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2

알라딘: 회복력 시대 - 재야생화되는 지구에서 생존을 다시 상상하다 제러미 리프킨

알라딘: 회복력 시대


회복력 시대 - 재야생화되는 지구에서 생존을 다시 상상하다 
제러미 리프킨 (지은이),안진환 (옮긴이)민음사2022-11-01
원제 : 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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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432쪽
152*223mm (A5신)
630g
ISBN : 9788937427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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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선택
"제러미 리프킨. 전 세계 동시 출간"
우리가 알던 세계는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개발하고 확장하고 뻗어 나가는 것이 곧 옮음이라 믿던 진보의 시대는 파국을 불러왔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경제,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새로운 문명의 서사를 제시한다. 적응과 어우러짐, 생명애 의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회복력의 시대다.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의 구체적 모습을 상상한다. 그는 우리가 그간 가져온 세계에 대한 상을 산산이 부숴 근본부터 다시 세우길 제안한다. 자연과 문명의 관계, 자본의 작동 방식, 소유권의 주체 등 모든 방면에서의 전면적 변화만이 이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늦었어도 포기할 수 없다. 좌절이 일상이 된 세계에 희망을 눌러 담은 로드맵이 도착했다.
- 사회과학 MD 김경영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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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 (Hardcover)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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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바이러스가 계속 출현하고 기후는 따뜻해지고 있으며 지구는 야생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우리 인간 종은 현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혼란에 대책이 없는 상태다. 산업 발전을 이끈 효율성의 원칙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두었지만 결국 자연계의 파멸을 이끌었다.

어떻게 대멸종을 피하고 삶을 지속할 것인가?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경제⬝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에서 죽어 가는 진보의 시대를 해체하고 부상하는 새로운 문명의 서사를 제시한다. 8년의 집필 기간 끝에 완성되어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2022년 11월 1일 동시 출간되는 이 책은 그가 50년에 걸쳐 글로벌 경제와 사회, 거버넌스 혁신, 기후변화 등에 대해 연구한 결과가 집대성되어 있다.


목차


서론 9
1부 효율성 대 엔트로피: 현대성의 변증법
1. 마스크, 인공호흡기, 화장지: 적응성이 효율성보다 중요한 이유 21
2. 테일러주의와 열역학법칙 34
3. 현실 세계: 자연의 자본 59
2부 지구의 자산화와 노동력의 빈곤화
4. 대혼란: 지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클로저 79
5. 궁극의 약탈: 지구의 권력, 유전자풀, 전자기 스펙트럼의 상품화 95
6. 자본주의의 딜레마: 효율성의 증가, 노동자의 감소, 소비자 부채의 증가 135
3부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지구의 진화에 대한 재고
7. 생태적 자아: 우리는 저마다 흩어지는 패턴 167
8. 새로운 기원 이야기: 생명을 동기화하고 형성하는 생체시계와 전자기장 190
9. 과학적 방법론을 넘어: 복합 적응형 사회·생태 시스템 모델링 214
4부 회복력 시대: 산업 시대의 종말
10. 회복력 혁명 인프라 239
11. 생태 지역 거버넌스의 부상 265
12. 분산형 동료 시민 정치로 대체되는 대의민주주의 287
13. 생명애 의식의 출현 316
감사의 말 364
주석 366
찾아보기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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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7~18 자연을 인간 종에 적응시키기보다 인간 종을 자연에 다시 적응시키는 대전환은 자연의 비밀을 왜곡하고 지구를 우리 종의 독점적 소비를 위한 자원이자 상품으로 보는 데 중점을 둔 전통적인 베이컨주의식 과학 탐구 방식의 폐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차세대 과학자들이 복합 적응형 사회·생태 시스템 사고라고 부르는 근본적으로 새로... 더보기
P. 41~42 산업화 시대에 전 세계 표토의 3분의 1이 황폐해졌다.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표토가 60년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표토 1인치를 다시 채우는 데 500년이 넘게 걸린다. 과학자들은 또한 기후변화가 대량 멸종을 촉발해 앞으로 80년 안에 기존 모든 종의 50퍼센트까지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편... 더보기
P. 80 우리가 이 역사적 분기점에 도달한 경위와 시간 및 공간에 관한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14세기 중세 유럽에서 비롯해 나중에 현대를 정의하게 되는 두 가지 발전과 더불어 천진스럽게 시작된다. 첫 번째는 기계식 시계가 발명되고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이 일상적인 전례에서 엄격한 시간 계획을 세운 것이다. 두 번째는 이탈리아 ... 더보기
P. 200 생체시계가 각 생명체의 내부 활동 패턴을 조직하고 지구의 하루·태음·계절·1년 주기와 맺은 관계를 동기화하는데, 여기에는 각 생물 종의 공간적 패턴뿐만 아니라 시간적 패턴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다고 우리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또 다른 힘인 전자기장도 있다.
P. 220 회복력은 정확한 현상의 재정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의 경과와 사건은 그 발자취가 아무리 미미해도 사회에서처럼 자연에서도 항상 패턴과 과정과 관계를 변화시킨다. 회복력은 세상 속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방식으로 봐야 한다. 결국 적응성은 시간의 작용이다. 그것을 통해 개별 유기체와 특정 종 또는 그보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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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효율성을 숭배함으로써 우리는 북극을 녹이는 경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신작 『회복력 시대』에서 제러미 리프킨은 이제 효율성 대신 회복력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누구도 리프킨이 펼치는 비전에 매료되지 않거나 자극받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다!”
- 빌 맥키빈 (선구적인 기후 운동가‧작가)

“경제·사회 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새 저서 『회복력 시대』에서 천연자원이 유한한 행성에서 무제한의 경제 발전을 장려하는 기존의 경제적 지혜에 거세게 도전한다. 그는 우리가 ‘자연을 교실로’ 생각하고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 즉 시간과 공간·경제생활·거버넌스 및 자아에 대한 개념까지 다시 상상해야 지구에서 생명이 다시 번창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우리 종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대화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이미 때가 한참 늦은 상황이다.”
- 제인 구달 (제인 구달 협회 설립자, 유엔이 선정한 ‘평화의 메신저’)

“『회복력 시대』는 자연을 우리 종에 적응시키는 것에서 우리 종을 자연에 다시 적응시키는 것으로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세계관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러미 리프킨의 주장이다.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는 학습에 새로운 방식의 교수법을 제공하도록 교육 시스템을 재구상하고 재창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야 진보의 시대에서 회복력 시대로 변혁적 전환을 이룰 수 있다. 미래의 구상에 관한 리프킨의 놀라운 실적을 고려하건대 이 새 책의 메시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복력 시대』는 읽고 이해해야 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행동의 토대로 삼아야 하는, 진정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구서다.”
- 제리 윈드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

“리프킨의 『회복력 시대』는 무한한 성장과 고효율성(진보의 측정 기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어떻게 생명 네트워크를 파괴하고 우리와 동료 생명체를 대량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한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긴밀한 일부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우리가 이 불가분의 지구에서 다시 우리의 진화상 가족에 합류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두려움과 절망이 팽배해지는 이 시대에 리프킨은 그렇게 재생성과 번영, 회복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한다.”
- 반다나 시바

“‘효율성’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인류가 생물 다양성의 연쇄적 상실과 재앙과도 같은 기후변화의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의 시대에 대한 예언적 비전이 촉발하는 대안적인 미래로 우리를 안내한다.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인류의 기회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리프킨은 인류가 지구라는 고향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자기 성찰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이 금세기의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회복력 있는 세상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 아니 다스굽타 (세계자원연구소 소장 겸 CEO)

“제러미 리프킨은 변화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미래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진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지구상의 인간 존재에 대한 전체론적이고 생태학적인 개념을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공감과 생명애가 자연과 재결합하기 위해 펼치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 카를로 페트리니

“우리의 경제와 사회, 생태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면적인 글로벌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요 문제 중 어느 것도 단독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이며 그에 상응하는 전체적 솔루션을 필요로 한다. 제러미 리프킨은 40년 이상 전 세계의 주요 정부와 기업 조직의 요청에 따라 경제 및 기술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전체적 솔루션을 설계해 왔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인간 종의 미래 생존을 위협하는 인식 및 지각의 위기를 해결한다.
리프킨은 우리가 선형적,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사고에서 전체적이고 생태학적이며 생명 지향적인 사고와 가치로 이행하는 심오한 문화적 변혁의 문턱에 들어서 있다고 주장한다. 진보의 시대에서 회복력 시대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도전적이며 많은 것을 시사하지만, 동시에 깊은 희망을 주기도 한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이에게 열렬히 추천한다.”
- 프리초프 카프라 (물리학자, 『다빈치처럼 과학하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저자)

“리프킨은 우리에게 주변 세상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진보의 시대와 그에 따른 성취의 결과를 살펴보고 자연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시스템을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상상하라는 것이다.…… 정책 입안자와 정치인, 교육자, 시민 사회 지도자, 종교 지도자는 모두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구를 구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변화는 우리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다행히도 리프킨이 자세한 로드맵을 제시한다.”
- 켄 번스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의 감독)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서울신문
- 서울신문 2022년 11월 4일자
문화일보
- 문화일보 2022년 11월 4일자
중앙SUNDAY
- 중앙SUNDAY 2022년 11월 5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2022년 11월 4일자 '책과 삶'
세계일보
- 세계일보 2022년 11월 5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2022년 11월 7일자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22년 11월 7일자
한국일보
- 한국일보 2022년 11월 7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제러미 리프킨 (Jeremy Rifki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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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사회사상가이자 미래학자.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경제,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며 미래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왔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차 산업혁명으로의 전환에 나선 유럽연합과 중국이 경제 계획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설계자로 기여했으며, 미국의 인프라 구축 및 개선 계획과 관련해 미 상원 다수당의 리더인 찰스 슈머의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와튼스쿨 최고경영자 과정 교수(1995-2010)를 지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라는 주제로 《허프포스트》가 수행한 글로벌 설문 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사상가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글로벌 그린 뉴딜』, 『한계비용 제로 사회』, 『3차 산업혁명』, 『공감의 시대』, 『소유의 종말』, 『수소 혁명』, 『유러피언 드림』, 『노동의 종말』 등을 포함해 21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는 전 세계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접기

최근작 : <회복력 시대>,<글로벌 그린 뉴딜>,<엔트로피> … 총 120종 (모두보기)

안진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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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문번역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저서로 《영어 실무 번역》, 《Cool 영작문》 등이 있으며, 역서로 《전쟁의 기술》, 《넛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디즈니만이 하는 것》, 《스틱!》, 《스티브 잡스》, 《마켓 3.0》, 《괴짜 경제학》 등이 있다.

최근작 : <[CD] 난제해결 방정식 - 오디오 CD 1장>,<끌어당김의 지혜>,<끌어당김 Attraction> … 총 38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8년간 준비한 신작『회복력 시대』주요 내용

우리의 미래를 위한 문명사의 대전환!
“진보의 시대에서 회복력 시대로, 역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 우리는 효율성에서 적응성으로, 금융자본에서 생태자본으로,
생산성에서 재생성으로, 성장에서 번영으로 대전환하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 세계화가 쇠퇴하는 대신 세방화가 부상하고 있다.
● 생명권 정치학이 추진력을 얻으면서 지정학은 시들어 가고 있다.
● 생태적 지역 거버넌스가 젊은 세대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다.
● 대의민주주의가 동료 시민 의회와 분산형 동료 시민 정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 차갑고 무심한 이성이 공감(Empathy)과 생명애 의식(Biophilia Consciousness)에 우선권을 넘겨주고 있다.

● 위기의 인류를 위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회복력 시대』
바이러스가 계속 출현하고 기후는 따뜻해지고 있으며 지구는 야생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우리 인간 종은 현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혼란에 대책이 없는 상태다. 산업 발전을 이끈 효율성의 원칙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두었지만 결국 자연계의 파멸을 이끌었다. 어떻게 대멸종을 피하고 삶을 지속할 것인가?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경제⬝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에서 죽어 가는 진보의 시대를 해체하고 부상하는 새로운 문명의 서사를 제시한다. 8년의 집필 기간 끝에 완성되어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2022년 11월 1일 동시 출간되는 이 책은 그가 50년에 걸쳐 글로벌 경제와 사회, 거버넌스 혁신, 기후변화 등에 대해 연구한 결과가 집대성되어 있다.

● “진보의 시대에서 회복력 시대로, 효율성에서 적응성으로”
진보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효율성은 시간을 조직하는 최적 표준이 되었고, 그에 따라 인간 종은 사회의 풍요를 향상한다는 목표하에 점점 더 빠른 속도와 점점 줄어드는 시간 간격으로 천연자원의 수탈과 상품화, 소비를 최적화하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이 고갈되는 과정에서 공간은 수동적 천연자원과 동의어가 되었고 정치와 경제의 주요 역할은 자연을 재산으로 관리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지향성은 인류를 지구상의 지배적인 종으로 올려놓은 동시에 자연 세계는 파멸로 이끌었다.
리프킨은 진보의 시대가 효율성에 발맞춰 행진했다면, 새롭게 부상하는 회복력 시대는 적응성에 발을 맞춘다고 말한다. 효율성에서 적응성으로의 이행은 생산성에서 재생성으로, 성장에서 번영으로, 소유권에서 접근권으로, 판매자-구매자 시장에서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로, 선형 프로세스에서 인공두뇌 프로세스로, 수직 통합형 규모의 경제에서 수평 통합형 규모의 경제로, 중앙 집중형 가치사슬에서 분산형 가치사슬로, 거대 복합기업에서 유동적인 공유로 블록체인을 형성하고 민첩한 첨단기술 중소기업으로, 지식재산권에서 오픈소스 지식 공유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삶의 질 지수(QLI)로, 부정적인 외부 효과에서 순환성으로, 지정학에서 생명권 정치학으로의 전환을 포함한 경제 및 사회의 전면적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 젊은 세대는 이미 성장에서 번영으로, 금융자본에서 생태자본으로, 소비자주권주의에서 환경책임주의로, 세계화에서 세방화로, 대의 민주주의에서 시민 의회와 분산형 동료 시민 정치로 전환하고 있다. 동일선상에서 공감과 생명애가 새로운 규범이 되면서 냉정하고 무심한 이성은 약화하고 있다. 인간 종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오늘날, 리프킨은 근본적으로 다른 미래에 대한 창을 열어 주며 지구에서 다시 생명이 번성할 두 번째 기회를 위한 대담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 인류 문명사에 대한 전복적 성찰: 위대한 사람들이 잘못 읽은 세상의 이치
100년 전에는 지구 표면의 약 85퍼센트가 여전히 야생 지역으로 특징지어졌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이 일으킨 변형을 겪지 않은 육지가 23퍼센트 미만이며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이 마지막 야생 지역도 인간의 손때를 탈 것으로 보인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나고 35억 년 만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이런 사태의 책임 중 상당 부분은,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고 인류의 안녕을 보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명목하에 세계경제의 작동 방식에 대한 내러티브를 제공한 과학계와 경제학계와 재계에 있다.
그리고 종종 그 이야기는 최초의 근대 철학자로 여겨지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다. 그는 제한받지 않으며 수학으로 무장한 인간의 사고가 (우주에서 신이 하듯) 지구에서 존재에 대해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하며 스스로 영속하는 기계적 유사체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모든 기계가 마주하는 중력에 대한 설명이 어려웠는데, 그를 열렬히 지지한 아이작 뉴턴이 중력을 설명하는 수학 공식을 밝혀냈다. 행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유와 사과가 특정한 방식으로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유를 법칙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상정한 뉴턴에게 물질과 운동의 우주는 질서 정연하고 계산할 수 있으며 자발성이나 예측 불가능성의 여지는 없었다. 한마디로 질이 없는 양의 세계였다. 그는 수학적 증명으로 자신의 통찰력을 뒷받침해 계몽주의 시대를 수학화했고, 수학은 진보의 시대를 위한 발판을 제공했다. 한편 이들보다 앞서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자신을 자연과 분리하고 멀리서 그것을 엄정하게 관찰하고 그 비밀을 캐내 세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으로 축적하는 능력이고, 그것으로 “가능한 한 모든 것에 영향을 주어 인간 왕국의 경계를 확장한다”고 믿었다. 또한 갈릴레오는 미술가와 건축가에게 원근법의 수학에 관해 배운 것을 바탕으로 모든 과학적 탐구를 수행했다. 초연하고 합리적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객관성’은 500년이 넘는 역사 속에 과학이라는 소수만의 세계는 물론이고 대중문화에 대한 지배적 영향력을 유지해 왔고, 이와 함께 우리 모두가 자아를 확보하기 위해 세상을 응시하고 대상화하며 무단 이용하는 자율적 행위자라는 개념이 우세해졌다.

