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1

Yoo Jung Gil - 너무도 아름다워 슬픈 다큐 [수라>

Yoo Jung Gil - 너무도 아름다워 슬픈 다큐 <수라> 어제 7월 7일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황윤감독의 다큐... | Facebook

너무도 아름다워 슬픈 다큐 <수라> 
어제 7월 7일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황윤감독의 다큐 <수라>를 종교환경연대에서 단체로 관람했습니다. 수라는 새만금의 북쪽의 갯벌의 이름입니다. 현재 100개의 극장에 100명의 관객을 관람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황윤감독은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통해 수시로 동물권에 대한 강의를 부탁했던 분입니다. 저는 그녀의 관심이 동물보호와 동물권에 한정된 줄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다큐를 보면서 한 예술가의 힘과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다큐멘터리가 저마다의 깊은 메시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지만, <수라>는 그냥 감동이 아니라 영화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며 눈물바다를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 힘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공명입니다.
 
환경운동하는 우리는 새만금개발을 막으려고 삼보일배를 비롯한 온갖 노력을 했지만 물막이 공사로 이미 더 이상 갯벌로 돌릴수 없다는 좌절속에 마음을 접었던 곳입니다. 
  • 처음엔 농지가 부족해 농지를 만든다고 국민을 속였다가 
  • 이제는 첨단 스마트 산업도시를 만들겠다고 말을 바꾸고 
  • 이제 다시 신공항이 들어선다고 특히 미군공항이 들어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 <수라>는 새만금이 여전히 갯벌이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명이 펄펄 살아 있는 곳이며, 매립만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갯벌이라고 이름을 계속 불러준다면 언젠가 갯벌로 돌아올 것이라고 강력히 호소합니다. 정부는 40여종의 생물만있다고 했지만,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집요하고 조사를 통해 실제 20여만종의 생명이 찬란히 살아있는 아름다운 현장임을 보여줍니다.

내 가슴을 울린 것은, 물막이 공사로 하루 두 번씩 들어오던 바닷물을 기다리던 그 갯벌속에 수많은 조개, 게들이 오늘, 내일 목타게 기다리다가 빗물로 밖으로 나왔다가 뙤약볕에 하얗게 말라 죽은 처참한 생태학살(Ecocide)을 넘어서 대학살(masscare)의 모습입니다. 그생명의 목타는 갈망의 기다림을 생각하는 순간 결국 눈물이 터져나오더군요.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알록달록 물떼새, 다양한 도요새와 그들 수백만마리의 아름다운 군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올라와 새만금에서 쉬다가 죽은 먹이들 때문에 그들도 죽는 처참한 현장,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너무도 아름다워 오히려 슬픈 현장을 보여줍니다.
이 다큐는 멸종위기종인 <쇠검은 머리쑥새>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그 쑥새의 울음소리를 들려줍니다. 사라진줄 알았던 <흰발농개>가 10년동안 살아있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보여주고, <검은머리갈매기>와 알에서 나온 아기 <도요새>를 보여주며,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이 다큐는 도요새의 시점에서 본 갯벌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본 사람의 책임감 혹은 죄’를 언급하며 우리에게 그 책임을 지라고 말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이 다큐는 새만금 간척반대투쟁을 다큐로 담았던 고 이강길감독과 자신으로 면면이 이어지는 정신과, 목공일을 하면서 새만금생태조사단을 이끄는 오동필선생과 그 아들 오승준으로, 다시 황윤감독의 아들로 이어지는 의지와 희망의 대물림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7년간 집요한 노력으로 이 다큐를 찍은 감독의 감동을 전파하려는 눈물어린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를 만드는 힘이 되는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들려오는 노래 <아름다운 것들>이 이렇게 애절하고 아름다울 줄이야...
이 영화 꼭 상영관에서 보시길. 화면 크기만큼 감동합니다. 유튜브나 집에서 다운받아 나중에 볼생각하지 마시고. 당장 영화관으로 달려가주세요. 그래서 100개의 영화관을 성공시켜 도요새를 지켜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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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kki Chang
    글만으로도 다시 눈물이 터지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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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 구하는 마음 없이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떠나자, 구하는 마음 없이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떠나자, 구하는 마음 없이
등록 2023-07-11 18:55

