년 2월 3일, 서울 출생)는 한국의 개신교 사상가이며 교육자, 철학자, 종교가이다. 호는 다석(多夕)이다. 조만식, 김교신 등과 같은 세대로,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이현필 등의 스승이다. 다석(多夕)은 많은 세 끼(多)를 다 먹지 않고 저녁(夕) 한 끼만 먹는다는 뜻이다.[출처 필요]


목차
1생애
1.1출생과 성장
1.2기독교 신앙에 귀의
2결혼과 YMCA활동
3생애와 사상
4제자들
5지은 책
6가족
7함께 보기
8관련 서적
9참고 문헌
10외부 링크


생애[편집]
출생과 성장[편집]

1890년 3월 13일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 맏아들로 태아났다. 5살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6살때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을 배웠다.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고 다시 한문 서당에 다녔다. 12살때부터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3년 동안 맹자를 배웠다.

기독교 신앙에 귀의[편집]

15세에는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다.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9년 경기도 양평양평학교에서 한학기동안 교사로 일하였다. 1910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1912년에는 기독교 사상가요 문인인 톨스토이를 연구하여 그 영향으로 기성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짧은 소설들(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서 드러나듯이,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나가는 종교행사의 충실한 참여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복음을 이웃에 대한 자비,정직한 노동, 양심적 병역거부, 악을 선으로 이기는 비폭력투쟁등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일본 도쿄에 가서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결혼과 YMCA활동[편집]

1915년 김효정과 결혼하였고, 이후 최남선과 교제하며 잡지 《청춘》에 '농우', '오늘'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때에 이승훈이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였다. 후에 이것이 적발되어 압수당하였으며 류영모 대신 아버지 유영근이 체포되어 105일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일년간 재직하였다. 1928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1928년 이전에는 아버지의 경성피혁상점의 일을 도왔는데, 이후로는 아버지 유명근이 차려준 솜공장인 경성제면소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잡지 《성서조선》에 기고를 하였으며 이 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57일 만에 서대전 형무소에서 아들 의상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에 의하여 추대되었다.
생애와 사상[편집]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나 이후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 불, 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다.[1] 그의 강의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다.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그의 종교사상1998년 영국에든버러(Edinburgh)대학에서 강의되었다.[2]

제자들[편집]

제자 중에서 가장 아끼던 이는 함석헌이었다.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류영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퀘이커로 종교적 외도를 한 것에 대해서 크게 나무라고 의절하였다. 류영모와 제자 함석헌의 사상은 2008년 8월호 《기독교사상》에서 특집기사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로 소개되었다.[3]

지은 책[편집]
노자(늙은이)[4]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다석일지》, 김흥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하, 박영호, 두레
《제소리》(류영모의 강의록), 김흥호,
《다석 류영모 명상록》, 박영호 역·해, 두레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 김흥호 , , 2002년
《잃어버린 예수》(다석 사상으로 다시 읽는 요한복음), 박영호 , 교양인 , 2007년
《다석 유영모》(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철학자) , 박재순 , 현암사 , 2008년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정양모, 두레, 2009년
《다석 마지막 강의》류영모 박영호, 교양인, 2010년

참고 문헌[편집]

중앙일보 2001년 4월 5일자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 박영호, 두레
2008년 8월호 《기독교사상》-특집: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대한기독교서회 p.18-75
道德經 함석헌 기념사업회

2019/08/03

[단독]남양군도로 끌려간 6세 금복은 뙤약볕 아래서 카사바를 심었다 - 경향신문



[단독]남양군도로 끌려간 6세 금복은 뙤약볕 아래서 카사바를 심었다 - 경향신문




남양군도로 끌려간 6세 금복은 뙤약볕 아래서 카사바를 심었다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댓글25
입력 : 2019.08.01


정혜경 박사, 일제강점기 14세 미만 아동 강제노동 사례 첫 공개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숙소에 도착한 조선 소녀들.(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 원하는 모임 제공.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소장)


태평양 섬 등서 중노동 436명 분석
한반도 내 방적공장만 296명 달해
10세 미만 59명…최연소는 ‘5세’
반인도적 불법행위 대표적 증거로


1936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금복은 부모, 여동생과 함께 1939년 중서부 태평양(당시 남양군도) 티니언섬으로 떠났다. 몇 월인지는 모르고 일본에서 한두 달 머물렀던 것만 기억난다. 금복은 6세 때부터 일본 척식회사인 남양흥발(南洋興發)이 운영하는 ‘아기깡(Aguiguan)’ 농장에서 일했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카사바(고구마처럼 생긴 구황식물의 일종)를 심었다. 일을 했지만 제대로 급여를 받은 기억은 없다. 일본인들에게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1933년 12월생 인심은 1943년 6월 인천 동양방적으로 동원됐다. 마을 이장과 면서기가 “지역마다 할당된 인원이 있다”며 가야 한다고 했다. 인심 할머니는 “어린 딸을 보낼 수 없다며 울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해방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험난했다. “집으로 가라는데 방법을 몰라 공장에 가만히 있었다. 외삼촌이 데리러 와서야 공장을 나갈 수 있었다”고 인심 할머니는 말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징용에 끌려간 14세 미만 아동들의 실태를 분석한 연구가 처음 공개됐다. 남양군도, 일본, 한반도 일대 등으로 동원된 아동들은 성폭력, 배고픔 등에 시달렸다. 최연소 징용자는 중국 봉천성 남만방적에서 5세 때부터 일한 연임이었다.


31일 공개된 피해 사례는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정혜경 박사가 일제강점기 14세 미만 아동 436명을 분석한 결과다. 공개된 내용들은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강제동원으로 판단한 것 중 일부다. 위원회는 22만6583건의 징용피해 신고를 받아 21만8639건을 강제동원으로 판정했다. 위원회 조사과장이던 정 박사는 자신이 담당한 피해 사례 1087건 중 아동을 추려냈다.