● 산업화의 최전선에서 생태 지역 거버넌스로: 오대호의 어제와 오늘
1969년 6월 22일 정오 무렵 클리블랜드의 쿠야호가강 철교를 달리던 기차에서 튄 불꽃이 강으로 떨어지면서 수면에 떠다니던 산업폐기물에 옮겨 붙었다. 이렇게 일어난 화염이 순식간에 강을 가로질러 번져 나갔고, 일부 지역에서는 5층 이상 높이까지 치솟기도 했다. 오염수를 이리호로 흘려보내던 쿠야호가강뿐 아니라 산업 시대의 전성기에 오염된 물을 모두 오대호로 실어 나르던 일리노이의 시카고강과, 뉴욕의 버펄로강, 미시간의 루지강 등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기름과 용제, 산업용 화학물질, 배설물 등 각종 오염 물질이 지류를 타고 떠내려와 오대호로 흘러드는 것은 오랫동안 ‘일상적인 일’로 여겨졌다.
쿠야호가강의 화재는 1·2차 산업혁명의 요람이던 오대호 지역에서 150년이 넘는 산업 개발의 기간 동안 누적된 부정적 외부 효과, 즉 엔트로피 비용에 관해 대중의 전면적 각성을 촉발했다. 화재 발생 이후 10개월이 지난 1970년 4월, 최초의 지구의 날을 기념하며 근본적인 환경 개혁을 요구하는 평화 집회가 열렸고 2000만 명에 달하는 미국 시민이 곳곳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70년 12월, 미국 의회는 환경문제와 개혁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환경보호국(EPA)의 설립을 승인했다. 1983년에는 일리노이와 인디애나·미시간·미네소타·오하이오·위스콘신의 주지사들이 모여 오대호주지사협의회를 창설했는데, 뉴욕과 펜실베이니아가 1989년에 합류한 데 이어 2015년에 캐나다의 지방 수장들까지 정식 회원이 되었다. 지구의 전체 표면 담수 중 20퍼센트를 보유한 오대호 지역의 환경 관리가 호수 주변 지역 시민의 경제적, 사회적 안녕에 중요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데 국경이 없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오대호 지역은 생태 지역적 접근 방식을 구축하고 더 회복력 있는 경제와 사회를 만드는 데 선도적 위치에 있다.

● 차가운 이성 대신 따뜻한 공감이 지키는 생명 공동체
인간이 화석연료에 의존하며 일으킨 기후변화가 우리를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이끌고 있다는 경고 속에 새삼스럽게 깨닫는 진실은, 우리 자신과 동료 생물들의 삶이 과정과 패턴과 흐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이 지구 권역의 확장체다. 대륙권의 미네랄과 영양소, 수권의 물, 대기권의 산소가 원자와 분자의 형태로 우리를 통해 끊임없이 순환하며 우리의 DNA가 규정한 대로 세포와 조직, 기관 등에 거주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동안 다양한 간격으로 교체를 지속할 뿐이다. 우리 몸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원생생물, 고세균, 균류 등 다양한 생명체와 공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인체의 세포 절반 이상과 우리를 구성하는 DNA 대부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몸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나머지 생물에 속한다. 지구의 종과 생태계가 우리 몸의 가장자리에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 몸 안팎으로 흐른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행성 그 자체다. 결국 지구 생명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지구온난화 배출의 형태로 엔트로피 청구서가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인간 종은 동료 생물들과 다르게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연계를 약탈하고 망치는 종이면서 치유자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경 회로에 공감 충동이라는 특별한 자질이 연결된 축복받은 종이다. 공감 충동은 유연하고 무한한 확장성을 자랑한다. 이 희귀하고 소중한 속성은 진화하고 후퇴하고 다시 부상하기를 거듭했다.
최근 젊은 세대가 공감 충동의 적용 범위를 넓히고 인간 종을 넘어 우리 진화 가족의 일부인 동료 생명체를 모두 포함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이 생명애 의식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새로운 길을 향한 희망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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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대 보고 당연히 하드커버인줄 알았다. 아니었다 페이퍼백. 민음사 책값 비싼거 알만한 사람들 다 아는 거지만 도서정가제 시행하면서 장기적으로 책값 내려갈 거라고 입에 침튀기며 말하던 작자들...
물찬하마 2022-11-10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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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이 떨어지는 번역이 아쉬움
- 2022-11-04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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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할 것 같은 주제에 흥미로운 내용.
다만..번역의 문제인지 중간중간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이 다수 있음...이 문장들을 만나면 집중이 깨지고 한동안 펴보기 싫어지고...결국 읽는데 한참 걸림..이 비싼 돈 받아먹고 이따구로 만들다니..

보리건빵 2023-03-0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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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시대] 효율성의 시대에서 회복력의 시대로













영원한 것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달은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팬데믹을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이제까지 인류가 성장 혹은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배출해온 쓰레기를 비롯한 각종 오염원들을 지구 생태계가 스스로 정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신호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제 사회 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회복력 시대>는 팬데믹 이후 인류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숙고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2022년에 출간되었지만, 저자 후기에 따르면 2013년에 이 책의 주요 주제에 대한 조사를 시작해 총 8년에 걸쳐 집필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소유의 종말>, <한계비용 제로 사회>, <글로벌 그린 뉴딜> 등을 발표하며 기존 경제 모델의 한계와 새로운 발전 모델의 필요성을 주창해온 저자의 예측력이 이번 책에서도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진보의 시대는 사실상 이미 끝났고 적절한 사후 평가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모든 곳에서 더욱 결연한 목소리로 점점 크게 울려 펴지는 새로운 내러티브는 우리 인간 종이 우리의 세계관에서부터 경제에 대한 이해, 거버넌스의 유형,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지구라는 행성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11쪽)




저자에 따르면 그동안의 경제 성장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제 '회복력(resilience)'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한다. 기존의 산업 문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가치는 '효율성'이었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산업 문명은 인류에게 유례가 없는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영속해야 할 생명체라는 사고방식은, 수많은 다른 생물종의 멸종과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류의 능력은 무한하며 인류가 자연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이 이번 팬데믹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인류는 정복이 아닌 '적응'의 패러다임으로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다행히 적응은 인간에게 아주 낯선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몸은 수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유생생물, 고세균, 균류 등이 공존하는 하나의 생태계와도 같다. 인간의 몸은 섭취하는 음식이나 약물 외에도 24시간, 태음, 계절, 265일 등의 주기 리듬으로부터 영향받는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인간의 몸을 하나의 생태계, 하나의 행성, 하나의 우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의 몸, 다른 생명체, 다른 생태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확장된다면, 인류의 미래가 지금보다 밝을 거라고 예측한다.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일국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접 국가들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이익, 멀리는 우주 전체와 미래 세대를 포함하는 정책 결정과 판단이 이루어진다면 분쟁 가능성이 줄어들고 분쟁으로 인한 자원 고갈 및 생태계 파괴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몸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열쇠로도 보인다. 공교롭게도 이태원 참사, 봉화 광산 붕괴 사고, 제조업 노동자 사망 사고 등 최근 한국의 언론 매체를 장식하고 있는 사건 사고들의 중심에는 몸이 있다. 만약 정부와 기업이 국민과 노동자의 몸을 자신들의 몸처럼 여기고 소중히 대했다면 과연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다른) "생명에 대한 심오한 공감적 공명의 느낌" 없이는 인류 앞에 놓인 거대한 투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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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22-11-09 공감(1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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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시대 - 제러미 리프킨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는 지구의 기후 위기에 대한 명료한 해답을 내놓는다. 인간이 지배하는 지구라고 여겼지만, 인간은 지구에 잠시 머물다 갈 뿐이라는 것을. 대멸종을 촉발할 수도 있는 지구에서 생존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적응력이 뛰어난 인간종의 특성을 살려 회복력의 시대로 가는 것이다. 효율성을 추구했던 것에서 회복력을 우선시해야 하는 거라고 말이다.






토양은 식물을 고정하고 성장시키며 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토양은 작은 생태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생명이 가득 차 있다. 토양 침식의 원인이 되는 큰 해를 끼치는 것은 삼림 벌채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토양을 황폐화하는 것 중 석유화학 농법뿐만 아니라 또 다른 원인은 가축 방목으로 소 방목을 위해 열대우림이 불태워지고 있다.






가장 엄격한 생리학적 의미에서 우리가 생물의 한 종으로서 진정 누구인가를 깨닫는 일은 생명이 있는 진화하는 지구로 돌아가는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할 해방의 구원인 셈이다. (174페이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표현은 지구가 야생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거다. 그동안 기후변화 때문에, 지구에 위기가 닥쳤다는 것은 알았지만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다른 나라의 일이었다고 여겼던 바이러스가 우리 곁에서 웅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호우나 산불, 가뭄, 허리케인이 끊이질 않는다. 내가 거주하는 도시에서는 가뭄이 심해 내년부터 제한급수를 하겠다고 홍보하고 있다. 댐의 30%밖에 차지 않은 물의 양을 보고 놀랐다. 이 모두가 기후변화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수권이라고 하면 바다와 호수, 강, 지하 대수층은 물론 대기 중의 구름과 안개 등 지구상의 모든 물을 포함한다. 바다는 전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이 항해하거나 낚시할 수 있는 개방된 영역으로 여겨졌다. 바다를 통한 지구의 공유 해양을 둘러싼 싸움은 끊이질 않는다.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싸웠던 이유 중의 하나가 화석연료를 채취할 수 있는 권리를 얻고자 했다. 중국과 타이완, 일본, 한국, 스페인 등 다섯 나라는 공해 어획량으로 큰 수익을 차지했다. 상수와 위생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는 기후변화가 심해지면서 더욱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할 것이다. 지구의 일부 지역은 물 순환의 극적인 변화로 생태계가 붕괴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며 대량 이주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생명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물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해 회복력 관행을 도입하고 수자원 체제를 보호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찾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격변하는 기후에 대한 적응성은 분명 우리의 강점이다. 우리를 지구상에서 가장 회복력이 뛰어난 생물 종으로 만든 것도 적응성이다. 아마도 이것은 회복력 시대에 들어서는 우리가 열정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만한 고무적인 소식이다. (234페



회복력 시대는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의 집중 매장지에 대한 통제권에 집착하는 군사력 중심의 지정학에서 우리 인류를 해방해 대륙과 바다, 시간대를 가로지르는 디지털 판게아에서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의 공유를 장려하는 ‘생물권 정치’의 새로운 시대로 안내한다. (253페이지)






과학계에서는 지구의 절반을 야생으로 복원한다는 사명하에 생태 지역 거버넌스의 맥락과 일정을 수립했다. 생명체의 대멸종을 막으려면 지구의 평균온도가 섭씨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지구온난화 배출량을 제한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했다. 지구 평균온도의 1.5도 상승은 생태계의 붕괴와 생물 종의 대규모 멸종을 피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기후변화는 대비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당장 맞서 싸우고 적응해야 할 현재의 비상사태자 위기다.






코로나 팬데믹이 길어지자 인공적인 환경의 실내에 갇히는 상황은 절망감을 키웠다. 젊은 사람들은 답답함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고자 국립공원 등 자연 친화적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상호작용적 접근 방식이라고 했다. 자율성이 아닌 표용성에서 비롯된 생명애 의식의 표출이었다. 공감의 행위에서 비롯된 공감적 표용이다.






생명의 숨결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볼 일이다. 탄소의 발생률을 줄이기 위한 아주 작은 습관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상 속 일회용품을 줄이고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생활 속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회복력시대 #제러미리프킨 #민음사 #책 #책추천 #책리뷰 #도서리뷰 #북리뷰 #인문 #인문서 #기후위기 #미래예측 #생태계 #회복력 #생명의숨결 #생명애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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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eze 2022-11-20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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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시대

소비 중심의 물질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반성 ? 같은 도서였다. 읽으면서 아바타2가 생각이 많이났는데, 계속되는 성장을 위해서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길 수 밖에 없는 현대 자본주의가 불러온 기후위기 , 자연파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고 느껴졌다. 사실 리프킨 책이 주제의식이나 이런 것들은 좋지만 막상 책을 읽으면 딱 잡히는 느낌이 많이 들지는 못 하지만. 뭐 무튼 그래도 읽어볼만한 도서였다고 생각한다 !
Investor우기ya 2023-07-02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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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시대 -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제러미 리프킨의 <회복력 시대>를 읽는데 비교적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가독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내가 이 책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매우 폭넓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동시에 결코 얕지 않은 정보를 다룬다. 온전히 이해하고 서평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이 책이 가진 가치가 상당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지금껏 효율성의 시대를 살았다.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석탄 채굴, 노동력 착취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연 파괴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가장 효율성이 높은 방식으로 모든 것에 접근했다. 바로 효율성의 시대였다. 그런 효율성의 시대는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 지구의 온난화부터 재난 재해까지 지구는 점점 병들어가고 조금씩 우리는 병들어 가는 지구의 시그널을 접한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만 하는 방향 즉, 우리 시대의 염원이자 숙제가 주어졌다. 바로 회복력 시대로 나아가야만 한다. 과거 자연을 약탈하고 망친 우리는 그 심각성을 느끼고 다시금 자연을 회복하고 치유하기 위해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생명애 의식을 통한 자연과의 새로운 연계가 필요하다.



효율성이라는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은 전문적인 통창력을 다 갖추고도 과학 경영 원칙을 산업 생산에 적용하는 과정의 첫머리부터 명백히 드러난 모순을 보지 못했다.(중략)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는 해도 갈수록 더 적은 노동자가 필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더 적은 노동인구와 더 많은 실업자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본주의의 딜레마: 효율성의 증가, 노동자의 감소, 소비자 부채의 증가 (p135)


회복력과 적응력에 대한 내용에 앞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시대를 지배한 효율성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효율성이 가져온 현재의 모습을 직면해야 한다. 명백해 효율성에 의해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룩했다. 인쇄 혁명으로 인해 지식이 세대를 넘어 전달되고, 석탄과 증기 기관으로 인해 시간 장벽은 점차 사라지고 이동 거리가 단축되었다. 허나 한편으로 가축의 대량화로 인해 세계 초원은 황폐해지고 메탄 가스는 지구온난화를 가속화 한다. 인간이 육류를 먹기 위해 자연이 점차 파괴되는 것이다. 석탄, 석유로 인한 자연 파괴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디지털 인프라는 시간적,공간적 관계를 민주화해 전 세계에서 상업과 교역,시민 생활,사회생활을 위한 새로운 제휴가 번성할 수 있도록 돕고, 그에 따라 사회는 세계화에서 세방화로 이동한다.


회복력 혁명 인프라 (p251)


세계화는 값싼 인력을 찾아 다른 나라로 공장이 이동했다.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 역시 미국에 제조업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오프쇼링에서 온쇼링으로의 전환이다. 점차 세계화에서 세방화 되는 신호들을 볼 수 있다. 인간 노동력의 전면적 방향 재설정이 기다리고 있다. 저자는 앞으로 노동력은 생물권 관리에 집중되며 생태계 관리 분야에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 전망한다. 기후 관련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소유권에서 접근권으로, 판매자-구매자 시장에서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로, 아날로그 관료제에서 디지털 플랫폼으로, 제로섬 게임에서 네트워크 효과로, 성장에서 번영으로, 금융자본에서 자연 자본으로, 생산성에서 재생성으로, 선형 프로세스에서 인공두뇌적 프로세스로, 부정적인 외부 효과에서 순환성으로, 수직 통합형 규모의 경제에서 분산형 가치사슬로, GDP에서 QLI로, 세계화에서 세방화로, 글로벌 대기업에서 유동적인 글로컬 네트워크에 블록 체인으로 결합된 민첨한 첨단 기술 중소기업으로, 지정학에서 생물권 정치로 등이 그 변화의 예다.


회복력 혁명 인프라 (p253)




기존의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에서 벗어나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의 공유를 장려하는 새로운 시대를 바라본다. 근면과 물질적 진보만을 중시했던 과거에서 벗아나 이제는 지구의 리듬과 흐름에 맞춰 매 시간 매 공간의 회복력이 강조된다. 회복력 인프라를 통한 변화다. 지구와 재결합하는 회복력 시대의 앞에 서 있다.



지금까지 여정은 길고도 짜릿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지구상 존재의 종말을 감지하는 바로 이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의 생물 종으로서 보편적 친밀감을 느끼고 경험하며 지구 생명력과 하나가 되는 생명애 의식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애 의식의 출현 (p359)


물론 아직 갈길이 멀다. 기업마다 녹색 혁명이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 친화적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효율성에 초점을 두고 있음에 부정할 수 없다. 하루 아침에 망할 수도 있는 기업이 효율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길고 긴 싸움이다. 자연의 품에 우리는 다시 안겨야 한다. 정부는 자연 친화에 기여한 기업을 독려하고 지원해야 할 것이다. 세계는 에너지를 공유하고 순환하고 공유해야 할 것이다. 생물과 자연에 중심을 둔 정책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 점차 조금은 더 나은 미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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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 2022-12-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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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턱 끝까지 차오른 성장의 종말_회복력 시대



인도 출신 중년의 여교수는 말했다. 해외에서 경제학을 들을 때 이야기다. 경제는 커다란 사이클을 반복한다고 했다. 호황, 후퇴, 침체, 회복이 번갈아 간다고 했다. 다만 회복 단계에 급격하게 압축 성장하는 시기가 온다고 했다.그것을 경제학 용어로 '퀀텀점프'라고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 확대는 '성장'을 전제로 한다. 즉 사이클을 돌지만,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길 전제로 한다고 했다. 그것이 일종에 '수레바퀴'를 닮았다. 수레바퀴는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같은 곳을 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경제'를 벗어나 '철학'으로 갔을 때, 수레바퀴는 '윤회'를 닮았다. '경제'가 '철학'을 닮은 것은 둘 다 자연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을 닮은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산과 골은 번가르지만 확장한다. 우주 어디를 봐도 비슷하다. '탄생'과 '소멸' 사이에 호황, 후퇴, 침체, 회복이 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윤회'하지만, 그 턱에 걸려 넘어지면 '소멸'한다. 작은 사이클은 거기서 끝난다. 더 큰 사이클은 다시 '탄생'으로 이어진다. 2차원 그래프로 경제 그래프를 보면 재밌다. x축과 y축에 시간과 규모가 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표현할 방법을 고민해 왔다. 시공간을 기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해결하지 못한 숙제였다. 3, 4차원의 시공간을 평면에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천장 위에 붙어 있는 '파리'의 위치 계산하는 걸로, 인간은 시공간을 평면 위에 기록할 수 있게 됐다. 좌표평면이라는 개념이 들어선 것이다. 경제 사이클은 좌표 평면 위에서 위 아래를 그리며 나아간다. 다만, 그 관념은 16세기 수학자의 아이디어로 시작했을 뿐, 경제의 본질은 그것과 닮지 않았다. 경제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다. 마치 수축과 팽창을 하며 성장하는 것이 '심장'을 닮았고 '별'을 닮았다. 굳이 말하자면 위 아래로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부피'가 커져 간다.



