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9

신비 중의 신비 Kang-nam Oh

(2) Facebook



Kang-nam Oh

23 hrs · Public

신비 중의 신비





며칠 전 <새로운 종교, 새로운 기독교>라는 글에서 우리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사함을 받는 다는 대속 신앙(Atonement Theology) 대신에
우주에 편만한 신비를 체득하면서 경외심(awe)을 가지고 즐겁고 밝은 삶을 사는 것이 더 훌륭한 신앙생활이 아닌가 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 가르치려 드는 태도로 비칠까 걱정이 됩니다만, 그냥 이런 생각들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오늘은 우주의 신비 중 어떤 면에서 놀라움과 신기함을 느껴야 할까 한 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신비해 할 것이 많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 몸이 “신묘막측”하게 지어졌음을 감탄해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리 현상은 너무나 신기하고 신비스럽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우주 만물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어로  interrelatedness, interdependence라 할 수 있습니다.  상호연관, 상호의존입니다.

상수도가 없으면 하수도가 있을 수 없지만 하수도가 없어도 상수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출발이 없으면 도착도 없지만 도착이 없으면 출발도 없습니다.  계곡이 깊은 것은 산이 높기 때문이지만 산이 높은 것도 계곡이 깊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상품을 만드는 사업가가 없으면 고객도 없지만 고객이 없으면 사업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음악에 음표가 중요하지만 쉼표가 없으면 음표도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음(陰)이 없으면 양(陽)도 없고 양이 없으면 음도 없습니다.  이런 쌍들은 서로 배타적이나 반대가 아니라 서로 보완적(complementary)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말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냐냐주의(either/or)"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하는 “도도주의(both/and)”입니다.  거창한 용어로 하면 라틴말로 "coincidentia oppositorum"(대립의 일치, harmony of the opposites)라 합니다.

조금 복잡한 예를 듭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 있기 위해서는 벼가 있어야 하고 벼가 크기 위해서는 땅도, 물도, 공기도, 해도 있어야 합니다. 벼를 기르는 농부도 있어야 하고 농부의 부모와 조상도 있어야 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있어야 하고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 사람도, 농기구의 쇠붙이를 캐내는 광부도 있어야 하고, 쇠붙이를 품고 있는 광산도 있어야 하고, 쇠붙이를 녹이는 불도 있어야 하고....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 속에 우주가 다 있다면 내 속에도 우주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외로이 떠다니는 부평초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 한 가지만 더 듭니다.  문이 없으면 완전한 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집이 없으면 물론 문이라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문과 집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창문이 없으면 집이 없고 집이 없으면 창문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이나 창문이라는 말 속에는 집이라는 것이 포합되어 있고 집이라는 말에는 문이나 창문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이 없으면 집이 없고 집이 없으면 창문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문에는 창문이, 창문에는 문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외에 지붕, 벽 등과도 이와 같은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고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불교 화엄(華嚴) 철학에서는 이것을 “법계연기(法界緣起)”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얼키고 설켜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화엄에서 쓰는 말로 상입(相入, interpenetration) 상즉(相卽, mutual indentification)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이 비슷한 세계관을 펼치고 있습니다. 신비 중의 신비(玄之又玄)라고 했습니다.

이런 신비스러운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 혼자 잘났다고 독불장군처럼 거들먹거릴 수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내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이웃을 대접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랑할 원수조차도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놀라운(awesome) 진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으면 이 세상이 그만큼 평화스럽고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경우 humanist들이 말하는 "Can we be good without God?"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2020/05/06

탈북청소년 위한 한겨레학교를 아십니까? - 오마이뉴스



탈북청소년 위한 한겨레학교를 아십니까? - 오마이뉴스




탈북청소년 위한 한겨레학교를 아십니까?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학교 - 1편
08.07.04 10:19l최종 업데이트 08.07.04 10:19l
장영주(kp4075)



크게l
작게l
인쇄l
URL줄이기
스크랩

0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감2 댓글댓글달기













탈북자 청소년 대안학교인 한겨레중고등학교(교장 곽종문)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분단학교다. 한겨레학교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10-1번지에 소재한 대안 자율학교로 새터민(탈북자)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겨레학교 교포의 붉은색, 청색은 태극을 상징하며 녹색은 하나 된 일원임을 나타낸다. 교포는 전체적으로 남과 북이 꿈틀되는 기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역동적 움직임 속에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자는 포부를 담고 있다.







한겨레학교는 탈북한 새터민 가족 중 청소년을 대상으로 6개월에서 1년간 남한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본 교육을 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지난 2003년 영지성지학원이 설립되고, 2006년 1월 특성화중고등학교로 지정되었으며, 그해 3월에 개교하여 2007년 2월 1회 졸업생 5명을 배출했다. 그해 9월 이병태 제2대 이사장이 취임했고 지난 2월 제2회 졸업생 16명을 배출했다.


한겨레학교는 통합학교다. '학교법인 전인학원'이 설립한 특성화 자율학교이다. 남북한 교육체제(대표적인 예로 남한 초등학교 6년, 북한 소학교 4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일반 학교로 편입될 경우, 학습내용과 교과과정 등 남과 북이 다른 점들이 많아 대다수의 탈북청소년들이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 한겨레학교엔 중학교 3학급, 고등학교 3학급이 있으며 학급당 정원 20명이다.


전국에 있는 새터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해서 수시로 모집하고 있다. 최근 이 학교를 선호하는 새터민들이 늘어 법정 정원을 훨씬 초과한 학생을 수용하고 있다. 정원제를 강력히 시행할 수 없는 형편이라 한다. 120명 정원에 현재 178명이 재학하고 있다. 최소 1년 정도 남한사회 적응 교육을 받아야 전학에 용이하고, 대학 입학(특례입학)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겨레학교 학생들은 남북한의 교과편성의 차이와 편성된 교과의 구성 및 내용의 상이함과 용어의 차이로 학습 인지능력이 매우 떨어지며 제3국(북한 이탈 이후 중국 체류자가 전체의 70%임)에 오래 체류한 이들이 많아 상당수 학생들이 중국어 활용 능력은 뛰어나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통제된 생활습성으로 자율적 능력이 매우 떨어져 교사들의 체계적인 수업 지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기초기본학습이 부진하기 때문에 학년을 편성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원 퇴소 후 바로 편입이 이루어지므로 전반적으로 남한사회를 이해하는 정도가 매우 떨어진다. 이들은 남북한의 학제의 차이와 긴 탈북과정으로 인해 남한 학생들에 비해 개개인의 연령이 높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은 매우 높다.

