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3

알라딘: [전자책]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김학목 (옮긴이)홍익2019

알라딘: [전자책]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eBook]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 동양고전 슬기바다 13
노자 (지은이),김학목 (옮긴이)홍익2019-11-18
원제 : 道德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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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노자, 그의 가르침에 대한 천재 왕필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서 세상 사는 이치와 지혜를 발견케 하는 책이다. 노자 철학을 해석한 수많은 책 중에서, 가장 독특한 시각으로 주석한 왕필의 <노자주>는 노자 철학에 대해 단순히 주(註)를 단 작품이라기보다는 왕필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녹아 있는 불세출의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공자를 인간 이상의 성인으로 평가하고 추앙하는 데 반해서 그를 단순한 인간으로 평가했던 왕필의 파격적 시각에서 보듯이, 평범을 뛰어넘는 삶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 돋보이는 <노자주>는 동양학에 관심이 높은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목차


옮긴이의 말
24살의 천재 왕필이 바라본 『노자』
노자 도덕경·상편
노자 도덕경·하편
노자지략
「숭유론」(崇有論)
「귀무론」(貴無論)
[논문] 위진현학에서 지와 무에 대한 고찰
[논문] 『도덕경』의 시각으로 본 『성경』의 「창세기」 신화
[논문] 『초원담로』의 생명사상




책속에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 됨’(斯:美之爲美)은 추한 것 때문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선한 것이 선한 것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 선한 것이 선한 것이 됨은 선하지 않은 것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어 주며, 길고 짧은 것은 서로가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차이가 생기며, 가락(音)과 음률(聲)은 서로 반응하고, 앞과 뒤는 서로가 따른다. 접기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의 마음[人心]이 따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추한 것이란 사람들의 마음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은 기뻐하는 것과 노하는 것과 같고,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은 옳은 것과 그른 것과 같다. 기뻐하는 것과 노하는 것은 근원이 같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문호(門戶)가 같다. 그러므로 한쪽만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 본문의 여섯 가지[有無?難易?長短?高下?音聲?前後]는 모두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自然]들을 진술했으니, 한쪽만을 거론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치’[明數]이다. 접기
성인이 일반인보다 뛰어난 것은 신명이고, 보통 사람들과 같은 것은 오정(五情)이다. 신명이 뛰어나기 때문에 충화(沖和)를 체득해서 무에 통할 수 있고, 오정이 같기 때문에 슬픔과 즐거움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성인의 정은 사물에 응하지만 걸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걸림이 없는 것을 가지고 바로 다시 사물에 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노자 (老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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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에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창시한 철학자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노자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사마천의 『사기』 중 「노자열전」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경에 초나라의 고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춘추시대 말기에 주나라의 장서실(藏書室, 오늘날의 국립도서관)을 관리하던 수장실사(守藏室史)로 활동했다.
일설에 의하면, 공자가 젊었을 때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도 한다. 주나라가 쇠퇴하자 노자는 은둔하기로 결심하고 서방(西方)으로 떠나는 도중에 관문지기를 만났다.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도(道)’ 자로 시작되는 ‘도경(道經)’과 ‘덕(德)’ 자로 시작하는 ‘덕경(德經)’의 2권으로 구성된 책을 집필했다. 그 책이 바로 『도덕경(道德經)』이다. 81편의 짧은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진정한 자기를 완성하는 도(道)와 그것을 이루어가는 인간의 태도인 덕(德)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고(無爲),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행해야 한다(自然)”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바탕으로 도가사상을 처음 주장했다. 겉치레를 중시하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문명사회를 비판하고, 약육강식의 세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영원한 고전이 되었으며, 종교와 문학, 회화, 정치, 경영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오쩌둥, 톨스토이, 헤겔, 하이데거, 니체, 프로이트, 빌 게이츠, 마윈 등이 이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았다. 접기


최근작 : <도덕경의 빗장을 풀다>,<노자 도덕경>,<노자 도덕경(老子 道德經)> … 총 117종 (모두보기)

김학목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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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철학을 전공한 명리학자로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한국연구재단에서 주관한 『한국주역대전』과 『주역절중』 번역에 참여. 역서로는 『박세당의 노자』(2000, 우수학술도서), 『율곡 이이의 노자』,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장자 곽상주 해제』, 『초원 이충익의 담노 역주』(2015 우수학술도서) 등, 저서로는 『강화학파의 노자 주석에 관한 연구』, 『명리명강』, 『엄마의 명리공부』 등, 논문으로는 『장자 「소요유」의 상징구조와 마음 비움』, 『명리학, 미신인가 학문인가?』, 『간지와 음양오행의 결합시대』 등이 있음.

다음카페_ 해송과 함께 하는 명리명강
이메일 주소_ dangun2007@hanmail.net 접기


최근작 : <사주명리로 내 사랑 보기>,<노자 도덕경, 교육의 시선으로 읽다>,<주역절중 - 전12권> … 총 3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춘추시대의 무위 교과서 『노자』의 사상은,
무엇이든 드러내어 강조하면 도리어 생명을 훼손하니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노자, 그의 가르침에 대한 천재 왕필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서 세상사는 이치와 지혜를 발견케 하는 책이다. 노자 철학을 해석한 수많은 책 중에서, 가장 독특한 시각으로 주석한 왕필의 『노자주』는 노자 철학에 대해 단순히 주(註)를 단 작품이라기보다는 왕필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녹아 있는 불세출의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공자를 인간 이상의 성인으로 평가하고 추앙하는 데 반해서 그를 단순한 인간으로 평가했던 왕필의 파격적 시각에서 보듯이, 평범을 뛰어넘는 삶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 돋보이는 『노자주』는 동양학에 관심이 높은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24살의 천재 왕필이 바라본 『노자』

왕필은 '도덕경'을 아주 간단한 도식인 유와 무의 구조로 체계화시켜서 설명했다. 대상화 작용이 무화될 때,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가 없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무위이고 자연이다. 탁월한 재주를 가졌음에도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세기적인 천재 왕필, 그의 사상은 많은 오해 속에서도 찬탄을 받아 왔다.