나는 ‘힐링’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의 치유’라는 사전적 정의를 충실하게 따르자면 힐링을 배척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어떤 용어는 가끔 너무 값싸고 불순하게 변질한다.
한 시절 너도나도 애용했던 ‘웰빙’처럼, 어떤 말이 본뜻에서 벗어나 자의적 해석과 편리한 편집을 거쳐 유행하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특히 상업적으로 사용되면 매우 위험하다. 힐링 명상, 힐링 마사지, 힐링 요가, 힐링 여행. 힐링이 들어가는 언어 조합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마음이 조금 복잡하다. 건강한 몸과 정신은 복된 삶의 필수 조건인데, ‘몸과 마음의 치유와 회복’이라는 힐링의 본뜻을 되돌려 제대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무더운 여름, 휴가와 방학이 시작되면 산사는 무척 바쁘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고, 절에서도 다양한 수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세속의 벗들을 초대하기도 한다. 내가 있는 실상사도 늘 해오던 경전 공부 외에 ‘힐링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내놓았다. 힐링이라는 말에 예민한 내가 슬쩍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까지 힐링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까? 그래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4박 5일 마음 쉼터’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프로그램 제목을 바꾸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치유와 회복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들어가 보자. ‘마음 치유’, ‘회복적 정의’ 이런 말들이 필요하지 않은 삶이 진정 건강한 삶이고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치유와 회복을 애타게 요청한다. 왜 치유이고 회복인가? 불안하고 힘들고 지치고 아프기 때문이다. 왜 아픈가? 몸의 병처럼 마음의 병도 원인이 다양하다. 허나, 심신이 우울하고 슬프고 재미없고 화가 나고 괴로울 때 사람들은 아프다. 잘 들여다보면 그 원인은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그 사회적 병리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인간적 삶의 귀중함을 제일의 과제로 두지 않고, 돈을 숭상하면서 성과 제일주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온갖 부당 노동행위,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기업 운영, 무한 경쟁과 적자생존 세계관에 기대는 문화가 우리의 심신을 지치고 병들게 한다. 이런 상황을 사회적 진단과 처방으로 풀 때 사회도 건강해지고 구성원인 개인도 건강해진다.
그래서 권력을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참여하고 연대하는 시민의 행동’이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구조라는, 너무도 교묘하고 촘촘한 그물에 자유로운 영혼들의 바람이 갇혀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1처럼 단칼에 끊어낼 수도 없는 이 그물 사슬을 우리는 지혜롭고 진지하게,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풀고 끊어야 한다. 사회적 치유와 회복의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는 의연하게 그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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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치유와 회복의 길을 찾아보자. 고통의 원인을 온전히 사회 구조적 문제로만 진단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고통의 원인은 일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 ‘내 탓’인 고통도 있다. 나의 삶이 불안하고 의미 없고 재미없고 고통스럽다면 그 원인은 저마다 다양하다. 그렇게 다양한 ‘내 탓’을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잘못된 생각, 잘못된 습관, 잘못된 감정이다.
산중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차담을 나누면서 귀를 기울여보면 그들의 마음이 참으로 복잡하고 시끄럽다는 것을 느낀다. 늘 화가 나 있고 화낼 준비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면 연민이 든다. 섣부르고 어설픈 위로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진단은 적확하게 해야 한다. 개개인들이 잘못 들어선 길을 정직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나에게 맞지 않는 길이라면 결연하게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 지혜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마음가짐이 또 하나 있다. ‘구하지 않는 마음’이다. 
강한 자의식이 바탕이 되어 무언가를 열망하고 추구하며, 그로 인한 결과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구하는 마음’이다. 제아무리 옳은 가치를 실천하더라도 생각에 힘이 들어가면 타인의 인정을 구하고, 사회적 명망을 구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만족감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구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긴장과 강박의 감옥에 갇힌다. 그래서 노자는 생각에 힘을 빼고 자의식적 작위를 멈추는 무위를 강조했다.