조형의 기본 요소는 '점, 선, 면, 형'으로 이뤄졌다. 굳이 따지자면 경제는 '선'으로 표현된다. 다만 실제 그것은 '형'을 닮았다. 수축과 팽창을 번가르며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호흡을 닮았다. 종이 위에 죽은 어떤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닮았다. 지나온 흔적이 기록되는 것을 보면 나이테를 닮았다. 그 또한 생명을 닮았지만 여름과 겨울의 순환처럼 자연을 닮기도 했고, '보름달'과 '삭'이 번가르는 것 처럼 천문학을 닮았다. 경제 뿐만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미국을 세운 사람들은 대중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파벌과 이익집단의 경쟁을 일으킨다고 봤다. 대중정치가 쉽게 폭민정치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뭐든 탄생을 했다면, 성장하고 후퇴를 했다가 침체하기 마련이다. 와중 회복의 단계를 슬기롭게 넘기면 그것은 '퀀텀점프'한다. '소멸'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회복' 단계의 역할은 어느 주제에서나 필연적이다. 폭민정치가 소수의 침묵과 소외를 불러 일으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 정치는 선출을 통해 국정을 운영을 한다. 선거인단 혹은 권리장전과 같은 안정장치도 심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 독립선언문이나, 권리장전, 헌법에 '민주주의'라는 키워드가 언급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그 어디에도 '민주주의'는 언급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멸'로 이어지듯, 민주주의 또한 영원 불멸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도 '민주주의'가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것은 '저주' 처럼 들릴지만, 사실 모든 것은 그렇다. 영원한 일방향 성장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지난 1세기 우리를 성장시켜 왔던 주요 키워드 하나를 손꼽아 보면 '테일러주의'다. '테일러주의'는 철강회사에서 노동자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관리법이다. 노동자의 작업 범위와 동선, 움직임 등을 표준화하여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로써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테일러주의의 성공으로 미국은 '철강', '석유', '자동차' 산업을 기반으로 폭발적은 공급력을 갖게 됐다. 그것이 현대 우리 자본주의의 기반이다. 공급력을 해소시키기 위해 자본은 '광고'와 '마케팅'을 지독하게 성장시켰다. 턱 끝까지 차 있는 음식을 목구멍 깊숙히 더 밀어 넣고 이미 풍족한 옷을 마음에 들지 않게 했다. 불만족하게 하는 방법의 연구는 20세기 활발해 졌다. 포화된 육체를 넘어서 현대는 '영상'과 '정보'를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채워 넣는다. 육체가 포화에 이르자, 마케팅과 광고는 '정신'을 공략했다.



광고와 마케팅은 언제나 대중을 '불만스러운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이 더 불만족하고 더 탐욕스러우며, 더 혼란스러워야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새롭고 좋은 것을 구매했다. 소량품종 대량생산의 대명사인 포드가 자동차 업계 1인자로 있던 시기, 2인자 였던 '제너럴 모터스(GM)'은 새 광고 전략을 통해 업계 1위로 올라섰다. 그들은 "어떤 고객이든 자신이 원하는 색상의 자동차를 보유할 수 있습니다."라고 선전했다. 고객의 불만을 갈망으로 바꾼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산업은 이처럼 '표준화'하고 '획일화'하며,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나아갔다. 인간은 더 비인간적이며 '욕망'과 '번뇌'에 쉽게 휩쌓이는 피로도를 쌓았다. '산업' 또한 자연을 닮았다. 무한대 확장은 불가능하다. 극도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시기는 언젠가 저문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은 지금이야말로 '육체'와 '정신'이 모두 포화상태까지 와있다고 봤다. 경기 순환곡선처럼 이제 중요한 것은 '회복력 시대'를 어떻게 넘어서냐는 것이다. 탄생 후, 호황, 후퇴, 침체의 사이클을 넘고 '회복'의 단계에서 '퀀텀점프'를 하지 못하면 만물은 '소멸'로 이어진다. 그것은 '경제학'이 아니라, '우주적 규칙'이다. 에너지 낭비, 극단적인 효율성 강조, 지나친 표준화가 경제, 정치 뿐만 아니라, 적게는 개인의 자아, 크게는 자연까지 위협한다. 이제 올바른 회복력 시대를 분기점으로 우리가 새로운 도약을 할지 혹은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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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 by Rifkin, Jeremy.

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 - Kindle edition by Rifkin, Jeremy. Politics & Social Sciences Kindle eBooks @ Amaz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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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 
by Jeremy Rifkin (Author)
 Format: Kindle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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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dle from $18.04
Hardcover $15.99


A sweeping new interpretation of the history of civilization and a transformative vision of how our species will thrive on an unpredictable Earth.

The viruses keep coming, the climate is warming, and the Earth is rewilding. Our human family has no playbook to address the mayhem unfolding around us. If there is a change to reckon with, argues the renowned economic and social theorist Jeremy Rifkin, it’s that we are beginning to realize that
the human race never had dominion over the Earth and that nature is far more formidable than we thought, while our species seems much smaller and less significant in the bigger picture of life on Earth, undermining our long-cherished worldview. 
The Age of Progress, once considered sacrosanct, is on a deathwatch while a powerful new narrative, the Age of Resilience, is ascending.

In The Age of Resilience, Rifkin takes us on a new journey beginning with how we reconceptualize time and navigate space. During the Age of Progress, efficiency was the gold standard for organizing time, locking our species into the quest to optimize the expropriation, commodification, and consumption of the Earth’s bounty, at ever-greater speeds and in ever-shrinking time intervals, with the objective of increasing the opulence of human society, but at the expense of the depletion of nature. Space, observes Rifkin, became synonymous with passive natural resources, while a principal role of government and the economy was to manage nature as property. This long adhered to temporal-spatial orientation, writes Rifkin, has taken humanity to the commanding heights as the dominant species on Earth and to the ruin of the natural world.

In the emerging era, says Rifkin, efficiency is giving way to adaptivity as the all-encompassing temporal value while space is perceived as animated, self-organizing, and fluid. A younger generation, in turn, is pivoting from growth to flourishing, finance capital to ecological capital, productivity to regenerativity, Gross Domestic Product to Quality of Life Indicators, hyper-consumption to eco-stewardship, globalization to glocalization, geopolitics to biosphere politics, nation-state sovereignty to bioregional governance, and representative democracy to citizen assemblies and distributed peerocracy.

Future generations, suggests Rifkin, will likely experience existence less as objects and structures and more as patterns and processes and come to understand that each of us is literally an ecosystem made up of the microorganisms and elements that comprise the hydrosphere, lithosphere, atmosphere, and biosphere. The autonomous self of the Age of Progress is giving way to the ecological self of the Age of Resilience. The now worn scientific method that underwrote the Age of Progress is also falling by the wayside, making room for a new approach to science called Complex Adaptive Systems modeling. Likewise, detached reason is losing cachet while empathy and biophilia become the norm.

At a moment when the human family is deeply despairing of the future, Rifkin gives us a window into a promising new world and a radically different future that can bring us back into nature’s fold, giving life a second chance to flourish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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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y worshipping efficiency, we've managed to build an economic system that melted the Arctic. Jeremy Rifkin argues here that it's time to prioritize resilience instead...I defy anyone not to be fascinated and provoked by the vision he unfolds!" ―Bill McKibben, Climate Activist and Author 
--This text refers to an alternate kindle_edition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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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Jeremy Rifkin is president of 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 and the bestselling author of twenty-two books, including The Third Industrial Revolution,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 The Green New Deal, The End of Work, and The Empathic Civilization. The National Journal named Rifkin as one of 150 people in the U.S. that have the most influence in shaping federal government policy. He has also testified before numerous congressional committees. Since 1994, Mr. Rifkin has been a senior lecturer at the Wharton School’s Executive Education Program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Rifkin is ranked 123 in the WorldPost / HuffingtonPost 2015 global survey of “The World’s Most Influential Voices.” Rifkin has been an advisor to the leadership of the European Union since 2000. He also serves as an advisor to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is text refers to an alternate kindle_edition edition.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St. Martin's Press (November 1, 2022)
Print length ‏ : ‎ 320 pages


길희성 종교에서 영성에로 전환을 촉구한 세속인들의 사도 - 에큐메니안

종교에서 영성에로 전환을 촉구한 세속인들의 사도 - 에큐메니안


종교에서 영성에로 전환을 촉구한 세속인들의 사도가신이 길희성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 
승인 2023.09.11 



▲ 고 길희성 교수 ⓒ화면 갈무리


고(故) 길희성 교수는 길잃은 21세기 세속인들을 위한 구원의 사도

노학자 부부가 70대 이후 노년기에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를 팔아 
강화도에 심도학사(尋道學舍)라고 이름 붙인 ‘공부와 명상의 집’을 짓고, 
영성신학을 이끄시던 
종교신학계의 석학 길희성 교수가 9월 8일 새벽 80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필자는 그 분의 학자로서 일생과 종교인으로서의 헌신적인 실천적 삶을 우러러보면서 한국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는 깊은 관심과 조의를 표해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가신이 길희성 교수는 철학, 종교학, 신학을 두루 통섭한 우리 시대에 드문 대학자이셨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길희성 교수는 일찍이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신 후,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석사를 마친 후 하버드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서학문의 세계를 깊고 넓게 섭렵하셨다. 종교신학 전공학자로서 그가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된 이유이다. 생애 대부분을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교수와 은퇴 후 명예교수로서 봉직하면서 22권의 역작들을 생산하여 한국 사회에 쏟아내셨다.

길희성 교수는 인도철학, 불교사상, 가톨릭의 영성신학,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현대 개신교 신학에 정통하신 제1급의 학자이셨다. 그의 학문적 넓이와 깊이가 크고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주체적이고 창조적이어서 역설 같지만 한국 개신교 신학계는 그분의 학문적 열정과 열매를 도외시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폴 틸리히를 20세기 ‘지성인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에 비유하여 필자는 길희성 교수를 삶의 의미를 잃고 헤매는 ‘21세기 세속인들의 사도’라고 말하고 싶다.

현대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전환 시대”:
《마이스터 엑카르트 영성신학》과 《영적 휴머니즘》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22권의 자작물 중에서 2권을 추천하라면 필자는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과 《영적 휴머니즘》을 주저 없이 들고 싶다. 길희성 교수가 후반기에 특히 강조하는 점은, 현대는 전통적 종교가 큰 위력을 발휘하던 시대가 지났고 이제 영성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 종교에서 영성에로!>가 그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종교학자가 종교시대의 종언을 말한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 자가당착 아닌가?

물론 당분간 전통 기독교를 포함하여 기존의 세계적 종교들은 존속할 것이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제도적 종교들은 마치 금은 보석상자를 창고에 넣고 보존·관리하면서 현대인들에게 기념품을 팔거나 나누어주는 ‘종교 진리 박물관’이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종교기업체’같이 굳어졌다고 본다. 거기엔 샘솟는 듯한 생기와 역동성이 없다. 거룩한 경전, 교리 신조, 성직 질서, 교권과 정통 신학 체계가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점차로 종교 인구는 감소하고 다시 복원을 꿈꾸는 대형 집회 호시절은 쉽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이유가 코로나 팬데믹 같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겠지만,
길희성은 시대정신 자체가 종교를 넘어 영성에 관심이 있을 뿐이고 종교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대담한 시대감각을 갖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권의 대표적 책 중에서 앞의 책 《마이스터 엑카르트 영성사상》은 13세기 성 프란시스와 동시대 살았던 중세 후기 가톨릭 신학자요, 영성지도자요, 신비가이며 교회개혁자였던 엑카르트를 연구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중요시한 이유는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계는 물론이요, 현대사조 자체가 ‘신앙과 이성’의 분리 또는 갈등을 겪으며 각각 제 갈 길을 걷기 때문에, 세계관과 인간 이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특히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세계는 신을 잃었고 신은 세계를 잃었다. 새로운 자연과학의 발달과 인간 이성의 성숙함에 따라, 기존의 자연/초자연의 이중구조 세계관과 초월적 유신론 신관이 신뢰를 잃어간 것은 당연하지만, 무신론자가 되고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갖는 것이 무슨 큰 지식인들의 ‘전리품’이나 되는 양 착각하고 교만해진 결과는 오늘날 심각한 지구생명계의 종말 위협으로까지 곁길로 빠졌다고 길희성은 본다.

길희성 교수는 로마서 11장 31절 구절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11:31)는 성구를 기본 세계관 기초로 삼는다. 그것을 중세신비가 마이스터 엑하르는 “세계 만물이 신성(Gottheit)의 깊이로부터 출원(出願)하고 거기로 환원(還元)하며 창조주와 인간의 영성사이에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 일치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 창조론을 13세기 중세기 때에 이미 주장했던 것이다.

엑카르트 영성신학이 ‘돈과 권력’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주는 치유 처방전은 철저한 초탈, 초연, 자기비움의 영성이다. 소유의 욕망, 지식의 욕망, 의지의 욕망, 그리고 마침내 자기자신이 자기의 존재론적 주체라고 착각하는 존재의 욕망마저도 초탈하여야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엑카르트는 현대복음서 연구가들이 소위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고 강조하기 600년 전에, 이미 ‘역사적 예수’인 참사람 예수의 영성 알짬이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사람-참 하나님이시다“는 양성교리의 근거라고 갈파했다.

말씀의 성육신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한번만 일어난 특별 계시사건이 아니라, 우리들 모든 인간 안에서 만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보편적 성육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되어 일치를 이루시며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 같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자녀들이요 독생자들이라는 것이다.



▲ 김경재 명예교수는 22권에 이르는 길희성 교수의 책들 중 《마이스터 엑카르트 영성신학》과 《영적 휴머니즘》을 그의 역작으로 꼽았다.


《영적 휴머니즘》은 현대 세속적 문명비판서요 정통종교와 신학의 난재극복

위에서 필자가 추천한 길희성 교수 역작 중 둘째번 책은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마지막 저술작품 《영적 휴머니즘》이다. 이 책 안에서 우리는 길희성 교수의 모든 철학과 신학과 종교학의 결정체를 본다. 저자 길희성 교수는 이책을 저술하느라고 그야말로 온힘을 다해 집필하였기에 기력이 탈진되고 건강이 급속도로 약해져서 타계하신 것 아닐까라고 생각이 든다. 정신노동도 육체노동 만큼 인간의 기력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이 책 《영적 휴머니즘》은 21세기 이후 통과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새로운 인간과, 세계관, 신관을 제시하는 상당히 혁명적 저술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임마누엘 칸트가 계몽주의 시대 이성주의자들이 이성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것의 재판관인양 우쭐되던 것에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인식불가능하다고 제한했던 신에 관한 물음과 인간의 영혼과 영성에 관해서 다시 깊이 성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표현으로 하면 ‘형이상학적 진리’를 근대 이후 인간들은 포기하고, 인간의 수학적 이성에만 몰두하는 유물론적-생물학적 인간관에 갇혀버렸고, 자연은 ‘우연과 필연’으로 운동하는 기계같이 생각하였다. 보수신앙계 안에서는 이성, 진화론, 역사현실비판을 말하면 신앙의 탈선으로 간주하고, 과학과 종교 혹은 이성과 신앙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고 말았다. 맹목적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길희성 교수는 자신이 평생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과 종교적 영성가들을 연구한 결과, 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표현이야 다양하지만, 
시림은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형이상학적 진리’ 곧 생명과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의 뿌리인 
‘신 혹은 궁극적 실재’는 
존재론의 핵심이라는 것을 재발견하고 그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참 사람다운 삶, 영성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 삶을 살고간 예수 그리스도, 임재선사, 마이스터 엑카르트, 해월 최시형등을 대표적 사례로 들면서 그들을 눈여겨 보라고 현대인을 독려한다.