당시 아동들은 주로 방적공장에 동원됐다. 정 박사가 분석한 사례 중 한반도 내 방적공장에 동원된 아동만 296명에 달했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13세고, 59명이 10세 미만이다. 강제노동으로 사망한 최연소자는 부산 방적공장에서 일한 10세 소녀 김순랑양이다.


일본은 1919년 만들어진 국제노동기구(ILO)의 원가맹국이었다. 당시 일본이 비준했던 ILO 협약들에는 ‘14세 미만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1923년 개정된 일본 공장법에도 반영됐다. 하지만 일본은 각종 예외조항과 편법을 만들어 한반도 전체에서 아동을 징용했다. ILO 협약 위반을 피하기 위해 ‘12세 이상 아동이 소학교(초등학교) 교과를 수료한 경우 노동 허용’ ‘이미 사용 중인 12세 이상 14세 미만 아동에 관해서는 적용 배제’라는 예외규정을 만들었다. 또 일본 공장법은 식민지 조선에 적용하지 않았다. 공장법을 시행할 경우 조선의 산업 발달을 저해한다는 논리였다.



정 박사는 “성인 남성만 징용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아동, 여성 징용도 많았다”며 “아동 사망자를 불효자라고 호적에도 올리지 않았던 당시 정서를 고려하면 아동 피해자는 상상 이상으로 많을 것”이라고 했다. 정 박사는 아동 징용피해자나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 들은 이야기들을 엮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이라는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10600055&code=940100&fbclid=IwAR3rYqxfXhTdPD97EbYg7dd8i8Ti0ubBA_mqqwysTuasuwJlYm58SQ28gxA#csidxdb5c15193b31217bcbf6ecdaa896bfe

