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3

알라딘: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알라딘: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 카르마총서 5 
한자경 (지은이)예문서원200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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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쪽

목차
지은이의 말

들어가는 말

1. 마음 밖에 다른 법은 없다
2. 유식 불교의 전개 - 무상유식과 유상유식

제1장 색의 실유성 비판

1. 유부의 극미실재론
1) 극미실유의 의미
2) 극미의 성질
3) 극미의 집적과 개체 존재

2. 극미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1) 극미실재론의 논리적 불가능성
2) 극미실재론의 인식론적 불가능성

3. 전오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개체
1) 오경의 비실유성
2) 오근의 비실유성

제2장 명의 실유성 비판

1. 유부의 명구문신실재론
2. 명구문신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3. 제6 의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관념
1) 사유 대상으로서의 법경
2) 개념적 허망분별
3) 비유적 언어관

제3장 식의 심층 구조

1. 식전변의 사분설
1) 능연과 소연의 견불과 상분
2) 능변의 자증분과 증자증분

2. 능변식의 심층분석
1) 분별 주체로서의 의식
2) 욕망 주체로서의 말나식
3) 초월 주체로서의 아뢰야식

3. 식전변의 두 차원
1) 아뢰야식의 변현
2) 의식. 말나식의 분별

제4장 식과 경의 관계

1. 연기적 관계

2. 식과 경의 순환성
1)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순환
2) 변현(인연변)과 분별(분별변)의 순환

3. 식의 실성
1) 식의 삼성과 전의
2) 순환 속의 해탈의 길
3) 진여와 일진법계

맺는말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한자경 (지은이)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서양철학(칸트)을 공부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서우철학상 수상), 『불교의 무아론』(청송학술상 수상), 『실체의 연구: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한국철학의 맥』, 『명상의 철학적 기초』, 『자아의 연구』, 『자아의 탐색』,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동서양의 인간 이해』, 『일심의 철학』, 『불교 철학의 ... 더보기
최근작 : <불교의 무아론>,<의지, 자유로운가 속박되어 있는가>,<매거진 G 3호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 총 4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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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경 책은 한 10년전까지는 거의 빠짐없이 챙겨보긴 했는데 아마 불교학자로써는 꽤 래디컬한 입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탈을 문자 그대로 어떤 타협없이 그대로 주장하는 몇 안되는? 학자면서 구도자.  구매
리엔 2020-04-2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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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3 오식이 인식하는, 즉 연緣하는 감각 대상이 바로 색 · 성 · 향 · 미 · 촉의 오경五境이며, 이것이 곧 개체적인 물질적 존재로서의 색법色法 또는 색온이다. 그리고 감각과 구분되는 사유는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전오식前五識 다음의 제6 의식意識이 되고, 사유 대상으로서의 보편적 관념이란 바로 의식 대상인 법경法境 또는 18계 중의 법계法界에 해당한다. 법경은 색을 제외한 일체의 대상 존재로서, 색色과 구분하여 명名으로 표현될 수 있다.



13 우리는 흔히 감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각 대상이 감각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해야 하고, 사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유 대상이 사유와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에만 그 감각이 착각이 아닌 바른 감각이 되고 그 사유가 그릇된 사유가 아닌 바른 사유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개체적인 물질 또는 보편적인 관념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의 마음을 떠나 그 자체로서 객관적 실유성을 가지는 것이 된다. 그 중에서 개체적 물질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유물론’이 되고, 보편적 관념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독단적 관념론’이 될 것이다. 그 둘을 모두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는 경우라면 ‘이원론' 내지는 ‘다원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 유부의 논사들은 다원적 실재론자이다. 그들은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心法)이나 ‘마음의 작용'(心所法)과 독립하여 개체적 물질(色法)이나 보편적 관념이 각각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유식의 논사들은 일체 경境의 객관적 실유성을 부정한다. 심과 심소心所 이외에 물질이든 관념이든 그것이 인식 대상인 이상 인식 주관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15 엄밀히 말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식일 뿐이다. 식 너머에 식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외적 세계란 것도 실제로 식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식 안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21 전자와 같이 시작과 끝이 맞물린 완료된 원은 언제나 동일한 괘도를 달려야 하는 비역사적 순환만을 가능하게 하는 데 반해, 후자처럼 원의 끝(현행된 존재)과 시작(존재의 인식)이 서로 다른 이지러진 나선형 원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변천하는 역사성이 가능해진다. 바로 그 끝과 시작 사이의 간격, 다시 말해 인식과 존재, 식과 경이 벌어져 있는 그 틈새 사이로 우리의 경험과 개념의 변천사, 우리 삶의 역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22 가假의 현상 세계를 창출해 내는 아뢰야식의 전변 활동, 그 무한한 에너지의 심층 활동이 자각되지 않은 채 가려져서 의식되지 않는 상태를 유식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 무명으로 인해 욕망과 집착의 자기 의식(말나식)과 분별적 대상 의식(의식)이 발생하며, 그러한 표층적 의식 활동(業)이 종자를 낳고 그 종자가 다시 심층의 아뢰야식을 형성하며, 그 심층 아뢰야식의 종자가 다시 또 표층의 현상을 구성하는 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25 대승 경전은 유식계 경전인데, 유식은 중관의 공 사상을 계승하여 아공 · 법공을 인정하면서도 공으로서의 마음이 만들어 내 는 가假의 현상 세계를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일체가 공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대상 세계가 존재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가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마음의 활동성을 철학적 분석과 논의의 중심 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식은 유부의 실재론과 중관의 공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1장 색의 실유성 비판
32 불교 인식론에 따르면 현재적 인식이란의미에서 현량에 속한다. 현량의 감각 대상은 바로 시공간 상의 구체적 대상인 개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는 우리의 오감에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사람이든 소돈 꽃이든 시공간을 점한 구체적 개체라는 점에서는 돌맹이와 다를 바 없으며, 그 점에서 그것은 돌맹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이다. 이러한 물질을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한다.



33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 없어질 수 없는 것, 한마디로 말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물질(색)의 궁극적 미립자를 불교에서는 극미極微라고 한다.



43 일체 존재에 대해 배중률은 지켜져야 할 원리이다. 그러므로 극미에 대해서도 극미는 방분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방분이라는 말은 방향적인 부분, 즉 공간적인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극미가 방분을 가진다는 말은 극미가 각각의 부분으로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부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지지 않으며, 경량부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진다. 그런데 유식은 그 두 경우를 다 검토해 보고는 두 경우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극미라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52 유식은 감각적 인식 상태인 현량에서는 그 대상이 인식 내적인 것인가 인식 외적인 것인가 하는 분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량적 인식은 무분별적 인식이다. 현량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식 외부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인식 내부와 인식 외부의 분별, 의식 내적 표상과 의식 외적 사물의 분별은 현량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전오식의 대상으로서의 경은 그 대상을 반연하는 전오식을 떠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60 근根이란 인식을 야기시키는 능력으로 설정된 일종의 가설이지, 객관적 물질 존재 즉 색법色法으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식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시설된 것이지 그 존재가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현량 대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2장 명의 실유성 비판
65 만일 보편이 실재한다면 우리의 개념적인 분별적 인식은 단순한 허망분별이 아닌 참된 인식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만일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개념적 분별은 객관적 기준을 결한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분별이 되며, 그러한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되는 인식은 모두 허망성을 벗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이 일반 명사를 명名이라고 하고, 개념들 간의 연관에서 성립하는 명제를 구句라고 한다.



