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기자 입력 2019.09.24. 10:30



차은정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A : 다원주의 ‘전체속 부분’만 인정… 부분간 ‘평등한 관계’ 봐야

④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 1941~)

서구중심 ‘절대진리’ 비판에
다원주의 흡수하면서
부분적 진리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전체론 못벗어나
유럽 형이상학 지배한
신체 초월한 로고스로는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놓고
위계적 질서도 해체 못해
쏟아지는 정보홍수 속에서
어딘가에서 온 세계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가 중요


“사방이 적입니다.” 한 학생이 내게 한 말이다. 최근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제목의 인기 웹툰이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것을 보면 그 학생만 하는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다른 한편에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일컫는 줄임말로, 타인과 나누는 행복보다는 혼자서 즐기는 행복에 가까운 의미이다. 이제는 정녕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개념, 즉 인간은 타자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로는 더 이상 인간을 정의할 수 없는 것일까?

‘타인은 지옥이다’에 등장하는 고시원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바로 이 감각, 사람들이 같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학문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비서구의 ‘타문화’를 탐구해 왔던 서구 인류학에서는 이 감각이 학문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다. 1980년대까지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자신들이 비서구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는 데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비서구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자 그 기술이 ‘서구의 시선에 의한 비서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됐다.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에서 비근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위안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의 기술과는 전혀 다른 일제강점기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중에는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반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과도 잘 지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일제강점기에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을 이야기하는 시도는 조선인들이 실제 처했던 현실을 간과한 채 일본인의 편향된 이해를 보여 주는 데 그치기 쉽다.

서구 인류학도 연구 대상인 비서구를 알 수 없다. 20세기 인류학은 서구가 어떻게 비서구를 알 수 있을지를 해명하고자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를 흡수했다. 인류학자들은 비서구에 대한 자신의 기술이 객관적이며 이것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인정했지만 ‘부분적 진리’로서는 학문적 의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부분적 진리란 보통 비서구가 아닌 서구 자신의 이야기로 귀착되고 만다. 타자는 거울이고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는 인식이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이론적 종착점이었던 셈이다.

◇다원주의는 왜 자가당착에 빠지는가?

다원주의는 저마다 다양하고 무수히 많은 세계를 논하려 하지만 왜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귀착되는 걸까? 영국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은 다원주의가 여전히 ‘전체’를 상정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다원주의자들은 더 거대한 차원의 세계(전체)가 있고 그 하위에 작은 세계(부분)가 무수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체에 포괄된 부분들은 아무리 탈중심화하고 이질화하고 파편화한다 해도 끝내 전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전체의 중심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원주의의 자가당착은 세계를 전체로서 구상하고 이해하는 서구 문명 특유의 사고방식인 전체론에서 기인하는 문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전체론의 관점이 근대에 이르러 시각화(신체화)됐다는 점이다. 17세기 유럽에서는 광학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현미경과 망원경이 발명돼 인간 시야의 규모를 조정할 수 있게 됐고, 감각 기관을 통해 시야가 생겨난다는 점 또한 인지하게 됐다. 인간의 수정체는 그것을 본뜬 인공 기관인 현미경이나 망원경의 렌즈와 결합했다. 그러나 인간 개개의 시각을 뛰어넘어 확장된 인공 시야는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인간 문명의 본원적 한계 또한 드러냈다. 인간은 고도로 발전된 전파 망원경으로 블랙홀을 관측하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전파 영역의 빛 너머가 미지의 세계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138억 년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은 기껏해야 빛이 전달해 주는 38만 년의 우주만을 볼 뿐이다. 나아가 우리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들이 있을 것이라는 다중 우주론도 가설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따라서 전체가 과연 존재하느냐는 인식론적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이 전체의 존재를 알 수 없다면, 전체로 구상된 것들이 실은 전체 없는 부분 그 자체이지 않을까?

스트래선은 이러한 발상을 통해 근대 유럽 중심의 전체론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집으며 전체론에서 발동되는 전지전능의 시야를 문제시한다. 서구 유럽의 전체론적 시야는 비서구를 주변으로 밀어낸다. 스트래선에 앞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전체론적 사고가 위계적 질서의 원천임을 통찰한 바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유럽 형이상학의 중심에는 ‘로고스’라는 절대적 법칙이 있다. 데리다는 로고스가 서구와 남성을 중심에, 비서구와 여성을 주변에 위치시켜 왔다고 논했다. 유럽 형이상학은 세계를 전체로 구축하기 위해 초월적 중심을 상정했고, 음성이나 남근으로 이 중심을 상상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객관성’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세계를 중심과 주변으로 구조화하는 위계적 질서를 해체하려면 로고스를 탈구축해야 한다.

반면 스트래선은 로고스(음성이나 남근)를 탈구축한다 해도 유럽 형이상학의 초월성(탈신체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위계적 질서를 해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의 사고를 더 급진화한 것이다. 유럽 형이상학에서는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의 중심에 로고스를 둠으로써 객관성을 보증했다. 그러나 스트래선이 보기에는 로고스가 아니라 ‘신체를 초월해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스트래선은 신체의 부분적 감각을 계속 주입함으로써 전체론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세계에 대한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 놓는 것이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해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다.

◇부분들은 부분적으로 연결된다

전체론은 인류 문명사의 측면에서 낡은 사고방식이다.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많은 문제의 유발 원인으로 지목되는 인간 중심주의는 전체론과 궤를 같이한다. 근대 과학 기술 역시 발전을 거듭하며 자신의 전체론적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어쩌면 전체론이 문명적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약 5000년 전 도시 혁명 이래로 인류가 비대칭적 관계, 즉 힘의 불균등한 관계를 용인하면서 힘 있는 자의 시야를 세계에 대한 앎과 등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비대칭적 관계와 시선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이제는 새로운 관계와 앎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세계를 구축한다. 20세기 사회 과학은 전체를 ‘사회’로 표상했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개인’이 전체가 됐다. 그렇지만 세계가 전체를 포괄하는 일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애초에 실현될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 인간은 각자의 세계에 갇힌 채 타자를 욕망할 뿐인 에로스로 스스로를 불태우며 그 고통을 잠시 잊으려 한다. 하지만 스트래선은 저마다의 세계 속으로 흩어지는 대신 무수한 세계들이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를 되묻는다. 저 유한한 존재들이 한시적 에로스로 자신을 소진하는 것으로는 미래 인류를 위한 지식의 소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라고 구상되는 세계 속에 타자가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타자의 세계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생명의 궤적은 그 각각의 세계가 무수한 관계들에서 나왔음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지식은 세계를 어떻게 전체로 구상하는가에 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온 세계들과 어떻게 관계할 것이며 그 속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에 있다. 스트래선은 21세기의 지식을 캐내는 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으라고…. “계몽주의와 과학 혁명 궤도 바깥의 사회들에서는 관계가 사물의 반대편을 능수능란하게 해명한다. 인류학자는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해 낼 것이다. 요컨대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 메릴린 스트래선은

분야- 인류학-멜라네시아 민족학
사상- 존재론적 전회·비전체론
주요 활동·사건- 영국 사회인류학 비판, 존재론의 인류학으로 이론적 갱신을 선도
약력- 1941년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웨일스 지방에서 태어났다. 교사이자 1세대 페미니스트인 모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을 접했다.

