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9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 Greg Richardson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 Greg Richardson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LAST UPDATED ON: JANUARY 18, 2024 AT 4:51 AM
 JANUARY 18, 2024 BY GREG RICHARDSON

Urban Contemplation
Some of us apparently believe it is impossible to practice urban contemplation.

We assume we need to head out of town and away from other people to really practice contemplation. Do we need to travel into the country, to the mountains or the desert, into the woods or to the beach to be contemplative? Many of us are convinced we need to get as far as possible from other people to practice true contemplation.

Sometimes getting away from other people and our typical routines might help us listen to sacred stillness. We want to leave distractions behind and we feel the best way to do that is to physically leave.


I appreciate how attractive wild places can be. It takes me hours to drive to the monastery where I am an Oblate. While my trip begins in the city, I leave it behind and head up the Pacific coast to Big Sur.

It is easy for us to believe spiritual life lives in wild, remote places.

I believe, though, we are called to practice urban contemplation.

Our contemplative practices are not fragile. We do not need to protect them from other people.

It may seem more pleasant for us to practice contemplation in a bucolic setting, but it is not necessary. We can be just as contemplative in the city as we can in the country.

Urban contemplation is about not paying attention to what distracts us. We may feel more distracted downtown than we do in the country, but it is not necessarily the case.

When we close our eyes and take deep breaths, we can pay attention to sacred stillness in the city.

Most of what distracts me during my contemplative practices comes from within me, not from the city around me.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I was not born contemplative, nor was I born in a large city.

I was taught from an early age it was more valuable to know things than to learn things. Learning was just a step on the path toward knowing while knowing was the goal of learning. It was far better to know the right answer than to be in the process of learning it. Learning means we have not yet arrived at knowing.

Knowing was also more fun than learning. Learning requires patience, practice, and being open to new insights. Learning means we try new things and make mistakes, which just reinforces we do not already know the right answer.


People do not do well in school by learning, they do well by knowing the right answers.

The significant thing about knowing the answer is we have successfully completed learning. We no longer need to be open to new ideas when we already know the answers.

Moving from place to place, for school and for work, I searched for answers.

Gradually I began to realize my answers were not always right. I came to appreciate asking good questions more than having the right answers.

My seeking drew me to larger cities and to monastic life. I was received as a lay Oblate at a Benedictine monastery and hermitage in Big Sur, California.

I follow a rule of life which includes spiritual practices like regular prayer, reading, stillness, and solitude. At least once each year I leave the city where I live to spend time at the monastery.

I recognize a balance of seeking spiritual life in the everyday. The life of the city draws me more deeply into contemplative life, which draws me more deeply into city life.

The challenge for me is becoming a contemplative in the city.

Beginning to Practice Contemplation
The pattern and structure of monastic life gives us a framework to practice urban contemplation.

Everyday life in the city has a rhythm which is different from monastic life at the hermitage. Our daily and weekly schedules are not the same. We incorporate contemplative practices into our lives in our own ways.

It is important for us to take time each day to listen to sacred stillness. Our approach to everyday life is shaped by how we choose to practice urban contemplation.


Practices shape how we perceive our experiences. Urban contemplation is about how we live the situations we experience. As we become more open to spiritual life within us and around us we perceive everyday life in new ways.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is not limited to sitting and listening to stillness on a bench in the park all day. When I walk in the city each day I see people differently.

Being contemplative in the city is not simply a matter of slowing down, though that helps our paying attention. We practice listening and being open to the life around us.

A Living Practice of Contemplation
There is no magic formula or set of rules for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Some of us follow contemplative practices intended to help us take time to listen and pay attention. Our practices do not ensure we will live as contemplatives in the city.

Our first step might be taking time to set aside what distracts us. It is easy for us to get caught up in the entertainments and attractions which cities offer us. We pay so much attention to work and money, the expectations and other people which distract us. Some of us become so wrapped up in everyday life we are too exhausted to even think about anything else.

We are immersed in so many people and so many things to do we lose track of anything of real depth. It takes us so much effort to skim along the surface of life. Beginning to practice urban contemplation seems like more work than we can do.

The contemplative practices we choose to develop shape how we become contemplatives in the city.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means we pay attention to spiritual life within us and all around us wherever we find ourselves.

How will we begin practicing urban contemplation in a new way today?

When will we take time to practice urban contemplation this week?

[Image by judithjackson957]

Greg Richardson is a spiritual director in Southern California. He is a recovering assistant district attorney and associate university professor and is a lay Oblate with New Camaldoli Hermitage near Big Sur, California. Greg’s website is http://StrategicMonk.com and his email address is StrategicMonk@gmail.com.

2024/01/18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 - 자비·용서·관용·평화의 가치가 주는 교훈 < 법보신문

자비·용서·관용·평화의 가치가 주는 교훈 < 출판 < 기사본문 - 불교언론 법보신문

자비·용서·관용·평화의 가치가 주는 교훈
기자명 권오영 기자
입력 2024.01.16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
수바쉬 C 카샤 편집/허우성·허주형 옮김/운주사/5만원


6살 나이에 제14대 달라이라마에 즉위한 텐진 갸초의 삶은 험난했던 티베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59년 중국의 침략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인도로 망명한 이후 그는 오로지 티베트 민족의 염원을 대변하고 전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과 행동은 단지 티베트의 이익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중국인들에 대해 증오보단 그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세상 모든 이들에게 자비·관용·용서·평화의 가치를 역설해 왔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은 중국 침략 이후 티베트인이 겪어온 충격과 비극에도 비폭력, 자비, 평화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온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과 사상을 담은 대표적인 글 100편을 모아 엮은 것이다. 1977년부터 2013년 사이 티베트 문제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정치, 사회, 도덕, 영적 사안 등을 주제로 하는 여러 포럼에서 발표된 달라이라마의 담화문, 연설, 성명, 인터뷰 등을 가려 뽑은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연설 내용 대부분은 즉흥적이다. 때문에 항상 마음에 두고 있거나 사상의 기저를 다루는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책은 그의 진정성이 온전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진리, 사랑, 비폭력, 평화, 자비심, 보편적 책임감 등 달라이라마가 주창하는 정치철학의 기본교리는 모두 불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해결을 주장한다. 중국으로부터의 분리나 독립이 아닌 티베트 독자적인 언어, 종교, 가치, 전통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도록 진정한 자치권을 갖기를 원한다.



달라이라마는 또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다. 입법·행정·사법 기관들이 지정된 영역 내에서 자유롭게 작동하고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람의 독단적인 권력에 반대하며 스스로도 모든 권한을 이양한 바 있다. 경제정책에 있어 달라이라마는 스스로 밝혔듯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에 가깝다. 티베트인들을 비롯해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을 위한 정의에 입각한다면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달라이라마는 보편적 책임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열쇠라고 강조한다. 즉 자신이나 가족, 국가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후위기, 세계평화, 환경문제 등에서 보듯, 인류는 이제 하나의 운명공동체가 됐으며, 이런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책임감이 절실하다는 견해다.

책을 통해 인내와 무한한 관용, 절대적인 평정 등으로 일관하면서 역경에 처한 티베트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킨 달라이라마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결혼 고발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2017

 
1.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비극의 탄생이다.
결혼 특히 가정을 꾸린다는 건 대부분 출산과 양육을 동반하기 때문에,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의 논리대로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제도로써 전략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있는 제도인 것이다. 즉 자식을 전제로 한 결혼이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게 본질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개별자로서 자신의 인생은 끝났다고 봐도 된다. 왜냐하면 잔인하게 말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생식이 끝난 개체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이성애자 남녀의 결합만을 제도적 결혼으로 법적으로 인정하는데 이 사실 자체만 봐도 대를 이을 번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간주하는 지를 알 수 있는 셈. 결국 부모란 아이가 다음 세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게 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존재다. 결혼에서 자유보다는 책임과 헌신이, 개별자로서의 삶보다는 부모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한 이유가, 배우자 서로간에 서약과 구속이 반드시 수반되는 이유가, 그리하여 결혼이 사랑과 섹스의 무덤이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동물들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수행하는데 반해, 인간은 특이하게도 이러한 동물들의 본능적인 행동에 의문을 품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결혼의 비극이 시작된다.
무엇보다 여전히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유교적 결혼관념이 뿌리 깊은 가부장제 한국 사회에서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란 이름으로 남자 가족으로 편입되는 시스템을 여성 개인이 벗어나기란 극도로 힘든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란 말이 좋아 사랑이지 집안과 집안의 거래다. 남성 중심의 가족 비지니스라고나 할까.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이란 말 그대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과 개인이 자유로이 만나서 인습을 벗어나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결혼이란 전근대적 봉건 이데올로기를 답습하는 부모 세대와 개인의 가치와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중요시하는 자식 세대가 맞부딪히는 세대 간 충돌이 벌어지는 장이다. 대한민국에서 결혼한 남녀 모두에게 권리 없이 의무만 강요하는 역할극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무대이기도 하고. 특히 여성 잔혹사가 현모양처라는 이름으로 찬양되는 모성 신화 드라마가 시뭘드를 무대로 끝없이 계속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와 완벽한 결혼에 대한 지극한 환상을 품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난 말이지....... 참 신기하고 놀라울 뿐.
적어도 21세기를 사는,
여자들에게
결혼을 돈이 없어서 경제 수단을 의지하기 위해서 혼자 먹고 살 자신이 없어서 하지 말자.
남자들에게
결혼을 합법적이고 지속적인 섹스 상대를 찾기 위해서 안정적인 일상의 돌봄이 필요해서 하지 말자.
남녀 인간 모두에게
결혼을 외로워서 노년이 불안해서 보험으로 자식이 있어야 할 거 같아 하지 말자.
2.
사람마다 생각과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성애자 중심의 일부일처제 결혼만큼 보수적이고 위선적이며 이율배반적인 제도도 없다고 생각한다. 결혼한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시대, 기혼남성의 두 명 중 한 명이 외도/불륜을 저지르는 한국의 현실이야말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낡았다. 대안도 상상력도 아무 것도 없다. 고루하고 지루하다. 내게는 아무 매력도 없다. 그래서 나는 결혼이 지금과 같은 의미의 결혼이 아닌 다른 결합을 꿈꾼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라진 그런 미래는 과연 무엇이 될까.....나는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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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고발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결혼 고발
[기고] 아내이자 며느리가 되어본 후 알게된 것

사월날씨 | 기사입력 2017/01/09 [22:37]


결혼은 더 이상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의 무덤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혼으로 인해 의무와 책임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결혼 후 나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알기엔 상상력이 부족했다. 주변 사람들과 인터넷을 통해 간접경험이 넘쳐났지만, 동시에 ‘설마 내 일이 되겠어’ 라는 게으른 오만 또한 넘쳤다.



그래서 결혼했다. 당시의 애인과 만난 지 5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꽤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비관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성향 탓에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헤어짐에 대한 각오를 남겨두는 내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관계였다. 그는 내가 좀 더 자유롭고 용감하게 사는 것을 늘 지지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상대에 대한 믿음은 행복한 결혼생활의 전제가 될 수는 있어도 전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사랑의 무덤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역할인생의 강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시아버지는 나를 앉혀놓고 짐짓 근엄한 얼굴로 파일 수여식을 진행하셨다. 그 안에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이 손수 적힌 종이와 남편의 보험증서가 들어있었다. 시아버지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셨지만, 나의 역할은 명확했다. 남편과 시가의 신변잡기 문제를 담당하는 것. 그렇다면 남편은 우리 집에 와서 뭘 받았을까? 그야 물론 밥상이다.

시아버지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에게 나는 ‘며느리’이고 ‘아가’이다. 남편 부모님은 역할로 사시는 것에 익숙하다. 한 쪽은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역할로 생계를 책임지고 가정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다른 한 쪽은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역할로 살며 가사노동을 도맡고 자녀를 양육한다. 물론, 시어머니도 경제활동을 꽤 오래 하셨지만, 그건 시어머니의 본분이 아니기에 보조 역할로 치부될 뿐이다. 두 분은 이렇듯 명확한 역할 구분으로 평생을 사셨고, 당연하게도 나에겐 며느리의 역할을 기대하신다.

나는 그분들 앞에서 며느리라는 역할로서 존재할 뿐, 나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가치, 기호, 목표는 관심받지 못한다. 그분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남편을 내조하고, 건강하게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시가의 행사와 안부를 챙기는 것이다. 즉, 남편의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챙겨주고, 남편 부모님에게 살갑게 애교를 부리고, 부모님 댁에서는 부엌일을 알아서 야무지게 하는 것들이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다. 여기에 나의 가치관이나 성향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답을 알면서도 궁금할 때가 있다. 그분들은 나를 왜 그리 찾으실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혼자 시부모님을 찾아뵙기로 한 날, 그래도 내가 오는지 안 오는지 궁금해하신다. 우리 집에 오시기로 한 날, 나의 일정과 상관없이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와있기를 바라신다. 그분들은 나라는 사람을 원하시는 걸까, 며느리를 원하시는 걸까. 나를 만나서 하시는 말씀의 대부분이 남편 안부에 관한 것인 걸 보면, 답은 후자다.

물론, 역할인생은 당신들의 자식인 나의 남편에게도 적용된다. 남편 또한 이름보다는 ‘아들’이라 불리며, 아들로서 부모님을 챙기고 지원할 것을 요구받는다. 또한, 나의 남편으로서 나를 먹여 살리길 강요받는다. 역할인생이란 건, 필연적으로 개인성을 말살한다. 전통적인 성 역할을 거부하는 나와 남편의 선택은 존중받지 못한다. 개인의 주체적 선택과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는 이기적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이다. 심지어 당사자들끼리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출발점이 다르다. 결혼으로 인해 새로 얻게 된 우리의 호칭은 각각 '아가야'와 '김서방'이다. 이 호칭들 뒤에 올 자연스러운 말은 뭘까? ‘김서방, 이리 와서 갈비찜 들게’, ‘아가야, 그만하고 와서 쉬어라’ 정도일 것이다. ‘아가야, 들게’나 ‘김서방, 쉬어라’는 주술호응이 맞지 않는다. 나와 남편 모두 이름을 잃었지만, 과연 이를 같은 차원으로 볼 수 있을까.



▶ 시부모님에게 나는 며느리라는 역할로 존재할 뿐이다. 그분들도 평생 역할인생을 살아오셨다. ⓒfreepi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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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와 사위의 신분 차이


현재의 결혼제도 안에서 여자와 남자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내가 여자임을 생애 처음으로 가장 적나라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깨닫게 해준 것이 결혼이었다. 나는 절대로 남편과 동일한 위치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영원히 남편에게 종속된 한 단계 아래의 인간임을 결혼은 끊임없이 되새겨주었다. 이쯤에서 남자의 경제적 책임과 부담을 반론으로 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에 대한 가부장제의 억압은 경제 사정과 관련 없이 존재한다.