69 명구문신은 바로 그러한 형식적 질서를 가장 일반적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중 명신名身이 개별적 현상 사물에 부여되는 '이름'에 상응하는 개념적 실재라고 한다면, 구신句身은 그러한 현상 사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문장'에 상응하는 명제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유부는 이런 명신이나 구신이 그 이름이나 문장을 인식하는 우리의 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본 것이다.



70 유식唯識에서는 말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는 의미생기론의 관점을 취한다. 한마디로 말해 객관적 실유로서의 보편 또는 보편적 의미체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에 따르면 말소리와 그 말을 통해 생겨난 의미를 담고 있는 음운굴곡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의 음운굴곡이 곧 뜻을 나타내는 것이되, 그 뜻은 소리를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비로소 의미를 생성시키는 것이기에, 말을 떠난 독립적 의미체 또는 보편 실체로서의 명을 따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79 감각에 주어지는 사물의 속성은 감각의 순간에 개별적으로 포착되는 표상이다. 그처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표상을 그 각각의 자체 상이라는 의미에서 자상이라고 한다. 직접적 인식인 현량의 대상이 곧 자상이다. 반면 자상들을 비교 분석하고 추상화하여 개념으로 얻게 되는 표상은 더 이상 자상이 아니다.



79 속성 담지자로서의 실체, 의식 대상으로서의 법은 의식의 분별 구조에 따른 개념적 구성물일 뿐이다. 이 개념적 구성물은 추상적이므로 일반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을 공상共相이라고 한다.



83 존재론적으로 그렇게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제의 장미와 오늘의 장미를 동일한 하나의 장미로 보고, 한 촛불이 다 타오르도록 그 불꽃을 동일한 하나의 불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자기동일적 무엇인가가 변화하는 현상 배후에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찰나생멸하는 현상의 배후에 상정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이란 단지 우리의 언어 구조에 따른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다. 유식 역시 이와같은 경량부적 통찰에 따라 의식에 의해 사유되고 집착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은 의식 자체에 의해 분별되고 설정된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념적 분별은 실유의 보편이 상응하지 않는 허망분별일뿐이다.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 또한 허망분별의 개념인 것이다. 즉 감각적 현량 안에서 구체적 자상으로 주어지는 개별적 존재를 넘어서서 일반화된 개념으로 표현되는 보편이란, 단지 우리들 식의 허망분별의 결과일 뿐이다.



90 가假는 실재하는 실實과 대립적으로 사용된 개념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 의해 잘못 집착된 실과 대립적으로사용된 개념일 뿐이다. 즉 가假 너머에 실實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식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보편이든 색이든 명이든 모두 그것을 인식하는 식 너머에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유가 아니다. 실유적 존재가 아니기에 가라고 한다.



제3장 식의 심층 구조
92 인식이란 인식 주관이 인식 객관에 대해 무엇인가 알게 되는 활동 또는 그 활동 결과를 뜻한다. 이처럼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 작용을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연緣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식하는 주관은 '능히 연하는 것'으로서 능연能緣이 되고, 인식되는 객관은 '연해지는 것'으로서 소연所緣이 된다. 유식은 인식 주관인 능연을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인식 객관인 소연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92 유식에서의 인식이란 능연의 식이 소연의 경을 연하는 활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견분이 인식 객관인 상분을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인식 활동을 헤아림이라는 의미에서 량量이라 하기도 하는데, 능히 헤아리는 능량能量은 인식 주관을, 능량에 의해 헤아려지는 소량所量은 인식 객관을 의미한다. 인식 활동이란 곧 능량과 소량 사이에서 성립하는 량이며, 그런 활동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인식 자체는 헤아림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양과라고 한다.



95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과 상분의 대립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그 둘이 분리 대립되기 이전의 주객포괄의 초월적 근거로부터 이분화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식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견분이 상분을 연하는 것이지만, 그 내적 근거로부터 보면 그러한 견상이원화 이전의 통합적 근거인 식 자체가 견상으로 이원화되는 활동, 즉 식 자체의 주관과 객관으로의 자가이분화 활동이다. 유식에서의식의 개념 안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96 이러한 견상 또는 주객을 초월해 있는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견과 상, 주와 객이 분리되어 있는 지평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스스로 이원화하는 식자체의 활동은 과연 어떤 활동인가? 유식은 이와 같은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을 변變 또는 전변轉變이라고 칭한다.



97 우리가 객관적 · 독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식의 대상 즉 소연경은 실제로 식 자체의 전변 결과 즉 식소변이라는 것이 유식 식전변설의 요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식소변으로서의 대상과 마주한 인식 주관인 능연식으로서의 견분 역시 식 자체가 아니라 식이 전변한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주객으로 관계하는 식이 소연경을 연하는 능연식이라면, 스스로 이원화하여 소연경 자체를 산출해 내는 식은 그와 구분되는 능변식이다.



99 자증自證이란 그 스스로 명증적이라는 뜻이다. 한 인식의 참을 다른 인식에 의거하여 증명하는 것을 타증이라고 한다면,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명중적인 것을 자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식자체를 자증분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엄밀히 말해 자증적인 것은 견분이 상분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 인식 결과, 즉 양과量果이다. 인식 객관은 소량所量이고 인식 주관은 능량能量이며 능량이 소량을 인식하여 얻은 결과가 곧 양과인데, 이 양과가 바로 자증분이다. 식 자체로부터 능량과 소량이 이원화되고 인식이 발생하여 양과가 얻어지므로 유식은 이 셋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103 자증분이 대상의 인식에서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매개하는 공동 근거라면, 증자증분은 반성의 순간에 자증분(현재)과 견분(과거)을 매개하는 공동 근거이다. 견분과 상분으로의 주객 이원화가 식체의 공간적 이분화 즉 공간화라면, 자증분과 견분 즉 기억 주체(현재 주관)와 기억 대상(과거 주관)으로의 이원화는 식체의 시간적 이분화 즉 시간화이다.



104 대상세계(상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 인식 주관(견분)을 확증하는 자증분에서 찾아지고, 그 인식 주관(견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것(견분)을 다시 인식하는 주관(자증분)을 확증하는 증자증분에서 찾아진다. 이처럼 자증분은 나와 세계, 견분과 상분으로 이분되는 식의 공간화 활동으로서의 주객을 포괄하는 공간적 지평을 함축하며, 증자증분은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인식하는 나{지증분)와 인식된 나(견분)로 이분되는 식의 시간화 활동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포괄하는 시간적 지평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의 공간적 · 시간적 지평은 자증분과 중자증분의 식체 자체의 변현으로 설명되므로 그 이상의 부분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105 제 1능변식인 이숙식은 제8 아뢰야식이고, 제2능변식인 사량식은 제7말나식이며, 제3능변식인 요별경식은 제6 의식과 전오식을 포함한 여섯 식(六識)이다.



