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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7

Namgok Lee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묻고 담정 답하다’를 일단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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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묻고 담정 답하다’를 일단 다 읽었다.

나는 불교에 대한 이론이나 논리에 대해서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중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서 두 분의 대화를 통해서 ‘중도(中道)’ ‘중(中)’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특히 나라가 악성 편가름으로 정치적 혼돈이 계속되고, 문명을 둘러싸고 대전환이 요청되는  시점에서 현실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 책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하며, 두 분의 대화  뒷 부분 가운데 내가 밑줄을 친 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한다.
===

도법; 담정의 말에 따르자면 언어 자체를 희론(戱論)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언어에는 언어 자체의 한계와 위험성이 있다고 말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언어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말해야 할 점도 있다.
담정;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포함하여 일체 희론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법; 응병여약(應病與藥)의 말씀은 희론이 아니다. 붓다의 말씀 자체를 몽땅 희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
담정; 그렇지 않다. 부처님 말씀도 희론이다!  일체 희론을 벗겨 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만 방편교설의 진정한 의미를, 연기실상의 삶을 직시할 수 있다.


도법; 공도 왜곡되게 쓰면 희론이 된다고 하면 모를까 처음부터 희론인 공을 말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승의 언어에서는 도(道)를 말할 때 두 가지를 말한다.
첫 번째는 ‘도(道)는 말할 수 없다’이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 한다’이다.

도법; 그렇게 말하고 있는 <중론>에서 언어로 된 모든 것이 희론이라면, <중론>도 이제론도 공론도 논파론도 다 희론이지 않는가?
담정; 그렇다. 당연하다.

도법; 적멸해야할 것이 희론이라면서 왜 소멸해야할 그 희론을 설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담정; 필요 때문에 그렇다. 14난(難)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담정; 경론을 손에서 놓을 만큼 강조하는 선(禪), 즉 ‘선의 과잉’은 오늘날 맞지 않다고 본다. 선의 위대한 조사들도 자기 시대에 맞는 불교를 했고, 그 선불교도 불교의 긴 역사와 전통의 일부일 뿐이다.
도법; 선의 과잉이나 왜곡에 대한 문제 의식은 공감한다.  하지만 조사들 때문이라고 보는 것에는 동의가 안된다.
담정; 조사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불교를 하신 분들이다.
당시는 99%가 글을 모르던 문맹의 시대다.
오늘날은 99% 이상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
이 ‘문자 생활 시대’라는 변화는 기존의 불법을 담았던 ‘선’이라는 그릇을 다른 그릇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담정; 중요한 것은 (고려 지눌 스님등의 방법이) 부처님께서 쓰신 방법과 같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해석일지라도 기존의 것과 척지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동물희생제를 반대하시면서도 불에 대한 제사를 최고의 제사라고 하시며 제사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것을 피하셨다. 
민중과 괴리되는 불교나 중앙과 대치되는 극단적 선택은 현실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현실은 중앙 다수파 옆에서 비슷하게 같이 가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꾸려나가는 기나긴 싸움이다.

담정; 우리나라에서 한문으로된 글을 제일 많이 쓴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고, 불교에 관한 문헌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원효 스님이다. 이런 원효 스님이 붓을 들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을까, 버리고 갔을까? 나는 붓을 꺾고 갔다고 본다.

도법; 붓을 들고 갔든 버리고 갔든 꺾고 갔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화쟁이 고통과 불행을 낳는 싸움을 해결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론을 국가가 필요로 해서라 하더라도 정치권력과 같이 가는 것보다 민중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옳기도 하고 바람직하다는 판단으로 선택한 것으로 본다.

담정;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천과 이론화 작업의 사이에서 이론화 작업을 포기하고 민중 속으로 갔다는 것이다.
도법; 학술불교를 접고 갔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원효 스님이 현장으로 가는 것이 이론을 버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담정; 그렇다면 다음은 ‘그럼 원효 스님은 민중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이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학술불교의 대표자이자 대내적으로는 민중불교의 대표자였다.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그 역동성은 지금도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담정; 교학불교는 교학 불교대로, 실천불교는 실천불교대로 자기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도법; 교학과 실천은 일치되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중론>이 답을 내놓으면 바로 받아들이겠다.

담정; 이건 ‘탁!’해서 될 일이 아니다.
도법; 내 방식으로 하면 ‘탁!’해서 된다.
도법; 담정이 역경사로서 이론에 충실할 뿐 아니라 동시에 현실문제와 연결해 해답을 만들어내는 이론으로 진화하면 역경도 훨씬 좋은 결과를 내올 것이다.
담정; 나는 생각하는 것이 곧 실천하는 것이라며 불법의 정확한 의미를 옮기는 역경사의 삶에 만족한다. 땅을 파든, 경을 파든, 그렇게 파며 사는 삶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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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몇 대화를 옮겼다.
아마 읽으시면서 자신도 하고 싶은 말이 생기신 분에게는 이 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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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론(戱論)... 그만 내려놓으세요
달과 손가락 2020. 7. 26. 