며느리와 사위에게는 주어지는 기대가 다르다. 사위는 0에서 시작해 조금만 잘해도 바로 +로 올라가는 데 비해 며느리는 수많은 기대를 다 채워야 비로소 당연한 0이 된다. 그 많은 기대에서 하나라도 못 채우면 바로 -로 떨어진다. 시간을 내서 남편 부모님을 만나고, 좋은 식당과 카페를 알아보고, 나로서는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하여 그럭저럭 화목한 식사를 하고 나서도 ‘애교 없는 며느리’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다.

나의 애쓴 마음은 당연한 것이 되고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받는 반면, 남편의 마음은 쓴 만큼 그대로 빛이 난다. 사위에 대한 평가는 ‘한 일’에 집중되지만, 며느리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은 일’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양가에 같은 수준의 마음을 쓰고 행동을 하기로 합의하며 결혼한 지 1년, 나의 남편은 자상하고 배려 깊고 착한 사위가 되어 있었고, 나는 남편의 팔불출 덕분에 편하게 지내는 ‘그냥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제도 속의 개인

괴로울 때마다 나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내게 행해지는 억압의 얼굴인 남편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남편 부모님의 인품과 언행에서 좋은 점을 찾아서 별개의 문제들을 퉁치려고 노력했다. 어찌 됐든 가부장제 속에서 나는 약자의 위치에 놓여있고, 약자는 강자를 이해해야 표면적으로라도 편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고 염려하는 부모님이고, 내가 정기적으로 교류할 대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개인으로 보자면, 그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분들이다. 이 사실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불필요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분들은 정이 많고, 성실하게 가계를 꾸리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일상의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선량한 분들이다.

그러나 온화한 성품의 그분들과 내가 시부모와 며느리로 만나는 순간, 상황은 복잡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상처 입힐 의도가 전혀 없지만, 결과적으로 상처 내고 상처 입는다. 그분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분명 나를 상처 입히는 건 그분들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분들을 서운하게 만든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는 시도가 그분들에겐 며느리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 친할머니의 제사에 참석하기로 했을 때였다. 갈 때 앞치마를 꼭 챙기라는 시어머니의 당부가 있었다. 여기서 슬픈 건, 이 조언이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나를 위한 배려라는 점이다. 일할 때 옷이 젖을까 봐 걱정해주신 것인데, 나에 대한 걱정이 그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이 남편 부모님의 한계다. 남편 큰집에서 남편이 아닌 내가 부엌일을 한다는 차별적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무리 다정하게 나를 배려하셔도 가부장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억압은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나와 남편은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편이 전화를 걸어, 나 혼자 부엌에서 일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고, 남편도 나와 같이 일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남편 부모님의 평소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엄청난 역정과 함께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셨다. 시아버지는 ‘너희가 너희의 생각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문화가 있다’고, 시어머니는 남편이 부엌에서 일하는 건 당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라고 하셨다. 남편 부모님이 나를 배려하고 다정하게 대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내가 며느리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순간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내면화된 억압





▶ 자유롭고 싶은 여성들에게도 가부장제의 억압이 내면화되어 있다. ⓒ정은


끔찍한 건, 역할을 가장한 억압이 이미 나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점이다. 일단,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의 부당함에 대해 이성적으로는 명확하게 인지하지만, 무의식적인 책임감에 스스로 당황할 때가 있다.

결혼 후, 남편이 회사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와이프가 아침밥 차려줘?”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과일 도시락을 싸가는 남편에게 부러움과 칭찬이 쏟아졌다고 한다. 나의 상황과 성향에 기인한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었지만, 남편의 아침 도시락을 싸는 것은 개인적이기보다 사회적인 역할로 해석되었다. 질문이든 부러움이든 고정된 성 역할 발언과 발언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남편에게 쏟아내면서도, 내가 그들의 시선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도시락 내용이 부실할 때면 그들이 도시락을 보지 않기를 바라는 스스로에게 놀라곤 했다.

결혼한 순간부터 남편의 건강과 외형에 대한 평가는 곧장 아내에게 그 책임이 돌아간다. 남편이 살이 쪄도, 살이 빠져도, 셔츠가 구겨져도, 머리가 덥수룩해도 그건 아내의 직무유기로 여겨진다. 살이 쉽게 붙지 않는 남편의 몸은 나에겐 보기 좋게 늘씬한 몸이지만, 남편 부모님에게는 늘 걱정거리다. “OO(이)가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라는 남편 부모님의 말씀은 남편이 아닌 나를 향하고, 나는 자동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학습 받고 세뇌되었다. “그런가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신경을 안 쓰려고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이 이미 노력을 요한다.

이렇듯 아내에게는 남편을 ‘관리’할 의무가 주어진다. 남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전 세계를 움직이는 게 자연스럽다고 여겨지지만, 결혼제도 안에서는 갑자기 자율성이라고는 없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되는 아이러니이다. 남편이 미용실에 갈 타이밍을 살펴 안내해주는 것은 사소해 보이나 실은 굉장한 에너지 소모이다.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자들의 노동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다.


비혼과 기혼의 손익계산서

이 땅의 많은 여자들은 알고 있다. 결혼제도가 여자의 삶을 제약한다는 것,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에게는 기대되지 않는 것들이 ‘역할과 도리’라는 이름으로 요구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결혼을 원하고 결혼을 한다. 분명 결혼이 주는 달콤함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을 약속하고, 관계에서 안정감을 얻는 것과 같이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과업을 완료했다는 인정, 살 곳을 마련하고 아이를 기르는 데 필요한 제도적 지원 등도 있을 것이다.

결혼의 장점과 단점을 따져보면 어느 쪽의 리스트가 더 길까. 기혼과 비혼의 장단점을 표로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손익계산서를 만들어본 후, 여전히 결혼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사회적 특성을 고려해볼 때, 그 손익계산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어쩌면 비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일 수 있다.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 비혼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다면, 과연 이 사회의 여자들은 결혼에 관해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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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이 2022/12/17 [18:17]수정 | 삭제
아들이 본인집으로 혼자 오는 것을 가로막는 아들의 부인이 싫어요ㅇ 2022/12/17 [12:15]수정 | 삭제
감사합니다한

남그만 2020/01/25 [14:58]수정 | 삭제
한남은 똥그만싸고 아버지 기저귀나 갈아드리러 가십쇼으

이그 머저리들 2018/07/06 [16:40]수정 | 삭제
여기서 '남자들의 돈에 대한 부담감'을 꺼내는 머저리들을 볼 줄은 몰랐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응석이라는걸 아직도 모르는건가... 애초에 여자들은 돈에 대한 부담감을 지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어렵다. 벌 수 있는 돈의 한계가 있기

적어도20대 2017/10/04 [15:45]수정 | 삭제
적어도 20대 초 여자들은 이미 생각이 많이 바뀐거같습니다 굳이 어렸을때 봐온 성차별적 일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몇년 별 나이 차 안 나는 언니들이 시집가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 눈에 똑똑히 보이는 이상.. 제 주변에도 결혼 안 한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고 무엇보다 사회의 부조리함 같은건 대놓고 떠들어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니까요ㅋㅋ

맞말 2017/10/01 [18:20]수정 | 삭제
글 정말 공감됩니다. 아직 결혼은 안했지만 엄마나 여자친적들 명절때 보면 정말 일만하시거든요...명절뿐만이 아니라 틈틈히 전화안부나 남편 내조같은 그런 역할을 보면 비혼이 답이라고 생각돼요

ㅁㅁㅁ 2017/09/29 [02:45]수정 | 삭제
하.. 뭐 어느정도 사실인건 부정할 수 없지만 너무 극단적인거 같네요. 저렇게까지 생각할 정도면 결혼하지 말아야죠. 역할론이라고 말하는데 결혼을 함으로 인해서 자신이 꿈꾸던 역할을 못하게 됐다고 결혼이란걸 부정하는건 좀 아닌거 같네요. 오히려 대다수의 커플들은 잘들 살고 있어요. 저는 글쓴이의 말은 결국 그렇게 살아야한다는게 스트레스고 잘못된것이라고 들리네요. 진짜 그렇다면 결혼은 안하는게 답이죠. 괜히 해서 본인도 스트레스고 남편도 스트레스고.. 행복하려고 결혼하는건데 애시당초 결혼 자체가 스트레스면 어떻게 같이 살겠어요.

aloha 2017/09/28 [23:52]수정 | 삭제
결혼하기전 여성들이 반.드.시 알아야할 사실들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혼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모르고 결혼한다. 결혼생활로 그실체를 확실히 이해하게 되면. 사회적 편견이나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결혼제도에서 빠져나오는 이가 있고, 또는 애들을 위해 희생하고 사는 여성이 있다. 제발 결혼 하지마라. 사랑하고는 아무상관 없는 노예제니까.

야옹 2017/09/18 [22:16]수정 | 삭제
글쓴이의 며느리 보는 날이 기대된다는 건 비아냥이자 비꼼인가? 이 글이 고발하는 거대한 부조리/선한 얼굴을 한 악은 보이지 않는가? ㅉㅉ 대단한 감수성나셨네


ㄹㅇ 2017/09/14 [19:38]수정 | 삭제
전에도 결혼생각 없었지만 그냥 하루하루가 그래요. 헤어지자고 하면 염산뿌리는 남자. 이혼하자고 하면 며느리 가두는 시댁. 이건 정말 극일부겠지만 정말 하루하루 이런 뉴스를 보면서 글쎄, 이게 일부일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하루가 다르게 여성이 죽어가고있고, 여성 인구는 줄고있고...그냥 우리나라는 편하게 사는 것을 혐오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게으른 사람은 솔직히 그닥 게으르다거 볼 수도 없는 것 같거든요. 시댁에 가는 것 싫어하면 왜 나쁜 며느리에요?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차리지 않으면 왜 나쁜 며느리에요? 게으른거에요? 먹고싶은 사람이 챙기는 것 아닌가요? 시부모님께 애교있는,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없는 전 서로의 안위를 위해(나,시부모님,남편)포기할게요. 결혼은 하고싶은 사람들끼리 하는게 맞는거거든요. 누가 왈가왈부 할 수 없는거잖아요. 제가 여기와서 너결혼하지마! 할것도 아니고. 남한테 가서 결혼이 별로 안좋은 제도니까 모쪼록 나쁘게 생각해주세요. 할 것도 아니고. 님들 생각은 관심도 없어요. 전 제 생각 쓰러 왔거든요. 괜히 결혼해라 하지마시고 알아서 결혼상대 찾으세요. 왜 남보고 결혼에 대한 좋은생각 가지라고 해요? 자기생각은 자기생각이에요. 이 글 보고 결혼생각이 없어지는 여성이 많아지는게 아니고, 그 전부터 결혼생각이 별로 없었던 여성들이 마음을 다잡고 역시 결혼은 별로인 것 같아.생각하는 계기만 되는거니까요. 난 결혼할거고 시부모님도 잘 챙길거야!하는 여성은 그냥 글 무시하거나 욕하니까 걱정마세요. 저는 낯도 많이 가리는 사람이라 결혼은 앞으로도 생각 없을 것 같네요. 결혼 파이팅 하세요.

111 2017/09/13 [10:50]수정 | 삭제
공감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딸을 왜 출가외인이라고 하겠습니까? 남의 집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하고, 정작 그 집 아들은 앉아서 음식이나 받아먹고 있으니... 정말 부조리하고 차별적인 전통이죠- 한국에서 한국남자들과 결혼을 한다는 건, 애 하나 더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ㅋㅋ

뭐래 2017/09/12 [22:21]수정 | 삭제
글쓴이분 나중에 아들을 얻고 그 아들의 며느리가 같은 행동을 보였을때 아쉬워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역시 2017/06/19 [14:41]수정 | 삭제
아무리 생각해도 여성에게 결혼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 도태된 남자들이 아무리 비혼, 출산률을 부르짖어도 여자들은 절대 결혼 안 합니다.

ㅇㅇ 2017/05/29 [22:31]수정 | 삭제
역시 결혼은 여자의 무덤ㅋㅋ결혼하려는 남자는 널렸으나 결혼 하겠다는 여자는 없는것만 봐도

ㅋㅋㅋㅇ 2017/03/23 [13:19]수정 | 삭제
결혼은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 사람을 누구를 만나 그가족이 어떤사람이냐 다르겠지만 무조건 비관적도안좋은거같다

남자인데 2017/03/15 [12:29]수정 | 삭제
결혼 하지 마세요. 남자든 여자든 공통 사항입니다. 현 시대에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ㅎ 2017/03/12 [10:25]수정 | 삭제
결혼 절대 안합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요 제 주변 여자들도 점점 안한다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데까지 와서 빽빽거리는 남자들보면 더더욱 하기싫고요 됐고 안한다는데 왜 자꾸 난리인지 모르겠네요 좋은글 감사해요~

안녕 2017/02/14 [10:04]수정 | 삭제
좋은 글이 맞습니다.1. 남녀간에 차이는 분명이 존재하고, 남성이 하는 일이 더 많고, 쓰임새가 많으니, 남성이 우대를 받는 일이 많습니다. 2. 그렇다고 여성이 일을 하지 않는게 아니라, 적어도 남성의 80%까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노는 여성들 덕분에 사회적으로 80% 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3. 결혼은 절대 평등하지도 않고 ,좋은 제도가 아닙니다. 남성들도 괴롭지만, 특히 여성은 결혼을 하면, 몸이 종속이 됩니다. 한 인간이 종속 되버리는 겁니다.4. 현재 결혼 시스템을 변경하려고 노력을 하는 여성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 인간이 종속되는 결혼 제도와 시스템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남편과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거다??? 네. 현재 결혼 제도로는, 그렇게 살려면, 스스로 자신의 억누르고 종속시켜야 할 겁니다. 결혼 시스템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니까요.5. 결론:결혼하지 마세요


시현 2017/02/09 [17:54]수정 | 삭제
나도 힘들다 징징 하는 남자들 너무 많고 보기싫은데 그 힘듦과 책임을 만든 것 또한 남자라고 언제까지 알려줘야 합니까. 여자는 숙이고 순종하고 복속하고 아래에 있기를 강요받지요. 남자들은 그런 여자의 우위에 있기 위해 가부장!! 가족의 대장!!의 책임이란 걸 스스로 만들었지요. 그것까지 여자탓하면 어떡합니까. 남자들아 경제적 책임 지기 싫으면 가부장제를 박살내세요. 우리도 힘들어 죽는다 척하면서 니들보다도 아래에서 가부장제에 깔려 있는 여자들 입막음하지 말고.