왕필은 어려서부터 비범함을 드러내 10세 정도부터 이미 노자를 좋아하고 논변을 잘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추측에 의하면, 왕필이 '노자주'를 지은 것은 18세 때였다고 한다. 그 나이에 이런 주석을 남긴 것으로 볼 때, 왕필은 사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천재였던 것 같다. 당시 권세가이면서 뛰어난 사상가인 하안이 왕필의 재주를 아껴 중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왕필이 처음 관직에 기용되어 조상에게 독대를 요청해 뵙고는 도에 대한 이야기로만 몇 시간을 보내자, 조상이 어이없어했다는 기록이 있고, 놀기 좋아하고, 가볍고 물정을 몰랐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는 세상 사정에 조금은 어두운 재기 발랄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접기


평점 분포

7.8





注(주)라는 것이 물 붓듯이 어려운 말을 쉽게하는 설명(說明)이라면 이 책에는 세가지 과제가 있겠다.
도덕경 한문을 한글로 역주하고,
왕필이 注한 한문을 한글로 역주하고.
필자가 필요한 설명을 한글로 하는 것이다.
책에 대한 대강의 느낌엔 충분할지 모르나
엄밀하고 쉬운 이해엔 불만이다.

독자로서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백서와 죽간 노자, 왕필본 그리고 왕필이 주注한 내용의 서로 비교나 내용 변화 추적은 역시 다른 책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런 부분까지 주물렀던 도올 선생의 ˝노자와 21세기˝ 3권에 이은 하편 덕경 시리즈 출판을 열망했던 독자로서
죽간본, 백서본 노자의 오리지날한 고층대 사고에 대한 언급이 이 책에 부족함은 아쉽다.

(도올 선생이 ˝노자와 21세기˝ 3권에 이은 덕경 부분 새로운 책은 쓰지않으시고,
이번에 ˝노자가 옳았다˝로 노자 책에 대한 마지막 final 역주를 대신하셨다.
물론 하편 덕경에 대한 오롯하고 유려한 한글 해석이 마련되었다는 부분은 감사드릴 부분이지만 여간 아쉽다.
13경 주소를 계속하셔야 할 바쁜 선생께 딴지걸고 싶은 마음이야 추호도 없지만 도올 선생의 노자 사랑은 유별하신 것 같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길과 얻음˝,
˝노자와 21세기˝ 전3권,
˝노자가 옳았다˝ 이렇게 5~6권 정도다.
˝노자와 21세기˝가 너무 좋았기에 이번 ˝옳았다˝로 대신해야할 섭섭함은 이미 백서, 죽간본 노자와 비교하는 책들이 시중에 몇몇 출간되었으니 이로 위안 삼는다.)

결국 이 책은 위진시대 왕삐의 노자 주注에만 집중한 책이렸다.
소년 왕필의 천재성만으로 노자주석서 책 한 권 꾸려질 대접은 섭섭한 처사는 아니다.
(현재 시중의 노자왕필주注 역주본은 3종 임채우, 김시천, 김학목 3분 정도이다.)
죽간 또는 백서까지 유욕하는 독자의 만욕에 대한 이 책의 소사과욕 처분은 독자로서 감당할만 하다.
같은 필자의 책 ˝초원 이충익의 담노 역주˝에 실린 노자 원문의 한글 해석이 이 책의 해석보다 더 쉽고 유려한 느낌이다.
물론 서로 한문이 약간씩 다르기에 같은 판본은 아니라는 점...

노자를 스스로 느껴야 할진데,
자꾸 판본이나 백서니 죽간이니에 신경을 더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누군가와 혼자서 견주는 자기 병통만 같다.
이 책의 필자님 포함 위나라 왕필 소년은 이 부분에서 만큼은 더 건강하다 하겠다.
rushfire 2020-12-25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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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에 천재로 소문난 왕필의 주가 더해진 가장 접하기 쉬운 책인 것 같습니다. 내용이 쉬운 편은 아니나 차근히 읽고 생각해보면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moonnuk 2013-01-2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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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간에 노자하면 왕필주다. 그런데도 한국 시중엔 이 책과 임채우 번역 두 권 뿐이다. 몇 안되는 왕필번역본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일단 가치가 있다. 게다가 각 장마다 덧붙인 김학목 선생의 해설과 주석이 매우 친절하고 보기 편하다.
초연 2015-01-2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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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철학을 공부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반복하며 꾸준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Lovemance 2014-06-2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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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을 슬기바다 판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구문에서는 기존 판보다 글의 간격이 더 넓어지고 뒤의 풀이는 다양하고 자세한 터라 쉬엄쉬엄 읽되 오래 각인됩니다. 아마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왕필의 주`가 아닐까요.
아름드리 2014-04-15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만만하게 볼게 아닌 도덕경

고전에 무지한 나에게 논어, 맹자, 채근담, 명심보감, 법구경, 소학 등은 그저 다 묶어서 '고전'의 카테고리일 뿐이었다. 자발적으로 읽을 확률이 아주 낮을 카테고리이기도 하고.

언젠가 <채근담>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잘 읽혀졌다. 그리고서 <법구경>을 읽었는데 이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고 가르침이 되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모두 다가가기 어려운 것은 아닌가보다 했다.

