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예술신학 심광섭 Philo Kalia, 신대식 『예술신학』을 읽고...

알라딘: 예술신학

심광섭 (지은이)
대한기독교서회2010-02-20



전자책
1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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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감사의 글

제 1장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제 2장 하나님을 보는 환희
제 3장 예수의 미의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제 4장 글로리아. 예술신학의 근본 개념
제 5장 창조의 아름다움
제 6장 멋. 인간학적 예술신학의 기초 개념
제 7장 아름답다 예수여! 십자가 책형의 미학-숭고
제 8장 미학적 구원론
제 9장 율법의 사용과 성도의 향기로움 삶
제 10장 성만찬의 미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제 11장 영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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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심광섭 (지은이)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1985)
독일 베텔신학대학(Kirchliche Hochschule Bethel) 신학박사(1991)
(사)한국영성예술협회_예술목회연구원 원장

지은책
기독교 미학의 향연(2018)
공감과 대화의 신학 F.Schleiermacher (2015,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예술신학 (2011, 2011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2003)
탈형이상학의 하느님. 하이데거, 바이셰델, 벨테의 신론 연구 (1998)
신학으로 가는 길 (1996)


최근작 :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기독교 미학의 향연>,<공감과 대화의 신학> … 총 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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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ristian fine arts / Christian Aesthetics

심광섭 저, 『예술신학』을 읽고...
아트가브리엘 2011. 11. 24. 18:37 
http://blog.daum.net/artangel/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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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출자: 신대식,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기독교미술학과,
 제출일: 20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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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본 연구자는 개혁교회 경건주의 역사와 경건주의 신학에서 추구하는 신앙과 학문적 경향이 기독교 지상대명령과 문화명령에 얼마나 중요하게 연관을 갖는지 의문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번 연구 중에 심광섭의 『예술신학』을 통하여서는 감성적 인식의 폭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과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분석해 보고, 개혁교회가 지금까지 추구하는 신학적 경향과 기독교인의 삶에서 인식을 새롭게 할 계기로 삼고저 한다.
    연구자료가 감리교 토양의『예술신학』이라는 점에서는, 칼빈주의 장로교 시각과 다르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본 연구자는 겸손한 자세로 개혁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과거 역사적 개혁교회 경건주의 신앙과 전통의 시각에서 장점을 수용하고 보완할 점을 찾으려고한다. 이를 위하여 학문적 자료로 삼고자, 제1장부터 제11장까지 요약정리하고, 개혁교회 경건주의와 개혁교회생명신학의 실천적 입장에서 문제점과 대안에 간결하게 본 연구자의 논지로 마치려 한다.

Ⅱ. 심광섭의 ‘예술신학’의 요점

제 1장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계몽주의시대 이후 이성과 계시를 대립시킨 개신교회와 카톨릭교회의 정통주의 모두 다 신앙을 이성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
하다. 즉, 계시의 가능성을 인간 이성의 지평 안으로 제한하는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는 이성적 개념으
로서 도달하고자 하는 논리적 진리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선과 미의 범주로 이해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진성미의 카테고리는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범주이다.
    오늘날 기독교신앙이 공감의 폭이 너무 좁고 감정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상상력을 질식시킨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말해 기독교 신앙에는 어
떤 심미적 철학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미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결국 어떤 신앙도 없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하나님도 있을 수 없음을 인
식해야만 한다.
    신학이 조형을 통해 나타난 아름다움을 경원시한 또 하나의 다른 원인은 감성적인 세계는 허위의 세계이며 초감각적인 세계만이 진리의 세계
라고 주장해 온 플라톤주의의 강한 영향권 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신앙은 공동체의 교리적 진술에 치우쳐 지나치게 논리적이 됨으로
써 공동체의 감성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시대에 펼쳐가야할 신앙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광적(廣的), 감성의 신앙이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미와 씨름한 기독교신학과 교회의 역사
    1) 고대교회와 아우구스 티누스
초대 기독교미술은 콘스탄티누스 이전(313) 미술과 이후 미술로 나뉜다. 초대교회는 결코 회화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교회의 가장 초기의 작품들
은 종교화가 허용되었다는 정황을 충분히 반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가장 선하시고 아름다운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며
아름다움 자체라고 고백하였다.
    2) 중세와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은 자연과 인간을 발견하고 종교적 지배로부터 인간과 자연을 해방하고자 했다. 가령 프랑드르의 예술가들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
연적인 것을 한 화면에 섞어 자연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3) 종교개혁과 근대
루터교회는 회화에 매우 개방적이다. 칼뱅은 회화에 대해 음악보다 더 단호하다. 원칙적으로 이미지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미신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지만 어떤 상을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기 때문에 그것을 순전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한다" 했다. 그러나 칼뱅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20: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유형적으로 표
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는 일은 더욱 더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며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고 하여, 예술의 기능을 인정하지만 예술
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예술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칼뱅은 "형상물 사용이 어떤 악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단언한다.
한국교회에서 이미지 사용에 대한 사정은 더 열악하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적 전통과 청교도적 영향으로 더욱 강화된 금욕주의적 미학의 전통이
한국교회에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4) 신앙의 아름다움을 찾는 현대신학의 고투
근대신학의 창시자 슐라이어 마허(E Schleiermacher)는 종교를 심미적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
과 감정"이며 "무한자에 대한 느낌과 취향"이다.

  2. 아름다움을 찾는 신학
    1) 감성으로 신학하기
최근 교육가들은 감성적 경험이 지적작용을 고무한다는데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은 교육과정에서의 오감의 작용( 맛, 접촉, 듣기, 냄새 맡기, 보
기)을 고무한다. 네델란드 신학자 종교가 반더 레우는 예술( 춤, 연극, 문학, 회화, 건축, 음악)을 신학적으로 읽는 신학적 미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신학적 주제를 미학으로 읽는 미학적 신학을 훌륭하게 결합하고 있다. 이제 예술신학, 예술목회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제 2장 하나님을 보는 환희

  1. 신학의 감각
기독교 신학의 주류 전통은 자신을 감각과 느낌 등 감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하기 보다는 개념과 논리 등 이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해 왔다. 아무리
위대한 지식의 체계라도 그것이 신앙의 경험에 근거하고 그 경험을 해명해 주지 못한다면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시인 엘리엇은 현대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 "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느
낄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사람의 오감 중에서 단연 뛰어난 것은 '보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 예수로 육화함으로써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기독교를 청각중심의 종교, "들음의 종교"로만 알고 있으나 기독교는 시각, 곧 "봄의 종교"이기도 하다. 동방교회는 봄을 강조한 반면, 서
방교회는 들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방교회가 말씀의 계시를 배제해 왔다면, 서방교회는 특히 개신교는 미학을 배제해 왔다. 양자는 서로 보완되
어야 한다.

  2. 신학 그리고 하나님을 그리는 예술
기독교신앙의 학문인 신학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의 신비이고 생의 최고의 가치인 진, 선, 미, 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기리고 사랑하고 그리
워하고 즐거워하며 생각과 언어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술적 활동으로서 그분을 그리는 학문이다. 나는 신학을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그리워 그분을 그리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3. 창조주 하나님의 예술적 행위
칼뱅도『기독교강요』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술가로 언급한다. "하늘의 무수한 성군을 놀라운 질서에 따라 배치, 배열하시고 서로 어
울리게 하신 그 예술가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외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 최
초의 예술가이시다. 요한일서 서문은 미학적 그리스도를 위한 대헌장이다.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

  4.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즐거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뉘인 아기예수의 형상(눅 2:7). 그는 보이지 아나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1:15).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오 그 본체의 형상(히1:3).

  5. 성령 안에서 신학하기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사막 빈들로 가신다. 사막은 인간의 업적, 성취가 없고 인간의 자랑이 끝나는 곳이다. 사막은 인간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
지 못하고 자기 힘만으로 실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의 체험 장이다. 텅 빈 속에 하나님만
오시니 하나님과 예수는 하나가 되었다.

제 3장 예수의 미의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1. 예수의 미의식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아름다움과 선을 향한 에로스는 타자의 아름다움에 먼저 주목하고 그 아름다움에 때문에 사랑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아
가페적 사랑은 단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타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타자의 곤
경을 먼저 주목하는 아가페의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누더기와 넝마 같은 인간성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미적 감각이고 미의
식이다.

  2.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1) 미적판단
논리적 판단이 개념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려고 하는 반면, 미적판단은 대상이 나의 표상 속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쾌감 혹은 불쾌감에 관
심한다는 것이다. 미적판단은 증명될 수 없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구속력을 갖는다.
    2) 미적자유
미적자유는 예술 외적인 목적에서 해방되어 전적으로 그 목적을 자기 자신 속에 갖는 자신의 형식의 완성에만 과제를 두는 무관심적인 활동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만족은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와 결부된 유쾌한 것, 선한 것과는 달리 대상이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자유로운 만
족 무관심한 만족이다.
    3) 미적 충일함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눅9;33)라는 고백과,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나
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처럼 자기의 이해 밖에서 일어난다. 아름다움은 대상이 의미하는 가치
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만족을 창출하지만 그 만족이 아직 기호로써 중개되기 때문에 기호가 현실을 담보하지 못하는 한 충분하지 못하다.
    형상 또는 외형의 세계, 곧 현실을 떠난 것은 주관의 환상일 뿐 예술에서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논의가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적 실천에서 세계를 잇는 그대로 재현하려 했으며 모더니즘은 세계를 의식의 흐름으로 재구성하려했다.


제 4장 글로리아, 예술신학의 근본개념

    루터는 영광의 신학에 대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내세운다. 십자가의 신학은 수난의 서술에서 그려진다. 성육신이 미의 미학을 논의한다면, 수
난과 십자가는 추의 미학을 서술한다. 영광은 교의학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고 드러내는 계시와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성서와 신학에
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낼 때 나타난 현상과 경험을 제시하기 위한 개념이기 때문에 예술신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1. 성서의 영광이해

아름다움이란 관념은 신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 33장 17정 "네 눈은 왕을 그 아름다운 가운데서 보며...,"에 사용한 외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다. 히브리 사상이나 신약성서에서는 주요한 역할 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답다(καλος)는 70인역(LXX)에서 창세기, 지혜서, 아가서,
전도서, 잠언, 등 여러 번 등장하는데, 창시기 1장의 '좋았다'(פוב(는 단어도 미학적인 아름다움이나 내적인 효용성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
의 기대에 부합하는 피조물의 직무상의 능력을 표현한 무질서 안에서의 질서를 의미한다. καλος(美)의 의미는 외적 특질을 의미하는 폭넓은 개
념(용기, 유용성, 선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창조가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며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승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은
καλος를 Pulchrum(美)이 아닌 bonum(善)으로 번역했다. 세계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그리스적이다. 성서미학에 나오는 것은 그리스어
로 번역함으로써 그리스영향을 통해 성서로 가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영광의 구약 개념 כבוד)카보드)나 신약δόξα(독사)는 빛, 광휘(光輝), 광
채(光彩)를 의미한다.
10/31/21, 1:22 PM 신대식의 예술세계
https://blog.daum.net/artangel/1182 3/5


