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4

[서평] 개화-문명화-근대화, 뒷면을 들춰볼 필요가 있다.

 [서평] 개화-문명화-근대화, 뒷면을 들춰볼 필요가 있다.




권태억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문명화’?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중 유별나게 연구실 밖을 내다보는 기색이 없던 권 교수가 이런 민감한 단어를 제목에 걸고 책을 내다니!

10년 전부터 ‘문명화’가 민감한 말이 된 것은 뉴라이트 때문이다. 식민지배와 독재정치를 합리화 내지 미화하는 뉴라이트 ‘역사 뒤집기’의 출발점이 바로 ‘문명화’의 개념에 있다. 아무리 나쁜 정치나 통치라도 문명 발전의 방향에 맞으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독재정치나 이민족 지배는 야만스러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고, 20세기 한국인의 경험은 분명히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직관이나 통념과 반대로 식민통치와 독재정치를 문명과 결부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문명’의 의미를 입맛대로 잡으면 된다.

예컨대 뉴라이트 핵심 이데올로그 이영훈은 문명의 기초 요소로 “자유, 인권, 법치, 사유재산, 시장, 자기 책임” 등을 꼽는다.(<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 펴냄) 46쪽) 통념에 비해 아주 좁은 범위의 문명이다. 그 좁은 범위를 찬찬히 따져보면 바로 ‘자본주의 문명’이다. 그는 위의 요소들이 갖춰지지 않았던 개항기 이전의 조선은 야만 상태였고 일본인이 비로소 조선에 문명을 전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대로라면 애덤 스미스 이전의 인류에게는 문명이란 것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인데, 우스우면서도 웃기 어려운 주장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임에도 이 사회에서 행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를 좋아하는 것도 참 희한한 일이다. 얼마 전 총리 후보로 지명됐던 문창극이나 이번에 KBS 이사장으로 선임된 이인호 같은 사람들. 그래도 그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을 보면 일반인의 상식은 건재한 모양이다.

말이 안 되는 얘기가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게 해주는 꼬투리가 더러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개항기의 개화운동 같은 것. 개화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연구가 많이 쌓여 왔는데도, ‘개화’가 조선의 망국을 막기 위한 절대적 과제였다고 하는 것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의 인식으로 남아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면서 내세운 ‘문명화’가 바로 ‘개화’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가 풀지 못한 숙제를 일본이 대신 풀어주었다고 하는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개화’에 대한 환상은 이 사회 역사인식의 큰 허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갑신정변의 성격을 놓고 이 환상이 크게 작용하는데, 나는 이 정변이 주체적 개혁운동보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이었다고 본다. 식민지시대 일본 사학자들은 갑신정변을 높이 떠받들면서 그 서술에서 일본 측 개입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 조동걸은 일제의 대표적 관찬 사서인 조선사편수회 간 <조선사대계 최근세사>의 서술 내용을 이렇게 살폈다.

갑신정변의 서술을 보면 개화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대궐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므로 죽첨 공사가 1개 중대를 이끌고 갔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사전모의는 언급하지 않았다. (...) 그 때 부산 동본원사 별원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한 일인 청년들이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내용에 대해서도 역시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남의 나라 궁전에 군대를 진입시키는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로 그러한 일을 범한 갑신정변 때의 일본군이었다. 조선에 대한 통상 침략도 일본에 의해서 비롯되었고, 군대의 궁궐침범도 일본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것이 역사에서 평론되지 않았던 것은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현대한국사학사>(나남출판 펴냄) 293쪽)

갑신정변에 관한 책에서 일본의 개입을 이 정도라도 밝힌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갑신정변의 ‘개화’라는 ‘대의(大義)’를 떠받드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풀려나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식민사관이 끈질기게 남아있는 대표적 사례다.

식민사관의 극복이 미흡하다. 식민사관이 주장한 내용은 배척하면서도 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개항기의 개화사상에는 좋은 가치를 담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개화’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받들어서는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화’는 ‘독립’과 함께 일본이 자기네 조선 ‘진출’을 위해 내세운 구호였다. 독립에는 물론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독립협회에서 친일파가 맡은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쓴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개화-문명화-근대화는 모두 연속성을 가진 개념이었다. 일본이 아직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지 않은 단계에서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모든 노력이 ‘개화’로 표현되는데, 그중에는 일본의 진출에 유리한 요소가 많았다. 그리고 식민지시대 일본 학자들은 그런 요소만을 진정한 개화로 추켜세웠다. 예컨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개혁 노력도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사대당’이라 하여 ‘개화당’과 대비시키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의 지속적 지배력이 확립되자 일본이 이끄는 변화 방향에 ‘문명화’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문명화’의 기본 성격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했다.

1910년대 ‘문명적’ 제도의 도입은 당연히 일제의 제국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도입된 제도나 변화들이 근대적, 문명적인 것이었으므로 이를 조선인을 위한 문명화, 문명의 도입으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문명적 제도들이 한말부터 지식인들이 갈망하고 하루빨리 이룰 것을 주장하던 것들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의 이해를 앞세운 것으로서 한국인들의 이해관계를 배려한 것이 아님은 물론 심지어 그 이해에 반하는 것도 있었으므로 불평과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강제적이고 폭력적 수단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강요에 의한 협조는 한계가 있으므로 자신의 시정을 ‘문명화’로 합리화하는 논리가 필요했다. 문명화론은 이에서 더 나아가 조선인들의 차별대우 시정 요구라든가 정치적 권리 요구를 거부하는 반대논리로서도 기능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일제는 자신들을 문명화의 화신으로서 그려내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96쪽)

일본이 조선 지배를 ‘문명화’로 합리화한 것은 독창적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유럽 열강이 정복사업을 문명화의 사명으로 분식한 사실은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란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제1장 “제국주의 침략기 문명화 사명론과 일본”에서 제국주의시대에 유행한 문명화 사명론을 일본이 배워오는 경위를 밝혔다. 문명화와 관련된 일본의 기만성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배워온 모델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문명(文明)’과 ‘civilization’ 사이의 차이를 저자는 생각하게 해준다. 동양인은 화이(華夷)론의 맥락에서 ‘문명’의 의미를 생각하기 쉽다. 정신문화 수준이 높은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civilization’이란 말이 쓰인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임을 저자는 밝힌다. 계몽주의 가치관이 투영되어 ‘진보’의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 정복사업의 진행에 따라 유럽인과 비 유럽인을 구분하는 기준 개념이 되었다.(3~6쪽) 20세기 후반부터 차츰 보편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게 되었지만, 아직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것, 또는 서양적인 것으로 ‘문명’의 의미를 제한해서 본다.

19세기 말 통용되던 ‘문명’의 의미를 저자는 이렇게 정리했다.