며칠 전, ㅊ대명사가 나와 두권의 책을 추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는데 그 중 한권으로 이 책, <노자의 도덕경>을 추천하는 것이다. 도덕경이란 제목으로 나와있는 책 중 이 책, 즉 왕필의 주가 제일 잘 해석되었다면서. '노자의 도덕경'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정말 많은 저자의 <도덕경>이 나와 있었다. 누가 번역을 하느냐, 누가 해석을 했느냐에 따라 수십권의 책들이 있었다. 그중 이 책은 중국의 천재학자라고 알려진 '왕필'이라는 사람이 해석을 해놓은 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로 번역을 해놓은 책이다. 같은 내용을 원본으로 했다면 누가 해석을 해놓은 것이 그리 큰 차이가 있으랴 했던 나의 생각 역시 잘 모르고 한 것이라는건 책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은 다른 책에 보면 이렇게 해석되어 있다는 예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인데, 춘추시대 하면 제자백가도 함께 떠올려지듯이 여러 사상들이 제각기 나름의 덕목을 내세우면서 번성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중 '도가'의 시조를 이룬 노자의 사상은 다른 사상들과 조금 다른 것이, 덕목을 내세우지 않을 것을 권한다는게 덕목이랄까. '무위 (無爲:없을 무, 할 위)'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나오는 '버리라, 비우라'는 말에서도 나타난있다. '무엇을 행하라'는 가르침이 담겨있기 보다는 무엇을 행하려하지 말라니, 종교 서적을 읽고 있는 착각이 들때도 있었다. '도교'라는 것이 생겨났을 만 했다.

노자의 도덕경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이 조선시대인데, 조선시대의 정치철학이었던 유학과는 근본 이념부터 많이 차이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위에 말했듯이 노자의 도덕경 원본을 누가 해석했느냐에 따라 유학, 혹은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써놓은 것도 있고 (이충익), 유학의 근본 사상을 부정하지 않은 것도 있다. 아마 조선시대에 노자의 도덕경이 이단으로 찍히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도덕경 주석이 유학의 근본 사상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노자의 도덕경은 왜 '무위'를 주장하는가? 무위를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모든 '있음 (有)'은 모두 '없음 (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은 절대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고, 하나의 이면이 다른 하나라는 것이다. 즉, 나온 곳은 같은데 이름을 다르게 붙였을 뿐이라고 한다. 사물의 존재 방식에 있어서도 대상화된 유는 무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필연적인 존재 방식이라서 어느 한쪽만 추구하는 것은 그것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비어 있음에서 생기고 움직임은 모두 고요함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만물이 다 함께 움직일지라도 끝내는 비어 있음과 고요함으로 돌아가니, 그것이 바로 사물의 궁극이다.

잘은 모르지만 어떤 종교적인 철학이 느껴진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이치도 같은 맥락일 것 같다는 것, 그리고 불교 사상과도 어딘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우면 반드시 넘친다'라는 말에서 나아가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다.

도덕경 상편의 22장 내용은 짧은 댓구 형식으로 노자의 사상을 그나마 쉽게 전달해준다.

"굽히면 온전해지고, 스스로 그 밝음을 드러내지 않으면 온전해진다.

우묵하면 채워지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면 그 공을 소유한다.

낡으면 새로와지며, 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면 그 덕이 오래간다.

적게 되면 (근본을) 얻고, 많게 되면 미혹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기만성'에 대한 글이 나오는데, '큰 그릇은 반드시 늦게 완성된다' 라고 풀이가 되어 있다. '반드시'? 큰 그릇이 늦게 완성되는 이유는 분별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분별하기 보다는 수용하는데까지는 연륜이 필요할테니까.

379쪽에, '허무 (虛無)'를 '마음비움'이라고 한 것도 인상적이다.

이 책의 뒤에는 노자의 도덕경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쓰여진 <숭유론>, 그리고 도덕경과 관련된 논문들도 함께 실려 있으며 책의 시작은 '왕필'에 대한 소개글로 하고 있다. 2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짧은 생을 살면서도 천재 소리를 들었다는 왕필. 하지만 우리말로 번역을 한 번역자는 이 왕필의 주석본보다는 조선시대 이충익의 주석이 훨씬 더 뛰어나다면서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집중이 요구되었던 책. '다 옳은 말이야'라면서 술술 읽어넘어가지질 않았다. 소위 '생각'을 해가며 읽어야하는 책이었기에 다른 주석으로 또 읽어봐야겠다고 안그래도 생각하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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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8-15 공감(8) 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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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알라딘: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 카르마총서 5 
한자경 (지은이)예문서원2000-12-20
===
199쪽

목차
지은이의 말

들어가는 말

1. 마음 밖에 다른 법은 없다
2. 유식 불교의 전개 - 무상유식과 유상유식

제1장 색의 실유성 비판

1. 유부의 극미실재론
1) 극미실유의 의미
2) 극미의 성질
3) 극미의 집적과 개체 존재

2. 극미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1) 극미실재론의 논리적 불가능성
2) 극미실재론의 인식론적 불가능성

3. 전오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개체
1) 오경의 비실유성
2) 오근의 비실유성

제2장 명의 실유성 비판

1. 유부의 명구문신실재론
2. 명구문신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3. 제6 의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관념
1) 사유 대상으로서의 법경
2) 개념적 허망분별
3) 비유적 언어관

제3장 식의 심층 구조

1. 식전변의 사분설
1) 능연과 소연의 견불과 상분
2) 능변의 자증분과 증자증분

2. 능변식의 심층분석
1) 분별 주체로서의 의식
2) 욕망 주체로서의 말나식
3) 초월 주체로서의 아뢰야식

3. 식전변의 두 차원
1) 아뢰야식의 변현
2) 의식. 말나식의 분별

제4장 식과 경의 관계

1. 연기적 관계

2. 식과 경의 순환성
1)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순환
2) 변현(인연변)과 분별(분별변)의 순환