2019/05/22

류영모의 삶과 그가 남긴 『다석강의』 - 에큐메니안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12 18:59
“경전에 이르기를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적의 도(道)로 돌아가면 재앙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친다’ 했다.”(한용운)(1)
지난 호까지 나는 독일의 가톨릭 종교철학자 베른하르트 벨터의 사상 전모를 특히 그의 ‘없음’(무) 사상과 관련해 다루어 보았다. 또한 동양의 ‘없음’(무) 사상과 비교하며 글을 마무리 하였다.
이번 글부터는 한국으로 눈을 돌려 한국의 사상가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나는 오랫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석 류영모에 대한 연구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주제가 분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제가 함축하고 있는 방향과 내용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였다.
다석 류영모는 왜 철학자가 아니었나
우선 주제에서 ‘철학적 의미’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한국 철학계의 연구 풍토를 감안할 때 부정적인 배경을 함축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 철학계에서는 아무도 류영모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 그의 사상의 일부분이 드러나면서 몇몇 학자들이 류영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대부분 신학자들이었다.
▲ 다석 류영모 선생님(사진 오른쪽)과 부인 김효정 선생님(가운데), 그리고 제자 박영호 선생님(왼쪽) ⓒGetty Image
그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도 선뜩 그를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그의 일지나 강의 가운데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생각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류영모가 어디에서도 철학적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 ‘사상가’로 분류할 수는 있어도 ‘철학자’로 지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듯싶다.
따라서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 점이 분명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류영모가 남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잡지에 실린 글은 몇 편 되지도 않고 그나마 그것도 학술지가 아닌 일반 교양지 수준의 잡지에 실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있는 그의 어록이나 명상록 등은 그가 종로 YMCA 연경반에서 행한 강의들과 그가 거의 매일 기록한 일기들을 기록하고 해설한 것들이다.
그의 일기인 『다석일지』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시 형식으로 쓰여 있다. 대충 한시(漢詩)가 1300편, 우리말 시가 1700편정도 실려 있다. 이 시들은 대부분 짧고 함축적이어서 해설이 없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든 형편이다.
류영모의 생각의 큰 얼개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은 그의 강의록이다. 여기서의 강의도 대학이나 학술단체에서의 강의가 아니라 성경연구모임에서 몇몇 사람들을 앞에 놓고 행한 강의일 뿐이다. 이 강의록마저도 그가 준비한 강의원고가 아니고 제자들이 속기사를 시켜 기록하게 한 강의 기록본이다.
이 강의록이 ‘다석어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지만 학술적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2)
류영모는 왜 한국 철학자인가
이와 같은 배경이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넓은 의미의 사상가는 될지 몰라도 철학자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의 일기와 강의록에 심오한 사상의 단편은 있을지 몰라도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류영모 철학’이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동안 『다석일지』와 그의 강의록들을 공부하고, 다석의 제자들이 해설해서 펴낸 명상록들과 일지 공부들을 연구하면서 다석의 생각들이 단순히 사상의 편린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나의 큰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류영모 자신은 신, 우주[세계], 인간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사상들을 좀 더 넓고 깊게 그 함축한 의미를 따라가며 이해하여 해석할 때 다석의 독특한 신론, 우주[세계]론, 인간론을 구축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동안 나는 이런 작업을 하여 몇 편의 글과 책으로 출간하였다.(3)
따라서 체계적인 이론이 없기 때문에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 근거가 없는 셈이다.(4)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비록 그가 남긴 글은 하나도 없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를 철학자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사상에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류영모를 철학자로 내세울 수 있는 근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류영모는 우리말로 사유하고 철학한 주체적인 한국 철학자다.
2) 그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시도한 현대 철학자이다. 우리는 그의 철학에서 시대정신의 반영을 읽어낼 수 있다.
3) 그는 동서 통합의 지구촌 시대에 통합적인 사유로 새로운 신론, 인간론, 생명론을 전개한 세계 철학자이다.
4) 그는 무엇보다도 존재이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 철학자이다. 있음의 관점이 아닌 없음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것을 제안한 ‘없음[무]의 형이상학자’이다.
5) 그는 이성중심의 인간관에서 탈피하여 영성중심의 인간관을 제시한 인간학자이다.
6) 그는 생명에서 하늘의 뜻을 볼 것을 제안한 영성가이다.
다음 글부터 나는 좀더 자세하게 위의 주장들을 검토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이원섭 옮김, 운주사, 1992, 119.
(미주 2) 다석학회는 이 강의 속기록들을 검토하여 믿고 인용할 수 있는 강의록으로 출간하였다.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미주 3) 참조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인문학 연구」 제4집(1999),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34; “존재에서 성스러움에로! 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모색 ― 하이데거의 철학과 류영모 사상에 대한 비교연구”, 『인문학과 해석학』(해석학 연구 제8집) (한국해석학회 편) (2001. 10월), 247〜300; “다석 류영모에게서의 텅빔과 성스러움”, 2000년 11월 18일 체코 올로모츠에서 개최된 국제현상학회 발표원고,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16집 (2001년 6월), 353〜392; “다석 류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씨알의 소리』통권 제174호(2003년 9/10월호), 71〜99; “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류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생명사상 재조명』(오산창립100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집) (2005년 11월 28일), 53〜85;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 2003;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지식산업사, 2003.
(미주 4) 물론 나는 류영모의 인간론, 신론, 생명론 등을 전개하면서 류영모 자신의 말이나 글에 의존하기보다는 그의 말이나 글이 함축하고 있는 차원과 그 지시하고 있는 방향을 고려에 넣어 이론적인 얼개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혹자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자의적인 해석에 가깝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은 철학이론들이 그런 생산적인 대결에서 생겨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류영모의 삶과 그가 남긴 『다석강의』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2)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19 19:00
40년을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걸어다닌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칠성판이라고 하는 죽음의 널판자에서 자고 하루의 시작과 더불어 그 위에서 사색하고 공부하면서 하루를 살다가 밤이 되면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다시 죽음의 널 위에서 눈을 감는다. 매일같이 그렇게 하루[할우]를 사는 ‘하루살이’의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류영모의 삶과 연경반(硏經班) 강의
바로 그가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고 설파하면서 인류의 모든 문제는 식(食)과 색(色)에 달려 있다고 외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1890〜1981)이다. 그처럼, 그의 주장대로 산다면 21세기 인류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처럼 하루 한 끼니만 먹고 걸어다니면서 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정신과 가르침에서 암울한 이 시대를 헤쳐 나갈 삶의 지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석 류영모, 그는 누구인가?(1) 류영모는 어려서는 서당과 소학교에 다녔다. 17세에는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간 수학하였다. 이렇게 그는 서당교육과 신식교육을 아울러 배운 신지식인이었다.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교사로 2년 간 봉직한다. 그 후 일본에 유학 가서 동경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수학하고 귀국한다. 1921년 31세에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년 간 재직한다.
이때 함석헌과 운명적으로 만나 평생 그의 스승이 된다. 1928년부터 약 35년 간 YMCA에서 성서를 포함한 동서양의 경전을 연구하는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지도한다. 1939년 51세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고 일일일식(一日一食)과 금욕생활을 실천한다.
1955년에 일년 뒤인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한다. 일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한다. 1959년 노자 도덕경을 우리말로 완역하고 그밖에도 다른 경전의 중요부분들을 우리말로 옮긴다. 1981년 2월 3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하루살이의 삶이 3만 3천 2백일을 채운 날이다.
2006년에 출간된 책 『다석강의』(2)는 다석이 1956년 10월 17일부터 1957년 9월 13일까지 약 일년 간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에서 한 강의를 속기록에 바탕해서 복원한 강의록이다. 다석 강의의 속기록 전문이 출간되기는 처음이다. 이 강의록을 보고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먼저 일 년이 채 안 되는 강의의 기록이 천 쪽 가량의 방대한 분량이라는 사실이다. 서양의 저명한 사상가의 두 학기 강의록에서도 이만한 분량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한국의 무명 양봉가(養蜂家)가 해낸 것이다.
그 다음 그 내용이 그야말로 깊은 사색과 명상, 그리고 엄격한 자기수련에서 갈고 닦아낸 삶의 지혜라는 것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의 대화록, 공자의 가르침, 간디의 어록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주옥같은 말씀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이 타오른다. 35년의 연경반 강의에서 일 년 치 강의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동서양 종교에 대한 통합적 사유의 길
“이 사람이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유교의 경전도 먹고 불교의 경(經)들도 먹습니다. 살림이 구차하니 정식으로 먹지 못하고, 구걸하다시피 여기서도 얻어먹고 저기서도 빌어먹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이 사람의 깜냥[消化力]으로 소화시켜 왔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하여 내 건강이 별로 상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나 유교 경전을 보나 불교의 경을 보나 그리스의 지(智)를 보나 종국은 이 ‘몸성히’, ‘맘뇌어’, ‘뜻태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3)
이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류영모는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아우르는 ‘무엇’인가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그의 독특한 언어관에 바탕해서 펼쳐나갔다. 그에 의하면, 언어[말]는 하느님의 마루[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류영모는 우리말에 담긴 존재의 소리 또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고유한 인간관, 생명관, 신관을 펼쳐보이려 시도하였다. 따라서 류영모는 우리말로 철학하려 시도한 최초의 한국 사상가인 셈이다.
다석 사상의 뛰어남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 언문, 암글이라고 무시되고 천시받아 온 ‘한글’로서 학문할 수 있고 철학할 수 있음을, 아니 철학해야 함을 보여준 데 있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서 말건네 오고 있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고 믿었다. 바로 우리말 속에 우리의 독특한 삶의 방식, 사유방식, 철학이 들어있음을 강조하였다.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이 글이요, 글이 말이다. 하느님의 뜻을 담는 신기(神器)요 제기(祭器)이다. 하느님의 마루뜻[宗旨]을 나타내자는 말이요, 하느님을 그리는 뜻[思慕]을 나타내자는 글이다.
“이렇게 몇 자가 분열식을 하면 이 속에 갖출 것 다 갖춘 것 같아요, 말이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말도 정말 이렇게 되어야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오지 지금같이 남에게(외국어) 얻어온 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돼요. 글자 한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 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어요.”(4)
다석은 우주의 영원한 생명줄이 이어 이어 내려와서 지금 여기의 나의 몸에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이제긋’이라고 이름한다. 무한한 생명이 이어져 내려와 그 끄트머리가 나에게까지 닿은 것이 ‘이긋’이고, 이제 그것을 지금 여기의 내가 이어받아 이어나가야 할 끄트머리로 삼을 때 ‘제긋’이다. 이렇게 ‘하나’인 우주생명은 ‘이제긋’으로서 나의 몸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웋일름[하늘의 뜻]을 따라 하늘로부터 받은 속알[바탈]을 태워 다시 ‘하나’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입니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다니는 것밖에 없습니다.”(5) “‘우’를 쳐다보면서 올라가는 것만이 거룩하게 되는 길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항상 하는 소리입니다.”(6) “이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늘 하나입니다. ‘하나’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가 신입니다. 하늘을 왜 믿습니까? 간단히 ‘하나’를 믿는 것이 옳지 않나요?”(7) “이 사람이 드릴 말씀은 사는 날까지 하느님을 더 알고 더 연구하고 싶고, 덕(德)이라는 것을 더 붙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덕’을 붙여 보고 싶습니다.”(8)
우리말로 철학한 최초의 사상가
배움과 말의 관계에 대한 다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배운다는 것은 말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어 사귀게 합니다. 물건과 물건 사이를 설명해주고 밝혀주는 것도 또한 말입니다. 말은 ‘너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 할 때에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이치상관(理致相關)이라 물건과 물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치를 밝혀주는 것입니다.”(9)
다석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실존을 찾아갈 수 있고 하느님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말씀을 모르고서는 도무지 사람 노릇을 못한다.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또 말을 알지 못하면 무엇을 갖고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도(道)라는 것도 말의 길을 안다는 것이다.
다석에 의하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신이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신과 연락하는 것, 곧 신이 건네주는 것이 생각이다. 신이 건네주지 않으면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한다면 신과 연락이 되어야 한다.(10)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을 보고 나온다. 거의 들리지 않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씀이 나온다. 정말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말씀이 나온다. 말씀이 나오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언젠가는 우리가 말씀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결단이 난다. 하느님의 얼이 끊어지면 그렇게 된다. 생각하는 데 하느님이 계시고,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은 짐승이다.(11)
다석은 우리말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계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한자말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별(別) · 의(義) · 친(親) · 정(正)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닳(별) · 옳(의) · 핞(친) · 밣(정)’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야 우리말로 문화예술의 사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너무 어려워도 안 되고 간단히 뜻을 나타내야겠는데, 그러한 표식이 없고서는 큰 사상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문으로 적어 놓으면 설명하여야 하고, 자꾸 설명하다 그만두게 됩니다.”(12)
“진 · 선 · 미, 이것도 우리말로는 없습니다. ‘참(眞) · 좋(善) · 곻(美)’으로 나타내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해놓아야 후세 사람도 그 뜻을 알고 이어서 다시 큰 사상을 담게 되는 것입니다.”(13)
다석은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시험 삼아 말하지만 후에 우리나라 철학이 있게 되면 이 말들이 잘 쓰일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 민족에게 철학이 필요하면, 누가 되었건 우리말로 철학 용어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있어서 우리 몸이 있는 것같이, 우리가 쓰는 말도 꼭 필요한 자식처럼 필요한 말이 마침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쓰는 말을 억지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무리가 되더라도 만들어야 할 때는 만들어야 합니다.”(14)