시현 2017/02/09 [17:27]수정 | 삭제
그리고 밑에 여성님은 명예자지 증상이 상당하군요. 한 마디로 남자 앞잡이란 겁니다. 물론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에 부합하는 삶을 살면서도 충분히 행복한 개인도 있겠죠. 근데 억압으로 고통받는 다른 많은 여자들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자들아~ 다 나같이 순종하고 살아라~ 하면 명예자지가 되는 겁니다. 그거 나중에 지나고 보면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에요. 제가 그랬거든요. 아니면 굳이 닉네임까지 '여성'이라 쓰는 것보면 같잖은 남자놈 자작 같기도 하고 ㅋ


시현 2017/02/09 [17:17]수정 | 삭제
더 많은 여자들이 갈 수록 비혼을 선택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이 비혼을 결심하는 것만 봐도 우리의 결혼제도가 확실히 누구에게 불리한지 알 수 있다. 어떤 바보가 굳이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자신을 제도의 가장 밑바닥에 놓는 짓을 하려 하겠는가? 비혼자는 특히 비혼 여성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시현 2017/02/09 [17:09]수정 | 삭제
웃긴 건 불평하지 말고 행복만 보라는 인간들은 죄다 그 불공정을 겪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겪을 일 없는 남자들이란 거다. 마치 자본가들이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인데 노동자들은 너무 불평이 많고 부정적이고 공격적이라고 팔짱 끼고 말하는 것처럼.


ㅇㅇ 2017/02/09 [16:45]수정 | 삭제
여기서 여자인척 '여자들을 선동하지 말라'며 부들거리는 남자들 심리는 뻔하다. 여자들이 불공평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자기들 뒷바라지 안해줄까봐 무서운 거! 여자에게도 인생이 있다.

공감100 2017/02/06 [04:20]수정 | 삭제
왜 일다에까지 들어와서 이 글을 보고 글쓴이가 불행하니 뭐니 하는 댓글들은 뭔지?? 마지막에 글쓴 분 며느리 보는 날이 기대된다는 또 뭔지?? 나는 결혼 18년 차다. 40대 중반을 넘어섰고.. 남편이 장남이라 큰며느리지만 며느리 역할은 명절, 생신 때만 최소한만 한다. 시부모님도 그리 현대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들 며느리에게 크게 바라는 게 많지는 않아 그냥 그냥 지낸다. 시어머님의 남존여비적인 사고방식을 소화하기가 힘들어 오랜시간 (지금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냥 인정한다. 허나 이 글이 잘 이야기해주고 있듯이 결혼이란 여성에게 나라는 사람보다는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사적 관계에서까지 직접적으로 기대하고 강요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기제다. 그것에 의문을 표한다든지 글쓴이를 불쌍하니 뭐니는 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가? 나? 며느리를 혹시라도 보게 됨 내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댓글들 이 글도 읽어보이도 않고 가정 폭력이 어쩌고 저쩌고?? 글도 안 읽고 무례한 댓글 달려고 이런 곳에까지 오는 이들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지?? .


ㅎㅎㅎ 2017/02/05 [17:15]수정 | 삭제
글쓴분 며느리 보는 날이 기대되네요 ㅎㅎㅎ


여기선 2017/02/03 [19:44]수정 | 삭제
여기계신분들은 결국 혼자살아야됩니다남자든 여자든 똑같아요 남자도 내가왜 집사야돼 내가왜 어디갈때 운전을해야돼 왜내가 무거운걸 들어야돼 이런불만들로 만나살거면 여자든 남자든 만나면안됩니다 혼자살아가세요 예의상이라도 키워주셨고 이만큼자랐으니 노인분들 일시키는거보다 젊은사람들이 하는게 맞지요 외식을할수도있겠고 남자가 같이일할수도있겠고 요즘은 남자 잠만자고 그런집안들 많지않습니다 하나하나불만이면 상대또한 하나하나불만 늘어놓으면 많습니다같이일하자고하세여 남편이 그것도 못들어주면 사랑하는게아니죠 요즘 아들가진 어머니들도 장가가서 설겆이안하고 여자들 안도와주면 소박맞는다고말하십니다남편이 돕는다고 화내거나 그러지않습니다불만이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하길 바랍니다아마도 매사에 불만이 많으실겁니다 본인을 한번 돌아보세요 세상 다 불만들로 살아가시지는않는지


죠앤 2017/02/01 [23:29]수정 | 삭제
사랑에 눈 멀어 결혼했는데, 결혼 실상이 이런 줄 알았으면 정말 안 했을 거예요. 그렇게 악독한 시어머니가 아닌데도 가부장제위 굴레는 너무 크네요. 여자는 결혼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성차별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이제 결혼하는 친구들을 마냥 축하해줄 수 없어요...

ㅠㅠ쿤 2017/01/28 [14:28]수정 | 삭제
글이 올라왔을 때 한 번 읽고, 그 이후로도 가끔 찾아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본문보다 댓글을 보게 되네요. 이 글에 대해 비판적으로 쓰시는 분들은 어떤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현재의 아내 분들이 견디거나, 순응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혹은 그런 갈등조차 결혼의 일부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네요. 그렇다고해서 자신의 제한적인 경험치를 근거로 매도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혼이라는 시스템, 나아가 한국의 성차별적인 요소에 문제제기하는 목소리가 늘어난다는 것, 이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리 공감의 영역이 아닌, 남성 스스로가 자부하는 '이성(ㅋ)'의 영역이잖아요. 여기까지라도 차분하게 나와줬으면 좋겠네요.


123 2017/01/22 [11:18]수정 | 삭제
진짜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고 결혼을 통해 대부분 며느리의 역할을 강요받는데 왜 개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하시는건지 모르겠네요.명절때마다 시댁먼저 가서 일해야하고 안부전화하고 집안대소사 챙기고 이런거에 대한 육체적인 힘듬과 감정노동의 정신적인 괴로움을 토로하는 기혼분들 온라인에도 오프라인에서도 많은데 그 분들이 다 결혼 잘못해서 그런건가요? 본인이 겪지 않았다고 해서나는 안그런다,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지 말아 하는게 아니라 다수가 겪고 있으니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해야하지 않나요? 주부들이 겪는 명절스트레스라는 기사가 버젓이 있는 나라에서 결혼으로 파생되는 믈제점이 개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치부하라는게 웃겨요


맞아요 2017/01/22 [10:04]수정 | 삭제
각자의 호칭만 봐도 알지요. 남편쪽을 시댁 아내쪽은 친가. 남편쪽 가족들은 도련님 아가씨 형님... 며느리는 걍 옛날부터 자발적무료노예취급입니다. 주위에 진짜 결혼 잘한사람들은 결혼하지말라고합니다.... 저런결혼 할 바엔 혼자살지싶은 집인데 결혼하고 행복하다합니다... 나보고 너도 얼른 결혼하라고하는데 암만봐도 혼자 고생하기싫어서 그러는것같습니다... 그놈의 아침밥타령... 아침밥이 그렇게 증요한데 왜 지손으론 못차립니까? 그렇게 중요한데 좀 차려서 아내나 먹여주지 ㅋㅋㅋㅋ 밥통새끼들


ㅈㅅ 2017/01/21 [20:05]수정 | 삭제
이 글을 읽고 화내는 기혼여성분들 왜 화가날까요 이 글과 상관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에 불합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결혼제도가 좋아 죽겠으면 이 글이 그냥 남일같겠지 굳이 화날 일인가. 결혼한 자신은 행복하다며 모든 전통과 제도에 수긍하며 살았는데 그것들 하나하나 다 불평등하고 성차별적이란 진실이 보기 힘든거겠지


제3자 2017/01/21 [07:51]수정 | 삭제
제가 제3자의 시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ㅎㅁㄴ님이야말로 현실을 못보네여얼마전 김태희씨와 비가 결혼을했죠 ㅎㅁㄴ님보다 훨씬똑똑하고 각자의삶에서 어느것하나 부족하지않은 그들은 왜 님이말하는 불행하다는 결혼을할까여그사람좋고 최고의자리에있는 유재석씨는 왜 님이말하는잘못된제도의 결혼을할까요? 남자라서? 그러면 부족함없고 똑똑한 김태희씨는 ㅎㅁㄴ님보다 지식이없어서 그 현실을 몰라서? 부디 그들을 욕보이지마세여 행복한사람들은 행복한겁니다 제발 자신의 불행을 남에게 똑같이 적용하지마세여 그냥 전 결혼생활이 사람이어땠고 이래서 불행했어여 하면 위로의 말이라도 전할테니 다른사람들도 결혼때문에 이 제도때문에 다 불행해라는 생각은 버리세여 부디 좋은인식가지고 사시길바라겠습니다

ㅎㅁㄴ 2017/01/20 [14:31]수정 | 삭제
자기 인생 안 불행하다고 빼애액 하지말고 현실좀 보면 좋을텐데. 제 3자 시선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좀 봐요. 왜 기피하는지 솔직히 다 알면서 모른척하고있네.

ㅇㅇㅇ님 2017/01/20 [13:22]수정 | 삭제
ㅇㅇㅇ님 알았으니까 그렇게 잘난체 있는말없는말 해가며 혼자사시라구여 유교사상이니 사람들인식이니 불공정한대우니 불편한공식이니 갖은 불만토로하면서 혼자사시라구여 좋은점은 안보고 나쁜점만보고살려니 참 갑갑하시겠어여 무엇을하든 불만투성이겠져 삶이불쌍해보이네여

ㅇㅇㅇ 2017/01/20 [01:14]수정 | 삭제
이 글은 현실을 반영한 부분이 많고 아직도 유교사상이 잔재하는 한국이란 나라의 여자들이 겪는 불편한 진실이다. 기성세대에겐 아직도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할 의무를 가졌고, 집안일을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못하면 배워서라도 해내야 한다.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남녀평등의 시대며 불만을 말할 필요를 못느낀다는 사람들이 마치 그 평등을 자신들이 허락해온 냥, 으시대는 것을 보면 참 무식하기 짝이없다. 아직 표면적, 사회적으로도 완벽한 평등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정말 시급한 건 사람들의 인식 문제다.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고.."당연히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아내 혹은 며느리 혹은 엄마이기 때문에 ~ 해야하는 거다." 라는 인식부터가 뿌리뽑혀야 한다. 이런 인식이 배경에 깔린 사람에게서 딱히 불공정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의 말에서 묻어나오는 저 불편한 공식 때문에 관계가 불편해진다. 여자로서의 무언가를 강요받지 않는다 하면 고마워 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는 거다.


정말참 2017/01/19 [17:39]수정 | 삭제
정말참 보기만하다가 글쓰게만드네여 나쁜거만듣고 나쁜거만생각하고 일평생 혼자사세여 남의일이아니라 내가 행복한데 가정을 비하하는데 화가날정도로 행복해서 그래여 좋다는사람들보면 모르겠어여? 불행할수도있지만 행복할수도 있다는걸 인정해야지 결혼이 무덤이라는둥 남의 행복한 가정들까지 싸잡아 비하하지말아여 화나니까 그리고 이사이트 여성사이트 아니고 일베맞아여 같은 여성이봐도 화나네여 일생혼자살다가시라고 말하고싶네여 힘들때도있지만 행복한게 비교할수없을만큼 커요불행해서 이혼하는사람들도 결국 재혼을 꿈꾸고 재혼을합니다 결국 사람을 잘못만난거지 이거탓 저거탓하지말아여 내가볼땐 가정을 없애자는 님들이 제일 한심하고 불쌍하고 문제네여 이런사이트할시간에 차라리 불우이웃을 도우세여 그게 사회에 더 도움이되니까


참 2017/01/19 [01:57]수정 | 삭제
남일이라고 뒷짐지고 세상 평화롭게 좋게 살자는 분 참 많네요
직장 유부녀들이 다 똑같이 하는 말이 결혼하고 나니 남편은 그 전과 비슷하게 사는데 내 책임은 너무 많고 무조건 숙이고 살아야 되는 인생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둘 다 돈 버는 상황이어도 아내가 집에서 할일 남편이 해주면 세상에 둘도없는 다정한 남편취급받죠


스마일 2017/01/18 [23:41]수정 | 삭제
구구절절 공감되는 글입니다! 결혼 제도만큼 성차별적인 제도도 없겠지요!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잘 짜여진 글. 감동하고 갑니다^^


새댁 2017/01/18 [17:28]수정 | 삭제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해나갑니다. 결혼해서 힘들었고 불행했던 사람은 '결혼하면 힘들어'라고 얘기할 것이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가정을 꾸려나갔던 사람들은 '결혼 빨리해 일찍해~'라고 하겠죠. 작가님의 힘들었던 결혼생활.. 특히 며느리로서의 삶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이 사회가 이미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편견, 가부장적인 사고도 언젠가는 바뀌어야하는 부분입니다. 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것이라고도 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상황은 다 다른것이니까요. 시부모님께서'너희도 너희 생각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문화가 있다'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문화가 있습니다. 그걸 서로 배려하고 한발씩 양보해나가는 것이 결혼이고 두 가정의 결합이겠지요. 양쪽다 너무 자신의 것을 주장하고 내려놓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지혜롭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 2017/01/17 [19:15]수정 | 삭제
결혼에 대한 일부분만 얘기하시네요.전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거나 사랑의 무덤이라는 관점 둘다에 반대합니다.사회속에서 결혼은 나와 동반자가 인생이란 험난한 여행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이고 이마저도 개닌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주변을 둘러싼 환경탓 남탓하기 전에 나 스스로 어떤 삶을 살것인지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실듯...


조금심한듯 2017/01/17 [15:05]수정 | 삭제
저도 여성들이 한국에서 많이불행하다고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결혼 사랑하지않고 조건보고하면 형식상이니까 형식대로 살아야하니 불행하다고생각해여 많은가정이 그래서 불행하고요 남여가 평생을 죽자살자 좋아하는경우는 드문일이니까여 그런부부있으면 정말부러운일이고여근데 일적인관계도아니고 손익계산서라는 단어는 적절치않은거같네여 댓글쓰신분은 연애를 손익계산하면서하시나봐여 댓글단거만봐도 남성에 혐오감을 느끼고있다는게 느껴지네여 저도 한국남성사상의 남자들싫어해요 근데 우리아빠는 좋아해요 엄마한테나 저한테나 상냥하셨어요 만약 우리아빠같은 사람이 있다면 결혼하고싶어요 근데 살아봐도 그런남자가 거의없네여 여자위해주는남자가 드문거같아요


공감 2017/01/17 [07:24]수정 | 삭제
공감하고 갑니다.글 조리있게 잘 쓰셨네요. 비혼에 대한 편견이,사회적 눈초리가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다른분들도 손익계산서 꼭 챙겨보시길.. 막연히 꿈같은 행복한 결혼생활에 시작된다는 것은 무를 수 없는 복권 사는 것 같은거죠.