  2. 영광의 신학

칼뱅이 창조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극장) theatrum gloriae Dei"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세계 안에서 감지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현대신학에 두 가지를 기여했다. 하나는 신학의 진리 담론이 논쟁적, 논리적, 사변적, 객관적 성격에서 벗어나 성찰적, 구체적, 경험적, 참여
적 진리담론이 되는데 기여했고, 다른 하나는 신학과 미학, 논리와 감성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통합 된 것이다.
  1)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형식(form)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내용이다. 그래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
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2)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는 개신교 신학은 변증법적 사유를 적용하여 신앙으로부터  미완성의 봄(incohtio
visionis)을 제외시키고,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을 보는 것과 그 메시지를 들음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보았다. 
    ① 발타자르의 신학적 구성과 핵심개념으로서 계시와 아름다움
발타자르는 계시신학에 아름다움(美)을 도입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현재화하고 전달하는 일은 예전과 케리그마와 교리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
이 아니라 기독교예술을 통해서 일어난다.
    ② 발타자르의 신적형태들의 지각에 대하여 발타자르 신학적 착상은 ‘하나님의 형상’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인간은 몸을 수단으로 자신이 세
계의 부분이라는 사살을 인식하는 한 자기 자신을 현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현상들 중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그러므로 발타
자르는 인간이 존재하는 혹은 영의 일차적 이미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적 ,영적 현상은 항상 반응, 곧 응답적 현상이다. 인간은
현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치 거울처럼 응답적이고 반영적인 이미지로 반응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다라 창조
되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거울이며 인간의 영적이며 신체적인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형태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유사하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피조된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원초적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피조된 형상은 소외
된 형상이 아니라 형상을 닮아 형상과 일치하게 될 때 가치 있게 되는 형상인 것이다. 이 일치는 지각을 통해 일어난다. 미의 지각이란 삶의 형태
의 지각이며 그것은 인간의 형태 안에서 발견된다. 동시에 이 삶의 형태는 자기 창조적 형태가 아니라 주어진 선사받은 형태이며 자유와 신체성
과 영성을 부여받았다.
    발타자르는 왜 이 형태를 아름다운 형태라고 칭하는가? 삶의 형태의 지각은 지각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한
실재의 진리와 선(善)안에서 발견되며 이 실재는 무한하고 무진장한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형태 속에 나타난 이 실재의 현상은 이 형태를 넘
어 실재를 지시하며 동시에 이 형태의 실재 안에 현재한다. 발타자르의 신학적 미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계시가 꼴을 취한 형식(form)과 형태
(gostalt)이다.

==발타자르의 핵심적 개념의 형태와 영광==
  형태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나타나 꼴을 취한 형태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는 예수가 기호나 상징이 아니라 형태로 불려져야하는 이유이다. 예
수는 형태로서 하나님의 가리킴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곧 신현(神 顯)이다. 괴테는 형태가 자연에 도취되었을 때 경
험된다고 한다. 여기서 자연은 신적 상상력의 표현이다. 괴테는 후기 저작에서 형태개념을 수정하여 형태는 존재자의 본질의 표현이 된다. 괴테
의 경우와 동일하게 발타자르는 형태의 개념의 이해에서 모든 유형의 이원론을 배제한다. 근원적인 감각의 지각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형이상
학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존재 전체가 분리되고 파편화된 존재자들 속에 나타날 뿐이다. 존재자를 전체성 혹은 절재성의 파편 혹은 모순으
로 지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자는 존재의 형태로 간주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과 영광
발타자르는 교회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이 미에 초월적 범주의 자리를 부여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한다. 만일 신학이 미를 초월적 범주로
버려두어야 한다면 세계를 성령이 역사하는 공간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며 세계는 창조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에서 시
작한 발타자르의 형태의 개념과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론의 출발점이 된다

  3)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
칼바르트가 영광을 하나님의 본성에 국한하여 변증법적으로 다루었고 폰 발타자르가 은총과 자연, 계시와 아름다움을 유비적으로 해결할 때, 몰
트만은 은총과 자연을 종말론적으로 접근하면서 아름다움은 역사와 자연을 통해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의 형태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미적 범주는 믿음 안에 있는 새로운 생에 속하는 것이며 이 범주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과 새로운 순종은 샘솟는 기쁨이 없는 율법적 노력
이 되고 만다. 영광은 예술의 부활에서 놀이와 축제의 특징을 입는다. 창조의 놀이는 새창조의 시작인 부활에서 모든 피조물이 당하는 억압에 저
항하고 고난을 극복하여 기쁨의 축제에 참여하는 진정한 놀이의 신학이 된다. 몰트만에게 영광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영원한 기쁨의 잔치이다.

  3. 아름다움의 신학, 신학의 아름다움
바르트는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받을 만한 형태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 자체인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
은 모든 학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학문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다. 성육신의 아름다움은 예술신학의 미가 철
학적 미학에서 취한 방법론이나 철학적 미의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고유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발타자르
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아름다움, 즉 객관적 계시에 대한 성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미학적 범주로 말할 수 있고 사상적 착상을 제공한다고 평
가한다.

제 5장 창조의 아름다움: 생태 미학적 창조론

    창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구분되지만 아름다움자체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에 나타난 아름다움을 말한다. 창조의
아름다움은 철학적 미학에서 다루는 자연미와 구분된다. 자연미에는 근대철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예술미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
으며 존재론적으로 제 2의 현상을 지칭하였다. 중세에는 자연미와 예술미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르네상스에 이르러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
다는 인식이 싹트게 되어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자 칸트가 르네상스의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월성을 말함
으로써 그 순서를 역전시켰다. 근대이후 개신교신학은 자연친화적인 경건주의나 자연신비주의를 반대함으로써 자연을 성례전적으로 보거나 혹
은 미적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력을 아예 상실하고 말았다.
    장 칼뱅에 의하면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으나 타락 후에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
여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식을 회복하여 피조물과 갱신된 새로운 관계, 자연을 창조자로서 지각하며 창조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관계를 획득해야 한다. 칼뱅이 창조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란 점을 말한 것이다. 자연 탐
미주의는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보지 못하고  종교와 윤리로부터 미학의 독립이며, 미학의 자율성에서 본다.
    생태학적 창조론은 생태계의 위기가 직면하여 창조를 생태학적으로만 아니라 미학적으로 봄으로서 생태학적 태도가 제공하지 못하는 창조에
대한 인식을 보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 6장 멋, 한국의 인간학적 예술신학의 기초개념

    신석초는 한국의 독특한 미의식을 멋으로 규정한다. 멋이란 사치성 유기성의 산물이며 한가한 여유의 상태에서 혹은 잉여 된 정력의 소비작용으로 나타내는 것이지만 직접 사치의 상태는 아닌 것으로 거기에는 상당히 해박한 상식과 고매한 사상과 또는 예절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된 인간 삶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한다.

10/31/21, 1:22 PM 신대식의 예술세계
https://blog.daum.net/artangel/1182 4/5

    해천 윤성범은 바르트에게서 직접사사하여 바르트 신학의 화해론이 중요한 위치이듯이 한국에서 솜씨를 화해의 예술로 보고 한국미의 특징을 조화미로 특징짓는다.
    소석 유동식의 풍륭도의 전거는 신라말의 석학 최치원이 쓴 화랑의 미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한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7장 아름답다 예수여! 십자가의 책형의 미학- 숭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은 고대그리스의 형태미로는 표현할 수 없다. 십자가는 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추(醜더럽다)라고 해
야 옳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수남과 죽음의 순교를 추의역사로 분류한다
    한완상은 현실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경계하여 십자에서 “예수 따르미”의 아름다운 패배의 미학을 그려냈지만 더욱 근원적인 것은 패배의 미
학이 아니라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숭고한 사랑일 것이다.                                 
    어떤 형상이든지 그것을 보면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이 잇다. 그 형상이 사람일 경우 우리는 그것을 멋 혹은 기품이라고 한다. 멋이
인생의 밝음과 어두움이 개입되어 새겨지고 형상화된 아름다움이라면 십자가는 예수의 멋이며, 부활은 온 천하에 드러낸 환상적 놀이, 곧 신명이
요 흥이 될 것이다. 십자가 책형의 예수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이 형상화 되어 멋과 기품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ikon)이다.

제 8장 미학적 구원론

    어떻게 하나님을 세계 안에서 경험할 수 잇는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경험되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도 종
교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면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로서 표상하는 것, 그것이 종교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경험을 신
학의 구원론에 연결시켜 전개한 탁월한 신학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1703-1791이다. 성경은 영적 실재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너
희 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니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5-16)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요일1:1)하고, 바울은 자신
을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한다.
    영적 감각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영적 감각론을 수립한 최초의 학자
로서 그는 그리스도를 오감을 통해서 지각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보았다 해서 다 영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시각(inner sight)에 관하여 그리스도가 참된 빛이신 이유는 빌라도와 십자가
에 못 박은 자들이 예수를 육안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 다면 아무도 예수를
보았다 할 수 없다. 청각(hearing)에 관하여, 미각(taste), 후각(smell)에 관하여는 옥합이 깨뜨려질 때는 향기로 하나님의 자기비움(kenosis)과
그리스도의 향기다. 촉각(touch reception)에 관하여 오리게네스는 최고의 완전은 오감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을 통해 실현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감각의 집합체인 몸을 통해 말씀이 형상화 되었다는 것이다. 감각이 동물적인 사람은 동물이고 감각이 신적인 사람은 신인 것이
다. 나는 여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그 몸은 생각이나 의지정도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기 몸이 자기를 아끼고 사랑
하듯 자기의 영원한 생명으로 다른 생명조차도 그 안에서 살려 영원히 사는 생명이 되도록 하고 싶은 사랑이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과학적 경험과 종교경험에 대하여는 루터, 웨슬리, 슐라이어마허 세 사람 모두 신앙의 경험관련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에게 신학은 사
변신학이 아니라 실천신학이다. 근대의 데카르트와 칸트의 합리주의 전통과는 달리 후설이후의 현대 철학에서도 인식의 조건으로서 경험은 강조
된다. 메를로퐁티(Merleau Ponty)는 몸의 지각을 강조한다. 메를로퐁티는 모든 반성의 근거로서 몸의 전인격적 지각을 말한다. 인간은 몸을 통
하여 경험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을 미리 제공받으며 몸의 지각이 모든 사유를 앞서간다. 전통적인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 의식과 몸, 개인과
사회성 등의 이원론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을 제공하고 있다.

제 9장 율법의 사용과 신자의 향기로운 삶

    루터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성은 하나님의 법을 다르기 위한 도덕적 투쟁의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삶이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루터에 비해 종교개혁 이후 특히 루터의 제자 멜란히톤과 칼빈은 율법의 제3용법에 훨씬 더 많이 전념하였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신앙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희망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삶의 형태화에 관한 규칙이다.

제 10장 성찬의 미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성찬에 대한 이해는 급기야 종교개혁교회가 루터, 재세레파, 개혁파, 영국교회, 등으로 분열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예수께서 초대하신 만찬 앞에서 형제들이 싸우고 결국 갈라진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떡과 몸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피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매우 실천적으로 생각한다. 개신교회는 성찬의 관계를 향유의 행위와 무관하게 보려는 자들에게 대해서만 반대한다, 다른 한편 이 성찬의 관계에 덕과 포도주, 살과 피의 영적 향유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자들을 반대하여, 그는 경험을 강하게 강조하고 성천행위의 영향과 결과를 강하게 강조함으로써 처음부터 교의학적 입장을 약화시키고 있다. 성찬의 제정의 말씀을 듣고 떡과 포도주를 향유함으로써 영적 삶을 강화하는데 있다.
    심광섭은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인 삶의 새로운 형성은 하나님께 감사, 그리스도를 기억, 성령의 새창조, 사귐(타자의 초대와 사귐, 자연과 우주와의 사귐), 희생제사, 사회적 사랑과 정의 그리고 해방, 하나님 나라의 잔치, 성례전을 위한 거점으로 정리한다.

