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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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원점29
제5장 신은 빛이며 나와 함께 있다-일일일생일일일생 1971년 11월. 강연회는 도쿄에서 지방으로 확대되어 특히 칸사이 지방의 출장이 잦아지고 있었다. 24일에는 오사카 25일은 시코쿠로 가는 등 분주한 일정은 마치 선거운동의 유세를 방불케 했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것이 일생의 사업임을 나의 지도령으로부터 듣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 이틀 동안은 하루에 8시간의 연속 강연과 질의 응답 거기에다가 현상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수천 명의 청중 더욱이 환자의 개인 상담이 76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15년 되는 앉은뱅이, 10년 되는 반신불수의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청중이 보는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협력해 주는 빛의 대지도령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개의 생명은 ..2023. 3. 6.
제5장 신은 빛이며 나와 함께 있다-문학가의 죽음문학가의 죽음 "저는 신문기자입니다. 작가의 자살이 예전부터 많이 있는 듯한데 그들은 왜 죽음을 서두르는지요.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염세적이 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질문이다. 하기야 최근에도 미시마, 가와바다, 두 사람의 자살이 잇달아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슬픈 소식이 되어 있다. 작가가 죽음을 택하는 속마음을 일반 독자는 알 수 없다. 존경하는 작가의 죽음은 독자의 마음에 쓸쓸한 그늘을 던진다. 삶의 무상함이 엄습해 오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결론은 같다 하더라도 그 동기는 사람마다의 입장, 환경, 사상에 따라 다르다. 자살은 인생으로부터의 도피이고 자기보존의 극단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문인에 한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천수를 다하는 것이 본래의 도리이다...2023. 3. 6.
제5장 신은 빛이며 나와 함께 있다-예술과 정도예술과 정도 예술가는 표현을 통하여 어떻게 제3자의 마음에 호소할 것인가 하는 일로 늘 고심하고 있습니다마는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자칫하면 타락하기 쉽고 또한 작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자기 만족의 독선적인 생활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마음자리를 어디에 두면 좋겠습니까?" 이것은 어떤 여자 배우의 예술과 정법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음이 없는 예술은 일시적으로는 인기를 얻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배우들은 대개가 팬들에게 둘러싸여 떠받들어지므로 교만한 마음이 생겨 사생활과 예술이 하나로 합쳐지지 못함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대중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과거의 사람으로 잊혀져가는 것이 통례이다. 그 원인은 마음과 행위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비록 화려한 ..2023. 3. 6.

제4장 하늘과 땅을 잇는 가교-현세와 내세의 다름현세와 내세의 다름 저승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승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생명의 영원은 육체의 자손을 통하여 보존되므로 그런 의미에서의 영원성은 긍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유물적인 사고에 지배되어 올바른 생명의 전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조상이 혼과 마음까지 주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같은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형제 자매가 재산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부조화한 대립이 일어나서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일까. 자식이 부모의 마음과 같다면 부모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두 이해하고 불효 따위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흔히 있는 보기이지만 부모들은 자기가 못한 일을 자식에게 위탁이나 하듯이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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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21
제6장 인생론 노트-자기보존과 위선자자기보존과 위선자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좇고 남의 일은 내 알바 아니라고 하는 태도는 자기보존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을 주장하고 지위, 명예, 재산을 위해서는 마음을 희생시키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름과 가문에 흠이 되지 않을까 늘 염려하고 있다. 남의 칭찬을 받으면 흡족하고 충고를 받으면 감정적이 되어 보복을 궁리한다. 경제적으로 남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고 그 마음과 행위에는 조화가 없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물질 경제가 전부라고 고집한다. 남을 믿지 않는 주제에 자신을 믿게 하려고 금품을 뿌린다. 타인에게 배신을 당하면 원한을 품지만 자기는 남을 예사로 난도질하고 배신한다. 이런 사람들은 한때는 번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비와 사랑이 없기 때문에 ..2023. 2. 17.
제6장 인생론 노트-타력본원과 자력타력본원과 자력 타력본원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이 구제될 수는 없다. 니찌렌 시대의 사람들은 권력에 항거할 수 없는 무지몽매한 자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남묘호렌게교나 염불을 외는 타력 신앙을 통해서 신불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외에는 달리 구제하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신불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긴 채 과연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기도하는 것만으로 진정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마음을 무의 상태에 두고 과연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은 신불의 존재를 아는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서는 인간으로서의 수행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올바른 상념과 행위를 실천하는 가운데 신리의 조화는 생겨난다. 신불에 대해서 ..2023. 2. 17.
제6장 인생론 노트-인생인생 인간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며 죽는 것일까.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인생! 친한 사람과의 이별, 싫은 자와 함께 사는 괴로움, 경제적인 고통, 원망, 시기, 질투, 노여움, 독점욕,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마음이 고독한 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유명인의 오만, 육체적 불구에 대한 고민, 종교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자, 주색에 대한 욕망, 지위·명예욕, 인종차별에 우는 자, 동족끼리의 권력다툼, 종파싸움, 주의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과 파괴, 노사 분쟁, 고부간의 갈등 등등, 일일이 기록해 가자면 끝이 없는 부조화한 인생! 이러한 슬픔, 괴로움의 원인은 모두 중도의 마음을 상실한 행동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욕망의 와중에 자신을 매몰시켜 거기서 빠져나올 줄 모르며 빠져나올 생각조..2023. 2. 16.
제 6장 인생론 노트-조화에의 길조화에의 길 현대 사회의 잘못된 점은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상실한 생활 환경에 있다. 긴 역사는 인류가 연출한 투쟁과 파괴, 전쟁과 평화의 되풀이였다. 당대의 권력자는 무력이라는 물리적 힘으로 봉건 사회를 만들어 자신의 번영과 안전의 삶을 중생의 희생 위에 구축했다. 권력자와 손을 잡은 상인들은 물질과 경제력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봉건 사회는 자신이 뿌린 씨앗인 폭력에 의해서 이웃의 침공을 받고 무너진다. 권력은 세대 교체가 된다. 재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터전을 닦고 변함 없는 경제력을 많은 중생들의 희생 위에 구축하여 자기보존과 자아아욕의 집착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에 대하여 중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약자의 단결이란 기치를 들고 자본가와의 대립 투쟁에..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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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nana yoga 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_마음의 원점 full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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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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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 악령의 세계(상) (절판도서) : 네이버 블로그

악령의 세계(상) (절판도서) : 네이버 블로그

악령의 세계(상) (절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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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명: 악령의 세계, 상
저자명: 다카하시 신지 (안동민 역)
 출판사명: 서암출판사
 출판년도: 1994

 머리말

 영의 세계라고 하면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밀접
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꿈을 꾼다든가 제6감이 작용하는 일 등도 모두 영의 작용인 것이다. 그런데도 대개는 이런 일들
이 우연한 형태로 일어나므로 가볍게 넘겨 버린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흔히 3차원의 세계라고 하는데, 3차원이란 입체적인 세계이며,
빛과 그림자가 섞여 있는 세계인 것이다.
 영의 세계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이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는데, 크게 나누어서 빛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극락, 그리스도교에서는 천국이라고도 한다.
 반대로 그림자의 세계는 지옥과 같은 어두운 세계를 말한다. 과학적으로는 이러한
세계를 4차원 세계라고도 부른다.
 4차원 세계에 사는 영에게는 입체적인 3차원의 장애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벽 따
위도 쉽게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지옥에 떨어진 영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묶고 있으므로 그 행동 범위는 좁
고 또 일정한 곳에만 머무르게 된다.
예를 들면 묘지나 자살자가 많은 곳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범위
내에서는 3차원은 자유로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과 이들 영과의 관계는 우리들이 마음속에서 생각하거나 염을 함으로
써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자신의 육체라는 3차원의 옷을 두르고 있
지만 마음은 저승의 영들과 통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승과 저승, 두 곳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식이 잠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거나 생각하는 일이 상대방에게 통하
자신의 의식이 잠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거나 생각하는 일이 상대방에게 통하
거나 직감이 작용하거나 하는 것이다. 이들 현상을 텔레파시라든가 투시, 독심술이라
고 부르지만 실은 영들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의 마음은 저승의 영들과 서로 상통하고 있으므로, 생각이
옳지 않으면 소위 악령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
 옳지 않은 마음이란 남을 미워하거나 분노나 시기, 중상모략, 만족할 줄 모르는 마
음을 말하다. 어째서 이러한 상념이 좋지 않느냐 하면 자기 보존이 주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이었고 자기 보존의 역사였다. 하지만 인류의 목적은 조화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계라는 조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따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이 문명
속에서 자라면, 내향적인 사람은 고독해지고, 노이로제나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반대로 외향적인 사람은 과격하게 된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주로 내향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내가 개인적인 상담을 통해 다루었던 사람들의 고난의 기록인 것이다. 그 수는 굉장
히 많지만 그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참고가 되도록 한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개가 자기 보존에서 나온 분노나 증오가 발단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저승의 악령이 빙의되어 2중, 3중인격이 되어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이 지금까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가를 반성해 보라. 그리고
만약 그런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면 곧 고치셨으면 한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생활만
이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며, 이승에서의 기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오랜 동안의 저승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1994년 4월 저자


 머리말

 제1장 저주받은 가정
 사회의 한구석에서
 모습 없는 목소리
 지배하고 있던 마왕
 감격의 눈물

 제2장 물질문명의 함정
 마음이 병들다
 믿을 수 없는 사실
 며느리에게 빙의된 시어머니의 악령

제3장 신앙의 함정
 믿음과 구원
 무서운 타력신앙
 반성을 방해하는 악령
 약왕대문 대보살
 마음의 생활

제4장 인간의 마음, 그 불가사의
 위선의 허무함
 극심한 노이로제
 사신을 불러들이다

 제5장 잘못된 조상공양이 빚는 공포
 신을 건드리면 재앙이 온다
 죽은 사람이 허리에 빙의되다
 산 공양
 오봉의 참뜻

 제6장 황폐해지는 인간의 마음
 인간과 문명
 어린이는 부모의 거울
 (법화경)의 참뜻
벌은 누가 내리는가?
 염불투쟁의 모순
 사랑이 없는 부부
 난동을 부리는 악령
 끼리끼리 모인다
 머리와 마음은 다른것
 원인은 마음가짐에
 악의 파동
 노력과 용기와

 제7장 행위에 대하여
 매일의 생활
 육체의 수행과 번뇌
 아미타불
 오래된 절에서 생기는 이상한 일들

@ff

악령의 세계
 제1부
 제1장 저주받은 가정
 사회의 한 구석에서
 예전에는 흔히 저주받은 집안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남의 마음이나 신앙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집안이 오늘날보다도
눈에 더 띄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떨까?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현재는 과거보다 신앙의 형태
가 내용보다는 형식으로 많이 치우쳐져서, 신앙은 단순한 의식적인 면으로 바뀌어지고
옛날보다 그와 같은 화제나 문제가 훨씬 적어졌으며, 또한 병이나 재난이 생겼을 경우
에 신앙이나 마음의 문제보다는 병원 의사에게 달려가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정신적인 이야기는 스스로 멀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카하카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제4장 業의 章)

다카하카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제4.. : 네이버블로그

다카하카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제4장 業의 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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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업의 장(業의 章)  정법과 마(魔)
고타마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222


불교도, 크리스트교도 지금이야 말로 고타마나 예수의 가르침 당시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본래의 신리
는 사람들의 제멋대로의 주석에 의해 오랜 역사적 과정 중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주석, 그것은 좋
다.
지정의(智情意)의 신리에 근거한 것이라면 정법은 잃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
까?
불교도, 크리스트교도 본래의 모습을 바꿔 매일매일의 우리들의 생활에 녹아있지만 너무나도 형식화되고 행
사화되어 있다.
특히 불교는 지(智)와 의(意)에 따른 해석으로 치우쳐 그 진수인 정(情), 즉 “마음”을 잃고 있다. 혹은 단가
(檀家)라고 하는 단골 거래처 위에 가부좌를 튼
장례식불교가 되어, 혹은 관광사업이 되어, 혹은 재물을 취하는 숭배불교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있지 않는
것일까?
우리들도 또한 형식화된 그 일일 행사 안에 파묻혀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있다.현대사회의 왜곡은 물질
경제지상주의에 빠져 두드러진 물질문명의 발전에 수반하여 사람들의 마음 개개의 지배자인 불성 즉 신성

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 (제3장. 彼岸의 因緣)

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 (제.. : 네이버블로그

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 (제3장. 彼岸의 因緣)

제 3장 彼岸의 因緣
魂의 형제들 육체선과 의식...............162


우리들의 의식(혼)은 육체라고 하는 양친에게서 받은 인생항로의 배를 타고
대우주체 신의 몸의 일부분인 어느 작은 세포, 이 지구라고 하는 환경에서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양친, 형제자매는 인연에 의해서 이 현상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이들은 결혼하고 가족의 분열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도 모두 저 세상의 약속
의 시나리오에 의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약속에 의해 진행해온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수행을 위해 나온 것
이면서도 육체선의 안, 이, 비, 설, 신, 의(意)의 번뇌에 지배되어 스스로 고통이나 슬픔의 생활을 만들어 낸
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낸 부 조화로운 원인과 결과에 인생항로의 방향을 자주 바꾸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이다.그러한 자기자신의 부 조화로운 상념과 행위를 수정하기 위해 고생하고 인생에 있어서 보다 나은 안식
과 제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을 싹트게 하여 인간은 마음의 왕국을 반석의 자세로서 가는 것이다.우리들이 노화됨
에 따라 육친환경 속에서 한 사람, 두 사람 떨어져 외롭게 되어간다. 고독감이 강해져 간다. 이 고독한 인생이

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 (제2장 마음과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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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 (제2장 마음과 과학)
갯밭무시
靈魂과 마음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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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마음과 과학 과학적 신리편
반(反)세계. 반(反)물질은 입체물질계.....................120

이 현상계에 있어서 물질은 약 백 종류 정도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Fe(철), Cu(구리), Au(금)은 단체(單體)이며 한가지
종류의 원소로 성립되어 있다.
또한 물이나 알코올 등 두 가지 종류 이상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화합물이다.
이 화합물도 탄소가 들어간 복잡한 물질을 유기물이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물질을 무기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복잡한 무기, 유기 양(兩)화합물에 의해 규칙적으로
조합된 것이 생물이며 이 생물 중에서 사물을 생각하여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만물의 영장이 우리 인간인 것이다.
이 육체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물질의 분해 불가능한
가장 작은 구성단위를 원자라고 부르고 있다.




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 6장 인생론 노트-조화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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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 6장 인생론 노트-조화에의 길
by Yuneelif 2023. 2. 16.