윗댓 여성 남자인거 티난다 2017/01/17 [07:22]수정 | 삭제
그래 남자들은 가부장제가 현재도 여전히 어떻게 여성을 착취하는지 인정하기보단 이 글을 한낱 개인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싶겠지..계속 착취하고 싶으니까ㅋㅋ사랑하니까 희생하는거 아니냐고요?? 진짜 노예 눈을 계속 가리고 싶어서 난리구만ㅇㅇ


진짜불쌍 2017/01/16 [21:46]수정 | 삭제
ㅇㅇ 진짜불쌍하네여 사랑하는사람만난게중요한게아니라 남자한테 어떻게든 김치를 만들게해야겠다는생각진짜 불씽하네여 남자는 하는일없어여? 그까짓김치 같이만들수도있죠 아니면 사먹으면돼지 나는 그걸 누굴시키니마니 하면서 역할논란불러일으키는게 참 불쌍하네여 남자가 여자도 군대가라는식과 여자가 남자도 애낳아봐라 라는 양측의 주장하는사람들과 뭐가달라여 그런 논란의 서지않고 서로 사랑하는사람들이 많답니다 그들은 행복하게살고있어 ㅇㅇ님은 계속 불만만 터트리겠죠 혼자사세여 평생 그냥 혼자 그렇게 늙다 가세여 불만만 터트리면서. 진짜 사랑하는사람들은 서로 희생해여 정작 본인들은 그게 희생이라 생각안해여 사랑하니까 희생하는게 행복하니까 하는거지 아무것도 희생하기싫고 해주기싫으면 남으로만 평생 살아여 서로 좋은것만 안힘든것만 하고 살수있으면 얼마나좋겠어여 근데 세상은 그렇지않아요사랑하는사람이 아프면 밤새 병원에서 옆에서 간호해줄수도있는데 당신은 내가 왜 힘들게하냐며 불만갖고 간병인만 두겠죠 그게 합리적인 사랑이라고 떠들면서 말이죠 아무도 그거 사랑으로 안봐여 그냥 당신만 이게 맞다고 떠들뿐이지 이제 여기 안올래요 나도 이상해지네누가 써놨듯이 당신은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없어 그냥 혼자사는게맞아 당신말처럼이면 태어나지도못했을텐데 이리 불만갖고 떠들수도없었을텐데

ㅇㅇ 2017/01/16 [20:41]수정 | 삭제
"남자가 김치 담가오는 이야기를 못 짜온다" 라고 가이드라인을 줬으면 나같으면 오기로라도 "우리집은 남자가 김치 담갔다!" 이러고 우기기라도 하겠지 생각했는데... 김치는 담근다는 상상은 차마 남자가 애낳는 상상만큼 판타지한 건가 싶어지고…

ㅇㅇ 2017/01/16 [20:39]수정 | 삭제
크 김치 담그는 사위는 못 짜내오겠지 했더니 역시나 기껏 짜내봐야 "김치 담가주는 시댁"ㅋㅋㅋ 네 시어머니는 여자 아닌가요? 시어머니도 누군가의 며느리였겠죠? 며느리는 시어머니로 업글되어봐야 또 김치를 담그네요... 미친다 미쳐... 아들 낳아도 딸을 낳아도 여성의 인생은 김치를 담급니다. 아버지가 사위가 아들이 김치 담그는 이야기는 짜낼 수가 없어요. 상상력의 한계... 이렇게 또 한남의 한계를 보고 갑니다...


자기탓 2017/01/16 [19:55]수정 | 삭제
사랑이든 가족이든 가정이든 자기가 행복하면 행복한거고자기가 불행하면 불행한거다 가부장적인곳은그런거고 처가에서 밤새 김치해주고 그런곳은 그런곳이고 반대로 남자가 더 집안일도 해주고 김치도 시댁에서해주는곳은그런곳이고 며느리를 일꾼으로 들인곳은그런곳이고 며느리를 새로운가족 ,가족의축복이라고 생각하는곳은 그럴것이고복지잘된회사 직원의노력을 알아주는곳은 다니기좋을곳이고 착취하는회사는 그럴것이고 착취당한회사다녔다고 그렇다고 모든회사를 없애라고 어떤회사든들어가지말라는건 멍멍이소리다 비결혼 비출산이 불행한걸 보았던 사람들은 그럴것이고 결혼 출산이 행복한걸 본사람들은 행복할것이고 다 자기 만나기나름 자기살기나름 불행이라고 생각한사람은 평생 그리알고 혼자 그리살면된다 행복이라고생각하는사람은 화목하게 자식들과 알콩달콩 살면되는것이고남탓하지마라 제도탓하지마라 결국은 사람이 하는거다 세상엔 괜찮은사람 이상한사람 싸이코 좋은사람 나쁜사람 다양한사람이존재한다 나쁜사람들속에서살면 사람은 나쁜거다라고 정의하겠고 좋은사람들속에서 산사람은 사람은 좋은거다라고 정의하겠지 가족도 마찬가지다 자기 느끼고 살아온대로 살아라 누굴 변화시키려하지마라다만 모든가정은 불행하다생각하고살면 세상살기 힘들지않을까


뀨 2017/01/16 [19:06]수정 | 삭제
진짜 제가 읽어본 글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명문이네요. 댓글 중 태반이 남혐하지 말라 불평하지 마라 이런 댓글이네요.. 세상이 바뀌려면 100년은 기다려야 할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집은 시댁부모님이 잘해주니 글쓴이경험 가지고 일반화하지마라 이러시는 분이 많던데 그것은 본인 시부모가 특수한 케이스입니다. 지나가는 여자 잡고 물어보세요 한숨밖에 없을겁니다. 남자의 경제적 부담은 남성주의적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마저 여자탓을 하나요? 애초에 남성혐오와 역차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ㅇㅇ 2017/01/16 [18:53]수정 | 삭제
한국 남자가 아무리 상상력을 쥐짜내봐야 김장철에 처갓집에서 김장하고 명절마다 처갓집에서 제수음식을 새벽부터 하며 저녁까지 손님상 보는 사위는 짜내서 쓰기가 힘듭니다. 기껏 짜내봐야 우리 아빠가 내 밥 해줬다까지가 전부입니다. 그럼 애비가 되가지고 자식 밥도 안 해먹이면 그게 인간이냐... 시댁과 처가라는 권력의 차이, 관습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데 지 애비가 지 밥 해먹인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대단한 공이랍시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한남의 수준. 오늘도 또 이렇게 비혼 비출산이 답임을 확인하고 가네요...


ㅇㅇ 2017/01/16 [18:43]수정 | 삭제
여기서 "네 부모를 생각해라" "네 부모는 안 소중하냐" 이런 말 다는 사람은 99% 남자입니다. 왜냐면 자매만 있는 집안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상상력 떨어지는 존재는 한국 남자외엔 없기 때문입니다.

불쾌 2017/01/16 [18:03]수정 | 삭제
저는 여자인데 누가 여자로서 이해가되냐며 보여주길래 글읽어보다가 너무 불쾌해서 글씁니다 내부모님생각해도 이런말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얼마나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는지모르지만 불쾌할정도고여성을 대변한다는글을 써논거보고 기가찹니다말그대로 일베네요 여성사이트라하지말고 여성일베라고 바꿔주세요 같은여자가봐도 기가차고 불쾌하네요글쓴사람과 동조한사람들 참 힘들게살아오고 불행했던게 빤히보여서 더이상 안좋은말은안할게요


겨울 2017/01/16 [13:37]수정 | 삭제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지...'그분들은 나라는 사람을 원하시는 걸까, 며느리를 원하시는 걸까.'라는 문장에서 감탄했어요오늘도 비혼 비출산 명심하고 갑니다


ggumnal 2017/01/15 [23:51]수정 | 삭제
너무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ㅇㅇ님 2017/01/15 [23:37]수정 | 삭제
ㅇㅇ님 결혼의 실체적인 고민 그냥 님이 불쌍해요님이 배울점만은 부모님이나 좋은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이런생각 할수없겠죠전 가정이 무조건 불행한거다 라는건 여기와서 처음 들어봤네여저희아버지가 무거운거 드시고 고치시고 힘든일 하시는건 남성인권을 포기해서가 아니에여가족들위해서 먼가해주시면 저희도 좋은데 아버지가 더 좋아하세여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위해하는거니까요내가 왜해야돼? 하는순간 그건 님이 말한 불행한 가정인거죠알콜중독에 맞아가면서 살아온 가정은 불행한거죠 물론 알콜중독은 남성만아닌 여성도 어머니가 그러실수도있어여그런가정이면 참 힘들죠 그러면 알콜중독에 대해서 문제삼아야지 가정자체를 문제 삼으면 안돼죠가부장적인 생각때문에 여자가 힘들다 그러면 남자를 잘못만난거죠 남자가 그렇게 살아왔으면 보통 그쪽 가정도 그런거구여근데 때가 어느땐데 모든가정이 가부장적이다 그래여 전 저희아버지가 해주시는 요리 자주 먹어여옛날이였으면 남자가 부엌도 안들어갔겠죠 그래서 그 힘드신 어머니 모습보면서 자란 남자가 내 아내한테는 잘해줘야지 그런사람도 많고 세상도 변했어여근데 자기가 불행했다고 가정은 무조건 불행한거라니 약도 좋은점이있고 부작용이 있듯이 가정도 좋은가정이있고 불행한가정이있는거에여무조건이란 생각좀 이곳에 심으려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여자기만 2017/01/15 [23:10]수정 | 삭제
그러니까 예님 그냥 님이 불행한거라구여 다른가정도 그럴거란생각마시구여 불행한집도있고 행복한집도 있는데 왜 일반화를하냐구여 그냥 님이불행한가정에있던거에여 저희집은 가족외식을하거나 남자분들이 손수 모 사오시고 설겆이는 윷놀이해서 지는팀이하고 무조건 저희는 다같이놀고 다같이 치우고 행복해여 왜 자기의 불행을 가정이면 다그렇다고 기정화하냐구여 자기불행을 하소연할순있어도 남의 행복한가정들까지 비화하지말라


구여한 2017/01/15 [22:39]수정 | 삭제
좋은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특히 호칭에서 부터 시작되는 요구되는 역할이 다르다는 부분, 열심히 배려하는 부부가 되어도 시댁과 친정, 본가(?)와 처가 (이것도 웃기네 시댁은 시'댁'이고 처가는 처'가'라니) 에서 0으로 시작하는지 채워야만 하는 -에서 시작하는지 등에 관한 문단이요
최근에 한 친구가 어떠한 일정으로 인해 자녀를 친정어머니가 돌봐주신 적이 있었답니다. 저녁에 남편이 퇴근을 하고 돌아와서는 장모님 불편할까봐 방에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그날 밤에 당연하게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만약에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시는데 며느리가 퇴근하고 돌아와서 시어머니 불편하실까봐 방에 들어가 있었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

예 2017/01/15 [20:05]수정 | 삭제
일반화가 아니라 이게 일반적이다. 우리 부모님만 봐도 아빠는 하고픈 꿈 다 이뤄가시면서 살았고 엄마는 일 육아 가사일 외에 본인의 삶 없이 살아오셨다. 명절에도 남자들이 tv나 화투,바둑을 둘 동안 여자들은 하루종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다. 음식이 나오면 남자들은 갓 지은 음식을 먹고 여자들은 남은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다 먹으면 남자들은 술을 먹고 여자들은 안주를 만들어 바치고서야 쉴 시간이 주어진다. 이런 엄마가 안쓰러워 음식과 설거지를 도왔다. 하지만 큰아빠는 안주를 늦게 가져온다며 성질을 냈고 술집 종업원 취급받는게 기분나빠 설거지를 중단했다. 그랬더니 왜 설거지를 안하냐며 웅성거리고 사촌오빠는 소리를 질렀다. 물론 사촌오빠들나 남동생은 단 한번도 설거지를 한 적 없다. 작년쯤부턴 명절에 안가고 있지만 제일 서러운건 내가 큰집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도 명절에는 가야 한다며 날 설득하던 아빠다. 내 나이 20대 후반 이른친구들은 둘째까지 있다. 하지만 내 주의 70-80프로의 여자 지인들은 결혼 생각이 없다. 비슷한 이유이고 나 또한 독신으로 살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ㅇㅇ 2017/01/15 [19:05]수정 | 삭제
빻은댓글들.. 웬만한건 다른분들이 짚어주셨으니 넘어가고 이글작성자의 결혼생활만 이렇고 다른 가정은 행복하다고요?? 대개 그 행동은 여성의 인권포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답니다^_^ 나만 참으면 평화로워 라는 생각아래말이죠.

ㅇㅇ 2017/01/15 [14:58]수정 | 삭제
위에 답답한 댓글 몇개 보니 무슨 복붙한 것처럼 똑같아?ㅋㅋㅋ결혼에 대해 실체적인 고민을 안해본 사람 같네요. 철 좀 드시고 사람 말 좀 듣고 사세요. 여기 있는 대다수 여성들 그런 종류의 결혼환타지 갖고 있다가, 이미 수차례 깨지고 이 사회 속 여성의 위치에 대해 처절하게 다시 배운 사람입니다.