케임브리지대 거튼칼리지에 입학해 사회인류학의 거목 에드먼드 리치와 마이어 포테스에게서 케임브리지 정통 인류학을 배웠다. 1964년에는 동료 인류학자 앤드루 스트래선과 결혼했고, 파푸아뉴기니로 현지 조사를 떠났다. 그때부터 1976년까지 호주와 파푸아뉴기니를 오가며 멜라네시아의 친족과 여성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저서- 1976년부터 케임브리지대 비전임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영국 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에 대한 강의를 5년 동안 진행했다. 이전까지는 사회 인류학 정통에 입각한 연구를 했지만, 영국에 돌아온 직후 시대사상에 둔감한 케임브리지 인류학계의 분위기에 한계를 느껴 당대의 사상적 조류인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을 두루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는 21세기의 새로운 인류학을 예고하는 기념비적 저작 ‘증여의 젠더’(1988)와 ‘부분적인 연결들’(1991)을 출간했다.

특히 ‘부분적인 연결들’에서는 1980년대 페미니즘과 미국 인류학의 문화주의를 바탕으로 근대 유럽 중심의 전체론적 사고를 넘어서는 ‘탈전체론’을 획기적으로 시도했다.

이 책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인지 출간 당시 인류학계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제 의식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한편, 맨체스터대와 케임브리지대 사회인류학 교수로서 부지런히 후학을 양성했다. 그 결과 ‘부분적인 연결들’은 2000년대 이후 인류학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존재론적 전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파의 시초로 재평가됐다.

현재 케임브리지대 명예 교수이며, 팔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왕성한 학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총 15권의 단독 저술, 44편의 단독 논문, 57권의 공동 저술을 발표했고 지금까지도 21세기 인류와 공명하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북한 탐방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4) - 뉴스페이퍼



[북한 탐방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4) - 뉴스페이퍼


[북한 탐방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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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탐방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4)

이금주 매사추세츠 한국평화운동 공동의장
승인 2019.10.08



[북한 탐방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4)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보스턴의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새 학교에 적응하는라 분주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낯선 새 학교. 그래도 따뜻하고 친절한 학교 분위기가 좋다. 다양성이 발산하는 매력도 넘친다. 전세계 50여개 나라 출신의 학생과 교사로 이루어진 학교다. 그냥 보기에는 백인이 대다수이고 동양인, 흑인이 보이는 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민족적 다양성이 방대하다. 50여개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내는 교육 공동체이다.

미국은 이주민의 나라다. 각양각색의 인종과 문화가 각각의 빛깔과 개성을 유지하며 만들어 내는 조화와 통합을 지향한다. 그래서, 많은 다양한 문화들의 통합과 복합체로서의 미국을 “샐러드 그릇(Salad Bowl)”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샐러드 그릇” 안에서 각각의 재료가 고유의 성질을 유지하되 함께 뒤섞여 “샐러드”라는 음식을 만들어 내듯이,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문화가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낸다. 그런 “샐러드 그릇”의 모습을 새 학교에서 매일 발견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이주민 학생들의 출신나라도 다양하다. 한국,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레이트, 브라질, 우크라이나, 중국, 딩카, 수단 등 전세계에서 온 학생들이다. 나의 사랑스런 학생들도 각자의 문화를 학교로 가져와 서로 이해하고 발견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어루어져 하모니를 이루며 생활한다.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언어적 배경이 다른 어린 학생들도 서로 이해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5천년을 함께 해 온 우리 민족이다. 70년을 헤어져 살았어도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뜨거운 피는 5천년의 역사, 문화, 관습을 다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남과 북의 화합과 하나됨은 우리의 DNA에 새겨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어린 중학생들도 다양성 속에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데, 우리도 남과 북이 각자 70년의 세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천천히 한다면 우리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남북의 하나됨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다. 헤어져 살아온 70년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남과북의 평화공존의 가까운 미래를 본다.

평양에서의 첫 밤

보통강 상점 평양마트에서의 장보기는 평양에서의 첫날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다양한 북한상품을 구경하고 이것저것 골라 담는 것도 재미지만 나중에 계산서를 보고 물건의 가격을 확인하는 것 역시 큰 재미다. 강서 약수(24개) 한국돈 2000원, 대동강맥주 1병 800원, 류경소주 1700원, 과자(옥수수 칩) 1봉지 200원, 락화생(땅콩) 1봉지 250원 정도이다. 그 다음날 밤 냉장고에서 시원해진 대동강 맥주를 벗삼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옥수수 칩과 땅콩도 바삭바삭 신선하고 고소하다. 품질이 좋다. 품질대비 가격이 아주 저렴한 편이다. 특이한 점은 영수증에 세금항목이 없다. 안내원에게 나중에 물으니 북에는 세금이 없다고 했다.

평화자동차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평양에서의 첫 밤을 만끽하고 싶었다. 안내원과 기사에게 걸으면서 평양의 밤 풍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갑작스런 나의 밤산보 요청에 두 사람 다 흔쾌히 “ 좋습네다” 로 대답한다. 차에서 내려, 안내원과 함께 이미 어두워져 캄캄한 평양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9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지만 거리 여기 저기에 행인들이 보였다. 도심 공원 주변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인민대학습당이 보인다. 인민학습당은 1982년에 평양 중구역에 세워진 국립도서관이다. 처음에는 이 자리에 정부청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도서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40,000 km2의 한국전통의 합각지붕으로 된 12층 건물이다. 우리나라 전통건축물 양식을 살린 건물이 매우 특색있다고 생각했다. 불이 환하게 들어 온 외관은 밤에 더 아름다움을 뽐낸다. 건물 앞 조각상 분수에서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온다. 첫날 이런 운치있는 야경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 못 했다. 솔직히, 평양에서 밤에 나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 못 했다. 특별한 순간이다.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못 했던 일들이 첫날 계속 일어나고 있다. 예측과 예상을 뛰어넘는 경험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분수대 앞을 지나간다. 분수대 앞 벤치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다. 연인인듯한 분위기다. “좋을 때입니다. 연인같은데 데이트하나 보네요.” 데이트라는 말은 알아듯는 눈치다. “네, 그런가 봅네다. 청춘남녀가 연애하는건 자연스러운 것 아닙네까!.” “ 네. 그러구말구요. 북에서는 연인들이 주로 어디서 연애를 하나요?” 호기심이 발동해서 물었다.

“연애하는데 뭐 장소가 중요합니까? 마음이 통하면 어디서나 연애한다 말입네다.” 안내원이 사뭇 심각하게 대답한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 한편 재미있기도 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한 안내원의 말이 떠올라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하긴 그렇죠. 1년6개월의 열애 끝에 결혼하신 안내원 동무시니 더 잘 아시겠죠. 하하.” 안내원이 쑥스러운듯 대답도 못 하고 앞만 보고 걷는다. 남이나 북이나 연애담으로 사람을 놀리는 것은 재미가 솔솔하다.
평양의 야경 - 주체사상탑
평양의 야경 - 인민대학습당

보통문거리 숯불구이식당에서 가스맥주와 류경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처음 만나 결혼하기까지 서로의 연애담을 공개하였다. 안내원과 기사의 절절한 연애담은 나중에 “북남북녀” 북의 남성와 여성 이야기 편에서 다루겠다.