조화에의 길

현대 사회의 잘못된 점은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상실한 생활 환경에 있다.

긴 역사는 인류가 연출한 투쟁과 파괴, 전쟁과 평화의 되풀이였다. 당대의 권력자는 무력이라는 물리적 힘으로 봉건 사회를 만들어 자신의 번영과 안전의 삶을 중생의 희생 위에 구축했다.  권력자와 손을 잡은 상인들은 물질과 경제력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봉건 사회는 자신이 뿌린 씨앗인 폭력에 의해서 이웃의 침공을 받고 무너진다. 권력은 세대 교체가 된다. 재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터전을 닦고 변함 없는 경제력을 많은 중생들의 희생 위에 구축하여 자기보존과 자아아욕의 집착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에 대하여 중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약자의 단결이란 기치를 들고 자본가와의 대립 투쟁에 몸을 던진다.

한편 지주들은 소작인의 머리 위에 앉아 불평등한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약자가 일어날 수 없는 사회 제도는 계속된다. 인간은 물질문명의 환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든 환경 속에서 더욱 물욕의 불꽃을 태우면서 노사 공히 만족할 줄 모르는 아귀도에 빠져 물질경제의 노예가 되어 있다.

많은 인간들은 본심을 잃고 본능이 유혹하는 대로 사회악을 저지르고 있으며, 매스컴은 또한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자극하는 기사에 열을 올려 인심을 올바르게 향도하는 길을 외면하고 있다.

교ㅈ육자들 가운데에도 극단적인 사상에 마음이 빼앗겨 제자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세상을 과연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사회, 말법의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전 인류가 각성할 때이다. 마음을 상실한 물질과 경제지상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써는 조화있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물질 경제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선결 문제이다. 노사의 투쟁은 양쪽 다 고통을 만들고 있다. 공해 문제를 비롯하여 물가의 불안정, 동물적 본능, 사회의 무질서 등이 인간의 목을 죄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대조화에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끼리의 상호대화로써 이룰 수 있다. 

경영의 합리화만으로는 경제 사회의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노사의 대립도 임금의 해결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떠한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신리를 깨닫고 인간은 모두 형제이며 같은 시대에 태어난 동기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지금의 환겨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임을 상기하여 서로 인연으로 묶여 다 함께 인생 수행장에 내려와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노동자는 일할 수 있는 일터에 대해서, 고용주는 노동자에 대해서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의 근거이자 영혼의 수행장인 일터에서 최선의 땀을 쏟아야 한다.

땀을 흘려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보은의 행위이다. 노사 쌍방이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은의 실천을 하고 있는 일터에는 투쟁과 파괴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할 때 물가도 안정되고 공해라는 부조화한 현상도 소멸될 수 있다.

노사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리를 따르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자신을 멸망으로 몰고가게 될 것이다. 투쟁과 파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택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양보하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을 일상 생활에 실천으로 구현해야 한다. 몽매한 어린 양떼들을 양극단의 사상으로 선동해서는 안 된다. 그 선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부조화한 상념이 되어 평화스러운 안심입명을 잃게 한다.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나 명예 따위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 이것이 평안에의 지름길이다. 

인간답게 즐거운 일생을 보내는 것이 행복에의 길이며, 불국토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밑바닥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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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인생론 노트-인생
by Yuneelif 2023. 2. 16.
인생

인간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며 죽는 것일까.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인생!

친한 사람과의 이별, 싫은 자와 함께 사는 괴로움, 경제적인 고통, 원망, 시기, 질투, 노여움, 독점욕,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마음이 고독한 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유명인의 오만, 육체적 불구에 대한 고민, 종교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자, 주색에 대한 욕망, 지위·명예욕, 인종차별에 우는 자, 동족끼리의 권력다툼, 종파싸움, 주의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과 파괴, 노사 분쟁, 고부간의 갈등 등등, 일일이 기록해 가자면 끝이 없는 부조화한 인생!

이러한 슬픔, 괴로움의 원인은 모두 중도의 마음을 상실한 행동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욕망의 와중에 자신을 매몰시켜 거기서 빠져나올 줄 모르며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어떤 자는 인생에 실망하여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난해할 뿐이다.

이 난해한 인생을 가장 알기 쉽게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설명한 빛의 천사가 있다. 다름 아닌 인도의 석가모니부고 ㅏ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들의 설법도 오랜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많은 승려와 학자들의 지와 의에 의해서 변질돼 버렸다. 철학화, 의식화, 심지어는 상업화로 타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도 불교도 학문화, 철학화, 상업화되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신리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즉 이치는 알고 있는데 상념과 실천의 방법이 모호해졌다.

마음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종교가 현대 사회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와 의로써 도금된 불교와 기독교를 버리고 본래의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되찾는 길이다.

학문 종교, 관광 종교, 의식 조교로써는 현대 사회의 인간의 마음을 구제할 수 없다. 타락된 종교로써는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달을 수 없을 뿐더러 제멋대로의 인생을 밟게 되고 물질 경제의 노예가 되어 본성을 잃은 자가 수없이 많아진다. 신리의 철학화, 종교 전문화에 의한 타력 신앙, 이익주의 종교의 탈바꿈, 신불의 대량 생산화, 이런 것들이 종교의 왜곡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도 대중은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헤맨다. 종교를 왜곡시킨 지도자의 죄는 무겁다.

경은 일상 생활의 방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은 신리이며 인류의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는 이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육체 조상의 관습이나 종교적 관례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므로 자기의 종교가 정법인지 사법인지 확실하게 구별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 사찰, 교회가 신불이 존재하는 곳, 기도하는 장소로 착각되어 어느새 기복 신앙, 타력 신앙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신사, 사찰, 교회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심을 일깨워주고 신리를 실생활에 실천하도록 가르쳐주는 교실이어야 한다. 석가도 예수도 신불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을 세워 중생에게 예배하도록 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라지그리하 교외의 베느베나(죽림정사)나 시라바스티 교외의 젯다베나(기원정사), 그밖의 많은 정사들은 여러 나라의 왕이나 장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었지 교단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정사는 비구와 비구니들의 숙소요 신리를 설법하는 전당이었지 결코 신불에게 제사 지내거나 우상을 받드는 곳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리그랏드의 산저이나 공원의 광장 등이 설법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신리를 설법한 예수 그리스도도 신불이나 우상 앞에서 공양 예배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병든 중생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어 때론 요르단강에서 때로는 나자렛 언덕에서 혹은 헤르몬산에서 신리를 설법했다.

이렇게 설법된 신리는 오늘날에 와서도 불멸이며 우리들은 석가나 예수 당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거기 진짜 마음의 신리가 있으며 경문의 바른 정신이 있다. 

종파의 싸움이나 파벌의 추한 투쟁을 버리고 신리의 대도 위에 종교를 올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아 중생들의 버림을 받게 된다. 종파의 고집은 나 자신을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파멸로 몰고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리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 종교는 지에만 머물 뿐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상 생활의 행위는 위선이 되기 쉽다. 행위와 신리는 불이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 나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스스로 알게 된다.

석가와 예수가 설법한 신리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질되었으며 마침내 말법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중생은 마음을 상실하고 부조화한 생활의 늪에 빠져 사회 혼란의 원인을 만들고 있다. 물질경제 지상주의의 현ㄷ 사회가 과연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을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은 신불을 찾고 있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헤매고 있지 않은가. 말법 시대이기 때문에 상업 종교, 타력 신앙을 광신 맹신하여 본성을 잃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불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물 사상에 심신이 빼앗겨 인간 사회는 계급투쟁을 거쳐서 발전해 가는 것이며 물질문명도 거기서 번영해 간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다. 그런 지와 의에 의한 인간의 사상은 실은 동물적 본성인 것이므로 약육강식적 투쟁과 파괴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현대에도 계승되어 물질 우선 심부재의 폭력에 의한 피의 혁명을 실행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설령 일시적인 성공을 거둔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심의 인간까지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결국은 깨닫게 될 것이다. 권력이나 폭력의 힘으로 일시적으로 사상을 통일하였다. 하더라도 자유를 욕구하고 평안을 갈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상실한 지와 의만으로 무장된 지도자에게 세뇌된 사상은 어디까지나 도장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그 도장의 칠이 벗겨져 인간 본래의 불성인 알몸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신리에 거스른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가 만들고 있다. 부조화한 사상은 투쟁과 파괴를 불러일으켜 괴로움과 슬픔의 현상으로 나타나 순환한다. 왜냐하면 투쟁으로 쟁취한 것은 언젠가는 투쟁에 의해서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화한 사상으로 마음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무한대로 넓으며 지와 의의 산물인 협소한 사상의 올가미로 묶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상상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자유 자재이며 그 누구도 제약할 수 없으며 그 누구로부터도 제약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없다.

선인가 악인가의 판단은 신리인가 아닌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 자신의 올바른 마음을 충실하게 지니고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기중심이 아니라 남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중도의 척도로써 생활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선악은 결정된다. 신리는 불변이며 인간의 지와 의로써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신리는 신불의 지혜요 마음이며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류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조화와 파괴가 동거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며, 오늘날의 물질적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 사고 방식은 큰 잘못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신불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다. 대자연의 만생만물은 모두 상호 작용에 의해서 존립하며 대조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의 육체에 있어서도 한 개의 세포가 이상해지거나, 또는 한 기관이 부조화를 일으키면 여러 가지 변조가 나타난다. 즉 질병이라는 현상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병원이다, 의사다, 약이다 하고 당황한다.

조화는 질병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수행 목적의 으뜸가는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투쟁 운운하는 이 현실 사회의 양상으로 과연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부조화한 행위가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질경제 지상주의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항거하는 사람들의 인생에 과연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배신자라는 말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지옥의 아수라계에 통하고 있으며 그런 인생은 실로 어리석은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지배 계급의 횡포가 대중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생겨난 것인 만큼 지배층은 잘 반성해야 한다.

설령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경제력이나 지위라 할지라도 거기 만족할 줄 모르고 보다 많고 높은 것을 탐내고,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심도 없으며 자아아욕, 자기보존의 권화가 된 인간은 참으로 불쌍하고 저속한 자들이다. 사회에 이런 인간들이 많으면 혼란이 그칠 날이 없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대자연의 신리이며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의식에도 작용한다.

신불의 자비, 즉 육체보존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자연의 환경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행위가 보은이다. 인간 사회의 조화를 자기의 능력 범위 내에서 봉사하는 것이 인간 상호의 신리를 다질 수 있으며 조화와 평안의 사회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원래 누구든지 평화를 원하고 있다. 슬픔이나 괴로움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눈 앞의 현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잃고 스스로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을 짓는다.

마음이 없는 지적 사고 방식이 부조화한 사상을 낳고 표면적인 물질경제의 추구에 몰두하게 되며 인간 본래의 목적과 사명을 잃고 있다. 그래서 괴로움과 아픔의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불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물질경제가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인류는 조화의 틀이 잡힌 사회를 완성할 수 없다. 물질문명은 생활의 지혜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정신 문화나 마음의 진화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인은 물질경제에 사로잡혀 여러 방면으로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이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으로서 신성 불성을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신리에 따라 인생을 엮어가는 것, 이것이 행복으로 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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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6장 인생론 노트-타력본원과 자력
by Yuneelif 2023. 2. 17.

타력본원과 자력

타력본원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이 구제될 수는 없다.

니찌렌 시대의 사람들은 권력에 항거할 수 없는 무지몽매한 자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남묘호렌게교나 염불을 외는 타력 신앙을 통해서 신불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외에는 달리 구제하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신불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긴 채 과연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기도하는 것만으로 진정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마음을 무의 상태에 두고 과연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은 신불의 존재를 아는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서는 인간으로서의 수행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올바른 상념과 행위를 실천하는 가운데 신리의 조화는 생겨난다.

신불에 대해서 또한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대자연의 만상만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동시에 보은의 실천이야말로 보살심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타력 본원, 자기보존에 빠지기 쉽다.

올바른 목적에 대한 일염력은 노력과 용기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며, 자기도피와 자기보존의 제목 외우기 따위로 인류를 행복하게 인도할 수는 없다. 신불에게 감사하고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는 보은의 실천 행위를 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수호령이 있다. 항상 자신의 양심에 묻는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신성, 불지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자신의 마음을 상실한 신앙은 정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영혼의 본체 혹은 분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며, 나아가 각자의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서는 지도령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영들에 대한 감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 없는 협력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으니 깨달음과는 거리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구도에 대한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마음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편 우리는 엉터리 지도자의 설법이나, 신리도 모르는 영능자의 예언 등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신불의 노여움이라고 겁을 주거나 부적을 강매하는 따위의 지도자나 교조에게 마음이 빼앗겨서도 안 된다. 그들의 교리를 자세히 살펴보는 동시에 그들의 일상생활의 태도도 관찰해 보고, 스승으로 받들 만한 인물인가 아닌가를 잘 판단한 연후에 신앙을 결정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마저 그들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음은 무한한 생명과 상통하고 있는 보배요 왕국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그 왕국을 제삼자에게 팔아넘기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게 되고 노력하는 길도 잊어버리며 타력 본원에 몸을 맡겨버리게 된다. 신불은 스스로 믿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도움을 준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에 대한 수호령, 지도령의 협력은 항상 따라다닌다. 즉 자력을 다하는 노력의 극점에서 타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며 신리인 것이다.

실재계의 상단계의 빛의 대지도령이나 빛의 지도령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함부로 지도 협력하지도 않거니와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달콤한 약속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보존의 기도나 독경만으로 행복의 과실을 얻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기도나 불공으로 구제 받는다고 유혹하는 교조나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자아의 지와 의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깊은 추궁이 있어야 올바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신불의 대리인을 자칭하면서 마으에 평안을 주지 못하는 교조나 지도자들은 저급령이나 동물령에 지배당하고 있다. 한편 이 지상계에 집착하여 방황하고 있는 지박령이나 지옥의 마왕이 빙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어서도 안 된다.

비록 그들의 예언이 적중하고 병을 고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며, 더욱 부조화하고 어두운 영역으로 우리의 마음을 몰고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선자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모순이 많으므로 그럴 때는 주저할 것 없이 의문을 가지고 올바른 해답을 얻어내야 한다.

무엇이든지 성급하게 믿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신불은 각자의 마음의 왕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질이나 외모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중도의 마음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견해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마음을 돌처럼 단단하게 굳히면 반드시 왜곡되어 버린다. 항상 유연하게 가져야 정법의 실천이 가능해지고 깨달음의 첫걸음을 열 수 있다. 이런 실천을 통해서 90% 잠재의식의 지혜가 용현되어 자신의 과거세를 깨닫게 되고 전생윤회의 과정을 소생시켜 볼 수 있다.