여기에서 ‘문명’이란 것은 서구 국가들이 근대에 이르러 성취한 모든 것, 즉 과학혁명, 산업혁명을 통해 달성한 높은 생산력과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성립한 ‘시민사회’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여러 가치, 즉 당시 서구가 실현하였다고 자부한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 구체적 내용을 들어 보면 문명이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자연에 대한 지배, 또 ‘사회적 행동’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지배이다. (6~7쪽)

본론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 초기의 문명화 선전과 그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이 다뤄져 있다. 일본의 ‘악의’를 비난하는 데 쏠리지 않고 문명화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와 노력이 돋보인다. (나 같으면 ‘조선’, ‘조선인’으로 쓸 만한 자리에 저자는 ‘한국’, ‘한국인’으로 쓰는 기준을 세웠으므로 이 글에서는 나도 그에 따른다.)

당시의 한국은 많은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은 개혁을 추진할 의지와 능력이 빈약했다. 그래서 통감부-총독부의 강력한 개혁 추진에 인민이 반가워할 만한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성신문> 1908년 9월 16일자 논설이 대표적인 예다.

각 지방 군수가 민사 및 태형 이하의 범죄사건은 재판권을 가졌더니 사법권 독립 이후로 그 권능이 소멸되어 군수 군리 등이 그 부정재원이 감소한 고로 악감정을 갖는 자가 있고, 일반인민은 재판권이 독립됨을 아는 자가 얼마 없지만 그중에는 구(區) 재판소가 설치되어 군수에게 재판권이 없는 고로 사법권이 독립되었다 칭하고 인민이 문명한 판결을 받아 권리가 보호되겠다고 환영한다더라. (137쪽에서 재인용)

이뿐이랴. 위생, 교통과 통신의 발전 등 물질문명의 향상과 부정부패의 축소, 치안의 확립 등 ‘민생’ 방면에서 일본 통치가 가져온 혜택이 많이 있었다. 특히 통감부 시기(1904-1910)에 ‘시정(施政) 개선’이란 이름으로 시행된 문명화 정책은 직전의 대한제국 통치와 대비되어 민심의 지지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이런 ‘근대화’ 정책의 평가에 있어서 맥락(context)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나는 덧붙이고 싶다. 새로운 제도 도입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옛 제도 자체와의 비교에 앞서 옛 제도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황과의 비교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옛 제도가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시행방법이 워낙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 새 제도가 환영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문명화’ 정책에 좋은 점이 많았다면 왜 1919년에 거족적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물론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행과정에서 방법상의 흠결 때문에 다소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과 같은 전면적 저항은 지엽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일 수 없다.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2일자 논설에 문제의 성격이 나타나 보인다.

일인이 한인을 대하면 언필칭 문명을 개도한다 하며 독립을 부식한다 하며 동양에 평화를 유지한다 하고, 한인도 또한 시국을 관념하여 부득불 동주동종지국과 형제같이 친애하며 순치(脣齒)같이 상엄(相揜)할지라 하더니, 작년 일로 개전할 때 일본 군사가 입경하니 한국 남녀노유가 다투어 환영하고 제반 군수 운송의 일을 모두 어려움을 잊고 응하였는데 (...) 일본이 과연 이때에 시정개선을 실심으로 충고하며 문명진보를 실심 권도하였으면 한인들이 심열성복하기를 큰 가뭄에 단비를 만난 사람처럼 할 터인데 (...) 일본이 그런 일은 하지 않고 급급히 착수하는 것은 전국에 이권을 빼앗으며 일체 권세를 차례로 점취하며 간세한 자들을 이용하고 정직한 자를 쫓아내고 국민의 가옥과 토지를 늑수강취하며 심지어 인명을 참살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으며 재정을 고갈케 하니 생맥이 돈절하고 학무를 감축케 하니 교육이 더욱 쇠퇴라 (...) (130쪽에서 재인용)

요컨대 표리부동하다는 것이다. 소(小)중화를 자처하는 한국인에게는 일본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임진왜란의 기억도 있었다. 개화의 연장선에서 문명화를 반기는 마음 밑바닥에는 의심이 깔려 있었다. 일본 통치정책의 기만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문명화 정책이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었는데 몇몇 개인의 일탈과 부분적인 착오 때문에 저항을 맞게 된 것이었을까? 지금의 한국에서도 세월호 사건을 선원과 선주 등 좁은 범위의 책임으로 좁히려 애쓰는 경향을 정권 담당자들이 보이는데, 구조적 문제를 소홀히 하면 문제가 더 악화된다는 것을 식민지시대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의 모델인 유럽 열강의 문명화 책임론에도 본질적인 기만성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문명화 정책의 한계를 일단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일본 자체가 유럽 열강에 비해 ‘문명화’의 수준이 낮았다. 조선의 문명화를 뒷받침해줄 역량부터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같은 시기 유럽국의 식민지배에 비해 폭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제정책에서도 종합적 발전을 바라보지 못하고 착취에 집중해야 했다.

일본은 한국을 개항한 이후 줄곧 한국의 개화, 문명화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세력을 심고자 부심했는데, 그러한 시도가 전면화하는 것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1904년경부터였다. (...) 그리하여 일제가 표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시정개선’이라는 ‘선정’의 약속이었다. 고종을 중심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수호를 위한 개혁 시도가 이어졌지만, 그것이 볼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속에서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일제는 바로 이 점을 포착하고, ‘악정’의 개혁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조선을 자신의 영구한 세력권으로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완전한 영토로 통합하고 이를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것이 일제의 꿈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 식민화 이후 ‘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사업을 ‘문명화’로 분식하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문명화’의 혜택을 실제로 느끼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72-173쪽)

저자가 하나의 가설이라며 내놓는 ‘문화적 충격론’이 무척 흥미롭다. 일본 정책의 좋고 나쁘고 이전에, 관습에 어긋나는 변화가 너무 많았다는 문제다. “전통국가가 간여하지 않았던 세밀한 일상생활에까지 국가의 권력과 통제가 확대”되어 “모든 것이 간섭투성이”인 상황이 된 데 반감의 큰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이 3-1운동이 “서울과 의주로 연결되는 서북부에서 남부와 동북부로,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철도 연변에서 산간지역으로 파급되어 갔다”는 분석도 뒷받침해 준다고 저자는 본다. 교통이 편리한 곳일수록 문화적 충격이 빨리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5-168쪽)

조선의 망국을 국가 차원, 민족 차원, 문명 차원의 세 층위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제시한 바 있다. 권태억이 말하는 ‘문화적 충격’이란 것이 문명 차원의 갈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종래 일본 식민통치의 문제점을 밝히는 작업에서 별로 중시되지 못한 방향인데, 그 하나의 실마리에 마주친 것이 반갑다.