길희성 교수는 말한다:
영적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참 나는 가혹할 만큼 자기완성을 요구한다. … 세속적 휴머니즘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하기 어려운 높은 성인(聖人)의 경지를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


추모글을 쓰는 필자는 길희성 교수가 종교간 대화신학에 공헌한 학문적 공헌보다도 그 점이 더 중요한 주장이라고 느낀다. 이른바 라인홀드 니버 표현으로 말하면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원죄론과 구원교리’에 안주하면서, 타락 할 때로 타락해 있는줄도 느끼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비본래적 존재의 평범성’에 경종을 울린다. 
길희성 교수가 주고가는 마지막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루가 11:35)는 말씀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말씀이라고 본다.

 그가 평생 믿은 그대로 길희성 교수는
  •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다가, 
  •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으니

모든 근심걱정 내려놓으시고 ‘영원한 빛과 사랑의 세계’ 곧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시기를 빈다.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soombat1940@hanmail.net
===

이은선
4 h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9.12 화>
-길희성의 영적 휴매니즘과 한국 信學-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길희성 교수님이 추구하셨던 영적 휴매니즘의 의식에 
  • 현대 여성주의 의식이 포괄되고, 
  • 불교 신비주의보다 더욱 철저히 여기 지금의 일상과 살림의 영성을 추구하는 한국 신유교 전통의 개벽의식이 포괄되면 
어떤 모습의 새 인류세를 위한 믿음과 영성이 가능해질까요? 
'神學에서 信學으로'의 추구가 찾아나가는 길입니다.

Non-Theist Quakers | I asked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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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s post


Walter We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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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sked God to take away my habit. God said, no. It is not for me to take away but for you to give it up.
I asked God to heal my handicapped son. God said no. His spirit is whole his body is only temporary.
I asked God to give me patience but God said no. Patience is a by-product of tribulations. It isn't granted it is learned.
I asked God to give me happiness but God said no. I give you blessings happiness is up to you.
I asked God to spare me pain but God said no. Suffering draws you apart from worldly cares and brings you closer to me.
I asked God to make my spirit grow but God said no. You must grow on your own but I will prune you and make you fruitful.
I asked God for all things that I might enjoy life but God said no. I will give you life so you may enjoy all things.
I asked God to help me love others as He has loved me. God said ah, now you have the idea.
The day is yours don't throw it away.

Author unknown



Geoff Thomason

This still retains the belief in suffering as a virtue that is seen as a divine gift. Try telling that to the countless people for whom it has been used as an excuse to ignore their suffering. Some years ago a wonderful Friend who is no longer with us ended her ministry with 'Suffering is not a virtue!' Some of the finest words I've heard spoken in. Meeting.


Bryan Osborne

Geoff Thomason I nearly said Amen to that! For me the endless open ended "riddle" "enless loop" answers when clerics were caught out just did it for me alongside this mantra that we are born into sin. Connecting with other at our base human emotion has given me all the faith I need but it takes time to awaken. Something far too few of us seem to have for each other.

Katherine Lickley

This reminds me of one of the reasons I left charismatic evangelicalism. No more mind games trying to explain the sufferings heaped upon me and God's silence and therefore apparent lack of care for me as I gradually broke. I was having suicidal thoughts by the end. I'm so much happier and mentally healthier now.



Bryan Osborne

People ask me did I pray in the Army. I said for sure to absolutely no avail. The result being I have great faith in the inner spirit of humans so I try not to waste too much worldly time when helping people find their power as I have found mine.

The prayer.
Hello God, Hello God.. This is Bryan Over.......... 
Nothing Heard... OUT!


Sue White

If God says no to everything why do we need a god at all? Makes no sense

2023/09/11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 유영모" [1-10]

“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 NEW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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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의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의 맥락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 승인 2022.07.06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1)

몇 차례에 걸쳐 <성서와 문화>지에 다석 유영모(1890-1981)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지면을 허락하신 관계자분들께 감사하며 방대한 다석 사상의 핵심을 간추려 전달코자 노력할 것이다. 

다석 유영모

이번 첫 글에서는 다석을 ‘다석’ 되게 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을 살피고 필자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에 대해서 정리하겠다. 그간 필자는 고 김흥호 선생과 함께 펴낸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 2002)>>을 비롯하여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 <<빈탕한데 맞혀 놀이(동연 2011)>> 그리고 <<귀일신학(밀알북스 2020)>>등을 출판했고 다석학회 회원으로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아주경제>에서 단행본 출판을 목적하여 다석 연구자들 12명을 인터뷰했고 연구 동향을 취재했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올해 말 이 책이 출판되면 다석 유영모를 조망하는 다양한 시각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가 한국(서울대학교)서 열렸고 여기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몇 분이 세계적으로 공식화되었다. 불교의 원효와 지눌, 유교의 퇴계와 율곡 그리고 역사는 짧지만 다석 유영모와 그의 제자 함석헌이 세계가 인정하는 기독교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모의 무엇을 세계 철학계가 인정한 것인지를 물어야겠다. 다석(多夕)이란 말에서 보듯 유영모의 호는 저녁 석(夕)자가 세 개씩이나 겹쳐있다. 한 마디로 많은 저녁이란 뜻이다. 그의 사상이 밝은 대낮보다 어둔 밤을 선호, 중시했음을 적시한다. 이는 밤이 지닌 동양적 에토스 때문이었다. 지금껏 서구 기독교는 어둠을 이기는 빛의 종교로서 빛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악을 이기고 어둠을 극복하는 선을 대변했던 것이다. 이 빛은 곧 의식이기도 했다. 빛으로 만사가 드러나듯 일체를 분별, 판단하여 가치를 드러내는 기준이 바로 의식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서구는 의식을 앞세워 주체(동일)성의 철학을 탄생시켰고 그로써 세계 지배이데올로기를 정초했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사라질 때 비로소 장대한 우주, 서구가 보지 못한 존재의 여여성(如如性)이 드러날 수 있다. 이로부터 동양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했고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인 것을 역설해 왔다. 어둠, 곧 ‘텅 빔’ 속에 모든 것이 가득 찼으며 ‘있음이 곧 없음’ 이란 서구에 낯선 논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기껏해야 동일률과 모순율에 익숙한 서구로서는 배중률에 근거한 다석의 하느님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비롯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서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를 후술한 글에서 논할 수 있겠다. 김흥호가 다석 사상을 일컬어 ‘동양적 기독교’라 말했던바 서구 철학계의 평가는 이에 대한 긍정이자 인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도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그 혼자만의 창작물도 아닐 것이다. 앞선 이들의 영향사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녹여 자신 것으로 만든 치열한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다석 사상을 전후좌우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위로는 동학, 풍류, 천부경에 맥이 닿았고 옆으로는 신채호, 내촌, 톨스토이, 간디 등과 소통했고 아래로는 함석헌, 김흥호, 안병무, 박영호 등에게 영향을 주어 소위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길을 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다석 사상의 출처부터 서술하겠다. 정작 다석은 동학에 대한 말을 아꼈으나 필자는 양자의 관계성에 주목했다. 다석은 천부경을 오롯한 우리글로 번역할 만큼 이 책을 중시했다. 그 속에 인간을 중심에 둔 삼재사상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천부경의 생각은 다석과 동학의 핵심이자 풍류적 인간 이해의 본질에 속한다. 다석이 강조한 귀일(歸一) 개념도 결국 ’인중천지일‘의 뜻에서 찾아야 옳을 것이다. 물론 다석 스스로 이런 생각을 언술한 바 없다. 하지만 그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다석 사상은 동학을 기독교적으로 토착화시킨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최근 도올의 동학 연구가 출판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는 상황이다. 동경대전을 주해한 것인데 1. 2권의 각각의 부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코리안이다‘와 ’우리는 하느님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다석 역시 이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 그가 천부경을 중시하는 것은 삼재사상 때문이고 그것이 한글 창제의 원리, 특별히 모음(ㅡ, ㅣ, ㆍ)의 원리가 된 까닭이다. 다석에게 한글은 우리 민족을 하늘로 부르는 하늘의 소리(천문)이었는데 그 근거는 삼재에 대한 뜻풀이에 있다. 세상(ㅡ)을 뚫고 하늘(ㅣ)에 오를 때 고통 하는 소리, 아(ㆍ)를 십자가로 봤다. 인간 누구나가 하늘이고 고통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동학의 21자 주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늘을 품은 인간, ’시천주‘의 자각은 ’인중천지일‘의 다른 표현이자 삼재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후일 긴 논문을 통해 정교하게 밝힐 생각이다.

다석과 동시대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여기서는 다석 이후, 그의 영향 사 속에서 자기 소리를 내는 아래쪽 사람들, 즉 후학들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이렇듯 필자가 다석으로부터 이후의 영향사를 논하는 것은 선불교 바탕에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견줄 목적에서이다.

다석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상적 발전 속에서 앞서 말했듯이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기독교를 충분히 말할 여지가 있다. 일본뿐 아니라 서구와 변별된 토착적 기독교 사상을 여기서 찾을 일이다. 민중 신학도 의당 이 속에 포함될 수 있겠으나 그것으로 ‘다석 학파’의 기독교가 환원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고 봐야 옳겠다.

동학 시천주의 다석식 표현인 ‘바탈’(성)이 함석헌에게서 역사 속 ‘뜻’으로 해석되었고 김흥호는 그것을 동서를 아우르는 ‘실존’으로 표현했으며 박영호는 ‘얼 나’라는 이름하에 기독교 안팎을 넘나드는 개념으로 확대시킨 까닭이다. 안병무는 이를 씨알 민중이란 계급적 차원에서 이해했다.

이후 여러 신학자들이 이 개념을 부여잡고 나름 신학적 작업을 하고 있는바 이들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속성 차원에서 학파로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가톨릭 성서 신학자 정양모 신부도 이 반열에 서 있고 하이데거 연구자인 이기상 교수 역시 가톨릭을 배경 삼아 다석 언어관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이 모두는 <<대학>>의 ‘민(民)’ 개념을 ‘씨알’로 풀었던 다석의 본래 해석에 빚진 결과였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늘이 준 바탈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 그를 씨알로 명명했다. 물론 이들 간에도 상호 차이점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역사와 개인, 기독교와 이웃 종교, 동양과 서구, 개신교와 가톨릭, 각기 어디에 방점을 두는 가에 따라 다석을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학파 안에서의 발전적 동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향후 다석 학파의 기독교는 이런 지향성 하에서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다. 필자가 <<귀일신학>>을 펴내면서 펜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 사상이라 이름한 것도 민중 신학을 넘어 향후 영성 및 생태 신학을 위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되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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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多夕) 유영모가 품은 사상가들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7.20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2)

이번 호에는 다석에게 영향을 주었던 동시대 사상가 및 사조들에 대해 언급을 할 것이다. 앞선 글에서 다석의 영향사를 <<天符經(천부경)>>에 이르기까지 종적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다소 시차는 있지만 횡적 관계망 속에서 다석 사상을 조망할 생각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사상가라 할지라도 시대의 영향 없이 홀로 우뚝 설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 유영모에게 직간접적인 큰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들을 재차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신채호, 여준, 레오 톨스토이, 간디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 등. 이들 영향력이 날줄 씨줄로 엮이면서 다석사상, 곧 씨알철학이 생겨난 것이다. 혹시 이번 지면에 여백이 생긴다면 한글, 훈민정음에 대한 다석의 생각도 살펴볼 것이다. 역시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던바, 다석은 한글, 곧 훈민정음을 <<天符經(천부경)>>의 골자인 천지인 삼재론의 빛에서 뜻을 찾고 구했다. 목하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 한글은 다석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그가 뜻을 확대 재생산(창조)시키기도 했다. 그렇기에 향후 한류의 전개와 더불어 다석의 한글이해 또한 확산될 것을 소망한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는 다석에게 민족으로서의 ‘我(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대종교에 몸담고 상해 임정에도 참여했던 신채호는 후일 아나키스트로 평가받아 부정적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민족이해는 씨알 사상의 단초가 되었다. 

주지하듯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라 보았으나 그에게 ‘我(아)’는 고루한 민족주의 차원을 벗었고 약자의 우선성을 내포했다. 강대국들에 맞서 민족을 강조했으나 민족 안에서도 민중과 여성 등 약자는 항존했기에 이들을 ’아‘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다. 당시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비롯한 한국을 정복하는 현실에서 의당 민족이 강조되었을 뿐 ‘아’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항시 달리 표현될 수 있었다. 그가 일제가 주입한 민족 폄하사관, 소위 恨(한)의 민족사를 거부하고 강감찬, 을지문덕, 광개토왕 등의 민족 영웅들 역사, 영웅사관을 소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다석은 이런 기저 하에서 대종교가 중시하는 <<天符經(천부경)>>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순수 우리말로 이 책 81자를 풀어냈고 신채호의 ‘我(아)’를 ,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즉 후일 그의 핵심 사상이 된 歸一(귀일)의 본원 처로 확대 시킨 것이다. 

여준이란 분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산학교 시절 다석이 만났던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다.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던 그는 그곳에서 몽양 여운형의 친척인 여준을 만났고 그를 통해 불교 경전, 노자 <<道德經(도덕경)>> 등을 만나 읽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경전에 익숙했던 다석이었으나 여타 동양경전에 대해서는 배움이 없었던 터라 여준을 통해 자신의 사유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론을 주창했던 여운형 집안은 사실 동학교도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단양, 양평 등지에서 해월 최시형과 더불어 활동했던 분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후일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기까지 했지만 여준은 家學(가학)으로서 동양경전에 더욱 심취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다석이 동학의 중요성을 인지 못 한 것이 필자에게 여전히 의아스럽다.

다석의 사상 속에 당대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두 외국인이 있었다. 톨스토이와 간디가 그들이다. 주지하듯 톨스토이는 자신만의 바이블을 만들어 소위 비정통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 산상수훈이 그를 매료시킨 성서의 전부였고 실제로 그 정신대로 살고자 했다. 

다석이 특히 주목한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 제도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톨스토이의 부정적 생각이었다. 우선 神人(신인) 간의 중개자 개념을 부정한 것에 다석은 동의했다. 성직자들의 중개 없이 인간은 누구나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예수조차 중개, 대리자가 될 수 없다는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견해와 흡사했다. 이런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객사한 그의 장례식을 교회가 거부하기까지 했지만 살아생전 톨스토이는 산상수훈 정신만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역설했다. 다석이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비정통이라 여긴 것도 톨스토이 영향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제의 부정도 그를 가족들은 물론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은 큰 이유였다. 사후 자기 재산을 시민단체에 기부키로 한 결정을 두고 유족들과 시민사회가 갈등했다. 다석이 자기 재산을 동광원에 기부하며 생을 마감한 것도 이런 사건이 배경 되었다. 

성자로 불리는 간디는 자서전 제목을 ’My Life is my message’로 적을 만큼 삶과 사상의 일치를 꾀한 존재였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거룩한 길을 걸을 수 있음을 확신시켰다. 하지만 자기 삶이 메시지가 되기 위해 인간은 거듭 貪瞋痴(탐진치)와 씨름해야만 했다. 정통 기독교가 말하듯 원죄 상태로의 인간 탄생을 거부했으나 몸을 지닌 인간의 獸性(수성)을 거듭 떨쳐 낼 것을 강조한 것이다. 조혼 탓에 부친 죽음 앞에서도 성욕을 참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냈던 간디였지만 이후 다른 삶을 펼쳤고 영국 식민지에 대행했으나 비폭력의 방식으로 적대감을 이겨냈으며 하루 일식을 하며 소유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석이 일식과 解婚(해혼)을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은 것도 간디의 영향이 컸다. 다석에게는 이것이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더욱 신학화 되어갔다.

물리학 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 갔던 다석은 거기서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를 만났다. 이것은 이후 그의 제자들 - 예컨대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등 - 이 서로 정도차는 있었으나 무교회주의를 수용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본래 양명학에 심취했던 우찌무라는 기독교를 수용한 이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루터의 以信稱義(이신칭의) 사상을 수용했으나 일체 교회 제도는 부정했으며 일본식 기독교를 만들고자 했다. 루터 대속사상에 근거하여 기존 형식에 무관하게 성서를 읽었고 깨친 은혜를 갖고 일본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양정신에 몰두한 다석은 루터의 대속적 기독교를 수용키 어려웠다.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여겼던 것이다. 남의 생명을 먹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오히려 대속적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 스스로도 자신의 몸을 줄여(십자가) 마음을 확장시키는(부활) 방식으로 하늘과 하나 된 분으로 보았으며 그 예수가 우리 또한 그 길로 부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촉발한 비정통적 기독교가 우찌무라 간조를 경유하며 동양적 기독교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간디가 말했던 탐진치의 극복이 골자이자 관건이었다. 이에 더해 다석은 이웃을 침략하는 일본적 기독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김교신에 의해 가시화되었지만 다석 역시도 대속적 기독교 이상으로 일본적 기독교에 거부감을 표출했던 것이다. 다석이 <<천부경>> 속의 三才論(삼재론)에 기초하여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도모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訓民(훈민) 차원이 아니라 백성을 하늘로 이끄는 天文(천문)이라 했고 한글을 통해 가독교를 표현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지면 관계상 한글에 관한 다석의 설명은 다음 호의 주제로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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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소리’, 한글에 깃든 다석(多夕)의 사상
 뉴스M 편집부 승인 2022.08.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3)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다석은 한글을 ‘천문(天文)’, 곧 ‘하늘의 소리’라 하였다. 이것은 백성을 가르치는 소리, 훈민이라 언급했던 창제자 세종의 감각을 뛰어넘는 한글 이해라 할 것이다. 최근 한글을 자국어로 택한 소수민족도 있다고 들었다. 최근 BTS의 인기에 힘입어 세계인들이 한글 가사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으니 한글이 한류의 핵심이 될 미래를 기대해 본다. 감신대를 은퇴한 구약학자 방석종은 몇몇 음역 표기를 보충할 경우 한글이 세계 공용문자로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글이 사람을 하늘로 부르는 소리라면 그 뜻과 소리는 한국인에게만 독점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446년 한글 창제 반포일은 세계를 구원하는 날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다석이 어떤 이유로 한글을 천문이라 했을지 살필 일이다.


