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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알라딘: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Poul Dam

알라딘: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위대한 국가 지도자의 모범
폴 담 (지은이), 
김장생 (옮긴이) 
  누멘 2009-10-30
정가
6,000원
판매가
6,000원 마일리지 300원




8
100자평 0편
리뷰 2편
세일즈포인트 178

원제 Nikolaj Fredrik Severin Grundtvig

104쪽
128*188mm (B6)


목차

  • 머리말
  • 그룬트비의 생애와 저작들
  • 시민대학
  • 그룬트비와 어린이 교육
  • 그룬트비와 민족교회
  • 민족성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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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폴 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 총 1종 (모두보기)

1921년 덴마트 코펜하겐 출생. 시민대학의 전직 교장이었고, 1964년부터 1977년까지 사회주의국민당국회의원을, 1976년부터 1977년까지는 최고회의 간부를 지냈다. 독일 점령기인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지도적 레지스탕스 그룹이었던 덴마크 연합의 비서가 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여 지도부 간부가 되었다. 그 후 시민대학 위원회를 포함한 여러 행정위원회의 비서와 주축 멤버로 활동하였다. 1954년부터 1963년까지에는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연합회 주간지를 편집하였다. 다양한 잡지들을 편집하였고, 교육뿐만이 아니라 사회 현상이나 사회사, 그룬트비의 정치적 업적과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덴마크 시민대학의 지도자였던 아른프레드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 교회.정치.문화에 관한 신문비평을 쓰며, 교회 강좌 및 대중 강좌를 활발히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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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김장생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처음 읽는 중세철학>,<사랑하며 춤추라>,<종교 속의 철학, 철학 속의 종교> … 총 13종 (모두보기)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과 스위스 제네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통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교양교육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고통의 문제에 관심이 많고 특히나 아프리카, 아시아의 빈곤과 고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빈곤의 사회과학》, 《신학의 저항과 탈주》, 《종교속의 철학, 철학속의 종교》, 《제3세대 토착화 신학》 등이 있고, 역서로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빈곤과 권력》, 《혼돈 앞에서 인간 철학을 잉태하다》 등이 있다.




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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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아빠 2017-12-02



헬조선의 탈출구로서 북유럽의 복지 사회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지는 가운데 그 뿌리가 되는 그룬트비의 활약사가 출간되어 기쁘다. 가나안농군학교와 이상촌의 김용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역시 덴마크 농촌운동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해방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서 그룬트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도자들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근대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이가 바로 그룬트비일진대, 그런데 그에 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책 역시 그룬트비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분량과 깊이면에서 그다지 흡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반나절 읽어낼만한 입문서로는 제격이다. 바라기로는 제대로 된 평전이나 연구서가 어서 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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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즈스피어 2019-08-15

굉장히 짧아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략히 알아보기에 좋으나.. 오타가 조금 있는게 거슬린다

“대안 교육 모델 찾는다” - 그룬트비 2002

“대안 교육 모델 찾는다” - 기독신문

“대안 교육 모델 찾는다”
근대교육이 잃어버린 지혜와 영성 기독교적 관점서 재조명 
총신유아교육학술대회-코메니우스, 기독교교육학회-그룬트비

 김은홍  입력 2002.12.03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와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이 두 사람은 교육자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러나 일반에 알려진 이들의 면모에서는 이들의 교육사상이 기독교 신앙 또는 기독교 사상과 긴밀하게 이어져있음은 흔히 간과된다. 양보하여 세속 교육학에서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기독교교육학에서조차도 이들의 진면목이 ‘기독교’ 교육학의 관점에서 조명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더구나, 이들의 교육사상이 세속의 근대 학교교육이 버린 지혜와 영성의 교육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요즘의 대안교육이 상실한 지혜와 영성의 회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

11월 16일 총신유아교육학술대회에서 정일웅 교수는 체코형제교회의 감독이자 교육학자인 코메니우스에게서, 11월 23일 한국기독교육학회 연차학술대회에서 송순재 교수는 덴마크 루터교회의 목사이자 교육개혁가인 크룬트비에게서 근대 학교교육이 잃어버린 지혜의 교육, 곧 대안 교육의 모델을 찾았다.

■코메니우스 “지혜를 가르쳐라”

코메니우스 교육사상의 핵심은 범지혜(pansophia)이다. 코메니우스는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골1:28)는 성경 말씀에서 범지혜 교육의 실제적인 목표와 내용을 제시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완전한 자’는 윤리적으로 그러한 자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범지혜의 배움을 일생동안 실행해야 할 교육 과제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범교육학>에서 삶의 전 과정을 학교, 곧 태아기 학교·유아기 학교·소년기 학교·청소년기 학교·청년기 학교·장년기 학교·노년기 학교·사망의 학교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기독교적 평생교육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혜의 획득을 위하여 배워야 할 기본적인 학습의 범위를 세 권의 책, 곧 자연과 정신과 성경에 한정했다. 그리고 인간이 창조세계의 질서와 관계에서, 인간성의 세 가지 기본요소인 지성과 덕성과 경건성을 쌓은 것을 범교육의 실제적인 목표로 삼았다. 지성은 자연과 관계에서, 덕성은 이웃인 인간과 관계에서, 경건성은 창조주와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인간의 기본성품이라는 것이다.
특히,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오늘날 일반 교육학에서 주장되는 생존의 경쟁력으로서 ‘지식의 축적’이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율성의 확내나 능력의 무한한 개발”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창조의 목적에 적합하게 창조주의 뜻을 수행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려는 깨우침과 양육과 훈련과 돌봄에 있다.

그룬트비 “자유롭게 가르쳐라”

그룬트비는 1814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덴마크가 도입한 의무교육제도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는 의무교육제도는 국가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가난하고 단순한 보통 사람들을 국가 권력이 바라는 바에 따라 주물럭거려 보려는 ‘강제적 훈련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의무교육은 게으름과 무관심을 기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좀더 올바른 길은 시민됨(citizenship)을 지향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선의 학교란 “선량한 시민을 기르는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룬트비는 하층민과 평민들 안에 깃들어 있는 가치를 정당하게 인식하려 했다. 그는 미래에는 이 사람들이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집에서 하는 교육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부모는 이런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하고, 국가는 이 책임을 함부로 취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룬트비의 이런 사상이 현대 프리스콜레(자유학교)의 주요 틀이 됐다.
그룬트비는 자유 교육의 내용과 방법으로 생동성과 자유와 자연스러움을 중요시했다. 기계적 암기학습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그는 대신 이야기하기, 노래부르기, 놀이를 권장했다.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즐거움과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교호적 인간관계와 의사소통 구조를 중시했다. 학교에서 다양한 주제들 사이에서, 교사와 부모,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강의와 시험이 아니라 자유로운 담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학교에서 의무로 가르치는 교리주의적 종교수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성경과 기독교신앙은 학교의 강제적 사안이 아니라 가정에서 부모가 책임지고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사안이라고 보았다. 방법 역시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노래하기를 권장했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목사/[김진홍목사]

강명원의 블로그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목사/[김진홍목사]
강명원 블로그|2004.06.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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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김진홍 목사]

지금 덴마크는 잘사는 나라 중에서도 잘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소득이 높은

점보다 각종 복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기에 국민들의 삶의 질이 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음으로 인해서다.