제 11장 영성의 미학

    핀바르 코놀리(Finbarr B. Connolly)는 영성이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닌 하나님과의 친분 관계를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개신교 교회와 신학에서 영성에 해당하는 단어는 "경건(敬虔)"일 것이다. 경건은 원래 신앙에 근거하여 활동적인 사랑가운데서 모든 삶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경건주의와 19세기의 각성운동과 부흥운동에서는 점점 개인의 내면성에만 관련된 단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영성에 그 자리를 내주는 듯싶다.
    신적 미의 세계는 인간이 통상 아주 사랑하는 사물에 관심을 보이고, 추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에 대하여 이사야나 아모스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추한 현실을 치유하는 사랑의 힘은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넘어선 신의 아름다움의 세계에 진입함이다. 오늘의 영성은 신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체현하고 표현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신적 미의 세계는 형식적 아름다움이 사랑의 내용을 담아내는 세계이다.
 "...하늘은 우리 마음 안에 있소"(프란체스코).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봄으로써 거룩해진다. 하나님은 모든 이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그런데 그분의 현존은 인간이 알아 볼 때만 드러나신다. 아 그때! 우리에게는 세상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심광섭)


Ⅲ. 결론 

현대사회에서 시각예술의 이미지(Image)는 정지된 채로 머물지 않고 생명의 유기체성처럼 창의적으로 새롭게 예술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개혁파 기독교 안에서는 이러한 보편적 현상이 어느 때 부터인가 제약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초기 칼빈주의 개혁자들의 시각예술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경원시한 것으로 보인다. 개혁파 입장에서 바르게 인식하려면 지성이나 감성은 인간 본성의 두 측면으로 함께 타락했든지 함께 중생된다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며, 성경은 두 본성 중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 연구자는 자연과 예술에서의 심미적 경험을, 세속적 영역 내지는 위험스런 인식으로 여기는 것은 영적경험에 있어서 감성적 경험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주의(ism)을 만들어 칼빈주의로 신봉한 것으로 인하여 개신교 신앙생활은 사소한 오류가 아니라,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목표에 중대한 오류가 발생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에서는 교리와 변증을 듣고, 일상적 삶의 원천은 교회 밖에서 얻게 되는 격으로 예술에 있어서 형상(Image)을 교리적으로는 우상(idol)시하면서도, 삶속에서는 시각예술에 있어 조형적 형상이 신앙생활에서는 은혜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신앙과 삶의 이원론적 현상에 대하여, 예술적 감성을 신학적 인식의 방법론으로 보완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4세기 말경에는 성경의 문맹자에게 종교화로 신앙교육을 하였고, 1522년에 성상파괴가 한창일 때 종교개혁자 루터는 삽화를 게재한 신약성경에서 교육적 순기능으로 활용하였던 것과 개혁교회 경건주의자들의 신앙과 윤리적 삶 속에서는 시각예술을 통하여 교육적 기능만이 아니라 선포적 기능까지도 하였던 것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자는 하나님이 주신 예술적 재능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할 목적으로 우상(idol)을 만드는데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런 목적과 기능으로 시각예술을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창조한 동산에서 우리가 “휘황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되거나, 하나님의 창조적 재능주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교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미술은 거짓 신을 숭배하는 악마의 짓"이라 부정했던 이유가 창세기 3장의 금단의 열매를 해석하는 차이에서 생긴 것으로 본다. 하와가 보기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는데,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고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유혹의 제공자라고 생각한 이유에서 조형예술이나 시각예술을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칼빈의 경우에도 시각예술의 조형(造形)을 통하여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경원시한 원인은 그가 어거스틴 이래로 플라톤철학의 계승자가 되었던 이유로 보이며, 감성적인 세계는 허위이며 초 감성적인 세계만이 진리의 세계라고 주장하는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21세기부터는 헬레니즘적 스콜라 학문이 아니라 생명신학운동에서 기독교문화의 변혁적 주체가 될 감성(感性, sensibility)의 기능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회자와 신학자는 예술신학과 문화명령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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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E 문화 예술과 목회
[예술신학] ①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하나님을 보는 신앙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28
심광섭 목사
승인 2019.09.1

나는 약 20여 년 전부터 기독교 신앙이 형상화하는 아름다운 진리의 생명적 형태를 찾는 구도자이며, 그것을 말하고 전하는 전도자임을 자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책의 제목을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이라 달기도 했다. 나는 <예술과 기독교 신앙>, <예술신학> 등을 신설하여 가르치기도 했고, 2013년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 이래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 일은 마치 바울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받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

여기서 바울이 말한 복음이란 나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는”(엡 4:13) 기독교 신앙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아름다움이다.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얼굴의 하나님은 아름답고 감미로운 분(dulcedo Dei)이다. 복음의 진리(道)와 복음의 실천(德과 仁)은 복음의 아름다움(藝)에 놀라고, 그것에 끌려 노닐고 즐거워함으로부터 나오며(脫) 다시 거기로 향(向)한다. 요컨대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생각(思)하며 행(實行)하기에 앞서 느끼고 반응(感應)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중세기의 신학자 안셀무스가 남긴 유명한 명제에서처럼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여겨져 왔다. 논리적 진리에 더하여 신앙에서 선을 찾고 행하는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바울은 믿음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 갈 5:6)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예술신학의 새로운 명제로서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을 제시하였다.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대주교 성당의 '승리자 그리스도' 6c.

교회사가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승리자 그리스도>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해 주는 개념은 진•선•미임을 역설한다. 그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대주교 예배당에 새겨진 인상적인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상에 새겨진 “에고 숨 비아 베리타스 에트 비타”(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에 주목한다.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펠리칸은 그리스의 고전적 삼중주인 미, 진리, 선에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주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길’은 아름다운 것(미)을 지칭하며, ‘진리’는 빛을, ‘생명’은 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라벤나의 그리스도 상은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사실에서 신앙의 ‘진리’와 ‘선’만큼 궁리(窮理)하지 못했던 신앙의 ‘아름다움’(美)이 새롭게 화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眞) 선(善)한 아름다움(美)을 보는 것(觀)이다. 참된 삶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유한한 표층에서 발하는 은닉된 신적 근원을 보는 것이다. 논리를 다투는 사실들의 세계보다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가 더 크고,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보다 존재의 감각과 감응하는 세계가 더 깊고 높다. 신앙의 진리와 신앙의 실천은 신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즐거움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그곳을 지향한다.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치열한 것이고 얼마나 비장하고 간절한 것인가? 욥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 하나님 자신이다. 욥이 씨름하는 것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며,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기 위한 신학적 쟁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욥 19:26-27)

하나님 자신을 보려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마침내 욥은 직접 하나님을 두 눈으로 뵙는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 42:5)


수도자는 시편을 노래하며 부재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맛본다. 하나님이 몸과 마음에 꾹꾹 차게 현존하신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요일 1:1). ‘말씀을 들음’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봄’은 신앙이 도달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할 안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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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NEW NORMAL  常識を超える エコビレッジの可能性と未来 | Facebook
TUESDAY, 2 NOVEMBER 2021 FROM 21:30-23:30 UTC+10:30
NEW NORMAL  常識を超える エコビレッジの可能性と未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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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 by 三角エコビレッジ サイハテ and GEN-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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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Japanと、アズワンと、サイハテエコビレッジから、これまでの常識を超えて、誰もが安心して本心で生きられる、”NEW NORMAL”の創造を広く呼び掛けます。
━━━━━━━━━━
日 時:11月2日(火)20: 00~22:00 @オンライン
参加費:一般1500円/GEN-Japan会員1000円/学生500円
申込先:https://gen2021-11-2.peatix.com
共 催:GEN-Japan/三角エコビレッジSAIHATE
★お申込みされた方で当日都合が悪く参加できなかった方にも全員、動画を視聴期間限定でお送りします。
━━━━━━━━━━
トークゲストは、都市型エコビレッジとして注目されるアズワン鈴鹿コミュニティの小野雅司氏と、次世代型エコビレッジを代表するエコビレッジ・SAIHATEから、工藤シンク氏と坂井勇貴氏

サイハテがスタートして10年を迎え、アズワンも20年を超えて、これまでの常識にとらわれないで、持続可能な、人間らしい新しい社会を創造しようとしてきました。
コロナ禍や気候変動の中、社会に対して不信感を強めていたり、これからの世界に希望を持てなくなっている人々も増えていますが、でも本当はどうでしょうか?
ここに自分たちの足元から、本心から願う通りの世界を創ろうと、トライ&エラーを楽しみながら実践している人たちがいます。

次世代型コミュニティのサイハテの工藤さん、坂井さん二人からは、ズバリ若者に人気のサイハテの魅力とは。さらに10年続いてきたポイントを。
小野氏からは、20年にわたるアズワンでの経験と、世界や日本各地の様々なコミュニティづくりにかかわり研究してきた中から、コミュニティの持続と発展のためのポイント、世界で共通する「カギ」について話してもらいます。
そして小野さんの話をもとに、人間性を尊重する、本心で生きられるコミュニティがどれほど求められているか、3人でトークしながら、一緒に探究します。
NEW Normal、これまでの常識を超えて、誰もが本心で生きられる社会、持続可能なコミュニティを考えたい人、集まれ!


Philo Kalia 심광섭 폴 틸리히 산산조각이 나고 바스러져서 그 심층에 흐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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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2 h ·




Philo Kalia  심광섭
18 h ·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기독교 사상사의 ‘근대’ 편에서 교회 내부의 신학적 운동보다 교회 밖에서 일어난 사상적 변화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교회 내부의 신학자로서 크게 다룬 인물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복고신앙 조금, 슐라이어마허와 키르케고르, 틸리히의 스승 마르틴 켈러와 하르낙 정도이고, 
그 외에는 모두 교회 밖의 사상적 운동이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스피노자와 헤겔, 셸링,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쇼펜하우어와 니체. 이들은 전통 교회와 신학의 비판자로서 근대의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오늘의 인간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오히려 신학자들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그는 복음적인 대답만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상황의 분석과 이해를 신학에 포함시킨다.

이는 틸리히가 신앙의 내용을 서술하는 조직신학을 구성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계시-하느님-그리스도-성령-하느님 나라’로서의 조직신학이 아니라 
‘이성과 계시, 존재와 하느님, 생명과 영, 역사와 하느님 나라’, 
이처럼 ‘와’(and)를 중심으로 상황과 복음을 동시에 결합한다. 

신학은 상황 혹은 복음의 양자택일 아니라 
상황과 복음을 비평적으로 묶어 창조적으로 엮는 ‘와’에서 사건화되고 발생한다.

틸리히의 신학적 태도는 인간의 상황, 인간의 곤경에서 절대로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칼 바르트의 입장과 다르다. 
  • 바르트 같으면 신이 밖으로부터 인간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인간에게 말해야 한다. 바르트 신학은 인간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상황으로부터, 인간의 곤경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인간 안에는 신과 만날 수 있는 아무런 접촉점이 없다. 
  • 바르트는 동료 에밀 브룬너의 『자연과 은총』이란 저서에 대해 한마디 큰 소리로 『아니요』(Nein!)라고 잘라 말했다. 단호한 Nein!에서 신앙의 절대성을 지키려는 20세기 파수꾼의 숭고한 사명을 느낀다. 
  • 그래서 바르트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18세기의 계몽주의, 루소, 레싱, 칸트, 헤르더와 노발리스를 신학의 전사(Vorgeschichte)로 다룬다. 이것은 연대기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내용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사자후(獅子吼)도 역사적 울림일 뿐이다.