주지하듯 한글은 모음(母音)과 자음(子音)으로 구성되었다.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고 자음 즉 ‘아설순치후’의 다섯 소리는 오행(五行)론과 관계있다. 한마디로 삼재론과 음양오행론이 한글 창제의 원리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지인, 삼재가 어머니 소리이고 오행론으로 구성된 자음이 그의 소리를 쫓는 아들 소리란 점이다. 어미 소리를 듣고 그가 부르는 곳으로 따라갈 때 즉 모음과 자음이 옳게 만날 경우 정음(正音), 바른 소리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다석은 모음을 하늘소리, 일명 ‘계’ 소리라 했고 자음을 지금 여기서의 소리 ‘예’ 소리라 헸으며’ 소리가 ‘계’ 소리를 따를 때 그것을 ‘제’소리라 일컬었다. ‘제’ 소리가 정음, 바른 소리이자 구원의 길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글 창제 원리에 있어 삼재론이 의뜸이란 사실이다. 삼재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하 아래의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반도 내 백두대간을 중심하여 시베리아 북부까지 선을 그릴 때 그 오른쪽은 수렵 문화 지역이었고 반대편은 중국 농경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농경문화의 경우 빛의 있고 없음에 따른 음양 철학을 발전시켰고 삼재론은 짐승들의 목숨을 담보로 삶을 이어갔던 수렵문화를 배경 삼았다. 음양 철학이 오행의 관계철학으로 되었다면 삼재론은 ‘없음’을 우선하는 종교적 세계를 상상했던 것이다. 사냥 직전까지 작동한 생명력이 졸지에 사라진 그 현실에 주목한 결과다. 눈앞에 먹거리로 던져진 사체, 그 물질 보다 앞서 있던 생명력에 대한 경외가 수렵문화의 특징이자 삼재론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기본 철학은 삼재론 중심의 오행론 체계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고 체제를 담은 책이 바로 <<天符經천부경>>이었다. 이미 <<道德經도덕경>>을 순수 우리말로 번역했고 몇 개의 불경을 풀었지만 다석은 궁극, 최종적으로 <<천부경>> 또한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시적 세계(地지)속에 비가시적으로 현존 활동하는 하늘의 도(天천)를 인간(人인) 속에서 찾을 것을 삼재론을 갖고 역설한 책이 바로 <<천부경>>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다석이 말하는 ‘없이 있음’을 불교 혹은 노장사상의 영향이라 일컫지만 <<천부경>>까지 소급해야 옳다.

몸의 숨만 쉰다고 해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얼의 숨도 쉬어야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이제 한글 모음의 구성 원리로서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삼재론에 대한 다석의 풀이를 말해야겠다. 의당 <<천부경>>, 곧 ’없이 있음‘의 세계관의 토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탐진치로 만연되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대물림된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탐진치는 다석에게 기독교 원죄와도 같다. 이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이 인간 속에 감춰진 하늘 ’바탈‘ 이다. 이런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을 갖고 태어난 인간(l)은 그렇기에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를 존재이다. 인간이 여타 동물과 달리 직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인간 세상을 뚫고 하늘 본성을 따르기가 결코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인간(l), 그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순간, 세상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 그것이 십자가(+)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늘 뜻대로 하시라’는 예수의 절규가 터져 나온 시공간이다. 이 길은 인간이라면 가야 할 길이다. 누구에게도 ’대신’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예수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삼재, 즉 ‘-‘. ‘l' 그리고 ‘ㆍ'가 서로 만날 때 ’으이아‘ 즉 고통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것이 인간이자 인간의 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롯이 인간을 이렇게 부르는 보이지 않는 세계, ’계‘소리 덕분이다. ’계‘ 소리가 있기에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계‘소리에 ’예‘소리로 답하며 그것을 ’제‘소리로 만들라는 큰 뜻이 한글 속에 담겼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이다.

이처럼 삼재 사상은 인간을 하늘로 부르는 어미 소리로서 ’계‘의 세계에 속했다. 예수 역시 이 소리에 답한 존재이다. 그가 짊어진 십자가는 우리를 대속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다 우리 역시 ’길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이런 길이 우리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 은총이자 대속이라면 대속일 것이다. 

이렇듯 삼재론은 자음, 곧 ’예‘ 소리를 힘껏 추동하여 ’제‘소리로 이끈다. 다른 어떤 외국 언어에서도 찾을 수 없는 3단계 자음 변화가 바로 삼재론과 잇댄 사상적 열매인 까닭이다. 예컨대 ’ㅁ ㅂ ㅍ‘, ’ㅅ ㅈ ㅊ’을 다석은 물음, 부름, 푸름, ‘삶, 잠, 참’으로 풀었다. 삶의 물음을 꽉 물고 불려서 풀어내라는 뜻이고 삶은 죽음(잠)을 통해서만 진실(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가르쳤다. ‘목숨’, ‘말숨’ 그리고 ‘얼숨’이 바로 이런 뜻을 담았다. 몸의 숨만 쉰다고 해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얼의 숨도 쉬어야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선상에서 다석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풀어내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한글에 상형문자인 한문 이상으로 뜻을 부여했던 것이다. 농사를 ’열음 질‘,즉 열매를 맺는 일로 풀었고, ’얼굴(골)‘을 하늘로부터 받은 얼의 골짜기라 했으며 사람을 하늘에서 받은 바탈을 불사르는 존재란 뜻으로 이해했다. 꽁문이와 꼭대기의 풀이도 흥미롭다. 아랫도리(항문)를 꼭 물어 단단히 조여야 하늘에 꼭 대일(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석은 한글이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천문이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한글로 신학 하기‘란 긴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다석은 지금 사용치 않은 꼭지 없는 히읗 등 한글 4자 역시 되살렸고 그를 통해 뜻을 만들고자 하였다. 동시에 표준어 사용 탓에 사라진 지방 언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사투리가 그저 변방언어가 아니라 뜻이 담긴 언어인 것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은 하이데거가 말대로 한글을 우리 민족의 존재의 집으로 본 것이 틀림없다. 한글을 하늘이 준 소리라 믿고 우리 인간을 ’없이 있는‘ 그 세계로 이끌고자 했던 다석의 노력이 참으로 귀하다. 

다음 호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다석 사상을 서구사상과 견줘 풀어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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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8.1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4): 다석의 신론

이번 글에서는 다석의 하느님 이해, 곧 그의 신관을 살펴보겠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다석은 '있음'보다 '없음'을, 빛보다는 어둠을 우선시했다. 많은 저녁(밤)을 뜻하는 다석이란 이름 속에 이런 의미가 담겼다. 이는 서구 기독교나 그쪽 철학 사상과 견줄 때 대단히 낯설다. 하지만 다석은 이를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란 말이 적시하듯 없음과 있음은 결코 양자택일적이지 않다. ‘없음이 곧 있음'이고 ‘빛이 곧 어둠’이란 것은 서구 논리들, 동일률이나 배중률로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적시하는 다석의 예를 소개한다.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핀 꽃을 보며 좋아하나 정작 나무와 꽃을 가능케 하는 허공을 보지 못하다는 것이다. 허공 없이는 나무도 꽃도 존재할 수 없다. 허공(무)이 우선이나 나무나 꽃과 둘일 수 없다(不二불이)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다. 이 점에서 다석의 신론은 ’무위적 유위‘를 말하는 노자의 도,현상과 실재의 궁극적 일치(“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를 말하는 불교적 공(sunjata) 사상과도 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다석의 하느님 이해가 이들 사상과 변별되는 지점 또한 없지 않다. 신적 초월성과 인간의 의지가 이들에 비해 강조된 까닭이다. 초월성은 대종교의 경전이 된 <<천부경>>의 영향이겠고, 인간 의지는 유교적 토양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통섭하여 다석은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룬 예수를 설명했다. 인습적 기독교를 떠났지만 예수 없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속적 죽음으로 예수를 의미화하는 기성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는 다음 호에서 설명할 것이다.

얼마 전 <<없이 계신 하느님- 절대자에 대해 동양적으로 사유하기>>란 책이 동연에서 출판되었다. 성공회 윤정현 신부가 영국 버밍햄 대학에서 썼던 다석 관련 최초의 박사 논문이다. 2003년에 제출한 논문을 거의 20년 만에 한국어로 재탄생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좋은 자료라 생각하며 일독하면 좋을 책이다. 서구인들에게 하느님을 논하는 다른(동양) 논리가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석 신론의 논리적 전거를 밝히는 일에 주력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한정된 지면을 통해 다석 신론의 속성과 의미 등에 초점을 두고 살필 것이다. 다시 후술하겠으나 다석이 즐겨 사용하는 ‘귀일’(歸一)이라는 말뜻도 소개하겠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없이 있는 하느님, 도대체 이 말뜻은 무엇인가?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없음을 강조하고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있음'을 말하는 다석의 신관은 서구 기독교적 사유, 교리체계에 안주한 사람들에게는 많이 낯설고 난해할 것이다. 다석 신관의 구조와 의미는 <천부경>의 한 구절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말 속에 모두 담겼다. 높이 계신 하느님이 육신을 지닌 인간 속에 내주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 자체가 초월의 내주라는 뜻이다.

가톨릭 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초월을 초월한 것이 땅 중의 땅인 ‘인간’이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독생자가 될 수 있다. 다음 호 주제지만 예수만이 초월적 육화일 수 없다고 봤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초월)을 ‘받’아 몸속에 모신 존재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석이 즐겨 쓰는 용어로- '바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탈은 ‘받 할’, 즉 위로부터 ‘받’아 ‘할’ 것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받 할’을 자음 접변하여 읽으면 '바탈'이 된다.

이 '바탈'은 유교의 경우 본연지성이겠고 불교에는 불성일 것이며 동학은 인내천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 ’독생자‘로 언표될 수 있다. 이는 모두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살아야 할 인간의 공통된 모습들이다. 인간에게 얼굴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얼굴은 내면의 '바탈'이 드러나는 얼의 골짜기인 까닭이다. 따라서 하늘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없이 있는’ 하느님의 실상이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이때 바탈은 얼이자 성령이라 말 할 수 있다. 봐도 보이지 않는 비실체적 존재인 까닭이다. 초월의 내주로서 이것은 본디 초월성을 인정치 않는 불교나 노장사상과는 조금 달랐다. 이들 종교들은 세상 ‘밖’을 인정치 않았으나(0도=360도의 세계관) 다석은 ‘밖’을 중시했으니 말이다. 물론 ’밖’을 실체로 여겼던 기독교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로써 다석은 모든 종교가 저마다의 '바탈'의 실현을 통해 온통 하나가 되길 바랐다. 종교가 하나 되는 것을 통해 세상 전체가 바르게 될 것을 희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일사상(신학)의 핵심이자 골자였다. 한마디로 인간 마음이 곧 빈탕이신(없이 계신) 하느님과 같음을 알라는 것이다.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할 일이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해왔던 신적 보편성의 실상이다. 여성 신학자 이은선의 말을 빌리자면 성’(聖)의 평범성’일 것이다.

이런 보편성에 이르려면 인간은 거듭 자신의 탐진치를 축소시켜내야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둘이 아닌 것을 알 때 가능하다. 자신의 삶도 하느님 존재가 그렇듯이 없이 있듯이- 빈탕한데 맞혀서-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인간은 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느님처럼 없이 있지 못하며 늘상 덜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을 뿐이다. 바탈이 하늘인 것을 잊었기에, 둘 사이에 분리가 발생한 탓에 없음은 실종되고 견물생심을 일으키는 '있음'의 세계에 미혹된 탓이다. 따라서 ’덜‘ 없기에 더럽게 된 것이 인간의 실상, 곧 죄(인)라 할 것이다. 그럴수록 덜 없는 인간을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 이끄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다석은 ‘목숨’, ‘말 숨’ 그리고 ‘얼 숨’을 순차적으로 구별하며 강조했다. 탐진치에 속한 인간이 목숨, 곧 육체의 숨을 쉬는 반면에 이를 벗고자 애쓰는 존재를 일컬어 '말 숨’을 쉰다고 했다. 종교들의 가르침이 곧 ‘말 숨’인 셈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은 ‘얼 숨’에 달렸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이다. 세상이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과 땅이 인간 속에서 하나가 된 상태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뭇 종교는 자신들 가르침을 절대화시키는 누로부터 해방되어야 마땅하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회통시켜 하나에로 이끄는 ‘영(성령)’인 까닭이다. 이 주제는 인간론과 귀일사상을 논하는 지면에서 재차 다룰 것인바 여기서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겠다.

주지하듯 서구 신학은 그간 ‘비신화화’(불트만), ‘비종교화’(본회퍼), 그리고 ‘비케리그마화’(부리)라는 신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성 기독교의 틀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비신화화가 서구 전통 내에서 메시지의 시간적 차이를 극복한 경우라면 비종교화는 기독교 메시지를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시킨 차원일 것이다. 이에 반해 비케리그마화는 기독교 메시지가 공간 차에 따라 달리 의미화 될 수 있다는 신학적 견해다.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은 이 점에서 비케리그마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말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논할 예수에 대한 이해 역시 신앙의 그리스도와도 다르고 역사적 예수상과도 크게 변별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각각의 공간적 풍토에 따라 케리그마가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비케리그마화가 다석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그 신학적 배경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글 말미에 사족처럼 덧붙였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이해된 다석의 예수상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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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길이 되라"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9.0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5): 다석의 예수 이해

다석의 하느님 이해 –없이 계신 이- 가 서구사고에서 낯설 듯이 그의 예수론 또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틀에서 많이 빗겨나 있다.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서구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대속론을 전혀 달리 해석했던 까닭이다. 이는 인간이 탄생 시부터 죄를 품었다는 원죄론에 대한 부정과 맥을 같이 한다.

최근 서구에서 적극 논의 되는 바, 원죄보다는 원은총(Original biessing)을 강조하는 편이다. 물론 다석도 인간 죄성을 인정했다. 인간 몸의 속성(기질)과 연관된 貪嗔痴(탐진치) 즉 욕심내고, 분노하고 치정에 얽힌 인간 삶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 삶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들어 왔는지를 절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白死千難(백사천난)의 수행과정 속에서 인간이 극복할 일이지 누군가에 의한 속죄의 대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점에서 다석은 톨스토이에 잇대어 자신의 기독교를 스스로 ’비정통‘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비정통이란 말은 ’동양적‘이란 말과 뜻이 다르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예수의 유일성을 보편화 시켰다. 앞서 본대로 聖(성)의 보편성을 뜻한다. 예수만이 하늘의 독생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저마다 하늘의 독생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없이 게신 이가 인간 속에 바탈(본성)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참을 그리워하고 참에 이르고자 애써야 할 존재이다. 다석은 이런 존재를 ’얼‘ 혹은 ’얼나‘라고 불렀다. 성령의 동양적 표현일 것이다. 비록 탐진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를 이길 수 있는 힘, 곧 하늘로부터 ’받‘아서 ’할‘ 것(바탈)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속알‘로서의 ’얼‘이다. 이점에서 예수가 독생자 듯이 우리 또한 독생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독생자인 것, 곧 자신의 ’얼‘을 믿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옳다.

이점에서 예수와 우리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없다. 하지만 예수와 우리 간의 구별(차이) 또한 없을 수 없다. 일상 속 우리와 다르게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석은 이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탈각시켰다. 그에게 십자가란 몸(탐진치)를 지닌 예수가 ’자기 뜻 버려 하늘 뜻‘ 구한(이룬) 지난한 수행의 꽃이자 열매였다. 그렇기에 다석은 종종 십자가와 부활을 ’몸 줄여 마음을 크게 만드는 일‘이라 풀었다. 탐진치라는 한계이자 제약을 스스로 해결한 존재, 그가 바로 예수였다는 것이다. 하늘 뜻에 따라 맛을 추구했던 자신의 삶(몸)을 이겨 하늘로 솟난 존재가 되었다. 이런 예수를 길이라 믿고 따르다 우리 역시 길 되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목표이자 이룰 과제이다. 이를 대속과 대별되는 일종의 ’자속‘사상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를 걸머진 예수가 없다면 우리 갈 길도 분명치 않았을 것이다. 이점에서 예수가 갔던 길, 십자가는 그 자체로 은총이자 대속의 또 다른 의미라 하겠다. 길을 걸었던 사람이 앞서 있다는 것 이것이 구원이자 희망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던 바, 이를 우리는 스승 기독론이라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다석 자신도 유불선 모두가 하늘로부터 받을 것은 다 받은 종교이지만 자신의 스승은 오로지 예수뿐이라 말했다. 피한방울을 나누지 않았으나 부모, 자식 지간보다 더 가깝고 무제약적인 존재, 그가 바로 동양적 의미에서 스승이다. 스승, 길을 간 사람이 앞서 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불교와 기독교 대화에 전념하는 교토학파의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예수이해를 다석 사상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토학파의 경우 신과 인간의 접촉에 주목했다. ’신이 우리와 늘 상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 개념을 불교의 ’불성‘과 연계 시킨 것이다. 인간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과 신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같이 보았다. 하지만 이를 ’일차적 접촉‘이라 보고 진일보된 견해를 피력한 이도 있다. 예수의 경우 임마누엘에 만족치 않고 그 스스로 신이 된 ’이차적 접촉‘을 이뤘다는 것이다. 일견할 때 이들의 일차, 이차 접촉은 각기 다석의 ’얼‘ 사상과 스승 예수 이해와 유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교토학파의 경우 예수의 이차 접촉을 각(깨달음), 곧 돈오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다석과 달리 곧 자신 속 獸性(수성)과의 백사천난의 투쟁 차원을 간과했던 것이다. 다석의 시각에서 볼 때 의지의 결핍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토학파와 견줄 때 다석이 불교만큼이나 유교를 중시했던 까닭이다.