미주

(미주 1) 다석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길잡이 글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박영호, 『씨알.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홍익재, 1985;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다석사상전집 1, 문화일보사, 1995;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전2권), 두레, 2001; 박재순, 『다석 유영모. 동서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현암사, 2008.
(미주 2)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975.
(미주 3) 류영모, 『다석강의』, 606.
(미주 4)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문화일보 1996, 131/2.
(미주 5) 류영모, 『다석강의』, 607.
(미주 6) 류영모, 『다석강의』, 667.
(미주 7) 류영모, 『다석강의』, 103.
(미주 8) 류영모, 『다석강의』, 110.
(미주 9) 류영모, 『다석강의』, 48/6.
(미주 10)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96/7.
(미주 11)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100.
(미주 12) 류영모, 『다석강의』, 132.
(미주 13) 류영모, 『다석강의』, 133.
(미주 14) 류영모, 『다석강의』, 678.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2019/02/08

함석헌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속죄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무교회(1945-1955)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함석헌 속죄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오철근
12 hrs ·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함석헌

속죄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오늘은 여러분과 약속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죄 문제입니다. 기독교에서 보는 세계는 윤리적인 질서라고 위에서 말했습니다. 윤리적이기 때문에 죄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면 곧 십자가, 십자가라면 곧 죄, 그거면 기독교의 전부로 알만큼 죄와 그것을 해결하는 속죄문제는 기독교에서 중요한 교리가 되어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둘셋 모인 곳에 가기만 하면, 예배나 토론을 하는 곳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곧 죄, 회개, 속죄, 하는 말을 듣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교 속죄교라 할 만합니다.