 틸리히는 “이제 나는 이 사상이 지탱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은 후견인이 불필요한 성인(成人)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세속 세계 속에서 종교영역과 문화영역의 분리는 이 이상 존속될 수 없다. 
교회는 역사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의 유일한 대표가 아니다. 세속문화도 이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본회퍼의 사상에 따르면 현재에 있어서 아마도 세속문화가 더 참된 권리를 가질지 모른다. 성과 속의 분리는 성서에는 없는 생각이다.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이 구별되어 따로 있으며 그 안에, 그 시간에 입장해야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성서에 없다. 
하느님이 임하는 장소, 하느님이 현존하는 시간이 성소(聖所)이고 성시(聖時)이다. 성소와 성시가 교회나 성당, 예배와 미사 시간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성전과 교회, 안식일과 주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장소와 시간이 거룩함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배타적인 시공간은 아니다
‘아버지가 피우시던 꽁초’(레오나르도 보프)와 ‘강아지똥’(권정생)이 성사가 될 수 있듯이 뒷간도 성소가 될 수 있다  (손원영, “기독교의 생태신학적 ‘뒷간신학’”).

교회는 문화의 자율적 발전에서 떠나 있어야 하는가? 
교회는 문화 전체에 대해서 최후의 진리 보루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적응성을 잃고 구석으로 밀려나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일반 세속문화 안에 있는 종교적 요소와 종교 안에 있는 문화적 요소를 이해하고, 지난 시대와 문화에 존재했던 통합과 같은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는 시도를 꾀할 것인가? 
지상에서 문화와 종교의 통합은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종교 없는 문화, 문화 없는 종교로 영역을 분할 축소하여 자신들만을 위한 닫힌 성안에서 자신들만의 잔치를 고집할 것인가?

지난 2년 코로나19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달라져야할까? 
보이는 ‘내’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 이완되어 교회와 세계, 신앙과 문화 및 예술을 갈랐던 경계의 문들이 열리고 담들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유불선 이웃 종교 등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그들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는 주체이며, 그들 안에 깃든 종교적 옥동자녀(玉童子女)를 산파(産婆)해야 한다. 
적용이나 해석이 아니라 산파술이 필요하다. 
문화 없는 종교로 축소될 수 없듯이 종교 없는 문화로 축소될 수 없다. 이런 방향은 인간의 풍요로운 자기실현을 위해 해로울 뿐이다. 
유구한 종교적 가치는 세속적 무신론의 사회 속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고 바스러져서 그 심층에 흐르고 있음을 다 안다.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정말 행복한 사람을 뜻하는가? - Wonderful Mind

자기계발 탐구 -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정말 행복한 사람을 뜻하는가? - Wonderful Mind
자기계발 탐구 -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정말 행복한 사람을 뜻하는가?
3분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마지막 업데이트: 28 8월, 2021


진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념, 꿈, 관계를 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의 글에서 알아보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을 가기로 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와 같은 결정은 평생 여행의 시작점이 된다. 때로는 선택한 결정이 올바른지 확신이 들지 않고, 길을 잃은 아이처럼 헤매기도 한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실패의 가능성, 남들의 시선,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관한 불신 등 다양한 장애물을 맞닥트리며 좌절을 맛보게 되기도 한다.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웃고, 슬프게 만드는 것에 울고, 화나게 만드는 것에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연연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이 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다.

현대인은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늘 신경 쓰고 존중해야 하지만, 인간으로의 진정성을 유지하려면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정성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체성이나 삶의 일부가 된 습관, 생각 및 인간관계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다.


자신을 선택하는 것은 삶 속 중요한 무언가에 작별을 고하는 것, 또는 진정으로 ‘혼자’가 되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혼자 있는 것은 ‘고독함’과는 다른 개념이다. 혼자 있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얻고 성공을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세상에서 세상의 의견을 따라 사는 것이란 쉽다. 고독함을 피해 남들을 따라 사는 것도 쉽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군중 가운데서 고독의 독립성을 완벽하게 달콤하게 지키는 사람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다른 사람들의 기대

진정성을 찾는 과정에서 인생에 영향을 미친 핵심 인물들과 마주하게 되곤 한다. 아래에서 살펴보자.
당신의 내면: 당신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봤거나 가깝게 알고 지내는 이들은 아마 당신을 완벽하게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위해 내려야 하는 결정들에 관해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근무하는 회사: 근무하는 회사의 견해와 피드백을 통해 당신이 직장에서 얼마나 능력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지인: 이들은 당신이 어느 시점에서 관계를 맺었거나 당신이 막연하게 아는 사람들로, 인생에서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지인’들의 의견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곤 한다. 이는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당신 자신: 종종 당신 자신의 최악의 적이 되어 불안감을 악화할 수도 있다.

정확히 당신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당신이 느끼는 것과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따라야 할까?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 진정성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학습에 대한 앨버트 반두라의 연구에 따르면 학습의 주요 원천은 관찰이라고 한다. 즉, 다른 사람의 행동과 그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수용 및 헌신 치료 전문가 스티븐 C. 헤이스는 진정성이야말로 모두가 이뤄야 하는 목표의 ‘핵심’이며 진정성 없는 삶, 즉 ‘자신과의 단절’이란 다른 사람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라고 주장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느끼는 것과 분리될 때, 당신은 당신의 진정한 내면으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욕망과 가치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흔한 방어 메커니즘으로 사용되곤 한다.

진정성이 없는 행동의 또 다른 전형적인 패턴은 경험 회피다. 이런 패턴을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을 무서워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면서 평생을 보낸다.
의미 있는 삶 그리고 성공의 길

성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나 성공에 관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다.

수용 및 헌신 치료는 환자가 자신의 가치를 명확히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을 구축하는 데 기본이 되며, 이러한 가치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많은 이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과 그들이 원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성을 유지하려면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깊이 알아야 한다. 혼자가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당신을 다른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성취일 것이다.”

– 랄프 월도 에머슨-

서술형 심리치료: 불안감 완화에 효과적일까? - Wonderful Mind

서술형 심리치료: 불안감 완화에 효과적일까? - Wonderful Mind



서술형 심리치료: 불안감 완화에 효과적일까?
3분
이 편지는 아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당신이 단지 당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도우려고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첫 만남 이후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당신은 새로운 장소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 업데이트: 04 6월, 2021


서술형 심리치료의 목표는 당신의 현재 관계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제는 다시 정의해야 할 때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더 편안하고 정직하게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자.

불안과 인간의 관계는 항상 복잡하고, 때로는 괴롭다. 하지만, 당신에게 필요한 힘을 줄 때도 있다. 불안에 대한 이 편지는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깨닫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대답이 없는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다.



“불안은 사랑의 가장 큰 살인자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당신을 붙잡을 때 당신처럼 느낀다. 당신은 그를 구하고 싶지만, 그가 당신을 죽일 것을 알고 있다.”

아나이스 닌



서술형 심리치료: 불안에 대한 편지

편지는 보통 “친애하는 친구”와 같은 것으로 시작되지만, 이것은 불안에 대한 편지이다. 따라서, 친구로서 언급하기가 어렵고, 그리고 실제로 불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사랑은 당신을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의 칼날은 꽤 날카롭고 매우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불안을 “특출한 동반자”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주로 불안이 다른 시간에 있기 때문이고, 불안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불안은 삶에 전반적으로 눈에 띈다.



“특출한 동반자, 이 편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재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당신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아픈지. 사람들은 변하고 모든 사람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공간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첫 만남

불안과의 첫 만남에 대한 언급을 편지에 담지 않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 갑작스러움은 처음으로 당신의 기억력을 크게 위축시킨다.


갑자기 불안이 당신의 몸을 잔인하게 흔들었고 당신은 어지럽고 물에 빠진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갑자기 임박한 것 같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당신의 심장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수면과 식욕에 불안이 스며들어 온몸이 쑤셨다.

통제력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당시 당신이 느꼈던 감정에 대한 절제된 표현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누군가가 마침내 이름을 지었다. 그것은 당신의 심장도 아니고 당신이 상상했던 치명적인 질병도 아니었다.

당신은 불안의 대상이었고, 대답하지 않은 질문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내가 괜찮다면 왜 지금이지?” “어떻게 불안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까?” “이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식은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이 불안에 대한 편지가 있기 훨씬 전에, 당신은 불안을 싫어했고 심지어 불안을 없애려고까지 했다. 아마 당신은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라고 수천 번 소리쳤을 것이다.

물론, 당신은 고통, 피로, 고립 등 그것을 싫어할 이유가 많았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과 멀어졌을 때 불안해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당신이 불안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묵시적인 침묵의 서약을 강요했다.

하지만 증오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너무나 많은 분노에 지쳐 있었다.

나중에, 당신은 불안이 무한히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매우 어렵게 받아들이는 당신 자신을 발견했다.

당신은 귀담아듣기로 결심했고, 가능한 한 끈기 있게 대답하지 않은 질문들을 스스로 물었다.

당신은 불안이 “모든 것이 괜찮은가?”라고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지금이지?” 이 메아리는 당신이 마침내 이 불안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것은 당신의 긴 침묵의 목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자주 끊겨서 어떻게 해서든 들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당신은 “이 목소리가 꼭 들릴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분개할 정도로 궁금해한다.

서술형 심리치료: 들어봐, 친구

당신은 어려운 여정에서 충성스러운 동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구로서의 불안감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이 소중한 친구는 다재다능하고 훌륭한 경청자이다. 이 친구는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들을 수 있다.

그렇다, 좋은 경청자는 진정한 친구다. 지금 당장 알지 못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당신에게 말해주는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실 불안은 그것이 갈등적인 면임을 드러낼 때조차 당신의 친구다. 하지만, 당신은 이 우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심지어 그 우정을 즐기지 않을 때조차도.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공유함으로써 이 편지를 끝낸다. 결국, 불안이 당신이 편지를 쓰는 실제 이유다. 이제 직접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자.



“불안, 나는 솔직히 가끔 네가 싫다. 하지만, 나는 네가 왜 여기에 있고 너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도우려고 하는지 또한 이해한다. 내 말이 들리자마자 네가 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만약 네가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너의 방문을 이해하기 전에 너를 내쫓고 싶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어려울 테니 약속은 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에 대한 편지 쓰기

그렇게 하는 것은 내면의 대화를 시작하고 자기 지식의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과 같은 증상은 종종 빙산의 일각이다.

무의식의 어둠 속 깊숙한 곳에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겪는 심리 치료 과정의 일부는 반드시 근본적인 심리적 갈등을 밝혀내는 것이어야 한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서술형 심리치료는 이 편지와 같은 기술을 불안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주관적인 감각을 말로 바꾸는 과정을 촉진하는 데 아주 좋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불안에 대한 편지를 쓰기를 강력히 권한다. 다시 말해, 현재 관계를 정의해 보자. 자신의 편지를 어떻게 시작할 건가?

기공: 특징과 실천 - Wonderful Mind

기공: 특징과 실천 - Wonderful Mind

기공: 특징과 실천
2분
기공 수련은 일련의 간단한 자세와 동작을 통해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균형 있게 조절하는 천년의 수련이다. 그것은 또한 자기 마사지와 명상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지막 업데이트: 31 1월, 2021


기공 수련은 신체 에너지의 적용과 최적화에 관한 인식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약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중국의 전통 의학이다.

기공 수련은 침술이 있는 중국의 전통 의술과 같은 호흡, 동작, 시각화가 필요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치” 또는 “기”라고 불리는 풍부한 활력 에너지가 있을 때 건강하다고 한다.

그러한 에너지는 정체되거나 흩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자유롭게 순환해야 한다. 기공에 따르면, 신체 어느 부위에나 기의 과잉이나 결핍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그 결과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좋아진다.