그러나 150여 년 전의 덴마크는 그야말로 바닥을 헤매는 나라였다. 영국과의 명분

없는 오랜 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치고 나라 안에는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상이군인들만 그득한 처지였다. 국토 중의 좋은 부분은 빼앗기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만 남겨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면 번성하는 것이 도박과 싸움판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덴마크를 일으킨 정신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바로 그룬트비히 목사의 삼애 운동(三愛運動)이다. 삼애 운동이라 함은 그룬트비히 목사가 주창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겨레 사랑의 세 가지 사랑 운동을 일컫는다. 덴마크란 나라가 그렇게 거덜 나게 되었을 때에 선각자 그룬트비히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일으키려면 먼저 종교와 교육의 개혁이 일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바른 신앙 운동으로 백성들의 혼을 깨우쳐 나가는 교육 운동을 일으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작된 운동이 그 유명한 덴마크의 국민 고등

학교 운동이다


-새 교육 운동-



그룬드비히(Nikolaj Grundvig, 1783~1872) 목사가 삼애 운동(三愛運動)을

바탕으로 삼아 종교와 교육을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에

감명을 받은 한 젊은이가 있었다.



크리스텐 콜(Christen Kold, 1816~1870)이란 이 젊은이는 18세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자 그룬드비히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감명을 받은 바대로 자신이 맡은 교실에서

교육 개혁을 실천하려 하였다. 살아 있는 말을 살아 있는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산

교육을 실천하자는 뜻에서 그는 국정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교과서로 학생들에게 생생한 대화식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의 반 학생들은 한결같이 행복한 얼굴로 받아들였으나 교육청 당국으로부터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2년 만에 교직

에서 해임 당하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기를 15년을 거듭하다가 35세가 되던 때에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학교가 덴마크 교육을 살리고 나라

까지 살리는 새 교육 운동, 새 나라 건설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헌 농가 건물 한

동을 빌려 15명의 학생들을 모아 5개월 기간으로 실시하였던 첫 번째 학기부터 그는 학생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살고 함께 뒹굴며 산 교육을 베풀었다.


크리스텐 콜이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세우던 때에 1851년 11월 1일을 개교일로 잡고는 첫 입학생 15명을 보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입학식이 있던 전날인 10월 31일까지 단 한 명만이 등록하였다. 난감하여진 그는 11월 1일에 개학식 시간이 되기 직전까지 학교 뒤 숲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시작하는 이 학교에 학생이 겨우 한 명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14명의 학생을 더 보내 주시옵소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숲에서 나온즉 마차 소리가 덜커덩거리며 나더니 한 마차에 14명의

이웃 마을 젊은이들이 타고 와 학교에 등록하겠다며 교정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에서 크리스텐 콜은 학생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뒹굴며 가슴으로 몸으로 실천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첫 학기인 5개월이 지난 뒤에는 15명의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그들이 졸업을 앞두고 남긴 소감문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크리스텐 콜 선생이 그들에게 삶의 방향을 깨우쳐 주었고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조국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고 적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목표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대학 시절에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크게 매력을 느꼈던 철학자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有神論的 實存主義)의 원조 격으로 인정받는 철학자로 그룬트비히 목사와 동시대에 활약하였던 분이다.



나는 철학과를 다니는 동안에 상급반이 되면서 한 가지 고민하였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장래에 어느 분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때 나는 19세기 중엽 덴마크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선각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그 두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와 그룬트비히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순수 철학자다. 자신의 철학을 철저히 하기 위해 사랑하는 약혼녀까지 포기한 채 순전히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 전념하였던 분이다.

그러나 그룬트비히는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인 코펜하겐에서 코펜하겐대학을 같이 다녔지만 자신을 실현하여 나가는 과정은 달랐다. 그룬트비히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후 일반 성직자들처럼 교회 안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겨레와 백성을 살리는 운동에 헌신하였던 분이다. 말하자면 사회 개혁자로 활약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개혁자다. 특히 자신이 속한 덴마크 교회와 교육을 개혁하여 새로운 덴마크 국민정신을 일으키는 데 헌신하였다.



나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민감하였던 대학생 시절에 키에르케고르의 길을 따라 순수 문학으로서의 철학자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그룬트비히 목사와 같이 사회 개혁자의 길을 가느냐의 문제로 갈등을 겪었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룬트비히 목사의 길을 선택하였던 셈인데 그간에 이루어 놓은 열매로써 평가한다면 그룬트비히의 그림자만 밟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 새 교육 운동-



크리스텐 콜은 그냥 교사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어버이였고 형님이었고 친구였다. 그는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잤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노동하였다. 학교가 마치 화목한 한 가정과 같았다.



그가 세운 국민고등학교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의 교육학자였으며 정규학교의 교장이었던 몬라드(D.G. Monrad)박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콜에게 학교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18세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였기에 나의 모든 삶을 바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배워 행복하게 되도록 도와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텐 콜의 이 말을 들은 몬라드 박사는 비웃는 투로 대꾸하였다. “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시구려. 그러나 잘 되겠소이까?”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 이론에 젖어있던 그로서는 콜의 새로운 교육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룬트비히 목사의 혼을 깨우는 설교에 감동을 받은 크리스텐 콜이 세운 국민고등학교는 헛간 같은 허름한 집에서 15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다섯 달 만에 첫 학기를 끝낸 후에 학생 중의 한명이 남긴 글이 있다.



“나는 일반 국민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높고 깊은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공허함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나의 고민을 콜이 해결해 주었다. 욕망과 회의에 차 있었던 때에 나는 그의 두 손에 쥐어진 양초 토막과도 같았다. 그는 마치 조각가가 흙덩이를 빚어 작품을 만들 듯이 같은 방식으로 나를 만들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에게는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혼 속에 깃들어 있는 고귀한 것들을 일깨워 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목숨을 걸고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 젊은이들의 마음은 감동으로 채워졌다.



이런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교사인 콜의 인격과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혼으로부터 나오는 살아 있는 말이 살아 있는 젊은 혼에게 전하여졌을 때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힘이었다. 이런 힘이 참 교육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그룬트비히가 활약하였던 때의 덴마크는 독일의 침범을 막으려고 10여 년간 싸우다가 지치고 쓰러져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때였다. 국토 중에 아름답고 쓸모 있는 부분은 빼앗기고 국민들은 희망을 잃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그룬트비히 목사는 실의에 빠진 동포들을 향하여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토하였다. 삼애 운동(三愛運動)으로 알려진 운동이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백성들을 도우신다. 살고자 땀 흘려 일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도우신다.

둘째, 땅을 사랑하라! 좋은 땅은 독일에 빼앗기고 황무지 모래땅만 남았으나 그렇다고 낙망하여선 안 된다. 황무지 땅도, 모래땅도 땀 흘리고 정성들여 갈고 가꾸면 옥토로 바뀐다.

셋째, 동포를 사랑하라! 건장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강대국과의 10여 년에 걸친 전쟁에서 전사하고 약자들만 남았다. 그러나 낙망하거나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약한 사람들도 뭉치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룬트비히의 심금을 울리는 애국 설교에 뜻있는 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각 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삼애 운동을 실천하여 병든 겨레를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6월 28일자


- 죽음에 이르는 병 -



1864년이 덴마크에게는 망국의 해였다. 한 민족, 한 국가로서의 덴마크가 희망을 잃어버린 해였다. 개인도 국가도 희망을 잃어버리게 됨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제목이다.



그 책에서 이르기를 ‘희망을 잃어버림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개인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개인이 망하고, 한 민족이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민족이 망하게 된다. 1864년에 덴마크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덴마크는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10년을 끌어왔던 독일과의 전쟁에서 최후로 항복하게 된 해였다. 항복하게 되면서 덴마크는 국토 중의 곡창지대였던 남쪽 땅을 독일에 빼앗기게 되고 쓸모없는 황무지나 모래밭만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실망에 빠진 젊은이들은 댄스나 당구치기로 세월을 보냈다. 어른들은 도박과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때에 구국 운동에 발 벗고 나선 이가 그룬트비히였다.