3. 식의 실성
1) 식의 삼성과 전의
2) 순환 속의 해탈의 길
3) 진여와 일진법계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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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한자경 (지은이)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서양철학(칸트)을 공부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서우철학상 수상), 『불교의 무아론』(청송학술상 수상), 『실체의 연구: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한국철학의 맥』, 『명상의 철학적 기초』, 『자아의 연구』, 『자아의 탐색』,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동서양의 인간 이해』, 『일심의 철학』, 『불교 철학의 ... 더보기
최근작 : <불교의 무아론>,<의지, 자유로운가 속박되어 있는가>,<매거진 G 3호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 총 4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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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경 책은 한 10년전까지는 거의 빠짐없이 챙겨보긴 했는데 아마 불교학자로써는 꽤 래디컬한 입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탈을 문자 그대로 어떤 타협없이 그대로 주장하는 몇 안되는? 학자면서 구도자.  구매
리엔 2020-04-2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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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3 오식이 인식하는, 즉 연緣하는 감각 대상이 바로 색 · 성 · 향 · 미 · 촉의 오경五境이며, 이것이 곧 개체적인 물질적 존재로서의 색법色法 또는 색온이다. 그리고 감각과 구분되는 사유는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전오식前五識 다음의 제6 의식意識이 되고, 사유 대상으로서의 보편적 관념이란 바로 의식 대상인 법경法境 또는 18계 중의 법계法界에 해당한다. 법경은 색을 제외한 일체의 대상 존재로서, 색色과 구분하여 명名으로 표현될 수 있다.



13 우리는 흔히 감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각 대상이 감각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해야 하고, 사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유 대상이 사유와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에만 그 감각이 착각이 아닌 바른 감각이 되고 그 사유가 그릇된 사유가 아닌 바른 사유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개체적인 물질 또는 보편적인 관념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의 마음을 떠나 그 자체로서 객관적 실유성을 가지는 것이 된다. 그 중에서 개체적 물질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유물론’이 되고, 보편적 관념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독단적 관념론’이 될 것이다. 그 둘을 모두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는 경우라면 ‘이원론' 내지는 ‘다원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 유부의 논사들은 다원적 실재론자이다. 그들은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心法)이나 ‘마음의 작용'(心所法)과 독립하여 개체적 물질(色法)이나 보편적 관념이 각각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유식의 논사들은 일체 경境의 객관적 실유성을 부정한다. 심과 심소心所 이외에 물질이든 관념이든 그것이 인식 대상인 이상 인식 주관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15 엄밀히 말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식일 뿐이다. 식 너머에 식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외적 세계란 것도 실제로 식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식 안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21 전자와 같이 시작과 끝이 맞물린 완료된 원은 언제나 동일한 괘도를 달려야 하는 비역사적 순환만을 가능하게 하는 데 반해, 후자처럼 원의 끝(현행된 존재)과 시작(존재의 인식)이 서로 다른 이지러진 나선형 원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변천하는 역사성이 가능해진다. 바로 그 끝과 시작 사이의 간격, 다시 말해 인식과 존재, 식과 경이 벌어져 있는 그 틈새 사이로 우리의 경험과 개념의 변천사, 우리 삶의 역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22 가假의 현상 세계를 창출해 내는 아뢰야식의 전변 활동, 그 무한한 에너지의 심층 활동이 자각되지 않은 채 가려져서 의식되지 않는 상태를 유식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 무명으로 인해 욕망과 집착의 자기 의식(말나식)과 분별적 대상 의식(의식)이 발생하며, 그러한 표층적 의식 활동(業)이 종자를 낳고 그 종자가 다시 심층의 아뢰야식을 형성하며, 그 심층 아뢰야식의 종자가 다시 또 표층의 현상을 구성하는 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25 대승 경전은 유식계 경전인데, 유식은 중관의 공 사상을 계승하여 아공 · 법공을 인정하면서도 공으로서의 마음이 만들어 내 는 가假의 현상 세계를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일체가 공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대상 세계가 존재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가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마음의 활동성을 철학적 분석과 논의의 중심 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식은 유부의 실재론과 중관의 공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1장 색의 실유성 비판
32 불교 인식론에 따르면 현재적 인식이란의미에서 현량에 속한다. 현량의 감각 대상은 바로 시공간 상의 구체적 대상인 개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는 우리의 오감에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사람이든 소돈 꽃이든 시공간을 점한 구체적 개체라는 점에서는 돌맹이와 다를 바 없으며, 그 점에서 그것은 돌맹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이다. 이러한 물질을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한다.



33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 없어질 수 없는 것, 한마디로 말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물질(색)의 궁극적 미립자를 불교에서는 극미極微라고 한다.



43 일체 존재에 대해 배중률은 지켜져야 할 원리이다. 그러므로 극미에 대해서도 극미는 방분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방분이라는 말은 방향적인 부분, 즉 공간적인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극미가 방분을 가진다는 말은 극미가 각각의 부분으로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부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지지 않으며, 경량부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진다. 그런데 유식은 그 두 경우를 다 검토해 보고는 두 경우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극미라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52 유식은 감각적 인식 상태인 현량에서는 그 대상이 인식 내적인 것인가 인식 외적인 것인가 하는 분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량적 인식은 무분별적 인식이다. 현량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식 외부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인식 내부와 인식 외부의 분별, 의식 내적 표상과 의식 외적 사물의 분별은 현량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전오식의 대상으로서의 경은 그 대상을 반연하는 전오식을 떠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60 근根이란 인식을 야기시키는 능력으로 설정된 일종의 가설이지, 객관적 물질 존재 즉 색법色法으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식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시설된 것이지 그 존재가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현량 대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2장 명의 실유성 비판
65 만일 보편이 실재한다면 우리의 개념적인 분별적 인식은 단순한 허망분별이 아닌 참된 인식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만일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개념적 분별은 객관적 기준을 결한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분별이 되며, 그러한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되는 인식은 모두 허망성을 벗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이 일반 명사를 명名이라고 하고, 개념들 간의 연관에서 성립하는 명제를 구句라고 한다.