“기공은 내부 에너지를 정제하고 배양하는 예술이자 과학이다.”

-켄 코언-



기공: 실천

나이와 신체조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기공 연습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적인 자세, 역동적인 움직임, 착석한 자세, 행진, 그리고 소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요가와는 달리, 앞서 말한 자세를 달성하기 위해 훌륭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공에서는 선생님이 필요 없다. 스스로 배우고 연습할 수 있다. 또한 “작고 규칙적인” 원칙에 의해 안내된다.


즉, 짧은 시간 동안 지속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루에 15분에서 30분이 소요된다.

이 기술의 가장 일반적인 수련은 셀프 마사지로 시작하고, 그다음에 이완이 이어진다. 그리고 정적인 자세, 역동적인 움직임, 마지막으로 명상이 있다.

대부분의 움직임은 도교의 전통에서 나온다. 어떤 것들은 불교에서 영감을 받았고, 어떤 것들은 현대적이다.

기공: 이점

기공은 몸의 에너지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 따라서, 영양을 공급하고 강화한다. 추정에 따르면 이 수련의 이점은 3개월간의 일상생활 후에 눈에 띄게 나타난다.

중국 전통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기공은 다음을 수행할 수 있다.
스트레스를 줄인다. 태극권과 마찬가지로 이 연습은 스트레스와 걱정을 줄일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감정들이 소화 장애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소화 기능도 좋아진다.
에너지 균형을 맞춰 면역 체계를 강화하여 신체가 감염 및 암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 덜 취약하게 한다. 또한, 그것은 화학요법이나 방사선요법의 부작용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
관절염이나 류머티즘 같은 질병으로 인한 만성 통증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근육통을 완화하고 두통을 예방한다.
근육량을 강화한다. 그러므로, 기공 연습은 70세 이상 사람들의 낙상을 예방하는데 중요한 요소인 근육 손실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



기공과 전통 한의학

중국 전통 의학의 핵심인 중국 철학 전통에서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음양 특성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음은 여성에 해당하며, 추위, 휴식, 내부, 부드러움, 수용성, 연약함 및 유사한 개념에 해당한다.

양은 남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열, 움직임, 힘, 활동, 딱딱함 등과 관련이 있다.

비슷하게, 전통적인 한의학에서는, 기라고 불리는 필수적인 형태의 에너지가 있는데, 기는 에너지 체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질병은 기가 흐르지 않을 때 발생한다. 다시 말해, 순환이 정체되거나 중단되거나 분산될 때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너지가 제대로 흐르게 하고 음양의 균형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침술, 마사지, 식이요법, 한방, 기공 등을 통해 이를 달성한다.

불교에 따른 10가지 윤리적 약속 - Wonderful Mind

불교에 따른 10가지 윤리적 약속 - Wonderful Mind

불교에 따른 10가지 윤리적 약속
3분
윤리적 약속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바람직한 행동 패턴이다.
불교에 따른 10가지 윤리적 약속
마지막 업데이트: 25 7월,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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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자들과 서양 국가의 국민들은 매우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윤리적 약속’에서만은 동일한 의견을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도덕적 행동에 관해서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불교에 따른 10가지 윤리적 약속

윤리적 약속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바람직한 행동 패턴이다. 프로이트는 윤리적 약속이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고의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라. 결국 더 상처를 받는건 당신 자신이리라.”

 -부처-

다른 교리와 달리 불교에서 윤리적 약속이란 지성과 크게 관련이 있다. 이는 행동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의 표시이자, 결국 자신을 해치는 행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불교에 따른 10가지 윤리적 약속
윤리적 약속 

1 –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불교도가 말하는 ‘생명’에는 인간 외에도 다른 모든 생명체가 포함된다. 이는 대부분의 불교도가 채식주의자인 이유이기도 한데, 그들 중 소수는 식물의 비필수적인 부분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생명을 온전히 존중하기 때문이다.

2 –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마라
불교도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지 않으면, 즉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도둑질 금지 규칙’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는 관대함과 비이기심에 더 관련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는 것은 관대함 그리고 비이기심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잊지말자.

3 – 유해한 성행위에 탐닉하지 마라

불교도는 ‘해로운’ 성행위를 자신이나 타인 또는 둘 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고통을 주는 행위로 본다.

어떤 성행위가 해로운 것으로 분류되는 지에 대한 특정 기준은 없다.

불교도들은 성행위가 성장과 진화를 위한 행위이며, 누군가를 타락시키거나 노예화하는 관행이 아니라고 본다.

 4 – 거짓말을 삼가라
불교도들은 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침묵’하는 행위에 큰 가치를 둔다. 대화를 무분별하게 해서는 안 되며 중요한 대화를 위해 아껴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현실과 멀어지게 한다. 또한 당신과 타인을 진리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에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게 한다. 영적 성장의 길을 가는 모든 이들에게는 진리가 목표라는 것을 잊지 말자.

5 – 무례한 말은 자제하라
무례하거나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당신이 화를 내면, 당신이 하는 말은 가치를 잃게 된다. 무례한 언행이란 소통하려는 의도가 아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주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언어 폭력도 엄연한 폭력이다.

6 – 잡담에 탐닉하지 마라
불교도들은 이유가 있을 때만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의사소통이 필요하지 않다면 침묵하는 것을 추천한다.

잡담은 주의력 부족, 불안 또는 긴장의 표시이기도 하다.

말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균형과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7 – 남을 비방하지 마라
이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약속 중 하나이다. 주변에 없는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다. 소통의 목적은 이해와 화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루는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8 – 욕심을 버려라
탐욕은 영적 발전의 큰 적이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불교 원리 중 하나인 ‘해탈;에 어긋나는데, 이는 외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은 괴로움을 낳으며 인간의 초심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원할수록 괴로워진다. 이런 이유로 ‘많이 가진’ 특권층 사람들도 고통받곤 하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어느 시점에서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 얼굴 동상입니다.
9 – 증오를 버려라
자비는 불교의 큰 기둥 중 하나로, 사랑의 가장 진화된 형태로 해석되곤 한다. 이와 반대로 증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해석된다.

불교도들은 증오가 사람을 ‘장님’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게다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러면 당신은 결국 감정적으로 불균형해지고 고요함과 균형으로 가는 길을 닫아버리게 될 것이다.

10 – 마음을 정화하라
이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윤리적 약속 중 하나로, 불교도들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마음을 정화한다는 것은 무지를 지혜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지성과 마음을 흐리게 하고 진리를 찾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한다. 현명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이며, 순수하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다.

10가지 윤리적 약속: 결론
불교의 윤리적 약속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는 절대 삶을 제한하는 ‘명령’은 아니다. 불교가 원하는 윤리적 약속의 목표는 처벌이 아닌, 특정 행동이 얼마나 해를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사실상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 화합과 행복을 이루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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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사랑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 그것은 서방 세계에서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 서방 세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 둘 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양면적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랑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에 애착을 갖지도 않고, 의존을 불러 일으키지도 ...



참고문헌
Jahr, F. (2013). Bio-ética: una perspectiva de las relaciones éticas de los seres humanos con los animales y las plantas (1927). Aesthethika. Revista Internacional sobre Subjetividad, Política y Arte, 8(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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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달성, 역경 극복, 기술 향상, 자신의 강점 찾기 등은 심리학을 구성하는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인 자기계발에 관련된 요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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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지만, 욕망과 만족 사이에는 때로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또한, 당신의 마음은 좋든 나쁘든 현실을 통제하지…


자기계발더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성격을 개발하는 방법


더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성격을 가질 수 있을까? 자신을 완전히 변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어떤 특징들을 개선하도록…


자기계발지금 어떤 가면 아래 자신을 감추고 있는가?


가면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 발 더 앞으로 나가기 위해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가면 아래 숨어 있으면…

감정의 역사: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 Wonderful Mind

감정의 역사: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 Wonderful Mind


감정의 역사: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3분
오늘의 글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동정심에 관해 알아보자.



마지막 업데이트: 28 8월, 2021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수행된 다양한 조사를 통해 네안데르탈인이 비합리적이고 비지능적인 생물이었다는 일반적인 기존의 인식이 이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실, 그들의 예술적, 인지적 능력과 생에 관한 관심은 최근 흥미로운 데이터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오늘의 글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동정심의 관계에 관해 알아보자.
감정의 역사: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약 3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네안데르탈랜시스가 공통적인 혈통에서 분리되어 나뉘었다. 호모 네안데르탈랜시스는 멸종하였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새로운 영토를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과학계는 네안데르탈인이 인간 이전에 존재한 ‘멍청한’ 존재라는 의견에 비동의하기 시작했다.

최근 이루어진 다양한 연구의 결과는 모두 인간과 네안데르탈인은 다른 ‘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키고 있다. 영국의 사우샘프턴 대학,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대학, 알 칼라 데 에나 레스 대학은 이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를 공개했다.

그들은 칸타브리아, 에스트 레마 두라, 안달루시아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림이 실제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이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들이 사실 역사상 최초의 ‘예술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화의 역사가 다시 쓰인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페니 스피킨스 박사-




네안데르탈인도 동정심을 느꼈을까?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다. 그들은 애정이 많았고 자신의 생존을 걱정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수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뼈와 두개골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생물학자들은 뼈를 제한된 정보만 제공하는 ‘연구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고생물학 분야에서는 모든 ‘뼈’가 이야기를 전달하고 과거의 순간을 ‘설명’한다고 믿는다.

라샤펠오생(La Chapelle Aux Saints)에서 매우 흥미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다. 약 60,000년 전에 살았던 40세에 가까운 네안데르탈인의 유해가 발견된 것이다.

요크 대학교의 페니 스피킨스 박사가 수행한 연구는 다음을 입증했다.
네안데르탈인: 자신의 집단을 돌보는 ‘노인’

인류학자들은 라샤펠오생에서 발견된 이 네안데르탈인을 ‘노인’이라고 불렀다. 그의 유해를 분석한 후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노인’은 많은 치아를 잃어버렸고 심한 치주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는 그가 먹고 씹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하악 (아래턱)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또한 그는 척추와 어깨에 골관절염이 있었다.
그는 오른쪽 발에 갈비뼈 골절과 퇴행성 문제가 있었다.
그는 엉덩이에 심한 퇴행이 있었다. 이는 그가 큰 고통과 움직임에 어려움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도 ‘노인’은 잘 먹고, 잘 보살펴졌으며, 죽었을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묻히기까지 했다.

이것은 네안데르탈인이 ‘동정심’을 느꼈다는 주장의 유일한 증거가 아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가 존재한다.