나와 나의 그룹은 마음 속에서 실재계의 수호령, 지도령과 대화도 할 수 있고 육체의 오관을 이용해서도 대화할 수 있다. 명상적 반성을 계속함으로써 우리 몸은 황금색 아로에 싸이고 의식의 광자체는 성운층을 뚫는 크기로 확대되어 지상에 있는 자신의 조그마한 육체를 내려다보게 된다.

우리의 의식은 광자체의 육체를 가지고 원자체의 육체인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원자 육체에서 이탈한 광자체를 부려 차원이 다른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물론 대지도령과도 대화할 수 있다.

이미 이 현상계를 하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갈 볼 수도 있고, 상단계의 빛의 지도령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정도 방문할 수 있다.

천상계에 올라갈 때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마치 돔같은 것을 타고 초고속 엘레베이터로 상승하는 것 같다. 하늘의 별들이 똑똑하게 보인다. 실재계는 평온한 세계다. 저단계의 세계와 상단계의 세계는 그 영역이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육체는 영자선이라는 것에 의해서 광자체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서로의 연락을 취할 수 있지만, 의식이 육체로 돌아올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이 지상계의 만상만물은 저 세상에도 존재하며 그 색채는 이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평화롭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식물의 녹색은 이른 봄날의 신록처럼 보드랍고 포근하다. 이 색채는 영혼을 정화한다.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 공존의 세계이며, 마치 현상계의 올림픽처럼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저마다의 복장을 하고 공생하고 있는 집단 사회이다. 세계는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똑똑하게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저단계의 세계가 되면 역시 자국적 환경에 칩거한다. 자기주장을 하는 세계다. 더욱이 지옥계에 이르러서는 남을 신용할 수도 없고, 겉으로는 조화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면 서로 싸운다. 자기보존의 세계이며, 평안이란 티끌만큼도 없다. 마왕의 권력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며 진정한 자유란 있을 수 없고 평안한 생활도 영위할 수 없는 세계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상실한 인간들이 거주하는 부조화한 세계이며, 자비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냉정한 인간들의 마음이 만들어 내고 있는 세계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도 그 환경에서 반성하는 계기를 잡고 언젠가는 빛의 천사들의 도움을 얻어 구제된다. 저세상의 세계는 표면 의식이 90%이기 때문에 반성하면 그 효과가 즉시 현상화되어 광자체의 광자량이 많아져서 조화에의 속도도 매우 빠르다. 마음의 조화도는 곧바로 육체(광자체)에 나타나 당사자는 그 조화도에 상응하는 세계로 상승해 간다. 이와 같은 부조화한 세계에도 여러 단계의 계층이 있으며, 또한 빛의 천상계도 여러 단계로 구분된다. 천상계의 상단계 이상은 천사, 빛의 천사, 상단계 지도령, 상상단계의 빛의 대지도령 등으로 그 세계가 구분되어 각기 조화에 비례한 사회가 구성된다. 

이 현상계는 실재계에서 투영되는 입체 영화와 같은 세계이다.

이승이건 저승이건 요는 그 육체 구성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중심인 영혼에는 변화가 없다. 전생윤회를 하는 과정에서 이 현상계에서는 원자체라는 육체를, 저 실재계에서는 광자체라는 육체를 그때그때 갈아 입는 환경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의식, 즉 영혼은 태어나는 일도 없으며 죽는 일도 없다. 불생불멸이다. 불지도 줄지도 않는다. 부증불감이다. 이것이 본래의 실상이다. 우리는 이 본질을 잘 이해하여 거짓의 자기 표현이나 거짓의 신불 신앙, 엉터리 판단은 피해야 한다.

신리를 외면한 거짓 인생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 고뇌의 짐을 지게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지배자인 마음의 왕국을 올바르게 구축하여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부동심을 가지고 마음의 짐을 벗어던짐으로써 비로소 안심입명의 평화스러운 환경을 누릴 수 있다.

전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불인 '마음'을 믿고 그 마음의 왕국에 내재되어 있는 보고의 문을 자력으로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숙명론이나 쓸 데 없는 논쟁을 피하고 혼란스러운 온갖 유혹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법에 따른 실천 생활을 통해야만 올바른 마음의 제동장치가 작용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6장 인생론 노트-자기보존과 위선자

by Yuneelif 2023. 2. 17.

자기보존과 위선자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좇고 남의 일은 내 알바 아니라고 하는 태도는 자기보존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을 주장하고 지위, 명예, 재산을 위해서는 마음을 희생시키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름과 가문에 흠이 되지 않을까 늘 염려하고 있다.

남의 칭찬을 받으면 흡족하고 충고를 받으면 감정적이 되어 보복을 궁리한다.

경제적으로 남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고 그 마음과 행위에는 조화가 없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물질 경제가 전부라고 고집한다.

남을 믿지 않는 주제에 자신을 믿게 하려고 금품을 뿌린다.

타인에게 배신을 당하면 원한을 품지만 자기는 남을 예사로 난도질하고 배신한다.

이런 사람들은 한때는 번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비와 사랑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몰락한다. 마음에 평화가 없고 근친자들로부터는 불신을 받게 되며 최후에는 사면초가가 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빈약한 자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마음은 아귀도에 통하고 반성이라곤 하지 않는 인생이기 때문에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서 본성을 깨달을 때까지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정법을 깨닫지 못하고 물질 경제가 전부라고 착각하여 인간으로서의 수행 목적을 잊어버리고 나룻배인 육체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데 있다.

우리가 이승을 떠날 때는 경제도 지위도 명예도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다. 오로지 인생 경험의 일체가 기록된 의식, 즉 영혼을 가지고 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물질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는 인간은 평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신불의 자녀로서의 만족감과 기쁨이 떠날 날이 없다. 

한편 종교 단체의 한 세포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의 교리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라고 맹신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는다. 자기가 속한 교단이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며 상대방의 교단을 깔아뭉개려고 서로 논쟁한다.

제삼자로부터 올바른 신리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며, 마치 자기 자신이 신리를 깨닫고 있는 것처럼 남을 굴복시키려고 한다. 반론을 당하면 마음에 부조화를 일으켜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내어 다시 논쟁을 건다.

하지만 그러한 칭찬과 반론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 만족에 도취되는 길 뿐이다. 자기 만족은 파멸의 씨앗이 되며, 도리를 깨닫고 있다면 논쟁 따위에 휘말릴 리가 없다.

철학적 불교 용어를 구사하면서 뽐내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왕국을 볼 수 없다.

개개인의 마음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확고 부동한 조직이 확립된다. 지와 의의 논쟁은 조직에 금이 갈 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불벌이라든가 법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두운 상념이 지어내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현상화되는 것이지 결코 신불의 뜻은 아닌 것이다. 만일 벌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불을 사칭한 악령들의 짓임을 알아야 한다.

올바른 마음으로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신불의 빛에 싸이기 때문에 악령도 재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육체의 지배자인 마음의 왕국은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이다. 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부조화한 상념에 의해서 자신이 불러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마음 속에 벌에 대한 공포심을 품으면 곧바로 그런 세계와 통하게 되어 현상화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신리도 아닌 엉터리 진리를 믿고 마음 속에 불안과 혼란의 신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잘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신앙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을 상실한 조직의 세포에 다름 아니며 마음 속의 공포를 더욱 에스컬레이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같이 정법을 개닫지 못하고 마음의 왕국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지도자가 사욕으로 조직을 확장해 나가면 그 부조화한 업보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또한 그 업보는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 질병의 모습으로 현상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리를 깨닫지 못한 지도자야말로 위선자이며, 그의 잘못된 삶은 결국 죽어서 자기 자신이 심판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신불의 법칙이다.

마음의 절대성을 설법해야 할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마음의 평화도 다스리지 못하고 항상 아집과 투쟁심에 불타며 타종교를 헐뜯고 몰아부치는 것은 지도자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지도자는 자신의 위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앉아 정도를 좇아 공부해야 한다.

또한 지도자로서 중생의 앞장에 선 자는 마땅히 중생의 평안과 복지를 위해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아욕의 마음은 마침내 자기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

기만과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않는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합지중이 되어 투쟁과 파괴의 와중에 휩쓸려 자신의 본성마저 잃어버린다.

마음이 없는 부조화한 몇몇 지도자에 의해서 대중이 선동되고, 걸핏하면 때려부수는 행위가 마치 정의의 용사처럼 자행되는 현실은 바로 지옥의 아수라계로 통한다.

마음을 잃은 주의와 주장이 폭력을 휘둘러대는 행위는 위선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물질 경제만을 으뜸으로 삼는 인간들의 집단이며 물질과 경제의 노예로 전락한 군상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배신 행위도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다. 약한 자는 저항할 수 없으며 폭력 앞에 굴복을 강요 당한다. 하지만 그 폭력도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까지는 굴복시킬 수 없다. 육체는 구속할 수 있을지 모르나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행사한 자는 폭력의 반작용을 받게 되며 추상같은 업보를 피할 길이 없다.

이러한 사회는 어두운 상념에 덮여 수없는 혼란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유와 평화의 마음이 싹터 조화에의 상념은 구체화된다. 인류가 신불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자신을 되살펴 볼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봉건 사회 혹은 독재 하에서 오랜 투쟁과 파괴의 업을 체험하면서 진화하여 왔다.

언젠가는 원시 공산 사회보다 차원이 높은 만민 평등의 공존공영의 사회로 진화해 갈 것이다. 물질 경제를 초월한 마음의 소유자들에 의해서다. 그리고 심우선(마음이우선)의 사회로 전진해 갈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는 신불의 지혜의 보고를 자력으로 언젠가는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은 오늘날의 종교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고 인간의 올바른 목적과 사명에 대해서 적은 것이다.

형식적 종교나 우상을 받드는 종교의 잘못 등을 지적하는 한편 신앙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 위대한 불성, 신성을 상술하고 인류가 물질 지상주의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소원이 아닐 것이다.

생명은 본체를 중심으로 다섯 분신으로 성립되며 교대 교대로 이 지상계에 내려와 영혼의 수행을 한다. 그리고 이 지구 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목적을 안고 있다.

감정, 이성, 지성, 본능의 조화를 팔정도에 의해서 이루고 신리에 맞는 생활을 통해서 영혼을 보다 고차원으로 진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 길이 바로 신불의 자녀다운 우리들의 사명이다.

신슈 사쿠의 고원에서 태어났던 나의 생활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열 살 때 거기서 생사의 경계를 왕래하는 희귀한 체험을 되풀이하면서 '신앙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나 자신의 육체 안에 있는 '또 한 사람의 나'의 존재를 알았다. 그 후 30 수 년 동안 나는 그 '또 한 사람의 나'에 대해서 회의하였으며, 그 해명을 위한 탐구에 탐구를 거듭해 왔다. 그래서 이젠 그 생명의 불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외없이 수호령 지도령이 있다. 올바른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 영혼의 형제들이 차원이 다른 저세상에서 항상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알아내었다. 그리고 또 사고, 질병 등 모든 고뇌의 원인은 부조화, 욕심, 자기보존 등의 어두운 상념에 기인한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우리들의 인생은 이 세상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저 세상과의 왕래를 통해서 영원히 전생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는 유전의 생명이ㅂ다.

이러한 사실을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하고, 그 이해된 것이 실천으로 옮겨져, 보다 고차원의 '조화있는 삶과 사회'를 구축해 나가기 위한 인생을 엮어 준다면 나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싶다.

나의 염원은 이것뿐이다.

평안과 조화의 마음을 깨달아 인류가 투쟁과 파괴의 동물적 본능을 버리고 보다 좋은 사회를 구축하는 데 일조가 된다면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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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제1장. 神理에 이르는 말의 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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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과 마음의 과학 113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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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보)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도서.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원문 제목 : Beyond The Himalaya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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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의 생명 (한스훌쩌) (5)
마음의 여행 (정신세계사 발간도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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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발견 (과학편)(제1장. 神理에 이르는 말의 魂)
갯밭무시  靈魂과 마음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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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견  과학편
高橋信次

[차 례]

제 1장 神理에 이르는 말의 魂  의식과 육체

영도개안은 사명달성에의 제 1 보....10
의식이란 혼 ...............................19
의식의 중심은 마음.......................33
마음(1).......................................36
마음(2).......................................39
마음(3).......................................55
의식(魂)과 육체............................66
의식이야말로 기억의 근본...............72
육체--위장의 의식........................76
육체는 인생항로의 배.....................85
인생론 노-트
조화에의 길..................................92
인 생 .........................................95
타력본원(他力本願)과 자력(自力).....105
자기보존(自己保存)과 위선자(僞善者)..112

제 2장 마음과 과학  과학적 신리론

반세계, 반물질은 입체적 물질계............120
색심불이(色心不二)와 에너지-불멸의 법칙..126
작용, 반작용의 법칙.............................129
신(神)이란 무엇인가.............................133
신불(神佛)과 인간................................139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원리 ....................145
연(緣)의 실-끼리끼리 모인다..................152

제 3장 피안의 인연  혼(魂)의 형제들

육체주(肉體舟)와 의식.............................162
문증(文證),이증(理證),현증(現象)에 이길 수 없다....172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있을 수 없다.............175
지옥으로부터 현세에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177
무가치(無價値)한 환경의 조건.....................179
병(病)은 스스로에 대한 경고(警告)...............180
오인(五人)의 분신(分身).............................192
오인(五人)의 분신(分身).............................192
에수 그리스도의 생명.................................194
석가모니의 생명........................................202
수호령(守護靈). 지도령(指道靈)....................208

제 4장 업의 장 정법과 마(魔)

고타마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222
업(業;카르마)과 윤회(윤회).............................234
저 세상과 이 세상.........................................241
[후 기]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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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神理에 이르는 말의 혼(魂)
의식과 육체
- 영도개안 (靈道開眼)은 사명달성에의 첫 걸음..............10

1970년 8월 15일부터 사흘간 나는 동지와 함께 시즈오카縣(현) 후지에다市에서
제1회 연수회를 열었다.
목적은 도회의 혼잡을 벗어나 집단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자신의 마음과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아
지금까지의 자기자신의 마음과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아
결점을 수정하려는 취지였다.
엄격한 계율 따위는 버리고 가장 자유로운 집단생활 속에서 八正道(팔정도)를 근본으로
한 상념과 행위의 실천을 하며 마음과 마음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까라는 문제를
연구하는 것으로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생활에 연수회를 활용하여
그 연수가 마음의 청정제가 되면 한층 더 나은 혼의 정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함에 있어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는 것은
그것을 수정하는 실마리를 잡는 것이 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의 결점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항상 결점을 커버하려고 해서 오히려 결점을 추가해 버린다.
스스로를 꾸미려고 하는 자기보존의 마음은 역으로
자신의 마음에 어두운 상념의 그림자를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상반되는 겉모습을 꾸미는 마음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공허한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 것이다……
자기보존의 본능에 의해 타인에게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아 자기자신을 작은 껍질 안에 가두어 버린다.
그것은 가련한 처지이다.
하지만 그 중에는 여성이 아름다워지려고 생각하는 본능,
옷이나 화장에 의해 겉 모습에의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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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 악령의 세계 상 / 하 - 심령과학 4