이미 65세이 이른 그는 율랜드 반도 남쪽에 있는 스캄링스뺑컨(Skamlingsbanken)이란 곳에서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는 백성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 아래 날마다 강연회를 열어 백성들의 혼을 깨우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⑥

- 새 교육 운동-



크리스텐 콜은 그냥 교사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어버이였고 형님이었고 친구였다. 그는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잤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노동하였다. 학교가 마치 화목한 한 가정과 같았다.



그가 세운 국민고등학교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의 교육학자였으며 정규학교의 교장이었던 몬라드(D.G. Monrad)박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콜에게 학교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18세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였기에 나의 모든 삶을 바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배워 행복하게 되도록 도와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텐 콜의 이 말을 들은 몬라드 박사는 비웃는 투로 대꾸하였다. “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시구려. 그러나 잘 되겠소이까?”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 이론에 젖어있던 그로서는 콜의 새로운 교육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덴마크 잡감 – 1 새마을운동과 류달영 선생의 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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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pyo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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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잡감 – 1
(새마을운동과 류달영 선생의 유훈
)
독일에 숨어 있는 줄 알았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됐다. 생뚱맞은 덴마크... 독일의 승마 도시 드레스덴언에 이어 이번엔 덴마크의 승마 도시다.
박정희 시대의 DNA를 온몸에 품은 손녀 정유라와 증손뻘 되는 갓난 아기는 그렇게 덴마크 경찰에 의해 영어(囹圄)이 몸이 되었다. 이 뉴스를 접하자 내 입은 벌써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 금수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

1970년 시작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널리 퍼친 노래 ‘잘 살아 보세’의 가사이다. 박정희, 최태민, 박근혜, 최순실, 그리고 정유라와 그 아이에게 "잘 사는 것"은 무엇이며, ‘부귀영화’란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은 도시 중심의 공업화 중심이었다. 따라서 인구의 70%가 살던 농촌의 경제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박정희는 유달영 선생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를 읽고 실의에 빠져 있던 덴마크를 부흥시킨 국민운동가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목사와 황무지 개간운동가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에게 큰 감동을 받고 소위 ‘새마을운동’을 기획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새마을 정신도 덴마크 사례를 그대로 모방한 ‘근면-자조-협동 정신’(세 잎 마크)을 강조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정신과 방법을 동원하여도 그 목적이 추악한 동기에 기인한다면 결국 호박에 줄을 그어 수박을 만들려는 꼼수밖에 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바로 그 경우였다. 69년 삼선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해 다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농촌 방방곡곡까지 관제 선거와 상명하복 체제를 구축하고자 허울 좋은 ‘새마을운동’ 조직을 구상한 것이다.
 
내 고향 동해시의 쌍용양회에서 과잉 생산 중이던 시멘트 재고를 잔뜩 사들여 새마을 운동에 투입, 전국 리 단위 마을에 600포씩 마구 뿌려댔다. 다리, 댐, 도로 건설 등 기간산업과 방공호 구축이 더 시급했던 상황에서 전국 초가집을 없애 외견상 ‘새마을’을 일구자는 구호는 2년 뒤의 ‘유신독재체제’ 수립을 위한 효과적인 민심 정지작업이 되었다. 심지어 그 때 초가 지붕을 없애고 놓았던 슬레이트 자재들은 모두 석면으로 범벅된 것이었다. 석면의 해악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알려졌던 바, 1970년은 국제적으로 석면이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된 해었다. 그런데도 박정권은 그걸로 산천지붕을 도배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했고 무지한 국민들은 환호했다.

시읍면 등이 주도하던 관제 부정선거의 전국적 ‘점 조직화’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민간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공고해졌다. 농촌 마을을 새 마을로 살리겠다는 당초 구호와는 달리, 공업 올인 정책으로 농촌은 갈수록 붕괴되었고, 농민들은 전태일 열사와 같은 살인적인 노예 노동 현장으로 내 몰렸다. 김대중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잘 살게 됐다는 선전은 속임수”라고 일갈한 것도 그러한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독재 체제 완비를 위한 조급증으로부터 탄생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위로부터의 권위적 근대화 정책의 연장선이었고, 더 나아가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과 매우 유사하다. 그 정책은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관료로 있을 때 입안한 것이었는데, 박정희가 장교로 근무한 관동군이 만주국 예하였음을 감안하면 그 뿌리는 덴마크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덴마크를 끌어들인 것은 과거 일본이 유럽의 농촌 근대화 모델 중 하나로서 덴마크를 참고한 것을 다시 모방하여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박정희의 이러한 관제 사업에 류달영 선생(전 서울농대 교수)이 동원되었던 사실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류달영 선생의 스승인 김교신 선생은, 일본의 우치무라 선생이 근대 농업국 덴마크의 부흥 사례를 일본에 처음 소개하기 위해 쓴 책 『덴마크 이야기』를 류달영에게 전달했고, 그 책에 감동받은 류달영은 평생을 농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해방 후 서울농대 교수로 부임한 류달영 선생은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책 한 권을 낸다. 제목은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몇 년 만에 26쇄를 찍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책이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가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류달영이 맡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박정희 의장은 “덴마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류 선생을 재건국민운동의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 일에 박 의장이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본부장직을 수락했다고...
 
5·16 군사정부(군정) 시기 재건국민운동은 사실상 류달영이 이끌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취임한 류달영은,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곧바로 덴마크 모델로 국민운동 플랜을 만들어 실행했다. 하지만, 1년 8개월을 재직하고 63년 5월 사임하면서 후임 본부장으로 이관구를 추천했고 이관구도 류달영의 방향을 이어나갔다. 이 시절을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한결같은 이상인 동양의 덴마크를 이 국토에 건설해보겠다는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가지고 온 대형의 그룬트비(덴마크 지도자) 사진을 걸어놓고 출근 전에 한 번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박정희의 위촉으로 류달영이 주도한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됐을까? 류달영은 사업 부문을 크게 국민교육, 향토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 넷으로 나누어 덴마크 모델에 따라 ‘농민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중앙과 도지부, 시·군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개발’은 농로·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봉사대 조직으로 전개하고자 애썼다.
 
‘덴마크’의 농촌진흥 정신으로 제대로 실천해 보려 했던 류달영 선생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의 독재 연장 도구로 점차 전락해 가는 이 사업이 훗날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관제화되는 것을 보시면서 류달영 선생은 아래와 같이 통렬한 비판을 남기셨다.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 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중략) 군정이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 역사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혁명만이 용납될 수 있다. 그것은 민중 자신의 자아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고요한 국민의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의 전신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둘은 운동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정부 각료와 각 시도 공무원들이 총동원해서 국민을 끌고 간 백 퍼센트 관 운동이었다.”(‘국회보’ 1997. 10.)
유신시절,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 운운하며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자율적, 창의적, 혁신적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 오히려 후진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덴마크’와 바로 위 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은 그 주장이 얼마나 억지이며 허구적인지 잘 증명해 준다.
이들 북구의 나라들이 채택한 사회적 민주주의 모델은, 오히려 독재보다 민주주의와 복지정책이 경제 성장에 더욱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유럽에서 상대적인 낙후 지역이었고, 1인당 GDP도 1만 달러가 안 되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면서도 윤택한 국가들이 되어 있다.
바로 그러한 땅 덴마크에서, 박정희와 최태민의 손녀, 그리고 젖먹이 증손이 체포되었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가 유린했던 덴마크의 참 개혁정신, 농촌 살리기 정신의 통쾌한 복수극을 보는 듯하다.
이제 정유라는 한국에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금 우리의 몫이다. 덴마크에서 체포된 정유라와 그 어미 최순실과 박근혜를 우리가 어떻게 다룰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류달영 선생이 못 다 이룬 ‘동양의 덴마크’ 건설의 꿈이 다시 좌초할지 아니면 부활할지 말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기권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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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김교신 영향으로 농촌계몽 참여…5·16 군정기 재건국민운동본부 이끌어
http://weekly.donga.com/List/3/all/11/1515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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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⑫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김교신 영향으로 농촌계몽 참여…5·16 군정기 재건국민운동본부 이끌어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
2015-11-16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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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62년 6월 3일 경기 김포에서 모내기를 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과 최고위원들. 5·16 군사정부 시절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됐다.