인민대학습당의 휘황찬란한 조명과 조각상 분수 앞에서 청춘남녀가 자아내는 로맨틱한 분위기는 내가 처음 맞은 평양의 여름밤을 압도하고 있다. 평양 밤거리에서 데이트하는 젊은이들을 마주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다정한 연인은 손을 마주잡고 분수를 바라보며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을까? 까만 밤 하늘 아래, 휘황찬란한 조명이 이 연인들을 환하게 비춘다. 두 젊은이의 흰색 셔츠가 환한 불빛을 반사한다.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남성과 흰색 셔츠를 입은 여성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평양교원대, 김일성대학, 김책공대를 둘러보면서, 이 복장이 대학생 교복임을 알았다. 남녀대학생들의 여름밤 데이트. 젊은 연인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는 즐겁다. 그 풋풋한 사랑이 싱그럽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었을 가장 찬란하고 빛나던 시절의 뜨거운 사랑을 추억하게 해서인가. 자꾸 눈이 가는 나의 머리를 억지로 돌려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젊은 연인을 뒤로 하고 우리는 천천히 버드나무 늘어진 거리를 걸었다. 중간에 지하보도를 지났다. 지하보도 내부는 깨끗하고 잘 관리되는 보였다. 벽이 흰색과 파란색 타일로 되어 있다. 지하보도를 걷는 사람이 우리말고 두세명 더 있었다. 내부는 등이 적당히 밝아 무서운 느낌도 없었다. 밤에 다녀도 치안은 전혀 문제 없어 보였다. 나는 안내원과 동행하니 두말할 나위도 없이 안전하다.

평양도 역시 세상 다른 곳처럼 사람사는 곳이다. 밤늦게 데이트 하는 연인들도 보고 말이다. 그런데, 무슨 횡재라고 한 듯 나도 모르게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 평양에 도착해서 단 몇시간 만에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경험을 했다. 북에 대한 나의 이미지가 산산히 부숴졌다. 뭔가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울 것 같은 삶의 모습들을 상상했었다. 첫날 도착해서 지금까지 내가 본 평양은 나의 선입견과 상상을 다 깨뜨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내 다리를 꼬집어 볼 정도로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신기했다. 평양에서의 첫 밤은 경이로움과 흥분 그리고 새로움으로 나를 채우며 이렇게 깊어갔다.

굿모닝 평양!- 대동강변에서 만난 평양의 아침

평양에서의 첫 아침. 아침 산책을 나갔다. 호텔 바로 뒤가 대동강이다. 대동강변을 따라 걷는다. 강변 주변에 아파트들이 쭉 늘어서 있다. 대동강변을 따라 줄지어 들어선 화사한 색감의 고층 아파트가 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한강 주변의 아파트를 연상케하는 풍경이다. 어제 평양시내에 첫발을 들이면서 본 현대적이고 발전된 시가의 모습이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오늘 아침 또 다시 눈이 깜짝 놀란다. 연신 속으로 “여기가 서울인가? 평양인가 ? 한강인가? 대동강인가?”를 묻는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북에서는 살림집이라고 불리는 아파트들. 파스텔 톤의 밝은 색감이 대동강의 풍광과 잘 어울린다. 한 여름의 파란 하늘. 그 아래 연한 풀빛의 대동강. 하늘과 강에 접해 늘어선 쭉쭉 뻗은 고층 아파트. 대동강변의 모습도 이러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 했다.

강변보도를 따라 걷는다. 아파트 사이사이 공원과 체육시설이 보였다. 주민 편의시설인듯 하다. 운동기구를 갖춘 공원이 눈에 들어 온다. 서울의 동네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와 비슷한 시설이다. 놀랍다. 주민체육편의 시설이 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 살면서 이런 류의 주민 편의를 위한 공공체육시설을 보지 못 했다. 거의 흡사한 시설들이 남과 북에는 있다. 남과 북의 동질성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인가!

강변을 따라 계속 걷는다. 이번에는 스케이트 파크인 듯한 구조물이 보인다. 평양에 스케이트 파크가 ? 설마?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내 동공이 커진다. 와우! 스케이트 파크다! 아들이 좋아하겠다. 엄마가 평양에 간다니까 덩달아 신이 난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이 구글 맵으로 평양에서 스케이트 팍을 찾아 보았다. 10살 때부터 스케이트 보드를 타온 아들은 수준급의 스케이트 보더다. 미국정부의 대북여행 금지 행정명령이 해제되면 꼭 엄마랑 아빠랑 같이 북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던 아들이다. 더 나아가 한국시민의 북한 방문이 가능해지면 할머니, 할아버지 를 모시고 두 분 고향인 황해도 은율과 장연을 가고 싶다고 했던 아들이 생각났다. 평양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싶다고 했던 아이는 구글 맵에서 평양을 검색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때 아이의 실망감이란… 그런 평양에 스케이트 팍크가 있다니!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신기하고 기뻤다.

“어머 저거 스케이트 파크네요! 평양 아이들도 스케이트보드를 타나봐요?” 안내원에게 스케이트 파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저거 말입네까? 네 맞습네다. 저기서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도 타고 로라스케이트도 탑네다.” 놀라운 발견이다. 8시가 조금 지난 이른 아침이었고 평일이었기에 스케이트 파크에서 아이들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모습은 보지 못 했다.

이 기쁜 정보를 아이에게 꼭 알려야겠다. 평양의 스케이트 팍크가 있음을 알고 좋아할 아들, 그리고 우리 아이가 평양의 고등학생들과 같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본다. 다음 여행에는 꼭 함께 와야지. 평양 스케이트 보드 여행! 우리 아들의 로망이 실현되길!
대동강변 살림집 (아파트)

대동강변에서 만난 노년의 삶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가까이 다다갔다. 60대 노인들이었다. 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색할 정도로 힘이 넘쳐 보인다. 2명이 짝을 지어 복식으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여성이 파트너를 향해 콕을 높이 띄워 올린다. 같은 편 남성이 네트 넘어 상대편에게 세게 넘긴다. 콕을 서로 주고 받아 친다. 잘 하라는 응원의 소리도 들린다.

열심히 배드민턴을 치는 노인들의 방해하고 싶지 않아 5분여 정도 지켜만 보았다. 마침 4명의 복식팀과 함께 온 이웃주민들이 있었다. 내가 재미동포라고 소개하고 먼저 얘기를 건냈다.

“와우, 배드민턴 잘 치시네요. 매일 이렇게 나와서 치세요”
“예, 그렇습네다. 매일 아침 나와서 운동합네다. 퇴직하고 뭐 합네까. 운동이라도 해야한다 말입네다.”
“이 근처에 사시나봐요. 친구분들하고 나오셨나봐요”
(옆의 아파트를 가르키며) “저 살림집에 삽네다. 이웃들하고 이렇에 아침마다 나옵네다”.