반면 역사적 예수 연구는 기존의 교리화된 대속사상을 깨는 측면에서 다석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역사적 연구가 예수의 비유, 어록에 초점을 두는 까닭에 예수는 교회가 고백하듯 결코 대속주가 될 수 없다. 그의 죽음보다 삶이 강조된 까닭이다. 하지만 다석과 비교시 역사적 예수연구도 문제가 없지 않다. 역사 연구는 역사적 예수가 오늘을 사는 우리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 하지 못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 정작 그와 우리의 관계설정을 방해한 탓이다. 역사적 예수는 기존의 교리적 고백적 차원이 전제될 때만 유의미하다. 하지만 다석은 예수나 우리가 같은 바탈(얼)을 지녔다고 봤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의 난점을 극복했다. 모두가 하늘의 독생자란 사실, 없이 계신이의 존재근거란 것을 통해 우리와 예수를 관계시켰다. 반면 역사적 예수에게 얼 기독론은 매우 낯설 수밖에 없다. 바탈(얼)의 힘으로 길가다 길 되신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며 우리 역시 길 되는 것이 스승기독론의 요체이다. 결국 다석 사상은 교토학파를 스승 기독론으로, 역사적 예수연구를 얼 기독론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었다.

다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실컷‘과 ’대충‘이란 두 말이었다.  예수와 같은 ’그이‘가 되고자 한다면 이 두 말과 멀리해야 옳다.

이런 다석의 예수론은 신론에서 언급한 바처럼 비케리그마화의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다. 성서 속 예수 상이 다석에 이르러 동양적으로 재해석(구성)된 까닭이다. 예수가 ’없이 계신 이‘의 삶을 체화시켰다면 서구적 신관에서 비롯한 예수이해와 변별되는 것이 당연하다. 앞서 봤듯이 전통적으로 대속적 구세주가 대세였고 역사적 예수연구는 제국 체제에 저항하는 지혜자 내지 혁명가로 예수를 각인시킨 반면 다석은 비정통적, 동양적 예수 상, 즉 수행적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경우 수행이라 해서 사적, 개인적 차원만 생각할 수 없다. 탐진치는 개인적 차원의 수성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탐욕, 사실을 왜곡하는 저널리즘 그리고 N 번방사태가 말하듯 사회의 구조적 차원까지 적시한다. 후술하겠지만 기후붕괴와 구조적 불평등 사회에서 탐진치와의 싸움은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여기서 다석은 전통적인 대속 사상을 동학의 '侍’(모심), 불교의 ’緣起‘(연기)와 같은 차원에서 풀어냈다.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일상사가 곧 대속이란 것이다. 종교로서의 대속, 그 의미를 한껏 확장시킨 결과였다. 이는 세상에 관계 아닌 것이 없고, 이것과 저것이 상호적으로 발생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말한 생명 외경론도 같은 맥락이겠다. 그럴수록 남의 생명(삶의 의지)을 적게 탐하는 일이 중요하다. 단순하게 사는 삶이 몸 줄여 마음 넓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남의 생명대신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삶이 수행이고, 자속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기독론의 본질이다.

다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실컷‘과 ’대충‘이란 두 말이었다. 실컷 먹고 대충 사는 것을 복이라 여기며 맛을 추구하며 산다. 길을 가다가 길 되려면, 즉 예수와 같은 ’그이‘가 되고자 한다면 이 두 말과 멀리해야 옳다. 이것은 ’자기 몸을 산제사로 바치라‘는 성서 언어와 지극히 대치된다. 그러려면 종교를 통해 복 받는 일과 효용을 얻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옳다. 하지만 대속적 기독론이 가져온 폐해가 너무 크다. 종교개혁이 말한 3개의 ’오직’(Only)교리가 자본주의 체제- 탐진치-를 유지, 존속, 확대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이점에서 다석의 수행적 기독론은 탐욕에 젖은 병든 기독교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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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 놀이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9.17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6): 다석의 인간 이해

다석의 인간론을 쓰려하니 이미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에서 기독론- 예수이해 –이 인간 문제 해결을 위한 궁극적인 상수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다석의 경우 인간을 예수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기독론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교리로 여기지 않은 결과였다. 예수처럼 인간도 ‘빈탕(없이 있음)’의 독생자로 여겼을 뿐이다. 이웃 종교들도 하늘로부터 받을 것은 모두 다 받았다 했으니 기독교든 불교든 인간 이해에 있어 종교 간 차이도 없다.

지난 세월 형성된 서구 기독교의 두 유형, 가톨릭과 개신교의 두 신학원리들- 존재유비(Analogia entis)와 신앙유비(Analogia fidei)–에 의지해서 다석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선험적 죄 성 자체가 부정되었기에 유비(가톨릭)나 역설(개신교)의 논리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각성은 서구 어느 것보다 깊다하겠다.

이점에서 이 글 제목이 ‘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놀이’로 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본대로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이다. 인간이 하느님 형상이라면 그 역시 ‘없이 있어야 할’ 존재여야만 했다. 하지만 인간 속 獸性(수성), 탐진치로 인해 인간의 현존은 ‘덜 없는’ 상태에 놓였다. 한마디로 소유, 욕망 지향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없음의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 상태, 곧 ‘덜 없음’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러움’이 된다. 더러움은 깨끗함의 반대어로서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때 더러움은 서구 기독교가 말했던 원죄와는 많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없이 있는 존재, ‘바탈’로서 세상에 태어났던 까닭이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 바탈(얼)로서, 좀 더 넓게 화장시켜 말하자면 세상을 가득채운 영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그렇듯이 하느님과 세상도 이점에서 不二(불이)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설명을 독점해온 서구 기독교로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탐진치 탓에 더러워진 인간은 자신을 깨끗게 하면 된다. 어기서 ‘깨끗’은 거룩을 표현하는 다석 고유한 언어로서 한번 ‘깨’어져서 ‘끝’을 보라는 뜻을 지녔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 속 바탈에 의지하여 깨끗의 과정을 통해 ‘없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늘 계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처럼 너희도 거룩 하라는 성서말씀의 본뜻이라 여겼다. 김흥호는 다석의 경우 인습화된 언어 ‘거룩’ 보다 ‘깨끗’이란 말을 더 선호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없음’과 ‘있음’에 따른 인간이해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주지하듯 기독교는 영혼을 자신의 육체보다 절대 우월하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곧잘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형상과 등가로 여긴 것이다. 여타 피조물과 견줘 인간은 월등히 우월한 존재로 봤다.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유색인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로 확장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토미즘 신학의 역할 탓이었다. 식물은 生魂(생혼)만을, 동물의 경우 생혼과 覺魂(각혼)을 그리고 인간은 이에 더해 靈魂(영혼)을 지녔다고 가르친 것이다. 생혼과 각혼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지만 영혼만큼은 지속하기에 신적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몸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죽음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최근 場(장, Field)이론을 근거로 인간 본질인 영혼이 달리 설명되는 추세이다. 몸속에 영혼이 있지 않고 영혼 속에 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과학적 개념인 장(Field)과 호환될 수 있는 바, 영이라 불러도 좋고 ‘온생명’이란 말도 낯설지 않다. 거대한 생명공간으로서의 장(영)안에서 개체는 전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차별 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를 ‘새로운 애니미즘’(New Animism)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 때 영, 혹은 장은 다석이 말한 ‘빈탕’ 곧 ‘없음’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허공이 곧 있음의 근거였던 까닭이다. 텅빈 곳에 영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유교의 경우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었고 불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언표 되었으며 기독교의 하느님을 ‘없이 계신 이’로 부른 이유였다. 이처럼 하느님 영이 줄 곧 우리와 더불어 있었기에 다석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 한시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었기에 누가 누구에게 베풀 수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다석이 성리학의 인식론, 격물(格物)을 盡物性(진물성)이라 달리 표현한 것에 주목한다. 격물은 만물이 동일한 理(이)를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理(이)가 사물의 이치와 교감하다가 어느 순간 주객의 일치가 이뤄진다는 성리학의 으뜸 개념이다. 다석은 이를 ‘진물성’으로 재 개념화 시켜 사물과 인간 본성 간 간격이 사라진 하나 된 상태를 더욱 강조했다. 경물에서 보듯 사물을 대상화 시키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물성과의 일치를 역설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주희의 理學(이학)이 아닌 왕양명의 心學(심학)과 유사하다.

동학에서 말하는 내 마음이 곧 네(그)마음이라는 ‘吾心卽汝心’(오심즉여심)의 경지라고 말해도 좋다. 사실 동학이 敬天(경천), 敬人(경인)을 넘어 敬物(경물)을 강조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였다. 하지만 다석의 ‘진물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物(물)을 존경한다는 말 속에서 지행합일의 경지를 살폈다. 예컨대 닭을 마음에 품고 귀하게 생각했다면(경물) 사람은 새벽닭이 그렇듯이 부지런한 닭의 성질까지 닮아야 했던 것이다. 닭처럼 부지런한 존재가 되는 것이 진물성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이런 논의는 결국 ‘덜 없어’ 더러워진 존재, 탐진치에 찌든 인간을 치유, 해방 시킬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존재하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땅으로부터 하늘로 솟난 길이었듯이 우리 역시 솟난 존재가 되길 바라서였다. 누구든지 자기 몸을 제물삼아야(자속) 가능한 일이다.

다석의 십자가는 이렇듯 ‘덜 없는’ 인간이 ‘없이 계신 이’와 하나 되는 길을 적시한다. 이것이 단적으로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즉 사람 또는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주지하듯 ‘덜 없는’ 인간은 뭇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견물생심의 존재이다. 그럴수록 사물의 본성을 알고 그와 하나 되면 자기 마음을 지킬 것을 역설했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각성은 자연과의 동근원성을 말하는 지점까지 확장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몸성히(목숨), 마음놓이(말숨)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바탈(얼숨)을 실현시킨 ‘바탈태우’의 경지라 할 것이다.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이 아니라 스스로를 태워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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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있음의 존재론과 생태학   이정배 교수 승인 2022.10.04 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7): 기후붕괴 시대의 다석 사상

지난 장에서 우리는 견물생심에 반하는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물건을 보고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논했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현실과 맞서는 주체적 인간태도를 다석의 말로 표현한 것이다. 주지하듯 홀로세 말기의 지구생태계가 자본주의 폐해로 기후붕괴시대에 접어들었다. 물건에 마음이 홀려 인류가 욕망 덩어리로 살 경우 2050년 거주 불가능한 지구가 될 것이란 경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자연의 질적 파괴가 임계점을 넘어선 탓이다.

이런 난제를 해결키 위해 기독교 내부에서 여러 형태의 생태신학이 등장했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등장했고 신론의 모형변이, 곧 어머니 하느님 이란 말도 회자되었다. 기독교내부의 뿌리은유-하느님, 그리스도 등-들을 생태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연과 관계하는 인간의 태도를 바꿀 목적에서였다. 일리가 없지 않으나 이들 경우는 여전히 ‘있음’의 표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전 인류의 생태적 회심을 위해 다석이 말했던 ‘없음’의 존재론적 차원을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없이 있는 하느님을 닮은 ‘없이 있는 인간’이 될 때 자연 역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달리 말하자면 인간위주의 도구적 관점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론적 관점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점에서 ‘없이 있는 하느님’은 생태학적 회심의 전거라 말할 수 있겠다.

  다석 신론의 요체인 ‘없이 있음’이란 말은 서구 주류 담론 어느 것으로도 해명될 수 없었다. ‘없음’을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초월적 근거이자 전체로 봤던 까닭이다. 더욱이 이것이 인간 속에 바탈- 받아서 할 것-로서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인간 역시 하느님처럼 없이 있어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빈탕의 자녀인 인간은 자연을 욕망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성찰해야 옳다. <다석 일지> 곳곳에 누차 언급 되었던 바,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旣成佛’(기성불)이었다. 우주만물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 속성을 우주 만물 속에서 찾았다는 말을 누차 남겼다. 반면 인간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未成佛(미성불)상태로 있다. 자신을 없이 있는 존재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망을 지닌 몸으로서의 존재, 탐진치의 삶을 벗겨내지 못한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생태적 위기극복은 緣木求魚(연목구어)이고 생태적 회심은 言語道斷(언어도단)일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다석은 성령이란 말로 ‘없이 계신 하느님’과 인간의 ‘바탈’을 상호 소통시키고자 했다. 우주를 지속시키는 ‘하나’이자 자기 속의 ‘바탈’로서의 영을 우주 만물 속에서 봤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속에 깃든 영을 찾는 것 역시 인간의 할 일로 여겼다. 지난 장에서 언급한 ‘盡物性’(진물성)이란 말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는 사물(자연)의 본성과 인간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상태를 일컫는 바, 몸나(개체존재)의 극복을 전제한다. 절대생명인 ‘하나’와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바탈을 태울 때(바탈태우) 가능하다. 목숨만이 아니라 말(얼) 숨을 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인간이 져야할 십자가라 했으며 이로써 누구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자신의 바탈을 태우는 것을 십자가로 본 것이다.

다석은 예수 십자가를 ‘一坐食 一言仁’(일좌식일언인)이란 말로 다시 풀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했듯이’ 자기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란 말뜻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다석에게서 ‘몸 줄여 마음 늘리는 일’로 재구성된 결과였다. “쌀 한 알을 심어 천 알, 만 알 수학하는 것도 이득이지만 斷食(色)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 아들(그리스도)로 변하는 이득이 더 크다”는 그의 말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몸나가 이웃과 자연을 해치는 탐욕스런 자아이듯 말 숨 쉬는 참(얼)나는 우주만물과 하나 된 존재를 적시한다.

다석은 우주만물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禮’(예)라 했고 그것을 ‘알맞음’(中庸)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렇기에 참 나는 생태적 자아, 곧 생태적 회심을 이룬 존재라 말해도 좋겠다. 이런 차원에서 다석은 대속교리를 다음처럼 생태적으로 풀어냈다. “내가 먹는 낱알과 체소가 나의 생명을 위해 희생되어 힘을 내게 대속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입니다.” 등. 그렇기에 앞서 말한 ‘盡物性’(진물성)은 우주만물을 성례전적 대속 제물로 이해하기위한 전거였다. 대속하는 물질(자연)의 본성을 옳게 알아야 인간 역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닭고기를 먹으면 닭처럼 일찍 깨어 기도하고 일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 생명에 대한 보답이라 여긴 것이다. 한마디로 맛으로, 욕망으로 먹지 말고 뜻으로 살자는 것이다. ‘일좌식, 일언인’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를 ‘단식’과 ‘단색’으로 줄여 말해도 좋다. 

 一食(일식), 혹은 단식은 見物生心(견물생심)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남의 생명을 탐하지 말고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라는 것이다. 남의 생명 소중함을 깨달아 자기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였다.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제물로 삼는 일식은 일종의 ’자기 비움‘으로서 인간을 생태적으로 재 주체화시킬 수 있다. 기후붕괴를 여실히 경험 중인 21세기의 화두가 평등도 자유도 아닌 단순성(Simplicity), 곧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일인 것도 일식의 뜻과 무관치 않다.

性(성)의 문제 역시 생태적으로 중요하다. 인류 존속을 위해 필요하겠으나 절제 없어 몸을 망치는 일들로 세상이 시끄럽다. 생존을 위해 살생하고 교미하는 동물과 인간이 같을 수 없다. 자연이 무너지듯 자기 몸을 해하는 욕망은 인간이 失性(실성)했다는 반증이다. 그럴수록 다석은 ’夫婦有別‘(부부유별)을 강조했다. 다석의 , 解婚(해혼)즉 부부로 살되 남녀로 사는 관계를 끊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성에 있어서도 금욕이 필요한 시대가 된 까닭이다. OECD 국가 중에서 포르노 문화가 가장 센 나라가 한국이란 사실이 많이 부끄럽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놓이고 자신의 바탈을 불사를 수 있다. 앞전에서 말한 꽁문이와 꼭대기란 말을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다석은 남녀문제를 해결한 존재를 일컬어 ’마음 씻어난 이‘라 불렀다. 