20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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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ろを耕す 自然と暮ら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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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サイトは、鶴島夕子のプライベートブログです。



ある日 カフェで



「こころを耕す 自然と暮らす」を大事に



日々、de – sign されることをそのまま書き留めるものです。



ものごとの感じや味わい、質感の微妙な点まで覚るような



こころのハタラキ、その感覚。



それを、具体的に表現したい。



わたしの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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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フィール



東京都出身

3.11をきっかけに、ご縁あって農山村に移り住む。現在は、三重県鈴鹿市に住まいを移し、サイエンズ留学中。



2001年より、自己表現のトレーニングであるアサーションのトレーナーとして活動を始める。全国各地の行政、非営利団体、医療福祉職、企業などにトレーニングを届けてきた。誰もが、主体を失わずに自由意志で嬉しく有難く生きられるように、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癖を手がかりに自己表現をふり返り、ほんとうの思いや願いを素直に言葉にして表現していくことをサポートする。



自己の内面を観察して自覚を深めていく識別のトレーニングを得意とする。さまざまな感情のマネジメント、思い込みや前提の発見と再認識、こころの欲求のさらに奥にあるほんとうの願いへ向けて、かろやかに、晴れ晴れと、具体的な人間関係で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題材にしてトレーニングを行う。

大事な観点は、非暴力。内面での葛藤、対立、攻撃性について取り扱い、内的平和を思い出していくことが必要なプロセスとなる。それは、人を自由にするだけでなく、その人本来の姿が、扉を開いてあらわれてくるかのよう(アサート)。自己矛盾が減り、シンプルになっていくと、その人の軸が立ち、意志が目覚める。



自由でありながら、他者と共に生き、創造できる存在に、お互いに成り合えっていく人たちが大勢いたら・・・ 自然とも仲良くする暮らしや社会は、今よりもっと簡単に実現していくのではないかなと思います。



わたしも、この人生が終わるまで向上していきたい。

成り合っていく人たちと、こころの手を結びたい。

子ども達の世代へ、カタチのない宝物を残していきたい。



経営者カレッジレポート

経営者カレッジレポート



◆ひろしちゃん(60代男性)



「人のための会社を楽しく実現する」

●1日目のスタディーツアー、おふくろさん弁当、Suzukaファーム、サイエンズスクール

そうは言ってもから  目的の研究会で人のためのが浮かび上がってくる

やることがあるベース 人のためと言ったり、思ったりしても実際は(ベースは)どうか

 

●2日目のスタディーツアー、おふくろさん弁当社長係のプレゼン

「仕事の出来る人」「仕事が速い人」を重宝がると・・・

私が鈴鹿に来て7年、おふくろさん弁当がスタートして8年

人と人が結集して、検討して研究して、ゼロから考え直して

ベースが「人」へ切り換わり、気風が変わって来る様に感動



●3日目のスタディーツアー、おふくろさん弁当社員の交流会

里山で一緒だった中島君が、今一番安心した状態かなと言ったのが印象的

・やらなあかんベースから、やりたいベース

・疲れた心からは創造性は生まれない

・圧力をかけない、かからない空気

何だ、自分の今居る空間は安心の空気に包まれているじゃないか

創るの大好きな自分は肩に力が入っていたぞ

・それにしても、岩手メンバーの今後の結集と展開は楽しみだなぁ~

・鈴鹿の里山空間は

  クリエイティブスペース

  芽出る(愛でる)スペース

  完全オープンスペース

  フリースペース

  エンジョイスペース

どれにしようかな、どれもかなぁ~

◆吉田光晴(30代男性)



資本主義社会の中での“会社”と、人が幸せを感じる組織とは私は別物と思っていた。

おふくろさん弁当は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の中で営業しているから成り立つものであり、私の経営している会社には参考にはならないのだろうと思っていた。しかし『人』に焦点を当てて『人の為』の会社を考えた時、それはどこでも関係なく、人のいる所であればどの地域どの組織でも「人の為の会社」に出来るのだと強く思った。

社員一人一人が、携わる人の誰もが自主的に(本当の意味で主体的に)仕事を考え、楽しく働ける気風を作るには、それは企業理念を壁に張り出すことでもなく、社長のトップダウンで動かすものでもなく、社員一人一人がお互いに何でも言い合えるような関係性を構築するのがいいと思う。植物が自分の力で成長しようとするのと同じく、人も自分で成功する、成長したいと思っている。社員のその成長しようとする気持ちを信じて、自分が今経営する会社でも、出来るところから一つずつルールや規制、罰則を少しずつ減らしていき、お互いを縛ることの無い様な繋がりを作っていきたい。

それにはまず私、自らが自分の心を開き、素直に社員に自分の思っていることを話し、また社員の話している言葉のその奥の気持ち、更にその奥にあるものを推し量かりながら話を聴くようにしたい。

業務や仕事上のやり取りだけに囚われずに、社員を「人」として改めて認識し、向き合っていきたい。その一歩を踏み出せれば、おふくろさん弁当の様な「人の為の会社」に近づいていくのではないか。2泊3日の経営者向けカレッジを通して私は確信した。

人の為の会社が全国に広がっていけば、本来やりたくない業務、社会に対して良くない影響を与える企業も減っていき、世の中が自然に良くなり、人が幸福を感じられる社会が実現していくのかもしれない。

「誰もが幸福を感じられる社会」それは夢物語ではなく、一昨年参加したマイライフセミナーに続き、再度強く確信をした。岩手に帰ってからのことを考えると楽しみです。

第2回参加者レポート(2016/2/19-21)

◆N.Y.(40代男性)



会社で,責められたり,とがめられたりせず,誰かと対立することもなく,ストレスや不安・心配なく,楽しく,出退勤も自由に働けて,それでいてお金がもらえ,暮らしていける。こんな夢のような話しは我が国にはあるわけない。というのが一般的な考えだ。しかし,実際,それを実現している会社があるとしたらどうだろうか。

曲がりなりにも人を雇う立場にある者としては,どのような仕組みでそれが成り立つのか,どのような資源があったらそうなるのか,労務管理はどうなっているのか等々興味津々で訪問してみた。

来てみてまず気がつくことは,働く仕組みや資源,労務管理によってそれが成り立つ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だ。そして,「常識」とは違う働き方や社員同士の和気あいあいとした雰囲気があることに驚く。それでは,このような幸せな働き方ができる会社の「土壌」とはなんなのか。ここが,このカレッジで探求すべき重要なテーマであった。そしてそれは,人と人とがどのような間柄であるのかという点に尽き,そこが出発点と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次第に明らかになっていく。つまり,どんな仕掛けでもなく,経営者の一方的な働きかけでもなく,ましてや労務管理でもない,働く人同士の,家族のように親しく,気兼ねのない関係性という安心したベースの上で会社の「仕事」が行われ,仕事が成り立ち,働く者たちも幸せを感じ,業績も上がっていくという好循環を生み出しているのだ。

それでは,幸せに働くベースとなる,働く人同士の家族のように親しく,気兼ねのない関係性はどのようにしたら醸成されるのだろうか。この点は,今回のカレッジでもその一端に触れたと思うが,詳細は,今後カレッジを受講する方にとっては,「ネタバレ」となってしまうため記述を控えるが,自分自身にとっては今後さらに検討してみたいテーマともなった。そして,頭の中で検討するだけではなく,実際の職場においても実践してみたいという気持ちにもなった。

人は何のために働くのか,人の本質とはなんなのか。自分自身は,その理にかなった働き方や生き方ができる社会を熱望している。まずは目の前の一歩からはじめてみよう。そういう気持ちを再確認して筆をおきたいと思う。



◆W.T.(70代女性)



生い立ちが、人格や行動を支配しているだろうことは知っていた。私の父は、愛情は豊かであったが、アルコール依存症で早死にした。長期入院の果てに亡くなった養母。一方、ピアノのレッスンをしている隣家の少女、加えてバレーも習っている。

子どもの頃は、私は橋の下から拾われてきた子で、本当の家は豊かだったと想像していた。貧困と片親の中で生きていた私は、人は平等でないと知った! 

