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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Namgok Lee ‘대장동’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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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9 October 2021  · 

이 글은 오늘 새벽에 페북에 올렸다가 삭제한 글인데, 다시 올린다.
삭제할 때 들었던 생각은 이 글이 길어서가 아니라, 지금은 이런 글이 지금의 우리 정세와 상황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과제를 흐리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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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10여년은 우리가 털고 가야할 과제들을 대단히 거친 방식(중도의 길은 거칠고 험하다), 비이성적으로 편갈라 싸우는 우려스러운 외형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난 시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의 그늘에서 자라난 암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그 방아쇠는 어떤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번에는  ‘대장동’이 그 방아쇠다. 반드시 제대로 털고 가야 한다.
===

그럼에도 다시 올리는 이유는 새로운 정치와 문명을 이루어가는 주류의 철학이 뒷받침될 때라야 그 동안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자유와 다원성에 바탕을 둔 국민적 통합‘과 ’인류적 위기를 넘어서는 문명 전환‘의  길을 열어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5년 전에 썼던 글이다.
===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


분절Ⅰ→무분절→분절Ⅱ에 대한 견해다.

깨달음의 세계나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야기할 때는 무분절이나 분절Ⅱ를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현실 문제에 부딪치면 분절Ⅰ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지금 우리는 분절Ⅰ의 격렬한 쟁투 속에 있다.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들어낸다.
한 편에서는 ‘사랑’과 ‘관용’을 이야기하다가도 어떤 현실과 만나면 ‘증오’와 ‘타도’의 잇빨을 들어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관념이나 그런 관념 안에서의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대할 때 ‘역지사지’하고 ‘구동존이’하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내가 일관되게 제안하는 ‘합작’이나 ‘연합’은 분절Ⅱ의 세계로 나온 주체들 간에 이루어질 때라야 진실한 것이 된다.
깨달음의 세계처럼 엄정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의 세계는 ‘무분절의 세계’라는 이해 정도만 있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그 상대가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인정만이라도 있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여 오고, 자신의 삶과 사회적 실천도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격렬한 분절Ⅰ의 쟁투를 통해서 적어도 이런 진화라도 있어야 ‘헛고생’이나 ‘후퇴’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나 자신도 다시 볼 겸, 옛 글을 공유한다.
좀 길지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큰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 선승의 화두를 이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수도 있고, 선문(禪門)의 금기(禁忌)일지 모르지만, 요즘 보고 있는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필부의 만용일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가(禪家)의 화두 속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극히 소수의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보편진리와 그에 바탕한 삶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먼저 박석 교수의 번역을 통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
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이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Ⅰ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Ⅱ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Ⅱ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Ⅱ를 분절Ⅱ답게 만들고 분절Ⅰ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
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나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

2021/10/08

의식이라는 꿈 - 뇌에서 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대니얼 데닛 (지은이),문규민 (옮긴이)

알라딘: 의식이라는 꿈

의식이라는 꿈 - 뇌에서 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대니얼 데닛 (지은이),문규민 (옮긴이)바다출판사2021-06-07
원제 : Sweet Dreams: Philosophical Obstacles to a Science of Consciousness (2004년)

320쪽

책소개

이 시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대니얼 데닛은 과학의 최신 성과와 진화적 관점을 중시하는 대표적 철학자다. 철학자의 역할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고 강조하는 그는 심리철학, 인지과학, 생물철학의 선구자로서 마음·종교·인공지능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공지능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 마빈 민스키는 대니얼 데닛을 두고 ‘버트런드 러셀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과 지적 대결을 펼칠 사상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학자, 데닛은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2년, 40여 년 학문적 공적을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상을 수상했다. 현재 미국의 터프츠 대학교에서 가장 저명한 교수직인 유니버시티 프로페서쉽과 인지 연구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데닛은 리처드 도킨스의 밈 이론을 자신의 지향계 이론에 결합하여 의식·종교·인공지능에 흥미로운 철학 이론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중에서도 마음을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데닛이 반세기 동안 골몰해 온 지적 난제 중 하나는 ‘축축한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 나오는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데닛은 의식을 과학(3인칭 접근)이 접근할 수 있는가? 라는 골자의 질문을 던지며 의식 이론을 정립했는데 이를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1991)라는 책에서 한 차례 총정리한 바 있다.

이후 데닛은 꾸준한 대중 강연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보완하며 10여 년을 보냈는데 미국에서는 그사이 ‘뇌의 10년’이라는 기치로 뇌과학을 부흥시키려는 정책적 움직임과 새로운 과학적 성취도 있었다. 이 책 《의식이라는 꿈》은 그 시간 속에서 새롭게 의식 이론을 보완하며 집대성한 데닛의 집념이 담긴 결과물이다. 프랑스 장 니코드 연구소 강연 등에서 행한 강연록이 기본 바탕이 되었다. 의식과학은 우리에게 조금 낯선 분야다. 인류에게 의식이 생긴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사건인데 이 분야의 최전선에서 다뤄지는 쟁점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목차
옮긴이의 말
들어가며
주요 용어

1장 좀비감: 직관의 소멸?
자연주의적 전회│반동분자들│좀비의 당혹스러움│넓은 기능주의와 최소주의│환상의 미래

2장 의식에 대한 삼인칭 접근
화성에서 온 과학자│통속 이론과 철학│타자현상학 다시 보기│타자현상학과 데이비드 차머스│이인칭 관점

3장 의식이라는 ‘마술’ 설명하기
마술을 설명한다는 보답 없는 과제│관객 해체하기│소리 나는 카드│

4장 감각질이 우리 삶을 살 만하게 해 주는가?
감각질, 잡기 어려운 용의자│변화맹과 감각질의 문제│클라프그라스 씨의 달콤한 꿈과 악몽

5장 로보메리가 아는 것
메리와 파란 바나나│‘확실히’ 그는 놀랄 거야│당신은 그래 봤어야 해!│로보메리│감금된 로보메리

6장 우리는 지금 의식을 설명하고 있는가?더보기

책속에서
첫문장
사울 스타인버그는 일러스트(26쪽 QR코드 참조-편집자주)는 의식의 문제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좋은 방식을 구현한다.
P. 109 많은 이들에게 의식은 하나의 신비,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놀라운 마술쇼, 설명을 불허하는 특수 효과들의 끝없는 연속으로 보인다. 나는 그들이 심하게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은 비록 그 작동에서 있어서는 절묘하게 독창적이지만, 기적적이거나 심지어 궁극적으로는 신비스럽지조차 않은 (신진대사나 생식, 자가 수리와 같은) 물리적... 더보기
P. 61 의식은 과학을 넘어선 신비로서 자주 상찬받는다. 그것이 우리 각자의 안으로부터 제아무리 내밀하게 알려지건, 밖에서는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전통이 그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자연 현상(신진 대사·생식·대륙 이동·빛·중력 등)을 심층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꼭 그만큼... 더보기
물론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는 타자현상학이 뭔가를 빠뜨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게 바로 좀비감이다. 타자현상학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매우 직접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좀비감을 그 어떤 좋은 의식 이론이라도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진심 어린 확신들 중 하나로 포함시킴으로써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의식 이론이 책임지고 설... 더보기
P. 232 기본적인 생각은 의식은 텔레비전보다는 명성fame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을 담지하는 사건들이 의식적이게 되기 위해 그것으로 변환되어야 할 뇌 안의 특수한 ‘표상의 매체’가 아니다. 캔위셔가 적절하게 강조하듯이 “주어진 지각적 특성에 대한 자각a 신경 상관물은 그 특성을 지각적으로 분석하는 바로 그 신경 구조 속에서 발... 더보기
P. 258 간단히 말해?그리고 지금 우리는 너무나 많은 오해를 야기한 도발적인 판본에 이르렀는데?원칙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축축한, 유기적인 뇌를 한 묶음의 실리콘 칩과 전선으로 대체하고도 별문제 없이 생각을 (또한 의식을 가지는 일과 그 외 기타 등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감한 전망, 즉 계산주의 또는 ‘강한 인공지능’은, 두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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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대니얼 데닛 (Daniel C. Dennett)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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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최신 성과와 진화적 관점을 중시하는 철학자. 이 시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로 정평이 난 그는 심리철학, 인지과학, 생물철학의 선구자로서 마음·종교·인공지능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빈 민스키는 그를 ‘버트런드 러셀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1942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학문적 공헌을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터프츠 대학교에서 가장 저명한 교수직인 유니버시티 프로페서쉽을 보유하고 있으며 같은 대학교의 오스틴 B. 플래처 철학 교수와 인지 연구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데닛은 리처드 도킨스의 밈 이론을 자신의 지향계 이론에 결합하여 의식·종교·인공지능 등에 흥미로운 철학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실제로 지난 40여 년 동안 《다윈의 위험한 생각》 《마음의 진화》 《마음의 설계》 《내용과 의식》 《지향적 자세》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 마음을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이해의 지평을 넓혀 왔다. 그 밖의 저서로는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신 없음의 과학》(공저) 《자유의 진화》 《주문을 깨다》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가 있다.
데닛은 강단의 학자라는 관성에서 비껴가는 고유의 표현법을 고수한다. 직관펌프라고 불리는 사고 실험으로 통념에 빠진 철학자들의 오류를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논증과 다양한 관찰에 기반한 예증이 있다.
또한 그는 철학자를 가리켜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데 더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든 물음에 답하려는 욕망을 누르고, 열린 마음과 좋은 질문으로 낡은 관행과 전통을 깨뜨리는 철학자라면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장대한 구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접기
최근작 : <의식이라는 꿈>,<신 없음의 과학>,<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총 97종 (모두보기)
문규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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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 연구교수. 경희 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인도불교학으로 석사 학위를, 서울 대학교 철학과에서 의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 대학교와 서울시립 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연구했다. 주로 분석철학 계통의 형이상학, 과학철학, 심리철학, 인식론의 주요 문제들을 연구한다. 전문 분야는 의식과학과 형이상학이며 주요 논문으로는 “Making Sense of Consciousness as Integrated Information”(2019), “Exclusion and Underdetermined Qualia”(2019) 등이 있다. 의식과학을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연구 모임을 운영 중이며 최근에는 현대 인류학과 존재론의 새로운 흐름들, 임상심리학과 정신의학 등으로 연구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제대로 된 문제라면 반드시 답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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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분야 : 정리/심플라이프 2위 (브랜드 지수 56,405점), 과학 6위 (브랜드 지수 302,774점), 음악이야기 15위 (브랜드 지수 6,095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무수한 세포들 사이에
의식 주체의 자리는 있는가
우리의 신체는 수조 개의 세포로 만들어져 있고, 각각의 세포에는 마음이 없다. 빵 반죽을 부풀게 하는 효모 또한 생명이지만 의식적이거나 자각적이진 않다. 내 몸속 세포 중 어느 것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알지 못한다. 의식적 주체를 설명하려 한다면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세포들로부터 뭔가를 아는 세포 조직들로의 이행이 이루어져야만 한다.(244쪽) 이를 두고 하나의 의식적 자아, 하나의 마음이라는 총본부로 기능하는 체계나 영혼과 같이 마법적인 부가 요소가 개입한다는 관념이 한때 의식에 관한 가장 우세한 표상이었다.(29쪽) 하지만 이제 이러한 이원론은 거짓이라는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 우리 각자는 물리적인, ‘마음이 없는 로봇’으로 만들어졌을 뿐 결코 어떤 다른 비물리적인 요소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흔히 생각하는 주체를 묘사할 때 뇌 안에 누군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생각한다. 이를 데카르트적 극장이라고 한다. 의식을 영화를 감상하듯 객석에 앉아 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찰하는 존재라고 보는 관점인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전제한 개념인데 정신과 내적 자아가 자리하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데닛은 우리의 뇌에 그러한 공간이 따로 없다고 지적한다. 뇌 안의 더 작은 행위자, 생물학적인 요소의 역할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데닛은 의식의 다중 원고 모델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의식이 발생하는 자리 따위는 없다. 다만 뇌의 모든 정신 활동은 감각 입력이 각각 독립적으로 처리되고, 연속적으로 편집되고 수정, 해석된 결과물이다. “뇌 안의 정치적 대박을 위한 ‘정보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있겠지만(242쪽) 우리가 자연스럽게 전제하는 1인칭 주체는 그 경쟁의 다양한 후속 효과들 속에 이미 통합된 결과일 뿐이며 단일하고 고정 불변한 존재가 아니다. 데닛은 이 의식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3인칭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타자현상학이다. 의식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사고 장치인 것이다.