이 추가 증거에 따르면 사냥이나 낙상으로 상처를 입은 네안데르탈인들도 돌봄을 받았으며, 부상자라고 버림을 받은 자의 수는 아주 적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단단한 유대를 형성하고 그들 자신의 생존에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네안데르탈인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전문가들이 화석과 그 매장지를 통해 매일 얻는 정보는 대단하다. 또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더 많은 화석과 샘플이 발견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 진화의 복잡한 퍼즐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고생물학 분야 전문가이자 아타에푸에르카 (Atapuerca) 프로젝트의 공동 책임자인 호제 마리아 베르무데스 데 카스트로 (José Maria Bermùdez de Castro)는 골격 유골, 특히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은 감정이 있는지를 밝혀내는 데 충분한 자료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인간과 같은 변연계 (감정을 조정하는 뇌 영역)를 가졌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인간과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유전적 근접성을 고려한다면 그들 역시 기쁨, 두려움, 슬픔, 놀라움, 심지어 사랑을 경험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결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감정, 특히 연민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자신을 돌보고 노인과 부상자를 돌볼 때 이 특별한 감정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어린이 장난감처럼 보이는 물건도 발굴했다. 이것은 확실히 사회 집단이 네안데르탈인에게 중요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과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은 야생적이고 비이성적인 생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술을 사랑하고 애정, 연민, 기쁨과 같은 사회적 감정을 경험하는 협동 사회를 만들었다.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오래된 인식을 바꿔 그들이 유전 암호의 일부를 형성하고, 따라서 자신의 역사를 형성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혼잣말: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은 실제로 치료 효과가 있다 - Wonderful Mind

잣말: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은 실제로 치료 효과가 있다 - Wonderful Mind

웰니스
자기계발

혼잣말: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은 실제로 치료 효과가 있다
3분




마지막 업데이트: 01 11월, 2019


혼잣말 하는 것이 당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실 혼잣말처럼 치료효과가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우리 모두 결국 혼자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 자신과 소통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카타르시스적이며, 스스로를 돌봄에 있어 정서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알더스 헉슬리는 우리가 향상시킬 힘을 가지고, 깊이 알 수 있는 것은 우주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자신에게 주지 않고, 자신을 경시한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탐험가도 자신의 마음 깊이 들어가는 사람만큼 오래 여행하지 못한다.”

-쥴리안 그린-

실제로 심리학자들은 우리 모두가 내적 대화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안좋게 사용한다. 미시간 대학의 정서 심리학자인 에단 크로스는 인간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혼잣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 대부분은 똑같이 행동한다. 무슨일이 기대한대로 되지 않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의식이 우리가 얼마나 멍청하고 쓸모 없는지 말을 한다. 이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우울증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지게 만드는 부정적인 내적 대화이다. 변화를 만들어보자.

건강에 좋은 혼잣말

위에서 언급한 에단 크로스 교수는 실험을 수행 해 흥미롭고 유용한 결론을 이끌어 냈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인생에 더 성공하고, 안정적이며, 더 행복하다는 결론이다.


얼핏 보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혼잣말 하는 것은 힘을 가진다: 우리의 뇌가 더 잘 작동하고, 지각능력이 향상되고, 당신의 감정을 더 잘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 효과를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내적 대화가 우리에게 좋다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혼잣말은 당신을 더 똑똑하게 만든다

혼잣말을 한다고 하룻밤 사이에 더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지적 능력이 앞으로 향상될 것이다. 사고력과 집중력이 향상되고,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디보자 마리아. 집중하고 이 문제에 대하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자.” 혹은” 마크, 넌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진정하고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라는 단순한 말들을 하는 것이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세가지 아주 단단하고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것은 강철, 다이아몬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

혼잣말을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나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하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란 것을 기억하자.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에서 왜 자신을 배제 시키는가? 왜 앉아서 자기 자신과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해 보지 않는가?

그렇게 한다고 이상한 것이 아니다. 혼잣말을 하지 않음으로서 최고의 자기계발과 개인적 성장 기술을 놓치게 된다. 여기에 몇 가지 혼잣말의 이점들이 있다
혼잣말은 당신이 현재 그리고 지금 어떻게 느끼는지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이는 당신의 현재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잘 처리할 수 있기 위함이다.

내적 대화는 동기 부여의 강력한 원천이다.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진솔하고, 믿을만한 동기부여의 원천이다. 당신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보자. “안젤라,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안돼. 어서 나아가보자!”
실험 심리학의 계간지는, 크게 혼잣말을 하는 것은 대뇌 피질 속 무언가의 스위치를 켠다고 말했다. 이는 사람의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살고 있는 곳이다. 또한 더 명확히 사고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때, 관점을 가지고 부정적 생각을 좀 더 현실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부정적 대화를 통제해야만 혼잣말이 멋지고 건강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잘 하는게 없어. 넌 잘 할 수 없고, 넌 실패작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왜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려는가? 소크라테스는 사고를 영혼이 스스로 하는 대화라고 정의했다.우리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친절하고, 애정 어리게, 그리고 건설적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웰니스 - Wonderful Mind Content List 2

웰니스 - Wonderful Mind


심리학
심리학 탐구: 존중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하는가
멘탈 블록: 당신의 뇌를 멈추는 거대한 불안감
"월리를 찾아라" - 우리의 두뇌는 월리를 어떻게 찾을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의 유래
목표 달성을 위한 최강 비밀 무기간략히 보기신경과학
항간질제의 종류와 성능을 알아보자
뇌 감염과 그 증상의 분류
뇌를 변화시키는 이기적인 행동과 이타적인 행동

수막은 무엇인가: 특성과 기능
눈맞춤이 기억에 미치는 영향간략히 보기인간관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연인 관계에 미치는 영향
어린 아이를 키우는 것은 청소년을 키우는 것보다 쉬울까?
아이들을 위해 이혼하지 않는 부부

청소년 임신부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감정적으로 자녀를 통제하는 부모간략히 보기웰니스

행복한 삶을 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5가지 팁
자신의 행복을 남의 손에 맡기면 안 되는 이유
분노의 잠재력: 자신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분노에 귀를 기울여라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로는 무엇이 있을까?
좌절감을 이겨내는 6가지 방법간략히 보기
건강
다발성 경화증과 ALS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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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에 미치는 후성유전학의 영향력
오만 증후군: 부패한 권력을 가진 이들의 삶간략히 보기문화
감정의 역사: 네안데르탈인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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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네 신화: 섹스에 대한 두려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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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쉽게 만드는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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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촉진하는 전문적인 자아 인식

문제 해결을 위한 스트로맨 제안
재택근무의 도입: 원격 근무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간략히 보기

2021/10/30

용담유사(龍潭遺詞)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담유사(龍潭遺詞)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담유사(龍潭遺詞)


고전시가문헌

조선후기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가사 「용담가」·「언삼가」·「교훈가」 등 9편을 수록한 가사집. 포교가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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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 21 / 도덕가 / 수시경세가
분야고전시가유형문헌성격가사집, 포교가사집편저자최제우(崔濟愚)제작시기조선 후기, 1881년 6월(간행), 1893년(간행), 1922년(간행)간행자최시형시대조선성격가사집, 포교가사집편저자최제우(崔濟愚)제작시기조선 후기, 1881년 6월(간행), 1893년(간행), 1922년(간행)간행자최시형
정의
조선후기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가사 「용담가」·「언삼가」·「교훈가」 등 9편을 수록한 가사집.포교가사집.

내용
한글본. 1860년(철종 11)에서 1863년에 걸쳐 지었다. 수록 내용은 용담가(龍潭歌)·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도수사(道修詞)·권학가(勸學歌)·도덕가(道德歌)·흥비가(興比歌)·검결(劍訣)의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운행록 水雲行錄』에 의하면, 이 『용담유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처사가 處士歌」를 포함하여 모두 10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담유사』는 1881년 6월 충청북도 단양군 남면 천동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고, 그 뒤 1893년과 1922년 각각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된 바 있다. 이때 「검결」은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함께 간행되지 못하였다.
『용담유사』는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더불어 동학의 기본경전이다. 최제우는 그가 깨친 후천개벽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국문으로 쓰고, 가사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였던 것이다. 각 편의 내용과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용담가 : 1860년 득도한 바로 그 해에 지은 가사이다. 전체가 4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음보 1구로 모두 144구로 되어 있다. 「용담가」는 조상 때부터 지켜내려왔고, 또 최제우 자신이 태어나서 자랐으며 득도하였던 경주 구미산 용담의 아름다움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한 가사이다. 용담의 산의 형세와 물의 형세가 아름답고 절묘함을 노래하였으며, 신라 때 우리 문화를 찬미하면서 득도하게 된 내력과 그 기쁨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 「용담가」에는 당시 일반 민중간의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풍수지리사상과 가계존중의 문벌충효의식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운율의 흐름과 변화 있는 언어의 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2) 안심가 : 1860년에 발표한 가사이다. 2음보 1구로 총 290구로 되어있다. 이 「안심가」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지은 노래이다.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득도한 뒤 하늘에서 물형부(物形符)를 받아 이를 그린 종이를 먹고 신선과 같은 풍채와 골격을 갖추게 된 자신을 서학(西學)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그 뒤,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곧 왜적을 쓸어버리고 우리나라의 운수를 보전할 몸임을 밝히고, 따라서 부녀자들은 안심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특히,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천대받던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현숙하고 거룩하다고 떠받들면서, 춘삼월 호시절의 태평가를 함께 부를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선각자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이다.
(3) 교훈가 : 『수운행록』·『천도교창건사』 등에 의하면 186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제우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에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2음보 1구로 총 448구로 된 장편가사이다. 자손들에게 내리는 교훈형식으로 된 이 가사는, 고향의 교도들에게 힘써 수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곧,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그의 몸에 이미 모시고 있으므로, 하늘 조화의 그 참된 마음을 고이고이 삼가 지켜 이를 공경하고 믿는 데서 창조의 바른 기운을 되살려낼 것을 당부한 것이다.
(4) 몽중노소문답가 : 『수운행록』에 의하면 1861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천도교사 天道敎史』에는 1862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총 4장으로, 2음보 1구로 총 169구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산 ᄒᆞᆫ양도읍 ᄉᆞᄇᆡᆨ년 지늰 후의 ᄒᆞ원갑 이 세상”에 자식이 없던 두 늙은이가 금강산에 들어가 산신께 빌어 옥동자를 얻었다. 이 아이는 ‘군불군(君不君)’·‘신불신(臣不臣)’·‘부불부(父不父)’·‘자부자(子不子)’의 난세를 한탄하고,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고향에 돌아와 백가시서(百家詩書)를 외웠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을 떠나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 쉬다가 꿈속에 한 도사를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는 최제우의 출생·성장·득도과정·득도내용 등을 요령 있게 잘 설명하고 있다. 득도의 내용은 다음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십이졔국 괴딜운수 다시 ᄀᆡ벽 안일넌가 ᄐᆡ평성세 다시 졍ᄒᆡ 국ᄐᆡ민안 ᄒᆞᆯ거시니 ᄀᆡ탄지심 두지 말고 ᄎᆞᄎᆞᄎᆞᄎᆞ 지나셔라 ᄒᆞ원갑 지나거든 상원갑 호시졀의 만고업ᄂᆞᆫ 무극ᄃᆡ도 이셰상의 날거시니.”라는 도사의 깨우침이 그것이다.
(5) 도수사 : 1861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200구로 되어 있다. 득도한 뒤 고향에서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제자들에게 수도하기를 간곡히 당부한 것이다. 즉, “셩경이ᄌᆞ 디켜ᄂᆡ야 ᄎᆞᄎᆞᄎᆞᄎᆞ 닥가ᄂᆡ면 무극ᄃᆡ도 안일넌가 시호시호 긋ᄃᆡ오면 도셩입덕 안일넌가.”라고 하면서, 제자들이 자신이 전한 연원도통(淵源道統)을 지키면서 성(誠)과 경(敬)으로 도를 닦기를 당부하고 있다.
(6) 권학가 : 남원읍 서쪽 10리 밖 교룡산성 안에 정하였던 은적암(隱寂庵)에서 임술년(1862) 새해를 맞이하면서, 각지 제자들에 대한 정회(情懷)를 가눌 길 없어 지은 가사이다. 2음보 1구로 총 228구로 되어 있다. 최제우 자신이 자각창도(自覺創道)한 동학을 믿음으로써 다 같이한울님의 참뜻으로 돌아가 한 몸 같이 될 것을 권유한 노래이다. “성지우성(誠之又誠) 공경해서 한울님만 공경하소.”, “성경이자(誠敬二字) 지켜내어 한울님을 공경하면 자아시(自兒時) 있던 신병(身病) 물약자효(勿藥自效) 아닐런가.”라고 노래한다. 이어서 어질고 뜻있는 사람 만나거든 시대의 운수와 변화를 의논하며, 백년의 신세(身勢)를 말하거든 이 가사를 주고 결의해서 기르침을 존중하도록 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7) 도덕가 : 1863년 7월 경주 현곡면 등지에서 순회설법하던 당시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136구로 되어 있다. 지벌(地閥)과 문필(文筆)보다는 도덕의 귀중함을 깨우친 노래이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조화를 자각 실현함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내 몸에 이미 모시고 있는 하느님에 대하여 공경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이니, 『대학』·『중용』의 종지(宗旨)로서 천명된 성경이자(誠敬二字)가 그것이요, 『주역 周易』의 문언전(文言傳)에 언급된 바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기를 강조함이 그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8) 흥비가 : 1863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184구로 되어 있다. 「흥비가」는 『시경』의 노래체인 흥(興)주 01)과 비(比)주 02)를 사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친 노래이다. 도를 닦는 일은 결코 어렵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적인 일부터 요령 있게 행하는 데에서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흥비가」는 천도 파악의 인식론적 과정을 비유적으로 노래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9) 검결 : 1861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24구의 짧은 노래이다. ‘칼노래’라는 뜻의 이 노래는 최제우가 정치적 변혁을 꾀하였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최제우는 전라북도 남원의 은적암에서 수도를 하면서 득도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검결」을 짓고 목검(木劍)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 입고 이칼 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에서 보듯이, 최제우는 수도에만 그치치 않고 상원갑 세계를 위한 변혁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최제우는 처형당하였고, 「검결」도 『용담유사』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해지지 못하였다. 갑오동학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의 군가로 애창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동학가사(東學歌辭)』 Ⅰ(한국정신문화연구원,1979)