私がこの生活から脱却し、夢を抱いて生きるためには自力で這い上がらないとならないことは分かっていた。足の悪い障害を抱えた兄と二人暮らしの私は、常に兄から人の2倍・3倍努力せよと言われ続けた。夢が描けるには方法は一つ。人一倍の精励だった。私は孤独だった。



定時制高校時代から、計画を以って、なすべきことをしっかりこなしていくことを自分に課して生きてきた。人にも無意識にもそれを求めて来ている自分がいた。したがって、今も、スタッフはしっかり課題をこなして欲しい人であり、組織の目標を理解し、実践してもらう存在であった。そこには緊張関係と反発と不信が生じやすい環境で有ったことが、今回理解できたのではないか。しかし、常に叱咤激励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努力や実績には手放しで褒めているし、期待を表明してきた。

しかし、“人のための会社を楽しく実現するためには”では、安心が人の力を最大限に引き出すということを知った。私自身の体験でも、緊張はミスを呼ぶことは知っていたものの、目標を明確に示すべきとの人事管理を私は行っていた!

「母と子の虹の架け橋」の“ママハウス”は、本来、研究職のようなもので、管理になじまないフラットな関係が必要と頭で分かっていたものの、どちらかと言うと成果を求める焦りもあって、命令や指示の傾向であり、スタッフの創造性が発揮されにくかったと、一層アズワンで思った。アズワンでの、おふくろさん弁当の人間関係の持ち方を導入しなくてはなるまい。



次いで、釜石の「ママハウス」は現地ママに委ねることとしようか。「ベビーホーム・虹」と「虹の家」の運営は現地スタッフに委ねよう! 「花巻ママハウス」は、“おふくろさん弁当”の関係性形成に取り組もう。そして、私の豊かな日々のため、新たな目標であるシェアハウスを探っていきたい。



有難うございました! 盛岡と花巻でお会いしましょう!

◆昌ちゃん(50代女性)



人のための会社を楽しく実現する!ということがこの3日間の中で可能であるということを実感できました。

人を大切(大事)にするとは、一人一人が心の中にあるこだわり、執着を手放していかないと自分も人も大切にしていけないこと! 解放できて来た分づつ、人の話も聞く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り、人の心(思い)を聴く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る。これが心の成長なしには可能にならないのだなぁ~と感じ、「お弁当屋さん」は各人が心の成長をしてきて、今の様な状態になれている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した。

それぞれのペースはあるだろうけど、各人が成長することで私たち岩手(イーハトーブ)の地元でも実現が可能であることを目指していけます。

これから、「調べる機会」を仲間と共に集い!やりたいと思います。

自分の心を調べる(見つめる、内観する)ことなしに、心の成長を進めることは出来ないのなら「やるしかない」と思いました。



イーハトーブの地で、私たちもアズワンのようなコミュニティーを実現したい!実現していきたい!と思って、今ワクワクな気分です!やったぁ~



このカレッジに参加できてとても幸せです。

スタッフの方々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そして岩手でカレッジを開催することを実現したいです。

私もアズワンに来て、それぞれのコースを受けたいと思います。

これからもよろしくお願い致します。

こんにちは!わがまちの社長さん2016年6月15日~放送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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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続可能な社会の試み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鈴鹿」 2016年版ビデオ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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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続可能な社会の試み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鈴鹿」 2016年版ビデ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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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16. 4. 25.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鈴鹿の2016年度版の紹介ビデオです。争いのない幸せな世界の実現を目指し、2000年に始まったこの試みも16年目を迎えました。まだまだ試行錯誤の途中ですが、現段階での一端を紹介します。

持続可能な社会づくりカレッジ | 詳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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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催日程> 2016年 全3回コース 







コミュニティのベースは「人」と「社会環境」づくりから始まる

~参加・体験型の学び~



持続可能な社会をめざして、地域やコミュニティなど各地で環境や社会問題など様々な取り組みが行われていますが、

お金や人間関係がネックなって、話し合いやコミュニケーションがうまくいかなくなった体験はありませんか?

仲が悪くても仕方がない、そんなあきらめや妥協もあって当たり前、それをうまくやるのを人間関係だと思っていませんか?



なぜ自分の願いと裏腹に人と人とが、対立や分裂、逆にそれを避けるために、距離を取ったり、あきらめたり、また遠慮や気兼ねをしてしまうのでしょうか?

モノ、コトではなく、心で繋がる人を基盤としたコミュニティが地球全体に育まれていくことが、持続可能な社会づくりの鍵となります。



持続可能なコミュニティや社会を実現するために、私達一人一人が日常の暮らしや仕事の中で



 ●本来の自分自身を取り戻し、自分らしく生きられること

 ●人の話に心から耳を傾け合い、何でも安心して話し合える「人」になり合っていくための、「社会環境(機構や仕組み)」が育っていくこと



それらこそが、持続可能のための肝心な近道ではないでしょうか?

<開催場所>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鈴鹿 http://as-one.main.jp/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の研修所、SCSをメインの会場とする他、居住者の家庭、

  地域で里山な農地で環境に配慮する取り組みを実践している現場訪問や滞在も交える。



Address: 三重県鈴鹿市阿古曽町14-28   TEL&FAx: 059-389-6603

・名古屋から電車で約1時間。車で約1時間15分(東名阪自動車道利用)

・大阪鶴橋駅から近鉄線で約2時間半。車で約2時間半(新名神高速道または西名阪自動車道を利用)

・中部国際空港や伊勢神宮からも近く、京都、奈良、大阪、名古屋からおよそ1~2時間の距離





<参加費>



■収入に応じて参加費は異なります(自己申告制)

①年収200万円未満  84,000円  (早割・学割 81,000円)

②年収200万円以上  89,000円  (早割・学割 84,000円)



*参加費には3回コース全ての宿泊費・食費が含まれます。

*早期割引の方は、各コース一か月前までにお申込みとご入金下さい。

*JSSC教育基金制度を使って、分割払い(無利子)も可能です。

 ご希望の方はお問い合わせください。

*ご入金をもって正式な参加受付とします。



<定員> 15名 (最低催行人数:4名)





<ナビゲータ紹介>



小野雅司(サイエンズ研究所 研究員)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の人々 他





<お問い合わせ方法>



ご質問等がございましたら、何でもお気軽に参加申込ページのフォームにて問い合わせ下さい。

尚、一週間しても返信がない場合はお手数ですが、jssc358@gmail.comまでメール下さい。

<第7期>

■第1回 9月23日(金)~24日(日)(2泊3日)