69 명구문신은 바로 그러한 형식적 질서를 가장 일반적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중 명신名身이 개별적 현상 사물에 부여되는 '이름'에 상응하는 개념적 실재라고 한다면, 구신句身은 그러한 현상 사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문장'에 상응하는 명제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유부는 이런 명신이나 구신이 그 이름이나 문장을 인식하는 우리의 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본 것이다.



70 유식唯識에서는 말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는 의미생기론의 관점을 취한다. 한마디로 말해 객관적 실유로서의 보편 또는 보편적 의미체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에 따르면 말소리와 그 말을 통해 생겨난 의미를 담고 있는 음운굴곡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의 음운굴곡이 곧 뜻을 나타내는 것이되, 그 뜻은 소리를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비로소 의미를 생성시키는 것이기에, 말을 떠난 독립적 의미체 또는 보편 실체로서의 명을 따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79 감각에 주어지는 사물의 속성은 감각의 순간에 개별적으로 포착되는 표상이다. 그처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표상을 그 각각의 자체 상이라는 의미에서 자상이라고 한다. 직접적 인식인 현량의 대상이 곧 자상이다. 반면 자상들을 비교 분석하고 추상화하여 개념으로 얻게 되는 표상은 더 이상 자상이 아니다.



79 속성 담지자로서의 실체, 의식 대상으로서의 법은 의식의 분별 구조에 따른 개념적 구성물일 뿐이다. 이 개념적 구성물은 추상적이므로 일반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을 공상共相이라고 한다.



83 존재론적으로 그렇게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제의 장미와 오늘의 장미를 동일한 하나의 장미로 보고, 한 촛불이 다 타오르도록 그 불꽃을 동일한 하나의 불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자기동일적 무엇인가가 변화하는 현상 배후에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찰나생멸하는 현상의 배후에 상정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이란 단지 우리의 언어 구조에 따른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다. 유식 역시 이와같은 경량부적 통찰에 따라 의식에 의해 사유되고 집착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은 의식 자체에 의해 분별되고 설정된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념적 분별은 실유의 보편이 상응하지 않는 허망분별일뿐이다.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 또한 허망분별의 개념인 것이다. 즉 감각적 현량 안에서 구체적 자상으로 주어지는 개별적 존재를 넘어서서 일반화된 개념으로 표현되는 보편이란, 단지 우리들 식의 허망분별의 결과일 뿐이다.



90 가假는 실재하는 실實과 대립적으로 사용된 개념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 의해 잘못 집착된 실과 대립적으로사용된 개념일 뿐이다. 즉 가假 너머에 실實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식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보편이든 색이든 명이든 모두 그것을 인식하는 식 너머에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유가 아니다. 실유적 존재가 아니기에 가라고 한다.



제3장 식의 심층 구조
92 인식이란 인식 주관이 인식 객관에 대해 무엇인가 알게 되는 활동 또는 그 활동 결과를 뜻한다. 이처럼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 작용을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연緣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식하는 주관은 '능히 연하는 것'으로서 능연能緣이 되고, 인식되는 객관은 '연해지는 것'으로서 소연所緣이 된다. 유식은 인식 주관인 능연을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인식 객관인 소연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92 유식에서의 인식이란 능연의 식이 소연의 경을 연하는 활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견분이 인식 객관인 상분을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인식 활동을 헤아림이라는 의미에서 량量이라 하기도 하는데, 능히 헤아리는 능량能量은 인식 주관을, 능량에 의해 헤아려지는 소량所量은 인식 객관을 의미한다. 인식 활동이란 곧 능량과 소량 사이에서 성립하는 량이며, 그런 활동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인식 자체는 헤아림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양과라고 한다.



95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과 상분의 대립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그 둘이 분리 대립되기 이전의 주객포괄의 초월적 근거로부터 이분화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식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견분이 상분을 연하는 것이지만, 그 내적 근거로부터 보면 그러한 견상이원화 이전의 통합적 근거인 식 자체가 견상으로 이원화되는 활동, 즉 식 자체의 주관과 객관으로의 자가이분화 활동이다. 유식에서의식의 개념 안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96 이러한 견상 또는 주객을 초월해 있는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견과 상, 주와 객이 분리되어 있는 지평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스스로 이원화하는 식자체의 활동은 과연 어떤 활동인가? 유식은 이와 같은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을 변變 또는 전변轉變이라고 칭한다.



97 우리가 객관적 · 독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식의 대상 즉 소연경은 실제로 식 자체의 전변 결과 즉 식소변이라는 것이 유식 식전변설의 요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식소변으로서의 대상과 마주한 인식 주관인 능연식으로서의 견분 역시 식 자체가 아니라 식이 전변한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주객으로 관계하는 식이 소연경을 연하는 능연식이라면, 스스로 이원화하여 소연경 자체를 산출해 내는 식은 그와 구분되는 능변식이다.