ㅇㅇ 2017/01/15 [11:04]수정 | 삭제
일반화 하지 말라고 노예같은소리들 하고 있는데 니들 행복이나 일반화하지마세여 ㅋㅋㅋㅋ저게 현실이에여

ab 2017/01/14 [11:23]수정 | 삭제
지나가다가 답답한 분들 많아서 글 남깁니다. 결혼생활 자체를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던 아니던 그것은 이미 하나의 현실이고, 그 아래에서 인간성을 포기하길 강요한다고 느껴진다면 그 사람에겐 이미 폭력적인 것이죠. 그런데 이 글의 댓글에 유독 자신의 결혼생활이 행복한 것이라고 최면을 걸고 있는 분들이 자신의 환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친구 2017/01/14 [10:31]수정 | 삭제
만배 공감해요.저의 시부모님은 글쓴님 시부모님보다 더하다 하면 위로가 되실지도요...그런데 세상엔 합리적이고 존경할 수 있는 시부모님을 가진 사람도 꽤 많더군요.(부정적인 댓글을 단 분들이 아마 그런 분들이 아닐까 추측만...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니까 ^^;) 글쓴님 남편분은 글쓴님 혼자 부엌에 있는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아들이라서 다행이지만, 제 남편 포함,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많은 한국의 아들들은 그런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점 참 부럽네요.바람지기 2017/01/14 [10:10]수정 | 삭제
글쓴이가 느낀 경험을 정말 세세히 공유해주셔서 감사히 글을 읽었습니다. 동시에 답답한 댓글들을 보며 '이런게 가부장제구나.'하고 글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기분이었습니다.그와달님오케이님동감 2017/01/14 [09:31]수정 | 삭제
그와달님과 오케이님말에 전적으로동의해요 글의 제목을 결혼고발이 아닌 내 시부모 고발로 바꿨으면 좋겠다글쓴이가 불행한거지 일반많은가정들이 더없이 행복해요 저도 그렇구여 전 시부모님 너무좋으시고 오히려 김치며 음식이며 챙겨주시고제가 병원에 있을땐 더없이 챙겨주셨어여 저희 가족들도 너무좋은데 새로운 가족이 생겼구나 전 너무 행복하거든여여성사이트라서 들어와봤는데 여성의 불합리함이 아닌 그냥 개인불행을 전체의불행으로 기정화하고싶은거같네여성폭력을 당했다면 모든 남자가 혐오스럽다 없어져야한다 이런식이네여좋은 남자도 많아여 이런생각으로 좋은남자들 놓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여그런데 이곳에 있는분들은 벌써 생각이 굳혀지고 사상이되고 사상이굳혀져서 신념이 되버린분들이네여이건 어떻게 설득해도 안돼여 그냥 이분들은 그게 불행한거다 생각하고 동떨어진 삶을 사셔야해요솔직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면 여성사이트가 아닌 일베사이트인거같아여 친구나 지인들 결혼식들은 절대 안가시겠어여 가시면 머라고들하세여? 하지마 지옥이니까 이러시지않잖아여참석한 모든이들이 정말 축하해 라고 합니다.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에 그냥 축하해주세여 '병리적 남성성문화판타지'니 비참한 '제로게임'이니 '계승자' '도련님' '하우스키퍼'사랑은 그런 말도안되는단어들과 바꿀수있는게 아니에여. 정말 간절하게 진심으로 10의 1분이라도 이곳에서 빠져나오셨으면 좋겠어여오케이 2017/01/14 [01:57]수정 | 삭제
글쓴이 불쌍해요 저희 시댁은 아버님이 요리 설거지하시고 어머님이 청소 빨래 하시는데 저한테 기대하시는 건 단 한가지 남편이랑 행복하게 잘 사는 거예요.. 시댁 너무 좋고 행복한데.... 안타깝습니다. 힘내세용어쩜 2017/01/14 [01:07]수정 | 삭제
이렇게 글을 잘 쓰시나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필력에 감탄하고 갑니다....ㅇㅇ 2017/01/14 [00:29]수정 | 삭제
결혼을 하고 안하고는 개인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무슨 사랑운운 아이의 소중함 운운하세요 남자와의 사랑이 싫은 인생을 사는것도 아이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것도 개인의 선택입니다 부모를 욕보이게 하지 말라고요?? 저는 저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를 불쌍하다 생각합니다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사람과 아이를 가지는것이 당연하다 생각해오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삶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온 부모세대를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살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롯이 제가 누릴 수 있는 자유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와달 2017/01/13 [23:59]수정 | 삭제
글쓴이의 결혼생활이 참으로 팍팍하고 안쓰럽다. 많은 가정들이 이러한 갈등을 겪고있을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본인의 결혼 생활이 녹록지 않음을, 양가와 본인의 가족이 겪는 갈등과 불평등함을 일반화 시키고 있다는 것은 지양해주었으면 한다. 불특정 다수가, 미혼의 여성이 이런 잘 쓰여진 투정어린 일기를 보고, 지레 결혼생활에 겁을먹고, 불필요 하게 방어적으로 새로운 가족들을 접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 모든 여자가 같지않듯. 모든 어른 또한 같지 않다. 글의 제목을 결혼고발이 아닌 내 시부모 고발로 바꿨으면 좋겠다.ㅇㅇ 2017/01/13 [22:21]수정 | 삭제
이런 줄줄이 명문들을 읽고도 남자도 힘들다느니 이기적이라느니 소리 하고 싶은 사람들 진짜 부끄러운줄 알아라. 그러니까 여자들이 너네랑 결혼을 안해주는거다. 평생 그렇게 결혼시장에서 도태돼서 살아라 한심한 남자들아.진짜걱정된다 2017/01/13 [21:48]수정 | 삭제
니엄마 니아빠가 걱정이 많으시겠다고? 니엄마 니아빠는 어떻게 생겨? 비결혼 비출산이라며 아이는 어떻게 생기는데? 생겼다고치자 당신들은 이름으로 불리고싶다며 역할도 싫다며 엄마아빠 역할은 어떻게하는데?세상에 편한것만하고사는 사람들이어딨어 더욱이 내가족들 그사람가족들 챙겨주는게 싫어? 내 부모가 소중하면 내사랑하는이의부모도 소중한거야 근데 당신들은 자기부모도 안소중하지? 사랑을 이익계산하면서 하지마 당신들은 사랑할 자격도 없어 부모는 더욱더 될 자격이없어 여기서 우물안에 더우물안에 갇혀서 몇안되는 당신들끼리살아 현재도 행복해서 웃고있는 가정들에 수치심안기지말고 아님 어디 모임이나 친구들 많은데서 이딴얘기들 해봐봐 더없이 불쌍하게 쳐다볼걸 우리가족들도 명절이되면 더없이 반값고 더없이 즐거워 친정에가서도 시댁에가서도 우리 늘 웃고와 당신들이 행복하지못했다고 다른걸로탓하지마 당신들이못한거고 당신들이 사람을 잘못만난거니까 왜해야하는지모르겠다고? 그럼 혼자들살아 외롭게그냥 혼자들살라고 그리고 다른사람들 물들이려하지마 행복할수있는인생을 망치려하게하지마 친구가 시댁에서 힘들었다고 투정들한다고? 그래서 헤어진대? 남편흉본다고? 그래서 헤어진대? 투정은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디서든지해 그럼당신들은 다 관두겠네 다 안하겠어 좋은게있으면 싫은것도 있어 희생할수도있고 그런게없었으면 당신들은 태어나지도못했고 태어나도 버림만받을뿐이야 아이의 소중함도 모를테지 사람들이 시댁도 찾아뵙고 친정도 찾아뵙고 부모님들에게 우리 모습보여드리고 키워주신부모님들이 자식이 다커서 이제 자신들처럼 한가정을 이뤘구나 찾아뵙고 안심하게 못해드려? 여기 진짜 사회악이다. 당신들 나중에 혹시라도 자식들 생기면 사랑하는사람하고 사는모습볼생각도하지마 혼자들 살아 그리고 그렇게 말해 '너가 왜와'정신좀차려, 걱정 

등등 2017/01/13 [20:42]수정 | 삭제
"결혼 고발" 글 잘읽었습니다. 너무나 공감입니다. 특히 중장년남성들 성교육프로그램에서 꼭 자료로 써야겠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불편한 열폭남성(들? 한명?)이 응애응애 빼액~ 난리났군요.
이제는 유행도 지난, 빤히 남자인데 여자인척하는 아이디 '여성'하며. 아이디 '정신좀차려'(? '니' 엄마아빠가 상담치료에 '니' 꼭 데려가셔야겠소.)와 아이디 '걱정'은 댓글 1/3이 똑같기까지. 포털사이트 등에서 아이디 여러개로 같은 내용 복사하던 버릇을 못고치고 여기서까지...ㅉㅉ
'니들'(? 니?) 온라인에서 열폭떠는 병 스스로 못고치겠으면 주위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새해에는 꼭 고쳐야한다오. '니들'(? '니'?) 엄마아빠가 '걱정'이 참 많으시겠소..

걱정 2017/01/13 [14:32]수정 | 삭제
집에 손님이와도 대접을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이모이는데 혼자다하는것도아니고 돕지도못해? 당신들은 어른의 대한예의도 사랑하는사람의대한 예의도 없어 JJ 남의권력으로 가정폭력이라고?당신이 그런사람을 만난거뿐이야 일반의 행복한가정들은 절대그러지않아 선생이 나쁜짓했다고 세상의모든선생이 나빠? 의사가 나쁜약 썼다고 모든의사가 나빠? 사람이나쁜거야 니들이 좋은사람을 만나 그럴려면 이런 거지같은사상 버리고 좋은사람이되도록 노력해 어릴때 남자나 가족한테 데였나본데 일반가정들은 참 행복해 하녀니 하우스키퍼니 이딴말 나오지도않고 생각조차할수없어 당신들은 이런생각을가지게되는삶을살아서 지금 참 힘들겠다 워낙 안타까워 한글자 써본다정신좀차려 2017/01/13 [14:21]수정 | 삭제
집에 손님이와도 대접을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이모이는데 혼자다하는것도아니고 돕지도못해? 당신들은 어른의 대한예의도 사랑하는사람의대한 예의도 없어 JJ 남자의권력으로 가정폭력이라고?당신이 그런사람을 만난거뿐이야 일반의 행복한가정들은 남자가 힘이세든 더배웠든 못배웠든절대그러지않아 선생이 나쁜짓했다고 세상의모든선생이 나빠? 의사가 나쁜약 썼다고 모든의사가 나빠? 사람이나쁜거야 니들이 좋은사람을 만나 그럴려면 이런 거지같은사상 버리고 좋은사람이되도록 노력부터해 하녀니 하우스키퍼니 그딴거 사랑에 가져다붙이지말고. 당신들이 당신들 서로 망치고있는데 어디 어릴적에 사람한테 가족한테 데였나본데 그랬으면 당신들이 좋은사람이되야지 껴들건아니지만 워낙 안타까워서 한글자써본다 아니면 당신들끼리 뭉쳐서 마을세워서살아 근데 당신들은 당신들끼리살아도 또 불만일거야 서로 나쁘다고할테고허클 2017/01/13 [13:10]수정 | 삭제
아내의 집에 인사드리러 갔을때 생각이 나네요.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술 뜨면서 부터 시작되더군요. '자네는 얼마나 모았는가' 부터 시작해서 남자가 집한채는 스스로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며 안되면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더군요. 남자는 어디 돈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줄 아는지. 제 주위 친구들도 대개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 보면 뭐 특별한 상황도 아닌 것 같더군요.네, 솔직히 아내에게 돈 보내라는 말 하기도 싫고 당연히 아내와 아이들, 가족은 남자가 책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남자의 책임은 당연한 것으로 이미 기준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불평등한 대우에 대해서만 끊이없이 주장하는 이런 불공정거래는 도대체 언제까지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불평등하다고 생각되면 모든 일에 대해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세요. 본인에게 유리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불리한 것은 불공평하다는 논리는 이제 그만 좀 합시다.상당히 많은 집은 시댁과 처가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테디베어 2017/01/12 [22:11]수정 | 삭제
나이들었다는 걸로 이 모든게 정당화되진 않습니다. 저희 시부모님 70세신데도 젊은이들의 가치를 배우시려고 노력하세요. 제 이름으로 저를 부르고, 시댁가면 어머님이 요리하시고, 저랑 남편이 설거지 합니다. 시아버님이 그 사이에 다과준비하시고요. 제사도 그냥 음식 사서하고, 차리고 치우는건 가족 모두가 움직입니다.평소에는 가족 카톡방에서 자잘한 일상 공유도 많이 하고요.모든 대화는 가족 카톡방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집니다. 이러니 시부모님과 정말 가족이 되었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더 생긴것같아 좋아요. 오히려 요새는 제 남편보다 제가 시부모님과 더 친합니다. 나이들었다고 과거만 고수하면서 살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여성 2017/01/12 [21:59]수정 | 삭제
난 내가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너무좋아여 더 잘해드리고싶고 찾아뵙고싶구여 이건 마음의 문제지 제도의문제가아니에여 명절 부모님의 산소가는것도 힘들어도 가는사람들은 세상의 시스템이 이상해서 가는것은 아니에여 일베의 논리로 대다수의 여성들이 그렇다고생각하지마세여 지금도 여전히 결혼을 꿈꾸고 결혼을하고있고 행복하게사는사람들 많으니까여 명절때 힘들수있죠 많은가족이모이니까여 그정도도하지못할거라면 혼자들사세여 연애만한다구여? 요리는 왜해여 힘든데 시스템 운운하겠죠 그사람의 가족 환경 모두 사랑하는거에여 마치 무엇을 실험하고 연구하듯이 누군가를 만나려하지마세여 힘들게 자식들위해사신 우리의 부모님들을 욕보이게하지마세여 참 열심히 사시고 자식을 사랑하신분들입니다 비결혼 비출산? 모든 여성을 대표한다생각하지마세여 다툴수도있고 보듬어줄수도있는게 사랑이에여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여자들 많아여아이가 더없이 소중한 여자들 많아여이럴거면 어디 섬에가서들 사세여 불평불만늘어놓지말구여

사라 2017/01/12 [19:42]수정 | 삭제
너무 공감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어쩜 지금의 내마음과 이리 똑같을까...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렇게 느끼는데 여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어쩜 이리 무감각할까 고민하는 하루입니다.

이유 2017/01/12 [18:14]수정 | 삭제
딸에게 꼭 보여주고싶은 글. 내가 결혼할 때 아무도 저런 얘길 하지않았다. 난 정말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

ㅇㅇ 2017/01/12 [13:26]수정 | 삭제
글게님은 7문단부터 다시 읽어보세요.

E30 2017/01/12 [13:18]수정 | 삭제
공감합니다. 그래서 비혼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이죠.예전에는 여성들에게 이렇다 할 교육도 없이 그저 세뇌뿐이었던 삶이지만 지금은 남녀 모두 공평한 교육을 받습니다.한마디로? '윤리'를 배웠으니 써먹는겁니다.응 

결혼안해 2017/01/12 [12:35]수정 | 삭제
무책임님 님이나 그렇게 사세요

제이디 2017/01/12 [11:25]수정 | 삭제
'니들이 그냥 수그리고 살아라 노예년들아'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법륜의 개소리 한마당을 왜 봐 시간아깝게..?