■第2回 10月21日(金)~23日(日)(2泊3日)

■第3回 11月25日(金)~27日(日)(2泊3日)



<第8期>

■2017年1月~3月開催予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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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回 
持続可能な人間関係とは?
 -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のスタディツアー
 -それぞれの課題の共有

第2回 
コミュニティづくりのベースとなる「話し合い」とは?
 -なぜ話し合えなくなるのか
 -なんでも話し合える関係とは

第3回 
持続可能な組織運営とは?
 -ルールやリーダーがなくても運営できるベースとは
 -贈り合いの経済のベースは
 -わけ隔てのない親しさが生み出すモノもココロも豊かな社会

*内容は随時変更することがあります

第六期2回目の感想

第六期2回目の感想





1. 印象に残ったこと、理解が深まったこと、自分の中で起きた変化など



「自立した自分を取り戻す」

2日目の「私が話し合いができなくなるのは なぜか?」を通して、自分を観察していくうちに、人との関係の中で、むしろ私自身から自分の主体性を失っているのを発見しました。

朝の散歩で、今日のレポートのテーマについて考えていたら、若い頃の事を思い出しました。

一人旅が好きで、定期的に日常を離れて旅をしていました。今になって改めて、一人旅 をしていた理由が明らかになりました。人との関係を離れて『自分を取り戻すための旅』だったんだと。

いつの頃からか、人との関係の中では、自分の主体性を押し殺す事が良いとか、人の言う事は聞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か、勝手に思い込んでいたんだと気づきました。

自分では、今まで、他の人に比べれば、自分らしく、生きていると思って生きてきましたが、人の中では、全く自分らしさを失っていました。

この自分らしさを、人との中で取り戻す事が、私が何でも話し合えるために、必要なことだと思います。 まずこの事を自分が感じている想いや、そこから来る考えを素直に表現する事なしには、

何でも話せるという状態にはなれないんだと・・・。本当の自立にはならないと、やっと気づく事ができたように思います。思い出すと、ずーと このメッセージを妻から言われていた様な気がします。その時には、素直に受け入れる事が出来なくて反発していたけど、ここから自由にならないと、僕の未来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

僕がこんな状態になった原因を見つめてみると、父の存在が大きいかもしれません。おそらく仕事場で、自分の思いや考えを押し殺して働き、酒を飲んだ時、普段の人格とまるで違う人になり母にあたっていたのを、子供の頃、ずっと見て育ちました。

僕がそこから受け取ったメッセージは、こんな大人にはなりたくない、という反面教師的なものでしたが、見事にそっくりな大人になってしまった気がします。「人との関係の中では自分を押し殺すものだ」ということを、動かしがたい事実、常識のように考えていました。それは、仕方のないものだと・・・。

何でも話し合うという事は、自分の主体性を取り戻したところからでしか有り得ない。

相手の主体を受けとめて、自分の主体と交流するやり取りを生み、育むために、お互いの主体性を大事にすることから、それが実現してゆくのだと思います。

逆にいえば、相手の主体性を侵してしまうのは、自分の主体性を大事にしていないからだともいえるかもしれません。

(40代男性、S.K)



「愛されたくて、本心を隠してきた」

自分の気持ち、本心の見つめ方が、少しわかった様な気がします。自分の本心がどんなものに隠されているか?

事例を振り返ってみることで、観えてくる世界がありました。いい子でいたい、その事で愛を受けとりたいと、切実に求める気持ちから、本心を隠すようにな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こういう事が少し見えるようになったのは、今回の成果でした。

(40代男性、S.K)



「一方的な通達から、気持ちを聞き合う双方向に」

自分の今まで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在り方を見直せた。自分なりに解決しようとして考えた結論を相手に伝えるという、一方的な方法しか知らないで、結論に重きを置いていた。

2日目に他の参加者の例を一緒に調べてみて、相手と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とるとき、特にネガティブな感情が発生した時に、自分もそのストレスから解放されるために、その気持ちをないことにしたくなる。見ないようにする。何か理由を自分で作って自分を納得させて、解消できた、と思っていた。ただ、その方法でここまでやって来て、それは一時的な紛らわしで、いつか破たんする可能性が高いと思ってきた。

自分が何でも話せる状態にならないと、話し合うことは難しい。ではどうしたらよいか。話し合う事が、結論有りきではなく、相手、自分の感情を開いて見るということで、新しい関係を生むの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

①相手との関係を悪くしたくない、伝えたくない様な行き違い、感情や思いのずれ、

→ ②この人とはうまくいかないと確信する様なトラブルが起きる。

→ ③自分なりに結論や解決策を考えて相手に伝える。

この工程において、③だけを相手につきつけていると気づいた。そこを、①の自分の気持ちを相手にただ伝える、聞いてもらって自分が困っていることをシンプルに話して、相手の反応を見て、聞いて話をした時に、③の結論自体が変わることも十分ありえたし、①の自分が感じていたネガティブな感情さえも、自分の思い込みだったと気づくことも多いかと思った。

自分が話し合える関係を作るには、まず自分のネガティブな感情と向き合い、相手への遠慮を外し、相手を何とかしようと決めつけないで、現状を作りだした自分の状態を見てみる。そこからそのままの気持ちを伝えて、相手の話もよく聴く。

この気付きから、これまで関係に問題があった母親に対して、今までとは違った内容のメールを送ることができた。すると母親から、これまでとは全く違った反応が返ってきた。すれ違いから、相手の違いを 非難することばかりに目がいっていたと思う。

そして、相手が変化しない事は、自分が変化しない、という事だったのかもと考えた。

(30代女性、おやぢ)



「気持ちKIMOCHIはスパイスでしかなかった」

なぜ話し合えなくなるのか、それはKIMOCHIに直面するのを恐れるから。

キモチ、キモイ。

「~ベキ」という規範がそいつを覆い隠してくれている。

他者のあるべきイメージがあり、自分のあるべきイメージがあった。

罪悪感も、劣等感も、それと表裏一体だった。

ようはKIMOCHIが外から侵されるのを防ぐ壁だった。

KIMOCHIに外から侵されるのを防ぐ壁だった。

命令の「通達」が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モデル。

だから話し合いは「ベキ」×「ベキ」だった。

やりたくないけど、やるべきだからやる。

なぜあいつはやるべきことをやっていないんだ。

KIMOCHIに反するベキが、またもう一つKIMOCHIに反するベキを生んで行く。

これまで僕の日常の足はTSUTATSU交通だったし、食べるのはMONOサンドやホームメード弁当だった。KIMOCHIはスパイスでしかなかった。

今回気づいたのは、KIMOCHI交通の大切さ。

KIMOCHI弁当。

KIMOCHI交通の駅弁。メインディッシュはキモチ。豚キムチもあるよ。

おそらく僕は「君のKIMOCHI弁当なんかに興味はないよ」というフリをしたかった。

独立した主体であるところの私は自分の弁当を持っているし、あなたの弁当などいらないよと。

なんで相手に興味がないフリをしたかったのか。

それもまたベキベキした自画像を維持するためであった。

ベキベキした包装紙を剝いで折り紙でも遊びながら、自分のKIMOCHIに深呼吸させる。

相手のKIMOCHIへの率直な食欲を受け入れて、KIMOCHI交通網の路線図を描いていきたい。

(30代男性、J.Y)