잘못된 습관 역시 자신을 한없이 피로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우리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많이 만들고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여, 무언가에 몰두하고는 있지만 의미를 못 찾고 허전해 한다. 반짝하는 재미도 금세 시들해진다. 일상의 작은 습관들을 잘 살피고 불필요한 것을 단호하게 걷어낼 때 삶의 공간이 넉넉해질 것이다. 그 여유로운 공간을 고요함으로 채우도록 습관을 전환해보자. 심신이 건강해질 것이다. 단순 소박한 삶이 행복한 개인과 건강한 사회의 해답이다.

불순한 감정 또한 내가 나를 괴롭히는 주범이다. 이를 번뇌라고 한다. 그러나 좋은 감정 또한 집착하면서 지나치게 사용하면 후유증이 따른다. 자의식을 동반하여 추구하는 감정은 결국 ‘구하는 마음’이다. 건강한 삶은 고요하고 침착하고 담담하게 감정을 마주하는 절제와 조절의 삶이다. 들뜸도 사라지고 침체도 사라진 그 자리에 무심하고 생생한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맞는다. 저마다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쌓인 피로를 풀 것이다. 부디 마음 편히 쉬기를 바란다. 더불어 피로한 마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성찰하기를 바란다. 치유와 회복이라는 힐링이 한시적 효과를 내는 수액이어서는 안 된다. 바로 보라! 그리고 내려놓으시라!

법인 스님/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
이 글은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참여사회> 7-8월호와 함께 합니다.

다산의 마음공부 열복과 청복 - 이경용 목사

[전문가 칼럼] 다산의 마음공부 열복과 청복 - 가스펠투데이

[전문가 칼럼] 다산의 마음공부 열복과 청복
이경용 목사
승인 2023.06.29

단양 사인암

사람은 누구나 다 복을 좋아한다. 새해 인사도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우리 조상들은 복을 받기 위해 기왓장, 대문, 장롱, 이불, 베개, 밥그릇과 숟가락에도 복(福) 자를 새겨 넣었다. 나는 복 받기 싫어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복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복이란 무엇일까.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복을 두 가지로 나눈다. 열복과 청복이다. 다산은 1799년 병조참판 오대익(吳大益)의 71세 생일을 축하하는 글에서 열복과 청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소위 복(福)이란 것은 대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아가서는 대장군의 깃발을 세우고, 관인(官印)을 허리에 두르고, 풍악을 울리며 미녀를 끼고 놀고, 들어와서는 높은 수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대궐에 들어 묘당(廟堂)에 앉아 온 나라의 일을 듣는다. 이를 ‘열복(熱福)’이라 한다.

또 하나는 깊은 산중에 살면서, 삼베옷에 짚신을 걸치고 맑은 샘물가에서 발을 씻으며,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소리를 읊조리고, 마루 위에 좋은 거문고와 오래 묵은 경(磬, 옥돌로 만든 타악기), 바둑판 하나와 한 다락의 책이 있고, 마루 앞에 백학(白鶴) 한 쌍을 기르고, 기이한 꽃과 나무, 장수와 건강에 이로운 약초들을 심으며, 때로는 승려나 선인들과 더불어 오가고 돌아다니며 즐기면서 세월이 오가는 것을 잊고 나랏일이 잘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를 듣지도 않는다. 이를 ‘청복(淸福)’이라 한다.”

사람들은 화끈한 열복을 복이라 생각한다. 열복이란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고위 관직에 이르고, 부자가 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떵떵거리며 사는 삶이다. 그러나 열복의 끝은 대부분 불행으로 마치는 경향이 있다. 한때 어깨에 힘주고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사람들이 노년엔 고개 숙인 초라한 모습으로 TV에 나오는 것을 종종 본다. 다산은 사람들이 열복과 청복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각자의 성품에 따르지만, 하늘은 청복을 몹시 아껴서 소수의 사람에게만 준다고 한다.

다산의 청복 모델인 오대익(1729-1803)은 승지와 병조참판을 지낸 이로 다산이 존경하던 정치 선배이다. 다산은 부친이 울산부사(울산시장)로 있을 때, 울산에서 부친을 만나고 상경하며 단양에 들러 사인암을 보고 이런 시를 짓는다.