글게 2017/01/12 [11:23]수정 | 삭제
글쓴이의 시댁과 남편의 문제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치부한다면. 그래서 이땅의 모든 남편이, 시부모가 문제라면.. 나 역시 사위로서 할 말이 많다. 애초에 결혼전부터 이해가 안갔다. 결혼전에 무슨 의식을 치르듯..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책임지고 잘 데리고 살겠습니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처가 식구부터 이해가 안갔다. 왜 내가 딸을 받아야 하고 내가 데리고 잘 살아야 하지? 딸은 성인으로 자라서 결혼하는거 아니었나? 늘 입에 달리는 가장이란 소리.. 난 나랑 동등한 주체와 만나 결혼했다. 내가 왜 가장이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월급여도 아내보다흠 2017/01/12 [11:13]수정 | 삭제
법륜스님 동영상을 많이 보시라는 댓글 보고 글을 남기게제이디 2017/01/12 [11:11]수정 | 삭제
가슴으로// 이런데까지 와서 조롱하려고 하는 꼴을 보면 화가 나면서도 여자들의 비혼비출산 선언이 애지간히 똥줄이 타는 일인가보다 싶어서 웃기기도 하네 여윽시 한국남자들은 투명해서 탈임가슴으로 2017/01/12 [11:00]수정 | 삭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좀 많이 시청하셔야겠습니다.유튜브에서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드라마 그만 보시고, 이제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세요.자신의 노력이 빛을 보는데는 또 다른 노력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제이디 2017/01/12 [10:54]수정 | 삭제
밑에 무책임이라는 닉네임 쓰는 인간아 니가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니가 가부장제로 이득보는 남자이거나 가부장제를 내면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합리화하는 여성 노예라서지 다른 이유가 아니여행자 2017/01/12 [10:27]수정 | 삭제
결혼 후 시댁식구들의 생일을 자연스런 대화중에 알게되었어요. 저에게 알려주려는 의도였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그간 선물을 하기도하고 연락만 드린 것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의 생일을 축하해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3년 정도 지나즈음.... 그 때였을 거에요. 난 챙겨줄 사람이지 챙김을 받을 사람이 애초에 아니었다는 걸요. 댓글 중에 글쓴이는 남편분이 제사에 가지말자고 했는데 무슨 불평이나 감사하지않냐하는데 그게 왜 감사한 일일까요. 당연한 일인데 말이죠.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게 당연한 관계는 "며느리","동서"같은 역할에는 없습니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라는게 남녀, 며느리와사위 모두에게 동일하게 부담이 주어진다면(물론 그랬다면 남성들이 가만있지않았겠지만) 이런 칼럼 또한 논조가 달라졌겠지요..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혼이라는 형식을 거쳐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여성이라면 공감에 공감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누르고 싶어지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무책임 2017/01/12 [06:38]수정 | 삭제
절대 동의할수 없는글이네여무언가를 얻기위해선 그에따른 대가와 책임이 뒤따릅니다그걸 다른말로 역할이라할수있습니다회사에서 경제적자산을 얻는건좋지만 하기싫은일을 시키는건싫다면 얻을수없습니다 본문과 리플을쓴 그대들 또한 당신의 부모님들의 역할이있었기에 태어날수있었고 자랄수있었을겁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을 얻는데 있어서 책임과 역할은 당연한겁니다 다만 지금 문제는 가부장적인 남자의 성향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남자가 명절휴일중 시댁반 처가 반 정확히 나눠가있는분들이 많습니다 설겆이와 음식을 같이하는 남성분들도 많구여 기존틀에 박혀있다면 설득을하십시요 사랑하는사람인데 사랑하는 아내의 부모또한 소중히생각할것입니다 아니라면 헤어지시구여 그런데 비출산 비결혼의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면 세상엔 아이들이 태어나지도 부모의 보살핌속에 자라지도 못하게됩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좋은일만할순없는겁니다 어느 역할하나 싫다면, 그럴려면 회사도 국가도 가족도어디 소속되서도 안되는겁니다기차 2017/01/12 [00:54]수정 | 삭제
읽는동안 목안이 꽉 막혀오는 답답함을 느꼈어요..6년간 한명의 파트너와 비혼/비출산으로 살고 있습니다. 파트너는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언급하신 며늘아가로는 절대 취급받지 않을 테지만) 서로 딱히 결혼(페이퍼워크)이나 세레모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지내다보니 어느새 6년이네요. 그래도 사는곳은 한국인지라 2-3년차 부터는 주위에서 언제쯤? 이라는 질문 수도 없이 받다가 이제는 저희를 결혼한 커플인양 대해줍니다. 이런 저도 남들이 요구하는 역할에 '아내' 라는 탈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동네(시골)어른들에게 제 파트너를 소개할때 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도모르게 남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스스로 내가 왜이러나 싶어요. 나도 어쩔수 없는, 이런 틀에서 교육받고 자란 역할에 충실해야한다고 뼛속까지 새겨진 사람인가 싶구요. 글에서 처럼 안그럴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참 서글픕니다. 전 비혼 비출산 삶을 유지할 생각힙니다. 물론 파트너의 생각도 계속 유지된다면 말이죠. 사람은 살다보면 변한다 라는 말도 있고 절대 안변하는게 사람이야 라는 말도 있죠. 그 어느것도 맞다고 단언못하겠어요. 그냥 물 흐르는대로 사는게 가장 건강한 삶이지 않을까.. 우린, 열심히 노력해서 안되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또 다짐하죠. 그냥 노력하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살면 좋겠어요.모질이 2017/01/11 [23:55]수정 | 삭제
외로움이 제일 큰 적인가봐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으면 굳이 결혼할 필요는 없는 듯...


sophie 2017/01/11 [23:18]수정 | 삭제
한국사회의 결혼제도의 부당함을 경험한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이네요... 그런데 글쓴이는 별로 불평할 위치는 아닌 듯... 남편분이 제사에 가지 않는데 동의하셨다니... 천연기념물과 같이 사신다고 자랑하고 싶으신건지? 남들 열받으라고?


sun 2017/01/11 [21:34]수정 | 삭제
만나면 시댁 욕, 시어머니와 시누이 욕만 해대고 중간에서 제 역할 못 하는 남편 비난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실컷 떠들어대는 걸 참고 들어주면 마지막에 하는 말들이 "그래서 넌 결혼 언제 할거야?"입니다. 친구들 역시 이 사회에서 여성은 반드시 혼자 살 수 없고 결혼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문화에 따른 거고 그래서 그런 불평불만을 내내 터트리며 삽니다. 정말 너무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한 커플은 본적이 없습니다. 그냥 나이먹어가고 남들 다 결혼하니, 이만하면 결혼할 만하다고 결혼한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혼자 늙으면 큰일날 거 같고 불안정해하고 사회적 편견이 무서웠겠지요들. 물론 혼자 살면 외롭고 의지할 곳도 없겠지만, 비혼자가 느는 추세라 앞으로의 사회는 비혼 여성 연대도 늘고 비혼자가 살기 나아져 가리라 생각됩니다.비혼비출산 2017/01/11 [19:16]수정 | 삭제
잘 읽었습니다 역시 답은 하나, 비혼비출산뿐이란걸 실감하고 가요. 저도 우리집 귀한 딸인데 남의 아들, 남의 부모 뒷바라지나 할순 없으니까요.


강가딘 2017/01/11 [17:23]수정 | 삭제
결혼과 비혼의 단점리스트를 만들면결혼은 1 2 3 4 5 6 7 로 나갈것이고비혼은 1 1 1 1 1 1 1 로 나갈것같다.

Sofia 2017/01/11 [17:08]수정 | 삭제
정말 공감가는 글이네요.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미안해하고 책임감을 느끼고 그럴때마다 정말 결혼한 게 너무 후회가 돼요. 친정엄마도 항상 저보고 더 잘하라고 해요. 남편한테 맛있는걸 해주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잘 해줘야 한대요. 하지만 무엇때문에? 저는 그러라고 태어난 존재가 아닌데 말이죠.


구리어스 2017/01/11 [12:23]수정 | 삭제
예전 국민학교 다닐때는 '남자는 하늘,여자는 땅'이라는 농담을 하고 그랬는데, 최근에는 욕 먹기 쉬운 농담이 됐죠.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과 이념이 조금씩 바뀐다는걸 많이 느낍니다. 글쓴이가 느꼈던 불합리도 다음 세대에는 많이 없질꺼라고 생각


jj 2017/01/11 [02:33]수정 | 삭제
남편있는 여자가 큰 벼슬이라는 환상을 깨는 일이 급선무죠. 이 환상 속에서는 남편을 위해 뭐든 하게 되어 있음. 벼슬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 발가락인들 못빨랴가 되는 거죠. 그러니 이런 결혼 문화가 아직도 유지되는 겁니다. 무려 21세기가 시작된지도 17년이 넘은 시점. 혼인신고 하면서 간땡이가 점점 부어가는 남자들은 가정폭력을 저질러보며 그 권력을 만끽.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자를 등신 만들어. 비혼 급증에는 다 이유가 있죠. 여성들은 남자들과 안 얽히는 게 남는 장사. 섹스토이 좋은 거 하나 장만해 일생 편안하게 사는 게 답이죠. 그러다보면 여성으로서 크게 성공한 사업가도 쏟아져나올테고. 남자 치닥거리 하며 일생 보내던 여성들이 오롯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길을 가버려야 일이 됨.와와 2017/01/10 [22:44]수정 | 삭제
감사한 글입니다. 결혼을 '선택'했다 생각했지만 제가 선택한 건 '결혼일 뿐'이었지 앞으로 저의 생애주기가 시부모. 친정부모. 생길지 모를 아이들까지 6명이 넘는 사람의 인생에 자리할 역할을 중점으로 펼쳐질 거라고는 생각 안했습니다. 용기내어 우리의 결합이 대안적인 삶을 향하도록 노력하겠다 했지만..결혼과 꿈을 맞바꿨다는 자괴감은 아직도 무심결에 찾아와 저를 괴롭히고요. 그래도... 남편은 나와 함께 대안을 찾을 의지가 있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내야 할 용기는 그저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용기였던 듯합니다.무수리 2017/01/10 [22:18]수정 | 삭제
비혼 여자 직장인입니다. 이 글을 읽다보니 직장에서의 여자역할도 떠오르게 됩니다. 여직원이라고 부르면서 남직원 업무의 써포트 역할만 주는 회사가 있네요. 이런 회사 아직 많을 것 같은데요. 일 잘 한다고 점점 더 높은 직위의 남직원의 써포트 역할만 주ㅇㅇ 2017/01/10 [17:07]수정 | 삭제
정말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40대 60대 80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렇게 쭉 결혼 안하렵니다. 비혼이든 결혼이든 인생의 고통과 부조리가 마찬가지라면, 저는 감옥 속에서 제게 맞지 않는 역할을 하느니, 홀로 모험을 하면서 지금처럼 신나게 비혼을 살렵니다. 또 가족이라는게 결혼만으로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비혼 친구들과 함께 또 따로 생활하면서 삶의 충만함을 누리고 있어요 : 좋은글 감사합니다.2222 2017/01/10 [12:37]수정 | 삭제
그래서 결혼안합니다 아마도 이런 비혼추세때문에 1자궁 2츨산으로 법으로 강제될꺼같군요

kume 2017/01/10 [10:06]수정 | 삭제
그래도 부부 간에는 대화하고 평등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 같네요. 결혼 후 태도 바꿔버리고 물타기하는 남편들도 많죠. 여자 혼자 거대한 가부장제와 싸우고, 주위에선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으라 하고. 평화를 깬 건 합리적이지 않은 관계와 대우 때문인데 다 여자 탓되고. ㅠㅠ 결혼하면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같을 거다라는 말이 왜 나왔나 알 것 같아요. 최소한 불공평하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면 좋겠네요.'며늘아가'와 '자네', 

언어는 정신 2017/01/10 [03:08]수정 | 삭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수준 가부장판타지를 유지하면서 일본수준 병리적 남성성문화판타지를 실천할뿐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비참한 제로게임을 구구절절이 객관적으로 언어화해주신듯합니다.

한국의 결혼이란 신랑 어머니가 아들 손 잡고 들어와 신부 옆에 함께 서는 모습인듯합니다. 며느리라는 ‘근본없는’ 신참 '하녀'는 아들이라는 ‘계승자’인 '도련님'을 모실 자격 즉 남편집안 '하우스키퍼'로 인정받기위한 견습기간을 끝도없이 치루는듯합니다.
(물론 생식적으로 열등한 생물인 아들-남성이 대를 이으려니 생식적으로 우월한 며느리-여자를 정신없게 괴롭히면서 대놓고 뻔뻔해져야하는 무의식적 의식적 열등감이 이유겠습니다만.)

그리고 한국은 아기가 태어나면 ('하녀'인 며느리에게 시'댁'은 몸추스리기 어려우니까?) 친정식구들이 더 도맡을 의무가 부여되는듯해 내용적으로는 심히 가모장적이면서 호칭 등 구조적으로는 대놓고 가부장적인 유치찬란한 심보를 아직도 못고치고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미혼모자가정을 인정하는 인두겁은 쓸줄알게되어야 민주주의국가로서 걸음마를 시작할테고, 여자들이 병리적 남성문화에 종속되지않아도 "...살 곳을 마련하고 아이를 기르는 데 필요한 제도적 지원..."이 당연해질텐데, 역행해버린 MB정권 이후 한국남성문화는 다시금 엉덩이에 뿔난 못된 송아지가 된것인지...? 우선 정권을 바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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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선언2-2] 동학, 인류세의 철학 : 네이버 카페

[신인간선언2-2] 동학, 인류세의 철학 : 네이버 카페

[다시주유팔로] [신인간선언2-2] 동학, 인류세의 철학
모시는사람들 
신인간선언 2-2 : [필자주] 이 글은 포덕 164년 한 해 동안 ‘신인간(新人間) 선언 2024’라는 연간기획의 두 번째 글(2 - 2/4)입니다. 지난호(2023.12) 프롤로그에 이어 신인간 165(2024)년 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1월호 게재분량 중 2/4를 소개합니다. 온라인 버전은 신인간 연재 내용을 토대로 수정 보완된 것입니다.[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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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신인간의 조건

2. 동학, 인류세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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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에 이 인류세 선언을 폴 크뤼천보다 앞서서 이미 160년 전에 한 분이 수운대신사이고, 그 이후의 해월신사, 의암성사이다. 동학은 창도 이래로 끊임없이 ‘인류세’의 도래를 경계하며 그 환난의 시간을 돌파할, 넘어설, 이겨나갈 지혜에 관하여 말하였다.

수운대신사가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다”고 할 때 운(運)은 선천운을 의미한다. 나아가 “개벽 후 오만년” “오만년지 운수(五萬年之 運數)”(이상 <용담가>), “오만년지 시호(五萬年之 時乎)”(<검결>) 등의 말도 모두 선천(운)의 종결과 후천(운)의 개시라는 거대한 전환을 말한다. 초-인간의 시간이면서 지구적인 차원의 시간이다. “지금은 노천(老天)이라 영험이 없다”(<도덕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험이 없다는 건 생명을 낳고 살리는 힘(生生之德)이 거세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지구적 수준의 대변혁을 일컬어 “다시 개벽”이라는 한마디 말로 지칭하였다.