전자책 도서관












악령의 세계 상 - 심령과학 3

다카하시 신지 | 서음출판사
2004-10-13ePub362 K보유1, 대출0, 예약중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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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저승의 영들과 서로 상통하고 있으므로, 생각이 옳지 않으면 소위 악령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 옳지 않은 마음이란 남을 미워하거나 분노나 시기, 중상모략,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말하다. 어째서 이러한 상념(想念)이 좋지 않느냐 하면 자기 보존이 주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이었고 자기 보존의 역사였다. 하지만 인류의 목적은 조화(調和)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계라는 조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따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이 문명 속에서 자라면, 내향적인 사람은 고독해지고, 노이로제나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반대로 외향적인 사람은 과격하게 된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주로 내향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001. 저주받은 가정 
002. 물질문명의 함정 
003. 신앙의 함정 
004. 인간의 마음, 그 불가사의 
005. 잘못된 조상공양이 빛는 공포 
006. 황폐해지는 인간의 마음 
007. 행위에 대하여





악령의 세계 하 - 심령과학 4

다카하시 신지 | 서음출판사
2004-10-21ePub399 K보유1, 대출0, 예약중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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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저승의 영들과 서로 상통하고 있으므로, 생각이 옳지 않으면 소위 악령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 옳지 않은 마음이란 남을 미워하거나 분노나 시기, 중상모략,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말하다. 어째서 이러한 상념(想念)이 좋지 않느냐 하면 자기 보존이 주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이었고 자기 보존의 역사였다. 하지만 인류의 목적은 조화(調和)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계라는 조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따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이 문명 속에서 자라면, 내향적인 사람은 고독해지고, 노이로제나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반대로 외향적인 사람은 과격하게 된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주로 내향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1. 타력신앙의 공포 
2. 일본의 엑소시스트 
3. 위쟈반
4.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여자 
5. 거미줄에 걸린 곤충 
6. 피의 바다, 지옥의 고문 
7. 방황하는 영혼




[Sejin님의 서재] 이찬수 책 12

[Sejin님의 서재] "책과 통하는 블로그, 알라딘 서재!"

검색어 : 이찬수 / 총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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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이찬수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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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평화와 평화들
이찬수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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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여러 가지 얼굴
김성철.이찬수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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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그리스도교, 한국적이기 위하여
이찬수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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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신- 일본서기에서 신영성운동까지
이찬수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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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종교평화학자 이찬수 교수의 새로운 신학 강의
이찬수 지음 / 동연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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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의 암호- 칼 라너의 신학과 다원적 종교의 세계
이찬수 지음 / 분도출판사 / 1999년 3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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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한국을 다시 묻다: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
이찬수 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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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평화공동체
이찬수 편 / 모시는사람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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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평화사상 1- 원효에서 안중근까지
서보혁.이찬수 지음 / 인간사랑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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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평화사상 2- 유영모에서 김대중까지
서보혁.이찬수 엮음 / 인간사랑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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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 종교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진단한 한국종교의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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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有情の農学 : 宇根 豊 농본주의의 스스메

宇根豊 Une Yutaka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宇根 豊(うね ゆたか、旧姓名 永藤豊、1950年6月2日 - )は、日本の百姓にして思想家。農と自然の研究所代表。百姓の経験を思想化し表現することに生涯をかけて来た。

経歴[編集]

1950年長崎県島原市で生まれた。島原高校卒業、九州大学農学部農学科卒業。1973年より福岡県の農業改良普及員。1974年宇根公代と結婚し、宇根姓を名乗る。1978年より減農薬稲作を提唱した。1988年糸島郡二丈町(現糸島市)にて就農。2000年福岡県庁を退職。NPO法人「農と自然の研究所」を百姓仲間と設立し、代表理事に選任される。2004年社会人入学していた九州大学より農学博士の学位を授与。2010年農と自然の研究所はNPO法人を解散して任意団体へ移行。

日本農業経営大学校講師、東京農業大学客員教授、福岡県生物多様性策定委員。

業績[編集]

1978年より「虫見板」を用いた「減農薬稲作」を技術化、理論化して、普及した。それまでの農薬のスケジュール散布を科学的に批判し、百姓自らが散布の是非を判断するもので、それまでの上意下達の近代化技術の実践的な変革運動となった。1983年には、「減農薬米」の産直を福岡市農協と生協県連(現在のグリーンコープ)とで始めた。これは米流通の革新であった。1984年には害虫・益虫以外の虫が多いことに気づき、「ただの虫」と命名し、現在は広く使われ、学会等でも使用されている。

減農薬運動は1985年宇根が『減農薬稲作のすすめ』4000部を自費出版することによって、一挙に広がった。その後この本は農文協から『減農薬のイネつくり』としてリメイクされ出版されると、さらに全国に広がった。

1990年代の宇根は、田んぼの生きものと百姓仕事の関係を明らかにしていった。日本の赤とんぼ(主に薄羽黄トンボや秋茜)のほとんどが田んぼで生まれることを突きとめ、農業生産物に生きものたちも含めるように提案し、作物同様に生きものも育てる「環境稲作」を技術化した。1997年には『第1回農業と自然環境全国シンポジウム』を百姓主導で開催し、全国から1200人の参加者が前原市(現糸島市)に集うほどの広がりをもった。

2000年代は「農と自然の研究所[1]」に拠って、田んぼの「生きもの調査」の手法の開発・普及、農業を「自然環境まで生産している」という考えに転換させる「環境支払い」政策を具体的に提案、田んぼの生きものとごはん一杯の関係を数値化し、さらに図示することに成功[2]、田んぼの「生きもの指標」と「草花指標」を製作して、百姓のまなざしを豊かにとりもどす方法を提示、田んぼの生きもの(動物・植物・微生物)を多くの人の協力で「田んぼの生きもの全種リスト」してまとめて、改訂を重ねて、日本に棲息する5668種をリスト化[3]。これは世界でも前例がない取組みであった。

2010年代は、百姓に専念しながら、農業の近代化を深く問い直す思想的な営みを続けている。まず2011年に出版した『百姓学宣言』で、「百姓学」の理論化をすすめ「内からのまなざし」をその核に据えた。その後「農の本質」への思索から「農本主義」の発掘と再評価に取り組み、現代に生かす「(新)農本主義」の本を相次いで出版した。さらに、百姓の「天地自然論」をまとめ、最近はICT、AI技術の農業への導入に危機感をもち「反スマート農業」の理論化をすすめている。

引用元[編集]

  1. 『減農薬のイネつくり』(農文協)
  2. 『農は天地有情 宇根豊聞き書き』佐藤弘(西日本新聞社)活動実績はこの本による。
  3. 『田んぼの忘れもの』(葦書房)
  4. 『天地有情の農学』(コモンズ)宇根豊の学位論文
  5. 『宇根豊の減農薬稲作から農本主義への思想展開』大石和男(「農林業問題研究」第56巻・第3号、2020年9月)思想展開はこの論文による。
  6. 「農と自然の研究所」ホームページ(http://hb7.seikyou.ne.jp/home/N-une/)

受賞歴[編集]

  • 1985年 「第11回山崎農業賞」(山崎農業研究所)
  • 1998年 「地上50周年記念論文賞」(家の光協会)
  • 1998年 「第4回地方自治研究賞」(自治労)
  • 1999年 「水環境学会」九州支部文化賞(水環境学会九州支部)
  • 2000年 「日本農業普及学会」第1回奨励賞(日本農業普及学会)
  • 2003年 「日本作物学会」第2回技術賞(減農薬稲作技術の研究と普及、日本作物学会)
  • 2006年 「第23回農業ジャーナリスト賞」特別賞(『国民のための百姓学』、農政ジャーナリストの会)
  • 2006年 「第7回明日への環境賞」(朝日新聞社、農と自然の研究所)
  • 2009年 「第1回環境アワード」(環境省・イオン財団、農と自然の研究所)
  • 2020年 「日本農業普及学会」学術賞(日本農業普及学会)

評価[編集]

農薬運動の評価[編集]

当初は、福岡県や農水省から「危険思想」だと見られていた。なぜなら減農薬稲作は単なる対抗技術ではなく、近代化技術である農薬を推進してきた側の姿勢や思想や価値観の欠陥を、農業改良普及員という推進側内部の人間から、提起されていると受けとめられたからである。しかし、現実に減農薬運動が百姓の実感に合い、確実に実績をあげていくことに対して、行政内部からも評価の動きが出てくるようになった。

一方で、現場の減農薬運動の評価は、「虫見板」の普及に現れている。福岡市農協と糸島農協が全組合員に配布したことを始まりとして、2017年時点で販売枚数だけでも20万枚を超えている。「減農薬」という用語は、とうとう農水省まで採用するようになった。もっとも農水省が宇根の反対意見陳述にもかかわらず減農薬の定義を「慣行の農薬散布の半分以下」としたための、運動論としては弱くなったことは否めない。「減農薬」という表示は広く使われるようになり、それが宇根らの運動から提起されたものだということは、現在ではほとんど忘れ去られている。「減農薬運動」を学術的に評価したものとしては、1985年に『第11回山崎農業賞』が、2002年に「日本作物学会・第2回技術賞」が宇根個人に贈られている。

現在では「ただの虫の評価」「環境稲作の評価」「農と自然の研究所の評価」「百姓学の評価」「宇根農本主義の評価」が始まっている。

著書[編集]

単著[編集]

  1. 『減農薬稲作のすすめ』擬百姓舎、1985年(自費出版、4000部)
  2. 『減農薬のイネつくり』農文協、1987年
  3. 『「指導」が百姓と指導員をダメにする』農村文化運動106巻、1987年
  4. 『田んぼの忘れもの』葦書房、1996年
  5. 『環境稲作のすすめ』環境稲作研究会、1998年
  6. 『田んぼの学校 入学編』農文協、2000年(絵:貝原浩)
  7. 『百姓仕事が自然をつくる 2400年めの赤トンボ』築地書館、2001年
  8. 『国民のための百姓学』家の光協会、2002年
  9. 『虫見板で豊かな田んぼへ』創森社、2004年
  10. 『国民のための百姓学』家の光協会、2005年
  11. 『農の扉の開け方』全国農業改良普及支援協会、2005年
  12. 『天地有情の農学』コモンズ、2007年
  13. 『風景は百姓仕事がつくる』築地書館、2010年
  14. 『農と自然の復興』創森社、2010年
  15. 『農がそこにいつもあたりまえに存在し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北星社、2010年
  16. 『農は過去と未来をつなぐ』岩波書店 ジュニア新書、2010年
  17. 『百姓学宣言』農山漁村文化協会、 2011年
  18. 『田んぼの生きものと農業の心』NHK出版(「こころをよむ」ラジオテキスト)
  19. 『農本主義へのいざない』創森社、2014年
  20. 『農本主義が未来を耕す』現代書館、2014年
  21. 『愛国心と愛郷心』農文協、2015年
  22. 『農本主義のすすめ』ちくま新書、2016年
  23. 日本人にとって自然とはなにか』ちくまプリマ―新書、2019年
  24. 『うねゆたかの田んぼの絵本 全5巻』農文協、2020年・2021年

著書・共著[編集]

  1. 『米・輸入か、農の再生か』学陽書房、1987年(第3章執筆)
  2. 『減農薬のための 田の虫図鑑』農文協、1989年(日鷹一雅・赤松富仁 共著)
  3. 『農薬問題一問一答』合同出版、1989年(分担執筆)
  4. 『地域が動きだすとき』農文協、1989年(分担執筆)
  5. 『農協の有機農業』家の光協会、1989年(分担執筆)
  6. 『ヒノヒカリ』農文協、1990年(分担執筆)
  7. 『沖縄へのメッセージ』サザンプレス、1990年(「新しい稲作西表の安心米」執筆)
  8. 『環境百科』駿河台出版社、1992年(分担執筆)
  9. 『低投入稲作は可能』富民協会(橋川潮 編)、1996年(「環境の技術論」執筆)
  10. 『井上ひさしの農業講座』家の光協会、1997年(第1章・ 第2章執筆)
  11. 『水田生態系における生物多様性』養賢堂、1998年(第2章執筆)
  12. 『田んぼ探検隊』家の光協会、1998年(漫画家・尾瀬あきらと 合作、「ちゃぐりん」4月号付録)  
  13. 『有機農業ハンドブック』日本有機農業研究会、1999年(第2章執筆)
  14. 『自然と結ぶ』昭和堂、1999年(講座「人間と環境」第3巻第5章執筆)
  15. 『除草剤を使わないイネつくり』農文協、1999年(第1章・第3章執筆)
  16. 『食料主権』農文協、2000年(第2章「「自給」の技術の長き不在」執筆)
  17. 『子どもに贈る本 第2集』みすず書房、2000年(分担執筆)
  18. 『農村ビオトープ―農業生産と自然との共存』信山社、2000年(第3章執筆)
  19. 『環境市民とまちづくり:自然共生編』ぎょうせい、2002年(第2章執筆)
  20. 『農は天地有情』西日本新聞社、2008年(宇根豊 語り・佐藤弘 聞き書き)
  21. 『本来農業宣言』コモンズ、2009年
  22. 『3.11と私 東日本大震災で考えたこと』藤原書店、2012年
  23. 『つなぐ力聞く力』農文協(日本農業普及学会 編)、2017年
  24. 『「農業を株式会社化する」という無理』家の光協会、2019年
  25. 『農家・農村との協働とは何か 50のテーマから考える協働学入門』農文協、2019年
  26. 『新しい小農』創森社(小農学会 編)(第5章「小農学概論序説」執筆)
  27. 『有機農業大全』コモンズ(日本有機農業学会 編)、2019年(第3章執筆)

脚注[編集]

  1. ^ 農と自然の研究所”. 宇根豊. 2021年1月22日閲覧。
  2. ^ この図案は宇根の絵によって図案化され、2017年現在20万枚以上が販売されている。
  3. ^ 現在このリストは、滋賀県立琵琶湖博物館に引き継がれ、改訂増補がなされている。