현재 북한에서 소학교 졸업 5~10%, 고등중학교 졸업 5~10% 이외에 80~90%는 중퇴자(북한에서는 생활이 어려워 학생들이 학교 졸업에 대해 무딘 경향이 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바로 들어가는 것을 직통제라 한다)로 학력심의위원회에서 학령을 배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 교과 이동수업을 하는 데 교사는 특별교실에 근무하고 학생들이 이동하며 수업을 받는다. 전학생 기숙사(10명 단위 1명 지도교사 숙식 참여) 생활을 하며 학생 1인당 월 18만원 정도의 기숙사비를 국고에서 지원받는다.


교육은 교과과정 40% 지원과정 30% 적응과정 30%로 편성 운영하는데 30% 적응과정은 지하철타기, 동사무소 일보기, 도서관 활용하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에 활용하며 1박 2일 간 문화기행(10명 1조, 1명 지도교사)은 서울에서 체험활동으로 진행된다.

















북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와 남한에서 부여받은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통일교육은 화공교육(화합하여 공존하자는 뜻)이라 하는데 학교장의 교육철학이 중요하며 2006년 개교 이래 적응 능력이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다.


곽종문 교장은 "가뭄이 든 황토밭에 물을 뿌리면 100% 빨리 빨아들이는 힘과 같이 이들도 이를 악물고 남한사회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다"며 "솔직히 학력은 부족하다, 1년 이후 일반학교에 전학 가려면 많은 애로 사항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도 똑 같은 한국인이다, 이념적으로 갈려 있는 상태가 아니"라며 "그들은 조금만 가르쳐 줘도 학력이 최대한 향상된다, 배움에 한이 맺혀서 갈증을 느끼기에 그들의 요구 해소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중고등학교는 현재 주민들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기적성 교육은 외부강사를 활용하며 자원봉사자도 모집하고 있다.


한겨레중고등학교의 교훈은 '맑고 밝고 훈훈하게'다. 교사훈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학교 상징인 교목은 소나무(푸름은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함), 교화는 연꽃(진흙 속의 깨끗함과 온화함), 교색은 하늘색(희망, 평화, 화합, 단결)이다.


이 학교는 북한에서 생활하던 청소년들이 자유를 찾아 남한에 터전을 잡고 통일을 열망하며 생활하는 동안 남과 북이 하나되는 공간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주인터넷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74세 나이에도 매일 영어 공부하는 노력가 - 중앙일보



74세 나이에도 매일 영어 공부하는 노력가 - 중앙일보




74세 나이에도 매일 영어 공부하는 노력가
[중앙선데이] 입력 2010.04.25 02:07 | 163호 31면 지면보기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김환영 기자

『맹자』에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불쌍히 여겨 언짢아하는 마음’을 이른다. 누구에게나 측은지심이 있지만 그 마음이 실천으로 이어지기는 힘들다. 이기심 때문에 외면하거나 잊어버리기 일쑤다. 측은지심이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측은지심을 유지하고, 남의 측은지심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원불교 박청수 원로교무가 바로 그런 성직자다.





내가 본 박청수 원로교무남의 불행은 박청수 원로교무를 불행하게 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면 그는 밤잠을 설친다. 측은지심은 박 원로교무로 하여금 캄보디아 지뢰 제거 활동을 후원하고 이라크 전쟁 피해자를 돕고 아프가니스탄에 의족·의수를 지원하게 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에서 자연재해를 당한 중남미 사람까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본능적으로 못 견딘다.

박청수 원로교무가 말하기 시작하면 대상자들이 그의 측은지심을 같이 느끼기 시작한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람과 대가, 성취감을 수확하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그는 묻는다. 그는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따뜻한 가슴, 소외 계층을 살피려는 마음을 자극한다.

박청수 원로교무의 엄청난 설득력은 그가 공부하는 성직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스물두 살 무렵이었을 때 어른 교도들이 ‘요즈음은 교당에 와도 교무님 설교 내용이 들을 것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듣게 됐다.

그래서 그는 ‘교무가 되려면 반드시 큰 실력을 갖추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독서 계획에 따라 각종 고전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박청수 원로교무는 ‘휴식을 두려워하는 학생’이었다.


박청수 원로교무는 74세인 지금도 매일 아침 5~10분은 영어 공부를 한다. 20년 동안 계속된 습관이다. 박 원로교무는 영어로 강연도 하고 축사도 할 수 있다. 원고 없이 즉석에서 30~40분 동안 자신의 체험과 하고 싶은 말을 중심으로 강연하는 게 가능하다.

50년 원불교 성직자 생활과 세계 55개국에 걸친 봉사활동으로 박청수 원로교무는 유명 인사가 됐다. 그는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초청받아 손님으로 참석했다. 박청수 원로교무는 청와대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청와대 사람들은 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외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인도 라다크의 상가세나 스님은 1997년 『거룩한 어머니(The Divine Mother)』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박청수 원로교무가 히말라야 지역 라다크 사람들을 도운 미담을 영문으로 저술한 것이다.