이 노인들과의 대화는 10여분 이어졌다. 이들은 퇴직하고 여가를 즐기는 대동강변에 살림집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다. 퇴직하고나서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다고 했다. 남자는 60세 여자는 55세가 정년이다. 정년 후에는 생활비(연금)가 정부에서 나와서 생활한다고 한다. 기본 생활용품 중 무료로 나오는 것이 있어 노후생활에 크게 돈이 들지 않는다. 정년 퇴직 후에는 이렇게 운동을 하거나 손주를 돌봐주며 소일거리를 한다.
대동강변 체육시설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퇴직 노인들
대동강변 체육시설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퇴직 노인들

배드민튼 치는 젊은 노인들과 헤어져 대동강변을 따라 더 걸었다. 이번에는 강가에서 낚시하는 좀 더 연로한 일군의 노인들이 보였다. 호기심에 다가갔다. 나를 재미동포라고 소개했다. “ 아, 미국에서 오셨습네까?” 약간의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눈빛이다. “낚시를 하시네요. 물고기 좀 잡으셨나요?’ “예, 붕어 한마리 잡았습네다.” 양동이 안 찰랑거는 물 속에 은갈색의 붕어가 보였다. “이 붕어는 댁에 가서 매운탕 해서 드시나요?” 중절모를 쓴 노인이 씩 웃는다. 말렸다가 구워서 손주 곽밥(도시락)에 반찬으로 보낸다고 한다. 70대로 보이는 이 노인은 그동안 손주 도시락 반찬 대느라고 열심히 낚시했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나와서 고운 손주를 먹이려고 물고기를 잡고 있다. 갸륵한 할아버지의 마음이다. 강가에 다른 노인들도 여럿 보인다. 모두들 손주를 생각하고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을까? 남이나 북이나 할아버지는 언제나 손주가 눈에 밟힌다.
대동강변 아침출근길 자전거 부대
대동강변 낚시하는 노인
대동강변의 아침, 손을 잡고 산책하는 할머니와 손녀

대동강변, 여름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가르며 자전거들이 달린다. 대부분 출근길의 흰색셔츠나 인민복을 입은 남성들이다. 손녀의 손을 잡고 아침 산책을 하는 할머니가 내 앞에 간다. 잔꽃무늬의 시원한 여름티셔츠를 할머니와 손녀가 맞춰 입었다. 손녀와 할머니 둘 다 귀엽다. 꼭 잡은 손에서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 옆에 짐을 실은 자전거도 보인다.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아침 대동강변은 바쁜듯 여유로운듯 사람사는 모습을 드러낸다. 평양시민들은 하루를 이렇게 시작하나 보다. 버드나무 늘어진 대동강변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대동강변 스케이트 파크
대동강변 주민체육시설

평양에서 카카오톡하다!

아침산책을 마치고 우리는 보통강 호텔로 갔다. 인터넷 연결을 위해서다. 방북 전에 “고려링크”라는 곳에서 인터넷 연결이 가능하고 평양에서 카톡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방북은 단순한 개인차원의 여행이 아니라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위해 북한을 바로 알고, 남과 북을 하나로 잇기 위함이었기에 방북기간 중 외부 평화운동가들과의 소통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나의 방북여정에 세계 여러나라의 한인평화활동가와 평와애호가를 초대해 평화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의 효과를 증폭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평화운동가 남관우 씨가 방북 기간 중 ‘평양에서 카톡 라이브’를 하자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평양에서 카카오톡으로 전세계 살고 있는 동포평화애호가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다. “평양카톡라이브”를 이루기 위해 보통강호텔 로비에 위치한 고려링크에 온 것이다. 북한에서 유심칩을 사면 무리 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서양 관광객과 중국인 관광객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 나도 줄 맨 뒷줄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다. 심카드를 사서 내 휴대전화에 인터넷을 연결했다. 심카드 구입 비용은 200불. 50GB의 데이타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250GB당 50불이다. 나는 일단 이날은 기본인 50GB만 구입했다. 이후 추가로 500GB를 구입해 방북기간 중 300불을 유심칩과 데이타 구입비로 지출했다. 인터넷이 연결되자 마자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미주동포 평양 카톡 라이브> 방에 접속했다.

“굿모닝 여러분! 평양에서 인사드려요!”

나의 평양 도착시각을 알고 있었던 해외동포평화운동가들은 북에서의 나의 소식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링크 보통강 호텔에서 인터넷 연결 성공!” 나는 평양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해외동포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소식을 전했다. 미국 뉴욕의 활동가가 바로 답신한다. “평양의 첫날이 시작됐군요!” 이제 곧 평양교원대를 방문할 예정이어서, 해외동포활동가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질문사항을 알려달라고 카톡메세지를 보냈다. 미국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인디애나폴리스, 샌디에고, 독일, 남아공, 한국 등지의 평화운동가들에게서 격려, 응원, 질문이 쏟아졌다.

이후 나는 북한에서 카톡과 텔레그램을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미국과 해외에 있는 평화운동가들과 수시로 소통했다. 인터넷 속도는 빨랐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데이타를 사용했을 때와 전혀 그 속도가 차이가 없었다. “평양 라이브” 그 꿈이 실현되었다. 방북 기간 내내 채팅방을 통해 실시간 평양을 중계했다. 채팅방에 “평양의 교사들은 교육과정을 어떻게 짜냐”, '대동강 맥주는 가격이 얼마냐', '장마당은 어떤 분위기냐'라는 질문이 올라왔고 바로바로 답을 하기도 했다.

평양에서 미국, 유럽, 한국 등 전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는 느낌이 아주 흥분되었다. 세계 각지역의 동포활동가들의 질문, 격려, 응원 등을 받고 소통하고 교류하니까 마치 혼자 여행온 게 아니라 같이 온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더 재밌고 신났다. 북도 더 이상 고립되고 은둔된 사회가 아니라 언제라도 조건이 되면 세계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엔 평양에서 현지 시민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을 라이브로 시도하고 싶다.
북한의 인터넷-3세대 이동통신 고려링크
북한의 인터넷-3세대 이동통신 고려링크

평양시민의 손전화와 앱

인터넷 이야기가 나왔으니 평양의 시민들의 휴대전화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평양거리 여기저기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은 아주 흔하다. 거리에서 바쁘게 걸으며 손전화로 통화하거나 지하철에서 버스정류장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ㆍ통일부ㆍ통계청ㆍ코트라 자료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의 보도를 종합하면 북한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구는 4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북한 인구(2560만명)의 15.6%가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셈이다. 스마트 폰은 이미 북한주민의 생활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듯 보였다.

인터넷이 연결되고 한국과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나의 안부를 전했다. 평양에 잘 도착했고 즐겁게 여행하고 있다고. 그런데, 가족이 얼른 돌아오라고 계속 SNS 메시지를 보내 왔다. 미사일 때문에 난리라고. 그래서 가족이 보낸 메시지를 안내원에게 보여줬다. 안내원은 자신의 스마트폰의 앱을 열어 <로동신문>을 보여주었다.