“옥을 깎은 붉은 절벽 만길 높이 솟았고, 푸른 물에 구름 바위 거꾸로 꽂히었네.

시랑이 학을 탔던 소나무 아직 남았고, 승상이 거문고 타던 바위 아니 잠기었네.”


시랑은 오대익을 말하고, 승상은 서애 유성룡을 말한다. 일찍이 오대익은 충북 단양 사인암에 머물며 신선처럼 지내던 사람이다. 오대익은 나무로 만든 학을 사인암 꼭대기 소나무에 매어 놓고, 종들에게 밧줄을 천천히 내리게 하고 나무 학을 타고 내려오며 부채를 부치며 아래 물까지 내려왔다. 한마디로 신선놀음을 한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를 알고 있는 다산은 사인암에서 오대익을 부러워하며 시를 지었다. 사인암(舍人岩)은 고려 시대 사인(舍人) 벼슬을 한 우탁(1263~1343)이 머물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탁은 유명한 탄로가(嘆老歌,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를 지은이다.

다산은 훗날 강진으로 귀양 가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읍내 제자들, 외가 제자들, 승려 제자들 세 그룹이다. 다산의 제자 가운데 끝까지 다산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은 황상(1788-1870)이다. 아전의 아들인 황상은 좀 둔하지만,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고 이어간 사람이다. 어느 날, 황상이 다산에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조용하게 숨어 사는 은자(隱者)에 대해 질문하자, ‘제황상유인첩’이란 글을 지어준다. 유인(幽人)이란 은자를 말한다.

은자로 살아가려면, 산수가 그윽한 산골에서 호수를 끼고 시내를 옆에 두고 넉넉한 논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야 한다. 집은 정남향으로 서너 칸 짓고, 방안은 하얀 설화지로 도배하고, 1300여 권의 책과 모과나무로 만든 탁자를 둔다. 담장 안은 석류, 치자, 목련, 국화를 가꾼다. 집 옆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붕어를 기르며, 산에서 흐르는 물을 대나무를 쪼개 물홈통으로 사용하여 물이 졸졸 떨어지게 한다. 담장 너머 채소밭엔 아욱, 파, 마늘, 오이, 고구마를 가꾸고 해당화로 담장을 만든다. 50보쯤 떨어진 물가 바위에 정자를 짓고 대나무로 난간을 만든다. 그리고 가끔 친구가 찾아오면 호수에서 배를 타고 시를 짓고 송엽주 한잔을 나눈다. 임금이 불러도 굳이 대답하지 않고, 빙긋이 웃고 나가지 않는다. 이게 바로 은자의 삶이라 한다.
허련이 그린 〈일속산방도〉, 1853년

한마디로 무릉도원의 삶이다.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의 조선판 그림이다. 놀랍게도 다산은 18년 강진 귀양살이에서 다산초당을 가꾸며 이런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갔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작은 무릉도원이다. 제자 황상도 훗날 산골에 일속산방(一粟山房, 좁쌀 한 톨만 한 작은 집)을 짓고 은자의 삶을 살아갔다. 한가지 생각할 것은 다산초당이나 일속산방이 단순히 은둔의 공간이 아니라, 창조의 산실이란 것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500여 권의 책을 썼고, 황상도 “치원유고”등 문집을 남겼다. 황상의 시에 감탄한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가던 길에 황상을 찾아 직접 강진에 간 일도 있다.

21세기 증권이 오르내리고 쳇GPT가 오가는 뜨거운 세상에 진정한 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복이 다르겠지만, 다산이 말하는 청복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주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절대 빈곤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고, 농촌 미자립교회 목회로 힘든 분들이 많지만, 자족하는 마음과 청복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 여름휴가에 강진 다산초당이나 단양 사인암을 가보시길 권한다.이경용 목사

청주영광교회 담임목사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영성나무 대표

저서
『감정치유기도』(두란노),
『말씀묵상기도』(Lectio Divina, 예전단),
『고난에 대한 다산 정약용과 욥의 대화』(영성나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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