박청수 원로교무는 2007년 은퇴했다. 그러나 그의 봉사활동은 멈출 수 없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하늘 사람』이라는 박 원로교무의 저서에 대한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박청수 교무를 아는 사람으로서 정년퇴임이 그의 봉사활동에 마침표를 찍으리라 예상하는 이는 없으리라 믿는다.” 아니나 다를까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에게 농어촌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 자리를 맡겼다.
관련기사“작더라도 좋은 일 시작해보세요,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출가 50년 인생 70년...원불교 박청수교무 자서전 '하늘사람'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출가 50년 인생 70년...원불교 박청수교무 자서전 '하늘사람'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출가 50년 인생 70년...원불교 박청수교무 자서전 '하늘사람'



도휘정

승인 2007.02.20 23:02





[문화]전체기사 문화일반 문학ㆍ출판 전시ㆍ공연 영화ㆍ연극 문화재ㆍ학술 종교 방송ㆍ연예



“사람들은 때로 나를 두고 말할 때, 남을 위해 좋은 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마음 속으로 내가 그들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남’들이 내 삶을 가꾸는 텃밭이 돼주고, 때로는 넓은 농경지도 되어 내 삶에 의미를 충족시켜 주고 성취감과 보람까지 안겨주는 고마운 인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원불교 박청수 교무(70). 올 초 정년퇴임한 그가 자서전 「하늘사람」(여백)을 펴냈다. “열아홉에 출가하여 살아온 나의 출가 50년을 마치 단숨에 살아버린 것 같다”며 꺼내놓은 출가 50년, 인생 70년의 이야기다.



1937년 남원 수지면 홈실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박교무는 56년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해 출가해 정녀가 됐다. 흰저고리 검정치마를 입게된 것은 ‘정녀로서 너른 세상에서 큰 살림을 살라’하신 어머니의 뜻을 따른 것.



가톨릭 성 라자로 마을과 인연을 맺고 나환자들과 형제의 정을 나눈 31년, 인도와 캄보디아, 아프리카 등 종교의 벽을 넘어 인종의 벽도 초월한 나눔의 삶, 북인도 히말라야 설산 라다크에 기숙학교와 무료 구제병원을 세우고 캄보디아 빈민들을 위해 참여한 지뢰 제거운동 등 「하늘사람」에는 그의 희생과 봉사가 잔잔하게 담겨있다.



무지와 가난, 질병 퇴치를 위해 세계 55개국에서 ‘빈자의 어머니’로 살아온 박교무. 상명대 양종훈 교수는 그의 퇴임에 맞춰 박교무의 삶이 기록된 신문과 방송, 잡지 기사 등을 모아 「언론이 본 박청수 교무」(이제)를 엮어내기도 했다.



교역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현재 원불교 대안학교인 성지송악중, 헌산중, 탈북주민 자녀를 위한 한겨레초·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관음 나무위키

관음

최근 수정 시각: 
1. 觀音2. 觀淫
2.1. 인터넷 용어로써
3. 관음도

1. 觀音[편집]

불교용어 관세음보살을 줄인 관음보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2. 觀淫[편집]

Voyeurism

음란한 것을 본다는 뜻. 성도착증의 일종인 관음증의 관음도 이런 뜻이다.

2.1. 인터넷 용어로써[편집]

넓은 의미로는 오지랖, 훔쳐보기, 엿듣기, 남의 사생활을 알려고 하기 등을 모두 관음이라 일컫게 되었고, 조금 더 좁은 의미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혹은 싫어하는) 대상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는 행위. 같은 말로 염탐(廉探)이 있다.

흔히 일본에서 한국에 대해 다룰 때 한국에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사건에 대해 자기들끼리 대토론을 하고 있다든지, 혹은 자기네 국회에서 날치기[1]가 일어나고 있는데 일본 방송국에서는 대한민국 국회의 탄핵 표결을 생중계한다든지, 전혀 상관없는 주제에서 뜬금없이 한국 소식을 끌고온다든지, 국내의 해외 반응 사이트는 현재 가생이닷컴 한 곳만 남은 데 비해 일본에서는 한국 반응만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사이트가 수십 곳이 넘는다든지 하는, 한국 소식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는 일을 가리킬 때 쓴다.

이들에게 "한국한테 관심이 많구나." 하고 말하면 기겁하며 "우리는 한국을 감시하는 것뿐이다!" 하는 정신승리 반응이 돌아오는 것이 특징.

대표적인 예시로는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NHK에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정규 방송을 끊고 속보로 전했으며 이후 개표가 진행되자 정규 방송 하단에 문재인홍준표안철수 후보의 득표상황을 생중계했었다. 문재인의 당선이 확정되자 대부분의 방송사에서는 혐한 방송인들(...)을 모아다가 토론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2019년에는 조국의 청문회를 생중계를 가지는 등 그야말로 관음의 절정을 다했는 점에서 일본 내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많다.# 시청률도 한국만 나오면 높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한국 역시 일본을 관음하고 있는데, 일본더러 관음을 운운하기에는 오바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도 일본에 대한 관음을 매우하며 지금 이것도 좀 나아진거지 국가 수준 차이가 확나던 2000년대 전에 훨씬 심했다.[2]그리고 라이벌 의식이라고 포장했다. 유명한 말로는 최지룡의 만화 여로에 나오는 한국인들은 세계의 누구보다 일본인을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 것일까?등이 있을정도. 가생이 닷컴개소문 닷컴 등 해외 반응을 퍼나르는 사이트가 많았으나 지금은 크게 위축된 상태.

2010년대에 들어서는 한국은 일본에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예전에 비해 줄었으며, 오히려 일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질 뿐더러 일본을 알고 제대로 된 비판도 등장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일본에서는 국수주의가 성장하며, 2000년대 한국에 버금갈 정도로 한국을 의식하고 공격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와 별개로 게임 플레이중 상대해야할 적을 주시했음에도 무시하거나 보고만 있는 상황일때도 쓰인다.

3. 관음도[편집]

파일:관움도오.jpg
울릉도와 관음도. 우측 상단에 보이는 섬은 죽도.
파일:0구역.jpg
울릉도의 해변에서 바라본 관음도와 현수교.