데닛의 의식 이론
우리가 생각한 ‘그런 의식’은 없다
영미권에서는 1970년대부터 물리적으로 형언하기 힘든, 의식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측면들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해 왔다. 데닛은 이를 반박하며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속마음’으로 의식을 바라보는 것은 지구중심설과 다를 바 없는 틀린 직관이라고 지적했다.(186쪽) 데닛의 의식 이론은 크게 부정적·비판적 단계와 긍정적·설명적 단계로 나누어진다.(5쪽) 부정적·비판적 단계에서는 일부 철학자와 과학자 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감각질, 현상적 속성, 현상적 의식, 주관성과 같은 것들을 ‘해체’한다. 감각질(퀄리아)의 어원은 질quality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복수형이다. 의식에 대한 가장 흔한 직관으로 정신 상태의 질적인 내용을 의미하며 의식을 다른 모든 심리 상태들과 명확히 구분된다고 본다. 데닛은 감각질은 없다고 단언한다. 현대 철학자들이 감각질을 전제하고 의식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의 뇌과학적 성과를 무시한 채 여전히 데카르트적 시각에 갇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긍정적·설명적 단계에서는 뇌가 의식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이론적 모델을 제안한다. 최근 의식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서 주목받는 범심론과 환영론 중에서 환영론의 원천 발상은 전부 데닛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뇌가 의식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데닛 고유의 이론적 모델을 뼈대로 한다. 이후 데닛은 다중 원고 모델을 더욱 발전시키고 세련되게 다듬은 개념들을 ‘뇌 안의 명성’, ‘두뇌의 유명인’ 등으로 이름 붙였었는데 이 책에서는 ‘환상의 메아리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환상의 메아리 이론은 스타니슬라스 드엔의 광역 뉴런 작업 공간 이론을 뼈대로 삼아 데닛이 보충적 설명을 덧붙였다. 그 핵심은 뇌 안에서 매 순간마다 정보들, 표상들, 신호들 사이에서 선거 또는 오디션과 같은 경쟁과 선발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식적 뇌는 최정상의 자리를 두고 온갖 정보, 표상, 신호들이 서로 정치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는 아수라장이다. 단일한 자아가 총본부로서 기능하는, 그런 의식은 없다.

좀비감, 색 과학자 메리 …
기존의 통념을 부수는 데닛식 직관펌프
《의식이라는 꿈》에서 대니얼 데닛은 데이비드 차머스가 주창한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반박한다. 이는 데이비드 차머스를 일약 철학계의 락스타로 만든 구분법으로서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표준 패러다임으로 마음, 특히 마음의 의식적인 측면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몸속의 신경 과정이 어떻게 주관적 경험을 불러일으키는지, 인간의 내적 경험을 직접 다룰 수 없는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차머스는 쉬운 문제와는 달리 어려운 문제는 원칙적으로 해결이 어렵다고 보는데, 데닛은 아예 그런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의식을 물리적 관점으로 설명될 수 없는, 주관적 느낌이라고 보는 것은 환영이라는 것이다.
데닛은 이 외에도 기존의 사고 실험에서 의식과학을 가로막는 철학적 장애물들을 지적해낸다. 그중 하나가 좀비감이다. 좀비감은 의식적 인간과 완전한 좀비 사이에 실제적인 차이가 있다는 확신 및 직관을 일컫는데 데닛은 이를 천동설과 같은 직관이라고 비판한다.(1장) 나아가 색 과학자 메리 사고 실험을 비판한다. 색 과학자 메리는 1982년에 첫선을 보인 프랭크 잭슨의 사고 실험이다. 메리는 흑백의 방에서 흑백 텔레비전을 보며 세상을 보는 과학자다. 토마토의 빨강색이나 다른 색깔 용어를 사용할 때 일어나는 물리적 정보를 알고 있다. 이를테면 빨강색을 볼 때의 망막 자극이나 성대 및 폐의 변화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흑백방에서 풀려나 컬러 텔레비전 모니터를 얻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의문을 던지며 ‘물리주의는 거짓’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 사고 실험은 좋은 사고 실험일까? 데닛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오래된 충고를 끌어온다.(180쪽) 철학자들이 사고 실험을 다룰 때, 과학자들이 자신의 관심 대상을 다루는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변형시키고, 뒤집고, 모든 각도에서 검토하며, 다른 모든 설정과 조건에서 당신이 인과의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았음을 반드시 확인하라는 의미다. 데닛은 메리에 대한 사고 실험을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메리를 흑백방에 억류한 사람이 색을 보여주기로 마음 먹으며 ‘파란 바나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메리는 그것을 보자마자 ‘파란 바나나’라는 것을 알아챈다. “색 지각의 물리적 원인들과 효과들”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리주의를 부정하는 사고 실험은 보통 이런 상황까지 가정하지 않은 채 쉽게 결론을 내려 버린다. 색 과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진 가상 인물에 대한 상상력 부재다. ‘무엇을 본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신경계에 끼치는 세세한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기존 철학적 전통에만 기댄 통념적 사고 실험은 논리적 비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인류에게 의식이 생긴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며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33쪽) 지구상 모든 생명체에게 면역, 시각 등의 체계를 선사한 진화적 산물이지만 단순히 마음이 여타 생물학적 현상들과 달라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상적인 생명과학이 기계론적으로 해석할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의식과학은 명실상부 정상과학이 되어 가고 있다. 데닛은 그 기초가 될 수 없는 불량 직관들을 폐기하며 통념과 관성을 부수는 것이 참다운 앎에 기여하는 철학자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접기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박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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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박규태
박규태(朴奎泰)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라프카디오 헌의 일본론』, 
『일본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애니메이션으로 읽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황금가지』, 『국화와 칼』,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 신도사』 등이 있다.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8-362-B00006).

1. 들어가는 말

<휴머니티플러스>(H+, 세계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의 전신)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이하 TH)을 “생명의 증진을 위한 원리와 가치에 입각하여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의해 현재의 인간 형식과 한계를 넘어서서 지적 삶의 진화를 유지하고 촉진시키고자 하는 일군의 삶의 철학”1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인 간향상(human enhancement)을 위한 창발적인 테크놀로지를 옹호하는 문화 적· 지적 운동으로서의 TH는 테크놀로지를 적용하는 방법과 선택 과정에 서 윤리적 문제를 수반하는데, 그 적용의 맥락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한 만큼 여러 상이한 유형이 존재한다. 
가령 기본적으로 모든 사회경제적 계층의 인간을 적용 대상으로 삼아 성공과 행복의 한층 더 큰 차원으로 인간이 고양될 것이라는 윤리적 비전에 입각한 ‘민주적(democratic) TH’, 발전과 향상을 시민적 권리이자 자유로 보 는 점에서는 민주적 TH와 유사하지만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좀 더 강조하
고 정부 차원의 규제에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자유주의적(libertarian) TH’, 인류와 테크놀로지 발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에서 인간 진화와 발 전의 총체적인 업그레이드에 대한 실용적 접근을 강조하는 ‘엑스트로피주 의(extropianism) TH’,2 테크놀로지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 즉 초지성 을 가진 기계가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질 것이며, 그것이 인류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는 확신에 입각한 ‘특이점주의(singularitarianism) TH’, 약물과 유전 자공학의 진화를 통해 인간 심리 상태가 향상될 것이라 주장하면서 고통, 걱정, 스트레스 등의 인간 경험은 궁극적으로 없어질 것으로 보는 ‘쾌락주 의적(hedonistic) TH’, 가장 일반적인 유형의 TH로 인간 조건을 업그레이드

1 < 휴머니티플러스> 홈페이지 http://humanityplus.org/.
2 여 기서 ‘엑스트로피’란 ‘엔트로피’의 반의어로 주조된 용어며, <엑스트로피 연구소>의 설립자 막스 모 어(Max More)에 의해 “유기체 시스템의 지성, 기능적 질서, 활력, 에너지, 생명, 경험, 발전과 성장의 능력 및 추동력 등의 상태와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규정한다. 요컨대 무질서를 강화시키는 엔트로피 에 반해 엑스트로피는 질서를 강화시키는 에너지를 가리키는 듯싶다. 신상규,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머니즘』, 아카넷, 2014, 114~116쪽.
 
함으로써 죽음이 정복될 것이라고 보는 등 노화와 죽음의 문제에 초점을 맞 추는 ‘생존주의자(survivalist) TH’, 인간을 특정 도시나 국가가 아닌 세계시 민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입각하여 내셔널리즘적· 지리적· 애국주의적 충성 대신 하나의 종으로서의 전체적인 통합성을 강조하고 그런 인간 종족의 진 화를 위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계주의적
(cosmopolitan) TH’, 인류가 다음 단계의 집합적 사유로 진화할 수 있는 유일 한 길은 세계에 대해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나아가 우리가 학습하고 창조해 낸 것들을 깊이 재성찰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는 ‘우주진화론(cosmism) TH’, 반자본주의적· 반국가적 입장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무정부주의 적 민주주의 체제를 촉진시킬 것이며 그 결과 정부나 국가가 불필요해질 것 이라고 믿는 ‘무정부주의적(anarcho) TH’, 그리고 현존하는 여러 종교와 TH 가 양립 가능하다고 보는 ‘종교적(religious) TH’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와 같은 TH의 다양한 유형 가운데 특히 ‘종교적 TH’ 와 관련하여 종교와 TH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흔히 애미니즘적이라고 일 컬어지는 일본 신도(神道)와 불교 및 각각의 가미(神)와 호토케(佛) 관념이 일본의 TH적 테크놀로지 문화의 중요한 밑그림이라는 점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하에서는 먼저 TH와 종교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하는 다 양한 담론을 간략히 계보화한 후, 네오-애니미즘에서 테크노-애니미즘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 일본의 사례에 적용시켜 그것을 ‘신불-애니미즘’이 라 명명할 것이다. 이어서 그런 신불-애니미즘과 관련하여 가미와 호토케 의 개념사를 살펴본 후 유희성,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trans-spirituality), 하 이브리드(hybrid), 모노노아와레(物哀)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종교와 TH적 일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
인간향상이라든가 ‘묵시론적 인공지능’(apocalyptic AI)이라는 TH의 이상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단체로, 전술한 <휴머니티플러스>를 비롯하여 <엑스토
피아 연구소>, <윤리와 창발적 테크놀로지 연구소>(Institute for Ethics and Emerging Technologies), <우주 엔지니어 단체>(Order of Cosmic Engineers)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해 막스 모어(Max More), 제임스 휴즈(James Hughes),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한스 모라벡(Hans Moravec), 레이 커즈와 일(Ray Kurzweil) 같은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이념이 21세기에 널 리 확장되어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철학 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TH에는 종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신념체계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 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물론 <몰몬교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라든가 <기독 교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처럼 종교인들이 구성한 TH 조직뿐만 아니라 
‘트랜스종교’(transreligion)를 표방하는 <테라셈(Terasem) 운동> 같은 TH적인 
종교시스템도 있지만, 대부분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도라든가 종교의 례를 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티로시-사무엘슨(H. Tirosh-Samuelson)은 다양한 유형의 TH를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종교와 초월의 문제에 접근하는 “세속적 신앙”(a secular faith) 이라고 규정한다. 전술한 <휴머니티플러스>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확실히 TH는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이다. 하지만 레이너(D. Rayner) 에 따르면 “무신론은 제4의 아브라함 종교”와 다름이 없다. 즉 무신론도 유 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이어 서구 유일신 전통에서 비롯된 하나의 종교라 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자면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TH를 종교와 연관시켜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셈이다. 

이와 달리 종교를 전(前)트랜스휴머니즘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종교는 TH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TH를 낳고 키우는 토양 혹은 씨앗이라는 것 이다. 역으로 TH를 전(前)종교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양자를 파트너 관계로 보는 견해 또한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인 간향상에 있어 TH와 종교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TH도 종교도 인간 을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며 인간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변형시킨다는 TH의 목표는 대부분의 종교가 내세우는 목표와 공통된다. 사실상 종교의 목표도 인간의 변형에 있기 때문 이다. 양자는 다만 그 목표에 이르는 통로가 다를 뿐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적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면, TH는 과학을 통 해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TH와 종교의 파트너 관계는 양자의 유사성에 입각할 때 한층 더 강고 해질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종말론, 신정론(theodicy), 구원론 등과 관련하여 종종 양자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첫째, 레이 커즈와일은 테크놀로지적 특이점9이 가까워졌다고 주장한다.  
커즈와일을 비롯하여 버너 빈지(Vernor Vinge) 같은 특이점주의자(Singularitarian) 들은 초인공지능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초인공지능의 출현은 그 로 인해 인류가 대파국을 맞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급 격한 테크놀로지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특이점은 역사적 시간 개념을 벗어 난 전혀 새로운 단계로의 전이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종교적 종말론의 속성을 가진다.
cordiaabchao.wordpress.com/2014/08/14/paganroots/) 참조. 
 
둘째, 광의로서의 신정론을 ‘악과 고통의 문제’를 묻는 물음이라고 규정
할 수 있다면, 인간 한계에서 비롯되는 질병, 노화, 죽음 등의 악과 고통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테크놀로지를 통한 인간향상을 추구하는 TH 의 문제의식 또한 신정론과 동일한 물음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와 같은 TH적 신정론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신정론 혹은 홀로코스트 이후 인간의  책임을 묻는 ‘인정론’(anthropodicy)을 훨씬 넘어서서 인간이 신이 될 것을 주 장하기도 한다. TH는 인간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단계다. TH적 신정론의 본질은 악과 고통의 존재를 신에 의해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악 을 없애느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서 신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의무다. 그래야만 악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크 워커(Mark Walker)는 이런 관점을 ‘네오-이레니우스적 신정론’ (Neo-Irenaean Theodicy)이라고 부른다.  