“뭐 그런 걸 신경 쓰십네까. 일 없습네다. 안심하시라요.” 일상적인 군사훈련을 하는 거라고 했다. 사실 평양은 고요했다. 지난 7월 31일부터 8월 7일까지 북한은 총 3번, 미사일과 방사포를 쐈다. 내가 평양에 머물렀던 시기다. 나는 평양에서 이 소식을 안내원의 로동신문을 통해 접했다. 북한의 발사체가 남한을 향한 경고라는 보도를 읽은 한국에 있던 부모님과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서 메시지가 쏟아졌다. 가족들은 이런 시기에 북한에 있으면 위험하다며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평양의 일상은 고요히 흘러갔다.북한에선 자신들의 무기를 테스트하는 거라고 했다. 미국과 남측이 북을 상대로 전쟁연습인 한미군사훈련을 하기에 이에 대한 북측의 대응이라고 안내원은 전했다. 대동강 주변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평양시민,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평양 거리를 산책하는 연인, 거리에서 빙수를 즐기는 사람들… 북녘동포의 일상은 계속 되고 있었다. 정말 전쟁을 일으키려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북의 교원과 대화를 할 시간이 있었는데, 한미군사훈련기간 동안에 그는 미국이 북을 침략할까봐 공포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안내원이나 운전기사, 교원, 내가 만난 북녘동포 그 누구에게서도 남한을 향한 비난을 듣지 못 했다.

북한의 스마트폰은 어떨까? 너무 궁금했다. 안내원의 허락을 구해 이거저것 앱을 열어 보았다. <공세> 라는 앱을 여니 <로동신문>과 다른 언론매체 앱이 보였다. 오락과 도서에 게임 앱도 여러개 있었다. 북한동포들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정보를 검색하고 인터넷신문을 본다. 젊은이들이 블루투스를 귀에 꽂고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세계 다른 나라의 시민들처럼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며 일상을 산다. 서울의 시민이나 보스턴의 시민처럼 평양의 시민도 다른 공간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매일을 살고 있다. 북녘 동포의 일상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에 평화를 만드는 첫걸음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데서 평화는 시작된다.
북한의 스마트폰 앱

다음 편에서는 나의 북한 탐방의 여정을 따라 미래의 꿈을 심는 평양교원대 방문을 시작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광복지구상점,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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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문화의 대립 바깥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가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자연과 문화의 대립 바깥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가기자 입력 2019.10.08.





이부록 작가











A : 자연주의와 애니미즘 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탐구



⑥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1949∼)



‘인간은 동식물과 다르다’는



서구 자연주의 사고 비판하며



인간 우월적 존재론에 반기



아마존 아추아인들 삶 통해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와 동일시하는



인간 - 非인간의‘평등’밝혀



서구 인식론적 오류 대안을



원주민의 모델에서 찾지 않아



다원주의적 삶 탐구로 풀어



‘자연’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해 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여기 제주의 풍광이 떠오른다. 지난 몇 년 수없이 아름답다는 말을 내뱉게 했던 숲, 오름, 바다, 하늘. 하지만 나는 도로 확장을 이유로 잘려나간 비자림로의 삼나무들과 제2공항이 생기면 콘크리트로 뒤덮일 성산의 들판도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제주의 자연에 찬탄하면서 그 파괴를 한탄하지만, 과연 내가 누리는 삶의 혜택들 중 자연을 길들이거나 해하지 않고 얻어 낸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자연의 이용과 보호라는 상반된 입장은 사실 동일한 지평 위에서 적대적으로 공존한다. 두 입장 모두 자연을 대상화한다. 양쪽 모두에서 자연은 인간 중심주의에 복종한다. 인간의 기쁨을 위해 이용되고 희생되는 자연은 인간의 더 큰 기쁨을 위해, 또는 인간의 고통(가령 잘린 나무를 볼 때의 마음 아픔)을 없애기 위해 보호된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 밖에 위치시킨다. 우리는 자연의 전제에 맞선 지난한 투쟁을 통해 쟁취한 ‘문화(또는 문명)’의 편에 서서 자연을 바라본다.



◇ 아마존의 인간주의



프랑스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는 이러한 관점이 근대 서구인 또는 서구화된 인류의 전유물임을 지적한다. 자연과 분리돼 있고 그것에 대립하는 문화의 영역 안에 인간이 자리한다는 관념은 르네상스 이후 모습을 갖춰 서구의 정치·경제 모델과 더불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됐다. 데스콜라는 이 같은 사고의 지평을 ‘자연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핵심 명제는 인간이 여타의 종들과는 다른 부류,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데스콜라가 연구한 아마존의 아추아인에게는 서구화된 인류가 자연이라고 대상화하는 숲과 강이 바로 자신들의 세계이다. 그들은 숲과 강의 온갖 존재들과 육체적·영적으로 교류하면서 그곳을 자신들의 세계로 만든다. 동식물 종들이 영혼을 가지고 자율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여기면서, 아추아인은 자신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상호작용의 양식을 비인간과의 관계로 확장한다. 여자들은 밭에서 기르는 작물을 자식처럼 대하고 남자들은 숲에서 사냥하는 동물을 처남처럼 취급한다. 아추아인의 사회적 삶 대부분을 관장하는 친족의 원리는 아추아인과 비인간 존재들 사이의 교류 또한 조직한다.



그런데 이것은 일종의 전도된 인간 중심주의가 아닐까? 인간만이 독점하는 지적·영적·도덕적 속성에 대한 믿음에 입각해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한 존재로 스스로를 표상하는 서구적 인간 중심주의를 반대로 뒤집어, 아마존 민족들은 인간적 속성의 공유라는 가설에 따라 비인간 종들을 자신과 동등한 사회적 파트너로 대우한다.



인간-비인간의 근본적 연속성이라는 존재론적 테제를 지지하는 흥미로운 과정 중 하나는 꿈속에서 이뤄지는 만남이다. 아추아인은 꿈꾸는 자의 영혼이 몸의 굴레에서 벗어나 역시 꿈을 꾸고 있는 다른 동식물의 영혼과 교류한다고 여긴다. 가령 사냥꾼은 내일 사냥할 동물의 영혼과 꿈에서 만나는데, 특기할 점은 꿈속에서 모든 존재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 서로 다른 껍질을 쓰고 있는 존재들이 꿈에서는 하나같이 인간의 모습을 띠고 서로를 만난다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뤄지는 동식물들의 삶에 대한 인간주의적 상상과 연결된다. 각각의 종들은 나름의 언어, 친족 규범, 의례적 실천, 추장과 샤먼으로 대표되는 분업 체계를 가진 ‘사회’를 이뤄 살아간다. 아마존적 세계에는 자연과 문화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근본적 동일성을 갖는 인간과 비인간의 ‘사회들’이 세계를 평등하게 구획하는데, 데스콜라는 세계를 만들고 살아가는 아마존 원주민들의 방식을 ‘애니미즘’이라고 부른다.



◇ 네 가지 존재론



애니미즘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 예컨대 가축 사육이 그중 하나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취해서만 살아갈 수 있기에 살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생명을 길들인다는 것, 가령 돼지를 우리에 가두고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마존 원주민이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길들일 동물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설정된 존재론적 관계로 인해 아마존 원주민은 사냥꾼에 머문다.