「最初から守りに入っていた」

今までは、話し合うということは、事業とか言葉のやり取りで、上辺のことばかりに捉われて、内面に触れることをしてこなかった。

自分が出来ていないと指摘されると心にゆとりがなくなり、話し合いのはずなのに、いつのまにか始点がずれていくことが多かったと思う。誰が言った、言わない、とか、自分の援護で話し合いにならないで終始してきた。中途半端で終わってしまって、いつも同じことを繰り返してきた気がする。

ここにきて皆さんの話を聴いているうちに、自分が何で守りに入るのか、また相手の言葉の背景を知ることで紐解いていかないと、何でも話し合える仲にはなれないことに気付かされました。

(70代女性、N.H)



◇印象に残ったこと。

今回の講座で少しずつ、みんなが心を開いていく様子が伺えた。そのことによって、親しさを感じていった。

自分事をあまり人に話してこなかった、私自身の変化に自分が一番驚いています。

◇理解が深まったこと。

なぜ、娘がカレッジへの参加を希望したのか分からないまま、また、何か自分たちの活動の参考になることがあればいいなと軽い気持ちで伺いました。

一回目の講座を受ける中で、娘の気持ちが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下手な私自身の改善を願ってだと気付きました。

きっと、私が思っている以上に娘の方が深刻に悩んでいたと思います。

「なぜ、話し合いがうまくできないのか。」自分なりにあれこれ反省しながらも、娘に切りだす糸口が見つからないまま一か月が過ぎた感じでした。

今回、みんなで話し合い掘り下げていく中で、「娘さんは、お母さんが好きだよ」と、すーさんの一言にはっとしました。私の心の底に、無意識のうちに「娘は私が嫌いだ」と勝手に決めつけている事に気づきました。自分を振り出しに戻せるきっかけができたと思いました。まだ、娘とは話し合っていませんが、心穏やかな日々を過ごしています。

(70代女性、N.H)



「母親と娘の関係」

会議をしても会議じゃなく口論になってしまう。

何で素直にしゃべれないんだろう。

ごめんなさいの一言が娘に言えないもどかしさ

娘さんからは私のやっていること認めてほしい。

でもこれって愛情の裏返し

娘さんは母親の愛情が欲しい為に

自分の気持ちとは裏腹に

違うことを伝え続けていたのでは

かあちゃん。きづいて

(60代男性 鈴木)



第6期2回目の感想(2016/6/17-19)

2.    疑問に思ったこと、質問したいこと、これから理解していきたいこと



どのように恐れは無くなっていくのか? など (40代男性 R.Y)



実践方法、これから、模索していくのだと思う。対話を続けていく途中に、やはり、疲れる時があるかと思うが、そういう時はどうしたらいいのか?

相手との関係が変化したい場合は、まだ、足りないものがあるのか、限界なのか、その見極めは、いつくだすのだろうか?  (30代女性、おやぢ)



一番身近であり、一番大事にしたい娘との関係を修復していきたいと思っています。

時間がかかるかもしれませんが、自分自身を磨くことによって会の運営に活かせると思っています。

(70代女性、N.H)



●その他、なんでも・・・



J君やおやぢさんなど一緒の地域から来ている人たちと場を共にでき、今後にも繋がりそうでありがたいです。

(40代男性、R.Y)

突然お金という制度がなくなったらどうする?|✳︎Open the Door✳︎

突然お金という制度がなくなったらどうする?|✳︎Open the Door✳︎



お兄ちゃん的に大好きな人から「突然お金という制度がなくなったらどうする?」と聞かれたことがあった。



私はあまり恐怖みたいなものは感じなくて、「みんなで持っているものを与え合ったら生きていけるんじゃないかな」というよくわからない自信みたいなものを感じたから、「特に何もしないかもしれない」と話した。「きっと、お金をたくさん貯めている人(囲い込もうとする人)はお金の制度がなくなったら怖いだろうね」と話していたのを覚えている。



彼はお金がなくなったらどうするか考えて、『汚い水もきれいにろ過して飲めるストロー的なサムシング』を買ったらしく、ドヤ顔で見せてくれたのがおもしろかった。今思うと、それは「そこらへんの水が飲めなくなったらどうする?」の答えなんじゃないかというツッコミが私の中から出てきて、新幹線の中で思い出し笑いをしてしまった。





~*~*~*~*~





8/12~8/14、三重県の鈴鹿市にある少し珍しいコミュニティ『アズワンコミュニティ鈴鹿』にお邪魔してきた。







なぜ珍しいかというと、そのコミュニティの中では、



お金を介さずにいろんな営みが行われているのだ。



まさに冒頭の状態を実践しているコミュニティであると言える。



そのコミュニティ内の企業で働いても基本的には給料は発生せず、仕事とお金が完全に分離されている。また、コミュニティ内には無料で物をもらうことのできるコンビニのようなお店があったり、無料で泊めてくれるお家があったりする。(※コミュニティ外とのやりとりはお金を介している。)



「争いのない幸せな世界」を目指し2001年にコミュニティがつくられたのだそうで、現在は「親しさでつながる安心の中で、その人らしく暮らせるコミュニティ」として運営されており、「権力・多数決がない」とか「義務・責任がない」とか「教え・押付けがない」といった、コミュニティならではの考え方『as one style』が確立されている。







なぜそんなコミュニティが成り立つのか、不思議に思われる人も多いだろう。事実、私と同じタイミングでコミュニティを訪れていた人達は「わからないことだらけだ」と話していた。



まずお金という存在はなんなのか考えてみると、人間がつくりだした『制度』に過ぎないのだけれども、現状の世の中はお金ありきで全てのモノやサービスが動いているので、「お金がなければ生きていけない」と思いがちなのだと思う。しかし、よく考えてみると、縄文時代の人はお金がなくても生きていたのだから、本来ひとはお金がなくても生きていけるのだ。



「そうはいっても争いや奪い合いが起こ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と疑問に思う人もいるだろう。私が考える、争いや奪い合いが起こらない主な理由は2つだ。



1.やりたいことだけをやり、やりたくないことはやらないため。



2.自分の内面と向き合って、心の豊かさを追求しているた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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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やりたいことだけをやり、やりたくないことはやらないため。



一般的には、「やりたくなくても仕事ならやらなければいけない」のが普通なのではないだろうか。しかし、このコミュニティ内の人たちは、やりたくない仕事はやらない。やりたいことだけ、やれる範囲でやっているのだ。だからこそ、ストレスはほぼたまらないし、給料という見返りも必要がない。むしろ、仕事をすることが趣味のような感覚で楽しいのだ。