110 말나식이 의식의 근인 의意의 식이라는 말은 곧 대상 의식의 소의근인 의意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이라는 뜻이다. 제6 의식이 의意에 근거해서 법法인 대상을 인식하는 대상 인식이라면, 제7 말나식은 그처럼 대상을 인식하던 의意 자체의 자기 의식 또는 자기 인식이다.



110 여기서 말나식의 소의와 소연은 아뢰야식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그 행상은 사량思量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말나식의 고유한 인식 작용을 의식에서의 대상 요별과 구분하여 사량이라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사량이란 어떤 인식 작용을 말하는가? 사량의 사思는 마음의 인위적 조작을 의미한다.



112 이처럼 찰나생멸적 현상에 대해 자성을 가진 법을 실체로 상정하여 그에 따라 현상 세계를 요별해 내는 우리의 의식 활동 근저에는 바로 자기동일적 법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유식은 법집이라고 한다. 의식의 자기 안과 밖, 자아와 외부 세계의 분별, 그리고 대상 세계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구조짓는 분별 활동의 근저에는 이미 자기동일적 법이 실재한다는 헤아림, 즉 근원적 법집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근원적 법집이 말나식의 사량에 속한다.



112 제6 의식이 의식에 담겨지는 내용을 자신 밖의 세계로 대상화하는 식이라면, 그 의식의 소의근인 의章, 즉 말나식은 바로 대상화를 행하는 자신에 대한 식인 자기 의식이다. 자기 의식으로서의 이 말나식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의식을 가지는 자', 즉 '의식된 세계를 가지는 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식의 내용이 바뀌고 사라져도 그 자신은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이런저런 의식의 변화를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식에 대해, 그리고 그 의식 안에서 인식된 세계에 대해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주재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113 말나식은 대상화를 수행하는 제6 의식(대상 의식)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자기 의식으로서, 바로 그 안에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바로 이와 같이 세계를 객관적 실체로, 자아를 항상적 주재자로 헤아려 집착하는 번뇌적 작용을 뜻한다. 우리 마음의 표면에 등장하는 의식이란 바로 이러한 근본적 집착 위에 수행되는 제약된 분별 활동일 뿐이다.



114 의식이나 말나식의 심층에 존재하면서 그들 식이 남긴 흔적을 종자로서 간직하는 식을 유식에서는 제7 말나식 다음의 식이라 해서 제8식이라고 한다. 이 식은 종자들을 함장한 식이라는 의미에서 장식이라고 불리며, 이를 음역하여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잠재적인 종자들의 총체이다. 이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이 감추어진 식으로서, 우리가 흔히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마음이다. 제8 아뢰야식은 모든 식 작용의 근본 전제가 되므로 본식이라고도 한다.



119 불교는 우리의 업은 그 자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형태의 흔적을 남긴다고 본다. 인간의 업이 남기는 흔적, 그것을 유식은 종자라고 말한다. 이 종자를 가리켜 업이 남긴 흔적, 남겨진 습관적 기운이란 의미에서 '습기'라고도 한다. 이 종자 또는 습기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남겨진다. 이처럼 업이 남긴 종자가 함장되어 있는 곳, 또는 그 종자 자체의 흐름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업이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인 종자로서 계속 남아있다는 말은 그것이 어느 순간에는 다시 그 자신의 경과를 낳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자란 아뢰야식 내에 머물러 있다가 때가 되면 그 내용에 따라 다시 자신의 결과를 낳는 세력이다.



127 신체와 기세간 그리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식소변이러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뢰야식의 상분으로서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함장 유지되고 있는 종자와 그대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종자생종자의 과정 속에 있는 잠재태의 종자인 데 반해, 상분으로서의 종자란 그런 잠재적 종자가 인연이 갖추어져 현실화된 종자생현행 결과로서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잠재적 종자가 현행화하여 견상으로 이원화됨으로써 비로소 상분으로서의 종자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신체나 기세간의 색법으로가 아니라 관념적 또는 정신적 형태로 현행화한 종자를 뜻한다. 의식이 포착하는 관념의 세계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27 유식은 감각 능력을 갖춘 우리의 신체를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간주한다. 이는 곧 '인간의 신체란 인간 마음의 변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29 신체와 그 신체가 의지해 사는 세간이 아뢰야식의 전변이라는 말은 그것들이 바로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종자가 현상으로 현실화되는 종자의 현행 결과라는 말이다. 종자는 이전의 업이 남긴 흔적, 즉 업력이다. 그 업이 개인적 업이 남긴 종자인 불공종자일 때 개인적 신체가 형성되고, 개인을 넘어서는 공동의 업이 남긴 종자인 공종자일 때 공동의 기세간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130 신체와 기세간이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이리는 것은 인간과 우주 존재의 시원에 대한 불교적 존재론 또는 우주론을 말해 주는 것이다. 



130 불교는 오히려 물질을 유정의 업으로부터 설명한다. 이 때 유정이라 함은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인식 작용을 가진 존재, 즉 동물적 생명체 일체를 의미한다. 불교는 유정의 업으로부터 그 결과로서의 유정의 신체와 그 신체가 의지하여 살게 될 기세간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138 우리는 그렇게 현상 세계를 생성하는 우리 마음의 심층의 활동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형성이 완료되어 나타난 현상 세계, 즉 이미 현행화된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 세계이지 현상을 형성하는 마음의 활동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 세계를 우리의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여라고 생각할 뿐 우리 자신의 마음이 창출해 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139 의식과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활동을 알지 못하기에, 그 무지로 인해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견분과 상분을 마치 식 바깥의 객관적 실재인 듯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뢰야식의 견분을 객관적 실체인 자아로 아뢰야식의 상분을 또 다른 객관적 실체인 세계로 집착하는데, 이것이 곧 아집과 벌집이다.



146 이렇게 보면 아뢰야식의 전변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전변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전변은 우리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존재론적 전변으로서의 변현이며, 의식과 말나식의 전변은 그런 현상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론적 전변으로서의 분별이다.



제4장 식과 경의 관계
156 아뢰야식 내의 잠재적 종자가 구체적인 현상 세계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종자의 현행화라 하며, 이를 종자생현행이라 한다. 종자가 현행화한 결과가 바로 이 세계이다. 이는 세계를 아뢰야식의 외화, 종자의 자기실현으로 보는 것이다. 종자란 현상 세계를 창출하는 변화 차별의 공동이며, 현상 세계란 바로 그 공능의 자기실현이다. 종자가 현행화하여 구체적인 현상 세계를 이룬다. 현상은 종자의 현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은 아뢰야식이 형성하는 세계를 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세력으로서의 종자들이 현상화되어 나타난 세계, 즉 식이 전 변화한 결과, 한마디로 식소변이라고 밝힌다.



157 의식과 말나식의 활동에 의해 우리 마음에 종자가 심어지는 과정을 유식에서는 종자의 훈습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현행훈종자이다. 땅 밑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나무가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땅에 심는 것과 같다.