산스크리트어 prapañca의 한자어(漢字語)로 허구적인 관념(觀念)을 실재(實在)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마음 작용, 마음속으로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지어냄, 혹은 허망한 언어(言語) 무의미한 말, 헛소리, 관념을 가리켜 희론(戱論)이라 합니다.

그 말은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입니다. 무언가 진상(眞相)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 희론입니다.
중심(中心)에 적중(適中)치 못하거나,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말들을 희론(戱論)으로 간주하며, 싯다르타는 가끔 그 말을 사용해 제자들을 경책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읽고 있는 글들이 얼마나 중심에 적중하고 있는지를 살피며 사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화살을 맞았다면 화살촉을 빼어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화살촉의 재질(材質)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계(五戒)의 하나에 불망언(不妄言)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가르치고는 있습니다만, 원래의 의미는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않는 말, 깨달음, 즉 “지금 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검증(檢證) 역시도 불가능한 것으로 쓸데없이 타인의 시간을 뺏는 말들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슴에는 독화살이 꽂혀있으며, 머리 위는 불타고 있다고 선지식(善知識)들은 말합니다. 그런 상황에 깨달음 말고 신경 쓸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신의 관심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살피세요. 과연 당신의 말과 행동은 생명 에너지 자리, 깨달음을 향해가고 있는가 말입니다.
먹고 입는 것, 그리고 소유하는 것과 전생(前生)이나 다음 생(生)에 대한 말들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희론(戱論)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 깨달음을 향해 필요한 에너지(氣)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파악하는 일(見性)이 가장 시급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누구고 어떤 옷을 입고 있든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이 귓등으로 들린다면 역시 당신은 수행자(修行者)가 아닙니다.
희론(戱論)에서 벗어나세요. 그것이 가슴에서 화살을 뽑고 불타는 머리 위를 식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최선(最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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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을 잡는 그릇

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2018. 4. 12. 11:53
https://arukda.tistory.com/entry/%EC%95%84%EB%A1%AC%EC%9D%84-%EC%9E%A1%EB%8A%94-%EA%B7%B8%EB%A6%87