류달영은 김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다. 함남 흥남 공장에서 김교신과 한방을 쓰며 생활하던 터였지만, 1945년 4월 잠시 개성으로 나왔다 맹장이 터져 급작스럽게 수술을 받느라 스승의 와병도 모르고 있었다. 4월 25일, 김교신 선생이 별세했다는 전보를 받았을 때를 류달영은 이렇게 기억했다. “천지가 캄캄하였다.”

류달영이 보여줬던 김교신에 대한 전적인 존경과 신뢰는 유명하다. 후일 그는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류달영이 김교신을 만난 것은 18세가 되던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이 해는 김교신도 양정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첫해였고, 이후 류달영이 졸업할 때까지 5년간 담임을 김교신이 맡았다. 당시 양정고보는 한번 신입 1년생을 담임하게 되면 졸업까지 5년간 맡는 구조였다.

류달영은 양정고보 졸업 후 수원고등농림학교(3년제, 서울대 농대 전신)에 재학하던 시절에도 김교신의 주일 성서모임에 출석했고,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개성 호수돈여고보(4년제, 미국 감리교 계통 학교) 교사로 있을 때도 근처 송도고보로 옮겨온 김교신과 일상을 같이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터진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개성에 있을 때였다. 류달영에게 김교신이라는 존재가 지닌 절대성을 생각해보면 류달영이 김교신, 함석헌 등과 같이 가장 오랜 기간 감옥에 있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성서조선 그룹에 합류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평생을 농촌운동에 바친 류달영 전 서울대 교수(1911~2004)는 5·16 군사정부가 주도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으나 본부가 해체되자 1964년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해 민간 차원에서 운동을 계속했다.

훗날 ‘농민의 대부’로 추앙받는 류달영이 처음 농촌운동의 꿈을 갖게 된 것은 양정고보 학생 시절이었다. 1931년 여름, 양정고보 4학년이던 류달영은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에 참여하면서 “일평생 농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졸업 후 세브란스의학전문으로 보내려는 주변의 움직임을 물리치고, 조선 유일의 농학 고등교육기관인 수원고농에 입학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무교회주의자들은 일제강점기 여타 우파 민족운동 진영과 마찬가지로 청년교육과 농촌계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류달영이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간 곳은 개성 호수돈여고보 박물(식물·동물·광물) 교사 자리였다. 수원고농 졸업 즈음 김교신의 권유가 있었다. ‘성서조선’ 창간 동인의 한 사람인 양인성이 호수돈여고보를 떠나면서 후임 추천을 함석헌에게 부탁했는데, 그 자리를 김교신이 류달영에게 권한 것이었다.

류달영이 호수돈여고보 교사로 있던 1939년, 최용신 전기를 쓰게 된 것도 무교회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농촌운동에 대한 관심의 발로였다. 류달영의 ‘최용신 소전(小傳)’은, 심훈의 유명 소설 ‘상록수’ 속 주인공 ‘채영신’의 실존 모델인 여성 농촌운동가 최용신(1909~35)의 희생적 삶에 대한 논픽션 기록물이다. 당시 이미 출간돼 있던 심훈의 ‘상록수’가 실제 최용신의 삶에 대해 왜곡이 심하다고 판단한 성서조선 그룹이 최용신의 생애를 정확히 기록해 장차 농촌운동의 모본으로 남기고자 책을 낸 것이었다. 류달영이 집필자로 결정된 것은, 그가 최용신이 활동하던 시흥군 샘골(지금의 경기 안산)과 가까운 수원고농 출신인 데다 수원고농의 조선인학생회 일로 생전의 최용신과 몇 차례 만난 바 있었던 까닭이다. 류달영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집필을 마쳤고, 책 서문은 김교신이 썼다. 출판 비용은 김교신, 류영모, 함석헌 등이 거출해 마련했는데 출간 1년 만에 4쇄가 나갔다.

이미 양정고보 시절 농촌운동에 평생을 투신하기로 결심한 류달영이 구체적인 농촌개발 모델을 그리게 된 것은 수원고농에 입학해서였다고 한다. 우치무라 간조가 농업국가 덴마크의 부흥담을 일본에 처음 소개한 소책자 ‘덴마크 이야기’를 김교신이 여러 권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권을 류달영에게 준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훗날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해방 후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된 류달영은 전쟁 와중인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몇 년째 구상하던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몇 년 만에 26쇄를 찍을 정도로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33년 김교신이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이 류달영, 가운데가 김교신이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61년 6월 12일 열린 재건국민운동 촉진대회.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으로 이 대회에 참가한 박정희 전 대통령(앉은 이 가운데 오른쪽 맨 끝)의 모습도 보인다(왼쪽). 심훈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농촌운동가 최용신(가운데). 왼쪽은 독립운동가 황애덕, 오른쪽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이다. 류달영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농촌운동에 대한 기록의 하나로 ‘최용신 소전(小傳)’을 썼다.

새마을운동의 모델이 된 재건국민운동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31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제1회 참가자 모집 사고. 브나로드운동은 약 10만 명의 문맹자를 교육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이 책이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가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류달영이 맡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박정희 의장은 “덴마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류 선생을 재건국민운동의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 일에 박 의장이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본부장직을 수락했다.

5·16 군사정부(군정) 시기 재건국민운동은 사실상 류달영이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6월 출범 당시 초대 본부장은 유진오였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2개월여 만에 사임했다. 류달영은 그해 9월부터 일을 맡아 새롭게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플랜을 만들어 실행했다. 1년 8개월을 재직하고 63년 5월 사임하면서 류달영은 후임 본부장으로 이관구를 추천했고, 3대 본부장 이관구도 류달영의 운동 방향을 이어나갔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취임한 류달영은 곧 덴마크 모델에 따라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착수했다. 이 시절을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한결같은 이상인 동양의 덴마크를 이 국토에 건설해보겠다는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가지고 온 대형의 그룬트비(덴마크 지도자) 사진을 걸어놓고 출근 전에 한 번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됐을까. 류달영은 사업 부문을 크게 국민교육, 향토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 넷으로 나눴다. ‘국민교육’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 ‘농민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중앙과 도지부, 시·군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개발’은 농로·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봉사대 조직으로 전개했다.

운동은 추진력 있게 이뤄졌으며, 취임 1년 만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앙교육원과 시도지부교육원에서 각각 7000여 명과 6만4000여 명의 농촌운동 지도자를 교육했고 마을 청년회관 약 7000동, 농로 5만4000여km, 수로 3300여km를 개설했다. 부엌, 변소 등 생활환경 개선과 농촌 결식아동 급식을 실시하는 것은 물론, 41만여 명의 농어촌학생봉사대를 조직했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성천 류달영의 생애를 기록한 ‘나라사랑’(성천문화재단, 2006).