『한국가사문학론』(정재호,집문당,1982)


「용담유사의 내용분석」(김인환,『문학과 문학사상』,열화당,1978)


『한국문학통사』 4(조동일,지식산업사,1986)


「용담유사의 근대적 성격」(정재호,『근대문학의 형성과정』,문학과 지성사,1983)
주석
주01먼저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한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주02어떤 사물을 끌어대어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가리켜 하는 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용담유사(龍潭遺詞))]

원문/전문 보기 - 용담유사 (龍潭遺詞)(교훈가(敎訓歌))

원문/전문 보기 - 용담유사 (龍潭遺詞)(교훈가(敎訓歌))


◈ 용담유사 (龍潭遺詞)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881년
최제우


목 차
1 권. 교훈가(敎訓歌)


2 권. 안심가(安心歌)

3 권. 용담가(龍潭歌)

4 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5 권. 도수사(道修詞)

6 권. 권학가(勸學歌)

7 권. 도덕가(道德歌)

8 권. 흥비가(興比歌)

9 권. (附) 검결(劒訣)
===


1. 1.
1
왈이자질 아이들아 경수차서 하였어라 너희도 이세상에 오행으로 생겨나서
 
2
삼강을 법을삼고 오륜에 참예해서 이십살 자라나니 성문고족 이내집안
 
3
병수없는 너의거동 보고나니 경사로다 소업없이 길러내니 일희일비 아닐런가
 
2. 2.
1
내역시 이세상에 자아시 지낸일을 역력히 생각하니 대저인간 백천만사
 
2
행코나니 그뿐이오 겪고나니 고생일세 그중에 한가지도 소업성공 바이없어
 
3
흉중에 품은회포 일소일파 하온후에 이내신명 돌아보니 나이이미 사십이오
 
4
세상풍속 돌아보니 여차여차 우여차라 아서라 이내신명 이밖에 다시없다
 
5
구미용담 찾아들어 중한맹세 다시하고 부처가 마주앉아 탄식하고 하는말이
 
6
대장부 사십평생 해음없이 지내나니 이제야 할길없네 자호이름 다시지어
 
7
불출산외 맹세하니 기의심장 아닐런가
 
3. 3.
1
슬프다 이내신명 이리될줄 알았으면 윤산은 고사하고 부모님께 받은세업
 
2
근력기중 하였으면 악의악식 면치마는 경륜이나 있는듯이 효박한 이세상에
 
3
혼자앉아 탄식하고 그럭저럭 하다가서 탕패산업 되었으니 원망도 쓸데없고
 
4
한탄도 쓸데없네 여필종부 아닐런가 자네역시 자아시로 호의호식 하던말을
 
5
일시도 아니말면 부화부순 무엇이며 강보에 어린자식 불인지사 아닐런가
 
6
그말저말 다던지고 차차차차 지내보세 천생만민 하였으니 필수지직 할것이오
 
7
명내재천 하였으니 죽을염려 왜있으며 한울님이 사람낼때 녹없이는 아니내네
 
8
우리라 무슨팔자 그다지 기험할꼬 부하고 귀한사람 이전시절 빈천이오
 
9
빈하고 천한사람 오는시절 부귀로세 천운이 순환하사 무왕불복 하시나니
 
10
그러나 이내집은 적선적덕 하는공은 자전자시 고연이라 여경인들 없을소냐
 
11
세세유전 착한마음 잃지말고 지켜내서 안빈낙도 하온후에 수신제가 하여보세
 
12
아무리 세상사람 비방하고 원망말을 청이불문 하여두고 불의지사 흉한빛을
 
13
시지불견 하여두고 어린자식 효유해서 매매사사 교훈하여 어진일을 본을받아
 
14
가정지업 지켜내면 그아니 낙일런가
 
4. 4.
1
이러그러 안심해서 칠팔삭 지내나니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
 
2
정심수신 하온후에 다시앉아 생각하니 우리집안 여경인가 순환지리 회복인가
 
3
어찌이리 망극한고 전만고 후만고를 역력히 생각해도 글도없고 말도없네
 
4
대저생령 많은사람 사람없어 이러한가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5
윤회같이 둘린운수 내가어찌 받았으며 억조창생 많은사람 내가어찌 높았으며
 