전(筌), 고기잡는 그릇

오늘날 세존이 우리를 제법(諸法) 농담의 의론(議論)의 똥을 사랑하여 덜게 하실새
농담의 의론을 거꾸로 가려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똥이라고 했다.
『월인석보』의 구절이다. 세종의 말투이다. ‘농담의 의론(議論)’은 희론(戱論)을 번역한 것이다.
‘똥을 사랑하다’라고 한다. ‘사랑’은 물론 사유(思惟)이다. 똥을 사랑하고 똥을 덜라고 한다.
무릇 말씀이 있으면 다 노릇의 말씀이 되며
희론(戱論), 불교에서 참 자주 쓰는 말이다. 언해불전에서는 이 말을 ‘노릇의 말씀’이라고 새긴
다. 여기서 노릇은 놀이이다. 농담이라는 말, 말을 놀린다. 가지고 논다. 희론(戱論)은 목적과 의도
를 벗어난 논란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독화살의 비유’라는 게 있다. 독화살을 맞았다면 화살을 뽑
고 약을 쓰고, 어떤 조치라도 얼른 해야 한다. 당장 해야할 일은 제쳐 두고, 독이 어떠니 화살이 어
떠니 시시비비를 따진다면 그런 것이 희론이다. 이런 논란은 감정에 휘둘리고 지식과 이론에 집착
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언해불전의 ‘노릇의 말씀’은 웃자고 하는 농담, 그냥 말장난이 아니다. 그렇
다고 목적과 의도를 벗어난 논란 만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노릇의 말씀’은 말씀의 본질이다. 말의
얼굴이다. 말은 개념이나 논리, 나름의 규칙을 따라 노는 놀이이다. ‘노릇의 말씀’은 말하자면 불교
의 언어관이다. 소통의 철학이다. 개념이나 논리를 따라 가는 말씀, 이런 말씀을 따라 가다 보면 생
각이 뒤집히고 마음을 더럽힌다. 그래서 ‘노릇의 말씀’은 모두가 똥이라고 한다.
부혈기지속(夫血氣之屬)이 필유지(必有知)하고, 범유지자(凡有知者)가 필동체(必同體)하니
피와 기분(氣分)의 류(類)는 반드시 아롬이 있고, 무릇 아롬이 있는 것은 반드시 체(體)가
한가지이니
언해불전의 구절이지만, 이건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서 빌어온 말이다. 혈기(血氣), 기
(氣)를 ‘기분’이라고 읽는다. 피와 기분을 가진 무리들, 언해불전은 이 구절을 불교의 중생(衆生)으
로 읽는다. 몸과 생명을 가졌다. 지(知)를 ‘아롬’이라고 새긴다. 피가 흐르고 기가 흐르는 중생들은
반드시 아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롬을 가졌다면 모두가 동체(同體), 한 몸이다. 이렇게 읽으면
유교도 불교도 다툴 것도 없다. 언해불전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까닭은 이 구절에 언해불전에서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몸이 한가지로 가졌다는 ‘아롬’이다. 아롬
은 ‘알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요즘에야 ‘앎’이라고 한다. ‘알다’라는 동사는 ‘모르다’와 짝을
이룬다. 언해불전은 이 말의 명사형을 ‘모롬’이라고 쓴다. ‘모롬과 아롬’의 짝이다.
구태여 아롬을 앞세우는 까닭은 ‘모롬’이 있기 때문이다. 언해불전은 뒤집힌 ‘아롬’을 다룬다.
뒤집힌 ‘아롬’이 ‘모롬’이다. 모롬과 아롬 사이에 말이 있다. 모롬을 다시 뒤집어 아롬으로 바꾸고
자 한다. 말은 모롬을 아롬으로 바꿔 주는 수단이다. 길이다. 언해불전은 ‘니라다’라는 동사를 쓴
다. ‘(말을) 이르다’의 옛말이다. 그리고 이 말의 명사형은 ‘니롬’이라고 한다. ‘니라다’의 짝은 ‘듣
다’이다. 이 말의 명사형은 ‘드롬’이다 .‘니롬과 드롬’의 짝이다. 니롬과 드롬의 길을 통하여 모롬이
아롬으로 바뀐다. 모롬을 아롬으로 바꾸는 말의 길이다. 이 두 개의 짝을 순서대로 맞춰보자면 ‘모
롬-니롬-드롬-아롬’이 된다. 언해불전의 말투가 이렇다.
이 두 개의 짝 , 요즘에는 쓰지 않는 옛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 짝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운이
맞는다. 입에 착착 붙는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말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15세기 언해불전
에 담긴 우리말투이다. 이 말투에는 말을 하는 기술과 말을 듣는 기술이 담겨 있다. ‘니롬과 드
롬’의 짝이다. 그리고 이 짝은 ‘모롬과 아롬’의 짝을 향한다. 모르는 상태를 아는 상태로 바꾸어 가
는 방향이다. 이 두개의 짝, 내 입에 착착 붙는 말, 그래서 나는 이 짝 만큼은 그냥 쓰려고 한다. 오
래된 옛말이다. 요즘 문법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말로 바꾸어 보려고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말
도 길어지고 짝도 맞지를 않았다. 낯설고, 이상하더라도 그러려니 들어주길 바란다.
전(筌)은 고기 잡는 그릇이오, 제(蹄)는 토끼 그물이니 고기를 잡으면 전(筌)을 잊고, 토끼
를 잡으면 제(蹄)를 잊는다.
이건 『장자(莊子)』에서 따온 말이다. 고기 잡는 그릇, 전(筌)을 전(詮)으로 비겨 읽는다. 그리
고 ‘니라다’, 또는 ‘니롬’으로 새긴다. 니롬과 드롬, 말을 그릇과 그물에 비긴다. 모롬을 아롬으로
바꿔 주는 그릇이다. 니롬과 드롬의 그릇으로 아롬을 잡는다. 이게 말의 쓰임새이다. 아롬을 잡는
그릇, 아롬을 잡으면 잊으라고 한다. 고기 잡는 그릇, 쓰고 나면 창고든 어디든 던져 두면 된다. 그
런데 니롬과 드롬의 그릇, 던져 두기가 쉽지 않다. 고기를 잡은 뒤에도 오락 가락 놀린다. 그러다
보면 노릇의 말씀이 되고, 똥이 된다. 고기를 잡기는커녕, 나와 남을 함께 더럽힌다.

===
고작 다섯 손가락으로 세상을 헤아리려고 한다. 
희론(戱論)이다! 
박유하를 생각한다.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patiensky&logNo=220283816561