  결국  일식과 단색은 없이 있는 하느님과 하나 되려는 인간의 수행이다. 빈탕한데 맞혀 놀아야 할 종교적 삶의 본질인 셈이다. 다석은 이를 自贖(자속)의 길이라 했다. 빈탕의 큰 하나를 모르면 탐진치의 지배를 벗을 길이 없다. 탕자처럼 매순간 몸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석은 거듭 강조한다.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꽃을 꽃 되게 하는 것이 빈탕인 한 이것은 소유대상일 수 없다. 꽃만 볼 때 그것은 꺾고 싶고 갖고 싶은 물질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서구 생태학적 위기의 본질이다.

빈탕을 알아야 맛이 아닌 뜻을 따라 살 수 있다. 있음이 아니라 없음에 걸맞게 살자는 것이다. 덜 없어 더러운 인간 삶을 끝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없음에 근거한 생태학적 회심 이것이 자신과 인류 나아가 우주를 구하는 길일 것이다. 기후붕괴 시대에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에코지능이다. 이는 자연 따라 사는 능력(Biomimicry)이러 불러도 좋다. 윤리적 소비란 말도 이로부터 비롯할 수 있다. 자연의 한계를 극복 대상이 아니라 적응대상으로 성찰하는 것이 옳다. 다석이 ’진물성‘ 개념을 내세워 견물불가생의 삶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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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의 ’없음‘과 성 프란시스코의 ’가난‘   이정배 교수 승인 2022.10.1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8): 없음과 가난

다석은 1959년도 11월 경 <<다석 일지>>를 통해 독일의 신비 영성가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두 차례나 연거푸 다루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을 인간의 바탈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하고 자신을 찾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서구 신비사상 속에서 확인했던 까닭이다. 필자 역시 이 점에 공감하며 이런 구조 속에서 양자를 비교 성찰할 의욕을 느낀다. 하지만 논리적 구조에서만이 아니라 누구 게나 주어진 바탈로서의 ’얼‘이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길을 가다 길이 되라- 白死千難(백사천난)의 과정을 생각할 때 에카르트 보다는 가난을 살아냈던 성 프란시스코가 더 적합한 비교 파트너라 확신한다. 프란시스칸 작은 형제회 창립 80주년을 맞아 필자에게 연구과제를 주었기에 당시 이런 관심을 약술한 바 있었다.

사실 프란치스칸 전통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성보다 의지를 강조했고 보편보다 개체를 앞세운 이 전통은 개신교 탄생의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농민전쟁을 진압하고 군주들 편에 섰던 루터와 견줄 때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프란시스코가 더 많이 생각났다. 차라리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말고 그가 두세기 앞서 종교개혁의 주창자가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고 많다. 프란시스코 교단에 속한 현 교황이 했던 말, ’교회의 복음화 없이 는 세상의 복음화 없다‘는 말을 주목한다. 가난을 통해 예수와 하나 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삶, 아마 그것이 그가 말하는 복음화의 실재(Reality)였을 것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프란치스칸 정신은 자본세를 맞아 사실적 종말로 치닫는 지구를 구할 백신일 수 있겠다. 그에게 가난은 곧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산 이가 예수였으며 우리를 그 길로 부르기 때문이다. 다석의 말로는 없이 계신 하느님 곧 ’빈탕‘한데 맞혀 사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이것-가난과 없음-을 선이라 일컬었다. 더욱이 ’믿음‘에 근거한 속죄론을 앞세우지 않았고 하느님 주신 자유의지를 중히 여겼으며 오로지 가난-없이 있음-을 통한 신비적 합일을 지향했다. 바로 여기서 관상을 통해 신비적 합일을 이룬 에크하르트와 변별된다. 자연을 토미즘 전통에서 말하듯 신과의 유비(Analogia entis) 차원에서 보지 않고 신적 계시로 본 것도 자연을 旣成佛(기성불)로 여긴 다석과 전혀 다르지 않다.

프란치스칸 전통의 변별력은 ’하느님은 ’선(bonum)‘이고 창조된 모든 것 역시 ’선‘이다’는 말로 축약해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가난은 선의 다른 말이다. 왜냐면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가난한 자로 살았던 까닭이다. ‘내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의 십자가, 제 뜻마저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은 십자가에서 가난의 절정을 보았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세상(피조물)이 선이자 가난이란 것이 프란치스코 신학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하여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 속에서 선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자연의 전적 타락을 말했던 개신교 신학과는 발상이 동이 서에서 멀 듯 달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육화’란 개념이다. 인간을 포함한 온갖 피조물에게 하느님 –가난- 善(선)에 참여케 하는 근원적 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원 축복(Original Blessing)이란 말과 흡사하다. 일차적으로 하느님은 예수에게 자신과 일치된 본성을 갖게 했고 그것이 그가 걸머졌던 가난의 길, 십자가로서 나타났다. 그로써 그는 인간 및 피조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선을 이루도록 도울 수 있었다. 피조물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간성, 곧 가난(선)을 덧입게 했던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일체가 자기개별화 과정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프란시스코는 이를 육화된 그리스도의 성취로 이해했다. 자연의 창조성에 대한 대 긍정이라 하겠다. 이는 대속에 대한 다석 생각과 정확히 일치된다.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 以天食天, 이천식천)’는 동학의 말처럼 다석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 저마다 상이한 것들이 서로를 살리고-대속하고- 있음을 강조한 까닭이다. 일체의 존재를 예외 없이 利他自利(이타자리)의 차원에서 봤던 것이다. 타자를 위한 방식으로 각기 개별화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육화의 실현이었다.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십자가)가 중요하다. 

이처럼 성 프란시스코는 선, 창조(피조물) 그리고 구원을 하나로 보았다. 그 하나는 결국 완벽한 가난에서 성취된다. 세상을 치유하고 완성하는 길이 가난에 있다고 본 까닭이다. 그에게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하느님 목적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세상 밖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이다. 따라서 자연이 하느님 선을 드러내 세상을 유익(대속)하게 하듯 인간 역시 자신 삶을 가난케 하여 여타 피조물을 살려내야만 했다. 여기서 가난은 세상을 치유하고 살려내는 일로써 ‘그리스도를 행함’, 즉 십자가를 지는 일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칸은 사적인 것을 결코 인정치 않았다. 존재하는 것 일체가 선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체 존재가 신적인 사랑의 대상일 뿐 필요나 소유를 위한 것일 수 없었다. 여기서 사적 가난과 사회적 가난은 상호 무관치 않다. 한마디로 ‘共生共貧’(공생공빈)의 가치를 적시한다. 가난이자 선 자체인 하느님 본성에 상응토록 세상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존재이유라 본 것이다.

지금은 본뜻에서 많이 빗겨났으나 수도 공동체 역시 이련 연유로 생겨났다. 다석 역시 이런 차원에서 개신교 공동체, 歸一園(귀일원)건립을 위해 상당한 사적 재산을 기부했다. 말년의 다석은 이현필이 세운 동광원에 머물며 강의하고 예배하는 일을 즐겼다. 수도 공동체가 가난의 실험장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와 다석은 가난이 인간과 자연을 복원시켜 세상을 구원하는 최적의 백신이라 여겼다. 그럴수록 하느님의 선(가난)을 자기 무화의 방식으로 살아 낸 예수들 ‘모방’을 너머 윤리적 ‘합일’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貪瞋痴(빈진치), 즉 욕심, 분노, 치정과 결별할 때 가능하다. 이들 제거하는 일이 십자가였던바 이 과정이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로서 구원이었고 우리 모두를 예수처럼 독생자로 탄생(A Child is new born)시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폈듯 다석의 ‘없음’은 프란치스코가 말했던 선(bonum)과 다르지 않다. 말했듯이 선이 곧 가난이기도 했다. 이 선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속에 내재(육화)했으며 예수는 이들 피조물을 완성시키고자 하느님처럼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셨다. 자신을 내어준 하느님처럼 가난(십자가)했던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들 인생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내재된 선에 근거해서 인간은 누구나 예수처럼 살아야 했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교리화 된 주류 기독교의 속죄론(대속)이 자리 할 여지가 없다. 선행적 은총인 ‘그리스도 육화’란 개념 때문이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우리 속에 바탈로서 내주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이렇듯 없음은 善(선)이자 靈(영)이었고 세상을 존속, 유지시키는 이었다. 하지만 하늘 ‘바탈’을 지닌 인간은 기성불인 자연과 달리 외물에 혹해 자신의 선한 본성을 잃고 ‘덜’없는 失性(실성)한 존재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盡物性’(진물성)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럴수록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십자가)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갈 길(십자가)을 제시하며 그 길을 걷도록 추동하는 까닭이다. 길을 가다가 스스로 길이 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렇듯 이들 두 사람은 대속과 모방 차원을 넘어 예수와 하나 되는 신비적, 실천적 길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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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사상과 동학, 이들은 서로 낯설까?
 이정배 승인 2022.11.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9): 다석과 동학

평소 다석의 글을 읽으면서 큰 물음이 생겼다. 불교, 유교의 경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기독교를 풀이하고 죽음과 부활의 뜻을 펼쳤던 다석 이었지만 정작 동학, 천도교에 대한 그의 언급을 찾을 수 없었던 탓이다. 간혹 말씀이 있었으나 긍정적이기 보다 오히려 부정적 톤이 강했다. 이점은 그의 제자 함석헌에게서도 예외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심지어 폄하하는 내용까지 찾을 수 있다. 한글을 천문이라 말하며 그 뜻을 가르쳤으나 최초로 한글 경전을 갖고 시작된 동학을 낯설게 느낀 이유가 많이 궁금했다.

평소 필자는 동학과 다석 사상은 같은 뿌리에 연원을 두었고 동일한 줄기에서 서로 색깔만 다른 열매를 맺은 것이라 여겼다. 동학사상의 본질과 구조를 기독교적 언어로 재구성한 것을 다석 사상이라 여길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필자의 궁금증을 풀고자 이들 두 사상의 공통기원과 사상적 관계를 밝히는 논문을 썼던 적이 있다.<<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모시는 사람들 2009)>>.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발표했으나 논의가 많이 확산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3.1선언 백주년(2019) 이래로 동학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필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짧은 지면이지만 본고에서 이 점을 체계적으로 적시해 보겠다.

서세동점시기에 대처했던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우리 것을 지키려는 위정척사와 서구 것을 수용하려는 개화파의 시각이 그것이다. 물론 東道西器(동도서기)와 같은 틈새의 논리도 있었으나 器(물질, 서구)에 대한 道(정신, 동양)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본질상 위정척사파의 관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동학 연구자들 중심으로 온전한 제 3의 시각, 즉 ‘개벽’적 차원이 회자되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나 서구를 답습, 추종했던 것과 달리 독자적 근대를 우리 식으로 잉태했다는 발상이다. 우리에게도 기독교 서구와 다르지만 동학사상에 토대한 ‘개벽적 근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고자 하는 주체적 태도로서 숙고할 가치가 있다.

본 주제를 갖고 출판된 연구서적 -<<개벽의 사상사-문명전환기의 한국사상(창비 2022)>>-을 참고하면 좋겠다. 물론 논쟁할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동학을 폄하 내지 무시한 듯 보인 다석과의 비판적 대화를 위해 본 논지를 일단 수용할 것이다. 동학에 대한 다석의 부정적 편견 이면에 다음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무엇보다 그가 기독교적 세례를 받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기독교적 세계관, 개화파의 시각을 지녔다고 말 할 수 있겠다. 후일 정통기독교로부터 벗어났지만 기독교 –스승 예수론- 에 근거해서 사유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불선을 통합시킨 歸一(귀일)사상도 결국 기독교적 색체를 강하게 띄고 있다. 다석 연구자들 대다수가 기독교 신학자인 것도 이를 반증한다. 다석이 천체 물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것 역시 개인적 취향을 넘어 근대적 세계관의 영향이었다.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

영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합리적 사유 또한 중시했던 까닭이다. 하여 비합리와 초합리 간의 범주오류를 범치 않고자 애썼다. 이점에서 전쟁터에서 주문을 외라 가르치는 동학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영부를 불태워 물에 타 마시면 죽지 않는다는 설도 수용할 수 없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유교, 불교와 견줄 때 자생적 종교인 동학이 미신(비합리)처럼 여겨진 탓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一理(일리)를 지닐 뿐 全理(전리)가 될 수는 없었다. 씨ᄋᆞᆯ(민)을 강조했으나 민중 종교성과 접하지 못했고 ‘다른’ 세상을 찾는 개벽의 불온성을 수용치 못한 까닭이다. 이는 다석 사상이 ‘우익’ 민족주의 사유와 연계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지하듯 해방 전후 공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독립이란 목표는 같았으나 이르는 방법에 있어 입장을 달리했다.

민족주의가 계급적 사유에 냉담했던 반면 사회주의는 민중 모순에 둔감한 민족주의를 비판했던 것이다. 대다수 종교들이 민족주의와 결탁하여 사회주의와 맞섰고 이들 중심으로 나라가 세워졌다. 우익 민족주의가 대한민국의 건국 주체가 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 역시 사회주의와의 연결점을 갖지 못했다. 이에 반해 동학의 경우 사회주의 경향성을 지닌 그룹과 인물이 적지 않았고- 물론 모두가 그렇지 않았으나- 폭력도 불사한 측면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물론 제자 함석헌도 미신성 및 사회주의 성향을 띤 동학에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살아생전 다석이 관계했던 사람들 면모에서 우익민족주의에 경도된 그를 살필 수 있다.(<<다석전기 류영모와그의 시대>> 교양인 2012). 허나 그럴수록 필자는 동학과 다석 사상의 관계성을 역설할 필요를 느껴왔다.

짧은 지면에 이들 연관성을 모두 적시할 수 없지만 골격은 밝혀야겠다. 필자는 다석 사상이 동학을 경유, 최치원의 풍류사상과 만날 수 있으며 누차 언급했듯이 <<천부경>>에까지 소급한다고 생각해왔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실린 ‘玄妙之道, 包含三敎, 接化群生’(현묘지도, 포함삼교, 접화군생)이란 말이 동학의 경우 侍(시)자를 풀이한 ‘內有神靈, 外有氣化, 各知不移’(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란 개념은 물론 다석이 언급한 계소리(하느님), 예소리(예수), 제소리(성령)와 내용 및 구조적으로 비슷함을 넘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상 모두가 天地人(천지인)삼재사상의 틀거지 하에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즉 하늘, 땅, 사람, 곧 삼재론을 펼쳤으며 특히 사람에게서 하늘과 땅이 하나(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가 되었다는 <<천부경>>에 토대를 둔 사유체제란 것이다. 따라서 이들 각각은 표현에 있어 다르지만 구조 및 뜻으로는 전혀 다를 수 없다.

한국 고유한  道(도), 風流(풍류)는 본질에 있어 <<천부경>>속에 담긴 天地人삼재론과 관계있다. 유불선을 품는 모체이자 일상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힘인 풍류가 바로 삼재론이 산물이었다. 하지만 풍류의 핵심을 멋(조화)에서 봤던 유동식과 달리 필자는 生(생), 곧 살리는 일(接化群生, 접화군생)에 그 본질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接’이란 말이 包含三敎(포함삼교)의 ‘包’와 합쳐져 후일 동학은 包接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다. 최치원과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모두 경주 崔(최)가로서 家學(가학)으로 연결된 된 것도 이런 관계성을 뒷받침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내유신령은 우리들 속에 거룩한 영이 내주한다는 것이며 외유기화는 이 영이 우주만물 속에서 활동한다는 뜻이고 각지불이는 이들 생명의 영을 누구도 옮기거나 망가트릴 수 없다는 의미를 지녔다. 다석은 이를 순수 우리글을 사용하여 ‘계’, ‘예’, ‘제’ 소리로 풀었다. 계는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하늘의 소리, 예는 그곳으로부터 이어 이어져 이 땅에 까지 이른 말씀 그리고 제는 그 말씀을 만나 그와 하나 된 삶(바탈태우)을 일컫는다. 이렇듯 최치원, 동학 그리고 다석 사상은 형식적으로는 삼수 변화에 토대를 두었고 내용적으로는 ‘인중천지일, 곧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상이며 단순한 조화(멋)가 아니라 세계와 삶 자체를 바꾸려는 뜻을 담고 있다. 짧게 이야기 했지만 이들 사상 간의 골격과 맥을 잡아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다석을 좀 더 발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학의 민중성, 생명성이 다석을 통해 드러나길 소망한다.