99 자증自證이란 그 스스로 명증적이라는 뜻이다. 한 인식의 참을 다른 인식에 의거하여 증명하는 것을 타증이라고 한다면,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명중적인 것을 자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식자체를 자증분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엄밀히 말해 자증적인 것은 견분이 상분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 인식 결과, 즉 양과量果이다. 인식 객관은 소량所量이고 인식 주관은 능량能量이며 능량이 소량을 인식하여 얻은 결과가 곧 양과인데, 이 양과가 바로 자증분이다. 식 자체로부터 능량과 소량이 이원화되고 인식이 발생하여 양과가 얻어지므로 유식은 이 셋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103 자증분이 대상의 인식에서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매개하는 공동 근거라면, 증자증분은 반성의 순간에 자증분(현재)과 견분(과거)을 매개하는 공동 근거이다. 견분과 상분으로의 주객 이원화가 식체의 공간적 이분화 즉 공간화라면, 자증분과 견분 즉 기억 주체(현재 주관)와 기억 대상(과거 주관)으로의 이원화는 식체의 시간적 이분화 즉 시간화이다.



104 대상세계(상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 인식 주관(견분)을 확증하는 자증분에서 찾아지고, 그 인식 주관(견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것(견분)을 다시 인식하는 주관(자증분)을 확증하는 증자증분에서 찾아진다. 이처럼 자증분은 나와 세계, 견분과 상분으로 이분되는 식의 공간화 활동으로서의 주객을 포괄하는 공간적 지평을 함축하며, 증자증분은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인식하는 나{지증분)와 인식된 나(견분)로 이분되는 식의 시간화 활동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포괄하는 시간적 지평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의 공간적 · 시간적 지평은 자증분과 중자증분의 식체 자체의 변현으로 설명되므로 그 이상의 부분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105 제 1능변식인 이숙식은 제8 아뢰야식이고, 제2능변식인 사량식은 제7말나식이며, 제3능변식인 요별경식은 제6 의식과 전오식을 포함한 여섯 식(六識)이다.



110 말나식이 의식의 근인 의意의 식이라는 말은 곧 대상 의식의 소의근인 의意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이라는 뜻이다. 제6 의식이 의意에 근거해서 법法인 대상을 인식하는 대상 인식이라면, 제7 말나식은 그처럼 대상을 인식하던 의意 자체의 자기 의식 또는 자기 인식이다.



110 여기서 말나식의 소의와 소연은 아뢰야식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그 행상은 사량思量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말나식의 고유한 인식 작용을 의식에서의 대상 요별과 구분하여 사량이라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사량이란 어떤 인식 작용을 말하는가? 사량의 사思는 마음의 인위적 조작을 의미한다.



112 이처럼 찰나생멸적 현상에 대해 자성을 가진 법을 실체로 상정하여 그에 따라 현상 세계를 요별해 내는 우리의 의식 활동 근저에는 바로 자기동일적 법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유식은 법집이라고 한다. 의식의 자기 안과 밖, 자아와 외부 세계의 분별, 그리고 대상 세계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구조짓는 분별 활동의 근저에는 이미 자기동일적 법이 실재한다는 헤아림, 즉 근원적 법집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근원적 법집이 말나식의 사량에 속한다.



112 제6 의식이 의식에 담겨지는 내용을 자신 밖의 세계로 대상화하는 식이라면, 그 의식의 소의근인 의章, 즉 말나식은 바로 대상화를 행하는 자신에 대한 식인 자기 의식이다. 자기 의식으로서의 이 말나식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의식을 가지는 자', 즉 '의식된 세계를 가지는 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식의 내용이 바뀌고 사라져도 그 자신은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이런저런 의식의 변화를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식에 대해, 그리고 그 의식 안에서 인식된 세계에 대해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주재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113 말나식은 대상화를 수행하는 제6 의식(대상 의식)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자기 의식으로서, 바로 그 안에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바로 이와 같이 세계를 객관적 실체로, 자아를 항상적 주재자로 헤아려 집착하는 번뇌적 작용을 뜻한다. 우리 마음의 표면에 등장하는 의식이란 바로 이러한 근본적 집착 위에 수행되는 제약된 분별 활동일 뿐이다.



114 의식이나 말나식의 심층에 존재하면서 그들 식이 남긴 흔적을 종자로서 간직하는 식을 유식에서는 제7 말나식 다음의 식이라 해서 제8식이라고 한다. 이 식은 종자들을 함장한 식이라는 의미에서 장식이라고 불리며, 이를 음역하여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잠재적인 종자들의 총체이다. 이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이 감추어진 식으로서, 우리가 흔히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마음이다. 제8 아뢰야식은 모든 식 작용의 근본 전제가 되므로 본식이라고도 한다.



119 불교는 우리의 업은 그 자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형태의 흔적을 남긴다고 본다. 인간의 업이 남기는 흔적, 그것을 유식은 종자라고 말한다. 이 종자를 가리켜 업이 남긴 흔적, 남겨진 습관적 기운이란 의미에서 '습기'라고도 한다. 이 종자 또는 습기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남겨진다. 이처럼 업이 남긴 종자가 함장되어 있는 곳, 또는 그 종자 자체의 흐름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업이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인 종자로서 계속 남아있다는 말은 그것이 어느 순간에는 다시 그 자신의 경과를 낳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자란 아뢰야식 내에 머물러 있다가 때가 되면 그 내용에 따라 다시 자신의 결과를 낳는 세력이다.



127 신체와 기세간 그리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식소변이러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뢰야식의 상분으로서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함장 유지되고 있는 종자와 그대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종자생종자의 과정 속에 있는 잠재태의 종자인 데 반해, 상분으로서의 종자란 그런 잠재적 종자가 인연이 갖추어져 현실화된 종자생현행 결과로서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잠재적 종자가 현행화하여 견상으로 이원화됨으로써 비로소 상분으로서의 종자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신체나 기세간의 색법으로가 아니라 관념적 또는 정신적 형태로 현행화한 종자를 뜻한다. 의식이 포착하는 관념의 세계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27 유식은 감각 능력을 갖춘 우리의 신체를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간주한다. 이는 곧 '인간의 신체란 인간 마음의 변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29 신체와 그 신체가 의지해 사는 세간이 아뢰야식의 전변이라는 말은 그것들이 바로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종자가 현상으로 현실화되는 종자의 현행 결과라는 말이다. 종자는 이전의 업이 남긴 흔적, 즉 업력이다. 그 업이 개인적 업이 남긴 종자인 불공종자일 때 개인적 신체가 형성되고, 개인을 넘어서는 공동의 업이 남긴 종자인 공종자일 때 공동의 기세간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130 신체와 기세간이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이리는 것은 인간과 우주 존재의 시원에 대한 불교적 존재론 또는 우주론을 말해 주는 것이다. 