문학과 철학 또는 사회 과학은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을. 
시는 하늘의 언어, p로 쓰는 것, 
소설은 그야말로 잡(雜)이고.., 
철학은? 사상은? 
학문의 엄니가 철학인 것은 
그것이 철학이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 이외에 답이 없다. 
파천 단상
희론(戱論)과 박유하
담정
2015. 2. 26. 8:52
 이웃추가
3 1 담정의 샨띠 통신
가라타니 고진을 옮겼을 때, 
박유하는 어떤 시각으로 고진을 보았을까? 
민족nation이 민족국가nation인 것을!
~~~
『중론』의 귀경게다.
무언가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緣起](이기에)
소멸함이 없고[不滅] 생겨남이 없고[不生]
그침이 없고[不斷] 항상함이 없고[不常]
오는 게 없고[不來] 가는 게 없고[不去]
다른 의미가 아니고[不異] 같은 의미가 아닌 것[不一]이니
희론(戱論)*이 적멸하여 적정(한 상태에 머물 수 있는) 가르침
정등각자의 말씀들의
진리, 그것에 경배하옵니다.**
* 희론(戱論, Skt. prapaňca Tib. spros pa)은 중관사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참고할만한 산스끄리뜨어 어원 분석은 다음과 같다.
‘prapaňca(희론, 여러 갈래로 퍼진 사유와 언어, 진리에 어긋난 사유와 언어. … pra(앞으로)+√p
aňc(퍼지다, 다섯 손가락을 펴다. pra-√paňc(생각 등이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가다. 망상하다. 생
각을 표현하다.’ - 『쁘라산나빠다』, p. 38.
‘*√paňc는 다섯 손가락(paňca)을 연상한다. 그러므로 언어, 사유 및 논리와 같은 세간 관습에 의
하여 절대적 진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허공을 움켜쥐려고 벌린 다섯 손가락의 부질없는 동작
에 비유된다.’ - 같은 책, p. 993(자세한 내용은 같은 책 [318(22-15)]번 게송 해제 참조,
어근 ‘빤쯔(√paňc)’는 ‘빠즈(√pac)’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기에는 ‘요리하다’는 뜻부터 ‘to ripen,
mature, bring to perfection or completion, to develop or change into’ 등의 긍정적인 뜻이 있
다.
** 산스끄리뜨어 원본이나 [청목소]의 용수보살의 귀경게가 아닌 티벳 게송을 직역으로 옮겼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왜 용수가 붓다에게 예경하는 지에 대한 이유인데, ‘열반적정’은 희론(戱論)
이 그친 상태[寂滅], 즉 적정(寂靜 = 평온)을 이끄는 그것이 바로 연기(緣起)라는 것이다. 그 내
용은 물론 8불중도이다. 연기 사상에 대한 강조는 명확하고 그 8불중도의 내용 또한 밝혀져 있
으나, 티벳 불교에서는 이 귀경게의 의미에 집중하기보다 이후 월칭으로 대별되는 ‘쁘라상기까’
주석 방법에 따른 것이 한역 경전권과 갈리진, 커다란 두 가지 해석의 흐름을 나은 배경이 아닌
가 한다.
~~~
3 1 담정의 샨띠 통신
*사진은 나까무라 하지메(中村 哲) 선생... 모든 불학자들의 큰 스승이셨던 분. 70년대 강의를
들었던 분에 따르자면, 강의는 잼병이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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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호흡하는불교, 월간불광
100호 특집II-이것이 불교 중흥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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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말 같지 않은 말을 희론(戱論)이라 하셨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말은 희론이라는 뜻이다. 남의
말을 되풀이하고 불경의 말씀을 인용한다고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대중에 감동을 주지 않을
때 그 말은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불교인은 이 희론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심과 감동이 따르
지 않은 불교지식, 불교학은 체온이 없는 말이나 글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가 다시 흥하고 사는 길은 부처
님의 말씀을 쉽고 평범하게 전하는 것이고 체험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이라는 외형적 틀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빨리, 정확하게 봐야
한다. 불법은 해인사 장경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중(市中)에 있어야 한다. 책 속에서 불법을 구하는 자세
에서, 가슴 속에서 불법을 구하는 불교인이 되어야 불교가 다시 살 것이다
===
<희론戱論, 산스크리트어 prapanca쁘라빤짜>
아미산 2017. 4. 13. 11:07 http://blog.daum.net/511-33/12369931


여기서 희戱는 진실이 모자란다는 뜻이고 론論은 사물에 대한 생각이 진리에 맞지 않는
언론을 말한다 따라서 희론이란 허망한 언어 무의미한 말 부질없는 말 헛소리에 가까운 쓸데
없는 말장난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희론戱論은 잘못되고 무의미한 말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생
각이며 진리에 어긋나고 그릇된 집착과 차별에서 비롯돼 사람들을 망상의 세계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탐ㆍ진ㆍ치 삼독심에 오염된 마음작용이 희론이다
주객전도된 전도몽상 번뇌 망상이 희론이다
사실본래성품 그대로 자각 인식하지 못하고 알음알이로 사유하고 고집하는 것이 희론이다 희론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자아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상적 지각의 확산 즉 망상을
의미한다 세상사람 가운데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정론正論보다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결론이 나지 않는 끝없는 쟁론만을 생산해내는 희론戱論에 빠져 허송세월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익한 희론戱論을 일삼는다면 마음만 산란해진다 이러한 망상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질병의 근원이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나타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싸움 논쟁 언쟁 교만
중상 질투 인색을 수반한다