물론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요, 구경의 목적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가는 곳은 영원한 생명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속죄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요 방법이지, 목적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중요시하게 되는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그렇게 중요시하는 것은 기독교가 인격적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종교인 이상, 사람의 맘을 바로잡기를 목적하는 이상, 어느 종교나 죄에 관한 가르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처럼 거기 대해 심각히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죄는 어찌하여 있게 되느냐.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죄를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됐다든지, 물욕에 가려서 그랬다든지 하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 속에 자유로운 의지로 의식적으로 된 것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인격적인 우주관에 서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역사를 단순한 물리적인 변천과정으로 보는 데는 죄가 있을 리가 없고, 양심의 고통이니 가책이니가 있을리 없습니다. 우주정신의 범신론적 현현으로 보는 데도 그렇고, 형이상학적인 원리의 발전으로 보는 데서도 그렇고, 맹목적인 의지로 더듬어가는 데서도 죄의 고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여러가지 설명은 인간의 가슴속 깊이 들어 있는 독사 같은 죄의 고민을 없애볼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용이 없는 것은 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사실은 그러한 설명보다는 더 강하고 끈질긴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도 다른 생물과 일반으로 간단한 데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해가는 것이라고 생물학자가 말해도, 죄란 불완전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철학자가 말해도, 고민하는 인간의 가슴에서 죄의 의식을 뽑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물질주의, 현실주의가 왕성해감을 따라 양심이 점점 둔해져 가는 것 같으면서도, 과학의 응용에 따라 생활은 날로날로 편리해 가는 것 같으면서도, 세계적으로 고민이 늘어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인 증거요, 죄가 인간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요, 우주에 윤리적인 질서가 엄존하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죄는 인간 자유의지의 산물이요, 이성의 산물입니다. 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무엇보다 먼저 처분해야할, 무엇보다 나중까지 깉어 있을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간 혼의 알 속에서부터 대우주의 끝까지 뻗어 있는 균사(菌絲)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물이 오늘날까지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얼마나 고통스런 우주관입니까? 또 얼마나 진실하고 장엄한, 거룩한 우주관입니까?

성경은 예수의 사업을 한마디로 요약해 죄를 정결케 했다 합니다. 그것이 근본이요, 다른 모든 활동도 다 거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통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 생각할 때 예수께서 유대민족에 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고금 여러 민족 중 그들처럼 죄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가진 민족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상한 성격의 민족이어서 한편 유대인이라면 곧 돈을 연상할 만큼 이욕적(利慾的)이면서 다른 한편엔 엄격한 도덕적 양심을 가집니다. 강한 광선같이, 렘브람트(Rembrandt van Rijn)의 그림을 보는 것같이 명암이 극도로 대조됩니다. 『구약』 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죄, 완악, 불의, 음란 등등 이런 문구로 꿰뚫려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역사적 문헌인데, 세계 어떤 국가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게 신음으로 일관된 것은 없습니다. 정말 뺀 백성이었습니다. 죄의 의식이 그들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낳은 태반이었습니다. 예수는 다른 데서 날 수없었습니다. 이 고민하는 양심만이 영원한 인격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끊는 용광로만이 순금을 낳을 수 있는 것같이.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유대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바라보면 놀라운 대조를 이루어 한개 숭엄한 그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아니고는 그 인격의 영광이 찬란한 맛을 완전히 알 수 없고, 또 그 인격의 빛이 아니고는 그 역사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예수가 가장 많이 쓰신 말씀을 들면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일 것입니다. 이것은 끓어 돌아가는 용광로의 중심에 떠오르는 결정체같이 빛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죄의식에서만 닦이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나는 그를 영원한 로켓탄이라 했습니다. 이 로켓탄을 발사하는 폭발하는 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영이겠지만 , 그 폭발을 가능케 하는 굳은 탄피는 죄의식으로 단련된 강철같이 엄혹한 도덕입니다.

어느 민족의 역사가 아니 그러리오만, 특히 유대 역사는 훈련의 역사요 단련의 역사입니다. 둔한 짐승깉이, 약한 어린이 같이 그들은 채찍에 맞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들을 후려갈긴 채찍은 '거룩'이요, '의'였습니다. [창세기] 이하를 읽어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알고 그 의를 배우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국가, 여러 문화와 접촉하며 가지가지의 파란곡절을 겪었지만, 구경의 의미는 이 두 가지에 돌아가고 맙니다. 두 채찍 사이에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엎어지는 동안 가슴속에 늘어간 것은 날카로운 죄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포수시대(捕囚時代)를 지내고, 예언자도 끊어지고, 나라가 완전히 망한 때에 마치 심장도 인젠 이 이상 견딜 수도 없다 할 만큼 된 때에, 고대 모든 문화 중 가장 고상한 도덕적인 문화를 가졌던 종교의 뺀 백성은 절망하려 했습니다. 그때에 나온 것이 예수요, 그가 와서 한 말이 "하늘나라 가깝다" "나를 믿으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였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는 한가지 사실의 두 면입니다. 인생의 입장에서 하면 인간의 목표는 영원한 생명이고, 역사적 입장에서 하면 역사의 완성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죄의 고민속에 절망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것을 복음이라, 기뿐 소식이라 했습니다. 예수는 무엇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었나. '사랑'과 '참'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왔다"고 했습니다. 거룩과 의를 배우기에 기운이 빠진 인간을 그는 사랑과 참의 가슴에 안아 살려냈습니다. 칼날같이 날카롭던 죄와 그뒤에 따라서는 무서운 죽음이 그만 권위를 잃고 안개같이 사라지게 됐고, 무너진 역사의 무더기 속에서 새 생명의 싹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옛사람은 듣기를 "하나님은 노여워하는 하나님이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노를 풀어보려고 단식도 해보고,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써도 보고, 제사도 드려보았습니다. 소박한 양심에도 생 • 사 • 화 • 복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는 줄을 알았고, 또 윤리적인 질서 속에 난 생명인지라, 제가 당하는 불행과 제 행위를 인과적으로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은 어째 그런지는 모르면서도 역사의 먼동 트기부터 당연한 것으로 그리 생각하여왔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첨부터 지배해온 법칙입니다.