130 불교는 오히려 물질을 유정의 업으로부터 설명한다. 이 때 유정이라 함은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인식 작용을 가진 존재, 즉 동물적 생명체 일체를 의미한다. 불교는 유정의 업으로부터 그 결과로서의 유정의 신체와 그 신체가 의지하여 살게 될 기세간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138 우리는 그렇게 현상 세계를 생성하는 우리 마음의 심층의 활동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형성이 완료되어 나타난 현상 세계, 즉 이미 현행화된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 세계이지 현상을 형성하는 마음의 활동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 세계를 우리의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여라고 생각할 뿐 우리 자신의 마음이 창출해 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139 의식과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활동을 알지 못하기에, 그 무지로 인해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견분과 상분을 마치 식 바깥의 객관적 실재인 듯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뢰야식의 견분을 객관적 실체인 자아로 아뢰야식의 상분을 또 다른 객관적 실체인 세계로 집착하는데, 이것이 곧 아집과 벌집이다.



146 이렇게 보면 아뢰야식의 전변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전변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전변은 우리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존재론적 전변으로서의 변현이며, 의식과 말나식의 전변은 그런 현상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론적 전변으로서의 분별이다.



제4장 식과 경의 관계
156 아뢰야식 내의 잠재적 종자가 구체적인 현상 세계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종자의 현행화라 하며, 이를 종자생현행이라 한다. 종자가 현행화한 결과가 바로 이 세계이다. 이는 세계를 아뢰야식의 외화, 종자의 자기실현으로 보는 것이다. 종자란 현상 세계를 창출하는 변화 차별의 공동이며, 현상 세계란 바로 그 공능의 자기실현이다. 종자가 현행화하여 구체적인 현상 세계를 이룬다. 현상은 종자의 현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은 아뢰야식이 형성하는 세계를 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세력으로서의 종자들이 현상화되어 나타난 세계, 즉 식이 전 변화한 결과, 한마디로 식소변이라고 밝힌다.



157 의식과 말나식의 활동에 의해 우리 마음에 종자가 심어지는 과정을 유식에서는 종자의 훈습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현행훈종자이다. 땅 밑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나무가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땅에 심는 것과 같다.



160 상분인 기세간과 견분인 마음의 작용, 이 둘은 아뢰야식 자체의 변현 결과이다. 그런데 이 식의 활동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그들 식소변을 각각 별개의 실체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량분별하는 현행식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의식과 말나식의 작용이다. 이를 아뢰야식의 변현과 구분하여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이라고 한다. 앞서 논의하였듯이 현행훈종자로서 종자를 훈습하는 현행식은 현행 아뢰야식이 아니라 바로 현상을 집착 분별하는 현행 의식과 말나식인 것이다.



164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 · 말나식의 분별 사이에서 순환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은 바로 우리 식의 활동을 주도하는 종자이다. 의식 · 말나식의 분별 작용을 통해 아뢰야식 안에 심어졌다가 다시 현상 세계로 변현하게 되는 종자, 즉 명언종자인 것이다. 여기서 명언이 함의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또 그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사량분별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명언, 즉 개념 또는 언어라는 것이다.



169 이처럼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을 그 현상 근거로서의 식을 사상한 채 실체화하고 고정화하여 집착 · 분별하는 것을 '두루 계산하여 집착한다'는 의미에서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170 즉 인연에 따라 변현된 의타기의 현상 세계를 욕망과 집착에 따라 허망분별하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집과 법집을 벗어 버린 의타기의 현실 자체를 유식은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172 아我와 법法이 의타기의 가유假有이고 실아실법의 실유實有가 아니라는 것을 앎으로써 변계소집을 벗어나면,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서 그 여여如如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 현상의 참된 모습을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집과 법집에 기반한 의식과 말나식의 허망한 계탁분별을 벗어나면 현상은 심층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으로, 인연변의 의타기소생으로 원만성취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의타기로부터 변계소집을 떠나면, 즉 아집 · 법집의 실체화를 떠나면 그것이 곧 원성실성이다.



179 아뢰야식의 변현 활동 자체를 자각함으로써 심층의 무명이 제거되고, 그리하여 식소변의 현상을 실체화하여 집착하는 변계소집이 극복된다. 아뢰야식의 변현 결과인 현상이 바로 아뢰야식의 변현 그 자체로서 올바르게 인식되므로 더 이상 의식이나 말나식의 변계소집에 의한 왜곡된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88 현상에 대한 일체의 앎은 무명으로 인한 집착이 배제된 차원에서 다시 긍정된다. 자각된 의타기는 곧 청정의타기이므로, 그 의타기에 따라 변현하는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은 변계소집을 벗은 무분별후득지가 된다. 깨달은 자는 다시 이 무분별후득지로써 의타기의 생사를 사는 중생의 고를 더불어 알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본무분별로서의 지혜와 함께해야만 하는 보살의 자비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식학파가 유식무경으로써 논하고자 한 것은 일체 현상 존재의 유식성이지만, 그러한 유식성을 밝힘으로써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유식성의 내적 자각 즉 마음의 활동성에 관한 내적 직관이다. 이 유식성의 자각이 곧 아공 • 법공의 깨달음이다. 