160 상분인 기세간과 견분인 마음의 작용, 이 둘은 아뢰야식 자체의 변현 결과이다. 그런데 이 식의 활동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그들 식소변을 각각 별개의 실체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량분별하는 현행식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의식과 말나식의 작용이다. 이를 아뢰야식의 변현과 구분하여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이라고 한다. 앞서 논의하였듯이 현행훈종자로서 종자를 훈습하는 현행식은 현행 아뢰야식이 아니라 바로 현상을 집착 분별하는 현행 의식과 말나식인 것이다.



164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 · 말나식의 분별 사이에서 순환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은 바로 우리 식의 활동을 주도하는 종자이다. 의식 · 말나식의 분별 작용을 통해 아뢰야식 안에 심어졌다가 다시 현상 세계로 변현하게 되는 종자, 즉 명언종자인 것이다. 여기서 명언이 함의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또 그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사량분별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명언, 즉 개념 또는 언어라는 것이다.



169 이처럼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을 그 현상 근거로서의 식을 사상한 채 실체화하고 고정화하여 집착 · 분별하는 것을 '두루 계산하여 집착한다'는 의미에서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170 즉 인연에 따라 변현된 의타기의 현상 세계를 욕망과 집착에 따라 허망분별하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집과 법집을 벗어 버린 의타기의 현실 자체를 유식은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172 아我와 법法이 의타기의 가유假有이고 실아실법의 실유實有가 아니라는 것을 앎으로써 변계소집을 벗어나면,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서 그 여여如如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 현상의 참된 모습을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집과 법집에 기반한 의식과 말나식의 허망한 계탁분별을 벗어나면 현상은 심층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으로, 인연변의 의타기소생으로 원만성취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의타기로부터 변계소집을 떠나면, 즉 아집 · 법집의 실체화를 떠나면 그것이 곧 원성실성이다.



179 아뢰야식의 변현 활동 자체를 자각함으로써 심층의 무명이 제거되고, 그리하여 식소변의 현상을 실체화하여 집착하는 변계소집이 극복된다. 아뢰야식의 변현 결과인 현상이 바로 아뢰야식의 변현 그 자체로서 올바르게 인식되므로 더 이상 의식이나 말나식의 변계소집에 의한 왜곡된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88 현상에 대한 일체의 앎은 무명으로 인한 집착이 배제된 차원에서 다시 긍정된다. 자각된 의타기는 곧 청정의타기이므로, 그 의타기에 따라 변현하는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은 변계소집을 벗은 무분별후득지가 된다. 깨달은 자는 다시 이 무분별후득지로써 의타기의 생사를 사는 중생의 고를 더불어 알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본무분별로서의 지혜와 함께해야만 하는 보살의 자비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식학파가 유식무경으로써 논하고자 한 것은 일체 현상 존재의 유식성이지만, 그러한 유식성을 밝힘으로써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유식성의 내적 자각 즉 마음의 활동성에 관한 내적 직관이다. 이 유식성의 자각이 곧 아공 • 법공의 깨달음이다. 



189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자기 마음의 활동을 단 한 점의 무의식적 잔재도 남기지 않은 채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이다. 그처럼 투명해진 마음, 세계가 어떻게 마음의 활동을 통해 현현하게 되는가를 여실히 직관하는 그 진여심에서는,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식과 경의 관계가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 묘妙의 관계가 된다.



맺는말
192 그깨달음의 유식적 표현이 바로 유식무경이다. 그러나 유식 논사들의 위대함은 그 깨달음 자체에 있지 않다. 인간이 존재하는 전세계 그 어느 곳에 그와 같은 깨달음이 없는 곳이 있겠는가? 그들의 위대함은 단순히 수행적 깨달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이론화하고 체계화했다는 데 있다.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말로 드러내고자 한 것, 말을 떠난 진여眞如를 방편적 말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 현상초월적 깨달음의 의미를 현상 세계의 분석을 통해 밝혀 내고자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무경은 수행적 깨달음의 내용인 동시에 일체가 가상임을 논증하는 이론적 작업이기도 하다.



195 유한한 일체의 현상을 넘어서서 무한으로 비약하게 되는 초월의 경험이 바로 유식성의 자각이다. 초월의 경험은 곧 경계 너머로의 자유의 자각이며, 해탈의 깨달음이다. 그와 같은 현상초월적 눈의 주체는 우주 바깥의 신도 아니고 우주를 창조한 브라흐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누구나의 마음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진실한 성품 곧 불성이자 여래장이며, 한마디로 말해 일심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이 유식무경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 - 불교신문

유식무경(唯識無境) - 불교신문

유식무경(唯識無境)


승인 2002.09.01

앎의 교리 삶의 교리 <31>

인식 속에서만 대상 존재

우리 눈앞의 대상은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모든 사물은 의식의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텔레비전은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은 과연 텔레비전 속에서나마 실재하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모두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동일한 인식의 대상이면서 단순한 외견이나 착각, 환상, 허구와 같은 것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진실된 자세’란 무엇일까요.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존재인 현상을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의식과는 분리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보고(眼) 듣고(耳) 맡고(鼻) 맛보고(舌) 부딪치는(身) 개별적인 인식 활동은 의식(意識)이 종합하고 통제합니다. 만일 의식(제6식)이 여러 인식활동(전5식)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혼돈 속에 빠지겠지요. 뇌의 갑작스런 혈액 순환 장애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팔다리의 수의(遂意) 운동이 불가능해진 중풍(腦卒中) 환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손과 발 등 몸의 반쪽이 그의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말을 듣지 않지요. 

이러한 마비(痲痺)현상을 한의학에서는 ‘불인(不仁)하다’고 합니다. 은행씨(杏仁)나 복숭아씨(桃仁)처럼 혈액이라는 생명의 씨앗(仁)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즉 생명 활동의 커뮤니케이션(識)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不仁) 뜻입니다. 때문에 의식은 즉 의사 소통 내지 혈액 순환 등 생명활동의 기반이 되지요. 그런데 이 의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통섭하는 의근(意根)과 비감각적 대상(法境)을 인연으로 하여 생깁니다. 인식 활동인 이 식은 여러 교리에서 설명되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존재의 다섯 가지 요소(五蘊) 가운데 다섯 번째인 식과, 열 두 가지 인연 생기(十二緣起) 중의 세 번째인 입니다. 특히 이 식은 ‘유식’(唯識)이라는 말에서 보다 심화되지요. 표층의식인 제6식과 심층의식인 제7식과 제8식 내지 제9식으로까지 설명됩니다. ‘식’은 ‘의식’ 내지 ‘인식의 작용 그 자체’를 말하지요. 