관음도는 죽도독도와 함께 울릉도의 3대 부속 도서이며 관할을 받는 지역은 울릉군이다.
죽도나 독도와는 달리 무인도이지만 관광 명소가 되었다. 2012년 울릉도의 숙원사업이었던 일주도로와[3] 연관하여 보행 전용 현수교가 개설되었다. 근처 주차장에 주차한 뒤 걸어갈 수 있다. 울릉도-관음도간 140m 현수교 준공(연합뉴스 기사)[울릉도 vs 울릉도] ① 일주도로 따라 한 바퀴(연합뉴스 기사)[아무튼, 주말] 55년만에 완전 개통된 울릉도 일주도로… 가까이 온 원시의 풍경(조선일보 기사),

세상에서 뒤처진 사람 돕는 게 보은이고 사랑이죠 - 여성신문

세상에서 뒤처진 사람 돕는 게 보은이고 사랑이죠 - 여성신문





세상에서 뒤처진 사람 돕는 게 보은이고 사랑이죠

박길자 / 여성신문 기자
승인 2015.04.07 14:51
수정 2015-04-15 09:21
댓글 0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자서전 출간한 원불교 박청수 교무
학교 9곳, 병원 2곳 설립… 세계 55개국 도운 봉사의 삶
고 박완서 작가 “박 교무에게 돈 드려야 이기적으로 산 게 참회돼”
“난 평생 길쌈했던 여인… 염원이 종자가 되어 이룬 일이죠”







최근 자서전을 낸 원불교 박청수 교무는 “천주교는 사랑, 원불교는 보은, 불교는 자비로 이 세상에서 뒤처지고 못난 사람을 돕는 것”이라며 “종교마다 하는 일이 달라 보여도 사실은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50년의 긴 세월 동안 세계 55개국을 돕고 나라 안팎에 학교 9곳과 병원 2곳을 세웠어요. 그 하나하나의 일은 늘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졌어요. 애간장이 녹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냈어요. 낮도 밤도 없이 궁리하느라 출퇴근도 없었지요. 길쌈하던 여인을 보면 새벽에도 실꾸리를 감고 물레질을 하잖아요? 나는 평생 쉼 없이 길쌈했던 여인이었어요.”

원불교 박청수(79) 교무가 최근 자서전을 냈다. 『박청수-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세상 받든 이야기』라는 제목의 711쪽짜리 방대한 책이다. 박 교무의 삶을 통해 올해 100년을 맞은 민족종교 원불교 역사도 엿볼 수 있다.








자서전은 열화당 출판사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열화당 영혼도서관’ 시리즈 중 하나로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 건립 추진 중인 ‘안중근 기념 영혼도서관’에 소장될 예정이다. 박 교무는 “그동안 출간한 저서 중 4권에서 글을 뽑아 다듬고 여기에 지난해 여름 400장 분량의 원고를 새로 써서 보탰다”며 “열화당에서 자서전을 선물로 받은 것 같다”며 웃었다. 열화당에선 박 교무의 수필, 칼럼, 기행문 등을 모은 쌍둥이 문집이 나올 예정이다.

박 교무는 “제 글을 읽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빼야 될 곳도, 보탤 곳도 없이 간결하고 순수하다고 하더라”며 “나는 글 공부도 안 했고 스승 한 명 없다. 내 맘대로 글을 썼는데 이렇게 말해주니 고마웠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나눔의 삶을 살아온 데 대해 “아주 철없던 시절에 무아봉공(無我奉公)해서 숭배받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삶의 큰 무게가 됐다”고 말했다. 무아봉공이란 나를 없애고 공익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한다는 뜻으로 원불교의 네 가지 기본 강령 중 하나다. 특히 그는 종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왔다. 천주교 시설인 성라자로마을의 한센인들을 40년간 챙겼고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롭게’ 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붓글씨로 쓰인 책 제목은 법정 스님이 박청수 교무에게 보낸 손 편지에서 뽑은 것이다.

‘한국의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박 교무는 2007년 강남교당에서 퇴임한 후 지금은 경기도 용인의 대안학교 헌산중학교 이사장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그는 그동안 북인도 히말라야 라다크,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등 세계 55개국에서 무지, 빈곤, 질병 퇴치를 위해 힘썼다. 수백만 개의 지뢰가 묻힌 캄보디아 땅에서 지뢰를 제거하기 위한 후원금을 보낸 일부터 미얀마의 196개 마을과 캄보디아 74개 마을에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 공동 우물이나 식수 펌프를 마련해 준 일, 아프리카 12개국에 긴급 의약품을 후원한 일까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해냈다.


히말라야 설산에 세운 마하보디불교기숙학교는 25명으로 출발해 지금은 학생이 830명이나 된다. 이 아이들은 대학에도 진학하고 미국 유학도 다녀왔다. 박 교무는 “아이들에게 밝은 앞길이 열리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천주교는 사랑, 원불교는 보은, 불교는 자비로 이 세상에서 뒤처지고 못난 사람을 돕는 것”이라며 “종교마다 하는 일이 달라 보여도 사실은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봉사를 하느라 바빠서 TV 드라마 한 편 여유롭게 못 봤다. “그런 일에 마음을 쓰고 정신을 소모할 겨를이 없었어요. 지난번 출판기념회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면 모금이 안 될 것 같아 평생 잘 먹고 잘 입지 못했다’고 말했더니 사람들이 맛난 음식을 사주겠다며 줄을 섰어요.(웃음)”

그가 평생 모금해 지원한 액수는 105억원. 여기에 정부 지원액을 포함하면 350억원 규모다. 후원자들은 박 교무에 대한 신뢰가 강하다. 누구보다 투명하게 일을 하기 때문이다. 평소 종잣돈을 많이 대준 고 박완서 작가는 “박청수 교무에게 돈을 드리면 전액이 목적지로 간다”고 말하곤 했다. 또 박 교무에게 돈을 내야 이기적으로 산 게 참회가 된다며 웃곤 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와의 특별한 인연도 눈길을 끈다. 박 교무가 “한센인들이 먹는 약이 독해 해독제로 설탕물을 타서 마셔야 한다”고 강연을 했는데 홍 여사가 이 말을 들은 후 34년 동안 이 회장의 생일 때마다 성라자로마을 식구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설탕과 푸짐한 먹거리를 선물해왔다고 한다.