Amazon.co.jp: 天地有情の農学 : 宇根 豊: Japanese Books





天地有情の農学 Tankobon Hardcover – July 1, 2007
by 宇根 豊 (著)
3.7 3.7 out of 5 stars 3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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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description

著者略歴 (「BOOK著者紹介情報」より)
宇根/豊
1950年長崎県島原市生まれ。1973年福岡県農業改良普及員となる。1978年減農薬運動を提唱・普及。1988年新規参入で就農。2000年福岡県庁を退職。農と自然の研究所を設立。現在、NPO法人農と自然の研究所代表(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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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とんぼ

5.0 out of 5 stars 大胆で新鮮Reviewed in Japan on August 31, 2007

考えてみれば不思議ですが、なぜ百姓を養成する農学、百姓が身につける農学、百姓の言葉になる農学は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机の上から見下ろす農学、百姓を指導する農学が主流です。かつて百姓の青年たちに親たちが吐いた「百姓に学問はいらない」という言葉は、学問の体質を実に鋭く見抜い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百姓にいる学問」とはどういうものでしょうか。
 現代では、所得(カネ)につながるのが「役に立つ」の定義になっていますが、そういう意味では役に立たなくても、百姓が自分の情感を自分で抱きしめるときに役立つ農学だってあってもいいはずですし、それが「天地有情の農学」だと思います。具体的な事例と理屈は、この本を読んでもらうしかありませんが、「そうか、オレ仕事の合間に、風景を眺めるのは、こういうことだったのか」と百姓に納得させるまなざしがここには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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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沢さんのスタークリムソン | メイン | 「日照りに不作なし」 というけれど »

『天地有情の農学』-消費者に問う農学?
8月7日の日記で、宇根豊さんの新著に触れ、
「うまく整理できれば改めて」 なんて書いてしまった手前、
どうも棚にしまえなくて、今日まで脇に置いたままである。
私なりに書けるだけ書いて、いったん収めておきたいと思う。

『天地有情の農学』
e07082901.jpg

天地とは ‘自然’ のこと。
有情とは ‘生きものたち’ のこと。
この世は生命のいとなみで満ちている、というような意味。

それを支える 農‘学’ の道を切り開こうというメッセージなのだが、
私には、迫られているような圧力を感じたのである。
こんなふうに-

消費者にこそ ‘農学’ が必要なのではないのか?
1960年代より進められた「農業の近代化」というやつは、
農薬や化学肥料に依存し過ぎた生産方法によって、
環境(生態系)を壊し、人々の健康も脅かす要素を、高めてきた。

その反省や批判をベースに有機農業や減農薬運動は興り、
ようやく 『環境や生物多様性を育む』 仕事 としてまっとうに評価されるまでになった。

たとえば、農薬を使わない水田は生物多様性が増し、水系(地下水)も保全する。
カエルは、カエルの餌となる生き物や、カエルを餌とする生き物とつながっていて、
それやこれやの生き物の多様な循環が、環境の豊かさを構成する。
そのつながりを目に見える形で示すひとつの試みが、「田んぼの生き物調査」である。

この価値や、農業と自然の関係を、
きっちりと学問(科学)的にも明らかにする「農学」の確立を、
アプローチの手法、道筋を含めて提示しようとしているわけだが、
ことは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から厄介だ。

無農薬のお米が環境を守ることにつながっているとしても、
その「環境保全」部分は、米の価格には含まれていない、という問題である。

価格には含まれていないが、それがあること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メリットを
「外部経済」と呼ぶが、
百姓(宇根さんは胸を張ってそう言う)が、
当たり前に百姓仕事をしてくれることによって得られている、
米代に含まれない大切な外部経済の部分を、誰がどうやって保障するのか。

そこで宇根さんは「環境デカップリング」の導入を提言する。
EUなどですでに実施されている仕組みで、
環境を維持するための指標を作って、それを実施する生産者に一定の所得保障をする、
という考え方である。

この考え方はたしかに、
「有機農業推進法」の「推進に関する基本方針」の中でも、
検討の必要性が盛り込まれている。

しかし・・・・・ここで私は靄(モヤ)に包まれたような気分に陥る。

私の知る農民の本音は、
田んぼでたくさんの赤とんぼを育てたところで、補助金を貰おうなんて思っちゃいない。
フツーに米や農産物を売って、フツーに食っていければいい、という感じである。

とはいえ、安い輸入農産物に押されて価格が低迷する今のご時勢、
このままでは外部経済の価値が守れない。

そこは税金で補償するしかない……のか。

宇根さんの「天地有情農学」論に賛辞を送りながらも、
私はこの最後の経済の部分で、わだかまりを捨てきれない。

税金を使うには国民の合意が必要である。
たとえ消費者が納得したとしても、生産者は喜ぶのだろうか。
安い米を買って、別な形で税金をつぎ込んで補償するという格好は、
けっして生産と消費のまっとうな関係とはいえないのではないか。

私としては、例えば
1kg=600円でお米を買った後に、環境支払いという名目でもう100円徴収されるよりは、
1kg=700円を “佐藤さんの米代” として出したい。
それで佐藤さんが当たり前に有機農業が持続できる価格として。
(これが今の「大地」の基本姿勢でもある)
その方が消費者の‘支持の選択’権も多様になる。

しかし、そんな悠長なことは言ってられない、ようなのだ。
水や空気はすべての人に同等に与えられているわけだから、
国民には等しく負担してもら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

安さを求める人には別途税金を-
生々しい話であるが、こういう議論もし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
「農の危機はイコール環境の危機」 という構造になってしまった。
天地有情の農学は、こんなふうに我々消費者に‘農学’を迫っている。

私はまだ結論が出せない。
とりあえずは、農業の価値に国民的合意を得る上での論として支持しつつ、
一方で、大地の提唱する「THAT’S国産」運動の方が好きだ、
とは言っておきたい。


※「THAT’S国産」運動……‘国産のものを、まっとうな価格で食べよう’ という運動。
                  畜産物の餌も国産にこだわることで自給率を上げ、
                  輸送コストを下げることでCO2削減にも貢献できる。

投稿者: 戎谷徹也(大地を守る会) 日時: 23:42 | パーマリンク | コメント (0) | トラックバック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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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치쿠마 프리머 신서)›고객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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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치쿠마 프리머 신서)
일본인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치쿠마 프리머 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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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통증 생활
별 5개 중 2.0개 일본인의 자연관을 백성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만.
작성일: 2019년 8월 9일 일본
확인된 구매
자연을 '내에서 본 자연'과 '밖에서 본 자연'과의 눈빛으로 건너뛰고 전자를 백성 시선, 후자를 과학적 시선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논의 농작업의 풍경을 배경으로, 「자연」과 「일본의 문화」에 「사생관」을 냄새게 하는 것으로, 철학적 사고를 섞은 논고(아니, 에세이인가)를 전개하는 내용이군요.

이 책에서는 "백성"이라는 말을 감안하여 사용하면 전치하는 것이 좋습니다만, 자연을 테마로 한 저작에 비해 부자연스러운 선언일까, 라고 느꼈습니다. 가끔 '백성'은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백성'이라고 표현하면 끝난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100 성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고집이 있는 본서의 내용을 예감시킵니다.

다소 감상적인 표현을 곳곳에 느끼는 것이 좋다고 해서, 논고 그 자체가 독선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됩니다. 희미한 견해를 한다면, 백성이라는 생업을, 특정한 뛰어난 자연의 견해를 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어둡게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분위기를 느끼는 방법에 따라, 본서에 대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나눌 것 같습니다. 백성이라는 직업명을 과시하고, 특별시하는 듯한 자의성이 행간에 번져 나오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P31에서는, 논의 물이 말라 올라 오타마작시가 죽은 것에 대한 백성의 감상이 그래프화되고 있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꽤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 조사결과에서 나오는 논고도 젊은이와 노인을 이분화하는 강인한 인과결합에 의한 해석을 볼 수 있습니다. 「과학적」을 옆에 두고 싶은 기분은 알 수 있습니다만, 결국은 비과학적이고, 독선적인 논고에 페이지를 반복하는 손이 둔해져 버립니다. 「농」의 시점을 중심으로 한 「자연관」에의 독자적인 감각을 피로하는 것은 환영입니다만, 설득적인 근거가 피로되지 않으면, 역시 독선적인 모노이이에 들려 버립니다.
무례하면서, 본서는 독단적인 「자연에의 부자연스러운 비과학적 에세이」일까, 라고, 읽었습니다.

p68 근처에서 시작되는 "자연"이라는 말의 이면성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인위가 더해지지 않는다」의 의미에서의 자연과, 「인공물 이외의 삼라 만상」의 의미, 라고 하는 「자연」에의 정의의 칸 나누기입니다. 자연에 대한 일본어가 없었던 이유에 기독교적인 창조물로서의 밖에서의 눈빛과 천지를 밖에서 볼 수 없었던 일본 문화적 속에서의 눈빛, 이라는 상태의 대비로 설명해 합니다. 요점은 자연의 일부로서 연면과 살아 온 일본인의 DNA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19 페이지에서는 스마트 농업과 ICT 기술에 비판을 쏟고 있습니다. 타바타의 자연을 관찰하는 백성 안에서의 “눈빛”까지도 기계에 시키는 감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혜택과 자연에 대한 눈빛을 2항 대립화시켜 경직화한 생각을 끌어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비과학적인 것은 괜찮지만, 젊은층이 대상의 본서입니다. 편견 포함에 들려 버리는 설명에는 읽는 측의 지식과 감각의 밸런스를 묻는 것 같습니다. 「식」이라고 하는 「농」으로부터의 혜택에의 시점을 두고 떠난 편향된 시야에는, 인간의 손에 의하지 않는 농작업의 효율화, 나아가서는 품종 개량이라고 하는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농(논)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단 놓는 저작 기술이 없다고 보여, 이른바 「옛날은 좋았던 절」에 시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농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어미니즘에의 제안으로 전개해 가는데, 역시 아무래도 독선적인 정리 방법이라고 느껴 버립니다. 과학적 시점을 반영한 자연을, 내로부터의 감각에 근거하는(일본적, 백성 감성적인) 인간이 공생하는 자연과 상대화하는 것으로, 다양한 자연·비자연·부자연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느낌. 바이어스 기미의 논조 그대로 최종 페이지를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고통이었습니다.
3명이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
붉은 잠자리
별 5개 중 5.0개 따뜻하고 친절합니다.
작성일: 2019년 10월 21일 일본
 백성의 자연에 대한 눈빛이 그렇게 열심히, 논리적으로, 그리고 정애를 담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표에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농업은 살아있는 생명을 빼앗지 않고 있을 수 없지만, 이것을 왜 백성은 괴롭히지 않아도 되는지, 라는 질문은 매우 깊은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정직하고 과학적입니다. 살아있는 것을 "또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만날 수 있는' 같은 자연 친화적인 농업을 해야 한다는 사상이 강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에, 효율을 추구하는 것에 급성장하고 있는 현재의 농정이나 근대화 기술에 어려운 것은 당연하겠지요.
 「지구 환경」의 보전 등, 밖으로부터 자연이나 농업을 바라보는 보기 과학적인 언설의 차가움에 지쳐 있는 사람에게, 저자의 제창하는 「내로부터의 눈빛」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준다. 오타마작시의 죽음에 대한 백성의 감상은 언제나 곁에 있는 생물이 죽어서 처음으로 '녹슬다'고 느끼는 감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지면 짐작이 가득 떠오릅니다.
 저자가 과학에 어려운 것은 과학이 부족한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해충・익충・그냥 벌레」라는 분류는 과학적입니다만, 왜 일본인은 「그냥 벌레」의 이름을 가장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과학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저자는 훌륭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자가 유기농업의 세계에서는 실적이 있는 사람으로,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법을 과학적으로 추구해 온 경험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천지 자연을 잡기 위해서는 누구도 자신의 실감과 경험을 동원하여 느끼는 것입니다. 과학이 후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자연"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그것이 두 번이나 수입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두번 모두 일본인 나름대로 환골 탈태하여 '일본어'로 해 버렸다는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문득 눈을 멈추어 버리는 들꽃의 일륜에, 우리는 우주를 봐 버린다고 하면, 그럴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합니다.
 학자에게는 없는, 백성의 견해의 대단함이 전해져 오는 매우 좋은 책이었습니다. 도시의 사람에게도 꼭 읽어 주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4명이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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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본주의의 스스메 (치쿠마 신서 1213)

고객 리뷰

별 5개 중 4.1개
4.1/5
16개의 글로벌 등급



총 평가 16개, 리뷰 포함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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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510

별 5개 중 4.0개 자본주의에 의해서, 어떻게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이 없어져 왔는지를 소개해, 농본주의적인 삶의 방법과의 견해의 유용성·중요성을 설고 있다2016년 10월 9일 일본에서 검토됨
확인된 구매
아베 정권의 농업 정책은, 농업의 6차 산업화, 농산물 수출의 확대 등의 농업의 성장 산업화에 의해, 농업 소득 배증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정책에 탄 농업 사업자의 움직임이, 종종 언론 에서 보도되고 있다. 나는 농본주의의 의미도 모르는 채, 본서를 확실히, 그런 시류에 따른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의 본서는, 그러한 시류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었다. 

필자에 의하면, 농본주의란, 「근대화, 자본주의화는, 천지 자연을 상대로 하는 농이 걸어야 할 길은 아니었다」라고 느낀 마을 안의 백성으로부터, 메이지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 「반근대」 「반자본주의」의 사상으로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필자는 우선 농본주의 탄생의 경위와 그 사상의 내용, 전후, 농본주의가 묻혀 버린 이유를 상세하게 분석하여 소개한 후, 자본주의에 의해 어떻게 지켜야 한다. 해야 할 많은 소중한 것이 잃어 버렸는지, 이것이든, 이것이든지 뿐만 아니라 반복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소개하고, 철두 철미,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거기에 대치하는 농 본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견해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뜨겁게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이루고 있는 우리 소비자도 생각하게 하는 말이 거기 꽉 박혀있고, 이러한 말에 농본주의의 근본적인 사상이 상징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내 인상에 강하게 남은 일부만 발췌하여 소개해 두고 싶다. 

・농업이란, 「자연의 제약」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극복해, 돈이 되는 생산을 늘리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일본 국가와 백성은 소중한 것을 100년에 걸쳐 버려 왔습니다. 
・자본주의는, 농중의 산업 부분인 「농업」에 뿐만 아니라 주목시켜, 천지 자연 속에 느긋하게 떠오르는 큰 배인 농을 잃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농본주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농 속의 근대화해서는 안되는 세계를 지켜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천지 자연으로부터의 메구미의 대부분에 경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좋다. 경제가치가 없어도, 언제나 거기에 당연히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조용히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실은 농이란 그런 것입니다. 
・돈이 되는 것에 가치가 있고, 돈이 되지 않는 것에는 가치가 없다고 하는 사고법이 정착해 왔습니다. 돈이 되는 것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 것이 희생되는 것이 일상 차반사가 되었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의 대표는 천지 자연의 풍경과 생물들입니다. 