이 식은 ‘비즈냐아나’(vijn~a-na)‘비즈납띠(vijnapti)로 변별됩니다. 이는 인식의 주체로 보느냐 활동으로 보느냐에 의해 분기되는 것이지요. 
‘비즈냐아나’(識)는 ‘식 자체’ 내지 ‘어떤 대상을 내용으로 하는 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식’은 ‘항시 변하고 있는 흐름으로서의 식’입니다.
‘비즈납띠’는 ‘인식되어진 것’ 또는 ‘인식의 내용’ 내지 사물의 겉모습인 ‘표상’(表象)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흔히 인식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물은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지 내 마음에 나타난 사물의 겉모습(表象)일 뿐이며, 모든 사물은 내 의식의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影像)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식 속에서만 대상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주관적 관념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유식학을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유식 역시 연기·무자성·공의 입장에서 존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세친은 그의 〈유식이십론〉(실은 22송)에서 대상의 비실재성을 논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물의 시간적, 공간적 구별, 동일한 대상의 인식, 대상에 따라 취하는 성공적인 행위들에 대한 설명을 꿈의 현상에 대비하여 해명하지요. 
즉 악업으로 지옥에 떨어진 이들에게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는 지옥의 문지기들은 객관적 존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지기들은 단지 지옥의 고통을 받는 이들의 나쁜 업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결코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문지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업이 남긴 힘’ 또는 ‘습기’(習氣)는 모두 우리의 식 안에 내재한다는 것이지요. 세친은 우리의 인식은 모두 식 자체의 종자(씨앗)로부터 생겨나는 것일 뿐이며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식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중국 자은(법상)종에서 ‘안난진호(安難陳護)1·2·3·4’라는 말로 식의 사분(四分)설을 제기한 것도 바로 ‘대상’을 ‘인식’ 속에서 해명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식이라는 것도 실체는 아닙니다. 폭포수와 같은 하나의 흐름일 뿐이지요.

고영섭/동국대 강사

알라딘: 노자(老子),최재목 (옮긴이)을유문화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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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  | 을유세계사상고전
노자 (지은이),최재목 (옮긴이)을유문화사2006-12-15
















































Sales Point : 1,714

9.1 100자평(4)리뷰(3)
324쪽
책소개
현존하는 최고(最古) 판본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 <노자>의 완역서. 관점초묘죽간본 <노자>는 1993년에 중국 초나라 시기의 무덤에서 죽간의 형태로 출토된 것이다. 초기 노자 및 그 학파의 생생한 목소리를 발견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판본에서 보이는 각 장(章) 배열의 순서나 문장 해석상의 여러 의문점을 풀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고전의 현대적 접근을 표방하여 기획된 <을유세계사상고전시리즈> 중 한 권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초간본 <노자>의 원형을 보여주는 도판과 그 원문이 실려 있고, 노자와 <노자>에 대한 종래의 연구 성과가 직접 비교 정리되어 있다.

또한 각 경문에 대한 음독과 해석, 각 장의 해설뿐만 아니라 초나라 시대 한자와 현대의 상용한자를 함께 수록하고 그 형성 과정과 의미 등을 1,000개가 넘는 주석을 통해 풀이하고 있어 노자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목차


머리말
일러두기

노자와 <노자>, 그리고 초간본 <노자>에 대하여

갑본(甲本)
초간본 <노자> 갑본 도판
제1장 지모를 끊고 괴변을 버리면
제2장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되는 까닭은
제3장 죄는 욕심 부리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다
제4장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제5장 먼 옛날 훌륭히 일을 잘 해내는 사람
제6장 일삼아 하려고 하면 실패하고
제7장 도는 항상 무위이다
제8장 함이 없음을 한다
제9장 천하 사람들이 모두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제10장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제11장 무언가가 있었는데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2장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제13장 텅 빔을 이루는 것이 지극하고
제14장 형세가 안정되었을 때는 유지하기 쉽고
제15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제16장 정당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제17장 덕을 품음이 두터운 사람은
제18장 이름(명칭)과 몸(생명), 어는 것이 절실한가?
제19장 반대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제20장 지속해서 채우려는 것은

을본(乙本)
초간본 <노자> 을본 도판
제1장 백성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
제2장 배우는 사람은 [배울 것이] 나날이 늘어나고
제3장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제4장 사람들이 총애와 수모에 어지러워지는 것처럼
제5장 높은 경지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제6장 문을 닫고, 구멍을 막으면
제7장 크게 담은 것은 비운 것과 같다
제8장 잘 심은 것은 뽑히지 아니하고

병본(丙本)
초간본 <노자> 병본 도판
제1장 최선의 통치자는 아래에서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제2장 지대한 형상을 잡게 되면
제3장 군자는 평상시에 왼쪽을 높이고

부록_ 관점초묘죽간본 <노자> 교정문(校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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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았으며
땅은 하늘을 본받았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았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은 것이다.

- 본문 11장 '무언가가 있었는데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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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노자 (老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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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에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창시한 철학자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노자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사마천의 『사기』 중 「노자열전」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경에 초나라의 고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춘추시대 말기에 주나라의 장서실(藏書室, 오늘날의 국립도서관)을 관리하던 수장실사(守藏室史)로 활동했다.
일설에 의하면, 공자가 젊었을 때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도 한다. 주나라가 쇠퇴하자 노자는 은둔하기로 결심하고 서방(西方)으로 떠나는 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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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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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기를 보냈다.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현재까지 시를 꾸준히 써 오고 있다.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도중 일본으로 건너가 츠쿠바 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방문학자·객원 연구원으로서 하버드 대학, 도쿄 대학, 레이던 대학, 베이징 대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영남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대충 제멋대로 별 재미없이 살아가고 있다. 닉네임은 돌구乭九, 돌돌乭乭, 목이木耳 등을 쓴다. 한국양명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전공은 동양철학 중에서 양명학과 동아시아사상사이다. 동양 밖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보다 객관적인 눈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2011년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으로 가서 연구년을 보냈다. 이때 틈틈이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끼고 사색한 것들을 기록하여 [교수신문]에 2년간 연재했는데,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는 그 원고 내용을 다듬고 보완한 것이다. 유럽 곳곳을 유랑하며 얻은 영감, 인문적 아이디어와 상상 속에서 여러 철학자, 문학가, 예술가의 글과 작품들이 서로 대화하며 다채롭게 얼굴을 드러낸다. 여기에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틈틈이 그린 그림, 딱 100자로 된 시들이 어우러지며 시각적인 즐거움과 깊은 사유의 여운을 전해준다.

저서로 『동아시아의 양명학』, 『나의 유교 읽기』, 『멀고도 낯선 동양』, 『쉽게 읽는 퇴계의 성학십도』, 『내 마음이 등불이다―왕양명의 삶과 사상』, 『늪―글쓰기와 상상력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노자』, 『퇴계심학과 왕양명』, 『東亞陽明學的展開』, 『사이間에서 놀다遊』 ,『시를 그리고 그림을 쓰다』, 『잠들지 마라 잊혀져간다』,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언덕의 시학』, 『상상의 불교학』,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 등이 있고, 공역서로 『왕양명선생실기』, 『미의 법문』, 『근대라는 아포리아』 등이 있다. 시집 『점에서 만난 타인들』, 『기다리는 꿈』,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 『길은 가끔 산으로도 접어든다』, 『가슴에서 뜨거웠다면 모두 희망이다』, 『잠들지 마라 잊혀져 간다』, 『해피만다라』,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 등이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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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일단은 한자에 음이 달려 있어서 따로 한자를 찾는 불편은 없어 편하고, 뒷부분에 해설도 있어 읽는데 도움이 되네요~
2012-11-0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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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알던 도덕경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주석이 매우 자세하다
책수집가 2014-11-15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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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이 진짜 굉장히 상세하다. 놀랐을 정도. 다만 본문보다 해설이 길다는 느낌은 강함
히버드 2020-05-0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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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죽간본이라 그런지 내용이 좀...