해월신사는 <개벽운수편>에서 “만년에 대일변하고 천년에 중일변하고 백년에 소일변하는 것은 천운(天運)이고, 천년에 대일변하고 백년에 중일변하고 십년에 소일변하는 것은 인사(人事)이니라”고 한 천운(천운)이란 천지, 즉 지구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 홀로세 11,700년과 ‘만년 대일변’의 시간적 일치는 우연일 뿐, 더 본질적인 것은 ‘변화한다’는 통찰이다. 그동안 이 만년-천년-백년의 변화는 ‘자연적인 시간(天運) 흐름’에 의한 것이고, 인간사의 변화는 천년-백년-십년의 단위여서 서로 교차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되었으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인간 외부의 자연(천지, 우주)만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상호 작용하면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동학의 시간관을 모두 운수에 관한 예언적 선언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오늘 인류세에 즈음하여, 대신사와 신사의 이러한 언명은 인심세태와 천지기운의 변화를 영적 예지력으로 통찰한, 사실적인 선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영적 예지력’은 신비한 초인적 능력, 초월적 계시 같은 것이 아니라, 마음과 기운을 맑고 바르게 함으로써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 현상의 심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간-한울사람(=신인간)의 능력을 말한다.

나아가 의암성사는 결정적으로, “천지의 기수로 보면 지금은 일 년의 가을이요, 하루의 저녁때와 같은 세계라. 물질의 복잡한 것과 공기의 부패한 것이 그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사이에 있는 우리 사람인들 어찌 홀로 편안히 살 수 있겠는가. 큰 시기가 한번 바뀔 때가 눈앞에 닥쳤도다. 무섭게 죽이는 가을바람이 쌀쌀하고 쓸쓸하게 서쪽으로부터 동쪽에 불어오니, 우거졌던 푸른 초목이 아무리 현재의 모양을 아직 보존하고 있지마는 하룻밤 지나면 산에 가득 차 누렇게 떨어지는 가련한 서리 맞은 잎뿐이리니, 이제 이 유형의 개벽을 당하여 정신상으로 무형의 개벽을 하지 않으면, 천하로 옷을 입고 우주로 집을 삼고 사해로 밭을 가는 그 사람이라도 「한번 가지에서 떨어지면 문득 적막한 서리 맞은 잎」과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 사람과 물건이 개벽하는 때이니라.”(<인여물개벽설>)라고 하였다. 오늘 인류세의 정황을, 100년 전의 언어로써,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현대 학문의 글(용어)과 100년 전 ‘한국인’의 글(용어)의 차이로 말미암은 이질감은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면 오늘 세계적인 학자들이 인류세와 관련하여 내놓는 담론과 판박이로 일치한다. 종교적, 신앙적 믿음에 기대어, 이러한 수운-해월-의암 스승님의 예언적 통찰력은 한울님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만보지는않는다동학의스승님들이이러한선언을할수있었던것은이미그당시에훗날‘인류세’라고명명되는지도서
게만 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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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학문의 글(용어)과 100년 전 ‘한국인’의 글(용어)의 차이로 말미암은 이질감은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면 오늘 세계적인 학자들이 인류세와 관련하여 내놓는 담론과 판박이로 일치한다. 종교적, 신앙적 믿음에 기대어, 이러한 수운-해월-의암 스승님의 예언적 통찰력은 한울님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동학의 스승님들이 이러한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당시에 훗날, ‘인류세’라고 명명되는 지구사적인, 세계사적인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산업혁명’이 시작된 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을 들여다보는 감수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취천하(攻取天下)의 기세로 밀려오는 서양 근대 (산업)문명이 겨우 그 기미만 보이던 때에, ‘산업혁명’의 여파로 오늘 21세기에 비로소 본격화되는 인류세를 감지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당시는
기후위기의 징후를 느낀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괴질이 수시로 유행하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전 지구적인 위기와 연결지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해월-의암으로 이어지는 동학의 스승님들은 각자위심하고 각자도생하는 인심과 천지부모의 살보다 한낱 버선(물질)을 중히 여기는 세태 속에서 천지(부모)와 어긋나는 패륜적 인간이 초래한 부모-자녀 공멸의 위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긴급 전문으로 회복적 치유의 메시지를 발신했다. 그것이 다시개벽 동학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동학사상은 곧 인류세 시대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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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은 ‘그러므로 인류세에 기후위기, 지구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동학을 배우라, 천도교에 귀의하라’고 할 것이냐, 아니면 동학의 진리, 천도교의 감수성을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설 지혜와 용기와 힘을 갖도록 하느냐이다. 세상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 기획-신인간 선언-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개벽은, 혁명은 변방에서 일어난다. 동학은 지구의 변방 동아시아 조선, 조선의 변방 경주 용담에서 창도되었고, 해월은 평생 변방을 떠돌며 고비원주(高飛遠走)를 계속하였으며, 의암의 시대 천도교는 국내에서는 최대의 종단이 되었으나, 이미 조선이 전 지구적 지평 속에 놓이게 된 바에야 역시 변방임을 면치 못하였다. 무엇보다, 지금 동학(천도교)는 변방이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가 변화하는 것이 옳다.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 옳다.

<이전 연재 보기>

2024/01/17

** [아직도 가야 할 길] 완벽 요약|내적 성장을 위한 최고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 완벽 요약|내적 성장을 위한 최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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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완벽 요약|내적 성장을 위한 최고의 책
인생책100권 202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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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완벽 요약|내적 성장을 위한 최고의 책

왜 우리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까?
평생을 정신과 의사로 헌신한 모건 스캇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이에 대한 답을 내놓습니다.
(영상 아래에 요약 내용을 기재해 두었습니다.)

[7번째 인생책] 아직도 가야 할 길 요약(1편)ㅣ정신과 의사가 말하는 내…
2부 사랑
3부 성장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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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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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어진 것들입니다.
환자가 자기 자신과 씨름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
그런 씨름에 실패한 환자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관찰하며 얻은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책의 2가지 전제가 있다면,
첫째,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영혼과 정신의 성숙 과정’이란 복잡하고 험난하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평생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저자인 스캇 펙이 크리스찬처럼 보이지만 
책을 쓰던 당시에는 크리스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책이 출간된 1978년 당시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5년 후에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심리치료에 대해 드러내 놓고 말하시는 시기가 아니었기에
당시에는 책 내용이 용감하다는 평이 많았고,
책의 내공 덕분에 점차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책 덕분에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총 4부로 나뉘어 있는데,
  • 우리가 삶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고,
  • 이러한 훈련의 힘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 우리 삶의 은총들을 기억하며
  • 신의 경지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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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훈련


1. 인생은 고통에 직면하는 것

석가모니가 말했듯이 삶은 고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닙니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스스로 해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훈련이 필요하다.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됩니다.
피하려고만 하면,
피하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또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성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3. 4가지 훈련 방법.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생의 고통을 성숙하게 감내하고 훈련하여 성장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4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1)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훈련

즐거운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짠다는 것입니다.
또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도 있습니다.
삶의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술은
어려서부터 배우기 시작하는데,
부모의 양육 방식이 결정적이고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우리 부모가 기꺼이 나와 함께 고통을 함께해 준다면,
고통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도 기꺼이 그 고통을 견뎌 내야겠다”
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훈련의 시작입니다.

2) 책임지는 훈련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삶의 문제를 그때그때 직면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문제이고, 이를 해결하는 것도 내게 달렸다”라고 말할 때야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사람들이 이를 회피합니다.
고통은 따르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책임을 어디에 둘 것인지 평가하고 또 평가해야하는 것입니다.
양육할 때도 아이가 책임을 회피할 때 지적해주고,
때로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진실에 충실하는 훈련

진실이란 현실을 말하는데,
현실을 명확히 볼수록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보다 나은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지도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도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만드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며 현실을 감수하고 파악하려고 노력 할수록,
우리의 지도는 정확해집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도는 조그맣거나 대강 그려져 있고,
세상에 대한 견해도 협소하고 오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나의 세계관이 정확하다고 확신하면서,
새로운 정보에 대해 흥미도 가지지 않습니다.
지도 제작에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우리가 계속 지도를 고쳐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정하고 개정하는 과정이 괴롭기에
그 낡은 견해를 끝까지 지키는 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합니다.

4) 균형을 맞추는 훈련
‘균형 잡기’란 우리에게 융통성을 주는 훈련입니다.
복잡한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분노를 표현할 줄 아는 능력뿐만 아니라,
표출하지 않을 줄 아는 능력도 소유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분노를 다른 방법으로 표출할 줄 아는 능력도 가져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려면
상충되는 필요성들, 목적, 의무, 책임, 방향 등을 융통성 있게 균형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열정이나, 경쟁심, 신중함 같은 것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포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이나
나의 일부였던 것을 포기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이
우울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우울증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입니다.
‘중년의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보내려면
이전에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과 방법들을 포기해야하기에 괴롭습니다.
괴로움을 감당해낼 수 없다면,
옛날 그대로의 생각과 행동에 매달리면서 진정으로 성숙하지 못하게 됩니다.


4. 결론
삶의 훈련 과정을 마치면,
우리는 삶의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이유는
고통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더 이상 고통은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고,
‘아니다’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나의 능력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정신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엄격한 자기 훈련을 통해 사랑할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 능력 때문에 세상은 그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름에 응하여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큰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위대한 사람은 고통을 기쁘게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은 곧 기쁨이라는 역설이 성립됩니다.
1부를 정리하지만,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4가지 기술이 있다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까요?
그 답은 2부에 언급할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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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사랑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유사한 내용이 많습니다.

1.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에 대해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완전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처럼
다양한 범주로 나누기도 했지만,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이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면,

첫째, 이는 목적론적인 정의입니다. 즉, ‘정신적 성장’이 사랑의 목적인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하나의 순환의 과정입니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는 사람은 본인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또 이는 다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갑니다.
셋째,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도 포함합니다. 나는 인간이고, 다른 사람도 인간이므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넷째,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할 때라야만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라는 단어가 욕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려는 욕구 자체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입니다. 사랑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신비한 개념을 갖고 있고,
본질에 대해 혼동합니다.
잘못된 이해가 모든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기에
이제는 ‘사랑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
3가지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밝혀 보겠습니다.


2. 사랑에 대한 착각

1) 사랑에 빠지는 것과 진짜 사랑을 혼동하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성적인 것과 관련된 일시적인 애욕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황홀한 느낌은 항상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 아닌 이유가 3가지 있다면,
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의지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나. 사랑에 빠지는 일은 한 개인의 한계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그 사람의 정신적 발전을 북돋아 주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일시적으로 도피가 가능하게 합니다.
개인의 자아 영역의 일부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의 자아 영역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나와 사랑하는 그 사람은 하나다. 더 이상 고독은 없다’는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환상도
서로가 자신의 욕망과 취미, 편견, 생활 리듬만 고집하면서,
결국 자아 영역은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2) 의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상대방과 함께 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의존성’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열심히 돌봐 준다는 확신 없이는,
적절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거나,
자기가 완전하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의존성’이 우리를 압도하면,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기만을 갈구하며,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합니다.

3) 사랑은 느낌(애착)이 아니다.
사랑의 느낌은 애착을 수반하지만
단순한 애착과 사랑은 4가지 면에서 뚜렷하게 다릅니다.

  • 가. 우리는 생명이나 영혼의 유무에 관계없이 애착을 합니다. 물질, 취미, 애완동물에도 애착하고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 나. 다른 사람에게 애착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의 정신적인 발전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매번 십대 아들을 직접 운전해주어 등하교시키기를 고집한 어머니는 아이에게 집착한 것이지 정신적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 다. 애착의 강도는 지혜나 책임 의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낯선 두 사람이 술집에서 만나 애정을 느낄 때, 그들에게는 같이 하룻밤을 보내는 것만이 가장 소중합니다.
  • 라. 애착이란 순간적인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사랑이 아닌 것들에 대해 알아봤지만,
이제는 무엇이 사랑인지 6가지로 정의하겠습니다.


3. 사랑이란?

1) 깊이 관심을 갖는 것(노력)

사랑은 자신을 확장시키는 ‘노력’입니다.
  • 마음을 넓게 가지려고 애쓰고,
  • 게으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발전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상대의 성장을 기원하기에 관심을 갖고,
  • 우리 자신의 의식을 변환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지만 중요한 방법은
  •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 내가 놓인 사회적 처지가 어떠한가, 내가 상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나의 생각들을 제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가능한 한 상대와 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기에 엄청난 노력이 요구됩니다.

  • 양육에 있어서도 아이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 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존중감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가 됩니다. 아이는 사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 나. 아이들은 자신이 귀중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귀중한 것들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 다. 우리는 그 재잘거림 속에서 아이가 가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만의 특수성도 쉽게 깨닫습니다.
  • 라.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욱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 마. 아이들은 부모가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독특한 점을 이해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기꺼이 부모 말에 순종하고 부모가 그들을 대했던 것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부모를 대합니다.

2) 용기
우리가 자신을 확대하는 것은 말하자면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애착해야 하는데
이때, 거부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곧 고통이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미지의 것, 결정되지 않은 것,
불완전한 것을 택하기가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거대한 뛰어넘기를 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장하는 것과 용기, 사랑은 3가지 측면에서 큰 관련이 있습니다.
  • 가. 성장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 나. 자신을 위한,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킬 용기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사랑해주고 존중해준 부모님 덕분에 충만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 다. 자신의 심리적 독립과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 사람만이 정신적인 성장을 할 수 있고, 진정한 사랑도 실현할 수 있습니다.


3) 두터운 책임감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는 언제나 책임감이 내재해 있습니다.
책임감이 많다고 해서 꼭 성공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책임 의식이 생겨나지 않는 관계는 부서지기 쉽고 장기적으로 약화됩니다.

4) 바로 보도록 일깨우는
우리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도록 일깨워 주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 “내가 옳고, 네가 잘못했다”라고 접근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책 없이 비판하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가 상대방보다 더 우수한 지식과 지혜를 가질 수 있지만,
  • 상대의 삶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
  • 그 삶에 대해 충고해 주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상대의 선택이 오히려 현명한 게 아닌지,
나의 편견으로 인해 내 인식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아닌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계속해서 자문해야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 참을성 있고 사려 싶게,
  • 그러나 활발하게 아이들이 진실에 직면하도록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또한 부모도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를 바로 보게 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결혼 관계가 상대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하려면
  • 서로가 지속적으로 바로 봐야 합니다.
  •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최선의 비판자가 되어야 참으로 성공한 결혼입니다.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 단순히 갈등이 없는 관계가 좋은 게 아니라, 애정을 갖고 상대방이 진실에 맞서도록 일깨워야 합니다.
  • 그렇지 않다면 그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합니다.

5) 훈련되는 것
우리가 참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 어떻게 해서든 나의 행동을 교정하도록 훈련하고,
  •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 최대로 이바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확장을 포함하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가 요구됩니다.
  • 그러나 우리 에너지는 한정적이기에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서
  •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6) 독립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한 독립적 주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독립성과 고유한 개성을 존중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촉진시킵니다.

독립성이 부족한 부모는 감정적인 면에서 아이가 자신과 분리된 독립 개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그들 자신의 느낌을 어떻게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지,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관리할지 곤란을 겪습니다.

이를 칼릴 지브란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이다...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은 줄지라도, 당신의 생각을 줄 수는 없다...
당신은 그들을 애써 닮으려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선 안 된다...”