그래 그들은 항상 벌벌 떠는 심리였습니다. 또 유치한 생각에, 자기의 무력을 언제나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술적으로 초월한 능력의 하나님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호의를 얻으려 전전긍긍하는 것이 고대 종교였습니다. 이리하는 동안에 그들은 그 종교의 초보적 소학에서 도덕생활의 기초를 닦았고,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규율을 지키는 것을 배우기는 했으나, 맘의 평안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맘의 평안이 없는 한 모든 축복의 약속은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차차 주의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돌리게 됐습니다. 마법 • 주문으로 행복을 끌어오자던 생각을 그만두고 제사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자기네가 지은 죄를 없이 해주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 중에 아름답고 흠 없는 놈을 골라 제단 앞에서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를 단위에 통으로 불살랐습니다. 그리하여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노한 하나님의 풀어진 얼굴을 보려 했습니다.

몰론 죄의 값이 죽음인 것을 양심적으로 아는 이상 죄를 청산하려면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을 그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고, 죽는 의미를 표시하여 그 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서 취한 의식이 곧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물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로 피를 제단에 뿌린 것입니다. 뿌린 짐승의 피는 곧 자기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시사회에서는 정말 사람을 잡아 제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에도 그 자취가 아직 '심청이 이야기'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사상이 진보됨에 따라 그것은 그만두고 짐승으로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민하는 유대인의 신전 안에서는 죽는 짐승의 비명이 그칠 날 없었고, 또 제단에서는 늘 선지피가 뚝뚝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것으로 양심을 평안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짐승은 아무래도 사람은 아니요, 대제사장은 비록 전 민중을 대표한다 해도 나 자신의 맘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개 비유요, 식이요, 제도요, 기계지 산 인격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유치한 시대에 일시 양심의 위로를 아니 받은 것 아니나, 그것으로는 정말 양심을 완전히 죄의 권위에서 해방하여 영혼의 자유를 얻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도는 점점 복잡해가고 의식은 점점 엄중해가건만, 양심은 차차 더 괴롭고 무력할 뿐이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소수의 진실한 양심속에 반대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아니 된다. " 그들은 더 인격적으로, 따라서 더 정신적으로 하나님에 접근하기를 애썼습니다. 아모스, 호세아로 시작되어 이사야, 미가, 에레미야, 제2 이사야 등으로 내려오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교회와 의식제도에 관계 없는 자유신앙자들 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사종교와 예수의 복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제사를 즐겨 하지 않고 자비를 즐겨한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죄를 사했다 하라" "내 율법을 그들의 맘에 두리라" 하는 소리를 그들은 벌써 양심속에 들었습니다.

그러는 때에 예수가 나타나시어 폭탄적으로 한 선언이 "하나님은 아버지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영이시다" 했습니다. 놀라운 혁명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일 사랑의 아버지라면 그 앞에 죄란 것이 있을리 없습니다. 죄가 없는데 속죄제가 무슨 필요며, 벌벌 떨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만일 영이시라면 그 앞에 일체의 형식이 소용이 없고 오직 참으로 하는 양심이 요구될 뿐 아니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아버지라, 영이시라 하는 말을 듣고, 제사장과 교법사들이 분이 나 죽이려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종교가 토대에서부터 진동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목자 없는 양같이 헤메는" 민중을 보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네 죄를 사하였다" "평안하라, 두려워 말라" 했고, 사람들은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전 옛날 사람들이 죄란 것을 가슴에 꼭 안고, 그것을 피해보려고 눈을 감아도 보고, 달음질도 해보며, 애쓰면서 하지 못하던 것을 예수는 그 죄의 실재성을 빼앗음으로써 스스로 없어지게 했습니다. 죄의 실재성을 무엇으로 빼앗았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으로써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아버지로 아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안 것입니다.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한테 인격적인 태도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음으로써 그를 아버지로 알아보았고, 아버지를 앎으로써 그의 가슴에 사뭇 들어갔습니다. 거기 죄가 있을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품속으로서 왔노라 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죄는 믿지 않는 자에게만 있습니다. 죄가 따로 있는 것 아니라 믿지 않는 심정, 그것이 곧 죄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죄가 실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심정에, 생명의 근본 원리는 사랑이니 그 안에 정죄함이나 심판함이나 죽음이 있을 수 없다 믿는 맘에, 죄는 있을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2019/01/10

1901 “지속가능한 문명 실현하는 북의 농축산정책”


 “지속가능한 문명 실현하는 북의 농축산정책”



기획연재
김수복 선생 ‘북의 과학기술정책’
“지속가능한 문명 실현하는 북의 농축산정책”

기사승인 2019.01.10 14:42:18

- 김수복 선생의 ‘북의 과학기술정책’ - 고리형 순환생산체계와 후방산업(1)



재미동포 통일운동가인 김수복 선생(6.15뉴욕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대북제재 원유 공급 중단으로 조성된 전력난을 이겨낸 북 특유의 ‘자연흐름식 물길공사’에 이어 공장·기업소와 주거단지에 농축산업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고리형 순환생산체계(closed loop)에 의한 후방사업’을 소개하는 글을 보내왔다. 
김 선생은 앞으로 북의 자연개발과 과학기술분야를 주로 다룰 예정이어서 연재 제목을 ‘북의 과학기술정책’으로 바꾼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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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은 평양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승용차이다. 지난 2013년 5월17일 화창한 봄날 휘파람을 몰고 신의주 고속도로를 달렸다.