정부 문서상 기록으로 실제와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여러 사정을 감안했을 때 의미 있는 결과였다. 이 사업들은 모두 새마을운동에 앞선 것으로 학계의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나, 재건국민운동이 후일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류달영의 구상은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국민운동을 전개해나가고자 했지만 내부에서조차 국가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결국 군정 세력이 선거를 통해 ‘민간’ 정권으로 옷을 갈아입은 직후인 1964년 2월, 재건국민운동법이 폐기되고 본부도 해체됐다. 결과적으로 정권에 이용당한 모습이 되자 류달영은 격분했다. 오랜 무교회주의 동지이자 ‘스승의 벗’인 함석헌이 정권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을 즈음, 류달영은 ‘동아일보’ 65년 5월 15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국가동원체제에 대한 혐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류달영(왼쪽)과 김교신.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중략) 군정이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 역사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혁명만이 용납될 수 있다. 그것은 민중 자신의 자아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고요한 국민의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근본적으로 우치무라 간조 이후 무교회주의자의 사상은 국가주의와는 상극에 놓인 것이었다. 류달영은 국가적 단위에서 ‘민간운동’을 전개해보려 했지만, 재건국민운동은 관제운동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기 어려웠고 의도했던 목표도 완성하지 못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가 해체되고 나서 류달영은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해 민간운동을 계속해나가고자 했다. 민간의 자발적인 자기개조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류달영은 훗날 사람들이 자신이 이끌던 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을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연관 짓는 것을 싫어했다. 류달영은 이렇게 말했다.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의 전신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둘은 운동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정부 각료와 각 시도 공무원들이 총동원해서 국민을 끌고 간 백 퍼센트 관 운동이었다.”(‘국회보’ 1997. 10.)

이런 생각은, 국가동원체제를 혐오하는 무교회주의 계보에 류달영이 서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류달영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을 보탰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원장이 된 김준 등 자신이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고 있던 시기 운동에 참여케 했던 서울대 농대 제자 가운데 많은 수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간부가 됐던 이유도 있었다. 류달영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농민이 잘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류달영은 정치 진영과 무관한 자리에서 오로지 한국 농촌과 농민만 생각했다. 82년 국정자문위원회에 참석했을 때 농촌경제를 파탄 낸 “원흉들의 집단이 바로 경제기획원”이라며 정부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류달영이 국가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이룬 성과는 크다. 대한민국 사회에 류달영이 기여한 것은 농촌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평생교육’ 개념은, 1980년 헌법개정심의위원으로 참여한 류달영이 ‘평생교육’ 조항을 헌법으로 제정케 함으로써 대중화된 것이다. 이때도 류달영은 덴마크 교육모델을 참조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룬 결과들은 적어도 스승 김교신과 무교회주의자들이 구상하던 사회의 모습은 아니었다.



주간동아 1013호 (p60~63)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대한민국 설계자들


2020/01/14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 시미즈 미츠루 지음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 녹색평론

2014.11.07.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이계삼


시미즈 미츠루 지음
녹색평론사, 2014년

늘 꿈꾸었던 것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달리 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혁명기 소비에트나 ‘김 주석’이 통치하는 북한을 동경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에는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소개되었지만, 의문이 남았다.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거느렸고 거대한 수탈과 살육의 바탕 위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가 대체 무얼까, 똘레랑스는 결국 ‘강자의 도덕’ 아닌가. 그리고 프랑스가 세계 2위의 원전대국임을 알고 나서부터 그 나라에 대한 동경은 싹 사라졌다. 근대세계 속에 우리의 푯대가 되어줄 다른 체제, 모델은 없는 것 같았다. 근대 이전의 풀뿌리 민중세계를 되살리는 것 말고 우리가 선택할 길은 없어 보이는데, 이미 후기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떻게 그런 세계를 되살릴 수 있을지는 막연했다.

그리고 덴마크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가슴이 뛰었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를 어떻게 맞았느냐는 것은 그 나라 민중의 현재적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사실을 덴마크를 보면서 깨달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강제로 근대세계로 편입당했고, 거의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수탈과 살육을 겪고, 그 반작용으로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를 강요당한 채 지난 100여 년의 시간을 지내야 했다. 우리의 근대 100년은 부국강병과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극심한 경제성장으로 내달려 오면서, 오직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에 마음의 자리를 다 빼앗겼다. 그런데 덴마크는 전혀 달랐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대만이 원전 중단을 결정해서 칭송을 받고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예 원전을 짓지 않는 것이다. 덴마크가 바로 그런 나라이다. 원전은 중앙집권주의, 지역차별, 민중 배제의 상징이며, 거대자본과 권력의 유착관계로써 유지된다. 그 어마어마한 위험과 미래세대에까지 전가되는 부담을 고려하면 그 자체로 반민주주의의 상징이다.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를 겪고, 세계가 너도나도 원전으로 몰려갈 때 덴마크는 전혀 다른 사회적 과정을 거쳤다. 덴마크에는 ‘시민합의회의’라는 전통이 있어서 수준 높은 토론들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에너지를 풍족하게 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주제로까지 이어진 심도 깊은 토론들을 거쳤고, 곳곳에서 반원전운동이 불붙었다. 그중 특기할 움직임으로 ‘트빈스쿨’이라는 폴케호이스콜레(‘국민고등학교’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그런 표현으로는 의미를 담아낼 수 없어 이 책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다 ― 필자 주)에서 추진한 에너지 자립운동의 일환인 풍차 제작 프로젝트가 있다. 몇몇 전문가들이 거들기는 했으나 거의 비전문가들이 함께 연구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술을 응용하고 중고 부품을 이용해서 제작했다. “정부가 60만kW 원전 1기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3만 대의 풍차를 만들어서 민중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정신으로 출발해, 연인원 10만 명이 참여한 대중운동이었다. 결국 덴마크정부는 1985년 원전 건설을 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덴마크의 공식 종교는 루터파 복음교회인데, 그 기원이 되는 종교개혁 지도자 마틴 루터는 유대인을 배신 민족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시너고그(유대인 회당)를 불질러 파괴하라”고 선동한 사람이다. 그런데 덴마크의 유대인은 다른 유럽에서와 달리 박해를 일절 받지 않았고, 19세기 초부터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5년간 덴마크를 점령했던 독일은 덴마크정부에 유대인(7,000명가량)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덴마크정부는 즉시 시너고그에서 신년예배를 드리던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서, 이들이 중립국 스웨덴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했다. 시너고그에 남겨진 유대교 성전은 코펜하겐의 복음교회에 감추어졌고, 이들의 집과 직장도 그대로 보존되었고, 심지어 뜰의 잔디도 이웃들이 깎아주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덴마크에는 이슬람계 이민자 학교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소수자 학교가 있다. 종교기관, 노동조합, NGO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신나치주의자들의 학교 설립도 제한하지 않는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똘레랑스’는 덴마크 민주주의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다른 근대, 높은 수준의 시민적 교양과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체제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그룬트비협회 간사로 주민운동가, 교육철학자인 시미즈 미츠루(清水滿)의 책 《삶을 위한 학교》는 한마디로 그룬트비의 사상과, 이를 구현한 폴케호이스콜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룬트비의 사상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1783―1872)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유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향 우드뷔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머니와 교회에서 부양하는 의지가지없는 노인들이었다. 어머니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대지의 언어’ 그리고 노인들이 들려주는 전설과 옛이야기의 세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또한 당시 관행에 따라 라틴어학교에서 수학했지만, ‘모든 사람을 쓸모없게 하고 나태하게 하고 썩게 만드는’ 라틴어학교의 권위주의와 지식 중심의 일방적 학교문화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젊은 시절 연상의 기혼 부인을 사랑하고 비련의 고통을 겪으며 그는 ‘인간’의 감정에 눈뜨게 되었고, 계몽주의의 차가운 이성보다 사랑으로 대변되는 인간적 감정의 우위를 설파하는 문예사조에 감화되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목사였지만 기성 교회에 순응하지 못했고, 형식과 강제에 의존하는 지식인 성직자를 혐오했다. 유년기의 영감을 좇아 북유럽 설화와 민중적 고전을 탐구하여 많은 책들을 번역·편찬했고, 그 깨달음의 기쁨을 시로 노래했다. 그는 급진적 인민주의의 길에 다가섰고, 끝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에서 최종의 답을 찾았다. “진리는 성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모여든 회중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었던 것은 사도들, 원시 기독교 교단,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성서는 종이 위의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그 말씀이 되살아나는 것은 교회에 모여든 경건한, 가난한 ‘신도들 사이에서’라는 것이다. ‘민중들의 살아있는 말’, 그것이 바로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죽음의 학교를 알고 있다. … 설령 (성스러운 문헌처럼) 천사의 손이나 별의 펜으로 쓰여졌다 하더라도 모든 문자는 죽어있다. 모든 책의 지식도 죽어있다. 그것은 독자의 삶과 결코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문법만큼 마음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없다.
― 그룬트비, 〈삶을 위한 학교〉(1838)