셋째, 홉킨스(P. Hopkins)는 종교도 TH도 동물성을 초월하려는 시도에 
있어서는 닮은꼴이라고 말한다.  양자 모두 ‘초월’이라는 구원론적 모티브 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우식은 트랜스휴먼이 호모 사피엔
스로부터 호모 트란센덴탈리스(homo transcendentalis), 즉 ‘초월적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이 호모 트란센덴탈리스는 명백히 호모 사이엔티피쿠스
(homo scientificus, 과학적 인간)와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종교적 인간)
를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종교와 TH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지점에서부터 종교로서의 TH 를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이 논의되어왔다. 가령 과학적 종교, 대체종교, 신 종교, 테크노-종교, 데이터-종교, 최후의 종교, 신영지주의, ‘참된 가짜’ 종 교로서의 TH 담론들이 그것이다. 먼저 드 가리스(H. De Garis)는 과학자들 의 종교를 ‘우주진화론주의’(cosmism)라고 부르면서, 이런 과학적 종교의 일 차 목적은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들에게는 인공지능이 일 종의 종교인 것이다. 또한 사이보그주의자들의 목적은 그들 자신이 인공지 능신이 되는 데에 있다.14 이들은 로봇공학이 인간에게 신적인 힘과 권능을 부여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불멸이라든가 사자의 부활 등과 같이 고래 로부터 오랫동안 종교가 목표로 삼아온 것들을 테크놀로지가 이룰 수 있으 리라고 믿는다.
한편 종교의 대안을 추구하는 대체종교로서의 뉴에이지 운동이나 스피
리추얼리티 운동도 TH와 그 목표가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낡은 종교 대신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우주적 내러티브를 요청” 하는 TH 또한 일종의 대체종교로 볼 수 있다. 아마라신감(A. Amarasingam)은 여기서 더 나 아가 TH로 대변되는 미래학을 전통종교에 도전하는 하나의 신종교운동으 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묵시론적 인공지능’이라는 TH의 어젠다가 이미 우리의 공공생활과 현대의 종교적 다원주의 안에 들어와 있으며 현대 윤리학의 한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 

유대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도 신종교로서의 TH를 시 사한다. 그는 『호모 데우스』(Home Deus)에서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 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는 별 관계가 없고 기술과 관계있는 용감한” 이 신종교를 하라리는 ‘테크노-종교’(techno-religion, 기술종교)라 명명한다. 테 크노-종교는 사후에 천상의 존재들을 통한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행복, 평화, 번영, 심지어 영생까지도 주겠다고 약 속한다. 그는 이런 테크노-종교의 두 유형으로 테크노-휴머니즘(techno-
humanism, 기술 인본주의)과 데이터-종교(data-religion, 데이터교)를 제시한다. 이 중 21세기의 테크노-휴머니즘은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와 컴퓨터를 연결

14  Hugo de Garis, “The Artilect War,” Issues 98, March, 2012, pp.15~16.
하는 인터페이스의 도움으로 전혀 다른 초인간 모델인 ‘호모 데우스’(homo deus), 즉 훨씬 우수한 인간 모델로서의 신적 인간[神人]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7 이에 비해 데이터-종교에 있어 우주는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 루어져 있고, 그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이라 불리는 “신과 같은” 데이터 처리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 면 ‘스피리추얼한 인터넷’ 이 마치 편재하는 신처럼 모든 것을 통제할 것 이고 인간은 전적으로 그 만물인터넷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19 이와 같은 테크노-종교는 종교의 최종적인 진화단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하
여 브루얼(D. Bruere)은 하라리와 유사한 어조로, TH를 영지(靈知, Gnosis), 즉 ‘참된 지식’에 의한 구원을 추구했던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와 유사성을 보여주는 ‘최후의 종교’ 로 이해한다.  
한편 모라벡은 『마음의 아이들』 에서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나 로봇에 다운로드하거나 업로드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아가 그는 지구의 모든 과거 거주자들의 부활과 마음 이식이 가능해지는 미래를 묘사하기도 한다. 종교학자 이창익에 따르면 “이런 모라벡의 상상력은 종교적 상상력과 무척 닮아 있다. 가령 마음 이식을 통해 하나의 영혼이 동시에 여러 개의 신체를 소유할 수 있고 연속해서 다른 신체를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환생이나 윤회의 기계적 실현을 가리킨다. 그는 영혼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는 기계라는 미래의 신체에 다운로드되는 과거의 영혼(마음)으로 이해된 다. 이것은 종교적 세계의 기계적 실현이자 종교가 사라진 세계다. 이리하 여 그는 신체에서 해방된 ‘우리의 마음이 낳은 아이들’이 거주하는 현세적 내세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22

17  유 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481~483쪽.

이와 같은 모라벡의 발상 또한 “육체에서 해방된 마음 혹은 영혼”이라는 
영지주의적 주제의 각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불완전하고 악 한 신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이 세상은 참된 세상이 아니라고 보았
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 몸에 대한 TH의 관점이, 몸이란 영혼을 가두어놓은 사악한 함정이나 감옥일 뿐이라고 보는 ‘신영지주의’로 간주되기도 한다.  종교학자 데이비드 치데스터(D. Chidester)는 『참된 가짜』에서 종교를 “초 인간적인 것 및 하위인간적인 것과 관련시켜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절 충하고 극복하려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참된 가짜’란 종교가 일련의 사기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종교적 효과를 야기한다는 것, 가령 초월의 감각을 제공하거나 인간 행동에 대한 의미를 확장시킨다거나 혹은 공동체를 확립시켜주는 역할을 해왔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게라시(R.M. 
Geraci)에 따르면 TH의 묵시론적 인공지능의 특징적 요소들은 이와 같은 ‘참된 가짜’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TH는 미래에 초인간적인 상 태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음으로써, 치데스터가 정의하는 종교, 즉 인 간이라는 의미의 극복과 관련된 신념과 실천을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이런 ‘참된 가짜’의 개념을 하라리는 ‘공유된 허구’ 혹은 ‘상상의 질서’라 고 바꿔 말한다. 하라리에 따르면 “21세기에 역사학과 생물학의 경계가 흐 려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념(ideology)이라는 허구(fiction)들이 유전자 가닥들을 고쳐 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
22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종교문화비평』 31, 2017, 223~224쪽.
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그러 므로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석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 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 야 한다.”26 여기서 ‘허구’란 사회적 조화를 위해 공유된 어떤 것을 가리키 고, ‘이념’이란 주로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하라리는 “근대 과학은 확실히 게임의 룰을 바꾸었지만, 그 렇다고 신화를 사실로 대체한 것은 아니다. 신화는 계속 인류를 지배하고 있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 강화할 뿐”27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TH로 대 변되는 과학, 그리고 신화로 대변되는 종교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이며,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인 휴머니즘28은 이와 같은 자기기만의 능 력, 즉 우리의 공유된 허구들에 광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포스트 휴머니즘을(따라서 TH도) 이런 휴머니즘의 한 변형체로 보는 듯한 하라리는 “당대의 기술적 현실들을 알지 못하는 종교는 요청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필자의 윤문) 이라 하여 종교와 TH가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임을 시사한다. “종교와 기술은 서로를 밀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서 멀리 벗어날 수 없”29 기 때문이다.
세속적 신앙 혹은 무신론적 종교로서의 TH, 종교의 파트너로서의 TH, 
종말론· 신정론· 구원론 등에 있어 종교와 TH의 유사성, 과학적 종교, 대체 종교, 신종교, 테크노-종교, 데이터-종교, 최후의 종교, 신영지주의, ‘참된 가짜’ 종교로서의 TH를 말하는 이상의 관점들은 각각 상이한 맥락을 가지 면서도 공통적으로 종교와 TH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리하 여 이창익은 인간의 영혼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트랜스휴머니스트적 기획이 란 일종의 종교 이야기라고 천명한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우고자 

26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03, 215~216쪽. 
27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49~250쪽. 
28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307쪽.
29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372쪽. 

하는 이야기, 심지어 욕망과 시간과 영혼까지도 지우고자 하는 이야기, 식 물이나 동물 심지어 광물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인 간이기를 멈추고 인간 아닌 것, 인간 너머의 것이 된다는 것은 바로 종교적 사유의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0 

3. 애 니미즘의 일본지(日本誌):  
네오-애니미즘, 테크노-애니미즘, 신불-애니미즘 

1) 네오-애니미즘

이처럼 인간, 동물, 식물, 광물 등의 경계가 삼투압적인 종교적 사유를 대표 하는 것으로 애니미즘을 들 수 있다. 20세기 초 타일러(E.B. Tylor)가 주장한 ‘만물에 내재하는 정령 혹은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믿음’이라든가 ‘최소한의 종교 정의’를 가리키는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는 학계에서는 오래 전에 폐기 되었으나 대중적으로는 매우 강력하게 살아남았고, 근래에 들어 생태학이나 인류학의 네오-애니미즘 논쟁 및 종교학 등에서 ‘새로운 사유를 열어줄 수 있는 개념’으로서 학문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런 ‘새로운 사유’와 관 련하여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론적 인식론’(relational epistemology)에 특 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애니미즘은 몸-마음의 서구적 이분법을 넘어 상 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31  이에 따라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타일러의 어법이 아닌 오지브
와(Ojibwa) 담론에 따른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류학자 어빙 할로웰(I. Hallowell)은 아메리카 원주민 오지브와 족의 연구를 통해 ‘퍼슨’(person)이라 는 용어를 인간만이 아닌 모든 종에 포괄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퍼슨들’(other-than-human persons)이라는 말을 주조하여 인간

30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220쪽.
31 대 표적으로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E. Viveiros de Castro), 버드-데이 빗(Nurit Bird-David), 호른보르크(A. Hornborg) 등의 주장을 들 수 있다. 

도 그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는 활물(animate beings)임을 주장한다. 이때 퍼슨 이란 가령 ‘사람 퍼슨’과 ‘사람이 아닌 퍼슨’,32 ‘선더버드 퍼슨’과 ‘선더버드 가 아닌 퍼슨’, ‘바위 퍼슨’과 ‘바위가 아닌 퍼슨’ 등과 같이, 사람 외에도 새 라든가 바위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할로웰은 인간에게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어떤 것을 퍼슨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과의 유사 성에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할로웰은 퍼슨을 인간적 속성이나 행위에만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것’을 포함하는 범주, 즉 ‘인간’보다 훨씬 더 크고 포괄적인 범주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 Harvey)는 이런 퍼슨이라는 말을 모든 종 사
이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각 종들 간의 차이는 이런 유사성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연 세계의 관계론적 속성에 주목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퍼슨들은 그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다른 퍼슨들과 관계할 때 비로소 퍼슨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
다. 따라서 오지브와 담론에서 애니미즘은 구성원 대부분이 ‘인간과는 다른 퍼슨들’의 공동체 안에서 잘 살고자 하는 시도를 지칭한다. 그것은 다양한 관계론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가리킨다.  하비는 애니미즘을 “세계가 퍼슨 들의 공동체이며 그 가운데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세계관에 주어 진 꼬리표” 라고 재정의한다. 이때 인간은 퍼슨들로 구성된 애니미즘적 세 계의 일부가 되며, 사람이 아닌 것들도 퍼슨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다시 말 해 퍼슨이라는 범주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의 내적 속성, 즉 신념, 합리성, 주체성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성의 관점에서 인격성(personhood)을 파악하는 서구적인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비는 이와 같은 네오-애니미즘적 관점에 입각하여 종교에 대해서도 

32   오지브와 족은 죽은 조상의 영을 ‘사람이 아닌 퍼슨’으로 지칭한다. Irving Hallowell, “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 T.S. Smith, The Island of the Anishinaabeg, University of Idaho Press, 1995, p.4.

“상관적이고 물질적이며 참여적인 세계 안에서 함께 거주하는 퍼슨들 사이 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교섭(negotiation)” 나아가 “그렇게 상관적으로 실재하 는 세계 안에서의 에티켓 체계(etiquette system)”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종교 는 다양한 ‘퍼슨’들로 구성된 종들 사이의 에티켓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이다. 여기서 에티켓이란 사람들의 행위규범이나 의식(ritual), 혹은 인간보 다 더 큰 세계(‘퍼슨’들의 세계: 필자)에 있어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 치는 퍼슨들 간의 관계성과 관련된 하나의 공적(公的)인 교섭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말하는 ‘다도의 종교’37라 든가 ‘가타(型)의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는 일본이야말로 이런 ‘에티켓으로 서의 종교’가 잘 발달된 사례일지도 모른다. 17세기 말 일본을 여행한 독일 인 외과의사 캠퍼(Engelbert Kaempfer)는 그의 『일본지』에서 일본을 “세계 어 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예의바르고 정중하며 호기심에 가득 찬 나 라” 로 묘사하고 있다. 그를 감탄케 한 것은 몸에 붙은 예의범절이 일본사 회 전체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캠퍼는 “비천한 시골촌 부에서 고귀한 계층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행위 작법은 제국 전체를 시민 적 교제(civility)와 에티켓(good manners)의 학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나 다” 고 격찬한 것이다. 