ストレスがたまると、私は食欲が異常発生してジャンクフードや甘い高カロリーなスイーツなどを大量に食べたり、物欲が異常発生して服を大量買いしたりしていた。しかし、今はやりたいことだけやっているため、食欲も物欲も異常発生することはない。たぶん人によってストレスによる影響は様々なんだろうと思うのだけれど、過剰な欲求が現れるのは大抵ストレスが原因なんだろうなと思う。コミュニティの人達も、過剰な欲求を抱えておらず最低限で満足してしまうため、奪い合い・囲い込みといったことが起きないのだろう。





2.自分の内面と向き合って、心の豊かさを追求しているため。



浜松のトランジション・タウン(持続可能な街)の運営をしていたという私と同年代の男性が話してくれたことなのだけれど、トランジション・タウンでは運営がうまく行っているように感じていても、ある日突然運営のリーダーなどが「もうやってられない、疲れた!」と言い放ち、去って行ってしまうことがよくあるそうだ。あまりにもよく起こるために、このような現象のことを表す『バーンアウト』という言葉が生まれたほどだという。



バーンアウトが起こる原因として、彼は「持続可能な街のシステムをつくればそのように生きられると思って、システムをつくろうとしていたけれども、本当に必要なのはシステムではなくて人間の心の豊かさなんだと気づいたんだ。街が持続可能でも、人間が持続可能じゃないと成り立たないんだとわかって、今のコミュニティに学びに来たんだよ。」と話してくれた。



このコミュニティでは、心の豊かさを追求するために、自分の心と向き合う手段を学ぶことのできるスクールが開講されている。さらに心の研究所のようなものもあって、日々スクールを開講しながらひとの本質について研究しているのだという。







コミュニティ内の里山を案内してくれた男性がこんなことを話してくれた。

「『木を見て、森を見ず』という言葉があるけれども、僕は今の世の中を『森を見て、土を見ず』だと思っているよ。表面に現れているところだけを見てなんとかしようとしているけれども、本当に必要なことは土壌の豊かさであって、目に見えないところにいかに目を向けるかなんだと思うんだ。」



私は彼らの話を聞いて本当にそのとおりだと思ったし、私と同じように考えて実践している人に出会えたことが何より嬉しかった。私に昔「お前の考えは甘いんだ。そんなに社会は甘くない。」と言っていた父親に「どうだっ!ほら見ろ!」と言いたくなったのは言うまでもない。





~*~*~*~*~





最終日、時間が空いたので、コミュニティ内のお家でお昼寝をさせてもらった。台所ではその日の夜ご飯の準備がされていて、包丁で野菜を切るサクサク、トコトコという音が聞こえてきた。おばあちゃん家に遊びに来ているような感覚がして、胸がじわーっとあたたかくなった。



気がついたら、涙が出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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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月のある日、そらべあ基金というNPO法人の人に、

「私はこれから仕事をしたとしても対価としてお金を受け取りたくなくて、与えきりたいんです。相手が私に何かをあげたいと思ったときに与えてくれれば良くて、それはお金でもいいし、お金じゃなくても良いと思ってるんです。」

と熱弁していたところ、このコミュニティを紹介してくれた。



このコミュニティの存在を聞いたとき、日本にそんなコミュニティがあるのかと本当に驚いて鳥肌が立ったし、同時にすごく興奮してワクワクした。きっとこれも前兆であり、私の人生の大きな流れの一つなんだろうなと思った。だから、これから私はこの生き方を実践したいし、必要な人に伝えていきたいと思っている。







やりたいことだけ、やれる範囲でやることができるお弁当屋さん。





毎日、農場で採れた野菜を使って作ってくださった家庭料理は最高においしかった。





里山の原風景。山の間に広がる田んぼの緑が美し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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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友湯(まゆ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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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 - 개량화덕.로켓스토브.화목난로.벽난로.깡통난로구들 만들기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 - 개량화덕.로켓스토브.화목난로.벽난로.깡통난로구들 만들기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 - 개량화덕.로켓스토브.화목난로.벽난로.깡통난로구들 만들기

김성원 (지은이) | 소나무 | 20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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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의 화덕에 관한 역사.문화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와, 사라졌던 나무화덕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그 결과를 정리한 정보서이자 화덕 만들기 안내서이다. 저자 자신이 직접 만들어 보고, 또 카페의 회원들과 많은 정보를 나눈 후 쓴 글이기 때문에 직접 만들면서 느낀점과 개선해야 할 것들이 글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우리 생활에서 쉽게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화덕들을, 100컷이 넘는 사진과 200컷이 넘는 다양한 삽화로 소개하며 화덕.난로의 구조도가 실려 있어 재미와 실용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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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시대

| 제1장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기술, 화덕

화덕의 시대 | 좋은 화덕의 조건 | 나무 연소의 비밀

| 제2장 | 세계의 개량 화덕들

전통 화덕들 | 아프리카의 개량 화덕 | 중남미의 개량 화덕 | 아시아의 개량 화덕

| 제3장 | 숲과 사람을 생각하고 만든 화덕

밥할 나무도 귀하던 시절 | 삽 한 자루로 만드는 벵갈 구덩이화덕 | 거꾸로 타는 시멘트블록화덕 | 진흙반죽 단열화덕 | 초간단 단열깡통화덕 | 위나르스키 박사의 로켓화덕

| 제4장 | 땔감 걱정 없는 가마솥화덕

GTZ의 두 구멍 대형 화덕 | 무여농원의 부뚜막 아궁이 가마솥화덕 | 말라위의 희망화덕 | 산마을고교 학생들과 만든 가마솥화덕 | 스와질란드의 대형 사자화덕 | 열기고리를 장착한 가마솥화덕

| 제5장 | 연기 없는 조리용 화덕

솥자리가 여러 개인 다구 화덕 | 벽돌조적 다구 화덕 만들기 | 빵 굽는 함석오븐화덕 | 나무로 만든 가구형 화덕 | 싱거화덕 | 2차 공기주입구를 가진 포그비화덕 | 전국귀농운동본부 벽돌 철판화덕 | 막돌과 기와로 만든 철판화덕 | 자연과 건강을 돌보는 팟사리화덕 | 남미의 다양한 철판화덕들 | 부담 없는 드럼통 철판화덕 | 필립스 디자인의 조립 점토판화덕 | 전통 부뚜막과 아궁이

| 제6장 | 버너처럼 타오르는 나무가스풍로

나무는 가스가 되어야 불이 붙는다 | 나무가스풍로의 원리 | 깡통으로 만드는 나무가스풍로 | 강제 송풍식 나무가스풍로 | 단열 개량 화덕과 나무가스풍로의 만남 | 남아프리카의 조왕화덕 | 베트남의 TLUD 왕겨가스풍로 | 솜씨 좋게 나무가스풍로에 불 피우기 | 나무가스화 이론을 응용한 숯 만들기

| 제7장 | 화목난로를 손에 쥐다

철제난로의 기본 구조 | 오븐 장착 화목난로 | 거꾸로 타는 난로

| 제8장 | 화목난로의 3박자, 열복사·대류·열전도

열복사·대류·열전도 | 열복사·대류·열전도를 이용한 난로 만들기

| 제9장 | 알고 있던 벽난로 그 이상

커다란 몸체, 은근한 열기 | 벽난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 제10장 | 장작꽂이 종탑형 벽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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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서울시철거민협의회, 노동정보화사업단, 노동정치연합, 구로와 울산 노동 현장에서 빈민·노동·진보정치 관련 단체의 활동가로 일했다. 이후로 30대 후반까지 IT분야 컨설턴트, 패션 마케터, 광고 전략가로 좌충우돌 직장생활을 했다. 마흔에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시민단체 ‘에너지전환’의 간사로 일하다 2007년 전남 장흥으로 귀촌했다.