그는 “마음 눈이 밝아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혜가 있어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했던 일 가운데 회의를 거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염원이 종자가 되어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아마 회의를 거쳤더라면 두 나라도 돕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로지 직관에 의지해 살았어요. 그러려면 내가 오롯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생각이 산만해선 안 돼요.”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길자 / 여성신문 기자 muse@womennews.co.kr다른기사 보기

[문화저널21 사람,공감,소통의 미디어(종합인터넷신문)] 세상 받든 ‘완전연소’의 삶…원불교 박청수 교무 자서전 출간



[문화저널21 사람,공감,소통의 미디어(종합인터넷신문)] 세상 받든 ‘완전연소’의 삶…원불교 박청수 교무 자서전 출간





세상 받든 ‘완전연소’의 삶…원불교 박청수 교무 자서전 출간

‘열화당 영혼도서관’ 시리즈, 세계의 마더 박청수 교무의 자전적 기록

가 -가 +

이영경 기자
기사입력 2015-04-08













“지난 오십 년의 긴 세월 동안 많은 일을 했지만 어느 일도 쉬운 일은 없었고, 그 하나하나의 일은 늘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했던 일들 중 회의를 거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계 오십오 개국을 돕고 나라 안팎에 아홉 개의 학교와 두 개의 병원을 세웠지만, 오직 나의 염원이 종자가 되어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아마 회의를 거쳤더라면 두 나라도 돕기 어려웠을 겁니다” <박청수-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세상 받든 이야기> 중 ‘책을 펴내며’ 발췌



[문화저널21 이영경 기자] 1956년 출가해 원불교 교무의 길로 들어섰다. 1969년 사직교당을 시작으로 원평교당, 우이동 수도원 교당을 거쳐 2007년 서울 강남교당을 은퇴할 때까지 오십 여년의 세월 동안 박청수 교무는 성불제중(成佛濟衆)의 서원을 이루어나갔다. 캄보디아, 북한, 아프리카, 러시아 볼고그라드, 인도, 중국 등 세계 오십오 개국을 방문하고 도우며 무지, 빈곤, 질병 퇴치에 힘써왔다.



그 기나긴 세월이 책 <박청수-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세상 받든 이야기>에 담겨 있다. ‘박청수 기록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출판기념회가 지난 2일 삼성동 한국도심공항 3층 서울컨벤션에서 열렸다. 방송인 김미화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이기웅 열화당 대표를 비롯해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 이인호 KBS 이사장,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 이배용 한국학 중앙연구원 원장, 조욱현 성라자로마을 원장신부,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축사자로 참석했다.

















총 열 장으로 구성돼 있는 <박청수-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세상 받든 이야기>에는 삶을 이끌어준 어머니의 가르침, 교당 교화 활동, 세계 곳곳을 도운 광활한 봉사의 현장, 고마운 인연들에 관한 다정한 사연 등이 저자의 필력 그대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박청수 교무가 열정을 바쳤던 도처의 일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십여 년 동안 틈나는 대로 써 둔 일생의 기록들을 엮은 것으로, 때때마다 쓴 글이기에 현장감이 살아 있으며, 사무치는 마음이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그간 출간된 여섯 권의 저서에서 필요한 글들을 가려 뽑아 다시금 문장을 가다듬었다. 최근의 일들이나 미처 적어 두지 못한 일들은 새로 썼다. 오랜 시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의 힘이 모여 이루어진 일인 만큼 정확한 일시, 장소, 인명 등을 재확인하고 수정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됐다. 또한 글과 함께 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관련 자료 이미지들이 수록돼 있어 이해를 돕는다.


출판기념회 자리에 선 박청수 교무는 지금껏 해온 모든 일들을 스스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 요량만으로 어떻게 일을 할까요.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불만불평 없이 형편 것 도운 이들이 있기에 가능했지요. 여기 오랜 시간 저를 도운 강남교도 분들이 많이 와 계신데, 그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지켜보고 항상 따뜻한 말씀을 주신 모든 분들이 제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 주셨어요.”










무엇보다 어머니의 힘이 크다. 스물일곱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 어려운 시기에 두 딸을 공부시켰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교무가 되어 너른 세상에 나가 많은 이들을 도우라고. 너를 끝까지 가르치겠다고. 그리고 어머니는 홀로 저와 동생 박덕수 교무를 끝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의 바람과 스승의 가르침이 저를 키웠어요.”



그렇게 박 교무는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되는 대신 세계의 어머니가 되어 몸과 마음을 다해 도왔다. 북한동포, 조선족, 고려인 등 해외 우리 민족들뿐 아니라 시각장애인, 저소득층 어린이, 한센병 환자, 새터민 등 국내 소외계층을 위해서도 쉬지 않았다. 나라 안팎에 아홉 개의 학교를 설립했고 히말라야 라다크, 캄보디아 바탐방에 병원을 세웠다. 미얀마와 캄보디아에는 총 이백칠십 개 마을에 공동 우물을 파거나 식수 펌프를 묻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되어서, 고속 압축의 경제발전이 있어서 그 과실을 따다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가난을 품느라 좋은 옷 한 번 사보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 한 번 스스로 찾아먹지 않았다. “모금이 안 될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뜻을 정해 일을 해나가는데, 내 입에 맛있는 것을 넣고 내 몸에 좋은 것을 걸치면 모금이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스스로를 ‘완전연소’ 시키며 세상을 환하게 밝혔던 박청수 교무의 삶, 그 궤적이 담긴 책 <박청수-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세상 받든 이야기>는 ‘열화당 영혼도서관’ 시리즈로 출간됐다. 이 시리즈는 자신의 삶을 기록해 보존함으로써 한 인간의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고, 후대들이 그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현재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 건립 추진 중인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에 소장될 예정이다.