2) 테크노-애니미즘

카스퍼 젠슨(C. Jensen)과 앤더스 블록(A. Blok), 앤 앨리슨(A. Alison)은 이런 ‘에 티켓의 학교’로서의 일본에 네오-애니미즘을 적용시킨 것을 ‘테크노-애니미
즘’(techno-animism)이라고 부른다. 가령 젠슨과 블록은 인간이 아닌 것들, 즉 
앞서 언급한 퍼슨들의 세계와 맺는 관계의 운반체로서 신도(神道)를 지목한 다. 신도는 복잡하고 근대화된 고도의 테크노-과학적인 일본 안에 “살아 있 는 애니미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젠슨과 블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일본의 테크놀로지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는 자주 신도적인 것이 일본 고래의 영적 신앙과 우주론적 상상력의 애니미즘적 층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언급되곤 한다. 그때 일본은 신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는 ‘테크노-애니미즘’의 나라로 묘사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 동물, 영적 존재, 기계적 존재 간의 경계를 
단호하게 해체하는 다형적 도착성(polymorphous perversity)을 엿볼 수 있다. 신도
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내재적· 감성적· 매혹적인 힘들을 해석하는 데에 흥 미로운 소재를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신도적 테크노-애니미즘은 과학, 정치, 생 태학, 우주가 서로 얽혀 있는 현대 상황에 관한 한층 더 폭넓은 사고를 불러일
으킨다.  

위 인용문은 네오-애니미즘이 그렇듯이 테크노-애니미즘 또한 새로운 
지적 영역을 열어주리라는 기대를 표출하고 있다. 실제로 신도를 논하는 많 은 일본인은 신도의 특징으로 무엇보다 자연과의 애니미즘적인 친화력을 꼽곤 한다. 이때 ‘자연’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유의해야 한다. 일본 에서는 “자연을 아끼자”(自然にやさしい)라는 표어가 늘 회자되는데, 이때의 자연은 네이처(nature)의 번역어다. 원래 근대 일본인은 네이처를 두 가지 단 어로 번역했다. ‘덴넨’(天然)과 ‘시젠’(自然)이 그것이다. 이 중 덴넨이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시젠은 이념화된 자연을 가리킨다. 오늘날 일본인이 자 연(시젠)을 말할 때 그 실질적인 내용은 종종 덴넨을 인공적으로 바꾼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가령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며 덴넨에 인위를 가하여 바꾸는 것이 일본 정원술의 특징이다.42 그러니까 일본인이 생각하는 자연 혹은 애니미즘이란 애초부터 인공성과 쉽게 결합될 수 있는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일본을 “테크노-애니미즘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문화인류학

자 앤 앨리슨은 『세기의 괴물들』에서 각종 장난감과 캐릭터 상품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일본적 테크노-애니미즘의 특징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사회생 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애니미즘적 무의식’(animist unconscious)에 주목한 다. 그런 애니미즘적 무의식으로 인해 일본 문화에는 첨단 테크놀로지와 스 피리추얼한 것들이 쉽사리 뒤섞여 공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앨리슨은 이 와 같은 애니미즘적 감각을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 혹은 자연과 테크 놀로지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획 짓지 않는 일본의 민속전통, 신도, 불교적 관념과 연관시켜 이해한다. 가령 앨리슨은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에 지속적 으로 나타나는 테크노-애니미즘의 출발점으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만화 『철완 아톰』(1963)을 들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과 비슷한 마음이나 영 혼을 가지고 있는 로봇 소년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런 일본 대중문화는 “모 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바위에서 개미에 이르기까지 우주만물에 스피 리추얼리티가 스며들어 있다”는 일본의 애니미즘적 종교 전통에 의해 고취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테크노-애니미즘은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몸에 딱 맞는 옷 같
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의 테크노-애니미즘이란 “상품소비주의의 물질적 실천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하나의 스타일로서, 현대 테크놀로지와 상품 에 영혼과 생명을 부여하고 뉴에이지적 관행을 통해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 는 것” 을 가리킨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관련 캐릭 터 상품들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파워레인저’, ‘도라에몽’, ‘울트라맨’, ‘드래곤볼’, ‘세일러문’, ‘마징가Z’, ‘건담’, ‘다마고치’, ‘포켓몬스터’, ‘헬로우 키티’ 등을 비롯한 각종 캐릭터 상품, 특히 로봇이나 사이보그 캐릭터를 조 형화한 피규어 상품 등을 들 수 있다. 앨리슨은 이런 상품들에 대해 발터 벤 야민의 개념을 빌려 ‘마법의 상품’(enchanted commodities)이라고 명명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포켓몬스터’나 ‘세일러문’ 같은 장난감 캐릭터들은 마치 생명이 부여되어 살아 있는(animated) 것 같은 명확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장난감 피규어들에게 생명과 행위주체로서의 속성을 불 어넣는다든지, 로봇과 동물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해체된 그런 세계 안 에 함께 위치시키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한편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에 천착해온 스테프 어퍼스(S. Aupers)는 「기 계의 복수: 근대성, 디지털 테크놀로지, 애니미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테 크노-애니미즘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앨리슨이 ‘마법의 상품’ 을 테크노-애니미즘의 일본적 구현물로 이해한 것에 비해, 어퍼스는 막스 베버가 말한 탈마법화(disenchantment)를 뒤집은 재(再)마법화(re-enchantment) 의 관점에서 테크노-애니미즘과 TH의 관계 일반을 언급한다. 이때 어퍼스 는 특히 인터넷 전문 저널 『와이어드』(Wired)에 주목한다. 이 저널의 기고자 중에는 스스로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애니미즘주의자라고 여기면서 테크 노-샤먼이라든가 테크노-마녀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퍼스는 이런 컴퓨터 전문가들을 ‘테크노-애니미즘주의자’로 보면서, 그 사회학적 배경으로 재마법화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즉 근대 후기의 인간 들은 스스로가 일종의 시뮬레이트된 인공적인 ‘마법의 정원’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 신비로 경험된 것은 자연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인간 이 만든 테크놀로지적 환경이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영역 안 에 테크노-애니미즘적인 관념과 정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고대적 형식의 종교인 테크노-애니미즘의 출현은 합리화의 가속화 과정이 낳은 직접적이고도 예상치 못한 결과, 혹은 ‘비합리적인’ 부대효과라 할 수 있다. 합리화의 과정이 종교의 소멸이 아닌 재마법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한편으로 테크놀로지 자체의 신비화 혹은 마법화 (주술화)를 수반했다는 말이다.46 그러니까 물질적 환경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점과 인공지능 및 인공생명 공학 분야의 테크놀로지 발전 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사 실 이런 테크노-애니미즘은 앞서 젠슨과 블록, 앨리슨이 밝혔듯이 일본에 서 매우 뚜렷한 형태로 확인된다. 가령 TH라는 주제에 천착한 대표적 작품 인 오시이 마모루(押井守)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와 그 속편 인 <이노센스>(2004)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로지 ‘고스트’(인간의 마음, 의식, 기억, 감정, 영혼)만 남겨놓고 인간의 몸 전체가 기계 와 인공두뇌로 대체된 사이보그를 비롯하여 안드로이드 로봇이나 인형들의 세계를 무대로 전개된다. 인간만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 속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지극히 애매해진 테크노-애니미즘적 특징 을 잘 구현하고 있다. 네오-애니미즘의 연장선상에 있는 테크노-애니미즘 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과 기계 간 불연속의 해체’47에 있는데, <공각기동 대>와 <이노센스>는 바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애매해진 세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48

<공각기동대>의 여전사 사이보그 구사나기는 테크놀로지의 확장 앞에 서 끊임없이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느끼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반문 하며 고뇌한다. 그 결과 구사나기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해커 인형사와의 융 합을 선택한다. 이는 테크놀로지를 통한 한층 더 진화된 상태로의 궁극적인 상승을 암시한다. 경계 해체의 표상인 ‘인간과 기계의 융합’이라는 이와 같 은 TH적 상승은 단지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오래된 욕망에서 비롯된 

46 Stef Aupers, “The Revenge of the Machines,” p.200, pp.216~218.
47 매 즐리시(Bruce Mazlish)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은 인류에게 있어 ‘네 번째 불연속’에 해당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와 지상의 불연속을 제거했다면, 다윈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불연속적 구 분을 해체했다. 한편 프로이트는 유아적인 본성과 문명화된 성품 혹은 병든 정신과 건강한 정신의 연속성을 입증했다. 이에 비해 TH은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을 해체했다는 것이다. 신상규, 『호모 사 피엔스의 미래』, 50쪽.
48 오 시이 감독의 작품에 나타난 경계전이적 상상력에 관해서는 Park Kyutae, “A Study on Mamoru 
Oshii: Identity and Border in Japanese Animation,” 『일본사상』 15, 2008, 121~129쪽 참조.
것이기도 하다. 서수정에 따르면, “사이보그는 전지전능함을 향한 인간 의 지의 집결점이며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의 실험장”49과 다름 없다.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는 인간의 자기 확장 가능성을 테크놀로지 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인간향상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TH의 목표와 정 확히 일치한다. 오시이는 <공각기동대>와 관련된 한 인터뷰에서 “이데올로 기도 종교도 인간을 변혁시킬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가능성은 테크놀 로지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녀(구사나기와 인 형사가 융합한 의체: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테크놀로지가 탄생시킨 새로운 인 간이며, 새로운 시대의 이브라 할 수 있다. 단, 그 소녀가 신의 모습일지 악 마의 모습일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50고 말한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이란 바로 TH가 지향하는 ‘포스트휴먼’51을 연상케 한다. 이는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이란 인류가 자신의 진화를 완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포용해야 할 어 떤 것이며, 포스트휴먼이야말로 다음 단계의 참된 인간성이 될 수밖에 없다 는 오시이의 비전을 시사한다.  이와 더불어 오시이는 위에 인용된 인터뷰 의 말미에서 엿볼 수 있듯이 TH와 포스트휴먼 혹은 테크노-애니미즘의 위 험성에 대해서도 열린 물음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3) 신불(神佛)-애니미즘

이 대목에서 테크놀로지와 애니미즘을 결합시킨 신조어 테크노-애니미즘 의 구체적인 일본적 맥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오-애니미즘 담론

49 서 수정,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현대 사이보그’ 특성: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를 중심으로」, 『한 국콘텐츠학회논문지』 7(4), 2007, 152쪽.
50 오 시이 마모루 인터뷰, “지금도 답을 찾고 있다.” 안영순,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에 나타난 오시 이 마모루의 존재 인식」, 『순천향 인문학논총』 15, 2005, 169쪽 각주 21. 
51 트 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이 한층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다고 예언 하면서 이렇게 변형된 인간을 ‘포스트휴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등장하기 이전에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서구의 인류학 담론에서 거의 폐 기된 용어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오직 일본에서만은 애니미즘이라는 개 념이 일본 문화의 독특성을 설명하거나 일본사회의 모델을 구축하는 수단 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53 이런 경향과 관련하여 2001년 창간된 본격적인 종교비평 저널 『현대종교』는 간행사에서 “일본인의 종교성의 근저에 있는 애니미즘은 종교인가? 일본에서는 ‘종교’의 미래에 큰 희망을 걸지 않는 사 람들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것’이라든가 ‘애니미즘’에는 많은 희망을 걸 기도 한다”54고 적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에서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애니미즘 복권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일본판 뉴에이지인 ‘정신세 계’와 그 흐름을 이어받은 ‘신영성운동’55 및 이른바 ‘영성적 지식인’이라 불 리는 일군의 지식인들, 또는 일본인론 및 일본교론 논자들에 의해 애니미즘 의 다양한 버전이 재생산되어왔다. 근래에는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배경으 로 하는 ‘스피리추얼리티’라는 말과 애니미즘적 색채가 농후한 일본 문화를 연상시키는 ‘이노치’(命)라는 말이 때로는 교차하거나 때로는 중첩되면서 흥륭”56하고 있다.