Tag#다석#동학#최제우#유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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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귀일(歸一)사상    이정배 승인 2022.11.2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10): 다석과 귀일사상


다석 사상의 핵심이자 결론은 귀일(歸一) 속에 있다. 귀일, 그 말은 하나에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하나’가 뭔지를 묻고 찾고자 지금껏 여러 말을 해왔다. 여기서 귀일은 통일과 많이 다르다. 상호 다른 것을 원만하게 조정하는 것이 통일이다. 이 과정에서 타협과 대충, 속임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귀일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다. 근원으로 돌아갈 때 남북도 하나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상적으로 다양한 종교들 역시 귀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서구 종교다원주의와 다석 사상이 같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제종교가 하나인 것 이상으로 세상 전체가 정의로울 수 있다고도 확신했다. 마지막 글인 본고에서 다석이 정치적 이념과 종교들을 어떻게 하나로 엮었는지를 서술할 것이다. 필자의 책 <<귀일신학(신앙과 지성사 2021)>>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다석은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정의(大同正義)를 ‘온통 하나’란 말로 풀었다. 대동은 크게 같아진다는 뜻으로 어떤 ‘-ism’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세상은 이런 큰 하나를 모르기에 편 나눠 싸울 뿐이다. 인간 속에 이런 ‘하나’로부터 온 소중한 것이 내재한다. 이 하나로부터 수백 수천가지가 비롯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큰 하나’를 간직한 자신 속 깊은 곳을 굳게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을 거듭 비워야 옳다. 즉 전체를 품은 하나가 내주한 곳이 바로 자신의 ‘속알’(본성)이기에 이는 비울수록 커진다. 마치 모든 것을 채우는 허공, 곧 진공모유(眞空妙有)의 우주처럼 말이다. 다석은 이를 ‘속곧이 믿븨’란 말로 표현했다. 자기 속의 하나를 깨쳐서 그를 싹 티워 지속해서 성장시키는 일을 적시한 것이다. 인중천지일로서의 인간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주지하듯 대동의 ‘大’를 둘로 나누면 사람 ‘人’자가 두 개 생긴다. ‘同’을 쪼개면 ‘司(판단)’가 되고 ‘正’은 ‘下’와 ‘止’로, ‘義’는 ‘羊’과 我‘로 파자된다. 이를 종합하면 의견 분분한 사람들이지만 옳은 판단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판단을 받아 양처럼 묵묵히 그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말뜻이다. 온통 하나가 된 세상은 이렇게 이뤄진다. 이를 위한 방편이 경신중정(敬愼重正)이다. 언제든 요지부동한 마음을 갖고 ’하나‘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생각과 삶이 나뉠지라도 다른 것 속에 늘 상 같음이 있어 ’큰 하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신종추원‘(愼終追遠). 큰 하나로 돌아가는 것(귀일)이라 불렀다. 온통 하나인 것이 내주했기에 차이가 있지만 서로 닮을 수 있고 그 하나 탓에 모두 옳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사, 곧 예배의 본질로 여겼다. 결국 귀일 사상은 허공(빈탕)과 마음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절대는 본래 나를 떠나서는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이 하나를 온전히 감(感)하여 지(知)하는 일이 사람이 되는 길이자 사는 이유겠다. 인간이 이런 절대(온통 하나)의 아들로 느껴질 때 누구나가 독생자가 된다. 그렇기에 다석은 예수나 나나 모두 독생자인 것을 강조했다. 다석의 멋진 말을 소개한다. “허공이 공간을 만들고 이 공간에 뜻을 명령하는 것은 시간이다”시자명야(時者名也). 절대 하나를 느낀 바로 그 순간을 일컬어 시간이라 한 것이다. 빈탕(절대 하나)의 활동이 자기 것이 되는 때(시간제단)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의 자리(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하나(빈탕)에 맞혀 살면 우리 마음을 빼앗길 여지가 없다. 신앙(믿음)은 자신 속에서 큰 하나를 찾아 그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이것은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누고 쪼개진 세상만 알뿐 온통 하나인 그를 외려 배척한다. 그럴수록 다석은 귀일로서만 정의로운 대동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다석은 현상적으로 달라 보이는 종교들 간의 회통을 강변할 수 있었다.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부언하지만 개체는 그에 앞서 존재했던 전체에서 나왔기에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다. 유교의 추원보본(追遠報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귀일 사상은 전체와 개체의 관계를 중시했다. 전체로서의 하나는 비록 알 수없는 것이나(不測)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흡수 통합되는 러시아 인형 같은 통섭(統攝)이 아니라 마치 소금물처럼 형체를 없이하며 맛을 내는 통섭(通涉)의 방식으로 그렇다. 따라서 기독교를 변증한 종래의 서구적 논리들- 천주교의 존재유비나 개신교의 신앙유비- 과는 전혀 달랐다. 불측의 존재인 큰 하나(빈탕)가 만물 속에 천지인 셋으로 머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온전히 품게 했던 까닭이다. 이 셋은 오로지 사람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셋의 귀일처가 바로 밑둥(바탈)인 것이다. 이런 하나를 찾아 그와 일치되려는 것이 종교들의 할 일이자 본질이다.

비록 존심/양성(유교), 돈오/점수(불교), 칭의/성화(기독교), 시천/양천(동학) 등 개념적 구별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온통 하나와 일치한 삶을 목적하기에 이들 간 소통은 항시 가능하다. 다석은 이런 삶을 일컬어 대효(大孝)라 칭했다. 그에게 예수는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대효의 존재였고 우리에게 그 길로 나설 것을 청하는 존재였다. 석가와 공자 역시 이점에서 차이가 없다. 단지 다석은 예수를 통해 대효의 길을 가려고 했을 뿐이다. 이런 연유로 다음과 같은 등식이 가능하다. 지면 여유가 없어 구조만 밝혀 보겠다. 앞서 말한 계소리/예소리/제소리를 기준하여 이에 상응하는 종교개념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예수(십자가)/성령(기독교), 견성/고행/성불(불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로지위교(修道之謂敎,유교), 시천주(侍天主)/양천주(養天主)/체천주(體天主, 동학). 말했듯이 이들 개념들 모두는 큰 하나(빈탕)와 일치하기 위해 자기 속 깊은 곳을 곧게 믿고 자신을 비우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속곧이 믿븨‘의 삶을 명시한 것이다. 이점에서 그간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한마디로 大孝의 종교성을 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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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0건)


없이 계시는 하느님 | 윤정현 - 교보문고 2022

없이 계시는 하느님 | 윤정현 - 교보문고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윤정현 저자(글)
동연 · 2022년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일반 > 기독교일반



수상내역/미디어추천
전문기관 추천도서 >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 > 2022년 선정

다종교 문화 속에서 하느님 생각하기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 언어,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구성원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지만, 활발해진 국제적인 인적 교류와 유입으로 인해서 한국 역시 다문화 사회에 진입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사실 문화에는 종교가 포함되기 때문에 다종교 문화의 경험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과 마주치는 일을 적어도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하다. 흔히 다툼이나 갈등이 야기되는 경험을 가졌을 것인데, 그것은 신불(神佛)로 표현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책의 저자는 종교적 다원 상황을 유년 시절부터 겪기 시작했었다고 술회한다. 그런 상황은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지속적이었으며, 드디어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하느님 이해를 연구의 주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동양적 사고를 통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이 분야의 선구자 가운데 한 분인 다석 유영모 선생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20년 전의 일이었고, 더욱이 저자는 동양적으로 재개념화한 하느님 이해를 영문으로 발표해 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책은 저자의 20년 전 논문을 번역하고 다듬어 우리말로 펴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동양적 종교문화의 언어로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를 위한 귀한 연구서가 될 것이다.

윤정현 신부님 영성 인터뷰 2 spiritual interview w fath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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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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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교에도 궁극적인 목적에 이런게 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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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프로를 리스트에 크게 이제 유영모 전쟁이 사상의 팩과 저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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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컨설팅 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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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그런 왜 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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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그 탄게 를 넘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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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종교를 넘어서 나는 영성 주의자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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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체험한 영성 spd 출 리스트 라고 내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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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원에 총계 매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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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 통에 예 넘었어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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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종교는 이제 수직적인 예 관점에서 보면 불교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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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그리고 힘들겠다 이렇게 부분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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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와 철 제자의 관계를 따 보면 이렇게 벽이 다 있어요 그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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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특색이 부의 수직적으로 했구요 근데 이제 수평적으로 보면 제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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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베타 지위가 있고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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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포괄 죄가 있고 3월 낸 타원 죄가 있고 그 다음에 영성 주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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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나 다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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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 주의자 정도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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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더 것을 언어는 총재의 매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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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기에 이제 유형 녹아 있는 거예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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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천의 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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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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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시자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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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예수님이 그 제도 종교는 창시자 에 진리 하고 간격 쓰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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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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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교리 신념 체계를 해서 신자들을 자기의 영역 안에 묶어 두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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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제도를 유지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쓰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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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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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하고 예수님 막 완결 수 있고 풍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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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하고 관계 없을 수가 있어요 그 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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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알약이 에 신경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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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을 묶어 룩에서 표리 체계를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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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체험들 매트릭스 안에 놀게 만드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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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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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용무는 그를 넘어 저 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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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 신형 책 의미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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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직접 철재 자 체험 할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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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중요시 6월을 종교나 비싼 양상이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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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빌레 들에서 인 제 7단계의 신앙 체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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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상 돼 있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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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워하고 4만명에 돼서 에 대성 신호의 보면 불교에도 그런 신앙 체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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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 2축 낫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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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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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어느 정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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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앙 체계 라는 교리 책의 의미로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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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다 서기 이제 그렇게 돼 줘도 인데 타서 공보다 이렇게 4
3:19
주역을 탓에 길 나름 대한 주역 도덕경 을 보다 보니까 더더욱 병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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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높은 단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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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깨달음은 겉이 쓰신 7 를 기록한 책으로 이젠 다 느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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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체험의 눈으로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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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필수 안 현상 될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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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신비주의의 자들 하고 그 다음에 동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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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식 그 다음에 심 제 자망 그런 수행의 단계 하고
3:54
p 싼 위험해 구인회 조 시간 충실한 화훼 숨을 초절 하는 거죠
3:59
1000점 현내 탄 전 하고 마음 조주 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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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이제 심 제 흐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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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에 방범 에서 의 에 저희 님의 3매 감액 0 이고 그 다음 자막
4:12
모든 이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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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기 자살까지 줘 걸고 완전히 인생의 평정심 해서 들어가 아예 그런
4:21
그 수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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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노장 서서 이제 그런 스타일로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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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현대 수양의 사막의 교부들 에집트 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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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의 산 신 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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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통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사회의 사회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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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교우들이 토굴을 폭을 타고 들어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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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것이 이제 그 파이가 꼭 퍼서 까지 생리 파인 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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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을 뚫어 산수도 잘 색 것이 카파 덕에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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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답한 부캐 요 예 그게 교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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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부들 넘어서 인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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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토스 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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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 이스탄불 하고
5:14
예 테살로니키 까 중간에 이렇게 쭉 반도 처럼 다온 중간 점심 수도 0
5:20
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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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 돈 많이 있는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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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자치 공화국이 해야 아 흑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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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갖 유형의 이제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5:37
그리스 의 그 수도 온 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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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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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젠 옷이 아 n 짜르 가 돈을 많이 돼서
5:47
너 샤의 수 돈이 제일 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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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도체 1 그 수행자 도 만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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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분들이 이젠 오셔야 로 가서 이젠 러시아의 영성
6:00
노 셰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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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우리 스타렉스 스타렉스 의거 루가노 인양 만들 얘기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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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얘기 좀 스타일 3 근데 토를 톨스토이 너 이제 또 수도의 부 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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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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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뭐라고 이제 번 약해서 낮은 죄악을 해서 참 그 그건 노인인 스타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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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말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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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 보기만 해도 사람이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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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뜨이게 그 시 친정은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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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변화시키고 차신 노변 하시는 남들 변화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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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제 토스트에 도 이제 그런 노인들 보고 자신이 편에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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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으셔야 종교에 대해서 공격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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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질 러시아의 영성 까지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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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교부들 에집트 에 나일 강 위에서 부터 추자 있었지요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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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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끗이 너 시리아 정부에 이제 그 영성 해야 하네요
7:05
정수 라고 할까 이즘 톨스토이 로 나타나요
7:11
그 이제 톨스토이가 이제 그 예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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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던가 시작이라는 다 빼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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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에 7 예수 며 오랜만에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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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요약 보험사가 있어요 폴 수도의 나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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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를 만들고 그리고 단편 을 쓰면서 사랑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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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드리고 뭐 그 엄청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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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뭐 팍 이 주교가 를 쓰고 그렇게 해서 종교가 된 것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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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하는 있는게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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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돼서 맡은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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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후드 쏘 뭐 그 소설이 파는 거에
7:56
예 그리고 너 시아 경계로 떨어져도 파 문명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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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 해방 시키고 타이 다 토지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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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캑 싸하게 따운 나그네로 살자 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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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간 여행에서 춥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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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지 다한 러시아 그 영성 영향을 받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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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상의 불이 불교 형성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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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소 돼요 다를 게 없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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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날 이들도 담고 싶으면 이제 보니까 이제 나는 아이템을 그걸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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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 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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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이렇게 살고 있는 거에 대해서
8:42
어떤 세상적 맥락 세서 그런 실천이
8:48
믿게 될 것인지 그런 것
8:51
시설도 아니고 않아요 크게 아이들 뭐 되어서 키 9
8:56
이러한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추워져서 하는 개인적으로
9:03
에 가장 가장 해서 그랬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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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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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뭐랄까 프로그램을 위해서 또 복지 시설을 만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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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전혀 관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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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아이들이 잡고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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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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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주향 해요 하늘에서 주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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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 이라는 생각을 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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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이제 아이를 돌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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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함부로 할 수 없다 무등산 하나님의 생명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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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수신 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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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겠는데 in 은 이제 내가 낮기 때문에 내 끌어안 생각을 하고 마음들
10:00
해요 우리나
10:02
그는 예 그는 쫒아 검은 하늘 쏘는거 고 하나님의 생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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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의 몸을 통해 선 나왔지만 은 하나님의 생 님 생명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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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잘 섬기고 잘 양육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꼽히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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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버리는데 소유로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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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로 알고 악대 암막 때리기도 하고 혼내기 라고
10:32
그런데 이제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을 하 애들 키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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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
하나님이 지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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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 이제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10:47
그 다음에 내가 이제 함부로 가게 되면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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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가 정말 이어 나를 사랑하는 내 같다
10:54
니까 하나님 사랑을 예 한데 정말 이가 그 그런 질문들을 해요
11:02
그래서 이제 저는 하나님을 여러 모시고 산다 올 때 있었네요
11:07
예 대가리 약간 뭐 감정에 치우친 닫은 예
11:11
어떤 미움에서 하는 바로
11:14
니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게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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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거 를 내 늙게 3 그래 나의 하나님으로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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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l 하나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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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선생님을 통해서 우리의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제 깨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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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서 오래 해야 알기도 하고 어떻게 네 아이를 통해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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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치게 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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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아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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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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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에 대해서 금번 좋질 문학에 하는 걸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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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면 얘들이 여럿이 틈이 없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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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에 101 되나요 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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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그 아이의 마음은 끝난줄 알았어 근데 이제 10살 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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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또 어쩌다 이제 9만 한다 끝날 남자가 왜 키울 수도 없고
12:21
힘들다 쉽지 않잖아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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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제는 추가했는데 똥 거야
12:31
도 지난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 반대로 했는데도
12:36
을 주어진 것 돼야 돼 아 어떻해요
12:39
앗 아 예
12:42
그래서 키우게 된 거예요
12:51
통계 감사합니다 예
12:59
오 예 처음 만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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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v 있다보니 2 이 앞에 선 3 이용 보다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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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10 4 쌓여 예 그 답 5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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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와 꼬아 아무 통해 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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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5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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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비슷한 그러한 소피의 온리 미쓰도요 막 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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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석 함석헌 선생님은 변신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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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 건 서울대학교 날때가 미도 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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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면 되게 카 기도 하고 그랬었죠 아예 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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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는 이제 함 선생님은 이제 정치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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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택하고 천시 참 예 이영노 선생님 이제 종교성이 정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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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 첨엔 약하고 제가 그걸 이제 꼰 앙 고속도로를 쭉 내려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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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 서쪽은 고부 에요 통증을 입 아니고 아 같은 동시대에 서쪽은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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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이고 임 양쪽에는 강증산 있어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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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전 복녀는 정치 참여의 강하고
14:10
강진 사는 청취 참여 것보다도 총 교수님 강의
14:14
아 갭 역사상 을 말하고 총재 잉
14:17
그런 사상을 한데 저는 이제 u 용모와 함석헌 도
14:23
그런 차원에서 생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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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도로 서의 세계 를 바꾸려고 하는 현실 참여 형이라면 장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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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에요
14:33
아 종교성이 깡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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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괜찮은 둘일 4호 보안이 돼야 한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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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과 대성이 군요 예 그 같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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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만 4 중요하다 할 수 없다고 봐요
14:46
예 그래서 양쪽을 저는 제 보고 있어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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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설 팔트 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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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 측은 지신 아 그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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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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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이 무슨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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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거기에는 그 그런 분들이 는 약자들 카라 앉아 등 공감에서 친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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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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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런 것이 3 종료 성을 가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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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오는 에구 줄 굳이 라고 심 등 급히 연락 오자 좋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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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편안한 거 카나에 앉아서 남 호롱 에서 뭐 더 볼 수 있는
15:32
입시 냥 간지 쪽이 강하지 않아요 되게 예
15:35
현대종교 질 추구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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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청취자들은 약자들 카나다 소외된 제 친구가 되죠
15:44
공감적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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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하다보니까 현실의 참여할 수밖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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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 들어가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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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질 그 태어나게
15:58
했는데 그 신발은 딴 현실 참여 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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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나비 저의 생각을 행동으로 낮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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