희론은 산스크리트어 쁘라빤짜prapanca의 한역인데 이는 어근 prapa 또는 prapac
- 상세히 설명하다 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원래는 현상 확장 다양화 상세한 설명
발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사유의 개념적 확장 등의 의미를 가졌다
이 말이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된다 한역에서는 희론을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
인다
이는 희론이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


경전經典에 어떤 구절을 기억해 가지고 어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느니 해서 자기를 과시하
는 것이 희론이다 그래서 희론은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 희론戱論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용수는 희론을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것이라 했다 허구적인 관념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마음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희론에는 어디까지나 전도된 인식이 전제된다 예컨대 우리가 나라는 표현을
할 때 마치 그 말에 따라 어떤 영속적인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과 같
〈중론송〉의 다음 게송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의의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고 했다
이 말을 중국에서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 멋지게 한역했다 참된 궁극적 실재에서는 희론
이 절멸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용수는 공성空性은 연기와 같은 말인데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써는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연기는 바로 공성空性이라고 했다 그리고 희론은 생사윤
회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고 연기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았다
그리하여 중도中道나 중관中觀은 바로 이런 망상희론을 없애고 세상을 똑바로 보는 방법
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망상의 소멸 번뇌의 소멸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라고 했다
부파불교 당시 무성했던 아비담마abhidhamma에는 희론이 너무 많았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등장한 대승불교였기에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심도 있게 희론을 다룬 듯하다
허긴 침체한 우리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남방불교의 아비담마 중에도 이해하지
못할 허황된 희론이 많이 보인다 사몰심死沒心), 그리고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니 존재지
속식存在持續識이니 결생심結生心이니 하는 바왕가찌따bhavanga citta 등은 언뜻 보기
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깊이 사유해보면 완전히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소리다
때문에 오늘날 남방 상좌부불교 이론에 열광하는 범부들을 위해 마구 퍼다 옮기는 식의 행태는
곤란하다
희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간화선看話禪이라는 기제에 맞서려는 듯한 아비담마가 오히려
희론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냉정히 검토해봐야 한다 숭고한 부처님 법을 다룸에는 조심스러워
야 하는데 얼마간의 알음알이로 신중하지 못하고 종횡무진 하는 일부 남방 아비담마 전공자들
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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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3