먼저 대표적인 영성적 지식인들에 의한 애니미즘 담론에 대해 생각해보 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따르면, 일본 종교의 뿌리는 조몬인들의 수렵 채집문화에 기반을 둔 애니미즘적 고신도(古神道)에 있다. ‘애니미즘’이라든 가 그것에 토대를 둔 ‘일본적 영성’ 혹은 ‘애니미즘적 영성’에 입각한 우메 하라 일본학은 ‘나무와 숲의 종교’인 일본의 신도 및 불교 사상에 내장된 생 명사상과 일본적 영성이 인류에 침투할 때 비로소 인류가 살아남을 가능성 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한다.57 다시 말해 애니미즘적인 ‘숲의 사상’이 세계
53 J . Clammer, “Shinto dreams: Difference and the Alternative Politics of Nature,” Japan and Its Others: Globalization, Difference and the Critique of Modernity, Rosanna, Vic.: Pacific Press, 2001, p.217.
54 国際宗教硏究所 編, 『現代宗教 2001』, 東京堂出版, 2001, 6쪽. 
55 ‘정신세계’와 ‘신영성운동’에 대해서는 박규태,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 티’』, 특히 37~52쪽 참조.
56 島薗進 , 『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興隆』, 岩波書店, 2007, 40쪽. 
57 梅原猛, 『〈森の思想〉が人類を救う』, 小学館, 1991, 특히 232~237쪽.
를 구원할 수 있으며, 그런 애니미즘적 고신도야말로 미래 인류의 종교라는 것이다.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도 이와 유사한 어조로 자연을 대하는 일 본인의 독특한 애니미즘적 감각과 심정이 일본인의 종교관의 모태를 형성 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애니미즘이란 ‘인간과 신 사이의 열려진 경계’ 또는 ‘자연과의 조화’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일본 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런 애니미즘적 감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일본이야말로 현 대사회의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 가 신도적 영성을 강조하는 가마타 도지(鎌田東二)는 『덴카와 만다라: 초종교 에의 수로』58에서 애니미즘, 샤머니즘, 다신교가 잘 보존되어 있는 나라 현 소재 덴카와(天河) 신사가 ‘신성한 자연의 정적’을 경험하게 해준다면서 그런 자연 경험이 바로 ‘영성’으로 지칭되는 ‘초종교’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는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
란(親鸞)을 조몬과 불교를 접합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다. 즉 정토진종에서 조몬적 애니미즘의 성격을 띤 ‘증여의 사고’를 보는 나카자와는, 신란의 절 대타력 사상은 순수증여자로서의 아미타불이 아낌없이 베푸는 무한한 자비 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버리게(無私)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나카자와는 일본 불교를 “애니미즘적 사고와 불교의 철학적 이치가 융합하여 마침내 일본인이 납득할 만한 종교로 거듭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창조적인 애니미즘’이라든가 ‘불교의 조몬적 요소 에 대한 발굴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나카자와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 이라 할 수 있다.59 한편 민속학자 고마쓰 가즈히코(小松和彦)에 따르면 일본 의 요괴는 애니미즘적 색채를 잘 보여준다. 고마쓰는 일본 요괴현상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배경으로 고래의 애니미즘 신앙을 들고 있다. 산, 강, 나무, 물, 바위 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데, 그 영이 인간에게 잘못된 생각이나 악의를 품고 재앙을 일으킬 때 그것은 모두 요괴가 된다는 
58 鎌田東二 · 津村喬 編, 『天河曼陀羅: 超宗教への水路』, 春秋社, 1994.
59 가 와이 하야오· 나카자와 신이치, 『불교가 좋다』,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4, 83쪽, 133~135쪽.
것이다. 나아가 이런 애니미즘적 관념은 일본에서 자연물을 가공하여 만들 어낸 기물이나 도구에까지 확장된다. 즉 기물이나 도구에도 영혼과 정령이 깃들어 있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일으 킬 수도 있다고 여겼고 그런 관념이 요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쓰쿠모가 미’라는 요괴가 바로 그것이다.60 고마쓰는 이와 같이 애니미즘이 투영된 요 괴 연구를 통해 일본 문화의 심층을 엿보고자 한다.

이들과 더불어 일본의 애니미즘 담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문화인류학자 
이와타 게이지(岩田慶治)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가미와 신(神): 애니미 즘 우주의 여행』(1984)과 『애니미즘시대』(1993)에서 애니미즘적 가미(神) 체 험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종교이며 모든 종교의 뿌리가 되는 초종교로서, 그것은 곧 본래의 자신과 만나는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이와타에 따르면 애 니미즘은 미발달된 초기의 종교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적 감 각’이며, 따라서 애니미즘 연구는 인간과 우주(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그리하여 이와타는 종래 부정적으로 평가받아온 애니미 즘의 중요한 의미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함으로써 애니미즘의 복권을 기도하 는 이른바 ‘신애니미즘’을 주창한다.61
위에서 소개한 애니미즘의 복권을 주장하는 영성적 지식인들의 담론은 크게 보면 이른바 ‘일본인론’(=일본문화론)이라는 일본 특유의 지적 장르에 속 해 있다. 종교학자 시마조노 스스무(島園進)는 일본인론을 ‘일본교론’의 관점 에서 파악한 바 있는데,62 1990년대 전반에 절정을 이룬 일본교론 및 일본인 론은 외국의 세계종교를 비판하고 ‘일본교’,63 신도, 애니미즘을 칭송함으로 써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 특징 중 하나인 일본 중심주의와 신국 내셔널리즘은 자연을 신성시하는 애니미즘적인 신도적 감 수성, 조상신을 비롯하여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오래된 풍습, 유한한 인륜적 
60 고 마쓰 가즈히코, 「일본의 요괴관에 대하여」, 『현대일본의 요괴문화론』, 제이앤씨, 2014, 4~6쪽. 
61 岩田慶治 , 『カミと神』, 講談社学術文庫, 1989, 46쪽.
62 島薗進 , 『ポストモダンの新宗教』, 東京堂出版, 2001, 138~170쪽 참조.
63 ‘ 일본교’에 관해서는 박규태, 「‘일본교’와 ‘스피리추얼리티’」, 『일본비평』 5, 2011 참조.
조직을 절대시하는 일본인의 사유방식 등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주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영성적 지식인들과 일본인론자들의 애니미즘 담론에 이어 2011년 3 · 11동일본대지진 이후의 탈원전운동에서는 종교단체와 우익, 좌 익을 가릴 것 없이 “이노치를 지켜라”는 주장이 자주 등장했다. 일본어 ‘이 노치’(命)는 일반적인 ‘생명’ 개념에서 더 나아가 대자연의 작용 자체를 가 리키는 말로, 불교의 『법화경』 사상과 불성(佛性) 사상 및 전술한 애니미즘 재평가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이쇼 시대의 ‘생명주의’까지 거 슬러 올라가는 이노치 관념에서 인간은 이노치에 의해 ‘살려지고’ 자연과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양자가 서로 연대하면서 이노치를 구성한다. 또한 이노치 관념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그 근원적 생명이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하며 신인합일(神人合一)을 통해 생명력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본 신종교 교단들의 이른바 ‘생명주의적 구제관’64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 밖에 환경사상 분야에서도 1980년대 이래 심층생태학과 일본 애니미즘을 융합시킨 생명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 은 다양한 애니미즘적 생명주의가 3 · 11동일본대지진 이후 종교인들에 의 한 반원전운동의 근거로 기능하고 있다.65 
이와타의 사례를 제외하면 이와 같은 애니미즘 복권의 움직임이 네오애니미즘이나 테크노-애니미즘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이 애 니미즘의 풍부한 유산을 찾아볼 수 있는 나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유산 들은 특히 신도 및 불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글에서는 이를 ‘신불(神佛)-애니미즘’이라 지칭하고자 한다.66 이와 관련

64 対馬路人他 , 「新宗教における生命主義的救済観」, 『思想』 665, 1979 참조.
65 堀江宗正 , 「脫/反原発運動のスピリチュアリティ」, 『現代宗教 2013』, 東京堂出版, 2013, 81~83쪽.
66 일 본에는 신불(神佛, 신부츠)이라는 일상용어가 있다. 그것은 신도의 가미(神)와 불교의 호토케(佛) 를 병렬시킨 단순한 합성어가 아니다. 일본인에게 신과 불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일본인에게 신불이란 가미이기도 하고 호토케이기도 한, 혹은 가미도 아니고 호토케도 아닌 제3의 새로운 신관 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본인의 특이한 종교적 상상력이 주조해낸 새로운 신관념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박규태, 「신불분리의 종교사적 일고찰: 신불의 타자론」, 『아세아연구』 46(4), 
2003, 93~94쪽.

하여 종교인류학자 사사키 고칸(佐々木宏幹)은 『가미(神)와 호토케(佛)와 일본 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 등을 보면 일본인은 인간을 비롯하여 산, 강, 풀, 나무, 새, 짐승, 벌레, 물고기와 심지어 인공물까지도 가미로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가미를 ‘무엇이든 심상치 않고 뛰어난 힘(德)을 가진 외경스러운 존재’로 규정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 팔백만신으로 표상되는 다신교적 신도의 기초에는 모든 존재에서 생명과 신성을 인정하는 애 니미즘이 깔려 있다. 일본 TV 등에 매일같이 등장하는 인령, 동물령, 생령에 의 한 뒤탈(祟り)과 빙의 등의 사례는 실로 현대 애니미즘 문화 그 자체라 할 수 있
다. 또한 대도시에서 행해지는 바늘공양이나 시계공양이라든가 대형 여객기에 대한 신도적 정화의례 등에서 우리는 도구와 기계 등에 대해서도 인격과 유사 한 성격을 인정하는 애니미즘적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67
모든 존재에서 생명과 신성을 인정하는 일본인들의 이런 애니미즘적 감
각을 카슬리스(T.P. Kasulis)는 “내재적 연결(immanent connectedness)의 경험을 초래하는 신도의 능력”이라고 불렀다.68 여기서 ‘내재적 연결’이란 네오-애 니미즘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관계론적 인식론’과 상통하는 개념 으로 보인다.69 그리하여 클램머(J. Clammer)는 신도를 “애니미즘의 세련화된 형태”70로 이해하기도 한다. 일찍이 미나카타 구마구스(南方熊楠)라든가 야 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의 민속학은 신도적인 심층생태학적 감각, 즉 숲이 나 신사 같은 특정 장소에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공존한다는 신성한 공간
67 佐 々木宏幹, 『神と仏と日本人』, 吉川弘文館, 1996, 2~3쪽.
68 トーマス · カス─リス, 衣笠正晃 訳, 『神道』, ちくま学芸文庫, 2014, 272쪽.
69 신 도는 가미라는 영적 존재들이 과도하게 차고 넘치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 세계는 인간과 인간 이 아닌 세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자의 경계는 애매하고 상호 가변적이다. 젠슨과 블록은 자연과 문화를 대립시키는 서구 모더니즘의 이원론과는 달리, 신도적 세계관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연속
성 혹은 그 경계의 해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Casper B. Jensen & Anders Blok, 
“Techno-animism in Japan,” pp.97, 104. 70 J . Clammer, “Shinto dreams,” p.238.
감각에 주목한 바 있다. 사실 일본의 애니미즘 담론은 대부분 신도와 결부 되어 있다. 이때 신도는 일본 민속종교의 광범위하고 다면적인 토대로 간주 되곤 한다.  이에 비해 한때 승려였던 제임스 휴즈 교수가 주도하는 도덕 적 향상을 위한 <사이보그붓다 프로젝트> 는 TH와 불교의 유사성을 주장 한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일본 불교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생물 등 모든 존재 안에 궁극자로서의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기계와 인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TH에 근접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사사키의 지적대로 우리는 일본 문화에서 이와 같은 신불-애니 미즘의 풍부한 유산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미야자키 하야오 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라든가 <이웃집 토토로>는 각각 원시신도적 숲과 ‘수호신사의 숲’을 무대로 애니미즘적 기호를 재창출하고 있으며,73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아마테라스 신화를 묘사한 신도 기도문(노리토)의 주제곡이라든가 스사노오 신화에 나오는 구사나기의 각색 등 전체적으로 신도적 모티브와 분위기를 배경에 깔고 있다. 한편 창(F.T. Chang)과 하르트 (L.A. Hart)는 죽은 실험용 동물들을 공양하는 일본 과학자들의 관습에 주목 하면서 그것이 일본 불교와 신도의 관행이라는 점을 지적한다.74 젠슨과 블 록 또한 신도적 관계주의의 표출은 나무든 동물이든 로봇이든 초첨단 장난
감이든 오직 사물적 현현(thingly manifestation)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동물공양이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이밖에 신사나 사원에서 배포하는 다양한 유형의 주술적 부적(오마모리 
혹은 오후다)에 대한 일본인들의 뿌리 깊은 집착도 신불-애미니즘의 문화현 상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자동차나 버스에 ‘교통안전’이라고 적힌 부적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대학 실험실의 전 자현미경에 부적을 붙여 놓았다거나 로켓에 부적을 붙여 쏘아 올렸다는 이 야기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 애니미즘과 마찬가지로 주술 또한 관계론적 세 계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도 및 불교의 부적문화가 첨단 기술문명 과 공존하는 일본은 신불-애니미즘의 풍부한 보고라 아니할 수 없다. 