최첨단 새 기술에 의해서 무연탄만 있으면 비료를 뽑을 수 있다는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당시 유튜브에는 북은 비료가 없어서 농사를 못 짓는다며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영상들이 많이 퍼져있었다. 공장 포장반으로 들어서자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요소비료를 재빠른 동작으로 포장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달려가서 금방 생산한 하얀 비료알갱이를 내손에 한 움큼 쥐어보니 아직 따끈한 온기가 내 심장까지 스며왔다. 유튜브에 날조한 거짓들이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방문 기록을 보니 공장 종업원이 1만2000명인데 기술직은 3000여명이고 나머지는 후방사업에 종사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 뉴욕에 돌아와서 한참 뒤 남흥청년화학을 소개하는 동영상의 후방축산기지 편을 보고서야 이러한 엄청난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북의 공장들에는 제품 생산부서와 별도로 공장 일군들과 가족은 물론이고 인근 애육원, 육아원, 양로원과 초등학원, 중등학원과 인근 주민들에게 공급할 육류단백질, 채소, 버섯과 심지어 과일을 생산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 약 4000개의 농업협동농장과 축산전문조합은 당연한 것이고 전국의 모든 공장, 기업소, 군부대도 자체적으로 먹거리를 해결하고 있다. 대부분 육류, 야채, 과일, 버섯 등의 부식을 생산하지만 남흥청년화학과 같은 대규모 공장에서는 벼농사까지 지어서 주식까지도 해결하는 단위가 많이 있다.

이러한 사업을 후방사업 또는 후방축산사업이라고 한다. 농축산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진행하게 되므로 고리형 순환생산체계(closed loop)에 의한 후방사업이라고도 한다. 후방사업은 북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당 정책으로 시행되었고 김정은 시대에 와서 대대적으로 실시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2015년 5월 다시 평양에 가서 국가과학원 참사실장 리문호 박사로부터 고리형 순환생산체계를 비롯해서 북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해서 자세히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리문호 박사는 미국의 아라모스 핵연구소 책임자였던 핵공학 전문가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평양에 왔을 때 3번이나 안내한 핵분야 전문가이다.

▲ 리문호 국가과학원 참사실장(박사. 왼쪽)과 함께


이와 같이 전국의 모든 기본 단위에서 자기들에게 적합한 축산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아파트단지와 공사 기간이 장기화되는 자연흐름식물길공사장이나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도 집짐승을 기르고 야채밭과 겨울철을 위한 남새온실까지 건설해 자기 단위 일꾼들에게 1년 내내 신선한 야채는 물론 육류 단백질 공급을 해결하고 있다. 양어장까지 함께 묶어서 진행하는 곳도 많이 있다.

이제는 밥만을 주식으로 하지 않고 축산물, 수산물을 더 많이 먹자는 당 정책을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앞세워 새로운 우량종자를 펼치며 짐승 먹이풀을 개발해 알곡먹이를 대폭 줄이면서도 집짐승의 숫자를 확대하고 있다. 리문호 실장에 의하면 스위스의 파울 염소와 잔앤종 염소와 또 3원 교잡 원원종돼지 우량종자를 대대적으로 전국으로 펼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화학비료를 장기적으로 사용하면 땅이 산화되어 지력이 떨어져 생산성도 떨어지며 농산물에 있어야 할 필수 영양소도 결핍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가혹한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반공화국 세력들의 대북제재가 강화되면서 원유 공급이 급락하자 농사에 필요한 화학비료 생산도 영향을 받았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유기질비료 생산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화학비료의 효과를 극대화시켜주는 식물성장활성제 등을 많이 개발했다. 이것들은 이미 이용하던 흙보산비료와 함께 알곡생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북에서는 각 지역의 토양 특성에 맞는 유기질거름과 흙보산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각 군에 한군데씩 오래전부터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유기질비료 원료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축산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다. 돼지, 닭, 오리, 거위(게사니)의 배설물을 볏짚, 콩짚, 옥수수대와 야채 부산물에 섞어 발효시키면 질이 좋은 유기질거름이 된다. 그러나 볏짚과 콩짚 등은 가을에는 흔하지만 겨울과 봄에는 귀하고 양도 제한적이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영양가 높은 짐승먹이용 풀 육종에 힘을 넣어 이제 우수한 새로운 풀들이 등장했다. 비름, 토끼풀, 자주꽃자리와 같이 종전부터 있던 풀들에 더해서 단백풀, 애국풀이 나왔다.

단백풀은 연못처럼 얕은 물위에 떠서 자라는데 흙탕물이나 썩은 물에서도 잘 자라며 물 정화 능력이 탁월하다. 이 풀에는 단백질 함량이 많고 돼지, 닭의 식성에 잘 맞아 집짐승 알곡먹이를 대폭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단백풀은 잘 자라므로 계속 걷어내 많은 양을 얻을 수 있다.

▲ 물웅덩이에서 자라는 단백풀(위성과학자살림집 남새온실. 2015년)


새로운 종자인 애국풀은 수수대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성장이 빠르고 5m까지 자라며 넙적한 잎이 28개까지 돋아 많은 양을 거둬들일 수 있다. 소, 염소, 돼지가 좋아하고 영양가도 높아 알곡먹이를 대폭 줄여주고 있다. 겨울나기를 위해서 절여 보관한다. 우리가 김치를 먹듯 가축에게도 겨울철에는 풀조림을 먹여서 건강을 증진시킨다.

애국풀을 개발한 원산농업종합대학 생물공학연구소의 동영상(아래)이 잘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 대동강 과수종합농장, 은정구역 위성과학자거리 살림집 단지에 이어 휴전선 접경 세포지구 대단위 축산기지에서 고리형 순환생산체계가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소개하겠다.

1. 대동강 과수종합농장

▲ 끝이 보이지 않는 대동강 과수종합농장 1000정보. 멀리 살림집들 너머에도 사과밭이 있다.


1000정보에 달하는 대단위 사과전문농장인 대동강 과수종합농장은 2009년 11월에 완공되었다. 평양시 동북 외곽에 있다. 작업에 편하도록 키 작은 사과 종자를 육종한 사과밭이 끝이 보이지 않는 무릉도원이 되었다. 사과 가공공장은 거의 무인화로 돌아가는데 사과과자, 단물 사이다, 사과술, 식초, 향수, 비누, 샴프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이용해서는 규모가 대단한 대동강 돼지공장과 양어장도 운영하고 있다. 각 부위별로 포장한 돼지고기제품과 여러 가공품과 양어장에서 키운 잉어, 왕새우, 왕개구리, 자라도 판매하고 있다.