6
일세상 없는사람 내가어찌 있었던고 아마도 이내일은 잠자다가 얻었던가
 
7
꿈꾸다가 받았던가 측량치 못할러라 사람을 가렸으면 나만못한 사람이며
 
8
재질을 가렸으면 나만못한 재질이며 만단의아 두지마는 한울님이 정하시니
 
9
무가내라 할길없네 사양지심 있지마는 어디가서 사양하며 문의지심 있지마는
 
10
어디가서 문의하며 편언척자 없는법을 어디가서 본을볼꼬 묵묵부답 생각하니
 
11
고친자호 방불하고 어린듯이 앉았으니 고친이름 분명하다
 
5. 5.
1
그럭저럭 할길없어 없는정신 가다듬어 한울님께 아뢰오니 한울님 하신말씀
 
2
너도역시 사람이라 무엇을 알았으며 억조창생 많은사람 동귀일체 하는줄을
 
3
사십평생 알았더냐 우습다 자네사람 백천만사 행할때는 무슨뜻을 그러하며
 
4
입산한 그달부터 자호이름 고칠때는 무슨뜻을 그러한고 소위입춘 비는말은
 
5
복록은 아니빌고 무슨경륜 포부있어 세간중인 부동귀라 의심없이 지어내어
 
6
완연히 붙여두니 세상사람 구경할 때 자네마음 어떻던고 그런비위 어디두고
 
7
만고없는 무극대도 받아놓고 자랑하니 그 아니 개자한가 세상사람 돌아보고
 
8
많고많은 그사람에 인지재질 가려내어총명노둔 무엇이며 세상사람 저러하여
 
9
의아탄식 무엇인고 남만못한 사람인줄 네가어찌 알았으며 남만못한 재질인줄
 
10
네가어찌 알잔말고 그런소리 말았어라 낙지이후 첨이로다 착한운수 둘러놓고
 
11
포태지수 정해내어 자아시 자라날 때 어느일을 내모르며 적세만물 하는법과
 
12
백천만사 행하기를 조화중에 시켰으니 출등인물 하는이는 비비유지 아닐런가
 
13
지각없는 세상사람 원한듯이 하는말이 아무는 이세상에 재승박덕 아닐런가
 
14
세전산업 탕패하고 구미용담 일정각에 불출산외 하는뜻은 알다가도 모를러라
 
15
가난한 저세정에 세상사람 한데섞여 아유구용 한다해도 처자보명 모르고서
 
16
가정지업 지켜내어 안빈낙도 한단말은 가소절창 아닐런가 이말저말 붕등해도
 
17
내가알지 네가알까 그런생각 두지말고 정심수도 하였어라 시킨대로 시행해서
 
18
차차차차 가르치면 무궁조화 다던지고 포덕천하 할것이니 차제도법 그뿐일세
 
19
법을정코 글을지어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 될것이니
 
20
지상신선 네아니냐
 
6. 6.
1
이말씀 들은후에 심독희 자부로다 그제야 이날부터 부처가 마주앉아
 
2
이말저말 다한후에 희희낙담 그뿐일세 이제는 자네듣소 이내몸이 이리되니
 
3
자소시 하던장난 여광여취 아닐런가 내역시 하던말이 헛말이 옳게되니
 
4
남아역시 출세후에 장난도 할것이오 헛말인들 아니할까 자네마음 어떠한고
 
5
노처의 거동보소 묻는말은 대답찮고 무릎안고 입다시며 세상소리 서너마디
 
6
근근히 끌어내어 천장만 살피면서 꿈일런가 잠일런가 허허세상 허허세상
 
7
다같이 세상사람 우리복이 이러할까 한울님도 한울님도 이리될 우리신명
 
8
어찌앞날 지낸고생 그다지 시키신고 오늘사 참말이지 여광여취 저양반을
 
9
간곳마다 따라가서 지질한 그고생을 눌로대해 그말이며 그중에 집에들면
 
10
장담같이 하는말이 그사람도 그사람도 고생이 무엇인고 이내팔자 좋을진댄
 
11
희락은 벗을삼고 고생은 희락이라 잔말말고 따라가세 공로할 내아니라
 
12
내역시 어척없어 얼굴을 뻔히보며 중심에 한숨지어 이적지 지낸일은
 
13
다름이 아니로다 인물대접 하는거동 세상사람 아닌듯고 처자에게 하는거동
 
14
이내진정 지극하니 천은이 있게되면 좋은운수 회복할줄 나도또한 알았습네
 
15
일소일파 하온후에 불승기양 되었더라
 
7. 7.
1
그럭저럭 지내다가 통개중문 하여두고 오는사람 가르치니 불승감당 되었더라
 
2
현인군자 모여들어 명명기덕 하여내니 성운성덕 분명하다
 
8. 8.
1
그모르는 세상사람 승기자 싫어할줄 무근설화 지어내어 듣지못한 그말이며
 
2
보지못한 그소리를 어찌그리 자아내서 향안설화 분분한고 슬프다 세상사람
 
3
내운수 좋자하니 네운수 가련할줄 네가어찌 알잔말고 가련하다 경주향중
 
4
무인지경 분명하다 어진사람 있게되면 이런말이 왜있으며 향중풍속 다던지고
 
5
이내문운 가련하다 알도못한 흉언괴설 남보다가 배나하며 육친이 무삼일고
 
6
원수같이 대접하며 살부지수 있었던가 어찌그리 원수런고 은원없이 지낸사람
 
7
그중에 싸잡혀서 또역시 원수되니 조걸위학 이아닌가
 
9. 9.
1
아무리 그리해도 죄없으면 그뿐일세 아무리 그리하나 나도세상 사람으로
 
2
무단히 사죄없이 모함중에 들단말가 이운수 아닐러면 무죄한들 면할소냐
 
3
하물며 이내집은 과문지취 아닐런가 아서라 이내신명 운수도 믿지마는
 
4
감당도 어려우되 남의이목 살펴두고 이같이 아니말면 세상을 능멸한듯
 
5
관장을 능멸한듯 무가내라 할길없네
 
10. 10.
1
무극한 이내도는 내아니 가르쳐도 운수있는 그사람은 차차차차 받아다가
 
2
차차차차 가르치니 내없어도 당행일세 행장을 차려내어 수천리를 경영하니
 
3
수도하는 사람마다 성지우성 하지마는 모우미성 너희들을 어찌하고 가잔말고
 
4
잊을도리 전혀없어 만단효유 하지마는 차마못한 이내회포 역지사지 하였어라
 
5
그러나 할길없어 일조분리 되었더라
 
11. 11.
1
멀고먼 가는길에 생각나니 너희로다
 
2
객지에 외로앉아 어떤때는 생각나서 너희수도 하는거동 귀에도 쟁쟁하며
 
3
눈에도 삼삼하며 어떤때는 생각나서 일사위법 하는빛이 눈에도 거슬리며
 
4
귀에도 들리는듯 아마도 너희거동 일사위법 분명하다 명명한 이운수는
 
5
원한다고 이러하며 바란다고 이러할까 아서라 너희거동 아니봐도 보는듯다
 
6
부자유친 있지마는 운수조차 유친이며 형제일신 있지마는 운수조차 일신인가
 
7
너희역시 사람이면 남의수도 하는법을 응당히 보지마는 어찌그리 매몰한고
 
8
지각없는 이것들아 남의수도 본을받아 성지우성 공경해서 정심수신 하였어라
 
9
아무리 그러해도 이내몸이 이리되니 은덕이야 있지마는 도성입덕 하는법은
 
10
한가지는 정성이요 한가지는 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아니듣고 낭유하면
 
11
금수에 가직하고 자행자지 아닐런가 우습다 너희사람 나는도시 모를러라
 
12
부자형제 그가운데 도성입덕 각각이라 대저세상 사람중에 정성있는 그사람은
 
13
어진사람 분명하니 작심으로 본을보고 정성공경 없단말가 애달하다 너희들은
 
14
출등한 현인들은 바랄줄 아니로되 사람의 아래되고 도덕에 못미치면
 
15
자작지얼이라도 나는또한 한이로다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
 
16
너희라 무슨팔자 불로자득 되단말가 해음없는 이것들아 날로믿고 그러하냐
 
17
나는도시 믿지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
 
18
내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전혀믿고 해몽못한 너희들은 서책은 아주폐코
 
19
수도하기 힘쓰기는 그도또한 도덕이라 문장이고 도덕이고 귀어허사 될까보다 열
 
20
세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어라
 
21
현인군자 될것이니 도성입덕 못미칠까 이같이 쉬운도를 자포자기 하단말가
 
22
애달다 너희사람 어찌그리 매몰한고 탄식하기 괴롭도다 요순같은 성현들도
 
23
불초자식 두었으니 한할것이 없다마는 우선에 보는도리 울울한 이내회포
 
24
금차하니 난감이오 두자하니 애달해서 강작히 지은문자 귀귀자자 살펴내어
 
25
방탕지심 두지말고 이내경계 받아내어 서로만날 그시절에 괄목상대 되게되면
 
26
즐겁기는 고사하고 이내집안 큰운수라 이글보고 개과하여 날본듯이 수도하라
 
27
부디부디 이글보고 남과같이 하였어라 너희역시 그렇다가 말래지사 불민하면
 
28
날로보고 원망할까 내역시 이글전해 효험없이 되게되면 네신수 가련하고
 
29
이내말 헛말되면 그역시 수치로다 너희역시 사람이면 생각고 생각할까
【 】교훈가(敎訓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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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1
현숙한 내집부녀 이글보고 안심하소 대저생령 초목군생 사생재천 아닐런가
 
2
하물며 만물지간 유인이 최령일네 나도또한 한울님께 명복받아 출세하니
 
3
자아시 지낸일을 역력히 헤어보니 첩첩이 험한일을 당코나니 고생일네
 
4
이도역시 천정이라 무가내라 할길없다
 
2. 2.
1
그모르는 처자들은 유의유식 귀공자를 흠선해서 하는말이 신선인가 사람인가
 
2
일천지하 생긴몸이 어찌저리 같잖은고 앙천탄식 하는말을 보고나니 한숨이오
 
3
듣고나니 눈물이라 내역시 하는말이 비감회심 두지말고 내말잠간 들었어라
 
4
호천금궐 상제님도 불택선악 하신다네 자조정 공경이하 한울님께 명복받아
 
5
부귀자는 공경이오 빈천자는 백성이라 우리또한 빈천자로 초야에 자라나서
 
6
유의유식 귀공자는 앙망불급 아닐런가 복록은 다버리고 구설앙화 무섭더라
 
7
졸부귀 불상이라 만고유전 아닐런가 공부자 하신말씀 안빈낙도 내아닌가
 
8
우리라 무슨팔자 고진감래 없을소냐 흥진비래 무섭더라 한탄말고 지내보세
 
3. 3.
1
이러그러 지내나니 거연사십 되었더라 사십평생 이뿐인가 무가내라 할길없네
 
2
가련하다 우리부친 구미산정 지을때에 날주려고 지었던가 할길없어 무가내라
 
3
천불생무록지인이라 이말이 그말인가
 
4. 4.
1
무정세월 여류파라 칠팔삭 지내나니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2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는소리 천지가 진동할때
 
3
집안사람 거동보소 경황실색 하는말이 애고애고 내팔자야 무삼일로 이러한고
 
4
애고애고 사람들아 약도사 못해볼까 침침칠야 저문밤에 눌로대해 이말할꼬
 
5
경황실색 우는자식 구석마다 끼어있고 댁의거동 볼작시면 자방머리 행주치마
 
6
엎어지며 자빠지며 종종걸음 한창할 때 공중에서 외는소리 물구물공 하였어라
 
7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어찌 알까보냐 초야에 묻힌인생 이리될줄 알았던가
 
8
개벽시 국초일을 만지장서 나리시고 십이제국 다버리고 아국운수 먼저하네
 
9
그럭저럭 창황실색 정신수습 되었더라
 
5. 5.
1
그럭저럭 장등달야 백지펴라 분부하네 창황실색 할길없어 백지펴고 붓을드니
 
2
생전못본 물형부가 종이위에 완연터라 내역시 정신없어 처자불러 묻는말이
 
3
이웬일고 이웬일고 저런부 더러본가 자식의 하는말이 아버님 이웬일고
 
4
정신수습 하옵소서 백지펴고 붓을드니 물형부 있단말씀 그도또한 혼미로다
 
5
애고애고 어머님아 우리신명 이웬일고 아버님 거동보소 저런말씀 어디있노
 
6
모자가 마주앉아 수파통곡 한창할 때 한울님 하신말씀 지각없는 인생들아
 
7
삼신산 불사약을 사람마다 볼까보냐 미련한 이인생아 네가다시 그려내서
 
8
그릇안에 살라두고 냉수일배 떠다가서 일장탄복 하였어라 이말씀 들은후에
 
9
바삐한장 그려내어 물에타서 먹어보니 무성무취 다시없고 무자미지 특심이라
 
10
그럭저럭 먹은부가 수백장이 되었더라 칠팔삭 지내나니 가는몸이 굵어지고
 
11
검던낯이 희어지네 어화세상 사람들아 선풍도골 내아닌가 좋을시고 좋을시고
 
12
이내신명 좋을시고 불로불사 하단말가 만승천자 진시황도 여산에 누워있고
 
13
한무제 승로반도 웃음바탕 되었더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14
영세무궁 하단말가 좋을시고 좋을시고 금을준들 바꿀소냐 은을준들 바꿀소냐
 
15
진시황 한무제가 무엇없어 죽었는고 내가그때 났었더면 불사약을 손에들고
 
16
조롱만상 하올것을 늦게나니 한이로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6. 6.
1
그모르는 세상사람 한장다고 두장다고 비틀비틀 하는말이 저리되면 신선인가
 
2
칙칙한 세상사람 승기자 싫어할줄 어찌그리 알았던고 답답해도 할길없다
 
3
나도또한 한울님께 분부받아 그린부를 금수같은 너희몸에 불사약이 미칠소냐
 
4
가소롭다 가소롭다 너희음해 가소롭다 신무소범 나뿐이다 면무참색 네가알까
 
5
애달하다 애달하다 너희음해 애달하다 우리야 저럴진댄 머잖은 세월에도
 
6
괴질바랠 정이없다 뛰고보고 죽고보세 요악한 고인물이 할말이 바이없어
 
7
서학이라 이름하고 온동내 외는말이 사망년 저인물이 서학에나 싸잡힐까
 
8
그모르는 세상사람 그거로사 말이라고 추켜들고 하는말이 용담에는 명인나서
 
9
범도되고 용도되고 서학에는 용터라고 종종걸음 치는말을 역력히 못할러라
 
7. 7.
1
거룩한 내집부녀 이글보고 안심하소 소위서학 하는사람 암만봐도 명인없데
 
2
서학이라 이름하고 내몸발천 하렸던가 초야에 묻힌사람 나도또한 원이로다
 
3
한울님께 받은재주 만병회춘 되지마는 이내몸 발천되면 한울님이 주실런가
 
4
주시기만 줄작시면 편작이 다시와도 이내선약 당할소냐 만세명인 나뿐이다
 
8. 8.
1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가련하다 전세임진 몇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
 
2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
 
3
기험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 기험하다 개같은 왜적놈아 너희신명 돌아보라
 
4
너희역시 하륙해서 무슨은덕 있었던고 전세임진 그때라도 오성한음 없었으면
 
5
옥새보전 뉘가할꼬 아국명현 다시없다 나도또한 한울님께 옥새보전 봉명하네
 
6
무병지란 지낸후에 살아나는 인생들은 한울님께 복록정해 수명을랑 내게비네
 
7
내나라 무슨운수 그다지 기험할꼬 거룩한 내집부녀 자세보고 안심하소
 
8
개같은 왜적놈이 전세임진 왔다가서 술싼일 못했다고 쇠술로 안먹는줄
 
9
세상사람 뉘가알꼬 그역시 원수로다 만고충신 김덕령이 그때벌써 살았으면
 
10
이런일이 왜있을꼬 소인참소 기험하다 불과삼삭 마칠것을 팔년지체 무삼일고
 
11
나도또한 신선으로 이런풍진 무삼일고 나도또한 한울님께 신선이라 봉명해도
 
12
이런고생 다시없다 세상음해 다하더라 기장하다 기장하다 내집부녀 기장하다
 
13
내가또한 신선되어 비상천 한다해도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14
일야에 멸하고서 전지무궁 하여놓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의원수 갚아보세
 
15
중수한 한의비각 헐고나니 초개같고 붓고나니 박산일세 이런걱정 모르고서
 
16
요악한 세상사람 눌로대해 이말하노 우리선조 험천땅에 공덕비를 높이세워
 
17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같은 이내절개 금석으로 세울줄을 세상사람 뉘가알꼬
 
18
애달다 저인물이 눌로대해 음해하노 요악한 저인물이 눌로대해 저말하노
 
19
한울님이 내몸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 그말저말 듣지말고 거룩한 내집부녀
 
20
근심말고 안심하소 이가사 외어내서 춘삼월 호시절에 태평가 불러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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