4. 가미와 호토케의 유희

종교가 과학이론 형성에 강력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기는 게라시에 따르 면,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의 목표 및 그 관행의 차이는 각 나라의 종교적 환 경과 관계가 있다. 가령 미국은 영적 신체 안에서 구원을 희구하는 우주적 목적과 종말론적 천년왕국을 소망하는 기독교적 환경에 의해 연구자들은 인간형 로봇(humonoid)보다는 인공지능을 더 선호한다. 인공지능의 발달 안 에서 우주적 의미를 찾고, 가상적인 비생물학적 신체 안에서 인간 정신의 구 원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게라시는 ‘묵시론적 인공지능’을 언급하면서 그 지도적 선구자로 한스 모라벡과 레이 커즈와일을 들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인공지능보다 인간형 로봇을 더 선호한다. 게라시는 
이런 일본적 경향의 배경으로 인간에 대한 불교와 신도의 긍정적이고 낙관 적인 관점을 들고 있다. 신도와 불교가 일본 로봇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 다는 것이다. 가령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로봇이 언젠가 붓다 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한편으로는 세계가 가미라는 신성한 실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신도적 세계관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성화(聖化)된 로봇의 현존을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즐긴다. 로봇이 제의적 성화와 종교적 초 월의 주체로서 자연세계의 근원적인 성성(聖性)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때 불 교와 신도는 자연세계 및 그 안에 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로봇까지도 축복하 여 우주적 구원사에 참여시키고자 한다. 가령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 지만 해도 새로 출시된 로봇에 제의를 수행하기 위해 많은 공장에서 신도 사제들이 채용되었다. 지금은 이런 애니미즘적 관행이 거의 사라졌지만, 로 봇공학 자체는 여전히 성성(聖性)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76 미국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공지능을, 그리고 일본은 신도와 불교의 
영향으로 인간형 로봇을 더 선호한다는 게라시의 주장은 시사적이다. 하지 만 일본인이 인간형 로봇을 선호하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 을 들고 있는 그의 주장은 다소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신불-애니미즘의 관 점에서 볼 때, 인간보다는 호토케와 가미 혹은 인신(人神)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 인간형 로봇에 대한 선호도를 촉진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적 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을 면 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1)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
‘치’(靈), ‘미’(神), ‘다마’(靈) 등의 고대 일본어는 애니미즘에 입각한 조몬인들 의 소박한 신 관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들이 과연 가미라는 관념으로 승 화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신화가 체계화되고 신명(神名)이 정비되어 문헌 에 기록된 단계에서 이미 외래사상의 영향이 보이므로, 그 이전 시대 신 관 념의 원형을 찾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가미’라는 말은 한국 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매우 유력한데, 아이누어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 다.77 요컨대 가미는 원래 수입품이었다.78 이런 가미의 특징 중 이 글과 관
76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Religion and Our Scientific View of the Natural World,” Theology and Science 4(3), 2006, pp.229~230, 235~237. 한편 일본 정부는 2015년 9월 <인공지능· 사 물인터넷(IoT)· 빅데이터에 의한 신산업 사회혁명> 프로젝트를 출범하는 등 근래 인공지능 연구에 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77 고 대 일본어 치, 미, 다마의 용례로 미즈치(水靈), 오로치(山靈), 이카즈치(雷, 嚴靈), 구노치(木靈), 누 즈치(野靈), 시오쓰치(潮靈), 가구쓰치(火靈), 쓰키요미(月神), 야마쓰미(山神), 와다쓰미(海神), 고다 마(木靈), 이키스다마(生靈) 등이 있다. 源了圓, 「日本における「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考察」, 関晃 · 源了圓 編, 『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研究』, 講談社, 1981, 7~11쪽.
78 가 미의 어원에 대한 기존의 관점으로, 가가미(鏡)에서 온 말, 가시코미(畏)의 약어, 가미의 ‘미’는 ‘히’
(태양)에서 온 말, 가미(上)의 뜻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마지막 설이 에도시대부터 널리 지지되어왔
련하여 특히 주목할 것은 애니미즘적 측면, 신인동형론적 속성, 변신의 유 연성 등 세 가지다. 
첫째, 가미의 정의와 관련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국학자 모
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지지한다. 
대저 가미란 고전 등에 보이는 천지의 여러 신들을 비롯하여, 그 신들을 모신 신사의 미타마(御靈)를 말한다. 또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수초목이나 바다 와 산 및 그 밖에 무엇이든 심상치 않고 뛰어난 기운(德)이 있으며 두렵고 외경 스러운 것들을 가미라고 한다. [뛰어나다는 것은 존귀하고 선하거나 공훈이 뛰어나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나 기이한 것이라 해도 매우 뛰어나며 두렵고 외경스러우면 가미라 하 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신이라 할 때 먼저 입에 올리기조차 황공하옵신 천황은 대대로 모두 가미임은 말할 나위 없다. 천황은 원신(遠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인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존귀하고 황공하옵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신인(神人) 이 줄곧 있어왔다. 또한 천하에 거리낌이 없는 존재라기보다는 일국(一國) 일리(一里) 일가(一
家)에 매여 있다 해도 각자의 신분에 상응하는 신인도 있다. 그런데 신대(神代)의 신들도 대개는 그 신대의 사람들이었다. … 나아가 바위, 뿌리, 나무 그루터기, 풀과 이파리 등도 모두 가미가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 등도 가미라고 부른 경우가 많다. 이는 그 미타마가 가미라는 뜻이 아니라, 직접 바다나 산 그 자체를 가리켜 가미라 한 것이다. 이것들도 모두 두렵고 외경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저 가미란 이처럼 다종다양하여 귀한 가미와 천한 가미 가 있는가 하면 강한 가미와 약한 가미, 선한 가미와 악한 가미도 있다. 이 가미 들은 마음도 행위도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가미란 대개 한 가지로 정해서 말하
기 어려운 존재다.(『古事記傳』 3)79
다. 하지만 오노에 따르면 이런 어원설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나라시대의 일본어는 지금은 없어졌 지만 발음상의 구별이 있었다. 이 점은 언어학자 하시모토 신키치(橋本進吉) 등에 의한 만엽가나 연 구에서 밝혀진 것으로 학계에서 이미 승인된 설이다. 나라시대에는 ‘미’의 음이 두 개 있었다. mi의 음과 mï가 그것인데, 가미(神)의 ‘미’는 이 중 후자(mï)에 해당한다. 그런데 기존 어원설에서의 ‘미’ 는 모두 전자(mi)에 속하므로, 가미의 어원을 일본어 내부에서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大野晋, 『一語の辞典 神』, 三省堂, 1997, 6~7쪽.
79 『本居宣長全集』 9, 筑摩書房, 1968, 125~126쪽.
일본적 본질과 독특성을 찾아내고자 노력한 노리나가의 가미 정의는 신 도적 애니미즘을 반영하고 있다. 거기서 가미란 신사에 모신 천신이나 조상 신만이 아니라, 인간· 동물· 새· 식물· 산· 바위· 바다· 호수 특히 폭포 같은 자연의 장엄한 현현 등을 포함한다. 나아가 천황은 ‘먼 가미’(遠神)로서 인간 이거나 인간이었던 가미다. 이에 비해 모든 지역과 마을 혹은 가정에서 모 시는 조상신은 ‘가까운 가미’라 할 수 있다. 한편 천둥은 ‘울리는 가미’(雷, 가 미나리)이고 고다마(木靈)는 나무의 가미다. 이처럼 가미는 신격화된 인간뿐 만 아니라 인간 아닌 것들도 다수 포괄한다. 이처럼 노리나가의 가미 정의 는 크게 애니미즘이라는 범주 안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둘째, 가미는 처음부터 신인동형론적인 개념이었다. 가미의 이름 밑에 
남녀의 구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접미어를 붙여 인간임을 시사하 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어법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가령 이자나기의 ‘기’, 스사노오의 ‘오’, 오호토노지의 ‘지’, 오호다라시히코의 ‘히코’ 등은 남 자를, 이자나미의 ‘미’, 오호히루메의 ‘메’, 오호토노베의 ‘베’, 오키나가다라 시히메의 ‘히메’ 등은 여자를 나타내는 접미어다. 또한 아메노미나카누시의 ‘누시’(主)라든가 오호나무치의 ‘무치’(貴) 등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 는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어의 사례다.80 여기서 특히 ‘신인’(神人)이라는 표 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에는 “천지가 혼성(混成)할 때 처음에 가미(神人)가 있었다. 우
 