lyk@mhj21.com

원불교 바탐방 무료구제병원 - 건치신문



원불교 바탐방 무료구제병원 - 건치신문



원불교 바탐방 무료구제병원

이동호
승인 2008.07.09 16:39

[캄보디아 친구들 이야기] 20



한국의 원불교는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불교가 '참선'과 '기복'의 양면성을 가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앉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불교를 새롭게 리모델링한 원불교는 현실의 생활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원불교 교당은 시내 한가운데 있고 복지시설과 학교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교무님들은 마치 카톨릭의 수녀님들처럼 결혼대신에 평생을 공부하고 봉사하며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 캄보디아에서 원불교는 비교적 일찍 NGO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한국의 마더데레사'로 잘 알려진 박청수 교무에 의해 난민지원사업이 시작된 것이 벌써 20년, 영국의 할로재단과 함께 지뢰제거운동에 처음 동참한 것이 1989년이고 바탐방지역의 전쟁고아들을 본격적으로 돕기 위한 지원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9년입니다.



지금까지 원불교의 박청수재단을 통해 수 억원의 지원금과 물품들이 지뢰제거사업, 지뢰피해자지원사업, 전쟁고아지원사업, 난민지원사업, 의약품지원사업 등을 통해 캄보디아에 지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탐방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한 무료구제병원이 2003년 3월 25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바탐방은 원불교와 좀 특별한 인연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 곳의 교무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박청수 교무님의 자서전을 통해 그분이 처음 캄보디아와 인연을 맺게 된 일에서부터 무료병원을 세우고 최지운 교무님을 파견하게 된 사연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당이 위치한 곳 인근에 고아원이 있습니다. 바로 그 고아원이 박청수재단이 처음 바탐방의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던 곳이며 그 고아원의 설립자이며 지역유력인사인 손수베르씨와의 인연으로 그 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구제병원부지 2천 평을 매입하고 그곳에 교당과 병원건물 2개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2년 2월에 시작된 공사는 3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박청수 교무님과 최지운 교무님의 헌신에 힘입어 이듬해 완공되었고 지금 이곳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되었습니다.


병원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조용한 동네로 정문 앞으로는 논밭도 제법 펼쳐져 있는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오전 8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제법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병원건물 앞에 자리잡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낮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빨리 진찰을 받고 약을 타서 다시 그들의 집으로, 혹은 일터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가끔은 한 시간, 두 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모토를 타고, 또 걸어서 이 곳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침 이른 시각에 병원에 도착해서 병원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녀노인들부터 젊은이들, 그리고 아픈 아이를 데리고 온 이, 처자를 데리고 온 이도 있습니다. 또 붉은 승복을 입은 스님도 있습니다.


병원건물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병원이라고 하기엔 턱없는 시설입니다. 진료소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듯 합니다. 과거 7,80년대 도시변두리 달동네와 공단 등지에서 활발했던 주말진료소는 병원갈 형편이 안되었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들에게 그나마 큰 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료장비래야 청진기가 고작이고 요즘 우리나라의 어느 개인병원에나 다 있는 초음파조차도 갖추지 못한 장비수준은 캄보디아의 의료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게다가 진료를 맡고 있는 현지의사는 이미 나이가 60대를 넘은 것처럼 보입니다. 주사놓는 것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회피하고 오직 청진기만으로 환자를 보는 늙은 캄보디아의사. 옛날 베트남에서 의사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그는 문진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비교적 정학히 짚어낼 수 있는 노련함을 갖추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투약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진료과정을 보고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상설진료소이기는 하지만 진료수준은 거의 주말진료소와 다름 없습니다.


이틀 후, 프놈펜에서 방문했던 한국의사들이 세운 기독교선교 무료병원인 헤브론병원과 여러가지로 비교가 됩니다. 병원건물이야 두 곳 모두 훌륭하지만 헤브론병원은 초음파와 혈액검사기 등 기본적인 진단장비와 검사장비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20년 이상 개업의사로서 풍부한 임상경험을 가진 훌륭한 의사들이 진료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캄보디아 사람들이 가진 생활습관과 풍토병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이는 시간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바탐방의 원불교구제병원은 묵묵하게 오랜 시간을 지켜온 교무님들의 헌신에 의해 훌륭하게 가꾸어져 왔지만, 한편으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많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아빠가 진료를 받는 동안 아이는 병원 앞마당의 그네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엄마 곁에서 아빠를 기다립니다. 병원은 쉬기에 참 좋은 공간입니다. 게다가 한 쪽으로는 아주 널찍한 공터가 있어서 교무님들은 여기에 배구코트와 농구대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아마 주민잔치나 체육대회라도 여는 모양입니다. 진료활동 외에도 한글학교와 컴퓨터교육, 그리고 아주 가난한 지역주민들을 위한 생활지원사업도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공터 일부를 잘라서 건물 한 두 채를 더 세울 계획이라고 합니다. 저희들같은 손님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새 공간이 생기면 다른 사업을 더 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지겠지요. 건물이 더 들어서더라도 배구코트는 남겨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언제라도 와서 운동할 수 있게요.


무료구제병원의 운영에 대해서만큼은 교무님들도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인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투약에 의존하는 좁은 진료범위, 예산의 문제로 인한 현지의사 고용문제 (젊은 의사를 구하려면 급여를 두 배 이상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짧은 진료시간(대개 오전에 진료가 끝납니다), 갈수록 조금씩 감소하는 환자 수 (요즘은 하루 평균 50~70명) 등등..