그러므로 그는 “가난하지만 신으로부터 받은 녹색의 대지를 보살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친구”를 참된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의 생각은 기존 교단으로부터 배격당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농민과 개혁파 목사들이 타락한 국교회와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은 뒤 가난한 노인들을 부양하는 구빈원 겸 병원에서 목사로 종신토록 근무했다.
그룬트비 사상의 핵심 개념은 폴케오프뤼스닝(folkeoplysning: 민중의 자기계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육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기피했다. 그룬트비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선거제와 의회는 부자와 엘리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허구의 기제라고 보았다. 그는 민중과 엘리트,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그 위에서 상호작용하며 포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폴케오프뤼스닝을 자신이 주창한 시민대학인 폴케호이스콜레의 목적으로 삼았다. 라틴어를 폐지하고, 배울 의지를 가진 누구라도 모여서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말’로 상호작용하며 삶의 신비를 깨닫고 ‘나 자신에게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학교를 제안했다. 관료, 상인, 수공업자, 농민의 자제들이 칸막이 없이 교류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폴케호이스콜레를 제안한 것이다. 그룬트비는 시험을 배격했다. 시험은 “젊은이가 자신의 경험의 범위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을 반복함으로써만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써 연장자가 젊은이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직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보았다.

그룬트비는 그 자신 시인이었고,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는 산문적인 세계의 거대함 앞에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차이를 통합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시의 정신임을 믿었다. 그는 이야기의 구체적인 풍토성과 너그러운 개방성을 사랑했다. 그는 시와 이야기가 ‘살아있는 말’을 되살려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이상은 폴케호이스콜레운동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었다.

크리스텐 콜

그룬트비는 영국 체류 당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보았던 모습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교사와 학생이 침식을 같이하고 친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칼리지 형식의 학교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제안은 크리스텐 콜(1816―1870)에게서 심화된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그룬트비는 국민대학을 꿈꾸었지만 콜 이후부터 실제로 창립된 폴케호이스콜레는 오히려 지방의 소규모 학교로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폴케호이스콜레의 농민적 성격을 강화시켰고, 학교마다 특색을 갖춘 다원성을 구현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은 농민에 의한 사회개혁과 사회의 재조직화를 가능케 했으며, 결과적으로 덴마크의 근대를 농본사회로 이끌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은 가난한 구둣방 집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 다니던 청년기부터 깊은 신앙적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럽을 도보로 횡단하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은 구도자였던 콜은 그룬트비의 사상을 접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무명의 민중의 교사였지만 그룬트비의 격려와 후원에 힘입어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고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헌신적으로 가르쳐 곳곳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는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지 국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국가로부터 되찾자”고 주장하며, 초등 대안학교인 프리스콜레의 기원이 되는 학교를 만들었다. 현재 프리스콜레는 덴마크 전역에 200여 개교가 존재하며, 공교육에 깊은 자극을 주어 덴마크의 초등교육을 사실상 견인하고 있다. 콜은 또한 오늘날 덴마크 교육제도에서 중요한 한 축이 되는 애프터스콜레의 간접적인 창설자이다. 14세부터 18세의 학생을 별도로 받아들여 나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애프터스콜레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동안 공교육 트랙에서 빠져나와 음악, 스포츠, 미술, 목공을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거의 전문가 수준까지 배우게 되는 학교이다. 기숙생활을 통해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법을 배우고, 풍부한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예민한 청소년기의 자아 형성에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콜이 첫 번째 전형을 만들어낸 이래 150년 동안 애프터스콜레는 덴마크 교육에서 독특한 역할을 해왔고, 현재는 전국에 226개 학교가 있으며, 덴마크 청소년 셋 중 한 명은 이 학교를 거쳐 간다고 한다.

농민과 협동조합

프로이센과 1, 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끝난 1864년, 덴마크는 유틀란트 반도의 3분의 1을 상실했다. 나라 전체가 열패감에 빠져 있었고, 국수적인 민족주의가 발호할 때였다. 그러나 그룬트비의 사상과 폴케호이스콜레의 민중적 교육의 저력은 전혀 다른 방식의 대안을 찾았다. 유럽 문화를 무시하여 전쟁에서 졌고, 산업혁명이 지체되어 기술력과 경제력이 떨어진 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항해서, 뜻있는 그룬트비의 사상적 제자들은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여 농민을 위한 민중교육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뛰어난 시인, 신학자, 과학자가 몰려들어 민중교육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달가스(1828―1894)의 “칼로써 잃어버린 것을 보습으로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힘을 키워 무력으로 적국에 대해서 복수를 계획하지 않고, 쟁기와 보습을 갖고 남은 영토와 싸워 그것을 전원으로 바꿈으로써 적이 뺏어간 것을 벌충하자는 것이다. 달가스는 히스 황야에 농민들과 함께 방풍림을 조성하고 용수로를 건설했으며, 토지개량, 도로망과 간이 철도를 정비하는 등 농업진흥사업을 도왔다. 끝내 덴마크 농민들은 100만ha의 황무지를 70만ha의 경지로 바꾸었고, 19만ha를 숲으로 만들었다.

1840년대부터 1900년경까지 오늘날 덴마크의 기틀을 닦은 세력은 농민이었다. 폴케호이스콜레와 그 자매학교에 해당하는 농업학교에 다니며 인간해방과 평등의식에 눈을 뜬 농민 그리고 그들의 교사들이 농민계몽 지도자가 되었고, 정부에 농촌위원회 구성과 자작농 창설, 소작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근대화를 겪은 국가들의 일반적인 경로와 달리 농민들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되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내린 농민들의 공동체인 협동조합 조직이 활발하게 형성되었다. 농민들은 낙농, 도축, 원예 협동조합들을 만들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스스로 관장했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이후에야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비자생협이 덴마크에서는 1866년에 만들어졌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주식회사로의 전환이 끊임없이 요구되었지만, 대자본가가 지배하게 될 것을 예견한 농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협동조합의 농민들은 높은 생산성과 협동력으로 세계 제일의 농민국가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정치개혁을 주도했다. 농민세력은 처음에는 도시의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였으나 연대는 깨지고 1870년 ‘좌익당’을 결성하여 ‘우익당’과 맞서게 되었다. 좌익당 지도자들은 모두 폴케호이스콜레 졸업생들이었다. 자작농과 소농이 중심이 된 농민정당은 늘 혁신세력이었다. 보수당은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1891년 세계 최초로 연금법을 만들었고, 이로써 덴마크 사회복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01년에는 좌익당이 집권당과 타협하자 다시 ‘좌익개혁당’이 만들어져 도시노동자 중심의 사민당과 함께 노농정권을 수립했다. 농민이 하원 총수의 114석 중 76석을 차지할 정도로 다수당이고, 사민당은 14석에 불과했다. 이 좌익 개혁당이 정권 장악 후 우경화하자 다시 ‘급진개혁당’이 분리되어 1913년 정권을 장악하고 여성 참정권, 8시간 노동제, 소작농을 위한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21년에 이미 건강보험제에 해당하는 ‘질병보험법’이 제정되었고, 이듬해에는 ‘노령연금법’이 제정되었다. 덴마크 현대 정치의 기본방향을 결정한 것은 폴케호이스콜레로 대표되는 농민 중심의 민중운동이었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와 오늘날 우리