希修 무아와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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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ourites 15e Jtuslutyo r2020s 
< 무아와 윤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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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언급되는 1, 3, 4 단계는 초기경전에 나와 있는 것이고, 2단계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중간에 넣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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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단계 (Mundane Level): 업의 책임자로서의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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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들이 업에 의해 생겨나고 자기 업의 상속자가 된다고 AN 5:57은 말한다. 하지만, 건강, 적성, 부모 등 삶의 큰 윤곽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타고났어도, 마치 어떤 방송국에서 TV 연속극 제작을 시작할 때는 대충의 플롯만 있고 스토리의 디테일은 시청자 반응을 보면서 전개해 가는 것처럼 삶의 구체성은 매순간 자유의지로 내리는 선택 (생각, 말, 행동)과 노력에 의해 스스로 완성해 간다. 물론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게끔 하는 모멘텀을 그 윤곽 자체가 이미 갖고 있기는 하며 ('자유의지'가 '100%의 자유'는 아니라는 뜻), 그 모멘텀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도 않다. (모멘텀을 바꾸지 못 한다는 전제 하에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바로 점성술이라고 나는 생각.) 나의 현재 행동 (생각과 말 포함)이 얼마나 skillful 혹은 wholesome한지, 즉 어떤 탐진치(貪瞋痴)가 얼마나 많이/적게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이것이 새로운 업으로서, 전생/과거 업과 상호작용을 계속하면서 나의 삶을 확정해 나간다. (삶에 저항 않고 분별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그야말로 운명/팔자의 노예로 살겠다는 얘기. 저런 수용적 태도는, 최선을 다 해도 당장 바뀌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하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쾌락/이익만 좇는 이기적인 사람은 내세에 고통스러운 조건들을 타고나고, 바른 과정/방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세에 행복한 조건들이 갖춰진 곳으로 윤회한다는 내용을 초기불교에서는 mundane right view라고 부른다. 암튼 이 삶의 책임( ≠탓)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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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ity and impurity are one's own doing. No on purifies another." -- Dh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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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e owner of my actions, heir to my actions, born of my actions, related through my actions, and have my actions as my arbitrator. Whatever I do, for good or for evil, to that will I fall heir." -- AN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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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단계: '나'라고 동일시/집착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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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기독교나 베다전통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그런 영혼을 불교에선 인정하지 않는다. One and the same 영혼이 옷을 갈아입듯 몸을 바꾸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reincarnation)이고, 한 양초의 불로써 다른 양초에 불을 붙이듯 그렇게 불=업이 다음 양초=생으로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윤회(rebirth). 힌두교의 윤회와 다른 점은, 불교의 윤회에서는 이전 양초의 불과 이후 양초의 불이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생의 A가 남긴 업이 물질을 끌어와 B라는 이승의 육체를 형성한다. 이 때 A의 업 때문에 몸을 받는 B는 A의 업도 상속받는다. (마치, 부모님의 사업체 상속시 채무도 함께 상속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상속받은 업을 요리할 책임은 B에게 있고, 그 요리의 결과가 B의 미래 and/or B의 업을 상속할 내세의 C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만 어떤 업이 이승의 B 자신에게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업이 내세의 C에게 갈지 알 수 없기에, B로서는 그저 요리에 최선을 다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의 윤회이며, 해탈로써 정지시키지 않는 한 이 과정은 영원히 무한히 반복된다. 겉모습으로만 A-B-C의 '세 사람'인 것이지 업은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 셋이 100% 동일한 인물인 것도 아니다. 전생의 나와 이승의 나의 연결성도 보아야 하고, 동시에 현 찰나의 나와 ('찰나'는 1/75초) 다음 찰나의 나 사이의 다른 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을 규정할 근거/바탕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예를 들어, B가 사고로 팔 하나를 잃어도 심지어 식물인간이 되어도 그는 D나 E 아닌 여전히 B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살피다 보면, B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근거로 삼을 만한 본질적/필수적 부분/요소를 단 한 가지도 확정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B의 타고난 성격은 A의 업의 결과이기에, B의 뜻대로 100% 컨트롤하기는 어렵다. 이런 내용들을 한 마디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 바로 '無我'이지만, 사실 부처님은 "'나'라는 건 없다"거나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본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I have a self'도 'I have no self'도 잘못된 견해 6가지에 들어간다고 부처님은 MN2에서 명시하셨다.) 몸이나 생각 등을 '나'라고 동일시해 봐야 고통만 따르므로 '내가 아님 (not self)'을 기억하라고 하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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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런데 한자로 번역할 때 無我라고 해 놓고 나니,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고 과잉 단순화하는 데에서 온갖 문제가 비롯된다. 글자 그대로 '나'도 없고 '너'도 없다면, 모든 것이 "본래 없"고 환상일 뿐이라면, 내가 너를, 혹은 네가 나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이미 아라한이 된 사리풋타와 마하가섭은 왜 여전히 천성의 차이를 보이는지? 無我 가르침은 그저 동일시/집착하지 말으라는 얘기일 뿐, 모든 행동 (생각과 말 포함)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배고플 때 남의 입에 밥숟갈 넣지 않으셨다. 나와 남을 구분 못/안 하는 게 무아인 것이 아니며, 나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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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단계 (Transcendent Level): 매사를 process로서, impersonal하게 파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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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불교는 윤회와 무아를 말하는데, 내가 없다면 대체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라며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한다. (윤회 방편설이 등장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런지.) 하지만 '나'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무엇이 윤회하는지, 해탈한 존재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업을 짓는 나와 그 과보를 받는 내가 동일인물인지 아닌지, 우주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 세상 만사가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인지 아닌지, 만물이 결국 하나인지 모두 제각각인지 등의 문제들은 고와 고의 해결에 오히려 방해만 되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부처님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명시하셨다 (SN 44:10, MN 2, MN 72, MN 63, SN 12:15, SN 12:20). 업을 짓는 이승의 '나'와 그 과보를 받는 내세의 '나'.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견해도 하나의 극단이요 그 둘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도 또 다른 극단일 뿐이니, 어떤 문제든 self라는 관점에서도 not-self라는 관점에서도, existence의 관점에서도 non-existence의 관점에서도 생각하지 말고, 다만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관점으로만 파악하라고 하셨다 (SN 12:12, SN 12:15, SN 12:48). 이것이 transcendent right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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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을 때 portrait 모드로 찍으면 주인공 얼굴만 또렷이 나오고 그 외에는 흐릿하게 나오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나'라는 주체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러나 촛점을 행위의 주체나 존재가 아닌 행동 (생각과 말 포함) 자체에 두고서, 심지어 자기 자신 포함 세상 만사를 자신의 생각/감정/이익 아닌 오직 인과의 관점에서만 impersonal하게 바라보는 것이 바로 'not self,' 'no conceit'인 것. 