189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자기 마음의 활동을 단 한 점의 무의식적 잔재도 남기지 않은 채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이다. 그처럼 투명해진 마음, 세계가 어떻게 마음의 활동을 통해 현현하게 되는가를 여실히 직관하는 그 진여심에서는,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식과 경의 관계가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 묘妙의 관계가 된다.



맺는말
192 그깨달음의 유식적 표현이 바로 유식무경이다. 그러나 유식 논사들의 위대함은 그 깨달음 자체에 있지 않다. 인간이 존재하는 전세계 그 어느 곳에 그와 같은 깨달음이 없는 곳이 있겠는가? 그들의 위대함은 단순히 수행적 깨달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이론화하고 체계화했다는 데 있다.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말로 드러내고자 한 것, 말을 떠난 진여眞如를 방편적 말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 현상초월적 깨달음의 의미를 현상 세계의 분석을 통해 밝혀 내고자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무경은 수행적 깨달음의 내용인 동시에 일체가 가상임을 논증하는 이론적 작업이기도 하다.



195 유한한 일체의 현상을 넘어서서 무한으로 비약하게 되는 초월의 경험이 바로 유식성의 자각이다. 초월의 경험은 곧 경계 너머로의 자유의 자각이며, 해탈의 깨달음이다. 그와 같은 현상초월적 눈의 주체는 우주 바깥의 신도 아니고 우주를 창조한 브라흐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누구나의 마음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진실한 성품 곧 불성이자 여래장이며, 한마디로 말해 일심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이 유식무경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 - 불교신문

유식무경(唯識無境) - 불교신문

유식무경(唯識無境)


승인 2002.09.01

앎의 교리 삶의 교리 <31>

인식 속에서만 대상 존재

우리 눈앞의 대상은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모든 사물은 의식의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텔레비전은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은 과연 텔레비전 속에서나마 실재하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모두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동일한 인식의 대상이면서 단순한 외견이나 착각, 환상, 허구와 같은 것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진실된 자세’란 무엇일까요.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존재인 현상을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의식과는 분리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보고(眼) 듣고(耳) 맡고(鼻) 맛보고(舌) 부딪치는(身) 개별적인 인식 활동은 의식(意識)이 종합하고 통제합니다. 만일 의식(제6식)이 여러 인식활동(전5식)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혼돈 속에 빠지겠지요. 뇌의 갑작스런 혈액 순환 장애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팔다리의 수의(遂意) 운동이 불가능해진 중풍(腦卒中) 환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손과 발 등 몸의 반쪽이 그의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말을 듣지 않지요. 

이러한 마비(痲痺)현상을 한의학에서는 ‘불인(不仁)하다’고 합니다. 은행씨(杏仁)나 복숭아씨(桃仁)처럼 혈액이라는 생명의 씨앗(仁)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즉 생명 활동의 커뮤니케이션(識)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不仁) 뜻입니다. 때문에 의식은 즉 의사 소통 내지 혈액 순환 등 생명활동의 기반이 되지요. 그런데 이 의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통섭하는 의근(意根)과 비감각적 대상(法境)을 인연으로 하여 생깁니다. 인식 활동인 이 식은 여러 교리에서 설명되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존재의 다섯 가지 요소(五蘊) 가운데 다섯 번째인 식과, 열 두 가지 인연 생기(十二緣起) 중의 세 번째인 입니다. 특히 이 식은 ‘유식’(唯識)이라는 말에서 보다 심화되지요. 표층의식인 제6식과 심층의식인 제7식과 제8식 내지 제9식으로까지 설명됩니다. ‘식’은 ‘의식’ 내지 ‘인식의 작용 그 자체’를 말하지요. 

이 식은 ‘비즈냐아나’(vijn~a-na)‘비즈납띠(vijnapti)로 변별됩니다. 이는 인식의 주체로 보느냐 활동으로 보느냐에 의해 분기되는 것이지요. 
‘비즈냐아나’(識)는 ‘식 자체’ 내지 ‘어떤 대상을 내용으로 하는 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식’은 ‘항시 변하고 있는 흐름으로서의 식’입니다.
‘비즈납띠’는 ‘인식되어진 것’ 또는 ‘인식의 내용’ 내지 사물의 겉모습인 ‘표상’(表象)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흔히 인식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물은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지 내 마음에 나타난 사물의 겉모습(表象)일 뿐이며, 모든 사물은 내 의식의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影像)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식 속에서만 대상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주관적 관념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유식학을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유식 역시 연기·무자성·공의 입장에서 존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세친은 그의 〈유식이십론〉(실은 22송)에서 대상의 비실재성을 논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물의 시간적, 공간적 구별, 동일한 대상의 인식, 대상에 따라 취하는 성공적인 행위들에 대한 설명을 꿈의 현상에 대비하여 해명하지요. 
즉 악업으로 지옥에 떨어진 이들에게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는 지옥의 문지기들은 객관적 존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지기들은 단지 지옥의 고통을 받는 이들의 나쁜 업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결코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문지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업이 남긴 힘’ 또는 ‘습기’(習氣)는 모두 우리의 식 안에 내재한다는 것이지요. 세친은 우리의 인식은 모두 식 자체의 종자(씨앗)로부터 생겨나는 것일 뿐이며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식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중국 자은(법상)종에서 ‘안난진호(安難陳護)1·2·3·4’라는 말로 식의 사분(四分)설을 제기한 것도 바로 ‘대상’을 ‘인식’ 속에서 해명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식이라는 것도 실체는 아닙니다. 폭포수와 같은 하나의 흐름일 뿐이지요.

고영섭/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