필자는 유기·감농약 운동, 자연 농법, 정년 귀농, 시골 생활 등의 예를 들고, 이것들을 새로운 농본주의 운동의 모아로 파악하고 있지만, 황새나 토키와 공존할 수 있는 서식 환경을 정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현지 농가의 대처 등도, 당사자가 그것을 농본주의라고 의식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따로 하고, 그러한 움직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농본주의가 사회의 주류가 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면서, 곧 자본주의는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끝난 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그리는 “미래 구상이 필요하다며 필자가 그리는 100년 후의 미래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이윽고 자본주의가 끝을 맞을지 어떨지는 나에게는 모르겠지만,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심각화해, 분명히 자본주의가 막힘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일본에 있어서는, 그것을 농본주의라고 의식하고 있는지 어떨지는 따로 해도, 농본주의적 생활 방식에 가치를 찾아내, 그것을 실천에 옮겨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나갈 것이라고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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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

별 5개 중 5.0개 새로운 것인지, 온고 지신적인 가치관을 가르쳐 주었다2017년 4월 23일 일본에서 검토됨
확인된 구매
 저는 아마추어이고 가정채원의 초보자로 막연히 자본주의의 다음 시대는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책에서는, 농의 본질에는, 천지 속에서의 농 작업을 중심으로 한 생활속에, 벌는 것과는 다른, 무아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는 만족감, 행복감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기업은 규제가 있어 넣지 않았지만, 산업으로서의 농업에는 농업 인구의 감소도 있어, 향후 기업이 점점 참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농의 가치관이 남아 가는 것은, 자급 자족적, 여가적, 취미적인 개인이나 소규모의 농가의 생활·영업 속이 되는 것은 아닐까.
 즉,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벌는 산업으로서의 농업은 기업이, 그리고, 농은 개인이 실시하는 시대가 되는 것이 아닌가.
 TV에서는 지금까지의 욕망자본주의에서 앞으로는 공공자본주의로 이행한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다음 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은 맛있고, 이 농이라는 가치관은 기본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나서 돈을 벌는 것에 대한 자세에 변화를 느꼈습니다. 돈, 승리, 경쟁, 능력, 효율 등이 중시되는 시대, 즉 피곤한 시대부터 푹 멀어진 느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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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

바인 보이스
별 5개 중 3.0개 죽어가는 비문???2016년 10월 30일 일본에서 검토됨

농업의 주식회사화, 농업의 수출 경쟁력 강화 등 용감한 불평이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경쟁'이나 '경영'이라는 말이 옛날부터 싫어하고 농업까지 이런 종류의 터미놀로지를 가져오는 감성에 아무래도 어색한 것을 느껴 버립니다. 그 위화감의 근원을 알기 쉽게 풀어 주는 것이 이 작품이겠지요. 그리고 그 해명 작업은 「농본주의」라고 하는 「망령」과 같은 도구를 사용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솔직히 놀랐습니다.
제 학생 시절의 기억을 따라가도, 농본주의라는 것은 일종의 남아있고, 일본의 「파시즘」연구에서도 이것은 언제나 footnote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던 것 같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 학자에게는 토지 감이 없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타치바나와 권도도 이름만을 footnote로 보는 것만으로 단순한 경력을 기억의 한쪽 구석에 담는 것만으로 그들의 저작을 손에 잡지 않았다.
그들의 주창한 “농본주의”를 현대의 문맥 속에서 저자의 말로 알기 쉽게 풀어내려고 한 것이 본서입니다. 그 목표는 성공했습니다. 그 작업에서 밝혀지는 것은이 농본주의의 라디칼 반 근대성, 반 휴머니즘과 반 자본주의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라디칼인 사상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패배를 운명(doomed) 붙이고 있는 사상입니다. 본서를 읽으면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인생을 현대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의 다양한 힌트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단지 어느 시대에도 농본주의의 "결함"은 현대의 일상적인 현실에 대한 실망을 놓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농업 인구가 노령화되고 급감하는 가운데 점점 그 누락이 의식되게 될 것입니다. 기존의 정치나 경제로부터 분리된 「농」이 가지는 역할을 인식해, 그것을 경제적으로 지지한다고 하는 저자의 생각이 일본의 현상으로 찬의를 얻는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만, 이 생각이 매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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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

별 5개 중 5.0개 똥을 냄새로 생각하지 않았던 옛 농본주의자의 광기 ―― 이것과는 관계없지만 「자신의 똥은 냄새가 좋다」(몬테뉴)작성일: 2022년 1월 21일 일본
확인된 구매
이 책에서 영감을 얻은 마음으로 떠오르는 것을 쓴다.
요즘은 '생태학', '자연과 공생하는 생활', '생물의 다양성' 등이 좋은 아이들 사이에서 공감으로 말해진다.
또한 'SDGs'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타났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느낌'을 경쟁하고 있다.
우리 요시모토 선생님(요시모토 타카아키씨)은, 「하이 에디프스론」에서 「「농본 파시즘」의 얇은 형태 혹은 고도 자본주의의 사회에 있어서의 「농본 파시즘」의 새로운, 현재적인 형태가 생태 이다”라고 단절한다.
그래도 지금도 농본주의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 조금 놀랐다.
나에게 농본주의는 '과거의 유물'이며 농본주의에 대해 '농담'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 '경쟁'에는 '어둠', '공포', '광기', '폭력', '죽음', '가가와시' 등의 마이너스 이미지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내 불공부에 의한 '편견'에 틀림없지만, 농본주의가 쇼와기의 파시즘과 혼연 일체화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영향이기도 하다.
농본 사상의 창도자 중 한 명, 왠지 무서운 이름의 권도성경도 한몫하고 있는 것 같다.
농본주의를 두려워하고 있는 한편으로, 농본주의에 이상한 매력을 느끼고 본서 『농본주의의 스스메』를 사 버리니까, 실로 기묘하다.
그러한 기묘한 앰비밸런스에 육박하기 위해서, 본서를 베이스로 하고, 농본주의에 대해 공부해 보려고 한다.
마루야마 마오씨나 하시가와 후미조씨 등의 저서와 비교하면, 본서는 상당히 친숙하게 쓰여 있다.
 
저는 초등학교 졸업까지 학교가 쉬면 어머니의 친가(농가)가 있는 농촌에서 지냈기 때문에 논의 풍경에 강한 향수를 느낍니다.
여름에는, 삼촌이 소차에 실어 주고, 여름 하늘 아래를 「우시 모모」의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깎인 여름 풀의 냄새가 나는 논길을 천천히 가, 물을 빚은 「 위어에서 낚시를 했다.
또 눈이 깜빡이는 가운데 삼촌이 가끔 손에 숨을 불어넣으면서 묵묵히 논에 괭이를 넣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후년에 여러 번 백성을 그만두고 싶었다고 삼촌은 울었다.
나의 작은 농촌 체험에서 저자의 "농이란 인간이 천지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라는 말은 내 가슴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위화감 같은 것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저자는 “농의 본질을 백성 안에서의 눈빛으로 잡고 언젠가 써 보자는 마음으로 백성을 이어왔다”고 말한다.
아마도 위화감의 근원은 내 '백성 밖에서의 눈빛'과 저자의 '백성 안에서의 눈빛'의 엇갈림일 것이다.
나는 성인하고 나서 오랜 세월 반도체 엔지니어의 일을 하고 있는 사이에, 「백성의 밖으로부터의 눈빛」을 익혀 버린 것 같다.
저자는 "농(의 본질)은 자본주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농(本質)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가 낳은 '반도체 업계'에서 익힌 사고방법이 '백성 안에서의 눈빛'에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이야기가 벗어나지만 과학의 첨단기술에 근거한 '반도체산업'이 그 옛날 '반도체농업론'(반도체는 천도모양의 농업과 같다는 논의)로 불렸던 적이 있었다.
‘반도체산업’은 그 초기에 ‘인손을 통해 애정을 갖고 자비하도록 대상으로 일하는 농업’과 닮았던 것이다.
 
<초기의 반도체 제조는 모두 인손을 통해 행해졌다. 제조하는 환경도 충분히 관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수율 (양품률)은 항상 크게 변동했습니다. 수율은 보통 제로%에서 수십%로, 90~100% 등은 꿈의 또 꿈. 극단적인 경우는 그 날의 날씨에 따라 수율이 변화하기 때문에 농업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반도체 농업론이라고 불렸다.
반도체 농업론은 완전히 과거의 이야기로 잊혀지려 하고 있지만, 1%의 수율을 올리기 위해 이루어진 방대한 노력이 있었던 것은 기억에 두고 싶다. 집적 회로 개발 기술자는 당연히 수율 향상을 고려하여 설계했다. 농업에 한쪽 다리를 찔러 씨앗을 뿌리는 방법으로 발아 시기가 어긋나는 일 등을 배웠다. >(A lullaby for myself, 2009/6/6 「반도체 농업론」으로부터)
 
이야기를 되돌리면, 농본주의자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비합리적·정신주의적인 '유가독존과 같은 경지'에서 정서·정감에 호소하는 '종교' 같은 농본주의가 냉혹한 합리적 사고에 근거한 자본주의를 상대로 하면 적지 않는다 분명하다.
저자는 그러한 것을 충분히 인지한 후 “농본주의자는 농이 자본주의에 맞지 않는다고 자각했기 때문에 행복을 비경제 세계에 요구했다. 그것이 구도자처럼 보이는, 농의 세계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견해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다, 「시대가 변천해,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정밀해지고, 과학적인 표현이 풍부해질 수 있다」 어쩌면 백성의 정신세계는 드디어 표현의 장소와 기회가 없어져 가겠다고 겸허하게 말한다.
그러한 비합리적·정신주의적인 농본주의가 쇼와기 일본에 큰 임팩트를 준 것은, 츠츠이 기요타다씨(사회학자)의 「쇼와기 일본의 구조」로부터 대략 상상할 수 있다(요지):
 
<사상이 '비합리적'이거나 '정신주의'이거나 하는 것과 그것이 운동에 있어서 '현실적'인지 '비현실적'인지는 레벨이 다른 것이다. 체계적·논리적 「사상」이 「운동」의 단계에서는 「비현실적」인 것도,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비합리적」사상→「공상적」운동(「합리적」사상→「현실적」운동)이라고만 파악하려는 생각의 배후에는, 「합리적」인 것이 항상 대중을 파악한다고 하는 전제 가 있습니다. 이 '전제'를 뒤집은 것이 30년대 역사다. >
 
반복하지만, 나는 불공부에 의한 「편견」의 탓에, 농본주의에 불필요한 「경쟁」을 느끼고 있다.
나이가 들고 지지이에 다가가면 어렸을 때 보낸 그리운 논의 경치가 생각나게 되지만, 이때 농본주의에 대한 '농담'의 실체에 다가가고 싶다.
 
그래서 우연히 소유하는 와타나베 쿄지씨(사상사가)의 '일본 근대의 역설'의 '권도성경의 사치와 국가'를 읽어 보았다.
매운 입 평론의 와타나베 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요지)
 
: 문제는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는 이론적 범주의 의미를 결코 파헤치지 않는 사람이다. 『자치민범』에서 그가 말하는 것은 국사상의 사실과 동양성현의 교설의 해석이며, 인성이나 공동체나 국가에 대해서도, 그는 이론적인 문제의 단서에 모처럼 서면서 결코 거기 에서 고찰을 심화시키지 않는다. 국가를 민중의 '애천의 마음'의 수탈기구로 인정하면서 그는 그 인식을 국가 자체의 지양 방향으로 진행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런 '치술'이 '아사 치체통의 본지에 쏘는 위도', 즉 관료 전제에 빠지지 않도록 바랄 뿐이다.
권도가 다이쇼쇼와기의 천황제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사회변혁도 아니면 혁명의 재개도 아니다. 그는 당시 부르주아적 재산법과 지방자치법에 손을 넣어 예전과 같은 공동체적 농촌을 재건하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권도의 현실의 정책적 요구가 이 정도의 온화한 것인 것은, 그 사상의 출자와 계보로부터 말해 오히려 당연한 일. 하시가와 후미조씨가 최초로 지적한 것이지만, 권당의 저작을 읽으면, 그것은 야나기타 국남의 문장과 약간 비슷하다. 이 두 사람은 문체뿐만 아니라 사건에 대한 관심의 방향과 관심의 폭이 매우 가깝다.
 
이와 같은 야나기타를 연상시키는 보수주의자의 사상이 쇼와 유신의 광열에 몰린 청년들의 혁명강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가 쇼와사의 이로니다. 권도가 젊은 유신자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그가 동양적 농촌 자치의 이념을 국가권력이 겉으로 소멸하는 지점까지 기저적인 생활민의 위상에 가깝게 보여주었다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급진적 아나키스트가 권도 안에 「국가로부터의 영구적인 자립」의 지향을 읽도록(듯이), 쇼와의 젊은 유신자들은 권도 안에, 천황과 촌락 공동체가 일체의 나쁜 중간 기구를 무 화해 직결하는 국가=코뮌의 환영을 엿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도의 뇌중에 있는 촌락 공동체의 범형을 잘 보면, 과거에는 생명의 굶주림과 같은 충동에 촉구되어 자신이 거기에서 튀어나온 온 그 향촌의《무》의 상모를 , 그것이 뒤틀리지 않고 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깊은 우려로 주의해야 했을 것이다. 동양적 농촌자치의 극한상 가운데 겉보기 국가가 소멸되는지 보이는 것은 동양적 성천자의 극한상인 천황 속에서 겉보기 권력이 소실되는 것과 완전히 같은 기제에 의한다. 국가지양의 회로는 이러한 《무》의 통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젊은 유신자들의 한 사람은, 쿠도의 사치가, 자신이 생활의 최저의 곳에서 계속 고민해 온 그 인간의 관계에의 굶주림, 그 공동성에의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 온후하게 해서 성선적인 보수적 경세가 앞에서 묵묵히 떠난 것임에 틀림없다. >
 
과연 그럴까, 와타나베씨의 매운 입평언에 의해, 권도성경은 「동양사상에 익숙한, 농촌의 인테리 할아버지」같은 것을 알았다.
더 빨리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으면, 불필요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끝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와타나베 쿄지 씨의 '기타 이치키'도 독독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먼저 저자는 “농본주의자는 농이 자본주의에 맞지 않는다고 자각했기 때문에 행복을 비경제 세계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 「비경제의 세계」라는 말에 의해, 이야기는 크게 비약하지만, 나는 드래커라고 하는 할아버지씨(피터·F·드래커)를 상기한다.
드러커는 미국의 저명한 경영학자(자칭 ‘사회생태학자’)이지만 대중은 ‘탈경제사회’=‘비경제의 세계’로 향한다고 한다.
드래커는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요지):
 
<내가 지지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이다.
잘 작동하지 않지만 다른 것보다 낫다.
자본주의에는 중대한 의심을 가진다. 경제를 최중시하고 우상화하며 너무 일원적이다.
나는 미국 경영자에게 소득 격차를 20배 이상으로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다.
이를 넘으면 분노와 시라케가 만연한다.
나는 1930년대에, 너무 불평등이 절망을 초래하고 파시즘 전체주의에 힘을 준ㄴ다는 것을 걱정하고 걱정은 명중했다.
경영자가 대금을 회중에 넣으면서 대량의 레이오프를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인도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행위가 일반 사원에게 가져오는 분노와 시라케는 반드시 높은 트케가 되어 돌아온다.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는 자본주의의 금전적인 계산으로 표현할 수 없다.
금전이라는 근시안적인 생각이 생활과 인생의 전곡면을 지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
 
반복하면, 경영자와 일반 종업원의 소득 격차가 20배 이상이 되면, 그 불평등이, 분노・시라케・절망을 초래해, 파시즘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미국 기업처럼 대량 레이오프를 한 성과로 경영진이 천문학적 보상을 얻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도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덧붙여서, 드래커가 지지하는 「자유경제주의」란, 시장 기능을 중시하는 경제를 말한다.
"시장 경제(market economy)란 시장을 통해 재·서비스의 거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경제를 말한다. 대립 개념은 계획 경제. 또한 시장 기능을 중시하는 경제를 특히 시장주의 경제 자유주의 경제 등이라고 부를 수 있다”(Wikipedia)라고 설명되고 있다.
 