어떤 일이든 변화와 발전이 없으면 매너리즘과 함께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는 법이지요. 한국과 같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아니어서 다를지 모르지만 이 곳이 현재 처한 상황은 두 분의 교무님에게 크나큰 숙제를 안겨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오는 지원금은 한정되어 있고, 그 빠듯한 예산으로 의약품 구입과 의사급여 등 병원도 운영해야 하고 게다가 교당도 운영하면서 포교활동과 주민사업까지도 해야하는 바탐방의 원불교교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금의 확대일까 아니면 변화와 발전을 위한 어떤 특별한 계기일까? 이런 저런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기에 섣부른 제안이나 계획을 말씀드리기는 어려웠습니다. 헌신과 봉사의 마음 하나로 이 머나먼 이국에 와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교무님들을 그저 존경의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알라딘: 소태산 평전

알라딘: 소태산 평전:









소태산 평전 - 원불교 교조 박중빈 일대기
이혜화 (지은이)북바이북2018-11-16












































미리보기


정가
25,000원
판매가
22,500원 (10%, 2,500원 할인)


소태산 평전 - 원불교 교조 박중빈 일대기
22,500원 (10%, 2,500원 할인)


양장본
516쪽
152*224mm
851g




책소개
젊은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원불교 교조 박중빈(법호 소태산)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온 저자 이혜화가,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 『원불교의 문학세계』, 『소태산 박중빈』 등에 이어 박중빈의 일대기를 그린 『소태산 평전』을 출간했다.

『소태산 평전』은 한 종교단체의 우두머리 박중빈이 아닌,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인류와 세계를 사랑했던 교조 박중빈의 생애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악한 장난꾸러기 아이였던 박중빈이 구도자의 길에 이르기 위해 정진하고, 교조가 되어 교인들의 마음과 삶을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에서, 이 시대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종교단체가 가져야 할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목차


Ⅰ. 서장–하늘·땅·사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없다/ 출세와 후천개벽/ 출세의 공간–호남/ 영광, 그 땅의 의미/ 가계와 혈통

Ⅱ. 아동기–맹랑한 싹수
춘삼월 호시절/ 달을 잡으려는 아이/ 퇴학 맞은 방화범/ 산신령을 찾아라

Ⅲ. 청년기–찬란한 귀환
15세에 결혼하다/ 도사를 찾아라/ 뒤뚱거리는 홀로서기/ 주막으로 혹은 파시로/ 다시 구도의 길로/ 노루목의 폐인/ 노루목에 피는 우담바라

Ⅳ. 영산에서–땅을 열고 하늘도 열고
에루화 낙화로다/ 최초법어와 방편 교화/ 처음을 함께한 제자들/ 문학가 소태산과 『법의대전』/ 여봐라 처자야 말 들어라/ 개교 표어와 남다른 생각/ 무모한 도전/ 벽해상전 꿈을 이루다/ 아홉 번째 제자 송규/ 개벽의 상두소/ 산상기도/ 땅공사 하늘공사

Ⅴ. 변산에서–숨어서 그물을 짜다
월명암 답사/ 모악산 금산사 탐방/ 일원상과 김제경찰서/ 내변산으로 숨다/ 봉래정사 석두거사/ 교법의 그물을 짜다/ 불교를 혁신하려면/ 정산 송규와 변산 제자들/ 하산을 준비하다/ 하산과 상경/ 익산 새미르/ 구타원과 그 일행

Ⅵ. 익산에서–일원화 꽃을 피우다
갑자년 이후/ 강약의 도리/ 도둑고개에서 피는 일원화/ 간이하게 비근하게/ 세상에 드러나는 불법연구회/ 불법연구회를 찾은 도산 안창호/ 소태산의 여행 일기/ 소태산의 금강산 탐방 ①/ 소태산의 금강산 탐방 ②/ 소태산의 경상도 여행/ 황정신행이란 인물

Ⅶ. 수난기–그래도 적은 없다
신종교의 수난/ 안도산 이후/ 일제 탄압의 대응법/ 감화되는 일경들/ 벼랑에 선 불법연구회/ 소태산을 따른 여자 제자들/ 인간 소태산의 아픔/ 서대원의 기행

Ⅷ. 입멸–소태산의 만고일월
열반 준비/ 불교정전/ 열반 전야/ 열반 ①/ 열반 ②/ 열반 이후 ①/ 열반 이후 ②

Ⅸ. 대단원–춤추는 니르바나
이제 다 이루었다/ 뒷이야기

후기
소태산 박중빈 연보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박중빈朴重彬,. 법호 소태산少太山.




P. 49~50 박중빈의 모친은 옥녀봉에 뜬 태양이 갑자기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중빈은 제자들에게 태몽의 신비로 교조를 장엄하는 따위의 섣부른 짓을 하지 못하도록 엄히 당부하였다. 이 점은 박중빈의 의도를 톺아볼 필요가 있다. (…) 신비화되고 미화된 성자의 탄생담이 발심 단계에 있는 후세인의 의욕을 꺾고 아예 꿈조차 꾸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니 그럴듯한 태몽도 없는 사람은 시작 단계에서 자포자기하는 좌절을 겪을 수 있다. 접기
P. 408 소태산이 돈암동 회관(경성지부)에 가자 산부처님(생불)이 온다고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점심 식사 때 소태산은 상추쌈을 맛있게 들었는데 이를 보고 주민들이 실망했다. 식사가 끝나자 소태산은 변소에 일을 보러 갔다. 이 모습을 본 주민들은 모두 속았다고 하며 돌아갔다. 소태산은 익산 본관(총부)으로 돌아와서 황이천에게 말했다. “이천! 내가 경성 가서 부처님 시험을 보고 낙방했다. 나보다 더한 사람도 다 낙방하겠더라.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다 도망갔다.” 설마 생불에게 공중부양이나 오병이어(五餠二魚,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 함)의 기적까진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최소한 보통 사람처럼 먹고 배설하면 안 된다. 미숫가루에 생수 한 잔이면 합격했을까? 용변은, 꾹 참고 있다가 아무도 몰래 일을 보았더라면 합격했을까? 접기
P. 424 소태산은 여성의 권리를 인권 차원에서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교법상 남녀 차별을 용납하지 않았던 소태산으로서도 난감한 일은 적지 않았다. 강연 훈련 때면, 남녀노소가 똑같이 연단에서 강연 발표를 하도록 했어도 여자 제자들은 너무나 수줍어하여 연단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소태산은 커튼을 치고라도 강연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교무 양성도 남녀를 함께하였고, 새파란 애송이 정녀를 지방 교무로 파견하는 일도 꺼리지 않았다. 접기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8년 11월 16일 출판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이혜화 (지은이)