그래서 Thanissaro 스님은 '나' 포함 세상 만사를 process로 파악하라고, Bodhi 스님은 a series of events로 이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Vimalaramsi 스님은 impersonalization이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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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ikkhu Bodhi on Brahman / Atman / Oneness / Fullness (Brahmanism) vs. Emptiness (Early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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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ikkhu Bodhi on 'not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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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다음은 SN 21:2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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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 "우리의 스승인 부처님에게 어떤 변화 (죽음을 의미)가 생긴다면 사리풋타 존자님은 그로 인해 슬픔, 탄식, 고통, 번뇌, 절망 등의 영향을 받으실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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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풋타] "부처님이 오래 사신다면 무수한 존재들을 위해 물론 훨씬 더 좋은 일이겠지만, 스승님께 어떤 변화가 생긴다 해도 내게 슬픔, 탄식, 고통, 번뇌, 절망 등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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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
(번역 i) "That must be because Venerable Sāriputta has long ago totally eradicated ego, possessiveness, and the underlying tendency to conceit. ... ..."
(번역 ii) "Surely, it's because Ven. Sariputta's I-making & mine-making and obsessions with conceit have long been well uproote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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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경은,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놓고서 take personally하는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라는 메세지로 해석해야만 이해가 된다. 즉 불교의 ‘not self,’ ‘no conceit’는 우리가 흔히 생각해 오던 상식적 의미의 '겸손'이나 ‘자기희생’이 아니라 take things impersonally하라는 가르침인 것.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항상 행동하라"는 칸트의 도덕법칙도 결국 자신의 이익, 감정, 이미지에 대한 집착 없이 공평무사하게, impersonal하게 행동하라는 얘기일 테니, 그런 측면에서 칸트의 도덕법칙도 무아와 비슷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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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단계 (Final Level): 모든 것을 초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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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正道의 right view에서부터 시작하여 팔정도의 8요소를 모두 계발한 후 다시 right view로 돌아와 해탈이 완성된다. 시작 단계의 right view = mundane discernment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매사를 탐진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분별력이고, 주체/존재 아닌 행위/인과의 관점에서만 impersonal 하게 매사를 바라보는 right view는 transcendent discernment. 그리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단순히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직접 '확인'/'체험'하는 것이 final right view 혹은 right knowledge (9단계). 그리고 이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 '나' 포함 모든 관념 및 수행의 노력까지도 놓게 된다 => 10단계인 right release/liberation/deliverance (DN 18, DN 33, MN 8, MN 65, MN 78, MN 117, AN 10:103, AN 10:108, AN 10:118, AN10:122, SN 14:29, SN 45:26, SN 55:26, etc.). 이것이 바로, 윤회의 강 건너편에 안착한 뗏목에서 내리는 '해탈'이며, 이렇듯 수행은 10단계 프로세스 (Tenfold Path)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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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나'에 대한 집착은 강의 건너편에 안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으며, 그래서 타니사로 스님은 강을 건너가고 있는 수행의 와중에는 건강한 '에고' (프로이드가 말한 원래 의미 그대로의 '본능과 사회적 요구들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에고')가 오히려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을 위로할 줄 모르고 자신을 행복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만족을 위해 남을 이용하려고 하는 나르시시스트 혹은 소시오패스처럼 행동하게 (의도야 어떻든, 스스로 의식하든 못 하든) 될 것이기에. 팔정도의 8요소를 계발하고 있는 과정에서는 매사를 오직 인과의 관점에서 impersonally 하게 분석하는 노력으로 충분하며, 강의 건너편에 안착하기도 전에 '에고없는 척'하는 것은 강의 한가운데에서 배에서 내려 물에 빠져 죽는 행위와도 같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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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22: The Wisdom of Ego. Mature Wisdom Requires a Mature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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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at a later time, he abandons conceit, having relied on conceit." -- AN 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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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강의 건너편에 도달도 못 했으면서 심오한 척하느라 4단계의 얘기를 주문처럼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integrity에 주의해야 하고, '나 없다'의 과잉단순화된 무아에 취해 있는 사람은 3단계의 skillful vs. unskillful 사고를 '수준 낮은 이분법'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도 바로 과잉단순화된 무아나 oneness/nonduality에 대한 집착인데, 초기불교는 이 oneness/nonduality마저 거쳐 가는 명상 단계일 뿐 truth/reality는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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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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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를 주체 아닌 행위에 촛점을 두고서 인과의 관점에서만 impersonal 하게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그럼 무엇인가? '나'라는 주체 위주로 생각할수록 존재에 집중=집착하게 되고, 그 집중/집착의 힘이 바로 존재를 반복하는 윤회의 동력이 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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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ver one’s selfhood turns up, there that action will ripen. Where that action ripens, there one will experience its fruit, either in this very life that has arisen or further along in the sequence." -- AN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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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not self, no conceit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런 교리들의 목적도 상식적 의미의 '겸손'이나 '원만한 인간관계' 혹은 '사랑'이 아니라 바로 '윤회로부터의 해방' 즉 '해탈'인 것. 그러니 "불교에서 윤회는 방편설" 류의 얘기는, 불교의 대전제부터 아예 부정하고 들어가는 셈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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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해탈하실 때 3가지를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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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본인의 윤회. 수십만 번에 걸치는 윤회동안 어떤 생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었는지까지 자세히.
(b) 인간들의 윤회 패턴. 어떤 행동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고 그 결과가 언제 찾아오고 등등.