책 앞부분 70페이지가 노자(사람 및 책)와 시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 읽고 나니 왜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 이해가 됩니다. 동시에 죽간본을 선택한 게 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본문을 펼치자 먼저 기가 죽었습니다.

고대 한자가 현대 한자와 다른 게 많더군요. 게다가 당시에 한자의 수가 지금에 비해 엄청나게 부족한 터라 빌려 쓴 글자도 많고. 그래서 읽어도 해석이 안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가 죽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상당히 짧습니다. 다른 노자(이른바 도덕경)는 5천여 자에 이르는데 이 죽간본은 초기 것이라 그런지 2천여 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 읽은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책이 생각 났습니다. 널리 알려진 백서본은 내용이 뒤죽박죽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래에 있던 책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늘어나고 또 순서가 엉켜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간의 상태가 너무 좋아 보이는 것과 너무 최근(1993년)에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이 좀 찜찜합니다. 물론 탄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을 했었겠지만, 이것 저것을 함께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발굴된 곳이 중국이고 얼마전 일본에선가 유명한 고고학자에 의한 가짜 고대 유물 사건도 있었고요.

중국 고대 사상에 관한 책으로는 처음 읽는 셈이라서 잘못 판단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것들을 읽다 보면 이 리뷰를 고쳐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2008년 6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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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 2009-05-25 공감(3)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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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21 동양고전강좌/地下의 노자와 紙上의 노자





위나라의 학자였던 왕필(王弼, 226-249)은 중세 중국의 관념론적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가 쓴 [노자주(老子註)]와 [주역주(周易註)]는 수ㆍ당 대에 성행했고,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읽는 대부분의 [노자]는 왕필의 [노자]다. 왕필이라는 천재적인 학자가 주를 달고 정리한 그 [노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정치적 목적에서 공자의 유학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그러다보니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는, 혹은 본래의 뜻과는 상반된 의미로 왜곡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







굳이 원본 [노자]면 어떻고 왕필의 [노자]면 어떤가. 내 삶에 지침이 되고 활력이 된다면 상관없다는 식의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 건 없다. 어떤 텍스트 건 읽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재해석이 되기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노자]가 원래의 [노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여러 사람의 욕망이 투영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도 중요하다. 알아야 맹신에 빠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老子, 마이너스 철학으로 리더를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동양 사상 강좌 후반기를 이끌어갈 강사는 이승률 교수다. 첫날 강의의 제목은 “地下의 노자와 紙上의 노자”.







왕필의 [노자]는 ‘紙上의 노자’다. 3세기의 학자가 정리한 [노자]인 것이다. 그러다가 1973년 제후급 무덤인 마왕퇴에서 비단에 쓴 [노자]가 출토되었다. 이름하여 ‘마왕퇴백서(帛書)’라고 불리는 이 판본에 의하면 글자 수는 현행본과 거의 비슷한데, 갑/을 2종의 판본이 존재한다. 한대(漢代)의 예서체로 서사되어 있다. 쓰인 시기를 살펴보면 갑본은 B.C. 206~180년 경, 을본은 B.C. 180~157년 경으로 추정한다. ‘地下의 노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3년 곽점이라는 곳에서 출토된 곽점초간(郭店 楚簡)은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모양이다. 연대적으로 가장 오래 된 텍스트가 발굴된 것이다. B.C. 4~3세기로 추정되는 전국시대 초나라 문자로 쓰여진 이 죽간(竹簡)은 현행본 [노자]의 81장 중 1/5 정도에 해당하는 2046字로 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곽점본을 [노자]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텍스트로 본다.







老子라는 인물은 전설처럼 베일에 쌓여 있다. 사마천의 [史記] <노자한비열전>에는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출신으로, 성은 李씨고, 이름은 耳, 자는 耼이다. 주나라 왕실 장서실의 사관이었다.”라고 밝히면서 노담이라는 인물이 노자라는 것을 사실화, 역사화하려 하고 있지만, 사마천은 “世莫知其然否”이라고 하여 노자가 누구인지 확신이 없음을 밝혔다. 사마천이 [史記]를 쓸 때 참고한 자료도 결국 [莊子]였을 것이라고 본다면 원래의 [노자]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이승률 교수는 우리가 [노자]라는 텍스트를 현 상황과 관련된 선입견을 바탕으로 읽으면 원래의 메시지를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곽점초간(郭店 楚簡)에 권위 있는 학자인 그의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노자의 원래 모습을 좀 더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역사의 흐름과 맞물려 원래의 [노자]가 지금의 [노자]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참고 도서]



[노자] 최재목, 을유문화사, 2006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소나무, 2001



[김충열 교수의 노자강의] 김충열, 예문서원, 2004



[노자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김홍경, 들녘, 2003



[백서 노자 백서본과 곽점본ㆍ왕필본의 텍스트 비교와 해석] 이석명, 청계출판사, 2003



[老子] 池田知久, 2006



[老子註譯及評介] 陳鼓應, 1987


http://blog.naver.com/ythsun2

www.renai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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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oo86 2011-10-2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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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최고(最古) 판본




노자의 최고(最古) 판본인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이 1993년 중국 초나라 시기의 무덤에서 죽간 형태로 출토되었다. 그 덕분에 그 이후 판본에서의 오류와 오역을 바로잡아 노자의 사상에 보다 정확하게 다가서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본 노자는 그 의미와 깊이가 한이없게 느껴졌을만큼 감동적이었다. 이러한 노자의 사상을 가까이에서 편리하게 접할 수 있으니 이 책의 출판을 위해 노력한 연구자 와 출판사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바이다.

인문고전을 읽기로 다짐하지 아니하였다면 나는 이 책을 만나지 못해 노자의 사상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을 모른다는 것은 혼란한 세상 속에서 기준을 세우지 못한다는 의미와 함께 자신의 삶에서 부실한 면을 보완하지 못하여 모자란 삶을 살 수 밖에 없음 의미하기도 하리라. 그만큼 <노자>는 나에게 크고 깊은 도전을 주었다!