일찍부터 소태산 박중빈에 관심을 가지고 국문학을 전공(고려대 문학박사)하면서 관련 저술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1991), 『‘새로 쓴’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2012), 『원불교의 문학세계』(2012) 등의 연구서 외에 장편소설 『소태산 박중빈 1, 2』(2004)가 있다. 이 밖에 다수의 논저와 교양서로 『책, 꽃만큼 아름답고 밥만큼 소중하다』(2007), 『미르』(2012), 『설화, 욕망을 품다』(2018) 등을 냈다. 다년간 여러 대학에 출강했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 현재는 연... 더보기


최근작 : <소태산 평전>,<설화, 욕망을 품다>,<미르>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젊은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원불교 교조 박중빈(법호 소태산)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온 저자 이혜화가,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 『원불교의 문학세계』, 『소태산 박중빈』 등에 이어 박중빈의 일대기를 그린 『소태산 평전』을 출간했다.『소태산 평전』은 한 종교단체의 우두머리 박중빈이 아닌,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인류와 세계를 사랑했던 교조 박중빈의 생애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악한 장난꾸러기 아이였던 박중빈이 구도자의 길에 이르기 위해 정진하고, 교조가 되어 교인들의 마음과 삶을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에서, 이 시대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종교단체가 가져야 할 정신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소태산의 생애가 온몸으로 구현한 가르침은
인류와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던 원불교 교조 박중빈의 일대기

박중빈(朴重彬), 법호 소태산(少太山), 존칭 대종사.
1891년 전남 영광에서 나서 고행 수도 끝에 1916년 깨달음을 얻은 후,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를 창건하여 전북 익산을 중심으로 포교하다가 1943년에 사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교조를 만나다
대개 종교단체에서는 지도자를 ‘교주(敎主)’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교조(敎祖)’라고 부른다. 교주가 종교단체의 지도자나 우두머리를 뜻한다면, 교조는 종교단체나 종교를 처음 세우거나 이끈 사람을 뜻한다. 이는 소태산이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자세와도 맞닿아 있는 호칭이다.
소태산은 자신이 종교단체의 우두머리라고 해서 극진한 대접을 받거나 존경받길 원하기보다, 교인들이 상처받거나 어려워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길을 찾기 위해 함께했다. 종교단체를 만들 당시에도 교인들의 도움을 무작정 바라기보다, 함께 일(방언공사)하고 돈을 벌어 교인들의 생계와 종교의 존립을 감당했다. 나아가 교리로서 ‘부부권리동일’이나 ‘남녀권리동일’ 등을 내세우며 여성의 권리를 인권 차원에서 진지하게 인식했다.
한 종교단체의 우두머리가 아닌, 그저 종교단체를 세우고 이끈 사람이 소태산이다. 『소태산 평전』에서는 소태산의 이런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마음의 문제를 가진 교인의 짐을 우스갯소리로 덜어주는 모습이라든지, 금전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모습이라든지, 교인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모습 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한 믿음직한 어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태산의 삶을 열 단계로 나누어 보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의 삶을 열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를 대종사십상(大宗師十相) 혹은 십상이라 부른다. 『소태산 평전』은 소태산이 나서부터 열반할 때까지의 생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려나가면서, 삶이 변화하는 각 시기를 십상으로 알기 쉽게 정리한다.
① 하늘을 보고 의문을 일으키는 모습(관천기의상), ② 삼밭재에서 기원하는 모습(삼령기원상), ③ 스승 찾아 고행하는 모습(구사고행상), ④ 강변에서 선정 상태에 몰입한 모습(강변입정상), ⑤ 노루목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 모습(장항대각상), ⑥ 영산에서 조수막이 둑을 쌓는 모습(영산방언상), ⑦ 피 지장으로 진리계의 인증을 받는 모습(혈인법인상), ⑧ 봉래산에서 교법을 만드는 모습(봉래제법상), ⑨ 신룡에서 법륜을 굴리는 모습(신룡전법상), ⑩ 계미년에 열반을 보인 모습(계미열반상).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교인들의 생존과 종교의 존립을 위해 경제활동을 함께하고, 많은 이들과 소통하며 교법을 만들고, 자신이 세운 종교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다 열반하는 단계 하나하나에서, 현대인들이 바라는 리더의 참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소태산의 생애가 온몸으로 구현한 가르침
“1943년에 열반한 박중빈은 21세기 원불교 안에서 생전보다 더욱 강력한 영향력으로 살아 있다. 한국 현실만 보더라도 그의 교법이 갖는 시대적 수요는 더욱 불어나고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지만, 삶의 만족도나 행복지수는 오히려 떨어져 젊은 층은 ‘헬조선’을 입에 달고 산다. (…) 소태산의 생애가 온몸으로 구현한 가르침은 개인 구원과 더불어 사회와 국가의 구원, 더 나아가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필자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러 독자와 동행하는 짧지 않은 여행길에 나서려 한다.”
저자의 이 짧지 않은 여행길은 2년여 동안 계속됐다. 평생에 걸쳐 모아둔 자료와 인터뷰를 토대로 소태산의 생애를 정리하는 데만 2년여가 걸린 셈이다. 『소태산 평전』을 쓰며 저자는 기록자로서의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태산의 신화 비슷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현실적인 해석과 분석을 내놓은 것은,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애쓴 흔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을까. 확신하긴 어렵지만 독자에게 여러 가지 힌트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소태산이 만들고 싶었던 종교단체의 모습이나, 교리, 그가 살아온 삶이 그것을 입증한다.
『소태산 평전』을 읽으며, 소태산의 생애를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구원이라는 것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접기