(c) 심리적 윤회. 어떤 마음을 먹으면 그 결과로 내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되고 그로 인해 어떤 경험이 찾아오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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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b와 c를 관통하는 공통된 법칙을 찾으셨는데 그게 12연기=인과이다. 그러니까 b는 12연기가 거시적 레벨 (생과 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이고 c는 미시적 레벨 (한 개인의 한 찰나의 의식과 다음 찰나의 의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인 셈. 그래서 매사를 주체 아닌 행위에 촛점을 두고서 인과의 한 과정으로만 파악하라고 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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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자기 마음의 변화는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어차피 미시적 차원에서의 원리와 거시적 차원에서의 원리는 동일하기에, 윤회가 믿기지 않는다면 안 믿어도 상관은 없다. 미시적 차원에서의 연기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윤회가 있을 경우 좋은 곳으로 윤회할 것이고, 설사 윤회가 없다 한들 이미 이승에서 마음 수행의 효용을 보았으니 억울할 이유가 없는 것. 하지만 누가 죽을 때마다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그 사람은 어디로 윤회했느냐고 묻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대답하시거나, 어떤 행동은 이승에서 그 결과가 오고 어떤 행동은 다음 생에서 그 결과가 오며 또 어떤 행동은 몇 생 후에 결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얘기들이 초기경전에 줄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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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無我之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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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 추가로 언급하고 맺으려고 한다. 예술 작품/활동에 푸욱 빠져 잠시나마 '나'를 완전히 망각할 때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걸 바람직한 상태로 오해하기에 그래서 심지어는 섹스를 '수행'으로 삼는 탄트라라는 것도 생긴 것이지만, 이런 해석은 부처님의 관점과는 전혀! 무관하다. 초기불교는 섹스, 도박, 권력, 쇼핑, 예술, 여행, 우정/사랑, 심지어 학문마저도 모두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feeding이라 간주한다. 물론 도박보다는 예술이 건전하고 인간관계보다는 자연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건강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즐거움은 명상을 통해 자가발전하는 것. 또, 예술이든 뭐든 그런 외부 자극에 distract되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 중에도 늘상 자신의 호흡에 대한 관조를 자기 마음/의식의 anchor로 삼으라고 (바로 이것이 'centered'의 의미)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니 외부의 무언가에 빠져 잠시나마 자신을 망각/상실하는 의미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아/무아지경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 What an ir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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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8. 무아는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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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7. 남의 자기중심주의를 떠받드는 것이 Not Self, No Conc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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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6.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듯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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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5. 무조건 남을 내 위에/앞에 두는 것이 무아/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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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3.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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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ity of Heart
You, 崔明淑, Sungsoo Hong and 1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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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希修
    '공동체의 화합!을 원한다면 비판!을 잘 하고 또 잘 받아 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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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明淑
    3단계는 자기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상태이겠네요.. 인간의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과문하여 글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네요.ㅜㅜ 그래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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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希修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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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希修
    주어를 삭제한 채 술어만 들여다 보고 impersonal하게 판단하는 것. 불교의 '무아'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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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운동 동지가 박원순을 보내는 방법 -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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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njin Kang
    이해를 돕기 위해 선생님이 추가하신 2단계가 굉장히 값지네요 ^^ 이렇게 공짜로 봐도 되는건지 살짝 죄송스러움이 느꺼질 정도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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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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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jin Kang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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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Master Gotama? Is the one who acts the sam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s of the act)?" "The one "(Το say,) brahman, one who acts is the same one who experiences, is one extreme." "Then, Master Gotama, is the one who acts someone other than the who experiences?" "(Το say,) brahman, The one who acts is someone other than the one who experiences, is the second extreme. Avoiding both of these extremes, the Tathagata teaches the Dhamma via the middle: "From ignorance a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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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w
  •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requisiteconditioncome condition come fabrications...." SN 12:46 S 12. "Whatever brahmans and contemplatives, teachers of kamma, who declare that pleasure and pain are self-made, even that is dependent on contact. Whatever brahmans and contemplatives, teachers of kamma who declare that pleasure and pain are other-made... self-made and other-made... neither selfmade nor other-made, but arise spontaneously, even that is dependent on cont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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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w
  • 希修
    자타 불문, 주어/대상 아닌 술어/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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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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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希修
    '내가 남보다 위'라는 생각뿐 아니라 '내가 남보다 아래'라는 생각 역시 conceit (자만. self-image 집착)이라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나'라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중심적') 사고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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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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