데스콜라는 아마존 원주민의 존재론과 근대 서구의 존재론을 대비시킨다. 서구의 자연주의는 인간과 비인간이 육체성의 차원에서는 유사한 반면, 내면성의 차원에서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전제한다. 비록 다른 종들과 같은 질료로 구성되지만, 오직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 반대로 아마존의 애니미즘은 육체성의 차원에서는 차이를, 내면성의 차원에서는 유사성을 가정한다.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 다른 껍질을 쓰고 있을 뿐 동일한 속성의 내면을 가지고 자율적 삶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등하다.



자연주의와 애니미즘 외에 논리적으로 두 가지 조합이 더 가능하다. 먼저 육체성과 내면성 양쪽 모두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유사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 데스콜라는 호주 원주민의 ‘토테미즘’에서 이 모델의 실현을 본다. 인간-비인간의 존재론적 연속성을 아마존의 경우보다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설정하는 토테미즘의 세계에서도 동식물을 길들이는 일은 물론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동식물 종(예컨대 캥거루)은 세계를 창조한 신화적 영웅의 매개를 통해 특정 인간 집단(‘캥거루 혈족’)과 존재론적으로 일체화된다. 마지막 모델은 육체성과 내면성의 양 차원 모두에서 차이를 가정하는 ‘유비주의’다. 크고 작은 농경·유목 문명들에서 현실화되는 유비주의적 세계의 중심에는 신(조상)과 인간 사이의 위계, 보호, 복종의 관계가 있다. 이런 관계와의 유비를 통해 왕과 백성, 주인과 노예, 인간과 가축 등의 다른 관계들, 나아가 동물의 왕국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역시 파악된다.



◇ 가지 않은 길



데스콜라가 전하는 아마존의 삶과 사유는 매력적이다. 환경에 대한 파괴적 개입과 동식물에 대한 착취로 귀결되는 서구적 인간 중심주의를 버리고, 아마존 식의 공유와 공존의 사고를 되찾자고 말하고 싶은 유혹마저 든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서구화된 인류는 숲과 밭에서 이뤄지는 육체적·영적 교류가 아니라 대개 자본주의적 임노동과 슈퍼마켓에서의 소비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얻는다. 현대적 삶의 대부분은 친족 관계의 규제 밖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숲과 강 대신 빌딩과 상하수도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러한 존재가 과연 아마존적 의식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데스콜라는 서구화된 인류의 인식론적 오류와 도덕적 파탄을 교정해 줄 대안 모델을 원주민들에게서 찾으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데스콜라가 생각하는 인류학의 사명은 인간이 세계를 만들고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일이다. 데스콜라의 네 가지 존재론이 예시하듯 인류학은 인간이 밟아 온 여러 갈래의 길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 삶의 양식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지금 인류가 걷고 있는 것과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서구화된 인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까? 자연주의적 세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데스콜라 자신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충실한 과학자로서 그가 현재 집중하는 작업은 하나의 존재론에서 다른 존재론으로 변형을 가능케 하는 형식적 조건을 밝히고, 상이한 존재론들이 함께 묶여 혼종적 모델을 만들어 내는 사례를 분석하는 데 있다.



데스콜라는 이미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것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주창하는 ‘다원주의적 인류학’을 심화하고 있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적 방식의 복수성을 해명하고자 하는 이 기획을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탐구로 확장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이 아직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이 사고 실험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설정하는 모든 세계에서는,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가 사고되는 것 역시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박세진 제주대 사회학과 강사



■ 필리프 데스콜라는



분야- 인류학-남아메리카 민족학



사상- 구조주의, 인지 인류학



주요 활동·사건- 자연/문화 이원론 비판, 네 가지 존재론 이론화



약력-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생클루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파리 제10대학교와 고등실습연구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구조주의 인류학을 선도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지도 아래 에콰도르 아마존 우림의 아추아인이 생태 환경과 동식물 종들을 사회화하는 방식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인간-비인간 관계의 비교 인류학’에 대한 세미나, ‘실천의 이유들: 불변항, 보편항, 다양성’을 주제로 한 연구 모임을 이끌었다.



2000년 콜레주드프랑스 자연 인류학 교수로 선출됐고, 이로써 마르셀 모스에서 시작되는 프랑스 사회인류학의 계보를 잇는 적자로 자리매김했다. 2012년 프랑스 학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으로 간주되는 국립과학연구소 금메달을 수상했다.



저서- 주요 저서로 ‘길들여진 자연’(1986), ‘황혼의 창(槍)’(1993),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2005)가 있다. ‘길들여진 자연’에서는 아추아인의 생태계를 분석해 이것이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사회성의 관계망임을 밝혀냈다.



‘황혼의 창’은 삶과 죽음, 전쟁과 정치, 신화와 주술, 영토와 정체성 등 다양한 층위에 걸친 아추아인의 삶을 증언한다. 주저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에서는 민족지적·역사적 자료를 광범위하게 비교 분석해 인간과 비인간 종들이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방식을 탐구했다.



이로써 자연주의, 애니미즘, 토테미즘, 유비주의 등 이른바 ‘네 가지 존재론’을 도출해 냈다.







연재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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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의 최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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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9기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신규 위촉 56% - 한호일보



[19기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신규 위촉 56% - 한호일보

[19기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신규 위촉 56%97명 중 54명, 여성 36%, 45세 미만 33%
고직순 기자 | 승인 2019.09.0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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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진 아태 부의장, 형주백 호주협의회장 유임

이숙진 아태 부의장(왼쪽)과 형주백 호주협의회장이 유임됐다


9월부터 2년 임기가 시작되는 제19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 임원진과 자문위원들이 지난 주 발표됐다.

한호일보가 6일 온라인을 통해 보도한대로 5명의 해외부의장 중 
이숙진 아시아•태평양지역회의 부의장(제마이홀딩스그룹 대표)과 
해외협의회장(43명) 중 형주백 18기협의회장(HNJ P/L 대표)은 19기 호주협의회장으로 유임됐다.

또 시드니 동포 이수길 민주연합 호주회장(재호주과학기술자협회 대표)과 
차인순 씨(Sharon Family Day Care 대표)가 해외상임위원(34명)으로 위촉됐다.

호주협의회에서 위촉된 총 147명(시드니총영사관 관할 지역 97명 포함) 명단도 해당 자문위원들에게 통보됐다. 호주협의회는 호주 및 파푸아뉴기니, 피지 등 태평양 도서국가들이 포함된다.
시드니총영사관 관할지역 97명 중 재임자가 43명이고 신규위원은 54명으로 56%를 차지했다. 여성위원이 35명(36%)이며 청년위원(45세 이하)은 32명(33%)이다. 재임자 중에는 다수의 10년 이상 연임자들도 포함돼 있다.