국내 최초로 흙부대 집을 짓고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이웃과 함께 짓는 흙부대 집」을 출간했다. ‘로켓스토브’와 ‘고효율 개량화덕’, ‘로켓매스히터’, ‘구들 개량법’을 세...





“불 지필 줄이나 알어?”



“석유문명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인류사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불에 대해서 가장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200만 년 전 석기시대부터입니다. 인류가 화덕을 처음 사용한 때는 기원전 50만 년 전입니다. 석유 보일러와 가스레인지가 한국에서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때는 20년 전. 그 이전 도시지역은 석유곤로나 연탄보일러를 사용했고, 농촌은 여전히 대다수가 화목을 때는 아궁이와 화덕을 사용했습니다. 현재로부터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람들은 최근까지 수백만 년 동안 장작을 직접 때며 불을 가까이 바라보고, 불을 직접 다루며 살아왔습니다. 그만큼 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본문 12쪽)



“화덕은 인류 문명과 불의 발견만큼이나 오래된 기술입니다.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화덕은 기원전 40만 년 전 중국 화덕과 50만 년 전의 유럽 화덕이죠. 석기시대 동굴에서 살았던 인류는 원시적인 돌화덕을 만들어 사용했고, 빙하기의 인류도 추위를 막기 위해 화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요리를 위해 불을 피우기 시작한 때는 50만 년 전이고, 기원전 10만 년 전쯤 인류는 본격적으로 요리에 불을 사용했습니다. 불을 다루고 이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인류 문명은 시작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인류는 꽤 오랫동안 수많은 세대를 거쳐 누적된 불의 기억을 DNA 속에 담고 있는 셈입니다. 불의 유전자라고나 할까, 50만 년 동안 불을 지펴온 점화본능이랄까, 우리 속에 화인으로 각인되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덕을 사용하다 보면 오래된 점화본능이 후끈후끈 살아납니다.”(본문 14쪽)



우리의 아궁이, 그들의 화덕



“선진국이라 불리는 서구 국가들과 일부 아시아, 남미 국가의 도시지역 중산층들에게 이제 나무화덕이나 오븐, 벽난로는 숯불구이, 바베큐 파티, 피자, 빵 등을 굽는 화려한 전원생활의 로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과학적 원리에 따라 적정기술에 기반해서 만든 효율 좋은 전통 화덕과 과학자들과 함께 개량한 화덕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가들과 지역의 사회 운동가들은 이러한 화덕들을 발굴하고 개량해서 각 지역으로 보급하고 있습니다.”(본문 19쪽)



우리들은 구들을 자화자찬하면서도 세계의 화덕 전통과 소통하는 데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전통적이며 동시에 현대적인 전 세계 화덕과 난방기술을 소개하는 첫 번째 시도일 것입니다.

1차 화덕 개량 사업은 정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맥락에서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는 아프리카 사헬의 가뭄에 대한 원조사업으로 진행되었고, 1976년 과테말라 지진 이후 원조사업의 하나로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차 화덕 개량 원조사업은 주 원료인 나무 소비를 줄이고 열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기존 화덕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서구 선진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최근의 3차 화덕 개량 원조사업은 에너지 위기, 기후변화, 탄소배출권, 청정개발체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작비가 적게 들고 누구나 쉽게 배워 만들 수 있는 ‘중간기술’과 환경에 영향을 덜 끼치는 ‘적정기술’이 적용된 대안 화덕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무시되고 있는 간단한 나무화덕으로 제3세계 국가 곳곳에서 독일, 영국, 미국 등 유럽 선진국들은 명분은 명분대로 얻고 청정개발체제, 탄소배출권을 통한 경제적 이익은 이익대로 얻고 있습니다. 난방과 요리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난방화덕기술 ‘부뚜막 아궁이 구들’을 자랑하는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전통 기술이 무조건 세계 최고일까요? 세계 최고를 알리기 위해 우린 무엇을 했나요? 다른 나라의 화덕이나 장작오븐, 벽난로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의 전 세계적인 화덕 개량 산업을 살펴보면 볼수록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혹시 각지의 문화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발전한 결과인 ‘문화적 차이’를 ‘문화적 우열’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벽난로와 구들의 결합, 그 아름다운 만남



뜨끈하게 등을 지질 수 있는 구들 바닥,

이글거리는 불꽃 그림자가 포근한 벽난로,

이 둘은 집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세밀한 낭만적 욕망의 대상 가운데 결코 하나가 된 적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는 바닥난방을 요구하는 우리의 좌식문화를 대표하고, 또 다른 하나는 서양의 입식 문화에서 발전된 공간난방에 걸맞기 때문입니다. 좌식문화 위에 그대로 누운 채 서양식 건축문화를 받아들인 우리들은 두 문화를 모두 욕망합니다. 그리고 집과 공간을 따뜻하게 하는 방식을 항상 생각하죠.

두 난방 방식을 어떻게 하나로 화해시킬 것인가? 1990년 대 초 위나르스키 박사는 대류, 축열, 열복사 방식을 종합해서 바닥난방과 공간난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서양식 벽난로 구들을 개발했습니다. 일명 거꾸로 타는 난로구들(Rocket mass heater)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화종 선생의 산촌도드리벽난로 구들장 벽난로, 그 외 다양한 바닥 겸용 벽난로가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 난방장치를 통해 우리는 그 오랜 숙원을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의 특징



‘화덕의 귀환’은 각 나라의 화덕에 관한 역사·문화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와, 사라졌던 나무화덕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그 결과를 정리한 정보서이자 화덕 만들기 안내서입니다. 저자 자신이 직접 만들어 보고, 또 카페의 회원들과 많은 정보를 나눈 후 쓴 글이기 때문에 직접 만들면서 느낀점과 개선해야 할 것들이 글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 쉽게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화덕들을, 100컷이 넘는 사진과 200컷이 넘는 다양한 삽화로 소개하며 화덕·난로의 구조도가 실려 있어 재미와 실용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쌀쌀한 이 계절에 가족들과 함께 깡통난로 하나쯤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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