마시아시카비히코지노미코토라 한다”든가 “갈대싹이 처음으로 진흙 속에 생겨나는가 싶더니 곧 가미(人)로 변했다. 구니도코타치노미코토라 한다”(밑 줄은 필자)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가미(神人, 人)란 “사람 같은 인간적인 신” 을 가리킨다.81 한편 신도신화에 나오는 가미들이 실제로는 인간이었다고 보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따르면,82 가미를 나타내는 ‘미코토’(尊)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존칭이다. 즉 미코토는 인
80 大野晋 , 『一語の辞典 神』, 20~21쪽.
81 『日本書紀』 上, 日本古典文学大系, 岩波書店, 1967, 78쪽 각주 1.
82 津田左右吉 , 『日本古典の硏究』 上, 『津田左右吉全集』 1, 岩波書店, 1963, 666쪽.
간으로서의 신인이라는 것이다. 이 기사에 앞서 『일본서기』는 하늘과 땅이 생성된 후 “가미(神聖)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83고 적고 있다. 이는 신인동형 론적 가미 관념의 성립과 더불어 ‘신성’이라는 성격이 가미 관념에 부착되 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에게 정1위라든가 종3위 등과 같이 신위를 수여한 신도의 신계(神階)제도는 오늘날의 신 관념에서 보자면 놀랄 만한 것이지만, 위와 같은 신인동형론적 가미 관념에 의거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83
셋째, 신도는 마치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인형’처럼 시대가 변하면 재 빨리 전 시대의 의상을 벗어던지고 다음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가령 상대(上代)의 고신도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전래한 사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라(奈良)시대 초엽 신도는 고대통일국가를 형성하 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헤이안(平安)시대가 되면 불교 가 깊이 침투하면서 신도는 이제 불교의 옷으로 갈아입었고, 가마쿠라(鎌倉) 시대에는 천태계의 본지수적(本地垂迹)신도와 진언계의 양부(兩部)신도가 되 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삼교(유교, 불교, 노장)일치의 옷으로 갈아입고 반(反)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주창하는 요시다(吉田)신도가 되었다. 도쿠가 와(徳川)시대에는 불교의 옷을 벗고 유교의 옷으로 갈아입어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리당심지(理當心地)신도라든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의 스이카 (垂加)신도 등과 같은 유가(儒家)신도가 되었다. 그 후 국학이 발흥하자 이번 에는 유교의 옷을 벗고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학(古學)신도가 되었 다. 나아가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고도(古道)신도는 기독교의 옷을 껴 입었다. 심지어 막부 말기에는 신도가 기독교와 습합하여 와타나베 이카리 마로(渡辺重石丸)의 신기(神基)습합신도가 되었다. 이어서 메이지(明治)시대에 는 가족국가 이데올로기가 대두하면서 국가신도(신사신도)가 출현했으며, 패 전 후에는 이 국가신도의 의상을 벗어버리고 서구 민주주의의 의상을 걸치 게 된다. 이런 신도의 특질은 그대로 가미의 변신성과 겹쳐진다. 즉 『고사기』에 
83 『日本書紀』 上, 76쪽.
있어 황실과 일부 유력씨족의 우지가미(씨신: 氏神)은 조상신이 되었다. 신불 습합신도에서는 가미가 불보살의 수적이 되었고, 신유습합신도에서는 리 (理)나 태극 그 자체 혹은 리가 순수한 기를 타고 나타난 것을 가미라고 했 다. 신도와 국학이 습합하면서 가미는 황실과 국민의 조상신이 되었고, 신 기습합신도에서는 데우스 같은 창조신이자 주재신 혹은 사후 심판을 관장 하는 신이 되었으며, 국가신도에서는 황실 및 국민의 조상신이 됨과 아울러 충신, 의사, 전몰자가 신격화되기도 했다. 한 신사에서 모시는 신이라 해도 제신이 종종 바뀌며, 기도자나 제사자조차 그 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는 제신이 누구든 상관없을 정도다.84 
한편 일본에서는 붓다(Buddha)를 호토케라고 한다. 인도의 붓다는 중국 후한시대에 ‘부도’(浮圖=浮屠)85로 음역되었는데, 이 ‘부도’를 일본에서는 현재 
‘후토’ 혹은 ‘호도’라 읽는다. 여기서 ‘도’(圖, 屠)는 중국 한대의 고음에서는 닥 (dag)이라 하여 모음 a의 음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도는 붓다를 직 역한 음역으로 불타(佛陀)와 동음이었다. 그러다가 부도를 간략하게 적어 ‘불’(佛)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 일본어 호토케의 ‘호토’는 본래 의미상 붓다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이라는 글자의 음(but)을 빌린 것이었다. 한편 ‘케’는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던 접미어 ‘카’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호토케는 처음에는 ‘깨달음 을 얻은 각자’(붓다)를 나타내기보다는 ‘호토의 상(像)’이라든가 ‘호토의 도 (圖)’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와 같은 호토케의 중요한 개념적 특성으로 무엇보다 가미와의 불가분한 관계성과 애니미즘적 속성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일본서기』에는 552년 처음으로 불상과 경전이 들어왔을 때 긴메 이(欽明) 천황이 “서번(西蕃)이 모시는 불상의 면모가 찬란한 게 이제껏 본 적 이 없다. 숭경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호토케는 ‘번 신’(蕃神), 즉 외국의 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비다쓰(敏達) 천황기 14년조
84 石田一良 , 「日本上代の神観念」, 関晃 · 源了圓 編, 『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研究』, 講談社, 1981, 87~89쪽.
85 부 처나 고승 사후에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둥근 돌 또는 그 부처나 승려를 가리키는 말.
에는 “불신(佛神)의 마음에 뒤탈이 있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에서 호토케 를 ‘불신’이라고 한 것은 이 기사가 유일하지만, 『원흥사연기병류기자재장』 (元興寺緣起竝流記資材帳)에는 ‘타국신’(他國神)이라는 표현 외에 “불신은 두려 운 존재다”라든가 “불신을 모신다”와 같이 ‘불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는 전래 당시에 호토케가 가미의 일종으로 관념되었으며, 나라시대 중엽 까지도 그런 인식이 확실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헤이안시대 중엽부터 이른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 확립되 면서 가미와 호토케의 관계에 역전이 일어난다. 여기서 ‘본지수적’이란 특 정한 가미와 특정한 불보살이 결부되어 가미는 호토케의 수적(垂迹=변형, 화
신)이고 호토케는 가미의 본지(本地=원형, 본체)라 하여 신불관계를 이론화한 관념체계를 가리킨다. 피안의 절대적 존재인 부처가 일본의 중생을 구제하 기 위해 임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이 바로 가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까 호토케가 오리지널이고 가미는 카피(아바타)인 셈이므로, 거기에는 가미 가 호토케의 일종이라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본지수적설의 형성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 호토케 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토케에게 꽃을 바친 다”, “호토케를 예배한다”, “호토케를 그린다”, “호토케를 받는다”, “호토케에 게 말한다” 등에서처럼 호토케를 ‘불상’이나 ‘불도’(佛圖)의 뜻으로 사용한 용 례다. 다른 하나는 “호토케를 마음에 담는다”, “호토케에게 기도한다”, “호토 케에게 이별의 인사를 한다” 등에서처럼 호토케를 부처(佛)의 의미로 사용한 용례인데, 이는 가미의 용법과 거의 구별이 어렵다. 실제로 ‘가미호토케’라든 가 ‘호토케가미’라는 표현도 많이 나온다.86 호토케가 가미의 일종이든 역으 로 가미가 호토케의 일종이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관념되었던 것이다. 
둘째, 그런 만큼 가미와 마찬가지로 호토케 또한 애니미즘적 속성을 지 녔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호토케의 애니미즘적 속성은 헤이안 시대 진언밀교의 ‘즉신성불론’(卽身成佛論) 및 천태밀교의 ‘천태본각론’(天台
86 大野晉 , 『一語の辞典: 神』, 24~28, 42쪽.
本覺論)과 ‘초목국토성불론’(草木國土成佛論)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교는 궁극 적 실재를 감각적 존재로 이해했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 언어, 사유에 의한 행위의 순수화를 통해 궁극적 실재와 일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통상 불 교에서는 삼겁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행을 거듭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이에 반해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空海)는 신(身), 구(口), 의(意) 라는 삼밀의 종교적 실천에 의해 “몸 그대로 성불한다”는 뜻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구카이와 함께 즉신성불을 주장한 천태종의 창시자 사이초(最澄)는 “호
토케와 범부가 하나”(佛凡一體)라는 사상에 입각한 천태본각론을 내세웠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으면 십만 법계의 제불과 일체의 보살도 모두 내 몸 안 에 있다. 내 몸을 떠나 그 바깥에서 별개의 부처를 추구하는 것은 내 몸이 곧 진여(眞如)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나아가 “초목, 기와, 조약돌, 산하, 대지, 대해, 허공 등 모두가 진여이므로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하여 이른 바 “초목과 국토가 모두 성불한다”(草木國土悉皆成佛)는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런 초목국토성불 사상은 중국 천태종의 성불관에는 보이지 않으며, 오히 려 초목도 말을 한다는 신도의 애니미즘적 자연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
작된다.87 
이상에서 살펴본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사는 기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TH적 친화성을 신도 및 불교의 관점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이 글의 의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 가미와 호토케 개념은 애니 미즘적 속성을 공유한다. 둘째, 가미와 호토케는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1859년 일본에 온 헵번(J. Hepburn, 1815~1911)이 『화영· 영 화어림집성』(和英 · 英和語林集成. 1886년 제3판)에서 “God: 신도에서는 가미(神), 불교에서는 호토케”라고 적었던 것도 바로 동전의 양면 같은 양자의 관계에 
87  源了圓 , 「日本における「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考察」, 30~31쪽. 우메하라 다케시도 사이초의 천태본각 론과 산천초목성불론에 대해 조몬시대 이래 애니미즘적 신도신앙이 일본 불교를 애니미즘화했다고 해석한다. 梅原猛, 『〈森の思想〉が人類を救う』, 82~84쪽.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88 
끝으로, 무엇보다 가미와 호토케 개념은 인간과 신의 경계가 상호가역
적이며 삼투압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신도에서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설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모두 호토케가 된다고 여긴 다. 그래서 흔히 사자를 호토케라고 부른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사람이 가 미나 호토케가 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민속학의 관점에 의하면, 사자(死者)의 영은 유족들의 공양을 받음으로써 서서히 날뛰는 성격 을 상실하고 이윽고 조령(祖靈)이 되거나 마침내 가미가 되어 사람들을 수호 한다고 믿는다. 가미나 호토케가 되는 것은 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 행을 쌓은 사람이나 신령이 빙의한 사람을 일본에서는 ‘생신’(生神, 이키가미) 이라든가 ‘생불’(生佛, 이키보토케)이라고 부르면서 숭경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본에서는 천리교(天理敎) 교조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나 금광교 (金光敎) 교조 아카자와 분지(赤沢文治)처럼 신이 빙의한 샤먼이 생신으로 존 숭되어 신도계 및 불교계 신종교 교단의 교조가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생신이나 생불은 사자(死者)가 호토케로 변신하듯이 생자(生者)가 가미나 호 토케가 된 경우다. 이는 신불과 사람이 본래 연쇄되어 있고 특정 조건이 충 족되면 사람이 쉽게 신불로 이행하며, 역으로 신불도 사람으로 화신(빙의)할 수 있다는 관념을 잘 보여준다.89
2) 유희하는 가미와 호토케 혹은 가미와 호토케를 유희하기 재클렌(A. Jackelén)에 따르면 서구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호모 리투르기쿠스’
(Homo liturgicus, 제의적 인간)가 아니라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다. 그런데 이 호모 파베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에 의해 완성 되지 않는 한, 아직 비극적 존재다.  이에 비해 마쓰리(祭)의 제국 일본의 이 상적 인간상은 아마도 ‘호모 리투르기쿠스’와 ‘호모 루덴스’가 만나는 접점 
88 大野晉 , 『一語の辞典: 神』, 84~85쪽.
89 佐 々木宏幹, 『神と仏と日本人』, 5~7쪽.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서구인들이 윤리적 유일신관에 입각하여 절대적 으로 선한 신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신정론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악과 고통 의 문제에 대처해왔다고 한다면, 에도(江戸)시대에 대지진으로 무너진 폐허 의 도시에서 유희적인 나마즈에(鯰繪)91를 만들어 판매하고 소비했던 일본 인들은 애니미즘적 신불과 함께 즐기는 놀이에 참여하는 쪽을 더 선호하는 듯싶다. 
일본의 로봇문화가 이런 ‘호모 루덴스’로서의 일본인을 보여주는 장면 은 자못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로봇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미국인들의 일 반적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대체로 인간과 로봇 이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인간형 로봇의 인기 가 매우 높은데, 이는 직접적으로 데즈카 오사무92의 만화 『철완 아톰』으로 부터 받은 영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문화적 배경으로 역시 신불-애니 미즘의 세계관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게라시는 신도식 복장을 한 로봇 사제가 의식을 거행하는 요코하마의 사례를 들면서, 로봇에게 성성을 부여하는 일본인의 경향이 신도와 불교적 관념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영적 로봇’(spiritual robot)이라고 부른다.93 일본인들은 로봇들이 인간의 일거리를 빼앗는다거나 창조자 인간을 전복시킬지 모른다는 테크놀 로지적 종말론주의(technological armageddonism)에 대한 두려움 없이 로봇공학 의 미래를 기대하는 경향이 강하다.94 심지어 로봇들이 “지성적이고 비이기 적인 성자가 될 수 있다” 거나 혹은 “당연히 로봇도 영혼을 가진다”96고 여기기까지 한다.

91 에 도시대 일본인들은 땅 밑의 거대한 메기(나마즈)가 지진을 일으킨다고 여겼다. 나마즈에와 일본인 의 유희성에 관해서는 박규태, 「가시마신앙과 신사: 무신에서 지진의 수호신으로」, 『종교문화비평』 
5, 2004, 270~277쪽 참조.
92 데 즈카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TH적 문제의식의 선구적 모티브들을 많이 보여준다. 사람과 똑같은 감정을 가진 소년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철완 아톰> 외에도, <불새>(1954~1988, 총 17
편)는 슈퍼컴퓨터 인공지능에 의한 인간 지배 및 인류 멸망이라는 종말론적인 특이점 모티브라든가 복제동물과 복제인간의 모티브 또는 불사(不死)의 모티브 등 현저한 TH적 모티브들을 보여주는 장 면들로 가득 차 있다.
93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p.237.
94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pp.239~240. 
와카야마현 히다카가와정(日高川町) 소재 니우(丹生)신사에서는 매년 10
월 10일경에 ‘웃음의 마쓰리’(笑い祭)를 거행한다. 이때 어릿광대로 분장한 ‘스즈후리’(鈴振り)가 방울을 울리면서 “웃어라, 웃어라” 하고 외치면서 가마 행렬을 선도한다. 그런데 2008년부터 이 스즈후리 역에 웃음로봇이 등장하 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니우신사 근방은 전통적인 인형극인 분라쿠(文楽)로 유명한 지역인 만큼 분라쿠 인형의 몸짓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이 로봇은 일본인의 유희정신과 신도의 결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한편 도요타의 트럼펫 로봇이라든가 바이올린 로봇, 세계 최초의 2족 보행 로봇인 혼다의 아시모(Asimo), 소니의 엔터테인먼트 로봇 크리오(Qrio) 및 세계 최초의 애완견 로봇 아이보(AIBO), 미쓰비시의 가정용 로봇 와카마 루(Wakamaru), 산업종합기술연구소(AIST)의 여성형 로봇 미임(Miim), 소프트 뱅크의 가정용 로봇 페퍼(Pepper) 등 유희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로봇들이 특히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다. 일본 가요에 맞춰 춤추는 크리오라든가 노래 도 부르고 패션쇼도 하는 미임, 그리고 2015년 하우스텐보스에 개장된 세 계 최초의 로봇호텔인 ‘헨나 호텔’에서 모든 서비스를 담당하는 로봇들은 일본인에게 참된 ‘로봇 퍼슨’(robot person)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인간형 로봇에 대한 이와 같은 일본인의 열광적인 관심과 더불어 일본사회 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는 특히 1990년대 후반의 제2차 로봇 붐 이래 정부와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지 원을 받는 다양한 로봇 프로젝트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왔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메카물 <신세기 에반 게리온>을 필두로 하여 제2차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났다. 일본의 로봇 붐과 애니메이션 붐의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봇에 대한 일본인의 상상력은 주로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아 배양 되어왔기 때문이다. 제2차 애니메이션 붐을 전후한 흐름과 관련하여 소머
(E. Somer)는 <철완 아톰>(1963), <건담>(1979), <아키라>(1988), <패트레이버> 
(1989),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 <공각기동대>(1995), <이노센스>(2004) 등 의 로봇 메카물을 중심으로 ‘인간의 로봇화’, ‘로봇의 인간화’, ‘로봇을 통한 인간의 인간화’라는 세 범주를 제시하면서 그것들의 공통점으로 인간과 로 봇의 애매한 경계 감각을 들고 있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경계가 고정되어버린 곳에서 막을 내리며, 불투명
하게 열려 있는 ‘버려진’ 경계의 틈새에서 꽃피기 마련인 것이 유희일지도 모른다. 일본인의 유희정신은 버려진 인형이라든가 바늘, 가위, 인쇄 판목 등의 용도 폐기된 물건들을 공양하여 성화하는 불교 승려들의 관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쓸모없는 사물들도 인간과 생명을 공유하며, 따라서 그 사물들에 대한 공양이 우주적 붓다와의 평화로운 합일을 촉진시킬 것이라 고 여기기 때문이다.98
불교와 테크놀로지의 통합을 지향하는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 상적인 방식으로 현대 로봇공학에 대한 불교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는 1970 년에 <자재(自在)연구소>를 설립하여 로봇산업에 있어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해 불교적 원리를 활용하고자 했다. 가령 이 연구소의 멤버들은 불교 경 전을 암송하거나 명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로봇을 디자인하거나 창안해
냈다. 마사히로는 『로봇 안의 불성』(영문판)에서 “(인간뿐만 아니라) 바위, 나무, 강, 산, 개와 곰, 곤충과 박테리아 안에도 불성이 있다. 또한 나와 내 동료들 이 만드는 기계와 로봇 안에도 불성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성, 즉 ‘호토케의 본성’(buddha-nature)은 애니미즘적 가미와 동일한 이미지 로 묘사되고 있다. 기계와 로봇에도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한 것은 “지각이 있는 것과 지각이 없는 것” 안에 현존하는 것이 불성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 이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사히로에게 불성은 실로 “모든 것을 작동케 하는 원리 혹은 법칙”과 다름 없다.  이처럼 로봇의 불 성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하는 마사히로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은 붓다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붓다에 의해 의지를 수여받았다. 그리하 여 인간은 그 의지를 붓다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진실로 우 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붓다의 마음과 일치한다. 제어하는 것과 제어 받는 것은 모두 불성의 현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계를 조작한다고 생각해서
는 안 된다. 사실은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것이다.   
마사히로는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상호호혜 성’(reciprocality)이라고 부른다. 연기설이나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사사무애설(事事無碍說)을 떠올리게 하는 이 상호호혜성은 비단 불 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간과 기계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전체적인 인과 적 상호연관성과 관련된 이런 감각은 신불-애니미즘의 중핵적인 스피리추 얼리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희하는 가미와 호토케 혹은 가미와 호토케를 유희하는 일본인의 스피리추얼리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내장 까지 서로 얽혀 있는 그 스피리추얼리티는 유희가 또 다른 유희를 낳는 풍 경 속에서 태어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스 스로를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면서도 TH가 스피리추 얼리티를 배제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가령 제임스 휴즈는 TH의 기 획이 여러 종교의 종말론· 신정론· 구원론과 양립 가능하며, 거기서 새로운 
TH적 스피리추얼리티, 즉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trans-spirituality)가 탄생 할 것으로 기대한다.  일본의 경우 그런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는 신불애니미즘과 테크놀로지의 양립을 통해 배태되어온 것이다. 