시드니 총영사관 관계자는 2일 “평통 사무국에서 자문위원 명단은 개인정보 등의 사유로 비공개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고직순 기자 editor@hanhodaily.com

류영모의 ‘다석 마지막 강의’ :: 불교저널



류영모의 ‘다석 마지막 강의’ :: 불교저널



류영모의 ‘다석 마지막 강의’
다석 류영모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육성


2010년 03월 29일 (월) 17:49:49 서현욱 기자 mytrea70@yahoo.co.kr






폐부를 찌르는 다석 사상의 정수!
육성으로 듣는 동서 회통의 종교사상

2008년 7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류영모는 우리 말과 글로 철학을 했던 최초의 사상가이자, 기독교를 큰 줄기로 삼아 유교, 불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통달하여 마침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우리나라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임을 말한 다석의 종교 사상은 21세기 들어와 종교 간 분열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상생을 가능하게 해줄 희망과 대안의 사상으로서 세계 신학계와 철학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다석 마지막 강의》는 다석 류영모가 여든한 살 때인 1971년 8월 12일부터 일 주일간 전남 광주에 있는 자생적 금욕 수도 공동체 ‘동광원’에서 수녀와 수사들에게 한 강의의 녹음 테이프를 글로 옮기고 류영모의 직제자 박영호가 풀이한 것이다. 일평생 삶과 죽음을 궁구하며 진리를 좇은 대사상가가 들려주는 폐부를 찌르는 간결하고 명료한 진언 속에서 다석 사상의 핵심을 만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꿰어 낸 제소리!

이 강의에서 류영모는 《맹자》와 《중용》, 《주역》, 구약과 신약 성경, 불경을 두루 아우르며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일원다교(一元多敎)의 사상을 펼친다. 또한 류영모는 예수와 석가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본받을 스승이라고 말한다. 예수와 석가도 하느님을 신앙한 이들이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와 석가처럼 하느님을 신앙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예수와 석가의 하느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다석 마지막 강의》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예수와 석가처럼 큰 깨달음에 이른 몇 사람만이 냈던 독창적인 ‘제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다석 강의 녹음 테이프 가운데 음질 상태가 좋은 5개의 강의를 골라 MP3 CD로 만들어 책에 첨부하였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로 진리를 말하는 류영모의 맑고 굳센 목소리가 시종일관 청중을 압도한다.

다석 류영모의 마지막 강의, 40년 만에 빛을 보다!
다석 류영모는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사상가이자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달통한 석학이었지만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현재 다석과 관련된 책들은 다석이 직접 구술하거나 쓴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려는 제자들의 기록이거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이다. 그나마 다석이 1956~1957년에 걸쳐 서울 YMCA에서 행한 연경반 강의의 속기록 전문을 다듬어 출간한 《다석강의》가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석 마지막 강의》에서 다석 류영모 자신이 직접 들려주는 다석 사상의 정수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81세의 나이로 죽음을 앞둔 다석 류영모가 ‘동광원’이라는 금욕 수도 공동체에서 마지막으로 한 대중 강연의 녹음 테이프를 녹취해 풀어 쓴 것이다.

동광원 강의 녹음 테이프는 그 발견 자체가 일대 사건이다. 애초에 동광원에서 이루어진 고별 강의를 서울 쪽의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다석의 강의를 동광원의 수사 김용래가 녹음했다는 사실이 20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려졌다. 류영모의 말씀을 가장 먼저 녹음한 곳은 KBS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1959년 12월 8일에 13분 동안 요가 운동에 관해 녹음을 했는데, KBS에 문의한 바에 따르면 녹음 테이프는 보관되어 있었으나 음질이 훼손되어 들을 수 없다. 그밖에 몇 사람이 다석의 강의를 녹음하였으나 분실되었다. 결국 동광원 녹음 테이프는 류영모의 육성이 담긴 유일한 자료로서 대단히 가치가 높다. 가공되기 전 원석과 같은 《다석 마지막 강의》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책이 될 것이다.

동광원 강의 녹음 테이프의 진정한 가치는 다석 류영모의 가르침을 다른 이의 손과 머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들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마지막 고별 강의에서 류영모는 일체의 군소리를 떨어버리고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게 진리를 이야기하는, 최고 경지에 이른 사상가, 영성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굽이를 지나거나 곁길로 나가지 않고 오로지 앞을 향해 시원하게 뚫린 큰길로 성큼성큼 걸어가 곧장 핵심으로 들어가는 다석의 육성 강의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스승을 직접 뵐 수 없는 목마름을 풀어줄 해갈의 물줄기가 될 것이다.
류영모/교양인/22,000원

◎ 류영모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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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이 하나였던 참사람 다석 류영모(1890~1981)

다석 류영모는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처음 세례를 받고 8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老子)》를 한글로 완역하는 등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 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

생전에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재단법인 씨알’을 만들었다.

◎풀이, 박영호(1934~ ) 는?

1934년에 태어난 박영호는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가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그는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박영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잃어버린 예수 -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도서출판 교양인 제공

2019/10/07

19 이기상.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 - 에큐메니안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 - 에큐메니안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12 18:59


“경전에 이르기를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적의 도(道)로 돌아가면 재앙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친다’ 했다.”(한용운)(1)

지난 호까지 나는 독일의 가톨릭 종교철학자 베른하르트 벨터의 사상 전모를 특히 그의 ‘없음’(무) 사상과 관련해 다루어 보았다. 또한 동양의 ‘없음’(무) 사상과 비교하며 글을 마무리 하였다.

이번 글부터는 한국으로 눈을 돌려 한국의 사상가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나는 오랫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석 류영모에 대한 연구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주제가 분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제가 함축하고 있는 방향과 내용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였다.

다석 류영모는 왜 철학자가 아니었나

우선 주제에서 ‘철학적 의미’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한국 철학계의 연구 풍토를 감안할 때 부정적인 배경을 함축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 철학계에서는 아무도 류영모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 그의 사상의 일부분이 드러나면서 몇몇 학자들이 류영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대부분 신학자들이었다.

▲ 다석 류영모 선생님(사진 오른쪽)과 부인 김효정 선생님(가운데), 그리고 제자 박영호 선생님(왼쪽) ⓒGetty Image


그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도 선뜩 그를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그의 일지나 강의 가운데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생각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류영모가 어디에서도 철학적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 ‘사상가’로 분류할 수는 있어도 ‘철학자’로 지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듯싶다.

따라서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 점이 분명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류영모가 남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잡지에 실린 글은 몇 편 되지도 않고 그나마 그것도 학술지가 아닌 일반 교양지 수준의 잡지에 실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있는 그의 어록이나 명상록 등은 그가 종로 YMCA 연경반에서 행한 강의들과 그가 거의 매일 기록한 일기들을 기록하고 해설한 것들이다.

그의 일기인 『다석일지』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시 형식으로 쓰여 있다. 대충 한시(漢詩)가 1300편, 우리말 시가 1700편정도 실려 있다. 이 시들은 대부분 짧고 함축적이어서 해설이 없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든 형편이다.

류영모의 생각의 큰 얼개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은 그의 강의록이다. 여기서의 강의도 대학이나 학술단체에서의 강의가 아니라 성경연구모임에서 몇몇 사람들을 앞에 놓고 행한 강의일 뿐이다. 이 강의록마저도 그가 준비한 강의원고가 아니고 제자들이 속기사를 시켜 기록하게 한 강의 기록본이다.