드래커는 23세 무렵에 ‘경제인’의 끝―전체주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구상을 얻었다.
'경제인의 끝'이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끝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경제 경제 지상주의(경제적인 자유와 만족을 최우선하는 사고)이며, 인간을 경제적 동물(이코노믹 애니멀)로 하고 있다.
드래커는 경제 지상주의에 강한 의심을 안았다.
드래커는 자본주의에 대해 '경제인'의 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의 성장과 확대는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의미가 있다.
사회적 목적의 달성을 약속하는 한에는 바람직하지만, 그 약속이 환상임이 분명해지면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의심스러워진다
.
현재의 경제사회의 기초를 전제로 하면서 새로운 자유롭고 평등한 탈경제 지상주의사회를 찾아 발전시켜야 한다
. >
 
이 드래커의 설을, 쿠항 케이이치씨는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항에 넘치는 드래커
해설책 중에서, 쿠항씨의 「그림으로 읽어 풀린다! 드래커 이론'은 '드래커는 경제 지상주의를 어떻게 보는가'까지 언급하고 있는 적은 예이다.
쿠항씨는 다음과 같이 썼다(요지
 
) 역시 사적이익을 부정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마르크스주의도 모두 파탄했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사적이익의 긍정), 마르크스주의(사적이익의 부정)의 어느 쪽도, 「사회·인간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은 경제 활동이다」라고 하는 경제 지상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경제인"의 개념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세계대공황에 의해 경제지상주의의 파탄이 밝혀져 사회질서가 망가져 사람들이 불안과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을 수습하는 새로운 개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역사의 균열에서 파시즘(탈경제사회)은 태어났다고 드래커는 지적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질서의 기둥으로 한 경제의 우위성을 부정하여 비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탈경제사회를 표방했기 때문에 경제지상주의로 농락당함 , 절망했던 대중의 마음을 잡았다. >
 
지금 지금의 세계 정세를 보면, 정말로, 끔찍한 아님이다.
“세계의 자산 랭크에서 상위 1%의 부유층이 지금은 남은 99%의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부를 보유하고 있다”(2016.01.19, Bloomberg).
민주주의 제도는 한 줌의 부유층 등에게만 유익한 시스템이 되어 결국 희망을 잃은 대중은 획기적으로 '탈경제사회'를 목표로 하는 파시즘을 대망하게 된다.
대중의 마음은 파시즘을 향해 걷기 시작하고 있다.
 
이야기를 되돌리면, 본서 『농본주의의 스스메』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요지)
 
: .
결코 흙의 굉장함, 훌륭함, 아름다움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흙의 풍요를 잃는 것과 싸우기 위해 농본주의는 태어났다.
농본주의에 한하지 않고, 변혁의 사상이라는 것은, 언제의 시대도 현실 사회에의 분노나 위기감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
 
<농본주의는 옛날도 지금도, 반체제 사상이 되어 버린다.
2000년 이상 이어져 온 '농'의 본질(원리)과 근대국가가 채용한 '근대화·자본주의화'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민국가가 근대화·자본주의화를 그만두지 않는 한 농본주의자의 반체제 시도는 계속된다.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농본주의는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다.
농본주의자는 언제나 농본주의가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꿈꿨지만 로망으로 끝났다.
밖에서의 '미래 예측'에서 농본주의자를 용기짓는 것은 '이윽고 자본주의는 끝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 끝난 뒤를 어떻게 살아갈지, 내에서의 눈빛을 총동원하여 '구상'해야 한다.
대혼란 안에 자본주의가 끝나고 강권적인 정권이 탄생하지 않도록. >
 
이와 상기의 드래커씨의 경고를 맞추면, 쇼와기의 일본에 있어서, 경제 지상주의의 자본주의·마르크스주의에 절망한 도시의 대중이 파시즘(탈경제 사회)을 목표로 하는 것과 동기해, 농촌의 농본주의자도 농을 압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로부터 사회의 변혁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도시의 키타이치 휘·오카와 슈메이 등과 농촌의 권도성경·타치바나 타카사부로 등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공통의 적은 자본주의였다.
또 키타이치키에게 찬동한 청년 장교들은 '쇼와 초기 농촌 위기, 농민의 극도의 빈궁화'에 분노했기 때문에 농본주의에도 가까웠다.
그래서 농본주의가 '파시즘의 온상' '파시즘의 속성'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인용 투성이의 레뷰의 마지막이 되지만, 「농민」 「백성」이라고 하면, 나는 마츠나가 유이치씨를 잊을 수 없다.
마츠나가 伍一씨(1930년 4월 22일-2008년 3월 3일)는 후쿠오카현 오기마치 출신의 농민시인·평론가이며, 시집, 많은 평론집, “일본 농민시사 전 5권” (호세이대학 출판국, 1967-70년) 등을 간행.
마츠나가 씨는 17세 때 '이웃촌의 소년 히로마츠 섭의 수재에 놀라 경의의 때를 안았다'고 한다.
또 태평양전쟁 중반인 1943년(13세)부터 응소한 형(1945년 전병사)을 대신해 가업 농업을 하면서 중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런 마츠나가 씨는 시인의 섬세한 감각으로 농본 사상의 존재에 깊이 탐구한다.
특히 '시비의 장면'에서 빈농 A와 농본주의자 B의 '똥의 냄새'를 파악하는 방법에 관한 고찰은 탁발이다.
나는 범용한 논고작인 빈농A쪽에 짜지만, 「이상을 이상으로 하지 않고, 이상을 정상으로 착각시키는 로직」을 Fuck하는 농본주의자 B를 싫은 놈이라고 생각한다.
「똥의 냄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원래, 배설물을 냄새라고 느끼는 것은, 생리학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러니까, 「똥을 잡아도 냄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똥을 냄새라고 느끼면 안 된다」라고 무리하게 생각하는 농본주의자 B는, 「광기」의 입구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해도 긴 인용이 되지만, 마츠나가씨는 「토착의 가면극」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요지): <농본 사상가들에게는, 이러한 자연성을 현실의 구조에 직결
 
시킨다 방법론이 있었다.
자연이식도 원시자치도 자제자치도 자주자구도, 소사는 태고의 미화에 근거한다.
지나간 시간이 미화되는 것은 세속 로맨티시즘의 소산은 아니다.
이 세속성을 금압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농본사상가들은 불가시의 세계인 태고에 미적인 환상을 이어준다.
추의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들은 태고의 무구한 신들의 서거하는 거룩한 영역과 착각하고,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성성을 사상의 원질로 만들 수 있었다.
이 성성을 데모니쉬한 요소로부터 구분해, 자연이라고 칭하는 가시 즉 불가시적 존재에 의해 대치시켜, 그것을 신앙 대상으로까지 높인 것만이, 태고의 아름다움을 감수하는 눈으로 현실의 추를 찾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거기에는 투쟁의 부정, 혼미의 부정, 수탈의 부정, 악정의 부정, 자본의 부정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에고이즘에 대한 도전인 이 순수성에 의거한 사고방법은 속성 그 자체로 일상을 꿰매고 있는 것에는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장애가 일단 제거된 때부터, 이 자연성=성성은 사람을 이상한 흥분에 몰아넣고, 신비를 피부에 느끼게 한다.
이 마술성을 눈치채지 못하는 철학의 학생은 농본 사상을 논단할 자격은 없다.
세속성을 금압하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그 속성을 길들인다는 사술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농본 사상의 농민에 미치는 영향의 질을 논할 수 없다.
 
쿠도 나리경, 타치바나 타카사부로, 에도 겐지, 오카모토 리요시, 나가노 로, 카토 이치오, 야마자키 노부요시 등 모두 자치의 원리에 문제를 짜고 직접 농경을 체험하지 않고 이 사상적 근저를 소유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농의 관념의 구조에 집중한 것도, 모두 자연성=성성=신격성을 무기로 하면서, 투쟁을 부정해 왔다.
특히 계급투쟁은 자연성의 적이며, 자치를 거절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경우의 농민이란, 광의의 「토에 뿌리내리는 것」으로서의 농민으로서 규정되는 외 아니었다.
그러므로 빈의 현실은 사상적 모티프 밖으로 방척되어 '토를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토에 뿌리내리는 것'인 그 추상성 가운데 빈은 모든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리얼리티가 농경과 연결될 수 있었을 때의 인간의 존재감과 '흙에 뿌리내리는 것'이 농경할 때의 존재감을 비교하는 것도 도로가 아니다.
가난한 현실에 서 있지만 시비의 장면을 생각해 본다.
빈농A가 인분뇨를 좁은 밭(소작지)에 베풀 때 그는 인분뇨의 냄새를 확실히 냄새맡을 수 있어 "이것을 걸어 두면 야채는 자란다"고 생각한다.
농본주의자 B가 인분뇨를 중간 정도로 넓은 밭(자작지)에 베풀 때 그는 인분뇨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이 더러운 것이 그 아름답고 신선한 야채를 키우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감각이며 믿음입니다.
 
A는 A이고 계속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상(범용)한 지점을 지키고, B는 B이기 때문에 냄새를 냄새라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
자연의 마술성=하늘의 조화력에 대한 한결같은 귀심으로 정상성을 넘은 곳에 자기를 왜곡해야 했다.
B는 거기서 인간적으로 A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할 때, 그 평가야말로 농본 사상을 긍정·시인하는 것의 그것이며, 따라서 또 이상을 이상으로 하지 않고, 이상을 정상으로 착각시키는 로직을 광적인 자기주박성과 섞여 소유해야 한다.
B에 있어서, A는 탈락자이고, 좋아하지 않는 농민이며, 정상인 것이 저열하다는 입장에서 피차별자가 된다.
 
「똥을 잡아도 냄새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1인분의 농민이다」로서 안성농림학교의 학생에게 가르친 야마자키 노부요시를 기억한다.
야마자키 노부요시가 “반소작인의 입장”에서 강연해 “나를 지주의 견해처럼 생각하는 세간은, 나의 뜻을 모른다. 에 시류에 편승해 떠들썩한 소작인을 꾸짖고, 원만 협조의 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목표로 하는 그의 지향으로서 설득력을 가진다.
 
야마자키 연길에게 농민의 존재를 지지하는 것은 합리성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무계급적 상호협조에 의한 자립 → 자치의 방향으로 사는 정신의 확충이었다.
야마자키 연길에 있어서는, 생산의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으로서의 농민은 증산을 향하는 오직 한 마음으로 정신적 부를 확보할 수 있고, 그 느슨한 근로주의가 즉시 나라를 지지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소집단의 상호 협조에 의한 자치의 유효성이 부동의 것이 된다.
에도 겐미네는 백성을 정의하고 「스스로 농업의 노작에 따라 일가의 생계를 영위하고 있는 사람」에서 「천도님과 토지와 작물에 대해, 끝나지 않는 짓을 하지 않는 사람」에 가, '백성의 만족, 궁리한 ​​양견을 가진 사람'으로 한정하면서 제3의 정의에 이르러 '행'과 '타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했다.
에도 현령에 있어서는, 「장」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해 무변의 천지에 부딪히고, 개개의 법에 맞는 가려에의 길을 찾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장론적 가려행학 綜組像회도 등 기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만다라를 만들어, 난해한 방엔을 통해 사람을 연기에 감았다.자치의 개념은 개개의 인식만큼 명확화되지 않았지만, 농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시선
의 날카로움의 관점에서, 강도 능령의 그것은 천재적이었다.여기서
 
A가 이 두 농본 사상가에 의해 어떻게 논리적으로 처우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그들은 B의 존재를 생각의 모티프
와 했을 뿐만 아니라 목적 물시하고, B의 국가에서의 유의의성을 논할 필요가 있었고, 소외된 A는 번외지의 하민에게 밀려 버리기 위해서, A의 투쟁의 에너지는 용서 어려운 죄과로 되어 국가권력을 하고 그 죄과를 압살시키는 무언의 조언자의 위치를 ​​계속 지켜냈다
 
. , 하늘(자연)의 섭리에 반대하는 것이다.
옛날의 농본주의자가 "똥을 잡아도 냄새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1인분의 농민이다"등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농업의 인기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본서『농본주의의 스스메』에서는, 밖으로부터의 「미래 예측」으로서 「이윽고 자본주의는 끝난다」라면, 자본주의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끝난 후를 어떻게 살아갈까, 의 눈빛을 총동원하고 '구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의 「구상」을 듣고 싶다.
 