5. 나오는 말: 하이브리드와 모노노아와레

TH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라는 양날의 칼을 내포하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엘론 머스크(Elon Musk) 등은 TH의 위험성을 강한 어조로 경고한 다. 그렇다면 유희적이고 관계론적인 신불의 애니미즘은 이런 위험성으로 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물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하이브리드’와 ‘모노노아와레’다.  
TH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포스트휴먼을 창조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는 데에 있다. 이 포스트 휴먼을 일본의 맥락에서 바꾸어 말하자면 신인(神人, god-man) 혹은 가미나 호토케와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앞에서 이런 가미와 호토케가 일본의 TH적 테크놀로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지를 네오-애니미즘으로부터 테크노-애니미즘을 거쳐 신불-애니미즘에 이르는 회로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때의 애니미즘은 모두 관계론적 인식론 뿐만 아니라 혼성성, 즉 하이브리드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타일러류의 애니미즘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가령 일본종교사의 가미와 호토케의 특이한 융합은 신불이라는 하이브 리드를 낳았는데, 실은 가미와 호토케 자체가 원래 일종의 하이브리드였다 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가미와 호토케는 인간도 아니고 비인간도 아니며, 혹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비인간이기도 한 것, 인간 비슷한 어떤 존 재이기 때문이다. 신불-애니미즘은 인간과 자연이 가미나 호토케 혹은 신 불이라는 하이브리드와 접합되는 풍경을 연출한다. 거기서는 인간도 하나 의 하이브리드가 된다. 나아가 멘젤(P. Menzel)과 달뤼시오(F. D’Aluisio)는 초 지성을 가진 로봇과 인간이 합쳐진 하이브리드를 ‘로보 사피엔스’라고 이름 붙였다.102 마찬가지로 전술한 테크노-애니미즘이라든가 테크노-종교 혹은 
102  Peter Menzel & Faith D’Aluisio, Robo Sapiens 참조.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는 인간의 마음이 기계와 접목된 곳에서 생겨난 하 이브리드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호른보르크(A. Hornborg)에 따르면 네오-애니미즘은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주체들로 지각, 소통, 그리고 행위주체(agency)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대안적 인식을 제시한다.  또한 젠슨과 블록은 일본의 테크노-애 니미즘적 혼성성에서 엿볼 수 있는 미학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 주목할 것 을 제안한다.104 그뿐만 아니라 앨리슨은 현대일본의 유희상품의 중심에 로 봇 등의 메카물이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미학적 테크노-애니미즘’
(aesthetic techno-animism)이라고 부른다.105 이런 관점들은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런 가능성은 노리나가가 “사물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고 해석한 모노 노아와레의 미학을 연상시킨다. 흔히 가장 일본적인 미의식이라고 일컬어 지는 모노노아와레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내재된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삼투압적으로 교섭하는 ‘관계론적 공감의 능력’과 ‘감성적 인식론’에 기초 하고 있다.106 이와 관련하여 이케가미 에이코(池上英子)는 『미와 예절의 유 대』107에서 모노노아와레적 미야비(雅)의 미의식으로 충만했던 고대 궁정의 영향으로 중세에 이르러 미적 의례가 정치생활로 고양되었고, 렌가(連歌), 다도, 꽃꽂이, 조루리, 정원, 하이쿠 등의 다양한 ‘에티켓’ 영역에서 일상생 활 속에 미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결사 네트워크가 널리 확산되면서 ‘미학적 일본’(aesthetic Japan)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음을, 그리 고 그것이 근대 이래 ‘일본적 미’(Japanese the beautiful)라는 이데올로기로 고 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규명해냈다. 
마음은 우주를 채우기 위해 성장한다. 그런 마음이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설 때 마음은 바로 신이 된다. 신은 하나의 세계 영혼 또는 세계 영혼들의 집합체 이고 인간은 이런 신의 현재적 발전 상태가 드러나는 현장이다. 신이 성장하면 인간도 성장한다. 한편 인공지능은 모든 사물에 마음을 장착하는 과정, 또는 마 음이 모든 사물에 스며드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인공 마음’ 이라는 연결끈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 남김없이 마음이 스며드는 것을 지향할 것이 다. 거기서 마음은 더 이상 인간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신
적 마음일 것이다.108   
다소 시적인 위 인용문에서의 ‘신’을 가미와 호토케로 대체한다면, 그것 은 기계에까지 확장된 하이브리드, 즉 미학적 일본에 있어 신불의 모노노아 와레를 대변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적 미’라 는 이데올로기가 심화되면서 내셔널리스트들에 의해 이용되었다고 말하는 이케가미의 지적은 모노노아와레의 미학을 체계화한 노리나가 국학이 오늘 날까지도 일본 내셔널리즘의 핵심부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 을 일깨워준다. 거기에는 신불-애니미즘의 정치성, 애니미즘과 국가신도의 관계, 신도 내셔널리즘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TH와 일본 종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글이 미처 다루지 못한 이런 문제들 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 여기서는 다만 내셔널리즘이 하이브리드라는 이 름하에 희석되거나 모노노아와레가 일본이라는 경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한, TH적 일본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부연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108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241~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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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과 인간향상의 생명정치학 | 신상규

투고일자: 2017. 6. 12 | 심사완료일자: 2017. 6. 26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인간향상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현재 인간향상 논쟁의 중심 전선은 트랜스휴머니스 트와 생명보수주의자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논쟁의 초점은 인간향상을 금지할 어떤 원칙적 이유 가 있느냐의 문제다. 이 은 논쟁의 초점을 바꾸고 생명정치적 요소들을 더욱 진지하게 고려할 필 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향상 논쟁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향상기술의 추구나 금지보다 사회 적 정의와 인간적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향상기술의 발전과 적용을 어떻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이 은 인간향상 논쟁이 자유주의적 트랜스휴 머니스트와 기술진보주의자 사이의 논쟁으로 재설정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 사회적 정의나 불 평등의 문제가 좀 더 적절히 고려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기술진보주의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율성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고 이에 입각하여 자율성과 사회적 공정성의 관계를 재평가한다. 주제어: 트랜스휴머니즘, 생명정치학, 자율성, 사회적 정의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 박규태
투고일자: 2017. 6. 15 | 심사완료일자: 2017. 6. 28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이 의 목적은 트랜스휴머니즘의 다양한 유형 가운데 특히 ‘종교적 트랜스휴머니즘’과 관련하여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흔히 애미니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신도와 불 교 및 각각의 가미(神)와 호토케(佛) 관념이 트랜스휴머니즘적인 일본 테크놀로지 문화의 중요한 밑그림이라는 점을 규명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이 은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의 양립 가능성 을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을 간략히 계보화한 후, 네오-애니미즘에서 테크노-애니미즘에 이르는 사 유의 흐름을 일본의 사례에 적용시켜 그것을 ‘신불-애니미즘’이라 명명한다. 이어서 그러한 신불애니미즘과 관련하여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사를 살펴본 후 유희성,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 하이 브리드, 모노노아와레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종교와 테크놀로지적 일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자 한다. 주제어: 트랜스휴머니즘, 종교, 네오-애니미즘, 테크노-애니미즘, 신불-애니미즘, 가미, 호토케 일본 SF소설 속 ‘포스트휴먼’적 상상력의 현재 | 신하경
투고일자: 2017. 6. 26 | 심사완료일자: 2017. 7. 4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현재 일본의 SF소설은 정보통신기술, 신경과학, 인지과학, 컴퓨터-신경 네트워킹, 유전공학 등 제 반 과학의 발달을 소설 세계의 설정으로 도입하면서, 그러한 과학기술들이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 을 예측하고 재현한다. 그 결과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지’란 무엇인 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감정’이란 무엇인가 등의 문제가 제기되며, 이러한 문제제기들이 ‘포스트 휴먼’적 상상력을 구성하고 있다. ‘포스트휴먼’의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며, 그에 대한 탐구의 과정은 과학기술의 개별적 속성에 따라 ‘기술적’인 특성을 가진다.
구체적으로, 이토 케이카쿠는 『학살기관』과 『하모니』를 통해 주로 정보통신기술과 뇌과학의 
발달이 야기하는 포스트휴먼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정보통신기술은 ‘예측 가능한 인간’이라는 인간 관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인간 개개인의 독자적 개성은 부정되고, 예측 가능한 사고와 행동
324   일본비평 17호 
mediator
Transhumanism and the Biopolitics of Human Enhancement | SHIN Sangkyu Several criticisms have been raised against human enhancement. A central dividing line in current human enhancement debate has been drawn between transhumanists and bioconservatives. The main focus of the debate has been whether there is any principled reason to ban human enhancement. In this paper, I claim that we need to change the focus of debate by considering biopolitical factors more seriously. The more important question in human enhancement debate should be how can we regulate and control developments and applications of human enhancement technologies in a democratic way for the purpose of promoting social equality and human values, rather than the current focus on whether we should pursue or ban enhancement technologies. Thus, I propose that human enhancement debate needs to be reconfigured between libertarian transhumanists and techno-progressives, so that the problems of social justice and inequality get their more deserving considerations. And by taking the side of techno-progressives, I will discern two senses within the concept of autonomy and reevaluate the relation between autonomy and social justice. t,FZXPSETtranshumanism, biopolitics, autonomy, social justice
“Shinbutsu-animism” and Transhumanism: The Game of Kami and Hotoke  
| PARK Kyu Tae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closely examine how had the Japanese concepts of Kami(神) and Hotoke(佛), which have originated from Shinto and Buddhism respectively and are often said to be animistic, influenced greatly on the culture of Japanese technology. Thus, I pay special attention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ranshumanism and religion, which are deeply associated with “religious transhumanism” among the various types of transhumanism. In so doing, I will present the notion of “shinbutsu(神佛)-animism” by applying the stream of thinking from neo-animism to techno-animism to the case of technological Japan after taking into careful considerations for diverse discourses related to the compatibility of transhumanism and religion. Furthermore, those concepts of Kami and Hotoke will be analyzed from the perspective of “shinbutsu-animism.” Finally, I will reconsider how technological Japan is related to religion by focusing on several keywords such as game-mind, trans-spirituality, hybrid, and mono-no-aware. 
t,FZXPSETtranshumanism, religion, neo-animism, techno-animism, shinbutsu-animism, kami, hotoke
Posthuman Imagination in Japanese Science Fiction | SHIN Ha-kyoung 
Science fictions in Japan introduce the development of various sciences, such as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neuroscience, cognitive science, computer-neural networking, 
328   일본비평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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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옴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 옴 사건 일본교 네오-네셔널리즘 
 | 한양학술총서 1  
박규태한양대학교출판부2015-08-25


기본정보
520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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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제1장 현대 일본 사회의 종교 지형 : 종교붐·‘정신세계·’ 신영성운동·신신종교
제2장 [옴 진리교]사건과 ‘내 안의 옴 진리교’
제3장 ‘옴 문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IQ84』
제4장 프레·스피리추얼리티 : 일본적 영성
제5장 스피리추얼리티란 무엇인가
제6장 영성적 지식인과 스피리추얼리티
제7장 스피리추얼리티 담론과 종교 담론
제8장 대중문화와 스피리추얼리티
제9장 일본교와 스피리추얼리티 : 모든 일본인은 일본교도이다?!
제10장 네오·내셔널리즘과 신신종교 : 보수 우경화 현상의 종교적 밑그림
제11장 [행복의 과학]과 네오?내셔널리즘
제12장 희망의 스피리추얼리티 : 종교·탈원전·공공성

맺음말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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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규태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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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일본 재발견?: 일본인의 성지를 걷다』, 『일본정신분석』(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 및 2019 종교문화비평학회 학술상 수상작),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2018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포스트?-?옴 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옴 사건·일본교·네오?-?내셔널리즘』(2016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일본 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노케히메까지』, 『일본의 신사』,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황금가지』, 『세계종교사상사 3』, 『일본 신도사』,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 시스템』,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현대 일본의 순례 문화>,<일본 재발견>,<일본정신분석> … 총 43종 (모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