생각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 인간의 됨됨이의 궁극은? 나는 누구나 그 끝을 꿈꾸고 도달하기 바라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길에는 지도가 없으며 그 도달 방법이 규정되어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 여정에는 멘토가 있으리라. 나는 그 멘토가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남긴 글이라고 확신한다. 땅 속 깊은 곳에 놓여진 죽간(竹簡)이라면 멘토로 삼음이 불가능하겠지만 오늘날엔 이렇게 가까운 곳에 노자(Old Master)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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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Gimm 2013-06-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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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노자(老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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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세무사 2017-03-27

노자: 노자(老子)


노자(老子) - 10점
노자 지음, 최재목 옮김/을유문화사



머리말

일러두기


노자와 <노자>, 그리고 초간본 <노자>에 대하여


갑본(甲本)

초간본 <노자> 갑본 도판

제1장 지모를 끊고 괴변을 버리면

제2장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되는 까닭은

제3장 죄는 욕심 부리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다

제4장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제5장 먼 옛날 훌륭히 일을 잘 해내는 사람

제6장 일삼아 하려고 하면 실패하고

제7장 도는 항상 무위이다

제8장 함이 없음을 한다

제9장 천하 사람들이 모두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제10장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제11장 무언가가 있었는데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2장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제13장 텅 빔을 이루는 것이 지극하고

제14장 형세가 안정되었을 때는 유지하기 쉽고

제15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제16장 정당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제17장 덕을 품음이 두터운 사람은

제18장 이름(명칭)과 몸(생명), 어는 것이 절실한가?

제19장 반대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제20장 지속해서 채우려는 것은


을본(乙本)

초간본 <노자> 을본 도판

제1장 백성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

제2장 배우는 사람은 [배울 것이] 나날이 늘어나고

제3장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제4장 사람들이 총애와 수모에 어지러워지는 것처럼

제5장 높은 경지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제6장 문을 닫고, 구멍을 막으면

제7장 크게 담은 것은 비운 것과 같다

제8장 잘 심은 것은 뽑히지 아니하고


병본(丙本)

초간본 <노자> 병본 도판

제1장 최선의 통치자는 아래에서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제2장 지대한 형상을 잡게 되면

제3장 군자는 평상시에 왼쪽을 높이고


부록_ 관점초묘죽간본 <노자> 교정문(校定文)

찾아보기





머리말

5 다시 말하면 <노자>라는 책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컨대 초간본·백서본·왕필본 등등처럼 여러 종류가 있으며, 주해본·해설서 또한 근대 이전 그리고 이후에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 수없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중 어느 한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종합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온다. 


6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나는 이제까지 발견된 〈노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인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 노자(老子)〉 이하 초간본 〈노자〉를 우리말로 풀이하고 문자고증을 포함하여 상세히 주해하기로 한 것이다. 초간본 〈노자〉는 중국 초(楚)나라 때의 무덤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으로추정)에서 출토된 죽간(竹簡)의 형태로 된 것이다. 초간본 〈노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운운하는 현행본 〈노자〉 훨씬 이전에 성립한 가장 원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판본이다. 따라서 초기 노자 혹은 노자학파의 생생한 목소리를 발견해 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이후 판본에서 보이는 각 장(章) 배열의 순서나 문장 해석상의 여러 의문점을 풀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12 기타 종래의 연구 가운데 이 책에서 비교적 많이 참고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 팽호(彭浩), 〈곽점초간 《노자》 교독(郭店楚簡《老子》校讀)〉(武漢: 湖北人民出版社, 2001).

• 윤진환(尹振環), 〈초간노자변석(楚簡老子辨析)〉(北京 : 中華書局, 2001).

• 료명춘(廖名春), 〈곽점초간노자교석(郭店楚簡老子校釋)〉(北京: 淸華大出版社, 2003).

• 곽기(郭折),  〈곽점죽간여선진학술사상(郭店竹簡與先秦學術思想)〉(上海: 上海敎育出版社, 1999).

• 진고응(陳鼓應), 〈노자금주금역급평가(老子今託今譯及評價)〉 (臺北: 臺灣商務印書館, 2000(3차 수정본)).


이들 저서 가운데 진고응의 〈노자금주금역급평가〉는 이미 언급한대로 최재목·박종연이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책 속에서 '진고옹, ~쪽'으로 표시한 것은 모두 이 번역본의 것을 말한다.


13 이어서, 국내의 많은 〈노자〉 관련 역•저서 가운데 비교적 많이 참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서울 : 들녘, 2003)

• 김홍경,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 노자〉 (서울 : 소나무, 2001).

• 양방웅, 〈초간노자〉(서울 : 예경, 2003).

• 이석명, 〈백서노자- 백서본과 곽점본 • 왕필본의 텍스트 비교와 해석〉(서울 : 청계 , 2003).

• 김충렬, 〈김충렬 교수의 노자 강의〉 (서울 : 예문서원, 2004).


14 책에서 자주 쓰는 '진본(眞本)', '고본(古本)', '금본(今本)', '개작본(改作本)', '통행본(通行本)', 현행본(現行本)'을 개념적으로 구별해 두고자 한다.

• '진본(眞本)'은 고본을 가능하게 한 가장 원초(시초)의 편집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을 '조본(祖本)' 혹은 '원본'이라고도한다.

• '고본(古本)'은 초간본 〈노자〉를 말한다. 만일 초간본 〈노자〉보다 더 원본에 해당하는 것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금본에 대해서는 이것을 고본이라고 부른다.

• '금본(今本)'은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 출토의 백서 〈노자(老子)〉 갑본·을본(이하, 백서본 〈노자〉 갑본·을본), 왕필본(王弼本) 〈노자〉하상공본(河上公本) 〈노자〉부혁본(傅奕本) 〈노자〉 등을 말한다. 금본에는 고본에 없는 내용이 약 60% 이상 추가 되어 있다.

• '개작본(改作本)'은 고본을 개작한 것(예컨대, 태사담의 〈노자〉나 백서본 〈노자〉처럼)만이 아니라, 개작된 금본을 다시 개작한 것(왕필본 〈노자〉 등)까지 포괄한다. 그래서 개작본은 가끔 금본과 동일하게 불리는 수도 있다.

• '통행본(通行本)'은 백서본 〈노자〉와 체제를 달리하며, 내용상 현재까지 통용되는 판본들이며, 그 기준이 되는 판본은 왕필본〈노자〉이다. 따라서 근·현대의 학자들이 교정 ·주석한 판본(즉 '현행본(現行本)')과는 구별하여 사용한다.

• '현행본(現行本)'은 근 ·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 간행되어 통용되는 판본을 말한다. 위의 통행본과 구별된다. 물론 현행본은 왕필본〈노자〉를 표본으로 하면서도 백서본<노자>, 나아가서 최근에는 초간본〈노자〉까지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원문을 교정(校定)한 것이 나오고 있다.


주석 중에서 말하는 '가차자(假借字)'는 당시에 글자가 없어서 서로 상통하는 글자를 임시로 빌려서 쓴 것을 말하고, '이체자(異體字)'는 다른 모양(=형태)의 글자를 말하며, '착오자(錯誤字)'는 잘못 옮겨 적음[誤寫]으로써 생긴 오자(誤字)를 말한다.


노자와 <노자>, 그리고 초간본 <노자>에 대하여

30 한편, 노자는 중국의 종교•정치 등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즉 노자는 도교(道敎)의 신(神)으로서 존숭되고, 신선(神仙)의 상징적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자의 성명(姓名)이 '이이(李耳)'라는 것에서 같은 이(李)씨 성이었던 당(唐) 왕조(고조 이연(李淵))에서는 그를 더욱 신격화하고, 〈노자〉를 〈도덕경〉으로 존숭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는 노자가 인도(印度)에 가서 석가(釋迦)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든가, 석가는 원래 노자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신(=노자의 변화신)이라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 또는 호화설(胡化說)이라고도 함)'과 같은 전설도 생겨나게 된다.