저자인 스캇펙은 자신의 아내의 목적과 역할에 대해 이렇게 정의 내렸습니다.

“그녀가 가진 목적은 최대한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할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 [?]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독립성을 길러 주려고 애씁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이 고독한 여행은 혼자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칼릴 지브란결혼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두어서, 당신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이 춤추도록 하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포개어지지는 마라.
각각의 잔을 채워라. 그러나 한 개의 잔으로 마시지는 마라.
서로 당신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을 먹지는 마라.
당신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 고유의 세계 속으로는 침범하지 마라...

지금까지 1부의 훈련이 방금 2부에서 말한 사랑을 토대로 해서 발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또한 사랑의 결핍이 정신병의 주요 원인이 되고,
사랑이 정신 치료에 기초적인 요소라는 것은 알지만,

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고 끊임없이 버림당했는데도
정신 치료 없이도 성숙하고 건강하게 자랐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또 더 어려운 차원의 사랑도 존재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통찰력을 얻기 위해 3부-4부부터는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합니다.


3부. 성장과 종교

1. 세계관이 곧 종교다.

사람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훈련, 사랑, 생활의 경험들을 통해 성장하고,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이해하며 성장합니다.
반대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인생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해의 폭과 세련됨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편차가 생기는데,
이러한 이해가 곧 우리의 종교입니다.

비록 부정확하고 제한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에 대한 이해(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니,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신을 섬기고 예배를 가지는 것만 종교는 아닌 것입니다.
무신론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종교)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문화이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가족입니다.

부모의 성격하느님에 대한 성격에 투사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이면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을 믿고,
반대이면 처벌하는 하느님 개념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현실 세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역할에 부합되는 종교와 세계관을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갱신하고 더 넒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해 범위를 확대시켜야 합니다.

1부에서 얘기한 지도를 수정해 가는 비유처럼 말입니다.

2. 과학도 종교다

정신적 성장이라는 것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해 보다 큰 우주로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이전의 경험들로 이루어진 작은 우주에서 탈피해 인식을 확장하고 시야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하나의 세계관이자 종교로써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정확한 고찰을 위해 조사/지식/의심/경험 등의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실제 종교로서의 과학은 다른 많은 세계관을 능가하는 도약을 이뤄냈습니다.

과학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갖는 회의적인 세계관
맹진/미신/검증되지 않은 전제에 기초를 둔 세계관보다는 발전됐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이제 막 정신적 성장을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과학의 견해는
마치 자기 조상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농부의 견해만큼이나 편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정말 우리가 버려야할 원시적이고 어린애 같은 것이 아니고, 정신병의 한 유형도 아닙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정신병의 원인이 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이 독이 되고, 어떤 사랑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해 회의할 때 2가지 함정에 빠집니다.

1)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내버리는 것
하느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더러운 목욕물이 있습니다.
성전, 종교 재판, 동물 제물, 인간 제물, 미신, 파문, 교리주의, 무지, 위선, 독선, 잔인, 공포, 복종, 병적인 죄의식 등.

그런데 생각해 봐야할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행한 것인지,
인간이 하느님에게 저지른 것인지 봐야 합니다.

2) 동굴 속에 갇힌 것처럼 시야가 좁아지는 것

많은 과학자들이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증거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론적으로 과학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과학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되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회의하는 과학적 태도가 필요하지만,
과학 자체가 우상이 되지 않도록 과학에 대해서도 회의적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의적인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기 자장, 양자 이론, 상대성 이론 같은 것들을 통해
현실이 역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이러한 패러독스를 깨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종교와 과학의 통합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종교인들과 과학자들은 스스로가 만든 좁은 틀 속에 머물러서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종교와 과학은 너무 상이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이라고 하면 너무 극적인 것만 연상합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하늘로부터 내리치는 소리를 찾기만,
사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매 순간의 사건들이 기적의 증거이고 은총입니다.



4부. 은총


1. 삶 자체가 은총이다.

1) 건강이라는 기적
정신과 의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환자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의학적 통계로는 어떤 정신적 외상을 받으면 노이로제 증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왜 정신질환에 빠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어떻게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을 이겨 내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서
그 힘이 최악의 환경에 처한 대다수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지키고 유지시킨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대해 의사들이 저항과 면역 체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몸의 방어 체계가 실패한다는 것보다,
어떻게 제대로 가동되는 것이 보편적인지,
훨씬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자연 법칙과 관습적인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인간 정신의 한 부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무의식이라는 기적

숨겨진 마음의 존재와 그 풍요로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꿈’입니다.
무의식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깨어 있을 때도 유효하고 적절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자유연상’처럼 스쳐가는 단편적인 생각도 그 중의 한 종류입니다.
또한 ‘무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무의식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실제와는 다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스스로 믿고 있는 것보다 좀 낫거나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발달 과정에서 주된 과제는 우리가 의식하는 자기의 개념을 실제와 일치시켜 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겉보기보다 훨씬 현명한 우리 내부의 무의식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융은 집단 무의식 이론을 말하며 우리의 지혜가 유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상 앞에 경외의 심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파고드는 일은 본질적으로 우주의 질서를 사색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을 없다고 믿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3) 일상에서의 기적
살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친구와 같은 꿈을 꾼다던가,
교통사고로 박살난 차에서 다치지 않고 나오는 일들도 생깁니다.
이러한 기적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다만 기적이란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고 굉장히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주어진 은총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딱히 추구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능력적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지만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냥 지나치고 이를 활용하지 못합니다.

2. 은총이란 무엇인가?

정리하자면 삶에는 여러 기적 같은 현상들이 있고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1) 이것은 인간의 삶과 영적 성장을 이끌고, 보호하고 육성한다.
2) 이것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은 이해하지 어렵지만 신체의 면역이나 꿈으로 나오고, 과학적으로는 불합리해 보인다.
3) 인간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뿐 아니라 본질적이다.
4)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받지만, 그 근원은 의식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고 의식적 의사 결정을 초월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바깥에서 생겨나 인간의 영적 성숙을 돕습니다.
우리는 이 기적에 의해 성장합니다.


모든 생명의 성장 과정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개념화하기 훨씬 전부터
이 힘은 종교에 의해서 인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은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기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와 관계없이,
우리의 의식적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떤 힘(기적)이 우리의 영적 성숙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이 기적을 ‘진화’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3. 은총은 어디에서 오는가?

1) 진화 역시 은총이다.

영적인 성숙은 곧 개인의 진화입니다.
육체는 생명 주기에 따라 변화는 하지만 진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일생 동안 계속해서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진화의 과정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미개한 정신에서 영적 정신으로 거듭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힘겹고 어려운 것인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적인 기적은 이 저항을 극복해 냅니다.
우리는 성장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식은 인류 전체에도 적용됩니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몇 세기 전만해도 이 책의 주요 주제인 자녀의 정신적 성장, 부모가 가져야할 책임감에 대해 생각도 안했었습니다.
그러면 이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미 우리는 이 힘에 대해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랑’이라고,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북돋워 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도’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인간애라고 하는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 의식 밖에 존재하면서 영적 성장을 돕는, 진화라고 하는 전능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2) 진화(은총)의 힘은 신으로부터 온다.

이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답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근원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추측하고 이론화하고, 가정과 가설을 세울 뿐입니다.
진화와 은총의 기적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의 존재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성숙하기를 원하며 우리를 사랑한다는 가설은, 너무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단순하다 해도,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고 질문을 던져 본 사람이라도
이보다 나은 가설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3) 진화(은총)의 목적은 신이 되는 것

사랑하는 능력, 성장하고 진화하려는 열망이 하느님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것이라고 가정하면,
곧이어 우리는 그 목적이 무엇일까를 묻게 됩니다.
  • 왜 하느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가?
  • 우리는 어디를 향해 성장하는 것인가?
  • 진화의 마지막은 어디인가?
  •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진지하게 탐구하면 결국 한 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릅니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게 되는 일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곧 진화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입니다.


4. 진화를 막는 것

1) 게으름

하느님의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관념은 우리에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웁니다.
이를 믿는 즉시 우리가 할 수 있는 끝없는 노력을 통해 죽는 순간까지 성장에 게을러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을 바쳐야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 볼 의무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인간이 신과 같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면,
영적 성장이나 의식 수준을 높이거나, 사랑을 실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주어진 인간으로 지내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우리가 성장하여 자신과 같이 되도록
능동적으로 우리를 돕고 잇다는 생각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직시하도록
합니다.
게으름만 극복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장애물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게으름에 관한 책이기도 합니다.

1부 ‘훈련’에서 필요한 고통을 피하려고 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2부 ‘사랑’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자아의 경계를 확장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영혼의 성숙에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 4부에서 게으름은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게으름은 세상 도처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속에도 새로운 학문, 책임, 성숙의 영역으로 나 자신을 확대해 가는 데 있어서 게으름과 유사한 머뭇거림이 있습니다.

2) 게으름의 형태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이 게으름으로 인한 것입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심리 치료에서도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시작하고서도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채 그만둡니다.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인데,
자신이 처한 고충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력보다,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3) 악

그런 점에서 악은 실제 존재하는데,
악이란 게으름이 극한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게으름인데,
평범하게 게으른 사람은 그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정말 악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과 엔트로피의 힘 사이에서 비교적 균형을 잘 유지하기 때문이고,
악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넓게 퍼져 있는 악과의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는 한 방법입니다.


5.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1) 정신적 발전은 의식의 성장이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얼마나 아는가 하는 것은 영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잣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종교나 세계관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성향과 편견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는 훈련과 사랑에 집중하면서 세상과 사랑하는 것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적 발전은 곧 의식의 성장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의식 conscious는 말은

‘함께’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 con과
‘안다’라는 뜻의 scire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의식한다는 것은 ‘함께 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함께 안다는 것인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아는 것입니다.
'인식'이란 '의식'을 '무의식'과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2) 영적 성장의 목표 = 신

그런데 또 우리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무의식은 모든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어떤 과학적 답변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느님의 존재를 가설로 새울 뿐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입니다.
지금의 자신보다 더 현명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신의 일부이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목표는 의식적 자아가 신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즉, 의식을 지닌 채로 신의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신’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난 의식의 새싹이 신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신은 전혀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입니다.

3) 신이 된다는 것의 의미

하느님에 가까운 자아가 될 수 있도록 성숙한 의식적 자아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것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를 통해 새롭고 강인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그분의 오른팔이요, 그분의 일부가 됩니다.

의식적 결정을 통해 이 세상이 신의 의지에 따르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우리 삶 자체가 하느님 은총의 한 모습으로,
인간들 속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며,

사랑 없던 곳에 사랑을 심고,
이웃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인류 자체의 진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6. 왜 극소수만이 은총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까?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하고 인생의 전문가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을 가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의식이라는 뿌리가 그들에게만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생명체, 하느님의 것임을 인식합니다.

하느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 덕분에
진정으로 힘 있는 사람은 자기 의식의 축소를 경험합니다.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라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왜 극소수만이 은총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까요?

여기에는 4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영적 권력의 무게
그러나 영적 권능을 경험하는 것은 즐겁기도 하지만,
2가지 측면에서 힘든 일입니다.
  • 가. 인식이 심화될수록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더욱 많은 자료를 필요로 하고 또 소화해 내야 합니다. 영적 권력이란 단순한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심오한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면
  • 서도 여전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하는 능력입니다.
  • 나. 고독입니다. 자기 위에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나 비난할 사람,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최고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와 대등할 정도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본인을 이해할 제자가 없었습니다.

2) 책임회피
정신 질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불쾌한 사실들을 우리 의식 밖으로 몰아내면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를 ‘방어 기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방어 기제로 인해 사람들은 정신 질환자들을 ‘뭘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무의식은 악몽이나 불안, 우울증, 기타 증후군을 통해 경고합니다.
이러한 증후군은 병이 아니라 치료의 단서인데,
많은 사람들이 은총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선물을 거절합니다.
문제의 핵심을 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사하고, 특정 행동은 하지 않거나, 약물, 마약에 손을 댑니다.
때로는 증후군에 대해 인정할 때조차도 교묘하게 바깥 세상에 책임을 전가합니다.

3) 성장 의지
성장 의지는 어린 시절의 부모 사랑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인 은총에 의해서도 자라납니다.
이 은총은 우리의 의식 세계 바깥에 있는 강력한 힘으로서 무의식이라고 하는 대리자를 통해 작용하고,
부모 외에도 사랑을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용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옵니다. [?]

4) 게으름 & 두려움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지만,
우리 대부분이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도움을 거부하며, 게으릅니다.
우리에게 저주로 내려진 엔트로피라는 원죄로 지금의 편안한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은총에의 부름은 책임과 권력이 있는 지위로 승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는 커다란 의무를 지는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기에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고 수고하는 삶으로의 부름이고,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으로의 부름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어린이 상태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총에 저항하는 이유는
힘을 남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근면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외에 탓할 사람이 없는 권력의 정상에 올라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고독한 선장이 되기보다는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는 어른으로서의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기쁘다’라는 것보다 ‘제기랄’이라는 반응을 더 많이 합니다.
‘부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 받은 자는 적다’는 말은 은총에의 부름에 응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7. 은총을 맞이하는 법

1) 은총은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마치 영적인 성장이 질서 정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노력과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냥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은총을 차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은총이 우리를 비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찾으려 애쓰지 않았음에도 은총이 우리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어떤 차원에서 보면 선택은 하느님이 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아 새로운 삶을 선사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상황에 무척 놀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경험을 자기가 찾아 얻은 것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2) 그러나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은총이 기적적으로 올 때 자신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옥한 땅,
은총을 환영하는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처도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지만,
사실 이전에 16년 동안 이를 찾아 헤맨 시간이 있었습니다.
은총의 축복을 받은 것은 찾아 헤매면서도
또 전혀 찾지 않는다는 역설이 교묘히 배합되어 있습니다.

의식적 의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과 지혜를 따라 훨씬 정확하게 바른 길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추구하지 않고서도 은총의 축복을 받는 방법은,
이것이 그저 선물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의지의 영역 너머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선물)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 성장의 여행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우리의 의식적 의지가 해내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게 안내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안내되면 여행은 훨씬 더 빨라집니다.

8. 홀로 가야 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걸음걸이가 안전하고 가치 있다고 보장되기를 원하나,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 및 행동의 독립성을 요구합니다.
어떤 스승도 우리를 데리고 가지 못합니다.
확고한 공식도 없기에 우리는 좌절하기 쉽지만,
일단 은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을 의미 없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의 이해 방식은 없어집니다.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 힘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은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이 실존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신의 의지가 개인의 정신적 성장에 기여한다는 최고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느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우주의 길 잃은 미아가 아니라,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도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따뜻하게 맞아들여짐을 압니다.
더 이상 우리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