덴마크도 2차대전 이후 서서히 산업사회로 재편되면서 농업국가를 고수할 수는 없게 되었다. 덴마크 경제 또한 글로벌 경제의 격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덴마크 농민의 비율은 5.8%로 급감하게 된다. 사회복지제도에서 여전히 이상적인 나라로 거론되지만, ‘노동의욕 감퇴 사회’로의 재편은 피할 수 없었다. 오늘날 폴케호이스콜레는 농촌 청년들이 아닌 도시의 젊은이들을 주로 받아들이게 되고, 문화센터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고, 사회변혁적 정체성은 흐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세계 제1의 도서관 장서 대출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덴마크의 높은 시민적 교양은 유지되고 있고, 복지‘국가’가 아닌 복지‘사회’의 기반은 건재하며,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적 전통은 굳건하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는 그룬트비와 폴케호이스콜레, 곧 사상과 교육의 힘으로 가능했다. 한편 프로이센과의 전쟁 이후 독일 침공(5년) 정도를 제외한 150여 년의 시간대에 별다른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유럽의 변방에다 매력적인 자원의 산지가 아니었던 지정학적 행운도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한 요인이리라 추측해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과거를 생각했다. 그룬트비의 자리에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크리스텐 콜의 자리에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과 《성서조선》의 김교신을, 그리고 폴케호이스콜레의 자리에 구한말과 식민지시대에 이 나라 곳곳에 존재했던 수많은 야학들을 대입시켜보았다. 이를테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대륙으로 건너가기 이전의 윤봉길, 열일곱 나이에 농민을 위한 야학을 열고 계모임과 독서회, 농민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농민들을 위한 교과서 《농민독본》을 저술했던 윤봉길 같은 이들이 또한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근대 이행기에서 최제우와 최시형과 안창호와 이승훈과 김교신 그리고 수많은 윤봉길들은 좌절했고, 수많은 이광수들이 우리의 근대를 이끌었다.

지금 우리는 또다른 이행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이미 ‘교육 불가능’이라는 언술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그것은 학교교육이 지금껏 그 어이없는 파행과 모순 속에서도 그나마 학생들에게 부여해왔던 교육을 통한 물질적 유익이 이제 그 시효를 다한 것에서 일차적으로 유래한다. 그것은, 석유가 생산 정점을 지나고 금융경제가 황혼기에 접어든 세계적 상황에, 부동산 거품이 언제 꺼질 줄 모르고 빈부격차가 갈수록 극심해지며, 비정규직 산업예비군이 창궐하는 국내적 상황에,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실체적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즉자적인 욕망의 해소에만 골몰하며 각기 인생의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정확히 조응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바라볼 한 푯대로서 덴마크를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언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땀 흘려 노동하는 삶,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생존방식, 인생의 의미를 궁구하는 대화와 공동체생활을 복원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주적인 농민으로, 시민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 출발은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와 같은 작은 교육기관이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우선, 나부터 그 길을 가고 싶다.

2016/10/29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1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1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今に生きるデンマルク国の話-」
小山 哲司
内村鑑三