이 강의록이 ‘다석어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지만 학술적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2)

류영모는 왜 한국 철학자인가

이와 같은 배경이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넓은 의미의 사상가는 될지 몰라도 철학자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의 일기와 강의록에 심오한 사상의 단편은 있을지 몰라도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류영모 철학’이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동안 『다석일지』와 그의 강의록들을 공부하고, 다석의 제자들이 해설해서 펴낸 명상록들과 일지 공부들을 연구하면서 다석의 생각들이 단순히 사상의 편린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나의 큰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류영모 자신은 신, 우주[세계], 인간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사상들을 좀 더 넓고 깊게 그 함축한 의미를 따라가며 이해하여 해석할 때 다석의 독특한 신론, 우주[세계]론, 인간론을 구축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동안 나는 이런 작업을 하여 몇 편의 글과 책으로 출간하였다.(3)

따라서 체계적인 이론이 없기 때문에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 근거가 없는 셈이다.(4)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비록 그가 남긴 글은 하나도 없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를 철학자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사상에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류영모를 철학자로 내세울 수 있는 근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류영모는 우리말로 사유하고 철학한 주체적인 한국 철학자다.
2) 그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시도한 현대 철학자이다. 우리는 그의 철학에서 시대정신의 반영을 읽어낼 수 있다.
3) 그는 동서 통합의 지구촌 시대에 통합적인 사유로 새로운 신론, 인간론, 생명론을 전개한 세계 철학자이다.
4) 그는 무엇보다도 존재이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 철학자이다. 있음의 관점이 아닌 없음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것을 제안한 ‘없음[무]의 형이상학자’이다.
5) 그는 이성중심의 인간관에서 탈피하여 영성중심의 인간관을 제시한 인간학자이다.
6) 그는 생명에서 하늘의 뜻을 볼 것을 제안한 영성가이다.


다음 글부터 나는 좀더 자세하게 위의 주장들을 검토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이원섭 옮김, 운주사, 1992, 119.
(미주 2) 다석학회는 이 강의 속기록들을 검토하여 믿고 인용할 수 있는 강의록으로 출간하였다.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미주 3) 참조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인문학 연구」 제4집(1999),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34; “존재에서 성스러움에로! 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모색 ― 하이데거의 철학과 류영모 사상에 대한 비교연구”, 『인문학과 해석학』(해석학 연구 제8집) (한국해석학회 편) (2001. 10월), 247〜300; “다석 류영모에게서의 텅빔과 성스러움”, 2000년 11월 18일 체코 올로모츠에서 개최된 국제현상학회 발표원고,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16집 (2001년 6월), 353〜392; “다석 류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씨알의 소리』통권 제174호(2003년 9/10월호), 71〜99; “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류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생명사상 재조명』(오산창립100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집) (2005년 11월 28일), 53〜85;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 2003;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지식산업사, 2003.
(미주 4) 물론 나는 류영모의 인간론, 신론, 생명론 등을 전개하면서 류영모 자신의 말이나 글에 의존하기보다는 그의 말이나 글이 함축하고 있는 차원과 그 지시하고 있는 방향을 고려에 넣어 이론적인 얼개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혹자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자의적인 해석에 가깝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은 철학이론들이 그런 생산적인 대결에서 생겨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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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현대 한국 철학의 시작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2019-05-26 17:42



류영모의 삶과 그가 남긴 『다석강의』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2019-05-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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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현대 한국 철학의 시작
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3)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26 17:42



얼마 전에 나는 큰 책방에서 철학책들을 훑어보다가 『한국철학의 흐름』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나 흐뭇한 기분도 잠시 차례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고 있다는 그 책이 마지막으로 다룬 사상가가 다산 정약용이었기 때문이다.(1)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서 1836년에 명을 달리한 사상가이다. 그를 끝으로 하여 한국철학의 흐름은 멈추었다는 이야기다.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한국철학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는 이야기다. 독일을 예로 든다면 마치 헤겔(1770〜1831)을 끝으로 독일철학이 끝났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누가 한국 철학자인가

아니 그 예도 충분치 못하다. 헤겔이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로 통하는 것은 그가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정약용은 한 권도 자신의 사상을 한글로 써서 펴낸 적이 없다.(2) 서양에서의 근대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라틴어가 아닌 그들의 지방어인 민족어로 사유하고 글을 썼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정약용을 한국 근대 사상가로 분류하는 데에도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학을 시대의 자식이라고 하며 자신의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는다고 말한다. 정말로 정약용 이후 이 땅에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은 사상가나 철학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지난 170년 동안 이 한반도에는 우리의 현실과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인간이 무엇인지, 세상이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했는지, 이 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으로 고민한 학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

▲ 철학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모국어로 생각하며 문제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다석 류영모는 현대 한국 철학자이다.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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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우리 철학인들은 왜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인지, 20세기 들어서서 한국철학은 무엇을 했는지, 21세기 한국철학의 전망은 어떠한지 등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철학자,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는 사람

독일어로 기술되지 않은 독일철학, 프랑스어로 쓰이지 않은 프랑스철학을 생각할 수 없듯이 우선 우리는 엄격히 우리말인 한글로 서술되지 않은 사상들을 ‘한국철학’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조심해야 한다. 물론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 등이 다 한국역사에 속한다. 그 시대의 사상들을 넓은 의미에서 한국사상 또는 한국철학에 소속시킬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우리는 한국 고대 사상, 중세 사상, 근대 사상, 현대 사상 등의 시대구분을 하고 그 구분의 기준을 마련하고 그 철학적 독특함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럴 경우 정약용을 한국 근대 사상가로 분류할 수 있는지, 어떤 근거에서 근대 사상가인지 논의해봐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언어와 사상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하지 않고 한국에서 낳아서 자라 사상 활동을 한 사람은 모두 한국 사상가로 간주했다. 단순하게 산 시기 또는 왕조를 염두에 두고 사상가들을 분류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20세기 들어서서 세계철학의 흐름 자체가 ‘언어’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언어를 철학의 핵심주제로 삼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보편 언어란 없고 언어는 모두 말하는 민족의 기억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에 사상을 표현한다는 철학의 언어도 어쩔 수 없이 그 시대 그 민족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철학은 어디 다른 곳보다도 한민족의 기억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한글말 속에 가장 잘 표현되었을 것이다. 어떤 다른 언어보다도 한글말로 가장 맞갖게 기술되었을 것이다.

왜 류영모는 한국 철학자인가

이렇게 사상과 언어와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하고 철학은 우리말인 한글로 해야 하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한글로 표현된 말과 글에서 우리의 세계관, 인간관, 신관을 찾아 해석해내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한국의 현대 사상가라고 불리기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그런 사람은 바로 다석 류영모라고 주장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보며 우리말을 통해 우리말 안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말건네온 하느님[존재]의 소리를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다음 글부터는 류영모가 20세기 한국의 현대철학자로서 손색이 없음을 입증해보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20세기 초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문제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 당시 지식인들은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고찰하기로 한다.

미주
(미주 1) 한국 사상이나 철학에서 다산 정약용을 마지막 사상가로 소개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김재영, 『한국사상 오디세이』, 인물과사상사, 2004; 민병수 외, 『한국사상』, 우석출판사, 2004;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2001.
(미주 2) 우리는 오늘날 한시(漢詩)로만 시를 써서 발표한 시인을 엄밀한 의미의 한국현대시인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가.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