돼지공장과 양어장에서 나온 배설물은 다시 위생처리를 거쳐 질 좋은 유기질거름이 되어 사과밭에 뿌려진다. 비옥해진 토양은 사과 풍년을 약속한다.

대단위 공장이 돌아가고 있는데 쓰레기가 거의 없는 청정 순환생산체계를 실현하고 있다. 이것을 북에서 고리형 순환생산체계에 의한 농축산이라고 부른다.

▲ 사과제품 가공공장. 거의 무인화된 자동흐름생산체계이다.


▲ 대동강 과수종합농장 매점 봉사원들이 우리 일행을 배웅하고 있다.


▲ 매점 내부


▲ 부위별로 포장된 돼지고기제품


▲ 사과 찌꺼기로 기른 자라, 잉어, 왕개구리, 새우도 판매한다.


2. 은정구역 위성과학자거리 살림집 단지

북의 과학중시정책의 핵심기관 중 하나인 국가과학원은 평양시 북쪽 은정구역에 분원을 두고 있다. 은정구역은 평성시에 속했는데 얼마 전에 평양시로 편입되었다. 평성시는 평안남도 도행정소재지이며 평양에 들어오는 길목이다.

위성과학자거리는 24개 호동에 1004개 가구가 입주할 수 있도록 2014년에 완성되었다. 국가과학원 참사실장 리문호 박사께서 내가 미국에서 제기했던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질의에 대해 하나하나 해설을 해주시고 오후에는 위성과학자거리까지 동행해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여행을 하다보면 과분한 대접을 받아서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학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인 나에게 방문 때마다 베풀어주신 국가과학원의 여러 분원, 인민대학습당, 김철주사범대학,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위성과학자거리 살림집 단지는 탁아소, 유치원, 소학교 초급과 고급중학교까지 있고, 체육관, 병원, 일용잡화가게, 행정관리사무소를 갖춘 종합적 아파트단지이다. 이름은 과학자 살림집이지만 모두 과학자만 입주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은퇴한 부부가 아들 손주와 함께 거주하는 한 가구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살림집 매 호동마다 아래 사진과 같이 일정한 텃밭이 붙어있어 해당 주민들이 채소를 가꾸고 필요한 만큼 뜯어다가 싱싱한 식재료로 이용한다고 한다. 겨울철에도 싱싱한 야채 공급이 가능하도록 4개 호동의 태양열남새온실을 운영하고 있다.

▲ 매 호동 앞에 남새밭이 있다.


위성과학자거리 태양열남새온실 4개동


태양열남새온실 관리자가 마침 온실 천정에 엘이디(LED)등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매 호동 면적이 350평방미터인데 300평방미터의 남새(야채)밭 옆에 돼지우리, 단백풀 물웅덩이, 부엌과 메탄가스 발생 탱크, 영양액 탱크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여성 관리자는 첫 동에 있는 관리원실에 기거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다녀오는데 남편이 돼지냄새 난다며 놀린다고 웃는다. 위성과학자거리가 완성되면서 관리자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되어 자원했단다. 재정분야에서 일했고 남편은 지금도 재정부서에서 일하고 있다며 리승기 박사의 손주며느리 량혜옥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나도 리승기 박사에 관한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더니 금방 내 손을 덥석 잡고 친오빠처럼 살갑게 대해주며 토마토 3알을 선물로 주었다.

남새온실에는 여러 가지 남새를 가꾸고 바나나도 시험재배하고 있었다. 위에 실은 단백풀 소개 사진을 여기서 찍었다. 시멘트로 만든 자그마한 물웅덩이 위에 단백풀이 자라고 그 밑에는 미꾸라지가 헤엄치고 있다. 단백풀과 미꾸라지가 상생하는 평화의 현장이었다. 단백풀과 미꾸라지는 다 자라면 돼지먹이가 되고 돼지 배설물은 발효해서 남새온실의 거름이 된다. 남새 부산물과 돼지배설물을 메탄가스탱크로 흘려보내 발효되면 많은 양의 메탄가스가 생긴다. 부엌에 있는 가스레인지를 켜자 불이 확하며 붙었다. 또 메탄가스를 만들고 남는 찌꺼기는 유기질 거름이 되어 남새밭에 뿌려진다.

온실 북쪽 벽은 두꺼운 콘크리트로 쌓고 흙을 더해 찬 기운을 차단하고 남향은 여러 겹 박막비닐로 되어있어 태양열을 흡수하므로 겨울에도 상온이 유지된다. 필요한 전기는 옆에 설치한 태양빛전지판에서 생산한다.

이렇게 크지 않은 아파트단지에서도 친환경 무공해 태양열온실을 운영하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과학지식이 일반 인민들의 생활에 그대로 이용하도록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무엇 하나 쓸모없게 버려지지 않고 모든 것이 이웃에 유익하게 재사용되는 것이다. 고리형 순환생산체계가 생활화되고 있다. 다음에는 이런 주택단지가 얼마나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지 자료를 구하려고 한다.

(계속) 


▲ 오밀조밀한 남새온실 350평방미터의 구조.


▲ 온실 천정에 LED등을 설치해 놓았다.


▲ 온실 내부 돼지우리에 11마리 새끼돼지가 통통하다.


▲ 단백풀이 얼마나 크게 자라는지를 손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 남새온실 량혜옥 관리원(왼쪽)과 함께.


▲ 돼지 배설물과 버리는 남새가 발효할 때 생기는 메탄가스로 밥도 짓고 물도 데운다.


김수복 6.15뉴욕지역위 공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