内村鑑三
     本日の私の話のタイトルは、去る8月に開かれた三愛講座の主題である三つの愛、即ち、「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をお借りしました。8月には三愛精神に沿った学びを致しましたが、三愛精神自体については余り触れられませんでしたので、一年の締めくくりでもあるクリスマスの時期に三愛精神の歴史を辿り、三愛精神の過去、現在、そして未来を展望してみたいと思います。副題を「今に生きるデンマルク国の話」としましたが、これは日本における三愛精神は内村鑑三の「デンマルク国の話」を出発点としており、しかも、今から90年近くも前に語られた「デンマルク国の話」は、今に生き、そして、未来に命を保つ話であると考えるからです。
     この「デンマルク国の話」は、明治44年(1911年)1月22日に柏木の今井館で行われた講演をまとめたものであり、「信仰と樹木とをもって国を救いし話」というサブタイトルが付けられております。その粗筋は、ドイツ、オーストリアとの戦争に敗れてシュレスウィヒとホルスタインの2州を奪われたデンマークの復興を願う工兵士官ダルガスが、デンマークの領土の半分以上を占めるユトランドに植林を行って沃土となし、外に失った国土を内に求めようとする苦心を描いたもの。ダルガスの苦心の結果、ユトランドの荒野には樅の木が繁り、木材が収穫できるようになったばかりか、気候自体が大きく変化して、良き田園となったのです。
     1911年に内村が今井館で行った「デンマルク国の話」は、その年の「聖書之研究」第136号に掲載され、内村は、それ以後も1924年に「木を植えよ」を「国民新聞」に発表し、さらに、「西洋の模範国 デンマルクに就て」を同新聞に発表するなど、デンマークに対する高い評価と強い関心を示していきます。やがて「デンマルク国の話」は小中学校の教科書にも掲載され、広く読まれるようになって参りますが、国民一般に広く読ま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点で、内村の著作としては「後世への最大遺物」と並んで双璧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
     こうした内村の影響力と当時のトルストイの流行とによって、「理想の農業国 デンマーク」ブームが起きて参ります。
     ところで、内村の札幌農学校時代の友人に渡瀬寅次郎(1859~1926)という人物がおりました。渡瀬寅次郎は静岡県沼津市の出身で、内村よりも1年早く第一回生として札幌農学校に入学し、クラーク博士の薫陶を受けてキリスト教を信じる様になります。卒業後は、まず北海道開拓史として官界に入り、次いで教育界に身を転じ、明治19年(1886年)には旧制水戸中学校(現在の茨城県立水戸第一高等学校)の校長として水戸に赴任しております。明治21年(1888年)には茨城県立師範学校の校長に転じ、明治22年(1889年)にその職を辞した後は、活動の場を実業界に転じて「東京興農園」という種苗の販売会社を設立します。東京を中心にしながら札幌や信州上田に農園を作り、また、静岡県の沼津に柑橘園を作ります。やがて、千葉県、埼玉県、山梨県などの各地に採種場を設けていきますので、農業分野の実業家としては成功した人物であったといえるでしょう。
     大正15年(1926年)に渡瀬が亡くなったとき、内村鑑三は札幌時代の旧友を代表して次のような追悼の言葉を述べております。
              「グルントウィツヒの如く」
     我等の旧き友の一人なる渡瀬寅次郎君は永き眠につかれました。悲しみに堪へません。
      (中  略)
     渡瀬君の霊魂は天にまします神の懐に帰りました。しかしながら君のこの世における事業はまだ完成されません。神を信ずる者の事業は自分のための事業ではありません。国のため、人類のため、神のための事業であります。そして君はよくこのことを解してゐられたと承つてをります。丁抹(デンマーク)流の、基督教の基礎に立てる農学校を起こしたいとは、君の年来の志望であつたと承ります。もし君がなほ十年生存せられたならば、この理想が君の直接の監督の下に実現したらうと思ひます。しかしながら、このことなくして逝かれしは、残念至極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尊ぶべき理想は実現を見ずして已むべきではありません。その実行の責任は今や御遺族とわれら友人の上に落ちているのであります。
     日本はたしかにかかる農学校を必要とします。基督教を基礎とするものでありますから、これを日本政府の設立に待つことは出来ません。これは渡瀬君の如き人物を待って初めて実現さるゝものであります。もし丁抹の農聖グルントウイツヒの精神がわれらの旧友渡瀬寅次郎君の名によって、わが日本に実現するにいたりますならば、君は天上の祝福を得しと同時に、地上の栄光を得らるゝものであると思ひます。私は旧札幌農学校の同士を代表し、こゝに渡瀬寅次郎君の名をグルントウイツヒの名が丁抹に残る如く、わが日本に残したいとの希望を述べます。これ亡き君に対し、君の遺族と友人とが尽くすべき最大の義務であると信じます。
      (内村鑑三全集第30巻(岩波書店 1982年 P183~185)
     この追悼の言葉で触れたように、渡瀬寅次郎はデンマーク流の、基督教の基礎に立った農学校を作ることを望んでおりました。渡瀬が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を建設することを思い立った経緯については、当時、デンマークから帰国した直後のデンマーク研究家平林広人(1886~1986)が、「デンマルク」(文化書房 昭和3年発行)の中で次のように述べています。
     山形縣自治講習所長として十年の貴い経験を有し、再度丁抹に遊び欧州各地の農村教育を視察された、吾人の先輩加藤完治氏は、石黒忠篤氏、山崎延吉氏、井上準之助氏、及び小平權一氏その他の知己、同情者によりて組織された日本国民高等学校協會によりて茨城縣支部に我國最初の高等學校を創立し、昭和二年の春既に開校しておられることは周知のことである。
     然るに大正十五年四月丁抹訪日飛行機の歓迎準備講演として、著者(平林)の東京放送局に於てせる「丁抹の文化について」と題せる放送を、病床に在って聴取し共鳴せられたる故渡瀬寅次郎氏の遺志によって更に一つの国民高等學校が生まれることになつてゐる。(「デンマルク」121~2P)
     これによれば、平林の講演をラジオで聞いた渡瀬が感銘を受け、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建設を思い立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また、平林の伝記「祖父 平林広人」(私家版 岩淵文人著 P113)によれば、銀座教会の今井三郎牧師によって内村を紹介された平林が、デンマーク流の国民高等学校が日本にも欲しいと語ったところ、内村は賛成したばかりか、積極的な援助を約束して、平林を渡瀬に紹介したとされています。多分、渡瀬は平林に直接会った上で、放送も聞いたのでしょう。なぜデンマークかという点では、内村鑑三が「デンマルク国の話」で火をつけた、当時のデンマークブームがあったことは言うまでもありません。
     こうして、「デンマルク国の話」から15年経った大正時代の末に、内村はデンマークへの関心を深め、渡瀬の遺志を受けて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建設に乗り出して行きます。
     ところで、内村は渡瀬寅次郎の追悼の言葉を「グルントウィツヒの如く」と題し、「渡瀬寅次郎君の名をグルントウイツヒの名が丁抹に残る如く、わが日本に残したい」と述べました。このグルントウイツヒがどの様な人物であり、彼が建設したとされる国民高等学校はどのような学校であったのでしょうか?このことについて、簡単に紹介しておきたいと思います。
     内村がグルントウイツヒと表記した人物は、ニコライ・F・S・グルントヴィ(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のことです。グルントヴィは、牧師の家庭に生まれ、父の跡を継いで牧師になりますが、当時のデンマークの儀礼化したキリスト教会を批判し、「主の言葉はなぜその家(教会)から消えうせてしまったか」という説教集を出版して教会勢力からの非難を浴びます。教会との論争の中で、彼のキリスト教理解は次第に変貌を遂げ、やがては、キリスト教の真理、キリストの言葉は、教会に集う無学だが敬虔な信徒の間によみがえるという理解に至り、これに共感した農民たちが、デンマーク国教会の改革運動に乗り出していきます。
     グルントヴィは、こうした農民たちの台頭を楽観的に見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農民たちの実力が高まったとしても、彼等の声が国政に反映され、農民とそれ以外の人々(ブルジョアジーなど)との平等が達成されることが必要であり、それが出来なければ、民主主義は一転して衆愚政治になってしまう。そして、衆愚政治とさせないためには、国民の多数を占める民衆(農民)が高いレベルの学問を身に付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たのです。
     グルントヴィは、自分の理想とする学校の姿を本にまとめ「生のための学校」として世に出します。それによれば、グルントヴィはイギリス留学中にケンブリッジで経験したカレッジをモデルとした学校を考えていたようです。教師と学生が寝食を共にし、親密に生きた言葉によって語り合う中で、それぞれの生が生き生きとしたものとなり、生への期待を喚起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
     ここで、「生きた言葉」で語り合うと申しましたが、グルントヴィの念頭には、死んだ言葉、死んだ学問の代表としてラテン語学校がありました。グルントヴィ自身は、こうした古典語の素養の豊かな人物でありましたが、かつて通ったラテン語学校での体験が、彼にこうした思いを抱かせたのです。そこでは権威主義的な教師によって無味乾燥な詰め込みの勉強が強いられ、学校の雰囲気自体も窒息しそうなものであって、このラテン語学校のことをグルントヴィは「すべてが人をだめにし、怠惰にさせ、腐らせるもの」と表現しております。グルントヴィの理想が「生のための学校」であれば、さしずめ彼が体験したラテン語学校は「死の学校」とでもいうべき存在であったのでしょう。もし、現在の日本の学校を見たら彼は何というでしょうか?
     「生きた言葉」で語り合い、それぞれの生を深めて行くことが目的であれば、そこに資格や試験、単位などが入り込む余地はないとグルントヴィは考えました。彼によれば、試験とは「年長者が、若者の経験の範囲では答えられず、ただ他人の言葉を繰り返すことで答えとするに過ぎないような質問で、若者を苦しめるもの」なのです。こうした「受験制度」の帰結がどうなるのかを、彼は、150年以上も前に見抜いていたことになります。また、職業訓練を導入することも認めることは出来ませんでした。それは、生のためではなく、利益のためだからです。
     資格も得られず、試験も単位もない学校が、果たして存在できるのでしょうか?受験という目的があるからこそ子どもたちは机に向かい、学力を身に付けて行く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グルントヴィは、学校のシステムは試験に基づくべきではなく、「全ての賢明な学校のシステムは、絶えざる啓発に基づく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ます。こうした啓発は、試験制度では押し殺されてしまうのです。
     グルントヴィは、こうした自分の理想の学校を「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と名付けました。英語では「Folk high school」と表記しますが、日本語に直せば「国民高等学校」とでもいうのでしょうか。こ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は、1844年に最初の学校が作られ、その後、グルントヴィに共鳴する人々によってデンマーク各地に展開されて行きます。
     黎明期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運営は、農村青年の生活に合わせて、冬の6ヶ月を男子学生、夏の3ヶ月を女子学生という学期構成を取り、原則として全寮制として教師も学生と寝食を共にしました。
     当初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は18才以上の青年を対象としておりましたが、やがて、それ以下の年齢の子どもたちを対象としたフリースコーレ(小学校に相当)が1856年に作られます。フリースコーレを設立したクリステン・コルという人物は、子どもの教育は親と教師がするものであり、国家が介入してはならないと主張して次のように言います。
    「子どもは国家に属するのではなく、親に属するのだ。だから両親は、子どもの一時期に責任があるのではなく、その全ての精神的な成長に渡って、責任があると理解しなければならない。」
     やがて、フリースコーレと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間をつなぐ、エフタースコーレという中学校に相当する学校が設立され、現在の体制の原型ができ上がって参ります。
    2へ続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