마침
 
*********************
 
【부록 1】
 
우리가 요시모토 선생님(요시모토 타카아키씨)은, 「대상황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지 :
_
농지개혁은 연합국 점령군의 군정당국의 명령으로 일본의 어느 규모 이상의 지주, 특히 부재지주를 중심으로 한 지주계급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소작인(고용되어 농민으로서 소작료를 지불하면서 농경하고 있던 사람)을 해방해, 자립농으로 했다.
봉건적 세력의 기반인 지주계급을 해체하고 소작인을 해방했다.
이 이후 일본의 농경사회는 지주가 소유하는 토지를 한정해, 소작인은 명목상은 없고, 자작농만이 되었다.
이것은 신성하게 하고 침범할 수 없는 천황에서 상징천황으로 바뀐 것과 대단히 잘 맞는 것이다.
 
● 「사회파시즘과 농본파시즘」
일본의 진보적 세력은 상징천황제를 포함한 신헌법을 지키라고 한다.
신헌법을 지켜라는 것은 상징천황제도 함께 지키는 것이며, 이것은 대단히 큰 문제가 된다.
일본 전쟁 전의 좌익은 전쟁 중에 대략 전부가 파시스트가 되었다.
파시즘을 대별하면 두 종류가 있다.
(1) 사회 파시즘 · · 나치의 파시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서구에서 수입 된
파시즘 한 농경사회를 실현하자는 농본주의적인 파시즘
농본 파시즘은 나(요시모토 선생님)가 명명한 것이다.
농본주의적인 파시즘의 주장은, 아시아적인 사회·국가의 특징이지만, 신성하게 해 침범하지 않을 황제를 정점에 두고, 나쁨을 하는 것은 그 중간에 있는 측근이기 때문에, 중간을 배제해, 그 아래에서 평등한 농경사회를 만드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는 생각.
전쟁에 패하고 해방되면 파시스트들은 다시 좌익진보적 세력으로 바뀐 즉 2단계 전향을 했다.
그 문제를 근거로 하고, 지금의 천황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와 맞는 농경사회의 문제에 대해 현재 큰 문제를 겪고 있다.
 
●「보수계 라디칼리스트와 진보적 반동」
현재 일본에서도 생태적인 주장이 있다.
농업은 일본인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농협의 아저씨라든지, 농문협의 좌익으로부터 해체한 무리가 주장한다.
그리고 차와 농산물은 자유화하라, 농업은 멸망해도 상관없기 때문에 자유화하라는 논란도 있다.
농업을 지키고 농경사회를 지키며 농업의 자유화 반대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좌익계의 사람들이다.
반대로, 농업은 멸망해도 좋고, 그보다도, 도시의 일반 대중은 주거를 가지지 않고 곤란하다.
도시 주변의 농지에 일반 주택지 수준의 세금을 걸면 대도시 주변의 농지는 농민이 놓을 것이다.
그것을 도시의 일반 대중에게 맞추면 주거 문제는 해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 보수계 라디칼리스트이다.
진보적인 반동은 농업을 지키고 농업자유화에 반대한다.
이 심볼의 역전 현상은 전전의 역전 현상과 거의 동일하게 보인다.
 
●「상징천황제는 어디에서 끝나는가」
일본의 농경사회가 위협에 처할 때와 상징천황제가 멸망할 때는 대응할 것이라고 기본적으로는 생각한다.
일본 농업사회의 문제가 현재 형체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일본의 보수 라디칼리스트와 진보적 반동의 대립점이 의미가 없다면 지금의 천황을 마지막으로 하여 상징천황제 는 무의미화해 나갈 것이다.
단순화해 보면 상징천황제가 형해화하는 것과 일본의 농경사회가 형해화할지 여부는 병렬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농업이 전혀 사라지면 상징천황제의 기반이 전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농지개혁은 점령군의 강제명령으로 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맡겨두면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 정도 일본인은 개혁을 좋아하지 않는다.
방치해 두면 보수적 라디칼리스트가 말하는 대로 대도시 주변의 농지는 점점 개별적으로 팔릴 것이다.
하지만 일거에 세금을 택지 수준으로 하고 농지를 놓을 수 있도록 법률로 강제하면 아마 피를 볼 정도로 힘들 것이다.
 
【부록 2】
 
“2·26의 청년 장교”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고고의 재야의
 
정치 학자인 타키무라 타카이치 씨는, “기타 이치키”의 “<청년 장교>의 사상적 특질”로, 다음과 같이 에 쓰기(요지):
(despot(despot)이란, 「상인 마호빈」의 종류가 아니고, 「전제 군주, 독재자, 폭군, 타일런트」를 말한다) <아시아적 절대 군주>타루<천황제>의 정치적 구조를
 
기초 타·<제도 이데올로기> 타루·공인 「국체론」에서는, <천황>과 <국민>의 관계를, 일본 고래의 <아시아적 대가족>에 있어서의 <부모(아버지)>와 <아이>와의 관계 에 의제함으로써, <국민>은 <천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동일하게 <아카코>로 여겨졌다. <천황은 국민을 '오호미타에서'로 하고, 아카코라고 사소되어 애호해 준다> 그렇게 되어 천황의 이러한 고마운 자비와 자애에 대해 절대 협순하는 것, 즉 <천황을 큰 부모님과 바라보며 오로지 수순의 참을 한다>는, 신민으로서의 국민의 제일의 의무로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의는 군신으로 하여 정은 부자이다>로 여겨진 바와 같이 <군신 일체>는 무엇보다도 걸리는 <부모와 자식>과 같은 <정>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공인 「국체론」의 사상적 특질은 <군신 일체>라는 천황과 국민과의 정신적인 조화를 목표로 한 <공동체주의>이며, 보편화하면 <데스팟>의 지배를 절대적인 전제로 하는 <아시아적 정신 공동체주의>의 일종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거기에는 자비로운 <가부장>의 지배와 가족원의 절대적 恭順을 메달의 양면으로 하는 <아시아적 가족 공동체주의>가 원리적인 핵으로 포섭되고 있다.
<아시아적 정신 공동체주의>로서의 공인 “국체론”의 사상적 특질은, <데스포트(천황)-즉-공동체>주의로서의 논리적 귀결하자, “국체론” 그 자체가 <사회주의> 적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 <사유재산제> 부정으로서의 <사회주의>론, 정확하게는 <데스팟·사회주의>론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인 '국체론'은 구체적인 제도론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만약 전개하면 일본국가사회의 실질제도적 구조를 이루는 자본제와 적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장교의 '국체'관은 공인 '국체론' 그 자체이지만, 그 <사회주의>적 성격을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장교가 <2·26>과 같이 라디컬한 거에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사회의 참상(농촌에서는 빈농의 무리가 지주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고 도시에서는 노동대중이 대자본가 재벌의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비참한 현상)에 대해 청년 장교로 생각되는 해석은 단지 하나. 즉, <천황>이 계시는데 우리 국민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천황>의 우리 국민에 대한 따뜻한 자비와 자애가, <폐하>의 주위에 있는 원로·중신·군벌·당벌 등 일부 특권계급의 '사리 사욕'에 의해 차단되어 우리 국민에게 직접 닿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군측의 노신 군적'을 일소하면 <아시아적 공동체> 즉 <데스팟 사회주의>로서 우리 '국체'의 진정한 모습 개현이 가능하다. 라는 것이 청년 장교의 발상이다.
 
【부록 3】
 
농본 사상에 관한 넷 기사

「농의 원리의 사적 연구」를 저술한 경대·후지와라 타츠시 준 교수를 중심으로, 우네 토요 씨나 드래커의 일도 써 있다.
 
JAcom 농업협동조합신문
〈농본주의〉복고와 가능성――의·식·심·정·기술의 통합 설명[기자 투시안] 2021년 7월 10일 농학의 폐색감을 깨는 저서
이다
 
. 46세의 경대 후지와라 타츠시 준 교수는 신시점에서 수많은 흥미로운 책을 저지해 왔다. 「농본주의」의 심연을 탐구하는 최신저 「농의 원리의 사적 연구」(창원사)는, 오랫동안 농의 세계를 관찰해 온 기자의 <투시안>에서 봐도 이채를 발한다.
 
● 동상 이몽의 <농은 나라의 기>
<농은 나라의 기>인 농본주의만큼 <동상이몽>의 네자를 상기시키는 말은 없다. 이상협정 TPP의 반대운동의 선두에 선 만세장 전중회 회장(당시)이 반복했다. 한편 '자유화 단행정권'에서 TPP 협상을 비롯한 전례 없는 시장 개방을 강행한 아베 신조 전 총리도 소신 표명에서 몇 번이나 같은 <농은 나라의 기>라는 말을 내고 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비슷한 것은 <식품안전보장>이기도 하다. 식량안보로 현재 전중회장·나카이테츠루는 더욱 구체적으로 ‘국소국산’과 어디까지나 국민이 소비하는 것은 국산으로 공급한다고 명확히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식량안보는 농업자유화론자들에게도 <상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적절한 수입과 국내 생산, 비축을 조합해 이루어지는 논리다.
 
● 농학 번영해 농업 죽는
일본의 농학의 조로, 농본주의를 주창한 요코이 시경이 말했다고 하는 「농학 번영해 농업 죽는다」. 농학이 관념론에 기울여 현실과 유리하는 것에 대한 계명의 말로 유포한다.
핵심을 찌르고 있지만, 요즘은 관저 농정에 의한 농협 개혁이나 생유 제도 개혁, 아니 <개악>의 강경 돌파로, 「농정 번영해 농협·농업 죽는다」 상황이 있었던 것으로 이중 사본이 되었다 버린다.
한편 인문과학의 관점에서 식농사상사를 끈 후지와라는 앞의 '농의 원리' 속에서 “농학이란 그 자체로 농업 발전할 정도로 농업 멸각시켜 나가는 역설적인 숙명을 띠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읽지 말아야 할까. 농학의 발전은 식의 공학화라는 성격도 면할 수 없었다. 눈으로부터 비늘의 지적이다. 그래서 굳이 부제는 <「농학 번영해 농업 죽는다」재고>라고 친 것이다.
근원에 『합리적 농업의 원리』를 저술한 농학의 조·독일의 테어의 사상을 끈다. 물론, 농학은 농업 발전의 학과의 반론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지금의 푸드테크가 다가오는 곳은 유전자조합의 유기농업진흥이나 축산 없는 배양육 등을 생각하면, 원래 음식과 농의 존재 그 자체가 있을 곳조차 없어질 수 있다. 후지와라도 「지금의 식과 농기술의 진보는 바로 식과 농의 폐기이며, 프로세스의 생략이었다」라고 읽는다.
 
● 전체주의 모두 표리 일체
정치학의 태두 마루야마 마오의 「농본주의는 일본 파시즘의 특징의 하나」의 지적은, 지금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전은 농업 진흥에 식민지 확대와도 연결되었다.
후지와라는 JA 전중 발행의 '월간 JA' 2018년 2월호 '내 오피니언'에서 음식과 농의 현상에 경종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농본주의의 역사 분석의 중요성도 설했다. 나치 독일이 '식량 자급률 100%' 등을 호소하고 정권을 얻은 것도 지적한다. 음식과 농은 '나라를 지배하는 도구'로도 돌아간다.
「월간 JA」의 인터뷰에서 후지와라는 JA의 역할을 「신자유주의와 대치해, 지역에서 진지하게 농업과 마주하는 생산자를 돕는다」라고 한 다음에, 농가가 디그니티(존엄)를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의 개혁과의 타협은 일견, 안전처럼 보이고, "악마에게 오른팔을 내밀면 다음은 왼팔을 요구받고, 마지막은 온몸을 먹는다"고 위험성을 호소했다. 농협개혁을 근거로 해도 적을 발한 지적이다.
 
● 새로운 태동에도 주목 이런 가운데
후지와라가 주목하는 1명에게, 신농본주의를 주장하는 재야의 농학자로 <논의 생물>을 통해 농업의 경제적 가치를 데이터로 나타내, 에코로지컬한 시점으로 음식과 농의 본연의 방법을 설설하는 우네 유타카가 있다.
우네의 생각은 『농본주의의 스스메』(치쿠마 신서)를 알기 쉽다. <농은 천지에 떠오르는 큰 배> <농본주의란 '농'을 농업이 아니라 농으로 보는 견해를 되찾는 것>.
일단 후쿠오카의 우네를 방문하여 사진을 찍으려고 가을의 논에 들어가면 우네 주변을 붉은 잠자리가 많이 날아 놀랐다. 우네는 자연과 공생하는 농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네는 타치바나 타카사부로, 권도성경 등 지역 운동가를 논하면서 애국주의에 근거하지 않는 생태적인 사상으로서 구시대적인 농본주의로부터의 탈피를 도모했다. 다만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와의 관계 논란이 불충분해 역사적 배경의 고찰이 상당히 버려지고 있다"고 후지와라는 지적한다. 역사를 근거로 한 신농본주의로의 과정은 막 시작되었다.
 
● 타치바나 타카시의 타치바나 타카사부로
앞의 ​​우네의 저서에도 등장하는 농본주의자 타치바나 타카사부로. 혈맹단 등을 키운 이바라키 출신으로 구제 미토 중학(현 현립 미토 이치고)에서 제일 고등학교로 진행된 수재다. 오스기 사카에의 아나키즘에 감화된 뒤 현지로 돌아와 애향학원을 주재하여 파시즘으로 변모했다.
얼마 전 사망한 조사 보도의 타치바나 타카시와 혈연 관계에 있는 것은 몰랐다. 그렇게 말하면, 타치바나 타카시의 본명은 타치바나 타카시. 왜 <다치바나>의 이름을 엎드린 것인가. 우익의 타카사부로의 존재를 지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타치바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이바라키에서 보내고, 이바라키 대학 부속 중학에서 미토 이치고에 진학. 도중부터 도립 우에노 고등학교에 전학해 동대에 입학했다. 타카사부로와 겹치는 곳이 있다.
루포라이터 타치바나는 농협, 농업문제도 1980년 전후에 정력적으로 취재했지만 결코 농본주의의 사상면을 접하지 않았다.
 
● 종합지로서의 신농학
거기서 후지와라는 고고의 농학으로부터의 이륙을 시도한다. 「농의 원리」를 의・식・심・정・기의 5개의 측면에서의 어프로치, 이른바 다면체적인 종합지로서의 새로운 「농의 원리」를 모색한다. 이들과의 교류를 깊게 번창하고, 단지 전문화할 만한 관허의 농학은 조용히 죽고, 분해되어 “아직 보지 않는 종합적인 학문의 비옥이 되어 간다”고 본다.
예를 들어 농복연계의 확산은 앞의 의·식·심 등의 융합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기자의 <투시안>에서 보면 새로운 '농원리' 찾기의 여행은 20세기 지식의 거인, P.F 드래커가 말한 <이미 일어난 미래>의 단서는 있다. (K)
 
【부록】마지막
See all details for 농본주의의 스스메 (치쿠마 신서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