31 우리가 읽고 있는 통행본 〈노자〉는 글자 수가 5천여 자이며 상•하 2편으로 되어 있다. 상편은 37장, 하편은 44 장, 합계 81장으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또 상편은 '도(道)'를 이야기하고 하편은 '덕(德)'을 이야기하기에 상•하편을 각각 '도경(道經)', '덕경(德經)'이라 부르고 양자를 합해서 〈도덕경(道德經)〉이라 부르는 것도 관례화되어 있다. 그런데,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왕필본 〈노자〉에 훨씬 앞서는 백서본 〈노자〉는 통행본 〈노자〉와 비교할 때 상•하편이 뒤바뀌어 있기에 〈덕도경(德道經)〉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노자〉에 왜 상•하편의 분명한 구별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상•하 2편, 81장의 배열 순서가 왜 구체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도 의문시되는 점들이 있다. 통행본〈노자〉는 같은 취지의 글을 치밀한 기획 아래 체계적으로 한 곳에 모았다는 그런 편찬의식은 느낄 수 없고, 단편적인 말을 잡다하게 집성한 책이라 보일뿐이다.


33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자〉(혹은 〈도덕경〉)는 '본래 그대로의 어떤 것(조본 혹은 진본. 금본에 대해서는 고본이라 부름)' 다시 말해서 '노자(老子)리는 인물 혹은 그 동조자나 후계자의 격언집 그대로'가 아니고, 여러 인물들의 개작작업(개작본 과정)을 거쳐서(이것은 고본에 대해서 금본이라 부름)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판본(통행본)'으로 틀이 잡힌 뒤, 다시 시간이 지나면서 정비 작업이 가해져서 완비된 형태의 현재의 판본(현행본)이 이루어진 것이다.


50 왕필본(王弼本) 〈노자〉

그냥 왕본(王本)이라고도 한다. 위(魏)나라의 천재 사상가로 위진현학(魏晉玄學)을 대표하며 24세로 요절한 왕필(王弼 226-249)이라는 인물이 '18세 (243)'에 주석을 단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왕필이 그 당시까지 내려오던 여러 텍스트를 자신의 일관된 틀 속에서 정비•재구성하여 탁월하게 주석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현행본〈노자(老子)〉 혹은 〈도덕경(道德經)〉은 이것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그만큼 왕필본〈노자〉는 현재까지도 가장 훌륭한 판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51 하상공본(河上公本) 〈노자〉

(노자 도덕경) 〈하상공장구(河上公章句)〉라고도 부른다. 한(漢)나라 문제(文帝)때 하상(河上)에 살았던 은둔한 선비(=하상공(河上公)혹은 하상장인(河上丈人)이라고도 함)의 것이라 전해지나 작자는 분명하지 않다. 이 책이 만들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동한(東漢)•서한(西漢)•위진(魏晉) 등 여러 설이 있다.


54 백서본 〈노자〉의 등장

1973년 12월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백서 〈노자〉가 발굴되었다.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168년경이다. 백서란 '백, 즉 비단에 글을 쓴 책[書]'(=비단으로 된 책)이다. 이에 대한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대륙 쪽의 학자들)도 있었으나 별 대수롭지 않다는 평가(대만 학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다시 말해서 백서 〈노자〉에 대한 학계의 반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백서본 〈노자〉에는 갑본(甲本) • 을본(乙本) 2종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차자(假借字, 빌린 글자)가 많다. 이것은 선진 및 한대 초기만 해도 널리 쓰이는 글자가 많지 않았던 탓인데, 당시 학습•상용하던 글자가 3,300자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백서본 〈노자〉 갑본은 진대(秦代)의 판본이고, 을본은 한대(漢代)의 판본으로 보인다. 을본은 갑본을 토대로 다듬어진 것이다.


58 초간본 〈노자〉의 발굴과 그 의의

고고학의 혜택과 중국학의 발전

백서본 〈노자〉가 출토되고 20년 뒤인 1993년 8월 중국 호북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의 초(楚)나라 무덤에서 죽간(竹簡)으로 된 〈노자〉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백서본 〈노자〉보다 2세기 가까이 연대를 소급할 수 있는 것으로 학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초간본 〈노자〉는 통행본〈노자〉와 비교할 때 저자 및 저작 시기가 다를 뿐 아니라 사상 내용 또한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같은 구절도 있지만 분량과 장(章)•절(節)의 순서 면에서도 크게 다르다. 이 때문에 노자라는 인물과 〈노자〉라는 책에 대한 종래의 주장을 흔들어 놓았고, 그 연구 방향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초간본 〈노자〉는 중국에서 최초로 문자통일이 이루어졌던 진나라 이전의 초나라 지역에서 사용하던 문자, 즉 문자통일정책에 의한 표준 자형(字形)이 아닌 가차자(假借字)등으로 되어 있어 읽기가 쉽지 않다.


69 노자의 시상 혹은 그것이 담긴 〈노자〉라는 책의 비조(鼻祖)는 노담이며, 그는 실존인물로 보아야 될 것 같다. 이를 부정할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일단 그렇게 추정해도 될 것 같다. 노자(老子)의 노(老)는 성(姓)이 아니고 존칭이며 노자(老子)는 우리가 흔히 쓰는 '노선생(老先生)', 즉 '늙은 선생 (Old Master)'을 의미한다. 


  노담은 기원전 571 년 이전에 하남성 녹읍현 출생이며, 기원전 535년에서 522년 사이 공자(17-30세)가 방문했을 때, 그에게서 예(禮) 등에 대한 조언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노자와 노담을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하며, 또한 노자와 〈노자〉를 분리해서 이해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기원전 384년에 함곡관에서 윤희에게 도•덕에 대한 상•하권 두 권의 5천여 언으로 된 책을 주었고, 기원전 374년에 진 헌공을 만나러 떠난 태사담은 노담과 다른 인물이며, 백서본 〈노자〉, 왕필본〈노자〉와 같은 개작본은 태사담이 개작한 〈노자〉를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장자(莊子)와 한비(韓非)는 태사담이 개작한, 아마도 백서의 <덕도경(德道經)>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노자〉(=1차 개작본)를 본 사람들이다.


  곽점에서 출토된 초간본 〈노자〉는 통행본 〈노자〉의 '성립 과정'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노담, 그 사람의 사상이 기록된(또는 그의 직계나 그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현재 우리가 보는 완성된 〈노자〉의 '원본(즉 조본, 진본)'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조심스런 부분이 있으므로 일단 '고본'으로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본으로서 죽간본에 담겨 있는, 공자와 동시대인 노담의 말은 그저 '소박한 형태'로서 금본(또는 통행본, 개작본)에서 볼 수 있는 정치철학적 언설 및 유가(儒家)나 타학파를 비판하는 주장·체계·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시기의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